모세오경을 쓴 모세를 비롯해서,
구약성경은 대략 32명의 저자들에 의하여 기록되었고
신약은 바울을 포함하여 8명의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구약의 모세오경은 대략 주전1500년에 기록되었고
마지막책인 말라기는 주전 약400년에 기록되었다.
구약은 모두 1100여 년에 걸쳐 완성된 반면,
신약은 50여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전체 성경이 완성되는데는
구약에서 신약으로의 이행되던 시기인 400년을 포함하여
대략 1500년에서 1600년의 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여기서 주전은 기원전, B.C 이고 주후는 기원후, A.D 입니다.)
▶ 창세기
새벽을 깨우리로다 창세기(創世記) Genesis 06-06-2023(화) , 창세기 38-50장
오늘의 묵상 창세기(Genesis) 04-10-2023 / 06-06-2023(화)
1. 저자 : 모세
애급 궁중에서 양육을 받은 학자, 정치가, 장군이었다.
세상의 관념에 따르면 그는 종교 지도자였다.
2. 장소 : 시내 산과 광야에서 기록
3. 시기 : 주전 4004년과 주전 1689년 사이에 발생한 것이며,
그 기록은 주전 1500년경에 했다.
▶ 출애굽기
1) 저자 : 성경의 처음 5권은 모두 모세가 쓴 것으로 `모세 오경`이라 불린다. 출애굽기 17장 14절과 34장 27절은 이 책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쓰도록 명하신 것임을 증명한다.
2) 시기 : 이 책에서 기록한 사건들은 주전 1706년과 1490년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 레위기
1) 저자 : 이 책의 저자는 모세이다. 전체의 내용이 모두 모세에 대한 여호와의 `고하여 이름`, `분부`이다.
2) 장소 : 장소는 시내 광야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곳에서 머물렀고 조금도 이동하지 않았다.
3) 시기 : 이 책에 기재된 법도와 명령은 하나님께서 일 개월 반에 걸쳐 모세에게 분부하신 것으로 그 기간은 대략 이스라엘의 정월 일 일, 곧 회막이 건축될 때(출 40:2, 17, 레 1:1)부터 2월 20일, 즉 그들이 시내 광야를 떠날 때까지이다(민 10:11-12).
▶ 민수기
1) 저자 : 모세가 기록하였다.
2) 장소 : 시내 산과 광야이다.
3) 시기 : 이 책에서 기록한 사건들은 주전 1490년부터 1451년 사이에 발생하였다.
▶ 신명기
1) 저자 :`신명기(Deuteronomy)`라는 단어는 `제 2의 율법`을 의미한다. 즉, `다시 말해 주는 것`, `되풀이해 말하는 것`, `다시 들려 주는 것`이란 뜻이다. 이 책의 저자는 하나님의 종인 모세가 분명하다. 처음에는 입으로 전하다가 이후에 책으로 쓴 것이다(1:3, 31:24-26 참조).
2) 장소 : 이 책은 앞의 민수기의 마지막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이 두 권의 책의 기록 시기와 장소는 같다. 모두 출애굽 이후 제 40년이고 장소는 모압 평원이다.
3) 시기 : 이 책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 시간은 약 사십 년으로 주전 1491년부터 주전 1451년까지이다.
▶ 여호수아
1) 저자 : 여호수아서의 저자는 여호수아이며(1:1), 그의 이름은 `여호와 구원자`, `여호와의 구원`을 뜻한다(민 13:16).
2) 장소 : 여호수아서를 쓴 장소는 모압 평지이다(신 34:8-9).
3) 시기 : 이 책을 쓴 시기는 주전 1451년에서 1426년까지이다.
▶ 사사기
1) 저자 : 사사기의 저자에 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으나 그것을 입증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많은 권위자들은 사무엘이 기록한 것으로 추정한다.
2) 시기 : 사사기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는 주전 1425년경에서(여호수아의 죽음 후) 주전 1120년경까지(삼손이 죽었을 때―16:30-31)로 약 305년간이다. 다음 목록은 역사에 따른 연대순이다. ① 2:6-9(주전 1426년경) ② 1:1-36(주전 1425년경) ③ 2:1-5(주전 1425년경) ④ 2:10-13(주전 `) ⑤ 17:1-21:25(주전 1406년경) ⑥ 2:14-16:31(주전 `-1120년경)
▶ 룻기
1) 저자 : 룻기는 역사와 시기에 있어서 앞의 책 사사기와 다음의 책 사무엘서와 연관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무엘이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2) 시기 :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는 말씀에 따라(4:22) 저작 시기는 사사들의 통치 이후 열왕의 때다. 이 책에서 다루는 역사의 기간은 주전 1322년경부터 1312년경까지 약 11년 간이다. 기록한 역사는 모압과 유다에서 발생했다(1:1, 22).
▶ 사무엘상
1) 저자 : 사무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들으심` 또는 `하나님께 구함`을 의미한다. 사무엘상 1장부터 24장까지는 사무엘이 쓴 것이다. 사무엘상의 나머지 부분과 사무엘하 전부는 선지자 나단과 선견자 갓이 썼다(대상 29:29).
2) 장소 : 저술 장소는 에브라임과 유다였다.
3) 시기 : 사무엘상`하의 저술 시기는 주전 1171년에서 1017년경이다.
▶ 사무엘하
1) 저자 : 기록자들은 나단과 갓이었다.
2) 시기 : 가나안 땅에서 주전 1056년부터 1017년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하였다.
▶ 열왕기상
1) 저자 : 열왕기의 저자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나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가 그 저자라고 생각한다.
2) 장소 : 이 책은 아마 가나안 땅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3) 시기 : 열왕기상에서 기록된 것은 주전 1015년부터 897년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다.
▶ 열왕기하
1) 저자 : 예레미야가 이 책을 썼을 것이다.
2) 장소 : 아마도 가나안 땅에서 기록했을 것이다.
3) 시기 : 이 책에 기록된 일들은 주전 896년부터 588년 사이에 일어났다.
▶ 역대상/하
1) 저자 : 역대상`하의 저자는 아마도 에스라였을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역대하 36장 22절과 23절을 에스라 1장 1절에서 3절 상반절까지와 비교해서 보아야 한다. 이 두 부분이 반복된 것은 역대상`하를 에스라서의 저자인 에스라가 썼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2) 시기 : 상권은 주전 1056년에서 1015년까지 약 사십일 년이라는 기간을 포함하고 있는데, 열조의 계보를 포함하지 않는다. 하권은 주전 1015년에서 536년까지 약 사백칠십구 년이라는 기간을 포함하고 있다. 이 두 권의 책은 아마도 에스라가 포로됨에서 귀환한 후에 예루살렘에서 썼을 것이다
▶ 에스라
1) 저자 : 에스라서의 저자는 `도움` 또는 `돕는 자`를 의미하는 이름을 가진 에스라였다. 그는 아론의 자손으로서(7:1-5) 모세의 율법에 능한 제사장이요, 서기관이었다(7:6, 11-12).
2) 장소 : 그의 책들은 예루살렘에서 기록되었다.
3) 시기 : 이 책의 내용은 주전 536년부터 457년까지 약 팔십 년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 느헤미야
1) 저자 : 이 책의 저자는 느헤미야로 그의 이름은 `여호와의 위로`를 뜻한다. 그는 왕의 술 관원이었다(1:11하).
2) 장소 : 이 책 전체는 느헤미야가 그의 대적들의 시험과 공격을 받는 가운데서 위로이신 하나님을 신뢰한 내용으로 예루살렘에서 기록되었다.
3) 시기 : 이 책의 내용은 주전 446년부터 434년까지 약 십이 년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 에스더
1) 저자 : 에스더의 저자는 아마 모르드개였을 것이다(에 9:20, 23). 에스더의 삼촌인 그는 그녀를 양육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유대인들을 사랑한 자였다.
2) 장소 : 아마도 수산 성에서 기록됐을 것이다.
3) 시기 : 이 책의 내용은 아하수에로가 통치하던 기간(주전 486-465년) 중 적어도 10년의 기간을 다룬다.
▶ 욥기
1) 저자 : 이 책의 제목은 저자인 욥의 이름을 따라 붙여졌다. 욥은 `미움을 받다`또는`핍박을 받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욥이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에게서 어떠한 고통을 겪었는지를 나타내 준다. 에스겔 14장 12, 14, 20절과 야고보서 5장 11절은 이 책을 욥이 썼다는 것을 확증해 준다.
2) 장소 : 이 책이 쓰인 장소는 에돔에 속하는 우스 땅으로서(애 4:21) 아라비아 광야 서쪽이다.
3) 시기 : 이 책이 쓰인 시기는 욥의 유목 생활(욥 1:3)과 그가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린 방식(욥 1:5, 창 22:13, 31:54)에 따르면, 주전 약 2000년경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시대이다.
▶ 시편
1) 저자 : 시편의 대부분을 다윗이 기록하였기 때문에 시편을 다윗의 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시편의 머리말에 따르면 다윗이 일흔 세 편을 기록하였고, 아삽이 열두 편을, 그리고 헤만과 에단이 각각 한 편씩을 썼다. 또 고라의 자손이 열 편, 솔로몬이 두 편, 모세가 한 편을 기록하였으며, 머리말이 없는 것도 오십 편이 된다. 머리말이 없는 것 중에서 몇 편 예를 들면 시편 2편(행 4:25), 95편(히 4:7), 96편(대상 16:23-33), 105편(대상 16:8-22)은 다윗이 기록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편을 썼지만, 그것은 모두 한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2) 장소 : 시편은 모세가 광야에서 기록한 90편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이스라엘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3) 시기 : 가장 초기의 시편은 주전 1500년에 모세가 쓴 것(시편 90편)이며, 마지막 시편은 137편일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포로로 잡혀간 뒤 기록한 것이다.
▶ 잠언
1) 저자 : 잠언은 현자들의 말을 모은 것이다. 주된 기자와 수집자는 솔로몬으로서 그는 삼천 개의 잠언을 지었다(왕상 4:32, 전 12:9 참조). 또한 히스기야는 25장에서 29장까지에 있는 열조들의 몇몇 잠언들을 추가하였다.
2) 장소 : 잠언은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쓰였을 것이다.
3) 시기 : 솔로몬의 잠언들은 주전 1000년경에 쓰였고, 히스기야의 잠언들은 그로부터 약 삼백 년 후에 쓰인 것이다.
▶ 전도서
1) 저자 : 전도서의 저자는 지혜로운 왕 솔로몬이다(1:1, 12, 12:9, 왕상 4:32).
2) 장소 : 그는 이 책을 예루살렘에서 썼다(1:1, 12).
3) 시기 : 저작 시기는 주전 977년경으로 솔로몬이 타락한 후이다.
▶ 아가서
1) 저자 : 아가서는 솔로몬이 말년에 이스라엘에서 기록한 것으로 잠언이나 전도서보다 이해하기가 어렵다.
2) 시기 : 솔로몬의 통치 시기는 주전 970-931년이었다
▶ 이사야
1) 장소 : 이사야서는 저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이다. 일반적인 성경 해석가들은 흔히 이사야를 선지자 중에서 가장 큰 선지자라고 칭한다. 그가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가장 상세하고 광범위하게 썼기 때문이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는 이스라엘 왕국의 선지자 아모스와 호세아, 그리고 유다 왕국의 선지자 미가와 동시대 사람이었다. 역사가였던 그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에 이르는 네 왕조에 걸쳐 가장 긴 기간 동안 선지자로서 사역했다(1:1). 유대인들 사이에서 믿을 만한 유전(tradition)과 2세기의 몇몇 랍비들의 저서에 따르면 그는 므낫세의 재위 기간에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다(왕하 21:16, 24:4, 마 5:12, 행 7:52).
2) 장소 : 예루살렘에서 기록되었다.
3) 시기 : 이사야서는 주전 760년경부터 698년 사이이다.
▶ 예레미야
1) 저자 :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는 아나돗 사람이었다(1:1). 그는 제사장으로 태어났으며 요시야 왕 십삼 년에 선지자로 부르심받았다. 그는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힐 때까지 주님을 위해서 예언했다(1:2-3, 5-7). 그는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 중에서 가장 핍박을 많이 받은 선지자로 왕과 지도자들과 제사장과 백성들 중 소수를 제외하고 모두가 그를 반대하고 증오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체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특히 그의 예언에 관하여 그릇되게 말하고 반박했으며 아사랴와 요하난과 같은 친 애굽파들이 그를 억지로 애굽으로 가게 했다(43:2-7).
2) 장소 : 이 책의 대부분은 유다에서 기록하였고, 마지막 장들은 애굽에서 썼다.
3) 시기 : 그 기간은 주전 629년부터 588년까지이다
▶ 예레미야애가
1) 저자 : 예레미야 애가의 저자는 울며 애통해 하는 선지자 예레미야이다(대하 35:25 참조). 이 책은 한 때 예레미야서의 일부였으나, 어느 때부터인가 `예레미야 제 2권`으로 불렸다. 유대의 전통과 70인 역의 번역가들에 따르면 이 책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함락시킨 후에 예레미야가 기록하였다.
2) 장소 : 이 책은 대부분이 예루살렘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 밖 골고다(갈보리로 불리기도 함) 맞은편에 예레미야의 동굴로 불리는 감춰진 동굴이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예레미야가 거기 앉아서 황무한 성을 바라보고 애통해 하면서 애가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3) 시기 : 이것으로 볼 때 그 책은 주전 588년에 쓰였을 것이다.
▶ 에스겔
1) 저자 : 에스겔은 부시의 아들로 제사장이었다(1:3). 에스겔이란 이름은 `하나님께서 강화하실 것이다` 혹은 `전능자가 너의 힘이다`를 의미하며, 부시는 `경멸받은`이라는 뜻이다.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멸받은 선지자 였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강화시키셨다.
2) 시기 : 그는 사역을 주전 595년부터 574년까지 바벨론에서 수행하였다.
▶ 다니엘
1) 저자 : 이 책의 저자는 유다 지파의 후손인 다니엘이다(1:6). 그의 이름은 `하나님은 심판자`라는 의미이다.
2) 장소 : 이 일이 발생한 장소는 바벨론 성과 엘람 성 등이다.
3) 시기 : 이 책의 내용이 포함하고 있는 시간은 약 73년간으로 주전 607년부터 주전 534년까지이다.
▶ 호세아
1) 저자 : 저자인 호세아는 브에리의 아들이었다(1:1).
그의 이름은 `구원` 혹은 `여호와는 구원`을 의미한다.
2) 장소 : 그의 사역의 장소는 북이스라엘이었다.
3) 시기 : 호세아의 사역 시기는 주전 785년부터 725년까지 육십 년 동안이며, 그가 사역하던 때에는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 두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호세아의 사역의 대상은 음란하고 변절한 이스라엘 왕국이었다. 음란은 이스라엘의 상태를 말하며, 변절은 이스라엘의 위치를 가리킨다. 상태로 말하자면 그들은 간음했으며, 위치로 말하자면 그들은 변절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내인 이스라엘의 상황이었다.
▶ 요엘
1) 저자 : 요엘은 브두엘의 아들이었다(욜 1:1). 그의 이름은 `여호와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2) 장소 : 요엘은 이 책을 유다에서 기록하였다.
3) 시기 : 그 기간은 대략 주전 870년부터 865년 사이일 것이다.
▶ 아모스
1) 저자 : 히브리어에서 `아모스`는 `짐을 진 자`를 의미한다.
2) 장소 :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의 벧엘에서 사역했다.
3) 시기 : 아모스의 사역 시기는 주전 787년경이었고(1:1상), 그의 사역의 대상은 북이스라엘이었다(1:1하).
▶ 오바댜
1) 저자 : 오바댜는`여호와의 종`을 의미한다.
2) 시기 : 오바댜는 이 책을 아마도 주전 880년에 유다에서 기록했을 것이다.
▶ 요나
1) 저자 : 히브리어로 요나는 `비둘기`를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나가 평강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비둘기처럼 나아가기 원하셨음을 상징한다.
2) 장소 : 요나의 사역의 대상은 앗수르의 수도인 큰 성 니느웨 사람들이었으며, 사역의 장소 또한 니느웨였다.
3) 시기 : 요나의 사역 시기는 선지자 엘리사 시대인 주전 862년경이었다.
▶ 미가
1) 저자 : 모레셋 사람 미가는 유다 열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예언하였다(1:1). 그는 이사야와 호세아와 동시대 사람이었으며(사 1:1, 호 1:1), 아마도 아모스와도 동시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라는 뜻이다(7:18).
2) 장소 : 유다에서 기록되었다.
3) 시기 : 이 책은 주전 약 750년에서 710년 사이이다.
▶ 나훔
1) 저자 : 히브리어에서 나훔이라는 말은`위로`와`보복`을 의미한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민 이스라엘을 위로하시고, 이스라엘의 원수 니느웨에게 보복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2) 장소 : 나훔의 사역 장소는 유다였다. 그는 큰 성 니느웨를 대상으로 사역했다. 바벨 성과 니느웨 성은 니므롯이 건축한 것으로(창 10:8-11) 바벨론과 앗수르의 수도가 되었다. 적그리스도의 첫 번째 예표인 니므롯은 하나님을 반대한 첫 번째 사람이었으며, 이 나라들 둘은 하나님을 반대하는 인류의 강한 예표들이었다.
시기 : 나훔의 사역 시기는 주전 713년경이었다. 그것은 앗수르 왕 산헤립이 이스라엘을 침략한 해였다.
▶ 하박국
1) 저자 : 하박국이라는 이름은 `품에 안다`혹은`달라붙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품에 안기고 그분께 달라붙을 필요가 있다.
2) 장소 : 그가 사역한 장소는 유다였다.
3) 시기 : 하박국의 사역 시기는 주전 626년경이었다. 이것은 바벨론이 침입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간 시기와 매우 가깝다.
▶ 스바냐
1) 저자 : 스바냐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숨겨 주신 자`혹은 `여호와께서 보배로 여기신 자`라는 의미이다.
2) 장소 : 그는 유다와 수도 예루살렘을 대상으로 사역했다.
3) 시기 : 스바냐의 사역 시기는 하박국과 예레미야의 시대인 주전 630년경으로 사역 장소는 유다였다.
▶ 학개
1) 저자 : 학개는 스가랴와 동시대에 살았으며(스 5:1), 다리오 왕 이 년에 하나님을 위해 예언하였다. 그의 이름은 `나의 절기` 혹은 `여호와의 절기`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가 일찍 고국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절기를 회복하기를 얼마나 사모했는가를 보여 준다.
2) 시기 : 이 책에서 기록한 일들은 주전 약 520년에 예루살렘에서 석 달 스무나흘 동안에 발생한 것이다.
▶ 스가랴
1) 저자 : 스가랴는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슥 1:1)로서 포로된 땅에서 태어났다가 스룹바벨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다. 잇도는 돌아온 최초의 제사장 무리에 속해 있었다(느 12:4, 16). 그러므로 스가랴는 예레미야와 에스겔처럼 제사장 겸 선지자였다.
잇도는 `정한 때`를 베레갸는 `여호와께 복을 받음`을, 스가랴는 `여호와의 기억하심을 입음`을 의미한다. 이 세 이름을 함께 모아 볼 때 `정한 때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고 기억하심`이란 뜻이 나타난다. 분명히 하나님은 정하신 날에 백성에게 복 주시고 기억하실 것이다.
2) 장소 : 유다에서 기록했다.
3) 시기 : 이 책은 주전 520년이다.
▶ 말라기
1) 저자 : 말라기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나의 사자(使者)`를 의미한다. 이는 말라기가 여호와의 말씀을 그분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사역하는 하나님의 사자였음을 나타낸다.
2) 시기 : 그의 사역 시기는 주전 400년경으로서 느헤미야 시대였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상으로 사역했다.
신약
▶ 마태복음
1. 저자 : 레위라고도 불리는 마태는 세리였는데 사도가 되었다(9:9, 눅 5:27).
이것은 9장 10절의 `그 주인`과 10장 3절의 `세리`라는 특별한 언급에 의해 증명된다.
2) 장소 : 유대 땅일 것이다.
3. 시기 : 주님께서 부활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은(28:15) 주후 37년과 40년 사이,
성전이 파괴되기(24:2) 전에 유대 땅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평범한 유대인들을 위해서 기록되었다.
왜냐하면 이 책에는 유대의 관습과 절기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 마가복음 /
오늘의 묵상 - 마가복음(Mark) 06-07-2023 / 06-24-2023
새벽을 깨우리로다 마가복음(Mark) 06-08-2023(금) / 06-24-2023(토)
1. 저자 : 요한이라고도 불리는 마가(행 12:25)
그는 여러 마리아들 중 한 마리아의 아들이자, 바나바의 조카(골 4:10)
그는 바나바와 사울의 사역에 동행했는데(행 12:25)
바울의 첫 번째 이방을 위한 사역 여행에 함께했다가 버가에서 그를 떠나 돌아왔다(행 13:13).
그 때문에 바울의 두 번째 여행에는 거절당했다.
그러자 마가는 바나바와 함께 일하러 갔다.
이 시점에서 바나바는 바울과 갈라섰다(행 15:36-40).
그러나 마가는 바울의 후반기에 이르러 그와 가까웠으며(골 4:10, 몬 24절),
바울이 순교할 때까지 그에게 유용했다(딤후 4:11).
베드로가 그를 아들로 간주한 것으로 보아(벧전 5:13) 아마도 그는 베드로와도 줄곧 가까웠던 것 같다.
2. 장소 : 로마(딤후 4:11)
3. 시기 : 주후 67년에서 70년 사이에 쓰였다.
13장 2절의 내용은 이 책이 성전의 파괴전, 아마도 사도 바울의 죽음 후에 기록되었음을 증명한다.
마가의 책은 유대의 이름과 관습과 절기들을 많이 설명한다(3:17, 5:41, 7:3, 11, 14:12, 15:42).
이것은 이 책이 이방인들, 특히 로마인들에게 쓰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마가복음을 상징하는 형상은 "송아지" 또는 "황소"라고 한다.
송아지와 황소는 종(노예)을 상징하므로 마가복음의 수신자들은 로마에 흩어져 살아가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다.
당시 세계는 로마가 패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만일 예수께서 이 세상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라고 강조한다면 마치 로마 정부에 대한 반역을 일으킬 수 있다는 오해를 일으키게 되므로 메시아는 종으로 오신 예수라고 강조하였다.
▶ 누가복음
1. 저자 : 초대 교회는 누가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로 간주했다.
이 두 책의 문체와 작문을 볼 때 누가가 저자임이 분명하다.
누가는 의사였으며 아마도 아시아계 헬라인이었을 것이다(골 4:14).
그는 드로아에서부터 바울의 사역에 동참했으며,
바울의 세 차례 사역 여행에 동행했다(행 16:10-17, 20:5-21:18, 27:1-28:15).
그는 바울이 순교할 때까지 그의 신실한 동반자였다(몬 24, 딤후 4:11).
그러므로 그의 복음은 마가가 베드로의 관점을 대표한 것처럼,
바울의 관점을 나타냈을 것이다.
2. 시기 : 사도행전이 쓰이기 전인, 주후 약 60년,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의 감옥에 있을 때 썼을 것이다.
이 책은 데오빌로에게 보내졌다(1:3).
▶ 요한복음
1. 저자 : 사도 요한이 기록했다(21:20, 24).
그는 세베대의 아들이었고(마 10:2),
그의 형은 야고보, 어머니는 살로메였다.
살로메는 주님을 따르고 섬기던 자매이다(마 27:55-56, 막 15:40).
2. 장소 : 에베소
3. 시기 : 주후 약 90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유대와 이방의 모든 믿는 이에게 쓴 것이다.
1장 38절과 5장 2절, 그리고 19장 13절의 설명으로 보아 이것을 알 수 있다.
▶ 사도행전
1. 저자 : 이 책은 바울의 동역자였던 누가가 자신의 여행 기록을 기초로 해서 기록한 것이다.
2. 장소 : 이 책은 아마도 로마에서 기록됐을 것이다(몬 24, 딤후 4:11).
3. 시기 : 완성 시기는 아마 이 책에 쓰인 사건들이 끝난 직후인 주후 67년과 68년 사이로 추정된다(1:1).
수신자는 데오빌로였다(1:1, 눅 1:3).
▶ 로마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 : 고린도
3. 시기 : 이 책은 사도 바울이 주후 60년경 제3차 전도 여행이 끝날 무렵,
고린도에서(15:25-32, 행 19:21, 20:1-3)
3개월간 머무는 동안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1:7) 쓴 것이다.
▶ 고린도전서
1. 저자 : 사도 바울(1:1, 9:1-2)
2. 장소 : 에베소(행 19:21-22, 고전 16:3-8, 19)
3. 시기 : 부르심받은 지 이십오 년 후(행 9:3-6, 15-16),
이방인들에게 보내심을 받은 지는 십사 년이 지났을 때(행 13:1-4, 9) 이 서신을 썼다.
대략 주후 59년경이라고 보는데
그 시기는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렀던 삼 년간의 기간이 끝나갈 무렵이다(행 20:31, 고전 16:8)
▶ 고린도후서
1. 저자 : 사도 바울(1:1).
2. 장소 : 마게도니아(7:5-6, 8:1, 9:2, 4).
3. 시기 : 대략 주후 60년경으로 로마서를 쓰기 이전이다.
고린도후서 2장 13절을 볼 때,
이 서신은 바울의 제 3차 전도 여행 때 에베소에 체류한 후 마게도니아에서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 갈라디아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 : 고린도, 바울이 일 년 반 동안 거기에서 머무는 중에 썼을 것이다(행 18:1-11).
3. 시기 : 대략 주후 54년경 바울이 두 번째 전도 여행을 하는 동안,
곧 갈라디아를 통과하여 여행하고 고린도에 도착한 후에 썼을 것이다
▶ 에베소서
1. 저자 : 사도 바울(1:1)
2. 장소 : 로마, 그때 바울은 투옥되어 있었다(엡 3:1, 4:1, 6:20, 행 28:30).
3. 시기 : 대략 주후 64년경
▶ 빌립보서
1. 저자 :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바울과 디모데(1:1)
2. 장소 : 로마, 바울은 그때 투옥 되어 있었다(빌 1:13, 행 28:30).
3. 시기 : 대략 주후 64년경,
아마도 에베소서를 쓴 다음에 이 서신을 썼을 것이다(1:25, 2:24 참조).
▶ 골로새서
1. 저자 : 사도 바울과 형제 디모데
2. 장소 : 로마 감옥
3. 시기 : 주후 64년에 빌레몬서와 거의같은 시기에 썼다(4:9-10, 몬 10-12).
▶ 데살로니가전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 :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동역자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함께 고린도에 머무르면서(1:1, 3:6, 행 18:1, 5) 쓴 것이다.
3. 시기 : 주후 54년경
▶ 데살로니가후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와 시기 : 데살로니가후서는 전서와 같은 장소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연이어 기록되었다.
주후 54년경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동역자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함께 고린도에 머무르면서(1:1, 3:6, 행 18:1, 5) 쓴 것이다
▶ 디모데전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와 시기 : 바울이 로마의 첫 번째 투옥에서 풀려난 뒤인 주후 65년경,
즉 바울이 처음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후에 마게도니아(1:3)에서 썼다.
▶ 디모데후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와 시기 : 바울이 순교 직전인 주후 67년경,
2차 투옥시 로마 감옥에서 썼을 것이다
▶ 디도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 : 1장 5절과 3장 12절을 볼 때 기록 장소는 니고볼리
3. 시기 : 대략 주후 65년경 바울이 첫 번째로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후
그레데를 거쳐 니고볼리에 도착했을 때(1:5, 3:12) 썼을 것이다.
▶ 빌레몬서
1. 저자 : 사도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1절).
2. 장소 : 로마 감옥
3. 시기 : 대략 주후 64년경,
바울이 처음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나기 바로 전에(9, 22절) 썼을 것이다
▶ 히브리서
1. 저자 : 바울을 저자로 추정할 수 있다.
13장 23절에서 디모데를 언급한 것과 분위기로 보아 그가 저자임을 알 수 있다.
* 전통적인 입장은 저자를 알 수 없다고 한다.
2. 장소와 시기 : 사도 바울이 로마 투옥에서 풀려난 후인
주후 67년경 밀레도에 머물 때(딤후 4:20 참조) 기록했을 것이다.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13:24)이라는 언급에서 이 책은 로마에서 쓰지 않았다는 것을 본다.
내용에 따르면 이것은 분명히 히브리 신자들에게 쓴 것이다.
▶ 야고보서
1. 저자 :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자,
주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1:1, 마 13:55)인 야고보가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쓴 것이다(1:1).
2. 장소 : 야고보가 어느 때 예루살렘을 떠났다는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이것은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쓰였을 것이다.
3. 시기 : 그 내용에 교회의 하락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주후 50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 베드로전서
1. 저자 : 사도 베드로가 이방 나라들에 흩어져 있는 유대 믿는 이들에게 쓴 것이다(1:1).
2. 장소 : 유프라테스 강의 큰 도시인 바벨론에서 이루어졌다(5:13).
3. 시기 : 바울의 순교 이전임이 분명하다(5:13).
그러므로 이것은 주후 64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 베드로후서
1. 저자 : 사도 베드로가 이방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의 믿는 이들에게 쓴 것이다(벧전 1:1).
2. 시기 : 2장의 교회의 타락한 상태와 3장 15절에서 16절의 사도 바울에 관한 천거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바울의 순교 후인, 아마도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함락 전인 주후 69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순교 직전에 기록되었음이 틀림없다(1:14).
▶ 요한일서
1. 저자 :사도 요한
이 서신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은 모든 믿는 이들에게 쓴 것이다(5:11-13).
2. 장소와 시기 : 교회 역사와 이 서신 전체의 내용에 따르면 요한이 밧모 섬의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인
아마도 주후 90년과 95년 사이에 그가 마지막으로 사역했던 에베소에서 기록했음에 틀림없다.
▶ 요한이서
1. 저자 : 요한이 택하심을 입은 자매와 그녀의 자녀에게 쓴 것이다(1절).
2. 장소와 시기 : 요한일서 이후에 쓰여졌을 것이다(요한일서의 이 부분을 참고하라). 교회 역사는 이 책이 기록된 당시, 요한이 에베소의 장로였음을 명확하게 진술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에베소에서 기록됐음이 틀림없다
▶ 요한삼서
1. 저자 : 요한이 에베소의 장로였을 때, 그곳에서 가이오에게 쓴 것이다(1절)
▶ 유다서
1. 저자 : 주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였던 유다(마 13:55)
2. 장소 : 예루살렘이거나 유대일 것이지만 어느 곳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3. 시기 : 교회의 타락한 상태는 베드후서를 기록한 당시의 상태와 유사하므로 예루살렘이 멸망한 주후 70년 이전인 주후 69년경에 베드로후서와 거의 동시에 기록했을 수 있다.
▶ 요한계시록
1. 저자 : 사도 요한
2. 장소와 시기 :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을 당시인 주후 90년경에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1:1, 4, 9) 쓴 것이다.
대한민국 5대 국경일(國慶日)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
대한민국은 격변의 20세기 일제의 침탈 가운데 발아하여, 야만적 태평양 전쟁과 6.25 한국전쟁을 겪으며 자유민주주의를
기치로 성장했다.
이념으로 갈린 동족상잔의 6.25는 서로 무고한 생명을 살육하고, 아름다운 강산을 초토화한 슬픈 전쟁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전쟁을 기억하며, 전쟁 후 70년간 평화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또한 목숨을 바쳐 조국을 지킨 숭고한 참전
용사들에게도 머리 숙여 감사의 마음을 바친다.
한국교회총연합은 6.25 전쟁 73주년,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 기념 예배>를 드리며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첫째, 한국교회는 한반도의 지속적인 평화와 안정, 복음적 통일을 위해 기도한다.
모든 교회는 평화의 하나님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평화의 시간이 더 길어지도록 행동하며 기도할 것이다. 생명을 존귀히 여기는 복음으로 이념과 삶의 방식이 다른 이들과 대화하며 협력할 것이다.
둘째, 정치 지도자들은 남북의 평화로운 공존과 국민통합으로 남남갈등 해소에 앞장서야 한다.
헌법 제4조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는 조문대로 평화적 통일의 방법을 강구해야 하며, 작금의 지나치게 적대적인 남남갈등의 해소를 위해 행동할 것을 촉구한다.
셋째, 한국교회는 저출산과 기후 위기 극복, 이웃과 함께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이 당면한 저출산과 지구적 문제인 기후 위기는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라 국민과 함께 저출산과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며, 주변의 이웃을 돌아보는 사랑 실천에 앞장설 것을 다짐한다.
비구름 바람 거느리고
인간을 도우셨다는 우리 옛적
삼백예순 남은 일이 하늘뜻 그대로였다
삼천만 한결같이 지킬 새 언약 이루니
옛길에 새 걸음으로 발맞추리라
이날은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다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
손 씻고 고이 받들어서
대계의 별들 같이 궤도로만
사사없는 빛난 그 위 앞날은 복뿐이로다
바닷물 높다더냐 이제부터 쉬거라
여기서 저 소리나니 평화오리다
이날은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다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5대 국경일의 하나로 7월 17일이다.
조선왕조 건국일이 7월 17일로서, 이 날과 맞추어 공포하였다.이 날은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한 헌법의 제정(7월 12일) 및 공포(7월 17일)를 온 국민이 경축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며 헌법수호를 다짐하는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온 국민은 가정에 국기를 게양하여 이 날의 뜻을 높이고 있다. 중앙기념행사는 생존하는 제헌국회의원과 3부요인을 비롯한 각계 대표가 모여 의식을 거행한다.
성경 수비학이란 성경에 나온 숫자를 가지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숫자는 7과 40입니다.
7이란 숫자는
완성, 또는 완벽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7:2-4, 요한계시록 1:20).
7이 자주 “하나님의 숫자”로 불려지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완벽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4:5, 5:1, 5-6).
숫자 3 또한 거룩한 완전성, 즉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이루어진 삼위일체를 생각나게 합니다.
숫자 40은 종종 “근신이나 시험의 숫자”로 이해됩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아다녔고(신명기
8:2-5),
모세는 40일 동안 산에 있었으며(출애굽기 24:18),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40일 이후에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 경고했고(요나 3:4),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시험 당하셨으며(마태복음 4:2),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사이에
40일이란 기간이 있었습니다(사도행전 1:3).
성경 속에서 반복되는 또 다른 숫자는 4인데, 이는 동, 서, 남, 북과
4계절을 가리키는 창조의 수입니다.
숫자 6은 인간의 수로 여겨집니다.
인간은 6일째에 창조되었고, 오직 6일만 일합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성경이 숫자를 사용해 무엇인가를 강조하는 또 다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적그리스도의 숫자가
666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숫자들이 정말로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여전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어떤 패턴을 가지고, 또는
영적 진실을 가르치기 위해 숫자를 사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성경 수비학”을 지나치게 중요시하고, 성경에
나온 모든 숫자들에 담긴 특별한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종종 성경 속의 숫자는 단순히 숫자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 속에서 비밀스러운 의미나 숨겨진 메시지, 암호를 찾아내라고 요청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모든 필요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고, 우리로 하여금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기에 충분한 숨김없는 진리들이 더 많이 담겨져 있습니다(디모데후서 3:16).
오늘날 수비학은 갑자기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세계에서 우승한 유명 인사들의 이름을 바꾸는 수많은 영화 스타들의 이름에 행운이 찾아옵니다. 이제 제대로 작동합니까? 우리는 역사의 다른 문화에서 숫자가 가진 중요성과 중요성을 볼 때 우리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숫자에는 모든 차이를 만드는 특정 진동이 있으며 수비학자가 이 숫자를 분석할 때 진동이 개인에게 미칠 영향을 평가합니다. 숫자와 의미를 하나씩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0은 아무 의미도 없고, 무효이고, 공허하지만 강력한 숫자이며 신중하게 만들어진 상징적인 변경 사항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도교와 불교와 같은 믿음은 영적 공허함과 공허함을 나타내고, 이슬람과 카발리즘과 같은 믿음에서 0은 무한한 빛의 힘과 무한한 에너지의 상징을 의미합니다. 0은 본질적인 공허함, 모든 것의 기원, 생명의 알이 기원하는 완전한 원, 그리고 모든 존재의 전체성을 취합니다. 그것은 라틴어 nulla figura에서 파생되었으며, 이는 실제 인물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는 0 다음에 오고 2보다 앞에 오는 숫자입니다. 그것은 남성의 남근을 상징하는 표시이며 신과 하나가 됨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키며 남성적 힘의 우월성을 지지합니다. 그것은 화합의 본질과 삶의 주기의 시작에 대한 궁극적인 상징으로 간주됩니다. 그것은 모든 가능성과 모든 존재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이중성을 제거하는 숫자이며 모든 다양성이 숫자 1에 수렴한다고 믿어집니다. 그것은 완전한 완성과 히브리어와 같은 종교 질서를 볼 수 있으며 잠재 지능과 가장 높으신 분의 자리이며 아도나이와 동등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것은 이슬람 신앙에 대한 절대적인 숫자로 간주되며 피타고라스 학파는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믿습니다. 중국인은 가장 중요한 남성성을 유지합니다. 그것은 양, 천상의 그리고 상서로운 힘이라고 믿어집니다.
이중성의
두 여신과 자연적으로 하나의 반대인 하나는 남성을 의미하고 둘은 반드시 여성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다양성, 변경 및 갈등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한 쪽에서 균형과 안정성을 예시합니다.
2는 화합의 반대와 일시적이고 파괴 가능한 것을 상징합니다. 두 개의
번호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경향이 있으며, 야망이 없고 불안하고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좋은 속성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데 좋고 협조적이고 선량한 성격을 좋아할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가 이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힌두교 신앙에서
두 가지는 힘의 이중성을 나타내고 히브리인들은 그것이 생명력을 상징한다고 믿습니다. 하나는 음양의 강력한 부분을 나타내고 두
개는 음의 약한 부분을 나타냅니다.
3은 삼위일체, 우주의 3단계, 삶의 3단계, 간단히 말해서 성장, 절정 및 죽음을 포함하는 3단계를 나타냅니다. 숫자는 성장, 에너지, 이중성 및 표현 및 합성을 향한 움직임을 예시합니다. 그것은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 영혼 및 정신의 삼중 요소; 땅, 천국과 지옥과 탄생, 삶과 죽음은 모두 3으로 상징됩니다. 이 숫자를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매력적이고 자기 표현적이며 외향적이고 활동적입니다. 자연적인 욕망은 돈과 이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Three аlѕо는 thе 3명의 마녀와 3개의 소원과 같은 초자연적인 것과 강한 연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 전통에서는 제자들이 따르도록 요청한 믿음 또는 삼보(三寶)의 세 가지 보석이 있습니다. 중국 신화 3에 나오는 긍정적인 힘을 가진 상서로운 숫자입니다. 도교는 세 가지가 평형의 중심점이라고 믿습니다.
4개는 3개를 성공하고 5개는 모든 단단한 물체의 기초로 간주됩니다. 그것은 네 번째 차원, 즉 시간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건설의 상징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안절부절, 순환성 및 역동성에 반대되는 안정적입니다. 그것은 전체성, 완성 및 견고성을 예시합니다. 수비학적 숫자가 4인 사람들은 현명하고 침착하며 꾸준합니다. 4는 지구, 물, 불, 공기의 네 가지 기본 요소를 나타냅니다. 북쪽, 남쪽, 동쪽 및 서쪽의 4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낙원에는 4개의 강이 있었습니다. 그리스 문화에서 4는 헤르메스의 신성한 숫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네 가지가 선행과 지성의 숫자라고 믿습니다. Four аlѕо는 Kabbalah의 4가지 세계를 나타냅니다. 힌두교의 경우 4개는 완벽을 나타내며 힌두교의 삼위일체 중 하나인 브라흐마는 4면을 나타냅니다. 도교는 탑, 칼, 스파이크 곤봉을 들고 있는 4명의 천상의 수호자가 있다고 믿습니다. 튜튼 사람들은 세상을 지지하는 네 명의 난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슬람에서는 우주의 본질, 창조자, 우주 영, 우주 영혼, 태초 물질의 4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많은 긍정적인 특성이 명시되어 있지만 네 가지와 같은 부정적인 특성은 사람들을 느리고 폭력적이며 의심스럽고 매우 보수적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오감(五感)과 오감(五感), 그리고 다섯 개의 꽃잎이 있는 예수나 연꽃의 다섯 상처를 인지합니다. 5는 새로운 것, 탐험되지 않은 것, 그리고 변경 가능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소우주를 상징합니다. 여러 번 오각형은 두 손과 두 발을 가진 인간을 상징합니다. 오각형은 하늘, 땅, 네 가지 기본 점 및 중심점의 만남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우주의 창조주인 신회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명상, 종교 및 다재다능함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남성 섹슈얼리티의 상징이며, еvеrуthіng에게 끌리지만 іѕ аnуthіng에 의해 개최되지는 않습니다. 충동적이고 대담하며 참을성이 없습니다. 5번인 사람들의 특징적인 특성은 미개척이고 매우 외향적인 것을 아는 데 매우 호기심이 많습니다. 그들은 다재다능하고 수완이 있습니다. 그들은 규칙과 법률을 조작할 수 있고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지만 때때로 이것은 그들이 모든 거래의 잭이 되지만 아무도 마스터가 되지 못하게 합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다섯은 에덴 동산에서 타락한 후의 인간을 상징합니다. Graeco-Roman 문화에서 5는 사랑과 연합의 숫자입니다. 이 숫자는 금성을 의미합니다. 힌두 신화에서 5개는 필수 조합을 만들고 5개는 가혹함, 힘 및 두려움을 나타냅니다. 이슬람교는 다섯 가지 기본 교리와 이슬람교도가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는 다섯 가지 기둥을 믿습니다.
6은 완벽한 숫자로 간주되며 David와 결혼의 별과 관련된 숫자입니다. 여섯 аlѕ®는 조화, 안정성 및 균형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를 완성하는 데 6일이 걸렸습니다. 6개의 аlѕ®는 행운, 건강, 아름다움 및 기회를 나타냅니다. 주사위는 6면이 있으며 가장 높은 숫자는 6입니다. 힌두 신화에서 인기 있는 태양 바퀴에는 6개의 광선이 있습니다. 6번을 가진 사람들은 매우 긍정적인 환경을 가지고 있으며 관계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따라서 평화를 즐깁니다. 가치를 존중하고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을 즐깁니다. Kabbalism 6은 아름다움과 창조를 의미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그 숫자가 완성과 창조의 상징이며 하나님이 여섯째 날에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더 밝은 특성의 여섯 가지 특성은 더 어두운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완고하고, 비논리적이며, 편협하고 과도한 불안으로 고통받습니다.
Seven은 일곱째 날, 휴식과 예배의 날, 하나님의 미덕을 기억하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선물을 생각하는 날을 생각나게 합니다. 일곱 가지 성사, 일곱 가지 덕, 일곱 가지 죄, 일곱 가지 영의 선물과 같은 다양한 참조가 있습니다. 생명의 나무에는 7개의 가지가 있고 모든 가지에는 7개의 잎이 있습니다. 태양의 일곱 번째 광선은 인간이 죽은 후 천국에 도달하기 위해 가는 길입니다. 불교에서 일곱은 상승의 숫자이고 일곱 단계는 하나가 시간성을 초월하기 위해 취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 신화에서 7은 Fate의 7명의 여사제와 7명의 현자처럼 중요한 숫자입니다. 다산을 상징하는 여섯 마리의 소와 황소가 있습니다. 7은 달과 관련이 있으며, 이는 반사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아폴로의 악기에는 7개의 현이 있고 판에는 7개의 파이프가 있습니다. 히브리 문화에서 7은 신비로운 지능을 의미하며 유대 달력에서는 7일의 성일을 의미합니다. 이슬람에서는 7개의 하늘과 7개의 색과 7개의 땅과 바다가 있습니다. 일곱 개의 숫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영적이고 철학적이지만 외톨이가 되어 거리를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사적인 사람들이고 그들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민감하지만 공개적이지는 않습니다.
여덟은 부활의 상징이며 낙원의 회복입니다. 그것은 연대와 안정성을 유지하며 첫 번째 큐브이며 루트 구조에서 완벽함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영원, 무한 및 불멸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변환이 시작될 때 반대의 쌍과 비슷합니다. 팔각형은 원형이 되기 위한 정사각형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Fоr ѕоmе іt аlѕо는 리드미컬한 주기를 의미하며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인간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7일의 금식과 엄격한 참회 후에 인간은 8일째에 포만과 만족의 단계에 도달합니다. 불교도들은 8이 완성을 의미한다고 믿고 중국인들은 8이 전체를 의미한다고 믿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여덟은 중생과 중생의 숫자입니다. 이슬람은 하늘과 땅의 고삐를 쥐고 있는 여덟 명의 천사가 있다고 믿습니다. 일본인은 여덟이 풍요와 풍요의 숫자라고 믿습니다. 플라톤은 천국의 기둥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색상의 8개의 구체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8순위를 가진 사람들은 권력, 돈, 성공에 대한 야심 찬 야망을 품고 때로는 갑작스러운 성공이나 실패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때때로 권력에 대한 갈증은 그들을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만듭니다.
9번은 완벽함과 총체성의 숫자입니다. 그것은 지구에 새로운 인간을 데려오기 위해 취해진 기간입니다. 그것은 완료, 성취 및 성취의 삼중 삼중화를 의미합니다. 3과 같은 숫자는 초자연적 인 의미가 있습니다. 0부터 시작하는 숫자 시리즈를 완성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불, 산 및 여성 그룹으로 그룹화 된 남성의 상징과 물 및 동굴과 같은 여성적 인 것을 그룹화 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히브리 신앙 아홉은 지능의 상징이며 순수하고 신비롭지 않습니다. Kabbalism에서는 9개가 기초라고 믿습니다.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아홉은 불의 숫자이며, 아그니입니다. 9번의 특징적인 특성은 동료 인간을 섬기고 사회적 대의를 위해 싸우고자 하는 강한 열망입니다. 9번의 연인이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관대하지만 나중에는 이기적이고 성격이 급한 사람들. 그들은 쉽게 상처를 받고 정서적 안정이 부족하기 때문에 조금 민감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10은 중생과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그것은 운명과 운명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분을 향한 영혼의 귀환과 하나가 되는 것을 표시합니다. 그것은 모든 계산의 기초이며 힌두교 우주론과 중국인의 기초 역할을 합니다. 중국어의 경우 셀 수 없는 것, 모든 것의 표현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창조의 본보기입니다. 중국 문화에는 십계명이 있고 기독교에는 십계명이 있습니다. 히브리 신앙에 대한 Aссоrdіng tо 요드의 숫자, 10은 영원한 단어, 신성의 첫 글자입니다. 10가지의 성격 특성은 매우 강력하고 때로는 가려집니다. 그들은 종종 지도자와 개척자입니다. 그들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길을 거의 막지 않습니다. 숫자의 부정적인 특성은 완고함, 완고함 및 완고함입니다. 그들은 때때로 비관적이고 질투합니다.
