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 12, 13, 14, 15문


12문 :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의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형벌을 받아 마땅한데,
        어떻게 이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
  답 :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義)가 만족되기를 원하십니다.1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든 아니면 다른 이에 의해서든 죄값을 완전히 치러야 합니다.2

13문 :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까?
  답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죄책(罪責)을 증가시킬 뿐입니다.3

14문 :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단지 피조물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자가 있습니까?
  답 : 하나도 없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책 때문에 다른 피조물을 형벌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4
        둘째,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단지 피조물로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짐을 감당할 수도 없고,
                다른 피조물을 거기에서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5

15문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중보자와 구원자를 찾아야 합니까?
  답 : 참인간이고6
         의로운 분이시나7
        동시에 참하나님이고 모든 피조물보다 능력이 뛰어나신 분입니다.8


1) 창 2:17; 출 20:5; 23:7; 겔 18:4; 히 10:30
2) 사 53:11; 마 5:26; 롬 8:3-4
3) 욥 9:2-3; 시 130:3; 마 6:12; 롬 2:4-5
4) 겔 18:4; 히 2:14-17
5) 시 49:7-8; 130:3; 나 1:6; 히 10:4                
6) 고전 15:21; 히 2:17                            
7) 고후 5:21; 히 7:26        
8) 사 7:14; 9:6; 렘 23:6; 요 1:1; 롬 8:3-4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라(로마서 12:21) / 주일 설교 원고(2020-2-16) 이승혁목사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라!(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Do not be overcome by evil, but overcome evil with good.   

참조 / 마태복음 5:39∼41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왜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할까요?
시편 37편 27절의 말씀으로 그 이유를 소개합니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신앙생활을 영적생활이라고 합니다.

영적생활에 성공하기 위해서 영적생활의 원리를 잘 적용해야 합니다.
영적생활의 기본 원리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또 다른 원리는 로마서 12장 21절 말씀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영적생활의 기본 원리를 “믿음”이란 단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믿음이란 용어의 근거는 하박국 2장 4절에서 “에무나”를 번역한 것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에무나’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49회 사용되었습니다.

에무나’라는 단어가 “진실(眞實)” 또는 “성실(誠實)”이라고 번역하였으나 단 한 번 하박국서에서는 “믿음”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에무나, 피스티스)”은 “진실”과 “성실”을 의미합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돈을 많이 벌어 헌금을 많이 하려고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서 헌금을 많이 한다면 그것이 믿음에 의한 헌금일까요?

‘에무나’라는 믿음은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헌금을 하기 위해서 “진실”과 “성실”하게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러한 것이 “에무나”라는 “믿음”입니다.

종교가 있는 사람과 종교가 없는 사람을 비교할 때 어떤 사람이 행복할까요?

종교를 바르게 믿는다면 종교가 있는 사람이 종교가 없는 사람보다 더 행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종교를 바르게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국의 경우 전체 인구의 50%가 종교가 없다고 합니다.

5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유교, 천도교, 가톨릭 등에 해당합니다.

부처를 믿는 사람을 불자(佛子)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을 성도(聖徒)라고 합니다.

성도(聖徒)란 “성스러울 성(聖)” “무리 도(徒)”라는 훈으로 “성스러운 무리”라고 하겠습니다.

성스러운 무리들의 영적생활 원리는 악을 악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라!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을 “체로키부족”의 전설 같은 이야기에서 찾아봅니다.

체로키(Cherokee)’는 북아메리카의 원주민으로 ‘이로쿼이어’를 사용합니다.
1650년에는 인구 22,000명이었으나 그 후 천연두의 유행으로 절반으로 감소되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배 과정에서 백인의 문화를 대폭 수용하였으며, 미국 정부는 원주민 교육의 시범 케이스로 1769년 디트머스 대학을 설립하였고, 북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고유 문자를 가진 원주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오클라호마의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강제이주 당했습니다. 문명화된 다섯 부족 중 한 부족입니다.

체로키 부족의 추장이 손자에게 인생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에서는 늘 싸움이 일어난단다. 마치 두 마리 늑대가 싸우는 것과 같단다.”

“하나는 악마 같은 놈 또 다른 놈은 선한 놈이지.”

손자는 잠시 동안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생각하다가 할아버지께 물었습니다. 

“그럼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체로키의 추장은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긴단다.”

