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nykcn.org,2013:/posts Patris Church(πατρίς ἐκκλεσία) 이승혁목사 (917)597-2322 2020-02-16T18:53:16Z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510214 2020-02-16T18:53:16Z 2020-02-16T18:53:16Z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 12:21) / 주일 설교(2020-2-16) 이승혁목사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510200 2020-02-16T18:00:37Z 2020-02-16T18:00:38Z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 12:21) / 주일 설교(2020-2-16) 이승혁목사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510077 2020-02-16T12:22:52Z 2020-02-16T12:22:52Z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 12, 13, 14, 15문


12문 :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의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형벌을 받아 마땅한데,
        어떻게 이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
  답 :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義)가 만족되기를 원하십니다.1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든 아니면 다른 이에 의해서든 죄값을 완전히 치러야 합니다.2

13문 :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까?
  답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죄책(罪責)을 증가시킬 뿐입니다.3

14문 :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단지 피조물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자가 있습니까?
  답 : 하나도 없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책 때문에 다른 피조물을 형벌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4
        둘째,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단지 피조물로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짐을 감당할 수도 없고,
                다른 피조물을 거기에서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5

15문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중보자와 구원자를 찾아야 합니까?
  답 : 참인간이고6
         의로운 분이시나7
        동시에 참하나님이고 모든 피조물보다 능력이 뛰어나신 분입니다.8


1) 창 2:17; 출 20:5; 23:7; 겔 18:4; 히 10:30
2) 사 53:11; 마 5:26; 롬 8:3-4
3) 욥 9:2-3; 시 130:3; 마 6:12; 롬 2:4-5
4) 겔 18:4; 히 2:14-17
5) 시 49:7-8; 130:3; 나 1:6; 히 10:4                
6) 고전 15:21; 히 2:17                            
7) 고후 5:21; 히 7:26        
8) 사 7:14; 9:6; 렘 23:6; 요 1:1; 롬 8:3-4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509844 2020-02-15T17:24:47Z 2020-02-16T12:18:29Z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라(로마서 12:21) / 주일 설교 원고(2020-2-16) 이승혁목사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라!(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Do not be overcome by evil, but overcome evil with good.   

참조 / 마태복음 5:39∼41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왜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할까요?
시편 37편 27절의 말씀으로 그 이유를 소개합니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신앙생활을 영적생활이라고 합니다.

영적생활에 성공하기 위해서 영적생활의 원리를 잘 적용해야 합니다.
영적생활의 기본 원리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또 다른 원리는 로마서 12장 21절 말씀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영적생활의 기본 원리를 “믿음”이란 단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믿음이란 용어의 근거는 하박국 2장 4절에서 “에무나”를 번역한 것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에무나’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49회 사용되었습니다.

에무나’라는 단어가 “진실(眞實)” 또는 “성실(誠實)”이라고 번역하였으나 단 한 번 하박국서에서는 “믿음”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에무나, 피스티스)”은 “진실”과 “성실”을 의미합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돈을 많이 벌어 헌금을 많이 하려고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서 헌금을 많이 한다면 그것이 믿음에 의한 헌금일까요?

‘에무나’라는 믿음은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헌금을 하기 위해서 “진실”과 “성실”하게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러한 것이 “에무나”라는 “믿음”입니다.

종교가 있는 사람과 종교가 없는 사람을 비교할 때 어떤 사람이 행복할까요?

종교를 바르게 믿는다면 종교가 있는 사람이 종교가 없는 사람보다 더 행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종교를 바르게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국의 경우 전체 인구의 50%가 종교가 없다고 합니다.

5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유교, 천도교, 가톨릭 등에 해당합니다.

부처를 믿는 사람을 불자(佛子)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을 성도(聖徒)라고 합니다.

성도(聖徒)란 “성스러울 성(聖)” “무리 도(徒)”라는 훈으로 “성스러운 무리”라고 하겠습니다.

성스러운 무리들의 영적생활 원리는 악을 악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라!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을 “체로키부족”의 전설 같은 이야기에서 찾아봅니다.

체로키(Cherokee)’는 북아메리카의 원주민으로 ‘이로쿼이어’를 사용합니다.
1650년에는 인구 22,000명이었으나 그 후 천연두의 유행으로 절반으로 감소되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배 과정에서 백인의 문화를 대폭 수용하였으며, 미국 정부는 원주민 교육의 시범 케이스로 1769년 디트머스 대학을 설립하였고, 북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고유 문자를 가진 원주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오클라호마의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강제이주 당했습니다. 문명화된 다섯 부족 중 한 부족입니다.

체로키 부족의 추장이 손자에게 인생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에서는 늘 싸움이 일어난단다. 마치 두 마리 늑대가 싸우는 것과 같단다.”

“하나는 악마 같은 놈 또 다른 놈은 선한 놈이지.”

손자는 잠시 동안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생각하다가 할아버지께 물었습니다. 

“그럼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체로키의 추장은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긴단다.”

선으로 악을 이기려면 먼저 선에게 먹이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선에게 먹이를 줄 수 있는 방법은 오늘의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원리는 강한 것을 이기려면 더 강한 힘을 가져야 합니다.

선과 악의 힘을 비교하면 악이 선보다 더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는 말씀은 세상적인 원리가 아닙니다.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영적원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영적 원리를 가장 쉽고 분명하게 요약한 말씀이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의 산상복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산상복음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5:39∼41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악한 자를 대적(對敵)하지 말라(마태복음 5:39)

대적(對敵, ἀντιστῆναι)이란 “대할 (對)” “원수 (敵)”
적과 맞서 싸움을 의미합니다.

안디스테미(ἀνθίστημι, 436, anthistémi)”라는 헬라어는 “∼에 대항하여(to set against)” 또는 “견디다(withstand)”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은 “악한 자에게 대항하지 말라” 또는 “악한 자에 대해서 견디라”는 뜻입니다.

첫째, 돌려대라(마태복음 5:39)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 돌려대라(στρέψον) - 스트레포(στρέφω, 4762. strephó)
- 돌려라(to turn), i.e. 전환하라(to change)

여러분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
상대방과 마주 설 때 상대편의 오른편 뺨을 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가능성을 몇 가지로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상대방의 뒤에서 오른편 뺨을 칠 수 있습니다.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몰래 때리는 것이므로 본문에서 합당한 경우가 아닙니다.

둘째는 상대방과 마주 설 때 왼손으로 오른편 뺨을 칠 수 있습니다.

쿰란공동체에서는 심지어 왼손을 사용하여 제스처를 하는 경우 열흘 동안 회원직을 박탈하고 회개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셋째는 상대방과 마주 서서 오른 손을 돌려서 때리거나 아니면 손등으로 칠 수 있습니다.

오른 손등이나 오른 손을 돌려서 때리는 것은 정상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의 풍속에 의하면 손등으로 치는 것은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창피와 모욕을 주기 위한 상징적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이라는 말은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주인이 노예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아이에게,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네 주제를 파악하라”는 뜻으로, 혹은 “너는 내 부하이니 권위에 복종하라”는 뜻으로 손등으로 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너는 쓰레기 같은 존재” 라는 뜻을 전달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청중들, 즉 당시의 소작농들과 병자들, 여인들이 이런 모욕을 당하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런 비인간적인 모욕을 더 이상 당하지 말고, 왼쪽 뺨도 돌려대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것은 반항하라는 뜻이 분명합니다. 

즉 오른쪽 뺨을 맞은 사람이 왼쪽 뺨을 돌려댈 경우에는 가해자가 더 이상 손등으로 때릴 수 없게 됩니다.

또한 가해자가 왼손으로 친 것은 상처를 주지 않고 단지 모욕할 생각으로 친 것인데, 왼쪽 뺨을 돌려댈 경우에는 부득이 오른쪽 손으로 때릴 수밖에 없게 된다.

오른쪽 손으로 때린다는 것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싸울 경우뿐이기 때문에, 상급자가 오른 손으로 때리는 것은 결국 하급자를 자기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왼쪽 뺨을 돌려대는 것은 소작농이나 노예가, 혹은 유대인이 그 상급자에게 대하여 “나는 인간이다!” 라고 선언하는 행위라고 하겠습니다.

“나를 존엄성이 있는 존재로 취급하라”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즉 “당신이 나를 때려죽일 수도 있지만, 나는 더 이상 쓰레기가 아니며, 당신과 동등한 사람” 이라고 행동으로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왼쪽 뺨을 돌려대라는 것은 폭력에 굴종하여 눈을 내리깔고, 주인의 처분에 맡기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는 지금 “절대로 굴종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폭력적 세계 속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서 그렇다면 맞아죽을 것입니다. 모든 약자들이 함께 왼뺨을 돌려댈 때 비로소 사회적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가지게 하라!(마태복음 5: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 가지게 하며(λαβεῖν) - 람바노( λαμβάνω, 2983. lambanó)
- 가지다(to take), 받다(receive)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의복은 겉옷과 속옷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따라서 속옷을 가지려고 할 때 겉옷까지 가지게 한다면 벌거벗은 몸이 될 것입니다.

이 말씀 역시 불의를 조장하는 것으로 오해되었습니다. .

이 말씀의 배경이 되는 담보물 규정은 신명기 24:10∼15에 소개되었습니다.
네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줄 때에 너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말고. 너는 밖에 서 있고 네게 꾸는 자가 전당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

 
보통 담보물은 양이나 염소처럼 동산(動産)을 담보물로 잡지만, 그런 종류가 없을 경우 부동산을 담보물로 제공했다.

그러나 궁핍한 사람들은 겉옷을 담보로 잡혔지만, 낮 동안뿐이고, 해가 질 무렵에는 채권자가 반드시 채무자에게 겉옷을 되돌려주어, 추운 겨울에 채무자가 그 겉옷을 덮고 잘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예수 당시에 빚 문제는 가장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습니다.

로마제국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갖가지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부자들이 세금을 탈루하는 방식은 제국의 변방에 있는 토지를 매입하여 재산을 은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은 토지를 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가족의 생계가 그 토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부자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는 방식은 빌려준 돈이나 곡식에 대해 25% 내지 250%의 엄청난 이자를 붙이는 방식이었습니다.
농민들은 결국 이자를 갚지 못해 땅을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는 이런 상황에 대해 채권자들이 아니라 채무자들을 대상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법정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너를 고소하여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내어 주라”는 말씀은 채무자가 입고 있는 속옷까지 벗어주어 완전히 벌거벗고 나체가 되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회에서 자신의 벗은 몸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알몸이 되는 것은 최소한 사람들을 찡그리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미국의 성서학자 “로버트 펑크(Robert W. Funk, 1926. 7. 18∼2005. 9. 3)”의 연구에 따르면 사해사본의 하나인 “훈련교범”에서 몸을 드러내는 규정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옷에서 팔을 빼면서 우연히 맨몸을 드러내면 30일 간 참회해야 한다.
둘째는 친구에게 아무 이유 없이 맨몸을 드러낸 경우에는 6개월 간 벌을 받는다(Manual of Discipline 7:12, 14.).
셋째는 수치를 당하는 것은 나체가 된 사람을 보는 사람들이다.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사람에게 겉옷을 벗어주라는 말씀은 “게릴라 전술”과 같습니다.

“게릴라 전술”(비정규전, 유격대)이란 전력이 약한 쪽이 강한 쪽을 치고 빠지는 식으로 괴롭히는 전략이라고 하겠습니다. 게릴라의 어원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대항하던 스페인의 비정규 무장집단들을 스페인어로 전쟁을 의미하는 ‘게릴라(Guerra)’에 “작은”이란 접미사 “일라(illa)”가 합쳐진 “게리야”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영어식 발음은 “구어륄라”에 가까우며 “게릴라”라고 하면 알아듣지 못합니다.

“게릴라(guerrilla)”들이 사용하는 게릴라전은 대개의 힘없는 약소민족들과 약소국가들의 국민들이 선호하는 전쟁 방식입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는 7년 전쟁 때 프랑스 혹은 영국 쪽에 붙은 미국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방법이고, 미국독립전쟁 때 역시 실전에 가까운 훈련을 받은 영국군을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 힘들었던 식민지인들이 쓰던 방법이었습니다. 서로 전면을 바라보면서 싸우는 전열보병에 익숙했던 유럽 군인들에겐 이동 도중에 공격하고 빠져버리는 것은 천적과도 같은 전술이기도 했다. 
 
채권자 앞에서 벌거벗고 떠남으로써 고리대금에 근거한 경제구조가 어떤 것인지를 남김없이 폭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동행하라! - 가주어라!(마태복음 5:41)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주어라(마태복음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 동행하고(ὕπαγε) ; 후파고(ὑπάγω, 5217. hupagó)
-
인도하고, 이끌림을 받고(to lead or bring under), to lead on slowly, to depart

이 말씀 역시 많이 오해되어 왔다.

소요사태가 발생할 경우 로마 군단들은 신속하게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하루에 100리를 행군해야 할 경우도 있었다.

30~40 킬로그램에 달하는 배낭을 지고 행군하는 것을 쉽게 하기 위해 로마의 군법은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시켜 대신 배낭을 지고 가도록 하는 권리를 허락했다.

이러한 명령에 따르는 것은 예속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불응하는 것은 반역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그 권리를 남용할 경우 토착민들의 불만을 고조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오 리로 제한시켰다.

또한 로마의 모든 도로에는 오리마다 표지석이 세워져 있기 때문에, 이 군법을 어기는 군인들에 대해서는 장교들(백부장)이 적절한 처벌을 주도록 했던 것이다.

예수는 그 청중들에게 단지 로마군인들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배낭을 지고 오 리를 걸어간 후에 오리를 더 가겠다고 우기라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피해를 입는가?

그 병사로 하여금 군법을 어기도록 만들어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하라는 것이다.

로마 병사가 유대인에게 싹싹 빌도록 만들라는 것이다.

유대인이 1마일을 더 지고 가겠다고 맞설 때 로마 군인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예수는 식민지의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 체제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존엄성과 자주성을 목숨 걸고 지키는 전략을 통해 개인의 해방과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확보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폭력 앞에서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비폭력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폭력을 극복하라는 가르침이다.

또한 우리의 안전은 타인의 불안전 위에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안전을 보증할 때만 우리가 안전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 역시 우리가 폭력을 당할 때라도 비폭력으로 우리의 존엄성을 지킬 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폭력을 철저하게 폭로하여 자신들의 폭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후에 그를 용서함으로써, 우리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서, 인간 사이의 철저한 신뢰에 바탕을 둔 영적원리라고 하겠습니다.

* 마태복음 5:42∼45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 고린도전서 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 아모스 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 시편 37:27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Turn from evil and do good; then you will dwell in the land forever.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509658 2020-02-15T01:32:50Z 2020-02-15T01:32:51Z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9, 10, 11문

9문 : 하나님께서 사람이 행할 수 없는 것을 그의 율법에서 요구하신다면
        이것은 부당한 일이 아닙니까?
답 :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행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으나,1
        사람은 마귀의 꾐에 빠져 고의(故意)로 불순종하였고,2
        그 결과 자기 자신뿐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도
        하나님의 그러한 선물들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3

10문 :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불순종과 반역을
          형벌하지 않고 지나치시겠습니까?
  답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죄(原罪)와 자범죄(自犯罪) 모두에 대해
       심히 진노하셔서
       그 죄들을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의로운 심판으로 형벌하실 것입니다.4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0)고 선언하셨습니다.5

11문 :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자비하신 분이 아닙니까?
  답 : 하나님은 참으로 자비하신 분이나6
        동시에 의로우신 분입니다.7
        죄는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엄위를
        거슬러 짓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공의는
        이 죄에 대해 최고의 형벌,
        곧 몸과 영혼에
        영원한 형벌을 내릴 것을 요구합니다.8

1) 창 1:27; 2:16-17
2) 창 3:4-6,13; 요 8:44; 딤전 2:13-14
3) 롬 5:12
4) 창 2:17; 출 20:5; 34:7; 시 5:4-5; 7:11-13; 나 1:2; 롬 1:18; 5:12; 엡 5:6; 히 9:27
5) 신 27:26
6) 출 20:6; 34:6-7
7) 출 20:5; 23:7; 신 7:9-11; 히 10:30-31
8) 나 1:2-3; 마 25:45-46; 살후 1:8-9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507776 2020-02-09T18:47:44Z 2020-02-13T16:45:24Z 옛 사람 새 사람(에베소서 4:17-24) / 주일설교(2020-02-09) 황선민목사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507499 2020-02-08T15:50:19Z 2020-02-08T20:58:04Z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6, 7, 8문

6문 :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렇게 악하고 패역한 상태로 창조하셨습니까?
답: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선하게,1
                또한 자신의 형상,2
                곧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하셨습니다.3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창조주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마음으로 사랑하며,
                영원한 복락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살고,
        그리하여 그분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4

7문: 그렇다면 이렇게 타락한 사람의 본성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답 : 우리의 시조(始祖) 아담과 하와가
                낙원(樂園)에서 타락하고 불순종한 데서 왔습니다.5
        그때 사람의 본성이 심히 부패하여
                우리는 모두 죄악 중에 잉태되고 출생합니다.6

8문 : 그렇다면 우리는 그토록 부패하여, 선은 조금도 행할 수 없으며
        온갖 악만 행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까?
답 : 그렇습니다.7
        우리가 하나님의 성신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참으로 그렇습니다.8


1) 창 1:31        
2) 창 1:26-27
3) 엡 4:24; 골 3:10        
4) 시 8:4-9; 계 4:11
5) 창 3장; 롬 5:12,18-19
6) 시 51:5; 요 3:6        
7) 창 6:5; 8:21; 욥 14:4; 사 53:6; 딛 3:3        
8) 요 3:3,5; 고전 12:3; 고후 3:5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507473 2020-02-08T14:17:12Z 2020-02-08T14:18:50Z 로뎀나무(대싸리나무)

로뎀나무(대싸리나무)

로뎀나무를 ""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대싸리나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엘리야가 왜 광야로 나갔을까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싸움에서 이긴 직후, 이세벨의 미움을 받아 죽이려는 계획을 알고 살기 위하여 도망쳤습니다. 그런 엘리야가 살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여 그가 찾았던 도피처는 광야였습니다. 수행원을 데리고, 나귀를 타고 이스라엘의 최남단 도시 브엘세바로 향했다. 그 과정도 순탄치는 않았을 것입니다. 혹시나 이세벨 왕비가 보낸 자객(?)의 위협을 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10여일 이상이 걸리는 도망길이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북왕국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요단강 동편 길르앗 지방에 살던 이민자였습니다. 그가 북 왕국 이스라엘 왕의 위협을 피해 남왕국 유대 왕국의 끝자락까지 발걸음을 옮긴 것입니다. 그 길이 익숙하였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지나 산지길을 따라 예루살렘, 헤브론을 거쳐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브엘세바 지역에 도착해서는 거기서 혼자 하룻길을 더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것도 걸어들어갑니다. 그곳은 완전한 광야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아주 뜨거운 초여름 날씨가 기다리는 곳이었습니다.
 
봄 여름의 브엘세바 광야는 아주 뜨겁습니다.

40~50도를 오르내린다. 때때로 강한 바람이 불어 닥칩니다. 광야에는 폭풍과 바람도 무서운 복병이다. 종종 도둑들의 공격을 받는 곳입니다. 그야말로 광야는 보호막이 없는 공간입니다.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앞쪽은 모압 땅 해 돋는 편, 즉 동쪽이었습니다. 서쪽은, ‘뒤편’으로 표현하였는데, 지중해(대해 또는 서해)를 지목했습니다. 오른쪽은 남방(네게브 사막) 지역을, 왼쪽은 북방 갈릴리를 비롯한 산지를 가리켰습니다.
 
예루살렘의 우편 지역, 이스라엘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람으로서 살기가 가장 험악한 지역 브엘세바 이남 지역인 남방(네게브) 지역은 그야말로 그늘이 필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아울러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는 악한 자가 지배하는 땅, 마귀가 다스리는 공간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원수를 발등상 되게(굴복시키게) 하셔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편에 그늘이 되시는 하나님’을 노래하기도 했습니다.
 
로뎀나무 곁에 눕다.
 
광야에 그늘이 될 만한 나무는 많지 않습니다. 싯딤나무(아카시아 나무)와 종려나무(대추야자 나무) 정도가 제대로 된 그늘을 제공할 뿐입니다.
 
거기에 비해서도 대싸리나무인 로뎀나무는 긴 시간을 보호해주는 그런 그늘이 없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그늘도 없이 햇살에 온몸을 노출하는 것은 그야말로 죽을 짓입니다. 엘리야는 그것을 시도한 것입니다.
 
아예 그 뜨거운 뙤약볕 아래 잠을 청합니다. 하나님께 죽여 달라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죽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선택한 것은 진짜 죽음이었습니다.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병 
 
이 표현은 우리 식의 현대적 표현입니다. 당시에 유리병은 없었습니다. 불에 구운 떡은, 사실 뜨거운 돌 위에서 익힌 빵입니다.
 
엘리야 이야기에 등장하는 '뜨거운 돌로 구운 빵'이 주는 시각적인 느낌이 남다릅니다. 뙤약볕에 의해 땅과 돌도 다 달궈져 있습니다. 달걀이 그냥 익을 정도입니다. 숯불에 달궈진 돌이 아닌, 태양열로 달궈진 그 뜨거운 돌 위에 빵이 익어가는 풍경이 묘하기만 합니다.

엘리야가 죽기 위하여 찾았던 땅, 봄에서 여름 사이, 낮 기온이 50도를 오르내리던 뜨거운 광야였습니다. 죽겠다고 누워버린 엘리야. 그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엘리야의 그 뜨거운 고통의 마음은 타오르고, 타들어가고, 점점 불이 꺼져갑니다. 
 
그런 절박함과 절망가운데 있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그늘과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하십니다. 삶의 막바지까지 스스로 내달렸던 엘리야와 함께 하셨습니다. 엘리야의 행동을 두고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하여 그곳까지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그 곁에 같이 계셨습니다. 그의 우편에 그늘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에게 빵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광야, 죽음의 자리에서도 ‘임마누엘’이셨습니다.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505579 2020-02-02T18:44:48Z 2020-02-02T18:44:48Z 행동하는 믿음(하박국 2:4, 야고보서 2:26) / 주일 설교(2020-2-6) 이승혁목사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505099 2020-02-01T06:55:30Z 2020-02-01T22:04:18Z 행동하는 믿음(하박국 2:4, 야고보서 2:26) / 주일 설교 원고(2020-2-6)
행동하는 믿음(하박국 2:4, 야고보서 2:26)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See, he is puffed up; his desires are not upright--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As the body without the spirit is dead, so faith without deeds is dead.

행동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중국의 영적 지도자이었던 "워치만 니(Watchman Nee, 倪柝声(聲). 1903. 11. 4~1972. 5. 30)의 가르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도입 이야기 #.1)

옛날 계단 식 논에서 농사를 짓던 기독교인 농부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해 몹시 가물었던 때에 계단 식 맨 위 논의 주인이었던 농부는 모내기를 마치고 밤을 새워 아래 골짜기에서 물을 길어 논에 물을 채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논을 살펴보니 바로 아래 논 주인이 위 논의 둑을 허물고 위 논의 물을 전부 아래로 흘려 내려 보냈습니다.
화가 치민 위 논의 농부는 또다시 아래 골짜기에서부터 물지게를 짊어지고 물을 길어 논에 물을 채웠습니다.
다음 날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이 세 차례 반복되었을 때는 도저히 참기 어려웠습니다.
위 논의 주인 농부는 당시 영적 지도자 "워치만 니"를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고 질문했다고 합니다.
그때 “워치만 니”는 위 논 주인이었던 기독인 농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방법을 바꾸세요! 이번에는 아래 논에 물을 채운 후 그리고 당신의 논에 물을 채우세요!”

위 논의 주인 농부는 힘든 일이지만 가르침대로 하고 비록 몸은 매우 힘들었으나 마음은 편안하게 잠을 청했습니다.
다음 날 아래 논 주인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믿는 예수를 나도 믿고 싶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당신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라면........"

행동하는 믿음이란 "믿음이란 추상명사동사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이런 행동이 가능할까요?
그 이유는 성경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You diligently study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that b them you possess eternal life.
These are the Scriptures that testify about me.

2020년 오늘의 묵상을 위한 성경 읽기는 요한일서야고보서 그리고 로마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주간에는 에베소서를 읽게 됩니다.

요한일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生命)"
야고보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본(本)"
로마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의(義)" 라고 합니다.

야고보서에서 믿음은 행동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로마서에서 믿음은 구세주를 믿는 것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구약 하박국서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See, he is puffed up; his desires are not upright--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하박국서 2장 4절에서 "믿음"이란 단어는 히브리어 "에무나"를 번역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에무나"라는 단어가 49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박국서 2장 4절에서만 "믿음"으로 번역하였고 48회는 "진실(眞實)" "성실(誠實)"이라고 번역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박국서 2장 4절에서만 "에무나"라는 단어를 "믿음"이라고 번역했는지 역사적 배경을 살펴야 합니다.

하박국서는 기원전 606년경에 바벨론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을 잡아 죽이는 모습을 보면서 하박국의 마음에 의심의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면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 때문에 악인들이 의인들을 잡아 죽이는 것을 볼 수 없었을텐데 어찌하여 악인들의 악에 대하여 방관만 하시는지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대답은, "보라 그 바벨론 사람들은 그 마음은 교만(驕慢)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正直)하지 못해! 그래서 그들의 종말로 속히 이르게 될 것이야. 비록 더디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기다려 봐라! 정녕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바벨론 왕이 망하게 되는 이유가 그의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해서 망하는 것이라면, 만약 그 당시 어떤 사람이 의인이 되려면 교만하지 않고 겸손해야 하고 또 정직하고 성실해야만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 하박국 선지자에게 대답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셨을 때 그 믿음이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 "살리라"하신 말씀도 그 사람의 영혼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이 질문했던바 악인들이 의인들을 다 잡아다가 죽이고 있는 현실을 두고 하나님께 탄원을 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답변으로서 "살리라"하고 대답하신 말씀은 바울이 말하는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 시대가 예레미야 선지자가 사역을 하고 있었던 시대였고, 그때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 와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바벨론으로 끌어갈 때 나온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당시 역사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듣고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의로운 사람들이었고 또 비교적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되어 죽임을 당하지 않고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가서 거기서 살게 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 구절 즉 하박국서 2장 4절을 인용하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된다는 말은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성실(에무나)과 진실 정직함을 그 사람의 의(義)로 여겨주신다는 말씀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신구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믿는다 혹은 예수님을 믿는다 더 나아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그 사람의 성품과 행실이 착하지도 않고 충성되지도 않고 성실하지 않고 진실하지 않으며 정직하지 않고 행함도 없고 성화도 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거짓 믿음이요 죽은 믿음이며 능히 구원에 들어갈 수 없는 믿음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요 야고보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의 자손들 중에서 죄가 아주 없어서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 같이 원죄(原罪)가 있다고 하지만 그 중에 교만하고 정직하지 않고 성실하지 않고 착하지 않고 충성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겸손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고 착하고 충성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바로 그러한 믿음 즉 죄(罪)도 있고 허물도 있고 실수(失手)도 있고 약점(弱点)도 있는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근본적으로 착하고 충성되고 정직하고 성실하고 신실하고 진실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의 그 성실(에무나)를 그의 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예수를 믿기 때문에 밤새도록 아래 골짜기에서부터 밤새도록 힘들게 물지게에 물을 길어 논을 가득 채웠지만 순식간에 논둑을 터쳐 자기 논에 물을 흘러내려보내는 화가 나는 행실에 대하여 다투지 않고 논쟁하지 않고 영적 지도자의 가르침에 따라 아래 논에 물을 채우고 그 다음에 자기 논에 물을 채운다는 것이 현실에서 자주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그 일을 믿음으로 감당했을 때 아래 논 주인의 강퍅한 마음은 녹아내려서 나도 당신이 믿는 예수를 믿어야 하겠다는 결단한 것처럼 오늘날도 이와 같은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에무나와 같은 진실하고 성실한 믿음이라고 합니다.

열왕기상 3장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이 가로되 주(主)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誠實)과 공의(公義)와 정직(正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主)의 앞에서 행(行)하므로 주(主)께서 저에게 큰 은혜(恩惠)를 베푸셨고 주(主)께서 또 저를 위(爲)하여 이 큰 은혜(恩惠)를 예비(豫備)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의 대답은,
"네가 염려하는 의인들(예루살렘 사람들 중에 의인)은 그 믿음(에무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된단다." 이렇게 대답하신 것입니다.

이때 믿음이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고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의인들 중에 정말 성실하고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이 있다면 그 성실하고 진실하고 정직한 믿음(에무나)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니 네가 염려하지 않아도 내가 오히려 너보다 더 아끼고 있단다!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이란 말도 좀 더 심도 있게 살펴서 오해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믿음이란 말이 추상명사 혹은 동사로 된 단어지만 본래는 형용사성실한, 진실한, 정직한 등의 용어였습니다. 따라서 행위도 중요하지만 행위 이전에 존재의 성품이 더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이란?

첫째, 진실(眞實)한 믿음
둘째, 성실(誠實)한 믿음

행동하는 믿음이란?
첫째, 진실한 믿음

진실(眞實)이란 한자는 "참 진(眞)" "열매 실(實)"입니다.
진실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거짓이 없이 바르고 참됨."
"참되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 라고 합니다.

진실이란 히브리 단어는 "에메트
(אֱמֶת)" 라고 합니다.
에메트(אֱמֶת)라는 단어는 히브리 알파벳  첫문자 '알렙' 과 중간 문자 '엠므' 마지막 문자 '타우'가 합성하여 만든 단어입니다.
에메트란 단어는 처음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변함이 없는 것을 진리 또는 진실이라고 합니다.

구약 호세아 4장 1절에서
"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이 땅에 없는 것은 진실(에메트,
אֱמֶת)과 인애(헤세드, חֶסֶד)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다아트, דַּעַת)이라고 합니다.

환경에 따라 바뀌는 것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사랑은 바뀔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 결혼식에서 주례자는 신랑과 신부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 사랑하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면 믿음도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받은 사람이 건강할 수도 있고 건강이 나쁠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건강해야만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진실한 믿음은 변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왜 믿음이 변할까요?
무섭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가장 용감하고 결단력이 빠른 제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로 가야 할 것을 말씀하셨을 때에 앞장서서 절대 선생님에게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나도 같이 죽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자신의 믿음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믿음은 어린 여종의 한 마디 말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와 그 환경이 두렵고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환경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진실한 믿음입니다.

신명기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에무나)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시편 33: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에무나). 


행동하는 믿음이란?
첫째, 진실(眞實)한 믿음
둘째, 성실(誠實)한 믿음

시편 89:1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에무나)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성실이란 한자의 훈(訓)은 “정성 성(誠), 열매 실(實)” 이라고 합니다.
성실이란 한자의 뜻은 “정성스럽고 참된” 이라고 합니다.

믿음에는 정성과 참된 것이 필수 조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정성의 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는 기도를 많이 하는 성도들과 신학 지식이 풍부한 성도들 그리고 말을 잘하는 성도들은 많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말씀과 계명대로 실행하는 성도들이 드물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외국에서는 기독교 인구가 20%가 넘으면 기독교 국가로 간주합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기독교 인구가 25%라고 합니다.
한국은 분명 기독교 국가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성공회 목사인 “죤 스토트”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교회와 사회를 둘러본 후에
한국에는 미숙한 크리스천이 많은 것 같다.’ 라고 말했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고 말씀을 부지런히 읽지만 그 말씀과 그 기도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불성실한 신앙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주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믿기 시작한 때부터 즉시 거룩한 삶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중생(重生)하는 시점과 성화(聖化)의 출발점이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세월이 흘러도 도무지 성화되지 않고 변화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아직 중생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고 사랑이 없고 성화가 되지 않는 사람의 믿음은 거짓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없는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원숭이 같은 신앙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앵무새와 같은 신앙입니다.
이제는 분명하게 변해야 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므로 나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행할 수 있는 믿음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을 행동하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은 두 가지 특별한 삶을 고백합니다.

첫째는 진실한 신앙

진실이란 변함이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신앙으로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주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둘째는 성실한 신앙

성실이란 거짓이 섞이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영어로 신시어(sincere)를 "성실한" 이라고 합니다.
신시어의 어원은 라틴어 "시네세라(sinecera)" 라고 합니다.
시네세라는 시네(sine)와 세라(cera) 두 단어가 합성한 단어로 시네(sine)는 없다는 뜻이며,
세라(cera)는 양초, 왁스(wax)를 말합니다.

고대 사회에 조각상(彫刻像)을 마당에 세워두는 것이 부자들의 풍습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각상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가끔 훼손된 조각품을 값싸게 판매하는 상인에게 그와 같은 조각상을 구임하여 마당에 세웠다고 합니다. 훼손된 조각품의 일부분을 왁스로 채우고 마치 완벽한 조각품처럼 장식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뜨거운 햇살에 의해서 훼손된 부분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런 조각품이 시장에 많이 나왔기 때문에 완벽한 조각품에는 반드시 "시네세라(sine cera)" 라는 보증서가 첨부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성실한 신앙이란 조금이라도 거짓이 없는 믿음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처럼 사자굴에 들어가는 신앙,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과 같은 풀무불에 던져질 때에도 주저하지 않는 신앙을 말합니다.


진실과 성실이란 두 기둥 외에 또 하나의 기둥을 찾는다면 "순종"이라고 하겠습니다.

순종하는 믿음

순종이란 내가 이해하고 인정하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내 생각과 내 방법과는 전혀 다르지만 하나님의 방법이며 하나님의 생각이라면 인정하고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인용했던 “믿음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이란 말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그냥 믿음이란 뭐 다른 뜻이 없고 예수님을 믿는 것 아닌가 하고 얼버무려 넘기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을 두고 말씀하실 때 처음부터 단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어 순종케 되는 믿음을 명시하였습니다.

로마서 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로마서 16:26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에무나)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4b)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순종(順從)이란 한자의 훈은 “순할 순(順)” “좇을 종(從)”입니다.
순종이란 뜻은 “다른 사람, 특히 윗사람의 말이나 의견 따위에 순순히 따르는 것.” 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순종이란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순순히 따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마태복음 18:22)”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셨던 말씀입니다. 주를 믿는 성도는 반드시 이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용서하며 살아오셨나요?
더구나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43∼45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믿음이란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못하는 믿음으로 이제까지 주를 믿는다고 자부하며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순종하는 신앙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가르침에도 순종해야 합니다.

히브리 백성 모두가 죽임을 당할 계획이 세워진 때에도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며 삼일 금식을 하고 왕 앞에 나가 하만의 계획을 폭로하여 히브리 민족을 위기에서 구원했던 에스더와 같은 신앙입니다.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504652 2020-01-31T00:30:10Z 2020-01-31T06:48:26Z 2020년 1월 오늘의 묵상 자료(1월)



♦ 1월 1일(수)

말씀 : 요한일서 1:1∼10
묵상 : 하나님은 빛이시라(God is Light)(5절)
성구 :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참조 :
야고보서 1:17(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
요한일서 4:8(하나님은 사랑)
요한복음 4:24(하나님은 영)

☞ 빛(φῶς, 5457. phós) ;
빛(light, radiance),
빛의 근원(a source of light)
radiance의 빛이란 첫째는 행복감과 건강 등이 얼굴에 나타나는 빛, 둘째는 따스하고 밝은 빛을 말합니다.
 
♦ 빛의 특징
1. 불변(야고보서 1:17)
2. 사랑(요한일서 4:8)
3. 영(靈)(요한복음 4:24)

♦ 빛의 이야기
어느 날 시각장애인이 등불을 켜들고 밤길을 나섰습니다. 나는 비록 불빛을 볼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이 내가 들고 있는 등불을 보고 부딪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얼마동안 잘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과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시각장애인은 버럭 화를 내며 “당신은 눈도 없소? 나는 앞을 못 보지만 당신은 내가 들고 있는 이 등불을 보지 못하시오?” 그때 상대방이 “꺼진 등불을 어떻게 봅니까?”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 너희는 세상의 빛이시라!(마태복음 5:14)
2020년 빛의 사람으로 세상을 밝혀줄 당신의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위하여 날마다 기도합시다.

♦ 주여, 빛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미국의 정치가이며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 라고 불렸단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 1. 17~1790. 4. 17)은 그가 살고 있던 필라델피아 시민들에게 선한 일을 하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는 아름답고 좋은 등을 하나 준비해서 집 앞에 선반을 만들고 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등불은 집 안에 두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집 밖에 두는 것은 낭비라고 여겼습니다.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사람들은 뭔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집 밖에 등불을 두니까 밤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멀리서도 방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좋게 생각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 밖에 등불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가 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가로등의 시작이었다고 합니다.

만약 길거리에 가로등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캄캄하고 어둡겠습니까? 세계적으로 가로등이 생기게 된 것은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을 위하여 집 밖에 등불을 둠으로써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선한 행동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감화를 준 것입니다.

♦ 나는 어떤 방법으로 빛의 삶을 실천할 것인가 살펴봅시다!

- 빛에 거한다면 어둠이 없습니다. 어둠이란 “죄성”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할수록 숨어 있던 우리의 죄를 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주여, 나의 숨은 죄를 깨달아 온전히 벗어버리게 하옵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1월 1일(수)
오늘의 주제 묵상 단상(斷想)
- 하나님은 빛이시라(God is Light)
* ὁ Θεὸς φῶς ἐστιν(the God light is)

빛(φῶς, 포스, phós)이란 물리적인 빛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은 신령한 존재를 말합니다.
신령한 존재는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통된 존재 양식은 “생명(生命)”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스스로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성령으로 임하여 죽음 후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영원한 생명이 되셨습니다.

성령은 살리는 생명으로 죽음이 육체와 영혼의 분리 상태라고 합니다. 죽은 육체 안으로 영이 들어가면 죽은 사람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 것이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살려내는 생명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생명으로 하나가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주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 몸과 마음으로 믿어
이 세상에서
육체로 살아갈 때
온전한 건강으로
세상의 삶을 누리게 하옵소서!

♦ 1월 2일(목)

♦ 말씀 : 요한일서 2:1∼29
♦ 묵상 : 대언자(An Advocate)(1절)
♦ 성구 :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참조 : 요한일서 14:16

☞ 대언자(代言者)(παράκλητος, 3875. paraklétos)
대언자는 요한복음에서 “보혜사”(14:16, 26. 15:26. 16:6, 13) 또는 “진리의 영” “진리의 성령”(14:17. 15:26. 16:13)으로 소개합니다.

♦ 보혜사 이야기

특별감지기능(特別感知技能)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시각(視覺), 촉각(觸覺), 미각(味覺), 청각(聽覺), 취각(吹角) 등 오감(五感)만으로는 감지할 수 없고 판단할 수도 없는 것을 과학적 기계를 가지고 감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북극의 자력을 감지하는 나침판이 있고, 먼 곳에 오는 전파는 레이더(radar)로 감지합니다. 먼별에서 날아오는 에너르기는 레이더(radar) 망원경으로 감지합니다.

세상에는 특별감지기능을 갖고 있는 기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들이 있는 것처럼   만일 인간이 갖고 있는 오감을 통해서 감지할 수 있는 것만 인정한다면 세상의 일부분만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의 오감으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 수 없다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성령을 모신 자만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 수 있는 특별감지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한복음 14:16).

♦ 보혜사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심을 증거 할 수 있습니까?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1월 2일(목)
오늘의 주제 묵상 단상(斷想)
- 대언자(代言者, 파라클래토스, παράκλητος, paraklétos)

성령께서 나의 대언자가 되려면 반드시 내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가 무엇인가요?

“방언” “예언” “신유 은사” “방언 통역” 등과 같은 현상적인 것을 자주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현상이지 실체가 아닙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사도행전 19:2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성령을 받았는지 점검하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믿음이 분명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주를 고백한 후에는 삶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지혜롭게 행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마가복음 13: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성령의 사람은 지혜로운 말을 합니다.
그 지혜는 지식이 아닙니다.

♦ 1월 3일(금)

♦ 말씀 : 요한일서 3:1∼29
♦ 묵상 :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심(8절)
♦ 성구 :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
오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children of God)”라고 합니다(요 1:12).
예수께서 마귀의 일을 멸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권세(權勢)”를 주셨습니다. 그 ‘권세’를 합법적(合法的) 권세(權勢, ἐξουσία, 에쿠시아)라고 합니다.

합법적 권세란 마치 교통경찰이 도로에서 교통법규를 위반한 차량에게 범칙금 티켓을 발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경찰보다 키가 크고 힘이 강한 사람이 도로에서 경찰처럼 교통법규를 위반한 차량을 멈추라고 하면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찰은 합법적인 권한을 부여받았으므로 얼마든지 교통법규를 위반한 차량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마귀의 일 즉 죄를 짓는 유혹의 손길을 합법적으로 주신 권세를 사용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이 권세는 나의 능력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권세를 주를 믿는 자녀들이 사용할 수 있는 법적인 권세를 말합니다.

♦ 내 삶의 영역에서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할 것이 무엇인가 찾아봅시다.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명령해 봅시다. 아직도 내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나의 믿음을 더 강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주여,
나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붙잡아 주옵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1월 3일(금)
오늘의 주제 묵상 단상(斷想)
- 합법적(合法的) 권세(權勢) 에쿠시아(ἐξουσία)

예수 이름으로 명(命)하여 더러운 귀신(鬼神)을 내쫓는 힘은 어디에서 나와야 할까요?
합법적으로 이미 주어진 권세는 두 가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의 보증(고린도후서 1:22, 5:5)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둘째는 권세를 사용할 수 있는 기도(마가복음 9:29)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이미 주어진 합법적인 권세를 믿음의 기도로 무장할 때 성령께서 보증하여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물러가라!” 외치고 선포할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증거 하는 성령의 사람으로 쓰임받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ἐξουσία(1849. exousia)
정의(Definition) : power to act, authority
용법(Usage) : (a) power, authority, weight, especially: moral authority, influence.
(b) in a quasi-personal sense, derived from later Judaism, of a spiritual power, and hence of an earthly power.  

♦ 1월 4일(토)

♦ 말씀 : 요한일서 4:1∼21
♦ 묵상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8절)
♦ 성구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God is Love)
(ὁ Θεὸς ἀγάπη ἐστίν)

☞ 사랑(ἀγάπη, 26. agapé) 
(정의, Definition) : love, goodwill
(적용, Usage) : love, benevolence, good will, esteem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희생적 사랑입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남녀 간의 쾌락적 사랑입니다.
필리아의 사랑은 친구들 사이의 우정입니다.
스토르게의 사랑은 가족 특히 혈연관계의 가족애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경험하셨나요?
내가 직접 경험했던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해 봅시다.
그리고 나와 다른 경험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높고 넓고 깊고 위대한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 하나님의 사랑은 “피의 사랑”입니다.
피를 통하여 사랑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사랑을 완성하는 은혜입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브리서 9:22)
 
♦ 주님의 피로 사랑을 확인하셨는지요?
그 사랑을 아가패(agape) 즉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 스토르게(가족의 사랑)의 사랑을 확인해 봅시다.

1988년 12월 7일 11시,
당시 소련의 영토인 “아르메니아”에 지진이 감지되었습니다.

원래 지진이 많은 지역이어서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곧 일상으로 돌아가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30분 후, 진도 7.0 이상의 강진이 발생하였고 대부분 내진설계가 되어있지 않던 

석조 주택들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고, 도시는 폐허가 되어버렸습니다.

지진이 벌어지고 3일 만에 2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확인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피해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기만 했습니다.

끔찍하게도 사망한 대부분의 사람은 무너진 건물에 깔린 압사였습니다.

이때, 지진으로 무너진 9층 건물의 잔해 속에 26살의 어머니 “스잔나 페트로시안”과 4살 된 딸 “가야니”도 갇혔습니다.

모녀를 기다리는 것은 오직 죽음의 공포뿐이었습니다.

여진이 느껴질 때마다 머리 위의 잔해들이 다시 무너지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습니다.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들을 뚫고 나가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몸을 들썩이는 것조차 두려운 와중에 아이는 갈증과 굶주림에 지쳐 큰 소리로 울부짖었습니다.

“엄마. 너무 목이 말라요.”

그때 “스잔나”는 부서진 유리 조각으로 손가락을 찔러 딸에게 자신의 피를 먹였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보챌 때마다 차례차례 손가락을 베어 아기의 입에 물렸습니다.

이 모녀가 극적으로 구출된 것은 매몰되고 14일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렇게 빠져나온 어머니 “스잔나”의 손가락 열 개는 모두 피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엄마는 그저 딸이 살았다는 것에 감사하고 안도했습니다.

딸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피는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고통스러워하는 딸을 위해서 어떠한 고통도 감당한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은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십자가에서 흘리셨던 주님의 피가
죄와 사망의 사슬을 풀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살아났습니다.
피로 얻은 새로운 생명입니다.
이 생명 다하도록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가 아닐까요?

♦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인가요?
그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1월 4일(토) 나의 묵상 노트

오늘의 묵상 주제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God is Love)
* ὁ Θεὸς ἀγάπη ἐστίν

신약 성경은 세 개의 기둥으로 세워졌습니다.
첫째는 복음의 기둥
둘째는 바울의 기둥
셋째는 요한의 기둥
요한의 기둥에는 “요한복음”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요한계시록”이 채워져 있습니다.

요한의 기둥에서는 하나님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하나님은 생명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의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반열에 세워주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확인하셨는지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는지요?
처음 사랑을 되찾아 믿음의 길에서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생명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되었기에 사랑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같은 민족이기에 사랑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같은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를 용서받고 새 생명을 얻었기에 그 생명을 전해야 하고 서로 나눠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가족과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과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먼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가증스런 위선적 신앙을 주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먼저
내 집 근처 다니면서
생명을 나눠줘야 할 영혼을 찾아
사랑으로 베풀고
마음의 문을 열게 한 후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복음의 기회를
반드시 찾아내야 합니다.

주여,
복음의 문을 열게 하소서
진리를 가르칠 지혜를 주소서
상한 심령을 위로할
사랑의 언어를 주옵소서!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

6

요한일서 5:1∼21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1

7

야고보서 1:1∼21

시련 받는 믿음

1

8

야고보서 1:22∼27

실천하는 믿음

1

9

야고보서 2:1∼13

형제애와 믿음

1

10

야고보서 2:14∼26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

1

11

야고보서 3:1∼18

혀의 억제와 믿음

1

12

주일

설교 묵상

 


야고보는 “실천(實踐)의 사도(師徒)”
야고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본(本)”
야고보서의 메시지는 “복음(福音)을 살라!”


야고보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로마서의 교훈을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성경에서 서로 다른 것을 교훈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는 이방인들을 위한 가르침이라면 야보고서는 주의 백성들을 향한 깨우침입니다.

종교란 인간이 신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너희의 믿음은 너희가 행동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믿음이 없는 행동을 하는 것과 믿음이 없다고 하면서 믿음이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은 믿음이란 내가 갖고 있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야고보서는 기도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기도의 약속 ; 1:5∼8, 4:8, 5:15∼18
기도의 장애물 ; 4:1∼4
기도의 시각 ; 1:5, 4:1∼2, 5:13∼14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

6

요한일서 5:1∼21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1

7

야고보서 1:1∼21

시련 받는 믿음

1

8

야고보서 1:22∼27

실천하는 믿음

1

9

야고보서 2:1∼13

형제애와 믿음

1

10

야고보서 2:14∼26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

1

11

야고보서 3:1∼18

혀의 억제와 믿음

1

12

주일

설교 묵상

 



♦ 1월 6일(월)

♦ 말씀 : 요한일서 5:1∼21
♦ 묵상 :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3절)
♦ 성구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βαρεῖαι οὐκ, 바레이아이 우크, burdensome not)
- 무겁다(βαρύς, 926. barus) heavy, weighty, burdensome
- (현대인의 성경)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 (새번역, 공동번역) 무거운 짐이 아니다
- (NIV) his commands are not burdensome.
 
♦ 계명(誡命)과 사랑(愛)
계명을 계시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돕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계명을 마치 사람을 억압하는 법으로 이해합니다.

예를 들면 에덴동산에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못할 것을 비교하면 먹지 못할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이외에는 모두 먹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계명이었습니다. 단 하나를 지키지 못하여 사랑의 울타리를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계명을 지키지 못할 때 사랑의 나침반은 방향을 가리킬 수 없었습니다. 사랑의 나침반을 수정하려면 먼저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어떻게 계명을 지킬 수 있을까요?

♦ 무겁지 않느냐?
한 어린이가 자기 몸만큼 큰 아기를 업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어린이에게 “무겁지 않니?” 하고 물었을 때 어린이는 “아니요 내 동생이라 무겁지 않아요”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어린이가 동생을 업고 길을 걷는 것은 분명히 무거운 길입니다. 그러나 동생을 사랑하는 형의 마음은 무거운 것이 될 수 없었겠지요.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성령님의 도움을 기도합시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성령의 도움을 받는다면 사랑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님은 성령의 사람이 되어 돌을 던지고 침을 뱉고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치는 무리들을 사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주님 닮기 원하네
그 아름다운 주 예수를
사랑의 주님 따르기 원하네
그 성령의 도움을 따라
주여,
세상을 변화시킬 사랑의 영으로
늘 충만케 하옵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1월 6일(월)
나의 묵상
사랑은 영원합니다.

유네스코 연구보고서에 의한 생물의 수명 연한을 소개합니다.
거북이는 200년,

앵무새는 140년,

매는 90년,

코끼리는 65년,

말은 62년,

뱀장어는 56년,

고양이는 39년,

고래는 37년,

개는 34년,

원숭이는 26년,

오리는 14년
생물들의 수명과 사람의 수명을 비교하면
사람의 수명은 코끼리, 말, 뱀장어와 비슷합니다.
과학과 의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사람의 평균 수명을 120년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을 보장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명령하신 계명에 따라
순종하므로 영원한 삶을 보장하는
은혜의 길에서 행복하기를 기도합시다.

♦ 1월 7일(화)

♦ 말씀 : 야고보서 1:1∼21
♦ 묵상 : 시련 받는 믿음(3절)
♦ 성구 :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 믿음의 시련(試鍊)과 인내(忍耐)

시련(試鍊)이란?
“겪어 내기 힘든 어려움”을 말합니다.

시련(δοκίμιον)이란?
헬라어로 “δοκίμιον(1383. dokimion. 도키미온)” 이라고 합니다.
‘도키미온’이란 “시험(a testing, a test, trial)”이란 뜻입니다.

왜 믿음에 시련이 있습니까?
선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왜 고난이 닥쳐옵니까?
값비싼 은혜(恩惠)는 고난(苦難)을 통해서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에 “야고보”라는 인물이 세 사람입니다.
첫째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둘째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셋째는 주님의 동생 야고보라고 합니다.
야보고서를 기록한 야고보는 ‘주님의 동생 야고보’를 말합니다.

야고보는 “실천(實踐)의 사도(師徒)”
야고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본(本)”
야고보서의 메시지는 “복음(福音)을 살라!”


야고보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以信得義)”는 로마서의 핵심을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以行得義)”고 강조합니다. 성경에서 서로 다른 것을 교훈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는 이방인들을 위한 권면 입니다.

야보고서는 주의 백성들을 향한 깨우침입니다.

주의 백성들은 이방인들보다 성숙한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이란 고난이 없는 행복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 오래 참으며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 믿음으로 고난과 시련을 받아드립시다.


어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그리스도인 대장장이에게 “당신이 그토록 어려움을 겪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나는 어떤 사람이든 거듭나면 그의 고난이 끝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 대장장이는 주저함 없이 “이 쇳조각을 보십시오. 이것이 농기구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먼저 열처리가 잘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불에 달구어서 망치질을 합니다. 쇠의 강도가 높아질 때까지 반복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 잘 부러져서 의도된 목적에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들의 안일과 즐거움만이 아닌 더 큰 목적을 위하여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진실하게 따르고 섬기기를 원합니다. 진실과 섬김을 위하여 시련과 시험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믿음을 단련합니다.

만일 시련과 단련을 거부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세워질 수 없을 것입니다.

구원받았지만 아직도 주님께서 사용하기에는 부적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쁨으로 우리를 주님의 방법에 맡겨야 합니다.

주님,
아직은 불같은 시련을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유익한 목적을 위하여
고난의 문을 열었습니다.

믿음의 시련이
더 큰 영광과 사역을 위해
내 삶을 위하여 예비하신
주님의 계획에 따라
믿고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1월 7일(화)
나의 묵상
- 믿음의 시련으로 나를 새롭게 하소서!

왜 나에게만 이런 고난이 있는가?
사람들은 시련과 고난이 닥쳐오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고난을 받는가?
이렇게 의심하고 잘못한 무엇이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생각을 모두 거부하셨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실 때
마침 태어날 때부터 볼 수 없는 시각장애자를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이 사람은 누구의 죄 때문에 이렇게 태어났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생각하지도 못한 어려움과 고통이 다가왔을 때
물론 잘못을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이런 틀에 붙잡혀버리면 자기 발전과 성장이 없습니다.

이런 고난과 시련 때문에
나를 새롭게 하시고
순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고
목적에 합당한 삶을 결단합시다.

주여,
나를 주의 뜻에 맞는
거룩한 사람으로
다듬어 주시옵소서!


그리스도인 여러분! 당신은 지금 고난 가운데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겸손하게 당신 자신을 주님의 손에 맡기고, 그와 같은 시련을 통해 “연단받은 자”가 주님을 보다 가장 잘 섬길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믿음의 시련을 즐기는 평범한 여인의 이야기

일찍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두 아들을 양육하기 위하여 재래시장에서 콩나물 장사를 하며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았던 여인을 지켜준 것은 힘들게 믿음의 길을 자식들을 교육시켰습니다.

자식들은 장성했고 모두들 나름대로 성공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자식들과 같이 살지 않고 혼자 작은 오두막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엄마의 고생과 수고를 잘 아는 자식들은 “어머니, 이제는 아파트로 이사 가시든지 아니면 단독 주택으로 옮기자.”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자식들을 불러 모은 후에 “너희들이 정말 원한다면 나를 위해 집을 한 채 지어라. 내가 원하는 집은 바닥은 맑은 유리로 깔고, 기둥은 황금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둥 밑바닥에는 보석을 박아야 한다. 그런데 그 보석의 색깔이 달라야 한다. 그리고 12개의 문을 만들어야 한다.”


자식들은 어머니에게 “어머니, 농담하지 마세요. 그런 집이 어디 있어요?”

그때 어머니는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못 하겠다면 그만 둬라! 나는 그런 집을 하늘나라에 갖고 있단다.”


세상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오히려 작은 오두막집에서 하늘나라의 행복을 누릴 줄 아는
믿음의 어머니처럼
비록 세상에서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하늘나라에 쌓여 있는 믿음의 상급을 바라보며 항상 행복하기를 기도합시다.

1

8

야고보서 1:22∼27

실천하는 믿음


♦ 1월 8일(수)

♦ 말씀 : 야고보서 1:22∼27
♦ 묵상 : 실천하는 믿음(22절)
♦ 성구 :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아멘

♦ 행동하는 믿음으로

믿음의 다양성을 살펴봅시다.
첫째는 듣기만 하는 믿음
둘째는 말하는 믿음
셋째는 행동하는 믿음

듣기만 하는 믿음은 꿀 먹은 벙어리와 같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듣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들었으면 반응이 나타나야 합니다.

말하는 믿음은 앵무새와 같은 믿음입니다.
앵무새는 언어의 유희와 같은 말장난입니다.
듣는 사람에게 흥미를 줄 수 있지만 감동은 줄 수 없습니다.

행동하는 믿음은 꿀벌과 같은 믿음입니다.
꿀벌은 꽃을 찾아다니며 꿀을 얻지만 꽃가루를 옮겨주며 열매를 맺게 합니다.
말씀을 듣고 가르치고 행하므로 신앙이 성장하고 그 삶을 지켜보는 사람을 움직여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군으로 헌신하게 합니다.

♦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다섯 가지 법칙

첫째, 열정보존의 법칙

열정은 열정의 양만큼 마지막에는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올 것입니다.


둘째, 힘의 법칙

힘이 있는 곳으로 사람이 모이고, 힘이 있는 자가 항상 앞자리에 앉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힘을 갖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힘을 갖는 순간부터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힘보다 더 큰 힘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힘이 있을 때 상대방을 배려해 줄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셋째, 기브 앤 테이크(Give & Take) 법칙

뿌린 대로 거둘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원한다면 먼저 상대에게 더 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넷째, 습관의 법칙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말이 되기 때문이다.

말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행동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습관이 되기 때문이다.

습관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인격이 되기 때문이다.

인격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습관이 곧 삶이라고 합니다.
좋지 못한 습관이 있다면 빨리 버리고, 좋은 습관이 있다면 더욱더 활성화 시켜 삶의 무대를 더 넓게 확장시켜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 위대함의 법칙

인간의 내면에는 크기를 알 수 없는 능력이 있습니다. 물질적인 성공의 크기가 아니라 가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을 성공의 중심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람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물질적인 부를 추구할 때가 아니라 소중한 무엇을 지키려고 할 때 드러난다고 하겠습니다.

♦ 바울과 야고보의 조화


불협화음이란 소리의 조화를 무너트린 것입니다.
화음이란 소리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람직한 믿음을 위하여 바울과 야고보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복음을 안으로 받아드리라”고 합니다.
복음을 안으로 받아드리기 위해서 위에 계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므로 위에 계신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야고보는 “복음을 밖으로 드러내라”고 합니다.
복음을 밖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땅위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바울은 신앙의 근원을 말하고, 야고보는 신앙의 결실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면 그 믿음으로 나를 변화시켜 세상 어느 한 구석에 복음의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그 날을 함께 기다려 봅시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월 8일(수)
나의 묵상 노트
- 실천하는 믿음(야고보서 1:22)

실천(實踐)이란 한자의 훈은 "열매 실(實)" "밟을 천(踐)"으로 사전에서 말하는 정의를 살펴봅니다.

1. 생각한 것을 실제로 행함.
2. 자연이나 사회를 변혁하는 의식적․계획적 활동의 전체.
3. 인간의 윤리적 행위.

행하는 자(ποιηταὶ)란 헬라어의 의미를 찾아봅니다.
"포이에태스(ποιητής,4163, poiétés)"란 "만드는 사람(maker))" 또는 "행하는 사람(doer)"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만든다는 것은 말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한다는 것은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세상의 질서는 법을 지킬 때 유지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지킬 때에 아름답게 유지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의 힘을 무시하거나 외면한다면 반드시 실패할 것입니다.
믿음은 한 사람으로 시작합니다.
베드로 한 사람을 통하여 전달된 복음은 유대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바울 한 사람을 통하여 전달된 복음은 이방인들 변화시켰습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킨다는 복음송가의 가사를 생각하며 이제부터라도 작은 불꽃이 되어 큰 불을 위한 불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작은 불꽃에 성령의 불씨가 남아 있어야 불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큰 불을 일으키려면 먼저 불씨를 만들어야 합니다. 성령의 불씨를 찾아내어 작은 불꽃을 만들어 이 세상을 살맛나는 세상으로 만들어야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1

9

야고보서 2:1∼13

형제애와 믿음


♦ 1월 9일(목)
♦ 말씀 : 야고보서 2:1∼13
♦ 묵상 : 형제애와 믿음(5절)
♦ 성구 :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형제들(ἀδελφοί)”이란 “형제(ἀδελφός)”의 복수형입니다.
“아델포스(ἀδελφός, adelphos)”의 뜻은 “형제(brother)” 또는 “같은 종교 공동체의 회원(member of the same religious community)” 그리고 “기독교인(especially a fellow Christian)”을 말합니다.  

♦ 형제들을 향한 말씀

형제(兄弟)는 “혈연관계(血緣關係)”로 맺는 형제와 “신앙관계(信仰關係)”로 맺어진 형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혈연의 형제가 신앙의 형제로 연결되는 관계가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말씀합니다.

아직도 내가 만난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형제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힘을 회복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형제들에게 두 가지를 부탁합니다.

첫째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1절, 9절)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는 말씀은 교회에서 부자(富者)와 빈자(貧者)를 구별하여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 공동체에서 서로 구별하여 판단하는 것은 “악한 생각”입니다. 더 나아가 누가 더 잘 믿고 더 잘 섬기느냐에 의해서 신앙을 판단하는 것 또한 잘못된 판단이라고 하겠습니다.

열 손가락 중에서 깨물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는 것처럼 신앙 공동체는 사랑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누구 편이냐 하는 식의 편을 나누려는 잘못된 생각은 신앙 공동체를 흔드는 것입니다.

