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과이의 한 성당벽에 써 있는 "반성하는 주기도문"

우르과이의 한 성당벽에 써 있는
"반성하는 주기도문"

- 주님의 기도를 바칠때-

"하늘에 계신" 하지 말아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 하지 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 하지 말아라.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지 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지 말아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지말아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말아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말아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 말아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 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 하지 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A message painted on a barrio church in Uruguay:


Don’t say Father
if each day you do not behave like a son.
Don’t say Our
if you live shut off in yourself.

Don’t say Who Art in Heaven
if you think only of worldly things.

Don’t say Hallowed Be Thy Name
unless you really honor it.

Don’t say Thy Kingdom Come
if you have a material outcome in mind.

Don’t say Thy Will Be Done
unless you are ready to accept it when it hurts.

Don’t say Our Daily Bread
unless you care about the hungry.

Don’t say Forgive Us Our Trespasses
if you bear a grudge against someone.

Don’t say Deliver Us From Evil
unless you are prepared to make a stand against it.

Don’t say Amen
unless you really mean it.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3문, 제4문, 제5문

제 3 문 : 어떻게 당신의 비참함을 알 수 있습니까?
답 : 하나님의 율법이 내게 가르쳐 줍니다.
1) 로마서 3:20; 7:7-25

제 4 문 :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22:37-40 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1) 신명기 6:5
2) 레위기 19:18

제 5 문 : 당신은 그 모든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답 :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과 내 이웃을 미워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1) 로마서 3:9-20, 23; 요한일서 1:8, 10
2) 창세기 6:5; 예례미야 17:9; 로마서 7:23-24; 8:7; 에베소서 2:1-3; 디도서 3: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2문

제 2 문 : 이러한 위로의 기쁨 안에서 살다가 죽기 위하여 당신은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답 : 세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1
둘째, 어떻게 내가 그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났는가, 2
셋째, 나는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3

1) 로마서 3:9-10; 요한일서 1:10
2) 요한복음 17:3; 사도행전 4:12; 10:43
3) 마태복음 5:16; 로마서 6:13; 에베소서 5:8-10; 디모데후서 2:15; 베드로전서 2:9-10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1문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서문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1559년부터 1576년까지 독일의 팔라티네이트 지역을 다스렸던 프레드릭 III 세의 요청에 의해서 1563년도에 하이델베르그시에서 작성되었다. 본 요리문답은 청년들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 그 지역 교회들의 설교를 위한 가이드로, 그리고 팔라티네이트 지역에 있는 다양한 개신교회들 사이에 통일된 신앙고백의 형태로 고안되었다.

오랜 전통은 본 요리문답의 저자로 자카리아스 울시누스 (Zacharias Ursinus)와 캐스퍼 올리비아누스 (Caspar Olevianus)를 공동저자로 지목하고 있지만, 사실 요리문답의 프로젝트는 프레드릭 III 세의 지휘 아래 여러 목회자들과 대학의 신학자들의 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울시누스는 아마도 그 팀의 주요저자로 그리고 올리비아누스는 그보다 적은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본 요리문답은 작성된 직후 1563년도 1월에 하이델베르그에서 열린 한 총회에서 인준되었다.
본문에 약간을 첨가한 두번째와 세번째 독일어 판, 그리고 라틴어 번역이 같은 해에 하이델베르그에서 출판되었다.
세번째 독일어 판은 1563년도 11월 15일에 작성된 팔라티네이트 교회헌법에 포함되었는데, 그 때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52개의 주일로 구성되어서 주일의 오후 예배에 사용되도록 하였다. 그렇게 사용하면 요리문답 전체를 1년의 설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돌트총회에서 1619년도에 인준된 직후에 개혁교회들 사이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요리문답과 신앙고백이 되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유럽,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다양한 언어들로 번역되었으며, 종교개혁 시대의 문서 중에서 현재도 가장 널리 사용되고 따듯하게 받아들여지는 요리문답으로 남아있다. 본 요리문답에 포함된 관련 성경구절들 대부분은 초기 독일어와 라틴어 판들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으며, 북미개혁교회 (CRC)의 1975 년도 총회가 타당하다고 인준한 것들이다.

