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nykcn.org,2013:/posts 파트리스교회(πατρίς ἐκκλεσία) Patris Church (917)597-2322 이승혁목사(Pastor Victor Lee) 2019-08-25T17:21:13Z tag:nykcn.org,2013:Post/1448442 2019-08-25T17:21:13Z 2019-08-25T17:21:13Z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Ⅵ(요한계시록 20:6) 주일설교(2019-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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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48372 2019-08-25T12:24:11Z 2019-08-25T12:24:11Z 파크리스교회 주일 예배 안내


예배 장소 ; 동서데이케어센터

주소 ; 136-39 37Ave Flushing NY 1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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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48225 2019-08-24T22:54:10Z 2019-08-24T22:54:10Z 2018 브루클린 연합감리교회 가족 수련회 강의안

2018
브루클린 연합감리교회 가족 수련회

주제 / 고백과 성령(Confession & Holy Spirit)


성경 - 베드로전서 1:1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Be holy because I am holy.)

주제 찬송 / 15장 내 영혼 이제 깨어서


Sep. 1(Sat) ∼ 3(Mon)

Mt. Giles Conference Center

Add: 439 East Rinker Rd. Stroudsburg. PA 18360

Phone (570) 629-0920

1강(9월 1일) / 토요일 오후 6:30-9:20
☞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누가복음 5:1∼11)

2강(9월 2일) / 주일 오전 6:00-7:30

☞ 죄를 자백하자!(요한일서 1:9)

3강(9월 2일) / 주일 예배 오전 9:30-12:00

☞ 서로 사랑하자!(베드로전서 4:8)

4강(9월 2일) / 주일 오후 5:00-6:20

☞ 성령을 받았느냐?(사도행전 19:2)

5강(9월 3일) / 월요일 오전 6:00-7:30

☞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고린도후서 6:10)

6강(9월 3일) / 월요일 오전 9:30-12:00
☞ 예수의 흔적(갈라디아서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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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고백과 성령(Confession & The Holy Spirit)
성경 / 베드로전서(1Peter) 1:1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Be holy because I'm holy.
찬송 / 15장 내 영혼 이제 깨어서

고백(告白)
1. 마음속에 숨긴 일이나 생각한 바를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함
2. 죄를 용서받고자 고해 신부에게 죄를 숨김없이 밝힘

- 알릴 고(告), 고할 고(告)
- 말할 자 백(白)

성령(聖靈)
1. 성부 성자와 함께 성삼위의 하나

- 성스러울 성(聖), 거룩할 성(聖)
- 신령 령(靈)

Ⅰ. 역사적 의미
-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1938. 9. 9. - 신사참배 장로교단의 결의(27차 총회)
* 1948. 8. 15. -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8. 9. 9.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 공산정권 시작)
1958. 9. 9. - 북한의 교회 폐쇄
* 1994. 7. 8. - 김일성 사망 후 김일성 유훈 통치 대략 4년 동안
1998. 9. 9. - 김정일 정권 세습

9월 9일은 한국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날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사건들이 9월 9일에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9월 9일을 맞이하여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Ⅱ. 교회사적 의미
- 이민교회의 과제

1902. 12.  20. 첫 이민의 시작(102명), 58명은 인천 내리교회 교인(56.8%)

1903. 1. 12. 하와이 도착 후 기도의 제단을 쌓다(미주 한인 이민교회의 시작).

1903. 11. 미연합감리교회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조직하고 “하와이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 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Ⅲ. 성경은 고백의 말씀

(예화) 희랍의 민화 중에 ‘포대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
일생동안 밀가루 포대를 만들면서 늘 ‘내가 막아버렸지!’ 이렇게 중얼거리며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

밀가루 포대를 만들던 사람이 하루는 꿈을 꾸는데 넓은 들판에 수많은 샘들이 솟아나는데 특이한 것은 샘마다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들판을 지키는 사람에게 샘물에 쓰여 있는 사람의 이름과 샘은 무슨 의미인가? 하고 물었더니 샘에 쓰여 있는 이름은 그 사람이 샘물이 솟아나는 것만큼 복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밀가루 포대 만드는 사람은 넓은 들판에서 자기 이름이 쓰여 있는 샘을 찾았는데 샘에서 물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주위에 다른 샘에서는 물이 콸콸하고 잘 나오고 있었다. 밀가루 포대 만드는 사람은 이 샘이 막혀버렸구나! 그렇다면 내가 샘을 뚫어줘야지 하고 긴 장대를 갖고 자기 이름이 쓰여 진 샘의 구멍에 긴 장대를 넣고 마구 쑤셨다. 그리고 장대를 뽑았더니 순간적으로 흙탕물이 솟구치더니 그나마 졸졸 나오던 물마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서 눈을 떴는데 꿈이었다. 참 이상한 꿈이구나! 하고 아침을 맞아 평소와 다름없이 가게 문을 열고 열심히 밀가루 포대를 만들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그 마을을 민정 시찰하던 어진 왕이 그 가에 앞을 지나가며 밀가루 포대 만드는 사람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주위 사람들에게 묻기를 “왜 저 사람은 하루 종일 내가 막아버렸지!” 하며 웅얼거리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말하기를 “저 사람이 참 착합니다. 거짓을 모르고 속일 줄도 모릅니다. 너무 정직해서 저렇게 어렵게 지낸다.”고 하였다. 어진 왕은 그날 저녁 신하에게 밀가루 포대 만드는 사람의 집에 왕이 먹는 빵을 한 접시 만들어 보내라고 하였다. 왕의 신하가 보낸 빵을 받은 사람이 한 접시의 빵으로는 우리 식구 한 끼 정도의 식량밖에 안 되니 차라리 빵집 주인에게 이 빵은 왕궁에서 만든 왕의 식탁에 올라가는 아주 맛있는 빵인데 내가 이것을 줄 테니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주겠소? 하고 제안을 하자 빵집 주인은 당신 가족들이 한 주일 동안 먹을 수 있는 빵을 제공하겠다고 한다. 밀가루 포대 만드는 사람은 역시 나는 머리를 잘 굴리는구나! 하며 앞으로 일 주일은 빵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며 가족들에게 자랑하였다.

얼마 후 어진 왕이 그 가게 앞을 지나가는데 여전히 “내가 막아버렸지!” 하며 중얼거리는 밀가루 포대 만드는 사람의 말을 듣고는 아직도 부족한가 하며 그날 저녁 신하에게 궁궐에서 왕이 먹는 맛있는 과일 한 접시를 보냈다. 그러자 밀가루 포대 만드는 사람은 또다시 머리를 굴려 과일도 늘 먹던 사람이 먹어야지 평소에 먹지 않던 과일을 먹으면 배탈이 날 수 있으니 차라리 과일을 과일가게 주인에게 가져간 후 임금님이 보내주신 과일인데 당신은 내게 무엇을 주겠느냐? 하고 제안하였더니 과일 가게 주인은 당신 가족들이 평소에 먹던 과일을 일주일 동안 먹을 수 있는 만큼 가져가라고 한다. 밀가루 포대 만드는 사람은 역시 사람은 머리를 굴려야 한다며 가족들에게 자랑을 하였다.

그리고 또 얼마 후 왕이 그 가게 앞을 지나가는데 여전히 “내가 막아버렸지!” 하며 웅얼거린다. 왕은 또다시 신하에게 이번에는 금화가 가득한 자루 하나를 밀가루 포대 만드는 사람이 가게에서 집으로 가려면 반드시 작은 다리 하나를 건너야 하므로 그 다리 중간에 자루를 놓고 기다렸다가 그 사람이 집으로 갈 때 들고 가도록 지키라고 하였다. 집으로 돌아가던 밀가루 포대 만드는 사람이 다리 앞에 서더니 평생토록 건넌 다리가 아닌가! 오늘은 눈을 감고 건너야지 하고 두 눈을 감고 다리를 건너가므로 다리 중간에 있던 금화가 가득한 자루를 볼 수 없었다. 결국 그 자루를 신하가 다시 들고 와서 왕에게 내려놓자 왕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하고 묻자 신하는 자기가 본 그대로 설명하였다. 그러자 왕은 할 수 없구나! 그 사람의 복은 그것뿐이구나! 하고 더 이상 밀가루 포대 만드는 사람에게 아무 것도 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빵을 만들던 사람은 도대체 왕이 먹는 빵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하고 빵을 잘랐더니 그 안에 금화가 감추어져 있었다. 또한 과일 가게 주인은 도대체 왕이 먹는 과일은 어떤 맛일까? 하고 과일을 잘랐더니 그 안에 역시 금화가 있었다. 결국 빵집주인과 과일가게 주인만 부자가 되었다.

오늘 2018년 수련회를 시작하는 첫 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무슨 복을 내려주셨는지 확인할 수 있다면 이제까지 신앙생활을 하였던 것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생명입니다. 그 생명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It is as if the dew of Hermon were falling on Mount Zion. For there the LORD bestows his blessing, even life forevermore.)

영생이란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육체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을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백이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구약과 신약에서 대표적인 고백을 소개합니다.

☞ 욥의 신앙고백(욥기 23:10)

-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But he knows the way that I take; when he has tested me, I will come forth as gold.) 

* 욥기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My ears had heard of you but now my eyes have seen you.)   

☞ 백부장의 신앙고백(마태복음 8:8)

-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The centurion replied, Lord, I do not deserve to have you come under my roof. But just say the word, and my servant will be healed.)

* 마태복음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When Jesus heard this, he was astonished and said to those following him, I tell you the truth, I have not found anyone in Israel with such great faith.) 

* 마태복음 8: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대로 될찌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Then Jesus said to the centurion, Go! It will be done just as you believed it would. And his servant was healed at that very hour.)   

송재천목사와 아들 송문호

뇌에 이상이 생겨 수술 후 시력을 잃었다. 사춘기 소년에게 찾아온 불행한 사건이었는데 송문호군의 고백은 “세상의 온갖 더럽고 추한 것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하시려고 시력을 가져 가셨다.”

소년의 입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고백의 믿음을 갖는 사람에게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나.

이상현박사와 아들의 죽음

아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 길가의 도랑에 빠져 죽은 상태로 발견되었을 때 신학자로서 목사로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슬픔에 갈피를 잡지 못할 때 미국인 교수가 저녁마다 찾아와서는 거실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몇 시간 동안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책을 읽고 가더랍니다.

그런데 한인교회 목사와 교인들은 와서 찬송을 부르고 위로하고 기도하는데 도저히 마음의 위로가 안 되고 평안이 없었다고 합니다. 미국인 교수가 처음에는 참 이상하구나! 생각했는데 일주일을 계속하여 거실을 지키는데 그 때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지켜보시겠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는 슬픔을 당한 가정에 찾아가서 찬송하고 성경을 찾고 설교하는 것보다 그 곁에서 진심으로 함께 하는 위로가 참된 위로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클레이풀 교수의 고백

미국의 철학자인 클레이풀 교수가 한 친구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그곳에서 두 팔과 두 다리가 없는 친구의 여동생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소녀는 기형아였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정서가 발달해 음악과 미술에 조예가 깊었다. 클레이풀이 소녀에게 물었다.

내가 네 처지였다면 아마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이 너를 이렇게 밝은 얼굴로 바꾸어 놓았는가? 소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내가 가진 것은 너무 많아요. 음악을 듣고 명작을 읽을 수 있는 귀와 눈이 있어요. 가족과 친구들의 사랑도 있구요.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내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물이 많은데 왜 내가 슬퍼해야 하나요?

클레이풀 교수는 소녀의 고백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신앙의 위대한 능력을 깨닫고 복음을 받아들였다. 복음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 심지어 사람의 표정까지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표정이 우울한 신자는 자신의 삶을 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의 고백이 주위에 누군가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믿음의 길을 길었던 우리들이 이 시대에 고백을 회복하므로 이제까지 누릴 수 없었고 경험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스펄전의 고백

위대한 설교가로 알려진 스펄전(C. H. Spurgeon)은 그의 생(生)의 말년에 투병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 때 한 성도가 병문안을 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목사님, 많이 아프시죠?” “네. 너무 아픕니다. 이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가 이렇게 아플수록 더욱 가까이 제 곁에 와 계십니다.” 그는 자신의 힘든 고통 가운데서도 놀라운 주님의 사랑의 체험을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히틀러 경호원 쿠르트 바그너의 고백

히틀러의 경호원 중에 쿠르트 바그너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히틀러를 신처럼 숭배했는데 전쟁이 끝날 무렵 히틀러가 자살하자 자신의 인생도 붕괴되는 것을 깨닫고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커피 한잔을 마시려고 하던 중 전도책자를 보고 집어 들었다가 끝까지 다 읽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크게 변화되었다.

진정한 삶의 의미와 경배대상을 찾은 그는 바로 부근의 목회자를 찾아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이때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예수님은 구세주이시며 평화의 주인이시다.”

성경은 성령의 말씀
- 성령은 깨닫는 영이다!

(도입 이야기) 나의 출생과 목회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내 모습을 알게 된 그 때의 모습

조부 이성봉장로(윤봉선), 외조부 김창하장로(백애제)
부 이영복장로, 모 김은신권사
아들을 낳으면 목사로 바치고, 딸을 낳으면 전도사로 평생 독신으로 살아라.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후에 6. 25 전쟁이 일어났고 그 시대에 어머니의 젖을 빨면 젖지 나오지 않아 헛배가 불렀다고 합니다.

1. 급성 폐렴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생명
출생 후 여덟 달이 지나 한국전쟁(1950. 6. 25)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제대로 먹지 못하여 영양실조에 급성폐렴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은 후 목사로 바쳤으니 죽어도 교회 강단 앞에서 죽어야 한다며 강단 앞에 내려놓고 밤새도록 눈물로 기도하셨던 어머님. 다음 날 아침 열이 내리고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어서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가 하는 말은 ‘무슨 약을 사용했느냐? 이 난리 통에 그런 약이 있다면 돈을 벌 수 있다며 동업을 하자고 제안하더랍니다. 그때 예, 다른 특별한 약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신구약을 썼습니다.

2. 자동차 사고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생명
유치원 때에 당시 경전병원장의 지프차 뒤에서 여자 아이와 함께 있었는데 여자 아이는 그 자리에서 즉사(엄마가 죽은 딸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머리가 깨져 골이 머리 밖으로 나온 것을 안고 다녔다). 마침 내가 병원 응급실에서 진료를 마치고 병원 밖으로 나오는데 죽은 딸을 안고 있던 엄마가 나를 보더니 달려오며 너는 살았는데 내 딸은.......하며 내게로 달려오는 것을 보고 즉시 병원 안으로 들어갔었다.

3. 고압선에 감전되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생명
초등학교 때 등교하려고 학교로 가는 길에 마침 대한석탄공사 건물 신축 중 4층 위에서 시멘트 강화벽으로 세웠던 판자를 제거하는 중에 고압선을 끊어 그 아래에 지나가던 내 왼쪽으로 스쳐 지나갔고 나는 잠시 그 자리에서 쓰러져 허우적거리다 다시 일어나 학교로 갔는데 왼편 발 옆이 터져있었고 기적적으로 살았습니다.

이번 수련회는 제가 주님의 부름에 대한 소명과 사명을 확인하려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과정에서 함께 내게 역사하셨던 주님의 은혜와 앞으로 인도하실 주님의 은혜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2000년 7월 4일 저희 가족들이 뉴욕 존 에프 케네디 공항으로 이민자로 첫 출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큰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작은 아들은 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당시 제 나이가 50이었습니다. 주위에서는 늦은 나이에 왜 미국으로 가려는가? 하는 부정적인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이 미국으로 가서 공부하겠다고 합니다. 큰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에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앞으로 목사가 되려면 좀 더 넓은 세계에 가서 일찍부터 공부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큰 아들의 국민학교 담임선생이 “사무엘아, 너무 참 좋겠다. 일찍부터 너의 목표가 정해졌고 그 목표를 위해 아버지가 너를 뉴욕을 보낼 수 있는 여건이 되는구나! 앞으로 유명한 목사가 되거든 선생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당시는 조기 유학이라는 것을 생각도 할 수 없는 때 이었습니다. 마침 저희 교회에 세브란스 병원 내과 과장 이선주 집사님이 뉴욕의 국제 면허증을 갖고 세브란스 외국인 진료소에서 근무하는 인요한박사가 있다며 그 분을 소개하여 뉴욕시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신체검사 및 예방 접종에 대한 서류를 준비하여 뉴욕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바로 학교 입학시켰습니다. 당시 아들이 입학했던 학교가 Rego Park에 있는 학교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나는 다시 서울로 나갔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큰 아들이 고등학교를 마치자 이제는 뉴욕으로 다시 보내달라고 합니다. 그때 제가 아들에게 지금은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너 혼자는 보낼 수 없다. 만일 네가 원한다면 다른 가족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작은 아들 다니엘은 선천적인 장애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한국에서는 자베트 신드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뉴욕에 와서 다시 검사한 후에 댄디 워커 신드롬이라고 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사람의 머리에 큰 뇌와 작은 뇌가 있는데 이 병은 작은 뇌의 일부가 물로 채워져 있는 병이라고 합니다. 원인은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장애인 학교에 입학을 해야 하는데 작은 아들이 장애인 학교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여 특수학급이 있는 일반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아들 때문에 제가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학교운영위원장을 2년 동안 맡았습니다.

뉴욕으로 이주하게 된 배경은 세브란스 병원 담당 의사가 뉴욕시에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으므로 다니엘에게 맞는 과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여 뉴욕으로 결정했습니다. 물론 당시 저희 부모님과 제 동생 세 명의 가족들 모두 뉴욕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 뉴욕 생활의 출발이었습니다.
저희가 한국미대사관에서 7월 3일에 영주권을 받고 그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뉴욕에 도착했는데 그 날이 7월 4일이었습니다.

저희 가족들이 뉴욕 행 대한항공 비행기에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뉴욕에서 목회자로 살아가는 것이 모두들 어렵다고 합니다. 만일 목회를 전념하지 못하면 다른 것에 관심을 갖고 결국은 세상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사오니 무슨 이이 있든지 목회가 우선이 되게 하시고 목회를 하는 동안 목회자 사례는 매월 $1000만 받겠습니다. 이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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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9월 1일 오후 6:30∼7:30)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누가복음 5:1∼11)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When Simon Peter saw this, he fell at Jesus' knees and said, "Go away from me, Lord; I am a sinful man.

세상에서 가장 길면서도 가장 짧은 것은?

가장 빠르면서도 가장 느린 것은?
가장 작게 나눌 수 있으면서도 가장 길게 늘일 수 있는 것은?
가장 하찮은 것 같으면서도 가장 회한을 많이 남기는 것은?
그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사소한 것은 모두 집어삼키고,
위대한 것에는 생명과 영혼을 불어넣는 그것,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시간(時間)입니다.
영국의 과학자 마이클 패러대이(Michael Faraday, 1791. 9. 22∼1867. 8. 25)가 남긴 말입니다.

시간에 대한 두 가지 용어를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크로노스(Chronos)
둘째는 카이로스(Kairos)

크로노스는 자연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말합니다. 해가 뜨고 해가 지면 하루가 지나고,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나면 일 년이 지나갑니다. 지나간 인류의 역사를 크로노스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크로니클(Chronicle, 연대기) 이란 영어 단어가 크로노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하여 진행합니다. 예를 들면 해마다 나이가 한 단계씩 올라갑니다. 내 의지가 아닙니다. 이와 같은 시간을 크로노스 즉 일상적인 시간을 의미합니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카이로스입니다. 카이로스는 특별한 시간을 말합니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간이고,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이루는 시간입니다. 크로노스가 모두의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나만의 특별한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왜 우리에게 카이로스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파스칼(Pascal) 인간은 중간적 존재

시간적으로 과거와 미래의 중간 현재
공간적으로 하늘과 땅의 중간 땅위에서 활동
형태적으로 하나님도 아니고 천사도 아닌 인간

2018년 가족수련회의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을 회복하기 위하여 사도 베드로의 생애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베드로의 생애를 살펴보면 베드로에게서 세 가지 고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 가지 고백이란 죄의 고백과 믿음의 고백 그리고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첫째는 죄(罪)의 고백 / 누가복음 5:10
둘째는 믿음(信)의 고백 / 마태복음 16:18
셋째는 사랑(愛)의 고백 / 요한복음 21:15, 16, 17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고백에 따른 특별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죄의 고백에 대한 말씀

누가복은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죄에 대한 고백에 대해서 사람을 취하리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선택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5:10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죄(罪)란 무엇인가?

허물 죄(罪)의 한자를 파자하면 넉 사(四)와 아니 비(非)자의 결합이 된 것입니다.
네 가지 아닌 것들에 대해서 성경에서 찾아봅니다.

죄(罪)라는 한자는 두 사람이 등을 돌린 상태를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아담은 하와를 향하여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라고 감격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후에 아담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저 여자 때문’이라고 잘못의 원인을 여자에게 돌렸습니다. 등을 돌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언제나 등을 돌린 우리들을 지켜보십니다. 주님이 등을 돌리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불신(不信) 요한복음 16:9, 마가복음 16:16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In regard to sin, because men do not believe in me.)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Whoever believes and is baptized will be saved, but whoever does not believe will be condemned.)  

불선(不善) 야고보서 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Anyone, then, who knows the good he ought to do and doesn't do it, sins.   

불의(不義) 요한일서 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All wrongdoing is sin, and there is sin that does not lead to death.

불법(不法)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Everyone who sins breaks the law; in fact, sin is lawlessness. 

죄의 특징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For all have sinned and fall short of the glory of God.  

믿음의 고백에 대한 말씀

마태복음 16:18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믿음에 대한 고백에 대해서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이란 한자는 믿을 신(信)
믿을 信자를 파자하면 사람 인(人)과 말씀 언(言)

1968년 여름 가나안농군학교 고등학생으로 입교하여 특수훈련을 받을 때 식사 때마다 반드시 암기해야 하는 열 가지 구호가 있었습니다. 그 구호 중에 ‘한마디의 말이 약속어음이 되어야 한다.’ 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이며 철학자이었던 윌리암 제임스의 명언


생각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말이 되기 때문이다. 

말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행동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습관이 되기 때문이다. 

습관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인격이 되기 때문이다. 

인격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생각을 바꾸면 말이 바뀔 것이다.
말을 바뀌면 행동이 바뀔 것이다.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뀔 것이다.
습관을 바꾸면 인격이 바뀔 것이다.
인격을 바꾸면 인생이 바뀔 것이다.

☞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믿음은 맡기는 것입니다.
어떻게 맡길 수 있습니까?
기도로 맡겨야 합니다.

빌립보서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petition, with thanksgiving, present your requests to God.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Cast all your anxiety on him because he cares for you. 

시편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Cast your cares on the LORD and he will sustain you; he will never let the righteous fall.)      

믿음이란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맡기다는 히브리어 단어는 ‘솰라크’ 라고 합니다. 솰라크의 뜻은 ‘던지다’ ‘신뢰하다’입니다. 즉 신뢰하므로 모든 짐을 던져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산꼭대기로 커다란 둥근 돌을 밀고 올라가서 반대편 방향으로 밀어버리는 것입니다. 높은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결코 간단하고 쉬운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긴장해야 하고 둥글고 큰 돌이 다시 원위치로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마쳐야 맡겨 버리는 것이 됩니다.

어려운 문제를 맡겨야 합니다.
시각장애인 교수 김기현집사(연대 94학번)
대학 입학 후 턱 부정교합 수술 중 실명하여 중도 실명자가 되었다. 기독교 교양 과목을 가르치는 김정주교수의 도움을 받아 졸업하기 전에 배우자를 위한 기도를 시작하였다.
1. 실명하지 않는 남자
2. 요리를 잘 하는 남자
3. 아이를 잘 양육하는 남자
4. 시댁의 가족들이 시각장애인을 이해할 수 있는 가족
5. 예수를 잘 믿는 남자
6. 나이 차이가 3살 터울로 위 또는 아래의 남자
7. 생활 능력이 있는 남자
8. 가정적인 남자
9. 미국 유학을 갈 때 같이 가서 도와줄 수 있는 남자


시력이 온전한 여자일지라도 이런 조건을 갖춘 남자를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위에서는 모두 아니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믿음을 갖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도움을 주던 김정주교수도 그것은 아니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결혼하기 전에 나이 차이가 6살 터울이라 기도 제목에서 어긋났으므로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결혼 후에 깨닫게 된 것은 나이 차이가 3살 터울이면 자주 다투고 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보스톤 대학에 유학을 한 후 장애인 재활 상담학을 전공하고 평택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사랑의 고백에 대한 약속

요한복음 21:15, 16, 17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Agapao)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Agapao)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Phileo)

요한복음 21:15, 16, 17
내 어린 양을 먹이라(Feed my lambs.)
내 양을 치라(Take care of my sheep.)
내 양을 먹이라(Feed my sheep.)    

사랑 애(愛)
사랑 애(愛)자에 대한 해석이 두 가지로 소개됩니다.

첫째는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것
둘째는 힘들고 괴로워도 참는 것

사랑에 대한 한문자의 두 가지 정의를 이해하려면 사랑 애(愛)자를 분석해야 합니다.
  
사랑 애(愛)자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손톱 조(爪), 덮을 멱(冖), 마음 심(心), 뒤져올 치(夂)

그런데 사랑 애(愛)자의 고어는 마음 심(心)을 중심으로 윗부분과 아랫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랑 애(愛)자의 윗부분은 다시 목메일 기(旡)자와 마음 심(心)의 합자라고 중문자보에서 소개합니다.

첫째는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것

사랑을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유는 사랑 애(愛)자가 한문자 받을 수(受)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둘째는 힘들고 괴로워도 참는 것
사랑을 힘들고 괴로워도 참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유는 사랑 애(愛)자가 한문자 사랑 애(愛)자의 윗부분은 목메일 기(旡)자와 마음 심(心)의 합자라고 중문자보에서 소개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랑에 대한 고백에 대해서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말씀하셨습니다.

☞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히 사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대학시절 교양 과목을 수강할 때 여러 문학부 학생들이 함께 강의를 듣습니다. 그런데 영문과 여학생을 사모하는 철학과 학생이 한번 만나게 해 달라고 사정을 하여 그 여학생을 만나서 자세하게 설명을 한 후 두 사람이 당시 시청 앞에 있는 어느 다방에서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습니다. 그때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사랑을 고백했을 때 있었던 사례를 소개합니다.
고백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통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살펴보면 일방적인 고백을 자주 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습니다. 올바른 고백에 대해서는 분명한 약속과 축복이 있습니다.

죄의 고백에 대해서는 제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고백에 대해서는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고백에 대해서는 내 양을 먹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18년 수련회의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크로노스와 같은 일상적인 시간 속에서 카이로스와 같은 주님의 은총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복된 시간으로 새겨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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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강 9월 2일(주일) 오전 6:00∼7:30

죄를 자백하자!(요한일서 1:9)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to forgive us our sins, and to cleanse us from all unrighteousness.   

속담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라는 말처럼 어제 함께 나누었던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베드로의 신앙여정에서 세 가지 고백을 소개했습니다.

첫째는 죄의 고백

죄를 고백했을 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분의 변화가 되었습니다. 어부에서 제자 또는 사도가 된 것입니다. 

둘째는 믿음의 고백

믿음을 고백했을 때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직분의 변화가 되었습니다. 어장을 관리하던 어부가 이제는 교회에서 교인들을 관리하는 목자가 된 것입니다.

셋째는 사랑의 고백

사랑을 고백했을 때는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을 먹이라는 말씀은 베드로에게 주신 특별한 사명을 말합니다.

상급의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어부는 어부로서 일생을 마쳐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양을 먹이는 목자는 주님 나라의 상급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받은 상급은 순교의 반열에 세워진 것입니다.

왜 죄를 고백해야 하는가?
어떻게 죄를 고백해야 하는가?

자백이란 단어를 헬라어로 호모로게라고 합니다. 호모로게는 같다는 뜻의 호모와 말한다는 레고라는 두 개의 단어가 결합하여 하나의 단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자백은 자기의 죄를 아뢰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지은 죄를 내가 모두 기억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은 잊어버린 것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호모로게라는 단어는 내가 지은 죄를 내가 모르지만 하나님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억하고 있는 그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자백이 온전한 회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는 죄를 내가 깨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내게 임하여 나로 하여금 내가 지은 모든 죄를 기억나게 합니다. 따라서 자백이란 내 의지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내 죄를 고백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렇게 자백했습니다.
이제까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잘 잡는 사람은 베드로이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이런 것이 기적입니다.

(예화) 동해안 울산해안경비사령부, 해안경비 초소 내무반원들에게 주일마다 심방하고 성경을 가르칠 때 울산의 낚시꾼들이 제게 부탁하기를 해안가에 들어가서 낚시를 한 번 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하여 해안경비사령관의 허락을 받아 교회 청년들과 낚시꾼들이 낚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 아무도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 다니엘이 던진 낚시에 물고기 한 마리가 올라왔습니다. 유치원에 다니던 아들이 고기를 잡는 순간 모두 와! 하고 소리쳤습니다.

왜 베드로는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겠습니다. 섭리란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주권을 말합니다.

자백하기 이전에도 주님은 나와 함께 하셨습니다. 다만 내가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도 없었고 믿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백이 이루어진 후에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화) 신입 사병들이 훈련소와 특수학교에서 과정을 마치고 부대로 전입해 오면 인사과에서 사병들을 주특기에 따라 분리하여 예하 부대로 보냅니다. 한번은 여러 사병들이 전입신고를 하려고 준비할 때 먼저 신병들의 소지품 검사를 합니다. 대부분 주머니에서 모든 소지품을 모자를 벗어 그 안에 담게 합니다. 그러면 신병들은 순식간에 모든 소지품들을 모자에 담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책상 앞에 서게 한 후에 모자에 담았던 소지품들을 책상 위에 쏟아 놓게 합니다. 그리고 자대생활에 필요한 것은 소지할 수 있도록 다시 돌려주고 자대생활에 필요하지 않는 것은 인사과에 보관하거나 아니면 배치를 받는 부대의 지휘관에게 전달하여 관리하도로 합니다. 한번은 어느 사병의 소지품 중에서 사용할 수 없는 볼펜이 나왔습니다. 그 사병에게 이 볼펜 써지지 않는다. 버려도 되는가? 하고 물었더니 예 버려도 됩니다! 하고 큰 소리로 대답합니다. 그래서 쓰레기통으로 볼펜을 던져 넣는데 그 사병의 눈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볼펜을 지켜봅니다. 뭔가 이상하다는 예감이 있어서 볼펜을 다시 꺼내 볼펜을 분리하였더니 그 안에 만 원짜리 지폐가 똘똘 말아서 대략 10만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사병에게 돈이 있으면 맡기라고 하였는데 왜 맡기지 않았는가? 물었더니 혹시 자대에 배치되면 고참들이 돈을 빼앗을까 하여 감춘 것이라고 합니다. 사병에게 인사과에 돈을 맡겼다는 증서를 발급하고 사병의 사인을 받은 후에 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우리들에게 신앙생활에 필요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 버리는 것이 자백이며 회개라고 하겠습니다.

회개(Shoov 슈브)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마음속에 모셔 드리며 주님을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순간 인간은 영은 중생(born again)하여 영적으로 변화된 상태(change of status) 즉 미크바(Mikvah)가 된다. 이렇게 될 때 죄인이 구원 받고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세계를 함께 누릴 예슈아의 신부가 되는 것이다.

히브리 뿌리를 통해서 본 회개는 참으로 구체적이다.

회개를 슈브(ב ש)라고 합니다.
슈브는 신(ש)은 ‘파괴 시킨다(destroy)’는 뜻이며,
베트(ב)는 ‘집(the house)’ 이란 뜻입니다.
즉 예전에 살던 집(베트) 즉 옛 성품과 구습과 행동은 불로 태워 신(신) 부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시 옛집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고대 히브리 글자의 모양과 뜻은 우리에게 회개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원래의 뜻은 정복자가 모든 포로들을 귀화시키기 원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만약 포로들이 자기가 살던 옛 고향 집을 사모하고 돌아가려고 한다면 이 계획을 이룩할 수 없게 된다.

과거와의 인연을 완전히 분쇄시키기 위해 정복자는 포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그들이 살던 옛집을 완전히 불태워 버려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한다.

이 같은 배경에서 “회개(Return, Repentance)” 란 말이 비롯되었다. 즉 돌아갈 옛 집이 없으면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옛 성품을 완전히 부숴뜨려야 구습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때가 바로 진정한 회개한 상태다

회개라는 헬라어 단어는 ‘메타노이아’ 라고 합니다. 메타노이아의 의미는 ‘과녁에서 벗어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소요리문답 첫 번째 질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라고 합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영화롭게 한다. 영화롭게 한다는 것을 영광 돌린다고 말합니다.
영광(榮光)이란 한자어를 파자합니다.
불 화(火), 덮을 멱(冖), 나무 목(木).
나무 목(木)자는 사람 인(人), 열 십(十)자가 합성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반드시 내가 십자가를 감당한 후에 그것을 짊어지고 완전히 불에 타 없어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랑과 인정받으려고 몸부림을 치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예화) 이솝 이야기 중에 머리가 좋은 개구리와 독수리라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하늘을 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 개구리가 머리는 좋았지만 결국 자기 자랑 때문에 그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는 것은 비록 개구리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교훈입니다.

마태복음 16:24b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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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강 9월 2일(주일) 오전 9:30∼12:00

서로 사랑하자!(베드로전서 4:8)

그동안 함께 나눈 말씀들을 정리해봅니다.

베드로에게는 세 가지 고백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죄인의 고백(신분의 변화, 사람을 낚는 어부)
둘째는 믿음의 고백(직분의 변화, 교회의 일군)
셋째는 사랑의 고백(상급의 변화, 세상의 안일한 삶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누릴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순교자의 반열에 세워진 것)


그러므로 자백을 해야 합니다. 자백이란 내가 기억하는 죄를 아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억하고 있는 것을 성령의 도움을 받아 모두 고백하는 회개를 말합니다. 회개는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방향을 바꾸려면 입으로만 인정하는 것이 안리 몸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삶을 통하여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인가요?
정말 사랑해 보셨습니까?

(도입 이야기) 전도사 시절 중고등학교 학생을 맡았을 때 어느 중학교 여학생이 찾아와서 상담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 중학교 여학생의 고민은 언니가 있는데 언니가 너무 밉다고 합니다. 이유를 들어보면 언니는 수시로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라면도 끓여 먹고 전축을 틀어놓고 놀기도 하는데 한번은 시험이 끝나는 날 언니처럼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라면도 끓이고 떡볶이도 만들어서 맛있게 먹고 놀고 있는데 언니가 학교에서 일찍 돌아와서 친구들 앞에서 ‘다 나가!’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친구들 앞에 너무 미안할 뿐 아니라 동생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는 행동 때문에 그때부터 언니가 미워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 여학생에게 언니가 죽으면 좋겠느냐? 하고 물었더니 죽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제가 한 가지 좋은 방법이 있는데 오늘부터 너하고 나만 아는 비밀 처방을 할 테니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다짐한 후에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 요한일서를 읽고 하나님, 우리 언니 빨리 죽여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두 주간이 지난 후 그 여학생이 찾아와서 전도사님 우리 언니 죽으면 안돼요! 언지 죽지 않게 해 주세요! 라고 말합니다. 드디어 주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제가 그 여학생에게 왜 언니가 죽으면 안 될까? 언니가 미워서 죽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그랬더니 성경을 읽어보면 읽어볼수록 내가 죽어야지 언니가 죽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면서도 그 사랑은 철저하게 이기적인 사랑이었지 희생적인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전개 이야기) 온산공업단지에서 교회를 시작할 무렵 그 지역은 학성 이씨 문중 마을입니다. 당시 이후락씨 선조의 묘가 도로가 에 크게 자리 잡고 있는 마을입니다. 그런 마을에 교회가 세워졌으니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싫어했는지 교회를 세우면 또 헐러버리고 세우면 헐어버리고 이러기를 반복하던 중 처음 교회를 시작하던 목사님을 부산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제게 연락이 와서 주일에 설교를 부탁하여 주말이면 서울에서 울산으로 향하는 고속버스를 타고 울산에 내려가서 다시 온산공업단지가 형성된 공장 지대에서 벗어난 마을에 세워진 교회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월요일 새벽에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세워진 위치가 그 마을 당수나무가 있는 바로 옆입니다. 당수나무가 당시 소나무로 수령이 대략 240년 이라고 합니다. 왜 당수나무인가 하고 물었더니 마을 사람들의 대답이 사라호 태풍 때 온 마을이 물에 잠겼는데 소나무는 물에 감긴 후에도 그대로 그 자리에 흔들림 없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당수나무가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 마을을 부도하는 서울 무당이 있는데 그 무당이 마을 사람들에게 당수나무 옆에 교회가 있기 때문에 마을이 평온하지 못하다며 마을 굿을 해야 한다고 마을 사람들을 충동질 하던 때입니다.
매월 정월 대보름이 되면 당수나무에 동제를 지내려고 마을 사람 중에서 제를 맡아서 지낼 제관을 선출하고 제관은 한 밤중에 목욕하고 당수나무 앞에 제를 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마을 이장이 교회에 찾아와서 교인들에게 오늘 제를 지내야 하니 교회 전기불을 빌려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교인들은 목사님, 절대로 전기 빌려주면 안 됩니다. 어떻게 우상 제사를 지내는 곳에 교회 전기를 빌려줄 수 있습니까? 그리고 교회를 세울 때 얼마나 우리들을 힘들게 했습니까? 그러므로 절대로 교회 전기불 빌려주면 안 됩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교인들의 이야기가 일부는 맞지만 전부가 맞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교인들에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제관이 제사 음식을 바칠 때 다른 불도 아니고 교회 전기불이 그곳에 비추이니 귀신들이 오겠습니까? 절대로 귀신은 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전기를 빌려주고 돈도 받으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을 제게 맡기시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시든지 아니면 교회에서 철야기도하시든지 편하게 하세요. 그러자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서울무당이란 사람이 동네 사람들에게 당수나무 귀신이 마을 떠났으니 다시 당수나무 귀신을 불러와야 하므로 큰 마을 굿을 준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당시 대략 300만원이 필요한 굿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런 돈을 지불합니까? 아무도 나서지 않습니다. 그때 제가 마을 이장에게 교회에 와서 예배하면 돈이 필요 없습니다. 아무 때나 오셔서 예배하면 좋습니다. 더구나 교회 전기불 잠깐 사용했는데 도망가는 귀신이라면 뭣하러 그런 귀신을 섬겨야 합니까?


기독교의 사랑이 정말 놀랍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은 성도들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 너무나 이기적입니다.

(전개 이야기) 시주를 받으려고 문을 두드린 어느 스님과의 이야기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기독교의 사랑은 덮어주는 것입니다. 덮어준다는 것은 용서를 의미합니다. 기독교에는 용서가 있지만 불교에는 요서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있는 그 어떤 것도 죽일 수 없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조상으로 오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덮어주는 사랑을 확인해 봅시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손수 만드신 가죽 옷으로 아담과 하와를 덮어주셨습니다.

노아 시대가 죄악이 세상에 가득한 곳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노아에게 잣나무를 켜서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방주 안과 밖에 역청을 바르게 하셨습니다. 역청이란 몰론 요즘으로 골타르와 같은 방수용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보 역철청을 카파르 라고 합니다. 카파르는 속죄를 의미하는 덮어준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430년 동안 고역에 시달 릴 때 열 가지 재앙이 임했습니다. 마지막 재앙이 임하기 전에 장자와 초태생의 죽음을 말씀하셨는데 이 재앙에서 안전하려면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피를 보고 재앙이 넘어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유월절의 시작입니다.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중에 ‘다 이루었다!’ 라는 말씀은 이제까지 덮어주기 위하여 하나님이 행하셨던 모든 것을 완전히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테텔레스타이(요한복음 19:30)

유대인들이 제물을 바치려고 가져왔을 때 제물을 검사하는 제사장이 그 제물이 흠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 테텔레스타이 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은 속죄의 완전한 제물이셨습니다.

화가가 그림을 완성한 후 그림의 한쪽 구석에 사인을 합니다. 이때 화가는 테텔레스타이라고 말합니다. 그림을 완성하였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창조 후에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원의 그림을 완성하셨습니다.

빚을 진 사람이 모든 빚을 다 갚은 후에 채무자에게 외치는 말이 테텔레스타이 라고 합니다. 이제 모든 빚은 다 갚았다!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원수 사탄 마귀에게 붙잡혀 있던 모든 죄의 빚을 다 해결하신 것입니다.

심부름꾼이 심부름을 모두 마친 후 자신을 보낸 주인에게 돌아와서 하는 말이 테텔레스타이입니다. 심부름을 잘 마쳤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짊어지셨던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습니다. 그 어린 양이 이제는 모든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십자가의 현장으로 우리들을 부르셨습니다.

“죽는 게 두려운 것이 아니다. 한 번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게 두려운 것이다.”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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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강 9월 2일(주일) 오후 5:00∼7:30

성령을 받았느냐?(사도행전 19: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And asked them, Did you receive the Holy Spirit when you believed?" They answered, "No, we have not even heard that there is a Holy Spirit.)
  

여러분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받은 것 같기도 하고 받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까? 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에 대해서 분명하게 고백하지 못하느냐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구원 받은 삶을 살았습니까?

성령도 구원과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을 받은 삶을 살았습니까?
- 성령 받은 삶을 유지하려면 성령으로 계속하여 채워져야 합니다.

은혜는 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문제는 내가 채워지지 않고 계속 주기만 하면 내 안에서 불만과 불평 그리고 감사가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내가 계속 채워져야 하고 채워진 것을 나눠주는 것이 은혜의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은사 중심의 성령

(도입 이야기) 중국 대륙을 말을 타고 가던 사진사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주님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중 갑자기 사진을 찍으라는 음성을 듣고 사진기를 들어 눈 덮인 벌판을 찍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진을 현상하고 인화한 후에 놀라운 모습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 주님의 얼굴이라는 흑백 사진입니다.
고등학교 동창, 종로 2가에서 한식당을 운영, 부인 집사님은 여의도 순복음교회에 출석한다. 어느 날 부인과 딸이 그림 하나는 보여주며 이 그림에서 예수님이 보이느냐? 묻더랍니다. 아무리 뚫어져라 보아도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대뜸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하더랍니다. 매일 저녁 집에 들어가면 그림을 보여주며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느냐고 묻는다고 합니다. 제가 그 친구에게 그림을 가져와라 그리고 그림 위에 눈과 코와 입과 얼굴 윤곽을 그려준 후에 자 이제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느냐? 물었더니 분명하게 보인다고 대답합니다. 그 다음에는 모든 윤곽을 지우고 다시 그림을 보여주었더니 정말 보인다고 합니다.

오늘 저녁 집에 들어가서 또 그림을 보여줄 때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느냐 묻거든 눈과 코와 입을 가리키고 보인다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구원을 받았구나 하고 소리치거든 구원은 그런 그림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이란 내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심을 믿는 믿음의 고백에 의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치라고 말했습니다.

또 어떤 분은 방언을 할 줄 아느냐? 방언을 하면 구원을 받은 것이고 방언을 하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성령을 마치 무슨 은사를 행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자주 경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은사 중심의 성령은 무슨 기적 같은 것이 나타나야 성령의 역사라고 믿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리스도의 얼굴

한 경 직

 

아버지

이제 저희의 신령한 눈을 열어서

아버지의 형상이시오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우리 주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소서

그 눈물 어린 얼굴,

가시 면류관 쓰신 그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얼굴도 주님의 얼굴로 변하고

우리 교회의 모습도 주님의 얼굴로 변할 때까지,

그리하여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

감히 주님의 얼굴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을 때까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얼굴을 앙망하게 해 주소서


둘째는 이론적 성령

이론적 성령을 다른 말로 말씀 중심이라고 합니다. 말씀 중심으로 가르치면 이론적으로는 강하지만 은사면에서는 약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성경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은사(恩賜) - 1. 임금이 물건을 내려 줌
              2. 하느님이 주신 재능

* 은혜 은(恩), 줄 사(賜)

* 헬라어 / 카리스마(은사), 카라(기쁨), 카리스(은혜) 

내가 정말 은혜를 받았는가? 검증하는 방법
1. 사용하라(use)
2. 기쁨이 있는가?(joy)
3. 계속 사용하는가?(keep ues)
3. 열매가 있는가?(fruit)
4. 재창조가 진행되는가?(recreation)
5.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가?(glory)

성령을 받은 증거

초대교회 때는 성령이 불과 같고 바람과 같고 방언을 말하고 이러한 현상적인 것에 의해서 처음으로 성령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 의해서 지금도 초대교회 전통적인 성령의 이해가 강조되기도 합니다. 초대교회의 성령 강림 사건은 성령을 가시적인 것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을 강하게 하였다. 그러나 성령의 임재가 반드시 가시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Therefore I tell you that no one who is speaking by the Spirit of God says, "Jesus be cursed," and no one can say, "Jesus is Lord," except by the Holy Spirit.)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성령을 받았다는 성경적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주를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 라는 고백과 함께 ‘이것을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다. 내가 네게 천국 열쇠를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천국 열쇠란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천국 열쇠는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메시아 즉 구세주로 고백하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천국 열쇠를 받았을 때 이것을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곧 성령께서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알려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성령 충만

충만이란 헬라어 단어는 ‘플래래스’ 라고 합니다. 플래래스는 내 안에 가득 채워진 상태가 아니라 내 안에 가득차서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And the disciples were filled with joy and with the Holy Spirit.)    

본문의 상황을 잘 관찰해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쫓겨났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과 유대 귀부인들에 의해서 쫓겨난 상황입니다. 그런데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는 것은 내적 충만함에 멈춘 상태가 아니라 외적 충만함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는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는 믿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내 죄가 깨끗이 씻어졌기 때문에 죄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삶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예화) 사울은 계속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운 왕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예화) 요셉은 형들의 미움과 시기로 애급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러나 애급의 총리가 되었을 때에 형들을 미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먼저 애급으로 보냈다고 위로했습니다.

내게 손해나 불이익이 있을지라도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는다. 내 안에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런 삶을 살아가게 한다. 나의 각오나 결심으로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각오나 결심은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것처럼 무용하며 간사하다.


오늘날 세상은 끊임없이 줄 세우고 편을 갈라서 자신의 잇속을 채운다. 그리고 자신의 편에 서지 않은 사람은 무자비하게 쳐내고 짓밟고 죽인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할 때 이미 성령께서 고백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오셔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성령을 받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지만 베드로의 삶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고 심문을 받을 때 베드로는 멀리서 어떻게 될 지 상황을 주시하려고 모닥불 곁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때 어린 여종이  베드로에게 당신도 예수와 같은 무리가 아니냐 하며 묻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그런 사람을 알지 못한다며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떠날지 몰라도 자신은 절대로 주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성령을 받지 못해서 부인했을까요? 아니면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인했을까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 번 나타나셨었습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씩이나 목격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루는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간다며 그물을 들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노련한 어부였던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니 고기를 잡지 못하고 동이 틀 무렵 해안가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고리를 얼마나 잡았느냐 하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고기를 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고 하셨던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바다로 뛰어내려 예수님께로 달려갔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아침 식사를 마쳤을 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하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며 고백했습니다.


베드로가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는 말을 들으셨던 예수님은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한다며 베드로를 부르셨던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며 너희가 몇 날이 못 되어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여러 사도들 그리고 주를 따르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고 있을 때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성령 충만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가 이때부터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으며 마지막에는 순교의 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경우 성령을 받은 것과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느냐 라는 질문은 구원을 받았느냐 라는 질문이라고 한다면 성령 충만함을 받았느냐 라는 질문은 구원 받은 삶을 살았느냐 라는 질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케 된 사람과 성령을 받은 사람과의 차이를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래 도표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왜 성령을 받아야 합니까?

사람을 만든 재료는 흙과 생기입니다. 동물을 만든 재료는 흙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생기를 육체의 몸에 갖고 살아가는 영적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을 세 종류로 구분합니다.

성경

개역한글

영어

새번역

공동번역

현대인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

natural man

자연에 속한 사람

영적이 아닌 사람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

고전 3:1

육신에
속한 자

carnal man

육에 속한
사람

육적인
사람

세속적인
사람

고전 2:15

신령한 자

spiritual man

신령한
사람

영적인
사람

영적인
사람


육에 속한 사람(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유다서 1:19,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이 없는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누구일까?

(새번역) 자연에 속한 사람

그러나 자연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런 일들이 어리석은 일이며, 그는 이런 일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입니다 


(공동번역) 영적이 아닌 사람

그러나 영적이 아닌 사람은 하느님의 성령께서 주신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런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현대인의 성경)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영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것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영적인 일에는 깜깜하고 도무지 깨닫지를 못합니다. 육체대로만 살기 때문에 영적인 이야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천국, 지옥,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해도 영적인 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자연인이라고 합니다.

육신적인 신자(Carnal man)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공동번역) 육적인 사람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적인 사람을 대할 때와 같이 말할 수가 없어서 육적인 사람, 곧 교인으로서는 어린 아이를 대하듯이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번역) 육에 속한 사람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에 속한 사람에게 하듯이 말할 수 없고, 육에 속한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 같은 사람에게 말하듯이 하였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세속적인 사람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적인 사람을 대하듯이 말할 수가 없어서 세속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를 대하듯 말합니다.

육신적인 신자란 예수를 믿지만 영적으로 성숙하여 신령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어린 아이와 같이 육신의 소욕대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구원은 받았어도 아직 육체의 소욕을 버리지 못하고 영적인 세계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읽지만 의무적으로 읽고 예배에 참여하지만 의무적으로 예배하기 때문에 기쁨이 없습니다.

말씀과 예배의 기쁨이 없기 때문에 만약 주일에 다른 행사가 있다면 예배보다는 그 행사가 우선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남이 먹여 주어야지 스스로는 성경도 제대로 읽을 수 없고, 또 은혜를 받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시기, 분쟁, 다툼이 많습니다. 모든 교회에서 일어나는 시끄러운 문제들도 바로 이런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육적인 사람들 때문에 말썽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령한 신자(Spiritual man) 고린도전서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새번역) 신령한 사람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서도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공동번역) 영적인 사람

영적인 사람은 무엇이나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사람 자신은 아무에게서도 판단받지 않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영적인 사람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제대로 평가하지만 세상 사람은 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하고 장성하여 분별력이 있고 영적인 힘이 있는 장성한 교인을 말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교인은 잘못된 교리, 잘못된 신학, 잘못된 영의 역사 등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단사상에 현혹되거나 매혹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심령에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어서 모든 것을 알게 해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의 특징


첫째, 분별의 지혜(요한일서 2:20)

너희는 거룩한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성령의 기름 부음이 내 안에 가득하게 채워질 때 모든 것들을 분별하여 깨닫게 하십니다. 


요한일서 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성령의 기름 부음이 오면 자연히 깨달아지고 알아지는 것입니다.


둘째, 온유한 심령(갈라디아서 6:1)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온유하다는 것은 부드럽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드러운 사람은 잘못된 길에 들어간 사람을 잘 인도하여 주께로 나오게 합니다.

시험받는 사람이 있을 때에 자기를 반성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 잡으라고 했습니다.


셋째, 죄를 다스리는 능력(갈라디아서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욕망에 이끌리는 것은 아직도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증거이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얻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 증거자의 삶(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 4:31

빌기를 다 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육은 영적인 일에 무능합니다. 육적인 사람은 영적인 봉사에 쓰여 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령 충만의 목적은 영적인 봉사의 힘을 얻는 것입니다.


무디(D. L. Moodv) 같은 이는 국민학교 3학년 밖에 못나온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키도 작고 목소리도 나빴다고 합니다. 배운 것이 없고 훌륭한 체모를 가지고 있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무디와 같은 부흥사는 없다고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고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될 때에 어떠한 상황과 조건에 처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은 나타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나 기도나 봉사나 무엇이든지 성령을 받아야 그 능력이 오는 것을 믿으시고 아무쪼록 열심히 기도하고 사모하고 기다려 성령 충만히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은혜를 체험하는 길을 영어의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 Something, Nothing, Everything

Something,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존재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러나 내가 아무 것도 아님(nothing)을 깨닫고 주께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Everything,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구한말 언더우드 선교사(Horace Grant Underwood, 1859. 7. 19∼1916. 10. 12)
영국 런던에서 출생하여 13세 때 미국으로 이주
한국어 이름 원두우(元杜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에 제물포 항구에서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은 옮겨와 앉았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 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 한 이 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 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 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그의 겸손한 순종(Nothing)은 이 땅에 하나님의 큰 은혜, 선교의 열매(Everything)를 맺게 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Sorrowful, yet always rejoicing; poor, yet making many rich; having nothing, and yet possessing everything.    

세기적인 과학자 뉴턴이 말년에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그 많던 지식을 망각해버렸습니다. 답답해하던 제자들이 안타깝게 묻습니다. “이제 와서 선생님이 알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뉴턴은 여유 있게 대답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수께서 내 구주라는 사실이다. 이것 외에 더 무슨 지식이 필요 하느냐?”

세상이 아무리 복잡할지라도 신앙인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만 가지고 있으면 충분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
이를 인정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배려하며 겸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가 내 구주라는 것.
환경에 요동하지 않고 조용히 주를 기다리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쓰십니다. 두 가지가 준비된 사람을 쓰십니다. 자신이 죄인 됨을 인식하고 예수가 내 구주임을 믿는 사람 그로 인해 계시에 절대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도 못 받은 자에게 천국 열쇠를 주신다고 하셨겠습니까? 이렇게 그 때에도 성신의 감동을 받아 신앙 고백을 바로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천국 열쇠는 베드로가 잘 나서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신앙 고백이 곧 천국 열쇠가 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내가 죽을 대신에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을 믿고 시인하면 다 영생을 얻고 구원을 받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10장 20절에도 보면 70인 전도대들이 돌아와서는 “주님!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하며 굉장한 보고를 할 때에 예수님께서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벌써 그 때에 오순절 전에도 제자들은 이미 하늘나라에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0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여기서 목욕한다는 말은 죄 사함을 받고 중생하여 구원받았다는 말이요, 또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는 말은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도 매일매일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발에 먼지가 묻는 것과 같이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졌으면 그때그때에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라는 말씀도 열두 제자중의 한 사람 곧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한 마귀의 자녀인 가룟 유다를 지적하여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열두 제자 중 가룟 유다 한 사람을 빼놓고는 다 중생을 한 사람이라고 분명히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옳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기만 하면 다른 뜨거운 체험, 은사 같은 것들을 몰라도 중심으로 믿는다면 구원은 받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따라서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고 그러한 신자들이 있는 교회가 부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9장 l절부터 보면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며 보니까 성령을 못 받은 것 같았습니다. 이 에베소 교회는 아볼로라고 하는 젊은 목사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말도 잘하고 학식도 많고 성경도 잘 알고 열심도 있었으나 성령의 세례를 못 받았습니다. 그래서 교인들도 성령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바울이 그 교회에 가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하고 물으니 우리는 성령이 계시다는 말조차 듣지 못했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만일에 예수를 믿는 것으로 다 된다고 하면 네가 믿느냐? 하고 물을 것이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하는 말은 또 무엇입니까? 그러나 믿어 중생하는 것과 성령 세례를 받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바울이 다시 그러면 너희들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바울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자기 뒤에 오시는 이는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했는데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다시 설교하며 예배드리며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며 안수했더니 성령도 받고 방언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도 성령을 받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안수도 해야 합니다. 방언하는 것도 성령의 은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성령을 받는다 안수를 한다 하면 반대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 목사님들 가운데도 성령 세례를 모르고 체험이 없어서 성령을 받는다던지 소리를 내며 기도를 한다고 하면 질색하는 분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물로 세례를 받았지만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승천하신 후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l20명이나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하루, 이틀, 사흘… 열흘 동안이나 기다리면서 열심으로 기도하던 중 열흘째 되던 날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여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뜨거워지더니 이상한 말을 하고 능력을 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 기도하며 사모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자들이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히 받는 것입니다. 교회가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히 받는 것입니다. 목회하는 데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이것 이상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성령 충만해 진다는 말은 마치 돈을 많이 가지고 있거나 또는 물을 많이 가지고 있듯이 성령을 많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것도 내 힘으로 하려고 할 때에는 예수를 믿는 생활이 힘들고 괴롭기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은혜를 받으면 기쁨으로 하게 되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성령이 충만해지면 모든 의심과 부조리가 해결됩니다. 과거에는 설교를 들어도 성경을 읽어도 의심이 자꾸 생겨납니다.


그러나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그러한 의심이 다 사라지고 부조리하게 생각되었던 것이 믿음 안에서 다 해결되고 완전해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중생하지 못하고 영생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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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강 9월 3일 오전 6:00∼7:30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고린도후서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Sorrowful, yet always rejoicing; poor, yet making many rich; having nothing, and yet possessing everything.)

기독교 신앙은 역설적 신앙(paradoxical faith)
- 논리에 맞지 않는 말
- 이치에 맞지 않는 말
(예) 급할수록 돌아가라!

- 급하면 지름길로 가야 빠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지만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다.

(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1)
(예)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며(마태복음 5:39)
(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복음 7:13)

(도입 이야기) 쟁반에 사과 10개가 있습니다. 먹는 방법은 반드시 하루에 1개씩만 먹어야 합니다. 열흘 후에 사과를 먹은 두 그룹의 사람들에게 사과를 어떻게 먹었느냐? 질문했을 때 첫 번째 그룹에서는 매일 같이 상한 것을 골라서 먹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그룹은 매일 같이 가장 좋은 것만 골라서 먹었다고 합니다. 어느 그룹이 가장 맛있는 사과를 먹었을까요? 물론 두 번째 그룹입니다. 그 이유는 같은 환경과 조건에서 가장 좋은 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믿습니까?
문제 해결이란 환경과 조건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바뀌느냐?
생각하는 방식이 바뀝니다.
하나님의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For my thoughts are not your thoughts, neither are your ways my ways, declares the LORD. As the heavens are higher than the earth, so are my ways higher than your ways and my thoughts than your thoughts.)    

역설적 신앙은 체험하면 할수록 그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면 중국의 신학자 워치만니의 간증, 계단식 논에서 가장 위쪽에 논을 소유한 어느 성도의 질문과 대답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가톨릭교회의 평신도 회장을 지냈던 우해석씨의 경우 24시간 빨래방을 운영할 때 뉴욕에 이주하고 한 달이 지난 사람을 채용한다. 왜 저 사람을 채용하는가? 저 사람은 지금 당장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생계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루마니아교회 앞의 눈을 치웠을 때 신부께서 성찬용 포도주 한 병을 주며 고맙다고 인사를 합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신앙입니다.

김동익목사(1941.∼ 1998. 4. 1 신장암 사망, 56세)
수술을 받기 전 황산성변호사가 김목사에게 이번 기회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수술실에 들어가 수술 전 담당 의사를 위하여 기도하자 의사는 환자가 의사를 위하여 기도한 것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수술 후 밤에 꿈을 꾸는데 주님이 오셔서 아픈 곳을 만지시며 회복될 것이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회복하여 강단에서 설교할 때 주님을 만났고 주님께서 회복시켜 주셨다고 간증할 때 모든 교인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암이 전이되어 결국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황산성변호사는 목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는 영수님이셨고 아버지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님이셨습니다. 더구나 새문안교회 작고하신 김동익목사님의 사모가 되었습니다. 목사의 부인이 되었어도 신약은 읽었지만 구약은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체험하게 된 동기가 꿈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꿈에 지옥에 떨어지는 꿈을 꾸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들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 천국은 분명하게 있습니다. 고백하며 주여! 하고 외쳤을 때 꿈이 깨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신앙이 분명해 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아들을 주의 종으로 바치라는 음성이었다고 합니다. 아들은 법조인이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아들의 마음을 주님이 바꿔달라고 하였다. 이 땅의 공무원이 좋겠느냐? 하늘나라의 공무원이 좋겠느냐? 어머니 정말 거창하게 나오십니다. 그리고 아들은 결국 결정된 하나님의 종이므로 앞으로 고난의 과정이 얼마나 힘든 줄 아느냐? 연세대 신학교 원서를 구입하여 갖고 다니며 결국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토저 목사와 레이븐 힐 목사의 대화 중에서


토저는 레이븐 힐에게 종이에 쓴 편지 한 장을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레이븐힐 목사, 나는 미국 대통령의 편지보다, 이 편지를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네.”

제가 토저에게 물었습니다. “이유가 뭐지?”
그때 토저는 이런 이야기를 제게 들려주었습니다.

레이븐힐 목사, 들어보게. 이 편지는, 아프리카에 사는, 키가 작은 흑인 남자가 내게 보낸 것이야. 그의 이름은 듀마야.

그는 어느 날 밤, 한 침례교회에 갔고, 그곳에서 주님을 만나서, 그날 놀랍게 구원을 받았어. 회심의 체험을 한 거야! 듀마는 예배를 마치고 교회 문을 나서려고 하는데, 그 교회 목사가 말했지.