이것은 각 숫자가 제공하는 특성과 기능입니다. 이 정보가 기본 아이디어를 형성하기에 충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지식 상태와 경험의 폭이 기적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결정해 줄 것이다.
예를 들면 사막에 거주하던 사람이 나이아가라 폭포수 앞에 서면 그는 분명히 이것은 기적이라고 할 것이다.
100년 전에 살던 사람이 오늘의 시대를 바라본다면 이것도 기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초음속 비행기와 거대한 화물선이 바다에 둥둥 떠 다닌다는 것이 놀랍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에서 설교하는 것을 한국에서 즉시 들을 수 있다는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하겠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적과 기사를 Wonder,
기적을 Miracle,
표적은 sign 이라고 번역했다.
한글 성경은 헬라어 세메이온(σημειόν)을 이적 또는 표적이라고 번역했고,
테라스(τέρας)를 기적이라고 번역해서 혼선 양상을 보인다.
이적, 기적, 기사는 테라스(τέρας)로 번역해야 하고
세메이온(σημειόν)은 표적으로 번역해야 구분이 될 것이다.
“표적”이란 히브리어로 ‘오트’(תוא)이고, 헬라어는 쎄메이온(σημεῖον)이며 영어로는 ‘사인’ (sign)으로 ‘표시’, ‘징조’, ‘증표’ 등의 뜻을 가진다.
표적을 둘로 나누어 본다면 초인간적 행사를 이적 기적이라 하고 초자연적 행사를 이적 기사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적이나 기적이나 기사는 표적(sign, σημεῖον)의 다른 명사들이다.
그래서 히브리어에서는 이적, 기적, 기사, 표적이 ‘오트’(תוא)로 통일된다.
요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일곱 개의 대표적 표적이 나타난다.
1.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표적(요 2:1~11)
2. 가버나움에서 죽어가는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요 4:46~54))
3. 베데스다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요 5:1~9)
4.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오병이어로 5,000명의 무리를 먹이신 표적(요 6:1~15))
5. 디베랴 바다에서 물 위를 걸으신 표적,(요 6:16~21)
6. 실로암에서 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신 표적(요 9:1~12)
7. 베다니에서 죽은 지 사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요 11:1~44)
이 표적의 의미가 무엇인가?
성경에 나타난 구속사적 표적들
첫째는 이스라엘 구원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표적
지팡이로 뱀을 만들어 보이시는 일, 모세의 손에 문둥병을 발하게 하셨다가 다시 치유하시는 일 등이 약속을 이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표적인 것이다. 임마누엘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인이다.
둘째는 무흠하신 속죄의 어린 양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적
메시야가 성령으로 잉태되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성령세례를 받게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속죄 양으로 오신 메시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이다(사 7:14).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하심과 속죄주의 자격을 나타내는 사인이다.
셋째는 기적을 통해 천국을 보이시는 성령님의 능력의 표적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권능을 따라 나타나는 치유사역과 초자연적 기적 등은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님을 통해 만물을 회복하고 우리를 천국으로 초대하시는 메시아인 증거의 사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주님에 의한(by Jesus), 주님에 대한(of Jesus), 주님을 위한(for Jesus) 표적을 탐욕에 의하여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표적으로 오인하게 되었다.
오병이어의 표적이 있은 뒤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질문했다. 모세는 만나를 통해 먹을 것을 제공하는 표적을 보였는데 예수는 무슨 표적을 보이겠는가? 라고 질문하게 된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따른 것은 경제적 해결이나 정치적 이슈로 표적을 구했음을 스스로 자인하는 장면이다
그 증거로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주님을 따르는 무리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때 주님께서 그들을 보면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나를 증거하는)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이 땅의)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라고 하셨다.
주님은 정치적이고 탐욕적인 표적을 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진정한 표적이 무엇인가를 선포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태복음 12:39~40)(누가복음 11:29)
주님은 이미 자신에 대한 표적으로 많은 이적 기사를 통해 주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육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며 이 땅의 표적만을 구하는 저들에게 요나의 표적을 통해 종말론적 구속자로 오시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증거하신 것이다.
요나의 표적이 주님 자신을 증거하는 모형으로서의 진정한 표적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러나 깨달을 수 있는 귀 있는 자만이 알 수 있었다.
바울사도께서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선포했다.
“유대인은 (땅의)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땅의)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표적과 지혜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전 1:22~23).
성경에 나타나는 이적 기사의 표적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 예언한 메시아요 구세주라고 표식인데 이것을 모르는 군중들에게 바울 사도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진정한 표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기적은 불가사의한 일을 뜻하는 라틴어 미라쿨룸(miraculum)에서 왔다.
자연이나 사건의 흐름에 대해
초자연적 간섭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적은 근본적으로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다.
기독교 안에서도 기적의 종결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있는 반면 오늘날까지 성결파 및 오순절 복음주의자들은 신유와 방언 등 각종 기적이 유효함을 주장한다.
이런
기적의 개념에 대해 세속 학문은 역사적으로(Renan), 과학적으로(J. Huxley), 신학적으로(Sabatier),
철학적으로(D. Hume) 많은 반론을 제기해왔다.
18세기 영국 철학자 흄(David Hume)은 기적을 자연법의 위배로
보았다.
흄은 종교에 관한 자신의 유명한 두 저서 <종교의 자연사>와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에서 우주
질서의 원인이 되는 지적 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신은 성경적 창조주 하나님이라기 보다 우주
질서의 원인으로서 가정된 이신론적 존재(a deitistic being)이며 따라서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는 자연 법칙을 위반하는
기적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흄에게 있어 기적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흄이 볼 때에 혹 신의 특별한 의지에 의해
일반 법칙이 깨어지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이 전혀 알아챌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흄이 영국 교회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된 것은 정통 교리에 반하는 바로 이같은 그의 사상이 원인이었다.
기적은 분명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20세기 초 과학자들 뿐 아니라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기적을 거부한 사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개혁주의 보수신학자 벤자민 워필드는 우리 마음에 품은 세계관이 아니라 우주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실들에 대한 정당한 고찰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기적을 이해하였다. 그러면서 워필드는 기적은 사도들이 교회의 토대를 놓음과 함께 그쳤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즉 성경에 계시된 기적은 사실이나,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기적은 성경이 완성되면서 종결된 것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오순절 계통뿐 아니라 보수장로교 안에서도 기적 종결에 대한 반론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여기서 기적은 종결되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신학적 논쟁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해결점 찾기가 결코 쉽지않은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이 문제는 성경을 과학의 틀 속으로 가져갈 때 문제가 발생한다. 즉 피조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는 인과율(因果律)에 사로잡힌 희랍인들의 구조 안에서 기적은 이해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었다. 기적이 그들의 틀 속에 잡힐 수 없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에 있어 관심은 하나님의 일이었다. 하나님이 단지 무엇을 하시며 그 일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가 그들의 의문의 영역이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의 과학적 검증은 희랍인의 몫이지 결코 유대인들의 몫은 아닌 것이다. 즉 성경을 과학의 틀 속에 넣을 것인가 아니면 성경의 틀 속에 과학을 넣을 것인가에 따라 해석은 전혀 달라진다. 성경은 과학 책이 아니다. 과학의 언어로 쓰여 지지 않은 책이다. 자연과학적 영역과는 관심 분야가 다른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대해 우리가 갖는 신앙적 믿음으로 인해 비록 성경이 과학책이 아니기는 하나 성경의 말씀대로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이 곧 성경의 하나님이시라면 진정한 과학은 성경적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 초월과 내재의 두 권의 책(말씀의 책 성경과 하나님의 활동의 책 자연)은 때로는 근접하기도 하고 어떤 시기는 우호적이었으며 어떤 때는 서로 간에 무관심한 영역으로 치부하여왔으며 어떤 때는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여왔다. 그것은 간혹 필요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필요한 긴장이기도 하였다.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자연과학의 질서를 만드시고 그 사실을 성경을 통해 계시하시고자 하였다. 참된 기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 우주의 근본적인 법칙과 과정들의 관계에 비추어 정의 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이적은 자연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이라고 알고 있는 것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자연의 통상적인 일상 진행 과정을 자연이라고 부르고 하나님께서 이에 반대되는 일을 행하실 때에 기적 또는 이적이라고
한다’(contra Faustum ⅩⅩⅥ)고도 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본성에 대항하는 행위를 하시는 분이 아니며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믿음이 약한 자들’이 자기들의 틀 속에서 오해를 가지고 살 뿐인 것이다. 그럼 이제 기적과 이적과 표적과 기사가
성경적으로 어떤 늬앙스를 가지는 말인지 살펴보자.
1. 기적
성경에
기적으로 번역된 단어는 시편 40:5(paia), 이사야 20:3(mowpheth), 데살로니가후서 2:9(teras) 등이
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역사(시 40: 5)가 바로 초자연적 사건으로서의 기적이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기적(奇蹟, wonder, miracle)의 의미는 사실 그리 간단하지 않다.
기적은 하나님의 어떤 목적성을 가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적을 너무 단순하게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질서나 시간에 초자연적으로 친히 개입하시는 역사를
말한다’고 말하면 세상은 스스로 존재하였으나 하나님이 가끔은 세상에 직접 개입하신다는 늬앙스를 주거나 창조의 섭리와 보존은 덜
직접적이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므로 기적이라는 말의 본 뜻은 잘 분별하여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져야 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기적이라는 말을 이신론적 사고나 이원론적 의미로 무심코 사용하는 경우를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웨인 그루뎀은
기적에 대한 성경적 의미에 대해 ‘이 세상에서 흔치 않은 방법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적은 좀 더 구체성을 가지고 성경에서 이적(異蹟, sign, miracle), 표적(表蹟, sign), 기사(奇事, miraculous sign), 이적의 표징(表徵, miraculous sign, 출 4:8) 등의 말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2. 이적
이적은 자연의 일반적 법칙이나 추이와 다르게
나타나는 사건을 말하는 데 구약에서는 주로 출애굽, 광야 생활, 약속 땅 가나안으로의 입성(시편 105-106편)과 선지자
엘리야, 엘리사의 활동 기간(왕상 17장-왕하 8장) 때 주로 나타나고, 신약에서는 병고침(마 8:14-17; 요 4:46-54
등)과 귀신 추방(마 8:28-34; 막 1: 23-28 등), 자연 이적(요 2:1-11; 마 14:22-33; 마
8:23-27 등)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3. 표적
표적은
구약의 경우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언약의 관계나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oth= 출 12:13; 신 22:14, 17,
20)되며 신약에서는 주로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이나 그에 대한 반응에 표적(semeion=마 12:38)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4. 기사
기사(oth=
시 105:27, mowpheth=출 11:9,10; 신 4:34; 6:22; 느 9:10; 시 78:43 등 , paia= 시
9:1, teras=마 24:24)는 놀랍고 경탄할만한 사건에 주로 쓰였는데 어원적으로 이적(oth=출 4:8,9; 민
14:11,22; 신 4:34= 헬라어 semeion에 대응; 느 9:10, mowpheth= 출 4:21= 헬라어 teras에
대응, paia= 출 3:20, semeion=마 12: 38, 39)과 거의 같은 말이므로, 이적의 범주에 들지 않는 기사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잘 구별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구원의 능력과 언약의 신실함을 나타내기 위해 표적을 주시고
기사(wonders= mowpheth,히)를 행하신다.
기사는 종말론적인 우주적 징조들(욥 2:30)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 곳곳에 신사를 세운 뒤 조선인에게 참배하도록 강제한 정책을 가리킨다.
신사참배는 신토의 신사에 참배하는 종교 의식이다.
종교의 교리가 신사참배와 충돌하는 기독교 신자들은 신사참배 강제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여 이에 저항하다가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일제는 각지에 신사를 세우고 학교와 가정에도 소형 신사를 설치하도록 하여 황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주로 기독교 계열의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이같은 정책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조선에는 개화기 이래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 학교들이 다수 있었고, 우상 숭배를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기독교의 교리는 신사 앞에서 절하는 신사참배 의식과 충돌을 낳았다.
기독교계는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가 1935년을 기점으로 조선총독부의 강경책에 신사참배 용인파와 반대파로 분열되면서 큰 갈등이 시작되었다.
1937년 중일 전쟁 무렵부터는 조선총독부가 일부 학교를 폐교시키면서까지 신사참배 강행 의지를 보여 문을 닫지 않은 학교들은 신사참배를 실시해야 했다.
조선총독부는 기독교계 학교에 보급된 신사참배를 교회로까지 확장시키기 위하여 압력을 행사했고,
1938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계기로 각 교파의 목회자들이 솔선해 신사참배에 나서면서 급격히 황민화 정책에 동조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반대파의 강경론자인 주기철, 최상림이 옥사하는 등 희생자도 발생했다.
한편 평양에 있던 기독교 계열의 숭실대학은 1912년 11월 25일 조선 통독부 학무국이 학교 인가를 했으나,
1925년 대조선 교육방침(소위, 문호통치)으로 숭실대학교를 전문학교로 격을 낮추었다.
1938년 3월 4일 일본 제국의 억압적인 통치와 강제적 신사참배에 반대한 숭실전문학교는 자진 폐교 결정을 내린다.
신사참배와 친일활동을 했던 당시의 다른 대학들에 비교해 볼 때 이는 진정으로 민족을 위한 대학이었다는 평가가 의식있는 국민들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신사참배에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 등 다른 종교 성직자와 신자들도 참여해야 했으나, 상대적으로 마찰은 적었다.
신사참배는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강요한 것으로서, 신사는 일본의 민간종교인 신도(神道, Shintoism)의 사원으로 일본 왕실의 조상신이나 국가 공로자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일제는 합방 후 신사사원규칙을 발표, 서울에 조선신궁을 세우는 한편, 각 지방에 신사를
세웠다.
조선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은 1935년경부터인데, 우선 각급학교 학생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으나 기독교계 학교에서는
이를 거부하다가 평양 숭실학교·숭의학교 등이 폐교되었고 학생·선교사·목사들의 반대운동은 계속되었으며, 주기철 목사와 같이
적극적으로 반대하다가 투옥되어 순교한 일이 발생하였다.
중일전쟁(1937∼1945년)을 전후하여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재차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천주교는 로마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신사참배에 응했고,
감리교도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장로교는 한때 반대했으나, 총독부의 요구와 일부 친일목사들에 의해 제27회 총회에서 찬성결의를 함으로써 결국 굴복했다.
1945년 8월 15일 지국주의 야욕의 일제가 패전으로 종전되었지만 신사참배와 관련하여 아직까지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등 문제와 논란이 발생되고 있다.
신사참배에 기독교계 전체가 공식적으로 동원된 것은 그 후유증이 상당히 컸다.
일제 패망 후 며칠만에 신사를 불태워 버렸을 만큼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조선인의 반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특히 신사참배에 앞장선 이들이 법적 책임을 지는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문제가 잠복해 있었다.
후에 이로 인한 상처를 씻기 위해 공산주의를 사탄으로 삼는 지나친 반공주의와 보수주의적 흐름이 나타났을 정도로 한국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가 있다.
2006년 대한민국의 소장파 목회자들이 모여 결성한 한국 기도굑 목회자 협의회가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한 일과 독재정권 시절에 권력층과 야합해 정의를 뒤엎기도 한 죄악에 대해 마음을 찢으며 참회한다."
내용으로 반성문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교단 차원의 공식적인 인정이나 참회는 현재까지 하지 않고 있다.
한국 장로교회 신사참배 결의와 1940년대의 부일과 배교
2018년 9월 10일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를 “솔선 여행하고, 비상시국하에서의 총후 황국 신민으로서의 적성을 다하기로” 결의하고 성명서를 낸 지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는 한국 장로교회 50주년 희년잔치를 마친 후 불과 4년 만의 일이었는데, 오늘날까지 134년의 한국 장로교회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이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여 관심은 갖지만 매우 피상적으로 알고 있으며, 그 이후 1945년 해방 때까지 교회가 어떤 범과를 저질렀는가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여 회개 집회를 갖는다는 보도가 있지만,1)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학문적인 평가와 반성도 빈약한 실정이다. 더구나 올해는 한국 장로교회 중요 교단 총회가 신사참배 결의 80주년 기념일에 개회하는 데도, 이에 대한 의미있는 행사가 준비되지 않고 있는 것은 한국 교회의 빈곤한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한국 장로교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여, 그 이후 1940년대 한국장로교회의 부일과 배교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한다. 이 사건은 우리 시대에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그 역사적인 경계를 삼고자 한다. 이 논의를 통해 한국 장로교회가 새롭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1.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1) 일제강점기 기독교 탄압의 배경과 신사참배 강요
일본 제국주의(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정치적 억압정책, 경제적 수탈정책, 문화적 말살정책 등 세 가지 정책으로 나타났다.2) 정치적 억압정책은 한국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한국인의 정치적 참여를 봉쇄하는 것이었고, 경제적 수탈정책은 농업 방면과 상공업 방면에서의 수탈이 중심이 되었으며, 문화적 수탈정책은 교육정책과 언어정책, 역사왜곡 등이 중심이 되었다. 거기다가 종교적 탄압정책도 함께 나타났는데, 일제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극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천황숭배와 신사신앙을 축으로 하는 그들의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기독교와는 조화, 공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제에게는 당시 기독교가 민족운동과 깊은 연대를 가진 배일세력으로 인식되었으며, 일본과 경쟁, 혹은 적대관계에 있는 영국과 미국 등 서구 여러 나라들과 선교사를 매개로 연결되어 통제나 지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3) 일제가 기독교를 유독 탄압했던 것은 이렇게 일본의 제국주의적 본성과 갚은 관련을 갖는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은 그 야욕을 중국으로 뻗히게 되었는데, 1932년에 허수아비 정권으로 만주국을 수립했다. 일제의 이러한 야욕은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노골화되어, 1937년 7월 선전포고 없는 중일전쟁을 도발한 후에는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며 중국대륙을 병탄하려 했다. 이는 전쟁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었으므로, 그들이 즐겨 사용했던 ‘총후(銃後, 후방을 의미)의 지원과 협력을 위해 국민정신의 통일이 중요했다. 이에 조선과 일본이 하나임을 강조하는 내선일체 정신 계몽에 적극적이었다.
1936년 8월 관동군 사령관 출신의 미나미가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조선민족을 말살하는 대대적인 억압정책을 폈다. 일제는 1937년에 들면서 9월 6일 애국일 제정, 10월 2일 ‘황국신민의 서사’의 제정과 일상적 제창 강요, 1938년 2월 6일 지원병제 실시, 3월 4일 민족성 말살을 위한 조선교육령 개정, 1939년 1월 10일 창씨개명 강요, 1942년 5월 징병제 실시, 1942년 초등교육 배가계획 등의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4)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시작한 후 그들의 종교 신도(神道)를 한국에 이식하기 시작했다. 1925년 조선신궁을 건립한 이래 도처에 신사를 건립하면서 1936년에는 전국에 54개의 신사(神社)와 293개의 신사(神祠)를 보유하게 되었다. 일제는 신사참배로 국민들의 정신적 통일을 이루려 하였다.
신사참배의 강요의 첫 시도는 1932년 춘기 황령제의 제례에 각급학교의 참여를 요구한 데서 시작되었다.5) 이러한 요구가 1935년부터 기독교 학교 신사참배 강요로 나타났고, 1936년부터는 교회와 교회기관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1937년 7월에 1면 1신사 정책이 추진되면서, 신사가 급격히 늘어 1945년에는 신사(神社) 79개와 신사(神祠) 1,062개가 되었다.6) 최근 공개된 1942년 5월 경 전남 담양면장의 공문에 의하면, 일제는 신사운영비까지 주민이 부담하게 했다.7)
2)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신사참배는 기독교 여러 교파에 요구되어 장로교에서는 1938년 2월 9일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후 8월에는 평양노회, 9월에는 경안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고, 전국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일제의 강요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8) 이 시기에 각 종교단체나 다른 교파들 가운데 천주교는 교황청의 정책에 따라 일찍이 1936년 5월에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였고, 안식교는 1935년에, 감리교는 1938년 9월 3일 총리사 양주삼의 명의로 신사참배 여행 성명서를 발표했다. 마지막으로는 장로교 총회가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 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추히 국민정신총동원 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期)함
소화 13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제27회 총회에서는 이 결의 후 평양기독교친목회 심익현 목사가 신사참배 즉시 실행을 특청하자, 총회가 이를 받아들여 김길창 부총회장의 인솔로 전국노회장 23명이 총회를 대표하여 평양 신사에 참배하였다.9) 이어 총회에서 김길창이 제출한 건의안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10)
1) 당국과 조선교회와 선교사단과의 삼각적 관계의 원만을 도모할 일
2) 총후보국(銃後報國)에 물자헌납운동은 물론 우선 정신 동원의 일부로서 내지교회와의 연락을 위한 친선사절을 보낼 일
3) 국방헌금은 교회가 일정한 시일에 애국예배를 보는 동시에 국방헌금대로서 조직할 일
4) 신사참배는 사대절(四大節)에 일반시민과 같이 참배하도록 당국과 교섭할 일.
12월 12일에는 장로교 홍택기, 김길창, 감리교의 양주삼, 김종우, 성결교의 이명직 등 5인이 한국교회 대표단으로 일본의 이세신궁과 가시하라신궁 참배를 떠났다.11)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겠지만, 총회에서의 부속 결의와 그 이후 지도자들의 행적으로 볼 때 신사참배는 일제의 강요와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3) 기독교 학교의 폐쇄와 신사참배 반대운동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저항의 반작용도 있었는데,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기 위해 1938년 졸업생들에게 우편으로 졸업장을 보내고 스스로 휴교했다. 주한 각 선교부들은 신사참배에 응하지 않기 위해 그동안 설립, 운영해오던 기독교 학교를 폐교했다. 이들 선교부들 가운데는 남장로교회 선교부가 강력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사참배 강요가 본격화 되면서 선교본부 풀톤 총무가 내한하여 신사참배 반대의 의지를 분명히 함에 따라 그해 9월 6일 전라남북도의 도지사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전라지역의 네 학교를 강제로 폐교하였다. 순천 매산학교, 전주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등의 세 학교도 스스로 폐교 신청을 해 폐교되었다.12) 이같은 반응은 부산경남지역을 관할하던 호주장로교회도 1938년 6월에 학교들을 폐쇄하였다.
신사참배 반대에 따른 일제의 종교적 탄압이 가속화되면서 다른 교파들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1942년 2월 20일 미국감리교회 해외선교부에서 선교사들은 모든 선교지역에서 철수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고,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철수하였다.13)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후 전국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평안남도 주기철, 평안북도 이기선, 경상남도 한상동, 만주 한부선 등이었다.14) 집단적, 조직적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한 이들은 1940년 9월 20일 새벽 4시 일제검거로 체포되었다. 한국 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로 200여 교회가 폐문되고, 2천여 명이 투옥되었으며 이중 50여 명이 순교하였다.15) 8월 17일 밤 이기선, 주남선, 한상동 등 20명이 평양감옥에서, 손양원이 청주감옥에서, 또다른 소수가 부산감옥에서 출옥했다.16)
2. 신사참배 결의 이후의 한국 장로교회의 훼절과 배교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가의식으로 결의한 이후 교회는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9월에 있은 제28회 총회에서는 일제에 협력하기 위한 기구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조직했다. 총회 파회 후 산회되는 총회와는 달리 이 기구는 상시체제를 유지하였는데, 이사장은 총회장이 맡고, 각 노회장은 이사로, 총대들은 평의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전국에 26개 노회 지맹이 결성되고, 731개 애국반이 조직되었다. 1937년 7월부터 1940년 8월까지 장로회 총회연맹에 보고된 장로교의 친일행위는 전승축하회 604회, 무운장구기도회 8,953회 국방헌금 15,803.46원, 휼병금 1,726.46원, 유기 308점, 시국강연회 1355회, 위문 181회, 위문대 1,580개였다.17)
1940년대의 한국 장로교회 총회는 개회 이후 총대 일동이 신사에 참배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18) 제30회 총회에서는 시난극복의 결의문을 작성, 총회장 명의로 발표하고, 이를 지나주둔황군사령관에게 보내기로 결의하였다.19)
동양평화를 확보하고 팔기일우의 대이상을 구현한다는 황국부동의 국시를 지금은 적성국 가의 제국에 대한 도전적 태도가 일일 노골화되어 아국의 국시수행에 방해를 위해 광분 하는 현 시국의 긴박하고 비상의 때인 가을에 기독교도로서 초연하지 않고 장로교파 36 만 신도는 불퇴전의 결의를 가지고 국책에 순응하여 결전태도를 실천확립하고 시난극복 의 정신을 갖도록 한다.
소화 16년 11월 22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1940년대의 한국 장로교회가 얼마나 부일과 배교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는 제31회 총회 회의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20)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개회되었던 제31회 총회는 개회예배 전에 먼저 필승 기원선언문을 채택하고,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회의록은 “일동은 크게 감격해서 박수를 하였다”고 기록하였다.21)
천황의 덕분으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고, 그로 인해 세계 신질서를 완성한 것 이 우리 제국의 국시입니다. 우리의 황군 장병은 하늘에서 바다에서 육지에서 큰 전과를 거둬가 고 있는 것에 대하여 전장의 뒤에 있는 국민은 감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가을에 우리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천황의 은혜에 감격해 눈물을 흘리고, 협심 전력으로 성스러운 업적을 완수하도록 매진할 것을 결심합니다.
왼쪽과 같이 선언합니다.
소화 17년 10월 16일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31회 총회에서는 이 선언문 채택뿐만 아니라 개회 이튿날 1942년 10월 17일 오전 9시 30분 총대원들이 일제히 평양 신사에 가서 참배하였으며, 이어 평안남도 고등감찰과장의 시국강연, 국민의례, 특별강연회, 전승기도예배가 있었다. 주일에는 성만찬 예식이 있은 후 창무 조선군 보도부장의 강연, 저녁에는 오후 7시에 전승기도예배를 가졌다. 총회 주최로 대동아전쟁 목적 관철과 기독교도의 실무를 재삼 격려하기 위하여 호남선, 경부선, 함경선, 황해선, 경의선 등 다섯 조로 나누어 전조선 중요도시에서 시국순회 강연대를 파송하기도 했다.22) 총회의 경건회에서도 설교를 맡은 목사가 로마서 13장 1-3절을 중심으로 ‘기독교인의 국민적 각오’라는 친일적 설교를 하기도 했다.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이후 불과 4년 안에 총회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는 더 이상 장로교회의 총회일 수가 없었다.23)
1940년대에는 황민화 사상이 기독교 안에 까지 깊숙이 들어왔는데, 전국 교회에 가미다나(信朋)을 설치하고, 예배 전에 천조대신의 신패에 경배하고, 동쪽을 행해 일본 왕에게 절하고, 황국신민서사 낭독과 국기배례를 한 후 예배를 드렸다. 더구나 서울의 한강이나 부산의 송도 앞바다에서 천조대신 이름으로 신도침례(미소기 바라이)를 받도록 했다. 또 구약성경 사용을 폐지하고, 찬송가도 부분적으로 삭제되었다.24) 한부선은 그 시대에 모든 교회가 총독부의 선전도구가 되기 위해 하나의 교회로 묶여 총독부의 통제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증언한다. 성경도 구약성경에서 종말론과 연관이 있는 부분들은 사용이 금지되었고, 복음서를 중심으로 설교하게 했으며, 기독교인들이 주일에도 ‘전쟁을 위한 노력 동원’이 되었다고 전한다.25) 찬송도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금주가 등 21곡이 삭제되었다.26) 이같은 일은 감리교에서 더 협조적이었는데 1939년 1월 히라누마 내각에 의해 종교단체법이 통과된 후에 일본 기독교 조선 감리교단 정춘수 통리가 전국교회에 시도한 공문에서 확인된다. 공문에는 구약성서와 신약의 묵시록을 사용하지 않고, 사복음서에 기인하여 교의를 선포하기로 교회에 통달이 있었다.27)
3. 1940년대 한국 장로교회의 부일, 배교 행적들
제31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1942년 10월 16일 서문밖교회당에서 26개 노회 총대 목사 69명, 장로 66명, 모두 135명이 참석한 가운데 회집했다. 이 총회에 각 노회에서 상황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총회 회의록 79면부터 90면까지에 수록되어 있다. 각 노회는 감사의 건, 교회상황, 특별상황, 교육상황, 장래 계획, 교세 통계 등을 보고하는데, 노회는 특별상황과 장래 계획이라는 항에서 부일, 배교 행적들을 상세하게 남기고 있다. 이를 내용별로 분류,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애국기 헌납 헌금
1841년 8월 ‘조선장로교도 애국기 헌납기성회’가 조직되고, 모금을 시작하였다. 이어 이 일은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연맹’을 통해 이루어졌다. 다수의 노회에서는 애국기 헌납을 위해 헌금하였는데, 충청노회는 4,051.60원을, 전북노회는 4,000여 원을, 군산노회는 4,500원을, 용천노회 25,000원, 평서노회 8,000여 원을 헌금했고, 삼산노회와 제주노회는 금액을 밝히지는 않지만 애국기 헌금을 위해 후방국민으로서 정성을 다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모든 헌금은 기성회를 통해 모금되어 군에 전달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계속되자 일제는 무기 제작을 위한 물자 확보를 위해 교회의 종을 징발했다. 충청노회는 82개 교회 가운데 80개 교회의 종을 헌납하였고, 평서노회는 68교회에서 국방헌금 외에 조종 77개와 놋그릇 152개를 헌납하였으며, 전북노회는 종과 함께 금속류 회수운동을 전개하여 놋그릇 수 천점과 교회 조종을 헌납했다고 보고하고 있다.28) 이렇게 수납된 종은 1941년 10월부터 1942년 10월 15일까지 전국적으로 1,540개, 총액 약 11만 9,832원에 달했으며, 놋그릇 등 잡종기 헌납은 2,165점이었다.29)
이렇게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1942년 2월 10일 육해군에 애국기 1대 또는 기관총 7정의 대금으로 150,317.50원을 헌납하였고, 그 후 들어온 자금으로 같은 해 6월 조선군 사령부를 방문하여 육군환자용 자동차 3대 기금으로 23,221.28원을 납부했다.30) 1942년 9월 20일 해군성으로 헌납한 애국기 명명식이 경성운동장에서 개최되었는데, 총회 대표가 함께해 감사장과 수납서를 받았으며, 해군보국호 선상전투가 한 대와 육군 기관총 두 정에 대한 명명은 ‘조선장로호’로 명하고, 당일 헌납 보국호 사진을 해군성으로부터 받았다는 총회 연맹 보고를 하고 있다.31)
총회 연맹은 1944년 반도인에 대한 징병령 계획에 따라 “이 감격을 안고 동 준비운동을 함에 있어 실제적 운동으로서 전 조선 기독교 가정 부인계몽운동을 하기로”하고, “전 조선 기독교 지도자는 일본적 기독교 정신 아래 교회원을 지도하도록 함에 있어서 본 총회 연맹은 그 지도자에 대한 황도정신에 함량과 함께 기독교 신학사상의 명랑화를 기해서 철저하게 연성운동을 하도록 함”이라 보고한다.32) 이 시기 한국 장로교회의 부일협력과 반민족적인 행위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2) 시국강연회와 전승축하대회
이 시기에 여러 노회에서 시국강연회도 실시하였다. 충청노회는 관내 82개 교회 가운데 80교회에서 시국강연회를 실시하고, 조종을 헌납하고, 부여신궁 제조에 근로봉사대 3인을 파견했다. 이와 함께 충청노회가 교파합동 청원서를 총회에 제출하였다.33) 삼산노회는 징병제 실시 경연과 애국예배를 실하였고, 제주노회도 1938년 2월 지원징병제 실시에 따라 축하 강연을 도경찰서 고등계의 후원 아래 제주도내 20여 개 교회에서 개최하였다.
일본군이 전장에서 승리하면서 노회에서는 전승축하대회도 개최하였다. 이 일에 가장 앞장섰던 노회는 서울을 교구로 하는 경성노회였는데, 결전 체제강화 신도대회를 개최하고, 전승기원대회와 남방 출정 황군장병을 위한 일장기 500본을 발송했으며, 싱가포르 함락 축하 신도대회 및 징병제 실시 감사대회를 개최하였다.34) 노회 관내 여러 교회는 국어(일본어) 강습회 개최, 황군장병에 대한 위문품, 위문금을 종전대로 발송하였다는 보고로 보아 이전부터 계속된 사업임을 알 수 있다.
3) 교회 통폐합
일제는 교회의 통폐합에도 적극적이었다. 일제는 기독교 세력의 약화를 기하기 위해 지역교회의 통폐합을 강요하여 1941년 3,624교회에서 1942년에는 2,543교회로 줄어들었다.35) 한 해 동안 모두 1,081교회가 폐쇄되었는데, 이는 당시 총 장로교교회 수의 30%가 되는 것이다. 그중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 경남노회로, 노회 상황보고에서 “통제에 의해 교회의 통폐합을 실행한 결과, 335교회 중에 108교회가 감소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36) 이는 총회산하 교회 감소분의 꼭 10%를 차지하는 수로, 전국 26노회인 것을 고려하면 가장 많은 수의 교회가 폐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일제의 박해에 의해 기독교 신앙과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지만, 노회의 보고를 볼 때 노회가 일제의 뜻을 따라 적극적으로 교회 통폐합에 협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일본적 기독교 추진
일제는 기독교를 일본적 기독교로 바꾸기에 혈안이 되었고, 교회들이 이에 협력했다. 충청노회는 일본적 기독교로 진일보 전환했다고 보고하고, 함북노회는 교역자 하기 수련회를 개최하여 일본정신사 강의를 한 주 동안 청강을 보고하고 있다. 황해노회는 신도의 신앙에 충실하기 위해 힘을 쏟았음을 보고하고, 평양노회는 비상시국에 임하여 각 시찰부에서 활동하는 선교 대신에 목사를 파견하여 순회하도록 하고 있다. 삼산노회에서는 일요학교에서 일본어로 가르치고, 일요학교 지도수련회를 개최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또한 여러 노회가 일본적 기독교화에 앞장서겠다는 장래 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경성노회는 신도로서 충성보국의 전신을 철저하게 하도록 하며, 전북노회는 일본적 기독교 확립에 매진하며, 전남노회도 황국길에 따라서 일본 기독교 완성에 매진할 계획을 보고하고 있다. 제주노회도 국어 보급을 장려하고, 일본적 기독교에 매진하며, 경남노회도 교회의 지도자 및 신도 등을 노회 또는 지방적으로 각각 훈련시켜 일본적 기독교 건설에 매진하며, 경동노회도 신도들에게 철저히 시국인식을 하게 하여 전도 사업 및 종교교육에 임하여 일본적 기독교 건설에 매진토록 하는 것을 장래 계획으로 보고하고 있다. 경북노회와 함북노회 등도 유사한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
5) 교파의 통폐합
한국 장로교회의 이같은 부일협력과 배교행위가 따르는 사이, 일제는 기독교를 효율적으로 통제, 관리하기 위해 교파통합을 추진, 각 교파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폐합하려 했다. 교파통합을 위한 일제의 뜻을 파악하였던 충청노회와 평양노회는 교파 통합청원서를 총회에 제출하였다. 이 청원은 정치부로 보내졌다가, 정치부 보고를 받아 가결하고 중앙상치위원회에 위임되었다.37)
교파의 통폐합은 제31회 총회 이전에 이미 추진되고 있었는데, 1942년 1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일본기독교 조선교구, 구세군 등 다섯 교파 대표가 모여 조선기독교합동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통합을 추진하다가 감리교의 이탈로 실패로 돌아갔다. 교파 통합이 결렬되자, 장로교 총회는 상치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1943년 5월 총회를 해산하고,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 되었다.38) 이어 일제는 전세가 이미 기울었음에도 불구하고 1945년 8월 1일에 다시 모든 교파들을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합되었다.39) 초대 통리는 장로교 김관식, 부통리에는 감리교 정춘수가 맡았다. 이것이 불과 해방 두 주 전의 일이었다.
장대현교회 목사로 평양노회 총대로서 교파 통합안을 헌의하고,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설립에 앞장서 통리가 되었던 김관식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재빠르게 변신해 해방과 함께 조선교단의 기구적인 재건에 앞장섰다. 그는 1945년 9월 8일 새문안교회당에서 남부대회를 소집해 대회장을 맡아 교단을 이끌기를 원했으나 감리교와 장로교 대표들이 각각 교파로 환원을 원하면서 단일교단 유지가 무산되었다. 기독교계 친일인사들이 이렇게 해방 후 자숙없이 한국교회 대표로 등장하였고, 그에 비해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쇄신론자들은 분리주의자로 매도되고, 결국 1951년 장로교 총회에서 축출되고 말았다.40)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국가의 체계를 갖추기에 급급한 나머지 친일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아 민족정기가 바로 서지 못한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불행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정권에 협력하였던 독일 교회가 1945년 8월에 프랑크푸르트에서, 10월에 슈투트가르트에서 모여 지난날의 잘못을 참회하고 ‘슈투트가르트 죄책 고백’을 발표하고 하고, 책임있는 사람들은 독일교회의 재건과정에서 물러난 것과 대비되고 있다.41)
맺는 말
지금까지 일제의 기독교 탄압과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 그 후 1940년대 한국 장로교회가 어떻게 훼절되고 배교의 길을 걸었는가를 논의하였다. 이제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하며 이 소론을 마치려 한다.
첫째,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 결의 80년을 맞아 부끄러운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회개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당시의 우상은 신사에 절하는 것이었는데, 이 시대에 어떤 우상들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에 침투하고 있는가를 인식하고, 이를 청산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심각한 우상은 돈과 명예와 권력일 것이다.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의 재정비리는 교회가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에 어느 정도 성취를 경험한 이들이 감투에 대한 욕심이 연합기관을 만들어 명예를 추구하고, 비상식적인 기관 운영으로 자주 물의를 일으킨다. 또 교회의 역량을 넘어선 거대한 예배당을 건축하고, 이를 유지하지 못해 이단교회에 넘기는 일까지 발생되는 것은 교계 지도자들이 명예의 우상을 섬기기 때문이다. 또 오늘의 한국 교회에 교권주의가 판을 치고, 교회 지도자들이 국가권력과 결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것은 권력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국 교회에서 더 이상 교권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
둘째, 한국 장로교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이후 발생한 교회의 훼절과 배교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가 이루어지고 그 방파제가 무너진 후 1940년대에 모든 것이 일시에 무너지는 도미노 현상을 경험했다. 1940년대에 목사들이 신도 침례까지 받았고, 한국 장로교회 총회는 애국기 헌납 헌금, 시국강연회와 전승축하대회, 교회 통폐합, 일본적 기독교화 추진, 교파 통폐합 등에 앞장서 부일과 반민족적 배교의 길을 걸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한 매체의 보도에 의하면 한국 교회 총회장이나 중요 기관장들의 상당수가 교회를 자녀에게 세습했다. 한국 장로교회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예장통합의 총회 재판국이 총회 헌법의 규정을 벗어나 명성교회의 세습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함에 따라 이 문제가 제103회 총회의 핫이슈가 되어 있다. 한국 교회 희년 잔치를 벌인 후 4년 만에 이루어진 신사참배 결의와 같이 이 사건은 한국장로교회 총회 설립 100년 잔치를 벌인 후 불과 6년 만에 일어났다. 한국 장로교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가 한국 교회의 일제강점기의 부일과 배교의 본격적인 출발이 된 것과 같이 명성교회 세습의 용인은 한국 장로교회가 향후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을 것인가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이 문제의 통합총회의 최종 결정이 한국 교회의 미래의 결정적인 방향타가 될 것이 분명하다. 한국 교회는 지금 흥망의 기로에 서 있다.
셋째, 한국 교회와 교계는 법과 상식으로 목회와 행정이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최근 비리 혐의로 총신대 총장과 이사들이 해임되어 임시이사가 파송되었고, 피어선성경학교의 백년 역사를 이은 평택대 총장은 20년 동안 여직원 성추행이라는 파렴치한 사건으로 법정 구속되었다. 대형교회들에서 발생한 목회자 비리와 윤리적인 문제들이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있으며, 많은 기독교계 대학들이 비리로 몸살을 앓고, 이러한 여러 문제들이 자주 방송에 노출되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있다. 한국 교회는 교회 행정과 재정운영에서 사회에서 통용되는 기준도 따르지 못해 사법부의 판단과 정죄를 받고 있다. 한국 교회는 공적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넷째, 한국 교회와 연합기관은 지난 수년 동안 정치적인 행사에 참여하면서 극단적인 수구세력으로 지목되고, 지성사회의 혐오를 받고 있다.
지도자들이 역사의식을 갖지 못하고 교회를 정치집회에 동원하면서 교회의 영광이 손상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한국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지만, 이 땅에 속한 기관이 아니다.
한국 교회가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아 이 중대한 역사적 범죄를 깨닫고, 이를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사로잡고 있는 우리 시대의 돈과 명예와 권력의 우상을 척결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한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교회에 주어진 사명에 충실해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하여 한국 교회 200년의 새로운 역사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2022년 성탄주일을 맞이하여 "오늘의 미국의 영적 수준이 어느 단계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첫째, 상(上), 둘째, 중(中), 셋째, 하(下)
막연하게 미국 사회의 영적 수준을 개인의 느낌에 따라 판단할 것이 아니라 제가 판단하려는 기준은 "언어(言語)"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정의하는 용어 중에 "호모 루켄스(Homo Luquens)"라는 말은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3대 절기는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입니다.
이와 같은 절기를 맞이하면 어떻게 서로 인사하셨습니까?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해피 땡스기빙(Happy Thanksgiving)"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해피 땡스기빙(Happy Thanksgiving)"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를 "해피 할러데이(Happy Holiday)"라고 해야 한다는 사회적 여론이 점점 더 크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현재 기독교 인구 비율이 대략 64%라고 합니다.
물론 이 수치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한 통계입니다.
아직도 기독교인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절반을 능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여론은 기독교식의 인사말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서 교회의 반응은 조용합니다.
또 한가지 사례는 바이든 대통령에 의해서 동성결혼법이 법적으로 인정한다고 결정된 것입니다.
만일 어느 교회 설교자가 동성애와 동성결혼은 비성경적이라고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면 법적으로 제재를 받게 된다는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사회의 이러한 분위기를 그 시대에서 통요하는 언어를 갖고 진단하는 것을 "언령신앙(言靈信仰, language is spiritual belief)" 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에서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은 '말에 생명이 있다"는 뜻으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고 그 시대에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시대적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피 이스터, 해피 땡스기빙, 메리 크리스마스와 같은 인사말을 사회가 요구하는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사회의 영적 수준이 분명하게 낮아지고 있다는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현상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요?
불교(불교)에서 불자(佛者)들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이라는 염불(念佛)을 사용하여 간단하게 기도합니다. 모두 열 여섯 글자로 아주 간단한 기도문입니다.
물론 기독교에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이 초신자들을 물론 기존 기독교인들에게도 즐겁게 사용할 수 있는 기도문은 아닙니다.
더구나 교회에서 주기도문은 모임을 마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이 의미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불자들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에게 귀의합니다 이렇게 염불을 외우면서 기도합니다.
'나무’는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아미타불은 극락에 계신 부처님을 말합니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부처님을 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염불(念佛)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분들께 귀의한다는 뜻과 함께 이 분들처럼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에는 염불과 같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신앙을 고백하는 기도가 없을까?
물론 동방교에서 수행하는 신자들을 위하여 사용하던 "예수님의 기도" 즉 "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Lord, have mercy on me!)" 라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목회 현장에서 보다 더 아주 간단한 기도가 없을까 고민하던 중 예수님의 이름에서 기도문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Jesus)
둘째는 그리스도(Christ)
셋째는 임마누엘(Immanuel)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예수(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저희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He will be save us from sin)"라고 합니다.
예수 라는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구주!"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구주!
Jesus is my Savior!
둘째는 그리스도(마태복음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be anointed people) " 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기름이란 성령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생명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하신 영원한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생명!" 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생명!
Jesus is my Life!
요한일서 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셋째는 임마누엘(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be with us)"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은 세 개의 말을 합성하여 만든 단어라고 하겠습니다.
‘임’(함께, with)
‘마누’(우리와, us)
‘엘’(하나님, God)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부터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된 것이었습니다(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 예수님은 구원자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를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치료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24절에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가 일어나고 해방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고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29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 외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임마누엘이란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권세!"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권세!
Jesus is Power!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주 쉽게 설명한다면 여기 아주 얇은 종이 한장이 있습니다.
이 종이는 어린아이들도 쉽게 찢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이를 철판과 합친 후에 찢으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찢을 수 없습니다.
종이가 강해진 것이 아니라 철판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음므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연약한 내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에게 붙어 있는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어떤 질병도 환난도 근심과 걱정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실예 /
울주군 온산면 덕신리 625번지 신경부락에 대략 450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이 나무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과 같은 나무라고 믿고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 주민들이 돈을 모아 제를 지내고 심지어 무당을 불러 밤새도록 굿판을 벌렸습니다.
그런데 그 당수나무 바로 옆에 교회를 세웠으므로 마을 주민들의 반대는 아주 심각했습니다.
어느 해에 마을 이장이 찾아와서 정월 대보름 날 제를 지내려면 당수나무에 전기불을 켜야 하는데 마침 교회가 바로 옆에 있으므로 전선을 연결하여 전등을 켤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합니다.
이때 교인들은 어떻게 당수나무 제사를 지내는데 교회 전기불을 줄 수 있느냐?
제사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이므로 전기를 빌려주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교회 전기불을 밝히면 당수나무에 제를 지내는데 귀신이 겁이나서 오겠습니까?
그러자 교인들이 목사님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을 이장이신 작고하신 이수엽씨를 찾아가서 제가 당수나무에 전선을 연결하여 전등을 달았으니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일러주었더니 이장은 전기세를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밤새도록 백열전구 켜봐야 전기세가 얼마나 나오겠습니까?
