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히브리서 9:27) / 수요 성서연구 원고 #.2(06 / 17 / 20) 이승혁목사


나의 어머니 김은신권사님의 장례를 준비하며
1928년 12월 21일 -  ? (    년  월 일)


1. 장례를 가족장으로


2. 장례예식을 위한 순서지 만들기

 집례
 입관 예식
 발인 예식
 하관 예식

3. 장지 :  Pinelawn

이영복장로와 합장 




죽음의 사슬을 벗기까지

골로새서 3:10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자의 형상을 좇아 자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젊은 나이에 벌써 성공의 길에 들어선 영국의 한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영국 의사당 앞에서비중 높은 변호를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에 대해 많은 긴장과 부담감을 가진 나머지 지나친 스트레스로 인하여 그만 쓰러지고말았습니다.
그 이후 출세가도를 달리던 그의 인생은 점차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정신착란 증세로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그는 자신이 더럽고 추한 무가치한 존재라고 자학함으로써 자살까지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변에 그를 불쌍히 여기며 관심을 가진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복음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를 쓸모없다고 여기며 자살하려 했던 그가 죽음의 쇠사슬로부터풀려 나오는 데는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의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더럽고 추한 자신의 삶이새로운 삶으로 변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변한 삶의 모습과 그 사랑의 감격을 시로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저 도적 회개하고서 이 샘에 씻었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속함을 얻은 백성은 영생을얻겠네
샘솟듯 하는 피 권세 한없이 있도다"

이 찬송가가 바로 그의 간증의 노래입니다.
그는 바로 윌리엄 카우퍼(William Cowper)로서영국 문학사에 있어서 고전 문학가로 손꼽힐 만한 인물입니다.

스가랴서 13:1
그 날에 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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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죽었다!

잘 죽었다는 말에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긍정적인 의미의 잘 죽었다
둘째는 부정적인 의미의 잘 죽었다

예를 들면 흉악한 범죄자가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는데 그 범죄자가 죽었을 때 '그 사람 잘 죽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죽음은 긍정적인 반응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일생동안 전도자로 살면서 온갖 고생을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잘 죽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고생할 일들이 눈 앞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고인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한 친지의 장례식을 마친 뒤 유가족이 베푼 식사 자리에서 친구들과 나눈 화두였다.
고인은 개인 사업체를 성공적으로 잘 키워 ‘잘 살다’가 떠난 재력가였다.
고인의 동향 친구가 “고인은 ‘웰빙’ 하시다 ‘웰다잉’ 하셨으므로 이 세상에 별로 여한은 없을 것”이라고 요즘 유행어를 인용해 조사를 했다.

우리는 고인을 기리는 이런저런 덕담을 나눴는데 ‘웰빙’과 ‘웰다잉’이 화젯거리가 되었다.
한 친구가 “그거 쉬운 말로 ‘잘살다’가 ‘잘 죽었다’ 아냐?” 한마디 해서 좌중을 웃겼다.
화제는 동사인 ‘살다’와 ‘죽었다’를 수식하는 부사 ‘잘’의 의미에 모아졌다.

복합어인 ‘잘살다’의 사전적 의미는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살다’이다. 고소득, 호화주택, 고급차, 명품 따위로 채워진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연상하면 된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선망하는 삶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은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잘살아 보세”를 외치며 물질적 풍요를 향해 앞만 보고 내달려왔다. ‘잘 먹고 잘 입어 못난 놈 없다’는 속담을 입에 달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경쟁적으로 돈벌이에 매달렸다. 미주 한인사회도 아마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한국이 이제 살만해지니까 국민들도 뒤를 돌아보는 여유를 갖고 물질적 풍요가 목표인 ‘잘살다’의 의미를 재조명해보며 사회적, 정신적, 영적 풍요를 아우르는 웰빙 바람을 통한 삶의 질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삶이 어찌 물질적 풍요로만 충족될 수가 있겠는가?동사를 수식하는 부사인 ‘잘’의 용도는 아주 다양하고 그 의미는 참으로 풍요롭다. 한 글자로 된 단어치고 ‘잘’처럼 유용한 말도 없는 것 같다. “마음을 ‘잘’ 쓰라”면 “마음을 ‘바르고 착하게’ 쓰라”는 의미이다. “잘 봐 달라”에서 ‘잘’은 ‘친절하고 성의 있게”라는 뜻이요, “수박이 ‘잘’ 익었다”면 수박이 ‘어떤 기준에 꼭 맞게’ 익었다고 보면 된다. 이 밖에도 ‘잘’은 익숙하고 능란하게, 자세하고 분명하게, 어렵지 않게, 만족스럽게, 편하고 순조롭게 등 다양한 의미를 따분하고 단조로운 행위에 덧입혀 빛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잘’이 ‘살다’에 붙어 그 의미가 ‘물질적으로 넉넉하게’로 제한돼 버렸다. 웰빙은 복합어 ‘잘살다’를 두 단어 ‘잘’과 ‘살다’로 갈라 ‘잘 살다’로 만들어 ‘잘’의 다양하고 풍성한 의미를 ‘살다’에 접목시키는 사회운동이 아닐까 한다. ‘잘 살다’는 ‘재산과 관계없이 바르게, 훌륭하게 산다’는 뜻이다. 그래서 ‘잘살다’ 죽어도 ‘잘 죽었다’는 치사(?)를 듣기가 어렵다.

웰빙에 이어 유행어가 된 ‘웰다잉’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죽음에 대비하는 삶을 통해 편안한 죽음을 맞자는 것이다. ‘잘 죽기’라고 알기 쉽게 써도 될 듯싶은데 굳이 웰다잉으로 표기하는 이유는 ‘죽음’이 공포와 외면의 대상이요 저주의 대명사처럼 인식되는 금기어인 탓 같다. ‘잘 죽었다’ 소리를 하면 죽은 사람도 벌떡 일어나 화를 낼 판이다. 모두 거쳐 가는 관문인 죽음이 왜 꿈속에서조차 마주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걸까?예일대 철학과 셸리 케이건 교수는 내가 최근 읽은 그의 저서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죽음은 나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는 ‘박탈이론’을 토대로 죽고 나면 삶이 가져다주는 모든 축복을 앗기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주장한다. 케이건 교수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물리론자이다. 나는 그의 이론에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다.

웰빙과 웰다잉 곧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은 별개의 이슈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움이 절실한 영혼들에게 손을 잘 내밀 줄 아는 등 잘 사는 방법을 실천하며 사는 삶이 웰빙이요, 웰빙의 도착역이자 마침표가 곧 웰다잉 아닌가. 나도 좀 잘 살다가 잘 죽었다 소리를 듣고 싶은데 두고 볼 일이다. 이런 묘비명을 남기면 사람들이 너무 튀었다고 하거나 웃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나 잘 살다가 잘 죽어 여기 누웠노라”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사람의 죽음을 일컫는 표현에는 망자(亡者; 생명이 끊어진 사람)를 달래고 유족(遺族)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배려에서 생긴 완곡한 표현이 많다.

일전에 천안함 유족 사망 보도 기사에서 모든 보도매체가 한결같이 '별세'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에 궁금해서 사람의 죽음을 일컫는 다양한 우리말을 '나무위키'를 중심으로 정리해봤다.

붕(崩) : 황제의 죽음을 일컫는 말로 여기에 다른 수식어가 붙는 경우도 있다.

가붕(駕崩), 붕어(崩御), 붕조(崩殂), 천붕(天崩)
등이 그 사례이다.

안가(晏駕) : 붕어(崩御)와 같은 말이다.

빈천(賓天) / 상빈(上賓) : 하늘이나 높은 곳의 손님이 되시다.

안가(晏駕) : 편안히 가마에 오르시다.

등하(登遐) : 먼 곳에 오르시다.

용어(龍馭) : 용을 타다 / 용을 타고 승천하다

조락(殂落) : 제왕의 죽음으로 가장 직설적인 표현이다

승하(昇遐) : 황제나 왕처럼 존귀한 사람의 죽음을 높여 이르던 말로 흔히 재위 중인 왕의 죽음을 일컫는다.

훙(薨): 황후, 왕, 왕후, 상왕, 대비 등에 속하는 계층의 죽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조선의 경우 영조 이전에는 세자의 죽음을 대군과 같이 졸(卒)을 썼으나 조선 영조대왕 대부터는 세자에게도 훙(薨)을 써서 다른 왕자들과 구별했다. 마찬가지로 수식어를 붙여도 된다. 훙서(薨逝), 훙거(薨去) 등으로 사용한다.

승하(昇遐): 재위 중인 왕이 죽었을 때 주로 사용하며, 황제와 왕에게 모두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다.

졸(卒): 생을 마치다는 의미로 실록 등에서 주로 사용하여 조선 영조대왕 이전에는 세자에게도 이 표현을 썼다. 그러니 소현세자는 졸(卒)하였다고 기록된 반면 사도세자는 훙서(薨逝)했다고 기록됐다.

서세(逝世) / 서거(逝去): 인간세계를 떠났다는 의미이며, 서거(逝去)는 요즘도 대통령과 같은 고위 공무원의 죽음에 사용되고 있다.

사거(死去): 죽어서 세상을 떠났다는 의미이며, 그 높임말이 서거(逝去)이다.

타계(他界): 인간세계를 떠나서 다른 세계(저승)로 간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이며, 특히 귀인(貴人)의 죽음을 이르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불교에서 유래한 용어가 아니며, 비슷한 말로 별세(別世)가 있다.

하서(下逝): 죽어서 세상을 떠났다는 의미이지만 사용례를 보지는 못했다.

불록(不祿): 국가에서 주는 월급을 더이상 못 타먹게 됐다는 의미이다. 책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하다.

사망(死亡): 사람의 죽음을 의미하는 한자어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친숙한 말로 주로 행정이나 사무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를 높여 이르는 말로 작고(作故)가 있다. 그러나 어감과는 별개로 이 용어는 사람에게만 쓰일 수 있기 때문에 동물의 죽음에 '사망'이라고 표현할 수 없다.

사(死) / 몰(歿): 일반적인 죽음을 의미하지만 단독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운명(殞命): 사람의 목숨이 끊어졌다는 의미로 사망선고 때나 가끔 듣는 말이다.

절명(絶命): 운명(殞命)과 같은 뜻이지만 좀 더 강렬한 뉘앙스를 갖는다. 운명(殞命)이 보통 조용한 분위기에서 서서히 맞게 된 죽음을 의미한다면, 절명(絶命)은 갑작스런 사고나 급성 질환 등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빠르게 죽음을 당할 때 사용되고 있다.

별세(別世): '윗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높임말로 서세(逝世)가 있으나 거의 쓰이진 않는다. 현재는 '돌아가셨다'라는 의미로 흔히 사용되고 있다.

하세(下世): 세상(世上)을 버린다는 의미로 웃어른이 돌아가심을 일컫는다.

영면(永眠): 영원히 잠든다는 뜻으로 장례에서 주로 듣는 말이다.

폐(斃): 역적이나 죄인, 악인 등의 죽음을 이른다. 폐사(斃死)폐사라고도 한다. 이 폐(斃)라는 한자는 '넘어져 죽다', '고꾸라져 죽다'라는 뜻으로 '아주 비참하고 끔찍하게 죽었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현재는 주로 짐승이나 어패류가 갑자기 죽거나 급격한 기온 변화나 병균 감염으로 소, 오리, 물고기, 조개 따위가 죽는 것을 이르는 말로 가축을 매립 혹은 소각할 때 사용되는 폐사(斃死)가 바로 그것이다.

급사(急死) / 급서(急逝): 갑작스런 죽음을 이르는 말로 급서(急逝)는 급사(急死)의 높임말이다.

요망(夭亡), 요절(夭折): 갑작스러운 죽음을 이르는 말로 주로 젊은 사람이 죽었을 때 사용한다. '일찍 죽을' 요(夭)나 '꺾을' 절(折)이 붙으면 갑작스런 죽음을 의미한다.

순교(殉敎): 특정 종교와 관계없이 어떤 종교를 위해서 또는 종교 활동의 결과로 사망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순국(殉國):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활동의 결과로 사망하거나 국가의 멸망과 명을 같이하여 사망을 택하는 경우에 사용되는 용어이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충정공 민영환(忠正公 閔泳煥, 1861~1905)이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11월 30일 자결하니, 이를 순국(殉國)이라 한다

순직(殉職): 일을 하다가 사망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계급이 있는 직업의 경우 특진하거나 국가유공자로 지정된다. 군인이 비전투 상황에서 일을 하다가 사망하는 것도 순직이라 할 수 있다.

전사(戰死): 군인 등을 비롯한 전투원이 전투 상황에서 공격을 받아 사망함을 일컫는다.

순장(殉葬) / 순사(殉死): 신분이 높은 군주 등이 사망했을 때 따라 죽거나 장사 지낼 때 무덤에 따라 들어가는 일을 일컫는다. 순사(殉死, self-immolation)의 사례는 1829년 12월 4일 영국령 인도(British India)의 일부 지역에서 금지된 인도의 악습인 사티(Sati)가 유명하다. 사티는 힌두교 장례 풍습으로 미망인이 사망한 남편의 화장용 장작더미 위에서 순사(殉死, self-immolation) 했다.

순절(殉節): 과거 중국과 한국에서 인도의 사티와 비슷하게 과부가 죽은 남편에게 절개를 지켜 목숨을 끊은 것을 일컫는다.

취의(就義): '의를 위해 죽다'라는 의미로 주로 의롭거나 대의를 위한 죽음을 일컫는다. 실제 사용례를 보지는 못했다.

사별(死別): 죽어서 이별했다는 의미로 사용되며, 대개의 경우 배우자 사망을 의미하지만 그 외의 가족에 대해서도 사용할 수 있다.

견배(見背): 돌아가시는 어버이를 뵙다는 뜻으로 어버이를 여의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상(喪): 친족의 장례를 이르는 말이었으나 죽음을 일컫는 완곡 어법으로 널리 쓰인다. 조모상, 부친상 등으로 사용된다.

호상(好喪)은 병환 없이 무병장수하며 복을 누리고 오래 산 사람의 상사(喪事)를 일컫는다.

악상(惡喪)은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젊어서 죽은 사람의 상사를 일컬는데 흔히 젊어서 부모보다 먼저 죽은 사람의 상사를 일컫는다. 특히, 후자의 경우를 참혹한 슬픔이라는 의미의 참척(慘慽)이라 일컫는다.

임종(臨終) : 죽음을 맞이함 또는 부모가 돌아가실 때 자식이 그 곁을 지킴 등의 의미로 널리 사용된다.

귀천(歸天) / 귀토(歸土): 하늘/흙으로 돌아가다

사거(死去): 죽어서 세상을 떠나다. 주로 저명한 외국인의 죽음에 사용되는 표현인데, 서거로 대접하기에는 좀 과하고 사망으로 하기에는 미흡한 중간급 저명인물의 자연사에 따라붙는다.

불귀(不歸): 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돌아오지 않다'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불귀의 객(客)이 되다"라는 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유명(幽明)을 달리하다:'죽다'를 완곡하게 일컫는 말이며, ‘유명(幽明)’은 저승과 이승을 일컫는다.

작고(作故): 고인(故人; 옛날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장서(長逝): '영영 가고 돌아오지 아니하다'라는 뜻으로 죽음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다.

극락왕생(極樂往生): '죽어서 극락에서 다시 태어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극락은 아미타불(阿彌陀佛; 대승 불교 정토교의 중심을 이루는 부처로 수행 중에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대원(大願)을 품고 성불하여 극락에서 교화하고 있다는 부처)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로 괴로움이 없고 지극히 안락하며 자유로운 세상을 일컫는다.

가학서거(駕鶴西去) 또는 가학서유(駕鶴西游): '선인이 득도하여 학을 타고 서방 극락 세계로 날아가다'라는 의미로 존경 받던 사람의 죽음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다.

좌화(坐化): 승려의 죽음을 일컫는 말로 '(승려가) 앉은 채로 죽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열반(涅槃): 승려의 죽음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으며, 본래의 의미는 모든 번뇌의 얽매임에서 벗어나고 진리를 깨달아 불생불멸의 법을 체득한 경지를 일컫는데, 이러한 열반이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 목적이다.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의 음차어이다.

입적(入寂): 승려의 죽음을 완곡하게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으며, 비슷한 말로는 입멸(入滅), 귀적(歸寂), 적멸(寂滅), 원적(圓寂), 멸도(滅度) 등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반진(反眞): 도교에서 죽음을 이르는 말이다.

등선(登仙):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되다'라는 의미이며, 존귀한 사람의 죽음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우화(羽化): '번데기가 날개 있는 성충이 되다' 또는 '사람의 몸에 날개가 돋아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되다'라는 의미로 죽음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귀서(歸西): '귀천(歸天)'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인기(咽氣): '숨을 거두다', '죽다' 등의 의미이다.

소천(召天): (개신교) '하나님의 부름을 받다'라는 뜻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용어이다.

선종(善終): 문자 그대로는 '천수(天壽)를 다하다', '끝마무리를 잘하다'. '유종의 미를 거두다' 등으로 사용되지만, 가톨릭에서는 임종 때 성사를 받아 큰 죄가 없는 상태에서 죽는 일을 일컫는다. 즉. 가톨릭에서 선종은 착하게 살다가 복되게 마친다는 뜻의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준말이다.

안식(安息): 문자 그대로 '편히 쉬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정교회에서는 신자의 죽음을 일컫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는 죽음 후 최후의 심판과 부활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다.

승화(昇華): 원래는 고체가 곧바로 기체가 되는 현상을 뜻하는데, 통일교에서 죽음을 승화라고 말하며 장례식을 승화식이라고 한다. 국내 화장장 중에 승화원이란 이름을 붙인 곳이 있다.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용례이다.

조천(朝天): 대종교에서 도가 높은 이의 죽음을 이르는 말이다.

환원(還元): 천도교에서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대로 사람의 죽음을 일컫는 말은 참으로 다양하다. 내가 이 말을 모두 알고 사용하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아래의 보도 사례에서 보면, 보도매체에 관계없이 한결같이 모두 '별세'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궁금했다. 사람의 사망을 알리는 표현에 어떤 것이 있는지.



<목인은 죽은 이의 길동무들이다>

목인이란 말이 생소하지요?
굿, 불교 의식, 상여에 꽂는 나무 인형, 그 밖에 솟대나 혼례식에 쓰는 기러기 등 나무로 조각한 것들을 넓은 의미에서 목인이라 하지만, 오늘은 상여에 꽂은 인형으로 좁혀서 ‘목인’이라 칭하겠습니다. 그 옛날 죽은 이를 보내는 일이 마을 전체의 일이었을 때, 마을마다 목상여를 만들어 상엿집에 보관해 두고 썼습니다. 그러니까 이 목상여를 장식했던 동물, 꽃, 사람들을 목인이라 하는 것이지요.

이들은 죽은 이의 길동무입니다. 살았을 때 어땠는지는 몰라도 죽어서는 다 같은 사람이라는 참으로 평등주의적인 생각을 우리 조상들은 했었지요. 그래서 보통 사람이 죽어도 화려하게 꾸민 상여에 태워 저승길이 초라하지 않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죽은 이의 영혼에 대한 예의이면서 동시에 이승에 남지도 저승에 가지도 못하는 주검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지요.


호랑이를 문 용과 흥부놀부 용수판

<하늘나라로 갈 때는 용을 타고 가셔요>
상여의 상단 앞뒤로 반달 모양의 용수판이란 것을 부착합니다. 당연히 용의 모습을 하고 있고, 그 모습도 각양각색이더군요. 물고기를 문 용, 호랑이를 문 용, 비익조를 새긴 용수판, 흥부놀부 용수판도 있습니다. 심지어 얼굴이 새까매서인지 ‘오바마’라 이름 붙인 용수판도 있더군요. 다 각각 바라는 바를 담았을까요? 아무래도 바닷가 마을에선 물고기, 심지어 낙지를 무는 용이 죽은 이를 실어다 주길 바랐을 테고, 산골마을 사람들은 호랑이를 문 용이 데려다 주길 바랐을 테지요. 20세기로 갈수록 용수판의 그림은 회화성이 두드러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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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용은 임금 즉, 권력을 상징하는 동물. 그리고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신. 이런 용도 죽음 앞에서는 만인의 용이 되어 저승길의 길잡이가 되어 준다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목인들은 왜 호랑이를 탔나?>
호랑이하면 떠오르는 것은?
산신령 또는 산신령의 심부름꾼. 산신도를 보면 대개 산신령이 호랑이를 타고 있습니다. 이것은 도교의 영향으로 산신이 사람으로 표현되면서 호랑이가 심부름꾼쯤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을 공동체 신앙의 하나로 산신제를 올릴 때 호랑이는 산신으로 신격화됩니다. 맹수 중의 맹수 호랑이는 사람들에게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기 때문이지요

울고 넘는다는 박달재 아래에 있던 외갓집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 호랑이가 나온다는 고개를 넘으려면 사촌들과 무리지어 나무칼까지 차고 우르르 달려서 넘어 갔더랬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옛이야기의 주인공쯤으로 감정이입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래도 머릿속에 오만 상상을 하며 공포에 질렸고, 때론 그 공포를 즐겼던 기억입니다.

목인들 가운데 유난히 호랑이를 탄 사람들이 많은 것은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뜻과 더불어 죽은 이의 신분과 지위를 높여 주려는 의미가 있었던 것이지요. 호랑이에 앉은 망자는 어떤 어려움 없이 저승길로 인도되었을 것입니다.


망치를 든 저승사자와 도끼를 든 순사

<죽은 이를 지켜주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

죽은 이를 하늘로 인도하는 목인들은 봉황이나 학을 탄 선비, 동자, 산신령들이 많았습니다.
봉황이나 학은 태평성대를 알리고 고고한 인품을 자랑하는 금조(錦鳥)들이고, 그 신성한 금조를 탄 이들의 신분도 범상치는 않았습니다. 평생을 개똥밭에서 참외 구르듯 살았는지 몰라도, 그곳에서도 인물 난다고, 학식 높은 선비가 되고 힘센 장수가 되어 저승길을 함께 합니다. 저들이 망자 자신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그 중 일제 강점기 때는 순사가 등장하네요.
이때쯤 되면 붉은 낯빛에 망치를 든 저승사자보다 말 탄 일본 순사가 더욱 두려웠을 것입니다.
상여에 부착하는 목인조차 시대 인식의 소산임을 느끼게 됩니다.

남사당패 목인

<잘 죽었구나~ 가는 길 신나게 한판 놀아보세>
가슴 찡하게 다가온 목인들도 있었습니다.
온 식구를 목인으로 만들어 장식한 것은 이승에 너무 많은 미련이 남아서였을까요?
그런 미련을 무 자르듯 떨치고 저세상 가는 길 한판 놀아보자는 남사당패 목인들도 있더군요.
슬픔에 잠겨야 할 초상집에서 “아이고 아이고 잘 죽었다. ……뭐를 많이 벌어놔서 그다지도 잘 죽었노. 속이 다 시원하지!”하고 넋두리를 하듯이 구정지게 노래를 합니다. 이런 상여놀이를 진도에서는 ‘다시래기’라고 하고, 경상도에서는 ‘대돋음’, 전라도에서는 ‘상여 어른다’고 하네요. 다시래기란 말 자체에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 다함께 어울려 논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니,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을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아예, 남사당 놀이판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살판 땅재주놀음을 펼치는 이를 보세요. 힘껏 물구나무선 종아리에 팽팽한 기운이 오르고, ‘삘릴리’ 날라리 소리로 하늘로 죽음을 띄워 보냅니다.

삶과 죽음, 슬픔과 흥겨움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어쩌면 우리는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한바탕 살다 간 우리네 인생처럼 그렇게 한바탕 놀다 가는 것이지요. 한 사람의 죽음이 공동체의 문화로 승화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혼백을 실어 나르는 가마를 영여, 또는 가마채가 허리까지 온다 하여 요여라고 한다.

<상여는 영여의 뒤를 따라간다>
색깔 고운 작은 가마엔 누가 탈까요? 돌아가신 분의 혼백과 신주를 태워 오는 가마입니다. 상여가 주검을 실어 나르는 가마라면 영여는 영혼을 실어 가는 것입니다. 가끔 영구차 앞에 죽은 이의 사진이나 혼백을 실은 승용차가 앞장서 가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영어도 이젠 승용차가 대신 하는 것이지요.

보통 영여(요여)의 지붕에는 녹색 바탕에 연꽃을 조각하고 옆에도 연꽃망울을 장식한다는데, 목인 박물관의 요여는 높이 있어서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꽃은 다시 피어나는 재생의 의미. 연꽃 또한 영혼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불교의 연화화생, 심청이가 연꽃 속에서 살아오는 것 등이 모두 부활의 의미겠지요. 무엇보다 영혼을 주검보다 우선했던 옛사람들의 생각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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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1. https://blog.naver.com/sadfog/120019479523




죽음이란 무엇인가?
- 성경적 죽음에 대한 이해

죽음이란 사회적 연결망이 끊어지고 하나님 나라의 사회적 연결망은 연결되는 것이다!

연결망이 끊어지면 ‘대체(代替) 불능
오직 그 사람과는 더 이상 앞으로는 어떤 추억도 관계도 가질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슬퍼합니다.

여러 해 전에 송재천목사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 아들 송천호군이 제게 카톡으로 아버지 목사님이 돌아가셨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아들 송천호군이 아버지의 휴대전화를 사용하여 아버지와 연결되었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한 것입니다. 서로 연결하던 연결망이 죽음으로 끊어졌기 때문에 아들이 대신하여 연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이란 세상에서 연락하던 사회적 연결망을 끊어졌지만 주님 나라에서 신령한 연락망은 개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크리스천인 한 의사가 중병에 걸린 어떤 환자를 찾아 갔습니다.
그 환자가 "의사 선생님, 제가 회복할 수 을까있요?"하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글쎄요, 아마 어려울 겁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환자는 "나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무덤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선생님은 아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솔직히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죽음 저 건너편에 있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열리더니 의사가 기르는 개가 뛰어 들어와 주인에게 뛰어올라 꼬리를 치면서 좋아했습니다.

그때 의사는 환자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셨지요. 이개가 이 방안에 들어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자기 주인이 여기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아무 두려움 없이 뛰어 들어온 것입니다. 죽음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는 말씀드릴 수가 없지만 한 가지 사실, 곧 우리 주님께서 그곳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족합니다. 아무 생각마시고 그를 믿기만 하십시오. 문이 열릴 때 두려움 없이 들어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
"이것이 나에게는 마지막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새로운 삶은 시작이다!"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 나는 마지막을 맞이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죽은 후에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죽음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이다.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어떤 질병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Precious in the sight of the LORD is the death of his saint. 

모든 사람들이 죽어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죽음은 귀중하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성도의 죽음이 귀중한 것은 이 세상에서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약속에 믿음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죽음의 세 가지 의미

죽음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 
인간의 생명은 인간 속에 본래부터 주어져 있는 내재적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욥기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교제할 때만 인간은 참된 삶을 살 수 있다. 

성경적 의미에서 죽음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어 그로부터 분리되는 상태”를 뜻한다.
성경은 죽음의 이러한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제시한다.

첫째, 육체적 죽음(Physical death)

육체적 죽음이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멈추었지만 영혼은 여전히 활동합니다.
- 창세기 3:19, 시편 146:4, 전도서 12:7; 야고보서 2:26

창세기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시편 146:4,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전도서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러나 육체적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나 중지가 아니라 생명과 결합된 육체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죽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는 죄의 형벌로서 인간의 생명에 주어진 것이다. 성경은 이를 죽음이 죄로 인해 인간 세계에 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한다(롬 5:12, 17).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성경은 죽음이 인간이 누리는 생명과는 대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낯설고 이질적이며 심지어 적대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죽음은 범죄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시 90:7, 11), 심판(롬 1:32), 정죄(롬 5:16), 저주(갈 3:13)로 표현된다. 

시편 90: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시편 90:11,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로마서 1: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로마서 5: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 결과 육체적 죽음에는 일반적으로 두려움과 공포가 수반된다. 이 고찰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원래 상태가 해체나 사멸의 씨앗을 지니고 있었다는 생각이 완전히 전적으로 배제된다는 사실은 옳은 생각이다. 또한 죄의 결과와 형벌로서 육체가 죽음을 맞게 된다는 사실에서 육체적 죽음은 영혼의 죽음의 결과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둘째, 영적 죽음(Spiritual death)

영적 죽음이란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죄의 결과와 형벌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그로 끊어져서 영적 생명을 상실한 상태를 가리킨다.
- 에베소서  2:1∼2; 에스겔 18:4, 20; 로마서  6:23). 

에베소서 2:1∼2,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에스겔 18: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 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에스겔 18:20,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 아들은 아비의 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 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영적 죽음은 영혼의 멸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 죄의 형벌로서 죄책을 짊어지고 고통을 받게 되며 삶의 모든 측면에서 죄로 오염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영적 죽음으로 인해 인간은 참된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망각하고 그분을 떠나 자신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삼고 자기중심적 삶을 살아가게 될 따름이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만족과 평안을 상실한 채 죄악의 깊은 수렁 속에서 번민과 방황으로 점철되어지는 삶이 아닌가?

인간의 영혼은 수많은 사상, 열정, 욕망으로 인해 뒤엉켜서 삶은 혼란과 실망의 장이 되어 버렸고 그 결과 피조물 전체가 인간이 초래한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되었다(롬 8:20, 22). 죄의 결과로 주어진 삶의 엄청난 고통과 번민과 방황은 인생의 참되고 유일한 희망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요청할 따름이다. 

로마서 8: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로마서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셋째, 영원한 죽음(Eternal death)

영원한 죽음을 요한계시록에서는 “둘째 사망(the second death)” 이라고 합니다(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Then death and Hades were thrown into the lake of fire. The lake of fire is the second death.   

영원한 죽음을 다른 말로 둘째 사망(the second death)이라고 합니다.
영혼의 죽음의 최종결과로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생명력을 상실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아래 거하게 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는 가장 두려운 의미에서의 죽음이며 여기에는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영혼의 고통, 즉 양심의 가책과 회오가 지속적으로 뒤따른다. 

요한은 이를 고통의 연기가 영원토록 타오르게 될 것이라고 표현했다(계 14: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영원한 죽음은 결코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영혼과 육체의 영원한 멸절(annihilatio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소멸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과 무서운 진노 아래서 영원히 고통당하지만 결코 죽지 아니하고 불가피하게 영원히 살게 되는 상태, 죽기를 아무리 원해도 죽을 수 없는 상태(non posse non mori)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영원한 죽음의 상태가 가시화되고 현실화되는 상태가 바로 성경이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지옥’에 해당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창세기 4장 26절의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에노스(Enos)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은 “남자” 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라고 합니다.
에노스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세상과 구별된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오늘날 여호와의 이름은 "예수"라고 하셨습니다(아버지의 이름 - 요한복음 17:6, 11-12, .26)

왜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을 불러야 할까요?

요한복음 14:2-3,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In my Father's house are many rooms; if it were not so, I would have told you. I am going there to prepare a place for you.
And if I go and prepare a place for you, I will come back and take you to be with me that you also may be where I am.

죽은 후에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것은 내가 있을 집을 찾지 못한 것이다.
세상에서 자기 집을 찾지 못할 때는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 병을 "치매"라고 한다면 죽은 후에 갈 곳을 모르는 사람은 "영적 치매"에 걸린 것이라고 하겠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는 사람은 '에노스'처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것처럼 오늘날도 내가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될 때 예수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죽음, 그 자체가 메시지

사람의 일생을 사자성어로 표현한다면 “생로병사(生老病死)” 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것처럼 “생로병사(生老病死)”란 “태어나서 나이가 들어 병들고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생로병(生老病)”까지는 늘 가깝게 생각하면서도 “사(死)”에 대해서는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시간 속에 있는 네 개의 기둥’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생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노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난만큼 육체가 약하고 쇄하여 가는 것입니다.
병은 약한 육체가 회복할 수 없는 질병이 걸려 고통하는 것입니다.
사는 마지막 죽음입니다.
그런데도 죽음을 심각하게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암에 걸려 수술을 받은 후에 죽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도 죽는구나!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공부하고 배워야 하겠다.
그 결과 죽음 앞에서는 내가 예수를 진실하게 믿었는가?
이 질문에 진실한 대답을 하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세 가지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첫째는 내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
둘째는 혼자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
셋째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

죽음은 두렵다. 그래서 대면하고 싶지 않다. 죽음이 보내는 시선을 피하려고만 한다.

반대로 죽음에 대해 모르는 것도 세 가지 있다.

첫째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둘째는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셋째는 죽을 장소를 알지 못한다.

*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호라티우스”의 라틴어 시 한 구절로부터 유래한 말이다.
현재를 잡아라(Seize the day)” 라는 의미로 알려져 있다.
본래, 단어 그대로 “카르페(Carpe)”는 “뽑다”를 의미하는 “카르포(Carpo)”의 명령형이었으나, “오비디우스”는 “즐기다, 잡다, 사용하다, 이용하다” 라는 뜻의 단어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디엠(Diem)”은 “날”을 의미하는 “디에스(dies)”의 목적격으로, “디에스”의 목적어이다. 

“호라티우스”의 “현재를 잡아라,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의 부분 구절이다. 이 노래는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호라티우스”가 에피쿠로스 학파에 속하였으므로, 보통 이 구절은 그와 연계하여 이해되고 있다.

카르페 디엠이란 내가 살아있을 때에 예수를 진실하게 믿으라!

*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를 뜻하는 라틴어 낱말이다.

옛날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외치게 했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 라는 뜻인데,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 이런 의미에서 생겨난 풍습이라고 한다.

한편 이러한 맥락에서 17세기 네델란드 정물화 화풍인 ‘바니타스 화풍’도 영향 받았다고 여겨진다.

메멘토 모리란 사무엘처럼 사망과 나의 사이는 한걸음 뿐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0:3b,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나바호 인디안 족들의 메멘토 모리 

나바호 인디언 부족에게서도 이와 같은 “메멘토 모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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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에서 "죽음"

- 10회(1:18, 2:11, 23, 6:8, 18:8, 20:6, 13, 14, 21:4,8)

- 사망(死亡) : 죽을 사(사), 망할 망(亡), 잃을 망(亡)

1:18(네크로스) 3498 / νεκρὸς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I am the Living One; I was dead, and behold I am alive for ever and ever! And I hold the keys of death and Hades.

* dead, lifeless, a dead body, a corpse.

2:11(다나토스) 2288 / θάνατος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He who has an ear, let him hear what the Spirit says to the churches. He who overcomes will not be hurt at all by the second death.

* death, physical or spiritual death

2:23, 6:8, 18:8, 20:6, 13, 14, 21:4, 8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6:8, 내가 보매 청황색 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18:8,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참조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 요한계시록에서 "죽음(死亡)"이란 단어는 "(네크로스) 3498 / νεκρὸς" "(다나토스) 2288 / θάνατος"라고 합니다.
그런데 '네크로스'는 육체적인 죽음의 의미로 단 한 번 사용되었습니다(1:18).
반면에 '다나코스'라는 죽음은 영적 죽음 특히 둘째 사망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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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 죽음과 장례

생명

유대교에서 삶은 그 어떤 것보다 가치가 있다.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한 생명을 취하는 것은 온 세상을 파괴하는 것과 같고,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은 온 세상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탈무드는 말한다.

613개 계명 중 살인, 우상숭배, 근친상간과 간음은 생명을 구하는 데 범해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것이기에 유일하게 금지된 것들이다. 그러나 가끔 생명을 구할 때 필요하다면 계명을 범하여도 된다. 심각한 병자나 노동을 하는 여인은 금식하는 것이 생명을 위험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대속죄일에 금식하면 안 된다. 또한 안식일에 많은 것이 금지되어 있더라도, 의사는 안식일에도 긴급전화를 받을 수 있다. 어머니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유산도 가능하다(유대교 법에 의하면 태어나지 않은 아기는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기에 어머니의 생명이 우선시 된다.).

생명은 너무나 가치 있기에 그것을 해하는 어떤 것도, 고통을 경감시키는 것 조차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안락사, 자살 그리고 자살을 돕는 행위도 유대교법에서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탈무드는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이라면 사람의 팔을 자르는 것조차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갑작스런, 우연한 죽음, 고통스러워하는 병자에게 유대교법은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금하도록 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유대교법이 생명을 연장시키는 특정한 수단을 거부하거나 “플러그를 뽑는 것(안락사)”을 허용한다.

죽음

비록 일찍 죽거나 불행하게 죽더라도 유대교에서 죽음은 비극이 아니다. 죽음은 자연 현상이다. 우리의 삶과도 같은 죽음은 의미를 가지며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는 일부이다. 게다가 유대교는 가치 있는 삶을 산 사람에게 보상이 주어질 내세와 다시 올 세상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유대교에서 애도하는 행위는 외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혐오감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죽음과 애도에 관련된 유대인 행동들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진다.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한 존경(kavod ha-met)과 죽은 자를 그리워할 산 자들에 대한 위로(nihum avelim)이다.

 

시신을 다루는 방법

 

사람이 죽은 후에는 눈을 감겨야 하고, 시신은 바닥에 잘 뉘어 덮고, 그 옆에 초를 밝혀둔다. 고인에 대한 존경하는 의미로써 매장 될 때까지 시신은 결코 홀로 두어서는 안 된다. 고인 옆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쇼므림(shomerim; ‘지키는 자들’)이라 부른다.

고인을 존경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쇼므림은 먹어서도 마셔도 안 되며, 시신과 함께 하는 한 계명도 지켜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은 고인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데, 고인이 된 자는 이런 것을 하나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공동체들은 ‘헤브라 카디샤’ (chevra kaddisha, the holy society)라고 알려진 시신을 다루는 조직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이다. 이런 일은 결코 갚을 수 없는 것이기에 아주 대단히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검시는 시신에 대한 모독이기에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생명을 구하는 일이거나 법원에서 요구할 경우에는 가능하다. 검시가 하여야만 할 때에는 반드시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시신의 존재는 제의적 부정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코헨(제사장)은 시신이 있는 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시신과 함께 있던 사람들을 집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는다. 이는 영적인 부정을 제거하는 상징적인 행동이지 육체적인 부정을 씻는 것은 아니다. 육체적으로 시신을 접촉했건 간에 관계 없이 적용된다.

 


장례 준비에서 시신은 온전히 깨끗하게 하고 단순하고 순전한 아마포 수의로 감싼다.
현인들이 수의나 관은 단순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도 장례에 있어서 부자들보다 못한 대우를 받지 않게 되었다.
이제 고인에게 필요 없어진 기도보(tallit)로 시신을 감싼다.
시신을 방부처리 하지도 않고, 시신에서 장기나 분비물을 제거해서도 안 된다.

 

시신은 화장되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땅에 묻혀야 한다.
관이 필요하다면 시신이 땅과 접촉할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야 한다.
장례식에서 시신이 전시되어서는 안 된다.
유대교법에 관을 열고 식을 진행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법에 의하면 장례식에 친구들뿐 아니라 고인과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들도 와서 조롱할 수 있기 때문에 시신을 보여주는 것은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죽음과 장례 2 - 애도 유대교 / 이스라엘 정보  

2010. 6. 25. 3:17

https://blog.naver.com/world700/90089889308

Mourning 애도

 

유대인들의 애도하는 것은 장례의 슬픔을 감소시키도록 몇몇 기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상을 당한 사람들이 비관적인 표현을 해도 되며, 정상적 생활로 돌아가기까지 애도 기간에는 슬픔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게 되어있다.

 

 

가까운 가족(부모, 형제, 배우자나 자녀)이 먼저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첫 슬픔의 전통적 표현으로 옷을 찢는다. 부모께서 돌아가셨을 때에는 심장 있는 부분을 찢고, 다른 친척일 때에는 오른편을 찢는다. 이렇게 옷을 찢는 것을 ‘케리야’ (keriyah’ "tearing")라고 한다. 애도자는 가족의 생명을 취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참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그리며 축복문을 읽는다.

죽음에서 장례까지, 애도자(고인의 가족을 말함)의 외로운 책임감은 고인과 장례 준비를 위한 것이다. 이 기간을 ‘아니눗’(aninut)이라 한다. 이 기간 동안 애도자들은 모든 긍정적인 율법에 대하여 지키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애도가 모든 것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보통 이 기간 하루나 이틀이다. 유대교에서 장례는 신속하게 처리한다.

 

 

 

이 아니눗 기간 동안 가족은 외로이 남아 슬픔을 충분히 표현하도록 한다. 또한 이 기간에 추모객들은 전화를 하거나 방문해서는 안 된다.
 
매장한 후 가까운 가족이나 이웃 또는 친구들이 애도자들을 위해 처음 식사(the se'udat havra'ah; 추모객의 식사)를 준비한다. 전통적으로 이 식사는 계란(생명의 상징)과 빵으로 되어 있다. 식사는 그 가족들만을 위한 것고 추모객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런 순서 이후에는 추모객들이 전화를 해도 된다.

애도 기간 이후는 쉬바(shiva, ‘일곱’, 7일간이기 때문이다). 쉬바는 고인의 부모, 자녀, 배우자 그리고 형제들이 되도록이면 고인의 집에 모두 모여 지킨다. 쉬바는 매장한 날 시작되며 이후 7일간 계속된다. 애도자들은 일반적인 의자 대신에 등받이 없는 낮은 의자나 바닥에 앉고, 가죽으로 만든 신을 신지 않으며, 이발하거나 면도도 하지 않는다. 화장도, 일도 안 하며, 안락이나 기쁨을 위한 것도 하지 않고, 목욕, 성관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거나 토라도 공부하지 않는다(슬픔과 애도와 관련된 토라는 예외이다). 애도자들은 사망소식이나 장례식 때에 찢은 옷을 입고 있다. 집안에 있는 거울은 덮어 가린다. 기도 예식은 쉬바 중에 있으며, 친구, 이웃과 친척들이 모여 ‘미니안’(minyan, 10명이 모여야 한다.)을 위한 정족수를 채운다.

 

 

애도 기간 중에 축제가 시작되어 겹칠 때면, 애도를 멈춘다. 그러나 만약 축제기간 중에 상을 당하였다면, 애도는 축제기간 뒤로 미뤄진다. 쉬바기간에 안식일이 있어도 7일 중 하루로 계산하고 애도 기간을 끝내지 않는다. 이 기간 중 모든 사람이 애도하는 행위(찢어진 옷을 입거나 신을 신지 않는 것)는 연기되고, 개인적으로 하는 것은 계속 할 수 있다.

다음 애도하는 것은 30일, 즉 ‘쉴로쉼’(shloshim, 매장 후 30일이기 때문이다.)이다. 이 기간 동안 애도자들은 파티나 축하연에 참석하지 않고, 이발이나 면도, 그리고 음악을 듣는 것도 금한다.
마지막 공식적인 애도는 ‘아벨룻’이다. 이것은 부모님을 위해서만 하는 것이다. 이 기간은 매장 후 12개월이다. 그때에 애도자들은 파티, 축하연, 공연이나 콘서트에 참석하지 않는다. 매장 후 11개월 동안 고인의 아들은 애도자의 카디쉬(kaddish, 애도자의 기도)를 매일 읽는다.

 

 

아벨룻 이후 모든 것이 마쳐지며, 고인의 가족은 공식적인 애도기간이 끝난다. 그러나 고인을 추모하는 몇 가지가 남아 있기도 하다. 매년, 추모 1주년 가족은 고인의 ‘야흐르쩨잇’(이디쉬어, ‘1주년’)을 지킨다. 야흐르쩨잇 때에 아들들은 카디쉬를 읽고 가능하다면 회당에서 ‘알리야’(aliyah, 토라 읽기를 축복함)를 한다. 그리고 모든 애도자들은 고인을 기리며 24시간 초를 밝힌다. 게다가 대속죄일, 슈미니 아쩨렛, 유월절 마지막날, 그리고 맥추절 예식에서 회당에서 하프타라 읽기가 끝난 후 ‘이쯔코르’(“그가 기억하기를……”)라는 애도자의 기도를 읽으며 끝맺는다. 야흐르쩨잇 촛대는 이런 날들에도 켜둔다. 
 

 


애도자를 방문하는 손님들은 상투적인 표현이나 진부한 것으로 슬픔을 표현해서는 안 된다. 손님은 애도자가 먼저 말을 걸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고인에 대한 이야기에서 화제를 전환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애도 기간의 목적인 애도자의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 제한 될 수 있다. 반면에 전화하는 사람들은 고인에 대한 대화를 더 하도록 도와야 한다.


상가를 떠날 때에 손님들은 전통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예루살렘과 시온의 모든 애도자들에게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Kaddish

 

카디쉬

קדיש

Aramaic: "holy"



카디쉬는 보통 애도자의 기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카디쉬 기도는 평상시에도 많이 사용되는 것이고, 기도 자체는 죽음이나 애도와는 관련이 없다. 기도는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창조하신 세상에서 그의 이름이 높이 들리며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여러분의 생명의 날 동안 그의 왕권으로 다스림을 받으소서…....”. 그리고 이런 맥락이 계속 된다. 애도자의 진정한 기도는 장례 때에 무덤에서 읊는 '엘 몰라이 라카밈(El Molai Rachamim)'이다.




그러면 왜 애도자들이 카디쉬를 읊조리나?

 

부모님을 여읜 것처럼 큰 상실 이후에 여러분은 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거나, 하나님의 부정의에 대해 소리칠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반면 유대교는 공공모임(정족수 10명이 채워져야 하는 'minyan' 앞에서), 매일 애도자를 일으켜 세우고 이런 상실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다시 확신시킨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고인의 공적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고인은 개인적인 상실감 앞에서 이런 믿음을 보일 수 있는 자녀를 양육한 좋은 부모여야 하기 때문이다.



가자지역의 평화를 위하여 2008년 1월 텔 하쇼메르 병원에서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지도자들이 모여 함께 기도하였다. 사진은 랍비가 죽은 자들을 위해 El Male Rahamim기도문을 읽고 있다.





그러면 애도 기간이 12개월인데, 왜 카디쉬는 11개월만 읊는가?

 

유대인들 전통에 의하면 영혼은 다가올 세상에 들어가기 전 자신을 정화시키는 기간을 보내야만 한다. 가장 악한 사람이 정결케 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최장 12개월이다. 카디쉬를 읊는 12개월은 그의 부모가 12개월이 필요한 유형의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할 수도 있다. 이런 암시를 피하기 위해서 현인들은 자녀들이 카디쉬를 11개월만 읊도록 정하였다.
부모 뿐 아니라 가까운 친척을 위해서 카디쉬를 읊을 수 있는 사람은 그의 부모가 돌아가신 사람에 한 한다.


Tombstones 묘비


유대교법에 묘비는 꼭 필요하다. 그래야 고인이 잊혀지지 않을 것이고, 무덤이 더럽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공동체에서는 12개월의 애도기간을 마치기까지 묘비를 덮어두거나, 또는 묘비를 세우는 것을 미루는 관습이 있기도 하다. 이런 관습 속에는 매일 매일 애도하는 가운데 죽은 자가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런 관습을 지키는 공동체에서는 묘비를 개막하는 의식을 일반적으로 행하고 있다.

묘를 참배하러 와서 작은 돌을 올려놓는 관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관습은 쉰들러리스트라는 영화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것은 전통적인 유대인들 사이에서 조차도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몇몇은 어떻게 유래되었는지 의문시 하는 사람도 있다. 꽃과 달리 돌은 시들지도 않고 바람에 날리지도 않는다. 어떤 곳에서는 묘비를 세워야 하는데, 묘비로 보이는 것은 더럽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묘비에는 무엇을 쓰는가? (참고,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다)

영어로 된 묘비처럼 대부분 아주 간단한 내용을 히브리어로 쓴다.
그림은 전형적인 유대식 묘비이다.

제일 위에 있는 약자 ‘페이-눈’(פ''נ)은 ‘포 니트만’이나 ‘포 니크바르’를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 … 누워있다.”라는 뜻이다.
인용하는 표시처럼 보이는 점은 약자를 쓸 때에 사용하는 방법이다.

다음 줄은 고인의 이름을 쓰되, 형식은 ‘아무개(고인의 이름), 누구의 아들 또는 딸’로 표기한다.
“…의 아들”은 ‘벤(בן)’ 또는 ‘바르(בר)’라고 쓰며,
“…의 딸”은 ‘바트(בת)’라 한다.
묘비 위에 “Esther bat Mordecai”(에스더, 모르드개의 딸)로 표기한다.
때로 이름 앞에 레쉬(ר)가 나오는데 이는 “Mr.(미스터)”를 뜻한다. 때로 이런 것들이 이름 앞에 있어 그 신분을 나타내기도 한다. 제사장은 하 코헤인(הכהן), 레위인은 하 레비(הלוי), 또 랍비는 하 라브(הרב)로 표기한다.


세 번째 줄은 사망일자를 표시한다. ‘눈-페이(נ''פ)’로 시작하는 줄로 날짜, 달, 년도 순으로 표시된다. 날짜와 연도는 히브리어 숫자로 표시한다. 달 이름에는 그 앞에 ‘베이트(ב, “of”의 뜻)’를 붙여서 사용한다. 위 예제로 나온 묘비는 “5761년 쉬바트 월 18일”로 되어 있다. 요드-헤트=10+8 = 18, 쉰-베이트-타브()는 달 이름으로 쉬바트를 의미한다. 타브-쉰-싸멕-알렙= 400+300+60+1 = 761(5000은 있는 것으로 가정한다.)

마지막 줄은 “테헤 니슈마타흐 쩨루라흐 비쯔로르 하카임”의 약자다. 이는 “그녀의 영혼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기를 기원한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묘비에서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상징들(메노라=촛대, 마겐 다비드=다윗의 별, 두루마리 성경, 사자, 십계명 두 돌판)을 볼 수 있다. 이런 상징물은 고인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고, 단지 유대교인이라는 것만 나타낼 뿐이다. 하지만 만약 두 손이 이런 모습으로 있는 상징물이 있다면, 일반적으로 이는 고인이 제사장이었다는 것을 표시한다. 이런 손 모양은 제사장들이 한 해에 일정한 날 회중들을 축복할 때 사용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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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스님은 “인간은 되어 가다가 죽는다.”

인간의 삶을 됨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죽음은 됨의 과정의 막을 내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죽음은 됨의 과정을 끝내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과 같습니다.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인간은 본래부터 뭐든지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고 이것은 바로 궁금증이라고 하며
새로운 것을 알아 가려는 본능이 있다

인간에게는 배움의 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교육학에서는 배움의 본능에 대해서 세 가지로 정의합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죄
둘째는 알면서 행하지 않는 죄
셋째는 알면서도 가르치지 않는 죄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 배워야 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죽음을 가르치려 하지 않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회에 성경적인 죽음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죽음은 주로 장례식장에 생각할 수 있는 주제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죽음에 대한 가르침이 없다면 어디에서 죽음에 대한 지식을 얻겠습니까?

나이로 살지 말고 생각으로 살라”는 말도 있다.
이는 나이가 아닌 열린 생각으로 세상을 보라는 뜻으로 고착화된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사망(死亡) - 죽을 사(死), 잃을 망(亡), 망할 망(亡)

1. 사람의 목숨이 끊어짐
2. 자연인이 생명을 잃음

영어 - Death
헬라어 - 네크로스(nekros, νεκρός, 3498) dead  

죽음에 대한 표현을 살펴보겠습니다.
서거(逝去), 별세(別世), 타계(他界), 영면(永眠), 작고(作故) 등이 있다.

서거”는 사거(死去, 죽어서 세상을 떠남)의 높임말로 주로 대통령 같은 정치 지도자나 종교 지도자, 위대한 예술가 등 사회적으로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 사람에게 사용된다.

별세”는 '세상을 하직한다'는 뜻으로 윗사람에게 가장 많이 쓰인다.

타계”는 귀인의 죽음을 말하는데 서거를 쓸 정도는 아니지만 사회에 적잖은 기여를 했거나 어느 정도 지명도가 있는 인물에 쓰인다는 점에서 별세와 차이가 있다.

영면”은 영원이 잠들다는 뜻으로 주로 유명한 사람의 죽음을 뜻한다.

작고”는 고인이 되었다는 뜻으로 죽음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각 종교에서 죽음을 높이는 말도 있다.
가톨릭에서는 “선종(善終)”, 개신교에서는 “소천(召天)”이라 하고 불교에서는 승려의 죽음을 “입적(入寂)” 이라고 표현한다.

한자어 외에 동사나 관용구로는 “숨지다” “돌아가시다” “하늘나라로 가다” “밥숟가락 놓다
땅보탬”이라는 말도 있는데 “사람은 죽어서 땅에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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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천(召天)과 명복(冥福)
-  박황의 교수의 글

학생에게 아버지의 나이를 물었더니 학생이 말하기를 “향년 54세입니다” 하였다.
내가 순간 당황하여 “그럼 돌아가신 지는 얼마나 되었는가?” 하였더니 학생은 더욱 당황하여 “지금 집에 계시는데요.” 하였다.


아마 학생이 ‘향년(享年)’을 나이의 높임말인 연세(年歲)나 춘추(春秋) 등과 같은 의미로 혼동하였던 모양이다.
향년은 살아 생전의 나이 곧 죽은 이가 이 땅에서 향유(享有)하였던 수명(壽命)을 말한다.

우리말 가운데 죽음에 대한 별칭은 매우 다양하다.

사망(死亡), 임종(臨終), 별세(別世), 타계(他界), 하직(下直),
서거(逝去), 작고(作故), 귀천(歸天), 영면(永眠), 영서(永逝),
영결(永訣), 운명(殞命), 절명(絶命) …..

이 외에도 엄청나게 많다.

이는 우리 선조들이 오래도록 죽음을 고민하고 살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간혹 신문 기사에서 ‘운명(運命)을 달리했다.’라는 표현을 보게 된다.
이 또한 잘못된 문장으로 ‘유명(幽明)을 달리했다’라고 해야 옳다.

“‘유(幽)’와 ‘명(明)’을 달리했다.”라는 말은 생(生)과 사(死)를 달리했다는 말로서 ‘幽’는 어둠· 밤· 죽음· 저승· 악· 무형· 어리석음 등을 의미하고 ‘明’은 밝음· 낮· 삶·이승· 선· 유형· 지혜로움 등을 뜻한다.

굳이 ‘운명했다’라는 표현을 하고자 한다면  “암 투병 끝에 ‘운명(殞命)했다’”라고 해야 옳다.

죽음의 종교적 별칭으로는

불가에서는 열반(涅槃), 입적(入寂), 입멸(入滅), 멸도(滅度) 등이  있으며,
유가에서는 역책(易簀), 결영(結纓), 불록(不祿) 등으로 표현한다.

‘역책(易簀)’이란 ≪예기≫의 <단궁편(檀弓篇)>에 나오는 말로서,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이나 임종을 이르는 말.

증자(曾子)가 운명할 때, 일찍이 계손(季孫)에게 받은 대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자신은 대부가 아니어서 이 자리를 깔 수 없다 하고 다른 자리로 바꾸게 한 다음 운명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결영(結纓)’이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오는 말로서 갓끈을 고쳐 맨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자로가 위(衛)나라 난리에 싸우다가 적의 창에 맞아 갓끈이 끊어졌는데, “군자는 죽을 때에도 갓을 벗지 않는다.”하고 갓끈을 고쳐 매고서 죽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불록(不祿)’이란 신분에 따른 죽음의 다섯 가지 등급 가운데 하나이다.

즉 천자(天子)는 붕(崩), 제후는 훙(薨), 대부(大夫)는 졸(卒), 선비는 불록(不祿), 서인(庶人)은 사(死)라고 한다.

또한 《예기》 <곡례(曲禮)>에는 장수(長壽)하다가 죽은 것을 ‘졸(卒)’이라 하고, 젊어서 죽은 것을 ‘불록(不祿)이라 한다.’고 하였다.

천주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선종(善終)’이라 하는데,
이는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준말로서 ‘착하게 살다 복되게 생을 마쳤다’라는 의미이다.
‘믿음대로 살다 천국에 갔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개신교에서는 많은 사람이 ‘소천(召天)하였다’라고 말들 하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표현이다.
‘아무개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소천하였다.’라는 표현은 명백한 문법상의 오류이다.
‘소천(召天)’이라는 말은 우리말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로서 문법적으로 본다면 ‘하늘을 부른다.’라는 뜻이 된다.

대개 ‘소명(召命)’이나 ‘소집(召集)’이란 단어가 능동형으로 쓰일 때, 그 주체는 부르는 존재를 말한다.

예를 들자면 신학교를 입학하고자 하는 신학생은 ‘소명을 받았다.’라고 하지 스스로 ‘소명했다’라고 하지 않는다.
훈련장에 가는 예비군은 ‘소집을 당했다’라고 하지 자신이 ‘소집을 했다’라고 하지 않는다.

굳이 ‘소천’이라는 단어를 쓰고자 한다면 “소천하셨다.”가 아니라 “소천을 받았다.”라고 해야 옳다.
‘소천(召天)을 하였다’라는 말은 내가 ‘하늘을 불렀다’라는 뜻이므로 이제 때가 되었으니 ‘내가 죽고자 한다.’라거나 ‘나를 죽여달라.’라는
뜻이 된다.
인간이 자신의 수명을 위해 신을 불러낸다는 망령된 표현은 결국 죽을 권리가 내게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망자나 그 가족에게 흔히 하는 상례의 인사말로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말들을 한다.
‘명복(冥福)’이란 죽은 뒤에 저승에서 받는 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명복을 빈다.’라는 말은 죽은 사람의 사후 행복을 비는 말로서, 서방정토(西方淨土)에 가서 극락왕생(極樂往生)하도록 기원하는 불사(佛事)를 행하는 일이다.


‘고인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고인의 별세를 애도합니다.’
‘고인의 영면을 추모합니다.’,
‘고인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등등 고인의 생전의 종교나
신념에 따라 얼마든지 추모할 수 있는 표현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무턱대고 한결같이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하는 말은 진정성도 의미도 반감되는 매우 무성의(無誠意)한 예법이다.

더욱이 기독교인(基督敎人)이나 천주교인에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하는 것은 매우 큰 결례(缺禮)의 표현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죽은 이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하는 것은 무간지옥에 떨어진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인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하는 천도(薦度)의 발원(發願)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세를 따른다.’ 하였으니 이러한 모순(矛盾)된 말조차도 오랜 기간 많은 사람이 사용하다 보면 표준어로 굳어질 날이 있을 것이다. 神의 이름조차 인간의 의지대로 개명하는 족속들인데 뭔들 못하겠는가마는 그래도 알고는 써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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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후 삶에 대한 성경 구절 11가지

영국 기독교 신문 크리스천투데이의 칼럼니스트 앨래나 프랜시스는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후의 삶에 대한 성경구절 11가지(What the Bible has to say about life after death in 11 verses)"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바른 이해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프랜시스는 "영국 '죽음 알림 주간(Dying Matters Awareness Week)'에 많은 사람들이 죽기전 마지막 소원과 장례 계획을 이야기한다. 죽음은 우리 모두가 언젠가 맞이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중 대다수는 실질적으로, 영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프랜시스는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불평한 경험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한다. 죽음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까에 대한 대화는 대부분 부정적인 결말에 집중하는 경향이 크다"고 말했다.

프랜시스는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죽음에 관한 또 다른 밝고, 희망적인 관점이 있다. 죽음은 많은 것들의 종말을 맞이하게 하겠지만, 지상의 삶에서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7-18)

프랜시스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죽음 이후 약속된 삶을 보장 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을 약속받았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죽음을 앞둔 존재로써, 가족이나 친구들을 떠나보내야 하며,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큰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죽음은 실제로 영생으로 인도하며, 죽음에 대해 더 잘 이해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중요한 일이다"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성경구절 11가지다.

1. 요한복음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3.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4. 잠언 12:28

"공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잠12:28)

5. 고린도후서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5:8)

6. 요한 계시록 21:4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4)

7. 요한 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3)

8. 이사야 57:2

"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사57:2)

9.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10. 전도서 7:1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전7:1)

11. 욥기 19: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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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태어나서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아무리 피하려고 애를 써도 어느 순간 내 인생을 사로잡는 그 어둠의 세력은 우리가 환영해야하는 역설이다.
이 땅에서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하려고 모든 것을 다 동원해도 신이 정해준 때가 되면 거역할 수 없는 섭리이다.
요즘같이 젊음과 건강에 집착하고 의료기술이 발달한 시대에 죽음이라는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우리가 인정하고 친숙해야 될 주제이다. 

경쟁시대를 살아가는 바쁜 현대인들은 죽음에 대해 배우지도 못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 자체를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가족이나 이웃의 죽음을 경험해도 그때뿐이지 이내 죽음에 대하여 망각한다.
나에게도 언젠가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진리를 애써 부인하고 죽음과는 상관없는 불사신처럼 열심히 살아간다.
생이 있으면 사가 있는 법이고 자연의 원리와 순환이라는 법칙이 존재하는데 생에만 집착하는 어리석은 우리의 인생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가 선물이라면 죽음 또한 우리가 맞이해야 될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준비해야 되는데 대부분 죽음을 우리 삶을 침해하고 박탈하고 공포로 몰아가는 칼로 여긴다.
그러나 죽음은 잔인한 칼이 아니라 인생 모두에게 허락되어진 성스러운 칼이다.
이 죽음에 대한 공부와 준비가 한 인생을 더욱 성숙시키고 생명을 존중하게 만든다.
이에 대한 이해와 태도는 한 사회와 문화를 반영해 준다.

성도를 천국으로 보내면서 그 고인에게 어울리고 유가족에게 위로가 되고 조문객들에게는 영감과 교훈이 되는 내용으로 구성된 장례 설교문을 책으로 묶었다.
 
다양한 죽음의 얼굴과 무게를 그 상황에 맞게 하나님의 지혜로 맞이한다.
16명의 성도를 위한 설교문으로 구성이 되었는데 자살한 자, 분만실에서 출산과 함께 사망한 여인, 너무나 갑작스럽고 안타까운 죽음 등 그 여러 장벽 앞에 저자는 하나님께 질문하고 지혜를 얻어 은혜롭게 장례를 인도한다.
임종의 순간이 하나님의 임재가 강하게 역사하는 곳이고 이 사역이 가장 귀한 사역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진지하게 성도를 사랑하고 이해하며 다가간다.

설교문 끝에 저자의 삶과 신앙을 묵상한 후에 고인을 위해 시를 짓는다.
오직 그 성도만을 위해 목회자는 고인이 듣고 있다 생각하고 아름다운 시를 낭독한다.
또한 저자는 장례를 마친 후 이 환송을 위해 적은 원고를 유가족들에게 기념으로 선물한다.
그리고 저자는 자신의 교리적인 지식을 가지고 결코 무례하지 않고 종교적인 신념을 강요하지 않으며 인생의 교훈과 지혜를 얻도록 도와준다.

한 성도의 죽음 소식을 접할 때마다 여러 심방을 통해 준비를 하고 있었던 장례이든 갑작스런 장례이든 가슴이 내려앉고 제일 긴장이 되는 시간이다.
더구나 한 성도를 천국으로 환송하는 자리에 인간적인 슬픔이 너무 크지만 그 가운데서도 그보다 더 큰 소망을 드러내야 하기에 모든 순간과 절차마다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 집중한다.

이해하기 힘든 죽음 앞에서 어떻게 장례를 인도해야 할지 신학적인 질문 앞에 무너지기도 하였다.
내가 배운 교리적인 틀이 한 인간의 마지막을 황폐하게 만들고 유가족들 가슴에 못을 박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또한 비신자를 위한 장례를 인도하면서 어떤 말씀으로 권면하고 위로해야할지 몰라 난처했던 적도 있다. 등록만 되었지 복음과는 상관없고 십자가의 흔적이 안 보이는 잘 모르는 고인에게 무슨 말을 들려줘야 할지 몰라 난감했던 경우도 있었다.

 

반면에 죽음의 모습이 그 사람을 닮는다는 말처럼 은혜로운 죽음을 보며 기쁜 마음으로 장례를 인도한 적도 있다. 인생 마지막 순간, 가장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처절하게 외로운 순간에 젊은 목사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내 말씀과 기도에 하나님처럼 반응해준 어르신들이 기억난다. 목사가 옆에 있어줘서 믿음에 더 확신을 가지고 평안히 눈을 감았던 성도님이 떠오른다. 임종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나 하늘나라 간다’며 유가족에게 인사하고 평안히 가신 늙은 집사님도 그리워진다.

 

이렇게 죽음의 모습은 다양하고 무겁고 집례자로 하여금 긴장하게 만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시간만큼은 한 인생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이고 마지막이라도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발휘될 수 있는 골든타임이다. 그리고 한 인생의 마지막에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고 고인을 끝까지 배웅해주고 손잡아 줄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이다. 이제 눈을 감으면 현실을 벗어나는 시간에 고인을 평안히 가도록 돌봐주는 복된 사명이다.

 

설교문을 읽으며 그 상황이 그려지기에 내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도 하였다. 평소에 필자도 장례에 최선을 다해야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저자의 고인을 향한 태도와 자세를 보며 나는 더 숙연해졌고 마음을 더 새롭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설교문을 유가족에게 선물로 드리고 감동이 된다면 고인을 위해 시도 낭독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죽음은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불안과 공포이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들에게는 하늘로 가는 밝은 길이다.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이 죽음을 친구처럼 맞이할 것이지 악마처럼 맞이할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이 땅에서 내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많아도 하늘에서 내 이름을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헛된 것이다.
죽음의 순간 내 이름을 호명해주는 분이 있어야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죽음 후에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가 있고 영원한 본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경건하고 거룩하게 감사로 하루하루를 살게 만든다.
우리 주위를 보면 다양한 죽음이 도사리고 있고, 늘 우리 곁에 죽음이 있다.
언제 그 죽음이 나를 방문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이런 불안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죽음과 장례를 보며 오늘 여기서 영원한 것을 보고 사랑을 남기는 지혜를 얻기를 권해본다.

 


































기도(祈禱)


도입 이야기

28 이라는 숫자

"2X8"은 학생들은 "16" 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청춘"이라고 대답한다.

어느 교인이 자녀의 이름으로 헌금을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28만원을 빌려서 헌금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이가 시험을 치루는데 어려운 문제 때문에 주저하는데 "이것이 답이야" 라는 강한 음성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 아이는 그의 마음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따라 답을 결정하였는데 시험에 통과되어 합격하였다고 합니다.
더구나 놀란 것은 장학생을 28명 선발하였는데 그 아이의 성적이 28등이 되어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 아이에게 "2X8"은 "기도의 응답"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러한 간증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기적같은 일을 일어나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적인 기도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내가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나에게 일어난 기적은 더 큰 기적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내가 바뀐 상태에서 일어난 기적은 그 기적의 은혜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습니다.

유명한 설교자 스펄젼의 명언

"기도하지 않고 성공했다면 성공한 그것 때문에 망한다."

(간증) 중학교 때 세계사 시험을 앞두고 공부하던 중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시험지가 내 앞에 나타나 그 시험지의 문제의 답을 적어가던 중 마지막 시험문제의 답을 적지 못하여 안타까워 하던 중 놀라서 깨었는데 그 날 세계사 시험을 치루려고 시험지를 받는 순간 꿈에 보았던 시험 문제가 그대로 내 앞에 놓여 있었다.
당연히 그 시험은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이후 시험 때마다 그런 꿈을 꾸려고 하였다.
문제는 시험 공부를 더 열심히 준비하는 것인데 시험지가 나타나기를 소원하는 것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기도라는 용어를 살펴봅니다.

4336. 기도 - 프로슈케(prŏsĕuchē) / προσευχή

4336. 기도 - 프로슈케(prŏsĕuchē) / προσευχή

1. 기도,  2. 기도처

골로새서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Devote yourselves to prayer, being watchful and thankful.

- 영적인 자각을 의미하는 깨어 있으라

4332. 항상 힘쓰라 - 프로세드류오(prŏsĕdrĕuō) / προσεδρεύω 

1. 가까이 앉다
2. 시중하다
3. 섬기다

- 끈질기게 매달리는, 지속적인 의미
- 기도의 열심과 지속성

335. 강청 - 아나이데이아(anaidĕia) / ἀναίδεια

1. 고집
2. 건방짐
3. 뻔뻔스러움
4. 파렴치함
5. 부끄러움을 모름

* 신약성경에서 1회 사용 ἀναίδεια
부정접두어 아(α) +  아이도스(부끄러움이 없음) (127) αἰδώς / 체면불구하고 간구하는 것

(KJV) impotunity(무력감)(NIV) boldness(대담, 뱃심, 배짱)

교훈
1. 요청에 즉각적으로 응하지 않으려는 집 주인과 쾌히 주시려는 하나님을 대비하므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반드시 응답된다는 것을 강조(9-13절)
2. 응답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끝까지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살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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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단호하고 분명한 것이었다.
즉 ‘기도’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란 어떤 초능력적 힘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게를 이루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촉구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기도에 관한 명언


우리 하나님은 예측 할 수 없는 비상사태가 없으며 응할 수 없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 죠지뮬러 -




* 마른 눈 가지고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 

- 스펄젼 - 

* 성자를 만들어 내는 것은 기도의 힘이다. 

-이 엠 바운즈- 

* 기도의 실패자는 생활의 실패자이다. 

-이 엠 바운즈-

* 잘 기도한 자는 잘 배운 자요 많이 기도한 자는 많이 운 자이다. 

-루터-

* 어려운 환경에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마저 없다면 우리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칼뱅-

"모든 것을 하나님께 기도로 가져 갈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특권이다. 그렇지 않은가.

-허드슨 테일러-

* 늙어 갈수록 기도를 더 많이 하라. 그러해야 신령한 일에 냉냉해 지지 않는다.

- 죠지 물러-

* 싸움터에 나갈 때는 한번 기도하라. 바다에 나갈 때는 두번 기도하라. 그리고 결혼할 때는 3번 기도하라. 

-러시아 격언-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할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다. 

-마클라 쉴란-

* 하나님의 자녀는 기도로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다. 
사탄이 교인들에게서 이 무기를 빼앗거나 그것의 사용을 제지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앤드류 머레이-

* 기도는 영혼의 피이다. 

-죠지 허비트-

* 우리의 기도는 지칠 줄 모르는 힘과 거부될 수 없는 인내와 꺾여지지 않는 용기로 강하게 구해야 한다. 

-이 엠 바운즈-

* 기도는 아침의 열쇠요 저녁의 자물쇠이다. 

-그레이엄-

* 정신을 집중할 수 있을 때에만 기도하라. 

-탈무드-

* 무릎을 꿇은 그리스도인은 발돋움을 한 천문학자 보다 더 멀리 본다. 

-토플레디-





기도는 하나님과 교감(交感)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감(交感)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 할 때에는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기도의 목적은 진정으로 갈급하는 것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강청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사도행전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All of them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in other tongues as the Spirit enabled them.

4130 / 플래도(plēthō) πλήθω
1. 채우다
2. 영향을 주다
3. 완수하다
4. 공급하다

가득하다(마 22:10, 눅 4:28, 행 5:17)
적시다(마 27:48)
충만함을 받다(눅 1:15, 41)
차다(눅 1:57, 2:6, 22)
채우다(눅 5:7)
충만하다(행 4:8, 31, 13:9)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Do not get drunk on wine, which leads to debauchery. Instead, be filled with the Spirit.

로마서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May the God of hope fill you with all joy and peace as you trust in him, so that you may overflow with hope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누가복음 1:15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for he will be great in the sight of the Lord. He is never to take wine or other fermented drink, and he will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even from birth.

누가복음 1: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누가복음 1: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예수님의 기도(Jesus Prayer)

“예수 기도”(Jesus Prayer)는 화살기도의 두 번째 유형입니다.
이것은 동방정교회(The Eastern Orthodox)의 교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해 오던 기도문입니다.
이것은 호흡의 리듬에 맞추어 기도할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기도는 많은 사람에게 “쉬지 않고 드리는 기도”가 됩니다.
그 기도 말은 단순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the Lord, Jesus Christ, the son of God, have mercy on me).

“예수 기도”는 이러한 기도를 반복해서 드립니다.
동방정교회 교인들은 정해진 기도 시간에 묵상 기도를 하기 위한 배경으로 이 기도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이 기도문은 차를 타고 가거나, 걸어가거나, 세수를 하거나, 아무 때나 반복해서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 기도”는
1.  우리 모두가 죄인이며
2.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만듭니다.

이런 반복적인 기도에 진실함이 들어가 있다면 강력한 영적 화살이 될 수 있습니다.
반복적인 기도에 대해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복 그 자체를 싫어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거룩하게 보이기 위해 중언부언하는 공허한 반복의 기도를 싫어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 기도하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기도는 절대로 공허한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 오늘도 주님 안에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저와 우리 가족을 지켜주세요.”

우크라이나의 정교회 사제이자 영국국교회의 목사였던 케네스 왈드론(Kenneth R. Waldron)은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취되기 전 의식이 있을 때 의사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스포디, 포밀루이, 고스포디, 포밀루이, 고스포디, 포밀루이”.
의사는 ‘주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라고 반복하여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왈드론 목사는 의사 선생의 입술로부터 이런 기도소리를 들으면서 큰 위로를 얻었고 편안한 마음으로 마취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기도가 듣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된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습니다.
반복 기도문으로서 화살 기도를 사용할 때는 자신이 애용하는 기도문을 생각해 놓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문 붙이기

화살 기도문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간단한 기도문을 어떤 장소에 붙여놓은 것도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예를 들어, 화장실에다가 “하나님 아버지, 항상 주님 안에서 기뻐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문을 붙일 수 있습니다.
직장의 책상에도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문을 붙여 놓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대화를 즐겨야 합니다.
기도의 목적은 단순히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우리가 늘 하나님과 함께 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화살 기도를 하게 되면 그냥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도 영원한 가치로 투자되는 시간으로 전환됩니다.

유의점

화살 기도문은 시간이 부족하거나 또는 순간적인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는 기도문이기 때문에 화살기도만으로 기도 생활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규칙적인 기도의 장소와 시간을 가지는 기도의 사람이 화살 기도를 함께 사용할 때는 강력한 기도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화살기도를 드릴 때는 장문의 기도는 지양하는 것이 좋습니다.
간단하고 힘있는 기도의 표현을 사용해야 하며 진솔한 마음을 담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익

화살 기도문을 자꾸 사용하면 습관적인 기도의 사람이 되는 데 유익합니다.
즉 기도하는 것이 체질이 되는 데 좋습니다.
죄인인 인간 본성은 본래 기도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습관으로 만듬으로써 자신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화살 기도는 기도하기 싫은 우리의 본성을 길들이는 데 유익합니다.
또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순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강력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좋은 화살 기도문을 꼭 만드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향해 쏘아 올리십시오.
주님의 임재하심이 느껴질 것입니다.

시간

화살 기도 하나를 쏘는 데는 5초-10초 정도면 됩니다.
양적으로는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기도의 질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기도의 화살을 틈 나는 대로 쏘아야 하지만 아침에 기상하자마자 또한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꼭 쏘는 것이 좋습니다.

생각해 볼 문제

1. 여러분이 매일 아침 화살 기도를 드린다면 어떤 기도문을 만드시겠습니까?
2. “예수 기도”(Jesus Prayer)의 의미를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3. 화살기도를 실천하기 위한 계획안을 세워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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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 기도


화살기도는 영혼의 활을 당겨서 하나님께 쏘아 올리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적절한 상황에서 짧고 단순한 기도문을 가지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입니다.

화살기도는 주로 자신이 애용하는 기도문을 만들어 적절한 상황 때마다 사용합니다.
화살 기도는 주님의 전적인 긍휼하심을 간구하는 마음으로 드릴 때 효과적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박히는 화살을 쏘라

화살 하나는 하나의 기도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활에 화살을 하나씩 당겨서 시간이 나는 대로 하나님께 쏘아올릴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의 화살을 한 개 쏠 수 있습니다.
또 밤에 자기 전에도 쏠 수 있습니다.
하루 중에서 틈이 나는 대로, 적절한 순간마다 기도의 화살을 쏠 수 있습니다.
화살 기도의 기도문은 장황해서는 안됩니다.
마치 화살이 너무 길면 활로 당겨 힘있게 쏘기가 어려운 것과 같은 것입니다.
화살기도는 간단하고 단순해야 합니다.
화살은 짧지만 힘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힘차게 멀리 날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투영해서 쏘아야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 오늘도 주님 안에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저와 우리 가족을 지켜주세요.”

이러한 기도문은 여러분 각자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 날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기뻐하게 해 주세요.”

나는 차에 탈 때도 간단하게 화살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안전운행을 하도록 지켜주십시오.”

밤에 자기 전에도 화살 기도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함께 하신 것 감사드립니다.
이 밤에도 주님의 보혈로 덮어주세요.”

하루 중 생활하면서
“주님,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저를 주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 주시옵소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간단한 기도를 통해서 화살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글을 쓰기 전에 “주님 글을 쓸 수 있는 아이디어와 지혜를 주세요” 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회사 취직을 위해 인터뷰를 하기 전에도 “주님 이 인터뷰에서 제 입술 의 말을 주관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버스를 타기 전에 “주님, 안전운행하도록 지켜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 “아이들이 오늘도 공부 잘하고 친구들과 잘 지내게 함께 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의 화살

화살 기도는 간단한 기도이지만 우리의 마음을 담아서 드려야 합니다.
내면의 진실은 화살이 날아가기 위한 좋은 활이 됩니다.
성자로 여겨지는 존 비아니(John Vianney)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에 대해,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아름답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향기로운 이슬이다.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만 그 이슬을 가슴속에 느낄 수 있다.
기도에는 마치 잘 익은 포도로 만든 쥬스와도 같은 달콤함이 느껴진다.
간절한 기도 앞에서 문제들은 봄볕의 눈처럼 녹아버린다.
사람은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서 마치 대포에서 발사된 탄알처럼 곧장 하나님께 달려가야 한다.
기도는 우리 영혼을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킨다.
마치 에드벌룬을 높이 올려주는 불길처럼 기도는 우리 영혼을 높은 곳으로 데려다준다.
우리는 더 많이 기도하면 할수록 더 기도하고 싶어진다.
처음에는 수면에서 헤엄치지만 나중에는 점점 더 깊이 들어가 밑바닥을 향해 가는 물고기처럼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즐거움 속에 빠져 들어간다.
기도는 거룩한 물로서 그것이 흐르는 곳에 우리의 소원은 힘을 얻어 꽃을 피우게 된다.
우리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고 우리 마음의 목마름을 해소시켜 준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가장 열정적인 기도가 나옵니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기도의 가장 강력한 힘이 발휘됩니다.
우리는 마음 밑바닥에 있는 거룩한 꿈과 소원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내면의 진실한 소원은 하나님께 날아가는 화살의 강력한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화살 기도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는,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드리는 짧은 화살기도입니다.
둘째는, 반복해서 드리는 화살기도문입니다.
셋째는, 정해진 장소에 기도문을 붙여놓고 드리는 화살기도입니다.

성벽 재건의 마음을 담아서 쏘아올린 느헤미야의 기도

성경에서 우리는 느헤미야를 통해 화살기도의 첫 번째 유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파괴의 비보를 접한 느헤미야는 몇 개월 동안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아닥사스다 왕 앞에 얼굴에 수색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왕은 느헤미야에게 마음에 근심이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그 때 느헤미야는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왕은 느헤미야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어봅니다.
왕에게 대답하기 전에 느헤미야는 잠시 동안 묵상 기도를 드립니다(느 2:4).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묵상으로 잠깐 기도했지만 마음 속으로 하나님께 “짧고 단순한 화살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 왕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제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하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화살기도는 이처럼 어떤 순간적인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정해진 시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흐르는 강물처럼 하루 종일 흘러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간단한 문장이나 말을 사용하면서 짧은 화살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화살 기도문은 자신의 마음에 맞는 것을 선택하여 반복형 기도로 사용하는 것도 효과적입니다.
이러한 기도문을 계속해서 사용하면 좋은 기도의 훈련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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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주로 새벽기도를 설명할 때 자주 찾는 성구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시간 개념에서는 새벽이 아닙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언제 시작할까요?

유대인의 하루는 해가 지면서(저녁6시) 시작하여 그 다음날 해질 때 끝납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하루종일 일하다 가도 해자 져서 어둠의 커튼이 드리우면
“아 하루가 끝났구나” 하면서 감사의 일몰 기도를 드리고 하루를 마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낮과 밤을 12시간씩 나누어 구분했습니다.

