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예화 자료


한국적 예화 자료


1. 이성만, 이순 형제의 효제비(孝悌碑)

예전에 국민학교 교과서에 이야기로 실렸던 우애좋은 형제 이야기
낟가리를 서로에게 옮기는 형제가 달 밤에 서로 만나는 순간 감격적인 순간

충남 예산군 대흥면에 가면 ‘의좋은 형제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성만이순 형제의 효제비가 있다고 합니다.  
이 비석은 1978년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개뱅이다리’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예당저수지가 생기면서 물에 잠길 위험이 있자, 지금은 동서리의 대흥 동헌 앞으로 옮겨 놓았다고 합니다. 
예당저수지가 생기면서 인근 마을 어떤 사람이 기다란 돌을 주어, 마루 댓돌로 사용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울로 공부를 떠났던 자녀가 방학 때 집에 왔다가 댓돌에 한문이 쓰인 것을 보고서 읽어보니, 구전으로 전해왔던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실화임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의좋은 형제’는 1956-2000년까지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던 내용으로 형제의 우애를 보여주는 가슴 찡한 실화인데, 이 이이야기’는 농경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추수가 한창이던 가을, 형제는 땀으로 익힌 곡식을 거두어 똑같이 나눴습니다. 

각자 집으로 돌아간 형제는 서로를 생각했습니다. 
“이제 새살림을 차린 동생은 씀씀이도 많을 텐데….” 
형은 지게를 지고 낟가리가 있는 논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볏단을 동생의 낟가리에 옮겨 쌓았습니다. 
동생은 곡식을 똑같이 나눈 것이 잘못한 것 같았습니다. 
“형님은 부모님도 모시고 제사도 받들어야 하는데….” 
동생도 지게를 지고 논으로 나갔습니다. 
이튿날 형은 깜짝 놀랐습니다. 
낟가리가 조금도 줄지 않은 것입니다. 
동생도 놀랐습니다. 
그날 밤 형제는 각기 지게를 다시 지고 논으로 갔습니다. 
“너였구나! 볏단을 갖다 놓은 사람이….” 
“아니 바로 형님이셨군요.” 
형제는 어둠속에서 두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가슴 찡한 의좋은 형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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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조년, 이억년 형제의 투금탄

투금강(投金江)
서울시 영등포구 양화동(楊花洞)에 있었던 양화도(楊花渡)의 다른 이름.

서울의 여의도와 마포 사이 양천 앞 한강을 ‘투금탄’이라고 부르는데, 
우리의 전통적 금전관을 엿보게 하는 고사가 깃들어있는 강입니다. 
고려말기 이조년, 이억년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금덩이를 주었습니다. 
형제는 똑같이 나눠가지고 나루를 건너려고 나룻배를 탔습니다. 
배가 여울을 건너던 중 동생이 갑자기 나눠가진 금덩이를 강에 던졌습니다. 
깜짝 놀란 형이 “그 귀한 금덩이를 왜 버리느냐”고 아쉬워하자 동생이 말했습니다. 

“평소에 형님을 존경하여 따르는 마음이 지극했는데, 금덩이를 갖고 보니 자꾸만 형이 가진 금덩이가 큰 것 같은 사특한 마음이 들고, 형제의 우애를 깰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동생의 말을 들은 형도 가졌던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형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후일에 사람들이 이 강을 금덩어리를 던져버린 강이라고 해서 ‘투금탄’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후 형제가 재산 문제로 다투면 나룻배를 태워 이 투금탄 이야기를 들려주어 화해하도록 하는 형제 우애를 위한 교훈의 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 자료 사용 / 01-03-2024 새벽기도회 예수의 모친과 동생(누가 8:19-21)
세상 사람들도 물질을 초월하여 형제우애를 지키는데 하물며 복음을 갖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의 수준보다 더 낮은 삶에 허덕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도 나를 죽이지 못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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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정 박상길

조선 말기에 박상길이라는 백정(신분 사회에 천민 취급)이 장터에 푸줏간을 내었다한다.
어느 날 인근에 사는 양반 두 사람이 고기를 사러왔다.
그 중 한 사람이 먼저 고기를 주문한다.
"얘 상길아! 소고기 한근 다오"하니 칼로 고기를 베어 건네 주었다.
함께 온 다른 양반은 비록 천한 신분이긴 하지만 말을 함부로 하기가 거북했다.
그래서 "박서방! 나도 소고기 한근 주시게!"하였다.
선뜻 고기를 잘라 주었는데 먼저 산 양반이 보니 자기가 받은 것 보다 갑절은 더 많아보였다.
그래서 화를 내면서 "이놈아 똑같이 한근씩 샀는데 어째서 이 사람 것은 많고 내 것은 적으냐?" 하니 푸줏간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손님 고기는 상길이가 자른 것이고 이 어른 고기는 박서방이 자른 것입니다."

같은 입에서 나오는 말일지라도 어떤 말은 장미꽃처럼 향기가 있고 어떤 말은 가시처럼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는 교훈일 것이다.
문제는 말로 입은 상처는 칼로 입은 상처보다 훨씬 더 아프다는 것이다.
말 한 마디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 말의 마법 

옛날에 박만득이라는 백정이 있었다.
어느 날 두 양반이 그에게 고기를 사러 왔다.
그 중 한 양반은 습관대로 "야, 만득아! 고기 한 근 다오"라고 말했다. 만득은 "네"하며 고기를 한 근 내 주었다.
다른 양반은 "박 서방, 고기 한 근 주게"라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 고기는 언뜻 봐도 먼저 산 양반의 것보다 훨씬 더 커 보였다.
똑같이 한 근이라고 말했는데 차이가 많이 나자 앞의 양반이 화가 나 따졌다.

"이놈아, 같은 한 근인데 이 양반의 것은 많고 내 것은 왜 이렇게 적으냐?"
그러자 만득은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손님 것은 만득이가 자른 것이고, 저 손님 것은 박서방이 자른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때로는 한 마디 말이 그 어떤 치료약보다 효험을 발휘해 생명을 구하고, 또 때로는 비수가 돼 남의 마음을 도려내기도 합니다.
"졸라, 짱나" 등 비속어를 쓴다고 아이들을 나무라기에 앞서 어른들부터 말을 가려 써야되지 않을까요?


* 예화 사용 / 05-30-2023(화)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창세기 44:16)


철학자 하이덱거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말에도 색깔을 지니고 있다

집에서도,
직장에서 일을 할 때도
어느 공간이라도
우리는 항상 말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말투에 따라서
상황과 관계가 악화되기도 하고
긍정적으로 바뀌기도 하는데요,
이렇게 말투는 중요한 순간에서
결정적으로 좌지우지하곤 합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설득의 기법으로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에토스(ἔτος)는 신뢰, 호감을 말하고,
파도스(πάθος)는 공감, 감성을 뜻하며,
로고스(λόγος)논리와 이성을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상대를 설득하려면
에토스 60%, 파토스 30%, 로고스 10%로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런 방식으로 전달해야 합니다.

먼저 에토스를 통해 신뢰를 형성하고,
파토스를 통해 마음의 문을 열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은 마음의 지표이자, 거울입니다.
항상 필요한 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면
유연한 인간관계, 인생의 선순환을 불러오는
긍정적인 마음가짐까지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줄 행복의 선순환은
따뜻한 한마디 말에서 시작됩니다.

좋은 말을 남에게 베푸는 것은
비단옷을 입히는 것보다 따뜻하다.
– 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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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충성스런 일군 고 박태준박사

제가 대학 시절에 성가대원으로 봉사할 때 저희 성가대 지휘자는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이셨던 박태준박사님이었습니다.
당시 당회장이셨던 배명준목사님으로부터 성가대 지휘자의 신앙적인 삶을 들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대부분 예배 한 시간 전에 성가대원들이 모여서 연습을 합니다.
물론 예배를 마치고도 한 시간 이상을 연습을 했습니다.
어느 주일에 성가대 연습을 마치고 예배를 위하여 입장하려고 할 때 박태준박사님에게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고 합니다.
전화의 내용은 교수님의 딸이 세브란스병원에서 마지막 임종하기 전에 아버지를 뵙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연락을 받고 교수님은 주일 예배를 마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이미 딸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모님이 교수님에게 "아니 마지막으로 딸이 한 번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데 왜 이제 나타나느냐?" 하고 불평과 원망의 쓴소리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교수님께서 "사랑하는 딸은 훗날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오늘의 예배는 다시는 드릴 수 없지 않는가? 더구나 지휘자는 예배의 음악을 맡은 제사장과 같은 신분인데 어떻게 그 일을 멈풀 수 있겠는가?"


충성(忠誠) / 충성 충, 정성 성

충성이란 한자를 분해하면 가운 데 중 + 마음 심. 말씀 언 + 이룰 성
사람의 마음 중심에 말씀을 두고 그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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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백낙준박사 / 부모님의 헌신(아버지 백사금집사)

한국 기독교 초창기 때, 백사금 집사님이라고 하는 남자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이 집사님이 나가는 교회에 부흥사경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미국 선교사님이 오셔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백집사님이 나가는 교회는 조그마한 오막살이 교회였습니다.
폐가가 된 것을 수리해서 예배당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부흥회를 하면서 선교사님이 “이 교회도 성전 건축을 해야겠습니다.
주님은 희생할 자를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서 주님을 위해서 희생할 사람은 없습니까?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서 얼마큼 희생하느냐에 따라서 주님은 여러분의 앞날을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했을 때. 이 백집사님이 그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합니다.
눈물이 쏟아졌다고 합니다.
‘나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시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에 대해서 내가 무슨 희생인들 못하겠느냐’ 이렇게 결심을 하고는 집회가 끝난 다음에 선교사님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선교사님 땅이 얼마나 있어야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선교사 말씀이 천 평의 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 미국 사람들은 교회를 지을 때, 땅을 넓게 차지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천 평을 이야기 했나 봅니다.
“또 성전 건축을 하는데는 돈이 얼마나 들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 얼마 얼마쯤 들겠습니다”하고 대답해 주시더랍니다.

