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총회 평양 서문외 예배당 1938년 9월 9일 - 16일 신사참배 결의 자료


1938년 신사참배를 결의한 제27회 총회

신사참배 가결,
1. 하나님 말씀의 위반,
2. 장로회 헌법과 규칙 위반,
3. 일본 국법인 종교자유헌장에 위반,
4. 보통회의법의 위반

1938년 9월(9-16일) 오후 8시에 평양서문외예배당에서 제27회 총회가 개회되었다.
총회가 개회되고 제1부 경건예배를 마치고 정회한 후 2일째 되는 날 새벽 6시에 임종순 목사가 요한복음 16:25-33절 말씀을 읽고 “그리스도를 힘입어 안심함을 얻음”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오전 9시 30분에 속회되어 새 총회장으로 선출된 홍택기 목사가 히브리서 10:5-7절, 요한복음 4:34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 후 10시 40분에 안건 심의에 들어갔다.

공천부장의 함태영 목사의 보고를 별지로 받고 곧바로 신사참배 안건 심의에 들어갔다.
제27회 총회가 경건예배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신사참배 문제를 거론하여 결의를 했다는 것은 이미 신사참배의 가결을 몇 달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고 제27회 총회는 이를 실행에 옮기는 총회가 되었다.

총회가 소집되는 날 서문외교회당 안팎에는 수백 명의 사복 경찰관들이 둘러싸고, 강대상 아래는 평남경찰부장 등 수십 명의 고위 경찰들이 칼을 찬 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총대들 사이에는 각기 그 지방에서 올라온 경관 2명이 끼어 앉아 있고 총대석 좌우와 후면에도 무술경관 100명이 상엄하게 둘러싼 채 회가 시작되었다. 먼저 평남도지사의 축사를 시작으로 경건회에 이어 공천부 보고는 별지로 받기로 한 후 신사참배 안건을 상정했다.

전국 27개 노회(만주 4노회 포함) 목사 회원 86명, 장로 총대 85명, 선교사 22명, 합계 193명이 참석한 가운데 동 안건을 가결에 붙이자 떨리는 목소리로 가(可)만 묻고 부(否)는 묻지 않은 채 신사참배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음을 선언했다. 이 때 자리 사이에 끼어 앉아 있던 경찰이 일제히 일어나 경계태세에 들어갔는데 선교사 20여명이 일어나 “불법이오”, “항의합니다”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결국 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말았다.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후 곧바로 “부총회장과(임원대표) 각노회장으로(회원대표) 본 총회를 대표하여 즉시 신사 참배를 실행하기로 가결”하였다.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난 시간이 12시였다. 오후 2시에 속회할 때까지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의 안내에 따라 평양 신사로 가서 절하고 돌아왔다.

이와 같은 신사참배를 하고 난 이후 속회된 회의에서 “신사참배 결의안을 조선 총독, 총감, 경무국장, 학무국장, 조선군사령관, 총회대신, 척무대신, 제 각하에게 전보를 발송하기로 가결”하게 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같은 날(10일) 오후 1시에 따로 모임을 갖고 신사참배 가결를 무효화 시키기 위하여 “신사참배 가결은 하나님 말씀의 위반이요, 장로회 헌법과 규칙을 위반함이요, 일본 국법인 종교자유헌장에 위반이요, 이번 처사는 보통회의법의 위반”이라는 항의서를 총회에 긴급동의안으로 제출했다.
 
총회 12일에는 권찬영 외 25명도 연서날인으로 “이번 총회의 결의는 하나님의 계율과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에 위배 될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발언을 허락하지 않고 강제로 회의를 진행한 것은 일본 헌법에 부여한 종교자유의 정신에도 어긋난다”라는 항의서를 총회에 제출했다. 총회는 경찰의 강압에 못이겨 이들 항의서를 토론에 붙일 기회마저 주지 않고 무조건 기각시켜 버렸다.

총회가 파회(罷會)되고 석 달 후, 신사참배 결의가 가져온 비극적인 일들이 총회 산하 전국교회에 하달되었다.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회장으로 신사참배를 가결시킨 것도 부족해서 각 교회에 신사참배 반대한 행위에 대해 처벌할 것에 대한 총회장 서한을 보내게 되었는데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총회의 결의를 경멸하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주님의 뜻에 위배되는 유감 천만의 행동이다. 이런 비상 시국하에서 만일에 아직도 옛 습관으로 해서 이를 보류하거나, 주저하는 자가 있다면, 저들은 결코 신민으로 인정될 수 없으며, 교인으로도 인정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교회의 입장으로 볼 때도 이러한 반대하는 무리나 요소는 마땅히 처벌되어야 한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그 후 한국교회로 하여금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하였다.
총회 결의가 있는 이후 일본 경찰은 즉시 친일적인 목회자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그 시대 양심의 소리가 있었다는 점은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소재열 목사 근간,『한국장로교신학 전통』중에서.





신사참배 강요(神社參拜強要)


일제 강점기에 조선 곳곳에 신사를 세운 뒤 조선인에게 참배하도록 강제한 정책을 가리킨다.
신사참배는 신토의 신사에 참배하는 종교 의식이다.
종교의 교리가 신사참배와 충돌하는 기독교 신자들은 신사참배 강제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여 이에 저항하다가 피해를 입기도 했다.


배경

신토는 조선에  1876년 개항 이래 문화 침략의 일환으로 도입되었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조선통족부의 보호 아래 동화 정책의 일환으로 보급되었다.
특히 1930년대에 일본 제국이 중국 침략을 계획하면서 점차 강제적인 정책으로 변화했다.
일본 천황 신격화와 강제 신사참배는 조선을 정신적으로 지배함으로써 효율적인 식민 통치와 전쟁체제의 구축을 노린 것이었다.

추진 과정

1930년대 경성소방서 직원 신사참배

일제는 각지에 신사를 세우고 학교와 가정에도 소형 신사를 설치하도록 하여 황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주로 기독교 계열의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이같은 정책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조선에는 개화기 이래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 학교들이 다수 있었고, 우상 숭배를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기독교의 교리는 신사 앞에서 절하는 신사참배 의식과 충돌을 낳았다.

기독교계는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가 1935년을 기점으로 조선총독부의 강경책에 신사참배 용인파와 반대파로 분열되면서 큰 갈등이 시작되었다.

1937년 중일 전쟁 무렵부터는 조선총독부가 일부 학교를 폐교시키면서까지 신사참배 강행 의지를 보여 문을 닫지 않은 학교들은 신사참배를 실시해야 했다.

조선총독부는 기독교계 학교에 보급된 신사참배를 교회로까지 확장시키기 위하여 압력을 행사했고,
1938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계기로 각 교파의 목회자들이 솔선해 신사참배에 나서면서 급격히 황민화 정책에 동조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반대파의 강경론자인 주기철, 최상림이 옥사하는 등 희생자도 발생했다.

한편 평양에 있던 기독교 계열의 숭실대학은 1912년 11월 25일 조선 통독부 학무국이 학교 인가를 했으나,
1925년 대조선 교육방침(소위, 문호통치)으로 숭실대학교를 전문학교로 격을 낮추었다.

1938년 3월 4일 일본 제국의 억압적인 통치와 강제적 신사참배에 반대한 숭실전문학교는 자진 폐교 결정을 내린다.

신사참배와 친일활동을 했던 당시의 다른 대학들에 비교해 볼 때 이는 진정으로 민족을 위한 대학이었다는 평가가 의식있는 국민들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신사참배에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 등 다른 종교 성직자와 신자들도 참여해야 했으나, 상대적으로 마찰은 적었다.

영향

신사참배는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강요한 것으로서, 신사는 일본의 민간종교인 신도(神道, Shintoism)의 사원으로 일본 왕실의 조상신이나 국가 공로자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일제는 합방 후 신사사원규칙을 발표, 서울에 조선신궁을 세우는 한편, 각 지방에 신사를 세웠다.
조선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은 1935년경부터인데, 우선 각급학교 학생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으나 기독교계 학교에서는 이를 거부하다가 평양 숭실학교·숭의학교 등이 폐교되었고 학생·선교사·목사들의 반대운동은 계속되었으며, 주기철 목사와 같이 적극적으로 반대하다가 투옥되어 순교한 일이 발생하였다.

중일전쟁(1937∼1945년)을 전후하여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재차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천주교는 로마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신사참배에 응했고,
감리교도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장로교는 한때 반대했으나, 총독부의 요구와 일부 친일목사들에 의해 제27회 총회에서 찬성결의를 함으로써 결국 굴복했다.

1945년 8월 15일 지국주의 야욕의 일제가 패전으로 종전되었지만 신사참배와 관련하여 아직까지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등 문제와 논란이 발생되고 있다.

신사참배에 기독교계 전체가 공식적으로 동원된 것은 그 후유증이 상당히 컸다.
일제 패망 후 며칠만에 신사를 불태워 버렸을 만큼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조선인의 반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특히 신사참배에 앞장선 이들이 법적 책임을 지는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문제가 잠복해 있었다.
후에 이로 인한 상처를 씻기 위해 공산주의를 사탄으로 삼는 지나친 반공주의와 보수주의적 흐름이 나타났을 정도로 한국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가 있다.

2006년 대한민국의 소장파 목회자들이 모여 결성한 한국 기도굑 목회자 협의회가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한 일과 독재정권 시절에 권력층과 야합해 정의를 뒤엎기도 한 죄악에 대해 마음을 찢으며 참회한다."
내용으로 반성문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교단 차원의 공식적인 인정이나 참회는 현재까지 하지 않고 있다.








제27회 총회서 17개 노회 수치스런 결의 ... 전국 노회서 공식 취소 결의 잇따라야



▲ 제27회 총회회의록 중 신사참배 결의 내용을 담은 성명서가 기록된 부분.

1938년 9월 9일부터 15일까지 평양서문밖교회에서 조선과 만주 27개 노회의 총대 193명(목사 86명, 장로 85명, 선교사 22명)이 모여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를 개최하였다. 개회 당시 총회장은 이문주 목사(경북노회·대구남산교회)였다.

첫날 저녁 8시에 개회하여 임원을 선출하니 총회장으로 평북노회 홍택기 목사가 선출됐다. 이튿날 오전 9시 30분 속회하여 박응률 목사로 기도하게 하고 회무를 시작한 후 1시간이 지나서 10시 50분경, 평양노회장 박영률 목사가 평양노회 평서노회 안주노회의 연합대표로 신사참배를 결의하자는 제안을 하여 즉시 가결하였다. 그리고 성명서를 발표한다.

“아등(我等)은 신사(神社)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한다. 그러므로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려행(勵行)하고 나아가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 있어서 총후(銃後) 황국 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한다.

소화13년(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총회는 신사참배 가결 후 후속조치로 부총회장과 각 노회장이 총회를 대표하여 즉시 신사를 참배할 것을 결정하여, 12시 정회 후 평양 신사에 참배하고 돌아와서 오후 2시부터 속회했다.

평북노회는 총회 개회 이전인 1938년 2월에 이미 신사참배를 가결하였고, 전북노회도 6월 8일 제32회 정기노회 중에 가결하였으며(‘전북노회록’ 참고), 경북노회는 8월 19일 제36회 2차 임시노회에서 신사참배하기로 가결하고 이에 찬성하는 회원들을 총대로 선정하였다(‘경북노회105년사’ 참고).
▲ 신사참배를 결의한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표들이 1938년 9월 10일 평양신사를 찾아가 참배하는 모습이 당시 조선일보에 게재됐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전남노회였다. 전남노회(당시 노회장 박연세 목사)는 전국 27개 노회 중에 유일하게 노회 보고서에 신사참배를 결의한 내용을 총회에 제출하여 총회록에 남겼다. 1938년 5월 6일부터 10일까지 목포양동교회에서 열린 전남노회의 제30회 정기노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노회록에 담았다.

“광주 4교회 도당회와 목포양동교회 당회의 헌의안을 받아 다음과 같이 보고하나이다.

1.신사참배는 국민정신통일에 순연한 국가의식임으로 본 노회로서는 혼연히 참배함이 당연한 국민의 의무인 동시에 교회지도상 선명한 태도인줄을 아오며.” (만장 일치 가결)

이와 관련해 제27회 총회회의록(121쪽)의 제9호 각 노회 상황보고에서 전남노회 해당 부분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특별사항은 금춘 정기노회에 오랫동안 문제로 되어오던 참배 문제에 대하여 당국의 지시대로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참배는 국민정신 통일을 위한 국가 의식임을 인식하고 본 노회로서도 참배함이 국민의 당연한 의무인 동시에 교회 지도상 선명한 태도일줄 알고 이를 결의 실행하는 동시에 관내 각교회에 통지하여 일반 교인으로 취할 것을 보였사오며.”

제27회 총회에 참석한 전체 27개 노회 중에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한 노회는 17개였다. 이때 일제는 총회에 참석할 총대들은 신사참배를 찬동하는 자들로 선정할 것을 지시하였다. 당시 총회에 참석하고 상황을 목격한 김양선 목사는 당시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일제는 각 지방 경찰서를 통하여 총대로 선정된 노회 대표들에게 다음 3개의 조건 중 택일할 것을 강요하였다. 3개의 조건은 ‘1.총회에 참석하면 신사참배가 죄가 아니라는 것을 동의할 것 2.신사참배 문제가 상정되며 침묵할 것 3.상기 양안을 실행할 의사가 없으면 총대를 사퇴하고 참석하지 말 것’ 등이었다. 그리고 이 세 조건을 모두 불응하는 사람들을 구속 투옥하였다.

뿐만 아니라 총회 석상에서 경찰서 지도부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총대석 옆에도 정복 경찰이 서 있었으며, 총대석에도 사복경찰이 포진해 있었다.

이처럼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일제의 엄청난 강압에 의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스스로 수치스러운 결의를 한 것이며, 또한 당일 12시에 총회 대표가 직접 평양 신사에서 참배를 실시함으로 범죄를 저지르는데 이르고 말았다.

해방 후 1946년 남부총회에서 신사참배 취소 결의를 하였으나, 이는 남한 노회들만의 것으로 인정됐다. 이후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남북한 노회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안건(권연호 목사 제안)으로 받아, 신사참배 결의가 불법인 것으로 취소하는 정식 결의를 한다. 당시 총회 기간 중 회개의 성찬과 3시간 특별기도회를 열고, 6월 한 주일 전국교회가 회개하는 의미로 연보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들의 가족을 위로하는 일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총회와는 달리 과거 신사참배를 결의한 노회가 정식으로 회개하고 취소한 기록은 오랫동안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2016년 7월 31일 산정현교회에서 평양노회에서 분립한 7개 노회(경평, 남평양, 동평양, 서평양, 평양, 평양제일, 북평양)들이 과거 신사참배에 앞장선 노회 결의를 무효로 선언하는 취소결의를 했다.

또한 이 자리에서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복직도 결의한 후, 각 노회 대표들과 노회원들 그리고 총회역사위원회가 함께 모여 ‘주기철 목사 복권 감사예배’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과거 신사참배에 앞장선 노회와 선배 노회원들의 불의와 허물을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아가 신사 참배 거부운동에 앞장선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결의도 하였다,
▲ 장영학 목사(한국교회역사자료박물관 관장)

올해는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지 80주년을 맞는 해이다. 전국의 노회들은 총회의 치욕적인 신사참배 결의에 대해 공동 책임을 지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취소 결의를 하고, 회개하며 참회하는 성찬을 받아야 할 것이다. 비록 총회 차원에서 취소 결의를 했지만, 해방 이후 노회들이 정식으로 취소 결의를 한 흔적을 찾을 수 없으니 이에 대해 부담감을 갖고 노회들마다 정식 취소 결의를 해야 할 것이다, 모두가 역사적 책임을 지는 마음으로 참회를 해야 할 것이다.
▲ 평양 금수산에 세워진 신사.

이름도 예쁜 ‘금수산’ 자락에 ‘광풍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서있던 자리였다. 모란대와 을밀대 그리고 대동강 등 평양의 온갖 장관을 한 눈에 볼 수 있던 바로 그 자리. 하지만 이미 빼앗긴 조국의 산하였고, 거기에는 치욕의 상징인 일본 신사(神社)가 서있었다.

일행은 왼손, 오른손, 입을 차례로 씻고 옷깃을 여민 후 본격적인 신사참배 의식에 들어갔다. 정해진 순서대로 절을 하고, 손뼉을 치는 행위가 반복됐다. 바로 몇 시간 전 예배당에서 찬송을 부르던 그 입술이었고, 기도하기 위해 모았던 그 손이었다.

신사는 일본의 국교 신도(神道)의 사당이다. 당초 신도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선조나 자연을 숭배하던 토착신앙이었다. 그러나 1868년 일본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천황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신도를 적극 활용하면서 국가종교로 부각되었다.

대륙침탈의 야욕을 불태우던 일제는 자신들이 진출한 지역에는 반드시 신사를 세워 자국민의 단합과 상대민족의 사상통일을 꾀했고, 우리나라에도 1876년 개항 이후 전국에 수많은 신사를 설치한다. 처음에는 일본 거류민들 중심의 민간차원에서 건립과 운영이 이루어졌지만, 1910년 한일병탄 뒤부터는 본격적으로 국가 차원의 육성이 시작됐다.
▲ 서울 남산에 건립된 조선신궁.

1925년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이 건립된 것을 계기로 일제는 본격적으로 신사참배를 우리 민족에 강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립학교, 그 다음에는 일반 사립학교, 나중에는 기독교학교와 교회들까지 주요 공략대상이 됐다.

처음에는 ‘우상숭배’라며 강력히 맞섰던 한국기독교의 대오는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부르짖으며 강력한 식민정책을 펼친 일제의 탄압 앞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로마 교황청의 훈령을 받고 투항한 가톨릭에 이어, 개신교에서는 감리교회가 앞장서 1936년에 백기를 들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주도했던 장로교회마저 1938년 9월 10일 평양서문밖교회에서 개회한 제27회 총회를 기점으로 변절하며, 한국교회는 결국 패배의 쓴잔을 받아든다. 일본 경찰들이 대놓고 자행하는 감시와 통제 속에서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한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대표들은 회의까지 멈추고, 평양신사로 향했다.

평양신사는 일본인들이 ‘천조대신(天照大神)’이라 부르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를 제신으로 섬기는 사당이었다.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린 이들은 ‘기독교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다’ ‘애국적 국가의식이다’고 스스로 강변했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는 우상숭배이자 배교행위였다.

한국교회는 그렇게 쓰러졌다. 한 번 내준 신앙의 정절은 속절없이 내팽개쳐졌다. 이후 장로교 총회 기간에는 신사참배가 당연한 절차처럼 실시됐고, 전국 교회로부터 돈과 종을 거두어 일본군대의 무기 구입자금으로 헌납하기도 했다. 1942년에는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이 붙은 전투기가 등장했다.

이름 있는 목사들은 겨레 청년들을 점령국의 용병으로 내몰고, 일제의 대동아전쟁에 협력하도록 교회를 독려하는 시국강연회 연사로 등장했다. 한 때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었던 ‘대부흥’의 성지 평양의 교회들은 신사참배 결의 이후 쇠락의 길을 걷다가 결국 해방 이후에도 회복되지 못했다. 무서운 암흑기가 도래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2018년 9월 10일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며

한국 장로교회 신사참배 결의와 1940년대의 부일과 배교

 

나삼진 목사 (Joyful Educational Ministries 원장)

2018년 9월 10일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를 “솔선 여행하고, 비상시국하에서의 총후 황국 신민으로서의 적성을 다하기로” 결의하고 성명서를 낸 지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는 한국 장로교회 50주년 희년잔치를 마친 후 불과 4년 만의 일이었는데, 오늘날까지 134년의 한국 장로교회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이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여 관심은 갖지만 매우 피상적으로 알고 있으며, 그 이후 1945년 해방 때까지 교회가 어떤 범과를 저질렀는가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여 회개 집회를 갖는다는 보도가 있지만,1)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학문적인 평가와 반성도 빈약한 실정이다. 더구나 올해는 한국 장로교회 중요 교단 총회가 신사참배 결의 80주년 기념일에 개회하는 데도, 이에 대한 의미있는 행사가 준비되지 않고 있는 것은 한국 교회의 빈곤한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한국 장로교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여, 그 이후 1940년대 한국장로교회의 부일과 배교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한다. 이 사건은 우리 시대에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그 역사적인 경계를 삼고자 한다. 이 논의를 통해 한국 장로교회가 새롭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1.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1) 일제강점기 기독교 탄압의 배경과 신사참배 강요

일본 제국주의(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정치적 억압정책, 경제적 수탈정책, 문화적 말살정책 등 세 가지 정책으로 나타났다.2) 정치적 억압정책은 한국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한국인의 정치적 참여를 봉쇄하는 것이었고, 경제적 수탈정책은 농업 방면과 상공업 방면에서의 수탈이 중심이 되었으며, 문화적 수탈정책은 교육정책과 언어정책, 역사왜곡 등이 중심이 되었다. 거기다가 종교적 탄압정책도 함께 나타났는데, 일제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극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천황숭배와 신사신앙을 축으로 하는 그들의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기독교와는 조화, 공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제에게는 당시 기독교가 민족운동과 깊은 연대를 가진 배일세력으로 인식되었으며, 일본과 경쟁, 혹은 적대관계에 있는 영국과 미국 등 서구 여러 나라들과 선교사를 매개로 연결되어 통제나 지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3) 일제가 기독교를 유독 탄압했던 것은 이렇게 일본의 제국주의적 본성과 갚은 관련을 갖는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은 그 야욕을 중국으로 뻗히게 되었는데, 1932년에 허수아비 정권으로 만주국을 수립했다. 일제의 이러한 야욕은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노골화되어, 1937년 7월 선전포고 없는 중일전쟁을 도발한 후에는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며 중국대륙을 병탄하려 했다. 이는 전쟁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었으므로, 그들이 즐겨 사용했던 ‘총후(銃後, 후방을 의미)의 지원과 협력을 위해 국민정신의 통일이 중요했다. 이에 조선과 일본이 하나임을 강조하는 내선일체 정신 계몽에 적극적이었다.

1936년 8월 관동군 사령관 출신의 미나미가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조선민족을 말살하는 대대적인 억압정책을 폈다. 일제는 1937년에 들면서 9월 6일 애국일 제정, 10월 2일 ‘황국신민의 서사’의 제정과 일상적 제창 강요, 1938년 2월 6일 지원병제 실시, 3월 4일 민족성 말살을 위한 조선교육령 개정, 1939년 1월 10일 창씨개명 강요, 1942년 5월 징병제 실시, 1942년 초등교육 배가계획 등의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4)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시작한 후 그들의 종교 신도(神道)를 한국에 이식하기 시작했다. 1925년 조선신궁을 건립한 이래 도처에 신사를 건립하면서 1936년에는 전국에 54개의 신사(神社)와 293개의 신사(神祠)를 보유하게 되었다. 일제는 신사참배로 국민들의 정신적 통일을 이루려 하였다.

신사참배의 강요의 첫 시도는 1932년 춘기 황령제의 제례에 각급학교의 참여를 요구한 데서 시작되었다.5) 이러한 요구가 1935년부터 기독교 학교 신사참배 강요로 나타났고, 1936년부터는 교회와 교회기관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1937년 7월에 1면 1신사 정책이 추진되면서, 신사가 급격히 늘어 1945년에는 신사(神社) 79개와 신사(神祠) 1,062개가 되었다.6) 최근 공개된 1942년 5월 경 전남 담양면장의 공문에 의하면, 일제는 신사운영비까지 주민이 부담하게 했다.7)

2)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신사참배는 기독교 여러 교파에 요구되어 장로교에서는 1938년 2월 9일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후 8월에는 평양노회, 9월에는 경안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고, 전국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일제의 강요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8) 이 시기에 각 종교단체나 다른 교파들 가운데 천주교는 교황청의 정책에 따라 일찍이 1936년 5월에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였고, 안식교는 1935년에, 감리교는 1938년 9월 3일 총리사 양주삼의 명의로 신사참배 여행 성명서를 발표했다. 마지막으로는 장로교 총회가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 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추히 국민정신총동원 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期)함

소화 13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제27회 총회에서는 이 결의 후 평양기독교친목회 심익현 목사가 신사참배 즉시 실행을 특청하자, 총회가 이를 받아들여 김길창 부총회장의 인솔로 전국노회장 23명이 총회를 대표하여 평양 신사에 참배하였다.9) 이어 총회에서 김길창이 제출한 건의안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10)

1) 당국과 조선교회와 선교사단과의 삼각적 관계의 원만을 도모할 일

2) 총후보국(銃後報國)에 물자헌납운동은 물론 우선 정신 동원의 일부로서 내지교회와의 연락을 위한 친선사절을 보낼 일

3) 국방헌금은 교회가 일정한 시일에 애국예배를 보는 동시에 국방헌금대로서 조직할 일

4) 신사참배는 사대절(四大節)에 일반시민과 같이 참배하도록 당국과 교섭할 일.

12월 12일에는 장로교 홍택기, 김길창, 감리교의 양주삼, 김종우, 성결교의 이명직 등 5인이 한국교회 대표단으로 일본의 이세신궁과 가시하라신궁 참배를 떠났다.11)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겠지만, 총회에서의 부속 결의와 그 이후 지도자들의 행적으로 볼 때 신사참배는 일제의 강요와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3) 기독교 학교의 폐쇄와 신사참배 반대운동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저항의 반작용도 있었는데,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기 위해 1938년 졸업생들에게 우편으로 졸업장을 보내고 스스로 휴교했다. 주한 각 선교부들은 신사참배에 응하지 않기 위해 그동안 설립, 운영해오던 기독교 학교를 폐교했다. 이들 선교부들 가운데는 남장로교회 선교부가 강력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사참배 강요가 본격화 되면서 선교본부 풀톤 총무가 내한하여 신사참배 반대의 의지를 분명히 함에 따라 그해 9월 6일 전라남북도의 도지사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전라지역의 네 학교를 강제로 폐교하였다. 순천 매산학교, 전주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등의 세 학교도 스스로 폐교 신청을 해 폐교되었다.12) 이같은 반응은 부산경남지역을 관할하던 호주장로교회도 1938년 6월에 학교들을 폐쇄하였다.

신사참배 반대에 따른 일제의 종교적 탄압이 가속화되면서 다른 교파들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1942년 2월 20일 미국감리교회 해외선교부에서 선교사들은 모든 선교지역에서 철수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고,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철수하였다.13)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후 전국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평안남도 주기철, 평안북도 이기선, 경상남도 한상동, 만주 한부선 등이었다.14) 집단적, 조직적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한 이들은 1940년 9월 20일 새벽 4시 일제검거로 체포되었다. 한국 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로 200여 교회가 폐문되고, 2천여 명이 투옥되었으며 이중 50여 명이 순교하였다.15) 8월 17일 밤 이기선, 주남선, 한상동 등 20명이 평양감옥에서, 손양원이 청주감옥에서, 또다른 소수가 부산감옥에서 출옥했다.16)

 

2. 신사참배 결의 이후의 한국 장로교회의 훼절과 배교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가의식으로 결의한 이후 교회는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9월에 있은 제28회 총회에서는 일제에 협력하기 위한 기구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조직했다. 총회 파회 후 산회되는 총회와는 달리 이 기구는 상시체제를 유지하였는데, 이사장은 총회장이 맡고, 각 노회장은 이사로, 총대들은 평의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전국에 26개 노회 지맹이 결성되고, 731개 애국반이 조직되었다. 1937년 7월부터 1940년 8월까지 장로회 총회연맹에 보고된 장로교의 친일행위는 전승축하회 604회, 무운장구기도회 8,953회 국방헌금 15,803.46원, 휼병금 1,726.46원, 유기 308점, 시국강연회 1355회, 위문 181회, 위문대 1,580개였다.17)

1940년대의 한국 장로교회 총회는 개회 이후 총대 일동이 신사에 참배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18) 제30회 총회에서는 시난극복의 결의문을 작성, 총회장 명의로 발표하고, 이를 지나주둔황군사령관에게 보내기로 결의하였다.19)

동양평화를 확보하고 팔기일우의 대이상을 구현한다는 황국부동의 국시를 지금은 적성국 가의 제국에 대한 도전적 태도가 일일 노골화되어 아국의 국시수행에 방해를 위해 광분 하는 현 시국의 긴박하고 비상의 때인 가을에 기독교도로서 초연하지 않고 장로교파 36 만 신도는 불퇴전의 결의를 가지고 국책에 순응하여 결전태도를 실천확립하고 시난극복 의 정신을 갖도록 한다.

소화 16년 11월 22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1940년대의 한국 장로교회가 얼마나 부일과 배교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는 제31회 총회 회의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20)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개회되었던 제31회 총회는 개회예배 전에 먼저 필승 기원선언문을 채택하고,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회의록은 “일동은 크게 감격해서 박수를 하였다”고 기록하였다.21)

천황의 덕분으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고, 그로 인해 세계 신질서를 완성한 것 이 우리 제국의 국시입니다. 우리의 황군 장병은 하늘에서 바다에서 육지에서 큰 전과를 거둬가 고 있는 것에 대하여 전장의 뒤에 있는 국민은 감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가을에 우리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천황의 은혜에 감격해 눈물을 흘리고, 협심 전력으로 성스러운 업적을 완수하도록 매진할 것을 결심합니다.

왼쪽과 같이 선언합니다.

소화 17년 10월 16일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31회 총회에서는 이 선언문 채택뿐만 아니라 개회 이튿날 1942년 10월 17일 오전 9시 30분 총대원들이 일제히 평양 신사에 가서 참배하였으며, 이어 평안남도 고등감찰과장의 시국강연, 국민의례, 특별강연회, 전승기도예배가 있었다. 주일에는 성만찬 예식이 있은 후 창무 조선군 보도부장의 강연, 저녁에는 오후 7시에 전승기도예배를 가졌다. 총회 주최로 대동아전쟁 목적 관철과 기독교도의 실무를 재삼 격려하기 위하여 호남선, 경부선, 함경선, 황해선, 경의선 등 다섯 조로 나누어 전조선 중요도시에서 시국순회 강연대를 파송하기도 했다.22) 총회의 경건회에서도 설교를 맡은 목사가 로마서 13장 1-3절을 중심으로 ‘기독교인의 국민적 각오’라는 친일적 설교를 하기도 했다.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이후 불과 4년 안에 총회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는 더 이상 장로교회의 총회일 수가 없었다.23)

1940년대에는 황민화 사상이 기독교 안에 까지 깊숙이 들어왔는데, 전국 교회에 가미다나(信朋)을 설치하고, 예배 전에 천조대신의 신패에 경배하고, 동쪽을 행해 일본 왕에게 절하고, 황국신민서사 낭독과 국기배례를 한 후 예배를 드렸다. 더구나 서울의 한강이나 부산의 송도 앞바다에서 천조대신 이름으로 신도침례(미소기 바라이)를 받도록 했다. 또 구약성경 사용을 폐지하고, 찬송가도 부분적으로 삭제되었다.24) 한부선은 그 시대에 모든 교회가 총독부의 선전도구가 되기 위해 하나의 교회로 묶여 총독부의 통제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증언한다. 성경도 구약성경에서 종말론과 연관이 있는 부분들은 사용이 금지되었고, 복음서를 중심으로 설교하게 했으며, 기독교인들이 주일에도 ‘전쟁을 위한 노력 동원’이 되었다고 전한다.25) 찬송도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금주가 등 21곡이 삭제되었다.26) 이같은 일은 감리교에서 더 협조적이었는데 1939년 1월 히라누마 내각에 의해 종교단체법이 통과된 후에 일본 기독교 조선 감리교단 정춘수 통리가 전국교회에 시도한 공문에서 확인된다. 공문에는 구약성서와 신약의 묵시록을 사용하지 않고, 사복음서에 기인하여 교의를 선포하기로 교회에 통달이 있었다.27)

3. 1940년대 한국 장로교회의 부일, 배교 행적들

제31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1942년 10월 16일 서문밖교회당에서 26개 노회 총대 목사 69명, 장로 66명, 모두 135명이 참석한 가운데 회집했다. 이 총회에 각 노회에서 상황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총회 회의록 79면부터 90면까지에 수록되어 있다. 각 노회는 감사의 건, 교회상황, 특별상황, 교육상황, 장래 계획, 교세 통계 등을 보고하는데, 노회는 특별상황과 장래 계획이라는 항에서 부일, 배교 행적들을 상세하게 남기고 있다. 이를 내용별로 분류,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애국기 헌납 헌금

1841년 8월 ‘조선장로교도 애국기 헌납기성회’가 조직되고, 모금을 시작하였다. 이어 이 일은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연맹’을 통해 이루어졌다. 다수의 노회에서는 애국기 헌납을 위해 헌금하였는데, 충청노회는 4,051.60원을, 전북노회는 4,000여 원을, 군산노회는 4,500원을, 용천노회 25,000원, 평서노회 8,000여 원을 헌금했고, 삼산노회와 제주노회는 금액을 밝히지는 않지만 애국기 헌금을 위해 후방국민으로서 정성을 다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모든 헌금은 기성회를 통해 모금되어 군에 전달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계속되자 일제는 무기 제작을 위한 물자 확보를 위해 교회의 종을 징발했다. 충청노회는 82개 교회 가운데 80개 교회의 종을 헌납하였고, 평서노회는 68교회에서 국방헌금 외에 조종 77개와 놋그릇 152개를 헌납하였으며, 전북노회는 종과 함께 금속류 회수운동을 전개하여 놋그릇 수 천점과 교회 조종을 헌납했다고 보고하고 있다.28) 이렇게 수납된 종은 1941년 10월부터 1942년 10월 15일까지 전국적으로 1,540개, 총액 약 11만 9,832원에 달했으며, 놋그릇 등 잡종기 헌납은 2,165점이었다.29)

이렇게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1942년 2월 10일 육해군에 애국기 1대 또는 기관총 7정의 대금으로 150,317.50원을 헌납하였고, 그 후 들어온 자금으로 같은 해 6월 조선군 사령부를 방문하여 육군환자용 자동차 3대 기금으로 23,221.28원을 납부했다.30) 1942년 9월 20일 해군성으로 헌납한 애국기 명명식이 경성운동장에서 개최되었는데, 총회 대표가 함께해 감사장과 수납서를 받았으며, 해군보국호 선상전투가 한 대와 육군 기관총 두 정에 대한 명명은 ‘조선장로호’로 명하고, 당일 헌납 보국호 사진을 해군성으로부터 받았다는 총회 연맹 보고를 하고 있다.31)

총회 연맹은 1944년 반도인에 대한 징병령 계획에 따라 “이 감격을 안고 동 준비운동을 함에 있어 실제적 운동으로서 전 조선 기독교 가정 부인계몽운동을 하기로”하고, “전 조선 기독교 지도자는 일본적 기독교 정신 아래 교회원을 지도하도록 함에 있어서 본 총회 연맹은 그 지도자에 대한 황도정신에 함량과 함께 기독교 신학사상의 명랑화를 기해서 철저하게 연성운동을 하도록 함”이라 보고한다.32) 이 시기 한국 장로교회의 부일협력과 반민족적인 행위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2) 시국강연회와 전승축하대회

이 시기에 여러 노회에서 시국강연회도 실시하였다. 충청노회는 관내 82개 교회 가운데 80교회에서 시국강연회를 실시하고, 조종을 헌납하고, 부여신궁 제조에 근로봉사대 3인을 파견했다. 이와 함께 충청노회가 교파합동 청원서를 총회에 제출하였다.33) 삼산노회는 징병제 실시 경연과 애국예배를 실하였고, 제주노회도 1938년 2월 지원징병제 실시에 따라 축하 강연을 도경찰서 고등계의 후원 아래 제주도내 20여 개 교회에서 개최하였다.

