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예언과 거짓 예언


참 예언과 거짓 예언


참 예언은 회개를 강조한 회복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남은 자만이 이와 같은 일에 참여 할 수 있다.
 
거짓 예언은 약속을 강조한 회복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회개가 없기 때문에 약속만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예언과 분별(Prophecy and Discernment)

월터 모벌리 | 새물결플러스 | 468쪽

'예언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존재할까요?
이 점에 대해 논하기 전에, 일단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예언'의 뜻을 살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언'하면 '앞일을 미리 말하는 것'으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때 사용하는 예언은 한자로 미리 '예(豫)'를 사용한 예언(豫言)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은 맡을 '예(預)'를 사용한 예언(預言)입니다.

한자로 번역되어 성경에서 사용되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 본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앞일을 미리 말하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말한다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책의 저자인 월터 모벌리(R.W.L.Moberly)도 구약성경에서 '예언자'로 사용된 단어 '나비(navi)'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비(navi)는 본질상 하나님 편에서 말하는 사람이요, 남성 혹은 여성 대언자(spokesman or spokeswoman)다.
하나님 편에서 말한다는 개념은 자연스럽게 이 말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상관개념과 긴밀히 연결된다(33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은 '앞일'에 대해 말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의 말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이뤄질 일을 말하는 예언과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운명론적으로 정해진 미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뤄질 '하나님의 심판'을 말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미래에 이뤄질 일의 의미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하는 의미의 예언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예언' 자체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예언(자)적 선포'라고 해야 할지는 여전히 나눠야 할 부분들이 있겠지만,
본 지면에서 이에 대한 구체적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언'에 대한 '분별'입니다.
예언을 하는 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권위에 기대 '말'(이 말은 인간이 인지 가능한 인간의 것)을 하고 있는데,
그 예언을 듣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그 '예언'을 '하나님 말씀(뜻)'으로 분별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죠.
물론 오늘날 성경 독자들은 성경 속 예언자들의 말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 '참 예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들의 '예언'을 들었던 자들은 그것을 어떻게 분별했겠으며,
나아가 오늘날에도 '예언'이 유효하거나 혹은 '예언(자)적 선포'가 실행될 때 그 말을 듣는 우리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뜻)'인지 아닌지 어떻게 분별해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저자는 이에 대한 분별 기준을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들과 말씀 속에서 찾아 제시합니다.

예레미야의 경우, 특별히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립구도 속의 분별(2장과 3장 초반),
그리고 미가야와 시드기야의 구도(3장),
엘리사와 발람의 경우(4장),
요한의 진술과 바울의 진술(5, 6장)을 통해 우리가 참 예언과 그렇지 않은 것을 어떻게 분별해야 할지 기준을 제시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자는 예언을 행하는 예언자들의 삶의 모습과 태도에 그 기준을 둡니다.
즉 예언자의 도덕적 삶의 모습이 그 예언에 대한 진정성을 뒷받침해 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도덕적 삶의 모습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점과,
도덕주의와는 구별되어야 하는 점을 또한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도덕적 삶'과 '도덕주의'를 구별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여기서 '인간의 무능력함과 하나님의 전적 은혜'의 구도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도구로 사용될 인간을 부르실 때,
그의 도덕적 상태를 보고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은혜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멈춰,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의 도덕적 기준을 보고서가 아니고 은혜로 부르셨으며 그 은혜 안에서 자신의 말을 대언하게 하셨는데, 우리는 어떻게 그의 도덕적인 삶을 발견하고 그 삶 속에서 그가 말하는 것의 진위 여부를 분별하겠는가?", "그렇다면 인간이 과연 인위적이지 않은 도덕적 삶을 살 수 있는가?"

그러나 저자는 예언자의 도덕적 삶이 무엇으로 나타나는지(특히 예레미야와 요한)를 말해 줍니다. 이와 더불어 예수님의 말씀을 빌어 '거짓 예언자'에 대한 분별 기준을 제시해 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분별'의 기준을 발견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책을 통해 여러분들이 직접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책은 '예언자'에 대한 분별을 말하고 있지만, 책을 읽는 저는 목회자요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날 교회 공동체 내에서 이뤄지고 있는 '설교'와 '설교자'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는 듯 보이는 이 시대 속에, 그리고 목회자의 불의와 부정함들이 계속 드러나고 있는 분위기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그 일을 감당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국은 삶의 신실성입니다. '도덕주의'로 치환되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신실성입니다. 이 신실성은 말씀을 전하는 자의 삶의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저자는 제시합니다. 이 결과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확인 가능한 결과를 말할 수도 있지만, 말씀을 전하는 자의 목표, 그가 추구하는 것으로서의 결과를 말하기도 합니다.