신앙 공동체는 오직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하나 되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약속의 나라를 유업으로 삼아라(5절)

유업(κληρονόμους)이란 상속인(heir, inheritor)이란 뜻으로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는 아버지의 유산을 함께 상속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유업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누구의 편에 속하느냐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형제들은 어떤 사람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진리 위에 세워진 주님의 몸이 법의 심판을 받으려고 서로 고소하고 헐뜯는 안타까운 일들이 도처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러한 자리에서 모두 일어나 긍휼과 사랑의 마음으로 뭉쳐서 온전히 하나가 되는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거룩한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시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약속하신 나라(βασιλείας)
βασιλεία(basileia, 932)
Definition : kingdom, sovereignty, royal power.
Usage : kingship, sovereignty, authority, rule, especially of God, both in the world, and in the hearts of men; hence: kingdom, in the concrete sense  ,  

♦ 1월 9일(목)
나의 묵상 노트
- 형제를 사랑하라

종교(宗敎)란 “인간(人間)이 신(神)을 위하여 최선(最善)을 다하는 것”입니다.
기독교(基督敎)는 “하나님이 죄인(罪人)들을 위하여 최선(最善)을 다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너희의 믿음은 너희가 행동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따라서 야고보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행위의 실질적인 안내서” 즉 “신약의 잠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최고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최고의 법을 세속의 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이미 신앙을 포기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믿는다면 사람을 사람이 판단할 것이 아니라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한 번 더 기도하며 모두가 진리의 터전에 모일 수 있는 그 날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고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을 넓고 높고 깊게 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불의한 세상을 주님은 지금도 참고 기다립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구원 받아야 할 백성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참으셨습니다.
나도 참아야 합니다.
너도 참아야 합니다.
모두 참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스리며 주님의 임재를 기다려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법으로 판단할 수 없는 거룩한 공동체로 세워져야 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1

10

야고보서 2:14∼26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


♦ 1월 10일(금)
♦ 말씀 : 야고보서 2:14∼26
♦ 묵상 :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17절)
♦ 성구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아멘

죽은 것(νεκρά)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죽은 것(νεκρός. nekros, 3498)이란 단어가 “형용사”로 사용될 때와 “명사”로 사용될 때를 잘 구분해야 합니다.

형용사로 사용될 때는 죽은 것(dead), 생명이 없는 것(lifeless)을 말합니다.
명사로 사용될 때는 죽은 몸(dead body), 시체(corpse)를 말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생명이 없는 믿음” 다시 말하면 소망이 없는 믿음을 말합니다.

믿음의 소망은 영생입니다.

세상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에 만족하는 신앙은 소망이 없는 믿음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란 이 세상에서 고난과 핍박과 궁핍함과 곤고함의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라도 끝까지 믿음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결국은 영혼 구원이기 때문입니다(베드로전서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Receiving the end of your faith, even the salvation of your souls.) 

행함이 없는 믿음을 영혼이 없는 믿음이라고 합니다(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For as the body without the spirit is dead, so faith without works is dead also.) 

영혼의 구원이 없는 믿음을 자랑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영혼의 구원이 있는 믿음을 자랑할 수 있을까요?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때로는 고난을 받을지라도 그 고난을 딛고 일어나서 바른 길을 찾아가는 좁은 길과 좁은 문은 편리한 길이 아니라 진리의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길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진리의 길에서 주님의 은총을 기다리며 기도합시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월 10일(금)
나의 묵상 노트
-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생명(生命)과 사망(死亡)
우리 모두는 생명과 사망의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망(死亡) 후에는 “영생(永生)”과 “영벌(永罰)”이 있습니다.
생명(生命)에는 “육체적 생명”과 “정신적 생명” 그리고 “영적 생명”이 있습니다.

나는 어떤 생명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지 생각해봅니다.

육체적 생명은 의식주(衣食住)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정신적 생명은 지식(知識)과 상식(常識)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영적 생명은 신앙(信仰)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신앙이란 종교(宗敎)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종교는 기독교(基督敎)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결정됩니다.

왜 기독교만이 신앙이라고 고집할까요?
다른 종교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내부에는 초월자를 의지하려는 자리가 항상 비어 있습니다.
그 자리를 “영혼(靈魂)의 고독처(孤獨處)” 라고 합니다.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의욕(意慾)과 허무(虛無)가 초월자를 찾아다닙니다.
역사적으로 그 자리를 완벽하게 채웠던 절대자는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종교는 고독한 영혼이 절대자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절대자가 고독한 영혼을 찾아온 것입니다.

인간이 절대자를 찾아 올라가려는 것과
절대자가 인간을 찾아내려오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쉬운 방법일까요?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내가 찾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따라가는 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만을 따라가는 믿음으로
날마다
매 순간마다
주님만 바라보게 하소서. 

1

11

야고보서 3:1∼18

혀의 억제와 믿음


♦ 1월 11일(토)
♦ 말씀 : 야고보서 3:1∼18
♦ 묵상 : 혀의 억제와 믿음(2절)
♦ 성구 :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아멘

작은 것으로 통제하는 것은 "소의 코 두레" "배의 키" "말의 입에 재갈" "사람의 혀"라고 합니다.

사람의 혀는 말의 실수 때문에 통제를 해야 합니다.
어느 회당의 유명한 랍비가 제자에게 시장에 가서 가장 맛있는 고기를 사오라고 했답니다. 제자는 시장을 둘러보더니 소의 혀를 구입해 왔습니다. 얼마 후 랍비는 제자에게 오늘을 가장 맛없는 고기를 사오라고 했지요. 그러자 제자는 주저하지 않고 다시 소의 혀를 구해왔습니다. 랍비는 제자에게 어찌하여 가장 맛있는 것도 가장 맛이 없는 것도 소의 혀라고 생각했느냐? 물었습니다. 제자는 가장 잘 사용하면 모두에게 유익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모두에게 무익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는 탈무드의 교훈입니다.

언어가 잘못 사용될 때 혼란스럽게 합니다.
혼란은 질서를 파괴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오늘도 나의 말이
주님 앞에 열납 되고
모두에게 유익을 선물하는
은혜와 축복의 날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월 11일(토)
나의 묵상 노트
- 혀의 억제와 믿음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τέλειος ἀνήρ, perfect man)"이라고 합니다. 
"온전한"이란 헬라어는 "텔레이오스( τέλειος, teleios)"라고 합니다.
'텔레이오스'는 "완성된(complete)" "완벽한(perfect)"이란 뜻입니다. 특히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성격이라고 합니다(specially of the completeness of Christian character.)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혀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
성품을 잘 다스려도 혀가 자기 멋대로 내 뱉으면 다스려진 성품도 순식간에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유치원에서 토라 교육을 할 때 가르치는 언어에 대한 교훈을 소개합니다.

1. 항상 연장자에게 발언권을 준다.
2. 다른 사람의 이야기 도중에 끼어들지 않는다.
3.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한다.
4. 당황하면서 서둘러 대답하지 않는다.
5. 질문과 대답을 간결하게 한다.
6. 처음 할 이야기와 나중에 할 이야기를 구별하여 한다.
7. 잘 알지 못하고 말했거나 잘못 말한 것은 솔직하게 인정한다.

말하기를 즐기는 것보다 듣는 것을 즐길 줄 아는 지혜로운 주의 백성으로 다듬어지기를 소원하며 오늘도 혀에 재갈을 물릴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대합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

13

야고보서 4:1∼17

더욱 큰 은혜(6절)

1

14

야고보서 5:1∼20

믿음의 기도(15절)

1

15

로마서 1:1∼32

믿음으로 살리라(17절)

1

16

로마서 2:1∼29

마음의 할례(29절)

1

17

로마서 3:1∼31

믿음으로 얻는 의(28절)

1

18

로마서 4:1∼25

예수(25절)

1

19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

13

야고보서 4:1∼17

더욱 큰 은혜(6절)


♦ 1월 13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야고보서 4:1∼17
♦ 오늘 묵상을 위한 주제 : 더욱 큰 은혜를 사모하자!(6절)
♦ 성구 :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아멘

더욱 큰 은혜는 무엇일까요?
은혜가 작은 것도 있고 큰 것도 있을까요?
은혜는 오직 은혜일뿐입니다.
그러나 큰 은혜란 받은 은혜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계속적으로 유지하고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큰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약속하신 말씀을 살펴봅니다.

1.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은혜(6b)
2. 하나님께 순복하는 은혜(7a)
3. 마귀를 대적하는 은혜(7b)
4.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은혜(8a)
5. 마음을 성결케 하는 은혜(8b)
6. 비방하지 않는 은혜(11a)

왜 큰 은혜를 사모해야 할까요?
사람의 생명이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기 때문입니다(14절).
그러므로 생명이 있을 동안에 부지런히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지금도 나를 다스리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처음 은혜의 자리에서 벗어난 것을 찾는 것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한 후에 다시 제 자리를 찾는 것이 믿음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은 주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실천해야 합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나의 삶에 익숙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제부터 나의 삶에 익숙하도록 계속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처음부터 걷고 뛰는 것이 아니라 아장자아 걷다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걷기도 하고 뛰기고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줄 알았던 아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이제는 다 컸구나! 이렇게 느낄 때가 있었지요? 언제라고 생각합니까?

바로 그 때는 자기의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모습을 볼 때에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은혜(恩惠)는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억지로 주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행복하게 주는 것이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기쁘게 내 줄 수 있는 것이 은혜의 시작입니다.
오늘 내게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 그것을 누군가를 위하여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 봅시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월 13일(월) 나의 묵상 노트
- 더욱 큰 은혜를 사모하자!(6절)

‘은혜(恩惠, 카리스)’는 “기쁜 마음으로 주는 것”입니다.
내게서 소중한 것들은 무엇일까?

시간(時間)을 쪼개어 중보기도 합니다.
물질(物質)을 쪼개어 선교와 구제를 위해 바칩니다.
건강(健康)을 쪼개어 봉사합니다.
사람을 만날 때 복음을 증거 합니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

생명을 쪼개어 나눠 주신 주님의 은혜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믿는다면
나도 나의 것을 쪼개야 합니다.

주여,
소중한 것을 쪼개어
나눠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생각의 질서를
즐기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

14

야고보서 5:1∼20

믿음의 기도(15절)


♦ 1월 14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야고보서 5:1∼20
♦ 오늘 묵상을 위한 주제 : 믿음의 기도(15절)
♦ 성구 :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아멘 

“믿음의 기도”를 여러 번역으로 살펴봅니다.
NIV - the prayer offered in faith(믿음으로 바치는 기도)
KJV - the prayer of faith(믿음의 기도) 
새번역 - 믿음으로 간절히 드리는 기도 
현대인의 성경 - 믿음의 기도
공동번역 - 믿고 구하는 기도

“믿음의 기도”는 마치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위하여 베드로가 외쳤던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믿음으로 선포하는 기도
말씀을 믿고 주장하는 기도
오직 주의 능력만을 주장하는 기도

현대 교회는 재정적으로는 부족함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가 사용했던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주장하는 믿음은 없습니다.
과연 어느 것이 더 필요할까요?
재정적인 여유가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외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이제는 초대교회가 즐겨 사용하던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렇게 외칠 수 있는 능력의 기도를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에서 이런 기도를 해야 할 때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고난당할 때(5:13)
둘째는 즐거울 때(5:13)
셋째는 병들었을 때(5:14∼15)
넷째는 죄를 지었을 때(5:16)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성품의 사람이었지만 능력의 기도를 통하여 기도자의 삶이 무엇인가를 증거 합니다.

오, 주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그 말씀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기도자의 삶을 회복하여
엘리야와 같은 기도자로
든든하게 세워주시옵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월 14일(화)
- 나의 묵상 노트
믿음의 기도는 믿음의 찬송

사도행전 16장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는 곳으로 가던 길에 귀신들려 점을 치는 여종을 만났습니다. 여종은 점을 치고 복채를 받아 주인에게 바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종이 바울과 실라를 향하여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 라고 소리쳤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 날을 계속하자 바울은 그 여종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고 명령을 합니다. 그러자 귀신이 즉시 나왔고 더 이상 점을 칠 수 없으므로 여종의 주인은 자기의 이익의 소망이 없어졌기 때문에 바울과 실라를 관원에게 끌고 가서 우리 성을 요란하게 하는 자들이라고 고소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깊은 옥에 갇혔습니다. 밤중 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할 때 감옥 안에 있던 모든 죄수들이 기도와 찬송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서 옥터가 흔들리고 감옥의 문들이 열리고 죄수들을 묶고 있는 것들이 모두 풀렸습니다.

찬송을 부른 바울과 실라에게만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찬송을 들었던 죄수들에게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도들이 찬송할 때 찬송하는 성도들에게만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찬송이 울려 퍼지는 그 지역에도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찬송을 해야 할까요?
시편 150편 1절을 읽겠습니다.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찌어다.

성소와 궁창에서 찬양하라고 합니다.

성소란 구약 시대에는 성막과 성전을 말합니다. 성막과 성전이 신약 시대에는 교회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부터 찬송은 시작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몸이 성전이라고 깨우쳤습니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의 몸이 성전이므로 우리들이 교회에 모였을 때는 모이는 교회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를 떠나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갈 때는 흩어지는 교회가 됩니다. 따라서 찬송은 교회에서 시작하여 내 삶의 자리까지 확산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머물고 있는 그 자리가 곧 찬송해야 할 장소라고 하겠습니다.

궁창에서 찬양하라

궁창은 하늘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찬송하기 위해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가서 찬송해야 할까요? 권능의 궁창이란 하나님의 권위와 주권이 있는 하늘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늘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 아래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궁창에서 찬양하라는 말씀은 하늘 아래 어느 곳에서나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교회에서 찬양하고 교회 밖에서도 찬양해야 합니다.
이렇게 찬양이 울려 퍼질 때 그 찬양을 듣는 사람들 중에 누군가는 마치 감옥의 터가 흔들리고 죄수들을 묶었던 밧줄이 풀려진 것처럼 죄악의 사슬에서 해방될 수 있는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찬송의 위력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소개합니다.

저희들이 와이스톤에서 거주할 때 어느 날 수맥을 검사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수맥이 있는지 살펴보는데 이 집이 수맥이 분명하게 지나가는데 잡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혹시 교회에 다니느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라고 대답하자 역시 그렇군요 집안에 찬송가와 성경이 있으면 수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찬송가를 집안에 놓고 있는데도 그 위력이 나타난다면 그 찬송을 부르고 그 말씀을 묵상할 때에 더 크고 놀라운 능력이 나타날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성소와 권능의 궁창에서 찬양하라!

성도들이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찬송의 자리이며 그 찬송으로 구원의 은혜가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의 찬송을 부르는 일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찬송(讚頌)은
기도(祈禱)는
사하심을 얻으리라
He will be forgiven.
* ἀφίημι(863, aphiémi)
to send away, leave alone, permit.
(a) I send away
(b) I let go, release, permit to depart
(c) I remit, forgive
(d) I permit, suffer.   

요한일서 1:7b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3: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죄에 대한 사하심을 어떻게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을까요?
오직 성령의 도움으로 알 수 있고 깨닫게 됩니다.

요한일서 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But you have an anointing from the Holy One, and all of you know the truth.

요한일서 2:27a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금요찬양기도회 / 2018-10-19

 찬송의 자리(시편 150:1)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찌어다.

종교개혁자 칼빈(Jean Calvin. 1509. 7. 10∼1564. 5. 27)은 시편을 “영혼의 해부학”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영국의 성서 주석가 매튜 헨리(Matthew Henry, 1966. 10. 28~1714)는 시편 150편을 “시편의 기록 목적을 보여주는 시” 라고 정의했습니다.

시편 1편 첫 구절은 “복 있는 사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시편 150편의 마지막 구절은 “할렐루야”로 끝납니다. 따라서 시편의 결론은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 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는 곳으로 가던 길에 귀신들려 점을 치는 여종을 만났습니다. 여종은 점을 치고 복채를 받아 주인에게 바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종이 바울과 실라를 향하여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 라고 소리쳤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 날을 계속하자 바울은 그 여종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고 명령을 합니다. 그러자 귀신이 즉시 나왔고 더 이상 점을 칠 수 없으므로 여종의 주인은 자기의 이익의 소망이 없어졌기 때문에 바울과 실라를 관원에게 끌고 가서 우리 성을 요란하게 하는 자들이라고 고소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깊은 옥에 갇혔습니다. 밤중 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할 때 감옥 안에 있던 모든 죄수들이 기도와 찬송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서 옥터가 흔들리고 감옥의 문들이 열리고 죄수들을 묶고 있는 것들이 모두 풀렸습니다.

찬송을 부른 바울과 실라에게만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찬송을 들었던 죄수들에게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도들이 찬송할 때 찬송하는 성도들에게만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찬송이 울려 퍼지는 그 지역에도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찬송을 해야 할까요?
시편 150편 1절을 읽겠습니다.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찌어다.

성소와 궁창에서 찬양하라고 합니다.

성소란 구약 시대에는 성막과 성전을 말합니다. 성막과 성전이 신약 시대에는 교회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부터 찬송은 시작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몸이 성전이라고 깨우쳤습니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의 몸이 성전이므로 우리들이 교회에 모였을 때는 모이는 교회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를 떠나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갈 때는 흩어지는 교회가 됩니다. 따라서 찬송은 교회에서 시작하여 내 삶의 자리까지 확산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머물고 있는 그 자리가 곧 찬송해야 할 장소라고 하겠습니다.

궁창에서 찬양하라

궁창은 하늘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찬송하기 위해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가서 찬송해야 할까요? 권능의 궁창이란 하나님의 권위와 주권이 있는 하늘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늘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 아래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궁창에서 찬양하라는 말씀은 하늘 아래 어느 곳에서나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교회에서 찬양하고 교회 밖에서도 찬양해야 합니다.
이렇게 찬양이 울려 퍼질 때 그 찬양을 듣는 사람들 중에 누군가는 마치 감옥의 터가 흔들리고 죄수들을 묶었던 밧줄이 풀려진 것처럼 죄악의 사슬에서 해방될 수 있는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찬송의 위력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소개합니다.

저희들이 와이스톤에서 거주할 때 어느 날 수맥을 검사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수맥이 있는지 살펴보는데 이 집이 수맥이 분명하게 지나가는데 잡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혹시 교회에 다니느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라고 대답하자 역시 그렇군요 집안에 찬송가와 성경이 있으면 수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찬송가를 집안에 놓고 있는데도 그 위력이 나타난다면 그 찬송을 부르고 그 말씀을 묵상할 때에 더 크고 놀라운 능력이 나타날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성소와 권능의 궁창에서 찬양하라!

성도들이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찬송의 자리이며 그 찬송으로 구원의 은혜가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의 찬송을 부르는 일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1. 내 삶의 자리가 찬송으로 세워지게 하옵소서!
2. 뉴욕의 모든 교회들을 통하여 찬송이 회복되게 하옵소서!
3.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키는 찬송의 사람으로 쓰임 받게 하옵소서!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

15

로마서 1:1∼32

믿음으로 살리라(17절)


♦ 1월 15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로마서 1:1∼32
♦ 오늘 묵상을 위한 주제 : 믿음으로 살리라(17절)
♦ 성구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 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아멘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말씀을 어떻게 나의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복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예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신앙은 어떤 신앙일까요?

미국의 부흥 사였던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는 그대 자신을 믿어 보라!
그대는 실망할 때가 있을 것이다.

둘째는 친구를 믿어 보라!
어느 날 그들은 죽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대와 해어질 것이다.


셋째는 그대의 명성을 믿어 보라!
어느 때 훼방하는 혀가 그것을 뒤집어엎을 것이다.


넷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보라!
그대는 현세와 내세에 후회함이 없을 것이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후회(後悔)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누가복음 8:24∼25) 

믿음이 어디 있느냐?
예수가 어디 있느냐?

후회 없는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삶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러한 삶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월 15일(수)
나의 묵상 노트
믿음으로 살아봅시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은 대통령 취임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여러 가지 난관(難關)을 극복해 나아가려면 지혜, 애국심, 기독교 정신 등이 절대 필요하거니와 무엇보다도 이 나라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지켜 주실 하나님을 굳게 믿는 믿음입니다.

나라를 지키는 것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가정을 천국으로 회복하는 것도 믿음의 가족들입니다.
어지러운 때에 믿음으로 질서를 세우며 나라와 교회와 가정을 지킬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일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

16

로마서 2:1∼29

마음의 할례(29절)


♦ 1월 16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로마서 2:1∼29
♦ 오늘 묵상을 위한 주제 : 마음의 할례(29절)
♦ 성구 :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아멘 

할례(割禮)는 육체 즉 몸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할례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생각을 바꾸는 것이 마음에 할례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종교 개혁자 칼빈은 “우리의 문제는 교회에서 돈에 대해 너무 많이 이야기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해서 바르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에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나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회개를 믿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복음을 듣고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새사람이 되었다면 제일 먼저 변화가 있어야 할 삶의 영역 중의 하나가 ‘돈(物質)의 사용처’ 라고 생각합니다. 경제생활은 우리의 가치관이 민감하게 반영되는 영역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고, 하나님 앞에 정말 감사하게 나 자신을 드리고 싶다고 할 때 그의 헌금 생활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헌금’이라는 것은 한 사람이 어느 정도로 헌신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헌금하는 자세를 보면  주님을 향한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적인 헌금은 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대한 응답입니다.

파트리스교회의 헌금에 대한 신앙적인 고백을 소개합니다.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
감사는 성도의 생활!
선교와 성도의 사명!
구제는 성도의 헌신!

이와 같은 신앙적인 자세로 물질에 대한 생각을 바꿀 수 있는 마음의 할례를 실천합시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월 16일(목)
- 나의 묵상 노트
마음의 할례(The Circumcision Of The Heart) 

할례는 태어난 후 팔일 만에 남자 아이의 성기 표피를 잘라내는 의식입니다. 할례의 유래를 알려주는 말씀에 의하면(창 17:9∼14)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요구하신 언약의 증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겠다는 언약을 하셨는데 그들은 할례로써 그 언약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언약을 크게 오해했습니다. 그들은 할례의식을 통해 자동으로 하나님의 백성(자녀들)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할례의식은 곧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자격증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할례는 "무효(無效)"라고 선언합니다. 할례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겠다는 서약이라고 합니다(롬 2:25 참조). 

육체의 할례는 유대인의 증거라고 한다면 마음의 할례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마음의 할례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받아들여진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사람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의롭게 됩니다(칭의 단계).
의롭게 된 사람은 거룩하게 성화되어야 합니다(성화 단계).
성화된 후에는 온전하게 하는 사랑의 단계로 성숙해야 합니다(완전 단계).

할례의 참된 의미는 율법을 온전히 지키겠다는 서약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죄에 물들어 있어 율법을 온전히 지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충족할 수 있는 새로운 할례 의식에 주목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에 행하는 할례’ 입니다. 이 할례는 율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면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온전히 살아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오늘도 마음의 할례를 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승리하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져야 하겠습니다.

마음의 할례 사건의 첫 단계, 칭의

마음의 할례는 먼저 참된 회개에서 출발합니다. 회개는 단순히 ‘어떤 일을 잘못했다’ ‘저지른 잘못을 후회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의미를 갖습니다. 참된 회개는 다음 세 가지 내용들을 포함하게 됩니다. 첫째는 ‘우리 자신에 대한 바른 판단’입니다. 이는 곧 자신이 지닌 부패한 본성을 철저하게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패한 본성은 자기자신에 대한 그릇된 평가, 즉 교만을 의미합니다. 이 교만은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헛된 욕망’과 동일한 것으로 사탄의 형상입니다. 여기서 ‘나는…이다”라는 헛된 망상, 달리 말하면 ‘아집’이 만들어 집니다(계 3:17). 회개는 바로 이 같은 우리의 실상, 곧 ‘비참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모습’을 직시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둘째는 ‘이런 상황에 처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부패한 본성을 목도하면서도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온전히 변화시킨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게 될 뿐 아니라 이러한 시도가 오히려 죄에 죄를 더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실상을 명확히 알고 있기에 세상 사람들이 칭찬하거나 심지어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호의적인 평가를 내린다 해도 마음을 팔거나 귀를 기울일 수 없습니다. 셋째는 ‘복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의 실상을 분명히 알게 되면, 또한 자기에게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부터 벗어날 능력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필연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은총 가운데 예비하신 복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죽음의 문 앞에서 죽음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입니다. 이렇게 진실로 회개하는 자는 하늘이 멀지 않습니다. 손을 내밀면 잡을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진실로 회개 한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영적 세계에 눈 멀어 있던 이에게 빛과 같습니다. 눈먼 자에게 갈 길을 알려주며, 흑암 속에 있는 자들에게 빛을 비춰주며, 어리석은 자에게 진리를 깨우쳐 줍니다. 부패한 본성에서 만들어진 편견과 이 세상 위에 터 닦은 어리석은 지혜(고전 1:20)를 단번에 허물어뜨리는 강력한 무기인 것입니다. 참된 진리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온갖 망상과 장애물들을 쳐부수고 참된 진리의 근원 되시는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이 믿음은 일차적으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 오셨다는 사실(딤전 1:15)과 우리 죄를 자신의 몸에 온전히 지우신 사실(벧전 2:24), 그리고 우리 죄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요일 2:2)을 밝히 드러내고 확신케 합니다. 곧, 죄인인 나를 향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 대한 거룩한 확신이며 성령으로서 우리 가운데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깨닫게 하고 확신케 합니다. 이 인식과 확신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는 내 안에서의 교제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 안에 사는 사람은 죄의 사슬에서 해방됩니다. 죄 사함의 은총을 입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받게 됩니다.

마음의 할례 사건 둘째 단계, 성화

마음의 할례의 첫 단계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의롭게 되는 칭의의 단계라면, 두 번째 단계는 실제로 의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변모되는 성화의 단계가 할 수 있습니다. 회개를 통해 복음을 믿어 의롭게 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선물, 곧 성령을 부으십니다. 성령이 임할 때 우리 영혼은 거룩하게 변화되어 실제로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데 이 일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집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자는 그 자신의 영이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게 됩니다. 즉,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끊임 없이 그 영과 더불어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해 그들이 생명의 길을 걷고 있음을 확증해 주기 때문에 그들은 소망을 품고 그 길을 끝까지 걸어 가게 됩니다. 그 소망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영광의 면류관을 준비해 두셨다는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늘을 온전히 누릴 때까지 그 어떤 도전이나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먼 대양을 내다 보는 눈을 가졌기 때문에 순간순간 일렁이는 파도에 일희일비 하지 않고 묵묵히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나아갑니다. 교만과 아집이 만들어내는 허상에 귀 기울이지 않으며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지속적인 훈련으로 자신을 단련합니다. 어둠의 행위를 피하고 모든 부정한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의 삶을 뚜벅뚜벅 걸어갈 뿐입니다. 이 길은 한 순간만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눅 9:23) 날마다 행합니다. 자기의 옛 의견, 정열, 기질을 제거하여 흠 잡힐 것이 없도록 영과 혼과 몸을 완전히 순결케 해 가는 자기 부정의 삶을 늘 살아 가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은 마음의 할례를 받아 성화의 삶을 사는 삶의 샘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약한 자가 되었고 모욕을 당했으며 궁핍과 박해와 곤궁을 기뻐했습니다(고후 12:10). 그는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며 앞에 놓인 면류관의 소망이 이루어질 때까지 목표를 향해 달음질했던 것입니다.

마음의 할례 사건 셋째 단계, 완전

마음의 할례 사건의 세 번째 국면은 ‘완전’의 단계입니다. 이 완전의 단계는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즉, 완전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가장 중심적인 특징이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완전에 이른 자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드릴 사랑을 결코 다른 피조물과 나누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한 가지 마음으로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이 마음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만을 행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행합니다(고전 10:31). 그런데 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자연스럽게 이웃을 향하게 됩니다. 사랑이 지닌 속성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본질은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할례는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완성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최고 강령이요, 율법이 성취되는 길입니다.

마음의 할례와 믿음의 길

할례의 참된 의미는 율법을 온전히 지키겠다는 서약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죄에 물들어 있어 율법을 온전히 지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충족할 수 있는 새로운 할례의식에 주목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에 행하는 할례’입니다. 이 할례는 율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이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면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온전히 살아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지요. 

결론

마음의 할례를 받았다는 의미는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죄로 물들어 본래적인 의로부터 이탈되어 부패하고 육신적 생각으로 가득 차 하나님의 법에 복종치 않는 자기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고, 끊임없이 심판의 위협 속에서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나아가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자기에게 전혀 없음을 인식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예비하신 복음의 은총에 주목합니다. 그는 기꺼이 복음을 믿습니다. 자연적 인간의 시각을 버리고 믿음의 눈으로, 다시 말해 하나님 안에서의 시각으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믿음의 길을 통해서 경험됩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의 영과 함께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합니다(롬 8:16). 그러므로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상과 면류관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 할 것을 바라면서 기뻐합니다(롬 5:2). 현재의 수고나 환난에도 포기하지 않고 앞에 것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는 점점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 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육체와 혼과 영혼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 사랑은 또한 우리의 이웃을 향합니다. 그들을 자기의 몸처럼 사랑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할례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할례 받은 자의 발걸음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으십시오. 육신의 할례가 아닌 심령 안에 이루어지는 할례를 받으십시오. 새롭게 된 혼과 마음과 영의 올바른 상태가 회복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십시오. 마음과 삶이 더러움으로부터 깨끗함을 받아 아버지께서 온전한 것처럼 온전하게 되십시오. 풍성한 하늘나라의 삶을 누리십시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

17

로마서 3:1∼31

믿음으로 얻는 의(28절)


♦ 1월 17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로마서 3:1∼31
♦ 오늘 묵상을 위한 주제 : 믿음으로 얻는 의(28절)
♦ 성구 :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아멘  

“의(義, δικαιόω, 디카이오오, dikaioó)”란 사람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은 “의(義)”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義)”는 믿음에 의한 것을 강조합니다.

알렉산더 왕에게 아주 충성(忠誠)스러운 의사가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의사를 시기(猜忌)하여 어떻게 해서든 그 의사를 곤경(困境)에 빠뜨리고자 음모를 꾸몄습니다. 왕이 마시는 컵에 그 의사가 독약(毒藥)을 넣을 것이라는 거짓 편지(便紙)를 써서 왕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편지를 받은 왕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 편지를 읽어주면서 자신이 의사를 믿고 있다는 표시로 컵에 들어 있는 물을 단숨에 마셔버렸습니다. 의사에 대한 알렉산더 왕의 믿음은 순수하고 전폭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도 알렉산더 대왕처럼 의사에 대한 신뢰와 같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믿음은 놀라운 힘을 발휘(發揮)할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브리서  11:6).

예수님께서는 때로는 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고 책망하셨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스라엘에 이와 같은 믿음을 본 자가 없느니라.” 라고 격찬했습니다.

과연 큰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믿음이 아닐까요?
그보다 더 큰 믿음은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며 기쁨으로 고난도 감사하게 받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기적을 체험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고난을 견디는 것은 기적을 체험하는 것보다 더 아름답다고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가졌고 누렸을지라도 마지막 날에 믿음이 없는 자라고 책망 받는다면 세상의 것은 분명히 헛된 것이 될 것입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월 17일(금)
- 나의 묵상 노트
믿음으로 얻는 의(義)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의로운 사람 열 명을 찾는다고 합니다.
만일 열 명의 의로운 사람이 없으면 소돔과 고모라 성은 불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열심히 의로운 사람을 찾았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열 명의 의로운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요?

사람을 찾는 이솝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어느 날 이솝의 주인은 “얘, 이솝아! 목욕탕에 가서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하고 오너라.”

이솝은 목욕탕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목욕탕 문 앞에 돌이 박혀있었는데 목욕탕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돌에 걸려 넘어질 뻔하고 또는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에잇, 빌어먹을!” 하며 돌을 향해 욕을 하거나 불평하며 지나갔습니다.

이솝은 저 돌을 누가 치울까 궁금해 하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어떤 사람이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 사람은 “웬 돌이 여기 박혀 있나!” 하며 그 돌을 뽑아냈습니다. 그리고 손과 옷을 훌훌 털어버리고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솝은 그제야 일어나 집으로 달려가서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주인님! 목욕탕 안에 단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없는 것처럼 의로운 사람을 찾는 것도 어려운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의(義, δικαιόω)란 ‘내가(我)’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羊)’과 같은 길을 외면하지 않고 그 길을 즐기며 찾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의로운 사람을 찾아다닐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의롭다 칭함을 받은 성도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당당하게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너희들이 살고 있는 도시를 향하여 말씀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킬만한 사람 열 명을 찾아오너라!”

주님이 찾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으로 자원(自願)할 수 있는 믿음을 기도합시다.

오, 주여!
용서하소서.
주께서 찾는 믿음보다
나를 드러내는 믿음으로
떳떳하게 살아왔어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주여,
바른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 세워갈
그 믿음의 길만 걷게 하소서.


의(義, δικαιόω. 1344. 디카이오오, dikaioó)
정의(Definition) : to show to be righteous, declare righteous.
적용(Usage) : I make righteous, defend the cause of, plead for the righteousness (innocence) of, acquit, justify; hence: I regard as righteous.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

18

로마서 4:1∼25

예수(25절)


♦ 1월 18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로마서 4:1∼25
♦ 오늘 묵상을 위한 주제 : 예수(25절)
♦ 성구 :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아멘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내어 줄 때 죄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을까요?
먼저 죄(罪)란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등을 돌린 형상을 문자화 한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서로 사랑할 때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을 때는 등을 돌려버립니다. “죄(罪)”란 한자는 등을 돌린 상태를 형상화하여 만든 문자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사하심(용서, 容恕)(로마서 4:7)
둘째는 가리우심(도말, 塗抹)(로마서 4:7)
셋째는 인정하지 않음(망각, 妄覺)(로마서 4:8)
넷째는 간과하심(간과, 看過)(로마서 3:25)

“속에 육조판서가 들었으면 무엇 한다더냐?”
학식이 아무리 풍부하다해도 덕행이 없으면 그 학식이 쓸모없다는 속담입니다.

채근담에 “덕(德)은 재능의 주인이요, 재능은 덕(德)의 종이다. 그러므로 재능만 있고 덕(德)이 없음은 마치 집안에 주인이 없고 종이 일을 휘두름 같아서 어찌 도깨비가 날뛰지 않겠느냐” 하며 재덕(才德)을 겸비하기를 강조했습니다.

성경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를 믿노라 하면서 자기 유익만을 챙기고 사랑은 손톱만큼도 없는, 차기는 얼음장같은 신자라면 참 신앙인이 아니겠지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습니다(롬 3:28).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행하기 위한 것입니다(마 7:21).
그러므로 믿음과 행함이 겸비될 때 바람직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A. W. 토저의 “영적인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영적이라는 것은 어떤 특별한 갈망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갈망은 생명을 주며, 또 절제할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습니다.
영적인 사실에 있어서 어느 것이 중요한지 순서를 결정하기는 어렵지만 편의상 아래와 같이 구분해 봅니다.

1. 행복해지는 것보다 거룩하고자 하는 것이다.
2. 자신에게는 일시적으로 불명예나 손실이 올지라도 자기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는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영적인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기 원하는 사람이다.
4. 또한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견해대로 보는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사람이다.
5. 영적인 사람은 잘못 살아가기 보다는 바르게 죽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6. 한편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은 자기가 큰 대가를 지불해도 다른 사람이 성장하며 믿음에서 진보되기를 바란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우리 자신 가운데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셔야만 되어진다.

아무도 스스로 영적인 사람이 될 수는 없으며 오직 성령께서 자유롭게 움직이시어야 영적인 그리스도인을 만드실 수 있는 것이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월 18일(토)
- 나의 묵상 노트
오직 예수(Only Jesus Christ)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살아계신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는 새를 보세요.
죽은 새는 날지 못합니다.

어항속의 물고기를 보세요.
죽은 물고기는 헤엄치지 못합니다.

붉게 물든 단풍을 보세요.
죽은 나뭇잎은 물들지 않습니다.

질주하는 말을 보세요.
죽은 말은 달릴 수 없습니다.

해맑은 어린이의 웃음을 보세요.
죽은 아이는 웃지 못합니다.

아름답게 핀 꽃을 보세요.
죽은 식물은 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주렁주렁 열린 사과를 보세요.
죽은 사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한결같이 움직이는 것이고,
죽어 있는 것들은 한결같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체(屍體)라고 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살아 있으면 움직이고 꿈틀대며
활동하지만 죽어있다면 활동이 없는 시체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말은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말은 기상(뜻)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말은 희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말은 기쁨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말은 미래가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일을 하지 않고,
의미 없이 살며,
희망이 없으며,
기쁨이 없는 사람은 살았으나
산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오늘도 생명력을 갖고
이 세상을 흔들어 깨워 봅시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

20

로마서 5:1∼21

오실 자의 표상(14절)

1

21

로마서 6:1∼23

은혜 아래 거하라(14절)

1

22

로마서 7:1∼25

나는 곤고한 사람(24절)

1

23

로마서 8:1∼39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5절)

1

24

로마서 9:1∼33

약속의 자녀(8절)

1

25

로마서 10:1∼31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13절)

1

26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

20

로마서 5:1∼21

오실 자의 표상(14절)


♦ 1월 20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로마서 5:1∼21
♦ 묵상을 위한 주제 : 오실자의 표상(14절)
♦ 성구 :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아멘 

“오실자의 표상(表象)(a pattern of the one to come)” 이란 ‘오실 자의 모형(模型)’을 말합니다. 아담을 오실 자(메시아)의 표상이라고 합니다.
성도들은 무엇을 바라보며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할까요?
오실 자 즉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윌리엄 페더(William Feather)”의 이야기 중 하나를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이 소년 시절에 5달러짜리 지폐를 길에서 주웠다고 합니다.
어릴 때 5달러짜리 지폐를 주웠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항상 길바닥만 보고 다녔다고 합니다.

일생 동안 길바닥만 바라보며 그가 주운 것들은 “단추 29,519개”, “머리핀 54,172개” 그리고 “수천 개의 동전” 뿐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을 줍느라고 일생 동안 하늘과 구름 그리고 꽃과 새와 자연과 아름다움을 볼 기회가 없었으며 그의 허리는 굽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볼 수 없다면 이 세상에서는 낙오자와 같은 인생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처럼 세상 즐거움도 누리지 못했고 더구나 다시 오실 주님을 영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오실 자의 표상이 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봅시다.
하늘로 올라가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시다.

오실자의 표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는 ‘믿음의 대장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월 20일(월)
- 나의 묵상 노트
오실 자의 표상(a pattern of the one to come)

표상(表象)이란 헬라어는 “투포스(τύπος)” 라고 합니다.
‘투포스’란 “모양(figure), 모델(model), 유형(type)”이란 뜻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마지막 아담 예수의 표상이었습니다.
마지막 아담 예수님은 다시 오실 표상입니다.
예수보다 더 높은 하나님 없도다!
예수보다 더 깊은 사랑도 없도다!
예수보다 더 강한 생명도 없도다!

예수 계신 곳에는 참이 있구나!
예수 계신 때에는 선이 있구나!
예수 계신 일에는 빛이 있구나!

헐벗어도 예수라면 따뜻하오!
굶주려도 예수라면 배부르오!
목말라도 예수라면 시원하오!
알고 싶은 것 예수요!
보고 싶은 것 예수요!
되고 싶은 것 예수로다!

예수만 닮았으면 한다오!
예수처럼 살아봤으면 한다오!

오! 예수
주 예수여,
나를 잡아주소서
그 강한 손으로.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

21

로마서 6:1∼23

은혜 아래 거하라(14절)

♦ 1월 21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로마서 6: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은혜 아래 거하라(14절)
♦ 성구 :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아멘  

은혜 아래 거한다는 것은 "예수 아래 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은혜의 원천(源泉)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아래 거하는 사람의 삶은 어떤 삶일까요?

스페인의 귀족 출신 "이냐시오(Ignatius de Loyola, 1491∼1556)"는 "타는 불"이란 뜻이란 이름입니다. 그가 이단자라는 혐의로 투옥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그의 불행을 동정했습니다. 그러자 '이냐시오'는 '불행이라니요? 당신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쇠사슬에 묶이게 되는 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하여 묶이고자 하는 만큼의 많은 쇠사슬과 족쇄가 이 살라만카에는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괴로움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신앙의 가장 훌륭한 표본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삶이 "은혜 아래 거하는 것"이며 동시에 "예수 아래 거하는 것"입니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기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오! 주님,
저의 자유를 모두 드리오니
당신 마음대로 하소서.

저의 생각과 이해력,
저의 모든 의지를 받으소서.


제가 가진 것은 모두
당신께서 저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제 당신께
이 모든 것을 온전히 도로 돌려드려

당신께 맡깁니다.
그러하오니,
당신의 뜻대로 처리하소서.


저에게는 오직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함께 주소서.

그러면 저는 충분하게 가져

다른 것을 더 이상 찾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월 21일(화)
- 나의 묵상 노트

은혜 아래 거하라!

로욜라는 예수회의 창시자라고 합니다.
예수회를 설립하게 된 신앙적인 체험을 소개합니다.

카르도나 강가에서 이냐시오는 특별한 체험을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화해했다는 개인적인 확신이었으며,
구원에 대한 두려움과 조바심 때문에 자기 죄를 쉴새없이 고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자비에 몸을 맡기는 것이라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때부터 이냐시오는 날마다 행하던 단식을 멈추고,
피가 튀어오를 때까지 채찍으로 제 몸을 매질하던 짓을 그만 두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모든 능력을 봉헌하기로 결단합니다.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고 돌아온 이냐시오는 33살의 늦은 나이였지만
더 효과적인 봉사를 위해서 바르셀로나, 알칼라, 살라망카 등지에서
문법, 철학,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군인의 주보이자 만학도의 주보성인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한편 이냐시오는 틈틈이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자신의 고유한 길을 걸어 하느님을 찾아가는 영성수련을 지도했습니다.
아직 학생 신분으로 설익은 지식을 전하다 보니,
이단으로 몰려 종교재판을 받는 곤혹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양심은 크게 자극을 받았으며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전환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냐시오는 동냥으로 학비를 마련해서 공부를 계속 하였는데,
교회당국의 입장과 달리 그의 영성수련은 동료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것이어서
1534년에는 그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에 있는 성당에서
서원까지 하게 됩니다.

이게 실마리가 되어 ‘예수회’(Jesuit)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1537년에는 다른 여섯 명의 동료들과 함께 사제서품까지 받았으며,
1940년에는 교황 바오로 3세가 예수회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예수회의 수도사들의 삶의 원칙을 살펴봅니다.
수도회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먼저 가난해야 하며,
영예로운 자리를 탐하지 못하도록 빗장을 걸어두어야 한다고 합니다.
회원들은 자신의 부르심에 어울리게 겸손한 자세로
세상과 인간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로욜라는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당신의 동료를 우리 가운데서 개별적으로 찾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전부를 차지하는
그런 사람을 찾는다고 합니다.

개혁교회가 너무 부요하다고 자랑 할 만큼 비대해졌습니다.
이제는 철저하게 낮아짐과 겸비의 삶을 추구하는
예수회의 삶을 본받을 신앙적인 자세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60년대 어렵던 시절에 목회자의 한 달 사례비는 한 달을 겨우 지탱할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한 달 사례비로 몇 개월 이상을 지탱할 수 있는 많은 금액이 되었기에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어느 신학대학의 진솔한 고백을 생각하며 모든 교회와 지도자들이 스스로 낮아질 수 있는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

22

로마서 7:1∼25

나는 곤고한 사람(24절)

♦ 1월 22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로마서 7: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나는 곤고한 사람(24절)
♦ 성구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아멘

당신은 곤고(困苦)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피곤(疲困)한 사람입니까?

피곤이란 마음과 몸이 지쳐서 고달프다는 뜻입니다(tired man).
곤고하다는 말은 어렵고 고생스럽다는 뜻입니다(wretched man).

로마서 6장은 죄와 육체의 관계에 대한 결론으로 “죄의 삯은 사망(The wages of sin is death)” 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로마서 7장은 죄와 정신의 관계에 대한 결론으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What a wretched man I am!)” 이라고 탄식합니다.

곤고한 사람이란 “내 힘으로 죄를 이길 수 없고,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절망적인 선언을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큰 죄와 작은 죄를 구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큰 죄를 지은 사람도 죄인이며 작은 죄를 지은 사람도 죄인입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골”은 “가장 심각한 죄는 절망”이라고 합니다.
이 절망을 일컬어 “죽음에 이르는 병” 이라고 말했습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곧 절망을 의미합니다.
죄를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은 절망적인 존재입니다.
이 절망 즉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셨나요?
어떻게 찾으셨나요?

사망의 몸에서 구원할 수 있는 길을 찾으셨다면 이제는 지체하지 말고 그 방법을 빨리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할 일군이 없다고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까?
영의 눈을 떠서 길을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일에 앞장 설 수 있는 일군으로 세워지기를 기도합시다.

주여!
보내주소서
찾게 하소서
만나게 하소서
전하게 하소서
빛나고 아름다운
광명의 세계를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월 22일(수)
- 나의 묵상 노트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곤고한 사람의 특징은 아직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곤고한 자리에서 벗어나려면 알아야 합니다. 알기 위해서는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을 “배움의 동물” 이라고 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요람) 죽을 때까지(무덤) 인간은 배워야 합니다.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행복은 감사 속에 있고
감사는 만족 속에 있으며
만족의 나무에 감사의 꽃이 피고
감사의 꽃에 행복의 열매가 열린다고 합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행복이란 “정신적인 만족감”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곤고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는 가장 쉽고 가장 좋은 방법에 따라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다짐합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

23

로마서 8:1∼39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5절)


♦ 1월 23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로마서 8:1∼39
♦ 묵상을 위한 주제 :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5절)
♦ 성구 :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아멘 

영(靈)의 특징은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육(肉)의 특징은 너무나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장난감 오뚝이를 던져보셨는지요?
오뚝이는 던지기만 하면 반듯하게 일어섭니다.
무게 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육과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의 조화를 잘 갖춘 사람은 오뚝이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중심이 분명한 사람은 어떤 소리를 해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심이 서지 않은 사람은 불안하고 두려워합니다.

죄인(罪人)은 죄(罪)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해결되지 않은 죄는 반드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죄에 대한 깊은 고민 가운데서 놀라운 진리를 깨달은 사도 바울의 통찰력을 생각해 봅니다.

죄는 육체를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로마서 6:23).
죄는 정신을 황폐하게 합니다(로마서 7:24).
그러나 죄를 해결한 후에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게 하셨습니다(로마서 8:2).

죄와 사망의 법에 붙잡혔던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容恕)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의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용서의 은혜를 잊어버리게 하는 요소들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며, 은혜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나의 주머니와 행복과 명예와 소원과 “나”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었습니다.

“나”라는 울타리를 털어버리고 “우리”라는 용서와 은혜의 공동체를 세워가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중심에는 영(靈)이 있습니다.
영의 자리를 오직 예수로 채워 세상을 바라 볼 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던 모습을 회복하는 영의 사람이 되어 영의 생각으로 살아야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월 23일(목)
- 나의 묵상 노트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

육신의 생각은 절망과 사망입니다.
영의 생각은 소망과 생명입니다. 

탈무드에 소개된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모든 사람에게 항상 배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자기의 가진 것에 대하여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감사를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향한 우루과이 어느 성당의 벽에 새겨진 “반성하는 주기도문” 이란 기도를 소개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하늘에 계신” 하지 말아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 하지 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 하지 말아라.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지 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지 말아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지 말아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 말아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말아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 말아라.
죄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 하지 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육의 생각으로 기도할 것이 아니라
영의 생각으로 기도할 수 있는 은혜를 사모합시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

24

로마서 9:1∼33

약속의 자녀(8절)


♦ 1월 24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로마서 9:1∼33
♦ 묵상을 위한 주제 : 약속의 자녀(8절)
♦ 성구 :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아멘 

말씀을 “씨앗”으로 비유합니다.
씨앗이 뿌려지는 땅은 “좋은 땅” 이외에도 “길가” “가시밭” “돌밭”에 떨어집니다.
약속의 자녀는 말씀을 “좋은 땅”에 심어야 합니다.
좋은 땅이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씨앗이 최상급일지라도 좋은 땅으로 다듬어지지 않는다면 씨앗은 자랄 수도 없습니다.

씨앗이 잘 자랄 수 있는 좋은 땅을 회복하기 위하여 “Peter Lives” 라는 미국 신학자이자 작가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라는 재미있는 글을 소개합니다.

돈으로 사람(person)을 살 수는 있으나 
그 사람의 마음(spirit)을 살수는 없다.

돈으로 호화로운 집(house)을 살수는 있어도 
행복한 가정(home)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최고로 좋은 침대(bed)는 살 수 있어도 
최상의 달콤한 잠(sleep)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시계(clock)는 살 수 있어도 
흐르는 시간(time)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얼마든지 책(book)은 살 수 있어도 
결코 삶의 지혜(wisdom)는 살 수 없다.


돈으로 지위(position)는 살 수 있어도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존경(respect)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좋은 약(medicine)은 살 수 있어도 
평생 건강(health)은 살 수 없다.


돈으로 피(blood)는 살 수 있어도 
영원한 생명(life)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섹스(sex)는 살 수 있어도 
진정한 사랑(love)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쾌락(pleasure)은 살 수 있으나 
마음속 깊은 곳의 기쁨(delight)은 살수 없다.


돈으로 맛있는 음식(food)은 살 수 있지만 
마음이 동하는 식욕(appetite)은 살 수 없다.

 

돈으로 화려한 옷(clothes)은 살 수 있으나 
내면에서 우러난 참된 아름다움(beauty)을 살수는 없다.


돈으로 사치(luxury)를 꾸리면 살수는 있으나 
전통어린 문화(culture)를 살수는 없다.


돈으로 고급품(articles goods)을 살수는 있으나 
아늑한 평안(peace)을 살수는 없다.


돈으로 미인(beauty)을 살수는 있으나 
정신적인 평화로움(stability)은 살 수 없다.


돈이 있으면 성대한 장례식(funeral)을 치를 수 있지만 
행복한 죽음(glorious death)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종교(religion)는 얻을 수 있으나, 
소망하는 구원(salvation)은 얻을 수 없다.

 

돈은 일상생활에 절대 필요하고 편리한 수단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생활의 수단이지
인생의 목적은 결코 아닙니다. 
돈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돈만 가지고는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고
진정으로 만족스러운 것은 살 수 없습니다.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좋은 땅을 만드는 비결이라고 하겠습니다.
내 능력의 범위를 벗어난 것을 가지려는 욕심과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도 좋은 땅을 다듬어 말씀의 씨앗을 뿌려 열매를 맺기까지 수고하는 일에 기쁨이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월 24일(금)
- 나의 묵상 노트
약속의 자녀로 살아갑시다!

신앙생활은 교회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반드시 교회 중심으로만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것은 “교회주의(敎會主義)”라고 합니다. ‘교회주의’란 “교회를 위한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敎會)는 건물(建物) 즉 예배당(禮拜堂)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람은 예수를 믿는 한 사람(個人)으로 시작합니다.
개인(男子)과 개인(女子)이 만나서 가정(家政)을 만듭니다.
가장 교회다운 교회는 가정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성 가정(聖 家政)을 회복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도 신앙생활은 전개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지 교회를 키우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모험과 도박이라고 정의한 철학자는 ‘파스칼’입니다.
신앙이란 마치 내 생명과 전 인격을 건 도박(賭博)과 같습니다.
만일 잃어버린다면 자아 전체가 ‘무(無)’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얻게 되면 자아는 물론 ‘영원한 천국의 삶’을 얻게 됩니다.
약속의 자녀를 약속의 씨라고 합니다.
약속의 씨가 반드시 생명을 얻고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약속의 자녀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진리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씨앗을 뿌릴 때 좋은 열매를 기대하고 밭에 뿌립니다.
그런데 원수가 좋은 열매를 얻지 못하게 하려고 비슷한 씨를 몰래 밭에 뿌렸습니다. 몰래 뿌린 씨앗이 밭에서 더 잘 자라고 성장합니다. 열매를 맺는 때까지는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씨는 진리의 열매를 맺습니다.

약속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과 온갖 시련과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일어나서 새로운 삶의 영역을 확장시켜 나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성령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

25

로마서 10:1∼31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13절)


♦ 1월 25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로마서 10:1∼31
♦ 묵상을 위한 주제 :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13절)
♦ 성구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아멘 

주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와 같습니다(잠언 18:10).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견고한 망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견고한 망대(Strong Tower)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로마서 1:17).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주의 이름을 부를 때 구원하시고 변호해 주십니다(시편 54:1)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한국인의 습성은 어떤 위기를 만났을 때 “아이구 하나님!” 또는 “아이구 어머니!” 라고 외칩니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한국인의 습성에서 생각해 봅니다.
“아이구 하나님!”
하나님을 찾을 줄 아는 백성은 무너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견곤한 망대가 되신 하나님께서 든든하게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민족의 명절 설날을 맞이하는 모든 백성들에게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기회가 크게 열려지기를 소망합니다.

인생을 세 단어로 표현한 영어 단어를 소개합니다.
“hurry, worry, bury”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인생은 허둥지둥 서두르다가, 근심하던 중에 결국은 땅 속에 묻힌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인생은 땅속에 묻힐지라도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땅 속에 묻히는 인생이 아니라 반드시 살아나서 영원한 생명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삶을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설날을 맞아 우리 모두 예수 위에 세워지는 견고한 삶이 아름답게 펼쳐지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월 25일(토)
- 나의 묵상 노트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리스도의 영혼(Alma de Christo)”

그리스도의 영혼은 저를 거룩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몸은 저를 구원하소서.

그리스도의 피는 저를 취하게 하소서.

그리스도 늑골의 물은 저를 씻어주소서.

그리스도의 수난은 저에게 힘을 주소서.

오 선하신 저의 예수니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의 상처 속에 저를 숨겨주시고

당신을 떠나지 않게 하시며

사악한 원수에게서 지켜주소서.

제가 죽을 때에 불러주시어

당신께 오라 명하시고

당신의 성인들과 더불어

영원토록 당신을 찬미하게 하소서. 
아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그리스도의 영혼의 도움을 받는 지름길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주의 이름 부르리라
설날의 기쁨과 더불어
주의 이름을 부르며
설날의 기쁨을
영원한 기쁨으로 만들어 갑시다.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WHOEVER WILL CALL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whosoever shall call upon the name of the Lord shall be saved. 

“그리스도의 영혼(Alma de Christo)”

Alma de Cristo, santifícame.
그리스도
의 영혼은 저를 거룩하게 하소서.


Cuerpo de Cristo, sálvame.

그리스도의 몸은 저를 구원하소서.


Sangre de Cristo, embriágame

그리스도의 피는 저를 취하게 하소서.


Agua del constado de Cristo, lávame.

그리스도의 늑방의 물은 저를 씻어주소서.


Pasión de Cristo, confórtame.

그리스도의 수난은 저에게 힘을 주소서.


Oh mi buen Jesús, óyeme!

오, 선하신 저의 예수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Dentro de tus llagas, escóndeme.

당신의 상처 속에 저를 숨겨주시고


No permitas que me aparte de Ti.

당신을 떠나지 않게 하시며


Del maligno enemigo, defiéndeme.

사악한 원수에게서 지켜주소서.


En la hora de mi muerte, llámame.

제가 죽을 때에 불러주시어


Y mándame ir a Ti

당신께 오라 명하시고


Para que con tus santos te alabe

당신의 성인들과 더불어


Por los siglos de los siglos. Amén

영원토록 당신을 찬미하게 하소서. 아멘.


은혜란 내가 좋아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쁜 것도 감사한 믿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것입니다.

오늘도 은혜 아래 거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아래에서.............

1월 29일(주일) 예배 안내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편 119:18)
Open my eyes that I may see wonderful things in your law. 

주일을 맞이할 때마다 어느 교회에서 예배를 해야 하는지 주저하고 망설였던 경험은 없었는지요?
물론 예배하는 은혜로운 교회가 있다면 얼마나 감사할까요?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에 교회에 가지 않으면 무슨 화(禍)를 당하거나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았는지요?

예배는 장소(禮拜堂)가 아니라 사람이 우선입니다.
진리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될 때 예배는 바르게 드려질 수 있습니다.

교회에 갇혀버린 예배가 아니라 먼저 내 안에 거하시는 주의 영의 지배를 받아 주님이 기뻐하는 예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예배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첫째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자가 됩시다!

프랑스의 루이 14세 시대에 있었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주일에 왕과 그의 왕족들이 교회에 도착했는데 그 곳에는 왕실 설교자인 “프넬론 대주교”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교회의 많은 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보고 놀란 왕은 “모든 사람들이 다 어디에 있습니까? 왜 오늘 아침에는 아무도 출석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프넬론 주교’는 루이 14세에게 “저는 폐하께서 오늘 이곳에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광고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누가 하나님께 예배하러 오는지 아니면 단지 폐하께 아첨하러 오는지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왕의 눈도장을 찍으러 나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왕이 오늘 출석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대부분 교회를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부끄러운 예배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둘째는 예수 기쁨을 찾는 예배자가 됩시다!

미국의 어떤 흑인 농부가 동부의 도시생활에 너무나 지치고 힘들어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당시 희망이 넘치는 서부 개척지를 향해 떠났습니다. 마차를 타고 가다보니 교회당에서 종이 울립니다. 그 때야 주일인 줄 알고 교회당 밑에다 마차를 세워 놓고 아내와 두 자녀를 데리고 교회당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때 안내위원이 “여기는 백인만을 위한 교회당입니다. 흑인은 못 들어갑니다.” 라면서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인 가족은 교회 옆 창이 있는 곳에서 웅크리고 앉아 교회당 안에서 들리는 인도자의 소리를 따라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분이 인자한 눈빛으로 자기 가족들을 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흑인은 물었습니다. 
“아니, 당신은 흑인이 아닌데 왜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 분은 대답합니다. 
“오, 신실하고 착한 나의 아들아, 나는 예수 그리스도이니라. 이곳 마을에서 나를 찾고 내게 진정 예배드리는 이는 너희뿐인데 왜 저곳으로 들어가겠느냐? 저 곳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안내하는 자가 나를 가로 막고 있구나!”

예수님이 없는 예배가 화려하고 아름답게 진행된다는 것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기쁨을 회복하는 예배를 기도합니다.

아무리 크고 화려한 예배당에서 최고의 찬양대, 최고의 명 설교와 함께 드려지는 예배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해 드리지 않는다면 참된 예배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개척교회에서 몇 명이 모여서 드리는 초라한 예배라도 하나님을 향해 전심으로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함을 깨닫는 예배자로 거듭나는 은혜가 임하여 예수 기쁨을 회복하는 예배자로 거듭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

27

로마서 11:1∼36

이방인의 사도(13절)

1

28

로마서 12:1∼21

선으로 악을 이기라(21절)

1

29

로마서 13:1∼14

사랑은 율법의 완성(10절)

1

30

로마서 14:1∼23

하나님 나라의 요소(17절)

1

31

로마서 15:1∼33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29절)

2

1

로마서 16:1∼27

지혜의 자리와 악의 자리(19절)

2

2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

27

로마서 11:1∼36

이방인의 사도(13절)


♦ 1월 27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로마서 11:1∼36
♦ 묵상을 위한 주제 : 이방인의 사도(13절)
♦ 성구 :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아멘

사도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디모데전서 2:4)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로마서 16:26b)

복음의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동일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첫째는 유대인 즉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성도들을 성경적으로 바르게 양육해야 합니다. 둘째는 이방인 즉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채워질 때까지 이스라엘은 더러 완악하게 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25절).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저럴까?
교회가 왜 저럴까?

이런 비난의 소리가 믿지 않는 자들을 도외시 하려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을 자극하여 먼저 믿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로마서 15:21).

“늦게 배운 도적질이 무섭다!”고 합니다.
먼저 믿은 사람보다 늦게 믿은 사람이 먼저 믿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할 것입니다.그러므로 오래 믿었다는 시간과 날수의 자랑이 아니라 열심히 뜨겁게 간절하게 진실하게 믿었다는 내용을 자랑할 수 있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래 믿었다는 시간과 날수의 전통(傳統)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변화(變化)의 힘을 잃어버린 전통을 고집(固執)할 것이 아니라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지킬 수 있도록 단점(短點)을 수정(修正)하고 장점(長點)을 장려(獎勵)하여 새로운 힘을 발휘(發揮)하여 교회 안에 속한 성도들과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의 손을 잡고 다 함께 주님 나라를 세워갈 수 있는 은혜가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성전 한 모퉁이에서
부끄러운 삶을 읊조리는 세리처럼
내세울 것 없는
온전하지 못한 지난날의 신앙을
모두 내려놓고
성령의 사랑에 붙잡혀
이방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복음의 사람으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월 27일(월)
- 나의 묵상 노트
♦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주소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 입니까?
아니면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 입니까?

복음을 전하려면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복음의 울타리가 점점 좁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넓혀지고 있습니까?

서구사회 전통은 전체 인구의 20%가 기독교인 이라면 그 나라를 “기독교국가”라고 합니다. 한국의 기독교 인구가 25%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 수치는 한국에서는 더 이상 기독교 인구가 늘어날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의 울타리를 넓히려면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이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소금에 비유한다면 전체 국민의 25%가 소금이 되었습니다. 만일 25%의 소금을 물에 녹이면 그 물은 너무 짜서 도저히 마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은 한국 사회가 구석구석 부패했다고 탄식합니다. 그렇다면 교회와 교인들은 전혀 부패하지 않았을까요?

교회와 교인들이 먼저 부패했기 때문에 세상은 자연스럽게 부패한 것이 아닐까요?

소금의 맛을 잃어버린 기독교인들이 25%라는 수치적인 효과만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는 부정과 부패 심지어 좌경화(左傾化) 되고 말았습니다.