일본군이 전장에서 승리하면서 노회에서는 전승축하대회도 개최하였다. 이 일에 가장 앞장섰던 노회는 서울을 교구로 하는 경성노회였는데, 결전 체제강화 신도대회를 개최하고, 전승기원대회와 남방 출정 황군장병을 위한 일장기 500본을 발송했으며, 싱가포르 함락 축하 신도대회 및 징병제 실시 감사대회를 개최하였다.34) 노회 관내 여러 교회는 국어(일본어) 강습회 개최, 황군장병에 대한 위문품, 위문금을 종전대로 발송하였다는 보고로 보아 이전부터 계속된 사업임을 알 수 있다.

3) 교회 통폐합

일제는 교회의 통폐합에도 적극적이었다. 일제는 기독교 세력의 약화를 기하기 위해 지역교회의 통폐합을 강요하여 1941년 3,624교회에서 1942년에는 2,543교회로 줄어들었다.35) 한 해 동안 모두 1,081교회가 폐쇄되었는데, 이는 당시 총 장로교교회 수의 30%가 되는 것이다. 그중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 경남노회로, 노회 상황보고에서 “통제에 의해 교회의 통폐합을 실행한 결과, 335교회 중에 108교회가 감소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36) 이는 총회산하 교회 감소분의 꼭 10%를 차지하는 수로, 전국 26노회인 것을 고려하면 가장 많은 수의 교회가 폐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일제의 박해에 의해 기독교 신앙과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지만, 노회의 보고를 볼 때 노회가 일제의 뜻을 따라 적극적으로 교회 통폐합에 협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일본적 기독교 추진

일제는 기독교를 일본적 기독교로 바꾸기에 혈안이 되었고, 교회들이 이에 협력했다. 충청노회는 일본적 기독교로 진일보 전환했다고 보고하고, 함북노회는 교역자 하기 수련회를 개최하여 일본정신사 강의를 한 주 동안 청강을 보고하고 있다. 황해노회는 신도의 신앙에 충실하기 위해 힘을 쏟았음을 보고하고, 평양노회는 비상시국에 임하여 각 시찰부에서 활동하는 선교 대신에 목사를 파견하여 순회하도록 하고 있다. 삼산노회에서는 일요학교에서 일본어로 가르치고, 일요학교 지도수련회를 개최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또한 여러 노회가 일본적 기독교화에 앞장서겠다는 장래 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경성노회는 신도로서 충성보국의 전신을 철저하게 하도록 하며, 전북노회는 일본적 기독교 확립에 매진하며, 전남노회도 황국길에 따라서 일본 기독교 완성에 매진할 계획을 보고하고 있다. 제주노회도 국어 보급을 장려하고, 일본적 기독교에 매진하며, 경남노회도 교회의 지도자 및 신도 등을 노회 또는 지방적으로 각각 훈련시켜 일본적 기독교 건설에 매진하며, 경동노회도 신도들에게 철저히 시국인식을 하게 하여 전도 사업 및 종교교육에 임하여 일본적 기독교 건설에 매진토록 하는 것을 장래 계획으로 보고하고 있다. 경북노회와 함북노회 등도 유사한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

5) 교파의 통폐합

한국 장로교회의 이같은 부일협력과 배교행위가 따르는 사이, 일제는 기독교를 효율적으로 통제, 관리하기 위해 교파통합을 추진, 각 교파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폐합하려 했다. 교파통합을 위한 일제의 뜻을 파악하였던 충청노회와 평양노회는 교파 통합청원서를 총회에 제출하였다. 이 청원은 정치부로 보내졌다가, 정치부 보고를 받아 가결하고 중앙상치위원회에 위임되었다.37)

교파의 통폐합은 제31회 총회 이전에 이미 추진되고 있었는데, 1942년 1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일본기독교 조선교구, 구세군 등 다섯 교파 대표가 모여 조선기독교합동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통합을 추진하다가 감리교의 이탈로 실패로 돌아갔다. 교파 통합이 결렬되자, 장로교 총회는 상치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1943년 5월 총회를 해산하고,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 되었다.38) 이어 일제는 전세가 이미 기울었음에도 불구하고 1945년 8월 1일에 다시 모든 교파들을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합되었다.39) 초대 통리는 장로교 김관식, 부통리에는 감리교 정춘수가 맡았다. 이것이 불과 해방 두 주 전의 일이었다.

장대현교회 목사로 평양노회 총대로서 교파 통합안을 헌의하고,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설립에 앞장서 통리가 되었던 김관식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재빠르게 변신해 해방과 함께 조선교단의 기구적인 재건에 앞장섰다. 그는 1945년 9월 8일 새문안교회당에서 남부대회를 소집해 대회장을 맡아 교단을 이끌기를 원했으나 감리교와 장로교 대표들이 각각 교파로 환원을 원하면서 단일교단 유지가 무산되었다. 기독교계 친일인사들이 이렇게 해방 후 자숙없이 한국교회 대표로 등장하였고, 그에 비해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쇄신론자들은 분리주의자로 매도되고, 결국 1951년 장로교 총회에서 축출되고 말았다.40)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국가의 체계를 갖추기에 급급한 나머지 친일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아 민족정기가 바로 서지 못한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불행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정권에 협력하였던 독일 교회가 1945년 8월에 프랑크푸르트에서, 10월에 슈투트가르트에서 모여 지난날의 잘못을 참회하고 ‘슈투트가르트 죄책 고백’을 발표하고 하고, 책임있는 사람들은 독일교회의 재건과정에서 물러난 것과 대비되고 있다.41)

맺는 말

지금까지 일제의 기독교 탄압과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 그 후 1940년대 한국 장로교회가 어떻게 훼절되고 배교의 길을 걸었는가를 논의하였다. 이제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하며 이 소론을 마치려 한다.

첫째,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 결의 80년을 맞아 부끄러운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회개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당시의 우상은 신사에 절하는 것이었는데, 이 시대에 어떤 우상들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에 침투하고 있는가를 인식하고, 이를 청산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심각한 우상은 돈과 명예와 권력일 것이다.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의 재정비리는 교회가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에 어느 정도 성취를 경험한 이들이 감투에 대한 욕심이 연합기관을 만들어 명예를 추구하고, 비상식적인 기관 운영으로 자주 물의를 일으킨다. 또 교회의 역량을 넘어선 거대한 예배당을 건축하고, 이를 유지하지 못해 이단교회에 넘기는 일까지 발생되는 것은 교계 지도자들이 명예의 우상을 섬기기 때문이다. 또 오늘의 한국 교회에 교권주의가 판을 치고, 교회 지도자들이 국가권력과 결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것은 권력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국 교회에서 더 이상 교권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

둘째, 한국 장로교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이후 발생한 교회의 훼절과 배교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가 이루어지고 그 방파제가 무너진 후 1940년대에 모든 것이 일시에 무너지는 도미노 현상을 경험했다. 1940년대에 목사들이 신도 침례까지 받았고, 한국 장로교회 총회는 애국기 헌납 헌금, 시국강연회와 전승축하대회, 교회 통폐합, 일본적 기독교화 추진, 교파 통폐합 등에 앞장서 부일과 반민족적 배교의 길을 걸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한 매체의 보도에 의하면 한국 교회 총회장이나 중요 기관장들의 상당수가 교회를 자녀에게 세습했다. 한국 장로교회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예장통합의 총회 재판국이 총회 헌법의 규정을 벗어나 명성교회의 세습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함에 따라 이 문제가 제103회 총회의 핫이슈가 되어 있다. 한국 교회 희년 잔치를 벌인 후 4년 만에 이루어진 신사참배 결의와 같이 이 사건은 한국장로교회 총회 설립 100년 잔치를 벌인 후 불과 6년 만에 일어났다. 한국 장로교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가 한국 교회의 일제강점기의 부일과 배교의 본격적인 출발이 된 것과 같이 명성교회 세습의 용인은 한국 장로교회가 향후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을 것인가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이 문제의 통합총회의 최종 결정이 한국 교회의 미래의 결정적인 방향타가 될 것이 분명하다. 한국 교회는 지금 흥망의 기로에 서 있다.

셋째, 한국 교회와 교계는 법과 상식으로 목회와 행정이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최근 비리 혐의로 총신대 총장과 이사들이 해임되어 임시이사가 파송되었고, 피어선성경학교의 백년 역사를 이은 평택대 총장은 20년 동안 여직원 성추행이라는 파렴치한 사건으로 법정 구속되었다. 대형교회들에서 발생한 목회자 비리와 윤리적인 문제들이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있으며, 많은 기독교계 대학들이 비리로 몸살을 앓고, 이러한 여러 문제들이 자주 방송에 노출되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있다. 한국 교회는 교회 행정과 재정운영에서 사회에서 통용되는 기준도 따르지 못해 사법부의 판단과 정죄를 받고 있다. 한국 교회는 공적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넷째, 한국 교회와 연합기관은 지난 수년 동안 정치적인 행사에 참여하면서 극단적인 수구세력으로 지목되고, 지성사회의 혐오를 받고 있다.

지도자들이 역사의식을 갖지 못하고 교회를 정치집회에 동원하면서 교회의 영광이 손상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한국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지만, 이 땅에 속한 기관이 아니다.

한국 교회가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아 이 중대한 역사적 범죄를 깨닫고, 이를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사로잡고 있는 우리 시대의 돈과 명예와 권력의 우상을 척결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한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교회에 주어진 사명에 충실해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하여 한국 교회 200년의 새로운 역사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 한국 선교 원년 : 1885년 4월 5일 / 2021년은 선교 136주년



신사참배는 ‘차금법’ 문제 바로 볼 수 있게 하는 거울



한국교회가 지은 신사참배의 죄에 대해 되돌아보면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된다.

첫째, 만일 모든 한국교회가 힘을 합하여 저항했더라면 그것은 막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저항을 포기한 사람들에 의해 지도자들의 의견들이 분열되었고, 결국 신사참배의 강요에 굴복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것은 모든 교회사가가 아쉬워하는 대목이다.

둘째, 마귀는 그 죄악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일제는 이 신사참배가 종교 행위가 아니라 국민의례라는 명분을 들고 나왔고, 많은 지도자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 가운데는 실제로 그렇게 믿은 사람들도 있었고, 강요 때문에 굴복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렇게 믿고 싶어 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거짓이었음이 드러났다.

셋째, 마귀는 처음에는 조그만 것부터 시작하며, 일단 그것을 받아들이면 점점 더 심한 요구로 나아간다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는 국민의례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자, 일제는 더 심한 것들을 강요했다.

천조대신이나 천황이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높은 신이라고 주장해도 받아들여야 했다. 교회당 안에 간이신사를 설치하고 그것에 절하라고 해도, 예배시간에 신도예배를 함께 드리라고 해도, 목회자들에게 신도침례를 받으라고 해도,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신사참배는 종교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수용했기 때문이다.

넷째, 마귀는 처음에는 양처럼 접근해서는 폭군으로 돌변한다

신사참배가 처음에는 국민의례라는 부드러운 얼굴로 나타났지만, 일단 결의가 이루어지자 곧바로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무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다섯째, 법적 결의가 중요하다

날치기 결의였지만, 총회에서 일단 결의가 이뤄지자 그것은 모든 배도의 근거가 되었고,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빌미가 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총회의 결의나 법은 그것이 나쁜 것이라면 어떤 형태든 방관해서도 안 되고 함부로 통과되게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교훈은 오늘날 문제가 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평등법과 같은 악법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차별금지법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신사참배 문제와 유사성이 있다.

첫째, 신사참배가 그 속의 죄악을 감추기 위해 국민의례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 것처럼, 차별금지법도 그 속에 들어있는 죄악을 숨기기 위해 인권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나고 있다.

소위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명분은 참으로 그럴듯해 보이고 선한 동기가 들어있는 것 같지만,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엄청난 죄일 뿐이다. 우리는 그 가면에 속아서는 안 된다.

둘째, 신사참배가 조그만 것에서 시작해서 더 큰 배도로 이어진 것처럼, 동성애도 하나를 양보하면 더 큰 것을 양보하게 되어 있다.

동성애도 처음에는 동성 간의 애정을 허용하는 것에서 시작하다가 지금은 동성 간 결합까지도 허용하고 있다. 또 처음에는 육체적 성전환만을 트랜스젠더로 인정하다가 나중에는 육체적 성전환 없이 본인의 성정체성 주장만으로도 트랜스젠더로 인정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확대해 나간다면 나중에는 일부다처제도 소위 성소수자의 인권이라는 명분으로 보호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셋째, 신사참배가 국민의례라는 부드러운 얼굴로 시작했다가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폭군이 됐다.

차별금지법 역시 성소수자의 인권 보호라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무서운 얼굴로 돌변하게 된다. 이미 이 법은 동성애 반대자에 대한 탄압과 처벌 조항을 담고 있다. 신사참배의 가장 큰 피해자가 기독교였듯 차별금지법의 가장 큰 피해자도 기독교가 될 것이다.

넷째, 신사참배가 총회에서 결의되자 다른 모든 배도의 근거가 된 것처럼, 동성애 역시 법으로 합법화되면 교육이나 문화적인 면에서 다른 모든 죄악을 허용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이 법에 따라 학교에서는 동성애 옹호 조장교육이 진행될 것이다. 언론과 문화 예술에서는 동성애를 미화하게 될 것이고, 삶의 현장에선 동성애가 만연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법이 제정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다섯째,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교회지도자들이 일치단결하여 반대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사참배가 한국교회에 강요된 것처럼 차별금지법 문제에 대해서도 교회가 일치단결되지 않는다면 이 법이 제정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교회는 하나 된 목소리로 차별금지법에 반대하고 행동으로 나서야 한다. 이런 면에서 신사참배 문제는 차별금지법 문제를 바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좋은 ‘거울’이다. 팬데믹 시대 신앙을 위협하는 갖가지 시도에 대응하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라도 교회사를 더욱 깊이 연구해 나아갈 길을 찾자.





# 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ἀγάπη 참조 / 다음 주제 - 죄란 무엇인가? 2023년 주일 설교 자료 제공 사이트 참조


2023년 주일 설교 자료 제공(01. 01.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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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스교회 유투브 온라인 방송 / YouTube Patris Church(불낙지교회)

https://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Patris+Church

: 불신자(不信者)를 주님 앞으로
: 낙심한 자(落心者)를 주님 앞으로
: 지체하는 자(遲滯者)를 주님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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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매주일 설교를 위한 기초 자료를 제공합니다.
자료를 사용하여 자신의 신앙과 은혜를 더하여 설교 원고를 작성하여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2022년 12월 25일 성탄주일 설교

동영상 자료 / https://www.youtube.com/watch?v=_218RxcdD0g&t=1155s

2022년 성탄주일을 맞이하여 "오늘의 미국의 영적 수준이 어느 단계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첫째, 상(上),  둘째, 중(中),  셋째, 하(下)

막연하게 미국 사회의 영적 수준을 개인의 느낌에 따라 판단할 것이 아니라 제가 판단하려는 기준은 "언어(言語)"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정의하는 용어 중에 "호모 루켄스(Homo Luquens)"라는 말은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3대 절기는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입니다.
이와 같은 절기를 맞이하면 어떻게 서로 인사하셨습니까?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해피 땡스기빙(Happy Thanksgiving)"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해피 땡스기빙(Happy Thanksgiving)"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를 "해피 할러데이(Happy Holiday)"라고 해야 한다는 사회적 여론이 점점 더 크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현재 기독교 인구 비율이 대략 64%라고 합니다.
물론 이 수치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한 통계입니다.
아직도 기독교인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절반을 능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여론은 기독교식의 인사말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서 교회의 반응은 조용합니다.

또 한가지 사례는 바이든 대통령에 의해서 동성결혼법이 법적으로 인정한다고 결정된 것입니다.
만일 어느 교회 설교자가 동성애와 동성결혼은 비성경적이라고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면 법적으로 제재를 받게 된다는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사회의 이러한 분위기를 그 시대에서 통요하는 언어를 갖고 진단하는 것을 "언령신앙(言靈信仰, language is spiritual belief)" 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에서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은 '말에 생명이 있다"는 뜻으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고 그 시대에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시대적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피 이스터, 해피 땡스기빙, 메리 크리스마스와 같은 인사말을 사회가 요구하는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사회의 영적 수준이 분명하게 낮아지고 있다는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현상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요?

불교(불교)에서 불자(佛者)들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이라는 염불(念佛)을 사용하여 간단하게 기도합니다. 모두 열 여섯 글자로 아주 간단한 기도문입니다.

물론 기독교에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이 초신자들을 물론 기존 기독교인들에게도 즐겁게 사용할 수 있는 기도문은 아닙니다.
더구나 교회에서 주기도문은 모임을 마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이 의미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불자들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에게 귀의합니다 이렇게 염불을 외우면서 기도합니다.
'나무’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아미타불은 극락에 계신 부처님을 말합니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부처님을 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염불(念佛)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분들께 귀의한다는 뜻과 함께 이 분들처럼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에는 염불과 같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신앙을 고백하는 기도가 없을까?
물론 동방교에서 수행하는 신자들을 위하여 사용하던 "예수님의 기도"  즉 "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Lord, have mercy on me!)" 라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목회 현장에서 보다 더 아주 간단한 기도가 없을까 고민하던 중 예수님의 이름에서 기도문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Jesus)
둘째는 그리스도(Christ)
셋째는 임마누엘(Immanuel)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예수(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저희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He will be save us from sin)"라고 합니다.
예수 라는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구주!"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구주!
Jesus is my Savior!

둘째는 그리스도(마태복음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be anointed people) " 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기름이란 성령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생명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하신 영원한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생명!" 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생명!
Jesus is my Life!

요한일서 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셋째는 임마누엘(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be with us)"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은 세 개의 말을 합성하여 만든 단어라고 하겠습니다.

‘임’(함께, with)
‘마누’(우리와, us) 
‘엘’(하나님, God)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부터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된 것이었습니다(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 예수님은 구원자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를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치료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24절에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가 일어나고 해방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고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29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 외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임마누엘이란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권세!"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권세!
Jesus is Power!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주 쉽게 설명한다면 여기 아주 얇은 종이 한장이 있습니다.
이 종이는 어린아이들도 쉽게 찢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이를 철판과 합친 후에 찢으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찢을 수 없습니다.
종이가 강해진 것이 아니라 철판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음므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연약한 내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에게 붙어 있는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어떤 질병도 환난도 근심과 걱정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실예 /

울주군 온산면 덕신리 625번지 신경부락에 대략 450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이 나무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과 같은 나무라고 믿고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 주민들이 돈을 모아 제를 지내고 심지어 무당을 불러 밤새도록 굿판을 벌렸습니다.

그런데 그 당수나무 바로 옆에 교회를 세웠으므로 마을 주민들의 반대는 아주 심각했습니다.
어느 해에 마을 이장이 찾아와서 정월 대보름 날 제를 지내려면 당수나무에 전기불을 켜야 하는데 마침 교회가 바로 옆에 있으므로 전선을 연결하여 전등을 켤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합니다.

이때 교인들은 어떻게 당수나무 제사를 지내는데 교회 전기불을 줄 수 있느냐? 
제사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이므로 전기를 빌려주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교회 전기불을 밝히면 당수나무에 제를 지내는데 귀신이 겁이나서 오겠습니까?
그러자 교인들이 목사님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을 이장이신 작고하신 이수엽씨를 찾아가서 제가 당수나무에 전선을 연결하여 전등을 달았으니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일러주었더니 이장은 전기세를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밤새도록 백열전구 켜봐야 전기세가 얼마나 나오겠습니까?
그런 걱정 마시고 편하게 사용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월 대보름이 지난 후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마을 주민 회의를 하였는데 당시 마을 사람들을 주도하던 서울 무당이 주민들에게 당수나무 신을 위하여 동제를 지내야 한다며 동제를 지낼 돈을 거둬드렸다고 합니다.
문제는 서울무당이 굿판을 크게 벌였으니 그 결론은 당수나무 귀신이 마을을 떠났기 때문에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다며 그 마을에서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와이스톤(Whitestone)이라는 지역에서 거주할 때 한번은 어느 수맥을 진단하는 사람이 방문하여 집에 수맥이 흐르는지 찾아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엘보 모양의 금속 막대리를 손에 들고 이 방 저 방을 옮겨 다니면서 하는 말이 분명히 수맥이 있는데 잡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혹시 예수를 믿습니까? 그래서 예 제가 목사입니다. 
그러자 그 분이 집안에 성경책이 있는 것을 보고 성경책만 놔두어도 수맥이 잡히지 않습니다. 하고 떠났습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주님만 믿고 따라가면 될 것입니다. 
2022년 성탄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신앙으로 무장하여 다가오는 2023년 주와 동행하는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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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 

言靈信仰 (ことだましんこう, 언령신앙)

언령신앙(言灵信仰)은 동북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오랜 전통으로 말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어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는 믿음이다. 즉 말에 혼(魂)과 영(靈), 즉, 보이지 않는 '힘'이 깃들어 있어 그 말대로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좌우되고 평생의 운명(運命)까지도 영향을 받는다는 믿음이었다.

고대 일본 역시 마찬가지로 언어에는 신비한 영적인 힘이 깃들어 있고, 그 힘은 현실세계에 큰 영향력을 갖는다고 여겼다. 그러한 힘을 믿고, 그 힘으로 현실을 바꾸려 하는 것을 '고토다마신코(言灵信仰)'이라 한다. 고대의 일본인들은 좋은 말이나 아름다운 말을 하면 행복이 오고, 반면 나쁜 말을 하면 재앙이 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한편, 고대 일본인들은 사람의 이름에도 '언령'이 머물고 있다고 믿었다. 특히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 자신의 혼이라 여겨, 남성이 여성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구혼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성이 남성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구혼을 승낙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또 염불(念佛)을 외면서 징이나 북에 맞춰서 추는 '염불 오도리'의 경우 '남무아미카불'의 명호를 주문으로 외어 말로써 악령을 물리치는 언령신앙이 깃들어있다. 이처럼 고대 일본에서는 언령신앙이 일상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언령신앙의 영향을 받아 고대에 일본의 제사 의식에서 신을 제사 지낼 때의 언어는 아름답고 엄숙하게 미화되어 문학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 제사를 연행하는 자는 산 위에 올라가 나라의 땅이 얼마나 기름지고 풍요로운가를 노래로 표현하고는 했는데, 이것은 말의 힘으로 현실 세계의 풍작이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는 풍작의 모습을 노래로 표현하는 것으로, 그 노래, 바로 말에 담긴 힘이 현실의 풍작을 가져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언령신앙의 전통은 '노리토(祝詞)'와 '센묘(宣命)'라는 일본 상대의 고유한 문학 양식을 발달시킨다. '노리토(祝詞)'는 기년제(祈年祭) 등의 궁정제사에서 읊어진 신전에서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본래는 간단한 주문(呪文)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집단 제사를 올릴 때 선미(善美)를 다한 말들을 봉헌하고, 사람들의 번영과 행복을 기원하고 신의 위력에 감사하는 행사를 거듭하는 동안에 점차 '노리토'의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이다.

노리토의 주 내용은 신의 이름을 부르고, 제사를 지내는 이유, 제신(祭神)의 내력과 업적의 설명, 진설(陳設物)의 열거, 기원하는 일 등이다. 이러한 내용을 음률과 성조에 유의하여 반복, 대구, 열거, 마쿠라 고토바(일본 전통 시가인 '와카''에서 어떤 말 앞에 붙이는 특수한 수식어), 비유 등을 사용하여 장중미(莊重美)를 살려 읽는 과정을 통해 노리토의 형식을 완성하였다. 문헌상 현존하는 '노리토'는 『엔기시키 (延喜式)』에 수록된 27편과 『타이키 (台記)』에 수록된 1편으로 총 28편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센묘(宣命)'는 천황이 신하에게 내리는 조칙(詔勅)을 말한다. 천황의 즉위나 양위, 황후를 세우는 일, 연호를 바꾸는 일, 황태자를 세우거나 폐하는 일, 상을 주거나 벌을 주는 일 등 국가의 중대한 일에 관하여 작성한 문서이다. '노리토'가 신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센묘'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도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감정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특징이 있다. 현존하는 센묘는 『쇼쿠니혼키 (續日本記)』 62편이 수록되어 있고 그 밖의 문헌에 3편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에도 '언령신앙'의 전통이 있어, 우리 조상들은 말조심을 강조했다. 특히 설날부터 대보름까지의 기간에는 아예 남에게 듣기 좋은 덕담만 하는 풍습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또한 언령 신앙은 중국이나 한국 등지에서 볼 수 있는 '휘(諱)', '피휘(避諱)'의 풍습과도 연결된다. 원래 '휘'는 죽은 사람의 생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을 말하였으나, 나중에는 생전의 이름 자체가 '휘'로 와전되는 바람에 이름을 부르지 않는 행위는 따로 '피휘'라고 명명하였다. 
'피휘'의 풍습은 범위가 확대되어 살아있는 사람에게까지 미쳤다.
  

한국 문학의 경우 『삼국유사』 등에서 언령신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삼국유사 중 '혜공과 혜숙'의 일화에서 광덕이 아미타불을 향하여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달을 증인으로 삼는다. 여기에는 자신이 바라는 바를 미리 질문으로 던져버려 이루어지리라고 여기는 충류도 계통의 언령신앙이 담겨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말이 씨가 된다"와 같은 속담도 언령 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문학비평용어사전 "고토다마​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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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

불자들에게는 불경을 모두 읽거나 암송하지 않아도 아주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불경이 있습니다.
그 불경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모두 16자로 구성된 기도문이라고 하겠습니다.

Q : 스님이나 어른들이 기도 할 때 또는 텔레비전에서 스님들이 나와 염불 하는 모습을 보면 흔히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합니다. 어떤 뜻입니까?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것

A :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나무’는 귀의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것 입니다. 
아미타불은 극락에 계신 부처님이고,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분입니다. 
또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염불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분들께 귀의한다는 뜻과 함께 이 분들처럼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자료출처 / 불교신문 2219호/ 4월 12일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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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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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 후반, 러시아의 한 시골 청년이 쓴 것으로 알려진 이 책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보여준다. 
책의 주인공은 어느 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읽고 어떻게 하는 것이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인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순례의 길을 떠난다. 
그러던 중 순례자는 큰 스승을 만나 “예수의 기도”(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를 배우고, 하루에 3,000번씩, 6,000번씩, 나중에는 1만 2,000번씩 반복하여 기도를 함으로써 기도가 마음 깊은 곳에 이르며 평온해지고 하나님과 합일되는 황홀의 경지를 체험하게 된다. 이 책은 이렇게 깊은 영성을 체험하게 된 순례자의 기도 여행에 관한 이야기이다. 

미국의 저명한 종교학자 휴스턴 스미스 교수는 “러시아 영성의 고전”이라 했고, 샌프란시스코 대학 종교학자 제이콥 니들먼 교수는 “지난 100년 동안 나온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 서적으로 사람의 삶을 바꾸어 주는 희귀한 책들 중 하나”라고 칭송했다. 

심지어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와 더불어 러시아 혁명 이전 “러시아 문학의 3대 걸작”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역자 오강남 박사는 1970년대 초 캐나다에 유학하면서 이 책을 처음으로 접했는데 그 당시 기독교에도 불교의 ‘염불’과 같은 종교적 수행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 후 캐나다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종교학 개론 과목을 담당할 때에는 언제나 학생들에게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과제를 냈다. 그리고 한국 독자들에게도 이 책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영어본으로 나온 모든 번역본들을 참고해 한국어로 번역했다. 

책은 무엇보다 문장이 간결하고, 평온한 느낌을 갖게 하여 조용하게 묵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람들 앞에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에 익숙해진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처음에 책의 주인공이 행하는 기도 방식, 즉 “예수의 기도”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예수의 기도,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던 예수의 기도가 책의 주인공에게 주었던 느낌, ‘팔다리로 감미로운 쾌감이 퍼지고’, ‘기쁨으로 심장에 거품이 이는’ 그 느낌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을 꿈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로 영적인 성장을 꿈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의 기도”는 새로운 희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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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聖誕) : 

성인 성, 성스러울 성(聖), 낳을 탄, 태어날 탄(誕)
- 성(聖) / 귀 이(耳) + 입 구(口) + 임금 왕(王) 또는 북방 임(壬), 천간 임 

임금님처럼 듣고 말한다.
북방 임(크다, 성대하다) 크게 듣고 크게 말하다

聖자는 ‘성인’이나 ‘임금’, ‘거룩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聖자는 耳(귀 이)자와 口(입 구)자, 壬(천간 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聖자는 본래 ‘총명한 사람’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聖자의 갑골문을 보면 큰 귀를 가진 사람 옆에 口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누군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聖자는 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나 ‘총명한 사람’을 뜻했었다. 
하지만 후에 뜻이 확대되면서 지금은 ‘성인’이나 ‘거룩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壬자는 ‘북방’이나 ‘천간’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壬자는 士(선비 사)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선비’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士자와는 기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壬자의 기원에 대한 해석도 제각각이다. 
일부에서는 실을 엮던 도구로 보기도 하고 또 다른 해석에서는 북쪽에 있는 별과 땅을 연결한 모습이라고도 한다. 
壬자에 ‘북방’이라는 뜻이 있으니 그런 해석도 가능하리라 본다. 

또 壬자를 工(장인 공)자와 같은 자였던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당시의 工자()는 壬자와( ) 달랐기 때문에 같은 글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이 무의미한 것은 지금의 壬자는 유래와는 상관없이 천간(天干)의 아홉 번째라는 뜻으로만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또 때로는 다른 글자와 결합해 ‘사람’과 관계된 뜻을 전달하기도 한다.

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사람 또는 총명한 사람

탄(誕) / 말씀 언(言) + 길 연, 늘일 연(延) 
  말을 널리 늘이는 것(세상에 말을 널리 알리는 것)

誕자는 ‘태어나다’나 ‘거짓’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誕자는 言(말씀 언)자와 延(끌 연)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延자는 발을 길게 늘여 걷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늘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誕자는 이렇게 ‘늘이다’라는 뜻을 가진 延자와 言자가 결합한 것으로 ‘말을 길게 늘이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誕자에서 말하는 ‘말을 길게 늘이다’라는 것은 남을 속이기 위해 이리저리 말을 늘여놓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誕자는 본래 ‘거짓’을 뜻했지만, 후에 ‘말을 만든다’라는 뜻이 확대되면서 ‘태어나다’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지난 12월 4일 황목사님께서 "내 신앙의 월드컵"이란 주제로 설교했습니다.
예배 후 식탁의 교제 시간에 마침 한국에서 어느 후배가 유투브 속보를 보내왔는데 제가 확인하지도 않고 브라질에 대해서 부전승이라고 전했는데 결국은 어느 유투버의 돈벌이 용 가짜 뉴스이었습니다.

12월 5일(월) 다니엘 간닥터와 예약된 검진을 위하여 콜 택시를 불러 전화번호부에서 확인한 주소를 알려주고 이동을 했습니다. 
접수부에서 전부한 후 안내원이 그런 의사가 없다고 합니다.
급하게 병원 밖으로 나와서 사무엘에게 주소를 받아서 다시 콜택시를 불러서 병원을 찾아가서 모든 검사 결과와 앞으로 진료 방향을 확인하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어떤 정보든지 반드시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짐하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성탄이란 절기도 성경적인 검증이 필요한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미국에서 모든 휴일을 어느 특정 종교의 용어가 사용되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을 해피 할러데이(Happy Holiday) 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미국의 기독교 인구가 몇 %일까요?
2020년 기준 미국 내 기독교인(아동 포함)은 전체 인구 중 약 64%로 추산됐다. 
같은 해 무종교인은 약 30%는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등 기타 종교인은 약 6%로 집계됐다. 
현재 미국 종교 인구 변화 속도와 트렌드에 따라 기독교인 비율은 2070년 전체 인구의 약 54%에서 최저 약 35%까지 급락할 가능성이 있다.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부활절을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사용해야 합니까?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추수감사절을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사용해야 합니까?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성탄절을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사용해야 합니까?

침묵할 때가 있고 외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외쳐야 할 때라고 하겠습니다.

당당하게 외치려면 외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 힘이란 성탄절을 맞이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의 구유"가 준비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구유가 준비되셨습니까?
마음의 구유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 이름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
둘째는 그리스도
셋째는 임마누엘

언령신앙(言靈信仰

언령 신앙은 일본에서 특히 발전된 것으로 일본에서는 ‘코토다마(言霊)’라고 부른다. 
말에 보이지 않는 힘이 깃들어 좋은 말을 하면 행복이 오고, 나쁜 말을 하면 불행이 온다고 믿는 것이다. 
학자들은 ‘말(言, 코토)’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事, 코토)’이 발음이 같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일본의 신 고토시로누시(事代主)가 고사기(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에서는 고토시로누시(言代主)라고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 일상 생활 깊숙히 스며든 언령 신앙의 사례를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말이 씨가 된다.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 미국에서 크리스마스를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해야 하는가?
이런 사회현상에 대해서 교회는 침묵하고 있는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10년 이내에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미국 전역에서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동성결혼에 대하여 부정적인 가르침을 강조하면 분명한 저항을 받게 될 것입니다.

추수감사절, 부활절, 성탄절은 기독교의 3대 명절입니다.
이러한 절기를 해피 할러데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점 더 강세로 드러나는 것은 언어에 감춰져 있는 힘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불자들에게는 불경을 모두 읽거나 암송하지 않아도 아주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불경이 있습니다.
그 불경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모두 16자로 구성된 기도문이라고 하겠습니다.

Q : 스님이나 어른들이 기도 할 때 또는 텔레비전에서 스님들이 나와 염불 하는 모습을 보면 흔히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합니다. 어떤 뜻입니까?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것

A :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나무’는 귀의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것 입니다. 
아미타불은 극락에 계신 부처님이고,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분입니다. 
또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염불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분들께 귀의한다는 뜻과 함께 이 분들처럼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자료출처 / 불교신문 2219호/ 4월 12일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물론 기독교에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은 너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과 비교하면 길다고 하겠습니다.
초신자들에게 주기도문을 암송하여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하던 중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모두 15자 글자 입니다.

뉴욕으로 이주하여 처음에는 이 기도문에 대해서 소개했었기에 그동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더 강조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탄절을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말하지 말라고 하는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당당하게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외쳐야 합니다.

