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호선교사 최초 중국 여자 선교사



김순호선교사 이야기

< 중국산동의 "진꾸냥" >

존경하고 사랑하는 형님으로부터 귀한 원고를 받았습니다.

성탄 선물로 방금 탈고한 원고를 보내니 교정해달라는 부탁과 함께요.

형님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으시고 그저 베일 뒤에 계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죠.

베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섬머셋 모엄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Painted veil' 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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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중국에 거주하는 서양 부부의 애증을 그린 영화인데 후반부의 배경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지형을 가진 중국 시골에 형님이 사십니다.

페인티드 베일이라는 의미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위해 걷어내야 할 장막이나 면사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가식적인 결혼의 이면에서 뒤늦게 발견하는 참 사랑을 그리고 있지요.

우리 인생에서 벗겨야 할 장막이나 수건을 벋어 던지고 나면 인간은 자유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자유'라는 연결고리 삼아 형님께서 보내온 원고로 말머리를 돌려 봅니다.

원고의 제목은 '중국산동의 "진꾸냥" -김순호 선교사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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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형님은 1990년 중국 대련에서 만난 어느 조선족 할머니와의 대담에 소환된 한국인 여성 전도자를 소개합니다. 시아버지의 권유로 참여한 사경회에서 만난 조선인 여성 전도자는 힘있게 회개를 외쳤고 그 복음의 씨앗이 할머니의 마음 밭에 뿌려졌던 이야기 속에서 형님은 '김순호'선교사를 만납니다. 반갑고 놀랍기만 한 그 이름은 바로 저자의 이모할머님이셨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선교사인 김순호, 진꾸냥(김처자)의 족적을 따라가며 기록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의 기억과 기록속에서 발자취를 발굴하고 정리하여 작은 소책자를 완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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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에 의지하여 김순호 선교사님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1회 총회에서 해외선교사 파송을 결의한 이후로 1913년 황해노회로 부터 시초된 중국 산동선교사 파송은 1928년 17회 총회에 여선교사 파송이라는 획기적인 안건이 제기되고 드디어 31년 최초의 여성선교사로 김순호 선교사 파송예배가 드려집니다.

30세의 독신 여성 김순호는 파송뒤 2-3년의 현지어 습득을 마치고 산동사역을 시작합니다.

진꾸냥이라는 별명처럼 특유의 친화력으로 중국 여성의 전도의 문을 열어나가던 김선교사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귀국하라는 소환 명령을 받아 잠시 귀국하지만 다시 재정비하여 만주로 사역지를 변경하여 파송됩니다.

능숙한 현지어, 정결한 영성, 메인 바 없는 자유인으로서의 친화력, 뜨거운 구령의 열정이 혼합된 봉사와 섬김은 현지 중국 여성들에게는 마치 천사처럼 보였을 것이라고 저자는 소개합니다.

그러나 1942년 본부는 국제 정세 악화로 만주 사역을 종료하라고 통지하고 김선교사는 직을 사임합니다. 선교사직을 사임한 진꾸냥은 그러나 사역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히려 자비량 사역으로 전환하여 사역을 지속합니다.

김선교사는 그 삶의 마감 또한 큰 울림이 있습니다.

해방이후 평양에서 사역하던 김선교사는 월남하자는 권유를 물리치고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다 죽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오히려 북쪽으로 발걸음 옮겨 신의주 제2교회의 청빙을 받아들입니다.

안타깝게도 1951년 새벽기도 중에 폭도들에 끌려가 세상을 떠납니다. 50세의 안타까운 나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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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형님은 맺는 말에서 김순호 선교사를 '회개자', '자유자', '순교자'라는 세 단어로 그 삶을 요약합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개인 서신으로 혹시나 '자유자'라는 해석이 편견적인 해석이 아닌지 의견을 나눠달라고 했습니다.

이 부탁을 붙잡고 며칠 끙끙거리며 윈고를 다시 읽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고 글로 처음 소개받은 김순호선교사님의 몇몇 모습을 감히 캐리커쳐처럼 그려본다면 이렇습니다.

검소한 일상 생활, 현지어에 전념한 집중력, 정결을 향한 끊임없는 회개의 기도생활, 사역의 길이 막히자 홀연히 떠나는 자비량 사역,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나누는 손길, 죽음을 불사하고 오히려 험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구령의 열정 등으로 그려집니다.