이방인의 전도자로 거듭나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혁명을 일으켜야 합니다.
종교개혁을 통하여 개혁교회가 세워졌습니다(1517년 10월 31일).
한국의 기독교 원년(元年)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이라고 합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되고 125년이 지났습니다.
125년 만에 한국의 기독교는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는 부패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교회 개혁과 더불어 성도들의 신앙개혁 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신앙의 기초부터 다시 배우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끼리 만나서 수다를 떨고 마음에 맺힌 한풀이 하는 이야기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에 맺힌 한을 풀어주기 위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이방인들에게 관심을 갖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믿음 기도합니다.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

28

로마서 12:1∼21

선으로 악을 이기라(21절)


♦ 1월 28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로마서 12:1∼21
♦ 묵상을 위한 주제 : 선으로 악을 이기라!(21절)
♦ 성구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아멘

성경은 선(善)을 양에 비유하고, 악(惡)을 이리에 비유합니다.
양과 이리가 싸우면 이리가 이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힘이 없는 선이 강한 힘을 갖는 악을 이길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뱀같이 지혜(知慧)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純潔)하라고 하셨습니다(마 10:16).

지혜(知慧)와 순결(純潔)은 양이 이리 가운데서 이길 수 있는 비결이라고 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7∼18)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강한 힘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까요?

악한 방법과 선한 방법은 분명히 그 과정(課程)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악한 방법은 일시적으로 이길 수 있지만 마지막에는 선한 방법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방법보다 더 우월하기 때문입니다.
선한 방법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갈 때 최후의 승리는 하나님의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을 “바야 콘 디오스(Vaya con Dios)” 라고 합니다.

스페인에서는 잠시 헤어질 때 “아디오스(Adios)”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먼 길을 떠날 때는 “바야 콘 디오스(Vaya con Dios)” 라고 말합니다.
‘바야 콘 디오스’는 “하나님과 함께 가라(Go with God)”는 뜻입니다.

주의 백성들은 선한 방법만을 선택해야 합니다.
선한 방법을 따라 하나님과 함께 가는 길은 악한 방법을 이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2020년 설날을 지내며 다시 한 번 더 다짐해 봅니다.
“바야 콘 디오스(Vaya con Dios)”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월 28일(화)
- 나의 묵상 노트
♦ 선(善)으로 악(惡)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정치(政治)와 기독교(基督敎)의 목표(目標)는 이기는 것입니다.
정치는 이기기 위하여 수단(手段)과 방법(方法)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기기 위하여 모든 과정(科程)은 반드시 선(善)해야 한다고 주장(主張) 합니다. 그 과정을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인간의 힘은 한계(限界)가 있습니다.
제한된 힘으로 목표를 달성하려면 새로운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 힘은 성령(聖靈)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정말 선으로 악을 이기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성령의 도움을 기도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신비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없는 연약한 나와 같은 사람이 그 힘을 지원받아 끝까지 이기려고 노력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사람을 수단(手段)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目的)으로 대하라고 강조했습니다.

정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때로는 사람을 이용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합니다. 반면에 기독교 복음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고귀한 인격(人格)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혼탁(混濁)하고 어지러운 현실(現實)에서 오직 사람을 살리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승리하는 주님의 나라 주님의 백성들이 도처(到處)에서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현재 위기 가운데 있고, 그 위기의식이 기독교인들마저도 극단적으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지금만 위기를 겪은 것은 아니며, 위기가 항상 멸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위기 가운데서 기독교 신앙은 회개와 구원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새 시대를 열어가기에 합당한 구별된 남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한반도가 신라, 고려, 조선, 한국 등으로 변모하는 역사의 과정 속에서 한 시대가 종말을 맞이하면서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역사는 계속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해왔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망하게 하신다면 막을 자가 없고, 하나님께서 살리신다면 죽일 자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 자부했던 이스라엘도 흥망성쇠를 거듭해 왔고, 인류의 역사에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국가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뿐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

29

로마서 13:1∼14

사랑은 율법의 완성(10절)


♦ 1월 29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로마서 13:1∼14
♦ 묵상을 위한 주제 : 사랑은 율법의 완성(10절)
♦ 성구 :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아멘  

율법을 완성하는 비결을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서로 사랑하라(8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빚지다(오페일로)는 단어는 ‘의무가 있다’ 또는 ‘마땅히 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사랑(아가페)은 선택이 아니라 성도의 의무라고 하겠습니다.
성도는 사랑의 빚진 사람으로서 빚을 갚는 심정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함은 나는 사랑의 빚진 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롬 1:14).

둘째는 율법을 포함하는 사랑(9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행동하지 않는 사랑은 추상적입니다. 추상적인 사랑을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 율법을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율법을 구체적으로 계명이라고도 합니다(10절).

셋째는 사랑을 적용하라

사랑을 적용하려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웃과 내 몸은 구체적인 대상이며 구체적인 실체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사랑을 삶에 적용하려면 다른 사람에게 엄격하게 적용하라고 가르쳤던 것처럼 나를 엄격하게 가르치고 다스려야 할 때 율법을 온전히 이루게 될 것입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월 29일(수)
- 나의 묵상 노트
♦ 사랑으로 사람을 변화시키게 하소서!

기독교 신앙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까?
천리안(千里眼)을 갖는 도사(道士)와 같은 사람입니까?
손만 대면 모든 것이 황금(黃金)으로 변하는 미다스 손을 갖는 사람입니까?
온갖 질병(疾病)이라고 안수(按手)하면 고칠 수 있는 신유(神癒)의 사람입니까?
나는 사랑의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원합니다.

사랑이 없는 도사(道士)
사랑이 없는 미다스 손
사랑이 없는 신유(神癒)
이러한 것은 결국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특히 나를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나를 만족시키는 것으로는 결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내가 먼저 변화된 후에 상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가 먼저 변화된 후에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끌어안고 새 생명의 길을 함께 찾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생명을 얻고 회복하는 것이 율법이 완성입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

30

로마서 14:1∼23

하나님 나라의 요소(17절)


♦ 1월 30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로마서 14: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나님 나라의 요소(17절)
♦ 성구 :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아멘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eating and drinking, but of righteousness,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나라가 구성되려면 세 가지 충분필요조건을 갖춰야 합니다.
첫째는 국민(國民)
둘째는 국토(國土)
셋째는 주권(主權)

하나님 나라의 국민들은 주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성도(聖徒)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국토는 하늘(天)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주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統治)가 실현되는 곳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실현되는 곳에는 하나님의 섭리(攝理)가 나타나야 합니다.

어떻게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낼 수 있을까요?

찰스 린드버그(Charles Augustus Lindbergh)는 1930년 당시 프로펠러 하나 달린 단발 비행기를 몰고 대서양을 처음 횡단한 영웅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 일에 도전했다가 생명을 잃었습니다.


어느 날 린드버그가 파리를 가게 되었는데,

그가 온다는 소문에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렸습니다.


어느 큰 담배 회사 사장이 이 기회를 이용해서

자기 회사의 담배를 광고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린드버그에게 다가가 담배 한 개비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것을 손에 끼어도 좋고 입에 물어도 좋습니다.

포즈 한 번만 취해 주십시오.
그러면 사진 한 장 당 5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5만 달러면 약 6천 만 원입니다.

지금부터 90년 전에 5만 달러라면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그러나 엄격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린드버그는 사람들 앞에서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세례 받은 교인입니다. 담배 피울 수 없습니다.”


린드버그는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었기 때문에

담배 회사 사장의 제안을 받아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린드버그의 그 말이 다음 날

바로 파리 신문에 대서특필되어 나왔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에게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모금을 하여

10만 달러를 모아서 린드버그에게 전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린드버그의 이러한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은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아멘


☞ 1월 30일(목)
- 나의 묵상 노트
♦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 이루어지고 있는가?

어느 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들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너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하느니라!
정말, 내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 졌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안에 하나님 나라가 없습니다.
내 안에 없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려고 노력하고 설득시키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내 안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내 안에 세운 후에 그 나라가 내 안에 있다고 보여줘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말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 나라 내 안에 세워야 합니다.
주님을 내 안에 모셔야 합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을 내 안에 모시려면
주님이 보내시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내주하시는 은혜가
나를 다스리고 지배해야만 합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주님,
여기 임하소서
지금 이 자리에
생각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성령의 임재를
드러내게 하소서
보여주게 하소서
깨우치게 하소서
모두가
주 성령의 다스림에
무릎 꿇게 하소서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

31

로마서 15:1∼33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29절)


♦ 1월 31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로마서 15:1∼33
♦ 묵상을 위한 주제 :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29절)
♦ 성구 :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아멘 

충만한 축복(πληρώματι εὐλογίας)이란 영어로 “the fullness of blessing”이라고 합니다. 충만(充滿)이란 헬라어는 “플래로마(πλήρωμα, pléróma)”라고 합니다. ‘플래로마’란 “차고 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 충만이란 성령이 임재 하여 내 안에 가득차서 넘쳐 나오는 것입니다. 성령이 넘쳐날 때 나타나는 현상을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이란 보잘 것 없는 인생이 주님의 은총을 힘입어 성숙한 인격으로 거듭나는 삶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2019년 교수신문에서 발표한 2019년을 의미하는 사자성어로 “공명지조(共命之鳥)”라는 단어를 발표했습니다. ‘공명지조’란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하나의 몸에 두 개의 머리를 갖고 있는 “공명조(共命鳥)”라는 새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의 머리가 좋은 열매를 독차지해 먹어버리자 화가 난 또 다른 머리가 복수를 위해 독이 든 열매를 몰래 먹었습니다. 결국 몸에 독이 퍼져 두 머리가 모두 죽게 되었다는 어리석음을 빗대어 교훈하는 이야기를 말 합니다.

“대한민국”의 현실은 하나의 몸에 ‘보수’와 ‘진보’라는 두 개의 머리가 있는 공명조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심지어 기독교 신앙의 울타리 안에서도 서로 다른 생각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하나뿐입니다. 진리의 가르침을 바르게 배우고 익혀서 작은 차이를 충돌시키지 말고 서로 이해하고 다듬어서 목표를 이루기 위한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위하여 서로 기도하며 손을 잡고 일어나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수 있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월 31일(금)
- 나의 묵상 노트
♦ 예수님으로 하나 되는 축복을 이루어 냅시다!

나는 곧 “길(way)”이요 “진리(truth)”요 “생명(life)”이라.
하나 되는 비결은 이미 세 가지 단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길(way)’이란 단어에서 “방법(方法)”을 찾아야 합니다.

‘진리(truth)’라는 단어에서 “과정(過程)”을 찾습니다.

‘생명(life)’이란 단어에서 “목적(目的)”을 확인해야 합니다.

방법과 과정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똑같습니다.
목적을 위하여 서로 다른 방법과 과정을 다듬어야 합니다.

그러나 구원(救援)을 얻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 되는 은혜가 온 세상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스콜라 철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가톨릭 신학의 거장입니다.
아퀴나스는 훌륭한 학자이며 동시에 경건한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천사와 같은 박사”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수도원에서 기도하던 중 예수님께서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주님입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내가 아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로만 하나 되는 길이 열려지기를 원합니다.
오직 예수 생명으로 회복되는 은혜가 임하기를 원합니다.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504445 2020-01-30T14:07:11Z 2020-01-30T15:45:39Z 김요석 선교사 간증 이야기

김요석 선교사

김요석 선교사는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을 마치고 전라도 영암군에 있는 나환자 정착촌의 영호교회를 10여년간 담임하시다가
현재는 중국 오지에서 나환자들과 함께 기거하며 선교사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이 자료는 선교사님이 미국 한인교회 방문 때에 전한 메세지로 극동방송국 에서 편집 방송한 내용입니다.


(간증 내용)
제가 독일에서 공부할 때, 그 때 유명한 신약학 교수가 강당에서 학생이 하도 많이 오니까 - 유명하니까 학생이 많이 와서 - 갑자기 딱 스톱 하더니 하는 말이 - 그 때, 마가복음 강의를 했는데 갑자기 성경을 번쩍 들어요.


"여러분들 혹시 이 성경을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 있습니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 때 한 1,500명 - 대학원학생들, 학부학생들, 또 다른 과에서 들으러 온 학생들이 많이 있었는 데 아무도 손 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졸업반 학생도 있었고 또 목사고시에 합격한 그런 박사과정의 학생도 있었는데 아무도 손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때 제가 구석에 있다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날 이렇게 보더니만아마 독일사람 같지않게 생겼던 모양이지요. 하는 말이 "당신 어디서 왔소?" 하고 물었습니다.

" 한국서 왔습니다" 이야기를 하니까,

그 분이 하는 말이 "한국은 아직도 샤머니즘과 원시종교에 젖어 있어서 이걸 무조건 믿는 모양인데, 당신이 여기서 신학을 잘 배워보면은 아마 믿을건 없다는 것을 알게 될거라고" 그러면서 딱 하는 말이


"여러분들 이 성경은 껍데기 두 장만 - 가죽으로 된거 앞뒷장 두 개, 이 두 장외에는 믿을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용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많은 학생들은 조용했습니다.


그 강의를 마치고 나서 제 옆방에 사는 학생에게 물어 봤습니다.

"내가 혹시 독일어를 잘못 알아들어서 그런지 모르니까,

네가 한번 더 소개해 달라. 그 교수가 그렇게 물었나,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나 ? " 했더니, 이 친구가 대답도 안하고

가만히 나를 측은한 듯이 바라보면서 하는 말이

"자네 진짜 이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가?" 물어요.

그래서 제가 "너는 안 믿나?" 하고 대신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 하는 말이 "안 믿는다고"

"그럼 왜 자네는 신학해서 목사 될려고 하는가?"

"아- 직업이 좋지 않는가, 좋은 직업이니까 한다"

그런데 저는 어릴 때 자라면서 
'목사하고 신학할려면 사명감 있어야 된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야 된다'

그렇게 들어왔는데, 갑자기 직업 이야기를 하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무슨 직업이 좋길래?" 하고 물어봤습니다.

독일에는 신학교가 여기처럼 교단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립대학 속에

중심 학부로 서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 학생들이 제일 우수한 학생들

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신학부에서 공부를 못하면 의학부나 법학부로 내려가는 
- 그래서 상당히 자존심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학문적으로 높은데 가슴은 아주 차갑지요.

그리고 목사님도 국가 공무원이니까 
- 아주 고급 공무원이니까 또 상당히 지적 수준이 높고 - 
이렇게 되니까 아주 제일 똑똑한 사람이 오지만 신앙과 신학은 
별개로 공부하는겁니다.


그 때가 6~70년 후반이니까 사회주의 신학이라는거 - 
막스주의 신학이라는거 이야기할 땐데,

한 번은 그 교수가 강의를 하면서

"칼 막스야 말로 사도바울에 버금하는 대 선교사다"

그렇게 공언할 정도로 그런 판도가 날 그 때였습니다.

그 때 제가 고민이 생겼습니다.

'나는 이 신학을 공부한 것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배워서 
좋은 메세지를 전하고 싶어서 하는건데 만약, 그렇다면 내가 뭘 
전해야 되겠는가, 사람의 생각을 전해야 되겠는가?' 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그 다음 세미나에서 그 분과 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당신이 자꾸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증거를 대봐라. 
하나님의 존재가 확실하다는 증거를 대라.

하나님의 존재가 실존적이라는 증거를 대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러면 어떻게 대야 되는 겁니까?" 그러니까,

하는 말이 "당신이 그렇게 믿는다면 하나님과 한번 대면한 적이 
있을것 아닌가? 하나님 얼굴이 어떻게 생겼던가?

흑인 이든가, 백인 이든가 아니면 당신같은 황인종 이든가?

그 다음, 당신이 하나님 만났다면 악수라도 한번 했을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 손이 차든가 덥든가?"

제가 그 질문에 아무 대답을 못했습니다. 아무 말 못했어요.

그 보라구.

그러니까 당신 아직 모르면서 괜히 고집으로 믿는다는거요.

고집으로....

그러면서 제가 우왕좌왕 하다가 공부를 끝마치게 되었습니다.

마치고 나서 제가 한국으로 귀국을 했는데

와서 어느 신학교에서 특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들도 많이 오고, 신학교수들도 많이 와서 제 특강을 듣는다고 
앉아 있는데- 전 저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해서 발표를 하고 났는데 
갑자기 끝나기 전에  어떤 목사님이 손을 들고 질문을 하면서

"당신은 자유주의 신학자가 아니냐, 신신학자가 아니냐?"

공격이 들어왔습니다.

저는 독일에서 공부할 때는 복음주의자고 보수주의자라고 비난받다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거꾸로 자유주의다 신신학이다 그러니까

제가 아무 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마침 교수님들이 말려서 제가 챙피는 당하지는 않고, 얻어 맞지는 않고 물러갔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어떤 나이 많은 목사님 한 분이 저한테 와서 하는 말이

"참 당신, 이론이라든가 학문적인 것은 훌륭한데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없다. 이론하고 체험은 다르니까 한번 체험을 해보면 어떻겠는가?"

제게 그렇게 말씀하세요.

"그럼 뭐 어떻게 체험을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목회를 한 번 해보라는 거에요.

그래서 1년 예정으로 그 목사님이 소개한 어느 교회로

주소를 들고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저와 나병 환자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제가 가서 첫 주일날 설교를 할려고 단 위에 올라섰다가 제일 앞에 앉은

사람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말 문이 탁 막혀 버린겁니다.

한 몇 분 간을 가만히 보고 있었어요.

그분의 얼굴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코도 없고 입술도 떨어지고 눈알도 빠졌습니다.

그 얼굴에는 구멍만 다섯 개가 뚫린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까 손가락도 다 잘라져서 팔목만 남아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무 말 못하고 서 있다가 설교를 했는데, 지금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그 때 무슨 설교를 했는지 무슨 본문을 했는지 모를 정도로 당황해서

지났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서, 새로 부임한 목사니까 나갈 때 인사나 하자고

광고를 했습니다. 마치고 보니까 아무도 없어요. '그래 잘 되었다'

하고 밖으로 나갈려고 문을 여니까 문 밖에 줄을 죽 서 있어요.

그래서 어쩝니까, "아이구 안녕하십니까" 하고 손을 내미니까...

제일 앞에 앉았던 그 노인이 제가이 쪽에 서 있는데 손을 저 쪽으로

내밀면서 "목사님, 고맙습니다" 하고 팔을 내 밀어요.

뒷 사람이 있다가 그 노인의 팔을 제 쪽으로 향하게 해주는데...

여러분, 악수를 할려면 손이 있어야 되잖아요.

손가락이 있어야 손을 잡잖아요.

악수를 할려고 손을 보니까 손가락이 다 잘리고 팔목만 있는데...

이걸 어디다 잡아야 할지... 여길 잡을까... 저길 잡을까...

하고 망설이는데, 그 짤라진 손목에 노오란 고름 덩어리들이 동실동실

맺혀 있어요.

잡으면 꼭 터질것 같은데... 아이고, 모르겠다 하고 쥐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두 번째 사람의 손을 잡게 되었는데 할머니였습니다.

손을 보니까 반이 잘라졌어요. 손바닥만 반이 남았는데..

제가 그 손을 잡으니까, 갑자기 그 할머니가 왼손을 제 손 위에

떡 올려놓아요.

보니까 손가락이 떨어진 사이로 노랗게 고름이 맺혀 있는데

그걸 가지고 제 손등을 자꾸 비벼대는 겁니다. 꼭 터질것 같아요.

그래서, 아이고! 할머니 왜 이러시냐고 하며 손을 뺄려고 그랬는데

그 때, 그 할머니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제가 18살 때 이 병이 
들어서 지금 나이가 78입니다.

만 60년간 이 병으로 있다가 한 번도 성한 사람 손 못잡아 봤는데

오늘 목사님 손 잡아보라니까 너무 좋아서 제가 그럽니다."

그 때, 갑자기 제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이 손이 우리 예수님 손이 아니겠는가...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 더러운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 고초 받으신 손!

어쩌면 손가락도 부러졌고 거기서 헌데도 났고 상처난,

그래서 고름도 생긴 그런 비참한 손이었을거다.

내가 예수님 손 잡는데 뭘 이렇게 겁을 내는가!

그 때, 갑자기 독일에서 그 교수가 하던 말....

"자꾸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그러는데 그러면 네가 손 잡아봤냐,

하나님 얼굴 봤냐?"

그 말이 떠올라서 바로, 이것이 해답이구나

'아 이제야 내가 떳떳하게 우리 주님 손 잡았구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10여 년간을 공부하면서도 만나지 못했던 하나님을

오히려 그 분을 통해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할머니 한테 물었습니다.

"할머니, 참 세상이 원망스럽지 않습니까 또,

하나님이 원망스럽지 않습니까?"

어떻게 똑같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떤 사람은 시집가서 손주 볼 
나이에 할머니는 평생 이 고생하며 소외되어 사는데 하나님이 너무 
원망스럽지 않느냐고 제가 물었습니다.

그 때 그분이 뭐라고 그러는지 압니까?

"목사님, 나는 이 문둥병 걸린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 병 걸렸기에 예수 믿고 천국가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적이 뭔지 압니까?

어떤 분은 위암 걸렸다가, 무슨 병에 걸렸다가 기도해서 나으니까

무슨 이적 체험했다 그럽니다 만은 그보다 더 큰 이적,

이적 중에 최고의 이적은 병들지 않고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겁니다.

병들지 않고 기도하는 겁니다. 
병들지 않고 예수 믿고 예배 드리는 겁니다.

여러분, 그것을 아셔야 됩니다.

우리 건강한 사람들은 받을 축복 다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한번은 어떤 할머니가 밭을 메다가 일곱번째 손가락이 잘라졌어요.

자기도 모르게 툭 떨어진겁니다.

그거 들고는 "목사님!" 하고 불러요. 난리가 난듯이...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제가 일곱째 손가락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어떡하라고.." 했더니 하는 말이

"아 - 그래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아직 세 개가 남았습니다.

이 세 손가락 가지고 청소도 하고 목사님 밥 할 때도 쓸 수가 있습니다"

열 손가락 중에 일곱이 썩어지고 세 손가락만 남아도 그렇게 감사하고

기뻐하는데...

여러분, 열 손가락 가지고 사는거 감사해봤습니까?

발가락 열 개 다 갖춘것 감사해봤습니까?

발가락 하나만 떨어져 있어도 걷지 못합니다.

균형이 안잡혀서 그냥 쓰러집니다.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겁니다.

이 할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가 그 병이 드니까 온 집안 식구가 난리가 났더래요.

아예 골방에 가둬놓고는 나오지를 못하게 하더랍니다.

6남매 있는데 제일 큰 누나가 그 병에 걸리니까 다들 어디가서 
죽었으면 하는 눈치더랍니다.

여러분, 참 이상하잖아요. 다른 병 걸리면 온 식구가 기도하면서

병원에 입원도 시키고 하는데 왜 그 병만 걸리면 나 몰라라 하는거에요.

모두다 어디로 없어졌으면 하는 겁니다.

한번은 새벽에 눈을 떴는데 아버지가 나와서 숫돌에 낫을 갈더랍니다.

갑자기 마음에 '아! 오늘 밤에 아버지가 나를 죽이려는구나...'

생각이 들더래요.

그래서 가만히 누워서 보니까 숫돌을 몇 십분을 갈더니 날카로은 낫을 들고자기 방 안으로 아버지가 들어오더랍니다.

그러더니 한참 서 있다가 나가고, 또 들어와서 한참 서있다가 나가고

그러더랍니다. 그러더니 자기 방에 못 들어오고 있다가 그 다음날 밤에

들어와서 하는 말이 사실, 내가 널 죽이고 싶지만은 차마 애비로서 그럴 수는 없고 우리 집안을 위해서 네가 나가서 죽어달라고 그러더랍니다.

너 하나만 죽으면 너 동생들 시집 장가 가는데 지장이 없다고...

아마 옛날에는 그런 병이 있다면 큰일났던 모양이에요.

이 딸이 그 말 듣고 그래야 되겠다고 "제가 나가서 죽겠습니다"

뒤에 못이 있으니까 그 못에 들어가서 죽겠다고 하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렇게 나와서 죽을려고 하는데 어머니가 뒤따라 나와서

딸이 에미보다 먼저 죽으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서

쌀을 두 되 주면서 이것 가지고 산신령한테 가서 기도하라고 그렇게 
해서 나으면 다시 들어오라고 그러면 시집보내 주께....

제발 죽지는 말라고 그러더래요.

어머니 한 분만 살라고 그러지 다른 식구들은 다 죽었으면 하고

바라더랍니다.

어머니가 하도 간곡히 그러니까 쌀 자루를 지고 산으로 올라가다가

연못 가에 이르렀습니다. 갑자기 죽고싶은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쌀 자루 놓고 신발 벗고는 물에 뛰어들려고 하는데 그 어미니가

뒤 따라 왔어요. 뒤에서 허리를 꽉 껴안으며 울면서 그럽니다.

"에미보다 먼저 죽는 딸이 어디 있느냐? 제발, 죽지말아라"

그렇게 하도 울면서 간곡하게 부탁하니까 차마 죽지 못하고 살겠다고

나왔다가 섬으로 끌려갔다가 또, 우리 마을로 와서 살게 된 겁니다.

그러면서 그 분이 하는 말이 뭔지 압니까?

"저는 문둥이라도 되었기에 예수님 만나고, 
예수 믿고 천국 가지 않습니까?

정말 불쌍한 것은 우리 어머니, 아버지고 우리 형제입니다.

예수 안 믿고 지옥 갔을걸 생각하니까 너무 안타깝습니다."

여러분, 이런 믿음 보셨습니까?

믿음이란게 뭔지 압니까?

지금 주어진 상태에서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슨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가난하건 역경에 처해있건 병들어 있건

그 가운데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 기도가 진실로 나올 때

그것이 믿음이요 성령충만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충만인 것입니다.

처음에 거기에 갔더니 사흘이 지났는데 누가 와서 밥을 안해줘요.

밥 먹으라는 말도 없고. 그래서, 이거 이상하다 목사는 오자마자

한 며칠 굶어야 되는가 보다하고 그냥 있었더니 나흘째 되는 날 ,

한 사람이 와서 부엌을 보더니 아무것도 안해 먹은게 보였던 
모양이에요.

"목사님, 왜 밥 안해 먹습니까?" 그래요.

"글쎄, 내가 쌀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서 못해 먹는다고.....

책가방만 하나 들고 내려왔는데 ....."

그러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아이고, 우리보다 더 가난하네.."

그러더니 쌀을 얼마 걷어오더니 한끼를 해 줘요.

그렇게 사는데 바로 제 사택 옆에는 돼지 막을 쳐놨습니다.

겨울되면 뭐라는지 아십니까?

"목사님, 이 돼지가 얼어 죽을테니까 한 두 마리만 안고 자시요" 
그럽니다.

돼지를 안고 자면 돼지가 오줌싸고 똥싸고 하지요.

이것 참 기가 막히는거에요.

야, 굶더라도 제대로 된 집을 지어야 되겠다 생각해서..

마침 그 때 영농자금을 융자해 주길래 타다가 집부터 지어버렸어요.

집을 근사하게 지어놨는데 그게 전부 빚덩어리가 된 거라.

축사도 만들고 돼지도 넣고 그랬는데 돼지 파동이 80년 초에 일어나서

완전히 돼지 값이 없어지니까 꼼짝 못하게 된 거에요. 굶게 된 거에요.

그래서 주는대로 먹어야지 하고 있었어요.

그 때 헌금도 한 주일에 5~600원 밖에 안나오니까 전구 깨어지면

그거 하나 사서 갈면은 남는게 없어요.

성미라고 걷어서 가만 보니까 저녁 끼니를 못 먹는 사람이 있어요.

목사가 그것을 알고 나혼자 밥 해 먹을 수 없으니까 
도로 갖다 줬습니다.

이거 밥 해 먹으라고.

그 때 제가 깨달았어요.

아! 교회 공동체에서는 제일 가난한 사람은 목사가 되어야 하는구나

두 끼 먹는 사람이 있다면 목사는 한 끼 먹어야 족하고...

한 끼 먹는 사람이 있다면 목사는 굶어 죽어야 되겠다...

내가 굶어 죽으면 하나님께서 배불리 먹여 주시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생활하면서 1 년쯤 지났는데 부활절 날인가...

성미가 많이 걷혔어요. 또, 다들 보니까 끼니는 있어요.

내일은 내가 한 번 세 끼를 해 먹어야 겠다.

딱 한 번만 세 끼 해먹어야 되겠다 생각해서 새벽기도 마치고

쌀을 한 홉씩되고 있는데 갑자기 왠 사람이 찾아왔어요.

문을 여니까 모르는 남자가 서 있습니다.

누구시냐고,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니깐 우리 교회에서 30리 떨어진

다른 면에 사는 교회 목사님이에요. 어떻게 오셨냐 했더니

목사님 제가 미안한 부탁 드리러 왔다 그래요.

무슨 부탁이냐고, 하시라고 그랬더니

"쌀 좀 얻을까 하고 왔습니다" 그래요.

그 때 깨달았어요.

하나님께서 갑자기 웬 쌀을 이렇게 몇 되씩 주나 했더니

이건 날 먹으라는게 아니고 누구 줄 사람있으니까 잠시 맡으라는 거구나

생각해서 이유나 물어보고 뺏겨야 되겠다 싶어 왜 그럽니까? 하고

물었지요.

그분이 애가 셋이에요. 사모님 하고 다섯 식구 사는데 그 마을에서 한 달에 사비를 2만원씩 받기로 하고 왔답니다. 제가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야, 그거 많이 받네, 그런데 뭐하러 얻으러 왔나' 했더니 하는 말이

이 곳에 온지 1년쯤 되었는데 한 석달째 사비가 교회서 나오지를 못하고

할 수 없이 사모님이 하루에 일당 2,500 원씩 받고 받일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허리를 다쳐서 며칠 일하러 못나가니까 혼자라면 굶겠는데

조그만 애들이 자꾸 배고프다고 그래서 오늘 새벽기도 마치고 기도하면서 무작정 걷다가 제일 먼저 만나는 교회 들어가서 그 교회 목사님 한테

쌀 꾸어 오겠다고 기도하고 왔다는 거에요.

응답 받고 온 사람인데 쌀을 안 줄 수가 없는거지요.

그래서 그 응답 잘 받고 왔수다. 하나님께서 그 응답 주실려고 어제 주일날 쌀을 많이 모아 주신 모양이라 그러면서 당신은 다섯 식구고 나는 혼자니까 당신 거라고 그러면서 쌀을 줬습니다.

가는데 보니까 그 목사님이 다리를 절뚝절뚝 절어요.

다리를 왜 저느냐 했더니, 그 분이 군대 있던 사람인데 지뢰를 밟아서

다리가 잘려서 의족을 했어요.

그 때 마침 어떤 분이 제게 자전거를 하나 보내 왔어요.

새 자전거라 비닐도 아직 안 뜯은건데.

딱 한 번 타보고는 아까워서 천천히 타야되겠다고 놔둔건데.

그 30리씩 절뚝거리면서 걸어갈걸 생각하니까 마음이 안되어서 속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저 분이 자전거 탈줄 안다 그러면 주고 안 그러면 안 주고 그래야 겠다'

하고 물어봤더니 탈줄 안다고 그래요.

그럼 뭐 할 수 없다고 가져가라고...

속으로 그랬지요.

다리 절뚝 거리면서 자전거타는거 보다는 다리 절뚝 거리지 않고

걸어다니는게 더 복이 아니겠는가 하고...

"목사님, 또 필요하면 오십시오. 제가 맡았다가 주겠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몇 달 있다가 두 번 더 왔어요.

그 때마다 묘하게 쌀이 생기고 분식이 생겨서, 그것만 생기면

'아! 손님이 오겠구나'

하고 기다렸습니다.

한 번은 웬 스님이 찾아왔어요.

교회 스님이 머리 빡빡 깍고 장삼을 입고 오니까 그 좀 이상해요.

그래서 어떻게 왔냐고 문을 여니까 그 분이 하는 말이


- 여기 스님같은 목사님이 계셔서 찾아왔다 그래요.

- 예? 하고 물었더니

- 스님같은 목사님 계신다는 거에요.


그 말이 좀 고약합디다. 그래도 어떡합니까... 들어오라고.

하는 말이

- 예수와 석가모니는 형제 지간인데 석가가 예수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목사님 하고 나 하고 나이 따지지 말고 내가 형님하겠소. 동생하시오.

그럼 그렇게 하자고, 그렇게 하자는데 그럼 뭐라 그럽니까...

그러더니 앉아요. 눈이 부리부리하고 사람이 좀 무습게 생겼어요.

나는 바짝 말라가지고 압도 되었지요.

앉아서 불경에 대해 이야기를 하더니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저는 조용히 듣고 있었지요.

교회 와서 이 사람이 설법을 하는 거지요.

한참 얘기를 듣는데 가만 들어보니까 내가 언제 읽었던

고대 인도 경전에 나오는 말을 이 사람이 인용을 하는거 같은데

조금 내용이 다른거 같애요. 그래서 제가 형님 하나 질문해도 되겠냐고

- 뭐냐고

- 내가 볼 때는 그 인용하신 부분이 인도 경전에 마지막 부분인데

왜 첫번째 부분으로 인용하시는지 혹시 잘못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갑자기 그 사람 눈이 동그래지며 날 이렇게 보더니

- 아니 목사님도 스님 하셨소?

- 그런게 아니고 좀 읽어봤다고

그런저런 이야기 하다가 이제 배가 고픈 모양이에요.

아침 8시쯤 온 사람인데 그 때가 오후 3시쯤 되었으니까.. 하는 말이

- 아니 왜 밥 안주냐 그래요 손님 왔는데

- 오늘 혹시 있을지 없을지 몰라도 아마 식사가 되면 4시30분 되면 합니다. 그 때 한번 있는데 그 때까지 형님 계시면 제가 드리고 바쁘시다면 그냥 가셔도 말리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갈줄 알았더니 하는 말이

- 먹고 가야 되겠다는 거에요.

그래서 앉아 있었지요.

그 때 마침 또 손님 오셨다고 그 할머니가 밥을 해서 갖고 왔어요.

조그마한 소반에다가 밥 한 그릇, 김치 하나, 물 한그릇,

숟갈 하나, 젓가락 하나 이렇게 딱 들어오니까 스님이

- 내 밥 어디있소? 그래요.

그래서 제가 숟갈을 들고는 밥 그릇에다 반을 이렇게 그어 놓고

- 위는 형님 잡숫고 아래는 제가 먹겠소. 그러니까

숟갈로 잡숫겠소, 젓가락으로 잡숫겠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밥상을 옆에 놓고

저 한테 큰 절을 하면서

- 형님! 그런다 말이에요.

아니, 동생이 갑자기 형님 되는 법이 어디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분이 하는 말이

- 아, 제가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그래서 스님 동생이 갑자기 생겨버렸어요.

나는 또 밥상 보고 은혜 받는 사람 처음 봤습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 얘기 안하는 거에요.

형님 얘기 해주시오. 그래서

그 양반 하고 단 둘이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참 기가막힌 일이 생겼지요. 나는 좀 불편스럽지요.

이 친구 있으니까 밥을 반 그릇 뺏기니까 밥 먹을 때는 갔으면

좋겠는데 기어이 있는 거에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 형님! 왜 이렇게 사십니까? 그래요

- 뭐가? 그러니까

자기는 중이래도 고기도 먹고,갈비도 먹고 다 먹는데

왜, 이렇게 먹느냐 말이지요. 거꾸로 된거 같단 말이지요.

- 자네 어떻게 불자가 살생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

물었더니 하는 말이

- 나는 해탈을 했기 때문에. 아무거나 먹어도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 참 해탈도 괜찮은 해탈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한 6개월을 들락날락 했어요.

어떤 때는 일주일에 매일 오기도 하고 두세 번 오기도 하더니

한번은, 여기 가난한 집에 와서 없는거 자꾸 얻어 먹는게 미안하니까

- 제가 한턱 내겠소.

그러면서 자기 절로 오라고 그래요.

한 30리 떨어졌는데 거기 갈려면 허기가 져서 난 못가겠어요.

그래서 못가겠다고 그랬지요.

그랬더니 자동차를 보내 드릴께 오시라고 그래요.

- 중이 무슨 차가 있냐고?

- 중은 있을건 다 있다고 그래요.

그 다음날 차를 보내와서 타고 갔더니

법당에 200여명 사람들이 꽉 모여 있어요. 꽤 큰 절인데.

그 사람이 가운데 마이크를 잡고 좌정하고 턱 앉았어요.

저 친구가 무슨 말 하려나 하고 뒤에 앉아서 들었더니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딱 첫 서두가 이렇게 나옵니다.

-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극락이 저희 것임이요.

그 주어가 하나 바꼈어요.

그렇지만 극락이나 천국이나 파라다이스는 같거든.

그 다음이 문제요.

-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부처님을 볼 것임이라.

어두가 바껴진거에요. 그것만 바뀌고는 한 시간 내내 강의한게

나하고 성경공부 했던 8복음 얘기를 한 거에요.

그 친구 그랬어요. 8복음 보더니

- 이거 이거 부처님 교훈이라는 거에요.

그러더니 그렇게 써 먹습디다.

그 가난한 속에서도 제가 한 끼 먹으면 이틀 굶고 또 한 끼 먹으면

사흘 굶고 이렇게 살았는데 그래도 하나님께서 죽이시지는 않습디다.

죽을 일은 없고 한 번 누웠다가 일어날려면 하늘이 새까매져요.

누웠다 일어나기는 힘들어서 앉아서 자야겠다 해서 앉아서 잤는데

앉아서 일어나는 건 쉬운데 누웠다 일어날려니까 아무것도 안보여요.

이거 정말 영양실조 걸려서 끝나는가 보다 하는 그런 때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천사가 홀연히 나타났습니다.

갑자기 그 마을에 군수가 나타났지요, 면장이 나타난 겁니다.

면장도 한번 안오는 마을인데 군수가 나타났으니 난리가 났지요.

그런데 군수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 도에서 제일 높은 분이 나타난겁니다. 여러분, 한 도에서 제일 높은 분이 누군지 압니까?

도지사지요, 아니 도지사보다 더 높은 사람. 그 사모님이에요.

아, 그런데 그 도지사 사모님이라는 분이 찾아왔다는 겁니다.

그럴리가 없다고 나는 도지사 이름도 모르는데 날 찾아올리가 없다고.

군수가 밖에서 목사님 나와 보라는 거에요.


그때 제가 꿈틀꿈틀 댔습니다. 한 20분 가량 안나갔어요.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얼마나 저 사람이 거창한 사람이기에

하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제가 양말이 하나 밖에 없었는데

그게 빵꾸가 나서 그걸 깁고 있었어요.


맨발로 나갈 수는 없고 그것 기워서 나갈려니까 군수가 자꾸 나오래요.

할 수 없이 맨발로 검정고무신 신고 나갔습니다.

그렇게 만났습니다. 그 천사를 누가 보냈는지 압니까?

여기있는 이 순구 목사님이 보냈어요. 12년 전에.


나는 이 친구 여기(미국) 왔는지도 몰랐는데 10년 만에 처음 만났지요.

미국에 오신지도 몰랐는데 제가 늘 마음으로 빚진 생활을 했습니다.

그 때 정말 영양실조 걸려서 그럴 땐데 
그 분을 만나서 그 분이 저를 자기 공관으로 초대를 했습니다.

갔더니 고기국인거 같애요. 무슨 국인지 몰라도 고기 덩어리가 하나

들어있고 국물이 아주 기름기가 꽉 찬데....그걸 한 숟가락 입에 넣는데

아! 여기가 천국이구나.. 생각했어요.


얼마나 맛있던지 한 사발 먹고 염치 없지만은 또 한 사발 더 먹을 수

있냐고 했더니 또 한 사발 줍디다. 어떻게 맛이 있던지.

두 사발 먹고 나니까 입이 탁 막혀요. 그제서야

우리 식구들 생각난거에요.

야 - 이거 나도 별 수 없구나.

배고프니까 식구(나환자들) 생각없이 혼자 먹었구나.. 해서

아이고, 나 더 이상 못먹겠다고.. 그랬더니 그걸 사모님이 아시고

- 목사님 그럴줄 알고 제가 떡을 두 말 해놨습니다.

갈 때 가져가세요.

내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외출하니까 이 사람들이 어떻게 기다린지 압니까? 몇 시간을 교회 앞에서 뭘 갖고 올까 싶어서 기다린 겁니다.

버스를 대절해 와서 전남도내 귀부인들은 다 대동하고 왔지요.

오자마자, 우리 가서 예배부터 드립시다 하고 다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겁 나서 안들어갈려고 그래요.

그래서 다 들어오라고 그러고 전도집회를 한겁니다.

내가 찾아가서 전도해야 될 판인데 제 발로 들어왔으니깐

모아놓고 두 시간가량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 후 제 방에 왔습니다.

방이 조그만 해서 다는 못오고 대표만 들어오시라고, 
제가 대접할 건 없고 냉수만 한 그릇씩 드리겠다고 
그렇게 하고 그 분이 갔습니다.

며칠 후에 그 사모님 한테 연락이 왔어요.

자기 공관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거에요. 그래서

- 목사는 밥 먹으로는 못가고 말씀 전하러 밖에는 외출 못합니다. 
했지요. 그러니까 공관에서 예배 드리면 될거 아니냐고 그래요.

그러면 가지요 하고 가서그 공관 생기고 처음으로 거기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큰 회의실인데 전에 우리 교회 찾아온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왔어요. 70명 가량의 부인들이 왔습디다.

거기 기독교인은 별로 없고 불교 믿는 분들이 많았는데 
예배 마치고 하는 말이

- 목사님 말씀 들으니까 그거 부처님 말씀 만큼 아주 재미있으니까

우리 이런거 자주 모입시다. 그래요.

- 나는 그렇게 못한다고 거기서 나오기도 
힘들고 해서 안된다고 그랬더니

- 그러지 말고 한 달에 한번씩이라도 하자고 그럽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떠날 때까지 
도지사 공관에서 성경공부가 시작된겁니다.

놀라운 역사가 그 때 시작된 거지요.


그런 때에 독일에서 절 지도하신 교수님 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자기가 2년 후에는 은퇴를 하게 된답니다.

자기 후임자를 찾아보니까 김요석목사 당신이 제일 적임자인거 같아

추천을 했는데 허락이 났으니까 금년 말까지 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거기 가면은 하루 세 끼 밥은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앉아서 자꾸 저울질 하게 되었어요.

회답 못하고 한 두달 쯤 지났는데 또 편지가 왔어요.

아무래도 한 일년 일찍 와야되겠다. 인수인계 할 것도 있고 그러니까

빨리 오라는 편지가 두 번째 왔습니다.

그 때 제가 해답 안할 수가 없어서 답장을 썼습니다.

- 교수님, 날 그렇게 생각해 주고 위해주는건 좋은데

제가 가만히 기도하면서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

내가 이 교회 남아서 시무하는 것하고 
독일에서 교수님 후임자로 교수하는 것하고

어느게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까 하고 기도하니까

그냥 이 자리에 남는 것이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리라

하는 것을 깨닫고 거절하겠습니다.

하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 다음해 봄 신학기 시작될 무렵, 그 교수님이 일본에 모임이 있어서

왔다가 저 한테 찾아왔어요. 자기 생각에 얼마나 좋은 자리에 앉았길래

그 자리도 마다하고 이렇게 뿌리치는가 하고 온거에요.

밤중에 왔다가 그 다음날 새벽에 떠나야 되는데 
- 여섯시에 서울로 올라가서 비행기 타고 독일로 가야 되는데 - 
그때 우리가 새벽 예배를 4시에 드렸는데 교수님이 오신 김에 
우리 교인들한테 설교나 해주고 가시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그렇게 하자고 그래요.

새벽 4시에, 전 통역할려고 옆에 섰고 교수님은 말씀 전하실려고 
강단에 섰는데 몇년 전, 제가 처음 그 교회 부임하고 첫 설교할 때 
맨 앞에 앉았던 얼굴에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입술도 없이 구멍만 
다섯개가 남은 그 노인이 제일 앞에 딱 앉아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 교수가 보더니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껌벅껌벅 하고는 한 십분간 가만히 서 있어요.

그래서 왜 이러시냐고 쿡쿡 찌르면서 시작하라고 했더니

응, 그러고도 가만히 얼마간 서 있다가 
자기도 정신없이 몇 마디 하고는 내려왔어요. 
새벽예배 마치고 제가 돌아설려는데 갑자기 제 허리를 꽉

끌어안으면서 눈물이 글썽글썽 해 가지고 저 한테 이렇게 말합니다.

- 당신은 내 제자지만, 난 당신을 존경합니다.

여러분, 이 이상 영광이 어디 있습니까?

날 지도한 교수가 날 존경한다 했으니 
그 이상 더 큰 칭찬이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그 교수님이 떠나갔습니다.

이 양반이 독일 가서 소문을 어떻게 터뜨렸냐 하면


- 아, 저 김요석은 매일 하나님 손 잡고 목회하더라.

이렇게 된거에요.

그리고 한달쯤 뒤에 동기생인 독일 친구한테서 편지가 왔습니다.

같이 신학을 공부한 친군데 공부를 아주 잘했던 친굽니다.

이 친구가 목사가 되어서 목회를 하러 갔는데 오천명 모이는 교회인데

한 일년 반 정도 지났더니 삼백 명 밖에 교인이 남지 않았어요.

그래서 왜그랬는가 하고 나중에서 물었더니

이 친구가 설교를 하면서

- 나는 이 성경을 믿지 않지만 여러분들은 알아서 들으시오

하고 설교를 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알아서 안나오게 된거지요.

그러니 이 친구가 고민이 생긴겁니다.

자기는 학문적으로 문법적으로 정확히 논문을 써서 발표를 하는데

그게 안되거든요. 고민을 하다가 내가 이럴거 없이 고증학 교수나 하던가

이 목사직은 그만 둬야겠다고 하던 찰나인데 ..

소문에 자기 동창이 한국에서 매일 하나님 손 잡고 목회한다니까

나 한테 편지를 보내왔어요.

- 내가 들으니까 자네는 매일 하나님 손 잡고 목회 한다던데

나도 만약 가서 하나님 손 한번만 잡을 수 있다든가,

하나님 얼굴만 한번 볼 수 있다면

내가 절대적으로 성경 말씀 믿고 믿는 설교를 좀 할 테니까

나를 자네 부목사로 청빙할 수 있겠는가?

갑자기 부목사가 한 사람 생기게 되었습니다.

제가 답장을 썼지요.

- 야, 그 대우는 담임목사나 부목사나 똑같이 해 주겠다.

내가 먹는 만큼 너도 먹고, 똑 같이 할 테니까 그 외에는

서로 이의 달지 말자. 그러니까 그럴려면 오너라.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식사 량이 적어서 조금씩 밖에 못 먹으니까

괜찮겠는가.

그 친구가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자기 몸 무게가 110kg 이 넘는답니다. 그러니까 다이어트도 해야되는데

오히려 잘 되었다고 적게 먹으면 좋은 거라고 그러면서 온겁니다.

보니까 보따리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한 가방은 전부 구두만 있고 한 가방은 전부 양복만 있어요.

구두는 왜 이렇게 많이 가져왔느냐? 1년이면 하나 갖고 충분한데 했더니

뭐 옷에 맞춰서 구두를 신어야 된다나...그러고 들고 온겁니다.

나중에 하나도 못 신고 다 나눠졌지만..

사람들이 부목사 왔다고 환영할거 아닙니까?

오후에 왔으니 사람들 다 모여 있었지요.

그 친구가 사람들을 이렇게 둘러 보더니 하는 말이

- 야 이사람들 좀 이상하다.

- 뭐가?

제가 그러니까, 말은 못하고 우물우물 하다가

- 병신같다. 그래요.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독일 격언에 그런 말이 있지 않느냐.

병신 눈엔 병신만 보이고 천사 눈엔 천사만 보인다.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는 다신 아무 말도 안해요.

자기도 천사는 되고 싶었던 모양이지요.

첫 부임했으니까 이번주 설교해라 했더니 하는 말이

내가 독일서도 설교 못했는데 여기서 어떻게 할 수 있겠냐고,

그러니까 우선 하나님과 악수를 좀 하게 하든가

하나님 얼굴과 대면하게 해주기 전에는 설교 못한다는 거에요.

그럴려면 우리 성경공부 하자.

새벽기도 전에 2시쯤 일어나서 둘이서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이 친구는 히브리어성경, 헬라어성경, 라틴어성경 세 권만 들고 왔어요.

히브리어 성경부터 꺼내더니

- 이거봐 이거 문법적으로 틀리지 않았느냐?

문장 자체가 틀렸다는 거지요. 이렇게 따지고 들어가니까 성경공부가 됩니까

그래서, 아직 안되겠다 때가 안되었으니까 휴강하자고 그랬습니다.

그러고 한 이틀쯤 지나가도 밥이고 뭐고 아무것도 안 들어오니까

다이어트 하는 것도 좋지만 한 끼도 안먹으니까 죽겠거든요. 그 큰 덩치가..

왜, 밥 안주냐? 그러길래 자네 다이어트 한다고 그래서 한 일주일은 굶고

그 다음부터 조금씩 먹는거라고 그랬더니

자기는 살 안빼도 좋으니까 좀 먹게 해달라는 거에요.

배가 너무 고프다는 거에요.

그러면 새벽 2시쯤 일어나서 밖에 나가면 큰 빵을 하나씩 줄테니까

나눠먹자고 했더니 좋다고 그래요. 새벽 2시만 기다린 거지요.

새벽에 나가니까 마침 별이 하늘에 총총 빛이 나고 있어요.

- 입을 크게 벌려라. 하늘에서 별빵이 내려온다. 들이켜라.

- 너는 매일 저것만 먹느냐?

- 그렇다. 그러면 배가 부르다.

자기는 입을 크게 벌려도 배가 더 고프다는 거에요.

그렇게 굶기를 밥 먹듯 하면서 몇 달이 지났는데

좀 좋은 일이 생겼는지 어느 날 쌀이 많이 들어왔어요.

그러니까 이 친구가 하는 말이 한 끼 먹더라도 실컷 먹자고 그래요.

- 야, 매일 조금 먹다가 갑자기 많이 먹으면 탈 나니까 안된다. 그랬더니

- 탈 나는건 둘째치고 배불러 봐야 되겠다는 거에요.

그러더니 밥을 한양푼 이나 많이 해갔고는 거기다 김치 넣어서 비벼 먹는 거에요.

처음에는 김치 못먹겠다고 밥만 먹던 친구가 말입니다.

쫄아진 배에다가 갑자기 많이 들어가고 거기다 김치까지 섞어 먹었으니

배가 이상할거 아닙니까. 급한 설사를 만났지요.

변소를 가는데 급하지요.

그런데, 우리 변소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은 구덩이를 깊이 파고

나무 판대기를 두개 걸쳐 놓았어요. 그래서, 몸무게가 60kg 이내 같으면

별 요동이 없는데 그 이상 되면은 판대기가 흔들흔들 해집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 60kg 이상이 없었으니까 항상 안전했는데

이 친구 110kg 짜리가 들어가니까 흔들흔들 했지요.

전에는 조심스럽게 앉아서 일 보니까 괜찮았는데 이번에는 너무 급하니까

팍 주저앉아 버린거에요. 그러니까 나무 판대기가 뚝 부러진 겁니다.

변소 깊이가 한 4m 되는데 이 친구 키가 아무리 크도 ....

다행히 딱 걸려서 쑥 들어가지는 않고 목까지 꽉 찼어요.

갑자기 변소 안에서 소리가 요란하게 나요.

저 친구 교회에서는 은혜 못받더니 변소 가서 은혜 받았나 왠 저렇게 찬송을

부르나 하고 안가고 있었더니 지나가는 아이들이 보고는 저 한테 뛰어왔어요.

- 목사님, 저기 코 큰 목사가 똥통에 빠졌어요.

가봤더니 턱 걸쳐 있어요. 그런데 110kg 짜리를 제가 어떻게 들어냅니까?

- 조금 기다려라. 사람들 모아서 오겠다고

그러고 한 30분이 지났어요.

그러니 30분 동안을 똥통에서 온 몸이 저려진 거지요.

끌어내서 샘물 퍼가지고 씻어내는데

서양 사람들은 몸에 털이 많아서 노란 액체들이 붙어서 잘 안떨어져요.

빨래비누로 해도 냄새는 그대로 나는 거지요.

- 야, 안되겠다. 했더니

자기가 좋은 수가있다고 그래요. 들어가더니 향수를 가져왔어요.

그걸 막 뿌려대는데 그 냄새에다 향수 뿌리니까 더 안되겠어요.

새벽 예배 때 이 친구 나가니까 냄새 난다고 교인들이 다 도망가는 거에요.

- 자, 봐라. 이 교회 안에서 병신이 누구냐.

제일 더러운 냄새는 네가 피우고 있지 않느냐.

그 다음날 밤이 되었는데 그 친구가

- 아이고 성령불이 내 몸에 내렸는가 보다 그래요.

몸이 뜨겁고 이상하다고 그래요. 방도 찬데.

- 야 그럴리가 있냐, 어떻게 성령불이 네 몸에만 임하냐 나는 괜찮은데...

옷을 벗겨 보니까 몸에 뭐가 두들두들 났어요. 그게 뭔지 아세요?

똥독이라는 거에요.

이 사람, 자기는 성령불인줄 알고 있다가 아무래도 그거는 아닌거 같다고..

몸이 괴로우니까 갑자기 머리를 내밀면서 안수기도를 해달라는 거에요.

그 마을에서 아이들이 아프면 약도 없고 병원도 없으니까 사탕을 하나

입에 넣어주고 기도해 줍니다. 그러면 열도 내리고 그랬어요.

그래서 기도하면 다 된다고 그랬더니 이 친구가 그 동안 뭐라 그랬는지 압니까?

- 야, 미신적인 짓 하지 말라고, 병이 났으면 약을 먹여야지, 사탕 먹여서

되느냐? 병원에 데리고 가야지 그러면되느냐?

하면서 늘 비방하던 친군데 자기가 급하니까 기도해 달라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 이 사람아!

병 낫는 거는 자기 믿음으로 낫는 거야. 예수님께서도 자기가 고쳤다고

말씀 안하셨어. "네 믿음이 너를 구했으니" 하셨지 않느냐. 그러니

너 믿음 없으면 안된다.

- 야, 다음에 믿으면 되지 않겠냐, 앞으로 믿을 테니까 기도 해달라.

- 그래도 안되겠다구.

그렇게 똥통에 빠지고 나더니 이 친구가 사람이 달라졌어요.

그런데도 뭔가 확실치는 않아요.

하나님 말씀 믿어야 되겠네 하면서도 딱 걸리는게 성령입니다.

성령은 없다는 거에요. 하나님 o.k , 예수 그리스도도 좋은데.

성령은 좀 곤란하다는 거지요.

-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뭐. 못 믿겠다는거.

그리고 얼마 지나서 이 사람과 월출산에 산책을 갔습니다.

몇 시간 걸어가면 되니까.

그 날도 같이 가는데 이웃 마을 청년이 오토바이를 타고 왔어요.

그걸 보고 이 친구가 꾀가 났어요.

내 저거 타고 먼저 가 있을테니까 넌 천천히 오너라 그래요.

제가 그랬습니다.

우리나라 민요에 정든님 버리고 가면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그랬으니까

그냥 나랑 같이가자 그랬더니 괜찮다면서 타고 갔어요.

제가 두 시간쯤 뒤에 도착했더니 냇가가 있는데 오토바이가 다리 옆에

넘어져 있고 운전하던 사람은 넘어져서 이마가 찢어져서 일어나고 있고

이 사람이 보이지 않아요. 고함을 지르면서 이름을 불렀더니

다행히 다리 밑 물 속에 떨어졌어요.

마침 물이 있어서 다치지는 않고 옷만 버리고 미안한 듯이 일어나요.

- 괜찮아? 목 안 부러졌어. 다리 안 부러졌어.

- 괜찮다.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몇 미터 높이에서 뚝 떨어졌으니 굉장한 타박상을

입은 거에요. 밤에 자는데 얼마나 아픕니까.

그게 표시 없이아프거든요. 실컷 얻어 맞은 것처럼.

- 야, 나 진짜 믿을테니까. 기도 해달라. 아파 죽겠다.

- 야, 믿음 없이는 안된다.

마침, 우리 마을에 타박상에 먹는 좋은 민속 약이 하나 있는데

그거 먹을려면 먹으라. 그런데 냄새가 좀 고약하다.

여러분, 그게 뭔지 아십니까? "똥물" 입니다.

변소를 만들 때 구덩이를 깊이 파고는 삼베로 덮은 항아리를 변소 깊숙히

내려 놓습니다. 그러면 몇 년 동안 쌓이면 덩어리는 안들어가고 노오란

엑기스만 빨려들어갑니다. 그게 가득 찰 때 쯤 되면 끌어내서는

사이다 병에다 나눠 담아요. 그걸 집집마다 매달아 놓았다가 급할 때

사용하는데 그걸 누가 두 병을 가지고 온게 있었어요.

이거라고 주니까.

당장 뜯더니 한 병을 꿀꺽꿀꺽 마셔요.

다 먹더니 이 친구는 또 장이 긴지. 한 병 더 먹어야 되겠답니다.

그래서 두 병을 마시고 나니, 그게 얼마나 독합니까?

이 사람이 쓰러져서 곯아 떨어져 자는 거에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몇 시간을 자더니.

일어나서는 깨끗하다는 거에요. 안 아프다는 거에요.

그럼 됐다고. 그런데 그 냄새는 고약합디다.

입만 벌리면 그 친구 입에서 냄새가 나요.

나중에 이 친구가 독일돌아가서 목회를 하는데 자기 교회 대학생

하나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넘어졌답니다.

일주일 동안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아무리 주사를 놓아도 낫지 않더래요.

그래서 나한테 편지하기를 그 약좀 보내줄 수 있겠느냐고...

허허~ 아주 특별 약을 수출까지 할 뻔 했습니다.

자, 똥통에 빠져도 이 사람이 안되요.

똥물 까지 먹고 속까지 다 씻어내고 나니까 사람이 달라집디다.

여러분, 똥통에 빠진 걸로 끝내야지.

똥물 까지 뱃속에다 채웠다가 끌어내서야 되겠어요.

이 친구가 그러고 나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성령도 인정하게 되고 사람이 확 달라졌습니다.

설교를 하는데 근본이 달라진 겁니다.

성경을 공부하는데 야! 이 구절, 이런 구절이 언제 있었지?

아, 이거 처음 보는데.... 모든 것이 새로와 지는 겁니다.

완전히 사람이 달라졌어요.

그러고 있는 그 때입니다.

그 때 무슨 문제가 있었느냐 하면은 애들 유치원 딴데 못가니까

유치원도 지어야하고 중고등학생들도 불어나니까 교육관 같이 집을 짓고

싶은데 돈이 없는 겁니다.

저는 집 짓는 일 그만하자.

그냥 있는대로 하고 안되면 땅 바닥에서 하지 못 짓겠다 하니까.

전체 공동회의로 모여서 그럽니다.

- 아니 목사님, 지난 주에 설교 했지 않습니까?

모세가 기도하니까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메추리 고기가 내려왔는데

우리는 하나님 보고 기도할 때 만나나 메추리 고기 말고

시멘트 하고 벽돌, 철근 좀 내려달라 그러고 지으면 안되겠습니까?

그래 기도하면 되겠다. 그러면 기도하라 했더니 철야기도 합니다.

- 하나님, 철근 내려주시오. 벽돌 내려주시오.

하고 기도 끝나면 하늘 쳐다보고 갑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아무 것도 안 내려오거든요.

어느 날, 할머니 한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손수건에 뭘 꼼지꼼지 묶어서 가져왔는데 뭐냐고 뜯어 보니까

돈이 삼만 팔천원 들었어요. 아이고, 이 큰 돈이 왠 일이냐 했더니

사실은 제가 죽을 때 쓸 관 값입니다 그래요.

그 사람들은 죽을 때 관에다 묻혀 죽는 걸 괜찮은 걸로 압니다.

그래서 꼭 그 관 값을 일생동안 모아 뒀다가 죽을 때 유언하면서

관 하나 사서 넣어주시오. 그럽니다.

관 살려면 몇 년 더 모아야 겠지만 이걸로 우리 짓는데 보태 씁시다 하고

내어놓은 거에요.

제가 할머니 죽을 때 관은 누가 해주고 하고 물었더니

- 제가 그걸 몰랐습니다. 죽으면 예수님께서 다 책임져 주시는데

내가 무슨 관이 필요가 있겠느냐.. 이걸 깨달았습니다.

내가 참 믿음이 없는 사람이요. 그럽니다.

관 값이 들어오니까 공사를 시작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충 설계하고 기초공사부터 하자 하고 제가 건축감독을 맡았습니다.

먼저 구덩이를 이 만큼 팠어요.

바로 그런 찰나에 도지사께서 오셨어요.

예고없이 들이닥친 겁니다.

보니까 구덩이를 파 놓고 집 짓는 것처럼 해놓은 거에요.

- 목사님! 여기 뭐 할려고 이럽니까?

- 사실은 여기 교육관 지을려고 그럽니다. 애들 유치원도 마들고 그럴려구요.

- 건축자재는 어디 있습니까?

- 없지만, 하늘에서 내려오나 하고 지금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 분이 안 믿는 분이었어요. 그 날은 그렇게 갔어요.

그 다음날 도지사 사모님 한테 연락이 왔어요.

- 목사님, 어제 지사님 가셔서 안좋은 일 있었습니까?