그런 걱정 마시고 편하게 사용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월 대보름이 지난 후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마을 주민 회의를 하였는데 당시 마을 사람들을 주도하던 서울 무당이 주민들에게 당수나무 신을 위하여 동제를 지내야 한다며 동제를 지낼 돈을 거둬드렸다고 합니다.
문제는 서울무당이 굿판을 크게 벌였으니 그 결론은 당수나무 귀신이 마을을 떠났기 때문에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다며 그 마을에서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와이스톤(Whitestone)이라는 지역에서 거주할 때 한번은 어느 수맥을 진단하는 사람이 방문하여 집에 수맥이 흐르는지 찾아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엘보 모양의 금속 막대리를 손에 들고 이 방 저 방을 옮겨 다니면서 하는 말이 분명히 수맥이 있는데 잡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혹시 예수를 믿습니까? 그래서 예 제가 목사입니다.
그러자 그 분이 집안에 성경책이 있는 것을 보고 성경책만 놔두어도 수맥이 잡히지 않습니다. 하고 떠났습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주님만 믿고 따라가면 될 것입니다.
2022년 성탄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신앙으로 무장하여 다가오는 2023년 주와 동행하는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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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
언령신앙(言灵信仰)은 동북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오랜 전통으로 말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어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는 믿음이다. 즉 말에 혼(魂)과 영(靈), 즉, 보이지 않는 '힘'이 깃들어 있어 그 말대로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좌우되고 평생의 운명(運命)까지도 영향을 받는다는 믿음이었다.
고대 일본 역시 마찬가지로 언어에는 신비한 영적인 힘이 깃들어 있고, 그 힘은 현실세계에 큰 영향력을 갖는다고 여겼다. 그러한 힘을 믿고, 그 힘으로 현실을 바꾸려 하는 것을 '고토다마신코(言灵信仰)'이라 한다. 고대의 일본인들은 좋은 말이나 아름다운 말을 하면 행복이 오고, 반면 나쁜 말을 하면 재앙이 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한편, 고대 일본인들은 사람의 이름에도 '언령'이 머물고 있다고 믿었다. 특히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 자신의 혼이라 여겨, 남성이 여성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구혼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성이 남성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구혼을 승낙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또 염불(念佛)을 외면서 징이나 북에 맞춰서 추는 '염불 오도리'의 경우 '남무아미카불'의 명호를 주문으로 외어 말로써 악령을 물리치는 언령신앙이 깃들어있다. 이처럼 고대 일본에서는 언령신앙이 일상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언령신앙의 영향을 받아 고대에 일본의 제사 의식에서 신을 제사 지낼 때의 언어는 아름답고 엄숙하게 미화되어 문학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 제사를 연행하는 자는 산 위에 올라가 나라의 땅이 얼마나 기름지고 풍요로운가를 노래로 표현하고는 했는데, 이것은 말의 힘으로 현실 세계의 풍작이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는 풍작의 모습을 노래로 표현하는 것으로, 그 노래, 바로 말에 담긴 힘이 현실의 풍작을 가져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언령신앙의 전통은 '노리토(祝詞)'와 '센묘(宣命)'라는 일본 상대의 고유한 문학 양식을 발달시킨다. '노리토(祝詞)'는 기년제(祈年祭) 등의 궁정제사에서 읊어진 신전에서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본래는 간단한 주문(呪文)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집단 제사를 올릴 때 선미(善美)를 다한 말들을 봉헌하고, 사람들의 번영과 행복을 기원하고 신의 위력에 감사하는 행사를 거듭하는 동안에 점차 '노리토'의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이다.
노리토의 주 내용은 신의 이름을 부르고, 제사를 지내는 이유, 제신(祭神)의 내력과 업적의 설명, 진설(陳設物)의 열거, 기원하는 일 등이다. 이러한 내용을 음률과 성조에 유의하여 반복, 대구, 열거, 마쿠라 고토바(일본 전통 시가인 '와카''에서 어떤 말 앞에 붙이는 특수한 수식어), 비유 등을 사용하여 장중미(莊重美)를 살려 읽는 과정을 통해 노리토의 형식을 완성하였다. 문헌상 현존하는 '노리토'는 『엔기시키 (延喜式)』에 수록된 27편과 『타이키 (台記)』에 수록된 1편으로 총 28편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센묘(宣命)'는 천황이 신하에게 내리는 조칙(詔勅)을 말한다. 천황의 즉위나 양위, 황후를 세우는 일, 연호를 바꾸는 일, 황태자를 세우거나 폐하는 일, 상을 주거나 벌을 주는 일 등 국가의 중대한 일에 관하여 작성한 문서이다. '노리토'가 신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센묘'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도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감정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특징이 있다. 현존하는 센묘는 『쇼쿠니혼키 (續日本記)』 62편이 수록되어 있고 그 밖의 문헌에 3편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에도 '언령신앙'의 전통이 있어, 우리 조상들은 말조심을 강조했다. 특히 설날부터 대보름까지의 기간에는 아예 남에게 듣기 좋은 덕담만 하는 풍습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또한 언령 신앙은 중국이나 한국 등지에서 볼 수 있는 '휘(諱)', '피휘(避諱)'의 풍습과도 연결된다. 원래 '휘'는 죽은 사람의 생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을 말하였으나, 나중에는 생전의 이름 자체가 '휘'로 와전되는 바람에 이름을 부르지 않는 행위는 따로 '피휘'라고 명명하였다.
'피휘'의 풍습은 범위가 확대되어 살아있는 사람에게까지 미쳤다.
한국 문학의 경우 『삼국유사』 등에서 언령신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삼국유사 중 '혜공과 혜숙'의 일화에서 광덕이 아미타불을 향하여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달을 증인으로 삼는다. 여기에는 자신이 바라는 바를 미리 질문으로 던져버려 이루어지리라고 여기는 충류도 계통의 언령신앙이 담겨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말이 씨가 된다"와 같은 속담도 언령 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문학비평용어사전 "고토다마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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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
불자들에게는 불경을 모두 읽거나 암송하지 않아도 아주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불경이 있습니다.
그 불경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모두 16자로 구성된 기도문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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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880년대 후반, 러시아의 한 시골 청년이 쓴 것으로 알려진 이 책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보여준다.
책의 주인공은 어느 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읽고 어떻게 하는 것이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인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순례의 길을 떠난다.
그러던 중 순례자는 큰 스승을 만나 “예수의 기도”(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를 배우고, 하루에 3,000번씩, 6,000번씩, 나중에는 1만 2,000번씩 반복하여 기도를 함으로써 기도가 마음 깊은 곳에 이르며 평온해지고 하나님과 합일되는 황홀의 경지를 체험하게 된다. 이 책은 이렇게 깊은 영성을 체험하게 된 순례자의 기도 여행에 관한 이야기이다.
미국의 저명한 종교학자 휴스턴 스미스 교수는 “러시아 영성의 고전”이라 했고, 샌프란시스코 대학 종교학자 제이콥 니들먼 교수는 “지난 100년 동안 나온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 서적으로 사람의 삶을 바꾸어 주는 희귀한 책들 중 하나”라고 칭송했다.
심지어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와 더불어 러시아 혁명 이전 “러시아 문학의 3대 걸작”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역자 오강남 박사는 1970년대 초 캐나다에 유학하면서 이 책을 처음으로 접했는데 그 당시 기독교에도 불교의 ‘염불’과 같은 종교적 수행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 후 캐나다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종교학 개론 과목을 담당할 때에는 언제나 학생들에게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과제를 냈다. 그리고 한국 독자들에게도 이 책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영어본으로 나온 모든 번역본들을 참고해 한국어로 번역했다.
책은 무엇보다 문장이 간결하고, 평온한 느낌을 갖게 하여 조용하게 묵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람들 앞에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에 익숙해진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처음에 책의 주인공이 행하는 기도 방식, 즉 “예수의 기도”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예수의 기도,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던 예수의 기도가 책의 주인공에게 주었던 느낌, ‘팔다리로 감미로운 쾌감이 퍼지고’, ‘기쁨으로 심장에 거품이 이는’ 그 느낌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을 꿈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로 영적인 성장을 꿈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의 기도”는 새로운 희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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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 성스러울 성(聖), 낳을 탄, 태어날 탄(誕)
- 성(聖) / 귀 이(耳) + 입 구(口) + 임금 왕(王) 또는 북방 임(壬), 천간 임
임금님처럼 듣고 말한다.
북방 임(크다, 성대하다) 크게 듣고 크게 말하다
聖자는 ‘성인’이나 ‘임금’, ‘거룩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聖자는 耳(귀 이)자와 口(입 구)자, 壬(천간 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聖자는 본래 ‘총명한 사람’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聖자의 갑골문을 보면 큰 귀를 가진 사람 옆에 口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누군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聖자는 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나 ‘총명한 사람’을 뜻했었다.
하지만 후에 뜻이 확대되면서 지금은 ‘성인’이나 ‘거룩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壬자는 ‘북방’이나 ‘천간’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壬자는 士(선비 사)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선비’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士자와는 기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壬자의 기원에 대한 해석도 제각각이다.
일부에서는 실을 엮던 도구로 보기도 하고 또 다른 해석에서는 북쪽에 있는 별과 땅을 연결한 모습이라고도 한다.
壬자에 ‘북방’이라는 뜻이 있으니 그런 해석도 가능하리라 본다.
또 壬자를 工(장인 공)자와 같은 자였던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당시의 工자()는 壬자와( ) 달랐기 때문에 같은 글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이 무의미한 것은 지금의 壬자는 유래와는 상관없이 천간(天干)의 아홉 번째라는 뜻으로만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또 때로는 다른 글자와 결합해 ‘사람’과 관계된 뜻을 전달하기도 한다.
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사람 또는 총명한 사람
탄(誕) / 말씀 언(言) + 길 연, 늘일 연(延)
말을 널리 늘이는 것(세상에 말을 널리 알리는 것)
誕자는 ‘태어나다’나 ‘거짓’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誕자는 言(말씀 언)자와 延(끌 연)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延자는 발을 길게 늘여 걷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늘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誕자는 이렇게 ‘늘이다’라는 뜻을 가진 延자와 言자가 결합한 것으로 ‘말을 길게 늘이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誕자에서 말하는 ‘말을 길게 늘이다’라는 것은 남을 속이기 위해 이리저리 말을 늘여놓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誕자는 본래 ‘거짓’을 뜻했지만, 후에 ‘말을 만든다’라는 뜻이 확대되면서 ‘태어나다’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지난 12월 4일 황목사님께서 "내 신앙의 월드컵"이란 주제로 설교했습니다.
예배 후 식탁의 교제 시간에 마침 한국에서 어느 후배가 유투브 속보를 보내왔는데 제가 확인하지도 않고 브라질에 대해서 부전승이라고 전했는데 결국은 어느 유투버의 돈벌이 용 가짜 뉴스이었습니다.
12월 5일(월) 다니엘 간닥터와 예약된 검진을 위하여 콜 택시를 불러 전화번호부에서 확인한 주소를 알려주고 이동을 했습니다.
접수부에서 전부한 후 안내원이 그런 의사가 없다고 합니다.
급하게 병원 밖으로 나와서 사무엘에게 주소를 받아서 다시 콜택시를 불러서 병원을 찾아가서 모든 검사 결과와 앞으로 진료 방향을 확인하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어떤 정보든지 반드시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짐하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성탄이란 절기도 성경적인 검증이 필요한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미국에서 모든 휴일을 어느 특정 종교의 용어가 사용되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을 해피 할러데이(Happy Holiday) 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미국의 기독교 인구가 몇 %일까요?
2020년 기준 미국 내 기독교인(아동 포함)은 전체 인구 중 약 64%로 추산됐다.
같은 해 무종교인은 약 30%는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등 기타 종교인은 약 6%로 집계됐다.
현재 미국 종교 인구 변화 속도와 트렌드에 따라 기독교인 비율은 2070년 전체 인구의 약 54%에서 최저 약 35%까지 급락할 가능성이 있다.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부활절을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사용해야 합니까?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추수감사절을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사용해야 합니까?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성탄절을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사용해야 합니까?
침묵할 때가 있고 외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외쳐야 할 때라고 하겠습니다.
당당하게 외치려면 외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 힘이란 성탄절을 맞이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의 구유"가 준비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구유가 준비되셨습니까?
마음의 구유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 이름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
둘째는 그리스도
셋째는 임마누엘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말이 씨가 된다.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 미국에서 크리스마스를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해야 하는가?
이런 사회현상에 대해서 교회는 침묵하고 있는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10년 이내에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미국 전역에서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동성결혼에 대하여 부정적인 가르침을 강조하면 분명한 저항을 받게 될 것입니다.
추수감사절, 부활절, 성탄절은 기독교의 3대 명절입니다.
이러한 절기를 해피 할러데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점 더 강세로 드러나는 것은 언어에 감춰져 있는 힘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불자들에게는 불경을 모두 읽거나 암송하지 않아도 아주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불경이 있습니다.
그 불경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모두 16자로 구성된 기도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기독교에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은 너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과 비교하면 길다고 하겠습니다.
초신자들에게 주기도문을 암송하여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하던 중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모두 15자 글자 입니다.
뉴욕으로 이주하여 처음에는 이 기도문에 대해서 소개했었기에 그동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더 강조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탄절을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말하지 말라고 하는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당당하게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외쳐야 합니다.
무슨 말을 이 세상에 확장시켜야 할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찾아내려고 합니다.
오래 전에 교회가 토지수용법에 의하여 철거될 위기에서 마침 지역 경찰서 정보과장이 군청을 담당하는 형사를 소개해주며 함께 군청 직원을 만나라고 주선했습니다.
그때 군청의 담당 직원이 제안하기를 교회를 위해서 건축부지 300평을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는 중심부에 허락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로 돌아왔는데 마을 대표 몇 사람이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합니다.
자기들은 힘이 없으니 교회가 자기들과 더불어 함께 고등법원에 항소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마을 주민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외면하면 그만입니다.
더구나 그 주민들은 교회가 세워질 때 교회를 건축하지 못하도록 주도한 사람들입니다.
만일 교회가 주민들과 더불어 함께 행동하면 약속된 교회부지는 받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국 마을 주민들과 더불이 고등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하므로 군청의 제안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제가 결정할 수 있었던 힘은 예수님은 약자의 편에 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교회에 대해서 핍박하던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마을 주민들의 하소연에 귀를 기우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약자를 위한 길을 선택했을 때 마을의 주민들은 새로운 생각을 갖고 교회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Christmas
크리스마스는 라틴어 "그리스도"(Christus)와 "모임"(massa)의 합성어
'그리스도 모임' 즉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모임'으로 종교적인 예식을 의미한다.
동방 정교회나 개신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예배"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미사"로 번역한다.
크리스마스(Christmas)란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기념일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는 성탄일이라고도 한다.
크리스마스는 영어로 ‘그리스도(Christ)의 미사(mass)’라는 의미로 고대 영어인 Cristes maesse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X-mas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여기서의 X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크리스토스: ΧΡΙΣΤΟΣ)의 첫 글자를 뜻하는 것
크리스마스의 유래에 대한 주정은 크게 두 개의 시각이 있다.
첫째는 교회의 전통으로 교회 내에서 시작으로 보는 시각
둘째는 로마제국의 전통으로 로마의 절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시각
첫째는 교회의 전통으로 교회 내에서 시작으로 보는 시각
교회의 전통에서 크리스마스가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말에 따르면,
신약성서에는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기록되어 있지만 탄생일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문에 초기 기독교도들은 1월 1일과 1월 6일, 3월 27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해왔다고 하는데요.
이후 4세기를 거치면서 신학자이자 주교인 아우구스티누스와 기독교의 이단으로 구분되었던 도나투스주의자들 간의 논쟁에서 교회가 공인되기 전부터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지켰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록인 삼위일체론을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3월 25일에 수태되셨다.
(중략) 전통에 따르며 예수께서는 12월 25일에 태어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12월 25일이 전통 즉 초대교회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교회의 전통에서 수난일이며 동시에 수태일인 3월 25일부터 상징적인 9개월 이후인 12월 25일을 기독교의 그리스도론적 개념으로 탄생일로 본다는 기록입니다.
둘째는 로마제국의 전통으로 로마의 절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시각
로마제국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이들은 크리스마스 축제가 로마 연감의 기록에 따라 336년경 로마제국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로마교회 대주교 율리우스 1세가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선포한 350년부터 그리스도의 탄생제가 공식적인 '기독교'의 축제로 인정되기 시작하였고, 오늘날까지 전통으로 굳어지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가, 아니면 태양이 지구를 도는가?
현재는 가장 쉬운 천문학 지식이지만 몇백년 전만 하더라도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야 했다.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고 있었다.
성경의 여러 말씀이 그러하거니와, 지구가 정지하고 않고 돌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란 어려웠다.
감히 이러한 인식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사람이 바로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 - 1543)이다.
그런데 그가 이러한 발견을 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재미나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우선 코페르니쿠스가 이러한 발전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과학적인 발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심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심 때문이었다.
그는 천문학자임은 틀림없으나 단순한 아마추어에 불과했다.
그는 그 이전까지 전해오던 지구중심설인 프톨레마이오스의 모형을 놓고 생각하다가, 그 모형이 상당히 복잡하다고 느꼈다.
독실한 신자였던 그는, 전지전능하신 신이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주를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성스러운 신전을 비추어 주는 촛불을 어디에 놓아야 전체를 동시에 비출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곳은 당연히 중앙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곧 태양을 중심에 두어야 빛이 골고루 비추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이같은 추측을 발판으로하여 소위 태양중심설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새로운 체계를 발표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잘 알다시피, 자신의 체계가 당시의 상식과는 크게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들과 제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결국 1543년에 그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가 출판되었다.
그때가 바로 그의 임종 때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코페르니쿠스는 생전에 자신의 천문학자적인 체계로 인해 이단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했다.
교회와의 갈등을 두려워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출판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 알 도리는 없지만, 그의 임종에 맞추어 책이 발간되었다는 것은 아무튼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루터나 다른 종교지도자들은 여전히 과거의 신념에 매달리고 있었다.
루터는 이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주장을 전해 듣고, 코페르니쿠스를 가리켜 천문학의 '천'자도 모르는 바보라고 하며 "이 바보는 천문학 전체를 뒤엎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거룩한 성경은 여호수아가 멈추게 한 것은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고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책 제목에서 '회전'이라는 단어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180도를 돈다는 뜻의 '회전'이라는 단어가 나중에는 정치적인 격변을 뜻하는 '혁명'이라는 말로 서양에서 사용되었다.
우리가 아는 '혁명'이란 뜻의 어원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책 제목에서 나왔던 것이다.
과연 그의 전환이 서양 역사에서 얼마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그의 인식론적인 전환을 더 자세하게 이야기한 사람이 바로 시간보다도 더 정확하게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고 하는 철학자 칸트였다.
칸트가 철학에서 이룩한 인식론상의 전환은 자연과학에서 코페르니쿠스가 이룩한 전환과 아주 비슷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하여 칸트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정신이 대상들을 인식하려고 대상들의 주위에 돌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던 것을 칸트는 대상들로 하여금 정신이라고 하는 중심적 사실의 주위를 돌게 했다.
이제는 정신이 대상의 조건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정신이 정해 놓은 조건에 따르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우리들의 인식은 대상에 의거한다고 이제까지 생각되어 왔지만, 대상의 인식은 우리들의 주관 구성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놀라운 전환이었다.
그는 이것을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렀다.
마치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처럼 주관과 대상의 위치가 서로 바뀌었던 것이다.
칸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나의 생각은 별자리가 관측자의 주위를 회전한다고 보아서는 천체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본 코페르니쿠스가, 오히려 관측자의 편에서 회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별의 위치를 정지시킴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좀더 합당한 해답이 얻어질 수 있으리라는 획기적 사상을 제시했던 것에 비길 수가 있겠다."
그래서 이제 커다란 전환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제아무리 기발한 발상의 전환이라도 정작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에 비길 수 있을까?
세례(洗禮) 마태복음 3:11 |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구약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입니다.
신약의 첫 번째 책은 “마태복음”입니다.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 사이는 “대략 400년” 이란 긴 세월이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 시대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의 400년의 기간을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 라고 합니다.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를 “신구약 중간 시대”라고도 합니다. (아래 난외 주 참조)
기독교 이외에 가톨릭교회와 유대교에서는 신구약 중간 시대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셨다는 것을 강조하여 “외경”이란 말씀을 인정하고 사용합니다.
오래 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던 때에 어느 날 광야에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 거주하는 낯선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라고 외쳤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광야로 나와 요한의 외치는 소리를 들을 때 바로 이 사람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나는
너희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아니라 다만 물로 세례를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실 그 분은 너희들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며 실망하던 유대인들에게 메시아 신앙을 깨우쳤습니다. 요한의 외침을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서 세 종류의 세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 ; 회개와 구원을 위한 세례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 ; 구원의 확신과 보증을 위한 세례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 ; 심판을 위한 알곡과 죽정이를 구분하는 세례(불심판)
그런데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것은 분명하게 성경에 소개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셨을까요?
세 종류의 세례를 베푸셨던 수여자(授與者)를 살펴봅시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예수님 당시에는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마태복음 3:5∼6,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People went out to him from Jerusalem and all Judea and the whole region of the Jordan.
Confessing their sins, they were baptized by him in the Jordan River.
그러나 오늘날은 교회에서 목사가 세례를 베풉니다.
"주 예수를 믿는 (아무개)에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and this water symbolizes baptism that now saves you also--not the removal of dirt from the body but the pledge of a good conscience toward God. It saves you by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세례는 요한의 증거대로 분명히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제 성령세례를 베푸셨으며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When the Counselor comes, whom I will send to you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goes out from the Father, he
will testify about me.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사람들에게 보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령을 “보혜사(保惠師)” 라고 합니다.
“보혜사(保惠師)”란 무엇인가?
-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
보혜사란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가르치시는 선생님” 이란 뜻입니다.
보혜사를 영어 성경에서 찾아보면 NIV에서는 “상담자(the Counselor)”, KJV에서는 “위로자(the Comforter)”, NASB에서는 “돕는자(the Helper)” 라고 합니다.
보혜사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étos)” 라고 합니다.
스트롱 번호 3875
1. 옹호자(an advocate), 중보자(intercessor),
2. 위로자(a consoler), 위로자(a comforter), 돕는자(helper),
3. 변호사(Paraclete)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875
예수님께서 언제 누구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셨습니까?
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When the day of Pentecost came, they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Suddenly a sound like the blowing of a violent wind came from heaven and filled the whol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All of them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in other tongues as the Spirit enabled them.
오순절날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때 불세례도 함께 베푸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자세히 관찰하면 성령과 불이라는 용어가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는 사용하였으나 마가복음 1장과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성령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라고 모든 복음서에서 말씀하셨다면 불세례도 오순절 날 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그러므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세례자 요한에 의하면 성령세례와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성경을 폭 넓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과 불세례에 대한 말씀을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제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clear
his threshing floor, gathering his wheat into the barn and burning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불세례”는 불로 심판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9절,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리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At that time Jesus came from Nazareth in Galilee and was baptized by John in the Jordan.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John answered them all,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one more powerful than I will come, the thongs of whose sandals I
am not worthy to untie.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17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to clear his
threshing floor and to gather the wheat into his barn, but he will burn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I would not have known him, except that the one who sent me to baptize with water told me, 'The man on whom you see the Spirit come down and remain is he who will baptize with the Holy Spirit.'
34절,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I have seen and I testify that this is the Son of God.
참조 / 성령세례(사도행전 1:5, 11:16, 고린도전서 12:3)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해서 언급한 성경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이외 성경에서는 오직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에서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분명하게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진다는 것은 불이 다양하게 갈라져서 오순절 날 한 자리에 모여 있었던 다양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재 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불세례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사도행전 2: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When the day of Pentecost came, they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Suddenly a sound like the blowing of a violent wind came from heaven and filled the whol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오순절 날 성령의 임재가 나타났을 때 마치 성령은 강한 바람 소리로 들렸습니다.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바람이 아닙니다.
성령은 불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은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βαπτίσει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
- will baptize with the Spirit Holy and fire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장차 오실 그 분께서는 “성령(프뉴마)과 불(푸르)”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외쳤던 요한의 증언은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그 분이 그토록 기대하던 “메시아”라고 기다렸으나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사십일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사도행전 1:3).
이렇게 번역된 데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καὶ)”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카이”는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 라고 하여 앞의 것과 뒤의 것을 동등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령과 불”이라고 할 때 성령과 불을 동등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제까지 성령과 불을 이렇게 등위 접속사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등위 접속사가 아니라 우위 접속사로 해석하면 전혀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세례는 특별한 용법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위 접속사”인 “또는(or)”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위 접속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는 “성령 또는 불안에서” 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 사(四)복음서를 비교하여 연구해보면 더욱 확실히 증명된다.
먼저 우리는 “성령과 불로”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과 불로”가 아닌 “성령으로” 라고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 라고만 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11:16과 고린도전서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라고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여러 성구들을 참조할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 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 보더라도 “침례” 라는 말이 의미를 더 잘 통하게 한다. 만일 “세례”라고 하면 “성령으로 씻긴다”는 말이 되므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성령은 영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요 14:18∼19)이므로 '성령 안에서 침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하되 '생명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침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행 2:38, 행 19:2)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고전 3:16-17)'과도 같은 말이 되는데 결국 우리와 주님과의 상호내주(Inter-Residence)를 뜻한다.
한편 요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신령으로'라는 말은 “엔 프뉴마”로서 원 뜻은 “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의미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의미가 모두 해석되는 것이다. 즉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물 안에 잠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상징하는 뜻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 안에 잠긴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리가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로 세(침)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불 속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로서 신자와는 전혀 관계없고 불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즉 불신자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하는 대신에 '불 속에 잠기게 한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제 세례에 대한 용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세례(밥티조, βαπτίζω)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물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완전히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올 때는 과거의 나 즉 옛 사람은 죽었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물세례는 회개와 구원의 표시라고 하겠습니다.
βαπτίζω, ον
스트롱번호 907
* 요약 자료
주제 : 세례(洗禮)
- 세례(씻을 洗, 예도 禮)와 침례(잠길 沈, 예도 禮)
- 밥티조(물 속에 잠기다)
성경 : 마태복음 3:11
종류 :
1. 물세례(회개와 구원) 베드로전서 3:21
2. 성령세례(생명의 보증) 보혜사(요한복음 15:26)
- 로마서 8:2, 요한복음 6:63, 고린도후서 1:22, 5:5, 히브리서 12:29
3. 불세례(심판, 알곡과 죽정이)
- 신명기 4:24, 히브리서 12:29
- 마태복음 3:12, 누가복음 3:17
*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
- 전치사 "과"(카이)
등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을 같은 것으로 이해
우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은 서로 다른 것으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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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1-2022(금)
성령세례
"오순절 사건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
이와 같은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다.
이 속성은 한 마디로 "영원성(永遠性)"이다.
영원이란 어느 시대에는 나타나고 어느 시대에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사건은 지금도 앞으로도 마지막 그 날까지 지속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
"아니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며 그 영은 지금도 계속적으로 역사하는 영이다.
셋째, 바울의 증거
고린도전서 2:9-10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바울의 성령은 통찰하는 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영은 구약에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통하여 계속된다.
신명기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명기 30: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레위기 18: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로마서 11: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다.
그런데 그 율법을 그의 백성들이 지킬 수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의 백성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강조하였다.
로마서 2:28-29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 씻음을 정하신 신약의 한 성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에게 접붙이고 그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그의 영으로 거듭나고 양자가 되어 영생에 이르는 부활의 인침입니다.
이로써 세례 받은 사람들은 엄숙히 유형적
교회에 가입하게 되어 전적으로 오직 주께만 속한다는 약속을 공개적으로 고백함으로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는 죄의 용서, 인
치심, 성령의 부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함 등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를
구체적으로 우리의 실제 삶과 몇 가지로 연관시켜 보겠습니다.
2. 세례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증표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내적인 회개와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믿는
일입니다.
세례는 물로 씻음을 의미하는데 인간의 죄에 대한 씻음으로 물은 그리스도께서 흘린 보혈을 상징하며 그 보혈로
죄 씻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3. 세례는 새로운 피조물의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 안에서의 새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새로운 삶은 성령의 역사로서 변화된 새로운 생을 출발하게 됨을 의미 합니다.
4. 세례에 임한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이며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뜻합니다.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에 하나 되는 자격을 얻게 되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를 가지며 교회의 일원으로 교회를 통한 권리와
의무수행에 책임이 부여 됩니다.
가. 세례의 의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회개와 주의 길을 예비하는 변환기적이며 소개적인 세례였으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세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에 의한
세례입니다.
오늘의 세례 기준은 세례요한이나 제자들의 세례에서 찾을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마 28;19-20).
로마서 6:3-6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3:27-28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골로새서 2:11-12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나. 세례의 방법
침례회가 침례를 주장하는 근거는 로마서 6:3-6과 골로새서 2:11-12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분명하게 물속에 잠기는 것과 물속에서 나오는 것의 모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라 합니다(마 3:16, 행 8:38-39)
레위기 11:32
이런 것 중 어떤 것의 죽음이 병기에든지 의복에든지 가죽에든지 부대에든지 무론 무엇에 쓰는
그릇에든지 떨어지면 부정하여 지리니 물에 담그라 저녁까지 부정하다가 정할 것이며
레위기 15:13
유출병 있는 자는 그 유출이 깨끗하여지거든 그 몸이 정결하기 위하여 7일을 계산하여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몸을 씻을 것이요 그리하면 정하리니.
로마서 6:3-5과 골로새서 2:11-12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는 것이지 세례의 방법에 관한 내용으로 침례를 강조한 내용이 아닙니다. 레위기에서 나타난 정결 의식은 뿌리는 것으로 시행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레 14:4-7, 16, 49-53, 16:19, 민 8:5-7, 19:18-19)
고린도전서 10:1-2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출애굽기 14:22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다니엘 8:7
너는 이같이 하여 그들을 정결케 하되 곧 속죄의 물로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로 그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그 의복을 빨게 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
민수기 19:21
사람이 부정하고도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총회 중에서
끊쳐 질것이니라. 그는 정결케 하는 물로 뿌리움을 받지 아니 하였은즉 부정하니라.
에스겔 36: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너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히브리서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뿌려서 정결케 하는 의식은 침수(침례) 라고 주장하기보다 뿌리는 세례를 뜻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도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마가복음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것이요 믿지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사도행전 16: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족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
사도행전 8:12-13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 니라.
성경의 세례 방법은 물을 붓거나 물을 뿌리는 방법이 가능할 것입니다.
신약의 세례신약의 세례는 구약의 할례와 이스라엘 백성의 홍해바다 도강과 성결의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면서 이 언약을 후손 대대에 지킬 하례를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17:11-14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더라.
로마서 4:9-11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 뇨 할례 시냐 무할례 시냐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례는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외적인 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4:21-22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 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고린도전서 10:1-2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름아래 있고 바다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의 집단 홍해바다 도강을 세례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홍해 도당이 출애굽보다 결코 앞서지 못한다는 것은
세례가 구원보다 앞 설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죄 씻음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세례를 받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칼
헨리” 는 말하기를 요한의 세례는 당시 유대교에서 유행하던 관습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단지 관습적인 것에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회개의 요건에 관련된 것이 포함된 것으로 본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의 특성은
신적 기원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조라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마태복음 3:13-15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마태복음 21: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 서냐 사람에게 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 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사도행전 18:25
그가(아볼로)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누가복음 3:3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누가복음 7:29-30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 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우리가 이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며(마 3:5),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란 메시아로서의 사역의 출발을
선포하는 것이며 성부와 성령과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며 이 세례를 통하여 인가의 죄와 비애를 짊어지시는 사역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의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누가복음 12:4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예수님은 세례를 자신의 죽음과 연관시켜서 인간의 죄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희생물로 바치고 죽는다는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에 대하여 해석하셨을 뿐 아니라 승인하시고 명령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22-26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 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마가복음 16:15-16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온 천하에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베드로가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이 충만함을 받고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복음을 듣고 마음에
찔린 무리들이 우리가 어찌할꼬 말할 때 베드로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받으리라(행 2:37-38)
성령의 은사가 동반된 회개의 세례를 주장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10:47-48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 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하니라.
사도행전 16:14-15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고린도전서
1:14-17
그리스보와 가이오와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니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6:3-6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에베소서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
골로새서
2:11-12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나 세례가 제정되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할레가 있었기 때문에 할례에 대하여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할례의 의미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며 교제이고 축복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창세기 17: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신명기 10: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명기 30:6
네 하나님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예레미야 4:4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 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빌립보서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 당이라.
할례는
신앙에 의한 표시이며 그 신앙의 확증입니다.
구약의 할례는 신약의 세례와 동등하게 적용되며 할례와 세례는 언약관계 외에 성결과
확증으로 효력과 입회의 조건도 동등할 것입니다. 할례를 유아에게도 주어졌다면 세례도 유아에게 적용되어야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59
팔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하고자하더니
누가복음 2:21
할례 할 팔일이 되매 그 이름을 에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마태복음 19:14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10;14, 눅 18;16).
사도행전 10:44-45
베드로가 이 말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사도행전 16:14-15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
사도행전 16: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족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의 표와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유아세례의 자격과 조건은 부모들 자신이 먼저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유아세례는 하나님과 교회와 부모와 유아의 계약관계를 가집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8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부모의 자녀들에게 유아세례를 주되 한편 부모만 믿어도 가능하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세례 문답할 때
유아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서 공적인 신앙고백을 해야 하며 자녀의 하나님도 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유아세례는
구원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구원의 길로 인도되도록 부모가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 서약이요 하나님께 유아를 바치는 봉헌이며 하나님의
영이 은혜로 임하는 언약과 구원적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유아가
세례를 받을 때 순간적으로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머레이”는 유아세례의 효력도 성인세례의 효력과 동일하다고
하였습니다.
세례는 하나의 의미를 지니며 그것을 그리스도와의 연합됨과 성령의 중생함에 의하여 죄의 더러움으로부터 정결케함과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하여 죄악으로부터 정결케 됨을 표시하므로 유아세례는 장년세례와 같은 효력을 지닙니다.
사랑에 관한 자료는 2020년 1월 19일 주일 설교 원고를 기초 자료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처음 원고를 수정하여 up grade 하여 수정 보완합니다.
설교가 아니라 설교를 할 수 있는 자료를 소개합니다.
설교자들의 입장에서 응용하여 더 은혜롭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1년에 성경 일독을 계획한다면 주간 성경 읽기 본문 중에서 사랑에 관한 주제를 찾아 주일 설교 본문으로 선택합니다.
본문을 선택한 후에는 성경에서 사랑이란 의미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이해한 후 사랑의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는 내용으로 원고를 작성합니다.
설교 내용은 본문에 충실하되 적용을 위해서는 개 교회의 현장을 중심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기 위해 친히 말씀이 육신되어 인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의 죄를 사해 주시고, 율법의 정죄와 저주에서 풀어주셨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주시고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인간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함께 보시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1서 4:16~19)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한1서 4:9~10)
❑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는 우리가 당연히 갖춰야 할 양심이자 이성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그분의 뜻에 합당할까요?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신명기 5: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한복음 14: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태복음 22:37~39)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가복음 14:26)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21)
❑ 형제자매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당연지사 예수님은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형제자매를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실제적인 일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형제자매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한복음 13:34~35)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한1서 4:7)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베드로전서 1:22)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1서 3:18)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요한1서 4:12)
관련된 하나님 말씀:
『창조주만이 이 인류를 아끼고, 이 인류를 사랑하며, 창조주에게만이 이 인류를 내버리지 못하는 참된 마음이 있다. 또 창조주만이 이 인류를 긍휼히 여기고 모든 피조물을 아낀다. 그의 마음은 인류의 일거수일투족에 이끌린다. 그는 인류의 사악하고 패괴된 모습에 분노하고 근심하고 슬퍼하며, 인류가 회개하고 신복하는 모습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마음을 되돌리고 축하한다. 그의 모든 마음과 생각은 인류를 위해 생기고 움직이며, 그의 소유와 어떠함은 인류를 위해 발현된다. 또한 그의 희로애락은 인류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인류를 위해 바삐 움직이고, 인류를 위해 조용하게 자신의 생명을 모두 바치며, 인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의 일분일초를 기여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은 아낄 줄 몰랐지만 자신이 손수 창조한 인류는 늘 아껴 왔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인류에게 주었다…. 그가 조건도 보상도 없이 긍휼과 관용을 베푸는 것은 오로지 인류가 그의 눈 아래에서, 그의 생명의 공급 아래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또 언젠가 인류가 다시 그의 앞에 돌아와 그가 바로 인류에게 생존을 위한 자양분을 공급하고 만물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그분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전능자는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면서도 전혀 지각이 없는 사람을 혐오한다.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야 사람에게서 오는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찾으려 한다. 너의 마음과 영을 찾아 네게 물과 음식을 공급함으로써 너를 깨우고, 네가 더 이상 목마름과 굶주림을 겪지 않게 하려 한다. 더없이 피곤할 때도, 이 세상이 처량하다고 조금 느껴질 때도 방황하거나 울지 마라. 전능하신 하나님, 지키며 바라보는 그이가 네가 언제 돌아오든 너를 안아 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샘물처럼 끊이지 않고 흘러 너와 나에게, 그에게, 또 진심으로 진리를 찾고 하나님의 나타남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베푼다.』
1/4분기 성경 읽기
2023년 제 1 주 / 1월 1일 - 7일
주간 성경 읽기표 참조
범위 / 창세기 1장 - 창세기 19장
마태복음 1장 - 6:18
1. 교인들은 매일 성경 읽기표에 따라 성경 읽기를 실천합니다.
2. 설교자는 매일 주간 범위 전체를 읽고 주제에 맞는 본문을 구약과 신약에서 선택합니다.
3. 한 주일 전에 주보에 설교 제목과 본문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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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에로스 —“낭만적 사랑”
필리아 —“애정 어린 사랑”
Pragma — "지속적인 사랑" 1. 되어진 일, 2. 되어질 일, 3. 사물
어원 / 423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이루어진 일, 사실, 무엇이든지(마18:19), 사실, 내력, 일(눅 1:1, 행 5:4, 고후 7:11, 약 3:16, 히 6:18) 신약 성경 / 11회 사용 Pragma는
영어 단어 pragmatic을 얻는 곳입니다.
Philautia — "자기 사랑 / 자기 연민"
아가페 —“무조건적인 사랑” 사랑(아하바. אַהֲבָ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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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어느 상점에서 빵 한 덩이를 훔치고 절도 혐의로 기소된 노인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판사가 빵을 훔친 이유를 물었습니다.
"판사님, 저는 지금 이혼한 딸과 살고 있는데 딸은 병들었고 두 손녀딸이 굶고 있습니다.
빵 가게 앞을 지나가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손이 나갔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노인의 말을 들은 방청객들은 노인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공정한 법의 집행을 내려야 하는 판사는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판사는 잠시 후에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사정이 딱하다 할지라도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고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법대로 당신을 판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당시 10달러는 노인에게는 너무나도 컸습니다.
노인의 딱한 사정에 선처를 기대했던 방청객들은 실망스럽다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판결을 내린 판사는 자리에서 일어난 후 법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자를 내밀며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노인이 빵을 훔쳐야만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임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방치한 우리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 10달러를 제가 내겠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한다면 50센트를 이 모자에 넣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돈을 거두어 이 노인분에게 다 주도록 하시오."
그렇게 해서 57달러 50센트의 돈이 모였고, 노인은 돈을 받아서 10달러를 벌금으로 내고, 남은 47달러 50센트를 손에 쥐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습니다.
이 명판결로 유명해진 피오렐로 라과디아(Fiorello La Guardia) 판사는 그 후 1933년부터 1945년까지 12년 동안 뉴욕 시장을 세 번씩이나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법을 어긴 사람에게 벌은 내리는 이유는
다시는 그런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누군가가 저지른 작은 잘못은
온전히 그의 잘못만의 아니라 세상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 생겨나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아픔을 살펴볼 수 있다면
이 세상의 많은 잘못이 생겨나지 않도록
막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오늘의 명언
관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애의 소유이다. 우리는 모두 약함과 과오로 만들어져 있다.
우리는 어리석음을 서로 용서한다.
이것이 자연의 제일 법칙이다.
– 볼테르
(도입 예화) 희랍의 힐루카 대왕의 이야기 고대 희랍에 전설적인 힐루카 왕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법 정신은 공의에 의해서 지켜져야 합니다. 당시 사회가 안고 있던 큰 문제는 미성년자들이 음행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미성년자들의 잘못된 생활을 법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매우 엄한 법을 공포했습니다. 그 법은 음행 하다가 붙잡힌 미성년자들은 두 눈을 뽑아 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동안 세상은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힐루카 왕의 하나 뿐인 아들 젊은 왕자가 붙잡혀 왔습니다. 재판장은 매우 난처했습니다. 장차 왕위를 계승할 왕자의 두 눈을 뽑으면 눈이 없어 볼 수 없는 왕을 세워야 합니다. 왕자에게만 특혜를 주면 법의 공정성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때 주저하는 재판장에게 힐루카 왕은 법대로 집행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왕자의 오른쪽 눈이 뽑혔습니다. 이어서 나머지 왼쪽 눈을 뽑으려고 할 때 힐루카 왕은 자신의 왼쪽 눈을 뽑게 했습니다. 왕자의 잘못도 법대로 처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백성들은 다시는 법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사랑의 정신은 공의로운 실천에 의해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Love does no harm to its neighbor. Therefore love is the fulfillment of the law. 갈라디아서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The entire law is summed up in a single comma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율법이란 무엇입니까? 레위기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Do not seek revenge or bear a grudge against one of your people, but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I am the LORD. 율법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했습니까?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셨을까요? 인간이 지킬 수 없는 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법을 지키지 못하면 범법자가 됩니다. 범법자는 반드시 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벌을 받아야 할 백성들을 위하여 자신의 눈을 뽑게 했던 힐루카 왕처럼 사랑의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속죄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Therefore no one will be declared righteous in his sight by observing the law; rather, through the law we become conscious of sin. 로마서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
What shall we say, then? Is the law sin? Certainly
not! Indeed I would not have known what sin was except through the law.
For I would not have known what coveting really was if the law had not
said, "Do not covet." |
야고보서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For whoever keeps the whole law and yet stumbles at just one point is guilty of breaking all of it.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know that a man is not justified by observing the law, but by faith in Jesus Christ. So we, too, have put our faith in Christ Jesus that we may be justified by faith in Christ and not by observing the law, because by observing the law no one will be justified. |
그러나 신약 성경을 기록한 '코이네 헬라어'와 '헬라어'에는 사랑이란 단어를 다양하게 사용합니다.
먼저 사랑이란 다양한 단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랑이란 단어의 의미를 분명하게 살펴야 하는 이유는 언어의 혼돈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범위가 매우 넓습니다.
문제는 현대인들의 언어가 정확한 의미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LOVE)과 좋아하는 것(LIKE)은 분명하게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사랑이란 자기 희생과 헌신이 있습니다.
반면에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내려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것을 마치 사랑하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예를 들면 나라를 사랑한다는 대상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모를 사랑한다.
형제를 사랑한다.
친구를 사랑한다.
애인을 사랑한다.
음악을 사랑한다.
꽃을 사랑한다.
개(伴侶犬)를 사랑한다.
고양이(伴侶猫)를 사랑한다.
문학을
사랑한다.
교회를 사랑한다.
학문을 사랑한다.
우리 말에서는 사랑이란 단어 하나만으로도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그러나 헬라어에서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구분하여 사용했습니다.
첫째는 스토르게(storge, φιλόστοργος)(5387. philostorgos)
Definition : tenderly loving
Usage : tenderly loving, kindly affectionate to.
로마서 12:10(형제를 사랑하여)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Be devoted to one another in brotherly love. Honor one another above yourselves.
둘째는 필리아(philia, φιλία)(5373)
Definition : friendship
Usage : friendship, affection, fondness, love.
야고보서 4:4(세상과 벗된 것)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You adulterous people, don't you know that friendship
with the world is hatred toward God? Anyone who chooses to be a friend
of the world becomes an enemy of God.
셋째는 에피투미아(epithumia, ἐπιθυμία)(1939)
Definition: desire, passionate longing, lust
Usage: desire, eagerness for, inordinate desire, lust.
마가복음 4:19(욕심),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but the worries of this life, the deceitfulness of
wealth and the desires for other things come in and choke the word,
making it unfruitful.
누가복음 22:15(원하고 원하였노라)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And he said to them, "I have eagerly desired to eat this Passover with you before I suffer.
넷째는 에로스(eors, Ἔρως)
성경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단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연정과 성애의 신이다.
로마 신화에서 아모르 또는 큐피드와 같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고대 그리스어로 주로 이성에 대한 강렬한 성적 욕구를 의미하는 보통명사가 신격화된 것이다.
(예화) "토마스 불핀치(Thomas Bulfinch, 1796. 7. 15~ 1867. 5. 27)" 신화(mythology)에서 "아폴로와 다퓌네(Apollo and Daphne)"
희랍 신화에 아폴로와 다퓌네라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큐피트는 신비한 활과 화살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금촉 화살입니다.
금촉의 화살을 맞으면 누군가를 사랑하게 합니다.
또 다른 화살은 납촉 화살입니다.
납촉 화살을 맞으면 사람을 증오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런 화살을 맞으면 맞은 사람은 어떤 화살을 맞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느날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 장군 아폴로가 많은 사람들의 환영으로 받으며 성내로 들어옵니다.
그때 큐피트가 작은 활과 화살을 갖고 있었는데 아폴로는 큐피트에게 그런 것은 전쟁을 위한 무기이지 어린 아이들이 갖고 놀이하는 것이 아니라며 큐피트를 꾸짖었습니다.
비록 큐피트가 어렸지만 아폴로 장군의 으시대는 꼴을 싫어하여 아폴로에게 금촉 화살을 당겼습니다.
그리고 다퓌네는 숲의 신의 딸이었는데 다퓌네에게 납촉 화살을 쏘았습니다.
아폴로가 숲의 신의 딸 다퓌네를 보는 순간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미친듯이 다퓌네를 쫓아가면 다퓌네는 그 많은 여인들이 흠모하는 아폴로를 보기 싫다며 도망칩니다.