이 모습들의 뒤편에는 저자이신 형님이 혹시나 편견에 의한 착해(錯解)가 아닌지 우려한다는 말씀에도 불구하고,김선교사님의 족적에서 온전히 아니 차고도 넘치는 자유인의 의식 세계가 감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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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유란 바로, 가족이나 친지나 인연이나 그 어떤 이 땅의 소중한 관계라 해도 주님과 맺은 관계에 우선할 수 없다는 '소속으로 부터 자유'가 첫째이고,

둘째로는 선교사님이 가졌거나 누리는 모든 소유물은 이땅에 속한 것이기에 하늘에 속한 자의 발걸음을 제한하지 못한다는 '소유물로 부터의 자유'이고,

셋째로는 자신의 영을 묶고 제한하는 '죄로부터의 자유'로서, 이를 위해서 선교사님은 부단히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죄의 결과로 응어리진 것들을 가루로 부숴, 고운 가루로 만들어 빚어 주앞에 '소제물(素祭物)이 되고자 하는 다짐하는 모습이 감지됩니다.

선교사님의 삶은 진정 이땅의 것으로 부터는 자유자이지만 주를 향해서는 주께 속한 종의 삶을 사셨습니다.

큰 울림이 있는 얇은 원고를 읽고, 이 귀한 원고가 속히 책으로 이땅에 소개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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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 후에도 계속 사역한 김순호 선교사

김순호 선교사는 정신여학교와 일본 교리츠여자신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정신 함북의 보신학교에서 교원사역을 했고, 재령의 동부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했다.

총회 여전도회 전국총회가 설립되며 중국선교를 결의하고 1931년 9월 김순호를 산둥지역의 선교사로 파송했다. 1931년 그를 중국에 파송할 당시 도마리아 선교사가 전국 여전도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선교사였다. 중국 여성을 상대로 사역해 부녀 신앙운동에 큰 공헌을 했다. 전국 여전도회는 그를 위해 봉급과 어학학습비 600원, 교통비 30원을 주었다. 김 선교사는 북경에서 중국어를 체계적으로 배워 발음도 정확하고 영성이 깊어 중국인 부녀자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방지일, 이대영, 박상순 목사와 동역하면서 화북 지역의 여전도회를 조직하고 지도했다. 방지일 선교사는 "그는 두 지역의 여성을 위해 사역하도록 파송됐으며 그의 선교지 부임은 선교 사역의 활력을 더해 주었다"고 말했다.

중국에서는 처녀를 구량이라고 부르는 탓에 사람들은 순호 선교사를 '김구량'이라고 불렀다. 파송된 선교사들과 협력해 여성을 중심으로 말씀을 가르치고, 상담하는 등의 여성사역을 시작했다. 여성들은 복음을 듣고 신앙이 성장했으며 교회 활동 영역도 조금씩 넓어졌다.

김순호 선교사는 현지 조선선교회를 통해 현지에서의 안전을 위한 보호 및 관리를 받았다. 또 조선선교회 임원으로 참여해 남성 선교사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1934년과 1935년 산둥 조선선교사회에서 서기의 직무를 맡아 선교사역과 관련한 의사결정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다. 이뿐 아니라 중국 노회인 라이양 노회에서 회계로 선임되기도 했다.

만 5년간 산둥에서 어학 학습과 선교활동을 하던 김순호 선교사는 1936년 8월 안식년으로 귀국한다. 총회에서는 1년의 안식년 동안 6개월은 안식하고 6개월은 교회를 순회하면서 지모(즉묵)에 성경학교를 건축할 건축비를 모금토록 하였다. 이 기간 동안 김 선교사는 전남부인조력회와 전북조력회의 초청으로 광주와 전주를 방문해 집회를 가졌다. 전남부인조력회는 여전도회 총회와 협력해 성경학교 건축비를 보탰고 그의 선교비도 보냈다.

