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히브리서 9:27) / 수요 성서연구 원고 #.2(06 / 17 / 20) 이승혁목사


나의 어머니 김은신권사님의 장례를 준비하며
1928년 12월 21일 -  ? (    년  월 일)


1. 장례를 가족장으로


2. 장례예식을 위한 순서지 만들기

 집례
 입관 예식
 발인 예식
 하관 예식

3. 장지 :  Pinelawn

이영복장로와 합장 




죽음의 사슬을 벗기까지

골로새서 3:10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자의 형상을 좇아 자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젊은 나이에 벌써 성공의 길에 들어선 영국의 한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영국 의사당 앞에서비중 높은 변호를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에 대해 많은 긴장과 부담감을 가진 나머지 지나친 스트레스로 인하여 그만 쓰러지고말았습니다.
그 이후 출세가도를 달리던 그의 인생은 점차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정신착란 증세로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그는 자신이 더럽고 추한 무가치한 존재라고 자학함으로써 자살까지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변에 그를 불쌍히 여기며 관심을 가진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복음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를 쓸모없다고 여기며 자살하려 했던 그가 죽음의 쇠사슬로부터풀려 나오는 데는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의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더럽고 추한 자신의 삶이새로운 삶으로 변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변한 삶의 모습과 그 사랑의 감격을 시로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저 도적 회개하고서 이 샘에 씻었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속함을 얻은 백성은 영생을얻겠네
샘솟듯 하는 피 권세 한없이 있도다"

이 찬송가가 바로 그의 간증의 노래입니다.
그는 바로 윌리엄 카우퍼(William Cowper)로서영국 문학사에 있어서 고전 문학가로 손꼽힐 만한 인물입니다.

스가랴서 13:1
그 날에 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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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죽었다!

잘 죽었다는 말에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긍정적인 의미의 잘 죽었다
둘째는 부정적인 의미의 잘 죽었다

예를 들면 흉악한 범죄자가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는데 그 범죄자가 죽었을 때 '그 사람 잘 죽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죽음은 긍정적인 반응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일생동안 전도자로 살면서 온갖 고생을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잘 죽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고생할 일들이 눈 앞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고인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한 친지의 장례식을 마친 뒤 유가족이 베푼 식사 자리에서 친구들과 나눈 화두였다.
고인은 개인 사업체를 성공적으로 잘 키워 ‘잘 살다’가 떠난 재력가였다.
고인의 동향 친구가 “고인은 ‘웰빙’ 하시다 ‘웰다잉’ 하셨으므로 이 세상에 별로 여한은 없을 것”이라고 요즘 유행어를 인용해 조사를 했다.

우리는 고인을 기리는 이런저런 덕담을 나눴는데 ‘웰빙’과 ‘웰다잉’이 화젯거리가 되었다.
한 친구가 “그거 쉬운 말로 ‘잘살다’가 ‘잘 죽었다’ 아냐?” 한마디 해서 좌중을 웃겼다.
화제는 동사인 ‘살다’와 ‘죽었다’를 수식하는 부사 ‘잘’의 의미에 모아졌다.

복합어인 ‘잘살다’의 사전적 의미는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살다’이다. 고소득, 호화주택, 고급차, 명품 따위로 채워진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연상하면 된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선망하는 삶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은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잘살아 보세”를 외치며 물질적 풍요를 향해 앞만 보고 내달려왔다. ‘잘 먹고 잘 입어 못난 놈 없다’는 속담을 입에 달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경쟁적으로 돈벌이에 매달렸다. 미주 한인사회도 아마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한국이 이제 살만해지니까 국민들도 뒤를 돌아보는 여유를 갖고 물질적 풍요가 목표인 ‘잘살다’의 의미를 재조명해보며 사회적, 정신적, 영적 풍요를 아우르는 웰빙 바람을 통한 삶의 질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삶이 어찌 물질적 풍요로만 충족될 수가 있겠는가?동사를 수식하는 부사인 ‘잘’의 용도는 아주 다양하고 그 의미는 참으로 풍요롭다. 한 글자로 된 단어치고 ‘잘’처럼 유용한 말도 없는 것 같다. “마음을 ‘잘’ 쓰라”면 “마음을 ‘바르고 착하게’ 쓰라”는 의미이다. “잘 봐 달라”에서 ‘잘’은 ‘친절하고 성의 있게”라는 뜻이요, “수박이 ‘잘’ 익었다”면 수박이 ‘어떤 기준에 꼭 맞게’ 익었다고 보면 된다. 이 밖에도 ‘잘’은 익숙하고 능란하게, 자세하고 분명하게, 어렵지 않게, 만족스럽게, 편하고 순조롭게 등 다양한 의미를 따분하고 단조로운 행위에 덧입혀 빛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잘’이 ‘살다’에 붙어 그 의미가 ‘물질적으로 넉넉하게’로 제한돼 버렸다. 웰빙은 복합어 ‘잘살다’를 두 단어 ‘잘’과 ‘살다’로 갈라 ‘잘 살다’로 만들어 ‘잘’의 다양하고 풍성한 의미를 ‘살다’에 접목시키는 사회운동이 아닐까 한다. ‘잘 살다’는 ‘재산과 관계없이 바르게, 훌륭하게 산다’는 뜻이다. 그래서 ‘잘살다’ 죽어도 ‘잘 죽었다’는 치사(?)를 듣기가 어렵다.

웰빙에 이어 유행어가 된 ‘웰다잉’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죽음에 대비하는 삶을 통해 편안한 죽음을 맞자는 것이다. ‘잘 죽기’라고 알기 쉽게 써도 될 듯싶은데 굳이 웰다잉으로 표기하는 이유는 ‘죽음’이 공포와 외면의 대상이요 저주의 대명사처럼 인식되는 금기어인 탓 같다. ‘잘 죽었다’ 소리를 하면 죽은 사람도 벌떡 일어나 화를 낼 판이다. 모두 거쳐 가는 관문인 죽음이 왜 꿈속에서조차 마주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걸까?예일대 철학과 셸리 케이건 교수는 내가 최근 읽은 그의 저서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죽음은 나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는 ‘박탈이론’을 토대로 죽고 나면 삶이 가져다주는 모든 축복을 앗기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주장한다. 케이건 교수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물리론자이다. 나는 그의 이론에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다.

웰빙과 웰다잉 곧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은 별개의 이슈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움이 절실한 영혼들에게 손을 잘 내밀 줄 아는 등 잘 사는 방법을 실천하며 사는 삶이 웰빙이요, 웰빙의 도착역이자 마침표가 곧 웰다잉 아닌가. 나도 좀 잘 살다가 잘 죽었다 소리를 듣고 싶은데 두고 볼 일이다. 이런 묘비명을 남기면 사람들이 너무 튀었다고 하거나 웃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나 잘 살다가 잘 죽어 여기 누웠노라”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사람의 죽음을 일컫는 표현에는 망자(亡者; 생명이 끊어진 사람)를 달래고 유족(遺族)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배려에서 생긴 완곡한 표현이 많다.

일전에 천안함 유족 사망 보도 기사에서 모든 보도매체가 한결같이 '별세'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에 궁금해서 사람의 죽음을 일컫는 다양한 우리말을 '나무위키'를 중심으로 정리해봤다.

붕(崩) : 황제의 죽음을 일컫는 말로 여기에 다른 수식어가 붙는 경우도 있다.

가붕(駕崩), 붕어(崩御), 붕조(崩殂), 천붕(天崩)
등이 그 사례이다.

안가(晏駕) : 붕어(崩御)와 같은 말이다.

빈천(賓天) / 상빈(上賓) : 하늘이나 높은 곳의 손님이 되시다.

안가(晏駕) : 편안히 가마에 오르시다.

등하(登遐) : 먼 곳에 오르시다.

용어(龍馭) : 용을 타다 / 용을 타고 승천하다

조락(殂落) : 제왕의 죽음으로 가장 직설적인 표현이다

승하(昇遐) : 황제나 왕처럼 존귀한 사람의 죽음을 높여 이르던 말로 흔히 재위 중인 왕의 죽음을 일컫는다.

훙(薨): 황후, 왕, 왕후, 상왕, 대비 등에 속하는 계층의 죽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조선의 경우 영조 이전에는 세자의 죽음을 대군과 같이 졸(卒)을 썼으나 조선 영조대왕 대부터는 세자에게도 훙(薨)을 써서 다른 왕자들과 구별했다. 마찬가지로 수식어를 붙여도 된다. 훙서(薨逝), 훙거(薨去) 등으로 사용한다.