무슨 말을 이 세상에 확장시켜야 할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찾아내려고 합니다.


오래 전에 교회가 토지수용법에 의하여 철거될 위기에서 마침 지역 경찰서 정보과장이 군청을 담당하는 형사를 소개해주며 함께 군청 직원을 만나라고 주선했습니다.
그때 군청의 담당 직원이 제안하기를 교회를 위해서 건축부지 300평을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는 중심부에 허락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로 돌아왔는데 마을 대표 몇 사람이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합니다.
자기들은 힘이 없으니 교회가 자기들과 더불어 함께 고등법원에 항소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마을 주민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외면하면 그만입니다.
더구나 그 주민들은 교회가 세워질 때 교회를 건축하지 못하도록 주도한 사람들입니다.
만일 교회가 주민들과 더불어 함께 행동하면 약속된 교회부지는 받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국 마을 주민들과 더불이 고등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하므로 군청의 제안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제가 결정할 수 있었던 힘은 예수님은 약자의 편에 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교회에 대해서 핍박하던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마을 주민들의 하소연에 귀를 기우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약자를 위한 길을 선택했을 때 마을의 주민들은 새로운 생각을 갖고 교회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Christmas
크리스마스는 라틴어 "그리스도"(Christus)와 "모임"(massa)의 합성어
'그리스도 모임' 즉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모임'으로 종교적인 예식을 의미한다. 
동방 정교회나 개신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예배"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미사"로 번역한다.

크리스마스(Christmas)란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기념일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는 성탄일이라고도 한다.

크리스마스는 영어로 ‘그리스도(Christ)의 미사(mass)’라는 의미로 고대 영어인 Cristes maesse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X-mas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여기서의 X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크리스토스: ΧΡΙΣΤΟΣ)의 첫 글자를 뜻하는 것

​크리스마스의 유래에 대한 주정은 크게 두 개의 시각이 있다.

첫째는 교회의 전통으로 교회 내에서 시작으로 보는 시각
둘째는 로마제국의 전통으로 로마의 절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시각

첫째는 교회의 전통으로 교회 내에서 시작으로 보는 시각

교회의 전통에서 크리스마스가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말에 따르면, 
신약성서에는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기록되어 있지만 탄생일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문에 초기 기독교도들은 1월 1일과 1월 6일, 3월 27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해왔다고 하는데요. 
이후 4세기를 거치면서 신학자이자 주교인 아우구스티누스와 기독교의 이단으로 구분되었던 도나투스주의자들 간의 논쟁에서 교회가 공인되기 전부터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지켰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록인 삼위일체론을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3월 25일에 수태되셨다. 
(중략) 전통에 따르며 예수께서는 12월 25일에 태어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12월 25일이 전통 즉 초대교회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교회의 전통에서 수난일이며 동시에 수태일인 3월 25일부터 상징적인 9개월 이후인 12월 25일을 기독교의 그리스도론적 개념으로 탄생일로 본다는 기록입니다.

​둘째는 로마제국의 전통으로 로마의 절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시각

로마제국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이들은 크리스마스 축제가 로마 연감의 기록에 따라 336년경 로마제국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로마교회 대주교 율리우스 1세가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선포한 350년부터 그리스도의 탄생제가 공식적인 '기독교'의 축제로 인정되기 시작하였고, 오늘날까지 전통으로 굳어지게 되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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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성탄절은 코로나 시대에 맞이한다는 특이한 절기라는 것입니다.

 - 코로 숨을 쉬게 하신 하나님께서 숨을 쉬는 것도 부자연스럽게 하셨지요
 - 노동하는 것이 곧 기도하는 것이라고 깨우치며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로 말라고 하셨는데
 - 나 보다 더 약한 것 같은 사람도 건강하게 지내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일러라.



2023년 1월 1일(주일)

신년주일(新年主日)  


제목 /  새로운 피조물
성경 /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2022년을 하나님의 은혜로 모두 건강하게 지내왔습니다.
감사합니까?
감사를 표현하셨습니까?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은 표현할 줄 아는 것으로 증거합니다.
이전에는 감사하다는 것을 돈이 필요 없는 립 서비스(Lip Service)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감사를 물질로 표현합니다.
2023년 매주일 예배 때마다 감사예물을 드릴 수 있는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며 신앙생활의 기쁨을 함께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제 경우를 소개합니다.
저는 매주일 감사예물을 20불씩 합니다.
이 감사는 건강과 생명을 지켜주신 것에 대한 가장 기초가 되는 감사를 고백하는 예물입니다.
그리고 그 주간에 특별한 은혜를 받았을 때는 그 명목으로 감사예물을 드립니다.

여러분들도 감사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언어의 변화
둘째는 물질의 변화
셋째는 습관의 변화

첫째, 언어의 변화(言語의 變化) Change of Language

창세기 11: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원래 언어는 오직 한 언어로 소통이 가능했습니다(창세기 11: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그러나 죄가 세상을 지배한 이후에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고 할 때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므로 의사소통이 불편하게 되었습니다(창세기 11:6-7,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그러므로 언어의 변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칼트(René Descartes, 1596. 3. 31-1650. 2. 11)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예를 들면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들어보면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백화점과 호텔에서 엘리베이터 걸은 "올라갑니다!" "내려갑니다!" 라는 말을 하루 종일 사용합니다.
이 사람이 화장실에 들어가서 용무를 볼 때 누가 화장실 문을 두드리면 "올라갑니다" 또는 "내려갑니다" 라고 반응한다고 합니다.

전화 교환원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을 "통화중"이라고 합니다.
전화 교환원이 화장실에서 용무를 볼 때 누가 그 문을 두드리면 무엇이라고 반응할까요?
예, '통화중' 이라고 반응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예를 우리 주위에서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것은 잃어버린 기회
둘째는 시위를 떠난 화살
셋째는 입에서 나온 언어(말)

이 세 가지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무서운 것이 '말'이다.
격려와 기쁨의 말은 사람에게 용기와 행복을 주지만 저주와 비난의 말은 한 사람의 신용과 명예를 일시에 무너뜨릴 수도 있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침묵은 금이다'

'구화지문'(口禍之門)
구시상인부'(口是傷人斧)

옛 조상들은 말에 관한 여러 속담과 글들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로 준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각종 공해와 오염으로 세상이 더러워지기도 하지만 무책임한 말과 언어의 남발, 아첨과 중상모략, 공갈협박, 남을 흉보고 헐뜯는 말들로도 점차 오염되고 병들고 있다.
매스컴과 같은 대중매체 등을 통해 퍼지는 언어의 왜곡과 조작이 병리학적인 인간화를 조장한다.

말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노출시킨다.
먼저 말하는 기술보다 말하려는 사람의 인격과 대인관계를 중요시해야 한다.
생각하고 있는 바가 언젠가 말이 되어 나오기 때문에 진실함과 사랑으로 타인을 대하겠다는 마음가짐이 대화의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성숙한 사람의 훈련을 위한 첫 걸음은 바로 말과 행실의 일치에서 시작된다.
현재를 사는 우리에겐 그 어느 때보다 더 인정과 포용의 말, 희망과 용기의 말, 지혜의 말, 친절과 동정의 말, 감사의 말, 격려와 칭찬의 말, 사랑의 말이 절실히 필요하다.

믿음의 사람은 정직하고 진실한 언어만을 사용해야 한다.
나의 말이 곧 나의 삶이며 나의 인격과 같다.
따라서 성경적 언어를 배워야 한다.
성경적 언어는 성경적 사고에 의해서 형성된다.



둘째, 물질의 변화(物質의 變化) Change in Money


마태복음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는 이유는 도적이 있기 때문이며, 종이 돈은 좀이 먹고 구리돈은 동록이 쓸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의 이야기
랍비와 신부와 목사가 헌금에 대하여 이야기를 합니다.
헌금을 어떻게 하는가?
랍비는 돈을 모두 하늘로 던지며 하나님의 것은 하늘로 올라가고 내 것은 땅으로 쏟아지라고 합답니다.
그러자 신부는 땅에 금을 긋고 그곳으로 돈을 던지면서 저쪽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몫 이쪽에 있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고 한답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은 원을 그리고 그곳으로 돈을 던진 후에 원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몫 원밖에 있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고 한답니다.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모든 것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지만 십일조는 십분의 일만 드린다는 믿음입니다.
감사헌금을 바치는 것은 모든 것을 바쳐서 감사해야 하지만 이것만이라도 바침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신앙생활에 기초가 되는 몇 가지 원리를 살펴봅니다.

대인관계의 원리(마 6:2-4) : 구제
대신관계의 원리(마 6:5-15) : 기도
대아관계의 원리(마 6:16-18) : 금식
대물관계의 원리(마 6:19-32) : 보물(물질)

결론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성경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성경적인 언어를 사용함과 동시에 성경적인 물질관을 갖추어야 합니다.
성경적인 물질관의 대표적인 인물을 욥이라고 하겠습니다.

약 4천 년 전에 우스 땅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매우 다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소생은 아들이 일곱이요 딸이 셋이나 되었습니다.
재산도 상당해서 양이 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급작스런 재앙이 닥쳤습니다.
아들 딸, 열 명이 맏이 집에 모여 잔치를 하는데 집이 무너져 몰사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강도떼가 급습해서 들판에서 가축을 치는 종들을 죽이고 모든 가축을 강탈해 갔습니다.

한번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세요.
무슨 말로 욥의 심정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욥은 그 비보를 전해 듣고는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애통한 심정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망연자실하지 않고, 경건한 마음으로 땅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며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 1:21)

여러분 욥이 아브라함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족장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출발은 욥과 같은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욥은 아브라함보다 더 큰 부자로 등장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실직하거나 사업에 실패해서 비관 자살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누적된 카드빚을 갚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경제적인 파탄은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으며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내 재산을 다 잃었으니 살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잃은 재산이 내 것이 아니고 갚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면 자살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내 것을 잃었기 때문에 충격이 큰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이 사람들과 욥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소유권에 대한 인식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욥은 그 많던 재산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고 했습니다.

만일 누가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서 무이자로 돈을 천만 원 빌려주어서 잘 사용하고 있는데, 어느 날 찾아와서 그 돈을 돌려달라고 해서 돌려주었습니다.
빌린 돈을 돌려주었으니 억울한 생각이 들까요?
돌려주는 것이 아까울까요?
좀 아쉽기는 해도 억울하거나 아깝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래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욥은 그가 살던 나라에서 가장 큰 부자였습니다.
사회적인 명망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전 재산을 상실했다는 것은 그 때까지 쌓아올린 그의 모든 명예가 물거품이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원망은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물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봅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나와 상속재산을 공평하게 나누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 청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상속 재산을 분배하는 일로 분쟁이 생기면 랍비를 찾아가서 중재를 부탁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예수님을 보통 랍비처럼 생각하고 찾아왔나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하셨습니다. 상속 분쟁을 해결하려고 했다면 그 사람이 예수님을 잘못 찾아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관심을 가지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재산을 더 많이 갖고 적게 갖느냐 하는 문제는 예수님께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의 청을 물리치신 예수님은 그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물질을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한 가지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한 부자가 농사를 지었는데 대풍이었습니다. 소출이 너무 많아서 쌓아 둘 곳이 부족했습니다. ‘어떻게 할까?’ 궁리하던 그는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래 이렇게 하면 되겠군.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어야겠다.’ 그리고는 자기 영혼에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구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 날 밤늦게까지 사업 구상에 몰두하다가 잠든 부자는 이튿날 아침, 사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결론으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눅 12:21).

부자의 말을 살펴보면, 그는 가진 재물을 다 자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심지어 그는 자기가 생명의 주관자라도 되는 양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 부자의 영혼을 불러 가시니 그의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이 세상에는 이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가 물질의 주인인 양 착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더구나 사람들은 그들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이 부자처럼 많은 재물이 자기들의 영혼에 만족을 줄 줄로 착각합니다.
그들은 돈이면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줄 알고 돈을 의지해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언젠가 이 부자와 같이 돌이킬 수 없는 좌절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님들은 욥과 같이 생명과 물질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셋째, 습관의 변화(習慣의 變化) Change in Habits

누가복음 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히브리서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습관이란 자주 반복된 삶의 행동이 굳게 자리를 잡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레미야 22:21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고린도전서 8:7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

생각을 바꾸면 언어가 바뀐다.
언어를 바꾸면 행동이 바뀐다.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뀐다.
습관을 바꾸면 나의 삶이 바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정말 사랑한다고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닮은 부분이 무엇인가요?

사랑하면 닮습니다.
말하는 것, 입는 것, 분위기까지 닮아갑니다.
예수님의 습관을 닮는 것, 그분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을 통해 당신의 영혼을 빛나게 하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거룩한 자녀입니다.

세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만큼 길들여진 버릇 하나, 습관 하나가 한 사람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선배들의 경우 하나님을 향한 자신만의 거룩한 습관들을 한 가지씩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한 다윗.
그의 삶은 그 누구보다 파란만장했고, 고비가 많았지만
그만큼 그의 찬양도 시편을 가득 매울 만큼 성경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어떠한가?
그는 복음 전하기를 즐거워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갇혀서도, 이방민족의 위협 앞에서도, 모진 고문과 굶주림 속에도 복음을 전했고 심지어 편지로 작성하기 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의 습관은 새벽 미명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를 하러 외진 곳을 찾으셨던 예수님의 기도의 습관,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을 구원하시고 사랑으로 품으시는 모습 등 각각의 습관들을 통해 우리의 안일한 신앙생활을 바로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완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2023년 신년주일을 맞이합니다.
지난 날의 생각과 언어와 행동과 습관을 벗어버리고 이제부터 새로운 생각과 언어와 행동과 습관을 성경적인 생각으로 다듬어서 이전보다 보람있는 인생, 주님께서 인정하는 믿음, 가족들로부터 사랑을 확인하는 축복의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23년 첫 주간에 읽어야 할 성경

창세기 1장 - 창세기 19장          
마태복음 1장 -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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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자료 / 10-03-2022(월) 오늘의 묵상을 중심으로 새벽 기도회

새로운 피조물(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영적 하나됨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인이 되신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하나가 될 때 성립됩니다.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별개의 사건입니다.
누구나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따르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는 교회에 출석하고 교인으로 등록한 사람의 숫자는 1,200만 명에 가깝다고 합니다.
이 속에는 허수도 끼어있습니다.
교회 정착을 못하고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면서 교인으로 등록하기 때문에 교인 숫자가 겹치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리고 교회의 위상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입니다.
거듭난 사람들, 구원받은 사람들이 곧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는 ‘거듭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에서는 ‘새사람’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지으신 영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거룩한 영적 형상이 파괴되고 죄의 지배를 받는 타락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구원과 회복의 길을 터주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영접하고 부르는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 된다는 것이 바울의 고백이고 선포입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고 새것이 되려면 이전 것은 지나가야 합니다.
이전 것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한 새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새 것,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이전의 삶의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쉬운 예를 들어봅시다.
집을 새로 구입하여 이사를 합니다.
이제부터는 옛 주소와 새 주소로 구분합니다.
이전에 살던 집과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구분합니다.
이전 주소를 사용하면 우편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전 집으로 들어가려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은 더 이상 내 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적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나냐 합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지구가 태양을 도는가, 아니면 태양이 지구를 도는가?
현재는 가장 쉬운 천문학 지식이지만 몇백년 전만 하더라도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야 했다.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고 있었다.

​성경의 여러 말씀이 그러하거니와, 지구가 정지하고 않고 돌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란 어려웠다.
감히 이러한 인식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사람이 바로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 - 1543)이다.
그런데 그가 이러한 발견을 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재미나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우선 코페르니쿠스가 이러한 발전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과학적인 발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심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심 때문이었다.
그는 천문학자임은 틀림없으나 단순한 아마추어에 불과했다.
그는 그 이전까지 전해오던 지구중심설인 프톨레마이오스의 모형을 놓고 생각하다가, 그 모형이 상당히 복잡하다고 느꼈다.
독실한 신자였던 그는, 전지전능하신 신이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주를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성스러운 신전을 비추어 주는 촛불을 어디에 놓아야 전체를 동시에 비출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곳은 당연히 중앙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곧 태양을 중심에 두어야 빛이 골고루 비추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이같은 추측을 발판으로하여 소위 태양중심설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새로운 체계를 발표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잘 알다시피, 자신의 체계가 당시의 상식과는 크게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들과 제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결국 1543년에 그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가 출판되었다.

그때가 바로 그의 임종 때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코페르니쿠스는 생전에 자신의 천문학자적인 체계로 인해 이단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했다.
교회와의 갈등을 두려워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출판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 알 도리는 없지만, 그의 임종에 맞추어 책이 발간되었다는 것은 아무튼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루터나 다른 종교지도자들은 여전히 과거의 신념에 매달리고 있었다.
루터는 이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주장을 전해 듣고, 코페르니쿠스를 가리켜 천문학의 '천'자도 모르는 바보라고 하며 "이 바보는 천문학 전체를 뒤엎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거룩한 성경은 여호수아가 멈추게 한 것은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고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책 제목에서 '회전'이라는 단어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180도를 돈다는 뜻의 '회전'이라는 단어가 나중에는 정치적인 격변을 뜻하는 '혁명'이라는 말로 서양에서 사용되었다.
우리가 아는 '혁명'이란 뜻의 어원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책 제목에서 나왔던 것이다.
과연 그의 전환이 서양 역사에서 얼마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그의 인식론적인 전환을 더 자세하게 이야기한 사람이 바로 시간보다도 더 정확하게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고 하는 철학자 칸트였다.
칸트가 철학에서 이룩한 인식론상의 전환은 자연과학에서 코페르니쿠스가 이룩한 전환과 아주 비슷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하여 칸트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정신이 대상들을 인식하려고 대상들의 주위에 돌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던 것을 칸트는 대상들로 하여금 정신이라고 하는 중심적 사실의 주위를 돌게 했다.

이제는 정신이 대상의 조건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정신이 정해 놓은 조건에 따르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우리들의 인식은 대상에 의거한다고 이제까지 생각되어 왔지만, 대상의 인식은 우리들의 주관 구성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놀라운 전환이었다.
그는 이것을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렀다.
마치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처럼 주관과 대상의 위치가 서로 바뀌었던 것이다.

칸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나의 생각은 별자리가 관측자의 주위를 회전한다고 보아서는 천체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본 코페르니쿠스가, 오히려 관측자의 편에서 회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별의 위치를 정지시킴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좀더 합당한 해답이 얻어질 수 있으리라는 획기적 사상을 제시했던 것에 비길 수가 있겠다."

​그래서 이제 커다란 전환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제아무리 기발한 발상의 전환이라도 정작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에 비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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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8일(주일) 주님의 수세주일   

2023년 제2주간 성경 읽기 범위(1월 8일 - 14일)

창세기 20장 - 창세기 35장          
마태복음 6:19 - 10:1-20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and this water symbolizes baptism that now saves you also--not the removal of dirt from the body but the pledge of a good conscience toward God. It saves you by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교회력에 따라 오늘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의 수세주일"입니다.

세례는 죄를 씻는 구원을 위한 성결 예식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는데 세례를 받으셔야 했을까요?


파트리스교회 수요 성서 연구 #. 1 물세례와 불세례(2020-06-10)

세례(洗禮)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구약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입니다.
신약의 첫 번째 책은 “마태복음”입니다.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 사이는 “대략 400년” 이란 긴 세월이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 시대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의 400년의 기간을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 라고 합니다.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를 “신구약 중간 시대”라고도 합니다. (아래 난외 주 참조)

기독교 이외에 가톨릭교회와 유대교에서는 신구약 중간 시대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셨다는 것을 강조하여 “외경”이란 말씀을 인정하고 사용합니다.

오래 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던 때에 어느 날 광야에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 거주하는 낯선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라고 외쳤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광야로 나와 요한의 외치는 소리를 들을 때 바로 이 사람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나는 너희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아니라 다만 물로 세례를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실 그 분은 너희들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며 실망하던 유대인들에게 메시아 신앙을 깨우쳤습니다. 요한의 외침을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서 세 종류의 세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 ; 회개와 구원을 위한 세례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 ; 구원의 확신과 보증을 위한 세례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 ; 심판을 위한 알곡과 죽정이를 구분하는 세례(불심판)

그런데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것은 분명하게 성경에 소개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셨을까요?

세 종류의 세례를 베푸셨던 수여자(授與者)를 살펴봅시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예수님 당시에는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마태복음 3:5∼6,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People went out to him from Jerusalem and all Judea and the whole region of the Jordan.
Confessing their sins, they were baptized by him in the Jordan River.

그러나 오늘날은 교회에서 목사가 세례를 베풉니다.
"주 예수를 믿는 (아무개)에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and this water symbolizes baptism that now saves you also--not the removal of dirt from the body but the pledge of a good conscience toward God. It saves you by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세례는 요한의 증거대로 분명히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제 성령세례를 베푸셨으며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When the Counselor comes, whom I will send to you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goes out from the Father, he will testify about me.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사람들에게 보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령을 “보혜사(保惠師)” 라고 합니다.

“보혜사(保惠師)”란 무엇인가?
-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
보혜사란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가르치시는 선생님” 이란 뜻입니다.

보혜사를 영어 성경에서 찾아보면 NIV에서는 “상담자(the Counselor)”, KJV에서는 “위로자(the Comforter)”, NASB에서는 “돕는자(the Helper)” 라고 합니다.

보혜사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étos)” 라고 합니다.
스트롱 번호 3875

1. 옹호자(an advocate), 중보자(intercessor),
2. 위로자(a consoler), 위로자(a comforter), 돕는자(helper),
3. 변호사(Paraclete)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한일서 2:1.
3. 요한복음 14:16
발음 : 파라클래토스(paraklētŏs)
어원: 387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26, 16:7), 대언자(요일 2:1)
신약 성경 : 5회 사용

예수님께서 언제 누구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셨습니까?

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When the day of Pentecost came, they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Suddenly a sound like the blowing of a violent wind came from heaven and filled the whol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All of them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in other tongues as the Spirit enabled them.

오순절날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때 불세례도 함께 베푸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자세히 관찰하면 성령과 불이라는 용어가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는 사용하였으나 마가복음 1장과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성령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라고 모든 복음서에서 말씀하셨다면 불세례도 오순절 날 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그러므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세례자 요한에 의하면 성령세례와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성경을 폭 넓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과 불세례에 대한 말씀을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제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clear his threshing floor, gathering his wheat into the barn and burning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불세례”는 불로 심판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9절,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리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At that time Jesus came from Nazareth in Galilee and was baptized by John in the Jordan.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John answered them all,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one more powerful than I will come, the thongs of whose sandals I am not worthy to untie.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17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to clear his threshing floor and to gather the wheat into his barn, but he will burn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I would not have known him, except that the one who sent me to baptize with water told me, 'The man on whom you see the Spirit come down and remain is he who will baptize with the Holy Spirit.'

34절,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I have seen and I testify that this is the Son of God.

참조 / 성령세례(사도행전 1:5, 11:16, 고린도전서 12:3)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해서 언급한 성경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이외 성경에서는 오직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에서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분명하게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진다는 것은 불이 다양하게 갈라져서 오순절 날 한 자리에 모여 있었던 다양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재 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불세례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사도행전 2: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When the day of Pentecost came, they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Suddenly a sound like the blowing of a violent wind came from heaven and filled the whol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오순절 날 성령의 임재가 나타났을 때 마치 성령은 강한 바람 소리로 들렸습니다.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바람이 아닙니다.
성령은 불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은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βαπτίσει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
- will baptize with the Spirit Holy and fire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장차 오실 그 분께서는 “성령(프뉴마)과 불(푸르)”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외쳤던 요한의 증언은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그 분이 그토록 기대하던 “메시아”라고 기다렸으나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사십일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사도행전 1:3).

이렇게 번역된 데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καὶ)”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카이”는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 라고 하여 앞의 것과 뒤의 것을 동등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령과 불”이라고 할 때 성령과 불을 동등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제까지 성령과 불을 이렇게 등위 접속사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등위 접속사가 아니라 우위 접속사로 해석하면 전혀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세례는 특별한 용법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위 접속사”인 “또는(or)”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위 접속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는 “성령 또는 불안에서” 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 사(四)복음서를 비교하여 연구해보면 더욱 확실히 증명된다.
먼저 우리는 “성령과 불로”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과 불로”가 아닌 “성령으로” 라고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 라고만 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11:16과 고린도전서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라고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여러 성구들을 참조할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 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 보더라도 “침례” 라는 말이 의미를 더 잘 통하게 한다. 만일 “세례”라고 하면 “성령으로 씻긴다”는 말이 되므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성령은 영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요 14:18∼19)이므로 '성령 안에서 침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하되 '생명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침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행 2:38, 행 19:2)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고전 3:16-17)'과도 같은 말이 되는데 결국 우리와 주님과의 상호내주(Inter-Residence)를 뜻한다.

한편 요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신령으로'라는 말은 “엔 프뉴마”로서 원 뜻은 “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의미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의미가 모두 해석되는 것이다. 즉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물 안에 잠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상징하는 뜻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 안에 잠긴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리가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로 세(침)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불 속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로서 신자와는 전혀 관계없고 불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즉 불신자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하는 대신에 '불 속에 잠기게 한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제 세례에 대한 용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세례(밥티조, βαπτίζω)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물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완전히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올 때는 과거의 나 즉 옛 사람은 죽었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물세례는 회개와 구원의 표시라고 하겠습니다.

βαπτίζω, ον 스트롱번호 907

1. 잠그다
2. 결례를 행하다
3. 세례를 베풀다
발음 : 밥티조(baptizō)
어원 : 미래 βαπτίσω, 제1부정과거 ἐβάπ- τισα, 제1부정과거중간태 ἐβαπτισά- μην, 미완료수동태 ἐβαπτιζόμην,
완료수동 분사 βεβαπτισμένος, 제1부정과거수동 ἐβαπτίσθην, 미래수동태 βαπτισθήσομαι, 911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세례 받다(마 3:6,16, 막 16:16), 씻다(막 7:4), 세례 베풀다(요 1:25,26, 고전 1:14).
 [명] 세례(마 3:11, 막 1:4, 눅 3:16)
신약 성경 : 77회 사용

그런데 회개와 구원의 표를 받았지만 공중권세를 잡은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살면서 때로는 알게 모르게 죄를 짓게 됩니다.
이렇게 죄를 짓게 될 때 사탄은 정말 네가 구원을 받았느냐?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아직도 그렇게 살아가느냐? 하며 조롱하고 비난할 때 정말 내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는가? 하고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성령세례가 구원을 보증합니다.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set his seal of ownership on us, and put his Spirit in our hearts as 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

고린도후서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Now it is God who has made us for this very purpose and has given us the Spirit as 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

히브리서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Because of this oath, Jesus has become the guarantee of a better covenant.

성령세례가 보증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로마서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because through Christ Jesus the law of the Spirit of life set me fre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불세례는 심판 즉 소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명기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For the LORD your God is a consuming fire, a jealous God.

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for our "God is a consuming f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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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자료

주제 : 세례(洗禮)
- 세례(씻을 洗, 예도 禮)와 침례(잠길 沈, 예도 禮)
- 밥티조(물 속에 잠기다)

성경 : 마태복음 3:11

종류 :

 1. 물세례(회개와 구원) 베드로전서 3:21

 2. 성령세례(생명의 보증) 보혜사(요한복음 15:26)
 - 로마서 8:2, 요한복음 6:63, 고린도후서 1:22, 5:5, 히브리서 12:29

 3. 불세례(심판, 알곡과 죽정이)
- 신명기 4:24, 히브리서 12:29
- 마태복음 3:12, 누가복음 3:17

*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
- 전치사 "과"(카이)
 등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을 같은 것으로 이해
 우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은 서로 다른 것으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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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1-2022(금)
성령세례

"오순절 사건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

이와 같은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다.
이 속성은 한 마디로 "영원성(永遠性)"이다.
영원이란 어느 시대에는 나타나고 어느 시대에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사건은 지금도 앞으로도 마지막 그 날까지 지속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

"아니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며 그 영은 지금도 계속적으로 역사하는 영이다.

셋째, 바울의 증거


고린도전서 2:9-10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바울의 성령은 통찰하는 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영은 구약에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통하여 계속된다.

신명기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명기 30:6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레위기 18: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로마서 11: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다.
그런데 그 율법을 그의 백성들이 지킬 수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의 백성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강조하였다.

로마서 2:28-29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참고 자료

세례란 무엇입니까?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 씻음을 정하신 신약의 한 성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에게 접붙이고 그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그의 영으로 거듭나고 양자가 되어 영생에 이르는 부활의 인침입니다.
이로써 세례 받은 사람들은 엄숙히 유형적 교회에 가입하게 되어 전적으로 오직 주께만 속한다는 약속을 공개적으로 고백함으로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는 죄의 용서, 인 치심, 성령의 부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함 등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를 구체적으로 우리의 실제 삶과 몇 가지로 연관시켜 보겠습니다. 

1.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결정적 사건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로운 몸으로서의 출발을 다짐하고 공표하는 것으로서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2. 세례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증표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내적인 회개와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믿는 일입니다.
세례는 물로 씻음을 의미하는데 인간의 죄에 대한 씻음으로 물은 그리스도께서 흘린 보혈을 상징하며 그 보혈로 죄 씻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3. 세례는 새로운 피조물의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 안에서의 새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새로운 삶은 성령의 역사로서 변화된 새로운 생을 출발하게 됨을 의미 합니다.

4. 세례에 임한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이며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뜻합니다.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에 하나 되는 자격을 얻게 되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를 가지며 교회의 일원으로 교회를 통한 권리와 의무수행에 책임이 부여 됩니다.

가. 세례의 의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회개와 주의 길을 예비하는 변환기적이며 소개적인 세례였으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세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에 의한 세례입니다.

오늘의 세례 기준은 세례요한이나 제자들의 세례에서 찾을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마 28;19-20).

로마서 6:3-6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3:27-28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골로새서 2:11-12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나. 세례의 방법 

침례회가 침례를 주장하는 근거는 로마서 6:3-6과 골로새서 2:11-12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분명하게 물속에 잠기는 것과 물속에서 나오는 것의 모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라 합니다(마 3:16, 행 8:38-39)

레위기 11:32
이런 것 중 어떤 것의 죽음이 병기에든지 의복에든지 가죽에든지 부대에든지 무론 무엇에 쓰는 그릇에든지 떨어지면 부정하여 지리니 물에 담그라 저녁까지 부정하다가 정할 것이며

레위기 15:13
유출병 있는 자는 그 유출이 깨끗하여지거든 그 몸이 정결하기 위하여 7일을 계산하여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몸을 씻을 것이요 그리하면 정하리니.

로마서 6:3-5 골로새서 2:11-12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는 것이지 세례의 방법에 관한 내용으로 침례를 강조한 내용이 아닙니다. 레위기에서 나타난 정결 의식은 뿌리는 것으로 시행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레 14:4-7, 16, 49-53, 16:19, 민 8:5-7, 19:18-19)

고린도전서 10:1-2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출애굽기 14:22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다니엘 8:7
너는 이같이 하여 그들을 정결케 하되 곧 속죄의 물로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로  그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그 의복을 빨게 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

민수기 19:21
사람이 부정하고도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총회 중에서 끊쳐 질것이니라. 그는 정결케 하는 물로 뿌리움을 받지 아니 하였은즉 부정하니라. 

에스겔 36: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너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히브리서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뿌려서 정결케 하는 의식은 침수(침례) 라고 주장하기보다 뿌리는 세례를 뜻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도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마가복음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것이요 믿지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사도행전 16: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족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

사도행전 8:12-13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 니라.

성경의 세례 방법은 물을 붓거나 물을 뿌리는 방법이 가능할 것입니다.

신약의 세례 

신약의 세례는 구약의 할례와 이스라엘 백성의 홍해바다 도강과 성결의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면서 이 언약을 후손 대대에 지킬 하례를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17:11-14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할례에 참여한 사람 : 아브람, 이스마엘, 집에서 난자, 돈으로 사온 이방인, 아브람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입니다.
(유대인, 이방인, 친자, 서자, 남의 자식은 관계가 없음)

할례의 시기 : 칭의의 후입니다.
바울은 이 순서를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더라.

로마서 4:9-11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 뇨 할례 시냐 무할례 시냐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례는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외적인 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4:21-22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 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고린도전서 10:1-2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름아래 있고 바다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의 집단 홍해바다 도강을 세례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홍해 도당이 출애굽보다 결코 앞서지 못한다는 것은 세례가 구원보다 앞 설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죄 씻음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세례를 받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요한의 세례 

“칼 헨리” 는 말하기를 요한의 세례는 당시 유대교에서 유행하던 관습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단지 관습적인 것에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회개의 요건에 관련된 것이 포함된 것으로 본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의 특성은 신적 기원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조라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마태복음 3:13-15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마태복음 21: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 서냐 사람에게 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 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사도행전 18:25
그가(아볼로)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누가복음 3:3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누가복음 7:29-30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 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세례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우리가 이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며(마 3:5),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란 메시아로서의 사역의 출발을 선포하는 것이며 성부와 성령과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며 이 세례를 통하여 인가의 죄와 비애를 짊어지시는 사역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의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누가복음 12:4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예수님은 세례를 자신의 죽음과 연관시켜서 인간의 죄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희생물로 바치고 죽는다는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에 대하여 해석하셨을 뿐 아니라 승인하시고 명령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22-26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 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마가복음 16:15-16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온 천하에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사도들의 세례

베드로가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이 충만함을 받고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복음을 듣고 마음에 찔린 무리들이 우리가 어찌할꼬 말할 때 베드로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받으리라(행 2:37-38)
성령의 은사가 동반된 회개의 세례를 주장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10:47-48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 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하니라.

사도행전 16:14-15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고린도전서 1:14-17
그리스보와 가이오와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니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6:3-6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갈라디아서 3:27-28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에베소서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

골로새서  2:11-12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유아 세례

세례는 신앙고백을 통한 확증으로 주어지는 것인데 말도 잘 못하는 유아들이 어떻게 신앙할 고백할 수 있으며 믿음의 확증을 알 길이 없으므로 유아세례는 찬반의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유아세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구약의 할례를 주장하면서 난지 8일만에 행한 것은 언약적 측면에서 보아야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유아세례의 성경적 근거  

성경에는 유아에게 세례를 주라는 확실한 명령이 없으며 또 유아세레를 시행한 사례도 없습니다.

그러나 세례가 제정되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할레가 있었기 때문에 할례에 대하여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할례의 의미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며 교제이고 축복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7: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출애굽기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창세기 17: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신명기 10: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명기 30:6
네 하나님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예레미야 4:4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 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빌립보서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 당이라.

할례는 신앙에 의한 표시이며 그 신앙의 확증입니다.

구약의 할례는 신약의 세례와 동등하게 적용되며 할례와 세례는 언약관계 외에 성결과 확증으로 효력과 입회의 조건도 동등할 것입니다. 할례를 유아에게도 주어졌다면 세례도 유아에게 적용되어야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59
팔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하고자하더니

누가복음 2:21
할례 할 팔일이 되매 그 이름을 에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마태복음 19:14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10;14, 눅 18;16). 

