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새롭게(고린도후서 4:16-18) / 주일설교 원고(2018-10-21) 이승혁목사


                                                       숭실교회 ①. 1994. 6. 19
                                                       파트리스교회 ②. 2018. 10. 21

- 동일한 제목의 설교이었지만 내용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소개됩니다.

날마다 새롭게(고린도후서 4:16∼18)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16. Therefore we do not lose heart. Though outwardly we are wasting away, yet inwardly we are being renewed day by day.  
17. For our light and momentary troubles are achieving for us an eternal glory that far outweighs them all. 
18. So we fix our eyes not on what is seen, but on what is unseen. For what is seen is temporary, but what is unseen is eternal. 

현대인의 특징을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 라고 합니다. 포노 사피엔스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만 일상생활에서 자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지난 월요일 아침 맨하튼에 가려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두 번씩 갈아타고 가면서 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대략 제 주위에 앉거나 서 있는 승객들이 열두 명 가량이었습니다. 열두 명 가운데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사람의 수가 여섯 명 내지 일곱 명 가량이었습니다. 대략 50%가 넘는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여론조사 기관에서 “일주일 동안 휴대전화 없이 지내라고 한다면 어떨까?” 하는 질문을 하였을 때 51.6%가 불안해서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포노 사피엔스란 전화를 의미하는 라틴어 포노와 생각을 의미하는 사피엔스라는 두 단어가 합성된 신종어로 휴대전화 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요즈음은 데이케어센터에서도 스마프폰 사용법을 가르칩니다.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도 휴대전화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추세가 교회 안에도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에서는 성경 찬송을 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휴대전화에 찬송가와 성경 앱(App)을 다운받아 찬송을 부를 때에 또는 성경을 읽을 때에도 휴대전화를 열면 성경을 다양한 번역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포노 사피엔스와 그리스도인의 차이

그런데 아무리 휴대전화를 잘 사용하여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찬송을 부르면 포노 사피엔스는 될 수 있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해야 합니다.

유행이나 어느 대형교회가 행하는 것이 마치 성경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성경적이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 모두가 ‘포노 사피엔스’ 처럼 살아갈지라도 성도들은 비록 포노 사피엔스로 인정받거나 인정받지 못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해야 한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포노 사피엔스는 새롭게 출시되는 제품에 관심을 갖습니다. 새 제품을 구입하려고 제품을 판매하는 건물 앞에서 밤을 새우기도 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속사람을 새롭게 하려고 합니다.


본문의 16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겉사람이 후패한다는 말씀은 겉사람은 네오스의 시간에 해당합니다. 네오스의 시간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육체가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겉사람을 새롭게 하려고 보톡스, 마늘주사, 심지어 태반주사까지 맞는다고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는 말씀은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게 무장해야 합니다. 이때 새롭다는 것은 네오스와 같이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카이노스 즉 마음과 생각을 새롭게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육체는 약해질 수밖에 없지만 마음과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과 생각을 새롭게 하려면 세상이 부러워하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신앙생활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신앙생활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9∼10절에서 이렇게 깨우쳤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겉사람이 약해질 때 속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의 지배를 받아 점점 더 새롭게 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속사람이 새롭게 되려면 카이로스의 시간과 카이노스의 새롭게 하는 것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새롭게 하려고 다짐하지만 크로노스의 시간에 머물 때는 여전히 어제와 동일한 삶을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새롭게 하려고 다짐하는 순간 카이로스의 시간을 만들려고 습관에 따라 생활하지 않고 새로운 삶의 계획을 따라 살아갈 때 비로써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카이로스의 시간과 카이노스의 새롭게 하는 것이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을 날마다 새롭게 되라고 합니다. 날다 새롭게 될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을 바울 서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라(로마서 6:4)
둘째,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라(로마서 6:11)
셋째, 선한 일을 생각하라(에베소서 2:10)

