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이숙 - 죽으면 죽으리라

안이숙 - 죽으면 죽으리라

‘살아 있는 순교자’로 알려진 안이숙은 1908년 평안북도 박천에서 무역상을 경영했던 부호 안중호의 넷째 딸로서 팔삭동이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의 상당한 재력으로 풍요롭게 자라난 그녀는 아들이 없어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불협화음을 경험하며 자라게 된다.

 

 

자라면서 총명이 남달리 뛰어난 안이숙은 박천 공립보통학교를 거쳐 평양 서문여고를 졸업한 후에 그 당시 보통 사람들로는, 더구나 여자의 몸으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본 유학을 떠났으며, 일본 경도여전과 귀족학교인 동경 가정학원 연구과를 졸업했다. 그러므로 일본에서의 생활은 그 후 안이숙의 사역과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이숙이 21세가 되던 1929년에 귀국하여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 임용되어 근무했고, 1937년에는 평북 선천 사립 보성여학교에서 음악 및 일어교사로 교편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일제 말엽인 1939년 전교생이 합동으로 신사에 가서 행했던 신사참배시 의연히 꼿꼿하게 하나님 이외의 어떤 신에게도 절을 하지 않는 믿음의 절개를 보이며 신사참배를 거부한 후 신의주에 사는 제자의 집으로 피신하게 된다.

 

일본 형사의 눈을 피해 신의주 근교로 피신하던 중 “평양성으로 가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평양에 가게 된다. 거기서 평남 개천읍 십자의원의 의사인 박관준 장로를 만나 하나님의 대사로서 1940년 2월, 귀신의 땅 일본에 건너가서 위정자를 위시한 장관들을 만나 일본의 망국행동을 경고하고 그들의 한국 기독교 박해에 항의했다. 또한 제 74회 일본제국회의 때 의사당에서 ‘일본은 유황불로 망한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대사명을 전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 투옥되어(일본 국회의사당 수위가 쓴 기록에서 이날 사건이 자세하게 열거되어 있음) 평양형무소에 이감 후 6년의 옥고를 치렀다.

 

 

안이숙이 세상에 알려진 연유는 바로 옥중생활에서 착한 양 착한 목자로서 주님의 참사랑을 몸소 실행한 것이다. 주님은 안이숙을 통해 각색 죄수들과 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하나님과의 사랑을 회복시키셨던 놀라운 사건들이 <죽으면 죽으리라>에 실려 있다.

 

이러한 안이숙의 꼿꼿한 신앙은 일찍이 미국 선교사로부터 말씀공부를 배운 어머니의 영향에서 비롯된다. <죽으면 죽으리라>에 나와 있듯이 안이숙 어머니의 신앙은 참으로 놀랍고 대단하다. 옥중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추위와의 싸움이었다. 평양형무소의 추위는 안이숙의 눈을 얼게 할 정도로 혹독했다. 그녀의 눈에서는 고름이 나오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실명의 위기를 맞게 된다. 군의관의 배려로 일시 출감하여 치료할 수 있었는데, 이때 면회 온 안이숙 어머니의 말씀은 우리 가슴을 무척 감동케 한다.

 

여기 안이숙 어머니가 그 당시 말씀하신 내용을 소개한다.

 

“얘! 너 왜 눈을 위해 염려하니? 네가 네 생명을 주님께 바쳤을 때 넌 네 눈도 같이 바치지 않았느냐?”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감을 느꼈다.

“아무렴요. 눈도 바치고 모든 것 다 바쳤어요. 어머니! 알았어요.”

“주님께 일단 드렸으면 주님의 것이지 네 것이 아닐 게 아니냐? 주님께 한번 바친 네 몸과 네 생명은 주님이 알아서 잘하실 것인데, 너는 왜 네 것같이 염려하며 네 재간으로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주님이 그 능한 지혜로 다 좋게 하시는 것인데, 너나 내가 눈이 어두워야 좋을 것인고로 어둡게 하시는 것이 아닐까? 주 목사님은 도라홈으로 벌써 눈을 못 쓰게 되셨고 그로 인해서 더 충성하시는 것 잊어버렸냐? 사도 바울도 눈에 가시 때문에 순교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 눈을 뜨고 보지 못할 것을 보고 마음이 더 상하는 것보다 눈을 감고 아무 것도 안 보는 것이 너를 위해서 좋은 것인 줄 생각해 본 일이 없지?”

 

나는 이러한 위대한 대선생이 내 어머니인 것에 또 한번 탄복했다. 언제나 그는 내게 이런 대선생이었다. 주는 내게 합당한 신앙 모범의 어머니를 주셔서 지금까지 나를 기르시고 권면하시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얼굴에 웃음을 띄우면서

“자! 우리는 용사들인데 무엇 눈 같은 것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하겠어요. 자, 어머니 진정하세요. 저도 용진 맹진하겠어요.”

그리고 바라만 보고 섰던 여간수와 부장과 남간수에게

“미안합니다. 저는 제 갈 곳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하고 사무소를 나왔다. 여간수는 기가 막혀서

“나는 세상에 살다가 이런 일은 처음 봐요. 딸도 딸이지만 어머니는 더하시는군요.”


 

그 당시 안이숙과 함께 옥중생활을 했던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이기선 목사, 이광록 집사, 박관준 장로, 박신근 집사, 이인재 전도사, 조수옥 여집사, 최덕지 선생 등등과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최봉석 목사(최권능 목사), 그리고 위대한 설교자 주기철 목사이다.

 

‘아! 용사여! 신앙의 용사들이여! 참 장하고 존귀하여라!’

 

1945년 사형집행 몇 시간을 앞두고 안이숙은 8.15 광복과 함께 8월 17일 출옥했으며, 1948년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미국에서 김동명 목사님과 결혼했고, 미네아 폴리스에 있는 서북대학에서 영어와 음악공부를 마친 후, 텍사스 서남 침례신학교에서 기독교 교육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그 학교에서 교회음악을 연구했다.

 

1957년 미국 남침례교 국내선교부에서는 김동명 목사를 미국 선교사로 파송했으며 김 목사님은 Berendo Street Baptist Church를 개척하게 되며 이때 한 설교가 그 유명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이다.

 

교회 개척 이후 참으로 아름다운 간증이 많이 있는데, 이는 <죽으면 죽으리라>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안이숙이 미국으로 건너간 지 20년 만인 1968년에 귀국하여 <죽으면 죽으리라>를 출간했을 때 한국 교회 안팎에 큰 충격을 주었고 장기 베스트셀러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1976년에 그 후편 <죽으면 살리라>를 출간했으며, 1989년에는 또다시 <당신은 죽어요 그런데 안 죽어요>를 출간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후 1990년 <그럴 수도 있지>, <낫고 싶어요>, <솔직한 노래>, <자랑이 되는 자랑>, 1993년 <信情>, <지나가는 순례자>, 1995년 <온 세상 내 세상> 등 총 10편을 저술했다.

 

이후 1995년 11월 안이숙 사모님과 김동명 목사님이 힘을 모아 대전 대덕연구단지 내 새누리교회를 세운다.

 

그리고 1997년 10월 18일 미국 나성의 선한사마리아병원에서 89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나성 Hollywood Memorial Park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져 있다.

 

“주님을 위하여 일제 밑에서 6년 간 옥고, 사형을 앞두고 출옥한 실격한 순교자. 죽으면 죽으리라(If I Perish, I Perish) 죽으면 살리라(If I Perish, I Live).”



 

<죽으면 죽으리라 안이숙 이야기> pp27~36, 안이숙 저, 기독교문사,

 
자료 출처 /  안이숙 죽으면 죽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