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25 69주년 기념일을 맞아 여러 지인들이 보내 준 자료들을 소개합니다.

6.25 노래 가사 바뀐 것 아십니까?
 
사실 왜곡을 이 정도로 철저히 하는 세력이
지난 십 년간 정권을 쥐고 바꿔 놓은 역사의
편린이라지만, 그 파장은 오래 갈 것 입니다.
 
가사까지 편집된 “6.25의 노래”
금지곡으로 지정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6.25의 노래가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10년간 금지곡이 되었고,
그래서 우리 자녀들이 이 노래를
모르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참으로 많은 것들을 생각해보게 되는
대목입니다.

‘6.25의 노래’는 지금의 30대 이상이라면
초등학교 시절부터 자주 부르던 노래였습니다.
특히 매년 6월 달이 되면 선생님의 반주
소리에 자주 따라서 부르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이 곡을
《10년간 금지곡》으로 지정한 것도 모자라,
그 가사 까지도 아래와 같은 황당한 내용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 출처 : 이승현, 조갑제닷컴 회원 논객께서
지적해주신 그 내용과 문제점을 아래에
스크랩해 봅니다.
 
참고로 “6.25의 노래”의 원 가사는
본 글의 마지막에 게재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추모 시인
‘별이 되신 님이시여!’를 지은
'심재방 시인'이 개사를 맡았다고 합니다.
 
《新 6.25 노래》
- 심재방 지음
 
1.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조국의 산하가 두 동강나던 날을
동포의 가슴에다 총칼을 들이대어
핏물 강이 되고 주검 산이 된 날을
 
2.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동포 형제를 원수로 만든 그들을
겨레의 이름으로 부수고 또 부수어
선열의 흘린 피 헛되지 않게 시리
 
3.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자유와 민주와 평화와 번영 위해
민족의 공적과 싸우고 또 싸워서
통일의 그 날이 기어이 오게 시리
 
(후렴)
이제야 이루리 그 날의 숙원을
동포의 힘 모아 하나의 나라로
피의 원한 풀어 하나의 겨레로
이제야 이루리 한나라 한겨레

1절에는 북괴군이 남침했던 내용 대신
남북한이 서로 총칼을 들이대었다는
정황만 설명하고 있다.

2절에는 6.25 전쟁의 책임은 북한이 아니라
'외세'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외세'란 어디일까?

3절은 민족의 공적과 싸워서 통일을 이루자는 내용이 담았다.
'민족의 공적'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이러한 가사 내용으로 6.25 전쟁을 설명할 수
있을까?
 
6.25전쟁이라는 민족 최대의 비극을 왜곡하고 전쟁의 책임이 있는 '김일성에게 면죄부' 를
씌워주는 ‘신 6.25의 노래’는 역사 속에
사라져야 할 것이다.
종북 좌파들의 영악함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전교조를 통해서 아이 때부터 세뇌를 시키고,
수십년을 불러오며 반공정신을 일깨워준
6.25의 노래조차 이런 식으로 개사를 하면서
역사는 조금 조금씩 왜곡이 되고,
자라나는 세대는 그런 왜곡된 역사로 세뇌가
됩니다.

참고로  “6.25의 노래”  원곡가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 작사 박두진, 작곡 김동진
 
1.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2.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값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3.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 하리
 
<후렴>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보자 하니,
이제 이 나라는 ‘개 나라’ 입니다.
그 책임자는 ‘개통령’이라 하겠습니다. *


'진정한 벗인 나라'

"사랑하는 어머니에게,어머니의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머니, 저는 지원해서 전투비행 훈련을 받았습니다.
B-26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기수에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후미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지금 한국에서 싸우고 계십니다.
드디어 저도 미력한 힘이나마 아버님께 힘을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한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벗의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애인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 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짐 올림."