대중(회중) 앞에서는 얼마든지 속일 수 있지만, 결국 그가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다른 것에 있다면 그것은 분명 드러나기 때문이며, 여기에는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한 결과적 실패가 공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 속에 필자가 윗 문단에서 밝힌 '개인적 기준'은 바로 '탐욕·탐심'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히브리서 13장 7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종교 지도자들의 과오 중 하나는 신적 권위를 힘입어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말'이 일종의 '권력'이 될 수도 있는 시대 속에,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는 '설교자'들이 '설교'를 악용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설교'가 '예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예언적 측면이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1차로 설교자들은 설교 행위 그 자체에 권위를 둘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먼저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공동체 내에서 선포되는 '설교'는 1차로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교우들과의 관계 속에 이뤄지는 것이라 봅니다. 이는 단순히 성경의 지식을 전하는 일에 그치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방송(인터넷) 설교에 대해 긍정적 측면보다 부정적 측면이 많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최근 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수많은 설교가 넘처나고 있는 '설교 홍수의 시대' 속에, 예언을 사칭한 여러 말들이 넘처나는 시대 속에, 우리는 그 참과 거짓의 분별을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모벌리의 <예언과 분별>은, 이러한 가운데 우리에게 분별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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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예언과 거짓 예언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변화가 심하고 불안전한 시대를 살아가는현대인들은 이 물음에 구체적인 답을 얻고 싶어한다.
자신의 개인적인 앞날이나, 정치적인 미래을 알고자 점쟁이나 유명한 심령학자를 찾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의 예언들이 그다지 믿을만하지 못하다.
한편,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미래를 예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성경의 1/3은 예언서이다.
인기 있는 종교서적의 작가들은 특히 성경 마지막 책인 계시록 16:16절의 아마겟돈(Armageddon)을 자주 등장시킨다.
그들은 아마겟돈 이 마지막 세계대전이 일어날 곳으로 북구 팔레스틴의 갈멜(Carmel)산 근처의 므깃도(Megiddo)골짜기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남아있다.
아마겟돈으로 알려져있는 하마게돈(Harmagedon)이 정말로 그런 의미인지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성경을 믿는 크리스챤들도 서로 부딪치는 성경 해석을 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마지막 7년 환란을 겪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있다.
그들은 7년환란이 시작되기 직전에 교회는 휴거된다고 믿는다.

이들은 이스라엘과 시온산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며,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은 임박한 휴거의 첫번째 증거라고 믿는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참다운 교회는 7년환란을 통과해야만 하고, 순교와 시련의 환한을 견디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고 믿는다.

예언의 완성과 현대적 의미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세대주의자(dispensationalist)라 불렀다.

그들은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에 큰 의미를 두어,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에 큰 의미를 두어, 1948년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세대가 시작하는 해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마가복음 13:30절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고 한 말씀을 그 증거로 들었다.

'한 세대'를 40년으로 계산하며, 1988년은 아마겟돈 전쟁이 시작되는 해가 된다.
횔린세이(Hal Lindesy)는 [대유성 지구의 종말](The Late Great Planet Earth,New York:Bantam Books, 1973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무슨 세대냐구요? 분명히, 모든 상황,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의 건국은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한 세대는 40년정도의 기간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계산해보면, 1948년이후 40년정도면, 모든 일은 다 끝나버립니다."(p54)

"우리는 예수가 말했던 바로 그 마지막 세대입니다."

이러한 계산법에 따라 휴거는 1988에서 7년을 뺀 1981년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실제로 1981년에 휴거를 준비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시카고선타임즈(Chicago Sun-Times)] 1981년 6월 4일자는 그와 같은 잘못된 추측들이 가져온 결과를 아래와 같이 전했다.

"그 사건 (1981년 6월 28일에 휴거가 일어날 것으로 믿고)을 준비하기 위해, 50명의 신도(아리조나주 툭손의 밝은 집 복음협회,Light-house Gospel Foundation)들은 직장도 그만두고 재산도 처분했다."(p.34).

세대주의자들은 성경 지명의 문자적인 적용을 주장한다.

헤롤드 린셀(Harold Lindsell)은 중동지역이 마지막 예언의 무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성경은 중동이 예수의 재림과 관계가 있는 사건들이 일어난 주요 무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는 아마겟돈을 이스라엘과 아랍 산유국 사이의 전쟁이라고 보았다. 린셀은 같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예측했다.

"말세는 아랍국가의 석유가 고갈되기 전에 온다. 이는 말세가 가까운 것을 의미하며 세계역사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머지 않은 장래에그 정점에 이르게 될 것이다."

1967년 6월 6일전쟁 결과, 이스라엘 육군이 고도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그것을 구약예언 성취이며, "인류 역사의 결정적 전환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데렉 프린스(Derdk Prince) 이렇게 말했다. "예루살렘 지역에 유대인 정권이 다시 들어서는 것은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변하는 것이다. 예수가 말한 '이방인의 시대(the time of Gentiles)'는 끝나가고 있다. 새로운 시대가 온다. 그 시대는 이스라엘과 모든 나라들을 하나가 통치하는 때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지금의 이스라엘을 "마지막전쟁을 위한 도화선"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윌부드(Walvoord)는 "제 3차세계대전에서 아마겟돈"의사건 일지도 만들었다.

오늘날 기독교 예언가들 특별비 근본주의자들은, 지금의 우리들은 임박한 심판날을 앞둔 마지막 세대의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들의 성경해석은 하나의 공통괸 가정에서 출발한다. 히브리 예언자들은 예언서에서 앞날의 사건들을 기록했다고 보았다. 즉 문자적인 해석이 성경 해석의 바른 지침(gideline)이며 전제조건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서의 예언들이 미래에 문자 그대로 이루어 진다고 생각한다. 이는이스라엘의 각 계파, 지리적 설명,당시의 적대국들이 지금도 문자 그대로 적용됨을 뜻한다. 나아가, 현재의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세계(Gentile World) 에서 신정국가가 될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들은 구약의 예언은무조건 문자 그대로 신약시대에 일어나야 한다는데 너무 열중하여, 구약 예언서의 중심주제가 예수의 오심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나타난 예언

바젤론 유수 직전, 하나님께서 곧 유대국가를 회복하실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하 국수주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이맺은 언약 내용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만을 전했다.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을가리키면서 그들은 외쳤다. "이것은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렘 7:4). 마치 이스라엘이 하나님앞에서 지은 죄악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이미 떨어질 수 없는 하나가 된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와 같은 잘못된 평화와 소식에 반박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렘 23:16).