사도행전 10:44-45
베드로가 이 말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사도행전 16:14-15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

사도행전 16: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족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유아세례의 대상자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의 표와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유아세례의 자격과 조건은 부모들 자신이 먼저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유아세례는 하나님과 교회와 부모와 유아의 계약관계를 가집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8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부모의 자녀들에게 유아세례를 주되 한편 부모만 믿어도 가능하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세례 문답할 때 유아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서 공적인 신앙고백을 해야 하며 자녀의 하나님도 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유아세례는 구원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구원의 길로 인도되도록 부모가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 서약이요 하나님께 유아를 바치는 봉헌이며 하나님의 영이 은혜로 임하는 언약과 구원적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유아세례의 효력  세례교육 자료(문답용)

유아가 세례를 받을 때 순간적으로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머레이”는 유아세례의 효력도 성인세례의 효력과 동일하다고 하였습니다.
세례는 하나의 의미를 지니며 그것을 그리스도와의 연합됨과 성령의 중생함에 의하여 죄의 더러움으로부터 정결케함과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하여 죄악으로부터 정결케 됨을 표시하므로 유아세례는 장년세례와 같은 효력을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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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교육 자료(문답용)

Long Island 연합감리교회 자료 제공

성경 The Bible

1. 성경은 모두 몇 권으로 되어 있습니까?
How many books does the Bible have?
A: 구약은 39권, 신약은 27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Old Testament has 39 books and New Testament has 27.

2.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What does it mean that the Bible is the Word of God?
A: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하는 가르침이란 것을 의미합니다.It means that we must learn and follow the instructions of the Bible in our life.

3.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What does the Bible teach us?
A: 성경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인간, 죄, 구원, 삶의 원리, 그리고 영생과 죽음 등을 가르칩니다.
It teaches: God, Jesus Christ, human being, sin, salvation, principle of life, and life after death.

4. 복음의 중심내용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major theme of the Gospel?
A: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나타나 있습니다.
It is the love of God toward humankind which is revealed through Jesus’ crucifixion and resurrection.

5. 십계명을 말씀해 보십시오.
Please, say the ten commandments (Ex 20: 1-17; Deut 5: 6-21).
A: 첫째,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First, You shall have no other gods before me.

둘째,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말든지 말며, 그것들에 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Second, You shall not make for yourself an idol in the form of anything in heaven above or on the earth beneath or in the waters below. You shall not bow down to them or worship them.

셋째,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Third, You shall not misuse the name of the Lord your God.

넷째, 안식일을 기억하며 거룩히 지키라.
Fourth, Remember the Sabbath day by keeping it holy.

다섯째, 네 부모를 공경하라.
Fifth, Honor your father and your mother.

여섯째, 살인하지 말지니라.
Sixth, You shall not murder.

일곱째, 간음하지 말지니라.
Seventh, You shall not commit adultery.

여덟째,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Eighth, You shall not steal.

아홉째,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Ninth, You shall not give false testimony against your neighbor.

열째,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Tenth, You shall not covet your neighbor’s house.

6. 가장 큰 두 계명은 무엇입니까?
What are the two greatest commandments? (Matthew 22: 37-40)
A: 첫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
랑하라.둘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First,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Seco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7. 주기도문을 말씀해 보십시오.
Please say the Lord’s Prayer (Matthew 6: 9-13).

A: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
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Our Father, Who are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And forgive our trespasses,
as we forgive those who trespass against u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8. 성경을 매일 읽습니까? 하루에 몇 장을 읽습니까?
Do you read the Bible everyday? How many chapters do you read daily?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의 말씀을 말씀해 보십시오.
Please say the most favorite words in the Bible.
A:

9. 성경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습니까?
Will you try to learn and follow the teachings of the Bible in your life?
A: 예, 노력하겠습니다. Yes, I will.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

1. 성경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증언하고 있습니까?
Who does the Bible say Jesus is? (Matt 16: 16; Phil 2: 6)
A: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몸으로 나타나신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He is not only the Son of the living God but also the eternal God manifested in a human body.

2. 예수님은 어떻게 태어나셨습니까?
How was Jesus born? (Matt 1: 18, 25)
A: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습니다.
He was born in a virgin’s body,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3. 예수님은 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Why did Jesus come into this world? (Matt 1: 21)
A: 죄로부터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He came into this world to save people from their sin.

4.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What did Jesus do to save humankind?
A: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으신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He died on the cross bearing all the sins of humans
and was raised from the dead on the third day.

5.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What happens through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Rom 4: 255:10)
A: 모든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됨으로써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과 교제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All humans can be forgiven and righteous through their faith in Jesus Christ, and they can have the fellowship with the holy and almighty God.

6.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당신과 관계가 있습니까?
Is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related to you?
어떻게 관계가 있습니까?
How is it related to you?
A: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의 자비 속에서 사는
나의 새로운 삶을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Jesus Christ died for my sins and he was raised for my new life
in the merciful God.

7. 당신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Who is Jesus to you?
A: 나의 구원자이시고 나의 주님이십니다. He is my savior and my Lord.

8. 부활 후 예수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What happened to Jesus Christ after his resurrection?
(1 Cor 15: 5-8; Luke 24:51)
A: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그 후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올라 가셨습니다.
He has appeared to his disciples for forty days and was taken up
to the right hand of God in heavens.

9.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What is Jesus Christ doing now? (1 John 2: 1)
A: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고 성령을 통해 그들 가운데서 일하고 계십니다. He prays for all his believers and works among them through the Holy Spirit.

10.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What does it mean that Jesus Christ will come again on the last day? (Matt 24: 29-31; John 5: 27-29; 1 Thess 4: 16-7)
A: 모든 죄와 악을 심판하심으로써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구원 계획을 완성하실 겁니다.
By judging the sin and evil, Jesus Christ will accomplish the whole redemptive plan of God toward all humans.

구원 Salvation

1.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salvation?
A: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그래서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다시 창조되는 변화의 전 과정을 의미합니다.
This means the whole process of transformation in which we are freed from sin and our relationship with God is recovered and we are recreated as the righteous people of God.

2. 죄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sin?
A: 우리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을 놓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This is that we disobey the words of God by placing not God but ourselves in the center of our life.

3. 죄로부터의 자유는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Why is our freedom from the sin so important?
A: 가장 복되고 의미있는 삶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달려 있는데, 이 올바른 관계는 우리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The most blessed and meaningful life depends on our right relationship with God: that we place God in the middle of our life and obey the words of God.

4. 어떻게 죄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까?
How can we be freed from the sin?
A: 우리가 죄인이란 것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이시고
나의 주님이란 사실을 믿음으로써 죄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We can be freed from the sin by confessing that we are sinners and believing that Jesus Christ is my Savior and my Lord.

5.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요 나의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What does it mean that we believe,”Jesus Christ is my Savior and my Lord”? (John 1: 12; II Cor 5: 14-19)
A: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 영원히 용서를 받았고,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시고 인도하시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진리를 믿는 것을 말합니다.
It indicates that we receive the truth that all our sins are forgiven forever by means of Jesus’ crucifixion and resurrection,
and we are new creations that Jesus Christ rules and leads.

6.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삶은 어떤 것입니까?
How can you explain the new life in Jesus Christ?
A: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죄를 극복하고 매일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다시 창조되는 것입니다.
Through the deep fellowship with God believers overcome sins and are daily recreated to be the righteous people of God.

7.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되어가는 구원의 과정을 무엇이라 합니까?
What is the process of salvation called, that believers are recreated as the righteous people of God?
A: 성화라고 합니다. Sanctification.

8.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완성되는 구원의 단계를 무엇이라 합니까?
What is the final phase of salvation called, that believers finally become the righteous people of God?
A: 영화라고 합니다. Glorification.

9. 이 전 구원의 과정이 완성하는데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What must Christians do the most to accomplish their salvation?
A: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입니다. The deep fellowship with God.

10.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무엇으로 가능합니까?
What can you do for the deep fellowship with God?
A: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일을 통해 가능합니다.
I can pray and read the Bible for the deep fellowship with God.

11.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일들을 하시겠습니까?
Will you pray and read the Bible to walk in the deep fellowhip with God? A: 예. Yes, I will.

교회 Church

1. 교회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Church? (1Cor 12:27; Eph 1: 23)
A: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는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성경에서 이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성도들은 이 몸의 지체들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The Church is the community of the believers who serve Jesus Christ as the Lord. In the Bible, this community is also described as the body of Christ, where Jesus Christ is its head and his believers are its parts.

2. 교회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purpose of the Church?
A: 하나님이 인간들을 죄와 악에서 구원하시는 구속 사역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The Church participates in the divine work that God saves people from sin and evil.

3. 교회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교회가 하는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What are the important things that the Church must do in order to accomplish its purpose?
(Rom 12: 1-2; Matt 28: 18-20; Act 1: 8; Act 2: 44-47; 1 Pet 4: 7-11; 1 John 1:3-4)
A: 예배, 교육, 선교, 교제, 그리고 봉사입니다.
Worship, Education, Mission, Fellowship, and Service.

4. 예배란 무엇입니까? (Ps 29: 1-2, 66: 1-4, 145:1-2)
What are the worship?
A: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며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It is praising, honoring, and exalting God.

5.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명하신 두 가지 거룩한 예식 (성례)은 무엇입니까?
What are the two sacraments that Jesus Christ commanded the Church to do? (Matt 28:19; Luke 22: 14-20)
A: 세례와 성찬식입니다. Baptism and The Lord’s Supper

6. 세례는 무엇입니까?
What is the Baptism? (Rom 6: 3-5; 1Cor 12: 13; Gal 3: 26-28)
A: 세례는 우리의 옛 자아가 죽고 우리의 새 삶이 탄생하는 것을 나타내는 의식입니다.
Baptism is a ceremony that represents the death of our old self
and the birth of our new life.

7.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What do the bread and the wine represent? (Luke 22: 19-20)
A: 떡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찟기신 그리스도의 몸을, 그리고 포도주는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합니다.
The bread represents Christ’s body which was broken, and the wine symbolizes Christ’s blood which was shed for the forgiveness of our sins.

8. 성찬식에 합당하게 참여하기 위해서 무엇이 요구됩니까?
What is required of partaking worthily of the Lord’s supper? (1Cor 11: 27-29)
A: 성찬식에 참여하기 전에, 세례 받은 성도들은 자신들의 믿음에 관해,
주님의 몸을 분별할 줄 아는 가에 관하여, 그리고 회개와 사랑과 순종에
관해 자신들을 살펴야 합니다.
Before partaking of the Lord’s supper, The baptized believers are
required to examine themselves of their faith and knowledge to
discern the Lord’s body,
and of their repentance, love and obedience.

9. 기도는 무엇입니까?
What is prayer? (John 15:16)
A: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간청하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Prayer is a conversation with God by which believers listen to His word
and offer their own desires unto Him in the name of Jesus Christ.

10. 주일은 어떤 날입니까?
What day is the Lord’s day (Sunday)? (Acts 20:7)
A: 이 날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날로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성도들이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This is the day when believers gather and worship God in a church through celebrating the resurrection of Christ because Jesus Christ was raised on Sunday.

11. 헌금(십일조)의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importance of offering(Tithe)?
A: 헌금(십일조)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본래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로서, 드려진 헌금(십일조)을 통해 교회는 하나님의 자비와 영광을 드러내는 많은 선한 일들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The offering is our confession that everything which we have originally belongs to God, not us. And through offering churches can do many good works to reveal
the mercy and glory of God.

그리스도인의 삶 The Christian Life

1.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purpose of the Christian life?
A: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It is to glorify, praise and enjoy God forever.

2.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How may we glorify God? (Matt 5: 13-16)
A: 우리 안에서 창조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선한 행위들을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We glorify God by demonstrating our good deeds which God creates in us.

3.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보여야 하는 선한 행실이란 무엇입니까?
What are the good deeds that Christians must demonstrate to the world?
A: 두 가지 계명, 곧 주 너의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는 것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Theses deeds mean that Christians perform the two commandments:
(1)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2)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4. 예수님은 이 두 가지 계명을 재차 어떻게 설명하셨습니까?
How did Jesus explain about the two commandments? (John 13: 34-35)
A: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so you must love one another.

5. 남편과 아내에 관해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결혼의 경우)
What does the Bible teach to you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a husband and a wife? (If married) (Eph 5:22-33)
A: 남편들은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들의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들은 모든 것에서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Husbands ought to love their wives as their own bodies.
Wives ought to submit to their husbands in everything.

6. 부모와 자녀들에 관해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Eph 6: 1-4)
What does the Bible say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parents and children?
A: 부모들은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가르침과 기도 속에서 그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주님 안에서 부모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Parents must not exasperate their children but bring them up in the instruction of the Lord and prayer. Children must obey their parents in the Lord.

7.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What must Christians do with their country? (Rom 13: 1-7; 1Peter 2: 13-16)
A: 국가에 대한 모든 의무들을 주님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번영은 주님께 달려 있음으로 국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Christians must do all of their duties to the country in the Lord,
and pray for it because its prosperity depends on God.

8. 그리스도인들은 직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합니까?
What should Christians think of their job?
(2 Thes 3: 8-12; 1 Tim 4: 4-5)
A: 직업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성실히 일해야 합니다.
They should consider it as holy and work sincerely to reveal the glory of God.

9. 성경은 물질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What does the Bible say about money? (Deut 8: 11-20; Acts 4: 32-35)
A: 성도들은 그들 스스로가 물질을 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으로 얻은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그들은 물질을 버는 일 뿐만 아니라 어떤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성도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 청지기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모든 물질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물질을 관리해야 합니다.
Believers must remember that they do not get money by themselves but with the help of God. Unless God is with them, they cannot do anything including earning money by themselves. And they must remind themselves that they are stewards to God, Therefore, they must manage money according to the good will of God who is the real lord over money.

10. 세계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What should Christians do for the world?
(John 17: 22-26; Eph 1: 22-23)
A: 하나님의 사랑을 보임으로써 세상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고
그래서 세상에 평화가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By showing the divine love, they should make an effort that the world is united in Christ Jesus and peace is in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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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스교회 유투브 온라인 방송 / YouTube Patris Church(불낙지교회)

https://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Patris+Church

: 불신자(不信者)를 주님 앞으로
: 낙심한 자(落心者)를 주님 앞으로
: 지체하는 자(遲滯者)를 주님 앞으로

설교자들을 돕기 위한 자료를 제공합니다.
기본 자료를 이용하여 자유롭게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에 쫓기며 시달리는 설교자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한 주제를 갖고 4회 정도 성경에서 합당한 본문을 선택한 후에 설교를 진행합니다.
예를 들면 '사랑' 이란 주제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설교를 준비합니다.

1. 창세기 3:21, 가죽 옷 사랑
2. 창세기 6:14, 역청과 사랑
3. 창세기 9:20-27, 셈과 함과 야벳의 사랑
4. 창세기 19:8, 아무 짓도 하지 말라

이러한 식으로 본문을 선택하면 사랑에 대한 주제로 시리즈 설교가 가능합니다.
성경을 이러한 주제로 관찰한다면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요한계시록까지 수 십회 이상 설교가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를 중심으로 전 교인 성경 읽기와 묵상을 제공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나의 제안)

2023년 매일 성경 읽기를 계획한다면 "사랑"이란 주제로 성경을 읽어봅시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구절을 내가 원하는 색으로 표시합니다(예를 들면, 노랑, 파랑, 빨강.....)
그러면 2023년을 마감할 때는 내가 표시한 성경의 색갈만 들추면 모두 사랑에 대한 말씀을 찾게 됩니다.
이렇게 성경을 읽으면서 그 주간에 읽은 말씀 중에서 사랑에 관한 본문을 선택하여 주일 설교, 수요 성경공부 및 기도를 진행하면 목회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랑에 관한 자료는 2020년 1월 19일 주일 설교 원고를 기초 자료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처음 원고를 수정하여 up grade 하여 수정 보완합니다.
설교가 아니라 설교를 할 수 있는 자료를 소개합니다.
설교자들의 입장에서 응용하여 더 은혜롭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1년에 성경 일독을 계획한다면 주간 성경 읽기 본문 중에서 사랑에 관한 주제를 찾아 주일 설교 본문으로 선택합니다.
본문을 선택한 후에는 성경에서 사랑이란 의미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이해한 후 사랑의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는 내용으로 원고를 작성합니다.
설교 내용은 본문에 충실하되 적용을 위해서는 개 교회의 현장을 중심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기 위해 친히 말씀이 육신되어 인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의 죄를 사해 주시고, 율법의 정죄와 저주에서 풀어주셨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주시고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인간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함께 보시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1서 4:16~19)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한1서 4:9~10)

❑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는 우리가 당연히 갖춰야 할 양심이자 이성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그분의 뜻에 합당할까요?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신명기 5: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한복음 14: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태복음 22:37~39)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가복음 14:26)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21)

❑ 형제자매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당연지사
예수님은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형제자매를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실제적인 일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형제자매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한복음 13:34~35)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한1서 4:7)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베드로전서 1:22)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1서 3:18)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요한1서 4:12)

관련된 하나님 말씀:


『창조주만이 이 인류를 아끼고, 이 인류를 사랑하며, 창조주에게만이 이 인류를 내버리지 못하는 참된 마음이 있다. 또 창조주만이 이 인류를 긍휼히 여기고 모든 피조물을 아낀다. 그의 마음은 인류의 일거수일투족에 이끌린다. 그는 인류의 사악하고 패괴된 모습에 분노하고 근심하고 슬퍼하며, 인류가 회개하고 신복하는 모습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마음을 되돌리고 축하한다. 그의 모든 마음과 생각은 인류를 위해 생기고 움직이며, 그의 소유와 어떠함은 인류를 위해 발현된다. 또한 그의 희로애락은 인류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인류를 위해 바삐 움직이고, 인류를 위해 조용하게 자신의 생명을 모두 바치며, 인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의 일분일초를 기여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은 아낄 줄 몰랐지만 자신이 손수 창조한 인류는 늘 아껴 왔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인류에게 주었다…. 그가 조건도 보상도 없이 긍휼과 관용을 베푸는 것은 오로지 인류가 그의 눈 아래에서, 그의 생명의 공급 아래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또 언젠가 인류가 다시 그의 앞에 돌아와 그가 바로 인류에게 생존을 위한 자양분을 공급하고 만물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그분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전능자는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면서도 전혀 지각이 없는 사람을 혐오한다.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야 사람에게서 오는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찾으려 한다. 너의 마음과 영을 찾아 네게 물과 음식을 공급함으로써 너를 깨우고, 네가 더 이상 목마름과 굶주림을 겪지 않게 하려 한다. 더없이 피곤할 때도, 이 세상이 처량하다고 조금 느껴질 때도 방황하거나 울지 마라. 전능하신 하나님, 지키며 바라보는 그이가 네가 언제 돌아오든 너를 안아 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샘물처럼 끊이지 않고 흘러 너와 나에게, 그에게, 또 진심으로 진리를 찾고 하나님의 나타남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베푼다.』















1/4분기 성경 읽기

2023년 제 1 주 / 1월 1일 - 7일
주간 성경 읽기표 참조
범위 / 창세기 1장 - 창세기 19장
          마태복음 1장 - 6:18

1. 교인들은 매일 성경 읽기표에 따라 성경 읽기를 실천합니다.
2. 설교자는 매일 주간 범위 전체를 읽고 주제에 맞는 본문을 구약과 신약에서 선택합니다.
3. 한 주일 전에 주보에 설교 제목과 본문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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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주요 용어 설명 #. 1 사랑

* 자료 제1차 사용일 / 01-19-2020(주일)
* 자료 제1차 수정 일 / 05-30-2022(월)

사랑의 정의 : 덮어주는 것이다!
암송 성구 : 베드로 사팔(베드로전서 4:8)
- 베드로전서 5장
  베드로후서 3장
  따라서 베드로 사팔이라고 하면 베드로전서를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 God is Love.
Θεὸς ἀγάπη ἐστίν(데오스 아가패 에스틴)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Whoever does not love does not know God, because God is love.) 

요한일서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And so we know and rely on the love God has for us. God is love.
Whoever lives in love lives in God, and God in him.


에로스 —“낭만적 사랑”
에로스 는 누군가에 대한 강렬한 성적 욕망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인들은 종종 누군가가 자신의 말이나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열정적이고 압도적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정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로스 는 빨리 통치하지 않으면 매우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에로스의 두 가지 예를 찾습니다 .
삼손은 그것을 알아내는 데 더디었지만 Delilah에 대한 그의 열정이 그에게 역효과를 낸 후 마침내 에로스 의 위험을 이해 했습니다. Samson은 아마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신에 대해 약간 과신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에게 큰 힘을 축복 해 주셨지만, 그가 상식이나 충동을 통제하는 축복을받지 못한 것은 분명합니다.

삼손은 창녀들과 함께 잠을 자고 ( 사사기 16 : 1 ) 복수로 곡식 밭 전체를 불태 웠습니다 ( 사사기 15 : 5 ). 그러고 나서 그는 들릴라를 만났고 (사사기 16 장) 그녀에게서 손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블레셋 사람들의 스파이 였고, 우리가 알다시피, 그녀는 그를 속여 그의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그녀에게 말하도록했습니다. 나중에 그가 잠든 후에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을 모두 깎고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체포하고 그의 눈을 뽑았습니다.
다윗 왕은 또한 어느 날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손을 잡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둘 다 이미 결혼했지만 그는 즉시 밧세바로 보내 그녀와 친밀해질 수있었습니다. 몇 달 후, 그녀는 그에게 자신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David는 즉시 남편의 죽음을 계획하기 시작합니다.
그리스인들은 에로스에 대한 정의가 정확 했던 것 같습니다 . 매우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필리아 —“애정 어린 사랑”
모든 사랑은 어떤 식 으로든 애정이 있지만, 필리아 사랑은 열정이나 성적 충동을 포함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좋은 친구 사이의 사랑이나 당신과 당신이 존경하거나 존경하는 사람 사이의 선의에 가깝습니다.
우리 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사이의 필리아 사랑을 봅니다 . 그들은 예수님이 모인 엉뚱한 사람들로 시작했지만, 결국 그들은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도 계속 함께 사역 할 수있는 좋은 친구가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또한 필리아 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정의하는 일종의 사랑이라고 지적했습니다 .

“이로써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 셨기 때문에 사랑을 알게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형제들을 위해 우리의 삶을 내려 놓아야합니다.” 요한 일서 3:16
그는 18 절에서 계속해서 말합니다.
“내 어린 자녀들이여, 말이나 언어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로 사랑합시다. 그리고 이것으로 우리는 우리가 진리에 속하고 그분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확신 할 것임을 압니다.”
Philia 는 장기간에 걸쳐 낭만적 인 관계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에로스 사랑에 피드백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 사이에서 필리아 는 홀로 서 있습니다.

Storge — "친숙한 사랑"
storge 는 필리아 (친구 간의 사랑) 와 혼동 될 수 있지만 가족이 서로에 대해 느끼는 사랑과 더 관련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 대한 사랑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쉽게 깨지지 않는 매우 강한 유대감입니다. 물론,의 에로스 (낭만적 인 사랑)와 필리아 종종로 진화 (애정 사랑) storge 관계가 성장하고 깊어하지만 같은 storge가 더 부모와 아이들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예를 볼 storge 아버지 하나님 자신과 성경의 시작에 있습니다. 그의 아들 예수에 대한 그의 큰 사랑은 특히 마태 복음 3:17 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
“그리고 갑자기 하늘에서 '이는 내가 기뻐하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음성이 들렸다.”
storge의 다른 훌륭한 예 는 다음과 같습니다.

  • 예수에게 종을 고쳐달라고 요청한 백부장 ( 누가 복음 7 : 1 ~ 10 , 마태 복음 8 : 5 ~ 1 3)
  • 귀신 들린 딸을 구해달라고 예수님 께 간청 한 여인 ( 마태 복음 15 : 21 ~ 28 )
  • 예수 께 딸이 죽을 뻔했기 때문에 고쳐달라고 간청 한 회당장 야이로 ( 막 5 : 21 ~ 24 ).

Pragma — "지속적인 사랑"
결혼하고 한동안 결혼했다면 신혼 여행이 끝날 때가 온다는 것을 잘 알고있을 것입니다. 
에로스 둘 다 가지고 멋진의에 정착했다.
storge/ 필리아 혼합 생활은 명랑하게 따라 간다.
그러나 당신이 충분히 오래 지속된다면, 결국 당신은 지속적인 사랑 인 pragma 를 갖게 됩니다.

πρᾶγ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4229

1. 되어진 일,  2. 되어질 일, 3. 사물
발음 [ pragma ]
어원 / 423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이루어진 일, 사실, 무엇이든지(마18:19), 사실, 내력, 일(눅 1:1, 행 5:4, 고후 7:11, 약 3:16, 히 6:18)
신약 성경 / 11회 사용

Pragma는 영어 단어 pragmatic을 얻는 곳입니다.
시간의 시험을 견디는 실용적인 사랑입니다.
결혼 한 지 50년이 지난 남편과 아내가 갖고 있는 사랑이고, 그들은 여전히 손을 잡고 키스하고 싶어합니다.
열정이 하얗게 뜨거워지고 빠르게 사라지는 에로스 와는 반대로 프라그 마는 고급 와인과 같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장하고 진정으로 특별한 것으로 성장합니다.
성경에는 지속적인 사랑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가 많지 않지만,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해 읽을 때 그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께서 마침내 아들을 축복 해 주실 때까지 수십 년 동안 결혼했습니다.
그것은 소요 프라그를 긴 수명의 업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동안 다운을 지속하는 것은 실현하기 위해 지난에 몇. 결국 하나님은 창세기 21:1~7 에서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

우리는 또한 룻기에서 룻과 보아스와 함께 pragma 의 힌트를 봅니다 .
보아스가 룻과 결혼하기로 합의한 후, 그들의 결혼 생활은 충분히 오래 견디어 아들 오벳이 성장하여 제시라는 아들을 낳았고 그는 다윗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야곱과 라헬이 프라그마를 가졌으나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창 35: 6-20 ).
그녀에 대한 Jacob의 놀라운 사랑을 감안할 때, 우리는 그들이 결국 pragma를 가질 것이라고 가정 할 수 있습니다 .
그들은 확실히 eros 와 storge를 가지고 있었다 .

 

Philautia — "자기 사랑 / 자기 연민"
자기애 는 본질적으로 건강에 좋지 않을 수 있지만, 박애 는 건강한 자존감을 의미합니다. Psychology Today의 Neel Burton 박사는 자존감을“다른 사람의 가치와 비교하여 우리 자신의 가치에 대한 감정적 평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고 자신과의 관계를 반영하고 결정하는 매트릭스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세상에.”
그러므로 우리가 건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게하는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올바른 사랑을주고받을 수있는 좋은 자존감이 있습니다. 자존감이 좋으면 박애가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philautia 를 건강한 음식을 먹고,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운동을하는 자기 연민 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아프면 필요한 약을 복용하거나 기분이 나아질 수 있도록 의사를 찾아 갈 수 있습니다. 자기 연민이 없었다면 박애 가 없었을 것 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philautia 의 좋은 예 는 Daniel입니다. 그와 그의 친구 Hananiah (Shadrach), Mishael (Meshach), Azariah (Abed-Nego)가 바빌로니아 군대에 잡혔을 때 그들은 칼데 아어와 바빌로니아 문화를 배우기 위해 느부갓네살 왕의 궁전으로 끌려갔습니다. 왕은 그들에게 매일 맛있는 음식과 포도주를 주었지만 다니엘은 그러한 불경건 한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 히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도 그렇게하도록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내시들에게 하나님을 기리기 위해 열흘 동안 채소 만 먹고 물만 마시 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10 일이 지나자 소년들은 다른 포로 소년들보다 건강 해 보였습니다.
다니엘은 주로 하나님 께 영광을 돌리고 있었지만 그의 성실함 덕분 에 그는 자신이 바빌론에서 겪고있는 시련을 견딜 수 있도록 건강을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이 네 젊은이에 관해서는 하나님 께서 그들에게 모든 문학과 지혜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모든 환상과 꿈을 이해했습니다.” 다니엘 1:17

Ludas — "Playful Love"
사랑에 빠진 적이 있다면 의심 할 여지없이 ludas를 느꼈을 것 입니다. 뱃속의 나비, 빨라진 심장 박동, 사랑의 관심이 문을 통과하기를 기다릴 때 느끼는 불안입니다. 데이트의 초기 단계에서하는 유혹과 놀림, 놀기입니다. 일반적으로 관계를 구축하는 것보다 재미에 더 중점을 둡니다.
성경에서 루 다스 사랑 의 예는 솔로몬 왕과 솔로몬의 노래 책에 나오는 알려지지 않은 처녀 사이의 것입니다. 처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녀의 가족이 솔로몬에게 고용되었다고 믿습니다. 전도서 9 : 9 에 따르면 , 그녀는 결국 그의 첫 번째 아내가되었습니다 (즉, 699 명의 다른 여성과 결혼하고 300 명의 첩을 기르기 전에).
솔로몬이 악보로 썼던 솔로몬의 노래 전체 책은 서로에 대해 느낀 유혹과 그리움으로 넘쳐납니다. 노래의 언어는 SoS 4 : 3–5에서 약간 까다로워집니다 (그것을 찾아 보겠습니다. 그 당시에는 다소 매운 언어였습니다).
솔로몬과 처녀는 루다 와 에로스를 모두 사랑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아가페 —“무조건적인 사랑”
아가페 는 그리스의 모든 유형의 사랑 중에서 가장 특별하고 가장 존경심이 많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의 사역 내내 반복해서 언급하는 종류이며 모든 기독교 신앙이 포함하는 것입니다.
아가페 는 타인에 대한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인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그것은 이타적이고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돌보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수님 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 셨을 때 아가페 사랑을 완벽하게 예시하셨습니다 . 그의 고통은 우리가 자유롭게 될 수 있도록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모두 가지고이라고 입을 딱 벌리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어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37 ~ 39 : 마태 복음 22 장을 . 이 성경에서 예수님은 사실상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가장 큰 계명을 우리에게 주실 때 바리새인의 질문에 단순히 대답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 께서 그에게 말씀 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 번째이자 위대한 계명입니다. 두 번째는 그와 같습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합니다. ' ”
예수님은 아가페 사랑 에 대해 제자들과 수천 명의 다른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가르치 셨으며 , 그가가는 곳마다 그것을 공개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 산상 수훈에서 무수한 치유, 나사로를 죽은 자에서 부활시키는 것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는 것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아가페 사랑 의 완벽한 구체화 이셨습니다 .
예수님은 우리가 가진 사랑의 가장 훌륭한 모범 이시며 우리 모두가 매일 베끼려고 노력해야 할 분입니다.
상황에 따라 우리는 모두 다른 유형의 사랑을 경험하고 있지만, 아가페 는 집중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랑 입니다. 아가페 사랑 을주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되는 것입니다.
이번 밸런타인 데이에 예수님처럼 사랑을 줄 수있는 방법을 직접 알아보세요. 다른 사람을 우선시하고 관대하게 사랑하는 것을 매일의 목표로 삼으십시오. 하나님은 믿을 수없는 방법으로 당신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믿음, 소망, 사랑,이 세 가지 안에 거하십시오. 그러나 이들 중 가장 큰 것은 사랑입니다.” 고린도 전서 13:13


사랑(아하바. אַהֲבָה) 

히브리어로 ‘사랑’을 אַהֲבָה(아하바)라고 한다.
이 명사는 ‘사랑하다/좋아하다’란 뜻의 동사 אָהֵב(아헤브)에서 파생했다.
LXX에서는 그리스어로 γαπω (아가파오)라고 흔히 번역된다.
이 단어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표현하는 데서부터 게으름뱅이가 게걸스럽게 먹는 식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념을 전달한다.

동사 피엘형은 16회에 걸쳐 나오는데, ‘잘못된 애정행각’을 표현하여 우상숭배를 경고하기도 한다(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동사 אָהֵב(아헤브)는 대체로 사람 사이의 사랑을 그린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처럼 부자간의 사랑(창22:2)이나 야곱과 요셉의 경우처럼 형제간의 사랑(창37:3)을 그리는가 하면, 노예가 주인을 좋아해 평생 함께 살기를 원하는 것을 표현하기도 하고(출21:8), 이웃사랑을 명령하는 문장에도 사용된다(레19:18). 성도는 나그네를 사랑해야 한다(신10:19). 삼손이 데릴라를 사랑했다(삿14:16; 삿16:15). 룻이 나오미를 사랑한다(룻4:15). 엘가나는 브닌나보다 한나를 더 사랑했다(삼상1:5).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사랑했다(창25:28). 히람은 다윗을 사랑하여 국제 동맹을 맺었다(왕상5:1).

이상한 것은 자녀가 부모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사용된 경우가 한 군데도 없다는 점이다. “네 부모를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제5계명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אָהֵב(아헤브)가 아니라 כָּבֵד (카베드)로서 ‘존중하다/순종하다’란 의미이다. 즉, 자녀의 ‘사랑’ 대신에 ‘도리’를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효(孝)’라는 단어도 한글성경에는 오로지 디모데전서 5장 4절에 딱 한 번 나올 뿐, 구약성경에는 전혀 없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딤전5:4, 개역).

이 문장의 “효”는 그리스어로 ἀποδίδωμι (아포디도미)를 번역한 것인데, 새번역/공동역은 이를 “갚다/보답하다”라고 번역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אָהֵב(아헤브)가 사용된 경우는 매우 다양하다. 식도락(창27:4)을 표현하기도 하고, 취향으로서 기름(잠21:17)이나 은(전5:9)이나 선물(사1:23)을 좋아하는 경우,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시119:47), 율법(시119:97), 언약(시119:119), 교훈(시119:159)을 좋아하는 경우에 이 단어가 사용된다. 사람들은 마땅히 선(암5:15), 진리와 평화(슥8:19), 구원(시40:16), 지혜(잠29:3), 그리고 하나님(신6:5)을 사랑해야 한다는 표현도 많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한다는 표현에도 이 동사를 사용한다(신4:37: 사43:4; 말1:2).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것들로는 자기 백성 외에도 시온의 성문(시87:2), 정의와 공의(시33:5), 성전(말2:11)이 있다. 이와는 반대로 사람들이 악(시52:3), 죽음(잠8:36), 허무(시4:2), 저주(시109:17), 거짓 맹세(슥8:17)를 사랑한다는 표현도 많다. 백성은 방황하기를 좋아하고(렘56:10), 게을러서 잠자기를 좋아한다(사56:10).

우정을 분사형으로 표현하여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라고 표현할 때 이 용어를 차용했다(대하20:7). 강세형 피엘로 사용될 때 ‘아헤브’는 매춘행위를 가리키기도 한다(호2:7; 9:12; 겔16:33, 36-37; 렘22:20, 33; 30:14; 애1:19; 슥13:6).