이 편지는 6.25 당시 한국전에 참전한 미국의 8군 사령관 밴프리트 장군의 아들
지미 밴프리트 2세 공군 중위가 역시 한국전에 참전하면서 어머니에게 보낸 것이다.
당시 밴프리트 2세 중위는 해외근무를 마친 뒤라 한국전에 참여할 의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원해서 아버지가 사령관으로 있는 한국전에 참여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편지는 마지막이 되었다.
이 훌륭한 군인은 1952년 4월2일  압록강 남쪽의 순안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했다가
새벽 3시쯤 김포비행단의 레이더와 접촉한 후 표적을 향해 날아가더니
레이더에서 사라진 뒤 소식이 끊겼던 것이다.

즉시 수색작전이 시작되었다.
4월 4일 아침 10시 30분.
8군 사령관 밴프리트 장군은 미 공군 사령관 베레스트 장군으로부터
아들이 폭격비행 중 실종되었고,
지금 수색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를 묵묵히 듣고 있던 밴프리트 장군은 담담하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지미 밴프리트 2세 주위에 대한 수색작업을 즉시 중단하라.
적지에서의 수색작전은 너무 무모하다."

이 같은 내용은 인접 한국군 부대장으로서 회의에 참석했던 
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이 생전에 한 증언이다.

며칠 뒤 밴프리트 장군은 부활절을 맞는 전선에서 실종된 미군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모두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말한 벗은 곧 한국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밴프리트 미8군 사령관은 한국을 벗이라고 생각했고,
그 벗을 위해 자기 자식을 희생시킨 것이다.

이런 강직한 군인 앞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와 놀라운 부탁을 했다.
1952년 12월 대통령에 뽑힌 노르만디의 영웅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한국전선을 살피기 위해 방한, 8군사령부를 찾은 것이다.
8군과 한국군의 고위 장성들과 전 세계의 특파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밴프리트 사령관이 전선 현황 브리핑을 끝내자 조용히 듣고 있던
차기 대통령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느닷없는  질문을 했다.

" 장군, 내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대통령 당선자가 전투사령관에게 하는 첫 질문치고는
너무나 대통령답지 않은 사적인 질문이기도 했지만,
상대가 아들을 잃고도 꿈쩍하지 않는 밴프리트 였기에
모두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젠하워 소령은 전방의 미 제 3사단 정보처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밴프리트 장군이 사무적으로 짤막하게 대답하자,
아이젠하워는 그야말로 참석자 모두가 놀라 자빠질 정도의 사적인 부탁을 공공연히 하는 게 아닌가.

"사령관, 내 아들을 후방부대로 배치시켜주시오."
참석자들이 모두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때
밴프리트 장군도 언짢은 표정으로 아이젠하워를 응시하면서 의아해 하자
당선자가 조용히 말했다.

"내 아들이 전투 중에 전사한다면 슬프지만, 나는 그것을 가문의 영예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존 아이젠하워 소령이 포로가 된다면 적국은 분명 미국 대통령의 아들을 가지고
미국과 흥정하려들 것입니다. 나는 결단코 그런 흥정에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령관도 알다시피 미국 국민은 대통령의 아들이 적군의 포로가 되어
고초를 겪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대통령의 아들을 구하자'고 외치며 나와 미국에게
적군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압력을 가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령관이 즉시 내 아들이 포로가 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주실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장면인가.
순식간에 두리번거리면서 의아해 하던 분위기가 반전되어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표정이 되었고,
곧이어 "즉각 조치하겠습니다. 각하!" 라는 밴프리트 장군의 우렁찬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이 현장의 이야기는 미 2사단 72 탱크 대대의 대대장 T. R. Fehrenbach 중령이 전역 후 쓴
' This Kind of War(한국전쟁)'이라는 책에서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마지막 UN사령관이었던 마크 클라크 대장의 아들 클라크 대위도
금화지구의 저격능선에서 중대장으로 싸우다가 세 번에 걸친 부상으로 전역했으나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한국전에 참가한 미군 장성의 아들들은 모두 142명에 이르고, 그 중 32명이 전사했다.
한국전에서의 미군전사자는 모두 54,000여명, 부상자는 10만명이 넘었다.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하여 사령관이 전사하고 사단장이 포로가 되며,
자기 자식들마저 참전시켜 전사당하게 하는 장군들과,
남의 나라 전쟁에 54,00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도 꿈쩍도 하지 않는 국민을 둔 위대한 나라가 미국이다.