그러나 안식년 1년이 지난 후에도 김 선교사는 선교지로 돌아가지 못했다. 1937년 전면적으로 중일전쟁이 전개되면서 산둥성 선교지가 일본의 점령지가 되어 위험한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칭다오(청도)시에 거주하면서 지모를 왕래하며 이전처럼 성경공부 모임을 개최해 중국 여성들을 지도했다. 칭다오시 태평촌교회와 중가와교회 설립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던 중 여전도연합대회는 시국관계를 이유로 김 선교사를 당분간 소환하기로 결정한다. 1939년 9월 귀국함으로 김순호 선교사의 산둥성 선교는 막을 내린다.

당시 일제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은 대소련 전략기지, 철강, 석탄, 농산 자원 공급지, 불황에 허덕이던 일본 농촌 과잉인구의 배출구로서, 수도인 신경(현 장춘)특별시 외에 19개의 성을 두었으며 4312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봉천노회의 헌의에 의해 만주에 선교하기로 결의하고, 1937년 최혁주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해 만주선교를 시작한 상황이었다.

김순호 선교사는 1942년 만주로 파송돼 신경에서 남쪽으로 120리 떨어진 지린성 슈양양 현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최혁주 목사와 동역했다. 이미 산둥에서 여성들을 상대로 선교한 경험이 있고 유창하게 중국어를 하는 김 선교사를 통해 쌍양현의 선교는 더욱 적극적으로 진행됐다.

김 선교사는 산둥에서처럼 만주국에서도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했다. 슈양양현교회, 슈앙허진교회 등 각 교회에서 1개월 과정의 부녀 도리반을 설립해 만주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글자를 모르는 여성들에겐 주음자모를 가르쳐 하나님의 말씀을 읽도록 도와줬다. 이러한 사역은 만주 지역사회, 특히 부녀자들 사이에서 큰 호평을 받았으며, 김순호 선교사는 어디를 가든지 천사 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김 선교사와 최혁주 목사는 부근 농촌을 순회하며 '장막전도'를 했다. 찾아간 마을에 장막을 치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나팔을 불고 찬송을 불러 사람들을 소집해 복음을 선포하고 전도지를 나눠주는 방식의 전도였다. 당시 만주선교 기록을 보면 이러한 사역에 대해 김 선교사는 매우 만족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순호 씨도 산둥선교보다는 물론 힘은 드나 재미는 무한하다고 하며, 이제야 선교의 취미를 본다고 한다. 산둥은 타인이 건설하여 놓은 것을 심방이나 하고 도리반이나 할 것뿐이었으나 만주선교는 그야말로 제일선 개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김창덕, '만주광야 부르짖는 소리')

선교사들은 가는 곳마다 열심히 전도하고 신도들 스스로 예배당을 세우는 가운데 교회들은 크게 부흥했다. 김순호 선교사는 이곳에서도 부녀자를 위한 도리반을 만들었고 많은 여성들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왔다.

김순호 선교사와 최혁주 목사는 만주인 선교사업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회만 있으면 재만 각 노회를 찾아가 사역을 보고했다. 그 결과 남만노회에서는 어떤 형제가 전도인 1인을 돕기로 했고, 김순호 선교사를 통해 동만노회에서도 전도인 1인과 자금을 지원하는 후원자가 나타났다. 또한 신경 등지의 여성계에서 김순호 선교사를 통해 선교후원을 감당하기도 했다.

김순호 선교사는 1940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제29회 총회에 참석해 슈양양현의 전도 상황을 보고했다. 그러나 194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37년부터 시작된 만주선교를 1942년 2월에 종료하기로 하고 이 사실을 만주기독교총회에 통지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김순호 선교사는 만주국 선교사직을 사면하게 되는데, 1942년 9월 22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제21회 여전도연합대회에서 사면이 접수돼 허락하기로 결의했다.