- 아니, 모르겠는데요.

- 거기 갔다오더니 잠을 잘 못자요.

- 글쎄요.

- 거기 지금 뭘 하고 있습니까?

- 집 지을려고 그러고 있습니다.

- 그러면 돈 있습니까?

- 돈은 없고 지금 하늘에서 철근하고 벽돌 내려오라고 기도 중입니다.

그때사 웃어요. 그리고 며칠 지났는데

도지사님 하고 비서실장하고 군수하고 총무국장하고 네 사람이 찾아왔어요.

이 만한 상자를 하나 들고 왔더라고.. 앞에 내 놓길래 이게 뭡니까?

하고 보니까 돈이 가득 들었어요. 만원짜리가.

- 아니, 이거 뭡니까?

- 집 짓는데 보태 쓰라고 가져왔습니다.

제가 도로 내 밀었습니다.

- 이거 못 받습니다.

교회는 우리 믿는 성도들의 기도와 땀으로 건축하는 겁니다.

하나님 역사로 건축하는 거지. 이런 걸로는 못 짓습니다.

여러분, 바로 그렇습니다. 교회 역사는 우리 성도들의 기도와 땀,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간구로서 역사되는 겁니다.

세상의 어떤 권세나 세상의 물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도지사님이 뭐라고 그러는지 압니까?

- 아, 나도 믿으면 될거 아니냐고, 이거 헌금이라고 헌금이니까 받으세요.

그럽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장로님들이 당장 급하니까 이거 헌금이라니까 받읍시다 그래요.

그렇게 해서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목수를 불렀지요. 물건 샀지요. 짓기를 시작했는데 반을 짓고 나니까 돈이

다 떨어진 겁니다. 목수가 와서 하는 말이

- 목사님, 내일 물건 안들어 오면요. 더 이상 못 지어요.

- 그래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오늘이래도 뭐가 오겠지요. 기다려 봅시다.

내일은 내일이고, 오늘은 그만 끝내시오.

바로 그날 저녁 때입니다. 두 사람이 미국서 찾아왔어요.

나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제가 독일에서 올 때, 3년 전이었지요.

러가프 대학이라고 뉴저지에 있는 의과대학이 있습니다.

그 대학에 가서 채플 시간에 설교를 하고 떠나왔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떠난 3년 동안을 그 학생들이 헌금을 했어요.

학생 대표가 그 헌금을 가지고 온겁니다. 그 마을 까지...

여러분, 어떤 역사이건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고 계셨다는 겁니다.

이제 부목사로 왔던 그 독일 친구가 떠날 때가 되어서 마지막 떠나는 밤에

둘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데 이 친구가 이렇게 물어요.

- 아무리 내가 은혜받고 성령 받아도 걱정되는게 하나 있다.

설교를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교인들에게 은혜를 주겠는가?

가만 보니까 자네는 설교만 하면 사람들이 아멘, 아멘 하는데

나는 일년 내내 해봤자 아멘 소리 한 번도 못들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래서 제가 그 친구 손을 잡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 이 사람아, 설교는 입으로 하는게 아니네. 말로 하는게 아니야.

자네가 월요일부터 토요일 까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고

하나님 뜻대로 일주일을 살면은 주일날 강단에 올라가서 아무 말 안하고

한 시간을 서 있어도 온 교인은 은혜 받는다.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는 문자로 그냥 붙어있는 정지된 상태가 아닙니다.

우리 몸과 팔과 다리로 움직이는 역사입니다. 우리가 온 몸으로 행하고

손으로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고 이 친구가 독일로 돌아갔습니다. 놀라운 역사가 벌어졌어요.

삼백명 밖에 안남았던 교인이 만명으로 늘어난 겁니다. 일 년 반 사이에.

이 친구가 너무 기뻐서 역시, 엘리야의 이적은 아직도 있는 모양이라고 그래요.

자기 교회 300주년 기념행사로 한 주간을 비블목회라는 성경사경회 비슷한 것을

하는데 와서 해 달라는 초청장이 왔어요.

그러면서 편지 맨 끝에 뭐라고 썼는지 압니까?

- 나는 당신의 영원한 부목사 -

허허~ 그러니 이 친구 아직도 제 부목사인 셈입니다.

몇 달 뒤 그 행사 즈음에 제가 독일로 갔습니다.

강단에 올라갈려고 그러는데 교인이 굉장히 많아요. 꽤 큰 교회니까.

갑자기 이 친구가 서더니 제 손을 딱 쥐고 하는 말이 다른 이야기는

다 해도 좋은데 자기가 똥통에 빠진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거에요.

전 다 잊고 있었는데 이 친구가 일깨워 주니까 아예 첫 날,

그 이야기를 다 해 버렸지요.

앉아 있었던 분 중에서 신문사 편집국장 한던 분이 있었는데

다음날 신문에 '똥통에서 만난 성령예수' 라고 칼럼이 나왔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참 하나님의 은혜는 놀랍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부정하고

또, 부정하던 사람도 그렇게 변화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삶을 살면 살수록 특이한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이제 전에 왔던 스님친구 이야기로 다시 돌아옵니다.

이 친구가 한번은 오더니 하는 말이

- 형님, 제가 인도에서 공부하다가 티벳으로 넘어올 때 티벳에서 어떤 고승을

만났는데 아주 많이 수양된 스님인데 그 분이 아주 괜찮습디다.

생불(살아있는 부처) 같습니다.

형님하고 대화하면 맞을 테니까 언제 티벳 가면은 그 분을 만나보세요.

그 이야기 할 때는 잊어버렸지요.

그런데, 중국에 문둥병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기록을 보니까 다른 나라는 공개 되었지만 거기는 폐쇄되었기 때문에

어쩌면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걸 읽고 나니까 내가 여기 가까이 있으니까 중국을 한번 가봐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90 최성식 (기쁨가득)

[간증] 김요석선교사 -6편(홍콩으로....)- 05/27 08:57 306 line

내가 여기 가까이 살면서 중국을 한번 가봐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거기 갈려면 비행기 표도 준비해야지요.

준비할 게 많은데......

그때는 80년대 초라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기 전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무조건 가겠습니다.

비자를 받으려면 홍콩 가서 비자를 받아야 되는데..

홍콩까지 가게 되면 하나님 뜻인지 알고 가겠습니다.

전 아무것도 없습니다......

늘 갖고 다니는 노트 몇 권, 성경책 몇 권, 가방 하나 들고

서울로 떠나기 위해서 광주역으로 갔습니다.

광주역에 도착해서 보니까 주머니에 서울 갈 여비가 없어요.

생각도 못하고 나온 거지요.

저녁이라 밤차 타고 올라가야 되는데 마음으로는 '내일 모레 떠난다' 생각하고

내일은 주일이니까 서울에 있는 후배 목사님 교회 가서 자고

모레 가면 되겠다 생각하고 광주역 광장에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 분이 지나가더니 절 보고는

- 아! 목사님 아니세요. 어디 가십니까?

- 예, 서울 갑니다.

자기가 차표를 사주겠다고 그래요. 그래서 차표를 끊었습니다.

밤차 타고 새벽 여섯 시에 서울역에 도착했습니다.

서울역 광장에서도 가만히 서 있었어요.

또 웬 분이 지나가더니 절 보고는

- 목사님, 여기 뭐하러 왔습니까?

- 네, 지금 중국 갈려고 왔습니다.

- 아, 그럼 비행기 예약했습니까?

- 아직 안했습니다.

- 아, 그럼 티켓 샀습니까?

- 아직 안샀습니다.

절 가만히 쳐다봐요.

- 그럼, 언제 갈렵니까?

- 내일 갈겁니다.

- 그러면 오늘 밤 어디서 묵을 예정입니까?

- 아무개 교회서 묵을 예정입니다.

그리곤 헤어졌어요.

후배 목사님 교회를 찾아가서 주일 저녁예배와 다음날 새벽예배를 인도하고

공항으로 나갈려는데 어제 서울역에서 만났던 그 사람이 새벽에 절 찾아 왔어요.

- 목사님 내가 돈이 없어서 왕복표는 못 끊고 가는 편도만 끊었습니다.

이거 갖고 다녀오십시오.

- 그래요. 그럼 가지요.

그렇게 해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 도착해서 수속 다 밟고 나니까 수속 받는 아가씨가 공항세를 내라 그래요.

한국은 아직도 있나 몰라요. 최근에는 안가봐서 모르는데..

돈이 없어서 없다고 그랬지요.

주머니 아무리 뒤져봐도 동전 두개, 딱 200원 남아 있는데

이거면 되겠냐고 했더니 안된데요. 오천원이래요.

그래도 없는걸 뭐..

그 때는 여행 많이 안갈 때입니다.

- 외국 여행 가는 분이 공항세도 없어요?

- 하여튼 없다고..

그 아가씨가 가만히 있더니

- 아이구, 내가 내 드릴께 다음 번에는 갖고 다니세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 공항 생기고

공항세 안내고 나가는 사람 처음 봤대요.

비행기를 탔습니다.

저는 버스처럼 생각을 한거에요. 버스는 타면 빈 자리에 가서 앉잖아요.

제일 앞 좌석 보니까 넓은데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뒤에는 와글와글 한데..

그래서 앞에 가서 앉았지요.

아, 그랬더니 스튜어디스가 옷도 벗겨주고, 가방도 올려주고 아주 친절해요.

가운데 자리에 턱 앉아 있었더니 아무도 안타요. 그 이상하다....

여기 빈 자리 있는데 왜 자꾸 뒤로 가나...? 궁금해 하고 있는데

웬 사람이 탔는데 제 옆에 않아요. 신사분인데..

날 보더니 옆 자리가 비어 있어야 되는데 아마 내가 있었던 모양이지요.

좀 불편하지만은 어쩝니까.

자기 자리는 거기니깐 둘이 그냥 앉았습니다.

그 칸에 둘만 탔지요.

제가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 선생님, 혹시 예수 믿습니까?

날 이렇게 보더니

- 아, 돈 벌기도 바쁜데 예수님이 뭐요.

그러고는 자기 서류를 꺼내더니 체크하면서 보고 있어요.

내가 민망해서 가만히 있었지요. 비행기가 떠서 한 삼십 분이 지났습니다.

- 선생님, 제가 딱 하나만 더 물어보고 관두겠습니다.

- 뭐요?

- 이 비행기가 갑자기 폭발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살 방법이 있습니까?

이 사람이 갑자기 불안했던 모양이에요.

스튜어디스를 불러요.

아가씨 이리 좀 오라고..

- 이 비행기 안전한가?

- 예. 기술적으로는 다 안전한데 그 다음은 저도 모릅니다.

그 아가씨 대답한번 명쾌하게 합디다.

그러니 이 사람이 서류보다가 딱 놓고는 가만히 있어요. 불안한지.

난 눈 감고 모른척 하고는 갔지요.

얼마 지나니까 그때서야 이 사람이 날 보고

- 아, 선생님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 물어보시라고, 뭐냐고.

- 선생님은 이 비행기가 폭발해도 살 어떤 방도가 있습니까?

- 물론이지요. 난 이게 폭발해도 살 방법이 있기 때문에

혹시 선생님은 모르고 계시나 해서 제가 물어본겁니다.

- 그럼 혹시 저한테 가르쳐 줄 수 있겠습니까?

- 물론 가르쳐 줄 수 있지만 그 서류부터 좀 치우시오.

그 서류는 다 집어 넣어요. 그러면 이야기 해줄테니.

그 사람이 서류를 다 집어 넣은 후에 제 가방에서 성경책을 꺼냈습니다.

- 그게 뭡니까?

-아. 이거 성경입니다.

- 난 뭐 특수 낙하산이라도 있는줄 알았는데...

- 이 안에 사는 방법이 다 있다고.. 낙하산이야 사람이 잘못 만들 수도 있는데

여긴 살 수 있는 틀림없는 방법이 있기 때문에 알려 주려고 그러는데..

듣기 싫음 말라고..

- 아, 아니에요. 말씀해 보세요.

그렇게 해서 홍콩까지 가는 4시간을 비행기 안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한겁니다.

비행기 안에서 듣기 싫다고 나갈 수도 없잖아요.

창세기부터 하다가 시간이 없어서 하나님은 어떻고, 삼위일체는 어떻고

이야기를 하니까 처음에는 재미있는지 들어요.

그러다가 홍콩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이 사람이 하는 말이

- 선생님. 이제 됐습니다.

- 뭐가 됐어요?

- 아, 비행기 폭발 안했어요. 그러니 이제 성경공부 그만하자구요.

- 그럼 뭐 할 수 없지 그만둡시다.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그 때사 이 사람이 저한테

- 뭐하시는 분이세요?

- 목삽니다.

- 어디에 가세요?

- 중국 갈려고 그럽니다.

- 중국 가기 힘든데 .... 비자 받는데도 한 주일은 걸릴건데....

어느 호텔에 머무실렵니까?

- 아직 예약 안했습니다.

- 그러면 제가 예약해 드릴까요? 어느 호텔을 원합니까?

- 아 그것도 아직 모르겠어요.

- 그럼 누구 아는 사람 있습니까?

- 아니 없습니다.

- 그럼 어디서 묵을랍니까?

- 아는 사람 없어도 내리면은 아마 누군가가 날 맞이할 겁니다.

그러니까 걱정 안하고 갑니다.

- 아, 그래요.

비행기에서 내리고도 전 계속 그 사람 줄줄 따라갔지요.

앞에 큰 차가 한 대 대기하고 있어요. 이 사람이 온다고..

운전수가 나와서 회장님! 그러는거 같애요.

그 사람이 날 보더니 다시 물어요.

- 누구 나왔습니까?

- 아직 안나왔네요.

차 타고 갈려다가 갑자기

- 목사님, 이리 타시오. 오늘 저녁은 우리 집에서 묵으시오.

- 아, 그래요.

속으로는 '아마 당신이 그 사람인 모양이다' 하고 탔지요.

가는데 큰 집에 들어갔어요. 한 부부가 사는데, 일 하는 사람인 모양이에요.

점심때라 점심을 가지고 왔는데 전화가 막 오는 거에요.

뭐는 어떻게 팔고 뭐는 어떻게 팔아라. 그러고 난리에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 선생님, 바쁜데 딱 하나만 물어봅시다.

- 뭐냐고?

- 그동안, 돈을 얼마나 벌었길래 그렇게 바쁩니까?

- 아, 그 한 1억불까지 벌려고 그랬는데 그게 잘 안되네요.

- 그러면 일생 돈 버는 소망이 1억불 입니까?

- 아, 그럼요. 1억불이면 성공이죠.

그 당시 80년 초니까 큰 돈인거 같아요. 난 그게 큰 돈인지 아닌지 잘 모르지만.

제가 그랬지요.

- 제가, 한 100억불 벌 수 있는 아이디어가 있는데 알고 싶지 않습니까?

- 아, 그래요. 목사님이 거짓말 하겠나?

- 난 거짓말 안합니다.

갑자기 비서한테 전화 걸더니 모든 약속 취소하라는 거에요. 전화 딱 끊고

- 들읍시다. 우리 서재로 갔습니다.

또 성경책을 꺼냈습니다.

- 또, 그겁니까?

- 그거라구....

그때 제가 그 분한테 직설적으로 물었습니다.

- 자꾸 그겁니까, 그겁니까 그러는데 내가 하나 물어보자구

지금 이 세상에서, 세계에서 돈 제일 많이 가진 사람들이 누군지 압니까?

여러분, 그때 80년대 뿐 아닙니다. 90년대인 지금도 그래요.

지금 현재 세계에서, 월스트리트든, 동경이든, 싱가폴이든, 어디든간에

돈 제일 많이 가진 사람 누군지 알아요? 유대인입니다.

세계 금융시장의 7~80% 를 쥐고 있습니다. 그 이상하지 않아요.

유대인 인구가 600만도 안되는데.. 세계에 있는 사람 다 합쳐봐야 천만도

넘을까 말까 하는데. 55억 세계 인구가 있는데 그 중에 80% 돈을 쥐고 있다면

뭔가 비밀이 있지 않겠어요? 돈 잘버는 비결이.. 그게 뭔지 압니까?

바로 구약성경입니다. 히브리 성경이에요.

여러분, 이 히브리 성경 안에는요. 이 세상에서 잘 살 수있는 비결과 방법이

다 나와 있습니다. 번성하고 번영하는 방법이 다 나와 있어요.

성공하는 비결이 다 나와 있습니다. 그게 구약입니다.

신약은 뭔지 압니까?

신약은 구약에서 번 돈을, 물질을 얼마나 선하게 쓰느냐.

쓰는 방법이 나와있는 거에요. 그게 신구약의 차이 입니다.

이 사람이 가만히 들어보니까 유대인들이 홍콩서도 금융권을 쥐고 있거든요.

파리, 런던 금융시장도 다 그렇거든요.

- 아, 그 말 맞네요. 정말 그러네요.

- 바로 여기 있다구. 이 안에 당신이 100억불 아니고 1000억불 이상 벌 수 있는

비결이 이거라구. 들을려면 듣고 말라면 말라고.

- 아아, 그거 듣겠어요.

그래서 일주일은 그 안에서 비자 나올 때 까지 성경공부 시작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짜가 없더라구요. 그 집에서 공짜로 밥 먹여 주니까 이제

복음 전하게 하는 거에요. 히브리 말로 성경공부 하니깐 재미있거든 또.

그렇게 성경공부를 하는데 회사에선 일주일 사이에 난리가 난겁니다.

이 사람이 무슨 거래를 하는데 자기는 자신있게 물건을 샀는데, 선물거랜가..

뭐 이상한 용어에요. 잘 모르지만.. 그걸 했는데 그게 값이 내려가는거에요.

벌써, 50% 가 내려갔는데 계속 내려가니까 50% 라도 팔아야 되겠습니다 하고

밑에서 보고가 올라온 거에요. 이 사람이 고민이 생긴거지요. 저 보고 물어요.

- 목사님, 사실은 이 사업상의 문제는 절대로 아내하고도 이야기 안하는데

내가 다 판단하는데 이건 조금 곤란합니다. 목사님 한테 자문 좀 얻을까 하는데

되겠습니까?

- 뭐든지 이야기하라고, 뭡니까?

-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 50% 가 내려갔는데 이걸 제가 팔아치워야 될지.. 그러면

50%를 건지고 또 50% 손해 보는데 지금 고민입니다.

저는 단순하게 이야기 했지요.

- 보시오. 사업이라는 것은 밑지면 안되지 않소. 남아야지 밑지고 팔면 되겠냐고

팔지 말라고 그러니까

- 아, 그말 맞다고 ..

그리고 안팔았네 오후에 되니까 30%로 뚝 떨어져 버렸어요.

20%가 또 날아가 버린 거지요.

그러니까 밑에서 또 팔자는 거에요. 나한테 한번 더 물어봐요.

- 아, 밑져서는 안된다고.. 장사는 밑지는 거 아니라고 남아야지

남을 때 팔아야지 왜, 밑질 때 파냐고...

나는 그냥 원칙대로 판단한 거지요.

그 다음날 되니까 이게 10% 까지 내려간 거에요. 90% 날아간 거지요.

그렇게 되니까 이 사람이 포기하고

- 목사님 말씀 듣겠습니다. 하고 놔 둔거에요.

그 다음날 되었는데 이게 갑자기 50% 다시 뛰는 거에요.

이 사람 생각에 이상하거든요.

- 지금 팔까요. 그럼 50% 건지는데..

- 아, 밑지면 안된다 그랬지 않냐고..

그랬더니 그 다음 100% 로 뛴거에요. 야, 이제 되었다 싶은 거에요. 이 친구,

- 이제 팔까요. 된거 같은데..

- 뭐가 됐냐고, 본전가지고 뭐하냐고, 남아야 장사지. 더 기다려 보라고.

이게 또 오르는 거에요. 보전보다 한 30% 더 뛰었어요.

- 지금 팔까요.

- 그래도 장사는 적어도 배는 남아야지..좀더 기달려 보라고.

그런데, 며칠 있으니까 200% 되어서 배를 남겼어요.

그 때 이 사람이 욕심이 생긴겁니다.

- 아이고, 이제 안팔랍니다. 더 오를건데..

자기 생각에 또 오를거 같거든. 그때 제가 제동을 걸었습니다.

- 욕심내면 안돼. 고 정도로 끝내야지..

그 사람이 제 말 듣고 팔았어요.

팔고 나자마자 그 다음날 바로 뚝 떨어지는 거에요.

신기하거든요.

- 이야. 목사님! 그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을 들어보이면서

- 바로 이거라구, 여기에 다 있다고..

그러고 이제 내가 떠나려니까 이 사람이 비행기표 자기가 예약했으니까

자기가 그걸 줘야 갈 수 있으니까 조금만 더 머물렀다 가라고 그래요.

안된다고, 난 지금 바쁘다구 빨리 갔다와야 되겠다고 했더니

제 가방에다 돈을 가득 넣어주는 거에요. 그래서 그랬지요.

- 아, 난 돈이 필요없다구. 보라구 내가 가만 있어도 호텔 보다 더 좋은 방에서

자고 지금 가지 않냐고, 비행기 표도 당신이 지금 사줘서 가고 있는데 돈

필요없다고.

우리 예수님께서 전도하러 갈 때 전대도 갖지 말고 두 벌 옷도 갖지 말고

그냥 가라고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하니까 지금까지 다 됐으니까 필요없다고.

그랬더니 이 사람 뭐라는지 압니까?

- 목사님 하나님은 돈 없어도 사는지 몰라도 내 하나님은 돈 없으면 안되니까

쓰든 안쓰든 가져가 보세요.

그래도 안된다고 뿌리쳤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 돈이 고스란히 가방에

다 들어 있었어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쓰나 하고 상해에 도착했습니다.

#92 최성식 (기쁨가득)

[간증] 김요석선교사 -7편(실력자와 대결) 05/27 22:35 310 line

그래서 이걸 어떻게 쓰나 하고 상해에 도착했습니다.

상해 도착했을 때 제가 찾아간 것이 상해대학에 독일에서 같이 공부했던

중국 교수가 있었어요. 그 사람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사실은 내가 중국에 있는 문둥병자들을 도우러 왔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신학한 목사니까... 그 위치를 알려달라.

이 친구 뭐라는지 압니까?

중국에는 문둥병자가 하나도 없다는 거에요.

왜, 그러냐? 했더니.

등소평 동지가 교시를 내렸는데

우리 사회주의 복지국가에서는 그런 병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발표했기 때문에 무조건 없다는 거에요.

위에서 그렇다면 그런 줄 알라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그렇지 않다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한참 생각하더니 북경에 자기 친구가 당 보건국에 있는데

그 친구는 혹시 알거라고 편지를 하나 써줘요.

그 편지를 들고 북경으로 가서 그 사람을 만났습니다. 만나서,

사실은 내가 목산데 당신 친구하고 친하다.

십 여 년 전에 같이 공부했던 친군데 당신한테 부탁하러 왔다고 했더니

놀라면서 여기 문둥병자 있다는걸 어떻게 알고 왔냐 그래요.

속으로 `아, 여기 틀림없이 있구나` 생각했지요.

그런데 자기는 말해줄 수 없다는 거에요.

그러면 오늘 저녁 나랑 같이 식사하자.

식사하면서 얘기를 들으려고 그랬는데, 마침 이 사람이 하는 말이

자기 친구가 다른 성에 책임자로 있는데 그 친구 말에 의하면

그 성에는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자기가 말했다고 그러지는 말고

그에게 잘 이야기 하면 되는데..어떻게 하겠느냐고 그래서,

그러면 오늘 저녁식사 자리에 그 친구를 데리고 나오라고.

저녁에 두 사람이 나왔어요.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얘기 했지요.

- 난 목사다. 그리스도인만이 그 병자를 도울 수 있다.

그 외에는 아무도 못 도운다.

확실히 실력자들은 자신감이 있어요. 싱긋이 웃으면서

- 아, 있다고.

있지만 안된다고.. 소개해 줄 수 없다고 딱 잘라요.

내가 좀 실망하는 빛을 띠니까 느닷없이 사람이 하는 말이

- 그 기독교인은 술을 안 먹는다지요?

- 예, 그렇습니다.

- 그래요?

씨-익 웃더니 아주 독한 빼주를 시켜요. 그것도 큰 병으로.. 그리고

큰 잔에다 따르는 거에요. 그리고 조그마한 잔에도 붓더니

나한테 겁 준다고 불을 확 질러요. 아주 독한 술이니까

잔 위에 불이 확 솟아오릅니다.

- 나하고 이거 마시기 해서 이기면은 내가 안내하겠소!

참 묘한 타협안이 나온겁니다.

내가 먹지도 못하고.... 설사 그걸 마신다 해도

그 사람한테 이길 수 있겠냔 말이지요.

옛날 바울이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수 있다면 날 지옥 보내라고까지 기도했는데.

내가 이걸 마셔야 저들을 도울 수 있다면 하나님 용서하십시오.

마셔야 되겠습니다. 아멘 하고

마시자고 그랬습니다.

중국말로 '감빠이' 하게 되면 시작부터 끝까지 한꺼번에 쭉 들이키는 겁니다.

한번이라도 쉬면 안되요. 감빠이 하기로 하고 마시는데

먼저 그 사람이 쭉 들이켰습니다.

그리고 저도 잔을 들고 입에 다 댔습니다.

쭉 들이키는데 냉수에요. 독주가 아니고.... 나는 시원하게 잘 마셨지요.

잔을 탁 놓으니까 이 친구가 하는 말이

- 아! 주량이 세다.

두 잔째도 쭉 마셨습니다.

- 아! 주량이 세다는 거에요.

세 잔째...

그 큰 잔으로 세 잔째 마시고 나더니 그 사람이 중도에 콕 꼬구라져요.

나는 세 잔까지 다 마시고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술이 깬 그 사람이 절 찾아왔어요.

제 앞에 와서 - 큰 형님! 하고 큰 절을 합니다.

그리고 사나이로서 약속 한건 지킨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 사람따라서 문둥이가 있다는 곳으로 갔습니다.

가서 보여 주는데..

저기 들어갈려면 마스크하고, 모자 쓰고, 장갑 끼고 들어가라는 거에요.

괜찮다고 나는 그냥 들어가겠다고, 자기는 안들어 가겠답니다.

들어갔는데, 요쪽은 가지 말라 그래요. 보니까 뭘로 막아놨어요.

보는 사람 아무도 없길래..

사람 심리라는게 가지 말라는데 더 가고 싶잖아요.

문을 살짝 열고 쑥 들어갔지요. 깜짝 놀랐어요. 세상에.....

난 전부 다 돼지인줄 알았어요.

팔,다리 없는 사람들이 그냥 뒹굴면서

긴 죽통에 얼굴을 대고 핥아먹고 있는거에요.

여러분! 팔,다리가 없으면 걷지 못하지 않습니까.

얼마정도 갈려면 배로 걷습니다. 배로....

뱀이 기어가듯이 사람이 기어간다는게 말이 됩니까?

보니까 눈알도 다 빠진 사람들이 코로.. 떨어진 곳에서

냄새 맡으며 먹을걸 찾는 거에요.

하도 기가 막혀서 한 사람을 끌어안고 앉힐려니까

뒤에서 경비원이 와서 절 끌어내요. 실망이 되서 문을 열고 나오는데..

그래도 좀 낫다는 사람, 괜찮다는 사람들 보니까

팔이 하나씩 떨어진 사람, 눈알이 하나씩 빠진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저쪽에서 아리랑 소리가 나요.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데 소리 나는 쪽으로 가보니까

웬 할머니가 흥얼흥얼 대고 있어요.

눈 하나 빠지고, 팔은 하나 없고 이런 사람인데..

- 당신 한국사람이요?

- 아니요, 조선사람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어머니, 아버지가 북간도 왔을 때, 자기가 14살에 만주에 와서 그 병이 들었답니다.

그래갔고는 여기 와서 40년을 산거에요. 그래서 할머니가 되었는데..

부모님은 어디 계시냐고 물었더니... 갑자기 애가 되어 버렸어요.

- 우리 엄마! 우리 엄마!

울부짖으며 우리 엄마 좀 찾아달라고 그럽니다.

40 년이 지나도 그 마음은 아직 14살 마음이었던 거지요.

제가 위로할 말이 없어서 그 할머니 손을 꽉 잡았습니다.

반이 잘라진 손등인데...

갑자기 제 손등에 뜨끈뜨끈 한 불덩어리 같은게 떨어져요.

그 할머니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건데 그게 그렇게 뜨거울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나도 그만 그 자리서 같이 엉엉 울었습니다.

제가 엉엉 우니까.. 저 한테 물어요.

- 선생님, 뭐하시는 분이요?

- 아, 나는 예수 말씀 전하는 사람입니다.

- 예수가 뭡니까?

- 예수님은 우리를 병들지 않고 죽지 않게 하시는 분입니다.

가만히 있더니..

- 선생님. 나같은 병신도 그런분 알 수 있을까요?

- 아, 물론입니다.

- 어떻게요?

제가 할말이 없습니다.

여기 같으면 교회 가보시오. 성경 읽으시오. 하지만

거기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한참 생각하다가 제가 그랬지요.

- 할머니, 마음 속에 하고 싶은 말 다 하세요.

그리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시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대답하십니다.

그렇게 하고 거기서 돌아 나올려는데 그 분이 그래요.

- 선생님, 또 오시지요.

다시 오고 싶은 마음이 싹 없었지만

- 예, 언제 또 기회가 되면 오겠습니다. 하고 떠났습니다.

나오면서 너무 기가막혀서 저 사람들 어떻게 도울까 하다가 수용소장을

만났습니다. 홍콩에서 받은 가지고 있던 돈을 다 주면서

- 이걸 갖고 저 사람들 옷이든 뭐든 좀 해주시요.

그 때사 돈이 이렇게 필요했구나 한걸 알았지요.

수용소장이 그 돈을 받더니 뭐라고 그러는지 압니까?

-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 누군지 모르지만

우리 모택동 동지보다 더 훌륭합니다.

그러고는 갑자기 자기 입을 막아요. 누가 들었나 싶어서..

그렇게 하고 떠나왔는데 6개월 후가 되었어요.

아무래도 한 번 더 가봐야 되겠다 해서 그곳을 가니까

제가 오기 닷새전에 그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어요.

그래서 기가막혀서 돌아나오는데 갑자기, 그 중국 병자들이 막 나한테로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오더니

- 예수! 예수! 하고 소리 질러요.

- 왜 이러냐고? 물었더니

내가 6개월 전 거기를 떠난 후로 이 할머니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겁니다.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다른 환자들 보고

- 나는 문둥이가 아니다.

나는 이제 예수을 알기 때문에 문둥이가 아니다.

그리고 죽기전에 그러더랍니다.

- 나는 죽는게 아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고향으로 간다.

나를 이제 문둥이라고 말하지 말라.

그러면서 세상을 떠났다는 겁니다.

제가 그 때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전도는 결코 연기해서는 안된다

내가 다음에 와서 하지 했으면 벌써 그분은 세상 떠난겁니다.

바로 마찬가집니다. 여러분!

가까운 사람 전도하는거 미루면 안됩니다.

가까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미루면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때는 벌써 늦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그 마을에 머물 때 한 번은 팔십 먹은 노인이 찾아왔었습니다.

그 노인이 하는 말이

- 저도 여기서 살게 해주시오.

- 할아버지, 여기는 병자들만 사는 곳이라 안됩니다.

- 나도 병신 중에 병신입니다.

그리곤 얘기를 들려주는데..

그 분이 사십 년 전에 아들 여덟과 딸 둘, 십 남매를 뒀는데

그 중에 11살 된 네째 아들이 갑자기, 손이 고꾸라지고

눈이 비뚤어지더래요.

병원에 가니까 문둥병이라고 그러더랍니다.

그러면 얘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니까,

집에서 키우면 안되고 격리시켜야 하니까 섬으로 갖다 주라는 거에요.

그 때는 오래전이니까 교통도 불편할 뿐더러

그런 병 있으면 버스도 안 태워 줍니다.

배를 타기 위해 며칠을 걸어서 갑니다.

병 때문에 집 같은 곳에서는 안 재워주니까 저녁이 되면 산 밑에서 잠을 잡니다.

그 아이가 피곤해서 쪼그려 자는걸 보다가

얘는 앞으로 죽을 고생밖에 더하겠나 그럴바에야 내가 여기서

죽여서 땅에 파묻어 주는게 낫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돌을 들어 애를 때렸답니다.

그런데 마침 돌이 빗나갔어요.

두번째 돌을 들고서 가까이 가서 칠려고 하니까..

차마 아버지로서 죽일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데리고 부둣가에 왔습니다.

부두에서 환자들 싫어나르는 배를 보니까 눈알 빠진 사람, 코 떨어진 사람,

팔, 다리 다 떨어진사람들을 싣고 갑니다.

내 아들도 앞으로 저렇게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기가 막히더래요.

그래서 그 아들을 끌어안고는 저 구석으로 갔어요.

- 얘야, 네 팔자도 참 나쁘다. 나도 애비로서 책임이 있으니까

너혼자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고 내가 너하고 같이 죽겠다.

우리 둘이 같이 죽자.

그러고는 그 아들을 끌어안고 물속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뛰어 들어가니까 그 아들이 뭐라고 그러는지 압니까?

- 아버지! 죽일 놈은 나지, 아버지는 아니잖아요. 죽일 병신은 나니까

나만 물속에 콱 박아버리고 그냥 가세요.

자기 죽는 것도 모르고 아버지 살리려고 애를 씁니다.

- 아버지! 아버지는 살아야지요. 죽일 사람은 나요. 죽일 놈은 나요.

집에 가면 어머니도 있고 형님도 있고 동생도 있는데 아버지는 사세요.

나 혼자만 죽여줘요.

울면서 그 아들이 아버지를 살리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래서 차마 죽지는 못하고 다시 나왔습니다.

그 아들을 섬으로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사십 년이 지났습니다.

일곱 아들, 두 딸 모두 시집,장가 보내고

그 많던 재산도 자식들에게 다 나눠주고 했는데 부인이 세상을 떴습니다.

혼자 살면서 아들네 집에 왔다갔다 하다가

내가 너무 오래 살아도 이거 욕되는구나 해서

고향에 와서 죽고 싶은 마음에 고향으로 내려오다가 갑자기,

사십 년 전에 버렸던 그 아들이 생각나는 겁니다.

내가 다른 자식들에게는 재산도 주고 했는데 그 아들은 버리기만 하고

한번도 돌보지를 못했는데 죽기전에 만나서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해야되겠다 해서 찾아온 겁니다.

우리 마을에 아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 분이 와서 아들을 만난 겁니다.

자기는 만날 때, 그 아들이 자기를 원망하고 인상을 험하게 쓸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아들이 자기를 대접하면서 절을 하고, 손주 소개하고 난리에요.

그래서 물었습니다.

- 얘야, 네가 날 원망할 줄 알았더니 어찌 이렇게 날 대접하냐?

- 아버지가 날 버리고 떠날 때는 며칠, 몇 날을 아버지 엄마가

그렇게 원망스럽더니 예수 믿고 나니까 왜 그렇게

아버지 엄마가 고마운지..

날 낳으시고 날 천국가게 해 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고.

이 때까지 사십 년을 아버지 한번 만나게 해 달라고

부모님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버님이 저한테 온 것은 하나님이 저한테 보내신 겁니다.

이제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러면서 울더랍니다.

이 때, 이 노인이 저보고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 목사님, 나는 지금까지 가짜 아들 일곱을 위해 살았습니다.

진짜 아들은 제가 두 번이나 죽일려고 그랬습니다.

이런 병신이 어디있습니까?

정말 살려야 될 아들은 자기가 돌로 때려 죽이고 물에 빠뜨려 죽일려 그랬고

없어도 될 가짜 아들만 위해서 일생을 살아왔다는 거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았습니까?

없어도 될 가짜를 위해서 살아왔습니까?

버려도 될 욕심을 위해서 살아왔습니까?

인생에 아무 소용이 없는 욕심만을 위해 살아왔습니까?

정말 소중하고, 지켜야 될 믿음 다 팔아먹고

주님 사랑 다 팔아먹는 진짜는 버리고 살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앞으로 여러분 인생이 정말 참을 찾고, 진실을 찾고, 진짜를 위해

살아나갈 때 지금보다 하나님께서 더욱 큰 축복으로 여러분에게 충만히

내리실줄 믿습니다.

#93 최성식 (기쁨가득)

[간증] 김요석선교사 -8편(보석같은 진리) 05/27 22:38 357 line

제가 한번은 정상인이 사는 마을에 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저는 어느 마을에 가든지, 거기 백 호가 되든 삼백 호가 되든

크든 적든 간에 그 마을 사람들이 다 전도될 때 까지 거기에서 묵습니다.

그래야지 나중에 제가 다른 곳에 갔다와도 시험에 안들거든요.

그 마을에서 다른 사람은 다 전도 되었는데 그 마을에서 잘 사는

어떤 한 분이 전혀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제일 잘 사는 열 가정 중에 한 가정인데.. 아주 잘 사는 그런 집이었는데

아, 이 사람은 전연 받아들이지를 않을려고 그래요.

다 변화되고 그 집 한 집이 남았는데..

나중에 찾아가서 물어 봤어요.

- 당신, 내가 볼 때는.. 당신 얼굴을 보니까

꼭 하나님의 축복 받을 사람인데 어째서 그렇게 거부하느냐?

한 숨을 푹 쉬더니

- 사실은 제가 그럴 사정이 있습니다.

- 그게 뭐냐고?

- 제가 지은 죄가 많아서 그렀습니다.

- 당신이 지은 죄가 아무리 많다 할찌라도 하나님 앞에 솔직히 고백하고

자복하면은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다.

그분이 하는 말이

- 이것은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어쩔 수 없어서....

사실은, 나도 진작 믿고싶은 마음이 있었지만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 그 죄가 뭔지, 하나님께도 말 못할 사정이라면.. 나 한테는 말할 수 없소?

- 제가 그걸 말을 못합니다.

만약 그 말을 하게 되면 저는 이 마을에서 매장 당하고

맞아 죽을지도 모릅니다.

- 그럼 마음대로 하시오.

그렇게 평생 동안 가슴에 품고 고민하다가 죽는거 하고

탁 풀어 제치고 깨끗하게 회개하고 죽는게, 차이가 있을 테니까.

고민하다가 죽는거 하고 맞아죽더라도 차라리 깨끗이 자복하고 회개하고

죽는거 하고 어느게 좋겠는지 한번 잘 생각해 보시요.

첫날은 그렇게 하고 나왔습니다. 며칠 후에 그 사람이 찾아왔어요.

- 제가 고백하겠습니다.

얘기를 하는데, 이 분에게는 딸이 여섯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안이 궁하니깐 그 딸들을 상해에다 판 거에요.

제일 첫째 딸이 14살 때 팔았어요.

중국돈으로 돈이 꽤 들어왔습니다. 그 재미있거든요.

그 돈으로 집도 새로 짓고 하니까 살거 같거든요.

한번 그 맛을 들이니까 두번째 딸을 또 팔았어요.

동네 사람들한테는 외갓집 갔다하고 두번째 딸도 팔았습니다.

돈이 들어오니까 또 재미있거든요. 그래서 세번째 딸도 팔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둘은 어리니까 남기고 네 딸을 팔았는데 ..

해마다 하나씩 팔은 거에요.

동네 사람들은 외갓집이 잘 사니까 애들을 거둬 주는 모양이다.

시집보내 주는 모양이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넷을 팔고 나니까 집도 새로 짓고 그 동네에서 아주 부자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전혀 양심의 가책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딸들도 여기서 고생하는것 보다는 큰 도시에 팔려가면 호강하면서

살지 않겠느냐 하면서 좋다고 간거에요.

그런데 여러분, 그 딸들이 팔려서 어디로 갔겠습니까?

정말 죽은거와 같은 그러한 인생을 맞이했을지도 모르잖아요.

이 사람이 지금까지는 팔아놓고 아무런 양심의 가책없이 지냈는데

복음이 들어가니까 양심의 가책이 생긴겁니다.

참 이 복음의 역사는 묘하지요.

어떤 사람에게는 기쁨이요, 생명이요, 천국이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이요, 멸망의 성서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은 복음을 들은 후로 괴로운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그런거 안 믿는다. 나는 공산주의 사상 그대로 신봉하겠다는

식으로 그렇게 뻗대고 나갔던 겁니다.

그러면서 그 분이 하는 말이

- 선생님! 이런 죄인도.. 아무리 사랑이 많은 하나님이라도

용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친딸을 팔아먹고 그 돈으로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아무리 하나님이 자비로우시다 하더라도

이것을 용서해 주실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물질에 대한 유혹입니다.

떡에 관한 본능적인 유혹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어떤 극단적인 예가 될 수 있지만 어쩌면

우리도 이같이 이런 본능적인 유혹 때문에, 먹는 것 때문에,

물질 때문에 어쩌면 가장 귀한 신앙을 팔아먹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가장 귀한 양심을 팔때가 있습니까?

우리가 이것을 한번 생각을 해 봐야됩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것을 이길 힘이란 것은 기도 밖에 없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내가 항상 하나님 믿고 살아가는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확인하는 그러한 결정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시험은 마태복음 4장 5절에 나타나는

성전 지붕에서 뛰어내려라 하는 시험입니다.

여기에도 두 가지 유혹이 있습니다.

하나는 순간적이고 인기적인 것으로 사람을 현혹시키는 시험입니다.

아까 저녁 먹다가 평생 처음 듣는 이름이 TV 에서 나왔어요.

마이클 조단, 그게 여기서(미국) 애들부터 어른까지 부러워하고

난리라면서요. 아주 인기있고 그렇다는데..

이런 사람들이 인기있고 좋다고 현혹돼 따라가다가는 실망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연예인이라든가 코메디언 좋아하며 그런 사람 따라가다가 실망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사적인 예로 특히, 독일에 히틀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뭇솔리니같은 2차대전 때의 그런 사람 보세요.

히틀러가 연설을 하게 되면 온 독일 국민이 열광했습니다.

심지어는 당시 개신교 총회장 하던 루더빈 밀러 라는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히틀러 연설할 때 나타나서는 연설 다 끝날 때 마지막 축도를 합니다.

그 연설을 위해서 축도를 하는데 제일 끝에 '아멘' 하지 않고 - 예를 들어서

'영원히 있을찌어다' 이렇게 해놓고 나서는 아멘해야 되지 않습니까? -

그런데 이 사람 뭐라 그랬는지 압니까?

축도 후에 마지막을 '하이 히틀러' 로 끝을 맺습니다.

완전히 히틀러가 예수였습니다. 그런식으로 온 교회 - 개신교, 카톨릭 천주교까지

온 국민이 열렬했습니다. 히틀러가 최고다! 히틀러가 예수다!

나중에 히틀러 예수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그 다음 어떻게 되었습니까?

2차대전 끝나고 나서 지금까지도 히틀러 망령에 계속 배상금을 지급하고

있는 것이 현 독일입니다.

여러분들 지금도 이와같은 유혹!

인기적인, 물질적인 유혹이 계속 따르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이와같이 마귀는

이 선동하는 불의의 지도자 같이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시험입니다.

당시에도 이같은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유다라는 사람이 당시 팔레스틴에 나타나서 예수님 태어나시기 한 100년 쯤

전인데. 많은 군중에게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나를 따라오면 요단강이 옛날

홍해처럼 갈라져서 이 나라를 독립시키겠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유다라는 사람의 뒤를 따라가 '당장 독립되는구나' 하다가 당시 총독이었던

파디우스라는 사람에 의해서 전부 몰살된 사실이 역사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또, 한 때는 예수님과 똑 같이 내가 사흘 만에 예루살렘 성벽을 전부 무너

뜨리겠다고 선동했다가, 당시 총독이던 안토니우스 필릭스라는 사람에 의해

파멸된 사실이, 예수님 태어나시기 50년 전, 100년 전 사이로 일어났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한 것은 이와같은 과거의 혁명가나 거짓선지자의 약점

을 이용해서 유혹하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중국이야기로 들어갑니다.

티벳이란 나라를 찾게 되었습니다.

전에 이야기했던 스님이 자기가 인도에서 공부를 하고 티벳으로 넘어왔는데

티벳에 아주 훌륭한 고승이 있는데 그 분을 만나면 형님하고 대화가 되리라

해서 저한테 편지까지 적어줘서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고승이 있다는 사찰을 찾아갔습니다.

처음에는 그 고승이 만나주지를 않아요. 그래서 친구 스님이 넣어준 서신을

넣어줬더니 만나겠다고 그래요. 제가 들어갔더니 앞에 조그만 방에서 둘이가

마주 앉아서 대좌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잘왔냐, 못왔냐 그런 말도 없이 그냥 저를 한참 쳐다 봅니다.

저도 한참을 쳐다 봤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입을 열면서 하는 말이

- 당신의 영과 내 영이 다른데 무엇 때문에 날 찾아왔소?

- 나의 영과 당신의 영이 다른 것은 제가 압니다.

그래서, 당신의 영과 내 영이 무엇이 옳은 영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 아, 그러냐고. 그렇다면 며칠 후에 다시 만납시다.

한 주일쯤 지나니까 다시 불러요.

갔더니 절 한참 보다가 뭔 말을 할려고 그래요.

무슨 주문 같은 것을 외우더니 가만히 있습니다.

아무 말도 안하고 그렇게 몇 시간을 서로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붓하고 벼루하고 종이를 하나 꺼내서 제 앞에 던져 줘요.

- 지금 우리 둘이서 한 이야기를 여기에 써 보시오.

아무 말 안했어요. 몇 시간을.... 그런데 갑자기 그런단 말이에요.

제가 그것을 받아 쥐고 붓을 들어서 한자를 적어서 줬습니다.

그것을 받아보고 내려놓더니

- 당신 얘기를 좀 듣고 싶소.

- 그럼 내가 얘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 그렇소. 얘기 해보시오.

가방에서 성경책을 꺼내들고 앞에다 펼쳤습니다.

- 그게 뭐요?

- 내가 나 자신에 대해 할 이야기는 없고, 이 책에 있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 해보시오.

거기서 성경공부에 들어갔습니다.

당대에 티벳의 대 고승인데 그 앞에서, 마태복음의 팔복음은 어떻고

하면서 죽 이야기를 해나갔습니다. 한 몇 시간을 듣더니

갑자기 손을 들어요. 오른 손을 들더니

- 그 책을 내게 빌려줄 수 있겠소?

- 빌려드리지요.

성경책을 주고 나왔는데 두 달이 지나도 보이지를 않아요.

부르지도 않고, 나오지도 않고...

두 달 동안사찰에 머물면서 기다린 겁니다.

그 때 20살 넘은 한 청년이 머리를 빡빡 깍고 들어왔는데 행동이 좀 이상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한테다 흙을 던지질 않나.. 고함을 지르지 않나..

자기가 싼 배설물을 들고는 집어던지질 않나..

그러니까 같이 있던 스님들이 골치가 아프다고 묶어놓기도 하고,

밖에 내놓기도 하고 이랬는데 어느날 이 젊은 청년이 날 만나보고

내 앞에 와서는 조용해져요. 그러니까 그 스님들이 하는 말이

두 사람의 영이 비슷한 모양인데 좀 데리고 있으라고.

온 몸에는 자기 오물로 다 뒤집어 쓴 사람인데....

나도 불청객이라 부탁을 안들어 줄 수도 없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그래서 저랑 같이 제 방에서 묵게 되었습니다. 한 3일 쯤 지나니까

그 청년이 정상으로 돌아와서 내가 쓰던 신발도 닦아놓고 세숫대야에

물도 떠다 주고 그래요. 그래서 괜찮은 청년인데 왜 그랬느냐 그러면서

그 청년에게 제가 그랬습니다.

- 너는 정말 지혜롭고 착하고 선한 청년인데 괜히 엉뚱한 짓을 한 모양인데

이제는 괜찮을 거다. 그러니까 겁내지 말고 살아라.

이 사람이 괜찮아지니까 스님이 와서 하는 말이

- 아, 당신의 영이 우리 영보다 조금 더강하기 때문에

이 청년이 고쳐진거 같으니까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 그럼, 내보냅시다.

했더니 이 청년이 안갈려고 그래요. 한 주일만 더 있다 간다고 그래서.

그러면 그러라고. 한 주일 더 있다가 이 청년이 가면서 하는 말이

- 선생님! 만약 여기서 떠나시면 저희 집에 한번만 꼭 들러 주십시오.

- 내가 기회가 되면 찾아가겠다고.

그 청년이 그러고는 주소를 적어주고 사찰을 떠났습니다.

한 두달 지났는데 그 고승이 절 불러요.

들어가니까 그 성경책을 저 앞에 턱 놓으면서 하는 말이....

깜짝 놀랄 말을 합니다.

- 이렇게 바른 진리를 왜 이제 가져왔소?

이 사원이 선지가 2000 년이 넘는데 이같이 바른 진리를

왜, 아무도 이곳에 와서 그냥 던져라도 주지않고

지금까지 한 마디 말도 전해주지 않았소?

놀라운 말 아닙니까? 여러분!

이런 말 할 때 뭐라고 대답해야 됩니까? 성경적이고 불교적으로..

성경적이요 불교적으로 딱 맞는 대답이 뭐겠습니까?

이게 지혜거든..

그 사람한테 아이고 미안합니다. 늦게와서.. 이건 말이 안되잖아요.

참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것도 말이 안되잖아요.

참고 있다가 올 때까지 기다려라 그것도 말이 안되고.

뭔가 이 사람이 공감할 만한 말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 하루가 천년이요 천년이 하루로다.

어때요? 가장 불교적이고 기독교적인 말 아닙니까.

이게 지혜거든요. 똑같은 말인데도 우물우물 하지말고 묻자마자

턱 나와야 되는거라. 그 사람이 처음 얘기할 때 제가 숨도 쉬지 않고

"하루가 천년이요 천년이 하루로다"

하니까 그분이 무릎을 탁 치면서,

고맙다고 절을 하면서 선물을 하나 줍디다.

이만한 곽에다가 담은건데 꺼내보니까 피리 같애요.

때가 새카맣게 묻어 있어요.

툴툴 털고 한번 불어보라고 그래서 불어보니까

참 신비한 소리가 납디다. 그게 무슨 피린지 압니까?

자기 스승이 죽을 때 남겨준 다리 뼈로 만든 뼈 피리였습니다.

티벳에서는 장례식이 우리하고 다릅니다.

사람이 죽으면 친척들이 메고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 피리를 불면은 새들이나 들짐승이 몰려와요.

올라가서는 시체를 눕혀놓고 발바닥부터 칼과 끌로 다 오려냅니다.

살을 다 뜯어냅니다. 그리곤 주먹밥처럼 만들어서 새에게 던져 줘요.

얼굴살까지 모든 살을 깨끗이 닦아 냅니다.

아마 자연환경에도 좋을 것 같애요.

화장한다든가 매장한다든가 하는 것보다훨씬 낫지요.

그렇게 자연에 다 돌려주고는 제일 튼튼한 뼈가 이 다리 뼈인데

제자라든가 아주 친밀한 사람에게 선물로 줍니다.

그럼, 거기다가 구멍을 뚫어서 피리를 만들어 불거나

다른 걸로 이용하게 됩니다.

이 분이 여섯 살 때 입적을 했는데 100년 전 사셨던 자기 스승이 죽으면서

물려준 피리에요. 그러니까 100년이 더 넘은 사람의 뼈로 만든 피리인데

자기가 근 60년 이상을 가지고 있다가..

얼마나 고마웠으면 그걸 제게 줬겠습니까?

여러분, 전도 잘하면 이렇게 뼈 피리도 얻게 됩니다.

아무 부담없이 받게 됩니다. 그것만 받은게 아닙니다.

그 분이 그 때 70이 되었으니까 하는 말이,

나도 얼마 안있으면 죽을텐데 죽게 되면은 자기 다리뼈 하나를 가지라고..

그래서 미래의 피리까지 얻게 된겁니다.

몇 년 전에 찾아갔더니 아직 세상 안 떠나셨어요.

서로 즐겁게 재회만 하고 왔습니다.

여러분, 정말 그렀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진실된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보석같은 복음을 전하는데

그 받는 상급이 뼈 피리 뿐이겠습니까?

하늘나라에는 더 많은 상급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그 사찰에서 제 일은 다 끝났지요. 그러고 내려왔습니다.

기차 타고 내려오다가 갑자기 그 젊은 청년이 준 쪽지가 생각나서

주소를 보니까 거기서 하루쯤 떨어진 마을이었습니다.

주소를 따라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어마어마한 큰 집이었습니다.

앞에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요. 내가 잘못왔나 하고..

주소를 다시 봤어요. 맞길래 그 앞 초소에 가서 물어봤습니다.

그 집이 맞다고 그래요. 이 사람을 아는가 했더니, 그 집 아들이라 그래요.

들어갔습니다. 그 부모들이 나와서 반가이 맞이해줘요.

부모가 그 지역에서 상당한 실력자였습니다.

저 보고 물어요.

- 뭐하시는 분이세요.

- 전 복음 전하는 기독교 목삽니다.

그 사람이 갑자기 눈이 뚱그래지면서 하는 말이

- 못 들은걸로 할테니까, 딴데 가서는 절대 이런 말 하지 마세요.

- 그럴줄 알고 이야기 했습니다.

당신은 비밀을 지켜줄거 같아 이야기했노라고 웃었더니 자기도 웃어요.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6개월 동안 티벳에서 세수한번 제대로 못하고 있던거

거기서 목욕도 하고 깨끗이 닦게 되었습니다.

며칠을 잘 대접받고 떠나게 됐는데.... 저는 그냥 그것으로 끝나는줄 알았어요.

그 뒤 3년 후에 하나님의 엄청난 이적을, 그 사람을 통해서 일어나게 하실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것은 지금 이야기하지 못하고 3년 후의 이야기가 됩니다.

그 집을 떠나 다시 기차를 타고 올라오는데 한 하루쯤 왔어요.

중간에 기차가 역에 서니까 사람들이 바뀌어 들어오는데 한 노인이

제 앞에 앉았습니다. 한 열 시간쯤 가면서 제가 가지고 있는 독일어 성경을

보고 있는데, 저녁나절 쯤 갑자기 이 노인의 입에서 놀랄만한 소리가 나왔습니다.

세상에, 저는 그런말 처음 들어봤어요. 그 중국 땅에서.. 그 오지에서.

"다쓰 하일리그 쉬리프트 다쉬 마르진"

독일어가 툭 튀어나온 겁니다.

성경이 하일리그 쉬리프트라는 독일어로 가죽 겉장에 금박지로 쓰였는데

그걸 읽은 거에요. 그 사람이 손을 내밀면서

- 이걸 한번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제가 얼마나 놀랐던지 얼른 건네줬습니다.

그 분이 그걸 만져보면서 갑자기 눈물이 글썽글썽 해서 하는 말이

- 제가 50년 만에 이걸 다시 만져보는 겁니다.

#95 최성식 (기쁨가득)

[간증] 김요석선교사 -9편(공산당 이론가) 05/28 20:47 323 line

- 제가 이걸 50년 만에 다시 만나는 겁니다.

그분이 1940년대 상해대학 학생이었습니다.

아직 공산당이 천하를 통일하기 전이었는데 그 때 자기가 주원래 밑에서

심복으로 일하면서 학생연맹을 주도했답니다. 맨날 데모나 하고 시위나하고

폭력을 휘두르다가 한번은 자기 대학에 독일인 교수가 있었는데 그 분이

자기를 부르더래요.

- 이 사람아 자네 공부도 안하고 왜그렇게 맨날 싸움만 하는가?

- 우리 중국에는 공산주의가 필요합니다.

공산주의 혁명을 하기 위해서 제가 이 일을 합니다.

했더니 그 분이 그렇게 이야기 하더랍니다.

- 나도 공산주의자였네.

나이 50이 되어서야 이게 위선이라는 것을 깨닫고 전향했는데

진리라는 것은 천 년이 지나도 이천 년이 지나도 변치 않아야 되는데

이 공산주의는 벌써 맑스가 태어난지 100 년도 안되어갔고

벌써 수 차례 변질되었고 지금 살아있는 스탈린이나 레닌이나

그 사람들은 가짜 공산주의자들이다. 진짜가 아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 그럼, 뭐가 진리입니까?

하고 얘기를 했더니 그 교수가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게나 하고

준 책이 바로 내가 가졌던 그 책과 똑같은 고딕체로씌어진 성경이었습니다.

가져가서 읽어보니까 자기 마음에 안들지요.

혈기 왕성한 20대 였는데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고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을 대고.... 도저히 맞지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도로 갖다 줍니다.

이건 우리하고 안맞습니다.

우리 중국 인민을 위해서는 이걸로 안됩니다. 우린 싸워야 됩니다.

그러고는 성경을 던져줬습니다.

그 때 그 교수가 눈물이 글썽글썽 하면서 하는 말이

- 이 사람아! 국가 지도자가, 사회 지도자가 잘못된 진리를 쫓아가면은

그 민족과 그 사회는 망하게 되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울더래요.

그래도 자기는 그거 안하겠다 하고 열심히 혁명운동을 했답니다.

그러다가 과연 1949년에 중국이 통일되고 자기도 그 공로로 인해서 주원래의

보좌관이 되었다가 60년대 들어와서는 교육장까지 맡은 공산주의 이론가로

출세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걸로 끝났으면 몰랐지요.

1966년에 문화혁명이란 것이 일어납니다.

그 때 완전히 파괴됩니다. 개혁파들.. 대표적인 유서기 주석이 처형당했지요.

등소평은 발가벗겨서 쫓겨났지요. 그 밑에 있던 개혁파들 전부 꽁꽁 묶여서

벙거지 씌워갖고 강제노동으로 쫓겨 납니다.

쫓겨나면서 부하들에게 온갖 돌팔매를 받고 침 뱉음을 당하면서

갑자기 옛날에 40년대에 자기 스승 생각이 나더랍니다.

그 독일인 교수가....

"지도자가 잘못된 진리를 따라가면 너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온 민족도 망한다"

기가 막히더랍니다.

10 여년간을 강제노동소에 있다가 등소평이가 집권을 하면서 자기도 복권이 됩니다.

등소평이가 같이 일하자고 이 사람을 불렀답니다. 그 때 이 사람은 공산주의에

완전히 환멸을 느껴서 못하겠다고 하고 낙향해서 고향에서 살던 때였습니다.

그럴 때 절 만난 겁니다.자기 집이 가까우니까

- 선생님 우리 집에 며칠 유하시면 안되겠습니까?

제가 좀 의논 드릴 것이 있습니다.

- 아, 그래요.

저도 뭐, 갈 때는 많지만 오라는 데는 없었지요.

그러니까 아무데나 오라는데는 서슴치 않고 갔습니다.

자기 집에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두 손을 모으고는

- 선생님! 제게 글좀 가르쳐 주시요.

- 아니, 당신은 독일어도 이렇게 잘하고

상해대학 총장까지 지낸 학자인데 나한테 배울게 뭐가 있습니까?

- 그것이 다 허삽니다. 제가 50 년을 헛살았습니다.

내 나이 70 인데 50 년을 헛 살았습니다.

나를 스무살 난 학생으로 보시고 가르쳐 주시요.

전 공산주의 운동하면서 50년을 완전히 헛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기간 다 빼고 머리 하얀 스무살 된 학생으로 봐주시오.

제가 선생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날부터 그 집에서 거의 반년 가까이를 유하면서

나는 그 분에게 성경을 가르쳐주고, 저는 그 분에게

아주 정확한 중국어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아주 좋은 조건이 되었지요.

이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진심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변화가 뭔지 압니까?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들은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못살겠다는 겁니다.

그 동네가 팔백 호 이상되는 동넨데 인구가 이 천여명 되었습니다.

이삼십대 청년들이 한 사백명 가량 되었습니다.

그 분이 하는 말이 노인들은 빼놓고 우선 젊은 사람들만 변화시켜 놓으면

어른들은 자연히 따라올거라고.

그 집 뜰이 굉장히 넓은데 거기다가 지붕만 대충 해놓고는 이삼십대 청년들을

모두 모아놓고 매일 저녁 야간 성경공부를 시작한 겁니다.

그 분이 낮에는 나하고 공부하고 밤에는자기가 청년들하고 공부를 시작한 겁니다.

한 달, 두 달, 세 달이 지나는데 놀라운 역사가 벌어집니다.

중국 사람들은 술을 잘 먹습니다. 담배를 지독하게 피웁니다.

술 먹고 담배 피우게 되면 뭐합니까? 노름하게 됩니다.

노름하고 나면 뭐합니까? 잃었니, 땄니 하면서 싸우게 됩니다.

모두 난장판이에요. 특히 겨울에 되면 일을 안하게 되면은 난리납니다.

그런데 성경공부를 하고 나니까 술이 끊어지지요. 담배가 끊어지지요.

술 팔러 온 사람이 이상한 동네가 되어버렸다고 그래요. 술을 안먹으니까.

그런데 그 소문이 지역 당에 까지 났습니다.

저 동네 좀 이상해졌다는 거지요. 그래서 당에서 확인을 하러 왔습니다.

와보니까 매일 저녁에 모여서 공부를 하거든.

거기 뭐라고 쓰였나 하면은 '진리학사'라고 쓰붙여 놨어요.

그걸 보고 진리라는 것은 모택동 사회주의니까

아! 정말 이건 모범적인 마을이라고 하면서

표창해야 되겠다고 돌아갔습니다.