“형제님, 교회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또 오실 거죠? 제가 뭐 도와 드릴게 있나요?” “네, 있지요.”
“그게 뭔가요?”
“제게, 교회를 맡겨주십시오.”
“방금 뭐라고 그랬죠?”
“제게, 교회를 맡겨달라고요!”

듀마는 당황해하는 그 목회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평생 저를 변화시켜 줄, 그 무엇인가를, 애타게 찾아 다녔습니다. 이제 저는 새로운 사람입니다. 제 짐이 다 사라졌습니다. 그동안 저를 묶고 있던 무거운 족쇄에서, 제가 해방되고 완전히 풀려난 것을 느낍니다. 제 등 뒤에 항상 있던 무거운 짐이, 지금 다 사라졌어요. 오늘 예배시간에, 무엇인가 내 속에서 뿜어 올라와서 나를 정결하고 의롭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제게 교회의 강단을 맡겨주시기 바랍니다.”

“듀마 형제님, 정식 학교 교육을 받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학교에 다니신 적은 있으십니까?”
“아직 아닙니다.”
“그럼 그냥 교회나 다니세요.”

그러나 듀마는 계속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거듭남에 대해서 들어왔는데, 그런 일이 제게, 오늘, 지금 일어났습니다. 저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이제 저는, 다른 식욕도 없고, 다른 욕망도 없습니다. 저는 오직 하나님만을, 하나님만을, 하나님만을 원합니다.”

그 목사는, 적어도 정직했습니다.
“형제님, 나도 옛날에는 형제님처럼 그랬었어요.”

사람들은, 회심하고,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한 후에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그 신앙이 냉담하게 식어 버립니다.

듀마는 한 달 후에, 다시 교회로 나왔습니다. 그 목사는, 설교 중에, 듀마를 알아보았습니다. 예배 후에, 목사는, 듀마에게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잘 지냈어요?”
그 작은 흑인 듀마가 말했습니다.
“네, 그런데 물어볼 게 있습니다.”
“뭔데요?”
“목사님, 제게, 설교할 교회를 맡겨 주시겠어요?”
“형제님은, 전에도 그러더니만, 교회에 단 두 번 나오면서, 올 때마다 교회를 맡겨달라니. 내가 이 주머니와 저 주머니에 교회를 잔뜩 넣고 다닌다고 생각하나 보군요.”

예 목사님, 저는 지난 한 달 동안, 이 교회에 안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전에, 이 교회 문 앞에서 목사님과 헤어진 후에, 곧장 저는 이 길을 쭈욱 따라 걸어갔고, 마을을 빠져나와, 숲으로 갔습니다. 숲길을 계속 따라 걸었고, 한 시내가 나왔는데, 그 곳 시냇가에 있는 동굴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동굴 벽에 표시를 하면서, 21일 동안, 밤낮으로 성경을 읽으며 지냈습니다.

“하나님, 당신과 나, 둘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주셔야 합니다. 제가 이 문을 나서기 전, 설교자로 불렀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시지 않으면, 저는 평생 설교를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씀드리고, 저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누구와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침이면 시냇가에서 세수를 했습니다. 11일째 되는 한 밤 중에 성령이 제게 임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를 목사로 불렀다. 네가 병든 자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다. 가라!”
“그러니 목사님, 제게 교회를 맡겨 주시겠어요?”
“수요일 밤, 장로 회의가 있으니, 주일날 다시 와 보세요.”

그 목회자는, 수요일 날, 장로들과 상의를 한 후, 그 흑인이 끈덕진 광신자 같으니, 마을 반대편에 있는, 성도 5명이 모이는 오두막 지교회를 한 번 맡겨보자고 했습니다. 어차피 그 키 작은 흑인은 무식하고, 무례하고, 글도 제대로 모르니 교인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구박이나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교인들은, 며칠 혹은 몇 주간 그의 설교를 듣다가 문을 닫아걸고, 그에게, ‘당신은 목사로 부르심을 받지 못했으니 이 교회를 떠나라!’고 할 것이라고 장로들은 예상했습니다.

듀마의 남다른 점

평소에 성격상, 감상적인 곳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인 토저가 그 낡은 듀마의 편지에 키스를 하고, 서랍에 고이 넣는 것을, 저 레이븐힐은 보았습니다.

“이건 내게, 미국 대통령의 편지보다 더 귀한 편지야. 내가 듀마에 대한 말을 많이 들어왔는데, 그가 내게 편지를 보냈어. 사람들이 그 마을에서 쫓아낸 듀마, 장로들은, 다섯 명의 흑인 신자들을 통해, 그를 쫓아내려고 했는데, 듀마는, 현재 남아공 더반시에서 가장 큰 교회를 목회하고 있고, 지금 1200명의 교인들이 모이고 있어. 그 작고 초라한 교회에서, 그 버려졌던 교회가, 그렇게 부흥된 거야.”

그렇다면 여러분, 그런 부흥의 비밀이 무엇일까요? 동굴 속에서 21일 동안 밤낮으로 하나님께 “주님, 영원의 빛 가운데서, 제 작은 마음에 말씀해 주세요. 제가 설교자로 기름부음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말씀해 주세요.”

이렇게 간절히 간구했고 그래서 기름부음을 받았던 것이 그의 사역의 비밀은 아닐까요? 목회자 여러분, 그렇게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비밀이 아니라, 다 알지만, 실행하기가 어려운 거죠.

듀마는 매년 11월 17일이면 다시 그 동굴로 간다고 합니다. 그때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매년 11월 17일이면, 그는 아내와 자녀에게 키스를 하고 장로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그 동굴로 가서, 21일 동안 21일 낮과 밤을, 꼬박 그곳에서 혼자 보냅니다.

매년 21일 동안, 그는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소명과 사명을 새롭게 하고 21일 동안, 영적으로 새 힘을 얻고, 21일 동안, 새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이렇게 매년 그는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와 새로운 모략(counsel)과 새로운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한 번 성령세례를 받고 그것으로 지금부터 영원까지 계속 버틸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기름부음은 일생동안에 거듭 반복해서 부어집니다. 한 번 회심한 후에도 거듭 회심하는 체험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끔은 숨어버리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당신은 어두운 나락에 떨어진 것처럼 느낄 것입니다. 당신이 기름부음을 받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아니면 혼자 스스로의 능력과 웅변력에 의존해 사역하는 쪽을 택하는지를 하나님은 시험하기 위해 즉 당신을 알아보시려고 당신을 혼자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이때 저와 여러분이 택할 길은 기름부음을 새롭게 받기 위해 간절히 주님께 매달리는 길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그런 목적으로 함께 모였다가도 사흘도 못 버티고 다 떨어져 나간다고 합니다. 듀마가 남다르고 위대한 것은 바로 그 목적을 바꾸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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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강 9월 3일 오전 9:30∼12:00

예수의 흔적(갈라디아서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Finally, let no one cause me trouble, for I bear on my body the marks of

흔적(痕跡)이란 단어를 헬라어로 ‘스티그마’ 라고 합니다. 영어 단어에 ‘stigma’ 라는 단어는 ‘오명’ 이라고 합니다. 원래의 뜻은 흔적입니다.

흉터 흔(痕), 흔적 흔(痕), 자취 적(跡), 발자취 적(跡) - mark, stigma

예전에 가축들을 방목하는 시절에 여러 목장에서 많은 가축들이 들판에 모여서 지냅니다. 해가 질 무렵 목동은 자기 목장의 소유를 구분하여 가축들을 불러 모아야 합니다. 이때를 위해서 각 목장마다 자기 가축들에게 불로 달궈진 이니셜 마크를 짐승의 몸에 새깁니다. 새기는 것 보다는 오히려 불로 지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살갗이 불에 타들어가며 화상을 입은 피부에 자국이 남습니다. 이 자국을 스티그마라고 합니다.

2018년 가족 수련회를 마치면 각자 자기 삶의 현장으로 떠나야 합니다. 내 삶의 자리에서 수련회에 참석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삶의 시간은 여전히 크로노스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롭게 결단한다면 환경은 똑같습니다. 주위 사람들도 모두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은 카이로스가 될 것입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다듬기 위하여 이 시간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새겨야 하겠습니다.

흔적을 갖기 위해서는 고통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뻘건 쇳덩이가 짐승의 몸에 닿은 순간 짐승은 울부짖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흔적이 내가 누구의 소유가 되었다는 표시가 됩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갖게 된 사도 바울은 어떤 흔적을 가졌을까요?
신학자들마다 흔적을 다르게 해석합니다.

안질(eye trouble)이라고 하는 해석은 다메섹 도상에서 너무 강열한 빛을 보았기 때문에 시력이 약해졌다고 합니다.

간질(epilepsy)이라고 하는 해석은 바울이 복음을 증거 한 후에 갑자기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입에 거품을 물고 그 자리에서 쓰러지면 이제까지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 중에 상처가 되어 복음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안질이든 간질이든 구체적인 설명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도 바울은 그 흔적 때문에 어느 누구도 바울을 그리스도 안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멀어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런 흔적을 갖고 내 삶의 자리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입니다.

디모데전서 4:4∼5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For everything God created is good, and nothing is to be rejected if it is received with thanksgiving, because it is consecrat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예수의 흔적은 세상과 구분되는 거룩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목장의 가축들이 그들의 몸에 목장주인의 표시가 새겨져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거룩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거룩은 히브리어로 카도쉬 라고 합니다. 카도쉬의 의미는 구별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기준을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 감사 - thanksgiving

고린도후서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감사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육체의 제한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은 육체적인 조건에 만족할 때만 감사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삶을 회복할 때는 육체적인 조건을 불이익을 당하고 고통을 받을지라도 그 자리에서 감사가 가능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을 때 감사와 찬송을 하였습니다. 그때 옥문이 열리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화) 독일의 화가 알버트 듈러의 기도하는 손
(예화) 대학 시절 친구의 집에서 야간에 학교에 다니고 주간에는 집안의 일을 돕는  어느 친척 여학생의 모습

둘째, 하나님의 말씀 - the word of God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며 내 길에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발의 등은 현실과 현재를 비추는 빛입니다.
내 길의 빛은 앞으로 일어날 미래에 대한 소망의 빛입니다.

(예화) 배명준목사, 황해도 당수나무에 성경을 붙여놓아 마을에서 추방당했다.

셋째, 기도 - prayer

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기도는 곧 삶을 의미합니다.
기도와 삶이 분리될 때 세상은 혼돈 가운데서 흔들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기도가 곧 삶이 될 때 로마의 황제 서내면의 기도

(예화) 나의 원대로(불래)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델레마) 하옵소서!

(예화) 골방(마태복음 6:5∼8)
골방의 기도 - 탈무드의 랍비와 제자들(행동이 느리다고 비웃던 사람들에게 새 한 마리씩 나눠주며 2시간 안에 죽인 후에 그 새를 갖고 오너라. 제자들은 새를 가장 빨리 죽이면 수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재빠르게 행동하였다. 과연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곳은 어디인가?

하나님의 속성(성품) - 윤리적 속성(성품), 비윤리적 속성(성품)

골방 기도는
1. 집중하는 기도
- 오직 구원은 여호와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을 간절히 찾는 기도

(예화) 안치규(처조카) 이상한 꿈에 대한 해석(8월 18일, 토요일)
젊은이들이 혼돈할 수밖에 없는 현실 

(예화) 엘리야와 갈멜산의 대결(열왕기상 18:1∼46)

2. (사랑과 은혜를) 확증하는 기도

-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확증하는 기도

(예화) 요나의 큰 물고기 뱃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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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에서 베드로가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라는 고백을 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 게네사렛 호수가 소개됩니다.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쌔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구약에서는 긴네렛 이라고 불렀습니다(민수기 34:11, 여호수아 12:3). 긴네렛이란 명칭이 잘못 전달되어 게네사렛 이라고 합니다.
신약에서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소개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갈릴리 바다, 요한복음에서는 디배랴 바다, 누가복음에서는 게네사렛 호수라고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긴네렛, 게네사렛, 갈릴리, 디베랴는 모두 같은 곳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게네사렛 호수에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은 아무 것도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날이 밝아오자 베드로와 동료 어부들은 그물을 씻어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 두 개의 배가 있는 것을 보시고 마침 시몬의 배에 올라타신 후에 배를 조금 띄우라 하시고는 배 위에서 호숫가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사용하는 그물은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머리 위로 던져서 고기를 잡는 투망식의 그물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물을 길게 쳐 놓고 물의 흐름에 따라 그물을 드리우는 자망이란 그물이었습니다. 본문에 소개된 그물은 머리 위로 던지는 그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두 가지 이상한 것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물을 내리라

당시 어부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물고기를 잡는 방식과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둘째는 깊은 데로 가라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에게 날이 밝은 때는 물고기들이 깊은 곳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말씀하신 것은 당시 어부들에게는 물고기를 잡는 상식에도 맞지 않는 방식이었습니다. 상식에도 맞지 않는 방식대로 행했을 때 베드로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이렇게 한 번 그물을 내려 많은 물고기를 잡아본 예가 없었기에 베드로는 다른 동료들의 배를 불러 두 배에 물고기를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데 여기서 베드로도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밤새도록 잡을 수 없었던 물고기를 많이 잡았다면 예수님에게 “물고기를 잘 잡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아니면 “나와 같이 동업하여 더 많은 물고기를 잡아봅시다” 아니면 “오늘 운수대통이다” 외치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

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쌔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베드로는 말씀을 듣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군중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잠간 배를 빌려주었는데 그 배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곧 믿음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특별한 장소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내가 늘 머무는 그 자리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맡은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를 잡지 못하여 다시는 그물을 던지지 않겠다고 결단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어젯밤은 실패했지만 내일은 다시 희망을 갖고 그물을 던지려고 그물을 씻고 정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내가 하는 일을 모두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보다 내가 하는 일에 더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믿음의 대상 선생과 주여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베드로가 처음에는 예수님을 “선생이여” 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물고기를 그물 가득히 잡은 후에는 예수님을 “주여” 라고 불렀습니다.

선생이 아니라 주여 라고 호칭이 바뀐 것입니다. 믿음이란 대상의 호칭이 바뀌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내 삶의 자리에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주위에서 찾아야 합니다.

셋째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기를 잡던 어부 베드로가 내가 죄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자아관(自我觀) 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선지자 이아샤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고 주위에 여섯 날개를 갖고 있는 스랍들이 거룩하가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며 노래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 때문에 나는 망하게 되었다며 절망합니다. 그 이유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기도하는 중에 이사야 선지자와 같은 환상을 보았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할까요?

지난 밤 내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나를 만나주셨다면 자랑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오히려 두려워했습니다. 나와 같은 부정한 사람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뵐 수 있느냐 하며 자기의 죄성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거룩한 임재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메섹 도상의 사울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음성을 듣고 그 자리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율법으로만 알고 믿었던 사울에게 직접 들려온 음성은 사울을 믿음의 사도로 변화시켰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죄의 고백으로 인하여 사람을 낚는 어부 가 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물고기를 많이 잡은 것 때문에 더 많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가치를 선택하지 않고 죄의 고백으로 말미암아 제자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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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연합감리교회 수련회(9월 1일∼3일)

· 영적 생활의 원리(로마서 12:1∼2)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Therefore, I urge you, brothers, in view of God's mercy, to offer your bodies as living sacrifices, holy and pleasing to God this is your spiritual act of worship. 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Then you will be able to test and approve what God's will is his good, pleasing and perfect will.   

영적 생활의 의미
- 신앙생활은 영적 생활입니다.

- 영적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입 이야기) 초대교회 교부 시므온은 원형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앉아서 묵상하며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낮게 세워진 원형 기둥이 마지막에는 무려 30미터 높이까지 세워졌다고 합니다.

우리는 시므온처럼 생활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매일같이 생활의 터전에서 이른  아침부터 늦은 시간까지 분주하게 움직여야만 낯선 땅에서 생존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시므온처럼 세상과 분리하면 생존이 어렵습니다.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가족들을 위하여 더구나 성도들은 교회 봉사를 위하여 더 많은 수고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신앙생활이 결코 용이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 즉 영적생활의 원리를 바르게 인식해야 합니다.

(전개 이야기) 온산공업단지 주거지로 선정된 신경 마을에서 교회를 시작할 때 경험했던 서울 무당과의 보이지는 않는 전쟁
“교회 전기를 절대로 마을 제사 지내는 일에 사용하면 안 된다”
“교회 전기가 밝혀지면 귀신이 제사 음식을 먹으로 올 수 있겠느냐?”

(현실 이야기) 저는 2000년 7월 4일에 서울에서 영주권을 받은 후 케네디 공항으로 입국했습니다. 당시 제 나이가 50이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뉴욕에서 가족들과 살아야 했습니다. 목회자로 살았기에 저희들이 갖고 있던 돈은 몇 달 렌트비와 자동차 할부금을 지불하면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더구나 두 아들은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입학해야 합니다. 저희 가족들이 뉴욕에 도착하기 전에 비행기에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목회자로 불러주셨기에 다른 일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낯선 도시에서 생존의 문제에 붙잡혀 목회가 우선이 아니라 생존경쟁에 나서야 하는 일이 없도록 지켜주시옵소서!

왜냐하면 제가 나의 모습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제가 목회자로 보입니까? 아무리 살펴보아도 저는 목회자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목사로 살아가지 않으면 당장 세상으로 쉽게 동화될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교회 중심의 삶을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즉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저와 같은 사람은 교회를 떠나면 당장 무너져서 방탕한 삶을 즐기게 될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생활은 영적 존재를 알아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 영적 존재에는 어떤 존재들이 있을까요?

1. 하나님(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2. 천사(히브리서 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3. 사탄, 마귀, 귀신(요한계시록 12: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악령(惡靈)의 실체


사탄(사타노스) - 대적자
48회(구약 14회, 신약 34회)

마귀(디아보로스) - 고소자(주로 단수형으로 사용)
38회(구약 5회, 신약 33회)

귀신(다이몬, 다이모니온) - 신적힘(주로 복수형으로 사용)
99회(신약 99회)

4. 사람(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1:26∼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독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영적 생활은 사탄과 마귀와 귀신을 물리치는 생활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인가?
- 마귀의 일을 멸하려는 것이다.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마귀의 일은 무엇인가?
- 믿고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빼앗는 것이다.
-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8:12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가룟 유다(누가복음 22:3)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베드로(마태복음 16:21∼23)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광명의 천사(고린도후서 11: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히브리인의 마귀론
- 타락한 천사(이사야 14:12∼15, 에스겔 28:11∼19)

베드로후서 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유다서 1: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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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 예배(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영적 생활은 영적 예배로부터 출발합니다.


(도입 이야기) 온산에서 교회를 시작하고 새벽 기도회를 시작하려는데 교인들이 아무도 나오지 못합니다. 혼자서 예배실에 모든 교인들이 앉아 있다고 생각하고 새벽 기도회 순서에 따라 혼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른 새벽에 한 농부가 논을 살피러 논으로 가던 중 교회 창문으로 불빛이 환하게 비추므로 창문 가까이 와서 예배실 안을 들여다보았다고 합니다. 교인들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도 없는데도 혼자서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말씀을 전하는 것이 신기해서 몇 날 며칠 계속 지켜보다가 하루는 마을 회관 앞에서 교회에 출석하던 교인에게 “당신은 왜 새벽에 교회에 가지 않느냐?” 하고 묻더랍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새벽 기도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일생동안 정말 감격적인 예배에 대한 경험이 있었습니까?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북한 지하교회 성도의 예배)
찬송은 소리 내지 않고 입만 벌려서 찬송을 한다.
성경은 지하교회 성도들이 갖고 있는 성경 구절들을 돌려가며 카피한 것을 돌아가면 속으로 읽는다.
마음껏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싶다

(중국 단동 지역의 조선족 교회 예배)
1996년 5월경에 중국 집안시 에 거주하는 저희 어머님의 조카 가족들을 만나러 갔었습니다.
집안이란 도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능이 있는 곳입니다. 마침 주일을 맞이하여 조선족 교회에 방문하여 예배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찬송을 부르는데 우리들이 부르는 곡조와 전혀 다르게 부릅니다. 반주자도 없고 피아노는 물론 올겐도 없는 교회이어서 인도자가 부르는 대로 같이 따라 부르는 것입니다. 저희가 찬송을 부르는데 자꾸 저희를 쳐다봅니다. 저희들이 부르는 곡이 그들과 맞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찬송을 부르지 않고 그들이 부르는 소리를 듣기만 했습니다. 왜 이렇게 찬송이 곡조가 바뀌었을까? 한참 생각하는데 공산국가에서 찬송을 마음대로 부를 수 없었던 시대에 누군가 부르던 찬송을 듣고 배웠는데 시간이 지나면 서 찬송의 곡이 원곡과 다르게 부르게 되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예배의 인도자가 잘못 인도하면 예배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예배를 회복해야 할까요?
예배를 회복하는 지름길은 주님을 바르게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주님을 바르게 사랑하기 위해서 베드로의 경우 두 가지 고백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고백입니다(마태 16:16)
둘째는 사랑의 고백입니다(요한 21:15∼17)

신약 성경의 언어 헬라어에서 사랑의 용어로 사용된 단어
1. 아가패
2. 필로스
3. 에로스
4. 스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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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 고백(마태복음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Simon Peter answered,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신앙고백은 영적고백입니다.
입으로는 누구든지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고백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고백은 아닙니다.

(도입 이야기) 대학 시절 영문과 여학생을 사랑하던 철학과 학생의 독백
어렵게 덕수궁 분수 주위를 한 바퀴 두 바퀴 돌고 난 후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때 여학생은 ‘나는 약혼자가 있어요!’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남학생이 ‘그동안 영화를 본 것과 식당에서 밥을 먹은 것 그리고 덕수궁 입장료금과 차를 마신 것 모두 얼마인데 절반 값을 내놓으시오!’ 그러자 여학생이 지금 내 수중에 돈이 없으니 나중에 주겠다고 하고 서로 헤어져서 기숙사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여러분 남학생의 고백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랑한다면 약혼자가 있다는 것이 사실인지 아니면 마음을 떠 보는 것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성급하게 그동안 함께 데이트 하며 사용한 돈의 절반을 내놓으라는 것은 뭔가 사랑이 부족한 탓이 아닐까요?

신앙고백이란 주님에 대한 사랑 고백입니다.
사랑의 정의를 성경 신약성경 베드로전서 4장 8절에서 찾아봅니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갈라디아서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골로새서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베드로전서 2:2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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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한 사람들의 특징

1. 죄에 대한 인식(깨달음)이 달라 진다.

- 죄에 대한 심각성과 경각심이 생긴다.

 

2. 죄에 대한 느낌이 달라진다.

- 회개하기 전에는 죄는 지을 때 우리의 느낌을 자극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 느낌

을 따라가게 만드는데 회개한 후에는 사소한 죄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죄에 대

한 슬퍼하는 마음과 역겨운 마음을 갖는다.

3. 죄에서 돌이켜 죄와의 타협을 거부하며 죄와 처절하게 싸운다.

- 죄를 짓지 않을 순 없지만 회개한 후에는 더 이상 죄가 나를 지배할 수 없게 된

다. 전처럼 죄에 대해 결코 관대하지 않으며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고 또 싸운다.

힘들고 어려워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죄와 싸운다.

4. 삶의 목적과 방향이 바뀐다.

- 내 야망과 꿈 대신 하나님의 소원으로,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뀐다.

항상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의 뜻을 구하는 삶으로 바뀌게 된다.

(“Self centered” 에서 “God centered” 로의 전환)

 

5. 나의 기쁨, 관심, 사랑의 대상이 바뀐다.

- 세상의 것에서 하늘의 것으로, 육신의 것에서 신령한 것으로 그 대상이 바뀐다.

 

6.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과 그 결과로 순종의 기쁨을 알게 된다.

 

7.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한다.

- 자신 안에는 전혀 소망이 없음을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회개하고 자아가 죽은 자들의 특징

1. 그들은 야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모아 자기 왕국을 세우는데 관심이 없다.

2.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고 세워주는데 관심이 있다.

3.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분노하거니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4. 그들은 사람들을 정말로 사랑한다.

5. 그들은 주님 앞에 홀로 머무는 것을 좋아한다.

6. 그들은 다른 사람을 시샘하지 않는다.

-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광을 나누어주기를 기뻐한다.

7.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그들은 빨리 주님께로 가고 싶어 한다.

회개의 4가지 요소(4R)

 

1. Revelation of the truth about sin, sins, and sinful nature.

원죄와 나의 죄, 그리고 자아의 죄성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선포됨으로 죄

가 드러남.

 

2. Realization of the reality of my condition before God. 

하나님 앞에서 내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는 것.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는 모든 죄가 상대적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빛 아래 나의 모든 어둠이 (죄가) 드러난다.

그러나 죄를 드러내 주시는 것이 은혜이다 (회개할 기회를 얻을 수 있으므로)   


여기까지가 하나님이 하시는 부분(God initiates)

 

3. Renunciation of my sins: 죄를 끊고 버리는 것.

a. 죄를 고백하는 것: 하나님이 죄라고 하시는 것에 대해 동의하고 

하나님과 사람(피해자) 앞에 죄를 입으로 낱낱이 고백하는 것(고백이 없는 것은 회

개가 아니다)

b. 하나님이 용서하셨음을 받아들이는 것.

c. 내 삶에 죄와 관련된 모든 것을 제거하는 것:

나로 하여금 죄짓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 과감하게 제거하는 것.

 

4. Restitution and reconciliation: 피해보상(변상)과 화해. 

회개의 완성단계.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회개가 아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해야 할 몫(Our response)

 

이 네 가지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만 진정한 회개를 했다고 할 수 있다.

Repentance(회개)= God’s initiation (하나님의 주도하심) + Our response (우리 반응)


회개하지 않은 자들의 12가지 죄

 

1. 고집스러운 무지의 죄:

당신의 무지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무지의 죄를 버리지 않으면

이 죄가 당신의 생명을 취할 것이다. 그러므로 무지의 죄를 회개하라.

 

2.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 은밀한 죄:

자기만 아는, 몰래 즐기는 죄를 버리라. 그렇지 않으면 결국 영원한 멸망으로 이끈

다.

 

3.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죄:

종교적 의무(기도, 금식, 봉사 등)를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죄. 

 

4. 잘못된 동기에 이끌려 신앙 생활하는 죄:

육신적인 동기 곧 자기의 양심을 달래기 위해, 경건하다는 평판을 듣기 위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자기의 재능을 과시하기 위해,

세속적이고 불경건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등

자신의 유익을 위해 신앙 생활하는 죄. 이러한 자기 기만에 빠지지 않으려면

당신의 행위뿐만 아니라 당신의 동기까지도 깊이 살펴야 한다.  

 

5. 자기의 의를 믿는 죄: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부인하는 것이므로 이것이야 말로

자기 영혼을 멸망으로 이끄는 죄이다. 악한 죄로 멸망할 수 있듯이

겉으로 드러난 의와 선행 때문에 멸망할 수 있다.

최선을 다한 후에 당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인정하라.

나의 의를 더러운 옷처럼 여겨라.

 

6. 철저한 신앙생활에 대한 은밀한 증오:

제대로 뜨겁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은근히 미워하는 죄.

이들은 철저한 신앙생활을 기묘한 것, 경솔한 것, 무절제한 열정이라고 비판한다.

이런 사람들은 거룩함을 사랑하지도 않고 거룩함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결국 마음이 부패한 사람들이다.

 

7. 일정 수준의 신앙생활에 안주하는 죄:

자기가 정한 어떤 범주의 테두리 안에서만 신앙생활 하려는 죄.

곧 자기들의 신앙생활이 구원받기에 충분할 정도에 이르렀다고 판단하면

더 이상 진전하려고 하지 않는 죄로

이것은 오히려 그들이 진정한 은혜를 받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진정한 은혜는 사람들로 하여금 언제나 완전함을 열망하도록 만들기 때문

이다.

 

8.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죄:

이것이야 말로 거룩하게 되지 못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이것은 또한 회개하지 않았다는 뚜렷한 특징 중 하나이다.

 

9. 자기를 무시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에게 악의와 시기심을 품는 죄:

겉보기에 경건한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당한 모욕을 기억하고 원한을 품고

악을 악으로 갚고 보복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악이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끓는데도

그것을 미워하거나 억제하지 않고 저항하지도 않고

오히려 습관적으로 지배당하는 사람들은 악독이 가득하며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이

다.

 

10. 억제되지 않은 교만의 죄:

하나님의 칭찬보다 사람들의 칭찬을 더 사랑하고

사람의 존경과 갈채와 인정에 마음을 두는 사람들은

아직도 진정한 회개를 모르고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교만을 보지도 못하고 문제 삼지도 않고

그것 때문에 고민하지도 않는 사람들은 죄 가운데 완전히 죽어 있는 것이다.

 

11. 쾌락을 사랑하는 죄:

육신에게 자유를 주고 육신의 요구를 다 들어주고 육신을 기쁘게 해주는 사람,

배와 감각을 만족시키면서 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겉으로는 아무리 경건해 보여

도 다 가짜이다. 육신을 기쁘게 하는 삶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

다.

 

12. 육신의 안전을 의지하는 죄:

돈, 명예 등 자신을 안전(secure)하게 지켜줄 수 있을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붙들고

그것을 의지하여 거기에 안주하려는 죄.

 

이렇게까지 꼭 회개해야 하는 이유 – 생명으로 가는 길은 좁고 협착하며

구하여도 얻지 못할 수 있으므로.

또한 구한다고 다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 7:1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 13:24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마 19:25)

우리 힘으로는 회개할 수 없으나 성령께서 도우시면 가능하다.  


회개해야 하는 다섯 가지 이유

 

1.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롬 3:23)

2. 회개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겔 33:11, 눅 5:32, 벧후 3:9)

3.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하기 때문(눅 13:3, 5)

4. 회개는 심판 날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유일한 길(롬 2:4∼5)

 (회개치 않음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것이다)

5.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기 때문(눅 16: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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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48224 2019-08-24T22:50:38Z 2019-08-24T22:58:14Z 2019 브루클린연합감리교회 가족 수련회 강의 자료

2019
브루클린 연합감리교회 가족 수련회

주제 /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주제 성구 / 빌립보서 2:12b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μετὰ φόβου καὶ τρόμου τὴν ἑαυτῶν κατεργάζεσθε
with fear and trembling your own salvation
- to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주제 찬송 / 하나님의 나팔 소리

Aug. 31(Sat)∼Sep. 2(Mon)

Mt. Giles Conference Center

Add: 439 East Rinker Rd. Stroudsburg. PA 18360

                Phone (570) 629-0920


(도입 이야기)
‘안증회’라는 단체는 교주 안상홍이 설립한 ‘하나님의 교회 예수 증인회’에 대한 약자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교주 안상홍을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안상홍 교주가 1985년 2월 25일 뇌졸중으로 죽은 후에 장길자(1943. 10. 29) 라는 여인이 안상홍의 뒤를 이어 교주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장길자는 남편 김재훈과 함께 안증회의 집사였으나 김재훈과 이혼하고 안상홍의 또 다른 아내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안상홍이 죽은 후 안증회는 장길자를 하나님의 신부,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 위에 있는 어머니 등으로 추앙하고 있으며 장길자는 안증회의 여자 교주로 현재까지 단체를 이끌고 있습니다. 최근 안증회는 자신들의 단체명에서 ‘안상홍’을 빼고 ‘하나님의 교회’ 또는 ‘하나님의 교회 세계복음 선교협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잘못된 방향으로 미혹하는 단체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신앙의 근거가 되는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이해가 필요합니다.

복(福)이란 무엇인가?


한문자의 ‘복(福)’을 분해하면 ‘보일 시(示)’자와 ‘부유할 부(富)’자가 결합한 것입니다. 따라서 복에 대한 한문자의 정의는 “부를 어떻게 보느냐?” 즉 “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복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2장 3절에서 엿새 동안 모든 것을 만드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조 하신 후에 약속하신 복은 ‘안식(安息)’입니다.

세상을 만드신 후에 복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2장 21절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보겠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은혜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20절에서 “이것들을 증 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처음 세상에 오셨을 때와 다시 오실 때는 확연히 다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처음 오셨을 때는 십자가의 구원을 증거 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다시 오실 때에는 심판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판 후에는 두 가지 안식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하나는 영생(永生)을 위한 안식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벌(永罰)을 위한 안식입니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최고의 복은 영생이라고 하겠습니다.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한국인들이 복을 좋아합니다. 아마 그 이유는 고난의 역사를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생활의 도구들을 살펴보면 장판, 가구, 이불보, 애들 노리개, 심지어 숟가락에 까지 한자로 복이라고 새겨 넣는 민족입니다.

예수 믿기 시작한 이후에도 복에 대한 이해가 세상적인 관점에 머물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를 들면 무병장수, 자녀들의 입신출세,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 등입니다.

복을 받기 원하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복은 방향을 잘 찾아야 합니다.
 

복을 바르게 누리자!


축복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병든 신앙을 만듭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에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에 하나님을 맞추려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부분의 복이 우리의 욕심이지 진짜 우리의 필요는 아닙니다. 어린 아이는 당장 입속에 달콤한 넣어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것이 복이 아닙니다. 아이의 건강을 위하여 몸에 좋은 것을 공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금 힘들더라도, 참았다가 집에서 엄마 손으로 깨끗한 음식을 먹이는 것이, 아이에게 진짜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복과, 우리가 받고 싶어 하는 복의 차이가 바로 그것입니다.

 

같은 문제 해결을 하더라도 우리가 비서 직원을 불러서 해결하는 방식과 보스 앞에 이 문제를 가지고 가서 해결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릅니다.

 

비서를 불러서 일 시킬 때는, 나의 어젠더를 푸시 합니다. 내 시간에 맞춰서, 내 방법대로 일을 해 놓으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보스 앞에, 일을 갖고 가서 해결을 부탁할 때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면서, 그 분의 타이밍과 방법에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을 우리의 비서/하인 취급합니까?

내 생각대로, 내 방법대로, 나의 타이밍에 맞춰서, 일을 해 놓으라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자기 요구대로 안 되었다고, 시험에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비서로 부리는 분이 아니라

그 분 앞에, 우리가 겸허히 엎드리는,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장 사업 성공하고 싶고, 눈앞에 장애물을 치워버리고 싶은데,

하나님께서는 더 크고 더 넓은 시각으로, 복을 보시는 것입니다.

 

복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말씀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마태복음 5장
둘째는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복의 근원
셋째는 시편 1편에서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첫 공생애를 시작하는 첫 번째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첫 번째 가르침은 복에 대한 것 이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신 복이란 헬라어로 ‘마카리오스(3107. makarios, μακάριος)’ 라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삶이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는 천국이 그들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절망했다는 뜻입니다.

 

‘자기 잘 난 맛에 살아간다’는 말처럼 사람은 각자 자기 잘난 맛에 살다가 언제 자기 자신에게 절망합니까? 자기 자신의 힘으로 절대로 어쩔 수 없는 어떤 벽에 부딪혔을 때, 위기에 처했을 때 절망합니다.

불가능한 일에 부딪히면 절망합니다. 그래서 자식 문제 앞에서, 절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기에게 절망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노력하지, 하나님을 보지 않습니다. 불가능한 일을 당해야,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자기 자존심이 깨어지고, 하나님을 갈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애통하는 자의 복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습니다.
애통한다는 것은 단순히 슬퍼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인간적인 눈물을 흘려도, 카타르시스 현상이 나타나서, 감정적으로 위로가 됩니다. 기분이 좀 그럴 때는, 슬픈 음악을 듣거나, 슬픈 드라마를 보거나 하면서 많은 분들이 울면서, 자기감정을 해소합니다.

 

애통하다는 말은, 자기 인생이 정말 어쩔 수 없는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갖고 나와서,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교만했네요. 주님 제가 어쩔 수 없네요. 주님만이 제 삶에 구원자이십니다.’ 라고 통곡하면 엎드릴 때,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하늘의 위로를 받습니다.

 

사람이 주는 값싼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그런 복이 있습니다.

 

셋째, 온유한 자의 복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온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라우테스’는 야생마를 길들여서, 온순하게 만들다’는 뜻입니다. 야생마를 길들여서 기수의 뜻에 따라 달리는 아주 폭발적인 힘을 가진 특급 경주마로 만들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온유한 사람이라고 할 때 처음부터 그냥 얌전한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모세를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잖아요. 모세가 얼마나 자존심 쎈 사람이었습니까.

 

실력도 있고,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는데, 그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꺾어서, 완전히 하나님의 손에 딱 붙잡혀 놓으니까 모세는, 자기 야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비전을 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손에 꺾여서 사로잡힌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땅에, 널리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여기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은, 한 마디로 말해서, 늘 의(올바름)에 굶주려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에 굶주려 있는가가, 여러분의 인생을 결정합니다.

 

히딩크는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며 승리에 굶주렸던 사람입니다.

내가 돈에 목마르면, 인기에 목마르면, 그것이 내 인생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의로움에 목마른 사람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 만족을 모릅니다.

그래서 의의 자리를 제일 사모하고, 의가 되신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할 때, 그 의를 베부를 만큼 풍성히 얻는 것입니다. 

사모하는 사람이 얻고, 사모하지 않는 사람은 못 얻습니다.

 

다섯째,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품어주고, 참아주고, 용서해 주고,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렇게 형제를 품어주고, 용서하고, 사랑해 줄 때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도 그를 용서하고, 사랑해주고, 품어줍니다.

 

여러분이 형제를 긍휼히 여겨주는 것만큼, 하나님의 긍휼을 여러분이 가슴 깊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게 복이라는 겁니다.

 

여섯째,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여기서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영이 맑은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영이 깨끗해 졌어요.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아서 못 듣는게 아니라, 영이 맑지 않으면, 그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설교를 들으면, 거기서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주시는 메시지를 캐치해 냅니다.

 

기도할 때 성령님의 임재를 느끼고요,

찬양하고 성도들과 교제할 때, 정말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습니다.

영이 맑으니까 그렇죠.

그래서 늘 하늘의 음성과 감동과 분별력을 가지기 때문에, 그는 복된 자입니다.

 

일곱째, 화평케 하는 자의 복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모든 사람은 서로 간에 전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은,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피스메이킹을 합니다.

 

여러분이 진짜 성령을 체험했는가, 아닌가를 보려면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싸움이 일어나는가, 아니면 자꾸 화목이 일어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자꾸 싸우려는 사람이 있어요.

 

하나님과의 화목을 체험한 다음에, 다른 사람들과도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너는 정말 나의 아들이다’라고 인정해 주십니다.

 

여덟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의 복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니라.


주님을 믿는데, 더 이상 박해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진짜 말씀대로 살려고 세상 속에서 몸부림쳐 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해 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어떤 형태로든지 조금의 박해와 핍박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견뎌낼 때, 우리는 하늘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천국을 누리게 됩니다.

 

자 순식간에 훑어보았습니다만, 여러분 팔복이 한 복, 한 복을 꿰고 있는 공통분모가 무엇인지, 팔복의 핵심 포인트가 무엇인지 이제 대충 감이 오지요?


전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은, 모든 축복의 축복, 기초적인 축복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겁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깊이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복의 첫째도 천국으로 시작해서, 마지막도 천국으로 끝납니다. 예수님이 돈 많이 벌고,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유명해지는 복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 믿으면 그게 안 오느냐? 그건 아닙니다.

그건 아주 부수적인 것이라는 거죠.

정말 fundamental한 것은 우리의 영이, 예수로 충만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교제로 아주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복의 처음과 마지막이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진짜 복은 천국을 누리고, 소유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라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누가 진짜 복을 받았는지는, 천국 가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던 데이빗 브레이너드 선교사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비롯하여 빌리 그레이엄과 우리가 아는 모든 영적인 거장들이 그 분의 글과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일종의 멘토였습니다.

 

그는 29세에 소천했는데, 미국에서 인디언 선교에 헌신하셨는데, 그 짧은 생애와 그가 남긴 일기 형식의 글은,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일기’ 지난 3백년  안에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영적인 거장들의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가 짧게 살았다고 해서, 박복한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천국에 가 보면, 우리는 데이빗 브레이너드 라는 사람이 얼마나 큰 영적인 발자취를 남겼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복은, 천국에 가서야 알게 되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좇고, 하나님과 깊이 가까이 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가는 때는, 대부분 우리의 인생이 먹구름과 비바람과 광야를 통과할 때입니다.

영화를 볼 때도, 불이 꺼져야 영화가 잘 보이듯이 우리 인생에 불이 꺼질 때, 우리가 참 희한하게도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강렬하게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기도의 용사들, 영적 지도자들은 반드시 광야를 거쳐서 나왔습니다.

 

감옥에서, 또는 좌천되어서, 몸이 병들었을 때.. 기도를 배웁니다.

말씀을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성령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자신에게 절망하게 되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이 바로 그때 생기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인생이, 지금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여러분에게 허락된 그 고난이, 박복의 증거가 아니라

축복의 증거임을, 여러분은 믿으셔야 합니다.

스스로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

 

창세기 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을 이루느냐가 아니고

누구를 만나느냐.. 입니다.

우리 인생의 최고의 날은, 그러므로 주님이 내게 찾아오시는 날입니다.

아브라함은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심으로써, 노바디가 썸바디가 된 것입니다.

 

구원은, 백프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자기가 가진 것이 아무리 없다 해도,

스스로 생각에, ‘나는 정말 운이 없이 태어난 사람’이라 생각해도

여러분은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구원하셨다는 사실만으로,

세상에서 제일 운이 좋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축복의 시작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만찬을 나눌 텐데, 여러분이 성만찬을, 구원의 은혜를 감격함으로 참여한다면,

이렇게 십자가 보혈이 나를 위해서 흘려진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축복의 시작입니다.

이게 가장 큰 복이거든요.

 

▶이렇게 우리를 보혈의 피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그 다음에는, 우리와 함께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또한 큰 복입니다.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말씀과 기도의 시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삶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아브라함의 위대함은, 그렇게 하나님이 그를 부른 다음부터

그는 항상 예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창12장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떠난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2가지를 했는데,

-일단 장막을 쳤습니다. 자기 살 집을 차렸습니다.

우리도 어디를 가든지 장막을 칩니다.

 

우리가 옮기는 새로운 직장, 이사 가는 곳, 유학 가는 곳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계속 옮겨 다녔듯이, 오늘날 현대인들도 모바일 인생입니다.

성도님들 보면, 정신이 없을 정도로 자주 옮겨 다닙니다.

 

‘목사님, 제가 쿠웨이트에 2년 가 있게 되었습니다.’

‘영국으로 유학가서 3년 있다 돌아옵니다.’

‘세종시로 발령 받았습니다. 광주에 갑니다.’

 

그리고 막 KTX타고, 비행기타고 왔다갔다 하시는데

어떨 때는 기러기 아빠, 주말 부부처럼 헤어져 있기도 하시고

보니까, 우리 성도님들 인생도 모바일 인생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장막을 늘 치시며, 옮겨 다니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새롭게 장막을 치지만, 그는 반드시 거기에서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창12:8절에, 장막터를 세웠는데,

그 전에 7절에 제단을 먼저 쌓고 예배를 먼저 드렸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우선순위가 분명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학군이 어디인지, 뭐 이런 것 알아보고 집을 구하는데,

아브라함은 먼저 예배터부터 세우고, 다른 모든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창12:7~8

 

어제까지 우상이 들끓던 자리에, 믿음의 사람이 딱 가서 제단 쌓고 예배 드리니까

거기가 거룩한 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오기까지, 여기 건물은 거룩한 땅이 아니었지만,

우리가 들어와서 예배를 드리니까, 여기가 거룩한 땅이 된 것입니다.

 

저는 직장에 심방갈 때, 그 직장에 사무실의 스페이스가 별로 없는데도

콩알만한 방이라도, 기도실을 만들어 놓고, 보여주는 성도님들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들어가서, 힘들 때마다 여기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장막터 가운데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여러분이 항상 예배드리는 사람 되기를 바랍니다.

복의 근원이 되려면, 아브라함처럼, 항상 예배의 자리를 만들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왜 기업 회장 비서실 출신들이 승진을 빨리 하는지 아세요?

회장이 자기와 익숙하니까 그래요. 자주 보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모든 회사에서 고속 승진하는 사람의 특징은 바로 그것입니다.

자주 보이는 것입니다. 회장 눈에요.

 

여러분들, 하나님의 눈에 자주 보여야 됩니다.

주님이 기억하는 교인들은, 간단합니다.

자주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목사도 불꽃같은 눈이 있어서,

여러분이 한 주간만 빠져도 금방 알아요. 하물며 하나님은 어련하시겠습니까!

저는 똑똑한 교인보다, 덜 똑똑해도 우직하게 나와 주는 교인들이 더 고마워요.

자주 보여야 되고, 스쳐야 됩니다. 하나님도 그러실 겁니다.

 

‘아브라함은 나의 친구라’

그는 항상 하나님과 교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복이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딴 사람에게 복이 갈 틈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항상 와 있으니까요.

 

여러분은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예배하며 교제하는

아브라함 같은 신앙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배하는 사람은, 하늘의 축복을 받습니다.

엡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자 여기서 중요한 말은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어떠한 복도, 하나님은 그리스도 밖에서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복을 체험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됩니다.

반드시 ‘그리스도 안’이라는 파이프라인을 통해서,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여러분의 집에 TV, 세탁기, 컴퓨터, 냉장고가 있어도, 전기가 정전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집의 전기와도 같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없이 자녀가 명문 대학에 들어가고, 예수 없이 돈 잘 벌고..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예수 반석 위에다 세워야 됩니다.

 

자녀가 예수를 모르고 명문대 나와서 일류 직장 들어가는 것, 대단히 위험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자녀는 혹시 ‘현명한 악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축복은 예수 안에서 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물질, 예수님이 빠진 명예, 예수님과 무관한 자녀 교육이

참 복이 되지 못합니다.

모든 복은 예수 안에서 와야 되는데, 이 축복이 더욱 신령한 복이 됩니다.

 

Every spiritual blessing

영과 육은 연결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과 친해지면, 먼저 하늘의 복이 깊이 들어오는데

하나님의 그 영적인 복이 먼저 쫙 들어와서 기반이 쌓여야

나중에 그 기반위에서, 다른 모든 현실적 복들도 굳게 세워지는 것이죠.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기초공사를 영적으로 잘 다져놓으면, 그 다음에 하나님이 복을 주실 텐데

많은 사람들이 이 순서를 거꾸로 뒤집습니다.

‘나는 예수 믿는데, 왜 복은 안 주시지?’

‘내가 교회 다닌지 1년 되었는데, 왜 사업이 잘 안 풀리지?’

‘나는 왜 아직도 아프지?’

 

조급한 마음을 버리세요. 우리 영혼이 단단해 져야 됩니다. 깊어져야 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영적으로 굉장히 성숙해지고, 깊어지고

그런 뒤에 이런 축복이 와야, 그 사람을 살리지..

 

영적으로 다듬어지지 않는 사람에게, 물질의 복을 주면

그 물질이, 그 사람을 타락시킵니다.

 

영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그 권력이 그 사람을 죽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조급한 마음을 버리세요. 하늘의 복을 사모하십시오.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그러면 땅의 복은 발버둥치지 않아도,

In His time 주님의 때에 반드시 여러분에게 가랑비 이슬에 젖듯이, 그렇게 스며들 것입니다.

 

▶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위해서 예비하신 축복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여러분, 복은 능력입니다.

선한 일을 하려고 해도, 능력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복은 복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복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주시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위 구절에서 주어가 다 하나님이십니다. ‘내가’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내가 복을 줄 터이니, 너는 가만히 있으라는 겁니다.

 

우리는, 복을 자기가 쟁취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벨탑을 만든 사람들은, 자기들이 큰 탑을 만들고자 했는데,

하나님은 복을 너희에게 주고 싶다고 하십니다.

 

축복은 내 힘으로 쌓아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축복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시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첫 번째 복은, 사람의 복이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다.’

이 말씀은, ‘너희 자손들이 많아질 뿐만 아니라, 너희 자손들 옆으로 와서 붙어줄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캠프에는, 아브라함의 직계는 이삭 뿐이지만

그런데 옆에 붙어준 사람은, 이방인들까지 많았습니다. 가신 그룹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2백만이 출애굽했을 때, 순수한 유대인만 있었던 게 아니고,

‘중다한 잡족’이라 표현된 이방인들이 많이 따라왔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브라함의 직계 혈통의 자손이 많아지리라는 뜻도 되지만,

아브라함 옆으로, 그와 비전을 공유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이 붙을 것이라는 뜻도 됩니다.

 

   제가 인생에서 최고의 축복은 ‘사람의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리더십 강의를 많이 하는데, 리더십을 할려고 해도, 사람이 붙어야 리더십을 발휘하죠.

   사람이 한 명 뿐인데, 나는 리더이고, 너는 팔로워이고.. 그건 아무 의미도 없죠.

 

   리더십이 있느냐/없느냐의 차이는

   그 사람 옆으로 사람들이 붙느냐/안 붙느냐.. 그 차이입니다.

 

아브라함은 보니까, 옆에 하나님이 사람들을 많이 붙여 주셨습니다.

그것도 목숨을 바치고, 진심으로 아브라함을 사랑하고, 함께 뛰는 탁월한 재주와 충성심을 가진 사람들이 붙었습니다.

 

자, 아브라함 밑에서 얄미운 롯이, 세력을 키워가지고 독립해서 나가지요.

영악한 사람들이 다 롯에게 붙어서, 큰 세력을 만들어서 나갔는데,

롯이 잘 꼬셨겠죠. ‘너, 나를 따라오면 스톡옵션 줄게. 고속승진도 약속하마!’

젊고 빠릿한 롯을 따라서, 젊고 영악한 친구(종)들이 다 따라 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롯의 부하들의 차이와, 아브라함의 부하들의 차이는 몇 년만에 결판났습니다.

 

롯은 나가서 그 땅에서 전쟁을 겪었습니다.

전쟁을 겪으면서, 적군이 롯의 식구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롯이 스톡옵션과 돈으로 설득했던 부하들은,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 롯을, 누가 구해옵니까? 아브라함이 집에서 길렀던 사병 318인을 데리고 추격해서

적군을 공격해서 롯을 구해옵니다.

 

롯을 끌고 간 적군이 피라미 군대가 아닙니다.

당시 최고 강대국입니다. 4개국이 연합한 구름 떼 같이 많은 군대를

아브라함이 쫓아가서 격파하고 롯을 구출했다는 것은,

그 사병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목숨을 걸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나이들이 318명이나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붙여준 사람과, 롯이 돈으로 긁어모은 사람의 차이가 잘 드러납니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해 보고, 뼈저리게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 합니다.

 

좋은 배우자, 좋은 친구, 좋은 목회자, 좋은 직장 상사 만나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인생을 좀 살아보신 어르신들은 아시죠.

아무리 아이를 과외공부 잘 시켜서, 명문대학 나오게 키우면 뭐 합니까.

결혼 잘못하면, 그냥 망가지는데요.

 

그렇게 잘난 사람도, 사업파트너 한 명 잘못 만나면, 그냥 무너지는데요.

그렇게 믿음 좋은 사람도, 교인 잘못 만나면 그냥 시험듭니다. 사람의 축복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저는 그래서 아이들을 축복할 때,

‘이 자녀에게 사람의 축복을 주십시오. 좋은 스승, 좋은 친구, 좋은 배우자, 좋은 목회자 만나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인생이 끝난 겁니다. 승리하는 겁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좋은 교회 공동체를 만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아주 중요한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래서 교회를 여러분이 사랑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여러분의 주위에 주신 사람들은 여러분이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배우자, 맨날 바가지만 긁지 마시고

‘아이고 우리 복덩이’ 하나님이 복 주신 사람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도, 하나님이 여러분께 복 주신 것으로 믿고 선포하십시오.

자꾸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사람 더 많이 붙여주십니다.

 

우리 교회 부흥의 비결은,

저는 매 주일, 우리 교회 교인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또 이런 복덩어리를 보내주셨군요.

우리 교회들이 저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계속 하나님께 선포하며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이렇게 복을 보내주셨군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더 복된 사람들을 많이 보내주시는 것 같아요.

아브라함 옆에, 그런 복된 사람들이 붙었다는 겁니다.

여러분께 이런 '사람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이 주시는 두 번째 복은 이름을 창대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making your name great 이름이 창대하게 된 다는 말은, 단순히 유명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양적인 축복돠 함께 질적인 축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냥 부자가 되는 게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칭찬 받는 부자가 되는 겁니다.

 

부자들도 욕먹는 부자 있잖아요. 그러는 부자가 있고,

저렇게 성실하게 일하고, 저렇게 좋은 일 많이 하면서,

저렇게 건실하게 노력하니까 부자가 됐네! 그래서 명예로운 성공을 이룬 분들이 있어요.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부는, 근심을 겸하여 주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자기 실력에 기초를 두지 않은 성공은, 너무나 불안한 겁니다.

 

학력을 부풀리고, 자기 이력을 부풀리고, 남을 사기 쳐서 이룬 부나 명예는

얼마나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입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정직하게 땀을 흘려서 얻어낸 열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의 성공을 인정하고 축복하는 그것이 바로 ‘이름이 창대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성공이,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름이 창대하게 된다는 것은, 크레센도 처럼 점점 커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대에서, 2대, 3대로 내려갈수록, 후손의 축복이 더 커진다는 것인데,

아브라함보다 이삭이, 이삭보다 야곱이, 야곱보다 요셉이 훨씬 더 잘되잖아요.

여러분의 자손이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3. 보호하심의 축복입니다.

 

창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너무 심플합니다. 너와 나는 하나다. 내가 너와 운명 공동체로 살겠다.

그래서 너를 건드리는 사람은, 나를 건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선포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 보호하심의 축복이 너무나 좋은 거 있죠.

특별히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 이 보호하심의 축복을 믿으니까, 담대해 집니다.

 

요즘, 애들 키우기가 얼마나 불안합니까.

요즘 뭐 여자아이들 학교 보내기도 불안하고

남자아이들도 왕따 당할까봐, 학교폭력 당할까봐 얼마나 불안합니까.

유학보냈더니, 미국에서 총기사고도 많이 난다 그러지, 사방이 사고 투성이입니다.

 

24시간 우리가 따라다닐 수도 없고, 그러나 하나님이 보호하신다고 믿습니다.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상치 못하도록, 그분의 보호막이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지키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믿음의 가문은, 특히 하나님의 보호막이 두껍고 강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강합니다.

여러분이 기도보다 더 강합니다. 왜냐면 믿음의 부모들의 기도가 쌓였거든요.

 

하나님이 특별히 저도 많이 봐 주시는 것을 느낍니다.

믿음의 부모들의 기도가, 자녀를 지키는 겁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축복을 여러분께 주십니다.

 

▶4. 중요한 것은, 축복을 받았으면,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겁니다.

 

12:3b,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 말씀이, 아브라함의 복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주셨으면, 우리가 축복의 종착역이 아닙니다.

우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한테 하나님께 돈을 줘서 ‘아브라함아, 네가 세계 최초의 억만장자가 되어라.

그래서 대 저택을 사라. 스포츠카를 20대 사서, 잘 향유해라’

이걸 위해서, 복 주신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복은,

앞으로 열방으로 나아갈 하나님의 축복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이걸 몰랐습니다.

솔로몬에게 하나님이 엄청난 부를 쏟아부어주셨는데,

그의 창고에서는 input은 있는데, output이 없었습니다.

 

솔로몬이 곳간을 풀어서, 백성과 나누었다.. 이런 말은 성경에 안 나옵니다.

나누지 않으니까, 자식 대에 외국군의 침략을 당했어요. 싹 다 털어가 버립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나누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명에 따라서 각 사람에게 다른 복을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재물의 축복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의 복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음악의 복을 주시고, 건강의 복을 주시고,

이런 복을 나눠 주시는데, 그 사람에게 맡기신 사명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은, 어떤 면에서 그의 은사에 가깝다고 봅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재물의 축복을 주시지 않은 까닭은,

이 사람에게는 재물을 주면, 이 재물이 그를 죽이겠거든요.

 

그래서 그 사람에겐 안 주시고, 지혜의 축복, 지식의 축복을 주신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받은 지식과 지혜를 가르치면서, 그걸 사용해야 합니다.

 

재물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그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됩니다.

흘려보내야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게 쌓여서 썩게 되고, 그 썩는 환처가 자기를 죽입니다.

 

복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열매는 내 혼자만 따 먹는게 아닙니다. 남과 함께 따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축복을 달라고만 하지 말고, 축복을 주셨을 때,

여러분이 감당할 사명을 위해서 여러분이 헌신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축복은요, 작은 사명부터 헌신을 잘 하는 사람에게 계속 오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 사람은 축복 받고 딴 짓을 안 하니까요.

욕심 많은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헌신의 사람, 순종의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계속 축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이 축복은요, 하나님의 계획이, 나의 삶을 새로운 단계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찾아오시는 것, 구원하시는 것이 복의 시작인데,

구원하신 다음에 계속 교제하시면서 사명을 주시는데,

축복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자기만 알던 인생에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인생으로 업그레이드 하도록, 인생을 바꾸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조금 고통스러워요.

 

그래서 아브라함도 이 환상적인 축복의 말씀을 듣고 나서,

아브라함의 인생이 조금 힘들어 졌습니다. 창12장에 보면,

 

첫 부분은 축복의 말씀 듣고 좋았어요. 그 말씀 듣고 순종해서 이민을 떠나왔어요.

아마 아내와 하인들은, 입이 나올만큼 불만이 많았을 겁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서 미지의 땅으로 가니까요.

 

사원들이 전부 반대하는 프로젝트를, 사장이 혼자 고집스럽게 추진한 일이라면,

그 프로젝트가 대박이 나야, 사장의 권위가 세워지는데,

약속의 땅까지 가기만 하면, 대박이 터질줄 알았는데,

그 땅에 오자마자 흉년이 든 것입니다.

 

사람들이 전부다 아브라함을 째려보게 되었죠.

‘사장님,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뭐가 있습니까? 축복은커녕, 복의 그림자도 안 보이네요’

아브라함이 그때 기도 안 하고, 당황스러워서 애굽으로 확 가버렸습니다.

거기서 밥은 먹었는데, 문제는 밥을 잘 먹여준 애굽 왕이 자기 아내 보는 눈길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머리가 빨리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남편이라고 소개했다가는, 자기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눈치 챘습니다.

그래서 자기 누이동생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자 바로가 아브라함을 후대하고, 지참금도 듬뿍 줍니다.

아브라함은 속으로 죽을 맛이죠.

약속의 씨앗을 잉태할 아내를, 이집트 왕에게 넘겼으니요..

 

이때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악몽을 꾸게 하시고,

그제야 아브라함이 거짓말 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이니, 그냥 선물 줘서 보냈습니다.

그래서 간신히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돌아왔는데, 이미 권위는 땅에 다 떨어졌어요.

부하들 눈에, 애굽으로 가자 그러더니, 거기서 거짓말해서 아내 뺏길 뻔 하고

툴툴 거리면서 왔는데(12장 후반), 또 롯이 반란을 일으킵니다.(13장)

 

롯이 툴툴거리며 불평하는 영악한 회사원들 다 모아서, 독립선언 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하나님의 복을 받고 아브라함이 움직인 몇 년 사이에 다 일어난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생각이 나지 않았겠어요? ‘이게 뭔 복이여?’

가만히 보면, 이런 갈등 상황이 일어난 데는, 아브라함 자신의 책임이 절반 이상입니다.

 

힘들어질 때, 기도해 보지 않고, 시세를 살펴서 애굽으로 이사갔죠?

애굽 왕에게 안 해도 되는 거짓말 했죠? 이게 다 아브라함의 옛 사람이 아직 살아있어서 그런 거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도 이 모든 기간이 필요했던 겁니다.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축복을 받을 만한 그릇으로 이 사람을 만들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믿음의 갈등 상황이 불가피해요.

 

우리 옛사람이 깨어지고, 새사람의 형상으로 점점 변화되기 까지

막 뒤집어지고, 혼동스러워요.

 

▶여러분의 인생에서, 지금 그 시점을 지나고 있는 분이 있을 거에요.

하나님이 분명히 복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새로운 음성을 들려주시고,

새로운 비전에 헌신시키셨는데, 자기 인생이 더 복잡해집니다.

부부싸움이 더 잦아지고, 회사 일은 사방에서 구멍이 터지고, 막 갈등상황이 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이런 갈등이 계속되는데, 이게 좋은 겁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옛사람을 끄집어내면서,

새로운 하나님을 체험하게 해 주시는 시간인줄 믿으세요.