또한 자칭. 선지자들이 바벧론에 끌려간 유대인들 가운데도 있었다.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의 귀환이 임박했다고 선전하므로, 은근히 유대인들의 반란을 부축기기도 했다. 느부갓네살은 2명의 반란자를 체포하여 처형했다.(렘 29:22). 이는 예레미야가 포로된 유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언한 것이 이루어진 것을 뜻한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골라야의 아들 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들은 내 이름으로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한 자라 보라 내가 그들을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너희 목전에서 그들을 죽일것 이라"(렘 29:21).

하루는 궁전 뜰에서 예레미야는 국수주의 거짓선지자가 하나니야(Hananiah) 맞닥뜨린다. 하나니야는 바벧론 포로 생활이 70년 동안 계속되리라는 예리미야의 예언과는 정반대로 하나님께서 곧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말했다.(렘 25:11,29:10). 뻔뻔하게 하나니야는 주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2년 안에 하나님이 바벧론으로 간 유대 모든 포로들을 다시 돌아가게 할 것이다."고 말했다.(렘 28:4).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는 '평화(shalom)'가 임박했음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자신의 예언일 뿐이었다. 그 때 예레미야는 그와

같은 '평화'의 선포는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과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렘 29:8,참조, 사 8:20).

그러면, 왜 하나니야의 예언은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는가? 그는 예레미야의 예언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이 빠른 시일안에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거짓 예언자들을 구별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평화와 축복의 언약을 무조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이스라엘의 회복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귀향의 필수적인 조건이라 할 수 있는 회개와 믿음의 회목을 애써 무시하거나 거부하고 있다.

"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벧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는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렘29:10-14).

도덕적인 회개가 예레미야의 예언의 핵심이다(렘 18:7-10).
그러나 하나니야는 "여호와께 패역하는 말" (렘 28:16)을 전했으며, 조건없는 예루살렘의 평화를 선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거짓을 믿게"(렘 28:15) 하였다.

구약학자들 가우네는 하나니야를 선지자 이사야를 '흉내낸 사람(caricature)' 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이는 하나니야가 '그날에'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목에 매인 앗수르의 멍에를 (사 10:27) 벗어지게 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앵무새처럼 반복했기 때문이라 한다. 하나니야는 자신의 시대로부터 100년전 전에 이사야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이 살던 시대에 무자적으로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았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이사야의 예언에 응답하지 않은 것으로 단정했다.

유대 신학자들 마틴부버(Martin Buber)는 하나니야가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하나니야는 전적으로 다른 역사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시간을 잘못 안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몰랐다. 거짓 선지자들은 그저 이사야의 예언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그들은 각각의 예언이 갖는 조건을 무시하고 있다. 즉 그들은 이사야의 예언을 어떤 시대에나 적용할 수 있는 조건없는 안전의 약속으로 선전했던 것이다."

하나니야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가 아니었다. 그는 참 선지자처럼 거룩한 도성과 성전을 위해 간구하는 선지자의 소명을 받지 못했다. (렘27:18).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멸망했

고, 이는 유대인들이 성전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믿는 대신에 성전

을 의지한 때문이다. 히스기야왕은 앗수르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 했을 때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의 안전을 지켰는데, 이

것은 한 모형이 되어서 그후 유대인들이 잘못된 평안을 갖게 되는 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히스기야왕 이후의 왕들이 종교적으로 타락했다. 유대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때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평안'하다 안전하다'는 메시지를 전했고, 백성들로 잘못된 희망을 갖게 했을 뿐아니라. 결과적으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재촉하는 결과를가져왔다. "그들이 내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는 마음의 강퍅한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렘 23:17,18).

"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렘 23:21).

이스라엘의 자칭 선지자들은 열정을 갖고 자신들이 참 예언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믿었던 것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판단하지 않으셨다.

"이와 같이 내가 내 노를 담과 회칠한 자에게 다 이루고 또 너희에게 말하기를 담도 없어지고 회칠한 자들가고 없어졌다. 하리리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며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본다 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13:15,16).

모세는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구별하는 결정 기준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그 예언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지를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고 했다 (신 13:1-5). 하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이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시험하셨다.(신 23:3). 모세오경(Torah)은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구별하는 기준이되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유혹, 이방 신들을 믿게 하던 거짓 선지자들을 주로 지적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뜻에도 어긋나며 또한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거짓 예언들에도 적용할수 있다. (신 30:1-3).

주전 586년,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함락한 다음 하나님은 거짓된 평화의 예언들이 왜 잘못된 것인가하는 보다 깊은 이유를 선지자를 통해 알려 주었다.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 사로 잡핸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저희가 거짓 경고와 미혹케 할 것만 보았도다"(애 2:14).

" 그 선지자들의 죄와 제사장들의 죄악을 인함이니 저희가 성읍 중에서 의인의 피를 흘렸도다"(애 4:13).