제1문 : 사나 죽으나 당신의 단 하나의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1 사나 죽으나 2 몸과 영혼이 모두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3 주께서 보배로운 피를 흘려 나의 모든 죄값을 치러주셨고 4 마귀의 권세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5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는 6 나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나의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나를 항상 지켜주십니다. 7 실로 모든 것이 협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룹니다. 8 내가 주님의 것이기에 주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게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시고, 9 지금부터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기꺼이 주를 위하여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10

1) 고린도전서 6:19-20
2) 로마서 14:7-9
3) 고린도전서 3:23; 디도서 2:14
4) 베드로전서 1:18-19; 요한일서 1:7-9; 2:2
5) 요한복음 8:34-36; 히브리서 2:14-15 ; 요한일서 3:1-11
6) 마태복음 10:29-31; 누가복음 21:16-18
7) 요한복음 6:39-40; 10:27-30; 데살로니가후서 3:3; 베드로전서 1:5
8) 로마서 8:28
9) 로마서 8:15-16; 고린도후서 1:21-22; 5:5; 에베소서 1:13-14
10) 로마서 8:1-17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주일 설교 원고(2020-1-19) 이승혁목사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 God is Love.

Θεὸς ἀγάπη ἐστίν(데오스 아가패 에스틴)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Whoever does not love does not know God, because God is love.) 

요한일서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성경에서 누구라고 고백하는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아는 것만큼 믿고, 믿는 것만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서신에서 하나님에 대한 중요한 고백 세 가지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 1: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 하나님은 빛이시라
빛의 영적 의미는 "생명(生命)"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이라.

둘째는 하나님은 영이시라(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 하나님은 영이시라
영의 영적 의미는 "자유(自由)"를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3: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셋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16)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의 영적 의미는 "용서(容恕)"를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빛과 영과 사랑의 공통된 특징은 "영원(永遠)"이라고 하겠습니다.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용서는 영원한 용서입니다.
자유는 영원한 자유입니다.

2020년 1월 5일 신년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오늘은 1월 4일(토)에 읽었던 요한일서 4장의 말씀 중에서 묵상 주제로 소개했던 "하나님은 사랑"이란
주제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하셨을까요?

(도입 예화) 희랍의 힐루카 대왕의 이야기

고대 희랍에 전설적인 힐루카 왕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당시 사회가 안고 있던 큰 문제는 미성년자들이 음행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미성년자들의 잘못된 생활을 법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매우 엄한 법을 공포했습니다.
그 법은 음행 하다가 붙잡힌 미성년자들은 두 눈을 뽑아 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동안 세상은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힐루카 왕의 하나 뿐인 아들 젊은 왕자가 붙잡혀 왔습니다.
재판장은 매우 난처했습니다.
장차 왕위를 계승할 왕자의 두 눈을 뽑으면 눈이 없어 볼 수 없는 왕을 세워야 합니다.
왕자에게만 특혜를 주면 법의 공정성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때 주저하는 재판장에게 힐루카 왕은 법대로 집행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왕자의 오른쪽 눈이 뽑혔습니다.
이어서 나머지 왼쪽 눈을 뽑으려고 할 때 힐루카 왕은 자신의 왼쪽 눈을 뽑게 했습니다.
왕자의 잘못도 법대로 처리한다는 깨닫게 된 백성들은 다시는 법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법 정신은 공의에 의해서 지켜져야 합니다.
사랑의 정신은 공의로운 실천에 의해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갈라디아서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율법이란 무엇입니까?
레위기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율법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했습니까?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셨을까요?
인간이 지킬 수 없는 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법을 지키지 못하면 범법자가 됩니다.
범법자는 반드시 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벌을 받아야 할 백성들을 위하여 자신의 눈을 뽑게 했던 힐루카 왕처럼 사랑의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속죄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로마서 3:20
,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야고보서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우리 말에는 "사랑" 이란 단어가 하나뿐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을 기록한 '코이네 헬라어'와 '헬라어'에는 사랑이란 단어를 다양하게 사용합니다.
먼저 사랑이란 다양한 단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랑이란 단어의 의미를 분명하게 살펴야 하는 이유는 언어의 혼돈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범위가 매우 넓습니다.