명사형 אַהַב (아하브)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잠5:19와 호8:9에 두 차례만 등장한다. 잠언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아내를 “사랑스런” 암사슴에 비유했지만(LXX φιλα), 호세아서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여서 에브라임의 우상숭배를 매매춘 행위에 비유하여 “연인에게 제 몸을 팔았다”라고 묘사하였다(LXX γαπω).

추상명사로 쓰일 때는 אַהֲבָה (아하바)로 표현된다. 이 여성명사는 야곱의 라헬 사랑처럼 아내를 향한 남편의 사랑을 가리킨다(창29:20). 이에 빗대어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같은 단어로 표현된다(신7:8; 대하2:11). 요나단과 다윗의 사랑도 이 단어로 표현되었다(삼상18:3; 20:17; 삼하1:6).

지혜서들과 일부 예언서에서 이 단어는 잠언 10장 12절과 같이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는 따위의 순수 추상명사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채소만 있어도 사랑을 곁들인 식사가 좋다”(사역, 잠15:17; 전9:1, 6). 아가서에서 “임의 사랑이 내 위에 깃발처럼 펄럭이어요”(아2:4)와 같이 연인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에 견준 표현이 10차례 나오는데, 이는 저자의 공교로운 솜씨로 느껴진다(아2:5; 5:8; 8:6, 7, 등).

예언서에서는 이 단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맥락에서 긴요하게 사용되고 있다(렘31:3; 호11:4; 믹6:8). 재미있는 것은 미가서 6장 8절에는 ‘아하바’와 ‘헤세드’가 연결되어 나온다는 점이다(אַהֲבַת חֶסֶד).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는 신실함을 가리켜 חֶסֶד(헤세드)라고 하는데, 이것을 한글성경에서는 흔히 “은혜”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은혜는 곧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여 ‘헤세드’를 매우 많이 사용한다.

예를 들면 신명기 5장 10절 한 문장 안에 ‘헤세드’와 동사 ‘아헤브’가 함께 나오지만, ‘헤세드’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란 뜻을 전달하고 있다. 아래를 비교해 보라.

한글개역)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새번역)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공동역)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가톨릭역)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헤세드’도 성경에 언급되는 빈도수가 매우 높다. 창세기에 열 차례 나오고, 출애굽기에는 네 차례, 레위기에 한 차례, 민수기에 두 차례, 신명기에 세 차례, 도합 20차례 언급된다. 이 단어는 특히 시편에 엄청나게 자주 나온다. 시편의 시인들은 이 단어를 무려 128회 사용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좋고 위대한지를 노래하였다.

칠십인역 성경은 히브리어 ‘아헤브’나 ‘헤세드’를 모두 그리스어 ἀγαπάω (아가파오)로 번역하고 있다. 이 번역어는 창세기에 10차례 나오는데, 대부분 동사 (아헤브)의 번역어이다(창27:4, 9, 14; 37:4은 제외). 창세기에 나오는 חֶסֶד(헤세드)는 열 차례 중 여섯 차례나 δικαιοσύνη(디카이오쉬네)라고 번역되어 있다(창19:19; 20:13; 21:23; 24:27, 49; 32:11).

이로써 오늘날 ‘사랑/love’이란 단어가 함축하는 의미는 성경 시대의 언어에 담긴 의미와 매우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더욱 특이한 점은 연인이나 친족이나 친구,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하여 ‘아하바’ 곧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효(孝)’라는 관념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학자들이 더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다만 구약성서의 ‘아헤브’란 용어가 헬라어 역본에서 아가페나 아가파오란 용어로 번역되었는데 이 헬라어 용어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예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는 전문용어로 특정화되었는지를 연구하는 일은 앞으로 놓칠 수 없는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도입 예화) 뉴욕시장 피오렐로 라과디아의 판결

1930년 어느 상점에서 빵 한 덩이를 훔치고 절도 혐의로 기소된 노인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판사가 빵을 훔친 이유를 물었습니다.

"판사님, 저는 지금 이혼한 딸과 살고 있는데 딸은 병들었고 두 손녀딸이 굶고 있습니다.
빵 가게 앞을 지나가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손이 나갔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노인의 말을 들은 방청객들은 노인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공정한 법의 집행을 내려야 하는 판사는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판사는 잠시 후에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사정이 딱하다 할지라도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고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법대로 당신을 판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당시 10달러는 노인에게는 너무나도 컸습니다.
노인의 딱한 사정에 선처를 기대했던 방청객들은 실망스럽다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판결을 내린 판사는 자리에서 일어난 후 법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자를 내밀며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노인이 빵을 훔쳐야만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임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방치한 우리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 10달러를 제가 내겠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한다면 50센트를 이 모자에 넣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돈을 거두어 이 노인분에게 다 주도록 하시오."

그렇게 해서 57달러 50센트의 돈이 모였고, 노인은 돈을 받아서 10달러를 벌금으로 내고, 남은 47달러 50센트를 손에 쥐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습니다.

이 명판결로 유명해진 피오렐로 라과디아(Fiorello La Guardia) 판사는 그 후 1933년부터 1945년까지 12년 동안 뉴욕 시장을 세 번씩이나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법을 어긴 사람에게 벌은 내리는 이유는
다시는 그런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누군가가 저지른 작은 잘못은
온전히 그의 잘못만의 아니라 세상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 생겨나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아픔을 살펴볼 수 있다면
이 세상의 많은 잘못이 생겨나지 않도록
막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오늘의 명언
관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애의 소유이다.
우리는 모두 약함과 과오로 만들어져 있다.
우리는 어리석음을 서로 용서한다.
이것이 자연의 제일 법칙이다.
– 볼테르 





(도입 예화) 희랍의 힐루카 대왕의 이야기

고대 희랍에 전설적인 힐루카 왕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당시 사회가 안고 있던 큰 문제는 미성년자들이 음행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미성년자들의 잘못된 생활을 법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매우 엄한 법을 공포했습니다.
그 법은 음행 하다가 붙잡힌 미성년자들은 두 눈을 뽑아 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동안 세상은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힐루카 왕의 하나 뿐인 아들 젊은 왕자가 붙잡혀 왔습니다.
재판장은 매우 난처했습니다.
장차 왕위를 계승할 왕자의 두 눈을 뽑으면 눈이 없어 볼 수 없는 왕을 세워야 합니다.
왕자에게만 특혜를 주면 법의 공정성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때 주저하는 재판장에게 힐루카 왕은 법대로 집행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왕자의 오른쪽 눈이 뽑혔습니다.
이어서 나머지 왼쪽 눈을 뽑으려고 할 때 힐루카 왕은 자신의 왼쪽 눈을 뽑게 했습니다.
왕자의 잘못도 법대로 처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백성들은 다시는 법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법 정신은 공의에 의해서 지켜져야 합니다.
사랑의 정신은 공의로운 실천에 의해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Love does no harm to its neighbor. Therefore love is the fulfillment of the law.

갈라디아서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The entire law is summed up in a single comma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율법이란 무엇입니까?
레위기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Do not seek revenge or bear a grudge against one of your people, but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I am the LORD.

율법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했습니까?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셨을까요?
인간이 지킬 수 없는 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법을 지키지 못하면 범법자가 됩니다.
범법자는 반드시 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벌을 받아야 할 백성들을 위하여 자신의 눈을 뽑게 했던 힐루카 왕처럼 사랑의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속죄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로마서 3:20
,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Therefore no one will be declared righteous in his sight by observing the law; rather, through the law we become conscious of sin.

로마서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What shall we say, then? Is the law sin? Certainly not! Indeed I would not have known what sin was except through the law. For I would not have known what coveting really was if the law had not said, "Do not covet."

야고보서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For whoever keeps the whole law and yet stumbles at just one point is guilty of breaking all of it.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know that a man is not justified by observing the law, but by faith in Jesus Christ. So we, too, have put our faith in Christ Jesus that we may be justified by faith in Christ and not by observing the law, because by observing the law no one will be justified.

우리 말에는 "사랑" 이란 단어가 하나뿐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을 기록한 '코이네 헬라어'와 '헬라어'에는 사랑이란 단어를 다양하게 사용합니다.
먼저 사랑이란 다양한 단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랑이란 단어의 의미를 분명하게 살펴야 하는 이유는 언어의 혼돈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범위가 매우 넓습니다.
문제는 현대인들의 언어가 정확한 의미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LOVE)과 좋아하는 것(LIKE)은 분명하게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사랑이란 자기 희생과 헌신이 있습니다.
반면에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내려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것을 마치 사랑하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예를 들면 나라를 사랑한다는 대상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모를 사랑한다.
형제를 사랑한다.
친구를 사랑한다.
애인을 사랑한다.
음악을 사랑한다.
꽃을 사랑한다.
개(伴侶犬)를 사랑한다.
고양이(伴侶猫)를 사랑한다.
문학을 사랑한다.
교회를 사랑한다.
학문을 사랑한다.

우리 말에서는 사랑이란 단어 하나만으로도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그러나 헬라어에서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구분하여 사용했습니다.

첫째는 스토르게(storge, φιλόστοργος)(5387. philostorgos) 
Definition : tenderly loving
Usage : tenderly loving, kindly affectionate to.

로마서 12:10(형제를 사랑하여)
형제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Be devoted to one another in brotherly love. Honor one another above yourselves.

둘째는 필리아(philia, φιλία)(5373)
Definition : friendship
Usage : friendship, affection, fondness, love.

야고보서 4:4(세상과 벗된 것)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You adulterous people, don't you know that friendship with the world is hatred toward God? Anyone who chooses to be a friend of the world becomes an enemy of God.

셋째는 에피투미아(epithumia, ἐπιθυμία)(1939)
Definition: desire, passionate longing, lust
Usage: desire, eagerness for, inordinate desire, lust.

마가복음 4:19(욕심),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but the worries of this life, the deceitfulness of wealth and the desires for other things come in and choke the word, making it unfruitful.

누가복음 22:15(원하고 원하였노라)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And he said to them, "I have eagerly desired to eat this Passover with you before I suffer.


넷째는 에로스(eors, Ἔρως)
성경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단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연정과 성애의 신이다.
로마 신화에서 아모르 또는 큐피드와 같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고대 그리스어로 주로 이성에 대한 강렬한 성적 욕구를 의미하는 보통명사가 신격화된 것이다.

(예화) "토마스 불핀치(Thomas Bulfinch, 1796. 7. 15~ 1867. 5. 27)" 신화(mythology)에서 "아폴로와 다퓌네(Apollo and Daphne)"

희랍 신화에 아폴로와 다퓌네라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큐피트는 신비한 활과 화살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금촉 화살입니다.
금촉의 화살을 맞으면 누군가를 사랑하게 합니다.
또 다른 화살은 납촉 화살입니다.
납촉 화살을 맞으면 사람을 증오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런 화살을 맞으면 맞은 사람은 어떤 화살을 맞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느날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 장군 아폴로가 많은 사람들의 환영으로 받으며 성내로 들어옵니다.
그때 큐피트가 작은 활과 화살을 갖고 있었는데 아폴로는 큐피트에게 그런 것은 전쟁을 위한 무기이지 어린 아이들이 갖고 놀이하는 것이 아니라며 큐피트를 꾸짖었습니다.
비록 큐피트가 어렸지만 아폴로 장군의 으시대는 꼴을 싫어하여 아폴로에게 금촉 화살을 당겼습니다.

그리고 다퓌네는 숲의 신의 딸이었는데 다퓌네에게 납촉 화살을 쏘았습니다.
아폴로가 숲의 신의 딸 다퓌네를 보는 순간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미친듯이 다퓌네를 쫓아가면 다퓌네는 그 많은 여인들이 흠모하는 아폴로를 보기 싫다며 도망칩니다.
쫓고 쫓기는 사랑과 미움의 전쟁은 계속되면 될 수록 아폴로의 마음은 점점 더 다퓌네를 향하여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어느 날 아폴로는 오늘이 기어이 다퓌네를 붙잡겠다며 사력을 다하여 쫓아가서 드디어 다퓌네의 허리를 부둥켜 안았습니다.
그때 다퓌네는 아버지 숲의 신에게에 도움을 청합니다.
다급한 딸의 외침을 듣고 다퓌네를 나무로 변하게 만들었지요.
아폴로가 다퓌네의 허림을 부둥켜 안는 순간 눈을 감았다가 떠 보니 다퓌네의 허리가 아니라 나무 기둥이었습니다.
얼마나 허망할까요?
다퓌네의 치렁치렁한 머리는 나뭇잎이 되었고
다퓌네의 두 다리는 나무의 뿌리가 되었으며
다퓌네의 두 팔은 나무 가지가 되었습니다.
아폴로는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이 나무가 되었기에 이렇게 외칩니다.
"너는 이제부터 영원한 나무가 되어라!"
(You are ever green tree forever!)
이렇게 부르는 것도 서운하여 마라톤 우승자에게 월계수나무로 만든 월계수 관을 씌워주는 전통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다섯째는 아가페(agape, ἀγάπη)(26)
Definition : love, goodwill
Usage : love, benevolence, good will, esteem; plur: love-feasts

마태복음 24:12(사랑이 식어지리라)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Because of the increase of wickedness, the love of most will grow cold.

누가복음 11:42(하나님께 대한 사랑)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
Woe to you Pharisees, because you give God a tenth of your mint, rue and all other kinds of garden herbs, but you neglect justice and the love of God. You should have practiced the latter without leaving the former undone.

요한복음 5:42(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but I know you. I know that you do not have the love of God in your hearts.

사랑이란 단어가 우리 말처럼 단순하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필요한 단어를 사용하므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한 예를 성경에서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노련한 어부이었지만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여 피곤하고 지쳤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져보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순식간에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졌습니다.
그러자 그물을 잡아 당기면서 얼마나 많은 고기가 잡혔는지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고 말씀하셨던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잡은 물고기를 구워 아침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가 사용한 사랑이란 단어는 "필리아" 라는 단어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단어는 "아가페"와 "필리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과 두번째는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세번째는 필리아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아가페라는 사랑은 베드로처럼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입장에서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변함없이 사랑하고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헌신적인 사랑으로 마치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처럼 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필리아라는 사랑은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과 같은 사랑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물었을 때 어떻게 베드로가 주님에게 아가페라고 대답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필리아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을 헤아리셨던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네가 정말 나를 필리아할 수 있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예 나는 주님을 필리아 할 수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많은 신혼부부들이 예식장에서 주례와 증인들 앞에서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 사랑할 것을 다짐하고 약속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부부들이 서로 헤어지고 있습니까?

인간들의 사랑이란 이렇게 약속을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시리라는 말씀은 인간들이 배신하고 떠나버려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은 "용서하는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1st. 가죽옷(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The LORD God made garments of skin for Adam and his wife and clothed them.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런데 나무잎은 해가 뜨면 곧 잎이 마르고 시들어버립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짐승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죽옷을 아담과 하와에게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의 특징은 짐승을 잡아 죽일 때 생명을 잃은 짐승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은 피가 없는 옷 즉 용서가 없는 옷입니다.
반면에 가죽옷은 짐승의 피가 있는 옷입니다.

성경은 피를 생명이라고 합니다(신명기 12:23)

다만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지 못하리니.
But be sure you do not eat the blood, because the blood is the life, and you must not eat the life with the meat.

성경은 피를 용서라고 합니다(히브리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In fact, the law requires that nearly everything b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


용서의 특징은 덮어주는 것입니다.

가죽옷으로 덮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창세기 3:21)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으로 덮어주셨습니다.

방주의 안과 밖을 역청을 바르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창세기 6:14)
노아가 방주를 만든 나무를 '잣나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개역 개정판 성경에서는 '고페르 나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역청을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역청을 "코페르"라고 합니다. 코페르라는 단어는 "속죄" 라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속죄제 제물의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피로 덮는 용서가 완성된 것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므로 모든 사람의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예수께서 흘리신 피를 "화목제"라고 합니다.
 
화목제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사랑
요한일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인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화목제를 히브리어로 "제바흐 쉘라밈" 이라고 합니다.
제바흐제물, 쉘라밈평화(샬롬의 복수형)

화목제 제사의 특징

첫째는 암수 모두 바칠 수 있다.

둘째는 기름과 콩팥을 드린다.
(기름이 잘 타기 때문이다)

셋째는 남은 제물은 바친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이 나눠 먹을 수 있다.
(단 3일 이내에 만 먹어야 하고 그 후에는 반드시 불에 태워버려야 한다)

넷째는 평등 의무 제사
화목제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배려하는 산비둘기, 집비둘기의 새끼는 제물을 받지 않는 평등의무 제사였습니다.
즉 성막을 지을 때에는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에게 똑 같은 속전을 거두시게 하신 것처럼, 평등하게 부담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화목제 제사의 근거
로마서 3:23-26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for all have sinned and fall short of the glory of God,
and are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 through the redemption that came by Christ Jesus.
God presented him as a sacrifice of atonement, through faith in his blood. He did this to demonstrate his justice, because in his forbearance he had left the sins committed beforehand unpunished.
he did it to demonstrate his justice at the present time, so as to be just and the one who justifies those who have faith in Jesus.


(예화) 가정과 화평

메이어라는 랍비는 설교를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그는 매주 금요일 밤이면 예배당에서 어김없이 설교를 했는데, 몇 백 명씩 한꺼번에 몰려 들어 그의 설교를 들었다.
그들 가운데 메이어의 설교듣기를 매우 좋아하는 여인이 있었다.
다른 여자들은 금요일 밤이되면 안식일에 먹을 음식을 만드느라 바쁜데, 그 여자만은 이 랍비의 설교를 들으러 나왔다.
메이어는 긴 시간 동안 설교를 했고 그 여인은 그 설교에 만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남편이 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내일이 안식일인데 음식은 장만하지 않고 어디를 쏘다니고 있느냐며 화를 내며 물었다.
"도대체 어디를 갔다 왔어!"
"예배당에서 메이어 랍비님의 설교를 듣고 오는 길이예요"
그러자 남편은 몹시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 랍비의 얼굴에다 침을 뱉고 오기전에는 절대로 집에 들어올 생각은 하지도 말어!"
집에서 쫓겨난 아내는 할 수 없이 친구 집에서 머물며 남편과 별거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메이어는 자기의 설교가 너무 길었기 때문에 한 가정의 평화를 깨뜨렸다고 몹시 후회했다.
그리고는 그 여인을 불러 눈이 몹시 아프다고 호소하면서 '남의 타액으로 씻으면 낫게 된다는데, 당신이 좀 씻어 주시오'하고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여인은 랍비의 눈에다 침을 뱉게 되었다.

제자들은 랍비에게 '선생님께선 덕망이 높으신데, 어째서 여자가 얼굴에 침을 밷도록 허락하셨습니까?'하니 랍비는 이렇게 말했다.

"가정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는 그 보다도 더한 일이라도 할 수 있다네."

사랑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 아들이 화목제 희생의 제물이 되어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일에 이르기를 원하는 사랑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무섭게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던 시대에 기록된 말씀으로 빨리 예수님 오시기를 갈망한 예언서입니다.
그런데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주님은 다시 오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예수님을 알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which God gave him to show his servants what must soon take place. He made it known by sending his angel to his servant John.

* 5034, 속히(타코스, tachŏs) τάχος
- 시간적으로 빠른 이란 의미가 아니라 "반드시" 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He who testifies to these things says, "Yes, I am coming soon." Amen. Come, Lord Jesus.

* 5035, 속히(타쿠, tachü) ταχύ
- 서둘러서, 빨리, 지체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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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히" 라는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설교한 자료를 소개합니다.
요한계시록 편에 보면 좀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차 설교일 / 03-31-2019

속히 될 일(요한계시록 1:1, 22:6)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which God gave him to show his servants what must soon take place. He made it known by sending his angel to his servant John.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The angel said to me, "These words are trustworthy and true. The Lord, the God of the spirits of the prophets, sent his angel to show his servants the things that must soon take place."   

* 속히 될 일(What must soon take place) - 곧 일어날 일, 반드시 일어날 일

속담에 ‘구슬이 세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단편적인 지식과 정보를 하나로 연결해야만 바르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지난 두 주일에 소개했던 설교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요한계시록은 오직 예수로만 읽어야 합니다.

프리즘(Prism)은 빛을 굴절 분산시키는 광학도구를 사용하여 햇빛을 통과시키면 프리즘을 통과한 햇빛은 무지개 색으로 분해되어 영롱하게 나타납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들었던 성경에 관한 모든 단편적인 정보들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렌즈로 통과시켜 주님 오실 그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일까?

요한계시록은 계시의 말씀입니다. 계시란 하나님의 구원 방법과 계획이란 비밀을 알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언의 말씀입니다. 예언이란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주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편지의 말씀입니다. 편지는 직접 찾아가서 전할 수 없는 내용을 글로 적어 보낼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였고 예언하셨던 말씀을 글로 적어 보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속히 될 일’이란 무엇일까?

요한계시록을 읽고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자세는 먼저 요한계시록의 범위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범위를 성경 전체로 확장하는 것이 바람직한 성경의 교훈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22장 19절에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속히 될 일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속히”라는 단어가 요한계시록과 성경에서 사용된 말씀을 살펴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속히”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 수가 본문을 포함하여 8구절로 소개됩니다.
(1:1, 2:6, 3:11, 11:14, 22:6, 22:7, 22:12, 22:20).

“속히” 라는 단어가 사용된 모든 구절들을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제한된 시간 때문에 설교의 주제에 합당한 구절들을 살펴보면 ‘속히 될 일’이란 22장 6절에서 “속히 되어질 일” 이라고 소개합니다.
이어서 “속히 될 일” 이란 3장 11절, 22장 7절과 12절 그리고 20절에서 “속히 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히 될 일”은 “속히 오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기가 대략 기원 후 96년이라고 합니다. 2천 년 전에 속히 될 일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직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속히 될 일 즉 주님의 재림이 아직도 실현되지 않은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시간(時間) 개념(槪念)

속히 될 일에 대해서 시간 개념으로 해석하면 ‘빠르다’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속히 이루어질 일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당장 오늘 아니면 내일 아니면 내 생전에 오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목격했던 제자들은 그들이 살아있을 동안에 주님이 오실 것으로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면서 제자들은 그들이 만났던 주님에 대한 증거를 후대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복음서를 시작으로 신약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만일 주님이 제자들 생전에 오셨다면 성경이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실 주님이 오시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베드로후서 3장 8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다르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인위적인 방법이므로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1:6∼7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장소(場所) 개념(槪念)

속히 될 일에 대한 해석을 시간적으로 해석하면 반드시 오실 장소에 대한 궁금증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어디에’ 오실 것을 찾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느 특별한 장소를 마치 계시를 통해 받은 것처럼 소개합니다.

예를 들면 과천, 피지 섬, 브라질, 계룡산과 같은 곳이 될 것이라며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인물(人物) 개념(槪念)

속히 될 일을 시간과 장소로 해석하면 그 다음에는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어느 특정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1992년 시한부종말론의 이장림,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지상낙원 피지 섬으로 집단 이주시키는 사례(은혜로교회 신옥주), 두 증인 중 한 사람이라며 영원불멸의 교주(전도관 박태선),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므로 교인들은 전 재산을 정리해서 브라질에 마련한 4천만평의 땅으로 집단 이주하여 마지막 때를 준비하라는 교회도 있습니다.

영적(靈的) 개념(槪念)

속히 될 일이란 시간과 공간과 인물 중심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묵시문학의 특징인 영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영적 세계에서는 시간 개념과 장소 개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속히’라는 말은 ‘확실히’ ‘틀림없이’ 라는 속뜻으로 ‘반드시 될 일’이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속히” 라는 의미를 ‘문자적’으로 또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해석하면 본질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묵시문학의 특성을 전제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묵시문학에서 “속히” 라는 의미는 “확실히” 또는 “틀림없이” 라는 뜻으로 “속히 될 일”이란 “반드시 일어날 일”이란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속히 될 일’이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이므로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2천년이 지나도 오시지 않았기에 아마 오시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반드시 실현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전개 이야기)
미국 여성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펄벅 여사는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느 해 중국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그녀가 살던 마을에 백인 선교사의 가족들이 우리 마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신이 분노하여 가뭄이 계속 된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소문은 점점 분노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밤에 마을 사람들이 삽, 곡괭이, 쇠스랑 등 농기구를 들고 펄벅의 집으로 몰려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외국 출장 중이라 집에는 어머니와 어린 펄벅밖에 없어서 아무런 대책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집안에 있는 찻잔을 모두 꺼내 차를 준비하고 케이크와 과일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손님들을 초대한 것처럼 대문과 집안의 모든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어린 펄벅에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도록 하시고 어머니는 바느질감을 잡았습니다.

얼마 뒤 농기구를 든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대문이 굳게 잠기고 집안은 깜깜할 것이라고 여기고 횃불을 들고 펄벅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대문이 열려있어 마당으로 들어섰더니 모든 방문이 열려 있고 방마다 불이 환하게 켜진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또한 방마다 차와 케이크 그리고 과일이 차려진 것을 보고 어리둥절하여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멈칫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정중하게 마을 분들을 맞이하며 “어서 오십시오. 정말 잘 오셨습니다. 방으로 들어오셔서 차라도 한 잔씩 드시면서 말씀하십시오.” 그 말을 듣고 더 어리둥절 하는데 그들 중 어느 한 사람이 횃불을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가자 다른 사람들도 그를 뒤따라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구석에서 놀고 있는 아이와 어머니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차를 마시고 케이크와 과일을 먹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그토록 기다리던 비가 내렸습니다. 훗날 어머니는 어른이 된 펄 벅 여사에게 그날 밤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고 합니다.

“그날 밤 조금이라도 도망칠 방법이 있었다면 도망치다가 잡혀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살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막다른 골목에서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인지라 모든 것을 각오하고 그런 용기를 내어 보았단다.”

그리고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용기는 절망에서 생긴다.” 이 말은 펄 벅 여사가 절망적인 순간에 항상 떠올리는 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속히 될 일은 속히 오리라는 약속으로 반드시 오실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 주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았다는 것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사랑을 새롭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왜 주님께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직 오시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주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속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5: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 급히(ταχύ) 사화하라 - 속히(ταχύ) 사화하라 

(현대인 성경) 타협하라
(공동번역) 화해하여라
(새번역) 화해하도록 하여라

‘사화하다’(유노온, 능동형)는 상처를 준 사람이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사화(사과)는 상처를 준 사람이 해야 하고, 화해는 상처를 받은 사람이 해야 합니다. 사화와 화해가 이루어진 것을 합의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8: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 빨리(ταχύ) - 속히(ταχύ) 

성도들이 속히 해야 할 일은 부활의 소식을 빨리 가서 알려야 합니다. 종말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부활의 소식을 빨리 알리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적인 종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만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지라도 여전히 유대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활의 소식을 전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소식을 함께 나누며 주님 오실 그 날을 함께 준비할 수 있는 믿음으로 무장해야 하겠습니다.

속히 될 일이란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께서 속히 오실 것이라는 사건입니다. 주님이 속히 오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속히 오실 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까?

20:15 -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21:27 -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그러므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야 합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이름은 등과 기름을 예비하는 사람입니다.
등과 기름을 예비하기 위해서 속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것으로 구원받은 것으로 신앙생활의 감격이 없고 감사가 없다면 교회에 다닌다는 것뿐이지 신앙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부족한 것이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을 자랑하며 즐거워 할 것입니다.

아쉬운 것은 요한계시록을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사람들이 “속히 될 일”에 대한 주제를 현실 세계에서 나타는 현상과 징조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시대의 징조와 현상은 잘 몰라도 등과 기름을 예비한 지혜로운 사람들만이 주님을 영접할 수 있다는 비유의 가르침과 같이 “속히 될 일”을 말씀하신 감추어진 은혜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속히 될 일”이란 용어가 요한계시록에서 두 번 사용된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1, 속히 될 일
22:6, 속히 되어질 일

속히 될 일 또는 속히 되어질 일은 무엇인가?

3:11, 속히 오리니(I am coming soon.)
22:7, 속히 오리니(I am coming soon!)
22:12, 속히 오리니(I am coming soon!)  
22:20, 속히 오리라(I am coming soon.) 


속히 될 일은 속히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속히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때는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기를 기준으로 대략 2천

년 전의 예언입니다. 2천 년 전에 예언한 내용이 아직도 성취되지 않았다면 그 예언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정말 그 예언을 믿고 기다리고 있을까요? 인간의 평균 수명이 80 또는 90이라고 한다면 속히 오실 것이란 예언을 믿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속히 오리라고 예언하셨을까요?

미래에 나타날 현상과 징조들을 알려고 할 것이 아니라 짧은 인생을 살면서 반드시 속히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신앙적인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신앙적인 삶은 무엇일까요? 속히 라는 단어가 사용된 성경에 소개된 말씀을 찾아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학창 시절에 시험을 치룬 줄 압니다. 시험 일자가 발표되면 모든 학생들이 시험공부를 합니다. 시험 일자가 중요합니까? 시험을 잘 치룰 수 있는 공부가 중요합니까? 시험이 목적이 아니라 시험을 통하여 학생들의 실력을 향상시키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속히 될 일은 반드시 오실 것을 의미합니다. 반드시 오실 주님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기다리는 것보다 다시 오실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삶이 중요합니다.

속히 오시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에게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입니까? 하고 질문했을 때 부활의 주님께서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속히 오실 주님의 때와 기한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는 성령을 받고 증인의 삶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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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사랑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And we know that in all things God works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him, who have been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아가패 사랑의 힘

첫째, 두려움을 물리치는 힘(요한일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There is no fear in love. But perfect love drives out fear, because fear has to do with punishment. The one who fears is not made perfect in love.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합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힘 이상의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딤후 1:7).
For God did not give us a spirit of timidity, but a spirit of power, of love and of self-discipline.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두려움이란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의 줄임말
(Fear ; False Evidence Appering Real)

반려견을 돌보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처음에 집으로 데려오면 불안하여 부들부들 떨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집 주인은 나를 버리지 않겠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 꼬리를 흔들고
따라다니며 좋아한다고 합니다.

강아지도 이렇게 반응한다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둘째, 성령으로 역사하는 힘(요한일서 4:12∼23)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울이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믿고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면 하나님의 영, 곧 인격을 가지신 거룩한 바람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임재 하시어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그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겠습니까!

셋째,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도록 역사하는 힘(요한일서 4:14∼15)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 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아가페 사랑)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1. 내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보니
슬픔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2. 주의 얼굴 뵙기전에 멀리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3.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예수 모신곳이 그어디나 하늘나라

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모든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많은 성도들이 애창하고 있는
찬송가 438장 “내 영혼이 은총입어(Since Christ my soul from sin set free)”
버틀러(C.F. Butler) 작사
블렉( J.M. Black) 작곡
1898년에 발표한 곡입니다.

본 찬송의 작사자 버틀러(C. F. Butler)의 생애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작곡자 James Milton Black (1856- 1938)
뉴욕  사우스 힐에서 태어났으며, 조기 음악교육으로 작곡가, 성악가, 합창 지휘자, 음악교사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뉴욕의 존 하워드(John Howard)와 무디 신학교의 다이넬 타운어(Daniel Brink Towner)로부터 사사하면서 음악적 기초를 든든히 쌓아나갔으며 1881년경 펜실바니주 윌리암스포트(Williamsport)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1904년부터 생을 마칠 때까지 그곳의 파인스트리트 감리교회(Pine Street Methodist Episcopal Church)의 지휘자, 주일학교 교사로서 활동하면서 많은 찬송곡을 작곡하였습니다. 

그의 최초의 작곡집 “영혼의 송가”(Songs of the Soul, 1894)는 2년 동안에 40만부 이상 팔렸다고 하며, 바로 이어 후속 편 Songs of the Soul, Number Two (1896)를 출간했습니다.
또한 그는 10여권의 복음 성가집을 발간해 낼 정도로 정력적으로 작곡활동을 하였는데, 그간 그가 작곡한 곡은 약 1500곡에 이릅니다.

그가 지은 찬송가곡이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 두 곡 실려 있는,
180장 “하나님의 나팔소리”
438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입니다.
전자는 그가 작사, 작곡한 곡이고
후자는 버틀러가 작사한 시에 그가 곡을 지은 것이죠.

버틀러는 누가복음 17장 20-21절, “바리세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는 말씀을 배경으로, 하나님나라의 현재적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감격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현재적 심령 상태를 그리고 있습니다. 

후렴의,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부분을 원시에 가깝게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O hallelujah, yes, 'tis Heav'n
(할렐루야! 그래요, 그것은 천국이어요)

'Tis Heav'n to Know my sins forgiv'n
(내가 죄 사함 받은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것은 천국이예요)

On land or sea, what matters where?
(땅이나 바다나, 그 어디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Where Jesus is, 'tis Heaven there. 
(주님이 계신 그곳은 천국이어요)


지휘자 토스카니니의 고백을 올려봅니다.

"어려울 때 힘이 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좋은 환경이 아니라고 불평하지 마라.
좋은 환경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아담은 에덴 동산이란 좋은 환경에서도 타락하지 않았는가?
눈물나는 역경에서도 감사를 드리자.
흐르는 눈물로 인해 하나님을 더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역경에 처할수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시어
우리를 보호하시고 힘을 주신다"

(결론을 위한 이야기)

중국 후한을 세운 광무제에게 호양 공주라는 여동생이 있었다고 합니다.
호양 공주가 아끼는 노비가 있었는데 공주의 권세를 믿고 살인을 한 후에 공주의 저택에 숨어서 지냈습니다.
당시 낙양성의 치안을 담당했던 "동선"이라는 관리가 이 노비를 처벌 하기 위해서 공주의 대문 앞에 잠복하고 있다가 공주가 외출할 때 따라 나오는 노비를 붙잡아 그 자리에서 처형했다고 합니다.

공주는 자신의 눈앞에서 아끼는 노비가 죽음을 당하자 오빠 광무제에게 동선이라는 관리를 처형하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에 광무제가 동선을 불러 공주에게 사과하라고 하자 동선은 자신은 사과하지 못하겠고 차라리 죽겠다고 버텼습니다. 이런 광경을 본 호양 공주는 "오빠가 황제가 아니었을 때에는 집에다 죄 지은 사람을 숨겨 주어도 관가에서 잡아가지 못했는데 오히려 황제가 되고나니 오빠의 힘이 줄어든 것 같다."며 짜증을 부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광무제는 웃으면서 "황제가 되었으니 일반 백성 때와 같이 행동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하면서 고집쟁이 관리인 동선을 풀어주고 오히려 상을 주었다고 합니다.

광무제는 여동생 호양공주를 달래고 정직한 관리를 풀어줌으로써 친인척도 달래고 국정의 기강도 바로잡았다는 교훈입니다.