낮 시간은 대략 아침부터(해뜰때부터) 저녁(해질때까지) 까지로서 현재의 아침6시에서 저녁6시까지 정도였으며,
밤은 오후 6시부터 그 다음날 아침 6시까지 12시간이었습니다.

밤은 다시 3시간 단위로 묶어 “경”이라 불렀습니다.
제1경은 오후 6-9시, 제2경은 오후  9-12시, 제3경은 오후 12-3시, 제4경은 오후 3-6시 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밤 4경에 제자들이 씨름하던 바다위로 걸어가신 시간대가 언제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낮 시간은 아침 6시에서 저녁 6시까지 12시간으로 한 시간 단위로 제1시, 2시 등으로 구분했습니다.
제1시는 아침 7시, 제6시는 낮 12시, 제9시는 오후 3시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유대인의 시간 즉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을 오늘의 시간으로 환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6을 더해주면 됩니다.
(이것도 어려우면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에서 초침시계에서 시간을 가리키는 바늘의 반대편이 지금의 시간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

예를 들면 사도행전 3장 1절에서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 시간 제구시는 오후 9시가 아니라 오후 3시를 말합니다(9+6=15,즉 오후3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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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5~22)

기도를 영적 호흡이라고 합니다.
호흡을 할 때 호흡하는 방법을 배워서 숨을 내쉬고 들어바십니까?
생명이 있는 육체는 자연스럽게 호흡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중병에 걸렸을 때는 자기 힘으로 호흡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산소호흡기로 숨을 쉬도록 도와줍니다.

건강한 영혼
건강한 육체
건강한 신앙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땅에는 중단해야 될 일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쁜 생각과 나쁜 습관, 하나님의 계명에 위반되는 것과 불신앙에 대한 것, 어두움에 관한 것 등등 이러한 것들은 빨리 중단할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중단해서는 안 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육체가 호흡을 함으로 존재하듯이 영적 생활에서 가장 귀한 것은 바로 기도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기도 쉬는 것을 죄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삼상 12:23)
그는 기도 쉬는 것을 큰 죄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기도를 중단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어떠한 의미일까요?

첫째,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계속하라

출애굽기 33:11에 보면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친한 벗이라도 대화가 중단되면 마음에서도 멀어지고 또 정(情)도 멀어집니다.
우리는 항상 대화 속에 이해를 서로 주고받게 되고 정(情)도 서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영적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가 없이는 신앙생활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숨을 거둔다는 것은 바로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중단하는 것은 바로 신앙을 자살시키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떠한 환경과 처지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서가 아버지 이삭에게 받을 축복을 야곱이 가로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어머니 리브가 곁에 있으면서 대화를 자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생활을 통해서 늘 하나님과 영적인 대화를 계속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역대상 10:13에 보면 사울의 죽은 기록이 나옵니다.

사울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아 왕까지 되었지만 그가 결정적으로 생명을 잃게 된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고 신접한 사람 즉 귀신 들린 사람에게 가르쳐주기를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방신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올리는 경배를 중단하지 말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1년에 몇 번 정기적으로 드리고 끝나면 안됩니다. 우리는 평생토록 하나님 앞에 산 제물이 되어서 늘 경배하는 생활을 지속해야 합니다. 시편 95:6에 보면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경배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무릎을 꿇는 것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가 계속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경배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안전한 시간, 가장 하나님께 보장 받는 시간은 바로 예배하는 시간입니다. 예배가 살면 믿음이 삽니다. 예배가 살면 교회가 삽니다. 예배가 살면 여러분의 인격도 변화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했습니다(요 4:23).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일을 숨질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경배’라는 말은 ‘꿇어 엎드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 예배는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또 ‘주인의 발 앞에 하인 된 위치에서 엎드려 경의를 표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주인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중단하지 않는 가정과 교회와 민족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예배가 가장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향기로움을 계속 올려드리라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시 141:2) 기도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예물입니다. 요한계시록 5:8에도 보면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도가 얼마나 귀하면 금 대접에 담았을까요? 옛날에 귀한 음식은 임금님의 상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귀하면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가겠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항상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매일처럼 올라가는 기도의 향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기도를 하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게 되고, 기도 속에서 신앙이 성장하게 되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기도의 줄이 잡힌 사람은 항상 미리 예방의 기도도 하고, 처방의 기도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 26:41)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고 졸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시험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기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항상 기도함으로 깨어있기 때문에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항상 기도로 깨어서 주님과 영적 대화가 이어짐으로 여러분의 아름다운 기도의 향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항상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항상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것입니다.

시편 55:22에 보면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맡기는 것과 버리는 것은 다릅니다. 전당포에 맡기는 것은 다시 찾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맡겨 버리는 것은 다시 찾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올림픽대로를 타고 공항에 가다 보면 난지도에 쓰레기를 버리는 차량은 많이 보았지만 그 버린 쓰레기를 다시 싣고 가는 차량은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무거운 짐을 다 주께 맡겨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기도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잠언 16:3에도 보면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시편 37:5에도 보면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베드로전서 5:7에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여분의 모든 것을 기도로 하나님께 다 맡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인간이 견디기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 이를 때에도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계속하고, 하나님 앞에 올리는 경배를 중단하지 말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의 향을 계속 올려드리고, 항상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어서 늘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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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응답 11가지 유형

 

1. 예스(Yes)형 

우리의 기도와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즉각적인 응답이다. 
개인, 사회, 국가, 교회문제 등으로 기도할 때 즉각 주시는 응답.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에 응답.   

2. 노(NO)형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 거부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는 경우이다.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 반사회적, 비인격적, 비성경적인 기도에 침묵이나  거절로 응답. 이 외에도 형제를 용서치 못함, 교만, 혈기, 외식적인 기도,  죄, 두 마음, 의심, 잘못된 금식, 불순종 등에 거절하시는 응답. 

3. 주바라기형   

힘들고 지칠 때,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하나님만 믿고 의지할 때 기적적으로 주시는 응답.   
홍해 앞, 여호사밧 왕과 백성들의 찬양을 통해 하나님이 적군을 물리쳐 주시는 응답.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서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  

4. 업그레이드형 

우리의 기도와 믿음 그 이상의 것을 주시는 응답.  
어떠한 것을 구했는데 최상의 시간(때) 에 최고의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평소 믿음이 하나님의 뜻과 정확하게 일치할 때 상상과 기대를 초월해서 주시는  환상적인 기도응답이다.
솔로몬이 지혜만 구했는데 그가 구하지 아니한 부와 명예도 주셨다.  
전무후무한 지혜를 주셨다는 사실   

5. 웨이트(Wait)형   

인생은 먼 길을 여행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때로는 형통한 환경의 아스팔트길을 걸어갈 때도 있다. 
그러나 어려움의 진흙탕길, 가시밭길을 걸어갈 때도 있다.   
폭풍우나 비바람을 맞고 외로운 길을 걸어가야 할 때도 있다.   
가슴에는 비전을 품고 마음속에는 굳건한 의지와 강철 같은 체력으로  가야할 길을 가야한다.   
믿음과 기도로 앞길을 헤치고 걸어갈 때 지연된 응답이 있다.  
크로노스(인간의 시간)와 카이로스(하나님의 시간)는 다르다.  

웨이트형과 진주조개형의 차이는, 웨이트형은 믿음으로 지속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진주조개형은 먼저 계시나 응답을 받았지만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에 받게 되는 기도응답을 말한다.  

6. 진주조개형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환상, 계시 혹은 기도응답을 통해 그 일에 대해서 약속을 받게 된다.   
그런데 아픔과 시련, 연단, 회개, 불시험 등을 통과하고 받게 되는 응답이다.   
자아가 깨지고 교만이 제거되고 하나님 중심으로 패러다임이 변할 때 받게 되는 응답.   
하나님이 한 시대에 크게 쓰시는 사람들은 이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다윗의 "아둘람 굴"과 같은 과정을 거칠 때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이 임하게 된다.   

요셉의 예   

7. 물레방아형   

직선형 기도응답이 아니라 변환형 기도응답이다.  
우리가 A를 구했는데 B나 C, D를 주실 때도 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러 가려고 했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고 마게도냐(유럽)로 인도 하셨다.   
유럽에 기독교 문명이 획기적으로 열리는 전기가 된 것이다.   
자신의 기도와 고집만 주장하고 금식을 한다고 해서 자기 뜻대로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고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시대를 움직이는 사역을 펼칠 수 있다.  

8. 야베스형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 영, 혼, 육의 총체적인 전인적 축복을 주시는 경우이다.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인 모든 영역에서의 완전한 기도응답.   
이 기도에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지침이 있다.   
그것은 피(정의), 땀(노력), 눈물(양심)의 3대 액체가 필요하다.   
이것을 알고 야베스의 축복을 말해야 한다.  

씨를 뿌리고 기도해야 한다.  
이 시대의 야베스라면 한국의 100대 재벌(?) 정도는 될 것이다.   
관념의 유희는 위험하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9. 징검다리형   

하나의 목표나 프로젝트를 추진해 가기 위해서는 일의 시작 전, 과정,  후까지 기도를 해야 한다.   
지속적인 기도와 연속적인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기도응답이다.  
느헤미야의 성벽재건(방해자, 거짓 선지자 출현 때도 지속적인 기도)  

10. 지오디(GOD)형   


하나님의 방법을 말한다.  
인간의 기도나 믿음, 의지와는 무관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한다.  
주권적인 의지와 주권적인 권능을 말한다.  
인간의 생사화복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한다.   
창조와 보존, 통치, 성도의 고난, 선택과 유기, 징계 등.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요구에 응답해야 할 때가 있다.   

이사야 선지자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 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8).  

11. 미사일형   


교회, 전도, 구원, 부모의 기도, 성도를 위한 합심기도, 목회자의 중보형기도 등을 말한다.   
이러한 기도응답의 원리를 알고 365일, 24시간을 주님과 연합된 삶을 살게 될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과 그 분의 뜻 안에서  성공과 부와 명예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된다(전1:26).  

결론(結論)

기도와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무한한 하나님의 자원과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 신앙인 것이다.   
기도는 우리의 전 삶을 통해서 역사한다.   
심지어는 우리의 죽음 이후에 후손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사람은 인생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직립하여 설 수 있다.   
기도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관점은 기도를 하나님과의 거래관계로 보아서는 안 된다.   
'거래’가 아니라 ‘관계’여야 한다는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연합되고, 우리가 변화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우리의 삶과 모든 생활에서의 모습을 조율하고 일치시키는 대화,  즉 커뮤니케이션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기도100%은 우리가 신앙생활과 인격, 기도를 100%로 최선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뜻 안에서 360°의 다양한 환경과 방법으로 응답을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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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쎄(Hermann Karl Hesse. 1877. 7. 2~1962. 8. 9)의 기도

하나님이여,
우리 자신에 대하여 절망케 하옵소서.
하나님에게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 절망케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 자신이
더 이상 지탱할 아무 힘이 없을 때까지 절망케 하옵소서.
그래서 오직 하나님으로만
희망과 소망을 가지게 해 주옵소서.

* 오늘의 묵상(01-11-2021 소개)

라인홀드 니버(Karl Paul Reinhold Niebuhr. 1892∼1971)의 “평온을 비는 기도”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차이를 분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한 번에 하루를 살게 하시고

한 번에 한 순간을 누리게 하시며,

어려운 일들을 평화에 이르는 좁은 길로 받아들이며,

죄로 가득한 세상을, 내가 갖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그분께서 그러하셨듯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제가 그분의 뜻 아래 무릎 꿇을 때,

그분께서 바로잡으실 것을 믿게 하셔서

이 생에서는 사리에 맞는 행복을

내 생에서는 영원토록 그분과 함께 다함이 없는 행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아멘.


Serenity Prayer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Living one day at a time;

Enjoying one moment at a time;

Accepting hardships as the pathway to peace;

Taking, as He did, this sinful world

As it is, not as I would have it;

Trusting that He will make all things right

If I surrender to His Will;

So that I may be reasonably happy in this life

And supremely happy with Him

Forever and ever in the next.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의 기도

하나님께서 편한 길과 반쪽짜리 진리,
피상적인 관계를 불편하게 여기는 심령을 주셔서
마음 속 깊이 침잠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를 빕니다.
 
하나님께서 불의와 핍박, 인간에 대한 착취에
분노할 줄 아는 심령을 주셔서
정의와 자유,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시길 빕니다.
 
하나님께서 아픔과 거절,
굶주림과 전쟁으로 고난당하는 이들을 위해
눈물 흘릴 줄 아는 심령을 주셔서
기꺼이 손을 내밀어 세상의 고통을 어루만지며
괴로움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게 되기를 빕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어리석음의 복을 주셔서
스스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게 하시길 빕니다.
그리하여 다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모든 아이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정의와 사랑을 가져다 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Carol Wimmer)

“나는 기독교인이에요” 라고 말할 때
“난 구원 받았다!” 라고 외치는 게 아니에요.

“난 가끔 길을 잃어요. 
그래서 이 길을 택했어요.” 라고 말하는 거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교만함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발을 헛디뎌 비틀거려서 하나님께서 나의 인도자가 되길 바란다고 고백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강하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약해서 계속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한다고 말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성공했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실패해서 결코 빚을 다 갚을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는 혼돈에 처해 있어서 겸손하게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내가 완벽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 결점이 너무나 뚜렷하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나는 뼈아픈 고통을 여전히 느껴요.

내 마음이 아파서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구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나는 판단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내게는 그럴 권한이 없어요.

내가 사랑받는다는 사실 그 하나만을 안다는 것이에요.


기도(祈禱)는 친밀한 교통(交通)(intimate intercourse)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의 살아 있는 믿음의 표현으로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intimate intercourse)이라고 합니다. 

성부 하나님이 기도를 들었고 응답하시며 성자가 그의 이름으로 중보하시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기도를 활성화시켜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어지게 된다.
칼빈이 말한대로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은 우리에게 참된 지혜와 경건 그리고 건강한 믿음을 준다.

바운즈(E. M. Bounds)

"성도를 만드는 것은 기도의 힘이다. 기도하면 기도할 수록 참된 성도가 되어간다. 기도를 위하여 많은 시간, 특별히 아침 시간을 바치면 성스러운 생활에서 그 효과가 현저하게 나타나게 된다."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문이 열리고, 틀이 형성되며, 그 내용이 규제되기 때문에 철저하게 말씀의 묵상을 요구하며, 말씀 묵상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알기 때문에 확신과 소망을 갖게 합니다. 

또한 마음 속에 깊은 감동과 큰 감격을 심어 주어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므로 기도는 말씀 묵상과 찬미와 더불어 행하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찬미는 말씀에 기초해야 하고, 지나치게 감정적이거나 충동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특권이요, 의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의 은혜를 감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적 사랑에 감격하며 그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중보 기도를 본받아 온
인류와 우주적 교회를 위하여 드리는 우리의 중보기도는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의 지름길이요, 사랑과 믿음과 소망으로 하나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뿐 아니라 형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최상의 방편입니다.

기도(祈禱)의 법칙(法則)


칼빈은 성령과 말씀을 따라 기도함에 있어서 특별히 네 가지의 법칙
1. 경외하는 마음으로
2. 진심으로
3. 겸손하게
4. 믿음으로

첫째 법칙 - 경외하는 마음으로

구약성경에 보면, 에컨대 레위기에 나오는 의식법 등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초월성을 유념하게 하여 우리가 하나님께나 아갈 때 경외심을 가질 것을 강조한다.

신약에서도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위엄이 무한하며 그의 본질을 불가해하고 그의 권능이 한량없으며 그의 존재 또한 영원함을 알게 하려는데 있다고 칼빈은 해석한다.

주기도의 첫째 기원, "이름이 거룩하게 되오며"에 대해서도 칼빈은 이 기원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들려 드릴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큰 수치를 인하여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칼빈은 아주 강조한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대화하며 기도하려는 자들은 합당한 생각과 마음을 가져야 한다.

둘째 법칙 - 진심으로, 열정적으로

성경은 위선적인 기도를 정죄할 뿐만 아니라 기도를 진실하고 열정적으로 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한다.
예수님은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경고하셨고, 기도의 응답이 더딜 때 끈기 있게 기도할 것을 권하였다.
그리고 기도에는 열정적인 열망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여 기도한 세리는 자기의 감정이 고조되어 있음을 표현하여 자기의 가슴을 쳤으며, 그리스도의 기도들은 심한 통곡
과 눈물로 드려졌는데,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셨다.
엘리야도 간절하게 기도했던 것으로 성경은 말한다.
칼빈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자신의 무력함을 항상 느끼며,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필요한가를 간절하게 생각하고서 그것을 응답 받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이 기도에 가미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셋째 법칙 -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겸손한 기도의 전형적인 실례는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이다.
칼빈은 주장하기를 기도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모든 자만심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올바른 기도의 준비와 시작은 겸손하고 성실하게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간구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은 그 뜻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사실상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 결정되며 우리 스스로 기도의 내용을 조작하지 않게 된다.
이로써 겸손하고 순복하는 기도가 가능하다.

넷째 법칙 -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성경이 분명하게 지시하는 바에 의하면 믿음은 응답받는 기도의 필수 조건이다.
칼빈이 제시하는 넷째 법칙은 기도하되,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리라는 확실한 소망을 품고서 용기를 내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지는 것은 모두 믿음을 통해서 얻는다고 하는가 하면, 사람들은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것이요, 공포심 없이 그러나 경외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고 칼빈은 또한 말한다.

칼빈이 제시한바 네 가지 법칙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185문답)에 다음과 같이 진술되어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며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과 필요한 것들과 죄악들을 깊이 깨닫고 마음으로 회개하며 감사하고 열심을 품되 이해, 믿음, 신실, 열정, 사랑 그리고 인내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뜻에 겸손히 순복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祈禱) / 마태복음 6:7∼9a

7. 또 기도(프로슈코메노이)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아이테사이=아이테오)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어떤 것일까?

기도로 하나님에게 생각을 하게하고, 내 기도로 인해 하나님이 하나님의 계획을 별도로 세우거나 바꾸거나 하게 할 수 있는 것인가?
피조물인 사람의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왜 기도를 하나님은 또는 예수님은 하게 하신 것인가? 

여러분은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절대 주권자시며,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이나 생각을 인간이 하는 기도로 바꾸시거나 혹은 인간이 하는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과연 바꿀 수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열심히 기도를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속성을 속성대로 믿는 기도일까요?

아니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왜 자기가 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이 그 때 그 때 바뀌는 것처럼 생각이 돼서 열심히 기도를 하는 믿음이 생기는 것일까요?

지금 기도 자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할 때 누가 주어냐? 즉 누구를 위한 기도냐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 역시 돈 문제로 정말 너무너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정말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정확히 3년 동안 매달을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넘어갈 수 있도록 해주신 예수님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소중한 체험인데요, 그래서 지금도 저는 예수님 경리과장 같은 예수님이라는 말을 농담처럼 곧잘 합니다. 예수님처럼 정말 정확한 분은 없는 것을 저는 너무 잘 압니다. 그리고 많은 목사님들 역시 기도가 만능인 것으로 생각을 하는 목사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기도는 왜 하는가?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가 도대체 무엇인지 아는 것이 기도에 대해 이런 생각을 깊이 하면서 성경 말씀들을 찾아가보면, 기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팔랄
- 간섭하다, 판단하다, 중재하다, 기도하다.

“팔랄”이란 기도는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입니다.
히브리어 단어 해석이 사실은 참 어렵습니다.
히브리어를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 해석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도의 대표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어 “팔랄”은 “간섭하다, 판단하다, 중재하다, 기도하다”는 뜻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외에는 계시지 않는 것을 구약의 기도를 대표하는 “팔랄”이라는 단어에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팔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 . .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요나 2:1,2,10)


옛날 히브리 사람들은 기도를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브라함과 요나, 모세, 그리고 다윗에게 기도는 무엇을 의미하였던 것일까? 그들이 생각하던 기도의 개념은 오늘날 크리스천이 생각하는 기도의 개념과 어떻게 달랐을 것인가?


기도의 문자적 의미 - 입과 지팡이

구약성경에서 대표적으로 사용된 기도하다는 뜻의 히브리어는 ‘팔랄’이다.
앞에 접두사 테를 붙이면 테필라, 즉, 기도라는 명사가 된다.
팔랄의 어근은 ‘팔’인데 ‘페이’와 ‘라메드’의 두 글자로 되어있다.
‘페이’는 입을 뜻하는 상형문자로서 여기서는 말을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한편 ‘라메드’는 권위를 상징한다.
원래 라메드는 양치는 목자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긴 지팡이를 그린 상형문자이다.
목자는 그 지팡이를 가지고 양떼의 가고 멈춤과 모든 행동을 결정하며 다스린다.
양들의 입장에서 보면 또한 그 지팡이는 자기들을 맹수로부터 보호하는 강한 힘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팔’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권위자에게 말하다”라는 뜻이 된다.

한편 땅에 떨어지거나 엎드리다는 단어 ‘나팔’도 같은 어근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팔랄이라는 단어의 문자적 해석은 “권세를 가진 사람의 앞에 엎드려 송사를 올리거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옛날에는 성문이나 광장에 유력자가 모습을 나타내면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자신이 당한 억울함이나 부당한 일들에 대하여 고하며 이에 대하여 정의의 심판을 내려줄 것을 간구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사무엘하 15장에 보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하여 일찍 성문으로 나가 재판관을 자칭하며 모든 송사를 가진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고 왕의 신하를 대신하여 심판을 내려주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에는 누구든지 개인적으로 부당한 일을 당하여 곤경에 처하였든지 아니면 그 지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잘못된 관행이나 부정행위에 대하여 분개한 사람은 권세를 가진 사람에게 찾아가 목소리를 높여 진정을 올리고, 권세자가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고 상황에 개입하여 왜곡된 질서를 바로잡아 주기를 절실하게 구하였다.

그러면 그 권세자가 그 진정된 바를 토대로 잘잘못을 가리고 훼손되었던 정의를 다시 회복시켜 주었는데 그 것이 바로 심판이다.
그러므로 팔랄의 또 다른 뜻에 ‘심판하다’ 또는 ‘중재하다’가 있다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시편 106편에 비느하스가 하나님을 능멸한 악인들을 정죄하고 처벌한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정죄의 행위가 바로 같은 히브리어 ‘팔랄’이다. 하나님은 이를 영원하게 흔들리지 않을 의라고 여기셨다.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 때에 비느하스가 일어나 처벌하니(팔랄)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이 일을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 대대로 무궁하리로다” (시편 106:28-31)

따라서 팔랄(기도)의 본질적 의미는 다름 아니라 정의가 손상된 것에 대하여 강한 정의감을 가지고 권세자에게 진정함으로써 정의를 다시 바로잡는 행위를 뜻한다.
그 권세자 중에 가장 높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 지고의 권세자에게 하는 팔랄이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인간인 재판관에게 가서 말하면 송사라고 하고,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은 기도라고 완전히 서로 다른 단어로 분리하여 버렸지만, 옛 히브리어에서 재판관에게 하든지, 왕에게 하든지, 하나님에게 하든지 모두 팔랄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권세자에게 고하는 것이고, 정의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왕과 통치자는 모두 하나님의 대리인이므로 (로마서 13:1) 그들에게 송사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게 고하는 것이 된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로마서 13:1-2)

영적 의미 - 하나님의 정의를 위하여

정의가 손상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생명이 훼손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큰 영적 원리에서 보면 죄로 인하여 저주가 왔고 저주로 인하여 죽음이 온 세상을 덮어 다스리게 되었다. 그런 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짓밟힌 생명에 대하여 가슴 아파하며 그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에게 고하는 것이 기도이다. 고대 히브리 개념상 재판관은 생명을 회복시키는 자를 뜻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 즉, 법은 생명이고, 그 법을 확립하는 것은 생명을 지키고 살리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영적 원리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팔랄이다.

생명이 손상되고 정의가 무너져 가는 것은 개인적인 삶에서도 벌어지며, 지역사회와 나라 차원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자기와 자기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라 자기가 속한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불의와 생명의 파괴에 대하여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해될 것이다.


성경에 팔랄이 가장 처음 등장한 곳이 창세기 20장이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남방으로 이사가서 아비멜렉왕의 땅에 살게 되었는데,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사라가 아내인 것을 감추고 그녀를 누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비멜렉이 자칫 사라를 아내로 취하려고 하였는데, 그결과 아비멜렉에게 멸족의 재앙이 오게 되었다. 아비멜렉에게 잘못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꿈을 통하여 그에게 경고를 하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를 위하여 기도하도록 하셨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팔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줄 알찌니라 . . .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팔랄)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창세기 20:7, 17)


성경에 처음 나오는 기도의 상황치고는 약간 어이가 없는 것 같다. 아브라함이 두려움에서 지어낸 거짓말의 결과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고, 하나님은 급히 아비멜렉에게 재앙을 피할 방법을 제시하셔야 했는데, 그것이 아브라함의 기도였다. 그 상황이 어찌 되었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팔랄(기도)을 함으로써 억울한 죽음을 막고 생명을 회복시킨 점이다. 그 점이 팔랄의 본질을 보여준다. 기도를 하는 아브라함으로 치면 그리 떳떳한 입장도 아니었다. 아브라함이 완벽했냐 아니냐가 기도 응답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도가 이루어지고 아니고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 즉, 하나님의 법, 생명의 법을 세우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한편 누군가 죽을 죄를 범하고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할 경우에도 대변자가 나타나 권세자에게 탄원하고 긍휼을 구할 수 있다. 긍휼과 자비에 의한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에서 구하기 위해서 여러 번 ‘팔랄’을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닥칠 때 마다, 모세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서서 진정을 하고 송사를 하여 멸망을 막고,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오므로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였느니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멸하겠다 하셨으므로 내가 여전히 사십 주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리고 여호와께 간구(팔랄)하여 가로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위엄으로 속하시고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을 멸하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이 백성의 강퍅과 악과 죄를 보지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내신 그 땅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일 능력도 없고 그들을 미워도 하사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하여 내셨다 할까 두려워하나이다. 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였었노라” (신명기 9:24-29)


고개가 뻣뻣하고 끊임없이 거역하며 자기를 해하려고 까지 한 이스라엘 백성이 뭐가 예뻐서 모세가 그리하였겠는가? 끝 까지 오로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 하나님의 의를 지키기 위해서 모세는 개인적인 감정을 초월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중보자가 되었다. 우리의 판단과 감정을 따르는 대신,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것인가 만을 기준으로 기도할 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한 기도가 진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44)


열렬한 기도와 기적

권세자 앞에 엎드려 부당한 상황을 바로잡고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간절히 진정하는 히브리어 ‘팔랄’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유추할 수 있다.
사람들은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인간인 권세자 앞에서도 ‘아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열을 올리면서 항변을 하고 진정을 하지 않을 것인가?
하물며 최고의 권세자이신 하나님께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제가 뭐 알겠습니까. 그저 잘 알아서 하옵소서’ 하고 돌아서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화를 통하여 바로 그 점을 가르치려고 하셨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8:1-8)

팔랄은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나아가 ‘아니 이 세상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불의를 이대로 내버려 두시렵니까?’ 하면서 마치 따지기라도 하듯이 항변이라고 할 만큼 당당하게 하나님께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유다의 멸망을 앞둔 마지막 때 선지자 하박국이 패악이 만연하고 불법이 자행되는 현실을 보고 부르짖었던 것과 같이 ...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하박국 1:2-4)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성경은 말한다 (야고보서 5:16).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팔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아들 사무엘을 얻고 의를 회복한 것처럼 (사무엘상 1:10-11), 또 히스기야왕이 “사자의 손에서 글을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놓고 .....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으로 주만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하며 기도(팔랄)하여 아수르의 침략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지킨 것처럼 (이사야서 37:14-15, 20), 의인의 열렬한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기적을 가져 온다. 시편 118장에 보면 우리의 기도를 주께서 응답하실 때, 주가 행하신 것을 ‘우리 눈에 기이한 바’라고 칭송하였다. 그 '기이한 바'가 히브리어로 기사와 이적을 뜻하는 ‘팔라’인데, 바로 이 단어가 또한 ‘팔랄’과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형제어라는 사실이 참 인상적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드린 기도를 주께서 응답하시어 멋들어지게 정의를 행하신 것을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 때 우리의 영혼은 짜릿한 감동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감사를 경험하게 된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팔라)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시편 118:21-24)





카라 
- 기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카라”는 기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샤알
- 요구하다 기원하다

“샤알”은 “요구하다, 기원하다”라는 뜻입니다. 

파가
- 중재로서 탄원

“파가”는 “중재로서의 탄원”을 뜻합니다.

“할라”
- 은혜를 구할 때 사용하는 단어

“할라”는 흔히 은혜를 구할 때는 쓰이기도 하는 단어입니다(시편 119:58).

내가 전심으로 주의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I have sought your face with all my heart; be gracious to me according to your promise.    

자아크
-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 구하는 것

“자아크”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부르짖는 것을 말합니다(삿 3:9, 시 22:5).

라난
- “라난”은 “소리치다, 외치다”(시 17:1, 렘 31:12, 애 2:19)

샤와
“샤와”는 “도움을 청해서 부르짖다”

샤하르
“샤하르”는 “구하다”

‘나’는 부드럽고 신중한 요청으로 애원, 소원, 허락 등등

‘린나’는 슬픈 또는 진정성을 담은 느낌으로 외침, 함성, 부르짖음(시 17 : 1)

‘테필라’는 중재, 탄원, 간청, 애원, 기도 또 넓은 의미로는 찬송이나 거룩한 노래로 어근(語根)은 ‘팔랄’에서 온 변형 단어

תְּפִלָּה 테필라

‘말씀’과 ‘기도’는 기독교 신앙생활의 두 중심축이다.
히브리어로 <테필라 תְּפִלָּה>
동사 <팔랄 פָּלָל>에서 파생하였다.
히브리어에서 ‘기도하다’란 뜻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동사는 매우 다양하다.

예컨대 ‘말하다’란 동사 <아마르 אָמַר>는 하나님께 아뢰고 또 하나님께서 응답하는 대화의 동작을 묘사하는데 종종 ‘기도하다’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그 외에도 ‘요구하다’란 뜻의 동사 <샤알שָׁאַל >도 종종 ‘간구하다’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또 ‘간구’<터힌나 תְּחִנָּה>란 명사는 ‘기도’<터힐라>란 명사와 나란히 병렬되어 나오기도 한다.

‘기도’<테필라 תְּפִלָּה>를 더욱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사 <팔랄 פָּלָל>의 의미를 더 연구해 보아야 한다.

<팔랄>이란 동사가 무슨 뜻으로 쓰였는지 알기는 매우 어려워서 학설도 여러가지이다.
백여 년 전에 독일의 벨하우젠(J. Wellhausen)이라는 학자가 ‘칼날’과 관련된 아랍어 동사 <팔라>과 연관이 있어서 히브리어 <팔랄>은 ‘자상을 내다/상처를 내다’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았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제의 중에 광란하면서 자기 몸에 칼로 자상을 내는 관행을 가리킨다. 성경의 율법은 그러한 우상숭배의 관행을 금지한다(신 14:1).


벨하우젠의 주장과는 달리 아랍어 <팔라>와의 연관성은 인정하지만 그 의미는 ‘자르다’라고 보는학자들이 있다. 이 의미에서 ‘구별하다’란 뜻으로 확장되고 나중에는 ‘판결하다’란 뜻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 중에 <펄릴라>는 ‘재판관’이란 뜻인데 이러한 확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어떤 학자들은 동사 <팔랄>이 본디 ‘넘어지다’란 뜻이었는데 이것이 발전하여서 엎드려 절하는 동작과 연결되면서 ‘기도하다’란 의미로 발전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스파이저(Speiser)는 <팔랄>은 ‘평가하다, 고려하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창 48:11; 삼상 2:25; 겔 16:52; 시 106:30같은 구절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동사가 피엘로 쓰이면 ‘생각하다, 고려하다’란 뜻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성경에서 히브리어 <팔랄> 동사는 84회 나오는데 대부분 히트파엘(재귀형)로 사용되고 있다.
이동사가 히트파엘(재귀형)로 쓰이는 경우에 ‘기도하다’라고 번역한다.
본디 ‘자르다, 구별하다, 고려하다’란 뜻의 이 동사가 히트파엘(재귀형)로 사용되면 그 뜻이 변하여 ‘기도하다’란 뜻이 되는지 그 이유를 알기가 쉽지 않다.

동사 <팔랄>의 의미 중에 ‘구별하다’란 의미가 ‘재판하다’란 뜻으로 확장되었는데 이것이 히트파엘로 쓰이면서 ‘하나님을 재판관으로 삼다’란 뜻으로 의미가 더욱 확장되었다고 보는 주장이 있다.

골드만(Goldman)은 분들은 <팔랄>에 ‘자르다/깨뜨리다’란 뜻이 있음에 주목하여 이것이 히트파엘(재귀형)으로 되면 ‘자기 자신을 깨뜨리다’란 뜻이 되어서 ‘통한하며 뉘우치다’란 뜻이 되고, 이것이 ‘기도하다’란 뜻으로 정착되었다고 본다.


토마스(A. Thomas)는 ‘결정하다, 해결하다’란 뜻이 재귀형이 되어서 ‘중재자로 활동하다’란 뜻이 되는데 여기서 ‘기도하다’란 의미로 발전했다고 본다.

또 어떤 분들은 ‘평가하다’란 동사에서 히트파엘(재귀형)이 되어 ‘자신을 되돌아보다’란 뜻이 되면서 기도하는 행위를 가리키게 되었다고 본다.

이처럼 ‘기도’<테필라>란 단어에 관한 어원을 따져보는 학설은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주장들을 종합해 보면 일정한 공통성이 발견된다.
‘기도’는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자신의 행위를 평가하고 반성하는 행위가 기본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반성의 기준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세우는 행위가 기도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기도’에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말씀’이 없이는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가 될 수 없다.

무릇 종교라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모든 종교는 기도를 강조한다.
기도 없는 종교는 없다.
그러나 다른 종교의 기도와 기독교의 기도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기독교의 기도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기도를 말씀에 입각해서 드리도록 가르치고 있다.
바알종교는 기도자 자신의 여망을 이루기 위해서 바알 신에게 자신의 존재를 바치는 표현으로서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광란의 기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야훼 종교는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움으로써 늘 말씀의 실존으로 자신을 변화시켜가는 기도를 가르친다.

오늘 한국교회는 바알종교의 기도를 드리는가, 아니면 야훼종교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사람이 귀를 둘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언 28:9).





‘테힌나트’ ‘간구’로 번역되는 단어로, 불쌍히 여기다(욥 19 : 21)라는 뜻을 지닌 동사‘하난’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외에도 히브리어에서의 기도로 생각할 수 있는 단어들은 많이 있는데, 기도나 간구나 구함 등, 기도에 해당하는 단어로 번역이 될 수 있는 단어들에 대해 살펴본 것처럼, 구약의 모든 단어들은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나 제의(祭儀) 또는 예배, 왕과 백성 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구하거나 애원하거나 청원을 하거나 부르짖는 것 등이 모두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런 단어들이 쓰이는 점에서, 이 역시 구약의 기도는 기도에 대한 예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8:26∼30 

26. 그런즉 이스라엘 하나님이여 원컨대(나) 주는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 확실하게 하옵소서.
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28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테필라트=테필라)와 간구(테힌나트=테힌나)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하린나=린나)과 비(미트팔렐=팔렐)는 기도(핫테필라=테필라)를 들으시옵소서.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핫테필라=테필라)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이템팔렐루=팔랄=그들이 기도하게 될) 때에 주는 그 간구함(테힌나트=테힌나)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길게 솔로몬이 ‘그런즉’으로 기도와 간구를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얼핏 번역 말씀을 보면, 솔로몬이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에게 하나님의 귀한 백성을 위해 다윗의 후손들에게 왕권을 주시며 맡기신다고 말씀을 하셔놓고 왜 이제 와서 하나님이 딴 말씀을 하십니까? 이런 항변의 뜻으로 이런 기도와 간구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 솔로몬은 온 우주보다도 더 큰, 하늘 위의 하늘에 계시는 어마어마한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그 크신 하나님이 하찮은 자신이 짓는 지상에 있는 작은 건물 안에 하나님이 계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런 낮은 마음으로 ‘그런즉’으로 이어지며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와 간구입니다.

이 말씀에서 ‘기도’는 히브리어 ‘테필라트’로 원형이 ‘테필라’인데 어근이 ‘팔랄’입니다. 뜻은 앞에서 말씀을 드린대로 ‘판결하다(삼상 2:25)’, ‘기도하다(삼상 1:21)’라는 뜻과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드리는 중보기도’를 ‘팔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중보기도’를 할 때 ‘팔랄’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한‘테필라’는 의미가‘팔랄’보다 훨씬 더 낮은 자세로 애타게 애원하는 기도를, 솔로몬이 하나님이 아버지인 다윗에게 하신 언약의 말씀을 생각을 하면서 아주 낮은 자세로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가 ‘테필라’기도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간구’는 ‘테힌나트’인데, 뜻은 ‘긍휼이 여기다(단 4:27), 불쌍히 여기다(욥 19:21)라는 뜻을 지닌 동사 ‘하난’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간구’는 자신이 떳떳하게 하나님에게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명사 수 11 : 20)로 탄원(명사 렘 37 : 20)을 간구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시고 제 간구를 들어달라는 뜻이 ‘간구’라는 ‘테힌나트’라는 단어의 뜻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린나’는 ‘외치다(시 78 : 65)’, ‘기뻐하다(시 32 : 11), ’‘부르짖다(애 2 : 19)의 뜻을 가진 ’‘라난’에서 온 명사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이 말씀에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이 왕권을 주실 것을 언약하신 다윗과 그 후손을 포함한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대표하는 중보자로써의 기도를 하나님의 은혜로 불쌍히 여겨서 들어주실 것을 부르짖는 기도와 간구라는 것이 원어 의미의 기도와 간구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은 다윗에게 언약하신 말씀이 아니고, 모세에게 성막 성전을 짓게 하실 때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실 것을 스스로 말씀하신 것을 상고하면서, 29절에서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거하실 곳에 대한 말씀이 계속 나옵니다. 이 말씀에서 이곳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세상을 예표하는 애굽에서 구원을 해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모세에게 짓도록 한 성막 성전인데, 성막성전이기 때문에 이동을 하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덮으시며 하나님이 인도를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화인줄을 알게 하시고 또 자신이 그런 하나님인 것을 하나님의 백성은 알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이런 기도와 간구는 열왕기 상 9절 3절에서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은 이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하나님의 눈이 바라보시는 성전을 향해서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믿고 이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향해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을 계속 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떤가?

 

왕상 9 : 1-9

1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의 무릇 이루기를 원하던 일이 마친 때에

2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3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 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이 말씀에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 구약의 모든 율법이나 계명은 율법이 완성이 되고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신약으로 다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대속으로 인한 죄 사함과 그로 인해서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진리와 복음입니다. 따라서 이 진리와 복음 외에 다른 진리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것이 곧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기복신앙, 율법신앙, 성경 말씀에서 벗어난 신비주의를 생각하면 무슨 말씀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기도에 대한 단어가 훨씬 더 명료해지고 간단해집니다.

 

프로슈케 : ‘프로슈케’는 명사인데, 동사인 ‘프로슈코마이’와 함께 70인 역에서 히브리어 기도를 번역하는 단어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프로슈케’는 명사로는‘요청’이고, ‘프로슈코마이’는 동사로 ‘요청하다’라는 뜻인데, 중요한 것은 ‘프로슈케’나 ‘프로슈코마이’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요청이라는 단어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데오마이 : ‘요청하다’‘바라다’라는 뜻인데 하나님이나 사람 등 모두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데에시스 : ‘요구하다’‘요청하다’‘바라다’라는 뜻인데, 이 단어 역시 하나님이나 사람들 모두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엔테우시스 : ‘애원’이라는 뜻으로 지배자 또는 왕에게 청원이나 애원을 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

아이테오 : 구하다. 요청하다. 사람끼리도 당연히 해당되는 단어.

유카리스티아 : ‘감사’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토스’인데 ,‘유’는 ‘좋은’이라는 뜻이고, ‘카리스토스’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감사’로 번역이 되는‘유카리스토스’는 ‘하나님의 좋은 은혜’‘의롭고 선하신 은혜’를 ‘유카리스토스’로 ‘성경적인 감사’라는 뜻이 어떤 감사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온 단어가 기도로 번역이 되는 ‘유카리스티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은 은혜’‘의롭고 선하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좋은 은혜는 삯이 아닌 은혜로 거져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얻는 죄 사함과 이로 인해서 얻는 성령에 의한 거듭남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음으로써 신약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 은혜를 감사하며 드리는 것이 예표적이 아닌, 본체적 의미에서의 기도임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약적 의미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성경적인 기도는 무엇이겠습니까?

​신약적 의미의 본체적 기도는 구약의 예표적인 기도와는 다르게 사람이 사람을 대신하는 중보기도는 인간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딤전 2 : ​5, 6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그러면 사람들은 왜 기도를 하는가?

첫째로 사람들이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시간과 공간에 가두어서 창조를 해서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에 인간은 미래의 일을 알 수 없고 그래서 무엇엔가 또 자신이 원하고 구하는 것들을 기도를 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창조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는 누군가를 향해서 하는 것인데, 기도나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닌, 사단 마귀의 미혹에 빠져서 사단 마귀가 기뻐하는, 생명의 길이 아닌, 사망의 길로 인도하는 내용의 기도를 부지불식 간에 우리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도는 안테나의 방향이 달라지고, 기도하는 대상이 달라지면 기도의 응답이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담 부부나 예수님이 성령에게 이끌려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말씀을 생각하면 분명히 알 것입니다.

 

둘째 기도를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육적 결핍과 영적인 결핍 때문에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은 육적 결핍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은 아주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육의 결핍을 채우려는 기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 세상에 속한 백성들이 하는 기도인 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육적인 결핍을 채워달라고 하는 기도는, 원어적으로 보면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프로슈케’또는‘프로슈코마이’가 아닌, 데오마이, 데에시스, 엔테우시스에 해당하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 6 : 53- 63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래서 어떤 이유로든지 살리는 것에 무익한, 육을 위한 것은 기도가 됐건, 예배가 됐건, 설교가 됐건, 찬양이 됐건, 영광을 돌리는 것이 건 간에 그 어떤 것도, 살리는 것에는 무익한 것이 대상이 되면 안 됩니다.

 

사 29 :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계명과 율법의 마침이 되는 분시신 것을 생각을 하면, 신약적으로 왜 하나님이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시는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원어로 보았을 때, 프로슈코마이와 유카리스티아 기도 두 단어 외에는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한, 자랑할 것은 오직 자신의 연약함과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대속과 성령으로의 거듭남을 생각하면, 신약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원어로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유카리스티아로 인해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프로슈코마이 기도가 되지 않는 것(거져 받은 죄 사함의 은혜와 거듭남의 은혜와 사랑)때문에 예수님이 여기서 벗어나는 기도를 싫어하신다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요 16 : 1-3 ; 6-20

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3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말씀이 길었습니다만, 복음교실은 침례교는 어떻고 감리교는 어떻고 이단들은 어떻고 가톨릭은 어떻고 이런 말 하는 것 아닙니다.

또 예수님은 얼마나 열심히 크게 부르짖는 기도를 하느냐 이런 것이 아니라 네가 진정으로 ‘프로슈코마이와 유카리스티아 기도를 하느냐?’ 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친히 자신이 알려주시는 주의 기도인 것을 예수님은 제자들인 깨닫게 하시려는 기도에 해한 말씀인 알아야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배나 찬송이나 기도나 모든 것은 복음교실이 수없이 반복을 하며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예배, 찬송, 기도가 되어야 하고, 이것은 결국 과연 나는 진정한 주어를 누구로 믿느냐의 문제이고, 따르느냐의 문제로 연결이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주어 문제는 결국 하나님의 속성을 속성대로 모두 빼놓지 않고 믿느냐, 믿지 않는 믿음이냐에 연결이 되고, 이 신앙으로 참 신앙과 짝퉁 신앙이 나누어지는 T형 분기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왕으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에게만 돌린다고 하면서도, 늘 사실은 자신이 주어가 되는, 그런 기도가 되면 안 되는 것을 예수님은 주의 기도를 알려주시기 전 제자들에게 당부로 하신 말씀이 주의 기도에 대한 선행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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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크리스천투데이에서 크리스천이 기도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증상에 관해 소개한 글이 눈길을 끈다.
다음은 우리가 기도의 능력을 간과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 4가지를 소개한다.

1. 진리로 거짓에 맞서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나 계시 그리고 하늘의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해달라고 기도할 때이다.
기도는 의사소통이다.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끊어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진리가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의 능력의 터 위에 확실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의 이름의 능력을 알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다.

2.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

실제로 모든 상황에서 기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분명히 말한다.
우리가 모든 일에 대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매번 당신에게 모든 능력으로 나타나신다.

3. 너무 쉽게 걱정한다.

빌립보서 4장 6절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한다.

기도는 독립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불안에 대한 강력한 대안이다. 걱정할 때 우리는 나 자신, 직장 또는 외부 환경을 신뢰한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선포하는 기도와 간구를 통해 우리는 그분이 완성하신 십자가 사역을 의존하게 된다.

4. 스스로의 대안을 먼저 찾는다.

우리는 항상 기도의 능력을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의 기본값은 계획과 전략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간절하고 신실한 기도에 담을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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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祈禱)

여러분과 나의 생활에서 기도가 없다면 주님과 나 사이가 숨 막히고, 죽어 버린 불모지와도 같을 것입니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있듯이,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있듯이 무의식중에라도, 잠 속에서도 무시로 불러보듯 주님을 향한 우리의 생각을 멈출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언어 없는 침묵의 기도도, 신음도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기도 없이 지나친 적이 없듯 우리의 전 존재가 기도일 것입니다.
때로는 탄식처럼 호소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기뻐서 찬송이 온통 기도일 때가 있고, 죄악을 자백하면서 눈물 흘릴 때도, 간구로 몇 날을 지날 때도 있습니다. 물질적인 필요, 건강의 필요, 가족과 자녀에 관한 문제, 진로, 그리고 민족과 세계를 위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기도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을 위해 생명을 걸고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버림을 받을지라도, 사도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짐을 받더라도, 존 낙스는 죽음이냐 스코틀랜드냐,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결사적인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저절로는 안 되는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구할 때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해 특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경 말씀과 주님을 생각하면서 모든 언어가 정지된 상태에서 전 존재의 문을 다 열고 주 앞에서 기도의 일광욕을 하면 많은 변화를 받고 깊은 은혜에 젖어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함을 받았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중 하나가 기도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하려 함이라”(요 14:13)

테니슨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이냐? 나는 어린아이처럼 이것저것 달라고 조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아이처럼 기도하는 자세, 피조물 의식을 갖고 모든 것을 신뢰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기도의 제목으로 너무 큰 것도, 너무 작은 것도 없습니다. 기독교의 4대 인물은 사도 바울, 어거스틴, 루터, 요한 웨슬레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의 생활 역시 기도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였고, 어거스틴은 기도의 생활 속에 깊은 경건이 있었습니다. 루터는 하루에 3~4시간 동안 기도 속에서 전투를 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퍼드대학에서 홀리 클럽(Holy Club)운동을 벌이면서, 학생 시절과 교수 생활까지 합해서 15년 동안 20여 명의 우수한 학생들을 모아 놓고 매일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기도와 성경 읽는 것을 일과로 삼았습니다.


1727년 독일의 헤른후트라는 곳에서 경건파 지도자들이 모여서 시작한 모라비안 운동은 처음부터 기도를 제일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48명이 24시간 연쇄(連鎖)기도를 시작한 이래로 100년 동안 그 제단에 기도의 불이 꺼진 일이 없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도 이 모라비안의 모임에서 변화를 받아 감리교를 창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100년 동안 불을 끄지 않고 24시간 연쇄기도를 한 단체는 이 모라비안 선교단 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성숙한 크리스천이라도 하나님의 우주 드라마 속에서는 작은 나사못 역할밖에 못합니다.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작은 부분을 완전히 감당해 내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기도는 힘을 생산해 냅니다. 기도는 없는 것을 있게 합니다. 기도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가져오게 합니다. 기도는 사물을 변화시킵니다. 자기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창조력이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이 생겨나고, 터널이 뚫리고, 돌같이 굳은 마음이 살같이 부드러워집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늘 규칙적으로 기도하시고, 밤 새워 기도하시고,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시고, 제자들을 택하시기 전에, 그리고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신 기도의 생활이었습니다. 기도 최우선의 삶을 젊었을 때부터 길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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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도로 말하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내게 말하지 않은 기도는 독백이다. 
공상에 흐르고 만다. 
주님과 만나지기만 하면 결코 밤이 그대로 밤일 수 없다. 
소경은 눈이 잠긴 채로 있을 수 없다. 
죽은 자도 그대로 무덤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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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무엇엔가 얽매이고 쫓기는 삶을 살고 있다. 
고요한 시간, 주님과 나만의 장소, 묵상과 기도와 성경 속에 파묻히는 하루의 30분이 없이 영적 생명이 유지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잠자는 시간을 줄이더라도, 하고 있는 일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려서라도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회복해야 한다. 
여기에 크리스천의 산실(産室)이 있고, 생존의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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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꿈을 심고 가꾸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사람의 생각 속에 꿈을 잉태시킨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임신이 되듯이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던 것을 “나는 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환상과 꿈과 가능성을 심어 주신다. 내게 심어진 꿈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것이 기도의 열매라고 하겠다. 2021년 나의 꿈을 내 가슴에 심고 그 꿈을 기도와 말씀으로 가꾸면서 2021년 마지막 날에 열매가 어떻게 맺혔는지 결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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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祈禱)
마태복음 6:7∼9a


7. 또 기도(프로슈코메노이)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아이테사이=아이테오)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성경 원어로 풀어보는 기도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어떤 것일까?
기도로 하나님에게 생각을 하게하고, 내 기도로 인해 하나님이 하나님의 계획을 별도로 세우거나 바꾸거나 하게 할 수 있는 것인가?
피조물인 사람의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왜 기도를 하나님은 또는 예수님은 하게 하신 것인가? 

여러분은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절대 주권자시며,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이나 생각을 인간이 하는 기도로 바꾸시거나 혹은 인간이 하는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과연 바꿀 수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열심히 기도를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속성을 속성대로 믿는 기도일까요?

아니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왜 자기가 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이 그 때 그 때 바뀌는 것처럼 생각이 돼서 열심히 기도를 하는 믿음이 생기는 것일까요?

지금 기도 자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할 때 누가 주어냐? 즉 누구를 위한 기도냐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 역시 돈 문제로 정말 너무너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정말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정확히 3년 동안 매달을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넘어갈 수 있도록 해주신 예수님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소중한 체험인데요, 그래서 지금도 저는 예수님 경리과장 같은 예수님이라는 말을 농담처럼 곧잘 합니다. 예수님처럼 정말 정확한 분은 없는 것을 저는 너무 잘 압니다. 그리고 많은 목사님들 역시 기도가 만능인 것으로 생각을 하는 목사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기도는 왜 하는가?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가 도대체 무엇인지 아는 것이 기도에 대해 이런 생각을 깊이 하면서 성경 말씀들을 찾아가보면, 기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팔랄
- 간섭하다, 판단하다, 중재하다, 기도하다.

“팔랄”이란 기도는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입니다. 히브리어 단어 해석이 사실은 참 어렵습니다. 히브리어를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 해석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도의 대표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어 “팔랄”은 “간섭하다, 판단하다, 중재하다, 기도하다”는 뜻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외에는 계시지 않는 것을 구약의 기도를 대표하는 “팔랄”이라는 단어에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카라 
- 기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카라”는 기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샤알
- 요구하다 기원하다

“샤알”은 “요구하다, 기원하다”라는 뜻입니다. 

파가
- 중재로서 탄원

“파가”는 “중재로서의 탄원”을 뜻합니다.

“할라”
- 은혜를 구할 때 사용하는 단어

“할라”는 흔히 은혜를 구할 때는 쓰이기도 하는 단어입니다(시편 119:58).

내가 전심으로 주의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I have sought your face with all my heart; be gracious to me according to your promise.    

자아크
-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 구하는 것

“자아크”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부르짖는 것을 말합니다(삿 3:9, 시 22:5).

라난
- “라난”은 “소리치다, 외치다”(시 17:1, 렘 31:12, 애 2:19)

샤와
“샤와”는 “도움을 청해서 부르짖다”

샤하르
“샤하르”는 “구하다”

‘나’는 부드럽고 신중한 요청으로 애원, 소원, 허락 등등

‘린나’는 슬픈 또는 진정성을 담은 느낌으로 외침, 함성, 부르짖음(시 17 : 1)

‘테필라’는 중재, 탄원, 간청, 애원, 기도 또 넓은 의미로는 찬송이나 거룩한 노래로 어근(語根)은 ‘팔랄’에서 온 변형 단어

‘테힌나트’‘간구’로 번역되는 단어로, 불쌍히 여기다(욥 19 : 21)라는 뜻을 지닌 동사‘하난’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외에도 히브리어에서의 기도로 생각할 수 있는 단어들은 많이 있는데, 기도나 간구나 구함 등, 기도에 해당하는 단어로 번역이 될 수 있는 단어들에 대해 살펴본 것처럼, 구약의 모든 단어들은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나 제의(祭儀) 또는 예배, 왕과 백성 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구하거나 애원하거나 청원을 하거나 부르짖는 것 등이 모두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런 단어들이 쓰이는 점에서, 이 역시 구약의 기도는 기도에 대한 예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8:26∼30 

26. 그런즉 이스라엘 하나님이여 원컨대(나) 주는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 확실하게 하옵소서.
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28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테필라트=테필라)와 간구(테힌나트=테힌나)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하린나=린나)과 비(미트팔렐=팔렐)는 기도(핫테필라=테필라)를 들으시옵소서.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핫테필라=테필라)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이템팔렐루=팔랄=그들이 기도하게 될) 때에 주는 그 간구함(테힌나트=테힌나)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길게 솔로몬이 ‘그런즉’으로 기도와 간구를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얼핏 번역 말씀을 보면, 솔로몬이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에게 하나님의 귀한 백성을 위해 다윗의 후손들에게 왕권을 주시며 맡기신다고 말씀을 하셔놓고 왜 이제 와서 하나님이 딴 말씀을 하십니까? 이런 항변의 뜻으로 이런 기도와 간구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 솔로몬은 온 우주보다도 더 큰, 하늘 위의 하늘에 계시는 어마어마한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그 크신 하나님이 하찮은 자신이 짓는 지상에 있는 작은 건물 안에 하나님이 계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런 낮은 마음으로 ‘그런즉’으로 이어지며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와 간구입니다.

이 말씀에서 ‘기도’는 히브리어 ‘테필라트’로 원형이 ‘테필라’인데 어근이 ‘팔랄’입니다. 뜻은 앞에서 말씀을 드린대로 ‘판결하다(삼상 2:25)’, ‘기도하다(삼상 1:21)’라는 뜻과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드리는 중보기도’를 ‘팔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중보기도’를 할 때 ‘팔랄’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한‘테필라’는 의미가‘팔랄’보다 훨씬 더 낮은 자세로 애타게 애원하는 기도를, 솔로몬이 하나님이 아버지인 다윗에게 하신 언약의 말씀을 생각을 하면서 아주 낮은 자세로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가 ‘테필라’기도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간구’는 ‘테힌나트’인데, 뜻은 ‘긍휼이 여기다(단 4:27), 불쌍히 여기다(욥 19:21)라는 뜻을 지닌 동사 ‘하난’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간구’는 자신이 떳떳하게 하나님에게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명사 수 11 : 20)로 탄원(명사 렘 37 : 20)을 간구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시고 제 간구를 들어달라는 뜻이 ‘간구’라는 ‘테힌나트’라는 단어의 뜻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린나’는 ‘외치다(시 78 : 65)’, ‘기뻐하다(시 32 : 11), ’‘부르짖다(애 2 : 19)의 뜻을 가진 ’‘라난’에서 온 명사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이 말씀에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이 왕권을 주실 것을 언약하신 다윗과 그 후손을 포함한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대표하는 중보자로써의 기도를 하나님의 은혜로 불쌍히 여겨서 들어주실 것을 부르짖는 기도와 간구라는 것이 원어 의미의 기도와 간구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은 다윗에게 언약하신 말씀이 아니고, 모세에게 성막 성전을 짓게 하실 때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실 것을 스스로 말씀하신 것을 상고하면서, 29절에서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거하실 곳에 대한 말씀이 계속 나옵니다. 이 말씀에서 이곳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세상을 예표하는 애굽에서 구원을 해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모세에게 짓도록 한 성막 성전인데, 성막성전이기 때문에 이동을 하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덮으시며 하나님이 인도를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화인줄을 알게 하시고 또 자신이 그런 하나님인 것을 하나님의 백성은 알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이런 기도와 간구는 열왕기 상 9절 3절에서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은 이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하나님의 눈이 바라보시는 성전을 향해서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믿고 이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향해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을 계속 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떤가?

 

왕상 9 : 1-9

1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의 무릇 이루기를 원하던 일이 마친 때에

2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3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 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이 말씀에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 구약의 모든 율법이나 계명은 율법이 완성이 되고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신약으로 다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대속으로 인한 죄 사함과 그로 인해서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진리와 복음입니다. 따라서 이 진리와 복음 외에 다른 진리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것이 곧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기복신앙, 율법신앙, 성경 말씀에서 벗어난 신비주의를 생각하면 무슨 말씀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기도에 대한 단어가 훨씬 더 명료해지고 간단해집니다.

 

프로슈케 : ‘프로슈케’는 명사인데, 동사인 ‘프로슈코마이’와 함께 70인 역에서 히브리어 기도를 번역하는 단어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프로슈케’는 명사로는‘요청’이고, ‘프로슈코마이’는 동사로 ‘요청하다’라는 뜻인데, 중요한 것은 ‘프로슈케’나 ‘프로슈코마이’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요청이라는 단어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데오마이 : ‘요청하다’‘바라다’라는 뜻인데 하나님이나 사람 등 모두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데에시스 : ‘요구하다’‘요청하다’‘바라다’라는 뜻인데, 이 단어 역시 하나님이나 사람들 모두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엔테우시스 : ‘애원’이라는 뜻으로 지배자 또는 왕에게 청원이나 애원을 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

아이테오 : 구하다. 요청하다. 사람끼리도 당연히 해당되는 단어.

유카리스티아 : ‘감사’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토스’인데 ,‘유’는 ‘좋은’이라는 뜻이고, ‘카리스토스’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감사’로 번역이 되는‘유카리스토스’는 ‘하나님의 좋은 은혜’‘의롭고 선하신 은혜’를 ‘유카리스토스’로 ‘성경적인 감사’라는 뜻이 어떤 감사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온 단어가 기도로 번역이 되는 ‘유카리스티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은 은혜’‘의롭고 선하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좋은 은혜는 삯이 아닌 은혜로 거져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얻는 죄 사함과 이로 인해서 얻는 성령에 의한 거듭남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음으로써 신약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 은혜를 감사하며 드리는 것이 예표적이 아닌, 본체적 의미에서의 기도임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약적 의미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성경적인 기도는 무엇이겠습니까?

​신약적 의미의 본체적 기도는 구약의 예표적인 기도와는 다르게 사람이 사람을 대신하는 중보기도는 인간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딤전 2 : ​5, 6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그러면 사람들은 왜 기도를 하는가?

첫째로 사람들이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시간과 공간에 가두어서 창조를 해서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에 인간은 미래의 일을 알 수 없고 그래서 무엇엔가 또 자신이 원하고 구하는 것들을 기도를 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창조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는 누군가를 향해서 하는 것인데, 기도나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닌, 사단 마귀의 미혹에 빠져서 사단 마귀가 기뻐하는, 생명의 길이 아닌, 사망의 길로 인도하는 내용의 기도를 부지불식 간에 우리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도는 안테나의 방향이 달라지고, 기도하는 대상이 달라지면 기도의 응답이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담 부부나 예수님이 성령에게 이끌려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말씀을 생각하면 분명히 알 것입니다.

 

둘째 기도를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육적 결핍과 영적인 결핍 때문에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은 육적 결핍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은 아주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육의 결핍을 채우려는 기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 세상에 속한 백성들이 하는 기도인 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육적인 결핍을 채워달라고 하는 기도는, 원어적으로 보면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프로슈케’또는‘프로슈코마이’가 아닌, 데오마이, 데에시스, 엔테우시스에 해당하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 6 : 53- 63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래서 어떤 이유로든지 살리는 것에 무익한, 육을 위한 것은 기도가 됐건, 예배가 됐건, 설교가 됐건, 찬양이 됐건, 영광을 돌리는 것이 건 간에 그 어떤 것도, 살리는 것에는 무익한 것이 대상이 되면 안 됩니다.

 

사 29 :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계명과 율법의 마침이 되는 분시신 것을 생각을 하면, 신약적으로 왜 하나님이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시는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원어로 보았을 때, 프로슈코마이와 유카리스티아 기도 두 단어 외에는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한, 자랑할 것은 오직 자신의 연약함과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대속과 성령으로의 거듭남을 생각하면, 신약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원어로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유카리스티아로 인해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프로슈코마이 기도가 되지 않는 것(거져 받은 죄 사함의 은혜와 거듭남의 은혜와 사랑)때문에 예수님이 여기서 벗어나는 기도를 싫어하신다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요 16 : 1-3 ; 6-20

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3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말씀이 길었습니다만, 복음교실은 침례교는 어떻고 감리교는 어떻고 이단들은 어떻고 가톨릭은 어떻고 이런 말 하는 것 아닙니다.

또 예수님은 얼마나 열심히 크게 부르짖는 기도를 하느냐 이런 것이 아니라 네가 진정으로 ‘프로슈코마이와 유카리스티아 기도를 하느냐?’ 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친히 자신이 알려주시는 주의 기도인 것을 예수님은 제자들인 깨닫게 하시려는 기도에 해한 말씀인 알아야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배나 찬송이나 기도나 모든 것은 복음교실이 수없이 반복을 하며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예배, 찬송, 기도가 되어야 하고, 이것은 결국 과연 나는 진정한 주어를 누구로 믿느냐의 문제이고, 따르느냐의 문제로 연결이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주어 문제는 결국 하나님의 속성을 속성대로 모두 빼놓지 않고 믿느냐, 믿지 않는 믿음이냐에 연결이 되고, 이 신앙으로 참 신앙과 짝퉁 신앙이 나누어지는 T형 분기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왕으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에게만 돌린다고 하면서도, 늘 사실은 자신이 주어가 되는, 그런 기도가 되면 안 되는 것을 예수님은 주의 기도를 알려주시기 전 제자들에게 당부로 하신 말씀이 주의 기도에 대한 선행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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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크리스천투데이에서 크리스천이 기도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증상에 관해 소개한 글이 눈길을 끈다. 다음은 우리가 기도의 능력을 간과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 4가지를 소개한다.

1. 진리로 거짓에 맞서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나 계시 그리고 하늘의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해달라고 기도할 때이다. 기도는 의사소통이다.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끊어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진리가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의 능력의 터 위에 확실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의 이름의 능력을 알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다.

2.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

실제로 모든 상황에서 기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분명히 말한다. 우리가 모든 일에 대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매번 당신에게 모든 능력으로 나타나신다.

3. 너무 쉽게 걱정한다.

빌립보서 4장 6절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한다.

기도는 독립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불안에 대한 강력한 대안이다. 걱정할 때 우리는 나 자신, 직장 또는 외부 환경을 신뢰한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선포하는 기도와 간구를 통해 우리는 그분이 완성하신 십자가 사역을 의존하게 된다.

4. 스스로의 대안을 먼저 찾는다.

우리는 항상 기도의 능력을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의 기본값은 계획과 전략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간절하고 신실한 기도에 담을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99048#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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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祈禱)

여러분과 나의 생활에서 기도가 없다면 주님과 나 사이가 숨 막히고, 죽어 버린 불모지와도 같을 것입니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있듯이,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있듯이 무의식중에라도, 잠 속에서도 무시로 불러보듯 주님을 향한 우리의 생각을 멈출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언어 없는 침묵의 기도도, 신음도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기도 없이 지나친 적이 없듯 우리의 전 존재가 기도일 것입니다.
때로는 탄식처럼 호소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기뻐서 찬송이 온통 기도일 때가 있고, 죄악을 자백하면서 눈물 흘릴 때도, 간구로 몇 날을 지날 때도 있습니다. 물질적인 필요, 건강의 필요, 가족과 자녀에 관한 문제, 진로, 그리고 민족과 세계를 위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기도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을 위해 생명을 걸고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버림을 받을지라도, 사도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짐을 받더라도, 존 낙스는 죽음이냐 스코틀랜드냐,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결사적인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저절로는 안 되는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구할 때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해 특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경 말씀과 주님을 생각하면서 모든 언어가 정지된 상태에서 전 존재의 문을 다 열고 주 앞에서 기도의 일광욕을 하면 많은 변화를 받고 깊은 은혜에 젖어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함을 받았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중 하나가 기도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하려 함이라”(요 14:13)

테니슨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이냐? 나는 어린아이처럼 이것저것 달라고 조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아이처럼 기도하는 자세, 피조물 의식을 갖고 모든 것을 신뢰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기도의 제목으로 너무 큰 것도, 너무 작은 것도 없습니다. 기독교의 4대 인물은 사도 바울, 어거스틴, 루터, 요한 웨슬레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의 생활 역시 기도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였고, 어거스틴은 기도의 생활 속에 깊은 경건이 있었습니다. 루터는 하루에 3~4시간 동안 기도 속에서 전투를 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퍼드대학에서 홀리 클럽(Holy Club)운동을 벌이면서, 학생 시절과 교수 생활까지 합해서 15년 동안 20여 명의 우수한 학생들을 모아 놓고 매일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기도와 성경 읽는 것을 일과로 삼았습니다.


1727년 독일의 헤른후트라는 곳에서 경건파 지도자들이 모여서 시작한 모라비안 운동은 처음부터 기도를 제일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48명이 24시간 연쇄(連鎖)기도를 시작한 이래로 100년 동안 그 제단에 기도의 불이 꺼진 일이 없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도 이 모라비안의 모임에서 변화를 받아 감리교를 창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100년 동안 불을 끄지 않고 24시간 연쇄기도를 한 단체는 이 모라비안 선교단 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성숙한 크리스천이라도 하나님의 우주 드라마 속에서는 작은 나사못 역할밖에 못합니다.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작은 부분을 완전히 감당해 내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기도는 힘을 생산해 냅니다. 기도는 없는 것을 있게 합니다. 기도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가져오게 합니다. 기도는 사물을 변화시킵니다. 자기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창조력이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이 생겨나고, 터널이 뚫리고, 돌같이 굳은 마음이 살같이 부드러워집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늘 규칙적으로 기도하시고, 밤 새워 기도하시고,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시고, 제자들을 택하시기 전에, 그리고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신 기도의 생활이었습니다. 기도 최우선의 삶을 젊었을 때부터 길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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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도로 말하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내게 말하지 않은 기도는 독백이다. 
공상에 흐르고 만다. 
주님과 만나지기만 하면 결코 밤이 그대로 밤일 수 없다. 
소경은 눈이 잠긴 채로 있을 수 없다. 
죽은 자도 그대로 무덤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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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무엇엔가 얽매이고 쫓기는 삶을 살고 있다. 
고요한 시간, 주님과 나만의 장소, 묵상과 기도와 성경 속에 파묻히는 하루의 30분이 없이 영적 생명이 유지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잠자는 시간을 줄이더라도, 하고 있는 일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려서라도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회복해야 한다. 
여기에 크리스천의 산실(産室)이 있고, 생존의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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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꿈을 심고 가꾸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사람의 생각 속에 꿈을 잉태시킨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임신이 되듯이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던 것을 “나는 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환상과 꿈과 가능성을 심어 주신다. 내게 심어진 꿈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것이 기도의 열매라고 하겠다. 2021년 나의 꿈을 내 가슴에 심고 그 꿈을 기도와 말씀으로 가꾸면서 2021년 마지막 날에 열매가 어떻게 맺혔는지 결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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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를  총체적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신문은 범죄백서 같다. 이런 일들은 기도와 금식 외에는 해결되지 않는다. 영적 싸움에 있어서 공중 권세를 잡은 자의 세력을 꺾는 가장 강렬한 힘은 기도다.

구국적 차원에서 기도운동을 전개해야 하겠다. 구국 금식기도는 성서적이다. 블레셋의 굴레에서 미스바의 금식성회, 모압과 암몬의 새일산 연합군 침략 때 여호사밧 왕의 회개금식 선포, 니느웨 성의 삼일 간 회개 금식기도, 하만의 유대인 말살 음모에 대항한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전 유대인들의 삼일 간 금식기도, 요엘서의 금식성회 등 거국적 회개 금식기도가 오늘의 우리에게 국난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는데 본이 될 것 같다.

루터의 기도가 유럽 일천년의 암흑시대에 종교개혁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죤 낙스의 기도가 스코틀랜드를 개혁했다. 허드슨 테일러의 기도가 중국 대륙선교의 길을 개척했다. 리빙스턴의 기도가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에 복음의 길을 열었다. 윌리암 케리의 기도가 인도의 23개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했고, 아도니람 저드슨의 기도가 미얀마 성경을 번역했다. 모라비안 교도의 100년에 걸친 쉼 없는 연쇄기도가 세계 도처에 복음의 문을 열었다.

빅토리아 영국여왕은 왕위 계승을 통고받는 순간 엎드려 기도했다. 64년간의 영국 통치를 성경과 기도로 했다. 영국 역사상 그녀만큼 위대한 왕은 없었다. 중국을 위한 수많은 기도가 지하교인을 낳게 했다. 기도가 동구와 소련의 철의 문을 열게 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공산화되고 북한의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한반도의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던 1976년 12월 나는 19명의 CCC 간사들과 민족을 위한 40일 금식기도를 드렸다. 1980년 3·1절을 앞두고는 거국적으로 40일 간 금식기도 캠페인을 했고, 3·1절 때는 3일 간 3만 명이 산에 가서 금식기도한 일이 있다. 1984년 세계기도성회 때는 연 10만 명이 3일 간 뚝섬에서 금식성회를 했다. 지난 해 연말에는 CCC 대학생 1만 2천명이 여의도 에어돔에 모여 3일 간 금식하며 국난극복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십시일반으로 모은 1억 원의 성금을 어려운 이웃을 돕는 단체에 기증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데 모아진 기도 이상 효과적이고 강렬한 것은 없다. 기도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최대의 원동력이다. 기도는 교회가 가진 도덕적, 영적 부흥, 사회 부흥의 최대 에네르기다. 이 힘이 가동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주님을 위해, 민족의 구원과 통일과 세계 선교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은 기도폭탄을 터뜨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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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공호흡과 기도

흔히들 기도는 호흡과 같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호흡은 누가 가르쳐서 호흡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호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호흡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면 기도하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왜 호흡하는 것을 배워야 할까요?
호흡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호흡이 잘못되어 목숨을 빼앗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목숨을 빼앗는 것은 아니지만 잘못된 호흡은 사람 몸의 기운을 약하게 합니다.

단공호흡법은 말 그대로 ‘단(丹)’을 비우는 호흡법이다. 다음은 변 선생의 설명이다. ‘우리 몸에는 항상 기운이 흐르고 있다. 기(氣)와 혈(血)이다. 혈 흐름의 중심은 심장이며 기 흐름은 단전(丹田)이 주관한다. 단전은 그 작용에 따라 세 곳으로 나눌 수 있다. 생각을 주관하는 상단(머리), 느낌을 주관하는 중단(가슴), 행을 주관하는 하단(아랫배)이다. 일반적으로 단전은 하단을 가리킨다. 단전 기운의 원활한 흐름이 건강한 신체의 기본이 된다. 스트레스 등으로 기가 흐르지 못하고 막히면 몸에 이상이 온다. 호흡법으로 단을 비워 새로운 기를 넣어주면 흐름이 원활해진다.’ 

지난 5월 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경찰의 폭력에 희생된 흑인 조지 플로이드(46) 사건은 플로이드가 경찰이 무릎으로 그의 목을 누르고 있을 때 “나는 숨을 쉴 수 없다!(I can't breath!)”라는 외침이 동영상으로 되면서 각 지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사건으로 발전되었다.


미 전역으로 확산된 시위에서는 플로이드가 숨가쁘게 말했던 “숨 쉴 수 없다”와 더불어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가 단골 문구로 등장한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흑인의 인권 유린을 규탄하는 시위 상황을 알리는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에선 “BLACK LIVES MATTER”가 디폴트처럼 따라붙는다.


호흡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생체 활동 중의 하나입니다. 호흡은 인간에게 필요한 산소를 공급해주고 몸에는 필요치 않은 이산화탄소를 밖으로 배출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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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금식
- 기도와 금식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기도와 금식 사이의 관계는 성경 안에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둘을 연결하는 공통점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도와 금식의 사례에 나타납니다. 구약에서는 기도와 함께 금식하는 것이 실제 또는 예기된 재앙에 직면하여 필요와 의존 의식, 비참한 무력감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도와 금식은 애통과 회개, 깊은 영적 필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 1장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고뇌 때문에 기도하며 금식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의 여러 날의 기도는 눈물과 금식, 그의 백성을 대신하는 죄의 자백, 그리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간청으로 그 특징을 나타냅니다. 그의 걱정이 너무 강하게 나타난 것으로 보아서 그가 기도 중에 먹고 마실 쉼의 시간을 취할 가능성은 거의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임한 황폐함을 알게 된 다니엘도 비슷한 태도를 보입니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단 9:3). 다니엘은 느헤미야처럼 금식하며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범죄 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옵니다”(5절).


구약의 여러 경우에서, 금식은 중보기도와 연관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병든 아이를 놓고 주 앞에서 울며 간절하게 중보기도(삼하 12:21∼22)하면서 금식합니다(삼하 12:16). 에스더는 그녀의 남편인 왕에게 나아갈 계획을 한 후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에게 그녀를 위해 금식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에 4:16). 분명히 금식과 간청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도 기도와 금식이 있지만 회개 및 죄의 자백과 관련되지는 않습니다. 여선지자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눅 2:37) 섬겼습니다. 그녀는 84 세의 나이에 이스라엘의 약속된 구세주를 기다리면서 성전에서 기도와 금식으로 주를 섬겼습니다. 또한 신약 성경에서 안디옥 교회는 성령께서 사울과 바나바에게 주의 사역을 위임하라고 말씀하실 때 예배와 관련해서 금식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도하고 금식하며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환송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례에서 기도와 금식은 주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은총을 구하는 요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식이 동반될 때 주께서 기도에 응답하실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기도와 함께 금식을 하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들의 진실성과 그들이 처한 상황이 매우 중대한 특성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상황이 더욱 심각할수록 금식과 기도는 더욱 적절하여집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어떤 소년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제자들은 이전에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세를 받았지만(마 6:7) 그 소년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왜 자신들은 귀신으로부터 그 아이를 해방시키는데 실패하였는지를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에는 ‘금식’이 추가되어 있습니다(마 17:21). 이 특별한 경우에, 귀신은 예외적으로 악하고 완강했습니다(막 9:21∼22). 예수께서는 고집 센 원수는 똑같이 강하고 확고한 믿음으로 대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기도는 영적 전투를 위해 준비된 무기이며(엡 6:18), 금식은 기도에 집중하고 결단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금식에 대한 신학은 신자들의 우선순위에 대한 신학으로서 신자들은 주님께 나뉘지 않은 집중적인 헌신과 영적 삶에 대한 관심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헌신은 음식과 음료와 같은 정상적이고 좋은 것들로부터 잠시 동안 삼가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와의 중단 없는 교제의 시간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은 것”(히 10:19)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더 나은 것들 중”에 가장 기쁜 것입니다. 기도와 금식은 짐이나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되며 도리어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에 대한 축하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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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를  총체적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신문은 범죄백서 같다. 이런 일들은 기도와 금식 외에는 해결되지 않는다. 영적 싸움에 있어서 공중 권세를 잡은 자의 세력을 꺾는 가장 강렬한 힘은 기도다.

구국적 차원에서 기도운동을 전개해야 하겠다. 구국 금식기도는 성서적이다. 블레셋의 굴레에서 미스바의 금식성회, 모압과 암몬의 새일산 연합군 침략 때 여호사밧 왕의 회개금식 선포, 니느웨 성의 삼일 간 회개 금식기도, 하만의 유대인 말살 음모에 대항한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전 유대인들의 삼일 간 금식기도, 요엘서의 금식성회 등 거국적 회개 금식기도가 오늘의 우리에게 국난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는데 본이 될 것 같다.

루터의 기도가 유럽 일천년의 암흑시대에 종교개혁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죤 낙스의 기도가 스코틀랜드를 개혁했다. 허드슨 테일러의 기도가 중국 대륙선교의 길을 개척했다. 리빙스턴의 기도가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에 복음의 길을 열었다. 윌리암 케리의 기도가 인도의 23개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했고, 아도니람 저드슨의 기도가 미얀마 성경을 번역했다. 모라비안 교도의 100년에 걸친 쉼 없는 연쇄기도가 세계 도처에 복음의 문을 열었다.

빅토리아 영국여왕은 왕위 계승을 통고받는 순간 엎드려 기도했다. 64년간의 영국 통치를 성경과 기도로 했다. 영국 역사상 그녀만큼 위대한 왕은 없었다. 중국을 위한 수많은 기도가 지하교인을 낳게 했다. 기도가 동구와 소련의 철의 문을 열게 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공산화되고 북한의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한반도의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던 1976년 12월 나는 19명의 CCC 간사들과 민족을 위한 40일 금식기도를 드렸다. 1980년 3·1절을 앞두고는 거국적으로 40일 간 금식기도 캠페인을 했고, 3·1절 때는 3일 간 3만 명이 산에 가서 금식기도한 일이 있다. 1984년 세계기도성회 때는 연 10만 명이 3일 간 뚝섬에서 금식성회를 했다. 지난 해 연말에는 CCC 대학생 1만 2천명이 여의도 에어돔에 모여 3일 간 금식하며 국난극복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십시일반으로 모은 1억 원의 성금을 어려운 이웃을 돕는 단체에 기증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데 모아진 기도 이상 효과적이고 강렬한 것은 없다. 기도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최대의 원동력이다. 기도는 교회가 가진 도덕적, 영적 부흥, 사회 부흥의 최대 에네르기다. 이 힘이 가동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주님을 위해, 민족의 구원과 통일과 세계 선교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은 기도폭탄을 터뜨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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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공호흡과 기도

흔히들 기도는 호흡과 같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호흡은 누가 가르쳐서 호흡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호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호흡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면 기도하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왜 호흡하는 것을 배워야 할까요?
호흡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호흡이 잘못되어 목숨을 빼앗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목숨을 빼앗는 것은 아니지만 잘못된 호흡은 사람 몸의 기운을 약하게 합니다.

단공호흡법은 말 그대로 ‘단(丹)’을 비우는 호흡법이다. 다음은 변 선생의 설명이다. ‘우리 몸에는 항상 기운이 흐르고 있다. 기(氣)와 혈(血)이다. 혈 흐름의 중심은 심장이며 기 흐름은 단전(丹田)이 주관한다. 단전은 그 작용에 따라 세 곳으로 나눌 수 있다. 생각을 주관하는 상단(머리), 느낌을 주관하는 중단(가슴), 행을 주관하는 하단(아랫배)이다. 일반적으로 단전은 하단을 가리킨다. 단전 기운의 원활한 흐름이 건강한 신체의 기본이 된다. 스트레스 등으로 기가 흐르지 못하고 막히면 몸에 이상이 온다. 호흡법으로 단을 비워 새로운 기를 넣어주면 흐름이 원활해진다.’ 

지난 5월 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경찰의 폭력에 희생된 흑인 조지 플로이드(46) 사건은 플로이드가 경찰이 무릎으로 그의 목을 누르고 있을 때 “나는 숨을 쉴 수 없다!(I can't breath!)”라는 외침이 동영상으로 되면서 각 지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사건으로 발전되었다.


미 전역으로 확산된 시위에서는 플로이드가 숨가쁘게 말했던 “숨 쉴 수 없다”와 더불어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가 단골 문구로 등장한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흑인의 인권 유린을 규탄하는 시위 상황을 알리는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에선 “BLACK LIVES MATTER”가 디폴트처럼 따라붙는다.