'진리학사' 라는 명칭으로 정식 허가가 났습니다.

청년들이 달라지니까 예의가 생기게 됩니다. 어른을 공대합니다.

이 공산주의라는게 어른, 아이 없는게 공산주의 거든요.

아무나 보고 동무라 그러지않습니까. 위, 아래가 없어요.

그런데 복음을 받아들에게 되니까 부모를 공경하게 됩니다.

어른들에게 공손해지게 된 겁니다.

아이들에게는 엄하게 교육이 됩니다.

동네가 확 달라졌어요.

처음에는 다리 같은게 부서졌으면 당에서 다리 만들어주기를 기다렸는데

이제는 자기들 스스로 합니다. 당에서 와보니 좋거든요.

전에는 맨날 투정하더니 이제는 자기들이 알아서 모든 것을 하니까

정말 모범적인 마을이라 그래서 표창까지 받았어요.

예수 믿고 당에서 표창받는 건 처음 봤어요.

변화가 되긴 되었는데 그래도 뭔가가 좀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여덟 살 먹은 한 아이가 절도죄로 인민재판에 불려나왔습니다.

거기는 마을에 규율이 있습니다. 그래서 동네에서 지은 절도라든가 그런 사건들은

경찰서까지 가지 않고 마을에서 촌장하고 위에 사람들이 모여서 유죌로 동의하면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게 소위 말하는 인민재판이지요.

유죄로 판결이 나면은 나이만큼 두들겨 팹니다.

오십 살난 사람이 죄를 지으면 볼기짝을 오십 대를 때립니다.

나이 많이 먹고도 정신 못 차렸으면 많이 맞으라 그런 뜻인 모양이에요.

그런데 여덟 살 난 애가 절도죄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절도의 사유는 달걀 두 개를 훔친 죄입니다. 그거 절도거든요.

도둑질은 도둑질이니까 애가 여덟 살을 긴 몽둥이로 맞아야 되는데

저도 명예 촌장 자격으로 그 재판에 참석을 했습니다.

제가 촌장의 선생이니까 명예 촌장이 된거지요.

모두 동의해서 벌을 내리자고 결정이 났어요. 그래서 제가

내가 한 마디 해도 되겠는가 했더니 하라고 그래요.

- 법이란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만약 법으로서 사람을 다 죽이게 되면

나중에 법 지킬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은가?

가만 들어보니까 말이 옳거든요. 모두 그렇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사람을 살려야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한번 얘기해보자고..

내가 다시 이 아이 하고 대화를 한번 나눠보겠다 그랬어요.

그 아이에게 제가 물었습니다.

- 얘야, 너 계란 두 개를 훔쳐 먹었냐?

- 예. 배가 고파서 그랬습니다.

그 때가 저녁 때였습니다.

- 그럼 너 점심 먹었냐?

- 안 먹었습니다.

- 아침은?

- 안 먹었습니다.

- 어제 저녁은? 아무말 못해요.

- 어제 점심은? 아무말 못합니다.

애가 이틀 굶고 나니까 지나가다가 이웃집에 계란 낳아놓은걸 보고

그냥 먹은겁니다. 그말 듣고 제가 할 말을 잃었어요.

제가 모인 사람들을 향해 물었습니다.

- 자, 어떤 사회단체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은 누가 지느냐?

- 단체 장이 집니다.

- 이 마을에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느냐?

- 촌장입니다.

- 그렇다면 여기서 촌장보다 더 높은 사람 누구냐?

- 선생입니다.

명예촌장이니까....항상 명예짜 붙으면 더 높아요. 중국에선.

- 그럼 됐다. 이 재판에서 피고는 나다.

내가 이 동네 어른으로서 이 아이가 이렇게 이틀 동안 굶을 정도로 모르고

있었다는건 어른인 나의 책임이다.

어느 아이도 이틀 굶고 지나가다가 계란 안먹을 아이가 없다.

이 아이가 그토록 굶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은 어른의 책임이다.

그러니까 내 나이대로 때려라.

그러고는 제가 형틀 위에다 엎어졌습니다. 다들 눈이 뚱그래졌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그 애 엄마가 튀어나와서 울면서 얘기를 합니다.

- 아닙니다.

제가 밭일 하는라고 너무 바빠서 이 애에게 밥을 못해줬습니다.

제 책임입니다.

그 때서야 그 여자 남편되는 애 아버지가 엉엉 울면서 나와서 꿇어앉아요.

- 그게 아닙니다. 제 잘못입니다.

사실은 제가 노름병을 못 고쳐서 집에 있는 쌀까지 다 팔고

그래서 그렇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절 때리세요.

그 마을에 노름이 없으졌으니까 이웃마을까지 가서 노름을 하다가

재산을 다 날린 겁니다.

그러는데 이번엔 이웃집에 있는 사람이 나와서 하는 말이

- 그런줄도 모르고 있은 우리가 잘못입니다.

이웃에서 그렇게 불행한 일이 벌어진 것을 모르고 있은 우리가 책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법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법입니다. 뭔지 압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그 어떤 더러운 사람도 거리끼지 않습니다.

어떤 허물도 아름답게 가리워줄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제가 그 일을 보고는 안되겠다. 이 마을이 물질적으로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되겠다 하고 생각하던 차에

거기서 나오는 축산물이 있었습니다.

뭐냐하니까 소, 돼지, 닭들인데.

그걸 가지고 어디다 파는지 봤더니

거기서 아주 가까운 시장에다 내다파는데 값이 아주 적어요.

그래서 틀림없이 어딘가는 좀 많이 주는데가 있겠다 싶어서 좀 멀리 나가봤습니다.

거기서 한 300km 떨어진 곳에는 아주 큰 시장이 있는데

거기서는 이웃시장에 파는 것보다 세 배나 비쌉니다.

그래서 거기다 팔면 되지 않겠느냐 했더니

거기까지 갈려면 가다가 짐승들이 다 죽을거라는 거에요.

왜, 죽냐니까. 삼백 킬로 짐승들 끌고가면 다 죽을거 아니냐는 거에요.

그러지 말고 트럭 불러서 갖다주면 몇 시간이면 갖다 줄거 아니냐?

이 사람들은 그 생각을 못한 거에요.

제대로 공산주의도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공산주의면 모아서 팔고 해야되는데 다 자기것만 팔고 오니까 안된거지요.

당장 큰 트럭 두 대를 빌려서 일차적으로

돼지, 소를 모아서 팔러가게된겁니다.

첫 사업이니까 나보고도 가자고 그래요. 그럼 가자고 해서

한 차에 세 명씩 여섯 명이 타고 뒤에는 소와 돼지를 잔뜩 싣고 떠났습니다.

한참 가니까 중간쯤 기름넣는 곳이 있어요.

거기서 기름도 넣고 쉬고 있는데

갑자기 어깨가 떡 벌어지고 힘이 센 듯한 청년들 몇이 오더니

- 이 물건 뭐 할거요?

- 이거 우리들이 저기 시장 가지고 가서 팔겁니다.

요만한 쪽지를 주면서 이 상점에 가서 팔라 그래요.

값만 맞으면 팔지요. 하고 들고 왔습니다.

시장에 도착했어요. 굉장히 큰 시장인데..

사업을 제대로 할려면 물건을 팔때는 값을 제일 많이 주는데 팔고

살 때는 제일 싼데서 사야 되잖아요.

기본만 알면 되니까.

찾다보니까 어디가 제일 많이 주길래 거기서 팔았습니다.

조금전에 만났던 사람들이 준 쪽지의 상점에서는 값을 싸게 불러서

안팔고 제일 많이 주는데서 팔았지요.

중국에는 수표 거래가 없습니다.

전부 현찰로 돈을 받으니까 큰 자루에 두 자루가 꽉 찼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큰 돈을 보니까 이야~ 하면서 감탄합니다.

앞에 두 자루를 싣고 뒤 차는 호위를 하면서 두 대가 빈 차로 가면서

휴게소 가서 저녁도 좀 잘 먹고 기름 넣고 들어가야 되겠다 하고 갔습니다.

웬걸, 도중에 한 20 여명 되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람들이 빙 둘러섭니다.

나는 뒷 차 타고 있었는데 뒤에서 보니까 옥신각신 해요.

가보니까 돈을 내라는 거에요.

통행세를....

중국에는 두 가지 세력이 있습니다.

하나는 공식적인 세력이고 또 하나는 비공식적인 세력이 있는데

비공식적인 세력한테 걸린 겁니다.

동네 사람들은 안된다 그러고 난리났지요.

공동재산인데 얼마 정해서 떼 줄 수도 없고 해서 안뺏길려고

다투는데 제가 가서 물었습니다.

- 뭣 때문에 그럽니까?

두목 되는 사람이 앞에 나와서

- 우리가 돈이 필요해서 그럽니다.

- 뭐하는데 쓰실라고 그렇게 필요합니까?

- 뭐, 좋은 일에 쓸라고 그러니까 내놓으시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 내가 보는 성경책에는 누가 부탁하거든

거절하지 말라 그랬으니까 드려야지요.

돈 가져 오라고 해서 두 자루 몽땅 다 줘버렸습니다.

다 가져 가라고.. 그렇지 않아요?

아, 줄바에야 다 주지....

어떻게 계산해서 줄 수도 없잖아요.

그 많은 돈을 헤아릴 수도 없고 그래서 다 가지고 가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같이 갔던 마을 사람들이 깜짝 놀란거지요.

깍아서 조금 줘야지.

그걸 다 주는 법이 어디 있냐는 거에요.

저 분은 지혜는 있는거 같은데 장사는 못하는 모양이다 그래요.

제 첫번째 제자인 촌장인 그분도

이름이 노학이란 분인데 얼굴이 새카맣게 된거에요.

가면 이제 동네 사람들 한테 맞아 죽었다 싶은 거지요.

다 주고 마을로 돌아갑니다. 편안하잖아요.

만약, 안주려고 하다가 싸움이라도 나면

사람이 다칠 수도 있는데 우선 사람을 편안하게 해야지요.

돈 다 주고 나면은 그 사람이 우리한테 시비 걸리 없지않습니까?

그러고 한 30분쯤 달리는데 지프차 두대가 앞에 와서 끼익 서요.

#96 최성식 (기쁨가득)

[간증] 김요석선교사 -10편(천국의 소인) 05/28 20:50 311 line

지프차 두 대가 앞에 와서 끼익 서요.

그 두목하고 아까 그 사람들이에요.

- 왜 쫓아 왔소?

돈 보따리를 도로 내줘요.

- 왜, 이거 도로 가져왔소?

-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해서 내가 이거 못받겠소.

- 무슨, 예감이 이상하길래....?

- 다른 사람은 두들겨 맞아야 돈을 주고, 피를 봐야 돈을 주는데

당신은 서슴치 않고 그것도 깍아달라는 것도 아니고 몽땅 다 주니까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해서 못받겠소.

그러니까, 기분 나빠서 이거 못받겠소. 도로 가져가시오.

그 어떡합니까 도로 주는데, 그래서 받아 가지고 다시 차를 타고 가는데

한 얼마쯤 가는데 갑자기 앞 차가 딱 서요.

막 뛰어내리는 거에요.

무슨 일 났는가 하고 내렸더니.

- 선생님, 큰일 났습니다.

- 왜?

- 돈이 더 왔습니다. 우리 것보다 더 많이 들어 있어요.

- 저 놈들이 이걸 핑계삼아서 우릴 두들겨 패고 차까지 뺏을려는거

아닌지 모른다고, 이거 어떻게 하지요?

하고 안절부절 해요.

- 그래, 그럼 어떡하지.

- 이거 도로 갖다줍시다. 남의 돈 갖다 줍시다.

- 그렇지, 남의 돈 가져오면 안되지. 그 옳은 말이다.

그럼 돌아가서 갖다주자.

도로 그 사람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가니까

- 왜, 왔소?

- 돈이 더 많아져서 그 돈 돌려주려고 왔습니다.

- 참 이상한 사람들이네...

남은 억지로 뺏어가는 판인데. 더 있으면 그냥 가면되지....

- 왜 돈을 더 넣었소?

- 제가 선생을 보니까 아무래도 제가 그 돈을 가지고 있는것 보다는

며칠간 번 건데, 선생께서 그 돈을 쓰시면 훨씬 더 유익할것 같아서

평생 한번 사람 노릇 해볼려고 그랬습니다. 그냥 가져가시오.

그 어떡합니까? 자꾸 가져가라는거. 그냥 들고왔습니다.

집에 오니까 온 동네 사람들 난리가 났지요.

앞으로 소 팔고, 돼지 팔 때는 선생 갑시다.

이건 판 돈 보다 들어오는 돈이 더 많다는 거지요.

집에 들어왔습니다.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오는데 갑자기

노학이라는 그 노인 제자가 두 손을 벌리고는 앞 마당에 콱 엎드러져요.

그러고는 막 엉엉 웁니다. 놀라서

당신 왜 이러냐고 그랬더니

- 선생님, 날 그냥 발로 콱콱 밟아서 때려 주시요.

- 왜 그럽니까?

- 제가 가룟유답니다.

- 아, 가룟유다가 왜 살아왔냐? 갑자기 왜 그럽니까?

- 사실은 제가 아까 선생님을 의심했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원망했습니다. 제자가 스승을 원망하고

의심한다는 것은 배신하는 겁니다. 제가 가룟유다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를 때려 주십시오. 한번 배신하면 열번, 스무번

배신할 수 있는데.. 제가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선생님, 그 뜻을 제가 몰랐습니다.

- 내 뜻이 뭔데?

- 선생님은 먼저 사람 다치지 않기 위해서 아닙니까.

돈이 중요한게 아니고.. 몽땅 다 주면 절대 해칠리가 없지 않습니까.

깍자,깍자 하니까 두들겨 맞고 치고 그렇게 되는거 아닙니까.

제가 선생님 뜻을 몰랐습니다.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사람이 우선이다. 그리고 이 살기 등등한 도둑에게는 전부 다 줄 때

그 사람들 기가 막혀서 손을 못댄단 말이에요.

여러분, 바로 그렇습니다.

아무리 물질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사람만큼 물질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업하면서 왜 실패하는지 압니까?

사람을 경시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을 경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그러셨어요.

"네가 아무리 곳간에 보물을 많이 쌓아놓았을지라도

오늘밤 네 생명을 거둬가면 그 보물이 무슨 소용이 있느뇨"

여러분, 기독교 경제학 1대 원칙이 "사람 중시" 입니다.

그게 사업의 비결인겁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통곡을 하면서 그래요.

그래서 제가.. 아니라고 나는 이렇게 훌륭한 - 정말 회개 금방하는 -

제자가 있어서 오히려 고맙다고...

그러고는 며칠 있는데 웬 손님이 찾아왔어요.

누군지 알아요?

그 두목이 저 한테 찾아온 겁니다.

와서는 대뜸 저한테 무릎을 꿇더니 하는 말이

- 아무리 봐도 선생께서는 무술의 고수 같은데

한 수 가르쳐 주십사고 찾아왔습니다.

뭐 눈에는 뭐가 보인다고..

싸움꾼 눈에는 싸움꾼 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에요.

자기가 여섯 살때 부턴가, 일곱 살 때부터 그 세계에 들어왔답니다.

어릴 때 부터 소매치기부터 시작해갔고 들어와서 한 30년 가까이 그 세계에서

기반을 다져서, 하여간에 싸움이라면 자기를 따를 사람이 없다나 그러면서

사람도 자기 손으로 수십 명을 죽였고 그렇게 했는데 며칠 전 선생님을

딱 만나보니까 보통 고수가 아닌데 한 수 좀 가르쳐 주시오.

그러니까 그 노학이란 분이 하는 말이

- 큰 스승이 그렇게 자네가 한 마디 한다고 들어 주겠는가,

자네 정승을 보이게.

내가 무슨 힘이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 선생은 아무 힘 없으니까 그냥 가거라 그렇게는 못했던 모양이요.

그 노인도 아주 근엄하게 물리쳤지요.

첫 날은 갑디다. 그런데 다음 주 또 왔어요.

- 당장 제가 제자로 삼아달라기는 너무 고귀하신 분이고

제가 가끔 놀러 올테니까 한 수 좀 가르쳐 줬으면 좋겠습니다.

생각나실 때 마다 한번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두 번째 제자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옛날 공산당 이론가에다가 도둑 두목까지 저한테 몰려오게 된 겁니다.

이제 본래 제가 살고 있는 마을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거기는 식구가 참 많습니다.

아주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기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고민거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혼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이혼 상담하러 오는 사람도 없고

자식 걱정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딱 하나 있어요. 배고픈 겁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세상을 떠날 때 하는 말이

- 선생님, 천국가면.. 밥 세끼 먹는 곳이 천국이지요.

- 천국은 밥 세끼 반드시 먹는 곳이다.

그러면 아멘 합니다. 여기는 아무도 아멘 안하네.

세상을 떠날 때 제가 물어봅니다.

-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가장 하고싶고 원하는 소망이 뭐냐?

- 딱 한번만 배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두 끼도 아니고 세 끼도 아니고 딱한 끼만....

그러나, 그렇게 해주지 못합니다. 제 대답은

- 조금 있다가 천국 가면은 얼마든지 첫 날은 많이 먹을 수 있으니까

실컷 먹으라. 거기가면 뭐든지 있다. 즐기라고....

여러분, 이 병은 중국 말로 '마팡빙' 이라 그럽니다.

마귀의 바람으로 얻은 병이라 그래요.

그렇다면 이 병은 절대 낫지 않는 병이라는 거지요.

사실, 이 병이 나면은 영양이 충분히 섭취 되어야 되고

약이 충분히 공급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야 스톱이 되어서

계속 이겨나가는데.... 그렇지 못하면 계속 험악하게 온 몸이

썩어서 들어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손가락이 떨어지고, 손목이 잘라지고, 팔뚝이 잘라지고,

또 이 어깨까지 다 잘라집니다. 두 다리까지 다 잘라지고 몸퉁이와

머리만 남게 됩니다. 그 머리에 눈알까지 그냥 붙어 있으면 좋은데

눈꺼풀이 썩게 되면 눈알까지 다 떨어져 버립니다.

코가 떨어지고 귀가 떨어지고 얼굴에는 아무것도 남는게 없습니다.

여기서 저기로 갈려면 걸어가야 되는데 발이 없으니까 기어갑니다.

뭘로 깁니까? 배로 밖에 길 수 없습니다.

양팔이 없고 두 다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세상을 떠날 날이 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아는 모양이요.

죽을 때 되면은 저 한테로 와서 제 옆에서 죽기를 원합니다.

저는 가는 곳마다 사택이 많습니다.

왜냐하니까 이십명이나 삼십명이 되는 팔다리 없는 사람들

제가 매일 하루씩 돌아가면서 잡니다.

여기서 하룻밤 자고 저기서 하룻밤 잡니다.

자다보면 누가 변을 보게 되면 제가 일어나서 갖다가 변도 뉘고

소변도 보게하고 돌아옵니다. 그렇게 자다가 몇 번씩 깨다가

어떤 날은 하도 피곤해서 나도 모르게 엎어져서 자니까

그 죽게 된 것을 아는 그 사람이.... 사람 죽을 때는

꼭 압니다. 제가 그걸 늘 경험했어요.

배로 기어서 제가 있는 곳으로 옵니다.

몇 시간을 그렇게 왔겠지요. 그러다가는 지쳐서

제가 이렇게 자면은 제 팔뚝을 베고서 쓰러져 잡니다.

그러다가 아침에 깨니까 여기 세명, 저기 세명, 또 아래에다

몇 명이 누워갔고 죽어있었습니다. 다 세상을 떠났어요.

제가 그걸 보고는 너무 기가막혀서 그 때 부터는 밤에 잘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니까, 그 사람들 마지막 소원이, 앉아서 하나님 앞에 가는 겁니다.

엎어지니까 앉아 있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두 다리가 없고 팔이 없으니까 지탱할 수 없습니다.

- 하나님 앞에 가는데 누워서 갈 수 없으니까 저를 좀 안아 주세요.

그래서 안겨서 세상을 떠납니다.

한 번은 제가 다른 마을에 갔다가 몇 달 만에 돌아오는데 거기 촌장이

그럽니다.

- 선생님, 큰일 났습니다.

한 사람이 있는데 죽었나 싶어서 파묻을려고 들고 나오면

벌떡 일어난다는 거에요. 또 죽었나하고 보면은 일어나고

그래서, 너 왜 안죽냐? 하고 물었더니

- 선생님 올 때까지는 못 죽는다는 거에요.

그래 제가 도착하니까 빨리 저 사람한테 가보라고.

벌써 다 썩었는데 안죽는다는 거요. 그래서 가봤습니다.

그 사람이 벌떡 일어나요.

- 왜, 날 그렇게 찾나?

- 선생님, 제가 하나님 나라에 가기 전에 딱 세 가지만

물어보고 가야되겠습니다.

- 뭐냐?

- 나같이 이렇게 추한데, 더러운데....

우리 부모님도 날 버렸는데.... 하나님께서 외면하면 어떡합니까?

-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널 기쁘게 받아 줄거다.

진짜 부모님은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염려하지 마라.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다.

- 두 번째는 그래도 내가 하나님 모르는데

하나님 날 알 수도 없으니까...

선생님 이름 써서 소개장을 하나 써주시오.

그러면, 제가 선생 이름 쓰인 소개장 가슴에 품고 가서 보이겠습니다.

여러분, 이런 큰 영광이 어디있습니까.

아, 내 이름 쓴 소개장 가져가서

"하나님 이 사람 천국 갈 자격 있으니 받아주시오"

그렇게 쓰달라는 겁니다.

그 때 제가 그랬습니다.

- 그거 필요없다.

하나님 벌써 알고 계신다.

당신 요말 하는거 까지 지금 듣고 계신다.

- 그렇지만 내가 너무 이렇게 몰골이 사나운데

거기가서 하나님하고 손 붙잡고 한번 손이라도 잡아야 되는데

이거 손이 없어서 어떡하지요?

- 그런 염려하지 마라.

당신이 천국에 들어서는 순간 당신은 변화된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팔이 생기고 손가락이 생기고 눈이 생기고 머리가 생기고

발이 생긴다. 그게 천국이다.

여러분, 천국이 바로 그렇습니다.

천국에는 병이 없습니다. 늙지 않습니다.

영원히 건강하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는 곳입니다.

그렇게 변화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는 가장 거룩한 모습으로 의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얼마나 좋은 곳입니까?

그 때 이 사람이 갑자기.... 요만큼 잘라진 팔뚝이 위로 올라갑니다.

만세 부르듯이 올라가면서

- 아! 선생님.

날 놓아주세요.

하늘이 열리면서 빛이 나오면서 큰 손이 제 손을 잡습니다.

그러고는 세상 떠났습니다. 그 세 마디 외치고.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옆에 있는 사람까지 다 은혜를 받는 겁니다.

저는 죽음을 통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전 늘 하나님 나라 가는 모습을 보면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천대받고 아무도 보지 않으려고

외면당했던 그 사람이지만은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보다도

더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자가 세례요한인데 그 보다 더 큰 자는 누구냐?

천국에서 제일 적은 자가 그 보다 더 크다.

천국에 들어서면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위대한 사람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그걸 믿지 않아요. 이 사람들이.

- 당신, 천국에 가면 모택동 동지보다 더 높다고 그랬더니

- 아-! 그럴리가 있겠냐고?

그런 사람들이 이제는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보면은 그곳은 지옥같은 곳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지옥같은 곳에서 천국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여기에 와보니까 한 달여 되도록 지나면서 이 곳을 보니까

이곳은 정말 제 눈으로 보기에 천국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사는 분들도 다들 천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과연 하나님 앞에 나도 천삽니다. 그렇게 자신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천국에 천사가 없다면 그건 천국이 아니지요.

천국에 천사가 없다면 그게 어떻게 천국일 수 있습니까?

그건 지옥밖에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떤 오아시스인지 신기루인지 모릅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천국같은 모습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이거 조심해야 됩니다.

사람이 악하고 악하게 되면 아무리 에덴동산

같은 곳도 지옥으로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미국 땅 보세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먹을 것 풍부하고 얼마나 좋습니까?

아마 그 사람들 여기 와보면 여기가 천국이라 그럴겁니다. 확실해요.

그런데 그 천국 같은 곳에서 과연 여러분 천국 같은 생활 하십니까?

여러분, 선교해야 되겠다. 땅끝까지 전도해야 된다 하지만은

여러분, 가장 귀한 전도가 뭔지 압니까?

제가 그 비결부터 한번 가르켜 드릴께요.

어떻게 하면 전세계를 복음화 시킬 수 있는가?

#97 최성식 (기쁨가득)

[간증] 김요석선교사 -11편(신비로운하나님 05/28 20:54 298 line

어떻게 하면 전세계를 복음화 시킬 수 있는가?

이 미국 땅을 전부 다 하나님 나라를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달려있습니다.

제가 그 예를 들지요.

로마가 기독교국이 되기 전에 아주 다신교였습니다.

로마가 국교로 될 그 당시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에 기독교 인구는

전 인구의 3%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황제 칙령이 내려서 기독교 국가로 변했습니다.

왜 그렇게 된지 압니까?

당시에 호화찬란했던 그 로마 문명에 물질의 부가 놀랄만큼 컸습니다.

요새 미국 같을지 모릅니다. 정말 풍부했습니다.

노예도 많았고 부자도 참 잘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나중에 왕족들 귀족들이 아들, 딸을 시집장가

보낼려고 가만 보니까....

대개 격이 맞게 혼인을 시키지 않습니까?

재벌집은 재벌집하고, 권력층은 권력층하고

찾아보니까 마땅한 며느리감이 안보이는 겁니다.

귀족집의 딸, 왕족집의 딸들 보니까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아주 더러운 처녀들입니다.

제대로 처녀같은 처녀가 없는 겁니다.

사윗감 고를려니까 또 그래요.

그래서 왕족들 귀족들이 가만히 생각하다가

그러면 이 땅에서 정말 순결하고 깨끗한 며느리감이 어디있는가

하고 찾았더니놀랍게도 그렇게 박해받고

업신여김 받던 그리스도인 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딸들은 순결하다 깨끗하다.

몸만 깨끗한 것이 아니고 마음도 깨긋하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깨끗하다.

그렇게 소문이 난겁니다.

과연, 만나보니 그렇거든요.

귀족집에서 왕족집에서 혼사를 이루기 위해 청혼을 합니다.

저쪽에서는 안할려고 그러지요. 그렇지만 강제로라도 데리고 온겁니다.

딸을 데려오고 또 사위도 삼게 되고 그렇게 된겁니다.

강제로 결혼을 한 이 그리스도인 처녀가 귀족 집, 왕족집에 시집을 와서

아이를 낳게 됩니다. 아이를 뱃속에 갖게 되었을 때부터

하나님께 기도 합니다. 남편은 믿지 않지만

우리 시부모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지만

이 아기만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뱃속에서 부터 기도했습니다.

아기는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인이 되버린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한 대가 지나고, 두 대가 지나고, 삼 대....

이렇게 백 몇 년이 지나니까

당시 왕족, 귀족이 전부 그리스도인이 되버린겁니다.

황제까지도, 황후까지도 그리스도인이 되버렸습니다.

그래서 국교가 된겁니다.

완전히 복음화가 이루어 졌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와 똑같으리라고 봅니다.

여러분 이 성경에서는 과거라는 것이 없습니다. 항상 현재입니다.

항상 같은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세계 복음화를 이루는 것은 선교사가 가서 할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됩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하고

세상 사람들 보기에 깨끗하다면

얼마가지 않아서 완전 복음화는 문제 없으리라 봅니다.

그렇지 않아요?

온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딸은 아름답고 깨끗하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아들은 훌륭한 사윗감이다. 그렇게 되니까 얼마나

쉬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 가정에 여러분 자녀가 앞으로 이 땅을 복음화 하느냐 못하느냐는

여기에 달렸습니다. 그것은 먼저 여러분 부모들이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먼저 인격자가 된 후에 한 단계 높은 거라는 겁니다.

이 사탄의 이 유혹은 타협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이것은 또한 자기자신을 불신하고 하나님에 대한 그 소망을 버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함으로써 정말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그런 유혹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복종으로 대항해서이겼다는 사실입니다.

한번은 당 간부에게 나도 그런 타협안을 받아봤습니다.

당 간부가 하는 말이

- 당신이 지금 하는 일은 내가 눈 감아 주니까 가능한데

당신은 지금 굉장한 세력과 싸우고 있는데

1 대 16억으로 싸운다는 거에요.

그래 무슨 말인가 했더니, 중국 공산당하고 나하고 싸운다는 거요.

왜냐하니까 중국 공산당이 하지 말라는걸 하고 있으니까

거기에 대한 반대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러지 말고 내가 당신이 건강한 사람 마을에 가서

일 하는 것은 보호해주고 절대적으로 눈감아 줄 테니까,

거기서는 나오는게 어떻겠는가?

그러면 당신이 가서 배고프게 고생하지 않아도 되고

앞으로 당신 가만 보니까 그 병에 전염되어 곤란할

수 도 있으니까 어떻게 하겠느냐고..

참 기가막힌 타협안입니다. 요런게 딱 걸리거든요.

제가 한참 생각하는 척 하면서 그랬습니다.

- 이 보시라고, 내가 여기온 것은 성한 사람들 위해서 여기 온게 아니라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 위해서 왔는데, 내 목적한 바가 그건데 나는 이건

안해도 좋아. 이 성한 사람들 위해서는 딴 사람이 얼마든지 와서 할 테니까

여기 놔두고 난 그냥 거기 들어가 있겠다고.

그랬더니 그 사람 하는 말이 나중에 후회 할 건데 하면서 협박도 하면서

물러났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이같이 사탄으로 부터 시험받을 때가

많습니다.

너무 그렇게 말씀대로 하지 말고, 너무 그렇게 성경적으로 신앙대로

따라가지 말고, 좀 적당하게 타협하면서도 따라갈 수 있지 않느냐!

이거얼마나 엄청난 말입니까? 적당히 하면은......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때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세가지 유혹이라는 것은 항상 우리가 당할 것을

예수님이 표본으로 받은 유혹인줄 압니다.

우리 인생 살아가면서 이같은 일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한번은 제가 기차를 타고 다른 성으로 이동하는데 긴 시간을 여행하니까

또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국 기차에 대해서 좀 이야기 해야되겠네요.

사람이 꽤 많습니다.꽉 차요. 화장실 까지 꽉 찹니다.

그러니까 화장실 볼일 보러 가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탈 때 깡통을 하나 큼직한걸로 들고 탑니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다 그래요. 그 자리에서 일볼거 다 보고

창문 열고 휙 던져 버리면 되니까.... 떨구고는 가고 급하면

또 볼일 보고 그렇게 갑니다.

그런데 문 열 때 좀 조심해야 되지요.

앞 칸에서 잘못 던져 버리면 그 다음 칸으로 떨어지니까.

처음엔 제가 그걸 몰랐는데

중국 사람이 문을 열 때 상당히 신중하게 살며시 열길래

저 사람이 느려서 그런가 보다 했더니 아니에요.

금방 탁 닫고 나니까 밖에서 탁 떨어지는 소리가 나요.

그렇게 기차를 이용하는데 북경에서 타면은 한 8일간을 와야 됩니다.

그러니 차 안에 냄새는 고약하지요.

여자는 여자대로 이렇게 앉아서 싸고..그러니까

거기는 꼭 목욕탕 같애요. 왜냐하면 일어나면 또 자리 뺏기거든

누가 와서 앉으니까 나갈 수도 없고 들어올 수도 없고 꼼짝없이 앉아있게

됩니다.

그런 판인데 지루하니까 내가 성경을 읽고 있었어요.

앞에 웬 아주머니가 타고 앉았는데 자꾸 날 힐끔힐끔 보는 거요.

갑자기 말문을 턱 열더니

- 아, 선생 그 뭐가재미있어서 하루종일 봅니까?

중국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산다 그러면 좋아합니다.

- 아, 이 책에는 잘 먹고 잘 사는 얘기가 있어서 봅니다.

- 아, 그러면 나도 좀 들려달라고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됩니까.

중국에는 전도를 함부로 못합니다.

그렇지만 상대방이 물으면 대답은 할 수 있거든요.

그래요 그럼 내 얘기 하지요. 얼마나 갑니까 했더니 하루 더 간데요.

그럼 시간은 충분하니까 얘기 하겠다고 , 이제 그 때부터 성경공부

시작한겁니다. 창세기 부터 시작했어요.

에덴의 동산이 나오고..... 이야기 성경으로 쭉 풀어 나갔는데

구약이 끝나기 전에 내릴 때가 되었어요. 선생, 다음에 언제 만나면

계속 합시다 하고 그 아주머니가 내렸어요. 이름도 성도 모르고 헤어졌어요.

그 다음 해에 기차를 타고 어디를 가게 되었는데 이 기차가 가다가 도중에

그냥 섰어요. 몇 시간 후에 간다, 다음에 간다 말도 없이 섰어요.

그래서 기관사한테 물어보니까 내일 아침쯤 떠난다 그래요.

그 추운 때니까. 가서 저녁먹고 어디서 자고 들어로래요.

가차 안에는 불도 안 들어오고 하니까.

사람들이 다 내렸습니다.

나도 내려서 어디가서 밥을 먹을까 하고 어영부영 하는데

저 쪽에서 막 소리를 치면서 부르는 소리가 나요.

난 여기 평생 처음 온 사람이니까, 나는 아니겠지 하고

음식점을 찾고 있는데 갑자기 웬 사람이 제 허리를 꽉 껴안아요.

보니까 웬 부인이에요.

- 당신, 누군데 이러오?

- 아니, 선생 날 모르겠소.

- 모르겠다고,

- 아, 그 때 저... 아담 이야기 해 주고 그런 사람 아니냐고..

가만 보니까 알듯 하기도 하고 잠시 만났던 사람이라

워낙 오래되어서 모르겠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내 앞에 앉아서 이야기 듣던 그 아주머니에요.

나 만날라고 기차만 타면 맨날 첫칸부터 마지막 칸 까지

다 돌아다녔다는 거에요. 그래서 왜 그랬는가 했더니

이 사람이 이 성, 저 성을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행상인이에요.

이 성에서 받아서는 저 성에 팔고, 여기것은 또 저기다 팔고

그렇게 한번 나가면 몇 달 씩 돌아다니는 사람인데

외부에서 온 행상인이 오면 얘기를 듣고 싶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오게 되면은 이야기를 잘 하는데

날 만난 이후로는 나한테 들은 성경 이야기만 한 거에요.

뭐라고 했냐니까?

아담이 하와하고 결혼했는데 첫 날 밤에 뭐가 잘못되서

큰 할아버지가 집에서 쫓아냈다고..

그런식으로 이야기를 재미있게 엮어 나가니까 사람들이 자꾸 그 얘기를

하라고 그래서, 계속 하다보니까 이야기 밑천이 떨어진거에요.

날 만나서 들어야 계속 이어지는데....

그래서 기차만 타면 기차 안을 뒤지면서 찾았다는 거에요.

못만나니까 자기가 기도까지 했다고 그래요.

당신 하나님이 누군지 몰라도 좀 만나게 해달라고...

그리고 1년 만에 만난겁니다.

자기 집으로 가자고 그래요.

기차가 멈춰 선 그 동네가 바로 자기 집인 겁니다.

가니까 아,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는데 한 이 백명 가량이 몰려왔어요.

이 아주머니가 어디 나갔다 오면 동네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으러

이 집으로 오는 거에요. 나한테 성경 이야기 듣고 나서는

그 때부터 일년 내내 그것만 이야기 한겁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듣고 또 다른 얘기 없냐고 할 판인데 절 만난 거지요.

잘 되었다고 선생이 직접하라고......

그러고는 동네 사람들을 모아온 겁니다.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쉬지않고 열 네 시간 성경공부를

그 때 처음 해봤습니다. 그날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아침

아홉시 까지 모두 앉아서 제 얘기를 들어요.

창세기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이야기 해 나가니까

자기들이 들었던 내용하고 좀 다르니까

- 그 아줌마 이야기 한거 틀렸지 않냐고....

그렇게 공부를 했는데 사람들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거기가 바로 교회가 되어 버렸어요.

세례도 안받고 성경도 모르던 사람이..

아담과 하와가 결혼해서 뭐가 잘못돼서 쫓겨났다고 이야기 했던 사람이

그 교회 지도자가 된겁니다.

성경을 하나 주면서 예전처럼 이야기 하지말고

그냥 처음부터 죽죽 읽어나가라고 그러다 보면 다 외워지니까

그렇게 하라고.

제게 몇 가지를 물어요.

사람 죽으면 어떻게 해줘야 되는지....

그냥 묻어니까 섭섭하더래요.

제가 어떻게 하라 그러고 기도문을 적어줬습니다.

또 젊은 애들이 혼인을 하는데 그냥 당서기 앞에 가서 선서 하는데

그게 좀 싱겁대요.

거기 갔다와서 뭔가 하나님 한테 알리는게 없냐고..

그래서 그것도 가르쳐 주고 기도문을 적어줬습니다.

세례라는게 있다니까 ....

그거 벼슬인데 받아야지요 합니다.

난 또 세례가 벼슬이라는 사람 처음 봤어요.

그래서 이거는 함부로 받는게 아니고 시험을 쳐야 한다 하니까

시험을 어떻게 치냐 해서... 당신 특별히 봐줘서 시험은 면제 하는데

성경을 처음 부터 끝까지 네 번 큰 소리로 소리내서 읽어라.

여러분, 바로 그렇습니다. 속으로 그냥 웅웅하고 읽는거 하고

소리내서 읽는거 하고 다릅니다. 한번 성경을 소리내서 읽어보면 전연 달라요.

마음 속으로 읽는 것, 두번 읽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렇게 네 번을 읽고, 마지막 한 번은 당신 친필로 한 권을 성경을 쓰라고.

그 때 무시험으로 세례를 주겠다.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겠다고. 자기는 자신 있다는 거에요.

기차타고 계속 읽어대면 되니까....

소리 크게 하면 다른 사람 시끄럽지 않냐고 했더니

소리내서 읽으면 옆에 사람 다 들으니까 자기가 이야기 책 읽어준다고

그러면 된다는 거에요.

그렇게 해서 교회가 하나 생기게 된겁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참 신비로워요.

이처럼 전도는 미루면 안됩니다. 당장에 해야되는 거에요.

하나님의 선이란 것은 미루면 안됩니다.

이 선행이라는거 내 돈 좀 벌면 하지요.

아, 지금 내가 몸이 피곤하니까 한 숨 자고 나서 하지요.

그 때는 벌써 늦었습니다.

선한 일과 사랑과 전도는 당장 해야하는 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남편 눈치만 보고 있다가 다음에 기분 좋을 때 전도하지 그러고 있으면

이미 늦은 겁니다. 그 순간에 성령이 함께 역사하실지 어떻게 압니까?

여러분, 성령의 역사는 진실되게 행하는 자에게 반드시 나타납니다.

은혜의 역사도 진실되게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나타난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제가 혼난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그거 이야기하고 끝내야겠어요.

#98 최성식 (기쁨가득)

[간증] 김요석선교사 -마지막(사랑의파워) 05/28 20:56 205 line

제가 혼난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그거 이야기하고 끝내야겠어요.

95년 12월인데,

집에 있는데 갑자기 배가 이상해요.

몇 시간을 계속 아픈 거에요. 저도 참을성이 있는 사람인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정도로 배가 아파요. 갑자기 생각에

아하! 이게 맹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맹장 걸릴리가 없는데 하고 생각을 하는데

아, 걸릴 이유가 딱 하나 있는 겁니다.

제가 그 사람들이 쓰러져서 제 팔을 베고 옆에서 죽을 때,

죽을 때되서 죽었는가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굶어 죽었어요.

허기가 져서... 먹을게 없는 겁니다.

풀도 뜯다가 겨울이 되어서 말라버리니까 그것도 안되는 거에요.

그래서 생각하다가 옛날, 어른들 말에 땅만 파면 먹을게 있다고

그래서 땅을 한 번 파봤습니다. 한 오륙십 센티 팠더니 땅 속에서

보드라운 흙이 나와요.

제 생각에 갑자기 이게 밀가루 같다는 생각이 든겁니다. 그래서

그걸 반죽을 해갔고 마른 풀 하고 섞어서 자꾸 몇 시간을 반죽

했더니 쫄깃쫄깃 해져요. 그걸 갖다가 수제비를 만들었어요.

그걸 줬더니, 딴 사람은 맛있다고 잘 먹는데 나는 얼굴이 붓고

이상해요. 몇 번 연습하니까 그 다음에는 괜찮아요.

그걸 한 덩어리 먹으니까 위가 든든해요.

아마 그래서 맹장이 걸렸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튼 내가 생각할 때는 맹장이에요.

제가 나귀가 한 마리 있습니다.

그 나귀는 다른 마을을 찾아가는데 그 마을에 있는

어떤 사람이 나귀 세끼를 한 마리 죽일려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하도 불쌍해서

- 여보시오. 그거 죽이지 말고 나한테 파시오.

- 죽일려는 동물은 안파는데 그냥 버릴테니까 당신 가져가시오.

- 왜, 죽일려고 그럽니까?

- 성질이 고약해서 죽이려 그럽니다.

나한테 오더니 성질이 왜 그렇게 좋은지 말도 잘 듣고 좋아요.

우리나라 말을 할려니 대상이 없었는데 잘 되었다고

그 나귀 이름을 돌쇠로 지었습니다.

돌쇠야! 돌쇠야! 오라 그러면 오고, 다리 좀 주물러 달라 그러면

다리도 주물러 주고, 어깨도 두들겨 달라 그러면 두들겨 주고

한국말은 잘 알아 들어요. 그런데 중국말로 하면 못 알아 들어요.

제가 하도 배가 아파서 돌쇠를 불렀습니다.

- 내가 지금 배가 아프다. 그러니까 알아듣는듯 해요.

엎드리길래 겨우 올라타고 나귀를 타고 여덟 시간을 나왔습니다.

배는 찢어지게 아픈데 그 마을에 갔더니 병원도 없고

의사도 없어요. 맹장은 수술해야 되는데.

보니까 침 놓는 사람이 하나있고,

동물 치료하는 수의사가 한 사람 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사람은 제대로 배운 수의사가 아니고

그냥 거들다가 배운 사람이에요.

의사라고 생각하고 들어가서

- 내가 맹장이니까 수술을 해야되는데 배를 찢어서 좀 해주시오.

그 사람이 덜덜 떨면서 하는 말이

- 나는 돼지 배하고 소 배는 열어서 봤는데 사람 배는 안 열어봤기 때문에

못하겠다는 거에요.

침술 놓는 사람한테

- 당신은 할 수 있소?

- 나도 못합니다.

- 그럼 마취약은 있습니까?

- 그것도 없습니다.

제가 들은게 있어서 침으로 마취를 해보라니까

자기는 한 번도 안해봤지만 그건 해보겠대요.

대강 혈을 잡아서 마취를 했습니다.

그 수의사는 덜덜 떨면서 안하는 겁니다.

- 수술 칼 있소?

- 오랫동안 쓰지 않았는데요.

하면서 숫돌에 자꾸 갈아요.

제가 그랬지요.

- 내가 의사니까 그리고 당신 옆에 보조가 두 사람 있으니까

걱정말고 시작하시오.

그 사람이 보조가 누가 있나 해서 둘러보니까 아무도 없거든.

- 어디있소? 안보이는데...

- 내 눈에는 보이니까 괜찮다고 하라고.

보통 오른쪽에 맹장이 있으니까 이쪽을 째라고...

내가 의사라고 그러니까

- 그럼 당신 시키는대로 하겠소.

- 그러라고.

옆구리를 찢고 창자을 꺼냈는데 어느건지 모르겠다는 거에요.

옆으로 볼려니까 나도 안보이고.. 그럼 안되겠다 도로 집어넣고

가운데를 길쭉하게 째라.... 나도 볼 수 있게

그러니 그 사람이 배꼽 위 부터 쭉 쨌어요.

조금 적당히 쨌으면 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까 맹장은 조그맣다고 그러는데 알아야지,

나도 봐야되니까 그렇게 찢었습니다.

그 참 속이 이상하게 생겼습디다.

저보고 이겁니까, 저겁니까? 그래요.

나도 모르지 어느건지.. 그건 아닌거 같다. 그것도 아니거 같다.

그러다가 뭐가 부패된 듯한게 조그만게 달려나와요.

아 그거 같다. 잘라버려라.

잘라내고 내장을 도로 집어넣었습니다.

난 아무 실로나 배를 끌어매면 되는 줄 알았어요.

나중에 알았지만 수술하는데 실이 다르다고 그러대요.

이불 꿰매는 굵은 실로, 바늘을가지고 대충 끌어맨 겁니다.

그게 붙어갖고 아물지가 않아요. 그 때가 겨울인데,

날씨는 춥고 배는 열었다 닫으니까 얼어오는거 같고.

거기다 무슨 약을 쓰야 되는데 나중에 알았지요.

피는 멈췄지만 물이 줄줄나고 그래요.

할 수 없이 나귀를 타고 어두워 가는데 우리 마을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돌아와서 있는데 이 삼일 후에

눈도 오고 하는데 다리가 얼어오기 시작합니다.

설상가상이 그 말인거 같애요.

배는 찢어졌지요. 두 다리는 점점 얼어옵니다.

하도 기가막혀서 들어가서 드러누워있는데 꼼짝을 못하는 겁니다.

다리가 점점 부어오르면서 거기서 누런 진물이 나오고 퉁퉁 붓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까 다리를 잘라내야 될 정도로 그렇게 심각했습니다.

아,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오더니 좋아해요.

- 왜, 좋아하느냐? 했더니

- 당신도 우리같이 된거 같다고...

두 다리 잘라지면 이제 어디 안가고

우리하고 평생 살테니까 좋다는 거에요.

그런데 내가 너무 괴로와 하니까 보더니 안됐던지

팔다리 없는 사람들이 기어와서 제 다리를 맛사지 하는 겁니다.

팔다리 없으니까 얼굴을 갖다가 그냥 비벼 댑니다.

팔이라도 좀 있는 사람은 팔로 비비는데 거기서 뭐가 나옵니까?

자기 몸에서 나오는 피고름이 그냥 묻어서 제 발을 감싸기 시작합니다.

제 찢어진 배 안에도 비벼대니까

배 위에도 이만큼 고름으로 덮였습니다.

나중에 굳어지니까 그것이 깁스처럼 그렇게 말라요.

그런데 그 부풀어 오른 배가 점점 가라앉는 겁니다.

그 두꺼워진 다리도점점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나중에 그게 장화처럼 벗겨져요. 무릎까지 이렇게 길게..

벗겨지니까 이만큼 두꺼운데..

피고름 장화! 그 때 처음 봤습니다.

배에서도 그걸 뜯어내 봤습니다. 깨끗해졌어요.

여러분 제가 그 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가장 더러운 문둥이 고름으로도

최고의 명약을 만드는구나!

그 안에 이들의 사랑이 있기에......

아무리 더러운 것도 사랑과 함께라면

최고의 명약이 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놀라운 것을 하나 깨달았습니다.

내가 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푼다고 왔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어떤 분은 제가 예수님과 닮아간다고 그럽니다.

예수님처럼 산다고 그러지만 사실 그렇지 못합니다.

그 때 제가 깨달은 겁니다.

예수님과 저와의 차이점이 바로 이거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천년 전에 많은 문둥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저는 문둥병자가 제 다리와 배에서 나는

고름을 깨끗이 고쳤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주님과 저의 차이라는 것을 그 때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오히려 이 문둥병자 보다 더 아랫사람이

아닌가.

오히려 내가 그들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가 그들에게 도움을 받았구나!

사실로 그렇습니다. 제가 진실로 고백하는 것은

제가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그 때 비로소 주님이 제게 하신

그 일의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이렇게 겸손을 배우라는 거구나.

내가 가장 낮아져야 되겠다.

주님의 십자가 지기 위해서는 가장 낮은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영적으로건 육적으로건 가장 낮은 사람이 되어야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질 수 있겠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뭔지 압니까?

성령의 역사가 뭔지 압니까?

그것은 사랑의 역사입니다.

사랑을 하기에 그 더러운 고름이 가장 귀한 약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기에 교만한 사람이 가장 겸손하고 착한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사랑하니까

하나님께서 쓰시고 그 고귀한 십자가 까지 대신지게 맡기셨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주님의 사랑, 그 사랑을 받아서 실천할 때마다

그 사랑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 은혜의 역사 반드시 나타날줄로

믿습니다.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



김요석 목사



   김요석 목사님은 15년간 독일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한국에 귀국하여 대학 강단에 서지만 영적인 갈등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어떤 목사님의 소개로 나환자 정착촌인 영호마을의 한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합니다.

이글은 영호를 방문하였다가 그들의 삶에 감동한 김요석 목사님의 독일 친구인 클라우드-디터 그래스가 1991년에 독일에 먼저 소개하였습니다.

김요석 목사님은 10년간 영호교회에서 사역하시다가 중국으로 떠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 연락이 끊겨 소식을 아는 분이 없는 상태이기에 부득이 독일어판을 번역하여 출판하게 된 것을 옮깁니다.

은혜가 되시길 바랍니다.


--------------------


믿음이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음과 같이 진리의 열매를 위하여 스스로 죽는 것을 뜻합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으나 영원히 살아 있는 진리와 목숨을 맞바꾸는 자들을 우리는 믿는 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의 글들]은 평생, 혹은 가장 귀한 순간에 진리를 위하여 죽거나 죽기를 결단하는 참 믿는 이들의, 참 믿는 이들을 위한, 참 믿음의 글입니다.


--------------------


글을 시작하면서

제가 섬기는 교회의 지체들은 영호라는 작은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이 마을은 서울에서 남쪽으로 약6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으로서, 주민이 250명 정도 됩니다.

영호는 아주 특이한 곳입니다. 이곳을 설명하려면 먼저 다른 이야기부터 해야할 것 같군요. 한국에는 아직도 나병이라는 무서운 병이 있는데, 나병이 양성으로 나타난 사람들은 소록도라는 섬에 강제 수용됩니다. 소록도에는 나병 환자들을 치료하는 의료시설이 있지요.

그곳에서 병이 호전되어 양성에서 음성으로 바뀐 사람들은 육지로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두 마을 중에서 한 곳을 선택하게 되는데, 저는 그중 한 마을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사람들을 만날 때 으레 손부터 감춥니다. 비틀려 있거나 아예 끊어져 나간 손가락이 남의 눈에 뜨이기라도 하면 나병을 앓았다는 사실이 금세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그들의 약한 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김요석


저는 제 친구인 김요석 목사의 교회에서 한 달 동안 함께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이야기해준 것과 우리가 체험한 것 가운데 몇 가지를 두 사람이 함께 쓰기로 했습니다. 나환자 정착촌에서 함께 살면서 겪은 김요석 목사의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김광운 화백은 몇몇 장면을 삽화로 그려 주셨습니다.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클라우스-디터 그래스(Klaus-Dieter Gress)

--------------------

1. 만남


오랜만에 고향인 한국에 돌아왔다.
독일에서 공부한지 15년째 되던 해에 서울에 있는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돌아온 것이다.
나는 한 학기 동안 신학교에서 강의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분열된 감정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러한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나님에 관한 이론적인 질문에는 언제든지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학생들에게 별 도움이 될 수 없음을 느꼈다.
그들은 여러 가지를 묻고 싶어 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신학 이론으로는 그 문제들에 대해 거의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주말에 시간을 내서 목사님이 없는 작은 교회를 돌보고 있었다.
그들은 내게 배운 신학을 그곳에서 늘 적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교인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무미건조한 신학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만족할 수 없었다.
나는 인간을 친히 만나기 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 문제를 생각하면 할수록 나의 체험보다는 교리가 더 많이 떠올랐다.
이러한 불만족스러운 마음은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이것이 내 얼굴에 씌어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나이 많으신 목사님 한 분이 다짜고짜 다음과 같이 물으셨다.

"교수님은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 목사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알고 싶으시다면 교수직에 머물러 있지만 말고 차라리 무슨 일을 해보십시오!"

그러면서 목사님은 한 가지 일을 제안하셨다.

"남부 지방에 제가 아는 작은 마을이 하나 있는데, 교회에 목사님이 안 계십니다.
그곳에 가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결정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마침내 교수직이라는 좋은 직장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다.
책 속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람을 직접 만나 악수를 나누듯이, 그렇게 만나고 싶었다.

목사님은 내게 그 마을의 주소를 건네 주셨다.
어느 토요일,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그 마을을 향해 떠났다.


긴 여행이었다.
영호에 도착하자 날이 벌써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두서너 사람이 나를 마중 나왔다.
그 사람들의 얼굴 생김이 특이한 것 같았지만 가로등 불빛으로는 자세히 볼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새로 온 목사입니다."

나는 스스로를 소개했다.
그 사람들은 별말 없이 어떤 작은 방으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이것이 내 방인가?
방에는 가구가 없었을 뿐 아니라 벽은 더러웠으며 작은 벌레들이 여기저기 기어 다니고 있었다.
방바닥에는 밤을 지낼 만한 이불 한 채 깔려 있지 않았다.
나는 너무 피곤해서 옷을 입은 채로 잠들어 버렸다.

주일 아침 8시 30분이 되자 교회 종소리가 작게 두 번 울렸다.
오래된 교회당에 가보니 아이들이 스무 명 가량 모여 있었다.
함께 찬송을 부르고 나서 어린이예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첫줄에 앉아 있는 꼬마가 계속 콧물을 훌쩍이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내 눈에 거슬렸다.

"얘야, 이리 와 봐. 내가 코 닦어줄게!"

코를 닦아주고 나서 다시 예수님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다른 사내아이 하나가 코를 훌쩍였다.
못들은 척하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소리였다.
결국 나는 스무 명의 코를 모두 닦어주어야 했다.
아이들이 재미있다는 듯이 삐죽삐죽 웃었다.

첫 어린이예배는 그렇게 끝났다.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대예배를 기다렸다.
마침내 시간이 되어 강대상 앞에 섰다.
몇몇 사람들이 머뭇거리며 교회당 안에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마치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이 내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왜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걸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교회 마루바닥 맨 앞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눈길이 그 할머니에게 닿는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모습이 저럴 수도 있단 말인가!
할머니의 얼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구멍 다섯 개뿐이었다.
눈도, 코도, 입술도 없었다.
양손조차 다 끊어져 나가고 없었다.
내가 나환자촌에 왔긴 왔구나!

예배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오직 한 가지 생각만 망치질하듯 나를 두들겨대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여기를 떠날 수 있을까?'

처음에는 예배 후에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작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예배가 끝난 뒤에 일부러 천천히 설교원고를 정돈하였다.
내가 늑장부리는 동안 사람들이 전부 돌아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마침내 교회 문을 닫으려고 강대상에서 내려오는데, 그 얼굴 없는 할머니가 고개를 드셨다.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

할머니는 손가락이 없는 손을 내게 내밀었다. 이 손을 어떻게 잡아야 하나? 나는 할머니의 손 위에 내 손을 그냥 올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의 느낌은 앞으로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곁에 있던 다른 할머니 한 분은 내 손을 잡고 아예 놓아 주지 않았다.

"할머니, 혹시 어디가 편찮으세요?"

나는 마침내 이렇게 물었다. 할머니는 흉한 얼굴로 웃어 보이려고 애쓰면서 대답했다.

"목사님, 전 열여덟 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건강한 손을 잡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목사님이 이렇게 제 손을 잡아 주시니 너무 기뻐서 "

나는 그 생각을 미처 못했다. 너무나 부끄러웠다. 하나님이 나를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손가락이 다 끊어져 나가고 없는 이 할머니의 뭉툭한 손 끄트머리에서 하나님은 내게 악수를 청하셨다. 바로 그 자리에서 나를 맞이하시기 위해서.  나는 누군가와 악수하듯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음을 느꼈다. 나의 소원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나는 할머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할머니, 할머니의 가혹한 운명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으십니까?"

"어떻게 제가 감히 하나님을 원망하겠습니까? 오히려 감사드려야지요. 하나님은 아픔 가운데서 제게 복을 주셨는걸요."

"복을 주셨다구요?"

나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그럼요. 예전에는 전도 많이 원망했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여기에서 살아온 긴 세월 동안 나를 잊지 않으시고 그 아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선물로 주셨지요. 하늘나라에 갈 소망도 주시구요. 목사님, 이것이 진짜 복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부끄러웠다. 지금까지 나는 한 번도 나의 건강을 하나님의 복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문둥병자로 살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복을 말할 수 있을까? 할머니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2. 가혹한 운명

열여덟 살 때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세수를 하는데 살갗에 이상한 반점이 생긴 거예요. 햇볕에 타서 그렇겠지 생각하고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지요. 그런데 군데군데 허연 부분이 점점 늘어나면서 고름이 차더군요. 어머님께 그것을 보여드렸더니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셨습니다. '문둥병'이라는 말이 제 귀를 때렸어요. 저는 제방으로 뛰어가 방바닥에 엎드려서 많이 울었지요.


그렇게 울고 있는데 어머니가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오시더니 저를 꼭 안아주시더군요.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요!"

나는 죽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머니는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어요.

"얘야, 내 말을 좀 들어보거라. 에미가 도와주마. 동네 사람들에게는 숨겨야 한다. 아무도 널 보지 못하게 해야돼.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널 섬으로 보내버릴게다. 하지만 에미는 널 잃고 살 수 없다."


그때부터 저는 방안에서만 살았지요. 어머니만 이따금씩 돌보아 주셨어요. 밤에는 마당에 데려다 주시기도 했지요. 그렇게 저는 짐승처럼 갇혀 지냈습니다.

"어머니, 전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정말 괴롭고 무서워요."

하지만 어머니도 그 답을 아실 리가 없었지요.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셨어요.

어느 날 저녁, 선잠이 들었는데 누군가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버지였어요. 손에는 낫을 움켜쥐고 . 저는 숨을 쉬지 않으려고 애를 썼어요.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습니다. 정말 아버지가 날 죽이실까?

아버지는 거기 서서 자신과 싸우며 망설이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어요. 아버지는 다시 밖으로 나가 버리셨습니다.

바로 그날 밤, 아버지는 쌀과자가 가득 담긴 그릇을 가지고 제 방에 들어오셨어요.

"남기지 말고 다 먹거라."

제가 하나씩 집어먹는 동안 아버지는 나를 지켜보고 계셨어요. 아버지는 한숨을 깊이 내쉬셨어요.

"네 병 때문에 우리 집안은 풍지박산이 나버렸다. 네가 우리집에서 사는 한 우리 식구는 살 수가 없어. 동네 사람들이 우릴 쫓아내 버릴게다. 네 동생들은 이제 같이 놀 친구도 없고, 용삼이 색시네에서는 파혼하자고 하는구나. 차라리 내 손으로 널 죽이는 것이 낫겠다 싶었는데 이 애비 심정을 알겠느냐?"

저는 솟구치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 오늘 저녁이 마지막이다. 내일부터 넌 이 집에 살 수 없는게야."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한 번도 돌아보시지 않고 나가 버리셨습니다.

저는 아버지 마음을 알 수 있었어요. 아버지는 차마 아버지 입으로 자살하라고 말씀하실 수 없었겠지요. 저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야 했어요.

다음 날 아침, 저는 집을 몰래 빠져 나와 강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미리 와 있는 사람이 있었어요. 어머니였습니다.

"넌 내 딸이야. 내 눈 앞에서 널 죽일 순 없다. 자, 이 쌀자루를 들고 산으로 올라가거라. 산신령께 치성을 드리면 혹시 고쳐주실지도 모르잖느냐? 그럼 너는 다시 집에 돌아올 수 있을게고."

어머니가 절 꼭 안아 주셨어요. 어머니의 사랑이 따뜻하게 절 감싸 주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주신 쌀자루를 들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어요. 그리고 그날 이후 한번도 저희 식구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하루 종일 산속을 돌아다녔어요. 산꼭대기에 올라가 산신령을 기다렸지만 허사였어요. 저를 도와주려고 나타난 것이라고는 허깨비 하나 없었습니다. 저는 혼자였어요.

배가 너무 고파서 결국 저는 산에서 내려와 버렸어요. 그리고 어느 농가에 밥 한바가지를 구걸했어요. 나는 거지처럼 밥을 동냥하는데, 산 속에 두고 온 쌀자루는 어떻게 되었을까? 산신령이 벌써 다 먹어 버렸을까, 아니면 남아 있을까? 저는 엉터리 산신령에게 화가 났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에게 잡혀서 소록도에 가게 되었지요.

소록도에서는 적어도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거기 있는 문둥병자들은 날 한 가족처럼 맞아 주었어요. 우리는 가족을 대신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잃어버린 아버지와 어머니와 오빠와 언니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소록도 사람들에게는 다른 점이 하나 있었어요. 이 사람들은 신령과 우상을 믿는 대신 하나님 한분만 믿었습니다. 이 하나님은 다른 신들과 달랐어요.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신 아드님은 문둥병을 무서워하지 않으시는 분이었지요. 저는 이 예수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요.


처음에 문둥병은 제게 사형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저는 아무 가치 없는 사람이 되었지요. 친부모와 형제도 절 거부했어요. 하지만 이제 저는 하나님을 찾았어요. 하나님은 저를 '딸'이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새 형제와 자매들도 얻었지요. 제게는 장차 하나님의 전에 영원히 거할 소망이 있습니다.