오랜 중국의 역사에서 후한의 광무제가 공신들을 잘 관리한 군주로 뽑힌다고 합니다. 광무제는 자신을 도와서 후한을 세운 공신들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명예를 주었지만 건국 이후 국정에는 손을 떼도록 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의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은혜를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릴 수 있는 그 날이 속히 도래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을 위한 이야기)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중에 "두 노인"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가난한 농부와 부자 상인이 긴 세월을 두고 꿈꾸며 계획했던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납니다.
며칠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던중 가난한 농부가 목이 마르다며 걸음을 멈추고 부자 상인에게 “여보게 저기 마을에 잠시 들려 물을 마시고 갈테니 자네 먼저 가게나” 하고 마을 가장 가까이 있는 허름한 집으로 들어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깜짝 놀랐습니다.
온 식구가 전염병에 걸려 앓고 있었으며 또 며칠을  굶었는지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우선 이것으로 먹을 것을 사세요. 그러면 힘이 날겁니다” 라며 가지고 있는 돈을 내밀었습니다.
농부는 여비가 없어서 여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부자 노인은 예루살렘에 도착해 성지를 둘러보고 예배도 드리며 성찬식도 참석해 은혜를 받았습니다.

몇 달간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부자도 여비가 떨어져 집으로 돌아 오다가 농부의 생각이 나서 그와 헤어졌던 마을에 들어갔을 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성인입니다. 그분이 없었다면 우리 식구는 모두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부자노인은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과연 농부의 행위가 옳은것 이었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순례가 아니라 남을 보살피며 살아가는 삶이야” 라고 중얼 거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이나 경제적으로 소외돼 거리와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연약하고 외로운 자들에게 형제 사랑을 실천했을까?

사실 가난한자들은 불합리한 사회적 환경과 제도의 모순, 부자의 횡포 등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하며 사회의 음지에서 소외된 채 타인의 관심과 배려없인 살수 없다.

그럼 그들을 누가 도와 주어야 할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약함과 사회의 구조적인 악에만 그 탓을 돌리거나 회피하지 말고 또한 조건을 붙여 배척하거나 간과하지 말고 도와줘야 한다.

이것은 공중의 새와 들판의 폴 한포기 까지도 관심을 가지신(마 6:26-29)
하나님의 뜻이며 율법의 대강령이자(마 22:36-40)
하나님께서 당신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가지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자기같이 사랑하라”(레 19:34)고 가난한자들을 맡겨 주셨기 때문이다.

* 1차 수정 완료 / 05-29-2022(주일 저녁)

창세기부터 성경을 읽어가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주제에 맞는 본문은 선택하여 설교하려는 자료를 올리려고 합니다.
함께 나누고 싶은 주제가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며 관심을 갖는 주제를 서로 연구하며 말씀으로 설교자를 변화시켜 교회를 진리의 말씀 위에 든든하게 세워가기를 소망합니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태어날 때 뿐 아니라 세상이 창조되기 전,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 조나단 에드워즈
True Christians are chosen of God from all eternity, not only before they were born,
but before the world was created.
- Jonathan Edwards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를 짓고 방탕하게 살아 멸망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반드시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사람은 버리지 않으시고 떠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을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은 모두 구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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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일 / 01-19-2019

가죽 옷과 어린 양의 피(창세기 3:21, 요한계시록 7:14, 19:8)

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The LORD God made garments of skin for Adam and his wife and clothed them.

요한계시록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I answered, "Sir, you know." And he said, "These are they who have come out of the great tribulation; they have washed their robes and made them white in the blood of the Lamb.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Fine linen, bright and clean, was given her to wear." (Fine linen stands for the righteous acts of the saints.)


(도입 이야기)
덴마크의 작가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 4. 2~1875. 8. 4)’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새 옷을 입고 뽐내기를 좋아하는 임금님이 있었어요. 나라를 돌보는 것보다 옷 갈아입기를 더 좋아했어요.
임금님은 거울 앞에서 떠날 줄 몰랐답니다.
“내 모습 어때?”
“정말 멋있습니다.”

신하들은 임금님 앞에서는 칭찬했지만 돌아서면 흉을 보았어요.
뽐내기 좋아하는 임금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어요.

어느 날 두 사람이 임금님을 찾아왔어요.
이 사람들은 아주 특별한 옷감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었는데 그 옷감은 바보의 눈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신비한 옷감이라고 말했어요.
좋은 옷 입기를 좋아하는 임금님은 당장 이 사람들에게 궁궐의 방 하나를 주며 신하들에게 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언제든지 제공하라며 당장 그 옷을 만들게 하였어요.
두 사람은 베틀 앞에 앉아 마치 옷감을 짜듯이 베틀을 움직이고 있었어요.
여러 날이 지난 후 임금님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지요.
그래서 가장 신뢰하는 신하를 보내어 확인하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그 신하가 방으로 들어갔을 때 신하의 눈에는 아무 것도 안 보였어요.
그렇다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바보라고 말할까봐 아무 말도 못했어요.
드디어 임금님이 입을 바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신기한 옷이 완성되었다며 두 사람은 임금님에게 그 옷을 입혀주었어요.
임금님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옷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임금님도 바보가 되겠지요.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고 두 사람이 입혀주는 대로 옷을 입은 후 그 옷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려고 거리로 나갔답니다.
사람들은 임금님이 벌거벗은 것을 보도 아무 말도 못하고 뒤로 돌아서 웃기만 했답니다.
그러자 어느 한 어린이가 ‘임금님은 벌거벗었다!’ 하고 외쳤어요.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다 같이 ‘벌거벗은 임금님!’ 하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전개 이야기)
심판의 날에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 날에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부끄러운 모습일 수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의 옷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이사야 61:1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구원의 옷(Garments of Salvation)을 어떻게 입어야 할까요?

아담과 하와는 직접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옷을 만들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방법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직접 가죽옷으로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옷을 입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에 의한 구원의 옷을 성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가죽옷(창세기 3:21) - 죄를 덮어주는 옷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자신의 죄를 자기의 방법대로 감추려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만든 옷은 “자기 의”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죄를 덮어주시려고 ‘가죽옷’을 만들어 입혔습니다.
가죽옷이란 죄를 용서받은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방법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 예증 #.1)
노아 홍수 때에 잣나무로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잣나무를 개역 개정 성경에서 ‘고페르나무’ 라고 합니다.
그리고 방주 안과 밖을 ‘역청’으로 바르게 하셨습니다.
역청을 ‘코페르’ 라고 합니다.
고페르와 코페르는 같은 문자로 발음을 나타내는 모음만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 고페르와 코페르의 뜻에는 ‘속죄’라는 뜻이 있습니다.

애급에서 나오기 전에 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른 집안에서는 장자의 죽음과 생축의 초태생이 죽는 일이 없었지만 양의 피를 바르지 않았던 집안에서는 장자의 죽음과 초태생의 죽음으로 인하여 큰 슬픔이 임했습니다.

(현실 예증 #.1)
2019년 10월 9일은 ‘욤 키퍼(Yom Kippur)’라는 공휴일은 ‘욤(Yom)’ ‘날(Day)’을 의미하고 ‘키퍼(Kippur)’는 ‘속죄(Atoinment)’를 의미합니다. 키퍼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고페르, 코페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곧 속죄를 받은 하나님의 의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 예증 #.2)
노아 홍수 후에 구원의 계시가 속죄제사로 말씀하셨습니다.
속죄제사는 개인이 바치는 제물과 백성 전체가 바치는 제물로 구분합니다. 개인적인 속죄제는 짐승의 머리에 개인이 안수하고 그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킨 후에 그 짐승을 잡은 후 피를 받아 제사장에게 드리면 제사장은 그 피를 성소 휘장 앞에서 일곱 번 뿌리고 그리고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회막 문 앞 번제단 밑에 쏟았습니다(레위기 4:6∼7).

그러나 백성 전체를 위한 속죄제사는 두 염소를 선택한 후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한 제물로 바치고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 염소라고 하여 광야로 보냈습니다. 이때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렸습니다(레위기 16:15, 18∼19).

속죄소가 있는 곳은 ‘지성소’입니다.
지성소까지 들어가야만 속죄가 해결됩니다.
이러한 속죄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마 27:51).
성소의 휘장이 둘로 나누어진 것은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히브리서 9: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세마포 옷 -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기 위한 예복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세마포 옷은 하얀 옷을 말합니다. 하얀 옷은 세탁을 잘 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 후 변화하신 주님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13∼15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은 인간의 방법에 의한 인간의 의라고 한다면 가죽옷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방법에 의한 의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로 약속하신 것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요한계시록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희어진 옷은 세마포 옷입니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적용)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요?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시편 132:16
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옷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이 외치리로다. 


제사장의 옷을 입히셨습니다.
대제사장 옷은 청색, 자색, 홍색실로 만들었습니다. 에봇은 금실과 가는 베실로 만들었습니다.

청색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자색은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홍색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피 흘리신 것을 기억나게 합니다.
금실은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가는 베실은 흰색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나타냅니다.

오늘 우리들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인정받았으므로 반드시 제사장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제사장의 옷이란 가죽옷처럼 속죄의 피가 뿌려진 옷입니다. 가죽옷은 속죄제사를 통하여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일반적인 속죄제는 휘장 앞에 희생 제물의 피를 일곱 번 뿌렸습니다. 그러나 대속죄일에 드려지는 속죄제사는 아세셀 염소는 광야로 보내버리고 다른 염소는 그 피를 받아 지성소 안에 있는 속죄소 즉 시은좌에 뿌려야만 용서를 받았습니다.

구원의 완성을 계시하신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는 것은 세마포 옷을 입었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하나님의 의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 될 수 있습니다. 고난주간을 지내는 동안 하나님의 의로 인정받은 구원의 옷을 입고 내가 맡은 삶의 자리에서 구원받은 증거를 눈으로 보여주고 입으로 고백하는 구원의 증인으로 승리하는 복된 한 주간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찬송가에는 오른편과 왼편에 사람의 이름이 소개됩니다.
왼편의 이름은 "작사자"
오른편의 이름은 "작곡자"

♪ 184장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 R, Rowry 작사, R, Rowry 작곡

1.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후렴> 예수의 흘린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2. 나를 정케하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사죄하는 증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3. 나의 죄속하시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는 공로 없도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4. 평안함과 소망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5. 영원토록 내 할 말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찬미 제목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 1826-1899)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 1826-1899)는 미국 펜실베니아 주 태생의 침례교 목사로서 루이스버그대학 (후에 버크넬대학) 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졸업과 함께 모교의 문학교수가 되었으며 후에 모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845년에 침례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웨스트체스터(West Chester)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여러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마지막으로 뉴저지 플레인필드(Plainfield)에 있는 파크아베뉴 침례교회에서 목회를 마쳤습니다.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 1826~1899)목사는 남북전쟁(1861~1865) 직후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던 그때 한손(Hanson)의 침례교회에서 시무했는데(1868 -1875) 어느 날 병든 사람을 돌보다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게 되고 40세가 되는 1866년 부터 본격적인 찬송가를 짓기 시작합니다. 

40세 이후부터 찬송가를 작사·작곡하기 시작한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목사는 스스로 찬송가 작가로 기억되기보다는 설교자로 기억되기를 원했지만 희망적인 찬송을 작사ㆍ작곡하여 보급함으로 수많은 이들에게 심령의 갈급함에 새 희망을 주게 되었고 100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훌륭한 찬송가 작시, 작곡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맥커천(Robert Guy McCutchan, 1877~1958) 목사는 “그의 설교는 불과 몇 천 명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그가 작사 · 작곡한 찬송은 지구상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으며, 이 일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비글로우메인(Biglow-Main) 출판사의 음악 편집자로서 일하면서 'Happy Voices, 1865' 를 시작으로 20권이나 되는 찬송 책들을 출판하였고, 1868년에는 브래드버리의 후임으로 주일학교 노래 편집인이 되었으며, 500여 곡의 어린이 찬송과 복음찬송들을 작곡. 혹은 작사하여 돈(Doane)과 함께 발행한 주일학교 어린이 찬송가와 출판물에 넣었습니다. 

그는《행복의 소리》'Happy Voices, 1865' 등 17 권의 찬송가책을 펴냈는데, 그 중에는 100만 부 이상이 팔린 책도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주일학교협의회 회장을 역임한 그는 대학 교수로도 있었고, 침례교 총회장도 역임하였습니다.  

그의 찬송가로서 우리 찬송가에 실려 있는 것은
1. 무덤에 머물러
2. 성자의 귀한 몸
3. 주 사랑하는 자
4. 나의 죄를 씻기는
5.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6. 날 위하여 십자가의
7.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8. 나의 갈길 다 가도록
9. 주 음성 외에는
10. 울어도 못하네
11.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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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라고? 약한 게 강한 거라고?’…말도 안되는 성경 속 아이러니의 비밀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희망 놓지 말아야’
인간관계 주제 신앙상담…김병삼·김기석·김학철 교수 답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정말 기독교인은 무조건 원수도 사랑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아야 하는 것일까.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 5:39)라는 말씀대로 살다가는 요즘같은 세상에서 소위 ‘호구’가 되는 것은 아닐까.

CBS 유튜브 상담 콘텐츠인 ‘잘잘법(잘 믿고 잘사는 법)’에 소개된 신앙상담 가운데 인간관계에 대한 성경 속 아이러니의 참뜻을 짚어봤다. 조회수가 높은 3가지 주제에 대해 김기석(청파교회) 김병삼(만나교회) 목사, 김학철(연세대) 교수가 답했다.

“하나님, 저 인간은 정말 보기 싫거든요.”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은 절망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 현실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게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희망을 낳고 희망이 있으면 우리가 사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희망 없이도 우리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에게 더 큰 희망을 주고 사랑을 줍니다. 어린아이는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미숙합니다.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미성숙함을 통해, 오히려 발전할 점을 기대하면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아이 뿐만 아닙니다. 바로 앞에 있는 누구도 마찬가지죠. ‘저게 정말 인간이야?’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직장 동료, 선배, 후배, 집안에 있는 골칫덩어리까지도요. 믿음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다른 삶을 살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놓치지 않아 주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힘든 노력이지만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김학철 교수)

“믿는 사람이 용서하라는데, 그게 잘 안 돼요.”

“우리가 용서를 해야 하는 까닭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입니다. 더 이상 피해자로 머물지 않기 위해서라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어로 ‘용서하다’가 포기브(forgive)잖아요.

그저 음절을 나누어 생각해보면 ‘~위하여’라는 뜻인 ‘포(for)’와 ‘주다’라는 의미인 ‘기브(give)’가 합쳐진 겁니다. 즉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그에게 선물을 주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용서가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선물은 잊어버리는 것(forget)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줬던 그 사람이 더 이상 내 삶을 좌지우지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 또한 용서가 우리에게 주는 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던 까닭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생의 가능성을 한껏 살아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은, 우리 삶을 하나님 앞에서 향유하게끔 하는 그분의 선물인 셈이죠.“(김기석 목사)

“8세 딸이 중도 장애를 얻었는데, 너무 힘들어요.”

“우리 삶에 제일 어려운 부분 중에 하나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죠.
그렇기에 ‘내가 원하지 않은 일들을 어떻게 내 삶에서 해석해 내는지’가 중요해요.
나는 수십 년 동안 장애를 가진 딸의 아빠로 살아왔어요.
우리 딸이 그렇게 힘들어했던 그 시간들에 대해 ‘하나님, 이건 무엇인가요?’ 여쭤봤지만 아직까지 답이 없어요.

하지만 그 과정 중에 하나님이 나를 바꾸셨어요.
나는 그전까지 예수 믿으면 잘 돼야 되고, 노력하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우리 딸을 통해서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건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약함이 강함이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이게 ‘믿음의 역설’ 같아요. (김병삼 목사)

미용사인데 ‘갑질’ 손님들 때문에 마음이 힘들어요

“내 경우를 얘기하자면, 나는 나의 삶의 원칙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많이 양보해요.
그러나 그 사람이 내 신앙의 어떤 본질적인 것들, 또 내가 인생에 세워두고 있는 내 삶의 어떤 진면목, 이런 것들을 포기하도록 만든다고 한다면 난 거기에 노(No)라고 단호하게 얘기하는데 그 기준은 누군가가 세워줄 순 없어요.

본인이 세워야 하는데, 그 속에서 나의 자존감이 무너질 상황이라든지, 내가 갖고 있는 신앙의 뿌리를 흔드는 일을 양보한다면 내가 무너질 수밖에 없거든요. (이를테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고통받는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인데, 어느 부자가 내게 ‘당신의 입장을 철회해라’ ‘왜 하나님의 우선적 관심이 가난한 사람에게 있다고 얘기하느냐’ 이러면 ‘난 그건 양보 안 된다’ (라고 답한다는) 얘기인 거죠.

그런가 하면 뒷돈을 넣어주면서 ‘나를 위해 좀 증언을 해달라’ 하는 청탁을 받을 때 그건 ‘노’라고 얘기를 해야 한다는 얘기죠. 양보할 수 있는 것이란 기꺼이 양보하더라도 내 자존감에 상처 입히지 않는 것들이죠.”(김기석 목사)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7195796&code=61221111&sid1=c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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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2:28-34

우리가 날마다 숨쉬고 활동하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우리들이 알 수 없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

매일 자다 깨면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것 같이 그렇게 급변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방향 없는 변화

그 앞에 우리들은 속수무책일 때가 많습니다.

셋째는 변화의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

많은 미래 학자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하고 미래를 전망합니다만 그대로 되지 않습니다.
믿었던 과학자의 생명연구가 이기적인 명예욕 때문에 물거품이 되는가하면,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생각지 않았던 배신을 느끼고 돌아서서 울어야 하는 예기치 않은 인간사들이 마치 럭비공이 뛰는 것처럼 어느 방향으로 뛸는지 알 수 없고, 어느 방향으로 변화될는지 모르는 그런 세상,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을까요?
자세히 살피면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절대로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여러분 노래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옛날에는 노래를<소리>라고 했습니다. 혹은<가락>이라고 했습니다.
옛날 우리 어르신들은<소리>라고만 하면 그 안에 창(唱)도 있고, 판소리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엔 트로트, 재즈, 락앤롤, 트위스트, 랩 그리고 발라드, 테크노, 힙합, 이게 정말 노래인가 싶을 정도의 도무지 이해가 잘 안가는 그런 장르의 음악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어르신들께 죄송하지만 가끔씩은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만 그러나 흘깃 흘깃 들어보면 한 가지는 분명히 귀에 들어오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모든 노래를 통 털어 보면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떠난 노래가 없습니다.
전부가 사랑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사랑, 기다리는 사랑, 갈구하는 사랑, 사랑이 주제가 됩니다.
그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은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향방 없이 변하고, 빨리 변한다할지라도 이 사랑 만큼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행복의 원천이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뉴욕 데일리 뉴스지에 예방의학 전문가인 피터 한센(Peter Hansen)박사가 이런 연구를 보도한바가 있습니다.

현대인의 건강을 위하여 우리가 흔히 말하는 건강식품, 규칙적인 운동, 담배, 술, 과로, 과식, 수면 부족 등 해로운 습관을 버리는 것을 50점으로 보고 남은 50점의 건강 관리법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창조적인 힘이 있어 신체의 저항력이 강해지고 병균과 싸우는 자연의 힘이 배양된다고 합니다.
사랑의 힘은 때때로 상상을 뛰어넘기도 하고 가끔은 상식을 뛰어넘기도 합니다.

하버드대학교 심리학 교수팀이 실험을 하였습니다.
인도의 빈민가에서 사랑의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테레사 수녀가 가난한 사람들을 병원에서 도와주는 모습을 찍은 기록 영화를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그 학생들의 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는 저항력을 검사하고, 일주일 후 같은 학생들에게 나치 독일이 유태인을 학살하는 잔인한 기록 영화를 보여주고 다시 저항력을 조사했답니다.
그랬더니 테레사 수녀의 영화를 본 뒤에 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는 저항력의 수치가 훨씬 높게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적 건강 나아가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도 하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왜 이리 시끄럽습니까?

첫째는 세상의 모든 문제는 사랑의 문제

먼저는 사랑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아예 사랑할 마음조차 없습니다.

둘째는 사랑이 있긴 있는데 병들어서 문제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쌍방이 주고 받아야 올바른 사랑입니다.
병든사랑은 일방적인 통로만 있습니다.
양방 통행이 필요합니다.

셋째는 거짓 사랑이 문제

사랑에 속았습니다.
거짓된 사랑이 우리 마음을 실망하게 합니다.
저마다 사랑을 외치지만 그게 사랑이 아닙니다.
이렇게 때로는 스스로 속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무지가 문제입니다.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못합니다.

넷째는 사랑이 통하지 않는 문제

 분명히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느끼질 못하고 그래서 사랑을 주지도 못하는 사랑의 의사소통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단절됩니다.
결국 이것은 불신의 문제입니다.
분명히 그는 사랑하고 있고 나는 사랑 받고 있으면서 내가 그 사랑을 믿지 않으면 사랑을 모르게 되고, 사랑을 모르면 감격이 없고, 감격 없는 사랑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에는 세 단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관심의 단계

관심도 대단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쥐를 키우는데 있어서 우유병만 빨려서 키운 쥐는 평균 600일을 살고, 그릇에 우유를 부어놓고 사람이 손으로 우유를 직접 먹이며 사랑의 손으로 쓰다듬어 주면서 키운 쥐는 훨씬 더 오래 사는데 평균 950일을 살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할 대상에 대해 거저 관심만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아름다운 사랑이 되기도 합니다.

둘째는 헌신의 단계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시간을 바쳐 사랑합니다.
그를 위해서 선물을 준비하고 그를 위해서 시간을 구별하여 둡니다.

셋째는 희생의 단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자세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른 응답이 아니라 오직 그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내가 됩니다.
이 사랑에 이르면 무슨 일이든지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랑이 됩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강한 사랑이 됩니다.

어느 날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을 아주 싫어하던 한 부인이 처칠에게 이렇게 거친 말을 했습니다.

“윈스턴, 만일 당신이 나의 남편이었다면 나는 당신의 차 속에 양잿물을 넣었을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윈스턴이 얼마나 멋있게 받아 넘겼던지 참 감동적입니다.
“부인, 만일 당신이 나의 아내였다면, 나는 그 양잿물을 마셨을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내가 희생하며 그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사랑은 이런 힘을 가진 능력입니다.

이처럼 사랑의 단계에 따라서 결과도 달라집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 사랑은 어느 단계까지 와 있습니까?

직도 그저 막연한 관심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헌신의 단계, 희생의 단계에까지 이르러 있는 수준 높은 사랑을 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받은 우리들이 마땅히 드려야 할 사랑은 어떤 사랑이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맘에도 사랑이 없고 행동에도 사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가장 강한 사랑의 모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직 자기 사랑입니다(自己愛).
그러나 자기 사랑이 먼저가 아닙니다.
성경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앨버트 슈바이처는 인간에게는 행복을 위한 세 가지 조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할 일(Something to Do)
둘째는 바라는 것(Something to Hope)
셋째는 사랑할 대상(Something to Love)

분명한 사랑의 대상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가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도 큰 불행이라고 말합니다만 그 보다 더 큰 불행은 내가 사랑할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곧 내 사랑을 받아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나를 절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행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그 사랑의 첫 번째 대상이 하나님임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 중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로 오늘 성경 말씀이 이 사랑의 시작을 말합니다.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는 "인간은 알고 있는 것에 의하여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것을 따라가게 되고, 또한 사랑하는 것에 모든 것을 바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그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의 욕심과 자기탐욕에 빠집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 때문에 죄를 짓게 되고, 명예와 권세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위해서라면 불법과 비리에라도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사랑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출발이어야 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서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입니다.
교회는 다닌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짓 신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기록한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사랑에 대한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얼마만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해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내 사랑을 확인하시고 출발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첫 걸음을 어떻게 내 딛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매사를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더군다나 신앙의 출발을 어디로부터 출발하느냐가 한 해를 성공적으로 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가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의 결심으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교회를 봉사하고 이웃을 섬길 줄 아는 신앙의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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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같은 하나님의 사랑(에스더 6:1~3, 8:1~2)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보면 분명히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왜 이런 일이 생기도록 내버려두시나 분명히 이것은 하나님이 실수하셨거나 무관심하신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지나놓고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더 깊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 세밀하신 하나님의 사랑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은 세밀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대한 태도를 보아서 세 종류의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무신론자

우주만물 즉 해와 달과 수억 만 개의 별들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조물주 같은 하나님은 없다고, 하는 무신론자가 있습니다.

둘째는 부분적 믿음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존재하신다고 믿지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이 계실 뿐이라고 하는 약간의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셋째는 삼위일체 신앙

하나님은 위대하셔서 해와 달과 수억만 개의 별들을 창조하실 뿐 아니라 우리 각자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우리의 머리털 하나라도 다 세시는 무소불능하시고(omnipotent) 무소부지하시고(omniscient) 무소부재하신(omnipresent) 하나님이라 믿는 신앙입니다. 이 세밀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바다와 육지를 지으시고 해와 달과 수억 만 개의 별들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지요. 어떻게 빅뱅에 의해서 우연히 생긴 해와 달과 별들이 질서 있게 운행될 수 있습니까? 전에도 설명드렸지만 단 5분도 늦지 않고 24시간에 자전하고 365일에 공전하고 태양과 지구의 거리가 조금만 더 가까우면 인간과 생물은 다 죽을 것이고 조금만 더 멀면 우리는 다 얼어 죽고 맙니다. 또 골고루 햇빛을 비치게 하려고 지구가 23.5°가 기울어져서 회전하니까 우리가 살지 기울기가 10°만 달라도 한쪽은 타 죽고 한쪽은 얼어 죽습니다. 또 달의 인력으로 바다의 조수가 들어왔다 나갔다 하니까 생물이 살 수가 있지 만일 물이 조용히 가만있으면 물이 썩어서 생물이 살 수가 없고 인력이 너무 강하면 지구가 물로 다 덮여 버리고 말 것입니다. 지구가 돌면서도 바닷물이 쏟아지지도 않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시계도 설계하고 만든 분이 있는 것같이, 이 예배당을 설계하고 건축한 사람이 있듯이, 해와 달과 모든 별들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위대하신 하나님은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까지 주관하셔서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고 그 많은 머리칼 하나 떨어지는 것까지 다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9절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  
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또 30~31절에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못하실 것이 없으시고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시편 14편 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설명합니다.

시편 139편 1~4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7~10절에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앉고 일어서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이 다 알고 계심을 믿어야 참된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예수님은 돈은 많지만 갈급한 심령을 가지고 뽕나무에 올라가 기다리는 삭개오의 이름까지 아시고 찾아오신 분이며 남편을 여섯 번이나 갈아 살며 외롭고 왕따당한 수가성 여인이 물 길러 올 것을 아시는 세밀하고 자비로우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벼슬이 높고 막강한 권력과 돈을 많이 가진 권세자들이나 부자는 별로 없고 가난하고 병들고 죄에 깊이 빠진 사람들과 어린아이들이 가까이 늘 있었습니다. 세밀하신 주님이 그들의 요구와 필요를 아시고 돌보아주신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잘난 자식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불구자, 정박아 자식의 손톱과 발톱 하나에까지 세밀하게 관심을 가지고 돌보는 것과 같습니다. 세밀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실수 같은 하나님의 사랑

어떤 때 하나님은 꼭 실수하셨거나 깜빡 잘못하신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지만 지나고 보면 하나님의 세밀하신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고아와 같은 에스더를 잘 키워준 모르드개는 말씀에 순종하며 목숨을 걸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믿음의 용사입니다.
  당시 파사와 메데의 큰 나라를 통치하는 아하수에로 왕 밑에 둘째로 큰 권세와 능력을 가진 하만이란 교만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수레를 타고 거리를 지나갈 때에는 온 국민이 엎드려 절을 했는데 신앙이 독실한 모르드개만은 우상이나 사람 앞에는 머리 숙여 절하지 않는다는 굳은 믿음으로 고개를 뻣뻣이 든 채 절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안 하만이 모르드개가 유대인인 줄 알고 모르드개만 아니라 온 유대 백성을 하루아침에 다 몰살시키려는 계략을 가지고 왕의 조서에 어인까지 받아놓았습니다. 이 때에 온 유대 백성이 모르드개 한 놈 때문에 우리가 멸절당하게 되었다고 얼마나 원망하고 불평하고 통곡을 했겠습니까?

오늘날 남다른 믿음을 가지고 바르게 살려고 하면 온갖 핍밥과 비난과 훼방을 받고 원망도 듣는 법입니다. 에스더 4장 3절에 보면 “왕의 조명이 각 도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곡읍하며 부르짖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고 했으니 모르드개 한 놈 때문에 우리가 다 몰살당하게 되었다고, 얼마나 욕하고 원망하고 죽일 듯이 날뛰었겠습니까? 믿음으로 살고 말씀대로 살 때 이런 핍박과 원망을 들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전에 왕이 모살당할 뻔했을 그것을 발견하고 즉시 고발하여 왕이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에스더 2장 21~23절에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문 지킨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아하수에로 왕을 원한하여 모살하려 하거늘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고하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고한지라 사실하여 실정을 얻었으므로 두 사람을 나무에 달고 그 일을 왕의 앞에서 궁중 일기에 기록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큰 공을 세운 모르드개에게 아무런 상을 주지 않았으니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실수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큰 사랑의 섭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더 6장 1~2절에 “이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그 속에 기록하기를 문 지킨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 왕을 모살하려 하는 것을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 하였는지라”, 이어 3절에 “왕이 가로되 이 일을 인하여 무슨 존귀와 관작을 모르드개에게 베풀었느냐 시신이 대답하되 아무것도 베풀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세밀하신 섭리요, 공을 세웠으나 보상을 받지 못하고 지나간 것도 바로 유대 민족이 위기를 당했을 때 대 역전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세밀하신 계획과 사랑이었습니다.
 
에스더 6장 4절에 “왕이 가로되 누가 뜰에 있느냐 마침 하만이 자기가 세운 나무에 모르드개 달기를 왕께 구하고자 하여 왕궁 바깥 뜰에 이른지라”고 했습니다. 왕이 묻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뇨…”(6절)라고 하니까 하만이 왕후의 만찬에 초청도 받았던 터라 “나밖에 누가 또 있으랴?”라고 생각하고, 7절에 “…왕께서 사람을 존귀케 하려면 왕의 입으시는 왕복과 왕의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취하고 그 왕복과 말을 왕의 방백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붙여서…성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왕명이 내려졌는데 그것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가 50규빗 되는 장대에 매달아 죽이려던 모르드개였습니다. 왕의 말에 자기가 제안한 대로 모르드개를 태우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외쳤습니다. 그날 밤 잔치에 다시 초대 받았는데 에스더가 나와 내 민족을 도륙하고 진멸하려는 자가 바로 이 하만이라고 할 때 끌려 나가 모르드개를 죽이려던 장대에 자기가 달려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란 말이 있듯이 하나님은 이 때를 위하여 모르드개가 공을 세웠으나 포상도 못 받았고 왕이 밤에 잠도 오지 않았고 그 때문에 역사책을 읽다가 이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수같이 보였지만 다 하나님의 세밀하신 사랑의 섭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밀하신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해와 달과 수억 만 개의 별들을 지으시고 운행하실 뿐 아니라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까지 간섭하시고 60억 인구의 머리털도 다 알고 세시는 무소부지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고 실수하시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섭리임을 믿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팔려 간 것이나 억울하게 감옥살이 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안 계시거나 하나님이 실수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몽해주면서 나가거든 나를 변호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도 그 사람이 까맣게 잊은 것도 도무지 하나님이 안 계시거나 무관심하신 것 또는 실수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요셉이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국무총리가 되지 못했을 것이고 또 꿈 해몽 받은 사람이 나가서 잊지 않고 즉시 왕께 고하여 출감했더라면 애굽의 바로 왕의 꿈도 해몽하지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애굽의 국무총리도 못 되고 자기 민족과 애굽 백성을 구원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수처럼 보일지라도 세밀하신 하나님의 사랑임을 믿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며 신앙생활을 바로 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은 세밀하셔서 세밀한 부분까지 간섭하시고 때론 징계하시고 때로는 칭찬하시고 축복도 하십니다. 그러나 되는 대로 적당히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세밀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느끼고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대강대강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세밀한 사랑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3. 세밀하신 사랑을 받으려면

  ① 먼저 거듭 나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해야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목자장 되시는 주님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셨고,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죄가 하나도 없고 완전히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그 순간부터 되는 것입니다.

  ② 세밀한 음성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해와 달과 별들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으로만 믿지 말고 섬세하시고 세밀하셔서 우리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도 아시는 무소부지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세밀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또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한 걸음, 한 걸음, 말씀에 비추어서 행동해야 합니다. 작은 일에도 적당히 거짓말하고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고 깨끗한 양심을 지키며 생활해야 합니다.
  어느 교수님이 한국에서는 십일조도 안 하고 기도생활도 안 했는데 미국에 가서 어떻게 은혜를 받고 십일조생활을 철저히 했습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이 구만리 장천 멀리 계신 것 같았는데 십일조생활을 철저히 한 다음부터 하나님이 가까이 계셔서 피부로 느낄 정도로 체험적인 생활을 한다고 간증하더랍니다. 새벽기도 한 번만 빠져도 하나님이 징계하심을 느끼고 주일성수 한 번 안 해도 사랑의 채찍을 맞고 십일조 한 번 떼어먹어도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교통사고로 손해를 보는 체험을 간증하는 이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동전 두 닢을 관심 깊게 보시는 분입니다. 세밀하게 신앙생활해야 하나님의 세밀한 사랑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③ 기도해본 후에 결정하십시오
 
무슨 일이나 기도해본 후에 결정하고 행동해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성군 다윗은 전쟁할 때에도 “가리이까, 말리이까?”, 또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고 물어본 후에 전쟁에 나갔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해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신명기 4장 7절에 “하나님은 기도할 때마다 가까이 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기도생활을 안 하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실수같이 느껴지는 때가 있어도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고 넓은 사랑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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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사도행전 2:1-4)


길선주 목사님은 성령과 말씀과 기도에 사로잡혔던 분이었기 때문에 철저한 회개와 부흥운동을 일으키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진정한 부흥운동은 말씀 운동이고 성령 운동이고 기도 운동이고 회개운동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방지일 목사님은 "영의 지배를 받아야 내 주장, 내 주관, 내 주체가 없어진다"고 말씀했습니다.
"영의 지배를 받아야 죄를 회개하게 되고 예수를 증거하게 되고 바른 신앙인이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살길도 “영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 한국교회는 성령과 말씀과 기도와 회개에 사로잡히는 것보다는 음악과 프로그램 등 인간적인 수단 방법에 치중하고 있고 정서와 감정에 치우치고 있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한다는 경고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경고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하나님께서는 또한 자기의 백성들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의 신인 성령님을 자기의 백성들에게 보내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요엘2:18,2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하나님께서 세상과 자기 백성들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성령님을 보내주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저는 이렇게 쉽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성이 엄마 아빠가 지성이를 사랑해서 많은 것을 해 주었습니다. 영양분이 많은 음식도 먹여 주었고, 좋은 약도 먹여 주었고, 좋은 장난감도 사 주었고, 포근한 이불도 만들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성이 엄마 아빠가 지성에게 준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은 아빠의 간을 떼어주고 엄마의 눈물을 쏟아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다 만들어주셨지만, 우리들에게 주신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은 하나님 자신의 몸의 일부를 떼어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보내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피와 살을 떼어서 주셨다는 말씀이고, 성령님을 보내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신과 혼의 일부를 떼어서 주셨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성령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합니다. 아들과 성령님을 보내주신 이유와 목적 세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지성이 아빠와 엄마가 간을 떼어주고 눈물을 쏟아준 것은 지성이를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고 성령님을 보내신 것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에스겔 37장은 죄와 허물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마른 뼈들의 모습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뼈들이 살아난 것은 말씀과 생기 즉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37:2-10). 하나님께서 마른 뼈들을 살리신 두 가지 방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말씀이었고 다른 하나는 생기였습니다. 말씀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생기는 성령님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신 목적은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들과 성령은 우리들을 살리십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2:1,4,5).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갈수 없느니라”(요3:5).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3:6). 성령은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마른 뼈들 위에 말씀과 성령이 임했을 때 살아 일어서서 큰 군대를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마가의 다락 방에서 기도하던 120명 위에 성령이 바람과 같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행2:2). 여기 바람은 생기를 가리키는데 생기는 살리는 영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첫째 이유와 목적은 죽었던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입니다.