호흡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생체 활동 중의 하나입니다. 호흡은 인간에게 필요한 산소를 공급해주고 몸에는 필요치 않은 이산화탄소를 밖으로 배출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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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지 뮬러(George Muller, 1805-1898)
프러시아 크로펜스타트(Kroppenstaedt)에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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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동기 다섯 가지
- 기도는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1. 순수한 마음
 - 고아들을 사랑하는 마음

2.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마음
 - 주님 생각에 가장 좋은 것으로 하여 주옵소서!
   (나의 생각이 아니다)

3. 정직한 마음
 -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직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허물이 있어도 정직한 삶의 바탕 즉 잘못을 변명하거나 합리롸 하지 않는 것)

4. 말씀의 묵상
 -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편 81:10)
 -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시편 68:5)

5.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
 - 나의 기도와 삶을 통하여 얼마나 하나님을 잘 나타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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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가장 친밀한 방법 중 하나이다.
기도할 때 우리의 감정, 생각, 깊은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감사한 것을 하나님께 공유하게 된다.
또한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바를 듣고 성령께서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도록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도의 한 가지 매력적인 특징은 세상의 아무도 똑같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 기독교 사이트 바이블스터디툴즈( Biblestudytools)는 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10가지 종류를 소개했다.

1. 경배의 기도(시편 148:13)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찌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심이로다"

이런 종류의 기도는 깊은 사랑, 존경, 그리고 감사함으로 주님께 경배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주님이 누구시고 하시는 모든 것에 대한 경외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2. 감사의 기도(역대상 16:33-34)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여 만국 가운데서 건져 내시고 모으시사 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할찌어다"

어떤 이들에게는 매일 감사 기도로 시작하는 것이 그들이 생활 습관이다.
감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시고 자비로운 분인지에 대한 인식이자 우리에게 주신 새 생명에 대한 감격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다.

3. 고백의 기도(시편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우리 죄를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 따르는 크리스천으로 기도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죄에 대한 고백 기도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신다는 점을 많이 확인할 수 있다.

4. 서약의 기도(사무엘상 1:10-11)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약속은 하나님의 힘과 인도,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기도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불경건한 생활을 하지 말 것을 맹세할 것이다.
여기 한나의 서원에서 보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그것은 큰 사려와 확신을 가지고 해야 한다.

5. 조용한 성찰의 기도(시편 63: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침묵의 기도는 우리를 말로 가득 찬 기도에서 벗어나 조용히 성찰하고 반성할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한다.
이러한 기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묵상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배우고 그 분이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게 하는 것이다.

6. 치유를 위한 기도(시편 119:25)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I am laid low in the dust; preserve my life according to your word.

이 기도는 보통 우리가 육체적, 정신적, 또는 감정적 상처를 회복하려고 할 때 나온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육체적으로 변등이들을 치료하시는 것이었다.
성경은 우리가 모든 종류의 병들로부터 치유될 것을 구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7. 구원과 도움을 위한 기도(시편 107:6)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Then they cried out to the LORD in their trouble, and he delivered them from their distress.

우리가 도전, 고난 또는 어떠한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이를 위한 돌파구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8. 중보의 기도(골로새서 1:9-12)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For this reason, since the day we heard about you, we have not stopped praying for you and asking God to fill you with the knowledge of his will through all spiritual wisdom and understanding.
And we pray this in order that you may live a life worthy of the Lord and may please him in every way: bearing fruit in every good work, growing in the knowledge of God,
being strengthened with all power according to his glorious might so that you may have great endurance and patience, and joyfully
giving thanks to the Father, who has qualified you to share in the inheritance of the saints in the kingdom of light.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중재할 것을 말한다.

예로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기 전 마지막 시간 동안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음을 알고 있다.

9. 변화를 위한 기도(시편 139:23-24)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Search me, O God, and know my heart; test me and know my anxious thoughts.
See if there is any offensive way in me, and lead me in the way everlasting.

이러한 삶의 종류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처럼 살고, 그 길을 따라 행하고, 거룩해지는 과정에 들어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10. 축복의 기도(빌립보서 1:9-11)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And this is my prayer: that your love may abound more and more in knowledge and depth of insight,
so that you may be able to discern what is best and may be pure and blameless until the day of Christ.
filled with the fruit of righteousness that comes through Jesus Christ--to the glory and praise of God.

축복의 기도는 종종 선교사들, 다른 곳으로 떠나는 교인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 등을 위해 행해진다.
이러한 축복의 기도는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으며,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는 강력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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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규례가 아닌 진정으로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4)

기도는 어떤 형식적인 절차를 거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외우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기도는 말을 따라 하거나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 하나님과 마음을 나눔으로써 감동받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치레 행위를 기뻐하시지 않고 입으로만 가까이하는 것을 열납하지 않으시며 신령과 진정으로 기도하고 경배하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진실한 기도를 해 봤던 사람이라면 경험했을 것입니다.
예배할 때 혹은 큐티할 때 혹은 어떤 일이 생길 때 마음을 평온히 하고 전념해서 성실하게 하나님께 기도드리면 감동받고 평안과 기쁨을 느낍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에 신령으로 기도해 하나님과 가까이하기는커녕 규례를 지키고 형식적으로 몇 마디 하는 등 진심 어린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무심한 기도가 어찌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예컨대, 새벽(밤) 기도, 식전(식후) 기도 등은 오랫동안 규례적인 행위가 되어 형식적으로 하지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가끔은 하나님께 기도할 내용이 없으면서도 신앙인으로서 의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 말이나 중얼거립니다.
이러한 기도는 형식적인 것인데 하나님이 들어주실까요?
결코 들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규례를 지키는 무심한 기도는 듣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드리는 기도만이 하나님께 상달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을 평온히 하기를 중요시해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2.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0~14)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주님은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고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염증을 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입에 발린 말이고 자신의 공로와 좋은 행위를 자랑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상을 받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리는 자신이 죄인이므로 하나님 앞에 천한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세리는 기도할 때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터놓고 자신의 패괴를 인정하며 하나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해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세리와 같은 겸허한 마음을 갖췄나요?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늘 외식하며 자기 자랑을 합니다. 예컨대, 다른 사람이 기도를 길게 했을 때,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적지만 우습게 보일까 봐 반복적으로 말을 해서 기도 시간을 늘립니다. 일부러 많은 성경 구절을 외운다거나 듣기 좋은 말을 해서 돋보이려고 합니다. 열심히 사역해서 성과를 거두면 스스로를 주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는 자로 여기며 기도로 축복과 면류관을 요구하고 천국에 들어가 상을 받으려 합니다. 이렇듯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실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하려면 세리를 본받아 어떤 일이 임하든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실제 정형을 털어놓아야 합니다. 거짓과 꾸밈이 없고 외식하지 않으며, 어떤 패괴를 유로했든지 하나님께 고하며 구원해 달라고 빌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확한 기도법이고 이렇게 기도해야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3. 이성적으로 피조물의 위치에서 기도하라

성경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겟세마네라는 곳에서 세 번 기도했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마 26:39~44)

예수님은 구하는 마음, 순종의 자세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구하였지 하늘 아버지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피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거나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의 기도를 마친 후 예수님은 천부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성육신하게 된 이유는 인류를 십자가에서 구원하는 사역을 하기 위함이었기에 예수님은 완전히 순종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자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나 피조물의 위치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드리며 그의 뜻을 구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이성적으로 기도하고, 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어 피조물의 각도에서 기도함으로 우리의 모델이 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반성해 보면 우리는 이성적인 기도를 했을까요? 피조물의 위치에서 하나님께 구하고 순종하는 기도를 한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비이성적인 기도를 드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뜻대로 이렇게 저렇게 해 주세요 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께 강요합니다. 예컨대, 몸이 아플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보다 우리의 병을 고쳐 달라는 기도를 하기에 바쁩니다. 병에 호전이 없으면 하나님을 오해하고 불평하지요. 하나님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 좀 있고 헌신하거나 본분을 조금 하게 되면 우리가 평안하고 모든 것이 순조롭도록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고, 심지어는 가족들의 복까지 구합니다. 또 핍박과 환난이 임했을 때 하나님의 보호를 구하며 그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구하는 등 이러한 기도는 다 비이성적인 것입니다. 구하는 자세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드린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의 욕망을 채워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고 우리의 뜻대로 해 주십사 강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비이성적인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는 진실한 기도가 아주 적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기도할 줄 모른다. 사실 기도는 주로 마음속의 말을 하는 것인데, 평소에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기만 하면 위치를 잘못 선다. 하나님의 뜻에 맞든 맞지 않든, 하나님께 베풀어 달라고 억지로 구하는데, 그 결과 기도하면 할수록 무미건조해진다. 기도할 때 네가 마음속으로 어떤 것을 구하든, 어떤 것을 사모하든, 어떤 것을 얻으려고 요구하든, 혹은 어떤 일을 처리하려고 할 때 꿰뚫어 볼 수 없어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하든, 힘을 더해 달라고 하든, 혹은 하나님께 깨우쳐 달라고 하든, 이런 말하는 방식에도 *이지가 있어야 한다. 만약 네가 이지 없이 무릎 꿇자마자 “하나님, 저에게 힘을 더해 주십시오. 제 본성을 보게 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해 주십시오. 혹은 저에게 무엇 무엇을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어떻게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이 ‘주십시오’ 안에 강박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반드시 그렇게 해 주어야 한다고 압력을 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네가 스스로 사전에 다 정해 놓은 것이다. 네가 비록 그렇게 기도할지라도 성령은 그런 기도에 대해 ‘네가 이미 스스로 정해 놓고 그렇게 하려고 한 이상, 그런 기도가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라고 여긴다. 기도할 때에는 마땅히 찾고 구하고 순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너에게 일이 임할 때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면 너는 이렇게 말하여라. “하나님, 저에게 이런 일이 임했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일에서 당신을 만족게 하기를 원하고, 당신의 뜻을 찾고 구하기를 원하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저의 뜻대로 하지 않고 당신의 뜻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뜻은 다 당신의 뜻을 어기는 것이고, 당신을 대적하는 것이고,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것임을 당신께서 아십니다. 저를 깨우쳐 주시고, 이 일에서 인도해 주셔서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런 어조의 기도는 적합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하려면 이성을 갖춰 기도해야 합니다. 피조물의 위치에서 기도하며 자신의 선택과 요구와 계획이 없이 하나님께 구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가령 천재지변이나 인재로 인한 사고 등의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났을 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자기가 원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보호를 강요하며, 그런 고난을 옮겨 달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을 마련해 주신 뜻이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고 온전케 하시기 위함이거나 우리의 증언을 보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순종하는 자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한 자세로 기도해야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고, 우리가 기도하는 문제를 알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시고, 나아갈 방향을 가리켜 주실 것입니다.

4. 개인을 위한 기도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9~13)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바람은 하나님 당신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사탄에 의해 패괴된 후로, 하나님은 계속 구원 사역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진정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를 얻기 바라시며, 그리스도의 나라가 땅에 펼쳐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또한 자기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취지가 담긴 기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취지가 담긴 기도, 하나님께서 더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도록 힘쓰는 기도, 그리스도의 나라가 땅에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한 기도가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입니다.

성경에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의 소원은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여호와의 성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다윗은 항상 그 소원을 가지고 간구하며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기뻐해 다윗을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라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잘 다스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잘 예배할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제사와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지혜만 주신 것이 아니라 솔로몬이 구하지 않은 장수와 부귀영화까지 더해 주셨습니다. 욥은 언제나 악에서 떠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큰 시련 속에서도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1:21), “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백으로 사탄을 부끄럽게 하고, 하나님 편에 서서 울림 있는 증거를 보이며 후세들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 진리를 실천하기 위해 드리는 기도가 가장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이며, 반드시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드리는 기도를 살펴보면, 대부분 육의 욕심을 위한 기도일 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가 별로 없습니다. 예를 들면, 자녀의 대학 진학을 위한 기도,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간구하는 기도를 비롯해 전부 개인의 이익을 구하는 기도이자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기도가 태반입니다. 계속 하나님께 손 내밀며 축복과 은혜를 갈취하려고만 할 뿐,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기도를 드리는 경우가 없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기도를 드리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한 기도여야 합니다.
예를 들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히거나 뒷걸음치게 될 때, 하나님께 힘을 더해 달라고 간구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전파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간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 설교하거나 사역을 할 때면, 항상 책임감으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고,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길로 이끌 수 있게 성령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간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늘 이런 문제를 놓고 기도한다면,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와 빛 비춤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네 가지 기도법의 실행 원칙에 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도에 관한 올바른 실천 원칙을 파악하면, 기도가 어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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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Amen)

05-15-2022(주일)

아멘의 어원(語源) : 아만
아만의 의미 :
어떤 대상을 '지지하다' 혹은 '신임하다

여기서부터 이 말은 기도나 찬양 및 선언이 종결되어지는 종지부나 끝맺음에서 '진실로 그렇습니다' 또는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
'라는 동의나 소원의 뜻을 가진 '아멘'으로 발전되었다.

'아멘'이란 말은 단순한 종결(終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곧 어떤 선포나 찬양 그리고 기도 등을 지지하거나 확인 또는 시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나의 삶 속에 적용시키겠다는 결단의 의지(意志)까지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한편 신약 시대에 '아멘'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강조 용법('진실로 진실로'란 말은 헬라어로 '아멘 아멘'이다)으로 자주 사용되었고, 바울 사도에 의해서는 축복과 찬양(Doxology)의 결미어(結尾語)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계시록 서신에서 이 말을 인격화시켜 존재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하였다(계 3:14).
이 모든 배경하에서 '아멘'을 복창(復唱)하던 일은 유대인들의 습관이 되어 왔으며, 또한 그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기독교 공동체에 전달되어져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05-08-2022

Grhard Tersteegen(게르하르트 터스티겐) 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은혜로운 임재를

우리 안에 새롭게 일깨워 주십시오

그리하여 인생의 순례 길을 가는 동안

우리 안에 평화와 진실함과 용기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당신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당신을 굳세게 붙들게 하시고

당신에 대한 사랑이 식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당신과 연합된 우리의 마음이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하는 무슨 일에든지

항상 이어지게 해 주십시오


우리에게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마음속에서 들리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게 해주시고

당신께서 주시는 경고를 묵살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보십시오.

우리의 가난한 마음을

당신께 제물로 드립니다.

오서서 당신의 지성소를 채워 주시고

그곳에 더러운 것이 들어가지 못하게 지켜주십시오


오 사랑의 주님,

당신의 거룩한 영이 우리의 모든 영혼 속에 강같이 흐르게 하시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까지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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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7:11-26


11 모세가 당일에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이른 후, 그곳 세겜 땅 북쪽에 있는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반드시 이행하여야 할 '축복과 저주의 의식'을 언급한 부분이다. 이 의식은 이스라엘 12지파가 각기 6지파씩 양편 산에 갈라서서 축복과 저주를 각기 선포하는 의식인데, 여호수아 8:30-35에서 그대로 실행되었다.

한편,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왜 축복과 저주의 산으로 각각 선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2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산에 서고

ㅇ요단을 건넌 후에 - 2, 3, 4절에 이어 본장에서 벌써 네번째 언급되고 있는 구절이다. 이는 그만큼 요단(Jordan)을 건너는 일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임을 시사해준다.

ㅇ시므온과...베냐민 - 모두 야곱의 정부인(正婦人)인 레아와 라헬에게서 태어난 후손이다(창 29:31-30:24;35:16-18). 그러나 그중 레아의 막내 아들인 스불론의 지파와 서모(庶母) 빌하를 범하였던 장자 르우벤(창 35:22)의 지파는 여기서 제외되었다.

ㅇ축복하기 위하여 - 야곱의 정부인에게서 난 아들들이 이처럼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에 대하여 카일(Keil)은 '적자(嫡子)가 서자(庶子)보다 신분이 높고, 축복이 저주보다 품격이 높은 만큼 적자가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평하였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433).

ㅇ그리심 산 - 사마리아 성읍 부근에 위치한 오늘날의 '예벨 엣 투르'(Jebel et Tur)이다. 남북으로 에발 산과 마주보고 있는데, 특별히 그리심 산(Mt. Gerizim)이 축복을 선포하는 산으로 선택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3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고

ㅇ르우벤...납달리 -

전술한 것처럼 르우벤과 스불론 외에는 모두 야곱의 첩이었던 빌하와 실바의  후손이다(창 29:31-30:34). 르우벤과 스불론이 여기에 속하게 된 이유는 아마 르우벤은 서모 간통 사건으로  인한 장자권 박탈 때문이었을 것이고(창 35:22; 49:4; 대상 5:1), 스불론은 레아의 막내 아들이었기 때문(창 35:23)이었을 것이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ㅇ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

혹자들은 그리심 산에 선 지파들을 축복받은 지파들로, 에발 산에 선 지파들을 저주받은 지파들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단정
은 무리이다. 왜냐하면 에발 산에 서게 될 지파들 중에도 단, 아셀, 납달리 지파처럼 야곱의 축복을 받은 지파들이 있으며 그리심 산에 서게  된 지파들 중에도 시므온, 레위와 같이 야곱의 저주를 받은 지파도 있기 때문이다(창 49:1-27).

따라서 축복의 산에 오른 자들은 율법에 순종하는 자들을, 저주의 산에 오른 자들은 율법을 거역하는 자들을 각기 상징할 뿐으로 이해함이 좋다. 한편 에발 산(Mt. Ebal)이 특별히 저주를 선포하는 장소로 선택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4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ㅇ레위 사람 - 여기서는 레위 지파에 속한 모든 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언약궤
를 메고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의 중앙 부분에 서서 모세의 말을 전달받아 양편에 갈
라 서 있는 백성들에게 큰소리로 외칠 '레위 제사장'(9절;수 8:33)을 가리킨다
(Delitzsch, Lange, Alexander, Wycliffe)
ㅇ큰 소리로...이르기를 - 혹자들은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서 외치는 사람의 목
소리가 양편 산 중턱에 운집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들릴 수 있었겠는가라는
점에 의문을 표시한다. 그러나 성서 고고학자들에 의한 정밀 조사 결과 양쪽 산의 음
향 효과가 매우 훌륭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또 여러 차례의 실험 결과 여러 사람이
외칠경우 충분히 들려진다는 사실도 입증되었다(Stanley, Syria & Palestine;
Tristram, Land of Israel ;Hastings, Bonar, E.G. Kraeling).

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찌니라

ㅇ장색 -

각양 물건을 정교하게 만드는 기술자(craftsman)를 가리킨다. 당시 이들은 우상을 만들어 파는 일로 많은 이익을 보곤 하였다(행 19:24).

ㅇ가증하니 - 23:18 주석 참조.

ㅇ은밀히 세우는 자 -

십계명 중 제 2계명(5:8-10;출 20:4-6)을 은밀히 범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은밀히'에 해당하는 원어 '바사테르'는 '은밀
한 장소에'(KJV, in a secret place)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은밀한 장소'로 꼽을 만한 곳은 어디이겠는가? 물론 눈에 잘 안 띄는 골방이나 비밀 장소를 들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곳으로는 역시 사람의 마음 속을 꼽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보다 더 큰 비중으로 자기 마음 속에 은밀하게 품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 숭배이다.

ㅇ모든 백성은...아멘 할지니라 -

'아멘'(amen)이란 말은 본래 '확실하다', '신실하다'는 뜻의 '아만'에서 유래한 단어로 문장이나 대화의 끝에서 사용될 때 '과연 그렇습니다',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경홀히 여기는(칼라) -

원뜻은 '가볍다'로, 곧 상대방을 업신여기거나 비천히 여기는 것(잠 12:9), 절하(切下) 평가하거나 모독을 주는 것(사 16:14), 그리고 지독히 경멸하는 것 따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부모를 이처럼 업신여기는 것은 곧 자신의 근본(根本)을 망각한 행동일 뿐 아니라, 급기야는 부모를 통해 그 생명을 부여하신 하나님을 경홀히 하는 짓거리이다(21:18).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고 권면하였다. 출 20:12 주석 참조.

ㅇ저주를 받을 것이라(아루르) -

기본형은 '아라르'로 '버림을 받다'란 뜻이다. 즉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한다면, 버림을 받는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자신임을 잘 증거해 준다(Calvin).

17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 '여기서 지계표'(地界標;KJV,landmark;NIV,
boundary stone)란 땅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세운 돌이나 푯말을뜻한다(창 31:51,
52). 따라서 이러한 지계표를 마음대로 옮기거나 없애 버리는 것은 타인의 재산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 행위이다. 한편 성경 뿐 아니라 고대 바빌로니아의 법도 지계표를
침해하는 행위를 큰범법 행위로  규정하고  매우 엄격하게 다스렸다.19:14 주석 참조.

18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

고대 근동에는 여러 가지 환경적 요인과 풍토(風土)로 인하여 의외로 소경이 많았다.
즉 고온 건조한 기후와 쉴 새 없이 이는 먼지, 그리고 비위생적인 생활 환경 및 가난으로 인한 영양 실조 등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실명(失明)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로부터 이러한 소경을 일부러 괴롭히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따라서 본절이 의미하려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영역본 Living Bible은 본절을 '소경을 이용하여 그 이(利)를 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Cursed is he who takes advantage of a blind man)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이웃을 하나님의 계명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유혹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영적으로 해석하였다. 아뭏든 이는 보다 광범위한 의미로, 장애자의 약점을 이용하여 불의한 이(利)를 취하거나 또 는 그들을 괴롭히며 실족케 하는 일 따위를 엄격히 금하고 있는 조항임에는 틀림없다(레 19:14;롬 15:1). 실로 율법은 그러한 약자들의 약점을 악용하는 죄악에 대해서는 보다 혹독한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레 19:14 주석 참조.

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객이나 고아나 과부 -

가난하며 약한자, 그리고 억눌리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을 대표하는 구약 시대의 3대 약자들이다(14:29;16:11, 14;24:21;26:12, 13).

ㅇ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 

여기서  '억울케  하다'에  해당하는 '나타'는 '비틀다', '굽게 하다', '벗어나게 하다'는 뜻으로,
정당한 판결을 내리지 아니하고 힘 있는 자를 두호(斗護)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서는 이미 24:17에서도 엄금했던 바, 실로 하나님께서는 '공법(公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河水)같이' 흘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암5:24)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 계모와 구합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계모와 구합하는 자 -

'구합하다'에 해당하는 '솨카브'는 성(性) 관계를 갖기 위해  '잠자리를 같이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계모'에 해당하는 '에쉐트 아비'는 '아버지의 여자'란 뜻이다.
따라서 비단 이는 계모 뿐 아니라 아버지의 첩과도 성 행위를 하는 것을 포함한다.

ㅇ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

영역본 RSV는 이를 '아버지의 여자를 벌거벗겼으니'로, NIV는 '아버지의 침소를 더럽혔으니'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Living Bible은 '그녀는 그의 아버지에게 속하였으니'로 번역하고 있으며, 공동 번역은 '아비의 이불자락을 들치고'로 의역하고 있다. 아뭏든 이처럼 아버지의 침소, 아버지의 여자를 넘보는 행위는 인간의 기본 윤리를 저버리는 패역(悖逆)이니, 저주를 면할 길 없다(22:30). 레 18:8 주석참조.

21 무릇 짐승과 교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짐승과 교합하는 자 -

동성애, 근친 상관 등과 더불어 변태적인 성 행위 중의 하나인 수간(獸姦)을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수간자(獸姦者)는 근친 상간자 및 남색자(男色者)와 더불어 땅을 더럽히는 추악한 성범죄자로서 아스라엘 사회에서 반드시 제거되어야 했다(출 22:19;레 20:15, 16).
성경은 결코 생리적인 성적 욕망이나 충동을 죄악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性)의 창조자로서 하나님께서는 성을 인간들이 누릴 수 있는 지극한 기쁨으로 간주하셨다(잠 5:18; 전 9:9; 요 3:29).
이것은 창조시 아담의 독처(獨處)를 좋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한 여자 하와를 창조하여 준 사실(창 2:18, 22)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바로 이 남녀 창조 사건에서도 분명히 예시되었듯이 남녀간의 성적 욕망은 일부 일처의 신성한 결혼 제도에 의해서만 충족되어야 한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요 비밀이었다.

여기서 '비밀'이라고 한 것은 훗날 사도 바울이 설파했듯이 신랑과 신부의 한몸 되는 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순결한 일체성'을 상징하고 또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22:13-30; 엡 5:31, 32).
따라서 하나님의 신성한 창조 질서가 반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오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 내포되어 있는 일부 일처의 결혼 제도를 떠난 모든 성(性) 남용은, 더욱이 수간, 근친 상간, 동성애(同性愛) 등 타락한 인간의 어그러진 심성(心性)에 기인하고 있는(롬 1:26, 27) 모든 변태적(變態的)인 성행위는 단순한 도덕적 범죄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죄에까지 이르는 추악한 성범죄 행위인 것이다.

특히 고대 이방의 문란하고 타락한 제사 의식이나 설화 등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수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엄한 인간의 가치를 하등 동물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극악한 소행이므로 거룩한 공동체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결단코 용납될 수 없었다.  따라서 성경은 일관성 있게 이러한 모든 성범죄를 보다 엄격히, 그리고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는 성(性)의 타락으로 인해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가나안 족속의 멸절 그리고 로마의 패망 등을 거울삼아 성(性)개방 풍조로 인해 성(性)을 가볍게 취급하거나 심지어 상품화시키는 타락한 세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빛된 자녀답게 고결하고 아름다운 성(性) 윤리관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레 18:23; 20:15, 16 주석 참조).

22 그 자매 곧 그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과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23 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자매...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

누이는 항렬상 자기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자이다.
따라서 그러한 누이를 범하는 것은 우생학적(優生學的) 폐단은 차치하고라도, 곧 자기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는 짓이나 마찬가지 행위이므로 저주를 면할 길 없다. 레 18:9
주석 참조.

ㅇ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

성경은 자신의 장모와 성 관계를 갖는  파렴치한에 대하여서는 그들 모두를 반드시 화형(火刑)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레 18:17;20:14 주석 참조.

24 그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

과실치사(過失致死)가 아닌 한, 그 어떠한 살인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  결코 정당시킬 수 없다. 특히 암살(暗殺) 행위는 더욱 그러한
데,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상대방이 미처 방어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기습하는 도발 행위이기 때문이다. 죄를 은폐하려는 의도하에서 저지르는 계획적 살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출 20:13;민 35:16-21 주석 참조.

25 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

살인의 대가로 뇌물을 받는 행위는 곧 인간의 값어치를 추잡한 뇌물보다도 낮게 취급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비록 사람의 눈을 피해 그같은 죄를 자행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결국 하나님의 공의의 눈은 피할 수 없기에 저주를 면할 길 없다. 출 23:7, 8 주석 참조.

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

사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자란 아무도 없다(롬 3:10).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출애굽의 영웅 모세도, 그리고 성군(聖君) 다윗도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던 죄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짐짓 범죄치 아니하려고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율법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라 하겠다<창 6:9>.





기도(祈禱)

자료 / 예수님의 중보기도 / 워렌 위어스비 지음, 조은주 역. 은성출판사

01-9-2022(제2주)

허버트 록키어(Herbert Lockyer. 영국 1886-미국 1984)박사는 "성경에는 650편의 기도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곧 기도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국 침례교회 목사이었던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 6. 19-1892. 1. 3)은 "진정한 기도는 길이가 아니라 무게에 의해서 측정됩니다."라고 합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일생동안 예수를 믿으며 수 많은 기도를 했을 때 그 모든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만일 하늘에 상달되지 않는 기도를 했다면 무게가 없는 기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요한복음 17장)
17:1-5, 예수께서 자신을 위해 기도하시다
17:6-19,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다
  제자들의 안전(17:6-12)
  제자들의 거룩(17:13-19)
17:20-26, 예수께서 전체 교회를 위해 기도하시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드린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라고 정의합니다.
제사장의 기도를 다른 말로 "왕의 기도"라고도 합니다.

제사장으로서의 기도가 위대한 네 가지 이유를 소개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이므로 위대하다
둘째, 기도를 요구한 상황 때문에 위대하다
셋째, 기도에 있는 간구 때문에 위대하다
넷째, 승리 때문에 위대하다


01-16-2022(제3주)

잔느 귀용(Jeanne Guyon, 1648~1717)의 작품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하기(The Simplicity of Prayer)"에서 "기도는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에게 집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기도는 사탄이 침입 할 수 없는 요새입니다.
사탄은 그 요새 주위를 포위하고 공격하며 소란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기도에 집중할 때 사탄은 절대로 해칠 수 없습니다.
요즈음 어떤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의 기도의 자리를 점검해야 합니다.
혹시 나의 기도의 자리가 흔들려서 사탄이 공격할 수 있는 틈을 만들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디모데전서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For it is sanctifi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2022년 제3주간을 시작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앞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은총의 한 주간이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01-23-2022(제4주)

요한복음 17장을 '왕의 기도' 또는 '예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라고 합니다.
왕의 기도로서 첫번째는 하나님의 아들의 기도라는 것 때문에 위대한 기도라고 합니다.

첫째, 성부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셨다(17:3, 18, 21, 25)
선지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으셨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셨다.

둘째, 성부 하나님의 것은 나의 것(17:8, 16:28)
성도는 나의 모든 것이 아버지의 것이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것은 나의 것이라고 한다(17:10).

셋째, 성부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17:11-12)

예수님의 기도는 그 분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거한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 내 하나님께로 올라가신다고 하셨다(요 20:17)

01-30-2022(제5주)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
Prayer is the breathing of the soul.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기도가 없으면 영혼이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육체는 호흡이 없으면 곧 죽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시작해야 한다(로마서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합니다.
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려면 영을 받아야 합니다.
영을 받는 것을 "성령을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기도하려면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사도행전 19:2)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02-06-2022(제6주)


기도하다(요 17:9, 15, 29)는 뜻의 "비옵나니"라는 단어는 "동등한 상태로부터의 부탁" 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이 단어를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단어를 세 번 사용하셨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곧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원하옵나이다(요 17:24)
이 말은 간청이 아니라 명령이다.
성도들은 이런 권위를 가질 수 없지만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은혜를 누리며 신앙생활에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02-13-2022(제7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야고보서 5:15)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게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십니다.
병들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시는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간구 하옵기는 김영희권사님이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 가운데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김영희권사님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못하여 답답합니다.
그러나 질병으로 고통 당할 때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여 낙심하지 않게 하옵시고
오히려 고통 가운데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찾아 알게 하옵소서. 
질병 중에 있을 때 인생의 모든 것과 바꿀 수 있는 영원한 보물을 찾고 기뻐하며 믿음 위에 더욱 굳게 설 수 있는 믿음만을 주장하게 하옵소서. 

언제까지 육체의 고통으로 시달릴지 모르지만 질병으로 인하여 몸은 고통스럽고 불편한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강한 빛을 받아  성령의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또한 육신이 건강한 사람과 비교함으로 낙심하지 않고
고통 가운데서 십자가의 아픔을 몸소 겪으셨던 주님을 바라보며 그 사랑을 깊이 깨닫는 은혜가 넘쳐나게 하옵소서.
 
몸의 불편함을 불평하는 대신 이미 허락하신 은혜로 인하여 주님을 뜻을 나타낼 수 있는 은사를 찾게 하옵소서. 
질병도 그 가운데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다면 불행이 아니라 복이요, 재앙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은사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의사를 통하여 치료를 받을 때에 빨리 회복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고, 장기적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없도록, 병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만병의 의원이시고, 치료자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을 공부하므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행함으로 복을 받는다.


야고보서 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기도의 영을 구하라!

스가랴 12:10a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I will pour out on the house of David and the inhabitants of Jerusalem a spirit of grace and supplication.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In the same way, the Spirit helps us in our weakness. We do not know what we ought to pray for, but the Spirit himself intercedes for us with groans that words cannot express.

기도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는 "기도는 영혼의 호흡" 이라고 합니다.
호흡이란 생명이 있는 증거입니다.
죽은 사람은 호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영혼과 육이 하나로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호흡이 필수적인 것처럼 또한 영혼이 육체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정의한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생명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이 호흡을 하는 것처럼
살아있는 사람은 육체와 영혼이 하나가 된 것처럼
기도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의 흔적과 같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기도를 합시다!

나의 하나님이여
그리스도를 보사
나의 작별의 순간을 평안하게 하옵소서!

내 비록 흙에 지나지 않사오니
하나님 앞에 서서 기도하옵기는
쾌락을 구함도 아니오며
금을 요구함도 아니오라
그보다 더 큰 것을 구하오
하나님이 내게 주실 가장 큰 선물
내가 누를 영원한 생명일세.

내 마음 이제 기도와 찬송으로 넘치네
그리고 부드러운 그의 마음에
내 마음 가까이 끌어올리는
그 한 숨결 한 숨결을
내 하늘 아버지는 알고 계시네
내 기쁨과 평안 여기 있고
내 구원 당신 안에서 보니
아, 내 영혼을 지키시는 이여.

* 기도의 영 p. 180, 181, 182
- 기도(오 할레스비)

삶의 지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데이비드 케슬러가 쓴 "인생 수업"에 나오는 일화 입니다.

어느 기분 좋은 여름날, 갓 결혼한 부부가 저녁을 먹고 숲으로 산책을 나갔다.
둘이서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멀리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꽥, 꽥!"

아내: "저 소릴 들어봐, 닭이 틀림없어."

남편 : "아니야, 저건 거위야."

아내 : "아니야 닭이 분명해."

남편 :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건 말도 안돼. 닭은 '꼬꼬댁 꼬꼬!'하고 울지만, 거위는 '꽥, 꽥!' 하고 울거든. 저건 거위라고."

또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꽥, 꽥!"

남편 : "거봐 거위잖아!"

아내 : (한발로 땅을 구르며)  "아니야 저건 닭이야. 내가 장담할 수 있어."

남편 : (화가 나서)
 "잘 들어 여보! 저건 거위라니까! 당신은 정말이지..."

남편이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을 내뱉으려는 찰나 또 다시 "꽥, 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내가 눈물을 글성이며 말했다.
"저봐, 닭이잔아."

그 순간 남편은 아내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왜 그녀와 결혼했는가를 기억했다.
그는 얼굴을 누구러뜨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미안해, 여보 생각해 보니 당신말이 옳아. 저건 닭이야."

그러자 아내는 남편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여보"

두 사람이 사랑 속에 산책을 계속하는 동안 숲에서는 다시금 소리가 들려왔다. "꽥, 꽥!"

남편은 생각했다. '그것이 닭이든 거위든 무슨 상관인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기분 좋은 여름날 저녁 함께 산책을 즐기는 것이였다.

그렇다! 그것이 닭이든 거위든 무슨 상관인가?

우리가 상대에게 상처주고 결국은 관계가 단절되는 이유 중에 많은 부분이 멀리서 들려오는 동물의 소리가 닭인지 거위인지 같은 사소한 분쟁에서 비롯된다.

내 신념을 저버려야 할 일이 아니라면 내게 회복하지 못할 손해가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면 인정해 준들 무엇이 문제일까?

- 인생수업 중에서 -

"찰리 채플린" 명언

88세에 세상을 떠난 "찰리 채플린"이 남긴 4가지 명언

1.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우리들의 문제 조차도.

2. 난 빗속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아무도 내 눈물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3. 우리 삶에서 가장 의미 없는 날들은 웃지 않은 날 들이다.

4.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의사 6명은
* The sun ( 태양 )
* Rest ( 휴식 )
* Exercise ( 운동 )
* Diet ( 다이어트 )
* Self - Respect  ( 자존감 )
* Friends ( 친구 )

이 모든것들과 함께 당신의 삶을 즐기세요.
삶은 여행일 뿐입니다.
그러니 오늘을 충실히 사십시요.
내일은 안 올지도 모르니까요.

찰리 채플린
웃음은 몸 안의 조깅 입니다.

찰스 스펄전
진정한 기도는 길이가 아니라 무게에 의해서 측정된다.

허버트 록키어 박사
성경에는 650편의 기도들이 기록되어 있다.
기도 중에서 요한복음 17장의 주님의 제사장으로서의 기도가 가장 으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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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기도는 항상 하나님과의 역동적인 대화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을 때 주기도문은 우리가 매일 하나님께 이야기하는데 도움이 되는 모범이 됩니다.
여기 도움이 될 만한  여섯 단계 기도 가이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다시 집중하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깊이 숨을 들이 마시고 다음 단어에 집중해 보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천천히 숨을 내쉬며 다음과 같이 말해 보세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여러 번 반복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하나님의 성품에 주의를 기울여 보세요. 그리고 또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초점을 맞추어 보세요.

    여러분의 뜻을 다시 맞추어 보세요.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은 늘 그 분의 뜻을 이 땅에 이루고 계십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뜻을 그분의 뜻에 맞추는 것은 그분의 나라를 찾는 일입니다.

    주변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 보여주시기를 기도해 보세요.

    염려를 내려 놓으세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언가를 받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이 하나님께 여러분의 염려를 드릴 때 그분은 여러분께 무엇을 주실까요?

    여러분의 염려를 적어보세요. 그리고 하나씩 읽어 보세요. 염려를 소리 내어 읽을 때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마음 속으로 기도하세요.

    이 단계를 필요한 만큼 계속하세요.

    회개하고 응답하세요.

    사하여 준 것 같이.. 사하여 주시옵고

    여러분이 주님께 내려 놓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지금 주님께 고백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깊은 상처, 좋지 않은 행동, 어쩔 수 없는 중독, 반복되는 실수 등등일 까요?

    하나님은 여러분이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 생각을 그분께 말씀 드리고 그분의 음성을 들어 보세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구하세요.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우리는 모두 무언가로부터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셨나요?

    주님의 신실함에 감사 드리세요. 그리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말씀해 보세요. 주님의 보호가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보세요. 상황이 절망적으로 보일 때에도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기억 하세요.

    기뻐하며 돌아보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행하신 일을 기뻐하고 오늘 하루를 보내며 그분을 예배 할 방법을 찾으세요.

    그리고 잠시 하나님과 함께 한 이 시간을 곰곰이 돌아 보세요. 그분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보여 주셨나요? YouVersion기도 목록에 생각나는 것을 적어 보세요

예수님처럼 기도를 시작하면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가 우리 삶의 방식을 바꿀 때, 우리는 언제든지 확신, 의뢰함,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께 다가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 주기도문은 단순한 기도가 아니다.
이 기도는 이 땅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비전이다 ”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는 동안 불량한 질문을 꽤나 했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눅 9:54). 그러나 가끔은 멀쩡할 때도 있었다.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눅 11:1). 제자들이 그럴 때면, 우리 주님은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아버지와 즐거이 교제하는 법을 가르칠 기회가 생겼다며 퍽 기뻐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어느 날 오후 제자들과 열성 넘치는 군중이 산 중턱에 모였을 때 그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다. 누가복음 11:2-4에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가장 유명한 말씀 중 하나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짤막한데다 어린아이도 쉽게 외울 수 있지만, 이 기도의 간결함이나 익숙함에 현혹되지는 말자. 우리는 주님의 기도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기도라고 바르게 알고 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는 또한 그 이상이다. J. I. 패커는 주님의 기도를 “복음의 요약”이라고 부른 테르툴리아누스를, 그리고 “신성의 몸”이라고 부른 토마스 왓슨을 인용한다. 패커 자신은 주님의 기도는 “생활 전반의 열쇠”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기도보다 더 명확하게 가르치는 것은 없다”고 덧붙였다.

주기도문은 단순한 기도가 아니다. 이 기도는 이 땅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비전이다. 이 기도는 망가진 이 세상에 불의와 굶주림과 악이 있음을 인지한다. 이 기도는 믿음의 선언이요, 예배로의 부름이요, 하나의 외침이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사회의 개혁을, 이 땅에 천국이 임하게 해 달라는 변혁의 탄원이다.

그리하여, 주기도문은 단순히 그렇게 기도하라는 기도가 아니다. 주님의 기도는 그렇게 살라는 기도이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의 기도를 기도하면, 어린아이처럼 의지하는 마음가짐으로,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로,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선교에의 동참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자세: 어린아이와 같은 의존

마태복음 6장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이렇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으로 시작하신다. 예수님은 기도를 대하는 두 가지 방식을 대조하신다. 하나는 과시형 영성의 자세이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려고 종교 활동을 하는 자세이다. 다른 하나는 어린아이와 같은 의존, 곧 하늘 아버지께 우리가 완전히 의지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주기도문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과 의존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나라가 우리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임을 인정한다. 우리의 생존과 번영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불가능함을 알기에, 우리는 겸손히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 어린아이가 밤에 잠잘 준비를 하면서 도움과 안전을 구하는 것처럼 우리는 용서와 보호와 구원을 간청한다.

우리가 선하고 사랑 많으신 아버지의 발아래 있는 굶주리고 궁핍한 자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의 초점: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시편이다. 주기도문은 찬양, 탄식, 간구(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 중보(타인을 위한 기도)를 포함한 많은 요소가 시편의 구조와 흐름을 따른다. 주기도문은 우리를 자기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전심으로 예배하는 삶으로 초대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뿐만 아니라 주님과 왕으로서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전심으로 예배하는 자세로 기도하고 살아가라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끊임없이, 한눈팔지 말고 걸으라고 우리를 초청하신다. 진심으로 드리는 예배(시 86:11)는 우상 숭배(출 34:11-17), 탐욕(마 6:19-21), 처음 사랑에서 멀어짐(계 2:4)을 없애는 해독제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 삶의 중심을 예수님과 그의 영원한 나라에 두는 것이다. 남의 칭찬을 받으려는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인기를 얻고자 하는 욕심을 거부하는 것이며, 명성을 쌓으려고 거창한 일을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 존재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고 그분께 온전히 복종할 때 오는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의 관계들: 서로 사랑

단수 대명사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주기도문에서 간과되고 있는 아름다운 차원이다. 주기도문에는 “나”(“I” 또는 “me”)가 없다. 그 대신에 예수님은 공동 대명사 “우리”(“We” “us” “our”)로 기도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주기도문은 우리의 개인주의적 틀을 재고하고 우리가 교회와 얼마나 상호 연결되어 있는지 인정하고 맛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의 기도를 단수의 기도에서 공동의 기도로 바꾸심으로써,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두 번째 큰 계명(마 22:39)을, 그리고 주님께서 새 계명이라 이름 붙이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요 13:34-35)을 우리가 잊지 않게 하신다.

주기도문을 기도하면 우리는 형제자매의 실제적인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자원과 평화와 희망이 부족한 동료 신자들을 알아가는 것이다.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잘못할 때가 있으며 그럴 때마다 앙갚음을 일삼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며, 서로 용서하고 쓴 뿌리를 뽑아버리는 것이다.

주기도문을 정직하게 드린다는 것은 신속하고 철저하게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사명: 하나님의 일에 참여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깨어진 이 세상에 발을 들이지 않고서는 주기도문을 기도할 수 없다.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사역에 참여하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능력을 심어준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거나 그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한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게 될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온 세상 사람들의 (육체와 영의) 굶주림을 인식하고 그들을 먹이며 세계 빈곤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용서를 구하고(“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과 용서한 사실을 아뢰는(“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기도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자주 이웃과 동료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악의 잔혹하고 불의한 계략에서 사람들을 구하는 일에 나선다는 것이다.

주기도문을 기도하고 주기도문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기도하시며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요 17:18)

프레드릭 비크너가 말했듯이,

주기도문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게 좋다. 주님의 기도로 기도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 기도문을 입 밖에 낸다는 것은 호랑이를 우리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며, 원자력을 미풍처럼 보이게 하는 힘을 내뿜는 것이다.

비크너는 주기도문은 언젠가 성취될 약속의 노래임을 우리에게 되새겨 준다. 언젠가,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 잘될 거다. 그때까지, 우리는 기도한다.

원제: The Lord’s Prayer Is Meant to Be Lived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일용할 양식

τὸν ἄρτο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톤 아르톤 톤 에피우시온)

"일용할 양식"에 대한 헬라어는 τὸν ἄρτο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톤 아르톤 톤 에피우시온)이다. 
아르톤ἄρτον은 "빵"이다. 
신약의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던 음식이다.
여기서 빵은 부분으로 전체를 대표하는 제유법으로 사용되어, "양식" 일반 혹은 더 나아가 "물질" 일반을 의미한다. 

“일용할”로 번역되어 있는 헬라어 단어 “에피우시온"ἐπιούσιον은 주의 기도에 사용된 전체 헬라어 중에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단어이다. 이 단어를 해석하기 어려운 이유는 성경에 이 단어가 오직 주기도문에만 나오기 때문이고, 성경 밖에서도 그 용례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잘 안쓰이는 단어이기 때문에 정확한 뜻을 알기 어렵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상당히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신 셈이다.
이렇게 일상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사용하셨을 때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테니, 더 세심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에피우시온”이 무슨 뜻인지를 밝히기 위한 많은 학문적 연구가 있었다.

초대교회 시절부터 문제가 되었으니 긴 논란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 안에 용례가 없으니, 성경 밖 문서나 비문을 다 뒤져서 이 단어가 사용된 흔적이 있으면 그것에 근거해서 뜻을 찾아내려 하였는데, 노력에 비하여 결실이 적다.

이 단어가 쓰여있는 비문이 그리스의 어느 섬(Rhodes)에서 새로 발견되었을 때 거기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쏟았고, 이 단어가 쓰여있는 파피루스가 런던의 어느 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되었을 때에도 학계가 들썩 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직도 그 뜻을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말 주기도문이 “일용할”이라고 에피우시온을 번역했는데, 그건 기본적으로 에피우시온의 뜻을 “오늘”이라고 본 것이다. 영어로 daily bread라고 번역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새로운 발견을 반영하면 에피우시온은 "다음"이라는 뜻이 된다.
에피우시온에 "날"을 뜻하는 헤메라가 붙여써진 파피루스가 발견되었는데, 문맥에서 볼 때 "다음 날 곧 내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발견을 주의기도 해석에 적용하면  τὸν ἄρτο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톤 아르톤 톤 에피우시온) "다음 먹을 빵"이 된다.
그리고 이것을 의역하면 "생존에 필요한, 삶을 꾸려가는 데 필요한” 빵이 된다. 

에피우시온(ἐπιούσιον)이라는 단어 자체에 집중한 해석 역시 이런 해석과 궤를 같이 한다.
에피우시온은 "에피"라는 전치사와 "우시온"이라는 명사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에피(ἐπί)는 "~위에"를 뜻하는 전치사로 영어의 on이나 upon에 해당한다.
"우시온"이 나온 "우시아(οὐσία)"는 그리스 철학은 물론 삼위일체 교리에도 사용된 단어인데 그 기본 의미는 "존재(being, existence)"이다.

그러므로 에피우시온은 "존재를 떠받치는"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고, 이는 에피우시온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맥이 통한다. 

이런 이해를 고려한다면, 주의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하라 하신 "일용할 양식"이 하루 먹을 양식이 아닌 것으로 조심스레 해석할 수 있다.

"일용할 양식"은 문학적 표현으로 참 좋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단지 하루치 양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떠받치는 물질",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물질 전반"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라 하셨다. 

내게는 어디까지가 "일용할 양식"일까? 물어보고 묵상할 질문이다. 


주기도문의 신학(마태복음 6:9~15)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의 이곳과 누가복음의 평행문(11:2~4), 디다케(Didache)라는 2세기 교회사 문헌에 세 군데 실려 있다.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모범 기도를 가르쳐두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기도를 가르쳐달라는 요구에 이 기도를 전하는 것이 그 맥락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중언부언과 자기과시의 기도를 비판하며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는 맥락에서 모범적인 기도의 사례로 주기도문을 제시한다. 이러한 편집 맥락의 차이는 애당초 주기도문의 기원이 예수의 신학적 유산을 요약하는 가르침의 일환으로 제자들에게 전수되었고 그것이 다양한 맥락에서 실천적으로 응용되어갔음을 암시한다.

먼저 이 기도는 '우리'를 기도의 주체로 설정한 집단 기도(group prayer)로 규정된다. 개인으로 은밀하게 골방에서 드리는 묵상기도로서나 축귀를 위한 주술적 차원에서 이 기도가 활용된 것은 후대의 일이다. 이 기도의 내용만으로 판단할 때 주기도문은 두세 명 이상의 제자들이 모여 드리는 공적인 기도로 당시 유대교의 회당예배에서 유통된 카디쉬 기도(Kaddish prayer)를 그 원천자료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 유대교 기도가 하나님을 3인칭으로 설정한 기도라면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2인칭으로 설정해 기도하는 주체와의 긴밀한 인격적 대화와 소통을 전제로 깔고 있다. 나아가 신학사상이란 측면에서도 주기도문은 예수의 신학을 응집한 결정체라고 할 만한 중요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 기도가 짧고 중언부언을 방지한다는 점에서 앞의 기도 교훈과 일맥 상통하지만, 개인이 골방에서 드리는 은밀한 기도가 아니라 공적인 '집단기도'라는 점에서는 상기 맥락을 이탈한다.

먼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호명하며 이 기도는 시작된다. '하늘'의 초월성과 친근하게 옆에 계시는 '아버지'의 내재성이 동시에 강조된 이 기도의 서두는 그 보편적 보호자로서의 그 아버지를 '우리'의 아버지로 호칭함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의 개인적 편향과 편익을 위해 편파적으로 이용되거나 오남용되는 문제를 사전에 방지한다. 나아가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게 하시옵소서'라는 간구도 하나님의 이름이 세속적 이해관계에 엮여 함부로 오남용되지 않도록 극진하게 배려한 점이 도드라진다. 이는 나아가 십계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교훈의 연장선상에 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옵소서'라는 문구는 하나님의 왕적인 주권(basileia)이 이 땅에 온전히 실현되길 간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의와 사랑, 평화와 자비 등으로 요약되는 하나님이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간구한 세 번째 항목은 제 위치를 지키거나 제 순환궤도를 돌며 피조물 본연의 역할에 착실하게 순종하는 하늘의 일월성신, 나아가 그 아래 구름과 새들처럼 경계 없는 하나님의 자유를 구현하는 창공의 피조물과 달리 이 땅의 청지기로 세운 인간만이 유일하게 패역하며 하나님의 창조 뜻을 위반하는 현실을 암시한다. 그래서 타락과 죄악의 근원이 되는 이 땅의 인간 현실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구현되길 갈망하는 간구가 이어진 것이다.

다음으로 세 가지 인간을 위한 간구 중 첫째가 일용할 양식이다. 영적인 양식을 굳이 배제할 필요는 없지만 예수의 의중 가운데 이 양식은 무엇보다 육체적 양식이었다고 봐야 한다. 음식을 먹지 않고 생명이 온전히 건사될 수 없다. 이러한 현실적 판단 아래 당시 굶주림에 지친 가난한 생명을 배려하여 이로써 인간을 위한 중요한 첫째 간구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렇게 보존된 생명이라야 죄악과 싸우며 용서하고 용서받는 일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죄지은 자의 용서에 대한 간구는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빚의 탕감에 대한 내용이다. 사회경제적인 맥락에서 이 땅의 현실은 비대칭과 불균형, 그리고 양극화이다. 그것은 조건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마찬가지로 은혜로써 상대방의 빚을 탕감해줄 때 극복 가능한 과제다. 용서의 본질도 인간사회에 인간의 탐욕으로 불거진 이러한 비대칭, 불균형의 인간관계를 극복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시험'(peirasmos)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유혹'과 '시련'으로 달리 번역될 수도 있다. 여기서 시험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그 대상은 제자들을 포함한 인간이다. 하나님의 시험은 욥의 고전적 사례가 암시하듯 수수께끼 투성이다. 그것을 극복할 때 인간을 연단하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 치여 치명적인 타격으로 죽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파멸적인 최후로 종결되는 시험으로 더 이상 우리 인간을 끌어들이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그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각종 유형무형의 '악'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당신'께서 피조물인 인간을 향해 이런 구제와 구원의 의무가 있음을 자식의 도리로 상기시켜드리는 데 이 주기도문의 주된 목적이 있다. 이어지는 14절은 주기도문의 예전적 완성도를 살리기 위해 후대에 첨가된 송영구이고 14~15절은 주기도문의 구절 중 12절의 빚 탕감과 용서의 교훈을 한 번 더 강조하여 추가로 논평한 것이다.

주기도문은 짧지만 예수의 행적과 교훈을 압축한 심오한 신학사상을 품고 있다. 그 한 구절마다 수많은 해석과 논쟁을 유발할 뿐 아니라 신앙적인 도전이 지대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초창기부터 이 주기도문을 애용하며 자신의 기도를 비추는 거울로 삼았을 뿐 아니라 경건한 신앙과 삶의 훈련을 위한 기준으로 삼았다. 오늘날 수많은 주기도문 강해가 나왔지만 그 중에는 보충되고 교정되어야 할 부분들이 많다. 아울러, 그 심층을 추가로 탐구하면서 그 핵심 교훈을 치열하게 실천해야 할 것이다. 주기도문은 이렇듯 예수님의 가르침을 현대화하는 데 첨단의 기수로 재발굴하고 재정립해야 할 중요한 과제를 담고 있다.

신명기 27:11-26


11 모세가 당일에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이른 후, 그곳 세겜 땅 북쪽에 있는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반드시 이행하여야 할 '축복과 저주의 의식'을 언급한 부분이다. 이 의식은 이스라엘 12지파가 각기 6지파씩 양편 산에 갈라서서 축복과 저주를 각기 선포하는 의식인데, 여호수아 8:30-35에서 그대로 실행되었다.

한편,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왜 축복과 저주의 산으로 각각 선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2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산에 서고

ㅇ요단을 건넌 후에 - 2, 3, 4절에 이어 본장에서 벌써 네번째 언급되고 있는 구절이다. 이는 그만큼 요단(Jordan)을 건너는 일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임을 시사해준다.

ㅇ시므온과...베냐민 - 모두 야곱의 정부인(正婦人)인 레아와 라헬에게서 태어난 후손이다(창 29:31-30:24;35:16-18). 그러나 그중 레아의 막내 아들인 스불론의 지파와 서모(庶母) 빌하를 범하였던 장자 르우벤(창 35:22)의 지파는 여기서 제외되었다.

ㅇ축복하기 위하여 - 야곱의 정부인에게서 난 아들들이 이처럼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에 대하여 카일(Keil)은 '적자(嫡子)가 서자(庶子)보다 신분이 높고, 축복이 저주보다 품격이 높은 만큼 적자가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평하였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433).

ㅇ그리심 산 - 사마리아 성읍 부근에 위치한 오늘날의 '예벨 엣 투르'(Jebel et Tur)이다. 남북으로 에발 산과 마주보고 있는데, 특별히 그리심 산(Mt. Gerizim)이 축복을 선포하는 산으로 선택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3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고

ㅇ르우벤...납달리 - 전술한 것처럼 르우벤과 스불론 외에는 모두 야곱의 첩이었던
빌하와 실바의  후손이다(창 29:31-30:34). 르우벤과 스불론이 여기에 속하게 된 이
유는 아마 르우벤은 서모 간통 사건으로  인한 장자권 박탈 때문이었을 것이고(창
35:22;49:4;대상 5:1), 스불론은 레아의 막내 아들이었기 때문(창 35:23)이었을 것
이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ㅇ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 혹자들은 그리심 산에 선 지파들을 축복받은 지
파들로, 에발 산에 선 지파들을 저주받은 지파들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단정
은 무리이다. 왜냐하면 에발 산에 서게 될 지파들 중에도 단, 아셀, 납달리 지파처럼
야곱의 축복을 받은 지파들이 있으며 그리심 산에 서게  된 지파들 중에도 시므온,
레위와 같이 야곱의 저주를 받은 지파도 있기 때문이다(창 49:1-27). 따라서 축복의
산에 오른 자들은 율법에 순종하는 자들을, 저주의 산에 오른 자들은 율법을 거역하는
자들을 각기 상징할 뿐으로 이해함이 좋다. 한편 에발 산(Mt. Ebal)이 특별히 저주를
선포하는 장소로 선택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4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ㅇ레위 사람 - 여기서는 레위 지파에 속한 모든 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언약궤
를 메고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의 중앙 부분에 서서 모세의 말을 전달받아 양편에 갈
라 서 있는 백성들에게 큰소리로 외칠 '레위 제사장'(9절;수 8:33)을 가리킨다
(Delitzsch, Lange, Alexander, Wycliffe)
ㅇ큰 소리로...이르기를 - 혹자들은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서 외치는 사람의 목
소리가 양편 산 중턱에 운집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들릴 수 있었겠는가라는
점에 의문을 표시한다. 그러나 성서 고고학자들에 의한 정밀 조사 결과 양쪽 산의 음
향 효과가 매우 훌륭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또 여러 차례의 실험 결과 여러 사람이
외칠경우 충분히 들려진다는 사실도 입증되었다(Stanley, Syria & Palestine;
Tristram, Land of Israel ;Hastings, Bonar, E.G. Kraeling).

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찌니라

ㅇ장색 - 각양 물건을 정교하게 만드는 기술자(craftsman)를 가리킨다. 당시 이들은
우상을 만들어 파는 일로 많은 이익을 보곤 하였다(행 19:24).
ㅇ가증하니 - 23:18 주석 참조.
ㅇ은밀히 세우는 자 - 십계명 중 제 2계명(5:8-10;출 20:4-6)을 은밀히 범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은밀히'에 해당하는 원어 '바사테르'는 '은밀
한 장소에'(KJV, in a secret place)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은밀한
장소'로 꼽을 만한 곳은 어디이겠는가? 물론 눈에 잘 안 띄는 골방이나 비밀 장소를
들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곳으로는 역시 사람의 마음 속을 꼽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보다 더 큰 비중으로 자기 마음 속에 은밀
하게 품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 숭배이다.
ㅇ모든 백성은...아멘 할지니라 - '아멘'(amen)이란 말은 본래 '확실하다', '신실하
다'는 뜻의 '아만'에서 유래한 단어로 문장이나 대화의 끝에서 사용될 때
'과연 그렇습니다',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장 11-26절 강해, '아멘 연구'를 참조하라.

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경홀히 여기는(칼라) - 원뜻은 '가볍다'로, 곧 상대방을 업신여기거나
비천히 여기는 것(잠 12:9), 절하(切下) 평가하거나 모독을 주는 것(사 16:14), 그리
고 지독히 경멸하는 것 따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부모
를 이처럼 업신여기는 것은 곧 자신의 근본(根本)을 망각한 행동일 뿐 아니라, 급기야
는 부모를 통해 그 생명을 부여하신 하나님을 경홀히 하는 짓거리이다(21:18). 그러므
로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고 권면하였다. 출 20:12 주석 참조.
ㅇ저주를 받을 것이라(아루르) - 기본형은 '아라르'로 '버림을 받다'란 뜻이다. 즉 이
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한다면, 버림을 받는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자신임을 잘 증거해 준다(Calvin).

17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 '여기서 지계표'(地界標;KJV,landmark;NIV,
boundary stone)란 땅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세운 돌이나 푯말을뜻한다(창 31:51,
52). 따라서 이러한 지계표를 마음대로 옮기거나 없애 버리는 것은 타인의 재산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 행위이다. 한편 성경 뿐 아니라 고대 바빌로니아의 법도 지계표를
침해하는 행위를 큰범법 행위로  규정하고  매우 엄격하게 다스렸다.19:14 주석 참조.

18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 고대 근동에는 여러 가지 환경적 요인과
풍토(風土)로 인하여 의외로 소경이 많았다. 즉 고온 건조한 기후와 쉴 새 없이 이
는 먼지, 그리고 비위생적인 생활 환경 및 가난으로 인한 영양 실조 등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실명(失明)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로부터 이러한 소경을 일부러 괴롭
히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따라서 본절이 의미하려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단정
하기 어렵다. 그래서 영역본 Living Bible은 본절을 '소경을 이용하여 그 이(利)를
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Cursed is he who takes advantage of a blind man)
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이웃을 하나님의 계명의 길에
서 벗어나도록 유혹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영적으로 해석하였다. 아뭏든
이는 보다 광범위한 의미로, 장애자의 약점을 이용하여 불의한 이(利)를 취하거나 또
는 그들을 괴롭히며 실족케 하는 일 따위를 엄격히 금하고 있는 조항임에는 틀림없다
(레 19:14;롬 15:1). 실로 율법은 그러한 약자들의 약점을 악용하는 죄악에 대해서는
보다 혹독한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레 19:14 주석 참조.

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객이나 고아나 과부 - 가난하며 약한자, 그리고 억눌리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
을 대표하는 구약 시대의 3대 약자들이다(14:29;16:11, 14;24:21;26:12, 13).
ㅇ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  여기서  '억울케  하다'에  해당하는 '나타'
는 '비틀다', '굽게 하다', '벗어나게 하다'는 뜻으로, 정당한 판결을 내리
지 아니하고 힘 있는 자를 두호(斗護)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서
는 이미 24:17에서도 엄금했던 바, 실로 하나님께서는 '공법(公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河水)같이' 흘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암5:24)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 계모와 구합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계모와 구합하는 자 - '구합하다'에 해당하는 '솨카브'는 성(性) 관계
를 갖기 위해  '잠자리를 같이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계모'에 해당하는 '에쉐트 아
비'는 '아버지의 여자'란 뜻이다. 따라서 비단 이는 계모 뿐 아니
라 아버지의 첩과도 성 행위를 하는 것을 포함한다.
ㅇ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 영역본 RSV는 이를 '아버지의 여자를 벌거벗겼으
니'로, NIV는 '아버지의 침소를 더럽혔으니'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Living Bible은
'그녀는 그의 아버지에게 속하였으니'로 번역하고 있으며, 공동 번역은 '아비의 이불
자락을 들치고'로 의역하고 있다. 아뭏든 이처럼 아버지의 침소, 아버지의 여자를 넘
보는 행위는 인간의 기본 윤리를 저버리는 패역(悖逆)이니, 저주를 면할 길 없다
(22:30). 레 18:8 주석참조.

21 무릇 짐승과 교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짐승과 교합하는 자 - 동성애, 근친 상관 등과 더불어 변태적인 성 행위 중의 하
나인 수간(獸姦)을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수간자(獸姦者)는 근친 상간자 및 남색자
(男色者)와 더불어 땅을 더럽히는 추악한 성범죄자로서 아스라엘 사회에서 반드시 제
거되어야 했다(출 22:19;레 20:15, 16). 성경은 결코 생리적인 성적 욕망이나 충동을
죄악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性)의 창조자로서 하나님께서는 성을 인간들이 누릴 수
있는 지극한 기쁨으로 간주하셨다(잠 5:18;전 9:9;요 3:29). 이것은 창조시 아담의 독
처(獨處)를 좋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한 여자 하와를 창조하여 준 사실(창
2:18, 22)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바로 이 남녀 창조 사건에서도 분명히 예시
되었듯이 남녀간의 성적 욕망은 일부 일처의 신성한 결혼 제도에 의해서만 충족되어야
한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요 비밀이었다. 여기서 '비밀'이라고 한 것은
훗날 사도 바울이 설파했듯이 신랑과 신부의 한몸 되는 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순결한 일체성'을 상징하고 또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22:13-30;엡 5:31, 32).
따라서 하나님의 신성한 창조 질서가 반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오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 내포되어 있는 일부 일처의 결혼 제도를 떠난 모든 성(性) 남용은, 더
욱이 수간, 근친 상간, 동성애(同性愛) 등 타락한 인간의 어그러진 심성(心性)에
기인하고 있는(롬 1:26, 27) 모든 변태적(變態的)인 성행위는 단순한 도덕적 범죄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죄에까지 이르는 추악한 성범죄 행위인 것이
다. 특히 고대 이방의 문란하고 타락한 제사 의식이나 설화 등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
는 수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엄한 인간의 가치를 하등 동물의 수준으
로 격하시키는 극악한 소행이므로 거룩한 공동체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결단코 용납될
수 없었다.  따라서 성경은 일관성 있게 이러한 모든 성범죄를 보다 엄격히, 그리고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는 성(性)의 타락으로 인해 마침내 하나님
의 심판을 초래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가나안 족속의 멸절 그리고 로마의 패망 등
을 거울삼아 성(性)개방 풍조로 인해 성(性)을 가볍게 취급하거나 심지어 상품화시키
는 타락한 세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빛된 자녀답게 고결하고 아름다운 성(性) 윤리관
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레 18:23;20:15, 16 주석 참조).

22 그 자매 곧 그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과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23 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자매...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 누이는 항렬상 자기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자이다.
따라서 그러한 누이를 범하는 것은 우생학적(優生學的) 폐단은 차치하고라도, 곧 자기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는 짓이나 마찬가지 행위이므로 저주를 면할 길 없다. 레 18:9
주석 참조.
ㅇ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 성경은 자신의 장모와 성 관계를 갖는  파렴치한에
대하여서는 그들 모두를 반드시 화형(火刑)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레
18:17;20:14 주석 참조.

24 그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 과실치사(過失致死)가 아닌 한, 그 어떠한 살인 행
위도 하나님  앞에서  결코 정당시킬 수 없다. 특히 암살(暗殺) 행위는 더욱 그러한
데,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상대방이 미처 방어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기습하는 도
발 행위이기 때문이다. 죄를 은폐하려는 의도하에서 저지르는 계획적 살인 행위이
기 때문이다. 출 20:13;민 35:16-21 주석 참조.

25 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 살인의 대가로 뇌물을 받는 행위는
곧 인간의 값어치를 추잡한 뇌물보다도 낮게 취급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비록 사람
의 눈을 피해 그같은 죄를 자행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결국 하나님의 공의의 눈은 피
할 수 없기에 저주를 면할 길 없다. 출 23:7, 8 주석 참조.

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

사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자란 아무도 없다(롬 3:10).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출애굽의 영웅 모세도, 그리고 성군(聖君) 다윗도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던 죄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짐짓 범죄치 아니하려고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율법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라 하겠다<창 6:9>.

ㅇ아멘(Amen) -

이 말의 어원(語源)인 '아만'은 본래 어떤 대상을 '지지하다' 혹은 '신임하다'란 뜻이었다.
여기서부터 이 말은 기도나 찬양 및 선언이 종결되어지는 종지부나 끝맺음에서 '진실로 그렇습니다' 또는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
'라는 동의나 소원의 뜻을 가진 '아멘'으로 발전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아멘'이란 말은 단순한 종결(終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곧 어떤 선포나 찬양 그리고 기도 등을 지지하거나 확인 또는 시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나의 삶 속에 적용시키겠다는 결단의 의지(意志)까지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한편 신약 시대에 '아멘'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강조 용법('진실로 진실로'란 말은 헬라어로 '아멘 아멘'이다)으로 자주 사용되었고, 바울 사도에 의해서는 축복과 찬양(Doxology)의 결미어(結尾語)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계시록 서신에서 이 말을 인격화시켜 존재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하였다(계 3:14).
이 모든 배경하에서 '아멘'을 복창(復唱)하던 일은 유대인들의 습관이 되어 왔으며, 또한 그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기독교 공동체에 전달되어져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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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보내시면서 제자들이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를 묻자, 친히 가르쳐주신 기도문이다.
기도드리는 사람들의 눈을 고치어 하나님의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주기도문은 하늘에 속한 사항 3가지(여호와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아버지의 뜻)와 땅에 속한 사항 3가지(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악에서 보호)를 합하여 6가지를 담고 있다.

인간 삶에 관한 대부분을 포괄하는 것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직면하는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게 해준다. 즉, 신이 행한다는 신위(神爲)의 차원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순종과 청종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사무엘상 15:22절)

 

기독교란 ?

기독교(Christianity)는 로마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와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 그리고 개신교회(Protestantism)의 3교회를 합하여 일컫는다.

세계의 모든 교회가 함께 추구하는 주제이며, 기독교의 신학으로나 교회 현장에서 공통되게 추구하고 있는 주제는 ;

첫째 올바른 영성(Spirituality)이다.
둘째 건강한 공동체(Community)이다.
셋째 병들어가는 지구 공동체에 대한 치유(Healing)이다

하나님의 형상

미국의 여류신학자인 Betty Russel은 하나님의 형상을 4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영적인 하나님이다.
둘째 사랑의 하나님이다.
셋째 창조적인 하나님이다.
넷째 공동체로 계시는 하나님이다.

온주 상권(溫州 商權)과 기독교

중국은 기독교 인구가 줄잡아 5% 미만이다.
온주는 15%에 이르고 있다.
그 유명한 문화혁명(文化革命) 시절에도 교회에서의 예배를 중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곳의 젊은 크리스천들의 모임을 접하면서 중국 기독교의 밝은 미래를 보는 듯 했다.
생각해 볼 점은 중국교회 지도자들이 한국교회를 벤치마킹하려는 마음이 절실하다는 점이다.

감사와 기도

제일동포 3세인 의사 하루야마 시게오(春山茂雄)박사가 “뇌내혁명(腦內革命)”(3권)을 출간하여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됬다.
조선에서 한의원을 했던 할아버지로부터 어린 시절부터 침술, 지압술 등을 배웠고, 8세에 이미 일본정부로터 침술사의 자격증을 받았다. 동경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후 의사가 되었고, 한의학과 양의학을 융합하여 치료와 건강지도에 활용하였다.

“뇌분비 호르몬이 당신의 인생을 바꾼다”는 부제(副題)가 붙어있다.

원래 사람은 자신의 체내에 모든 질환에 대한 방어 기능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잘못된 생활습관과 삶의 방식으로 인해 걸리지 않아야 할 질병에 걸린다.

하루야마 시게오 박사는 자신의 병원에서 ‘음식, 운동, 기도’의 3가지 방법으로 각종 질병을 치료한다.

화를 내거나 누군가를 미워할 때 뇌 속에서 아드레날린(Adrenalin) 혹은 노르아드레날린(Noradrenalin) 호르몬이 분비된다. 이 호르몬은 강한 독소를 지니고 있어 사람을 병들게 하고 늙게 한다.

그러나, 감사하거나 기뻐할 때 그리고 기도와 명상에 깊이 빠져들 때 엔돌핀(Endorphin) 이나 베타엔돌핀(β-Endorphin) 호르몬이 분비되어 병을 낫게 하고 젊어지게 하며 행복감을 누리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감사하는 생활습관과 기도·명상에 젖어드는 영성의 삶에 통해 건강과 장수 그리고 행복과 행운을 동시에 붙잡을 수 있게 된다.

가난 (Poverty)이란?

I realize, of course, that it's no shame to shame to be poor.

But it's no (great) honor, either.

가난은 창피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위대한) 명예도 역시 아니다.

Luxury Shame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때를 만나게 되니 사람들의 의식이 다소 변해간다.
그동안 일부 지각없는 인사들이 부(富)를 뽐내기 위해, 또는 빈자(貧者)의 삶을 한탄하며 허파에 바람만 잔뜩 집어넣은 허영의 속물(俗物)들이 고가의 명품을 사서 온 몸에 휘감고 다녔다.
주체할 수 없는 부(富)를 가진 Super Rich 계층에서 고가의 명품을 소비하는 행태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바람직한 인사들이 생겨났다. 이때 느끼는 부끄러움을 Luxury Shame이라 한다. 신조어(新造語)다.
시대가 바뀌면서 인간 의식의 전환의 때가 왔나보다.

인생은 B to D

B는 Birth(태어남)이고, D는 Death(죽음)이다.
즉 인생은 태어났다가 죽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럼 B와 D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C가 있다.
C는 무엇인가?
바로 Choice(선택)이다.
즉 인생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선택하는 대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시다.
모든 일들이 그분의 선택의 역사다.
거룩한 하나님께서 거룩한 백성을 선택하시고지극히 사랑하시어서 천국으로 이끄신다.

B는 주님의 창조의 역사이고, D는 주님이 선택하신 백성들이 가는 목적지이다.
즉 영생(永生)의 삶을 사는 부활의 현장이요, 승리의 종착역인 것이다.

C는 주님의 선택이다.
주님은 범죄 하면서 사는 우리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부활하는 역사(役事)를 통해 우리 인류 전체의 죄를 값없이 용서해 주셨다.

우리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위대한 선택을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인간을 천국의 영생의 삶으로 이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자에 의한 리빙스턴의 부상 - 토마스 벤느 作)

(주님께서 동행하는 자도 시련과 고난을 당하지만, 능히 극복해 낸다)

 

우리 죄 많은 인간에 대한 그분의 지극한 사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이를 거부하고 헛된 우상을 만들고 이생의 자랑과 교만에 취해 스스로 드러내려고 애쓰면서 살아간다.


주님께서 이미 행하신 위대한 사랑의 선택을 망각하거나 거부하면, 살아있어도 죽은 자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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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다섯 가지를 영어 단어의 첫 글자를 따서 ‘5F’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F로 시작하는 다섯 가지가 행복한 노후를 만들어 준다”고 했습니다.

첫째, 파이낸스(Finance)

파이낸스는 돈을 의미합니다.
노후에도 돈이 부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전략으로 ‘LED 전략’을 제시 했습니다.

L은 ‘Long Work’의 약자로 오래 일하자는 의미입니다. 
E는 ‘Early Start’로 노후 대비를 젊을 때부터 일찍 시작하자는 의미입니다.
D는 맞벌이를 의미하는 ‘Double Income’입니다.

“100세 시대에는 맞벌이를 해야 노후 준비가 손쉬워진다”라고 했습니다.

둘째, 필드(Field)

필드는 일을 하는 분야를 의미합니다.
“노후에도 친구들과 함께 공통의 취미를 갖고 활동할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며

“100세 시대인 만큼, 은퇴 후 30~40년을 어떻게 보낼 건지 은퇴 전에 준비하는 게 좋겠다”라고 했습니다.
노후에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비용도 고려하면서 취미를 만드는 게 좋다고 했습니다.

셋째, 펀(Fun)

펀은 재미를 의미합니다.

“기부 활동, 취미 활동 등을 하면서 시간을 어떻게 재미있게 보낼 것인가도 미리 고민하고 준비해야 할 포인트”라고 했습니다.

넷째, 프랜드(Friend)

프랜드는 재미를 같이 즐길 가족이나 친구를 의미합니다.

“나이가 들어서는 노후를 같이 즐길 수 있는 알짜배기 친구들을 만들어 가는 관계의 다이어트가 필요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섯째, 피트니스(Fitness)

피트니스는 건강을 의미합니다.

행복한 노후에는 건강이 뒷받침 되야한다는 것입니다.
“피트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걷기와 근육 키우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즐기는 구호라며 ‘청바지’와 ‘백두산’이라는 문구를 소개했습니다.

‘청바지’는 ‘청춘은 바로 지금부터’를 줄인 것이고, ‘백두산’은 ‘백 세까지 두 발로 산에 가자’를 줄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노후에 필요한 ‘오자’는 ‘놀자, 쓰자, 베풀자, 웃자, 걷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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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 야이로,



야이로(Jairus,  Ἰάειρος) / 빛남, 그가 살린다, 하나님의 깨우침을 받은 자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마가복음 5:22-23)

• 회당장의 직무

'회당장 중 하나'는 "한 회당장"으로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가버나움에 있는 한 회당장으로 이해된다.
당시 회당의 조직은 회당장, 핫잔(Hazzan), 랍비 그리고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중에서 특별히 "집회의 우두머리"로 일컬어지는 회당장은 건물을 관리하며, 예배 순서의 작성 및 질서 유지, 심지어 재판과 같은 사무 증을 관할하던 장로 출신의 지도자였다(눅 4:13 ; 8:41 ; 행 18:8,17).
실로 이들은 제사장 계급의 상대적 실추(失墜)로 인해 소위 종교 민주화를 통해 등장한 평신도 계급(the laymen classes)들로서 이들의 등장은 곧 종교적 관심을 일반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제사장은 아니지만 예배를 주관하고 회당을 관리하며 다스리는 사람들이다.
때로 "회당장"이라는 명칭은 명예직으로서 행정적인 의무는 없으나 회중 가운데 탁월한 인물에게 이 직위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당시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의 대상이었다.
야이로(Jairus)는 바로 이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야이로 역시 그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었다고 보는데는 의심할 바 없다.

• 회당장 야이로

야이로( Ἰάειρος)는 "깨달은 사람" 내지는 "그는 빛난다"는 뜻의 히브리어 이름 "야일"의 헬라식 발음으로 이해된다(민 32:41 ; 삿 10:3).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최대의 존경을 표현하는 것이다.
회당장의 신분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존경받는 사회적 지위를 가졌다면 이 장면은
① 예수를 최고의 지위로 높이는 절대 겸손의 모습니다.
사실 그 당시 예수는 일반적으로 한 새로운 랍비 정도에 불과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던 터였기 때문에 유대의 종교를 대표할 만한 종교 지도층 인사가 그 앞에 무릎 꿇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② 예수의 치료이적이 그 지방에 아주 신빙성있고 믿을 만한 소문으로 알려져 있음을 암시한다.
즉 그 지방의 존경받는 회당장이 기적을 요청한 사실은 예수의 이적 행위에 대한 공적인 신뢰감을 증명하는 것이다.
③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철저한 믿음과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취한 회당장의 신앙적 행동을 보여 준다.
회당장이 직접 바닷가에 많은 무리가 모인 곳으로 예수를 찾아왔고 그러한 행동에 옮기기까지는 예수에 대한 믿음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 회당장 야이로 간절함

회당장은 마치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한 자처럼 필사적(必死的)으로 거듭 반복해서 예수께 간절히 매어달렸다.

1.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회당장이 예수께로 온 목적을 밝히고 있다. 이유는 "어린 딸이 다 죽게 된" 때문이다. 여기서 "어린 딸(뒤가트리온, θυγάτριον)이란 조그마한 여아를 깊은 애정으로 부를 때 사용하던 말이다. 이를 통해 야이로의 자식에 대한 애끓는 심정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죽게 되었사오니"(에스카토스 에케이, ἐσχάτως ἔχει)란 지금 즉음이 문 앞에 서 있을 만큼 그 병세가 최악의 상태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물론 그 딸의 병명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한편 누가 복음에서는 회당장이 직접 말하지 않고 기록자 누가가 담담히 설명하고 있는데, 어린 딸의 나이가 12살임을 밝히고 있다(눅 8:42).

그리고 회당장은 다만 예수께서 자기 집으로 가주기만을 간청한다(눅 8:41).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마 9:18)라고 말함으로써 절망적인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즉 마가와 누가복음은 "죽게 된 지경"을 말하고 마태복음은 이미 죽은 것으로 묘사한다. 이 같은 차이점은 마태가 마가복음에도 뒤에 기술되고 있는(35절) 이미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본시점과 종합하여 서술한 째문인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어쨌든 세 복음서의 공통된 점은 사태가 매우 급박(急迫)하다는 것이다.

2. 손을 얹으사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께서 그 손을 딸의 몸위에 얹으면 곧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 실로 회당장의 간청은 확신적이고 매우 구체적이다. 이는 병 치유에 대한 전권을 인정한 것이다. 여기 손을 얹어 안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바라는 행위이자 치병을 이한 일반적 행위로 알려져 있다(6:5 ; 8:23, 25 ; 약 5:14-16). 따라서 회당장의 이 같은 안수에서 요청은 예수의 능력과 권위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ㅣ며 그의 은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여기서 "구원을 얻어"(소데)란 "구원하다", "보전하다", "놓아주다", "병을 고치다"는 뜻을 지닌(소조, σωθῇ)의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로서 예수로 인한 병의 회복, 곧 건강을 기원한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재해석하면 "(당신으로부터) 건강을 회복하여 (계속) 살게 하소서"가 된다.

•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전령

마가의 현장감 넘치는 서술 기법이 또 한 번 돋보인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여기서 이야기는 급전환된다. 혈루증 치유 기적으로 무리들과 함께 멈추어서 지체하는 사이에 야이로의 집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물론 지금껏 예수 곁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야이로의 마음은 탈대로 다 타버린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한 애타는 상황 가운데 전해 진 내용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혈루증 치유와 예수의 구원 선언으로 고조된 분위기를 잠재우는 소식이었다.