그 백집사님이 집에 돌아와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다짐하는 기도를 했어요.
‘그래 이번에 내가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자, 주님께 한 번 멋지게 희생하고 그리고 내가 주님께 가자, 하루 세끼야 못 먹고 살겠느냐’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밭 중에서 제일 좋은 위치의 천 평을 떼어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논과 밭을 팔아서 성전 건축비로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다른 사람들은 바치고 싶어도 없어서 못 바치는데 제겐 바칠 것이 있어서 이렇게 바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주여 감사합니다.”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를 건축하다가 보니 건축비가 모자라게 되었습니다.
결국 할 수 없어서 백집사님이 갖고 있는 집도 팔아서 그것을 건축비로 내놓았습니다.
이 백집사님이 순진해 가지고는 그 선교사님의 말에 그대로 순종해서 있는 집까지 팔아 가지고 그만 교회 건축비로 내놓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자기가 살 것은 남겨 놓고 바쳐야 되는데 그만 순진한 마음에 몽땅 다 바치고 말았습니다.

성전은 멋지게 지어졌는데 그만 이 백집사님이 농사를 짓고, 살집이 없게 되었습니다.
있을 거처도 없습니다.
교회를 아름답게 짓고 목사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부임해 오셔서 보니까 교회는 아름답게 지어졌는데 이 백집사님의 형편이 말이 아닙니다.
살길이 막막한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목사님이 백집사님 부부를 불러 놓고 “그러면 집사님, 교회에 들어와서 사시지요”라고 해서 백집사님이 교회 사찰로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자기 땅을 다 바치고 자기 집을 다 바치고 이제 교회 사찰로 봉사하면서 완전히 희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동네 사람들이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적당히 믿어야지 저렇게 미쳐서야 되겠느냐”고 “저렇게 빈 털털이가 되가지고 저거 무슨 꼴이냐”며 동네 사람들이 백집사님을 상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그런데도 백집사님 부부는 사찰로 살면서 두 부부가 교회 마루에 엎으려서 매일매일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날마다 엉엉 울면서 어깨를 들먹거리면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그 우는소리를 들으니까 얼마나 가슴이 뜨끔뜨끔하겠습니까?
백집사님 부부가 교회에서 엎드려 울면서 기도할 때마다 목사님 간이 콩알만해지는 것입니다.
“아이고 저 부부가 옛날 집과 농토를 다 바치고 저렇게 살길이 막막하니까 그게 안타까워서 우는가 보다 얼마나 그게 생각날까” 하고 그 기도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저 간이 콩알만해지는 것입니다.
그 부부가 무엇을 기도하는가 알고 싶어서 한 번은 몰래 가서 들어봤답니다.

이렇게 기도를 드리더랍니다.

“주님! 우리는 이대로 살다가 천국을 가면 됩니다.
주님 만나면 거기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러나 하나 밖에 없는 이 아들을 공부시킬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부모 때문에 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공부시킬 길을 막아만 놓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공부시킬 길이 없겠습니까” 하며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전 재산을 하나님께 몽땅 바치고 나니까 자식을 공부시킬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부모 때문에 자식의 장래를 막아 놓은 것 같아서 그게 안타까워 이 부부가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이 기도 소리를 듣고서는 너무나 감격해서 “그러면 내가 이 일을 해결해 주어야 겠다”고 생각하고서 친구 목사님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했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 옛날 기독교 초창기 때만 하더라도 목사님들의 생활이 다 어려웠습니다.
다 가난하고 그래서 아무도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문이 결국 목사님의 입을 통해서 어디까지 퍼졌느냐 하면 결국 서울까지 퍼지게 되고 연세 대학교 뒤에 선교사들이 살고 있는 곳까지 퍼졌습니다.
마침 백집사님이 있는 교회에 와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했던 그 선교사님의 귀에까지 이 소식이 들리게 되었습니다.

이 선교사님이 마침 안식년이 되어서 미국으로 들어가려고 귀국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급히 평양으로 가서 그 백집사님을 만나 보게 되었습니다.

“집사님 참 큰일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크게 기뻐하고 계실 것입니다.
천국 가셔도 집사님 내외분께는 큰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집사님 소원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 선교사님 제게 하나 밖에 없는 이 아들을 공부시키는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미국에 데리고 가서 공부를 시켜 주기로 하되 공부하는 동안 서로 절대 편지 왕래를 하지 않기로 하고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선교사가 이 백집사님의 외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시켰습니다.
미국에서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공부를 시키고 대학원까지 보내서 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프린스턴 신학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세월이 19년이 흘렀습니다.

서울에 있는 연세 대학교에서 한국인 총장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미국인 총장 언더우드 박사가 총장으로 계시다가 이제 한국에서의 일을 끝내고 미국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후임자로 총장 감을 찾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총장 감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총장이 되는 조건이 첫째, 목사이어야 되고, 둘째는 교수 신분이어야 하며, 그리고 박사 출신이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한국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세 대학에서 세계 각지로 수소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프린스턴 신학대학에서 한국인 목사로서 교수로 있고 박사 학위를 취득한 분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연세 대학교에서 사람을 보내어서 그분을 모셔 오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백낙준 박사였습니다.
바로 그 백사금 집사님의 외동아들이었습니다.
이분이 초대 연세 대학교 총장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십니다.

“주라 그러면 그러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누가복음 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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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황해도 두메산골에서 한 소년이 석양에 산을 바라보며 "도대체 저 산은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서 끝나는 것일까?" 라고 중얼거리고있었다.
그가 바로 고산자 김정호였다.
그는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이루 말할 수 없는 역경속에 일생을 보냈다.
수 만리를 걸어야 했고 굶주리며 길가에서 잠을 자고 모아놓은 자료를 몽땅 잃어버리고 병이 나서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아내의 만류에도 김정호는 "나는 평생 소원이 좋은 지도를 만들어 보는 것이요. " 하며 20년 동안 전국을 세 번이나 돌고 백두산을 일곱 차례나 오르내렸다.

김정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아내는 이미 죽고 딸만 혼자서 외로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김 정호는 딸의 도움을 받아 판목을 하나씩 새겼으며 10년 후에는 판목을 완성하였고 1861년 철종 12년에는 종이에 찍어냈다.

절망의 시간에 지지 말고, 끝까지 견디어 승리의 면류관을 얻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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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남대문교회 고 배명준 목사

목사님이 어린 시절 마을에서 섬기던 '부근나무' 경상도 지방에서는 '당수나무'라고 합니다.
황해도 지방에서는 "부근나무"라고 한다고 합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숭배하는 나무가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성경책을 찢어서 풀을 칠한 후에 나무에 붙였다고 합니다.
다음 날 마을 사람들이 '부근나무'을 보더니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는가?" 하며 그 일을 행한 사람을 찾았는데 마침 배씨 집안의 아들이 그와같은 일을 하였다는 것을 알고 그 마을에서 추방했다고 합니다.

갑자기 마을에서 쫓겨난 배씨 집안의 가족들은 당장 먹을 것도 거주할 곳도 없어 난감하던 차에 마침 평양에 있던 선교사가 그 이야기를 듣고 찾아와서 예수님 때문에 쫓겨났으니 선교사가 책임을 질 것이라고 하여 배씨 가족들을 보살피며 나중에 어린 소년을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 신학을 공부케 하고 결국은 목회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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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채필근목사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교회를 순회하는 채필근 목사님은 가끔 선교부 돈을 가지고 각 교회에 나누어주곤 했다.
한번은 돈을 잔뜩 넣고 순회하는 도중 외딴 곳에 이르러 객주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손님들이 많아서 둘이 묵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서로 잠자리에 누웠으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혹시 저놈이 내 가 잠든 사이에 돈을 훔쳐가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난 다음날 주인이 차려다 준 상에서 겸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둘은 할 수 없이 서로 마주 앉아 식사기도를 하고 식사를 했다.
그랬더니 마주 앉았던 사람이 "선생님, 예수 믿는 어른입니까?" 해서 "네, 저는 채필근 목사입니다. " 했다.
그는 깜짝 놀라면서 "저는 0 0 교회 장로입니다. "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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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유관 - 감사와 청빈

김동인의 사초집을 보면 고려 말년인 1430년경 과거에 급제하여 세종대왕 때에는 우의정을 지낸 바 있는 유관이란 사람은 그의 생활이 청빈하였을 뿐만 아니라 감사하기를 잘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그가 청빈한 생활을 하였던지 우의정을 지내기 전까지만 해도 자기 집 하나도 변변한 것을 갖지 못하고 동대문 밖, 그것도 울타리와 대문도 없는 초가집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제때 지붕을 덮지 못하여 군데군데 하늘이 보일 만큼 구멍이 뚫어져 있었기 때문에 비가 오면 새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러나 유관은 조금도 불평하는 일이 없이 매사에 감사하였다.
5, 6월 장마철이 되어 비는 매일같이 내리고 방 안에는 편히 누울 곳도 없이 빗방울이 소리를 내며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유관 부부는 비가 새지 않는 곳으로 이리저리 옮겨 앉으며 비를 피하다가 나중에는 너무도 많은 비가 쏟아지므로 우산을 받쳐들고 마주 앉아서야 겨우 비를 피하게 되었다.
한참이나 소동을 벌인 후 기가 막혀 화가 나 있는 아내에게 유관은 위로하여 말하기를, "여보! 그래도 우리는 우산이 있으니 이와 같이 심한 비를 피할 수라도 있는 것이 아니오. 우리처럼 우산도 없는 집이야 지금 이 비에 오죽이나 하겠오. 그러니 감사하십시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불행 중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이 끝내 성공할 수 있음을 알게 하는 말이다.