예를 들면 나라를 사랑한다는 대상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모를 사랑한다.
형제를 사랑한다.
친구를 사랑한다.
애인을 사랑한다.
음악을 사랑한다.
꽃을 사랑한다.
개(伴侶犬)를 사랑한다.
고양이(伴侶猫)를 사랑한다.
문학을 사랑한다.
교회를 사랑한다.
학문을 사랑한다.

우리 말에서는 사랑이란 단어 하나만으로도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그러나 헬라어에서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구분하여 사용했습니다.

첫째는 스토르게(storge, φιλόστοργος)(5387. philostorgos) 
Definition : tenderly loving
Usage : tenderly loving, kindly affectionate to.

로마서 12:10(형제를 사랑하여)

둘째는 필리아(philia, φιλία)(5373)
Definition : friendship
Usage : friendship, affection, fondness, love.

야고보서 4:4(세상과 벗된 것)

셋째는 에피투미아(epithumia, ἐπιθυμία)(1939)
Definition: desire, passionate longing, lust
Usage: desire, eagerness for, inordinate desire, lust.

마가복음 4:19(욕심), 누가복음 22:25(원하고 원하였노라)

넷째는 에로스(eors, Ἔρως)
성경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단어
그리스 신황에  등장하는 연정과 성애의 신이다.
로마신화에서 아모르 또는 큐피드와 같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고대 그리스어로 주로 이성에 대한 강렬한 성적 욕구를 의미하는 보통명사가 신격화된 것이다

다섯째는 아가페(agape, ἀγάπη)(26)
Definition : love, goodwill
Usage : love, benevolence, good will, esteem; plur: love-feasts

마태복음 24:12(사랑이 식어지리라), 누가복음 11:42(하나님께 대한 사랑), 요한복음 5:42(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란 단어가 우리 말처럼 단순하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필요한 단어를 사용하므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한 예를 성경에서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노련한 어부이었지만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여 피곤하고 지쳤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져보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순식간에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물을 잡아 당기면서 얼마나 많은 고기가 잡혔는지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고 말씀하셨던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잡은 물고기를 구워 아침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가 사용한 사랑이란 단어는 "필리아" 라는 단어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단어는 "아가페"와 "필리아"이었습니다. 처음과 두번째는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세번째는 필리아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아가페라는 사랑은 베드로처럼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입장에서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변함없이 사랑하고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헌신적인 사랑으로 마치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처럼 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필리아라는 사랑은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과 같은 사랑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물었을 때 어떻게 베드로가 주님에게 아가페라고 대답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필리아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을 헤아리셨던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네가 정말 나를 필리아할 수 있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예 나는 주님을 필리아 할 수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많은 신혼부부들이 예식장에서 주례와 증인들 앞에서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 사랑할 것을 다짐하고 약속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부부들이 서로 헤어지고 있습니까?

인간들의 사랑이란 이렇게 약속을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시리라는 말씀은 인간들이 배신하고 떠나버려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은 "용서하는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용서의 특징은 덮어주는 것입니다.

가죽옷으로 덮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창세기 3:21)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으로 덮어주셨습니다.

방주의 안과 밖을 역청을 바르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창세기 6:14)
노아가 방주를 만든 나무를 '잣나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개역 개정판 성경에서는 '고페르 나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역청을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역청을 "코페르"라고 합니다. 코페르라는 단어는 "속죄" 라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속죄제 제물의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피로 덮는 용서가 완성된 것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므로 모든 사람의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예수께서 흘리신 피를 "화목제"라고 합니다.
 
화목제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사랑
요한일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인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화목제를 히브리어로 "제바흐 쉘라밈" 이라고 합니다.
제바흐제물, 쉘라밈평화(샬롬의 복수형)

화목제 제사의 특징

첫째는 암수 모두 바칠 수 있다.