만주 선교사직을 사임한 후에도 김순호 선교사는 1년간 사역을 계속했다. 예산 1200원 중 1000원은 김순호 선교사가 만주에서 활동하면서 저축한 돈으로, 200원은 여전도연합대회가 부담하기로 했다. 즉 선교사를 사임한 이후 1년간 더 사역하면서 필요한 비용은 대부분 김 선교사 자신이 감당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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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호 '타문화 女선교사' 김순호

▲손상웅 목사(시드선교회 연구실장)

[기독일보=손상웅 목사] 1928년 창립한 장로교 전국여전도회는 하나님께 감사하여 중국에 여선교사를 파송할 것을 결의하였고, 1930년 장로교 총회는 전국 여전도회의 결의를 기쁘게 받아 중국 산동에 여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선교구조 (여전도회) 와 회중구조 (총회) 라는 풀러신학교 선교역사 교수 폴 피어슨의 이론을 검증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교 역사학적 의미가 크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 선발 조건으로 중등 이상의 학교와 성경 학원 혹은 동등 이상 과정의 신학을 졸업하고 현재 교역에 종사하는 만 25세에서 만 30세의 여성 장로교인으로 규정하였다는 데서 '충분한 성경 지식'과 '사역 경험'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인정한 것은 매우 돋보이는 부분이다.

중국선교사로 선발된 만 28세의 김순호는 타문화 여선교사 제1호라는 명예를 얻었다. 김순호는 1902년 5월 15일 황해도 재령 동북 교회 김두한 장로의 딸로 태어나 재령 명신보통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를 거쳐 일본 횡번여자신학교를 졸업한 후 황해도 신천 경신학교와 함북 선진 보신여학교에서 교사를 역임하였고, 황해도 재령 동부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했다.

1931년 9월 11일 금강산 수양관에서 제4회 조선 여전도회 연합대회 총회 마지막날에 김순호 선교사 파송 예배를 드린 후 전국여전도회는 사례비와 어학비로 600원 그리고 여비로 30원을 지불하였다. 어학비를 지불한 전국 여전도회나, 선교지의 첫 3년을 어학공부에 투자한 김순호는 오늘날 "빨리 빨리" 선교로 언어연수를 뒷전으로 두는 선교사에게 큰 교훈이 아닐 수없다. 김순호가 북경어에 능했다는 마지막 산동선교사였던 방지일목사의 회고는 언어연수의 중요성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김순호의 실제 선교는 1934년부터의 팀선교다. 동료 선교사가 개척해 둔 17교회를 순방하면서 설교하고 심방하고 성경 공부반을 인도하는 등 복음선교에 역점을 두었고, 특별히 여성선교에 힘을 쏟았다. 1936년 안식년으로 귀국한 김순호는 6개월간 전국 교회를 순방하며 산동선교를 보고하는가 하면, 산동 성경 학교 건축을 위한 건축비를 모금하기도 하였다. 산동선교 보고를 접한 모든 교회는 그녀의 선교정신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뜻에서 매년 1월 셋째 주일을 <여전도회 주일>로 결의하고 전국 교회가 지켰다면 김순호는 든든한 후원교회와 중보기도팀을 확보한 셈이다. 중일전쟁이 종료된 후 1938년 10월에 시작된 김순호의 2기 사역은 청도에 거주하면서 산동선교를 펼쳤는데 1939년 여전도회 총회의 소환 결정이 있기 6년간이다.

이후 김순호에게 4년 간의 만주사역이 열렸다. 김순호의 3기 사역은 1939년 만주국 쌍향에서의 최혁주목사와의 팀사역이었다. 김순호는 만주 부녀자를 대상으로 성경 공부반을 개설하여 성경말씀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글을 모르는 부인에게 중국어를 가르쳐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함으로 계몽에도 힘썼다. 1941년에는 동반 지방교회 전도부 총무를 역임하는 등 그녀의 선교사역은 기관선교에 까지 뻗쳤다. 김순호의 마지막 사역인 4기 사역은 1942년 9월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제12회 여전도회 연합 대회에서 만주국 선교사를 사면하면서 1년간 자비량으로 3기사역을 이어갔다.

귀국후 신의주 제2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는가 하면 평양신학교에 출강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내던 김순호는 무엇보다도 회개를 강조하였는데 오늘날 회개없는 복음에 경고가 되고 있다. 한국동란 중인 1951년, 월남하지 않고 교회를 지키던 그녀는 51세로 공산 당원에 의해 순교하면서 중국인이 기억하던 '김고랑'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순종했다.