쫓고 쫓기는 사랑과 미움의 전쟁은 계속되면 될 수록 아폴로의 마음은 점점 더 다퓌네를 향하여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어느 날 아폴로는 오늘이 기어이 다퓌네를 붙잡겠다며 사력을 다하여 쫓아가서 드디어 다퓌네의 허리를 부둥켜 안았습니다.
그때 다퓌네는 아버지 숲의 신에게에 도움을 청합니다.
다급한 딸의 외침을 듣고 다퓌네를 나무로 변하게 만들었지요.
아폴로가 다퓌네의 허림을 부둥켜 안는 순간 눈을 감았다가 떠 보니 다퓌네의 허리가 아니라 나무 기둥이었습니다.
얼마나 허망할까요?
다퓌네의 치렁치렁한 머리는 나뭇잎이 되었고
다퓌네의 두 다리는 나무의 뿌리가 되었으며
다퓌네의 두 팔은 나무 가지가 되었습니다.
아폴로는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이 나무가 되었기에 이렇게 외칩니다.
"너는 이제부터 영원한 나무가 되어라!"
(You are ever green tree forever!)
이렇게 부르는 것도 서운하여 마라톤 우승자에게 월계수나무로 만든 월계수 관을 씌워주는 전통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다섯째는 아가페(agape, ἀγάπη)(26)
Definition : love, goodwill
Usage : love, benevolence, good will, esteem; plur: love-feasts
마태복음 24:12(사랑이 식어지리라)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Because of the increase of wickedness, the love of most will grow cold.
누가복음 11:42(하나님께 대한 사랑)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
Woe to you Pharisees, because you give God a tenth of your mint, rue and all other kinds of garden herbs, but you neglect justice and the love of God. You should have practiced the latter without leaving the former undone.
요한복음 5:42(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but I know you. I know that you do not have the love of God in your hearts.
사랑이란 단어가 우리 말처럼 단순하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필요한 단어를 사용하므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한 예를 성경에서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노련한 어부이었지만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여 피곤하고 지쳤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져보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순식간에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졌습니다.
그러자 그물을 잡아 당기면서 얼마나 많은 고기가 잡혔는지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고 말씀하셨던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잡은 물고기를 구워 아침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가 사용한 사랑이란 단어는 "필리아" 라는 단어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단어는 "아가페"와 "필리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과 두번째는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세번째는 필리아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아가페라는 사랑은 베드로처럼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입장에서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변함없이 사랑하고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헌신적인 사랑으로 마치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처럼 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필리아라는 사랑은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과 같은 사랑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물었을 때 어떻게 베드로가 주님에게 아가페라고 대답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필리아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을 헤아리셨던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네가 정말 나를 필리아할 수 있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예 나는 주님을 필리아 할 수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많은 신혼부부들이 예식장에서 주례와 증인들 앞에서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 사랑할 것을 다짐하고 약속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부부들이 서로 헤어지고 있습니까?
인간들의 사랑이란 이렇게 약속을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시리라는 말씀은 인간들이 배신하고 떠나버려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은 "용서하는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1st. 가죽옷(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The LORD God made garments of skin for Adam and his wife and clothed them.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런데 나무잎은 해가 뜨면 곧 잎이 마르고 시들어버립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짐승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죽옷을 아담과 하와에게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의 특징은 짐승을 잡아 죽일 때 생명을 잃은 짐승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은 피가 없는 옷 즉 용서가 없는 옷입니다.
반면에 가죽옷은 짐승의 피가 있는 옷입니다.
성경은 피를 생명이라고 합니다(신명기 12:23)
다만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지 못하리니.
But be sure you do not eat the blood, because the blood is the life, and you must not eat the life with the meat.
성경은 피를 용서라고 합니다(히브리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In fact, the law requires that nearly everything b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
용서의 특징은 덮어주는 것입니다.
가죽옷으로 덮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창세기 3:21)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으로 덮어주셨습니다.
방주의 안과 밖을 역청을 바르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창세기 6:14)
노아가 방주를 만든 나무를 '잣나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개역 개정판 성경에서는 '고페르 나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역청을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역청을 "코페르"라고 합니다. 코페르라는 단어는 "속죄" 라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속죄제 제물의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피로 덮는 용서가 완성된 것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므로 모든 사람의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예수께서 흘리신 피를 "화목제"라고 합니다.
화목제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사랑
요한일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인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화목제를 히브리어로 "제바흐 쉘라밈" 이라고 합니다.
제바흐는 제물, 쉘라밈은 평화(샬롬의 복수형)
화목제 제사의 특징
첫째는 암수 모두 바칠 수 있다.
둘째는 기름과 콩팥을 드린다.
(기름이 잘 타기 때문이다)
셋째는 남은 제물은 바친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이 나눠 먹을 수 있다.
(단 3일 이내에 만 먹어야 하고 그 후에는 반드시 불에 태워버려야 한다)
넷째는 평등 의무 제사
화목제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배려하는 산비둘기, 집비둘기의 새끼는 제물을 받지 않는 평등의무 제사였습니다.
즉 성막을 지을 때에는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에게 똑 같은 속전을 거두시게 하신 것처럼, 평등하게 부담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화목제 제사의 근거
로마서 3:23-26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for all have sinned and fall short of the glory of God,
and are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 through the redemption that came by Christ Jesus.
God presented him as a sacrifice of atonement, through faith in his blood. He did this to demonstrate his justice, because in his forbearance he had left the sins committed beforehand unpunished.
he did it to demonstrate his justice at the present
time, so as to be just and the one who justifies those who have faith in
Jesus.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무섭게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던 시대에 기록된 말씀으로 빨리 예수님 오시기를 갈망한 예언서입니다.
그런데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주님은 다시 오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예수님을 알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which God gave him to
show his servants what must soon take place. He made it known by sending
his angel to his servant John.
* 5034, 속히(타코스, tachŏs) τάχος
- 시간적으로 빠른 이란 의미가 아니라 "반드시" 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He who testifies to these things says, "Yes, I am coming soon." Amen. Come, Lord Jesus.
* 5035, 속히(타쿠, tachü) ταχύ
- 서둘러서, 빨리, 지체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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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히" 라는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설교한 자료를 소개합니다.
요한계시록 편에 보면 좀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차 설교일 / 03-31-2019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The
angel said to me, "These words are trustworthy and true. The Lord, the
God of the spirits of the prophets, sent his angel to show his servants
the things that must soon take place."
* 속히 될 일(What must soon take place) - 곧 일어날 일, 반드시 일어날 일
속담에 ‘구슬이 세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단편적인 지식과 정보를 하나로 연결해야만 바르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지난 두 주일에 소개했던 설교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요한계시록은 오직 예수로만 읽어야 합니다.
프리즘(Prism)은
빛을 굴절 분산시키는 광학도구를 사용하여 햇빛을 통과시키면 프리즘을 통과한 햇빛은 무지개 색으로 분해되어 영롱하게 나타납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들었던 성경에 관한 모든 단편적인 정보들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렌즈로 통과시켜 주님 오실 그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일까?
요한계시록은 계시의 말씀입니다. 계시란 하나님의 구원 방법과 계획이란 비밀을 알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언의 말씀입니다. 예언이란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주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편지의 말씀입니다. 편지는 직접 찾아가서 전할 수 없는 내용을 글로 적어 보낼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였고 예언하셨던 말씀을 글로 적어 보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속히 될 일’이란 무엇일까?
요한계시록을 읽고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자세는 먼저 요한계시록의 범위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범위를 성경 전체로 확장하는 것이 바람직한 성경의 교훈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22장 19절에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속히 될 일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속히”라는 단어가 요한계시록과 성경에서 사용된 말씀을 살펴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속히”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 수가 본문을 포함하여 8구절로 소개됩니다.
(1:1, 2:6, 3:11, 11:14, 22:6, 22:7, 22:12, 22:20).
“속히”
라는 단어가 사용된 모든 구절들을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제한된 시간 때문에 설교의 주제에 합당한 구절들을 살펴보면 ‘속히 될
일’이란 22장 6절에서 “속히 되어질 일” 이라고 소개합니다.
이어서 “속히 될 일” 이란 3장 11절, 22장 7절과 12절
그리고 20절에서 “속히 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히 될 일”은 “속히 오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기가 대략 기원 후 96년이라고 합니다. 2천 년 전에 속히 될 일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직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속히 될 일 즉 주님의 재림이 아직도 실현되지 않은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시간(時間) 개념(槪念)
속히 될 일에 대해서 시간 개념으로 해석하면 ‘빠르다’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속히 이루어질 일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당장 오늘 아니면 내일 아니면 내 생전에 오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목격했던 제자들은 그들이 살아있을 동안에 주님이 오실 것으로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면서 제자들은 그들이 만났던 주님에 대한 증거를 후대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복음서를 시작으로 신약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만일 주님이 제자들 생전에 오셨다면 성경이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실 주님이 오시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베드로후서 3장 8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다르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인위적인 방법이므로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1:6∼7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장소(場所) 개념(槪念)
속히 될 일에 대한 해석을 시간적으로 해석하면 반드시 오실 장소에 대한 궁금증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어디에’ 오실 것을 찾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느 특별한 장소를 마치 계시를 통해 받은 것처럼 소개합니다.
예를 들면 과천, 피지 섬, 브라질, 계룡산과 같은 곳이 될 것이라며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인물(人物) 개념(槪念)
속히 될 일을 시간과 장소로 해석하면 그 다음에는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어느 특정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1992년 시한부종말론의 이장림,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지상낙원 피지 섬으로 집단 이주시키는 사례(은혜로교회
신옥주), 두 증인 중 한 사람이라며 영원불멸의 교주(전도관 박태선),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므로 교인들은 전 재산을 정리해서
브라질에 마련한 4천만평의 땅으로 집단 이주하여 마지막 때를 준비하라는 교회도 있습니다.
영적(靈的) 개념(槪念)
속히
될 일이란 시간과 공간과 인물 중심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묵시문학의 특징인 영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영적 세계에서는 시간
개념과 장소 개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속히’라는 말은 ‘확실히’ ‘틀림없이’ 라는 속뜻으로 ‘반드시 될 일’이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속히” 라는 의미를 ‘문자적’으로 또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해석하면 본질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묵시문학의 특성을 전제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묵시문학에서 “속히” 라는 의미는 “확실히” 또는 “틀림없이” 라는 뜻으로 “속히 될 일”이란 “반드시 일어날 일”이란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속히 될 일’이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이므로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2천년이 지나도 오시지 않았기에 아마 오시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반드시 실현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전개 이야기)
미국 여성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펄벅 여사는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느 해 중국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그녀가 살던 마을에 백인 선교사의 가족들이 우리 마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신이 분노하여 가뭄이 계속 된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소문은 점점 분노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밤에 마을 사람들이 삽, 곡괭이, 쇠스랑 등 농기구를 들고
펄벅의 집으로 몰려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외국 출장 중이라 집에는 어머니와 어린 펄벅밖에 없어서 아무런 대책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집안에 있는 찻잔을 모두 꺼내 차를 준비하고 케이크와 과일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손님들을 초대한 것처럼 대문과 집안의 모든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어린 펄벅에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도록 하시고 어머니는 바느질감을
잡았습니다.
얼마 뒤 농기구를 든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대문이 굳게 잠기고 집안은 깜깜할 것이라고 여기고
횃불을 들고 펄벅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대문이 열려있어 마당으로 들어섰더니 모든 방문이 열려 있고 방마다 불이 환하게
켜진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또한 방마다 차와 케이크 그리고 과일이 차려진 것을 보고 어리둥절하여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멈칫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정중하게 마을 분들을 맞이하며 “어서 오십시오. 정말 잘 오셨습니다. 방으로 들어오셔서
차라도 한 잔씩 드시면서 말씀하십시오.” 그 말을 듣고 더 어리둥절 하는데 그들 중 어느 한 사람이 횃불을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가자 다른 사람들도 그를 뒤따라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구석에서 놀고 있는 아이와 어머니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차를
마시고 케이크와 과일을 먹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그토록 기다리던 비가 내렸습니다. 훗날 어머니는 어른이 된 펄 벅
여사에게 그날 밤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고 합니다.
“그날 밤 조금이라도 도망칠 방법이 있었다면 도망치다가 잡혀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살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막다른 골목에서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인지라 모든 것을 각오하고 그런 용기를 내어 보았단다.”
그리고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용기는 절망에서 생긴다.” 이 말은 펄 벅 여사가 절망적인 순간에 항상 떠올리는 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속히 될 일은 속히 오리라는 약속으로 반드시 오실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 주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았다는 것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사랑을 새롭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왜
주님께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직 오시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주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속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5: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 급히(ταχύ) 사화하라 - 속히(ταχύ) 사화하라
(현대인 성경) 타협하라
(공동번역) 화해하여라
(새번역) 화해하도록 하여라
‘사화하다’(유노온, 능동형)는 상처를 준 사람이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사화(사과)는 상처를 준 사람이 해야 하고, 화해는 상처를 받은 사람이 해야 합니다. 사화와 화해가 이루어진 것을 합의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8: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 빨리(ταχύ) - 속히(ταχύ)
성도들이
속히 해야 할 일은 부활의 소식을 빨리 가서 알려야 합니다. 종말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부활의 소식을 빨리 알리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적인 종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만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지라도 여전히 유대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활의 소식을 전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소식을 함께 나누며 주님 오실 그 날을 함께 준비할 수 있는 믿음으로 무장해야 하겠습니다.
속히 될 일이란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께서 속히 오실 것이라는 사건입니다. 주님이 속히 오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속히 오실 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까?
20:15 -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21:27 -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그러므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야 합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이름은 등과 기름을 예비하는 사람입니다.
등과
기름을 예비하기 위해서 속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것으로 구원받은 것으로 신앙생활의 감격이 없고 감사가 없다면 교회에 다닌다는 것뿐이지
신앙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부족한 것이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을 자랑하며 즐거워 할 것입니다.
아쉬운 것은 요한계시록을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사람들이 “속히 될 일”에
대한 주제를 현실 세계에서 나타는 현상과 징조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시대의 징조와 현상은 잘
몰라도 등과 기름을 예비한 지혜로운 사람들만이 주님을 영접할 수 있다는 비유의 가르침과 같이 “속히 될 일”을 말씀하신 감추어진
은혜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속히 될 일”이란 용어가 요한계시록에서 두 번 사용된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1, 속히 될 일
22:6, 속히 되어질 일
속히 될 일 또는 속히 되어질 일은 무엇인가?
3:11, 속히 오리니(I am coming soon.)
22:7, 속히 오리니(I am coming soon!)
22:12, 속히 오리니(I am coming soon!)
22:20, 속히 오리라(I am coming soon.)
속히 될 일은 속히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속히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때는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기를 기준으로 대략 2천
년 전의 예언입니다. 2천 년 전에 예언한 내용이 아직도 성취되지 않았다면 그 예언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정말 그 예언을 믿고
기다리고 있을까요? 인간의 평균 수명이 80 또는 90이라고 한다면 속히 오실 것이란 예언을 믿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속히 오리라고 예언하셨을까요?
미래에 나타날 현상과 징조들을 알려고 할 것이
아니라 짧은 인생을 살면서 반드시 속히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신앙적인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신앙적인 삶은 무엇일까요? 속히 라는 단어가 사용된 성경에 소개된 말씀을 찾아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학창 시절에
시험을 치룬 줄 압니다. 시험 일자가 발표되면 모든 학생들이 시험공부를 합니다. 시험 일자가 중요합니까? 시험을 잘 치룰 수 있는
공부가 중요합니까? 시험이 목적이 아니라 시험을 통하여 학생들의 실력을 향상시키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속히 될 일은 반드시 오실 것을 의미합니다. 반드시 오실 주님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기다리는 것보다 다시 오실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삶이 중요합니다.
속히 오시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에게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입니까? 하고 질문했을 때 부활의 주님께서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속히 오실 주님의 때와 기한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는 성령을 받고 증인의 삶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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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사랑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And we know that in all things God works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him, who have been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첫째, 두려움을 물리치는 힘(요한일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There is no fear in love. But perfect love drives out fear, because fear has to do with punishment. The one who fears is not made perfect in love.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합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힘 이상의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딤후 1:7).
For God did not give us a spirit of timidity, but a spirit of power, of love and of self-discipline.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두려움이란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의 줄임말
(Fear ; False Evidence Appering Real)
반려견을
돌보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처음에 집으로 데려오면 불안하여 부들부들 떨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집
주인은 나를 버리지 않겠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 꼬리를 흔들고
따라다니며 좋아한다고 합니다.
강아지도 이렇게 반응한다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둘째, 성령으로 역사하는 힘(요한일서 4:12∼23)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울이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믿고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면 하나님의 영, 곧 인격을 가지신 거룩한 바람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임재 하시어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그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겠습니까!
셋째,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도록 역사하는 힘(요한일서 4:14∼15)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 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아가페 사랑)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1. 내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보니
슬픔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2. 주의 얼굴 뵙기전에 멀리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3.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예수 모신곳이 그어디나 하늘나라
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모든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많은 성도들이 애창하고 있는
찬송가 438장 “내 영혼이 은총입어(Since Christ my soul from sin set free)”
버틀러(C.F. Butler) 작사
블렉( J.M. Black) 작곡
1898년에 발표한 곡입니다.
본 찬송의 작사자 버틀러(C. F. Butler)의 생애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작곡자 James Milton Black (1856- 1938)
뉴욕 사우스 힐에서 태어났으며, 조기 음악교육으로 작곡가, 성악가, 합창 지휘자, 음악교사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뉴욕의 존 하워드(John Howard)와 무디 신학교의 다이넬 타운어(Daniel Brink Towner)로부터 사사하면서 음악적 기초를 든든히 쌓아나갔으며 1881년경 펜실바니주 윌리암스포트(Williamsport)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1904년부터 생을 마칠 때까지 그곳의 파인스트리트 감리교회(Pine Street Methodist Episcopal Church)의 지휘자, 주일학교 교사로서 활동하면서 많은 찬송곡을 작곡하였습니다.
그의 최초의 작곡집 “영혼의 송가”(Songs of the Soul, 1894)는 2년 동안에 40만부 이상 팔렸다고 하며, 바로 이어 후속 편 Songs of the Soul, Number Two (1896)를 출간했습니다.
또한 그는 10여권의 복음 성가집을 발간해 낼 정도로 정력적으로 작곡활동을 하였는데, 그간 그가 작곡한 곡은 약 1500곡에 이릅니다.
그가 지은 찬송가곡이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 두 곡 실려 있는,
180장 “하나님의 나팔소리”
438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입니다.
전자는 그가 작사, 작곡한 곡이고
후자는 버틀러가 작사한 시에 그가 곡을 지은 것이죠.
버틀러는 누가복음 17장 20-21절, “바리세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는 말씀을 배경으로, 하나님나라의 현재적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감격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현재적 심령 상태를 그리고 있습니다.
후렴의,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부분을 원시에 가깝게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O hallelujah, yes, 'tis Heav'n
(할렐루야! 그래요, 그것은 천국이어요)
'Tis Heav'n to Know my sins forgiv'n
(내가 죄 사함 받은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것은 천국이예요)
On land or sea, what matters where?
(땅이나 바다나, 그 어디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Where Jesus is, 'tis Heaven there.
(주님이 계신 그곳은 천국이어요)
"어려울 때 힘이 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좋은 환경이 아니라고 불평하지 마라.
좋은 환경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아담은 에덴 동산이란 좋은 환경에서도 타락하지 않았는가?
눈물나는 역경에서도 감사를 드리자.
흐르는 눈물로 인해 하나님을 더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역경에 처할수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시어
우리를 보호하시고 힘을 주신다"
중국 후한을 세운 광무제에게 호양 공주라는 여동생이 있었다고 합니다.
호양 공주가 아끼는 노비가 있었는데 공주의 권세를 믿고
살인을 한 후에 공주의 저택에 숨어서 지냈습니다.
당시 낙양성의 치안을 담당했던 "동선"이라는 관리가 이 노비를 처벌 하기 위해서 공주의
대문 앞에 잠복하고 있다가 공주가 외출할 때 따라 나오는 노비를 붙잡아 그 자리에서 처형했다고 합니다.
공주는 자신의 눈앞에서 아끼는
노비가 죽음을 당하자 오빠 광무제에게 동선이라는 관리를 처형하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에 광무제가 동선을 불러 공주에게 사과하라고
하자 동선은 자신은 사과하지 못하겠고 차라리 죽겠다고 버텼습니다. 이런 광경을 본 호양 공주는 "오빠가 황제가 아니었을 때에는
집에다 죄 지은 사람을 숨겨 주어도 관가에서 잡아가지 못했는데 오히려 황제가 되고나니 오빠의 힘이 줄어든 것 같다."며 짜증을
부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광무제는 웃으면서 "황제가 되었으니 일반 백성 때와 같이 행동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하면서
고집쟁이 관리인 동선을 풀어주고 오히려 상을 주었다고 합니다.
광무제는 여동생 호양공주를 달래고 정직한 관리를 풀어줌으로써
친인척도 달래고 국정의 기강도 바로잡았다는 교훈입니다.
오랜 중국의 역사에서 후한의 광무제가 공신들을 잘 관리한 군주로 뽑힌다고 합니다. 광무제는 자신을 도와서 후한을 세운 공신들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명예를 주었지만 건국 이후 국정에는 손을 떼도록 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의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은혜를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릴 수 있는 그 날이 속히 도래하기를 기도합니다.
신하들은 임금님 앞에서는 칭찬했지만 돌아서면 흉을 보았어요.
뽐내기 좋아하는 임금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어요.
어느 날 두 사람이 임금님을 찾아왔어요.
이 사람들은 아주 특별한 옷감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었는데 그 옷감은 바보의
눈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신비한 옷감이라고 말했어요.
좋은 옷 입기를 좋아하는 임금님은 당장 이 사람들에게 궁궐의 방 하나를
주며 신하들에게 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언제든지 제공하라며 당장 그 옷을 만들게 하였어요.
두 사람은 베틀 앞에 앉아 마치
옷감을 짜듯이 베틀을 움직이고 있었어요.
여러 날이 지난 후 임금님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지요.
그래서 가장 신뢰하는 신하를
보내어 확인하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그 신하가 방으로 들어갔을 때 신하의 눈에는 아무 것도 안 보였어요.
그렇다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바보라고 말할까봐 아무 말도 못했어요.
드디어 임금님이 입을 바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신기한 옷이
완성되었다며 두 사람은 임금님에게 그 옷을 입혀주었어요.
임금님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옷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임금님도 바보가 되겠지요.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고 두 사람이 입혀주는 대로 옷을 입은 후 그 옷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려고 거리로
나갔답니다.
사람들은 임금님이 벌거벗은 것을 보도 아무 말도 못하고 뒤로 돌아서 웃기만 했답니다.
그러자 어느 한 어린이가
‘임금님은 벌거벗었다!’ 하고 외쳤어요.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다 같이 ‘벌거벗은 임금님!’ 하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전개 이야기)
심판의 날에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 날에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부끄러운 모습일 수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의 옷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이사야 61:1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구원의 옷(Garments of Salvation)을 어떻게 입어야 할까요?
아담과
하와는 직접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옷을 만들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방법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직접 가죽옷으로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옷을 입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에 의한 구원의 옷을 성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가죽옷(창세기 3:21) - 죄를 덮어주는 옷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자신의 죄를 자기의 방법대로 감추려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만든 옷은 “자기 의”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죄를 덮어주시려고 ‘가죽옷’을 만들어 입혔습니다.
가죽옷이란 죄를 용서받은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방법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 예증 #.1)
노아
홍수 때에 잣나무로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잣나무를 개역 개정 성경에서 ‘고페르나무’ 라고 합니다.
그리고 방주 안과 밖을
‘역청’으로 바르게 하셨습니다.
역청을 ‘코페르’ 라고 합니다.
고페르와 코페르는 같은 문자로 발음을 나타내는 모음만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 고페르와 코페르의 뜻에는 ‘속죄’라는 뜻이 있습니다.
애급에서 나오기 전에 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른 집안에서는 장자의 죽음과 생축의 초태생이 죽는 일이 없었지만 양의 피를 바르지 않았던 집안에서는 장자의 죽음과 초태생의 죽음으로 인하여 큰 슬픔이 임했습니다.
(현실 예증 #.1)
2019년
10월 9일은 ‘욤 키퍼(Yom Kippur)’라는 공휴일은 ‘욤(Yom)’ ‘날(Day)’을 의미하고 ‘키퍼(Kippur)’는
‘속죄(Atoinment)’를 의미합니다. 키퍼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고페르, 코페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곧 속죄를 받은 하나님의 의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 예증 #.2)
노아 홍수 후에 구원의 계시가 속죄제사로 말씀하셨습니다.
속죄제사는
개인이 바치는 제물과 백성 전체가 바치는 제물로 구분합니다. 개인적인 속죄제는 짐승의 머리에 개인이 안수하고 그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킨 후에 그 짐승을 잡은 후 피를 받아 제사장에게 드리면 제사장은 그 피를 성소 휘장 앞에서 일곱 번 뿌리고 그리고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회막 문 앞 번제단 밑에 쏟았습니다(레위기 4:6∼7).
그러나
백성 전체를 위한 속죄제사는 두 염소를 선택한 후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한 제물로 바치고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 염소라고 하여
광야로 보냈습니다. 이때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렸습니다(레위기 16:15, 18∼19).
속죄소가 있는 곳은 ‘지성소’입니다.
지성소까지 들어가야만 속죄가 해결됩니다.
이러한 속죄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마 27:51).
성소의 휘장이 둘로 나누어진
것은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히브리서 9: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세마포 옷 -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기 위한 예복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세마포 옷은 하얀 옷을 말합니다. 하얀 옷은 세탁을 잘 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 후 변화하신 주님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13∼15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은 인간의 방법에 의한 인간의 의라고 한다면 가죽옷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방법에 의한 의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로 약속하신 것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요한계시록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희어진 옷은 세마포 옷입니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적용)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요?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시편 132:16
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옷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이 외치리로다.
제사장의 옷을 입히셨습니다.
대제사장 옷은 청색, 자색, 홍색실로 만들었습니다. 에봇은 금실과 가는 베실로 만들었습니다.
청색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자색은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홍색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피 흘리신 것을 기억나게 합니다.
금실은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가는 베실은 흰색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나타냅니다.
오늘 우리들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인정받았으므로 반드시 제사장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제사장의 옷이란 가죽옷처럼 속죄의 피가 뿌려진 옷입니다. 가죽옷은 속죄제사를 통하여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일반적인 속죄제는 휘장 앞에 희생 제물의 피를 일곱 번 뿌렸습니다. 그러나 대속죄일에 드려지는 속죄제사는 아세셀 염소는 광야로
보내버리고 다른 염소는 그 피를 받아 지성소 안에 있는 속죄소 즉 시은좌에 뿌려야만 용서를 받았습니다.
구원의 완성을 계시하신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는 것은 세마포 옷을 입었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하나님의 의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 될 수 있습니다. 고난주간을 지내는 동안 하나님의 의로 인정받은 구원의 옷을
입고 내가 맡은 삶의 자리에서 구원받은 증거를 눈으로 보여주고 입으로 고백하는 구원의 증인으로 승리하는 복된 한 주간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찬송가에는 오른편과 왼편에 사람의 이름이 소개됩니다.
왼편의 이름은 "작사자"
오른편의 이름은 "작곡자"
♪ 184장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 R, Rowry 작사, R, Rowry 작곡
1.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후렴> 예수의 흘린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2. 나를 정케하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사죄하는 증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3. 나의 죄속하시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는 공로 없도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4. 평안함과 소망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5. 영원토록 내 할 말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찬미 제목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 1826-1899)는 미국 펜실베니아 주 태생의 침례교 목사로서 루이스버그대학 (후에 버크넬대학) 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졸업과 함께 모교의 문학교수가 되었으며 후에 모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845년에 침례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웨스트체스터(West Chester)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여러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마지막으로 뉴저지 플레인필드(Plainfield)에 있는 파크아베뉴 침례교회에서 목회를 마쳤습니다.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 1826~1899)목사는 남북전쟁(1861~1865) 직후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던 그때 한손(Hanson)의 침례교회에서 시무했는데(1868 -1875) 어느 날 병든 사람을 돌보다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게 되고 40세가 되는 1866년 부터 본격적인 찬송가를 짓기 시작합니다.
40세 이후부터 찬송가를 작사·작곡하기 시작한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목사는 스스로 찬송가 작가로 기억되기보다는 설교자로 기억되기를 원했지만 희망적인 찬송을 작사ㆍ작곡하여 보급함으로 수많은 이들에게 심령의 갈급함에 새 희망을 주게 되었고 100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훌륭한 찬송가 작시, 작곡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맥커천(Robert Guy McCutchan, 1877~1958) 목사는 “그의 설교는 불과 몇 천 명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그가 작사 · 작곡한 찬송은 지구상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으며, 이 일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비글로우메인(Biglow-Main) 출판사의 음악 편집자로서 일하면서 'Happy Voices, 1865' 를 시작으로 20권이나 되는 찬송 책들을 출판하였고, 1868년에는 브래드버리의 후임으로 주일학교 노래 편집인이 되었으며, 500여 곡의 어린이 찬송과 복음찬송들을 작곡. 혹은 작사하여 돈(Doane)과 함께 발행한 주일학교 어린이 찬송가와 출판물에 넣었습니다.
그는《행복의 소리》'Happy Voices, 1865' 등 17 권의 찬송가책을 펴냈는데, 그 중에는 100만 부 이상이 팔린 책도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주일학교협의회 회장을 역임한 그는 대학 교수로도 있었고, 침례교 총회장도 역임하였습니다.
그의 찬송가로서 우리 찬송가에 실려 있는 것은
1. 무덤에 머물러
2. 성자의 귀한 몸
3. 주 사랑하는 자
4. 나의 죄를 씻기는
5.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6. 날 위하여 십자가의
7.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8. 나의 갈길 다 가도록
9. 주 음성 외에는
10. 울어도 못하네
11.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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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날마다 숨쉬고 활동하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우리들이 알 수 없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
매일 자다 깨면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것 같이 그렇게 급변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방향
없는 변화
그 앞에 우리들은 속수무책일 때가 많습니다.
셋째는 변화의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
많은 미래
학자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하고 미래를 전망합니다만 그대로 되지 않습니다.
믿었던 과학자의 생명연구가 이기적인 명예욕 때문에
물거품이 되는가하면,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생각지 않았던 배신을 느끼고 돌아서서 울어야 하는 예기치 않은 인간사들이 마치 럭비공이
뛰는 것처럼 어느 방향으로 뛸는지 알 수 없고, 어느 방향으로 변화될는지 모르는 그런 세상,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을까요?
자세히 살피면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절대로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여러분 노래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옛날에는 노래를<소리>라고 했습니다.
혹은<가락>이라고 했습니다.
옛날 우리 어르신들은<소리>라고만 하면 그 안에 창(唱)도 있고, 판소리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엔 트로트, 재즈, 락앤롤, 트위스트, 랩 그리고 발라드, 테크노, 힙합, 이게 정말 노래인가 싶을 정도의
도무지 이해가 잘 안가는 그런 장르의 음악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어르신들께 죄송하지만 가끔씩은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만 그러나 흘깃 흘깃 들어보면 한 가지는 분명히 귀에 들어오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모든 노래를
통 털어 보면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떠난 노래가 없습니다.
전부가 사랑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사랑,
기다리는 사랑, 갈구하는 사랑, 사랑이 주제가 됩니다.
그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은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향방 없이 변하고, 빨리 변한다할지라도 이 사랑 만큼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행복의 원천이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뉴욕 데일리 뉴스지에 예방의학 전문가인 피터 한센(Peter Hansen)박사가 이런 연구를 보도한바가 있습니다.
현대인의 건강을 위하여 우리가 흔히 말하는 건강식품, 규칙적인 운동, 담배, 술, 과로, 과식, 수면 부족 등 해로운 습관을
버리는 것을 50점으로 보고 남은 50점의 건강 관리법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창조적인 힘이 있어
신체의 저항력이 강해지고 병균과 싸우는 자연의 힘이 배양된다고 합니다.
사랑의 힘은 때때로 상상을 뛰어넘기도 하고 가끔은 상식을
뛰어넘기도 합니다.
하버드대학교 심리학 교수팀이 실험을 하였습니다.
인도의 빈민가에서 사랑의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테레사
수녀가 가난한 사람들을 병원에서 도와주는 모습을 찍은 기록 영화를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그 학생들의 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는 저항력을 검사하고, 일주일 후 같은 학생들에게 나치 독일이 유태인을 학살하는 잔인한 기록 영화를
보여주고 다시 저항력을 조사했답니다.
그랬더니 테레사 수녀의 영화를 본 뒤에 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는 저항력의 수치가 훨씬 높게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적 건강 나아가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도 하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왜 이리 시끄럽습니까?
첫째는 세상의 모든 문제는 사랑의 문제
먼저는 사랑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아예 사랑할
마음조차 없습니다.
둘째는 사랑이 있긴 있는데 병들어서 문제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쌍방이 주고 받아야 올바른 사랑입니다.
병든사랑은 일방적인 통로만 있습니다.
양방 통행이 필요합니다.
셋째는 거짓 사랑이 문제
사랑에 속았습니다.
거짓된
사랑이 우리 마음을 실망하게 합니다.
저마다 사랑을 외치지만 그게 사랑이 아닙니다.
이렇게 때로는 스스로 속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무지가 문제입니다.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못합니다.
넷째는 사랑이 통하지 않는 문제
분명히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느끼질 못하고 그래서 사랑을 주지도 못하는 사랑의 의사소통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단절됩니다.
결국 이것은 불신의 문제입니다.
분명히 그는 사랑하고 있고 나는 사랑 받고 있으면서 내가 그 사랑을 믿지 않으면 사랑을 모르게
되고, 사랑을 모르면 감격이 없고, 감격 없는 사랑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에는 세 단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관심의 단계
관심도 대단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쥐를 키우는데 있어서 우유병만 빨려서
키운 쥐는 평균 600일을 살고, 그릇에 우유를 부어놓고 사람이 손으로 우유를 직접 먹이며 사랑의 손으로 쓰다듬어 주면서 키운
쥐는 훨씬 더 오래 사는데 평균 950일을 살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할 대상에 대해 거저 관심만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아름다운
사랑이 되기도 합니다.
둘째는 헌신의 단계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시간을 바쳐 사랑합니다.
그를 위해서 선물을 준비하고 그를 위해서 시간을 구별하여 둡니다.
셋째는 희생의 단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자세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른 응답이 아니라 오직 그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내가 됩니다.
이 사랑에 이르면 무슨 일이든지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랑이 됩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강한 사랑이 됩니다.
어느 날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을 아주 싫어하던 한 부인이 처칠에게 이렇게 거친 말을 했습니다.
“윈스턴,
만일 당신이 나의 남편이었다면 나는 당신의 차 속에 양잿물을 넣었을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윈스턴이 얼마나 멋있게 받아 넘겼던지
참 감동적입니다.
“부인, 만일 당신이 나의 아내였다면, 나는 그 양잿물을 마셨을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내가
희생하며 그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사랑은 이런 힘을 가진 능력입니다.
이처럼 사랑의 단계에 따라서 결과도 달라집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 사랑은 어느 단계까지 와 있습니까?
아
직도
그저 막연한 관심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헌신의 단계, 희생의 단계에까지 이르러 있는 수준 높은 사랑을 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받은 우리들이 마땅히 드려야 할 사랑은 어떤 사랑이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맘에도 사랑이 없고 행동에도 사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가장 강한 사랑의 모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직 자기 사랑입니다(自己愛).
그러나 자기 사랑이
먼저가 아닙니다.
성경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앨버트 슈바이처는 인간에게는 행복을 위한 세 가지 조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할 일(Something to Do)
둘째는 바라는 것(Something to Hope)
셋째는 사랑할 대상(Something to Love)
분명한 사랑의
대상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가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도 큰 불행이라고 말합니다만 그 보다 더 큰 불행은 내가 사랑할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곧 내 사랑을 받아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나를 절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행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그 사랑의 첫 번째 대상이 하나님임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 중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로 오늘 성경 말씀이 이 사랑의 시작을 말합니다.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는 "인간은 알고 있는 것에 의하여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것을 따라가게 되고, 또한 사랑하는 것에 모든 것을
바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그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의 욕심과
자기탐욕에 빠집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 때문에 죄를 짓게 되고, 명예와 권세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위해서라면 불법과
비리에라도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사랑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출발이어야 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서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입니다.
교회는 다닌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짓 신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기록한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사랑에 대한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얼마만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해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내 사랑을
확인하시고 출발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첫 걸음을 어떻게 내 딛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매사를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더군다나 신앙의 출발을 어디로부터 출발하느냐가 한 해를 성공적으로 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가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의 결심으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교회를 봉사하고 이웃을
섬길 줄 아는 신앙의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체렘'이란 단어의 의미는 완성된 모습이 아니라 완성을 위하여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한 조각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은 모습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닮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
체렘의 의미 / 길가에 버려진 거대한 바위가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누가 저렇게 큰 바위를 길에다 버려두었나?
이때 어느 조각가 한 사람이 그 바위를 조각실로 옮긴 후에 부지런히 조각품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거대한 바위에서 조각품이 될 수 없는 떨어져 나가는 조각들을 "체렘" 이라고 합니다.
옷(케토넷트, כְּתֹנֶת kethôneth)
발음
: kethôneth
어원 : 40:14, כָּתְנוֹת, 출 39:27, 복수 연계형 כִּתְנוֹת, 창 3:21, 출 39:27, 복수 어미활용 כֻּתָּנוֹתָם, 레 10:5, ‘가리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는가?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려고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는데 그 이유는 가죽옷을 만들려면 짐승이 죽어야 합니다.
짐승이 죽을 때 피를 흘려야 합니다.
따라서 가죽옷의 의미를 두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는 희생 - 십자가(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For the message of the cross is foolishness to those who are perishing, but to us who are being saved it is the power of God.
둘째는 피 - 보혈(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In fact, the law requires that nearly everything b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
다소니 : 사랑하는 사람
다소다 : 애틋하게 사랑하다
가람 : 강의 우리말
그린비 : 그리운 남자
여우별 : 궂은 날 잠깐 보였다가 사라진 별
볼우물 : 보조개
아람치 : 자기의 차지가 된 것
미르 : 용
푸르미르 : 청용
미리내 : 은하수
그린내 : 연인
아라 : 바다
꼬꼬지 : 아주 오랜 엣날
눈바래기 : 멀리 가지않고 눈으로 마중
마루 : 하늘
그린나래 : 그린듯이 아름다운 날개
예그리나 : 사랑하는 우리사이
비나리 : 축복의 말
어리연히프제 : 치마를입고 활쏘는 여자들
가시버시 : 아내 , 남편을 뜻하는 말
늘솔길 : 언제나 솔바람이 부는 길
한울 : 우주
꽃가람 : 꽃이 있는 강
수피아 : 숲의 요정
아토 : 선물
희나리 : 마른장작
샛별 : 새벽 동쪽 하늘에서 빛나는 금성
닻별 : 카시오페아 별자리
산돌림 : 옮겨다니며 내리는 소나기
듀륏체리 : 늦게 얻은 사랑스러운 딸자식
물비늘 : 잔잔한 물결이 햇살에 비치는 모양
타니 : 귀걸이
하람 : 꿈의 뜻
사시랑이 : 가늘고 힘 없는 사람
도투락 : 어린아이 머리댕기
가우리 : 고구려
미쁘다 : 진실하다
아띠 : 친구
새라 : 새롭다
나린 : 하늘이 내린
라온하제 : 즐거운 내일
라온제나 : 기쁜 우리
라온힐조 : 즐거운 이른아침
꽃 잠 : 신혼부부의 첫날밤
나르샤 : 날아오르다
흐노니 : 누군가를 그리워하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월 | 순우리말 | 뜻 |
1 | 해오름달 | 새해 아침에 힘있게 오르는 달 |
2 | 시샘달 | 잎샘 추위와 꽃샘 추위가 있는 겨울의 끝달 |
3 | 물오름달 | 뫼와 틀에 물오르는달 |
4 | 잎새달 | 물오른 나무들이 저마다 잎 돋우는 달 |
5 | 푸른달 | 마음이 푸른 모든이의 달 |
6 | 누리달 | 온 누리에 생명의 소리가 가득 차 넘치는 달 |
7 | 견우직녀달 | 견우직녀가 만나는 아름다운 날 |
8 | 타오름달 | 하늘엔 해, 땅위에선 가슴이 타는 정열의 달 |
9 | 열매달 | 가지마다 열매 맺는 달 |
10 | 하늘연달 | 밝달뫼에 아침의 나라가 열린 달 |
11 | 마름달 | 가을에서 겨울로 치닫는 달 |
12 | 매듭달 | 마음을 가다듬는 한해의 끄트머리 달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가람
'강의 옛말' 강처럼 넓고 부드럽게 흐르듯이
가람슬기
강처럼 푸르게 그리고 슬기롭게
가온
'가운데의 옛말' 세상에 중심이 되어라
그린나래
그린듯한 아름다운 날개처럼
고운
'고운' 말 그대로 고운 삶을 살아라
나래 '날개를 이르는 말' 자유롭고 창조적
나린
하늘이 내린
나르샤
비상하다, 날아오르다
나봄
봄에 태어난 아이
나예
나비처럼 예쁜 아이
난새
한껏 날아오른 새처럼 힘차게
노을
노을처럼 곱고 예쁘게 자라거라
누리
온세상에 너의 뜻을 펼치며 살거라
누리봄
세상을 봄처럼 희망차게 가꾸는 사람
늘봄
늘 봄처럼 싱그러운
늘찬
늘 옹골차게
빈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
다소니
사랑하는 사람
다슬
모든 일을 슬기롭게
다솜
애틋한 사랑
다온
모든 좋을 일이 다 오다
다올
하는 일 마다 복이 오다
다은
다사롭고 은은하게 자라는
다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
다흰
다흰 모두 다 하얗고 순수한
단미
사랑스러운 여자
도담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두빛나래
두개의 빛나는 날개
든해
집안으로 가득 들어온 햇빛처럼 밝게
라온
'즐거운'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 늘 즐겁게
라라
흥겹고 즐거운 삶을 살거라
라미
'동그라미'에서 따온 말, 동글동글 부드럽게
루리
'이루리' 모든 뜻을 이루다
마루
산 꼭대기 정상에 우뚝 서길
마루한
으뜸가는 큰 사람이 되거라
마리
'머리'의 옛말, 으뜸가는 사람
모아
늘 뜻을 모아 사는 삶을 살거라
미나
미덥게 자라나길
미르
'용'을 뜻하는 말, 용처럼 씩씩하고 멋지게
미리내
은하수를 뜻하는 예쁜 순우리말
바다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갖거라
바론
'바른'의 옛 순우리말로 바르게 살길
벼리
'일이나 어떤 글의 뼈대가 되는' 중심이 되다
별하
별처럼 높고 빛이 나는 사람 차고 미덥게
산다라
굳세고 꿋꿋하게
소아
소담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길
소미
솜처럼 깨끗한
솔찬
소나무처럼 푸르고 옹골찬
수련
몸과 마음씨가 맑고 고운 사람이 되길
수피아
숲의 요정
슬기
언제나 슬기로운 사람
슬아
슬기로움과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
설아
눈과 같이 깨끗한 아이
슬예
슬기롭고 예쁜 사람
슬옹
슬기롭고 옹골찬 사람
슬우
슬기롭고 우람하고 씩씩한
슬찬
슬기로움으로 가득찬 사람
시내
시냇물처럼 말고 깨끗한 사람
'바다'의 우리말, 바다처럼 넓게 살거라
아란
아름답게 자란
아람
가을햇살에 충분히 익어 저절로 벌어진 과일
아리수
'한강'의 우리말
아리아
'요정'의 우리말
아롱별
아롱다롱 빛나는 별처럼 아름답게 자라길
움찬
돋아오르는 싹처럼 힘차게 자라길
윤슬
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물결
으뜸
이 세상의 최고라는 뜻
은가람
'은은히 흐르는 강' 이라는 뜻의 순우리말
이든
착하고 어질다
이솔
소나무 같은 곧은 품성을 지닌 아이
자올
원만한 성격
잔디
잔디처럼 끈기를 가진 사람이 되어라
주나
사랑과 기쁨을 주는
주리
즐거움을 주리
지니
많은 복을 지니다
지은
세상을 바르게 하는 좋은 글을 지은 사람이 되길
지음
지금의 삶을 아름답게
진이
진달래처럼 곱고 예쁜 사람
알차게 잘 자란 소나무처럼
찬슬
슬기로움으로 가득차다
초롱
맑고 영롱하게
큰솔
크게 잘 자란 소나무처럼
토리
도토리처럼 작지만 야무지고 옹골차게
티나
어디서나 예쁘고 고운 티가 나는 사람이 되길
푸르내
푸른 물이 가득 흐르는 맑은 시내
푸르니
마음이 늘 푸른
하나
이세상에 단 하나
하늬
'하늬바람'처럼 시원한 사람
하람
하늘이 내린 소중한
하랑
함께 사는 세상에서 높은 사람이 되길
한결
한결같은 지조
한빛
큰 빛, 세상을 이끄는 환한 빛
한울
큰 울타리처럼 포근한 사람
해나
해가 나듯 따뜻한 사람
해솔
해처럼 밝고 소나무처럼 바르다
해찬솔
햇빛이 가득찬 푸르른 소나무처럼
https://atodtoa.tistory.com/104
도입 이야기
28 이라는 숫자
"2X8"은 학생들은 "16" 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청춘"이라고 대답한다.
어느 교인이 자녀의 이름으로 헌금을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28만원을 빌려서 헌금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이가 시험을 치루는데 어려운 문제 때문에 주저하는데 "이것이 답이야" 라는 강한 음성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 아이는 그의 마음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따라 답을 결정하였는데 시험에 통과되어 합격하였다고 합니다.
더구나 놀란 것은 장학생을 28명 선발하였는데 그 아이의 성적이 28등이 되어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 아이에게 "2X8"은 "기도의 응답"이라고 합니다.