목사님, 이것이 진짜 복이 아니겠습니까?




3. 평화를 위한 굶주림

어느새 겨울이 시작되었고 눈이 많이 내렸다. 얼음처럼 차가운 날씨였다. 어느 날 아침 새벽예배를 마친 후 집에 가보니, 꼬마 다섯이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니?"

내가 물었지만 아이들은 얼어붙은 듯이 서 있기만 했다. 마침내 그 중에서 가장 큰 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사님, 우리 엄마 좀 찾아 주세요. 엄마가 집을 나갔어요."

"무슨 일로?"

"할아버지가 엄마를 때렸어요."

나는 아이들을 집까지 다래다주었다. 할아버지는 집에 계셨다.

"할아버님, 애들 어머니가 왜 집을 나갔습니까?"

"그년이 아주 못된 년이어요."

노인은 욕을 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보니 며느리의 잘못이었다.

"엄마는 곧 집에 돌아오실거야."

일단 아이들을 달래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집에서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몰려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머니들은 여러 가지로 내게 이의를 제기하면서 애들 어머니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말했다.

"애기들 엄마가 잘 도망가부렀어요. 그 노인네가 자기 며느리 징허게 못살게 했당게요. 맨날 며느리 욕이나 허고 돌아댕기는디 그 정도 참은 것도 다행이지요."

" 시아버님이 잘못하시긴 잘못하셨군요."

나는 다음 주일 설교를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머리에는 온통 이 집 생각뿐이었다. 두 사람의 태도에 다 일리가 있었지만, 그 사이에 끼인 아이들은 울면서 지내야 했다. 아이들로서는 어른들 일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가족은 모두 주일마다 예배드리러 나오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들 사이의 화평에 대해 충분히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닐까?

그제서야 나는 이 일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바로 내 잘못이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내 죄를 회개하며 금식하기로 결심했다. 금식이 닷새째로 접어든 날, 차씨 할아버지가 내 금식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목사님, 저 때문에 금식하시는가요?"

할아버지는 나를 책망했다.

"아닙니다. 할아버님 때문이 아니라 저 때문에 금식하는 거예요. 할아버님도 옳고 며느님에게도 잘못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불쌍합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울면서 배고파하는 것은 제 탓입니다. 제가 평화와 화해에 대해 충분히 설교하지 못한 탓입니다. 그래서 금식하는 겁니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이 돌아가셨다.

금식한 지 여드레가 지나자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 할아버지는 나를 찾아와 고백하셨다.

"목사님, 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식구들하고 며느리한테 너무 심했는갑네요. 인자 어째야 쓴당가요?"

"할아버님, 할아버님은 이미 가장 선한 길로 발을 디디신 겁니다. 저와 함께 기도하시지요."

나는 차씨 할아버지 댁에 가서 함께 아침을 먹었다. 그때 밖에서 아이들의 환성이 들려 왔다. 아이들의 어머니가 돌아온 것이다. 할아버지는 곧바로 며느리를 맞아들이셨다.

"아버님,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며느리가 먼저 말했다.

"아니다, 인자 다 잘 될 것이다. 내 맘이 달라져야제."

이제 아무도 상대방에게 잘못을 넘기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화해하게 되었다.

나는 두 사람이 화해하는 것을 보면서 내 배를 슬쩍 만져보았다. 배가 쑥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선한 목적을 위한 굶주림, 평화를 위한 굶주림이었다.

4.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 있다

이웃 동네에 살고 있는 한 가장이 우리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그들은 초신자였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는 상태였다. 게다가 이웃 동네는 워낙 불교가 지배적인 곳이었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는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온 동네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그들은 이웃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살아야 했다.

어느 날 저녁 그 집 아버지가 나를 찾아왔다. 잔뜩 화가 나서 목에는 핏대가 서고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모습이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나셨어요? 누구하고 싸우기라도 했습니까?"

나는 다그치듯 물었다.

"아니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제가 지금까지는 화가 나도 꾹 참았다구요. 예수 믿는 사람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목사님께서 늘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옆집 그 인간은 해도 정말 너무 하지 뭡니까? 도대체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 좀 해주십시오. 목사님은 그래도 목사님이니까 뭔가 답이 있지 않겠습니까?"

양씨는 숨을 가쁘게 쉬며 씩씩거렸다. 우선 그를 진정시키는 일일 급했다.

"무슨 일인지 차근차근 말씀해 보십시오."

양씨는 깊이 숨을 몰아쉰 다음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오후에 우리 어미 돼지 다섯 마리가 옆집 채소밭에 들어가서 그 집 채소를 몽땅 먹어치웠거든요. 그랬더니 옆집에서 손해배상을 해달라고 하더라구요."

"그야 당연히 배상해야지요."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저도 손해는 배상해 주려고 했지요. 그런데 그 인간이 말도 안 되는 걸 요구하지 뭡니까!"

"도대체 옆집 분이 원하는 게 뭔데요?"

"글세, 우리 어미 돼지 다섯 마리를 전부 달라는 겁니다!"

양씨는 다시 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무리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이런 경우에 화가 안나는 놈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

양씨는 씩씩거리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옆집 사람은 형제님을 시험해 보려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은 형제님이 마구 흥분하고 화내기를 바랄 거예요. 그렇게 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온 동네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려면 그가 원하는 것을 모두 다 주셔야 합니다. 큰 손해를 입게 되더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더 많은 것으로 갚아주실 겁니다."

내 말이 초신자 양씨에게 설득력이 있을까? 양씨는 양손을 허리에 얹고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좋습니다. 어쨌든 저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요. 아까는 정말 화가 났지만, 다 접어두고 하나님께 순종하겠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지요."

그는 돌아갔다.

양씨는 정말로 한 마디 불평 없이 돼지 다섯 마리를 전부 옆집에 주어 버렸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양씨가 미친 거 아니야?"

많은 사람들이 양씨를 비웃었지만, 그중에는 양씨의 태도를 보고 사뭇 진지해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 예수 믿는 사람은 저렇게 하는구나.'

그것은 여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그 사건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나뭇잎이 곱게 물들어가던 어느 가을날 밤, 양씨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목사님, 밤 늦게 죄송합니다.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전에 제가 목사님의 말씀을 따르기는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굉장히 분했습니다. 그래서 옆집 사람이 한 짓을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오늘 아침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지 뭡니까? 글쎄 옆집 황소 일곱 마리가 우리집 밭에서 실컷 뜯어먹고 있는 겁니다.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옆집 사람이 그걸 보고 양심의 가책을 받았는지, 저한테 와서 난처한 얼굴로 이러는 겁니다. '양씨, 어떻게 배상해야 할까?'

처음 생각 같아서는 그 황소 일곱 마리를 냅다 끌어오고 싶었지요. 하지만 목사님께 먼저 여쭈어 보아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목사님, 이제 제가 이겼지요? 그렇지요? 돼지 다섯 마리에 황소 일곱 마리라니, 목사님 말씀대로 하나님은 정말 제가 잃은 것보다도 더 많이 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양씨의 얼굴은 커다란 이익을 얻게 되리라는 기대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기대를 저버릴 수 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형제님, 형제님은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앙갚음 하려는 마음을 버리시고 그분에서 용서하는 마음을 보여주십시오. 형제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양씨의 얼굴이 갑자기 침울해졌다. 그는 올 때와는 달리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맥빠진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음 날 저녁, 양씨는 또한번 신이 나서 나를 찾아왔다.

"목사님 말씀이 또 맞았어요! 하나님이 정말 더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어제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옆집 사람에게 아무런 배상도 받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오늘 오후에 그 사람이 돼지 아흔 마리를 끌고 우리 집에 왔지 뭡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 돼지 전부 자네 껄세. 내가 자네 때문에 지난 밤에 한숨도 못 잤어. 지난 번 일로 틀림없이 화가 잔뜩 났을 텐데 왜 내 황소를 달라고 하지 않느냐 말이야. 내가 그걸 생각하느라고 머리가 다 빠개지는 것 같아. 자, 자네 돼지가 낳은 새끼 열 여덟 마리씩 다 합해서 아흔 마리 전부 데려왔으니 다 가져가게. 그리고 이제부터는 이웃끼리 잘 지내보세."

양씨는 예기치 않은 이 이야기를 듣고 흥분해서 나한테 뛰어온 것이다.

"생각해 보세요. 별안간에 이렇게 많은 돼지를 되돌려 받은 것도 굉장하지만, 지금까지 옆집에서 그놈들 전부를 먹인 먹이를 생각하면 정말 하나님이 제가 손해본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주셨지 뭡니까? 이제 저는 확실히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이 뭔지 아십니까?

좋아라 하던 양씨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마을 전체가 우리를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인정하게 된겁니다. 이거야말로 하나님께 받은 최고의 선물이 아니겠습니까?"


5. 참사랑이란


문둥병은 재발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쉰여섯 되신 그 아주머니에게도 문둥병이 재발했다. 몸과 얼굴이 부어오르고 양쪽 눈과 콧구멍에서 고름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다른 마을 사람들은 아예 그 집에 발길을 끊어버렸고, 나이 지긋한 교회 어른 한 분은 그 아주머니를 소록도로 다시 보내고자까지 했다. 게다가 소문은 꼬리를 물고 이웃 동네까지 퍼져나갔다.

심한 불안과 절망에 빠진 아주머니는 한꺼번에 많은 양의 약을 먹어버렸다. 차라리 죽어서라도 문둥병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리어 위만 상해서 이제는 제대로 먹거나 마실 수도 없게 되었다.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렇게 두 주가 지나갔다.

내가 찾아갔을 때 아주머니는 아무런 기력 없이 누워있었다. 아주머니는 나를 알아보고는 간곡히 부탁하기 시작했다.

"목사님, 제발 저를 다시 소록도로 보내지 말아주세요. 저는 두 번 다시 소록도에서 문둥병자로 살고 싶지 않아요!"

"그럼요. 하지만 여기 그대로 계시려면 건강을 빨리 되찾으셔야 합니다. 아무 거라도 좀 잡수어 보세요!"

"먹을 수가 없어요."

아주머니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부엌을 내다보니 아궁이 위에 생선찌개가 담긴 냄비가 있었다. 나는 숟가락으로 찌개를 떠서 맛을 보았다. 아주머니는 입을 다물지 못할 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내가 병에 옮을 것을 겁내지 않고 자신의 숟가락을 쓰는 것에 깜짝 놀란 것이다.

나는 생선찌개를 가득 떠올린 숟가락을 아주머니에게 건넸다.

"맛 좀 보세요. 아주 맛있는데요!"

아주머니는 내가 건넨 국물을 꿀꺽 삼켰다.

'아주머니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드실 텐데 내가 함께 있으면 어떨까?'

나는 신중하게 생각해본 다음,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냄비가 텅 빌 때까지 아주머니와 함께 숟가락 하나로 번갈아가며 찌개를 먹었다.

배부르게 먹은 송씨 아주머니는 금세 잠이 들었다.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니 온통 고름투성이어서 아주 끔찍해 보였다. 나는 수건으로 고름을 깨끗이 닦아냈다. 닦아도 닦아도 고름은 다시 흘러나왔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그 누런 액체를 비추었다. 고름이 마치 금처럼 반짝였다.

"자매님, 자매님 얼굴에 금이 정말 많기도 하네요!"

나는 크게 소리내어 말했다.

내가 어떻게 아주머니에게 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었을까? 나는 그 동안 아주머니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나는 건강한 사람이고 아주머니는 문둥병자였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내게 잔잔한 웃음을 보내주었다. 내가 그 아주머니의 숟가락을 썼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주머니에게 입맞춤과도 같은 것이었다.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담이 무너졌다.

그때 나는 참사랑이란 바로 내가 그 사람의 자리로 옮겨가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 아주머니 앞에서 나는 그분과 똑같이 문둥병자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 아주머니에게 감사했다. 아주머니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내게 가르쳐 주었다. 하나님은 바로 나의 자리에 오셔서 나와 하나님의 사이를 막고 있던 담을 허물어 버리신 것이다.


6. 지체 높은 사람의 방문


어느 나른한 봄날 저녁에 군수가 나를 찾아왔다. 군수처럼 지체 높은 사람이 우리 마을에 찾아온 적은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김 목사님이십니까? 지금에야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사실은 우리 도지사 사모님께서 목사님을 꼭 만나고 싶어하셔서 말입니다. 내일 시간을 내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지체 높은 분이 어디에서 내 말을 들었을까?

"혹시 다른 사람과 저를 혼동하신 것 아닙니까?"

나는 좀더 신중을 기하기 위해 되물었다. 그런데 군수는 영호에 살고 있는 내가 틀림없다고 말했다.

다음 날 급한 환자를 심방할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군수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날짜를 낼 모레로 연기할 수 없을까요? 그날은 시간을 낼 수 있겠는데요."

군수는 아주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느 누구도 군수에게 이렇게 말한 사람이 없었나보다.

"음 목사님이 정 그러시다면 목사님의 대답을 그대로 전하지요."

다음날 아침 군수가 또 찾아왔다.

"내일 오후 두 시가 괜찮으시다면 기꺼이 오시겠답니다."

그가 돌아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우리 마을 길에 무언가 덜거덕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영호는 국도에서 약 6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있기 때문에 마을로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고르지 못한 들길을 통하는 것뿐이었다.

그 요란한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알아보려고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때 저만치 한 무리의 일꾼들이 트럭과 불도져를 몰고 마을 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체 높은 사람이 방문할 들길에 자갈을 깔고 땅을 평평하게 고르기 위해서 였다.

약속한 날 점심시간에 군수와 면장과 경찰서장이 공무원 몇 명을 거느리고 미리 왔다. 마을 분위기가 잔뜩 들떠 있었다. 그렇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실제로 본적이 지금껏 한 번도 없었던 탓이었다.

정확하게 오후 두 시가 되자 도지사 부인이 도착했다. 부인은 스물다섯 명의 다른 부인들과 함께 왔다. 상류사회의 부인들이 가난한 우리 마을에 모두 모인 것이다.

물론 나도 긴장이 되었다. 도대체 우리 마을에는 왜 온 것일까? 도지사 부인은 서울에서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듣고, 문둥병자들의 교회를 섬기를 이 목사에게 호기심을 품게 되었다. 그 부인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부인은 그토록 풍요로운 생활을 하면서도 만족할 수 없었다.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 부인의 갈증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부인은 영호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기를 원했다.

"모두 교회로 가시지요. 이렇게 오셨으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시다!"

나는 그 사람들을 모두 교회로 안내했다.

도지사 부인이 이 특별 예배에서 자신이 찾고 있던 것을 찾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부인은 떠나기 전에 내게 물었다.

"목사님, 목사님께 필요한 것을 하나 해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떠나실 때 우리 마을 사람들과 악수를 해주시겠습니까?"

부인은 확실히 불쾌한 듯 했다. 그러나 자가용에 오르기 전에 어떤 할머니 한 분에게 재빨리 손을 내밀었다. 할머니에게는 분명히 큰 영광이었다. 할머니는 그 후로 계속해서 그 부인을 위해 기도했다. 나중에야 나는 그 지체 높은 부인이 손씻을 물을 준비하기 위해 차들이 줄줄이 서서 기다려야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지체 높은'분의 방문이 있은 후 우리 마을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국도와 연결되는 길에는 콘크리트가 깔렸고, 전화도 연결되었다. 그리고 두 주 후에는 내 책상 위에 전화가 놓이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아침, 낯익은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들려 왔다.

"목사님, 목사님을 우리 집에서 모이는 성경공부 모임에 모시고 싶습니다. 와 주시겠습니까?"

나는 그 부인의 초대에 기꺼이 응했다. 그 부인은 자신이 찾고 있던 것을 우리에게서 찾았던 
것이다!


7. 아직 늦지 않았다.


다시 봄이 찾아왔다. 모두들 들일을 하러 나갈 무렵이었다. 나는 근처를 돌아보려고 이웃 동네 쪽으로 갔다.

한 채소밭에서 몸집이 작은 할머니가 쪼그리고 앉아 잡초를 뜯고 있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잠시 후에 할머니는 비틀린 잇몸이 부끄러웠는지 당황하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이고, 부처님 오셨네! 저는 항상 살아계신 부처님 만나는 것이 소원이었는디."

할머니는 기쁨에 넘쳐서 말했다.

"아닙니다."

나는 놀라서 대답했다.

"저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에요."

이 말밖에는 다른 대답할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가 '목사'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예수가 누구다요?"

할머니는 알고 싶어 했다. 나는 할머니 옆에 주저앉아서 말했다.

"그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예요. 예수는 우리말로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뜻이고,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구원자'라는 뜻이지요. 예수님은 오래 전에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어요. 예수님은 할머니나 저와 똑같은 사람이셨지만, 또 하나님의 아들이기도 하십니다. 그 이름의 뜻대로 하나님은 인간을 도와주시고 무엇보다 흉악한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 주셨지요. 예수님은 친구가 많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를 너무나 미워해서 죽여버렸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 주셨어요. 하나님은 이처럼 인간을 돕고 구원해 주시기위해 오늘도 예수님을 모든 나라에 보내 주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예수님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진짜로 우리한테 찾아온당가요?"

할머니는 내 말을 막고 물었다.

"그럼요. 바로 이곳에도 오십니다."

그 사실은 할머니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할머니의 눈이 반짝였다.

할머니는 80년동안 부처님을 공양했다. 그러나 그 조각상은 눈 앞에서 항상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할머니는 절에서 기도를 드리기도 하고 조상의 무덤 앞에서 제사를 드리기도 했지만 의지할 곳이 없기는 마찬가지이였다. 하루가 다르게 힘이 빠지고 죽음의 공포가 다가왔다. 그러나 할머니를 도와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희망의 빛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저도 목사님처럼 예수님 백성이 될 수 있을까 모르겄네요. 나이가 벌써 여든아홉이나 되았는디!"

할머니는 기대감에 부푼 목소리로 물었다.

"나이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시면 할머니도 예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할머니에게 용기를 드리고 싶었다.

"그러면 지금 저를 예수님한테 데꼬 갈 수 있으시오?"

할머니는 조급하게 물었다.

"내일 새벽 네 시에 영호에 있는 우리 교회에 오세요. 매일 새벽기도회가 있거든요. 거기 오시면 예수님을 만나실 수 있어요."

"새벽기도회가 뭐다요? 예수님이 진짜 거기 있어요? 그러먼 제가 제일 좋은 옷 입고 가야 쓰겄네요."

"새벽기도회는 새벽에 교회에 함께 모여 하나님과 예수님께 노래하고 기도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일과 말씀을 적어 놓은 책을 읽습니다. 우리는 그 책을 성경이라고 부르지요."

"근디 저는 글을 몰라요."

"걱정마세요. 예수님이 할머니와 말씀하실 길을 찾으실 테니까요. 그럼 내일 새벽에 꼭 오세요."

그날 밤 태풍을 동반한 큰 비가 밤새도록 퍼부었다. 길에는 물이 넘쳐 흘렀고 전기는 끊어졌다. 이런 날 노인이 새벽기도회에 나오기는 힘들겠지 . 그런데 성가대가 막 찬양을 시작했을 때였다. 교회 문이 열리더니 그 몸집 작은 할머니가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손에는 손전등을 들고 있었다.

교회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할머니에게 쏟아졌다. 할머니는 얼굴을 붉히며 무릎을 꿇고 앉더니 두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성경 한 부분을 읽은 다음 설교를 했다. 설교 시간 내내 무릎을 꿇고 앉아 무언가를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예배가 끝나고 다들 돌아가고 난 후에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왔다. 할머니가 아는 사람은 교회에서 나 혼자뿐이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말했다.

"목사님, 진짜 고맙습니다. 진짜로 제가 예수님을 봤어요."

"그러십니까? 어디에서요?"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목사님 옆에 계신 거를 똑똑히 봤당게요! 목사님하고 똑같이 생겼드랑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제가 볼 때에는 목사님이나 예수님이나 똑같당게요."

할머니는 확신하고 있었다.

전에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못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말이 맞다. 우리는 곁에 있는 어린 아이들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볼 수 있다. 나는 할머니에게서 중요한 것을 배우게 되었다.

나는 또 하나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할머니, 아까 예배 시간에 혼잣말씀을 계속 하시는 것 같던데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인자 제가 예수님 만났응께, 인제까지 저 살아온 거 예수님한테 싹 다 애기했당게요. 예수님이 내 얘기 다들어준께 정말로 좋아라우."

할머니는 고마워하며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나는 할머니가 마음속으로 무엇인가를 새로이 품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근디 제가 성경책 읽을라믄 어째야 쓰까요?"

할머니는 도움을 청하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매일 새벽기도가 끝난 후에 나에게 오시라고 말씀드렸다.

말씀드린 대로 할머니는 매일 새벽 나를 찾아왔고, 내가 성경을 펴서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읽어나가면 한 글자 한 글자 따라 읽었다. 이렇게 해서 할머니는 성경구절을 배우게 되었고 새벽기도 때마다 배운 것을 자랑스럽게 외워보이곤 했다.

그렇게 두세 달이 지난 후였다. 할머니는 내가 가르쳐드리지 않은 성경구절들을 외우고 있었다.

"아니, 할머니! 어디서 그걸 배우셨어요?"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처음에는 목사님 따라서 외았는디, 예수님이 도와서 인자는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았당게요."

마침내 할머니는 글을 깨우친 것이다!

그 후에 할머니는 아예 우리 마을로 이사를 오셨고, 손자들도 청년부 모임에 나오게 되었다. 할머니가 직접 손자들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전했던 것이다.


8. 변함없는 사랑


처음 영호에 갔을 때 나는 그곳 사람들의 사정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점차 사람들의 신뢰를 얻게 되면서 비로소 사람들의 사연을 조금씩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중에서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어느 마을에서 젊은이 한 쌍이 결혼했다. 아내가 임신하게 되자 부부는 정말 기뻐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에게 문둥병이 발병했다. 정말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아내는 문둥병자들을 격리 수용하는 소록도로 가야만 했다.

법적으로 남편은 아내와 이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그대로 버려둘 수 없었다. 오히려 아내와 함께 소록도로 들어가 살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관계당국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자 남편은 아기를 부모님 집으로 데려갔다. 이별은 이 젊은 부부에게 너무나도 큰 고통이었다. 남편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나도 문둥병자가 될거야. 그러면 내 마누라, 내 자식과 함께 살 수 있을 것 아냐!"

그는 절망으로 절규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일 년이 지난 후 그는 처음으로 아내가 있는 섬을 찾아 갔다. 아내를 보았을 때 그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얼굴에 문둥병으로 인한 흉터가 있긴 했지만 아내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전 여기서 한 사람을 알게 되었어요!"

아내가 남편에게 주저없이 말했다.

"물론 남자겠지?"

남편은 분노와 질투를 감추려고 애쓰며 말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한테는 당신밖에 없어요. 제가 말하는 그분은 저뿐 아니라 당신도 사랑하시는 분이에요."

"그 자가 누구야? 대체 어디 있지?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군!"

아내는 그에게 작은 책을 한 권 건네주었다. 그것은 목사님이 선물로 주신 신약성경이었다. 소록도로 간 아내는 예수를 믿게 되었던 것이다.

"여보, 이 책은 우리 두 사람에게 다시 희망을 줄거예요. 그것을 읽으면 저의 새 주인이 어떤 분인지 잘 알 수 있어요. 꼭 읽어보세요!"

두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와 다름없이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시간은 빨리 흘러 헤어질 시간이 왔다. 이별은 이 부부에게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남편은 성경을 읽으면서 믿음의 소망을 아내와 함께 나누게 되었다. 그는 그후 5년 동안 한결같이 아내가 돌아올 날만을 기다렸다. 아이를 언제까지 엄마 없이 키워야 하는지.

그러던 어느 날 소록도에서 소식이 왔다. 아내의 문둥병이 음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아내는 육지에 있는 가족에게 올 수 있었다. 그들은 몇몇 다른 문둥병자가 가족과 함께 영호로 이사했고, 여기에서 새 생활을 시작했다. 건강한 아이들도 태어났다.

이렇게 해서 이 작은 마을은 점점 커져 갔다. 그들은 마을에 예배당도 건축하였다. 그러나 이웃 동네 사람들은 그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이들은 언제까지나 똑같은 문둥이일 따름이었다.

그들이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믿음으로 희망을 잃지 않았다. 매일 아침 해가 뜨기 전, 그들은 작은 교회에 모여 찬양하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었다. 겨울날 영하의 날씨에도 그들은 손뼉치며 찬양하면서 몸을 따뜻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 교회에 오겠다는 목사님은 한 명도 없었다.

긴 세월이 흘렀다. 처음 영호에 온 사람들은 이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다. 문둥병이 재발하는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한 중년 부인은 약을 먹어도 아무런 효과가 없어서 발가락을 절단해야만 했다. 문둥병은 늘 그런 흔적을 남겼다. 그런데 그와 똑같이 이 마을에서 늘 하나님의 흔적이 있었다.

젊은 남편이 문둥병에 걸린 아내를 버리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은 문둥병자들에게 신실하셨다. 그 부부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영호 사람들은 몸이 다시 나빠질 때에도 용기를 잃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새 가정들이 늘어났다. 소록도에서 사람들이 왔다. 지금 영호에는 약 예순다섯 가정이 백 명이 넘는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9. 어떤 부유한 농부 이야기


영호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대부분 문둥병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웃 지역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약점보다는 그 약점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 때문에 더 깊은 상처를 입게 된다. 때때로 그들도 그것 때문에 더 힘겨워한다. 그래도 '문둥이'들의 신앙생활은 점점 꽃을 피웠다. 우리의 예배 시간과 성경공부 시간은 점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어느 날 이웃 마을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 마을로 찾아왔다. 건강한 사람이 우리 마을에 찾아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 아주머니는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서 나를 찾아왔다. 그것은 정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목사님,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제 남편을 좀 도와주세요. 그 양반이 지금 많이 아파요. 한의한테도 가보고 양의한테도 가보았는데 전혀 차도가 없습니다. 절에 가서 불공도 드려보고 스님한테 부탁해서 치성도 드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무당을 불러다 굿을 했지만 그것도 효과가 없네요. 우리 동네 애들 말을 들어보니 예수님은 아픈 사람을 낫게 하신다던데 그게 정말입니까?"

아주머니가 이렇게 영호까지 와서 나에게 도움을 청하기까지 정말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아주머니,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나는 물었다.

"사실 예수님이 누군지 잘 몰라요. 그거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듣고 하지만 예수님을 알고 싶습니다!"

아주머니는 정말 진지하게 말했고, 그 말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이리 들어오십시오. 좀 앉으시지요."

나는 성경을 펴서 신약을 몇 부분 읽어 주었다. 나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기적적인 치료자나 마술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해주고 싶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것도 성경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씀을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예수님이 병자들을 모두 치료해주신 것은 아니라는 말을 듣고도 실망하지 않았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그리고 남편되는 분께 꼭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저한테 들은 대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우리는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 부유한 농부의 아내는 몇 번씩이나 고개를 숙이며 고마워 했다.

며칠 후 그 아주머니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목사님, 저희 집에 좀 와주세요. 우리집 양반이 예수를 믿고 싶대요."

그래서 나는 기쁜 마음으로 교회 장로님을 모셔와 함께 출발할 채비를 했다. 그런데 그 부인의 안색이 변하더니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내게 귀엣말을 하는 것이었다.

"저 사람들은 말고요 목사님만 혼자 오세요."

아주머니는 우리 마을 사람들이 자기 집에 오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우리가 다같이 갈 수 없다면 저도 안 가겠습니다."

나는 불편한 마음을 표현했다. 농부의 아내는 잠시 생각하더니 마침내 결심을 했다는 듯이 말했다.

"좋습니다. 모두 함께 가시지요."

우리는 모두 이웃 마을로 갔다. 아주머니가 방문을 열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한 남자가 고통을 못 이겨 웅크린 채 방바닥에 꼬꾸러져 있었다.

그는 며칠 전부터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했다고 했다. 우리는 그의 주변에 둘러 앉았다. 우리는 먼저 찬송을 몇 곡 불렀다. 그리고 나서 내가 집에서 미리 찾아온 성경 구절을 읽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던 농부의 얼굴이 점점 편안해졌다. 우리는 차례차례 돌아가며 그를 위해 마음을 다하여 기도드렸다. 기도는 길었다. 그 농부에게 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육체의 치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얻는 것이었다.

농부는 이내 잠이 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잠이었다. 아주머니가 고마워하며 우리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돌아온 후에도 그 농부를 생각하며 기도했다.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우리에게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농부의 가족이 모두 새벽기도회에 나온 것이다. 병들었던 농부는 옷을 멋있게 차려 입고 가족들보다 먼저 교회에 왔다. 그는 건강해 보였다.

이 농부의 마음속에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났는지! 이전에는 문둥병자들을 멀리하던 그가 이제는 우리 동네 사람들의 친구이자 후원자가 되었다. 그는 바로 뛰어다니며 자기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있다.

우리의 믿음은 겨자씨만큼 작은 것이었지만 이 일로 인해 큰 믿음의 용기를 얻게 되었다.


10. 안녕하세요?


한국에서는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는데 이것은 "평안하십니까?"라는 뜻이다. 이 인사말과 관련된 일이 하나 생각난다.

나와 가까운 사람이 알고 지내는 여의사가 있었다. 오십대 초반인 그 의사는 광주에서는 꽤 널리 알려진 교수였다.

"자네가 그 의사와 한번 이야기해 볼 수 없을까? 벌써 몇 달 동안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는군.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왠지 자네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친구가 나에게 제안해왔다.

영호에서도 할 일이 많긴 했지만, 이 여교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모르는 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에 갔다. 사무실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커다란 문패에 그 교수의 직함과 이름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방문한 것에 그리 놀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두 시간이 넘도록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주로 미국에서 보낸 유학생활과 화려한 업적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아주 거창하게 설명하더니 갑자기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감탄하며 맞장구쳐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그는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마침내 결정적인 지점에 이르렀다. 지난 해 좋은 교수 자리가 하나 생겼다. 이 교수는 그 자리를 꼭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여러 가지로 애를 썼지만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그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 자신이 그 자리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 실패를 맛본 후에 그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매사에 만족할 수 없었고 두통과 우울증까지 생겼다. 여기까지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상한 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전 모든 걸 소유하고 있습니다. 돈도 많고 이름도 꽤 알려졌죠. 좋은 직장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이제 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지금 몹시 불안합니다. 목사님, 말씀해 주세요. 어떻게 해야 다시 평안한 마음을 찾을 수 있을까요?"

나는 대답했다.

"교수님, 저는 교수님의 우울증에 대해서 의학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문둥병자들이 함께 모여 사는 마을에 한번 오십시오. 그러면 제가 만족이 무엇인지 보여드리겠습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 의사 교수는 정말 우리 마을에 찾아왔다. 우리는 마을 주위를 함께 거닐다가 채소밭에서 일하고 있던 아주머니 한 분을 만났다. 우리를 본 아주머니는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목사님, 이것 쪼까 보씨오. 저번 주에 손가락이 세 번째로 끊어져 불렀거든요. 근디 아직 일곱 개는 멀쩡하다니까요. 정말 감사해 죽겄네요."

어안이 벙벙해진 교수는 나를 바라보았다.

"저게 무슨 말이에요? 대체 뭘 감사한다는 거지요? 저 아주머니는 늙고 못생긴 데다가 문둥병 환자이고 손가락도 일곱 개밖에 안 남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만족하면서 웃을 수가 있는 거죠?"

나는 놀라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그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바로 다른 점입니다. 저 아주머니는 가진 게 별로 없습니다. 더군다나 손가락도 일곱 개밖에 없지요. 그렇지만 자기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아주머니의 얼굴에서 볼 수 있는 저 기쁨은 하나님의 값진 선물이지요.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교수님은 건강하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큰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 교수님은 이제껏 한 번도 감사하지 않았지요. 교수님은 항상 자기 힘으로 기쁨을 만들려고 하지만 교수님 스스로 기쁨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 당연하지요."

그는 이 진리를 깨달았을까?

우리는 아무말 없이 한참 걸었다. 교회 앞에서 그가 멈춰 섰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한 눈치였다.

"목사님, 저는 중요한 걸 배웠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그것을 감사할 때 기쁨과 만족이 온다는 것을요. 하지만 전 도무지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상황이 나빠질 때 다른 사람을 원망하기보다는 자신을 질책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우리는 조금 후에 집에 도착했다.

"잠깐만 기다리시겠습니까? 조촐한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나는 식사기도를 드리고 나서 그에게 음식을 권했다.

상 위에는 밥 한그릇과 김치와 맵게 무친 나물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는 한 술도 뜨지 않았다. 그의 눈빛을 보니 무엇이 문제인지 알 것 같았다.

"목사님, 이걸로 충분하세요? 고기나 생선도 없이 밥 하나 김치 하나로 식사하기가 어렵지 않으세요? 대체 목사님은 뭘 가지고 그렇게 만족하신다는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목사님이라면 서울에서도 아주 좋은 자리를 얻을 수 있을 텐데 가구도 없는 방 하나에 검정 고무신으로 지내다니 저로서는 정말 이해가 안되네요. 목사님은 하나님께 지금의 상황을 감사하시나요? 아까 하나님께 기도하셨지요? 도대체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지요?"

나는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지 않았다.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교수님, 지금 혹시 6,000원 정도 있습니까?"

그에게 그만한 돈이 없을 리가 없었다. 우리는 함께 시내로 나가 서점에 갔다. 나는 성경을 하나 집어 그에게 건네 주었다.

"이 책을 읽으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될 것이고, 평화의 샘을 만나게 될 겁니다."

그 교수는 성경을 가지고 다시 광주로 돌아갔다. 나는 기대감을 가지고 기다렸다.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나는 그 교수를 잊지 않고 늘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교회 사람들은 그를 위해 함께 기도했다.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 갑자기 버스 한 대가 마을 어귀에서 들어서며 큰 소리로 경적을 울렸다. 서른다섯 명 가량의 사람들이 차에서 내렸다. 그 여교수와 조교 의사들, 그리고 의과 대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일주일 내내 우리 마을과 근방에 사는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해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생활필수품도 몇 상자씩 가져왔다. 일요일 저녁에 우리는 모두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이 방문으로 우리만 도움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교수와 교수를 도와주러 함께 온 사람들의 얼굴에는 만족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 의사는 평안을 찾는 질문의 답을 찾은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평안을 주셨다.

"안녕하세요?"

"평안하십니까?"


11. 가족의 반대를 이겨낸 새댁


이웃 마을에 사는 어는 젊은 새댁이 우리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새댁은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캄캄할 때 시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집을 몰래 빠져 나오곤 했다. 우리는 앞으로도 뾰족한 해결책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시댁이 워낙 엄격한 유교 집안이었기 때문에 새댁은 공개적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시댁 식구들은 며느리의 낯선 신앙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어느 날 아침 시아버지가 마당에 나와 대문 곁에 서 있었던 것이다.

"얘야, 이렇게 일찍 들에 나갔다 오는 길이냐? 그런데 왜 그렇게 손이 말끔하지? 이제 바른 대로 말하거라. 너, 문둥이 마을에 있는 예수쟁이들과 함께 있다가 오는 거지?"

새댁은 시아버지의 다그침에 놀라고 겁이 나서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깬 가족들이 모두 마당으로 뛰쳐 나왔다. 젊은 남편은 황당한 얼굴로 자기 부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무슨 망신 당할 짓이라도 했어?"

"니 처가 문둥이 마을에 있는 교회에 다닌단다. 여태까지 우리는 감쪽같이 속이고 말이다. 그래도 누가 내게 알려줬으니 망정이지. 그래서 내가 이 아침부터 니 처를 문간에서 지키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발칙한 것 같으니라구!"

노인은 뒷짐을 진 채로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남편이 기겁해서 아내를 꾸짖었다.

"아버지가 당신을 야단치는 것은 당연해. 왜 문둥이들이 믿는 다른 나라 신을 믿어가지고 우리 집안을 쑥대 밭으로 만드는 거야?"

다시 시아버지가 말을 가로챘다.

"네가 예수교를 믿어서 우리 집안의 기강은 엉망이 됐다. 조상님들이 우리를 보호하시다가도 너 때문에 거두어 가시지 않겠느냐? 예수쟁이들이 조상들께 제사도 안 드린다는 말은 나도 들었다. 너도 이제 제사를 안 지낼 셈이냐?"

모두 아버지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새댁은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때부터 집안 식구들이 모두 새댁을 구박하고 구속하기 시작했다. 새댁은 그후로 새벽기도회에 나올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새댁이 집에서 어떤 어려움을 당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몇 주 후에 새댁은 가족들의 강요에 못이겨 교회에 나오는 것을 단념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새댁은 일을 하다가 갑자기 쓰러지더니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상태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저녁에 내가 심방을 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과 시누이가 그 새댁을 옮겨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 처가 몹시 아픕니다. 다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서 걷지도 못하고 헛소리만 해대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남편이 말했다. 난 그들을 바라보다가 함께 기도하자고 말했다. 우리는 새댁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나누어 앉았다. 나는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했다. 특히 이 여인이 견뎌내야 했던 내적 싸움을 위해 기도했다. 시누이가 울기 시작했다.

"저희도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어요. 저희 때문에 언니가 아프다니! 목사님, 저희가 정말 잘못했어요. 이 죄를 어떻게 하면 갚을 수 있을까요?"

시누이는 새언니가 낫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죄를 뉘우치는 마음과 새언니에 대한 염려를 할 수 있는 대로 모두 하나님께 내려 놓으십시오."

두 사람은 내 말대로 소리내어 함께 기도했다.

갑자기 새댁이 눈을 뜨고 입술을 움직였다. 기도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새댁이 잘 아는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새댁도 같이 찬송하려는 듯이 입술을 움직였다. 반응을 보이지 시작한 것이다!

남편이 아내에게 찬송가를 내밀었다. 그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어찌나 크고 또렷하던지 우리는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다시 한번 더 기도를 드렸다. 그러고 나서 남편은 아내를 부축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남편과 여동생이 아픈 새댁과 함께 기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새댁의 몸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친척들은 남편과 그 여동생의 마음이 변해가는 것을 보고 예수교가 사람을 그렇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아주 놀라워했다.

새댁과 남편과 시누이는 한 주도 빠짐없이 영호로 예배드리러 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조상의 보복도, 문둥병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시아버지까지도 내가 무엇을 설교했는지 물어보고, 아무도 몰래 아들의 성경을 뒤적거리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족의 반대는 없어졌다.


12. 슬픈 이야기


서울에서 친구 하나가 영호로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주변을 산책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우리 교회가 사들인 땅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거기에 공동묘지를 만들 생각이었다.

한국에는 돌아가신 분들을 가족의 땅에 묻는 풍습이 있어서, 시골에 가면 여기저기에서 비석이 세워진 둥그런 무덤을 쉽게 볼 수 있다.

친구는 들판을 두루 돌아보았다. 멀지 않은 채소밭 저편에 무덤 하나가 외롭게 솟아 있었다. 그 무덤 위로 풀이 드문드문 나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저기에는 누가 묻혀 있는 거야? 묻힌 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친구는 그 무덤에 관심을 보였다.

"한번 가보겠나? 참 슬픈 일이 있었지."

우리는 풀이 무성한 곳을 지나 그 무덤 앞에 섰다.

"십자가가 새겨져 있군. 자네 교회 교인이었나?"

친구가 내게 물었다.

"작년 11월에 여기에서 한 청년을 장사지냈네. 겨우 스물두 살이었지. 비참한 죽음이었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거든."

난 친구가 이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일 아침 우리 교회에서 가장 연로하신 박씨 할아버지를 자네에게 소개해 주겠네. 여기 누워 있는 청년의 아버지 되는 분이시지. 그 부부는 청년이 아기였을 때 양자로 데려왔다는군. 청년은 소록도에서 태어났는데 생모는 해산할 때 죽었지. 아버지는 누군지도 모르고 말이야. 사람들은 먼 친척집에서 아이를 거두어주길 바랐지만 친척들은 그 아이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네. 문둥병이 워낙 무서운 병이고 아이가 정말 건강한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니 그랬겠지. 그러다가 박씨 할아버지가 그 소식을 들은거야. 할아버지가 아내와 함께 소록도를 떠나도 된다는 허락을 막 받았을 때였지. 두 사람은 그때까지 결혼을 위해 육지로 가려고 애를 쓰던 참이었어.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두 사람도 소록도에서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된 사이지.

두 사람은 그 갓난아기의 사정을 듣고서는 곧장 아이를 데려왔다네. 그리고 영호로 이사해서 친자식처럼 정성껏 키웠지. 두 사람은 아이를 낳을 수 없었거든.

아이는 자라서 학교도 잘 다니고 부모님께 큰 기쁨을 안겨 주었다네. 부부는 아이에게 성경 이야기도 들려주었지. 그 아이는 아주 인기가 좋은 청년으로 자랐다네. 그의 기쁨은 우리 모두의 기쁨이었지. 우리가 아는 그 아이는 친절하고 인정 많은 젊은이였다. 학교를 마친 청년은 군에 입대했지. 그는 어느 소도시 근방에서 군대생활을 했어. 그리고 거기서 한 아가씨와 시간을 보냈지.

그는 자랑스럽게 부모님께 도시에 사는 처녀에 대해 말씀을 드렸지.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었지 결혼하기로 약속했다네. 물론 부부도 아들과 똑같은 심정으로 기뻐했네. 그들은 빨리 아가씨를 보고 싶은 마음에 집으로 초대했지. 그런데 몇 주가 지나도록 오지 않는 거야. 그때마다 이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곤 했지. 그런데 사살은 그 아가씨의 부모가 문둥병자들이 사는 마을에 가지못하게 딸을 막았던 거였네. 아가씨의 부모는 두 사람을 멀어지게 만들었고 청년은 절망에 빠졌지.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짤막하게 끝나고 말았네. 두 젊은이는 같이 도망가려고 했어. 아무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곳까지 아주 멀리. 그러나 아가씨의 부모는 그것을 미리 눈치채고 딸을 친척집에 보내버렸다네. 청년은 크게 상심했지.

그는 영호에 와서 부모님의 서랍에 들어 있던 문둥병 치료약을 먹어버렸어. 부모가 청년을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시간이 너무 지난 후였네.

마을 사람들은 너무 놀라 할 말을 잊었다네. 물론 우리는 무엇이 이런 비극적인 결과를 불러왔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 .

박씨 할아버지 내외는 우리 마을이 보이지 않는 곳에 아들을 묻고 싶어했네. 그래서 산이 보이는 이 한적한 곳을 택한걸세."

우리는 아무말 없이 다시 영호로 돌아왔다. 한 젊은이와 그의 비극적인 이야기에 대한 생각에 잠긴 채.


13. 돌아온 아버지


"목사님, 목사님!"

나는 그것이 정씨의 목소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우리 성가대에서 베이스를 맡아 노래하고 있었다. 내가 채 대답도 하기 전에 그가 허둥지둥 내 방에 들어왔다. 무슨 큰 일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목사님, 아버지와 헤어진 지 사십 년 만에 아버지가 절 찾아오셨어요.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오늘 아침 갑자기 오셨어요!"

정씨는 내 팔을 잡고 나를 문까지 끌고 갔다.

"이리 오세요, 목사님. 저희 아버지를 소개해 드릴게요!"

그제서야 나는 그의 아버지를 알아보았다. 노인은 미닫이 문에 몸을 반쯤 숨기고 있었다. 그는 당황했는지 자신이 쓴 밀짚모자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들었다. 거센 비바람에 주름진 구리빛 얼굴이었다. 양쪽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 셋은 작은 상에 둘러 앉아 수박을 먹었다. 정씨의 아버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 처와 저는 여덟 아들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아이들이 좀 큰 다음에는 밭에서 열심히 저희 일을 도왔지요. 그렇지만 우리의 기쁨은 얼마 안 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넷째 놈이 열두 살에 문둥병에 걸린 겁니다. 우리 식구에게 그런 일이 생겼다는 것을 믿을 수도 없었고, 우선 동네가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지요.

우리는 그 사실을 오랫동안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근선이가 문둥병에 걸렸다는 말이 온 동네에 파다하게 퍼졌지요. 문둥병자는 가족과 고향을 떠나는 게 법이지만 저는 제 아들이 소록도에 산다는 건 꿈도 꾸고 싶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생각했지요. 저는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고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딴 도리가 없었습니다.

전 근선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갔습니다. 한참을 올라가니 좁은 골짜기가 나오더군요. 절벽이 나오면 밀어버릴 생각이었지요. 그러면 그저 사고로 보일 테니까 . 절벽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가슴이 마구 뛰더군요. 저는 저를 따라오고 있는 근선이를 자꾸 돌아다보았습니다. 지금 이 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마침내 발 밑으로 좁은 골짜기가 내려다보였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아들의 어깨를 잡고 .

아니야! 내 아들을 떨어뜨릴 수는 없어. 그래, 차라리 같이 떨어져 버리자! 그런데 근선이 놈이 불안한 눈으로 날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엄마하고 형들하고 동생들을 생각해보세요. 아버지는 우리 가족에게 꼭 필요한 분이에요. 저 때문에 식구들을 내팽개치시면 안돼요.'

아들이 대견했습니다. 그 아이는 우리 식구 모두의 사랑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골짜기를 빠져나왔습니다. 저는 아들을 바닷가까지 바래다주었지요. 작은 배 한척이 와서 아이를 소록도로 데려갔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저는 근선이가 죽었다고 말했어요. 사망신고까지 했지요. 근선이는 영원히 우리 앞에서 사라져야 했습니다.

세월은 화살처럼 지나갔습니다. 아들들은 모두 결혼해서 대부분 고향을 떠났지요. 제 처와 저는 그때까지 건강했기 때문에 어느 아들에게도 짐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끼리 살던 집에서 그냥 살았습니다.

그런데 제 처가 죽고 나자 의지할 데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먹고 사는 문제를 혼자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럴 힘조차 없어져 버리더군요.

전 당연히 큰 아들네로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라는 걸 담박에 알게 되었습니다. 한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지 아우네로 가보라더군요. 그래서 얼마있지 않아 짐을 꾸려 둘째 아들네로 떠났지요.

그렇지만 그 놈 집에서도 다를 게 없었습니다. 아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늙은 아비를 기꺼이 맞아들여서 편안히 죽게 해주는 자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내가 잘못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뼈에 사무쳤습니다. 저와 제 처는 오직 아들들만을 위해 살아왔어요. 하지만 우리는 잘못 살았습니다.

전 차량한 마음으로 소록도에 있는 아들을 생각했지요. 그때까지는 그 아이에 대해서는 일절 아무 것도 알려 들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이들을 위해 그 아이를 버린 거지요. 이 놈이 얼마나 죽일 놈인지!

저는 소록도에 가서 근선이 소식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벌써 섬을 떠나 결혼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근선이가 살고 있는 마을을 찾아 이렇게 영호에 오게된 겁니다. 사십 년이 지나서야 하나밖에 없는 진짜 아들놈한테 돌아온 거지요 . 저는 아들네 집 앞에서 오래 망설였습니다 .

근선이가 뭐라고 할까? 저는 원망만 실컷 듣고 쫓겨날 각오를 했습니다. 아비가 가장 필요할 때 저를 버렸으니, 무슨 말을 들어도 싸지 용기를 내서 오긴 왔지만 다른 아들들은 다 어떻게 하고 왔느냐고 하면 뭐라고 하나 .

도저히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돌아서려는 찰나에 어떤 여자가 내다보며 친절하게 말을 걸더군요.

'할아버지, 이리 들어오세요. 누구 찾는 사람 있으세요? 아까부터 서 계신 걸 보았는데.'

그 여자는 바로 제 며늘애였습니다. 그때 외양간에서 나오던 근선이가 저를 알아보았습니다. 아들놈은 저를 끌어안고 울더군요 .

'애비는 사십 년 동안 네 소식 한 번 알아보지 않았다. 내가 원망스럽지 않으냐?'

'처음 소록도에 갔을 때는 너무 외로웠지요. 밤마다 집 꿈을 꾸었어요. 식구들을 미워하면서, 내 운명을 원망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문둥병자이면서도 저와는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반발심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끌리더군요. 그 사람들은 자신을 문둥병자 이상의 어떤 존재로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저는 그들 중 한 사람과 사귀게 되었지요. 그분은 병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대해 말씀해 주셨지요. 그리고 그후로 예수님께 선물로 받은 사랑을 나에게 주었지요. 저는 그 사람들을 따라서 예배와 성경공부에 가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예수를 믿게 되고 난 다음부터는 식구들에 대한 미움을 잊게 되더라구요. 살고 싶은 마음도 생기구요. 전에는 그냥 죽고만 싶었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살아있다는 것 자체를 기뻐해야 할 이유가 생겼지요.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에서 나를 떼어놓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그러다가 집사람을 만나게 되었어요. 우리는 사랑하게 되었고 언젠가는 육지로 나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랐지요. 그리고 어느 날 우리 꿈은 현실이 되었어요. 우리는 섬을 떠나서 결혼할 수 있었고 이곳 영호에서 가정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우린 우리와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어요, 아버지.'

그토록 긴 세월 끝에 만난 아들이 오늘 아침에 제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손주놈들도 보여주더군요 ."

할아버지는 긴 이야기를 마치고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이제 할아버지는 아들과 가정을 찾았다. 집을 떠난 탕자가 돌아오듯이 잃어버렸던 아버지가 집에 돌아온 것이다.

"우리 마을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우리 세 사람은 손을 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14.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확성기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교회탑에서 울리는 찬송가 소리였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그날 밤 나는 거의 눈을 붙이지 못했다. 거센 돌풍이 집과 외양간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러나 잠을 자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어제 저녁 느지막이 걸려온 전화 때문이었다.

"목사님, 접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아, 형제님이십니까? 무슨 일이 있으세요?"

"30분 전쯤에 택시 한 대가 옆집 나씨네 앞에 서더라구요. 그래서 창문으로 내다보니까 그집 애 택상이를 택시에 태우는 겁니다. 집사람을 불러서 '저 집에 또 뭔 일이 났나보다'고 말했지요. 택상이와 택상이 엄마가 택시를 타고 떠난 다음에 그 집 문을 두드렸더니 할머니가 열어주시는데 울어서 눈이 잔뜩 부어 있더라구요. 집안에서 나씨가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게 들리데요. 술에 잔뜩 취한 채로 나와서는 노모를 확 밀어제치고 제 얼굴 앞에서 주먹을 휘둘러 대는데, 나 원 참. 그러더니 '내 집에서는 내 맘대로 할거니까 내버려두라구!'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문을 쾅 닫아버리는 겁니다.

목사님,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애비라는 사람이 자식을 병원에 갈 정도로 패다니, 게다가 이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에요. 이대로 가만이 앉아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 같은데요. 게다가 그 집도 우리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까?

목사님, 나씨와 이야기 좀 해보세요. 혹시 목사님 말씀은 들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하지만 제가 얘기했다고는 하지 마세요. 나씨와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요."

박씨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나는 전화가 끊기 뒤에도 오랫동안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그만큼 그 소식은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박씨의 말은 과정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나씨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그렇게 이성을 잃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그의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나씨는 작년에 큰 양계장을 짓느라고 돈을 많이 꾸어야 했다. 그러나 나씨네가 양계장 때문에 큰 빚을 졌다는 사실을 아는 마을 사람들은 없었다. 그런데 다른 문제가 있는 걸까? 그렇게 성실한 사람이 지난 주에는 왜 그리 술을 많이 마셨을까? 나씨는 내 앞에서는 자신의 어려움을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새벽기도회 후에도 그저 몇 마디 인사말만 나누곤 했다.

그런데 이 집에 숨겨져 있던 불행을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다. 나씨 집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단지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 때문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집 식구들이 이런 문제를 털어놓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교회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설교와 성경공부에서 그렇게 여러 번 이야기했고 구역예배에서도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얼마나 많이 이야기했던가!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한 가족이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도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이렇게 서로 돌보지 못하다니!

나는 나 자신과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크게 실망했다. 우리는 얼마나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가!

확성기에서 다시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찬송가가 끝났다. 나는 터벅터벅 걸어서 교회로 갔다. 장마철의 끈끈한 바람이 내 얼굴로 확 불어왔다. 새벽기도회에 친밀한 듯이 모여 있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해야한단 말인가?

나는 강대상으로 올라갔다. 모두들 기대하는 마음으로 강대상을 올려다보며 좋은 말씀을 듣게 되기를 기다렸다. 나는 그들의 이기적인 생각에 화가 났다. 새벽부터 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전화로 들은 이야기를 간단히 말했다. 구체적인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나는 교회에 모인 교인들 앞에서 이 주간에는 심방을 일절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교인들을 그대로 둔 채로 나는 혼자 내 방으로 돌아와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내가 미처 묻기도 전에 말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목사님, 어떻게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제 이야기를 하실 수 있습니까? 저는 그래도 그렇게 심하게 자식을 때리지는 않는다구요."

"제가 말한 사람은 형제님이 아닌데요."

우리는 두 사람 다 어안이 벙벙해져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럼 저희 동네에 그런 사람이 또 있단 말씀입니까?"

"이리 들어와 보세요.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이야기해야 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털어놓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실제 생활에 부딪쳤을 때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나님의 풍성한 용서 가운데 일부분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베풀기 위해서는 얼마나 힘들게 씨름해야 하는지!

이씨가 말했다.

"예배드리러 함께 모여 앉은 우리의 모습은 마치 죄의 실로 짜놓은 옷감 같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어요. 그래서 교회 밖으로 한 걸음만 나와도 다시 싸움이 시작되고 괴로운 일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우리 부부 사이나 식구들 사이에서도 그랬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아들에게 너무 심했어요. 너무 화가 나는 바람에 하나님은 자격 없는 저를 그토록 긍휼히 대해 주셨는데 저는 아들에게 그렇게 못했습니다. 마음으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 그런 짓을 하게 됩니다. 저는 몰매를 맞아도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씨는 절망감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형제님, 저도 형제님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근심을 내려놓았다. 이씨는 돌아갔고 내 마음도 잔잔해졌다.

그렇지만 나씨 일을 어떻게 해야 되나?

그 이튿날에는 나씨도, 그 가족도 보이지 않았다. 새벽기도회에도 나오지 않았고 예배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보기가 머무나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우리는 그들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좋은 생각이 하나 따 올랐다. 그날 어린이 성가대 시험이 있었는데 우리는 시험을 치르는 대신 곧장 나씨 집으로 행진해 갔다. 우리는 가면서 힘차게 노래를 불렀다. 동네사람들은 우리가 대체 어디로 가는지 구경하고 있다.

"오랜만입니다. 어린이 성가대원들이 형제님을 방문하고 싶어해서 이렇게 왔습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나씨의 어두웠던 얼굴에 갑자기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알았다. 이것은 그의 가족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특별한 방문이었던 것이다.

"어서 들어오거라!"

그는 꼬마들을 맞이했다. 금세 작은 상 몇 개가 놓이고 맛있는 떡과 참외가 차려졌다. 우리는 다시 우리와 하나가 된 나씨 집에서 먹고 울고 노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15. 하나님의 씨는 자란다


"목사님, 계셔유?"

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네, 여기 있습니다. 들어오세요!"

나는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문을 살짝 열리더니 할머니 한 분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 할머니세요? 어서 들어오세요."

유씨 할머니는 고무신을 벗고 방으로 들어왔다.

"목사님, 어떻게 지내셔유?"

할머니는 공손하게 절을 하며 내 안부를 물었다.

"잘 지냅니다. 여기 좀 앉으시지요."

나도 절을 하며 방석을 권했다. 할머니는 방석에 앉아 조용히 기도를 드리더니, 내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목사님, 제 안경 좀 봐주셔유. 귀 가장자리가 영 아프구만유."

"어디 볼까요?"

나는 할머니의 안경테를 약간 구부려서 간격을 넓혀드렸다.

"이제 한번 써보세요."

안경은 편하게 잘 맞았다. 할머니는 수줍은 듯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이구, 목사님이 여기 안 계셨더라면 어쨌을까 몰러!"

할머니는 손가락이 끊어져 나가고 없는 두 손을 무릎 사이에 감추었다.

"목사님, 절대 여기를 떠나지 마셔유. 목사님이 떠나시면 우리는 죄다 목자없는 양떼가 되버릴 거구만유."

할머니가 이렇게 부탁하시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할머니는 문둥병에 걸린 후부터 여든일곱이 된 지금까지 미움과 배척만 당해 왔던 것이다. 할머니의 가족들에게 할머니는 더 이상 세상에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평소에 궁금히 여기던 것을 물어보았다.

"할머니, 제가 할머니를 알게 된 것도 벌써 몇 년이 되었네요. 한 가지 여쭈어 보아도 될까요?"

"그러믄유."

"할머니는 언제 예수를 믿게 되셨습니까?"

할머니는 그때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가 스물두 살 때 어떤 일본 목사님의 전도를 받았구만유. 그 목사님이 무슨 말을 할라치면 일본 사람들이 목사님을 내몰곤 했지유.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못할 짓도 많이 했지만 그 목사님은 참말로 좋은 분이였시유. 일본 군인이 못된 짓을 할 때마다 어쩔 줄을 모르셨지유."

할머니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는 먹을 것이 귀했지유. 쌀은 구경하기도 힘들었으니까유. 그때 생각하면 요즘은 진짜 좋은 시상이지유."

할머니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어떤 일본 목사님 한 분이 오래 전에 이 할머니의 마음에 하나님의 씨를 뿌렸구나. 지금 할머니는 나이든 사람이건 젊은 사람이건 할 것 없이 모든 영호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으로 존경받는 분이 되었다.

할머니는 아침 10시만 되면 교회에 기도하러 가기 위해 작은 집을 나선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자신의 문제인 양 가슴에 품고 오래오래 기도하신다.

요즘 우리는 사오십 명 가량의 노인들을 보살필 수 있는 양로원을 세우려고 한다. 문둥병이든 노인들은 돌보아줄 가족 하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목돈이 없이도 일을 시작해줄 건축 회사를 찾고 있다. 영호에 사는 사람들은 비록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지만 큰 믿음을 가지고 있다.

영호에서는 하나님의 씨가 자라고 있다. 척박한 토양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는 매일 새벽 4시에 새벽기도회로 모인다. 이 시간에 가장 중요한 일은 기도이다. 형제 한 분과 자매 한 분이 기도하고 나면 보통 내가 설교를 한다. 물론 찬송도 한다. 겨울에는 찬송이 특히 중요하다. 우리 교회에는 난방시설이 없는데 힘차게 찬송을 하면 몸이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많은 교인들이 새벽기도회에 온다. 이제 그들은 새벽기도회를 빼놓은 하루 생활리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새벽기도회에서는 이틀에 한 번씩 학생 성가대가 찬양을 드린다. 학생들은 영한대역 성경을 보면서 성경구절을 외운다.

주일 아침이면 어린이예배를 먼저 드리고 11시에 대예배를 드린다. 남녀 성가대원들이 멋있는 가운을 입고 매주 찬양을 드린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교회는 벌써 꽉 차 버린다. 우리 교회에는 의자가 없기 때문에 모두들 방석을 깔고 앉는다. 시간이 되면 교회탑에 설치한 확성기로 녹음된 찬송가가 울려퍼진다. 그것이 교회종을 대신해준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우리는 일종의 '희망곡'을 부른다. 사람들이 자신이 부르고 싶은 찬송가 장수를 큰 소리로 말하면 반주자와 성가대가 선창한다.

교인들 대부분은 2시 오후예배에 참석하고 예배가 끝나면 구역별 성경퀴즈대회를 연다. 이렇게 매주 점수를 매겨서 연말에 합산하고, 그 중에서 제일 성적이 좋은 구역에게 상을 준다. 주일 저녁에는 청년예배가 있다. 이 예배 때에는 전도사님이 설교를 한다. 교회에 이렇게 집회가 많은데도 내가 기쁨을 잃지 않는 것은 내 곁에 동역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전도사님, 장로님, 집사님, 주일학교 교사, 구역장 등 여러 분들이 교회를 섬긴다. 교회에 속한 사람은 남녀노소 할것없이 함께 일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뿌리신 씨를 거두는 사람들이다. 평일에는 일터에 나가서 각자 일을 하지만 저녁 시간과 주일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따로 떼어 놓는다.

매달 마지막 주일에는 재미있는 행사가 있다. 성격암송대회에서 성경을 가장 많이 외우는 암송왕이 탄생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암송왕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할 뿐 아니라 이 행사를 아주 재미있어 한다.

수요일 저녁에는 교회에 모여 성경공부를 한다. 또 목요일 저녁에는 자매들의 모임이 있다. 집사님들의 모임이라고 해도 좋겠다. 부인들은 우리 동네에 사는 노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하고, 각자 할 일을 분담한다. 금요일에는 다섯 가정씩 한구역으로 모여 구역예배를 드린다. 구역은 우리 교회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기초단위이다.

영호 사람들에게 교회는 두말할 나위없이 중요한 존재이다. 그들은 삶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하나됨'을 교회에서 경험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영호도 많이 변했다. 낡은 초가집들이 헐리고 새 집들이 들어섰다. 사람들은 밭일뿐 아니라 양돈 사업도 한다.

"우리 자식들은 우리보다 잘 살아야지요."