글ㅣ시드선교회 연구실장 손상웅 목사(풀러신학교 선교역사 전공·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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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최초 장로교 여선교사 김순호(순교자)

“나는 복음전파하다 죽고자 북한에 간다”


타문화권에 첫 여선교사를 파송한 제4회 여전도회연합회 총회(1931년 9월 금강산수양관)

김순호는 한국교회 장로교 사상 최초로 총회와 여전도회의 인준을 받은 여자선교사로 중국 산둥성에서 9년여 봉직했고, 평양신학교 여자부 교수와 사감을 역임한 후 최북단 신의주 제4교회를 섬기다가 1951년 새벽제단에서 기도하던 중 공산군에 체포되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김순호는 일생동안 학문탐구와 선교생활로 일관한 한국교회의 여선지자였다.

김순호는 1902년 5월 15일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 재령동부교회 김두한 장로의 딸로 출생하였다. 가정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경건한 기독교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총기를 보인 그녀는 여자로서 접하기 힘든 신학문과 신학을 공부했다. 당시의 분위기로 보아 여성이 신학문을 공부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었다. 모든 것은 기독교사상으로 개화된 아버지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열정적으로 학문탐구에 매진

김순호는 재령의 명신학교(明信學校)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김순호가 다니는 재령읍교회(후에 재령동부교회)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 황해도 재령 갑부 정찬유(鄭纘裕) 장로가 세웠다. 정 장로는 “교회를 짓기 전에는 결코 내 집을 갖지 않겠다.” 서원하고, 전도사를 일본에 보내 교회건축 양식을 공부해오도록 한 후, 재령 동부교회를 세운 것이다. 3만평 대지 위에 7가지 색이 영롱하게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2층 교회는 당시 한국 최고의 교회였다. 정 장로는 이어 명신학교도 세웠다. 정 장로는 또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많은 장학금을 줬다고 전해진다.

김순호는 명신학교를 졸업을 하자마자 서울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기독교명문 정신학교(貞信學校)에 입학하여 1921년 졸업하고는 곧장 일본의 요코하마여자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그녀의 학문탐구 욕망은 그칠 줄 몰랐다. 다시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연구에 몰두했던 것이다. 이 학교를 졸업한 후 모교회인 재령 동부교회에서 4년간 전도사로 교회를 받들었다.

1912년 9월 1일 평양여자성경학원에서 총대 221명이 모여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창립총회의 최초 안건으로 중국 선교를 결의한 후 1913년 5월 박태로 선교사를 산둥성에 보내고, 1913년 11월에는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산둥성은 유교의 교조 공자의 출생지로 외국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어서 선교의 불모지였다. 총회는 다시 1917년 방효원, 홍승한 두 목사를 증파(增派)하였고, 1918년에는 박상순 목사를 파송하였다. 1923년에는 이대영 목사를, 1937년에는 방지일 목사를 파송하여 선교사업을 확장시켰다.

중국선교사들은 여자 선교사가 꼭 필요하다고 청원서를 냈다. 1930년 9월에 소집된 총회는 이를 접수했고, 여전도회가 선교비를 지원하기로 결의하고, 1931년 3월 여선교사 파송공고를 기독신보에 실었다. 그 자격요건은 다음과 같다.

“장로교인으로 중등 이상의 학교를 졸업하고 성경학원 혹은 동등 이상 과정의 신학을 졸업한 자, 내외지에서 교역(敎役)에 종사하는 자로 연령은 만 25에서 만 30세의 충분한 성경지식과 사역경험이 있는 자이다.”

지원자들이 나타났지만 그 중 여전도회연합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김순호 전도사가 선임됐다. 주위에서는 여자의 몸으로 낯선 이역만리에서 선교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며 만류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김순효 전도사는 고향 뒷산 장수산에 올라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해 기도했다. 그녀가 눈을 뜨자 호랑이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있음을 깨닫고 날이 밝도록 기도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호랑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확신했다.

하나님 뜻 깨닫고 선교사의 길로

1931년 9월 금강산 수양관에서 회집된 제4회 여전도회연합회는 김순호 선교사를 중국 산둥성에 파송하는 파송식을 거행했다. 봉급과 어학학습비 600원, 교통비 30원이라는 예산이 책정됐다.