여러분을 복 주시기 위해서, 그 기초 바탕을 조정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 있는 사람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을 소유하신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살기 때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그 뿌리가 예수님께, 성령님께 깊이 뿌리 내린 사람입니다. 겉모양을 봐서는 모릅니다. 뿌리는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 뿌리가 닿은 예수님으로부터 날마다 은혜와 능력과 하늘의 힘을 공급 받는 사람이, 진짜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합니다.

여기서 ‘묵상’이란 히브리어 뜻은 ‘배고픈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 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기도할 때가, 우리 인생이 잘 풀릴 때가 아니라

세상이 나를 상처주고, 실패하고 좌절해서 마음이 상처투성이 일때

날마다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서, 울부짖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고, 만사가 다 형통하게 된다.

그 말은 내 입맛대로 인생이 다 풀린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그 사람의 인생에서 타이밍에 맞추어서 딱딱 이루어져 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형통'이란 단어는, 요셉이 감옥에 있었을 때,

또한 보디발의 집에 있었을 때, 거기서 형통했던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우리 인간적 눈으로 볼 때는 성공 참 대단하네

감옥에서 출세했네, 성공이네! 그게 아니라요.

우리는 단편적인 지금의 그림을 보고, 성공을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전체 장엄한 파노라마를 보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실 때, 지금은 감옥에 들어왔지만

이게 총리대신까지 가는 하이웨이에 들어선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타임스케줄에는 정확하게 일분일초도 어김이 없어요.

요셉은 그 시절에 맺어야 될 과실을 맺으면서, 지금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복 있는 사람인 거죠.

 

여러분의 인생을, 지금 단편적으로 보면 몸이 아프고, 좌천당하고 그러니까 절망스럽겠지만,

인생을 크게 길게 보시면, 여러분의 대에, 또한 여러분의 자녀의 대에,

하나님은 반드시 위대한 뜻을 이루실 겁니다.

 

지금 당하는 고난은, 거기로 가는 작은 터널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예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는, 건강한 시냇가에 심긴 복된 나무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항상 활기에 차 있습니다.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evergreen입니다.

가난해도 기죽지 않고, 몸이 아파도 씩씩하고

남들이 다 안된다고 하고, 다 망한다고 하는데, 이 사람에게는 여유가 있고, 하늘의 평안이 있는 겁니다.

 

어제보니까 다 죽을 것 같았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는 쌩쌩하게 봉사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언제나 그렇게 삽니다.

 

마치는 말


예수님의 팔복, 아브라함이 누렸던 복,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가 누리는 복의 공통분모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복”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옛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성경적인 복의 핵심은 세상에서 누리는 물질적인 복이 아니라 영적인 복입니다. 영적인 복을 Hard Drive 라고 한다면 세속적인 복음 Software라고 하겠습니다. 하드 드라이버의 용량이 작은데 소프트웨어를 아무리 많이 깔아야 작동되지 않습니다.
 

영적인 복이 없이 돈을 잘 벌고,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고, 최고의 직장에 다닌다고 자랑하지만 마지막 날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영적인 복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잠시 광야로 내몰 수도 있습니다. 광야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스스로 불쌍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광야에서 가장 필요한 것만 찾는 것처럼 오직 한 가지 하나님만 갈망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지금 가난하고 몸이 아프다 할지라도 그 은혜가 여러분께 충만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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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파트리스교회 2019-7-14(주일)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Ⅰ(요한계시록 1:3)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오늘의 주제가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입니다.
왜 요한계시록을 ‘복으로 읽어야 하는가?’
그 이유를 먼저 소개합니다.
성경을 산(山)에 비유하면 성경에는 구약이라는 산과 신약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구약이란 산에는 39종류의 나무들이 있고, 신약에는 27종류의 나무들이 있습니다. 나무들이 우거진 것을 삼림(森林)이라고 합니다. 삼림이란 한자를 분석하면 ‘수풀 삼(森)’ 자에는 나무(木)가 세 개 있습니다. 또한 ‘수풀 림(林)’ 자에는 나무(木)가 두 개 있습니다. 따라서 삼림이란 성경에는 66종류의 나무들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66번째 종류의 나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삼림에 있는 나무로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요한계시록을 삼림의 나무로 읽거나 해석하지 않고 마치 거대한 산맥(山脈)처럼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요한계시록은 읽는 것도 어렵고 이해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고 이해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요한계시록을 삼림에 있는 다양한 나무 중 하나라 생각해 봅니다. 다양한 나무들 중에서 공통적인 요소들을 찾는다면 첫 번째가 복(福)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22장 404절로 구성되었는데 복에 관한 말씀이 7번 소개됩니다. 성경 전체에서 강조하는 복과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는 복의 관계를 찾는다면 삼림에 속한 나무로서 요한계시록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福)’이란 한자를 분석하면 ‘볼 시(示)’와 ‘부유할 부(富)’자가 결합한 것으로 복이란 한자의 의미는 “부유한 것을 어떻게 보느냐?” 또는 “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하겠습니다.

저희가 200년 7월 4일에 뉴욕 존 에프 케네디 공항으로 가족들이 입국했습니다. 그 당시 플러싱에 '다쓰죽' 이란 모임이 한인사회에 있었는데 다쓰죽의 회원이 되려면 승용차의 기준을Benz라고 합니다. 또한 다쓰죽의 의미는 내가 번 돈은 내가 다 쓰고 죽겠다는 모임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한인 이민자들의 삶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부(富)를 돈으로 비유하면 ‘돈을 어떻게 보느냐?’에 의해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가 형성됩니다. 자본주의는 자기 능력에 따라 일을 하고 그 대가를 받는 사회를 말합니다. 사회주의는 능력에 따라 수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수입을 모두 합산하여 사람 수대로 배분하여 똑같이 나누는 사회를 말합니다. 공산주의는 돈과 수입만 균등한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에 계급이 없다며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회를 말합니다. 그런데 공산주의가 유지하려면 작은 그룹을 만들고 그 그룹을 대표하는 지도자를 선발합니다. 이렇게 지도자 위에 또 다른 지도자를 세워 나가면 마지막에는 수령이란 최고의 지도자가 나타납니다. 모든 사람은 결국 수령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공산주의라고 하겠습니다.

복에 대한 견해를 두 가지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외형적인 복(外形的 福) - 세속적 복

외형적인 복을 세속적인 복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를 부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고급 승용차를 구입하려고 합니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Benz라는 자동차가 있습니다. 독일 교회 초청으로 Benz를 생산하는 도시를 방문했을 때 놀란 것은 Benz를 타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을 안내하는 독일 목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독일 사람들도 Benz 가격이 너무 비싸서 잘 타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파트의 가족들의 수에 맞는 것을 선택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것을 좋아합니다. 옷과 가방 심지어 신발에도 명품이 있습니다.

얼마 전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후배가 서울에서 여러 동문들을 만났는데 대부분 50평 아파트에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데 뉴욕으로 돌아와서 자기의 삶을 둘러보며 나는 그동안 미국 생활 40년을 헛살았구나! 하고 느꼈다고 합니다. 이런 삶이 모두 세속적인 복에 붙들려 살아가는 인생이라고 하겠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이 가져야 만족할 수 있을까요?

둘째는 내면적인 복(內面的 福) - 신령한 복, 영적 복

내면적인 복을 신령한 복 또는 영적인 복이라고 합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여 생각하기를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자 그리고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할 때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시며 어리석은 부자를 깨우쳤습니다(누가복음 12:16∼20).

내면적인 복에 대한 교훈을 어느 부자에 대한 비유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자가 어리석은 이유는 내면적인 복이 외면적인 복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복에 대한 두 개의 단어는 ‘베라카(1293. berakah, בְּרָכָה)’와 ‘에세르(835. esher, אֶשֶׁר)’ 라고 합니다.
베라카의 복을 신명기 28:1∼2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베라카’ 라는 복은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순종할 때 복을 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베라카’ 라는 복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에세르의 복은 시편 1:1∼3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에세르(esher, אֶשֶׁר)’의 복을 시편에서 ‘아쉬레이(אַ֥שְֽׁרֵי)’ 라고 합니다. 아쉬레이(אַ֥שְֽׁרֵי־)는 에세르(אֶשֶׁר)의 복수형입니다. 아쉬레이의 복은 시냇가에서 심은 나무를 말합니다. 이때 시냇가는 복수형으로 하나의 시내가 마르면 또 다른 마르지 않은 시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자연적으로 뿌리를 내린 나무가 아니라 반드시 심은 나무를 말합니다. 복이란 나무가 마르지 않는 시냇가에 심겨진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복을 시편 133:3에서 찾아봅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구약에서 복(1293. berakah, בְּרָכָה)이란 곧 영생(永生)을 말합니다. 영생의 복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의 복을 요한계시록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복’ 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모두 일곱 구절입니다(1:3, 14:13, 16:15, 19:9, 20:6, 22:7, 22:14).

일곱 구절에 소개된 복에 대한 말씀을 찾는 것이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예언의 말씀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 예언의 그 말씀(τοὺς λόγους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the  words of the prophecy)’ 이라고 합니다. 예언의 말씀이란 성경 전체에 소개된 예언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서만 예언하는 제한된 말씀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말씀이란 곧 요한계시록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언의 말씀이란 주제가 사용된 구절은 모두 5구절입니다(1:3, 22:7, 10, 18, 19).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도 예언의 말씀이란 구절은 오직 요한계시록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요한계시록 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요한계시록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예언의 말씀이 강조하는 내용은 ‘속히 오리라’ ‘가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속히’ 라는 단어가 8구절에 소개 됩니다(1:1, 2:16, 3:11, 11:14, 22:6, 7, 12, 20).

속히 - tachos(τάχος), tachu(ταχύ) 
- (영적 의미) 반드시
- (시간적 의미) 빨리  

1. 1:1, 속히 될 일 - τάχει, quickness, 5034. tachos(τάχος) 
2. 2:16, 속히 임하여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3. 3:11, 속히 임하리니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4. 11:14, 속히 이르는도다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5. 22:6, 속히 될 일 - τάχει. quickness, 5034. tachos(τάχος)  
6. 22:7, 속히 오리니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7. 22:12, 속히 오리니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8. 22:20, 속히 오리라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예언의 말씀이 강조하는 내용은 반드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은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움이니라.

때가 가깝다는 것을 ‘마지막 때’ 라고 합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의 특징을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때’ 라고 합니다.
요한일서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따라서 오늘날을 마지막 시대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시대에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자다가 깰 때는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진 때를 말합니다.

로마서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어리석은 예언

18세기에 영국 복음주의 각성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은 요한 웨슬리(John Wesley)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입니다. 조지 휫필드는 탁월한 설교자였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영국과 미국을 13번 왕래하면서 대각성 운동을 이끌었는데, 어느 날그의 아들이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조지 휫필드가 너무나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다는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내 아들을 살려주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죽고 말았습니다. 조지 휫필드와 같은 유명한 설교자일지라도 때로는 자기 생각과 판단에 따라 예언하면 틀린 예언을 할 수 있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그 충격으로 인하여 6개월 동안 설교를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때로는 기도하다가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 또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예언하는 어리석음에 빠지면 안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성경의 한 부분으로 마지막 이루어질 것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무섭다거나 공포 분위기를 제공하는 말씀이 아니라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하고 격려하므로 이기도록 돕는 말씀으로 읽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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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파트리스교회 2019-7-21(주일)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Ⅱ(요한계시록 1:3)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성경에서 강조하는 최고의 복은 ‘영생(永生)’입니다.
영생이란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죽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포기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 2. 7~1535. 7. 6)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왕에게 항복하라고 그를 졸랐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오랫동안 함께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왜 당신은 꽃 같은 나이에 당신과 우리 가족에게 가장 비극적인 불행을 가져오려 하십니까?” 이 말을 들은 모어는 이렇게 되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최소한 20년은 사실 거예요.” 그러자 그는 소리쳤습니다. “이 땅에서의 20년밖에 안 되는 삶을 위하여, 내가 영원한 삶을 포기하고 고통에 나를 내어 준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오! 영혼을 잃는 것보다는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을 잃는 편이 오히려 더 좋은 일이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소?”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이란 제목으로 두 번째 설교를 합니다. 지난 주일에 소개했던 설교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성경을 산(山)에 비유할 때 구약이란 산에는 39종류의 나무가 자라고 있고, 신약이란 산에는 27종류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나무들이 많이 우거진 곳을 삼림(森林)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다양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삼림(森林)과 같습니다. 삼림(森林)이란 한자어의 훈은 ‘수풀 삼(森)’, ‘수풀 림(林)’이라고 합니다. 삼림(森林)이란 한에는 나무(木)만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삼림의 나무들 중에서 66번째 종류의 나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요한계시록을 삼림 속에 있는 나무라고 해석하지 않고 많은 높은 산들이 줄지어 있는 산맥(山脈)으로 이해했습니다. 그 결과 산맥(山脈)은 쉽게 올라갈 수 없는 아주 높고 험준한 곳이기에 요한계시록을 특별한 은사를 받은 교주만이 해석할 수 있다고 강조되었으며 심지어 특정한 교파에 가입해야만 된다는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삼림(山脈)의 한 나무처럼 성경의 줄기에 따라 한 주제로 읽을 때 요한계시록은 어렵고 난해한 말씀이 아니라 누구든지 읽을 수 있는 약속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주제로 읽는 첫 번째 방법은 ‘복(福)’이란 주제로 읽는 것입니다.

복(福)이란 한자는 볼 시(示)와 부요할 부(富)가 결합한 단어로 "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 또는 '부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부(富)'의 기준을 '돈' '자동차' '집'과 같은 외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세속적인 복'과 '내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신령한 복'으로 구분합니다.

구약에서 복이란 두 단어 '베라카(신명기 28:1∼2)'와 '에제르(시편 23:1∼3)'를 소개합니다. 베라카와 에제르는 순종의 복을 말합니다. 순종하는 약속의 백성들은 뛰어난 민족이 될 것이며 마치 마르지 않는 시냇가(복수)에 심어진 나무처럼 항상 물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복은 영생(永生)입니다(시편 133:3, 요한복음 3:16, 17:3).

예언의 말씀이란 그 예언의 그 말씀(요한계시록 1:3, 22:7, 10, 18, 19)을 말합니다.

예언의 말씀의 내용은 '속히 오리라! 가감하지 말라!' 라고 합니다. 속히(1:1, 2:16, 3:11, 11:14, 22:6, 7, 12, 20)라는 말은 시간적인 의미보다는 영적 의미로 '반드시 오실 것'을 말합니다.

오늘은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두 번째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먼저 요한계시록 1장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예언의 말씀으로 소개된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특징을 세 가지 모습 즉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영생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복을 누리기 위해서 예언의 말씀 속히 오시리라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위한 세 가지 자세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읽는 자, 둘째는 듣는 자들, 셋째는 지키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첫째, 읽는 자(아나기노스콘, ἀναγινώσκων)

본문에서 ‘읽는 자’는 두루마리의 말씀을 회당에서 회중을 대표하여 전문적으로 읽는 낭독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성경을 읽는 자를 말합니다. 성경을 문자로만 읽는 것이 아닙니다.

1. 확실하게 아는 것(to know certainly)
2. 다시 아는 것(know again)
3. 인식하는 것(recognize), 알아차리는 것(discern)

요한계시록에 사용된 각종 상징과 숫자들의 의미를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결론입니다. 만일 상징과 숫자들과 인과 나팔과 대접의 의미는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결론을 모르거나 지나쳐 버린다면 큰 실수를 범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해외여행이 한창일 때 가이드가 신신당부하기를 많은 관광객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기 때문에 항상 가이드가 들고 있는 깃발을 보고 따라와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에게 이번 여행이 어떠했느냐? 하고 물었을 때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외국 땅에서 가이드가 들고 다니는 깃발만 보도 따라다녔기 때문에 아무 것도 기억이 없다고 했다는 우스개 이야기처럼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해가 상징과 숫자와 인과 나팔과 대접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성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잃어버린다면 그 결과는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며(창 1:1), 창조한 세상을 심판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계 22:20).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성경에서 예언의 결론은 '마라나타'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믿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복으로 읽는다는 것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믿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듣는 자(아쿠온테스, ἀκούοντες)

본문에서 듣는 자는 문법적으로 복수형입니다. 읽는 자는 한 사람이지만 듣는 사람은 여러 사람입니다. 회당의 예배는 성인 남자 10명 이상이 모였을 때에 예배가 시작되었으므로 최소한 10명 이상이 듣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1. 이해하는 것(to understanding)
2. 가르칠 수 있는 것(to teaching)

교육심리학에서는 죄(罪)에 대한 정의가 아주 새롭습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것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을 모르면서 특히 요한계시록을 모르면서 읽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구원의 진리를 알았으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말씀 처럼 다시 오실 심판의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깨우쳐야 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

알면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는 것은 내 안에 머물지만 행하는 것은 내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을 안다고 말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겠습니다.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깨달은 후에는 아직도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소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24장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 무렵 함께 유하려고 어느 집에 들어가서 음식을 먹으려고 할 때 주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 제자들에게 떼어 주셨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그 분이 주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을 눈이 밝아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주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주님이 보이기 시작하면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실천을 위하여 들어야 한다.

예수님은 많은 말씀들을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비유로 가르치실 때 사용하셨던 ‘들으라’ 또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들으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은 이미 증거 된 가르침들 즉 구약의 말씀에 대해서 실천하기 위해서 들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마가복음 4:3∼9).


셋째, 지키는 자(테룬테스, τηροῦντες) 


테룬테스(τηροῦντες)는 테레오(τηρέω)의 복수형으로 ‘지키는 것’ 그리고 ‘감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키는 자는 물론 예언의 말씀을 지킬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감시해야 합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잘못 전달되거나 가르치는 것을 감시하고 그와 같은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도록 생명을 사랑하고 영혼을 감시하는 책임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에 무당(巫堂)의 수가 대략 30만 명이라고 하며 무당에 의해서 창출되는 년 간 금액이 무려 6조원이라고 합니다. 교인의 수가 1,200만 목사의 수가 6만이라고 하는데 교인들이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였다면 어떻게 한국사회가 이렇게 무당의 수가 점점 더 늘어가고 있을까요?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한 책임을 교회가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28,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약속하신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8: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일서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요한계시록은 읽고 듣고 지키므로 복을 누립니다. 해석하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해가 될 때까지 읽고 들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2:7에서 지키는 것에 대한 복을 강조합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지킨다는 말은 실천한다는 뜻도 있지만 그 말씀을 변질되지 않도록 없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지킨다는 뜻이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영생의 복을 누리기 위하여 그 예언의 그 말씀 곧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켜야 합니다.

티벳 사람들의 종교는 라마 불교라고 합니다. 티벳 사람들은 라마 불교의 경전을 읽지 않기 때문에 라마 불교를 모른다고 합니다. 티벳의 불자들이 경전을 읽지 않기 때문에 라마 불교 사원 주위에 ‘마니차(摩尼車་)’ 라는 불교 도구를 만들어 놓습니다. ‘마니차’란 원통형 모양으로 표면에는 ‘만트라’가 새겨져 있고, 내부에는 롤로 경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마니차의 크기는 다양하여 손에 쥘 수 있는 크기부터 큰 것은 몇 미터에 달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둥근 원통 마니차를 손으로 돌리면 한 번 읽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라는 마니차를 한번 돌리면 창세기를 한 번 읽는 것입니다. 두 번 돌리면 두 번 읽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니차를 돌리기만 하기 때문에 경전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간혹 도로에서 자동차 뒤에 성경 찬송을 얹어놓고 다니는 운전자를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찬송을 마치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소원하는 부적과 같이 사용한다면 이런 것도 기독교식 마니차라고 하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요한계시록을 읽지 않고 듣지도 않으므로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영생(永生)의 복(福)을 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복이란 주제로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 영원한 삶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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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31:11,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로 듣게 할찌니.

말씀을 읽는 자의 예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자리에서 일어나 성경을 펼쳐서 한 구절을 읽었던 어느 교인이 하루는 성경을 펼치는 순간 마태복음 27:5 말씀이 눈에 띄었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그러자 이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성경을 펼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 펼쳐진 말씀은 요한복음 13:27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것도 아니라고 판단한 삶이 모든 것은 삼 세 번으로 결정하는 것이지 하며 세 번째 성경을 펼쳤습니다. 이때 나타난 말씀은 누가복음 10:37이었다고 합니다.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아시지요?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읽어야 하고 예수님을 알기 위하여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창조의 일을 마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조 후에 복을 명하신 하나님은 성경의 마지막 요한계시록에서는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물론 요한계시록은 21절이 마지막 말씀입니다. 마지막 구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은 인사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말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세상은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아들을 다시 이 세상에 보내실 것이라는 분명한 줄기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듣는 자(아쿠온테스, ἀκούοντες)

본문에서 듣는 자는 문법적으로 복수형입니다. 읽는 자는 한 사람이지만 듣는 사람은 여러 사람입니다. 회당의 예배는 성인 남자 10명 이상이 모였을 때에 예배가 시작되었으므로 최소한 10명 이상이 듣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1. 이해하는 것(to understanding)
2. 가르칠 수 있는 것(to teaching)

교육심리학에서는 죄(罪)에 대한 정의가 아주 새롭습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것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을 모르면서 특히 요한계시록을 모르면서 읽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구원의 진리를 알았으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말씀 처럼 다시 오실 심판의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깨우쳐야 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

알면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는 것은 내 안에 머물지만 행하는 것은 내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을 안다고 말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겠습니다.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깨달은 후에는 아직도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소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24장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 무렵 함께 유하려고 어느 집에 들어가서 음식을 먹으려고 할 때 주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 제자들에게 떼어 주셨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그 분이 주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을 눈이 밝아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주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주님이 보이기 시작하면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실천을 위하여 들어야 한다.

예수님은 많은 말씀들을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비유로 가르치실 때 사용하셨던 ‘들으라’ 또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들으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은 이미 증거 된 가르침들 즉 구약의 말씀에 대해서 실천하기 위해서 들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마가복음 4:3∼9).


신명기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란 삶의 실천을 마음과 눈과 귀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성취를 위하여 들어야 합니다. 많은 설교를 듣지만 실천보다는 아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신명기 12:28,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는 듣고 지키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선과 의를 행하면 너와 네 후손에게 영영히 복이 있으리라. 

말씀을 듣는 자의 예화

예전에 우체국에서 전보를 보낼 때에는 전보 문자가 10자 이내로 글을 적어야 했습니다. 어느 지방 우체국에서 일어났던 사례라고 합니다. 친구가 타지에서 결혼식을 하기 때문에 참석할 수 없었던 신실한 교인이 전보 문자를 성경에서 찾은 후 아주 간단하게 요일 4:18이라고 적어 우체국 직원에게 전달했다고 합니다. 우체국 직원이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 다녔었기에 전보 내용을 읽더니 어릴 때 기억이 희미했던지 성경에 요일은 없이 하며 요일을 요한 4:18 이렇게 발송했다고 합니다. 결혼식장에서 축하 전보를 읽어주는데 요한복음 4장 18절을 그대로 읽었다고 합니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들어야 합니다. 바르게 듣기 위한 방법은 내가 지키기 위해서 듣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 지키는 자(테룬테스, τηροῦντες) 


테룬테스(τηροῦντες)는 테레오(τηρέω)의 복수형으로 ‘지키는 것’ 그리고 ‘감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키는 자는 물론 예언의 말씀을 지킬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감시해야 합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잘못 전달되거나 가르치는 것을 감시하고 그와 같은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도록 생명을 사랑하고 영혼을 감시하는 책임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에 무당(巫堂)의 수가 대략 30만 명이라고 하며 무당에 의해서 창출되는 년 간 금액이 무려 6조원이라고 합니다. 교인의 수가 1,200만 목사의 수가 6만이라고 하는데 교인들이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였다면 어떻게 한국사회가 이렇게 무당의 수가 점점 더 늘어가고 있을까요?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한 책임을 교회가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28,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약속하신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8: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일서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요한계시록은 읽고 듣고 지키므로 복을 누립니다. 해석하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해가 될 때까지 읽고 들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2:7에서 지키는 것에 대한 복을 강조합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지킨다는 말은 실천한다는 뜻도 있지만 그 말씀을 변질되지 않도록 없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지킨다는 뜻이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영생의 복을 누리기 위하여 그 예언의 그 말씀 곧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켜야 합니다.

티벳 사람들의 종교는 라마 불교라고 합니다. 티벳 사람들은 라마 불교의 경전을 읽지 않기 때문에 라마 불교를 모른다고 합니다. 티벳의 불자들이 경전을 읽지 않기 때문에 라마 불교 사원 주위에 ‘마니차(摩尼車་)’ 라는 불교 도구를 만들어 놓습니다. ‘마니차’란 원통형 모양으로 표면에는 ‘만트라’가 새겨져 있고, 내부에는 롤로 경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마니차의 크기는 다양하여 손에 쥘 수 있는 크기부터 큰 것은 몇 미터에 달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둥근 원통 마니차를 손으로 돌리면 한 번 읽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라는 마니차를 한번 돌리면 창세기를 한 번 읽는 것입니다. 두 번 돌리면 두 번 읽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니차를 돌리기만 하기 때문에 경전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간혹 도로에서 자동차 뒤에 성경 찬송을 얹어놓고 다니는 운전자를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찬송을 마치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소원하는 부적과 같이 사용한다면 이런 것도 기독교식 마니차라고 하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요한계시록을 읽지 않고 듣지도 않으므로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영생(永生)의 복(福)을 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복이란 주제로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 영원한 삶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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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福)이란 사람의 삶에 관련된 의식주(衣食住) 전반에 걸쳐 각종 문양과 장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오복(五福) ; 書經 洪範九疇

1. 수(壽) - 장수를 누림
2. 부(富) - 가멸함
3. 강녕(康寧) - 건강하고 마음 편안함
4. 유호덕(攸好德) - 심성의 후덕함
5. 고종명(考終命)- 임종을 성취함

한비자(韓非子)
1. 수(壽) - 장수함
2. 부(富) - 가멸함
3. 귀(貴) - 귀함

한국인의 정통
1. 아내를 잘 만나는 것(良妻)
2. 치아가 튼튼한 것(建齒)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복을 비는 가운데 태어나서 복을 비는 마음속에서 자라나 복을 비는 뭇 상징 속에 둘러싸여 복을 빌며 살다가 다시 복을 비는 마음속에서 죽어간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복은 한국인의 삶을 그 밑바닥에서 움직이고 있는 가장 끈질기고 가장 보편적인 동기이다. 

생(生)과 사(死), 수(壽)와 요(夭, 일찍 죽을 요. 夭卒. 夭折), 부(富)와 빈(貧)

박지원(朴趾源)의 소설 ‘허생전(許生傳)’을 보면 서울의 가난한 선비가 돈 1만금을 빌려서 전국의 과일을 매점해 두었다가 열배 값을 받고 되판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 작품에서 주인공 허생이 “겨우 1만금으로서 나라가 기울었으니 그 얕고 깊음을 알 수 있구나(以萬金傾之, 知國淺深矣).” 하고 넋두리하고 있는 것처럼, 지난 세기말까지 전통사회의 개인생활이나 국가경제는 빈곤하였던 것이다. 서민문학인 판소리의 사설에는 그러한 가난에 대한 한(恨)이 도처에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흥부전〉에서 흥부의 아내는 “지빈무(至貧無, 지독히 가난함)의 이내 형세, 금옥 같은 애중자식 헐벗기고 굶주리니 그 아니 가련한가, 세상에 주린 사람 뉘라서 구원하며……이 세상에 답답한 일 가난밖에 또 있는가.” 하고 넋두리하고 있다. 

가난했던 시절에 복을 빈다는 것은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소극적인 동기에서 나온 소망입니다.

‘가진 돈이 없으면 망건 꼴이 나쁘다.’
‘돈이 없으면 적막강산이요, 돈이 있으면 금수강산이라.’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
‘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가 된다.’

부를 비는 마음은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일차적 소극적 동기에서부터 보다 더 많은 재물을 추구하려는 이차적 및 적극적 동기로 발전한다. 현실적으로 보다 더 많은 재물을 바라는 마음은 가난한 사람에게나 부자에게 있어서나 매한가지(마찬가지)이다.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처지가 바뀌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싶어 하는 탐(貪)이 생긴다. 그래서 우리나라 고전문학에서의 부의 정형화(定型化)된 묘사에는 모든 것을 선별 없이 다 갖추어대는 일종의 망라주의, 나열주의의 표현이 흔히 눈에 띈다. 

'옹고집전'을 보면 석숭(石崇)의 부자와 도주공(陶朱公)의 성세를 부러워하지 않을 정도의 주인공이 누리는 부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의 마당 꾸밈새를 이렇게 적고 있다.

“앞뜰에 노적이요 뒤뜰에 잠옥이라, 울 밑에 벌통 놓고 오동심어 정자삼고, 송백심어 차면하고 사랑앞에 연못 파고, 연못 위에 석가산을 무어놓고, 석가산 위에 일간 초당을 지었으되 네 귀에 풍경이라…….”

'춘향전'의 춘향어미가 이도령을 사위로 맞아들일 것을 생각하고 주효를 차려 내오는 장면에는 다음과 같은 장광설이 이어진다.

“주효를 차릴 적에 안주 등을 볼짝시면 굄새도 정결하고 대양판 가리찜, 소양판 제육찜, 풀풀뛰는 숭어찜, 포도동 나는 메추리탕에 동래 울산 대전복. 대모장도 드는 칼로 맹상군의 눈썹 채로 어스비슥 오려놓고, 염통산적 양볶이와 춘치자명 생치다리, 적벽대접 분원기에 냉면조차 비벼놓고, 생밤·찐밤·잔송이며 호도·대추·석류·유자·준시·앵두·탕기 같은 청술레를 칫수 있게 괴었는데, 술병치레 볼짝시면 티끌 없는 백옥병과 벽해수상 산호병과 엽락금정 오동병과 목이 긴 황생병·자라병·당화병·쇄금병·소상동정 죽절병. 그 가운데 천은 알안자·적동자·쇄금자를 차례로 놓았는데 구비함도 갖을시고……”

가장 좋은 것을 빠짐없이 두루 망라한다는 이러한 부에 대한 소망은 물질적인 부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을 나타내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의 물질주의는 수의 현세주의와 함께 한국적인 현실주의의 두 다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의 소망이 추구하는 무선별의 망라주의는 물질적인 대상에만 국한되지 않고 때로는 그를 넘어 정신적·신앙적인 차원의 세계에까지 번져가기도 한다. 〈심청전〉을 보면 심봉사 아내가 일점 혈육 없음을 개탄하고 온갖 재물과 정성을 들여 공들이는 사설이 펼쳐진다. 

“명산 대천 신령당, 고묘 총사 석왕사에 석불보살 미륵님전 노구마지 당 짓기라 칠성불공 나한불공 백일산제 제석불공 가사시주 연등시주 창호시주 신중 마치다리 적선 길닦기와 집에 들어 있는 날도 성주, 조왕 터주 제신 가까스로 다지 내니 공든 탑이 무너지며 힘든 나무 부러지랴.”

이렇게 공을 들여 늦게 본 딸이 자라나 이번에는 공양미 삼백 석을 불전에 시주하면 아버지가 눈을 뜨리라는 말을 듣고 그 공양미를 마련하게 해달라고 다음과 같이 빈다. “상천일월 성진이며 하지 후토 성왕 사방지신, 제천제물 석가여래 팔금강보살 소소감응 하옵소소…….” 불교의 갖가지 불공이며 시주가 무교(巫敎)의 여러 귀신·잡신 섬기기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나열되고 있다. 이러한 축원내용은 거기에서 현세적인 삶을 위한 무교와 불교의 융화를 보기도 하고, 혹은 모든 외래의 고등종교를 기복 종교화하는 우리 나라의 무속적인 기층문화를 보기도 하는 등 풀이가 가능하다. 그와 함께 그러한 다신론적 내지 범신론적 축원내용은 좋은 것은 두루 갖추고자 하는 한국적인 부의 추구가 물질적인 대상에서 신앙적인 대상으로 전위된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복의 조형적인 상징은 복자 및 복과 관련된 길상문자(吉詳文字)와 함께 한국인의 전통적인 의식주 생활의 여러 군데에서 숱하게 눈에 띈다. 먼저 의생활과 관련된 것부터 살펴보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날 때 맨 먼저 그를 싸주는 강보(襁褓)에 흔히 수놓은 글자가 복자이고 갓난아이의 베갯모(베개의 양쪽 마구리의 꾸임새)에도 복자를 수놓은 것을 자주 본다.

일반사회에서도 아이들의 돌옷, 부녀자의 한복에는 복자를 수놓거나 복자무늬의 옷감이 이용되었고, 궁중에서는 왕비나 비·빈의 원삼(圓衫), 공주의 활옷〔花衣〕, 당의(唐衣) 등에 역시 복자 무늬를 수놓거나 복자 무늬가 든 감을 쓰곤 하였다. 비단 갓난아이의 강보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여염집의 침구에는 요·이불·베개에 두루 복자 무늬가 든 감이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베갯모의 수 글자에는 복자와 복에 관련된 길상문자가 많이 눈에 띈다.

오복을 기원하는 의생활에서의 조형적 상징은 특히 전통사회의 안방에서의 부인네들 살림살이 주변에 널리 깔려 있다. 반짇고리· 바늘겨레· 자(尺) 등 바느질과 관련된 물건에도 복자가 자리 잡고 있고, 특히 장신구에 있어서는 복자나 복을 상징하는 박쥐 편복(惹絡, 한자어가 복과 같은 소리를 낸 데서 유래)는 가장 흔히 쓰이는 장식 주제가 되었다. 부인의 관모류에는 화관(花冠)이나 족두리 혹은 전모(氈帽)에 복자와 복과 관련된 길상문자를 수놓기도 하고 붓으로 적기도 하였다. 궁중에서나 반가(班家)에서 길사(吉事)가 있을 때 옷을 정장한 부녀들이 옷고름·안고름·허리띠 등에 매단 노리개류에는 복과 관련된 수(壽)·부(富)·귀(貴)의 세 글자를 엷은 구리판에서 오려내어 술(絲線) 세 줄에 달고 그 위를 매듭으로 장식한 문자삼작(文字三作),노리개가 있다. 또 오복을 기원하는 뜻에서 도금(鍍金)한 박쥐를 아래위의 매듭 사이에 꿴 편복삼작(惹絡三作) 노리개가 있다. 그밖에도 복주머니가 있고 복자가 그려진 신발이 있으며, 복자무늬의 감으로 지은 여러 갈래 여러 가지의 옷가지들이 퍼지고 있었다. 

식생활에 있어서는 음식류· 식기류 등에 다같이 복과 관련된 상징조형이 널리 사용되었다.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한중록〉을 보면 궁중에서도 왕세자가 “……두 살에 글자를 배워서 육십 여자를 쓰시고, 세살에 다식(茶食)을 드시매 수(壽)자·복(福)자 박은 것을 골라 잡수시고……”라는 기록이 눈에 띈다. 그러한 다식을 만들기 위해서 복자·수자를 새긴 다식판(茶食板)이 남아 있고 복떡·복희병(福喜餠)을 만들기 위해서 복자와 희자를 새긴 떡살 또한 널리 퍼져 있었다. 정월 대보름날에는 민속에서 김쌈을 먹는데 이것을 복쌈이라고 한다. 복날에는 들깻잎으로 쌈을 해서 먹는데 그것도 복쌈이라고 일컫는다. 정월 초하룻날에는 쌀을 씻는 조리를 새벽에 파는데, 그것을 사면 한해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뜻에서 복조리(福黍籬)라고 일컫는다. 복자나 복과 관련된 길상문양을 그리거나 새긴 식기류로는 찬합·주발대접·수저·수저집·소반·번상·전골상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사람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도 복스럽게 먹는다고 칭찬하는가 하면 복이 달아나겠다고 꾸짖기도 한다. 제사를 마치고 제관이 제사에 쓴 술이나 제물을 먹는 것은 음복(飮福)한다고 말한다. 

주생활에 있어서는 장롱· 반닫이· 삼층장· 문갑의 가구류, 창문· 벽걸이 등의 장식물에 복자와 복을 상징하는 길상문양 등이 자주 등장한다. 집터를 고를 때도 지덕(地德)이 좋은 복지(福地)를 찾기 위해 풍수지리설을 따르는 것은 복을 많이 누릴 수 있는 복가(福家)를 짓고자 하는 바램에서이다. 그뿐만 아니라 집을 옮길 때에는 다시 방위(方位)를 따지고 이사 날짜를 택일하는 것 역시 복가를 찾는 마음의 표현이다. 한편 방안 장식용으로 그려진 민화(民怜)는 관가의 것이건 민가의 것이건 그 중심적인 화제(怜題)가 복을 비는 표상들이다. 십장생도(十長生圖)의 그림이나 길상문자를 채색, 변형해서 회화화한 병풍 등이 보기이다. 여염집의 기둥이나 대문에 입춘대길(立春大吉)을 비는 춘방(春榜:입춘서)에서 흔히 보게 되는 것이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라는 복자가 든 글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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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파트리스교회 2019-7-28(주일)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Ⅲ(요한계시록 14:13)


- 주 안에서 죽는 자의 복(Μακάριοι οἱ νεκροὶ οἱ ἐν Κυρίῳ ἀποθνῄσκοντες)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에서 증거 하는 일곱 가지 복

첫째, 1:3 -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의 복
둘째, 14:13 - 주 안에서 죽는 자의 복
셋째, 16:15 - 충성된 옷을 입고 있는 자의 복
넷째, 19:9 -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자의 복
다섯째, 20:6 -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의 복 
여섯째, 22:7 - 성경말씀을 지키는 자의 복
일곱째, 22:14 - 예수의 피로 두루마기를 빠는 자의 복

모든 복의 기초는 영생(永生)입니다(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들어야 할 소리와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들어야 할 소리를 ‘하늘의 소리’라고 한다면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땅의 소리’라고 하겠습니다.

최초로 하늘의 소리와 땅의 소리가 충돌한 사건이 에덴동산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2:16∼17)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하나님은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 여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사탄(뱀)은 여자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창세기 3:1b∼6).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이때 여자가 사탄(뱀)에게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사탄(뱀)은 여자에게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라고 여자의 말에 더욱 강한 부정적인 생각을 강요합니다.

이때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는 순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고, 심지어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나타났습니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었습니다.

하늘의 소리와 땅의 소리가 충돌했을 때 여자는 땅의 소리가 더 크게 들렸습니다. 아담은 여자로부터 “내가 먼저 먹었는데 이렇게 죽지 않았어요.” 라는 땅의 소리를 듣습니다. 아담은 여자가 들려주는 땅의 소리를 듣고 그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아담으로부터 모든 인류가 받은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아담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고 주리셨을 때 다시 사탄이 찾아와서 땅의 소리를 들려줍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사탄은 사역을 시작하는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돌을 빵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며 땅의 소리로 유혹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 이라고 또다시 하늘의 소리와 땅의 소리를 함께 들려주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또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사탄이 예수님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첫째 아담은 땅의 소리에 마음을 빼앗겼지만 둘째 아담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온전히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우렸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땅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위에서 자주 듣는 소리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좋으냐? 돈만 있으면 마음대로 편리하게 먹을 수 있고 다닐 수 있고 입을 수 있고 쉴 수 있고 이런 세상을 구경 못한 옛날 사람들이 참 불행하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땅의 소리는 세상을 즐기려고 합니다. 반면에 하늘의 소리는 하나님을 즐기려고 합니다.

오늘 요한계시록의 말씀에서 하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누구일까요?

여기서 주 안에서(in christ) 죽는 자들을 헬라어 성경에서 “호이 네크로이 호이 엔 쿠리오 아포드네스콘테스(οἱ νεκροὶ οἱ ἐν Κυρίῳ ἀποθνῄσκοντες)” 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문맥상으로 볼 때는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성도들과 순교한 성도들을 말합니다. 이기는 성도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계 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그러나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누구일까요?

첫째,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를 믿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두 강도들이 함께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때 한 강도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을 조롱했지만 다른 한 강도는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고통을 받는다는 믿음을 갖고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해도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을 보여준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신앙고백이 분명한 사람입니다(마태복음 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둘째,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

구원받은 강도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후에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빌레몬서에 오네시모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오네시모는 태어날 때부터 종의 신분이었습니다. 빌레몬이란 주인의 집에서 종으로 살아가면서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며 자기 삶을 정리하고 주인처럼 살아보려고 주인집에서 몰래 귀중한 물건을 들고 도망쳤습니다. 오네시모가 도망하여 세상을 나름대로 잘 살아보려고 했지만 그만 붙잡혀서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네시모가 갇힌 감옥에 사도 바울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에게서 어떻게 여기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듣게 됩니다. 놀랍게도 오네시모의 주인이 빌레몬이란 사실을 알고 오네시모가 감방에서 나갈 때 편지 한 장을 써서 오네시모에게 주며 이것을 갖고 빌레몬을 찾아가라고 합니다. 그 편지가 빌레몬서입니다.
당시 종이 주인집에서 물건을 훔쳐 도망하다가 붙잡힐 경우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는데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하여 주인 빌레몬에게 이제부터는 너희 집의 종이 아니라 형제로 인정하고 만일 오네시모가 손해를 입힌 것이 있다면 사도 바울이 모두 갚아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렇게 오네시모는 예수를 영접한 후에 그의 삶은 빌레몬과 동등한 믿음의 형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죄의 종으로 붙잡혀 죽음의 노예가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들은 예수님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있을 동안에 우리가 힘써야 할 삶은 주와 연합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즐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행동하는 신앙의 사람입니다(야고보서 2:17, 26)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리고 성경에서는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을 가리켜 잠을 자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은 잠에서 깨어날 사람입니다(요한복음 11:10)

우리 친구 나사로는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은 슬픔으로 가득했습니다. 왜냐하면 베다니 마을에서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의 신앙은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을 만큼 소문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제자들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나사로가 잠자는 것이라면 그 병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나사라고 죽었으나 그는 잠을 자고 있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예수 안에서
- 디아 투 이에수(διὰ τοῦ Ἰησοῦ) through Jesus

예수 안에서 라고 번역된 것은 ‘예수로 말미암아’ 라는 뜻입니다.

에스커위드(Askwith)라는 신학자는 '예수로 말미암아' 라는 것을 "예수를 믿다가 죽은 자들과 부활하신 예수와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구약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주 안에서 죽는 사람으로 살아가면 철저하게 자기 사랑을 버리고 이웃 사랑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살았던 사람들을 성령께서 위로하십니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주 안에서 죽는 신앙의 삶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을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에 대한 공식적인 메시아 선언이 드러난 후에 제자들에게 부탁하셨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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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 죽는 자의 복(Μακάριοι οἱ νεκροὶ οἱ ἐν Κυρίῳ ἀποθνῄσκοντες)

* ἀποθνῄσκω(to die) - 599. apothnéskó 
* νεκρός(dead) - 3498. nekros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신앙의 기준은 성경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에서 머물고 더 이상 관심을 갖는 것은 신앙의 정도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늘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이란?

성경에서 ‘죽음’이란 ‘잠을 자는 것’ 이라고 말씀합니다(요 11:11, 살전 4:14).

요한복음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데살로니가전서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성경에서 죽은 후의 세계는?

죽은 후에 육체는 땅에 묻힙니다. 그렇다면 영혼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시공간의 제약을 받았고 물질로 이뤄진 사람의 육신(body)은 이 땅에 남아서 썩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면 예수 믿은 신자는 신령한 육체를 입고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과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됩니다. 그럼 죽은 후와 마지막 때의 부활까지 사이에 영혼은 어떤 상태로 어디에 있는지(중간기 혹은 중간상태라고 칭함)에 관해선 신학적으로 여러 의견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음부(스올)라는 곳에서 마지막 심판(부활)의 날까지 아무 의식 없이 죽은 상태로 무한정 대기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가톨릭은 연옥설을 주장하며 제2의 회개 기회가 있다고 합니다.

종교개혁파 재침례파는 단순히 잠자고 있다고 합니다.

칼빈은 의식할 수 있는 존재(루터보다 의식할 수 있는 존재를 더 강조)로 대기하지만 잠정적이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라고 합니다. 그러나 영혼이 육체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자칫 플라톤의 인간의 영육 이분설을 지지하는 것처럼 여겨져 많은 논쟁과 반발이 있어 왔습니다.

첫째, 낙원에 머문다(누가복음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회개한 강도에게 하신 말씀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강도는 일반 유대인들처럼 먼 미래의 심판 날을 생각하고 “당신의 왕국에 임하실 때에” 자기를 생각해달라고(구원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반면에 주님은 “오늘 낙원에 함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오늘 가신 곳은 분명 천국입니다. 낙원이라는 용어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2:4에서 삼층천 즉 천국이라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죽은 후 곧바로 천국 간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브라함의 품에 머문다(누가복음 16: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합니다(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런 중간기에 대해 성경은 거의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 믿는 신자가 죽는 순간에 완전히 파멸되지 않으며 그리스도로부터도 완전히 단절되지 않는다는 점을 성경이 말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이에 대해 개혁주의 신학자 안토니 후크마가 신약성경의 세 구절을 들어 설명합니다(개혁주의종말론, 안토니 후크마 저작, 유호준 역, 1986, 기독교문서선교회 page 129∼151)

바울 서신에서 가르치는 죽음 후의 상태

영원한 집에 거한다(고린도후서 5:6∼8)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땅에 있는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이 있다고 합니다. 땅에 있는 장막이란 육신을 입고 죄와 고통이 많은 이 땅에서의 존재 양태입니다. 그것이 무너진 것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하나님의 영원한 집이 예비 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지은 집의 구체적 양상에 대해서 여러 의견이 있지만 이 땅과는 전혀 다른 영광스런 존재 양식을 입는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다(빌립보서 1:21∼23)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찐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면서 “나의 소망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됨”이고 그것이 더 좋다고 고백합니다. ‘떠나다’는 헬라어는 죽는 것을 의미하기에 떠나서 죽는 순간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없어졌거나 잠만 자고 있는 상태에선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할 수 없으며 그것이 더 좋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죽음의 순간에 주님과 함께 하늘의 집에 있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는 입신하여 천국에까지 가서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계시 받은 자입니다. 그가 지어낸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며 그 개인의 종교적 사상 철학도 아닙니다. 분명히 보고 들으며 체험하고 온 그 삼층천이 너무 좋아서 즉, 사실에 입각해서 자기 소망을 말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 받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비유에선 아브라함의 품)에서 평안히 지내고 있었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제발 나사로를 다시 땅으로 보내어 살아있는 자기 형제 다섯에게 이런 구원과 심판을 증거 하여 지옥에 오직 않도록 해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를 안 믿는 자는 죽은 자 중에 살아나는 자가 가서 증언해도 믿지 않는다고 거절했습니다.

이 비유에선 인간이 죽은 후 부활 이전이라도 분명히 천국과 지옥으로 나눠지고 의식과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단순히 비유이기에 중간기 상태로 해석해선 안 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후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상태가 완연히 나눠지지 않는 이상, 또 믿는 자가 가는 곳이 아주 좋은 곳이라는 전제 없이, 이런 비유를 말씀하실 리는 없습니다. 또 살아있는 형제에게 지옥의 고통을 설명해달라고 하니까 마지막 부활 이전의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 진리에 관해선 예수님의 말씀이 최종 권위를 갖습니다. 신자가 죽은 후 부활 때까지의 중간기 상태에 관해서도 이 비유와 십자가상의 강도에게 하신 약속에서 주님이 말하고 있는 바대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구체적인 상태와 모습은 성경이 침묵하기에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시공간의 제약이 있는 물질계에서 벗어났기에 썩지 않고 영존할 것입니다. 바울의 보충 설명에 따르면 분명히 이 땅에서 육신을 입은 존재양상보다 훨씬 좋고 영화로운 모습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잠정적이며 완성된 상태는 아닙니다. 마지막 때에 신령한 육신으로 입고 부활할 때에 비로소 최종적 영화가 이뤄질 것입니다.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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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파트리스교회 2019-8-11(주일)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Ⅳ(요한계시록 16:15)


- 자기 옷을 지키는 자의 복

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Behold, I come like a thief! Blessed is he who stays awake and keeps his clothes with him, so that he may not go naked and be shamefully exposed. 

믿음(信)이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다!”

광복 74주년 기념 주일을 맞이하며 오늘의 시대를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국가관이 마구 흔들리는 시대를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국회의원은 애국가를 부르지 말자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대통령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설마 하며 동영상을 관심을 갖고 동영상을 보는데 대통령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태극기에 경례를 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라도 믿음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선다면 하나님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성도가 있고 교회가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조국을 긍휼히 여길 것입니다.

의식주(衣食住. 옷 衣, 밥 食, 살 住)란 “사람이 생활하는 데 기본이 되는 옷과 음식과 집”을 말합니다. 왜 사람은 옷과 밥과 집이 필요할까요?

첫 사람 아담은 옷과 음식과 집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세상을 “에덴”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후에 에덴에서 쫓겨나므로 그때부터는 옷과 음식과 집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도 이 세상에서는 옷과 음식과 집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을 어떻게 얻고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은 요한계시록에 소개된 일곱 가지 복에 대한 말씀 중에서 세 번째로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소개된 일곱 가지 복에 대한 말씀을 함께 기억하려고 코팅 복사하여 주보와 함께 나눠드렸습니다(Laminate). 다음 주일부터 일곱 개의 성구를 암기하신 교우들에게는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함께 나눴던 성구를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지키다(테레오, τηρέω. 5083. téreó)는 단어는 단순히 지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보다(to watch over)' 또는 '경계하다(to guard)'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슬퍼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복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수고를 그치고 안식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죽음을 슬퍼하기 때문에 죽은 후에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는 죽은 조상에게 음식을 차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후손들은 하루 세 끼씩 식사를 하면서 조상들을 위한다며 일 년에 단 한 차례 제사를 드리며 음식을 차려주는 것이 과연 효도하는 것일까요?

기독교 신앙은 죽은 후에 슬퍼하며 효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에 더 잘 모시고 섬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늘 소개할 말씀 요한계시록 16장 15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정상적인 사람은 옷을 벗고 다니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여 각 가정을 심방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예정된 모든 가정들을 심방하며 마지막 한 가정이 남았습니다. 그 집에 도착하였을 때 집안에서는 분명히 누군가 있는데 아무리 벨을 눌러도 문을 열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심방을 왔다가 돌아간다는 표시로 요한계시록 3장 20절이란 성구를 적은 메모를 남기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며칠 후 목사님이 사무실 문을 열려고 하는데 문에 지난 번 심방 때에 남겨둔 메모가 사무실에 붙어 있었는데 그 메모지 아래에 창세기 3장 10절이란 성구가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후에 그들은 벗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은 죄를 지은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옷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옷, 흰 옷, 피 뿌린 옷, 세마포, 붉은 옷, 두루마기”와 같이 다양하게 소개됩니다. 헬라어 성경에서는 히마티온, 스톨래, 리논, 부시논 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옷이란 몸을 보호하는 기능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징적 의미로 사용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옷의 의미는 기능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4∼5절을 찾겠습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사데 교회를 향한 말씀 중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 몇 사람이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이라고 합니다.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의미를 요한계시록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옳은 행실(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것(요한계시록 7:13∼14)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후에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옷의 기능적인 의미만 생각한다면 구태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힐 필요가 없었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과 가죽옷의 차이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하나님의 방법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죄의 결과이므로 죄를 감추려고 옷을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옷이란 죄를 감추기 위하여 인간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을까요? 가죽옷을 만들려면 반드시 짐승을 죽여야 합니다. 짐승을 죽이려면 피가 흘러나옵니다. 성경에서 피가 상징하는 것은 생명과 용서라고 합니다.

첫째는 피는 생명(신명기 12:23)

오직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아울러 먹지 못하리니. 

노아 홍수 사건 후에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홍수 이전에는 사람들의 식물은 오직 채소 위주의 식단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후에 살아있는 동물을 식물로 주시면서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창 9:4).

둘째는 피는 용서(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가죽옷이란 죄를 지은 사람이 흘려야 할 피를 짐승이 대신 피를 흘림으로 죄를 지은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가죽옷으로 약속한 용서의 은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입어야 할 옷을 구원의 옷과 의의 옷이라고 계시하셨습니다.

이사야 61:10,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구원의 옷이란 아담이 죄를 지은 후에 자기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만들어 입었던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과 같이 인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서 입혀주셨던 가죽옷 즉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서 해결 받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의 옷과 의의 옷으로 계시된 약속은 오랫동안 짐승의 희생 제사로 그 약속을 지켜왔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어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마지막에는 홍포를 입은 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홍포를 입으셨던 예수님

요셉은 어려서부터 채색옷을 입고 자랐습니다.
사사 시대에 미디안 왕들은 자섹 옷을 입었습니다.
모르드개는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었습니다.
벨사살 왕은 다니엘에게 자색 옷을 입혀 줄 것이라고 여러 차례 약속했습니다.

서양 속담에 “자주색에서 태어났다(Born in the purple)” 이란 말은 고귀한 혈통, 부유한 가문에서 탄생했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요즈음 말로는 ‘금수저’ 라고 하겠습니다. 
고대에는 색깔 있는 옷 특히 자주색으로 염색한 옷은 그 엄청난 가격과 염색과정의 어려움 때문에 최고급 옷감으로 인정되었고 곧 권위와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자주색 옷을 입혔습니다. 만왕의 왕이라고 존경한 것이 아니라 조롱하려고 입힌 것입니다. 그러나 조롱의 옷은 결국 영광스런 세마포 흰옷으로 드러났습니다.

가죽옷을 구원의 옷과 의의 옷으로 완성하시려고 십자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요한계시록 16장 15절에서 옷에 대한 신앙의 결론을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깨어' 라는 헬라 단어는 '그래고레오' 라고 합니다.
'그래고레오'란 '잠들지 않고 지켜보는 것'을 말합니다(awake).
'그래고레오'란 '관심을 갖고 주시하는 것'을 말합니다(watch).

왜 깨어 있어야 합니까?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도적같이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적이 오는 날짜를 통보하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대만의 장개석 총통은 “예수님은 간첩과 같이 오신다!”고 강조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은 도적같이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잠들지 않고 지켜보고 있어야 합니다. 관심을 갖고 주시해야 합니다.

자기 옷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구원의 옷은 어느 교주가 어느 교단이 어느 교회가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어린 양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허락하십니다.

요한계시록 7장은 하나님의 인을 맞은 144,000에 대한 말씀입니다.

7장 10절에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요한계시록 17:14,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5: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가죽옷은 구원의 옷으로 의의 겉옷으로 이어져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세마포 즉 옳은 행실이라고 하셨습니다. 옳은 행실은 부자 청년과 같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모두 지켰기 때문에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부족한 것 즉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후에 얻을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도적 같이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도적같이 온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그 날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왜 깨어 있으라고 하셨을까요?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42∼43a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태복음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어떻게 깨어 있을 수 있을까요?
기도하므로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누가복은 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깨어 있는 자에게 약속된 것은 무엇일까요?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12: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왜 깨어 있어야 할까요?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데살로니가전서 5: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베드로후서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요한계시록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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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파트리스교회 2019-8-18(주일)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Ⅴ(요한계시록 19:9)

            

- 어린 양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는 자의 복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어린 양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 양(羊)입니다.

☞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어린 양의 신부는 누구인가?

☞ 요한계시록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 신부(νύμφην) - 눔패(νύμφη), 3565. numphé. a bride, a young woman     

* 아내(γυναῖκα) - 구내(γυνή), 1135. guné. a woman        

요한계시록에서 어린 양의 아내는 교회를 말합니다.

☞ 10절을 읽겠습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 22절을 읽겠습니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 26, 27절을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새 예루살렘은 교회를 말합니다. 새 예루살렘 교회는 곧 예수님이십니다. 새 예루살렘 교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성도들입니다. 따라서 어린 양의 아내는 교회이며 그 교회는 예수님만을 믿고 예수님만을 살아가는 성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도입 이야기)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대 묵시문학으로 기록된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려면 혼인에 대한 유대인의 풍속을 알아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의 의미를 신앙적으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개역한글 성경 요한계시록에 '아내'라는 단어가 19장 7절(구네, γυνή)과 21장 9절(눔패, νύμφη) 두 번 소개됩니다.

요한계시록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 아내(γυνὴ) - γυνή, 1135. guné

현대인의 성경, 새번역 성경,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모두 '신부' 라고 번역합니다.

구네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마리아에게 여자여(γύναι)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말했을 때 '여자여!' 라는 단어를 '구나이' 라고 합니다. 이때 '구나이'는 아내가 아니라 '부인이여!' 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 아내(νύμφην) - νύμφη, 3565. numphé, 젊은 아내, 부인

유대인의 결혼 절차
- 유대인의 결혼 풍속은 정혼(定婚)과 결혼(結婚)과 동거(同居)라는 삼단계로 진행됩니다.
첫 번째 단계, 정혼(定婚)

남자가 여자의 집에 증인과 함께 세 가지 예물을 갖고 찾아갑니다. 세 가지 예물이란 서약서와 포도주와 은금을 말합니다. 먼저 남자가 여자의 아버지에게 당신의 딸과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청혼을 합니다. 이때 아버지가 딸에게 청혼을 받아드리겠느냐? 하고 묻습니다. 딸이 청혼을 받아드리면 포도주 한 잔을 따라주고 딸이 반잔을 마신 후에 청혼 서약서 위에 포도주 몇 방울을 떨어트린 후 나머지 잔을 남자가 마신 후에 은금을 딸의 아버지에게 드립니다.

이때 신부의 아버지는 뿔 나팔을 불어 온 동네에 정혼을 알리며 아버지가 딸과 남자에게 축복합니다. 이것을 정혼(定婚)이라고 합니다.

신약 성경 마태복음 1장 18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 정혼(μνηστευθείσης) - μνηστεύω. 3423. mnésteuó,
to espouse(옹호하다, 지지하다), betroth(정혼하다)  
  
* 동거(συνελθεῖν) - συνέρχομαι. 4905. sunerchomai,
to come together(함께하다), to accompany(동행하다)       

두 번째 단계는 결혼(結婚)

정혼의 단계를 마치면 여자는 친정집에서 신부 수업을 받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로부터 1년 동안 신랑 수업을 받으며 신부와 함께 기거할 집을 짓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던 말씀에 해당합니다(요한복음 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집(οἰκίᾳ) -  οἰκία, 3614. oikia.  a house, dwelling      
* 거할 곳(μοναὶ) -  μονή,  3438. moné. an abiding, an abode    
* 처소(τόπον) - τόπος, 5117. topos.  a place 
    
세 번째 단계는 동거(同居)

신랑이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로부터 신랑 수업을 받으며 신부와 함께 거주할 집을 짓고 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제는 신부를 데려올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면 아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이제 가서 신부를 데려오라'고 하면 신랑은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을 찾아갑니다. 신부를 데리러 가는 날은 아들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가 결정하므로 아들 즉 신랑도 모릅니다(마태복음 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오직 아버지만이 아시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마태복음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친구들과 신부의 집에 갈 때 동네 입구에서 큰 소리로 신랑의 친구들을 신부의 집을 향해 신랑을 맞이하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신부를 데리고 신랑의 집으로 돌아오면 두 번째 결혼 계약을 합니다. 이때 계약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을 약속하며 신랑이 신부에게 징표를 줍니다. 그리고 첫 날밤을 지냅니다. 첫날밤을 지낸 후 아침에 신랑은 문을 열고 '신부는 순결하였다!' 라고 외치면 일주일 동안 혼인잔치가 시작됩니다.

가나 혼인 잔치 집에 포도주가 부족했다는 것은 가장 즐겁고 기쁜 날 함께 마실 포도주가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포도주는 피의 언약을 상징합니다. 혼인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혼인 언약이 없다는 것으로 신랑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은 끊어진 언약 관계를 회복시키셨다는 것이며 이것을 표적(表迹) 이라고 합니다. 표적은 기적(奇蹟)과 다른 것으로 기적은 단순히 놀라운 사건이지만 표적은 놀라운 사건 속에 감추어진 구속의 진리와 은혜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문맥을 살펴보면 어린 양의 혼인 잔치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요한계시록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라는 말씀은 아직 혼인 잔치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아내" 라고 부르는 것은 정혼 단계에서 부르는 호칭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각각 각자의 집에서 신랑 수업과 신부 수업을 잘 받고 있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신랑의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혼인 기약이 이르렀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내를 데려오라고 말할 때 비로써 세마포를 입게 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세마포를 입게 하였다는 말씀은 드디어 신랑이 아버지로부터 신부를 데려올 그 날을 알려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천사가 사도 요한에게 말하기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기록하라고 하며 이것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라고 합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는다는 것이 참된 말씀입니다.

어느 교주와 교파와 교회에 등록하고 받아주는 것이 복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어린 양 혼인 잔치가 무엇입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라는 찬송의 가사를 작사했던 존 뉴턴 목사님의 간증을 기억하십니까?