끔직 하게도 자식들을 사랑하여 거대한 재산을 물려주려고 온갖 부정을 일삼던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들과,
어떻게든 자식들을 군대에 안 보내려고 갖은 수단을 다 쓰는
벼슬깨나 하고 돈깨나 있다는 지도층 인사들,
무슨 방법으로라도 병역을 면제 받기 위해 갖가지 꾀를 다 쓰는
연예인이나 스포츠선수들이 인기를 누리고있는 국민을 가진 한국,
과연 어느 나라 아버지가 훌륭한 아버지이고,
어느 국민이 훌륭한 국민일까?
어느 나라를 미워하고 반대해야 하며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에게 감사해야 하는가?
우리는 지금 입은 은혜를 신의와 도리를 지키며 살고 있는 것일까?





"집필자가 내용수정 협의에 참여한 것처럼 꾸며 도장 몰래 찍어
교육부 과장·연구사, 출판사 직원에 '협의록' 위조하라고 지시"


교육부가 지난해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국정(國定) 사회 교과서 수정 과정에 불법 개입해 집필 책임자도 모르게 교과서 내용을 대거 바꾸고 합법적인 것처럼 서류까지 위조한 것으로 24일 드러났다. 검찰은 최근 교과서 불법 수정을 지시한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사문서위조교사 등)로 당시 교육부 교과서정책과장 A씨와 교육연구사 B씨 등 담당 공무원 2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교육부는 지난해 관련 논란이 불거졌을 때 "편찬 기관(진주교대 국정도서편찬위원회)과 발행 출판사 간에 벌어진 일"이라며 개입 의혹을 부인했다. 하지만 검찰은 처음부터 끝까지 교육부가 불법 행위를 지휘·교사했다고 판단했다.

24일 법무부가 국회에 제출한 공소장에 따르면 A과장은 2017년 9월 6학년 사회 교과서 내용을 수정하기 위해 B연구사에게 "관련 민원이 있으면 (교과서를) 수정하는 데 수월하다"고 지시했고, B연구사는 알고 지내던 교사 I씨에게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바꿔 달라는 내용의 민원을 국민신문고에 접수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I씨는 같은 달 해당 민원을 접수시켰고, 이를 근거로 교과서 수정 작업이 시작됐다. 그러나 집필 책임자인 박용조 진주교대 교수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과서를 고칠 수는 없다"며 수정을 거부했다. 이에 A과장은 박 교수를 작업에서 배제하라고 실무진에게 지시한 뒤 F교수가 대신 수정을 맡도록 조치했다.

공소장에 따르면 A과장과 B연구사는 교과서 출판사 담당자 C씨에게 교과서 수정을 위한 '협의록'을 위조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수정을 주도했으면서 '편찬 기관'이 먼저 수정을 요구한 것처럼 허위 기재토록 한 것이다. 더구나 책임자인 박 교수가 협의 과정에 참여한 것처럼 꾸민 뒤 박 교수의 도장까지 '도둑 날인'했다. 이렇게 불법 수정된 사회 교과서는 전국 6064개 초등학교, 43만3721명의 학생에게 배포돼 교재로 쓰였다. A과장과 B연구사는 검찰에서 "문재인 정부 입장에 맞춰 교과서가 수정됐다는 비판이 나올 것이 염려돼 출판사가 '알아서 고치는' 모양새를 취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당시 김상곤 교육부 장관과 차관 등 윗선의 지시 및 관여 여부에 대해선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수사를 종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유한국당 김도읍 의원은 "윗선의 개입 여부를 조사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군인의 품격


2017년 6.25 전쟁 관련 기념식이 벌어지고 있는 국립현충원에 86세의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꼿꼿한 자세, 다부진 눈,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는 박옥선 할머니는 참전용사들의 자리에 앉아계셨습니다.
1968년 전역한 박옥선 대위는 간호장교로 전쟁터를 누빈 대한민국 군인입니다.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로 차별받던 시절, 더 배우고 자립하고 싶어 간호장교 시험을 치렀습니다.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부모님을 뿌리치고 임관하여 전쟁터를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지옥과 같은 상황을 봤습니다.
고통 속에 죽어가며 울부짖는 병사들의 공포,
아무리 치료해도 계속 늘어가기만 하는 부상자들,
죽을힘을 다해도 살릴 수 없던 사망자들.
전쟁터는 눈물과 절망감만이 쌓여가는 아비규환의 도가니였습니다.