승하(昇遐): 재위 중인 왕이 죽었을 때 주로 사용하며, 황제와 왕에게 모두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다.

졸(卒): 생을 마치다는 의미로 실록 등에서 주로 사용하여 조선 영조대왕 이전에는 세자에게도 이 표현을 썼다. 그러니 소현세자는 졸(卒)하였다고 기록된 반면 사도세자는 훙서(薨逝)했다고 기록됐다.

서세(逝世) / 서거(逝去): 인간세계를 떠났다는 의미이며, 서거(逝去)는 요즘도 대통령과 같은 고위 공무원의 죽음에 사용되고 있다.

사거(死去): 죽어서 세상을 떠났다는 의미이며, 그 높임말이 서거(逝去)이다.

타계(他界): 인간세계를 떠나서 다른 세계(저승)로 간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이며, 특히 귀인(貴人)의 죽음을 이르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불교에서 유래한 용어가 아니며, 비슷한 말로 별세(別世)가 있다.

하서(下逝): 죽어서 세상을 떠났다는 의미이지만 사용례를 보지는 못했다.

불록(不祿): 국가에서 주는 월급을 더이상 못 타먹게 됐다는 의미이다. 책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하다.

사망(死亡): 사람의 죽음을 의미하는 한자어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친숙한 말로 주로 행정이나 사무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를 높여 이르는 말로 작고(作故)가 있다. 그러나 어감과는 별개로 이 용어는 사람에게만 쓰일 수 있기 때문에 동물의 죽음에 '사망'이라고 표현할 수 없다.

사(死) / 몰(歿): 일반적인 죽음을 의미하지만 단독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운명(殞命): 사람의 목숨이 끊어졌다는 의미로 사망선고 때나 가끔 듣는 말이다.

절명(絶命): 운명(殞命)과 같은 뜻이지만 좀 더 강렬한 뉘앙스를 갖는다. 운명(殞命)이 보통 조용한 분위기에서 서서히 맞게 된 죽음을 의미한다면, 절명(絶命)은 갑작스런 사고나 급성 질환 등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빠르게 죽음을 당할 때 사용되고 있다.

별세(別世): '윗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높임말로 서세(逝世)가 있으나 거의 쓰이진 않는다. 현재는 '돌아가셨다'라는 의미로 흔히 사용되고 있다.

하세(下世): 세상(世上)을 버린다는 의미로 웃어른이 돌아가심을 일컫는다.

영면(永眠): 영원히 잠든다는 뜻으로 장례에서 주로 듣는 말이다.

폐(斃): 역적이나 죄인, 악인 등의 죽음을 이른다. 폐사(斃死)폐사라고도 한다. 이 폐(斃)라는 한자는 '넘어져 죽다', '고꾸라져 죽다'라는 뜻으로 '아주 비참하고 끔찍하게 죽었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현재는 주로 짐승이나 어패류가 갑자기 죽거나 급격한 기온 변화나 병균 감염으로 소, 오리, 물고기, 조개 따위가 죽는 것을 이르는 말로 가축을 매립 혹은 소각할 때 사용되는 폐사(斃死)가 바로 그것이다.

급사(急死) / 급서(急逝): 갑작스런 죽음을 이르는 말로 급서(急逝)는 급사(急死)의 높임말이다.

요망(夭亡), 요절(夭折): 갑작스러운 죽음을 이르는 말로 주로 젊은 사람이 죽었을 때 사용한다. '일찍 죽을' 요(夭)나 '꺾을' 절(折)이 붙으면 갑작스런 죽음을 의미한다.

순교(殉敎): 특정 종교와 관계없이 어떤 종교를 위해서 또는 종교 활동의 결과로 사망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순국(殉國):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활동의 결과로 사망하거나 국가의 멸망과 명을 같이하여 사망을 택하는 경우에 사용되는 용어이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충정공 민영환(忠正公 閔泳煥, 1861~1905)이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11월 30일 자결하니, 이를 순국(殉國)이라 한다

순직(殉職): 일을 하다가 사망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계급이 있는 직업의 경우 특진하거나 국가유공자로 지정된다. 군인이 비전투 상황에서 일을 하다가 사망하는 것도 순직이라 할 수 있다.

전사(戰死): 군인 등을 비롯한 전투원이 전투 상황에서 공격을 받아 사망함을 일컫는다.

순장(殉葬) / 순사(殉死): 신분이 높은 군주 등이 사망했을 때 따라 죽거나 장사 지낼 때 무덤에 따라 들어가는 일을 일컫는다. 순사(殉死, self-immolation)의 사례는 1829년 12월 4일 영국령 인도(British India)의 일부 지역에서 금지된 인도의 악습인 사티(Sati)가 유명하다. 사티는 힌두교 장례 풍습으로 미망인이 사망한 남편의 화장용 장작더미 위에서 순사(殉死, self-immolation) 했다.

순절(殉節): 과거 중국과 한국에서 인도의 사티와 비슷하게 과부가 죽은 남편에게 절개를 지켜 목숨을 끊은 것을 일컫는다.

취의(就義): '의를 위해 죽다'라는 의미로 주로 의롭거나 대의를 위한 죽음을 일컫는다. 실제 사용례를 보지는 못했다.

사별(死別): 죽어서 이별했다는 의미로 사용되며, 대개의 경우 배우자 사망을 의미하지만 그 외의 가족에 대해서도 사용할 수 있다.

견배(見背): 돌아가시는 어버이를 뵙다는 뜻으로 어버이를 여의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상(喪): 친족의 장례를 이르는 말이었으나 죽음을 일컫는 완곡 어법으로 널리 쓰인다. 조모상, 부친상 등으로 사용된다.

호상(好喪)은 병환 없이 무병장수하며 복을 누리고 오래 산 사람의 상사(喪事)를 일컫는다.

악상(惡喪)은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젊어서 죽은 사람의 상사를 일컬는데 흔히 젊어서 부모보다 먼저 죽은 사람의 상사를 일컫는다. 특히, 후자의 경우를 참혹한 슬픔이라는 의미의 참척(慘慽)이라 일컫는다.

임종(臨終) : 죽음을 맞이함 또는 부모가 돌아가실 때 자식이 그 곁을 지킴 등의 의미로 널리 사용된다.

귀천(歸天) / 귀토(歸土): 하늘/흙으로 돌아가다

사거(死去): 죽어서 세상을 떠나다. 주로 저명한 외국인의 죽음에 사용되는 표현인데, 서거로 대접하기에는 좀 과하고 사망으로 하기에는 미흡한 중간급 저명인물의 자연사에 따라붙는다.

불귀(不歸): 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돌아오지 않다'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불귀의 객(客)이 되다"라는 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유명(幽明)을 달리하다:'죽다'를 완곡하게 일컫는 말이며, ‘유명(幽明)’은 저승과 이승을 일컫는다.

작고(作故): 고인(故人; 옛날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장서(長逝): '영영 가고 돌아오지 아니하다'라는 뜻으로 죽음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다.

극락왕생(極樂往生): '죽어서 극락에서 다시 태어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극락은 아미타불(阿彌陀佛; 대승 불교 정토교의 중심을 이루는 부처로 수행 중에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대원(大願)을 품고 성불하여 극락에서 교화하고 있다는 부처)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로 괴로움이 없고 지극히 안락하며 자유로운 세상을 일컫는다.

가학서거(駕鶴西去) 또는 가학서유(駕鶴西游): '선인이 득도하여 학을 타고 서방 극락 세계로 날아가다'라는 의미로 존경 받던 사람의 죽음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다.

좌화(坐化): 승려의 죽음을 일컫는 말로 '(승려가) 앉은 채로 죽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열반(涅槃): 승려의 죽음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으며, 본래의 의미는 모든 번뇌의 얽매임에서 벗어나고 진리를 깨달아 불생불멸의 법을 체득한 경지를 일컫는데, 이러한 열반이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 목적이다.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의 음차어이다.

입적(入寂): 승려의 죽음을 완곡하게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으며, 비슷한 말로는 입멸(入滅), 귀적(歸寂), 적멸(寂滅), 원적(圓寂), 멸도(滅度) 등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반진(反眞): 도교에서 죽음을 이르는 말이다.

등선(登仙):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되다'라는 의미이며, 존귀한 사람의 죽음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우화(羽化): '번데기가 날개 있는 성충이 되다' 또는 '사람의 몸에 날개가 돋아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되다'라는 의미로 죽음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귀서(歸西): '귀천(歸天)'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인기(咽氣): '숨을 거두다', '죽다' 등의 의미이다.