김순호 선교사는 중국 산둥성(山東省) 라이양(萊陽) 임지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이방인 상대의 선교란 쉽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중국어 공부부터 시작해야 했다. 이듬해 9월에는 북경에 가서 중국어 공부를 했고, 1933년 4월 산둥성으로 돌아와 활동했다. 중국 언어와 풍습을 익혀가며 이방종교를 알려야 하는 선교사 수업은 대단히 힘들었을 것이다. 어느 날은 모진 마음까지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네가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너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를 아느냐? 힘써 기도하여 새 힘을 얻으라”는 음성을 듣고 3층 다락으로 올라가 100일 동안 기도하며 새 힘을 얻었다.

김 선교사는 1936년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기까지 17개 지역을 순회하며 중국여성들을 위한 성경공부모임 및 사경회와 부흥회 등을 인도했다. 김 선교사는 귀국하여 장로교 제25회 총회(9월)가 전남 광주양림교회에서 회집 되었을 때 총대들 앞에서 활동보고를 했다. 이에 총대들은 큰 박수로 격려하였고, 여전도회의 선교정신을 기리고 격려하는 뜻에서 매년 1월 셋째주일을 「여전도회주일」로 지키기로 결의했다.

1938년 10월 17일 김 선교사는 다시 여전도연합회의 파송으로 산둥성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칭다오(靑島)에서 거주하며 태평촌교회와 중가와교회 설립에 앞장섰다. 이듬해 겨울에는 만주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최혁주 선교사와 동역하며 만주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문맹퇴치에 앞장섰다. 특히 마을에 장막을 치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나팔을 불고 찬양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 뒤 전도지를 나눠주는 ‘장막전도’에 힘썼다. 그러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1942년 2월까지 만주선교를 종료하기로 결의하자 선교사직을 사임하였고, 동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제12회 여전도연합대회에서 사면허락을 받았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록에는 김순호 선교사가 중가와(仲家窪)교회 설립에 많은 협조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중가와교회 방지일 선교사는 저서 “임마누엘”(p. 213)에서 중가와교회 설립초기 상황을 다름과 같이 기록했다. “중가와는 아주 낮은 지대로 좋은 주택 지을 데도 못 되고, 무허가 빈민들이 한두 사람 믿게 되니 한 칸 방을 얻어 예배드리기 시작했다. 장봉준(張鳳俊) 장로라는 유력한 이가 그곳에 작은 집들을 넓은 대지에 입구 자로 방정하게 지어 한 촌락이 되었다. 그 빈민 중에서 좀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 그런 집에 세를 든다. 나도 한 칸을 얻어 거기서 예배를 드리니 주위에 주택이 많은 지라 비교적 교회성장이 빨랐다. 1940년 4월 17일부터 수요일마다 옥외 대전도를 한 달 동안 계속했는데, 평균 500여 명씩 큰 정원에 모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교회 지키다 순교 영광 얻어

1941년 장로회 총회는 1939년에 신사참배문제로 폐쇄됐던 평양신학교를 재건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여교역자의 양성을 목적으로 여자부를 설치하자는 계획도 세웠다. 1942년 여전도회는 기금 7천 원을 총회에 전달하여 평양신학교 여자부 설치를 도왔고, 여자 신학부 초대이사에 김순호, 김마리아, 유안심, 배명진, 이순남 씨 등 5인을 피선했다. 김순호 선교사는 평양신학교의 교수 겸 기숙사 사감으로 봉직했으나 학교는 공산당의 간섭으로 2년을 버티지 못하고 폐교조치 되었다.

신의주 제4교회가 김순효를 전도사로 청빙하는 청빙서가 왔을 때 그를 아끼는 이들은 가지 말라고 말렸다. 한걸음이라도 남쪽으로 가야 한다고 권유했다. 그러나 김 전도사는 “모두 살기 위해 남으로 가지만, 나는 복음을 위해 죽으러 북으로 간다”는 말과 함께 임지로 가서 교회를 지키다가 1951년 어느 날, 새벽기도회에서 기도하는 도중 갑자기 들이닥친 내무서원에게 개 끌려가듯 끌려가 갖은 매를 맞고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순교했다. 당년 51세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전국연합회는 그녀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김순호는 교단총회의 인준과 여전도회 인준을 받은 유일한 선교사였다. 단신의 젊은 여성의 헌신적인 선교사역은 여성의 목회를 인정받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고, 여전도회는 해외선교의 큰 몫을 잘 감당한 결실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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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도하다 죽으려고 지금 북으로 가겠습니다