어느 날 존 뉴턴 목사님이 천국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면서 평소에 궁금했던 세 가지 질문이 있었는데 첫째는 세상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성도들의 모습을 천국에서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둘째는 신앙생활을 저런 식으로 한다면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하고 염려했던 사람들에 대한 모습 그리고 세 번째는 과연 나와 같은 죄인을 천국에서 받아주실까 하는 궁금증에 대한 답을 얻고 싶었기에 세 가지 의문에 대해서 확인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확인한 후 세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성도들을 천국에서 만나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신앙생활을 저렇게 하면 안 될 텐데 하고 염려했던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나와 같은 죄인의 이름도 천국에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린 양 혼인 잔치란 어린 양이신 부활하여 승천하였던 예수님께서 신랑으로 다시 오실 때 주를 믿던 성도들이 신부로서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자리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 천국에 들어가고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사람은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 확증하며 신앙생활을 바르게 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없음을 어느 누구도 판단할 수 없지만 내가 내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시험하고 확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나는 정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입니까?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확실하게 갖고 있습니까? 그것을 시험하고 확증해야 합니다.

진노의 자녀로 태어났던 나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힘입어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일찍부터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자연스럽게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것만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마태복음 22:1∼13,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 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 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예복(禮服, 에두마 가무 ἔνδυμα γάμου)을 준비하셨습니까?

마태복음 22:11∼12,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 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 예복(禮服, ἔνδυμα γάμου) 
- ἔνδυμα. 1742. enduma.  apparel
- γάμος. 1062. gamos. a wedding 
   
예복(禮服)이란 혼인 잔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입는 옷을 말합니다(ἔνδυμα γάμου). 어린 양의 혼인 잔치는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에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세마포(βύσσινος)를 말합니다.

세마포를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 세마포(βύσσινον) - βύσσινος. 1039. bussinos,  fine linen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입니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부자 청년처럼 어려서부터 모든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에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 옷(στολὰς) - στολή. 4749. stolé,  equipment(장비), apparel(의류) 

예복이란 일상생활을 위하여 입는 옷과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어린 양 혼인 잔치에 참여할 때 반드시 검증해야 할 옷으로 의복(衣服)이 아니라 행실(行實)을 말합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어느 교주도 교파도 교회도 옳다고 인정받지 못합니다. 다만 어린 양의 피 십자가 보혈을 내 죄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신 것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요약합니다.
어린 양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만 청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각자의 일에 얽매여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참여한 사람들 중에 예복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지만 입으로는 믿고 마음으로 믿지 못한 사람은 예복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어린 양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으셨습니까?
초청장을 받았으면 잔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으로 내게 맡겨진 믿음의 본분을 바르게 감당하여 모두가 잔치 자리에서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하며 축복합니다.
 

♪ 찬송 162장
신랑 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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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Ⅵ(요한계시록 20:6)

                                             ①. 파트리스교회 2019-8-25(주일)               

-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의 복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요한계시록 19장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린 양은 신랑이 되시는 예수님이 이십니다. 신부는 예수님이 주인 되신 교회이며 그 교회에 소속된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가 동일한 교회가 아닙니다. 정말 주님이 주인이 되는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주님이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에 소속된 구성원들 중에 내가 먼저 주님에게 속한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몇 가지 중요한 용어들을 정리해야 합니다.

첫째는 천년왕국(千年王國)
둘째는 둘째 사망(死亡)
셋째는 첫째 부활(復活)

천년왕국(千年王國)

요한계시록에는 ‘천년왕국(千年王國)’이란 용어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 의해서 자주 천년왕국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어왔기에 대부분의 교인들은 마치 ‘천년왕국(千年王國)’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천년(千年)’이란 단어를 인터넷 한글개역성경에서 검색하면 9번 사용된 것으로 나타난다.

구약에서는 시편에서 1회(90:4), 전도서에서 1회(6:6).
신약에서는 베드로후서에서 1회(3:8), 요한계시록에서 6회(20:2, 3, 4, 5, 6, 7)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된 ‘천년(千年)’에 관한 말씀들을 중심으로 과연 ‘천년왕국(千年王國)’이란 용어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이해를 소개하려고 한다.
2절, 일천년 동안(a thousand years) - χίλια ἔτη.  

3절, 천년이 차도록(till the thousand years) - τὰ χίλια ἔτη. (the thousand years)      

4절, 천년 동안(a thousand years) - χίλια ἔτη.      

5절, 그 천년이 차기까지(until the thousand years) - τὰ χίλια ἔτη. (the thousand years)      

6절, 천년 동안(a thousand years) - τὰ χίλια ἔτη. (the thousand years)       

7절, 천년이 차매(the thousand years are expired) - τὰ χίλια ἔτη. (the thousand years)

* τὰ /  ὁ, ἡ, τό. 3588. ho, hé, to. the  
* χίλιοι. 5507. chilioi, a thousand     
* ἔτος. 2094. etos. a year    


분명한 사실은 요한계시록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는 ‘천년왕국’이란 용어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학교와 교회 그리고 성도들이 ‘천년왕국’을 언급하고 마치 머지않아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처럼 믿고 기다리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천년왕국’이란 용어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년’이란 ‘상징적인 수’로 사용한 것이다. 상징이란 증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요한계시록 20:2∼3,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이 말씀에서 ‘용’ ‘옛 뱀’은 상징으로 사용한 것이다. 사단과 마귀에 대한 상징으로 표현한 것처럼 ‘천년’이란 단어 또한 상징으로 사용한 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년을 마치 천년동안 지속되는 어느 특정한 기간이라고 해석하므로 ‘천년왕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는 말씀은 천년이라는 기간과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왕 노릇하리라는 뜻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영원토록 왕 노릇하리라는 말씀을 성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서 택하신 족속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 된 것은 천년왕국에서 이루어질 미래의 사건입니까? 아니면 예수를 믿는 그 순간 바로 이루어진 과거의 사건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과거에 실현된 사건은 지금도 계속되며 미래에도 계속될 것입니다. 따라서 천년동안이란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지금도 지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사망(死亡)

둘째 사망이란 단어를 검색하면 요한계시록에서 4회 사용된 것으로 나타난다(2:11, 20:6, 14, 21:18).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된 둘째 사망에 관한 말씀들을 살펴봅시다(2:11, 20:6, 20:14, 21:8).

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20:14,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된 ‘둘째 사망’에 관한 말씀들을 종합하여 정리하면 둘째 사망이란 한 가지 의미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불 못에 던져지는 것(20:14)
- 사망, 음부

불 못이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21:8)
- 두려워하는 자들, 믿지 않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행음자들, 술객들, 우상숭배자들,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

그동안 자주 들을 수 있었던 ‘지옥(地獄)’이란 마치 “유황불이 활활 영원히 꺼지지 않고 타는 못”을 말합니다.

첫째 부활(復活)

요한계시록에서만 2회 사용된 것으로 검색할 수 있다(20:5, 20:6).

요한계시록 20: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이는 첫째 부활이라.

요한계시록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첫째 부활이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고 이미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둘째 사망이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유황불이 타오르는 불못에 던져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첫쩨 부활에 참여한 백성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성도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왕과 제사장으로 임명받았습니다.

베드로전서 2:9∼10,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우리가 택하신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그의 소유가 된 것은 무조건 적인 긍휼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의 은혜를 힘입어 성경을 바르게 읽어야 하고 성경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여 매일의 삶에 적용하므로 이 땅에 새 하늘과 새 땅이 회복될 수 있는 길을 예비해야 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마태복음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0: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 왔다 하고.

* 천국(ἡ βασιλεία) - βασιλεία, 932. basileia.
kingdom, sovereignty, royal power  

천국은 하늘 왕국 즉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하늘의 왕국은 이미 이 땅에 임했습니까? 아직 임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미 하늘 왕국은 임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된 왕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분명하게 하늘 왕국은 완성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늘 왕국이란 하나님이 다스리는 왕국을 말합니다.
하늘 왕국이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아미 임했습니다.

다니엘 2:44,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마태복음 23:37∼3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스가랴 14:9,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이사야 11:6∼9,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시편 46:9∼10,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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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하늘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늘의 예루살렘 강하 사건(계 21:1~5)을 통해 본 하늘의 의미’를 발표하고 “하늘은 더 이상 피안의 세계로서 이 세상과는 이질적인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 이 세상과 통일돼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공간이 된다”며 “새 예루살렘 강하 사건은 이러한 새 창조의 정황을 교회론적 관점에서 조망하는 그림 언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새 예루살렘 강하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하늘과 땅이 통합되는 새 창조의 환경에 대한 묘사라는 것이다. 이 소장은 “새 예루살렘은 장소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인 성도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성경에서 일관성 있게 사용되고 있다”며 “이는 24장로(계 4), 14만 4000(계 7:1~8), 셀 수 없는 큰 무리(계 7:9~17)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요한계시록에서 초림과 재림 사이의 교회 공동체는 지상에서 전투하는 모습을 띠지만 동시에 하늘에서 승리한 공동체로 존재하는 이중적 특징을 지닌다”며 “이 땅은 우리가 버리고 떠나야 할 소멸의 결과를 기다리는 대상이 절대 아니다. 하늘은 언제나 땅과의 통일을 이루도록 존재한다(엡 1:10). 하늘과 땅을 통합돼 온 우주가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지혜(세인트앤드루대) 박사도 ‘히브리서 12장 25~29절의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위한 하늘의 진동’을 주제로 발표하고 “해당 본문은 창조 세계가 진동해 멸망할 것이라는 마지막 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의 창조세계와 하늘의 세계를 그의 백성들과 함께 거할 영원한 처소로 준비시킬 것임을 전하는 약속의 메시지”라고 밝혔다. 이 박사는 “종말 상태에 대한 전통적 경향은 죽어서 하늘로 가는 데 집중돼 왔지만 이는 땅의 환경문제나 세상의 사회적·구조적 불의를 무관심하게 만든 불균형적 신앙 모습을 촉발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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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왕국(千年王國)

성경에서 중요한 주제 두 가지를 소개한다면 구원과 왕국이라고 하겠습니다. 대부분 구원만 강조하는 경향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바르게 읽어볼 때 왕국을 건설하고 그곳에 구원받은 백성들을 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에베소서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1: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1: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하신 은혜는 왕국 안에서 구속하신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으로 에덴동산(왕국)에 거주할 수 없도록 쫓아내셨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사탄이 지배하는 곳에서 왕국을 다스릴 수 있는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기원전 606년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후 다른 나라와 민족의 지배를 받으며 비록 약속의 땅에 거하면서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기원전 4년 예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1:32,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한글 번역에서 살펴보면 마치 천년이란 기간이 채워져 지난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천년설 - 천년이 있기 전에 재림이 있다.
후천년설 - 천년이 지나고 재림이 있다.
무천년설 - 천년은 상징적인 수가 되어 천년은 없다.

* 천년의 기준에 의해서 시기가 다를지라도 중요한 것은 재림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다.

* 천년동안(χίλια ἔτη.)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Ⅶ(요한계시록 22:7)

  ①. 파트리스교회 2019-9-8(주일)                

-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복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1장 3절에서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22장 7절에서 지키는 것과 1장 3절에서 지키는 것이란 단어는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1장 3절에서 예언의 말씀 - τοὺς λόγους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22장 7절에서 예언의 말씀 - τοὺς λόγους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τοῦ βιβλίου


1장에서 예언의 말씀은 제한적인 예언의 말씀으로 요한계시록에 소개된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22장에서는 요한계시록을 포함한 성경 전체에서 소개된 예언의 말씀을 말합니다.

말씀을 가감 없이 지키는 자가 누릴 복

22장 7절에서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셨고, 22장 18∼19절에서는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셨습니다.

성경은 가감해서는 안 될 책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19절에서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일부일지라도 시인하지 않으면 신앙에 큰 쇠퇴를 가져옵니다. 가령 기도 한 가지만 그 필요성을 부인해 보십시오. 그 영적 생활은 천국에서 가장 보잘 것이 없게 되고 말 것입니다.

계시록 역시 결코 가감해서는 안 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가감하지 말라는 경고는 계시록 해석의 중요한 지침 사항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구절 한 문구라도 무언가 의미가 있다고 믿어 충실히 해석한 결과 귀한 진리가 내포되어 있음을 체험했습니다. 비유와 상징이란 한 가지만 달라도 아닌 것입니다. 스무고개 놀이와 같이 하나만 달라도 아닙니다.

예를 들면 코끼리에 대해서 99가지가 맞아도 한 가지만 틀리면 코끼리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계시록 강해에서 가장 범하기 쉬운 실수는 내용이 어렵다 보니 추측으로 대충 이해하려 함입니다. 그러나 본 교재는 전체는 물론이요 작은 용어나 수식어 하나라도 빠짐없이 문맥의 흐름에 부합한 의미로 모두 해석했습니다. 어느 한 부분 더하거나 감한 적 있었습니까? 이 계시록의 영적인 주제 역시 지어낸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할 내용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본문에 충실할 수 있음은 계시록을 복음으로 볼 때 가능합니다.

그러나 계시록을 가감하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받습니다. 그래서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모두 입으로는 희망을 이야기 하나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래서 은혜보다는 심리적으로 이미 재앙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가감할 때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린다고 하셨듯이 복음의 구체성을 전하지 못하니 성화와 별로 관계없고 따라서 생명적인 은혜의 삶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계 22:18∼19에 해석의 힌트가 숨어 있었습니다. 계시록의 온갖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은 달리 풀어야 할 것이 아니라 결국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에 대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의 복음입니다. 계시록을 예수의 복음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역사적 종말론을 소홀히 해서도 방종의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물론 본 강해는 그 동안 소홀했던 부분인 영적인 관점을 강조한 것일 뿐 결코 역사적 미래를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계시록에서 역사적인 면과 신령한 복음의 면을 함께 인정할 때 진정한 은혜 생활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자의 복(시 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히브리어로 ‘묵상’은 ‘정신을 모아 잠잠히 생각하다.’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모아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대해서 잠잠히 생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시편 119:148,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믿음으로 말씀을 사랑하는 자에게 많은 것으로 복을 주십니다. 어떤 복을 말씀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십니까? 

첫째, 지혜의 삶(시편 119:98)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원수보다 지혜롭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원수의 특징은 갖은 모략과 간사한 계략을 총동원하여 상대방을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원수가 제 아무리 간사한 지혜를 총동원하여 우리들을 넘어뜨리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말씀을 통하여 원수의 지혜를 능가하는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심지어 시편 199편 99절에는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스승은 가르치는 자입니다. 제자가 스승보다 낫지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지혜를 얻은 자는 스승의 지혜를 능가한다는 말입니다. 

100절에는 노인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노인의 지혜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랜 기간 동안 경험을 통하여 익힌 산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경험이 부족하고 나이가 어리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얻은 지혜는 경험적인 지혜를 능가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 중의 지혜요, 보배 중의 보배가 되기 때문에 이 말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말씀을 사모하며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잠언 9장 10절에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원수보다 스승보다 노인보다 더 깊은 지혜와 명철을 주십니다. 원수의 전략보다 더 뛰어난 전략을, 스승의 지식보다 더 뛰어난 지식을, 노인의 경험보다 더 귀한 경험적 지식을 성경에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명철과 지혜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대처하고 승리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겁니다. 그 명철과 지식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이 지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으로써, 우리는 그 지혜를 통해서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세계 최대의 백화점을 운영하고 나중에 미국의 체신부 장관까지 역임한 존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는 그의 말년에 사업가로서의 6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장에서 한권의 낡은 성경책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저의 출생일인 1838년 7월 11일부터 오늘까지 무려 30,026일을 살아왔습니다. 저는 인생에서 투자하는 것마다 많은 이윤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저의 투자 중 가장 성공한 것은 열두 살 때 2달러 50센트를 주고 빨간 가죽 성경을 산 것입니다. 바로 이 낡은 성경이 제가 한 가장 위대한 투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지혜를 얻어 지혜로운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변화의 삶(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고 중생을 얻는 것은 성령과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만납니까? 말씀 속에서 만납니다. 말씀을 읽고 순종하면 주님이 그 안에 계십니다. 말씀을 읽으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의 해답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하나님을 중심하여 살아야 됨을 성경을 통하여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예수는 나의 구주이심을 확실히 믿게 되고 그를 사랑하며 그와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120년 전에 선교사들이 가지고 온 말씀 때문에 그리고 중국에서 누가복음을 번역해서 압록강을 건너 말씀이 이 땅에 퍼지면서 이 민족은 이렇게 놀라운 민족이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해서 성경을 번역하여 독일과 온 유럽 땅에 말씀을 나누어주면서 유럽에서는 문예 부흥이 일어나고 세계를 움직이는 위대한 과학발명이 물밀듯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조지 워싱턴은 말하기를 ‘성경 없이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프리카의 식인종을 변화시킨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거스틴을 변화시켜 탕자를 성자로 만든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로마서 13:11∼14,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 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팀 라하이 목사님은 뛰어난 교육가요, 성공적인 목회자요, 베스트셀러의 작가인데  그는 “하루 15분이 영어를 정복한다.”는 광고 문구를 보고는 그 말을 성경공부에 적용하였습니다.

하루에 아침 15분만 일찍 일어나서 맑은 정신에 성경을 읽었습니다. 하루에 15분, 일 년 365일이면 5,475분, 이 하루의 15분이라는 시간은 약 4일 정도의 시간이 됩니다. 팀 라하이 목사님의 경험으로 하루 15분이면 성경을 완전히 통독하고, 성경 중에 중요한 부분은 여러 차례 읽을 수 있고, 중요한 진리, 약속, 계명들이 마음속에 뿌리박게 되며, 가장 중요한 말씀들은 묵상하게 되며, 요절을 깨달을 수 있고, 성경말씀에 해박하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죽은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하는 생동감 있는 말씀입니다. 나를 변화시키고 내 인생을 새롭게 하는 능력을 가진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셋째, 평안의 삶(시편 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촌에는 여러 가지로 불안과 염려에 휩싸여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으며 염려와 걱정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평안과 장애물이 없으리라는 축복이야말로 우리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호송 당할 때 유라굴로라는 큰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가 생명을 잃어버릴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불안과 염려로 인하여 모두가 죽게 될 운명에 처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한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평안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27: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셨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위기 앞에서도 말씀을 주사 큰 평안을 주십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과 화목한 자로서 평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죄 때문에 평안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고 죄로 인하여 불안과 근심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주시므로 참된 평안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두고 그 말씀대로 순종할 때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며 거기에 참된 평안이 깃들게 됩니다.  

넷째, 위로의 은총(시편 119:50)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는 위로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사람의 말이나 도움으로서도 위로를 경험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참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욥이 당하였던 그 고난을 한번 생각하여 보십시오. 정말 사람의 입술로 형용하기 힘든 고난이었지만 그 고난 속에서도 위로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 힘을 얻었습니다. 고난 중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욥이 믿었습니다. 그를 연단하시고 정금 같이 만드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고 승리합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 후 베드로는 낙심하여 갈릴리 바다로 가서 물고기를 잡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오십니다. 

베드로야 너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시는 주님 앞에서 베드로 고백합니다.

주님 아십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주님의 위로와 사명이 주어졌니다. 실패한 베드로에게 위로와 회복의 말씀으로 새로운 삶을 허락하십니다.

진정한 위로의 말씀 소생케 하는 말씀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은 시몬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시몬아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주님만이 아십니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세 가지의 큰 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와 고통과 죽음의 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짐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십자가의 은혜가 죄의 짐을 해결합니다. 고통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의 말씀이 해결합니다. 죽음에 대해서는 부활과 영생의 말씀을 통하여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죄와 고통과 죽음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니라.


말씀을 사랑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변화를 주십니다. 평안을 주십니다. 위로와 사명을 주십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자 되어 이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찬송 234장 평생에 듣던 말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①. 파트리스교회 2019-9-15(주일)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Ⅷ(요한계시록 22:14)

-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의 복

그 두루마기(στολὰς)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삶의 문제는 곧 생명(生命)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삶의 문제는 두 가지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죽느냐 사느냐?

한반도는 두 가지 다른 체재가 지배하면서 전혀 다른 삶이 드러났습니다. 북한의 경제는 남한 보다 훨씬 더 좋은 여건에서 시작했지만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사회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남한은 비록 북한 보다 낮은 경제 수준에서 시작했지만 현재는 세계 경제 상위권에 진입한 국가로 인정받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북한의 문제는 죽느냐 사느냐? 이런 문제가 삶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둘째는 먹느냐 사느냐?

남한에서는 무엇을 먹고 사느냐가 삶의 관심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삶은 육신을 위한 것이며 육체적인 것에 관심에 초점을 맞춘 삶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느냐 사느냐? 먹느냐 사느냐? 두 삶의 문제는 미래에 대한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이란 주제에 따라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삶은 현실과 미래를 연결하는 삶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두루마기는 옷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을 먹느냐? 이러한 관심에서 배가 부르면 반드시 무엇을 입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결정됩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에서 두루마기는 옷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두루마기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 두루마기(στολὰς) - στολή(4749. stolé)  
Definition : equipment(장비, 용품), apparel(의류, 의복 특히 공식 행사에서 입는 것)

Usage : a long robe, worn by the upper classes in the East. 

‘두루마기’를 헬라어로 ‘스톨래’ 라고 합니다. 스톨래에서 영어의 스톨(Stole)이란 단어가 유래합니다. 두루마기 스톨래는 공식 행사에서 입는 옷을 말합니다.

주님의 재림의 날에 어린 양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계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예복(禮服)을 입어야 합니다. 일반적인 혼인 잔치에 참여하려면 예복은 반드시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이 직접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유대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때는 참석자가 예복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손님들을 위하여 준비합니다. 만일 각자 개인이 준비한다면 어떤 사람은 최고의 명품 옷을 입을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시장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려고 주인이 하객들을 위하여 준비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하객들의 예복은 똑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예복은 어떤 옷일까요?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예복을 세마포 라고 합니다. 세마포는 옳은 행실이라고 하셨습니다.

* 세마포(βύσσινον) - the fine linen
-  βύσσινος(1039. bussinos) fine linen, cotten 

* 옳은 행실(δικαιώματα) - righteous acts 
- δικαίωμα(1345. dikaióma) a righteous deed 

옳은 행실이란 사람이 바른 행위와 삶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어떤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옳은 행실을 자랑할 수 없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옳은 행실이란 무엇일까요?

관주 성경에서 두루마기란 단어에 사용된 관주를 찾아봅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 라는 말씀에 자가 표기되었습니다. 그 지시를 따라 찾아보면 7장 14절이라고 소개합니다.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 옷(στολὰς) - 7장 14절의 옷은 22장 14절의 두루마기와 동일한 단어 ‘스톨래’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두루마기는 곧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3:20∼22,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두루마기를 빠는 자는 누구일까요?

두루마기를 빠는 것은 옷을 빠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 중에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라는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새 번역 주기도문중에서)

회개는 구원을 얻는 일회적인 회개와 매일의 죄를 고백하는 성결을 위한 회개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얻는 회개는 일생에 단 한 번뿐입니다.
이미 목욕을 한 사람은 발만 씻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은 13:1∼10,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서 용서받아 이미 목욕한 자와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는 동안에 나도 모르게 또는 내가 알면서도 심령이 더러워지고 몸도 더럽혀 집니다. 그래서 더럽혀진 발을 씻듯 혹은 옷을 세탁해야 하듯 늘 씻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은혜의 경험을 놓치고 맙니다. 물론 구원에서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날마다 행실을 씻지 않으면 하나님의 임재와 예비하신 은혜들을 경험하지 못하고 심하면 징계 아래 있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6:9∼11,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 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디도서 2:11∼14,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계시록에서 약속한 일곱 가지 복을 종합해 볼 때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모두 믿음 안에서 바로 살라는 신령한 교훈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복에 대한 것도 모두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복이십니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서 우리 모두 거룩하고 신령한 삶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복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삶을 추구하고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곧 복을 누리는 지름길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복의 책입니다.
왜냐하면 일곱 가지 복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일곱(7)이란 수의 의미는 두 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완전수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늘의 수 삼(3)과 땅의 수 사(4)를 더하면 칠(7)이 됩니다. 완전함을 나타내는 수 또는 충만의 수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일곱을 자주 언급합니다.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일곱 영 등과 같은 내용입니다.

둘째는 신령한 수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매일 성 주위를 한 바퀴씩 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게 하셨습니다. 일곱 바퀴를 돌고난 후에 모든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향하여 무너져라! 하고 외쳤을 때 그 견고한 성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일곱이란 수가 신령한 수가 됩니다.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아담으로 인하여 들어온 죄를 완전히 씻음을 상징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罪, 하마르타네이)란 원어의 뜻은 '과녁을 빗나가다' 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화살을 쏘는 궁수와 사격을 하는 사격수들이 과녁을 향하여 화살을 쏘고 총을 쏩니다. 이때 궁수와 사격수가 겨냥한 과녁은 가장 정 중앙을 정통(正統)이라고 합니다. 정통에서 벗어난 모든 것을 하마르티아라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질서를 벗어난 행위가 모두 죄가 됩니다.

죄의 근원 사단(루시퍼) 마귀는 질서를 파괴하고 하나님께 쫓겨났습니다. 그 마귀에게 속아 아담에게 생명이 죽고 사망이 왕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그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우리를 회복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음으로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복은 영생입니다. 죄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에 아담에게 주고자 했던 그 영생복락을 우리 믿는 자에게 주시며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 것 입니다.

생명나무의 영생과를(永生) 먹는 것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이며 저 천국에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 문은 천국의 문이며 그 성은 새 예루살렘 성전인 하늘의 성전으로 천국의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전을 의미합니다. 천국과 같은 새 예루살렘은 물리적인 빛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자체가 빛입니다(계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이마에 인침을 받은 사람


요한계시록 7: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9:4,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13:16,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4:9,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요한계시록 17: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요한계시록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니.

요한계시록 22: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요한계시록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요한계시록 5:7,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요한계시록 5: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요한계시록 5: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5:12,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찌어다 하니.

요한계시록 6: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요한계시록 6: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요한계시록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요한계시록 7: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요한계시록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요한계시록 7: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요한계시록 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 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요한계시록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4: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요한계시록 14: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요한계시록 14: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요한계시록 15: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요한계시록 17:14,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요한계시록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요한계시록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요한계시록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요한계시록 21: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요한계시록 21: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요한계시록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요한계시록 22: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요한계시록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2017-4-9)

알파(Α)와 오메가(Ω)(요한계시록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I am the Alpha and the Omega, says the Lord God,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 the Almighty. 


‘알파(Α)와 오메가(Ω)’는 신약 성경을 기록한 헬라어의 24개 대문자 중에서 알파(Α)는 첫 번째 문자이고 오메가(Ω)는 마지막 문자입니다.

헬라어의 알파벳은 대문자는 24문자, 소문자는 25문자(시그마는 2가지 형태) 입니다. 첫 문자는 알파(Α), 마지막 문자는 오메가(Ω)입니다.
한글로 말하면 자음으로는 기역(ㄱ), 히읗(ㅎ)
영어로 말하면 A, Z
알파와 오메가의 의미는 처음과 끝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알파와 오메가는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알파(Α)와 오메가(Ω)’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을 ‘알파(Α)와 오메가(Ω)’라고 불렀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은 시작하신 일은 반드시 완성하신다.’는 뜻에서 ‘알파(Α)와 오메가(Ω)’ 라고 불렀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적과 같은 일을 자주 체험하는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기적을 체험하는 것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민족이 함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을 체험한 만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29:3∼4,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가 목도하였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때로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적과 같은 체험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적보다 더 필요한 것은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중요합니다. 왜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중요할까요?

(도입 이야기)
최근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카이퍼 상 수상자로 발표했던 뉴욕 리디머 장로교회를 설립한 팀 켈러 목사(Tim Keller, 66)의 수상을 취소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 이유는 성 소수자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과거에 프린스턴 신학교는 개혁주의 정통신학의 요람이었으나 지금은 신학적 자유주의 요새가 되었습니다. 프린스턴신학교의 가르침은 동성애자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팀 켈러목사는 이러한 신앙에 동조하지 않기 때문에 카이퍼 상 수상자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프린스턴 신학교의 결정에 대해서 남침례신학교 보이스 칼리지 학장 데니 버크(Denny Burk) 목사는 ‘빛이 어둠과 함께 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고 따라가는 제자라면 어느 누구도 카이퍼 상을 받을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전개 이야기)
동성애자에 대한 신학은 교단과 신학자들 그리고 사람들마다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날 때는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신학교에서는 동성애자들에 대해 찬성하고 어느 신학교에서는 반대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어느 가르침을 따라야 할까요?


신학은 시대에 따라 그 내용이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변함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 하는 하나님의 칭호가 ‘알파(Α)와 오메가(Ω)’ 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알파(Α)와 오메가(Ω)’ 라는 말씀이 세 번 사용되었습니다(1:8, 21:6, 22:13).

1장 8절과 21장 6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알파(Α)와 오메가(Ω)’ 라 하셨습니다. 22장 13절은 주님께서 ‘알파(Α)와 오메가(Ω)’ 되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파(Α)와 오메가(Ω)’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칭호가 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칭호에 대한 용어를 세 가지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알파(Α)와 오메가(Ω)(1:8, 21:6, 22:13)
처음과 나중(21:6, 22:13)
시작과 끝(22:13)


요한계시록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 1장 4절에서 말씀하신 것을 다시 인용한 것입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예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사용하는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시간은 현재(이제도 계시고)와 과거(전에도 계시고)와 미래(장차 오실 이)로 말씀하셨습니다.


왜 세상의 시간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독특한 방법으로 시간의 흐름을 말씀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신앙생활을 바르게 유지하려면 현재의 시간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시간은 과거로부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지만 약속하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애급의 노예로 고달픈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힘으로 도저히 애급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 초기 교회와 성도들은 로마 황제의 명령에 따라 로마 황제 카이사가 주가 되신다는 고백을 해야만 일상생활이 가능했습니다. 만일 이러한 명령을 거역하면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심각한 어려움이 시달렸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 요한은 밧모라는 섬에 유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에도 애급의 노예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던 ‘알파(Α)와 오메가(Ω)’ 되시는 그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기 때문에 반드시 로마의 핍박으로부터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알파(Α)와 오메가(Ω)’는 구약 이사야 44장 6절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사야 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로마 황제가 세상의 최고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유일하신 왕이신 하나님이 되신다는 고백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역사를 완성하시는 하나님만을 찬송해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잠시 로마의 황제가 세상을 지배하는 왕처럼 군림하지만 그는 결코 왕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속 역사가 성취되고 완성될 것입니다.

21장 6절에서,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루었도다’ 라는 말은 21장 1절에서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새 창조를 마쳤기 때문에 ‘이루었도다(기노마이, γίνομαι)’ 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새 창조를 마치신 하나님은 ‘알파(Α)와 오메가(Ω)’ 라고 부릅니다. ‘알파(Α)와 오메가(Ω)’ 되신 하나님께서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 이사야 55장 1절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생명수 샘물이란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입니다. 구약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적 배경은 바벨론의 포로가 된 백성들의 궁핍한 삶에 허덕이던 백성들에게 의식주의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에는 로마 황제를 숭배하지 않으면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명의 문제가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알파(Α)와 오메가(Ω)’ 되신 주님께서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주시기 때문에 삶의 문제가 없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경제 활동이 없으면 모두가 생명의 위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은 물질만능주의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창조가 완성된 예루살렘에서는 생명의 위험을 느낄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하나님의 호칭은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킬 때에 사용했던 호칭과 동일합니다. 이와 같은 동일한 호칭은 예수께서도 하나님과 같이 역사의 주인이 되심을 증거 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처음과 나중

요한계시록 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요한계시록 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이신 영원 무한한 존재

하나님은 처음도 되시고 나중도 되십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계셨고 영원 후까지 계십니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생각할 때 그렇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님은 시작과 끝입니다. 무한에서 무한에 미치기까지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이라고 여러 곳에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시편 90: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박국 1:12,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시편 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신, 무한에서 무한에까지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요. 하나님은 안 계신 데가 없으시고,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우리는 이렇게 항상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제가 없고 내일이 없고 항상 오늘입니다. 하나님은 과거가 없고 미래가 없고 언제나 현재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먼 데가 없고 가까운 데가 없고 동이 없고 서가 없고 어디나 계시는 하 나님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하나님 앞과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시작과 끝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무너진 세상을 새롭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된 이름입니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하나님이 만물의 시작과 끝

하나님은 이 우주 공간에 대해서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우주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고, 우주의 종국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이 천지를 창조하심으로 이 우주가 존재합니다.

요한계시록 20:11, 또 내가 크고 횐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우주의 종국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인생을 지으신 이도 하나님이요, 이 인생을 불러 가실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90: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돌아가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인간의 역사의 시작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요, 결국 인간 역사의 종국의 마지막 페이지도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한 국가의 흥망성쇠, 온 세계의 최후의 페이지도 결국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인간의 구원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은혜 줄자에게 은혜 주시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도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2:2, 그리스도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


우리를 택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독생자를 보내시는 이도 하나님이 시요, 죄를 사하여 주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인생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 십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우리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하시는 말씀은 만물의 기원과 종국을 말씀합니다. 

‘알파(Α)와 오메가(Ω)’의 하나님은 한번 시작한 것은 반드시 끝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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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시종(始終)이며 일 하신다

처음과 끝이 다름이 없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은 알파와 오메가, 첫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끝까지 있는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은 처음 사랑은 있으나 끝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친구간의 사랑, 교역자의 사랑도 처음에는 있는데 마지막에 멀어져 오메가, 끝이 없는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처음과 나중이 같은 사랑입니다. 렘 31:3,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궁한 사랑입니다. 요 13장,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알파의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메가의 사랑, 끝 사랑이 있습니다. 롬 8장에 그리스도의 사랑은 세상의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알파와 오메가의 사랑이십니다. 


2. 하나님의 공의도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시편 145:17,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도다” 라고 했습니다. 시편 11:5,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옛날이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옛날 아브라함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의 법률은 조석으로 변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공의는 알파와 오메가로써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에도 악인을 벌하시고 오늘에 와서도 악인을 벌하십니다. 옛날에도 죄를 회개할 때에 미쁘시고 의로우사 죄를 용서해 주셨고, 오늘날도 죄를 참으로 회개할 때에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 우사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변치 아니하므로 언약을 하였으면 옛날에도 지키셨고, 오늘도 지키셨습니다. 사람의 약속은 믿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이신 까닭에 하나님께서 시 작하신 일은 반드시 마치십니다. 살전 5: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시기를 시작한 후에 끝까지 인도해서 가나안 복지에 도달하게 하실 뿐더러 아브라함의 일생을 주장하여 주시고, 축복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모세를 통하여 홍해를 일단 건너 게 한 후에 광야 40년간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반드시 하나님께서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로 하여금 그 백성을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시고야 만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알파와 오메가의 신앙 을 요구하십니다. 시종 여일한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교인에게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신으로 마치고자 하느냐? 너희가 전에는 달음박질을 잘 하였더니 오늘날 어떻게 이 모양이 되었느냐 ?”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의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 이 같은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우리 중에 전에는, 과거에는 달음박질 잘 하던 분이 오늘날 쉬는 분은 없읍니까? 용의 머리는 크지만 용의 꼬리는 뱀같이 가는 자, 용두사미같은 신앙을 가진 자 있읍니까? 그만 신앙에 낙심된 자 있읍니까? 젊은 시절에는 오히려 주의 일을 열심으로 하고 모든 일을 잘 하다가도 나이가 들어서 많은 경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주님을 더 잘 봉사할 수 있으련만 끝이 미비한 신앙 가진 자 더러 있읍니까?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파와 오메가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부활하신 주께서

요한계시록 2:1,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
내가 너희에게 책망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알파의 사랑은 있었지만 오메가의 사랑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알파의 사랑을 귀하게 여기지만 오메가의 사랑도 귀하게 여기십니다. 끝까지 우리는 주를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하여 주님을 버리고 세상에 간 자 없습니까?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은 역시 우리에게 알파와 오메가의 봉사를 요구 하고 계십니다. 몇 년 전, 몇 십 년 전에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봉사 잘 하셨습니까? 좋습니다. 오늘은 어떻습니까? 주님께서는 오메가의 봉사를 요구 하십니다. 처음에 직분을 맡았을 때 우리가 열심 으로 일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몇 해 지나서 오늘날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끝이 깨끗한 오메가의 봉사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생애도 알파가 있으면 오메가, 끝이 있습니다. 이 세상도 알파가 있으면 종말 심판의 오메가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메가의 심판의 날이 속히 임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알파와 오메가 의 신앙. 사랑, 봉사. 변함없는 우리로서 바로 서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 기에 합당한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알파(Α)

알파가 되신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신앙고백을 할 때에도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아버지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단순히 착한 사람에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주 전체의 근원이십니다.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928. 10. 2~2014. 9. 5)

‘하나님은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 이라고 합니다.

로마 황제의 박해에 핍박과 탄압에서도 알파가 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로마 황제가 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가 되심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하나님이 알파가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자기중심에 펼쳐진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현실의 문제에 시달립니다.

우리의 모든 근거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 외에 다른 그 어떤 존재가 여러분에게 필요합니까?

세상을 완성하시는 오메가(Ω)

오메가 되신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상을 완성하신다는 뜻입니다. 완성된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 이라고 하셨습니다(21:1).

4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눈물, 죽음, 애통, 통곡, 아픔이 없는 세상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상상이 잘 가지 않을 겁니다. 이런 것이 있어야 웃음과 삶과 즐거움을 느끼는 방식으로 작동되는 세상에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표현들은 마지막 때에 모든 세상과 삶이 완성된다는 사실에 대한 비유이자 은유입니다. 로마 황제는 눈물과 죽음과 아픔을 씻어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만이 그게 가능합니다. 로마 황제의 존엄에 굴복하라고 강요받던 시대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라는 사실을 줄기차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자라고 말입니다. 정말 혁명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는 영혼의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이 종이두루마리처럼 말린다거나 바다에서 용이 나오는 광경도 있습니다.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표현들이 많습니다. 저는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마다 그 역동성에 감동을 받습니다. 전혀 새로운 언어로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일이나 사람들은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거기서 거기입니다. 대통령이나 필부나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조 단위의 재산이 있는 사람이나 겨우 먹고 사는 정도의 사람이나 인간의 근본에서는 다를 게 없습니다. 모두 이 세상에서 한 순간 살다가 떠나야할 것들입니다. 우리가 그런 대상에 매달려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런 삶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밥벌이를 포기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그 해방이 실제로 가능할까요?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에게 눈을 돌리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만물 속에) 계시고, 전에도 (우주와 인류 역사에) 계셨고, 장차 (세상 마지막 때 생명을 완성하기 위해) 오실 분입니다.

그는 바로 모든 것의 알파이며, 모든 것의 오메가이십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이 세상과 그 안에서의 삶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궁극적인 미래라는 사실을 믿고 안심하십시오.


나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

알파와 오메가 ; 1:8, 21:6, 22:13
처음과 나중 ; 1:17, 2:8, 2:19, 21:6, 22:13
시작과 끝 ; 22:13

이 말씀은 계시록의 말씀을 더욱 권위 있게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완전(完全)

헬라인은 알파벳 처음 문자 알파(Α)부터 마지막 문자 오메가(Ω)까지를 부름으로써 완전성을 나타내고, 히브리인들도 그들의 글자 알레프(א)부터 타우(ת)라는 끝 글자를 나타낼 때 모든 일의 결말을 보는 완전성을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은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2. 영원(永遠)

알파와 오메가의 설명에 이어서 처음과 나중이라 했습니다. 우리 주님 안에서는 영원부터 영원까지의 처음과 나중의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3. 권위(權威)

헬라인들은 늘 제우스신에게 감사드릴 때 시작과 끝이라고 말하던 것을 인용한 말로써 하나님의 권세는 시작으로써 누구에게 이어 받은 권세나 능력이 아니며. 또 끝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그 권세, 영광, 능력은 그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는 이 말씀 속에 하나님의 완전한 권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성, 무시간성, 그리고 권위를 의미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 받은 자와 버림 받은 자 


구원 받은 자(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권세가 있습니다. 즉 이 구절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 측의 할 일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회생을 우리의 것으로 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그들의 예복 두루마기를 빨아야 합니다. 비누와 물은 옷 을 씻을 수 있고 때를 씻을 수 있으나 우리 마음의 죄와 예복의 두루마기 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이고 자기의 것으로 만든 자만이 두루마기 빠는 자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즉 두루마기를 빨아야 할 까닭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계 2:7, 22:2)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기 위함입니다. 그 성에 들어가지 못하면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하는 자를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버림 받은 자(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우리는 구원 받은 이의 보상은 그 성에 들어가 그 좋은 것을 서로 나누는 것이라고 배됐습니다. 이 절에서 우리는 회개하지 않은 자와 그럼 으로써 영원히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그들의 운명을 보게 되겠습니다. 개라는 말은 동물을 말함이 아니요 동물처럼 살아온 사람을 말합니다. 개는 야만적이고 더러운 것을 모두 뜻합니다. 개들은 부정하며, 방종하며, 무례한 자, 천한 인간, 사나운 인간, 기독교를 파괴하는 배교자를 말 합니다. 유대인들의 개의 개념은 애완용이나 집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집 없이 방황하며 야만적인 것을 개라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개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랍비의 말에 우상 숭배자와 함께 먹는 자를 개와 더불어 먹는 자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할례 받지 못한 자를 개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신명기 23:18,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 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 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부탁입니다. 주님의 피로 새 예복 두루마기를 빨아 주님의 말씀 을 지켜 구원의 자리에서 주님을 영접하여 달라는 주님의 부탁에 응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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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48186 2019-08-24T20:50:02Z 2019-08-24T20:50:02Z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Ⅵ(요한계시록 20:6) 설교 원고(2019-08-25)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Ⅵ(요한계시록 20:6)


-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의 복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요한계시록 19장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린 양은 신랑이 되시는 예수님이 이십니다. 신부는 예수님이 주인 되신 교회이며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가 동일한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내용에서 모든 교회에 공통된 말씀은 두 가지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교회
둘째는 예수 이름으로 승리하는 교회

예수님께서 주인이 되신 교회는 반드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신 교회는 반드시 예수 이름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려 몇 가지 중요한 용어들을 정리해야 합니다.

첫째는 첫째 부활(復活)

둘째는 둘째 사망(死亡)
셋째는 천년왕국(千年王國)

먼저 이러한 용어들을 정리하기 전에 구원에 대한 믿음을 성경적으로 확실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믿음입니까? 아니면 행위입니까? 믿음에 의한 것을 구속론적 구원이라고 합니다. 행위에 의한 것을 도덕론적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속론적(救贖論的, redemptional)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속론적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께 죄 값으로 지불되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구속론적 구원이란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신앙입니다. 

도덕론적(道德論的, ethical) 구원이란 무엇인가?

도덕론적 구원이란 믿음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행위(行爲)가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도덕론적 구원이란 모든 종교에 적용되는 보편적 속성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즈음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하는 것은 다른 종교를 무시하고 화해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기독교를 편협한 종교라고 하기 때문에 종교다원화주의와 같은 사상이 유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진리는 변질 될 수 없으므로 오직 예수의 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당당하게 주장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구원에 대한 혼돈과 갈등이 자주 일어나는 이유는 구속론적 구원인가 아니면 도덕론적 구원인가를 서로 혼합하여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느냐? 라는 질문은 마치 구원을 도덕론적 구원의 근거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한번 받은 구원은 빼앗길 수 없다는 것은 구속론적 구원의 근거에 의하여 사람이 선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기 때문에 사람의 행위가 구원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속론적 구원을 근거로 오늘의 말씀을 살펴보면 첫째부활과 둘째사망과 천년왕국이란 개념을 잘 몰라도 분명히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첫째 부활과 둘째 사망과 천년 왕국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부활(復活)이란 무엇인가?

첫째 부활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된 첫째 부활에 관한 성구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부활이란 용어를 20장 5절과 6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5∼6,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첫째 부활이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둘째 사망의 해는 무엇일까요? 둘째 사망(死亡)이란 용어가 2:11, 20:6, 14, 21:18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에서 ‘둘째 사망’이란 불못에 던져지는 것을 말합니다. 불못이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을 말합니다(21:8). 불못에 던져지는 것들은 사망과 음부(20:14) 그리고 두려워하는 자들, 믿지 않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행음자들, 술객들, 우상숭배자들,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21:8).

흔히 ‘지옥(地獄)’을 마치 “유황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고 타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전에서 정의하는 지옥(地獄)이란 “아주 괴롭거나 더없이 참담한 환경이나 형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현실에서 악한 일을 한 사람이 죽어서간다고 하는 세계.” “큰 죄를 짓고 죽은 사람이 그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악마와 함께 영원히 벌을 받는다고 하는 곳.” 이라고 합니다.

첫째 부활이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예수님께서 재림의 심판주로 오셨을 때 유황불 못에 던져지는 것은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첫째 사망은 육신의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천년왕국(千年王國)이란 무엇인가?

‘천년(千年)’이란 단어가 한글개역성경에서 9번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시편에서 1회(90:4), 전도서에서 1회(6:6).
신약에서는 베드로후서에서 1회(3:8), 요한계시록에서 6회(20:2, 3, 4, 5, 6, 7)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된 ‘천년(千年)’에 관한 말씀들을 중심으로 과연 ‘천년왕국(千年王國)’이란 용어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이해를 소개하려고 한다.

2절, 일천년 동안(a thousand years) - χίλια ἔτη.  

3절, 천년이 차도록(till the thousand years) - τὰ χίλια ἔτη. (the thousand years)      

4절, 천년 동안(a thousand years) - χίλια ἔτη.      

5절, 그 천년이 차기까지(until the thousand years) - τὰ χίλια ἔτη. (the thousand years)      

6절, 천년 동안(a thousand years) - τὰ χίλια ἔτη. (the thousand years)       

7절, 천년이 차매(the thousand years are expired) - τὰ χίλια ἔτη. (the thousand years)

* τὰ /  ὁ, ἡ, τό. 3588. ho, hé, to. the  
* χίλιοι. 5507. chilioi, a thousand     
* ἔτος. 2094. etos. a year    


분명한 사실은 요한계시록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는 ‘천년왕국’이란 용어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학교와 교회 그리고 성도들이 ‘천년왕국’을 언급하고 마치 머지않아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처럼 믿고 기다리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이란 용어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년’이란 ‘상징적인 수’로 사용한 것이다. 상징이란 증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요한계시록 20:2∼3,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이 말씀에서 ‘용’ ‘옛 뱀’은 상징으로 사용한 것이다. 사단과 마귀에 대한 상징으로 표현한 것처럼 ‘천년’이란 단어 또한 상징으로 사용한 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년을 마치 천년동안 지속되는 어느 특정한 기간이라고 해석하므로 ‘천년왕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는 말씀은 천년이라는 기간과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왕 노릇하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이 예수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고 선포했습니다(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서 택하신 족속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 된 것은 천년왕국에서 이루어질 미래의 사건입니까? 아니면 예수를 믿는 그 순간에 이루어진 과거의 사건이었으며 지금도 계속되는 사건이고 또한 장차 미래에도 확실하게 증거 될 것입니다. 따라서 천년 동안 왕 노릇한다는 것은 미래에만 이루어질 사건이 아닙니다.

과거에 실현된 사건은 지금도 계속되며 미래에도 계속될 것입니다. 따라서 천년동안이란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지금도 지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천년왕국(千年王國)이란 말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요한계시록에는 ‘천년왕국(千年王國)’이란 용어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 의해서 자주 천년왕국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어왔기에 대부분의 교인들은 마치 ‘천년왕국(千年王國)’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은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깨우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마태복음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0: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 왔다 하고.

* 천국(ἡ βασιλεία) - βασιλεία, 932. basileia.
kingdom, sovereignty, royal power  

천국은 하늘 왕국 즉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하늘의 왕국은 이미 이 땅에 임했습니까? 아직 임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미 하늘 왕국은 임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된 왕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분명하게 하늘 왕국은 완성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늘 왕국이란 하나님이 다스리는 왕국을 말합니다.
하늘 왕국이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아미 임했습니다.

다니엘 2:44,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마태복음 23:37∼3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스가랴 14:9,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이사야 11:6∼9,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시편 46:9∼10,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성경은 하늘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늘의 예루살렘 강하 사건(계 21:1~5)을 통해 본 하늘의 의미를 발표하고 “하늘은 더 이상 피안의 세계로서 이 세상과는 이질적인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 이 세상과 통일돼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공간이 된다.”며 “새 예루살렘 강하 사건은 이러한 새 창조의 정황을 교회론적 관점에서 조망하는 그림 언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새 예루살렘 강하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하늘과 땅이 통합되는 새 창조의 환경에 대한 묘사라는 것이다. 이 소장은 “새 예루살렘은 장소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인 성도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성경에서 일관성 있게 사용되고 있다”며 “이는 24장로(계 4), 14만 4000(계 7:1~8), 셀 수 없는 큰 무리(계 7:9~17)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요한계시록에서 초림과 재림 사이의 교회 공동체는 지상에서 전투하는 모습을 띠지만 동시에 하늘에서 승리한 공동체로 존재하는 이중적 특징을 지닌다”며 “이 땅은 우리가 버리고 떠나야 할 소멸의 결과를 기다리는 대상이 절대 아니다. 하늘은 언제나 땅과의 통일을 이루도록 존재한다(엡 1:10). 하늘과 땅을 통합돼 온 우주가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지혜(세인트앤드루대) 박사도 ‘히브리서 12장 25~29절의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위한 하늘의 진동’을 주제로 발표하고 “해당 본문은 창조 세계가 진동해 멸망할 것이라는 마지막 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의 창조세계와 하늘의 세계를 그의 백성들과 함께 거할 영원한 처소로 준비시킬 것임을 전하는 약속의 메시지”라고 밝혔다. 이 박사는 “종말 상태에 대한 전통적 경향은 죽어서 하늘로 가는 데 집중돼 왔지만 이는 땅의 환경문제나 세상의 사회적·구조적 불의를 무관심하게 만든 불균형적 신앙 모습을 촉발했다”고 지적했다.


천년왕국(千年王國)

성경에서 중요한 주제 두 가지를 소개한다면 구원과 왕국이라고 하겠습니다. 대부분 구원만 강조하는 경향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바르게 읽어볼 때 왕국을 건설하고 그곳에 구원받은 백성들을 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에베소서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1: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1: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하신 은혜는 왕국 안에서 구속하신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으로 에덴동산(왕국)에 거주할 수 없도록 쫓아내셨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사탄이 지배하는 곳에서 왕국을 다스릴 수 있는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기원전 606년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후 다른 나라와 민족의 지배를 받으며 비록 약속의 땅에 거하면서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기원전 4년 예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1:32,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한글 번역에서 살펴보면 마치 천년이란 기간이 채워져 지난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천년설 - 천년이 있기 전에 재림이 있다.
후천년설 - 천년이 지나고 재림이 있다.
무천년설 - 천년은 상징적인 수가 되어 천년은 없다.

* 천년의 기준에 의해서 시기가 다를지라도 중요한 것은 재림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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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48090 2019-08-24T14:59:27Z 2019-08-24T14:59:27Z 오늘의 묵상(8월)

오늘의 묵상 8월

오늘의 말씀

8

1

대하 26:1∼28:27, 롬 15:1∼15:21, 시 118:8∼118:17

8

2

대하 29:1∼30:27, 롬 15:22∼16:7, 시 118:18∼118:29

8

3

대하 31:1∼32:33, 롬 16:8∼16:27, 시 119:1∼119:8

8

4

대하 33:1∼34:33, 고전 1:1∼1:17, 시 119:9∼119:16

 
8월 1일(목)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26:1∼28:27
웃시야는 통치 초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형통케 되었으나, 후기에는 교만한 마음으로 제사장의 고유 역할인 성전의 분향 사역을 대신하려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문둥병으로 일생을 마쳤다. 요담은 하나님의 전 건축 사업에 힘썼으며, 바르게 행하여 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아하스는 하나님 앞에서 우상 숭배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다.  

♦ 로마서 15:1∼15:21
바울은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를 본받아 약한 형제를 돌보고 서로 포용해야 하며, 이웃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고 권면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일꾼으로서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셨다고 하였다.  

♦ 시편 118:8∼118:17
시인은 자신의 대적 앞에서 권능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 (시편 118:17)

8월을 맞이합니다.
더위를 이길 수 있는 어떤 비결을 갖고 있는지요?

늙은 소금장수와 젊은 소금장수가 산 너머 마을에 가서 소금을 팔려고 무거운 소금을 짊어지고 높은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산 중턱 쯤에서 잠시 쉬려고 젊은 소금장수가 소금지게를 내려놓으며 “아이고, 이 산이 지금보다 반만 됐으면 소금장사 해먹기가 좋을 텐데.” 라고 말했지요. 그러자 늙은 소금장수가 젊은 소금장수에게 “이 사람아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이 산이 세 배는 더 높았으면 좋겠네.” 하고 말했습니다. 젊은 소금장수는 깜짝 놀라며 “어르신, 지금 산도 너무 높아서 힘이 드는데 세 배나 더 높으면 좋겠다니요?” 그러자 늙은 소금장수가 “이 사람아 이 산이 낮으면 저 동네 사람 중에 누가 우리 소금을 사 먹겠는가? 다 산 너머로 와서 소금을 사 먹을 것 아닌가? 오히려 산이 세 배나 높으면 우리가 소금을 더 비싸게 더 잘 팔 수 있을 것 아닌가!”


어렵고 힘든 훈련을 받으면 그것은 신나는 일입니다. 무더위를 이길 수 있는 비결은 나를 훈련하는 하나님의 다양한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어느 교우가 전화를 하며 ‘목사님, 정말 더워요! 어떻게 지내세요?’ 라고 말을 하더군요. 그때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옥은 이것보다 더 뜨거워요. 지옥을 경험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 생각하고 견뎌야지요!’

아직도 지옥에 가야 할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생각하며 생명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므로 더위를 이기는 훈련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주여!
복음의 길 열어
방황하는 뭇 생명
구원 복음 이정표 따라
무더운 8월의 땀방울 모아
지옥의 불 끄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2일(금)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29:1∼30:27
히스기야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며, 아하스 시대에 파괴된 성전 복구 사업에 헌신하였다. 또한 성전을 성결케 한 후 성전에서 시행되던 각종 제사들을 실시하였으며, 복구된 성전에서 유월절을 지키도록 결정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유월절 의식을 시행하며 하나님을 섬겼다.

♦ 로마서 15:22∼16:7
바울은 로마 성도들을 방문하고 싶다고 밝히면서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여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모금한 구제 헌금을 전달하려고 하였다. 그 후 로마 교회를 지나 서바나로 갈 것을 계획하였고, 성도들에게 자신의 편지를 전해 줄 신실한 자매 뵈뵈를 천거하였다.  

♦ 시편 118:18∼118:29
시인은 의인에게 응답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시편 118:25)

이제 구원하소서!
이제 형통케 하소서!

나만 구원 받고
나만 형통하면 좋을까요?

두 사람이 여행을 하고 있었지요. 

한 사람은 고집이 세고 욕심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은 부드럽고 친절합니다. 


욕심 많은 사람이 이것저것 요구합니다. 

친절한 사람이 그것을 들어줍니다. 


다음에 다시 여행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누가 같이 가자고 하겠습니까? 


남들과 같이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남들이 같이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누구와 함께 있고 싶어 합니까?

나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남을 구원하고
남을 형통케 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합니다.

오 주여,
주 사랑 따라
주님 본 받아 살며
주 구원
주 형통
모두에게 전하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3일(토)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31:1∼32:33
히스기야는 전국에 있는 우상을 없애고, 성전 일을 맡은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책을 회복시킨 후 보수 규정을 마련하여 그 직책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십일조와 예물의 효과적 관리 분배로 불필요한 낭비를 방지하였다. 또한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략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들을 물리쳤다.  

♦ 로마서 16:8∼16:27
바울은 로마 교회에 있는 복음의 동역자들과 성도들에게 문안 인사를 하고, 교회의 분열을 조장하는 세력들을 엄히 경계하라고 권면하였다.  

♦ 시편 119:1∼119:8
시인은 계명을 지켜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한다고 교훈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내가 주의 율례들을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시편 119:8) 

주문(呪文)을 외우면 40인 도둑 떼의 돌문이 열립니다.

주문을 외우면 손오공이 변신합니다.

주문을 외우면 돌이 금이 됩니다.

주문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이 외우나
선한 사람이 외우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祈禱)는 다르지요.

기도를 한다고 돌문이 열리거나 돌이 금이 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다른 사람이 드린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주문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유롭고 은혜로우신 응답으로
기도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이 임하게 되는 축복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항상 주의 율례를 생각하며 그 울타리 안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오늘도 기도하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우뚝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사람의 눈에 띄기 보다는
주님의 눈에 들게 하소서

주님의 눈에 띌 때
사람의 마음에 울림이 있게 하소서

간절한 기도자의 마음
주의 사랑으로 채워주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4일(주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33:1∼34:33
므낫세는 우상 숭배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앗수르의 침입을 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그는 회개 기도를 통하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왕위를 회복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그의 아들 아몬은 우상에게 제사하며 야웨께 범죄하여 신복의 반역으로 죽임을 당했으며, 요시야는 우상을 파괴하고 성전을 정화하는 개혁 운동에 착수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했다.  

♦ 고린도전서 1:1∼1:17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강조하면서 교회에 문안 인사를 한 후, 고린도 교회의 파당으로 인한 분열을 지적하면서 온전히 합하라고 권면하였다.  

♦ 시편 119:9∼119:16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한 자가 범죄하지 않고 깨끗한 행실을 할 수 있다고 교훈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시편 119:14)

재물을 좋아하듯 주의 말씀을 좋아할 수 있다면 그것이 믿음이 아닐까요?
재물은 좋아하는데 주의 계명을 멀리한다면 그것은 세상의 길에서 방황하는 것이겠지요?

천국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합니다(롬 14:17)
그렇다면 지옥은 악령 안에서 불의와 분쟁과 괴로움일 것입니다.

천국방언은 의와 평강과 희락을 주어 천국을 만듭니다.

지옥방언은 불의와 분쟁과 괴로움을 주어 지옥을 만듭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런 말은 천국방언입니다.

“이게 뭐야!”
“네 까짓 것이 뭔데!”
이런 말은 지옥방언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는 천국방언입니다.

“하려면 제대로 하지.”는 지옥방언입니다.


천국 방언은 천국을 소유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지옥 방언은 지옥으로 점령된 삶에서 나오겠지요?
천국 방언으로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사역자로 승리합시다.

오 주님,
천국 마음에
주 사랑 깃발 날리고
주님 닮은
빛난 얼굴 미소로
세상을 품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오늘의 말씀

8

5

대하 35:1∼36:23, 고전 1:18∼1:31, 시 119:17∼119:25

8

6

스 1:1∼2:70, 고전 2:1∼2:16, 시 119:26∼119:32

8

7

스 3:1∼4:24, 고전 3:1∼3:23, 시 119:33∼119:40

8

8

스 5:1∼6:22, 고전 4:1∼4:21, 시 119:41∼119:48

8

9

스 7:1∼8:20, 고전 5:1∼5:13, 시 119:49∼119:56

8

10

스 8:1∼9:15, 고전 6:1∼6:20, 시 119:57∼119:64

8

11

스 10:1∼10:44, 고전 7:1∼7:24, 시 119:65∼119:72


8월 5일(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35:1∼36:23
요시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월절을 지키게 하였으나,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애굽 왕 느고의 말을 듣지 않고 애굽과 싸우다가 므깃도 전투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그 후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올랐으나 애굽의 포로가 되었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여호야김과 여호야긴도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시드기야로 인해 결국 유다는 멸망하였다.

 
♦ 고린도전서 1:18∼1:31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를 대조하면서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임을 강조하였다. 
♦ 시편 119:1∼119:25
시인은 훼방과 멸시를 받을지라도 주의 율례를 묵상한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증거가 바로 자신의 즐거움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十字架)의 도(道)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말씀
십자가의 진리
십자가의 정신
십자가의 믿음
주여
이제는 모두가
십자가의 삶을
자랑할 수 있는 용기
더 하소서
이 작은 몸에

기도
김수영(1921∼1968)

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는 마음으로

우리가 찾는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루자!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6일(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라 1:1∼2:70
하나님께서는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라는 조서를 내리게 하셨다.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 고린도전서 2:1∼2:16
바울은 오직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사역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신령한 일은 오직 신령한 것으로 분변한다고 하였다.  

♦ 시편 119:26∼119:32
시인은 영혼의 눌림을 호소하면서 주의 말씀대로 세워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시편 119:28b)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워주세요!
어제 시리아에서 근무하는 정형외과 군의관으로부터 사고로 인하여 여러 동료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모르는 지역에서는 상상도 못한 사건과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편하게 지냅니다.
정말 이 평안이 주님이 주신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음식(飮食)은 우리 몸을 보하여 건강을 줍니다.