4336. 기도 - 프로슈케(prŏsĕuchē) / προσευχή
1. 기도, 2. 기도처1. 가까이 앉다
2. 시중하다
3. 섬기다
- 끈질기게 매달리는, 지속적인 의미
- 기도의 열심과 지속성
1. 고집
2. 건방짐
3. 뻔뻔스러움
4. 파렴치함
5. 부끄러움을 모름
* 신약성경에서 1회 사용 ἀναίδεια
부정접두어 아(α) + 아이도스(부끄러움이 없음) (127) αἰδώς / 체면불구하고 간구하는 것
(KJV) impotunity(무력감)(NIV) boldness(대담, 뱃심, 배짱)
교훈
1. 요청에 즉각적으로 응하지 않으려는 집 주인과 쾌히 주시려는 하나님을 대비하므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반드시 응답된다는 것을 강조(9-13절)
2. 응답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끝까지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살전 5: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단호하고 분명한 것이었다.
즉 ‘기도’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란 어떤 초능력적 힘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게를 이루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촉구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감(交感)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 할 때에는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기도의 목적은 진정으로 갈급하는 것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강청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사도행전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All of them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in other tongues as the Spirit enabled them.
4130 / 플래도(plēthō) πλήθω
1. 채우다
2. 영향을 주다
3. 완수하다
4. 공급하다
가득하다(마 22:10, 눅 4:28, 행 5:17)
적시다(마 27:48)
충만함을 받다(눅 1:15, 41)
차다(눅 1:57, 2:6, 22)
채우다(눅 5:7)
충만하다(행 4:8, 31, 13:9)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Do not get drunk on wine, which leads to debauchery. Instead, be filled with the Spirit.
로마서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May the God of hope fill you with all joy and peace as you trust in him, so that you may overflow with hope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누가복음 1:15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for he will be great in the sight of the Lord. He is
never to take wine or other fermented drink, and he will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even from birth.
누가복음 1: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누가복음 1: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화살기도는 영혼의 활을 당겨서 하나님께 쏘아 올리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적절한 상황에서 짧고 단순한 기도문을 가지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입니다.
화살기도는 주로 자신이 애용하는 기도문을 만들어 적절한 상황 때마다 사용합니다.
화살 기도는 주님의 전적인 긍휼하심을 간구하는 마음으로 드릴 때 효과적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박히는 화살을 쏘라
화살
하나는 하나의 기도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활에 화살을 하나씩 당겨서 시간이 나는 대로 하나님께 쏘아올릴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의 화살을 한 개 쏠 수 있습니다.
또 밤에 자기 전에도 쏠 수 있습니다.
하루 중에서 틈이 나는 대로, 적절한
순간마다 기도의 화살을 쏠 수 있습니다.
화살 기도의 기도문은 장황해서는 안됩니다.
마치 화살이 너무 길면 활로 당겨 힘있게
쏘기가 어려운 것과 같은 것입니다.
화살기도는 간단하고 단순해야 합니다.
화살은 짧지만 힘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힘차게 멀리
날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투영해서 쏘아야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 오늘도 주님 안에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저와 우리 가족을 지켜주세요.”
이러한 기도문은 여러분 각자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 날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기뻐하게 해
주세요.”
나는 차에 탈 때도 간단하게 화살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안전운행을 하도록 지켜주십시오.”
밤에 자기 전에도 화살
기도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함께 하신 것 감사드립니다.
이 밤에도 주님의 보혈로 덮어주세요.”
하루 중
생활하면서
“주님,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저를 주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 주시옵소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간단한 기도를 통해서 화살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글을 쓰기 전에 “주님 글을 쓸 수 있는
아이디어와 지혜를 주세요” 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회사 취직을 위해 인터뷰를 하기 전에도 “주님 이 인터뷰에서 제 입술 의 말을
주관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버스를 타기 전에 “주님, 안전운행하도록 지켜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 “아이들이 오늘도 공부 잘하고 친구들과 잘 지내게 함께 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의 화살
화살
기도는 간단한 기도이지만 우리의 마음을 담아서 드려야 합니다.
내면의 진실은 화살이 날아가기 위한 좋은 활이 됩니다.
성자로
여겨지는 존 비아니(John Vianney)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에 대해,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아름답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향기로운 이슬이다.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만 그 이슬을 가슴속에 느낄
수 있다.
기도에는 마치 잘 익은 포도로 만든 쥬스와도 같은 달콤함이 느껴진다.
간절한 기도 앞에서 문제들은 봄볕의 눈처럼
녹아버린다.
사람은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서 마치 대포에서 발사된 탄알처럼 곧장 하나님께 달려가야 한다.
기도는 우리 영혼을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킨다.
마치 에드벌룬을 높이 올려주는 불길처럼 기도는 우리 영혼을 높은 곳으로 데려다준다.
우리는 더
많이 기도하면 할수록 더 기도하고 싶어진다.
처음에는 수면에서 헤엄치지만 나중에는 점점 더 깊이 들어가 밑바닥을 향해 가는
물고기처럼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즐거움 속에 빠져 들어간다.
기도는 거룩한 물로서 그것이 흐르는 곳에 우리의 소원은
힘을 얻어 꽃을 피우게 된다.
우리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고 우리 마음의 목마름을 해소시켜 준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가장 열정적인 기도가 나옵니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기도의 가장 강력한 힘이 발휘됩니다.
우리는 마음
밑바닥에 있는 거룩한 꿈과 소원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내면의 진실한 소원은 하나님께 날아가는 화살의 강력한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화살 기도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는,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드리는 짧은 화살기도입니다.
둘째는,
반복해서 드리는 화살기도문입니다.
셋째는, 정해진 장소에 기도문을 붙여놓고 드리는 화살기도입니다.
성벽 재건의 마음을 담아서 쏘아올린 느헤미야의 기도
성경에서
우리는 느헤미야를 통해 화살기도의 첫 번째 유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파괴의 비보를 접한 느헤미야는 몇 개월
동안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아닥사스다 왕 앞에 얼굴에 수색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왕은 느헤미야에게 마음에 근심이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그 때 느헤미야는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왕은 느헤미야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어봅니다.
왕에게 대답하기 전에 느헤미야는 잠시 동안
묵상 기도를 드립니다(느 2:4).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묵상으로 잠깐
기도했지만 마음 속으로 하나님께 “짧고 단순한 화살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 왕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제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하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화살기도는
이처럼 어떤 순간적인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정해진 시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흐르는 강물처럼 하루 종일 흘러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간단한 문장이나 말을 사용하면서 짧은 화살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화살 기도문은 자신의 마음에 맞는 것을 선택하여 반복형 기도로 사용하는 것도 효과적입니다.
이러한 기도문을 계속해서 사용하면 좋은 기도의 훈련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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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주로 새벽기도를 설명할 때 자주 찾는 성구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시간 개념에서는 새벽이 아닙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언제 시작할까요? 유대인의 하루는 해가 지면서(저녁6시) 시작하여 그 다음날 해질 때 끝납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하루종일 일하다 가도 해자 져서 어둠의 커튼이 드리우면 “아 하루가 끝났구나” 하면서 감사의 일몰 기도를 드리고 하루를 마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낮과 밤을 12시간씩 나누어 구분했습니다. 낮 시간은 대략 아침부터(해뜰때부터) 저녁(해질때까지) 까지로서 현재의 아침6시에서 저녁6시까지 정도였으며, 밤은 오후 6시부터 그 다음날 아침 6시까지 12시간이었습니다. 밤은 다시 3시간 단위로 묶어 “경”이라 불렀습니다. 제1경은 오후 6-9시, 제2경은 오후 9-12시, 제3경은 오후 12-3시, 제4경은 오후 3-6시 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밤 4경에 제자들이 씨름하던 바다위로 걸어가신 시간대가 언제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낮 시간은 아침 6시에서 저녁 6시까지 12시간으로 한 시간 단위로 제1시, 2시 등으로 구분했습니다. 제1시는 아침 7시, 제6시는 낮 12시, 제9시는 오후 3시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유대인의 시간 즉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을 오늘의 시간으로 환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6을 더해주면 됩니다. (이것도 어려우면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에서 초침시계에서 시간을 가리키는 바늘의 반대편이 지금의 시간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 예를 들면 사도행전 3장 1절에서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 시간 제구시는 오후 9시가 아니라 오후 3시를 말합니다(9+6=15,즉 오후3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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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영적 호흡이라고 합니다.
호흡을 할 때 호흡하는 방법을 배워서 숨을 내쉬고 들어바십니까?
생명이 있는 육체는 자연스럽게 호흡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중병에 걸렸을 때는 자기 힘으로 호흡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산소호흡기로 숨을 쉬도록 도와줍니다.
건강한 영혼
건강한 육체
건강한 신앙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땅에는 중단해야 될 일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쁜 생각과 나쁜 습관, 하나님의 계명에 위반되는 것과
불신앙에 대한 것, 어두움에 관한 것 등등 이러한 것들은 빨리 중단할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중단해서는 안 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육체가 호흡을 함으로 존재하듯이
영적 생활에서 가장 귀한 것은 바로 기도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기도 쉬는 것을 죄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삼상 12:23)
그는 기도 쉬는 것을 큰 죄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기도를 중단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어떠한 의미일까요?
첫째,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계속하라
출애굽기 33:11에 보면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친한 벗이라도 대화가 중단되면 마음에서도 멀어지고 또 정(情)도 멀어집니다.
우리는
항상 대화 속에 이해를 서로 주고받게 되고 정(情)도 서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영적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가 없이는
신앙생활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숨을 거둔다는 것은 바로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중단하는 것은 바로
신앙을 자살시키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떠한 환경과 처지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서가 아버지 이삭에게 받을 축복을 야곱이 가로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어머니 리브가 곁에 있으면서 대화를 자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생활을 통해서 늘 하나님과 영적인 대화를 계속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역대상 10:13에 보면 사울의 죽은 기록이 나옵니다.
사울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아 왕까지 되었지만 그가 결정적으로 생명을 잃게 된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고 신접한 사람 즉 귀신 들린 사람에게 가르쳐주기를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방신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올리는 경배를 중단하지 말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1년에 몇 번 정기적으로 드리고 끝나면 안됩니다. 우리는 평생토록 하나님 앞에 산 제물이 되어서 늘
경배하는 생활을 지속해야 합니다. 시편 95:6에 보면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경배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무릎을 꿇는 것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가
계속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경배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안전한 시간, 가장 하나님께 보장 받는 시간은 바로 예배하는
시간입니다. 예배가 살면 믿음이 삽니다. 예배가 살면 교회가 삽니다. 예배가 살면 여러분의 인격도 변화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했습니다(요 4:23).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일을 숨질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경배’라는 말은 ‘꿇어 엎드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 예배는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또 ‘주인의 발 앞에 하인 된 위치에서 엎드려
경의를 표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주인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중단하지 않는
가정과 교회와 민족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예배가 가장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향기로움을 계속 올려드리라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시 141:2) 기도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예물입니다. 요한계시록
5:8에도 보면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도가 얼마나 귀하면 금 대접에 담았을까요? 옛날에 귀한 음식은 임금님의 상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귀하면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가겠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항상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매일처럼 올라가는 기도의 향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기도를 하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게 되고, 기도 속에서 신앙이 성장하게 되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기도의 줄이 잡힌 사람은 항상 미리 예방의 기도도 하고, 처방의 기도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 26:41)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고 졸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시험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기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항상 기도함으로
깨어있기 때문에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항상 기도로 깨어서 주님과 영적 대화가 이어짐으로 여러분의 아름다운
기도의 향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항상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항상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것입니다.
시편 55:22에 보면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맡기는 것과 버리는 것은 다릅니다. 전당포에 맡기는 것은 다시 찾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맡겨 버리는 것은 다시
찾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올림픽대로를 타고 공항에 가다 보면 난지도에 쓰레기를 버리는 차량은 많이 보았지만 그 버린 쓰레기를
다시 싣고 가는 차량은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무거운 짐을 다 주께 맡겨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기도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잠언 16:3에도 보면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시편 37:5에도 보면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베드로전서 5:7에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여분의 모든 것을 기도로 하나님께 다 맡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인간이 견디기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 이를 때에도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계속하고, 하나님 앞에 올리는 경배를 중단하지 말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의 향을 계속 올려드리고, 항상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어서 늘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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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스(Yes)형
2. 노(NO)형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 거부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는 경우이다.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 반사회적, 비인격적, 비성경적인 기도에 침묵이나 거절로 응답. 이 외에도 형제를 용서치 못함, 교만, 혈기, 외식적인 기도, 죄, 두 마음, 의심, 잘못된 금식, 불순종 등에 거절하시는 응답.
3. 주바라기형
힘들고 지칠 때,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하나님만 믿고 의지할 때 기적적으로 주시는 응답.
홍해 앞, 여호사밧 왕과 백성들의 찬양을 통해 하나님이 적군을 물리쳐 주시는 응답.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서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
5. 웨이트(Wait)형
인생은 먼 길을 여행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때로는 형통한 환경의 아스팔트길을 걸어갈 때도 있다.
그러나 어려움의 진흙탕길, 가시밭길을 걸어갈 때도 있다.
폭풍우나 비바람을 맞고 외로운 길을 걸어가야 할 때도 있다.
가슴에는 비전을 품고 마음속에는 굳건한 의지와 강철 같은 체력으로 가야할 길을 가야한다.
믿음과 기도로 앞길을 헤치고 걸어갈 때 지연된 응답이 있다.
크로노스(인간의 시간)와 카이로스(하나님의 시간)는 다르다.
웨이트형과 진주조개형의 차이는, 웨이트형은 믿음으로 지속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진주조개형은 먼저 계시나 응답을 받았지만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에 받게 되는 기도응답을 말한다.
7. 물레방아형
직선형 기도응답이 아니라 변환형 기도응답이다.
우리가 A를 구했는데 B나 C, D를 주실 때도 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러 가려고 했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고 마게도냐(유럽)로 인도 하셨다.
유럽에 기독교 문명이 획기적으로 열리는 전기가 된 것이다.
자신의 기도와 고집만 주장하고 금식을 한다고 해서 자기 뜻대로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고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시대를 움직이는 사역을 펼칠 수 있다.
8. 야베스형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 영, 혼, 육의 총체적인 전인적 축복을 주시는 경우이다.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인 모든 영역에서의 완전한 기도응답.
이 기도에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지침이 있다.
그것은 피(정의), 땀(노력), 눈물(양심)의 3대 액체가 필요하다.
이것을 알고 야베스의 축복을 말해야 한다.
9. 징검다리형
하나의 목표나 프로젝트를 추진해 가기 위해서는 일의 시작 전, 과정, 후까지 기도를 해야 한다.
지속적인 기도와 연속적인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기도응답이다.
느헤미야의 성벽재건(방해자, 거짓 선지자 출현 때도 지속적인 기도)
하나님의 방법을 말한다.
인간의 기도나 믿음, 의지와는 무관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한다.
주권적인 의지와 주권적인 권능을 말한다.
인간의 생사화복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한다.
창조와 보존, 통치, 성도의 고난, 선택과 유기, 징계 등.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요구에 응답해야 할 때가 있다.
이사야 선지자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 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8).
교회, 전도, 구원, 부모의 기도, 성도를 위한 합심기도, 목회자의 중보형기도 등을 말한다.
이러한
기도응답의 원리를 알고 365일, 24시간을 주님과 연합된 삶을 살게 될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과 그 분의 뜻 안에서 성공과 부와 명예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된다(전1:26).
헤르만 헤쎄(Hermann Karl Hesse. 1877. 7. 2~1962. 8. 9)의 기도
하나님이여,
우리 자신에 대하여 절망케 하옵소서.
하나님에게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 절망케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 자신이
더 이상 지탱할 아무 힘이 없을 때까지 절망케 하옵소서.
그래서 오직 하나님으로만
희망과 소망을 가지게 해 주옵소서.
* 오늘의 묵상(01-11-2021 소개)
라인홀드 니버(Karl Paul Reinhold Niebuhr. 1892∼1971)의 “평온을 비는 기도”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차이를 분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한 번에 하루를 살게 하시고
한 번에 한 순간을 누리게 하시며,
어려운 일들을 평화에 이르는 좁은 길로 받아들이며,
죄로 가득한 세상을, 내가 갖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그분께서 그러하셨듯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제가 그분의 뜻 아래 무릎 꿇을 때,
그분께서 바로잡으실 것을 믿게 하셔서
이 생에서는 사리에 맞는 행복을
내 생에서는 영원토록 그분과 함께 다함이 없는 행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아멘.
Serenity Prayer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Living one day at a time;
Enjoying one moment at a time;
Accepting hardships as the pathway to peace;
Taking, as He did, this sinful world
As it is, not as I would have it;
Trusting that He will make all things right
If I surrender to His Will;
So that I may be reasonably happy in this life
And supremely happy with Him
Forever and ever in the next.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Carol Wimmer)
“나는 기독교인이에요” 라고 말할 때
“난 구원 받았다!” 라고 외치는 게 아니에요.
“난 가끔 길을 잃어요.
그래서 이 길을 택했어요.” 라고 말하는 거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교만함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발을 헛디뎌 비틀거려서 하나님께서 나의 인도자가 되길 바란다고 고백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강하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약해서 계속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한다고 말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성공했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실패해서 결코 빚을 다 갚을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는 혼돈에 처해 있어서 겸손하게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내가 완벽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 결점이 너무나 뚜렷하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나는 뼈아픈 고통을 여전히 느껴요.
내 마음이 아파서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구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나는 판단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내게는 그럴 권한이 없어요.
내가 사랑받는다는 사실 그 하나만을 안다는 것이에요.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의 살아 있는 믿음의 표현으로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intimate intercourse)이라고 합니다.
성부 하나님이 기도를 들었고 응답하시며 성자가 그의 이름으로 중보하시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기도를 활성화시켜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어지게 된다.
칼빈이 말한대로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은 우리에게 참된 지혜와 경건 그리고 건강한 믿음을 준다.
바운즈(E. M. Bounds)
"성도를 만드는 것은 기도의 힘이다. 기도하면 기도할 수록 참된 성도가 되어간다. 기도를 위하여 많은 시간, 특별히 아침 시간을 바치면 성스러운 생활에서 그 효과가 현저하게 나타나게 된다."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문이 열리고, 틀이 형성되며, 그 내용이 규제되기 때문에 철저하게 말씀의 묵상을 요구하며, 말씀 묵상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알기 때문에 확신과 소망을 갖게 합니다.
또한 마음 속에 깊은 감동과 큰 감격을 심어 주어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므로 기도는 말씀 묵상과 찬미와 더불어 행하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찬미는 말씀에 기초해야 하고, 지나치게 감정적이거나 충동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특권이요, 의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의 은혜를 감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적 사랑에 감격하며 그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중보 기도를 본받아 온
인류와 우주적 교회를 위하여 드리는 우리의 중보기도는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의 지름길이요, 사랑과 믿음과 소망으로 하나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뿐 아니라 형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최상의 방편입니다.
칼빈은 성령과 말씀을 따라 기도함에 있어서 특별히 네 가지의 법칙
1. 경외하는 마음으로
2. 진심으로
3. 겸손하게
4. 믿음으로
첫째 법칙 - 경외하는 마음으로
구약성경에 보면, 에컨대 레위기에 나오는 의식법 등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초월성을 유념하게 하여 우리가 하나님께나 아갈 때 경외심을 가질 것을 강조한다.
신약에서도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위엄이 무한하며 그의 본질을 불가해하고 그의 권능이 한량없으며 그의 존재 또한 영원함을 알게 하려는데 있다고 칼빈은 해석한다.
주기도의 첫째 기원, "이름이 거룩하게 되오며"에 대해서도 칼빈은 이 기원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들려 드릴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큰 수치를 인하여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칼빈은 아주 강조한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대화하며 기도하려는 자들은 합당한 생각과 마음을 가져야 한다.
둘째 법칙 - 진심으로, 열정적으로
성경은 위선적인 기도를 정죄할 뿐만 아니라 기도를 진실하고 열정적으로 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한다.
예수님은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경고하셨고, 기도의 응답이 더딜 때 끈기 있게 기도할 것을 권하였다.
그리고 기도에는 열정적인 열망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여 기도한 세리는 자기의 감정이 고조되어 있음을 표현하여 자기의 가슴을 쳤으며, 그리스도의 기도들은 심한 통곡
과 눈물로 드려졌는데,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셨다.
엘리야도 간절하게 기도했던 것으로 성경은 말한다.
칼빈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자신의 무력함을 항상 느끼며,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필요한가를 간절하게 생각하고서 그것을 응답 받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이 기도에 가미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셋째 법칙 -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겸손한 기도의 전형적인 실례는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이다.
칼빈은 주장하기를 기도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모든 자만심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올바른 기도의 준비와 시작은 겸손하고 성실하게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간구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은 그 뜻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사실상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 결정되며 우리 스스로 기도의 내용을 조작하지 않게 된다.
이로써 겸손하고 순복하는 기도가 가능하다.
넷째 법칙 -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성경이 분명하게 지시하는 바에 의하면 믿음은 응답받는 기도의 필수 조건이다.
칼빈이 제시하는 넷째 법칙은 기도하되,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리라는 확실한 소망을 품고서 용기를 내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지는 것은 모두 믿음을 통해서 얻는다고 하는가 하면, 사람들은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것이요, 공포심 없이 그러나 경외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고 칼빈은 또한 말한다.
칼빈이 제시한바 네 가지 법칙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185문답)에 다음과 같이 진술되어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며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과 필요한 것들과 죄악들을 깊이 깨닫고 마음으로 회개하며 감사하고 열심을 품되 이해, 믿음, 신실, 열정, 사랑 그리고 인내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뜻에 겸손히 순복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어떤 것일까?
기도로 하나님에게 생각을 하게하고, 내 기도로 인해 하나님이 하나님의 계획을 별도로 세우거나 바꾸거나 하게 할 수 있는 것인가?
피조물인 사람의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왜 기도를 하나님은 또는 예수님은 하게 하신 것인가?
여러분은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절대 주권자시며,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이나 생각을 인간이 하는 기도로 바꾸시거나 혹은 인간이 하는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과연 바꿀 수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열심히 기도를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속성을 속성대로 믿는 기도일까요?
아니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왜 자기가 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이 그 때 그 때 바뀌는 것처럼 생각이 돼서 열심히 기도를 하는 믿음이 생기는 것일까요?
지금 기도 자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할 때 누가 주어냐? 즉 누구를 위한 기도냐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 역시 돈 문제로 정말 너무너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정말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정확히 3년 동안 매달을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넘어갈 수 있도록 해주신 예수님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소중한 체험인데요, 그래서 지금도 저는 예수님 경리과장 같은 예수님이라는 말을 농담처럼 곧잘 합니다. 예수님처럼 정말 정확한 분은 없는 것을 저는 너무 잘 압니다. 그리고 많은 목사님들 역시 기도가 만능인 것으로 생각을 하는 목사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기도는 왜 하는가?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가 도대체 무엇인지 아는 것이 기도에 대해 이런 생각을 깊이 하면서 성경 말씀들을 찾아가보면, 기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팔랄
- 간섭하다, 판단하다, 중재하다, 기도하다.
“팔랄”이란 기도는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입니다.
히브리어 단어 해석이 사실은 참 어렵습니다.
히브리어를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 해석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도의 대표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어 “팔랄”은 “간섭하다, 판단하다, 중재하다, 기도하다”는 뜻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외에는 계시지 않는 것을 구약의 기도를 대표하는 “팔랄”이라는 단어에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팔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 . .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요나 2:1,2,10)
옛날 히브리 사람들은 기도를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브라함과 요나, 모세, 그리고 다윗에게 기도는 무엇을 의미하였던 것일까? 그들이 생각하던 기도의 개념은 오늘날 크리스천이 생각하는 기도의 개념과 어떻게 달랐을 것인가?
기도의 문자적 의미 - 입과 지팡이
구약성경에서 대표적으로 사용된 기도하다는 뜻의 히브리어는 ‘팔랄’이다.
앞에 접두사 테를 붙이면
테필라, 즉, 기도라는 명사가 된다.
팔랄의 어근은 ‘팔’인데 ‘페이’와 ‘라메드’의 두 글자로 되어있다.
‘페이’는 입을
뜻하는 상형문자로서 여기서는 말을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한편 ‘라메드’는 권위를 상징한다.
원래 라메드는 양치는 목자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긴 지팡이를 그린 상형문자이다.
목자는 그 지팡이를 가지고 양떼의 가고 멈춤과 모든 행동을 결정하며 다스린다.
양들의 입장에서 보면 또한 그 지팡이는 자기들을 맹수로부터 보호하는 강한 힘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팔’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권위자에게 말하다”라는 뜻이 된다.
한편 땅에 떨어지거나 엎드리다는 단어 ‘나팔’도 같은 어근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팔랄이라는
단어의 문자적 해석은 “권세를 가진 사람의 앞에 엎드려 송사를 올리거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옛날에는
성문이나 광장에 유력자가 모습을 나타내면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자신이 당한 억울함이나 부당한 일들에 대하여 고하며 이에
대하여 정의의 심판을 내려줄 것을 간구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사무엘하 15장에 보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하여 일찍 성문으로 나가 재판관을 자칭하며 모든 송사를 가진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고 왕의 신하를 대신하여 심판을
내려주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에는 누구든지 개인적으로 부당한 일을 당하여 곤경에 처하였든지 아니면 그 지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잘못된 관행이나 부정행위에 대하여 분개한 사람은 권세를 가진 사람에게 찾아가 목소리를 높여 진정을 올리고, 권세자가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고 상황에 개입하여 왜곡된 질서를 바로잡아 주기를 절실하게 구하였다.
그러면 그 권세자가 그 진정된 바를
토대로 잘잘못을 가리고 훼손되었던 정의를 다시 회복시켜 주었는데 그 것이 바로 심판이다.
그러므로 팔랄의 또 다른 뜻에
‘심판하다’ 또는 ‘중재하다’가 있다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시편 106편에 비느하스가 하나님을 능멸한 악인들을 정죄하고 처벌한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정죄의 행위가 바로 같은 히브리어 ‘팔랄’이다. 하나님은 이를 영원하게 흔들리지 않을 의라고
여기셨다.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 때에 비느하스가 일어나 처벌하니(팔랄)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이 일을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 대대로 무궁하리로다” (시편 106:28-31)
따라서 팔랄(기도)의 본질적 의미는 다름 아니라 정의가 손상된 것에 대하여 강한 정의감을 가지고
권세자에게 진정함으로써 정의를 다시 바로잡는 행위를 뜻한다.
그 권세자 중에 가장 높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 지고의
권세자에게 하는 팔랄이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인간인 재판관에게 가서 말하면 송사라고 하고,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은
기도라고 완전히 서로 다른 단어로 분리하여 버렸지만, 옛 히브리어에서 재판관에게 하든지, 왕에게 하든지, 하나님에게 하든지 모두
팔랄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권세자에게 고하는 것이고, 정의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왕과 통치자는 모두 하나님의 대리인이므로
(로마서 13:1) 그들에게 송사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게 고하는 것이 된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로마서
13:1-2)
영적 의미 - 하나님의 정의를 위하여
정의가 손상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생명이 훼손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큰 영적 원리에서 보면
죄로 인하여 저주가 왔고 저주로 인하여 죽음이 온 세상을 덮어 다스리게 되었다. 그런 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짓밟힌 생명에 대하여
가슴 아파하며 그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에게 고하는 것이 기도이다. 고대 히브리 개념상 재판관은 생명을 회복시키는 자를
뜻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 즉, 법은 생명이고, 그 법을 확립하는 것은 생명을 지키고 살리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영적 원리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팔랄이다.
생명이 손상되고 정의가 무너져 가는 것은 개인적인 삶에서도 벌어지며, 지역사회와 나라 차원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자기와 자기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라 자기가 속한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불의와 생명의 파괴에 대하여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해될 것이다.
성경에 팔랄이 가장 처음 등장한 곳이 창세기 20장이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남방으로 이사가서
아비멜렉왕의 땅에 살게 되었는데,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사라가 아내인 것을 감추고 그녀를 누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비멜렉이 자칫 사라를 아내로 취하려고 하였는데, 그결과 아비멜렉에게 멸족의 재앙이 오게 되었다. 아비멜렉에게 잘못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꿈을 통하여 그에게 경고를 하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를 위하여 기도하도록 하셨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팔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줄 알찌니라 . . .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팔랄)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창세기 20:7, 17)
성경에 처음 나오는 기도의 상황치고는 약간 어이가 없는 것 같다. 아브라함이 두려움에서 지어낸
거짓말의 결과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고, 하나님은 급히 아비멜렉에게 재앙을 피할 방법을 제시하셔야
했는데, 그것이 아브라함의 기도였다. 그 상황이 어찌 되었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팔랄(기도)을 함으로써 억울한 죽음을
막고 생명을 회복시킨 점이다. 그 점이 팔랄의 본질을 보여준다. 기도를 하는 아브라함으로 치면 그리 떳떳한 입장도 아니었다.
아브라함이 완벽했냐 아니냐가 기도 응답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도가 이루어지고 아니고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 즉, 하나님의 법, 생명의 법을 세우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한편 누군가 죽을 죄를 범하고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할 경우에도 대변자가 나타나 권세자에게
탄원하고 긍휼을 구할 수 있다. 긍휼과 자비에 의한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에서 구하기 위해서 여러 번 ‘팔랄’을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닥칠 때
마다, 모세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서서 진정을 하고 송사를 하여 멸망을 막고,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오므로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였느니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멸하겠다 하셨으므로 내가 여전히 사십 주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리고 여호와께 간구(팔랄)하여 가로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위엄으로 속하시고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을 멸하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이 백성의 강퍅과 악과 죄를 보지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내신 그 땅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일 능력도 없고 그들을 미워도 하사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하여 내셨다 할까 두려워하나이다. 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였었노라” (신명기 9:24-29)
고개가 뻣뻣하고 끊임없이 거역하며 자기를 해하려고 까지 한 이스라엘 백성이 뭐가 예뻐서 모세가
그리하였겠는가? 끝 까지 오로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 하나님의 의를 지키기 위해서 모세는 개인적인 감정을 초월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중보자가 되었다. 우리의 판단과 감정을 따르는 대신,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것인가 만을 기준으로 기도할 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한 기도가 진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44)
열렬한 기도와 기적
권세자 앞에 엎드려 부당한 상황을 바로잡고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간절히 진정하는 히브리어
‘팔랄’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유추할 수 있다.
사람들은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인간인
권세자 앞에서도 ‘아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열을 올리면서 항변을 하고 진정을 하지 않을 것인가?
하물며 최고의 권세자이신 하나님께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제가 뭐 알겠습니까. 그저 잘 알아서 하옵소서’ 하고 돌아서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화를 통하여 바로 그 점을 가르치려고 하셨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8:1-8)
팔랄은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나아가 ‘아니 이 세상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불의를 이대로 내버려
두시렵니까?’ 하면서 마치 따지기라도 하듯이 항변이라고 할 만큼 당당하게 하나님께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유다의 멸망을 앞둔
마지막 때 선지자 하박국이 패악이 만연하고 불법이 자행되는 현실을 보고 부르짖었던 것과 같이 ...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하박국 1:2-4)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성경은 말한다 (야고보서 5:16).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팔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아들 사무엘을 얻고 의를 회복한 것처럼 (사무엘상 1:10-11), 또
히스기야왕이 “사자의 손에서 글을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놓고 .....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으로 주만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하며 기도(팔랄)하여 아수르의 침략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지킨 것처럼 (이사야서 37:14-15, 20), 의인의 열렬한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기적을 가져 온다. 시편
118장에 보면 우리의 기도를 주께서 응답하실 때, 주가 행하신 것을 ‘우리 눈에 기이한 바’라고 칭송하였다. 그 '기이한 바'가
히브리어로 기사와 이적을 뜻하는 ‘팔라’인데, 바로 이 단어가 또한 ‘팔랄’과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형제어라는 사실이 참
인상적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드린 기도를 주께서 응답하시어 멋들어지게 정의를 행하신 것을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 때
우리의 영혼은 짜릿한 감동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감사를 경험하게 된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팔라) 바로다
카라
- 기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카라”는 기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샤알
- 요구하다 기원하다
“샤알”은 “요구하다, 기원하다”라는 뜻입니다.
파가
- 중재로서 탄원
“파가”는 “중재로서의 탄원”을 뜻합니다.
“할라”
- 은혜를 구할 때 사용하는 단어
“할라”는 흔히 은혜를 구할 때는 쓰이기도 하는 단어입니다(시편 119:58).
내가 전심으로 주의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I have sought your face with all my heart; be gracious to me according to your promise.
자아크
-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 구하는 것
“자아크”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부르짖는 것을 말합니다(삿 3:9, 시 22:5).
라난
- “라난”은 “소리치다, 외치다”(시 17:1, 렘 31:12, 애 2:19)
샤와
“샤와”는 “도움을 청해서 부르짖다”
샤하르
“샤하르”는 “구하다”
‘나’는 부드럽고 신중한 요청으로 애원, 소원, 허락 등등
‘린나’는 슬픈 또는 진정성을 담은 느낌으로 외침, 함성, 부르짖음(시 17 : 1)
‘말씀’과
‘기도’는 기독교 신앙생활의 두 중심축이다.
히브리어로 <테필라
תְּפִלָּה>
동사 <팔랄 פָּלָל>에서 파생하였다.
히브리어에서
‘기도하다’란 뜻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동사는 매우 다양하다.
예컨대 ‘말하다’란 동사 <아마르 אָמַר>는 하나님께
아뢰고 또 하나님께서 응답하는 대화의 동작을 묘사하는데 종종 ‘기도하다’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그 외에도 ‘요구하다’란 뜻의 동사
<샤알שָׁאַל >도 종종 ‘간구하다’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또 ‘간구’<터힌나 תְּחִנָּה>란
명사는 ‘기도’<터힐라>란 명사와 나란히 병렬되어 나오기도 한다.
‘기도’<테필라 תְּפִלָּה>를 더욱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사 <팔랄 פָּלָל>의 의미를 더 연구해 보아야 한다.
<팔랄>이란
동사가 무슨 뜻으로 쓰였는지 알기는 매우 어려워서 학설도 여러가지이다.
백여 년 전에 독일의 벨하우젠(J.
Wellhausen)이라는 학자가 ‘칼날’과 관련된 아랍어 동사 <팔라>과 연관이 있어서 히브리어 <팔랄>은
‘자상을 내다/상처를 내다’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았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제의 중에 광란하면서 자기 몸에 칼로 자상을 내는
관행을 가리킨다. 성경의 율법은 그러한 우상숭배의 관행을 금지한다(신 14:1).
벨하우젠의 주장과는 달리 아랍어 <팔라>와의 연관성은 인정하지만 그 의미는 ‘자르다’라고 보는학자들이 있다. 이 의미에서 ‘구별하다’란 뜻으로 확장되고 나중에는 ‘판결하다’란 뜻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 중에 <펄릴라>는 ‘재판관’이란 뜻인데 이러한 확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어떤 학자들은 동사 <팔랄>이 본디 ‘넘어지다’란 뜻이었는데 이것이 발전하여서 엎드려 절하는 동작과 연결되면서 ‘기도하다’란 의미로 발전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스파이저(Speiser)는 <팔랄>은 ‘평가하다, 고려하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창 48:11; 삼상 2:25; 겔 16:52; 시 106:30같은 구절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동사가 피엘로 쓰이면
‘생각하다, 고려하다’란 뜻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성경에서 히브리어 <팔랄> 동사는
84회 나오는데 대부분 히트파엘(재귀형)로 사용되고 있다.
이동사가 히트파엘(재귀형)로 쓰이는 경우에 ‘기도하다’라고 번역한다.
본디 ‘자르다, 구별하다, 고려하다’란 뜻의 이 동사가 히트파엘(재귀형)로 사용되면 그 뜻이 변하여 ‘기도하다’란 뜻이 되는지 그
이유를 알기가 쉽지 않다.
동사 <팔랄>의 의미 중에 ‘구별하다’란 의미가 ‘재판하다’란
뜻으로 확장되었는데 이것이 히트파엘로 쓰이면서 ‘하나님을 재판관으로 삼다’란 뜻으로 의미가 더욱 확장되었다고 보는 주장이 있다.
골드만(Goldman)은 분들은 <팔랄>에 ‘자르다/깨뜨리다’란 뜻이 있음에 주목하여 이것이
히트파엘(재귀형)으로 되면 ‘자기 자신을 깨뜨리다’란 뜻이 되어서 ‘통한하며 뉘우치다’란 뜻이 되고, 이것이 ‘기도하다’란 뜻으로
정착되었다고 본다.
토마스(A. Thomas)는 ‘결정하다, 해결하다’란 뜻이
재귀형이 되어서 ‘중재자로 활동하다’란 뜻이 되는데 여기서 ‘기도하다’란 의미로 발전했다고 본다.
또 어떤 분들은 ‘평가하다’란
동사에서 히트파엘(재귀형)이 되어 ‘자신을 되돌아보다’란 뜻이 되면서 기도하는 행위를 가리키게 되었다고 본다.
이처럼
‘기도’<테필라>란 단어에 관한 어원을 따져보는 학설은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주장들을
종합해 보면 일정한 공통성이 발견된다.
‘기도’는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자신의 행위를 평가하고 반성하는 행위가 기본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반성의 기준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세우는 행위가 기도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기도’에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말씀’이 없이는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가 될 수 없다.
무릇
종교라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모든 종교는 기도를 강조한다.
기도 없는 종교는 없다.
그러나 다른 종교의 기도와
기독교의 기도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기독교의 기도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기도를 말씀에 입각해서 드리도록 가르치고 있다.
바알종교는 기도자 자신의 여망을 이루기 위해서 바알 신에게 자신의 존재를 바치는
표현으로서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광란의 기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야훼 종교는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움으로써
늘 말씀의 실존으로 자신을 변화시켜가는 기도를 가르친다.
오늘 한국교회는 바알종교의 기도를 드리는가, 아니면 야훼종교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사람이 귀를 둘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언 28:9).
‘테힌나트’ ‘간구’로 번역되는 단어로, 불쌍히 여기다(욥 19 : 21)라는 뜻을 지닌 동사‘하난’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외에도 히브리어에서의 기도로 생각할 수 있는 단어들은 많이 있는데, 기도나 간구나 구함 등, 기도에 해당하는 단어로 번역이 될 수 있는 단어들에 대해 살펴본 것처럼, 구약의 모든 단어들은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나 제의(祭儀) 또는 예배, 왕과 백성 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구하거나 애원하거나 청원을 하거나 부르짖는 것 등이 모두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런 단어들이 쓰이는 점에서, 이 역시 구약의 기도는 기도에 대한 예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8:26∼30
26. 그런즉 이스라엘 하나님이여 원컨대(나) 주는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 확실하게 하옵소서.
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28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테필라트=테필라)와 간구(테힌나트=테힌나)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하린나=린나)과 비(미트팔렐=팔렐)는 기도(핫테필라=테필라)를 들으시옵소서.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핫테필라=테필라)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이템팔렐루=팔랄=그들이 기도하게 될) 때에 주는 그 간구함(테힌나트=테힌나)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길게 솔로몬이 ‘그런즉’으로 기도와 간구를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얼핏 번역 말씀을 보면, 솔로몬이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에게 하나님의 귀한 백성을 위해 다윗의 후손들에게 왕권을 주시며 맡기신다고 말씀을 하셔놓고 왜 이제 와서 하나님이 딴 말씀을 하십니까? 이런 항변의 뜻으로 이런 기도와 간구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 솔로몬은 온 우주보다도 더 큰, 하늘 위의 하늘에 계시는 어마어마한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그 크신 하나님이 하찮은 자신이 짓는 지상에 있는 작은 건물 안에 하나님이 계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런 낮은 마음으로 ‘그런즉’으로 이어지며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와 간구입니다.
이 말씀에서 ‘기도’는 히브리어 ‘테필라트’로 원형이 ‘테필라’인데 어근이 ‘팔랄’입니다. 뜻은 앞에서 말씀을 드린대로 ‘판결하다(삼상 2:25)’, ‘기도하다(삼상 1:21)’라는 뜻과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드리는 중보기도’를 ‘팔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중보기도’를 할 때 ‘팔랄’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한‘테필라’는 의미가‘팔랄’보다 훨씬 더 낮은 자세로 애타게 애원하는 기도를, 솔로몬이 하나님이 아버지인 다윗에게 하신 언약의 말씀을 생각을 하면서 아주 낮은 자세로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가 ‘테필라’기도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간구’는 ‘테힌나트’인데, 뜻은 ‘긍휼이 여기다(단 4:27), 불쌍히 여기다(욥 19:21)라는 뜻을 지닌 동사 ‘하난’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간구’는 자신이 떳떳하게 하나님에게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명사 수 11 : 20)로 탄원(명사 렘 37 : 20)을 간구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시고 제 간구를 들어달라는 뜻이 ‘간구’라는 ‘테힌나트’라는 단어의 뜻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린나’는 ‘외치다(시 78 : 65)’, ‘기뻐하다(시 32 : 11), ’‘부르짖다(애 2 : 19)의 뜻을 가진 ’‘라난’에서 온 명사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이 말씀에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이 왕권을 주실 것을 언약하신 다윗과 그 후손을 포함한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대표하는 중보자로써의 기도를 하나님의 은혜로 불쌍히 여겨서 들어주실 것을 부르짖는 기도와 간구라는 것이 원어 의미의 기도와 간구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은 다윗에게 언약하신 말씀이 아니고, 모세에게 성막 성전을 짓게 하실 때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실 것을 스스로 말씀하신 것을 상고하면서, 29절에서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거하실 곳에 대한 말씀이 계속 나옵니다. 이 말씀에서 이곳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세상을 예표하는 애굽에서 구원을 해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모세에게 짓도록 한 성막 성전인데, 성막성전이기 때문에 이동을 하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덮으시며 하나님이 인도를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화인줄을 알게 하시고 또 자신이 그런 하나님인 것을 하나님의 백성은 알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이런 기도와 간구는 열왕기 상 9절 3절에서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은 이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하나님의 눈이 바라보시는 성전을 향해서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믿고 이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향해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을 계속 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떤가?
왕상 9 : 1-9
1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의 무릇 이루기를 원하던 일이 마친 때에
2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3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 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이 말씀에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 구약의 모든 율법이나 계명은 율법이 완성이 되고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신약으로 다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대속으로 인한 죄 사함과 그로 인해서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진리와 복음입니다. 따라서 이 진리와 복음 외에 다른 진리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것이 곧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기복신앙, 율법신앙, 성경 말씀에서 벗어난 신비주의를 생각하면 무슨 말씀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기도에 대한 단어가 훨씬 더 명료해지고 간단해집니다.
프로슈케 : ‘프로슈케’는 명사인데, 동사인 ‘프로슈코마이’와 함께 70인 역에서 히브리어 기도를 번역하는 단어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프로슈케’는 명사로는‘요청’이고, ‘프로슈코마이’는 동사로 ‘요청하다’라는 뜻인데, 중요한 것은 ‘프로슈케’나 ‘프로슈코마이’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요청이라는 단어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데오마이 : ‘요청하다’‘바라다’라는 뜻인데 하나님이나 사람 등 모두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데에시스 : ‘요구하다’‘요청하다’‘바라다’라는 뜻인데, 이 단어 역시 하나님이나 사람들 모두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엔테우시스 : ‘애원’이라는 뜻으로 지배자 또는 왕에게 청원이나 애원을 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
아이테오 : 구하다. 요청하다. 사람끼리도 당연히 해당되는 단어.
유카리스티아 : ‘감사’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토스’인데 ,‘유’는 ‘좋은’이라는 뜻이고, ‘카리스토스’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감사’로 번역이 되는‘유카리스토스’는 ‘하나님의 좋은 은혜’‘의롭고 선하신 은혜’를 ‘유카리스토스’로 ‘성경적인 감사’라는 뜻이 어떤 감사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온 단어가 기도로 번역이 되는 ‘유카리스티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은 은혜’‘의롭고 선하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좋은 은혜는 삯이 아닌 은혜로 거져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얻는 죄 사함과 이로 인해서 얻는 성령에 의한 거듭남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음으로써 신약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 은혜를 감사하며 드리는 것이 예표적이 아닌, 본체적 의미에서의 기도임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약적 의미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성경적인 기도는 무엇이겠습니까?
신약적 의미의 본체적 기도는 구약의 예표적인 기도와는 다르게 사람이 사람을 대신하는 중보기도는 인간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딤전 2 : 5, 6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그러면 사람들은 왜 기도를 하는가?
첫째로 사람들이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시간과 공간에 가두어서 창조를 해서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에 인간은 미래의 일을 알 수 없고 그래서 무엇엔가 또 자신이 원하고 구하는 것들을 기도를 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창조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는 누군가를 향해서 하는 것인데, 기도나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닌, 사단 마귀의 미혹에 빠져서 사단 마귀가 기뻐하는, 생명의 길이 아닌, 사망의 길로 인도하는 내용의 기도를 부지불식 간에 우리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도는 안테나의 방향이 달라지고, 기도하는 대상이 달라지면 기도의 응답이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담 부부나 예수님이 성령에게 이끌려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말씀을 생각하면 분명히 알 것입니다.
둘째 기도를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육적 결핍과 영적인 결핍 때문에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은 육적 결핍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은 아주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육의 결핍을 채우려는 기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 세상에 속한 백성들이 하는 기도인 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육적인 결핍을 채워달라고 하는 기도는, 원어적으로 보면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프로슈케’또는‘프로슈코마이’가 아닌, 데오마이, 데에시스, 엔테우시스에 해당하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 6 : 53- 63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래서 어떤 이유로든지 살리는 것에 무익한, 육을 위한 것은 기도가 됐건, 예배가 됐건, 설교가 됐건, 찬양이 됐건, 영광을 돌리는 것이 건 간에 그 어떤 것도, 살리는 것에는 무익한 것이 대상이 되면 안 됩니다.
사 29 :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계명과 율법의 마침이 되는 분시신 것을 생각을 하면, 신약적으로 왜 하나님이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시는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원어로 보았을 때, 프로슈코마이와 유카리스티아 기도 두 단어 외에는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한, 자랑할 것은 오직 자신의 연약함과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대속과 성령으로의 거듭남을 생각하면, 신약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원어로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유카리스티아로 인해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프로슈코마이 기도가 되지 않는 것(거져 받은 죄 사함의 은혜와 거듭남의 은혜와 사랑)때문에 예수님이 여기서 벗어나는 기도를 싫어하신다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요 16 : 1-3 ; 6-20
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3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말씀이 길었습니다만, 복음교실은 침례교는 어떻고 감리교는 어떻고 이단들은 어떻고 가톨릭은 어떻고 이런 말 하는 것 아닙니다.