선으로 악을 이기려면 먼저 선에게 먹이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선에게 먹이를 줄 수 있는 방법은 오늘의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원리는 강한 것을 이기려면 더 강한 힘을 가져야 합니다.

선과 악의 힘을 비교하면 악이 선보다 더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는 말씀은 세상적인 원리가 아닙니다.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영적원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영적 원리를 가장 쉽고 분명하게 요약한 말씀이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의 산상복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산상복음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5:39∼41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악한 자를 대적(對敵)하지 말라(마태복음 5:39)

대적(對敵, ἀντιστῆναι)이란 “대할 (對)” “원수 (敵)”
적과 맞서 싸움을 의미합니다.

안디스테미(ἀνθίστημι, 436, anthistémi)”라는 헬라어는 “∼에 대항하여(to set against)” 또는 “견디다(withstand)”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은 “악한 자에게 대항하지 말라” 또는 “악한 자에 대해서 견디라”는 뜻입니다.

첫째, 돌려대라(마태복음 5:39)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 돌려대라(στρέψον) - 스트레포(στρέφω, 4762. strephó)
- 돌려라(to turn), i.e. 전환하라(to change)

여러분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
상대방과 마주 설 때 상대편의 오른편 뺨을 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가능성을 몇 가지로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상대방의 뒤에서 오른편 뺨을 칠 수 있습니다.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몰래 때리는 것이므로 본문에서 합당한 경우가 아닙니다.

둘째는 상대방과 마주 설 때 왼손으로 오른편 뺨을 칠 수 있습니다.

쿰란공동체에서는 심지어 왼손을 사용하여 제스처를 하는 경우 열흘 동안 회원직을 박탈하고 회개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셋째는 상대방과 마주 서서 오른 손을 돌려서 때리거나 아니면 손등으로 칠 수 있습니다.

오른 손등이나 오른 손을 돌려서 때리는 것은 정상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의 풍속에 의하면 손등으로 치는 것은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창피와 모욕을 주기 위한 상징적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이라는 말은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주인이 노예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아이에게,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네 주제를 파악하라”는 뜻으로, 혹은 “너는 내 부하이니 권위에 복종하라”는 뜻으로 손등으로 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너는 쓰레기 같은 존재” 라는 뜻을 전달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청중들, 즉 당시의 소작농들과 병자들, 여인들이 이런 모욕을 당하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런 비인간적인 모욕을 더 이상 당하지 말고, 왼쪽 뺨도 돌려대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것은 반항하라는 뜻이 분명합니다. 

즉 오른쪽 뺨을 맞은 사람이 왼쪽 뺨을 돌려댈 경우에는 가해자가 더 이상 손등으로 때릴 수 없게 됩니다.

또한 가해자가 왼손으로 친 것은 상처를 주지 않고 단지 모욕할 생각으로 친 것인데, 왼쪽 뺨을 돌려댈 경우에는 부득이 오른쪽 손으로 때릴 수밖에 없게 된다.

오른쪽 손으로 때린다는 것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싸울 경우뿐이기 때문에, 상급자가 오른 손으로 때리는 것은 결국 하급자를 자기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왼쪽 뺨을 돌려대는 것은 소작농이나 노예가, 혹은 유대인이 그 상급자에게 대하여 “나는 인간이다!” 라고 선언하는 행위라고 하겠습니다.

“나를 존엄성이 있는 존재로 취급하라”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즉 “당신이 나를 때려죽일 수도 있지만, 나는 더 이상 쓰레기가 아니며, 당신과 동등한 사람” 이라고 행동으로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왼쪽 뺨을 돌려대라는 것은 폭력에 굴종하여 눈을 내리깔고, 주인의 처분에 맡기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는 지금 “절대로 굴종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폭력적 세계 속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서 그렇다면 맞아죽을 것입니다. 모든 약자들이 함께 왼뺨을 돌려댈 때 비로소 사회적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가지게 하라!(마태복음 5: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 가지게 하며(λαβεῖν) - 람바노( λαμβάνω, 2983. lambanó)
- 가지다(to take), 받다(receive)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의복은 겉옷과 속옷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따라서 속옷을 가지려고 할 때 겉옷까지 가지게 한다면 벌거벗은 몸이 될 것입니다.

이 말씀 역시 불의를 조장하는 것으로 오해되었습니다. .