이스라엘의 거짓 선지자들은 분명 하나님의 백성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었다. 에스겔은 엄중하게 그들의 잘못을 폭로하고 있다.

"그 선지자들이 그들을 위하여 회를 칠하고 스스로 허탄한 이상을 보여 거짓 복술을 행하며 여호와가 말하지 아니하였어도 주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였으며 이 땅 백성은 강포하여 늑탈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였으며 우거한 자를 불법하게 학대하였으므로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 찾아가 얻지 못하고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아가 얻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아가 얻지 못한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22:28-31).

자칭 선지자들은 건방지게도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참 예언을 전하지 못하게 막기도 했다. 미가는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어늘 욕사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고 불평했다.(미 2:6, 암 7:16). 미가는 거짓 평화를 전하는 선지자들과는 정반대의 예언을 했다.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같게 되리라"(미 3:12).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참예언과 거짓 예언의 근본적 차이는 무엇인가?

참선지는 언제나 어두운 앞날만 예언했고, 거짓 선지자들만 평화와 번영을 예언할 것일까? 하나님의 선지들도 분명 앞으로 메시야의 왕국에서 누리게 될 평화을 선포했다.(미 4:1-5, 암 9:11-15, 렘 23:5, 6,  29:13,14, 32:42, 겔 36:24-32, 37:24-28).

본질적인 차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를 벗어났을 때, 참 예언자들은 진실한 회개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깨어있는 자(남은 자) 만이 이스라엘의 약속된 평화와 축복을 누렸다.(암 5:6,15, 미 2:12, 13, 4:6-8, 렘23:3-6, 31:7, 31-34, 겔 36:24-28).

반면, 거짓 예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겠다는 약속의 성취만을 강조, 도덕적(신앙적)인 전제조건을 생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조건 없는 보장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들은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즉 거짓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이스라엘을 아무 조건 없이 선택하셨다는 독단의 교리를 전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이스스라엘과 메시야의 관계에 대한 어떠한 관심도 보이지 못했다.

오늘날도 과거의 거짓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이 현재의 이스라엘을 택해서 회복시켰다고 단정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의 예를 따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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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 선거에서


예언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지보다는 선포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예언은 미래를 예측하기도 합니다.

10월 말, 팻 로버트슨은 “의심의 여지 없이 트럼프가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다.”라는 말을 하나님에게서 들었다고 선언했습니다.
로버트슨의 말 덕분인지 트럼프는 예상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총 7천만 표를 얻었기에 로버트슨이 실제로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을 받았을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가 온전한 이야기를 들었을까요?

대부분의 선거에서 우리는 50대 50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2016년 목사이자 예언가인 예례미야 존슨은 트럼프가 공화당 예비 선거에 등장하기 전부터 트럼프의 첫 임기를 정확하게 예측했습니다.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승리를 예측한 것은 로버트슨만이 아니었습니다.
존슨의 예언을 포함한 대부분의 공개 예언은 트럼프 편에 서며 때로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선거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트럼프에게 투표한 몇몇 사람들조차 이번에는 바이든이 이길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하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출신인 메시아 지도자 론 칸토르는 트럼프를 우상화하는 교회 때문에 바이든이 승리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을 두 번이나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지지자들에게 말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나 트럼프가 실제로 재선에 성공해서 짧은 시간 안에 예언가들이 참됨을 증명할 가능성이 적어 보이지만, 이는 우리를 향한 경고입니다.”

재검표와 법원을 향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선거 결과가 유지된다면 트럼프의 승리를 예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거짓 선지자였을까요?

예언에 실수가 있었다고 해도 그 사람들이 모두 거짓 선지자는 아니며, 가르침에 실수가 있었다고 그 사람들이 거짓 선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존재합니다. 예언의 진정한 선물이 오늘을 위한 것이라고 믿지 않는 중단 주의자들조차도 이에 동의합니다.

거짓 선지자이든 아니든, 매우 공개적인 잘못된 예언은 하나님의 이름에 큰 불명예를 안겨줄 위험이 있으므로 특히 심각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이미 기독교인을 조롱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조롱할 근거를 더 찾을 수 있습니다. 신명기 18장은 일반적으로 무법한 거역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로 설명되는 “추상적”인 잘못된 예언에 대해 경고합니다 (신명기 1:43, 17:13).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라고 신명기 18장 22절은 기록합니다.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하나님의 말씀 듣기

그러나 참된 예언조차도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참 선지자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이 기이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행동했으며 (예레미야 19:10, 사도행전 21:11) 동시대 사람들은 때때로 그들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열왕기하 9:11, 예레미야 29:26, 요한복음 10:20).

하나님의 더 큰 장기적 목적과는 달리, 단기적 목적을 가진 대부분의 성경 예언은 조건적입니다. 따라서 니네베가 회개했기 때문에 요나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요나 3:4)고 했던 예언은 요나 세대에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예례미야 18:7-10). 조건부 예언의 방식에 대한 관점은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선택이나 최종 결과를 미리 알고 계시지만, 한정된 시간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일정한 기간 내에 보여주시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은 때때로 약속된 결과를 미루셨습니다. 엘리야는 아합 혈통의 파멸을 예언했습니다 (열왕기상 21:20-24). 그러나 아합이 자신을 낮추자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아합이 살아있는 동안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개인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대신 아들의 시대에 재앙을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21:29).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세 가지 임무를 위임하셨습니다 (열왕기상 19:15-16). 엘리야는 엘리사를 부르는 임무 하나를 직접 성취했습니다. 다른 두 가지는 엘리사와 그가 차례로 위임한 선지자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임무는 다른 사람이 수행했습니다.