S. 존슨이란 사람은 말하기를 "감사하는 마음은 높은 교양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서 저속한 인간에게서는 이것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

프랑스 혁명사를 집필하여 그 이름을 전 세계에 떨친 영국의 역사가이며 평론가인 칼라일은, "나는 암흑을 사랑하고 암흑 속에서 살았으며 죄인들의 괴수로 빛을 미워하고 경건한 생활을 비웃었으나 하나님은 나에게 풍성한 자비를 베푸셨으므로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노라."고 하였던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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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애가승무노인탄(哀歌僧舞老人歎)



이조 숙종대왕때의 일입니다.
그때에「哀歌僧舞老人歎」이란 말이 있는데 무슨 뜻인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숙종 대왕은 간간이 야간에 민정 시찰을 다니셨습니다.
어느 날 밤도 역시 신하를 한 사람 데리고 민정시찰을 나와서 어느 골목을 들어가니까 초라한 어느 오두막집에서 불빛이 새나오는데 노인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장고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노랫소리도 들립니다.
문틈으로 드려다 보니 노인은 초라한 밥상을 앞에 놓고 울고 있고, 아들인 듯한 젊은 아들은 장고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머리를 깎은 여승은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하도 이 광경이 기이하여 주인을 찾아 물어보니 기막힌 사연을 이야기 해 주는데 참으로 가상하기 이를 데 없는 사연이었습니다.
그 사연인즉슨 그날이 아버지의 생일인데 끼니가 없어 며느리가 머리를 잘라 팔아 가지고 시아버지의 생일 상을 보고 아버지 기뻐하시라고 아들이 장고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니 며느리가 춤을 추는데 이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목이 메어 밥을 먹지 못하고 탄식하며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임금은 말하기를 자신은 지금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인데 그 아들보고 내일 과거를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은 출제를 한 것이 바로「애가승무노인탄」이란 문제를 냈습니다.
그 뜻이 바로 "슬픈 노래를 부르는데 승려와 같이 머리를 깎고 춤을 추고 노인은 탄식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은 바로 자기의 어제 저녁 일이 시험문제에 나왔기 때문에 장원급제를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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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공짜 복음

한 생선 장수가 추운 겨울에 어떤 동네에 가서 생선을 사라고 외치고 다녔다.
그러나 아무리 돌아다녀도 누구 한 사람 값조차 묻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가장 큰 대문 집에 이르렀을 때 한 신사가 나와서 생선을 보더니 "그 생선 전부 얼마요?"하고 물었다.
생선 장수가 "네, 10만 내십시오" 하니 "자, 생선 값 외에 5만원을 더 줄테니 이 생선을 집집마다 골고루 나누어주시오." 하면서 돈을 지불하였다.
생선 장수는 뜻밖의 횡재에 기뻤다.
그래서 동네에 다니면서 "자, 거저 주는 생선이요. 거저 주는 생선.."하고 외쳤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받으려 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생선 장수를 미친 사람이라고 비웃기까지 했다.
생선 장수는 하는 수 없이 신사에게 도로 갖고 와서 "아무리 거저 준다고 해도 받으려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신사는 "그럼 나와 함께 다녀 봅시다."하여 둘이서 "거저 주는 생선이요. 누구든지 와서 받아 가시오."하고 외쳤으나 역시 아무도 나오는 이가 없었다.
그러던 중 어떤 작은 아이 하나가 와서 생선을 달라고 했다.
그들은 큼직한 것으로 집어 주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그제서야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생선을 받아갔고 생선을 금새 동이 났다.
어떤 부인이 다가와서 "누구는 주고 나같이 구제 받을 사람은 왜 안 주는 거요?"하며 불평하였다.
생선 장수가 그 부인을 보고 "아까는 미친놈이라고 욕을 하더니 왜 이제 와서 불평을 하는 거요?"하자 그 여인은 얼굴이 붉어지며 돌아가 버렸다.
생선 장수가 신사에게 물었다.
"생선을 사서 동네 사람들에게 거저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동네는 가난한 동네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아무리 생선 사라고 외쳐도 사먹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도울 겸 동네 사람들에게 선사도 할 겸해서 생선을 다 사서 나누어 준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양식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복음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생선 장수처럼 외치고 또 외쳐야 한다.
"거저 주는 생선이요. 누구든지 받아가시오!"
"거저 주는 복음이요. 누구든지 받아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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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정동교회의 빚

1914년 당시 정동교회는 미화로 200달러 정도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빚은 1893년에 시작한 교회 건축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목사님은 빚을 갚기 위해 헌금을 하자고 했지만 그날 걷힌 헌금은 50달러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교인은 이화학당 학생이 많았습니다.
기숙사로 돌아온 학생들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바치기로 의논하고 주일 저녁 교회에 다시 모였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찬송을 부른 후 한사람 씩 나와 가진 것을 바쳤습니다.
동전 17달러 정도, 반지 35개, 손거울, 자명종 2개, 양먈, 내의, 구두, 혼수감으로 어머니가 주신 붉은 명주도 있었습니다.
어떤 여학생은 댕기머리를 잘라서 주님께 드린다며 내어 놓았습니다.
그날 그 교회의 빚은 해결되었습니다.
빚 바랜 이화여대 학생들의 요즘 세태에 비기면 고전소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누가 주의 일에 더욱 힘쓸 수 있습니까?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누가 자신의 댕기머리를 잘라서 드릴 수 있습니까?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한평생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서 교회 섬기고 직분 감당하고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내 대신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오! 주여,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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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남대문교회 김성섭장로님

장로님은 마포에서 공덕의원을 운영하셨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남대문교회 주일학교 부장으로 섬기셨던 장로님입니다.
제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는 주일학교 반사가 되어 장로님과 함께 주일학교에서 섬기고 있었을  무렵
어느 주일에 교사회 시간에 늦게 되었는데 교회 문앞에서 교사들을 기다리시던 장로님께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나를 부르시더니
"이선생, 아침도 먹지 못하고 오느라고 수고하네" 하시며 지갑을 열어 돈을 주시며 다음 주일부터는 아침을 먹고 택시를 타고 오라고 하신다.
인품으로나 모든 생활에서 이러한 인격을 소유한 장로님이 그리워진다.

내가 어렸을 때 그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진료를 받으면 진료비를 오히려 내 호주머니에 넣어주셨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열심히 공부하라며 영어사전과 한영사전을 선물로 주시기도 하셨다.
오늘날 이러한 섬김의 본이 되시는 장로님을 그리워하는 것은 교회가 너무 변질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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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강남제일병원장 최낙원 박사

60년대 겨울,
서울 인왕산 자락엔 세칸 초가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그날그날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빈촌 어귀에 길갓집 툇마루 앞에 찜솥을 걸어 놓고 만두 쪄서 파는 조그만 가게가 있었습니다.  
쪄낸 만두는 솥뚜껑 위에 얹어 둡니다.  
만두소 만들고 만두피 빚고 손님에게 만두 파는 모든 일을 혼자서 다 하는 만두가게 주인 이름은 순덕 아지매였습니다
입동 지나자 날씨가 제법 싸늘해 졌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어린 남매가 보따리를 들고 만두가게 앞을 지나다가  추위에 곱은 손을 솥뚜껑 위에서 녹이고 가곤 했습니다.  