둘째는 우리들을 만남과 교제의 존재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지성이 아빠와 엄마가 간을 떼어주고 눈물을 쏟아 주면서 지성이를 살린 목적은 지성이가 엄마 아빠와 말을 주고 받고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혜성이와 말을 주고 받고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말을 주고 받고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커 가면서 친구들과 함께 놀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교제하면서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은 만남과 교제의 존재입니다. 사람은 만남과 교제를 통해서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죄는 생명을 앗아가고 죄는 만남과 교제도 앗아 갑니다. 그래서 사람이 불행해집니다. 인사도 하지 않고 만나지도 않고 교제도 하지 않는 사람은 영이 죽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중요한 일은 우리 죄인들로 하여금 만남과 교제의 삶을 살게 하시는 일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고 이웃과 교제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게 되고 이웃과 친밀하게 교제하게 됩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했을 때 저희가 모두 방언을 했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여기 방언은 하나님과 친밀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하고 사람들과 친밀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성령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바지’ 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말하게 하고, 이웃들을 형제 자매라고 부르면서 이웃들과 친밀하게 말을 하게 합니다. 말은 만남과 교제의 가장 중요한 수단입니다.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함께 모여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둘째 이유와 목적은 말도 인사도 할 줄 몰랐던 우리들을 말도 하고 인사도 하고 교제도 하는 만남과 교제의 존재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입니다.

셋째는 우리들을 주의 일을 하는 봉사자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지성이 아빠와 엄마가 간을 떼어주고 눈물을 쏟아 주면서 지성이를 살린 또 하나의 목적은 지성이가 엄마 아빠와 말과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뿐만 아니라 커서 좋은 일을 하는 훌륭한 일꾼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은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 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주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봉사하게 하십니다. "성령으로 봉사하며"(빌3:3) 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오직 성련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은사들을 주시는데 그 모든 은사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주님의 일을 하게 하는 은사들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주시나니”(고전12:8-10).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12:6-8).
성령을 받은 자는 열심히 주의 일을 합니다.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하다가” 이렇게 찬송을 부르면서 열심히 주의 일을 합니다. 특히 교제와 기도와 봉사와 전도의 일을 열심히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은 열심히 교제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전도하면서 주의 일을 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47).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들은 자기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구제하는 일에 힘을 썼고 전도하는 일에 힘을 썼고 선교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성령님은 이기적이고 무능하고 게으른 우리들로 하여금 열심히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게 하고 그래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물질과 시간에 인색한 사람은 주님과 거리가 먼 사람이고 성령님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우리 조선의 초대교회 신앙의 선배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자기들의 몸은 돌보지 않고 자기들의 몸이 부서지고 닳도록 주님의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이 그랬고 최권능 목사님이 그랬고 윤함애 사모님이 그랬습니다. 윤함애 사모는 기도의 여인이었고 사랑과 봉사의 여인이었습니다. 최봉석 목사는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셋째 이유와 목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기적이고 무능하고 게으른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일꾼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어주셨습니다. 첫째는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둘째는 우리들을 만남과 교제의 사람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셋째는 우리들을 봉사하며 사는 주님의 일꾼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이었습니다. 자신의 몸의 일부를 떼어주시면서 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진실하고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성령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모하고 예수님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을 사모하고 성령님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이 충만하고, 교제가 충만하고, 봉사가 충만한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곱 집사님들이 성령이 충만했던 것처럼 우리 교회 집사님들과 권사님들이 모두 성령님으로 충만하기 바랍니다. 사도들이 성령 충만했던 것처럼 우리 교회 교역자들과 장로님들이 모두 성령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기 전에 영화 이야기를 간단히 하겠습니다. 최근에 깐느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유명해진 영화 '밀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사실 저는 여 배우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 영화를 본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어제 아침 우연히 CBS 인터넷 뉴스에 실린 '밀양'이라는 영화에 대한 어느 사람의 해설을 읽고 그 해설에 공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설의 일부를 여러분들에게 그대로 소개합니다.

"영화의 내용은 단순하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유괴범에게 아들까지 살해당한 여주인공 '신애'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 힘으로 고통을 이겨가던 중 어느 날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겠다며 범인을 면회 가겠다고 나선다. 신애는 자신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었고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범인으로부터 뜻밖의 말을 듣는다. 범인은 자신은 감옥에 와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 하나님께 회개하고 이미 용서를 받았으며 지금은 너무도 마음이 평안하다고 말한다. 순간 신애의 얼굴에 당혹한 기색이 역력해진다. ‘그래요?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셨어요?’ 범인과의 면회를 마치고 나온 신애는 주차장에서 기절한다. 결국 신애는 그와 같은 살인범의 말에 충격을 받고 기독교의 신앙을 버린다.” 영화에 대한 분석적 해설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습니다.

“신애와 범인이 구원과 용서를 말하지만 정작 그들의 삶이 비극인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구원과 용서가 허상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구원과 용서가 허상인 까닭은 그것이 허영과 탐욕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애의 비극의 원천은 허영이다. 아들의 죽음은 신애 자신의 허영이 부른 비극인 셈이다. 신애의 허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신애는 상처받은 자들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한 후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며 믿음생활을 한다. 그녀는 예전에는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더 이상 고통 가운데 통곡하지 않으며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모두가 그녀의 믿음에 감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그녀는 진정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알게 되었던 것일까? 그녀는 진정 그 믿음의 힘으로 범인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세계에 붙잡혀 있을 뿐 진정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지 못했다. 신애는 용서를 보여주려 했다. 범인에게 그리고 교인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범인을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허영이란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다. 돈이 없으면서도 돈 많은 것처럼 보이고자 사지도 못할 땅을 보러 다녔던 것처럼 신애의 용서에는 영적인 허영이 감추어져 있다. 자신이 범인을 용서하는 모습을 굳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영적 허영의 덫이 놓여있다."
저는 이와 같은 영화에 대한 해설을 읽으면서 이창동 감독이나 상당수의 불신자들의 눈에 비친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자들의 모습이 ‘허상’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심각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창동 감독이나 상당수의 불신자들이 용서와 구원을 전하는 기독교 복음의 깊은 내용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창동 감독이나 상당수의 불신자들의 눈에 비친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자들의 모습이 허상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심각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얼마 전에 옥한흠 목사는 오늘의 한국교회는 ‘허수’ ‘허세’ ‘허상’ 등 `3허(虛)'에 사로잡혀 있다고 분석한 일도 있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 안에는 ‘허영’과 ‘허상’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이와 같은 ‘허영’과 ‘허상’이 적지 않게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몸의 일부를 떼어서 우리들에게 주신 중요한 이유는 우리들에게서 이와 같은 모든 종교적인 ‘허영’과 ‘허상’을 제거하시고 우리들을 하나님 닮은 진실하고 겸손하고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들어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날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 먹어야 하고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마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 충만 성령님 충만 그리고 하나님 충만한 삶, 하나님 닮은 진실하고 겸손하고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의 복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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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하나님의 사랑(로마서 5:1~8)


사도 바울은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을 통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여기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지은 죄를 깨끗이 씻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새로운 관계가 바로 샬롬, 화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탕자가 아니라 아들로 맞이합니다. 아들의 과거는 전혀 묻지 않습니다. 다만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기쁘게 맞이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2~24) 아버지의 말에는 탕자라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예수를 구주로 믿고 돌아온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인정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으면 또한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나를 바로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나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계속 나 자신을 괴롭히며 힘들게 살아갑니다. 그리고 마치 그것이 믿음이 좋은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는 무엇보다 자신과의 화평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화평을 누리자!”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화평을 즐기자는 말입니다. 화평이란 그냥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즐겨야 합니다. 돈도 갖고 있다고 해서 다 내 것입니까? 내가 써야 내 것입니다. 멋진 집을 구입해서 평생 남에게 빌려 줬다면 그 집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집에서 하루라도 살면서 즐겨야 비로소 내 집입니다. 즐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평은 즐겨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화평을 잃어버린 후에 비로소 그 화평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다 깨진 후에 뒤늦게 후회하지 않습니까? 때문에 먼저 화평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졌는가 하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화평이 주어졌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이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로 막힌 담을 깨뜨리셨습니다. 얼마나 비싼 댓가를 치렀습니까?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화평을 즐길 수 있습니다. 너무 쉽게 주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화평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는 것 같습니다. 모르면 즐거움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즐거움은 깨닫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치를 깨닫는 순간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화평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초로 모든 것을 볼 수 있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불화한 상태에서 보는 것과 화평한 상태에서 보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불화한 상태에서 이웃을 보면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화평한 상태에서는 모든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책망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모든 것을 화평한 상태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면서 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먼 미래까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래의 약속을 바라보며 즐거워한다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영원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어떻게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말씀 속에 그 비밀이 있습니다. “앎이로다!” 즉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알기 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어떤 환난이 있어도 믿음의 사람은 그 의미를 깨달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환난으로 인한 고통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깨닫지 못합니다. 매를 맞을 때 나를 사랑해서 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고맙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를 미워해서 때린다고 생각하면 상황은 정반대가 됩니다. 같은 매라도 하나님과 화평을 즐기는 상태에서 맞으면 그 매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 것 같으면 더 이상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우리가 환난 중에 고통을 느끼는 것은 꼭 저주받은 것 같고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것이라고 믿으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과수원을 경영하는 농부는 나무가 자라기 시작하는 봄에 그 가지를 잘라 줍니다. 잘라 주어야 제대로 자랍니다. 가지를 자를 때 그 나무가 미워서 자릅니까? 우리도 가지를 잘라내는 고통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아픔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만 있으면 그 아픔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과 믿어지는 것의 차이를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믿는 것이란 내가 믿으려고 애쓰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반면에 믿어지는 것은 성령이 도우셔서 저절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하나가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그는 믿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자기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비참하게 죽어 가고 있는 한 청년을 그는 그리스도로 믿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았으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가는 자를 어떻게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때문에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어지는 것도 성령이 역사하셔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과 사랑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오히려 사랑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사랑하려고 할 때 무엇을 먼저 생각합니까? 상대방의 반응을 생각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상대방이 기대한 것과 다른 반응을 보이면 오히려 그 사랑이 변하여 미움이 되지 않습니까? 힘쓰고 애쓰는 것으로는 참 사랑을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형제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백 구십 번의 용서란 우리의 의지만 가지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십니다.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신비한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용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의 선물로 우리 마음에 부어지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자유롭고 또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훗날 사랑의 사도라고 일컬어진 요한에게 주목하게 됩니다. 그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가려고 하실 때 그 마을 사람들이 길을 막고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요한이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 사랑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랑이 부어지자 그는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진 마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와 더불어 싸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우리 마음대로 됩니까? 율법이 없어서 우리가 죄를 짓습니까? 법으로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죄의 유혹은 더 달콤하게 다가오지 않습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비로소 죄의 종 노릇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죄를 이기게 되는 것은 모두 다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부어져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는데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나 자신과 더불어 먼저 화평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놀라운 변화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망 중에 우리가 기뻐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가운데 임하신 충만한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의 선물로 우리의 마음에 부어지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자유롭고 또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충만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새롭게 변화된 모습으로 죄와 더불어 싸워 이길 뿐 아니라 십자가 위에 나타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땅끝까지 전하고 증거하는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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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사무엘하 12:15-25)


요새 암에 걸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암 전문의 원종수 권사님의 말에 의하면 암이 자라 자각 증상이 생길 때까지는 7년이 걸리고, 마지막 1년에 암이 증상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암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분명한 원인은 담배라고 합니다. 담배 피면 암 걸릴 확률이 25배가 되고, 거기에 술을 하면 4배가 늘어나서 술 담배 하면 보통 사람보다 암에 걸릴 확률이 100배가 된다고 합니다.

담배 다음으로 지적되는 암의 원인으로 공해, 합성세제, 농약 등이 있지만 그런 경우에는 2-3배가 늘어난다고 합니다. 그처럼 보통 사람에게 생기는 하루 6-7개의 암세포와 술 담배를 하는 사람에게 생기는 하루 600-700개의 암세포는 사람 몸에 있는 경찰세포(surveillance cell)가 잡아먹는데, 사람에게 마음의 상처와 스트레스가 있으면 그 마음의 상처와 스트레스로 인해 경찰세포의 활동이 줄고 결국 암에 걸리게 된다고 합니다.

그처럼 사람이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관리하지 못하면 질병이 생길 확률은 현저하게 높아집니다. 죄는 질병을 초래하고, 거의 모든 불행도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죄가 있으면 마음의 평안도 없고, 능력 있는 삶도 살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거룩한 만큼 능력이 나타납니다. 어떤 분은 산에 가야 능력이 생기는 줄 아는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사람은 거룩한 만큼 능력이 생깁니다. 우리의 기도도 거룩한 만큼 능력 있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거룩한 삶의 능력을 잘 체험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오해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거룩한 사람을 유머도 없고, 잘 웃지도 않고, 웃어도 절대 이빨을 보이지 않고, 목소리도 항상 낮게 깔고 말하는 사람인 줄 압니다. 그런 분들은 “주여!”라는 말이 입에 배였습니다. 길을 가다 발을 삐끗해도 “주여!”라고 하고, 밥 먹다 돌을 씹어도 “주여!”라고 합니다. 전화를 하면 “여보세요!”라고 하지 않고 목소리를 낮게 깔고 “할렐루야!”라고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거룩한 사람을 존경하기보다는 꽉 막힌 지긋지긋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자라면서 “나는 커서 절대 거룩한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라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함은 겉모양이나 옷차림과는 상관없습니다. 어떤 분은 분명히 거룩한 분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참 유머도 많고 얼마나 잘 웃는지 모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함은 내면이 아름다운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아름답게 내면을 가꾸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삶도 아름답게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

오늘 본문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생긴 불륜의 아들이 병에 걸려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고통을 다윗이 잘 극복해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주셨고, 본문 25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이름을 여디디야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여디디야란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은 어떤 성도를 사랑하실까요?

1. 진실하게 회개하는 성도

본문을 보면 죄의 대가가 아주 비싸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됩니다. 다윗이 자신의 불륜에 대해 회개했을 때 13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회개를 받아주셨지만 불륜의 자식은 하나님께서 치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처럼 죄는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면 언제나 사함 받을 수 있지만 죄의 열매는 반드시 주어지게 됩니다. 그처럼 죄의 대가는 비싸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로 살면서도 죄를 힘써 멀리해야 합니다.

어느 날, 미국의 한 주정뱅이 도박꾼이 근처에 살던 조나단 에드워드란 유명한 목사님에게 와서 간밤에 꾼 꿈을 말해주었습니다. 그 꿈에서 천사가 나타나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1년 후에 너를 불러가겠다고 했다면서 그날부터 그는 술과 도박을 끊고, 교회를 잘 다녔습니다. 그러나 몇 개월 후에 다시 술과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그의 꿈을 말하며 권면했지만 그는 더욱 교회에서 멀어져 갔고 마침내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그 꿈은 개꿈이었어요. 그런 꿈에 왜 연연합니까?”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술에 만취되어 계단을 내려오다 실족해 목이 꺾여 죽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목사님이 일기책을 찾아보니까 그날이 꼭 1년 전 그가 자신을 찾아온 날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다 그렇게 벌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죄는 반드시 뼈아픈 대가를 지불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어떻게 죄를 멀리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완벽하게 살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방법은 없고, 중요한 것은 진실하게 회개하는 것입니다. 죄의 대가만 비싼 것이 아니라 진실한 회개의 대가도 비싸고, 순종과 헌신의 대가도 비쌉니다. 우리가 진실하게 회개하고 힘써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면 그만큼 복된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느 한 기도제목이라도 우리는 잊을지라도 하나님을 기억하시고 반드시 가장 적절하게 최선의 모습으로 응답해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교회에 나온 발걸음 하나라도 기억하시고, 교회에 떨어진 종이 한 장 주운 것과 이웃에게 냉수 한 그릇 주신 것도 하나님은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한 대로 갚아주시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2. 최선을 다하는 성도

다윗은 자신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아들이 죽어 갈 때에 어떻게 합니까?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이 구절에서 “안에 들어가서”라는 말은 골방 안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는 골방 안으로 들어가서 떳떳하게 머리를 들어 기도하지 못하고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애절하게 기도했습니다.

너무 애절하게 기도하니까 왕의 건강을 염려해 원로 신하들이 다윗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윗은 듣지도 않고 먹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예배도 최선을 다하고, 기도도 최선을 다하고, 예배 후에 세상에 나가 사는 것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1960년대 어느 날, 한 신학생이 섬기는 시골 교회에서 한분이 소천했습니다. 그 장례 일로 학기말 시험공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예배를 마치고 야간열차를 타고 아침에 신학교에 도착했습니다. 첫 과목시험은 ‘성령론’이었는데, 시험 시간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그런데 책을 여니까 너무 피곤해서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절망한 나머지 전도사님은 어차피 책은 눈에 안 들어오니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매달리자고 생각하고 기도실로 갔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동안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저의 처지를 잘 아시는 하나님! 저는 매주 먼 길을 다니며 지금 목회와 공부를 동시에 하는데 왜 하필이면 시험 전에 김 집사님을 불러가셨습니까? 이제 시험이 닥쳤습니다. 성령님! 성령론 시험 시간에 임하셔서 시험 들지 않게 하소서!”

그처럼 간절히 기도한 후 교실에 들어가 큰 기대를 하고 시험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문제였습니다. 하나님도 무심하셨습니다. 성령론 시험시간에 성령님은 어디론가 사라지셨습니다. 결국 그 전도사님은 시험지에 자기상황을 간략하게 쓰고 마지막에 이렇게 썼습니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저는 이 문제를 몰라도 성령님은 잘 아실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담당교수가 그 답안지를 보고 이렇게 채점했습니다. “성령님은 100점! 너는 0점!” 결국 그 신학생은 그 과목을 재수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가끔 보면 믿음생활은 100점인 것 같은데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은 0점으로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성도

그처럼 다윗이 간절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아이는 죽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본문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 아이가 죽자 다윗은 곧 일어나 단장을 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린 후에 궁으로 돌아와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때 신하들이 왕에게 물었습니다. “왕이여! 왜 아이가 살았을 때는 금식하시고 우시더니 왜 아이가 죽으니까 일어나 잡수십니까?” 그때 다윗은 말합니다. 본문 22-23절 말씀을 보십시오.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다윗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렇게 하셨는데 너무 슬퍼하면서 죽은 아이에 대해 지나치게 미련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그 일에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간절한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가 있지만 사실 응답이 없는 것도 크게 보면 결국 응답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시고, 나중에 더 귀한 자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기도가 주는 한 가지 축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기도하면 기도하는 사람 자체가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기도를 통해서 자식의 죽음조차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마음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환경은 바뀌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내 마음은 바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시련도 이길 수 있는 엄청난 능력과 여유가 생길 것입니다. 기도는 엑스테리어(exterior)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테리어(interior)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 내적인 변화는 기도가 주는 가장 큰 축복의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게 인테리어를 변화시키면 신기하게 엑스테리어도 변화되는 큰 축복이 따라옵니다.

우리는 이 기도의 패턴을 잊지 말고 내가 원하는 대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조급한 마음으로 기도에 대해 회의를 느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물리적으로 응답되지는 않아도, 반드시 하나님 앞에 열납되어 가장 선한 모습으로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켜 은혜의 단비가 되어 우리들에게 내릴 것입니다.

4. 새롭게 시작하는 성도

다윗은 아이가 죽기 전에는 아이를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아이가 죽자 금방 그 불행을 잃어버리고 20절 말씀처럼 몸을 단장하고 하나님께 경배한 후에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다윗의 가장 매력적인 면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그 모습을 하나님이 기쁘게 보시고 하나님은 솔로몬이란 귀한 자녀를 새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불행을 쉽게 잊을 줄 아는 거룩한 건망증을 가져야 합니다. 거룩한 건망증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과거의 불행을 잘 잊을 때 새로운 은혜를 더해주실 것입니다. 잘했든 잘못했든 과거의 일은 하나님께서 이미 결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결재하신 지나간 일에 너무 매달려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대개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사람에게 제일 나쁜 성품 중의 하나가 편견인데, 왜 편견이 생깁니까? 과거에 대한 나쁜 기억을 잊어버리지 못하면서 생기는 초기 정신병적 질환이 바로 편견입니다. 편견은 세상을 자기가 아는 잣대로만 봅니다. 그러다 보면 전혀 현실과 동떨어진 판단을 할 수 있고, 일부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기 때문에 성공적인 삶을 살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도 그런 야박한 사람에게 결코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군대 생활을 전남 광주에서 전경으로 했습니다. 어느 날, 훈련소 생활을 끝내고 자대가 있는 광주에 도착했을 때, 그분은 기분이 착잡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서울에서만 자란 분이었는데,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도가 난동을 부린 일로 알고 광주 사람은 다 사기꾼이고 귀신인 줄 알고 군대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3년 후, 그분이 군대를 마치고 대학에 복학해서 MT(멤버 단합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경상도 영주 근처에서 텐트를 치고 잤는데 깨어보니 텐트는 없어지고 돗자리에서만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한 동안 경상도 사람은 다 깡패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광주 사람이나 경상도 사람이나 대부분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나쁜 기억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일을 잘 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향해 지금 새롭게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새로운 결단과 실천을 보시고 더 좋은 일을 결재해주시고, 우리의 새로운 결단은 곧 주님의 결단으로 바꾸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사야 43장 19절 말씀처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 지금까지 잘못한 일과 부끄러운 일과 실패한 일도 많았지만 그 일에 매여 낙심하고 좌절하고 우리의 선한 계획과 열심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용납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오늘도 예배 시간에 다시 새로운 옷을 입고 힘차게 출발하면 우리는 반드시 변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고, 우리 앞에는 지금보다 더욱 복된 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 >

다윗이 과거의 불행을 잘 극복하자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을 주셨습니까? 본문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믿음을 보시고 더 좋은 아이를 주셨고, 다윗은 그 아이의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지었습니다. 솔로몬은 ‘평강의 사람’이란 뜻으로 ‘샬롬’이란 말과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이 구절에서 ‘여디디야’란 정확하게 말하면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란 뜻입니다. 다윗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징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자 하나님께서 죽은 아이보다 더 사랑스런 아이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6.25 때 평양 창동교회 전도사님 한 분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피난 도중에 다리가 불편해 중화(中和)라는 지역에서 더 피난가지 못하고 빈집에 혼자 머물렀습니다. 마음속에 원망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하필 이런 때에 다리를 못 쓰게 만드시나요?” 그분은 공산 치하에서 열심히 하나님 일을 한 보상이 이건가 하는 원망이 생겼습니다.

다음날, 다행이 다리가 조금 나아져 다시 급히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조금 가자 길옆에 수십 구의 시체가 있었는데, 전날 같이 피난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피난 가다 조그만 군수창고에서 인민군복을 발견하고 추우니까 껴입었는데 미군이 인민군인 줄 알고 기총소사를 해서 거의 대부분이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때 전도사님은 하나님을 잠시 원망했던 것을 회개하고, 그때의 은혜를 기억하며 열심히 교회를 섬겨 큰 교회를 이뤘는데, 그 교회가 바로 노량진 교회라고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고난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사람의 실패는 하나님의 실패가 아닙니다. 진짜 실패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놀라운 기억력을 가진 것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저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사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고양이보다 개를 더 선호합니까? 가장 큰 이유는 개가 고양이보다 주인을 더 따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고양이와 개는 기억시스템이 아주 다르다고 합니다. 개는 주인이 열 가지를 잘못해도 한 가지만 잘해주면 그 한 가지 잘해준 것을 기억해서 주인을 졸졸 따른다고 합니다. 반면에 고양이는 열 번 잘해줘도 한번 잘못해 주면 잘해준 것은 싹 잊어버리고 잘못한 것 때문에 토라져서 주인과 거리를 둔다고 합니다.

우리는 고양이형 성도가 되지 말고 개형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하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두 가지 고난을 가지고 만 가지 은혜를 잊어버리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절망하는 것은 고양이 같은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죽도록 잊지 못하는 개 같은 충성스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은혜를 잊어버리면 추하게 되고, 결말도 비참하게 됩니다. 반면에 은혜를 잊지 않으면 반드시 은혜를 더 입습니다. 가정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 대해서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를 잊어버리면 그 사람은 인격적으로 아주 문제가 많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수고하는 남편과 아내의 뒷모습을 보고 눈물이 나오지 않으면 그런 눈깔은 한참 문제가 있는 눈깔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그 말을 듣고 아내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눈물이 나오지 않아서 “내 눈깔이 문제가 있나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어느 날은 아내의 뒷모습을 보고 눈에서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가슴에서 눈물이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깊이 생각하면 배우자는 너무 고마운 존재입니다. 저도 가끔 “아내가 없으면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도 그런데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령님이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삽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없고, 성령님의 함께 하심이 없었으면 사는 것이 참으로 외롭고 힘들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범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감사는 축복받는 길이고, 불평은 망하는 길입니다.

원종수 권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의사가 되면서 두 가지 소원을 가졌습니다. 하나는 가난한 어머니의 속옷을 사드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어머니와 돼지고기 같이 먹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서울대 병원 인턴으로 첫 월급을 받고 어머니에게 달려가 말했습니다. “어머님! 첫 월급 받았습니다. 이제 돼지불고기 먹으러 가고 어머니 속옷을 사러 백화점에도 같이 가요.”

그때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종수야 기왕 믿을 바에야 잘 믿자.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으니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자! 이 첫 월급은 첫 열매잖아. 이 첫 열매는 하나님께 드리자!” 결국 그 첫 열매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 일이 있고 약 보름 후에 학장님이 불렀습니다. 의사고시 전국대회에서 1등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금을 주는데 하나님 앞에 바쳤던 월급의 2배를 주셨습니다. 그는 감탄했습니다. “하나님! 정말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군요. 첫 열매를 다 드렸더니 1등도 하게 해주시고 상금도 주셨네요.” 그는 그 상금을 가지고 어머니에게 달려가 말했습니다. “어머니! 제가 전국 의사고시에서 1등 했어요. 이제 저와 함께 돼지불고기 실컷 먹어요.”

그때 어머니가 봉투를 받아들고 말했습니다. “종수야! 너 상금 타 본적 있니?” “처음인데요.” “그래? 첫 상금이면 첫 열매구나! 이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자. 그리고 주일까지 기다리다간 우리가 시험 들겠다! 내일 새벽 제단에 가서 드리자!” 결국 그 상금도 바로 제단에 바쳤다고 합니다. 그런 헌신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와 구변을 더해주시고 암 치료의 권위자이자 훌륭한 전도자로 삼아주신 줄 믿습니다.

때로 살다 보면 고난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지나보면 별것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히 걱정거리가 있었겠지만 지난 달 무슨 걱정을 했는지, 작년에 무슨 걱정을 했는지 지금은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오늘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이 지나고 보면 별로 걱정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아무리 고난이 있어도 오늘 이 순간부터 그냥 잊어버리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우리의 사명과 비전을 향해 열심히 달려 나가면 반드시 우리 앞에 놀라운 일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항상 믿는 사람답게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복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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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축복(시편 91:14-16)


성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는 “인간은 알고 있는 것에 의하여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것을 따라가게 되고, 또한 사랑하는 것에 모든 것을 바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욕심과 탐욕에 빠집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 때문에 죄를 짓게 되고, 명예와 권세를 사랑하는 사람은 불법과 비리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사랑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22:37∼39).

사랑에 대한 계명이 큰 계명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이 사랑에 대한 계명을 지키지 않습니다.
또 사랑한다 하면서 잘못된 사랑을 합니다.
온전한 사랑을 하지 못하여 사랑 때문에 죄짓고 불신앙에 빠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가짜 사랑을 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진짜 사랑,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축복 받는 사랑을 하려면, 사랑에도 세 단계가 필요합니다.

첫째, 관심의 단계

관심이란 라틴어는 인터 엣세(inter esse)한다.
라틴어에서 관심이란 "함께 생각한다" "함께 행동한다" "같은 말을 한다" 라고 합니다.

둘째, 헌신의 단계
.
히브리어로 헌신을 "마래"라고 한다.
마래는 가득 채운다는 뜻입니다.
가득 채운 곳에는 다른 어떤 것도 자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셋째, 희생의 단계

헌신을 채우는 것이라고 한다면 희생이란 채운 것을 완전하게 비워버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자세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단계에 따라서 결과도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느 단계에까지 와 있습니까?

‘관심의 단계’입니까? 아니면 ‘헌신의 단계’, ‘희생의 단계’까지 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축복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입술로는,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맘에도 사랑이 없고 행동에도 사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기만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신 7:12∼13), 위험에서 건져내시고(시 91:14), 평안하게 만들어 주시고(시 119:165), 보호하여 주십니다(시 145:20).

하나님께서 넘치는 사랑을 주시고(잠 8:17), 기쁨을 채워주시고(사 56:6∼7),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고(롬 8:28),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십니다(약 2:5).

사랑의 씨앗을 뿌리면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배경 설명

오늘 봉독한 성경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삶의 역경과 절망적인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내용의 찬양시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왕과 신하, 백성들이, 전쟁터에 출전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혹은 어떤 사람이 삶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릴 때, 제사장이 불렀던 찬송으로 추측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보호하시고 축복하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께서 축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사오니,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시고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날 우리도 살다보면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질병이 닥칠 때도 있고, 죽음이 닥칠 때도 있고, 두려움과 불안감에 떨 때도 있습니다.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지만, 결과는 모두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느냐, 사랑하고 있지 않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다섯 가지의 축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건져주시겠다
두 번째는 높여주시고,
세 번째는 응답하시고,
네 번째는 저와 함께 하시고,
다섯 번째는 장수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이 다섯 가지 축복이 나타납니다.

1. 내가 저를 건지리라 - 구원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시 91:14a)

여기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하솨크’라고 하는데, 그 뜻은 ‘달라붙다’, ‘애착을 가지다’입니다.
다시 말해서 갓난아이가 엄마를 안 떨어지려고 꽉 붙드는 것을 말합니다.
갓난아이는 엄마를 떨어지기만 하면 울고 난리가 납니다.
어떻게 하든지 엄마를 안 떨어지려고 붙들고 발버둥을 칩니다.
‘하솨크’는 바로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전적으로 의지하고 매달리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앞에 꼭 붙잡힌 바 되고, 우리도 하나님 앞에 달라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역사, 하나님께서 지키고 보호하시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꼭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여,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만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매달립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합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노력합니다. 최선을 다합니다.”라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통해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그런데 ‘건지리라’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엄마가 젖먹이 자식을 항상 보살피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엄마가 젖먹이 자식에게 젖도 주고 옷도 입혀 주고 병났을 때는 병원에도 데려가고 항상 돌봐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봐주시고 전쟁과 위험에서 건져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고난 중에도 피할 길을 주시고 구원하시고 보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서 결단코 이탈되는 일이 없습니다.

시편 145편 20절에 다윗 왕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사람이 아무리 어려움과 위험 속에 빠졌다 할지라도 눈만 똑바로 뜨고 있으면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수직적인 눈’과 ‘수평적인 눈’만 가지고 있으면 곧 회복될 수 있습니다.

수직적인 눈은 하늘을 쳐다보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말합니다.
수평적인 눈은 인류 역사와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말합니다.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 수직적인 눈을 가진 사람은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청합니다. 또한 수평적인 눈을 가지고 인류 역사를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섭리하셨음을 깨닫고 진리 가운데 항상 거합니다.

기자 생활을 하던 서른두 살 난 젊은 남자가 있었습니다.
5∼6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지 불면증과 심한 우울증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는 밤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무려 백일 동안이나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대인공포증, 자율신경실조 현상까지 나타났습니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정신과 의사를 만났습니다.
“나를 좀 도와 주십시오. 내가 무슨 병에 걸렸습니까?”
“당신은 기자 생활로 너무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아서 모든 것이 다 비정상입니다.
그러니 나하고 세 가지만 약속합시다.
‘첫째, 자살하지 말 것, 둘째, 이사하지 말 것, 셋째, 사표 쓰지 말 것.’
이것이 당신이 지켜야 할 약속입니다.”

그는 정말, 빌딩 옥상 같은 데 올라가면 뛰어내리고 싶고, 다리를 지나가면 강에 뛰어들어가고 싶고, 자동차가 지나가면 뛰어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달려왔습니다.
아들을 붙들고 “얘야, 내가 너에게 강권하니 넌 무조건 교회 나가라. 너는 교회 나가야 된다. 교회밖에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남자는 그냥 십자가 간판만 보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 교회를 나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에게 “목사님, 나를 좀 도와 주십시오. 나는 극심한 정신병으로 시달리고 있습니다.”라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은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쳐다보고 구원받은 것처럼, 당신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숙제를 주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숙제입니까?”
“매일마다 성경 한 장씩을 쓰십시오. 병이 나을 때까지, 성경을 하루에 한 장씩 계속해서 쓰십시오. 이것이 숙제입니다.”