성경의 예언에서는 언제보다 무엇이 더 중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요엘서의 처음 두 장은 심판을 위한 하나님의 시간인 주님의 날과 관련하여 임박한 메뚜기 침략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의 날에 대한 진정한 침략을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3:9-17, 특히 14절). 즉, 예언을 통해 가까운 사건은 시간을 지정하지 않고 나중에 올 사건을 예고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봅니다. 예수님이 두 번 오실 것이라고 미리 인식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미국 선거에 대한 대부분의 예언은 조건부였습니까? 아니면 단순히 틀린 예언이었을까요? 누구나 “많은 사람이 이렇게 투표하면 선거의 결과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라고 단순히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확률을 감안할 때, 트럼프의 승리를 장담하는 예언은 다소 대담했다고 보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기

경건한 사람들조차도 때때로 자신이 들은 것을 잘못 해석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세처럼 항상 하나님을 대면하며 말씀을 분명하게 듣는 것은 아닙니다 (민수기 12:6-8). 나단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하여 말씀하신 후에 그가 다윗에게 준 확신을 바로 잡아야 했습니다 (사무엘하 7:3-5). 나단과 같은 경건한 궁정 선지자조차도 잘못된 가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선지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고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신분에 의문을 가졌습니다 (마태복음 11:2-3, 누가복음 7 :18-20). 아마도 요한은 다음에 올 사람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찍이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3:11, 누가복음 3:16). 요한이 알기로는 예수님은 누구에게도 불로 침례를 주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것은 옳았지만, 요한의 추론은 모든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더 큰 그림의 한 부분만 보았기 때문에 잘못되었습니다.

모든 예언이 부분적이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는 잘못된 해석을 하나님의 메시지와 혼동 할 위험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이전에 좋은 배우자나 직업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일에 관한 결정일수록 명확하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더 어려워집니다.

이것이 누가가 사도행전 21장 4절의 말씀과 같은 성령이 이끄시는 말씀을 “예언”이라고 부르지 않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친구들은 그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9:21 해석). 바울의 친구들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20:23, 21:11) 그가 가지 말아야 한다고 잘못 추론했습니다 (21:12–14, 열왕기하 2:3-5, 16-18). 비록 우리의 주관적 판단은 불완전하지만, 삶에서 주님의 지혜를 구하여 주관적으로 판단하기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들이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9).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아는 것은 제한적이고 부분적입니다 (9-12).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이 완전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종들 중 누구도 불완전한 예언을 한 적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각각의 예언을 분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고린도전서 14:29). 그는 우리에게 성령을 소멸하거나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대신 우리는 헤아려 좋은 것은 취하고 악은 거부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9-22).

현대의 예언에서 일부 대중적인 가르침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긍정적 고백”이라는 이름 하에 행해진 가르침의 과잉이 예언의 잠재적 오류를 주도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하는 주장”에 관한 신학을 거부하는 많은 이들 조차 ”예언적 선언”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언은 신앙을 확신하기 위해 행하여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으로 산에게 명령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마가복음 11:23). 그러나 앞선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믿어야 이 또한 가능한 것입니다 (22절). 예언적 “선언”은 결국 하나님께서 명하고 인도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례미야애가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명령하지 않으시면, 누가 말하여 이룰 수 있겠는가?” (예례미야애가 3:37).

다른 의견 듣기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저명한 사람들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2008년에 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에티오피아 목사가 제 아들에 대한 것과 제가 두 권의 큰 책을 쓰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예언했습니다. 저를 혼란스럽게 한 것은 그가 두 번째 책이 첫 번째 책보다 분량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당시 4,000페이지가 사도행전 해설이 먼저 출간되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메스핀 목사의 말이 인상적이었지만 틀린 예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1,100페이지 밖에 안되는 기적에 관한 제 책이 사도행전 해설 전에 출간되었습니다. 메스핀이 옳았고 저는 틀렸습니다.

올해 많은 기독교인들은 트럼프가 다시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지도자들의 예언을 들었습니다. 예레미야 존슨과 같은 일부 사람들은 그들의 예언이 결국 진실이 될 것이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했습니다. 크리스 발로톤과 같은 다른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사과했습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예언이 우발적이거나, 시간적으로 잘못되었거나, 실수였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저는 트럼프 지지자가 아니지만 경건한 예언이 사실로 입증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며, 따라서 사람들의 실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선지자는 아니지만 제 꿈이 불안감을 안겨준 경험이 있습니다. 선거 8개월 전인 2016년 3월, 저는 트럼프가 성경의 예후왕 (열왕기하 10:28-31)과 같은 인물일 수 있고 회개가 필요하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2016년 5월에는 (미래에서) 트럼프가 난민 아동 학대를 하여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인종 폭동을 유발하는 그의 말을 꿈에서 목격했습니다. 2016년 선거가 끝난 후 저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그에 대한 악몽을 꾸는데, 다른 많은 사람도 나처럼 같은 것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다음 해에 트럼프 지지자들이 반발을 일으켜 제가 그들에게 경고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호세아 8:7).