소천(召天): (개신교) '하나님의 부름을 받다'라는 뜻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용어이다.

선종(善終): 문자 그대로는 '천수(天壽)를 다하다', '끝마무리를 잘하다'. '유종의 미를 거두다' 등으로 사용되지만, 가톨릭에서는 임종 때 성사를 받아 큰 죄가 없는 상태에서 죽는 일을 일컫는다. 즉. 가톨릭에서 선종은 착하게 살다가 복되게 마친다는 뜻의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준말이다.

안식(安息): 문자 그대로 '편히 쉬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정교회에서는 신자의 죽음을 일컫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는 죽음 후 최후의 심판과 부활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다.

승화(昇華): 원래는 고체가 곧바로 기체가 되는 현상을 뜻하는데, 통일교에서 죽음을 승화라고 말하며 장례식을 승화식이라고 한다. 국내 화장장 중에 승화원이란 이름을 붙인 곳이 있다.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용례이다.

조천(朝天): 대종교에서 도가 높은 이의 죽음을 이르는 말이다.

환원(還元): 천도교에서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대로 사람의 죽음을 일컫는 말은 참으로 다양하다. 내가 이 말을 모두 알고 사용하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아래의 보도 사례에서 보면, 보도매체에 관계없이 한결같이 모두 '별세'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궁금했다. 사람의 사망을 알리는 표현에 어떤 것이 있는지.



<목인은 죽은 이의 길동무들이다>

목인이란 말이 생소하지요?
굿, 불교 의식, 상여에 꽂는 나무 인형, 그 밖에 솟대나 혼례식에 쓰는 기러기 등 나무로 조각한 것들을 넓은 의미에서 목인이라 하지만, 오늘은 상여에 꽂은 인형으로 좁혀서 ‘목인’이라 칭하겠습니다. 그 옛날 죽은 이를 보내는 일이 마을 전체의 일이었을 때, 마을마다 목상여를 만들어 상엿집에 보관해 두고 썼습니다. 그러니까 이 목상여를 장식했던 동물, 꽃, 사람들을 목인이라 하는 것이지요.

이들은 죽은 이의 길동무입니다. 살았을 때 어땠는지는 몰라도 죽어서는 다 같은 사람이라는 참으로 평등주의적인 생각을 우리 조상들은 했었지요. 그래서 보통 사람이 죽어도 화려하게 꾸민 상여에 태워 저승길이 초라하지 않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죽은 이의 영혼에 대한 예의이면서 동시에 이승에 남지도 저승에 가지도 못하는 주검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지요.


호랑이를 문 용과 흥부놀부 용수판

<하늘나라로 갈 때는 용을 타고 가셔요>
상여의 상단 앞뒤로 반달 모양의 용수판이란 것을 부착합니다. 당연히 용의 모습을 하고 있고, 그 모습도 각양각색이더군요. 물고기를 문 용, 호랑이를 문 용, 비익조를 새긴 용수판, 흥부놀부 용수판도 있습니다. 심지어 얼굴이 새까매서인지 ‘오바마’라 이름 붙인 용수판도 있더군요. 다 각각 바라는 바를 담았을까요? 아무래도 바닷가 마을에선 물고기, 심지어 낙지를 무는 용이 죽은 이를 실어다 주길 바랐을 테고, 산골마을 사람들은 호랑이를 문 용이 데려다 주길 바랐을 테지요. 20세기로 갈수록 용수판의 그림은 회화성이 두드러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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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용은 임금 즉, 권력을 상징하는 동물. 그리고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신. 이런 용도 죽음 앞에서는 만인의 용이 되어 저승길의 길잡이가 되어 준다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목인들은 왜 호랑이를 탔나?>
호랑이하면 떠오르는 것은?
산신령 또는 산신령의 심부름꾼. 산신도를 보면 대개 산신령이 호랑이를 타고 있습니다. 이것은 도교의 영향으로 산신이 사람으로 표현되면서 호랑이가 심부름꾼쯤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을 공동체 신앙의 하나로 산신제를 올릴 때 호랑이는 산신으로 신격화됩니다. 맹수 중의 맹수 호랑이는 사람들에게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기 때문이지요

울고 넘는다는 박달재 아래에 있던 외갓집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 호랑이가 나온다는 고개를 넘으려면 사촌들과 무리지어 나무칼까지 차고 우르르 달려서 넘어 갔더랬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옛이야기의 주인공쯤으로 감정이입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래도 머릿속에 오만 상상을 하며 공포에 질렸고, 때론 그 공포를 즐겼던 기억입니다.

목인들 가운데 유난히 호랑이를 탄 사람들이 많은 것은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뜻과 더불어 죽은 이의 신분과 지위를 높여 주려는 의미가 있었던 것이지요. 호랑이에 앉은 망자는 어떤 어려움 없이 저승길로 인도되었을 것입니다.


망치를 든 저승사자와 도끼를 든 순사

<죽은 이를 지켜주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

죽은 이를 하늘로 인도하는 목인들은 봉황이나 학을 탄 선비, 동자, 산신령들이 많았습니다.
봉황이나 학은 태평성대를 알리고 고고한 인품을 자랑하는 금조(錦鳥)들이고, 그 신성한 금조를 탄 이들의 신분도 범상치는 않았습니다. 평생을 개똥밭에서 참외 구르듯 살았는지 몰라도, 그곳에서도 인물 난다고, 학식 높은 선비가 되고 힘센 장수가 되어 저승길을 함께 합니다. 저들이 망자 자신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그 중 일제 강점기 때는 순사가 등장하네요.
이때쯤 되면 붉은 낯빛에 망치를 든 저승사자보다 말 탄 일본 순사가 더욱 두려웠을 것입니다.
상여에 부착하는 목인조차 시대 인식의 소산임을 느끼게 됩니다.

남사당패 목인

<잘 죽었구나~ 가는 길 신나게 한판 놀아보세>
가슴 찡하게 다가온 목인들도 있었습니다.
온 식구를 목인으로 만들어 장식한 것은 이승에 너무 많은 미련이 남아서였을까요?
그런 미련을 무 자르듯 떨치고 저세상 가는 길 한판 놀아보자는 남사당패 목인들도 있더군요.
슬픔에 잠겨야 할 초상집에서 “아이고 아이고 잘 죽었다. ……뭐를 많이 벌어놔서 그다지도 잘 죽었노. 속이 다 시원하지!”하고 넋두리를 하듯이 구정지게 노래를 합니다. 이런 상여놀이를 진도에서는 ‘다시래기’라고 하고, 경상도에서는 ‘대돋음’, 전라도에서는 ‘상여 어른다’고 하네요. 다시래기란 말 자체에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 다함께 어울려 논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니,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을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아예, 남사당 놀이판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살판 땅재주놀음을 펼치는 이를 보세요. 힘껏 물구나무선 종아리에 팽팽한 기운이 오르고, ‘삘릴리’ 날라리 소리로 하늘로 죽음을 띄워 보냅니다.

삶과 죽음, 슬픔과 흥겨움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어쩌면 우리는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한바탕 살다 간 우리네 인생처럼 그렇게 한바탕 놀다 가는 것이지요. 한 사람의 죽음이 공동체의 문화로 승화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혼백을 실어 나르는 가마를 영여, 또는 가마채가 허리까지 온다 하여 요여라고 한다.

<상여는 영여의 뒤를 따라간다>
색깔 고운 작은 가마엔 누가 탈까요? 돌아가신 분의 혼백과 신주를 태워 오는 가마입니다. 상여가 주검을 실어 나르는 가마라면 영여는 영혼을 실어 가는 것입니다. 가끔 영구차 앞에 죽은 이의 사진이나 혼백을 실은 승용차가 앞장서 가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영어도 이젠 승용차가 대신 하는 것이지요.

보통 영여(요여)의 지붕에는 녹색 바탕에 연꽃을 조각하고 옆에도 연꽃망울을 장식한다는데, 목인 박물관의 요여는 높이 있어서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꽃은 다시 피어나는 재생의 의미. 연꽃 또한 영혼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불교의 연화화생, 심청이가 연꽃 속에서 살아오는 것 등이 모두 부활의 의미겠지요. 무엇보다 영혼을 주검보다 우선했던 옛사람들의 생각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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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1. https://blog.naver.com/sadfog/120019479523




죽음이란 무엇인가?
- 성경적 죽음에 대한 이해

죽음이란 사회적 연결망이 끊어지고 하나님 나라의 사회적 연결망은 연결되는 것이다!