어느 날 순덕 아지매가 부엌에서 만두소와 피를 장만해 나갔더니 어린 남매는 이미 떠나서 골목길 끝자락을 돌고 있었습니다.  
얼핏 기억에 솥뚜껑 위에 만두 하나가 없어진 것 같았습니다,  
남매가 가는 골목길을 이내 따라 올라갔습니다.  
저 애들이 만두를 훔처 먹은 것 같아 혼을 내려고 했었습니다.
그때 꼬부랑 골목길을 막 쫓아 오르는데, 아이들 울음소리가 났습니다.
바로 그 남매였습니다,  흐느끼며 울던 누나가 목 멘 소리로 말했습니다.  
"나는 도둑놈 동생을 둔 적 없어. 이제부터 누나라고 부르지도 말아라."
예닐곱 살쯤 되는 남동생이 울며 말했습니다.  
"누나야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담 옆에 몸을 숨긴 순덕 아지매가 남매를 달랠까 하다가 더 무안해 할 것 같아 가게로 돌아 왔습니다.  
이튿날도 보따리 든 남매가 골목을 내려와 만두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누나가 동전 한 닢을 툇마루에 놓으며 중얼 거렸습니다.  
"어제 아주머니가 안 계셔서  외상으로 만두 한 개 가지고 갔구먼요."  
어느 날 저녁 나절 보따리 들고 올라가던 남매가 손을 안 녹이고 지나 치길래 순덕 아지매가 남매를 불렀습니다.  
"얘들아  속 터진 만두는 팔 수가 없으니  우리 셋이서 먹자꾸나."   
누나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맙습니다만 집에 가서 저녁을 먹을래요."  하고는 남동생 손을 끌고 올라 가면서
"얻어 먹는 버릇 들면 진짜 거지가 되는 거야. 알았니?" 하는거였습니다.  
어린 동생 달래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찬바람에 실려 순덕 아지매 귀에 닿았습니다
어느 날 보따리를 또 들고 내려가는 남매에게 물었습니다.
"그 보따리는 무엇이며 어디 가는 거냐?"  
누나 되는 여자 아이는 땅만 보고 걸으며 "할머니 심부름 가는 거예요."  
메마른 한마디 뿐이었습니다.
더욱 궁금해진 순덕 아지매는 이리저리 물어봐서 그 남매 집사정을 알아냈습니다.
얼마 전 이곳 서촌으로 거의 봉사에 가까운 할머니와 어린 남매 이리 세 식구가 이곳으로 이사와 궁핍 속에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할머니 바느질 솜씨가 워낙 좋아 종로통 포목 점에서 바느질 꺼리를 맡기면 어린 남매가 타박타박 걸어서 자하문을 지나 종로 통까지 바느질 보따리를 들고 오간다는 것입니다.  
남매의 아버지가 죽고 나서 바로 이듬해 어머니도 유복자인 동생 낳다가  그만 모두 이승을 갑자기 하직했다는 것입니다,  
응달 진 인왕산 자락 빈촌에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남동생이 만두 하나 훔친 이후로도 남매는 여전히 만두가게 앞을 오가며 다니지만.  
솥뚜껑에 손을 녹이기는 고사하고 아예 고개를 돌리며 외면하고 지나 다니고 있었습니다
"너희 엄마 이름 봉임이지 신봉임 맞지?"  
어느 날 순덕 아지매가 가게앞을 지나가는 남매를 잡고 물었습니다.  
깜짝 놀란 남매가 발걸음을 멈추고 쳐다 봅니다.  
"아이고 봉임이 아들딸을 이렇게 만나다니  천지 신명님 고맙습니다."
남매를 꼭 껴안은 아지매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합니다, 
"너희 엄마와 나는 어릴 때 둘도 없는 친구였단다.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고. 
너희 집은 잘 살아 인정 많은 너희 엄마는 우리집에 쌀도 퍼담아 주고 콩도 한 자루씩 갖다 주었단다."
그날 이후 남매는 저녁 나절 올라갈 때는 꼭 만두가게에 들려서 속 터진 만두를 먹고,  순덕 아지매가 싸주는 만두를 들고 할머니께 가져다 드렸습니다.  
순덕 아지매는 동사무소에 가서 호적부를 뒤져 남매의 죽은 어머니 이름이 신봉임 이라는 것을 알아냈고.  
그 이후로 만두를 빚을 때는 꼭 몇개는 아예 만두피를 일부러 찢어 놓았습니다.  
인왕산 달동네 만두 솥에 속 터진 만두가 익어갈 때 만두 솥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30여 년 후 어느 날 만두가게 앞에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서고 중년신사가 내렸습니다.   
신사는 가게 안에 꾸부리고 만두 빗는 노파의 손을 덥석 잡습니다.  
신사는 눈물을 흘리며 할머니를 쳐다봅니다,     
"누구 이신가요?"   
신사는 할머니 친구 봉임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만두집 노파는 그때서야 옛날 그 남매를 기억했습니다.  
두 사람은 말없이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명문 미국대학 유학까지  다녀와 병원 원장이 된 봉임의 아들  최낙원  강남제일병원 원장입니다.

* 이 글을 읽고 오늘 아침도 감동의 눈물로 하루를 출발합니다.

누나의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운 품격 있는 가치관,
그리고 만두가게 주인의 고상한 품격에 고개 숙여집니다.

화려한 학력과 경력이 과연 이들의 삶에 비교 우위에 있었을까요?
우리 주변에서 오늘날도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훗날 쓰여질 수 있는 일들이
혹시나 나 자신이나 주위에 있는지 묻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이 세상 아이들도 모두 이런 아이들로 성장할 수 있을런지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또한 내 이웃은 누구인가?
내 친구는 누구인가?

사람이 60세를 넘기면 살아온 나이를 세지 말고
내 주위에 술 한 잔이나 싸구려 음식 하나라도
가끔 함께 먹을 친구나 이웃이 몇 명이나 되는지 세어 보아야 한답니다.  

많을수록 인생성공 아니지만
그래도 인생을 이기적으로 헛되이 살지 않은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강남제일병원장 최낙원 박사의 실화 눈물 어린 감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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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김창인 목사의 설교 속에 등장하는 실화이다.

이북의 남포에 예배당이 한 곳도 없을 때의 이야기이다.
선교사들이 평양에 와서 교회를 세우고 선교하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평양에는 교회가 한두 곳 있었다.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서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던 한 부인이 평양에서 남포로 이사를 했다.
문제는 남포에는 교회가 없으니 주일날이면 평양으로 예배드리러 간다.

그것도 주일날 가는 것이 아니라 토요일에 미리 가는데 소달구지를 타고 간다.
소달구지는 사람의 걸음보다도 느리다.
그렇게 토요일 올라가 잠을 자고,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저녁 예배까지 드린 후에 또 그 밤을 지내고 월요일에 다시 남포로 돌아왔다.
옛날 우리의 조상들은 주일 하루를 지키기 위해서 이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그 부인의 평생소원이 하나 있었으니, 곧 남포에 예배당을 세우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의 힘 나의 재산을 가지고는 예배당을 지을 수 없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예배당을 하나 세워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1년이 가고 3년이 가고 5년이 가도 아무런 징조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부인은 인내로 기도를 끊지 않았다.

그날도 평양으로 예배를 드리러 가는데, 아들 두 형제를 데리고 갔다.
교대로 소를 몰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들이 빨리 가느라고 채찍을 휘두르며 소를 몰았다.
그렇게 하면 소가 빨리 가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길이 신작로일지라도 넓지는 않았다.
옆으로는 말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소를 몰던 아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고 소에게 채찍을 휘두르다가 그만 그 말을 때리고 말았다.
말이 깜짝 놀라서 뛰는 바람에 말을 타고 지나가던 나이가 제법 지긋한 사람이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경찰서로 갔지만 화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검찰로 넘어가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정에서 두 아들 중에서 도대체 누가 채찍질을 잘못해서 남의 말을 때려 떨어지게 하여 중상을 입혔는지가 문제였다.
둘이 한꺼번에 했을 리는 없고 진짜 범인을 잡아서 벌을 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때 형제 중에 형이 이렇게 대답한다.
“제가 했습니다. 저를 벌주십시오.”
그러자 이번엔 동생이 나서더니 “아닙니다.
그땐 형님이 자고 있었고, 내가 소를 몰고 있었으니 내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또 형은 아니라고 자기가 했다고 하고 동생은 또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검사는 어머니한테 “도대체 누가 잘못을 했습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나는 그때 너무 피곤해서 졸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아들이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기어이 벌을 주어야 한다면 작은아들을 벌주어 감옥에 보내십시오.”라고 말한다.
검사가 이상하다 생각되어 “왜 그렇습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답한다. “큰아들은 전처소생이요 작은 아들은 제가 이 집에 와서 낳은 친아들입니다.
그러니 전처소생은 가만히 놔두시고 내가 낳은 친아들을 벌주십시오.”

검사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날의 재판이 끝난 후에 검사가 부인에게 묻는다.
“당신 소원이 무엇입니까?”
어머니는 “나는 이렇게 평양으로 예배드리러 가지 않게 남포에 예배당을 하나 세우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만 해도 검사들이 괜찮을 때이다.
감동받은 검사는 자기 사재를 털어 남포에 예배당을 하나 세워 주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 참으로 묘하다.
1년, 3년, 5년,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렸는데 도움은 고사하고 어째서 예배드리러 가는 길에 그런 사고가 난단 말인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이럴 수 있느냐고, 다시는 예배당에 안 간다고, 그따위 하나님은 믿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었을 게다.

그런데 그 사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전화위복의 은혜를 주셨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섬기고 찬양하는 아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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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오성에 관한 일화
-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


조선 중기 정승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친구 사이
오성(鰲城)은 이항복의  봉호인 오성부원군에서 따왔고, 한음(漢陰)은 이덕형의 호라고 한다.

1. 서당에서 공부할 때 수업 도중 훈장님이 졸고 있었는데 오성이 몰래 껍질을 까지 않은 생밤을 화로에 넣에 폭발시켜 훈장님과 학생들을 놀라게 했다.
어린이용 문고판에서는 보통 이 때 한음과 처음 만난 것으로 나온다.

2. 오성이 본인의 집의 잘 익은 감을 따 먹으려고 하인을 하나 호출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하인이 옆집 권철[9] 대감의 자택으로 넘어간 가지의 감은 하나도 손을 안 대는 것이었다.
오성이 왜 그러는 거냐고 의아해하자 저쪽 감을 땄다가는 (하인) 본인이 옆집 하인한테 볼기를 맞기에 그럴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오성이 무슨 이유로 옆집 하인이 너를 구타할 자격이 있는 거냐고 묻자 옆집이 권철 대감의 집으로써 더 지체 높은 사람의 하인이니 그렇다는 것이다.
이에 오성이 옆집으로 가서 권철의 방 창호지를 손으로 뚫어 손을 넣고 권철에게 "대감, 이 손이 누구 손입니까?"라고 물었다.
권철은 황당해하며 "그게 당연히 네 손이지 누구 손이냐?"라고 대답했고, 이에 오성은 또다시 "이 손이 대감의 방으로 들어갔는데 대감의 손 아닙니까?"라고 다시 물었고, 권철은 "네 손에 달렸으니 당연히 네 손이지."라고 재차 답했다.
그리고 잠시 후 오성은 "그럼 저희 집 감나무에서 대감댁으로 넘어간 가지에 달린 감은 누구 감입니까?"라고 되묻자 권철이 웃으면서[10] "그야 당연히 너희 집 감이지."라고 하였고 이에 오성이 "그러면 왜 대감님댁 하인들이 담장 너머로 넘어간 감들을 못 따게 한 것입니까?"라고 다시 묻자 권철은 "아마도 우리 집 하인들이 배움이 부족해서 그랬던 모양이다.[11]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잘 교육하마."라고 하였고, 감들을 마저 다 따 가게 허가하였고, 이후 권철은 오성의 모습에 감탄했고, 이후 오성은 권율의 사위가 되면서 한집안 식구가 되었다.