약(藥)은 우리 몸의 잘못된 부분을 치료하여 건강을 줍니다.


건강한 사람은 약보다 음식이 더 필요합니다.

격려는 우리 마음과 삶 전체에 활력을 줍니다.

경책은 잘못된 부분을 치료해줍니다.

보통은 격려가 더 필요합니다.

격려만으로도 여러 가지 잘못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책으로 고쳐야 할 잘못도 있습니다.


바르고 건강한 삶을 살려면 경책만 있어도 안 되지만 격려만 있어도 안 됩니다.

적절한 격려와 적절한 경책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책인 성경에도 격려와 경책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오 주여,
그 말씀으로
바르게 세워주소서
세상의 소금과 빛 되게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7일(수)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라 3:1∼4:24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모여 단을 쌓고 야웨께 번제를 드린 후 성전 재건을 시작하였다. 성전 재건은 바사 왕 고레스 시대부터 다리오 즉위 때까지 방해를 받았는데, 아닥사스다 왕 때에는 방해 세력의 고소로 성전 건축이 완전히 중단되어 다리오 제2년까지 계속되었다.  

♦ 고린도전서 3:1∼3:23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육에 속하였기 때문에 분쟁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복음 전도자와 신자들의 관계를 밝히 드러냄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의 화합을 간곡하게 권면하였다. 또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공력을 쌓도록 권면하였다. 

♦ 시편 119:33∼119:40
시인은 주의 의에 더욱 합치된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의 율법을 간구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시편 119:34b)  

깨닫는다는 한자는 각성(覺醒)이라고 합니다.

각성이란 의미를 소개합니다. 
1. 어떤 잘못이나 사실 등을 깨달아 앎
2. 깨어나 정신을 차림
3. 정신을 차리고 주의 깊게 살피어 경계하는 태도

그리스도인들이 각성해야 할 것을 오늘의 말씀에서 생각합니다.
구약에서 성전은 예루살렘에 건축된 솔로몬 성전이었습니다.
신약에서 성전은 주의 영이 거하는 몸과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당신의 마음에 주의 영이 거하십니까?
주의 영이 거하신다면 주의 영이 인도하는 생각과 행동에 의한 거룩한 삶이 드러나야 합니다.
거룩한 입술보다 거룩한 몸에 의한 삶이 자랑스러운 가정으로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자비하신 주님!
언어의 거룩함이
몸의 거룩함으로 드러나
거룩한 하루가 쌓여지게 하소서

거룩한 하루하루가
쌓이고 쌓여
주의 거룩함이
온 천지를 덮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8일(목)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라 5:1∼6:22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을 통해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성전 건축의 열정을 다시 회복하여 성전 건축을 재개하였다. 방해 세력들은 다리오 왕에게 조서를 올렸는데, 오히려 성전 건축의 완결 조서가 내려서 성전이 완공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완공 후에 성전 봉헌식을 하고 유월절을 지켰다.  

♦ 고린도전서 4:1∼4:21
바울은 일꾼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뿐이며, 충성에 대한 판단은 오직 예수님께서 하신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역자 중심으로 당파를 만든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을 지적하였다.  

♦ 시편 119:41∼119:48
시인은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간구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이 묵상하고 지키겠다고 고백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린도전서 4:2)

맡은 자가 구할 것은 ‘충성(忠誠)’입니다.
최근 잘 훈련된 군견이 길을 잃어버린 여자 중학생을 10일 만에 찾아냈다고 합니다. 군견과 인명구조견과의 차이는 사람을 발견하면 군견은 그 자리에 앉아서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명구조견은 사람을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마구 짖는다고 합니다. 목적은 같은 것일지라도 드러내는 방법이 전혀 다른 것은 만일 전쟁터에서 적군을 발견한 군견이 짖어댄다면 더 큰 위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잘 훈련된 십자가 군병입니다. 십자가 군병은 일반 군사와 다른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 차이는 일반 군사는 눈에 보이는 적군들과 싸우는 것이지만 십자가 군병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야 하므로 반드시 영의 눈을 떠야 합니다. 보이는 현상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비록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 실체를 알 수 있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주의 계명에 따라 선택과 결정과 실천에 의한 방법으로 승리하는 싸움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눈을 들어
어둡고 냉랭한 거리
헤매는 무리들 속에
숨어 있는 악한 세력
믿음의 손으로 붙잡아
광야로 몰아내고
승리의 깃발 세우게 하소서
진리의 빛 비추게 하소서
사랑의 노래 부르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9일(금)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라 7:1∼8:20
아닥사스다 왕은 조서를 내려 율법 학사 겸 제사장인 에스라와 그의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시켰다. 이는 에스라를 중심으로 한 제2차 귀환이었다. 에스라와 함께 귀환한 명단이 유명 가문별 족보로 기록되었다.  

♦ 고린도전서 5:1∼5:13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행해진 근친상간의 죄와 부도덕한 악행을 언급하면서 죄를 보고도 방치한 성도들을 책망하였다. 그리고 악을 행하는 자들을 교회에서 내쫓으라고 명령하였다. 

♦ 시편 119:49∼119:56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곤란 중에 있는 자에게 위로와 노래가 되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 (시편 119:56)

소유(所有)의 의미는 '자기 것으로 가짐' 또는 '대상을 전면적 또는 일반적으로 지배함' 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자랑할 소유는 무엇입니까?

이민 생활에서 성공적인 삶을 세 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자녀 교육에 성공한 경우, 둘째는 제물을 많이 모은 경우, 셋째는 취미 생활에 즐거움을 누리는 경우라고 합니다. 아마 이런 세가지 모두를 갖춘 이민자들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의 고백은 '주의 말씀대로 살았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 가지 모두를 갖추지 못했어도 오직 한 가지 주의 말씀대로 살았다면 그 이상 더 좋은 소유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을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의 길을 걸었다면 이 세상 것은 소유하지 못했지만 영원한 삶을 누릴 영생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주여,
예수로 자랑
예수로 감사
예수로 찬양
예수로 섬김
예수로 헌신
예수로 기쁨
예수로 봉사
예수로 사랑
오 주여,
오직 예수로만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10일(토)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라 8:21∼9:15
에스라는 아하와 강가에서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예루살렘에 이르는 동안 인생길 어려움에 대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였다. 예루살렘에 안착한 후, 방백들은 에스라에게 와서 이방 여인과 결혼한 백성들의 죄를 알렸다. 이에 에스라는 백성들의 범죄로 인하여 큰 근심 가운데 하나님께 통곡하며 회개 기도를 하였다.  

♦ 고린도전서 6:1∼6:20
바울은 교우 간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세상 법정에 소송하지 말고 교회 자체 내에서 해결하도록 권면하였다. 그리고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는 음행을 피하고 하나님의 성령의 전인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다.  

♦ 시편 119:57∼119:64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애쓰며 주의 율례로 가르쳐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하리이다. (시편 119:62)

한 밤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해 보셨나요?
왜 깊은 잠자리에 있어야 할 시간에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을까요?
엄청난 파도가 밀려옵니다.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풍랑이 닥쳐온다는데도 놀라지 않는 세상을 향하여 깊은 밤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어 하늘을 향하여 읊조립니다.

주님!
세상을 바른 길로 인도할 일군을 세워야 합니다.
누가 그 일을 감당해야 할까요?
일어나 빛을 발하라 하셨지요.
빛이 없는 몸으로 일어날지라도
아무도 그 빛을 볼 수 없습니다.
아하와 강가의 눈물을 회복하게 하소서
거룩한 처소에서 화합하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으로 다듬어 주소서

전능하신 주여!
한반도 땅 새롭게
한민족 하나 되게
교회를 진리로 씻겨 주소서 
주 사랑
이 몸을 흔들어
흘러내리는 틈새 구멍에
밀어 넣어 주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11일(주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라 10:1∼10:44
에스라가 통회 자복하는 기도를 드리자, 온 백성들이 함께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회개하였다. 스가냐가 먼저 이방인 아내를 내어 보내고 에스라에게 그 일을 온 백성에게 주장할 것을 요청하였다. 에스라는 백성들을 예루살렘에 모이게 한 후,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도록 촉구하고 그들의 죄를 인하여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리게 하였다.

♦ 고린도전서 7:1∼7:24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결혼과 성생활에 대해서 말하면서, 절제할 수 없는 자는 음행을 방지하기 위해서 결혼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자기처럼 독신으로 지내기를 권하면서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고 권면하였다.  

♦ 시편 119:65∼119:72
시인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례와 법을 깨달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에스라 10:1) 

지도자(指導者)란 '특정한 집단이나 사회를 앞장서 거느리고 이끄는 사람'을 말합니다.

에스라가 회개하며 자복할 때 모든 백성들도 지도자를 따라 그들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왔습니다.

바울은 절제할 수 없으면 결혼하라고 권면합니다.

지도자의 올바른 가르침과 본이 되는 삶은 사람들을 바른 길에서 떠나지 않도록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바른 길을 벗어날 때 교회는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일어날 수 없다면 세상의 질서와 가치는 무너질 것입니다.

성도여 일어나라!
성도여 빛을 발하라!
빛이 되기 위하여
소금이 되게 하소서
소금으로 녹아내린 세상
그 안에서 모두가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생명의 풍성함을 회복케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오늘의 말씀

8

12

느 1:1∼2:20, 고전 7:25∼7:40, 시 119:73∼119:80

8

13

느 3:1∼4:23, 고전 8:1∼8:13, 시 119:81∼119:88

8

14

느 5:1∼6:19, 고전 9:1∼9:18, 시 119:89∼119:96

8

15

느 7:1∼8:12, 고전 9:19∼10:13, 시 119:97∼119:104

8

16

느 8:13∼9:38, 고전 10:14∼10:33, 시 119:105∼119:112

8

17

느 10:1∼11:36, 고전 11:1∼11:16, 시 119:113∼119:120

8

18

느 12:1∼12:47, 고전 11:17∼11:34, 시 119:121∼119:128


8월 12일(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1:1∼2:20

느헤미야서는 바벨론으로부터의 3차 포로 귀환과 성벽 재건,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회복과 부흥의 역사를 기록하여 언약을 성취하신 신실한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벽이 훼파된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왕의 허락을 받고 귀향하여 에스라와 함께 성벽을 재건한다. 그 후 백성들은 수문 광장에 모여 에스라가 읽는 율법을 듣고 자신과 조상의 죄를 회개하고 율법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유다 총독으로 12년간 업무를 관장하다가 바벨론을 다녀온 사이 백성들은 다시 죄악의 길에 빠졌고, 이를 발견한 느헤미야가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한다.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인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능욕을 받는다는 비참한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드렸다.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야의 고민을 듣고 조서를 내려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에 가도록 허락하였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느헤미야는 밤중에 예루살렘 성벽의 참담한 상황을 확인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벽 중건을 호소하였다.  

♦ 고린도전서 7:25∼7:40
바울은 처녀가 결혼하면 마음이 나누인다는 것을 들어 독신을 권하였다. 그러나 부모는 처녀의 의사를 존중하여 마음에 작정한 대로 딸의 결혼 여부를 잘 결정하라고 하였다.  

♦ 시편 119:73∼119:80
시인은 자신의 고통이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에서 나온 것임을 고백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을 간구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느헤미야 2:4) 

묵도(黙禱)란 ‘눈을 감고 말없이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선지자 느헤미야의 묵도는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진 소원을 왕에게 고할 수 있는 믿음의 원천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인가요?

그 소원을 성취하려면 먼저 마음 깊이 소원을 심어야 합니다.
소원을 마음에 심은 후에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입으로 고백한 후에는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거룩한 소원을 마음에 품고 날마다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한 믿음으로 자기를 다스릴 수 있는 은총의 삶을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아버지!
마음의 소원을
입술의 열매로
삶의 터전에 쌓아
그 날의 감격을 바라며
오늘도
인내하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13일(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3:1∼4:23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벽 건축과 중수에 각기 맡은 대로 헌신하였다. 산발랏과 도비야의 세력들은 성벽 건축 방해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백성들에게 성벽 공사를 진행할 때 노역과 파수를 번갈아 가며 참여하도록 하였다.  

♦ 고린도전서 8:1∼8:13
바울은 우상 제물 먹는 일에 있어서 연약한 자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삼가라고 권면하였다.  

♦ 시편 119:81∼119:88
시인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계명의 신실하심을 굳게 믿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시편 119:88a)

주여!
온 땅의 족속(族屬)들에게
회복(回復)의 영(靈)을 퍼부어 주옵소서.

거룩한 영의 지배를 받는
순결한 백성들이
땅을 밟을 때마다
자비의 숨을 쉴 때마다
인자한 말을 할 때마다
피곤한 몸을 눕힐 때마다

주님!
살아나게 하소서
회복되게 하소서
진리의 영으로 하나 되어
주의 땅으로
거듭나게 하소서.

사탄의 비매품(非賣品)이라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날 마귀가 상가의 진열대에 자신의 도구를 모아놓고 경매(競賣)한다는 광고를 했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고 흥미로운 경매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물건들 중에 ‘비매품(非賣品, Not Sale)’이라고 표시된 이상하게 생긴 도구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한 사람이 마귀에게 “마귀 양반! 도대체 이것은 무엇에 쓰는 것이요? 그리고 또 왜 이것에만 ‘비매품’이라 써 붙였소?” 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의 질문에 대해 마귀는 “음, 이것은 아주 귀중한 것이지요. 내게는 둘도 없이 귀중한 것이라네. 이 도구가 마귀의 일을 성공케 하는 아주 특별한 도구라네. 다른 도구는 나누어 줄 수 있지만, 이것만은 절대 안 돼. 이것은 ‘낙심(落心)’이라고 하는데 이것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집어넣으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심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단 말이야. 낙심이라는 도구로 나는 세상의 무엇이든지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있게 되거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라꼴이 눈뜨고 보기에 힘들지요?
지도자의 말이 듣기에 거북하지요?
어쩔 수 없다고 한탄하지요?
그러나 낙심하지 말고 기도합시다.
반드시 주님이 회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14일(수)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5:1∼6:19
성벽 공사가 어렵게 진행되는 동안 백성들 사이에서 취리 행위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였고, 백성들은 부르짖어 불평하였다. 이에 느헤미야는 취리 행위를 금지시키고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또한 대적들은 느헤미야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성벽 건축은 완료되었다.  

♦ 고린도전서 9:1∼9:18
바울은 자신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유와 권리가 있지만, 복음을 위하여 종의 자세를 취하는 자신의 삶을 강조하였다.  

♦ 시편 119:89∼119:96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만물을 보고 계명의 신실함을 노래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시편 119:94a)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공사하는 감격을 나누면서도 백성들 사이에는 덕스럽지 못한 일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감사는 현실에 대한 만족이 아니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때 고백할 수 있는 나눔의 마음입니다.

거리에서 예수를 믿으라며 전도지를 나눠주는 사역도 매우 소중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역도 사도 바울에게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므로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자랑할 것이 무엇일까요?

미국의 선교사 칵스가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에 미들타운에 있는 대학을 방문했을 때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한 대학생에게 “만일 내가 아프리카에서 죽는다면 자네가 직접 아프리카로 와서 묘비를 써주기 바라네.” 이렇게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학생은 주저하지 않고 “예, 제가 쓰겠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라고 써야 할까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선교사 칵스는 “내가 죽고, 또 수천 명의 선교사가 죽는 한이 있어도 아프리카는 결코 포기할 수 없다.” 라고 써달라고 했습니다.

자유대한민국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잘못된 주체사상에 도취한 사람들에 의해서 나라의 근본이 흔들릴 때 칵스 선교사와 같은 심정으로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내가 죽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할지라도 자유대한민국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오 주여!
진리가 약속한 자유
자유가 보장한 민주주의
더 이상 흔들림이 없는
다져진 믿음의 기초위에
주여!
들끓는 온 땅에
진리가 흐르게 하소서
자유가 넘치게 하소서
정의가 실현되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15일(목)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7:1∼8:12
느헤미야는 하나니와 하나냐에게 예루살렘 성을 다스리고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귀환자들의 보계를 얻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스라에게 율법 책 낭독을 요청하였고, 율법을 깨닫게 된 백성들은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울며 회개하였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위로하면서 하나님의 성일을 기쁨으로 지키게 하였다.  

♦ 고린도전서 9:19∼10:13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처럼 행하였다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 출애굽 과정 동안 하나님께 행한 범죄를 거울삼아 죄악에서 돌아설 것을 권면하였다.  

♦ 시편 119:97∼119:104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사모하는 자에게 지혜와 명철이 된다고 노래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고린도전서 10:10) 

원망(怨望)이란 사전적 의미는 “못마땅하게 여겨 탓하거나 불평을 품고 미워함.”입니다.

광복 74주년을 맞이하는 이 날에 역사와 지도자들의 행적으로 뒤집어 놓는 가치가 사람들을 미혹하고 흔드는 이 시대에 이런 현상의 뿌리가 원망이라고 하겠습니다.

광야의 백성들은 노예로 살던 애급 땅에서 즐겨 먹던 음식을 먹지 못하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는 현실을 원망한 것 때문에 무려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후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율법을 찾아낸 후에 그 말씀을 들으며 모든 백성들이 함께 뉘우치며 다시는 원망의 포로가 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듯이 모든 성도들이 믿음으로 일어나 다시는 조국의 터가 흔들리지 않도록 자유민주주의 기초를 든든하게 다질 수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하며 선포합니다.

주님!
74년의 흐름
분단 아픔의 흔적
잊지 못하는 기억을 모아
후손들에게
이런 아픔이 없기를
무릎을 꿇습니다.
두 손을 모아
하늘을 우러러 비옵나니
오 주여!
자유와 평화의 터전위에
겨레 사랑의 큰 샘
분수처럼 솟구치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16일(금)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8:13∼9:38
백성의 지도자들이 에스라를 찾아와 율법을 배우던 중, 율법 책에 기록된 초막절의 규례를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온 백성들이 그 규례를 지켰다. 초막절을 시행한 후 에스라는 기쁨으로 날마다 율법을 낭독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과 조상들의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 고린도전서 10:14∼10:33
바울은 우상 숭배를 피하고 모든 일에 하나님의 영광과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고 권면하였다.  

♦ 시편 119:105∼119:112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고난 속에서 빛과 등불처럼 앞길을 비춰 주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시편 119:107) 

만일 내 인생길에 말할 없는 어려움이 닥쳐왔다면 어떻게 그 어려움을 이길 수 있을까요? 성경은 고난(苦難)을 극복하는 비결을 ‘하나님의 말씀’ 이라고 강조합니다.

주의 말씀의 놀라운 능력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위로의 말씀
둘째는 소망의 말씀
셋째는 인내의 말씀
넷째는 생명의 말씀
이러한 말씀의 진가(眞價)를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체험할 수 있는 은혜가 풍성하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능력을 잃은 법이 없습니다.
다만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과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그 말씀의 생명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될 뿐입니다.

오 주여!
그 말씀에
온전히 사로잡혀
주님의 삶을
저희들도 살아가도록
힘을 더하여 주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17일(토)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10:1∼11:36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켜 충성할 것을 맹세하는 표시로 인을 치는 일에 동참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 성에 머물렀으며, 그 남은 백성은 제비를 뽑아 십분의 일은 성에 거하고 나머지는 다른 성읍에 거하였다.  

♦ 고린도전서 11:1∼11:16
바울은 창조 원리에 따라 여자의 머리는 남자임을 강조하면서 여자의 참된 지위는 남자를 섬기는 데 있음을 깨우쳤다.  

♦ 시편 119:113∼119:120
시인은 하나님의 율례에 항상 주의하며 살기를 원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시편 119:114a)

예수의 흔적(痕迹, 스티그마)를 자랑하던 바울처럼 성벽을 쌓은 후에 인봉한 자들의 명단을 소개하며 섬김의 삶을 다짐한 것처럼 오늘날도 주의 인(印)을 받은 거룩한 성도들이 도처에서 섬김과 헌신의 자리를 다듬어가야 합니다.

요동치는 세상에 거룩한 믿음으로 섬김과 헌신의 삶을 보여주므로 더 이상 세상이 주체사상에 의해서 잘못된 신앙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도록 거룩한 백성들이 일어나기 위하여 우리들의 은신처와 방패가 되신 주님 앞에 모여 회개와 결단의 간구를 함께 높여야 하겠습니다.

능력의 주님!
거짓된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오는 거리에
진리의 외침이 들려지게 하소서

사랑의 주님!
소망 없는 가치에
몸과 마음을 빼앗긴 생명들에게
참 소망의 기쁜 소리가
귓가에 들려지게 하소서
마음에 새겨지게 하소서
몸으로 부딪치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18일(주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12:1∼12:47
예루살렘 성벽이 완성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며 성벽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 고린도전서 11:17∼11:34
바울은 성찬으로 인한 분쟁을 책망하고, 자신을 먼저 살핀 후에 성찬에 참여하라고 권면하였다.  

♦ 시편 119:121∼119:128
시인은 하나님 말씀의 증거를 깨닫게 되기를 간구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나를 기념하라(고린도전서 11:24, 25b)

주의 백성들의 삶은 매일 매일이 주를 기념하는 날이어야 합니다.
기념(記念)이란 뜻 깊은 일이나 사건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기는 것을 말합니다. 성찬예식에서 사용하는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기념의 깊은 뜻은 예수님의 삶을 내가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삶을 보여줄 수 있는 믿음을 기도합시다.
그리고 그 믿음에 의한 삶의 모습이 이 땅위에 심어져서 구원의 열매를 맺도록 결단합시다.

거룩하신 주님!
주님의 거룩 본받아 살며  
주님을 증거 하게 하소서
주님을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을 전하게 하소서
이 작은 생명 다하도록.......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오늘의 말씀

8

19

느 13:1∼13:31, 고전 12:1∼12:27, 시 119:129∼119:136

8

20

에 1:1∼2:23, 고전 12:28∼13:13, 시 119:137∼119:144

8

21

에 3:1∼5:14, 고전 14:1∼14:19, 시 119:145∼119:152

8

22

에 6:1∼8:17, 고전 14:20∼14:40, 시 119:153∼119:160

8

23

에 9:1∼10:3, 고전 15:1∼15:28, 시 119:161∼119:168

8

24

욥 1:1∼3:26, 고전 15:29∼15:58, 시 119:169∼119:176

8

25

욥 4:1∼6:30, 고전 16:1∼16:24, 시 120:1∼120:7


8월 19일(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13:1∼13:31
예루살렘을 떠났던 느헤미야는 다시 돌아와 성전에서 악행을 일삼던 도비야의 거처를 없애고, 레위인들이 받을 십일조를 곡간에 들였다. 또한 안식일을 준수하게 하였으며,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을 금지시키고 제사장과 레위인의 반열을 세워 그들의 일을 하게 하였다.  

♦ 고린도전서 12:1∼12:27
바울은 성령의 다양한 은사는 한 성령이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는 것이며, 각 사람에게 유익하게 하시기 위해 주신다고 하셨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지체로서 한 몸이라고 하였다.  

♦ 시편 119:129∼119:136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둔한 자에게 깨달음을 주신다고 고백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 (시편 119:133b) 

죄가 없는 세상은 어느 곳일까요?
에덴동산, 아브라함의 품, 낙원, 영생의 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겠지요.
죄가 가득한 세상에서 매일의 삶을 살아야 하는 성도들이 죄를 이길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느헤미야는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들을 하나님의 회에서 쫓아냈습니다. 하나님의 방에서 자리를 잡았던 도비야도 내쫓았습니다.

죄가 나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주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구할 때 반드시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손짓하는 거짓된 사람들도 멀리해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그들의 죄악 된 삶에 동화되어 함께 멸망의 길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주님!
악한 세력들을 향하여
무너지라!
떠나가라!
외칠 수 있는
믿음의 간구를
잊지 않게 하소서.

주님 나라가 임하기까지
주님 사랑이 증거 되기까지
죄와 끝까지 싸워
이기게 하소서.

죄를 분별하는
지혜의 영을 더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20일(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더 1:1∼2:23
아하수에로 왕의 잔치에서 왕후 와스디는 왕의 명령을 거부함으로써 폐위되었다. 그리고 새 왕후로 에스더가 간택되었다. 모르드개는 왕을 모살하려는 두 내시의 음모를 에스더를 통해 보고하였고, 그의 이름은 궁중 일기에 기록되었다.  

♦ 고린도전서 12:28∼13:13
바울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강조하였다. 

♦ 시편 119:137∼119:144
시인은 하나님의 법은 진리이며, 그의 증거는 영원한 의로움이 된다고 고백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시편 119:143)

은사(恩賜)는 카리스마(Karisma)
은혜(恩惠)는 카리스(Karis)
감격(感激)과 기쁨은 카라(Kara)

기쁨(카라)의 원천은 감격스런 구원의 은혜(카리스)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지속될 때 나를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은 은사(카리스마)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시간이 지나면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가짜 뉴스가 세상을 도배하는 때에 진리의 소식을 전하는 유투버들의 작은 외침은 반드시 거대한 매스컴을 무너트릴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환난과 우환 속에 감추어져 있을지라도 오직 주의 말씀 따라 진리의 증거자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승리하는 그 날을 위하여.....

오 주여! 
작은 새의 날개 짓에
신음하는 소리를 싣고
진리 찾아 공중을 배회하는
가련한 몸짓을 붙잡아 주소서
그 소리에 확성기를 대고
더 멀리
더 넓게
더 높게
더 많이
전달되게 하소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그 날까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21일(수)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더 3:1∼5:14
신분이 높아진 '하만'에게 '모르드개'가 절하지 않자, 이에 앙심을 품은 '하만'은 '모르드개'와 그의 민족 유대인들을 죽일 음모를 꾸며 왕의 조서를 받아냈다. 이 사실을 안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은 애통하며 금식하였고, 왕후 '에스더'는 죽음을 각오하고 왕께 나아가 '하만'과 함께 잔치에 참석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하만'은 '모르드개'를 처형할 계획을 세웠다.  

♦ 고린도전서 14:1∼14:19
바울은 방언과 예언의 유익성을 말하면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방언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하였다.

 
♦ 시편 119:145∼119:152
시인은 위기에서의 구원을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시편 119:148) 

도처에 주의 뜻을 거역하는 각종 수단과 방법이 지겹도록 찾아올지라도 오직 주님의 뜻 이루기 위한 거룩한 몸부림의 모르드개와 같이 때로는 죽음을 각오한 에스더와 같이 다양한 은사를 동원하여 기도하리라.

이 땅의 평화를 위하여
이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위하여
온 땅이여
주의 뜻을 이루는
거룩한 땅과 백성들로
가득 가득 채워질지어다.

내 삶에 어두움이 오면
빛으로 역주행하고

누군가 나를 미워하면
사랑으로 역주행하라

주여
이 거룩한 역주행으로
주님 닮아가는
복음의 씨앗으로
오늘도
심겨지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22일(목)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더 6:1∼8:17
아닥사스다 왕은 잠이 오지 않아 궁중 일기를 읽다가 모르드개의 공적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왕은 그에게 상을 베풀었는가 알아본 다음, 하만을 시켜 모르드개를 존귀케 하였다. 둘째 날 잔치에서 에스더는 하만의 음모를 왕께 폭로하였고, 모르드개를 달고자 한 나무에는 하만이 처형당했다. 그리고 에스더의 간청으로 인해 유다인들을 죽이라는 왕의 조서는 철회되고 오히려 원수를 갚게 되었다.  

♦ 고린도전서 14:20∼14:40
바울은 교회 안에서 다양한 은사들을 행할 때,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질서를 따라 적당하게 하라고 권면하였다.  

♦ 시편 119:153∼119:160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고난당하는 자에게 증거가 되고 그를 소성시켜 줌을 고백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리소서. (시편 119:154b)

민족을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는 것
교회를 하나님의 은혜로 세우는 것
고난의 사람을 믿음의 반석 위로 옮기는 것
이러한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방법을 찾을 때 실현할 수 있습니다.지금 어떤 짓눌림에 의해 어려움을 겪고 있나요?
내 방법과 내 솜씨를 주의 말씀으로 다듬어 주의 방법을 찾아 무릎을 꿇고 주여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주님 영광 드러나게 하소서 간절히 부르짖고 다시 시작합시다.

오 능력의 주님이시여!
나를 나답게 세워주소서 

오늘 살아 있음에 감사를
내일의 소망에 믿음을 품고
오늘을 살아가는
나는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은
오늘을 모릅니다.
내일도 모릅니다.

죽은 사람은
주머니에 남아 있는 것조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오늘의 노력과
내일의 기대에서
제외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 주여,
오늘을 살아갈
새 힘을 주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23일(금)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더 9:1∼10:3
모르드개는 왕궁에서 존귀하게 되었고, 그의 명성은 전국에 퍼졌다. 모르드개는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된 부림절 규례를 제정하였다.

 
♦ 고린도전서 15:1∼15:28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도들의 부활과 영생의 근거와 첫 열매가 됨을 강조하였다.  

♦ 시편 119:161∼119:168
시인은 핍박과 곤고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굳건히 지키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린도전서 15:22)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을 찬양합시다.
성경에서 처음이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물론 '시작(始作)'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대표(代表)'라는 뜻입니다.
첫 아담의 죄와 사망은 모든 사람에게 전가(轉嫁)된 것처럼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適用)됩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부림절 축제를 즐기게 되는 것처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소망은 모든 인류에게 새 생명 축제가 될 것입니다.
오늘도 새 생명의 감격을 즐기며 주님을 찬양합시다.

생명의 주여
죽음의 틀에서
그 틀을 벗어난 삶을 보게 하소서

소망의 주여
암울한 현실에서
그 틀을 넘어선 삶을 얻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24일(토)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욥기 1:1∼3:26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 그러나 사단의 참소로 인해 욥은 그의 모든 소유물들과 자녀들을 잃고 온몸에 악창이 생겼다. 그렇지만 욥은 하나님께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으며, 이 소식을 듣고 찾아온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욥의 상태를 보고 7일 동안 말을 걸지 못하였다. 절망한 욥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였다.  

♦ 고린도전서 15:29∼15:28
바울은 하나님의 권세에 대해 선언한 후,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씨앗의 비유를 들어서 부활의 소망인 둘째 아담 그리스도와 썩지 않을 부활체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그는 부활에 관한 분명한 확신 위에서 사망을 향해 담대한 승리의 선언을 하였다.

♦ 시편 119:169∼119:176
시인은 주의 계명을 깨닫게 하실 것을 간구하며, 깨달을 때마다 즐거움으로 찬양하며 감사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시편 119:175a)  

사탄은 참소(讒訴)하는 일을 좋아합니다.
사탄이 의로운 사람 욥을 참소하는 까닭은 하나님 경외하는 자리에서 떨어트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욥의 믿음이 정말 하나님 중심인가? 아니면 세속의 부를 즐거워하기 때문인가?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즐거움을 높이려는 것 때문입니까?

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시인의 애달픈 외침을 마음에 담고 주님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나도 가야 합니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주님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
고난의 길을
믿음으로 걷게 하소서

주님,
흩어 진 마음을
사랑으로 달래게 하소서

주님,
눈물 골짜기
통곡의 소리로 덮어
영혼의 멋진 삶을 누리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25일(주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욥기 4:1∼6:30
엘리바스는 욥의 고난이 ‘숨겨진 죄’ 때문이라고 하면서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회개 후에 받게 될 축복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욥은 불성실한 그의 태도와 말을 책망한 뒤, 자신의 허물을 깨닫게 하면 잠잠하겠다고 하였다.  

♦ 고린도전서 16:1∼16:24
바울은 성도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요청하면서 신실한 일꾼을 추천하였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 대한 자신의 간절한 사랑을 표현한 후,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간구하였다.  

♦ 시편 120:1∼120:7
시인은 환난과 곤고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린도전서 16:14) 

고난의 웅덩이에 빠진 욥을 향하여 은밀한 죄를 회개하라는 엘리바스가 친구일까요? 아니면 타인일까요?

어려움에 갇혔을 때 나를 찾아와 함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친구가 내 주위에 누구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신앙의 동지와 더불어 이 땅에서 겪게 될 고난을 당당하게 물리칠 수 있는 믿음을 회복합시다. 실력과 힘이 없는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랑과 믿음의 용사로 거듭나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의 주여,
메마른 마음에
뜨거운 사랑을 부어주소서

믿음의 주여,
갈라진 심령에
뜨거운 성령을 부어주소서

위태로울 때
괴로울 때
어려울 때
즐겁게 찾아올 수 있는
친구가 되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오늘의 말씀

8

26

욥 7:1∼9:35, 고후 1:1∼1:14, 시 121:1∼121:8

8

27

욥 10:1∼12:25, 고후 1:15∼2:4, 시 122:1∼122:9

8

28

욥 13:1∼15:35, 고후 2:5∼2:17, 시 123:1∼124:8

8

29

욥 16:1∼19:29, 고후 3:1∼3:18, 시 125:1∼125:5

8

30

욥 20:1∼22:30, 고후 4:1∼4:15, 시 126:1∼126:6

8

31

욥 23:1∼26:14, 고후 4:16∼5:10, 시 127:1∼127:5

9

1

욥 27:1∼29:25, 고후 5:11∼5:21, 시 128:1∼128:6



8월 26일(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욥기 7:1∼9:35
욥의 답변과 호소가 계속되는 가운데 수아 사람 빌닷이 욥의 변명을 반박하였다. 빌닷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말하면서 욥의 자녀들이 죄의 대가로 죽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욥에게 옛 열조들의 경험과 지혜를 배우라고 권고하면서, 욥이 회개하면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충고하였다. 그러자 욥은 하나님의 강력한 권능과 자신의 약함을 대조하면서 자신의 순전함을 고백하였다.  

♦ 고린도후서 1:1∼1:14
바울은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를 잊지 않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자신의 자랑임을 밝혔다.

♦ 시편 121:1∼121:8
시인은 천지를 지으신 야훼만이 완벽한 도움이 된다고 찬양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편 121:2) 

가장 강력한 도움의 원천(源泉)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자유대한민국의 위태로운 현실을 위하여
병상의 고통 가운데서 신음하는 환자들을 위하여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이 갇혀있는 정치범 수용소의 문이 열려지기를 위하여
영적 갈급함을 신령한 은사로 채우기 위하여
우리 모두 야훼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주여,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가 공허한 말들과 
경건한 문구들을 늘어놓지 말게 하시고, 
사랑이 말을 짓는 것보다 더 나으며 
순종이 논증보다 더 좋음을 알게 하소서. 
우리는 항상 말들과
온갖 경건한 상투어들을 갖다 붙이며 
당신의 계명으로부터 도망치려합니다. 

우리를 굳게 붙들어 주시고 
우리를 사로잡아 
오늘날 필요한 당신의 말씀에 굴복시키시고 
우리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오늘 행하게 하소서. 
그리고 이를 믿음으로 행하게 하소서.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의 기도 중에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27일(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욥기 10:1∼12:25
욥의 계속되는 한탄 가운데 나아마 사람 소발이 욥의 변명에 대해 공격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내세워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는 욥의 고백을 비난하면서 욥이 회개하면 용서를 받지만,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결과가 올 것이라고 충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욥은 자신이 친구들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자신도 지혜와 명철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 고린도후서 1:15∼2:4
바울의 고린도 교회의 방문 계획이 변경된 이유는 인간적인 이익과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순종한 것이며 고린도 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랑의 배려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들로 근심하게 한 것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 시편 122:1∼122:9
다윗은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의 평강과 형통을 기원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린도후서 1:22) 

성령(聖靈)은 성도들의 믿음을 보증하는 하나님의 약속의 영(靈)입니다.
성령의 보증(保證)이 없다면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힘으로 대항할 힘이 없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기도합시다.
나라와 민족,
교회와 성도,
가정과 가족,
사회와 이웃,
영적 장애가 내 안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주 하나님, 
이 세상을 좀 보시옵소서. 
굶주림과 목마름, 
실향과 실업, 
눈물과 절망을 보시옵소서. 

하나님, 

이것이 당신의 자비의 자녀들이란 말씀입니까? 

이것이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이란 말입니까? 

오, 

당신의 피조물들이 이렇게 고통을 당해야만 하니 

우리는 분명 너무나 당신으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곧 끝장이 날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아무것도 소망하지 않습니다. 

이제 당신이 오소서, 

오 하나님, 

그리고 이 모든 불행과 

이 모든 비탄을 없애 주시며 

부디 당신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려 하신다는 

그 언약을 우리에게 감추지 마소서. 

당신께서 가난한 자들과 슬픔에 빠진 자들, 

근심하는 자들과 고난을 당하는 자들을 

당신의 나라에 초대하셨던 그 언약을 

우리에게 감추지 마소서. 

하나님, 우리를 다시 기쁘게 해 주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28일(수)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욥기 13:1∼15:35
욥은 친구들이 말하는 고난에 대한 이해를 자신도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 그렇지만 그것이 자기의 경우와는 다르다고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과 직접 변론하여 자신의 결백을 밝히기 원한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엘리바스는 이러한 욥의 말을 정죄하면서, 악인의 고통스런 운명을 제시하며 하나님께 용서 구할 것을 촉구하였다.  

♦ 고린도후서 2:5∼2:17
바울은 교회에서 물의를 일으킨 자들을 용서하라고 권면하면서, ‘성도는 모든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서 생명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였다.  

♦ 시편 123:1∼124:8
시인은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사모하며 그의 도우심에 감사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린도후서 2:15)

사람다운 냄새가 그립습니다.
사람에게서 야수(野獸)의 피 냄새가 진동합니다.
사람에게서 거짓의 오물(汚物) 냄새가 어지럽습니다.
사람에게서 위선(僞善)의 탈이 소리칩니다.
사람에게서 교만(驕慢)의 얼이 유혹합니다.
주여,
내 몸에서 복음의 향기가 분수처럼
솟구치도록 붙잡아 주옵소서.

링컨의 기도가 그리워지는 현실입니다.
미국의 남부와 북부 사이에서 큰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흑인 노예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편하게 살던 남부 사람들은 노예 없이는 불편해서 하루도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예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비인도적인 표어까지 내걸면서 북군을 밀어 붙였습니다.
그런 남군 앞에 북군은 가는 곳마다 쓴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상황이 급박해진 북군들은 모여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편이 되셔서 북군이 이기게 하소서!”

이러한 기도를 들은 링컨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이 북군 편이 되어 주시라고 기도하지 말고, 북군이 하나님 편에 서게 해달라고 기도하시오!”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은혜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게 하옵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29일(목)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욥기 16:1∼19:29
욥은 친구들을 ‘번뇌케 하는 위로자’라고 고백하였으며, 하나님께 눈물의 기도를 드리면서 자신의 결백함을 보증해 줄 보증물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빌닷은 친구들을 원망하는 욥을 책망하며 욥을 악인에 비유하여 그에게 닥칠 외적인 재앙을 장황하게 묘사하였다. 그러자 욥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사로 말미암았으며, 이제 근거 없는 비방은 그만 두고 긍휼한 마음을 가져 줄 것과 끝까지 비방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죽은 후에 하나님 보기를 사모하였다.  

♦ 고린도후서 3:1∼3:18
바울은 주의 영광을 위한 사도직의 우월성을 구약의 직분과 비교하여 설명하였다. 즉, 구약의 직분은 모세가 그 얼굴을 가림으로써 영광이 가려진 것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였으나, 신약의 직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세의 얼굴을 가린 수건이 벗어져 영광이 드러나는 것과 같이 영광스럽다고 하였다. 

♦ 시편 125:1∼125:5
시인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가 그의 능력으로 안전한 삶을 산다고 노래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린도후서 3:17) 

진리(眞理)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주의 영이 자유케 하리라(고후 3:17)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리라(갈 5:1)
진리와 주의 영과 그리스도는 결국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만이 자유를 주실 수 있습니다.
자유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의 기쁨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윌리암 바클레이 기도
- 운전자의 기도

오, 하나님! 
차를 운전할 때마다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음을 기억하도록 도우소서. 

차의 흐름이 짜증나게 느껴질 때 

나에게 인내심을 주시어 

몇 분을 단축하려고 모험을 시도하려다가 

나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험에 바트리지 않게 하소서. 


나에게 예의 바름을 주시어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운전자들도 생각할 수 있게 하소서. 


항상 민첩하게 하시고 

지혜를 주시어
멈추고 정지해야 될 때를 알게 하소서. 


도로 위에서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게 하는 

버릇이나 쾌감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운전하는 도로 위에서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도하나이다.
아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30일(금)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욥기 20:1∼22:30
소발은 잔인하기 짝이 없는 비유까지 서슴지 않고 하면서 욥에게 회개를 강조하였다. 이에 대하여 욥은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악인의 형통함에 관하여 역설하였다. 엘리바스는 욥의 죄악이 크다고 책망하였다. 그러나 훗날에 그는 위로자의 자세로 돌아가 회개하여 불의를 버리면 하나님께서 다시 욥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권면하였다.

♦ 고린도후서 4:1∼4:15
바울은 예수를 위하여 자신이 종 된 것을 증거 하면서 자신의 연약함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가 담긴 질그릇으로 비유하였다.

♦ 시편 126:1∼126:6
시인은 포로 된 자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방된 것을 감사 찬양 드리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7) 

질그릇에 보배를 담으면 질그릇의 가치는 질그릇의 가치는 보배의 가치로 승격(昇格)합니다. 질그릇에 개밥을 담으면 질그릇의 가치는 개밥그릇으로 전락(轉落)합니다.

내 몸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내 몸의 가치가 결정(決定)되는 것처럼 내 몸에 담는 것은 나의 결정입니다.

주님, 나의 가치를 승격할 수 있는 결정에 최선을 다하도록 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슈피겔 기도
- 이렇게 살게 하소서

살아가면서
내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작은 것에 감사하며 

불평하지 않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아침에 일어나 

눈부신 햇살에게 문안드리며 

오늘 하루 

내 곁에 있는 모든 이들과 

따스한 대화와 온기로 

살게 하옵소서. 


아침마다 

내 안에 생겨나는 

높은 마음 낮추이고 

저문해 서산에 넘실거리면 

입술엔 사랑을 담고 

가슴엔 희열을 내뿜으며 

우리의 삶이 공동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도 

내가 할일이 무엇인지 

잘 기억하여 

교만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편안한 사람으로 

기억되게 하옵소서. 


그냥 

세월의 흐름 속에 

나를 묻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창조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지금 

이 시점에서 바라보는 태양이 

이토록 아름답다는 생각을 

영원히 간직하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31일(토)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욥기 23:1∼26:14
욥은 엘리바스의 답변에 탄식하면서, 하나님께서 결백한 자신의 호소에 답변해 주실 것을 간구하였다. 그리고 악인들의 최후에 관하여 말한 후, 그들을 놓아두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문을 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빌닷은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을 말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깨끗한 사람은 없다고 하였다.

♦ 고린도후서 4:16∼5:10
바울은 속사람과 겉사람을 비교하면서,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하였다. 또한 손으로 지은 집과 영원한 집을 비교하면서 현세와 내세의 생명에 대해 설명하였다. 그리고 장차 우리는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든지 하나님 나라에 있든지 항상 주를 기쁘시게 해야 할 것이라고 권면하였다.

♦ 시편 127:1∼127:5
시인은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돌보심을 찬양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린도후서 4:16)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은 위선(僞善)이며 거짓입니다.
나는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일까?
내가 나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라 내가 주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정말 겉과 속이 같은 삶을 살아왔을까?
어지러운 세상에서 나도 모르게 겉과 속이 다른 삶과 생각을 가졌다면 이제 이런 잘못된 것을 철저하게 털어버려야 합니다.

아비스 기도(Avis B. Christansen)
- 헌신의 기도

예수,
나의 주 나의 왕이시여, 
당신께 드릴 생애는
단 한 번뿐이라. 
당신의 자비를 찬양할 입도
단 하나 뿐이라. 
당신의 비할 데 없는 영광을 위해
바쳐질 마음도 
단 하나 뿐이라. 
온전히 드려질 마음은
단 하나 뿐이라. 
주여,
당신을 위해 사용될 인생은
이 생애뿐이라. 
지나치는 모든 순간이
영원히 가치 있게 하소서. 
주위에는 영혼들이
죄와 수치 중에 죽어가나이다. 
나를 저들에게로 이끌어 
갈보리 구속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소서. 
당신의 영광스런 이름으로 전하게 하소서. 

주여,
이 단 한 번뿐인 생애를 취하소서. 
아무것도 움켜쥠 없이
이제 당신의 뜻을 준행 하리이다. 
나를 위해 모든 것을
값없이 내어주신 당신께서 
당신을 위해 쓰시고자
이 생명을 요구하시니 
내 구주여,
매 순간 순간을
당신께 드리나이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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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결혼 풍속 10단계

1단계 ; 적령기 13세∼18세
(일곱 절기 때 공공의 장소에서 서로 만날 수 있다)
(부모의 약속에 따라 만날 수도 있다)

2단계 ; 세 가지 준비물
1. 포도주 한 잔
2. 신부의 값을 결정하는 은과 금
3. 제1 서약서
(남자는 여자의 아버지에게 나는 ∼지파 ∼집의 ∼이다)신신
(찾아온 목적을 분명하게 말한다. 당신의 딸과 결혼을 하고 싶다. 허락해 주세요)

3단계 ; 세 가지 질문
(여자의 아버지가 딸에게 세 가지를 질문한다. 남자가 없는 자리에서)
1. 지적 요소 - 남자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2. 정적 요소 - 얼마나 사랑하는가?
3. 의적 요소 - 고난이 닥쳐와도 정말 헌신할 각오가 되었는가?
* 아버지가 딸에게 ‘내가 이 결혼을 허락해 주기를 원하느냐?’
(딸이 승낙한 후에 남자에게 허락을 한다)

4단계 ; 신부의 몸값을 흥정
(이때 남자는 자리를 피하고 대리인이 나선다. 거래를 위한 흥정이 아니라 서로 상대방의 집안 형편에 맞도록 고려한다)

5단계 ; 첫 번째 계약서를 읽는다.
포도주 한 잔을 남자와 여자가 반잔씩 나누어 마신다.
이때 서약서 위에 여자가 반잔을 마신 후 몇 방울의 포도주를 부은 후 남자가 마신다.
은금을 지불한다.
청혼, 포도주를 나누어 마신다, 서약서를 확인 후 정혼(定婚)으로 부부가 된다.

6단계 ; 신부의 아버지가 뿔나팔을 불어 정혼식을 알린다.
신랑과 신부를 축복기도 한다.
법적으로 부부가 인정되었으나 서로 떨어져 지낸다.

신부여 지금으로부터 약 일 년 후 어느 날 알지 못하는 어느 날 저녁 반드시 당신을 데리러 올 것입니다. 준비하고 기다리십시오!

7단계 ; 일 년간의 별거(別居)

생사가 걸린 일 이외에는 결코 만날 수 없다.
신랑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서 함께 기거할 집을 준비한다. 
신부는 자기 생활 방식을 버리고 남편 집의 생활 방식을 연습한다.
신부는 신랑 이외에 이성 교제를 중단하고 신랑만을 사모하며 기다린다.

8단계 ; 신부를 데리러 오는 때
신부는 신랑을 맞이할 날을 학수고대한다.
신랑은 신부를 데리러 갈 그 날을 사모하며 기다린다.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 후에 “이제 신부를 데려 오너라!”
(신부를 데리러 가는 그 시간은 아버지의 권한에 속하므로 아들은 모른다)

신랑과 신랑의 친구들은 횃불을 들고 신부의 동네로 찾아간다.
신부 측에서는 “보라, 신랑이 오고 있다!”
신부는 이때 단장을 하고 친구들과 같이 신랑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서 함께 신랑의 집으로 간다.

9단계 ; 두 번째 계약서
미래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서와 신랑의 징표를 준다.
합방을 한다.

10단계 ; 사랑의 선언
두 번째 계약서를 들고 이 신부는 정절에 관하여 깨끗하였으므로 결혼은 완성되었다고 선언한다.

유대 사회에서 일 주일의 기간은 ‘김추어진 기간(Hidden Seven Days)’ 이라고 한다.

정혼은 신부의 집에서
결혼은 신랑의 집에서 이루어진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 옳은 행실(δικαιώματα, 디카이오마타)
δικαίωμα. 1345. dikaióma. an ordinance, a sentence of acquittal or condemnation, a righteous deed      

디카이오마란 법령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행위로 옳은 것이 아니라 선포된 의를 말합니다. 행위적인 행위로 옳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선언에 의해서 옳다고 인정된 존재이다(다 이루었다!) 

로마서 3:20∼22,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빌립보서 3:4∼9,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옳은 행실은 구원의 은혜로 얻은 것입니다.

유대 풍속은 잔치에 초청을 받았을 때 내가 준비하는 예복이 없었다. 잔치를 준비한 신랑의 집에서 준비한 예복을 받아서 입어야 한다. 따라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준비한 예복 즉 십자가 보혈에 의한 구원의 옷 세마포의 옷을 받아 입은 후에 그 잔치에 참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은혜입니다.

유대의 전통은 혼인 잔치에서 입는 예복은 초청을 한 집에서 준비합니다. 철저하게 신랑 위주로 진행된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각자 준비하는 예복이라면 빈부귀천에 따라 화려한 명품과 값싼 것으로 구분될 것입니다. 그러나 초청자의 집 즉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것으로 누구에게나 동일한 옷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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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45982 2019-08-18T11:13:12Z 2019-08-18T11:13:12Z 할렐루야의 의미와 용법

할렐루야!
-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할랄 - 찬양하라
루 - 너희의
야 - 야훼 하나님

구약에서 시편에서 23회
104:35, 45. 106:1, 48. 111:1. 112:1. 113:1, 9. 115:18. 116:19.
117:2. 135:1, 21. 146:1, 10. 147:1, 20. 148:1. 149:1, 9. 150:1, 6.

신약에서 요한계시록에서 4회
요한계시록 19:1, 3, 4, 6

19:1 -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라!

19:3 - 심판의 하나님을 찬양하라!(2절 참조)

19:4 - (아멘과 함께 사용)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 질 것을 내가 믿고 찬양한다!

19:6 -  전능하신 통치를 찬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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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45496 2019-08-16T20:08:41Z 2019-08-18T01:40:15Z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Ⅴ(요한계시록 19:9) 설교 원고(2019-08-18)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Ⅴ(요한계시록 19:9)


- 어린 양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는 자의 복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어린 양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 양(羊)입니다.

☞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어린 양의 신부는 누구인가?

요한계시록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 신부(νύμφην) - 눔패(νύμφη), 3565. numphé. a bride, a young woman     

* 아내(γυναῖκα) - 구내(γυνή), 1135. guné. a woman        

요한계시록에서 어린 양의 아내는 교회를 말합니다.

10절을 읽겠습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 22절을 읽겠습니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6, 27절을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새 예루살렘은 교회를 말합니다. 새 예루살렘 교회는 곧 예수님이십니다. 새 예루살렘 교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성도들입니다. 따라서 어린 양의 아내는 교회이며 그 교회는 예수님만을 믿고 예수님만을 살아가는 성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도입 이야기)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대 묵시문학으로 기록된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려면 혼인에 대한 유대인의 풍속을 알아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의 의미를 신앙적으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개역한글 성경 요한계시록에 '아내'라는 단어가 19장 7절(구네, γυνή)과 21장 9절(눔패, νύμφη) 두 번 소개됩니다.

요한계시록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 아내(γυνὴ) - γυνή, 1135. guné

현대인의 성경, 새번역 성경,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모두 '신부' 라고 번역합니다.

구네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마리아에게 여자여(γύναι)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말했을 때 '여자여!' 라는 단어를 '구나이' 라고 합니다. 이때 '구나이'는 아내가 아니라 '부인이여!' 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 아내(νύμφην) - νύμφη, 3565. numphé, 젊은 아내, 부인

유대인의 결혼 절차
- 유대인의 결혼 풍속은 정혼(定婚)과 결혼(結婚)과 동거(同居)라는 삼단계로 진행됩니다.

첫 번째 단계, 정혼(定婚)

남자가 여자의 집에 증인과 함께 세 가지 예물을 갖고 찾아갑니다. 세 가지 예물이란 서약서와 포도주와 은금을 말합니다. 먼저 남자가 여자의 아버지에게 당신의 딸과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청혼을 합니다. 이때 아버지가 딸에게 청혼을 받아드리겠느냐? 하고 묻습니다. 딸이 청혼을 받아드리면 포도주 한 잔을 따라주고 딸이 반잔을 마신 후에 청혼 서약서 위에 포도주 몇 방울을 떨어트린 후 나머지 잔을 남자가 마신 후에 은금을 딸의 아버지에게 드립니다.

이때 신부의 아버지는 뿔 나팔을 불어 온 동네에 정혼을 알리며 아버지가 딸과 남자에게 축복합니다. 이것을 정혼(定婚)이라고 합니다.

신약 성경 마태복음 1장 18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 정혼(μνηστευθείσης) - μνηστεύω. 3423. mnésteuó,
to espouse(옹호하다, 지지하다), betroth(정혼하다)  
  
* 동거(συνελθεῖν) - συνέρχομαι. 4905. sunerchomai,
to come together(함께하다), to accompany(동행하다)       

두 번째 단계는 결혼(結婚)

정혼의 단계를 마치면 여자는 친정집에서 신부 수업을 받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로부터 1년 동안 신랑 수업을 받으며 신부와 함께 기거할 집을 짓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던 말씀에 해당합니다(요한복음 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집(οἰκίᾳ) -  οἰκία, 3614. oikia.  a house, dwelling      
* 거할 곳(μοναὶ) -  μονή,  3438. moné. an abiding, an abode    
* 처소(τόπον) - τόπος, 5117. topos.  a place      

세 번째 단계는 동거(同居)

신랑이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로부터 신랑 수업을 받으며 신부와 함께 거주할 집을 짓고 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제는 신부를 데려올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면 아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이제 가서 신부를 데려오라'고 하면 신랑은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을 찾아갑니다. 신부를 데리러 가는 날은 아들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가 결정하므로 아들 즉 신랑도 모릅니다(마태복음 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오직 아버지만이 아시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마태복음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고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친구들과 신부의 집에 갈 때 동네 입구에서 큰 소리로 신랑의 친구들을 신부의 집을 향해 신랑을 맞이하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신부를 데리고 신랑의 집으로 돌아오면 두 번째 결혼 계약을 합니다. 이때 계약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을 약속하며 신랑이 신부에게 징표를 줍니다. 그리고 첫 날밤을 지냅니다. 첫날밤을 지낸 후 아침에 신랑은 문을 열고 '신부는 순결하였다!' 라고 외치면 일주일 동안 혼인잔치가 시작됩니다.

가나 혼인 잔치 집에 포도주가 부족했다는 것은 가장 즐겁고 기쁜 날 함께 마실 포도주가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포도주는 피의 언약을 상징합니다. 혼인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혼인 언약이 없다는 것으로 신랑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은 끊어진 언약 관계를 회복시키셨다는 것이며 이것을 표적(表迹) 이라고 합니다. 표적은 기적(奇蹟)과 다른 것으로 기적은 단순히 놀라운 사건이지만 표적은 놀라운 사건 속에 감추어진 구속의 진리와 은혜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문맥을 살펴보면 어린 양의 혼인 잔치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요한계시록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라는 말씀은 아직 혼인 잔치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아내" 라고 부르는 것은 정혼 단계에서 부르는 호칭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각각 각자의 집에서 신랑 수업과 신부 수업을 잘 받고 있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신랑의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혼인 기약이 이르렀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내를 데려오라고 말할 때 비로써 세마포를 입게 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세마포를 입게 하였다는 말씀은 드디어 신랑이 아버지로부터 신부를 데려올 그 날을 알려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천사가 사도 요한에게 말하기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기록하라고 하며 이것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라고 합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는다는 것이 참된 말씀입니다.

어느 교주와 교파와 교회에 등록하고 받아주는 것이 복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어린 양 혼인 잔치가 무엇입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라는 찬송의 가사를 작사했던 존 뉴턴 목사님의 간증을 기억하십니까?

어느 날 존 뉴턴 목사님이 천국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면서 평소에 궁금했던 세 가지 질문이 있었는데 첫째는 세상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성도들의 모습을 천국에서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둘째는 신앙생활을 저런 식으로 한다면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하고 염려했던 사람들에 대한 모습 그리고 세 번째는 과연 나와 같은 죄인을 천국에서 받아주실까 하는 궁금증에 대한 답을 얻고 싶었기에 세 가지 의문에 대해서 확인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확인한 후 세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성도들을 천국에서 만나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신앙생활을 저렇게 하면 안 될 텐데 하고 염려했던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나와 같은 죄인의 이름도 천국에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린 양 혼인 잔치란 어린 양이신 부활하여 승천하였던 예수님께서 신랑으로 다시 오실 때 주를 믿던 성도들이 신부로서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자리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 천국에 들어가고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사람은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 확증하며 신앙생활을 바르게 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없음을 어느 누구도 판단할 수 없지만 내가 내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시험하고 확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나는 정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입니까?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확실하게 갖고 있습니까? 그것을 시험하고 확증해야 합니다.

진노의 자녀로 태어났던 나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힘입어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셨고 일찍부터 예수님을 믿고 섬김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고 그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만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마태복음 22:1∼13,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 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 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예복(禮服, ἔνδυμα γάμου)을 준비하셨습니까?

마태복음 22:11∼12,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 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 예복(禮服, ἔνδυμα γάμου) 
- ἔνδυμα. 1742. enduma.  apparel
- γάμος. 1062. gamos. a wedding 
   
예복(禮服)이란 혼인 잔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입는 옷을 말합니다(ἔνδυμα γάμου). 어린 양의 혼인 잔치는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에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세마포(βύσσινος)를 말합니다.

세마포를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 세마포(βύσσινον) - βύσσινος. 1039. bussinos,  fine linen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입니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부자 청년처럼 어려서부터 모든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에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 옷(στολὰς) - στολή. 4749. stolé,  equipment(장비), apparel(의류) 

예복이란 일상생활을 위하여 입는 옷과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어린 양 혼인 잔치에 참여할 때 반드시 검증해야 할 옷으로 의복(衣服)이 아니라 행실(行實)을 말합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어느 교주도 교파도 교회도 옳다고 인정받지 못합니다. 다만 어린 양의 피 십자가 보혈을 내 죄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신 것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요약합니다.
어린 양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만 청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각자의 일에 얽매여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참여한 사람들 중에 예복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지만 입으로는 믿고 마음으로 믿지 못한 사람은 예복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어린 양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으셨습니까?
초청장을 받았으면 잔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으로 내게 맡겨진 믿음의 본분을 바르게 감당하여 모두가 잔치 자리에서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하며 축복합니다.
 

♪ 찬송 162장
신랑 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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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44081 2019-08-13T00:58:57Z 2019-08-18T17:17:53Z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Ⅳ(요한계시록 16:15) 주일설교(2019-08-11) 자기 옷을 지키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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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43202 2019-08-10T20:50:14Z 2019-08-11T09:16:50Z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Ⅳ(요한계시록 16:15) 설교 원고(2019-08-11)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Ⅳ(요한계시록 16:15)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Ⅳ(요한계시록 16:15)

- 자기 옷을 지키는 자의 복

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Behold, I come like a thief! Blessed is he who stays awake and keeps his clothes with him, so that he may not go naked and be shamefully exposed. 

믿음(信)이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다!”

광복 74주년 기념 주일을 맞이하며 오늘의 시대를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국가관이 마구 흔들리는 시대를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국회의원은 애국가를 부르지 말자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대통령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설마 하며 동영상을 관심을 갖고 동영상을 보는데 대통령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태극기에 경례를 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라도 믿음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선다면 하나님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성도가 있고 교회가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조국을 긍휼히 여길 것입니다.

의식주(衣食住. 옷 衣, 밥 食, 살 住)란 “사람이 생활하는 데 기본이 되는 옷과 음식과 집”을 말합니다. 왜 사람은 옷과 밥과 집이 필요할까요?

첫 사람 아담은 옷과 음식과 집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세상을 “에덴”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후에 에덴에서 쫓겨나므로 그때부터는 옷과 음식과 집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도 이 세상에서는 옷과 음식과 집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을 어떻게 얻고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은 요한계시록에 소개된 일곱 가지 복에 대한 말씀 중에서 세 번째로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소개된 일곱 가지 복에 대한 말씀을 함께 기억하려고 코팅 복사하여 주보와 함께 나눠드렸습니다(Laminate). 다음 주일부터 일곱 개의 성구를 암기하신 교우들에게는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함께 나눴던 성구를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지키다(테레오, τηρέω. 5083. téreó)는 단어는 단순히 지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보다(to watch over)' 또는 '경계하다(to guard)'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슬퍼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복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수고를 그치고 안식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죽음을 슬퍼하기 때문에 죽은 후에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는 죽은 조상에게 음식을 차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후손들은 하루 세 끼씩 식사를 하면서 조상들을 위한다며 일 년에 단 한 차례 제사를 드리며 음식을 차려주는 것이 과연 효도하는 것일까요?

