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사도행전 11:25-26)


그리스도인(사도행전 11:25-26)

바나바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Χριστιανούς(크리스티아누스) /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1. 그리스도에게 배우는 사람
2.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
3.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안디옥교회는 두 가지 특징을 갖습니다.

첫째는 최초의 이방인 교회
둘째는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들은 교회


"그리스도인" 이라는 말이 신약 성경에서 세 번 사용되었습니다.

첫째는 사도행전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둘째는 사도행전 26:28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셋째는 베드로전서 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예화)
한국의 선교 역사에는 수많은 신앙의 거인들이 있었다.
한국 초기 선교사로서 연동교회의 담임목사였던 게일은 자신이 만난 가장 위대한 신앙인으로 연동교회 초대장로였던 고찬익을 소개합니다.

고찬익은 원래 원산에서 게일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아 신자가 되었다.
그때부터 원산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곤 하였다.
가난한 신자들의 방 자리 밑에서 알 수 없는 돈이 나오고, 혹은 뜰에서 쌀자루가 발견되었다.
또 원산 거리에서 거지가 매우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 모습도 종종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궁금했으나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고찬익이 게일을 따라서 서울로 가게 되었고 그후에는 이런 이상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그 사건들이 고찬익이 행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온 고찬익은 게일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서 연동교회에서 전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고찬익이 하루는 20세 전후의 청년을 만나서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나는 의식이 빈궁해서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고찬익은 “노동을 하면 먹을 것이 나오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청년은 양반 출신이어서 노동을 천하게 생각했다.
고찬익은 청년에게 “내일 아침 일찍 아침식사 전에 우리집으로 오라”고 말했다.

고찬익은 집에 가서 지게와 수건을 둘씩 준비하고 아내에게 밥을 한 그릇 더 지으라고 했다.
다음날 청년이 약속시간에 고찬익의 집에 왔다.
고찬익은 청년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지게를 하나씩 지고 인근 선교사댁 건축 공사장에 가서 함께 종일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일을 마치고 받은 노임을 그 청년에게 주었다.
고찬익은 청년에게 복음을 전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의 소중함까지 가르쳐주었다.

길선주 목사는 고찬익 장로를 “경성교회 기초사역에서 가장 유능한 전도자”라고 평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I am a Christian) 또는 나는 신자입니다(I am a believer)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다(This man is a Christian)"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내 주위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야! 라는 말을 들을만한 믿음생활을 하고 있었는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라는 뜻에서 찾아야 합니다.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제사장" "선지자" "왕"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제사장은 죄를 대신하여 자기의 생명을 내려놓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선지자는 혼돈된 세상에서 진리를 위하여 가야 할 길을 찾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은 적군을 대항하여 싸워서 이겨야 하는 사람입니다.
적군이란 마귀의 유혹을 물리쳐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만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만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파트리스교회 교인들이 비로서 뉴욕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왜냐하면 사람이란 "삶"의 주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예수를 믿는 내가 성경책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읽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비로서 복음이 전파될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7월 26일) 동서데이케어 사모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8월 2일부터 구은숙권사님께서 동서데이케어에서 네일 봉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사모님께서 재료비를 주시겠다고 하여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봉사는 권사님이 하실 것이며 재료비는 선교비에서 지출합니다.
재료를 구입한 금액이 $123이라고 합니다.
선교란 복음이 사람을 만나야 전달됩니다.
봉사자가 사람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 것입니다.
더구나 사모님의 경우 예전에는 교회에 출석하였으나 지금은 성당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에서 실망하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런 것이 복음이 아닐까요?
또 이런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닐까요?