여기서 "죽었나이다"(아페다넨, ἀπέθανεν)는 제 2과거 직설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그 죽음이 변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임을 보고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더 이상 손 쓸 필요가 없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어찌하여 선생을 괴롭게 하나이까", 이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상황을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 즉 야이로의 딸의 죽음을 전한 자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의 바르고 합리적인 발상으로써 예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 것을 간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괴롭게 하다"란 뜻의 원어(스퀼로, σκύλλω)는 원래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의 껍질을 벗길 때 사용하던 말로서 가혹하리만치 혹독한 고통이나 쓰라림을 뜻한다(마 9:36). 따라서 이 말은 더 이상 예수를 "귀찮게 하거나 마음에 부담을 주지 말라"는 매우 단호한 요청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전한 말을 아예 무시하셨다. 실로 예수의 생명을 구원하는 사역 앞에서 이같은 절망적 소식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계속 당신이 목적하신 바를 추진해 가셨고, 더불어 딸의 죽음 소식 앞에 절망하고 있는 야이로를 격려하셨다. 이에 예수는 절망에 사로잡힌 야이로를 향해 희밍을 선언한다.

•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워 말라", "믿기만 하라"는 이 이중 명령은 모두 현재형을 취하고 있어 그 같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엄명이다. 이는 곧 죽음의 소식에 마음 흔들리지 말고 지금껏 나를 향해 지니고 있었던 그 믿음, 그것을 계속하여 지니라는 말씀이다(롬 4:20, 21). 실로 예수는 당신의 신적 본성을 의지하고 죽음을 훨씬 뛰어넘는 당신의 초월적인 능력을 계속 바라보게 하신 것이다 두려움과 믿음은 항상 적대적 관계이다. 따라서 극한 절망 속에 있을 바로 그 시점에 모든 부정적 요소(두려움)를 떨치고 절대적 존재이신 예수를 절대 신뢰하는 것은 참 용기요 참믿음이다. 예수께 지속적 신뢰를 갖는 이 믿음이야말로 곧 생명의 유일한 열쇠이다.

• 죽음을 받아들이고 체념한 야이로의 사람들

"훤화함과.....울며.....통곡함" - 여기서 "훤화함"이란 어지러울 정도로 시끄러이 떠드는 것을, "심히 통곡함"이란 마치 꽹과리가 울려 대듯이 크게 울어대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집안은 초상집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여서 시끄럽게 떠들며 통곡하고 있었다. 마태복음에서는 피리를 불고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음을 묘사한다(마 9:23). 유대인들의 장례식은 흔히 정중한 분위기 보다는 조금 격앙스럽게 피리를 불고 통곡하며 소란하다. 또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여 피리를 불고 울게도 하였다. 이처럼 직업적으로 울어 주는 자들은 주로 여인들로서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대성통곡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 통곡 소리는 가슴 또는 손바닥을 치며 함창 혹은 교창(交昌)으로 이뤄 다. 한편 사회적으로 유력한 인사였던 야이로 집안이었기에 이러한 고용 통곡꾼 뿐 아니라 많은 조문객(弔問客)과 가족 친지들을 합한다면 야이로의 집은 참으로 혼란스러웠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풍경은 죽음의 절망감과 함께 정신 못차릴 정도의 소음과 호란스러움으로 인해 또다른 절망감으로 들어가게 한다. 어쨌든 야이로 집에 모여든 사람들은 다만 슬퍼하거나 그 아이의 죽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길 뿐 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야이로 집안에 궁극적인 평안을 제공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예수께서는 절망적인 초상집 분위기를 극적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즉 장례 풍습에 따라 통곡하며 소란스럽게 떠드는 행위를 급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어찌하여 이처럼 야단들이냐 이제 그만 치우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아이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혹자는 이를 축어적(逐語的)으로 해석하여 아이가 정말 죽지 않고 단지 기절한 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가의 기록(눅 8:55) 중 "그 영이 돌아와"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그 아이는 분명 영(靈)과 육(肉)이 분리된 죽은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죽은사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헬레니즘(Hellenism)과 유대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완곡 어법이다(창 47:30 ; 단 12:2 ; 요 11:11 ; 행 7:60 ; 고전 15:18 ; 살전 5:10).

특별히 생명과 부활(Resurrection)의 주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죽음을 바라보실 때 그것은 영원한 허무나 절망이 아니라 잠시 잠간의 잠에 불과한 상태였음이 분명하다. 특별히 이 말씀은 그 소녀의 소생을 전제한 말씀이라는 점에서 볼 때 비록 죽음의 실재성은 명확한 사실이나 그것은 단지 한시적(限時的)인 수면 상태와 같은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고전 15:51). 진정 죽음과 삶의 지배권을 가지신 이 예수의 말씀은 모든 죽은 자와 죽어가는 우리 인생들에게 부활의 아름다운 희망을 갖게 하는 복음이 아닐 수 없다(욥 19:25-27).

• 저희가 비웃더라(사람들의 반응)

예수께서 선언한 희망의 믿음이 다시 한 번 절망의 벽에 부딪힌다. 즉 인간의 죽음을 영구한 종말로 보았던 주변의 사람들이 본질적(本質的)으로 무지한 자신들의 실상은 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의 무지를 비웃었던 것이다. 여기서 "비웃더라"(카테게론)는 단어는 미완료 시제로서 그들의 조롱섞인 비웃음이 계속되었음을 보여 준다. 어쨌든 이 비웃음은 결과적으로 그 소녀의 죽음이 현상적(現象的)으로 명확한 사실이었다는 점과 또 이후에 그 소녀를 살리신 예수의 능력은 참으로 신비하고 초월한 이적이었음을 반증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

• 저희를 다 내어 보내셨다

여기 "내어 보내셨다"(에크발론, ἐκβαλὼν)는 말은 강압적으로 몰아내셨다는 뜻으로 위엄에 찬 예수의 권위를 엿보게 한다. 실로 예수는 당신의 능력과 존재를 부인하고 의심하는 자들은 생명의 기적을 체험하는 특권에서 제외시키고자 비난과 조소로 일관하는 무리들을 매몰차게 쫓아내셨다. 그리고 그곳에 당신의 이적의 세 증인(제자들)과 그 아이의 부모만을 동참케 하셨다. 이 장면은 한 방문객에 불과한 예수가 그 집의 참 주인으로 행사하시는 기이한 모습을 보여 준다(Benger, Robertson). 실로 예수가 주인으로 있는 가정은 곧 생명의 기적을 맛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질 것이다.

탈리타 쿰, Ταλιθά κοῦμι, 소녀야 네게 말한다. 일어나야지!

• 아이의 손을 잡고

예수의 치유 행위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여기서는 아이의 손을 잡는다. 이는 죽음을 향해 뻗는 생명의 손길로서 처음 야이로가 바닷가에 찾아와 예수께 간청할 때 아이에게 손을 얹어 달라고 한 사실을 기억나게 하는 장면이다(23절). 이처럼 어린아이의 손을 잡는 예수의 모습은 참으로 진지하고 애정어린 인자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절망에 처한 사람을 주님이 손잡아 주리라는 표현은 출 3:20 ; 7:5 ; 시 37:24 ; 눅 1:66 ; 행 11:21 등 여러 군대 나타난다. 진정 주님은 절망 속에 헤메이는 영혼들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시고 참생명에로 인도하시는 친절한 안내자요 신실한 보호자가 되신다(시 23:2, 4).

• 달리다굼(탈리타 쿰, Ταλιθά κοῦμι)

예수 당시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던 아람어 탈리타 쿰에서 유래한 말로서 "탈리다(Ταλιθά)"(소녀야란 뜻)와 "쿰(κοῦμι)"(일어나라는 뜻)의 합성어이다.
이를 번역하면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해석할 때 "내가 네게 말하노니"라는 말을 첨가시키고 있다.
이것은 "달리다굼"이라는 말이 어머니가 아침에 아이를 깨울 때 사용하는 평범한 일상어라고 보았을 때, 그 말의 신적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마가가 추가시켜 해석한 첨가어로 보인다.
"달리다굼"이라는 말은 여기서만 나오고 마태복음(일으키시는 행동만 기록)과 누가복음(번역문만을 기술)에서는 이 말이 없다.
여기서도 사실성과 생동감(生動感)을 특히 강조하는 마가의 문장 기법이 돋보인다.
즉 마가는 주님께서 친히 사용하신 아람어의 이 단문을 마치 현장을 재현하듯 분명히 기록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 아람어와 함께 번역문을 병기함으로써 아람어에 생소한 이방 독자들을 향해 성실한 노력을 보여 주고 있다.

"소녀야........일어나라"

여기서 "일어나라"는 뜻의 "에게이레(ἔγειραι)"는 2인칭 단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단호하고도 권위에 찬 예수의 명령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사실 이 말은 앞에도 언급했듯이 해가 뜨는 아침에 부모가 아이를 사랑스러운 어조로 깨울 때 흔히 쓰던 말이었다는 점에서 본 장면은 새 아침의 환희와 정겨움을 더해 준다.
실로 생명(生命)과 부활(復活)의 새 지평을 여신 예수께서는 친히 그 아침을 마련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죽어 있는 영혼들에게 그 아침을 맞이하도록 "달리다굼"으로 친히 깨우고 계신 것이다.

•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었다

여기서는 치유의 결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즉 예수의 말씀대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걸었다고 묘사한다.
더욱이 마가는 "일어난"(아네스테, ἀνέστη) 동작을 단순 과거 시제로 처리하고 곧이어 "걸어다닌"(페리에파테이, περιεπάτει) 동작을 미완료 시제로 묘사하여, 즉각적으 로깨어나 계속 방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닌 사실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녀의 나이가 12세였다는 사실은 그녀의 동작이 얼마나 가볍고 발랄했을까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실로 그녀는 생명은 물론 원기(元氣)까지 회복하였던 것이다(Swete).

한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걸었다는 이야기가 없다.
그 이유는 소녀가 다시 살아난 사실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켜 기술하고자 했던 기록적 특징 때문이었을 것이다.

• 야이로의 딸과 혈루증 여인의 공통점

그런데 소녀의 나이가 12살이라는 사실을 누가복음에서는 이 이야기의 첫 부문에서 밝혔지만(눅 8:42) 마가는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밝히고 있다.
실로 이 12살이라는 나이는 인생에 있어서 이제 막 꽃이 피려는 시기(유대법상으로는 만 12년 6새월 이후에는 겨혼 가능 연령이 됨)이다. 특이한 점은 소녀의 나이와 이야기의 중간에 일어났던 혈루증에 걸린 여인의 투병 기간이 같은 12년으로 일치하고 있는 점이다.
성경에서 이 "12"라는 숫자가 완전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의 성취를 나타내는 수라는 사실과 연결하여 생각해 봄직하다(창 49:28 ; 겔 43:16 ; 계 21:12, 14).

•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소녀의 소생과 원기 회복은 주위 사람들에게 정신을 잃게 할 만큼 큰 충격으로 다가갔다.
여기서 놀라는 사람들은 40절에서 언급한 사실로 미루어 소녀의 부모와 요한, 베드로, 야고보이었을 것이다.
그 중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그 부모가 가장 큰 충격을 맏은 것으로 나타난다(눅 8:56).
특히 마가는 그들이 놀란 것을 "크게"라는 말과 "놀라거늘"이라는 반복법을 통하여 그들이 마치 황홀지경(恍惚之境)에라도 빠진 듯이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기적은 군중 속에서 공개적으로 일어난 혈루증 치유 기적과는 전혀 달리 실내에서 그리고 몇 명 안되는 목격자만 있는 은밀한 곳에서 조용하게 일어난 점이 특징적이다.

•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

여기서 예수는 또 다시 기적적인 사건에 대해 목격자들에게 비밀로 할 것을 명령한다(1:44 ; 3:12 ; 마 12:16 ; 16:20 ; 17:9 ; 눅 8:56).
이것은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고 그 사실을 알리라고 한 점과(19절) 혈루증 환자의 치유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사실(34절)과는 대조적이다.
예수의 이 같은 행위는 메시야의 자기 공개 시기가(마 16장) 이를 때까지 언제나 그러했듯이 당신의 놀라운 이적과 가사에 관한 소문이 대중들에 의해 문제화(問題化) 되지 않게 되기를 바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아이가 살아난 것을 비밀로 하기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에(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이의 죽음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 부모들이 그 아이들을 숨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마가는 메시야 은닉의 주제(Messianjc-secret motif)를 인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해 혹자(Cranfield)는, 예수께서 그러한 말씀을 한 것은 그 일을 절대적으로 비밀에 붙이라는 의미로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가능한 한 그 일이 널리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즉 알 필요가 없는 자들에게까지 그 기적에 대해 알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로 메시야로서 예수의 신성은 그것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공개되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감춰진다.
어쨌든 마태는 그 소문이 온 땅에 퍼진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마 9:26).

•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이 명령은 소녀가 완벽하게 다시 살아났음을 확인하게 한다.
즉 모든 몸의 기능이 정상적인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느 즉각적이면서도 완전한 인간 회복이요, 부분적 구원이 아니라 전체적인 구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예수의 치유 기적을 소개한 본장에서 치유 받은 모든 사람들의 완전한 회복이 강조되었다.
귀신들린 자는 가족과 사회 공동체로 복귀함으로써 구원을 받았고 혈루증 환자 역시 근본적 치료로써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
야이로의 딸도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것이라고 말하심으로써 소녀에게 전혀 이상이 없음을 알리면서 정상적으로 잠에서 막 깨어난 아이처럼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이다.

한편 예수의 이 같은 명령은 전인적인 생명을 다시 제공하신 크나큰 사랑과 더불어 그 아이가 몹시 아파있을 동안 매우 굶주려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고 그 아이에게 자상하게 먹을것까지 제공하게 하시는 당신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랑을 보여 준다.
진정 예수는 영혼의 문제뿐 아니라 육신의 문제까지도 해결하시는 궁극적인 해결자이셨던 것이다.



한국적 예화 자료


한국적 예화 자료


1. 이성만, 이순 형제의 효제비(孝悌碑)

예전에 국민학교 교과서에 이야기로 실렸던 우애좋은 형제 이야기
낟가리를 서로에게 옮기는 형제가 달 밤에 서로 만나는 순간 감격적인 순간

충남 예산군 대흥면에 가면 ‘의좋은 형제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성만이순 형제의 효제비가 있다고 합니다.  
이 비석은 1978년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개뱅이다리’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예당저수지가 생기면서 물에 잠길 위험이 있자, 지금은 동서리의 대흥 동헌 앞으로 옮겨 놓았다고 합니다. 
예당저수지가 생기면서 인근 마을 어떤 사람이 기다란 돌을 주어, 마루 댓돌로 사용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울로 공부를 떠났던 자녀가 방학 때 집에 왔다가 댓돌에 한문이 쓰인 것을 보고서 읽어보니, 구전으로 전해왔던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실화임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의좋은 형제’는 1956-2000년까지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던 내용으로 형제의 우애를 보여주는 가슴 찡한 실화인데, 이 이이야기’는 농경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추수가 한창이던 가을, 형제는 땀으로 익힌 곡식을 거두어 똑같이 나눴습니다. 

각자 집으로 돌아간 형제는 서로를 생각했습니다. 
“이제 새살림을 차린 동생은 씀씀이도 많을 텐데….” 
형은 지게를 지고 낟가리가 있는 논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볏단을 동생의 낟가리에 옮겨 쌓았습니다. 
동생은 곡식을 똑같이 나눈 것이 잘못한 것 같았습니다. 
“형님은 부모님도 모시고 제사도 받들어야 하는데….” 
동생도 지게를 지고 논으로 나갔습니다. 
이튿날 형은 깜짝 놀랐습니다. 
낟가리가 조금도 줄지 않은 것입니다. 
동생도 놀랐습니다. 
그날 밤 형제는 각기 지게를 다시 지고 논으로 갔습니다. 
“너였구나! 볏단을 갖다 놓은 사람이….” 
“아니 바로 형님이셨군요.” 
형제는 어둠속에서 두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가슴 찡한 의좋은 형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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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조년, 이억년 형제의 투금탄

투금강(投金江)
서울시 영등포구 양화동(楊花洞)에 있었던 양화도(楊花渡)의 다른 이름.

서울의 여의도와 마포 사이 양천 앞 한강을 ‘투금탄’이라고 부르는데, 
우리의 전통적 금전관을 엿보게 하는 고사가 깃들어있는 강입니다. 
고려말기 이조년, 이억년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금덩이를 주었습니다. 
형제는 똑같이 나눠가지고 나루를 건너려고 나룻배를 탔습니다. 
배가 여울을 건너던 중 동생이 갑자기 나눠가진 금덩이를 강에 던졌습니다. 
깜짝 놀란 형이 “그 귀한 금덩이를 왜 버리느냐”고 아쉬워하자 동생이 말했습니다. 

“평소에 형님을 존경하여 따르는 마음이 지극했는데, 금덩이를 갖고 보니 자꾸만 형이 가진 금덩이가 큰 것 같은 사특한 마음이 들고, 형제의 우애를 깰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동생의 말을 들은 형도 가졌던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형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후일에 사람들이 이 강을 금덩어리를 던져버린 강이라고 해서 ‘투금탄’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후 형제가 재산 문제로 다투면 나룻배를 태워 이 투금탄 이야기를 들려주어 화해하도록 하는 형제 우애를 위한 교훈의 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 자료 사용 / 01-03-2024 새벽기도회 예수의 모친과 동생(누가 8:19-21)
세상 사람들도 물질을 초월하여 형제우애를 지키는데 하물며 복음을 갖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의 수준보다 더 낮은 삶에 허덕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도 나를 죽이지 못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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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정 박상길

조선 말기에 박상길이라는 백정(신분 사회에 천민 취급)이 장터에 푸줏간을 내었다한다.
어느 날 인근에 사는 양반 두 사람이 고기를 사러왔다.
그 중 한 사람이 먼저 고기를 주문한다.
"얘 상길아! 소고기 한근 다오"하니 칼로 고기를 베어 건네 주었다.
함께 온 다른 양반은 비록 천한 신분이긴 하지만 말을 함부로 하기가 거북했다.
그래서 "박서방! 나도 소고기 한근 주시게!"하였다.
선뜻 고기를 잘라 주었는데 먼저 산 양반이 보니 자기가 받은 것 보다 갑절은 더 많아보였다.
그래서 화를 내면서 "이놈아 똑같이 한근씩 샀는데 어째서 이 사람 것은 많고 내 것은 적으냐?" 하니 푸줏간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손님 고기는 상길이가 자른 것이고 이 어른 고기는 박서방이 자른 것입니다."

같은 입에서 나오는 말일지라도 어떤 말은 장미꽃처럼 향기가 있고 어떤 말은 가시처럼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는 교훈일 것이다.
문제는 말로 입은 상처는 칼로 입은 상처보다 훨씬 더 아프다는 것이다.
말 한 마디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 말의 마법 

옛날에 박만득이라는 백정이 있었다.
어느 날 두 양반이 그에게 고기를 사러 왔다.
그 중 한 양반은 습관대로 "야, 만득아! 고기 한 근 다오"라고 말했다. 만득은 "네"하며 고기를 한 근 내 주었다.
다른 양반은 "박 서방, 고기 한 근 주게"라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 고기는 언뜻 봐도 먼저 산 양반의 것보다 훨씬 더 커 보였다.
똑같이 한 근이라고 말했는데 차이가 많이 나자 앞의 양반이 화가 나 따졌다.

"이놈아, 같은 한 근인데 이 양반의 것은 많고 내 것은 왜 이렇게 적으냐?"
그러자 만득은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손님 것은 만득이가 자른 것이고, 저 손님 것은 박서방이 자른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때로는 한 마디 말이 그 어떤 치료약보다 효험을 발휘해 생명을 구하고, 또 때로는 비수가 돼 남의 마음을 도려내기도 합니다.
"졸라, 짱나" 등 비속어를 쓴다고 아이들을 나무라기에 앞서 어른들부터 말을 가려 써야되지 않을까요?


* 예화 사용 / 05-30-2023(화)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창세기 44:16)


철학자 하이덱거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말에도 색깔을 지니고 있다

집에서도,
직장에서 일을 할 때도
어느 공간이라도
우리는 항상 말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말투에 따라서
상황과 관계가 악화되기도 하고
긍정적으로 바뀌기도 하는데요,
이렇게 말투는 중요한 순간에서
결정적으로 좌지우지하곤 합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설득의 기법으로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에토스(ἔτος)는 신뢰, 호감을 말하고,
파도스(πάθος)는 공감, 감성을 뜻하며,
로고스(λόγος)논리와 이성을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상대를 설득하려면
에토스 60%, 파토스 30%, 로고스 10%로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런 방식으로 전달해야 합니다.

먼저 에토스를 통해 신뢰를 형성하고,
파토스를 통해 마음의 문을 열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은 마음의 지표이자, 거울입니다.
항상 필요한 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면
유연한 인간관계, 인생의 선순환을 불러오는
긍정적인 마음가짐까지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줄 행복의 선순환은
따뜻한 한마디 말에서 시작됩니다.

좋은 말을 남에게 베푸는 것은
비단옷을 입히는 것보다 따뜻하다.
– 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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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충성스런 일군 고 박태준박사

제가 대학 시절에 성가대원으로 봉사할 때 저희 성가대 지휘자는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이셨던 박태준박사님이었습니다.
당시 당회장이셨던 배명준목사님으로부터 성가대 지휘자의 신앙적인 삶을 들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대부분 예배 한 시간 전에 성가대원들이 모여서 연습을 합니다.
물론 예배를 마치고도 한 시간 이상을 연습을 했습니다.
어느 주일에 성가대 연습을 마치고 예배를 위하여 입장하려고 할 때 박태준박사님에게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고 합니다.
전화의 내용은 교수님의 딸이 세브란스병원에서 마지막 임종하기 전에 아버지를 뵙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연락을 받고 교수님은 주일 예배를 마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이미 딸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모님이 교수님에게 "아니 마지막으로 딸이 한 번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데 왜 이제 나타나느냐?" 하고 불평과 원망의 쓴소리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교수님께서 "사랑하는 딸은 훗날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오늘의 예배는 다시는 드릴 수 없지 않는가? 더구나 지휘자는 예배의 음악을 맡은 제사장과 같은 신분인데 어떻게 그 일을 멈풀 수 있겠는가?"


충성(忠誠) / 충성 충, 정성 성

충성이란 한자를 분해하면 가운 데 중 + 마음 심. 말씀 언 + 이룰 성
사람의 마음 중심에 말씀을 두고 그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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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백낙준박사 / 부모님의 헌신(아버지 백사금집사)

한국 기독교 초창기 때, 백사금 집사님이라고 하는 남자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이 집사님이 나가는 교회에 부흥사경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미국 선교사님이 오셔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백집사님이 나가는 교회는 조그마한 오막살이 교회였습니다.
폐가가 된 것을 수리해서 예배당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부흥회를 하면서 선교사님이 “이 교회도 성전 건축을 해야겠습니다.
주님은 희생할 자를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서 주님을 위해서 희생할 사람은 없습니까?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서 얼마큼 희생하느냐에 따라서 주님은 여러분의 앞날을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했을 때. 이 백집사님이 그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합니다.
눈물이 쏟아졌다고 합니다.
‘나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시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에 대해서 내가 무슨 희생인들 못하겠느냐’ 이렇게 결심을 하고는 집회가 끝난 다음에 선교사님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선교사님 땅이 얼마나 있어야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선교사 말씀이 천 평의 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 미국 사람들은 교회를 지을 때, 땅을 넓게 차지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천 평을 이야기 했나 봅니다.
“또 성전 건축을 하는데는 돈이 얼마나 들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 얼마 얼마쯤 들겠습니다”하고 대답해 주시더랍니다.

그 백집사님이 집에 돌아와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다짐하는 기도를 했어요.
‘그래 이번에 내가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자, 주님께 한 번 멋지게 희생하고 그리고 내가 주님께 가자, 하루 세끼야 못 먹고 살겠느냐’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밭 중에서 제일 좋은 위치의 천 평을 떼어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논과 밭을 팔아서 성전 건축비로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다른 사람들은 바치고 싶어도 없어서 못 바치는데 제겐 바칠 것이 있어서 이렇게 바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주여 감사합니다.”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를 건축하다가 보니 건축비가 모자라게 되었습니다.
결국 할 수 없어서 백집사님이 갖고 있는 집도 팔아서 그것을 건축비로 내놓았습니다.
이 백집사님이 순진해 가지고는 그 선교사님의 말에 그대로 순종해서 있는 집까지 팔아 가지고 그만 교회 건축비로 내놓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자기가 살 것은 남겨 놓고 바쳐야 되는데 그만 순진한 마음에 몽땅 다 바치고 말았습니다.

성전은 멋지게 지어졌는데 그만 이 백집사님이 농사를 짓고, 살집이 없게 되었습니다.
있을 거처도 없습니다.
교회를 아름답게 짓고 목사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부임해 오셔서 보니까 교회는 아름답게 지어졌는데 이 백집사님의 형편이 말이 아닙니다.
살길이 막막한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목사님이 백집사님 부부를 불러 놓고 “그러면 집사님, 교회에 들어와서 사시지요”라고 해서 백집사님이 교회 사찰로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자기 땅을 다 바치고 자기 집을 다 바치고 이제 교회 사찰로 봉사하면서 완전히 희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동네 사람들이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적당히 믿어야지 저렇게 미쳐서야 되겠느냐”고 “저렇게 빈 털털이가 되가지고 저거 무슨 꼴이냐”며 동네 사람들이 백집사님을 상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그런데도 백집사님 부부는 사찰로 살면서 두 부부가 교회 마루에 엎으려서 매일매일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날마다 엉엉 울면서 어깨를 들먹거리면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그 우는소리를 들으니까 얼마나 가슴이 뜨끔뜨끔하겠습니까?
백집사님 부부가 교회에서 엎드려 울면서 기도할 때마다 목사님 간이 콩알만해지는 것입니다.
“아이고 저 부부가 옛날 집과 농토를 다 바치고 저렇게 살길이 막막하니까 그게 안타까워서 우는가 보다 얼마나 그게 생각날까” 하고 그 기도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저 간이 콩알만해지는 것입니다.
그 부부가 무엇을 기도하는가 알고 싶어서 한 번은 몰래 가서 들어봤답니다.

이렇게 기도를 드리더랍니다.

“주님! 우리는 이대로 살다가 천국을 가면 됩니다.
주님 만나면 거기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러나 하나 밖에 없는 이 아들을 공부시킬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부모 때문에 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공부시킬 길을 막아만 놓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공부시킬 길이 없겠습니까” 하며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전 재산을 하나님께 몽땅 바치고 나니까 자식을 공부시킬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부모 때문에 자식의 장래를 막아 놓은 것 같아서 그게 안타까워 이 부부가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이 기도 소리를 듣고서는 너무나 감격해서 “그러면 내가 이 일을 해결해 주어야 겠다”고 생각하고서 친구 목사님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했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 옛날 기독교 초창기 때만 하더라도 목사님들의 생활이 다 어려웠습니다.
다 가난하고 그래서 아무도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문이 결국 목사님의 입을 통해서 어디까지 퍼졌느냐 하면 결국 서울까지 퍼지게 되고 연세 대학교 뒤에 선교사들이 살고 있는 곳까지 퍼졌습니다.
마침 백집사님이 있는 교회에 와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했던 그 선교사님의 귀에까지 이 소식이 들리게 되었습니다.

이 선교사님이 마침 안식년이 되어서 미국으로 들어가려고 귀국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급히 평양으로 가서 그 백집사님을 만나 보게 되었습니다.

“집사님 참 큰일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크게 기뻐하고 계실 것입니다.
천국 가셔도 집사님 내외분께는 큰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집사님 소원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 선교사님 제게 하나 밖에 없는 이 아들을 공부시키는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미국에 데리고 가서 공부를 시켜 주기로 하되 공부하는 동안 서로 절대 편지 왕래를 하지 않기로 하고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선교사가 이 백집사님의 외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시켰습니다.
미국에서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공부를 시키고 대학원까지 보내서 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프린스턴 신학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세월이 19년이 흘렀습니다.

서울에 있는 연세 대학교에서 한국인 총장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미국인 총장 언더우드 박사가 총장으로 계시다가 이제 한국에서의 일을 끝내고 미국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후임자로 총장 감을 찾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총장 감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총장이 되는 조건이 첫째, 목사이어야 되고, 둘째는 교수 신분이어야 하며, 그리고 박사 출신이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한국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세 대학에서 세계 각지로 수소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프린스턴 신학대학에서 한국인 목사로서 교수로 있고 박사 학위를 취득한 분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연세 대학교에서 사람을 보내어서 그분을 모셔 오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백낙준 박사였습니다.
바로 그 백사금 집사님의 외동아들이었습니다.
이분이 초대 연세 대학교 총장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십니다.

“주라 그러면 그러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누가복음 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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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황해도 두메산골에서 한 소년이 석양에 산을 바라보며 "도대체 저 산은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서 끝나는 것일까?" 라고 중얼거리고있었다.
그가 바로 고산자 김정호였다.
그는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이루 말할 수 없는 역경속에 일생을 보냈다.
수 만리를 걸어야 했고 굶주리며 길가에서 잠을 자고 모아놓은 자료를 몽땅 잃어버리고 병이 나서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아내의 만류에도 김정호는 "나는 평생 소원이 좋은 지도를 만들어 보는 것이요. " 하며 20년 동안 전국을 세 번이나 돌고 백두산을 일곱 차례나 오르내렸다.

김정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아내는 이미 죽고 딸만 혼자서 외로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김 정호는 딸의 도움을 받아 판목을 하나씩 새겼으며 10년 후에는 판목을 완성하였고 1861년 철종 12년에는 종이에 찍어냈다.

절망의 시간에 지지 말고, 끝까지 견디어 승리의 면류관을 얻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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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남대문교회 고 배명준 목사

목사님이 어린 시절 마을에서 섬기던 '부근나무' 경상도 지방에서는 '당수나무'라고 합니다.
황해도 지방에서는 "부근나무"라고 한다고 합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숭배하는 나무가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성경책을 찢어서 풀을 칠한 후에 나무에 붙였다고 합니다.
다음 날 마을 사람들이 '부근나무'을 보더니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는가?" 하며 그 일을 행한 사람을 찾았는데 마침 배씨 집안의 아들이 그와같은 일을 하였다는 것을 알고 그 마을에서 추방했다고 합니다.

갑자기 마을에서 쫓겨난 배씨 집안의 가족들은 당장 먹을 것도 거주할 곳도 없어 난감하던 차에 마침 평양에 있던 선교사가 그 이야기를 듣고 찾아와서 예수님 때문에 쫓겨났으니 선교사가 책임을 질 것이라고 하여 배씨 가족들을 보살피며 나중에 어린 소년을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 신학을 공부케 하고 결국은 목회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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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채필근목사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교회를 순회하는 채필근 목사님은 가끔 선교부 돈을 가지고 각 교회에 나누어주곤 했다.
한번은 돈을 잔뜩 넣고 순회하는 도중 외딴 곳에 이르러 객주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손님들이 많아서 둘이 묵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서로 잠자리에 누웠으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혹시 저놈이 내 가 잠든 사이에 돈을 훔쳐가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난 다음날 주인이 차려다 준 상에서 겸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둘은 할 수 없이 서로 마주 앉아 식사기도를 하고 식사를 했다.
그랬더니 마주 앉았던 사람이 "선생님, 예수 믿는 어른입니까?" 해서 "네, 저는 채필근 목사입니다. " 했다.
그는 깜짝 놀라면서 "저는 0 0 교회 장로입니다. "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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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유관 - 감사와 청빈

김동인의 사초집을 보면 고려 말년인 1430년경 과거에 급제하여 세종대왕 때에는 우의정을 지낸 바 있는 유관이란 사람은 그의 생활이 청빈하였을 뿐만 아니라 감사하기를 잘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그가 청빈한 생활을 하였던지 우의정을 지내기 전까지만 해도 자기 집 하나도 변변한 것을 갖지 못하고 동대문 밖, 그것도 울타리와 대문도 없는 초가집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제때 지붕을 덮지 못하여 군데군데 하늘이 보일 만큼 구멍이 뚫어져 있었기 때문에 비가 오면 새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러나 유관은 조금도 불평하는 일이 없이 매사에 감사하였다.
5, 6월 장마철이 되어 비는 매일같이 내리고 방 안에는 편히 누울 곳도 없이 빗방울이 소리를 내며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유관 부부는 비가 새지 않는 곳으로 이리저리 옮겨 앉으며 비를 피하다가 나중에는 너무도 많은 비가 쏟아지므로 우산을 받쳐들고 마주 앉아서야 겨우 비를 피하게 되었다.
한참이나 소동을 벌인 후 기가 막혀 화가 나 있는 아내에게 유관은 위로하여 말하기를, "여보! 그래도 우리는 우산이 있으니 이와 같이 심한 비를 피할 수라도 있는 것이 아니오. 우리처럼 우산도 없는 집이야 지금 이 비에 오죽이나 하겠오. 그러니 감사하십시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불행 중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이 끝내 성공할 수 있음을 알게 하는 말이다.

S. 존슨이란 사람은 말하기를 "감사하는 마음은 높은 교양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서 저속한 인간에게서는 이것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

프랑스 혁명사를 집필하여 그 이름을 전 세계에 떨친 영국의 역사가이며 평론가인 칼라일은, "나는 암흑을 사랑하고 암흑 속에서 살았으며 죄인들의 괴수로 빛을 미워하고 경건한 생활을 비웃었으나 하나님은 나에게 풍성한 자비를 베푸셨으므로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노라."고 하였던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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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애가승무노인탄(哀歌僧舞老人歎)



이조 숙종대왕때의 일입니다.
그때에「哀歌僧舞老人歎」이란 말이 있는데 무슨 뜻인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숙종 대왕은 간간이 야간에 민정 시찰을 다니셨습니다.
어느 날 밤도 역시 신하를 한 사람 데리고 민정시찰을 나와서 어느 골목을 들어가니까 초라한 어느 오두막집에서 불빛이 새나오는데 노인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장고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노랫소리도 들립니다.
문틈으로 드려다 보니 노인은 초라한 밥상을 앞에 놓고 울고 있고, 아들인 듯한 젊은 아들은 장고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머리를 깎은 여승은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하도 이 광경이 기이하여 주인을 찾아 물어보니 기막힌 사연을 이야기 해 주는데 참으로 가상하기 이를 데 없는 사연이었습니다.
그 사연인즉슨 그날이 아버지의 생일인데 끼니가 없어 며느리가 머리를 잘라 팔아 가지고 시아버지의 생일 상을 보고 아버지 기뻐하시라고 아들이 장고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니 며느리가 춤을 추는데 이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목이 메어 밥을 먹지 못하고 탄식하며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임금은 말하기를 자신은 지금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인데 그 아들보고 내일 과거를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은 출제를 한 것이 바로「애가승무노인탄」이란 문제를 냈습니다.
그 뜻이 바로 "슬픈 노래를 부르는데 승려와 같이 머리를 깎고 춤을 추고 노인은 탄식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은 바로 자기의 어제 저녁 일이 시험문제에 나왔기 때문에 장원급제를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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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공짜 복음

한 생선 장수가 추운 겨울에 어떤 동네에 가서 생선을 사라고 외치고 다녔다.
그러나 아무리 돌아다녀도 누구 한 사람 값조차 묻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가장 큰 대문 집에 이르렀을 때 한 신사가 나와서 생선을 보더니 "그 생선 전부 얼마요?"하고 물었다.
생선 장수가 "네, 10만 내십시오" 하니 "자, 생선 값 외에 5만원을 더 줄테니 이 생선을 집집마다 골고루 나누어주시오." 하면서 돈을 지불하였다.
생선 장수는 뜻밖의 횡재에 기뻤다.
그래서 동네에 다니면서 "자, 거저 주는 생선이요. 거저 주는 생선.."하고 외쳤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받으려 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생선 장수를 미친 사람이라고 비웃기까지 했다.
생선 장수는 하는 수 없이 신사에게 도로 갖고 와서 "아무리 거저 준다고 해도 받으려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신사는 "그럼 나와 함께 다녀 봅시다."하여 둘이서 "거저 주는 생선이요. 누구든지 와서 받아 가시오."하고 외쳤으나 역시 아무도 나오는 이가 없었다.
그러던 중 어떤 작은 아이 하나가 와서 생선을 달라고 했다.
그들은 큼직한 것으로 집어 주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그제서야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생선을 받아갔고 생선을 금새 동이 났다.
어떤 부인이 다가와서 "누구는 주고 나같이 구제 받을 사람은 왜 안 주는 거요?"하며 불평하였다.
생선 장수가 그 부인을 보고 "아까는 미친놈이라고 욕을 하더니 왜 이제 와서 불평을 하는 거요?"하자 그 여인은 얼굴이 붉어지며 돌아가 버렸다.
생선 장수가 신사에게 물었다.
"생선을 사서 동네 사람들에게 거저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동네는 가난한 동네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아무리 생선 사라고 외쳐도 사먹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도울 겸 동네 사람들에게 선사도 할 겸해서 생선을 다 사서 나누어 준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양식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복음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생선 장수처럼 외치고 또 외쳐야 한다.
"거저 주는 생선이요. 누구든지 받아가시오!"
"거저 주는 복음이요. 누구든지 받아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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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정동교회의 빚

1914년 당시 정동교회는 미화로 200달러 정도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빚은 1893년에 시작한 교회 건축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목사님은 빚을 갚기 위해 헌금을 하자고 했지만 그날 걷힌 헌금은 50달러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교인은 이화학당 학생이 많았습니다.
기숙사로 돌아온 학생들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바치기로 의논하고 주일 저녁 교회에 다시 모였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찬송을 부른 후 한사람 씩 나와 가진 것을 바쳤습니다.
동전 17달러 정도, 반지 35개, 손거울, 자명종 2개, 양먈, 내의, 구두, 혼수감으로 어머니가 주신 붉은 명주도 있었습니다.
어떤 여학생은 댕기머리를 잘라서 주님께 드린다며 내어 놓았습니다.
그날 그 교회의 빚은 해결되었습니다.
빚 바랜 이화여대 학생들의 요즘 세태에 비기면 고전소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누가 주의 일에 더욱 힘쓸 수 있습니까?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누가 자신의 댕기머리를 잘라서 드릴 수 있습니까?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한평생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서 교회 섬기고 직분 감당하고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내 대신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오! 주여,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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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남대문교회 김성섭장로님

장로님은 마포에서 공덕의원을 운영하셨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남대문교회 주일학교 부장으로 섬기셨던 장로님입니다.
제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는 주일학교 반사가 되어 장로님과 함께 주일학교에서 섬기고 있었을  무렵
어느 주일에 교사회 시간에 늦게 되었는데 교회 문앞에서 교사들을 기다리시던 장로님께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나를 부르시더니
"이선생, 아침도 먹지 못하고 오느라고 수고하네" 하시며 지갑을 열어 돈을 주시며 다음 주일부터는 아침을 먹고 택시를 타고 오라고 하신다.
인품으로나 모든 생활에서 이러한 인격을 소유한 장로님이 그리워진다.

내가 어렸을 때 그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진료를 받으면 진료비를 오히려 내 호주머니에 넣어주셨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열심히 공부하라며 영어사전과 한영사전을 선물로 주시기도 하셨다.
오늘날 이러한 섬김의 본이 되시는 장로님을 그리워하는 것은 교회가 너무 변질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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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강남제일병원장 최낙원 박사

60년대 겨울,
서울 인왕산 자락엔 세칸 초가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그날그날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빈촌 어귀에 길갓집 툇마루 앞에 찜솥을 걸어 놓고 만두 쪄서 파는 조그만 가게가 있었습니다.  
쪄낸 만두는 솥뚜껑 위에 얹어 둡니다.  
만두소 만들고 만두피 빚고 손님에게 만두 파는 모든 일을 혼자서 다 하는 만두가게 주인 이름은 순덕 아지매였습니다
입동 지나자 날씨가 제법 싸늘해 졌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어린 남매가 보따리를 들고 만두가게 앞을 지나다가  추위에 곱은 손을 솥뚜껑 위에서 녹이고 가곤 했습니다.  

어느 날 순덕 아지매가 부엌에서 만두소와 피를 장만해 나갔더니 어린 남매는 이미 떠나서 골목길 끝자락을 돌고 있었습니다.  
얼핏 기억에 솥뚜껑 위에 만두 하나가 없어진 것 같았습니다,  
남매가 가는 골목길을 이내 따라 올라갔습니다.  
저 애들이 만두를 훔처 먹은 것 같아 혼을 내려고 했었습니다.
그때 꼬부랑 골목길을 막 쫓아 오르는데, 아이들 울음소리가 났습니다.
바로 그 남매였습니다,  흐느끼며 울던 누나가 목 멘 소리로 말했습니다.  
"나는 도둑놈 동생을 둔 적 없어. 이제부터 누나라고 부르지도 말아라."
예닐곱 살쯤 되는 남동생이 울며 말했습니다.  
"누나야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담 옆에 몸을 숨긴 순덕 아지매가 남매를 달랠까 하다가 더 무안해 할 것 같아 가게로 돌아 왔습니다.  
이튿날도 보따리 든 남매가 골목을 내려와 만두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누나가 동전 한 닢을 툇마루에 놓으며 중얼 거렸습니다.  
"어제 아주머니가 안 계셔서  외상으로 만두 한 개 가지고 갔구먼요."  
어느 날 저녁 나절 보따리 들고 올라가던 남매가 손을 안 녹이고 지나 치길래 순덕 아지매가 남매를 불렀습니다.  
"얘들아  속 터진 만두는 팔 수가 없으니  우리 셋이서 먹자꾸나."   
누나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맙습니다만 집에 가서 저녁을 먹을래요."  하고는 남동생 손을 끌고 올라 가면서
"얻어 먹는 버릇 들면 진짜 거지가 되는 거야. 알았니?" 하는거였습니다.  
어린 동생 달래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찬바람에 실려 순덕 아지매 귀에 닿았습니다
어느 날 보따리를 또 들고 내려가는 남매에게 물었습니다.
"그 보따리는 무엇이며 어디 가는 거냐?"  
누나 되는 여자 아이는 땅만 보고 걸으며 "할머니 심부름 가는 거예요."  
메마른 한마디 뿐이었습니다.
더욱 궁금해진 순덕 아지매는 이리저리 물어봐서 그 남매 집사정을 알아냈습니다.
얼마 전 이곳 서촌으로 거의 봉사에 가까운 할머니와 어린 남매 이리 세 식구가 이곳으로 이사와 궁핍 속에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할머니 바느질 솜씨가 워낙 좋아 종로통 포목 점에서 바느질 꺼리를 맡기면 어린 남매가 타박타박 걸어서 자하문을 지나 종로 통까지 바느질 보따리를 들고 오간다는 것입니다.  
남매의 아버지가 죽고 나서 바로 이듬해 어머니도 유복자인 동생 낳다가  그만 모두 이승을 갑자기 하직했다는 것입니다,  
응달 진 인왕산 자락 빈촌에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남동생이 만두 하나 훔친 이후로도 남매는 여전히 만두가게 앞을 오가며 다니지만.  
솥뚜껑에 손을 녹이기는 고사하고 아예 고개를 돌리며 외면하고 지나 다니고 있었습니다
"너희 엄마 이름 봉임이지 신봉임 맞지?"  
어느 날 순덕 아지매가 가게앞을 지나가는 남매를 잡고 물었습니다.  
깜짝 놀란 남매가 발걸음을 멈추고 쳐다 봅니다.  
"아이고 봉임이 아들딸을 이렇게 만나다니  천지 신명님 고맙습니다."
남매를 꼭 껴안은 아지매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합니다, 
"너희 엄마와 나는 어릴 때 둘도 없는 친구였단다.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고. 
너희 집은 잘 살아 인정 많은 너희 엄마는 우리집에 쌀도 퍼담아 주고 콩도 한 자루씩 갖다 주었단다."
그날 이후 남매는 저녁 나절 올라갈 때는 꼭 만두가게에 들려서 속 터진 만두를 먹고,  순덕 아지매가 싸주는 만두를 들고 할머니께 가져다 드렸습니다.  
순덕 아지매는 동사무소에 가서 호적부를 뒤져 남매의 죽은 어머니 이름이 신봉임 이라는 것을 알아냈고.  
그 이후로 만두를 빚을 때는 꼭 몇개는 아예 만두피를 일부러 찢어 놓았습니다.  
인왕산 달동네 만두 솥에 속 터진 만두가 익어갈 때 만두 솥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30여 년 후 어느 날 만두가게 앞에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서고 중년신사가 내렸습니다.   
신사는 가게 안에 꾸부리고 만두 빗는 노파의 손을 덥석 잡습니다.  
신사는 눈물을 흘리며 할머니를 쳐다봅니다,     
"누구 이신가요?"   
신사는 할머니 친구 봉임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만두집 노파는 그때서야 옛날 그 남매를 기억했습니다.  
두 사람은 말없이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명문 미국대학 유학까지  다녀와 병원 원장이 된 봉임의 아들  최낙원  강남제일병원 원장입니다.

* 이 글을 읽고 오늘 아침도 감동의 눈물로 하루를 출발합니다.

누나의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운 품격 있는 가치관,
그리고 만두가게 주인의 고상한 품격에 고개 숙여집니다.

화려한 학력과 경력이 과연 이들의 삶에 비교 우위에 있었을까요?
우리 주변에서 오늘날도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훗날 쓰여질 수 있는 일들이
혹시나 나 자신이나 주위에 있는지 묻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이 세상 아이들도 모두 이런 아이들로 성장할 수 있을런지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또한 내 이웃은 누구인가?
내 친구는 누구인가?

사람이 60세를 넘기면 살아온 나이를 세지 말고
내 주위에 술 한 잔이나 싸구려 음식 하나라도
가끔 함께 먹을 친구나 이웃이 몇 명이나 되는지 세어 보아야 한답니다.  

많을수록 인생성공 아니지만
그래도 인생을 이기적으로 헛되이 살지 않은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강남제일병원장 최낙원 박사의 실화 눈물 어린 감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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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김창인 목사의 설교 속에 등장하는 실화이다.

이북의 남포에 예배당이 한 곳도 없을 때의 이야기이다.
선교사들이 평양에 와서 교회를 세우고 선교하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평양에는 교회가 한두 곳 있었다.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서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던 한 부인이 평양에서 남포로 이사를 했다.
문제는 남포에는 교회가 없으니 주일날이면 평양으로 예배드리러 간다.

그것도 주일날 가는 것이 아니라 토요일에 미리 가는데 소달구지를 타고 간다.
소달구지는 사람의 걸음보다도 느리다.
그렇게 토요일 올라가 잠을 자고,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저녁 예배까지 드린 후에 또 그 밤을 지내고 월요일에 다시 남포로 돌아왔다.
옛날 우리의 조상들은 주일 하루를 지키기 위해서 이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그 부인의 평생소원이 하나 있었으니, 곧 남포에 예배당을 세우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의 힘 나의 재산을 가지고는 예배당을 지을 수 없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예배당을 하나 세워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1년이 가고 3년이 가고 5년이 가도 아무런 징조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부인은 인내로 기도를 끊지 않았다.

그날도 평양으로 예배를 드리러 가는데, 아들 두 형제를 데리고 갔다.
교대로 소를 몰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들이 빨리 가느라고 채찍을 휘두르며 소를 몰았다.
그렇게 하면 소가 빨리 가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길이 신작로일지라도 넓지는 않았다.
옆으로는 말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소를 몰던 아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고 소에게 채찍을 휘두르다가 그만 그 말을 때리고 말았다.
말이 깜짝 놀라서 뛰는 바람에 말을 타고 지나가던 나이가 제법 지긋한 사람이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경찰서로 갔지만 화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검찰로 넘어가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정에서 두 아들 중에서 도대체 누가 채찍질을 잘못해서 남의 말을 때려 떨어지게 하여 중상을 입혔는지가 문제였다.
둘이 한꺼번에 했을 리는 없고 진짜 범인을 잡아서 벌을 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때 형제 중에 형이 이렇게 대답한다.
“제가 했습니다. 저를 벌주십시오.”
그러자 이번엔 동생이 나서더니 “아닙니다.
그땐 형님이 자고 있었고, 내가 소를 몰고 있었으니 내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또 형은 아니라고 자기가 했다고 하고 동생은 또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검사는 어머니한테 “도대체 누가 잘못을 했습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나는 그때 너무 피곤해서 졸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아들이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기어이 벌을 주어야 한다면 작은아들을 벌주어 감옥에 보내십시오.”라고 말한다.
검사가 이상하다 생각되어 “왜 그렇습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답한다. “큰아들은 전처소생이요 작은 아들은 제가 이 집에 와서 낳은 친아들입니다.
그러니 전처소생은 가만히 놔두시고 내가 낳은 친아들을 벌주십시오.”

검사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날의 재판이 끝난 후에 검사가 부인에게 묻는다.
“당신 소원이 무엇입니까?”
어머니는 “나는 이렇게 평양으로 예배드리러 가지 않게 남포에 예배당을 하나 세우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만 해도 검사들이 괜찮을 때이다.
감동받은 검사는 자기 사재를 털어 남포에 예배당을 하나 세워 주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 참으로 묘하다.
1년, 3년, 5년,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렸는데 도움은 고사하고 어째서 예배드리러 가는 길에 그런 사고가 난단 말인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이럴 수 있느냐고, 다시는 예배당에 안 간다고, 그따위 하나님은 믿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었을 게다.

그런데 그 사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전화위복의 은혜를 주셨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섬기고 찬양하는 아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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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저자와 기록 연대

모세오경을 쓴 모세를 비롯해서,
구약성경은 대략 32명의 저자들에 의하여 기록되었고
신약은 바울을 포함하여 8명의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구약의 모세오경은 대략 주전1500년에 기록되었고
마지막책인 말라기는 주전 약400년에 기록되었다.
구약은 모두 1100여 년에 걸쳐 완성된 반면,
신약은 50여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전체 성경이 완성되는데는
구약에서 신약으로의 이행되던 시기인 400년을 포함하여
대략 1500년에서 1600년의 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여기서 주전은 기원전, B.C 이고 주후는 기원후, A.D 입니다.)

▶ 창세기

새벽을 깨우리로다 창세기(創世記) Genesis 06-06-2023(화) , 창세기 38-50장
오늘의 묵상 창세기(Genesis) 04-10-2023 / 06-06-2023(화)


1. 저자 : 모세
애급 궁중에서 양육을 받은 학자, 정치가, 장군이었다.
세상의 관념에 따르면 그는 종교 지도자였다. 

2. 장소 : 시내 산과 광야에서 기록


3. 시기 : 주전 4004년과 주전 1689년 사이에 발생한 것이며,
기록은 주전 1500년경에 했다.



▶ 출애굽기

1) 저자 : 성경의 처음 5권은 모두 모세가 쓴 것으로 `모세 오경`이라 불린다. 출애굽기 17장 14절과 34장 27절은 이 책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쓰도록 명하신 것임을 증명한다. 

2) 시기 : 이 책에서 기록한 사건들은 주전 1706년과 1490년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 레위기

1) 저자 : 이 책의 저자는 모세이다. 전체의 내용이 모두 모세에 대한 여호와의 `고하여 이름`, `분부`이다. 

2) 장소 : 장소는 시내 광야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곳에서 머물렀고 조금도 이동하지 않았다. 


3) 시기 : 이 책에 기재된 법도와 명령은 하나님께서 일 개월 반에 걸쳐 모세에게 분부하신 것으로 그 기간은 대략 이스라엘의 정월 일 일, 곧 회막이 건축될 때(출 40:2, 17, 레 1:1)부터 2월 20일, 즉 그들이 시내 광야를 떠날 때까지이다(민 10:11-12). 


▶ 민수기

1) 저자 : 모세가 기록하였다.
2) 장소 : 시내 산과 광야이다.
3) 시기 : 이 책에서 기록한 사건들은 주전 1490년부터 1451년 사이에 발생하였다.

▶ 신명기

1) 저자 :`신명기(Deuteronomy)`라는 단어는 `제 2의 율법`을 의미한다. 즉, `다시 말해 주는 것`, `되풀이해 말하는 것`, `다시 들려 주는 것`이란 뜻이다. 이 책의 저자는 하나님의 종인 모세가 분명하다. 처음에는 입으로 전하다가 이후에 책으로 쓴 것이다(1:3, 31:24-26 참조). 

2) 장소 : 이 책은 앞의 민수기의 마지막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이 두 권의 책의 기록 시기와 장소는 같다. 모두 출애굽 이후 제 40년이고 장소는 모압 평원이다. 


3) 시기 : 이 책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 시간은 약 사십 년으로 주전 1491년부터 주전 1451년까지이다. 


▶ 여호수아

1) 저자 : 여호수아서의 저자는 여호수아이며(1:1), 그의 이름은 `여호와 구원자`, `여호와의 구원`을 뜻한다(민 13:16). 

2) 장소 : 여호수아서를 쓴 장소는 모압 평지이다(신 34:8-9). 


3) 시기 : 이 책을 쓴 시기는 주전 1451년에서 1426년까지이다. 


▶ 사사기

1) 저자 : 사사기의 저자에 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으나 그것을 입증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많은 권위자들은 사무엘이 기록한 것으로 추정한다. 

2) 시기 : 사사기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는 주전 1425년경에서(여호수아의 죽음 후) 주전 1120년경까지(삼손이 죽었을 때―16:30-31)로 약 305년간이다. 다음 목록은 역사에 따른 연대순이다. ① 2:6-9(주전 1426년경) ② 1:1-36(주전 1425년경) ③ 2:1-5(주전 1425년경) ④ 2:10-13(주전 `) ⑤ 17:1-21:25(주전 1406년경) ⑥ 2:14-16:31(주전 `-1120년경)


▶ 룻기

1) 저자 : 룻기는 역사와 시기에 있어서 앞의 책 사사기와 다음의 책 사무엘서와 연관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무엘이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2) 시기 :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는 말씀에 따라(4:22) 저작 시기는 사사들의 통치 이후 열왕의 때다. 이 책에서 다루는 역사의 기간은 주전 1322년경부터 1312년경까지 약 11년 간이다. 기록한 역사는 모압과 유다에서 발생했다(1:1, 22). 


▶ 사무엘상

1) 저자 : 사무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들으심` 또는 `하나님께 구함`을 의미한다. 사무엘상 1장부터 24장까지는 사무엘이 쓴 것이다. 사무엘상의 나머지 부분과 사무엘하 전부는 선지자 나단과 선견자 갓이 썼다(대상 29:29). 

2) 장소 : 저술 장소는 에브라임과 유다였다. 


3) 시기 : 사무엘상`하의 저술 시기는 주전 1171년에서 1017년경이다. 


▶ 사무엘하

1) 저자 : 기록자들은 나단과 갓이었다. 

2) 시기 : 가나안 땅에서 주전 1056년부터 1017년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하였다.


▶ 열왕기상

1) 저자 : 열왕기의 저자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나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가 그 저자라고 생각한다. 

2) 장소 : 이 책은 아마 가나안 땅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3) 시기 : 열왕기상에서 기록된 것은 주전 1015년부터 897년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다.


▶ 열왕기하

1) 저자 : 예레미야가 이 책을 썼을 것이다.

2) 장소 : 아마도 가나안 땅에서 기록했을 것이다. 


3) 시기 : 이 책에 기록된 일들은 주전 896년부터 588년 사이에 일어났다. 


▶ 역대상/하

1) 저자 : 역대상`하의 저자는 아마도 에스라였을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역대하 36장 22절과 23절을 에스라 1장 1절에서 3절 상반절까지와 비교해서 보아야 한다. 이 두 부분이 반복된 것은 역대상`하를 에스라서의 저자인 에스라가 썼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2) 시기 : 상권은 주전 1056년에서 1015년까지 약 사십일 년이라는 기간을 포함하고 있는데, 열조의 계보를 포함하지 않는다. 하권은 주전 1015년에서 536년까지 약 사백칠십구 년이라는 기간을 포함하고 있다. 이 두 권의 책은 아마도 에스라가 포로됨에서 귀환한 후에 예루살렘에서 썼을 것이다


▶ 에스라

1) 저자 : 에스라서의 저자는 `도움` 또는 `돕는 자`를 의미하는 이름을 가진 에스라였다. 그는 아론의 자손으로서(7:1-5) 모세의 율법에 능한 제사장이요, 서기관이었다(7:6, 11-12). 

2) 장소 : 그의 책들은 예루살렘에서 기록되었다. 


3) 시기 : 이 책의 내용은 주전 536년부터 457년까지 약 팔십 년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 느헤미야

1) 저자 : 이 책의 저자는 느헤미야로 그의 이름은 `여호와의 위로`를 뜻한다. 그는 왕의 술 관원이었다(1:11하). 

2) 장소 : 이 책 전체는 느헤미야가 그의 대적들의 시험과 공격을 받는 가운데서 위로이신 하나님을 신뢰한 내용으로 예루살렘에서 기록되었다. 


3) 시기 : 이 책의 내용은 주전 446년부터 434년까지 약 십이 년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 에스더

1) 저자 : 에스더의 저자는 아마 모르드개였을 것이다(에 9:20, 23). 에스더의 삼촌인 그는 그녀를 양육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유대인들을 사랑한 자였다. 

2) 장소 : 아마도 수산 성에서 기록됐을 것이다.


3) 시기 : 이 책의 내용은 아하수에로가 통치하던 기간(주전 486-465년) 중 적어도 10년의 기간을 다룬다.


▶ 욥기

1) 저자 : 이 책의 제목은 저자인 욥의 이름을 따라 붙여졌다. 욥은 `미움을 받다`또는`핍박을 받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욥이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에게서 어떠한 고통을 겪었는지를 나타내 준다. 에스겔 14장 12, 14, 20절과 야고보서 5장 11절은 이 책을 욥이 썼다는 것을 확증해 준다. 

2) 장소 : 이 책이 쓰인 장소는 에돔에 속하는 우스 땅으로서(애 4:21) 아라비아 광야 서쪽이다. 


3) 시기 : 이 책이 쓰인 시기는 욥의 유목 생활(욥 1:3)과 그가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린 방식(욥 1:5, 창 22:13, 31:54)에 따르면, 주전 약 2000년경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시대이다.


▶ 시편

1) 저자 : 시편의 대부분을 다윗이 기록하였기 때문에 시편을 다윗의 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시편의 머리말에 따르면 다윗이 일흔 세 편을 기록하였고, 아삽이 열두 편을, 그리고 헤만과 에단이 각각 한 편씩을 썼다. 또 고라의 자손이 열 편, 솔로몬이 두 편, 모세가 한 편을 기록하였으며, 머리말이 없는 것도 오십 편이 된다. 머리말이 없는 것 중에서 몇 편 예를 들면 시편 2편(행 4:25), 95편(히 4:7), 96편(대상 16:23-33), 105편(대상 16:8-22)은 다윗이 기록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편을 썼지만, 그것은 모두 한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2) 장소 : 시편은 모세가 광야에서 기록한 90편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이스라엘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3) 시기 : 가장 초기의 시편은 주전 1500년에 모세가 쓴 것(시편 90편)이며, 마지막 시편은 137편일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포로로 잡혀간 뒤 기록한 것이다.


▶ 잠언

1) 저자 : 잠언은 현자들의 말을 모은 것이다. 주된 기자와 수집자는 솔로몬으로서 그는 삼천 개의 잠언을 지었다(왕상 4:32, 전 12:9 참조). 또한 히스기야는 25장에서 29장까지에 있는 열조들의 몇몇 잠언들을 추가하였다. 

2) 장소 : 잠언은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쓰였을 것이다.


3) 시기 : 솔로몬의 잠언들은 주전 1000년경에 쓰였고, 히스기야의 잠언들은 그로부터 약 삼백 년 후에 쓰인 것이다. 


▶ 전도서

1) 저자 : 전도서의 저자는 지혜로운 왕 솔로몬이다(1:1, 12, 12:9, 왕상 4:32).

2) 장소 : 그는 이 책을 예루살렘에서 썼다(1:1, 12). 


3) 시기 : 저작 시기는 주전 977년경으로 솔로몬이 타락한 후이다.


▶ 아가서

1) 저자 : 아가서는 솔로몬이 말년에 이스라엘에서 기록한 것으로 잠언이나 전도서보다 이해하기가 어렵다. 

2) 시기 : 솔로몬의 통치 시기는 주전 970-931년이었다


▶ 이사야

1) 장소 : 이사야서는 저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이다. 일반적인 성경 해석가들은 흔히 이사야를 선지자 중에서 가장 큰 선지자라고 칭한다. 그가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가장 상세하고 광범위하게 썼기 때문이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는 이스라엘 왕국의 선지자 아모스와 호세아, 그리고 유다 왕국의 선지자 미가와 동시대 사람이었다. 역사가였던 그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에 이르는 네 왕조에 걸쳐 가장 긴 기간 동안 선지자로서 사역했다(1:1). 유대인들 사이에서 믿을 만한 유전(tradition)과 2세기의 몇몇 랍비들의 저서에 따르면 그는 므낫세의 재위 기간에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다(왕하 21:16, 24:4, 마 5:12, 행 7:52). 

2) 장소 : 예루살렘에서 기록되었다.


3) 시기 : 이사야서는 주전 760년경부터 698년 사이이다.


▶ 예레미야

1) 저자 :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는 아나돗 사람이었다(1:1). 그는 제사장으로 태어났으며 요시야 왕 십삼 년에 선지자로 부르심받았다. 그는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힐 때까지 주님을 위해서 예언했다(1:2-3, 5-7). 그는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 중에서 가장 핍박을 많이 받은 선지자로 왕과 지도자들과 제사장과 백성들 중 소수를 제외하고 모두가 그를 반대하고 증오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체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특히 그의 예언에 관하여 그릇되게 말하고 반박했으며 아사랴와 요하난과 같은 친 애굽파들이 그를 억지로 애굽으로 가게 했다(43:2-7). 

2) 장소 : 이 책의 대부분은 유다에서 기록하였고, 마지막 장들은 애굽에서 썼다. 


3) 시기 : 그 기간은 주전 629년부터 588년까지이다


▶ 예레미야애가

1) 저자 : 예레미야 애가의 저자는 울며 애통해 하는 선지자 예레미야이다(대하 35:25 참조). 이 책은 한 때 예레미야서의 일부였으나, 어느 때부터인가 `예레미야 제 2권`으로 불렸다. 유대의 전통과 70인 역의 번역가들에 따르면 이 책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함락시킨 후에 예레미야가 기록하였다. 

2) 장소 : 이 책은 대부분이 예루살렘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 밖 골고다(갈보리로 불리기도 함) 맞은편에 예레미야의 동굴로 불리는 감춰진 동굴이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예레미야가 거기 앉아서 황무한 성을 바라보고 애통해 하면서 애가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3) 시기 : 이것으로 볼 때 그 책은 주전 588년에 쓰였을 것이다.


▶ 에스겔

1) 저자 : 에스겔은 부시의 아들로 제사장이었다(1:3). 에스겔이란 이름은 `하나님께서 강화하실 것이다` 혹은 `전능자가 너의 힘이다`를 의미하며, 부시는 `경멸받은`이라는 뜻이다.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멸받은 선지자 였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강화시키셨다. 

2) 시기 : 그는 사역을 주전 595년부터 574년까지 바벨론에서 수행하였다. 


▶ 다니엘

1) 저자 : 이 책의 저자는 유다 지파의 후손인 다니엘이다(1:6). 그의 이름은 `하나님은 심판자`라는 의미이다. 

2) 장소 : 이 일이 발생한 장소는 바벨론 성과 엘람 성 등이다. 


3) 시기 : 이 책의 내용이 포함하고 있는 시간은 약 73년간으로 주전 607년부터 주전 534년까지이다. 


▶ 호세아

1) 저자 : 저자인 호세아는 브에리의 아들이었다(1:1).
그의 이름은 `구원` 혹은 `여호와는 구원`을 의미한다.


2) 장소 : 그의 사역의 장소는 북이스라엘이었다.


3) 시기 : 호세아의 사역 시기는 주전 785년부터 725년까지 육십 년 동안이며, 그가 사역하던 때에는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 두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호세아의 사역의 대상은 음란하고 변절한 이스라엘 왕국이었다. 음란은 이스라엘의 상태를 말하며, 변절은 이스라엘의 위치를 가리킨다. 상태로 말하자면 그들은 간음했으며, 위치로 말하자면 그들은 변절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내인 이스라엘의 상황이었다.


▶ 요엘

1) 저자 : 요엘은 브두엘의 아들이었다(욜 1:1). 그의 이름은 `여호와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2) 장소 : 요엘은 이 책을 유다에서 기록하였다.


3) 시기 : 그 기간은 대략 주전 870년부터 865년 사이일 것이다.


▶ 아모스

1) 저자 : 히브리어에서 `아모스`는 `짐을 진 자`를 의미한다. 

2) 장소 :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의 벧엘에서 사역했다. 


3) 시기 : 아모스의 사역 시기는 주전 787년경이었고(1:1상), 그의 사역의 대상은 북이스라엘이었다(1:1하). 


▶ 오바댜

1) 저자 : 오바댜는`여호와의 종`을 의미한다. 

2) 시기 : 오바댜는 이 책을 아마도 주전 880년에 유다에서 기록했을 것이다. 


▶ 요나

1) 저자 : 히브리어로 요나는 `비둘기`를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나가 평강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비둘기처럼 나아가기 원하셨음을 상징한다. 

2) 장소 : 요나의 사역의 대상은 앗수르의 수도인 큰 성 니느웨 사람들이었으며, 사역의 장소 또한 니느웨였다.


3) 시기 : 요나의 사역 시기는 선지자 엘리사 시대인 주전 862년경이었다.


▶ 미가

1) 저자 : 모레셋 사람 미가는 유다 열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예언하였다(1:1). 그는 이사야와 호세아와 동시대 사람이었으며(사 1:1, 호 1:1), 아마도 아모스와도 동시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라는 뜻이다(7:18). 

2) 장소 : 유다에서 기록되었다.


3) 시기 : 이 책은 주전 약 750년에서 710년 사이이다.


▶ 나훔

1) 저자 : 히브리어에서 나훔이라는 말은`위로`와`보복`을 의미한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민 이스라엘을 위로하시고, 이스라엘의 원수 니느웨에게 보복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2) 장소 : 나훔의 사역 장소는 유다였다. 그는 큰 성 니느웨를 대상으로 사역했다. 바벨 성과 니느웨 성은 니므롯이 건축한 것으로(창 10:8-11) 바벨론과 앗수르의 수도가 되었다. 적그리스도의 첫 번째 예표인 니므롯은 하나님을 반대한 첫 번째 사람이었으며, 이 나라들 둘은 하나님을 반대하는 인류의 강한 예표들이었다.

시기 : 나훔의 사역 시기는 주전 713년경이었다. 그것은 앗수르 왕 산헤립이 이스라엘을 침략한 해였다. 

▶ 하박국

1) 저자 : 하박국이라는 이름은 `품에 안다`혹은`달라붙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품에 안기고 그분께 달라붙을 필요가 있다. 

2) 장소 : 그가 사역한 장소는 유다였다. 


3) 시기 : 하박국의 사역 시기는 주전 626년경이었다. 이것은 바벨론이 침입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간 시기와 매우 가깝다. 


▶ 스바냐

1) 저자 : 스바냐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숨겨 주신 자`혹은 `여호와께서 보배로 여기신 자`라는 의미이다. 

2) 장소 : 그는 유다와 수도 예루살렘을 대상으로 사역했다. 


3) 시기 : 스바냐의 사역 시기는 하박국과 예레미야의 시대인 주전 630년경으로 사역 장소는 유다였다.


▶ 학개

1) 저자 : 학개는 스가랴와 동시대에 살았으며(스 5:1), 다리오 왕 이 년에 하나님을 위해 예언하였다. 그의 이름은 `나의 절기` 혹은 `여호와의 절기`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가 일찍 고국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절기를 회복하기를 얼마나 사모했는가를 보여 준다. 

2) 시기 : 이 책에서 기록한 일들은 주전 약 520년에 예루살렘에서 석 달 스무나흘 동안에 발생한 것이다.


▶ 스가랴

1) 저자 : 스가랴는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슥 1:1)로서 포로된 땅에서 태어났다가 스룹바벨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다. 잇도는 돌아온 최초의 제사장 무리에 속해 있었다(느 12:4, 16). 그러므로 스가랴는 예레미야와 에스겔처럼 제사장 겸 선지자였다. 
잇도는 `정한 때`를 베레갸는 `여호와께 복을 받음`을, 스가랴는 `여호와의 기억하심을 입음`을 의미한다. 이 세 이름을 함께 모아 볼 때 `정한 때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고 기억하심`이란 뜻이 나타난다. 분명히 하나님은 정하신 날에 백성에게 복 주시고 기억하실 것이다. 

2) 장소 : 유다에서 기록했다. 


3) 시기 : 이 책은 주전 520년이다.


▶ 말라기

1) 저자 : 말라기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나의 사자(使者)`를 의미한다. 이는 말라기가 여호와의 말씀을 그분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사역하는 하나님의 사자였음을 나타낸다. 

2) 시기 : 그의 사역 시기는 주전 400년경으로서 느헤미야 시대였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상으로 사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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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 마태복음

1. 저자 : 레위라고도 불리는 마태는 세리였는데 사도가 되었다(9:9, 눅 5:27).
이것은 9장 10절의 `그 주인`과 10장 3절의 `세리`라는 특별한 언급에 의해 증명된다. 


2) 장소 : 유대 땅일 것이다.


3. 시기 : 주님께서 부활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은(28:15) 주후 37년과 40년 사이,
성전이 파괴되기(24:2) 전에 유대 땅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평범한 유대인들을 위해서 기록되었다.
왜냐하면 이 책에는 유대의 관습과 절기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 마가복음 /

오늘의 묵상  - 마가복음(Mark) 06-07-2023 /  06-24-2023

새벽을 깨우리로다 마가복음(Mark) 06-08-2023(금) / 06-24-2023(토)

1. 저자 : 요한이라고도 불리는 마가(행 12:25) 

그는 여러 마리아들 중 한 마리아의 아들이자, 바나바의 조카(골 4:10)
그는 바나바와 사울의 사역에 동행했는데(행 12:25)
바울의 첫 번째 이방을 위한 사역 여행에 함께했다가 버가에서 그를 떠나 돌아왔다(행 13:13).
그 때문에 바울의 두 번째 여행에는 거절당했다.
그러자 마가는 바나바와 함께 일하러 갔다.
이 시점에서 바나바는 바울과 갈라섰다(행 15:36-40).
그러나 마가는 바울의 후반기에 이르러 그와 가까웠으며(골 4:10, 몬 24절),
바울이 순교할 때까지 그에게 유용했다(딤후 4:11).
베드로가 그를 아들로 간주한 것으로 보아(벧전 5:13) 아마도 그는 베드로와도 줄곧 가까웠던 것 같다. 

2. 장소 : 로마(딤후 4:11)


3. 시기 : 주후 67년에서 70년 사이에 쓰였다.

13장 2절의 내용은 이 책이 성전의 파괴전, 아마도 사도 바울의 죽음 후에 기록되었음을 증명한다.
마가의 책은 유대의 이름과 관습과 절기들을 많이 설명한다(3:17, 5:41, 7:3, 11, 14:12, 15:42).
이것은 이 책이 이방인들, 특히 로마인들에게 쓰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마가복음을 상징하는 형상은 "송아지" 또는 "황소"라고 한다.
송아지와 황소는 종(노예)을 상징하므로 마가복음의 수신자들은 로마에 흩어져 살아가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다.
당시 세계는 로마가 패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만일 예수께서 이 세상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라고 강조한다면 마치 로마 정부에 대한 반역을 일으킬 수 있다는 오해를 일으키게 되므로 메시아는 종으로 오신 예수라고 강조하였다.

▶ 누가복음

1. 저자 : 초대 교회는 누가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로 간주했다.
이 두 책의 문체와 작문을 볼 때 누가가 저자임이 분명하다.
누가는 의사였으며 아마도 아시아계 헬라인이었을 것이다(골 4:14).
그는 드로아에서부터 바울의 사역에 동참했으며,
바울의 세 차례 사역 여행에 동행했다(행 16:10-17, 20:5-21:18, 27:1-28:15).
그는 바울이 순교할 때까지 그의 신실한 동반자였다(몬 24, 딤후 4:11).
그러므로 그의 복음은 마가가 베드로의 관점을 대표한 것처럼,
바울의 관점을 나타냈을 것이다. 


2. 시기 : 사도행전이 쓰이기 전인, 주후 약 60년,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의 감옥에 있을 때 썼을 것이다.
이 책은 데오빌로에게 보내졌다(1:3).


▶ 요한복음

1. 저자 : 사도 요한이 기록했다(21:20, 24).
그는 세베대의 아들이었고(마 10:2),
그의 형은 야고보, 어머니는 살로메였다.
살로메는 주님을 따르고 섬기던 자매이다(마 27:55-56, 막 15:40).


2. 장소 : 에베소


3. 시기 : 주후 약 90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유대와 이방의 모든 믿는 이에게 쓴 것이다.
1장 38절과 5장 2절, 그리고 19장 13절의 설명으로 보아 이것을 알 수 있다. 


▶ 사도행전

1. 저자 : 이 책은 바울의 동역자였던 누가가 자신의 여행 기록을 기초로 해서 기록한 것이다. 

2. 장소 : 이 책은 아마도 로마에서 기록됐을 것이다(몬 24, 딤후 4:11).


3. 시기 : 완성 시기는 아마 이 책에 쓰인 사건들이 끝난 직후인 주후 67년과 68년 사이로 추정된다(1:1).
수신자는 데오빌로였다(1:1, 눅 1:3).


▶ 로마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 : 고린도


3. 시기 : 이 책은 사도 바울이 주후 60년경 제3차 전도 여행이 끝날 무렵,
고린도에서(15:25-32, 행 19:21, 20:1-3)
3개월간 머무는 동안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1:7) 쓴 것이다.


▶ 고린도전서

1. 저자 : 사도 바울(1:1, 9:1-2)

2. 장소 : 에베소(행 19:21-22, 고전 16:3-8, 19)


3. 시기 : 부르심받은 지 이십오 년 후(행 9:3-6, 15-16),
이방인들에게 보내심을 받은 지는 십사 년이 지났을 때(행 13:1-4, 9) 이 서신을 썼다.
대략 주후 59년경이라고 보는데
그 시기는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렀던 삼 년간의 기간이 끝나갈 무렵이다(행 20:31, 고전 16:8)


▶ 고린도후서

1. 저자 : 사도 바울(1:1). 

2. 장소 : 마게도니아(7:5-6, 8:1, 9:2, 4).


3. 시기 : 대략 주후 60년경으로 로마서를 쓰기 이전이다.
고린도후서 2장 13절을 볼 때,
이 서신은 바울의 제 3차 전도 여행 때 에베소에 체류한 후 마게도니아에서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 갈라디아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 : 고린도, 바울이 일 년 반 동안 거기에서 머무는 중에 썼을 것이다(행 18:1-11). 


3. 시기 : 대략 주후 54년경 바울이 두 번째 전도 여행을 하는 동안,
곧 갈라디아를 통과하여 여행하고 고린도에 도착한 후에 썼을 것이다


▶ 에베소서

1. 저자 : 사도 바울(1:1)

2. 장소 : 로마, 그때 바울은 투옥되어 있었다(엡 3:1, 4:1, 6:20, 행 28:30). 


3. 시기 : 대략 주후 64년경


▶ 빌립보서

1. 저자 :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바울과 디모데(1:1)

2. 장소 : 로마, 바울은 그때 투옥 되어 있었다(빌 1:13, 행 28:30). 


3. 시기 : 대략 주후 64년경,
아마도 에베소서를 쓴 다음에 이 서신을 썼을 것이다(1:25, 2:24 참조).


▶ 골로새서

1. 저자 : 사도 바울과 형제 디모데

2. 장소 : 로마 감옥


3. 시기 : 주후 64년에 빌레몬서와 거의같은 시기에 썼다(4:9-10, 몬 10-12).


▶ 데살로니가전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 :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동역자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함께 고린도에 머무르면서(1:1, 3:6, 행 18:1, 5) 쓴 것이다.


3. 시기 : 주후 54년경


▶ 데살로니가후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와 시기 : 데살로니가후서는 전서와 같은 장소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연이어 기록되었다.
주후 54년경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동역자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함께 고린도에 머무르면서(1:1, 3:6, 행 18:1, 5) 쓴 것이다


▶ 디모데전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와 시기 : 바울이 로마의 첫 번째 투옥에서 풀려난 뒤인 주후 65년경,
즉 바울이 처음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후에 마게도니아(1:3)에서 썼다.


▶ 디모데후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와 시기 : 바울이 순교 직전인 주후 67년경,
2차 투옥시 로마 감옥에서 썼을 것이다


▶ 디도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 : 1장 5절과 3장 12절을 볼 때 기록 장소는 니고볼리


3. 시기 : 대략 주후 65년경 바울이 첫 번째로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후
그레데를 거쳐 니고볼리에 도착했을 때(1:5, 3:12) 썼을 것이다.


▶ 빌레몬서

1. 저자 : 사도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1절).

2. 장소 : 로마 감옥


3. 시기 : 대략 주후 64년경,
바울이 처음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나기 바로 전에(9, 22절) 썼을 것이다


▶ 히브리서

1. 저자 : 바울을 저자로 추정할 수 있다.
13장 23절에서 디모데를 언급한 것과 분위기로 보아 그가 저자임을 알 수 있다. 


* 전통적인 입장은 저자를 알 수 없다고 한다.

2. 장소와 시기 : 사도 바울이 로마 투옥에서 풀려난 후인
주후 67년경 밀레도에 머물 때(딤후 4:20 참조) 기록했을 것이다.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13:24)이라는 언급에서 이 책은 로마에서 쓰지 않았다는 것을 본다.
내용에 따르면 이것은 분명히 히브리 신자들에게 쓴 것이다.


▶ 야고보서

1. 저자 :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자,
주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1:1, 마 13:55)인 야고보가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쓴 것이다(1:1). 


2. 장소 : 야고보가 어느 때 예루살렘을 떠났다는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이것은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쓰였을 것이다.


3. 시기 : 그 내용에 교회의 하락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주후 50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 베드로전서


1. 저자 : 사도 베드로가 이방 나라들에 흩어져 있는 유대 믿는 이들에게 쓴 것이다(1:1). 

2. 장소 : 유프라테스 강의 큰 도시인 바벨론에서 이루어졌다(5:13). 


3. 시기 : 바울의 순교 이전임이 분명하다(5:13).
그러므로 이것은 주후 64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 베드로후서

1. 저자 : 사도 베드로가 이방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의 믿는 이들에게 쓴 것이다(벧전 1:1). 

2. 시기 : 2장의 교회의 타락한 상태와 3장 15절에서 16절의 사도 바울에 관한 천거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바울의 순교 후인, 아마도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함락 전인 주후 69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순교 직전에 기록되었음이 틀림없다(1:14).


▶ 요한일서

1. 저자 :사도 요한
이 서신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은 모든 믿는 이들에게 쓴 것이다(5:11-13).


2. 장소와 시기 : 교회 역사와 이 서신 전체의 내용에 따르면 요한이 밧모 섬의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인
아마도 주후 90년과 95년 사이에 그가 마지막으로 사역했던 에베소에서 기록했음에 틀림없다.


▶ 요한이서

1. 저자 : 요한이 택하심을 입은 자매와 그녀의 자녀에게 쓴 것이다(1절).
2. 장소와 시기 : 요한일서 이후에 쓰여졌을 것이다(요한일서의 이 부분을 참고하라). 교회 역사는 이 책이 기록된 당시, 요한이 에베소의 장로였음을 명확하게 진술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에베소에서 기록됐음이 틀림없다


▶ 요한삼서

1. 저자 : 요한이 에베소의 장로였을 때, 그곳에서 가이오에게 쓴 것이다(1절)

▶ 유다서

1. 저자 : 주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였던 유다(마 13:55)

2. 장소 : 예루살렘이거나 유대일 것이지만 어느 곳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3. 시기 : 교회의 타락한 상태는 베드후서를 기록한 당시의 상태와 유사하므로 예루살렘이 멸망한 주후 70년 이전인 주후 69년경에 베드로후서와 거의 동시에 기록했을 수 있다.


▶ 요한계시록

1. 저자 : 사도 요한

2.  장소와 시기 :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을 당시인 주후 90년경에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1:1, 4, 9)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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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대순으로 성경 읽기












국가 기념주일 / 6. 25 한국전쟁,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




대한민국 5대 국경일(國慶日)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






한국전쟁 / 6. 25  73주년, 정전협정 70주년 한국교회 성명서

대한민국은 격변의 20세기 일제의 침탈 가운데 발아하여, 야만적 태평양 전쟁과 6.25 한국전쟁을 겪으며 자유민주주의를 기치로 성장했다.
이념으로 갈린 동족상잔의 6.25는 서로 무고한 생명을 살육하고, 아름다운 강산을 초토화한 슬픈 전쟁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전쟁을 기억하며, 전쟁 후 70년간 평화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또한 목숨을 바쳐 조국을 지킨 숭고한 참전 용사들에게도 머리 숙여 감사의 마음을 바친다.