'악하게 살아가는 것이 전쟁이다.
저 사람을 안 죽이면 내가 죽어야 한다.
그러니까 전쟁은 있으면 안 돼.'

​그래서 박옥선 대위는 6.25 참전 유공자회 여성 회장을 맡아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동이 불편한 유공자들의 생활을 챙기며 돌보고 있습니다.
올해 87세, 본인도 적지 않은 나이이면서 다른 어르신들의 손발이 되어드리는 것이 오히려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누구보다 용감하지만,
전쟁의 공포를 바로 알고 비참함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자세,
그리고 다른 사람을 돕는 것에 오히려 감사하다는 마음가짐.
바로 이것이 박옥선 대위가 생각하는 대한민국 군인의 품격입니다.

'조국을 위한 자'들을 생각하면 언뜻 목숨 바쳐 산화한 호국영령들을 생각하기 쉽지만,
자신의 열정을 조국과 전쟁터에 바치고 남은 인생과 생명을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박옥선 대위 역시 조국에 목숨을 바치고 있는 순국선열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는 않는 가장 귀한 젊음을 나라를 위해 기꺼이 바치고 있는
모든 국군장병 여러분 역시 대한민국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숭고한 사람들입니다.

​많은 군인이 지키고 있는 대한민국 군인의 품격에 경의를 표합니다.


러시아 대통령이 밝힌 625 남침 극비문서와 남한 좌익대통령들의 반역


1994년 6월2일 모스크바 크렘린궁,
러시아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김영삼대통령에게 검은 서류상자 하나를 건제 주었다.

쏘련이 보관했던 남침계획 등을 담은 극비문서 고문서 사본이었다.

300여종의 문서에는
1949년 1월부터 53년 8월까지의 소련 외무부와 북한 외무성 간에 오간 전문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회의록 등
한국전쟁의 진상을 명확히 규명할 수있는 극비자료가 전부 포함되 있었다.

문서에는 김일성이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모택동으로부터 남침계획을 승인받고,
이들과 남침 시기 등에 대해 긴밀히 협의한 내용들이 자세히 담겨 있었다.

김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문서들을 통해 남한의 종북좌빨 성향의 이데올로그들이 주장해온 북침설이나
수정주의가 완전히 허구였음이 명백히 드러났다” 고 기록하였다.(『김영삼대통령회고록』298~299쪽)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
2007년 4월 23일 사망한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은 이렇게 한국과 인연이 깊다.
91년~99년 대통령 재직기간 세차례나 한국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을 정도다.

◆ 김일성의 남침기획 과정이 소상히 담겨 -

옐친이 넘겨준 문서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한달 전인 50년 5월 29일 
김일성은 슈티코프 당시 평양주재 소련대사를 면담한 자리에서
“소련이 지원한 무기와 장비가 이미 대부분 북한에 도착했다” 면서
“이제 6월까지 완전한 전투준비를 갖추게 됐다”고 통보했다.
북한의 남침이 김일성의 기획과 소련의 지원으로 이뤄진 것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자료였던 것이다.

이에 앞서 50년 5월 14일 스타린이 모택동에게 보낸 특별전문에는
“국제정세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인들의 요청에 동의 한다” 는
내용도 들어있다.

이에 모택동은 중국이 북한 김일성이를 적극 지원하겠다는 뜻을
스탈린에게 전달했다는 내용도 등장한다.

◆ 옐친이 전달한 고문서 주요 내용

 ▶1949년 3월 5일 김일성-스탈린 정상회담
김일성의 무력에 의한 조선통일에 관한 소련지도부의 견해 타진.