제가 존경하는 많은 분들이 대통령을 지지했지만 저는 그 꿈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어느 정도 그 꿈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낙태 합법화에 반대하기 때문에 대통령이 복음주의자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며 때때로 관점이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올해 8월, 트럼프가 2020년 선거에서 패배하는 꿈을 꿈꿨습니다. 그건 그저 꿈일 뿐이었습니다. 저는 온갖 종류의 꿈을 꾸며, 어떤 꿈이 중요해 보일 때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항상 확신하지 못합니다. 단순히 제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BBC 뉴스를 봤던 내용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 적어도 우리에게 기도할 동기를 부여합니다.

우리의 관점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더 큰 퍼즐 중 하나의 조각만을 각자 손에 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주인이시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역경에 맞서 만약 트럼프가 갑자기 대통령이 된다면 그 예언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대중의 관심을 끌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신 하나님께서 많은 독실한 신도들에서 필요한 주의를 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듣고 싶은 말로만 성령이 항상 위로하시지는 않습니다. “예언의 선포”로 인해 하나님께서 실제로 말씀하시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둔감해질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말을 무작정 믿는다면 위험한 사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열왕기상 13:11-32).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저는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보길 기대합니다. 그러나 예언은 공개적으로 선언되기 전에 혹은 필요하면 나중에라도 올바른 것인지 평가되어야 합니다.

Craig KeenerAsbury Theological Seminary의 성서 연구학과 F.M. Ada Thompson 교수입니다. 그는 Christobiography : Memories, History, and the Reliability of the Gospels의 저자로 2020 CT Book Award를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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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세상 끝날에 거짓 선지자들(prophets -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나 기독교계를 매우 혼란스럽게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고 하셨다 (마24:25).   이 점을 분명히 알고 있으라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새삼 강조하셨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바로 그 싯점에 와있다.   그래서 지금 기독교계는 거짓 선지자들(거짓 예언자들)로 인해서 영적 대 혼란을 겪고 있다.   미혹의 영이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우리 크리스챤들은 정신을 차리고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세에 나타나는 거짓 예언자들에게 어떤 특징이 있는가를 성경말씀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요즘 정체가 모호한 예언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들이 거짓 선지자들이다.   그래서 필자는 거짓 선지자 용어보다는 거짓 예언자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   용어상의 선지자예언자는 그 성격상 동일어 Prophet 이다.  


거짓 예언자는 매우 신기한 것을 보이며 자기를 따르게 한다

      ". . .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라도 미혹하게 하리라" (마24:24)                                                                                         Show great signs and wonders (매우 신기한 것 보이며)

      성경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사람의 마음을 크게 동요시킨다고 증거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대적에게 약탈 당할 때에 "네 눈에 보이는 일로 인해서 네가 미치리라"라고 하셨다.   보는 것으로 미친 마음이 된다.
                                                        You shall be driven mad because of the sight which your eyes see.

      눈으로 보는 "안목의 정욕"은 좋은 면에서든지 나쁜 면에서든지 사람의 마음을 거기에 미치게 만든다.   사로 잡힌바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각종 상품은 광고의 눈요기로 먼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요한계시록18:12-13에 보면 사람의 영혼이 음녀에게는 상품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영적 음녀인 "거짓 예언자"는 눈에 보이는 "신기한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홀려서, 즉 미혹하여" 마음을 사로잡아 자기를 따르게 한다.   그러므로 눈으로 보는 것에 호기심이 많아서 신기한 기적을 보고 확인하려는 사람은 쉽게 미혹의 영에게 사로잡힌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sign)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잘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다(요20:29).   보는 것으로 미혹당하지 말라는 뜻도 된다.  


거짓 예언자는 참 예언자인 척 한다

      "(선지자 아닌)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왕상13:18)

      위 본문에서 거짓 선지자가 참 선지자를 미혹하여 속인 것참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죽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거짓 선지자에게 속은 참 선지자는 결국 길을 가다가 사자에게 먹혀 죽는다 (왕상13:24).   오늘날에도 가짜 예언자들이 미혹의 영으로 홀려서 택하신 자라도 죽음의 길로 가게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고 강조하셨다.


거짓 예언자는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한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많은 놀라운 일(many wonders)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2-23).                                                                                                                         Depart from Me, you who practice lawlessness!'

        거짓 사도참 그리스도의 사도인 것처럼 가장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사도바울은 말했다(고후11:13).   왜냐하면 "사탄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 이다(고후11:14).   거짓 예언자가 자신이 참 예언자인 것처럼 가장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many wonders) 하는 것 전혀 이상한 것 아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까지도 깜박 속아넘어가게 하려면 그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과 기적을 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성령의 놀라운 능력이 임한 것으로 착각하여 영적 분별력 없는 자는 거기에 속아 넘어간다.   하나님은 욥을 테스트하실 때 사탄에게 마음 껏 해보라고 허락하신 것처럼, 마지막 때에도 참 성도를 가려내기 위해서 미혹의 영에게 허락하신다(살후2:11).   욥처럼 장성한 분량에 이른 성숙한 성도만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며(살후2:10)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인내의 신앙으로 자신을 지키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쭉정이가 아닌 알곡성도 이다.   마지막 때에 젖이나 먹는 신자는 분별력이 없으므로 미혹 당하게 되는데 그것은 쭉정이가 타작마당에서 바람에 날려가는 것과 같다.   지금은 추수때 인것을 기억하자!