둘째는 기름과 콩팥을 드린다.
(기름이 잘 타기 때문이다)

셋째는 남은 제물은 바친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이 나눠 먹을 수 있다.
(단 3일 이내에 만 먹어야 하고 그 후에는 반드시 불에 태워버려야 한다)

넷째는 평등 의무 제사
화목제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배려하는 산비둘기, 집비둘기의 새끼는 제물을 받지 않는 평등의무 제사였습니다.
즉 성막을 지을 때에는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에게 똑 같은 속전을 거두시게 하신 것처럼, 평등하게 부담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화목제 제사의 근거
로마서 3:23-26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예화) 가정과 화평

메이어라는 랍비는 설교를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그는 매주 금요일 밤이면 예배당에서 어김없이 설교를 했는데, 몇 백 명씩 한꺼번에 몰려 들어 그의 설교를 들었다.
그들 가운데 메이어의 설교듣기를 매우 좋아하는 여인이 있었다.
다른 여자들은 금요일 밤이되면 안식일에 먹을 음식을 만드느라 바쁜데, 그 여자만은 이 랍비의 설교를 들으러 나왔다.
메이어는 긴 시간 동안 설교를 했고 그 여인은 그 설교에 만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남편이 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내일이 안식일인데 음식은 장만하지 않고 어디를 쏘다니고 있느냐며 화를 내며 물었다.
"도대체 어디를 갔다 왔어!"
"예배당에서 메이어 랍비님의 설교를 듣고 오는 길이예요"
그러자 남편은 몹시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 랍비의 얼굴에다 침을 뱉고 오기전에는 절대로 집에 들어올 생각은 하지도 말어!"
집에서 쫓겨난 아내는 할 수 없이 친구 집에서 머물며 남편과 별거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메이어는 자기의 설교가 너무 길었기 때문에 한 가정의 평화를 깨뜨렸다고 몹시 후회했다.
그리고는 그 여인을 불러 눈이 몹시 아프다고 호소하면서 '남의 타액으로 씻으면 낫게 된다는데, 당신이 좀 씻어 주시오'하고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여인은 랍비의 눈에다 침을 뱉게 되었다.

제자들은 랍비에게 '선생님께선 덕망이 높으신데, 어째서 여자가 얼굴에 침을 밷도록 허락하셨습니까?'하니 랍비는 이렇게 말했다.

"가정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는 그 보다도 더한 일이라도 할 수 있다네."

사랑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 아들이 화목제 희생의 제물이 되어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일에 이르기를 원하는 사랑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무섭게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던 시대에 기록된 말씀으로 빨리 예수님 오시기를 갈망한 예언서입니다.
그런데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주님은 다시 오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예수님을 알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사랑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가페 사랑의 힘

첫째, 두려움을 물리치는 힘(요한일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합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힘 이상의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딤후 1:7).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두려움이란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의 줄임말
(Fear ; False Evidence Appering Real)

반려견을 돌보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처음에 집으로 데려오면 불안하여 부들부들 떨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집 주인은 나를 버리지 않겠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 꼬리를 흔들고
따라다니며 좋아한다고 합니다.

강아지도 이렇게 반응한다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둘째, 성령으로 역사하는 힘(요한일서 4:12∼23)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울이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믿고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면 하나님의 영, 곧 인격을 가지신 거룩한 바람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임재 하시어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그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겠습니까!

셋째,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도록 역사하는 힘(요한일서 4:14∼15)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 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아가페 사랑)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1. 내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보니
슬픔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2. 주의 얼굴 뵙기전에 멀리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3.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예수 모신곳이 그어디나 하늘나라

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모든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결론을 위한 이야기)
중국 후한을 세운 광무제에게 호양 공주라는 여동생이 있었다고 합니다.
호양 공주가 아끼는 노비가 있었는데 공주의 권세를 믿고 살인을 한 후에 공주의 저택에 숨어서 지냈습니다.
당시 낙양성의 치안을 담당했던 "동선"이라는 관리가 이 노비를 처벌 하기 위해서 공주의 대문 앞에 잠복하고 있다가 공주가 외출할 때 따라 나오는 노비를 붙잡아 그 자리에서 처형했다고 합니다.