기독교 신앙은 죽은 후에 슬퍼하며 효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에 더 잘 모시고 섬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늘 소개할 말씀 요한계시록 16장 15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정상적인 사람은 옷을 벗고 다니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여 각 가정을 심방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예정된 모든 가정들을 심방하며 마지막 한 가정이 남았습니다. 그 집에 도착하였을 때 집안에서는 분명히 누군가 있는데 아무리 벨을 눌러도 문을 열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심방을 왔다가 돌아간다는 표시로 요한계시록 3장 20절이란 성구를 적은 메모를 남기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며칠 후 목사님이 사무실 문을 열려고 하는데 문에 지난 번 심방 때에 남겨둔 메모가 사무실에 붙어 있었는데 그 메모지 아래에 창세기 3장 10절이란 성구가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후에 그들은 벗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은 죄를 지은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옷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옷, 흰 옷, 피 뿌린 옷, 세마포, 붉은 옷, 두루마기”와 같이 다양하게 소개됩니다. 헬라어 성경에서는 히마티온, 스톨래, 리논, 부시논 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옷이란 몸을 보호하는 기능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징적 의미로 사용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옷의 의미는 기능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4∼5절을 찾겠습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사데 교회를 향한 말씀 중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 몇 사람이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이라고 합니다.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의미를 요한계시록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옳은 행실(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것(요한계시록 7:13∼14)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후에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옷의 기능적인 의미만 생각한다면 구태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힐 필요가 없었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과 가죽옷의 차이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하나님의 방법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죄의 결과이므로 죄를 감추려고 옷을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옷이란 죄를 감추기 위하여 인간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을까요? 가죽옷을 만들려면 반드시 짐승을 죽여야 합니다. 짐승을 죽이려면 피가 흘러나옵니다. 성경에서 피가 상징하는 것은 생명과 용서라고 합니다.

첫째는 피는 생명(신명기 12:23)

오직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아울러 먹지 못하리니. 

노아 홍수 사건 후에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홍수 이전에는 사람들의 식물은 오직 채소 위주의 식단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후에 살아있는 동물을 식물로 주시면서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창 9:4).

둘째는 피는 용서(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가죽옷이란 죄를 지은 사람이 흘려야 할 피를 짐승이 대신 피를 흘림으로 죄를 지은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가죽옷으로 약속한 용서의 은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입어야 할 옷을 구원의 옷과 의의 옷이라고 계시하셨습니다.

이사야 61:10,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구원의 옷이란 아담이 죄를 지은 후에 자기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만들어 입었던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과 같이 인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서 입혀주셨던 가죽옷 즉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서 해결 받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의 옷과 의의 옷으로 계시된 약속은 오랫동안 짐승의 희생 제사로 그 약속을 지켜왔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어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마지막에는 홍포를 입은 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홍포를 입으셨던 예수님

요셉은 어려서부터 채색옷을 입고 자랐습니다.
사사 시대에 미디안 왕들은 자섹 옷을 입었습니다.
모르드개는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었습니다.
벨사살 왕은 다니엘에게 자색 옷을 입혀 줄 것이라고 여러 차례 약속했습니다.

서양 속담에 “자주색에서 태어났다(Born in the purple)” 이란 말은 고귀한 혈통, 부유한 가문에서 탄생했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요즈음 말로는 ‘금수저’ 라고 하겠습니다. 
고대에는 색깔 있는 옷 특히 자주색으로 염색한 옷은 그 엄청난 가격과 염색과정의 어려움 때문에 최고급 옷감으로 인정되었고 곧 권위와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자주색 옷을 입혔습니다. 만왕의 왕이라고 존경한 것이 아니라 조롱하려고 입힌 것입니다. 그러나 조롱의 옷은 결국 영광스런 세마포 흰옷으로 드러났습니다.

가죽옷을 구원의 옷과 의의 옷으로 완성하시려고 십자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요한계시록 16장 15절에서 옷에 대한 신앙의 결론을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깨어' 라는 헬라 단어는 '그래고레오' 라고 합니다.
'그래고레오'란 '잠들지 않고 지켜보는 것'을 말합니다(awake).
'그래고레오'란 '관심을 갖고 주시하는 것'을 말합니다(watch).

왜 깨어 있어야 합니까?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도적같이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적이 오는 날짜를 통보하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대만의 장개석 총통은 “예수님은 간첩과 같이 오신다!”고 강조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은 도적같이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잠들지 않고 지켜보고 있어야 합니다. 관심을 갖고 주시해야 합니다.

자기 옷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구원의 옷은 어느 교주가 어느 교단이 어느 교회가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어린 양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허락하십니다.

요한계시록 7장은 하나님의 인을 맞은 144,000에 대한 말씀입니다.

7장 10절에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요한계시록 17:14,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5: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가죽옷은 구원의 옷으로 의의 겉옷으로 이어져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세마포 즉 옳은 행실이라고 하셨습니다. 옳은 행실은 부자 청년과 같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모두 지켰기 때문에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부족한 것 즉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후에 얻을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도적 같이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도적같이 온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그 날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왜 깨어 있으라고 하셨을까요?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42∼43a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태복음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어떻게 깨어 있을 수 있을까요?
기도하므로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누가복은 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깨어 있는 자에게 약속된 것은 무엇일까요?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12: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왜 깨어 있어야 할까요?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데살로니가전서 5: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베드로후서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요한계시록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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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3:4, 7:14, 19:16 ) - 히마티온
- ἱμάτια, στολὰς, ἱμάτιον   

흰 옷(3:4∼5, 3:18, 4:4, 7:9, 7:13∼14, cf 행 1:10) - 스톨래

피 뿌린 옷(19:13) - 히마티온(ἱμάτιον)

세마포(15:6, 18:12, 18:16, 19:8, 19:14) - 리논

붉은 옷(18:16) - βύσσινον.

두루마기(6:11, 22:14) - 스톨래

헬라어에 의한 옷의 분류(히마티온, 스톨래, 리논)

헬라어

장절

히마티온

3:4, 3:18, 4:4, 19:13,

스톨래

7:9, 7:13, 7:14,

리논

19:14(βύσσινον) 


3:4(옷) ἱμάτια, 2440. himation
3:4(흰 옷) λευκοῖς, 3022. leukos 
3:18(흰 옷) ἱμάτια λευκὰ, 2440. 3022

4:4(흰 옷) ἱματίοις λευκοῖς, 2440. 3022 

6:11(흰 두루마기) στολὴ λευκή 4749. 3022

7:9(흰 옷) στολὰς λευκάς, 4749. 3022
- στολή, 4749. stolé    
7:13(흰 옷) στολὰς τὰς λευκὰς. 4749. 3588. 3022 
7:14(옷) στολὰς, στολή, 4749. stolé   
- ἐλεύκαναν.  λευκαίνω  3021. leukainó(to make white)

15:6(세마포) λίνον. λίνον 3043. linon 

18:12(세마포) βυσσίνου. 1039 
18:16(세마포) βύσσινον. 1039 
18:16(붉은 옷) κόκκινον,  κόκκινος 2847. kokkinos      

19:8(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βύσσινον, 1039. bussinos 
19:13(피 뿌린 옷) ἱμάτιον, 2440. himation   
19:14(희고 깨끗한 세마포) βύσσινος, 1039. bussinos 

옷에 대한 세속적인 기능과 성경적인 기능은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족장 시대에 요셉은 어려서부터 채색옷을 입고 자랐습니다. 채색옷이란 물론 가장 좋은 옷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요셉 시대에는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녀에게 구별하여 입혀주는 옷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창세기 37: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사사 시대에는 미디안 왕들이 자색옷을 입었습니다.

사사기 8:26,
기드온의 청한 바 금귀고리 중수가 금 일천칠백 세겔이요 그 외에 또 새 달 형상의 장식과 패물과 미디안 왕들의 입었던 자색 의복과 그 약대 목에 둘렀던 사슬이 있었더라.

모르드개는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었습니다.

에스더 8:15,
모르드개가 푸르고 흰 조복을 입고 큰 금면류관을 쓰고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고왕의 앞에서 나오니 수산 성이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고.

에스겔 23:6,
그들은 다 자색 옷을 입은 방백과 감독이요 준수한 소년, 말 타는 자들이라.

 

다니엘에게 벨사살 왕이 몇 번이나 약속합니다. 자주옷을 입히겠다는 것입니다. 즉 자주옷은 권력과 성공의 상징이었습니다.

다니엘 5:7,
왕이 크게 소리하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를 불러오게 하고 바벨론 박사들에게 일러 가로되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참조 / 다니엘 5:16, 29,

자색옷의 의미를 설명하는 서구사회에서 사용하는 문장을 소개합니다.

‘Born in the purple.’

문자 그대로 하면 “자주색에서 태어났다.” 라는 뜻인데 고귀한 혈통, 부유한 가문에서 탄생했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요즈음 말로는 ‘금수저’ 라고 하겠습니다. 

고대에는 색깔 있는 옷 특히 자주색으로 염색한 옷은 그 엄청난 가격과 염색과정의 어려움 때문에 최고급 옷감으로 인정되었고 곧 권위와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지중해 전역과 그 주변에선 자주색과 붉은 색은 권력과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도 자주색 옷을 입었다, 입힌다함은 왕권이나 최고의 권력과 부유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으로 음식을 대신하였고 약대털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활방식은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자연인이란 세속사회와 단절하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에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와 에쎄네파가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에쎄네파에 속한 사람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완전히 중립을 지키려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로마 군병들에 의해서 홍포를 입었습니다. 홍포란 당시 황제들이 입는 지배자의 옷을 말합니다. 만왕의 왕으로 오셨다고 말했기 때문에 홍포를 입힌 것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도 자색옷을 입었습니다.

누가복음 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예수님의 마지막 수난 때에 예수님을 모독하기 위해 입힌 옷도 황제권을 상징하는 자주색 옷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5:17,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로마시대 때 자주색은 황제 자주(imperial purple)라고 해 오직 황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색이었습니다.

황실 자주색 옷은 기원전 1600년경부터 페니키아인들이 티레 지방 특산 소라고둥으로 염색을 했다고 해서 티레 자주(Tyrian purple)라고도 불렸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염료를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헤라클레스였는대, 헤라클레스는 조개를 씹어 먹은 자기 개의 주둥이가 자주색으로 물든 것을 보고 염료 물질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도적 같이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도적같이 온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그 날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왜 깨어 있으라고 하셨을까요?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42∼43a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태복음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어떻게 깨어 있을 수 있을까요?
기도하므로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누가복은 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깨어 있는 자에게 약속된 것은 무엇일까요?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12: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왜 깨어 있어야 할까요?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데살로니가전서 5: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베드로후서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요한계시록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도입 이야기)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여 각 가정을 심방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예정된 모든 가정들을 심방하고 마지막 한 가정이 남았습니다. 그 집에 도착하였을 때 집안에서는 분명히 누군가 있었는데도 아무리 벨을 눌러도 문을 열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심방 왔다가 돌아간다는 표시로 요한계시록 3장 20절이란 성구를 적어놓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그 주간에 주일 예배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지난 번 심방 때에 왔다가 돌아갔다는 표시로 적어준 메모지가 사무실에 붙어 있었는데 그 메모지 아래에 창세기 3장 10절이란 성구가 적혀있었습니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옷에 대한 우스개 이야기입니다. 옷에 대한 명칭이 다양합니다. 교복(校服), 제복(制服), 군복(軍服), 예복(禮服), 법복(法服), 아동복(兒童服), 여성복(女性服), 우주복(宇宙服) 등과 같이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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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42519 2019-08-08T14:49:31Z 2019-08-08T14:49:31Z 예수와 유대교(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쎄네파, 열심당)

예수와 유대교

예수는 유대인으로서 유대교의 전통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를 이해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서 예수와 유대교의 관계를 조망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과제이다.

버미스(G. Vermes)를 비롯한 일부 신약성서학자들은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새롭게 조망하려고 한다.
이들은 예수와 유대교의 차이점보다도 그 공통점을 더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다음 몇 가지 이유로 그 문제점이 드러난다.

첫째로 예수 시대의 유대교는 아주 다양하였다는 점이다.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사」와 「유대고대사」에서 예수 시대를 전후하여 유대교 내에는 적어도 대표적인 4대 종파(hairesis) 즉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센파, 열심당이 있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예수가 유대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면 이 4종파 중 어디에 속하는 지 규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면모는 이 4개 종파와는 분명한 차별성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예수와 그의 후계자들은 구약성서 등 유대교의 일부 요소를 수용하였으므로 유대교와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갈등이 있었으나 점차 유대교와의 근본적인 차별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따라서 자신들을 유대교의 새로운 일파로 자리 매김하지 않고 유대교와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종교의 창시로 여겼다. 따라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함으로서 예루살렘에서 큰 박해를 받아 유다와사마리아와 다메섹으로 쫓겨 갔으며(행 8:4) 후에는 회당에서 축출당하는 것(요 9:22)을 감수하여야 했다. 초대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유대교와의 근본적인 차별성을 더욱 많이 발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로 유대교가 4대 종파로 그 분파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것은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비교적 후대에 등장하는 특이한 현상이다. 

이러한 종파의 분화가 일어난 원인으로 무엇보다도 포로후기의 정치적 문화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정치적으로 포로후기에 이스라엘은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통해 성전은 재건하였으나 다윗 왕정을 회복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따라서 희랍과 로마의 외세의 정치적 지배 하에서 성전 중심의 제사장적 신정국가 체제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의 유대교 탄압이 후 전개된 역사적 고비 마다 권력자들에 의해 다윗 왕정의 이상과 사독 계열의 대제사장직에 합법적인 계승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하였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속한 사회적 계층과 종교적 신념에 따라 정치적인 문제와 종교적인 문제에 대한 타협적이거나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서 대립적인 종파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4대 종파는 예수시대의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대한 유대인들의 4가지 종교적 대안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가 동시대의 4대 종파와 달랐다는 것은 예수의 대안이 달랐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예수의 대안과 유대교 4대 종파의 대안을 비교 검토하여 그 공통점과 차이점이 분석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불가피하게 거쳐야 할 과정이 아닐 수 없다.

보그(M. Borg)는 예수는 그 시대의 관습적인 지혜를 뒤집는 ‘전복적 지혜의 교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단지 그 시대의 관습적인 지혜를 뒤집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대안으로서 전향적인 의식을 제시하고 몸소 실천한 분이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을 평균적 의식(average consciousness)과 전향적 의식(advanced consciousness)으로 구분한 켄 윌버(K. Wilber)의 용어로 말하면 예수는 ‘전향적인 의식’의 교사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예수시대의 종교적 배경이 되는 후기 유대교의 4대 종파가 등장한 역사적 정치적 배경을 살펴 보고 그들의 주요한 가르침을 예수의 가르침과 비교함으로서 유대교의 평균적인 의식과 예수의 가르침의 전향적 의식의 차이점을 밝히려고 한다.

그리고 사이먼(M. Simon)은 유대교 4대 종파를 비교하는 방법론으로 의식적, 성서적, 교리적 차이라는 종교적 관점에 초점을 두었지만, 이러한 종교적인 면과 더불어 정치적의 입장과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위치로 중요한 비교의 준거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1. 예수와 에센파

에센파는 1세기 전후의 필로, 요세푸스, 히폴리투스, 폴리니의 기록에 나타나지만 신약성서에는 언급되지 않고 있어 그 동안 별 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에세네(희랍어로 Essaioi 혹은 Essenoi; 라틴으로 Esseni)의 뜻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 의견을 달리 하지만 아마도 히브라어의 ‘하씨딤’(자비/경건주의자들)과 동의어인 고대 시리아어 ‘하쎄’와 비슷한 아람어에 기원하거나 혹은 아람어의 ‘치유자, 의사’의 뜻인 ‘아씨, 아씨야’를 희랍어로 음역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1947년 키르벹 쿰란 지역에서 항아리에 보관된 사해사본(Dead Sea Scroll)이라 불리는 고대문서 발견되었다. 그곳을 발굴한 결과 강당, 식당, 찬장, 도기공장, 작업장, 수도시설, 욕실, 공동묘지 등을 갖춘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68년까지의 400명 정도가 거주 가능한 주거지가 발굴되었는데 에센파의 거주지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쿰란문서에는 에센이라는 이름이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에센파에 대한 고대의 기록과 쿰란공동체에 대한 사해 사본의 기록을 정밀하게 검토하면 양자가 많은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두 공동체를 일치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논쟁이 되고 있다. 버미스(G. Vermes) 등 일부 학자들은 양자의 연관성을 부정적으로 보지만, 브루스(F. F. Bruce)등 많은 학자들은 쿰란공동체는 에센파의 일부라고 한다. 요세푸스는 예수 당대의 에센파의 숫자가 4000명 정도라고 했는데 그중에 400명도의 핵심적인 무리들이 쿰란지역에는 거주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쿰람문서에는 ‘의의 교사’ 또는 ‘그 제사장’에 의해 그 공동체가 결성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의의 교사’가 실제로 대제사장이었던 인물인가 하는 여러 논쟁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한 최근 쉬터게만(H. Stegemann)는 의의 교사는 대제사장 야키모스(Jacimos=Alkimos) 후임의 익명의 사두개파 제사장설을 주장하였는 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당시의 역사 기록을 보면 마카바 독립 이후 사두개 가문의 대제사장이었던 야키모스가 BC. 159년 죽은 후 그 후임 대제사장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 요세푸스도 야키모스가 죽은 후 7년 동안 대제사장의 후계자가 없었고 BC. 152년 마카비 가문의 요나단(BC. 160-142)이 정권을 장악하자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BC. 164년 수전절 이후 매년 대속죄일(Yom Kipper) 절기를 지켰을 터인데 대제사장이 없이 이 가장 큰 절기를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7/8년 동안 대제사장이 없이 지냈을 리가 없다.

따라서 역사 기록에 사라진 이 시기의 사두개 가문의 익명의 대제사장이 바로 ‘의의 교사’인 ‘그 제사장’으로서 요나단에 의해 축출되자 추종자들을 이끌고 BC. 150년 경 광야로 피하여 에센공동체를 결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약 50년 후에 쿰란 공동체가 생겨났을 것으로 추산한다.

바리새파도 헤스모니아 왕가가 친외세 정책을 편 것과 대제사장직을 찬탈한 것에 반대했으나,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다. 바리새파는 평신도들로서 제사장직의 합법성에 대해서는 제사장들보다는 덜 민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센파는 제사장 가문의 사람들이었으므로 비합법적인 대제사장이 관할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 자체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이처럼 부패한 성전공동체의 대안으로 광야의 새로운 은둔 공동체인 쿰란 공동체를 결성하고 자신들의 공동체가 바로 종말론적 구원의 공동체인 것을 주장한 것이다.

쿰란 공동체가 남긴 문헌들을 통해서 볼 때, 서기관적 훈련과 학자적 지도를 받은 사람들과 사제귀족 출신들이 주로 공동체를 구성하고 이끌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복음서에도 사두개파, 바리새파, 열심당은 언급되어 있으나 에센파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에센파의 쿰란공동체가 알려지자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세례 요한이나 예수가 공적인 활동을 하기 전에 에센파에 소속하거나 어떤 교류를 가진 것이 아닌가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쿰란문서가 복음서의 기록과 초대 기독교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쿰란 문서에 나타나 있는 메시아 사상, 묵시사상, 선택된 공동체 사상, 의의 교사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구별된 생활, 선악 및 빛과 어두움의 이원론 등은 신약성서와 유사한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간의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차이점이 있는 것이 밝혀졌다.


1) 에센파는 배타적인 은둔 공동체이었다. 이 공동체는 자발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의의 교사(The Teacher of Righteousness)” 또는 “그 제사장”이라 불리 우는 뛰어난 지도자에 의해 결성된 특수한 공동체이다. 의의 교사가 ‘토라에 합당하게 올바른 것을 가르치는 유일한 참된 교사’라는 것은 그를 가르치는 칭호가 정관사로 표기된 것으로도 확인 될 수 있다. 쿰란문헌에 따르면 에센파들은 ‘사악한 대제사장’들에 의해 집행되는 예루살렘 성전 제사는 불결한 것으로 여겨 여기에 참여하는 것과 성전에서의 동물 희생 제사를 거부하였다. 그 대신 그들 공동체에서 시행하는 기도, 예배, 성결의식, 율법공부, 거룩한 식사, 안식일만을 거룩한 제의로 주장했다.

의의 교사는 막강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은둔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요, 하나님의 계시의 중계자이며, 성서 해석의 전권을 가진 자이며 동시에 선인과 악인을 판단하는 최후의 재판관이라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의의 교사를 세우셨으니, 그들을 그의 마음의 킬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니이다”(CD 1,11).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인 예언자들의 말에 담긴 모든 비밀들을 의의 교사에게 알려 주셨다” (1QpHab VIl,3)

“당신께서 나를 공의의 선택 받은 자를 위한 표시로 또한 놀라운 비밀들에 대한 지식을 선포하는 자로 세우셨나이다”(1QH VII,13)

“나의 모든 적대자를 당신께서 법정에서 죄 있다 선언하시니, 나를 통하여 의와 악을 구분하십니다.”(lQH VII,12)

그들은 세속에 물들지 않으려고 자신들만을 위한 은둔의 생활을 영위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그 어떤 것도 남에게 팔거나 사지 않았다.”고 한다. 공동체 외부의 사람들로부터 선물을 받거나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러하여 예루살렘을 떠나 광야에서 그들만의 은둔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었으며, 광야의 사람 은둔자는 아니었다. 광야에서의 40일간의 시험기간 외에는 도시나 시골의 저자 거리를 떠나지 않았다. 사도들 역시 유대인의 일상생활 혹은 일반 대중들에게서 떠나는 일은 없었다. 이 도시 저 도시를 순례하는 유랑전도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광야의 은둔자들은 아니었다.

예수의 공동체는 외형적인 삶의 형식에 있어서 세속의 삶과 크게 구별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공동체는 세속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세속의 삶과 엄격히 구별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였다.

2) 에센파 쿰란공동체는 선악이원론에 입각한 자신들만인 새로운 의의 공동체로 여겼다. 그들은 빛과 어두움, 진리와 거짓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였다. 쿰란 공동체는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총에 의한 “계약의 백성”으로 “빛의 아들들”이라고 생각했다. 그 외의 사람들은 “어두움의 아들들”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자기들이 빛의 아들들로서 사탄의 군대인 어둠의 아들들을 섬멸하게 될 큰 전쟁을 예비하고 있었다. 쿰란문서 중 전쟁교범에는 군대의 조직과 무장 및 전투 방식과 전략에 대한 상세한 지침이 등장한다. 이들이 섬멸하여야 할 어둠의 아들들 가운데 첫째가 로마인들이었을 것이다. 필로와 요세푸스는 에센파가 평화주의자라고 묘사하였으나, 에센파는 그들을 축출한 ‘악한 제사장’에 대한 복수의 희망이 가득차 있었으며, 실제로 서기 66-70년에 있었던 유대전쟁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에센파의 요한이 등장한다.

그러나 예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였다. 예수는 죄인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교제의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사람도 차별하거나 적대하지 않았다. 예수는 친히 개방적인 친교의 본을 보여 주었다. 예수의 가르침 중에는 전투지침과 같은 것은 전무하였고 원수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호의적이었던 것이다.

3) 에센파는 요세푸스의 지적처럼 “미래사를 예언하는 자”들이었다. 이들 문서에 다양한 시한부 종말론적 언급이 등장한다. 예루살렘 성전의 부패를 역사의 마지막 대심판의 징조로 보고, 메시아의 출현과 새 예루살렘의 성전 회복을 기대하였다. 한 문서에는 마지막 전쟁의 7년째 되는 해에 희생 제의가 다시금 회복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1QM 2:3-6). 제11동굴의 멜기세덱 문서(11Q Mechizedek)에는 세계사는 10개의 시대로 구분하고 매 시대는 490년간 지속되며, “시대의 종말”이 “열 번째 희년” 즉 창조 후 4900년이 되는 시기에 발생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요세푸스는 “그들의 예언이 거의 틀린 적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였으나 역사적으로는 그들의 시한부 종말론은 빗나가고 말았다. 예수도 임박한 종말을 선포하였으나 시한부 종말을 못 박은 것은 아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막 9:1)고 하였지만 이는 우주적 전쟁과 최후의 심판이 이뤄지는 묵시적 종말의 개념으로 한정할 수 없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당의적인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는 임박한 종말의 날이 언제 임할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막 13:32)고 단언 하였다.

4) 쿰란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마지막 날이 오면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거하지 않으시며 ‘사람의 성전’에 계실 것이라고 해석했다. ‘사람의 성전’은 사람으로 이룬 성전인 바로 그들의 공동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쿰란찬송시편에는 종말에나 나타나는 구원 상태가 지금 현재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어떠한 근심이나 탄식 그리고 어떠한 사악함도 없으며,… 당신의 진리가 밝히 드러났고, 영광으로 그리고 영원한 평화로 바뀌었네.”

‘불의한 시대’가 끝나고 ‘의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전통적인 묵시문학의 시간적 종말이 “불의한 영역”(IQH II,B; III,24)에 대립되는 “의인들의 영역”(lQH II,8; VII,14)으로 대체되는 공간절 종말을 주장한 것이다. 자신들의 공동체를 종말과 동일시되는 현재에 있어서 유일무이한 구원의 장(場)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공동체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종말의 구원공동체로 믿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특수한 공동체와 일치될 수 없는 것임에 분명하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전적으로 묵시적인 것도 전적으로 현세적인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서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가르쳤다(마 6:9-10). 에센파는 예루살렘 성소와 제의의 종말론적 회복만을 기다렸고, 열심당의 유대 왕조의 현세적 정치적 재건만을 우선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경우 하나님의 나라는 통치의 영역에 있어서 세계 안과 세계 밖을 중재하며, 체제의 초월과 체제 내의 변혁을 중재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순전히 영적인 것도 순전히 세상적인 것도 아니다. 양자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 에센파는 여러 면에서 비의적(秘儀的) 밀교적(密敎的) 공동체이었다. ‘의의 교사’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지식은 오직 공동체에 입회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에센파는 자신들의 십계명을 따로 정하였는데 그 중에는 “심지어는 목숨까지 위협한다 할지라도 에센파의 교리를 남에게 발설하지 않을 것(여덟째)”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비밀 결사체였음을 입증한다. 그리고 이 십계명을 범한 자는 추방되었으며 추방된 자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에센파의 교리를 비밀스럽게 간직하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거나 논쟁하는 것도 금지하였다. “이런 이유로 예수 전승에는 바리새파와의 논쟁은 있어도 에센파와의 논쟁은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리나 예수는 갈릴리와 이방의 여러 마을의 회당과 거리에서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의 공개된 자리에도 복음을 선포하였다. 누구라도 이 복음의 공개리에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은 공개적으로 전승되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의 이러한 공개성을 ‘비밀전승’과 구별하여 ‘사도전승’으로 지칭하였다.

6) 에센파의 영혼에 관한 교리는 이중영혼설과 영혼불멸설이었다. 하나님이 태초에 이 세상을 빛과 어두움으로 창조하셨고 그래서 이 세상에는 ‘진리의 영과 악마의 영’이 있다고 하였다. 에센파는 “육체는 부패하는 것이며, 인간의 몸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오직 영혼만이 영원한 것이며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고 믿었다. 선한 영혼은 고통이 없는 곳으로 가고, 악한 영혼은 고통스러운 동굴로 떨어진다 가르쳤다. 요세푸스는 이같은 교리는 희랍인들의 사상과 유사하다고 하였다. 영지주의나 영육 이원론적 사상의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공동체는 몸의 부활을 믿고 가르쳤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자이며, 하나님이 그의 죽은 몸은 다시 살리어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한 것이다. 에센파는 죽은 자의 몸의 부활을 믿지 않은 것이 확실하며 이점에서 예수 운동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길로 간 것이다.

7) 에센공동체는 정결목욕과 공동식사를 제의적 의식으로 준수하였다. 바리새파는 정결례를 위하여 손과 발을 씻었지만 쿰란공동체는 매일 흰 옷을 갈아 입고 두 번 목욕을 하였다. 이러한 제의적 성격을 띈 정결목욕을 공동체에 가입한 지 적어도 1년 이상이 된 사람에게만 허용하였다.

이처럼 에센파 쿰란공동체는 엄격한 금욕 공동체였다. 요세푸스는 그들이 “환락을 악으로 간주하고 감정의 절제와 금욕을 덕으로 여겼”으며, 부를 경멸하고 경탄을 자아낼 정도로 유무상통하였다고 평가 하였다. 공동체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엄격한 심사와 동시에 까다로운 생활규범을 부여하여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입단하는 사람은 입단식 때에 모세의 율법을 엄격히 지키기로 맹세하였으며 모든 소유를 공유하는 규칙을 지켜야 하였다.

쿰란공동체는 안식일 준수는 바리새파보더 더 엄격하게 준수하였다. 바리새파는 안식일의 여행거리를 1,000m로 제한 한 반면에 쿰란문서는 500m 이내로 제한하였다. 그리고 에센파는 미리 파 놓은 구덩이에 들어가 파낸 흙은 몸 위에 덮은 후 안식일 동안 꼼짝 않고 편히 누워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금식하였다. 쓸 데 없이 많이 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고기와 술을 배급 받아 배고픔을 해소하는 데에 필요한 양의 음식만 먹었다. 특히 공동식사 때에 흰 옷을 입었으며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말, 예를 들어 농담도 금지되었다. 큰 소리로 웃는 것도 금지되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에센파는 근검 절약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 할 정도로 “시간이 지나 다 낡아 떨어지기 전까지는 옷이나 신발을 새 것으로 바꾸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반면에 예수는 율법주의자나 금욕주의자는 아니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하였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예수는 ‘너희가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이렇게 말 한다’는 6가지 반명제를 통해 율법의 정신과 내용을 새롭게 선포하기도 하였다. 예수는 정결의식이나 먹고 마시는 문제에 있어서 자유로웠으며, “입에 들어가는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마 15:11)는 분명한 입장을 통해 에센파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는 다고 비난을 받았으며, 예수는 심지어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로 비난 받았다. 예수는 모든 고대 종교가 메여 있던 음식에 대한 종교적 금기를 타파함으로서 음식에 관하 전향적인 의식을 가르쳤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만의 의로움을 유지하기 위해 세속의 더러움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롭고 깨끗한 사람보다 불의하고 죄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먹고 마셨다. 에센파는 “세리와 죄인”들을 피해 광야로 은둔했으나, 예수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 11:19)가 되기 위해 속세 한 복판에서 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었다.

8) 필로와 요세푸스는 에센파 사람들이 모든 것을 공유하고 어떠한 사유재산도 갖고 있지 않는 것을 두 사람 다 한결같이 칭찬하였다. 당시 유대교 내의 어떠한 그룹도 이렇게 에센파처럼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유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 소유금지 조항과 관련하여, 자신의 소유 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거짓을 말하면 공동식사에 1년간 제외되며 식사배급량도 4분의 1이나 감량되는 처벌을 받는다는 사항도 찾아볼 수 있다(1 QS VI,24 이하). 이점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습에나 비교될 수 있다(행 2:42-47, 4:42-47).

그러나 쿰란공동체는 공동체내에 재산을 공유하면서도 계층구조에 따라 신분의 차별을 두었다. 사독 후손들인 제사장이 가장 윗 자리에 있었고 그 아래에 레위인, 그 아래에 평신도 출신의 수도사, 그 아래에 수도사 지망생이 있었다. 공동체에 입단하기 위하여 2-3년의 시험기간을 거친 다음 상위급 수도사들이 입단 여부를 결정하였다. 이러한 위계질서는 사제적 집단의 영향을 받은 까닭이라고 한다.

그리고 상급자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에센파는 항상 감독관(curatrs) 지시대로만 움직였다”고 한다. 어둠의 자녀들과 싸우기 위하여 공동체는 엄격한 계급제도와 질서를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에센파는 4계급(four classes)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즉 상급자 (the seniors) 밑에 하급자(the juniors)가 있었다. 상급자들은 어쩌다가 하급자의 몸에 닿기라도 하는 날이면 마치 이방안과 정촉이나 한 것처럼 몸을 씻었다.”

그러나 예수는 부자를 비판한 덕은 있으나 부 자체를 경멸하지는 않았으며 계급질서를 철저히 배격하였다. 예수는 달란트 비유(마 25:25-28)에서 재산을 땅에 묻어 두는 것보다는 이자를 받아서라도 이윤을 남기는 것을 나은 것으로 가르쳤다. 생산의 호율성과 부의 미덕을 가르친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추종했던 자들에게서는 사제적 영향이나 서기관적 영향을 받은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윗 자리를 좋아하는 자를 꾸짖는다(마 23; 6). 상급자와 하급자의 질서는 예수에게서 거꾸로 나타난다. 즉 위에 있는 자가 아래에 있는 자를 섬겨야 한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 20 : 26- 27).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는 이야기는 에센파의 계급질서와는 다른 윤리를 보여주고 있다.

9) 쿰란 공동체는 공동체의 규범을 위반했을 경우 엄격한 물리적인 처벌받았다. 예를 들면, 일반 모임 때 잠을 잔 것에 대한 벌칙은 10일 동안, 침 뱉는 행위는 30일, 발가벗고 다니면 6개월, 자신의 소유를 거짓 신고하면 1년 동안 제명하고 그 기간동안에는 음식물 배급을 1/4로 줄였다. 이는 겨우 목숨만을 부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예수 운동도 엄격하였지만, 어떤 잘못에 대하여 어떤 벌을 주어야 할지 그 목록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을 요구할 뿐이다. 예수의 제자 공동체에는 특별한 수련기간이나 입단식이나 입단의 맹세나 규칙적인 영성훈련이나 긴 기도의 시간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예배의식의 성격을 가진 식사나 목욕이 없었고 특별히 구별되는 복장도 없었다. 예수는 그의 공동체의 규칙이나 규약을 만들지 않았다.

쿰란 공동체는 엄격한 공동체 규율을 강제했지만, 예수운동은 상호 간의 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자발성을 보여 주었는데, 이 자발성은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는 힘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

10) 에센파가 독신으로서 결혼하지 않고 여자 없이 살아간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성인 남자 외에 여자는 어린이는 정회원이 될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에센파의 공동체에는 선천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은 들어오지 못하게 규례로 정했다. “멍청이, 미친 사람, 바보, 소경, 신체장애인, 절름발이, 귀머거리, 어린아이는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한다”(「새 계약의 규례」 xv:15-16)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절름발이들, 소경, 장애인들, 벙어리들을 고쳐 주었고,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15:29-31).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는 것은 예배에 참석했다는 뜻이다.

예수의 경우는 남성 성인 중심의 배타성은 배제되었다. 예수의 추종자와 후원자 중에는 많은 여성이 포함되어 있으며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요 4:4 이하)에서 보여 주듯이 여성을 환대했으며, 부활의 첫 목격자들도 여성이었다. 어린이에 대한 태도는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린이를 환대했으며 어린아이와 같아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였다(마 18:3). 예수는 쿰란공동체가 배제한 모든 사람들이 ‘복음의 공동체’에 들어오게 하여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요세푸스는 에센파를 유대교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인 것처럼 묘사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언행에 비추어 볼 때 에센파는 종교성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폐쇄성의 한계를 잘 드러내 보여 준다. 은둔적이고 계급차별적이고 밀의적이고 종말론적인 이 에센 종파는 유대전쟁 기간동안 로마의 침공을 받아 그 공동체가 완전히 파괴되고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2. 예수와 사두개파

사두개파는 지도계층의 제사장들과 세력 있는 가문으로 이루어진 소수의 친외세 권력층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사두개인(Sadducees)이라는 명칭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 사독(Zadok)의 후손을 지칭한다(대상 1:28-45, 5:30-41, 왕상 2:35). 특히 에스겔이 “레위의 후손 중 사독의 자손들이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 수종드는 자”(겔 40:46)로 지칭하였기 때문에 사두개파는 자신들이 합법적인 제사장 계층이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서기 9세기의 랍비 전승에는 안티고누스 소코의 제자 사독이 사두개파의 시조라고 한다.

포로후기에 페르샤의 후원을 받아 스룹 바벨과 함께 성전 재건에 앞장 선 대제사장은 사독가문의 여호수아였다. 사독가문의 제사장들은 사마리아 귀족층과 토착 유대인들의 성전재건 동참 요구를 거절하고 성전재건을 주도함으로써 사독가문의 후손들이 대제사장직을 계승하였다(벤 시라 50:18-21).

사두개파는 그 후 계속되는 헬라와 로마의 지배 하에서 왕정을 수립하지 못한 권력의 공백기 동안에 그들의 종교 정치 경제의 기득권을 유지하게 위하여 시대의 조류에 영합하여 왔다. 헬라가 유대를 지배할 때에는 성전제사가 방해받지 않는 한 유대의 헬레니즘화를 거부하지 않아 변절자 배반자로 비난받기도 하였다. 특히 예루살렘의 특권층인 대제사장들의 아들들이 헬라식의 나체경기에 참여하려고 유대인의 상징인 할례의 흔적을 제거하기 위해 에피스피즘(epispism)이라는 수술을 시행하여 유대인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마카베오상 1:14-15)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마카바 독립 이후에는 사두개 가문의 대제사장이었던 야키모스(Jacimos)가 BC. 159년 죽은 후 7년이 지난 BC. 152년 마카비 왕가의 요나단(BC. 160-142)이 대제사장직을 찬탈하자 이에 반발한 익명의 사두개파 대제사장은 그 추종자들을 이끌고 BC. 150년 경 광야로 피하여 에센공동체를 결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세푸스는 하스몬 왕가의 요한 히르카누스 1세(BC. 134-104)는 본시 바리새파였는 데 사두개파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BC. 150년 경에 익명의 사두개파 대제사장이 에센파를 결성한 이후에 예루살렘에 잔존한 사두개파가 있었다는 것이며 이들은 요한 히르카누스 역시 왕직과 대제사장직을 겸임하였으나 사두개파에게 실제적으로 성전을 관장할 수 있는 많은 권한을 부여함으로 피차의 공존을 타협한 것으로 보인다.

헤롯이 로마의 지원을 받아 왕이 된 후 그는 사두개파로 구성된 산헤드린을 해산하고 그들을 살해하였다. 헤롯은 사독가문 뿐만 아니라 마카비 독립 이후로 왕권과 대자사장직을 차지한 하스몬 왕가 출신의 어떠한 사람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지 않았고 ‘아리스토불’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이 직분을 일반 제사장 출신인 평민들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로마의 총독정치가 시작되면서 산헤드린이 재건되고 로마인들이 그들에게 종교적 자치를 허용한 이후 사두개파 사람들은 “정복자들과 완전히 야합”하였다.

예수 시대에도 “대제사장과 그 파”를 가르켜 사두개파라 지칭하였다. 제사장과 성전 경비대장이 사두개파로 등장한다(행 4:1-5, 5:17). 대제사장은 대부분이 사두개파가 맡았으며 산헤드린의 구성원도 대부분이 이들이었음을 암시한다.

사두개파는 유대의 종교 및 정치의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을 지지한 당파로서 기원전 2세기에서 예루살렘멸망(후70)에 이르는 기간에 세력을 가졌던 당파로 제사장적 특권을 유지하려 했던 귀족계급이었다. 따라서 종교적으로는 보수적이었으나 아주 정치적 색채가 강했으며 비교적 소수였다. 교양도 있었으므로 그리스 문화에 대하여 개방적이고 세속적이었다.

사두개파의 여러 특징을 통해 예수와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사두개파는 거만하고 배타적인 권력지향적인 소수의 귀족층으로서 매우 정치적인 성향을 지녔다. 요세푸스는 “그들이 대부분 고관 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은 성전의 중심의 기득권을 수호하며 현상유지하려는 보수적 현실주의자이다. 그들의 권위는 제의적인데서 비롯되었으며 성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요세푸스는 사두개파를 희랍의 에피큐리안과 상응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일반 백성들과 거의 접촉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영향을 행사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사두개파와 달랐다. 예수는 권력의 중심부에서 소외된 갈릴리 변방 나사렛 출신의 가난한 목공이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요 1:40)는 당시의 금언은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의 신분이 조롱받는 변방의 민중들이었음을 드러낸다. 예수의 제자나 추종자들도 주변부 인물들로서 사두개파는 하나도 없었다.

사두개파는 권력 지향적이었으나 예수는 섬김 지향적이었다. 사두개파는 식민지 외세와 결탁하여 권력을 지향하고 행사하는 귀족층으로서 백성을 섬겨야 한다는 계약공동체의 정치적 이상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이방인들의 통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막 10:42)고 하였다. 그리고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2) 사두개파는 성전중심의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반민족 친외세적인 태도도 서슴치 않았다.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 치하에서 헬라화를 지지했으며, 뒤이어 헤스몬 왕조와 헤롯 왕조뿐만 아니라 로마 총독과도 완전히 결탁하여 로마의 질서에 순응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반대 세력에 대하여 냉정하였다. 그들은 성전에 성전 경비대(temple polis) 두고 이들을 권력 수행의 도구로 삼았다. 현상유지를 통해 현실적인 기득권을 수호하려했던 사두개파는 기존질서를 변혁하려는 마카비파의 독립항쟁이나 예수 운동에 대하여 가혹하였다. 그리고 사두개파는 현세의 귀족 신분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내세의 신비에 대해 무관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는 권위 있고 새로운 가르침을 통해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 위해 율법, 안식일, 성전과 성전 제사에 대한 기존의 태도를 전향적으로 새롭게 설정하였다. 그래서 최근 보그(M. Borg)와 같은 신학자는 예수를 ‘전복적 지혜의 교사’로 규정한다. 예수는 역사상 어떤 종교 지도자보다도 체제 변혁적이었으므로 후기 유대교의 모든 체제를 다 바꾸어 새로운 기독교 체제로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한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였던 것이다.

3) 사두개파는 종교적으로도 엄격한 보수주의자였다. 그들은 성문화(成文化)된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준수 하지 않았다”고 한다. 모세 오경만을 경전으로 인정하였다. 그들은 제사장의 전통을 앞세워 구약성서의 예언자적 개혁적 전통을 무시했고 따라서 예언서를 하찮게 여겼다. 율법만을 인정하고 선조들의 구전전승을 부인하는 경전원칙을 고수하였다. 모세의 전통을 고수하여 예배의식의 개선이나 교리적 개혁도 반대하였다. 그들은 단지 오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부활을 부인했다(마태 22:23 병행, 사도 23:8).

그러나 예수는 사두개파의 부활에 대한 반론을 일일이 비판하였으며(마 22:30; 막 12:25; 눅 20:36)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 16:20) 등에서 내세의 삶과 지옥의 형벌에 대하여 자세히 가르쳤으며, 생전에 자신의 부활을 세 번이나 예고하였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전 15:14).

4) 사두개파는 천사들이나 영들도 믿지 않았다(행 23:8).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데스(Hades)에서의 심판과 형벌도 믿지 않았다. “영혼은 몸과 함께 죽는다”고 생각했다. 요세푸스는 그 까닭이 운명의 지배나 세상사나 인간사에 대한 신의 중재까지 부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개척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무한한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요 인본주의자로 묘사되고 있다.

반면에 예수는 철저히 영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으로 등장한다. 성령이 충만하여 그의 공적생애를 시작하였고, 인간의 자유의지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가르쳤다. 그래서 예수의 선구자인 세례요한 사두개파를 ‘독사의 자식’이라고 꾸짖었으며(마 3:7), 예수는 ‘사두개파의 누룩’ 즉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조심하라고 경고하기도 하였다(마 16:12).

사두개파는 귀족출신의 제사장 가문이었으므로 그들에게는 자신의 제사장적 특권의 유지 및 쟁탈이 민족적 자존이나 종교적 신앙보다 우선되었다. 물론 이러한 특권에는 성전 예배의 주도라는 종교적 이해관계와 이스라엘 본래의 제사장적 신정정치의 구현이라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사두개파는 외국의 지배가 그들의 제사장적 특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구약의 오경만을 경전으로 고집한 것도 경전 해석의 특권을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사두개파의 이러한 입장은 열심당과 바리새파의 반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사두개파는 교양 있는 지식층이었으며 외국문물에 대하여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권력의 중심부를 맴도는 극소수의 정치적인 인물로서 백성들의 환심을 사지 못했다. 따라서 주후 66년 로마를 대항하는 유대전쟁이 일어나자 일차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고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하자 그들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3. 예수와 바리새파

바리새파는 지체 높은 제사장 가문과 대조적으로 일종의 중간 계층을 대변하였다. 주로 율법을 연구하는 서기관들, 예루살렘 성전 제사에 소외된 하급 제사장들 그리고 율법에 따라 살기를 다짐하는 중산층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들은 사두개파와 달리 성전보다도 바벨론 포로기에 페르시아에서 시작된 회당을 그들의 종교 활동의 중심지로 여겼다. 따라서 성전에서의 제사행위 이상으로 회당에서의 공부와 기도와 율법을 읽고 토론하며 해석하는 것을 중요한 종교의식으로 발전시켰다.

바리새파는 그 기원에서 보면 마카비 독립 운동에 참여했던 ‘하시딤’(Hasidim) 즉 ‘경건한 자’(1Makk 2:42 등)들의 후예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에 의한 유대교 탄압에 대항하여 마카비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순전히 조상들의 신앙 유전을 지키기 위한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카비 가문이 세운 하스몬 왕조를 세웠으나 그들은 권력유지와 쟁탈의 정치적인 관심만큼 율법준수와 제의 집행에 대한 종교적인 열정을 보여 주지 못했다.

바리새(parush, perish)는 구별된 자라는 뜻이다. 바리새파가 이러한 명칭을 얻게 된 것은 다음 몇 가지 역사적 계기가 있었을 것으로 주장된다.

첫째는 하시딤의 후예 중에 BC 163년에 일어난 마카비의 무력투쟁에 참여하는 것에 반대한 이들이 처음으로 바리새 즉 분리주의자(perushim)로 불리었을 것이다.

둘째로 마카비 가문의 요나단이 BC. 152년 율법을 어기고 왕권과 함께 대제사장직을 장악함으로서 다수의 하시딤들이 하스몬 왕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함으로서 분리주의자로 불리웠을 것으로 추정한다.

셋째로 바리세파들이 페르샤의 이방적인 신앙 즉 내세와 부활 신앙을 도입하였다는 사두개파의 비난에서 바리세 즉 페르샤파(persha)라는 용어가 생겼을 것이다.

넷째로 바리새파들이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부정한 자들인 ‘땅의 사람들’(am haares)와 자신들을 ‘거룩한 자’로 구별하면서 바리새라고 불렀을 것이다.

어쨌든 요세푸스에 의하면 바리새파와 하스몬 왕가의 갈등이 점차 증폭되기 시작한 것으로 묘사한다. 요한 히르카누스 1세(John Hyrcanus I, 135-104 BC.)가 자신의 이름을 희랍식으로 창씨 개명을 하는 등 친헬라화 정책을 추진하고 또한 자신을 영도자, 대제사장, 예언자로 자처하자, 히르카누스의 모친이 전쟁포로였으므로 혈통의 순수성이 의심되는 자가 대제사장이 될 수 없다고 바리새파들이 거세게 항의하였다고 한다.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BC. 103-76) 역시 선왕 히르카누스의 전례에 따라 왕과 대제사장직을 겸직하였다. 기원전 90년 장막절에는 얀네우스가 대제사장직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부적합하라고 바리새파들이 항거하자 얀네우스는 분개하여 그 주모자 6000명의 동족을 살해하였고,

기원전 88년에도 얀네우스의 폭정에 항거하는 유대인 800명을 십자가형에 처하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 가족들을 학살하는 잔인함을 보여 주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8000명의 반란자들이 해외로 도피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바리새파의 세력이 주춤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마카비 가문이 왕권과 더불어 대제사장의 권한을 모두 장악한 것에 대해 바리새파의 반감이 극에 달하였다. 마침내 마카비 가문과 하시딤 사이의 협력관계가 적대관계로 돌변하였고 그들은 결별하였다.

아마 이때에 와서 대제사장 계층과 바리새파 사이의 분열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마카비 가문의 히르카누스가 왕이면서 동시에 대제사장직을 겸직한 것에 대해 바리새파는 종교적인 이유로 강력하게 항거한 것이다. 사이먼(M. Simon)에 의하면 “뜻 있는 유대인들은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제사장직과 군주체제의 분리가 다윗 시대부터 정해진 건드릴 수 없는 원칙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바리새파는 이러한 보수적인 정교분리의 입장을 충실히 따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얀네우스의 뒤를 이어 살로메 알렉산드리아(BC. 76-67)가 정권을 잡은 후 그의 아버지 히르카누스에 폐지된 모든 율법들이 회복되자 바리새파의 항거가 종식되었다고 한다. 이로서 바리새파와 살로메 알렉산더 사이의 정치적 대타협이 이루어져서 정지적인 권한과 종교적인 권한을 구분하여 바리세파에게는 종교적인 권한을 대폭 이양함으로서 바리새인들은 더 이상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요세푸스는 바래새인들은 시리아 총독 구레뇨의 인구조사와 납세 정책에도 순응하였으며, 백성들이 로마에 반항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만류하기도하였다고 한다.

헤롯이 정권을 잡은 후부터는 헤롯은 산헤드린을 해산하고 사독 가문에서 종신제로 계승 되었던 대제사장직을 자기 마음대로 아무나 임면(任免)하고 말았다. 따라서 바리새파의 정치적 영향력은 급감하였고 그들의 정치적 좌절감은 일반인들에 대한 종교적 영향력 강화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기원전 4년 헤롯이 죽은 후 유대가 셋으로 나눠지고 그나마 이름뿐인 헤롯의 세 아들들의 실정이 계속되자 바리새파는 허구적인 정치적 독립을 실제적인 종교적 자율로 바꾸려고 시도하였다. 산헤드린의 바리새파 지도자들은 50명의 대표를 로마에 보내어 로마황제에게 유대지역을 차라리 시리아에 합병하여 시리아 주재 로마총독의 통치를 받게 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로마에 거주하던 8,000여명의 유대인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그들은 다시 한번 정교분리에 입각하여 정치적 독립을 포기하는 대신 산헤드린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인 자치권을 확보하려는 대타협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기원 후 30년부터 입장을 바꾸어 완전히 종교적 독립을 위해 유대민족주의 운동에 편승하였으며, 일부 바리새파는 60년대부터는 열심당과 함께 유대 독립전쟁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열심당의 민족주의는 정치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바리새파의 민족주의는 철저하게 종교적 관점에 시도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벨론 포로 후에 널리 보급된 회당이 예수 시대에는 바리새파의 거점이 되었다. 회당의 지도자들은 자연히 율법에 능한 랍비이거나 율법학자이었다. 이들 서기관과 회당장의 대다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으며 회당과 각종 랍비 학교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훨씬 막강하였다. 예루살렘 성전과 달리 회당은 개인들과 개인들의 구원에 초점을 둔 바리새인들의 주장에 아주 잘 맞는 고도의 비중앙집중적인 기관이었다. 제사장 계층과 랍비 계층의 기능의 차이는 결국 두 가지 종교제도 즉 성전과 회당 사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당시 바리새파에는 소수의 제사장도 있었지만, 도시와 시골에 사는 농민들, 상인들, 수공업자들이 대부분이었고 요세푸스는 그 수 가 6,000명 정도라고 하였다.

복음서에는 예수와 바리세파 사이의 여러 논쟁이 있었음을 전해준다. 예수와 통치자들과의 갈등이 경시되어 온 것과 대조적으로 예수운동과 바리사이와의 갈등은 서슴없이 인정되어 왔다. 예수운동과 바리새파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되는 갈등은 마가복음의 묘사에 잘 나타나는 있다. 마가는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감시하고, 비난하고, 마침내 시험하고(막 2:6, 16-18, 24, 3:2, 22, 7:1-5, 8:11), 예수에게 올가미를 씌워 예수를 파멸시키려고 기도하는 예루살렘 권위자 자신들, 고위사제들, 원로들, 서기관들에게 예수를 넘겨주는 장면(11:18, 27, 14:1, 43, 15:1)에서 바리새인들과 예수 사이의 갈등을 묘사한다.

예수의 적대자였던 바리새파의 여러 특징을 통해 예수와 차이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유대인들의 지배적 에토스는 “사제들의 왕국과 거룩한 민족”(2베드 2:19 공동번역)이라는 표상에서 드러난다. 바리새파는 이러한 에토스에 충실하였다.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라는 긍지를 더 높이여 주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우주와 세계의 중심축으로 여겨졌다. 성전을 화려하게 꾸미고 성전 제사와 성전 순례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예수 시대의 성전은 이스라엘을 성별하는 거룩의 상징인 동시에 종교적으로나 정치 경제적으로 차별과 지배와 착취와 상징이 되었다. 예수는 이러한 성전의 체제의 근본적인 모순을 직시하고 성전을 정화하고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여 성전을 모독한 자라는 죄명으로 산헤드린의 재판을 받고 십자가 처형된 것이다.

2) 바리새파의 지배적 에토스나 문화적 패러다임은 정결로 이해되는 거룩성이었다. 거룩성은 장소나 사물, 시간들 사이뿐만 아니라 개인들이나 집단들 사이에서 예리한 경계를 형성하고 있는 정결체계로 규정된 사회적 구조를 탄생시켰다.

바리새파는 비거룩한 사람들 즉, 부정하고 불의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모든 죄인들과의 모든 접촉을 피하였다· 세리와 창녀들도 죄인에 속하였다. 질병은 죄의 결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병자와 불구자들도 죄인으로 분류되었다. 율법을 모르는 무할례자인 이방인들도 비거룩한 자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죄인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한 식탁에 앉아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막 2: 14-17). 바리새파에 속하지 않은 자들과 상종하지 않는 것을 그들의 종교적 의무로 여겼다. 정결에 관한 계명을 보다 더 철저히 지키기 위하여 그들은 함께 모여 식사를 하였다(녹 7 : 36, II: 37 이하 참조).

죄인으로 취급 받는 ‘세리와 창녀’가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 간다(마 21:3)는 예수의 선언은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므로 당시의 민중을 경악하게 하고 바리세인들을 격분하게 하기에 족한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고 반박하였다.

3) 거룩이라는 말은 ‘정결하여 구분된다’는 뜻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9:2)는 명령을 문자적으로 준수한 바리새파는 비거룩하다고 생각되는 외부 세계로부터 자신을 구분하기 위해 ‘거룩한 차별성’을 체계화하였다. 거룩을 강조한 바리새파의 율법주의적 경건성은 물론 비정치적일 수 없었다. 이방의 정치적 문화적 침투에 맞서 유대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인 전략으로 택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방어적 전략은 동시에 차별과 적대의 전략이기도 하였다.

예수는 바리새파의 경건성이 지니는 이 엄청난 모순을 직시하고 예리하게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명제를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하라.”(눅 6:36)는 명제로 대체한 것이다. 거룩의 이름으로 차별하였던 대상을 자비의 이름으로 포용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거룩한 차별성의 패러다임’을 ‘거룩한 자비심의 패라다임’으로 전환시킬 것을 역설한 것이다. 진정한 경건과 거룩은 이러한 차별과 적대를 해소하는 데서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것이 예수의 대안이었다.

4) 바리새파는 일상생활에서도 정결의식을 강조하였다. 부정한 것과 접촉하거나 신체에서 부정한 것이 유출된 사람은 종교적 정결을 상실하였으므로, 정결의 목욕을 하거나 일정한 기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식사기도를 드리는 손을 정결케 하기 위하여 식사시 마다 손을 씻었다(막 7:3 이하 참조).

그들은 사람의 정결뿐 아니라 식사에 사용하는 그릇의 정결도 유의하였다. 쥐가 접시로 지나가거나 생선 뼈 하나가 그릇에 떨어져도 부정 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잔과 접시도 정결하게 유지되어야 했다(마 23: 25 이하 참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떡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아니하는 것도 시비하였다(마 15:1-12, 막 7:1-23). 이에 대해 예수는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마 15:11)이라고 함으로서 그들의 말문을 막았다.

5) 바리새파는 율법주의적 엄격주의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요세푸스는 바리세파는 만사를 하나님의 섭리라고 돌리면서도 “인간의 의지는 악을 행할 수도 있고 선을 행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믿는 자들로 묘사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무거운 짐을 날라 준다든지, 남의 집 장작 을 쪼개어 주는 등 선한 일을 행하면 그들의 죄가 상쇄 받고 의를 얻게 된다고 믿었다. 그들의 도덕적 행위에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었진다는 정태적인 율법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타이센이 지적한 것처럼 전체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규범들을 강화시켜 놓고 그것을 실생활에 적용하여 실천하지 않아 스스로 모순을 일으켰다.

예수는 바리세인들의 이러한 언행불일치를 분명히 파악하고 통렬히 비판하였다. 예수에 의하면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 자들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지만 자신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다.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行)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行爲)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行)치 아니하며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 공동번역).

6) 바리새파는 모세의 율법 외에도 율법에 대한 조상의 해석의 전승까지도 문자적으로 엄격하게 지키려는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요세푸스도 “바리새파는 모세의 율법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조상들의 전래의 수 많은 규칙을 백성들에게 부과하여 지키게 하였다”고 증언한다. 이러한 ‘장로들의 유전’(막 7:3)은 모세, 여호수아, 예언자를 거쳐 회당의 지도자들에게 전수된 것으로서 그 권위를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 바쁜 일반 서민들은 이 모든 율법을 알고 이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율법을 모르는 족속’과 ‘율법을 지키는 못하는 무율법자들’을 양산하였다.

따라서 예수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아는 것을 하나의 특권으로 여기고 겉으로 꾸미기를 좋아하는 외식(外飾)하는 자들로 묘사한다.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마나 팔에 성구 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메달고 다니며 웃단에는 길다란 술을 달고 다닌다.”(마태 23:5-6 공동번역)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윗자리에 앉기를 즐기면 대접을 받기를 바라는 위선적인 인물로 비판한다.

7) 바리새인은 십일조 계명을 글자 그대로 지키고자 하였다. 레위 인이 먹고 살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쳐야 한다는 십일조 계명을 글자 그대로 지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바리새인 들은 땅에서 나는 소산물은 물론 돈을 주고 사는 물건의 십분의 일도 바쳐야 하며, 조미료와 채소의 십분의 일도 바쳐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십일조의 규정을 정확하게 지키기 위하여 그들은 회원 상호 간에 물건을 사고 팔았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눅 18:12 공동번역)는 바리새파의 기도는 이러한 이들의 생활태도를 반영한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준수할 뿐만 아니라, 율법의 보다 중요한 정신을 망각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그것은 마치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것처럼 우선순위를 반전시킨 어리석은 자들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23, 눅 11:42 )

8) 바리새인들은 매주 두 번, 곧 월요일과 목요일에 자발적으로 금식하였으며, 구제금을 희사하였으며, 하루에 세 번씩 기도의 시간을 지켰다. 길을 가다가 기도시간이 되면, 길가에서 몸을 예루살렘 성전 쪽으로 돌리고 기도하였다.

요한의 제자나 자신들처럼 자주 금식하고 기도하지 않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비난하였으나, 예수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눅 5:33)고 반문하였다. 바리새인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은 그들의 겉과 속이 다른 거짓과 위선이다. 그들은 ‘회칠한 무덤’(마 23:27)처럼 철저히 겉으로만 꾸미는 외식(外飾)하는 자들이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마 23:25, 눅 11:39)

9) 예수와 바리새파와 가장 큰 논쟁은 하나는 안식일 준수에 관한 것이었다. 안식일 논쟁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을 수 있느냐는 것과 안식일에 병자를 고칠 수 있느냐는 것으로 집약된다. 예수의 제자들이 시장하여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마 12:1, 눅 6:1)과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갈 때 제자들이 길을 열며 밀 이삭을 자른 것(막 2:23) 두고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고 비난하였다.

안식일에 대한 이들의 태도에서 구전을 중시한 그들의 종교적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안식일을 노동금지일로 엄격하게 지킨 바리새파는 구전에 의거하여 ‘노동에 해당하는 것’으로 규정한 39개 항목을 문자적으로 지켰다. 이러한 구전에 따라 노동으로 규정된 안식일에 밀 이삭을 비벼 먹는 일,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 등을 에 대하여 예수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예수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막 2:27)하시고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막 2:28, 눅 6:4)이라고 하였다.

안식일에 예수가 회당에서 손 마른 자(마 12:8-9, 막 3:6, 눅 6:6)를 고쳤을 때 바리새인들이 헤롯당과 함께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기도 하였다. 바리새파의 한 지도자 집에서 안식일에 식사하는 동안 고창병(蠱脹病 또는 수종병자)에 걸린 자를 치유한 다음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중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눅 14:5)고 반문하였다.

예수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 4, 눅 6:9, 마 12:12)고 반문하니 바리새인들이 오히려 잠잠하였다.