거짓 예언자는 자기가 거짓 선지자임을 스스로 폭로한다

        거짓 예언자(선지자)는 신.구약 성경 66권이 완성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에게 지금도 직접 계시(direct revelation)를 주며,  그러한 성령의 은사(gift)를 받은 사람이 이 시대의 선지자(prophet)요, 신사도(new apostle)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는 표현을 자주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영적 권위를 위임받은 것처럼 속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거짓 됨을 분명하고도 확실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통해서 분별하고 그들에게 속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옛적에 환상, 꿈, 음성, 현현 등의 방법으로 구약의 조상들에게 알려주셨지만 이 말세에는 그런 방법을 사?아지 않으시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히1:1-2).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동안 구원의 복음을 전하시고, 그가 선택한 사도들을 통하여 구원의 진리를 기록하게 하셨는데, 예수님께로부터 예언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받아 적은 사도가 바로 밧모섬의 사도요한이었고 그 책이 요한계시록(Revelation) 이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주시는"예언의 말씀"요한계시록으로 마감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이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사도 요한이 기록하게 하셨다(계22:18-19).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가 이것으로 마감 되었다"는 것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 예언자(거짓 선지자)들은 "아직도 예언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라고 거짓말 한다.   만일 거짓 예언자들이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면서 예언하면,  그것은 자기 자신 스스로가 거짓 예언자(거짓 선지자)임을 폭로하는 것 이다.   그것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요8:44)  하수인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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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그리스도는 거짓 선지자

거짓 선지자(false prophet)는 그리스도의 뜻을 올바로 전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적그리스도(Anti-christ), 거짓 교사, 거짓 사도라고도 일컫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사람의 마음을 혼미케 하거나 성경에 없는 거짓 교리를 가르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심판과 영원한 멸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마태복음 24:11, 요한계시록 20:10).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마가복음 13: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마가복음 7:6~7)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방법

거짓 선지자는 겉으로 봐서는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빛의 천사로 가장하거나 선한 목자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1:14~15). 2천 년 전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를 가리켜 ‘양의 옷을 입은 이리’라고 표현하셨습니다(마태복음 7:15~20).

그렇다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적그리스도가 ‘말’로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기록했습니다. 즉, 말 속에서 거짓 선지자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다니엘 7:25)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기록 외에 무엇을 덧붙이거나 빼버리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계시록 22:18~19). 이는 성경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하라는 의미입니다.

몇 년 전, 한 개신교 목사와 얘기를 나누던 중 성경에 없는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이유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그 목사는 “어떻게 사람이 성경대로 다 할 수 있느냐!”며 성경의 가르침 외에 ‘더하는’ 행위를 합리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성경대로 안 해도 된다는 말씀인가요?” 하고 되물었더니 당황스러운 낯빛을 보였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성경대로 다 할 수 있느냐.’는 말을 뒤집어보면 ‘성경대로 안 해도 된다’라는 말을 교묘하게 꾸민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는 교묘한 말장난으로 성경을 왜곡하고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을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기록된 가장 확실한 매뉴얼입니다. 목사의 말보다 성경을 더 신뢰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성경은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만든 크리스마스 등의 사람의 계명 대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한일서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새 언약의 유월절, 안식일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것입니다. 천국에 가려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는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바로 그곳에 참 선지자가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
 
이 시대가 너무 혼란하고 악한데 크리스천들이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것은 그들을 인도하는 목자들이 교회 부흥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책망으로 말씀을 올바로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에 크리스천들이 너무 많은데 그들의 행동과 말을 들어보면 도무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고 인간의 썩은 악취만 나는데도 자신들이 구원받았다고 하니 문제가 심각하다.

도무지 성경도 안 읽고 기도도 형식적으로만 하고 교회 출석과 십일조만 잘 하면 구원을 받았다고 자신하고 교회에서 그렇게 확신을 시키고 방심하게 만드니 문제다. 성경은 너희가 구원을 받았는지 너희 자신을 두렵고 떨림으로 확증하라고 한다. 온전히 죄 가운데 빠져서 방황하면서도 구원을 받았다고 방심하면 그 결과가 너무 비참하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성경을 잘 읽고 깨닫고 내 믿음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믿어주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

먼저 신구약에서 거짓선지자들의 특성을 바로 알고 그들에게 속지 말아야 하겠다.

첫째 그들은 압도적으로 숫자가 많다.
둘째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 한다(딤후 4:3-4, 사30:10-11).
하나님의 공의는 말하지 않고 사랑만 강조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지으면 무섭게 벌하셨다. 다윗이 간음죄를 지어 얼마나 무서운 벌을 받았는가. 많은 사람들이 보는 대낮에 자식이 아버지의 후궁들을 겁탈하고 아버지를 대적하다니 너무나 참혹한 예언되었던 비극이다. 그래서 참 선지자는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고 올바로 외치고 가르쳐야 한다.

산상수훈의 주님의 말씀은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가? 그 말씀들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주님의 보혈로 씻어야 한다. 그렇게 철저하게 씻는 사람을 보기가 너무나 어렵고 모두 다 구원받았다고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아 세상이 어둡다. '죄, 회개, 심판, 지옥' 이런 소리는 안하고 '사랑, 화평, 화목, 자유, 민주주의, 인본주의, 인권, 우리는 할 수 있다, 사랑은 증오를 이긴다(동성애 표어)' 등의 말만 한다.
 