한국교회총연합은 6.25 전쟁 73주년,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 기념 예배>를 드리며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첫째, 한국교회는 한반도의 지속적인 평화와 안정, 복음적 통일을 위해 기도한다.

모든 교회는 평화의 하나님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평화의 시간이 더 길어지도록 행동하며 기도할 것이다. 생명을 존귀히 여기는 복음으로 이념과 삶의 방식이 다른 이들과 대화하며 협력할 것이다.

둘째, 정치 지도자들은 남북의 평화로운 공존과 국민통합으로 남남갈등 해소에 앞장서야 한다.

헌법 제4조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는 조문대로 평화적 통일의 방법을 강구해야 하며, 작금의 지나치게 적대적인 남남갈등의 해소를 위해 행동할 것을 촉구한다.

셋째, 한국교회는 저출산과 기후 위기 극복, 이웃과 함께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이 당면한 저출산과 지구적 문제인 기후 위기는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라 국민과 함께 저출산과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며, 주변의 이웃을 돌아보는 사랑 실천에 앞장설 것을 다짐한다.













제헌절(制憲節) Constitution Day


제헌절은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제헌 헌법)이 제정, 공포된 것을 기념하는 대한민국 국경일이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지정하는 법정 국경일 가운데 유일하게 공휴일이 아닌 기념일이기도 하다.







제헌절 노래
정인보작사, 박태준작곡 1984년

비구름 바람 거느리고
인간을 도우셨다는 우리 옛적
삼백예순 남은 일이 하늘뜻 그대로였다
삼천만 한결같이 지킬 새 언약 이루니
옛길에 새 걸음으로 발맞추리라
이날은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다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
손 씻고 고이 받들어서
대계의 별들 같이 궤도로만
사사없는 빛난 그 위 앞날은 복뿐이로다
바닷물 높다더냐 이제부터 쉬거라
여기서 저 소리나니 평화오리다
이날은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다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



5대 국경일의 하나로 7월 17일이다.
조선왕조 건국일이 7월 17일로서, 이 날과 맞추어 공포하였다.

이 날은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한 헌법의 제정(7월 12일) 및 공포(7월 17일)를 온 국민이 경축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며 헌법수호를 다짐하는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온 국민은 가정에 국기를 게양하여 이 날의 뜻을 높이고 있다. 중앙기념행사는 생존하는 제헌국회의원과 3부요인을 비롯한 각계 대표가 모여 의식을 거행한다.




광복절 노래










한글날 노래







표적(세메이온) 기적(다우마) 기적(테라스)


성경 수비학이란 무엇인가요?

성경 수비학이란 성경에 나온 숫자를 가지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숫자는 7과 40입니다.

7이란 숫자는 완성, 또는 완벽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7:2-4, 요한계시록 1:20).
7이 자주 “하나님의 숫자”로 불려지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완벽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4:5, 5:1, 5-6).
숫자 3 또한 거룩한 완전성, 즉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이루어진 삼위일체를 생각나게 합니다.

숫자 40은 종종 “근신이나 시험의 숫자”로 이해됩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아다녔고(신명기 8:2-5),
모세는 40일 동안 산에 있었으며(출애굽기 24:18),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40일 이후에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 경고했고(요나 3:4),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시험 당하셨으며(마태복음 4:2),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사이에 40일이란 기간이 있었습니다(사도행전 1:3).

성경 속에서 반복되는 또 다른 숫자는 4인데, 이는 동, 서, 남, 북과 4계절을 가리키는 창조의 수입니다.
숫자 6은 인간의 수로 여겨집니다.
인간은 6일째에 창조되었고, 오직 6일만 일합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성경이 숫자를 사용해 무엇인가를 강조하는 또 다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적그리스도의 숫자가 666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숫자들이 정말로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여전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어떤 패턴을 가지고, 또는 영적 진실을 가르치기 위해 숫자를 사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성경 수비학”을 지나치게 중요시하고, 성경에 나온 모든 숫자들에 담긴 특별한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종종 성경 속의 숫자는 단순히 숫자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 속에서 비밀스러운 의미나 숨겨진 메시지, 암호를 찾아내라고 요청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모든 필요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고, 우리로 하여금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기에 충분한 숨김없는 진리들이 더 많이 담겨져 있습니다(디모데후서 3:16).
 

수비학 숫자와 그 의미

오늘날 수비학은 갑자기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세계에서 우승한 유명 인사들의 이름을 바꾸는 수많은 영화 스타들의 이름에 행운이 찾아옵니다. 이제 제대로 작동합니까? 우리는 역사의 다른 문화에서 숫자가 가진 중요성과 중요성을 볼 때 우리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숫자에는 모든 차이를 만드는 특정 진동이 있으며 수비학자가 이 숫자를 분석할 때 진동이 개인에게 미칠 영향을 평가합니다. 숫자와 의미를 하나씩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수비학 제로 (0)

0은 아무 의미도 없고, 무효이고, 공허하지만 강력한 숫자이며 신중하게 만들어진 상징적인 변경 사항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도교와 불교와 같은 믿음은 영적 공허함과 공허함을 나타내고, 이슬람과 카발리즘과 같은 믿음에서 0은 무한한 빛의 힘과 무한한 에너지의 상징을 의미합니다. 0은 본질적인 공허함, 모든 것의 기원, 생명의 알이 기원하는 완전한 원, 그리고 모든 존재의 전체성을 취합니다. 그것은 라틴어 nulla figura에서 파생되었으며, 이는 실제 인물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수비학 원 (1)

하나는 0 다음에 오고 2보다 앞에 오는 숫자입니다. 그것은 남성의 남근을 상징하는 표시이며 신과 하나가 됨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키며 남성적 힘의 우월성을 지지합니다. 그것은 화합의 본질과 삶의 주기의 시작에 대한 궁극적인 상징으로 간주됩니다. 그것은 모든 가능성과 모든 존재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이중성을 제거하는 숫자이며 모든 다양성이 숫자 1에 수렴한다고 믿어집니다. 그것은 완전한 완성과 히브리어와 같은 종교 질서를 볼 수 있으며 잠재 지능과 가장 높으신 분의 자리이며 아도나이와 동등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것은 이슬람 신앙에 대한 절대적인 숫자로 간주되며 피타고라스 학파는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믿습니다. 중국인은 가장 중요한 남성성을 유지합니다. 그것은 양, 천상의 그리고 상서로운 힘이라고 믿어집니다.

수비학 2(2)

이중성의 두 여신과 자연적으로 하나의 반대인 하나는 남성을 의미하고 둘은 반드시 여성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다양성, 변경 및 갈등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한 쪽에서 균형과 안정성을 예시합니다.
2는 화합의 반대와 일시적이고 파괴 가능한 것을 상징합니다. 두 개의 번호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경향이 있으며, 야망이 없고 불안하고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좋은 속성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데 좋고 협조적이고 선량한 성격을 좋아할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가 이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힌두교 신앙에서 두 가지는 힘의 이중성을 나타내고 히브리인들은 그것이 생명력을 상징한다고 믿습니다. 하나는 음양의 강력한 부분을 나타내고 두 개는 음의 약한 부분을 나타냅니다.


수비학 3(3)

3은 삼위일체, 우주의 3단계, 삶의 3단계, 간단히 말해서 성장, 절정 및 죽음을 포함하는 3단계를 나타냅니다. 숫자는 성장, 에너지, 이중성 및 표현 및 합성을 향한 움직임을 예시합니다. 그것은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 영혼 및 정신의 삼중 요소; 땅, 천국과 지옥과 탄생, 삶과 죽음은 모두 3으로 상징됩니다. 이 숫자를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매력적이고 자기 표현적이며 외향적이고 활동적입니다. 자연적인 욕망은 돈과 이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Three аlѕо는 thе 3명의 마녀와 3개의 소원과 같은 초자연적인 것과 강한 연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 전통에서는 제자들이 따르도록 요청한 믿음 또는 삼보(三寶)의 세 가지 보석이 있습니다. 중국 신화 3에 나오는 긍정적인 힘을 가진 상서로운 숫자입니다. 도교는 세 가지가 평형의 중심점이라고 믿습니다.


수비학 4(4)

4개는 3개를 성공하고 5개는 모든 단단한 물체의 기초로 간주됩니다. 그것은 네 번째 차원, 즉 시간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건설의 상징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안절부절, 순환성 및 역동성에 반대되는 안정적입니다. 그것은 전체성, 완성 및 견고성을 예시합니다. 수비학적 숫자가 4인 사람들은 현명하고 침착하며 꾸준합니다. 4는 지구, 물, 불, 공기의 네 가지 기본 요소를 나타냅니다. 북쪽, 남쪽, 동쪽 및 서쪽의 4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낙원에는 4개의 강이 있었습니다. 그리스 문화에서 4는 헤르메스의 신성한 숫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네 가지가 선행과 지성의 숫자라고 믿습니다. Four аlѕо는 Kabbalah의 4가지 세계를 나타냅니다. 힌두교의 경우 4개는 완벽을 나타내며 힌두교의 삼위일체 중 하나인 브라흐마는 4면을 나타냅니다. 도교는 탑, 칼, 스파이크 곤봉을 들고 있는 4명의 천상의 수호자가 있다고 믿습니다. 튜튼 사람들은 세상을 지지하는 네 명의 난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슬람에서는 우주의 본질, 창조자, 우주 영, 우주 영혼, 태초 물질의 4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많은 긍정적인 특성이 명시되어 있지만 네 가지와 같은 부정적인 특성은 사람들을 느리고 폭력적이며 의심스럽고 매우 보수적으로 만듭니다.

수비학 5 (5)

우리는 오감(五感)과 오감(五感), 그리고 다섯 개의 꽃잎이 있는 예수나 연꽃의 다섯 상처를 인지합니다. 5는 새로운 것, 탐험되지 않은 것, 그리고 변경 가능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소우주를 상징합니다. 여러 번 오각형은 두 손과 두 발을 가진 인간을 상징합니다. 오각형은 하늘, 땅, 네 가지 기본 점 및 중심점의 만남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우주의 창조주인 신회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명상, 종교 및 다재다능함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남성 섹슈얼리티의 상징이며, еvеrуthіng에게 끌리지만 іѕ аnуthіng에 의해 개최되지는 않습니다. 충동적이고 대담하며 참을성이 없습니다. 5번인 사람들의 특징적인 특성은 미개척이고 매우 외향적인 것을 아는 데 매우 호기심이 많습니다. 그들은 다재다능하고 수완이 있습니다. 그들은 규칙과 법률을 조작할 수 있고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지만 때때로 이것은 그들이 모든 거래의 잭이 되지만 아무도 마스터가 되지 못하게 합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다섯은 에덴 동산에서 타락한 후의 인간을 상징합니다. Graeco-Roman 문화에서 5는 사랑과 연합의 숫자입니다. 이 숫자는 금성을 의미합니다. 힌두 신화에서 5개는 필수 조합을 만들고 5개는 가혹함, 힘 및 두려움을 나타냅니다. 이슬람교는 다섯 가지 기본 교리와 이슬람교도가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는 다섯 가지 기둥을 믿습니다.

수비학 6 (6)

6은 완벽한 숫자로 간주되며 David와 결혼의 별과 관련된 숫자입니다. 여섯 аlѕ®는 조화, 안정성 및 균형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를 완성하는 데 6일이 걸렸습니다. 6개의 аlѕ®는 행운, 건강, 아름다움 및 기회를 나타냅니다. 주사위는 6면이 있으며 가장 높은 숫자는 6입니다. 힌두 신화에서 인기 있는 태양 바퀴에는 6개의 광선이 있습니다. 6번을 가진 사람들은 매우 긍정적인 환경을 가지고 있으며 관계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따라서 평화를 즐깁니다. 가치를 존중하고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을 즐깁니다. Kabbalism 6은 아름다움과 창조를 의미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그 숫자가 완성과 창조의 상징이며 하나님이 여섯째 날에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더 밝은 특성의 여섯 가지 특성은 더 어두운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완고하고, 비논리적이며, 편협하고 과도한 불안으로 고통받습니다.


수비학 7 (7)

Seven은 일곱째 날, 휴식과 예배의 날, 하나님의 미덕을 기억하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선물을 생각하는 날을 생각나게 합니다. 일곱 가지 성사, 일곱 가지 덕, 일곱 가지 죄, 일곱 가지 영의 선물과 같은 다양한 참조가 있습니다. 생명의 나무에는 7개의 가지가 있고 모든 가지에는 7개의 잎이 있습니다. 태양의 일곱 번째 광선은 인간이 죽은 후 천국에 도달하기 위해 가는 길입니다. 불교에서 일곱은 상승의 숫자이고 일곱 단계는 하나가 시간성을 초월하기 위해 취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 신화에서 7은 Fate의 7명의 여사제와 7명의 현자처럼 중요한 숫자입니다. 다산을 상징하는 여섯 마리의 소와 황소가 있습니다. 7은 달과 관련이 있으며, 이는 반사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아폴로의 악기에는 7개의 현이 있고 판에는 7개의 파이프가 있습니다. 히브리 문화에서 7은 신비로운 지능을 의미하며 유대 달력에서는 7일의 성일을 의미합니다. 이슬람에서는 7개의 하늘과 7개의 색과 7개의 땅과 바다가 있습니다. 일곱 개의 숫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영적이고 철학적이지만 외톨이가 되어 거리를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사적인 사람들이고 그들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민감하지만 공개적이지는 않습니다.

수비학 8 (8)

여덟은 부활의 상징이며 낙원의 회복입니다. 그것은 연대와 안정성을 유지하며 첫 번째 큐브이며 루트 구조에서 완벽함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영원, 무한 및 불멸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변환이 시작될 때 반대의 쌍과 비슷합니다. 팔각형은 원형이 되기 위한 정사각형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Fоr ѕоmе іt аlѕо는 리드미컬한 주기를 의미하며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인간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7일의 금식과 엄격한 참회 후에 인간은 8일째에 포만과 만족의 단계에 도달합니다. 불교도들은 8이 완성을 의미한다고 믿고 중국인들은 8이 전체를 의미한다고 믿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여덟은 중생과 중생의 숫자입니다. 이슬람은 하늘과 땅의 고삐를 쥐고 있는 여덟 명의 천사가 있다고 믿습니다. 일본인은 여덟이 풍요와 풍요의 숫자라고 믿습니다. 플라톤은 천국의 기둥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색상의 8개의 구체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8순위를 가진 사람들은 권력, 돈, 성공에 대한 야심 찬 야망을 품고 때로는 갑작스러운 성공이나 실패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때때로 권력에 대한 갈증은 그들을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만듭니다.

수비학 나인 (9)

9번은 완벽함과 총체성의 숫자입니다. 그것은 지구에 새로운 인간을 데려오기 위해 취해진 기간입니다. 그것은 완료, 성취 및 성취의 삼중 삼중화를 의미합니다. 3과 같은 숫자는 초자연적 인 의미가 있습니다. 0부터 시작하는 숫자 시리즈를 완성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불, 산 및 여성 그룹으로 그룹화 된 남성의 상징과 물 및 동굴과 같은 여성적 인 것을 그룹화 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히브리 신앙 아홉은 지능의 상징이며 순수하고 신비롭지 않습니다. Kabbalism에서는 9개가 기초라고 믿습니다.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아홉은 불의 숫자이며, 아그니입니다. 9번의 특징적인 특성은 동료 인간을 섬기고 사회적 대의를 위해 싸우고자 하는 강한 열망입니다. 9번의 연인이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관대하지만 나중에는 이기적이고 성격이 급한 사람들. 그들은 쉽게 상처를 받고 정서적 안정이 부족하기 때문에 조금 민감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수비학 10 (10)

10은 중생과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그것은 운명과 운명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분을 향한 영혼의 귀환과 하나가 되는 것을 표시합니다. 그것은 모든 계산의 기초이며 힌두교 우주론과 중국인의 기초 역할을 합니다. 중국어의 경우 셀 수 없는 것, 모든 것의 표현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창조의 본보기입니다. 중국 문화에는 십계명이 있고 기독교에는 십계명이 있습니다. 히브리 신앙에 대한 Aссоrdіng tо 요드의 숫자, 10은 영원한 단어, 신성의 첫 글자입니다. 10가지의 성격 특성은 매우 강력하고 때로는 가려집니다. 그들은 종종 지도자와 개척자입니다. 그들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길을 거의 막지 않습니다. 숫자의 부정적인 특성은 완고함, 완고함 및 완고함입니다. 그들은 때때로 비관적이고 질투합니다.

이것은 각 숫자가 제공하는 특성과 기능입니다. 이 정보가 기본 아이디어를 형성하기에 충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지식 상태와 경험의 폭이 기적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결정해 줄 것이다.
예를 들면 사막에 거주하던 사람이 나이아가라 폭포수 앞에 서면 그는 분명히 이것은 기적이라고 할 것이다.
100년 전에 살던 사람이 오늘의 시대를 바라본다면 이것도 기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초음속 비행기와 거대한 화물선이 바다에 둥둥 떠 다닌다는 것이 놀랍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에서 설교하는 것을 한국에서 즉시 들을 수 있다는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하겠다.




표적(세메이온. sēmĕiŏn)  σημεῖον, ου, τό 

1. 표징,  2. 표, 3. 기적
발음 / 세메이온(sēmĕiŏn)
관련 성경 / 표적(마 12:38, 행 2:22, 살후 2:9), 징조(마 24:3, 눅 21:7, 행 2:19), 군호(마 26:48), 이적 (막 13:22, 눅 23:8), 표(롬 4:11, 고후12:12).


마태복음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

세메이아(semeia)
세메이아는 표시(sign)라는 뜻의 희랍어 세메이온(semeion)의 복수형이다.
이러한 표적은 단지 사람을 놀라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능력 자체는 중립적이지만 사용하기에 따라 인간에게 유익하기도 하고 해롭기도 하다.
예를 들면 원자탄은 그 자체만으로는 선도 악도 아니다.
오직 사용하는 사람의 정신과 마음에 달려 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볼 때 하나님의 능력만을 보는 것으로 멈추지 말고 그의 사랑까지도 보아야 한다.



기적(다우마. thauma) θαῦμα, ατος, τό 

1. 놀랄 만한 일,  2. 놀라운 일,  3. 기적
발음 / 다우마(thauma)
어원 / 2300의 한 형태에서 유래한 뜻
관련 성경 / 놀랍게 여김(계 17:6)
신약 성경 / 2회 사용

데살로니가후서 2: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기적이란 우리를 놀라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적(miracle)이라는 말은 놀라다(to wonder)라는 뜻의 라틴어 미라리(mirari)에서 유래하였다.

첫째는 우리 힘으로 그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사(wonder)

성경의 기적들은 자주 두나메이스(dunameis)라고 한다.
이것은 능력(power)이라는 희랍어 두나미스(dunamis)의 복수형으로 다이나마이트(dynamite)라는 말에서 파생하였다.
따라서 하나의 기적 속에는 인간이 소유하지 못한 능력이 존재한다는 의미가 된다.

기적이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속에 특별하게 역사하심으로써 일어난 사건이다.

 

기적(테라스, tĕras) τέρας, ατος, τό 

1. 경이,  2. 전조, 3. 징조
발음 / 테라스(tĕras)
어원 / 불확실한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사(奇事)(마 24:24, 행 2:19, 고후 12:12), 기적(奇蹟)(살후 2:9)
신약 성경 / 16회 사용

마태복음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요한복음 4: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이적(세메이온. sēmĕiŏn)  σημεῖον, ου, τό 

1. 표징,  2. 표, 3. 기적
발음 / 세메이온(sēmĕiŏn)
관련 성경 / 표적(마 12:38, 행 2:22, 살후 2:9), 징조(마 24:3, 눅 21:7, 행 2:19), 군호(마 26:48), 이적 (막 13:22, 눅 23:8), 표(롬 4:11, 고후12:12).

마가복음 13: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누가복음 23:8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이적, 기적, 기사, 표적에 대한 이해

성경은 이적과 기적과 기사 그리고 표적으로 가득하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초인간적인 놀라운 행적으로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의 사건 그리고 자연계에서 벌어지는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물 위로 걷는다든가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사건 등을 이적, 기적, 기사라고 하고 이것들은 메시아적 증거로서 표적이라고 한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적과 기사를 Wonder,
기적을 Miracle,
표적은 sign 이라고 번역했다.

한글 성경은 헬라어 세메이온(σημειόν)을 이적 또는 표적이라고 번역했고,
테라스(τέρας)를 기적이라고 번역해서 혼선 양상을 보인다.

이적, 기적, 기사는 테라스(τέρας)로 번역해야 하고
세메이온(σημειόν)은 표적으로 번역해야 구분이 될 것이다.

“표적”이란 히브리어로 ‘오트’(תוא)이고, 헬라어는 쎄메이온(σημεῖον)이며 영어로는 ‘사인’ (sign)으로 ‘표시’, ‘징조’, ‘증표’ 등의 뜻을 가진다.

표적을 둘로 나누어 본다면 초인간적 행사를 이적 기적이라 하고 초자연적 행사를 이적 기사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적이나 기적이나 기사는 표적(sign, σημεῖον)의 다른 명사들이다.
그래서 히브리어에서는 이적, 기적, 기사, 표적이 ‘오트’(תוא)로 통일된다.

요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일곱 개의 대표적 표적이 나타난다.

1.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표적(요 2:1~11)

2. 가버나움에서 죽어가는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요 4:46~54))

3. 베데스다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요 5:1~9)

4.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오병이어로 5,000명의 무리를 먹이신 표적(요 6:1~15))

5. 디베랴 바다에서 물 위를 걸으신 표적,(요 6:16~21)

6. 실로암에서 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신 표적(요 9:1~12)

7. 베다니에서 죽은 지 사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요 11:1~44)

이 표적의 의미가 무엇인가?

성경에 나타난 구속사적 표적들

첫째는 이스라엘 구원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표적

지팡이로 뱀을 만들어 보이시는 일, 모세의 손에 문둥병을 발하게 하셨다가 다시 치유하시는 일 등이 약속을 이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표적인 것이다. 임마누엘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인이다.

둘째는 무흠하신 속죄의 어린 양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적

메시야가 성령으로 잉태되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성령세례를 받게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속죄 양으로 오신 메시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이다(사 7:14).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하심과 속죄주의 자격을 나타내는 사인이다.

셋째는 기적을 통해 천국을 보이시는 성령님의 능력의 표적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권능을 따라 나타나는 치유사역과 초자연적 기적 등은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님을 통해 만물을 회복하고 우리를 천국으로 초대하시는 메시아인 증거의 사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주님에 의한(by Jesus), 주님에 대한(of Jesus), 주님을 위한(for Jesus) 표적을 탐욕에 의하여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표적으로 오인하게 되었다.

오병이어의 표적이 있은 뒤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질문했다. 모세는 만나를 통해 먹을 것을 제공하는 표적을 보였는데 예수는 무슨 표적을 보이겠는가? 라고 질문하게 된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따른 것은 경제적 해결이나 정치적 이슈로 표적을 구했음을 스스로 자인하는 장면이다

그 증거로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주님을 따르는 무리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때 주님께서 그들을 보면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나를 증거하는)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이 땅의)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라고 하셨다.

주님은 정치적이고 탐욕적인 표적을 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진정한 표적이 무엇인가를 선포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태복음 12:39~40)(누가복음 11:29)

주님은 이미 자신에 대한 표적으로 많은 이적 기사를 통해 주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육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며 이 땅의 표적만을 구하는 저들에게 요나의 표적을 통해 종말론적 구속자로 오시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증거하신 것이다.
요나의 표적이 주님 자신을 증거하는 모형으로서의 진정한 표적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러나 깨달을 수 있는 귀 있는 자만이 알 수 있었다.

바울사도께서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선포했다.

“유대인은 (땅의)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땅의)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표적과 지혜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전 1:22~23).

성경에 나타나는 이적 기사의 표적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 예언한 메시아요 구세주라고 표식인데 이것을 모르는 군중들에게 바울 사도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진정한 표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기적과 이적과 표적과 기사와 같은 성경의 단어들

기적은 불가사의한 일을 뜻하는 라틴어 미라쿨룸(miraculum)에서 왔다.
자연이나 사건의 흐름에 대해 초자연적 간섭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적은 근본적으로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다.
기독교 안에서도 기적의 종결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있는 반면 오늘날까지 성결파 및 오순절 복음주의자들은 신유와 방언 등 각종 기적이 유효함을 주장한다.

이런 기적의 개념에 대해 세속 학문은 역사적으로(Renan), 과학적으로(J. Huxley), 신학적으로(Sabatier), 철학적으로(D. Hume) 많은 반론을 제기해왔다.

18세기 영국 철학자 흄(David Hume)은 기적을 자연법의 위배로 보았다.
흄은 종교에 관한 자신의 유명한 두 저서 <종교의 자연사>와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에서 우주 질서의 원인이 되는 지적 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신은 성경적 창조주 하나님이라기 보다 우주 질서의 원인으로서 가정된 이신론적 존재(a deitistic being)이며 따라서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는 자연 법칙을 위반하는 기적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흄에게 있어 기적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흄이 볼 때에 혹 신의 특별한 의지에 의해 일반 법칙이 깨어지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이 전혀 알아챌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흄이 영국 교회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된 것은 정통 교리에 반하는 바로 이같은 그의 사상이 원인이었다.

기적은 분명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20세기 초 과학자들 뿐 아니라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기적을 거부한 사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개혁주의 보수신학자 벤자민 워필드는 우리 마음에 품은 세계관이 아니라 우주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실들에 대한 정당한 고찰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기적을 이해하였다. 그러면서 워필드는 기적은 사도들이 교회의 토대를 놓음과 함께 그쳤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즉 성경에 계시된 기적은 사실이나,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기적은 성경이 완성되면서 종결된 것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오순절 계통뿐 아니라 보수장로교 안에서도 기적 종결에 대한 반론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여기서 기적은 종결되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신학적 논쟁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해결점 찾기가 결코 쉽지않은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이 문제는 성경을 과학의 틀 속으로 가져갈 때 문제가 발생한다. 즉 피조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는 인과율(因果律)에 사로잡힌 희랍인들의 구조 안에서 기적은 이해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었다. 기적이 그들의 틀 속에 잡힐 수 없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에 있어 관심은 하나님의 일이었다. 하나님이 단지 무엇을 하시며 그 일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가 그들의 의문의 영역이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의 과학적 검증은 희랍인의 몫이지 결코 유대인들의 몫은 아닌 것이다. 즉 성경을 과학의 틀 속에 넣을 것인가 아니면 성경의 틀 속에 과학을 넣을 것인가에 따라 해석은 전혀 달라진다. 성경은 과학 책이 아니다. 과학의 언어로 쓰여 지지 않은 책이다. 자연과학적 영역과는 관심 분야가 다른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대해 우리가 갖는 신앙적 믿음으로 인해 비록 성경이 과학책이 아니기는 하나 성경의 말씀대로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이 곧 성경의 하나님이시라면 진정한 과학은 성경적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 초월과 내재의 두 권의 책(말씀의 책 성경과 하나님의 활동의 책 자연)은 때로는 근접하기도 하고 어떤 시기는 우호적이었으며 어떤 때는 서로 간에 무관심한 영역으로 치부하여왔으며 어떤 때는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여왔다. 그것은 간혹 필요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필요한 긴장이기도 하였다.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자연과학의 질서를 만드시고 그 사실을 성경을 통해 계시하시고자 하였다. 참된 기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 우주의 근본적인 법칙과 과정들의 관계에 비추어 정의 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이적은 자연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이라고 알고 있는 것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자연의 통상적인 일상 진행 과정을 자연이라고 부르고 하나님께서 이에 반대되는 일을 행하실 때에 기적 또는 이적이라고 한다’(contra Faustum ⅩⅩⅥ)고도 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본성에 대항하는 행위를 하시는 분이 아니며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믿음이 약한 자들’이 자기들의 틀 속에서 오해를 가지고 살 뿐인 것이다. 그럼 이제 기적과 이적과 표적과 기사가 성경적으로 어떤 늬앙스를 가지는 말인지 살펴보자.

1. 기적

성경에 기적으로 번역된 단어는 시편 40:5(paia), 이사야 20:3(mowpheth), 데살로니가후서 2:9(teras) 등이 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역사(시 40: 5)가 바로 초자연적 사건으로서의 기적이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기적(奇蹟, wonder, miracle)의 의미는 사실 그리 간단하지 않다.
기적은 하나님의 어떤 목적성을 가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적을 너무 단순하게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질서나 시간에 초자연적으로 친히 개입하시는 역사를 말한다’고 말하면 세상은 스스로 존재하였으나 하나님이 가끔은 세상에 직접 개입하신다는 늬앙스를 주거나 창조의 섭리와 보존은 덜 직접적이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므로 기적이라는 말의 본 뜻은 잘 분별하여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져야 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기적이라는 말을 이신론적 사고나 이원론적 의미로 무심코 사용하는 경우를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웨인 그루뎀은 기적에 대한 성경적 의미에 대해 ‘이 세상에서 흔치 않은 방법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적은 좀 더 구체성을 가지고 성경에서 이적(異蹟, sign, miracle), 표적(表蹟, sign), 기사(奇事, miraculous sign), 이적의 표징(表徵, miraculous sign, 출 4:8) 등의 말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2. 이적

이적은 자연의 일반적 법칙이나 추이와 다르게 나타나는 사건을 말하는 데 구약에서는 주로 출애굽, 광야 생활, 약속 땅 가나안으로의 입성(시편 105-106편)과 선지자 엘리야, 엘리사의 활동 기간(왕상 17장-왕하 8장) 때 주로 나타나고, 신약에서는 병고침(마 8:14-17; 요 4:46-54 등)과 귀신 추방(마 8:28-34; 막 1: 23-28 등), 자연 이적(요 2:1-11; 마 14:22-33; 마 8:23-27 등)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3. 표적

표적은 구약의 경우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언약의 관계나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oth= 출 12:13; 신 22:14, 17, 20)되며 신약에서는 주로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이나 그에 대한 반응에 표적(semeion=마 12:38)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4. 기사

기사(oth= 시 105:27, mowpheth=출 11:9,10; 신 4:34; 6:22; 느 9:10; 시 78:43 등 , paia= 시 9:1, teras=마 24:24)는 놀랍고 경탄할만한 사건에 주로 쓰였는데 어원적으로 이적(oth=출 4:8,9; 민 14:11,22; 신 4:34= 헬라어 semeion에 대응; 느 9:10, mowpheth= 출 4:21= 헬라어 teras에 대응, paia= 출 3:20, semeion=마 12: 38, 39)과 거의 같은 말이므로, 이적의 범주에 들지 않는 기사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잘 구별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구원의 능력과 언약의 신실함을 나타내기 위해 표적을 주시고 기사(wonders= mowpheth,히)를 행하신다.
기사는 종말론적인 우주적 징조들(욥 2:30)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고 있다.




표적(Sign), 이적(Wonder), 기적(Miracle)

주로 같은 상황에서 등장하는 서로 다른 의미의 용어들이다.
특별히 예수님의 행적을 다루는 4복음서에서 이 용어들은 거의 비슷한 용어처럼 같은 상황에서 등장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적과 기적은 비슷한 말로서 놀라운 행적을 묘사하는 용어지만 표적은 전혀 그렇지 않다.
표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별하게 다루시는 방법과 연관되어 있다.

이적이나 기적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 보통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역사 등을 가리켜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신 일, 여호수아의 전쟁 때 태양을 멈추신 일,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하신 일,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일 등등, 이 모든 것들을 가리켜 성경은 “기적” 또는 “이적”이라고 한다.
이적의 목적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이나 그 분의 신성, 놀라우심, 위엄 등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표적은 이적보다 좀 더 넓은 범위를 갖는데, 표적 안에는 이적도 포함되어 있으나, 전혀 이적이 아닌 표적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16:16 이하에 묘사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라든지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든지 병자들에게 안수하여 치유시킨다든지 하는 것들은 이적이자 동시에 “표적”이라고 불려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 속에 포함되어 있는 안식일은 “표적”이라고 불려지기는 했어도 그것은 전혀 “이적”이나 “기적”이 아니다(겔 20:20).

표적이라는 것은 그것을 행하는 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증명하는 도구이다.
“표적”이란 영어로 “sign”이라고 하는데, 이는 “표시”, “징조” 등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좀더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말씀하시거나 주장하시고자 할 때 한 표적을 보이셔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그 말씀이나 언약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민족적으로 탄생할 때부터 “표적”과 더불어 시작된 민족이다.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시려 할 때 모세는 “그러나 보소서, 그들이 나를 믿지도 아니하고 내 음성에 귀기울이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말하기를 ‘주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라고 말한다(출 4:1). 즉 “주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증거를 보여주소서.”라고 한 것이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막대기로 뱀을 만들어 보이셨고, 또 모세의 손에 문둥병을 발하게 하셨다가 다시 치유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이적들을 주께서 모세를 보내신다는 “표”로 제시하신 것이다. 이때 이후로 “치유”라는 것은 하나님의 표적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표적” 가운데 인도하셨다. 광야에서 40년동안 표적으로 인도하셨고, 기드온에게는 미디안 백성들을 물리칠 지도자로 그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표적”으로 보여주셨고(판 6:17), 히스키야가 15년을 더 살게 된다는 것도 “표적”으로 알려 주셨으며(사 38:7), 메시야가 처녀에게서 태어나신다는 것도(사 7:14), 북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다는 것도(사 8:18),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는 것에 있어서도(사 19:20; 55:13) 모두 표적으로 인도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표적을 구하는 민족이다(고전 1:22).

이러한 모든 표적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표적은 바로 “치유”의 표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께서 메시야로 오실 때 그 분이 바로 왕이시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왕의 표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 분의 백성에게 오셨을 때 그들은 어떻게 예수님이 그들의 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으로 봄으로써이다. 구약에는 메시야가 오실 때 치유를 통해서 온다는 예언이 있다(겔 34:16, 사 33:24; 35:6). 『그 거민은 “나는 병들었다.”라고 말하지 아니하리니, 거기에 거하는 백성은 죄악이 사해지리라』(사 33:24). 『그때에 소경의 눈이 뜨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뚫리리라. 그때에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뛰고,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라. 광야에는 물이 솟아나오며 사막에는 시내가 흐르리라』(사 35:5-6). 『내가 잃어버린 자를 찾을 것이요, 쫓겨났던 자를 다시 데려오고 상한 자를 싸매 주며 병든 자를 강건케 해 주리라. 그러나 나는 살지고 강한 자를 멸할 것이며 심판으로 그들을 먹이리라』(겔 34:16). 이 모든 예언들은 예수님께서 그 분의 왕국을 회복하실 때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하시는 동안 그렇게도 많은 치유를 행하셨으며, 특히 자신이 왕이심을 직접적으로 증거한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 이후에 즉시로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라도 하신 듯 병고침의 표적을 행하신 것이다.

아쉽게도 그들은 이러한 표적을 보고서도 자기들의 왕을 거부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표적으로 이끄신다. 이 표적은 사도들에게도 이어지는데 이것이 “사도들의 표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고후 12:12) 이러한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임을 알고 믿으라는 것이었다. 마지막 때에도(대환란 때) 천국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적을 행하는 것이 표적으로 제시된다(막 16:16-18).

그러므로 표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특별한 방법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표적으로 인도하지 않으신다. 주목할 만한 것은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고전 1:22)라는 구절이다. 표적은 유대인의 것이다. 은사주의 운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많은 이방인들이 “이적”을 구하는 것 같으나 그러한 “이적”들은 결코 “표적”이 아니다. (물론 그 이적들은 가짜이거나 마귀에 의한 이적이다.) 이방인들이 어떠한 이적을 행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이적들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인 코넬료가 성령받은 증거로 방언을 했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4:22에 따라서 방언은 표적인데, 그렇다면 이방인 가운데서 표적이 행해졌다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그러나 코넬료가 행한 방언은 그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로 하여금 한 사실을 깨닫게 했다는데에 의미가 있다. 물론 이 사건은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의 문을 열어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방인 가운데에 표적이 일어났다는 것에 있어서는 베드로와의 관계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당시 베드로는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세 번씩이나 환상을 통해서 부정한 짐승을 먹으라고 하셨음에도 베드로는 율법에 의해 거부했던 것이다. 그러한 베드로에게 이방인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유대인들이 성령을 받을 때의 모습을 재현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코넬료로 하여금 방언을 하게 만들어 유대인인 베드로로 하여금 그 사실, 즉 이방인도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한 표적을 통해 알게 하신 것이다. 결국 이방인이 행한 표적도 믿지 않는 유대인을 위해서 행해진 표적일 뿐이다.

공관복음, 특히 마태복음에서 표적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고, 요한복음에서의 표적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요 20:30-31).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시라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이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누군가가 표적을 행할 필요가 없다.
이 표적은 기본적으로 왕국복음 아래에서 유효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행하시던 초림 당시에 이 표적이 행해져서 유대인으로 하여금 그 분이 왕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했다면, 다시 이 천국복음이 전파되는 대환란 때에 이 표적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다시 유효하게 제시될 것이다. 그 사이에 있는 교회시대의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분명하신 말씀이 있고, 또 우리는 유대인도 아니므로 어떠한 표적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마가복음 8:11 / 힐난하며 시험하여




마가복음 8: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The Pharisees came and began to question Jesus. To test him, they asked him for a sign from heaven.

힐난하며(4802) 수제테토(süzētĕō)  συζητέω 
1. 토의하다,  2. 논쟁하다, 3. 반영하다
발음 / 수제테토(süzētĕō)
어원 / 미완료 συνεζήτουν, 4862와 221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묻다(막 1:27, 눅 22:23), 시험하다(막 8:11), 문의하다(막 9:10, 눅 24:15), 변론하다(막 9:14, 12:28, 행 6:9).
신약 성경 / 10회 사용


시험하여(3985) 페이라조(pĕirazō) πειράζω 
1. 시도하다,  2. 시험하다,  3. 고후13:5
발음 / 페이라조(pĕirazō)
어원 / 미완료 ἐπείραζον, 미래 πειράσω, 제1부정과거 ἐπείρασα, 제1부정과거중간태, 2인칭단수 ἐπειράσω, 수동태, 제1부정과거 ἐπειράσθην, 완료분사 πεπειρασμένος, 398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시험받다(마 4:1, 약 1:13, 히 4:15), 시험하다(마 4:3, 눅 11:16, 고전 7:5), 애쓰다(행 16:7), 시험 당하다(고전 10:13, 히 11:37, 계 3:10)
신약 성경 / 38회 사용























제27회 총회 평양 서문외 예배당 1938년 9월 9일 - 16일 신사참배 결의 자료


1938년 신사참배를 결의한 제27회 총회

신사참배 가결,
1. 하나님 말씀의 위반,
2. 장로회 헌법과 규칙 위반,
3. 일본 국법인 종교자유헌장에 위반,
4. 보통회의법의 위반

1938년 9월(9-16일) 오후 8시에 평양서문외예배당에서 제27회 총회가 개회되었다.
총회가 개회되고 제1부 경건예배를 마치고 정회한 후 2일째 되는 날 새벽 6시에 임종순 목사가 요한복음 16:25-33절 말씀을 읽고 “그리스도를 힘입어 안심함을 얻음”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오전 9시 30분에 속회되어 새 총회장으로 선출된 홍택기 목사가 히브리서 10:5-7절, 요한복음 4:34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 후 10시 40분에 안건 심의에 들어갔다.

공천부장의 함태영 목사의 보고를 별지로 받고 곧바로 신사참배 안건 심의에 들어갔다.
제27회 총회가 경건예배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신사참배 문제를 거론하여 결의를 했다는 것은 이미 신사참배의 가결을 몇 달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고 제27회 총회는 이를 실행에 옮기는 총회가 되었다.

총회가 소집되는 날 서문외교회당 안팎에는 수백 명의 사복 경찰관들이 둘러싸고, 강대상 아래는 평남경찰부장 등 수십 명의 고위 경찰들이 칼을 찬 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총대들 사이에는 각기 그 지방에서 올라온 경관 2명이 끼어 앉아 있고 총대석 좌우와 후면에도 무술경관 100명이 상엄하게 둘러싼 채 회가 시작되었다. 먼저 평남도지사의 축사를 시작으로 경건회에 이어 공천부 보고는 별지로 받기로 한 후 신사참배 안건을 상정했다.

전국 27개 노회(만주 4노회 포함) 목사 회원 86명, 장로 총대 85명, 선교사 22명, 합계 193명이 참석한 가운데 동 안건을 가결에 붙이자 떨리는 목소리로 가(可)만 묻고 부(否)는 묻지 않은 채 신사참배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음을 선언했다. 이 때 자리 사이에 끼어 앉아 있던 경찰이 일제히 일어나 경계태세에 들어갔는데 선교사 20여명이 일어나 “불법이오”, “항의합니다”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결국 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말았다.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후 곧바로 “부총회장과(임원대표) 각노회장으로(회원대표) 본 총회를 대표하여 즉시 신사 참배를 실행하기로 가결”하였다.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난 시간이 12시였다. 오후 2시에 속회할 때까지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의 안내에 따라 평양 신사로 가서 절하고 돌아왔다.

이와 같은 신사참배를 하고 난 이후 속회된 회의에서 “신사참배 결의안을 조선 총독, 총감, 경무국장, 학무국장, 조선군사령관, 총회대신, 척무대신, 제 각하에게 전보를 발송하기로 가결”하게 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같은 날(10일) 오후 1시에 따로 모임을 갖고 신사참배 가결를 무효화 시키기 위하여 “신사참배 가결은 하나님 말씀의 위반이요, 장로회 헌법과 규칙을 위반함이요, 일본 국법인 종교자유헌장에 위반이요, 이번 처사는 보통회의법의 위반”이라는 항의서를 총회에 긴급동의안으로 제출했다.
 
총회 12일에는 권찬영 외 25명도 연서날인으로 “이번 총회의 결의는 하나님의 계율과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에 위배 될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발언을 허락하지 않고 강제로 회의를 진행한 것은 일본 헌법에 부여한 종교자유의 정신에도 어긋난다”라는 항의서를 총회에 제출했다. 총회는 경찰의 강압에 못이겨 이들 항의서를 토론에 붙일 기회마저 주지 않고 무조건 기각시켜 버렸다.

총회가 파회(罷會)되고 석 달 후, 신사참배 결의가 가져온 비극적인 일들이 총회 산하 전국교회에 하달되었다.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회장으로 신사참배를 가결시킨 것도 부족해서 각 교회에 신사참배 반대한 행위에 대해 처벌할 것에 대한 총회장 서한을 보내게 되었는데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총회의 결의를 경멸하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주님의 뜻에 위배되는 유감 천만의 행동이다. 이런 비상 시국하에서 만일에 아직도 옛 습관으로 해서 이를 보류하거나, 주저하는 자가 있다면, 저들은 결코 신민으로 인정될 수 없으며, 교인으로도 인정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교회의 입장으로 볼 때도 이러한 반대하는 무리나 요소는 마땅히 처벌되어야 한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그 후 한국교회로 하여금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하였다.
총회 결의가 있는 이후 일본 경찰은 즉시 친일적인 목회자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그 시대 양심의 소리가 있었다는 점은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소재열 목사 근간,『한국장로교신학 전통』중에서.





신사참배 강요(神社參拜強要)


일제 강점기에 조선 곳곳에 신사를 세운 뒤 조선인에게 참배하도록 강제한 정책을 가리킨다.
신사참배는 신토의 신사에 참배하는 종교 의식이다.
종교의 교리가 신사참배와 충돌하는 기독교 신자들은 신사참배 강제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여 이에 저항하다가 피해를 입기도 했다.


배경

신토는 조선에  1876년 개항 이래 문화 침략의 일환으로 도입되었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조선통족부의 보호 아래 동화 정책의 일환으로 보급되었다.
특히 1930년대에 일본 제국이 중국 침략을 계획하면서 점차 강제적인 정책으로 변화했다.
일본 천황 신격화와 강제 신사참배는 조선을 정신적으로 지배함으로써 효율적인 식민 통치와 전쟁체제의 구축을 노린 것이었다.

추진 과정

1930년대 경성소방서 직원 신사참배

일제는 각지에 신사를 세우고 학교와 가정에도 소형 신사를 설치하도록 하여 황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주로 기독교 계열의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이같은 정책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조선에는 개화기 이래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 학교들이 다수 있었고, 우상 숭배를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기독교의 교리는 신사 앞에서 절하는 신사참배 의식과 충돌을 낳았다.

기독교계는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가 1935년을 기점으로 조선총독부의 강경책에 신사참배 용인파와 반대파로 분열되면서 큰 갈등이 시작되었다.

1937년 중일 전쟁 무렵부터는 조선총독부가 일부 학교를 폐교시키면서까지 신사참배 강행 의지를 보여 문을 닫지 않은 학교들은 신사참배를 실시해야 했다.

조선총독부는 기독교계 학교에 보급된 신사참배를 교회로까지 확장시키기 위하여 압력을 행사했고,
1938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계기로 각 교파의 목회자들이 솔선해 신사참배에 나서면서 급격히 황민화 정책에 동조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반대파의 강경론자인 주기철, 최상림이 옥사하는 등 희생자도 발생했다.

한편 평양에 있던 기독교 계열의 숭실대학은 1912년 11월 25일 조선 통독부 학무국이 학교 인가를 했으나,
1925년 대조선 교육방침(소위, 문호통치)으로 숭실대학교를 전문학교로 격을 낮추었다.

1938년 3월 4일 일본 제국의 억압적인 통치와 강제적 신사참배에 반대한 숭실전문학교는 자진 폐교 결정을 내린다.

신사참배와 친일활동을 했던 당시의 다른 대학들에 비교해 볼 때 이는 진정으로 민족을 위한 대학이었다는 평가가 의식있는 국민들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신사참배에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 등 다른 종교 성직자와 신자들도 참여해야 했으나, 상대적으로 마찰은 적었다.

영향

신사참배는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강요한 것으로서, 신사는 일본의 민간종교인 신도(神道, Shintoism)의 사원으로 일본 왕실의 조상신이나 국가 공로자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일제는 합방 후 신사사원규칙을 발표, 서울에 조선신궁을 세우는 한편, 각 지방에 신사를 세웠다.
조선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은 1935년경부터인데, 우선 각급학교 학생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으나 기독교계 학교에서는 이를 거부하다가 평양 숭실학교·숭의학교 등이 폐교되었고 학생·선교사·목사들의 반대운동은 계속되었으며, 주기철 목사와 같이 적극적으로 반대하다가 투옥되어 순교한 일이 발생하였다.

중일전쟁(1937∼1945년)을 전후하여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재차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천주교는 로마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신사참배에 응했고,
감리교도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장로교는 한때 반대했으나, 총독부의 요구와 일부 친일목사들에 의해 제27회 총회에서 찬성결의를 함으로써 결국 굴복했다.

1945년 8월 15일 지국주의 야욕의 일제가 패전으로 종전되었지만 신사참배와 관련하여 아직까지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등 문제와 논란이 발생되고 있다.

신사참배에 기독교계 전체가 공식적으로 동원된 것은 그 후유증이 상당히 컸다.
일제 패망 후 며칠만에 신사를 불태워 버렸을 만큼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조선인의 반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특히 신사참배에 앞장선 이들이 법적 책임을 지는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문제가 잠복해 있었다.
후에 이로 인한 상처를 씻기 위해 공산주의를 사탄으로 삼는 지나친 반공주의와 보수주의적 흐름이 나타났을 정도로 한국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가 있다.

2006년 대한민국의 소장파 목회자들이 모여 결성한 한국 기도굑 목회자 협의회가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한 일과 독재정권 시절에 권력층과 야합해 정의를 뒤엎기도 한 죄악에 대해 마음을 찢으며 참회한다."
내용으로 반성문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교단 차원의 공식적인 인정이나 참회는 현재까지 하지 않고 있다.








제27회 총회서 17개 노회 수치스런 결의 ... 전국 노회서 공식 취소 결의 잇따라야



▲ 제27회 총회회의록 중 신사참배 결의 내용을 담은 성명서가 기록된 부분.

1938년 9월 9일부터 15일까지 평양서문밖교회에서 조선과 만주 27개 노회의 총대 193명(목사 86명, 장로 85명, 선교사 22명)이 모여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를 개최하였다. 개회 당시 총회장은 이문주 목사(경북노회·대구남산교회)였다.

첫날 저녁 8시에 개회하여 임원을 선출하니 총회장으로 평북노회 홍택기 목사가 선출됐다. 이튿날 오전 9시 30분 속회하여 박응률 목사로 기도하게 하고 회무를 시작한 후 1시간이 지나서 10시 50분경, 평양노회장 박영률 목사가 평양노회 평서노회 안주노회의 연합대표로 신사참배를 결의하자는 제안을 하여 즉시 가결하였다. 그리고 성명서를 발표한다.

“아등(我等)은 신사(神社)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한다. 그러므로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려행(勵行)하고 나아가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 있어서 총후(銃後) 황국 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한다.

소화13년(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총회는 신사참배 가결 후 후속조치로 부총회장과 각 노회장이 총회를 대표하여 즉시 신사를 참배할 것을 결정하여, 12시 정회 후 평양 신사에 참배하고 돌아와서 오후 2시부터 속회했다.

평북노회는 총회 개회 이전인 1938년 2월에 이미 신사참배를 가결하였고, 전북노회도 6월 8일 제32회 정기노회 중에 가결하였으며(‘전북노회록’ 참고), 경북노회는 8월 19일 제36회 2차 임시노회에서 신사참배하기로 가결하고 이에 찬성하는 회원들을 총대로 선정하였다(‘경북노회105년사’ 참고).
▲ 신사참배를 결의한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표들이 1938년 9월 10일 평양신사를 찾아가 참배하는 모습이 당시 조선일보에 게재됐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전남노회였다. 전남노회(당시 노회장 박연세 목사)는 전국 27개 노회 중에 유일하게 노회 보고서에 신사참배를 결의한 내용을 총회에 제출하여 총회록에 남겼다. 1938년 5월 6일부터 10일까지 목포양동교회에서 열린 전남노회의 제30회 정기노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노회록에 담았다.

“광주 4교회 도당회와 목포양동교회 당회의 헌의안을 받아 다음과 같이 보고하나이다.

1.신사참배는 국민정신통일에 순연한 국가의식임으로 본 노회로서는 혼연히 참배함이 당연한 국민의 의무인 동시에 교회지도상 선명한 태도인줄을 아오며.” (만장 일치 가결)

이와 관련해 제27회 총회회의록(121쪽)의 제9호 각 노회 상황보고에서 전남노회 해당 부분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특별사항은 금춘 정기노회에 오랫동안 문제로 되어오던 참배 문제에 대하여 당국의 지시대로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참배는 국민정신 통일을 위한 국가 의식임을 인식하고 본 노회로서도 참배함이 국민의 당연한 의무인 동시에 교회 지도상 선명한 태도일줄 알고 이를 결의 실행하는 동시에 관내 각교회에 통지하여 일반 교인으로 취할 것을 보였사오며.”

제27회 총회에 참석한 전체 27개 노회 중에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한 노회는 17개였다. 이때 일제는 총회에 참석할 총대들은 신사참배를 찬동하는 자들로 선정할 것을 지시하였다. 당시 총회에 참석하고 상황을 목격한 김양선 목사는 당시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일제는 각 지방 경찰서를 통하여 총대로 선정된 노회 대표들에게 다음 3개의 조건 중 택일할 것을 강요하였다. 3개의 조건은 ‘1.총회에 참석하면 신사참배가 죄가 아니라는 것을 동의할 것 2.신사참배 문제가 상정되며 침묵할 것 3.상기 양안을 실행할 의사가 없으면 총대를 사퇴하고 참석하지 말 것’ 등이었다. 그리고 이 세 조건을 모두 불응하는 사람들을 구속 투옥하였다.

뿐만 아니라 총회 석상에서 경찰서 지도부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총대석 옆에도 정복 경찰이 서 있었으며, 총대석에도 사복경찰이 포진해 있었다.

이처럼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일제의 엄청난 강압에 의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스스로 수치스러운 결의를 한 것이며, 또한 당일 12시에 총회 대표가 직접 평양 신사에서 참배를 실시함으로 범죄를 저지르는데 이르고 말았다.

해방 후 1946년 남부총회에서 신사참배 취소 결의를 하였으나, 이는 남한 노회들만의 것으로 인정됐다. 이후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남북한 노회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안건(권연호 목사 제안)으로 받아, 신사참배 결의가 불법인 것으로 취소하는 정식 결의를 한다. 당시 총회 기간 중 회개의 성찬과 3시간 특별기도회를 열고, 6월 한 주일 전국교회가 회개하는 의미로 연보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들의 가족을 위로하는 일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총회와는 달리 과거 신사참배를 결의한 노회가 정식으로 회개하고 취소한 기록은 오랫동안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2016년 7월 31일 산정현교회에서 평양노회에서 분립한 7개 노회(경평, 남평양, 동평양, 서평양, 평양, 평양제일, 북평양)들이 과거 신사참배에 앞장선 노회 결의를 무효로 선언하는 취소결의를 했다.

또한 이 자리에서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복직도 결의한 후, 각 노회 대표들과 노회원들 그리고 총회역사위원회가 함께 모여 ‘주기철 목사 복권 감사예배’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과거 신사참배에 앞장선 노회와 선배 노회원들의 불의와 허물을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아가 신사 참배 거부운동에 앞장선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결의도 하였다,
▲ 장영학 목사(한국교회역사자료박물관 관장)

올해는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지 80주년을 맞는 해이다. 전국의 노회들은 총회의 치욕적인 신사참배 결의에 대해 공동 책임을 지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취소 결의를 하고, 회개하며 참회하는 성찬을 받아야 할 것이다. 비록 총회 차원에서 취소 결의를 했지만, 해방 이후 노회들이 정식으로 취소 결의를 한 흔적을 찾을 수 없으니 이에 대해 부담감을 갖고 노회들마다 정식 취소 결의를 해야 할 것이다, 모두가 역사적 책임을 지는 마음으로 참회를 해야 할 것이다.
▲ 평양 금수산에 세워진 신사.

이름도 예쁜 ‘금수산’ 자락에 ‘광풍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서있던 자리였다. 모란대와 을밀대 그리고 대동강 등 평양의 온갖 장관을 한 눈에 볼 수 있던 바로 그 자리. 하지만 이미 빼앗긴 조국의 산하였고, 거기에는 치욕의 상징인 일본 신사(神社)가 서있었다.

일행은 왼손, 오른손, 입을 차례로 씻고 옷깃을 여민 후 본격적인 신사참배 의식에 들어갔다. 정해진 순서대로 절을 하고, 손뼉을 치는 행위가 반복됐다. 바로 몇 시간 전 예배당에서 찬송을 부르던 그 입술이었고, 기도하기 위해 모았던 그 손이었다.

신사는 일본의 국교 신도(神道)의 사당이다. 당초 신도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선조나 자연을 숭배하던 토착신앙이었다. 그러나 1868년 일본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천황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신도를 적극 활용하면서 국가종교로 부각되었다.

대륙침탈의 야욕을 불태우던 일제는 자신들이 진출한 지역에는 반드시 신사를 세워 자국민의 단합과 상대민족의 사상통일을 꾀했고, 우리나라에도 1876년 개항 이후 전국에 수많은 신사를 설치한다. 처음에는 일본 거류민들 중심의 민간차원에서 건립과 운영이 이루어졌지만, 1910년 한일병탄 뒤부터는 본격적으로 국가 차원의 육성이 시작됐다.
▲ 서울 남산에 건립된 조선신궁.

1925년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이 건립된 것을 계기로 일제는 본격적으로 신사참배를 우리 민족에 강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립학교, 그 다음에는 일반 사립학교, 나중에는 기독교학교와 교회들까지 주요 공략대상이 됐다.

처음에는 ‘우상숭배’라며 강력히 맞섰던 한국기독교의 대오는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부르짖으며 강력한 식민정책을 펼친 일제의 탄압 앞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로마 교황청의 훈령을 받고 투항한 가톨릭에 이어, 개신교에서는 감리교회가 앞장서 1936년에 백기를 들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주도했던 장로교회마저 1938년 9월 10일 평양서문밖교회에서 개회한 제27회 총회를 기점으로 변절하며, 한국교회는 결국 패배의 쓴잔을 받아든다. 일본 경찰들이 대놓고 자행하는 감시와 통제 속에서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한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대표들은 회의까지 멈추고, 평양신사로 향했다.

평양신사는 일본인들이 ‘천조대신(天照大神)’이라 부르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를 제신으로 섬기는 사당이었다.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린 이들은 ‘기독교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다’ ‘애국적 국가의식이다’고 스스로 강변했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는 우상숭배이자 배교행위였다.

한국교회는 그렇게 쓰러졌다. 한 번 내준 신앙의 정절은 속절없이 내팽개쳐졌다. 이후 장로교 총회 기간에는 신사참배가 당연한 절차처럼 실시됐고, 전국 교회로부터 돈과 종을 거두어 일본군대의 무기 구입자금으로 헌납하기도 했다. 1942년에는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이 붙은 전투기가 등장했다.

이름 있는 목사들은 겨레 청년들을 점령국의 용병으로 내몰고, 일제의 대동아전쟁에 협력하도록 교회를 독려하는 시국강연회 연사로 등장했다. 한 때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었던 ‘대부흥’의 성지 평양의 교회들은 신사참배 결의 이후 쇠락의 길을 걷다가 결국 해방 이후에도 회복되지 못했다. 무서운 암흑기가 도래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2018년 9월 10일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며

한국 장로교회 신사참배 결의와 1940년대의 부일과 배교

 

나삼진 목사 (Joyful Educational Ministries 원장)

2018년 9월 10일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를 “솔선 여행하고, 비상시국하에서의 총후 황국 신민으로서의 적성을 다하기로” 결의하고 성명서를 낸 지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는 한국 장로교회 50주년 희년잔치를 마친 후 불과 4년 만의 일이었는데, 오늘날까지 134년의 한국 장로교회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이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여 관심은 갖지만 매우 피상적으로 알고 있으며, 그 이후 1945년 해방 때까지 교회가 어떤 범과를 저질렀는가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여 회개 집회를 갖는다는 보도가 있지만,1)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학문적인 평가와 반성도 빈약한 실정이다. 더구나 올해는 한국 장로교회 중요 교단 총회가 신사참배 결의 80주년 기념일에 개회하는 데도, 이에 대한 의미있는 행사가 준비되지 않고 있는 것은 한국 교회의 빈곤한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한국 장로교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여, 그 이후 1940년대 한국장로교회의 부일과 배교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한다. 이 사건은 우리 시대에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그 역사적인 경계를 삼고자 한다. 이 논의를 통해 한국 장로교회가 새롭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1.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1) 일제강점기 기독교 탄압의 배경과 신사참배 강요

일본 제국주의(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정치적 억압정책, 경제적 수탈정책, 문화적 말살정책 등 세 가지 정책으로 나타났다.2) 정치적 억압정책은 한국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한국인의 정치적 참여를 봉쇄하는 것이었고, 경제적 수탈정책은 농업 방면과 상공업 방면에서의 수탈이 중심이 되었으며, 문화적 수탈정책은 교육정책과 언어정책, 역사왜곡 등이 중심이 되었다. 거기다가 종교적 탄압정책도 함께 나타났는데, 일제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극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천황숭배와 신사신앙을 축으로 하는 그들의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기독교와는 조화, 공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제에게는 당시 기독교가 민족운동과 깊은 연대를 가진 배일세력으로 인식되었으며, 일본과 경쟁, 혹은 적대관계에 있는 영국과 미국 등 서구 여러 나라들과 선교사를 매개로 연결되어 통제나 지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3) 일제가 기독교를 유독 탄압했던 것은 이렇게 일본의 제국주의적 본성과 갚은 관련을 갖는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은 그 야욕을 중국으로 뻗히게 되었는데, 1932년에 허수아비 정권으로 만주국을 수립했다. 일제의 이러한 야욕은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노골화되어, 1937년 7월 선전포고 없는 중일전쟁을 도발한 후에는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며 중국대륙을 병탄하려 했다. 이는 전쟁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었으므로, 그들이 즐겨 사용했던 ‘총후(銃後, 후방을 의미)의 지원과 협력을 위해 국민정신의 통일이 중요했다. 이에 조선과 일본이 하나임을 강조하는 내선일체 정신 계몽에 적극적이었다.

1936년 8월 관동군 사령관 출신의 미나미가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조선민족을 말살하는 대대적인 억압정책을 폈다. 일제는 1937년에 들면서 9월 6일 애국일 제정, 10월 2일 ‘황국신민의 서사’의 제정과 일상적 제창 강요, 1938년 2월 6일 지원병제 실시, 3월 4일 민족성 말살을 위한 조선교육령 개정, 1939년 1월 10일 창씨개명 강요, 1942년 5월 징병제 실시, 1942년 초등교육 배가계획 등의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4)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시작한 후 그들의 종교 신도(神道)를 한국에 이식하기 시작했다. 1925년 조선신궁을 건립한 이래 도처에 신사를 건립하면서 1936년에는 전국에 54개의 신사(神社)와 293개의 신사(神祠)를 보유하게 되었다. 일제는 신사참배로 국민들의 정신적 통일을 이루려 하였다.

신사참배의 강요의 첫 시도는 1932년 춘기 황령제의 제례에 각급학교의 참여를 요구한 데서 시작되었다.5) 이러한 요구가 1935년부터 기독교 학교 신사참배 강요로 나타났고, 1936년부터는 교회와 교회기관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1937년 7월에 1면 1신사 정책이 추진되면서, 신사가 급격히 늘어 1945년에는 신사(神社) 79개와 신사(神祠) 1,062개가 되었다.6) 최근 공개된 1942년 5월 경 전남 담양면장의 공문에 의하면, 일제는 신사운영비까지 주민이 부담하게 했다.7)

2)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신사참배는 기독교 여러 교파에 요구되어 장로교에서는 1938년 2월 9일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후 8월에는 평양노회, 9월에는 경안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고, 전국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일제의 강요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8) 이 시기에 각 종교단체나 다른 교파들 가운데 천주교는 교황청의 정책에 따라 일찍이 1936년 5월에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였고, 안식교는 1935년에, 감리교는 1938년 9월 3일 총리사 양주삼의 명의로 신사참배 여행 성명서를 발표했다. 마지막으로는 장로교 총회가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 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추히 국민정신총동원 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期)함

소화 13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제27회 총회에서는 이 결의 후 평양기독교친목회 심익현 목사가 신사참배 즉시 실행을 특청하자, 총회가 이를 받아들여 김길창 부총회장의 인솔로 전국노회장 23명이 총회를 대표하여 평양 신사에 참배하였다.9) 이어 총회에서 김길창이 제출한 건의안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10)

1) 당국과 조선교회와 선교사단과의 삼각적 관계의 원만을 도모할 일

2) 총후보국(銃後報國)에 물자헌납운동은 물론 우선 정신 동원의 일부로서 내지교회와의 연락을 위한 친선사절을 보낼 일

3) 국방헌금은 교회가 일정한 시일에 애국예배를 보는 동시에 국방헌금대로서 조직할 일

4) 신사참배는 사대절(四大節)에 일반시민과 같이 참배하도록 당국과 교섭할 일.

12월 12일에는 장로교 홍택기, 김길창, 감리교의 양주삼, 김종우, 성결교의 이명직 등 5인이 한국교회 대표단으로 일본의 이세신궁과 가시하라신궁 참배를 떠났다.11)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겠지만, 총회에서의 부속 결의와 그 이후 지도자들의 행적으로 볼 때 신사참배는 일제의 강요와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3) 기독교 학교의 폐쇄와 신사참배 반대운동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저항의 반작용도 있었는데,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기 위해 1938년 졸업생들에게 우편으로 졸업장을 보내고 스스로 휴교했다. 주한 각 선교부들은 신사참배에 응하지 않기 위해 그동안 설립, 운영해오던 기독교 학교를 폐교했다. 이들 선교부들 가운데는 남장로교회 선교부가 강력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사참배 강요가 본격화 되면서 선교본부 풀톤 총무가 내한하여 신사참배 반대의 의지를 분명히 함에 따라 그해 9월 6일 전라남북도의 도지사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전라지역의 네 학교를 강제로 폐교하였다. 순천 매산학교, 전주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등의 세 학교도 스스로 폐교 신청을 해 폐교되었다.12) 이같은 반응은 부산경남지역을 관할하던 호주장로교회도 1938년 6월에 학교들을 폐쇄하였다.

신사참배 반대에 따른 일제의 종교적 탄압이 가속화되면서 다른 교파들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1942년 2월 20일 미국감리교회 해외선교부에서 선교사들은 모든 선교지역에서 철수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고,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철수하였다.13)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후 전국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평안남도 주기철, 평안북도 이기선, 경상남도 한상동, 만주 한부선 등이었다.14) 집단적, 조직적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한 이들은 1940년 9월 20일 새벽 4시 일제검거로 체포되었다. 한국 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로 200여 교회가 폐문되고, 2천여 명이 투옥되었으며 이중 50여 명이 순교하였다.15) 8월 17일 밤 이기선, 주남선, 한상동 등 20명이 평양감옥에서, 손양원이 청주감옥에서, 또다른 소수가 부산감옥에서 출옥했다.16)

 

2. 신사참배 결의 이후의 한국 장로교회의 훼절과 배교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가의식으로 결의한 이후 교회는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9월에 있은 제28회 총회에서는 일제에 협력하기 위한 기구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조직했다. 총회 파회 후 산회되는 총회와는 달리 이 기구는 상시체제를 유지하였는데, 이사장은 총회장이 맡고, 각 노회장은 이사로, 총대들은 평의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전국에 26개 노회 지맹이 결성되고, 731개 애국반이 조직되었다. 1937년 7월부터 1940년 8월까지 장로회 총회연맹에 보고된 장로교의 친일행위는 전승축하회 604회, 무운장구기도회 8,953회 국방헌금 15,803.46원, 휼병금 1,726.46원, 유기 308점, 시국강연회 1355회, 위문 181회, 위문대 1,580개였다.17)

1940년대의 한국 장로교회 총회는 개회 이후 총대 일동이 신사에 참배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18) 제30회 총회에서는 시난극복의 결의문을 작성, 총회장 명의로 발표하고, 이를 지나주둔황군사령관에게 보내기로 결의하였다.19)

동양평화를 확보하고 팔기일우의 대이상을 구현한다는 황국부동의 국시를 지금은 적성국 가의 제국에 대한 도전적 태도가 일일 노골화되어 아국의 국시수행에 방해를 위해 광분 하는 현 시국의 긴박하고 비상의 때인 가을에 기독교도로서 초연하지 않고 장로교파 36 만 신도는 불퇴전의 결의를 가지고 국책에 순응하여 결전태도를 실천확립하고 시난극복 의 정신을 갖도록 한다.

소화 16년 11월 22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1940년대의 한국 장로교회가 얼마나 부일과 배교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는 제31회 총회 회의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20)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개회되었던 제31회 총회는 개회예배 전에 먼저 필승 기원선언문을 채택하고,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회의록은 “일동은 크게 감격해서 박수를 하였다”고 기록하였다.21)

천황의 덕분으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고, 그로 인해 세계 신질서를 완성한 것 이 우리 제국의 국시입니다. 우리의 황군 장병은 하늘에서 바다에서 육지에서 큰 전과를 거둬가 고 있는 것에 대하여 전장의 뒤에 있는 국민은 감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가을에 우리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천황의 은혜에 감격해 눈물을 흘리고, 협심 전력으로 성스러운 업적을 완수하도록 매진할 것을 결심합니다.

왼쪽과 같이 선언합니다.

소화 17년 10월 16일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31회 총회에서는 이 선언문 채택뿐만 아니라 개회 이튿날 1942년 10월 17일 오전 9시 30분 총대원들이 일제히 평양 신사에 가서 참배하였으며, 이어 평안남도 고등감찰과장의 시국강연, 국민의례, 특별강연회, 전승기도예배가 있었다. 주일에는 성만찬 예식이 있은 후 창무 조선군 보도부장의 강연, 저녁에는 오후 7시에 전승기도예배를 가졌다. 총회 주최로 대동아전쟁 목적 관철과 기독교도의 실무를 재삼 격려하기 위하여 호남선, 경부선, 함경선, 황해선, 경의선 등 다섯 조로 나누어 전조선 중요도시에서 시국순회 강연대를 파송하기도 했다.22) 총회의 경건회에서도 설교를 맡은 목사가 로마서 13장 1-3절을 중심으로 ‘기독교인의 국민적 각오’라는 친일적 설교를 하기도 했다.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이후 불과 4년 안에 총회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는 더 이상 장로교회의 총회일 수가 없었다.23)

1940년대에는 황민화 사상이 기독교 안에 까지 깊숙이 들어왔는데, 전국 교회에 가미다나(信朋)을 설치하고, 예배 전에 천조대신의 신패에 경배하고, 동쪽을 행해 일본 왕에게 절하고, 황국신민서사 낭독과 국기배례를 한 후 예배를 드렸다. 더구나 서울의 한강이나 부산의 송도 앞바다에서 천조대신 이름으로 신도침례(미소기 바라이)를 받도록 했다. 또 구약성경 사용을 폐지하고, 찬송가도 부분적으로 삭제되었다.24) 한부선은 그 시대에 모든 교회가 총독부의 선전도구가 되기 위해 하나의 교회로 묶여 총독부의 통제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증언한다. 성경도 구약성경에서 종말론과 연관이 있는 부분들은 사용이 금지되었고, 복음서를 중심으로 설교하게 했으며, 기독교인들이 주일에도 ‘전쟁을 위한 노력 동원’이 되었다고 전한다.25) 찬송도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금주가 등 21곡이 삭제되었다.26) 이같은 일은 감리교에서 더 협조적이었는데 1939년 1월 히라누마 내각에 의해 종교단체법이 통과된 후에 일본 기독교 조선 감리교단 정춘수 통리가 전국교회에 시도한 공문에서 확인된다. 공문에는 구약성서와 신약의 묵시록을 사용하지 않고, 사복음서에 기인하여 교의를 선포하기로 교회에 통달이 있었다.27)

3. 1940년대 한국 장로교회의 부일, 배교 행적들

제31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1942년 10월 16일 서문밖교회당에서 26개 노회 총대 목사 69명, 장로 66명, 모두 135명이 참석한 가운데 회집했다. 이 총회에 각 노회에서 상황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총회 회의록 79면부터 90면까지에 수록되어 있다. 각 노회는 감사의 건, 교회상황, 특별상황, 교육상황, 장래 계획, 교세 통계 등을 보고하는데, 노회는 특별상황과 장래 계획이라는 항에서 부일, 배교 행적들을 상세하게 남기고 있다. 이를 내용별로 분류,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애국기 헌납 헌금

1841년 8월 ‘조선장로교도 애국기 헌납기성회’가 조직되고, 모금을 시작하였다. 이어 이 일은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연맹’을 통해 이루어졌다. 다수의 노회에서는 애국기 헌납을 위해 헌금하였는데, 충청노회는 4,051.60원을, 전북노회는 4,000여 원을, 군산노회는 4,500원을, 용천노회 25,000원, 평서노회 8,000여 원을 헌금했고, 삼산노회와 제주노회는 금액을 밝히지는 않지만 애국기 헌금을 위해 후방국민으로서 정성을 다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모든 헌금은 기성회를 통해 모금되어 군에 전달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계속되자 일제는 무기 제작을 위한 물자 확보를 위해 교회의 종을 징발했다. 충청노회는 82개 교회 가운데 80개 교회의 종을 헌납하였고, 평서노회는 68교회에서 국방헌금 외에 조종 77개와 놋그릇 152개를 헌납하였으며, 전북노회는 종과 함께 금속류 회수운동을 전개하여 놋그릇 수 천점과 교회 조종을 헌납했다고 보고하고 있다.28) 이렇게 수납된 종은 1941년 10월부터 1942년 10월 15일까지 전국적으로 1,540개, 총액 약 11만 9,832원에 달했으며, 놋그릇 등 잡종기 헌납은 2,165점이었다.29)

이렇게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1942년 2월 10일 육해군에 애국기 1대 또는 기관총 7정의 대금으로 150,317.50원을 헌납하였고, 그 후 들어온 자금으로 같은 해 6월 조선군 사령부를 방문하여 육군환자용 자동차 3대 기금으로 23,221.28원을 납부했다.30) 1942년 9월 20일 해군성으로 헌납한 애국기 명명식이 경성운동장에서 개최되었는데, 총회 대표가 함께해 감사장과 수납서를 받았으며, 해군보국호 선상전투가 한 대와 육군 기관총 두 정에 대한 명명은 ‘조선장로호’로 명하고, 당일 헌납 보국호 사진을 해군성으로부터 받았다는 총회 연맹 보고를 하고 있다.31)

총회 연맹은 1944년 반도인에 대한 징병령 계획에 따라 “이 감격을 안고 동 준비운동을 함에 있어 실제적 운동으로서 전 조선 기독교 가정 부인계몽운동을 하기로”하고, “전 조선 기독교 지도자는 일본적 기독교 정신 아래 교회원을 지도하도록 함에 있어서 본 총회 연맹은 그 지도자에 대한 황도정신에 함량과 함께 기독교 신학사상의 명랑화를 기해서 철저하게 연성운동을 하도록 함”이라 보고한다.32) 이 시기 한국 장로교회의 부일협력과 반민족적인 행위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2) 시국강연회와 전승축하대회

이 시기에 여러 노회에서 시국강연회도 실시하였다. 충청노회는 관내 82개 교회 가운데 80교회에서 시국강연회를 실시하고, 조종을 헌납하고, 부여신궁 제조에 근로봉사대 3인을 파견했다. 이와 함께 충청노회가 교파합동 청원서를 총회에 제출하였다.33) 삼산노회는 징병제 실시 경연과 애국예배를 실하였고, 제주노회도 1938년 2월 지원징병제 실시에 따라 축하 강연을 도경찰서 고등계의 후원 아래 제주도내 20여 개 교회에서 개최하였다.

일본군이 전장에서 승리하면서 노회에서는 전승축하대회도 개최하였다. 이 일에 가장 앞장섰던 노회는 서울을 교구로 하는 경성노회였는데, 결전 체제강화 신도대회를 개최하고, 전승기원대회와 남방 출정 황군장병을 위한 일장기 500본을 발송했으며, 싱가포르 함락 축하 신도대회 및 징병제 실시 감사대회를 개최하였다.34) 노회 관내 여러 교회는 국어(일본어) 강습회 개최, 황군장병에 대한 위문품, 위문금을 종전대로 발송하였다는 보고로 보아 이전부터 계속된 사업임을 알 수 있다.

3) 교회 통폐합

일제는 교회의 통폐합에도 적극적이었다. 일제는 기독교 세력의 약화를 기하기 위해 지역교회의 통폐합을 강요하여 1941년 3,624교회에서 1942년에는 2,543교회로 줄어들었다.35) 한 해 동안 모두 1,081교회가 폐쇄되었는데, 이는 당시 총 장로교교회 수의 30%가 되는 것이다. 그중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 경남노회로, 노회 상황보고에서 “통제에 의해 교회의 통폐합을 실행한 결과, 335교회 중에 108교회가 감소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36) 이는 총회산하 교회 감소분의 꼭 10%를 차지하는 수로, 전국 26노회인 것을 고려하면 가장 많은 수의 교회가 폐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일제의 박해에 의해 기독교 신앙과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지만, 노회의 보고를 볼 때 노회가 일제의 뜻을 따라 적극적으로 교회 통폐합에 협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일본적 기독교 추진

일제는 기독교를 일본적 기독교로 바꾸기에 혈안이 되었고, 교회들이 이에 협력했다. 충청노회는 일본적 기독교로 진일보 전환했다고 보고하고, 함북노회는 교역자 하기 수련회를 개최하여 일본정신사 강의를 한 주 동안 청강을 보고하고 있다. 황해노회는 신도의 신앙에 충실하기 위해 힘을 쏟았음을 보고하고, 평양노회는 비상시국에 임하여 각 시찰부에서 활동하는 선교 대신에 목사를 파견하여 순회하도록 하고 있다. 삼산노회에서는 일요학교에서 일본어로 가르치고, 일요학교 지도수련회를 개최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또한 여러 노회가 일본적 기독교화에 앞장서겠다는 장래 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경성노회는 신도로서 충성보국의 전신을 철저하게 하도록 하며, 전북노회는 일본적 기독교 확립에 매진하며, 전남노회도 황국길에 따라서 일본 기독교 완성에 매진할 계획을 보고하고 있다. 제주노회도 국어 보급을 장려하고, 일본적 기독교에 매진하며, 경남노회도 교회의 지도자 및 신도 등을 노회 또는 지방적으로 각각 훈련시켜 일본적 기독교 건설에 매진하며, 경동노회도 신도들에게 철저히 시국인식을 하게 하여 전도 사업 및 종교교육에 임하여 일본적 기독교 건설에 매진토록 하는 것을 장래 계획으로 보고하고 있다. 경북노회와 함북노회 등도 유사한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

5) 교파의 통폐합

한국 장로교회의 이같은 부일협력과 배교행위가 따르는 사이, 일제는 기독교를 효율적으로 통제, 관리하기 위해 교파통합을 추진, 각 교파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폐합하려 했다. 교파통합을 위한 일제의 뜻을 파악하였던 충청노회와 평양노회는 교파 통합청원서를 총회에 제출하였다. 이 청원은 정치부로 보내졌다가, 정치부 보고를 받아 가결하고 중앙상치위원회에 위임되었다.37)

교파의 통폐합은 제31회 총회 이전에 이미 추진되고 있었는데, 1942년 1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일본기독교 조선교구, 구세군 등 다섯 교파 대표가 모여 조선기독교합동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통합을 추진하다가 감리교의 이탈로 실패로 돌아갔다. 교파 통합이 결렬되자, 장로교 총회는 상치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1943년 5월 총회를 해산하고,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 되었다.38) 이어 일제는 전세가 이미 기울었음에도 불구하고 1945년 8월 1일에 다시 모든 교파들을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합되었다.39) 초대 통리는 장로교 김관식, 부통리에는 감리교 정춘수가 맡았다. 이것이 불과 해방 두 주 전의 일이었다.

장대현교회 목사로 평양노회 총대로서 교파 통합안을 헌의하고,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설립에 앞장서 통리가 되었던 김관식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재빠르게 변신해 해방과 함께 조선교단의 기구적인 재건에 앞장섰다. 그는 1945년 9월 8일 새문안교회당에서 남부대회를 소집해 대회장을 맡아 교단을 이끌기를 원했으나 감리교와 장로교 대표들이 각각 교파로 환원을 원하면서 단일교단 유지가 무산되었다. 기독교계 친일인사들이 이렇게 해방 후 자숙없이 한국교회 대표로 등장하였고, 그에 비해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쇄신론자들은 분리주의자로 매도되고, 결국 1951년 장로교 총회에서 축출되고 말았다.40)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국가의 체계를 갖추기에 급급한 나머지 친일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아 민족정기가 바로 서지 못한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불행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정권에 협력하였던 독일 교회가 1945년 8월에 프랑크푸르트에서, 10월에 슈투트가르트에서 모여 지난날의 잘못을 참회하고 ‘슈투트가르트 죄책 고백’을 발표하고 하고, 책임있는 사람들은 독일교회의 재건과정에서 물러난 것과 대비되고 있다.41)

맺는 말

지금까지 일제의 기독교 탄압과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 그 후 1940년대 한국 장로교회가 어떻게 훼절되고 배교의 길을 걸었는가를 논의하였다. 이제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하며 이 소론을 마치려 한다.