또 예수님은 얼마나 열심히 크게 부르짖는 기도를 하느냐 이런 것이 아니라 네가 진정으로 ‘프로슈코마이와 유카리스티아 기도를 하느냐?’ 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친히 자신이 알려주시는 주의 기도인 것을 예수님은 제자들인 깨닫게 하시려는 기도에 해한 말씀인 알아야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배나 찬송이나 기도나 모든 것은 복음교실이 수없이 반복을 하며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예배, 찬송, 기도가 되어야 하고, 이것은 결국 과연 나는 진정한 주어를 누구로 믿느냐의 문제이고, 따르느냐의 문제로 연결이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주어 문제는 결국 하나님의 속성을 속성대로 모두 빼놓지 않고 믿느냐, 믿지 않는 믿음이냐에 연결이 되고, 이 신앙으로 참 신앙과 짝퉁 신앙이 나누어지는 T형 분기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왕으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에게만 돌린다고 하면서도, 늘 사실은 자신이 주어가 되는, 그런 기도가 되면 안 되는 것을 예수님은 주의 기도를 알려주시기 전 제자들에게 당부로 하신 말씀이 주의 기도에 대한 선행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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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크리스천투데이에서 크리스천이 기도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증상에 관해 소개한 글이 눈길을 끈다.
다음은 우리가 기도의 능력을 간과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 4가지를 소개한다.
1. 진리로 거짓에 맞서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나 계시 그리고 하늘의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해달라고 기도할 때이다.
기도는 의사소통이다.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끊어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진리가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의 능력의 터 위에 확실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의 이름의 능력을 알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다.
2.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
실제로 모든 상황에서 기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분명히 말한다.
우리가 모든 일에 대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매번 당신에게 모든 능력으로 나타나신다.
3. 너무 쉽게 걱정한다.
빌립보서 4장 6절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한다.
기도는 독립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불안에 대한 강력한 대안이다. 걱정할 때 우리는 나 자신, 직장 또는 외부 환경을 신뢰한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선포하는 기도와 간구를 통해 우리는 그분이 완성하신 십자가 사역을 의존하게 된다.
4. 스스로의 대안을 먼저 찾는다.
우리는 항상 기도의 능력을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의 기본값은 계획과 전략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간절하고 신실한 기도에 담을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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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祈禱)
여러분과 나의 생활에서 기도가 없다면 주님과 나 사이가 숨 막히고, 죽어 버린 불모지와도 같을 것입니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있듯이,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있듯이 무의식중에라도, 잠 속에서도 무시로 불러보듯 주님을 향한 우리의 생각을 멈출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언어 없는 침묵의 기도도, 신음도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기도 없이 지나친 적이 없듯 우리의 전 존재가 기도일 것입니다.
때로는 탄식처럼 호소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기뻐서 찬송이 온통 기도일 때가 있고, 죄악을 자백하면서 눈물 흘릴 때도, 간구로 몇 날을 지날 때도 있습니다. 물질적인 필요, 건강의 필요, 가족과 자녀에 관한 문제, 진로, 그리고 민족과 세계를 위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기도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을 위해 생명을 걸고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버림을 받을지라도, 사도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짐을 받더라도, 존 낙스는 죽음이냐 스코틀랜드냐,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결사적인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저절로는 안 되는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구할 때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해 특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경 말씀과 주님을 생각하면서 모든 언어가 정지된 상태에서 전 존재의 문을 다 열고 주 앞에서 기도의 일광욕을 하면 많은 변화를 받고 깊은 은혜에 젖어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함을 받았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중 하나가 기도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하려 함이라”(요 14:13)
테니슨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이냐? 나는 어린아이처럼 이것저것 달라고 조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아이처럼 기도하는 자세, 피조물 의식을 갖고 모든 것을 신뢰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기도의 제목으로 너무 큰 것도, 너무 작은 것도 없습니다. 기독교의 4대 인물은 사도 바울, 어거스틴, 루터, 요한 웨슬레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의 생활 역시 기도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였고, 어거스틴은 기도의 생활 속에 깊은 경건이 있었습니다. 루터는 하루에 3~4시간 동안 기도 속에서 전투를 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퍼드대학에서 홀리 클럽(Holy Club)운동을 벌이면서, 학생 시절과 교수 생활까지 합해서 15년 동안 20여 명의 우수한 학생들을 모아 놓고 매일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기도와 성경 읽는 것을 일과로 삼았습니다.
1727년 독일의 헤른후트라는 곳에서 경건파 지도자들이 모여서 시작한 모라비안 운동은 처음부터 기도를 제일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48명이 24시간 연쇄(連鎖)기도를 시작한 이래로 100년 동안 그 제단에 기도의 불이 꺼진 일이 없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도 이 모라비안의 모임에서 변화를 받아 감리교를 창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100년 동안 불을 끄지 않고 24시간 연쇄기도를 한 단체는 이 모라비안 선교단 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성숙한 크리스천이라도 하나님의 우주 드라마 속에서는 작은 나사못 역할밖에 못합니다.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작은 부분을 완전히 감당해 내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기도는 힘을 생산해 냅니다. 기도는 없는 것을 있게 합니다. 기도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가져오게 합니다. 기도는 사물을 변화시킵니다. 자기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창조력이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이 생겨나고, 터널이 뚫리고, 돌같이 굳은 마음이 살같이 부드러워집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늘 규칙적으로 기도하시고, 밤 새워 기도하시고,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시고, 제자들을 택하시기 전에, 그리고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신 기도의 생활이었습니다. 기도 최우선의 삶을 젊었을 때부터 길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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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도로 말하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내게 말하지 않은 기도는 독백이다.
공상에 흐르고 만다.
주님과 만나지기만 하면 결코 밤이 그대로 밤일 수 없다.
소경은 눈이 잠긴 채로 있을 수 없다.
죽은 자도 그대로 무덤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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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무엇엔가 얽매이고 쫓기는 삶을 살고 있다.
고요한 시간, 주님과 나만의 장소, 묵상과 기도와 성경 속에 파묻히는 하루의 30분이 없이 영적 생명이 유지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잠자는 시간을 줄이더라도, 하고 있는 일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려서라도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회복해야 한다.
여기에 크리스천의 산실(産室)이 있고, 생존의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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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꿈을 심고 가꾸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사람의 생각 속에 꿈을 잉태시킨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임신이 되듯이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던 것을 “나는 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환상과 꿈과 가능성을 심어 주신다. 내게 심어진 꿈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것이 기도의 열매라고 하겠다. 2021년 나의 꿈을 내 가슴에 심고 그 꿈을 기도와 말씀으로 가꾸면서 2021년 마지막 날에 열매가 어떻게 맺혔는지 결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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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祈禱)
마태복음 6:7∼9a
7. 또 기도(프로슈코메노이)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아이테사이=아이테오)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성경 원어로 풀어보는 기도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어떤 것일까?
기도로 하나님에게 생각을 하게하고, 내 기도로 인해 하나님이 하나님의 계획을 별도로 세우거나 바꾸거나 하게 할 수 있는 것인가?
피조물인 사람의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왜 기도를 하나님은 또는 예수님은 하게 하신 것인가?
여러분은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절대 주권자시며,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이나 생각을 인간이 하는 기도로 바꾸시거나 혹은 인간이 하는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과연 바꿀 수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열심히 기도를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속성을 속성대로 믿는 기도일까요?
아니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왜 자기가 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이 그 때 그 때 바뀌는 것처럼 생각이 돼서 열심히 기도를 하는 믿음이 생기는 것일까요?
지금 기도 자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할 때 누가 주어냐? 즉 누구를 위한 기도냐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 역시 돈 문제로 정말 너무너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정말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정확히 3년 동안 매달을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넘어갈 수 있도록 해주신 예수님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소중한 체험인데요, 그래서 지금도 저는 예수님 경리과장 같은 예수님이라는 말을 농담처럼 곧잘 합니다. 예수님처럼 정말 정확한 분은 없는 것을 저는 너무 잘 압니다. 그리고 많은 목사님들 역시 기도가 만능인 것으로 생각을 하는 목사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기도는 왜 하는가?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가 도대체 무엇인지 아는 것이 기도에 대해 이런 생각을 깊이 하면서 성경 말씀들을 찾아가보면, 기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팔랄
- 간섭하다, 판단하다, 중재하다, 기도하다.
“팔랄”이란 기도는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입니다. 히브리어 단어 해석이 사실은 참 어렵습니다. 히브리어를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 해석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도의 대표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어 “팔랄”은 “간섭하다, 판단하다, 중재하다, 기도하다”는 뜻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외에는 계시지 않는 것을 구약의 기도를 대표하는 “팔랄”이라는 단어에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카라
- 기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카라”는 기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샤알
- 요구하다 기원하다
“샤알”은 “요구하다, 기원하다”라는 뜻입니다.
파가
- 중재로서 탄원
“파가”는 “중재로서의 탄원”을 뜻합니다.
“할라”
- 은혜를 구할 때 사용하는 단어
“할라”는 흔히 은혜를 구할 때는 쓰이기도 하는 단어입니다(시편 119:58).
내가 전심으로 주의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I have sought your face with all my heart; be gracious to me according to your promise.
자아크
-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 구하는 것
“자아크”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부르짖는 것을 말합니다(삿 3:9, 시 22:5).
라난
- “라난”은 “소리치다, 외치다”(시 17:1, 렘 31:12, 애 2:19)
샤와
“샤와”는 “도움을 청해서 부르짖다”
샤하르
“샤하르”는 “구하다”
‘나’는 부드럽고 신중한 요청으로 애원, 소원, 허락 등등
‘린나’는 슬픈 또는 진정성을 담은 느낌으로 외침, 함성, 부르짖음(시 17 : 1)
‘테필라’는 중재, 탄원, 간청, 애원, 기도 또 넓은 의미로는 찬송이나 거룩한 노래로 어근(語根)은 ‘팔랄’에서 온 변형 단어
‘테힌나트’‘간구’로 번역되는 단어로, 불쌍히 여기다(욥 19 : 21)라는 뜻을 지닌 동사‘하난’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외에도 히브리어에서의 기도로 생각할 수 있는 단어들은 많이 있는데, 기도나 간구나 구함 등, 기도에 해당하는 단어로 번역이 될 수 있는 단어들에 대해 살펴본 것처럼, 구약의 모든 단어들은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나 제의(祭儀) 또는 예배, 왕과 백성 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구하거나 애원하거나 청원을 하거나 부르짖는 것 등이 모두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런 단어들이 쓰이는 점에서, 이 역시 구약의 기도는 기도에 대한 예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8:26∼30
26. 그런즉 이스라엘 하나님이여 원컨대(나) 주는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 확실하게 하옵소서.
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28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테필라트=테필라)와 간구(테힌나트=테힌나)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하린나=린나)과 비(미트팔렐=팔렐)는 기도(핫테필라=테필라)를 들으시옵소서.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핫테필라=테필라)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이템팔렐루=팔랄=그들이 기도하게 될) 때에 주는 그 간구함(테힌나트=테힌나)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길게 솔로몬이 ‘그런즉’으로 기도와 간구를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얼핏 번역 말씀을 보면, 솔로몬이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에게 하나님의 귀한 백성을 위해 다윗의 후손들에게 왕권을 주시며 맡기신다고 말씀을 하셔놓고 왜 이제 와서 하나님이 딴 말씀을 하십니까? 이런 항변의 뜻으로 이런 기도와 간구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 솔로몬은 온 우주보다도 더 큰, 하늘 위의 하늘에 계시는 어마어마한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그 크신 하나님이 하찮은 자신이 짓는 지상에 있는 작은 건물 안에 하나님이 계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런 낮은 마음으로 ‘그런즉’으로 이어지며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와 간구입니다.
이 말씀에서 ‘기도’는 히브리어 ‘테필라트’로 원형이 ‘테필라’인데 어근이 ‘팔랄’입니다. 뜻은 앞에서 말씀을 드린대로 ‘판결하다(삼상 2:25)’, ‘기도하다(삼상 1:21)’라는 뜻과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드리는 중보기도’를 ‘팔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중보기도’를 할 때 ‘팔랄’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한‘테필라’는 의미가‘팔랄’보다 훨씬 더 낮은 자세로 애타게 애원하는 기도를, 솔로몬이 하나님이 아버지인 다윗에게 하신 언약의 말씀을 생각을 하면서 아주 낮은 자세로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가 ‘테필라’기도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간구’는 ‘테힌나트’인데, 뜻은 ‘긍휼이 여기다(단 4:27), 불쌍히 여기다(욥 19:21)라는 뜻을 지닌 동사 ‘하난’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간구’는 자신이 떳떳하게 하나님에게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명사 수 11 : 20)로 탄원(명사 렘 37 : 20)을 간구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시고 제 간구를 들어달라는 뜻이 ‘간구’라는 ‘테힌나트’라는 단어의 뜻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린나’는 ‘외치다(시 78 : 65)’, ‘기뻐하다(시 32 : 11), ’‘부르짖다(애 2 : 19)의 뜻을 가진 ’‘라난’에서 온 명사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이 말씀에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이 왕권을 주실 것을 언약하신 다윗과 그 후손을 포함한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대표하는 중보자로써의 기도를 하나님의 은혜로 불쌍히 여겨서 들어주실 것을 부르짖는 기도와 간구라는 것이 원어 의미의 기도와 간구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은 다윗에게 언약하신 말씀이 아니고, 모세에게 성막 성전을 짓게 하실 때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실 것을 스스로 말씀하신 것을 상고하면서, 29절에서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거하실 곳에 대한 말씀이 계속 나옵니다. 이 말씀에서 이곳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세상을 예표하는 애굽에서 구원을 해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모세에게 짓도록 한 성막 성전인데, 성막성전이기 때문에 이동을 하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덮으시며 하나님이 인도를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화인줄을 알게 하시고 또 자신이 그런 하나님인 것을 하나님의 백성은 알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이런 기도와 간구는 열왕기 상 9절 3절에서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은 이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하나님의 눈이 바라보시는 성전을 향해서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믿고 이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향해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을 계속 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떤가?
왕상 9 : 1-9
1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의 무릇 이루기를 원하던 일이 마친 때에
2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3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 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이 말씀에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 구약의 모든 율법이나 계명은 율법이 완성이 되고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신약으로 다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대속으로 인한 죄 사함과 그로 인해서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진리와 복음입니다. 따라서 이 진리와 복음 외에 다른 진리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것이 곧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기복신앙, 율법신앙, 성경 말씀에서 벗어난 신비주의를 생각하면 무슨 말씀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기도에 대한 단어가 훨씬 더 명료해지고 간단해집니다.
프로슈케 : ‘프로슈케’는 명사인데, 동사인 ‘프로슈코마이’와 함께 70인 역에서 히브리어 기도를 번역하는 단어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프로슈케’는 명사로는‘요청’이고, ‘프로슈코마이’는 동사로 ‘요청하다’라는 뜻인데, 중요한 것은 ‘프로슈케’나 ‘프로슈코마이’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요청이라는 단어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데오마이 : ‘요청하다’‘바라다’라는 뜻인데 하나님이나 사람 등 모두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데에시스 : ‘요구하다’‘요청하다’‘바라다’라는 뜻인데, 이 단어 역시 하나님이나 사람들 모두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엔테우시스 : ‘애원’이라는 뜻으로 지배자 또는 왕에게 청원이나 애원을 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
아이테오 : 구하다. 요청하다. 사람끼리도 당연히 해당되는 단어.
유카리스티아 : ‘감사’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토스’인데 ,‘유’는 ‘좋은’이라는 뜻이고, ‘카리스토스’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감사’로 번역이 되는‘유카리스토스’는 ‘하나님의 좋은 은혜’‘의롭고 선하신 은혜’를 ‘유카리스토스’로 ‘성경적인 감사’라는 뜻이 어떤 감사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온 단어가 기도로 번역이 되는 ‘유카리스티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은 은혜’‘의롭고 선하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좋은 은혜는 삯이 아닌 은혜로 거져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얻는 죄 사함과 이로 인해서 얻는 성령에 의한 거듭남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음으로써 신약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 은혜를 감사하며 드리는 것이 예표적이 아닌, 본체적 의미에서의 기도임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약적 의미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성경적인 기도는 무엇이겠습니까?
신약적 의미의 본체적 기도는 구약의 예표적인 기도와는 다르게 사람이 사람을 대신하는 중보기도는 인간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딤전 2 : 5, 6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그러면 사람들은 왜 기도를 하는가?
첫째로 사람들이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시간과 공간에 가두어서 창조를 해서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에 인간은 미래의 일을 알 수 없고 그래서 무엇엔가 또 자신이 원하고 구하는 것들을 기도를 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창조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는 누군가를 향해서 하는 것인데, 기도나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닌, 사단 마귀의 미혹에 빠져서 사단 마귀가 기뻐하는, 생명의 길이 아닌, 사망의 길로 인도하는 내용의 기도를 부지불식 간에 우리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도는 안테나의 방향이 달라지고, 기도하는 대상이 달라지면 기도의 응답이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담 부부나 예수님이 성령에게 이끌려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말씀을 생각하면 분명히 알 것입니다.
둘째 기도를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육적 결핍과 영적인 결핍 때문에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은 육적 결핍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은 아주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육의 결핍을 채우려는 기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 세상에 속한 백성들이 하는 기도인 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육적인 결핍을 채워달라고 하는 기도는, 원어적으로 보면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프로슈케’또는‘프로슈코마이’가 아닌, 데오마이, 데에시스, 엔테우시스에 해당하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 6 : 53- 63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래서 어떤 이유로든지 살리는 것에 무익한, 육을 위한 것은 기도가 됐건, 예배가 됐건, 설교가 됐건, 찬양이 됐건, 영광을 돌리는 것이 건 간에 그 어떤 것도, 살리는 것에는 무익한 것이 대상이 되면 안 됩니다.
사 29 :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계명과 율법의 마침이 되는 분시신 것을 생각을 하면, 신약적으로 왜 하나님이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시는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원어로 보았을 때, 프로슈코마이와 유카리스티아 기도 두 단어 외에는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한, 자랑할 것은 오직 자신의 연약함과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대속과 성령으로의 거듭남을 생각하면, 신약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원어로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유카리스티아로 인해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프로슈코마이 기도가 되지 않는 것(거져 받은 죄 사함의 은혜와 거듭남의 은혜와 사랑)때문에 예수님이 여기서 벗어나는 기도를 싫어하신다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요 16 : 1-3 ; 6-20
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3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말씀이 길었습니다만, 복음교실은 침례교는 어떻고 감리교는 어떻고 이단들은 어떻고 가톨릭은 어떻고 이런 말 하는 것 아닙니다.
또 예수님은 얼마나 열심히 크게 부르짖는 기도를 하느냐 이런 것이 아니라 네가 진정으로 ‘프로슈코마이와 유카리스티아 기도를 하느냐?’ 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친히 자신이 알려주시는 주의 기도인 것을 예수님은 제자들인 깨닫게 하시려는 기도에 해한 말씀인 알아야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배나 찬송이나 기도나 모든 것은 복음교실이 수없이 반복을 하며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예배, 찬송, 기도가 되어야 하고, 이것은 결국 과연 나는 진정한 주어를 누구로 믿느냐의 문제이고, 따르느냐의 문제로 연결이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주어 문제는 결국 하나님의 속성을 속성대로 모두 빼놓지 않고 믿느냐, 믿지 않는 믿음이냐에 연결이 되고, 이 신앙으로 참 신앙과 짝퉁 신앙이 나누어지는 T형 분기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왕으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에게만 돌린다고 하면서도, 늘 사실은 자신이 주어가 되는, 그런 기도가 되면 안 되는 것을 예수님은 주의 기도를 알려주시기 전 제자들에게 당부로 하신 말씀이 주의 기도에 대한 선행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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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크리스천투데이에서 크리스천이 기도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증상에 관해 소개한 글이 눈길을 끈다. 다음은 우리가 기도의 능력을 간과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 4가지를 소개한다.
1. 진리로 거짓에 맞서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나 계시 그리고 하늘의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해달라고 기도할 때이다. 기도는 의사소통이다.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끊어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진리가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의 능력의 터 위에 확실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의 이름의 능력을 알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다.
2.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
실제로 모든 상황에서 기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분명히 말한다. 우리가 모든 일에 대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매번 당신에게 모든 능력으로 나타나신다.
3. 너무 쉽게 걱정한다.
빌립보서 4장 6절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한다.
기도는 독립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불안에 대한 강력한 대안이다. 걱정할 때 우리는 나 자신, 직장 또는 외부 환경을 신뢰한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선포하는 기도와 간구를 통해 우리는 그분이 완성하신 십자가 사역을 의존하게 된다.
4. 스스로의 대안을 먼저 찾는다.
우리는 항상 기도의 능력을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의 기본값은 계획과 전략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간절하고 신실한 기도에 담을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99048#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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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祈禱)
여러분과 나의 생활에서 기도가 없다면 주님과 나 사이가 숨 막히고, 죽어 버린 불모지와도 같을 것입니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있듯이,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있듯이 무의식중에라도, 잠 속에서도 무시로 불러보듯 주님을 향한 우리의 생각을 멈출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언어 없는 침묵의 기도도, 신음도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기도 없이 지나친 적이 없듯 우리의 전 존재가 기도일 것입니다.
때로는 탄식처럼 호소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기뻐서 찬송이 온통 기도일 때가 있고, 죄악을 자백하면서 눈물 흘릴 때도, 간구로 몇 날을 지날 때도 있습니다. 물질적인 필요, 건강의 필요, 가족과 자녀에 관한 문제, 진로, 그리고 민족과 세계를 위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기도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을 위해 생명을 걸고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버림을 받을지라도, 사도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짐을 받더라도, 존 낙스는 죽음이냐 스코틀랜드냐,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결사적인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저절로는 안 되는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구할 때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해 특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경 말씀과 주님을 생각하면서 모든 언어가 정지된 상태에서 전 존재의 문을 다 열고 주 앞에서 기도의 일광욕을 하면 많은 변화를 받고 깊은 은혜에 젖어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함을 받았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중 하나가 기도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하려 함이라”(요 14:13)
테니슨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이냐? 나는 어린아이처럼 이것저것 달라고 조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아이처럼 기도하는 자세, 피조물 의식을 갖고 모든 것을 신뢰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기도의 제목으로 너무 큰 것도, 너무 작은 것도 없습니다. 기독교의 4대 인물은 사도 바울, 어거스틴, 루터, 요한 웨슬레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의 생활 역시 기도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였고, 어거스틴은 기도의 생활 속에 깊은 경건이 있었습니다. 루터는 하루에 3~4시간 동안 기도 속에서 전투를 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퍼드대학에서 홀리 클럽(Holy Club)운동을 벌이면서, 학생 시절과 교수 생활까지 합해서 15년 동안 20여 명의 우수한 학생들을 모아 놓고 매일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기도와 성경 읽는 것을 일과로 삼았습니다.
1727년 독일의 헤른후트라는 곳에서 경건파 지도자들이 모여서 시작한 모라비안 운동은 처음부터 기도를 제일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48명이 24시간 연쇄(連鎖)기도를 시작한 이래로 100년 동안 그 제단에 기도의 불이 꺼진 일이 없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도 이 모라비안의 모임에서 변화를 받아 감리교를 창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100년 동안 불을 끄지 않고 24시간 연쇄기도를 한 단체는 이 모라비안 선교단 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성숙한 크리스천이라도 하나님의 우주 드라마 속에서는 작은 나사못 역할밖에 못합니다.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작은 부분을 완전히 감당해 내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기도는 힘을 생산해 냅니다. 기도는 없는 것을 있게 합니다. 기도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가져오게 합니다. 기도는 사물을 변화시킵니다. 자기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창조력이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이 생겨나고, 터널이 뚫리고, 돌같이 굳은 마음이 살같이 부드러워집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늘 규칙적으로 기도하시고, 밤 새워 기도하시고,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시고, 제자들을 택하시기 전에, 그리고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신 기도의 생활이었습니다. 기도 최우선의 삶을 젊었을 때부터 길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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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도로 말하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내게 말하지 않은 기도는 독백이다.
공상에 흐르고 만다.
주님과 만나지기만 하면 결코 밤이 그대로 밤일 수 없다.
소경은 눈이 잠긴 채로 있을 수 없다.
죽은 자도 그대로 무덤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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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무엇엔가 얽매이고 쫓기는 삶을 살고 있다.
고요한 시간, 주님과 나만의 장소, 묵상과 기도와 성경 속에 파묻히는 하루의 30분이 없이 영적 생명이 유지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잠자는 시간을 줄이더라도, 하고 있는 일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려서라도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회복해야 한다.
여기에 크리스천의 산실(産室)이 있고, 생존의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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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꿈을 심고 가꾸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사람의 생각 속에 꿈을 잉태시킨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임신이 되듯이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던 것을 “나는 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환상과 꿈과 가능성을 심어 주신다. 내게 심어진 꿈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것이 기도의 열매라고 하겠다. 2021년 나의 꿈을 내 가슴에 심고 그 꿈을 기도와 말씀으로 가꾸면서 2021년 마지막 날에 열매가 어떻게 맺혔는지 결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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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를 총체적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신문은 범죄백서 같다. 이런 일들은 기도와 금식 외에는 해결되지 않는다. 영적 싸움에 있어서 공중 권세를 잡은 자의 세력을 꺾는 가장 강렬한 힘은 기도다.
구국적 차원에서 기도운동을 전개해야 하겠다. 구국 금식기도는 성서적이다. 블레셋의 굴레에서 미스바의 금식성회, 모압과 암몬의 새일산 연합군 침략 때 여호사밧 왕의 회개금식 선포, 니느웨 성의 삼일 간 회개 금식기도, 하만의 유대인 말살 음모에 대항한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전 유대인들의 삼일 간 금식기도, 요엘서의 금식성회 등 거국적 회개 금식기도가 오늘의 우리에게 국난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는데 본이 될 것 같다.
루터의 기도가 유럽 일천년의 암흑시대에 종교개혁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죤 낙스의 기도가 스코틀랜드를 개혁했다. 허드슨 테일러의 기도가 중국 대륙선교의 길을 개척했다. 리빙스턴의 기도가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에 복음의 길을 열었다. 윌리암 케리의 기도가 인도의 23개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했고, 아도니람 저드슨의 기도가 미얀마 성경을 번역했다. 모라비안 교도의 100년에 걸친 쉼 없는 연쇄기도가 세계 도처에 복음의 문을 열었다.
빅토리아 영국여왕은 왕위 계승을 통고받는 순간 엎드려 기도했다. 64년간의 영국 통치를 성경과 기도로 했다. 영국 역사상 그녀만큼 위대한 왕은 없었다. 중국을 위한 수많은 기도가 지하교인을 낳게 했다. 기도가 동구와 소련의 철의 문을 열게 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공산화되고 북한의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한반도의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던 1976년 12월 나는 19명의 CCC 간사들과 민족을 위한 40일 금식기도를 드렸다. 1980년 3·1절을 앞두고는 거국적으로 40일 간 금식기도 캠페인을 했고, 3·1절 때는 3일 간 3만 명이 산에 가서 금식기도한 일이 있다. 1984년 세계기도성회 때는 연 10만 명이 3일 간 뚝섬에서 금식성회를 했다. 지난 해 연말에는 CCC 대학생 1만 2천명이 여의도 에어돔에 모여 3일 간 금식하며 국난극복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십시일반으로 모은 1억 원의 성금을 어려운 이웃을 돕는 단체에 기증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데 모아진 기도 이상 효과적이고 강렬한 것은 없다. 기도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최대의 원동력이다. 기도는 교회가 가진 도덕적, 영적 부흥, 사회 부흥의 최대 에네르기다. 이 힘이 가동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주님을 위해, 민족의 구원과 통일과 세계 선교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은 기도폭탄을 터뜨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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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공호흡과 기도
흔히들 기도는 호흡과 같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호흡은 누가 가르쳐서 호흡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호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호흡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면 기도하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왜 호흡하는 것을 배워야 할까요?
호흡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호흡이 잘못되어 목숨을 빼앗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목숨을 빼앗는 것은 아니지만 잘못된 호흡은 사람 몸의 기운을 약하게 합니다.
단공호흡법은 말 그대로 ‘단(丹)’을 비우는 호흡법이다. 다음은 변 선생의 설명이다. ‘우리 몸에는 항상 기운이 흐르고 있다. 기(氣)와 혈(血)이다. 혈 흐름의 중심은 심장이며 기 흐름은 단전(丹田)이 주관한다. 단전은 그 작용에 따라 세 곳으로 나눌 수 있다. 생각을 주관하는 상단(머리), 느낌을 주관하는 중단(가슴), 행을 주관하는 하단(아랫배)이다. 일반적으로 단전은 하단을 가리킨다. 단전 기운의 원활한 흐름이 건강한 신체의 기본이 된다. 스트레스 등으로 기가 흐르지 못하고 막히면 몸에 이상이 온다. 호흡법으로 단을 비워 새로운 기를 넣어주면 흐름이 원활해진다.’
지난 5월 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경찰의 폭력에 희생된 흑인 조지 플로이드(46) 사건은 플로이드가 경찰이 무릎으로 그의 목을 누르고 있을 때 “나는 숨을 쉴 수 없다!(I can't breath!)”라는 외침이 동영상으로 되면서 각 지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사건으로 발전되었다.
미 전역으로 확산된 시위에서는 플로이드가 숨가쁘게 말했던 “숨 쉴 수 없다”와 더불어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가 단골 문구로 등장한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흑인의 인권 유린을 규탄하는 시위 상황을 알리는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에선 “BLACK LIVES MATTER”가 디폴트처럼 따라붙는다.
호흡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생체 활동 중의 하나입니다. 호흡은 인간에게 필요한 산소를 공급해주고 몸에는 필요치 않은 이산화탄소를 밖으로 배출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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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금식
- 기도와 금식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기도와 금식 사이의 관계는 성경 안에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둘을 연결하는 공통점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도와 금식의 사례에 나타납니다. 구약에서는 기도와 함께 금식하는 것이 실제 또는 예기된 재앙에 직면하여 필요와 의존 의식, 비참한 무력감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도와 금식은 애통과 회개, 깊은 영적 필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 1장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고뇌 때문에 기도하며 금식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의 여러 날의 기도는 눈물과 금식, 그의 백성을 대신하는 죄의 자백, 그리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간청으로 그 특징을 나타냅니다. 그의 걱정이 너무 강하게 나타난 것으로 보아서 그가 기도 중에 먹고 마실 쉼의 시간을 취할 가능성은 거의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임한 황폐함을 알게 된 다니엘도 비슷한 태도를 보입니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단 9:3). 다니엘은 느헤미야처럼 금식하며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범죄 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옵니다”(5절).
구약의 여러 경우에서, 금식은 중보기도와 연관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병든 아이를 놓고 주 앞에서 울며 간절하게 중보기도(삼하 12:21∼22)하면서 금식합니다(삼하 12:16). 에스더는 그녀의 남편인 왕에게 나아갈 계획을 한 후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에게 그녀를 위해 금식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에 4:16). 분명히 금식과 간청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도 기도와 금식이 있지만 회개 및 죄의 자백과 관련되지는 않습니다. 여선지자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눅 2:37) 섬겼습니다. 그녀는 84 세의 나이에 이스라엘의 약속된 구세주를 기다리면서 성전에서 기도와 금식으로 주를 섬겼습니다. 또한 신약 성경에서 안디옥 교회는 성령께서 사울과 바나바에게 주의 사역을 위임하라고 말씀하실 때 예배와 관련해서 금식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도하고 금식하며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환송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례에서 기도와 금식은 주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은총을 구하는 요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식이 동반될 때 주께서 기도에 응답하실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기도와 함께 금식을 하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들의 진실성과 그들이 처한 상황이 매우 중대한 특성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상황이 더욱 심각할수록 금식과 기도는 더욱 적절하여집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어떤 소년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제자들은 이전에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세를 받았지만(마 6:7) 그 소년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왜 자신들은 귀신으로부터 그 아이를 해방시키는데 실패하였는지를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에는 ‘금식’이 추가되어 있습니다(마 17:21). 이 특별한 경우에, 귀신은 예외적으로 악하고 완강했습니다(막 9:21∼22). 예수께서는 고집 센 원수는 똑같이 강하고 확고한 믿음으로 대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기도는 영적 전투를 위해 준비된 무기이며(엡 6:18), 금식은 기도에 집중하고 결단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금식에 대한 신학은 신자들의 우선순위에 대한 신학으로서 신자들은 주님께 나뉘지 않은 집중적인 헌신과 영적 삶에 대한 관심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헌신은 음식과 음료와 같은 정상적이고 좋은 것들로부터 잠시 동안 삼가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와의 중단 없는 교제의 시간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은 것”(히 10:19)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더 나은 것들 중”에 가장 기쁜 것입니다. 기도와 금식은 짐이나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되며 도리어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에 대한 축하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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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를 총체적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신문은 범죄백서 같다. 이런 일들은 기도와 금식 외에는 해결되지 않는다. 영적 싸움에 있어서 공중 권세를 잡은 자의 세력을 꺾는 가장 강렬한 힘은 기도다.
구국적 차원에서 기도운동을 전개해야 하겠다. 구국 금식기도는 성서적이다. 블레셋의 굴레에서 미스바의 금식성회, 모압과 암몬의 새일산 연합군 침략 때 여호사밧 왕의 회개금식 선포, 니느웨 성의 삼일 간 회개 금식기도, 하만의 유대인 말살 음모에 대항한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전 유대인들의 삼일 간 금식기도, 요엘서의 금식성회 등 거국적 회개 금식기도가 오늘의 우리에게 국난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는데 본이 될 것 같다.
루터의 기도가 유럽 일천년의 암흑시대에 종교개혁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죤 낙스의 기도가 스코틀랜드를 개혁했다. 허드슨 테일러의 기도가 중국 대륙선교의 길을 개척했다. 리빙스턴의 기도가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에 복음의 길을 열었다. 윌리암 케리의 기도가 인도의 23개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했고, 아도니람 저드슨의 기도가 미얀마 성경을 번역했다. 모라비안 교도의 100년에 걸친 쉼 없는 연쇄기도가 세계 도처에 복음의 문을 열었다.
빅토리아 영국여왕은 왕위 계승을 통고받는 순간 엎드려 기도했다. 64년간의 영국 통치를 성경과 기도로 했다. 영국 역사상 그녀만큼 위대한 왕은 없었다. 중국을 위한 수많은 기도가 지하교인을 낳게 했다. 기도가 동구와 소련의 철의 문을 열게 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공산화되고 북한의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한반도의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던 1976년 12월 나는 19명의 CCC 간사들과 민족을 위한 40일 금식기도를 드렸다. 1980년 3·1절을 앞두고는 거국적으로 40일 간 금식기도 캠페인을 했고, 3·1절 때는 3일 간 3만 명이 산에 가서 금식기도한 일이 있다. 1984년 세계기도성회 때는 연 10만 명이 3일 간 뚝섬에서 금식성회를 했다. 지난 해 연말에는 CCC 대학생 1만 2천명이 여의도 에어돔에 모여 3일 간 금식하며 국난극복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십시일반으로 모은 1억 원의 성금을 어려운 이웃을 돕는 단체에 기증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데 모아진 기도 이상 효과적이고 강렬한 것은 없다. 기도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최대의 원동력이다. 기도는 교회가 가진 도덕적, 영적 부흥, 사회 부흥의 최대 에네르기다. 이 힘이 가동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주님을 위해, 민족의 구원과 통일과 세계 선교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은 기도폭탄을 터뜨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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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공호흡과 기도
흔히들 기도는 호흡과 같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호흡은 누가 가르쳐서 호흡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호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호흡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면 기도하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왜 호흡하는 것을 배워야 할까요?
호흡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호흡이 잘못되어 목숨을 빼앗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목숨을 빼앗는 것은 아니지만 잘못된 호흡은 사람 몸의 기운을 약하게 합니다.
단공호흡법은 말 그대로 ‘단(丹)’을 비우는 호흡법이다. 다음은 변 선생의 설명이다. ‘우리 몸에는 항상 기운이 흐르고 있다. 기(氣)와 혈(血)이다. 혈 흐름의 중심은 심장이며 기 흐름은 단전(丹田)이 주관한다. 단전은 그 작용에 따라 세 곳으로 나눌 수 있다. 생각을 주관하는 상단(머리), 느낌을 주관하는 중단(가슴), 행을 주관하는 하단(아랫배)이다. 일반적으로 단전은 하단을 가리킨다. 단전 기운의 원활한 흐름이 건강한 신체의 기본이 된다. 스트레스 등으로 기가 흐르지 못하고 막히면 몸에 이상이 온다. 호흡법으로 단을 비워 새로운 기를 넣어주면 흐름이 원활해진다.’
지난 5월 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경찰의 폭력에 희생된 흑인 조지 플로이드(46) 사건은 플로이드가 경찰이 무릎으로 그의 목을 누르고 있을 때 “나는 숨을 쉴 수 없다!(I can't breath!)”라는 외침이 동영상으로 되면서 각 지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사건으로 발전되었다.
미 전역으로 확산된 시위에서는 플로이드가 숨가쁘게 말했던 “숨 쉴 수 없다”와 더불어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가 단골 문구로 등장한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흑인의 인권 유린을 규탄하는 시위 상황을 알리는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에선 “BLACK LIVES MATTER”가 디폴트처럼 따라붙는다.
호흡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생체 활동 중의 하나입니다. 호흡은 인간에게 필요한 산소를 공급해주고 몸에는 필요치 않은 이산화탄소를 밖으로 배출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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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지 뮬러(George Muller, 1805-1898)
프러시아 크로펜스타트(Kroppenstaedt)에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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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동기 다섯 가지
- 기도는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1. 순수한 마음
- 고아들을 사랑하는 마음
2.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마음
- 주님 생각에 가장 좋은 것으로 하여 주옵소서!
(나의 생각이 아니다)
3. 정직한 마음
-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직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허물이 있어도 정직한 삶의 바탕 즉 잘못을 변명하거나 합리롸 하지 않는 것)
4. 말씀의 묵상
-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편 81:10)
-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시편 68:5)
5.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
- 나의 기도와 삶을 통하여 얼마나 하나님을 잘 나타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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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가장 친밀한 방법 중 하나이다.
기도할 때 우리의 감정, 생각, 깊은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감사한 것을 하나님께 공유하게 된다.
또한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바를 듣고 성령께서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도록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도의 한 가지 매력적인 특징은 세상의 아무도 똑같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 기독교 사이트
바이블스터디툴즈( Biblestudytools)는 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10가지 종류를 소개했다.
1. 경배의 기도(시편 148:13)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찌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심이로다"
이런 종류의 기도는 깊은 사랑, 존경, 그리고 감사함으로 주님께 경배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주님이 누구시고 하시는 모든 것에 대한 경외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2. 감사의 기도(역대상 16:33-34)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여 만국 가운데서 건져 내시고 모으시사 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할찌어다"
어떤 이들에게는 매일 감사 기도로 시작하는 것이 그들이 생활 습관이다.
감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시고 자비로운 분인지에 대한 인식이자 우리에게 주신 새 생명에 대한 감격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다.
3. 고백의 기도(시편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우리 죄를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 따르는 크리스천으로 기도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죄에 대한 고백 기도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신다는 점을 많이 확인할 수 있다.
4. 서약의 기도(사무엘상 1:10-11)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약속은 하나님의 힘과 인도,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기도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불경건한 생활을 하지 말 것을 맹세할 것이다.
여기 한나의 서원에서 보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그것은 큰 사려와 확신을 가지고 해야 한다.
5. 조용한 성찰의 기도(시편 63: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침묵의
기도는 우리를 말로 가득 찬 기도에서 벗어나 조용히 성찰하고 반성할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한다.
이러한 기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묵상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배우고 그 분이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게
하는 것이다.
6. 치유를 위한 기도(시편 119:25)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I am laid low in the dust; preserve my life according to your word.
이 기도는 보통 우리가 육체적,
정신적, 또는 감정적 상처를 회복하려고 할 때 나온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육체적으로 변등이들을
치료하시는 것이었다.
성경은 우리가 모든 종류의 병들로부터 치유될 것을 구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7. 구원과 도움을 위한 기도(시편 107:6)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Then they cried out to the LORD in their trouble, and he delivered them from their distress.
우리가 도전, 고난 또는 어떠한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이를 위한 돌파구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8. 중보의 기도(골로새서 1:9-12)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For this reason, since the day we heard about
you, we have not stopped praying for you and asking God to fill you with
the knowledge of his will through all spiritual wisdom and understanding.
And we pray this in order that you may live a life worthy of the Lord and may please him in every way: bearing fruit in every good work, growing in the knowledge of God,
being strengthened with all power according to his glorious might so that you may have great endurance and patience, and joyfully
giving thanks to the Father, who has qualified you to share in the inheritance of the saints in the kingdom of light.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중재할 것을 말한다.
예로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기 전 마지막 시간 동안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음을 알고
있다.
9. 변화를 위한 기도(시편 139:23-24)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Search me, O God, and know my heart; test me and know my anxious thoughts.
See if there is any offensive way in me, and lead me in the way everlasting.
이러한 삶의 종류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처럼 살고, 그 길을 따라 행하고, 거룩해지는 과정에 들어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10. 축복의 기도(빌립보서 1:9-11)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And this is my prayer: that your love may abound more and more in knowledge and depth of insight,
so that you may be able to discern what is best and may be pure and blameless until the day of Christ.
filled with the fruit of righteousness that comes through Jesus Christ--to the glory and praise of God.
축복의 기도는 종종 선교사들, 다른 곳으로 떠나는 교인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 등을 위해 행해진다.
이러한 축복의 기도는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으며,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는 강력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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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4)
기도는 어떤 형식적인 절차를 거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외우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기도는 말을 따라 하거나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 하나님과 마음을 나눔으로써 감동받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치레 행위를 기뻐하시지 않고 입으로만 가까이하는 것을 열납하지 않으시며 신령과 진정으로 기도하고
경배하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진실한 기도를 해 봤던 사람이라면 경험했을 것입니다.
예배할 때 혹은
큐티할 때 혹은 어떤 일이 생길 때 마음을 평온히 하고 전념해서 성실하게 하나님께 기도드리면 감동받고 평안과 기쁨을 느낍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에 신령으로 기도해 하나님과 가까이하기는커녕 규례를 지키고 형식적으로 몇 마디 하는 등 진심 어린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무심한 기도가 어찌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예컨대, 새벽(밤) 기도, 식전(식후)
기도 등은 오랫동안 규례적인 행위가 되어 형식적으로 하지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가끔은 하나님께
기도할 내용이 없으면서도 신앙인으로서 의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 말이나 중얼거립니다.
이러한 기도는 형식적인 것인데
하나님이 들어주실까요?
결코 들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규례를 지키는 무심한 기도는 듣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드리는 기도만이 하나님께 상달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을 평온히 하기를 중요시해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0~14)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주님은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고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염증을 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입에 발린 말이고 자신의 공로와 좋은 행위를 자랑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상을 받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리는 자신이 죄인이므로 하나님 앞에 천한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세리는 기도할 때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터놓고 자신의 패괴를 인정하며 하나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해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세리와 같은 겸허한 마음을 갖췄나요?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늘 외식하며 자기 자랑을 합니다. 예컨대, 다른 사람이 기도를 길게 했을 때,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적지만 우습게 보일까 봐 반복적으로 말을 해서 기도 시간을 늘립니다. 일부러 많은 성경 구절을 외운다거나 듣기 좋은 말을 해서 돋보이려고 합니다. 열심히 사역해서 성과를 거두면 스스로를 주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는 자로 여기며 기도로 축복과 면류관을 요구하고 천국에 들어가 상을 받으려 합니다. 이렇듯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실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하려면 세리를 본받아 어떤 일이 임하든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실제 정형을 털어놓아야 합니다. 거짓과 꾸밈이 없고 외식하지 않으며, 어떤 패괴를 유로했든지 하나님께 고하며 구원해 달라고 빌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확한 기도법이고 이렇게 기도해야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겟세마네라는 곳에서 세 번 기도했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마 26:39~44)
예수님은 구하는 마음, 순종의 자세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구하였지 하늘 아버지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피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거나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의 기도를 마친 후 예수님은 천부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성육신하게 된 이유는 인류를 십자가에서 구원하는 사역을 하기 위함이었기에 예수님은 완전히 순종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자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나 피조물의 위치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드리며 그의 뜻을 구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이성적으로 기도하고, 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어 피조물의 각도에서 기도함으로 우리의 모델이 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반성해 보면 우리는 이성적인 기도를 했을까요? 피조물의 위치에서 하나님께 구하고 순종하는 기도를 한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비이성적인 기도를 드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뜻대로 이렇게 저렇게 해 주세요 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께 강요합니다. 예컨대, 몸이 아플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보다 우리의 병을 고쳐 달라는 기도를 하기에 바쁩니다. 병에 호전이 없으면 하나님을 오해하고 불평하지요. 하나님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 좀 있고 헌신하거나 본분을 조금 하게 되면 우리가 평안하고 모든 것이 순조롭도록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고, 심지어는 가족들의 복까지 구합니다. 또 핍박과 환난이 임했을 때 하나님의 보호를 구하며 그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구하는 등 이러한 기도는 다 비이성적인 것입니다. 구하는 자세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드린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의 욕망을 채워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고 우리의 뜻대로 해 주십사 강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비이성적인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는 진실한 기도가 아주 적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기도할 줄 모른다. 사실 기도는 주로 마음속의 말을 하는 것인데, 평소에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기만 하면 위치를 잘못 선다. 하나님의 뜻에 맞든 맞지 않든, 하나님께 베풀어 달라고 억지로 구하는데, 그 결과 기도하면 할수록 무미건조해진다. 기도할 때 네가 마음속으로 어떤 것을 구하든, 어떤 것을 사모하든, 어떤 것을 얻으려고 요구하든, 혹은 어떤 일을 처리하려고 할 때 꿰뚫어 볼 수 없어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하든, 힘을 더해 달라고 하든, 혹은 하나님께 깨우쳐 달라고 하든, 이런 말하는 방식에도 *이지가 있어야 한다. 만약 네가 이지 없이 무릎 꿇자마자 “하나님, 저에게 힘을 더해 주십시오. 제 본성을 보게 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해 주십시오. 혹은 저에게 무엇 무엇을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어떻게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이 ‘주십시오’ 안에 강박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반드시 그렇게 해 주어야 한다고 압력을 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네가 스스로 사전에 다 정해 놓은 것이다. 네가 비록 그렇게 기도할지라도 성령은 그런 기도에 대해 ‘네가 이미 스스로 정해 놓고 그렇게 하려고 한 이상, 그런 기도가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라고 여긴다. 기도할 때에는 마땅히 찾고 구하고 순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너에게 일이 임할 때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면 너는 이렇게 말하여라. “하나님, 저에게 이런 일이 임했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일에서 당신을 만족게 하기를 원하고, 당신의 뜻을 찾고 구하기를 원하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저의 뜻대로 하지 않고 당신의 뜻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뜻은 다 당신의 뜻을 어기는 것이고, 당신을 대적하는 것이고,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것임을 당신께서 아십니다. 저를 깨우쳐 주시고, 이 일에서 인도해 주셔서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런 어조의 기도는 적합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하려면 이성을 갖춰 기도해야 합니다. 피조물의 위치에서 기도하며 자신의 선택과 요구와 계획이 없이 하나님께 구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가령 천재지변이나 인재로 인한 사고 등의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났을 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자기가 원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보호를 강요하며, 그런 고난을 옮겨 달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을 마련해 주신 뜻이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고 온전케 하시기 위함이거나 우리의 증언을 보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순종하는 자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한 자세로 기도해야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고, 우리가 기도하는 문제를 알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시고, 나아갈 방향을 가리켜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9~13)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바람은 하나님 당신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사탄에 의해 패괴된 후로, 하나님은 계속 구원 사역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진정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를 얻기 바라시며, 그리스도의 나라가 땅에 펼쳐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또한 자기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취지가 담긴 기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취지가 담긴 기도, 하나님께서 더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도록 힘쓰는 기도, 그리스도의 나라가 땅에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한 기도가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입니다.