자유대한민국에서 펼쳐지는 시대적 흐름을 지켜볼 때 꼭 기억해야 할 것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비핵화"
둘째는 "인권 회복"

북한을 돕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북한에 국수 공장을 짓고 국수를 생산할 때 국수는 생산 후 3-4일이 지나면 변질되기 때문에 즉각 분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생산하는대로 그 지역에 나눠줄 수 있습니다.
더구나 공장의 기계들을 모두 철거하면 교회당으로 사용하도록 계획하고 진행했습니다.
또한 비닐 하우스를 짓고 수경재배를 하는 기술자를 호주의 김은각집사님을 초청하여 사역을 맡겼는데 평신도이지만 모든 재료는 남한에서 가져와야 한다며 주장을 굽히지 않으므로 결국 남한에서 북으로 모든 자재를 실어 운반하는데 북한의 실무진들은 남한의 재료들 비늴, 철재 골조와 같은 것이 남한 상표가 표기되었기에 처음에는 완강하게 반대하였다고 합니다.

만일 곡식을 주면 곡식을 팔아서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돈이 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중국에 다시 팔아버리고 돈으로 환산할 뿐만 아니라 제공하는 것도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해결할 과제가 비핵화와 인권 회복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이러한 주장에 동의할 때 그만큼 물자를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교회에 대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불낙지교회에 대한 목표를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거나 만족을 얻지 못하여 교회를 옮기는 성장은 공동묘지에 무덤의 수가 늘어가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여 교회로 인도해야 합니다.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아 교회를 떠난 낙심한 영혼에게 주님의 치유가 임하여 교회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세상의 재미에 사로잡혀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지체하는 세상 풍조에 흔들리는 사람을 굳게 세워 교회를 찾도록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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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26 교회에 일년 간 모여 있어

바나바는 사울을 애써서 찾은 결과 그를 만나게 되었고 그를 안디옥으로 인도하였다. 그런 후 그들은 일년 간 교회에 함께 모여 있었다. 여기서 '간'으로 번역된 ‘흘론’은 ‘전체의', ‘온(whole)’이라는 뜻으로 그들이 일년 전부의 시간을 온전하게 함께하였음을 나타낸다. 이렇게 일정한 기간을 기록하는 것은 누가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행 18 :11; 19:8, 10 ; 24:27 ; 28:30). 안디옥 교회에서 그들은 함께 머무르면서 교회의 지도자로서 큰 무리를 가르쳤다. 

이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고 무리를 가르쳤던 것은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제 막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였기 때문에 기본적인 신앙 교육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년이라는 시간을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신앙 성숙을 위하여 전적으로 헌신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 부활, 승천, 보혜사 성령의 보내심, 현재의 일과 장래 일어날 일 등에 관한 여러 가지의 사실들과 그에 따른 의미들을 배웠을 것이다. 또한 이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방향을 설정하여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희생적인 봉사와 교육의 결과 안디옥 교회는 모범적인 교회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얻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에 부조를 보냈으며(29~30절) 후에 이방 선교의 전초 기지가 되었다. 실로 훌륭한 신앙의 지도자에 의한 지속적인 신앙 교육이 얼마나 위대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안디욱 교회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11: 26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이 안디옥에서 생겨났음을 보여 주며, 신약 성경에서 처음 등장함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 해당하는 ‘크리스티아누스’는 ‘크리스티아노스’의 복수형이다. ‘크리스티아노스’에서 접미사 ‘이아노스’는 ‘~에게 속한 자',  ~의 종’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쓰였으므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 ‘그리스도의 종들’ 즉 그리스도의 완전한 추종자들이란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렇게 일컬음을 받은 사람들은 바로 안디옥에 있던 제자들이다.

여기서 ‘제자들’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그들은 '형제들’(행 1:16 ; 9:30), ‘구원받는 사람들’(행 2:47), '주의 도를 쫓는 사람들’(행 9:2), '성도들’(행 9:13), '믿는 사람들’(행 10:45)이라고도 불리워지는 사람들로서 그리스도에게 모든 희망을 두고 그리스도만을 최종 목표로 하고 따르는 자들이다. 이들에게 드디어 그들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새로운 명칭이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안디옥의 이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첫째, 유대인들일 가능성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메시야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의미하며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분명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이 지어준 것은 아닐 것이다.