공주는 자신의 눈앞에서 아끼는 노비가 죽음을 당하자 오빠 광무제에게 동선이라는 관리를 처형하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에 광무제가 동선을 불러 공주에게 사과하라고 하자 동선은 자신은 사과하지 못하겠고 차라리 죽겠다고 버텼습니다. 이런 광경을 본 호양 공주는 "오빠가 황제가 아니었을 때에는 집에다 죄 지은 사람을 숨겨 주어도 관가에서 잡아가지 못했는데 오히려 황제가 되고나니 오빠의 힘이 줄어든 것 같다."며 짜증을 부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광무제는 웃으면서 "황제가 되었으니 일반 백성 때와 같이 행동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하면서 고집쟁이 관리인 동선을 풀어주고 오히려 상을 주었다고 합니다.

광무제는 여동생 호양공주를 달래고 정직한 관리를 풀어줌으로써 친인척도 달래고 국정의 기강도 바로잡았다는 교훈입니다.

오랜 중국의 역사에서 후한의 광무제가 공신들을 잘 관리한 군주로 뽑힌다고 합니다. 광무제는 자신을 도와서 후한을 세운 공신들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명예를 주었지만 건국 이후 국정에는 손을 떼도록 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의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은혜를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릴 수 있는 그 날이 속히 도래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을 위한 이야기)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중에 "두 노인"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가난한 농부와 부자 상인이 긴 세월을 두고 꿈꾸며 계획했던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납니다.
며칠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던중 가난한 농부가 목이 마르다며 걸음을 멈추고 부자 상인에게 “여보게 저기 마을에 잠시 들려 물을 마시고 갈테니 자네 먼저 가게나” 하고 마을 가장 가까이 있는 허름한 집으로 들어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깜짝 놀랐습니다.
온 식구가 전염병에 걸려 앓고 있었으며 또 며칠을  굶었는지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우선 이것으로 먹을 것을 사세요. 그러면 힘이 날겁니다” 라며 가지고 있는 돈을 내밀었습니다.
농부는 여비가 없어서 여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부자 노인은 예루살렘에 도착해 성지를 둘러보고 예배도 드리며 성찬식도 참석해 은혜를 받았습니다.

몇 달간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부자도 여비가 떨어져 집으로 돌아 오다가 농부의 생각이 나서 그와 헤어졌던 마을에 들어갔을 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성인입니다. 그분이 없었다면 우리 식구는 모두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부자노인은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과연 농부의 행위가 옳은것 이었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순례가 아니라 남을 보살피며 살아가는 삶이야” 라고 중얼 거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이나 경제적으로 소외돼 거리와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연약하고 외로운 자들에게 형제 사랑을 실천했을까?

사실 가난한자들은 불합리한 사회적 환경과 제도의 모순, 부자의 횡포 등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하며 사회의 음지에서 소외된 채 타인의 관심과 배려없인 살수 없다.

그럼 그들을 누가 도와 주어야 할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약함과 사회의 구조적인 악에만 그 탓을 돌리거나 회피하지 말고 또한 조건을 붙여 배척하거나 간과하지 말고 도와줘야 한다.

이것은 공중의 새와 들판의 폴 한포기 까지도 관심을 가지신(마 6:26-29)
하나님의 뜻이며 율법의 대강령이자(마 22:36-40)
하나님께서 당신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가지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자기같이 사랑하라”(레 19:34)고 가난한자들을 맡겨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 1:5) / 주일 설교 원고(2020-01-05) 이승혁목사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 1:5)

요한일서 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빛이시라!
God is light.
ὁ Θεὸς φῶς ἐστιν(the God light is)

2020년 첫 주일을 맞이합니다.
첫 주일의 의미를 “시작(始作)이 반(半)” 이라는 속담과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는 끼울 구멍이 없다”는 독일의 문호 궤테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 주일 예배에 성공한다면 2020년의 절반은 이미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에 오늘의 예배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 세자를 남긴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죽어서 무엇을 남겨야 할까요? 속담대로 한다면 사람은 누구나 이름 세 글자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남길 수 있는 것과 다른 것을 남겨야 할 것입니다.
다른 것을 남기려면 먼저 나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2020년 신앙생활을 위한 목표를 위한 표어를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라고 결정했습니다.