성경에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의 소원은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여호와의 성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다윗은 항상 그 소원을 가지고 간구하며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기뻐해 다윗을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라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잘 다스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잘 예배할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제사와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지혜만 주신 것이 아니라 솔로몬이 구하지 않은 장수와 부귀영화까지 더해 주셨습니다. 욥은 언제나 악에서 떠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큰 시련 속에서도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 1:21), “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백으로 사탄을 부끄럽게 하고, 하나님 편에 서서 울림 있는 증거를 보이며 후세들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 진리를 실천하기 위해 드리는 기도가 가장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이며, 반드시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드리는 기도를 살펴보면, 대부분 육의 욕심을 위한 기도일 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가 별로 없습니다. 예를 들면, 자녀의 대학 진학을 위한 기도,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간구하는 기도를 비롯해 전부 개인의 이익을 구하는 기도이자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기도가 태반입니다. 계속 하나님께 손 내밀며 축복과 은혜를 갈취하려고만 할 뿐,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기도를 드리는 경우가 없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기도를 드리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한 기도여야 합니다.
예를 들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히거나 뒷걸음치게 될 때, 하나님께 힘을 더해 달라고 간구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전파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간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 설교하거나 사역을 할 때면, 항상 책임감으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고,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길로 이끌 수 있게 성령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간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늘 이런 문제를 놓고 기도한다면,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와 빛 비춤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네 가지 기도법의 실행 원칙에 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도에 관한 올바른 실천 원칙을 파악하면, 기도가 어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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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2022
Grhard Tersteegen(게르하르트 터스티겐) 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은혜로운 임재를
우리 안에 새롭게 일깨워 주십시오
그리하여 인생의 순례 길을 가는 동안
우리 안에 평화와 진실함과 용기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당신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당신을 굳세게 붙들게 하시고
당신에 대한 사랑이 식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당신과 연합된 우리의 마음이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하는 무슨 일에든지
항상 이어지게 해 주십시오
우리에게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마음속에서 들리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게 해주시고
당신께서 주시는 경고를 묵살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보십시오.
우리의 가난한 마음을
당신께 제물로 드립니다.
오서서 당신의 지성소를 채워 주시고
그곳에 더러운 것이 들어가지 못하게 지켜주십시오
오 사랑의 주님,
당신의 거룩한 영이 우리의 모든 영혼 속에 강같이 흐르게 하시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까지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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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예수님의 중보기도 / 워렌 위어스비 지음, 조은주 역. 은성출판사
01-9-2022(제2주)
허버트 록키어(Herbert Lockyer. 영국 1886-미국 1984)박사는 "성경에는 650편의 기도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곧 기도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국 침례교회 목사이었던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 6. 19-1892. 1. 3)은 "진정한 기도는 길이가 아니라 무게에 의해서 측정됩니다."라고 합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일생동안 예수를 믿으며 수 많은 기도를 했을 때 그 모든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만일 하늘에 상달되지 않는 기도를 했다면 무게가 없는 기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요한복음 17장)
17:1-5, 예수께서 자신을 위해 기도하시다
17:6-19,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다
제자들의 안전(17:6-12)
제자들의 거룩(17:13-19)
17:20-26, 예수께서 전체 교회를 위해 기도하시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드린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라고 정의합니다.
제사장의 기도를 다른 말로 "왕의 기도"라고도 합니다.
제사장으로서의 기도가 위대한 네 가지 이유를 소개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이므로 위대하다
둘째, 기도를 요구한 상황 때문에 위대하다
셋째, 기도에 있는 간구 때문에 위대하다
넷째, 승리 때문에 위대하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야고보서 5:15)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게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십니다.
병들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시는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간구 하옵기는 김영희권사님이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 가운데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김영희권사님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못하여 답답합니다.
그러나 질병으로 고통 당할 때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여 낙심하지 않게 하옵시고
오히려 고통 가운데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찾아 알게 하옵소서.
질병 중에 있을 때 인생의 모든 것과 바꿀 수 있는 영원한 보물을 찾고 기뻐하며 믿음 위에 더욱 굳게 설 수 있는 믿음만을 주장하게 하옵소서.
언제까지 육체의 고통으로 시달릴지 모르지만 질병으로 인하여 몸은 고통스럽고 불편한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강한 빛을 받아 성령의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또한 육신이 건강한 사람과 비교함으로 낙심하지 않고
고통 가운데서 십자가의 아픔을 몸소 겪으셨던 주님을 바라보며 그 사랑을 깊이 깨닫는 은혜가 넘쳐나게 하옵소서.
몸의 불편함을 불평하는 대신 이미 허락하신 은혜로 인하여 주님을 뜻을 나타낼 수 있는 은사를 찾게 하옵소서.
질병도 그 가운데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다면 불행이 아니라 복이요, 재앙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은사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의사를 통하여 치료를 받을 때에 빨리 회복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고, 장기적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없도록, 병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만병의 의원이시고, 치료자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야고보서 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스가랴 12:10a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I will pour out on the house of David and the inhabitants of Jerusalem a spirit of grace and supplication.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In the same way, the Spirit helps us in our weakness.
We do not know what we ought to pray for, but the Spirit himself
intercedes for us with groans that words cannot express.
기도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는 "기도는 영혼의 호흡" 이라고 합니다.
호흡이란 생명이 있는 증거입니다.
죽은 사람은 호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영혼과 육이 하나로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호흡이 필수적인 것처럼 또한 영혼이 육체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정의한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생명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이 호흡을 하는 것처럼
살아있는 사람은 육체와 영혼이 하나가 된 것처럼
기도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의 흔적과 같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기도를 합시다!
나의 하나님이여
그리스도를 보사
나의 작별의 순간을 평안하게 하옵소서!
내 비록 흙에 지나지 않사오니
하나님 앞에 서서 기도하옵기는
쾌락을 구함도 아니오며
금을 요구함도 아니오라
그보다 더 큰 것을 구하오
하나님이 내게 주실 가장 큰 선물
내가 누를 영원한 생명일세.
내 마음 이제 기도와 찬송으로 넘치네
그리고 부드러운 그의 마음에
내 마음 가까이 끌어올리는
그 한 숨결 한 숨결을
내 하늘 아버지는 알고 계시네
내 기쁨과 평안 여기 있고
내 구원 당신 안에서 보니
아, 내 영혼을 지키시는 이여.
* 기도의 영 p. 180, 181, 182
- 기도(오 할레스비)
허버트 록키어 박사
성경에는 650편의 기도들이 기록되어 있다.
기도 중에서 요한복음 17장의 주님의 제사장으로서의 기도가 가장 으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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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기도는 항상 하나님과의 역동적인 대화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을 때 주기도문은 우리가 매일 하나님께 이야기하는데 도움이 되는 모범이 됩니다.
여기 도움이 될 만한 여섯 단계 기도 가이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다시 집중하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깊이 숨을 들이 마시고 다음 단어에 집중해 보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천천히 숨을 내쉬며 다음과 같이 말해 보세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여러 번 반복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하나님의 성품에 주의를 기울여 보세요. 그리고 또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초점을 맞추어 보세요.
여러분의 뜻을 다시 맞추어 보세요.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은 늘 그 분의 뜻을 이 땅에 이루고 계십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뜻을 그분의 뜻에 맞추는 것은 그분의 나라를 찾는 일입니다.
주변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 보여주시기를 기도해 보세요.
염려를 내려 놓으세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언가를 받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이 하나님께 여러분의 염려를 드릴 때 그분은 여러분께 무엇을 주실까요?
여러분의 염려를 적어보세요. 그리고 하나씩 읽어 보세요. 염려를 소리 내어 읽을 때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마음 속으로 기도하세요.
이 단계를 필요한 만큼 계속하세요.
회개하고 응답하세요.
사하여 준 것 같이.. 사하여 주시옵고
여러분이 주님께 내려 놓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지금 주님께 고백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깊은 상처, 좋지 않은 행동, 어쩔 수 없는 중독, 반복되는 실수 등등일 까요?
하나님은 여러분이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 생각을 그분께 말씀 드리고 그분의 음성을 들어 보세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구하세요.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우리는 모두 무언가로부터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셨나요?
주님의 신실함에 감사 드리세요. 그리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말씀해 보세요. 주님의 보호가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보세요. 상황이 절망적으로 보일 때에도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기억 하세요.
기뻐하며 돌아보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행하신 일을 기뻐하고 오늘 하루를 보내며 그분을 예배 할 방법을 찾으세요.
그리고 잠시 하나님과 함께 한 이 시간을 곰곰이 돌아 보세요. 그분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보여 주셨나요? YouVersion기도 목록에 생각나는 것을 적어 보세요
예수님처럼
기도를 시작하면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가 우리 삶의 방식을 바꿀
때, 우리는 언제든지 확신, 의뢰함,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께 다가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헬라어는 τὸν ἄρτο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톤 아르톤 톤 에피우시온)이다.
아르톤ἄρτον은 "빵"이다.
신약의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던 음식이다.
여기서 빵은 부분으로 전체를 대표하는 제유법으로 사용되어, "양식" 일반 혹은 더 나아가 "물질" 일반을 의미한다.
“일용할”로
번역되어 있는 헬라어 단어 “에피우시온"ἐπιούσιον은 주의 기도에 사용된 전체 헬라어 중에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단어이다.
이 단어를 해석하기 어려운 이유는 성경에 이 단어가 오직 주기도문에만 나오기 때문이고, 성경 밖에서도 그 용례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잘 안쓰이는 단어이기 때문에 정확한 뜻을 알기 어렵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상당히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신
셈이다.
이렇게 일상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사용하셨을 때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테니, 더 세심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에피우시온”이 무슨 뜻인지를 밝히기
위한 많은 학문적 연구가 있었다.
초대교회 시절부터 문제가 되었으니 긴 논란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 안에 용례가
없으니, 성경 밖 문서나 비문을 다 뒤져서 이 단어가 사용된 흔적이 있으면 그것에 근거해서 뜻을 찾아내려 하였는데, 노력에 비하여
결실이 적다.
이 단어가 쓰여있는 비문이 그리스의 어느 섬(Rhodes)에서 새로 발견되었을 때 거기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쏟았고, 이 단어가 쓰여있는 파피루스가 런던의 어느 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되었을 때에도 학계가 들썩 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직도 그 뜻을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말 주기도문이 “일용할”이라고 에피우시온을 번역했는데, 그건
기본적으로 에피우시온의 뜻을 “오늘”이라고 본 것이다. 영어로 daily bread라고 번역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새로운
발견을 반영하면 에피우시온은 "다음"이라는 뜻이 된다.
에피우시온에 "날"을 뜻하는 헤메라가 붙여써진 파피루스가 발견되었는데,
문맥에서 볼 때 "다음 날 곧 내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발견을 주의기도 해석에 적용하면 τὸν
ἄρτο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톤 아르톤 톤 에피우시온)은 "다음 먹을 빵"이 된다.
그리고 이것을 의역하면 "생존에
필요한, 삶을 꾸려가는 데 필요한” 빵이 된다.
에피우시온(ἐπιούσιον)이라는
단어 자체에 집중한 해석 역시 이런 해석과 궤를 같이 한다.
에피우시온은 "에피"라는 전치사와 "우시온"이라는 명사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에피(ἐπί)는 "~위에"를 뜻하는 전치사로 영어의 on이나 upon에 해당한다.
"우시온"이 나온 "우시아(οὐσία)"는
그리스 철학은 물론 삼위일체 교리에도 사용된 단어인데 그 기본 의미는 "존재(being, existence)"이다.
그러므로
에피우시온은 "존재를 떠받치는"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고, 이는 에피우시온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맥이 통한다.
이런
이해를 고려한다면, 주의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하라 하신 "일용할 양식"이 하루 먹을 양식이 아닌 것으로 조심스레
해석할 수 있다.
"일용할 양식"은 문학적 표현으로 참 좋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단지 하루치 양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떠받치는 물질",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물질 전반"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라 하셨다.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보내시면서 제자들이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를 묻자, 친히 가르쳐주신 기도문이다.
기도드리는 사람들의 눈을 고치어 하나님의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주기도문은 하늘에 속한 사항 3가지(여호와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아버지의 뜻)와 땅에 속한 사항 3가지(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악에서 보호)를 합하여 6가지를 담고 있다.
인간 삶에 관한 대부분을 포괄하는 것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직면하는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게 해준다. 즉, 신이 행한다는 신위(神爲)의 차원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순종과 청종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사무엘상 15:22절)
기독교란 ?
기독교(Christianity)는 로마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와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 그리고 개신교회(Protestantism)의 3교회를 합하여 일컫는다.
세계의 모든 교회가 함께 추구하는 주제이며, 기독교의 신학으로나 교회 현장에서 공통되게 추구하고 있는 주제는 ;
첫째 올바른 영성(Spirituality)이다.
둘째 건강한 공동체(Community)이다.
셋째 병들어가는 지구 공동체에 대한 치유(Healing)이다
하나님의 형상
미국의 여류신학자인 Betty Russel은 하나님의 형상을 4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영적인 하나님이다.
둘째 사랑의 하나님이다.
셋째 창조적인 하나님이다.
넷째 공동체로 계시는 하나님이다.
그곳의 젊은 크리스천들의 모임을 접하면서 중국 기독교의 밝은 미래를 보는 듯 했다.
생각해 볼 점은 중국교회 지도자들이 한국교회를 벤치마킹하려는 마음이 절실하다는 점이다.
감사와 기도
제일동포 3세인 의사 하루야마 시게오(春山茂雄)박사가 “뇌내혁명(腦內革命)”(3권)을 출간하여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됬다.
조선에서
한의원을 했던 할아버지로부터 어린 시절부터 침술, 지압술 등을 배웠고, 8세에 이미 일본정부로터 침술사의 자격증을 받았다.
동경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후 의사가 되었고, 한의학과 양의학을 융합하여 치료와 건강지도에 활용하였다.
“뇌분비 호르몬이 당신의 인생을 바꾼다”는 부제(副題)가 붙어있다.
원래 사람은 자신의 체내에 모든 질환에 대한 방어 기능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잘못된 생활습관과 삶의 방식으로 인해 걸리지 않아야 할 질병에 걸린다.
하루야마 시게오 박사는 자신의 병원에서 ‘음식, 운동, 기도’의 3가지 방법으로 각종 질병을 치료한다.
화를 내거나 누군가를 미워할 때 뇌 속에서 아드레날린(Adrenalin) 혹은 노르아드레날린(Noradrenalin) 호르몬이 분비된다. 이 호르몬은 강한 독소를 지니고 있어 사람을 병들게 하고 늙게 한다.
그러나, 감사하거나 기뻐할 때 그리고 기도와 명상에 깊이 빠져들 때 엔돌핀(Endorphin) 이나 베타엔돌핀(β-Endorphin) 호르몬이 분비되어 병을 낫게 하고 젊어지게 하며 행복감을 누리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감사하는 생활습관과 기도·명상에 젖어드는 영성의 삶에 통해 건강과 장수 그리고 행복과 행운을 동시에 붙잡을 수 있게 된다.
가난 (Poverty)이란?I realize, of course, that it's no shame to shame to be poor.
But it's no (great) honor, either.
가난은 창피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위대한) 명예도 역시 아니다.
Luxury Shame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때를 만나게 되니 사람들의 의식이 다소 변해간다.
그동안 일부 지각없는 인사들이 부(富)를 뽐내기 위해, 또는 빈자(貧者)의 삶을 한탄하며 허파에 바람만 잔뜩 집어넣은 허영의 속물(俗物)들이 고가의 명품을 사서 온 몸에 휘감고 다녔다.
주체할 수 없는 부(富)를 가진 Super Rich 계층에서 고가의 명품을 소비하는 행태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바람직한 인사들이 생겨났다. 이때 느끼는 부끄러움을 Luxury Shame이라 한다. 신조어(新造語)다.
시대가 바뀌면서 인간 의식의 전환의 때가 왔나보다.
인생은 B to D
B는 Birth(태어남)이고, D는 Death(죽음)이다.
즉 인생은 태어났다가 죽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럼 B와 D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C가 있다.
C는 무엇인가?
바로 Choice(선택)이다.
즉 인생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선택하는 대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시다.
모든 일들이 그분의 선택의 역사다.
거룩한 하나님께서 거룩한 백성을 선택하시고지극히 사랑하시어서 천국으로 이끄신다.
B는 주님의 창조의 역사이고, D는 주님이 선택하신 백성들이 가는 목적지이다.
즉 영생(永生)의 삶을 사는 부활의 현장이요, 승리의 종착역인 것이다.
C는 주님의 선택이다.
주님은 범죄 하면서 사는 우리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부활하는 역사(役事)를 통해 우리 인류 전체의 죄를 값없이 용서해 주셨다.
우리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위대한 선택을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인간을 천국의 영생의 삶으로 이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자에 의한 리빙스턴의 부상 - 토마스 벤느 作)
(주님께서 동행하는 자도 시련과 고난을 당하지만, 능히 극복해 낸다)
우리 죄 많은 인간에 대한 그분의 지극한 사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이를 거부하고 헛된 우상을 만들고 이생의 자랑과 교만에 취해 스스로 드러내려고 애쓰면서 살아간다.
주님께서 이미 행하신 위대한 사랑의 선택을 망각하거나 거부하면, 살아있어도 죽은 자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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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스교회 수요 성서 연구 #. 1 물세례와 불세례(2020-06-10)
세례(洗禮) 마태복음 3:11 |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구약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입니다.
신약의 첫 번째 책은 “마태복음”입니다.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 사이는 “대략 400년” 이란 긴 세월이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 시대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의 400년의 기간을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 라고 합니다.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를 “신구약 중간 시대”라고도 합니다. (아래 난외 주 참조)
기독교 이외에 가톨릭교회와 유대교에서는 신구약 중간 시대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셨다는 것을 강조하여 “외경”이란 말씀을 인정하고 사용합니다.
오래 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던 때에 어느 날 광야에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 거주하는 낯선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라고 외쳤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광야로 나와 요한의 외치는 소리를 들을 때 바로 이 사람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나는 너희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아니라 다만 물로 세례를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실 그 분은 너희들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며 실망하던 유대인들에게 메시아 신앙을 깨우쳤습니다. 요한의 외침을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서 세 종류의 세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 ; 회개와 구원을 위한 세례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 ; 구원의 확신과 보증을 위한 세례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 ; 심판을 위한 알곡과 죽정이를 구분하는 세례(불심판)
그런데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것은 분명하게 성경에 소개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셨을까요?
세 종류의 세례를 베푸셨던 수여자(授與者)를 살펴봅시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예수님 당시에는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마태복음 3:5∼6,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People went out to him from Jerusalem and all Judea and the whole region of the Jordan.
Confessing their sins, they were baptized by him in the Jordan River.
그러나 오늘날은 교회에서 목사가 세례를 베풉니다.
"주 예수를 믿는 (아무개)에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and this water symbolizes baptism that now saves you also--not the removal of dirt from the body but the pledge of a good conscience toward God. It saves you by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세례는 요한의 증거대로 분명히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제 성령세례를 베푸셨으며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When the Counselor comes, whom I will send to you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goes out from the Father, he
will testify about me.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사람들에게 보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령을 “보혜사(保惠師)” 라고 합니다.
“보혜사(保惠師)”란 무엇인가?
-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
보혜사란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가르치시는 선생님” 이란 뜻입니다.
보혜사를 영어 성경에서 찾아보면 NIV에서는 “상담자(the Counselor)”, KJV에서는 “위로자(the Comforter)”, NASB에서는 “돕는자(the Helper)” 라고 합니다.
보혜사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étos)” 라고 합니다.
스트롱 번호 3875
1. 옹호자(an advocate), 중보자(intercessor),
2. 위로자(a consoler), 위로자(a comforter), 돕는자(helper),
3. 변호사(Paraclete)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875
예수님께서 언제 누구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셨습니까?
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When the day of Pentecost came, they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Suddenly a sound like the blowing of a violent wind came from heaven and filled the whol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All of them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in other tongues as the Spirit enabled them.
오순절날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때 불세례도 함께 베푸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자세히 관찰하면 성령과 불이라는 용어가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는 사용하였으나 마가복음 1장과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성령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라고 모든 복음서에서 말씀하셨다면 불세례도 오순절 날 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그러므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세례자 요한에 의하면 성령세례와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성경을 폭 넓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과 불세례에 대한 말씀을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제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clear
his threshing floor, gathering his wheat into the barn and burning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불세례”는 불로 심판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9절,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리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At that time Jesus came from Nazareth in Galilee and was baptized by John in the Jordan.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John answered them all,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one more powerful than I will come, the thongs of whose sandals I
am not worthy to untie.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17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to clear his
threshing floor and to gather the wheat into his barn, but he will burn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I would not have known him, except that the one who sent me to baptize with water told me, 'The man on whom you see the Spirit come down and remain is he who will baptize with the Holy Spirit.'
34절,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I have seen and I testify that this is the Son of God.
참조 / 성령세례(사도행전 1:5, 11:16, 고린도전서 12:3)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해서 언급한 성경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이외 성경에서는 오직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에서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분명하게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진다는 것은 불이 다양하게 갈라져서 오순절 날 한 자리에 모여 있었던 다양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재 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불세례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사도행전 2: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When the day of Pentecost came, they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Suddenly a sound like the blowing of a violent wind came from heaven and filled the whol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오순절 날 성령의 임재가 나타났을 때 마치 성령은 강한 바람 소리로 들렸습니다.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바람이 아닙니다.
성령은 불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은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βαπτίσει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
- will baptize with the Spirit Holy and fire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장차 오실 그 분께서는 “성령(프뉴마)과 불(푸르)”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외쳤던 요한의 증언은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그 분이 그토록 기대하던 “메시아”라고 기다렸으나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사십일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사도행전 1:3).
이렇게 번역된 데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καὶ)”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카이”는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 라고 하여 앞의 것과 뒤의 것을 동등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령과 불”이라고 할 때 성령과 불을 동등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제까지 성령과 불을 이렇게 등위 접속사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등위 접속사가 아니라 우위 접속사로 해석하면 전혀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세례는 특별한 용법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위 접속사”인 “또는(or)”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위 접속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는 “성령 또는 불안에서” 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 사(四)복음서를 비교하여 연구해보면 더욱 확실히 증명된다.
먼저 우리는 “성령과 불로”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과 불로”가 아닌 “성령으로” 라고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 라고만 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11:16과 고린도전서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라고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여러 성구들을 참조할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 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 보더라도 “침례” 라는 말이 의미를 더 잘 통하게 한다. 만일 “세례”라고 하면 “성령으로 씻긴다”는 말이 되므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성령은 영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요 14:18∼19)이므로 '성령 안에서 침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하되 '생명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침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행 2:38, 행 19:2)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고전 3:16-17)'과도 같은 말이 되는데 결국 우리와 주님과의 상호내주(Inter-Residence)를 뜻한다.
한편 요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신령으로'라는 말은 “엔 프뉴마”로서 원 뜻은 “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의미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의미가 모두 해석되는 것이다. 즉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물 안에 잠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상징하는 뜻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 안에 잠긴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리가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로 세(침)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불 속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로서 신자와는 전혀 관계없고 불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즉 불신자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하는 대신에 '불 속에 잠기게 한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제 세례에 대한 용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세례(밥티조, βαπτίζω)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물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완전히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올 때는 과거의 나 즉 옛 사람은 죽었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물세례는 회개와 구원의 표시라고 하겠습니다.
βαπτίζω, ον
스트롱번호 907
* 요약 자료
주제 ; 세례(洗禮)
- 세례(씻을 洗, 예도 禮)와 침례(잠길 沈, 예도 禮)
- 밥티조(물속에 잠기다)
성경 ; 마태복음 3:11
종류 ;
1. 물세례(회개와 구원) 베드로전서 3:21
2. 성령세례(생명의 보증) 보혜사(요한복음 15:26)
- 로마서 8:2, 요한복음 6:63, 고린도후서 1:22, 5:5, 히브리서 12:29
3. 불세례(심판, 알곡과 죽정이)
- 신명기 4:24, 히브리서 12:29
- 마태복음 3:12, 누가복음 3:17
*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
- 전치사 "과"(카이)
등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을 같은 것으로 이해
우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은 서로 다른 것으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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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1-2022(금)
성령세례
"오순절 사건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
이와 같은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다.
이 속성은 한 마디로 "영원성(永遠性)"이다.
영원이란 어느 시대에는 나타나고 어느 시대에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사건은 지금도 앞으로도 마지막 그 날까지 지속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
"아니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며 그 영은 지금도 계속적으로 역사하는 영이다.
셋째, 바울의 증거
고린도전서 2:9-10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바울의 성령은 통찰하는 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영은 구약에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통하여 계속된다.
신명기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명기 30: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레위기 18: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로마서 11: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다.
그런데 그 율법을 그의 백성들이 지킬 수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의 백성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강조하였다.
로마서 2:28-29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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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외 주)
하나님의 성전 비용으로 쓰도록 우리는 해마다 삼분의 일 세겔씩 바친다. 집안별로 주사위를 던져서, 해마다 정한 때에 하나님의 성전에 땔 나무를 바칠 순서를 정한다. 해마다 우리 밭에서 나는 맏물과 온갖 과일 나무의 첫 열매를 주님의 성전에 바친다. (성전 운영을 위해서 재정을 책임지겠다) 처음 난 맏새끼들을 성전 제사장들 생활비를 위해서 바친다."(성전이 운영 되는데 필요한 인건비도 서포트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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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洗禮) 마태복음 3:11 |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서 세 종류의 세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
그런데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것은 분명하게 성경에 소개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셨을까요?
세 종류의 세례를 베푸셨던 수여자(授與者)를 살펴봅시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예수님 당시에는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마태복음 3:5∼6,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그러나 오늘날은 교회에서 목사가 세례를 베풉니다.
주 예수를 믿는 (아무개)에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성령세례는 요한의 증거대로 분명히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제 성령세례를 베푸셨으며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사람들에게 보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령을 “보혜사(保惠師)” 라고 합니다.
“보혜사(保惠師)”란 무엇인가?
-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
보혜사란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가르치시는 선생님” 이란 뜻입니다.
보혜사를 영어 성경에서 찾아보면 NIV에서는 “상담자(the Counselor)”, KJV에서는 “위로자(the Comforter)”, NASB에서는 “돕는자(the Helper)” 라고 합니다.
보혜사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étos)” 라고 하여
(a) 옹호자(an advocate), 중보자(intercessor),
(b) 마법사(a consoler), 위로자(a comforter), 돕는자(helper),
(c) 낙하산(Paraclete)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세례자 요한에 의하면 성령세례와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성경을 폭 넓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과 불세례에 대한 말씀을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제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마가복음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참조 / 성령세례(사도행전 1:5, 11:16, 고린도전서 12:3)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해서 언급한 성경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이외 성경에서는 오직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에서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지만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풀 수도 있고 베풀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불세례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사도행전 2: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오순절 날 성령의 임재가 나타났을 때 마치 성령은 강한 바람 소리로 들렸습니다.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바람이 아닙니다. 성령은 불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은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βαπτίσει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
- will baptize with the Spirit Holy and fire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장차 오실 그 분께서는 “성령(프뉴마)과 불(푸르)”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외쳤던 요한의 증언은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그 분이 그토록 기대하던 “메시아”라고 기다렸으나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사십일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사도행전 1:3).
이렇게 번역된 데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καὶ)”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카이”는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로 많이 사용하지만 간혹 “우위 접속사”인 “또는(or)”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위 접속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는 “성령 또는 불안에서” 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 사(四)복음서를 비교하여 연구해보면 더욱 확실히 증명된다. 먼저 우리는 '성령과 불로'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과 불로'가 아닌 '성령으로'라고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라고만 되어 있으며 행 11:16과 고전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라고만 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령으로 세례'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 보더라도 '침례'라는 말이 의미를 더 잘 통하게 한다. 만일 '세례'라고 하면 '성령으로 씻긴다'는 말이 되므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성령은 영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요 14:18∼19)이므로 '성령 안에서 침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하되 '생명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침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행 2:38, 행 19:2)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고전 3:16-17)'과도 같은 말이 되는데 결국 우리와 주님과의 상호내주(Inter-Residence)를 뜻한다.
한편 요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신령으로'라는 말은 “엔 프뉴마”로서 원 뜻은 “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의미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의미가 모두 해석되는 것이다. 즉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물 안에 잠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상징하는 뜻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 안에 잠긴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리가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로 세(침)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불 속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로서 신자와는 전혀 관계없고 불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즉 불신자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하는 대신에 '불 속에 잠기게 한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세례의 의미를 소개합니다.
세례는 물속에 잠긴다는 뜻입니다.
물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씻어낸다, 죽는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성령에 들어가서 씻어내고 죽는 것을 말합니다.
불세례는 불속에 들어가서 태워버리고 죽는 것을 말합니다.
Ⅰ. 세례(洗禮)란 무엇인가?
세례를 헬라어로 “밥티조(βαπτίζω)” 라고 합니다.
‘밥티조(baptizó)’의 뜻은 “담그는 것(to dip)”, “가라앉다(sink)” 라고 합니다.
“밥티조”라는 동사가 명사로는 “밥티스마(βάπτισμα)”가 되며 “세례자(침례자)”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될 때는 “밥티스테스(βαπτιστής)”라고 합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밥티스테스 요안네스”로서 “세례 요한”이 아니라 “세례자(침례자) 요한” 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세례를 히브리어로 “라하츠(rachats, רְחֲצוּ)” 라고 합니다.
“라하츠(rachats, רְחֲצוּ)”의 뜻은 “씻다(to wash)” “빨다” “목욕하다”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라하츠”의 행위는 정결 작업으로 나타납니다.
제사장이 위임 받을 때는 먼저 회막문에서 물로 깨끗이 몸을 씻고, 의복을 입고, 관을 쓰고, 예식을 행하게 됩니다. 물로 깨끗하게 씻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되고 성별된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0:20,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여호와 앞에 사를 때에도 그리할찌니라.
제사장들이 회막에서 여호와의 일에 참여하기 위해서 준비된 물두멍에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또 레위기 22:6, 민수기 19:7에 보면 부정함을 입은 사람이 물로 씻어서 정결함을 얻는 법이 나와 있습니다. 레위기 8:21, 9:14에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물로 깨끗이 씻으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26:6에서 ‘라하츠’ 행위는 무죄함 곧 의인의 반열에 속해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로마서 6:3∼5에는 “예수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곧 그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세례는 영적으로 예수 안에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태어났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세례의 의미는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태어났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물속에 들어갈 때는 이미 죽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올 때는 죽었던 존재가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2. 세례의 중요성
오늘날 세례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마태복음 28장의 말씀에 기초하여 행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세례가 신앙생활에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유언적으로 이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세례가 단순한 통과의례적인 의식이었다면 외식적인 것을 가장 싫어하신 주님이 명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세례를 베푸는 것’과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참 성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고, 예수님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하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받음으로 법적 교인이 되지만, 말씀 순종으로 참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입니다.
신약의 첫 번째 책은 "마태복음"입니다.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 사이는 대략 400년 이란 긴 세월이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 시대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의 400년의 기간을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라고 합니다.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를 "신구약 중간 시대"라고도 합니다.
세례 |
수여자 |
성구 |
의미 |
|
참고 |
불세례 |
성령 |
고린도전서 12:13 |
삶(능력) |
|
법적 기능 |
성령세례 |
예수 |
마가복음 1:8 |
복음의 증인(권능) |
|
능력적 기능 |
물세례 |
요한(목사) |
베드로전서 3:21 |
죄를 씻음(구원) |
|
의식적 기능 |
Englishman's Concordance.
Matthew 3:11 N-DNS GRK: βαπτίζω ἐν ὕδατι εἰς μετάνοιαν
NAS: As for me,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
//biblehub.com/str/greek/5204.htm - 32k
Ⅲ. 성령세례란 무엇인가?
마태복음 3:11 |
마가복음 1:8 |
사도행전 1:5 |
고린도전서 12:13 |
성령과 불 |
성령 |
성령 |
성령 |
누가복음 3:16 |
요한복음 1:33 |
사도행전 1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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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불 |
성령 |
성령 |
|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 |
|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Ⅳ. 불세례란 무엇인가?
불세례란 무엇인가?
Strong's Greek: 4442. πῦρ(pur) - fire
... 10 (cf. Luke 16:24); βαπτίζειν τινα πυρί (see βαπτίζω, II.
b. bb.), Matthew 3:11; Luke 3:16. the tongue ...
“성령과 불” 이라는 말이 마태복음(3:11)과 누가복음(3:16)에서만 사용되었고, 마가복음(1:8)과 요한복음(1:33)에는 “성령”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 라고만 표현하였다. 사도행전 11:16과 고린도전서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 라고만 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 이라고 할 때 성령은 보증하는 일을 합니다.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린도후서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물세례는 누가 베풀었습니까?
요단강에서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까?
유대 풍속은 세례를 베푸는 사람이 세례를 받는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해가 없도록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불세례
불세례가 무엇이며 그 근거는 무엇인가? 불세례라는 말은 마태복음 3:11과 누가복음 3:16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들은 불세례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 채 성령 체험의 일종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것은 앞의 두 곳의 성경 본문에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 라는 말씀에서 “성령과 불로” 라는 표현을 흔히 “성령과 동시에 불로” 라는 말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을 “성령”과 “불”로 동시에 세례 받는 것으로 오해하여 “성령불” 또는 “불성령” 등의 말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성령 받으라”는 말을 “불 받으라”는 말로 바꾸기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사실은 “성령”과 “불”은 함께 받는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존재인 것이다.
이렇게 번역된 데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 )”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카이”는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의 뜻으로 많이 사용하지만 간혹 “우위 접속사”인 “또는(Or)”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위 접속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는 “성령 또는 불안에서” 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 사(四)복음서를 비교하여 연구해보면 더욱 확실히 증명된다. 먼저 우리는 '성령과 불로'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과 불로'가 아닌 '성령으로'라고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라고만 되어 있으며 행 11:16과 고전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라고만 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령으로 세례'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 보더라도 '침례'라는 말이 의미를 더 잘 통하게 한다. 만일 '세례'라고 하면 '성령으로 씻긴다'는 말이 되므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성령은 영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요 14:18-19)이므로 '성령 안에서 침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하되 '생명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침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행 2:38, 행 19:2)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고전 3:16-17)'과도 같은 말이 되는데 결국 우리와 주님과의 상호내주(Inter-Residence)를 뜻한다.
한편 요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신령으로'라는 말은 “엔 프뉴마”로서 원 뜻은 “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의미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의미가 모두 해석되는 것이다. 즉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물 안에 잠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상징하는 뜻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 안에 잠긴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리가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로 세(침)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불 속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로서 신자와는 전혀 관계없고 불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즉 불신자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하는 대신에 '불 속에 잠기게 한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물세례는 공적인 선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씻음 받았다는 약속과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물세례를 받았지만 여전히 과거의 삶이 나도 모르게 반복되어 나를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합니다. 이러한 반복되는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물세례”와 “성령 세례” “불세례”를 외쳤습니다.
물세례는 회개케 하기 위한 세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결혼식을 하지 못하고 동거하며 아이들을 세 명씩이나 양육하던 어느 부인이 면사포를 쓰고 결혼식 한 번 해 봤으면 원이 없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미 혼인신고도 마쳤습니다. 아이들도 세 명씩이나 낳고 키우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부부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결혼식을 하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부담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진관에 가서 부부가 결혼식 사진을 찍고 응접실 벽에 걸어놓고 지내는 부부를 만났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때로는 어느 교인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세례를 꼭 받아야만 합니까?”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세례 받는 것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고, 세례를 받지 않고서는 못 견딜 것입니다. 세례는 죄 용서함의 표시와 증거로 받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세례는 구원 받은 사람들이 그 표징으로써 받는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는 “참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세례는 죄 사함의 방법이요, 날인이다. 하나님은 초대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이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에게도 죄 사함을 베풀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은 “세례가 군인들이 충성 맹세의 표시로써 국가 원수의 휘장을 붙이고 다니는 것과 같이 사람들 앞에서 신앙을 나타내는 표시나 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 즉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약속과 함께 받아야 하는 것을 알지 못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믿음과 회개와 세례입니다.
세례받기를 거절하거나 주저하시는 분들이여, 당신이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세례를 받는 것을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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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산소와 수소의 결합체(H₂O)이며 지구의 4분의 3을 덮고 있을 뿐 아니라 인체의 70%를 차지하는 물질이다.
최초로 언급된 창세기 1:6절의 '물'은 지구 표면을 덮고 있던 물(2절)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수분(水分)을 가리킨다.
물은 모든 생명체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성경에서도 650회 이상 언급되었다. 특별히 물이 부족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더욱 중요시되었으며, 모든 것의 기본이 되었다.
물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음료수였다(창 21:14, 민 20:11, 막 9:41, 요 2:7). 이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시기 전에 물로 옷을 빠는 등 정결케 할 것을 명하셨다(출 19:10-15). 제사장은 물두멍에 담긴 물로 수족을 씻어서 정결케 한 뒤 회막에 들어갔다(출 30:18-20).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으며(행 8:36-39),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그의 신부인 교회가 성별되어 흠없는 성화의 몸이 된 것을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셨다'고 표현했다(엡 5:26).
또한 물은 여러 가지를 상징했다.
먼저 물은 영적 축복과 회복을 상징했다(시 23:2, 사 12:3, 사 35:6-7).
물이 모자라란 것은 가장 심각한 일 중 하나이며, 선지자들은 이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기도 했다(렘 14:1-9, 욜 1:15-20, 암 4:7-8).
물은 자제력을 잃은 불안정한 상태(창 49:4)나 아이 성에서 패전하여 겁먹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수 7:5),
평화로운 상태(시 23:2),
환난이나 괴로움(사 43:2),
박해(시 124:4-5),
만국에 미칠 복음(사 11:9),
구원(사 55:1) 등도 상징했다.
또한 물은 영혼의 갈급함(시 42:1),
하나님의 축복하심(겔 47:1-12),
영생(계 22:17),
그리스도(요 4:10-15),
거듭남(요 7:37-38)을 상징했다.
불
성령
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질문) 오순절 날 왜 성령이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 같이 임하셨는가?
성경의 모든 계시는 점진적으로 진행됩니다.
이것을 “점진적 계시(progressive revelation)”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도 구약과 신약을 거쳐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마지막에 완성될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령에 대한 이해도 오순절 날 갑자기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 같이 임한 것이 아니라 점진적 과정을 거쳐 오순절 날 드디어 분명하게 나타났다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애급에서 고통을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을 때 홍해를 물 세례라고 합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생활 할 때 낮에는 구름 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이 나타나서 광야 생활을 지켜주셨다고 합니다. 이때 구름 기둥은 물세례, 불기둥은 성령 세례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오순절 날 불과 바람으로 임했던 성령의 점진적 계시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세례 요한의 증거(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광야에서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장차 메시아가 나타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βαπτίσει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
- will baptize with the Spirit Holy and fire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장차 오실 그 분께서는 “성령(프뉴마)과 불(푸르)”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외쳤던 요한의 증언은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그 분이 그토록 기대하던 “메시아”라고 기다렸으나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사십일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사도행전 1:3).
둘째는 부활하신 예수의 증거(사도행전 1:1:4∼5)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이제까지 단 한 사람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던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향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때 먼저 찾아가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고자 갈망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을 오백 명의 사람들이 목격했습니다(고린도전서 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세례 요한이 외쳤던 그 분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 분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분께서는 단 한 사람에게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실망했던 사람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성경의 증거는 실망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사도행전 1:15a)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부활하셨던 예수를 목격했던 사람들이 오백 명이라고 사도 바울은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함께 모였던 사람들은 120명이었다고 합니다. 380명은 실망하여 함께 모이지 않았습니다.
셋째는 오순절 날의 증거(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순절 날 드디어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쳤던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말씀이 함께 모였던 사람들이 들었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재 하여 방언으로 말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방언은 당시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함께 모였지만 서로 의사소통이 잘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유대인들의 절기(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히브리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 제자들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증거 할 때 갑자기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나타나서 성령 충만한 상태가 되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모여 있던 유대인들이 각자 자기들이 사용하던 언어로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Ⅰ. 세례(洗禮)의 의미
세례를 헬라어로 “밥티조(βαπτίζω)” 라고 합니다.
‘밥티조(baptizó)’의 뜻은 “담그는 것(to dip)”, “가라앉다(sink)” 라고 합니다.
밥티조라는 동사가 명사로는 밥티스마( )가 되며 세례자(침례자)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될 때는 밥티스테스( )가 된다. 세례 요한은 밥티스테스 요안네스( )로서 세례자(침례자) 요한이라고 번역해야 옳은 것이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에 사람을 물속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끌어올리는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을 “침례(浸禮)” 라고 합니다.
이러한 침례가 생활환경의 변화에 따라 물속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물을 뿌리는 예식으로 진행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물속에 들어갔다 나와야 세례를 받은 것이라며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교회와 교단도 있습니다.
Ⅱ. 물세례(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오래 전에 모태 신앙의 두 젊은이가 어렸을 때는 유아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대학생이 되어 입교 문답을 하고 세례 교인으로 인정을 받는 입교예식을 마치고 교회 근처 커피숍에 들어가서 커피를 주문한 후에 담배를 피우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세례 교인이 된 후에 처음 피우는 담배가 세례 교인이 되기 전에 피우던 그 담배 와 맛이 똑같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면서도 커피 맛이 똑같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를 받던 침례를 받던 음식 맛이 변하고 습관적으로 행하던 것들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겉 사람의 변화가 아니라 속사람의 변화가 나타나야 합니다.
‘물세례’는 구원의 표가 됩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세례 요한의 물세례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인물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무슨 죄가 있어서 세례를 받으셨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의를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마태복음 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매우 불편한 진실이었습니다. 세례를 베푼 사람은 세례를 받은 사람보다 영적인 권위가 높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것은 확실하지만 예수님이 영적으로 훨씬 앞선다는 사실을 강조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을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었지만 예수 보다 영적으로 우월하지 않다는 것을 증거 하려고 “요한의 세례는 물세례”로, “예수의 세례는 성령과 불세례”로 표현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왔습니다. 그에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중적 카리스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장에서도 그런 카리스마가 넘칩니다. 낙타털 옷을 입었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만 먹었습니다. 일단 겉모습만으로도 영적인 뭔가가 있어 보입니다. 요한은 단순히 있어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영적인 내공을 갖추었습니다.
5-7절 말씀이 그 상황을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이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요한의 설교는 대중들의 양심을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다그쳤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의 설교를 들은 당시 사람들은 간담이 서늘했을 겁니다. 뭔가 삶을 바꿔서 새롭게 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다짐도 했을 겁니다. 그것을 가리켜 성경은 “물세례” 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도덕적인 변화와 의로운 삶과 같은 변화는 지금도 요구됩니다.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삶의 태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비난받는 이유에서 가장 큰 것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대한 열정은 지대하지만 그것이 삶의 변화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힘드니 그저 교회에서 위로 받는다는 생각에만 치우쳐 있습니다. 기복적이고, 이기적이고, 개 교회 중심적이고, 반역사적이고, 반통일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경향을 많이 보입니다. 세례 요한의 물세례가 시급합니다. 이런 세례는 기독교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입니다.
Ⅲ. 불세례(마태복음 3:11b)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불세례의 사전적 의미는 “신도가 성령의 충만으로 죄악과 부정(不淨)을 불살라 성결(聖潔)하게 됨을 일컫는 말.”
'침례' 즉 '물속에 들어감'의 뜻은 무엇인가? 물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롬 6:3-4에서 말씀하듯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음을 상징한다. 즉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에서 침(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하는 상징적 행위라고 가르친다.
골 2:12에서도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라고 함으로써 역시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 이로 보더라도 '세례' 즉 '물로 씻음'이란 표현이 사망을 상징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물속에 잠긴다'는 뜻의 '침례'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침(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이는 곧 죄 사함의 상징이다. 결국 '침례'는 벧전 3:21의 말씀대로 '구원하는 표'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침례교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교파는 '세례'의 형식으로 의식을 거행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침례교를 제외한 나머지 교회가 모두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교회는 의식의 상징적 의미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또한 엡 5:26에서 말씀하는 '물로 씻음'을 '세례'의 근거로 삼기도 한다.