첫째,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라(로마서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사형언도를 받은 사형수를 최고수라고 합니다. 최고수의 하루는 해가 뜰 때부터가 아니라 해가 질 때부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사형은 시간이 해가 뜬 후에 집행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최고수에게 가장 기쁜 시간은 해가 질 때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가 뜰 때부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합니다. 최고수의 삶과 우리들의 삶이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최고수는 죽음을 기다리는 삶이지만 우리들은 반드시 죽는 존재이지만 죽음을 기다리지는 않습니다. 최고수가 죽음을 기다리는 이유는 이미 사형이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냉정하게 생각하면 우리들도 이미 죽음이 결정된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오늘은 죽음의 날이 아니라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최고수와 우리들의 차이를 결정하는 기준은 “새 생명”입니다. 최고수도 오늘 사형집행의 날이 될 수 있고 우리도 오늘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같은 것이지만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다른 이유는 죽음 이후에 대한 생각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최고수들 중에서 사형언도를 받은 후 절망 가운데서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지냈던 사람도 복음을 받아드린 후에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하루하루의 삶을 정리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내가 사형을 받은 후에 내 몸에서 필요한 장기를 모두 기증하고 심지어 자기의 몸은 의과대학의 해부용으로 기증하겠다고 결정한 후에는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초조한 날이 아니라 이제는 내가 이 세상에서 지은 죄 값을 이렇게 갚아주고 떠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고 합니다.

새 생명의 삶이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죽음은 누구나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는 부정적일수도 있고 긍정적일수도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가 새 생명의 삶을 누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의 확신을 갖는 사형수는 마지막 그 날을 기다리며 자기 몸에서 필요한 모든 장기를 기증하고 몸은 의과대학의 해부용으로 기증한 후에 세상에서 지은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하는 심정으로 새 날을 맞이하기 때문에 새 날은 새 생명의 날이 될 것입니다.

새 생명의 삶을 위하여 가져야 할 신앙의 자세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구세주가 되시고 지금은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라(로마서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세상에는 죄에 대하여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으나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는 죄에 대하여 살았으나 죽은 사람입니다.

죄에 대하여 살았으나 죽은 사람은 죄의 유혹에 대하여 쉽게 반응하고 죄와 함께 먹고 마시기를 좋아하며 즐거워하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영원한 죽음 영벌의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을 말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으나 살아있는 사람은 죄에 대하여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죄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 때에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사람을 말합니다.

죽었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려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선한 일을 생각하라(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10월의 도서 예수의 기도라는 책에서 순례자로 소개되는 주인공이 어느 마을을 지날 때 작은 교회에 들어가 기도를 마치고 나와 길을 가려는데 아이들이 쫓아와서 “거지님, 거지님 좀 기다리세요!” 하며 다가와 손을 잡고 “우리하고 같이 엄마에게 가요. 엄만 불쌍한 사람을 좋아하니까요” 하며 집으로 안내합니다. 집에서는 아이들의 엄마가 순례자를 복음의 정신에 따라 지나가는 길손을 정성껏 대접하며 남편의 시청 지정 판사인데 순례자를 하나님의 사자로 생각한다. 내일은 주일이므로 여기서 머물고 같이 예배드리고 예배 후에는 가난한 형제들 서른 명 정도 매 주일 같이 점심을 먹는데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합니다. 순례자는 이 사람이 정말 사람인가? 아니면 혼령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여주인의 집안은 경건한 가정으로 그녀의 어머니가 어려운 이웃을 사랑으로 대하며 항상 단순함과 경건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키우고 하녀들을 형제처럼 대하라고 당부하셨는데 어머니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안주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의 남편을 만난 후에 순례자는 선한 일이란 착한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군가로부터 영적인 이야기를 듣고 더욱 경건한 신앙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선한 일이란 먹을 것을 나눠주고 옷을 주고 얼마의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Let God be God!’ 즉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라!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보여주신 길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 방법. 내 길이 아닙니다. 그가 보여준 길로 그가 보여준 방법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결론을 위한 이야기
새 생명의 삶을 실현하는 것도
죄에 대하여 죽는 것도
선한 일에 열심 하는 것도
오직 예수님의 삶과 예수님의 방법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셨던 그 길은 좁은 길이며 좁은 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눈물과 기도가 없이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길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주님을 따라 살며 날마다 새롭게 되어 세상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즐거움을 주위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은혜가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1.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갈 수 있는 믿음으로 무장하자!
2.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드러나는 교회를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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