이 말씀의 배경이 되는 담보물 규정은 신명기 24:10∼15에 소개되었습니다.
네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줄 때에 너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말고. 너는 밖에 서 있고 네게 꾸는 자가 전당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

 
보통 담보물은 양이나 염소처럼 동산(動産)을 담보물로 잡지만, 그런 종류가 없을 경우 부동산을 담보물로 제공했다.

그러나 궁핍한 사람들은 겉옷을 담보로 잡혔지만, 낮 동안뿐이고, 해가 질 무렵에는 채권자가 반드시 채무자에게 겉옷을 되돌려주어, 추운 겨울에 채무자가 그 겉옷을 덮고 잘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예수 당시에 빚 문제는 가장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습니다.

로마제국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갖가지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부자들이 세금을 탈루하는 방식은 제국의 변방에 있는 토지를 매입하여 재산을 은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은 토지를 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가족의 생계가 그 토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부자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는 방식은 빌려준 돈이나 곡식에 대해 25% 내지 250%의 엄청난 이자를 붙이는 방식이었습니다.
농민들은 결국 이자를 갚지 못해 땅을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는 이런 상황에 대해 채권자들이 아니라 채무자들을 대상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법정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너를 고소하여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내어 주라”는 말씀은 채무자가 입고 있는 속옷까지 벗어주어 완전히 벌거벗고 나체가 되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회에서 자신의 벗은 몸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알몸이 되는 것은 최소한 사람들을 찡그리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미국의 성서학자 “로버트 펑크(Robert W. Funk, 1926. 7. 18∼2005. 9. 3)”의 연구에 따르면 사해사본의 하나인 “훈련교범”에서 몸을 드러내는 규정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옷에서 팔을 빼면서 우연히 맨몸을 드러내면 30일 간 참회해야 한다.
둘째는 친구에게 아무 이유 없이 맨몸을 드러낸 경우에는 6개월 간 벌을 받는다(Manual of Discipline 7:12, 14.).
셋째는 수치를 당하는 것은 나체가 된 사람을 보는 사람들이다.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사람에게 겉옷을 벗어주라는 말씀은 “게릴라 전술”과 같습니다.

“게릴라 전술”(비정규전, 유격대)이란 전력이 약한 쪽이 강한 쪽을 치고 빠지는 식으로 괴롭히는 전략이라고 하겠습니다. 게릴라의 어원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대항하던 스페인의 비정규 무장집단들을 스페인어로 전쟁을 의미하는 ‘게릴라(Guerra)’에 “작은”이란 접미사 “일라(illa)”가 합쳐진 “게리야”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영어식 발음은 “구어륄라”에 가까우며 “게릴라”라고 하면 알아듣지 못합니다.

“게릴라(guerrilla)”들이 사용하는 게릴라전은 대개의 힘없는 약소민족들과 약소국가들의 국민들이 선호하는 전쟁 방식입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는 7년 전쟁 때 프랑스 혹은 영국 쪽에 붙은 미국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방법이고, 미국독립전쟁 때 역시 실전에 가까운 훈련을 받은 영국군을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 힘들었던 식민지인들이 쓰던 방법이었습니다. 서로 전면을 바라보면서 싸우는 전열보병에 익숙했던 유럽 군인들에겐 이동 도중에 공격하고 빠져버리는 것은 천적과도 같은 전술이기도 했다. 
 
채권자 앞에서 벌거벗고 떠남으로써 고리대금에 근거한 경제구조가 어떤 것인지를 남김없이 폭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동행하라! - 가주어라!(마태복음 5:41)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주어라(마태복음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 동행하고(ὕπαγε) ; 후파고(ὑπάγω, 5217. hupagó)
-
인도하고, 이끌림을 받고(to lead or bring under), to lead on slowly, to depart

이 말씀 역시 많이 오해되어 왔다.

소요사태가 발생할 경우 로마 군단들은 신속하게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하루에 100리를 행군해야 할 경우도 있었다.

30~40 킬로그램에 달하는 배낭을 지고 행군하는 것을 쉽게 하기 위해 로마의 군법은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시켜 대신 배낭을 지고 가도록 하는 권리를 허락했다.

이러한 명령에 따르는 것은 예속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불응하는 것은 반역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그 권리를 남용할 경우 토착민들의 불만을 고조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오 리로 제한시켰다.