첫째,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 결의 80년을 맞아 부끄러운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회개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당시의 우상은 신사에 절하는 것이었는데, 이 시대에 어떤 우상들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에 침투하고 있는가를 인식하고, 이를 청산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심각한 우상은 돈과 명예와 권력일 것이다.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의 재정비리는 교회가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에 어느 정도 성취를 경험한 이들이 감투에 대한 욕심이 연합기관을 만들어 명예를 추구하고, 비상식적인 기관 운영으로 자주 물의를 일으킨다. 또 교회의 역량을 넘어선 거대한 예배당을 건축하고, 이를 유지하지 못해 이단교회에 넘기는 일까지 발생되는 것은 교계 지도자들이 명예의 우상을 섬기기 때문이다. 또 오늘의 한국 교회에 교권주의가 판을 치고, 교회 지도자들이 국가권력과 결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것은 권력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국 교회에서 더 이상 교권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

둘째, 한국 장로교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이후 발생한 교회의 훼절과 배교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가 이루어지고 그 방파제가 무너진 후 1940년대에 모든 것이 일시에 무너지는 도미노 현상을 경험했다. 1940년대에 목사들이 신도 침례까지 받았고, 한국 장로교회 총회는 애국기 헌납 헌금, 시국강연회와 전승축하대회, 교회 통폐합, 일본적 기독교화 추진, 교파 통폐합 등에 앞장서 부일과 반민족적 배교의 길을 걸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한 매체의 보도에 의하면 한국 교회 총회장이나 중요 기관장들의 상당수가 교회를 자녀에게 세습했다. 한국 장로교회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예장통합의 총회 재판국이 총회 헌법의 규정을 벗어나 명성교회의 세습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함에 따라 이 문제가 제103회 총회의 핫이슈가 되어 있다. 한국 교회 희년 잔치를 벌인 후 4년 만에 이루어진 신사참배 결의와 같이 이 사건은 한국장로교회 총회 설립 100년 잔치를 벌인 후 불과 6년 만에 일어났다. 한국 장로교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가 한국 교회의 일제강점기의 부일과 배교의 본격적인 출발이 된 것과 같이 명성교회 세습의 용인은 한국 장로교회가 향후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을 것인가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이 문제의 통합총회의 최종 결정이 한국 교회의 미래의 결정적인 방향타가 될 것이 분명하다. 한국 교회는 지금 흥망의 기로에 서 있다.

셋째, 한국 교회와 교계는 법과 상식으로 목회와 행정이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최근 비리 혐의로 총신대 총장과 이사들이 해임되어 임시이사가 파송되었고, 피어선성경학교의 백년 역사를 이은 평택대 총장은 20년 동안 여직원 성추행이라는 파렴치한 사건으로 법정 구속되었다. 대형교회들에서 발생한 목회자 비리와 윤리적인 문제들이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있으며, 많은 기독교계 대학들이 비리로 몸살을 앓고, 이러한 여러 문제들이 자주 방송에 노출되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있다. 한국 교회는 교회 행정과 재정운영에서 사회에서 통용되는 기준도 따르지 못해 사법부의 판단과 정죄를 받고 있다. 한국 교회는 공적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넷째, 한국 교회와 연합기관은 지난 수년 동안 정치적인 행사에 참여하면서 극단적인 수구세력으로 지목되고, 지성사회의 혐오를 받고 있다.

지도자들이 역사의식을 갖지 못하고 교회를 정치집회에 동원하면서 교회의 영광이 손상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한국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지만, 이 땅에 속한 기관이 아니다.

한국 교회가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아 이 중대한 역사적 범죄를 깨닫고, 이를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사로잡고 있는 우리 시대의 돈과 명예와 권력의 우상을 척결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한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교회에 주어진 사명에 충실해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하여 한국 교회 200년의 새로운 역사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 한국 선교 원년 : 1885년 4월 5일 / 2021년은 선교 136주년



신사참배는 ‘차금법’ 문제 바로 볼 수 있게 하는 거울



한국교회가 지은 신사참배의 죄에 대해 되돌아보면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된다.

첫째, 만일 모든 한국교회가 힘을 합하여 저항했더라면 그것은 막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저항을 포기한 사람들에 의해 지도자들의 의견들이 분열되었고, 결국 신사참배의 강요에 굴복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것은 모든 교회사가가 아쉬워하는 대목이다.

둘째, 마귀는 그 죄악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일제는 이 신사참배가 종교 행위가 아니라 국민의례라는 명분을 들고 나왔고, 많은 지도자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 가운데는 실제로 그렇게 믿은 사람들도 있었고, 강요 때문에 굴복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렇게 믿고 싶어 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거짓이었음이 드러났다.

셋째, 마귀는 처음에는 조그만 것부터 시작하며, 일단 그것을 받아들이면 점점 더 심한 요구로 나아간다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는 국민의례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자, 일제는 더 심한 것들을 강요했다.

천조대신이나 천황이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높은 신이라고 주장해도 받아들여야 했다. 교회당 안에 간이신사를 설치하고 그것에 절하라고 해도, 예배시간에 신도예배를 함께 드리라고 해도, 목회자들에게 신도침례를 받으라고 해도,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신사참배는 종교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수용했기 때문이다.

넷째, 마귀는 처음에는 양처럼 접근해서는 폭군으로 돌변한다

신사참배가 처음에는 국민의례라는 부드러운 얼굴로 나타났지만, 일단 결의가 이루어지자 곧바로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무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다섯째, 법적 결의가 중요하다

날치기 결의였지만, 총회에서 일단 결의가 이뤄지자 그것은 모든 배도의 근거가 되었고,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빌미가 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총회의 결의나 법은 그것이 나쁜 것이라면 어떤 형태든 방관해서도 안 되고 함부로 통과되게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교훈은 오늘날 문제가 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평등법과 같은 악법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차별금지법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신사참배 문제와 유사성이 있다.

첫째, 신사참배가 그 속의 죄악을 감추기 위해 국민의례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 것처럼, 차별금지법도 그 속에 들어있는 죄악을 숨기기 위해 인권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나고 있다.

소위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명분은 참으로 그럴듯해 보이고 선한 동기가 들어있는 것 같지만,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엄청난 죄일 뿐이다. 우리는 그 가면에 속아서는 안 된다.

둘째, 신사참배가 조그만 것에서 시작해서 더 큰 배도로 이어진 것처럼, 동성애도 하나를 양보하면 더 큰 것을 양보하게 되어 있다.

동성애도 처음에는 동성 간의 애정을 허용하는 것에서 시작하다가 지금은 동성 간 결합까지도 허용하고 있다. 또 처음에는 육체적 성전환만을 트랜스젠더로 인정하다가 나중에는 육체적 성전환 없이 본인의 성정체성 주장만으로도 트랜스젠더로 인정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확대해 나간다면 나중에는 일부다처제도 소위 성소수자의 인권이라는 명분으로 보호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셋째, 신사참배가 국민의례라는 부드러운 얼굴로 시작했다가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폭군이 됐다.

차별금지법 역시 성소수자의 인권 보호라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무서운 얼굴로 돌변하게 된다. 이미 이 법은 동성애 반대자에 대한 탄압과 처벌 조항을 담고 있다. 신사참배의 가장 큰 피해자가 기독교였듯 차별금지법의 가장 큰 피해자도 기독교가 될 것이다.

넷째, 신사참배가 총회에서 결의되자 다른 모든 배도의 근거가 된 것처럼, 동성애 역시 법으로 합법화되면 교육이나 문화적인 면에서 다른 모든 죄악을 허용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이 법에 따라 학교에서는 동성애 옹호 조장교육이 진행될 것이다. 언론과 문화 예술에서는 동성애를 미화하게 될 것이고, 삶의 현장에선 동성애가 만연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법이 제정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다섯째,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교회지도자들이 일치단결하여 반대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사참배가 한국교회에 강요된 것처럼 차별금지법 문제에 대해서도 교회가 일치단결되지 않는다면 이 법이 제정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교회는 하나 된 목소리로 차별금지법에 반대하고 행동으로 나서야 한다. 이런 면에서 신사참배 문제는 차별금지법 문제를 바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좋은 ‘거울’이다. 팬데믹 시대 신앙을 위협하는 갖가지 시도에 대응하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라도 교회사를 더욱 깊이 연구해 나아갈 길을 찾자.





# 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ἀγάπη 참조 / 다음 주제 - 죄란 무엇인가? 2023년 주일 설교 자료 제공 사이트 참조


2023년 주일 설교 자료 제공(01. 01.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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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스교회 유투브 온라인 방송 / YouTube Patris Church(불낙지교회)

https://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Patris+Church

: 불신자(不信者)를 주님 앞으로
: 낙심한 자(落心者)를 주님 앞으로
: 지체하는 자(遲滯者)를 주님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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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매주일 설교를 위한 기초 자료를 제공합니다.
자료를 사용하여 자신의 신앙과 은혜를 더하여 설교 원고를 작성하여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2022년 12월 25일 성탄주일 설교

동영상 자료 / https://www.youtube.com/watch?v=_218RxcdD0g&t=1155s

2022년 성탄주일을 맞이하여 "오늘의 미국의 영적 수준이 어느 단계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첫째, 상(上),  둘째, 중(中),  셋째, 하(下)

막연하게 미국 사회의 영적 수준을 개인의 느낌에 따라 판단할 것이 아니라 제가 판단하려는 기준은 "언어(言語)"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정의하는 용어 중에 "호모 루켄스(Homo Luquens)"라는 말은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3대 절기는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입니다.
이와 같은 절기를 맞이하면 어떻게 서로 인사하셨습니까?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해피 땡스기빙(Happy Thanksgiving)"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해피 땡스기빙(Happy Thanksgiving)"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를 "해피 할러데이(Happy Holiday)"라고 해야 한다는 사회적 여론이 점점 더 크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현재 기독교 인구 비율이 대략 64%라고 합니다.
물론 이 수치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한 통계입니다.
아직도 기독교인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절반을 능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여론은 기독교식의 인사말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서 교회의 반응은 조용합니다.

또 한가지 사례는 바이든 대통령에 의해서 동성결혼법이 법적으로 인정한다고 결정된 것입니다.
만일 어느 교회 설교자가 동성애와 동성결혼은 비성경적이라고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면 법적으로 제재를 받게 된다는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사회의 이러한 분위기를 그 시대에서 통요하는 언어를 갖고 진단하는 것을 "언령신앙(言靈信仰, language is spiritual belief)" 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에서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은 '말에 생명이 있다"는 뜻으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고 그 시대에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시대적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피 이스터, 해피 땡스기빙, 메리 크리스마스와 같은 인사말을 사회가 요구하는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사회의 영적 수준이 분명하게 낮아지고 있다는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현상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요?

불교(불교)에서 불자(佛者)들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이라는 염불(念佛)을 사용하여 간단하게 기도합니다. 모두 열 여섯 글자로 아주 간단한 기도문입니다.

물론 기독교에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이 초신자들을 물론 기존 기독교인들에게도 즐겁게 사용할 수 있는 기도문은 아닙니다.
더구나 교회에서 주기도문은 모임을 마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이 의미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불자들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에게 귀의합니다 이렇게 염불을 외우면서 기도합니다.
'나무’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아미타불은 극락에 계신 부처님을 말합니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부처님을 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염불(念佛)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분들께 귀의한다는 뜻과 함께 이 분들처럼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에는 염불과 같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신앙을 고백하는 기도가 없을까?
물론 동방교에서 수행하는 신자들을 위하여 사용하던 "예수님의 기도"  즉 "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Lord, have mercy on me!)" 라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목회 현장에서 보다 더 아주 간단한 기도가 없을까 고민하던 중 예수님의 이름에서 기도문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Jesus)
둘째는 그리스도(Christ)
셋째는 임마누엘(Immanuel)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예수(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저희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He will be save us from sin)"라고 합니다.
예수 라는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구주!"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구주!
Jesus is my Savior!

둘째는 그리스도(마태복음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be anointed people) " 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기름이란 성령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생명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하신 영원한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생명!" 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생명!
Jesus is my Life!

요한일서 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셋째는 임마누엘(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be with us)"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은 세 개의 말을 합성하여 만든 단어라고 하겠습니다.

‘임’(함께, with)
‘마누’(우리와, us) 
‘엘’(하나님, God)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부터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된 것이었습니다(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 예수님은 구원자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를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치료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24절에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가 일어나고 해방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고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29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 외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임마누엘이란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권세!"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권세!
Jesus is Power!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주 쉽게 설명한다면 여기 아주 얇은 종이 한장이 있습니다.
이 종이는 어린아이들도 쉽게 찢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이를 철판과 합친 후에 찢으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찢을 수 없습니다.
종이가 강해진 것이 아니라 철판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음므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연약한 내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에게 붙어 있는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어떤 질병도 환난도 근심과 걱정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실예 /

울주군 온산면 덕신리 625번지 신경부락에 대략 450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이 나무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과 같은 나무라고 믿고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 주민들이 돈을 모아 제를 지내고 심지어 무당을 불러 밤새도록 굿판을 벌렸습니다.

그런데 그 당수나무 바로 옆에 교회를 세웠으므로 마을 주민들의 반대는 아주 심각했습니다.
어느 해에 마을 이장이 찾아와서 정월 대보름 날 제를 지내려면 당수나무에 전기불을 켜야 하는데 마침 교회가 바로 옆에 있으므로 전선을 연결하여 전등을 켤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합니다.

이때 교인들은 어떻게 당수나무 제사를 지내는데 교회 전기불을 줄 수 있느냐? 
제사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이므로 전기를 빌려주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교회 전기불을 밝히면 당수나무에 제를 지내는데 귀신이 겁이나서 오겠습니까?
그러자 교인들이 목사님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을 이장이신 작고하신 이수엽씨를 찾아가서 제가 당수나무에 전선을 연결하여 전등을 달았으니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일러주었더니 이장은 전기세를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밤새도록 백열전구 켜봐야 전기세가 얼마나 나오겠습니까?
그런 걱정 마시고 편하게 사용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월 대보름이 지난 후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마을 주민 회의를 하였는데 당시 마을 사람들을 주도하던 서울 무당이 주민들에게 당수나무 신을 위하여 동제를 지내야 한다며 동제를 지낼 돈을 거둬드렸다고 합니다.
문제는 서울무당이 굿판을 크게 벌였으니 그 결론은 당수나무 귀신이 마을을 떠났기 때문에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다며 그 마을에서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와이스톤(Whitestone)이라는 지역에서 거주할 때 한번은 어느 수맥을 진단하는 사람이 방문하여 집에 수맥이 흐르는지 찾아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엘보 모양의 금속 막대리를 손에 들고 이 방 저 방을 옮겨 다니면서 하는 말이 분명히 수맥이 있는데 잡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혹시 예수를 믿습니까? 그래서 예 제가 목사입니다. 
그러자 그 분이 집안에 성경책이 있는 것을 보고 성경책만 놔두어도 수맥이 잡히지 않습니다. 하고 떠났습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주님만 믿고 따라가면 될 것입니다. 
2022년 성탄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신앙으로 무장하여 다가오는 2023년 주와 동행하는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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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 

言靈信仰 (ことだましんこう, 언령신앙)

언령신앙(言灵信仰)은 동북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오랜 전통으로 말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어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는 믿음이다. 즉 말에 혼(魂)과 영(靈), 즉, 보이지 않는 '힘'이 깃들어 있어 그 말대로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좌우되고 평생의 운명(運命)까지도 영향을 받는다는 믿음이었다.

고대 일본 역시 마찬가지로 언어에는 신비한 영적인 힘이 깃들어 있고, 그 힘은 현실세계에 큰 영향력을 갖는다고 여겼다. 그러한 힘을 믿고, 그 힘으로 현실을 바꾸려 하는 것을 '고토다마신코(言灵信仰)'이라 한다. 고대의 일본인들은 좋은 말이나 아름다운 말을 하면 행복이 오고, 반면 나쁜 말을 하면 재앙이 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한편, 고대 일본인들은 사람의 이름에도 '언령'이 머물고 있다고 믿었다. 특히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 자신의 혼이라 여겨, 남성이 여성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구혼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성이 남성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구혼을 승낙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또 염불(念佛)을 외면서 징이나 북에 맞춰서 추는 '염불 오도리'의 경우 '남무아미카불'의 명호를 주문으로 외어 말로써 악령을 물리치는 언령신앙이 깃들어있다. 이처럼 고대 일본에서는 언령신앙이 일상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언령신앙의 영향을 받아 고대에 일본의 제사 의식에서 신을 제사 지낼 때의 언어는 아름답고 엄숙하게 미화되어 문학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 제사를 연행하는 자는 산 위에 올라가 나라의 땅이 얼마나 기름지고 풍요로운가를 노래로 표현하고는 했는데, 이것은 말의 힘으로 현실 세계의 풍작이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는 풍작의 모습을 노래로 표현하는 것으로, 그 노래, 바로 말에 담긴 힘이 현실의 풍작을 가져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언령신앙의 전통은 '노리토(祝詞)'와 '센묘(宣命)'라는 일본 상대의 고유한 문학 양식을 발달시킨다. '노리토(祝詞)'는 기년제(祈年祭) 등의 궁정제사에서 읊어진 신전에서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본래는 간단한 주문(呪文)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집단 제사를 올릴 때 선미(善美)를 다한 말들을 봉헌하고, 사람들의 번영과 행복을 기원하고 신의 위력에 감사하는 행사를 거듭하는 동안에 점차 '노리토'의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이다.

노리토의 주 내용은 신의 이름을 부르고, 제사를 지내는 이유, 제신(祭神)의 내력과 업적의 설명, 진설(陳設物)의 열거, 기원하는 일 등이다. 이러한 내용을 음률과 성조에 유의하여 반복, 대구, 열거, 마쿠라 고토바(일본 전통 시가인 '와카''에서 어떤 말 앞에 붙이는 특수한 수식어), 비유 등을 사용하여 장중미(莊重美)를 살려 읽는 과정을 통해 노리토의 형식을 완성하였다. 문헌상 현존하는 '노리토'는 『엔기시키 (延喜式)』에 수록된 27편과 『타이키 (台記)』에 수록된 1편으로 총 28편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센묘(宣命)'는 천황이 신하에게 내리는 조칙(詔勅)을 말한다. 천황의 즉위나 양위, 황후를 세우는 일, 연호를 바꾸는 일, 황태자를 세우거나 폐하는 일, 상을 주거나 벌을 주는 일 등 국가의 중대한 일에 관하여 작성한 문서이다. '노리토'가 신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센묘'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도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감정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특징이 있다. 현존하는 센묘는 『쇼쿠니혼키 (續日本記)』 62편이 수록되어 있고 그 밖의 문헌에 3편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에도 '언령신앙'의 전통이 있어, 우리 조상들은 말조심을 강조했다. 특히 설날부터 대보름까지의 기간에는 아예 남에게 듣기 좋은 덕담만 하는 풍습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또한 언령 신앙은 중국이나 한국 등지에서 볼 수 있는 '휘(諱)', '피휘(避諱)'의 풍습과도 연결된다. 원래 '휘'는 죽은 사람의 생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을 말하였으나, 나중에는 생전의 이름 자체가 '휘'로 와전되는 바람에 이름을 부르지 않는 행위는 따로 '피휘'라고 명명하였다. 
'피휘'의 풍습은 범위가 확대되어 살아있는 사람에게까지 미쳤다.
  

한국 문학의 경우 『삼국유사』 등에서 언령신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삼국유사 중 '혜공과 혜숙'의 일화에서 광덕이 아미타불을 향하여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달을 증인으로 삼는다. 여기에는 자신이 바라는 바를 미리 질문으로 던져버려 이루어지리라고 여기는 충류도 계통의 언령신앙이 담겨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말이 씨가 된다"와 같은 속담도 언령 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문학비평용어사전 "고토다마​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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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

불자들에게는 불경을 모두 읽거나 암송하지 않아도 아주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불경이 있습니다.
그 불경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모두 16자로 구성된 기도문이라고 하겠습니다.

Q : 스님이나 어른들이 기도 할 때 또는 텔레비전에서 스님들이 나와 염불 하는 모습을 보면 흔히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합니다. 어떤 뜻입니까?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것

A :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나무’는 귀의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것 입니다. 
아미타불은 극락에 계신 부처님이고,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분입니다. 
또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염불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분들께 귀의한다는 뜻과 함께 이 분들처럼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자료출처 / 불교신문 2219호/ 4월 12일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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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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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 후반, 러시아의 한 시골 청년이 쓴 것으로 알려진 이 책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보여준다. 
책의 주인공은 어느 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읽고 어떻게 하는 것이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인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순례의 길을 떠난다. 
그러던 중 순례자는 큰 스승을 만나 “예수의 기도”(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를 배우고, 하루에 3,000번씩, 6,000번씩, 나중에는 1만 2,000번씩 반복하여 기도를 함으로써 기도가 마음 깊은 곳에 이르며 평온해지고 하나님과 합일되는 황홀의 경지를 체험하게 된다. 이 책은 이렇게 깊은 영성을 체험하게 된 순례자의 기도 여행에 관한 이야기이다. 

미국의 저명한 종교학자 휴스턴 스미스 교수는 “러시아 영성의 고전”이라 했고, 샌프란시스코 대학 종교학자 제이콥 니들먼 교수는 “지난 100년 동안 나온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 서적으로 사람의 삶을 바꾸어 주는 희귀한 책들 중 하나”라고 칭송했다. 

심지어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와 더불어 러시아 혁명 이전 “러시아 문학의 3대 걸작”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역자 오강남 박사는 1970년대 초 캐나다에 유학하면서 이 책을 처음으로 접했는데 그 당시 기독교에도 불교의 ‘염불’과 같은 종교적 수행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 후 캐나다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종교학 개론 과목을 담당할 때에는 언제나 학생들에게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과제를 냈다. 그리고 한국 독자들에게도 이 책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영어본으로 나온 모든 번역본들을 참고해 한국어로 번역했다. 

책은 무엇보다 문장이 간결하고, 평온한 느낌을 갖게 하여 조용하게 묵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람들 앞에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에 익숙해진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처음에 책의 주인공이 행하는 기도 방식, 즉 “예수의 기도”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예수의 기도,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던 예수의 기도가 책의 주인공에게 주었던 느낌, ‘팔다리로 감미로운 쾌감이 퍼지고’, ‘기쁨으로 심장에 거품이 이는’ 그 느낌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을 꿈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로 영적인 성장을 꿈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의 기도”는 새로운 희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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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聖誕) : 

성인 성, 성스러울 성(聖), 낳을 탄, 태어날 탄(誕)
- 성(聖) / 귀 이(耳) + 입 구(口) + 임금 왕(王) 또는 북방 임(壬), 천간 임 

임금님처럼 듣고 말한다.
북방 임(크다, 성대하다) 크게 듣고 크게 말하다

聖자는 ‘성인’이나 ‘임금’, ‘거룩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聖자는 耳(귀 이)자와 口(입 구)자, 壬(천간 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聖자는 본래 ‘총명한 사람’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聖자의 갑골문을 보면 큰 귀를 가진 사람 옆에 口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누군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聖자는 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나 ‘총명한 사람’을 뜻했었다. 
하지만 후에 뜻이 확대되면서 지금은 ‘성인’이나 ‘거룩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壬자는 ‘북방’이나 ‘천간’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壬자는 士(선비 사)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선비’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士자와는 기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壬자의 기원에 대한 해석도 제각각이다. 
일부에서는 실을 엮던 도구로 보기도 하고 또 다른 해석에서는 북쪽에 있는 별과 땅을 연결한 모습이라고도 한다. 
壬자에 ‘북방’이라는 뜻이 있으니 그런 해석도 가능하리라 본다. 

또 壬자를 工(장인 공)자와 같은 자였던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당시의 工자()는 壬자와( ) 달랐기 때문에 같은 글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이 무의미한 것은 지금의 壬자는 유래와는 상관없이 천간(天干)의 아홉 번째라는 뜻으로만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또 때로는 다른 글자와 결합해 ‘사람’과 관계된 뜻을 전달하기도 한다.

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사람 또는 총명한 사람

탄(誕) / 말씀 언(言) + 길 연, 늘일 연(延) 
  말을 널리 늘이는 것(세상에 말을 널리 알리는 것)

誕자는 ‘태어나다’나 ‘거짓’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誕자는 言(말씀 언)자와 延(끌 연)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延자는 발을 길게 늘여 걷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늘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誕자는 이렇게 ‘늘이다’라는 뜻을 가진 延자와 言자가 결합한 것으로 ‘말을 길게 늘이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誕자에서 말하는 ‘말을 길게 늘이다’라는 것은 남을 속이기 위해 이리저리 말을 늘여놓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誕자는 본래 ‘거짓’을 뜻했지만, 후에 ‘말을 만든다’라는 뜻이 확대되면서 ‘태어나다’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지난 12월 4일 황목사님께서 "내 신앙의 월드컵"이란 주제로 설교했습니다.
예배 후 식탁의 교제 시간에 마침 한국에서 어느 후배가 유투브 속보를 보내왔는데 제가 확인하지도 않고 브라질에 대해서 부전승이라고 전했는데 결국은 어느 유투버의 돈벌이 용 가짜 뉴스이었습니다.

12월 5일(월) 다니엘 간닥터와 예약된 검진을 위하여 콜 택시를 불러 전화번호부에서 확인한 주소를 알려주고 이동을 했습니다. 
접수부에서 전부한 후 안내원이 그런 의사가 없다고 합니다.
급하게 병원 밖으로 나와서 사무엘에게 주소를 받아서 다시 콜택시를 불러서 병원을 찾아가서 모든 검사 결과와 앞으로 진료 방향을 확인하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어떤 정보든지 반드시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짐하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성탄이란 절기도 성경적인 검증이 필요한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미국에서 모든 휴일을 어느 특정 종교의 용어가 사용되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을 해피 할러데이(Happy Holiday) 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미국의 기독교 인구가 몇 %일까요?
2020년 기준 미국 내 기독교인(아동 포함)은 전체 인구 중 약 64%로 추산됐다. 
같은 해 무종교인은 약 30%는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등 기타 종교인은 약 6%로 집계됐다. 
현재 미국 종교 인구 변화 속도와 트렌드에 따라 기독교인 비율은 2070년 전체 인구의 약 54%에서 최저 약 35%까지 급락할 가능성이 있다.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부활절을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사용해야 합니까?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추수감사절을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사용해야 합니까?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성탄절을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사용해야 합니까?

침묵할 때가 있고 외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외쳐야 할 때라고 하겠습니다.

당당하게 외치려면 외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 힘이란 성탄절을 맞이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의 구유"가 준비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구유가 준비되셨습니까?
마음의 구유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 이름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
둘째는 그리스도
셋째는 임마누엘

언령신앙(言靈信仰

언령 신앙은 일본에서 특히 발전된 것으로 일본에서는 ‘코토다마(言霊)’라고 부른다. 
말에 보이지 않는 힘이 깃들어 좋은 말을 하면 행복이 오고, 나쁜 말을 하면 불행이 온다고 믿는 것이다. 
학자들은 ‘말(言, 코토)’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事, 코토)’이 발음이 같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일본의 신 고토시로누시(事代主)가 고사기(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에서는 고토시로누시(言代主)라고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 일상 생활 깊숙히 스며든 언령 신앙의 사례를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말이 씨가 된다.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 미국에서 크리스마스를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해야 하는가?
이런 사회현상에 대해서 교회는 침묵하고 있는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10년 이내에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미국 전역에서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동성결혼에 대하여 부정적인 가르침을 강조하면 분명한 저항을 받게 될 것입니다.

추수감사절, 부활절, 성탄절은 기독교의 3대 명절입니다.
이러한 절기를 해피 할러데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점 더 강세로 드러나는 것은 언어에 감춰져 있는 힘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불자들에게는 불경을 모두 읽거나 암송하지 않아도 아주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불경이 있습니다.
그 불경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모두 16자로 구성된 기도문이라고 하겠습니다.

Q : 스님이나 어른들이 기도 할 때 또는 텔레비전에서 스님들이 나와 염불 하는 모습을 보면 흔히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합니다. 어떤 뜻입니까?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것

A :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나무’는 귀의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것 입니다. 
아미타불은 극락에 계신 부처님이고,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분입니다. 
또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염불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분들께 귀의한다는 뜻과 함께 이 분들처럼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자료출처 / 불교신문 2219호/ 4월 12일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물론 기독교에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은 너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과 비교하면 길다고 하겠습니다.
초신자들에게 주기도문을 암송하여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하던 중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모두 15자 글자 입니다.

뉴욕으로 이주하여 처음에는 이 기도문에 대해서 소개했었기에 그동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더 강조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탄절을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말하지 말라고 하는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당당하게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외쳐야 합니다.

무슨 말을 이 세상에 확장시켜야 할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찾아내려고 합니다.


오래 전에 교회가 토지수용법에 의하여 철거될 위기에서 마침 지역 경찰서 정보과장이 군청을 담당하는 형사를 소개해주며 함께 군청 직원을 만나라고 주선했습니다.
그때 군청의 담당 직원이 제안하기를 교회를 위해서 건축부지 300평을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는 중심부에 허락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로 돌아왔는데 마을 대표 몇 사람이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합니다.
자기들은 힘이 없으니 교회가 자기들과 더불어 함께 고등법원에 항소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마을 주민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외면하면 그만입니다.
더구나 그 주민들은 교회가 세워질 때 교회를 건축하지 못하도록 주도한 사람들입니다.
만일 교회가 주민들과 더불어 함께 행동하면 약속된 교회부지는 받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국 마을 주민들과 더불이 고등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하므로 군청의 제안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제가 결정할 수 있었던 힘은 예수님은 약자의 편에 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교회에 대해서 핍박하던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마을 주민들의 하소연에 귀를 기우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약자를 위한 길을 선택했을 때 마을의 주민들은 새로운 생각을 갖고 교회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Christmas
크리스마스는 라틴어 "그리스도"(Christus)와 "모임"(massa)의 합성어
'그리스도 모임' 즉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모임'으로 종교적인 예식을 의미한다. 
동방 정교회나 개신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예배"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미사"로 번역한다.

크리스마스(Christmas)란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기념일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는 성탄일이라고도 한다.

크리스마스는 영어로 ‘그리스도(Christ)의 미사(mass)’라는 의미로 고대 영어인 Cristes maesse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X-mas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여기서의 X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크리스토스: ΧΡΙΣΤΟΣ)의 첫 글자를 뜻하는 것

​크리스마스의 유래에 대한 주정은 크게 두 개의 시각이 있다.

첫째는 교회의 전통으로 교회 내에서 시작으로 보는 시각
둘째는 로마제국의 전통으로 로마의 절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시각

첫째는 교회의 전통으로 교회 내에서 시작으로 보는 시각

교회의 전통에서 크리스마스가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말에 따르면, 
신약성서에는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기록되어 있지만 탄생일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문에 초기 기독교도들은 1월 1일과 1월 6일, 3월 27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해왔다고 하는데요. 
이후 4세기를 거치면서 신학자이자 주교인 아우구스티누스와 기독교의 이단으로 구분되었던 도나투스주의자들 간의 논쟁에서 교회가 공인되기 전부터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지켰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록인 삼위일체론을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3월 25일에 수태되셨다. 
(중략) 전통에 따르며 예수께서는 12월 25일에 태어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12월 25일이 전통 즉 초대교회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교회의 전통에서 수난일이며 동시에 수태일인 3월 25일부터 상징적인 9개월 이후인 12월 25일을 기독교의 그리스도론적 개념으로 탄생일로 본다는 기록입니다.

​둘째는 로마제국의 전통으로 로마의 절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시각

로마제국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이들은 크리스마스 축제가 로마 연감의 기록에 따라 336년경 로마제국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로마교회 대주교 율리우스 1세가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선포한 350년부터 그리스도의 탄생제가 공식적인 '기독교'의 축제로 인정되기 시작하였고, 오늘날까지 전통으로 굳어지게 되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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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성탄절은 코로나 시대에 맞이한다는 특이한 절기라는 것입니다.

 - 코로 숨을 쉬게 하신 하나님께서 숨을 쉬는 것도 부자연스럽게 하셨지요
 - 노동하는 것이 곧 기도하는 것이라고 깨우치며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로 말라고 하셨는데
 - 나 보다 더 약한 것 같은 사람도 건강하게 지내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일러라.



2023년 1월 1일(주일)

신년주일(新年主日)  


제목 /  새로운 피조물
성경 /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2022년을 하나님의 은혜로 모두 건강하게 지내왔습니다.
감사합니까?
감사를 표현하셨습니까?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은 표현할 줄 아는 것으로 증거합니다.
이전에는 감사하다는 것을 돈이 필요 없는 립 서비스(Lip Service)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감사를 물질로 표현합니다.
2023년 매주일 예배 때마다 감사예물을 드릴 수 있는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며 신앙생활의 기쁨을 함께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제 경우를 소개합니다.
저는 매주일 감사예물을 20불씩 합니다.
이 감사는 건강과 생명을 지켜주신 것에 대한 가장 기초가 되는 감사를 고백하는 예물입니다.
그리고 그 주간에 특별한 은혜를 받았을 때는 그 명목으로 감사예물을 드립니다.

여러분들도 감사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언어의 변화
둘째는 물질의 변화
셋째는 습관의 변화

첫째, 언어의 변화(言語의 變化) Change of Language

창세기 11: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원래 언어는 오직 한 언어로 소통이 가능했습니다(창세기 11: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그러나 죄가 세상을 지배한 이후에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고 할 때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므로 의사소통이 불편하게 되었습니다(창세기 11:6-7,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그러므로 언어의 변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칼트(René Descartes, 1596. 3. 31-1650. 2. 11)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예를 들면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들어보면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백화점과 호텔에서 엘리베이터 걸은 "올라갑니다!" "내려갑니다!" 라는 말을 하루 종일 사용합니다.
이 사람이 화장실에 들어가서 용무를 볼 때 누가 화장실 문을 두드리면 "올라갑니다" 또는 "내려갑니다" 라고 반응한다고 합니다.

전화 교환원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을 "통화중"이라고 합니다.
전화 교환원이 화장실에서 용무를 볼 때 누가 그 문을 두드리면 무엇이라고 반응할까요?
예, '통화중' 이라고 반응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예를 우리 주위에서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것은 잃어버린 기회
둘째는 시위를 떠난 화살
셋째는 입에서 나온 언어(말)

이 세 가지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무서운 것이 '말'이다.
격려와 기쁨의 말은 사람에게 용기와 행복을 주지만 저주와 비난의 말은 한 사람의 신용과 명예를 일시에 무너뜨릴 수도 있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침묵은 금이다'

'구화지문'(口禍之門)
구시상인부'(口是傷人斧)

옛 조상들은 말에 관한 여러 속담과 글들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로 준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각종 공해와 오염으로 세상이 더러워지기도 하지만 무책임한 말과 언어의 남발, 아첨과 중상모략, 공갈협박, 남을 흉보고 헐뜯는 말들로도 점차 오염되고 병들고 있다.
매스컴과 같은 대중매체 등을 통해 퍼지는 언어의 왜곡과 조작이 병리학적인 인간화를 조장한다.

말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노출시킨다.
먼저 말하는 기술보다 말하려는 사람의 인격과 대인관계를 중요시해야 한다.
생각하고 있는 바가 언젠가 말이 되어 나오기 때문에 진실함과 사랑으로 타인을 대하겠다는 마음가짐이 대화의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성숙한 사람의 훈련을 위한 첫 걸음은 바로 말과 행실의 일치에서 시작된다.
현재를 사는 우리에겐 그 어느 때보다 더 인정과 포용의 말, 희망과 용기의 말, 지혜의 말, 친절과 동정의 말, 감사의 말, 격려와 칭찬의 말, 사랑의 말이 절실히 필요하다.

믿음의 사람은 정직하고 진실한 언어만을 사용해야 한다.
나의 말이 곧 나의 삶이며 나의 인격과 같다.
따라서 성경적 언어를 배워야 한다.
성경적 언어는 성경적 사고에 의해서 형성된다.



둘째, 물질의 변화(物質의 變化) Change in Money


마태복음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는 이유는 도적이 있기 때문이며, 종이 돈은 좀이 먹고 구리돈은 동록이 쓸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의 이야기
랍비와 신부와 목사가 헌금에 대하여 이야기를 합니다.
헌금을 어떻게 하는가?
랍비는 돈을 모두 하늘로 던지며 하나님의 것은 하늘로 올라가고 내 것은 땅으로 쏟아지라고 합답니다.
그러자 신부는 땅에 금을 긋고 그곳으로 돈을 던지면서 저쪽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몫 이쪽에 있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고 한답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은 원을 그리고 그곳으로 돈을 던진 후에 원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몫 원밖에 있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고 한답니다.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모든 것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지만 십일조는 십분의 일만 드린다는 믿음입니다.
감사헌금을 바치는 것은 모든 것을 바쳐서 감사해야 하지만 이것만이라도 바침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신앙생활에 기초가 되는 몇 가지 원리를 살펴봅니다.

대인관계의 원리(마 6:2-4) : 구제
대신관계의 원리(마 6:5-15) : 기도
대아관계의 원리(마 6:16-18) : 금식
대물관계의 원리(마 6:19-32) : 보물(물질)

결론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성경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성경적인 언어를 사용함과 동시에 성경적인 물질관을 갖추어야 합니다.
성경적인 물질관의 대표적인 인물을 욥이라고 하겠습니다.

약 4천 년 전에 우스 땅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매우 다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소생은 아들이 일곱이요 딸이 셋이나 되었습니다.
재산도 상당해서 양이 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급작스런 재앙이 닥쳤습니다.
아들 딸, 열 명이 맏이 집에 모여 잔치를 하는데 집이 무너져 몰사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강도떼가 급습해서 들판에서 가축을 치는 종들을 죽이고 모든 가축을 강탈해 갔습니다.

한번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세요.
무슨 말로 욥의 심정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욥은 그 비보를 전해 듣고는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애통한 심정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망연자실하지 않고, 경건한 마음으로 땅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며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 1:21)

여러분 욥이 아브라함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족장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출발은 욥과 같은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욥은 아브라함보다 더 큰 부자로 등장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실직하거나 사업에 실패해서 비관 자살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누적된 카드빚을 갚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경제적인 파탄은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으며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내 재산을 다 잃었으니 살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잃은 재산이 내 것이 아니고 갚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면 자살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내 것을 잃었기 때문에 충격이 큰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이 사람들과 욥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소유권에 대한 인식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욥은 그 많던 재산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고 했습니다.

만일 누가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서 무이자로 돈을 천만 원 빌려주어서 잘 사용하고 있는데, 어느 날 찾아와서 그 돈을 돌려달라고 해서 돌려주었습니다.
빌린 돈을 돌려주었으니 억울한 생각이 들까요?
돌려주는 것이 아까울까요?
좀 아쉽기는 해도 억울하거나 아깝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래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욥은 그가 살던 나라에서 가장 큰 부자였습니다.
사회적인 명망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전 재산을 상실했다는 것은 그 때까지 쌓아올린 그의 모든 명예가 물거품이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원망은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물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봅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나와 상속재산을 공평하게 나누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 청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상속 재산을 분배하는 일로 분쟁이 생기면 랍비를 찾아가서 중재를 부탁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예수님을 보통 랍비처럼 생각하고 찾아왔나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하셨습니다. 상속 분쟁을 해결하려고 했다면 그 사람이 예수님을 잘못 찾아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관심을 가지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재산을 더 많이 갖고 적게 갖느냐 하는 문제는 예수님께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의 청을 물리치신 예수님은 그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물질을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한 가지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한 부자가 농사를 지었는데 대풍이었습니다. 소출이 너무 많아서 쌓아 둘 곳이 부족했습니다. ‘어떻게 할까?’ 궁리하던 그는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래 이렇게 하면 되겠군.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어야겠다.’ 그리고는 자기 영혼에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구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 날 밤늦게까지 사업 구상에 몰두하다가 잠든 부자는 이튿날 아침, 사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결론으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눅 12:21).

부자의 말을 살펴보면, 그는 가진 재물을 다 자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심지어 그는 자기가 생명의 주관자라도 되는 양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 부자의 영혼을 불러 가시니 그의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이 세상에는 이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가 물질의 주인인 양 착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더구나 사람들은 그들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이 부자처럼 많은 재물이 자기들의 영혼에 만족을 줄 줄로 착각합니다.
그들은 돈이면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줄 알고 돈을 의지해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언젠가 이 부자와 같이 돌이킬 수 없는 좌절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님들은 욥과 같이 생명과 물질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셋째, 습관의 변화(習慣의 變化) Change in Habits

누가복음 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히브리서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습관이란 자주 반복된 삶의 행동이 굳게 자리를 잡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레미야 22:21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고린도전서 8:7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

생각을 바꾸면 언어가 바뀐다.
언어를 바꾸면 행동이 바뀐다.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뀐다.
습관을 바꾸면 나의 삶이 바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정말 사랑한다고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닮은 부분이 무엇인가요?

사랑하면 닮습니다.
말하는 것, 입는 것, 분위기까지 닮아갑니다.
예수님의 습관을 닮는 것, 그분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을 통해 당신의 영혼을 빛나게 하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거룩한 자녀입니다.

세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만큼 길들여진 버릇 하나, 습관 하나가 한 사람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선배들의 경우 하나님을 향한 자신만의 거룩한 습관들을 한 가지씩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한 다윗.
그의 삶은 그 누구보다 파란만장했고, 고비가 많았지만
그만큼 그의 찬양도 시편을 가득 매울 만큼 성경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어떠한가?
그는 복음 전하기를 즐거워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갇혀서도, 이방민족의 위협 앞에서도, 모진 고문과 굶주림 속에도 복음을 전했고 심지어 편지로 작성하기 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의 습관은 새벽 미명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를 하러 외진 곳을 찾으셨던 예수님의 기도의 습관,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을 구원하시고 사랑으로 품으시는 모습 등 각각의 습관들을 통해 우리의 안일한 신앙생활을 바로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완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2023년 신년주일을 맞이합니다.
지난 날의 생각과 언어와 행동과 습관을 벗어버리고 이제부터 새로운 생각과 언어와 행동과 습관을 성경적인 생각으로 다듬어서 이전보다 보람있는 인생, 주님께서 인정하는 믿음, 가족들로부터 사랑을 확인하는 축복의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23년 첫 주간에 읽어야 할 성경

창세기 1장 - 창세기 19장          
마태복음 1장 -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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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자료 / 10-03-2022(월) 오늘의 묵상을 중심으로 새벽 기도회

새로운 피조물(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영적 하나됨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인이 되신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하나가 될 때 성립됩니다.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별개의 사건입니다.
누구나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따르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는 교회에 출석하고 교인으로 등록한 사람의 숫자는 1,200만 명에 가깝다고 합니다.
이 속에는 허수도 끼어있습니다.
교회 정착을 못하고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면서 교인으로 등록하기 때문에 교인 숫자가 겹치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리고 교회의 위상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입니다.
거듭난 사람들, 구원받은 사람들이 곧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는 ‘거듭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에서는 ‘새사람’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지으신 영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거룩한 영적 형상이 파괴되고 죄의 지배를 받는 타락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구원과 회복의 길을 터주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영접하고 부르는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 된다는 것이 바울의 고백이고 선포입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고 새것이 되려면 이전 것은 지나가야 합니다.
이전 것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한 새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새 것,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이전의 삶의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쉬운 예를 들어봅시다.
집을 새로 구입하여 이사를 합니다.
이제부터는 옛 주소와 새 주소로 구분합니다.
이전에 살던 집과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구분합니다.
이전 주소를 사용하면 우편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전 집으로 들어가려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은 더 이상 내 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적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나냐 합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지구가 태양을 도는가, 아니면 태양이 지구를 도는가?
현재는 가장 쉬운 천문학 지식이지만 몇백년 전만 하더라도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야 했다.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고 있었다.

​성경의 여러 말씀이 그러하거니와, 지구가 정지하고 않고 돌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란 어려웠다.
감히 이러한 인식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사람이 바로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 - 1543)이다.
그런데 그가 이러한 발견을 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재미나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우선 코페르니쿠스가 이러한 발전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과학적인 발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심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심 때문이었다.
그는 천문학자임은 틀림없으나 단순한 아마추어에 불과했다.
그는 그 이전까지 전해오던 지구중심설인 프톨레마이오스의 모형을 놓고 생각하다가, 그 모형이 상당히 복잡하다고 느꼈다.
독실한 신자였던 그는, 전지전능하신 신이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주를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성스러운 신전을 비추어 주는 촛불을 어디에 놓아야 전체를 동시에 비출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곳은 당연히 중앙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곧 태양을 중심에 두어야 빛이 골고루 비추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이같은 추측을 발판으로하여 소위 태양중심설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새로운 체계를 발표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잘 알다시피, 자신의 체계가 당시의 상식과는 크게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들과 제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결국 1543년에 그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가 출판되었다.

그때가 바로 그의 임종 때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코페르니쿠스는 생전에 자신의 천문학자적인 체계로 인해 이단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했다.
교회와의 갈등을 두려워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출판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 알 도리는 없지만, 그의 임종에 맞추어 책이 발간되었다는 것은 아무튼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루터나 다른 종교지도자들은 여전히 과거의 신념에 매달리고 있었다.
루터는 이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주장을 전해 듣고, 코페르니쿠스를 가리켜 천문학의 '천'자도 모르는 바보라고 하며 "이 바보는 천문학 전체를 뒤엎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거룩한 성경은 여호수아가 멈추게 한 것은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고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책 제목에서 '회전'이라는 단어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180도를 돈다는 뜻의 '회전'이라는 단어가 나중에는 정치적인 격변을 뜻하는 '혁명'이라는 말로 서양에서 사용되었다.
우리가 아는 '혁명'이란 뜻의 어원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책 제목에서 나왔던 것이다.
과연 그의 전환이 서양 역사에서 얼마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그의 인식론적인 전환을 더 자세하게 이야기한 사람이 바로 시간보다도 더 정확하게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고 하는 철학자 칸트였다.
칸트가 철학에서 이룩한 인식론상의 전환은 자연과학에서 코페르니쿠스가 이룩한 전환과 아주 비슷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하여 칸트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정신이 대상들을 인식하려고 대상들의 주위에 돌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던 것을 칸트는 대상들로 하여금 정신이라고 하는 중심적 사실의 주위를 돌게 했다.

이제는 정신이 대상의 조건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정신이 정해 놓은 조건에 따르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우리들의 인식은 대상에 의거한다고 이제까지 생각되어 왔지만, 대상의 인식은 우리들의 주관 구성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놀라운 전환이었다.
그는 이것을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렀다.
마치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처럼 주관과 대상의 위치가 서로 바뀌었던 것이다.

칸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나의 생각은 별자리가 관측자의 주위를 회전한다고 보아서는 천체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본 코페르니쿠스가, 오히려 관측자의 편에서 회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별의 위치를 정지시킴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좀더 합당한 해답이 얻어질 수 있으리라는 획기적 사상을 제시했던 것에 비길 수가 있겠다."

​그래서 이제 커다란 전환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제아무리 기발한 발상의 전환이라도 정작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에 비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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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8일(주일) 주님의 수세주일   

2023년 제2주간 성경 읽기 범위(1월 8일 - 14일)

창세기 20장 - 창세기 35장          
마태복음 6:19 - 10:1-20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and this water symbolizes baptism that now saves you also--not the removal of dirt from the body but the pledge of a good conscience toward God. It saves you by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교회력에 따라 오늘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의 수세주일"입니다.

세례는 죄를 씻는 구원을 위한 성결 예식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는데 세례를 받으셔야 했을까요?


파트리스교회 수요 성서 연구 #. 1 물세례와 불세례(2020-06-10)

세례(洗禮)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구약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입니다.
신약의 첫 번째 책은 “마태복음”입니다.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 사이는 “대략 400년” 이란 긴 세월이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 시대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의 400년의 기간을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 라고 합니다.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를 “신구약 중간 시대”라고도 합니다. (아래 난외 주 참조)

기독교 이외에 가톨릭교회와 유대교에서는 신구약 중간 시대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셨다는 것을 강조하여 “외경”이란 말씀을 인정하고 사용합니다.

오래 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던 때에 어느 날 광야에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 거주하는 낯선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라고 외쳤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광야로 나와 요한의 외치는 소리를 들을 때 바로 이 사람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나는 너희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아니라 다만 물로 세례를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실 그 분은 너희들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며 실망하던 유대인들에게 메시아 신앙을 깨우쳤습니다. 요한의 외침을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서 세 종류의 세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 ; 회개와 구원을 위한 세례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 ; 구원의 확신과 보증을 위한 세례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 ; 심판을 위한 알곡과 죽정이를 구분하는 세례(불심판)

그런데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것은 분명하게 성경에 소개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셨을까요?

세 종류의 세례를 베푸셨던 수여자(授與者)를 살펴봅시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예수님 당시에는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마태복음 3:5∼6,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People went out to him from Jerusalem and all Judea and the whole region of the Jordan.
Confessing their sins, they were baptized by him in the Jordan River.

그러나 오늘날은 교회에서 목사가 세례를 베풉니다.
"주 예수를 믿는 (아무개)에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and this water symbolizes baptism that now saves you also--not the removal of dirt from the body but the pledge of a good conscience toward God. It saves you by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세례는 요한의 증거대로 분명히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제 성령세례를 베푸셨으며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When the Counselor comes, whom I will send to you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goes out from the Father, he will testify about me.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사람들에게 보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령을 “보혜사(保惠師)” 라고 합니다.

“보혜사(保惠師)”란 무엇인가?
-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
보혜사란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가르치시는 선생님” 이란 뜻입니다.

보혜사를 영어 성경에서 찾아보면 NIV에서는 “상담자(the Counselor)”, KJV에서는 “위로자(the Comforter)”, NASB에서는 “돕는자(the Helper)” 라고 합니다.

보혜사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étos)” 라고 합니다.
스트롱 번호 3875

1. 옹호자(an advocate), 중보자(intercessor),
2. 위로자(a consoler), 위로자(a comforter), 돕는자(helper),
3. 변호사(Paraclete)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한일서 2:1.
3. 요한복음 14:16
발음 : 파라클래토스(paraklētŏs)
어원: 387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26, 16:7), 대언자(요일 2:1)
신약 성경 : 5회 사용

예수님께서 언제 누구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셨습니까?

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When the day of Pentecost came, they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Suddenly a sound like the blowing of a violent wind came from heaven and filled the whol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All of them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in other tongues as the Spirit enabled them.

오순절날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때 불세례도 함께 베푸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자세히 관찰하면 성령과 불이라는 용어가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는 사용하였으나 마가복음 1장과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성령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라고 모든 복음서에서 말씀하셨다면 불세례도 오순절 날 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그러므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세례자 요한에 의하면 성령세례와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성경을 폭 넓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과 불세례에 대한 말씀을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제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clear his threshing floor, gathering his wheat into the barn and burning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불세례”는 불로 심판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9절,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리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At that time Jesus came from Nazareth in Galilee and was baptized by John in the Jordan.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John answered them all,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one more powerful than I will come, the thongs of whose sandals I am not worthy to untie.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17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to clear his threshing floor and to gather the wheat into his barn, but he will burn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I would not have known him, except that the one who sent me to baptize with water told me, 'The man on whom you see the Spirit come down and remain is he who will baptize with the Holy Spirit.'

34절,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I have seen and I testify that this is the Son of God.

참조 / 성령세례(사도행전 1:5, 11:16, 고린도전서 12:3)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해서 언급한 성경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이외 성경에서는 오직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에서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분명하게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진다는 것은 불이 다양하게 갈라져서 오순절 날 한 자리에 모여 있었던 다양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재 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불세례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사도행전 2: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When the day of Pentecost came, they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Suddenly a sound like the blowing of a violent wind came from heaven and filled the whol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오순절 날 성령의 임재가 나타났을 때 마치 성령은 강한 바람 소리로 들렸습니다.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바람이 아닙니다.
성령은 불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은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βαπτίσει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
- will baptize with the Spirit Holy and fire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장차 오실 그 분께서는 “성령(프뉴마)과 불(푸르)”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외쳤던 요한의 증언은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그 분이 그토록 기대하던 “메시아”라고 기다렸으나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사십일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사도행전 1:3).

이렇게 번역된 데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καὶ)”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카이”는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 라고 하여 앞의 것과 뒤의 것을 동등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령과 불”이라고 할 때 성령과 불을 동등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제까지 성령과 불을 이렇게 등위 접속사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등위 접속사가 아니라 우위 접속사로 해석하면 전혀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세례는 특별한 용법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위 접속사”인 “또는(or)”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위 접속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는 “성령 또는 불안에서” 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 사(四)복음서를 비교하여 연구해보면 더욱 확실히 증명된다.
먼저 우리는 “성령과 불로”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과 불로”가 아닌 “성령으로” 라고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 라고만 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11:16과 고린도전서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라고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여러 성구들을 참조할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 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 보더라도 “침례” 라는 말이 의미를 더 잘 통하게 한다. 만일 “세례”라고 하면 “성령으로 씻긴다”는 말이 되므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성령은 영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요 14:18∼19)이므로 '성령 안에서 침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하되 '생명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침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행 2:38, 행 19:2)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고전 3:16-17)'과도 같은 말이 되는데 결국 우리와 주님과의 상호내주(Inter-Residence)를 뜻한다.

한편 요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신령으로'라는 말은 “엔 프뉴마”로서 원 뜻은 “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의미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의미가 모두 해석되는 것이다. 즉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물 안에 잠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상징하는 뜻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 안에 잠긴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리가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로 세(침)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불 속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로서 신자와는 전혀 관계없고 불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즉 불신자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하는 대신에 '불 속에 잠기게 한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제 세례에 대한 용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세례(밥티조, βαπτίζω)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물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완전히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올 때는 과거의 나 즉 옛 사람은 죽었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물세례는 회개와 구원의 표시라고 하겠습니다.

βαπτίζω, ον 스트롱번호 907

1. 잠그다
2. 결례를 행하다
3. 세례를 베풀다
발음 : 밥티조(baptizō)
어원 : 미래 βαπτίσω, 제1부정과거 ἐβάπ- τισα, 제1부정과거중간태 ἐβαπτισά- μην, 미완료수동태 ἐβαπτιζόμην,
완료수동 분사 βεβαπτισμένος, 제1부정과거수동 ἐβαπτίσθην, 미래수동태 βαπτισθήσομαι, 911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세례 받다(마 3:6,16, 막 16:16), 씻다(막 7:4), 세례 베풀다(요 1:25,26, 고전 1:14).
 [명] 세례(마 3:11, 막 1:4, 눅 3:16)
신약 성경 : 77회 사용

그런데 회개와 구원의 표를 받았지만 공중권세를 잡은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살면서 때로는 알게 모르게 죄를 짓게 됩니다.
이렇게 죄를 짓게 될 때 사탄은 정말 네가 구원을 받았느냐?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아직도 그렇게 살아가느냐? 하며 조롱하고 비난할 때 정말 내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는가? 하고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성령세례가 구원을 보증합니다.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set his seal of ownership on us, and put his Spirit in our hearts as 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

고린도후서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Now it is God who has made us for this very purpose and has given us the Spirit as 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

히브리서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Because of this oath, Jesus has become the guarantee of a better covenant.

성령세례가 보증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로마서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because through Christ Jesus the law of the Spirit of life set me fre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불세례는 심판 즉 소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명기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For the LORD your God is a consuming fire, a jealous God.

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for our "God is a consuming f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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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자료

주제 : 세례(洗禮)
- 세례(씻을 洗, 예도 禮)와 침례(잠길 沈, 예도 禮)
- 밥티조(물 속에 잠기다)

성경 : 마태복음 3:11

종류 :

 1. 물세례(회개와 구원) 베드로전서 3:21

 2. 성령세례(생명의 보증) 보혜사(요한복음 15:26)
 - 로마서 8:2, 요한복음 6:63, 고린도후서 1:22, 5:5, 히브리서 12:29

 3. 불세례(심판, 알곡과 죽정이)
- 신명기 4:24, 히브리서 12:29
- 마태복음 3:12, 누가복음 3:17

*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
- 전치사 "과"(카이)
 등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을 같은 것으로 이해
 우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은 서로 다른 것으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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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1-2022(금)
성령세례

"오순절 사건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

이와 같은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다.
이 속성은 한 마디로 "영원성(永遠性)"이다.
영원이란 어느 시대에는 나타나고 어느 시대에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사건은 지금도 앞으로도 마지막 그 날까지 지속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

"아니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며 그 영은 지금도 계속적으로 역사하는 영이다.

셋째, 바울의 증거


고린도전서 2:9-10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바울의 성령은 통찰하는 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영은 구약에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통하여 계속된다.

신명기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명기 30:6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레위기 18: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로마서 11: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다.
그런데 그 율법을 그의 백성들이 지킬 수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의 백성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강조하였다.

로마서 2:28-29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참고 자료

세례란 무엇입니까?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 씻음을 정하신 신약의 한 성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에게 접붙이고 그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그의 영으로 거듭나고 양자가 되어 영생에 이르는 부활의 인침입니다.
이로써 세례 받은 사람들은 엄숙히 유형적 교회에 가입하게 되어 전적으로 오직 주께만 속한다는 약속을 공개적으로 고백함으로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는 죄의 용서, 인 치심, 성령의 부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함 등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를 구체적으로 우리의 실제 삶과 몇 가지로 연관시켜 보겠습니다. 

1.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결정적 사건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로운 몸으로서의 출발을 다짐하고 공표하는 것으로서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2. 세례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증표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내적인 회개와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믿는 일입니다.
세례는 물로 씻음을 의미하는데 인간의 죄에 대한 씻음으로 물은 그리스도께서 흘린 보혈을 상징하며 그 보혈로 죄 씻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3. 세례는 새로운 피조물의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 안에서의 새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새로운 삶은 성령의 역사로서 변화된 새로운 생을 출발하게 됨을 의미 합니다.

4. 세례에 임한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이며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뜻합니다.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에 하나 되는 자격을 얻게 되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를 가지며 교회의 일원으로 교회를 통한 권리와 의무수행에 책임이 부여 됩니다.

가. 세례의 의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회개와 주의 길을 예비하는 변환기적이며 소개적인 세례였으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세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에 의한 세례입니다.

오늘의 세례 기준은 세례요한이나 제자들의 세례에서 찾을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마 28;19-20).

로마서 6:3-6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3:27-28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골로새서 2:11-12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나. 세례의 방법 

침례회가 침례를 주장하는 근거는 로마서 6:3-6과 골로새서 2:11-12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분명하게 물속에 잠기는 것과 물속에서 나오는 것의 모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라 합니다(마 3:16, 행 8:38-39)

레위기 11:32
이런 것 중 어떤 것의 죽음이 병기에든지 의복에든지 가죽에든지 부대에든지 무론 무엇에 쓰는 그릇에든지 떨어지면 부정하여 지리니 물에 담그라 저녁까지 부정하다가 정할 것이며

레위기 15:13
유출병 있는 자는 그 유출이 깨끗하여지거든 그 몸이 정결하기 위하여 7일을 계산하여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몸을 씻을 것이요 그리하면 정하리니.

로마서 6:3-5 골로새서 2:11-12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는 것이지 세례의 방법에 관한 내용으로 침례를 강조한 내용이 아닙니다. 레위기에서 나타난 정결 의식은 뿌리는 것으로 시행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레 14:4-7, 16, 49-53, 16:19, 민 8:5-7, 19:18-19)

고린도전서 10:1-2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출애굽기 14:22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다니엘 8:7
너는 이같이 하여 그들을 정결케 하되 곧 속죄의 물로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로  그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그 의복을 빨게 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

민수기 19:21
사람이 부정하고도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총회 중에서 끊쳐 질것이니라. 그는 정결케 하는 물로 뿌리움을 받지 아니 하였은즉 부정하니라. 

에스겔 36: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너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히브리서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뿌려서 정결케 하는 의식은 침수(침례) 라고 주장하기보다 뿌리는 세례를 뜻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도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마가복음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것이요 믿지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사도행전 16: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족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

사도행전 8:12-13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 니라.

성경의 세례 방법은 물을 붓거나 물을 뿌리는 방법이 가능할 것입니다.

신약의 세례 

신약의 세례는 구약의 할례와 이스라엘 백성의 홍해바다 도강과 성결의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면서 이 언약을 후손 대대에 지킬 하례를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17:11-14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할례에 참여한 사람 : 아브람, 이스마엘, 집에서 난자, 돈으로 사온 이방인, 아브람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입니다.
(유대인, 이방인, 친자, 서자, 남의 자식은 관계가 없음)

할례의 시기 : 칭의의 후입니다.
바울은 이 순서를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더라.

로마서 4:9-11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 뇨 할례 시냐 무할례 시냐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례는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외적인 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4:21-22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 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고린도전서 10:1-2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름아래 있고 바다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의 집단 홍해바다 도강을 세례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홍해 도당이 출애굽보다 결코 앞서지 못한다는 것은 세례가 구원보다 앞 설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죄 씻음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세례를 받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요한의 세례 

“칼 헨리” 는 말하기를 요한의 세례는 당시 유대교에서 유행하던 관습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단지 관습적인 것에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회개의 요건에 관련된 것이 포함된 것으로 본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의 특성은 신적 기원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조라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마태복음 3:13-15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마태복음 21: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 서냐 사람에게 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 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사도행전 18:25
그가(아볼로)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누가복음 3:3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누가복음 7:29-30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 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세례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우리가 이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며(마 3:5),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란 메시아로서의 사역의 출발을 선포하는 것이며 성부와 성령과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며 이 세례를 통하여 인가의 죄와 비애를 짊어지시는 사역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의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누가복음 12:4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예수님은 세례를 자신의 죽음과 연관시켜서 인간의 죄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희생물로 바치고 죽는다는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에 대하여 해석하셨을 뿐 아니라 승인하시고 명령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22-26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 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마가복음 16:15-16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온 천하에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사도들의 세례

베드로가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이 충만함을 받고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복음을 듣고 마음에 찔린 무리들이 우리가 어찌할꼬 말할 때 베드로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받으리라(행 2:37-38)
성령의 은사가 동반된 회개의 세례를 주장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10:47-48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 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하니라.

사도행전 16:14-15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고린도전서 1:14-17
그리스보와 가이오와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니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6:3-6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갈라디아서 3:27-28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에베소서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

골로새서  2:11-12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유아 세례

세례는 신앙고백을 통한 확증으로 주어지는 것인데 말도 잘 못하는 유아들이 어떻게 신앙할 고백할 수 있으며 믿음의 확증을 알 길이 없으므로 유아세례는 찬반의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유아세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구약의 할례를 주장하면서 난지 8일만에 행한 것은 언약적 측면에서 보아야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유아세례의 성경적 근거  

성경에는 유아에게 세례를 주라는 확실한 명령이 없으며 또 유아세레를 시행한 사례도 없습니다.

그러나 세례가 제정되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할레가 있었기 때문에 할례에 대하여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할례의 의미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며 교제이고 축복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7: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출애굽기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창세기 17: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신명기 10: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명기 30:6
네 하나님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예레미야 4:4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 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빌립보서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 당이라.

할례는 신앙에 의한 표시이며 그 신앙의 확증입니다.

구약의 할례는 신약의 세례와 동등하게 적용되며 할례와 세례는 언약관계 외에 성결과 확증으로 효력과 입회의 조건도 동등할 것입니다. 할례를 유아에게도 주어졌다면 세례도 유아에게 적용되어야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59
팔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하고자하더니

누가복음 2:21
할례 할 팔일이 되매 그 이름을 에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마태복음 19:14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10;14, 눅 18;16). 

사도행전 10:44-45
베드로가 이 말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사도행전 16:14-15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

사도행전 16: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족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유아세례의 대상자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의 표와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유아세례의 자격과 조건은 부모들 자신이 먼저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유아세례는 하나님과 교회와 부모와 유아의 계약관계를 가집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8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부모의 자녀들에게 유아세례를 주되 한편 부모만 믿어도 가능하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세례 문답할 때 유아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서 공적인 신앙고백을 해야 하며 자녀의 하나님도 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유아세례는 구원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구원의 길로 인도되도록 부모가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 서약이요 하나님께 유아를 바치는 봉헌이며 하나님의 영이 은혜로 임하는 언약과 구원적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유아세례의 효력  세례교육 자료(문답용)

유아가 세례를 받을 때 순간적으로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머레이”는 유아세례의 효력도 성인세례의 효력과 동일하다고 하였습니다.
세례는 하나의 의미를 지니며 그것을 그리스도와의 연합됨과 성령의 중생함에 의하여 죄의 더러움으로부터 정결케함과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하여 죄악으로부터 정결케 됨을 표시하므로 유아세례는 장년세례와 같은 효력을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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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교육 자료(문답용)

Long Island 연합감리교회 자료 제공

성경 The Bible

1. 성경은 모두 몇 권으로 되어 있습니까?
How many books does the Bible have?
A: 구약은 39권, 신약은 27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Old Testament has 39 books and New Testament has 27.

2.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What does it mean that the Bible is the Word of God?
A: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하는 가르침이란 것을 의미합니다.It means that we must learn and follow the instructions of the Bible in our life.

3.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What does the Bible teach us?
A: 성경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인간, 죄, 구원, 삶의 원리, 그리고 영생과 죽음 등을 가르칩니다.
It teaches: God, Jesus Christ, human being, sin, salvation, principle of life, and life after death.

4. 복음의 중심내용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major theme of the Gospel?
A: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나타나 있습니다.
It is the love of God toward humankind which is revealed through Jesus’ crucifixion and resurrection.

5. 십계명을 말씀해 보십시오.
Please, say the ten commandments (Ex 20: 1-17; Deut 5: 6-21).
A: 첫째,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First, You shall have no other gods before me.

둘째,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말든지 말며, 그것들에 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Second, You shall not make for yourself an idol in the form of anything in heaven above or on the earth beneath or in the waters below. You shall not bow down to them or worship them.

셋째,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Third, You shall not misuse the name of the Lord your God.

넷째, 안식일을 기억하며 거룩히 지키라.
Fourth, Remember the Sabbath day by keeping it holy.

다섯째, 네 부모를 공경하라.
Fifth, Honor your father and your mother.

여섯째, 살인하지 말지니라.
Sixth, You shall not murder.

일곱째, 간음하지 말지니라.
Seventh, You shall not commit adultery.

여덟째,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Eighth, You shall not steal.

아홉째,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Ninth, You shall not give false testimony against your neighbor.

열째,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Tenth, You shall not covet your neighbor’s house.

6. 가장 큰 두 계명은 무엇입니까?
What are the two greatest commandments? (Matthew 22: 37-40)
A: 첫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
랑하라.둘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First,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Seco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7. 주기도문을 말씀해 보십시오.
Please say the Lord’s Prayer (Matthew 6: 9-13).

A: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
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Our Father, Who are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And forgive our trespasses,
as we forgive those who trespass against u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8. 성경을 매일 읽습니까? 하루에 몇 장을 읽습니까?
Do you read the Bible everyday? How many chapters do you read daily?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의 말씀을 말씀해 보십시오.
Please say the most favorite words in the Bible.
A:

9. 성경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습니까?
Will you try to learn and follow the teachings of the Bible in your life?
A: 예, 노력하겠습니다. Yes, I will.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

1. 성경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증언하고 있습니까?
Who does the Bible say Jesus is? (Matt 16: 16; Phil 2: 6)
A: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몸으로 나타나신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He is not only the Son of the living God but also the eternal God manifested in a human body.

2. 예수님은 어떻게 태어나셨습니까?
How was Jesus born? (Matt 1: 18, 25)
A: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습니다.
He was born in a virgin’s body,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3. 예수님은 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Why did Jesus come into this world? (Matt 1: 21)
A: 죄로부터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He came into this world to save people from their sin.

4.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What did Jesus do to save humankind?
A: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으신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He died on the cross bearing all the sins of humans
and was raised from the dead on the third day.

5.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What happens through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Rom 4: 255:10)
A: 모든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됨으로써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과 교제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All humans can be forgiven and righteous through their faith in Jesus Christ, and they can have the fellowship with the holy and almighty God.

6.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당신과 관계가 있습니까?
Is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related to you?
어떻게 관계가 있습니까?
How is it related to you?
A: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의 자비 속에서 사는
나의 새로운 삶을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Jesus Christ died for my sins and he was raised for my new life
in the merciful God.

7. 당신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Who is Jesus to you?
A: 나의 구원자이시고 나의 주님이십니다. He is my savior and my Lord.

8. 부활 후 예수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What happened to Jesus Christ after his resurrection?
(1 Cor 15: 5-8; Luke 24:51)
A: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그 후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올라 가셨습니다.
He has appeared to his disciples for forty days and was taken up
to the right hand of God in heavens.

9.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What is Jesus Christ doing now? (1 John 2: 1)
A: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고 성령을 통해 그들 가운데서 일하고 계십니다. He prays for all his believers and works among them through the Holy Spirit.

10.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What does it mean that Jesus Christ will come again on the last day? (Matt 24: 29-31; John 5: 27-29; 1 Thess 4: 16-7)
A: 모든 죄와 악을 심판하심으로써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구원 계획을 완성하실 겁니다.
By judging the sin and evil, Jesus Christ will accomplish the whole redemptive plan of God toward all humans.

구원 Salvation

1.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salvation?
A: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그래서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다시 창조되는 변화의 전 과정을 의미합니다.
This means the whole process of transformation in which we are freed from sin and our relationship with God is recovered and we are recreated as the righteous people of God.

2. 죄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sin?
A: 우리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을 놓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This is that we disobey the words of God by placing not God but ourselves in the center of our life.

3. 죄로부터의 자유는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Why is our freedom from the sin so important?
A: 가장 복되고 의미있는 삶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달려 있는데, 이 올바른 관계는 우리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The most blessed and meaningful life depends on our right relationship with God: that we place God in the middle of our life and obey the words of God.

4. 어떻게 죄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까?
How can we be freed from the sin?
A: 우리가 죄인이란 것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이시고
나의 주님이란 사실을 믿음으로써 죄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We can be freed from the sin by confessing that we are sinners and believing that Jesus Christ is my Savior and my Lord.

5.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요 나의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What does it mean that we believe,”Jesus Christ is my Savior and my Lord”? (John 1: 12; II Cor 5: 14-19)
A: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 영원히 용서를 받았고,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시고 인도하시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진리를 믿는 것을 말합니다.
It indicates that we receive the truth that all our sins are forgiven forever by means of Jesus’ crucifixion and resurrection,
and we are new creations that Jesus Christ rules and leads.

6.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삶은 어떤 것입니까?
How can you explain the new life in Jesus Christ?
A: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죄를 극복하고 매일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다시 창조되는 것입니다.
Through the deep fellowship with God believers overcome sins and are daily recreated to be the righteous people of God.

7.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되어가는 구원의 과정을 무엇이라 합니까?
What is the process of salvation called, that believers are recreated as the righteous people of God?
A: 성화라고 합니다. Sanctification.

8.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완성되는 구원의 단계를 무엇이라 합니까?
What is the final phase of salvation called, that believers finally become the righteous people of God?
A: 영화라고 합니다. Glorification.

9. 이 전 구원의 과정이 완성하는데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What must Christians do the most to accomplish their salvation?
A: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입니다. The deep fellowship with God.

10.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무엇으로 가능합니까?
What can you do for the deep fellowship with God?
A: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일을 통해 가능합니다.
I can pray and read the Bible for the deep fellowship with God.

11.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일들을 하시겠습니까?
Will you pray and read the Bible to walk in the deep fellowhip with God? A: 예. Yes, I will.

교회 Church

1. 교회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Church? (1Cor 12:27; Eph 1: 23)
A: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는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성경에서 이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성도들은 이 몸의 지체들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The Church is the community of the believers who serve Jesus Christ as the Lord. In the Bible, this community is also described as the body of Christ, where Jesus Christ is its head and his believers are its parts.

2. 교회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purpose of the Church?
A: 하나님이 인간들을 죄와 악에서 구원하시는 구속 사역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The Church participates in the divine work that God saves people from sin and evil.

3. 교회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교회가 하는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What are the important things that the Church must do in order to accomplish its purpose?
(Rom 12: 1-2; Matt 28: 18-20; Act 1: 8; Act 2: 44-47; 1 Pet 4: 7-11; 1 John 1:3-4)
A: 예배, 교육, 선교, 교제, 그리고 봉사입니다.
Worship, Education, Mission, Fellowship, and Service.

4. 예배란 무엇입니까? (Ps 29: 1-2, 66: 1-4, 145:1-2)
What are the worship?
A: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며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It is praising, honoring, and exalting God.

5.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명하신 두 가지 거룩한 예식 (성례)은 무엇입니까?
What are the two sacraments that Jesus Christ commanded the Church to do? (Matt 28:19; Luke 22: 14-20)
A: 세례와 성찬식입니다. Baptism and The Lord’s Supper

6. 세례는 무엇입니까?
What is the Baptism? (Rom 6: 3-5; 1Cor 12: 13; Gal 3: 26-28)
A: 세례는 우리의 옛 자아가 죽고 우리의 새 삶이 탄생하는 것을 나타내는 의식입니다.
Baptism is a ceremony that represents the death of our old self
and the birth of our new life.

7.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What do the bread and the wine represent? (Luke 22: 19-20)
A: 떡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찟기신 그리스도의 몸을, 그리고 포도주는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합니다.
The bread represents Christ’s body which was broken, and the wine symbolizes Christ’s blood which was shed for the forgiveness of our sins.

8. 성찬식에 합당하게 참여하기 위해서 무엇이 요구됩니까?
What is required of partaking worthily of the Lord’s supper? (1Cor 11: 27-29)
A: 성찬식에 참여하기 전에, 세례 받은 성도들은 자신들의 믿음에 관해,
주님의 몸을 분별할 줄 아는 가에 관하여, 그리고 회개와 사랑과 순종에
관해 자신들을 살펴야 합니다.
Before partaking of the Lord’s supper, The baptized believers are
required to examine themselves of their faith and knowledge to
discern the Lord’s body,
and of their repentance, love and obedience.

9. 기도는 무엇입니까?
What is prayer? (John 15:16)
A: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간청하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Prayer is a conversation with God by which believers listen to His word
and offer their own desires unto Him in the name of Jesus Christ.

10. 주일은 어떤 날입니까?
What day is the Lord’s day (Sunday)? (Acts 20:7)
A: 이 날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날로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성도들이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This is the day when believers gather and worship God in a church through celebrating the resurrection of Christ because Jesus Christ was raised on Sunday.

11. 헌금(십일조)의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importance of offering(Tithe)?
A: 헌금(십일조)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본래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로서, 드려진 헌금(십일조)을 통해 교회는 하나님의 자비와 영광을 드러내는 많은 선한 일들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The offering is our confession that everything which we have originally belongs to God, not us. And through offering churches can do many good works to reveal
the mercy and glory of God.

그리스도인의 삶 The Christian Life

1.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purpose of the Christian life?
A: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It is to glorify, praise and enjoy God forever.

2.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How may we glorify God? (Matt 5: 13-16)
A: 우리 안에서 창조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선한 행위들을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We glorify God by demonstrating our good deeds which God creates in us.

3.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보여야 하는 선한 행실이란 무엇입니까?
What are the good deeds that Christians must demonstrate to the world?
A: 두 가지 계명, 곧 주 너의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는 것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Theses deeds mean that Christians perform the two commandments:
(1)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2)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4. 예수님은 이 두 가지 계명을 재차 어떻게 설명하셨습니까?
How did Jesus explain about the two commandments? (John 13: 34-35)
A: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so you must love one another.

5. 남편과 아내에 관해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결혼의 경우)
What does the Bible teach to you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a husband and a wife? (If married) (Eph 5:22-33)
A: 남편들은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들의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들은 모든 것에서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Husbands ought to love their wives as their own bodies.
Wives ought to submit to their husbands in everything.

6. 부모와 자녀들에 관해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Eph 6: 1-4)
What does the Bible say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parents and children?
A: 부모들은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가르침과 기도 속에서 그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주님 안에서 부모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Parents must not exasperate their children but bring them up in the instruction of the Lord and prayer. Children must obey their parents in the Lord.

7.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What must Christians do with their country? (Rom 13: 1-7; 1Peter 2: 13-16)
A: 국가에 대한 모든 의무들을 주님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번영은 주님께 달려 있음으로 국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Christians must do all of their duties to the country in the Lord,
and pray for it because its prosperity depends on God.

8. 그리스도인들은 직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합니까?
What should Christians think of their job?
(2 Thes 3: 8-12; 1 Tim 4: 4-5)
A: 직업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성실히 일해야 합니다.
They should consider it as holy and work sincerely to reveal the glory of God.

9. 성경은 물질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What does the Bible say about money? (Deut 8: 11-20; Acts 4: 32-35)
A: 성도들은 그들 스스로가 물질을 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으로 얻은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그들은 물질을 버는 일 뿐만 아니라 어떤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성도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 청지기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모든 물질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물질을 관리해야 합니다.
Believers must remember that they do not get money by themselves but with the help of God. Unless God is with them, they cannot do anything including earning money by themselves. And they must remind themselves that they are stewards to God, Therefore, they must manage money according to the good will of God who is the real lord over money.

10. 세계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What should Christians do for the world?
(John 17: 22-26; Eph 1: 22-23)
A: 하나님의 사랑을 보임으로써 세상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고
그래서 세상에 평화가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By showing the divine love, they should make an effort that the world is united in Christ Jesus and peace is in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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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스교회 유투브 온라인 방송 / YouTube Patris Church(불낙지교회)

https://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Patris+Church

: 불신자(不信者)를 주님 앞으로
: 낙심한 자(落心者)를 주님 앞으로
: 지체하는 자(遲滯者)를 주님 앞으로

설교자들을 돕기 위한 자료를 제공합니다.
기본 자료를 이용하여 자유롭게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에 쫓기며 시달리는 설교자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한 주제를 갖고 4회 정도 성경에서 합당한 본문을 선택한 후에 설교를 진행합니다.
예를 들면 '사랑' 이란 주제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설교를 준비합니다.

1. 창세기 3:21, 가죽 옷 사랑
2. 창세기 6:14, 역청과 사랑
3. 창세기 9:20-27, 셈과 함과 야벳의 사랑
4. 창세기 19:8, 아무 짓도 하지 말라

이러한 식으로 본문을 선택하면 사랑에 대한 주제로 시리즈 설교가 가능합니다.
성경을 이러한 주제로 관찰한다면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요한계시록까지 수 십회 이상 설교가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를 중심으로 전 교인 성경 읽기와 묵상을 제공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나의 제안)

2023년 매일 성경 읽기를 계획한다면 "사랑"이란 주제로 성경을 읽어봅시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구절을 내가 원하는 색으로 표시합니다(예를 들면, 노랑, 파랑, 빨강.....)
그러면 2023년을 마감할 때는 내가 표시한 성경의 색갈만 들추면 모두 사랑에 대한 말씀을 찾게 됩니다.
이렇게 성경을 읽으면서 그 주간에 읽은 말씀 중에서 사랑에 관한 본문을 선택하여 주일 설교, 수요 성경공부 및 기도를 진행하면 목회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랑에 관한 자료는 2020년 1월 19일 주일 설교 원고를 기초 자료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처음 원고를 수정하여 up grade 하여 수정 보완합니다.
설교가 아니라 설교를 할 수 있는 자료를 소개합니다.
설교자들의 입장에서 응용하여 더 은혜롭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1년에 성경 일독을 계획한다면 주간 성경 읽기 본문 중에서 사랑에 관한 주제를 찾아 주일 설교 본문으로 선택합니다.
본문을 선택한 후에는 성경에서 사랑이란 의미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이해한 후 사랑의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는 내용으로 원고를 작성합니다.
설교 내용은 본문에 충실하되 적용을 위해서는 개 교회의 현장을 중심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기 위해 친히 말씀이 육신되어 인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의 죄를 사해 주시고, 율법의 정죄와 저주에서 풀어주셨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주시고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인간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함께 보시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1서 4:16~19)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한1서 4:9~10)

❑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는 우리가 당연히 갖춰야 할 양심이자 이성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그분의 뜻에 합당할까요?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신명기 5: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한복음 14: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태복음 22:37~39)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가복음 14:26)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21)

❑ 형제자매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당연지사
예수님은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형제자매를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실제적인 일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형제자매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한복음 13:34~35)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한1서 4:7)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베드로전서 1:22)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1서 3:18)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요한1서 4:12)

관련된 하나님 말씀:


『창조주만이 이 인류를 아끼고, 이 인류를 사랑하며, 창조주에게만이 이 인류를 내버리지 못하는 참된 마음이 있다. 또 창조주만이 이 인류를 긍휼히 여기고 모든 피조물을 아낀다. 그의 마음은 인류의 일거수일투족에 이끌린다. 그는 인류의 사악하고 패괴된 모습에 분노하고 근심하고 슬퍼하며, 인류가 회개하고 신복하는 모습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마음을 되돌리고 축하한다. 그의 모든 마음과 생각은 인류를 위해 생기고 움직이며, 그의 소유와 어떠함은 인류를 위해 발현된다. 또한 그의 희로애락은 인류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인류를 위해 바삐 움직이고, 인류를 위해 조용하게 자신의 생명을 모두 바치며, 인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의 일분일초를 기여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은 아낄 줄 몰랐지만 자신이 손수 창조한 인류는 늘 아껴 왔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인류에게 주었다…. 그가 조건도 보상도 없이 긍휼과 관용을 베푸는 것은 오로지 인류가 그의 눈 아래에서, 그의 생명의 공급 아래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또 언젠가 인류가 다시 그의 앞에 돌아와 그가 바로 인류에게 생존을 위한 자양분을 공급하고 만물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그분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전능자는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면서도 전혀 지각이 없는 사람을 혐오한다.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야 사람에게서 오는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찾으려 한다. 너의 마음과 영을 찾아 네게 물과 음식을 공급함으로써 너를 깨우고, 네가 더 이상 목마름과 굶주림을 겪지 않게 하려 한다. 더없이 피곤할 때도, 이 세상이 처량하다고 조금 느껴질 때도 방황하거나 울지 마라. 전능하신 하나님, 지키며 바라보는 그이가 네가 언제 돌아오든 너를 안아 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샘물처럼 끊이지 않고 흘러 너와 나에게, 그에게, 또 진심으로 진리를 찾고 하나님의 나타남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베푼다.』















1/4분기 성경 읽기

2023년 제 1 주 / 1월 1일 - 7일
주간 성경 읽기표 참조
범위 / 창세기 1장 - 창세기 19장
          마태복음 1장 - 6:18

1. 교인들은 매일 성경 읽기표에 따라 성경 읽기를 실천합니다.
2. 설교자는 매일 주간 범위 전체를 읽고 주제에 맞는 본문을 구약과 신약에서 선택합니다.
3. 한 주일 전에 주보에 설교 제목과 본문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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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주요 용어 설명 #. 1 사랑

* 자료 제1차 사용일 / 01-19-2020(주일)
* 자료 제1차 수정 일 / 05-30-2022(월)

사랑의 정의 : 덮어주는 것이다!
암송 성구 : 베드로 사팔(베드로전서 4:8)
- 베드로전서 5장
  베드로후서 3장
  따라서 베드로 사팔이라고 하면 베드로전서를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 God is Love.
Θεὸς ἀγάπη ἐστίν(데오스 아가패 에스틴)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Whoever does not love does not know God, because God is love.) 