여전도회 파송 첫 여선교사, 산동성과 만주서 사역
평양신학교 여교수로 후진 양성, 북으로 가 순교제물

 
[전도사, 선교사, 순교자]

가슴시린 이름들이다. 이 땅에서의 영화와는 거리가 먼 이들이지만 하늘나라의 가득한 상급을 품에 안은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몰라줄지라도 오직 그분만 바라보고 산 사람들이다.
하나의 이름만 있어도 영광이거늘 세 가지 칭호를 모두 가진 이가 있다. 그가 바로 '순교자 김순호'선교사이다.
당시 전국여전도회연합회가 단독 파송한 중국 선교사, 해방 후 평양신학교 여자부 교수 겸 사감, 한국전쟁으로 순교의 제물이 된 김순호이다.

 
[예비하신 길]
 
김순호는 1902년 5월 15일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 재령동부교회 김두한 장로의 딸로 태어났다. 재령 지역은 원래 가톨릭 교세가 강한 지역이었으나 미국 북장로교 윌리엄 헌트(William Hunt, 한국 이름 한위렴) 선교사의 헌신적 사역으로 기독교가 왕성한 고장이 되었다.
그래서 윌리엄 헌트 선교사를 '재령 선교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의 아들 브루스 헌터(Bruce Hunt, 한부선) 선교사 역시 한국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김순호는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았다. 재령의 명신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유학을 떠난다. 장로교회의 명문 여학교인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 3월 26일 제13회로 졸업하였다.
김순호는 정신여학교 재학중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적극 참여하였고 일본 경찰에 붙잡혀 심한 고문을 받았다. 이러한 환난 속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불굴의 신앙을 가졌으니 하나님의 연단의 방법이었다.
그는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요코하마 여자신학교에 유학하여 신학교육을 받는다. 졸업 후 함경북도 성진에 있는 보신여학교 교원으로 봉직하다가 고향 재령에 돌아와 재령동부교회 전도사로 4년간 시무하였다.

 
[선교사로서의 부름]
 
한국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로 발돋움하려고 노력하였다. 어린 교회이지만 복음을 해외에 선포하여야 한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감리교회에서는 인천내리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이민을 보낼 때에 1902년 홍승하 전도사를 선교사로 파송한 바 있다.
장로교회에서는 1907년 독노회 조직 기념으로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1912년 총회 조직 기념으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고 1913년에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계속하여 1917년 방효원 목사, 홍승한 목사, 1918년 박상순 목사, 1922년 이대영 목사, 1931년 김순호 전도사, 1937년 방지일 목사를 파송하여 1913년부터 1937년까지 5대에 걸쳐 8명의 목사와 1명의 여전도사를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1931년 9월에 모인 전국여전도회연합회 제4회 총회에서 김순호 전도사를 중국 산동성 선교사로 선정하고 단독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선교사로 선정된 과정에 이런 일화가 있다. 선교사로서의 영적 주장을 위해 황해도 재령의 장수산에서 산기도를 하였다. 기도를 하는데 큰 호랑이가 주위를 어설렁 그렸다고 한다. 겁에 질려 목사님께 호소하였더니 더욱 기도에 집중하라고 하였다. 날이 밝아 눈을 뜨니 호랑이는 물러가고 믿음의 담력을 얻었다고 한다.
중국에 가서 중국말을 배우는 데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언어의 어려움, 문화의 차이 등으로 고통을 겪을 때마다 기도로 이겨나갔다.
방지일 선교사는 '김순호 선교사는 여성 첫 선교사로서 비교적 과학적으로 어학을 습득하여 선교사 중에 북경 발음을 정확히 하였으며 기도도 많이 하셨다. 내가 중국에 갔을 때 중국인들은 金姑郞(김 처녀 라는 뜻)으로 애칭하였다. 부녀자 지도에 능하셨다.'고 기록하였다(방지일, 임마누엘, p.120).
김순호는 산동성 래양과 지미현에서 주로 사역하였는데 남자 선교사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여성사역을 하여 많은 결실을 거두었다.
중국 선교 1기를 마치고 1936년에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총회에 선교보고를 하고 5개월은 휴식하고 6개월은 전국 교회를 순회하며 선교보고를 하고 산동 성경신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기금을 모금하였다.
다시 중국에 가서 사역하다가 1938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방지일 목사가 사역하던 청도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주로 여성사역을 하였다. 단기 성경학교를 설립하여 성경을 가르쳤고 많은 집회를 인도하였다.
전국여전도회연합회는 1939년에 중일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김순호 선교사를 일시 귀국시켜 길림성 쌍양현에 다시 파송하여 선교사역을 하게 하였다.
1940년 안식년을 맞아 전국을 순회하면서 국내 전도를 하였다. 1942년에는 전국여전도회연합회에서 평양신학교 이사로 파송받고 일하였다.
1943년부터 해방되기까지 만주 용정을 중심으로 사역하였다. 일제 말기의 어려움 중에서 선교비 지급이 제대로 되지 못한 상황에서도 유창한 중국어 설교로 복음을 선포하며 '중국인의 신앙의 어머니'가 되었다.