또한 로마의 모든 도로에는 오리마다 표지석이 세워져 있기 때문에, 이 군법을 어기는 군인들에 대해서는 장교들(백부장)이 적절한 처벌을 주도록 했던 것이다.

예수는 그 청중들에게 단지 로마군인들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배낭을 지고 오 리를 걸어간 후에 오리를 더 가겠다고 우기라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피해를 입는가?

그 병사로 하여금 군법을 어기도록 만들어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하라는 것이다.

로마 병사가 유대인에게 싹싹 빌도록 만들라는 것이다.

유대인이 1마일을 더 지고 가겠다고 맞설 때 로마 군인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예수는 식민지의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 체제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존엄성과 자주성을 목숨 걸고 지키는 전략을 통해 개인의 해방과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확보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폭력 앞에서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비폭력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폭력을 극복하라는 가르침이다.

또한 우리의 안전은 타인의 불안전 위에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안전을 보증할 때만 우리가 안전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 역시 우리가 폭력을 당할 때라도 비폭력으로 우리의 존엄성을 지킬 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폭력을 철저하게 폭로하여 자신들의 폭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후에 그를 용서함으로써, 우리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서, 인간 사이의 철저한 신뢰에 바탕을 둔 영적원리라고 하겠습니다.

* 마태복음 5:42∼45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 고린도전서 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 아모스 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 시편 37:27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Turn from evil and do good; then you will dwell in the land forever.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9, 10, 11문

9문 : 하나님께서 사람이 행할 수 없는 것을 그의 율법에서 요구하신다면
        이것은 부당한 일이 아닙니까?
답 :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행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으나,1
        사람은 마귀의 꾐에 빠져 고의(故意)로 불순종하였고,2
        그 결과 자기 자신뿐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도
        하나님의 그러한 선물들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3

10문 :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불순종과 반역을
          형벌하지 않고 지나치시겠습니까?
  답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죄(原罪)와 자범죄(自犯罪) 모두에 대해
       심히 진노하셔서
       그 죄들을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의로운 심판으로 형벌하실 것입니다.4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0)고 선언하셨습니다.5

11문 :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자비하신 분이 아닙니까?
  답 : 하나님은 참으로 자비하신 분이나6
        동시에 의로우신 분입니다.7
        죄는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엄위를
        거슬러 짓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공의는
        이 죄에 대해 최고의 형벌,
        곧 몸과 영혼에
        영원한 형벌을 내릴 것을 요구합니다.8

1) 창 1:27; 2:16-17
2) 창 3:4-6,13; 요 8:44; 딤전 2:13-14
3) 롬 5:12
4) 창 2:17; 출 20:5; 34:7; 시 5:4-5; 7:11-13; 나 1:2; 롬 1:18; 5:12; 엡 5:6; 히 9:27
5) 신 27:26
6) 출 20:6; 34:6-7
7) 출 20:5; 23:7; 신 7:9-11; 히 10:30-31
8) 나 1:2-3; 마 25:45-46; 살후 1:8-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6, 7, 8문

6문 :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렇게 악하고 패역한 상태로 창조하셨습니까?
답: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선하게,1
                또한 자신의 형상,2
                곧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하셨습니다.3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창조주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마음으로 사랑하며,
                영원한 복락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살고,
        그리하여 그분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4

7문: 그렇다면 이렇게 타락한 사람의 본성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답 : 우리의 시조(始祖) 아담과 하와가
                낙원(樂園)에서 타락하고 불순종한 데서 왔습니다.5
        그때 사람의 본성이 심히 부패하여
                우리는 모두 죄악 중에 잉태되고 출생합니다.6

8문 : 그렇다면 우리는 그토록 부패하여, 선은 조금도 행할 수 없으며
        온갖 악만 행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까?
답 : 그렇습니다.7
        우리가 하나님의 성신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참으로 그렇습니다.8


1) 창 1:31        
2) 창 1:26-27
3) 엡 4:24; 골 3:10        
4) 시 8:4-9; 계 4:11
5) 창 3장; 롬 5:12,18-19
6) 시 51:5; 요 3:6        
7) 창 6:5; 8:21; 욥 14:4; 사 53:6; 딛 3:3        
8) 요 3:3,5; 고전 12:3; 고후 3:5


로뎀나무(대싸리나무)

로뎀나무(대싸리나무)