셋째 정치권력과 결탁한다.
정치를 좋아하고 세상 권력자들에게 뇌물을 주거나 그들과의 친분을 과장한다면 주님 나라와는 벌써 멀어진 것이다. 성경에는 의를 행하고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고 천국에 들어간다고 했고 악한 세대에 진리에 서면 반드시 핍박이 따라온다.
 
넷째 양의 옷을 입은 이리다(마 7:15).
다섯째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되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다(마 15:8-9).
여섯째 진리가 없다(요 8:44).
일곱째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이다(유다 19).
여덟째 주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하였으나 주님께 인정받지 못한다(마 7:22).
 
아홉째 거짓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마7:22).
열째 내 생각을 주장한다.
열한째 자기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혼동한다.
열두째 “ -- 을 하였다”는 것을 강조한다(라오디게아 교회)
열세째 자기가 주님을 잘 안다고 착각한다.
 
우리는 주님에 관하여 알지 말고 주님을 체험하고 내 마음속에 모시고 깊이 알아야 한다.  위에 열거한 것을 상고하면서 나는 어디에 걸리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회개하고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야 한다. 성경을 매일 읽고 안타깝게 기도하고 성령의 감동을 받고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알면 악한 이 시대에 올바로 외치는 핍박받는 선지자가 된다.


첫째 : 대적해야 할 거짓 선지자

1) 거짓 선지자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전하는 사명을 받은 자로서, 구약시대에는 요셉이나 다니엘에게는 꿈을 통해, 에스겔에게는 환상을 통해, 많은 택한 종들에게는 주로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게 하였고, 신약 시대에는 말씀과 계시로 증거케 하셨다. 그런데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켜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계속해서 보게 된다.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을 말하고(렘 14:14), 자기 임의로 묵시를 말하며(렘 23:16)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는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아니했다.

예수께서도 거짓 선지자들을 엄히 꾸짖으셨다. 거짓 선지자(yeudoprofhth")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세 번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세 번 정도 쓰인 단어로서 구약시대의 거짓 예언자들을 말하고 있다. 거짓 선지자들은 때로는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현혹되기 쉽다.

2) 삼가야 한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의 성도들에게 강한 어조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당부하셨다. 마 24:24, 26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그러므로 요한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야 할 방법을 제시했는데,성도들은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해 보아야 한다고 했다(요일 4:1). 어느 때나 거짓 선지자들은 주린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으므로 성도들은 누구든지 헛된 말로 자신들을 속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엡 5:6). 또한 엡 6:12~17의 바울의 권면대로 악의 세력과 대항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인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서 거짓의 세력들과 싸워 승리해야 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 내가 양 같은 너희를 이리 가운데 보냄 같은데 뱀같이 지혜롭게 처신해야 된다고 하셨다.

둘째 : 거짓 선지자의 모습

1) 겉모습(양의 옷을 입고 있음)

외모를 보고 거짓 선지자를 쉽게 분별할 수 없고 설교를 들어보아도 구분 짓기 어려운 것은 양으로 행세하고 위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의 모습은 이리이지만 양의 탈을 쓰고 있기 때문에 식별의 능력이 없는 자는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다. "양의 옷을 입고"(en endumasin probatwn)의 뜻을 풀이하면 '강탈하여 이득을 취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양의 탈을 쓴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가지게 한다. 벧후 2:1은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이 있어 멸망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주를 부인하게 하고 멸망을 자취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도라 할지라도 이단을 분별할 능력이 없으면 쉽게 넘어가게 되어 있다. 양은 순한 짐승의 대명사로서 성도를 가리킨다. 거짓 선지자들이 희생의 제물로도 쓰이는 양의 탈을 쓰고 있으므로 언제든지 양에게 접근이 가능하고 접촉하기에 용이하다. 그러므로 근신하고 깨어있지 아니하면 쉽게 거짓 세력의 밥이 되고 만다.

2) 참모습(노략질하는 이리)

거짓 선지자의 외모는 양으로 위장하지만 그들의 참모습은 노략질하는 이리의 특성을 지닌다. "노략질하는"(arpage")의 뜻은 '잡다, 끌어가다, 빼앗다, 채어가다'이다. 물질을 갈취하고 궁극적으로는 생명까지 빼앗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거짓 선지자를 쳐서 예언하라고 했다.

겔 13:1~20은 거짓 선지자에 대한 예언인데, 그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2절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며

② 3절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한다.

③ 4절 황무지의 여우 같고(할 일은 안하고 쏘다니기만 하고)

④ 6절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며

⑤ 7절 허탄한 묵시를 본다.

⑥ 10절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고 한다 (기복신앙).

⑦ 18절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고

⑧ 19절 거짓말을 지어내며

⑨ 20절 영혼을 사냥한다(새를 사냥하듯).

겔 22:27은 "그 가운데 그 방백들은 식물을 삼키는 이리 같아서 불의의 이를 취하려고 피를 흘려 영혼을 멸하거늘"이라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양들의 육신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 영혼 또한 멸망케 하는 자들이 거짓 선지자들이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을 훈련시켜 파송하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세상 끝날이 가까워 올수록 거짓 세력들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더욱 많아진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게다가 갖가지 수단, 방법을 다 쓰고 심지어 기사와 이적까지 행하므로, 믿음이 없거나 말씀으로 무장되지 아니하면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마 24:11, 13은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한다. 끝까지 견디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고, 깨어 근신하면서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참과 거짓을 분별할 뿐 아니라, 어떤 거짓 세력도 넉넉히 이겨내는 성도의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