3. 오성이 어린시절 대장간에 자주 놀러 갔는데 집에 가면서 몰래 못(이야기에 따라서는 편자)을 한두개씩 슬쩍해갔다.
당시에는 소위 말하는 개구멍바지라고 해서 엉덩이가 뚫려 있는 바지가 있었는데, 이걸 이용해서 개구멍바지를 입고 방문 후 훔치고 싶은 물건 위로 앉고서 슬쩍한 것.
이를 눈치챈 대장장이가 오성을 혼꾸녕을 내주기 위해 불에 달군 못을 맨 위에 올려놓았는데, 이를 몰랐던 오성이 못을 깔고 앉았다가 엉덩이에 화상을 입었다.
전승에 따라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뒷이야기가 더 있기도 하다.
이 일 이후에 대장간이 모종의 불운을 당해 망하게 되었는데, 오성이 그동안 훔쳤던 못들을 단지에 넣어 전부 돌려주며 다시 재기하게 도와주었다는 결말.

4. 오성이 한음에게 "내가 네 부인과 정을 통하였다"고 말하자, 이 말을 들은 한음 부인은 오성을 초청해서 떡에 똥을 넣어 오성에게 먹였다.
오성은 뭣도 모르고 똥이 든 떡을 먹었다가 호되게 당했다.
한음 부인은 거짓말을 하는 입에는 똥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5. 오성은 신붓감을 선보려고 인절미를 해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몽둥이로 자기를 쫓으며 때리라고 시킨 뒤 도망치는 체하며 신부의 치마폭 속으로 들어갔다.
신부는 이에 당황하지 않고 “선을 보려면 겉선이나 보시지 속선까지 보십니까.”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6. 한음으로부터 한밤중에 전염병으로 일가족이 몰살한 집에 시체 감장(勘葬)을  부탁받은 오성이 혼자 그 집에 이르러 시체를 감장하다가 갑자기 한 시체가 벌떡 일어나며 볼을 쥐어박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였는데,  알고 보니 시체인 척 누워 있었던 한음의 장난이었다.

7. 오성의 아버지는 오성의 담력을 시험하려고 한밤중에 외딴 숲 속의 고목나무 구멍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 오라고 시키고, 먼저 가서 나무 구멍 속에 숨어 있다가 오성이 구멍 속으로 손을 넣을 때 안에서 그의 손을 잡았는데, 오성은 놀라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체온이 느껴지자 귀신이 아니고 사람의 장난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8. 오성과 한음이 참새를 잡아 키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참새가 죽어버렸다.
이에 슬퍼한 오성과 한음은 새를 묻어주고 축문을 써주며 곡을 했는데 이를 본 오성의 아버지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장례식 놀이나 하냐?"고 오해하며 꾸중했다.
이에 오성은 "저희 때문에 참새가 억울하게 죽었는데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참새의 명복을 비는 축문을 아버지에게 보여주었다.
축문의 내용을 읽은 아버지가 그 문장 솜씨에 감탄하여 "한 번만 용서해줄 터이니 앞으로는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마라."고 주의를 주었다.

9. 둘이 어린 시절 시골 외갓집에 놀러갔는데, 그 곳에는 구두쇠 영감이 수박농사를 짓고 있었다.
오성과 한음은 맛있어 보이는 수박을 하나 따서 먹어봤는데, 이 영감이 거름을 안 줘서 비리고 맛도 더럽게 없었다.
이에 둘은 수박밭에 말뚝을 박아 수박들을 몽땅 못 쓰게 만들었으며, 둘은 "이를 본 영감이 정신을 차릴 것이다.",
"아니다, 정신을 차리기는 커녕 더 길길이 날뛸 것이다."라고 큭큭대며 상경했고, 다음날 이 모습을 보고 영감은 분기탱천해서 "어떤 놈이 우리 수박밭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거야? 당장 잡아서 모가지를 꺾어놔야지!"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나 그래놓고도 영감은 개과천선했는지 이듬해에 썩어버린 수박이 거름이 돼 맛 좋은 수박이 열렸고, 오성과 한음은 다시 그 시골을 찾았고, 영감은 둘에게 고마워하며 맛 좋은 수박을 대접했다.

10. 허 서방이라는 이름을 가진 농부가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기 위해 어느 날 오성과 한음을 찾아왔다.
사정인 즉슨, 얼마 전 본인의 아내가 길을 걷다가  화장실이 너무 급한 나머지 이 마을의 최고 부자인 황대감의 밭머리에서 소변을 봤는데, 운나쁘게도 그만 황대감에게 들켜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 극대노한 황대감은 허 서방의 처를 꾸중하면서 집의 황소를 가져오라는 어이없는 퀘스트를 내렸고,  마을 사람들도 이게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면서 황대감을 원망했단다.
오성과 한음은 본인들이 해결해주겠다고 하고 허 서방을 돌려보낸 뒤 다음날 황대감이 출입하는 타이밍에 맞춰 짜고서 갑자기 대판 싸우는 척 연극을 하였다.
황대감이 무슨 일인고 하며 의아해하자 오성 曰 "제가 얼마전에 길을 가다가 하도 급해서 이 밭에다가 본의 아니게 오줌을 눴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가 이 모습을 봐버렸고, 여기서 오줌을 눴다가는 황소 한 마리를 빼앗기게 된다며 날뛰는 게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말이냐고 맞섰고, 그래서 그 문제로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성이 이렇게 또박또박 얘기하자 황 대감은 뜨끔했다.
"저는 정말 이 고을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들었기에 이 친구를 말린 겁니다.
자기 밭에다 오줌을 누었다고 그 사람의 전 재산인 황소를 끌고 갔다고 하던데 혹시 대감님께서는 그 이야기 모르시나요?"
이번에는 한음이 맞장구를 치자 황 대감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딴전을 피웠다.
"저것 보십시오.
현재 저 친구는 끝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번에 암행어사가 되신 제 숙부께 말씀드려서 혼을 내주라고 할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렇게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어르신?"
암행어사라는 말을 듣자 황 대감은 표정이 굳어졌다.
"얘들아, 그만 가마를 돌려라. 갑자기 속이 좋지 않구나!"
황 대감은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허 서방을 호출했고, 그에게 황소를 돌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내가 자네 부인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려고 잠시 황소를 맡아두었던 것이니 오해는 말게. 자네도 생각해 보게.
상식적으로 아직 젊은 여자가 길바닥에서 방자스럽게 치마를 벌렁 까 내리고 소변을 보는 모습이 좋아 보이는가?
그래, 내 생각한 바가 있어서 한 일이니 그리 알게."
황 대감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허 서방의 등을 두드려주었고, 허 서방은 그렇게 소를 뺏기는 일은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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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안이숙 - 죽으면 죽으리라

‘살아 있는 순교자’로 알려진 안이숙은 1908년 평안북도 박천에서 무역상을 경영했던 부호 안중호의 넷째 딸로서 팔삭동이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의 상당한 재력으로 풍요롭게 자라난 그녀는 아들이 없어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불협화음을 경험하며 자라게 된다.

자라면서 총명이 남달리 뛰어난 안이숙은 박천 공립보통학교를 거쳐 평양 서문여고를 졸업한 후에 그 당시 보통 사람들로는, 더구나 여자의 몸으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본 유학을 떠났으며, 일본 경도여전과 귀족학교인 동경 가정학원 연구과를 졸업했다. 그러므로 일본에서의 생활은 그 후 안이숙의 사역과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이숙이 21세가 되던 1929년에 귀국하여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 임용되어 근무했고, 1937년에는 평북 선천 사립 보성여학교에서 음악 및 일어교사로 교편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일제 말엽인 1939년 전교생이 합동으로 신사에 가서 행했던 신사참배시 의연히 꼿꼿하게 하나님 이외의 어떤 신에게도 절을 하지 않는 믿음의 절개를 보이며 신사참배를 거부한 후 신의주에 사는 제자의 집으로 피신하게 된다.

일본 형사의 눈을 피해 신의주 근교로 피신하던 중 “평양성으로 가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평양에 가게 된다. 거기서 평남 개천읍 십자의원의 의사인 박관준 장로를 만나 하나님의 대사로서 1940년 2월, 귀신의 땅 일본에 건너가서 위정자를 위시한 장관들을 만나 일본의 망국행동을 경고하고 그들의 한국 기독교 박해에 항의했다. 또한 제 74회 일본제국회의 때 의사당에서 ‘일본은 유황불로 망한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대사명을 전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 투옥되어(일본 국회의사당 수위가 쓴 기록에서 이날 사건이 자세하게 열거되어 있음) 평양형무소에 이감 후 6년의 옥고를 치렀다.

 안이숙이 세상에 알려진 연유는 바로 옥중생활에서 착한 양 착한 목자로서 주님의 참사랑을 몸소 실행한 것이다. 주님은 안이숙을 통해 각색 죄수들과 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하나님과의 사랑을 회복시키셨던 놀라운 사건들이 <죽으면 죽으리라>에 실려 있다.