로뎀나무를 ""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대싸리나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엘리야가 왜 광야로 나갔을까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싸움에서 이긴 직후, 이세벨의 미움을 받아 죽이려는 계획을 알고 살기 위하여 도망쳤습니다. 그런 엘리야가 살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여 그가 찾았던 도피처는 광야였습니다. 수행원을 데리고, 나귀를 타고 이스라엘의 최남단 도시 브엘세바로 향했다. 그 과정도 순탄치는 않았을 것입니다. 혹시나 이세벨 왕비가 보낸 자객(?)의 위협을 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10여일 이상이 걸리는 도망길이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북왕국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요단강 동편 길르앗 지방에 살던 이민자였습니다. 그가 북 왕국 이스라엘 왕의 위협을 피해 남왕국 유대 왕국의 끝자락까지 발걸음을 옮긴 것입니다. 그 길이 익숙하였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지나 산지길을 따라 예루살렘, 헤브론을 거쳐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브엘세바 지역에 도착해서는 거기서 혼자 하룻길을 더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것도 걸어들어갑니다. 그곳은 완전한 광야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아주 뜨거운 초여름 날씨가 기다리는 곳이었습니다.
 
봄 여름의 브엘세바 광야는 아주 뜨겁습니다.

40~50도를 오르내린다. 때때로 강한 바람이 불어 닥칩니다. 광야에는 폭풍과 바람도 무서운 복병이다. 종종 도둑들의 공격을 받는 곳입니다. 그야말로 광야는 보호막이 없는 공간입니다.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앞쪽은 모압 땅 해 돋는 편, 즉 동쪽이었습니다. 서쪽은, ‘뒤편’으로 표현하였는데, 지중해(대해 또는 서해)를 지목했습니다. 오른쪽은 남방(네게브 사막) 지역을, 왼쪽은 북방 갈릴리를 비롯한 산지를 가리켰습니다.
 
예루살렘의 우편 지역, 이스라엘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람으로서 살기가 가장 험악한 지역 브엘세바 이남 지역인 남방(네게브) 지역은 그야말로 그늘이 필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아울러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는 악한 자가 지배하는 땅, 마귀가 다스리는 공간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원수를 발등상 되게(굴복시키게) 하셔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편에 그늘이 되시는 하나님’을 노래하기도 했습니다.
 
로뎀나무 곁에 눕다.
 
광야에 그늘이 될 만한 나무는 많지 않습니다. 싯딤나무(아카시아 나무)와 종려나무(대추야자 나무) 정도가 제대로 된 그늘을 제공할 뿐입니다.
 
거기에 비해서도 대싸리나무인 로뎀나무는 긴 시간을 보호해주는 그런 그늘이 없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그늘도 없이 햇살에 온몸을 노출하는 것은 그야말로 죽을 짓입니다. 엘리야는 그것을 시도한 것입니다.
 
아예 그 뜨거운 뙤약볕 아래 잠을 청합니다. 하나님께 죽여 달라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죽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선택한 것은 진짜 죽음이었습니다.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병 
 
이 표현은 우리 식의 현대적 표현입니다. 당시에 유리병은 없었습니다. 불에 구운 떡은, 사실 뜨거운 돌 위에서 익힌 빵입니다.
 
엘리야 이야기에 등장하는 '뜨거운 돌로 구운 빵'이 주는 시각적인 느낌이 남다릅니다. 뙤약볕에 의해 땅과 돌도 다 달궈져 있습니다. 달걀이 그냥 익을 정도입니다. 숯불에 달궈진 돌이 아닌, 태양열로 달궈진 그 뜨거운 돌 위에 빵이 익어가는 풍경이 묘하기만 합니다.

엘리야가 죽기 위하여 찾았던 땅, 봄에서 여름 사이, 낮 기온이 50도를 오르내리던 뜨거운 광야였습니다. 죽겠다고 누워버린 엘리야. 그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엘리야의 그 뜨거운 고통의 마음은 타오르고, 타들어가고, 점점 불이 꺼져갑니다. 
 
그런 절박함과 절망가운데 있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그늘과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하십니다. 삶의 막바지까지 스스로 내달렸던 엘리야와 함께 하셨습니다. 엘리야의 행동을 두고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하여 그곳까지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그 곁에 같이 계셨습니다. 그의 우편에 그늘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에게 빵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광야, 죽음의 자리에서도 ‘임마누엘’이셨습니다.