 
[평양신학교 여교수로 사역]
 
김순호 선교사는 해방이 되자 만주 훈춘에서 함경북도 청진으로 왔다.
거기서 얼마있다가 1947년 9월에 평양신학교 여자부 교수 겸 사감으로 부임한다.
평양신학교에서 여학생들을 지도할 교수를 물색하던 중 선교사 경력이 있는 김순호를 초빙하였다.
김순호는 예과 2학년을 담임하였고 성경과 교회사를 가르쳤다.
그때 배운 제자들 중에 이연옥, 주선애, 이동선, 조순덕, 이성훈 등 한국교회 여성지도자들이 있다.
김순호는 기숙사 사감으로 학생들의 생활지도를 하였다. 당시 여자기숙사생은 50명 정도였고 한 방에 보통 여섯 명씩 기거하였다.
김순호는 새벽기도회부터 인도하며 학생들을 철저히 가르쳤다. 그의 제자들이 여성지도자로서 사역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바른 지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역에서 특이한 것은 신학교 바로 앞에 있는 서문밖교회에서 매일 아침 5시부터 7시까지 한 시간은 기도, 한 시간은 성경읽기의 특이한 집회를 하였는데 신학생은 물론 일반 성도들까지 참석하여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김순호의 제자인 이연옥은 한국교회 여성지도자로 우뚝 선 존재인데 그의 스승인 김순호를 '교회에서 봉사하도록 훈련하고 가르친 사랑의 실천자'라고 평가하여 그의 가르침을 사모하였다.

 
[순교의 면류관]
 
김순호가 좋아하는 성경은 베드로전서였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4)는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상 주심을 사모하였다.
북한에 공산정권이 자리를 잡아가자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기 시작했다.
1948년 초여름 여름방학을 하자마자 제자 이연옥과 조순덕이 비밀리 김순호를 찾았다. 같이 월남하자고 권하였다. 김순호는 '가다가 로스케(소련군인)를 만나면 뭐라고 하는가? 너희는 남한에 가서 많이 배워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라.'고 권하였다.
공산당의 압제로 신학교가 문을 닫을 때 신의주제2교회에서 김순호를 전도사로 청빙하였다. 당시 북한교회의 목사나 교인들의 월남이 날마다 이어지고 있는 때에 김순호는 거꾸로 북쪽인 신의주로 가기를 결정했다.
주변에서 만류해도 '다 이 땅을 버리면 최후로 살아남을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나는 남겠습니다. 나는 전도하다 죽으려고 지금 북으로 가겠습니다.'고 했다. 다들 남으로 가는데 그는 북으로 갔다.

1949년 6월 평양신학교 제44회 졸업식에 참석하고, 창동교회(채필근 목사 시무)에서 여전도회 주최 사경회를 인도하고 평양을 떠나 신의주로 갔다.

신의주제2교회 새벽강단을 지키다가 1951년 몰려든 공산당에 체포되어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그의 나이 49세. 미혼의 몸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다가 순교의 면류관을 썼다.

김순호… 전도사, 선교사, 신학교수로 사역하다가 마지막에는 순교자로 우리 곁을 떠났으나 그의 영맥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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