▶1949년 8월 14일 김일성, 슈티코프 북한 주재 소련대사에게 조속한 대남 공격 필요성 주장

▶1950년 4월 김일성-스탈린 모스크바에서 남침회담.
스탈린, 북한의 무력통일 과업에 동의.

▶1950년5월 14일, 스탈린이 모택동에게 “무력통일에 착수하자”는
“김일성의 요청에 동의 한다” 는 전문을 보냄.

▶ 5월 15일 모택동이 북한의 3단계 남침계획에 동의.

▶ 6월 25일 북의 기습남침 한국전 발발.

▶ 9월 29일 김일성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뒤 스탈린에게 친서를 보내
소련과 중국의 직접 전쟁 개입을 간절히 요청.

1950년 9월 28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하자
당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다시 친필서한을 보내
“북한군 자력으로는 38선 이북을 지킬 수 없다”며
소련과 중국군의 즉각 전쟁개입을 애절히 요청한 사실이 기록된 문서 내용이었다.

★ 소련의 스탈린은 51년 3월 3일
북한에 소련군 2개 항공사단과 트럭 6000대를 공급한 것으로 확인됬다.

이 문서들은 현재 한국의 외교사료관에 보관중이다. 

그런데 이 자료들을 국민을 위해 당연히 공개하고 좌빨 민통당원들의 북침주장 입을 막고
이에대한 국민들간의 국력소모 침략논쟁에 종지부를 찍어야 옳지 않았는가?
김영삼 대통령재임시에만 밝혔고
그 이후 빨갱이 대통령들과 정치인들은 10년간 이에 대해 철저히 입을 다물었고
건망증 심한 국민들간의 계속된 논쟁을 즐기기만 했던 것이었다.

심지어 좌빨정부시절 통일부 장관에게 기자들이 북침설에 대한 입장을 묻자
묵묵부답이었지 아니한가? 
저들의 태도는 김일성이 지시에 따른 북침임을
국민들에게 암시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표현의 자유를 내새운 빨갱이 정치인들의 이적행위를
결코 이제 국민들이 지켜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어 문성근이 정치인 무리들은 죽창을 들고 시민군이 되어 나서라며
백만민란을 선동하는 행위가 어찌 용서될 수가 있겠는가? 
지도자는사회평화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거늘
어찌 남의 일처럼 팔장만 끼고 있는가?

김영삼대통령에게 전한 극비문서는
우리 국민의 피나는 세금을 소련에 제공한 차관의 뎃가로
옐친이 우리국민에게 전한것이며 60여년전 400만 살인자
김일성과 모택동 스탈린이 합세한 6.25 기습남침에 대한 진상을
인류에게 고발한 고문서이기에 
6.25 당시처럼 그 내용을 역사 교과서에서 후세들을 위해
반드시 교육해야 한다,

소련이 우리국민에게 전한 위 고문서는
결코 특정 정치인들 소유 문서가 아니며
민주국가 국민들의 소유이기에 진실교육을 위해 당장 널리 공개 하여야 한다.

전쟁 당시 한반도가 폐허의 젯더미로 변했고 피비린내 진동하는
6.25의 민족간 전쟁 비극을 직접 목격하지 않은 세대들의 전쟁 진실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바로 잡지 않음은 정치인들의 진정한 임무를 저버린 태도이며
역사의 죄인으로 남을 것이며 당신들 후대의 가문에 대한 국민 평가는
분명 국가를 배반한 역적들로 기록될 것이라 본다

일본의 침략보다도 수백배 잔인했고 현재도 침략을 계속중인 김일성의 침략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100여년전 한일간의 어두운 역사중 부정적인 부분만을 부풀리리고
허위 역사만을  강조 교육하는 이면에는 김일성이 비밀 교시에 담긴 내용에 따른
종북 무리들의 김일성의 동족 300만 살인행위를 감추며 전후세대의
눈을 다른곳으로 돌려 비켜 가자는 전략임은 세계인이 이미 간파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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