  이러한 안이숙의 꼿꼿한 신앙은 일찍이 미국 선교사로부터 말씀공부를 배운 어머니의 영향에서 비롯된다. <죽으면 죽으리라>에 나와 있듯이 안이숙 어머니의 신앙은 참으로 놀랍고 대단하다. 옥중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추위와의 싸움이었다. 평양형무소의 추위는 안이숙의 눈을 얼게 할 정도로 혹독했다. 그녀의 눈에서는 고름이 나오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실명의 위기를 맞게 된다. 군의관의 배려로 일시 출감하여 치료할 수 있었는데, 이때 면회 온 안이숙 어머니의 말씀은 우리 가슴을 무척 감동케 한다.

  여기 안이숙 어머니가 그 당시 말씀하신 내용을 소개한다.

  “얘! 너 왜 눈을 위해 염려하니? 네가 네 생명을 주님께 바쳤을 때 넌 네 눈도 같이 바치지 않았느냐?”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감을 느꼈다.

“아무렴요. 눈도 바치고 모든 것 다 바쳤어요. 어머니! 알았어요.”

“주님께 일단 드렸으면 주님의 것이지 네 것이 아닐 게 아니냐? 주님께 한번 바친 네 몸과 네 생명은 주님이 알아서 잘하실 것인데, 너는 왜 네 것같이 염려하며 네 재간으로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주님이 그 능한 지혜로 다 좋게 하시는 것인데, 너나 내가 눈이 어두워야 좋을 것인고로 어둡게 하시는 것이 아닐까? 주 목사님은 도라홈으로 벌써 눈을 못 쓰게 되셨고 그로 인해서 더 충성하시는 것 잊어버렸냐? 사도 바울도 눈에 가시 때문에 순교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 눈을 뜨고 보지 못할 것을 보고 마음이 더 상하는 것보다 눈을 감고 아무 것도 안 보는 것이 너를 위해서 좋은 것인 줄 생각해 본 일이 없지?”

 

나는 이러한 위대한 대선생이 내 어머니인 것에 또 한번 탄복했다. 언제나 그는 내게 이런 대선생이었다. 주는 내게 합당한 신앙 모범의 어머니를 주셔서 지금까지 나를 기르시고 권면하시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얼굴에 웃음을 띄우면서

“자! 우리는 용사들인데 무엇 눈 같은 것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하겠어요. 자, 어머니 진정하세요. 저도 용진 맹진하겠어요.”

그리고 바라만 보고 섰던 여간수와 부장과 남간수에게

“미안합니다. 저는 제 갈 곳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하고 사무소를 나왔다. 여간수는 기가 막혀서

“나는 세상에 살다가 이런 일은 처음 봐요. 딸도 딸이지만 어머니는 더하시는군요.”

그 당시 안이숙과 함께 옥중생활을 했던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이기선 목사, 이광록 집사, 박관준 장로, 박신근 집사, 이인재 전도사, 조수옥 여집사, 최덕지 선생 등등과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최봉석 목사(최권능 목사), 그리고 위대한 설교자 주기철 목사이다.

‘아! 용사여! 신앙의 용사들이여! 참 장하고 존귀하여라!’

1945년 사형집행 몇 시간을 앞두고 안이숙은 8.15 광복과 함께 8월 17일 출옥했으며, 1948년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미국에서 김동명 목사님과 결혼했고, 미네아 폴리스에 있는 서북대학에서 영어와 음악공부를 마친 후, 텍사스 서남 침례신학교에서 기독교 교육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그 학교에서 교회음악을 연구했다.

1957년 미국 남침례교 국내선교부에서는 김동명 목사를 미국 선교사로 파송했으며 김 목사님은 Berendo Street Baptist Church를 개척하게 되며 이때 한 설교가 그 유명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이다.

교회 개척 이후 참으로 아름다운 간증이 많이 있는데, 이는 <죽으면 죽으리라>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안이숙이 미국으로 건너간 지 20년 만인 1968년에 귀국하여 <죽으면 죽으리라>를 출간했을 때 한국 교회 안팎에 큰 충격을 주었고 장기 베스트셀러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1976년에 그 후편 <죽으면 살리라>를 출간했으며, 1989년에는 또다시 <당신은 죽어요 그런데 안 죽어요>를 출간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후 1990년 <그럴 수도 있지>, <낫고 싶어요>, <솔직한 노래>, <자랑이 되는 자랑>, 1993년 <信情>, <지나가는 순례자>, 1995년 <온 세상 내 세상> 등 총 10편을 저술했다.

 

이후 1995년 11월 안이숙 사모님과 김동명 목사님이 힘을 모아 대전 대덕연구단지 내 새누리교회를 세운다.

 

그리고 1997년 10월 18일 미국 나성의 선한사마리아병원에서 89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나성 Hollywood Memorial Park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져 있다.

 

“주님을 위하여 일제 밑에서 6년 간 옥고, 사형을 앞두고 출옥한 실격한 순교자. 죽으면 죽으리라(If I Perish, I Perish) 죽으면 살리라(If I Perish, I Live).”

 

<죽으면 죽으리라 안이숙 이야기> pp27~36, 안이숙 저, 기독교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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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옛날 김유신 장군이 젊은 시절 방탕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엣 생활을 정리하고 화랑도 정신으로 무장하여 동료들과 열심히 훈련을 마치고 모처럼 모여서 술자리를 가졌는데 그 날 그만 너무 취하여 말을 올라탔는데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엉뚱한 곳에 와서 누워있더랍니다.
곰곰히 생각하더니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 저 말이구나!
굉장히 좋은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김유신이 술이 취할 때마다 기생방으로 갔다는 것을 기억한 말이 그 날도 기생방으로 데려다 주었다고 합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김유신은 큰 칼을 들어 그 좋은 말의 목을 내리쳤다고 합니다.
주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말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주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좋은 말을 내리쳤느냐? 하고 질문했을 때 주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말이 아무리 좋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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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마취도 없이 허벅지살 25㎝ 어머니에게 이식한 아들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당한 임우영... 남겨진 가족에게 생긴 일들


송병순은 꼴머슴을 앞세워 집을 나섰다. 보리 방아를 찧으러 가는 길이다. 지게에 보리를 잔뜩 싣고 뚜벅뚜벅 걷는 꼴머슴은 얼마 안 가서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8월 말의 날씨는 여전히 뜨거웠기 때문이다. "잠시 쉬었다 가자." "네." 송병순과 꼴머슴은 손부채로 땀을 식히고 횡기에 있는 방앗간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송병순이 사는 충북 영동군 용화면 자계리 중자작(새땀)에서 횡기까지는 800m에 불과했지만 늦여름의 따가운 햇살은 그들의 걸음을 더디게 했다. 더군다나 송병순은 황달이 걸려 눈자위는 노랗고 빈혈기가 있었기에 식은땀마저 흘렸다.


"더운데 오느라 고생했어요." 방앗간 주인은 환한 웃음을 지며 송병순을 맞이했다. "잘 좀 찧어줘요." 주인은 보리를 찧기 위해 분주히 몸을 움직였다. 당시 용화면 자계리에 있던 방앗간은 전기나 석유로 발동기를 돌리는 곳이 아니었다. 참숯을 때어 그 화력으로 발동기를 돌리는 방식이었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제국주의가 부족한 연료난을 해결하기 위해 숯을 자동차 연료로 썼던 목탄차(木炭車)의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잠시 후 '쉭쉭' 하는 소리와 함께 발동기가 돌아갔다.

방앗간 주인은 이마의 땀을 훔치고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송병순은 보리가 잘 찧어지는지 보기 위해 기계 앞으로 갔다. "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쓰러졌다. 주인과 꼴머슴이 황급히 달려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송병순의 치마가 발동기 피댓줄에 휘감기면서 그녀의 하반신이 기계에 끌려간 것이다. 하반신이 파열되면서 피가 사방에 튀었다. "아이고 이 일을 어쩌나!" 손을 부들부들 떨던 주인은 밖으로 뛰어가더니 잠시 후에 트럭을 타고 왔다. 군용트럭을 이용해 벌채된 나무를 운송하던 트럭이었다. 당시 충북 영동군은 산림지대로 목재 생산의 주요 지역이었다. 트럭에 실린 송병순은 영동군 구세군병원으로 옮겨졌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허벅지 살 25cm 잘라내
 
해방 후 임우영의 모습박만순
 
피도 부족했지만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간 살을 이식하는 게 중요했다. 응급실 의사는 가족들에게 그녀의 상황을 설명하고, "피부이식 수술을 해야만 살아날 가능성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가족들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그 순간 붉어진 얼굴에 눈물이 빗물처럼 흘리던 큰 아들 임세환(당시 16세)이 "선생님, 제 허벅지 살을 잘라 내주세요"라고 말했다. 모두 눈이 동그래졌지만 어느 누구도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달리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임세환은 수술실 안의 어머니 옆 침대에 누웠다. 간호사들은 헝겊으로 그의 손목을 침대에 묶었다. 1954년 당시 영동 구세군병원은 마취시설이 안 되어 있을 만큼 시설이 열악했다.

"악~~~" 병원이 떠나가는 소리가 났다. 중학교 3학년 학생의 허벅지 생살을 25cm나 잘라 냈으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집도하는 의사나 돕는 간호사의 얼굴은 땀으로 번질거렸지만 이들은 묵묵히 수술에 전념했다. 몇 시간 만에 수술실에서 나온 의사에게 가족들이 몰려들었다. "선생님, 결과는 어떻습니까?" "글쎄, 경과를 봐야 합니다."