행동하는 믿음(하박국 2:4, 야고보서 2:26) / 주일 설교 원고(2020-2-6)

행동하는 믿음(하박국 2:4, 야고보서 2:26)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See, he is puffed up; his desires are not upright--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As the body without the spirit is dead, so faith without deeds is dead.

행동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중국의 영적 지도자이었던 "워치만 니(Watchman Nee, 倪柝声(聲). 1903. 11. 4~1972. 5. 30)의 가르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도입 이야기 #.1)

옛날 계단 식 논에서 농사를 짓던 기독교인 농부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해 몹시 가물었던 때에 계단 식 맨 위 논의 주인이었던 농부는 모내기를 마치고 밤을 새워 아래 골짜기에서 물을 길어 논에 물을 채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논을 살펴보니 바로 아래 논 주인이 위 논의 둑을 허물고 위 논의 물을 전부 아래로 흘려 내려 보냈습니다.
화가 치민 위 논의 농부는 또다시 아래 골짜기에서부터 물지게를 짊어지고 물을 길어 논에 물을 채웠습니다.
다음 날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이 세 차례 반복되었을 때는 도저히 참기 어려웠습니다.
위 논의 주인 농부는 당시 영적 지도자 "워치만 니"를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고 질문했다고 합니다.
그때 “워치만 니”는 위 논 주인이었던 기독인 농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방법을 바꾸세요! 이번에는 아래 논에 물을 채운 후 그리고 당신의 논에 물을 채우세요!”

위 논의 주인 농부는 힘든 일이지만 가르침대로 하고 비록 몸은 매우 힘들었으나 마음은 편안하게 잠을 청했습니다.
다음 날 아래 논 주인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믿는 예수를 나도 믿고 싶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당신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라면........"

행동하는 믿음이란 "믿음이란 추상명사동사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이런 행동이 가능할까요?
그 이유는 성경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You diligently study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that b them you possess eternal life.
These are the Scriptures that testify about me.

2020년 오늘의 묵상을 위한 성경 읽기는 요한일서야고보서 그리고 로마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주간에는 에베소서를 읽게 됩니다.

요한일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生命)"
야고보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본(本)"
로마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의(義)" 라고 합니다.

야고보서에서 믿음은 행동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로마서에서 믿음은 구세주를 믿는 것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구약 하박국서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See, he is puffed up; his desires are not upright--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하박국서 2장 4절에서 "믿음"이란 단어는 히브리어 "에무나"를 번역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에무나"라는 단어가 49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박국서 2장 4절에서만 "믿음"으로 번역하였고 48회는 "진실(眞實)" "성실(誠實)"이라고 번역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박국서 2장 4절에서만 "에무나"라는 단어를 "믿음"이라고 번역했는지 역사적 배경을 살펴야 합니다.