연결망이 끊어지면 ‘대체(代替) 불능
오직 그 사람과는 더 이상 앞으로는 어떤 추억도 관계도 가질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슬퍼합니다.

여러 해 전에 송재천목사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 아들 송천호군이 제게 카톡으로 아버지 목사님이 돌아가셨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아들 송천호군이 아버지의 휴대전화를 사용하여 아버지와 연결되었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한 것입니다. 서로 연결하던 연결망이 죽음으로 끊어졌기 때문에 아들이 대신하여 연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이란 세상에서 연락하던 사회적 연결망을 끊어졌지만 주님 나라에서 신령한 연락망은 개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크리스천인 한 의사가 중병에 걸린 어떤 환자를 찾아 갔습니다.
그 환자가 "의사 선생님, 제가 회복할 수 을까있요?"하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글쎄요, 아마 어려울 겁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환자는 "나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무덤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선생님은 아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솔직히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죽음 저 건너편에 있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열리더니 의사가 기르는 개가 뛰어 들어와 주인에게 뛰어올라 꼬리를 치면서 좋아했습니다.

그때 의사는 환자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셨지요. 이개가 이 방안에 들어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자기 주인이 여기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아무 두려움 없이 뛰어 들어온 것입니다. 죽음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는 말씀드릴 수가 없지만 한 가지 사실, 곧 우리 주님께서 그곳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족합니다. 아무 생각마시고 그를 믿기만 하십시오. 문이 열릴 때 두려움 없이 들어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
"이것이 나에게는 마지막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새로운 삶은 시작이다!"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 나는 마지막을 맞이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죽은 후에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죽음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이다.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어떤 질병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Precious in the sight of the LORD is the death of his saint. 

모든 사람들이 죽어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죽음은 귀중하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성도의 죽음이 귀중한 것은 이 세상에서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약속에 믿음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죽음의 세 가지 의미

죽음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 
인간의 생명은 인간 속에 본래부터 주어져 있는 내재적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욥기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교제할 때만 인간은 참된 삶을 살 수 있다. 

성경적 의미에서 죽음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어 그로부터 분리되는 상태”를 뜻한다.
성경은 죽음의 이러한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제시한다.

첫째, 육체적 죽음(Physical death)

육체적 죽음이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멈추었지만 영혼은 여전히 활동합니다.
- 창세기 3:19, 시편 146:4, 전도서 12:7; 야고보서 2:26

창세기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시편 146:4,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전도서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러나 육체적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나 중지가 아니라 생명과 결합된 육체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죽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는 죄의 형벌로서 인간의 생명에 주어진 것이다. 성경은 이를 죽음이 죄로 인해 인간 세계에 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한다(롬 5:12, 17).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성경은 죽음이 인간이 누리는 생명과는 대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낯설고 이질적이며 심지어 적대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죽음은 범죄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시 90:7, 11), 심판(롬 1:32), 정죄(롬 5:16), 저주(갈 3:13)로 표현된다. 

시편 90: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시편 90:11,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로마서 1: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로마서 5: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 결과 육체적 죽음에는 일반적으로 두려움과 공포가 수반된다. 이 고찰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원래 상태가 해체나 사멸의 씨앗을 지니고 있었다는 생각이 완전히 전적으로 배제된다는 사실은 옳은 생각이다. 또한 죄의 결과와 형벌로서 육체가 죽음을 맞게 된다는 사실에서 육체적 죽음은 영혼의 죽음의 결과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둘째, 영적 죽음(Spiritual death)

영적 죽음이란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죄의 결과와 형벌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그로 끊어져서 영적 생명을 상실한 상태를 가리킨다.
- 에베소서  2:1∼2; 에스겔 18:4, 20; 로마서  6:23). 

에베소서 2:1∼2,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에스겔 18: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 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에스겔 18:20,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 아들은 아비의 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 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영적 죽음은 영혼의 멸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 죄의 형벌로서 죄책을 짊어지고 고통을 받게 되며 삶의 모든 측면에서 죄로 오염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영적 죽음으로 인해 인간은 참된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망각하고 그분을 떠나 자신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삼고 자기중심적 삶을 살아가게 될 따름이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만족과 평안을 상실한 채 죄악의 깊은 수렁 속에서 번민과 방황으로 점철되어지는 삶이 아닌가?

인간의 영혼은 수많은 사상, 열정, 욕망으로 인해 뒤엉켜서 삶은 혼란과 실망의 장이 되어 버렸고 그 결과 피조물 전체가 인간이 초래한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되었다(롬 8:20, 22). 죄의 결과로 주어진 삶의 엄청난 고통과 번민과 방황은 인생의 참되고 유일한 희망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요청할 따름이다. 

로마서 8: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로마서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셋째, 영원한 죽음(Eternal death)

영원한 죽음을 요한계시록에서는 “둘째 사망(the second death)” 이라고 합니다(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Then death and Hades were thrown into the lake of fire. The lake of fire is the second death.   

영원한 죽음을 다른 말로 둘째 사망(the second death)이라고 합니다.
영혼의 죽음의 최종결과로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생명력을 상실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아래 거하게 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는 가장 두려운 의미에서의 죽음이며 여기에는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영혼의 고통, 즉 양심의 가책과 회오가 지속적으로 뒤따른다. 

요한은 이를 고통의 연기가 영원토록 타오르게 될 것이라고 표현했다(계 14: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영원한 죽음은 결코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영혼과 육체의 영원한 멸절(annihilatio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소멸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과 무서운 진노 아래서 영원히 고통당하지만 결코 죽지 아니하고 불가피하게 영원히 살게 되는 상태, 죽기를 아무리 원해도 죽을 수 없는 상태(non posse non mori)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영원한 죽음의 상태가 가시화되고 현실화되는 상태가 바로 성경이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지옥’에 해당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창세기 4장 26절의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에노스(Enos)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은 “남자” 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라고 합니다.
에노스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세상과 구별된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오늘날 여호와의 이름은 "예수"라고 하셨습니다(아버지의 이름 - 요한복음 17:6, 11-12, .26)

왜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을 불러야 할까요?

요한복음 14:2-3,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In my Father's house are many rooms; if it were not so, I would have told you. I am going there to prepare a place for you.
And if I go and prepare a place for you, I will come back and take you to be with me that you also may be where I am.

죽은 후에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것은 내가 있을 집을 찾지 못한 것이다.
세상에서 자기 집을 찾지 못할 때는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 병을 "치매"라고 한다면 죽은 후에 갈 곳을 모르는 사람은 "영적 치매"에 걸린 것이라고 하겠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는 사람은 '에노스'처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것처럼 오늘날도 내가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될 때 예수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죽음, 그 자체가 메시지

사람의 일생을 사자성어로 표현한다면 “생로병사(生老病死)” 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것처럼 “생로병사(生老病死)”란 “태어나서 나이가 들어 병들고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생로병(生老病)”까지는 늘 가깝게 생각하면서도 “사(死)”에 대해서는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시간 속에 있는 네 개의 기둥’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생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노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난만큼 육체가 약하고 쇄하여 가는 것입니다.
병은 약한 육체가 회복할 수 없는 질병이 걸려 고통하는 것입니다.
사는 마지막 죽음입니다.
그런데도 죽음을 심각하게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암에 걸려 수술을 받은 후에 죽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도 죽는구나!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공부하고 배워야 하겠다.
그 결과 죽음 앞에서는 내가 예수를 진실하게 믿었는가?
이 질문에 진실한 대답을 하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세 가지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첫째는 내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
둘째는 혼자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
셋째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

죽음은 두렵다. 그래서 대면하고 싶지 않다. 죽음이 보내는 시선을 피하려고만 한다.

반대로 죽음에 대해 모르는 것도 세 가지 있다.

첫째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둘째는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셋째는 죽을 장소를 알지 못한다.

*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호라티우스”의 라틴어 시 한 구절로부터 유래한 말이다.
현재를 잡아라(Seize the day)” 라는 의미로 알려져 있다.
본래, 단어 그대로 “카르페(Carpe)”는 “뽑다”를 의미하는 “카르포(Carpo)”의 명령형이었으나, “오비디우스”는 “즐기다, 잡다, 사용하다, 이용하다” 라는 뜻의 단어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디엠(Diem)”은 “날”을 의미하는 “디에스(dies)”의 목적격으로, “디에스”의 목적어이다. 