동네 어른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영호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교회 지붕에 올라가 석양빛에 빛나는 우리 마을을 보면서 이곳을 이 세상 어느 곳과도 바꾸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에는 하나님의 씨가 자라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들판이 있는 것이다.


16. 크리스마스에 생긴 일


아이들은 호기심이 많다. 아이들은 한결같이 새로운 것을 알고 싶어한다. 흔히 가족들 중에 교회에서 먼저 나오는 사람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집에 돌아가서 교회에서 들은 하나님 이야기나 예수님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열심히 대단한 선교사인 셈이다. 아이들은 이웃 동네에 가서도 선교사 노릇을 한다.

영호에서 맞이한 첫 크리스마스 때의 놀라운 일을 나는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오기 몇 주 전부터 교회 아이들은 동네 방네 다니면서 말했다.

"얼마 있으면 예수님 생일인데 그때 생일잔치를 할거야. 목사님이 우리를 전부 초대하신대!"

그 말을 들은 이웃 동네 아이들은 귀가 번쩍 뜨였다.

"먹을 것도 주냐? 부처님 오신 날에는 떡을 받았는데."

아이들은 친구들의 요구를 척척 받아주었다. 그들은 큰 소리로 나팔을 불었다.

"우리 목사님 말씀이 예수님은 모든 걸 알고 계신대. 그러니까 예수님 생일에는 우리 모두 배부르게 밥을 먹을 수 있어."

아이들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때문에 번번이 난처한 상황에 빠지곤 했다. 도대체 어떻게 크리스마스 전날까지 그렇게 많은 쌀을 마련할 수 있다는 말인가?

12월 24일은 무심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먹을 것을 아끼고 아껴서 쌀 반 자루는 어떻게 마련했지만, 그것말고는 쌀 한 톨도 얻지 못했다. 첫 크리스마스를 이렇게 맞이해야 하다니!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생기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려고 애써 왔다. 그러나 . 공기에 밥을 가득 담아 쪼르륵 소리나는 아이들의 주린 배를 채워줄 수만 있다면, 너무 배가 불러서 아무 말도 못할 정도로 실컷 먹게 해줄 수만 있다면 .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 되었다. 어른 아이 할것없이 예배당에 빽빽이 끼어 앉았다. 방석은 벌써 다 동이 난 지 오래였다. 세 시간 동안 자리를 뜨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극, 합장, 성탄절 이야기 이 모든 것이 어른과 아이들을 사로잡았다. 영호에서 맞이한 첫 크리스마스, 그것은 그야말로 생일잔치였다! 그러나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분명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어른들의 얼굴에서도 푸짐한 생일상의 기대를 읽을 수 있었다. 그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식은 땀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들이 동네방네 다니면서 "예수님은 모든 걸 알고 계신대"하고 말할 때 "하지만 목사님은 그렇지 못해"라는 말을 빠뜨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웃 동네 아이들은 예상보다 많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소원과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내 신학 속의 예수님은 과연 이 난처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실 것인가?

나는 뜨거운 감자를 뱉어버리듯이 내 고민을 밀어내버렸다. 먹든지 말든지, 결국 예수님 생일이니까 난 모르겠다. 잔치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다.

예배를 마치면서 나는 짧지만 분명한 기도를 드렸다.

"예수님, 당신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는 저녁에도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더 이상 없었다.

숨소리까지 들릴 듯이 조용했다. 몇 초가 지났을까, 아니면 몇 분? 내게는 영원처럼 아득한 시간이었다.

그때였다.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떤 남자가 서 있었는데 나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더니 나를 보고서는 교회가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말했다.

"목사님, 쌀을 세 가마니 가져왔는데 어디에 두면 좋을까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감사의 말이 튀어나왔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내 말에 아멘으로 응답했다.

예수님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이 계실까? 예수님은 참으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그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생각에 잠긴 나를 깨웠다.

"서울에서 오는 길입니다. 홍콩에서 주문한 기계가 서울로 왔거든요. 목사님, 홍콩에 있는 제 친구 아시지요? 그 친구가 목사님과 목사님 교회에 크리스마스 인사를 전하면서 이 쌀을 살 돈을 보냈습니다. 마침 사업상의 일로 이 근방에 올 일이 있어서 가져왔지요. 쌀이 택시 트렁크 안에 있는데, 누가 좀 옮기는 걸 도와주시겠습니까?"

사람들의 말문이 동시에 열렸다. 모두들 기쁨에 넘친 나머지 작은 교회당이 들썩들썩 했다.

정말 놀라운 크리스마스였다!

박 장로님은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 위해 집으로 달려갔다. 그 집 아궁이가 동네에서 가장 컸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밥공기와 수저를 챙기려고 집으로 달음질쳤다. 예배당 바닥에는 서둘러 작은 잔칫상이 차려졌다.

한 시간후, 우리는 모두 크리스마스 잔칫상에 둘러 앉았다. 공기에 소복이 담긴 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우리 아이들은 예수님이 자랑스러워서 마구 으시대며 신바람을 냈다. 그리고 행여나 이웃 동네 아이들에게 질까 싶어서 밥그릇을 부지런히 입으로 가져갔다.


17. 어떤 축구 선수


문둥병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이 생긴다.
하지만 이 무서운 병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스포츠 시즌이 될 때마다 주목받던 청년이 있었다.
스무 살의 그 청년은 몸이 민첩하고 공 다루는 솜씨가 대단했으며 골을 잘 넣는다는 평판을 얻고 있었다.
그는 대학축구부원에서 청소년 국가대표선수로 발탁되었고, 주요멤버로 선정될 것이 확실했다.
축구계에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는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

어느 날 연습이 끝난 후 그는 무릎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훈련을 심하게 한 탓이려니 생각하고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삼일 후면 통증이 가라앉겠지.
그러나 스스로 애써 안심시켰던 것과는 달리 고통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선수 생활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경기 도중에 다른 선수와 교체해야만 했다.
그는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절뚝거리며 퇴장했다.

"이상한데요. 이틀 후에 다시 오세요."

의사는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무릎뼈 아래 있는 두세 개의 희끄무레한 반점에 주목했다.
그러나 살갗을 약간 떼어내는 까닭을 청년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지금으로서는 통증의 원인을 명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의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교수님, 축구를 못 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요? 전 축구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청년은 웃어보이려고 했지만 얼굴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의사는 청년이 원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후에 애써 웃으면서 청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위로 했다.

그러나 청년은 위로를 받지 못했다. 의사의 말은 곧 다시 축구선수로 뛸 수 있을 것이라는 말로는 들리지 않았다.

이틀 후, 의사와 청년은 착잡한 심정으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년은 생각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나에게는 축구가 전부인데 . 의사는 의사대로 생각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내 말은 저 청년의 삶을 뒤바꾸어 놓을 텐데 .

"선생님, 제 병명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지요?"

청년은 마침내 마음의 준비를 한 것 같았다.

"이틀 전에 피부를 떼어냈던 걸 알지요? 검사 결과 나병 병원체로 판명되었습니다. 병이 이미 많이 퍼졌어요. 다음 단계로 진전되기 전에 빨리 치료를 해야 ."

"잠깐만요. 지금 제가 문둥병에 걸렸다는 말씀입니까? 저는 더러운 빈민촌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디서 그런 병을 얻었다는 겁니까?"

청년은 분노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벌써 몇 년 전에 감염되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의사는 설명하려고 애썼다.

"가족들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아버지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누이 둘을 판잣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제가 데려왔습니다. 좋은 아파트가 생겼거든요."

그 젊은 축구선수의 눈은 기억 속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아득한 기억 저편으로 골목에서 공을 차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기저기 폐수와 더러운 물들이 고여 있었고 누추한 함석지붕집들 사이로 개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떼지어 싸움질을 하거나 더러운 데서 뒹굴었다. 그러나 그것은 벌써 오래 전 일이다. 이제는 모든 것이 변했다.

"어쨌든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지금 바로 소록도로 가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오래 끌면 안됩니다! 되도록 빨리 가족들을 떠나야 합니다. 필요한 것들은 내가 준비할 테니 삼일 후에 다시 오십시오."

의사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는 정신이 나간 듯이 병원을 나와 달음질쳤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관중의 환호를 한 몸에 받던 축구선수가 아니던가! 그런데 이제 문둥이가 되어 섬으로 추방되어야 하다니!

청년이 그렇게 병원에서 나간 지 닷새가 지났다. 의사는 계속 기다렸지만 헛일이었다. 그 청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그날 아예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던 것이다.

학교에 있는 그의 책장에는 책들이 그대로 꽂혀 있었다. 축구복도 잘 개켜져 있었다. 그러나 축구화는 없었다.

청년의 어머니는 친구와 교수님들에게 그의 행방을 수소문해 보았다. 그의 소식을 알고 있는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 친구가 '난 지금 떠날거야. 그리고 절대로 돌아오지 않겠어'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냥 웃어 넘겼지요. "

어머니는 터미널에도 나가 보았다. 그러나 버스를 타고 가는 평범한 청년을 주의해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엾은 어머니는 여기저기 버스를 타고 다니며 운전사들과 승객에게 물어 보았지만 아들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이런 식으로 아들을 찾아다니던 어머니는 광주에서 내려가게 되었다. 광주 버스터미널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머니는 어느 가게에서 마른 오징어를 몇 마리 샀다. 배가 고플 때에는 구운 오징어를 씹는 것이 최고였다. 어머니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한 번만 더'라고 생각하며 가게 아저씨에게 아들의 사진을 내밀었다.

"혹시 이렇게 생긴 사람 본 적 있으세요?"

아저씨는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아, 봤어요. 청소년 국가대표선수 아닙니까? 지난 번에 저희 가게에 왔길래 혹시 광주에서 시합이 있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냥 고개를 돌리고 가버리더라구요. 저는 그냥 우스운 사람도 다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 사람을 찾고 계십니까?"

"이제야 그 애 소식을 듣게 되는군요. 제가 바로 그 애 에미입니다. 혹시 그 아이가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아주머니가 참 안되셨군요.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누구나 그런 식으로 행동할 때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는 법이거든요."

아저씨는 생각하는 듯한 시선으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이유가 있지요. 그 애는 식구들을 생각해서 집을 나간 거예요. 사실은 문둥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고 ."

어머니는 간신히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하지만 누구에게든지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이리 들어오세요. 아들한테 가게를 보라고 하고 우린 저 안쪽에서 이야기합시다."

가게 주인은 어머니를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어머니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한번 해보세요. 잘 되기를 빕니다!"

인정많은 아저씨는 작별인사를 했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바닷가에 서서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소록도가 있겠지. 거기 그 애가 있을거야 ."

어머니는 다음날을 위해 용기를 냈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는 첫 배를 타고 소록도에 갔다. 사무실 사람들은 어머니를 도와주기 위해 여러 가지로 애를 썼다. 어머니는 환자 명부를 찾아보았다. 아들이 있었다! 여기에서야 아들을 찾아헤매던 긴 여정이 끝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어떤 여자분이 어머니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어머니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며 아들을 기다렸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청년 한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들어왔다. 눈에는 검은 안경을 끼고 있었다.

"얘야!"

어머니가 아들을 끌어안으려 했다. 그러나 아들은 어머니를 밀쳐냈다.

"엄마, 이러지 마세요! 난 문둥병에 걸린 몸이라구요. 그만 가세요! 여긴 뭐하러 오셨어?"

"문둥병에 걸렸어도 넌 내 아들이야."

"절 잘 보세요. 여기 서 있는 것은 예전의 엄마 아들이 아니에요."

아들은 천천히 안경을 벗었다.

"제 얼굴은 끔찍하게 일그러졌어요. 저는 흉한 병신이라구요!"

그는 지팡이를 보여주었다.

"이 섬에 있는 사람들을 보세요.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가족들에게는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에요. 모두 우리를 혐오스럽게 쳐다본다구요."

아들은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

"얘야,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 문둥병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지 못하도록 하나님께 기도드리마."

이것은 아들이 들은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절뚝거리며 자기 거처로 돌아갔다. 어른이나 아이 할것없이 문둥병자들은 모두 거기에 모여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의 부고(訃告)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며 흘릴 눈물이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평생 흘릴 눈물을 이미 다 써버렸다.

청년은 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 사람들이 그를 발견해서 위를 세척했다. 두 주 동안 세 번이나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

그의 아버지뻘 되는 노인 한 분이 자리에 누운 그를 찾아왔다.

"죽기에는 너무 늦었어. 이젠 한번 살려고 해보게나. 내가 도와줌세!"

지난날의 스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청년에게 삶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워 주었다. 이 나이든 문둥병자가 지니고 있는 희망에는 한 가지 비밀이 감추어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었다.

노인과 청년은 일주일 내내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삶에 대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해서, 문둥병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생기는 사람들 사이의 거리감에 대해서, 가까이 지냈던 모든 이들에 대한 그리움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청년은 아버지 같은 노인과 친구처럼 지냈다. 이전에는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그는 바른 길을 찾았다. 예수를 믿는 그의 믿음은 날마다 자라갔다.

그가 축구선수로서 가졌던 희망은 문둥병으로 무참하게 깨졌고 삶에 대한 증오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그는 문둥이들의 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았다. 그리고 그속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게 되었다.


18. 진짜 문둥이


청년들의 수가 점점 많아졌다. 학생들은 이웃 마을에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 이야기를 좀더 들으려고 우리 마을에 찾아오는 청년들이 생겼다.

어느 주일 오후, 청년예배를 인도하고 있을 때였다. 몸집이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남자 한 사람이 예배당으로 들어왔다. 그는 신도 벗지 않은 채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그는 앉아있던 청년들을 훑어 보더니 한 청년의 멱살을 움켜쥐고서는 한 마디 말없이 그 빈약한 체격의 청년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람들은 마비된 듯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두 사람의 뒤를 쫓아나갔을 때까지도 예배당의 두 문짝은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청년이 더 맞지 않게 말리려고 했다. 나는 아버지가 자식을 때리는 이런 거친 폭력을 지겹도록 많이 보아 왔다. 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었을 때 그 남자의 주먹이 날아들었고 나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나는 멍한 정신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나의 행동에 놀라고 자신의 주먹이 내게 명중한 것에 놀란 탓인지 그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노여움으로 이글거렸다.

"내 자식이 문둥이들과 어울리다니, 절대 안될 말이지! 저 놈은 문둥이가 아니야. 내가 왜 이런 더러운 곳에서 저 자식을 찾아다녀야 하냐구!"

그는 고약하게 내뱉었다.

나는 내 검정색 단벌 양복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천천히 일어났다. 상처가 약간 났다. 나는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

"여기 문둥이가 어디 있습니까? 이 마을에 더러운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당신이야말로 문둥이입니다!"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까 그의 주먹이 내 얼굴에 명중한 것처럼 내 말 또한 그의 마음에 명중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아무말 없이 돌아서더니 아들을 밀쳐내고 돌아가버렸다. 그제서야 그의 주먹이 다시 날아올 수도 있었으리라는 생각에 식은 땀이 흘렀다.

그가 돌아가고 난 후에야 나는 청년들은 우리가 한 말을 모두 들었다. 이제는 예배를 마저 드리기 위해 예배당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긴장감이 돌았다. 모두들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고개를 숙인채 집을 향해 무거운 발검음을 돌렸다.

나는 집에 돌아와 글을 쓰면서 낮의 일을 애써 잊으려 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틀림없이 다시 올 것이다. 나는 그가 난폭하게 굴 것이 무서워서 책상 뒤에서 몸을 움츠렸다. 그가 정말 찾아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데 정말 그가 왔다. 밤 11시가 지난 지 얼마 안되었을 때였다.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열렸다. 그의 손에 쥐어진 몽둥이를 보고 나는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며 떨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가 나에게 앙갚음을 하러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몽둥이를 문 옆 기둥에 기대어 놓고 신을 벗고 들어왔다.

"목사님, 낮에는 죄송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는 방바닥만 내려다 보면서 침묵했다.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목사님, 제가 문둥이라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힘이 장사 같은 그 남자가 왜소한 내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그는 그제서야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부모님은 문둥병자들이었다. 그가 태어난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 단 한 가지 방법은 가능한 빨리 아이를 건강한 가정으로 입양시킨 것이었다.

아이는 자식이 없는 어느 가정에 아무도 모르게 입양이 되었다. 그들은 친자식처럼 아이를 길러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아이들과 싸우다가 '줏어다 키운 애'라고 놀리는 소리를 들은 아이는 울면서 부모님께 달려갔다. 부모님은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자신도 문둥병에 걸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늘 불안했다. 그러면서 문둥병과 관련된 것은 무조건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미워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청년기에 집을 떠나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도시로 갔다. 그러나 문둥병은 벗을 수 없는 굴레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실제로 발병한 것도 아닌데도 그는 그 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아내에게도 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직업상의 이유로 영호근처로 이사를 온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안고 우리 마을 사람들과 싸웠다. 그는 이웃들을 부추겨 우리 마을 사람들을 증오하며 대적하게 만들었다. 우리 마을 아이들을 볼 때마다 돌을 던져 쫓아버리기도 했다. 문둥병자 부모를 가진 아이들의 심정을 그토록 잘 알면서!

그는 바로 자기 자신의 운명과 싸우고 있었다. 겉에 드러나는 문둥병의 표시는 없었지만 속마음은 친부모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비밀이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찢기워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문둥병이었다. 그런데 자기 아들이 우리 마을에 갔다는 말을 듣게 되자 이성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저녁 무렵에는 낮에 벌어진 일이 마을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는 마침내 아내에게 마음을 털어놓았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호에 있는 목사를 찾아가보라고 용기를 북돋아준 사람은 바로 아내였다.

"목사님, 정말 불안합니다. 이제 우리 가정을 제 과거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것을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식구를 따돌리고 자식들도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게 되면 어떡합니까? 그렇게 된다면 그건 전부 제 잘못입니다."

"영호 사람들은 형제님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자신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도, 우리 자식들의 장래도 절대 포기하지 않지요. 우리는 한마음으로 살고 있고 바깥 사람들과도 유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우리의 업보인 문둥병 때문에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께 형제님의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받아들여 주기를 기도하거나 우리가 다시 건강하고 아름다워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문둥병자라는 운명을 짊어진 우리와 화해하신 후로는 많은 것이 변했지요.

형제님도 형제님의 삶과 화해하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 알게 될 겁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도와주실 겁니다."

그의 마음에서 무거운 돌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아들과 함께 우리 교회 청년들을 찾아왔다. 이제 그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 그리고 문둥병자들과의 싸움을 그치게 된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쏟아부어 주시는 평화를 발견해 나가기 시작했다.



19. 청소부 아주머니와 기적에 대한 설교


우리는 뼛속 깊이까지 피곤했다.
눈꺼풀은 무거웠고 주변의 시끌벅적한 소리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노곤했다.
독일에서 온 친구와 나는 광주 고속버스터미널의 대기실 복판에 있는 긴 의자 구석에 비좁게 끼어 앉아 있었다.
버스가 출발할 때마다 소음은 더 심해졌다.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빠르게 소지품을 챙겨 들고는 버스를 타러 우르르 몰려갔다.
대기실은 사람들이 버스를 타면 잠시 조용해지는가 싶다가 잠시 후에는 새로 온 사람들로 다시 북적거렸다.
친구와 나는 전혀 이야기를 나눌 기분이 아니었다.
우리는 지난 주 내내 이 모임 저 모임을 돌아다녔다.
성경 공부 모임과 청년부 모임, 공장에서 예배드리는 청년들의 모임에서부터 산에 있는 기도원까지,
그리고 새벽예배부터 저녁예배에 이르기까지 쉴새없이 돌아다녔다.

그러나 우리의 주제는 언제나 영호의 양로원 설립 계획으로 돌아오곤 했다.
우리는 순례자 같았다.
몇 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발로 뛰어다니고서는 냄새 나는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기도 했고,
공기조절기가 설치되어 있는 고급 리무진을 타기도 했다.
우리는 극에서 극으로 옮겨 다녔다.
어느 교회 장로님의 초대로 값비싼 호텔 뷔페에 가기도 하고 길거리의 작은 식당에서 서둘러 국수를 먹기도 했다.
또 유럽의 성당만큼 큰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가 하면 광주에 있는 작은 이발소의 한구석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우리가 이런저런 걱정거리에 눌려 기진맥진해서 앉아 있을 때 누군가 우리를 옆으로 밀치는 사람이 있었다.
청소부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는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앞에 팽개쳐 놓은 채 담뱃불을 붙이고 있었다.

자욱한 담배 연기 때문에 눈이 매웠다.
연기 너머로 수건을 두른 머리와 주름진 이마, 상처 자국이 있는 두툼한 뺨이 보였다.
이가 몇 개 빠져 있었으며 코는 납작했다.
아주머니는 나와 내 독일 친구를 위아래로 유심히 훑어 보시더니 내게 웃어보였다.
아주머니의 나이는 얼른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친구가 갑자기 인사를 했다.

"워매, 이 사람 한국말 허벌나게 잘 허네잉!"

아주머니가 얼른 인사를 받았다.
외국인이 한국말로 인사하는 것이 신기해서였을까?
대화는 쉽게 이어졌다.
우리는 손짓 발짓을 하거나 내가 통역을 해가면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아주머니의 남편은 산업재해로 세상을 떴다.
그때부터 아주머니는 터미널 청소부로 일하면서 아이들을 키워왔다.
식구들은 터미널 근처에 있는 방 한 칸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가 아주머니를 만났을 때는 아주머니가 담배를 한 대 피우며 쉬는 시간이었다.
아주머니는 터미널의 넓은 공간을 이리저리 청소하러 다니느라 피곤한 다리를 쉬고 있었다.

나는 아주머니가 곧 우리의 직업을 물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직접 묻지는 않아도 돌려서라도 물어보겠지.
하기는 물으면 안될 이유는 없지.
나는 아주머니가 묻기를 기다렸고, 마침내 아주머니는 내가 작은 시골 교회의 목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는 불교신자여요."

아주머니가 말했다.

"근디 절에 안 간지도 오래 됐어요. 초파일날 부모님 따라 갔던 것이 마지막이라잉."

아주머니가 살던 집 지하에 교회가 있었다.
아주머니는 저녁에 퇴근할 때 지하에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소리를 자주 들었다.
호기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감히 들어가보지는 못했다.

우리는 교회 사람들이 무얼 믿고 있는지 아시냐고 물었다.

"예수 믿는다는 건 알지라.
그리고 그 목사님이 아픈 사람한테 손 딱 엉그믄 싹 나서분다드만요.
그래서 한번 가보고 싶기는 헌디.
내가 다리 땀시 고생을 많이 혀서요.
한번 가보믄 어쩌까잉?"

아주머니가 거리낌없이 물었다.
나는 그 말을 친구에게 통역해 주었다.
우리는 어이가 없어서 서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목사가 기적의 치료자라고?
그것은 목사 본연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기적적으로 병 고치는 일을 기독교의 표징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주머니에게 더 이상 믿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었다.
영호행 버스가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스에 탄 후에 내가 친구에게 말했다.

"자네도 보았지?
기독교 신앙에서 아주머니가 희망을 거는 것은 기적적인 병고침이라구.
아주머니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기적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 안타깝군.
영호 식구들에게도 이 이야기를 해야겠어.
자네가 이런 설교를 한 번 했으면 하는데, 내일 예배 시간이 어떨까?"

우리는 밤늦도록 설교문을 작성했고, 나는 독일어 문장을 우리말로 옮겼다.
우리 교인들은 이 설교를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영호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 4장 46절에서 53절까지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본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고향 갈릴리에 있는 가나로 오시는 길입니다. 가나는 헤롯 대왕의 아들인 로마 왕 헤롯 안티파스의 다스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나의 한 혼인잔칫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편 게네사렛 호숫가에 있는 도시 가버나움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왕의 신하가 한 명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중한 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소문에 듣던 예수님이 가나에 오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가나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 자기 집에 와서 아들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어떤지 직접 겪어보셨기 때문에 여기에서 "너"라고 하지 않고 "너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임을 증명해 줄 만한 표적과 기사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증명이 안된다고 판단하면 메시아로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왕의 신하에게는 그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메시아든지 아니든지 아들만 구해주면 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같이 가주실 것을 또한번 간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같이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에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라는 말씀만 하십니다.

여러분이 누구에게 무엇을 부탁했는데 실제로 해주지는 않고 말만 하면 얼마나 실망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고, 집에 가서 아들이 실제로 건강하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와 그의 가족들은 모두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제목을 정한다면 '갈릴리에서 일어난 기적적인 치유'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건 아주 옛날 얘기야. 요즘은 그런 일이 생길 수 없어' 하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또는 '왜 요즘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지? 내 아이가 건강해질 수만 있다면 내가 더 쉽게 믿을텐데'하고 말씀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2절에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이렇게 단정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어떤 사람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했을까요?

제가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사막이 어떤 곳인지 아시지요? 어떤 사람이 사막에 서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몇 분 동안 꼼짝하지 않고 저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물도 먹지 못한 채 며칠이 지난 터라 그의 혀는 입천장에 딱 달라 붙어 있었습니다. 그는 생각합니다. '지평선 너머에 보이는 저것은 무엇일까? 혹시 물이 아닐까?' 그의 마음은 그곳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무언가가 그를 가로막습니다. 바로 그의 이성입니다. 그의 이성은 계속 그에게 말합니다. '저기 저 은빛나는 띠는 물이 아니라 신기루야. 그러니까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마.' 그는 이성의 판단에 따라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바로 사막에 서 있는 이 사람과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없고 하나님도 없으며 믿음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방향을 돌리고 맙니다.

다른 예를 또 들겠습니다.

창밖에 월출산을 한번 보십시오. 누군가 그 정상에 올라가려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길에 서 있는 안내표지판들은 각각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눈으로만 보아서는 어느 길이 얼마나 험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길은 끝까지 보이지 않고 봉우리 뒤편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마침내 그는 한 길을 선택해서 서둘러 출발합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망설이기 시작합니다. 그 길에는 자갈이 너무 많고 경사가 급합니다. 그는 멈추어서서 이리저리 생각해보다가 마침내 돌아섭니다. 그러면 다른 길은 좀더 쉬울까요? 그러나 어떤 길을 선택하더라도 매번 망설이게 될 것입니다. 그는 어느 길로 끝까지 가야 할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합니다.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도 그와 같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무엇을 믿는지 보면서 그 사람들을 따라가고 싶어합니다. 믿음의 길은 그들에게 너무나 어렵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이 그 길을 함께 가주실 텐데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광야에 샘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사막에서 목말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상에 올라가는 길을 찾기가 어려워서 산기슭에 서 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주며 우리가 정상에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삶과 죽음이 문제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무엇보다 먼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아들이 죽느냐 사느냐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아버지가 예수님의 말씀을 정말 믿는지에 대해 언급합니다.

결국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은 무엇으로 결정됩니까?

우리 예수님을 찾읍시다! 예수님을 신뢰합시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릅시다!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을 찾아가십시오!

오늘 말씀에서는 아픈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먹을 것을 찾고 일을 찾고 보호와 사랑을 찾고 신을 찾습니다. 성경은 "찾으면 찾을것이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 경험을 돌이켜볼 때 우리가 찾는 것 대부분은 한낱 동경으로 끝날 때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발견됩니다. 또한 하나님은 갈릴리에 사는 이 왕의 신하와 그 아픈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여, 하나님을 찾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알리십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많은 말을 들으며 많은 소식과 광고와 약속들을 듣습니다. 우리의 귀는 완전히 노출되어 있습니다. 눈은 감을 수 있지만 귀는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앞에서 눈은 감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귀를 뚫고 들어옵니다. 말씀은 항상 기적보다 앞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말씀은 예수님이 왕의 신하에게 주신 것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셨던 것은 지금 볼 수 없지만 그 말씀은 오늘도 성경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그의 말씀은 효력을 잃지 않았고 아직도 계속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병든 아이의 아버지는 내리쬐는 뜨거운 볕을 뚫고 30킬로미터를 달려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가나'는 '갈대'라는 뜻입니다. 가나로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은 그가 붙든 마지막 지푸라기 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거기에서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구하십시오! 그러면 얻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러 가지로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우리는 생각을 거부합니다. 우리의 이성은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또 우리는 가슴으로 거부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보다 다른 것들을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예수님께 강한 거부감을 느낄 때 우리는 차라리 예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사막에서 길잃은 사람의 예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지평선 너머 보이는 것이 물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갈증으로 목구멍이 타오르는데도 거기에서 몸을 돌이켜 반대 방향으로 갔습니다. 그는 눈 앞에 구원을 두고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몸을 돌이켜 반대 방향으로 간다면 우리는 결코 삶의 갈증을 해결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삶은 사막의 죽음과 같습니다.

월출산에 올라가려는 사람의 예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가는 길마다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상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믿음 적은 것을 도와주소서!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에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를 도와주소서!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들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믿음의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기 집에 와주십사는 신하의 간청을 예수님이 거절하고 혼자 돌려보냈을 때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이 성경을 읽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참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아닌지 알고자 하는 마음이 왕의 신하나 우리에게 있는지가 드러나는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왕의 신하에게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절박한 상황에 빠져서 좌절하고 있는 한 인간을 만나 주셨고, 그에게 속마음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왕의 신하는 그때까지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기보다는 기사와 표적을 행하는 사람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우리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그 신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한 것처럼 보이는 이 메시아, 곧 기적의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언제나 기적을 행하지는 않는다는 그 메시아에게서 등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갔습니까? 그가 예수님을 신뢰한다면 과연 그의 문제가 풀릴까요? 그의 믿음은 그의 시야보다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까요? 예수님과의 만남에는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을까요? 그의 믿음은 과연 그의 고민을 해결해줄까요? 그의 믿음은 눈으로 결과를 직접 볼 때까지 지속되고 있습니까? 그는 예수님 안에 계신 누군가를 깨닫고 있습니까?

우리도 왕의 신하처럼 예수님의 즉각적인 도움을 바랄 때가 많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예수님의 응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예수님은 말뿐인 분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신뢰합시다! 오늘 말씀은 왕의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값싼 말에 속았다고 생각하고 다른 길을 찾아보러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말씀은 바로 왕의 신하가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는 뜻입니다. 생사가 달린 상황에서 온전히 말씀 하나에만 의지하려면 불신을 극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인간의 말과 관련된 경험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과 관련해서도 많은 경험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까? 그의 말씀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똑같은 말씀임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세계와 삶 가운데서 그와 똑같은 능력의 말씀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시험해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약속하고 있는 것을 경험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왕의 신하는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 자리에서 현실을 변화시키는 '행동'이었습니다. 아이는 정말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빈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참으로 행복한 결말이 아닙니까? 무엇이 이 이야기를 행복한 결말로 이끌어 갔습니까? 여기에는 '기적의 치유자가 사경을 헤매던 아이를 살리다'라는 식의 제목을 붙이면 안됩니다. 이런 식으로 유발된 호기심은 하루만 지나도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핵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예수가 한 아버지와 그의 가족 모두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주었다'라는 제목, 불꽃처럼 영원히 꺼지지 않고 타오를 제목을 붙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기적입니다! 죽어가는 아이의 병을 고치는 것은 일시적인 구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아이와 그의 가족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을 보십시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이러한 믿음의 기적은 예수님이 사시던 때보다 지금 더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보다 눈에 보이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지도 못했는데 내가 왜 그 말을 믿어야 하지?" 하고 묻습니다.

왕의 신하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사렛 출신의 목수 예수를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왕의 명령에 담긴 권위를 알고 있는 그는 목수의 말을 왕의 말처럼 따랐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말씀을 믿으십시오!

여러분,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적을 직접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을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실재를 믿는 사람의 삶은 이미 변화받은 삶입니다.


덧붙이는 글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이 열아홉 편의 이야기에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저 그곳에서 놀라운 사람들을 만났을 때 제가 느낀 감정을 몇 마디 덧붙일 수 있을 뿐입니다.

영호에 사는 사람들이 왜 놀라운 사람들이냐구요?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성자는 아닙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일상의 크고 작은 어려움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는 한국 사람이든 독일 사람이든, 문둥병 환자이든 건강하든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시기나 질투, 분노나 다툼이나 불화 등으로 괴로움을 당합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영호와 그 이웃의 그리스도인들 이 하룻밤 사이에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꼭 달라붙어 있듯이 하나님께 꼭 매달려 있다는 점에서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문둥병 때문에 절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살아남은 것처럼 육체적으로도 살아남기 위한 전쟁의 복판에서도 평화를 누린다는 점에서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문둥병을 앓는다고 해서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문둥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훨씬 더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우리보다 뛰어난 점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김요석 목사가 최근에 보내온 편지의 몇 구절로 이 글을 맺고자 합니다.

양로원이 거의 완공되었네.
우리 식구들은 모두 주민을 찬양하고 있어.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건물을 세우게 되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지.
우리 믿음의 공동체가 독일에 안부를 전하네.

클라우스 디터 그래스

* 출처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김요석, 작성자 karamos)

 

김요석 목사님 관련 글

중국에서 나병환자들을 대상으로 목회하고 계시는 김요석 목사님으로부터 듣게 된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중국의 삼자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데 앞에 7살 먹은 아이가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중국은 20살이 될 때까지 교회를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 사상이 확립되기 전에 교회를 나가면 사상이 잘못될 수 있다고 해서 20살이 되기까지는 교회를 가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7살 아이가 앉아 있으니 궁금해서 예배를 마치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저 아이는 교회에 나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은 모택동 정권 당시, 문화 혁명 말기 때에 있었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한 마을에 다정하게 살고 있던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내는 만삭의 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에서 사상이 불순한 남편이나 아내가 있으면 고발하라는 지시가 자꾸 내려왔습니다. 승진하고 싶은 욕심을 갖게 된 남편은 아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당에 고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 이혼이 되고 말았고, 공관원들이 밤중에 와서 그 아내를 강제로 내쫓았습니다. 추운 겨울날 밤에 그녀는 그 동안 살던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더군다나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그저 몸 하나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추운 겨울밤에 길에서 얼어 죽을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교회 앞으로 갔습니다. 그 당시 교회는 이미 폐쇄돼서 문이 굳게 잠겨 있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교회 앞에 가고 싶어서 그 교회 앞으로 갔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장사하는 어떤 사람이 교회 앞을 지나가는데 바로 그 교회 앞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보니까 어떤 여인이 발가벗고 죽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옆에는 자신의 옷으로 돌돌 감아놓은 갓 태어난 아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그 후에 그 교회를 다녔던 할머니들에 의해서 키워지게 된 것입니다.


김요석 목사님은 독일에서 얼마든지 대학교수를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소록도 나환자촌과 중국 나환자촌에서 18년 넘게 특수목회 활동을 했습니다. 그가 소록도 나환자촌에서 목회할 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목사님의 교회에 다니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나환자도 아니고 멀쩡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믿겠다고 등록하고 1년 후 침례도 받고 나중에는 집사 직분도 받아 열심히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네 사람들이 그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 오가면 네가 나병에 걸리고 그러면 우리한테도 전염된다. 거기 가지 말라.” “아, 내 신앙인데 너희들이 간섭할 수 있느냐. 내 마음이다. 그러지 못하겠다.”


그는 동네 사람들이 아무리 협박해도 듣지 않고 온 가족을 데리고 교회에 잘 다녔습니다. 그러
던 어느 날 출산이 임박한 만삭의 어미돼지 5마리를 여기서 저기로 옮기는데 돼지들이 놀랬는지 갑자기 이웃집 채소밭에 뛰어들어 다 뭉개버렸습니다. 이웃집 주인이 배상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채소 값이나 물어주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웃집 주인은 돼지 5마리를 다 줘야 한다고 우겼습니다. 기가 차서 동네 사람들한테 물어보는데 동네 사람들도 그가 얼마나 미웠던지 그렇게 배상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그는 목사님한테 달려와서 어떡하면 좋겠느냐고 자문을 구했습니다. “목사님, 돼지들이 뭉갠 밭이래야 몇 평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돼지들을 다 달라니요. 그럴 수가 있습니까.”


“집사님, 성경에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달라면 주라고 했잖아요.” “목사님, 그래도 너무 하는 게 아닙니까.” “집사님, 믿으려면 성경대로 잘 믿어야 합니다.” 그는 믿음이 있어서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냥 어미돼지 5마리를 이웃집 주인에게 다 주었습니다. 목사님이 그를 위로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절대로 굶지 않게 하시고 손해 보지도 않게 하십니다.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열심히 일하십시오.”


그는 그런가 보다 하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어미돼지 5마리가 얼마나 복을 받았던지 한 마리가 새끼 18마리씩 낳았습니다. 어미돼지까지 합치면 거의 100마리가 됐습니다. ‘며칠 전만 해도 저것들이 다 내 것이었는데 어쩔 수 없지 뭐.’ 그는 돼지들을 볼 때마다 아쉬운 마음이 들곤 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내했습니다.


6개월이 흐르고 가을이 됐을 때 이웃집 주인이 키우던, 큰 황소 3마리가 갑자기 뛰어넘어 그의 밭을 다 짓밟았습니다. 그는 아주 신나서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역시 자기 백성을 손해 보지 않게 하십니다. 100배 이익을 보게 생겼습니다. 씨를 뿌리면 100배로 거둔다는 말씀이 정말 맞습니다.”


“집사님,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렇게 계산하는 게 아닙니다. 손해 볼 때는 봐도 남에게 손해 끼쳐서는 안 됩니다. 적정선에서 양심껏 배상받으세요.” “아니, 저 사람이 한 대로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어찌 기독교가 용서의 종교일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떡하면 됩니까.” “그냥 돌려주는 게 용서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절대로 손해 보지 않게 하십니다.” 그는 목사님의 말씀을 그냥 믿고 순종하기로 하고 돌아갔습니다. 이웃집 주인은 야단이 났습니다. ‘한 마리만 배상하면 좋겠는데.’ 그런데 웬걸요.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됐네. 내가 예수 믿는 덕에 자네가 복 받았네. 3마리 다 가져가게. 채소밭 그게 몇 푼이나 되겠어.”


이웃집 주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용서를 받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무리 양심이 없다고 해도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자기 같으면 얼씨구나 하고 황소 3마리를 다 빼앗을 텐데 예수 믿는 사람은 달라도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웃집 주인은 고민하다가 자신도 용서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자신이 6개월간 살지게 키웠던 그 돼지들을 다 몰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내가 잠시 맡은 것이니 돌려주겠네.” “그러면 어미돼지만 돌려주게.” “아니야, 다 받게.” 이웃집 주인이 하도 사정하기에 그는 6개월이나 키워놓은 돼지들을 다 돌려받았습니다.


김요석 목사님은 15년간 독일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한국에 귀국하여 대학 강단에 서지만 영적인 갈등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어떤 목사님의 소개로 나환자 정착촌인 영호마을의 한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합니다.


이글은 영호를 방문하였다가 그들의 삶에 감동한 김요석 목사님의 독일 친구인 클라우드-디터 그래스가 1991년에 독일에 먼저 소개하였습니다.


김요석 목사님은 10년간 영호교회에서 사역하시다가 중국으로 떠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 연락이 끊겨 소식을 아는 분이 없는 상태이기에 부득이 독일어판을 번역하여 출판하게 된 것을 옮깁니다.


은혜가 되시길 바랍니다.


한센 환우의 벗 김요석 목사님

국민일보 1998.10.10, 00:00

[이지현기자의 책읽기] 김요석목사의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숨어서 봉사해 `얼굴없는 천사'로 불리는 김요석 목사.
독일에서 15년동안 신학을 공부한 그는 귀국후 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했지만 영적인 갈증을 채울 수 없었다
학생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어려운 신학이론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이란 것을 깨닫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인간을 친히 만나길 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이 답답했던 김목사는 마침내 교수직을 버리고 서울에서 남쪽으로 약 6백㎞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에 정착하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 마을은 한센씨병이 음성으로 바뀐 사람들이 정착해 정상인과 이웃을 하며 살고 있는 곳이었다.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홍성사)에는 김목사가 이 마을에서 체험한 사랑과 그가 만난 하나님의 손길을 간증한 19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다.신앙의 힘에 의지해 새 삶을 가꿔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김목사는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일상의 크고 작은 어려움과 씨름을 한다고 말한다.그러나 그들이 일반인과 다른 것은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달라붙어 있듯이 하나님께 꼭 매달려 있다는 점이다.아픔을 신앙으로 극복해 낸 이들에게 신앙은 생명이었다.김목사는 척박한 오지,아무도 부임하려 하지 않던 이 마을 교회에 부임해 10여년동안 헌신적인 사역을 했다.행여 그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부정적으로 비쳐질까봐 글을 남기지 않았다.


이 책은 이 마을을 방문했다가 감동을 받은 김요석목사의 독일 친구 클라우스 디터 그래스가 `DAS DORF DER VERGESSENEN'이란 제목으로 1991년 독일에서 먼저 소개했다.김목사는 이 마을에서 10여년간 사역하고 중국으로 건너간 후 연락이 끊긴 상태라고 한다.김목사의 간증테이프는 이미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고 그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많은 사람들이 `얼굴없는 천사'를 만나길 기다리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현재 이 책을 서점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출판사가 책 속의 정착마을 주민들로부터 간곡한 부탁을 받고 모두 수거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한권의 책은 육체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전쟁을 치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감사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과의 만남이란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상대방에게 다가서는 것'이란 것을 알게 해 준 책이다.또 병을 치유받는 기적이 복음의 전부가 아니란 것을,불꽃처럼 영원히 꺼지지 않고 타오를 믿음을 얻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란 것을 깨닫게 해준다


[겨자씨] 고름을 빨다

국민일보|기사입력 2002-08-07


중국에서 한센병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김요석 선교사 간증입니다.

친구와 같이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센병 환자의 등에 고름이 들어있는데 아직 덜 곰겨서 짜지지 않았습니다.
김선교사는 그 부분을 입으로 핥았습니다.
자꾸만 빨았더니 그 부분이 약해졌습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고름을 짰습니다.
고름이 터지면서 옆에 친구 얼굴에 튀었습니다.
순간 그 친구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한센병에 전염될까 봐 울었냐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가 말했습니다.

“아니다. 네 고름을 빨 때 예수님이 옆에 와 계셨다.
나는 그 주님을 붙들고 있었다.
그런데 고름이 터져 내 얼굴에 튀는 순간 예수님이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아쉬워서 울었다”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502930 2020-01-26T18:02:41Z 2020-01-27T01:30:22Z 두 가지 열매(로마서 5:6-8) / 주일설교(2020-1-29) 황선민목사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502844 2020-01-26T11:48:33Z 2020-01-26T11:53:45Z 기독교의 한반도 전래에 대한 새로운 이해 이만열(숙대교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1. 초기 기독교 수용에 대한 종래의 학설

1.1.
기독교(개신교) 선교사가 가장 먼저 조선을 방문한 것은 1832년 독일 선교사 귀츨라프(Karl Guetzlaff)의 홍주만 고대도의 상륙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약 1개월간 머물면서 섬사람들에게 성경을 소개하고 교제를 나누었지만, 그의 방문은 영국 동인도회사의 의뢰를 받고 조선과의 통상을 타진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조선은 그가 다녀간 후에도 계속 서양 여러나라에 대해서는 물론 복음에 대해서도 문호를 열지 않았다.

귀츨라프가 조선을 방문한 지 30여년이 지난 후 조선을 방문한 선교사는 웨일즈 출신의 중국 선교사 토머스(R.Thomas) 목사였다. 1842년 남경조약이 체결된 후 구미제국의 중국진출이 활발해지자 여러 젊은이들이 선교사로 지원했는데, 토머스도 1860년대 초에 중국에 도착하였다. 동행했던 아내의 죽음과 선임 선교사들과의 불화가 그를 괴롭혔지만 윌리엄슨과의 만남은 그를 조선에 대해 튿별한 관심을 갖도록 했다. 그는 1865년에 조선을 방문하여 선교에 대한 뜻을 굳히게 되었지만,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와의 동행은 대동강에서의 희생을 초래했다. 이 두 사건은 1801년 신유박해에서 시작된 천주교에 대한 혹심한 박해가 계속되고 있던 때에 나타난 사건으로, 조선이 계속 쇄국 정책을 취하는 한에서는 기독교의 수용은 거의 불가능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종래 한국의 기독교 수용사는 귀츨라프와 토머스 목사의 입국 사건이 있은 후 20여년간의 시간이 경과된 후에야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는 것으로 연결된다. 1882년 한미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계기로 해서 비로소 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종래의 기독교사에 의하면, 1883년 주한미국공사관이 서울에 설치된 후 1884년과 1885년에 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였고 이것이 바로 한국 기독교의 효시로 보았다는 뜻이다.

1884년에는 당시 미국 감리회(북)의 일본 선교사였던 매클레이(R.Maclay) 목사가 6월 24일-7월 8일에 한국에 입국하여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한 결과 미 감리회가 한국에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고, 그 결과 그 이듬해에는 미국 감리회의 교육·의료 등의 여러 분야에 걸친 선교사들이 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 9월 20일에는 미국 북장로회의 의료선교사 알렌(H.N.Allen, 安連)이 그 전 해에 개설된 주한미국공사관의 공의(公醫) 자격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 복음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하여 정주하게 되는 것은 그 이듬해(1885)인데, 미 감리회의 아펜젤러(H.G.Appenzrller, 亞扁薛羅) 목사와 미 북장로회의 언더우드(H.G.Underwood, 元杜尤) 목사가 4월 5일 부활 주일에 함께 입국하여 이 나라에도 ‘부활의 아침’을 맞게 해 달라는 기원을 드리게 되었다.

1.2.
미국계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게 되는 데는 1882년 5월에 체결된 한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과 거기에 따른 한미관계의 진전이 크게 주효하였기 때문이다. 한미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가 교환되는 1883년에 미국에서는 전권공사로서 전 캘리포니아 검찰총장 출신의 푸트(Lucius Foote, 福德)가 비준서를 가지고 한국에 입국하였고, 비준서를 제정한 후에는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여 주한미국공사관을 개설하였다. 지금의 정동의 미국 대사관저가 그 때에 자리잡은 곳이다.

비준서를 한국정부에 제정한 후 미국은 한국에 대해 상응하는 조처를 권고하였다. 즉 한국의 국왕이 비준한 조약을 미국 정부에 제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권고에 따라 한국 정부는 민영익(閔泳翊)을 단장으로 하는 견미사절단(遣美使節團)을 구성하여 1883년 7월 파송하였다. 그들은 일본을 거쳐 9월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대륙횡단절도를 타고 시카고· 뉴욕을 거쳐 워싱톤으로 향하였다. 이 열차 안에서 미국 감리회의 목사 가우처(J.F.Goucher)가 이들 일행을 만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가우처는 뉴욕의 감리회해외선교부 본부에 헌금과 편지를 보내 한국에 대한 선교를 촉구하게 되었다. 그는 물론 일본 선교사로 파송된 미 감리회의 매클레이 선교사에게 연락하여 한국의 선교상황을 탐지하도록 부탁하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매클레이 목사가 1884년 6월 24일에서 7월 8일까지 2주일간 한국에 머물면서 김옥균(金玉均)을 통해 한국 정부로부터 미국 북감리회가 한국에서 교육 및 의료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낸 데에는 바로 이러한 뒷배경이 있었다.

1.3.
미국계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게 된 배경에는 19세기에 이르러 고조되고 있던 미국 교회의 선교열을 간과할 수 없다. 17-18세기의 대각성운동과 그 뒤에 일어난 무디(D.L.Moody)의 부흥운동은 미국민들을 영적으로 고양시켰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활로를 사회 속에서 새롭게 개척하도록 하였다. 영적으로 고양된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국내적으로는 인디언 선교에 정력을 기울이는가 하면 이미 소외현상이 일어나고 있던 산업현장에 복음을 적응하기 위하여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되었고, 대외적으로는 해외선교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미조약이 체결되고 난 뒤 미국 조야에서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당시 일본에 와서 고등교육에 종사하던 그리피스(Wm.E.Griffis)는 <은둔의 나라 한국, Corea, the Hermit Nation>을 써서 아직까지 서양세계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을 소개하였다. 이 책이 1911년까지 9판이나 거듭되어 출판된 것을 보면 얼마나 그 영향력이 컸던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정보들을 근거로 미국 교회에서도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고 있었다. 미국 북장로회 등 해외에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였던 교단의 해외 선교부에서 먼저 한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 같은 배경을 가졌기 때문이다.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은 미국의 신학생들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대각성운동과 부흥운동의 결과였다. 1880년대에는 이 운동이 여러 신학생들 사이에 사에에 해외선교를 위한 ‘신학생해외선교연맹(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s)'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하기방학을 이용하여 집회를 가지며 선교열을 고취하였다. 이들 집회에는 뒷날 한국에 첫 선교사로 파송된 아펜절러와 언더우드도 참석하였다. 신학생들의 이 집회는 오랫동안 계속되면서 선교열을 고취시켰다. 한국에 파송되었던 미국 북장로회의 언더우드가 1891년 휴가를 얻어 미국에 귀국했을 때 테네시 주 내슈빌(Nashville)에서 열렸던 이 집회에 참석하여 한국 선교를 소개하고 선교사 지망을 권고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기연이 되어 뒷날 미국 남장로회 소속의 신학생들이 한국 선교에 나서게 되었던 것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1.4.
1884년과 1885년 미국 북감리회와 북장로회의 선교사들의 한국 정주를 계기로, 구미 여러 나라로부터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선교사들의 내한은 여러 나라, 여러 교단에서 대부분이 교단을 배경으로 하였고 더러는 YMCA 같은 기독교 기관에서 파송을 받거나 혹은 개인 자격으로 들어오는 경우도 있어서 일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 파송과정을 일률적으로 언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비교적 초기에 들어와서 뒷날 한국 교회의 주류를 이룬 감리회의 2개 교단과 장로회의 4개 교단 선교부의 한국 입국상황은 대략 다음과 같다.

1885년 4월 5일에 미국의 북감리회(아펜젤러)와 북장로회(언더우드)가 복음선교사로 입국한 후, 1889년 10월에는 호주의 빅토리아 장로회 신도협회의 재정지원으로 데이비스(J.H.Davies) 목사와 그의 여동생(Mary)이 들어왔다. 그들은 부산에 선교거점을 확보하려고 서울을 출발했으나 여행 중에 병을 얻어 1890년 4월 데이비스 목사가 병사하자 동생도 그 해 8월 호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것이 계기가 되어 1891년 10월 호주 장로회에서는 매케이(J.H.Mackay) 멘지스(B.Menzies) 포오셋(Fawcett) 페리(J.Perry) 등을 파송하여 한국 선교를 본격화시켰다. 이들은 데이비스의 순교지인 부산으로 곧 바로 들어와 선교거점을 부산과 경남 지역에 확보하였다.
1892년 11월에는 미국 남장로회의 선교사들이 입국하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내슈빌의 신학생해외선교연맹 집회에 참석하여 언더우드의 강연을 들었던 남장로회 소속의 신학생들(L.B.Tate, C.Johnson, W.D.Reynolds)은 한국 선교를 결심하고 남장로회 해외선교부에 한국 선교사로 갈 것을 지원하고 기도하며 준비하였다. 여기에 레널즈의 친구였던 전킨(W.M.Junkin)이 합류하였다. 여기에다 언더우드와 그의 형(John Underwood)과 친구들이 내놓은 5천 달러의 선교기금은 이들의 한국 선교의 길을 재촉하였다. 그리하여 남장로회 해외선교부는 앞서의 신학생 테이트, 레널즈, 전킨과 새로이 지원한 여성들로 테이트의 여동생(Mary Tate), 데이비스(L.Davis), 레이번(M.Leyburn), 보울링( P.Boling)을 선교사로 임명하여 한국에 파송하였던 것이다.
1896년에 시작된 미국 남감리회의 한국 선교에는 개화파 인사였고 중국의 중서학원(中西學院)을 거쳐 미국의 밴더빌트와 에모리 대학에서 수학한 윤치호(尹致昊)의 공헌이 크다. 그는 미국 재학 시절 한국 선교를 호소했고 귀국에 앞서 에모리 대학의 캔들러(W.A.Candler) 총장에게 한국 선교를 위하여 200달러를 기탁하였을 뿐만 아니라 귀국 후에도 남감리회의 선교를 요청하였다. 그 결과 1895년 10월 중국에서 내한하여 선교상황을 점검한 바 있는 리드(C.F.Reid, 李德)가 그 이듬해 한국 선교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캐나다인들의 초기 한국 선교는 대부분 개인자격으로 시작되었다. 토론토대학 YMCA의 후원을 받은 게일(J.S.Gale, 奇一)이 1888년에, 토론토 실업인들의 후원을 받은 펜윅(M.C.Fenwick, 片爲益)이 1889년에, 토론토 의과대학 기독청년회의 지원을 받은 하디(R.A.Hardie, 河鯉永)가 1890년에, 역시 같은 단체의 지원을 받은 에비슨(O.R.Avison, 魚丕信)이 1893년에 각각 입국하였다. 이들은 뒷날 한국에서 선교부와 관계를 맺게 되는데, 게일과 에비슨이 미국 북장로회와, 하디가 미국 남감리회와, 펜윅이 침례회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캐나다 장로회의 한국 선교는 1898년부터 시작되는데, 여기에는 1893년 12월에 매리타임즈 지역의 장로교대학학생선교연맹의 파송을 받아 선교하던 매켄지(W.J.McKenzie, 梅見施 혹은 金世)의 불우한 죽음이 계기가 되었다. 소래에서 활동하던 매켄지는 ‘동학혁명’을 맞아 ‘척양척왜(斥洋斥倭)’를 부르짖던 농민군에게 호의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영양실조에 걸렸으면서도 그를 염려한 서울의 언더우드가 보낸 서양식 음식을 거부하고 한국인과 함께 주거와 식음을 같이하다가 그 결과 1895년 6월 24일에 죽었다. 그의 죽음은 캐나다인들의 한국 선교열을 고취시켰고, 매리타임즈 대회가 중심이 되어 캐나다 장로회 해외선교부에서 그리어슨(R.Grierson, 具禮孫) 맥레(D.M.McRae, 馬具禮) 푸트(W.R.Foote, 富斗一) 등을 한국 선교사로 임명, 1898년 9월 한국에 도착하게 되었다.
위에서 본 감리회와 장로회 외에, 영국성공회는 1890년에 트롤로프(M.N.Trollope, 趙馬可) 주교를 중심으로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하였고, 1900년에는 러시아 정교회가 러시아 공사관 안의 교당에서 공식예배를 시작하였다. 1904년에는 안식교가 진남포 용강 등지에서 손흥조·임기반 등에 의해 교회를 설립하였고, 1907년에는 오늘의 성결교회의 모체인 동양선교회가 김상준(金相濬)·정빈(鄭彬)에 의해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으로 시작되었으며, 1908년에는 영국의 구세군이 호가드(R.Hoggard, 許加斗)에 의해 선교가 시작되었다. 이 밖에도 미국 침례교 계통의 선교단체인 엘라딩기념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가 1895년에, 영국 계통의 플리머드형제단(Plymouth Brethren)이 1896년에, 일제의 한국침략에 발맞추어 일본의 조합교회(組合敎會)가 와다세(渡瀨常吉)를 앞세워 1909년 4월에 한국에 각각 들어오게 되었다

1.5.
지금까지 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한 경위를 중심으로 기독교의 한국 전래를 살폈다. 여기서 살필 수 있는 것은 전래 초기부터 한국에는 여러 교파가 무절제하게 전래되었다는 점이다. 뒷날 한국 교회에서 병폐로 나타났던 추악한 분열상은 이 때에 벌써 예견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교파적인 특징을 배경으로 하여 시작된 선교는 초기부터 경쟁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대부분의 선교부가 서울과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를 시작하였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한꺼번에 선교부가 많이 몰려 그 경쟁을 치열하게 전개하는 곳과 선교사의 발이 닿지 않은 지역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감리회와 장로회 사이에 선교지역을 분할하게 되었다. 선교지역 분할은 초기의 경쟁관계를 완화하기는 하였으나, 앞서 지적한 여러 교파의 도입이 한국 교회를 분열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한국교회의 분열을 가중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같은 외국 선교부의 도입과정에서 한국인들의 적극적인 수용의지가 있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일일이 밝힐 수 없지만, 가령 미국 북장로회의 한국에 대한 관심도 1882년에 도일(渡日)하여 그 이듬해에 개종한 이수정(李樹廷)이 미국의 선교잡지(예를 들면 The Missionary Review)에 한국 선교를 간절히 호소하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미국 남감리회의 경우 윤치호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이미 언급했거니와, 북감리회의 경우도, 일본에 갔던 김옥균이 한국의 기독교 수용의사를 강력히 피력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어렴풋이나마 “다른 제3세계 국가들에서 흔히 보이는 것처럼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국의 세력확장의 선봉대로 선교사를 먼저 파송한 것과는 다른 형태로 한국 선교가 추진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기독교 선교는,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 중 자국의 이익을 위해 활약한 점이 전혀 없다고는 부정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욕구를 지닌 한국인들의 적극적인 기독교 수용 의지와 함께 이뤄졌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2. 외국선교사 입국 이전의 기독교 복음의 전래

2.1.
위에서 언급한 한국 기독교의 수용사는 다분히 선교사 중심으로 한국의 기독교사를 이해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이해체계에 의하면, 선교사 입국 이전의 한국인이 기독교와 접촉하고 수용한 역사적인 사실은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성경의 일부가 한글로 번역되었고 많은 한국인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들 중에는 상당수가 번역된 성경을 한 반도로 갖고 들어와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이것은 중국과 만주를 통해 이뤄지고 있었다. 엄격히 말하면,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한반도에서는 번역된 성경에 의해 복음이 전해졌으며 신자가 생겨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기독교 복음은 선교사들의 입국에 의해 이뤄졌다는 종래의 주장은 수정되어야 하며 한국기독교의 기년(紀年)도 새롭게 정리되어야 한다.

2.2.
중국이 서양에 대해 문호를 개방한 것은 1840년의 아편전쟁과 그 2년 후의 남경조약에 의해서다. 구미의 선교단체들도 이 기회를 이용하여 많이 중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중 스코틀랜드의 연합장로회와 성서공회도 중국에 상륙하였다. 그들은 1860년대에 만주 요하(遼河) 하류 지역의 영구(營口)와 우장(牛莊)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만주 선교에 착수하였다. 주역은 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馬勤泰)와 존 로스(John Ross, 羅約翰)였다. 이들은 얼마 안 있어 1870년대에는 봉천(奉天, 瀋陽)에도 선교부를 설치하였다. 그렇게 한 이유의 하나는 한국에 대한 선교의 깊은 열정 때문이었다. 봉천에 선교부를 설치한 때를 전후하여 로스는 한·만 국경 관문이라 할 고려문을 방문하고 한국에 대한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은 만주에 와 있던 한국의 젊은이들을 만나 한국어를 배우기도 하고 한국에 관한 많은 정보를 축적하였다. 로스는 1877-79년 사이에 그 나름대로의 한국어 첫걸음에 해당하는 ‘Corean Primer’와 한국의 역사책인 ‘History of Corea’를 써서 간행하기도 하였다.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한편 그들에게 배운 한국어 실력을 기초로 그곳의 한국인들과 힘을 합쳐 성경을 번역하는 데에 정력을 기울였다. 1879년에는 4명의 한국인이 세례를 받았고 누가복음 등의 복음서가 번역이 완료되었다. 로스와 동역자들은 영국성서공회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인쇄에 필요한 기구들을 갖추고 1882년에는 번역된 성경을 인쇄에 붙쳐, 이 해 3월에는 누가복음을, 5월에는 요한복음을 각각 3천부씩 봉천의 문광(文光)서원에서 간행하였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간행하던 해에 이 일을 헌신적으로 도왔던 김청송(金靑松)과 서상륜(徐相崙)이 세례를 받았다. 뒤에서 다시 보겠지만, 이들은 출판된 성경을 압록강 대안의 서간도 지역과 의주 서울 등지에 반포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즉 성경과 전도책자를 반포하는 권서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문광서원에서 간행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그 종 각각 1천부씩을 일본에 있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지부의 톰슨 목사에게 전했다. 톰슨 목사는 1883년초에 일본인 권서(勸書) 나가노(長坂) 등을 통해 부산과 대구에서 이 복음서들을 한국인에게 보급하였다. 우리의 연구는 아직 이 때 남쪽에서 보급한 이 복음서들을 통해 기독교 복음에 접했다는 사실을 찾아낸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압록강 대안의 만주와 한국의 북쪽 지역에 보급된 성경을 통해서는 많은 열매가 맺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되고 있다.