지난 1월 1일부터 요한일서를 읽기 시작하여 1장부터 4장까지 읽었습니다.
함께 읽었던 말씀 중에서 설교 본문을 선택하고 설교하기 위하여 오늘 설교 제목은 요한일서 1장 5절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을 선택했습니다.

빛에 대한 탈무드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도입 이야기)
어느 유명한 랍비가 제자들에게 10불씩 나눠주며 날이 어둡기 전에 기도실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물건을 구해오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모였을 때 랍비는 제자들이 구입한 물건들을 확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이 가져온 것들은 기도실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10불을 갖고는 기도실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물건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평소에 어리석고 둔하다고 놀림을 받던 제자가 전기 스위치를 내리더니 어두워진 기도실 책상 위에 양초를 올려놓고  불을 밝혔습니다. 그 순간 어둡던 기도실이 환해졌습니다. 작은 양초의 불빛이 기도실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빛이란 어두운 방안을 물리칠 수 있다는 교훈의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지난 한 주일 동안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말씀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빛이라고 하셨을까요?

신약 성경 27권을 세 개의 기둥으로 설명하면 “복음의 기둥”과 “요한의 기둥” 그리고 “바울의 기둥”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기둥에서 빛이란 “착한 행실”이라고 합니다(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을 사람 앞에 비취에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바울의 기둥에서 빛이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합니다(에베소서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의로움진실함에 있느니라.  

요한의 기둥에서 빛이란 복음서와 바울 서신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내용을 말씀하여 "생명"이라고 합니다(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이라.

복음서와 바울 서신에서는 빛을 도덕과 윤리적인 행동으로 제한시켰습니다. 그러나 요한서신에서는 빛을 도덕과 윤리적인 행동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좁은 범위에서 읽을 수 있지만 2020년부터는 넓은 범위에서 읽고 묵상하려고 합니다. 주간에 읽은 말씀 중에서 설교 본문으로 선택하고 설교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더불어 설교하므로 성경을 폭 넓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스스로 존재하시는 영”입니다.

생명은 유일한 것입니다(시편 22:20)
-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①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①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① 내 유일한 것을 난외 주에서 "내 생명" 이라고 번역합니다.

시편 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욥기 33:30
그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돌이키고 생명의 빛으로 그에게 비취려 하심이니라.

시편 56:13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영원한 생명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영의 하나님을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합니다. 삼위일체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성부(聖父) 하나님(야고보서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성자(聖子) 예수님(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일서 1: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 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요한일서 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성령(聖靈) 하나님(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이한 빛"이란 "놀라운 빛"을 말합니다. 놀라운 빛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어두운 죄 가운데서 불러내어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신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기이한 빛이 되신 예수님은 놀라운 빛으로 죄악에 붙잡힌 인생을 불러내십니다. 그 좋은 예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을 향하여 가는 길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사울은 땅에 엎드렸을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이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물었을 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러한 기이하고 놀라운 빛을 곧 성령의 역사라고 하겠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다양한 빛으로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로 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성령님은 기이한 빛으로 임하셨습니다.

생명의 하나님(시편 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민수기 16:22
그 두 사람이 엎드려 가로되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민수기 27:16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예수님은 생명의 주(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성령님은 살리는 영(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곧 생명이라.

잠언 4:20∼23,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건강이 됨이니라.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 의 반대를 요한일서에서는 "어두움" 이라고 합니다.
요한일서에서 "어두움"이란 단어가 3회 사용되었습니다(1:5, 2:8, 2:11).
어두움의 정체를 요한일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2: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2: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어두움(어둠)은 "눈을 멀게 한다."
눈을 멀게하면 생명이신 하나님을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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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 1:5)

1. 빛은 생명(시편 36:9, 56:13, 욥기 33:30)

시편 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욥기 33:30
그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돌이키고 생명의 빛으로 그에게 비취려 하심이니라.

시편 56:13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2. 빛은 구원(시편 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3. 빛은 치료(말라기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4. 빛은 사랑(요한일서 2: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5. 새 하늘의 성전(요한계시록 21:24)

만국이 그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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