하지만 아들의 생살을 이식받은 어머니 송병순은 건강이 악화되기만 했다. 당시 의료기술 수준으로는 그녀의 삶을 소생시킬 수는 없었다. 사고 6개월 만인 1955년 3월 2일 송병순은 사망했다.

'효자선생' 가족 돕기 성금
 
임세환 사망 관련 기사-경향신문박만순
 
"지난 10일 영동역 광장에는 60여명 의 어린이들과 교육계인사들이 열차에서 내리는 말 없는 유해를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효자 선생으로 불리던 임세환 교사(31세)의 유해는 발을 구르며 울부짖는 제자들의 울음 속에 장지로 향했다." (경향신문 1968년 2월 19일자)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 살을 25cm나 잘라낸 임세환은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68년 1월 9일 부산복음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수술한 일로, 작고하기 전까지 병마와 싸웠다. 과다 수혈과 피부 이식 수술의 후유증으로 악성빈혈에 시달린 것이다.

영동중학교와 영동농고를 졸업한 그는 명지대학교의 전신인 서울 문리대 사범대를 나와 고향 영동에서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영동초등학교에서 조회를 할 때에 빈혈로 쓰러지기 일쑤였고, 사정을 알고 있던 교사들의 마음은 새카맣게 탔다. 그러다 결국 만 30세의 나이에 아내와 어린 딸 둘을 남겨놓고 세상을 하직했다.

고인이 담임을 맡았던 영동초등학교 3학년 4반 학생들을 포함한 전교생이 유가족을 돕기 위해 모금에 나섰고 12만원을 전달했다. 1968년 12만원은 2019년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500만원이다. 초등학생 모금액으로는 거액임을 알 수 있다.

임세환이 어린 나이부터 가장(家長) 역할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송병순의 남편은 어디 있었기에 아내와 어린 자식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아무런 힘도 되지 못했을까?

아버지에 대한 추억
 
용화면사무소 근무시절의 임우영대전호적사무협회영동지부기념사진 - 둘째 줄 우측 두번째가 임우영박만순
 
아버지 임우영은 둘째 아들 임두환에게 '맥가이버' 같은 존재였다. 뚝딱하면 책상이 만들어졌다. 또한 집에서 필요한 공구나 물품 웬만한 것은 아버지 손을 거쳐 탄생했다. 한국전쟁 전에 아버지는 집에서 책상을 당신 손으로 손수 만들었다. 그 책상을 아들 임두환은 70년 동안 보관해오고 있다. 이제는 낡아 색이 바래고, 실제 사용되지는 않지만 의미가 남다른 물건이다.

70년 된 책상에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녹아 있다. 색 바랜 책상은 70년 동안 보존되어 왔는데, 아버지는 69년 전 생을 달리했다. 현재는 대전광역시가 되어 있는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된 것이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최소 1800명에서 최대 7000명까지 사망했다는 이곳에서 충북 영동군 용화면 자계리 임우영도 사망한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전 대전형무소는 전국 각지에서 온 정치범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형무소에는 대전·충남 지역 정치범들과 제주 4.3사건 관련자, 여순사건 관련자, 타 지역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헌병대의 지휘를 받은 군인과 경찰은 대전형무소 재소자 1800명 이상을 처형했다. 학살지는 대전 산내 골령골이다. 산내에서는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대전충남 보도연맹원들이 함께 처형되었다.

충북 영동군에 거주하던 주민 중 전쟁 전에 국가보안법 등 시국사범 위반자들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영동과 옥천은 행정구역이 충북이지만 생활권은 대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영동군 정치범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들이 산내에서 학살된 것이다.

영동군 용화면 자계리에 살았던 임우영이 산내에서 학살된 이유는 무엇일까?

수배자를 숨겨주다
 
영동경찰서가 작성한 의견서철박만순
 
용화면 임우영(1916년생)은 용화면 자계리 출신으로 해방 후(1947.4.1.~11.15)에 용화면사무소 호적계에 근무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공무원이었던 그는 해방 후에도 그 직을 이어나갔다. 임우영의 활동내역과 전쟁기 학살정황은 지역주민들의 구술증언과 더불어 영동경찰서의 관련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임우영은 1948년 1월 송재웅 사건으로 인해 1948년 4월 1차 구속을 당했는데, 송재웅 사건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948년 1월 31일 제10구경찰서(영동경찰서) 용화지서 소속 순경 곽순영은 1946년 10월 3일 영동에서 발생한 좌익 폭동의 주모자로서 포고령 위반으로 수배를 받아오던 이필영이 용화면 자계리 임우영가에 은신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동 지서 순경 조용두, 안정희, 김대석, 정해걸 등 4명과 함께 동 가옥을 급습하자 마침 이곳에서 벌목을 위해 기숙하고 있던 피해자인 송재웅이 갑작스런 경찰의 출현에 놀라 도주를 하므로 마당에서 경비를 서던 동인이 이를 수배자로 오인하고 추격하여 격투를 벌이다, 곽순경이 총기를 탈취하려는 피해자에게 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소지하고 있던 99식 장총을 발사하여 현장에서 사망케 한 사건이 발생했다"(영동경찰서, <의견서철>, 1949)

위 사건이 임우영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임우영은 좌익 활동 혐의로 1949년 10월에 다시 영동경찰서에 연행되어 1949년 말에 재판을 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석방을 1년여 앞둔 시점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후퇴하는 군·경에 의해 불법적으로 학살당했다.

대를 이은 사랑

임우영이 학살된 후 아내 송병순은 자식 셋을 키워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런데 1954년 불의의 사고로 1년 후인 1955년에 사망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임세환 남매는 뜻하지 않게 천애고아가 되었다.

그러자 임세환의 숙부 임만영(1930년생)은 팔을 걷고 임세환 남매를 챙겼다. 그는 서울대 사범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영동고등학교를 시작으로 교직의 길을 걸었다. 이때부터 세환, 두환, 숙자 3남매를 한 집에서 데리고 살면서 모든 숙식과 생활을 챙겼다. 결국 큰 조카 세환은 대학까지 가르치고 나머지 조카들은 고등학교까지 가르쳤다.

당시는 경제적 형편이 어려우면 자기 자식들도 초등학교·중학교까지만 가르치던 것이 일반적 상황이었다. 그런데 조카들을 고등학교·대학교까지 가르친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임만영은 현대 세종대학교의 전신인 수도여자사범대학교를 나온 이부영과 결혼 후 2남3녀의 자식을 모두 교육자로 키워 '교육 집안'으로 호를 날렸다. 그는 이후 한양대학교와 인하전문대학 강사를 거쳐 서울교육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특히 1996년에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았다.

내리사랑의 바통은 임두환이 이어받았다. 임두환은 1968년 형 세환이 사망한 후 조카 둘을 책임졌다. 형수가 개가했기 때문에 부모의 역할을 대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는 숙부가 자신의 형제들에게 했던 것처럼, 조카 둘을 자신의 집에 데리고 살면서 고등학교까지 보내고, 시집을 보냈다. 대(代)를 이은 내리사랑이다.

영동대교에 세워진 모자(母子)상
 
영동대교 앞에 세워진 모자상박만순
 
2010년 11월 22일 충북 영동군 영동대교 앞에는 영동군 주민 300여명이 모였다. '효자 임세환 선생상' 건립식이 있었다. 임세환의 선행을 기려 영동군이 1억 원을 들여 모자상(母子상)을 건립한 것이다. 임두환(영동군 영동읍·80세)은 평생 자신의 삶의 과제로 삼았던 두 번째 일을 마무리해 흡족한 얼굴이었다.

그는 생의 첫 번째 과제였던 부친 임우영의 명예회복도 해결한 상태였다. 2002년부터 시작한 부친의 명예회복운동이 '대전·충청지역 형무소사건'으로 분류되어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규명 결정되었기 때문이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활동 중간에 암이 발생해 오랜 기간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약 10년 만에 부친의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을 일궈냈다.

임두환은 부친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진 후에 심혈을 기울여 형님의 선행에 대한 공론화와 동상건립운동을 추진했다. 그 결실이 2010년 말에 이루어졌다. 임두환은 "형님의 선행이 교과서에 수록되어 청소년들이 가족에 대한 사랑과 효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라고 밝혔다.

한국전쟁기에 국가폭력에 의해 많은 가족공동체가 붕괴되었다. 이후 연좌제에 의해 또 한 번의 고통을 받아 사회와 이웃으로부터 단절된 삶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가족밖에 없었다. 한국의 현대 산업사회 속에서는 주로 여성의 희생에 의한 남성의 성공신화가 주를 이룰 뿐이었다.

그런데 임두환 가족은 그렇지 않았다. 임우영이 국가폭력에 의해 학살되었음에도 서로가 밀어주고 끌어주는 가족애를 발휘함으로써 가족공동체를 온전히 유지하고 지역사회의 귀감이 된 것이다. 임만영-임세환-임두환으로 이어진 가족사랑·인간사랑의 정신은 개인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현대사회 속에서 시금석으로 삼아야 할 가치이지 않을까?
 
아버지 70년 전에 손수 만든 책상 앞에 있는 임두환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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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향덕의 효도 이야기

향덕(向德)은 웅천주(熊川州) 판적향(板積鄕) 사람이다. 아버지 이름은 선(善)이고 자(字)는 반길(潘吉)인데, 천성이 온후하고 착하여 마을에서 그 행실을 칭찬하였다. 어머니는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향덕 역시 효성스럽고 순하기로 당시에 소문이 났다. 천보(天寶) 14년(755년 경덕왕 14년) 을미(乙未)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고 더구나 전염병이 돌았다. 부모가 굶주리고 병이 났으며, 어머니는 또한 종기가 나서 모두 거의 죽게 되었다. 향덕이 밤낮으로 옷을 벗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편안히 위로하였으나 봉양할 것이 없어 이에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떼어 내어 먹게 하고, 또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 모두 완쾌시켰다. 향사(鄕司)가 주(州)에 보고하니, 주에서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은 명을 내려 벼 300섬과 집 한 채, 구분전(口分田) 약간을 내려주고, 담당 관청에 명하여 비석을 세워서 일을 기록하고 드러내도록 하였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은 그곳을 ‘효가(孝家)’라고 부른다.