둘째, 제자들 스스로가 지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것도 가능성에 그칠 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들 사이에서 ‘제자들’ 혹은 ‘형제들’이라고 부르면서 서로가 그리스도인임을 확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안디옥의 불신자들일 가능성이다. 바로 이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고 늘 그에 대해서만 말을 하는 제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람들(the christ-people)이라는 뜻으로(F. F. Bruce), 그리고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을 유대인들과 구별하기 위해(Robertson)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붙였을 것이다. 이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그러나 그 이름으로 불리우게 된 제자들은 그 이름을 기분 나빠하거나 수치스럽게 여기거나 주변 유대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조롱과 야유의 의미로 불리워진 이 명칭이 후대에는 존귀한 이름으로 바뀌었다.

한편,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이는 안디옥의 이방인 신자들이 더 이상 어떤 유대교의 한 종파에 속한 사람들로 인식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유대교와 구별되는 완전히 새로운 신앙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 당시 로마 시저의 군인들을 시저인이라고 불렀고, 폼페이의 군인들을 폼페이인이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 그래서 안디옥에 었던 신자들도 그런 식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그리스도의 군인, 그리스도의 종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워져 그들의 특징을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제자들이 이러한 표현을 거절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정말로 그리스도의 군사로 전신갑주를 입었기 때문이다(엡 6:11-18). 신약에서 이 단어는 행 26:28과 벧전 4:16에 두 번 더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교회용어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헬라어로 '크리스티아노스' 곧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란 뜻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소유로서 그분을 믿고 구주로 고백한 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예수님의 제자', '기독교인', '성도', '하나님의 백성'을 말한다.

이처럼 거룩한 호칭인 '그리스도인'은 초대교회 당시 수리아 안디옥 교회 성도에게 처음 사용되었다(행11:26; 26:28). 즉,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1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을 때 주위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고 '그리스도인'이라 부른 것이다. 처음 그 호칭은 경멸의 뜻, 멸시의 뉘앙스로 사용되었다(행24:5).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전도할 때에 아그립바가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할 때도 분명 홀대의 호칭으로 사용하였다(행26:28).

그러나 이 호칭은 점차 영광스럽고 복된 이름으로 쓰이게 된다. 사도 베드로는 고난받는 성도를 향해 그리스도인으로 고난받는 것을 부끄러워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이라는 영광스런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 권면하면서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얼마나 영광스런 것인지를 강조한 바 있다(벧전4:16).


 


말라기 1:1-5   이 시대의 거울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에는 마지막 시대의 특징을 일곱 가지로 말씀합니다. “어떻게”라는 부사를 관찰합니다.
1. 불평(1:2b),
2. 원망(1:6b),
3. 합리화(1:7),
4. 정당화(2:17),
5. 핑계(3:7),
6. 자기방어(3:8),
7. 자기 칭의(3:13)


    1.말라기서는 구약의 마지막 책이다.후에 신약에 등장하는 세레요한은 구약의 사람이다.사실 말라기에서 요한 까지는 약 400여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2.말라기 부터 요한의 때까지 400여년동안 성경이 기록되지 못한 것은 그 시대가 영적으로 어두웠기 때문이다.

  I.한 시대의 끝이 왔다.

   A.말라기 선지자에 대하여

    1.그는 파사나라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와 에언을 하였다.그의 전임 학개나 스가랴와는 약 100년의 기간이 경과한 후였다(주전432- 424사이).

    2.말라기의 활동은 구약의 시대를 마감하는 마무리 작업이었다.말라기는 변혁의 시대에 활동하던 에언자였다.

    3.어느 시대나 변혁기에 활동하는 지도자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옛 시대도 아니고 새 시대도 아닌 시기이면서 과거를 청산해야 하고 새 것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다.

   B.말라기의 멧세지.