하박국서는 기원전 606년경에 바벨론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을 잡아 죽이는 모습을 보면서 하박국의 마음에 의심의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면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 때문에 악인들이 의인들을 잡아 죽이는 것을 볼 수 없었을텐데 어찌하여 악인들의 악에 대하여 방관만 하시는지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대답은, "보라 그 바벨론 사람들은 그 마음은 교만(驕慢)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正直)하지 못해! 그래서 그들의 종말로 속히 이르게 될 것이야. 비록 더디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기다려 봐라! 정녕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바벨론 왕이 망하게 되는 이유가 그의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해서 망하는 것이라면, 만약 그 당시 어떤 사람이 의인이 되려면 교만하지 않고 겸손해야 하고 또 정직하고 성실해야만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 하박국 선지자에게 대답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셨을 때 그 믿음이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 "살리라"하신 말씀도 그 사람의 영혼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이 질문했던바 악인들이 의인들을 다 잡아다가 죽이고 있는 현실을 두고 하나님께 탄원을 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답변으로서 "살리라"하고 대답하신 말씀은 바울이 말하는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 시대가 예레미야 선지자가 사역을 하고 있었던 시대였고, 그때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 와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바벨론으로 끌어갈 때 나온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당시 역사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듣고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의로운 사람들이었고 또 비교적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되어 죽임을 당하지 않고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가서 거기서 살게 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 구절 즉 하박국서 2장 4절을 인용하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된다는 말은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성실(에무나)과 진실 정직함을 그 사람의 의(義)로 여겨주신다는 말씀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신구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믿는다 혹은 예수님을 믿는다 더 나아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그 사람의 성품과 행실이 착하지도 않고 충성되지도 않고 성실하지 않고 진실하지 않으며 정직하지 않고 행함도 없고 성화도 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거짓 믿음이요 죽은 믿음이며 능히 구원에 들어갈 수 없는 믿음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요 야고보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의 자손들 중에서 죄가 아주 없어서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 같이 원죄(原罪)가 있다고 하지만 그 중에 교만하고 정직하지 않고 성실하지 않고 착하지 않고 충성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겸손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고 착하고 충성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바로 그러한 믿음 즉 죄(罪)도 있고 허물도 있고 실수(失手)도 있고 약점(弱点)도 있는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근본적으로 착하고 충성되고 정직하고 성실하고 신실하고 진실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의 그 성실(에무나)를 그의 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예수를 믿기 때문에 밤새도록 아래 골짜기에서부터 밤새도록 힘들게 물지게에 물을 길어 논을 가득 채웠지만 순식간에 논둑을 터쳐 자기 논에 물을 흘러내려보내는 화가 나는 행실에 대하여 다투지 않고 논쟁하지 않고 영적 지도자의 가르침에 따라 아래 논에 물을 채우고 그 다음에 자기 논에 물을 채운다는 것이 현실에서 자주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그 일을 믿음으로 감당했을 때 아래 논 주인의 강퍅한 마음은 녹아내려서 나도 당신이 믿는 예수를 믿어야 하겠다는 결단한 것처럼 오늘날도 이와 같은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에무나와 같은 진실하고 성실한 믿음이라고 합니다.

열왕기상 3장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이 가로되 주(主)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誠實)과 공의(公義)와 정직(正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主)의 앞에서 행(行)하므로 주(主)께서 저에게 큰 은혜(恩惠)를 베푸셨고 주(主)께서 또 저를 위(爲)하여 이 큰 은혜(恩惠)를 예비(豫備)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의 대답은,
"네가 염려하는 의인들(예루살렘 사람들 중에 의인)은 그 믿음(에무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된단다." 이렇게 대답하신 것입니다.

이때 믿음이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고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의인들 중에 정말 성실하고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이 있다면 그 성실하고 진실하고 정직한 믿음(에무나)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니 네가 염려하지 않아도 내가 오히려 너보다 더 아끼고 있단다!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이란 말도 좀 더 심도 있게 살펴서 오해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믿음이란 말이 추상명사 혹은 동사로 된 단어지만 본래는 형용사성실한, 진실한, 정직한 등의 용어였습니다. 따라서 행위도 중요하지만 행위 이전에 존재의 성품이 더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이란?

첫째, 진실(眞實)한 믿음
둘째, 성실(誠實)한 믿음

행동하는 믿음이란?
첫째, 진실한 믿음

진실(眞實)이란 한자는 "참 진(眞)" "열매 실(實)"입니다.
진실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거짓이 없이 바르고 참됨."
"참되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 라고 합니다.

진실이란 히브리 단어는 "에메트
(אֱמֶת)" 라고 합니다.
에메트(אֱמֶת)라는 단어는 히브리 알파벳  첫문자 '알렙' 과 중간 문자 '엠므' 마지막 문자 '타우'가 합성하여 만든 단어입니다.
에메트란 단어는 처음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변함이 없는 것을 진리 또는 진실이라고 합니다.

구약 호세아 4장 1절에서
"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이 땅에 없는 것은 진실(에메트,
אֱמֶת)과 인애(헤세드, חֶסֶד)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다아트, דַּעַת)이라고 합니다.

환경에 따라 바뀌는 것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사랑은 바뀔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 결혼식에서 주례자는 신랑과 신부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 사랑하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면 믿음도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받은 사람이 건강할 수도 있고 건강이 나쁠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건강해야만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진실한 믿음은 변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왜 믿음이 변할까요?
무섭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가장 용감하고 결단력이 빠른 제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로 가야 할 것을 말씀하셨을 때에 앞장서서 절대 선생님에게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나도 같이 죽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자신의 믿음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믿음은 어린 여종의 한 마디 말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와 그 환경이 두렵고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환경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진실한 믿음입니다.

신명기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에무나)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시편 33: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에무나). 