요한일서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And so we know and rely on the love God has for us. God is love.
Whoever lives in love lives in God, and God in him.


에로스 —“낭만적 사랑”
에로스 는 누군가에 대한 강렬한 성적 욕망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인들은 종종 누군가가 자신의 말이나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열정적이고 압도적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정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로스 는 빨리 통치하지 않으면 매우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에로스의 두 가지 예를 찾습니다 .
삼손은 그것을 알아내는 데 더디었지만 Delilah에 대한 그의 열정이 그에게 역효과를 낸 후 마침내 에로스 의 위험을 이해 했습니다. Samson은 아마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신에 대해 약간 과신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에게 큰 힘을 축복 해 주셨지만, 그가 상식이나 충동을 통제하는 축복을받지 못한 것은 분명합니다.

삼손은 창녀들과 함께 잠을 자고 ( 사사기 16 : 1 ) 복수로 곡식 밭 전체를 불태 웠습니다 ( 사사기 15 : 5 ). 그러고 나서 그는 들릴라를 만났고 (사사기 16 장) 그녀에게서 손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블레셋 사람들의 스파이 였고, 우리가 알다시피, 그녀는 그를 속여 그의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그녀에게 말하도록했습니다. 나중에 그가 잠든 후에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을 모두 깎고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체포하고 그의 눈을 뽑았습니다.
다윗 왕은 또한 어느 날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손을 잡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둘 다 이미 결혼했지만 그는 즉시 밧세바로 보내 그녀와 친밀해질 수있었습니다. 몇 달 후, 그녀는 그에게 자신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David는 즉시 남편의 죽음을 계획하기 시작합니다.
그리스인들은 에로스에 대한 정의가 정확 했던 것 같습니다 . 매우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필리아 —“애정 어린 사랑”
모든 사랑은 어떤 식 으로든 애정이 있지만, 필리아 사랑은 열정이나 성적 충동을 포함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좋은 친구 사이의 사랑이나 당신과 당신이 존경하거나 존경하는 사람 사이의 선의에 가깝습니다.
우리 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사이의 필리아 사랑을 봅니다 . 그들은 예수님이 모인 엉뚱한 사람들로 시작했지만, 결국 그들은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도 계속 함께 사역 할 수있는 좋은 친구가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또한 필리아 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정의하는 일종의 사랑이라고 지적했습니다 .

“이로써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 셨기 때문에 사랑을 알게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형제들을 위해 우리의 삶을 내려 놓아야합니다.” 요한 일서 3:16
그는 18 절에서 계속해서 말합니다.
“내 어린 자녀들이여, 말이나 언어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로 사랑합시다. 그리고 이것으로 우리는 우리가 진리에 속하고 그분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확신 할 것임을 압니다.”
Philia 는 장기간에 걸쳐 낭만적 인 관계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에로스 사랑에 피드백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 사이에서 필리아 는 홀로 서 있습니다.

Storge — "친숙한 사랑"
storge 는 필리아 (친구 간의 사랑) 와 혼동 될 수 있지만 가족이 서로에 대해 느끼는 사랑과 더 관련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 대한 사랑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쉽게 깨지지 않는 매우 강한 유대감입니다. 물론,의 에로스 (낭만적 인 사랑)와 필리아 종종로 진화 (애정 사랑) storge 관계가 성장하고 깊어하지만 같은 storge가 더 부모와 아이들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예를 볼 storge 아버지 하나님 자신과 성경의 시작에 있습니다. 그의 아들 예수에 대한 그의 큰 사랑은 특히 마태 복음 3:17 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
“그리고 갑자기 하늘에서 '이는 내가 기뻐하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음성이 들렸다.”
storge의 다른 훌륭한 예 는 다음과 같습니다.

  • 예수에게 종을 고쳐달라고 요청한 백부장 ( 누가 복음 7 : 1 ~ 10 , 마태 복음 8 : 5 ~ 1 3)
  • 귀신 들린 딸을 구해달라고 예수님 께 간청 한 여인 ( 마태 복음 15 : 21 ~ 28 )
  • 예수 께 딸이 죽을 뻔했기 때문에 고쳐달라고 간청 한 회당장 야이로 ( 막 5 : 21 ~ 24 ).

Pragma — "지속적인 사랑"
결혼하고 한동안 결혼했다면 신혼 여행이 끝날 때가 온다는 것을 잘 알고있을 것입니다. 
에로스 둘 다 가지고 멋진의에 정착했다.
storge/ 필리아 혼합 생활은 명랑하게 따라 간다.
그러나 당신이 충분히 오래 지속된다면, 결국 당신은 지속적인 사랑 인 pragma 를 갖게 됩니다.

πρᾶγ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4229

1. 되어진 일,  2. 되어질 일, 3. 사물
발음 [ pragma ]
어원 / 423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이루어진 일, 사실, 무엇이든지(마18:19), 사실, 내력, 일(눅 1:1, 행 5:4, 고후 7:11, 약 3:16, 히 6:18)
신약 성경 / 11회 사용

Pragma는 영어 단어 pragmatic을 얻는 곳입니다.
시간의 시험을 견디는 실용적인 사랑입니다.
결혼 한 지 50년이 지난 남편과 아내가 갖고 있는 사랑이고, 그들은 여전히 손을 잡고 키스하고 싶어합니다.
열정이 하얗게 뜨거워지고 빠르게 사라지는 에로스 와는 반대로 프라그 마는 고급 와인과 같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장하고 진정으로 특별한 것으로 성장합니다.
성경에는 지속적인 사랑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가 많지 않지만,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해 읽을 때 그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께서 마침내 아들을 축복 해 주실 때까지 수십 년 동안 결혼했습니다.
그것은 소요 프라그를 긴 수명의 업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동안 다운을 지속하는 것은 실현하기 위해 지난에 몇. 결국 하나님은 창세기 21:1~7 에서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

우리는 또한 룻기에서 룻과 보아스와 함께 pragma 의 힌트를 봅니다 .
보아스가 룻과 결혼하기로 합의한 후, 그들의 결혼 생활은 충분히 오래 견디어 아들 오벳이 성장하여 제시라는 아들을 낳았고 그는 다윗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야곱과 라헬이 프라그마를 가졌으나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창 35: 6-20 ).
그녀에 대한 Jacob의 놀라운 사랑을 감안할 때, 우리는 그들이 결국 pragma를 가질 것이라고 가정 할 수 있습니다 .
그들은 확실히 eros 와 storge를 가지고 있었다 .

 

Philautia — "자기 사랑 / 자기 연민"
자기애 는 본질적으로 건강에 좋지 않을 수 있지만, 박애 는 건강한 자존감을 의미합니다. Psychology Today의 Neel Burton 박사는 자존감을“다른 사람의 가치와 비교하여 우리 자신의 가치에 대한 감정적 평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고 자신과의 관계를 반영하고 결정하는 매트릭스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세상에.”
그러므로 우리가 건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게하는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올바른 사랑을주고받을 수있는 좋은 자존감이 있습니다. 자존감이 좋으면 박애가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philautia 를 건강한 음식을 먹고,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운동을하는 자기 연민 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아프면 필요한 약을 복용하거나 기분이 나아질 수 있도록 의사를 찾아 갈 수 있습니다. 자기 연민이 없었다면 박애 가 없었을 것 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philautia 의 좋은 예 는 Daniel입니다. 그와 그의 친구 Hananiah (Shadrach), Mishael (Meshach), Azariah (Abed-Nego)가 바빌로니아 군대에 잡혔을 때 그들은 칼데 아어와 바빌로니아 문화를 배우기 위해 느부갓네살 왕의 궁전으로 끌려갔습니다. 왕은 그들에게 매일 맛있는 음식과 포도주를 주었지만 다니엘은 그러한 불경건 한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 히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도 그렇게하도록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내시들에게 하나님을 기리기 위해 열흘 동안 채소 만 먹고 물만 마시 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10 일이 지나자 소년들은 다른 포로 소년들보다 건강 해 보였습니다.
다니엘은 주로 하나님 께 영광을 돌리고 있었지만 그의 성실함 덕분 에 그는 자신이 바빌론에서 겪고있는 시련을 견딜 수 있도록 건강을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이 네 젊은이에 관해서는 하나님 께서 그들에게 모든 문학과 지혜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모든 환상과 꿈을 이해했습니다.” 다니엘 1:17

Ludas — "Playful Love"
사랑에 빠진 적이 있다면 의심 할 여지없이 ludas를 느꼈을 것 입니다. 뱃속의 나비, 빨라진 심장 박동, 사랑의 관심이 문을 통과하기를 기다릴 때 느끼는 불안입니다. 데이트의 초기 단계에서하는 유혹과 놀림, 놀기입니다. 일반적으로 관계를 구축하는 것보다 재미에 더 중점을 둡니다.
성경에서 루 다스 사랑 의 예는 솔로몬 왕과 솔로몬의 노래 책에 나오는 알려지지 않은 처녀 사이의 것입니다. 처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녀의 가족이 솔로몬에게 고용되었다고 믿습니다. 전도서 9 : 9 에 따르면 , 그녀는 결국 그의 첫 번째 아내가되었습니다 (즉, 699 명의 다른 여성과 결혼하고 300 명의 첩을 기르기 전에).
솔로몬이 악보로 썼던 솔로몬의 노래 전체 책은 서로에 대해 느낀 유혹과 그리움으로 넘쳐납니다. 노래의 언어는 SoS 4 : 3–5에서 약간 까다로워집니다 (그것을 찾아 보겠습니다. 그 당시에는 다소 매운 언어였습니다).
솔로몬과 처녀는 루다 와 에로스를 모두 사랑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아가페 —“무조건적인 사랑”
아가페 는 그리스의 모든 유형의 사랑 중에서 가장 특별하고 가장 존경심이 많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의 사역 내내 반복해서 언급하는 종류이며 모든 기독교 신앙이 포함하는 것입니다.
아가페 는 타인에 대한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인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그것은 이타적이고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돌보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수님 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 셨을 때 아가페 사랑을 완벽하게 예시하셨습니다 . 그의 고통은 우리가 자유롭게 될 수 있도록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모두 가지고이라고 입을 딱 벌리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어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37 ~ 39 : 마태 복음 22 장을 . 이 성경에서 예수님은 사실상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가장 큰 계명을 우리에게 주실 때 바리새인의 질문에 단순히 대답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 께서 그에게 말씀 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 번째이자 위대한 계명입니다. 두 번째는 그와 같습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합니다. ' ”
예수님은 아가페 사랑 에 대해 제자들과 수천 명의 다른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가르치 셨으며 , 그가가는 곳마다 그것을 공개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 산상 수훈에서 무수한 치유, 나사로를 죽은 자에서 부활시키는 것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는 것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아가페 사랑 의 완벽한 구체화 이셨습니다 .
예수님은 우리가 가진 사랑의 가장 훌륭한 모범 이시며 우리 모두가 매일 베끼려고 노력해야 할 분입니다.
상황에 따라 우리는 모두 다른 유형의 사랑을 경험하고 있지만, 아가페 는 집중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랑 입니다. 아가페 사랑 을주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되는 것입니다.
이번 밸런타인 데이에 예수님처럼 사랑을 줄 수있는 방법을 직접 알아보세요. 다른 사람을 우선시하고 관대하게 사랑하는 것을 매일의 목표로 삼으십시오. 하나님은 믿을 수없는 방법으로 당신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믿음, 소망, 사랑,이 세 가지 안에 거하십시오. 그러나 이들 중 가장 큰 것은 사랑입니다.” 고린도 전서 13:13


사랑(아하바. אַהֲבָה) 

히브리어로 ‘사랑’을 אַהֲבָה(아하바)라고 한다.
이 명사는 ‘사랑하다/좋아하다’란 뜻의 동사 אָהֵב(아헤브)에서 파생했다.
LXX에서는 그리스어로 γαπω (아가파오)라고 흔히 번역된다.
이 단어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표현하는 데서부터 게으름뱅이가 게걸스럽게 먹는 식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념을 전달한다.

동사 피엘형은 16회에 걸쳐 나오는데, ‘잘못된 애정행각’을 표현하여 우상숭배를 경고하기도 한다(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동사 אָהֵב(아헤브)는 대체로 사람 사이의 사랑을 그린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처럼 부자간의 사랑(창22:2)이나 야곱과 요셉의 경우처럼 형제간의 사랑(창37:3)을 그리는가 하면, 노예가 주인을 좋아해 평생 함께 살기를 원하는 것을 표현하기도 하고(출21:8), 이웃사랑을 명령하는 문장에도 사용된다(레19:18). 성도는 나그네를 사랑해야 한다(신10:19). 삼손이 데릴라를 사랑했다(삿14:16; 삿16:15). 룻이 나오미를 사랑한다(룻4:15). 엘가나는 브닌나보다 한나를 더 사랑했다(삼상1:5).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사랑했다(창25:28). 히람은 다윗을 사랑하여 국제 동맹을 맺었다(왕상5:1).

이상한 것은 자녀가 부모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사용된 경우가 한 군데도 없다는 점이다. “네 부모를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제5계명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אָהֵב(아헤브)가 아니라 כָּבֵד (카베드)로서 ‘존중하다/순종하다’란 의미이다. 즉, 자녀의 ‘사랑’ 대신에 ‘도리’를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효(孝)’라는 단어도 한글성경에는 오로지 디모데전서 5장 4절에 딱 한 번 나올 뿐, 구약성경에는 전혀 없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딤전5:4, 개역).

이 문장의 “효”는 그리스어로 ἀποδίδωμι (아포디도미)를 번역한 것인데, 새번역/공동역은 이를 “갚다/보답하다”라고 번역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אָהֵב(아헤브)가 사용된 경우는 매우 다양하다. 식도락(창27:4)을 표현하기도 하고, 취향으로서 기름(잠21:17)이나 은(전5:9)이나 선물(사1:23)을 좋아하는 경우,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시119:47), 율법(시119:97), 언약(시119:119), 교훈(시119:159)을 좋아하는 경우에 이 단어가 사용된다. 사람들은 마땅히 선(암5:15), 진리와 평화(슥8:19), 구원(시40:16), 지혜(잠29:3), 그리고 하나님(신6:5)을 사랑해야 한다는 표현도 많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한다는 표현에도 이 동사를 사용한다(신4:37: 사43:4; 말1:2).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것들로는 자기 백성 외에도 시온의 성문(시87:2), 정의와 공의(시33:5), 성전(말2:11)이 있다. 이와는 반대로 사람들이 악(시52:3), 죽음(잠8:36), 허무(시4:2), 저주(시109:17), 거짓 맹세(슥8:17)를 사랑한다는 표현도 많다. 백성은 방황하기를 좋아하고(렘56:10), 게을러서 잠자기를 좋아한다(사56:10).

우정을 분사형으로 표현하여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라고 표현할 때 이 용어를 차용했다(대하20:7). 강세형 피엘로 사용될 때 ‘아헤브’는 매춘행위를 가리키기도 한다(호2:7; 9:12; 겔16:33, 36-37; 렘22:20, 33; 30:14; 애1:19; 슥13:6).

명사형 אַהַב (아하브)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잠5:19와 호8:9에 두 차례만 등장한다. 잠언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아내를 “사랑스런” 암사슴에 비유했지만(LXX φιλα), 호세아서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여서 에브라임의 우상숭배를 매매춘 행위에 비유하여 “연인에게 제 몸을 팔았다”라고 묘사하였다(LXX γαπω).

추상명사로 쓰일 때는 אַהֲבָה (아하바)로 표현된다. 이 여성명사는 야곱의 라헬 사랑처럼 아내를 향한 남편의 사랑을 가리킨다(창29:20). 이에 빗대어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같은 단어로 표현된다(신7:8; 대하2:11). 요나단과 다윗의 사랑도 이 단어로 표현되었다(삼상18:3; 20:17; 삼하1:6).

지혜서들과 일부 예언서에서 이 단어는 잠언 10장 12절과 같이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는 따위의 순수 추상명사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채소만 있어도 사랑을 곁들인 식사가 좋다”(사역, 잠15:17; 전9:1, 6). 아가서에서 “임의 사랑이 내 위에 깃발처럼 펄럭이어요”(아2:4)와 같이 연인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에 견준 표현이 10차례 나오는데, 이는 저자의 공교로운 솜씨로 느껴진다(아2:5; 5:8; 8:6, 7, 등).

예언서에서는 이 단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맥락에서 긴요하게 사용되고 있다(렘31:3; 호11:4; 믹6:8). 재미있는 것은 미가서 6장 8절에는 ‘아하바’와 ‘헤세드’가 연결되어 나온다는 점이다(אַהֲבַת חֶסֶד).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는 신실함을 가리켜 חֶסֶד(헤세드)라고 하는데, 이것을 한글성경에서는 흔히 “은혜”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은혜는 곧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여 ‘헤세드’를 매우 많이 사용한다.

예를 들면 신명기 5장 10절 한 문장 안에 ‘헤세드’와 동사 ‘아헤브’가 함께 나오지만, ‘헤세드’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란 뜻을 전달하고 있다. 아래를 비교해 보라.

한글개역)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새번역)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공동역)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가톨릭역)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헤세드’도 성경에 언급되는 빈도수가 매우 높다. 창세기에 열 차례 나오고, 출애굽기에는 네 차례, 레위기에 한 차례, 민수기에 두 차례, 신명기에 세 차례, 도합 20차례 언급된다. 이 단어는 특히 시편에 엄청나게 자주 나온다. 시편의 시인들은 이 단어를 무려 128회 사용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좋고 위대한지를 노래하였다.

칠십인역 성경은 히브리어 ‘아헤브’나 ‘헤세드’를 모두 그리스어 ἀγαπάω (아가파오)로 번역하고 있다. 이 번역어는 창세기에 10차례 나오는데, 대부분 동사 (아헤브)의 번역어이다(창27:4, 9, 14; 37:4은 제외). 창세기에 나오는 חֶסֶד(헤세드)는 열 차례 중 여섯 차례나 δικαιοσύνη(디카이오쉬네)라고 번역되어 있다(창19:19; 20:13; 21:23; 24:27, 49; 32:11).

이로써 오늘날 ‘사랑/love’이란 단어가 함축하는 의미는 성경 시대의 언어에 담긴 의미와 매우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더욱 특이한 점은 연인이나 친족이나 친구,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하여 ‘아하바’ 곧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효(孝)’라는 관념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학자들이 더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다만 구약성서의 ‘아헤브’란 용어가 헬라어 역본에서 아가페나 아가파오란 용어로 번역되었는데 이 헬라어 용어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예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는 전문용어로 특정화되었는지를 연구하는 일은 앞으로 놓칠 수 없는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도입 예화) 뉴욕시장 피오렐로 라과디아의 판결

1930년 어느 상점에서 빵 한 덩이를 훔치고 절도 혐의로 기소된 노인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판사가 빵을 훔친 이유를 물었습니다.

"판사님, 저는 지금 이혼한 딸과 살고 있는데 딸은 병들었고 두 손녀딸이 굶고 있습니다.
빵 가게 앞을 지나가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손이 나갔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노인의 말을 들은 방청객들은 노인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공정한 법의 집행을 내려야 하는 판사는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판사는 잠시 후에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사정이 딱하다 할지라도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고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법대로 당신을 판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당시 10달러는 노인에게는 너무나도 컸습니다.
노인의 딱한 사정에 선처를 기대했던 방청객들은 실망스럽다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판결을 내린 판사는 자리에서 일어난 후 법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자를 내밀며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노인이 빵을 훔쳐야만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임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방치한 우리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 10달러를 제가 내겠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한다면 50센트를 이 모자에 넣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돈을 거두어 이 노인분에게 다 주도록 하시오."

그렇게 해서 57달러 50센트의 돈이 모였고, 노인은 돈을 받아서 10달러를 벌금으로 내고, 남은 47달러 50센트를 손에 쥐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습니다.

이 명판결로 유명해진 피오렐로 라과디아(Fiorello La Guardia) 판사는 그 후 1933년부터 1945년까지 12년 동안 뉴욕 시장을 세 번씩이나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법을 어긴 사람에게 벌은 내리는 이유는
다시는 그런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누군가가 저지른 작은 잘못은
온전히 그의 잘못만의 아니라 세상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 생겨나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아픔을 살펴볼 수 있다면
이 세상의 많은 잘못이 생겨나지 않도록
막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오늘의 명언
관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애의 소유이다.
우리는 모두 약함과 과오로 만들어져 있다.
우리는 어리석음을 서로 용서한다.
이것이 자연의 제일 법칙이다.
– 볼테르 





(도입 예화) 희랍의 힐루카 대왕의 이야기

고대 희랍에 전설적인 힐루카 왕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당시 사회가 안고 있던 큰 문제는 미성년자들이 음행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미성년자들의 잘못된 생활을 법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매우 엄한 법을 공포했습니다.
그 법은 음행 하다가 붙잡힌 미성년자들은 두 눈을 뽑아 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동안 세상은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힐루카 왕의 하나 뿐인 아들 젊은 왕자가 붙잡혀 왔습니다.
재판장은 매우 난처했습니다.
장차 왕위를 계승할 왕자의 두 눈을 뽑으면 눈이 없어 볼 수 없는 왕을 세워야 합니다.
왕자에게만 특혜를 주면 법의 공정성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때 주저하는 재판장에게 힐루카 왕은 법대로 집행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왕자의 오른쪽 눈이 뽑혔습니다.
이어서 나머지 왼쪽 눈을 뽑으려고 할 때 힐루카 왕은 자신의 왼쪽 눈을 뽑게 했습니다.
왕자의 잘못도 법대로 처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백성들은 다시는 법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법 정신은 공의에 의해서 지켜져야 합니다.
사랑의 정신은 공의로운 실천에 의해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Love does no harm to its neighbor. Therefore love is the fulfillment of the law.

갈라디아서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The entire law is summed up in a single comma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율법이란 무엇입니까?
레위기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Do not seek revenge or bear a grudge against one of your people, but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I am the LORD.

율법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했습니까?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셨을까요?
인간이 지킬 수 없는 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법을 지키지 못하면 범법자가 됩니다.
범법자는 반드시 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벌을 받아야 할 백성들을 위하여 자신의 눈을 뽑게 했던 힐루카 왕처럼 사랑의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속죄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로마서 3:20
,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Therefore no one will be declared righteous in his sight by observing the law; rather, through the law we become conscious of sin.

로마서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What shall we say, then? Is the law sin? Certainly not! Indeed I would not have known what sin was except through the law. For I would not have known what coveting really was if the law had not said, "Do not covet."

야고보서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For whoever keeps the whole law and yet stumbles at just one point is guilty of breaking all of it.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know that a man is not justified by observing the law, but by faith in Jesus Christ. So we, too, have put our faith in Christ Jesus that we may be justified by faith in Christ and not by observing the law, because by observing the law no one will be justified.

우리 말에는 "사랑" 이란 단어가 하나뿐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을 기록한 '코이네 헬라어'와 '헬라어'에는 사랑이란 단어를 다양하게 사용합니다.
먼저 사랑이란 다양한 단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랑이란 단어의 의미를 분명하게 살펴야 하는 이유는 언어의 혼돈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범위가 매우 넓습니다.
문제는 현대인들의 언어가 정확한 의미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LOVE)과 좋아하는 것(LIKE)은 분명하게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사랑이란 자기 희생과 헌신이 있습니다.
반면에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내려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것을 마치 사랑하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예를 들면 나라를 사랑한다는 대상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모를 사랑한다.
형제를 사랑한다.
친구를 사랑한다.
애인을 사랑한다.
음악을 사랑한다.
꽃을 사랑한다.
개(伴侶犬)를 사랑한다.
고양이(伴侶猫)를 사랑한다.
문학을 사랑한다.
교회를 사랑한다.
학문을 사랑한다.

우리 말에서는 사랑이란 단어 하나만으로도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그러나 헬라어에서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구분하여 사용했습니다.

첫째는 스토르게(storge, φιλόστοργος)(5387. philostorgos) 
Definition : tenderly loving
Usage : tenderly loving, kindly affectionate to.

로마서 12:10(형제를 사랑하여)
형제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Be devoted to one another in brotherly love. Honor one another above yourselves.

둘째는 필리아(philia, φιλία)(5373)
Definition : friendship
Usage : friendship, affection, fondness, love.

야고보서 4:4(세상과 벗된 것)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You adulterous people, don't you know that friendship with the world is hatred toward God? Anyone who chooses to be a friend of the world becomes an enemy of God.

셋째는 에피투미아(epithumia, ἐπιθυμία)(1939)
Definition: desire, passionate longing, lust
Usage: desire, eagerness for, inordinate desire, lust.

마가복음 4:19(욕심),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but the worries of this life, the deceitfulness of wealth and the desires for other things come in and choke the word, making it unfruitful.

누가복음 22:15(원하고 원하였노라)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And he said to them, "I have eagerly desired to eat this Passover with you before I suffer.


넷째는 에로스(eors, Ἔρως)
성경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단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연정과 성애의 신이다.
로마 신화에서 아모르 또는 큐피드와 같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고대 그리스어로 주로 이성에 대한 강렬한 성적 욕구를 의미하는 보통명사가 신격화된 것이다.

(예화) "토마스 불핀치(Thomas Bulfinch, 1796. 7. 15~ 1867. 5. 27)" 신화(mythology)에서 "아폴로와 다퓌네(Apollo and Daphne)"

희랍 신화에 아폴로와 다퓌네라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큐피트는 신비한 활과 화살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금촉 화살입니다.
금촉의 화살을 맞으면 누군가를 사랑하게 합니다.
또 다른 화살은 납촉 화살입니다.
납촉 화살을 맞으면 사람을 증오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런 화살을 맞으면 맞은 사람은 어떤 화살을 맞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느날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 장군 아폴로가 많은 사람들의 환영으로 받으며 성내로 들어옵니다.
그때 큐피트가 작은 활과 화살을 갖고 있었는데 아폴로는 큐피트에게 그런 것은 전쟁을 위한 무기이지 어린 아이들이 갖고 놀이하는 것이 아니라며 큐피트를 꾸짖었습니다.
비록 큐피트가 어렸지만 아폴로 장군의 으시대는 꼴을 싫어하여 아폴로에게 금촉 화살을 당겼습니다.

그리고 다퓌네는 숲의 신의 딸이었는데 다퓌네에게 납촉 화살을 쏘았습니다.
아폴로가 숲의 신의 딸 다퓌네를 보는 순간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미친듯이 다퓌네를 쫓아가면 다퓌네는 그 많은 여인들이 흠모하는 아폴로를 보기 싫다며 도망칩니다.
쫓고 쫓기는 사랑과 미움의 전쟁은 계속되면 될 수록 아폴로의 마음은 점점 더 다퓌네를 향하여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어느 날 아폴로는 오늘이 기어이 다퓌네를 붙잡겠다며 사력을 다하여 쫓아가서 드디어 다퓌네의 허리를 부둥켜 안았습니다.
그때 다퓌네는 아버지 숲의 신에게에 도움을 청합니다.
다급한 딸의 외침을 듣고 다퓌네를 나무로 변하게 만들었지요.
아폴로가 다퓌네의 허림을 부둥켜 안는 순간 눈을 감았다가 떠 보니 다퓌네의 허리가 아니라 나무 기둥이었습니다.
얼마나 허망할까요?
다퓌네의 치렁치렁한 머리는 나뭇잎이 되었고
다퓌네의 두 다리는 나무의 뿌리가 되었으며
다퓌네의 두 팔은 나무 가지가 되었습니다.
아폴로는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이 나무가 되었기에 이렇게 외칩니다.
"너는 이제부터 영원한 나무가 되어라!"
(You are ever green tree forever!)
이렇게 부르는 것도 서운하여 마라톤 우승자에게 월계수나무로 만든 월계수 관을 씌워주는 전통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다섯째는 아가페(agape, ἀγάπη)(26)
Definition : love, goodwill
Usage : love, benevolence, good will, esteem; plur: love-feasts

마태복음 24:12(사랑이 식어지리라)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Because of the increase of wickedness, the love of most will grow cold.

누가복음 11:42(하나님께 대한 사랑)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
Woe to you Pharisees, because you give God a tenth of your mint, rue and all other kinds of garden herbs, but you neglect justice and the love of God. You should have practiced the latter without leaving the former undone.

요한복음 5:42(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but I know you. I know that you do not have the love of God in your hearts.

사랑이란 단어가 우리 말처럼 단순하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필요한 단어를 사용하므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한 예를 성경에서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노련한 어부이었지만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여 피곤하고 지쳤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져보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순식간에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졌습니다.
그러자 그물을 잡아 당기면서 얼마나 많은 고기가 잡혔는지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고 말씀하셨던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잡은 물고기를 구워 아침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가 사용한 사랑이란 단어는 "필리아" 라는 단어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단어는 "아가페"와 "필리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과 두번째는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세번째는 필리아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아가페라는 사랑은 베드로처럼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입장에서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변함없이 사랑하고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헌신적인 사랑으로 마치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처럼 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필리아라는 사랑은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과 같은 사랑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물었을 때 어떻게 베드로가 주님에게 아가페라고 대답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필리아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을 헤아리셨던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네가 정말 나를 필리아할 수 있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예 나는 주님을 필리아 할 수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많은 신혼부부들이 예식장에서 주례와 증인들 앞에서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 사랑할 것을 다짐하고 약속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부부들이 서로 헤어지고 있습니까?

인간들의 사랑이란 이렇게 약속을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시리라는 말씀은 인간들이 배신하고 떠나버려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은 "용서하는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1st. 가죽옷(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The LORD God made garments of skin for Adam and his wife and clothed them.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런데 나무잎은 해가 뜨면 곧 잎이 마르고 시들어버립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짐승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죽옷을 아담과 하와에게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의 특징은 짐승을 잡아 죽일 때 생명을 잃은 짐승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은 피가 없는 옷 즉 용서가 없는 옷입니다.
반면에 가죽옷은 짐승의 피가 있는 옷입니다.

성경은 피를 생명이라고 합니다(신명기 12:23)

다만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지 못하리니.
But be sure you do not eat the blood, because the blood is the life, and you must not eat the life with the meat.

성경은 피를 용서라고 합니다(히브리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In fact, the law requires that nearly everything b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


용서의 특징은 덮어주는 것입니다.

가죽옷으로 덮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창세기 3:21)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으로 덮어주셨습니다.

방주의 안과 밖을 역청을 바르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창세기 6:14)
노아가 방주를 만든 나무를 '잣나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개역 개정판 성경에서는 '고페르 나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역청을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역청을 "코페르"라고 합니다. 코페르라는 단어는 "속죄" 라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속죄제 제물의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피로 덮는 용서가 완성된 것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므로 모든 사람의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예수께서 흘리신 피를 "화목제"라고 합니다.
 
화목제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사랑
요한일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인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화목제를 히브리어로 "제바흐 쉘라밈" 이라고 합니다.
제바흐제물, 쉘라밈평화(샬롬의 복수형)

화목제 제사의 특징

첫째는 암수 모두 바칠 수 있다.

둘째는 기름과 콩팥을 드린다.
(기름이 잘 타기 때문이다)

셋째는 남은 제물은 바친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이 나눠 먹을 수 있다.
(단 3일 이내에 만 먹어야 하고 그 후에는 반드시 불에 태워버려야 한다)

넷째는 평등 의무 제사
화목제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배려하는 산비둘기, 집비둘기의 새끼는 제물을 받지 않는 평등의무 제사였습니다.
즉 성막을 지을 때에는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에게 똑 같은 속전을 거두시게 하신 것처럼, 평등하게 부담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화목제 제사의 근거
로마서 3:23-26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for all have sinned and fall short of the glory of God,
and are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 through the redemption that came by Christ Jesus.
God presented him as a sacrifice of atonement, through faith in his blood. He did this to demonstrate his justice, because in his forbearance he had left the sins committed beforehand unpunished.
he did it to demonstrate his justice at the present time, so as to be just and the one who justifies those who have faith in Jesus.


(예화) 가정과 화평

메이어라는 랍비는 설교를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그는 매주 금요일 밤이면 예배당에서 어김없이 설교를 했는데, 몇 백 명씩 한꺼번에 몰려 들어 그의 설교를 들었다.
그들 가운데 메이어의 설교듣기를 매우 좋아하는 여인이 있었다.
다른 여자들은 금요일 밤이되면 안식일에 먹을 음식을 만드느라 바쁜데, 그 여자만은 이 랍비의 설교를 들으러 나왔다.
메이어는 긴 시간 동안 설교를 했고 그 여인은 그 설교에 만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남편이 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내일이 안식일인데 음식은 장만하지 않고 어디를 쏘다니고 있느냐며 화를 내며 물었다.
"도대체 어디를 갔다 왔어!"
"예배당에서 메이어 랍비님의 설교를 듣고 오는 길이예요"
그러자 남편은 몹시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 랍비의 얼굴에다 침을 뱉고 오기전에는 절대로 집에 들어올 생각은 하지도 말어!"
집에서 쫓겨난 아내는 할 수 없이 친구 집에서 머물며 남편과 별거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메이어는 자기의 설교가 너무 길었기 때문에 한 가정의 평화를 깨뜨렸다고 몹시 후회했다.
그리고는 그 여인을 불러 눈이 몹시 아프다고 호소하면서 '남의 타액으로 씻으면 낫게 된다는데, 당신이 좀 씻어 주시오'하고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여인은 랍비의 눈에다 침을 뱉게 되었다.

제자들은 랍비에게 '선생님께선 덕망이 높으신데, 어째서 여자가 얼굴에 침을 밷도록 허락하셨습니까?'하니 랍비는 이렇게 말했다.

"가정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는 그 보다도 더한 일이라도 할 수 있다네."

사랑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 아들이 화목제 희생의 제물이 되어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일에 이르기를 원하는 사랑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무섭게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던 시대에 기록된 말씀으로 빨리 예수님 오시기를 갈망한 예언서입니다.
그런데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주님은 다시 오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예수님을 알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which God gave him to show his servants what must soon take place. He made it known by sending his angel to his servant John.

* 5034, 속히(타코스, tachŏs) τάχος
- 시간적으로 빠른 이란 의미가 아니라 "반드시" 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He who testifies to these things says, "Yes, I am coming soon." Amen. Come, Lord Jesus.

* 5035, 속히(타쿠, tachü) ταχύ
- 서둘러서, 빨리, 지체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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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히" 라는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설교한 자료를 소개합니다.
요한계시록 편에 보면 좀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차 설교일 / 03-31-2019

속히 될 일(요한계시록 1:1, 22:6)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which God gave him to show his servants what must soon take place. He made it known by sending his angel to his servant John.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The angel said to me, "These words are trustworthy and true. The Lord, the God of the spirits of the prophets, sent his angel to show his servants the things that must soon take place."   

* 속히 될 일(What must soon take place) - 곧 일어날 일, 반드시 일어날 일

속담에 ‘구슬이 세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단편적인 지식과 정보를 하나로 연결해야만 바르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지난 두 주일에 소개했던 설교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요한계시록은 오직 예수로만 읽어야 합니다.

프리즘(Prism)은 빛을 굴절 분산시키는 광학도구를 사용하여 햇빛을 통과시키면 프리즘을 통과한 햇빛은 무지개 색으로 분해되어 영롱하게 나타납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들었던 성경에 관한 모든 단편적인 정보들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렌즈로 통과시켜 주님 오실 그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일까?

요한계시록은 계시의 말씀입니다. 계시란 하나님의 구원 방법과 계획이란 비밀을 알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언의 말씀입니다. 예언이란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주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편지의 말씀입니다. 편지는 직접 찾아가서 전할 수 없는 내용을 글로 적어 보낼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였고 예언하셨던 말씀을 글로 적어 보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속히 될 일’이란 무엇일까?

요한계시록을 읽고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자세는 먼저 요한계시록의 범위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범위를 성경 전체로 확장하는 것이 바람직한 성경의 교훈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22장 19절에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속히 될 일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속히”라는 단어가 요한계시록과 성경에서 사용된 말씀을 살펴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속히”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 수가 본문을 포함하여 8구절로 소개됩니다.
(1:1, 2:6, 3:11, 11:14, 22:6, 22:7, 22:12, 22:20).

“속히” 라는 단어가 사용된 모든 구절들을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제한된 시간 때문에 설교의 주제에 합당한 구절들을 살펴보면 ‘속히 될 일’이란 22장 6절에서 “속히 되어질 일” 이라고 소개합니다.
이어서 “속히 될 일” 이란 3장 11절, 22장 7절과 12절 그리고 20절에서 “속히 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히 될 일”은 “속히 오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기가 대략 기원 후 96년이라고 합니다. 2천 년 전에 속히 될 일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직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속히 될 일 즉 주님의 재림이 아직도 실현되지 않은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시간(時間) 개념(槪念)

속히 될 일에 대해서 시간 개념으로 해석하면 ‘빠르다’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속히 이루어질 일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당장 오늘 아니면 내일 아니면 내 생전에 오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목격했던 제자들은 그들이 살아있을 동안에 주님이 오실 것으로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면서 제자들은 그들이 만났던 주님에 대한 증거를 후대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복음서를 시작으로 신약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만일 주님이 제자들 생전에 오셨다면 성경이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실 주님이 오시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베드로후서 3장 8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다르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인위적인 방법이므로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1:6∼7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장소(場所) 개념(槪念)

속히 될 일에 대한 해석을 시간적으로 해석하면 반드시 오실 장소에 대한 궁금증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어디에’ 오실 것을 찾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느 특별한 장소를 마치 계시를 통해 받은 것처럼 소개합니다.

예를 들면 과천, 피지 섬, 브라질, 계룡산과 같은 곳이 될 것이라며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인물(人物) 개념(槪念)

속히 될 일을 시간과 장소로 해석하면 그 다음에는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어느 특정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1992년 시한부종말론의 이장림,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지상낙원 피지 섬으로 집단 이주시키는 사례(은혜로교회 신옥주), 두 증인 중 한 사람이라며 영원불멸의 교주(전도관 박태선),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므로 교인들은 전 재산을 정리해서 브라질에 마련한 4천만평의 땅으로 집단 이주하여 마지막 때를 준비하라는 교회도 있습니다.

영적(靈的) 개념(槪念)

속히 될 일이란 시간과 공간과 인물 중심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묵시문학의 특징인 영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영적 세계에서는 시간 개념과 장소 개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속히’라는 말은 ‘확실히’ ‘틀림없이’ 라는 속뜻으로 ‘반드시 될 일’이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속히” 라는 의미를 ‘문자적’으로 또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해석하면 본질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묵시문학의 특성을 전제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묵시문학에서 “속히” 라는 의미는 “확실히” 또는 “틀림없이” 라는 뜻으로 “속히 될 일”이란 “반드시 일어날 일”이란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속히 될 일’이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이므로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2천년이 지나도 오시지 않았기에 아마 오시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반드시 실현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전개 이야기)
미국 여성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펄벅 여사는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느 해 중국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그녀가 살던 마을에 백인 선교사의 가족들이 우리 마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신이 분노하여 가뭄이 계속 된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소문은 점점 분노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밤에 마을 사람들이 삽, 곡괭이, 쇠스랑 등 농기구를 들고 펄벅의 집으로 몰려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외국 출장 중이라 집에는 어머니와 어린 펄벅밖에 없어서 아무런 대책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집안에 있는 찻잔을 모두 꺼내 차를 준비하고 케이크와 과일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손님들을 초대한 것처럼 대문과 집안의 모든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어린 펄벅에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도록 하시고 어머니는 바느질감을 잡았습니다.

얼마 뒤 농기구를 든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대문이 굳게 잠기고 집안은 깜깜할 것이라고 여기고 횃불을 들고 펄벅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대문이 열려있어 마당으로 들어섰더니 모든 방문이 열려 있고 방마다 불이 환하게 켜진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또한 방마다 차와 케이크 그리고 과일이 차려진 것을 보고 어리둥절하여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멈칫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정중하게 마을 분들을 맞이하며 “어서 오십시오. 정말 잘 오셨습니다. 방으로 들어오셔서 차라도 한 잔씩 드시면서 말씀하십시오.” 그 말을 듣고 더 어리둥절 하는데 그들 중 어느 한 사람이 횃불을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가자 다른 사람들도 그를 뒤따라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구석에서 놀고 있는 아이와 어머니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차를 마시고 케이크와 과일을 먹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그토록 기다리던 비가 내렸습니다. 훗날 어머니는 어른이 된 펄 벅 여사에게 그날 밤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고 합니다.

“그날 밤 조금이라도 도망칠 방법이 있었다면 도망치다가 잡혀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살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막다른 골목에서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인지라 모든 것을 각오하고 그런 용기를 내어 보았단다.”

그리고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용기는 절망에서 생긴다.” 이 말은 펄 벅 여사가 절망적인 순간에 항상 떠올리는 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속히 될 일은 속히 오리라는 약속으로 반드시 오실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 주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았다는 것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사랑을 새롭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왜 주님께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직 오시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주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속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5: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 급히(ταχύ) 사화하라 - 속히(ταχύ) 사화하라 

(현대인 성경) 타협하라
(공동번역) 화해하여라
(새번역) 화해하도록 하여라

‘사화하다’(유노온, 능동형)는 상처를 준 사람이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사화(사과)는 상처를 준 사람이 해야 하고, 화해는 상처를 받은 사람이 해야 합니다. 사화와 화해가 이루어진 것을 합의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8: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 빨리(ταχύ) - 속히(ταχύ) 

성도들이 속히 해야 할 일은 부활의 소식을 빨리 가서 알려야 합니다. 종말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부활의 소식을 빨리 알리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적인 종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만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지라도 여전히 유대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활의 소식을 전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소식을 함께 나누며 주님 오실 그 날을 함께 준비할 수 있는 믿음으로 무장해야 하겠습니다.

속히 될 일이란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께서 속히 오실 것이라는 사건입니다. 주님이 속히 오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속히 오실 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까?

20:15 -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21:27 -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그러므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야 합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이름은 등과 기름을 예비하는 사람입니다.
등과 기름을 예비하기 위해서 속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것으로 구원받은 것으로 신앙생활의 감격이 없고 감사가 없다면 교회에 다닌다는 것뿐이지 신앙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부족한 것이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을 자랑하며 즐거워 할 것입니다.

아쉬운 것은 요한계시록을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사람들이 “속히 될 일”에 대한 주제를 현실 세계에서 나타는 현상과 징조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시대의 징조와 현상은 잘 몰라도 등과 기름을 예비한 지혜로운 사람들만이 주님을 영접할 수 있다는 비유의 가르침과 같이 “속히 될 일”을 말씀하신 감추어진 은혜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속히 될 일”이란 용어가 요한계시록에서 두 번 사용된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1, 속히 될 일
22:6, 속히 되어질 일

속히 될 일 또는 속히 되어질 일은 무엇인가?

3:11, 속히 오리니(I am coming soon.)
22:7, 속히 오리니(I am coming soon!)
22:12, 속히 오리니(I am coming soon!)  
22:20, 속히 오리라(I am coming soon.) 


속히 될 일은 속히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속히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때는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기를 기준으로 대략 2천

년 전의 예언입니다. 2천 년 전에 예언한 내용이 아직도 성취되지 않았다면 그 예언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정말 그 예언을 믿고 기다리고 있을까요? 인간의 평균 수명이 80 또는 90이라고 한다면 속히 오실 것이란 예언을 믿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속히 오리라고 예언하셨을까요?

미래에 나타날 현상과 징조들을 알려고 할 것이 아니라 짧은 인생을 살면서 반드시 속히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신앙적인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신앙적인 삶은 무엇일까요? 속히 라는 단어가 사용된 성경에 소개된 말씀을 찾아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학창 시절에 시험을 치룬 줄 압니다. 시험 일자가 발표되면 모든 학생들이 시험공부를 합니다. 시험 일자가 중요합니까? 시험을 잘 치룰 수 있는 공부가 중요합니까? 시험이 목적이 아니라 시험을 통하여 학생들의 실력을 향상시키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속히 될 일은 반드시 오실 것을 의미합니다. 반드시 오실 주님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기다리는 것보다 다시 오실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삶이 중요합니다.

속히 오시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에게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입니까? 하고 질문했을 때 부활의 주님께서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속히 오실 주님의 때와 기한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는 성령을 받고 증인의 삶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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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사랑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And we know that in all things God works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him, who have been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아가패 사랑의 힘

첫째, 두려움을 물리치는 힘(요한일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There is no fear in love. But perfect love drives out fear, because fear has to do with punishment. The one who fears is not made perfect in love.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합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힘 이상의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딤후 1:7).
For God did not give us a spirit of timidity, but a spirit of power, of love and of self-discipline.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두려움이란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의 줄임말
(Fear ; False Evidence Appering Real)

반려견을 돌보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처음에 집으로 데려오면 불안하여 부들부들 떨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집 주인은 나를 버리지 않겠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 꼬리를 흔들고
따라다니며 좋아한다고 합니다.

강아지도 이렇게 반응한다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둘째, 성령으로 역사하는 힘(요한일서 4:12∼23)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울이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믿고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면 하나님의 영, 곧 인격을 가지신 거룩한 바람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임재 하시어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그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겠습니까!

셋째,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도록 역사하는 힘(요한일서 4:14∼15)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 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아가페 사랑)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1. 내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보니
슬픔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2. 주의 얼굴 뵙기전에 멀리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3.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예수 모신곳이 그어디나 하늘나라

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모든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많은 성도들이 애창하고 있는
찬송가 438장 “내 영혼이 은총입어(Since Christ my soul from sin set free)”
버틀러(C.F. Butler) 작사
블렉( J.M. Black) 작곡
1898년에 발표한 곡입니다.

본 찬송의 작사자 버틀러(C. F. Butler)의 생애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작곡자 James Milton Black (1856- 1938)
뉴욕  사우스 힐에서 태어났으며, 조기 음악교육으로 작곡가, 성악가, 합창 지휘자, 음악교사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뉴욕의 존 하워드(John Howard)와 무디 신학교의 다이넬 타운어(Daniel Brink Towner)로부터 사사하면서 음악적 기초를 든든히 쌓아나갔으며 1881년경 펜실바니주 윌리암스포트(Williamsport)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1904년부터 생을 마칠 때까지 그곳의 파인스트리트 감리교회(Pine Street Methodist Episcopal Church)의 지휘자, 주일학교 교사로서 활동하면서 많은 찬송곡을 작곡하였습니다. 

그의 최초의 작곡집 “영혼의 송가”(Songs of the Soul, 1894)는 2년 동안에 40만부 이상 팔렸다고 하며, 바로 이어 후속 편 Songs of the Soul, Number Two (1896)를 출간했습니다.
또한 그는 10여권의 복음 성가집을 발간해 낼 정도로 정력적으로 작곡활동을 하였는데, 그간 그가 작곡한 곡은 약 1500곡에 이릅니다.

그가 지은 찬송가곡이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 두 곡 실려 있는,
180장 “하나님의 나팔소리”
438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입니다.
전자는 그가 작사, 작곡한 곡이고
후자는 버틀러가 작사한 시에 그가 곡을 지은 것이죠.

버틀러는 누가복음 17장 20-21절, “바리세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는 말씀을 배경으로, 하나님나라의 현재적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감격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현재적 심령 상태를 그리고 있습니다. 

후렴의,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부분을 원시에 가깝게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O hallelujah, yes, 'tis Heav'n
(할렐루야! 그래요, 그것은 천국이어요)

'Tis Heav'n to Know my sins forgiv'n
(내가 죄 사함 받은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것은 천국이예요)

On land or sea, what matters where?
(땅이나 바다나, 그 어디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Where Jesus is, 'tis Heaven there. 
(주님이 계신 그곳은 천국이어요)


지휘자 토스카니니의 고백을 올려봅니다.

"어려울 때 힘이 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좋은 환경이 아니라고 불평하지 마라.
좋은 환경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아담은 에덴 동산이란 좋은 환경에서도 타락하지 않았는가?
눈물나는 역경에서도 감사를 드리자.
흐르는 눈물로 인해 하나님을 더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역경에 처할수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시어
우리를 보호하시고 힘을 주신다"

(결론을 위한 이야기)

중국 후한을 세운 광무제에게 호양 공주라는 여동생이 있었다고 합니다.
호양 공주가 아끼는 노비가 있었는데 공주의 권세를 믿고 살인을 한 후에 공주의 저택에 숨어서 지냈습니다.
당시 낙양성의 치안을 담당했던 "동선"이라는 관리가 이 노비를 처벌 하기 위해서 공주의 대문 앞에 잠복하고 있다가 공주가 외출할 때 따라 나오는 노비를 붙잡아 그 자리에서 처형했다고 합니다.

공주는 자신의 눈앞에서 아끼는 노비가 죽음을 당하자 오빠 광무제에게 동선이라는 관리를 처형하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에 광무제가 동선을 불러 공주에게 사과하라고 하자 동선은 자신은 사과하지 못하겠고 차라리 죽겠다고 버텼습니다. 이런 광경을 본 호양 공주는 "오빠가 황제가 아니었을 때에는 집에다 죄 지은 사람을 숨겨 주어도 관가에서 잡아가지 못했는데 오히려 황제가 되고나니 오빠의 힘이 줄어든 것 같다."며 짜증을 부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광무제는 웃으면서 "황제가 되었으니 일반 백성 때와 같이 행동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하면서 고집쟁이 관리인 동선을 풀어주고 오히려 상을 주었다고 합니다.

광무제는 여동생 호양공주를 달래고 정직한 관리를 풀어줌으로써 친인척도 달래고 국정의 기강도 바로잡았다는 교훈입니다.

오랜 중국의 역사에서 후한의 광무제가 공신들을 잘 관리한 군주로 뽑힌다고 합니다. 광무제는 자신을 도와서 후한을 세운 공신들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명예를 주었지만 건국 이후 국정에는 손을 떼도록 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의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은혜를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릴 수 있는 그 날이 속히 도래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을 위한 이야기)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중에 "두 노인"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가난한 농부와 부자 상인이 긴 세월을 두고 꿈꾸며 계획했던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납니다.
며칠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던중 가난한 농부가 목이 마르다며 걸음을 멈추고 부자 상인에게 “여보게 저기 마을에 잠시 들려 물을 마시고 갈테니 자네 먼저 가게나” 하고 마을 가장 가까이 있는 허름한 집으로 들어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깜짝 놀랐습니다.
온 식구가 전염병에 걸려 앓고 있었으며 또 며칠을  굶었는지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우선 이것으로 먹을 것을 사세요. 그러면 힘이 날겁니다” 라며 가지고 있는 돈을 내밀었습니다.
농부는 여비가 없어서 여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부자 노인은 예루살렘에 도착해 성지를 둘러보고 예배도 드리며 성찬식도 참석해 은혜를 받았습니다.

몇 달간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부자도 여비가 떨어져 집으로 돌아 오다가 농부의 생각이 나서 그와 헤어졌던 마을에 들어갔을 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성인입니다. 그분이 없었다면 우리 식구는 모두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부자노인은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과연 농부의 행위가 옳은것 이었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순례가 아니라 남을 보살피며 살아가는 삶이야” 라고 중얼 거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이나 경제적으로 소외돼 거리와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연약하고 외로운 자들에게 형제 사랑을 실천했을까?

사실 가난한자들은 불합리한 사회적 환경과 제도의 모순, 부자의 횡포 등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하며 사회의 음지에서 소외된 채 타인의 관심과 배려없인 살수 없다.

그럼 그들을 누가 도와 주어야 할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약함과 사회의 구조적인 악에만 그 탓을 돌리거나 회피하지 말고 또한 조건을 붙여 배척하거나 간과하지 말고 도와줘야 한다.

이것은 공중의 새와 들판의 폴 한포기 까지도 관심을 가지신(마 6:26-29)
하나님의 뜻이며 율법의 대강령이자(마 22:36-40)
하나님께서 당신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가지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자기같이 사랑하라”(레 19:34)고 가난한자들을 맡겨 주셨기 때문이다.

* 1차 수정 완료 / 05-29-2022(주일 저녁)

창세기부터 성경을 읽어가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주제에 맞는 본문은 선택하여 설교하려는 자료를 올리려고 합니다.
함께 나누고 싶은 주제가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며 관심을 갖는 주제를 서로 연구하며 말씀으로 설교자를 변화시켜 교회를 진리의 말씀 위에 든든하게 세워가기를 소망합니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태어날 때 뿐 아니라 세상이 창조되기 전,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 조나단 에드워즈
True Christians are chosen of God from all eternity, not only before they were born,
but before the world was created.
- Jonathan Edwards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를 짓고 방탕하게 살아 멸망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반드시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사람은 버리지 않으시고 떠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을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은 모두 구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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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일 / 01-19-2019

가죽 옷과 어린 양의 피(창세기 3:21, 요한계시록 7:14, 19:8)

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The LORD God made garments of skin for Adam and his wife and clothed them.

요한계시록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I answered, "Sir, you know." And he said, "These are they who have come out of the great tribulation; they have washed their robes and made them white in the blood of the Lamb.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Fine linen, bright and clean, was given her to wear." (Fine linen stands for the righteous acts of the saints.)


(도입 이야기)
덴마크의 작가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 4. 2~1875. 8. 4)’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새 옷을 입고 뽐내기를 좋아하는 임금님이 있었어요. 나라를 돌보는 것보다 옷 갈아입기를 더 좋아했어요.
임금님은 거울 앞에서 떠날 줄 몰랐답니다.
“내 모습 어때?”
“정말 멋있습니다.”

신하들은 임금님 앞에서는 칭찬했지만 돌아서면 흉을 보았어요.
뽐내기 좋아하는 임금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어요.

어느 날 두 사람이 임금님을 찾아왔어요.
이 사람들은 아주 특별한 옷감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었는데 그 옷감은 바보의 눈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신비한 옷감이라고 말했어요.
좋은 옷 입기를 좋아하는 임금님은 당장 이 사람들에게 궁궐의 방 하나를 주며 신하들에게 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언제든지 제공하라며 당장 그 옷을 만들게 하였어요.
두 사람은 베틀 앞에 앉아 마치 옷감을 짜듯이 베틀을 움직이고 있었어요.
여러 날이 지난 후 임금님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지요.
그래서 가장 신뢰하는 신하를 보내어 확인하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그 신하가 방으로 들어갔을 때 신하의 눈에는 아무 것도 안 보였어요.
그렇다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바보라고 말할까봐 아무 말도 못했어요.
드디어 임금님이 입을 바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신기한 옷이 완성되었다며 두 사람은 임금님에게 그 옷을 입혀주었어요.
임금님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옷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임금님도 바보가 되겠지요.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고 두 사람이 입혀주는 대로 옷을 입은 후 그 옷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려고 거리로 나갔답니다.
사람들은 임금님이 벌거벗은 것을 보도 아무 말도 못하고 뒤로 돌아서 웃기만 했답니다.
그러자 어느 한 어린이가 ‘임금님은 벌거벗었다!’ 하고 외쳤어요.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다 같이 ‘벌거벗은 임금님!’ 하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전개 이야기)
심판의 날에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 날에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부끄러운 모습일 수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의 옷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이사야 61:1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구원의 옷(Garments of Salvation)을 어떻게 입어야 할까요?

아담과 하와는 직접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옷을 만들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방법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직접 가죽옷으로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옷을 입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에 의한 구원의 옷을 성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가죽옷(창세기 3:21) - 죄를 덮어주는 옷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자신의 죄를 자기의 방법대로 감추려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만든 옷은 “자기 의”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죄를 덮어주시려고 ‘가죽옷’을 만들어 입혔습니다.
가죽옷이란 죄를 용서받은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방법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 예증 #.1)
노아 홍수 때에 잣나무로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잣나무를 개역 개정 성경에서 ‘고페르나무’ 라고 합니다.
그리고 방주 안과 밖을 ‘역청’으로 바르게 하셨습니다.
역청을 ‘코페르’ 라고 합니다.
고페르와 코페르는 같은 문자로 발음을 나타내는 모음만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 고페르와 코페르의 뜻에는 ‘속죄’라는 뜻이 있습니다.

애급에서 나오기 전에 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른 집안에서는 장자의 죽음과 생축의 초태생이 죽는 일이 없었지만 양의 피를 바르지 않았던 집안에서는 장자의 죽음과 초태생의 죽음으로 인하여 큰 슬픔이 임했습니다.

(현실 예증 #.1)
2019년 10월 9일은 ‘욤 키퍼(Yom Kippur)’라는 공휴일은 ‘욤(Yom)’ ‘날(Day)’을 의미하고 ‘키퍼(Kippur)’는 ‘속죄(Atoinment)’를 의미합니다. 키퍼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고페르, 코페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곧 속죄를 받은 하나님의 의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 예증 #.2)
노아 홍수 후에 구원의 계시가 속죄제사로 말씀하셨습니다.
속죄제사는 개인이 바치는 제물과 백성 전체가 바치는 제물로 구분합니다. 개인적인 속죄제는 짐승의 머리에 개인이 안수하고 그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킨 후에 그 짐승을 잡은 후 피를 받아 제사장에게 드리면 제사장은 그 피를 성소 휘장 앞에서 일곱 번 뿌리고 그리고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회막 문 앞 번제단 밑에 쏟았습니다(레위기 4:6∼7).

그러나 백성 전체를 위한 속죄제사는 두 염소를 선택한 후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한 제물로 바치고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 염소라고 하여 광야로 보냈습니다. 이때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렸습니다(레위기 16:15, 18∼19).

속죄소가 있는 곳은 ‘지성소’입니다.
지성소까지 들어가야만 속죄가 해결됩니다.
이러한 속죄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마 27:51).
성소의 휘장이 둘로 나누어진 것은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히브리서 9: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세마포 옷 -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기 위한 예복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세마포 옷은 하얀 옷을 말합니다. 하얀 옷은 세탁을 잘 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 후 변화하신 주님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13∼15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은 인간의 방법에 의한 인간의 의라고 한다면 가죽옷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방법에 의한 의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로 약속하신 것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요한계시록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희어진 옷은 세마포 옷입니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적용)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요?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시편 132:16
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옷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이 외치리로다. 


제사장의 옷을 입히셨습니다.
대제사장 옷은 청색, 자색, 홍색실로 만들었습니다. 에봇은 금실과 가는 베실로 만들었습니다.

청색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자색은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홍색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피 흘리신 것을 기억나게 합니다.
금실은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가는 베실은 흰색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나타냅니다.

오늘 우리들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인정받았으므로 반드시 제사장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제사장의 옷이란 가죽옷처럼 속죄의 피가 뿌려진 옷입니다. 가죽옷은 속죄제사를 통하여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일반적인 속죄제는 휘장 앞에 희생 제물의 피를 일곱 번 뿌렸습니다. 그러나 대속죄일에 드려지는 속죄제사는 아세셀 염소는 광야로 보내버리고 다른 염소는 그 피를 받아 지성소 안에 있는 속죄소 즉 시은좌에 뿌려야만 용서를 받았습니다.

구원의 완성을 계시하신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는 것은 세마포 옷을 입었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하나님의 의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 될 수 있습니다. 고난주간을 지내는 동안 하나님의 의로 인정받은 구원의 옷을 입고 내가 맡은 삶의 자리에서 구원받은 증거를 눈으로 보여주고 입으로 고백하는 구원의 증인으로 승리하는 복된 한 주간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찬송가에는 오른편과 왼편에 사람의 이름이 소개됩니다.
왼편의 이름은 "작사자"
오른편의 이름은 "작곡자"

♪ 184장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 R, Rowry 작사, R, Rowry 작곡

1.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후렴> 예수의 흘린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2. 나를 정케하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사죄하는 증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3. 나의 죄속하시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는 공로 없도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4. 평안함과 소망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5. 영원토록 내 할 말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찬미 제목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 1826-1899)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 1826-1899)는 미국 펜실베니아 주 태생의 침례교 목사로서 루이스버그대학 (후에 버크넬대학) 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졸업과 함께 모교의 문학교수가 되었으며 후에 모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845년에 침례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웨스트체스터(West Chester)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여러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마지막으로 뉴저지 플레인필드(Plainfield)에 있는 파크아베뉴 침례교회에서 목회를 마쳤습니다.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 1826~1899)목사는 남북전쟁(1861~1865) 직후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던 그때 한손(Hanson)의 침례교회에서 시무했는데(1868 -1875) 어느 날 병든 사람을 돌보다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게 되고 40세가 되는 1866년 부터 본격적인 찬송가를 짓기 시작합니다. 

40세 이후부터 찬송가를 작사·작곡하기 시작한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목사는 스스로 찬송가 작가로 기억되기보다는 설교자로 기억되기를 원했지만 희망적인 찬송을 작사ㆍ작곡하여 보급함으로 수많은 이들에게 심령의 갈급함에 새 희망을 주게 되었고 100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훌륭한 찬송가 작시, 작곡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맥커천(Robert Guy McCutchan, 1877~1958) 목사는 “그의 설교는 불과 몇 천 명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그가 작사 · 작곡한 찬송은 지구상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으며, 이 일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비글로우메인(Biglow-Main) 출판사의 음악 편집자로서 일하면서 'Happy Voices, 1865' 를 시작으로 20권이나 되는 찬송 책들을 출판하였고, 1868년에는 브래드버리의 후임으로 주일학교 노래 편집인이 되었으며, 500여 곡의 어린이 찬송과 복음찬송들을 작곡. 혹은 작사하여 돈(Doane)과 함께 발행한 주일학교 어린이 찬송가와 출판물에 넣었습니다. 

그는《행복의 소리》'Happy Voices, 1865' 등 17 권의 찬송가책을 펴냈는데, 그 중에는 100만 부 이상이 팔린 책도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주일학교협의회 회장을 역임한 그는 대학 교수로도 있었고, 침례교 총회장도 역임하였습니다.  

그의 찬송가로서 우리 찬송가에 실려 있는 것은
1. 무덤에 머물러
2. 성자의 귀한 몸
3. 주 사랑하는 자
4. 나의 죄를 씻기는
5.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6. 날 위하여 십자가의
7.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8. 나의 갈길 다 가도록
9. 주 음성 외에는
10. 울어도 못하네
11.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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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라고? 약한 게 강한 거라고?’…말도 안되는 성경 속 아이러니의 비밀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희망 놓지 말아야’
인간관계 주제 신앙상담…김병삼·김기석·김학철 교수 답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정말 기독교인은 무조건 원수도 사랑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아야 하는 것일까.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 5:39)라는 말씀대로 살다가는 요즘같은 세상에서 소위 ‘호구’가 되는 것은 아닐까.

CBS 유튜브 상담 콘텐츠인 ‘잘잘법(잘 믿고 잘사는 법)’에 소개된 신앙상담 가운데 인간관계에 대한 성경 속 아이러니의 참뜻을 짚어봤다. 조회수가 높은 3가지 주제에 대해 김기석(청파교회) 김병삼(만나교회) 목사, 김학철(연세대) 교수가 답했다.

“하나님, 저 인간은 정말 보기 싫거든요.”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은 절망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 현실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게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희망을 낳고 희망이 있으면 우리가 사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희망 없이도 우리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에게 더 큰 희망을 주고 사랑을 줍니다. 어린아이는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미숙합니다.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미성숙함을 통해, 오히려 발전할 점을 기대하면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아이 뿐만 아닙니다. 바로 앞에 있는 누구도 마찬가지죠. ‘저게 정말 인간이야?’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직장 동료, 선배, 후배, 집안에 있는 골칫덩어리까지도요. 믿음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다른 삶을 살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놓치지 않아 주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힘든 노력이지만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김학철 교수)

“믿는 사람이 용서하라는데, 그게 잘 안 돼요.”

“우리가 용서를 해야 하는 까닭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입니다. 더 이상 피해자로 머물지 않기 위해서라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어로 ‘용서하다’가 포기브(forgive)잖아요.

그저 음절을 나누어 생각해보면 ‘~위하여’라는 뜻인 ‘포(for)’와 ‘주다’라는 의미인 ‘기브(give)’가 합쳐진 겁니다. 즉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그에게 선물을 주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용서가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선물은 잊어버리는 것(forget)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줬던 그 사람이 더 이상 내 삶을 좌지우지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 또한 용서가 우리에게 주는 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던 까닭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생의 가능성을 한껏 살아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은, 우리 삶을 하나님 앞에서 향유하게끔 하는 그분의 선물인 셈이죠.“(김기석 목사)

“8세 딸이 중도 장애를 얻었는데, 너무 힘들어요.”

“우리 삶에 제일 어려운 부분 중에 하나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죠.
그렇기에 ‘내가 원하지 않은 일들을 어떻게 내 삶에서 해석해 내는지’가 중요해요.
나는 수십 년 동안 장애를 가진 딸의 아빠로 살아왔어요.
우리 딸이 그렇게 힘들어했던 그 시간들에 대해 ‘하나님, 이건 무엇인가요?’ 여쭤봤지만 아직까지 답이 없어요.

하지만 그 과정 중에 하나님이 나를 바꾸셨어요.
나는 그전까지 예수 믿으면 잘 돼야 되고, 노력하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우리 딸을 통해서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건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약함이 강함이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이게 ‘믿음의 역설’ 같아요. (김병삼 목사)

미용사인데 ‘갑질’ 손님들 때문에 마음이 힘들어요

“내 경우를 얘기하자면, 나는 나의 삶의 원칙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많이 양보해요.
그러나 그 사람이 내 신앙의 어떤 본질적인 것들, 또 내가 인생에 세워두고 있는 내 삶의 어떤 진면목, 이런 것들을 포기하도록 만든다고 한다면 난 거기에 노(No)라고 단호하게 얘기하는데 그 기준은 누군가가 세워줄 순 없어요.

본인이 세워야 하는데, 그 속에서 나의 자존감이 무너질 상황이라든지, 내가 갖고 있는 신앙의 뿌리를 흔드는 일을 양보한다면 내가 무너질 수밖에 없거든요. (이를테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고통받는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인데, 어느 부자가 내게 ‘당신의 입장을 철회해라’ ‘왜 하나님의 우선적 관심이 가난한 사람에게 있다고 얘기하느냐’ 이러면 ‘난 그건 양보 안 된다’ (라고 답한다는) 얘기인 거죠.

그런가 하면 뒷돈을 넣어주면서 ‘나를 위해 좀 증언을 해달라’ 하는 청탁을 받을 때 그건 ‘노’라고 얘기를 해야 한다는 얘기죠. 양보할 수 있는 것이란 기꺼이 양보하더라도 내 자존감에 상처 입히지 않는 것들이죠.”(김기석 목사)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7195796&code=61221111&sid1=c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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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2:28-34

우리가 날마다 숨쉬고 활동하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우리들이 알 수 없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

매일 자다 깨면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것 같이 그렇게 급변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방향 없는 변화

그 앞에 우리들은 속수무책일 때가 많습니다.

셋째는 변화의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

많은 미래 학자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하고 미래를 전망합니다만 그대로 되지 않습니다.
믿었던 과학자의 생명연구가 이기적인 명예욕 때문에 물거품이 되는가하면,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생각지 않았던 배신을 느끼고 돌아서서 울어야 하는 예기치 않은 인간사들이 마치 럭비공이 뛰는 것처럼 어느 방향으로 뛸는지 알 수 없고, 어느 방향으로 변화될는지 모르는 그런 세상,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을까요?
자세히 살피면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절대로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여러분 노래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옛날에는 노래를<소리>라고 했습니다. 혹은<가락>이라고 했습니다.
옛날 우리 어르신들은<소리>라고만 하면 그 안에 창(唱)도 있고, 판소리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엔 트로트, 재즈, 락앤롤, 트위스트, 랩 그리고 발라드, 테크노, 힙합, 이게 정말 노래인가 싶을 정도의 도무지 이해가 잘 안가는 그런 장르의 음악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어르신들께 죄송하지만 가끔씩은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만 그러나 흘깃 흘깃 들어보면 한 가지는 분명히 귀에 들어오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모든 노래를 통 털어 보면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떠난 노래가 없습니다.
전부가 사랑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사랑, 기다리는 사랑, 갈구하는 사랑, 사랑이 주제가 됩니다.
그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은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향방 없이 변하고, 빨리 변한다할지라도 이 사랑 만큼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행복의 원천이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뉴욕 데일리 뉴스지에 예방의학 전문가인 피터 한센(Peter Hansen)박사가 이런 연구를 보도한바가 있습니다.

현대인의 건강을 위하여 우리가 흔히 말하는 건강식품, 규칙적인 운동, 담배, 술, 과로, 과식, 수면 부족 등 해로운 습관을 버리는 것을 50점으로 보고 남은 50점의 건강 관리법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창조적인 힘이 있어 신체의 저항력이 강해지고 병균과 싸우는 자연의 힘이 배양된다고 합니다.
사랑의 힘은 때때로 상상을 뛰어넘기도 하고 가끔은 상식을 뛰어넘기도 합니다.

하버드대학교 심리학 교수팀이 실험을 하였습니다.
인도의 빈민가에서 사랑의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테레사 수녀가 가난한 사람들을 병원에서 도와주는 모습을 찍은 기록 영화를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그 학생들의 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는 저항력을 검사하고, 일주일 후 같은 학생들에게 나치 독일이 유태인을 학살하는 잔인한 기록 영화를 보여주고 다시 저항력을 조사했답니다.
그랬더니 테레사 수녀의 영화를 본 뒤에 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는 저항력의 수치가 훨씬 높게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적 건강 나아가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도 하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왜 이리 시끄럽습니까?

첫째는 세상의 모든 문제는 사랑의 문제

먼저는 사랑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아예 사랑할 마음조차 없습니다.

둘째는 사랑이 있긴 있는데 병들어서 문제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쌍방이 주고 받아야 올바른 사랑입니다.
병든사랑은 일방적인 통로만 있습니다.
양방 통행이 필요합니다.

셋째는 거짓 사랑이 문제

사랑에 속았습니다.
거짓된 사랑이 우리 마음을 실망하게 합니다.
저마다 사랑을 외치지만 그게 사랑이 아닙니다.
이렇게 때로는 스스로 속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무지가 문제입니다.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못합니다.

넷째는 사랑이 통하지 않는 문제

 분명히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느끼질 못하고 그래서 사랑을 주지도 못하는 사랑의 의사소통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단절됩니다.
결국 이것은 불신의 문제입니다.
분명히 그는 사랑하고 있고 나는 사랑 받고 있으면서 내가 그 사랑을 믿지 않으면 사랑을 모르게 되고, 사랑을 모르면 감격이 없고, 감격 없는 사랑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에는 세 단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관심의 단계

관심도 대단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쥐를 키우는데 있어서 우유병만 빨려서 키운 쥐는 평균 600일을 살고, 그릇에 우유를 부어놓고 사람이 손으로 우유를 직접 먹이며 사랑의 손으로 쓰다듬어 주면서 키운 쥐는 훨씬 더 오래 사는데 평균 950일을 살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할 대상에 대해 거저 관심만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아름다운 사랑이 되기도 합니다.

둘째는 헌신의 단계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시간을 바쳐 사랑합니다.
그를 위해서 선물을 준비하고 그를 위해서 시간을 구별하여 둡니다.

셋째는 희생의 단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자세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른 응답이 아니라 오직 그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내가 됩니다.
이 사랑에 이르면 무슨 일이든지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랑이 됩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강한 사랑이 됩니다.

어느 날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을 아주 싫어하던 한 부인이 처칠에게 이렇게 거친 말을 했습니다.

“윈스턴, 만일 당신이 나의 남편이었다면 나는 당신의 차 속에 양잿물을 넣었을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윈스턴이 얼마나 멋있게 받아 넘겼던지 참 감동적입니다.
“부인, 만일 당신이 나의 아내였다면, 나는 그 양잿물을 마셨을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내가 희생하며 그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사랑은 이런 힘을 가진 능력입니다.

이처럼 사랑의 단계에 따라서 결과도 달라집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 사랑은 어느 단계까지 와 있습니까?

직도 그저 막연한 관심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헌신의 단계, 희생의 단계에까지 이르러 있는 수준 높은 사랑을 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받은 우리들이 마땅히 드려야 할 사랑은 어떤 사랑이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맘에도 사랑이 없고 행동에도 사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가장 강한 사랑의 모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직 자기 사랑입니다(自己愛).
그러나 자기 사랑이 먼저가 아닙니다.
성경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앨버트 슈바이처는 인간에게는 행복을 위한 세 가지 조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할 일(Something to Do)
둘째는 바라는 것(Something to Hope)
셋째는 사랑할 대상(Something to Love)

분명한 사랑의 대상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가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도 큰 불행이라고 말합니다만 그 보다 더 큰 불행은 내가 사랑할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곧 내 사랑을 받아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나를 절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행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그 사랑의 첫 번째 대상이 하나님임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 중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로 오늘 성경 말씀이 이 사랑의 시작을 말합니다.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는 "인간은 알고 있는 것에 의하여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것을 따라가게 되고, 또한 사랑하는 것에 모든 것을 바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그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의 욕심과 자기탐욕에 빠집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 때문에 죄를 짓게 되고, 명예와 권세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위해서라면 불법과 비리에라도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사랑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출발이어야 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서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입니다.
교회는 다닌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짓 신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기록한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사랑에 대한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얼마만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해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내 사랑을 확인하시고 출발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첫 걸음을 어떻게 내 딛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매사를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더군다나 신앙의 출발을 어디로부터 출발하느냐가 한 해를 성공적으로 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가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의 결심으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교회를 봉사하고 이웃을 섬길 줄 아는 신앙의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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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같은 하나님의 사랑(에스더 6:1~3, 8:1~2)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보면 분명히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왜 이런 일이 생기도록 내버려두시나 분명히 이것은 하나님이 실수하셨거나 무관심하신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지나놓고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더 깊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 세밀하신 하나님의 사랑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은 세밀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대한 태도를 보아서 세 종류의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무신론자

우주만물 즉 해와 달과 수억 만 개의 별들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조물주 같은 하나님은 없다고, 하는 무신론자가 있습니다.

둘째는 부분적 믿음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존재하신다고 믿지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이 계실 뿐이라고 하는 약간의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셋째는 삼위일체 신앙

하나님은 위대하셔서 해와 달과 수억만 개의 별들을 창조하실 뿐 아니라 우리 각자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우리의 머리털 하나라도 다 세시는 무소불능하시고(omnipotent) 무소부지하시고(omniscient) 무소부재하신(omnipresent) 하나님이라 믿는 신앙입니다. 이 세밀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바다와 육지를 지으시고 해와 달과 수억 만 개의 별들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지요. 어떻게 빅뱅에 의해서 우연히 생긴 해와 달과 별들이 질서 있게 운행될 수 있습니까? 전에도 설명드렸지만 단 5분도 늦지 않고 24시간에 자전하고 365일에 공전하고 태양과 지구의 거리가 조금만 더 가까우면 인간과 생물은 다 죽을 것이고 조금만 더 멀면 우리는 다 얼어 죽고 맙니다. 또 골고루 햇빛을 비치게 하려고 지구가 23.5°가 기울어져서 회전하니까 우리가 살지 기울기가 10°만 달라도 한쪽은 타 죽고 한쪽은 얼어 죽습니다. 또 달의 인력으로 바다의 조수가 들어왔다 나갔다 하니까 생물이 살 수가 있지 만일 물이 조용히 가만있으면 물이 썩어서 생물이 살 수가 없고 인력이 너무 강하면 지구가 물로 다 덮여 버리고 말 것입니다. 지구가 돌면서도 바닷물이 쏟아지지도 않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시계도 설계하고 만든 분이 있는 것같이, 이 예배당을 설계하고 건축한 사람이 있듯이, 해와 달과 모든 별들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위대하신 하나님은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까지 주관하셔서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고 그 많은 머리칼 하나 떨어지는 것까지 다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9절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  
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또 30~31절에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못하실 것이 없으시고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시편 14편 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설명합니다.

시편 139편 1~4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7~10절에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앉고 일어서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이 다 알고 계심을 믿어야 참된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예수님은 돈은 많지만 갈급한 심령을 가지고 뽕나무에 올라가 기다리는 삭개오의 이름까지 아시고 찾아오신 분이며 남편을 여섯 번이나 갈아 살며 외롭고 왕따당한 수가성 여인이 물 길러 올 것을 아시는 세밀하고 자비로우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벼슬이 높고 막강한 권력과 돈을 많이 가진 권세자들이나 부자는 별로 없고 가난하고 병들고 죄에 깊이 빠진 사람들과 어린아이들이 가까이 늘 있었습니다. 세밀하신 주님이 그들의 요구와 필요를 아시고 돌보아주신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잘난 자식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불구자, 정박아 자식의 손톱과 발톱 하나에까지 세밀하게 관심을 가지고 돌보는 것과 같습니다. 세밀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실수 같은 하나님의 사랑

어떤 때 하나님은 꼭 실수하셨거나 깜빡 잘못하신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지만 지나고 보면 하나님의 세밀하신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고아와 같은 에스더를 잘 키워준 모르드개는 말씀에 순종하며 목숨을 걸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믿음의 용사입니다.
  당시 파사와 메데의 큰 나라를 통치하는 아하수에로 왕 밑에 둘째로 큰 권세와 능력을 가진 하만이란 교만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수레를 타고 거리를 지나갈 때에는 온 국민이 엎드려 절을 했는데 신앙이 독실한 모르드개만은 우상이나 사람 앞에는 머리 숙여 절하지 않는다는 굳은 믿음으로 고개를 뻣뻣이 든 채 절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안 하만이 모르드개가 유대인인 줄 알고 모르드개만 아니라 온 유대 백성을 하루아침에 다 몰살시키려는 계략을 가지고 왕의 조서에 어인까지 받아놓았습니다. 이 때에 온 유대 백성이 모르드개 한 놈 때문에 우리가 멸절당하게 되었다고 얼마나 원망하고 불평하고 통곡을 했겠습니까?