“호라티우스”의 “현재를 잡아라,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의 부분 구절이다. 이 노래는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호라티우스”가 에피쿠로스 학파에 속하였으므로, 보통 이 구절은 그와 연계하여 이해되고 있다.

카르페 디엠이란 내가 살아있을 때에 예수를 진실하게 믿으라!

*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를 뜻하는 라틴어 낱말이다.

옛날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외치게 했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 라는 뜻인데,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 이런 의미에서 생겨난 풍습이라고 한다.

한편 이러한 맥락에서 17세기 네델란드 정물화 화풍인 ‘바니타스 화풍’도 영향 받았다고 여겨진다.

메멘토 모리란 사무엘처럼 사망과 나의 사이는 한걸음 뿐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0:3b,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나바호 인디안 족들의 메멘토 모리 

나바호 인디언 부족에게서도 이와 같은 “메멘토 모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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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에서 "죽음"

- 10회(1:18, 2:11, 23, 6:8, 18:8, 20:6, 13, 14, 21:4,8)

- 사망(死亡) : 죽을 사(사), 망할 망(亡), 잃을 망(亡)

1:18(네크로스) 3498 / νεκρὸς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I am the Living One; I was dead, and behold I am alive for ever and ever! And I hold the keys of death and Hades.

* dead, lifeless, a dead body, a corpse.

2:11(다나토스) 2288 / θάνατος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He who has an ear, let him hear what the Spirit says to the churches. He who overcomes will not be hurt at all by the second death.

* death, physical or spiritual death

2:23, 6:8, 18:8, 20:6, 13, 14, 21:4, 8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6:8, 내가 보매 청황색 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18:8,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참조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 요한계시록에서 "죽음(死亡)"이란 단어는 "(네크로스) 3498 / νεκρὸς" "(다나토스) 2288 / θάνατος"라고 합니다.
그런데 '네크로스'는 육체적인 죽음의 의미로 단 한 번 사용되었습니다(1:18).
반면에 '다나코스'라는 죽음은 영적 죽음 특히 둘째 사망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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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 죽음과 장례

생명

유대교에서 삶은 그 어떤 것보다 가치가 있다.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한 생명을 취하는 것은 온 세상을 파괴하는 것과 같고,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은 온 세상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탈무드는 말한다.

613개 계명 중 살인, 우상숭배, 근친상간과 간음은 생명을 구하는 데 범해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것이기에 유일하게 금지된 것들이다. 그러나 가끔 생명을 구할 때 필요하다면 계명을 범하여도 된다. 심각한 병자나 노동을 하는 여인은 금식하는 것이 생명을 위험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대속죄일에 금식하면 안 된다. 또한 안식일에 많은 것이 금지되어 있더라도, 의사는 안식일에도 긴급전화를 받을 수 있다. 어머니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유산도 가능하다(유대교 법에 의하면 태어나지 않은 아기는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기에 어머니의 생명이 우선시 된다.).

생명은 너무나 가치 있기에 그것을 해하는 어떤 것도, 고통을 경감시키는 것 조차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안락사, 자살 그리고 자살을 돕는 행위도 유대교법에서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탈무드는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이라면 사람의 팔을 자르는 것조차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갑작스런, 우연한 죽음, 고통스러워하는 병자에게 유대교법은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금하도록 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유대교법이 생명을 연장시키는 특정한 수단을 거부하거나 “플러그를 뽑는 것(안락사)”을 허용한다.

죽음

비록 일찍 죽거나 불행하게 죽더라도 유대교에서 죽음은 비극이 아니다. 죽음은 자연 현상이다. 우리의 삶과도 같은 죽음은 의미를 가지며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는 일부이다. 게다가 유대교는 가치 있는 삶을 산 사람에게 보상이 주어질 내세와 다시 올 세상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유대교에서 애도하는 행위는 외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혐오감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죽음과 애도에 관련된 유대인 행동들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진다.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한 존경(kavod ha-met)과 죽은 자를 그리워할 산 자들에 대한 위로(nihum avelim)이다.

 

시신을 다루는 방법

 

사람이 죽은 후에는 눈을 감겨야 하고, 시신은 바닥에 잘 뉘어 덮고, 그 옆에 초를 밝혀둔다. 고인에 대한 존경하는 의미로써 매장 될 때까지 시신은 결코 홀로 두어서는 안 된다. 고인 옆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쇼므림(shomerim; ‘지키는 자들’)이라 부른다.

고인을 존경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쇼므림은 먹어서도 마셔도 안 되며, 시신과 함께 하는 한 계명도 지켜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은 고인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데, 고인이 된 자는 이런 것을 하나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공동체들은 ‘헤브라 카디샤’ (chevra kaddisha, the holy society)라고 알려진 시신을 다루는 조직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이다. 이런 일은 결코 갚을 수 없는 것이기에 아주 대단히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검시는 시신에 대한 모독이기에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생명을 구하는 일이거나 법원에서 요구할 경우에는 가능하다. 검시가 하여야만 할 때에는 반드시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시신의 존재는 제의적 부정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코헨(제사장)은 시신이 있는 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시신과 함께 있던 사람들을 집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는다. 이는 영적인 부정을 제거하는 상징적인 행동이지 육체적인 부정을 씻는 것은 아니다. 육체적으로 시신을 접촉했건 간에 관계 없이 적용된다.

 


장례 준비에서 시신은 온전히 깨끗하게 하고 단순하고 순전한 아마포 수의로 감싼다.
현인들이 수의나 관은 단순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도 장례에 있어서 부자들보다 못한 대우를 받지 않게 되었다.
이제 고인에게 필요 없어진 기도보(tallit)로 시신을 감싼다.
시신을 방부처리 하지도 않고, 시신에서 장기나 분비물을 제거해서도 안 된다.

 

시신은 화장되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땅에 묻혀야 한다.
관이 필요하다면 시신이 땅과 접촉할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야 한다.
장례식에서 시신이 전시되어서는 안 된다.
유대교법에 관을 열고 식을 진행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법에 의하면 장례식에 친구들뿐 아니라 고인과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들도 와서 조롱할 수 있기 때문에 시신을 보여주는 것은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죽음과 장례 2 - 애도 유대교 / 이스라엘 정보  

2010. 6. 25. 3:17

https://blog.naver.com/world700/90089889308

Mourning 애도

 

유대인들의 애도하는 것은 장례의 슬픔을 감소시키도록 몇몇 기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상을 당한 사람들이 비관적인 표현을 해도 되며, 정상적 생활로 돌아가기까지 애도 기간에는 슬픔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게 되어있다.

 

 

가까운 가족(부모, 형제, 배우자나 자녀)이 먼저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첫 슬픔의 전통적 표현으로 옷을 찢는다. 부모께서 돌아가셨을 때에는 심장 있는 부분을 찢고, 다른 친척일 때에는 오른편을 찢는다. 이렇게 옷을 찢는 것을 ‘케리야’ (keriyah’ "tearing")라고 한다. 애도자는 가족의 생명을 취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참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그리며 축복문을 읽는다.

죽음에서 장례까지, 애도자(고인의 가족을 말함)의 외로운 책임감은 고인과 장례 준비를 위한 것이다. 이 기간을 ‘아니눗’(aninut)이라 한다. 이 기간 동안 애도자들은 모든 긍정적인 율법에 대하여 지키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애도가 모든 것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보통 이 기간 하루나 이틀이다. 유대교에서 장례는 신속하게 처리한다.

 

 

 

이 아니눗 기간 동안 가족은 외로이 남아 슬픔을 충분히 표현하도록 한다. 또한 이 기간에 추모객들은 전화를 하거나 방문해서는 안 된다.
 
매장한 후 가까운 가족이나 이웃 또는 친구들이 애도자들을 위해 처음 식사(the se'udat havra'ah; 추모객의 식사)를 준비한다. 전통적으로 이 식사는 계란(생명의 상징)과 빵으로 되어 있다. 식사는 그 가족들만을 위한 것고 추모객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런 순서 이후에는 추모객들이 전화를 해도 된다.