2.3.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간행된 후, 로스· 매킨타이어와 함께 성경 번역·출판에 종사했던 한국인들은 그 성경을 반포하는 일에 협력하였고 그 노력이 수세(受洗)의 열매를 맺게 되었다.
먼저 압록강 대안의 서간도 지역에서 행한 성경 반포와 그 성과다. 당시 압록강 대안의 만주 땅에는 흉년과 기근, 관리들의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이 도강(渡江)하여 농사를 짓고 있었다. 조선과 청 나라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해서인지, 그 수는 무려 3만여명이나 되었다. 당시 조선의 인구 약 800만명에 비하면 이 숫자는 대단하였다. 이들은 28개의 마을에 거주하고 있었다. 마로 이곳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로스의 성경 출판을 도왔던 김청송이다.
김청송은 자신의 고향이자 고구려의 고도 국내성이었던 집안(輯安)을 중심으로 28개 한인 부락을 졸며 수백권의 <누가복음>과 전도문서를 반포하였다. 1882년에 들어 6개월간의 권서활동 후에, 그는 로스에게 세례 희망자가 있음을 보고하였으나 로스는 믿지 않았다. 그 이듬해 김청송은 다시 6개월간 권서활동을 한 후에 개종자가 있음을 보고하였다. 로스는 1883년과 그 이듬해에 임오군란으로 좌천된 군인과 한인촌 계곡의 학자가 자신을 찾아 봉천에까지 왔던 사실에 자극과 충격을 받았다. 따라서 로스는 1884년 11월 중순 동료 선교사 웹스터(J.Webster)와 함께 서간도의 한인촌 방문에 나섰다. 그들은 혹한 속에서 600마일의 긴 여행 끝에 묘이산에서 시작되는 한인촌으로부터 20명, 10명, 25명, 10명, 또 10명씩 도합 75명을 문답 후에 세례를 베풀었다. 75명의 수세자들은 16세부터 72세까지였으며 대부분 가장들이었다. 이 때 수세자들은 엄격히 선별되었고, 더 많은 수의 문답자들이 다음 기회로 연기되었으며, 아직도 문답들 거치지 않은 훨씬 더 많은 수의 세례 희망자들이 28개 마을에 산재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 로스는 “이러한 결과를 보니 몇권의 책을 번역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가!”하고 감사했고, 동행한 웹스터는 “나는 이 계곡들에서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데, 바로 이것이 ‘한국을 어떻게 복음화할 것인가’하는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고백하였다.. J.Webster, "The Maker of the Manchuria Mission - An Appreciation of the Late Rev.John Ross, D.D." The Missionary Record of the United & Free Church of Scotland, Vol. 15, 1915, p.394

로스는 1885년 초여름에도 한인촌 방문에 나섰다. 그러나 이 때에는 벌써 개종자들에게 심각한 박해가 가해지고 있었다. 중국인 지주들이 한국인 소작인들을 동원하여 ‘야비한 마적단’으로 고용해서 무장시킨 다음 ‘새로운 운동과 관련된 주요인물들’(아마도 개종자들인 듯함)을 덮치도록 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손수 지은 집과 개간한 농장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런 박해의 분위기 속에서 로스는 “핍박이 있거나 없거나 교회에 들어오려고 원하는 자들”. J.Ross, "The Christian Dawn in Korea"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1890. 4., p.246
25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김청송이 뿌린 복음의 씨앗은 1884년 겨울에서 이듬해 여름까지 이렇게 100명의 수세자를 남겼다. 그러나 로스의 첫번째 방문 이후 중국인 지주들이 가한 새로운 기독교운동에 대한 의심과 심한 박해는 두번째 방문의 열성을 가로막았지만, 이것은 도리어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더 큰 진보를 이루게 했다. 집과 농토를 잃은 수세자들이 흩어지면서 이들 ‘디아스포라’(diaspora)들에 의해 압록강 남쪽 연안이나 서북지방에 기독교 복음이 더욱 확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웹스터가 남긴 “얼마 후 개종자들의 대부분은 한인계곡들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들고 갔고, 미국 선교사들이 북부지방에 들어갔을 때 이곳저곳에서 압록강계곡의 옛 거주지에서 신앙지식을 받아들였던 믿는 무리들을 발견하였다”. J.Webster, "The Maker of the Manchutia Mission" p.396
고 한 기록을 통해서, 한국의 초대 기독교가 서북지방에서 어떻게 그렇게 발전될 수 있었는가의 한 증거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2.4.
1882년 문광서원에서 최초로 간행된 복음서들은 일본과 만주에만 공급된 것이 아니고 압록강을 건너 한 반도에도 들어와 복음화의 초석을 놓기 시작했다. 백홍준·이응찬이 의주 지역에서, 유진천(? Liu ChuinT)이 평양에서, 서경조가 소래에서 그리고 서상륜이 서울에서 권서활동을 전개함으로써 복음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한국인 자신들이 먼저 복음화의 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 중에서도 서상륜이 서울에서 권서활동을 전개한 것은 아펜젤러·언더우드 등이 입국하기 전으로서 이 점은 역사학계의 주목을 끈다고 하겠다.
1870년대 후반, 홍삼장사 차 요하 하류의 영구(營口)에 갔던 서상륜은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馬勤泰) 목사를 만나는 것을 인연으로 하여 성경번역 사업을 도왔고, 1882년 복음서가 출간될 즈음에 로스로부터 세레를 받고 그 6개월 후인 10월 6일에 로스 목사 부처와 “함께 엎디어 주께 도와주시며 보호하심을 기도하고 서로 작별”. <셔션 샹륜의 경력> 그리스도신문 5권 38호, 1901년 9월 19일자.
기도한 후에 권서행로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약 3개월간 의부 등 한국의 서부지역에서 권서활동을 전개한 후에 서울로 향했다. 그가 서울에 이른 것은 아마도 1883년 1월경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와 함께 의주를 떠난 동생 서경조가 당숙이 있는 소래에 이른 것도 같은 무렵일 것이다
서울에 이르자 서상륜은 이 사실을 로스에게 알리고 성경의 보급을 요청한 듯하다. 로스는 5월 22일 평양 출신의 청년 편으로 <요한복음> 300권과 <누가복음> 100권을 전달하였고, 이것을 받은 서상륜은 이것으로 그 해 연말까지 6개월간 은밀히 전도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여러 명의 개종자를 얻은 그는 로스에게 “서울로 와서 세례를 원하는 13명의 친구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주고 교회를 조직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J.Ross, "The Christian Dawn in Korea" p.247
그러나 로스는 올 수 없었다.
1884년경 봉천의 로스는 서상륜에게 <신약전서>와 <덕혜입문(德慧入門)>이 든 상자를 보냈다. 로스는 상해에 있는 영국성서공회 지부에 연락하여 서울의 묄렌도르프(P.G.Moellendorff, 穆麟德)를 거쳐 최종의 수취인인 서상륜에게 이 상자가 도달하도록 하였다. 서상륜은 소래에 있는 동생 서경조를 불러 성경과 <덕혜입문>을 전달하였다. 서경조는 이것을 받은 후 반년 동안이나 ‘심중전(心中戰)’을 거친 후 이 해 말에 가서야 믿게 되었다.. 徐景祚, <徐景祚의 信道와 傳道와 松川敎會 設立歷史> 神學指南 1925년 10월호, p.88
우리는 여기서 한국에서 가장 먼저 설립되었다고 전해지는 소래교회의 설립연도의 한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서울에서 권서활동을 하던 서상륜은 1885년 초에 봉천의 로스를 방문하게 된다. 그 자리에서 그는 2년간 서울에서 사역한 내용을 보고하였다. 로스는 서상륜이 보고한 내용을 받아 런던의 영국성서공회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그가 2년 동안 노력한 결과 현재 70명이 넘는 세례 청원자가 있으며 그 가운데 몇 명은 주목할 만한 사람들입니다.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 중에 한 명이 세례받기 위해 함께 이곳으로 왔는데, 그의 말을 빌리면 그는 서울의 서쪽에 있는 한 도시에 ‘설교당’을 개설하였고 그곳에 18명의 신자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서울 남쪽의 한 도시에 있는 다른 한 개종자는 ‘20명 이상’의 세례 청원자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1885년 3월 8일자로 영국성서공회에 보낸 John Ross의 편지


위의 인용에서 우리는 한국 기독교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이 편지가 발송된 1885년 3월 8일 이전에 서상륜이 활동한 서울에서 세레청원자 70 이상이 있었다는 점과
서울의 근처에 18명 혹은 20여명이 모이는 신앙공동체가 있었다는 점이다.

1885년 3월 8일이라면 복음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한국에 도착한 1885년 4월 5일 부활절보다
거의 1개월가량 앞섰기 때문이다.
한국의 주변에까지 와 있던 기독교는, 그 수용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른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위대한 모험을 감행한 자기희생적인 한국인 신앙 선각자들에 의해 주체적으로 수용되었던 것이다.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501777 2020-01-23T03:39:58Z 2020-01-23T03:48:44Z 하바국 개론

하바국 개론

1. 표제

하박국의 표제는 다른 소선지서들과 같이 단순히 저자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하박국이란 히브리어는 “포옹하다”라는 뜻의 동사인 카바크(chabaq)에서 왔다.
어떤 학자들은 이 이름을 향기높은 한 정원의 식물인 아카드어(Akkadian)
“함바크크”(hambaququ)의 이름과 관련시키기도 한다.
하박국이라는 이름은 구약 중 다른 곳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2. 저자

하박국에 대해서는 그의 책에 나타난 것 이외에 더 알 길이 없다.
하박국이 아모스처럼 어떤 다른 일에 종사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지(암 7:14)
혹은 선지자 학교에서 부르심을 위하여 특별한 훈련을 받았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유명한 키르벳 쿰란(Khirbet Qumran) 사본 중에 하박국서를 취급한 사본이 하나 있었다.
조사해 본 결과 그것은 고대의 미드라쉬(midrash)
즉 성경 주석 책으로 판명되었는데 하박국서에서 짧은 귀절들을 인용하고 저자의 해석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 기록은 잘 보존되기는 했지만 불행히도 많은 공백들과 빠진 문장들이 있었다.
그 주석은 13줄의 기록인데 단지 하박국서 첫 두장만 포함하고 있다.
그 사본은 두개의 이사야서 사본들의 연대와 비슷한 B.C. 100년 경의 것이다.

하박국 주석책은 더욱 완전한 이사야 사본들과 함께 현대 히브리 문자로 기록된 같은 본문들을 수록하여
밀라 버로우(Millar Burrows)에 의해 복사판으로 출판되었다(성 마가 수도원의 사해 사본, 제1권, New Haven :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1950).

성서학에서 하박국 주석책의 가장 중요한 점은 주석도 중요하긴 하지만 주석에 있지 않고 성경 본문에 있다.
그 당시의 어떤 종파(아마도 에세네파)에 의해 필사된 이 본문은 마소라 성경의 가장 오래된 사본들 보다 거의 천년이나 앞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박국서의 어떤 본문을 연구하는 데에도 대단히 가치있는 것이다(합 1:4; 2:1, 4, 5, 15, 16).

 3. 역사적 배경

하박국은 심각한 배교의 시대, 즉 므낫세 통치 후기나 아몬의 통치 기간, 혹은 요시아 통치 초기에 기록된 듯하다.
하박국의 봉사는 선지자 나훔의 봉사에 바로 뒤따라서 있었던 것같다.
이 견해는 히브리어와 희랍어 정경에 나타난 그 책의 순서 배열을 통하여 지지를 받는다.
하박국이 자기 백성에게 돌리고 있는 일반적인 죄악들,
그가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죄악들이 역시 같은 시대임을 가리키고 있다.
하박국은 백성들의 죄악 때문에 바벨론이 곧 쳐들어오는 위기가 닥칠 것이고
그 위기가 마침내 유다를 포로로 만들 것을 잘 알았다.

하박국은 이 위기를 유다에게 미리 경고했으며 하나님과 그 백성의 원수이며 우상 숭배에 빠지고
불의한 바벨론에 대하여 하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했다.

 4. 주제

하박국은 유다의 죄를 한탄하고 자기 백성이 벌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그들이 당해야 할 고통에 대해 염려한다.
그는 또한 하나님께서 징벌하시기 위해 사용하신 도구,
즉 계속적인 번영으로 축복받은 것처럼 보이는 갈대아인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다.

하나님께서는 회의(懷疑)에 차있는 당신의 종의 마음에 해답을 주신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징벌은 그들의 궁극적인 행복을 위한 것이지만
바벨론으로 대표되는 악인들의 세상적 번영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사라질 것임을 하박국에게 보여 주신다.

하박국 3장에 기록된 기도는 불경건한 자의 운명과 의인의 승리로 얻는 보상에 대한 생생한 묘사로 그 절정을 이룬다.
이 대조를 통해서 의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면 생명을 얻게 되는 반면에
악인들과 마찬가지로 갈대아인들의 의기양양한 교만심이 그들을 어떻게 죽음으로 몰아가는가를
하박국에게 보여 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성결과 믿음을 강조하기 때문에 하박국은 이사야와 함께 복음 선지자로 여겨지고 있다.

욥기서가 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가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준 것처럼
하박국서는 왜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번영하도록 허락하시는가하는 문제에 해답을 준다.

하박국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의인들의 승리를 간절히 바라지만,
왜 하나님께서 유다의 범죄와 배교를 벌하시거나 간섭하지 않으시고
표면상 묵과하시는 것처럼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합 1:1-4, 렘 12:1).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악한 길들을 그치게 하시고 징벌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갈대아인들을 도구로 쓰실 것임을 하박국에게 알려 주신다(합 1:5-11,  사 10:5-16).

이 설명은 하박국의 마음에 또 하나의 문제를 야기시킨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징벌하시기 위하여 어떻게 유다보다 더 악한 나라를 사용하실 수 있으실까?
그런 계획이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와 조화될 수 있을 것인가?(합 1:12-17)

조급하기는 하지만 순수하고 진지하게 하박국은 하나님의 대답을 요청한다(합 2:1).
잠간동안 하박국의 조급한 요청을 묵과하신 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유다에 대한 당신의 목적이 확실함을 보증하신다(합 2:2, 3).
그리고 하박국에게 겸비와 믿음이 필요함을 지적하신다(합 2:4).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죄악들을 열거하기 시작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패역과 사악함을 다 알고 계시며
당신께서 여전히 세상 만사를 주관하고 계심을 하박국에게 확신시켜 주신다.
따라서 하박국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잠잠하여야 할 것이었다(합 2:20).
즉 그분이 지혜로 하시는 일에 대하여 의심하지 말 것이었다.

하나님의 지혜와 뜻에 감히 도전함으로서 예의의 한계선을 벗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하박국은 겸손히 통회한다.
그러나 동시에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선택된 도구로서의
유다에 대한 그의 진실하고도 깊은 염려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공의가 자비로 말미암아 완화되기를 탄원한다(합 3:1, 2).

이 기도에 이어 하나님께서 신실한 자들의 구원과 그들의 적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일하고 계시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에 대한 계시가 뒤따른다(합 3:3-16).
그리하여 하박국서는 하나님의 계획의 지혜로우심과 종국적인 성공에 대한
하박국의 신념을 확인함으로써 끝마친다(합 3:17-19).

 5. 개요

Ⅰ. 문제 : 유다와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1:1-17
     1. 유다의 죄악에 대한 하박국의 불평 1:1-4
     2. 유다를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1:5-11
     3.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하박국의 항의 1:12-17

Ⅱ. 해결 : 하나님의 계획의 지혜와 성공에 대한 확신 2:1-20
     1. 하박국이 대답을 구함 2:1
     2.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의 지혜와 성공에 대해 확신을 갖도록 권하심 2:2-4, 20
     3.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국가적 죄들을 열거하심 2:5-19

Ⅲ. 하박국의 응답 3:1-19
     1. 하나님의 행동과 자비를 위한 중재 3:1, 2
     2. 심판과 구원에 관한 이상 3:3-16
     3. 하나님께 대한 하박국의 신앙 고백 3:17-19


하박국 선지자에 대해서 거의 알려진 바는 없기 때문에 많은 추측과 전통들이 있어왔지만,
추측의 수준을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많은 학자들이 하박국을 제의선지자로 간주하고 있지만,
제의 선지자라는 용어 자체도 명료한 것이 아니며, 확증된 것도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하박국서가 제의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특별히 3장의 시나 음악용어들은 예배에 사용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차일즈는 비록 하박국서의 상당 부분이 제의적인 배경 속에서 기원했을 수는 있지만,
이 책의 자서전적인 요소들(2:1, 3:2,16-19)은 이 책의 현재 모습이 제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역사적 배경

하박국서는 갈대아 사람들이 일어난 때인 주전 7세기 후반이나 주전 6세기 초까지 쓰여졌다.
이 때를 고려한다면 어쩌면 하박국은 예레미야, 스바냐, 나훔, 그리고 요엘 등과 동시대인이었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비평학계 일부에선 갈대아 인들을 깃딤인 곧 헬라인으로 간주하여 극단적으로 늦은 시기로 잡는 사람들도 있었다.

문학적인 배경

첫 부분은 선지자와 하나님과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선지자는 애가의 양식을 통해서 하나님께 불평을 함으로 시작한다.
악인의 형통에 대한 불평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갈대아인을 통해서 벌하실 것을 말씀하시자,
보다 더 큰 불평이 이어진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들어서 선민을 치시는 것에 대한 불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장에서 하나님은 그 심판의 확실성을 재차 확인하셨다.
3장은 고어체적인 히브리 시로 구성되어 있다.

신학적인 메시지

하박국은 역사의 마지막 시기에 처한 유다와 예루살렘에 말씀을 선포했다.
내적으로는 부패하였으며, 신흥하는 바벨론의 세력으로 도전을 받고 있었다.
선지자는 이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무관심하시다고 불평을 하고 있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어려움이 있어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하며,
나아가서 온 땅에 하나님이 공의를 행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했다.
결국 하박국은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며,
재난에 직면해서 자신의 구원자이신 여호와를 찬양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신약으로의 접근

바울은 의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하박국서를 인용한다.
우리도 또한 악의 시대에 살고 있는데, 동일한 해답이 있다.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우리도 또한 동일한 신앙의 삶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하나님도 행하실 것이다.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501351 2020-01-22T03:18:11Z 2020-01-22T03:18:11Z 우르과이의 한 성당벽에 써 있는 "반성하는 주기도문"

우르과이의 한 성당벽에 써 있는
"반성하는 주기도문"

- 주님의 기도를 바칠때-

"하늘에 계신" 하지 말아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 하지 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 하지 말아라.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지 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지 말아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지말아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말아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말아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 말아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 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 하지 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A message painted on a barrio church in Uruguay:


Don’t say Father
if each day you do not behave like a son.
Don’t say Our
if you live shut off in yourself.

Don’t say Who Art in Heaven
if you think only of worldly things.

Don’t say Hallowed Be Thy Name
unless you really honor it.

Don’t say Thy Kingdom Come
if you have a material outcome in mind.

Don’t say Thy Will Be Done
unless you are ready to accept it when it hurts.

Don’t say Our Daily Bread
unless you care about the hungry.

Don’t say Forgive Us Our Trespasses
if you bear a grudge against someone.

Don’t say Deliver Us From Evil
unless you are prepared to make a stand against it.

Don’t say Amen
unless you really mean it.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501297 2020-01-22T01:21:55Z 2020-01-22T01:21:55Z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3문, 제4문, 제5문

제 3 문 : 어떻게 당신의 비참함을 알 수 있습니까?
답 : 하나님의 율법이 내게 가르쳐 줍니다.
1) 로마서 3:20; 7:7-25

제 4 문 :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22:37-40 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1) 신명기 6:5
2) 레위기 19:18

제 5 문 : 당신은 그 모든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답 :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과 내 이웃을 미워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1) 로마서 3:9-20, 23; 요한일서 1:8, 10
2) 창세기 6:5; 예례미야 17:9; 로마서 7:23-24; 8:7; 에베소서 2:1-3; 디도서 3:3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501295 2020-01-22T01:17:19Z 2020-01-22T01:17:20Z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2문

제 2 문 : 이러한 위로의 기쁨 안에서 살다가 죽기 위하여 당신은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답 : 세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1
둘째, 어떻게 내가 그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났는가, 2
셋째, 나는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3

1) 로마서 3:9-10; 요한일서 1:10
2) 요한복음 17:3; 사도행전 4:12; 10:43
3) 마태복음 5:16; 로마서 6:13; 에베소서 5:8-10; 디모데후서 2:15; 베드로전서 2:9-10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501294 2020-01-22T01:16:15Z 2020-01-22T01:16:15Z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1문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서문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1559년부터 1576년까지 독일의 팔라티네이트 지역을 다스렸던 프레드릭 III 세의 요청에 의해서 1563년도에 하이델베르그시에서 작성되었다. 본 요리문답은 청년들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 그 지역 교회들의 설교를 위한 가이드로, 그리고 팔라티네이트 지역에 있는 다양한 개신교회들 사이에 통일된 신앙고백의 형태로 고안되었다.

오랜 전통은 본 요리문답의 저자로 자카리아스 울시누스 (Zacharias Ursinus)와 캐스퍼 올리비아누스 (Caspar Olevianus)를 공동저자로 지목하고 있지만, 사실 요리문답의 프로젝트는 프레드릭 III 세의 지휘 아래 여러 목회자들과 대학의 신학자들의 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울시누스는 아마도 그 팀의 주요저자로 그리고 올리비아누스는 그보다 적은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본 요리문답은 작성된 직후 1563년도 1월에 하이델베르그에서 열린 한 총회에서 인준되었다.
본문에 약간을 첨가한 두번째와 세번째 독일어 판, 그리고 라틴어 번역이 같은 해에 하이델베르그에서 출판되었다.
세번째 독일어 판은 1563년도 11월 15일에 작성된 팔라티네이트 교회헌법에 포함되었는데, 그 때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52개의 주일로 구성되어서 주일의 오후 예배에 사용되도록 하였다. 그렇게 사용하면 요리문답 전체를 1년의 설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돌트총회에서 1619년도에 인준된 직후에 개혁교회들 사이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요리문답과 신앙고백이 되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유럽,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다양한 언어들로 번역되었으며, 종교개혁 시대의 문서 중에서 현재도 가장 널리 사용되고 따듯하게 받아들여지는 요리문답으로 남아있다. 본 요리문답에 포함된 관련 성경구절들 대부분은 초기 독일어와 라틴어 판들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으며, 북미개혁교회 (CRC)의 1975 년도 총회가 타당하다고 인준한 것들이다.

제1문 : 사나 죽으나 당신의 단 하나의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1 사나 죽으나 2 몸과 영혼이 모두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3 주께서 보배로운 피를 흘려 나의 모든 죄값을 치러주셨고 4 마귀의 권세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5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는 6 나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나의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나를 항상 지켜주십니다. 7 실로 모든 것이 협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룹니다. 8 내가 주님의 것이기에 주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게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시고, 9 지금부터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기꺼이 주를 위하여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10

1) 고린도전서 6:19-20
2) 로마서 14:7-9
3) 고린도전서 3:23; 디도서 2:14
4) 베드로전서 1:18-19; 요한일서 1:7-9; 2:2
5) 요한복음 8:34-36; 히브리서 2:14-15 ; 요한일서 3:1-11
6) 마태복음 10:29-31; 누가복음 21:16-18
7) 요한복음 6:39-40; 10:27-30; 데살로니가후서 3:3; 베드로전서 1:5
8) 로마서 8:28
9) 로마서 8:15-16; 고린도후서 1:21-22; 5:5; 에베소서 1:13-14
10) 로마서 8:1-17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500908 2020-01-20T14:01:34Z 2020-01-20T14:01:34Z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주일 설교 2020-1-19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500736 2020-01-19T18:03:50Z 2020-01-19T18:03:50Z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주일 설교(2020-1-19) / 이승혁목사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498339 2020-01-12T17:55:54Z 2020-01-12T17:55:54Z 나를 속이는 것들(요한일서 1:6-10) / 주일설교(2020-1-12) 황선민목사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497624 2020-01-10T14:15:43Z 2020-01-19T03:39:22Z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주일 설교 원고(2020-1-19) 이승혁목사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 God is Love.

Θεὸς ἀγάπη ἐστίν(데오스 아가패 에스틴)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Whoever does not love does not know God, because God is love.) 

요한일서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성경에서 누구라고 고백하는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아는 것만큼 믿고, 믿는 것만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서신에서 하나님에 대한 중요한 고백 세 가지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 1: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 하나님은 빛이시라
빛의 영적 의미는 "생명(生命)"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이라.

둘째는 하나님은 영이시라(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 하나님은 영이시라
영의 영적 의미는 "자유(自由)"를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3: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셋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16)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의 영적 의미는 "용서(容恕)"를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빛과 영과 사랑의 공통된 특징은 "영원(永遠)"이라고 하겠습니다.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용서는 영원한 용서입니다.
자유는 영원한 자유입니다.

2020년 1월 5일 신년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오늘은 1월 4일(토)에 읽었던 요한일서 4장의 말씀 중에서 묵상 주제로 소개했던 "하나님은 사랑"이란
주제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하셨을까요?

(도입 예화) 희랍의 힐루카 대왕의 이야기

고대 희랍에 전설적인 힐루카 왕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당시 사회가 안고 있던 큰 문제는 미성년자들이 음행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미성년자들의 잘못된 생활을 법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매우 엄한 법을 공포했습니다.
그 법은 음행 하다가 붙잡힌 미성년자들은 두 눈을 뽑아 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동안 세상은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힐루카 왕의 하나 뿐인 아들 젊은 왕자가 붙잡혀 왔습니다.
재판장은 매우 난처했습니다.
장차 왕위를 계승할 왕자의 두 눈을 뽑으면 눈이 없어 볼 수 없는 왕을 세워야 합니다.
왕자에게만 특혜를 주면 법의 공정성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때 주저하는 재판장에게 힐루카 왕은 법대로 집행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왕자의 오른쪽 눈이 뽑혔습니다.
이어서 나머지 왼쪽 눈을 뽑으려고 할 때 힐루카 왕은 자신의 왼쪽 눈을 뽑게 했습니다.
왕자의 잘못도 법대로 처리한다는 깨닫게 된 백성들은 다시는 법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법 정신은 공의에 의해서 지켜져야 합니다.
사랑의 정신은 공의로운 실천에 의해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갈라디아서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율법이란 무엇입니까?
레위기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율법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했습니까?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셨을까요?
인간이 지킬 수 없는 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법을 지키지 못하면 범법자가 됩니다.
범법자는 반드시 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벌을 받아야 할 백성들을 위하여 자신의 눈을 뽑게 했던 힐루카 왕처럼 사랑의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속죄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로마서 3:20
,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야고보서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우리 말에는 "사랑" 이란 단어가 하나뿐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을 기록한 '코이네 헬라어'와 '헬라어'에는 사랑이란 단어를 다양하게 사용합니다.
먼저 사랑이란 다양한 단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랑이란 단어의 의미를 분명하게 살펴야 하는 이유는 언어의 혼돈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범위가 매우 넓습니다.

예를 들면 나라를 사랑한다는 대상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모를 사랑한다.
형제를 사랑한다.
친구를 사랑한다.
애인을 사랑한다.
음악을 사랑한다.
꽃을 사랑한다.
개(伴侶犬)를 사랑한다.
고양이(伴侶猫)를 사랑한다.
문학을 사랑한다.
교회를 사랑한다.
학문을 사랑한다.

우리 말에서는 사랑이란 단어 하나만으로도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그러나 헬라어에서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구분하여 사용했습니다.

첫째는 스토르게(storge, φιλόστοργος)(5387. philostorgos) 
Definition : tenderly loving
Usage : tenderly loving, kindly affectionate to.

로마서 12:10(형제를 사랑하여)

둘째는 필리아(philia, φιλία)(5373)
Definition : friendship
Usage : friendship, affection, fondness, love.

야고보서 4:4(세상과 벗된 것)

셋째는 에피투미아(epithumia, ἐπιθυμία)(1939)
Definition: desire, passionate longing, lust
Usage: desire, eagerness for, inordinate desire, lust.

마가복음 4:19(욕심), 누가복음 22:25(원하고 원하였노라)

넷째는 에로스(eors, Ἔρως)
성경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단어
그리스 신황에  등장하는 연정과 성애의 신이다.
로마신화에서 아모르 또는 큐피드와 같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고대 그리스어로 주로 이성에 대한 강렬한 성적 욕구를 의미하는 보통명사가 신격화된 것이다

다섯째는 아가페(agape, ἀγάπη)(26)
Definition : love, goodwill
Usage : love, benevolence, good will, esteem; plur: love-feasts

마태복음 24:12(사랑이 식어지리라), 누가복음 11:42(하나님께 대한 사랑), 요한복음 5:42(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란 단어가 우리 말처럼 단순하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필요한 단어를 사용하므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한 예를 성경에서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노련한 어부이었지만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여 피곤하고 지쳤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져보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순식간에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물을 잡아 당기면서 얼마나 많은 고기가 잡혔는지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고 말씀하셨던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잡은 물고기를 구워 아침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가 사용한 사랑이란 단어는 "필리아" 라는 단어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단어는 "아가페"와 "필리아"이었습니다. 처음과 두번째는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세번째는 필리아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아가페라는 사랑은 베드로처럼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입장에서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변함없이 사랑하고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헌신적인 사랑으로 마치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처럼 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필리아라는 사랑은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과 같은 사랑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물었을 때 어떻게 베드로가 주님에게 아가페라고 대답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필리아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을 헤아리셨던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네가 정말 나를 필리아할 수 있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예 나는 주님을 필리아 할 수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많은 신혼부부들이 예식장에서 주례와 증인들 앞에서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 사랑할 것을 다짐하고 약속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부부들이 서로 헤어지고 있습니까?

인간들의 사랑이란 이렇게 약속을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시리라는 말씀은 인간들이 배신하고 떠나버려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은 "용서하는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용서의 특징은 덮어주는 것입니다.

가죽옷으로 덮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창세기 3:21)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으로 덮어주셨습니다.

방주의 안과 밖을 역청을 바르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창세기 6:14)
노아가 방주를 만든 나무를 '잣나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개역 개정판 성경에서는 '고페르 나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역청을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역청을 "코페르"라고 합니다. 코페르라는 단어는 "속죄" 라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속죄제 제물의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피로 덮는 용서가 완성된 것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므로 모든 사람의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예수께서 흘리신 피를 "화목제"라고 합니다.
 
화목제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사랑
요한일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인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화목제를 히브리어로 "제바흐 쉘라밈" 이라고 합니다.
제바흐제물, 쉘라밈평화(샬롬의 복수형)

화목제 제사의 특징

첫째는 암수 모두 바칠 수 있다.

둘째는 기름과 콩팥을 드린다.
(기름이 잘 타기 때문이다)

셋째는 남은 제물은 바친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이 나눠 먹을 수 있다.
(단 3일 이내에 만 먹어야 하고 그 후에는 반드시 불에 태워버려야 한다)

넷째는 평등 의무 제사
화목제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배려하는 산비둘기, 집비둘기의 새끼는 제물을 받지 않는 평등의무 제사였습니다.
즉 성막을 지을 때에는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에게 똑 같은 속전을 거두시게 하신 것처럼, 평등하게 부담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화목제 제사의 근거
로마서 3:23-26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예화) 가정과 화평

메이어라는 랍비는 설교를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그는 매주 금요일 밤이면 예배당에서 어김없이 설교를 했는데, 몇 백 명씩 한꺼번에 몰려 들어 그의 설교를 들었다.
그들 가운데 메이어의 설교듣기를 매우 좋아하는 여인이 있었다.
다른 여자들은 금요일 밤이되면 안식일에 먹을 음식을 만드느라 바쁜데, 그 여자만은 이 랍비의 설교를 들으러 나왔다.
메이어는 긴 시간 동안 설교를 했고 그 여인은 그 설교에 만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남편이 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내일이 안식일인데 음식은 장만하지 않고 어디를 쏘다니고 있느냐며 화를 내며 물었다.
"도대체 어디를 갔다 왔어!"
"예배당에서 메이어 랍비님의 설교를 듣고 오는 길이예요"
그러자 남편은 몹시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 랍비의 얼굴에다 침을 뱉고 오기전에는 절대로 집에 들어올 생각은 하지도 말어!"
집에서 쫓겨난 아내는 할 수 없이 친구 집에서 머물며 남편과 별거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메이어는 자기의 설교가 너무 길었기 때문에 한 가정의 평화를 깨뜨렸다고 몹시 후회했다.
그리고는 그 여인을 불러 눈이 몹시 아프다고 호소하면서 '남의 타액으로 씻으면 낫게 된다는데, 당신이 좀 씻어 주시오'하고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여인은 랍비의 눈에다 침을 뱉게 되었다.

제자들은 랍비에게 '선생님께선 덕망이 높으신데, 어째서 여자가 얼굴에 침을 밷도록 허락하셨습니까?'하니 랍비는 이렇게 말했다.

"가정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는 그 보다도 더한 일이라도 할 수 있다네."

사랑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 아들이 화목제 희생의 제물이 되어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일에 이르기를 원하는 사랑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무섭게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던 시대에 기록된 말씀으로 빨리 예수님 오시기를 갈망한 예언서입니다.
그런데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주님은 다시 오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예수님을 알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사랑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가페 사랑의 힘

첫째, 두려움을 물리치는 힘(요한일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합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힘 이상의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딤후 1:7).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두려움이란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의 줄임말
(Fear ; False Evidence Appering Real)

반려견을 돌보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처음에 집으로 데려오면 불안하여 부들부들 떨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집 주인은 나를 버리지 않겠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 꼬리를 흔들고
따라다니며 좋아한다고 합니다.

강아지도 이렇게 반응한다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둘째, 성령으로 역사하는 힘(요한일서 4:12∼23)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울이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믿고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면 하나님의 영, 곧 인격을 가지신 거룩한 바람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임재 하시어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그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겠습니까!

셋째,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도록 역사하는 힘(요한일서 4:14∼15)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 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아가페 사랑)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1. 내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보니
슬픔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2. 주의 얼굴 뵙기전에 멀리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3.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예수 모신곳이 그어디나 하늘나라

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모든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결론을 위한 이야기)
중국 후한을 세운 광무제에게 호양 공주라는 여동생이 있었다고 합니다.
호양 공주가 아끼는 노비가 있었는데 공주의 권세를 믿고 살인을 한 후에 공주의 저택에 숨어서 지냈습니다.
당시 낙양성의 치안을 담당했던 "동선"이라는 관리가 이 노비를 처벌 하기 위해서 공주의 대문 앞에 잠복하고 있다가 공주가 외출할 때 따라 나오는 노비를 붙잡아 그 자리에서 처형했다고 합니다.

공주는 자신의 눈앞에서 아끼는 노비가 죽음을 당하자 오빠 광무제에게 동선이라는 관리를 처형하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에 광무제가 동선을 불러 공주에게 사과하라고 하자 동선은 자신은 사과하지 못하겠고 차라리 죽겠다고 버텼습니다. 이런 광경을 본 호양 공주는 "오빠가 황제가 아니었을 때에는 집에다 죄 지은 사람을 숨겨 주어도 관가에서 잡아가지 못했는데 오히려 황제가 되고나니 오빠의 힘이 줄어든 것 같다."며 짜증을 부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광무제는 웃으면서 "황제가 되었으니 일반 백성 때와 같이 행동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하면서 고집쟁이 관리인 동선을 풀어주고 오히려 상을 주었다고 합니다.

광무제는 여동생 호양공주를 달래고 정직한 관리를 풀어줌으로써 친인척도 달래고 국정의 기강도 바로잡았다는 교훈입니다.

오랜 중국의 역사에서 후한의 광무제가 공신들을 잘 관리한 군주로 뽑힌다고 합니다. 광무제는 자신을 도와서 후한을 세운 공신들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명예를 주었지만 건국 이후 국정에는 손을 떼도록 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의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은혜를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릴 수 있는 그 날이 속히 도래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을 위한 이야기)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중에 "두 노인"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가난한 농부와 부자 상인이 긴 세월을 두고 꿈꾸며 계획했던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납니다.
며칠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던중 가난한 농부가 목이 마르다며 걸음을 멈추고 부자 상인에게 “여보게 저기 마을에 잠시 들려 물을 마시고 갈테니 자네 먼저 가게나” 하고 마을 가장 가까이 있는 허름한 집으로 들어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깜짝 놀랐습니다.
온 식구가 전염병에 걸려 앓고 있었으며 또 며칠을  굶었는지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우선 이것으로 먹을 것을 사세요. 그러면 힘이 날겁니다” 라며 가지고 있는 돈을 내밀었습니다.
농부는 여비가 없어서 여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부자 노인은 예루살렘에 도착해 성지를 둘러보고 예배도 드리며 성찬식도 참석해 은혜를 받았습니다.

몇 달간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부자도 여비가 떨어져 집으로 돌아 오다가 농부의 생각이 나서 그와 헤어졌던 마을에 들어갔을 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성인입니다. 그분이 없었다면 우리 식구는 모두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부자노인은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과연 농부의 행위가 옳은것 이었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순례가 아니라 남을 보살피며 살아가는 삶이야” 라고 중얼 거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이나 경제적으로 소외돼 거리와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연약하고 외로운 자들에게 형제 사랑을 실천했을까?

사실 가난한자들은 불합리한 사회적 환경과 제도의 모순, 부자의 횡포 등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하며 사회의 음지에서 소외된 채 타인의 관심과 배려없인 살수 없다.

그럼 그들을 누가 도와 주어야 할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약함과 사회의 구조적인 악에만 그 탓을 돌리거나 회피하지 말고 또한 조건을 붙여 배척하거나 간과하지 말고 도와줘야 한다.

이것은 공중의 새와 들판의 폴 한포기 까지도 관심을 가지신(마 6:26-29)
하나님의 뜻이며 율법의 대강령이자(마 22:36-40)
하나님께서 당신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가지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자기같이 사랑하라”(레 19:34)고 가난한자들을 맡겨 주셨기 때문이다.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495922 2020-01-06T05:05:53Z 2020-01-06T05:05:53Z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 1:5) / 주일 설교(2020-01-05) 이승혁목사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495550 2020-01-04T19:51:30Z 2020-01-06T12:29:35Z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 1:5) / 주일 설교 원고(2020-01-05) 이승혁목사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 1:5)

요한일서 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빛이시라!
God is light.
ὁ Θεὸς φῶς ἐστιν(the God light is)

2020년 첫 주일을 맞이합니다.
첫 주일의 의미를 “시작(始作)이 반(半)” 이라는 속담과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는 끼울 구멍이 없다”는 독일의 문호 궤테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 주일 예배에 성공한다면 2020년의 절반은 이미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에 오늘의 예배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 세자를 남긴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죽어서 무엇을 남겨야 할까요? 속담대로 한다면 사람은 누구나 이름 세 글자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남길 수 있는 것과 다른 것을 남겨야 할 것입니다.
다른 것을 남기려면 먼저 나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2020년 신앙생활을 위한 목표를 위한 표어를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라고 결정했습니다.

지난 1월 1일부터 요한일서를 읽기 시작하여 1장부터 4장까지 읽었습니다.
함께 읽었던 말씀 중에서 설교 본문을 선택하고 설교하기 위하여 오늘 설교 제목은 요한일서 1장 5절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을 선택했습니다.

빛에 대한 탈무드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도입 이야기)
어느 유명한 랍비가 제자들에게 10불씩 나눠주며 날이 어둡기 전에 기도실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물건을 구해오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모였을 때 랍비는 제자들이 구입한 물건들을 확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이 가져온 것들은 기도실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10불을 갖고는 기도실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물건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평소에 어리석고 둔하다고 놀림을 받던 제자가 전기 스위치를 내리더니 어두워진 기도실 책상 위에 양초를 올려놓고  불을 밝혔습니다. 그 순간 어둡던 기도실이 환해졌습니다. 작은 양초의 불빛이 기도실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빛이란 어두운 방안을 물리칠 수 있다는 교훈의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지난 한 주일 동안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말씀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빛이라고 하셨을까요?

신약 성경 27권을 세 개의 기둥으로 설명하면 “복음의 기둥”과 “요한의 기둥” 그리고 “바울의 기둥”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기둥에서 빛이란 “착한 행실”이라고 합니다(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을 사람 앞에 비취에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바울의 기둥에서 빛이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합니다(에베소서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의로움진실함에 있느니라.  

요한의 기둥에서 빛이란 복음서와 바울 서신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내용을 말씀하여 "생명"이라고 합니다(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이라.

복음서와 바울 서신에서는 빛을 도덕과 윤리적인 행동으로 제한시켰습니다. 그러나 요한서신에서는 빛을 도덕과 윤리적인 행동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좁은 범위에서 읽을 수 있지만 2020년부터는 넓은 범위에서 읽고 묵상하려고 합니다. 주간에 읽은 말씀 중에서 설교 본문으로 선택하고 설교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더불어 설교하므로 성경을 폭 넓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스스로 존재하시는 영”입니다.

생명은 유일한 것입니다(시편 22:20)
-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①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①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① 내 유일한 것을 난외 주에서 "내 생명" 이라고 번역합니다.

시편 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욥기 33:30
그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돌이키고 생명의 빛으로 그에게 비취려 하심이니라.

시편 56:13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영원한 생명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영의 하나님을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합니다. 삼위일체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성부(聖父) 하나님(야고보서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성자(聖子) 예수님(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일서 1: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 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요한일서 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성령(聖靈) 하나님(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이한 빛"이란 "놀라운 빛"을 말합니다. 놀라운 빛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어두운 죄 가운데서 불러내어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신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기이한 빛이 되신 예수님은 놀라운 빛으로 죄악에 붙잡힌 인생을 불러내십니다. 그 좋은 예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을 향하여 가는 길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사울은 땅에 엎드렸을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이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물었을 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러한 기이하고 놀라운 빛을 곧 성령의 역사라고 하겠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다양한 빛으로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로 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성령님은 기이한 빛으로 임하셨습니다.

생명의 하나님(시편 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민수기 16:22
그 두 사람이 엎드려 가로되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민수기 27:16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예수님은 생명의 주(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성령님은 살리는 영(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곧 생명이라.

잠언 4:20∼23,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건강이 됨이니라.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 의 반대를 요한일서에서는 "어두움" 이라고 합니다.
요한일서에서 "어두움"이란 단어가 3회 사용되었습니다(1:5, 2:8, 2:11).
어두움의 정체를 요한일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2: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2: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어두움(어둠)은 "눈을 멀게 한다."
눈을 멀게하면 생명이신 하나님을 볼 수 없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 1:5)

1. 빛은 생명(시편 36:9, 56:13, 욥기 33:30)

시편 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욥기 33:30
그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돌이키고 생명의 빛으로 그에게 비취려 하심이니라.

시편 56:13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2. 빛은 구원(시편 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3. 빛은 치료(말라기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4. 빛은 사랑(요한일서 2: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5. 새 하늘의 성전(요한계시록 21:24)

만국이 그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6.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494603 2020-01-01T13:40:46Z 2020-01-03T10:02:38Z 2020 주간 묵상(1월 1일-4일)


오늘의 말씀

12

30

말 1:1∼2:17, 계 21:1∼21:27, 잠 31:1∼31:9

12

31

말 3:1∼4:6, 계 22:1∼22:21, 잠 31:10∼31:31

1

1

요한일서 1:1∼10

하나님은 빛이시라

1

2

요한일서 2:1∼29

대언자

1

3

요한일서 3:1∼24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심

1

4

요한일서 4:1∼2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1

5

주일

교회 중심(교제, 섬김, 봉사, 나눔)



♦ 1월 1일(수)

말씀 : 요한일서 1:1∼10
묵상 : 하나님은 빛이시라(God is Light)(5절)
성구 :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참조 :
야고보서 1:17(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
요한일서 4:8(하나님은 사랑)
요한복음 4:24(하나님은 영)

☞ 빛(φῶς, 5457. phós) ;
빛(light, radiance),
빛의 근원(a source of light)
radiance의 빛이란 첫째는 행복감과 건강 등이 얼굴에 나타나는 빛, 둘째는 따스하고 밝은 빛을 말합니다.
 
♦ 빛의 특징
1. 불변(야고보서 1:17)
2. 사랑(요한일서 4:8)
3. 영(靈)(요한복음 4:24)

♦ 빛의 이야기
어느 날 시각장애인이 등불을 켜들고 밤길을 나섰습니다. 나는 비록 불빛을 볼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이 내가 들고 있는 등불을 보고 부딪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얼마동안 잘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과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시각장애인은 버럭 화를 내며 “당신은 눈도 없소? 나는 앞을 못 보지만 당신은 내가 들고 있는 이 등불을 보지 못하시오?” 그때 상대방이 “꺼진 등불을 어떻게 봅니까?”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 너희는 세상의 빛이시라!(마태복음 5:14)
2020년 빛의 사람으로 세상을 밝혀줄 당신의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위하여 날마다 기도합시다.

♦ 주여, 빛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미국의 정치가이며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 라고 불렸단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 1. 17~1790. 4. 17)은 그가 살고 있던 필라델피아 시민들에게 선한 일을 하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는 아름답고 좋은 등을 하나 준비해서 집 앞에 선반을 만들고 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등불은 집 안에 두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집 밖에 두는 것은 낭비라고 여겼습니다.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사람들은 뭔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집 밖에 등불을 두니까 밤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멀리서도 방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좋게 생각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 밖에 등불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가 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가로등의 시작이었다고 합니다.

만약 길거리에 가로등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캄캄하고 어둡겠습니까? 세계적으로 가로등이 생기게 된 것은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을 위하여 집 밖에 등불을 둠으로써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선한 행동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감화를 준 것입니다.

♦ 나는 어떤 방법으로 빛의 삶을 실천할 것인가 살펴봅시다!

- 빛에 거한다면 어둠이 없습니다. 어둠이란 “죄성”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할수록 숨어 있던 우리의 죄를 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주여, 나의 숨은 죄를 깨달아 온전히 벗어버리게 하옵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1월 1일(수)

오늘의 주제 묵상 단상(斷想)
- 하나님은 빛이시라(God is Light)

빛(φῶς, 포스, phós)이란 물리적인 빛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은 신령한 존재를 말합니다.
신령한 존재는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통된 존재 양식은 “생명(生命)”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스스로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성령으로 임하여 죽음 후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영원한 생명이 되셨습니다.
성령은 살리는 영으로 죽은 사람의 몸에 성령이 잉태하듯 죽은 육체 속에 들어가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 생명이 됩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는 생명으로 하나가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 1월 2일(목)

♦ 말씀 : 요한일서 2:1∼29
♦ 묵상 : 대언자(An Advocate)(1절)
♦ 성구 :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참조 : 요한일서 14:16

☞ 대언자(代言者)(παράκλητος, 3875. paraklétos)
대언자는 요한복음에서 “보혜사”(14:16, 26. 15:26. 16:6, 13) 또는 “진리의 영” “진리의 성령”(14:17. 15:26. 16:13)으로 소개합니다.

♦ 보혜사 이야기

특별감지기능(特別感知技能)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시각(視覺), 촉각(觸覺), 미각(味覺), 청각(聽覺), 취각(吹角) 등 오감(五感)만으로는 감지할 수 없고 판단할 수도 없는 것을 과학적 기계를 가지고 감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북극의 자력을 감지하는 나침판이 있고, 먼 곳에 오는 전파는 레이더(radar)로 감지합니다. 먼별에서 날아오는 에너르기는 레이더(radar) 망원경으로 감지합니다.

세상에는 특별감지기능을 갖고 있는 기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들이 있는 것처럼   만일 인간이 갖고 있는 오감을 통해서 감지할 수 있는 것만 인정한다면 세상의 일부분만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의 오감으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 수 없다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성령을 모신 자만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 수 있는 특별감지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한복음 14:16).

♦ 보혜사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심을 증거 할 수 있습니까?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1월 2일(목)

오늘의 주제 묵상 단상(斷想)
- 대언자(代言者, 파라클래토스, παράκλητος, paraklétos)

성령께서 나의 대언자가 되려면 반드시 내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가 무엇인가요?

“방언” “예언” “신유 은사” “방언 통역” 등과 같은 현상적인 것을 자주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현상이지 실체가 아닙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사도행전 19:2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성령을 받았는지 점검하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믿음이 분명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주를 고백한 후에는 삶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지혜롭게 행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마가복음 13: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성령의 사람은 지혜로운 말을 합니다.
그 지혜는 지식이 아닙니다.

♦ 1월 3일(금)

♦ 말씀 : 요한일서 3:1∼24
♦ 묵상 :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심(8절)
♦ 성구 :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
오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children of God)”라고 합니다(요 1:12).
예수께서 마귀의 일을 멸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권세(權勢)”를 주셨습니다. 그 ‘권세’를 합법적(合法的) 권세(權勢, ἐξουσία, 에쿠시아)라고 합니다.

합법적 권세란 마치 교통경찰이 도로에서 교통법규를 위반한 차량에게 범칙금 티켓을 발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경찰보다 키가 크고 힘이 강한 사람이 도로에서 경찰처럼 교통법규를 위반한 차량을 멈추라고 하면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찰은 합법적인 권한을 부여받았으므로 얼마든지 교통법규를 위반한 차량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마귀의 일 즉 죄를 짓는 유혹의 손길을 합법적으로 주신 권세를 사용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이 권세는 나의 능력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권세를 주를 믿는 자녀들이 사용할 수 있는 법적인 권세를 말합니다.

♦ 내 삶의 영역에서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할 것이 무엇인가 찾아봅시다.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명령해 봅시다. 아직도 내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나의 믿음을 더 강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주여,
나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붙잡아 주옵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ἐξουσία(1849. exousia)
정의(Definition) : power to act, authority
용법(Usage) : (a) power, authority, weight, especially: moral authority, influence.
(b) in a quasi-personal sense, derived from later Judaism, of a spiritual power, and hence of an earthly power.


1월 3일(금)
오늘의 주제 묵상 단상(斷想)
- 합법적(合法的) 권세(權勢) 에쿠시아(ἐξουσία)

예수 이름으로 명(命)하여 더러운 귀신(鬼神)을 내쫓는 힘은 어디에서 나와야 할까요?
합법적으로 이미 주어진 권세는 두 가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의 보증(고린도후서 1:22, 5:5)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둘째는 권세를 사용할 수 있는 기도(마가복음 9:29)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이미 주어진 합법적인 권세를 믿음의 기도로 무장할 때 성령께서 보증하여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물러가라!” 외치고 선포할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증거 하는 성령의 사람으로 쓰임받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 1월 4일(토)

♦ 말씀 : 요한일서 4:1∼21
♦ 묵상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8절)
♦ 성구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God is Love)(ὁ Θεὸς ἀγάπη ἐστίν)
☞ 사랑(ἀγάπη, 26. agapé)
(정의, Definition) : love, goodwill
(적용, Usage) : love, benevolence, good will, esteem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희생적 사랑입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남녀 간의 쾌락적 사랑입니다.
필리아의 사랑은 친구들 사이의 우정입니다.
스토르게의 사랑은 가족 특히 혈연관계의 가족애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경험하셨나요?
내가 직접 경험했던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해 봅시다.
그리고 나와 다른 경험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높고 넓고 깊고 위대한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 하나님의 사랑은 “피의 사랑”입니다.
피를 통하여 사랑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사랑을 완성하는 은혜입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브리서 9:22) 

♦ 주님의 피로 사랑을 확인하셨는지요?
그 사랑을 아가패(agape) 즉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 스토르게(가족의 사랑)의 사랑을 확인해 봅시다.

1988년 12월 7일 11시, 당시 소련의 영토인 “아르메니아”에 지진이 감지되었습니다.
원래 지진이 많은 지역이어서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곧 일상으로 돌아가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30분 후, 진도 7.0 이상의 강진이 발생하였고 대부분 내진설계가 되어있지 않던 석조 주택들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고, 도시는 폐허가 되어버렸습니다.
 
지진이 벌어지고 3일 만에 2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확인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피해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기만 했습니다.
 
끔찍하게도 사망한 대부분의 사람은 무너진 건물에 깔린 압사였습니다.
이때, 지진으로 무너진 9층 건물의 잔해 속에 26살의 어머니 “스잔나 페트로시안”과 4살 된 딸 “가야니”도 갇혔습니다.
모녀를 기다리는 것은 오직 죽음의 공포뿐이었습니다.
여진이 느껴질 때마다 머리 위의 잔해들이 다시 무너지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습니다.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들을 뚫고 나가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몸을 들썩이는 것조차 두려운 와중에 아이는 갈증과 굶주림에 지쳐 큰 소리로 울부짖었습니다.
 
“엄마. 너무 목이 말라요.”
 
그때 “스잔나”는 부서진 유리 조각으로 손가락을 찔러 딸에게 자신의 피를 먹였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보챌 때마다 차례차례 손가락을 베어 아기의 입에 물렸습니다.
 
이 모녀가 극적으로 구출된 것은 매몰되고 14일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렇게 빠져나온 어머니 “스잔나”의 손가락 열 개는 모두 피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엄마는 그저 딸이 살았다는 것에 감사하고 안도했습니다.
 
딸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피는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고통스러워하는 딸을 위해서 어떠한 고통도 감당한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은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십자가에서 흘리셨던 주님의 피가죄와 사망의 사슬을 풀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살아났습니다.
피로 얻은 새로운 생명입니다.
이 생명 다하도록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인간의 도리가 아닐까요?

♦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인가요?
그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494381 2019-12-31T10:38:24Z 2019-12-31T10:38:24Z 신약 27권 분류

♦ 신약 27권 분류

사복음서(4권)
-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역사서(1권)
- 사도행전

바울서신 (13권) 
 바울의 1차 전도여행(47-49)  
 바울의 2차 전도여행(49-52)
 -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갈라디아서 
 바울의 3차 전도여행(53-57)
 -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 
 바울의 1차 구금(60-62)
 - 골로새서, 빌레몬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바울의 4차 전도여행(62-66)
 - 디모데전서, 디도서 
 바울의 2차 구금(66-67)
 - 디모데후서 
  
공동서신(8권) 
-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야고보서, 유다서, 히브리서
 
예언서(1권)
- 요한계시록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494129 2019-12-30T14:22:58Z 2019-12-30T14:22:58Z 요한일서 묵상(2020. 1. 1-1. 6)

요한일서 묵상

♦ 1월 1일(수)

말씀 : 요한일서 1:1∼10

묵상 : 하나님은 빛이시라(God is Light)(5절)

성구 :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참조 :
야고보서 1:17(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
요한일서 4:8(하나님은 사랑)
요한복음 4:24(하나님은 영)

☞ 빛(φῶς, 5457. phós) ;
빛(light, radiance),
빛의 근원(a source of light)
radiance의 빛이란 첫째는 행복감과 건강 등이 얼굴에 나타나는 빛, 둘째는 따스하고 밝은 빛을 말합니다.
 
♦ 빛의 특징
1. 불변(야고보서 1:17)
2. 사랑(요한일서 4:8)
3. 영(靈)(요한복음 4:24)

♦ 빛의 이야기
어느 날 시각장애인이 등불을 켜들고 밤길을 나섰습니다.
나는 비록 불빛을 볼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이 내가 들고 있는 등불을 보고 부딪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얼마동안 잘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과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시각장애인은 버럭 화를 내며
“당신은 눈도 없소? 나는 앞을 못 보지만 당신은 내가 들고 있는 이 등불을 보지 못하시오?”
그때 상대방이
“꺼진 등불을 어떻게 봅니까?”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 너희는 세상의 빛이시라!(마태복음 5:14)
2020년 빛의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세상을 밝혀줄 나의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위하여 날마다 기도합시다.

♦ 주여, 빛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미국의 정치가이며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 라고 불렸단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 1. 17~1790. 4. 17)은
그가 살고 있던 필라델피아 시민들에게 선한 일을 하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는 아름답고 좋은 등을 하나 준비해서 집 앞에 선반을 만들고 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등불은 집 안에 두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집 밖에 두는 것은 낭비라고 여겼습니다.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사람들은 뭔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집 밖에 등불을 두니까 밤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멀리서도 방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좋게 생각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 밖에 등불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가 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가로등의 시작이었다고 합니다.

만약 길거리에 가로등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캄캄하고 어둡겠습니까?
가로등이 생기게 된 것은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을 위하여 집 밖에 등불을 둠으로써 생겨나게 된 것처럼 오늘날도 한 사람의 빛과 같은 선한 행동이 여러 사람에게 감동과 감화를 줄 것입니다.

2020년을 빛처럼 살아보시지 않겠습니까?
이 작은 나의 빛된 삶이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고 감동이 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소망의 빛으로 비추기를 기도합니다.

♦ 나는 어떤 방법으로 빛의 삶을 실천할 것인가 살펴봅시다!

빛에 거한다면 어둠이 없습니다.
어둠이란 “죄성”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할수록 숨어 있던 우리의 죄를 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주여,
나의 숨은 죄를 깨달아
온전히 벗어버리게 하옵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493950 2019-12-29T17:40:11Z 2020-01-02T14:31:53Z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Ⅱ(계 2:7, 시 119:169) / 주일설교(2019-12-29) 이승혁목사

]]>
Victor Lee
tag:nykcn.org,2013:Post/1493884 2019-12-29T00:52:11Z 2019-12-29T02:56:10Z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계 2:7, 시 119:169) / 주일설교 원고(2019-12-29)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시편 119:169. 요한계시록 2:7)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라는 제목을 한자로 표현하면 “자각지성경(自覺之聖經)” 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칭찬만 들었던 교회와 책망만 들었던 교회 그리고 칭찬과 책망을 동시에 들었던 교회를 향하여 동일하게 말씀하시기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교회들을 향하여 무엇을 말씀하실까요?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시편 119편 169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May my cry come before you, O LORD; give me understanding according to your word.) 

주의 말씀 앞에서는 모든 사람들은 죄인입니다.
죄인은 반드시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합니다.

죄를 도말(塗抹)하신다!
- 구름과 안개가 사라짐같이(이사야 44: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시편 51:9, 골로새서 2:14)

죄를 망각(妄覺)하신다!
- 기억하지 않는다!
(이사야 43:25, 시편 25:7, 히브리서 10:17)

죄를 용서(容恕)하신다!
- 등 뒤로 던져버린다!
(시편 39:13, 이사야 38:17)

죄를 세탁(洗濯)하신다!
- 어린 양의 피로 씻어주신다!
(요한계시록 7:14, 에베소서 5:26)

죄의 문제를 해결한 후에는 날마다 주의 말씀을 묵상(黙想)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는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만을 섬기려는 것입니다(시편 130:4).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현대인)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므로 우리가 두려운 마음으로 주를 섬깁니다. 

만일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들은 영원한 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욥기 10:14).

내가 범죄 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내 죄악을 사유치 아니하시나이다. 
주의 말씀을 묵상하라!

잠언 28:5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

주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여호와를 찾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는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누가복음 5:8)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게네사렛 호수가에서 예수께서 많은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실 때 마침 해변가에 두 개의 배가 있었습니다.
한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 배의 주인은 시몬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시몬의 배에 오르신 후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떨어지게 하신 후
배 위에서 육지에 모여 있던 많은 무리들을 향하여 말씀마친 후에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시몬은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시몬은 예수의 무릎에 엎으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시몬의 깨달음은 삶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고백이었습니다.
어부 시몬이 변화되어 제자 베드로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참조 누가복음 5:1∼12)

세리의 고백(누가복음 18:13)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두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세리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세리와 멀리 떨어져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그러나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유창한 기도이었지만 세리의 기도는 사람들 앞에서 감히 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초라한 기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던 세리는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는 말을 듣고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참조 누가복음 18:9∼14)

요나의 고백(요나 1:12)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나타났습니다.
그 말씀은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여호와를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욥바 항구에 3년에 한 번씩 출항하는 배가 출항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즉시 배 삯을 지불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에 승선했습니다.

얼마 후 하나님께서 큰 바람을 일으켜 바다에 내리시매 요나가 탔던 배가 거의 파선될 지경이었습니다.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선장이 요나에게 잠을 자는 자여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고 요나를 깨웠습니다.
바다의 풍랑이 잔잔해지지 않으므로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는지 찾아내려고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뽑혔습니다.

배에 탔던 선원들과 승객들은 요나에게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요나가 대답하기를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말씀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하므로 이런 풍랑이 임했습니다.”

선원들과 승객들은 요나에게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질문합니다.
그때 요나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라고 대답합니다.
그래도 선원들은 풍랑의 바다 속으로 요나를 던질 수 없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하였으나
점점 더 바다의 풍랑이 거세지므로 여호와께 부르짖기를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십니다.” 하고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바다가 잔잔해 졌습니다.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었습니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될 때 나는 베드로와 같이 세상에서 물질을 더 잡아 보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세리와 같이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아 살아보려던 어리석은 삶이었습니다.
요나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방법보다는
자기 방법대로 발버둥 쳤습니다.
이제는 이런 모든 잘못들을 고백하며 주님 뜻대로 살아가려고 결단합니다.

주여 나를 새롭게 하소서!
주여 나를 거룩하게 하소서!

교회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세 가지 고백을 찾아봅니다.

첫째는 어거스틴의 고백
마니교에서 기독교

둘째는 루터의 고백
로마 가톨릭교에서 기독교

셋째는 사울의 고백
유대교에서 기독교

오늘날도 자기 죄를 깨닫고 고백하는 사람을 붙잡아 주님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남은 일생을 온전히 주님께 헌신하는 신앙으로 고백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상의 축복을 신령한 하늘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97장, 주의 말씀 듣고 준행하는 자는

1. 주의 말씀 듣고서 준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터 닦고 집을 지음 같아
비가 오고 물나며 바람 부딪쳐도 반석 위에 세운 집 넘어지지 않네

2. 주의 말씀 듣고도 행치 않는 자는 모래 위에 터 닦고 집을 지음같아
비가 오고 물나며 바람 부딪칠 때 모래 위에 세운 집 크게 무너지네

3. 세상 모든 사람들 집을 짓는 자니 반석 위가 아니면 모래 위에 짓네
우리 구주 오셔서 지은 상을 줄 때 세운 공력 따라서 영영 상벌 주리

[후렴]
잘 짓고 잘 짓세 우리 집 잘 짓세 만세 반석 위에다 우리 집 잘 짓세







]]>
Victor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