오늘날 남다른 믿음을 가지고 바르게 살려고 하면 온갖 핍밥과 비난과 훼방을 받고 원망도 듣는 법입니다. 에스더 4장 3절에 보면 “왕의 조명이 각 도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곡읍하며 부르짖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고 했으니 모르드개 한 놈 때문에 우리가 다 몰살당하게 되었다고, 얼마나 욕하고 원망하고 죽일 듯이 날뛰었겠습니까? 믿음으로 살고 말씀대로 살 때 이런 핍박과 원망을 들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전에 왕이 모살당할 뻔했을 그것을 발견하고 즉시 고발하여 왕이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에스더 2장 21~23절에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문 지킨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아하수에로 왕을 원한하여 모살하려 하거늘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고하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고한지라 사실하여 실정을 얻었으므로 두 사람을 나무에 달고 그 일을 왕의 앞에서 궁중 일기에 기록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큰 공을 세운 모르드개에게 아무런 상을 주지 않았으니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실수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큰 사랑의 섭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더 6장 1~2절에 “이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그 속에 기록하기를 문 지킨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 왕을 모살하려 하는 것을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 하였는지라”, 이어 3절에 “왕이 가로되 이 일을 인하여 무슨 존귀와 관작을 모르드개에게 베풀었느냐 시신이 대답하되 아무것도 베풀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세밀하신 섭리요, 공을 세웠으나 보상을 받지 못하고 지나간 것도 바로 유대 민족이 위기를 당했을 때 대 역전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세밀하신 계획과 사랑이었습니다.
 
에스더 6장 4절에 “왕이 가로되 누가 뜰에 있느냐 마침 하만이 자기가 세운 나무에 모르드개 달기를 왕께 구하고자 하여 왕궁 바깥 뜰에 이른지라”고 했습니다. 왕이 묻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뇨…”(6절)라고 하니까 하만이 왕후의 만찬에 초청도 받았던 터라 “나밖에 누가 또 있으랴?”라고 생각하고, 7절에 “…왕께서 사람을 존귀케 하려면 왕의 입으시는 왕복과 왕의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취하고 그 왕복과 말을 왕의 방백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붙여서…성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왕명이 내려졌는데 그것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가 50규빗 되는 장대에 매달아 죽이려던 모르드개였습니다. 왕의 말에 자기가 제안한 대로 모르드개를 태우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외쳤습니다. 그날 밤 잔치에 다시 초대 받았는데 에스더가 나와 내 민족을 도륙하고 진멸하려는 자가 바로 이 하만이라고 할 때 끌려 나가 모르드개를 죽이려던 장대에 자기가 달려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란 말이 있듯이 하나님은 이 때를 위하여 모르드개가 공을 세웠으나 포상도 못 받았고 왕이 밤에 잠도 오지 않았고 그 때문에 역사책을 읽다가 이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수같이 보였지만 다 하나님의 세밀하신 사랑의 섭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밀하신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해와 달과 수억 만 개의 별들을 지으시고 운행하실 뿐 아니라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까지 간섭하시고 60억 인구의 머리털도 다 알고 세시는 무소부지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고 실수하시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섭리임을 믿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팔려 간 것이나 억울하게 감옥살이 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안 계시거나 하나님이 실수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몽해주면서 나가거든 나를 변호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도 그 사람이 까맣게 잊은 것도 도무지 하나님이 안 계시거나 무관심하신 것 또는 실수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요셉이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국무총리가 되지 못했을 것이고 또 꿈 해몽 받은 사람이 나가서 잊지 않고 즉시 왕께 고하여 출감했더라면 애굽의 바로 왕의 꿈도 해몽하지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애굽의 국무총리도 못 되고 자기 민족과 애굽 백성을 구원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수처럼 보일지라도 세밀하신 하나님의 사랑임을 믿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며 신앙생활을 바로 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은 세밀하셔서 세밀한 부분까지 간섭하시고 때론 징계하시고 때로는 칭찬하시고 축복도 하십니다. 그러나 되는 대로 적당히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세밀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느끼고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대강대강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세밀한 사랑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3. 세밀하신 사랑을 받으려면

  ① 먼저 거듭 나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해야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목자장 되시는 주님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셨고,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죄가 하나도 없고 완전히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그 순간부터 되는 것입니다.

  ② 세밀한 음성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해와 달과 별들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으로만 믿지 말고 섬세하시고 세밀하셔서 우리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도 아시는 무소부지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세밀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또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한 걸음, 한 걸음, 말씀에 비추어서 행동해야 합니다. 작은 일에도 적당히 거짓말하고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고 깨끗한 양심을 지키며 생활해야 합니다.
  어느 교수님이 한국에서는 십일조도 안 하고 기도생활도 안 했는데 미국에 가서 어떻게 은혜를 받고 십일조생활을 철저히 했습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이 구만리 장천 멀리 계신 것 같았는데 십일조생활을 철저히 한 다음부터 하나님이 가까이 계셔서 피부로 느낄 정도로 체험적인 생활을 한다고 간증하더랍니다. 새벽기도 한 번만 빠져도 하나님이 징계하심을 느끼고 주일성수 한 번 안 해도 사랑의 채찍을 맞고 십일조 한 번 떼어먹어도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교통사고로 손해를 보는 체험을 간증하는 이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동전 두 닢을 관심 깊게 보시는 분입니다. 세밀하게 신앙생활해야 하나님의 세밀한 사랑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③ 기도해본 후에 결정하십시오
 
무슨 일이나 기도해본 후에 결정하고 행동해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성군 다윗은 전쟁할 때에도 “가리이까, 말리이까?”, 또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고 물어본 후에 전쟁에 나갔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해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신명기 4장 7절에 “하나님은 기도할 때마다 가까이 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기도생활을 안 하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실수같이 느껴지는 때가 있어도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고 넓은 사랑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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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사도행전 2:1-4)


길선주 목사님은 성령과 말씀과 기도에 사로잡혔던 분이었기 때문에 철저한 회개와 부흥운동을 일으키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진정한 부흥운동은 말씀 운동이고 성령 운동이고 기도 운동이고 회개운동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방지일 목사님은 "영의 지배를 받아야 내 주장, 내 주관, 내 주체가 없어진다"고 말씀했습니다.
"영의 지배를 받아야 죄를 회개하게 되고 예수를 증거하게 되고 바른 신앙인이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살길도 “영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 한국교회는 성령과 말씀과 기도와 회개에 사로잡히는 것보다는 음악과 프로그램 등 인간적인 수단 방법에 치중하고 있고 정서와 감정에 치우치고 있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한다는 경고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경고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하나님께서는 또한 자기의 백성들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의 신인 성령님을 자기의 백성들에게 보내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요엘2:18,2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하나님께서 세상과 자기 백성들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성령님을 보내주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저는 이렇게 쉽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성이 엄마 아빠가 지성이를 사랑해서 많은 것을 해 주었습니다. 영양분이 많은 음식도 먹여 주었고, 좋은 약도 먹여 주었고, 좋은 장난감도 사 주었고, 포근한 이불도 만들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성이 엄마 아빠가 지성에게 준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은 아빠의 간을 떼어주고 엄마의 눈물을 쏟아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다 만들어주셨지만, 우리들에게 주신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은 하나님 자신의 몸의 일부를 떼어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보내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피와 살을 떼어서 주셨다는 말씀이고, 성령님을 보내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신과 혼의 일부를 떼어서 주셨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성령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합니다. 아들과 성령님을 보내주신 이유와 목적 세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지성이 아빠와 엄마가 간을 떼어주고 눈물을 쏟아준 것은 지성이를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고 성령님을 보내신 것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에스겔 37장은 죄와 허물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마른 뼈들의 모습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뼈들이 살아난 것은 말씀과 생기 즉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37:2-10). 하나님께서 마른 뼈들을 살리신 두 가지 방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말씀이었고 다른 하나는 생기였습니다. 말씀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생기는 성령님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신 목적은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들과 성령은 우리들을 살리십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2:1,4,5).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갈수 없느니라”(요3:5).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3:6). 성령은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마른 뼈들 위에 말씀과 성령이 임했을 때 살아 일어서서 큰 군대를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마가의 다락 방에서 기도하던 120명 위에 성령이 바람과 같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행2:2). 여기 바람은 생기를 가리키는데 생기는 살리는 영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첫째 이유와 목적은 죽었던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입니다.

둘째는 우리들을 만남과 교제의 존재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지성이 아빠와 엄마가 간을 떼어주고 눈물을 쏟아 주면서 지성이를 살린 목적은 지성이가 엄마 아빠와 말을 주고 받고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혜성이와 말을 주고 받고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말을 주고 받고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커 가면서 친구들과 함께 놀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교제하면서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은 만남과 교제의 존재입니다. 사람은 만남과 교제를 통해서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죄는 생명을 앗아가고 죄는 만남과 교제도 앗아 갑니다. 그래서 사람이 불행해집니다. 인사도 하지 않고 만나지도 않고 교제도 하지 않는 사람은 영이 죽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중요한 일은 우리 죄인들로 하여금 만남과 교제의 삶을 살게 하시는 일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고 이웃과 교제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게 되고 이웃과 친밀하게 교제하게 됩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했을 때 저희가 모두 방언을 했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여기 방언은 하나님과 친밀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하고 사람들과 친밀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성령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바지’ 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말하게 하고, 이웃들을 형제 자매라고 부르면서 이웃들과 친밀하게 말을 하게 합니다. 말은 만남과 교제의 가장 중요한 수단입니다.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함께 모여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둘째 이유와 목적은 말도 인사도 할 줄 몰랐던 우리들을 말도 하고 인사도 하고 교제도 하는 만남과 교제의 존재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입니다.

셋째는 우리들을 주의 일을 하는 봉사자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지성이 아빠와 엄마가 간을 떼어주고 눈물을 쏟아 주면서 지성이를 살린 또 하나의 목적은 지성이가 엄마 아빠와 말과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뿐만 아니라 커서 좋은 일을 하는 훌륭한 일꾼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은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 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주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봉사하게 하십니다. "성령으로 봉사하며"(빌3:3) 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오직 성련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은사들을 주시는데 그 모든 은사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주님의 일을 하게 하는 은사들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주시나니”(고전12:8-10).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12:6-8).
성령을 받은 자는 열심히 주의 일을 합니다.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하다가” 이렇게 찬송을 부르면서 열심히 주의 일을 합니다. 특히 교제와 기도와 봉사와 전도의 일을 열심히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은 열심히 교제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전도하면서 주의 일을 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47).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들은 자기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구제하는 일에 힘을 썼고 전도하는 일에 힘을 썼고 선교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성령님은 이기적이고 무능하고 게으른 우리들로 하여금 열심히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게 하고 그래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물질과 시간에 인색한 사람은 주님과 거리가 먼 사람이고 성령님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우리 조선의 초대교회 신앙의 선배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자기들의 몸은 돌보지 않고 자기들의 몸이 부서지고 닳도록 주님의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이 그랬고 최권능 목사님이 그랬고 윤함애 사모님이 그랬습니다. 윤함애 사모는 기도의 여인이었고 사랑과 봉사의 여인이었습니다. 최봉석 목사는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셋째 이유와 목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기적이고 무능하고 게으른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일꾼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어주셨습니다. 첫째는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둘째는 우리들을 만남과 교제의 사람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셋째는 우리들을 봉사하며 사는 주님의 일꾼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이었습니다. 자신의 몸의 일부를 떼어주시면서 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진실하고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성령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모하고 예수님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을 사모하고 성령님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이 충만하고, 교제가 충만하고, 봉사가 충만한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곱 집사님들이 성령이 충만했던 것처럼 우리 교회 집사님들과 권사님들이 모두 성령님으로 충만하기 바랍니다. 사도들이 성령 충만했던 것처럼 우리 교회 교역자들과 장로님들이 모두 성령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기 전에 영화 이야기를 간단히 하겠습니다. 최근에 깐느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유명해진 영화 '밀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사실 저는 여 배우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 영화를 본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어제 아침 우연히 CBS 인터넷 뉴스에 실린 '밀양'이라는 영화에 대한 어느 사람의 해설을 읽고 그 해설에 공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설의 일부를 여러분들에게 그대로 소개합니다.

"영화의 내용은 단순하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유괴범에게 아들까지 살해당한 여주인공 '신애'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 힘으로 고통을 이겨가던 중 어느 날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겠다며 범인을 면회 가겠다고 나선다. 신애는 자신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었고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범인으로부터 뜻밖의 말을 듣는다. 범인은 자신은 감옥에 와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 하나님께 회개하고 이미 용서를 받았으며 지금은 너무도 마음이 평안하다고 말한다. 순간 신애의 얼굴에 당혹한 기색이 역력해진다. ‘그래요?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셨어요?’ 범인과의 면회를 마치고 나온 신애는 주차장에서 기절한다. 결국 신애는 그와 같은 살인범의 말에 충격을 받고 기독교의 신앙을 버린다.” 영화에 대한 분석적 해설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습니다.

“신애와 범인이 구원과 용서를 말하지만 정작 그들의 삶이 비극인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구원과 용서가 허상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구원과 용서가 허상인 까닭은 그것이 허영과 탐욕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애의 비극의 원천은 허영이다. 아들의 죽음은 신애 자신의 허영이 부른 비극인 셈이다. 신애의 허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신애는 상처받은 자들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한 후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며 믿음생활을 한다. 그녀는 예전에는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더 이상 고통 가운데 통곡하지 않으며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모두가 그녀의 믿음에 감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그녀는 진정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알게 되었던 것일까? 그녀는 진정 그 믿음의 힘으로 범인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세계에 붙잡혀 있을 뿐 진정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지 못했다. 신애는 용서를 보여주려 했다. 범인에게 그리고 교인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범인을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허영이란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다. 돈이 없으면서도 돈 많은 것처럼 보이고자 사지도 못할 땅을 보러 다녔던 것처럼 신애의 용서에는 영적인 허영이 감추어져 있다. 자신이 범인을 용서하는 모습을 굳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영적 허영의 덫이 놓여있다."
저는 이와 같은 영화에 대한 해설을 읽으면서 이창동 감독이나 상당수의 불신자들의 눈에 비친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자들의 모습이 ‘허상’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심각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창동 감독이나 상당수의 불신자들이 용서와 구원을 전하는 기독교 복음의 깊은 내용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창동 감독이나 상당수의 불신자들의 눈에 비친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자들의 모습이 허상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심각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얼마 전에 옥한흠 목사는 오늘의 한국교회는 ‘허수’ ‘허세’ ‘허상’ 등 `3허(虛)'에 사로잡혀 있다고 분석한 일도 있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 안에는 ‘허영’과 ‘허상’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이와 같은 ‘허영’과 ‘허상’이 적지 않게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몸의 일부를 떼어서 우리들에게 주신 중요한 이유는 우리들에게서 이와 같은 모든 종교적인 ‘허영’과 ‘허상’을 제거하시고 우리들을 하나님 닮은 진실하고 겸손하고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들어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날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 먹어야 하고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마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 충만 성령님 충만 그리고 하나님 충만한 삶, 하나님 닮은 진실하고 겸손하고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의 복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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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하나님의 사랑(로마서 5:1~8)


사도 바울은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을 통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여기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지은 죄를 깨끗이 씻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새로운 관계가 바로 샬롬, 화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탕자가 아니라 아들로 맞이합니다. 아들의 과거는 전혀 묻지 않습니다. 다만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기쁘게 맞이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2~24) 아버지의 말에는 탕자라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예수를 구주로 믿고 돌아온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인정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으면 또한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나를 바로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나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계속 나 자신을 괴롭히며 힘들게 살아갑니다. 그리고 마치 그것이 믿음이 좋은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는 무엇보다 자신과의 화평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화평을 누리자!”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화평을 즐기자는 말입니다. 화평이란 그냥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즐겨야 합니다. 돈도 갖고 있다고 해서 다 내 것입니까? 내가 써야 내 것입니다. 멋진 집을 구입해서 평생 남에게 빌려 줬다면 그 집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집에서 하루라도 살면서 즐겨야 비로소 내 집입니다. 즐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평은 즐겨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화평을 잃어버린 후에 비로소 그 화평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다 깨진 후에 뒤늦게 후회하지 않습니까? 때문에 먼저 화평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졌는가 하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화평이 주어졌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이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로 막힌 담을 깨뜨리셨습니다. 얼마나 비싼 댓가를 치렀습니까?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화평을 즐길 수 있습니다. 너무 쉽게 주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화평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는 것 같습니다. 모르면 즐거움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즐거움은 깨닫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치를 깨닫는 순간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화평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초로 모든 것을 볼 수 있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불화한 상태에서 보는 것과 화평한 상태에서 보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불화한 상태에서 이웃을 보면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화평한 상태에서는 모든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책망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모든 것을 화평한 상태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면서 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먼 미래까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래의 약속을 바라보며 즐거워한다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영원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어떻게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말씀 속에 그 비밀이 있습니다. “앎이로다!” 즉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알기 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어떤 환난이 있어도 믿음의 사람은 그 의미를 깨달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환난으로 인한 고통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깨닫지 못합니다. 매를 맞을 때 나를 사랑해서 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고맙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를 미워해서 때린다고 생각하면 상황은 정반대가 됩니다. 같은 매라도 하나님과 화평을 즐기는 상태에서 맞으면 그 매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 것 같으면 더 이상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우리가 환난 중에 고통을 느끼는 것은 꼭 저주받은 것 같고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것이라고 믿으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과수원을 경영하는 농부는 나무가 자라기 시작하는 봄에 그 가지를 잘라 줍니다. 잘라 주어야 제대로 자랍니다. 가지를 자를 때 그 나무가 미워서 자릅니까? 우리도 가지를 잘라내는 고통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아픔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만 있으면 그 아픔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과 믿어지는 것의 차이를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믿는 것이란 내가 믿으려고 애쓰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반면에 믿어지는 것은 성령이 도우셔서 저절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하나가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그는 믿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자기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비참하게 죽어 가고 있는 한 청년을 그는 그리스도로 믿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았으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가는 자를 어떻게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때문에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어지는 것도 성령이 역사하셔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과 사랑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오히려 사랑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사랑하려고 할 때 무엇을 먼저 생각합니까? 상대방의 반응을 생각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상대방이 기대한 것과 다른 반응을 보이면 오히려 그 사랑이 변하여 미움이 되지 않습니까? 힘쓰고 애쓰는 것으로는 참 사랑을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형제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백 구십 번의 용서란 우리의 의지만 가지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십니다.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신비한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용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의 선물로 우리 마음에 부어지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자유롭고 또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훗날 사랑의 사도라고 일컬어진 요한에게 주목하게 됩니다. 그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가려고 하실 때 그 마을 사람들이 길을 막고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요한이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 사랑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랑이 부어지자 그는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진 마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와 더불어 싸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우리 마음대로 됩니까? 율법이 없어서 우리가 죄를 짓습니까? 법으로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죄의 유혹은 더 달콤하게 다가오지 않습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비로소 죄의 종 노릇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죄를 이기게 되는 것은 모두 다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부어져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는데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나 자신과 더불어 먼저 화평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놀라운 변화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망 중에 우리가 기뻐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가운데 임하신 충만한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의 선물로 우리의 마음에 부어지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자유롭고 또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충만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새롭게 변화된 모습으로 죄와 더불어 싸워 이길 뿐 아니라 십자가 위에 나타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땅끝까지 전하고 증거하는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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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사무엘하 12:15-25)


요새 암에 걸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암 전문의 원종수 권사님의 말에 의하면 암이 자라 자각 증상이 생길 때까지는 7년이 걸리고, 마지막 1년에 암이 증상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암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분명한 원인은 담배라고 합니다. 담배 피면 암 걸릴 확률이 25배가 되고, 거기에 술을 하면 4배가 늘어나서 술 담배 하면 보통 사람보다 암에 걸릴 확률이 100배가 된다고 합니다.

담배 다음으로 지적되는 암의 원인으로 공해, 합성세제, 농약 등이 있지만 그런 경우에는 2-3배가 늘어난다고 합니다. 그처럼 보통 사람에게 생기는 하루 6-7개의 암세포와 술 담배를 하는 사람에게 생기는 하루 600-700개의 암세포는 사람 몸에 있는 경찰세포(surveillance cell)가 잡아먹는데, 사람에게 마음의 상처와 스트레스가 있으면 그 마음의 상처와 스트레스로 인해 경찰세포의 활동이 줄고 결국 암에 걸리게 된다고 합니다.

그처럼 사람이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관리하지 못하면 질병이 생길 확률은 현저하게 높아집니다. 죄는 질병을 초래하고, 거의 모든 불행도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죄가 있으면 마음의 평안도 없고, 능력 있는 삶도 살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거룩한 만큼 능력이 나타납니다. 어떤 분은 산에 가야 능력이 생기는 줄 아는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사람은 거룩한 만큼 능력이 생깁니다. 우리의 기도도 거룩한 만큼 능력 있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거룩한 삶의 능력을 잘 체험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오해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거룩한 사람을 유머도 없고, 잘 웃지도 않고, 웃어도 절대 이빨을 보이지 않고, 목소리도 항상 낮게 깔고 말하는 사람인 줄 압니다. 그런 분들은 “주여!”라는 말이 입에 배였습니다. 길을 가다 발을 삐끗해도 “주여!”라고 하고, 밥 먹다 돌을 씹어도 “주여!”라고 합니다. 전화를 하면 “여보세요!”라고 하지 않고 목소리를 낮게 깔고 “할렐루야!”라고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거룩한 사람을 존경하기보다는 꽉 막힌 지긋지긋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자라면서 “나는 커서 절대 거룩한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라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함은 겉모양이나 옷차림과는 상관없습니다. 어떤 분은 분명히 거룩한 분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참 유머도 많고 얼마나 잘 웃는지 모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함은 내면이 아름다운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아름답게 내면을 가꾸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삶도 아름답게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

오늘 본문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생긴 불륜의 아들이 병에 걸려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고통을 다윗이 잘 극복해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주셨고, 본문 25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이름을 여디디야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여디디야란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은 어떤 성도를 사랑하실까요?

1. 진실하게 회개하는 성도

본문을 보면 죄의 대가가 아주 비싸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됩니다. 다윗이 자신의 불륜에 대해 회개했을 때 13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회개를 받아주셨지만 불륜의 자식은 하나님께서 치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처럼 죄는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면 언제나 사함 받을 수 있지만 죄의 열매는 반드시 주어지게 됩니다. 그처럼 죄의 대가는 비싸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로 살면서도 죄를 힘써 멀리해야 합니다.

어느 날, 미국의 한 주정뱅이 도박꾼이 근처에 살던 조나단 에드워드란 유명한 목사님에게 와서 간밤에 꾼 꿈을 말해주었습니다. 그 꿈에서 천사가 나타나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1년 후에 너를 불러가겠다고 했다면서 그날부터 그는 술과 도박을 끊고, 교회를 잘 다녔습니다. 그러나 몇 개월 후에 다시 술과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그의 꿈을 말하며 권면했지만 그는 더욱 교회에서 멀어져 갔고 마침내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그 꿈은 개꿈이었어요. 그런 꿈에 왜 연연합니까?”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술에 만취되어 계단을 내려오다 실족해 목이 꺾여 죽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목사님이 일기책을 찾아보니까 그날이 꼭 1년 전 그가 자신을 찾아온 날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다 그렇게 벌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죄는 반드시 뼈아픈 대가를 지불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어떻게 죄를 멀리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완벽하게 살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방법은 없고, 중요한 것은 진실하게 회개하는 것입니다. 죄의 대가만 비싼 것이 아니라 진실한 회개의 대가도 비싸고, 순종과 헌신의 대가도 비쌉니다. 우리가 진실하게 회개하고 힘써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면 그만큼 복된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느 한 기도제목이라도 우리는 잊을지라도 하나님을 기억하시고 반드시 가장 적절하게 최선의 모습으로 응답해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교회에 나온 발걸음 하나라도 기억하시고, 교회에 떨어진 종이 한 장 주운 것과 이웃에게 냉수 한 그릇 주신 것도 하나님은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한 대로 갚아주시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2. 최선을 다하는 성도

다윗은 자신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아들이 죽어 갈 때에 어떻게 합니까?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이 구절에서 “안에 들어가서”라는 말은 골방 안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는 골방 안으로 들어가서 떳떳하게 머리를 들어 기도하지 못하고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애절하게 기도했습니다.

너무 애절하게 기도하니까 왕의 건강을 염려해 원로 신하들이 다윗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윗은 듣지도 않고 먹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예배도 최선을 다하고, 기도도 최선을 다하고, 예배 후에 세상에 나가 사는 것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1960년대 어느 날, 한 신학생이 섬기는 시골 교회에서 한분이 소천했습니다. 그 장례 일로 학기말 시험공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예배를 마치고 야간열차를 타고 아침에 신학교에 도착했습니다. 첫 과목시험은 ‘성령론’이었는데, 시험 시간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그런데 책을 여니까 너무 피곤해서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절망한 나머지 전도사님은 어차피 책은 눈에 안 들어오니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매달리자고 생각하고 기도실로 갔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동안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저의 처지를 잘 아시는 하나님! 저는 매주 먼 길을 다니며 지금 목회와 공부를 동시에 하는데 왜 하필이면 시험 전에 김 집사님을 불러가셨습니까? 이제 시험이 닥쳤습니다. 성령님! 성령론 시험 시간에 임하셔서 시험 들지 않게 하소서!”

그처럼 간절히 기도한 후 교실에 들어가 큰 기대를 하고 시험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문제였습니다. 하나님도 무심하셨습니다. 성령론 시험시간에 성령님은 어디론가 사라지셨습니다. 결국 그 전도사님은 시험지에 자기상황을 간략하게 쓰고 마지막에 이렇게 썼습니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저는 이 문제를 몰라도 성령님은 잘 아실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담당교수가 그 답안지를 보고 이렇게 채점했습니다. “성령님은 100점! 너는 0점!” 결국 그 신학생은 그 과목을 재수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가끔 보면 믿음생활은 100점인 것 같은데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은 0점으로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성도

그처럼 다윗이 간절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아이는 죽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본문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 아이가 죽자 다윗은 곧 일어나 단장을 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린 후에 궁으로 돌아와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때 신하들이 왕에게 물었습니다. “왕이여! 왜 아이가 살았을 때는 금식하시고 우시더니 왜 아이가 죽으니까 일어나 잡수십니까?” 그때 다윗은 말합니다. 본문 22-23절 말씀을 보십시오.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다윗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렇게 하셨는데 너무 슬퍼하면서 죽은 아이에 대해 지나치게 미련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그 일에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간절한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가 있지만 사실 응답이 없는 것도 크게 보면 결국 응답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시고, 나중에 더 귀한 자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기도가 주는 한 가지 축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기도하면 기도하는 사람 자체가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기도를 통해서 자식의 죽음조차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마음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환경은 바뀌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내 마음은 바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시련도 이길 수 있는 엄청난 능력과 여유가 생길 것입니다. 기도는 엑스테리어(exterior)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테리어(interior)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 내적인 변화는 기도가 주는 가장 큰 축복의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게 인테리어를 변화시키면 신기하게 엑스테리어도 변화되는 큰 축복이 따라옵니다.

우리는 이 기도의 패턴을 잊지 말고 내가 원하는 대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조급한 마음으로 기도에 대해 회의를 느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물리적으로 응답되지는 않아도, 반드시 하나님 앞에 열납되어 가장 선한 모습으로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켜 은혜의 단비가 되어 우리들에게 내릴 것입니다.

4. 새롭게 시작하는 성도

다윗은 아이가 죽기 전에는 아이를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아이가 죽자 금방 그 불행을 잃어버리고 20절 말씀처럼 몸을 단장하고 하나님께 경배한 후에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다윗의 가장 매력적인 면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그 모습을 하나님이 기쁘게 보시고 하나님은 솔로몬이란 귀한 자녀를 새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불행을 쉽게 잊을 줄 아는 거룩한 건망증을 가져야 합니다. 거룩한 건망증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과거의 불행을 잘 잊을 때 새로운 은혜를 더해주실 것입니다. 잘했든 잘못했든 과거의 일은 하나님께서 이미 결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결재하신 지나간 일에 너무 매달려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대개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사람에게 제일 나쁜 성품 중의 하나가 편견인데, 왜 편견이 생깁니까? 과거에 대한 나쁜 기억을 잊어버리지 못하면서 생기는 초기 정신병적 질환이 바로 편견입니다. 편견은 세상을 자기가 아는 잣대로만 봅니다. 그러다 보면 전혀 현실과 동떨어진 판단을 할 수 있고, 일부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기 때문에 성공적인 삶을 살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도 그런 야박한 사람에게 결코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군대 생활을 전남 광주에서 전경으로 했습니다. 어느 날, 훈련소 생활을 끝내고 자대가 있는 광주에 도착했을 때, 그분은 기분이 착잡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서울에서만 자란 분이었는데,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도가 난동을 부린 일로 알고 광주 사람은 다 사기꾼이고 귀신인 줄 알고 군대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3년 후, 그분이 군대를 마치고 대학에 복학해서 MT(멤버 단합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경상도 영주 근처에서 텐트를 치고 잤는데 깨어보니 텐트는 없어지고 돗자리에서만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한 동안 경상도 사람은 다 깡패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광주 사람이나 경상도 사람이나 대부분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나쁜 기억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일을 잘 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향해 지금 새롭게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새로운 결단과 실천을 보시고 더 좋은 일을 결재해주시고, 우리의 새로운 결단은 곧 주님의 결단으로 바꾸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사야 43장 19절 말씀처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 지금까지 잘못한 일과 부끄러운 일과 실패한 일도 많았지만 그 일에 매여 낙심하고 좌절하고 우리의 선한 계획과 열심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용납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오늘도 예배 시간에 다시 새로운 옷을 입고 힘차게 출발하면 우리는 반드시 변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고, 우리 앞에는 지금보다 더욱 복된 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 >

다윗이 과거의 불행을 잘 극복하자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을 주셨습니까? 본문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믿음을 보시고 더 좋은 아이를 주셨고, 다윗은 그 아이의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지었습니다. 솔로몬은 ‘평강의 사람’이란 뜻으로 ‘샬롬’이란 말과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이 구절에서 ‘여디디야’란 정확하게 말하면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란 뜻입니다. 다윗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징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자 하나님께서 죽은 아이보다 더 사랑스런 아이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6.25 때 평양 창동교회 전도사님 한 분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피난 도중에 다리가 불편해 중화(中和)라는 지역에서 더 피난가지 못하고 빈집에 혼자 머물렀습니다. 마음속에 원망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하필 이런 때에 다리를 못 쓰게 만드시나요?” 그분은 공산 치하에서 열심히 하나님 일을 한 보상이 이건가 하는 원망이 생겼습니다.

다음날, 다행이 다리가 조금 나아져 다시 급히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조금 가자 길옆에 수십 구의 시체가 있었는데, 전날 같이 피난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피난 가다 조그만 군수창고에서 인민군복을 발견하고 추우니까 껴입었는데 미군이 인민군인 줄 알고 기총소사를 해서 거의 대부분이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때 전도사님은 하나님을 잠시 원망했던 것을 회개하고, 그때의 은혜를 기억하며 열심히 교회를 섬겨 큰 교회를 이뤘는데, 그 교회가 바로 노량진 교회라고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고난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사람의 실패는 하나님의 실패가 아닙니다. 진짜 실패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놀라운 기억력을 가진 것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저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사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고양이보다 개를 더 선호합니까? 가장 큰 이유는 개가 고양이보다 주인을 더 따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고양이와 개는 기억시스템이 아주 다르다고 합니다. 개는 주인이 열 가지를 잘못해도 한 가지만 잘해주면 그 한 가지 잘해준 것을 기억해서 주인을 졸졸 따른다고 합니다. 반면에 고양이는 열 번 잘해줘도 한번 잘못해 주면 잘해준 것은 싹 잊어버리고 잘못한 것 때문에 토라져서 주인과 거리를 둔다고 합니다.

우리는 고양이형 성도가 되지 말고 개형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하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두 가지 고난을 가지고 만 가지 은혜를 잊어버리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절망하는 것은 고양이 같은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죽도록 잊지 못하는 개 같은 충성스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은혜를 잊어버리면 추하게 되고, 결말도 비참하게 됩니다. 반면에 은혜를 잊지 않으면 반드시 은혜를 더 입습니다. 가정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 대해서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를 잊어버리면 그 사람은 인격적으로 아주 문제가 많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수고하는 남편과 아내의 뒷모습을 보고 눈물이 나오지 않으면 그런 눈깔은 한참 문제가 있는 눈깔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그 말을 듣고 아내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눈물이 나오지 않아서 “내 눈깔이 문제가 있나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어느 날은 아내의 뒷모습을 보고 눈에서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가슴에서 눈물이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깊이 생각하면 배우자는 너무 고마운 존재입니다. 저도 가끔 “아내가 없으면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도 그런데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령님이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삽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없고, 성령님의 함께 하심이 없었으면 사는 것이 참으로 외롭고 힘들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범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감사는 축복받는 길이고, 불평은 망하는 길입니다.

원종수 권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의사가 되면서 두 가지 소원을 가졌습니다. 하나는 가난한 어머니의 속옷을 사드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어머니와 돼지고기 같이 먹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서울대 병원 인턴으로 첫 월급을 받고 어머니에게 달려가 말했습니다. “어머님! 첫 월급 받았습니다. 이제 돼지불고기 먹으러 가고 어머니 속옷을 사러 백화점에도 같이 가요.”

그때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종수야 기왕 믿을 바에야 잘 믿자.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으니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자! 이 첫 월급은 첫 열매잖아. 이 첫 열매는 하나님께 드리자!” 결국 그 첫 열매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 일이 있고 약 보름 후에 학장님이 불렀습니다. 의사고시 전국대회에서 1등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금을 주는데 하나님 앞에 바쳤던 월급의 2배를 주셨습니다. 그는 감탄했습니다. “하나님! 정말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군요. 첫 열매를 다 드렸더니 1등도 하게 해주시고 상금도 주셨네요.” 그는 그 상금을 가지고 어머니에게 달려가 말했습니다. “어머니! 제가 전국 의사고시에서 1등 했어요. 이제 저와 함께 돼지불고기 실컷 먹어요.”

그때 어머니가 봉투를 받아들고 말했습니다. “종수야! 너 상금 타 본적 있니?” “처음인데요.” “그래? 첫 상금이면 첫 열매구나! 이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자. 그리고 주일까지 기다리다간 우리가 시험 들겠다! 내일 새벽 제단에 가서 드리자!” 결국 그 상금도 바로 제단에 바쳤다고 합니다. 그런 헌신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와 구변을 더해주시고 암 치료의 권위자이자 훌륭한 전도자로 삼아주신 줄 믿습니다.

때로 살다 보면 고난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지나보면 별것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히 걱정거리가 있었겠지만 지난 달 무슨 걱정을 했는지, 작년에 무슨 걱정을 했는지 지금은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오늘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이 지나고 보면 별로 걱정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아무리 고난이 있어도 오늘 이 순간부터 그냥 잊어버리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우리의 사명과 비전을 향해 열심히 달려 나가면 반드시 우리 앞에 놀라운 일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항상 믿는 사람답게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복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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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축복(시편 91:14-16)


성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는 “인간은 알고 있는 것에 의하여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것을 따라가게 되고, 또한 사랑하는 것에 모든 것을 바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욕심과 탐욕에 빠집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 때문에 죄를 짓게 되고, 명예와 권세를 사랑하는 사람은 불법과 비리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사랑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22:37∼39).

사랑에 대한 계명이 큰 계명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이 사랑에 대한 계명을 지키지 않습니다.
또 사랑한다 하면서 잘못된 사랑을 합니다.
온전한 사랑을 하지 못하여 사랑 때문에 죄짓고 불신앙에 빠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가짜 사랑을 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진짜 사랑,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축복 받는 사랑을 하려면, 사랑에도 세 단계가 필요합니다.

첫째, 관심의 단계

관심이란 라틴어는 인터 엣세(inter esse)한다.
라틴어에서 관심이란 "함께 생각한다" "함께 행동한다" "같은 말을 한다" 라고 합니다.

둘째, 헌신의 단계
.
히브리어로 헌신을 "마래"라고 한다.
마래는 가득 채운다는 뜻입니다.
가득 채운 곳에는 다른 어떤 것도 자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셋째, 희생의 단계

헌신을 채우는 것이라고 한다면 희생이란 채운 것을 완전하게 비워버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자세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단계에 따라서 결과도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느 단계에까지 와 있습니까?

‘관심의 단계’입니까? 아니면 ‘헌신의 단계’, ‘희생의 단계’까지 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축복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입술로는,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맘에도 사랑이 없고 행동에도 사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기만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신 7:12∼13), 위험에서 건져내시고(시 91:14), 평안하게 만들어 주시고(시 119:165), 보호하여 주십니다(시 145:20).

하나님께서 넘치는 사랑을 주시고(잠 8:17), 기쁨을 채워주시고(사 56:6∼7),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고(롬 8:28),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십니다(약 2:5).

사랑의 씨앗을 뿌리면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배경 설명

오늘 봉독한 성경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삶의 역경과 절망적인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내용의 찬양시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왕과 신하, 백성들이, 전쟁터에 출전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혹은 어떤 사람이 삶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릴 때, 제사장이 불렀던 찬송으로 추측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보호하시고 축복하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께서 축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사오니,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시고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날 우리도 살다보면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질병이 닥칠 때도 있고, 죽음이 닥칠 때도 있고, 두려움과 불안감에 떨 때도 있습니다.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지만, 결과는 모두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느냐, 사랑하고 있지 않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다섯 가지의 축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건져주시겠다
두 번째는 높여주시고,
세 번째는 응답하시고,
네 번째는 저와 함께 하시고,
다섯 번째는 장수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이 다섯 가지 축복이 나타납니다.

1. 내가 저를 건지리라 - 구원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시 91:14a)

여기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하솨크’라고 하는데, 그 뜻은 ‘달라붙다’, ‘애착을 가지다’입니다.
다시 말해서 갓난아이가 엄마를 안 떨어지려고 꽉 붙드는 것을 말합니다.
갓난아이는 엄마를 떨어지기만 하면 울고 난리가 납니다.
어떻게 하든지 엄마를 안 떨어지려고 붙들고 발버둥을 칩니다.
‘하솨크’는 바로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전적으로 의지하고 매달리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앞에 꼭 붙잡힌 바 되고, 우리도 하나님 앞에 달라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역사, 하나님께서 지키고 보호하시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꼭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여,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만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매달립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합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노력합니다. 최선을 다합니다.”라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통해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그런데 ‘건지리라’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엄마가 젖먹이 자식을 항상 보살피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엄마가 젖먹이 자식에게 젖도 주고 옷도 입혀 주고 병났을 때는 병원에도 데려가고 항상 돌봐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봐주시고 전쟁과 위험에서 건져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고난 중에도 피할 길을 주시고 구원하시고 보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서 결단코 이탈되는 일이 없습니다.

시편 145편 20절에 다윗 왕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사람이 아무리 어려움과 위험 속에 빠졌다 할지라도 눈만 똑바로 뜨고 있으면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수직적인 눈’과 ‘수평적인 눈’만 가지고 있으면 곧 회복될 수 있습니다.

수직적인 눈은 하늘을 쳐다보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말합니다.
수평적인 눈은 인류 역사와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말합니다.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 수직적인 눈을 가진 사람은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청합니다. 또한 수평적인 눈을 가지고 인류 역사를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섭리하셨음을 깨닫고 진리 가운데 항상 거합니다.

기자 생활을 하던 서른두 살 난 젊은 남자가 있었습니다.
5∼6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지 불면증과 심한 우울증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는 밤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무려 백일 동안이나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대인공포증, 자율신경실조 현상까지 나타났습니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정신과 의사를 만났습니다.
“나를 좀 도와 주십시오. 내가 무슨 병에 걸렸습니까?”
“당신은 기자 생활로 너무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아서 모든 것이 다 비정상입니다.
그러니 나하고 세 가지만 약속합시다.
‘첫째, 자살하지 말 것, 둘째, 이사하지 말 것, 셋째, 사표 쓰지 말 것.’
이것이 당신이 지켜야 할 약속입니다.”

그는 정말, 빌딩 옥상 같은 데 올라가면 뛰어내리고 싶고, 다리를 지나가면 강에 뛰어들어가고 싶고, 자동차가 지나가면 뛰어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달려왔습니다.
아들을 붙들고 “얘야, 내가 너에게 강권하니 넌 무조건 교회 나가라. 너는 교회 나가야 된다. 교회밖에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남자는 그냥 십자가 간판만 보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 교회를 나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에게 “목사님, 나를 좀 도와 주십시오. 나는 극심한 정신병으로 시달리고 있습니다.”라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은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쳐다보고 구원받은 것처럼, 당신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숙제를 주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숙제입니까?”
“매일마다 성경 한 장씩을 쓰십시오. 병이 나을 때까지, 성경을 하루에 한 장씩 계속해서 쓰십시오. 이것이 숙제입니다.”

그래서 이 남자는 성경을 한 장씩 계속해서 썼습니다. 한 달, 석 달, 육 개월, 일 년 동안 썼는데, 성경을 읽기 시작한 지 일 년 만에 잠을 잘 자게 되었습니다. 불면증이 없어졌습니다. 스트레스가 없어졌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성격이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돈과 자존심 문제에 민감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에게 해를 끼치면 울분과 분노, 질투심 때문에 견디질 못했습니다.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원수처럼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쓰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미워하는 마음이 떠나게 하시고 질투심이 떠나게 하시고 증오감이 떠나게 하시고, 나에게 용서하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그러자 평소에 증오하고 미워했던 사람에 대한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게 되었고, 오히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평강을 주시고 기쁨을 주셨습니다. 일 년 동안 성경 말씀을 읽자 생각이 변화되고 변화되어서 스트레스, 우울증도 없어지고 다시 건강을 되찾아 온전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변화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서 새로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도 하나님께서 해결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변화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2. 내가 저를 높이리라 - 높임, 존귀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시 91:14b)

여기서 ‘안다’는 것은 그냥 막연하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느끼고 맛보아 체험적으로 아는 신앙과 믿음을 말합니다. 그냥 친구 정도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함께 살므로서 서로 성격과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아는 것을 ‘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연단과 시련을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 나와 신앙 생활 하면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축복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연단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섭리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때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원망과 불평, 부정적인 생각에만 빠져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교회를 등지고, 성경을 등지고 자기 혼자 삽니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자를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높인다’는 단어에는 ‘안전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침략할 수 없는 높은 요새에 옮겨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높은 요새에 들어 올리셔서 아무 재앙 없이 안전하고 평안하게 살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둘째, 신분이 높아져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점점 형통하고 잘되는 것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셋째, 영광의 자리에 앉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낮아지고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점점 높여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한나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아들, 사무엘을 나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2장 7절 말씀을 보면,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찬양했습니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富)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한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음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높이시면 낮출 자가 없고, 하나님이 낮추시면 높일 자가 없으며,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을 부자가 되게도 하시며 부자를 가난하게도 하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높여 주십니까?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을 높여 주십니다(마 5:19). 섬기는 사람을 높여 주십니다(마 23:11). 기도하는 사람을 높여 주십니다(행 10:2, 22). 선을 행하는 사람(롬 13:3), 전도하는 사람(고후 8:18), 순종하는 사람(히 5:8∼10),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벧전 5:6)을 높여 주십니다. 교만한 사람은 패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늘 겸손하게 낮아지고 낮아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 “부귀(富貴)는 재천(在天)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자가 되고 귀하게 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 뭡니까? 구름입니까, 아니면 태양입니까, 별입니까, 달입니까? 아닙니다. 부귀가 하늘에게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 귀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부자가 되고 귀하게 되고 존귀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국회의원 중에 헨리 파우세트(Henry Fawcet)라는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국회의원은 맹인이었습니다. 어떻게 맹인이 가장 영향력 있는 국회의원이 되었을까요?

헨리 파우세트가 20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하루는 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실수로 총이 오발되는 바람에 그만 총알이 그의 얼굴에 맞고 말았습니다. 목숨은 건졌으나 그는 실명하여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고로 아버지도 충격을 받고 아들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내가 내 아들 장래를 망쳤구나.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겠다.’라고 죄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아들은 아들대로 ‘나는 이제 앞을 못 보니 책도 못 보고 살아서 뭐 하겠는가? 죽어버리자.’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부자가 다 이렇게 죽을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헨리는 누군가 심하게 통곡하며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보니까 자기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우는 소리를 듣고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울지 마세요. 아직도 나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도와주시면 나도 훌륭하게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너를 도와 주면 되겠니?”
“아버지, 나를 위해서 책을 읽어 주세요. 아버지가 나에게 책을 읽어 주시면, 내가 아버지를 통해서 책을 읽고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점자도 배워서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날 좀 도와주세요.”
“그래, 내가 널 도와 주마.”
아버지는 아들을 도와 열심히 책을 읽어주고, 아들은 점자를 배워서 최선을 다해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국회의원, 맹인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위기에 처하면 절망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도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 눈이 먼 헨리에게도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는 청춘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없는 것만 생각하고, 불평과 원망에 빠집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믿음이 있고 건강이 있고 소망이 있고 지혜가 있고 생각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것이고, 남은 것을 가지고도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고 인도하시고 사랑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내가 응답하리라 - 간구, 응답

“저가 내게 간구(懇求)하리니 내가 응답(應答)하리라”(시 91:15a)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간구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응답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간구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찬송하지 않습니다. 감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기의 고민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비밀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부모한테도 말못하고, 친구한테도 말 못했던 것, 얘기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말할 수 있고, 또 사랑하는 사람이 얘기하기 때문에 그 얘기를 들어주고 도와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십니다. 사람들은 무시하고 멸시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얘기, 어떤 간구를 하고 부르짖더라도 관심을 가지고 다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구하는 기도에는 응답이 있습니다. 문제 해결이 있습니다. 고난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기 때문에 기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24절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기쁨이 충만한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요, 슬픔이 충만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인상쓰는 사람, 우울한 사람, 불안한 사람, 두려움과 공포에 빠진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납니다. 감사가 넘쳐납니다. 용기와 희망이 솟아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사는 사람,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기도하는 사람에게 역사 하시고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가정도 행복한 가정은 기도하는 가정입니다. 회사도 잘되고 축복받는 회사는 기도하는 회사입니다. 교회도 부흥하고 발전하는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활력을 줍니다. 우리 생활을 풍족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강남 어느 지역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장사는 되지 않고,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만 생겼습니다. 이것저것 잡일로만 바빴지 식당 사업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부동산에 내놨는데 팔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게를 처분해야 하는데…. 이 가게를 팔고 뭘 할까?’하고 걱정했습니다. 앞길이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내가 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았지?’
그는 자기가 그 동안 새벽 기도도 하지 않고, 금식 기도, 철야 기도도 하지 않았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이제 내가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새벽 기도의 능력, 철야 기도의 능력, 금식 기도의 능력 주시고, 이 가게도 팔아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한 점잖은 신사가 그 식당에 찾아왔습니다. “우리 회사 직원이 한 50명 되는데, 직원 식사를 이 식당에 위탁할테니 직원들의 식사를 좀 맡아 주시오.”라고 말하며 선금으로 100만 원을 주고 갔습니다. 그래서 직원 50명이 식사를 하러 오니까 식당은 자리가 모자랄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식당을 팔아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식당을 넘치게 채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 식당 처분 안하게 된 것 감사합니다. 내 기도대로 응답 안 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이제 이 식당 안 팔리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이 식당을 통해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근심하고 걱정하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새벽 기도 하지 않습니다. 철야 기도 하지 않습니다. 금식 기도 하지 않습니다. 병원에 가서 수술하면 금식할지언정 하나님 앞에는 금식 기도 못합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어려운 고난과 고통 닥쳐야 뒤늦게 정신을 차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입니다. 그리고 대화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사랑한다고 하면서 입을 꾹 다물고 서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듣지 않는다면, 그것이 사랑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오순도순 대화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작은 문제도 기도하고, 큰 문제도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도 기도하고, 감당할 수 없는 것도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늘 깨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기도가 응답과 축복으로 나타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내가 저와 함께 하리라 - 함께 하심

“저희 환난(患難)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榮華)롭게 하리라”(시 91:15b)

여러분,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십니다. 동행하여 주십니다. 임마누엘의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성공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형통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행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왜 불행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왜 사업이 망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왜 회사에 부도가 납니까?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잘났다고 떠나고, 교만해서 떠났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불신앙에 빠지고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축복이 점점 떠나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드시 영광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환난에서 건져서 영화롭게 해 주십니다. 정신적인 만족과 물질의 축복,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번영과 칭찬과 영광과 성공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9장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은 어디 가서 무엇을 하든지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애굽 사람에게 팔려 보디발의 집에 갔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범사에 그를 형통케 하셨습니다(창 39:2). 또한 요셉은 모함을 받아 감옥에도 갔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케 하셨습니다(창 39:23). 결국 그는 옥중에서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마지막에 가서,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보상하시고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늘 깨닫고 느끼고 감사해야 합니다.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요, 수학자였던 파스칼(Blaise Pascal ; 1623∼1662)은 “행복은 우리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오직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만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디 가야 행복이 있습니까?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돈 많이 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대통령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권력을 가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돈이 있든 없든, 권력이 있든 없든, 하나님만 함께 하시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짜리 딸을 둔 어느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딸이 사춘기라서 그런지 부모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공부는 제쳐놓고 학교도 제대로 가지 않았습니다. 친구들하고 놀러 다니고, 집에는 밤늦게 들어왔습니다. 야단도 쳐보고 때려도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러다 가출해서 아주 잘못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걱정을 하다, 하다 이 부부가 ‘안되겠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 부모로선 더 이상 못하겠다.’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어디 가서 죄짓지 않게 하고, 사고 치지 않게 하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데 갑자기 마음속에 음성이 들렸습니다.
‘야, 너만 안타까우냐. 나도 안타깝다.’
‘뭐가요?’
‘네가 내 말을 안 들을 때, 내가 얼마나 안타까운 줄 아느냐?’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자신도 집사였지만 교회에 제대로 안 나가고, 하나님 말씀을 안 듣고 불순종했던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나도 너 참 안타깝다. 그러니까 너무 야단하지 마라. 나도 너를 참았으니까, 너도 참아라. 기도만 해라.’

그래서 딸이 속썩이고 말 안 듣는 것을 통해, 자기도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잘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 이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충성하고 헌신하겠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인내한 것처럼, 나도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딸에 대해 인내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날 밤도 딸이 안 들어오자 부부는 걱정이 되어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어디 가서 뭘 하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지키고 보호하고 함께 하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따르릉” 울렸습니다. 병원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딸이 병원에 입원하고 있으니 빨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봤더니 교통사고였습니다. 딸이 친구 세 명과 함께 택시를 탔는데, 택시가 그만 전신주에 정면충돌을 했다는 것입니다. 차는 불이 붙어서 전소해 버리고, 기사는 물론 그 안에 타고 있던 세 명의 학생이 다 다쳐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운전사 바로 옆, 조수 석에 앉았던 자기 딸만 무사했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얼굴만 하얗게 질려있었습니다.
‘하나님, 어째서 제일 위험한 자리에 앉은 내 딸만 안전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피투성이가 되고 다쳤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딸과 함께 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걱정 근심 하며 그냥 있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위험한 교통 사고에서 딸의 생명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딸이 병원에서 입원하고 있는 동안 아버지, 어머니와 대화를 많이 하여 부모와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사춘기에 탈선하고 방종하던 딸이 다시 돌아와 정상적으로 공부하고 착한 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딸을 살려주신 것 감사합니다. 딸의 마음을 다시 돌이키신 것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인내하고 끝까지 참고 기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 어떤 어려움과 절망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낙심하거나 탄식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고, 끝까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자녀가 안 들어 와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업이 안되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문제, 역경이 와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사랑하는 자에게 함께 하시는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우리 가정은 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축복을 받게 하시고, 이 나라도 민족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을 받게 하시고, 회사도 직장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을 주시고, 우리 교회 집사·장로·권사·성도들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축복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5.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리라 - 장수, 만족

“내가 장수(長壽)함으로 저를 만족(滿足)케 하며 나의 구원(救援)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시 91:16)

여러분, 생명의 주관자가 누구입니까? 누가 사람을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에 건강과 장수는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누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습니까? 우리가 한국에 태어난 것, 부모를 만나서 김씨, 박씨, 최씨가 된 것, 우리 인간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주관자,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생명도 주십니다. 건강도 주십니다. 장수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를 장수함으로 만족케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래 산다고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 세상의 악한 사람들 중에도 오래 사는 사람이 있지만, 그들은 욕망과 죄악과 갈등 속에서 삽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만족 없이 오래 사는 것은 오히려 고통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편안한 가운데 장수의 축복을 누리도록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잠언 10장 27절에 솔로몬 왕은 “여호와를 경외(敬畏)하면 장수하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믿으면 장수의 축복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장수한 사람들의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구약 성경에 사라는 127세(창 23:1), 아브라함은 175세까지 장수했습니다(창 25:7∼8). 이삭은 더 오래 살아서 180세까지 살았습니다(창 35:28∼29). 야곱이 147세(창 47:28), 요셉이 110세(창 50:26), 아론이 123세(민 33:39), 모세가 120세(신 34:7), 여호수아가 110세(수 24:29). 다 100세 이상을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잘 믿으면 100세 이상 축복 받고 산다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신약 성경에 안나는 106세까지 살았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눅 2:36∼37).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 여자는 보통 15세에 시집을 갔는데, 7년 동안 결혼 생활하고 84세를 과부로 살았다고 하니까 그의 나이를 106세로 추정하는 것입니다. 안나는 106세까지 과부로 살면서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하고 기도하여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렸습니다. 오늘 참석한 여러분도 다 장수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최근 8·15 남북이산가족 상봉 후에 ‘건강 관리 신드롬’이 생겼다고 합니다. “살아 있어야 가족과 형제들을 만날 수 있다. 건강해야 된다.”라고 해서 60세, 70세, 80세 할머니·할아버지들이 건강 관리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벽이면 약수터를 오르내리며 운동을 하고, 저녁에도 아파트 주변을 산책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건강의 비결이 뭡니까? 어떤 사람은 “건강 식품을 먹어야 건강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건강 식품 제조 업체인 미국의 허벌라이프사의 창업자 마크 휴즈 회장은, 건강 보조 식품을 판매해 한해 매출이 9억 달러에 달하는,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좀 더 안전하고 훌륭한 다이어트 식품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많은 건강 식품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세계 사람에게 더 많은 건강 보조 식품을 공급하는데 생애를 바치겠다.”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로스앤젤레스 해변에 있는 무려 300억 원짜리 초호화 맨션에서 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건강, 건강’, ‘장수, 장수’를 외치던 건강 식품 창업자 마크 휴즈는 44세에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건강 식품을 먹고 오래 살고자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오래 삽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고 장수하게 하셔야 오래 삽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 건강의 근원 되신 하나님, 우리는 그 하나님을 잘 믿어서 장수를 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에는 건강을 위협하는 유해 식품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제목입니다.

중국산 납 꽃게뿐만이 아닙니다. 납이 들어간 복어와 병어, 물 먹인 아귀, 돌 넣은 홍어, 살충제를 쓴 인삼 등 유해 식품이 아주 많습니다. 옥수수 기름에다 황산을 넣어 참기름 색깔로 바꾼, 황산 식용류를 만들어 30억 어치나 팔았습니다. 그밖에도 타르 색소를 넣어서 암을 유발시키고 혈소판 감소증을 일으키는 검은 깨, 발암 물질인 묵, 쇳가루 섞인 고춧가루 등 불량 식품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음식을 먹고도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요즘 신문을 보면 먹을 게 별로 없습니다. 무엇을 먹고 살아야겠습니까? 병든 소를 잡아서 소고기를 팔아먹지를 않나, 육류도 불량 식품이 참 많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불량 식품, 한국의 부정부패가 빨리 떠나게 하시고, 진정한 건강 식품이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여 축복받는 성도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해 주시고, 축복을 주십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둘째, 높여주시고,
셋째, 기도를 응답하시고,
넷째, 우리와 함께 하시고,
다섯째, 장수케 해 주십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충청남도 금산군에 사시는 95세 동갑내기 할머니와 할아버지, 송병호, 송원금 씨는 결혼 생활 80년 동안 한번도 아픈 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하십니다.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 건강 비결이 뭡니까?”하고 물었더니, 한결같이 “교회 때문이여. 교회 가는거 밖에 몰라.”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할머니가 시집왔을 때 시어머니 손에 이끌려 나갔던, 교회 생활이 건강을 유지하는 큰 기둥이라며, “우리는 첫째도 교회, 둘째도 교회, 셋째도 교회, 교회밖에 몰라요.

교회 열심히 다녔더니 하나님께서 장수하게 해 주셨습니다. 새벽 기도, 철야 기도, 금식 기도 예배 시간마다 나가고 하나님만 믿었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찬송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물질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교회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넘쳐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신앙이 좋으니까 그 집 아들, 딸부터 손자, 손녀까지 다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 받고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고,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신앙, 사랑의 인생을 살 때 하나님께서 풍족하게 역사하시고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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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에서 선택한 사랑에 대한 본문과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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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부터 5장을 읽으면서 '사랑"에 관한 설교 본문과 제목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창세기 1:26-28) 참조 5:1

형상이란 히브리 단어는 "체렘(צֶלֶם tselem)"이라고 합니다.

צֶלֶם  스트롱번호 6754
1. 그림자, 2. 형상

발음 : tselem

어원 : ‘그늘지다’는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형상(창 1:26, 삼상 6:5, 시 73:20), 석상(민 33:52), 우상(왕하 11:18, 겔 7:20, 암 5:26), 그림자(시 39:6).
구약 성경 : 17회 사용


'체렘'이란 단어의 의미는 완성된 모습이 아니라 완성을 위하여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한 조각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은 모습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닮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

체렘의 의미 / 길가에 버려진 거대한 바위가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누가 저렇게 큰 바위를 길에다 버려두었나?
이때 어느 조각가 한 사람이 그 바위를 조각실로 옮긴 후에 부지런히 조각품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거대한 바위에서 조각품이 될 수 없는 떨어져 나가는 조각들을 "체렘" 이라고 합니다.



가죽옷(창세기 3:21)

옷(케토넷트, כְּתֹנֶת kethôneth)

1. 사람의 가죽, 2. 시어에서는 몸, 3. 짐승의 가죽

발음 :  kethôneth

어원 : 40:14, כָּתְנוֹת, 출 39:27, 복수 연계형 כִּתְנוֹת, 창 3:21, 출 39:27, 복수 어미활용 כֻּתָּנוֹתָם, 레 10:5, ‘가리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가죽옷(창 3:21), 속옷(출 28: 39, 29:8, 39:27), 겉옷(출 40:14, 레 8:7), 옷(레 10:5, 삼하 15:32, 아 5:3), 채색옷(삼하 13:18, 19), 의복(느 7:70,72).
구약 성경 : 29회 사용

가죽(오르,  ʽôwr) עוֹר

어원 : 578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가죽(창 3:21, 레 4:11, 욥 2:4), 살(출 22:27),꺼풀(출 34:29, 30), 피부(레 13:2, 34, 렘 13:23, 욥 18:13).
구약 성경 : 99회 사용
모두에게 잘 알려진 본문을 설교하려면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엮은 옷과 가죽옷의 의미를 묵상합시다.
위에서 소개한 이미 설교한 "가죽옷과 예수님의 피"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설교일 / 01-19-2019).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는가?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려고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는데 그 이유는 가죽옷을 만들려면 짐승이 죽어야 합니다.
짐승이 죽을 때 피를 흘려야 합니다.
따라서 가죽옷의 의미를 두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는 희생 - 십자가(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For the message of the cross is foolishness to those who are perishing, but to us who are being saved it is the power of God.


둘째는 피 - 보혈(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케 되나니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In fact, the law requires that nearly everything b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


아담과 하와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하였지요.
인위적인 방법들을 철저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여전히 신앙의 울타리로 넘어오는 인위적인 가르침, 교리, 교주, 교단, 이념 등과 같은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영적인 방법 즉 신적인 방법만이 부끄러움을 가리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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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시드니 지역에서 "우리농장"을 운영하는 "김은각집사님"
오래 전 여의도에서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집사님께서 북한에서 가져온 북한성경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게 부탁하기를 "이목사는 통일이 되기 전까지 북한을 방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이유는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서로에게 덕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김은각집사님은 당시 월드비전의 북한 사업 담당을 하시던 고 박창빈목사님의 친구라고 합니다.
마침 북한 지역에 1000평 규모의 비닐 하우스를 제작해 달라는 주문을 받고 모든 자재는 남한의 것을 사용해야 한다고 고집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남한의 제품이 중국산 보다 훨씬 견고하고 효능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북한 당국에서는 남한의 제품이 북한으로 들어오면 혹시 남한 제품에 대한 우수성이 드러나므로 매우 긴장하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항에서 모든 재료를 선적하여 배편으로 북한 원산항으로 운반하는 일을 성공하셨다고 합니다.
당시 비닐 하우스에서 첫 열매를 가져와 서울에서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며 감격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참외, 오이, 깻잎.....

척박한 북한 땅에서 비닐 하우스를 제작하고 수경재배를 통하여 농산물을 생산하였을 때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감격해 하며 정말 이것이 비닐 하우스에서 생산되느냐 하며 감격했다고 합니다.

수경재배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북한 생활 13년, 윤상혁 평양의대 교수가 전한 놀라운 이야기


누구에게나 쉽게 허락되지 않는 땅 북한에서 13년을 살아 온 50세 남성이 희끗희끗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2000여명의 시선이 꽂힌 무대 위 스크린에는 팔이 꺾인 채 재활치료를 받으며 활짝 웃는 5세 어린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외국인 최초로 평양의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윤상혁 평양의대 회복기과(재활의학과) 교수,

그는 2007년 나진 선봉 지구에서 진료 봉사를 시작해 2년 전 코로나로 북한 국경이 봉쇄될 때까지 평양에 상주하며 척추 신경의학 및 뇌성마비와 자폐증 어린이들의 재활 치료에 힘써왔다.
척추전문의였던 그가 북한에서 ‘어린이 재활’ 영역으로 치료의 길을 낼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돼 준 것이 복신이와의 만남이었다.

“난로도 없는 추운 진료실에 할머니가 다섯 살짜리 아이를 등에 업고 찾아왔습니다.
아이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중증의 경직성 사지마비를 겪고 있는 뇌성마비였는데요.
보니까 입이 다 열려 있었고 머리는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음식을 씹어 삼킬 수도 없어 그동안 할머니가 대신 입으로 씹어 넣어줬습니다.”

양육하고 있던 네 살 막내 딸의 얼굴이 떠올라 더 마음이 쓰였다. 어린이 뇌성마비 환자를 치료해 본 게 처음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치료에 임했더니 몇 주 후 근육운동에서 변화가 보였다. 복신이는 손가락을 움직이고 주먹을 쥘 수도 있게 됐다. 몇 달 뒤 김일성종합대학 평양의학대 회복기과 교수로 부임하게 됐을 때도 복신이를 데려와 치료할 수 있도록 병원 측에 침상을 마련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복신이는 소아장애 증상 가운데 평양의대병원에서 받아들여진 첫 사례자가 됐다.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복신이 치료를 멈추지 않았지만 6개월여 시간이 흐르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하루는 복신이 할머니가 윤 교수를 찾아와 “복신이를 데리고 집에 가서 잠시 쉬고 오겠다”고 전했다. 알고 보니 낫지도 못할 아이 하나 때문에 입원해야 할 다른 아이들이 제대로 치료를 못 받는다는 말을 들어왔던 것이었다. 당시 북한 사회에서 복신이 같은 아이들은 가망이 없는 불치병으로 여겨왔기 때문에 치료받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윤 교수의 만류에도 할머니는 치료를 포기한 채 복신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후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뇌성마비 아이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차도가 있는 것을 본 사람들이 복신이 같은 자녀를 키우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 뒤 윤 교수의 치료실 앞에는 뇌성마비 아이들과 그 부모들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복신이가 집으로 간지 1년쯤 지나는 동안 여러 아이들이 병원을 스스로 걸어 나갔고, 증상이 호전되는 놀라운 일들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방송국에서 나와서 치료과정을 촬영하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복신이와 같은 뇌성마비 어린이들을 위한 소아행동발달장애 전문병원을 같이 세우기로 했습니다.”

윤 교수는 언젠가 복신이를 병원으로 데려와 다시 치료할 수 있는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소문해 부모와 연락이 닿았지만 복신이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그는 “그날 이후로 복신이와 같은 아이들을 위해 일하기로 마음먹었다”고 고백했다. 이어 “천국에서 제일 반가워할 그 일, 바로 어린이를 섬길 수 있는 길을 마련해준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후 뇌성마비 아이들의 치료센터와 전문의 교육과정도 국가의 승인을 받게 됐다. 복신이로 인해 숨겨졌던 수많은 아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과 기회가 찾아오게 된 것이다. 윤 교수는 참석자들을 향해 말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스펙을 쌓고 좋은 차를 사고 좋은 집에 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주님 앞에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새 계명의 마음을 받길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새 계명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신 그 사랑, 하나님과 내 이웃을 사랑하며 내가 서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자로 세워지는 것은 뒷전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밤, 우리가 다시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예배자로 회복되고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윤 교수는 북한 전역에 유치원 탁아소 농촌진료소를 짓는 국제 NGO ‘선양하나’의 국제대표를 맡고 있다. 선양하나는 북한 땅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며 살아가는 공동체다. 2008년 6명으로 출발해 현재는 8개국 39명의 동역자들과 함께 하고 있다.

유튜브 채널 ‘다니엘기도회’와 ‘미션라이프’로 실시간 중계된 이날 집회는 동시접속자 5500여명을 기록하며 온오프라인을 통해 은혜와 도전을 심어줬다. 셋째 날 집회인 27일에는 김승욱 할렐루야교회 목사가 메신저로 나설 예정이다.

자료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7016348&code=61221111&sid1=c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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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éline Marie Claudette Dion / 1968. 3. 30-
셀린 마리 클로데트 디옹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가를 부른 세계적인 팝가수 셀린 디온이 가수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그녀는 폭발적인 가창력과 맑은 음색을 지닌 '세계 최고의 여가수' 불린다.
인기정상을 달리던 그녀가 돌연 '부와 명예'를 거절하고 가정으로 돌아간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캐나다 출신인 셀린 디온이 가수가 된 것은 열두살 때였다.
그녀는 자신의 노래가 담긴 테이프를 들고 한 음반회사를 찾았다.
그때 지금의 남편인 안젤린이 빚을 얻어 음반을 만들어 주었고 셀린 디온의 매니저로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셀린 디온은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편이 지금 후두암에 걸려 투병중이다.
지금은 남편에게 내가 가장 필요한 시간이다.
남편 곁에서 병간호를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
쇼 비즈니스가 결코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이제 남편에게 진 사랑의 빚을 내가 갚을 차례다.
부부간의 사랑은 위기에서 그 진위가 가려진다.

성 요한 성당(Cathedral of St. John The Civine)

4억 달러의 예산으로 2050년에 완공 예정인 이 성당은 완공이 된다면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성당이 될 것이다.
고딕과 로마네스크 스타일로 지어지고 있는 건축물로 쉼터, 그래픽과 조각 스튜디오, 체육관, 원형극장 등이 들어설 예정이며 컬럼비아 대학교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미국 뉴욕의 성 요한교회는 매년 한번씩 성 프랜시스를 기념하는 예배를 갖는다.

맨하탄 모닝사이드 하이츠 근처에, 영국의 성공회 교회인 Episcopal Church가 1888년에 맨하탄에 있는 로마 카톨릭 교회인, 세인트 패트릭스 성당(St. Patrick's Cathedral)을 겨냥하여 교회를 계획하고, 1892년에 착공해서 두 세계 대전을 거치는 동안 비잔틴-로마네스크 양식에서 1909년 고딕양식으로 바뀌어 가며 현재까지 준공을 하고 있지만 완공되지 않은 상태이다. 2001년 화재로 문을 닫았다가 2008년에 다시 문을 열었다. 
 
13세기 북 프랑스 고딕 양식을 차용한 성당은 높이가 38미터에 길이 186미터 넓이 70미터의 미국내 가장 긴 성당이다. 성가대 뒤편에는 통로를 이용해 “방언의 방”으로 불리는 일곱 개의 작은 강당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1892년 미국을 들어오는 이민자 다수 민족을 상징해서 각각의 성인들을 축으로 만들어 졌다. 성당은 내부는 물론이고 굳이 성당안을 들어가지 않더라도 볼거리가 많다.

이 날은 성 프랜시스의 풍성한 사랑을 기념하기 위해 신자들이 집에서 기르고 있는 모든 동물도 함께 데려오도록 허용하고 있다.
"아시시의 성자"로 불리는 프랜시스는 설교시간에 지저귀는 참새들을 조용하게 만들고 사나운 짐승을 온순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프랜시스는 원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그가 입은 옷을 걸인들에게 선물했다.
그는 가끔 누더기를 걸친 채 귀가했다.
프랜시스는 종종 한센씨병에 걸린 환자들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으며 걸인들의 발을 씻어주었다.
프랜시스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충고한다.
그대여, 진정 행복과 평화를 원하는가.
그러면 먼저 마음을 비워라.
그리고 그 빈곳에 이웃에 대한 사랑을 채워라.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분노와 탐욕은 눈처럼 녹아내린다.


사랑은 내 안의 "나"를 비우는 것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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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주요 용어 설명 #. 2 죄(罪)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

죄의 정의 : 덮은 것을 벗겨내는 것이다!
암송 성구 : 로마서 6:23(로마 육이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266. 죄(하마르티아)

ἁμαρτία, ίας, ἡ

1. 죄,  2. 고후 11:7,  3. 요한 9:41

발음 / 하마르티아(hamartia)
어원/ 26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요 8:21, 롬 5:20), 불법(살후 2:3), 죄악(히 11:25)
신약 성경 / 173회 사용

* 264. ἁμαρτάνω

1. 하나님의 종교적 도덕적 법을 어기고 잘못하다,  2. 죄를 범하다

발음 / 하마르타노(hamartanō)
어원 / [기본형] 미래 ἁμαρτήσω, 제2부정과거 μάρτω, 가정법 ἤμαρτον, 제1부정과거 ἡμάρτησα, 가정법 ἁμαρτή- σω,
과거분사 ἁμαρτήσας, 1[부정불변사]과 3313의 어간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죄를 범하다(마 18:15), 죄를 짓다(눅 15:18, 롬 6:15), 죄로 인하다(요 9:2), 범죄하다(롬 2:12), 죄가 있다(벧전 2:20)
  • 신약 성경 /  43회 사용
  • * 3313. μέρος

    μέρος, ους, τό 

    1. 누가 11:36,  2. 몫
    발음 / 메로스(mĕrŏs)
    관련 성경 / 지방(마 2:22, 16:13, 행 19:1), 벌(마 24:51, 눅 12:46), 분깃(눅 15:12), 토막(눅 24:42), 편(요 21:6), 얼마(행 5:2),
    일부(행 23:6), 얼마간(롬 15:24), 어느 정도(고전 11:18), 부분적(고전 13:9, 12), 차례(고전 14:27), 정도(고후 2:5), 일(고후 9:3),
    지체(엡 4:16), 갈래(계 16:19), 참여(계 20:6, 21:8, 22:19)
    신약 성경 / 42회 사용

    사랑에 대한 정의를 되새겨 봅시다.
    사랑의 정의 : 덮어주는 것이다!
    - 사랑은 자기 울타리를 넘어야 확장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울타리 안에서만 사랑합니다. 

    암송 성구 : 베드로 사팔(베드로전서 4:8)
    - 베드로전서 5장
      베드로후서 3장
      따라서 베드로 사팔이라고 하면 베드로전서를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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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주제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사랑 다음의 주제는 "죄"
    왜냐하면 사랑은 죄를 덮어주는 것 즉 용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살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여름철에 비행기를 타게 될 때 지상에서는 날이 흐리고 비가 내릴지라도 비행기가 고공 도파 후 비행을 시작할 때는 고공에서는 해가 밝게 빛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항상 태양처럼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라는 검은 먹구름이 덮어버리면 빛나는 태양도 그 빛을 차단합니다.
    따라서 사랑은 친밀한 관계
    죄는 친밀한 관계의 단절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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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03-2023(주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하나님 사랑의 특징은 인격적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고 합니다.
    수단이란 사람을 물체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적이란 사람을 인격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드러나는 관계는 수단에 의한 방법으로 형성됩니다.

    예를 들면 푸주간에서 쇠고기를 구입하려고 돈을 지불하면 돈의 가치만큼 고기를 저울에 달아 확인 후에 고기를 줍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돈이라는 매개체가 관계를 형성합니다.

    그런데 어느 마을에 새롭게 개장하는 정육점에서 개업 기념일에 고기를 무료로 나눠준다고 하면 사람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순 우리말 모음

    다소니 : 사랑하는 사람

    다소다 : 애틋하게 사랑하다 

    가람 : 강의 우리말

    그린비 : 그리운 남자

    여우별 : 궂은 날 잠깐 보였다가 사라진 별 

    볼우물 : 보조개 

    아람치 : 자기의 차지가 된 것

    미르 : 용

    푸르미르 : 청용

    미리내 : 은하수

    그린내 : 연인

    아라 : 바다

    꼬꼬지 : 아주 오랜 엣날 

    눈바래기 : 멀리 가지않고 눈으로 마중

    마루 : 하늘

    그린나래 : 그린듯이 아름다운 날개

    예그리나 : 사랑하는 우리사이

    비나리 : 축복의 말 

    어리연히프제 : 치마를입고 활쏘는 여자들

    가시버시 : 아내 , 남편을 뜻하는 말

    늘솔길 : 언제나 솔바람이 부는 길

    한울 : 우주

    꽃가람 : 꽃이 있는 강

    수피아 : 숲의 요정

    아토 : 선물

    희나리 : 마른장작

    샛별 : 새벽 동쪽 하늘에서 빛나는 금성

    닻별 : 카시오페아 별자리

    산돌림 : 옮겨다니며 내리는 소나기

    듀륏체리 : 늦게 얻은 사랑스러운 딸자식

    물비늘 : 잔잔한 물결이 햇살에 비치는 모양

    타니 : 귀걸이 

    하람 : 꿈의 뜻

    사시랑이 : 가늘고 힘 없는 사람

    도투락 : 어린아이 머리댕기

    가우리 : 고구려 

    미쁘다 : 진실하다

    아띠 : 친구 

    새라 : 새롭다

    나린 : 하늘이 내린

    라온하제 : 즐거운 내일

    라온제나 : 기쁜 우리

    라온힐조 : 즐거운 이른아침

    꽃 잠 : 신혼부부의 첫날밤

    나르샤 : 날아오르다

    흐노니 : 누군가를 그리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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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우리말
    1 해오름달 새해 아침에 힘있게 오르는 달
    2 시샘달 잎샘 추위와 꽃샘 추위가 있는 겨울의 끝달
    3 물오름달 뫼와 틀에 물오르는달
    4 잎새달 물오른 나무들이 저마다 잎 돋우는 달
    5 푸른달 마음이 푸른 모든이의 달
    6 누리달 온 누리에 생명의 소리가 가득 차 넘치는 달
    7 견우직녀달 견우직녀가 만나는 아름다운 날
    8 타오름달 하늘엔 해, 땅위에선 가슴이 타는 정열의 달
    9 열매달 가지마다 열매 맺는 달
    10 하늘연달 밝달뫼에 아침의 나라가 열린 달
    11 마름달 가을에서 겨울로 치닫는 달
    12 매듭달 마음을 가다듬는 한해의 끄트머리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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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람
    '강의 옛말' 강처럼 넓고 부드럽게 흐르듯이

    가람슬기
    강처럼 푸르게 그리고 슬기롭게

    가온
    '가운데의 옛말' 세상에 중심이 되어라

    그린나래
    그린듯한 아름다운 날개처럼

    고운
    '고운' 말 그대로 고운 삶을 살아라

    나래 '날개를 이르는 말' 자유롭고 창조적

    나린
    하늘이 내린

    나르샤
    비상하다, 날아오르다

    나봄
    봄에 태어난 아이

    나예
    나비처럼 예쁜 아이

    난새
    한껏 날아오른 새처럼 힘차게

    노을
    노을처럼 곱고 예쁘게 자라거라

    누리
    온세상에 너의 뜻을 펼치며 살거라

    누리봄
    세상을 봄처럼 희망차게 가꾸는 사람

    늘봄
    늘 봄처럼 싱그러운

    늘찬
    늘 옹골차게

    다빈

    빈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

    다소니
    사랑하는 사람

    다슬
    모든 일을 슬기롭게

    다솜
    애틋한 사랑

    다온
    모든 좋을 일이 다 오다

    다올
    하는 일 마다 복이 오다

    다은
    다사롭고 은은하게 자라는

    다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

     

    다흰
    다흰 모두 다 하얗고 순수한

    단미
    사랑스러운 여자

    도담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두빛나래
    두개의 빛나는 날개

    든해
    집안으로 가득 들어온 햇빛처럼 밝게


    라온

    '즐거운'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 늘 즐겁게

    라라
    흥겹고 즐거운 삶을 살거라

    라미
    '동그라미'에서 따온 말, 동글동글 부드럽게

    루리
    '이루리' 모든 뜻을 이루다

    마루
    산 꼭대기 정상에 우뚝 서길

    마루한
    으뜸가는 큰 사람이 되거라

    마리
    '머리'의 옛말, 으뜸가는 사람

    모아
    늘 뜻을 모아 사는 삶을 살거라

    미나
    미덥게 자라나길

    미르
    '용'을 뜻하는 말, 용처럼 씩씩하고 멋지게

    미리내
    은하수를 뜻하는 예쁜 순우리말  

    바다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갖거라

    바론
    '바른'의 옛 순우리말로 바르게 살길

    벼리
    '일이나 어떤 글의 뼈대가 되는' 중심이 되다 

    별하
    별처럼 높고 빛이 나는 사람 차고 미덥게 

    산다라
    굳세고 꿋꿋하게

    소아
    소담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길

    소미
    솜처럼 깨끗한

    솔찬
    소나무처럼 푸르고 옹골찬

    수련
    몸과 마음씨가 맑고 고운 사람이 되길

    수피아
    숲의 요정

    슬기
    언제나 슬기로운 사람

    슬아
    슬기로움과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

    설아
    눈과 같이 깨끗한 아이

    슬예
    슬기롭고 예쁜 사람

    슬옹
    슬기롭고 옹골찬 사람

    슬우
    슬기롭고 우람하고 씩씩한

    슬찬
    슬기로움으로 가득찬 사람

    시내
    시냇물처럼 말고 깨끗한 사람

    아라

    '바다'의 우리말, 바다처럼 넓게 살거라

    아란
    아름답게 자란

    아람
    가을햇살에 충분히 익어 저절로 벌어진 과일

    아리수
    '한강'의 우리말

    아리아
    '요정'의 우리말

    아롱별
    아롱다롱 빛나는 별처럼 아름답게 자라길

    움찬
    돋아오르는 싹처럼 힘차게 자라길

    윤슬
    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물결

    으뜸
    이 세상의 최고라는 뜻

    은가람
    '은은히 흐르는 강' 이라는 뜻의 순우리말

    이든
    착하고 어질다

    이솔
    소나무 같은 곧은 품성을 지닌 아이

    자올
    원만한 성격

    잔디
    잔디처럼 끈기를 가진 사람이 되어라

    주나
    사랑과 기쁨을 주는

    주리
    즐거움을 주리

    지니
    많은 복을 지니다

    지은
    세상을 바르게 하는 좋은 글을 지은 사람이 되길

    지음
    지금의 삶을 아름답게

    진이
    진달래처럼 곱고 예쁜 사람

     

     

    찬솔

    알차게 잘 자란 소나무처럼

    찬슬
    슬기로움으로 가득차다

    초롱
    맑고 영롱하게

    큰솔

    크게 잘 자란 소나무처럼

    토리

    도토리처럼 작지만 야무지고 옹골차게

    티나
    어디서나 예쁘고 고운 티가 나는 사람이 되길

    푸르내

    푸른 물이 가득 흐르는 맑은 시내

    푸르니
    마음이 늘 푸른

    하나

    이세상에 단 하나

    하늬
    '하늬바람'처럼 시원한 사람

    하람
    하늘이 내린 소중한

    하랑
    함께 사는 세상에서 높은 사람이 되길

    한결
    한결같은 지조

    한빛
    큰 빛, 세상을 이끄는 환한 빛

    한울
    큰 울타리처럼 포근한 사람

    해나
    해가 나듯 따뜻한 사람

    해솔
    해처럼 밝고 소나무처럼 바르다

    해찬솔
    햇빛이 가득찬 푸르른 소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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