10) 바리새파 사람들은 페르시아와 조로아스트교의 영향을 받아 천사론, 악마론, 종말론, 예정론, 영혼불멸과 육체의 구원, 선악간의 상급 등을 신봉하였다는 점에서 종교적인 열정이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이 역사는 하나님이 지배한다고 믿었다. 지금은 비록 이방인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로 메시야가 도래하여 다윗의 왕국을 땅 위에 영광스럽게 재건되고 성전예배도 회복되리라고 믿었다. 블렉(M. Black)에 의하면 그들도 역시 경건하게 죽은 자들이 메시야의 도래와 함께 이 지상의 영광에 하기 위해 부활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기대는 현세적이었으며 내세적이 아니었다고 한다.

11)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바리새파는 정치적인 문제와 종교적인 문제를 철저히 분리시켰다. 그들의 종교적인 삶이 손상되지 않는 한 본질적으로 비정치적인 운동을 형성하였다. 이런 까닭에 바리새파는 오늘날 정교분리주의와 상통한다. 열심당이 정치적인 의를 강조한 반면에 바리새파는 율법적인 의를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예수는 바리새파의 이러한 모순을 명확히 지적하였다. 이들은 보면 예전의 선지자와 의인을 칭송한다하면서 현재의 선지자와 의인을 박해하는 정치적 의미에서 불의한 자들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마 23:13-31)

호슬리는 이런 비판이 예수의 추종자들에 의해 보존되고 정교화된 것이긴 하지만 예수로부터 유래한 것이므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마태의 특수자료 전승인 마태복음 23장은 적어도 예수의 추종자들이 바리새인들의 통상적인 권위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드러낸다.

예수는 이처럼 바리새파를 격렬하게 비판하였으므로 바리새인들이 결국 예수를 제거하기로 모의하고(요 11:47), 체포명령을 내리고(요 11:57), 체포하여(요 18:3) 빌라도의 법정으로 이송하고 십자가 처형을 받도록 한 장본인들이다. 예수의 추종자들을 유대 회당에서 축출시킨 자들도 바리새인들이었다(요 12:42).

이런 배경에서 보면 예수의 처형 이후 열렬한 바리새파인 사울이 이미 팔레스틴의 경계를 넘어 뿔뿔이 흩어진 예수운동을 박해하는 데 정열적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갈 1:13-14, 행 8:1-3).

4. 예수와 열심당(zealots)

요세푸스가 제4의 학파라고 부른 열심당은 잘 알려진 것처럼 주후 67-70년 사이에 로마에 항거하여 유대독립을 위해 무력 전쟁을 주도한 구국투사들이다.

열심당은 오직 야훼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참된 주권자이시면, 그분만이 성지 예루살렘의 참된 주인이시며, 그들이 사는 땅이 하나님께서 영구적으로 그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이교도들이 그 땅을 차지하여 권력을 행사하고 성전을 간섭하는 것에 대하여 방관하거나 협조하거나 타협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이며 유대인이기를 포기하는 것으로 보았다.

열심당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위하여 필요하다면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그들의 땅에서 이교도의 세력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주권과 유대인의 왕권과 그들에게 약속된 땅을 회복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열심당은 그들의 행동의 전형을 모세시대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열심 때문에 제사장 아론의 증손자 비느하스가 미디안의 여자와 음행한 시므리를 창으로 찔러 죽인 사건(민 25:1-15)과 주전 167년경 제사장 맛디아가 유대교에 대한 열심에서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의 유대교말살 정책에 항거하여 독립전쟁을 일으킨 사건에 둔다(마카베오 상 2:19-28).

요세푸스는 갈릴리 사람 유다(행 5: 37 참조)를 “열심당의 창시자”이며 그들은 “하나님 만을 주로 섬기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아켈라우스왕 때 구레뇨(Qurinius)의 인구조사령을 통한 납세부과가 유대인을 노예로 전락시키려는 사악한 정책으로 간주하고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촉구하였기 때문이다.

이 반란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비천한 계급 출신들”이었고, 갈릴리 유다가 체계적인 저항 조직을 결성한 것은 아니지만 이후의 일어난 많은 저항 집단의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요세푸스의 기록을 살펴 보면 예수가 출생한 이후 유대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즉 BC. 4년에서 AD. 65년 사이에도 이미 7번에 걸친 농민 반란이 있었다고 한다.

52년부터 60년 사이에 시카리파 (Sicarii)라고 부른 집단이 등장하게 된다. 그들은 옷 속에 짧은 단도(라틴어로 sime)를 품고 군중들 속에 섞여서 적대자를 살해하는 자객(행 21:38)불이었는데, 폭력과 테러를 일삼는 과격한 무장 독립투사라고 볼 수 있다. 66년 므나헴(Menahem)의 주도 하에 열심당은 마사다(Masada)를 포함한 여러 요세를 탈환하고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을 점령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열심당은 먼저 부유하고 권력이 있는 저명한 유대인들과 제사장계급 및 왕족을 공격 했다.그리고 채무증서를 불태우고, 제비뽑기에 의해 새로운 대사제를 선출하고 새로운 화폐를 주조한 것으로 상징되는 대안정부(alternative government)를 조직하였다.

당시의 유대는 이처럼 비적들이 들끓었다. 누구든지 반란자들의 두목으로서 왕이라 칭할 수 있었으며, 그 사회를 파멸로 몰아가면서, 몇몇 로마인들에게 골칫거리가 되었지만 대단한 정도는 아니었고, 오히려 열심당과 강도 때의 두목들이 삼파전(三派戰)이 되어 동족들에게 엄청난 살육을 초래하였고 성전의 성소마저도 피로 물들였던 것이다.

열심당들은 정치적인 정의를 실현하려는 실천적 변혁주의자이며, 이방인들이 식민지 정책에 대항한 무장 독립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바리새파의 정교분리나, 사두개파의 정치적 타협이나 에센파의 정치적 무관심 모두 비판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소극적 저항에서 적극적인 태러리즘(terrorism)으로, 순교로부터 무장투쟁”으로 나아간 것이다.

라이마루스 이래로 브렌돈을 비롯한 몇몇 학자들은 예수는 당시 유대교 4대 종파 가운데 열심당과의 유사성이 가장 많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몰트만에 의하면 예수와 열심당 사이에 여러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점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하였다.

예수와 열심당의 공통점으로 볼 수 있는 요소들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예수는 열심당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예수의 제자들도 열심당의 궁극적인 목표인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기대하였다.(마 19:28, 눅 22:28, 24:21, 행 1:6)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방식에 대한 입장은 서로 달랐다.

2) 복음서 자료에는 예수의 바리새파에 대한 논박은 발견되나 열심당에 대한 논박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예수는 열심당이 전형적으로 사용한 용어를 사용하여 헤롯을 여우라 칭했다(눅 13:32). 몰트만은 예수의 제자 중에 열심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열심당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예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열심당 시몬(막 3:18, 눅 6:15)이었다. 열심당 시몬 외에 바요나 시몬 베드로도 열심당일 가능성이 있다.

3)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정화는 제자들과 유대주민 및 로마 당국자들에게는 열심당의 시위적인 행위로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예수 자신의 성전 정화(막 11:15 이하) 역시 열심당의 기습적인 시위형태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의 성전 정화에 따른 후속 조치가 없었고, 제자들이 함께 가담하지 않은 점등으로 보이 열십당의 기습시위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최근의 많은 학자들은 성전 입성이나 성전정화는 열심당의 기습적인 시위가 아니라 예수의 성전 정화와 심판에 대한 예언자적 상징적 행위로 해석한다.

4) 예수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눅 12:51)고 한 적이 있다. 최후 만찬 후 제자들에게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눅 22:36)하신 것과 제자들이 “여기 칼 두 자루가 있다”고 대답한 것에 비추어 예수가 열심당처럼 무장을 독려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게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체포될 때 베드로가 이 칼을 사용하여 성전 경기병 말고의 귀를 자른 것(요 18:10) 것은 열심당의 폭력적인 행동 양식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도 무력을 행사하라는 직접적인 전략적 지침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소명에 수반되는 갈등을 예배하라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해석된다.

5) 예수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INRI)’이라는 정치적인 죄명에 부과되었고, 종교범과는 달리 투석형이 아닌 다른 ‘민란에 가담함 강도’ 즉 열심당과 함께(막 15:7)과 모반자로서 정치범의 처형 방식인 ‘십자가형’을 당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십자가 처형 역시 유대인의 모략과 빌라도의 오판에 의한 것으로 이해된다.

예수와 열심당 사이에 이러한 유사점 못지 않게 많은 차이점도 분명히 드러난다.

1) 열심당은 닥아 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로마의 식민지 통치를 종식 하고 유대왕국을 재건하는 것으로 성취하려고 하였다. 열심당의 하나님의 나라는 대중적으로 선출된 성직자 정치(hierocracy)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전쟁 기간 중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제비를 뽑아 제사장을 선출함으로써 사독 계열의 지도력과 제비뽑기에 근거한 다윗의 왕국의 전통을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운동에 참여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신정정치는 비록 평등주의적이라 하더라도, 성직자 정치라는 견지에서 이해했다는 암시는 어디에도 없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는 제비를 뽑아 왕을 세운 것처럼 옛 다윗 왕정과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것과는 달랐다. 예수는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선취하려고 하였다.

2) 예수는 열심당과 달리 적대자나 율법 위반자의 처형 및 율법 없는 자의 추방을 통해 이스라엘의 정화를 주장하지 않았다. 예수는 열심당의 편협한 국수주의 거부하였으며, 이방인들의 도시인 두로와 시돈과 데가볼리에 가서도 전도하였고, 이방인의 치유와 구원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로마의 백부장의 하인과 수로보니게 여인을 치유하였다.

3) 열심당은 일종의 율법주의적 엄격성에 비추어 보면 자기 의를 이루려는 열정에 있어서는 바리새파와 다름이 없었다. 극우적인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적인 의를 이루려고 하였지만 반면에 극좌적인 열심당의 정치적 의의 실천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바리새파 입장에서는 창녀가 가장 대표적인 반율법적인 죄인이었고, 열심당의 입장에서는 세리가 식민지 경제 수탈의 앞잡이였음으로 가장 반민족인 죄인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예수는 더 근본적으로 양자가 지닌 자기 의를 주장하는 율법성을 비판하였다. 예수에 의하면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자기 의와 달라서 정치적 죄인이나 율법적인 죄인을 모두 의롭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리와 창녀가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하였다. 의인을 이롭게 하는 것은 인간의 자기 의이고 죄인을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바리새파의 율법적 복종과 열심당의 정치적 복종 그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양자가 지닌 자기 의를 맹신하는 율법주의를 공격한 것이다.

4) 예수의 제자 중에는 과거의 열심당 출신도 있었지만, 열심당으로서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세리 마태도 있었다. 예수는 반민족주의자요 자기 백성을 세금으로 수탈하는 세리장 삭게오도 선대하고 그의 집에도 구원이 임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세리는 로마 식민지 지배 세력에협력함으로서 바리새파와 열심당의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들 죄인으로 취급되는 ‘세리의 친구’로 비난 받으면서도 세리들을 환대하고 식탁교제를 나누었다.

5) 열심당은 로마의 인구조사와 과세정책에 반대하면서 촉발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에 대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막 12:17)라고 명확한 확답을 회피하였다.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던 이 말씀은 열심당이 투쟁적인 상황에서 백성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예수를 자기 편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 듣고 싶어했던 대답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6) 보른캄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예수가 “세례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력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사용하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점령하려고 한다”(마 11:12)라는 한 말씀은 열심당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폭력적 수단 사용에 한 분명하고도 예리한 거부일 것으로 본다. 타이센도 이러한 입장에 동조한다.

7) 무엇보다도 폭력에 대한 예수의 태도 열심당과 전적으로 달랐던 것으로 이해된다. 예수는 로마에 대한 항쟁을 ‘거룩한 전쟁’으로 미화하고 폭력적인 투쟁을 선동하지 않았다. 예수는 폭력의 악순환을 거부하였다. 그들을 억압하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 26:52)고 하였다. 예수의 가르침은 기본 맥락은 사랑과 평화와 공의였다. 예수는 평화주의자였으며 원칙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폭력주의자는 아니었다.

로마의 식민지주의의 구조적 폭력 및 유대 왕국 자체의 제도적 폭력에 대한 열심당의 대응은 시위 약탈 테러 등의 저항과 항의, 협박 투옥 실종과 고문 처형 등의 억압, 마지막 단계는 반란(revolt)으로서 이어졌고, 결국은 폭력의 악순환을 가져왔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적 방식이 극대화되어 66년 경에 유대전쟁이 일어났지만 결국 로마의 더욱 잔인한 진압 폭력에 의해 유대는 멸망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예수 운동은 새로운 평화 운동으로 유대 멸망 이후에도 하나님의 나라 운동의 명맥을 세계화하여 오늘 날까지 이어 온 것이다.

6. 예수와 유대교 4대 종파

이러한 유대교의 4대 종파의 태도는 저마다 중대한 취약점을 지니고 있어 유대교 내애서도 서로 갈등관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사안에 대해 대립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 주기도 한다. 뵈젠과 타이센 및 메르츠가 구체적으로 유대교 4대 종파의 차이를 도식화한 것을 종합하여 재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 유대교 4대 종파의 비교

 



많은 학자들은 예수와 유대교에서 출발하였으나 당시의 유대교의 4대 종파 어느 파에도 속하지는 독자성과 차별성을 보인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한스 큉은 예수는 통상적인 규범을 깨드렸으나 유대교의 어떤 종파에도 편입되는 않은 다음과 같은 인물로 묘사한다.

“정치적 종교적 기성 권력체제와 충돌했으나(사제도 신학자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정치적 혁명가도 아니었다(오히려 폭력 포기의 설교자였다). 외면적이거나 내면적인 떠남(탈속)의 주창자도 아니었고(금욕고행자나 쿰란 수도자가 아니었다), 경건한 결의론자도 아니었다(‘계명에의 기쁨” 으로 충만한 바라사이파가 아니었다).”

분명히 예수는 그 당시 유대교 4대 종파가 택할 수 있는 4가지의 대안의 평균적인 의식(average consciousness)에 뛰어 넘어선 것이다. 예수는 그의 언행을 통해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갈등극에 달한 상황에서 새롭고 전향적인 의식을 제시한 새로운 종교의 대안이었다.

그래서 한스 큉은 이런 점에서 예수는 세계 4대 종교의 대표자와도 분명한 차별성이 드러난 다고 하였다.

“이 나자렛 사람은 인도의 신비주의 전통과 중국의 깨달음의 전통의 위대한 대표자들(붓다와 공자 등)과 다를 뿐 아니라,
근동 셈족에서 기원하는 다른 두 종교의 대표자들(모세와 무함마드)과도 다르다.”고 하였다


출처 : https://onefeel.tistory.com/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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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41011 2019-08-04T12:09:03Z 2019-08-04T12:14:00Z 청교도 신앙

미국의 뿌리 청교도의 신앙과 삶(1)
청교도운동의 시작과 발전

1. 청교도는 언제 시작되었는가?

청교도(淸敎徒, Puritan)란 영국의 종교개혁자들과 그의 후예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청교도 개혁운동은 영국의 종교개혁 운동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청교도들은 영국 종교개혁의 완성의 주역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중세교회 안에서도 선구자들의 종교개혁이 있었듯이 영국 내에도 몇몇 선구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영국의 종교개혁은 1534년 헨리 8세가 개인적이며 정치적인 이유에서 잉글랜드의 교회의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결별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534년의 수장령(首長令, Acts of Supremacy)에 따라 영국은 국왕을 최고 우두머리로 하는 독립교회가 되었는데 이것이 영국 국교회(성공회)이다. 영국에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으나 국교회 내에는 여전히 천주교적인 요소가 교회에 잔존하여 있었다. 반쯤 이루어진 종교개혁에 반하여 철저하고 완전한 종교개혁을 이루기 위하여 등장한 무리들이 청교도들이다.
로이드존스(D. Martyn Lloyd Jones, 1899-1981)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혁은 먼저 의식들과 예복들에서 시작되어 끝내는 영국 국교회의 전체 상태에 대한 의문으로 나아갔고 철저하게 개혁하려는 열망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청교도는 부분적으로 개혁된 교회에 만족하지 않고 완전하게 개혁된 교회를 원하였다.”

청교도 교회 개혁은 더욱 발전하여 엘리자베스(Elizabeth I, 1533-1603) 여왕이 다스리던 1560년대에는 청교도 운동이 하나의 조직된 운동으로 여겨졌다. 그러다가 결국 영국 국교회 내에서의 청교도 운동은 1662년 대 추방령으로 종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남으로 청교도들에게 설교하고 독립교회를 세울 수 있는 권리가 다시 주어지고 국교회 밖에서 계속된다.

이렇듯 청교도는 한 세기 반가량 영국에서 진행된 개신교 종교개혁운동이다. 청교도운동은 그들의 정신과 사상을 이어받은 그의 후예들에 의해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청교도라는 말이 최초로 사용된 시기는 1564년으로 추정되는데 이 이름은 처음에 영국 국교회에 비타협적인 개신교도들을 내리깎는 경멸조의 적개심이 가득한 호칭이었다. “까탈스러운 사람들, 비판적이고 고집불통의 사람들”, “국교에 반대하는 비판적이고,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작당들”이라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이 처음에 사용되었을 때에 대적자들에 의해서 붙여진 경멸조의 이름이었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영광스러운 표현이 되었듯이 청교도들이라는 경멸의 표현도 얼마 후에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고 그 이후의 세대에게 영광스러운 이름이 된 것이다.

2. 청교도는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는 청교도들을 알아야한다. 왜 그들을 알아야 하는가? 조셉 파이파(Dr. Joseph A. Pipa)는 청교도들을 알아야하는 중요한 이유를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그들은 우리와 비슷한 상황 속에 살면서도 효과적으로 복음사역을 하였기 때문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들은 우리의 신앙고백적인 표준서들의 발원(發源)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제임스 패커(J.I. Packer)는 다음과 같이 일곱까지 이유를 들었다.
– 그들은 성숙한 기독교인의 모델이다.
– 그들은 신학적 통합성을 추구했다.
– 그들의 영적 표현의 질이 뛰어났다.
– 그들은 효율적 행위에의 열정을 가졌다.
– 그들은 가정생활의 안정을 위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 그들은 인간의 가치에 대한 지각을 가졌다.
– 그들은 교회 갱신의 이상을 가졌다.

이처럼 우리가 청교도들을 알게 되면 참된 성도의 삶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삶을 알아야한다.

(1) 청교도들은 성경의 사람들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의 샘슨(Dr. Thomas Sampson)은 청교도들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들은 그 누구도 정당하게 잘못을 찾을 수 없는 교리와 생활을 지닌 형제들이었다.” 라이큰(Leland Ryken)도 이렇게 말했다. “청교도들은 이 세상의 성자들(Worldly Saints)이다. 그들은 세속 오염으로부터 격리된 거룩한 양심을 소유한자들이었다. 초대교회로부터 물려받은 사도적 순결과 거룩한 양심을 지키려고 세속으로부터 격리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어떠한 것이라도 거부했다.”

“오늘날 청교도들이 누구인가?”라고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다. “2000년 교회역사 속에서 성경 밖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성경적인 사람들이다.” 즉 성경에 가장 가까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 1899-1981)의 말처럼 “청교도는 언제나 신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헤른(James Heron, D.D)은 “청교도들이 원했던 것은 가능한 성경 속에 나타난 원리들에 적합한 교리는 물론이고 교회의 규율과 행정조직을 갖기 원했던 것이다.“라고 했다.

청교도들은 이처럼 오로지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모든 것을 복음적인 관점에서 보았던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철저하게 성경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통하여 성경의 권위가 온전히 드러났다.

(2) 청교도들은 온전한 개혁을 이루려고 한 사람들이었다.

청교도들이 살던 당시의 로마 가톨릭의 사제들은 정치적이고 형식적이었고 반쯤 개혁된 영국 국교회(성공회)도 이러한 잔재가 남아 있었다. 또한 왕이 교회의 통치자가 되어 교회를 국가의 시녀로 전락시키었다. 놀라운 것은 당시 성직자들 가운데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까막눈도 많았다고 한다. 결국 설교 없이 의식만 거행되는 예배가 만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고 빈곤 및 도덕성의 상실로 사회와 경제적인 불안이 심각하였다.

이러한 암흑의 시대에 청교도들은 국교회의 예배의식을 반대하고 초대교회와 같은 순수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다. 또한 성경을 연구하고 그 성경을 기초로 죄와 회개와 구원의 은혜를 중심한 설교를 강조하였다. 또한 이들은 거룩과 경건을 생활의 절대적인 요소로 삼았다. 결국 청교도들에 의해서 종교개혁의 모토인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라는 온전한 개혁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비록 영국 국교회 내에서는 그들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지만 영국 개신교 교회에 종교개혁의 주역들이 되었다.

(3) 청교도들은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설교한 사람들이었다.

“청교도들은 다른 어떤 자이기 전에 먼저 설교자였다.”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교회가 성경의 권위아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드러내는 설교의 권위를 되찾게 되었다. 특히 이것은 강단위의 위의 설교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청교도들은 무혈적이고 영적이고 구두적인 개혁을 설교를 통하여 이룬 자들이다.

그들의 설교시간은 예배시간과 동의어로 사용될 정도로 예배에 있어 설교는 핵심요소였다.” 그들은 설교를 공예배의 절정으로 간주했다. 즉 “성령의 권능에 의해서 수반되는 말씀 선포와 그 말씀으로 부터 오는 교훈을 구원관 성화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의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다.” 그래서 강단위의 청교도들은 설교를 위하여 성경을 철저히 연구하였고 “그들은 그들의 마지막 설교인 것처럼 선포했고 그들 모두는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설교하였다.”고 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의 말처럼 설교했다.
그들은 철저하게 성경의 진리를 설교함으로서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임을 강조하고, 의지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유일한 대상이 그리스도임을 제시하고, 신앙인의 삶의 방향이 경건과 거룩임을 일깨웠고, 철저한 직업 소명의식을 일깨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건전한 가정생활을 하게하고, 세상의 쾌락과 사치로부터 돌아서게 했다. 설교된 성경의 진리에 의해서 실제적으로 설교자들은 가장 성경적인 삶을 살았음은 물론이고 회중속의 청교도들도 그와 같이 살았다.

(4) 청교도들은 삶의 전반에서 경건한 의무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

청교도들에게 가장 중요시되는 단어는 ‘의무’라는 단어였다. “청교도들은 그들의 의무가 성경의 내용대로 순수한 신앙을 지키며 이것을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요 그 대가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순수한 신앙이 가정과 교회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실현되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그렇게 원하고 싸웠던 것이다.” 청교도들은 교회와 가정에서 청교도의 삶의 의무를 실제적으로 강조하였다.

한편 목회자들은 설교에서 공통적인 표현으로 하나님께 순종과 충성을 강조했으며 양떼들에게 신앙과 의무를 이행하라고 강조했다. 즉 청교도들이 철저하게 자신들의 의무로 삼았던 것들은 1) 성수주일, 2) 예배, 3) 기도, 4) 경건한 가정, 5) 거룩한 삶이었다.

– 철저한 주일 성수의 의무

리차드 백스터의 자서전에서 입증되듯이 안식일의 엄숙한 준수는 사실상 청교도 활동 중 가장 우선적이고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그들은 주일을 영혼을 위한 장날이요 단체의 찬양과 기도로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날로 생각했다. 청교도들이 체계화시킨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The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제118문은 이점을 분명히 하는데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주요한 의무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제118문 : 왜 가족의 어른들과 다른 윗사람들을 향해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특별히 주어졌습니까?

대 답 : 가족의 어른들과 다른 윗사람들을 향해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 이 특별히 주어진 것은 그들 자신에게 안식일을 지킬 의무가 있 을뿐만 아니라 그들의 통솔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로 안식일을 지키게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며, 그들 자신의 일로 아랫사람들 의 안식일을 방해하는 일이 흔히 있기 때문입니다.

또 소요리문답 제60문과 대요리문답 제117문에서는 어떻게 안식을 거룩히 지켜야하는 지를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제117문 : 안식일 혹은 주일을 어떻게 거룩하게 하여야 합니까?
대 답 : 안식일 혹은 주일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온 종일 거룩히 쉼 으로 할 것이며, 언제나 죄악 된 일을 그칠 뿐만 아니라 다른 날에 합당한 세상일이나 오락까지 그만두어야 하며, 부득이한 일과 자선 사업에 쓰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시간을 전적으로 공사간 예배하는 일에 드리는 것을 기쁨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마음을 준비할 것이며, 세상일을 미리 부 지런히 절제 있게 배치하고 적절히 처리하여 주일의 의무에 보 다 더 자유로이 또는 적절하게 행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주일성수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금지해야 할 것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소요리문답 제61문과 대요리문답 제119문은 이렇게 말한다.

제119문 : 제4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무엇입니까?
대 답 : 제4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요구된 의무를 하지 않는 모든 것과 모든 부주의와 등한함과 그것들을 무익하게 이행함과 이에 지쳐 괴로워함이며 또 게으름과 죄악 된 일을 하는 것과 세속적인 일과 오락에 대하여 필요 없는 일, 말, 생각들을 함으로써 그 날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청교도들은 주일성수를 의무로 여기며 철저하게 지킨 좋은 정통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주일성수에 대한 의무와 철저한 준수는 리차드 박스터가 사역하던 키더민스터의 변화된 모습을 통하여 확인된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주일날 거리에서 전혀 무질서가 보이지 않게 되었고 거리를 지날 때 수많은 가정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설교를 되풀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 예배의 의무

청교도들은 형식적이고 의식에 치우친 예배를 배격하고 성경에 근거한 순수한 예배, 간결한 예배를 사모하였다. 카튼(John Cotton, 1585-1652)의 표현처럼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사모함이다.” 청교도들이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기독교 예배의 세 가지 영역이 있다고 말한다. 곧 지역교회에서의 공적예배와 가족 단위의 가정예배와 골방에서의 개인예배인 것이다.

이중 공적예배가 가장 중요하다. 공적예배는 주일의 중심이다. 주일은 아침과 오후 혹은 저녁 공적예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복음적인 예배는 중생한 자들만의 특권이며 동시에 의무였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발견하는 특징가운데 그들은 가정에서 중요한 의무도 예배였다.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을 보면 “모든 가정이 통상 아침과 저녁에 시행하야 하는 가정예배는 기도와 성경읽기와 찬양으로 이루어진다.”라고 말한다.

청교도들은 가정에서 매일 예배하였다. 리차드 백스터는 “가정예배를 위해 단지 2명만 있어도 된다.”고 하며, 죠지 휫필드는 “마음만 올바르게 갖추어져 있다면 가정예배를 건덕스럽게 드리는데 있어 다른 어떤 비장한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다.”고 했다. 죠엘 비키(Joel R. Beeke)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부모들이 가정예배를 지속적으로 시행해야하는 이유를 이렇게 제시한다. “부부와 자녀들의 영원한 복락을 위해, 선한 양심의 만족을 위해, 자녀 양육의 도움을 위해, 주어진 시간이 짧기에 하나님과 그의 교회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정에서 매일 지속적으로 예배해야한다.”

– 기도의 의무

청교도들은 국교회의 고정된 기도서를 거절하고 즉석기도를 했다. 그들은 주일은 물론 일주일 내내 개인기도와 가족기도로 충만했다. 청교도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낙스(John Knox, 1513-1572)처럼 청교도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특히 청교도들은 “경건한 생활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냈으며 기도의 의무 실천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기도에 대한 의무가 대요리문답 제185문과 제186문에 잘 나타난다.

제185문 :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대 답 :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엄숙한 이해와 우리 자신의 무가 치함과 필요한 것들과 죄에 대한 깊은 의식과 통회하며 감사하는 열띤 마음을 가지고 이해, 믿음, 성실, 사랑과 인내로써 하나님을 바라며, 그의 뜻에 겸손히 복종함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제186문 : 하나님께서 기도의 의무에 관한 우리의 지침으로 어떠한 규칙 을 주셨습니까?

대 답 : 하나님의 말씀 전체가 기도의 의무에 관한 지침으로 사용되지만, 특별한 기도 법칙은 우리 구주 그리스도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의 양식인데 곧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경건한 가정의 의무

청교도들은 가정을 사회의 기본적인 단위인 동시에 하나의 교회로 보았다. 그들은 남편을 목사로 아내를 전도사로 하는 작은 교회라고 주장했다. “남편의 의무는 가족을 신앙으로 이끌고 주일날 그들을 교회에 데리고 가고 가정에서 그날 온종일 성별하도록 감독하고, 자녀에게 교리문답을 하고 믿음을 가르치고 설교를 들은 후에 가족 전체의 시험을 보아 얼마나 기억하고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부족하면 이해시키고, 매일 가정 예배를 이상적으로 하루에 두 번 인도하고, 언제나 모든 문제에어서 근실한 모범이 되는 것이다.”

왓슨(Thomas Watson, 1620-1686)은 “그리스도인 부모들이라면 자녀들을 그들의 자녀로 만들기보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위해 애쓴다.”고 믿었다. 설교자들은 가정을 경건한 가정으로 유지할 것을 강조하였다.

– 거룩한 삶에 대한 의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물론이고 오웬(John Owen, 1616-1683)도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땅의 삶 동안 그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성화이다.” 그는 또 말했다. “거룩은 하나님의 약속의 선물이기도 하며 인간에게 명해진 의무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이 의무를 실행할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바르게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 아닌 다른 목적으로 은혜를 주시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인이 거룩을 이루기 위해서는 죄를 억제하여야 하고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 청교도들은 이것을 하나의 교리로 다루어 ‘죄 죽임의 교리’(A doctrine on mortification)를 강조한다. 이 땅에서 완전한 거룩이 불가능하지만 그들은 거룩의 최고봉에 이르기 위한 열망으로 완전한 거룩을 추구한 사람들이다. 실제로 그들은 성경이외의 교회사에서 가장 거룩한 무리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탁원한 거룩은 그들의 특징인 동시에 그들의 능력이 되어서 자신들의 시대는 물론 지금껏 남긴 글을 통하여 영향을 미치고 있다.

(5) 청교도들은 개신교회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었다.

초기 청교도들은 장로교도였다. 헤른(James Heron)은 독립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로빈슨(John Robinson, 1576-1625)의 말을 인용한다. “교황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교황에게, 신교도들은 감독들에게, 청교도들은 장로회에, 우리들은 교회로 불리 우는 다수의 회중의 몸에 그것을 두었던 것이다.” 그는 장로정치가 초기의 청교도들의 특생이었음을 말한다.

로이드 존스는 말한다. “청교도주의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정신구조요 하나의 정신입니다. 저는 주장합니다. 참된 청교도주의는 궁극적으로 장로교회 안에서 발견됩니다. 특히 존 낙스에게서 말입니다.” 초기의 청교도들이 칼빈주의적인 전통을 따르는 장로교였으나 이후에 여러 개신교의 산실이 되었다. 물론 다른 시각에 바라보면 더 초기적인 형태의 청교도는 침례교도라고 말하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오늘날의 개신교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고향을 등지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의 미국으로 떠나 오늘 날의 미국교회와 미국의 정치, 교육,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으며 영국교회 내에서도 장로교회, 영국의 회중교회, 분리주의교회, 감리교회 등에 영향을 미쳤다.

- 글쓴 이 /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미국의 뿌리 청교도의 신앙과 삶(2)
청교도들의 신앙과 가정교육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가정의 붕괴다. 아이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만나는 세계는 어머니이고 그 다음으로는 가정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의 질서, 사람의 의무 등을 교육받음으로써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도록 준비된다. 그러한 가정은 하나님의 통치를 반영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들을 가르쳐줄 수 있는 가정의 기반이 지금 급속하게 해체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세속 정신이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가정을 거짓된 세속의 가치관으로 물들게 하거나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세속 정신에 물든 기독교 가정은 다음 세대에 참된 교회의 영적 번영과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해 헌신할 자녀들이 자랄 수 없다. 우리는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가정을 중시했던 사상으로 되돌아가 성경적 가정교육을 재건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가정교육

기독교 신앙의 개혁을 부르짖었던 종교개혁자들은 한결같이 자녀에 대한 종교교육의 책임을 부모들에게서 찾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언약백성들을 당신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시는 중요한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교육적 책임과 역할에 대해 각성하도록 만든 사람은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였다. 그는 부모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가장 중요한 의무가 자녀들을 신앙으로 교육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일을 교회와 학교가 도울 수는 있으나 결코 가정교육을 대신할 수 없다고 보았다. 자녀들은 부모와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을 습득해가야 한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가정을 교회와 함께 하나님이 주신 신적인 두 기관으로 이해했다.

칼빈(John Calvin, 1509-1564)도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기독교교육을 특별히 강조했다. 그는 부모의 신앙고백을 통해 유아세례를 받음으로써 자녀들이 언약백성으로 공동체 속에 포함된다고 여겼다. 이러한 언약의 맹세는 자녀들에게는 부모의 기독교적 가르침에 순응할 것을 그리고 부모에게는 자녀에게 기독교신앙을 가르칠 것을 맹세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목사의 직무는 교회 안에서 이런 일들이 올바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피고 감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쉬넬(Horace Bushnell, 1802-1876)은 가정이야말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한 신앙교육의 현장이며 이러한 교육을 통해서 언약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유지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모는 교사로 부름을 받은 사람으로서 참된 신앙인이 되지 않는다면 가정교육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더 나아가 자녀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교육할 때 그 방법도 신앙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부모는 하나님께서 자녀들 각자에게 주신 다양성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신앙적인 삶과 성품을 형성해가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정은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통치를 공정하게 반영하는 방식으로 자녀들을 올바로 가르칠 수 있다고 보았다.
2. 청교도와 가정

청교도였던 매더(Increase Mather, 1639-1723) 목사는 국가의 건강에서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이었다. 사회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복음화 된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진실하고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필요하고 그러한 세상의 변혁을 위해 섬길 수 있는 좋은 그리스도인은 가정을 통해서 배출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1679년에 타락한 가정들을 보며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가정은 교회와 국가의 양성소입니다. 가정을 잘 관리하십시오. 그리하면 나라는 보다 훌륭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뉴잉글랜드에서 경험하는 많은 상처와 커다란 불행들은 가정이 신앙적으로 무질서하기 때문입니다.”

(1) 남편과 아내

중세 가톨릭에서는 결혼의 제일 목적을 자녀 생산으로 보았지만 청교도들은 결혼의 제일 목적을 거룩한 친교에 두었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의 주요 관심사는 그들의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 방해받을 정도로 사랑하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여겼다. 하나님만이 자신들의 가장 고귀한 사랑과 경배를 받으실 분이었고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을 향한 경배를 인간이나 피조물이 차지하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생각했다.

아내가 출산 중에 죽어가고 있을 때 쉐퍼드(Thomas Shepard, 1605-1649) 목사의 다음과 같은 참회는 청교도들의 정신을 잘 반영한다. “나는 더 큰 약속을 바친 내 하나님보다 아내를 나의 영혼으로 기뻐하며 그래서 은밀하게 오만해지고 마음이 육욕으로 가득 차는 것을 깨달았다.” 청교도들에게 아내를 얻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내를 얻는 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데 더 훌륭한 준비를 갖추기 위한 것이었으며 아내를 더욱 하나님께로 가까이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청교도 남편은 법적으로 가정을 대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또 자녀들과 종들을 포함하여 자기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징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가족의 우두머리이며 주인이었다. 남편은 영적인 지도력과 통제권을 행사할 것을 기대했고 가족을 적절하게 부양할 책임이 있었다. 청교도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위로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며 아내를 때리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었다.

(2) 가정과 질서

청교도 가정의 질서는 부부간의 질서와 부모와 자식 간의 질서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과 위로를 받으며 남편에게 복종해야 했다. 그들은 남편과 아내의 친교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비유해 설명했다. 아내가 남편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하며 이로써 온전한 가정을 이루어가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모든 가족구성원들보다 뛰어난 열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도록 요구받았다. 교회는 남편들을 통해 아내와 자녀들의 신앙을 돌보고자 했다. 또 하나는 자녀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책임이었다. 그들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며 말씀을 따라 살도록 가르쳐야 했다. 그리고 자녀들이 하나님을 스스로 찾도록 신앙적으로 격려했다.

(3) 가장의 신앙적 책임

남편의 가정에 대한 지도권은 그가 가족들의 신앙에 대해 깊은 의무감과 책임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그들은 일찍 결혼하지 않았다. 10대의 남자가 결혼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17세 미만의 여자가 아내가 되는 일도 매우 예외적인 일이었다. 평균적으로 신랑의 나이는 신부보다 세 살 정도 많았으며 뉴잉글랜드의 이주민들의 경우 신랑의 평균 연령은 약 24세였다.

그들은 조혼을 거부하고 성숙한 나이의 결혼을 권장했다. 남편이 한 가정을 책임지는 데 가정을 부양할 경제적인 능력을 갖출 뿐 아니라 한 가족을 목회할 수 있는 영적인 지도력을 함양할 것을 요구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편으로서 아내를 가르치고 아버지로서 자기의 자녀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도록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었다.

청교도 남편들을 가장으로서 가족공동체를 무질서와 혼란에서 보호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가정생활의 경건을 통해 온 땅을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가정의 경건한 개혁을 위한 두 가지 열쇠가 있었는데, 그것은 질서와 교육이었다. 청교도들의 가족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넓은 것이었다. 그들에게 가족은 단지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연합하는 것이 한 가정을 이룩하는 성경적인 모범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에 한국과 같이 여러 세대가 한 지붕 아래서 사는 대가족제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부모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심지어는 사망한 배우자의 시집이나 처가와도 친밀한 가족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의 가족의 개념에는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 일하는 일꾼들까지 모두 포함되었다.

청교도 남편들은 이러한 가족구성원들 전체에 대한 신앙적인 인도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한 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아내와 함께 하나님을 위해 자녀를 기르고 자신들의 가정 속에 하나님이 가슴 아파하시는 어떠한 죄가 자라지 못하도록 했다.

(4) 자녀에 대한 신앙교육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된 부모들에게는 대체로 선택받은 자녀들을 주신다고 믿었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이라도 태어날 때부터 부패한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절하게 교육하지 않으면 죄와 부패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나님께는 자녀만 있을 뿐 손자는 없으시다.”라는 사상은 신앙이 혈통과 가문으로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회심과 신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앙은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각 세대마다 각기 하나님 앞에서 회심이 요구되는 것이며 부모들의 경건한 신앙을 통해 자녀가 저절로 구원에 이를 수는 없다.

리처드 매더(Richard Mather, 1596-1669)는 부모들이야말로 자녀들의 영적인 운명을 인도하는 효과적인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어린 자녀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과 씨름하는 데 최선을 다하라.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어머니의 기도와 눈물이 자녀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신다.”

인크리스 매더(Increase Mather, 1639-1723)의 다음과 같은 지적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우리의 조상들이 황무지와 같은 신대륙으로 건너온 것은 후손을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한 세대를 훈련시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조상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경건한 부모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특별한 유익과 격려 아래 있습니다.”

또한 카튼 매더(Cotton Mather, 1663-1728)의 충고는 그 당시 부모들에게 절실한 것이었다. “충분한 권위를 유지해 여러분의 말이 자녀에게 법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렇지만 여러분의 권위를 무자비와 난폭함 같은 것으로 잘못 생각해 자녀를 실망하도록 만들지 마십시오. 우리의 자녀를 가혹한 행동으로 노예처럼 취급해 우리 앞에 나올 때 항상 떨고 피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하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권위는 친절과 온유와 애정으로 조화를 이루어 우리의 자녀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를 두려워하고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은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자녀들이 하나님께도 고통이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당시 부모들이 자녀들의 응석을 너무 많이 받아주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녀가 부모에게 반항하는 것이 극도로 큰 죄악이라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자녀들을 향해서는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의 때가 이르기 전에 대개 죽임을 당합니다.”라고 권고했다. 인크리스 매더는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자녀가 주님을 저버릴 때 경건한 아버지의 눈물은 영원한 불길이 그 자녀의 영혼에 영원토록 더 맹렬하게 타오르도록 만들 것입니다. 부모를 가볍게 여기는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가 내릴 것입니다.”

3. 가정예배를 통한 자녀교육

자신의 자녀들을 향한 가장으로서의 영적인 지도력은 그들의 가정예배를 통해 잘 나타났다. 가정의 신앙교육과 실천은 가정이 마땅히 담당해야 할 필수적인 의무로서 중요하게 여겼다. 가장은 교회의 신앙교육을 보좌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교회는 자주 회중들에게 가정을 신앙으로 돌보는 의무들을 행하도록 일깨웠다.

매일 아침과 저녁, 성경봉독과 기도, 시편 찬송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예배가 있었으며, 이 예배를 인도하는 것은 가장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때때로 자녀들을 포함하는 가족들은 예배활동의 일부분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인도하기도 했다.

청교도 가장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고유한 질서를 유지했고 가족들이 건강한 신앙의 상태를 간직하도록 의무를 다했다. 간혹 교회들은 가장들에게 가장으로서 가정신앙의 의무들을 이행하겠다고 공적으로 서약하도록 지도했는데, 1680년 인크리스 매더 목사가 목회하던 보스턴교회의 다음과 같은 언약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에서 온전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자 노력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에서 분명하게 요구하시는 대로 우리의 가정에서 기도와 성경읽기를 중시하며,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힘입어 끊임없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또한 우리들은 우리 자녀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양육함으로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진정한 헌신으로 주님의 이름을 받는 자들이 되도록 우리의 책임을 행할 것이며, 그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며, 그들에게 주님을 경외하고 섬기도록 권하고 명하며, 그들 앞에 거룩한 모범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들의 회심과 구원을 위해 많이 기도할 것을 약속합니다.”

청교도들에게 가정예배의 중요한 내용은 세 가지다. 기도, 성경봉독, 찬송이다. 이 세 가지를 기본으로 한 단순한 형태로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청교도들은 가정예배와는 별도로 자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일을 중시했다. 이러한 교리교육에서 어머니의 역할이 매우 컸다. 실제로 키더민스터의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의 경우 ‘어머니의 교리문답’(Mother’s Catechism)이라는 항목의 문집을 만들어서 활용했는데 약 100페이지 분량의 내용들이었다.

리처드 백스터는 자신의 설교를 십 수 년이나 들어왔던 사람들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각 위가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 자신 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무식한 처지를 개탄하며 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를 힘썼다. 어른들은 교회를 통해 교리를 배워야 했고 자녀들은 부모와 교회를 통해 학습해야 했다. ‘어머니의 교리문답’(Mother’s Catechism)이라는 제목 아래 이러한 해설적인 성격을 띤 부제가 붙어 있다. ‘하나님과 그들 자신과 성경에 관한 지식에서 자녀들을 교리로 가르치는 친근한 방법’(A Familiar Way of Catechising of Children in the Knowledge of God, Themselves, and the Holy Scripture)

이 교리학습서는 엄마와 어린아이가 문답식으로 주고받는 이야기체로 되어 있는데 창조와 성경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 등을 망라하는 방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공통적으로 가정예배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교리를 자녀들에게 가르치기를 힘썼다. 이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리처드 백스터 목사가 주중에 자기 교구의 가정들을 심방했다. 그리고 자녀들이 부모에게서 교리를 올바로 배우고 있는지 문답으로 확인했다. 만약 자녀가 적절히 대답하지 못하면 그 부모들이 주일예배 때 서서 예배를 드리게 했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의지를 가지고 신앙을 고백하는 가장과 아내들이 자녀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정기적인 가정예배는 이러한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통로다.

맺는 말

자녀들에 대한 신앙교육이 반드시 가정예배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그들은 식사의 자리에서 부모와 함께 대화하며 기독교 교리를 한 가지씩이라도 가르친 후에야 식사한다. 모든 가정이 그리하지는 않겠지만 오늘날처럼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자녀들에게 가르치지 않는 시대에는 되새겨볼 가치가 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불신앙적인 문화와 가정을 파괴하려는 여러 가지 사회적 위협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경쟁적인 삶은 가족 간의 결속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인 남편들이 가장으로서의 영적인 책임을 통감하고 가정예배를 통해 가족들 간의 영적인 유대를 공고히 하고 무엇보다도 자녀들을 바른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모들이 경건한 삶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자녀들에게 존경을 받아야 할 것이며 기쁨으로 가정예배에 참여하도록 지도해야 할 것이다. 가정에서의 기독교 신앙의 보존을 위해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참된 회심과 중생이 강조되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 글쓴 이 / 김남준 목사(한국 열린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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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40055 2019-08-01T18:53:07Z 2019-08-01T18:53:07Z 오늘의 묵상(7월 15일 - 31일)

7월 15일(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상 15:1∼16:43
다윗은 웃사의 사건을 교훈삼아 하나님의 규례를 엄격히 준수하여 언약궤를 성공적으로 운반함으로써 예루살렘에 안치하였다. 감사 제사를 드린 다윗은 찬양대를 조직하여 하나님을 송축했으며, 언약궤를 섬길 봉사자들을 선정하여 직무를 배정했다. 

♦ 로마서 2:17∼3:8
바울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수여받았다는 특권 의식에 빠져서 율법의 근본정신을 망각한 채 할례와 같은 형식적 의식만을 강조하고 있음을 질책하였다.  

♦ 시편 107:10∼107:22
시인은 사람이 고통당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신음을 외면치 않으시고 구원하신다고 노래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편 107:20) 

믿음이란 하나님을 내 편으로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직한 신앙은 내가 하나님 편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격으로 바뀌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변화시키는 깨우침과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영적 회초리와 같습니다.

오늘도 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닮아가는 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쳐나기를 기도합시다.

주님,
닮기 원합니다.

주님,
예리한 말씀으로
나를 깨우쳐 주소서

깨달음 없던 신앙
말씀을 따르지 못하던 삶
이제는
깨닫고 따르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그 다음 날에도
오직 주님만 닮아가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16일(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상 17:1∼18:17
다윗은 성전 건축을 열망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의 아들에게 위임하셨다. 그러나 그의 왕위가 번영하고 영원하리라는 축복의 언약을 주셔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다. 다윗은 블레셋, 모압, 소바, 아람, 에돔 등 주변 국가들과의 싸움에서 승전하였다.  

♦ 로마서 3:9∼3:31
바울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밝히면서, 죄인된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이라고 강조하였다.  

♦ 시편 107:23∼107:32
시인은 하나님께서 광풍을 만나 부르짖는 자의 고통을 들으시고 광풍을 잔잔케 하셔서 안전하게 항구로 인도하심을 찬양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6:23)

사랑(愛)은 가장 좋은 관계를 말합니다.
죄(罪)는 좋은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회개(悔改)는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 보다 더 큰 사랑을 만나려고 하나님을 떠나므로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렸습니다. 그 결과는 너무 처참했지요. 마치 집을 나갔던 탕자와 같은 모습으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때는 이제는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에 하인으로 살고 싶었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에게 너는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이라 하며 과거를 묻지 않았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집을 찾아 이제는 돌아와야 합니다. 그 길은 자유를 얻는 길입니다.

자비하신 예수여
사망의 길에서
방황할 때에도
아침 햇살처럼 다가와
날마다
아침마다
마음의 문을 두드렸지요
그 소리가
너무 깊고 높아
잊지 못하고   
아버지 집으로 가오니
주여
이제는 제가 두드립니다.
열어 주소서
받아 주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17일(수)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상 19:1∼21:30
다윗은 암몬과 아람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3차에 걸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도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자 승리에 도취한 다윗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자기 과시를 세우려고 인구 조사를 행하여 온역으로 무려 7만 명이 희생되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다.

 
♦ 로마서 4:1∼4:12
바울은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그의 신실한 믿음 때문이며, 행위나 할례로는 결코 의를 얻을 수 없음을 논증하였다.  

♦ 시편 107:33∼107:43
시인은 주린 자와 궁핍한 자, 그리고 정직한 자의 산업을 번성케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시편 107:43)

세상이 흔들리는 모습에서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찾습니다.
정의가 무너진 세상에서 진리의 하나님을 찾습니다.

승리에 도취한 교만한 지도자가 미친 듯 흔들어대는 쌍칼을 피하여 잠시 숨을 고르고 바위 뒤에 숨어 기다립니다.

지쳐 쓰러질 그 날을 기다리며.......

오 주여!
자랑할 것도 없고
내세울 것조차 없는
가련한 육체 덩어리
잠깐 호흡 멈추면
쓰러질 가냘픈 생명

주의 햇살로
살짝 덮어주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18일(목)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상 22:1∼23:32
임종을 앞둔 다윗은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솔로몬과 방백들에게 성전 건축에 대한 당부의 말을 하였다. 그리고 생전에 새 왕국의 기초를 확립시켜 주기 위해 레위인들의 직분 배정을 위한 계수를 하였다.

  
♦ 로마서 4:13∼4:25
바울은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믿음의 후손이 되는 특권은 혈통이나 율법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 시편 108:1∼108:13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찬양한 다윗은 하나님의 권능과 도우심을 믿고 담대히 싸울 것을 다짐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편 108:2) 

새벽을 깨우는 신앙생활을 사모합시다!
현대 사회는 낮과 밤이 없는 삶이 가능합니다.
더구나 뉴욕의 맨하튼 지역은 더 심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을 깨우셨던 예수님을 본받아 하루의 첫 시간을 말씀과 기도와 묵상으로 시작할 때 삶의 우선순위가 아름답게 결정될 것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는 끼울 구멍이 없다.
독일의 문호 궤테의 말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기도를 소개합니다.

오 주여,
내가 알아야 할 것을 알게 하시고
내가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시며
당신을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을 찬양하게 하시고
당신이 보시기 값진 것을
가치 있게 생각하게 하시고
당신께 거슬리는 일을 미워하게 하소서.
내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게 하지 마시고
무지한 인간의 귀에 들리는 대로
말하지 말게 하시고
눈에 보이는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서 참된 판단을
분별 있게 내리도록 하시며
무엇보다도 항상 당신의 뜻에 무엇이
정말로 즐거운 것인가를 묻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19일(금)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상 24:1∼25:31
다윗은 보다 원활한 제사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제사장들과 그들의 시중을 들 레위인들, 그리고 성전에서 찬양을 맡을 찬양대를 각각 24반열로 조직하였다.  

♦ 로마서 5:1∼5:21
바울은 칭의의 결과로 얻게 되는 축복으로 하나님과의 화평, 소망, 즐거움 등에 대해 언급한 후, 첫째 아담 안에서 율법과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았던 인류가 이제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의와 영생을 얻게 되었다고 선포하였다.  

♦ 시편 109:1∼109:13
시인은 자신을 미워하는 대적들의 악행을 하나님께 고하면서 하나님께서 보응하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시편 109:4)

성경의 가르침은 나를 대적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기도는 원수를 사랑하는 비결입니다.
다윗의 기도는 제사 업무를 위하여 찬양대를 조직합니다.
바울의 기도는 예수 안에서 누릴 은혜를 사모합니다.
시인의 기도는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자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지만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기도는 어려운 것을 쉽게 할 수 있는 용기와 인내 그리고 믿음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도의 사람으로 우뚝 세워지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소망하며 ‘허영자’님의 ‘작은 기도’를 생각합니다.

눈보담도

희디 흰 마음이게 하소서

 

떠나는 것

고이 돌려보내고

오는 것

순히 맞아들이게 하소서

 

반짝이는

반짝이는 물결이게 하소서

 

가이없는 출렁임

그 아래 깊숙이

풀지 못할 신비를 간직케 하소서

 

몸부림이게 하소서

못 견디는 몸부림이게 하소서

 

엷음 바람결에도

멀리까지 날으는 은은하고 서러운

저녁 종소리이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20일(토)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상 26:1∼27:34
다윗은 성전 문지기와 창고지기, 그리고 치안이나 재판, 행정 일을 맡아 볼 일꾼들을 임명하였다. 이어 국방 강화를 위해 열두 개의 상비군을 조직하고 각 지파마다 행정 장관을 배정하였으며, 왕실 재정 관리자들과 왕의 보좌관들을 각각 임명하고 직임을 맡겼다.  

♦ 로마서 6:1∼6:23
바울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자’는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 자’라고 하면서, 이제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라고 하였다.  

♦ 시편 109:14∼109:25
시인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는 악인의 행위를 고발하면서 하나님의 응징이 있기를 호소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나는 석양 그림자 같이 지나가고 또 메뚜기 같이 불려 가오며. (시편 109:23)

다윗 시대에 각자 맡은 일이 있는 것처럼 오늘날도 각자의 일에 열중합니다. 아무리 일에 열중하여도 혼자서 할 수 없으므로 서로 돕고 협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므로 삶의 변화가 없는 것 같아도 어느 날 갑자기 옆자리에 있던 사람이 석양의 그림자처럼 지나가기도 하고 메뚜기처럼 불려갑니다.

석양의 날이 다가오기 전에 과연 내게 주어진 일을 잘 하고 있었는지 생각합니다. 나는 만족하였을지라도 다른 누군가에게 부담이 되었다면 삶의 방법을 수정해야 합니다. 너무 늦게 수정하면 더 이상 되돌릴 수 없어 매일 묵상하며 더 좋은 길을 찾는 지혜를 기도합니다.

기도
- 구상

땅이 꺼지는 이 요란 속에서도

언제나 당신의 속사귐에

귀 기울이게 하옵소서.

 

내 눈을 스쳐가는 허깨비와 무지개가

당신 빛으로 스러지게 하옵소서.

 

부끄러운 이 알몸을 가리울

풀잎 하나 주옵소서.

 

나의 노래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내 혀를 닳게 하옵소서.

 

이제 다가오는 불 장마 속에서

'노아'의 배를 타게 하옵소서.

 

그러나 저기 꽃잎 모양 스러져 가는

어린 양들과 한 가지로 있게 하옵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21일(주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상 28:1∼29:30
국가 조직 정비를 마친 다윗은 솔로몬과 방백들을 마지막으로 한자리에 모아 놓고,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준수할 것과 하나님의 대사업인 성전 건축 완수를 당부하였다. 또한 다윗은 몸소 성전 건축을 위한 막대한 헌물을 드렸다. 그리고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후에 임종하였다.  

♦ 로마서 7:1∼7:20
바울은 그리스도의 무조건적인 구속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더 이상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 ‘자유자’이며, 율법은 성도에게 단지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증거 하였다.  

♦ 시편 109:26∼109:31
시인은 악인의 대적에도 불구하고 구원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며 감사와 찬송을 드리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시편 109:30)

무엇을 감사하며 무엇을 찬송합니까?

다윗은 성전 건축에 필요한 것들을 최대의 정성으로 준비한 후 아들 솔로몬에게 물려주며 감사와 찬송을 올립니다.

바울은 율법의 정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신 예수님을 찬송하며 감사합니다.

시인은 많은 악한 대적들 가운데서도 늘 지켜주심에 대한 감사와 찬송을 올립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감사하며 찬송하시렵니까?
내게 주신 건강과 평범한 삶의 울타리에서 늘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그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감사기도
- 추영수

발 앞은

천 길 낭떠러지였습니다만

 

오! 주님

여기 외나무다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슴은

사정없이 겁에 질려 굳었습니다만

 

오! 주님

외나무다리를 건너려는 의지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현기증으로 눈은

장님이 되었습니다만

 

오! 주님

이 어려운 아픔을 감사할 수 있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제 힘으로는 도저히

끝까지 갈 수 없습니다만

 

오! 주님

온전히 주님께 자신을 맡길 수 있는

큰 평화를 감사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오늘의 말씀

7

22

대하 1:1∼3:17, 롬 7:21∼8:17, 시 110:1∼110:7

7

23

대하 4:1∼6:11, 롬 8:18∼8:39, 시 111:1∼111:10

7

24

대하 6:12∼7:22, 롬 9:1∼9:13, 시 112:1∼112:10

7

25

대하 8:1∼9:31, 롬 9:14∼9:29, 시 113:1∼113:9

7

26

대하 10:1∼12:16, 롬 9:15∼10:15, 시 114:1∼114:8

7

27

대하 13:1∼15:19, 롬 10:16∼11:12, 시 115:1∼115:8

7

28

대하 16:1∼18:34, 롬 11:13∼11:36, 시 115:9∼115:18


7월 22일(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1:1∼3:17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자 하나님께서 지혜를 구한 솔로몬에게 지혜는 물론, 재물과 존영까지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는 두로 왕 후람의 도움으로 성전 건축 준비를 마치고 건축에 착수하였다.  

♦ 로마서 7:21∼8:17
바울은 성화의 과정 중에서 성도들이 반드시 겪게 되는 내적 갈등에 대하여 언급한 후, 이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성도는 생명의 법 아래 있는 자임을 증거하였다. 그리고 성도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의 후사이며,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 시편 110:1∼110:7
다윗은 만왕의 왕이며 영원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통치와 심판을 예언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편 110:3) 

헌신(獻身)과 희생(犧牲)의 결합된 단어를 히브리어로 “헤세드” 라고 합니다. 헤세드는 ‘자비(慈悲)’란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대자대비(大慈大悲)라고 하지요. 불교의 자비가 기독교의 자비보다 더 크다고 자랑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변화를 일으키는 자비는 기독교에서 자주 나타납니다. 너무 큰 자비를 입어서 도저히 자기 힘으로 가당할 수 없어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자비가 아니라 비로 작지만 새로운 삶을 주도하는 기독교의 작은 자비일지라도 그 자비에 힘입어 헌신과 희생의 삶을 기도합니다.

평화의 기도
- 프랜시스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23일(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4:1∼6:11
성전에 비치할 여러 기구를 제조함으로써 성전 건축을 모두 마친 솔로몬은 다윗 성에 있던 언약궤를 새 성전으로 옮겨 안치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전을 건축하였음을 백성에게 선포하였다.  

♦ 로마서 7:21∼8:17
바울은 현재 성도들이 받는 고난은 장차 있을 천국 영광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미약한 것이며, 또한 성령의 도우심으로 능히 이길 수 있다고 하였다.  

♦ 시편 110:1∼110:7
시인은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찬양드리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그의 행하시는 일이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의 의가 영원히 서 있도다.(시편 111:3) 

합력(合力)하여 선(善)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면 어려울 때보다 평안할 때가 더 많았지요?
그런데도 속이 좁은 인생은 어려울 때만 생각하려고 합니다.
합력(合力)하여 선(善)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아주 좋은 협력자(協力者)입니다.
어떻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까요?
나의(人) 입의 말(口)이 어린 양(羊)의 말처럼(口) 일치가(一) 될 때 비로서 능력의 주님은 나를 돕습니다. 나의 믿음의 길(十)에 더 많은 힘(力)을 더하여 아주 큰 힘을(力) 드러나게 하십니다.

말을 위한 기도
- 이해인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 없이 뿌려 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더러는 다른 이의 가슴 속에서

좋은 열매를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언어의 나무

 

주여!

내가 지닌 언어의 나무에도

멀고 가까운 이웃들이 주고 간

크고 작은 말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둥근 것 모난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향기로운 것 반짝이는 것

 

그 주인의 얼굴은 잊었어도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와 함께 머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내가 할 말은

참 많은 것도 같고 적은 것도 같고

 

그러나 말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살이

 

매일매일 돌처럼 차고 단단한 결심을 해도

슬기로운 말의 주인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날마다 내가 말을 하고 살도록

허락하신 주여!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하여

먼저 잘 침묵하는 지혜를 깨치게 하소서

 

헤프지 않으면서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품위 있는

한 마디의 말을 위해

 

때로는 진통 겪는 어둠의 순간을

이겨 내게 하소서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집을 짓기 위해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道를 닦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하소서

 

언제나 진실하고

언제나 때에 맞고

언제나 책임 있는 말을

갈고 닦게 하소서

 

내가 이웃에게 말을 할 때에는

하찮은 농담이라도

함부로 지껄이지 않게 도와주시어

 

좀 더 겸허하고

좀 더 인내롭고

좀 더 분별있는

사랑의 말을 하게 하소서

 

내가 어려서부터 말로 저지른 모든 잘못

특히 사랑을 거스른 비방과 오해의 말들을

경솔한 속단과 편견과

위선의 말들을 주여 용서하소서.

 

나날이 새로운 마음
깨어 있는 마음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내 언어의 집을 짓게 하시어

해처럼 환히 빛나는 삶을

당신의 은총 속에 이어가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24일(수)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6:12∼7:22
솔로몬의 간절한 기도를 열납 하신 하나님은 불과 영광으로 응답하셨고, 이에 감사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7일간의 봉헌식에 이어 장막절 절기를 지켰다. 하나님께서는 밤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순종에 대한 복과 불순종에 대한 저주를 상기시키셨다.

 
♦ 로마서 9:1∼9:13
바울은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민족으로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혈통만 믿고 교만에 빠져 있는 그들에게 아브라함 후손의 진정한 의미는 혈통이 아닌 믿음에 있다고 밝혔다. 