아무튼 '세례'는 '침례'의 오역이지만 교회가 이를 영적으로 해석하는 오래된 전통을 바꿀 수는 없으므로 '세례'라는 표현을 그대로 인정하여 '침(세)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교회에서 '세례'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세례'의 성경적 의미를 알고 사용한다면 신앙이 왜곡되거나 하기까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불세례
불세례가 무엇이며 그 근거는 무엇인가? 불세례라는 말은 마태복음 3:11과 누가복음 3:16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들은 불세례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 채 성령 체험의 일종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것은 앞의 두 곳의 성경 본문에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 라는 말씀에서 “성령과 불로” 라는 표현을 흔히 “성령과 동시에 불로” 라는 말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을 “성령”과 “불”로 동시에 세례 받는 것으로 오해하여 “성령불” 또는 “불성령” 등의 말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성령 받으라”는 말을 “불 받으라”는 말로 바꾸기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사실은 “성령”과 “불”은 함께 받는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존재인 것이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βαπτίσει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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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번역된 데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καὶ)”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카이”는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로 많이 사용하지만 간혹 “우위 접속사”인 “또는(or)”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위 접속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는 “성령 또는 불안에서” 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 사(四)복음서를 비교하여 연구해보면 더욱 확실히 증명된다. 먼저 우리는 '성령과 불로'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과 불로'가 아닌 '성령으로'라고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라고만 되어 있으며 행 11:16과 고전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라고만 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령으로 세례'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 보더라도 '침례'라는 말이 의미를 더 잘 통하게 한다. 만일 '세례'라고 하면 '성령으로 씻긴다'는 말이 되므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성령은 영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요 14:18∼19)이므로 '성령 안에서 침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하되 '생명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침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행 2:38, 행 19:2)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고전 3:16-17)'과도 같은 말이 되는데 결국 우리와 주님과의 상호내주(Inter-Residence)를 뜻한다.
한편 요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신령으로'라는 말은 “엔 프뉴마”로서 원 뜻은 “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의미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의미가 모두 해석되는 것이다. 즉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물 안에 잠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상징하는 뜻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 안에 잠긴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리가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로 세(침)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불 속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로서 신자와는 전혀 관계없고 불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즉 불신자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하는 대신에 '불 속에 잠기게 한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심판을 상징하는 불
성경에서 “불”은 “심판”을 상징한다.
불은 헬라어로 “퓌르(πῦρ, pur)”인데 성경에서 퓌르는 예외 없이 심판을 통한 형벌의 수단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심판이라 함은 종말의 최후 정점에서 신 불신간에 단회적으로 받게 될 최후의 심판(광의적 심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별로 받는 정죄의 심판(협의적 심판)을 뜻한다.
요한복음 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심판을 받는다'고 할 때 '정죄를 받는다'는 뜻과 같은 것이다. 즉 이미 심판 받았다라는 말씀은 정죄받기로 정해졌다는 뜻이며 이러한 자는 불로 태워지는 운명이 되어 최후 정점의 심판 때 시행되리라는 것이다.
불이 심판을 가리킨다고 하는 것은 누가복음 3:17으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쭉정이'가 '불'에 태워질 것이라는 비유로 볼 때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마태복음 3:12에서도 같이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문장 구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타나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즉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 안에서 침(세)례를 주신다'라고만 되어서 '불'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불'의 의미를 설명하는 '쭉정이를 불에 태우신다'라고 하는 비유 역시 나타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각각 '불'에 대한 해석이 반드시 따라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두 복음서에는 마 3:12과 눅 3:17에서 각각 쭉정이를 불에 태우는 비유가 덧붙여 진 것이다. 즉 '불'은 쭉정이와 직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비유에서 신자는 알곡이므로 불과는 관계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와 유사한 내용으로 마 13장의 가라지 비유에서 '세상 끝에 가라지를 불사른다'라고 할 때의 '불' 역시 '심판'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불이 심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성경 구절은 많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히 12:29)이라고 할 때 불은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한편 행 2:3에서 성령 강림 때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여'라는 말씀에서 혹자들이 잘못 인용하여 성령과 불을 서로 관련시키는 것도 보게 되는데 이는 문맥을 잘 살피지 않고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성령이 불과 같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불의 혀'의 수없이 갈라진 형상을 비유하여 한 성령이 여러 사람에게 나뉘어져서 임하신 것을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성령'은 '불의 뜨거움'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고 단지 '불의 혀의 갈라지는 모양'만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성령이 보인다고 한 것도 물질이 아니신 하나님의 영이 보일리 없건만 '영적으로 보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보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호라오(ὁράω, horaó: to see, perceive, attend to)”는 주로 마음의 눈으로 영적인 것을 보는 것(마 26:64, 행 7:55∼56)을 뜻한다. 눈으로 물질을 보는 것을 뜻할 때는 “블레포(βλέπω, blepó. to look at)” 라는 동사가 주로 사용된다.
한편 구약에서도 단 7:9-11에서 알 수 있듯이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뜻한다. 그 밖에 출 3:2의 떨기나무의 불꽃과 렘 5:14의 하나님의 말씀의 불과 렘 23:29의 불같은 말씀과 방망이 등에서 하나님과 관련된 불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들 역시 하나님의 위엄과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 불의 뜨거운 속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는 모두 물질적인 불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떨기나무 불꽃은 불꽃의 극히 밝고 빛나는 영광과 위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성경에서 뜨거움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은 오직 성경 말씀을 풀어 주실 때(눅 24:32)와 서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라(벧전 1:22)고 했을 때뿐으로 이상으로 볼 때 성령과 불을 동시에 받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따라서 불세례를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성경의 뜻 그대로라면 심판을 받게 해달라는 말이 되므로 주의해야 한다. 혹자는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찬송 부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도를 다 아시므로 알아서 해주실 것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잘못된 것은 무엇이든지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는 정확한 성경 지식을 가질 필요도 없고 사사 시대처럼 각자의 생각에 좋은 대로 신앙 생활을 해나가면 된다(삿 21:25)는 말과 같다. 진실된 하나님의 자녀라면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일획이라도 변개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서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해야지 그런 식으로 견강부회(牽强附會)한다면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리가 없다.
간혹 간증집 등에는, 기도원 등에서 기도하던 중에 '뜨거운 불세례를 받았다'라고 하거나 심지어는 '불세례를 받고 뜨거워서 데굴데굴 굴렀다'라고 간증하는 것도 있는데 이는 물론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들이다. 정말 뜨거움을 맛보았다면 그것은 성령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의 정죄의 불을 체험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성령 받을 때 뜨거움을 느꼈다고 가르친 구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체험을 하였다면 성경과는 무관한 기묘한 체험이기 때문인 것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성도의 마음을 뜨겁게 하시는 뜨거움은 물질적인 뜨거움이 아니라, 마음의 감동이며 내적인 뜨거움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고 또한 열정과 희열 같은 뜨거움을 주신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물세례를 교회의 중심으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더 본질적인 세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불세례입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물세례는 어느 정도 손에 잡히지만 성령과 불세례는 그렇지 못합니다. 흔히 교회에서 말하듯이 “성령을 받으라”는 말인가 하는 정도입니다. 이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본문에 성령과 불이 나란히 소개됩니다.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
창세기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우리라는 복수 명사를 사용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닌가?
이슬람교 창시자 마호멧은 하나님은 괴물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한 몸에 머리가 셋이나 달린 그런 하나님을 믿는가?
기독교의 신관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라고 하겠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먼저 살펴야 한다.
첫째는 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
둘째는 사랑으로 존재하는 하나님
셋째는 창조하시는 하나님
넷째는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
- 마태복음 28:19,
- 요한일서 5:8, 증거하는 이가 셋 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성령론(요한복음 14, 15, 16장)
- 보혜사(保惠師),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선생님
-
물(水)
מַיִם (마임)
창세기 1장을 보면 빛의 창조 이전에 '물'이 있었다는 진술이 나온다. 2절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개역개정)란 말씀이 있다. “수면”(水面)이 ‘물’의 존재를 가리킨다. 물은 히브리어로는 מַיִם (마임)이다. ‘물’(마임)이 무엇이기에 ‘영’(루악흐)의 운동과 연동하는지 의아하다. 창1:2은 빛이 창조되기 이전의 상태를 진술한다. 빛이 있기 전에 ‘물’이 있었으며 “하나님의 영”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히브리어로 ‘루악흐 하엘로임’이고(רוּחַ אֱלֹהִים), “수면 위에”는 ‘알 퍼네-하마임’이다(עַל־פְּנֵי הַמָּיִם). “하나님의 영”이라고 번역된 רוּחַ (루악흐)는 ‘기’ 내지 ‘기운’, 또는 ‘바람’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루악흐’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창조의 능력이며 우주를 일정한 이치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구체적인 힘이다. 물리학이 발견한 ‘중력’과 같은 것을 우리는 이 ‘루악흐’와 견줄 수 있다. 하지만 ‘루악흐’가 활동하는 영역이 “수면 위”라고 하는 창1:2의 진술은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물’이 무엇이기에 ‘영’과 함께 작용하는가?
“수면 위에”란 어구는 공간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다. 둘째 날 “궁창”을 창조할 때 비로소 공간이 생겨난다. 아직 시간과 공간이 없는 상태에서 ‘루악흐’와 ‘물’이 상호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창세기의 독자들은 이 점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개역성경의 동사 ‘운행하다’란 단어는 רָחַף (락하프)이다. 이는 어떤 사물이 진동하며 매우 세차게 떨고 있는 동작을 가리킨다. <루악흐>가 물 위에서 진동하니 물이 함께 소용돌이치듯 서로 감응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רוּחַ (루악흐)가 움직이면 ‘물’, 곧 מַיִם (마임)도 덩달아 움직였다. 성령은 물을 움직이는 힘이고, 물은 성령을 따라서 움직인다.
이 사상은 창2:6에 나타난다. 땅 밑 곧 궁창에서 물이 솟아올라 온 땅을 적셨다(창2:6). 하나님은 이처럼 젖은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다(창2:7). 물이 사람의 몸에는 75%나 들어 있고 세포의 원형질에는 물이 95%나 차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하나님의 영”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רוּחַ (루악흐)는 중력의 법칙을 지어냈다. 사람도 그 기운에 감응하여 움직이고 활동한다. 성령은 사람의 몸 속에 있는 물, 곧 מַיִם (마임)을 통하여 사람을 감동시킨다. 이처럼 물은 성령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천지운행을 따라 사는 사람을 ‘농인(農人)’이라고 부른다. ‘농'(農)은 별 '진'(辰) 자 위에 노래 '곡'(曲)이 붙은 글자이다. 이 글자는 우주 만물이 황도를 따라 움직일 때 그 운동에 따라 덩실덩실 춤추며 노래하며 살아가는 존재를 가리킨다. 농인 몸 속에 들어있는 ‘물’이 성령과 감응하여 그 농인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게 된다.
물이 성령의 감동에 따라 움직이는 사례는 성경에 가득하다. 예컨대, 땅 밑에서 솟아나는 물(창2:6), 에덴동산에서 발원하는 물(창2:10-14), 노아의 대홍수(창6-9장), 애굽의 하수가 피로 변함(출7:17), 홍해가 갈라진 사건(출14:16), 마라의 쓴물(출15:25),, 므리바 바위(출17:6; 민20:11), 요단강이 갈라진 사건(수4:7), 엘리야와 엘리사가 요단강을 가른 사건(왕하2:8, 14), 에스겔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겔47:1), 등등 구약성경에 수두룩하게 등장한다. 신약성경에도 예수님의 기적들에 물이 언급된다. 가나의 혼인잔치, 베데스다의 연못, 소경을 침으로 고침, 풍랑을 꾸짖음, 물위를 걸으심, 등등 부지기수이다. 요한계시록에는 마지막 날에 새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가 환상으로 펼쳐지는 가운데 성경이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할만한 신학사상은 요한복음에 나온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신 대목이다(요3:5). 여기서 “물과 성령”은 창1:2의 “영”과 “물”에 연결된다. 주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도 하셨다(요3:3). ‘거듭나다’란 헬라어는 ἄνωθεν (아노텐)이란 부사로 표현되는데 이 부사는 ‘위로부터/from above’라는 뜻도 된다.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죄로 인하여 혈과 육의 존재이며, 아래로부터 태어나서 세상의 종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백성은 물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작용하여 죄의 저주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피조물로 회복된다. 이처럼 거듭나는 데에는 영과 물의 상호작용이 있어야 한다.
더 폭을 넓혀 보자. 우리가 파괴한 환경, 그로 인한 기후변화, 특히 수질오염은 죄의 결과이다. 환경의 회복은 우리가 거듭나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 ‘영’(루악흐)이 작용하면 ‘물’(마임)이 변하게 된다. 성령을 받으면 우리 인간의 몸 속에 있는 물이 맑아진다. 죄인이 지어낸 물질문명은 창조세계를 파괴하고 있지만, 물과 영으로 거듭난 우리는 참 인간을 회복하고 마침내 오염된 물을 회복할 것이다.
성령은 헬라어 “프뉴마” 이고, 불은 “푸르” 입니다.
“프뉴마”는 “영”이라는 뜻만이 아니라 “바람”과 “숨”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히브리인이나 헬라인 모두 영과 바람을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구 안에서 벌어지는 공기의 대류현상입니다. 물리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고대인들에게는 그런 물리학적인 정보가 전혀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는 어떤 것을 느꼈습니다. 봄이 오면 따뜻한 기운이 돌면서 죽은 듯이 보였던 땅에서 풀과 나무의 순이 돋아납니다. 찬 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자연에 생기가 없어집니다. 사람이 어머니 배에서 나오면 숨을 쉬기 시작하고, 죽으면 숨이 끊깁니다. 바람과 숨이 세상과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대 히브리인들은 영과 바람을 똑같은 단어인 “루아흐”라고 하였고 헬라인들은 “프뉴마”라고 말했습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생명을 주는 힘이지만 불은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생명을 결정하는 힘입니다. 고대인들에게 불이 얼마나 신비롭게 보였을지 상상해보십시오. 2백만 년 전 유인원들이 처음으로 불을 보았을 때 살아있는 생물로 보았을 겁니다. 무시무시한 괴물로 말입니다. 천천히 불을 관찰하고 다루면서 불이 생명의 원천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헬라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을 만물의 근원으로 보았습니다. 그게 틀린 말도 아닙니다. 불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태양이 지구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전기와 가스, 그리고 핵에 이르기까지 모든 에너지도 역시 불입니다. 고대 여러 문명이 태양을 신으로 섬겼다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닙니다. 구약성경에도 불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메타포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1 이하에 오순절 성도강림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 예루살렘의 마가 다락방에 모였던 2백여 제자들에게 성령이 바람과 불로 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 2:2∼3,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세례 요한이 말한 ‘프뉴마와 푸르’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바람과 불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바람과 불이 고대인들에게 절대적인 생명의 능력이었던 것처럼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 생명이었습니다. 절대 생명 경험이 바로 성령 강림이자 불세례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바람직한 삶의 변화라 할 수 있는 물세례에 머물지 말고 불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붙들었습니다.
Ⅳ. 절대 생명
MRA 라는 단체가 있습니다(Moral Re Armament). 우리말로 “도덕재무장” 이라고 합니다. 이 단체가 주장하는 네 가지 목표는 “정직, 순결, 무사, 사랑” 이라는 정신으로 “새 사랑, 새 가정, 새 사회, 새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세례에 대한 신앙을 바르게 가르치고 전달된다면 도덕재무장과 같은 목표가 반드시 실현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순절 날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를 통해서 절대 생명을 경험했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함께 가르침을 받았던 것도 십자가 사건으로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부활 후에는 부활을 의심했던 제자도 있었고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나고 드디어 부활 생명에 대한 믿음이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이 불의 혀같이 바람같이 임한 것과 방언을 말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부활 생명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믿음을 갖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The Spirit gives life; the flesh counts for nothing. The words I have spoken to you are spirit and they are life.
생명(生命)이란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살아있다는 것을 사람의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이집트에서 3천 년 전에 건설된 피라밑을 발굴하던 중 그 안에서 아주 오래된 씨앗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학자들은 그 씨앗을 심었습니다. 얼마 후 그 씨앗이 싹이 나서 자란 후에 그 씨앗이 완두콩 씨앗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오래 된 씨앗이라도 그 안에 생명이 있으면 반드시 자라날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무엇을 통해서 자기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뜨겁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현실적으로 말한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건강하게, 더 오래 사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재미있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삶을 성취하기 위해서 날마다 분투하며 최선을 다 합니다. 그런 삶의 태도를 잘못된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이 세상에 큰 어려움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소망하며 바랍니다. 그런데 과연 그와 같은 삶이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개인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한마디로 말하기는 힘듭니다만 방향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의 것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황소개구리라는 동화를 기억하십니까?
어느 연못에 개구리 떼가 모여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새끼 개구리가 연못 밖으로 나갔다가 커다란 황소가 지나가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얼른 연못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개구리에게 연못 밖에 나갔다가 아주 커다란 황소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아버지 개구리는 그래 얼마나 크더냐 하며 배를 내밀었다고 합니다. 새끼 개구리가 그것보다 더 커요! 하자 또 다시 힘껏 배를 내밀며 이만큼! 이렇게 반복하다 결국 황소개구리는 배가 터져 죽었다고 합니다.
욕심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교훈의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노인 어부가 황금빛 용왕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살려주면 원하는 것을 허락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아내에게 말하자 좋은 집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게 이루어지자 점점 욕심이 많아져 여왕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이루어지자 바다까지 다스릴 수 있는 왕이 되어야겠다고 했습니다. 쫄딱 망해서 옛 오막살이에서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아무리 넓은 집에서 없는 거 없이 다 갖추어도 결국 오막살이의 삶을 면치 못하게 만듭니다. 초라한 거지요. 이게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생명입니다. 물론 다르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서리가 묻은 토끼풀을 손으로 만지면서 무한한 생명의 신비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에 영혼의 무게를 걸어두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망을 성취하는 것에서만 삶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이런 우스개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하던 중 갑자기 비행기가 기체 고장을 일으켜 아주 위태로운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기장은 승객들에게 안전하게 준비된 낙하산을 착용하고 뛰어 내리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승객들의 수보다 낙하산이 한 개가 부족했다고 합니다. 한 사람씩 승무원들의 안내를 받아 조심스럽게 뛰어내리는데 낙하산이 2개가 남았을 무렵 갑자기 한 사람이 뛰어내렸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장과 어린 소년이 남아있었는데 기장은 소년에게 나는 기장으로서 마지막까지 나의 임무를 완수 할 테니 네가 이 낙하산을 짊어지고 뛰어내리라고 이야기를 할 때 소년은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 낙하산이 2개가 남아 있어요! 하더랍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하였더니 방금 전에 혼자 뛰어 내린 사람이 소년의 배낭을 낙하산으로 알고 그것을 짊어지고 뛰어내렸다고 합니다. 결국 기장과 소년은 마지막 남은 2개의 낙하산을 이용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욕심의 끝 결말이 어떤 것인지 느끼게 하는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박내수전도사의 이야기
밥상에서 김치가 올라왔는데 누런 황새기가 김치 그릇에 있기에 얼른 젓가락을 사용하여 자기 입속으로 넣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입안에 넣고 씹는데 황새기 젓이 아니라 볏짚이 김치 속에서 누렇게 물든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왜 그것을 입에 넣느냐? 하더랍니다.
아버지는 그것이 볏짚인 줄 알고 꺼내려고 젓가락을 가져갔는데 아들은 그것을 아버지가 먼저 먹으려는 줄 알고 젓가락을 가져다가 얼른 입안에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인간의 욕망이 참 어리석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도사님이 목사가 된 후 어느 여름 날 하기 수양회에 학생들을 인솔하여 가셨다가 학생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 물속에 뛰어들었다가 심장마미를 일으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절대 생명을 경험했다는 것은 이런 세상에서 제공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그게 실제로 있기는 있는 것일까요? 현실성 없는 허황한 기독교 교리에 불과한 것일까요?
마태복음 기자는 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말을 하고 이어서 4장에서 예수의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5장에서 그 유명한 ‘팔복’을 말합니다.
복이 있는 사람에 대한 목록이 거기 나옵니다. 복이 있다는 것은 생명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 목록에는 우리의 세상살이 경험과 다른 내용이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등등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세상에서 경쟁력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 자체가 이런 여덟 가지 복에 해당되는 분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방증입니다. 세상 경험에 따르면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은 아예 말이 되지 않아 보입니다. 가난과 애통 자체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가요? 팔복에 열거된 사람들은 세상에서 의존할 게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만 의존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완전한 절망을 경험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만 의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만 의존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구원을 얻고, 생명을 얻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런 절대 생명에 대한 경험에 근거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3:13∼17에는 예수님이 세례 받는 장면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하늘로부터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사도신경에도 예수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에게 신성 모독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나 분명한 진리였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신성모독이라는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를 통해서 절대 생명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사랑, 생명 경험
저는 지금 예수가 왜 생명인지에 대해서 주변적인 설명만 하고 있을 뿐이지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답이 까다롭기도 하고 제가 경험하고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기에 어쩔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으니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을 비롯해서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 무덤에 묻혔던 예수가 실제로 자신들의 일상에 나타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부활 경험입니다. 예수를 부활로 경험하니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비슷한 경험을 우리도 간혹 합니다.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일반적으로는 자식을 생각할 때도 그런 경험을 할 겁니다. 사람에게서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두말 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이들은 예수를 특별한 생명 존재로 경험한 것입니다. 죄와 죽음을 넘어서는 경험입니다. 죄와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 바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이는 거꾸로 죄와 죽음으로 빠져드는 게 생명을 잃는 길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성취해야 한다는 유혹과 갈망, 그리고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에 빠지면 생명을 잃습니다. 겉으로 살아있으나 죽은 거와 다를 게 없습니다. 그게 심리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면 우울증이 됩니다. 약물로 우울증을 치료한다고 해도 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가 쉽게 벗어나는 게 아닙니다. 복음서 기자들과 다른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서 생명을 얻는다고 믿었고, 그렇게 선포했습니다. 그러니 마태복음 기자가 세례요한의 입을 빌려서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푼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그런 경험도 없고 믿음도 없는 거 같다.’고 걱정하는 분들이 여기 계신가요? 거꾸로, 확신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어느 쪽에 속하든지 여러분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예수와의 실질적인 만남입니다.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건 한번 경험했다고 해서 계속 이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테니스를 1979년부터 쳤으니까 37년의 구력이 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잘 안 되는 게 공을 끝까지 보는 겁니다. 공을 라켓으로 쳐서 튕겨나가는 순간까지 집중해서 봐야만 공도 잘 나가고 몸도 망가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예수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른 데 한눈을 팔면 영적인 ‘엘보’가 옵니다. 예수를 생명으로 경험하여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를 더 깊이 아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노력을 해보신 적이 있나요? 그런 노력이 없으면서 기독교가 말하는 절대생명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변명이고, 불행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세례로 만족하는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서 칭찬을 받을만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기독교 근본에서는 거리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반드시 불세례가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여러분은 예수 주위를 맴도는 신앙이 아니라 예수께로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을 성령 충만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신앙을 그리스도 안에 라고도 합니다.
이번 주 암송할 말씀은 요한복음 6장 63절입니다.
다음 주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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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4WgFGso7y3M
세례의 의미
로마서 6:4,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세례의 의미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씻음의 의미로, 죄를 물로 씻을 수는 없지만 십자가의 보혈로 죄 사함 받았다는 것을 뜻하고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새 생명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물속에 잠긴다는 의미는 옛 사람이 죽는다는 뜻입니다(롬 6:3).
즉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가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세례는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며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교회와 회중 앞에 고백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갈 2:20).
눈물의 세례식
어제 드디어 기다리던 세례를 받았다. 한마디로 완전히 망가진 세례식이었다. 세례식 때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린다고 홍 집사님이 말했을 때, 나는 안 그럴 거라고 말한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 세례를 받는 그 좋은 날, 왜 우냐고…. 그런데 내가 그렇게 심하게 망가질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원래 마이크 체질로 통했다. 학창 시절에는 운동장에 모인 학우들이 내 한마디에 웃고, 내 한마디에 감동받곤 했다. 세례받기 전날 밤, 나는 5분에 맞춘 간증을 서너 번 읽고 연습했고, 한국에 전화해서 아내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아내는 너무 감동적이라고, 나는 정말 남편 잘 만난 것 같다고 그랬다. 목사님이 무릎 꿇고 앉은 내 머리에 손을 얹고 힘을 주셨다. ‘이제 시작이다’ 하며 마음을 굳게 먹고 있는데 물이 내 머리를 타고 흐르자 감정이 복받치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물로 죄를 씻는 형식을 취한다고 했는데, 그건 단순한 형식이 아니었다. 자리에 돌아와 앉았는데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왜 그렇게 힘들었고 또 오래 걸렸을까? 결국 이렇게 될 것을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버텼을까? 사람들을 펑펑 울리겠다고 자신하던 나는 없었고 죄를 용서받고 눈물 흘리는 초라한 나만 있었다. 내가 흘린 눈물에는 과거에 대한 서러움도 담겨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죄를 용서받고 든든한 하나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격한 행복의 눈물이었다. 하나님은 멋지게 간증하겠다는 나의 교만함도 여지없이 무너뜨리셨다. 하나님은 잔머리 굴리는 교만한 나를 원하시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 그래도 나의 그 진심을 하나님이 들으셨으니 만족하고 행복했다.
- 아름다운 시작, 주선태
피지 선교사
뉴질랜드 가까이에 솔로몬 群島가 있다. 여기 사는 원주민 피지 족속에게 선교했던 선교사가 쓴 책이다. 선교해서 그들이 예수 믿게 되면 세례를 주는데 '킬링 스톤'이라고 하는 바위 옆에서 베풀었다. 킬링 스톤이란 사람을 처형하는 바위이다. 처형법도 여러 가지가 있지 않은가? 목을 쳐 죽이는 일도 있고, 교수하는 일도 있고, 불태워 죽이는 일도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아주 특별한 방법이 행해졌다. 동네 한가운데에 큰 바위가 있는데 사람이 못된 죄를 짓게 되면 사형에 처하게 되고, 처형을 할 때에는 사람을 꽁꽁 묶어서 붙들고 머리를 그 바위에 짓이겨서 죽인다. 그래서 피가 그 바위에 흐른다. 그 피를 절대로 닦지 못하게 한다. 그대로 피가 벌겋게 흐르면 사람들이 '아! 죄 지으면 저렇게 된다'하고 일벌백계의 무서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 믿게 된 자들을 늘 붉은 피가 묻어 있는 그 바위에 데려가서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당신은 지금 죽는 거요. 옛사람이 완전히 죽는 시간입니다'하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콘스탄티누스
우스운 얘기가 있다. 꼭 전설 같은 이야기인데 기록에 있으니까 사실인 것 같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라고 하면 기독교의 자유를 선포한 대단히 중요한 로마 황제가 아닌가? 그러나 그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까지 세례를 안 받았다고 한다. 왜 안 받았는고 하니, 나는 왕이니까 사람도 죽여야 되고 전쟁도 해야 된다, 그런고로 세례 받을 수가 없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 임종이 임박하여 세례 받을 때에도 전설에 의하면 오른손은 남겨놓고 물속에 들어갔다고 한다. 오른손 가지고 험한 짓 많이 하는 것이니까 그랬다는 것이다. 그분 생각에는 내가 세례 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완전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되는데 나는 그렇게 살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가 죽기 전에는 세례를 받았다. 받고 죽었다.
/곽선희목사 설교예화 중
세례의 참뜻
갈라디아서 3:26∼2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반드시 알아야 할 세례의 영적 뜻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 가를 알기 위해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가. 예수 안에서 하나 되게 함(엡 4:5)
물세례란(마 3:11, 벧전 3:21)
성령 세례란(행 2:38, 고후 1:21∼22, 엡 1:13, 요 3:5, 엡 4:22∼24)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 받은 자 주와 하나 됨(롬 6:4∼5, 고전 6:17, 고전 12:13, 엡 4:5, 5:30)
나. 예수 안에서 옷을 입게 됨(갈 3:27)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 받은 자 그리스도와 함께 옷 입은 자임(갈 3:27, 롬 6:3∼4, 10∼11)
빛으로 옷 입은 자가 됨(요 8:12, 엡 5:8, (롬 13:12, 14)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 그 안에서 새로워짐(엡 4:13, 15∼6), (고후 5:17, 골 3:10)
다. 예수 안에서 유업을 얻게 됨(갈 3:29)
예수 안에서 자녀 되는 권세 얻음(요 1:12, 롬 8:15∼16, 갈 4:46)
예수 안에 있으면 죄에서 자유 함 얻게 됨(요 8:31-32, 롬 8:1-2)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됨(갈 3:28-29, 갈 4:7, (벧전 1:5-7, 벧후 1:10-11)
세례의 참 뜻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죽고 함께 살림을 받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사랑 선물 입니다. 우리 모두 세례의 참 뜻 바로 베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천국 백성 되시기를 바랍니다.
* 참조: 롬 6:1-11
세례, 그 영광스러운 의식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즉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모든 일을 하기 위해 세례를 받았다. 세례 요한의 선지자적 계명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 백성에게 새로운 요구를 하셨다. 그것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기 위해서 깨끗이 씻음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종 되신 분은 이스라엘이 하도록 요구받은 것은 무엇이든 그 백성을 위해 성취하셔야 했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세례의 요구를 포함한 자기 백성의 모든 짐을 짊어지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가되시기 위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이루셔야만 했다. 요단강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스스로 취하신 비하의 모습을 본다. 그런데 이 행위는 아무런 영광 없이 끝나지 않는다.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 1:10~11).
우리는 이 기사를 단지 예수님의 세례에 대한 후기쯤으로 알고 지나쳐 버린다. 하지만 그곳에서 발생한 일은 땅을 뒤흔들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하늘이 열렸다.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는 시각적 상징이 위에서 내려오는 비둘기의 형상으로 임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예수님은 세례 받으심을 통해 목수로서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일을 드디어 감당하시게 된 것이다.
- 「그리스도의 영광」/ R. C. 스프룰
목숨을 건 세례
한국 선교가 시작된 것은 1884년이다. 하지만 복음 전파의 자유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선교사들이 정식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허가를 받은 것은 1898년이 되어서였다. 복음 전파의 문은 서서히 열렸다. 한국인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금지되어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움트기 시작한 호기심은 법으로 막을 수 없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노도사라고 알려진 노춘경(盧春京)이었다. 그는 우연히 한문으로 된 기독교 배척문서를 읽고 호기심이 생겼다. 그는 선교사들에게 접근하여 기독교를 알고자 하였으나 선교사들은 주저하였다. 노춘경은 포기하지 않고 선교사 앨런의 집에 가서 그의 책상위에 놓여 있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몰래 가져가 열심히 읽었다.
노춘경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는 구할 수 있는 대로 많은 기독교 서적을 읽었고 선교사들의 주일예배에도 참석하였다. 그는 정식으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언더우드에게 세례문답을 받았다. 언더우드는 마지막으로 이 나라의 법이 아직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고 있으며 한번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 마음을 바꾸어 돌아서면 안 된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노춘경은 자신의 결심은 분명하며 최악의 경우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다고 대답했다.
선교사들은 이 세례문제에 민감했다. 아펜젤러는 자신의 느낌을 1886년 7월 24일자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로서는 그 의식이 대단히 진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한국인들의 분노를 사게 될 매우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신 분께서 그를 지키시리라고 확신한다.” 이런 논의와 기도 과정을 거쳐서 1886년 7월 18일 주일에 헤론 선교사의 집에서 노춘경은 세례를 받았다. 한국 땅에서 한국인에게 준 최초의 세례인 것이다. 그리고 그 세례는 목숨을 건 세례였다.
* 박명수 <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
1862년 중국선교를 시작한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는 1872년 맥킨타이어와 로스를 만주에 파송하여 만주선교를 시작하였다. 로스는 만주의 개항장인 영구(營口)를 거점으로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 무렵 로스는 평양 대동강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토머스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한국선교에 대한 꿈을 갖게 되었다. 로스는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 1874년 10월9일 영구를 출발하여 고려문을 방문하였다. 고려문은 봉황성 아래 놓여있는 작은 마을로서 청국과 조선국 사이의 합법적인 무역이 이루어지던 공식적인 관문이었다.
로스는 이곳에서 한국 상인들을 만나서 한문성경을 팔면서 전도했으나 한국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복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국산 양목에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여관에 있는 로스에게 50대의 남자상인 한 명이 찾아왔다. 그는 조선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서양종교를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다고 했다. 이 때 로스는 그 상인에게 한문으로 된 신약성경과 번즈목사가 번역한 ‘훈아진언’이라는 기독교소개서를 전해 주었다. 로스는 별 성과 없이 고려문을 떠났다. 하지만 로스의 노력이 열매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로스를 직접 찾아가 성경과 소책자를 받아간 상인은 자기의 고향인 의주로 돌아가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것을 전해 주어서 읽게 하였다.
1879년 초,두 명의 한국인이 만주에 있던 맥킨타이어 선교사를 찾아와서 기독교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매킨타이어는 한국교회의 첫 개종자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해야 하며, 또한 고향에 가서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두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얼마 후에 다시 돌아왔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어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돌아왔으나 세례 받을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여기에 나타난 무명의 의주 출신 청년이 한국개신교회 최초의 세례자이다.
/박명수<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
▣ 내 영혼의 생일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기념하는 신성한 의식입니다. 저는 이것을 육체의 생일과 구별해 ‘영혼의 생일’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말하면 웃으실지 모르지만, 저는 나이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머니한테 태어난 미네노는 63세,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 미네노는 43세!”
제 육적 자아에는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교만함이 있었습니다. 또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자신을 위장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저에게 호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평판과는 달리 제 뱃속에는 허영심과 야망이 꽉 차 있었습니다. 마음으로는 여전히 사람들을 비웃고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더럽고 교만한 인간입니까? 그러던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세례식이 시작되기 직전, 저는 목사님께 저의 더럽고 추한 죄를 빠짐없이 고백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세례의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이 날이야말로 제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영혼의 생일’입니다. 세례를 받자 제 생활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태어났고 변화되었습니다. 제2의 탄생일, 영혼의 생일에 말입니다.
* 인생은 아름다워」/ 미네노 다쓰히로
세례와 표심
나의 군목 시절 교회와 성당, 법당을 왔다 갔다 하는 철새 장병들이 있었다. 그들은 세례와 영세와 수계를 다 받아놔서 천국이 있든 극락이 있든 염려 없다고 큰소리쳤다. 상관의 말 한 마디에 종교생활까지 영향을 받던 엄혹한 시절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현실이었다. 지휘관의 종교적 성향에 따라 병사들까지 쉽게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 대선 후보의 부인이 법회에 참석해 법명을 받은 것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장로 부인이자 권사이기에 기독교인들의 의혹이 컸다. 당사자는 사실이 와전되었다며 극구 해명했다. 불교 행사에 참석했는데 본인이 원치 않는 법명을 일방적으로 선사받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그분이 기독교에서 불교로 개종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그러므로 법명 파동은 해명 그대로 불교를 존중하려는 호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타의에 의해 일어난 해프닝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다. 불교의 표심을 얻기 위해 절에 갔을 것이란 사실이다. 불교쪽의 지원을 얻겠다는 생각이 앞섰기에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에 혼란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깊이 발을 들여놓은 것 같다.
수계는 어떤지 모르지만 세례는 매우 중요한 기독교 예전이다. 물로 죄를 씻어 구원받았다는 표시(sign)가 세례인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을 얻는데”(롬 10:10), 그 구원 얻은 객관적 징표가 세례다. 세례가 중하였기에 초대 교인들은 함부로 세례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세례 받은 이후의 죄는 용서받기가 더 어렵다고 믿었기 때문에 콘스탄틴 대제는 임종 시에 가서야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세례는 기독교 입문의 자격증 그 이상을 의미한다.
선거철만 되면 종교계를 기웃거리는 정치인이 많다. 단지 한 표라도 더 얻을 요량으로 자신이 세례 받은 교회 중직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타종교에 지나치게 굽실거리는 이들도 있다. 타종교를 존중한다는 정신은 귀한 것이다. 그러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그럴 필요는 없다. 내 신앙을 확고히 지키면서도 얼마든지 타종교인들과 융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은 무조건 교인 후보를 찍어야만 한다고 선동하는 지도자들도 잘못이다. 자질과 역량을 먼저 저울질해야지 단지 나와 종교가 같다고 해서 편드는 것은 미숙한 발상이다. 대선을 앞두고 후보자나 유권자나 간에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 받은 이들의 숭고한 신앙 양심을 엄히 물어야 할 때다.
/김흥규(내리교회 담임)
▣ 청소년은 오늘의 주역
하기수련회를 한 주 앞둔 주일, 우리 교회 학생 3남매가 포장마차에서 술장사를 하는 어머니의 전도를 위해 3일 금식을 했다. 중2 여학생이 울먹이며 “목사님, 우리 어머니 교회 나오게 해주세요. 꼭 한번만 만나주세요.” 어머니의 영혼구원을 위해 금식하는 3남매에게 감동을 받아 다음날 어머니의 포장마차를 찾았다. “아이고, 목사님이 어떻게 이런 곳엘…. 소주 한잔 하실래요.” 그녀는 농담을 했다.
남편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술장사를 시작한 분이다. “수고 많습니다. 조금씩 쉬어가며 일하세요. 다음 주 교회에서 대둔산에 가는데 같이 가시지요.” “나 같은 사람이 가도 되나요?” 한 번도 교회에 온 일이 없는 분이 수련회에 참석했다. 그때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 술과 담배도 끊었다. 포장마차를 접고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시작했다. 지금은 권사가 되었고 그의 딸은 목사 사모님이 되었다. 청소년은 미래의 주역이 아니다. 그들을 은혜 받게 하라. 그들은 오늘의 주역이다.
/최낙중 목사<해오름교회>
얼굴이 부끄럽지 않게
어느 날 이웃 동네에 있는 카 센타에를 갔다. 오래 전부터 자동차의 워셔액 분출이 되지 않아 앞 유리를 닦을 수가 없었는데 크게 불편한 것도 없고 사용하는 일도 별로 없고 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시간여유가 있고, 집으로 오는 길이어서 그 작은 것 하나를 고치려고 들렸다. 그런데 부품 업체에서 주문을 한지 한참이 되었는데도 얼른 물건을 배달해 오지 않았다. 카센타 주인과 나는 짧고 일상적인 대화 몇 마디를 나누었는데 정부에 대한 불만과 양심적 병역거부문제 등에 관한 것이었다. 주로 그분이 얘기를 했지만 그냥 국민들의 일상적인 불만이었다. 그렇게 얘기를 했어도 자동차 부품은 얼른 오지 않았다. 나는 교회 얘기를 할까하다고 그만두고 나 혼자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서 휘파람으로 찬송가를 불렀다.
그가 찬송가 곡조를 알아듣고 "교회 다니세요?" 하고 묻는다. 자기도 달포 전부터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는데 '아멘이 무슨 뜻인지 할렐루야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또 세례는 얼마나 교회를 다녀야 받는 것이냐고도 물었다. 나는 적절한 대답을 해 주고 '우리 교회에도 한 번 와보라'고 하니 대뜸 "목사님이세요?" 하고 묻는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어쩐지 선해 보이고 평안해 보인다."고 한다. 나는 그분의 말을 듣고 가슴이 뜨끔했다. 만일에 부품을 늦게 가져온다고 짜증을 내고 정부에 대한 비판에 앞장을 서고 어줍 잖게 예수 믿는 것을 늘어놓으면서 불평을 했다면 나중에 나의 신분이 드러났을 때 얼마나 민망하고 미안했을까 더군다나 처음 믿는 교인 앞에서 말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어디에 가든 누구를 만나든 매사에 조심을 하지 않으면 주님의 영광을 가리 우고 교회를 욕되게 할 수 있다고 말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 한 사람의 영향
1517년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던 비텐베르크 시는 마르틴 루터 시로 개명된 지 오래다. 오늘날 독일 전 국민의 98%가 루터교인이다. 하나님이 함께한 종교개혁자 한 사람의 영향은 시대를 초월한다. 독일 학교의 방학은 모두 기독교와 연관되어 있다. 매년 10월 1일부터 두 주간은 추수감사절 방학이고 추수감사절과 성탄절, 부활절에도 각각 두 주간 방학을 한다. 모든 국민은 교회를 위해 종교세를 낸다. 목사는 정부 공무원이며 모든 아이는 유아세례를 받고 13세가 되면 1년간 매주 두 시간씩 100시간 이상 성경을 배워서 14세가 되면 입교식을 한다. 이 날은 부모님과 일가친척이 다 모여 축하잔치를 연다. 독일은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통일을 이루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헐고 하나 되는 것이 십자가 정신이다. 새해에는 하나님의 손에 잡힌 그리스도인이 되자.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이 새 역사를 만든다.
/최낙중 목사(관악교회)
▣ 지혜롭지 못한 보수
하루는 한 권사님이 목사님을 찾아왔다. “목사님, 제 딸의 결혼식 주례를 부탁드립니다.”
“네, 그러지요. 두 분 다 세례교인입니까?” “신랑은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권사님,ㅍ그럼 내가 주례를 설 수 없어요. 장로님께 부탁하십시오.” 주례를 못 서겠다는 대답을 들은 후부터 권사님의 마음이 변했다. 평소 목사님을 ‘큰 종’이라고 자랑하던 권사님이 목사님을 헐뜯기 시작했다. 권사님은 장로님들을 부추겨서 교회가 운영하는 신학교를 도와주면 안 된다고 했다. 목사님이 하면 안 되는 주례를 장로님은 해도 되는 것인가? 목사님이 사위가 될 청년을 미리 만나서 복음을 전해주고 세례를 받게 해서 결혼주례를 해줄 수는 없었을까. 청년을 구원하고 권사 가정도 돕고 목사님도 편안할 수 있었을 텐데…. 때로는 우리의 불필요한 형식주의와 보수주의가 삶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김상복 목사 (할렐루야교회)
▣ 세례에 관한 성경 말씀
0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3:16)
0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막 1:8)
0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 3:23)
0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2:41)
0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행 8:36)
0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 하리요 하고 라고 합니다. (행 10:47)
0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합니다. (벧전 3:21)
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분명한 말씀이 있습니다(사도행전 1:4∼5).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광야에서 세례 요한이 외쳤던 것을 부활 후에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 메시아만을 기다렸던 유대인들은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 세상에 머무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 하신 후에 예수님을 보았던 사람들이 무려 오백 명이라고 합니다(고린도전서 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예수께서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실 때
그런데
마가복음 3:11,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 참조 /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 참조 / 사도행전 11: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로마서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3: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골로새서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고린도전서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란도전서 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세례(洗禮)는 “물세례”와 “불세례”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세례(洗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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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세례 |
불세례 |
구원의 표(베드로전서 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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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세례’는 “요한의 세례” 라고 한다면 ‘불세례’는 “성령 세례”라고 합니다.
‘물세례’는 구원의 표가 됩니다(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불세례’는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사도행전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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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기록된 세례의 종류 : 물세례와 성령세례
Ⅰ. 성종현 목사가 말하는 세례의 종류
신약성서에는 첫째는 세례 요한의 세례(물세례), 둘째는 예수 제자들의 세례(요 4:1-2), 셋째는 불세례(마 3:11; 눅 3:16), 넷째는 성령의 세례(막 1:8; 행 1:5)가 언급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물세례는 회개와 정결, 불세례는 심판과 능력, 그리고 성령세례는 메시아의 구원과 영적 무장의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세례(물세례)와 성령세례(막 1:9-11)를 받으셨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세례 요한의 세례(물세례)와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았다(행 2:1-4).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은 성령의 오심으로 시작된다. 예수님은 성령 충만함을 받으신 후에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예수의 제자들도 성령의 불세례를 받은 후에 역사를 바꾸는 능력의 공동체로 탄생하게 되었다. (성종현 목사, ‘교회와 신학’ 장로회신학대학교 논문집 제26집 1994, p.228, 231)
이상에서 성종현 목사는 “물세례는 회개와 정결, 불세례는 심판과 능력, 그리고 성령세례는 메시아의 구원과 영적 무장의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고 하여 불세례와 성령 세례는 다르다고 하였고, 한편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았다. 예수의 제자들도 성령의 불세례를 받았다”라고 하여 성령세례와 성령의 불세례는 같은 뜻으로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세례의 종류를 “세례 요한의 세례, 예수 제자들의 세례, 불세례, 성령세례”의 4종류로 구분했다가, 성령의 불세례를 더 첨가하여 횡설수설한 주장을 하고 있다.
이렇게 모순된 주장을 하게 된 이유는 마 3:11, 눅 3:16에 나오는 “성령과 불세례,” 그리고 막 1:8, 요 1:33, 행 1:5에 나오는 “성령세례”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즉 성령 세례의 요소와 수단 그리고 도구에 대한 이해를 못하며, 막 1:8, 요 1:33, 행 1:5에서는 마 3:11, 눅 3:16에 나오는 ‘불’이란 단어가 생략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Ⅱ. 베이커 성경주석이 말하는 세례의 종류
가장 낮은 수준의 세례, 즉 물의 세례는 죄의 외적인 정화와 회개를 언급하며, 이와는 달리 성령의 세례는 믿음에 의한 내적인 정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의 세례는 그 특수한 본성으로 다시 태어난 보다 더 고상한 삶의 정화, 즉 변화를 표현한다(베이커 성경주석 ‘누가복음’[상] 157).
주제설교 : 불세례 성령강림. 유월절 다음에 오는 국가의 명절인 오순절 날은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는 약속에 놀랍게도 꼭 들어맞는다”(베이커 성경주석, ‘사도행전’ [상] p.102). 에베소 교인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오순절의 불세례가 물세례 의식의 반복을 불필요하게 했을 것이다. (베이커 성경주석 ‘사도행전’ [하] p.254)
이상에서 베이커 성경주석은 세례의 종류를 물세례, 성령의 세례, 불세례의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또한 행 1:5에 나오는 성령 세례를 오순절에 받았고, ‘에베소 교인들은 오순절의 불세례’라고 하여 불세례와 성령세례를 같이 취급하고 있다. 이상에서 세례는 세 가지로 구분했다가 여기에서는 두 가지로 구분하여 일치하지 않고 서로 모순되게 주장하고 있다. 이상의 “물의 세례는 죄의 외적인 정화와 회개를 언급하며, 이와는 달리 성령의 세례는 믿음에 의한 내적인 정화를 의미한다.”는 주장은 전혀 그릇된 것이다. 물세례는 내적인 죄의 정화 곧 회개를 위한 외적인 의식이다. 물세례는 내적인 죄의 정화를 위한 외적인 상징이다. 즉 외적인 물세례를 받을 때 내적인 죄의 정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물세례의 의미이다. 따라서 “성령의 세례는 믿음에 의한 내적인 정화를 의미한다.”는 주장은 천부당만부당한 그릇된 것으로 행 1:5, 행 1:8에 기록된 성령세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