    1.말라기선지자는 과거와 더불어 미래도 봐야만 했다.그래서 마태17:10절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는 말씀이 있다.여기서 엘리야란 말라기 3:1에"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에비할 것이요"의 '내 사자"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2.말라기 선지자는 엘리야의 심장을 가지고 오는 요한을 기다리면서 에언을 마쳤다.말라기는 과거만 본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입장을 보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그래서 우리가 이 시대를 보려면 말라기서를 보면될 것이다.

    3.말라기서에는 시대의 모습이 거울에 비춰지듯 나오는데 여기서 "어떻게"라는 말이 일곱번 나온다.

 II.마지막 시대의 일곱가지의 특징이 있다.

   1.쓴 원망(1:2하).
    1)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는 말은 감사의 말일까?원망의 말일까?이것은 원망의 소리였다.
    2)하나님의 사랑은 선택적 사랑이다.하나님이 에서와 야곱 중에서 하나를 선택 하시듯이 우리를 택하여 사랑하신다.

   2.큰 원망(1:6하).
    1)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 하였나이까?
    2)때로는 눈먼 짐승을 바  고,때로는 저는 것을 바쳤다.그럼에도 이들은 우리가 언제 그랬느냐는 것이다.
    3)말로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돼이 일컫는 행위다.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웠다고 모두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다.

   3.거짓을 합리화(1:7).
    1)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2)자신들이 더러운 것,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을 단에 드렸음에도 주를 향하여 대항하는 것은 주님을 멸시함이요,자기행위를 합리화하는 행위다.

   4.자기정당성 주장(2:17).
    1)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이까?
    2)말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괴롭히는 행위다.
    3)가정에서 부부가 서로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끝장이다.그래서 행복한 가정을 원하는 우리는 자기 정당성을 포기해야 한다.

   5.핑계(3:7)
    1)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2)돌아가는데는 복잡한 방법과 절차가 필요없다.
    3)이유를 대고 핑게를 대는 것은 싫다는 말이요,않겠다는 말이다.

   6.자기방어(3:8)
    1)이들은 십일조를 도적질하였다.그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라고 하는 것이다.
    2)도적질은 다른 것이 아니다.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못햇거나 않았으면 그것이 도적질이다.

   7.자기 칭의 주장(3:13)
    1)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2)여기서 무슨말로의 뜻은 "어떻게'라는 말이다.이는 매우 완악한 말이다.

    결  론
    1.말라기 시대의 특징과 말라기서의 특징을 살펴 보았다.지금의 상황과 어떤가?비슷한 것이 많이 있는 것 같다.
    2.이 말씀은 에수님 탄생 400년전의 것만이 아니다.바로 오늘의 문제요,바로 나 자신의 문제다.
    3.주의 말씀 앞에서 잃었던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스도인(I'm a believer)

16개월 만에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에는 마지막 시대의 특징을 일곱 가지로 말씀합니다. “어떻게”라는 부사를 관찰합니다.
  1. 불평(1:2b), 2. 원망(1:6b), 3. 합리화(1:7), 4. 정당화(2:17),
   5. 핑계(3:7), 6. 자기방어(3:8), 7. 자기 칭의(3:13)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에게 자주 나타나므로 “고통 하는 때”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딤후 3:1).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는 “영적 혼란(미혹, 거짓 선지자)” “자연적 징조(난리, 기근, 지진)” “도덕적 징조(불법)”가 나타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태 24:3∼14).
어려운 시기를 지내면서 마지막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 세상을 이기는 믿음(요일 5:1∼5)
둘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히 11:5∼6)
셋째, 영적 성장(고전 2:10∼16)
넷째, 상급을 받을 만한 충성된 삶(계 22:10∼12)
다섯째, 파수꾼의 사명(사 62:1∼7)
여섯째, 말씀으로 무장(벧후 1:19∼21)
어려운 고비를 잘 견디고 모두 건장한 모습으로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시다. 그리고 마지막 시대를 믿음으로 승리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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