애도 기간 이후는 쉬바(shiva, ‘일곱’, 7일간이기 때문이다). 쉬바는 고인의 부모, 자녀, 배우자 그리고 형제들이 되도록이면 고인의 집에 모두 모여 지킨다. 쉬바는 매장한 날 시작되며 이후 7일간 계속된다. 애도자들은 일반적인 의자 대신에 등받이 없는 낮은 의자나 바닥에 앉고, 가죽으로 만든 신을 신지 않으며, 이발하거나 면도도 하지 않는다. 화장도, 일도 안 하며, 안락이나 기쁨을 위한 것도 하지 않고, 목욕, 성관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거나 토라도 공부하지 않는다(슬픔과 애도와 관련된 토라는 예외이다). 애도자들은 사망소식이나 장례식 때에 찢은 옷을 입고 있다. 집안에 있는 거울은 덮어 가린다. 기도 예식은 쉬바 중에 있으며, 친구, 이웃과 친척들이 모여 ‘미니안’(minyan, 10명이 모여야 한다.)을 위한 정족수를 채운다.

 

 

애도 기간 중에 축제가 시작되어 겹칠 때면, 애도를 멈춘다. 그러나 만약 축제기간 중에 상을 당하였다면, 애도는 축제기간 뒤로 미뤄진다. 쉬바기간에 안식일이 있어도 7일 중 하루로 계산하고 애도 기간을 끝내지 않는다. 이 기간 중 모든 사람이 애도하는 행위(찢어진 옷을 입거나 신을 신지 않는 것)는 연기되고, 개인적으로 하는 것은 계속 할 수 있다.

다음 애도하는 것은 30일, 즉 ‘쉴로쉼’(shloshim, 매장 후 30일이기 때문이다.)이다. 이 기간 동안 애도자들은 파티나 축하연에 참석하지 않고, 이발이나 면도, 그리고 음악을 듣는 것도 금한다.
마지막 공식적인 애도는 ‘아벨룻’이다. 이것은 부모님을 위해서만 하는 것이다. 이 기간은 매장 후 12개월이다. 그때에 애도자들은 파티, 축하연, 공연이나 콘서트에 참석하지 않는다. 매장 후 11개월 동안 고인의 아들은 애도자의 카디쉬(kaddish, 애도자의 기도)를 매일 읽는다.

 

 

아벨룻 이후 모든 것이 마쳐지며, 고인의 가족은 공식적인 애도기간이 끝난다. 그러나 고인을 추모하는 몇 가지가 남아 있기도 하다. 매년, 추모 1주년 가족은 고인의 ‘야흐르쩨잇’(이디쉬어, ‘1주년’)을 지킨다. 야흐르쩨잇 때에 아들들은 카디쉬를 읽고 가능하다면 회당에서 ‘알리야’(aliyah, 토라 읽기를 축복함)를 한다. 그리고 모든 애도자들은 고인을 기리며 24시간 초를 밝힌다. 게다가 대속죄일, 슈미니 아쩨렛, 유월절 마지막날, 그리고 맥추절 예식에서 회당에서 하프타라 읽기가 끝난 후 ‘이쯔코르’(“그가 기억하기를……”)라는 애도자의 기도를 읽으며 끝맺는다. 야흐르쩨잇 촛대는 이런 날들에도 켜둔다. 
 

 


애도자를 방문하는 손님들은 상투적인 표현이나 진부한 것으로 슬픔을 표현해서는 안 된다. 손님은 애도자가 먼저 말을 걸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고인에 대한 이야기에서 화제를 전환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애도 기간의 목적인 애도자의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 제한 될 수 있다. 반면에 전화하는 사람들은 고인에 대한 대화를 더 하도록 도와야 한다.


상가를 떠날 때에 손님들은 전통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예루살렘과 시온의 모든 애도자들에게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Kaddish

 

카디쉬

קדיש

Aramaic: "holy"



카디쉬는 보통 애도자의 기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카디쉬 기도는 평상시에도 많이 사용되는 것이고, 기도 자체는 죽음이나 애도와는 관련이 없다. 기도는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창조하신 세상에서 그의 이름이 높이 들리며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여러분의 생명의 날 동안 그의 왕권으로 다스림을 받으소서…....”. 그리고 이런 맥락이 계속 된다. 애도자의 진정한 기도는 장례 때에 무덤에서 읊는 '엘 몰라이 라카밈(El Molai Rachamim)'이다.




그러면 왜 애도자들이 카디쉬를 읊조리나?

 

부모님을 여읜 것처럼 큰 상실 이후에 여러분은 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거나, 하나님의 부정의에 대해 소리칠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반면 유대교는 공공모임(정족수 10명이 채워져야 하는 'minyan' 앞에서), 매일 애도자를 일으켜 세우고 이런 상실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다시 확신시킨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고인의 공적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고인은 개인적인 상실감 앞에서 이런 믿음을 보일 수 있는 자녀를 양육한 좋은 부모여야 하기 때문이다.



가자지역의 평화를 위하여 2008년 1월 텔 하쇼메르 병원에서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지도자들이 모여 함께 기도하였다. 사진은 랍비가 죽은 자들을 위해 El Male Rahamim기도문을 읽고 있다.





그러면 애도 기간이 12개월인데, 왜 카디쉬는 11개월만 읊는가?

 

유대인들 전통에 의하면 영혼은 다가올 세상에 들어가기 전 자신을 정화시키는 기간을 보내야만 한다. 가장 악한 사람이 정결케 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최장 12개월이다. 카디쉬를 읊는 12개월은 그의 부모가 12개월이 필요한 유형의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할 수도 있다. 이런 암시를 피하기 위해서 현인들은 자녀들이 카디쉬를 11개월만 읊도록 정하였다.
부모 뿐 아니라 가까운 친척을 위해서 카디쉬를 읊을 수 있는 사람은 그의 부모가 돌아가신 사람에 한 한다.


Tombstones 묘비


유대교법에 묘비는 꼭 필요하다. 그래야 고인이 잊혀지지 않을 것이고, 무덤이 더럽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공동체에서는 12개월의 애도기간을 마치기까지 묘비를 덮어두거나, 또는 묘비를 세우는 것을 미루는 관습이 있기도 하다. 이런 관습 속에는 매일 매일 애도하는 가운데 죽은 자가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런 관습을 지키는 공동체에서는 묘비를 개막하는 의식을 일반적으로 행하고 있다.

묘를 참배하러 와서 작은 돌을 올려놓는 관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관습은 쉰들러리스트라는 영화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것은 전통적인 유대인들 사이에서 조차도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몇몇은 어떻게 유래되었는지 의문시 하는 사람도 있다. 꽃과 달리 돌은 시들지도 않고 바람에 날리지도 않는다. 어떤 곳에서는 묘비를 세워야 하는데, 묘비로 보이는 것은 더럽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묘비에는 무엇을 쓰는가? (참고,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다)

영어로 된 묘비처럼 대부분 아주 간단한 내용을 히브리어로 쓴다.
그림은 전형적인 유대식 묘비이다.

제일 위에 있는 약자 ‘페이-눈’(פ''נ)은 ‘포 니트만’이나 ‘포 니크바르’를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 … 누워있다.”라는 뜻이다.
인용하는 표시처럼 보이는 점은 약자를 쓸 때에 사용하는 방법이다.

다음 줄은 고인의 이름을 쓰되, 형식은 ‘아무개(고인의 이름), 누구의 아들 또는 딸’로 표기한다.
“…의 아들”은 ‘벤(בן)’ 또는 ‘바르(בר)’라고 쓰며,
“…의 딸”은 ‘바트(בת)’라 한다.
묘비 위에 “Esther bat Mordecai”(에스더, 모르드개의 딸)로 표기한다.
때로 이름 앞에 레쉬(ר)가 나오는데 이는 “Mr.(미스터)”를 뜻한다. 때로 이런 것들이 이름 앞에 있어 그 신분을 나타내기도 한다. 제사장은 하 코헤인(הכהן), 레위인은 하 레비(הלוי), 또 랍비는 하 라브(הרב)로 표기한다.


세 번째 줄은 사망일자를 표시한다. ‘눈-페이(נ''פ)’로 시작하는 줄로 날짜, 달, 년도 순으로 표시된다. 날짜와 연도는 히브리어 숫자로 표시한다. 달 이름에는 그 앞에 ‘베이트(ב, “of”의 뜻)’를 붙여서 사용한다. 위 예제로 나온 묘비는 “5761년 쉬바트 월 18일”로 되어 있다. 요드-헤트=10+8 = 18, 쉰-베이트-타브()는 달 이름으로 쉬바트를 의미한다. 타브-쉰-싸멕-알렙= 400+300+60+1 = 761(5000은 있는 것으로 가정한다.)