행동하는 믿음이란?
첫째, 진실(眞實)한 믿음
둘째, 성실(誠實)한 믿음

시편 89:1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에무나)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성실이란 한자의 훈(訓)은 “정성 성(誠), 열매 실(實)” 이라고 합니다.
성실이란 한자의 뜻은 “정성스럽고 참된” 이라고 합니다.

믿음에는 정성과 참된 것이 필수 조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정성의 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는 기도를 많이 하는 성도들과 신학 지식이 풍부한 성도들 그리고 말을 잘하는 성도들은 많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말씀과 계명대로 실행하는 성도들이 드물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외국에서는 기독교 인구가 20%가 넘으면 기독교 국가로 간주합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기독교 인구가 25%라고 합니다.
한국은 분명 기독교 국가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성공회 목사인 “죤 스토트”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교회와 사회를 둘러본 후에
한국에는 미숙한 크리스천이 많은 것 같다.’ 라고 말했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고 말씀을 부지런히 읽지만 그 말씀과 그 기도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불성실한 신앙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주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믿기 시작한 때부터 즉시 거룩한 삶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중생(重生)하는 시점과 성화(聖化)의 출발점이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세월이 흘러도 도무지 성화되지 않고 변화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아직 중생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고 사랑이 없고 성화가 되지 않는 사람의 믿음은 거짓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없는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원숭이 같은 신앙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앵무새와 같은 신앙입니다.
이제는 분명하게 변해야 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므로 나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행할 수 있는 믿음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을 행동하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은 두 가지 특별한 삶을 고백합니다.

첫째는 진실한 신앙

진실이란 변함이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신앙으로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주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둘째는 성실한 신앙

성실이란 거짓이 섞이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영어로 신시어(sincere)를 "성실한" 이라고 합니다.
신시어의 어원은 라틴어 "시네세라(sinecera)" 라고 합니다.
시네세라는 시네(sine)와 세라(cera) 두 단어가 합성한 단어로 시네(sine)는 없다는 뜻이며,
세라(cera)는 양초, 왁스(wax)를 말합니다.

고대 사회에 조각상(彫刻像)을 마당에 세워두는 것이 부자들의 풍습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각상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가끔 훼손된 조각품을 값싸게 판매하는 상인에게 그와 같은 조각상을 구임하여 마당에 세웠다고 합니다. 훼손된 조각품의 일부분을 왁스로 채우고 마치 완벽한 조각품처럼 장식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뜨거운 햇살에 의해서 훼손된 부분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런 조각품이 시장에 많이 나왔기 때문에 완벽한 조각품에는 반드시 "시네세라(sine cera)" 라는 보증서가 첨부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성실한 신앙이란 조금이라도 거짓이 없는 믿음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처럼 사자굴에 들어가는 신앙,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과 같은 풀무불에 던져질 때에도 주저하지 않는 신앙을 말합니다.


진실과 성실이란 두 기둥 외에 또 하나의 기둥을 찾는다면 "순종"이라고 하겠습니다.

순종하는 믿음

순종이란 내가 이해하고 인정하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내 생각과 내 방법과는 전혀 다르지만 하나님의 방법이며 하나님의 생각이라면 인정하고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인용했던 “믿음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이란 말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그냥 믿음이란 뭐 다른 뜻이 없고 예수님을 믿는 것 아닌가 하고 얼버무려 넘기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을 두고 말씀하실 때 처음부터 단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어 순종케 되는 믿음을 명시하였습니다.

로마서 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로마서 16:26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에무나)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4b)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순종(順從)이란 한자의 훈은 “순할 순(順)” “좇을 종(從)”입니다.
순종이란 뜻은 “다른 사람, 특히 윗사람의 말이나 의견 따위에 순순히 따르는 것.” 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순종이란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순순히 따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마태복음 18:22)”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셨던 말씀입니다. 주를 믿는 성도는 반드시 이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용서하며 살아오셨나요?
더구나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43∼45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믿음이란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못하는 믿음으로 이제까지 주를 믿는다고 자부하며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순종하는 신앙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가르침에도 순종해야 합니다.

히브리 백성 모두가 죽임을 당할 계획이 세워진 때에도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며 삼일 금식을 하고 왕 앞에 나가 하만의 계획을 폭로하여 히브리 민족을 위기에서 구원했던 에스더와 같은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