向德態川州板積鄕人也. 父名善, 字潘吉, 天資溫良, 鄕里推其行. 母則失其名. 向德亦以孝順, 爲時所稱. 天寶十四年乙未, 年荒民饑, 加之以疫癘. 父母飢且病, 母又發㿈, 皆濱於死. 向德日夜不解衣, 盡誠安慰, 而無以爲養, 乃刲髀肉以食之, 又吮母㿈, 皆致之平安. 鄕司報之州, 州報於王. 王下敎, 賜租三百斛宅一區口分田若干, 命有司立石紀事, 以標之. 至今人號其地云孝家.

이 사료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대에 살았던 효자 향덕(向德)에 관한 내용이다. 향덕 이야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효선(孝善) ‘향득사지할고공친(向得舍知割股供親)’조와 『삼국사기 』권9, 경덕왕 14년(755)조에도 전하는 데, 『삼국사기 』 열전의 내용이 가장 자세하다. 한편 『삼국유사 』에는 향덕의 이름이 ‘향득(向得)’으로 되어 있다.

향덕은 웅천주(熊川州, 충청남도 공주) 판적향(板積鄕) 사람이다. 755년(경덕왕 14년)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많은 백성이 굶주리고 전염병까지 돌았는데, 향덕의 부모도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었다. 이에 향덕은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떼어 내어 부모에게 먹이고,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내어 낫게 하였다. 지방 관청에서 그의 효행을 왕에게 보고하니, 왕이 큰 상을 내렸다고 한다.

이 기록으로 볼 때, 755년 봄 신라에는 심각한 기근이 전국을 휩쓸었고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돌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신라 경덕왕 대에는 유난히 자주 흉년과 기근이 발생했다. 『삼국사기 』 신라본기에 기록된 것만 보아도 745년(경덕왕 4년) 5월, 746년(경덕왕 5년) 가을과 겨울, 754년(경덕왕 13년) 8월에 가뭄과 전염병 등이 발생하였다. 특히 13년 8월에 있었던 가뭄과 병충해는 이듬해인 755년(경덕왕 14년) 봄의 전국적인 기근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재해는 국가적으로도 크게 문제되어 756년(경덕왕 15년) 2월에는 상대등(上大等) 김사인(金思仁)이 해마다 갖가지 재난이 발생하는 일을 가지고 왕에게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당시 정치의 득실을 논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해마다 가뭄이 발생하고 전국적으로 기근이 만연하자 향덕은 부모 공양의 길이 막연해지게 되었다. 『삼국유사 』에는 ‘향덕’이 ‘향득사지(向得舍知)’로 기록되어 있는데, 사지(舍知)는 신라 17관등 중 13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대체로 4두품에 해당하는 관등이다. 따라서 향덕이 원래 4두품에 해당하는 신분이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그가 사지라는 관등에 오른 것이 포상 후일 가능성도 있으므로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향덕이 4두품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그의 실제 생활은 극히 빈곤해서 일반 백성과 별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근에 역병까지 겹쳐 부모가 모두 거의 죽게 되자 향덕은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떼어 내어 부모에게 먹이는 ‘할고(割股)’와,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내는 극단적인 방법을 써서 부모의 병을 낫게 하였다.

향덕의 효행에 대해 주(州)의 보고를 통해서 알게 된 경덕왕은 향덕에게 포상하였다. 즉, 곡식과 집⋅토지를 내리고 거기에 더하여 비석을 세워 향덕의 효행을 기록하고 드러내도록 한 것이다. 이와 같은 할고 효행과 그 효행에 대한 국가의 표창은 모두 우리 역사상 처음 보이는 사례이다. 특히 비석, 즉 정려비(旌閭碑)를 세우도록 한 조치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사실 당시 당(唐)나라의 경우는 효자⋅효녀나 열녀 등에 대하여 그 가문과 고을을 정표(旌表)

나라에서 정려비, 정려문 등을 세워 선행을 한 인물을 칭찬하고 널리 알리는 행위

하는 것이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경덕왕 대에 이르러 향덕에 대한 것이 처음이다. 따라서 경덕왕이 취한 향덕의 효행에 대한 조치는 대민 교화를 목적으로 한 일종의 교화 정책으로서, 우리나라 정표 정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경덕왕은 재위 기간 동안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한화정책(漢化改策)을 꾸준히 추진하였다. 또한 당나라와의 밀접한 교류를 통하여 한문화(漢文化)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향덕의 효행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포상은 바로 당시 중국에서 보편화한 유교적 윤리, 또는 일종의 효치주의(孝治主義)의 구현과 짝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 동시에 당시 민심의 동요가 우려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덕치(德治)의 규범을 보이고 대민 교화를 지향함으로써 계속되는 재해로 인한 민심 이반을 막아 보고자 한 의도도 엿볼 수 있다.

향덕의 이야기는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효행 포상 사례이자 포상의 첫 사례로서, 유교적 윤리의 수용과 그 시행의 초기적 모습을 보여 준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향덕의 이야기가 『삼국사기 』 신라본기에도 기록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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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효선편 검토」,『동양학』3,김상현,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2000.
「『삼국유사』‘향득사지’조로 본 신라인의 효행」,『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30,김수태,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2009.
「『삼국유사』효선편의 이해」,『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30,김영하,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2009.
「신라시대 『효경』의 수용과 그 사회적 의의」,『이기백선생고희기념한국사학논총』(상),노용필,일조각,1994.
「삼국유사에 나타난 효선사상」,『인문과학』3⋅4,민병하,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1974.
「『삼국유사「효선」편 분석 연구」,『한자한문교육』21,엄선용,한국한자한문교육학회,2008.
「신라 효자 향덕과 그 유적」,『백제문화』11,윤용혁,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1978.
「신라 불교에서의 효관념-『삼국유사』효선편을 중심으로-」,『동아연구』2,이기백,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1983.

저서

『신라화엄사상사연구』, 김두진,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신라사상사연구』, 이기백, 일조각,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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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판단의 잣대

​인조때 큰 가뭄이 들어서 농작물이 모두 타들어 가고 민심은 흉흉해 졌습니다.
인조대왕은 베옷을 입고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에 올라가 기우제를 올렸습니다.
기우제에 하늘이 감동을 했는지,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 오더니 굵은 빗방울의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 했습니다.
얼마나 기다린 비 입니까.
더욱이 임금님이 친히 베옷을 입고 기우제를 드린 후에 내리는 비가 아닙니까.
만조백관들과 백성들은 얼싸안고 비를 맞으며 춤을 추며 기뻐했습니다.
인조대왕도 기뻐서 같이 비를 맞으며 춤을 추며 기뻐했습니다.
그때 임금의 눈에 아주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자가 보였습니다.
그건 한 선비가 갑자기 비가 오니까, 황급히 갓 끝을 붙잡고 비를 피해 처마밑으로 후다닥 피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비를 맞으며 춤을 추어도 모자랄 판에 그 비를 맞지 않겠다고 비를 피해서 처마 밑으로 피하다니 저런 고연놈이 있단 말인가.
화가 난 임금의 불호령이 내렸습니다.
"저놈을 당장 잡아서 끌어내려라!"
선비는 졸지에 비를 피한 죄로 잡혀왔습니다.
"네 이놈. 지금 오는 이 비가 무슨 비 인줄 아느냐?
3년동안 내리 가물어서 짐이 신하들과 함께 베옷을 입고 이곳에 올라와 하늘에 죄를 청하고 지성을 드리니 하늘이 감복 하시어 비를 내리셨고 만조백관들과 백성들은 너무 기뻐서 비를 맞으며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데 너는그 비를 피해 처마에 피하다니 비를 맞는게 그렇게 싫은거냐?"
"여봐라~~~" 저놈을 당장 형틀에 묶고 주리를 틀도록 하여라!"
그때 잡혀온 선비가 외쳤습니다.
"전하! 소인의 말을 한 번만 들어 주시옵소서!"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느냐?"
"그래 무슨 말이냐?"
"전하! 지금 오고있는 비가 얼마나 귀한 비 입니까?
내리 3년동안 내리지 않던 비가 임금님께서 베옷을 입고 기우제를 드리니, 하늘이 감복 하시어 비를 주셨습니다.
빨리 한 방울의 비라도 메마른 땅을 적셔야지, 이런 비를 저같은 비천한 몸이 맞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처마밑으로 피한 것이옵니다."
인조 임금이 그 말을 들으니 자기의 생각도 틀렸고, 비를 맞으며 춤을 춘 신하와 백성들 보다 비를 피한 선비가 더 충성 스런 백성이 아니던가? ​

"어리석은 사람이 현명해 지기도 하고, 악한 사람이 착해지기도 한다.
그러니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마라!"고"톨스토이" 말했습니다.

의외로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자신의 판단이 정확하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정치인들은 이념의 잣대로, 종교인들은 자기 신앙의 잣대로, 지식인들은 학문의 잣대로, 상식의 잣대로, 경험의 잣대로,지역의 잣대로, 모두 한가지씩 잣대를 가지고 주관적인 판단을 내립니다.
내가 경험한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가진 지식이 전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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