마지막 줄은 “테헤 니슈마타흐 쩨루라흐 비쯔로르 하카임”의 약자다. 이는 “그녀의 영혼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기를 기원한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묘비에서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상징들(메노라=촛대, 마겐 다비드=다윗의 별, 두루마리 성경, 사자, 십계명 두 돌판)을 볼 수 있다. 이런 상징물은 고인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고, 단지 유대교인이라는 것만 나타낼 뿐이다. 하지만 만약 두 손이 이런 모습으로 있는 상징물이 있다면, 일반적으로 이는 고인이 제사장이었다는 것을 표시한다. 이런 손 모양은 제사장들이 한 해에 일정한 날 회중들을 축복할 때 사용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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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스님은 “인간은 되어 가다가 죽는다.”

인간의 삶을 됨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죽음은 됨의 과정의 막을 내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죽음은 됨의 과정을 끝내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과 같습니다.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인간은 본래부터 뭐든지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고 이것은 바로 궁금증이라고 하며
새로운 것을 알아 가려는 본능이 있다

인간에게는 배움의 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교육학에서는 배움의 본능에 대해서 세 가지로 정의합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죄
둘째는 알면서 행하지 않는 죄
셋째는 알면서도 가르치지 않는 죄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 배워야 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죽음을 가르치려 하지 않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회에 성경적인 죽음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죽음은 주로 장례식장에 생각할 수 있는 주제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죽음에 대한 가르침이 없다면 어디에서 죽음에 대한 지식을 얻겠습니까?

나이로 살지 말고 생각으로 살라”는 말도 있다.
이는 나이가 아닌 열린 생각으로 세상을 보라는 뜻으로 고착화된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사망(死亡) - 죽을 사(死), 잃을 망(亡), 망할 망(亡)

1. 사람의 목숨이 끊어짐
2. 자연인이 생명을 잃음

영어 - Death
헬라어 - 네크로스(nekros, νεκρός, 3498) dead  

죽음에 대한 표현을 살펴보겠습니다.
서거(逝去), 별세(別世), 타계(他界), 영면(永眠), 작고(作故) 등이 있다.

서거”는 사거(死去, 죽어서 세상을 떠남)의 높임말로 주로 대통령 같은 정치 지도자나 종교 지도자, 위대한 예술가 등 사회적으로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 사람에게 사용된다.

별세”는 '세상을 하직한다'는 뜻으로 윗사람에게 가장 많이 쓰인다.

타계”는 귀인의 죽음을 말하는데 서거를 쓸 정도는 아니지만 사회에 적잖은 기여를 했거나 어느 정도 지명도가 있는 인물에 쓰인다는 점에서 별세와 차이가 있다.

영면”은 영원이 잠들다는 뜻으로 주로 유명한 사람의 죽음을 뜻한다.

작고”는 고인이 되었다는 뜻으로 죽음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각 종교에서 죽음을 높이는 말도 있다.
가톨릭에서는 “선종(善終)”, 개신교에서는 “소천(召天)”이라 하고 불교에서는 승려의 죽음을 “입적(入寂)” 이라고 표현한다.

한자어 외에 동사나 관용구로는 “숨지다” “돌아가시다” “하늘나라로 가다” “밥숟가락 놓다
땅보탬”이라는 말도 있는데 “사람은 죽어서 땅에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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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천(召天)과 명복(冥福)
-  박황의 교수의 글

학생에게 아버지의 나이를 물었더니 학생이 말하기를 “향년 54세입니다” 하였다.
내가 순간 당황하여 “그럼 돌아가신 지는 얼마나 되었는가?” 하였더니 학생은 더욱 당황하여 “지금 집에 계시는데요.” 하였다.


아마 학생이 ‘향년(享年)’을 나이의 높임말인 연세(年歲)나 춘추(春秋) 등과 같은 의미로 혼동하였던 모양이다.
향년은 살아 생전의 나이 곧 죽은 이가 이 땅에서 향유(享有)하였던 수명(壽命)을 말한다.

우리말 가운데 죽음에 대한 별칭은 매우 다양하다.

사망(死亡), 임종(臨終), 별세(別世), 타계(他界), 하직(下直),
서거(逝去), 작고(作故), 귀천(歸天), 영면(永眠), 영서(永逝),
영결(永訣), 운명(殞命), 절명(絶命) …..

이 외에도 엄청나게 많다.

이는 우리 선조들이 오래도록 죽음을 고민하고 살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간혹 신문 기사에서 ‘운명(運命)을 달리했다.’라는 표현을 보게 된다.
이 또한 잘못된 문장으로 ‘유명(幽明)을 달리했다’라고 해야 옳다.

“‘유(幽)’와 ‘명(明)’을 달리했다.”라는 말은 생(生)과 사(死)를 달리했다는 말로서 ‘幽’는 어둠· 밤· 죽음· 저승· 악· 무형· 어리석음 등을 의미하고 ‘明’은 밝음· 낮· 삶·이승· 선· 유형· 지혜로움 등을 뜻한다.

굳이 ‘운명했다’라는 표현을 하고자 한다면  “암 투병 끝에 ‘운명(殞命)했다’”라고 해야 옳다.

죽음의 종교적 별칭으로는

불가에서는 열반(涅槃), 입적(入寂), 입멸(入滅), 멸도(滅度) 등이  있으며,
유가에서는 역책(易簀), 결영(結纓), 불록(不祿) 등으로 표현한다.

‘역책(易簀)’이란 ≪예기≫의 <단궁편(檀弓篇)>에 나오는 말로서,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이나 임종을 이르는 말.

증자(曾子)가 운명할 때, 일찍이 계손(季孫)에게 받은 대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자신은 대부가 아니어서 이 자리를 깔 수 없다 하고 다른 자리로 바꾸게 한 다음 운명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결영(結纓)’이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오는 말로서 갓끈을 고쳐 맨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자로가 위(衛)나라 난리에 싸우다가 적의 창에 맞아 갓끈이 끊어졌는데, “군자는 죽을 때에도 갓을 벗지 않는다.”하고 갓끈을 고쳐 매고서 죽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불록(不祿)’이란 신분에 따른 죽음의 다섯 가지 등급 가운데 하나이다.

즉 천자(天子)는 붕(崩), 제후는 훙(薨), 대부(大夫)는 졸(卒), 선비는 불록(不祿), 서인(庶人)은 사(死)라고 한다.

또한 《예기》 <곡례(曲禮)>에는 장수(長壽)하다가 죽은 것을 ‘졸(卒)’이라 하고, 젊어서 죽은 것을 ‘불록(不祿)이라 한다.’고 하였다.

천주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선종(善終)’이라 하는데,
이는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준말로서 ‘착하게 살다 복되게 생을 마쳤다’라는 의미이다.
‘믿음대로 살다 천국에 갔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개신교에서는 많은 사람이 ‘소천(召天)하였다’라고 말들 하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표현이다.
‘아무개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소천하였다.’라는 표현은 명백한 문법상의 오류이다.
‘소천(召天)’이라는 말은 우리말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로서 문법적으로 본다면 ‘하늘을 부른다.’라는 뜻이 된다.

대개 ‘소명(召命)’이나 ‘소집(召集)’이란 단어가 능동형으로 쓰일 때, 그 주체는 부르는 존재를 말한다.

예를 들자면 신학교를 입학하고자 하는 신학생은 ‘소명을 받았다.’라고 하지 스스로 ‘소명했다’라고 하지 않는다.
훈련장에 가는 예비군은 ‘소집을 당했다’라고 하지 자신이 ‘소집을 했다’라고 하지 않는다.

굳이 ‘소천’이라는 단어를 쓰고자 한다면 “소천하셨다.”가 아니라 “소천을 받았다.”라고 해야 옳다.
‘소천(召天)을 하였다’라는 말은 내가 ‘하늘을 불렀다’라는 뜻이므로 이제 때가 되었으니 ‘내가 죽고자 한다.’라거나 ‘나를 죽여달라.’라는
뜻이 된다.
인간이 자신의 수명을 위해 신을 불러낸다는 망령된 표현은 결국 죽을 권리가 내게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망자나 그 가족에게 흔히 하는 상례의 인사말로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말들을 한다.
‘명복(冥福)’이란 죽은 뒤에 저승에서 받는 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명복을 빈다.’라는 말은 죽은 사람의 사후 행복을 비는 말로서, 서방정토(西方淨土)에 가서 극락왕생(極樂往生)하도록 기원하는 불사(佛事)를 행하는 일이다.