♦ 시편 112:1∼112:10
시인은 야웨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지키는 자가 받을 축복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시편 112:5)

순종(順從)은 복(福)의 길로,
불순종(不順從)은 저주(詛呪)의 길로 떨어집니다.
성전 건축 후 솔로몬의 기도와 백성들의 봉헌예식은 순종하는 길이었지만 혈통만을 고집하는 것은 불순종하는 길입니다.

신앙이란 혈통이 우선이 아니라 지금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육체적인 자랑거리를 모두 버리고 오직 영으로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
- W. E. 오카드

모든 사물을 꿰뚫어 보시며

사랑으로 모든 일을 참으시는 하느님

 

진리와 영으로 당신께 가까이 나가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주소서.

 

마음은 먼 데 가 있고

입술로만 드리는 예배가 되지 않게 하소서.

 

마음 깊은 곳을 살피시는 당신에게서

피하여 숨으려는 헛된 노력을 하지 않게 도와주소서.

 

이 밝은 대낮에 우리의 몸을 가리려고 덮어 쓰고 있는

모든 외투와 위장을 벗어버릴 수 있게 하소서.

 

진리의 빛을 바로 받아서

모든 거짓과 위선과 속임수를 물리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아

아무 것도 두려워 않을 만큼 용기 있게 하소서. 아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25일(목)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8:1∼9:31
솔로몬의 지혜로운 통치로 말미암아 정치, 경제, 종교, 각 방면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그의 명성을 듣고 방문한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와 부귀영화에 탄복하고 돌아갔다.

  
♦ 로마서 9:14∼9:29
혈통이 아닌 믿음, 즉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사실에 반감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바울은 토기장이 비유를 통해 의로우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섭리를 설명하였다.  

♦ 시편 113:1∼113:9
시인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낮아지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시편 113:3) 

모든 세상과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찬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심히 좋았다고 하셨던 것처럼 왜 세상을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곳으로 회복시키지 않으실까요?

타락한 인간 스스로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솔로몬은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그 지혜가 이웃 나라에도 알려질 수 있었지요. 선택의 의미를 히브리인에게만 적용하려는 유대인들은 믿음에 의한 구원과 선택에 대해서 용감하게 돌을 던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타락한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를 낮추어 내려오신 그 아들의 사랑을 힘입어 온 세상에 속한 가장 작은 나 자신부터 주님이 좋아할만한 믿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버리게 하소서
- 강은교

지금 어두운 것들은

모두 버리게 하소서

지금 높은 것들은

그 높음의 살들을

 

지금 어두운 것들은

그 어둠의 뼈들을

 

지금 울고 있는 것들은

그 울음의 피들을

利己의 잠들을

탐욕의 꿈들을

 

그리하여

보이게 하소서

지금 부는 바람은

봄으로 가는 바람이니

 

지금 반짝이는 별은

홀로 하늘을 끌고 가고 있으니

 

보이게 하소서

어둠 속의

속의 빛

차가운 눈이 품고 있는 저 탄생들

 

끝내는 흐르게 하소서

처음과 끝이 하나 되어

흐르게 하소서

 

일어서

흐르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26일(금)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10:1∼12:16
과중한 세금과 노역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르호보암에게 시정을 요구하였지만, 그는 어리석게도 강경책을 고수하였다. 결국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열 지파가 반란을 일으켜 왕국은 둘로 나뉘게 되었다. 르호보암은 초기에는 지혜로운 통치로 왕국을 안정시켰으나, 나라가 강성해지자 율법을 버리고 하나님께 범죄 하므로 애급 왕 시삭의 침입을 받는 징계를 받았다.  

♦ 로마서 9:30∼10:15
바울은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하는 유대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걸림돌일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하였다.  

♦ 시편 114:1∼114:8
시인은 온 땅을 놀라게 한 하나님의 이스라엘 구원 역사를 찬송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시편 114:8)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인간의 못된 본성은 선(善) 보다는 악(惡)을 더 좋아합니다.
선(善)을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가 변화(變化)되어야 합니다.
나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강하게 살아있고 세속의 욕망에 붙잡힌 육체 덩어리는 여전히 속된 것에 매력을 느낍니다.
반석을 쳐서 물이 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성령의 몽둥이로 나를 쳐서 죄악의 덩어리가 깨져 부스러져 모두 쏟아져 나와 주님의 손에 꽉 붙잡히기를 기도합니다.

기도
- 키에르케고르

오, 주 예수 그리스도,
운명을 맞이하여 뒤로 물러서지 아니하고

다만 앞으로 나아가신 주여,

 

당신께서는 스스로 고난을 당하시어
가난하고 비천하게 태어나셨습니다.

그리하여 가난하고 비천한 가운데

고통을 겪으시고 미움을 받으시고
배반을 당하시고 채찍을 맞으시고

침 뱉음을 받으시고
마지막에는 하느님께 버림을 받으심으로써

세상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머리를 숙이시고
수치스럽게 죽으셨습니다.

오! 그러나
당신께서는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영원하신 승리자여,

이 세상에서는
당신의 적들 손에 죽임을 당하셨지만

당신은 그렇게 죽으심으로써
오히려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당신께서는 머리를 들어
영원히 승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다만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27일(토)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13:1∼15:19
르호보암에 이어 왕위에 오른 유다 왕 아비야는 북이스라엘 여로보암과의 전투에서 전력상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유다의 3대 왕 아사는 우상을 파하고 성읍을 건축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므로 세라의 침입 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승리할 수 있었다. 아사는 아사랴의 예언을 듣고 종교 개혁을 시행했으며, 이에 하나님께서는 왕국의 평안을 허락하셨다. 

♦ 로마서 10:16∼11:12
바울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여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책임으로 핑계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 중 복음의 진리를 순종하는 소수의 남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고 하였다.

 
♦ 시편 115:1∼115:8
시인은 오직 주님만이 영광 받으실 분임을 고백하며, 우상 숭배의 헛됨을 말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시편 115:1b)

우상(偶像)의 기초는 욕심(慾心)입니다.
나라의 지도자가 내가 최고라는 자기 욕망에 도취될 때 나라는 어지럽습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내 설교가 최고라는 자기도취에 자만할 때 교회는 세상의 악이 될 것입니다.
내가 구원 받은 것도 내 공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마치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멸망의 문은 열리기 시작합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이란 작품을 쓴 작가 "할리엣드 비이쳐 스토우 여사"는 이 작품으로 인하여 굉장한 명예와 인기를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노예 해방을 위한 동기를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작가는 '이 작품은 내가 쓴 것이 아니라 주님이 쓰셨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이 영광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겸손히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작은 것을 큰 것으로 자랑하는 사람을 허풍장이라고 합니다.
큰 것을 작은 것으로 감추려는 사람을 천국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천국의 사람으로 세상에서는 가장 작은 자 같지만 주님 나라에서 가장 큰 자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영광을 오직 주님께 돌리는 믿음의 사람으로 든든하게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게 하소서


묵은 것을 걷고

새 것을 주시니

감사하여라.

 

기도하게 하시고

구하게 하시고

받은 줄로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시니

감사하여라.

 

주님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하루 또 허락하셨사오니

주님 위해 충성하리라

감사 감사하여라.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소서

삶과 죽음마저도

간증이 되게 하소서

 

주님의 뜻에 달려 나가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삶뿐만이 아니라

죽음마저도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여주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28일(주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16:1∼18:34
북이스라엘 왕 바아사의 침입을 받은 아사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적 자구책으로 아람 왕 벤하닷과 동맹하여 대응하였다. 그리고 이를 책망하는 하나니를 투옥시키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뒤를 이은 여호사밧은 전면적인 종교 개혁을 단행하고 말씀 교육과 국방 강화에 힘씀으로써 번영을 이루었다. 그러나 아합과 동맹하여 길르앗 라못 탈환에 나서는 실수를 범하였다. 미가야의 예언을 무시한 아합은 이 전쟁에서 전사했으며, 연합군은 패배하였다.  

♦ 로마서 11:13∼11:36
바울은 여러 비유를 들면서, 유대인의 실족으로 인해 이방인들을 향한 구원의 문이 열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이방인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다시 유대인의 구원을 위한 것이므로 이방인들 역시 교만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 시편 115:9∼115:18
시인은 도움과 방패이신 야웨를 의지하는 자가 복 받는 자임을 노래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시편 115:9) 

신앙의 정도(正道)에서 벗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사람을 두려워 할 때
2. 불신자와 가깝게 지낼 때
3. 사람을 의지할 때
4. 정욕에 붙잡힐 때
5. 교만해 질 때
6. 환난과 핍박으로 시달릴 때
7. 말씀을 멀리 할 때

신앙(信仰)이란 한자를 파자(파자)해 봅니다.
믿을 신(信)자는 사람(人)과 말씀(言)이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의지할 앙(仰)자는 사람(人)과 우러러 볼 앙(卬)이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신앙이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항상 하나님만 우러러 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도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꽉 붙잡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 기도

주여
기도하게 하소서
내 날을 위하여

주여
기도하게 하소서
내 삶을 위하여

주여
기도하게 하소서
하늘 부름을 위하여

주여
기도하게 하소서
기도자의 삶을 위하여

오 주여
살아가게 하소서
주 말씀 따라 순종하기 위하여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오늘의 말씀

7

29

대하 19:1∼20:37, 롬 12:1∼12:21, 시 116:1∼116:11

7

30

대하 21:1∼23:21, 롬 13:1∼13:14, 시 116:12∼116:19

7

31

대하 24:1∼25:28, 롬 14:1∼14:23, 시 117:1∼118:7

8

1

대하 26:1∼28:27, 롬 15:1∼15:21, 시 118:8∼118:17

8

2

대하 29:1∼30:27, 롬 15:22∼16:7, 시 118:18∼118:29

8

3

대하 31:1∼32:33, 롬 16:8∼16:27, 시 119:1∼119:8

8

4

대하 33:1∼34:33, 고전 1:1∼1:17, 시 119:9∼119:16


7월 29일(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19:1∼20:37
여호사밧은 아합과 동맹하여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한 예후의 책망을 듣고 회개한 후, 신앙 개혁과 더불어 제도적인 개혁을 일으켰다. 하나님의 징벌로 모압과 암몬 연합군의 침공을 당했지만, 여호사밧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철저히 간구하여 큰 승리와 영광을 얻었다.  

♦ 로마서 12:1∼12:21
바울은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삶을 교훈하면서, 먼저 교회내에서의 다양한 은사 활용과 하나님 사랑, 그리고 형제 사랑과 더 나아가 원수 사랑을 권면하였다.  

♦ 시편 116:1∼116:11
시인은 사망의 환난 속에서도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시편 116:9)

생명이 있는 땅은 다양한 사건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땅입니다.
천둥 번개 비와 바람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끔직한 사건과 사고가 항상 입을 벌리고 있는 땅입니다.

이와 같은 땅에서 성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나를 낮추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아이들아!
태초에 하나님은 하늘은 높고, 땅은 넓게 만드시어, 사람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그 낙을 충만히 누리도록 하셨단다. 그리고 청년들에게는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하셨지(전 12:1).

로마의 현인 세네카는 '모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Remember that you must die.)' 라는 뜻이란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집에 태어났든지 그 생과 사(生死)가 하늘 아버지의 뜻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느니라.

해 아래 새것이 이란 없단다. 너희들이 박물관에 가서 보아 알 듯 수천 년 전의 사람들도 오늘날 사람과 같은 밥숟가락과 젓가락으로 먹고 살았다. 수천 년 전 그들도 사랑하고, 증오하고, 이별의 슬픔으로 괴로워했고, 철학을 논하고, 예술을 추구하고, 전쟁하고, 그렇게 살았단다.

너희들이 무엇보다 먼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도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내 조상의 핏줄로 나를 내시고, 그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큰 뜻이 있다'는 엄청난 믿음의 횃불을 들고 이 놀랍고도 신묘막측한 삶의 세계에 들어서기를 기도한다.

주여,
이 땅의 생명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인식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붙잡아 주소서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30일(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21:1∼23:21
여호람은 자신의 형제와 방백들을 죽이고 산당을 세워 우상 숭배를 강요하는 등의 악정을 행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블레셋과 아라비아를 통해 징계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하셨다.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도 악정을 행하다가 예후의 손에 죽었다. 그러자 아달랴가 왕위 찬탈을 위해 다윗 왕가의 진멸을 꾀했는데, 결국은 극적으로 구출된 요아스가 여호야다의 개혁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 로마서 13:1∼13:14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회생활과 국가 권력에 대한 성도들의 태도에 대하여 권면하였다. 그리고 이웃 사랑의 계명 준수를 권면하면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다. 또한 임박한 종말에 대비하여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 것을 권면하였다.  

♦ 시편 116:12∼116:19
시인은 구원을 주신 야웨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자신의 서원을 갚을 것을 다짐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시편 116:17) 

권력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무겁고 중대한 책임을 갖는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여 마치 독재 권력에도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억지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하늘이 내려준 자리에서 인간의 욕망을 채우거나 잘못된 방법과 길을 선택할 때는 당연히 거부하고 저항할 수 있겠지요.
권력을 자랑하는 못난 인생이 아니라 권력의 칼을 바르게 사용하여 모두에게 희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生이란 한 조각 뜬구름 문득 일어나는 것과 같고,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死란 한 조각 뜬구름 문득 소멸하는 것과 같다. 


부운자체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
뜬구름이란 본래 그 실체가 없는 것,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
살고 죽는 것 역시 그와 같은 것.

오 주여,
평화의 날개를 펴고
온 땅을 휘저으며
모두의 마음에
미래에 대한 설렘 가득 채워
곳곳에 환한 미소 짓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그려진
사랑의 빛깔 날리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31일(수)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24:1∼25:28
역대하 24장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8대 왕 요아스(7세 즉위)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고 합니다.

역대하 25장은 요시아의 뒤를 이어 아마샤(25세 즉위)가 왕이 되었으나 정직히 행하려고 했지만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 로마서 14:1∼14:23
바울 사도는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의 판단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 시편 117:1∼118:7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신앙은 고통 중에 부르짖어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 묵상과 기도
-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시편 118:5)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주님,
내가 주께로 가오니
나를 받아주소서!
주님,
내가 슬프오니
내 눈물을 거두어 주소서!

주님,
나의 기쁨
주의 것이오니
오직 주님만
찬양하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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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38237 2019-07-28T18:12:36Z 2019-08-18T17:18:25Z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Ⅲ(요한계시록 14:13) / 주일설교(2019-07-28) 주 안에서 죽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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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38108 2019-07-28T09:26:25Z 2019-07-28T10:20:27Z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Ⅲ(요한계시록 14:13) / 설교 원고(2019-07-28)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Ⅲ(요한계시록 14:13)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복(福)”이란 ‘볼 시(示)’와 ‘부요할 부(富)’
- 부(돈, 재물, 부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

신명기의 복 - 베라카(28:1∼2)
시편의 복 - 에제르(1:1∼3) ☞ (복수형) 아쉬레이

선택받은 백성들에게 약속된 복은 '순종'입니다.
순종하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민족이 될 것이며,
마치 마르지 않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주로 물질적인 것을 기준으로 복을 결정한다.
그러나 성경은 물질보다는 사람이 우선이다.

마태복음 5:3∼10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요한계시록에서 증거 하는 일곱 가지 복

1st.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의 복(1:3)
2nd. 주 안에서 죽는 자의 복(14:13)
3rd. 자기의 옷을 지키는 자의 복(16:15)
4th.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자의 복(19:9)
5th.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의 복(20:6) 
6th.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복(22:7)
7th. 예수의 피로 두루마기를 빠는 자의 복(22:14)

모든 복의 기초는 영생(永生)입니다(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들어야 할 소리와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들어야 할 소리를 ‘하늘의 소리’라고 한다면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땅의 소리’라고 하겠습니다.

최초로 하늘의 소리와 땅의 소리가 충돌한 사건이 에덴동산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2:16∼17)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하나님은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 여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사탄(뱀)은 여자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창세기 3:1b∼6).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이때 여자가 사탄(뱀)에게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사탄(뱀)은 여자에게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라고 여자의 말에 더욱 강한 부정적인 생각을 강요합니다.

이때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는 순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고, 심지어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나타났습니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었습니다.

하늘의 소리와 땅의 소리가 충돌했을 때 여자는 땅의 소리가 더 크게 들렸습니다. 아담은 여자로부터 “내가 먼저 먹었는데 이렇게 죽지 않았어요.” 라는 땅의 소리를 듣습니다. 아담은 여자가 들려주는 땅의 소리를 듣고 그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아담으로부터 모든 인류가 받은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아담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고 주리셨을 때 다시 사탄이 찾아와서 땅의 소리를 들려줍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사탄은 사역을 시작하는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돌을 빵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며 땅의 소리로 유혹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 이라고 또다시 하늘의 소리와 땅의 소리를 함께 들려주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또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사탄이 예수님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첫째 아담은 땅의 소리에 마음을 빼앗겼지만 둘째 아담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온전히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우렸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땅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위에서 자주 듣는 소리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좋으냐? 돈만 있으면 마음대로 편리하게 먹을 수 있고 다닐 수 있고 입을 수 있고 쉴 수 있고 이런 세상을 구경 못한 옛날 사람들이 참 불행하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땅의 소리는 세상을 즐기려고 합니다. 반면에 하늘의 소리는 하나님을 즐기려고 합니다.

오늘 요한계시록의 말씀에서 하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누구일까요?

여기서 주 안에서(in christ) 죽는 자들을 헬라어 성경에서 “호이 네크로이 호이 엔 쿠리오 아포드네스콘테스(οἱ νεκροὶ οἱ ἐν Κυρίῳ ἀποθνῄσκοντες)” 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문맥상으로 볼 때는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성도들과 순교한 성도들을 말합니다. 이기는 성도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계 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그러나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누구일까요?

첫째,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를 믿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두 강도들이 함께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때 한 강도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을 조롱했지만 다른 한 강도는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고통을 받는다는 믿음을 갖고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해도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을 보여준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신앙고백이 분명한 사람입니다(마태복음 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둘째,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

구원받은 강도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후에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빌레몬서에 오네시모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오네시모는 태어날 때부터 종의 신분이었습니다. 빌레몬이란 주인의 집에서 종으로 살아가면서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며 자기 삶을 정리하고 주인처럼 살아보려고 주인집에서 몰래 귀중한 물건을 들고 도망쳤습니다. 오네시모가 도망하여 세상을 나름대로 잘 살아보려고 했지만 그만 붙잡혀서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네시모가 갇힌 감옥에 사도 바울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에게서 어떻게 여기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듣게 됩니다. 놀랍게도 오네시모의 주인이 빌레몬이란 사실을 알고 오네시모가 감방에서 나갈 때 편지 한 장을 써서 오네시모에게 주며 이것을 갖고 빌레몬을 찾아가라고 합니다. 그 편지가 빌레몬서입니다.
당시 종이 주인집에서 물건을 훔쳐 도망하다가 붙잡힐 경우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는데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하여 주인 빌레몬에게 이제부터는 너희 집의 종이 아니라 형제로 인정하고 만일 오네시모가 손해를 입힌 것이 있다면 사도 바울이 모두 갚아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렇게 오네시모는 예수를 영접한 후에 그의 삶은 빌레몬과 동등한 믿음의 형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죄의 종으로 붙잡혀 죽음의 노예가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들은 예수님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있을 동안에 우리가 힘써야 할 삶은 주와 연합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즐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행동하는 신앙의 사람입니다(야고보서 2:17, 26)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리고 성경에서는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을 가리켜 잠을 자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은 잠에서 깨어날 사람입니다(요한복음 11:10)

우리 친구 나사로는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은 슬픔으로 가득했습니다. 왜냐하면 베다니 마을에서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의 신앙은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을 만큼 소문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제자들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나사로가 잠자는 것이라면 그 병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나사라고 죽었으나 그는 잠을 자고 있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예수 안에서
- 디아 투 이에수(διὰ τοῦ Ἰησοῦ) through Jesus

예수 안에서 라고 번역된 것은 ‘예수로 말미암아’ 라는 뜻입니다.

에스커위드(Askwith)라는 신학자는 '예수로 말미암아' 라는 것을 "예수를 믿다가 죽은 자들과 부활하신 예수와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구약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주 안에서 죽는 사람으로 살아가면 철저하게 자기 사랑을 버리고 이웃 사랑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살았던 사람들을 성령께서 위로하십니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주 안에서 죽는 신앙의 삶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을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에 대한 공식적인 메시아 선언이 드러난 후에 제자들에게 부탁하셨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실예)

주 안에서 죽는다는 말씀의 의미

단순하게 교회에 다니거나 예수 믿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14장 12절에 보면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또한 13장에 보면 강한 권력과 권세를 가진 짐승이 등장합니다. 짐승이 갖고 있는 강력한 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짐승을 따라갑니다. 만일 이 짐승을 따르지 않는다면 삶이 고달프고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사로잡힐 수 있고, 칼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북한에서 먹을 것이 없어 중국으로 무작정 건너와 어느 교회에서 제공하는 음식을 먹으며 예수를 영접한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이 젊은이가 예수를 영접한 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북한으로 들어갔습니다. 북한에 들어가서 공안에 붙잡혔습니다. 젊은이를 신문하던 공안에게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를 설명했습니다.

북한이 이처럼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이렇게 세습하며 그들이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자 공안은 젊은이의 이야기에 동의하면서도 젊은이가 북한에서 가장 싫어하는 기독교 사상을 고집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살려주려고 수용소보다는 임시보호소와 같은 곳으로 보내려고 할 때 젊은이는 아닙니다. 수용소로 보내주시면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죽겠습니다. 결국 수용소로 보내진 젊은이가 얼마 후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얼마나 좋으면 젊은이가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아직도 북한 땅에 남아 있다는 것이 놀랍다고 했답니다.

이런 젊은이의 삶이 주 안에서 수고한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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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37342 2019-07-26T11:09:46Z 2019-07-26T11:09:46Z 2019 25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목록





오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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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21:1∼23:21, 롬 13:1∼13:14, 시 116:12∼1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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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24:1∼25:28, 롬 14:1∼14:23, 시 117:1∼1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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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26:1∼28:27, 롬 15:1∼15:21, 시 118:8∼1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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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29:1∼30:27, 롬 15:22∼16:7, 시 118:18∼1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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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31:1∼32:33, 롬 16:8∼16:27, 시 119:1∼119:8

8

4

대하 33:1∼34:33, 고전 1:1∼1:17, 시 119:9∼1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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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37166 2019-07-25T20:38:23Z 2019-07-25T20:38:23Z 말을 할 때와 들어야 할 때

말을 해야 할 때와 들을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두 마리의 기러기가 매년 하던 대로 남쪽으로 이동할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개구리 한 마리가 자기도 데려가 줄 수 있으냐고 물었습니다.

두 마리의 기러기는 ‘그래’라고 대답했지만 그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가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러자 무척이나 꾀 많은 이 개구리는 길고 튼튼한 풀잎 줄기를 구해 와서는 두 마리의 기러기들에게
자기는 풀잎 줄기 중간에 입으로 매달려 있을 테니 양쪽 줄기 끝을 발로 잡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마침내 두 마리의 기러기와 개구리는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한참을 날아오르자 저 아래로 사람들과 집들이 보였습니다.

넓게 펼쳐진 광경이 개구리에게는 무척이나 신기했습니다.

그때 두 마리의 기러기는 독특한 체험을 구상한 자신들의 창조력과 현명한 행동에 대해 큰 소리로 자화자찬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두 마리의 기러기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개구리는 허영심이 발동하여 그만 입을 벌리고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건 내 아이디어였잖아!”
그 순간, 개구리는 곧장 땅바닥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옛 속담 중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입을 다물고 있어라.
그러면 당신이 바보라도 바보인 줄 아는 사람이 절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입을 열면 모든 것이 다 탄로나고 만다.”

이런 옛말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말을 해야 할 때와 들어야 할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 자료출처 /  지그 지글러 지음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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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37161 2019-07-25T20:31:26Z 2019-07-26T11:04:47Z 오늘의 묵상(2019-07-22)

7월 22일(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1:1∼3:17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자 하나님께서 지혜를 구한 솔로몬에게 지혜는 물론, 재물과 존영까지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는 두로 왕 후람의 도움으로 성전 건축 준비를 마치고 건축에 착수하였다.  

♦ 로마서 7:21∼8:17
바울은 성화의 과정 중에서 성도들이 반드시 겪게 되는 내적 갈등에 대하여 언급한 후, 이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성도는 생명의 법 아래 있는 자임을 증거하였다. 그리고 성도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의 후사이며,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 시편 110:1∼110:7
다윗은 만왕의 왕이며 영원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통치와 심판을 예언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편 110:3) 

헌신(獻身)과 희생(犧牲)의 결합된 단어를 히브리어로 “헤세드” 라고 합니다. 헤세드는 ‘자비(慈悲)’란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대자대비(大慈大悲)라고 하지요. 불교의 자비가 기독교의 자비보다 더 크다고 자랑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변화를 일으키는 자비는 기독교에서 자주 나타납니다. 너무 큰 자비를 입어서 도저히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어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자비가 아니라 비로 작지만 새로운 삶을 주도하는 기독교의 작은 자비일지라도 그 자비에 힘입어 헌신과 희생의 삶을 기도합니다.

평화의 기도
- 프랜시스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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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36996 2019-07-25T13:39:59Z 2019-07-25T13:39:59Z 초대교회 대제사장 목록


로마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예루살렘은 두 명의 제사장이 세워집니다.
한 명은 율법에 따른 지파의 순서에 따라 한 명씩 제사장이 됩니다.
이것을 '반차를 따른다'고 표현합니다.

로마는 정치적을 압박하고 통치하기 위해 자신이 지목한 행정적 제사장을 더 세워 두 명이 됩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는 '대제사장들'이란 복수 형태를 사용합니다. 

요아자르 (보이투스​의 아들)

(유대​의 왕 아르켈라오스​에 의해 임명​됨—마 2:22)

엘르아살 (보이투스​의 아들)

예수 (시​에의 아들) (요아자르​가 민중​에 의해 복직​되었다)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에 의해 임명​됨—누 2:2)

안나스 (아나누스) (셋​의 아들) (퀴리니우스​에 의해 임명​되었다. 기원 15​년​경 유대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에 의해 해임​되었다. 안나스​는 가야바​의 장인​이었다. 그​는 해임​된 후​에도 계속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누 3:2; 요 18:13, 24; 행 4:6)

(유대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에 의해 임명​됨)

이스마엘 (파비​의 아들)

엘르아살 (안나스​의 아들)

시몬 (카미투스​의 아들)

요셉 가야바 (예수​의 지상 봉사 기간​과 사도​들​의 봉사 기간 초기​에 직무​를 수행​한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께서 산헤드린 앞​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대제사장​으로서 장인 안나스​와 함께 그 재판​을 주재​하였다.
[마 26:3, 57; 누 3:2; 요 11:49, 51; 18:13, 14, 24, 28]
그​와 안나스​는 베드로​와 요한​을 자기​들 앞​으로 불러서, 전파​하는 일​을 중단​하라고 명령​하였다. [행 4:6, 18]
가야바​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에 보내는 편지​들​을 받도록 사울​에게 권한​을 준 대제사장​이었다.—행 9:1, 2, 14)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에 의해 임명​됨)

요나단 (안나스​의 아들)

데오빌로 (안나스​의 아들)

(헤롯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임명​됨)

시몬 (칸테라스) (보이투스​의 아들)

맛디아 (맛다디아) (안나스​의 아들)

 

엘리오나이우스 (칸테라스​의 아들)

 

(칼키스​의 왕 헤롯​에 의해 임명​됨)

 

요셉 (카미두스​의 아들)

 

아나니아 (네데바이우스​의 아들) (바울​이 재판​을 받을 때 산헤드린​을 주재​한 대제사장.—행 23:2; 24:1)

 

(헤롯 아그리파 2​세​에 의해 임명​됨)

 

이스마엘 (파비​의 아들)

 

요셉 (카비) (이전​에 대제사장​이었던 시몬​의 아들)

 

안나스 (아나누스) (안나스​의 아들)

 

예수 (담나이우스​의 아들)

 

예수 (가말리엘​의 아들)

 

맛디아 (맛다디아) (데오빌로​의 아들)

 

파나스 (판니아스 또는 비느하스. 사무엘​의 아들) (헤롯 아그리파​에 의해서가 아니라 로마​와의 전쟁 중​에 백성​에 의해 대제사장​이 되었다)



출처: https://392766.tistory.com/3836?category=343800 [Pensé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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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36968 2019-07-25T12:17:57Z 2019-07-25T12:17:58Z 머피의 법칙'(Murphy's law)과 샐리의 법칙'(Sally's law)


살다 보면 일이 꼬이는(go wrong) 경우가 있다.
하필이면(of all occasion) 빵의 버터 바른 면이 바닥을 향해 떨어진다(fall buttered side down).

그 확률은 카펫 가격에 정비례한다(be directly proportional to the value of the carpet).

버스가 늘 늦게 와서 늦게 나갔더니 그날은 제시간에 와서(come on time) 이미 떠나버렸다.
하릴없이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데(be obliged to wait for the next bus) 길 건너엔 같은 번호
버스가 잇달아 지나가건만 이쪽엔 감감무소식이다.

이런 현상을 '머피의 법칙'(Murphy's law)이라고 한다.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보편적 

현상(universal phenomenon)이어서 '법칙'이라는 말이 붙었다. 자신만 불운하다고

(have hard luck)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런 경우는 수시로 있다. 직장에 지각을 해

(be late for work) 타이어 펑크가 났다고(have a flat tyre) 둘러댔는데(make up a story), 

다음날 진짜 펑크가 난다(get a flat). 살까 말까 망설이다(dither over buying an item) 

큰 마음 먹고(take the plunge) 샀더니, 어디선가 세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줄을 섰는데 다른 줄이 더 빨리 줄어든다(move faster). 냉큼 다른 줄에 가서 섰더니 

아까 그 줄이 더 빨리 줄어들기 시작한다.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이 커피를 따라주는데, 

마침 그때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난다(encounter turbulence). 타고 간 비행기는 

연착했는데(be delayed) 갈아타야 할 비행기는 제시간에 이륙해버렸다(take off on 

scratch). 물건이 떨어져도 하필 가장 큰 충격을 받는 쪽으로 떨어진다(fall so as to do 

the most damage). 게다가 그 가격에 정비례해 부서진다(be shattered in direct 

proportion to its value).


그와는 반대로(on the contrary) 원하는 일은 그 간절함에 반비례해 일어난다(happen 

in inverse ratio to its desirability). 기회는 늘 가장 적절하지 않은 순간에 찾아온다

(knock at the least opportune moment). 마음에 드는 신발은 맞는 사이즈가 없고, 

맞는 사이즈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세차를 했다 하면 비가 온다. 라디오를 틀면 매번 

좋아하는 노래 끝 부분이 흘러나온다. 손톱을 깎고 나면(cut your fingernails) 꼭 

가려운 곳이 생긴다.


이런 머피의 법칙과 정반대 개념이 '샐리의 법칙'(Sally's law)이다. 우연히 유리한 

일만 계속 생기고, 나쁜 일도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는(turn evils into blessings) 

경우를 말한다. 맑은 날에(on a clear day) 우산을 들고 나왔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든지, 시험 직전에 펼쳐본 교과서 내용이 문제로 나온다든지….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그 사람의 태도(one's 

attitude toward life)다. 머피의 법칙을 믿는 사람에겐 머피의 법칙만 벌어지고, 

샐리의 법칙을 믿는 사람에겐 샐리의 법칙만 일어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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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35541 2019-07-21T17:37:15Z 2019-07-21T17:37:15Z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2(1:3) 주일설교(2019-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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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33162 2019-07-16T12:18:50Z 2019-07-21T12:08:01Z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Ⅱ(요한계시록 1:3) 설교 원고(2019-07-21)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Ⅱ(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성경에서 강조하는 최고의 복은 ‘영생(永生)’입니다.
영생이란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죽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 부활의 때에 다시 살아날 줄 믿는다고 고백했던 마르다에게 분부하신 말씀입니다.   


영생이란?
포기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유토피아(Utopia)라는 저서를 남긴 영국의 사상가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 2. 7~1535. 7. 6)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왕에게 항복하라고 그를 졸랐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오랫동안 함께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왜 당신은 꽃 같은 나이에 당신과 우리 가족에게 가장 비극적인 불행을 가져오려 하십니까?”

이 말을 들은 모어는 이렇게 되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최소한 20년은 사실 거예요.”
그러자 그는 소리쳤습니다.
“이 땅에서의 20년밖에 안 되는 삶을 위하여, 내가 영원한 삶을 포기하고 고통에 나를 내어 준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오! 영혼을 잃는 것보다는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을 잃는 편이 오히려 더 좋은 일이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소?”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이란 제목으로 두 번째 설교를 합니다.
지난 주일에 소개했던 설교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성경을 산(山)에 비유할 때 구약이란 산에는 39종류의 나무가 자라고 있고, 신약이란 산에는 27종류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나무들이 많이 우거진 곳을 삼림(森林)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다양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삼림(森林)과 같습니다.
삼림(森林)이란 한자에는 수풀 삼(森)자에 나무 목(木)자가 세 개 사용되었고,
수풀 림(林)자에는 나무 목(木)자가 두 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이란 삼림에 속한  요한계시록은 삼림의 나무들 중에서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요한계시록을 삼림 속에 있는 나무라고 해석하지 않고 많은 높은 산들이 줄지어 있는 산맥(山脈)으로 이해했습니다.
그 결과 산맥(山脈)은 아주 높고 험준한 곳이기에 요한계시록을 특별한 은사를 받은 교주만이 해석할 수 있다고 강조되었으며 심지어 특정한 교파에 가입해야만 마지막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삼림(山脈)의 한 나무처럼 성경의 줄기에 따라 한 주제로 읽을 때 요한계시록은 어렵고 난해한 말씀이 아니라 누구든지 읽을 수 있는 약속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주제로 읽는 첫 번째 방법은 ‘복(福)’이란 주제로 읽는 것입니다.

복(福)이란 한자는 볼 시(示)와 부요할 부(富)가 결합한 단어로
“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 또는 “부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부(富)’의 기준을 “돈” “자동차” “집”과 같은 외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세속적인 복”과 “내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신령한 복”으로 구분합니다.

구약에서 복이란 두 단어 ‘베라카(신명기 28:1∼2)’와 ‘에제르(시편 23:1∼3)’는 “순종의 복”을 말합니다.
순종하는 약속의 백성들은 뛰어난 민족이 될 것이며 마치 마르지 않는 시냇가(복수)에 심어진 나무처럼 그 뿌리가 마르지 않는 물가에 심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복은 영생(永生)입니다(시편 133:3).
영생의 복은 예수를 믿음으로 얻습니다(요한복음 3:16).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7:3).

예언의 말씀이란 그 예언의 그 말씀(요한계시록 1:3, 22:7, 10, 18, 19)을 말합니다.

예언의 말씀의 내용은 ‘속히 오리라! 가감하지 말라!’고 합니다.
‘속히(1:1, 2:16, 3:11, 11:14, 22:6, 7, 12, 20)’ 라는 말은 시간적인 의미보다는 영적 의미로 “반드시 오실 것”을 말합니다.

오늘은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두 번째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먼저 요한계시록 1장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예언의 말씀으로 소개된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특징을 세 가지 모습 즉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영생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복을 누리기 위해서 예언의 말씀 속히 오시리라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위한 세 가지 자세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읽는 자, 둘째는 듣는 자들, 셋째는 지키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첫째, 읽는 자(아나기노스콘, ἀναγινώσκων)

본문에서 ‘읽는 자’는 두루마리의 말씀을 회당에서 회중을 대표하여 전문적으로 읽는 낭독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성경을 읽는 자를 말합니다. 성경을 문자로만 읽는 것이 아닙니다.

1. 확실하게 아는 것(to know certainly)
2. 다시 아는 것(know again)
3. 인식하는 것(recognize), 알아차리는 것(discern)

요한계시록에 사용된 각종 상징과 숫자들의 의미를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결론입니다. 만일 상징과 숫자들과 인과 나팔과 대접의 의미는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결론을 모르거나 지나쳐 버린다면 큰 실수를 범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해외여행이 한창일 때 가이드가 신신당부하기를 많은 관광객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기 때문에 항상 가이드가 들고 있는 깃발을 보고 따라와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에게 이번 여행이 어떠했느냐? 하고 물었을 때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외국 땅에서 가이드가 들고 다니는 깃발만 보도 따라다녔기 때문에 아무 것도 기억이 없다고 했다는 우스개 이야기처럼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해가 상징과 숫자와 인과 나팔과 대접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성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잃어버린다면 그 결과는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며(창 1:1), 창조한 세상을 심판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계 22:20).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성경에서 예언의 결론은 '마라나타'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믿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복으로 읽는다는 것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믿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듣는 자(아쿠온테스, ἀκούοντες)

본문에서 듣는 자는 문법적으로 복수형입니다. 읽는 자는 한 사람이지만 듣는 사람은 여러 사람입니다. 회당의 예배는 성인 남자 10명 이상이 모였을 때에 예배가 시작되었으므로 최소한 10명 이상이 듣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1. 이해하는 것(to understanding)
2. 가르칠 수 있는 것(to teaching)

교육심리학에서는 죄(罪)에 대한 정의가 아주 새롭습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것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을 모르면서 특히 요한계시록을 모르면서 읽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구원의 진리를 알았으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말씀 처럼 다시 오실 심판의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깨우쳐야 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

알면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는 것은 내 안에 머물지만 행하는 것은 내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을 안다고 말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겠습니다.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깨달은 후에는 아직도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소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24장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 무렵 함께 유하려고 어느 집에 들어가서 음식을 먹으려고 할 때 주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 제자들에게 떼어 주셨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그 분이 주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을 눈이 밝아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주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주님이 보이기 시작하면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말씀은 실천하기 위하여 들어야 한다.

예수님은 많은 말씀들을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비유로 가르치실 때 사용하셨던 ‘들으라’ 또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들으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은 이미 증거 된 가르침들 즉 구약의 말씀에 대해서 실천하기 위해서 들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마가복음 4:3∼9).

셋째, 지키는 자(테룬테스, τηροῦντες) 

테룬테스(τηροῦντες)는 테레오(τηρέω)의 복수형으로 ‘지키는 것’ 그리고 ‘감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키는 자는 물론 예언의 말씀을 지킬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감시해야 합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잘못 전달되거나 가르치는 것을 감시하고 그와 같은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도록 생명을 사랑하고 영혼을 감시하는 책임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에 무당(巫堂)의 수가 대략 30만 명이라고 하며 무당에 의해서 창출되는 년 간 금액이 무려 6조원이라고 합니다. 교인의 수가 1,200만 목사의 수가 6만이라고 하는데 교인들이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였다면 어떻게 한국사회가 이렇게 무당의 수가 점점 더 늘어가고 있을까요?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한 책임을 교회가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28,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약속하신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8: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일서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요한계시록은 읽고 듣고 지키므로 복을 누립니다. 해석하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해가 될 때까지 읽고 들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2:7에서 지키는 것에 대한 복을 강조합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지킨다는 말은 실천한다는 뜻도 있지만 그 말씀을 변질되지 않도록 없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지킨다는 뜻이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영생의 복을 누리기 위하여 그 예언의 그 말씀 곧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켜야 합니다.

티벳 사람들의 종교는 라마 불교라고 합니다. 티벳 사람들은 라마 불교의 경전을 읽지 않기 때문에 라마 불교를 모른다고 합니다. 티벳의 불자들이 경전을 읽지 않기 때문에 라마 불교 사원 주위에 ‘마니차(摩尼車་)’ 라는 불교 도구를 만들어 놓습니다. ‘마니차’란 원통형 모양으로 표면에는 ‘만트라’가 새겨져 있고, 내부에는 롤로 경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마니차의 크기는 다양하여 손에 쥘 수 있는 크기부터 큰 것은 몇 미터에 달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둥근 원통 마니차를 손으로 돌리면 한 번 읽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라는 마니차를 한번 돌리면 창세기를 한 번 읽는 것입니다. 두 번 돌리면 두 번 읽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니차를 돌리기만 하기 때문에 경전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간혹 도로에서 자동차 뒤에 성경 찬송을 얹어놓고 다니는 운전자를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찬송을 마치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소원하는 부적과 같이 사용한다면 이런 것도 기독교식 마니차라고 하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요한계시록을 읽지 않고 듣지도 않으므로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영생(永生)의 복(福)을 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복이란 주제로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 영원한 삶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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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32404 2019-07-14T17:16:03Z 2019-08-18T17:19:05Z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요한계시록 1:3) 주일 설교(2019-07-14)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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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32311 2019-07-14T10:43:48Z 2019-07-26T11:06:31Z 오늘의 묵상(2019-07-15)

7월 15일(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상 15:1∼16:43
다윗은 웃사의 사건을 교훈삼아 하나님의 규례를 엄격히 준수하여 언약궤를 성공적으로 운반함으로써 예루살렘에 안치하였다. 감사 제사를 드린 다윗은 찬양대를 조직하여 하나님을 송축했으며, 언약궤를 섬길 봉사자들을 선정하여 직무를 배정했다.

♦ 로마서 2:17∼3:8
바울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수여받았다는 특권 의식에 빠져서 율법의 근본정신을 망각한 채 할례와 같은 형식적 의식만을 강조하고 있음을 질책하였다.

♦ 시편 107:10∼107:22
시인은 사람이 고통당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신음을 외면치 않으시고 구원하신다고 노래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편 107:20)

믿음이란 하나님을 내 편으로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직한 신앙은 내가 하나님 편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원하는 인격으로 바뀌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변화시키는 깨우침과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영적 회초리와 같습니다.

오늘도 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닮아가는 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쳐나기를 기도합시다.

주님,
닮기 원합니다.

주님,
예리한 말씀으로
나를 깨우쳐 주소서.

깨달음 없던 신앙
말씀을 따르지 못하던 삶
이제는
깨닫고 따르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그 다음 날에도
오직 주님만 닮아가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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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32207 2019-07-14T02:27:42Z 2019-07-14T17:57:30Z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Ⅰ(요한계시록 1:3) / 설교 원고(2019-07-14)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Ⅰ(요한계시록 1:3)

오늘의 주제가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입니다.

왜 요한계시록을 ‘복으로 읽어야 하는가?’
그 이유를 먼저 소개합니다.

성경을 산(山)에 비유하면 성경에는 구약이라는 산과 신약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구약이란 산에는 39종류의 나무들이 있고, 신약에는 27종류의 나무들이 있습니다. 나무들이 우거진 것을 삼림(森林)이라고 합니다. 삼림이란 한자를 분석하면 ‘수풀 삼(森)’ 자에는 나무(木)가 세 개 있습니다. 또한 ‘수풀 림(林)’ 자에는 나무(木)가 두 개 있습니다. 따라서 삼림이란 성경에는 66종류의 나무들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66번째 종류의 나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삼림에 있는 나무로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요한계시록을 삼림의 나무로 읽거나 해석하지 않고 마치 거대한 산맥(山脈)처럼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요한계시록은 읽는 것도 어렵고 이해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고 이해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요한계시록을 삼림에 있는 다양한 나무 중 하나라 생각해 봅니다. 다양한 나무들 중에서 공통적인 요소들을 찾는다면 첫 번째가 복(福)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22장 404절로 구성되었는데 복에 관한 말씀이 7번 소개됩니다. 성경 전체에서 강조하는 복과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는 복의 관계를 찾는다면 삼림에 속한 나무로서 요한계시록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福)’이란 한자를 분석하면 ‘볼 시(示)’와 ‘부유할 부(富)’자가 결합한 것으로 복이란 한자의 의미는 “부유한 것을 어떻게 보느냐?” 또는 “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하겠습니다.

저희가 200년 7월 4일에 뉴욕 존 에프 케네디 공항으로 가족들이 입국했습니다. 그 당시 플러싱에 '다쓰죽' 이란 모임이 한인사회에 있었는데 다쓰죽의 회원이 되려면 승용차의 기준을Benz라고 합니다. 또한 다쓰죽의 의미는 내가 번 돈은 내가 다 쓰고 죽겠다는 모임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한인 이민자들의 삶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부(富)를 돈으로 비유하면 ‘돈을 어떻게 보느냐?’에 의해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가 형성됩니다. 자본주의는 자기 능력에 따라 일을 하고 그 대가를 받는 사회를 말합니다. 사회주의는 능력에 따라 수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수입을 모두 합산하여 사람 수대로 배분하여 똑같이 나누는 사회를 말합니다. 공산주의는 돈과 수입만 균등한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에 계급이 없다며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회를 말합니다. 그런데 공산주의가 유지하려면 작은 그룹을 만들고 그 그룹을 대표하는 지도자를 선발합니다. 이렇게 지도자 위에 또 다른 지도자를 세워 나가면 마지막에는 수령이란 최고의 지도자가 나타납니다. 모든 사람은 결국 수령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공산주의라고 하겠습니다.

복에 대한 견해를 두 가지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외형적인 복(外形的 福) - 세속적 복

외형적인 복을 세속적인 복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를 부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고급 승용차를 구입하려고 합니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Benz라는 자동차가 있습니다. 독일 교회 초청으로 Benz를 생산하는 도시를 방문했을 때 놀란 것은 Benz를 타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을 안내하는 독일 목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독일 사람들도 Benz 가격이 너무 비싸서 잘 타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파트의 가족들의 수에 맞는 것을 선택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것을 좋아합니다. 옷과 가방 심지어 신발에도 명품이 있습니다.

얼마 전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후배가 서울에서 여러 동문들을 만났는데 대부분 50평 아파트에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데 뉴욕으로 돌아와서 자기의 삶을 둘러보며 나는 그동안 미국 생활 40년을 헛살았구나! 하고 느꼈다고 합니다. 이런 삶이 모두 세속적인 복에 붙들려 살아가는 인생이라고 하겠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이 가져야 만족할 수 있을까요?

둘째는 내면적인 복(內面的 福) - 신령한 복, 영적 복

내면적인 복을 신령한 복 또는 영적인 복이라고 합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여 생각하기를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자 그리고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할 때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시며 어리석은 부자를 깨우쳤습니다(누가복음 12:16∼20).

내면적인 복에 대한 교훈을 어느 부자에 대한 비유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자가 어리석은 이유는 내면적인 복이 외면적인 복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복에 대한 두 개의 단어는 ‘베라카(1293. berakah, בְּרָכָה)’와 ‘에세르(835. esher, אֶשֶׁר)’ 라고 합니다.

베라카의 복을 신명기 28:1∼2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베라카’ 라는 복은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순종할 때 복을 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베라카’ 라는 복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에세르의 복은 시편 1:1∼3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에세르(esher, אֶשֶׁר)’의 복을 시편에서 ‘아쉬레이(אַ֥שְֽׁרֵי)’ 라고 합니다. 아쉬레이(אַ֥שְֽׁרֵי־)는 에세르(אֶשֶׁר)의 복수형입니다. 아쉬레이의 복은 시냇가에서 심은 나무를 말합니다. 이때 시냇가는 복수형으로 하나의 시내가 마르면 또 다른 마르지 않은 시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자연적으로 뿌리를 내린 나무가 아니라 반드시 심은 나무를 말합니다. 복이란 나무가 마르지 않는 시냇가에 심겨진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복을 시편 133:3에서 찾아봅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구약에서 복(1293. berakah, בְּרָכָה)이란 곧 영생(永生)을 말합니다. 영생의 복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의 복을 요한계시록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복’ 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모두 일곱 구절입니다(1:3, 14:13, 16:15, 19:9, 20:6, 22:7, 22:14).

일곱 구절에 소개된 복에 대한 말씀을 찾는 것이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예언의 말씀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 예언의 그 말씀(τοὺς λόγους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the  words of the prophecy)’ 이라고 합니다. 예언의 말씀이란 성경 전체에 소개된 예언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서만 예언하는 제한된 말씀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말씀이란 곧 요한계시록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언의 말씀이란 주제가 사용된 구절은 모두 5구절입니다(1:3, 22:7, 10, 18, 19).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도 예언의 말씀이란 구절은 오직 요한계시록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요한계시록 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요한계시록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예언의 말씀이 강조하는 내용은 ‘속히 오리라’ ‘가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속히’ 라는 단어가 8구절에 소개 됩니다(1:1, 2:16, 3:11, 11:14, 22:6, 7, 12, 20).

속히 - tachos(τάχος), tachu(ταχύ) 
- (영적 의미) 반드시
- (시간적 의미) 빨리  

1. 1:1, 속히 될 일 - τάχει, quickness, 5034. tachos(τάχος) 
2. 2:16, 속히 임하여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3. 3:11, 속히 임하리니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4. 11:14, 속히 이르는도다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5. 22:6, 속히 될 일 - τάχει. quickness, 5034. tachos(τάχος)  
6. 22:7, 속히 오리니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7. 22:12, 속히 오리니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8. 22:20, 속히 오리라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예언의 말씀이 강조하는 내용은 반드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은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움이니라.

때가 가깝다는 것을 ‘마지막 때’ 라고 합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의 특징을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때’ 라고 합니다.
요한일서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따라서 오늘날을 마지막 시대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시대에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자다가 깰 때는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진 때를 말합니다.

로마서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어리석은 예언

18세기에 영국 복음주의 각성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은 요한 웨슬리(John Wesley)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입니다. 조지 휫필드는 탁월한 설교자였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영국과 미국을 13번 왕래하면서 대각성 운동을 이끌었는데, 어느 날그의 아들이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조지 휫필드가 너무나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다는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내 아들을 살려주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죽고 말았습니다. 조지 휫필드와 같은 유명한 설교자일지라도 때로는 자기 생각과 판단에 따라 예언하면 틀린 예언을 할 수 있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그 충격으로 인하여 6개월 동안 설교를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때로는 기도하다가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 또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예언하는 어리석음에 빠지면 안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성경의 한 부분으로 마지막 이루어질 것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무섭다거나 공포 분위기를 제공하는 말씀이 아니라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하고 격려하므로 이기도록 돕는 말씀으로 읽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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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28561 2019-07-06T21:47:25Z 2019-07-07T09:20:17Z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 1899. 12. 20∼1981. 3. 1)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 1899. 12. 20∼1981. 3. 1)

“설교가 영혼을 살린다.”

강단의 힘을 믿은 사람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 1899∼1981)는
영국 웨일즈 남부 카디프에서 태어났다.
21살 때 성 바돌로매 병원에서 의학을 배워 의사 면허를 취득했는데 영국 국왕의 주치의였던
홀더(Sir Thomas Horder) 교수의 조수가 될 정도로 유능했다.

그러나 탁월한 의사로 인정받던 1926년 그는 의학계를 떠나 선교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제안을 받고 목회를 시작해 30년간 일했다.

은퇴 후 세상을 떠나기까지 영국 곳곳을 돌며 순회 설교를 했다.

21살에 의사가 되고 능력을 크게 인정받게 된 로이드 존스는
훗날 왕립 의과대학 학장 제임스 패터슨 로스(Sir James Paterson Ross, 1895-1980) 로부터
‘지금까지 내가 만난 가장 탁월한 의사들 중 하나’라는 극찬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새로운 사명은 육신의 치료가 아닌 영혼의 치료였다.

사람들은 그의 이와 같은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설교가 영혼을 살린다고 굳게 믿고 평생을 설교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내게 설교는 큰 신비입니다.”라고 한 로이드 존스의 말은
설교가 지식, 목소리, 웅변 실력, 흥미 등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오는 참된
권위와 능력임을 뜻한다.

단지 효과적으로 말을 잘해서 전달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설교에 있으며
오직 성경적인 바른 설교만 이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킨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늘 하나님을 먼저 생각했다.
그의 사역에 관한 메시지는 한마디로
‘사람에게서 돌아서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다.

1968년에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목회자로서의 마지막 설교를 한 로이드 존스는
은퇴 후에도 웨스트민스터 목회자 모임의 회장으로 일하며 많은 지역을 다니며 설교를 했다.

이안 머리 멕밀런(Ian Murray McKellen, 1939. 5. 25∼)는 마틴 로이드 존스의 전기에서
그가 남 긴 영적 유산을 여섯 가지로 꼽았다.
이 내용들을 살펴보면 그를 통해 우리가 설교자로서 배워야 할 것들이 있다.

1. 그는 가장 바람직한 목회자의 본을 보여주었다.

이안 머리는 20세기가 되기 전에는 목회자가 대개 존경의 대상이었으나
점차 목사라는 직분이 대수롭지 않은 자리로 전락하게 된 원인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보다 다른 명예와 다른 자리들에 관심을 가지면서
신앙의 언저리에서 설교하게 된 점을 들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들을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들을 소홀히 여기 리라.”(삼상 2:30)는 말씀처럼
목회자들이 하나님을 경시한 것이 문제였다 는 것이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언제나 하나님 우선이었고
인간의 잔 재주로 그 자리를 지키려 하지 않았다.

2. 그는 끝까지 하나님 중심의 진리를 지켰다.

당연한 진리를 저버리고 사람 중심이 될 때 기독교는 빛을 잃게 된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 속에서 모두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인간의 위로와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복음의 핵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믿을 때 저절로 따라오는
하나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같은 잘못 된 사상이 오늘날 더욱 심해지는 현상은
항상 하나님을 인간의 물질적 복과 세상에서의 행운을 채워주는 분으로서의
강조이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는 그런 문제점을 늘 지적하며 하나님 중심의 본질로 돌아갈 것을 외쳤다.

3. 그는 복음전도의 일차 관문은 지 교회임을 외쳤다.

“개 교회(a local church)가 중요하다.”
누구나 동의하는 말이나 실제로 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 로이드 존스 당시의 영국교회였으며
지금은 거의 몰락한 이전 유럽교회의 모습이었다.
개 교회는 너무 작기 때문에 전도가 힘들고
큰 기독교 단체나 교단적으로 거물급 목회자가 초청 된 전도 집회나 컨퍼런스 등으로만
부흥을 이끌 수 있다는 착각에 도전장을 던진 로이드 존스는
복음은 개 교회 예배에서 선포되는 것으로 믿었다.
이는 교회 양적 팽창주의에 대한 목회자들의 집착이 세상의 대기업 못지 않은 이 시대에
모든 목회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메시지이다.

4. 그는 참된 말씀 선포가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임을 강조했다.

1930년대의 남부 웨일즈를 공산주의로부터 지켰다는 평가를 받는 로이드 존스의 설교는
하나님 중심 신앙을 바탕으로 오직 성경 강해와 풀이로 일관되었다.

그가 ‘설교와 설교자’(Preaching and Preachers)라는 저서에서
“설교는 자기주장을 펴기 위해 성경 구절을 찾는 것이 아니고,
한 가지 예화를 전달하기 위해 성경지식과 다른 이야기들을 덧붙여 완성 하는 것이 아니며,
예배가 사람들의 구미에 맞게 구성되고 사람의 감정을 돋우는
유행하는 찬양들로 채워지는 통에 설교 시간은 줄어들고 능력도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오늘날 이런 현상이 더욱 심화되어 가고 있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5. 그는 교회가 그 시대를 결정하는 열쇠임을 역설했다.

로이드 존스는 당시 영국 사회가 신앙적으로 내리막길에 있다는 사실이
곧 개 교회들의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영국 교회들은 이 위기를 현대적 프로그램으로 넘어보려 했지만
그는 그것이 잘못 된 방법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교회에 대한 근본적인 답은 항상 성경에 있고
세상의 교회에 대한 요구는 교회와 교인들의 삶의 변화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로이드 존스는 이를 위해 철저한 성경적인 복음주의 신자 육성과
강력한 말씀 선포가 중요함을 강조했다.

6. 그는 교회 성장이 성령의 권능에 달려 있음을 강조했다.

로이드 존스는 성경 외에 다른 것으로는 영국 교회의 쇠퇴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교회 일치 운동이나 목회자가 학위 등을 얻는 것으로 이 문제를 극복하려는 것은
착각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오직 성령의 권능이 아니고는 영국교회의 쇠퇴를 막을 수 없는데
그 이유가 문제의 배후에는 항상 마귀의 세력 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마귀는 항상 가짜를 만들고 혼란을 일으키는 데 열심입니다.
마귀는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겉으로 나타는 현상과 경험에 흥분에 관심을 갖도록 이끄는데,
항상 이런 것들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귀의 말을 듣고,
그래서 마귀가 우리에게 역사하도록 만든다면 얼마나 미련한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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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28123 2019-07-05T15:41:43Z 2019-07-05T15:42:13Z 원시복음(Protevangelium, Proto - ‘원래의’, evanglium - ‘기독교복음’)

원시 복음(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창세기에서 처음으로 예언된 메시아(창 3:15)는 최초의 복음이었습니다.
이것을 원시복음(Protevangelium, Proto - ‘원래의’, evanglium - ‘기독교복음’)이라고 합니다.

마리아의 몸에서 출생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메시아 예언은 실현되었습니다(마 1:18∼23, 2:11).
이제 남은 메시아 예언은 부활 후 하늘로 오르신 예수님께서
다시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란 예언입니다(마 24:30, 26:64, 막 13:26, 14:62, 눅 21:27, 행 1:11, 계 1:7).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아담과 하와가 따 먹음으로
죄와사망이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사망으로 망하게 된 것을 그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담을 허시고 다시 낙원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신 것이
바로 원시 복음인 것입니다.

첫째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우리가 모두 죄인이 된 것입니다(원죄).
둘째 아담인 예수님이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표하여 죽으신 것은 결국 우리 모두가 각자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며 그로 인하여 우리는 영원한 형벌을 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해야 할 것이 꼭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믿음이 있을 때에 우리는 구원의 기쁨과
죄에서 해방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며
우리의 신앙생활은 보다 활기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성경에 기록된 족보는 4복음서 중에 마태복음 1장에 아브라함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 기록되었으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족보가 없고 누가복음 3장에서 예수께로부터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남자가 낳은 후손들의 대략이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족보는 남자가 낳은 후손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15절에서 말하는 여자의 후손이라 기록한 말씀이 단 한곳 마태복음 1장 16절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관하여 자세한 내용을 누가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눅1:25-3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유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아브라함의 후손을 낳은 남자가 아닌 여자가 있었으니
다윗의 후손 (마1:16) 야곱이 낳은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로 그에게 (마 1:18)
성령이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으시리니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여기 ‘덮으시다’라는 뜻은 감싸다라는 뜻으로
닭이 알을 품듯(창 1:2)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심과 같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시고 나신 것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 계신 예수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것과 같다

어쨌든 여자의 후손은 약속의 말씀대로(미 5:2. 눅 2:4. 마 2:11)
떡집이라 일컫는 베들레헴에서 나셨고(호 11:1. 마 2:15)
약속의 말씀대로 애급으로 피신하셨다가(마2:23)
약속의 말씀대로 나사렛에서 성장하셨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께서(고전 15:3)
성경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고전 15:4)
성경대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사단의 권세 아래 놓인 세상과
그리스도 안으로 불러냄을 받은 자들과의 전쟁이라 할 것이다

사단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이기신 세상을 다시금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다할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계 17:17)
하나님께로부터 권세를 받아 다스릴 환란까지이다.
얼마남지 않은 마지막 시간이 될 것을 아는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일을(계 2:9. 13:6. 16:9. 11. 21)
훼방할 것이며 회개치 않고(계 20:14) 불 못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최후의 날이 임하기까지 복음의 말씀을 변질시키고 왜곡하여
진리에서 비켜서도록 할 것이다.

그 하나는 동정녀에 관하여서이고
둘은 창조론에 대적하는 진화론이며
셋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부정하는 종교다원주의이며
넷은 홍해바다에 길을 내신 일이며
다섯은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미련한 자들의 대적이며
여섯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을 부인하는 일이며
일곱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그러므로 그들은(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으켜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고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그러므로 그 어떤 유혹에도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며
처음 듣고 믿은 복음의 말씀인 ‘십자가의 도’에서 떠나지 말고 오히려 굳게 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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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nykcn.org,2013:Post/1426125 2019-06-30T19:48:47Z 2019-07-01T02:54:02Z 신자와 불신자에 대한 재앙 심판의 배열(2019-6-30) 도표 참조

첨부 자료 #.2
                               

인자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신자

불신자

1:13∼18

2:1∼3:22

6:1∼17
8:1∼5

8:6∼9:21
11:15∼19

16:1∼21

17:1∼22:21

기독론

(基督論) Christology

교회론

(敎會論) Ecclesiology

종말론
(終末論)
Eschatology

                      불신자에 대한 심판의 배열

요한계시록에서 재앙에 의한 심판과 징계는 신자들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을 심판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1∼2,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요한계시록 15:13∼14,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위치 및 공간적 배열

밧모섬

하늘

1∼3장

4∼11장

12∼22장


환상과 계시의 배열
1:19 -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본 것

지금 있는 일

장차 될 일

1장

2∼3장

4∼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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