‘고인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고인의 별세를 애도합니다.’
‘고인의 영면을 추모합니다.’,
‘고인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등등 고인의 생전의 종교나
신념에 따라 얼마든지 추모할 수 있는 표현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무턱대고 한결같이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하는 말은 진정성도 의미도 반감되는 매우 무성의(無誠意)한 예법이다.

더욱이 기독교인(基督敎人)이나 천주교인에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하는 것은 매우 큰 결례(缺禮)의 표현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죽은 이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하는 것은 무간지옥에 떨어진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인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하는 천도(薦度)의 발원(發願)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세를 따른다.’ 하였으니 이러한 모순(矛盾)된 말조차도 오랜 기간 많은 사람이 사용하다 보면 표준어로 굳어질 날이 있을 것이다. 神의 이름조차 인간의 의지대로 개명하는 족속들인데 뭔들 못하겠는가마는 그래도 알고는 써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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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후 삶에 대한 성경 구절 11가지

영국 기독교 신문 크리스천투데이의 칼럼니스트 앨래나 프랜시스는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후의 삶에 대한 성경구절 11가지(What the Bible has to say about life after death in 11 verses)"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바른 이해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프랜시스는 "영국 '죽음 알림 주간(Dying Matters Awareness Week)'에 많은 사람들이 죽기전 마지막 소원과 장례 계획을 이야기한다. 죽음은 우리 모두가 언젠가 맞이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중 대다수는 실질적으로, 영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프랜시스는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불평한 경험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한다. 죽음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까에 대한 대화는 대부분 부정적인 결말에 집중하는 경향이 크다"고 말했다.

프랜시스는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죽음에 관한 또 다른 밝고, 희망적인 관점이 있다. 죽음은 많은 것들의 종말을 맞이하게 하겠지만, 지상의 삶에서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7-18)

프랜시스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죽음 이후 약속된 삶을 보장 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을 약속받았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죽음을 앞둔 존재로써, 가족이나 친구들을 떠나보내야 하며,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큰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죽음은 실제로 영생으로 인도하며, 죽음에 대해 더 잘 이해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중요한 일이다"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성경구절 11가지다.

1. 요한복음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3.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4. 잠언 12:28

"공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잠12:28)

5. 고린도후서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5:8)

6. 요한 계시록 21:4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4)

7. 요한 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3)

8. 이사야 57:2

"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사57:2)

9.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10. 전도서 7:1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전7:1)

11. 욥기 19: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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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태어나서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아무리 피하려고 애를 써도 어느 순간 내 인생을 사로잡는 그 어둠의 세력은 우리가 환영해야하는 역설이다.
이 땅에서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하려고 모든 것을 다 동원해도 신이 정해준 때가 되면 거역할 수 없는 섭리이다.
요즘같이 젊음과 건강에 집착하고 의료기술이 발달한 시대에 죽음이라는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우리가 인정하고 친숙해야 될 주제이다. 

경쟁시대를 살아가는 바쁜 현대인들은 죽음에 대해 배우지도 못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 자체를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가족이나 이웃의 죽음을 경험해도 그때뿐이지 이내 죽음에 대하여 망각한다.
나에게도 언젠가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진리를 애써 부인하고 죽음과는 상관없는 불사신처럼 열심히 살아간다.
생이 있으면 사가 있는 법이고 자연의 원리와 순환이라는 법칙이 존재하는데 생에만 집착하는 어리석은 우리의 인생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가 선물이라면 죽음 또한 우리가 맞이해야 될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준비해야 되는데 대부분 죽음을 우리 삶을 침해하고 박탈하고 공포로 몰아가는 칼로 여긴다.
그러나 죽음은 잔인한 칼이 아니라 인생 모두에게 허락되어진 성스러운 칼이다.
이 죽음에 대한 공부와 준비가 한 인생을 더욱 성숙시키고 생명을 존중하게 만든다.
이에 대한 이해와 태도는 한 사회와 문화를 반영해 준다.

성도를 천국으로 보내면서 그 고인에게 어울리고 유가족에게 위로가 되고 조문객들에게는 영감과 교훈이 되는 내용으로 구성된 장례 설교문을 책으로 묶었다.
 
다양한 죽음의 얼굴과 무게를 그 상황에 맞게 하나님의 지혜로 맞이한다.
16명의 성도를 위한 설교문으로 구성이 되었는데 자살한 자, 분만실에서 출산과 함께 사망한 여인, 너무나 갑작스럽고 안타까운 죽음 등 그 여러 장벽 앞에 저자는 하나님께 질문하고 지혜를 얻어 은혜롭게 장례를 인도한다.
임종의 순간이 하나님의 임재가 강하게 역사하는 곳이고 이 사역이 가장 귀한 사역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진지하게 성도를 사랑하고 이해하며 다가간다.

설교문 끝에 저자의 삶과 신앙을 묵상한 후에 고인을 위해 시를 짓는다.
오직 그 성도만을 위해 목회자는 고인이 듣고 있다 생각하고 아름다운 시를 낭독한다.
또한 저자는 장례를 마친 후 이 환송을 위해 적은 원고를 유가족들에게 기념으로 선물한다.
그리고 저자는 자신의 교리적인 지식을 가지고 결코 무례하지 않고 종교적인 신념을 강요하지 않으며 인생의 교훈과 지혜를 얻도록 도와준다.

한 성도의 죽음 소식을 접할 때마다 여러 심방을 통해 준비를 하고 있었던 장례이든 갑작스런 장례이든 가슴이 내려앉고 제일 긴장이 되는 시간이다.
더구나 한 성도를 천국으로 환송하는 자리에 인간적인 슬픔이 너무 크지만 그 가운데서도 그보다 더 큰 소망을 드러내야 하기에 모든 순간과 절차마다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 집중한다.

이해하기 힘든 죽음 앞에서 어떻게 장례를 인도해야 할지 신학적인 질문 앞에 무너지기도 하였다.
내가 배운 교리적인 틀이 한 인간의 마지막을 황폐하게 만들고 유가족들 가슴에 못을 박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또한 비신자를 위한 장례를 인도하면서 어떤 말씀으로 권면하고 위로해야할지 몰라 난처했던 적도 있다. 등록만 되었지 복음과는 상관없고 십자가의 흔적이 안 보이는 잘 모르는 고인에게 무슨 말을 들려줘야 할지 몰라 난감했던 경우도 있었다.

 

반면에 죽음의 모습이 그 사람을 닮는다는 말처럼 은혜로운 죽음을 보며 기쁜 마음으로 장례를 인도한 적도 있다.
인생 마지막 순간, 가장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처절하게 외로운 순간에 젊은 목사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내 말씀과 기도에 하나님처럼 반응해준 어르신들이 기억난다.
목사가 옆에 있어줘서 믿음에 더 확신을 가지고 평안히 눈을 감았던 성도님이 떠오른다.
임종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나 하늘나라 간다’며 유가족에게 인사하고 평안히 가신 늙은 집사님도 그리워진다.

이렇게 죽음의 모습은 다양하고 무겁고 집례자로 하여금 긴장하게 만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시간만큼은 한 인생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이고 마지막이라도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발휘될 수 있는 골든타임이다.
그리고 한 인생의 마지막에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고 고인을 끝까지 배웅해주고 손잡아 줄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이다.
이제 눈을 감으면 현실을 벗어나는 시간에 고인을 평안히 가도록 돌봐주는 복된 사명이다.

 

설교문을 읽으며 그 상황이 그려지기에 내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도 하였다. 평소에 필자도 장례에 최선을 다해야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저자의 고인을 향한 태도와 자세를 보며 나는 더 숙연해졌고 마음을 더 새롭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설교문을 유가족에게 선물로 드리고 감동이 된다면 고인을 위해 시도 낭독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죽음은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불안과 공포이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들에게는 하늘로 가는 밝은 길이다.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이 죽음을 친구처럼 맞이할 것이지 악마처럼 맞이할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이 땅에서 내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많아도 하늘에서 내 이름을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헛된 것이다.
죽음의 순간 내 이름을 호명해주는 분이 있어야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죽음 후에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가 있고 영원한 본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경건하고 거룩하게 감사로 하루하루를 살게 만든다.
우리 주위를 보면 다양한 죽음이 도사리고 있고, 늘 우리 곁에 죽음이 있다.
언제 그 죽음이 나를 방문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이런 불안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죽음과 장례를 보며 오늘 여기서 영원한 것을 보고 사랑을 남기는 지혜를 얻기를 권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