그래서 이 남자는 성경을 한 장씩 계속해서 썼습니다. 한 달, 석 달, 육 개월, 일 년 동안 썼는데, 성경을 읽기 시작한 지 일 년 만에 잠을 잘 자게 되었습니다. 불면증이 없어졌습니다. 스트레스가 없어졌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성격이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돈과 자존심 문제에 민감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에게 해를 끼치면 울분과 분노, 질투심 때문에 견디질 못했습니다.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원수처럼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쓰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미워하는 마음이 떠나게 하시고 질투심이 떠나게 하시고 증오감이 떠나게 하시고, 나에게 용서하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그러자 평소에 증오하고 미워했던 사람에 대한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게 되었고, 오히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평강을 주시고 기쁨을 주셨습니다. 일 년 동안 성경 말씀을 읽자 생각이 변화되고 변화되어서 스트레스, 우울증도 없어지고 다시 건강을 되찾아 온전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변화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서 새로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도 하나님께서 해결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변화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2. 내가 저를 높이리라 - 높임, 존귀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시 91:14b)

여기서 ‘안다’는 것은 그냥 막연하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느끼고 맛보아 체험적으로 아는 신앙과 믿음을 말합니다. 그냥 친구 정도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함께 살므로서 서로 성격과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아는 것을 ‘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연단과 시련을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 나와 신앙 생활 하면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축복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연단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섭리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때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원망과 불평, 부정적인 생각에만 빠져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교회를 등지고, 성경을 등지고 자기 혼자 삽니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자를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높인다’는 단어에는 ‘안전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침략할 수 없는 높은 요새에 옮겨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높은 요새에 들어 올리셔서 아무 재앙 없이 안전하고 평안하게 살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둘째, 신분이 높아져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점점 형통하고 잘되는 것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셋째, 영광의 자리에 앉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낮아지고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점점 높여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한나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아들, 사무엘을 나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2장 7절 말씀을 보면,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찬양했습니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富)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한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음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높이시면 낮출 자가 없고, 하나님이 낮추시면 높일 자가 없으며,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을 부자가 되게도 하시며 부자를 가난하게도 하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높여 주십니까?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을 높여 주십니다(마 5:19). 섬기는 사람을 높여 주십니다(마 23:11). 기도하는 사람을 높여 주십니다(행 10:2, 22). 선을 행하는 사람(롬 13:3), 전도하는 사람(고후 8:18), 순종하는 사람(히 5:8∼10),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벧전 5:6)을 높여 주십니다. 교만한 사람은 패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늘 겸손하게 낮아지고 낮아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 “부귀(富貴)는 재천(在天)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자가 되고 귀하게 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 뭡니까? 구름입니까, 아니면 태양입니까, 별입니까, 달입니까? 아닙니다. 부귀가 하늘에게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 귀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부자가 되고 귀하게 되고 존귀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국회의원 중에 헨리 파우세트(Henry Fawcet)라는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국회의원은 맹인이었습니다. 어떻게 맹인이 가장 영향력 있는 국회의원이 되었을까요?

헨리 파우세트가 20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하루는 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실수로 총이 오발되는 바람에 그만 총알이 그의 얼굴에 맞고 말았습니다. 목숨은 건졌으나 그는 실명하여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고로 아버지도 충격을 받고 아들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내가 내 아들 장래를 망쳤구나.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겠다.’라고 죄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아들은 아들대로 ‘나는 이제 앞을 못 보니 책도 못 보고 살아서 뭐 하겠는가? 죽어버리자.’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부자가 다 이렇게 죽을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헨리는 누군가 심하게 통곡하며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보니까 자기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우는 소리를 듣고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울지 마세요. 아직도 나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도와주시면 나도 훌륭하게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너를 도와 주면 되겠니?”
“아버지, 나를 위해서 책을 읽어 주세요. 아버지가 나에게 책을 읽어 주시면, 내가 아버지를 통해서 책을 읽고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점자도 배워서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날 좀 도와주세요.”
“그래, 내가 널 도와 주마.”
아버지는 아들을 도와 열심히 책을 읽어주고, 아들은 점자를 배워서 최선을 다해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국회의원, 맹인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위기에 처하면 절망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도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 눈이 먼 헨리에게도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는 청춘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없는 것만 생각하고, 불평과 원망에 빠집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믿음이 있고 건강이 있고 소망이 있고 지혜가 있고 생각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것이고, 남은 것을 가지고도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고 인도하시고 사랑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내가 응답하리라 - 간구, 응답

“저가 내게 간구(懇求)하리니 내가 응답(應答)하리라”(시 91:15a)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간구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응답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간구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찬송하지 않습니다. 감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기의 고민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비밀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부모한테도 말못하고, 친구한테도 말 못했던 것, 얘기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말할 수 있고, 또 사랑하는 사람이 얘기하기 때문에 그 얘기를 들어주고 도와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십니다. 사람들은 무시하고 멸시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얘기, 어떤 간구를 하고 부르짖더라도 관심을 가지고 다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구하는 기도에는 응답이 있습니다. 문제 해결이 있습니다. 고난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기 때문에 기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24절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기쁨이 충만한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요, 슬픔이 충만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인상쓰는 사람, 우울한 사람, 불안한 사람, 두려움과 공포에 빠진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납니다. 감사가 넘쳐납니다. 용기와 희망이 솟아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사는 사람,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기도하는 사람에게 역사 하시고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가정도 행복한 가정은 기도하는 가정입니다. 회사도 잘되고 축복받는 회사는 기도하는 회사입니다. 교회도 부흥하고 발전하는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활력을 줍니다. 우리 생활을 풍족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강남 어느 지역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장사는 되지 않고,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만 생겼습니다. 이것저것 잡일로만 바빴지 식당 사업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부동산에 내놨는데 팔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게를 처분해야 하는데…. 이 가게를 팔고 뭘 할까?’하고 걱정했습니다. 앞길이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내가 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았지?’
그는 자기가 그 동안 새벽 기도도 하지 않고, 금식 기도, 철야 기도도 하지 않았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이제 내가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새벽 기도의 능력, 철야 기도의 능력, 금식 기도의 능력 주시고, 이 가게도 팔아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한 점잖은 신사가 그 식당에 찾아왔습니다. “우리 회사 직원이 한 50명 되는데, 직원 식사를 이 식당에 위탁할테니 직원들의 식사를 좀 맡아 주시오.”라고 말하며 선금으로 100만 원을 주고 갔습니다. 그래서 직원 50명이 식사를 하러 오니까 식당은 자리가 모자랄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식당을 팔아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식당을 넘치게 채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 식당 처분 안하게 된 것 감사합니다. 내 기도대로 응답 안 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이제 이 식당 안 팔리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이 식당을 통해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근심하고 걱정하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새벽 기도 하지 않습니다. 철야 기도 하지 않습니다. 금식 기도 하지 않습니다. 병원에 가서 수술하면 금식할지언정 하나님 앞에는 금식 기도 못합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어려운 고난과 고통 닥쳐야 뒤늦게 정신을 차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입니다. 그리고 대화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사랑한다고 하면서 입을 꾹 다물고 서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듣지 않는다면, 그것이 사랑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오순도순 대화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작은 문제도 기도하고, 큰 문제도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도 기도하고, 감당할 수 없는 것도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늘 깨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기도가 응답과 축복으로 나타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내가 저와 함께 하리라 - 함께 하심

“저희 환난(患難)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榮華)롭게 하리라”(시 91:15b)

여러분,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십니다. 동행하여 주십니다. 임마누엘의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성공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형통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행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왜 불행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왜 사업이 망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왜 회사에 부도가 납니까?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잘났다고 떠나고, 교만해서 떠났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불신앙에 빠지고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축복이 점점 떠나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드시 영광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환난에서 건져서 영화롭게 해 주십니다. 정신적인 만족과 물질의 축복,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번영과 칭찬과 영광과 성공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9장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은 어디 가서 무엇을 하든지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애굽 사람에게 팔려 보디발의 집에 갔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범사에 그를 형통케 하셨습니다(창 39:2). 또한 요셉은 모함을 받아 감옥에도 갔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케 하셨습니다(창 39:23). 결국 그는 옥중에서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마지막에 가서,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보상하시고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늘 깨닫고 느끼고 감사해야 합니다.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요, 수학자였던 파스칼(Blaise Pascal ; 1623∼1662)은 “행복은 우리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오직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만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디 가야 행복이 있습니까?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돈 많이 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대통령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권력을 가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돈이 있든 없든, 권력이 있든 없든, 하나님만 함께 하시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짜리 딸을 둔 어느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딸이 사춘기라서 그런지 부모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공부는 제쳐놓고 학교도 제대로 가지 않았습니다. 친구들하고 놀러 다니고, 집에는 밤늦게 들어왔습니다. 야단도 쳐보고 때려도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러다 가출해서 아주 잘못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걱정을 하다, 하다 이 부부가 ‘안되겠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 부모로선 더 이상 못하겠다.’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어디 가서 죄짓지 않게 하고, 사고 치지 않게 하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데 갑자기 마음속에 음성이 들렸습니다.
‘야, 너만 안타까우냐. 나도 안타깝다.’
‘뭐가요?’
‘네가 내 말을 안 들을 때, 내가 얼마나 안타까운 줄 아느냐?’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자신도 집사였지만 교회에 제대로 안 나가고, 하나님 말씀을 안 듣고 불순종했던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나도 너 참 안타깝다. 그러니까 너무 야단하지 마라. 나도 너를 참았으니까, 너도 참아라. 기도만 해라.’

그래서 딸이 속썩이고 말 안 듣는 것을 통해, 자기도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잘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 이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충성하고 헌신하겠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인내한 것처럼, 나도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딸에 대해 인내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날 밤도 딸이 안 들어오자 부부는 걱정이 되어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어디 가서 뭘 하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지키고 보호하고 함께 하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따르릉” 울렸습니다. 병원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딸이 병원에 입원하고 있으니 빨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봤더니 교통사고였습니다. 딸이 친구 세 명과 함께 택시를 탔는데, 택시가 그만 전신주에 정면충돌을 했다는 것입니다. 차는 불이 붙어서 전소해 버리고, 기사는 물론 그 안에 타고 있던 세 명의 학생이 다 다쳐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운전사 바로 옆, 조수 석에 앉았던 자기 딸만 무사했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얼굴만 하얗게 질려있었습니다.
‘하나님, 어째서 제일 위험한 자리에 앉은 내 딸만 안전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피투성이가 되고 다쳤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딸과 함께 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걱정 근심 하며 그냥 있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위험한 교통 사고에서 딸의 생명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딸이 병원에서 입원하고 있는 동안 아버지, 어머니와 대화를 많이 하여 부모와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사춘기에 탈선하고 방종하던 딸이 다시 돌아와 정상적으로 공부하고 착한 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딸을 살려주신 것 감사합니다. 딸의 마음을 다시 돌이키신 것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인내하고 끝까지 참고 기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 어떤 어려움과 절망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낙심하거나 탄식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고, 끝까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자녀가 안 들어 와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업이 안되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문제, 역경이 와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사랑하는 자에게 함께 하시는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우리 가정은 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축복을 받게 하시고, 이 나라도 민족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을 받게 하시고, 회사도 직장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을 주시고, 우리 교회 집사·장로·권사·성도들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축복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5.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리라 - 장수, 만족

“내가 장수(長壽)함으로 저를 만족(滿足)케 하며 나의 구원(救援)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시 91:16)

여러분, 생명의 주관자가 누구입니까? 누가 사람을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에 건강과 장수는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누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습니까? 우리가 한국에 태어난 것, 부모를 만나서 김씨, 박씨, 최씨가 된 것, 우리 인간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주관자,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생명도 주십니다. 건강도 주십니다. 장수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를 장수함으로 만족케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래 산다고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 세상의 악한 사람들 중에도 오래 사는 사람이 있지만, 그들은 욕망과 죄악과 갈등 속에서 삽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만족 없이 오래 사는 것은 오히려 고통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편안한 가운데 장수의 축복을 누리도록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잠언 10장 27절에 솔로몬 왕은 “여호와를 경외(敬畏)하면 장수하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믿으면 장수의 축복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장수한 사람들의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구약 성경에 사라는 127세(창 23:1), 아브라함은 175세까지 장수했습니다(창 25:7∼8). 이삭은 더 오래 살아서 180세까지 살았습니다(창 35:28∼29). 야곱이 147세(창 47:28), 요셉이 110세(창 50:26), 아론이 123세(민 33:39), 모세가 120세(신 34:7), 여호수아가 110세(수 24:29). 다 100세 이상을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잘 믿으면 100세 이상 축복 받고 산다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신약 성경에 안나는 106세까지 살았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눅 2:36∼37).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 여자는 보통 15세에 시집을 갔는데, 7년 동안 결혼 생활하고 84세를 과부로 살았다고 하니까 그의 나이를 106세로 추정하는 것입니다. 안나는 106세까지 과부로 살면서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하고 기도하여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렸습니다. 오늘 참석한 여러분도 다 장수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최근 8·15 남북이산가족 상봉 후에 ‘건강 관리 신드롬’이 생겼다고 합니다. “살아 있어야 가족과 형제들을 만날 수 있다. 건강해야 된다.”라고 해서 60세, 70세, 80세 할머니·할아버지들이 건강 관리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벽이면 약수터를 오르내리며 운동을 하고, 저녁에도 아파트 주변을 산책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건강의 비결이 뭡니까? 어떤 사람은 “건강 식품을 먹어야 건강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건강 식품 제조 업체인 미국의 허벌라이프사의 창업자 마크 휴즈 회장은, 건강 보조 식품을 판매해 한해 매출이 9억 달러에 달하는,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좀 더 안전하고 훌륭한 다이어트 식품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많은 건강 식품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세계 사람에게 더 많은 건강 보조 식품을 공급하는데 생애를 바치겠다.”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로스앤젤레스 해변에 있는 무려 300억 원짜리 초호화 맨션에서 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건강, 건강’, ‘장수, 장수’를 외치던 건강 식품 창업자 마크 휴즈는 44세에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건강 식품을 먹고 오래 살고자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오래 삽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고 장수하게 하셔야 오래 삽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 건강의 근원 되신 하나님, 우리는 그 하나님을 잘 믿어서 장수를 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에는 건강을 위협하는 유해 식품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제목입니다.

중국산 납 꽃게뿐만이 아닙니다. 납이 들어간 복어와 병어, 물 먹인 아귀, 돌 넣은 홍어, 살충제를 쓴 인삼 등 유해 식품이 아주 많습니다. 옥수수 기름에다 황산을 넣어 참기름 색깔로 바꾼, 황산 식용류를 만들어 30억 어치나 팔았습니다. 그밖에도 타르 색소를 넣어서 암을 유발시키고 혈소판 감소증을 일으키는 검은 깨, 발암 물질인 묵, 쇳가루 섞인 고춧가루 등 불량 식품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음식을 먹고도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요즘 신문을 보면 먹을 게 별로 없습니다. 무엇을 먹고 살아야겠습니까? 병든 소를 잡아서 소고기를 팔아먹지를 않나, 육류도 불량 식품이 참 많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불량 식품, 한국의 부정부패가 빨리 떠나게 하시고, 진정한 건강 식품이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여 축복받는 성도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해 주시고, 축복을 주십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둘째, 높여주시고,
셋째, 기도를 응답하시고,
넷째, 우리와 함께 하시고,
다섯째, 장수케 해 주십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충청남도 금산군에 사시는 95세 동갑내기 할머니와 할아버지, 송병호, 송원금 씨는 결혼 생활 80년 동안 한번도 아픈 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하십니다.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 건강 비결이 뭡니까?”하고 물었더니, 한결같이 “교회 때문이여. 교회 가는거 밖에 몰라.”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할머니가 시집왔을 때 시어머니 손에 이끌려 나갔던, 교회 생활이 건강을 유지하는 큰 기둥이라며, “우리는 첫째도 교회, 둘째도 교회, 셋째도 교회, 교회밖에 몰라요.

교회 열심히 다녔더니 하나님께서 장수하게 해 주셨습니다. 새벽 기도, 철야 기도, 금식 기도 예배 시간마다 나가고 하나님만 믿었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찬송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물질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교회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넘쳐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신앙이 좋으니까 그 집 아들, 딸부터 손자, 손녀까지 다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 받고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고,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신앙, 사랑의 인생을 살 때 하나님께서 풍족하게 역사하시고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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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에서 선택한 사랑에 대한 본문과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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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부터 5장을 읽으면서 '사랑"에 관한 설교 본문과 제목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창세기 1:26-28) 참조 5:1

형상이란 히브리 단어는 "체렘(צֶלֶם tselem)"이라고 합니다.

צֶלֶם  스트롱번호 6754
1. 그림자, 2. 형상

발음 : tselem

어원 : ‘그늘지다’는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형상(창 1:26, 삼상 6:5, 시 73:20), 석상(민 33:52), 우상(왕하 11:18, 겔 7:20, 암 5:26), 그림자(시 39:6).
구약 성경 : 17회 사용


'체렘'이란 단어의 의미는 완성된 모습이 아니라 완성을 위하여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한 조각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은 모습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닮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

체렘의 의미 / 길가에 버려진 거대한 바위가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누가 저렇게 큰 바위를 길에다 버려두었나?
이때 어느 조각가 한 사람이 그 바위를 조각실로 옮긴 후에 부지런히 조각품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거대한 바위에서 조각품이 될 수 없는 떨어져 나가는 조각들을 "체렘" 이라고 합니다.



가죽옷(창세기 3:21)

옷(케토넷트, כְּתֹנֶת kethôneth)

1. 사람의 가죽, 2. 시어에서는 몸, 3. 짐승의 가죽

발음 :  kethôneth

어원 : 40:14, כָּתְנוֹת, 출 39:27, 복수 연계형 כִּתְנוֹת, 창 3:21, 출 39:27, 복수 어미활용 כֻּתָּנוֹתָם, 레 10:5, ‘가리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가죽옷(창 3:21), 속옷(출 28: 39, 29:8, 39:27), 겉옷(출 40:14, 레 8:7), 옷(레 10:5, 삼하 15:32, 아 5:3), 채색옷(삼하 13:18, 19), 의복(느 7:70,72).
구약 성경 : 29회 사용

가죽(오르,  ʽôwr) עוֹר

어원 : 578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가죽(창 3:21, 레 4:11, 욥 2:4), 살(출 22:27),꺼풀(출 34:29, 30), 피부(레 13:2, 34, 렘 13:23, 욥 18:13).
구약 성경 : 99회 사용
모두에게 잘 알려진 본문을 설교하려면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엮은 옷과 가죽옷의 의미를 묵상합시다.
위에서 소개한 이미 설교한 "가죽옷과 예수님의 피"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설교일 / 01-19-2019).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는가?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려고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는데 그 이유는 가죽옷을 만들려면 짐승이 죽어야 합니다.
짐승이 죽을 때 피를 흘려야 합니다.
따라서 가죽옷의 의미를 두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는 희생 - 십자가(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For the message of the cross is foolishness to those who are perishing, but to us who are being saved it is the power of God.


둘째는 피 - 보혈(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케 되나니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In fact, the law requires that nearly everything b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


아담과 하와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하였지요.
인위적인 방법들을 철저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여전히 신앙의 울타리로 넘어오는 인위적인 가르침, 교리, 교주, 교단, 이념 등과 같은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영적인 방법 즉 신적인 방법만이 부끄러움을 가리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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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시드니 지역에서 "우리농장"을 운영하는 "김은각집사님"
오래 전 여의도에서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집사님께서 북한에서 가져온 북한성경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게 부탁하기를 "이목사는 통일이 되기 전까지 북한을 방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이유는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서로에게 덕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김은각집사님은 당시 월드비전의 북한 사업 담당을 하시던 고 박창빈목사님의 친구라고 합니다.
마침 북한 지역에 1000평 규모의 비닐 하우스를 제작해 달라는 주문을 받고 모든 자재는 남한의 것을 사용해야 한다고 고집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남한의 제품이 중국산 보다 훨씬 견고하고 효능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북한 당국에서는 남한의 제품이 북한으로 들어오면 혹시 남한 제품에 대한 우수성이 드러나므로 매우 긴장하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항에서 모든 재료를 선적하여 배편으로 북한 원산항으로 운반하는 일을 성공하셨다고 합니다.
당시 비닐 하우스에서 첫 열매를 가져와 서울에서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며 감격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참외, 오이, 깻잎.....

척박한 북한 땅에서 비닐 하우스를 제작하고 수경재배를 통하여 농산물을 생산하였을 때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감격해 하며 정말 이것이 비닐 하우스에서 생산되느냐 하며 감격했다고 합니다.

수경재배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북한 생활 13년, 윤상혁 평양의대 교수가 전한 놀라운 이야기


누구에게나 쉽게 허락되지 않는 땅 북한에서 13년을 살아 온 50세 남성이 희끗희끗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2000여명의 시선이 꽂힌 무대 위 스크린에는 팔이 꺾인 채 재활치료를 받으며 활짝 웃는 5세 어린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외국인 최초로 평양의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윤상혁 평양의대 회복기과(재활의학과) 교수,

그는 2007년 나진 선봉 지구에서 진료 봉사를 시작해 2년 전 코로나로 북한 국경이 봉쇄될 때까지 평양에 상주하며 척추 신경의학 및 뇌성마비와 자폐증 어린이들의 재활 치료에 힘써왔다.
척추전문의였던 그가 북한에서 ‘어린이 재활’ 영역으로 치료의 길을 낼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돼 준 것이 복신이와의 만남이었다.

“난로도 없는 추운 진료실에 할머니가 다섯 살짜리 아이를 등에 업고 찾아왔습니다.
아이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중증의 경직성 사지마비를 겪고 있는 뇌성마비였는데요.
보니까 입이 다 열려 있었고 머리는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음식을 씹어 삼킬 수도 없어 그동안 할머니가 대신 입으로 씹어 넣어줬습니다.”

양육하고 있던 네 살 막내 딸의 얼굴이 떠올라 더 마음이 쓰였다. 어린이 뇌성마비 환자를 치료해 본 게 처음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치료에 임했더니 몇 주 후 근육운동에서 변화가 보였다. 복신이는 손가락을 움직이고 주먹을 쥘 수도 있게 됐다. 몇 달 뒤 김일성종합대학 평양의학대 회복기과 교수로 부임하게 됐을 때도 복신이를 데려와 치료할 수 있도록 병원 측에 침상을 마련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복신이는 소아장애 증상 가운데 평양의대병원에서 받아들여진 첫 사례자가 됐다.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복신이 치료를 멈추지 않았지만 6개월여 시간이 흐르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하루는 복신이 할머니가 윤 교수를 찾아와 “복신이를 데리고 집에 가서 잠시 쉬고 오겠다”고 전했다. 알고 보니 낫지도 못할 아이 하나 때문에 입원해야 할 다른 아이들이 제대로 치료를 못 받는다는 말을 들어왔던 것이었다. 당시 북한 사회에서 복신이 같은 아이들은 가망이 없는 불치병으로 여겨왔기 때문에 치료받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윤 교수의 만류에도 할머니는 치료를 포기한 채 복신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후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뇌성마비 아이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차도가 있는 것을 본 사람들이 복신이 같은 자녀를 키우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 뒤 윤 교수의 치료실 앞에는 뇌성마비 아이들과 그 부모들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복신이가 집으로 간지 1년쯤 지나는 동안 여러 아이들이 병원을 스스로 걸어 나갔고, 증상이 호전되는 놀라운 일들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방송국에서 나와서 치료과정을 촬영하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복신이와 같은 뇌성마비 어린이들을 위한 소아행동발달장애 전문병원을 같이 세우기로 했습니다.”

윤 교수는 언젠가 복신이를 병원으로 데려와 다시 치료할 수 있는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소문해 부모와 연락이 닿았지만 복신이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그는 “그날 이후로 복신이와 같은 아이들을 위해 일하기로 마음먹었다”고 고백했다. 이어 “천국에서 제일 반가워할 그 일, 바로 어린이를 섬길 수 있는 길을 마련해준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후 뇌성마비 아이들의 치료센터와 전문의 교육과정도 국가의 승인을 받게 됐다. 복신이로 인해 숨겨졌던 수많은 아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과 기회가 찾아오게 된 것이다. 윤 교수는 참석자들을 향해 말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스펙을 쌓고 좋은 차를 사고 좋은 집에 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주님 앞에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새 계명의 마음을 받길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새 계명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신 그 사랑, 하나님과 내 이웃을 사랑하며 내가 서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자로 세워지는 것은 뒷전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밤, 우리가 다시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예배자로 회복되고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윤 교수는 북한 전역에 유치원 탁아소 농촌진료소를 짓는 국제 NGO ‘선양하나’의 국제대표를 맡고 있다. 선양하나는 북한 땅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며 살아가는 공동체다. 2008년 6명으로 출발해 현재는 8개국 39명의 동역자들과 함께 하고 있다.

유튜브 채널 ‘다니엘기도회’와 ‘미션라이프’로 실시간 중계된 이날 집회는 동시접속자 5500여명을 기록하며 온오프라인을 통해 은혜와 도전을 심어줬다. 셋째 날 집회인 27일에는 김승욱 할렐루야교회 목사가 메신저로 나설 예정이다.

자료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7016348&code=61221111&sid1=c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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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éline Marie Claudette Dion / 1968. 3. 30-
셀린 마리 클로데트 디옹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가를 부른 세계적인 팝가수 셀린 디온이 가수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그녀는 폭발적인 가창력과 맑은 음색을 지닌 '세계 최고의 여가수' 불린다.
인기정상을 달리던 그녀가 돌연 '부와 명예'를 거절하고 가정으로 돌아간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캐나다 출신인 셀린 디온이 가수가 된 것은 열두살 때였다.
그녀는 자신의 노래가 담긴 테이프를 들고 한 음반회사를 찾았다.
그때 지금의 남편인 안젤린이 빚을 얻어 음반을 만들어 주었고 셀린 디온의 매니저로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셀린 디온은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편이 지금 후두암에 걸려 투병중이다.
지금은 남편에게 내가 가장 필요한 시간이다.
남편 곁에서 병간호를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
쇼 비즈니스가 결코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이제 남편에게 진 사랑의 빚을 내가 갚을 차례다.
부부간의 사랑은 위기에서 그 진위가 가려진다.

성 요한 성당(Cathedral of St. John The Civine)

4억 달러의 예산으로 2050년에 완공 예정인 이 성당은 완공이 된다면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성당이 될 것이다.
고딕과 로마네스크 스타일로 지어지고 있는 건축물로 쉼터, 그래픽과 조각 스튜디오, 체육관, 원형극장 등이 들어설 예정이며 컬럼비아 대학교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미국 뉴욕의 성 요한교회는 매년 한번씩 성 프랜시스를 기념하는 예배를 갖는다.

맨하탄 모닝사이드 하이츠 근처에, 영국의 성공회 교회인 Episcopal Church가 1888년에 맨하탄에 있는 로마 카톨릭 교회인, 세인트 패트릭스 성당(St. Patrick's Cathedral)을 겨냥하여 교회를 계획하고, 1892년에 착공해서 두 세계 대전을 거치는 동안 비잔틴-로마네스크 양식에서 1909년 고딕양식으로 바뀌어 가며 현재까지 준공을 하고 있지만 완공되지 않은 상태이다. 2001년 화재로 문을 닫았다가 2008년에 다시 문을 열었다. 
 
13세기 북 프랑스 고딕 양식을 차용한 성당은 높이가 38미터에 길이 186미터 넓이 70미터의 미국내 가장 긴 성당이다. 성가대 뒤편에는 통로를 이용해 “방언의 방”으로 불리는 일곱 개의 작은 강당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1892년 미국을 들어오는 이민자 다수 민족을 상징해서 각각의 성인들을 축으로 만들어 졌다. 성당은 내부는 물론이고 굳이 성당안을 들어가지 않더라도 볼거리가 많다.

이 날은 성 프랜시스의 풍성한 사랑을 기념하기 위해 신자들이 집에서 기르고 있는 모든 동물도 함께 데려오도록 허용하고 있다.
"아시시의 성자"로 불리는 프랜시스는 설교시간에 지저귀는 참새들을 조용하게 만들고 사나운 짐승을 온순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프랜시스는 원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그가 입은 옷을 걸인들에게 선물했다.
그는 가끔 누더기를 걸친 채 귀가했다.
프랜시스는 종종 한센씨병에 걸린 환자들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으며 걸인들의 발을 씻어주었다.
프랜시스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충고한다.
그대여, 진정 행복과 평화를 원하는가.
그러면 먼저 마음을 비워라.
그리고 그 빈곳에 이웃에 대한 사랑을 채워라.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분노와 탐욕은 눈처럼 녹아내린다.


사랑은 내 안의 "나"를 비우는 것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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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주요 용어 설명 #. 2 죄(罪)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

죄의 정의 : 덮은 것을 벗겨내는 것이다!
암송 성구 : 로마서 6:23(로마 육이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266. 죄(하마르티아)

ἁμαρτία, ίας, ἡ

1. 죄,  2. 고후 11:7,  3. 요한 9:41

발음 / 하마르티아(hamartia)
어원/ 26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요 8:21, 롬 5:20), 불법(살후 2:3), 죄악(히 11:25)
신약 성경 / 173회 사용

* 264. ἁμαρτάνω

1. 하나님의 종교적 도덕적 법을 어기고 잘못하다,  2. 죄를 범하다

발음 / 하마르타노(hamartanō)
어원 / [기본형] 미래 ἁμαρτήσω, 제2부정과거 μάρτω, 가정법 ἤμαρτον, 제1부정과거 ἡμάρτησα, 가정법 ἁμαρτή- σω,
과거분사 ἁμαρτήσας, 1[부정불변사]과 3313의 어간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죄를 범하다(마 18:15), 죄를 짓다(눅 15:18, 롬 6:15), 죄로 인하다(요 9:2), 범죄하다(롬 2:12), 죄가 있다(벧전 2:20)
  • 신약 성경 /  43회 사용
  • * 3313. μέρος

    μέρος, ους, τό 

    1. 누가 11:36,  2. 몫
    발음 / 메로스(mĕrŏs)
    관련 성경 / 지방(마 2:22, 16:13, 행 19:1), 벌(마 24:51, 눅 12:46), 분깃(눅 15:12), 토막(눅 24:42), 편(요 21:6), 얼마(행 5:2),
    일부(행 23:6), 얼마간(롬 15:24), 어느 정도(고전 11:18), 부분적(고전 13:9, 12), 차례(고전 14:27), 정도(고후 2:5), 일(고후 9:3),
    지체(엡 4:16), 갈래(계 16:19), 참여(계 20:6, 21:8, 22:19)
    신약 성경 / 42회 사용

    사랑에 대한 정의를 되새겨 봅시다.
    사랑의 정의 : 덮어주는 것이다!
    - 사랑은 자기 울타리를 넘어야 확장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울타리 안에서만 사랑합니다. 

    암송 성구 : 베드로 사팔(베드로전서 4:8)
    - 베드로전서 5장
      베드로후서 3장
      따라서 베드로 사팔이라고 하면 베드로전서를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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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주제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사랑 다음의 주제는 "죄"
    왜냐하면 사랑은 죄를 덮어주는 것 즉 용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살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여름철에 비행기를 타게 될 때 지상에서는 날이 흐리고 비가 내릴지라도 비행기가 고공 도파 후 비행을 시작할 때는 고공에서는 해가 밝게 빛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항상 태양처럼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라는 검은 먹구름이 덮어버리면 빛나는 태양도 그 빛을 차단합니다.
    따라서 사랑은 친밀한 관계
    죄는 친밀한 관계의 단절이라고 하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9-03-2023(주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하나님 사랑의 특징은 인격적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고 합니다.
    수단이란 사람을 물체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적이란 사람을 인격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드러나는 관계는 수단에 의한 방법으로 형성됩니다.

    예를 들면 푸주간에서 쇠고기를 구입하려고 돈을 지불하면 돈의 가치만큼 고기를 저울에 달아 확인 후에 고기를 줍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돈이라는 매개체가 관계를 형성합니다.

    그런데 어느 마을에 새롭게 개장하는 정육점에서 개업 기념일에 고기를 무료로 나눠준다고 하면 사람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순 우리말 모음

    다소니 : 사랑하는 사람

    다소다 : 애틋하게 사랑하다 

    가람 : 강의 우리말

    그린비 : 그리운 남자

    여우별 : 궂은 날 잠깐 보였다가 사라진 별 

    볼우물 : 보조개 

    아람치 : 자기의 차지가 된 것

    미르 : 용

    푸르미르 : 청용

    미리내 : 은하수

    그린내 : 연인

    아라 : 바다

    꼬꼬지 : 아주 오랜 엣날 

    눈바래기 : 멀리 가지않고 눈으로 마중

    마루 : 하늘

    그린나래 : 그린듯이 아름다운 날개

    예그리나 : 사랑하는 우리사이

    비나리 : 축복의 말 

    어리연히프제 : 치마를입고 활쏘는 여자들

    가시버시 : 아내 , 남편을 뜻하는 말

    늘솔길 : 언제나 솔바람이 부는 길

    한울 : 우주

    꽃가람 : 꽃이 있는 강

    수피아 : 숲의 요정

    아토 : 선물

    희나리 : 마른장작

    샛별 : 새벽 동쪽 하늘에서 빛나는 금성

    닻별 : 카시오페아 별자리

    산돌림 : 옮겨다니며 내리는 소나기

    듀륏체리 : 늦게 얻은 사랑스러운 딸자식

    물비늘 : 잔잔한 물결이 햇살에 비치는 모양

    타니 : 귀걸이 

    하람 : 꿈의 뜻

    사시랑이 : 가늘고 힘 없는 사람

    도투락 : 어린아이 머리댕기

    가우리 : 고구려 

    미쁘다 : 진실하다

    아띠 : 친구 

    새라 : 새롭다

    나린 : 하늘이 내린

    라온하제 : 즐거운 내일

    라온제나 : 기쁜 우리

    라온힐조 : 즐거운 이른아침

    꽃 잠 : 신혼부부의 첫날밤

    나르샤 : 날아오르다

    흐노니 : 누군가를 그리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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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우리말
    1 해오름달 새해 아침에 힘있게 오르는 달
    2 시샘달 잎샘 추위와 꽃샘 추위가 있는 겨울의 끝달
    3 물오름달 뫼와 틀에 물오르는달
    4 잎새달 물오른 나무들이 저마다 잎 돋우는 달
    5 푸른달 마음이 푸른 모든이의 달
    6 누리달 온 누리에 생명의 소리가 가득 차 넘치는 달
    7 견우직녀달 견우직녀가 만나는 아름다운 날
    8 타오름달 하늘엔 해, 땅위에선 가슴이 타는 정열의 달
    9 열매달 가지마다 열매 맺는 달
    10 하늘연달 밝달뫼에 아침의 나라가 열린 달
    11 마름달 가을에서 겨울로 치닫는 달
    12 매듭달 마음을 가다듬는 한해의 끄트머리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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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람
    '강의 옛말' 강처럼 넓고 부드럽게 흐르듯이

    가람슬기
    강처럼 푸르게 그리고 슬기롭게

    가온
    '가운데의 옛말' 세상에 중심이 되어라

    그린나래
    그린듯한 아름다운 날개처럼

    고운
    '고운' 말 그대로 고운 삶을 살아라

    나래 '날개를 이르는 말' 자유롭고 창조적

    나린
    하늘이 내린

    나르샤
    비상하다, 날아오르다

    나봄
    봄에 태어난 아이

    나예
    나비처럼 예쁜 아이

    난새
    한껏 날아오른 새처럼 힘차게

    노을
    노을처럼 곱고 예쁘게 자라거라

    누리
    온세상에 너의 뜻을 펼치며 살거라

    누리봄
    세상을 봄처럼 희망차게 가꾸는 사람

    늘봄
    늘 봄처럼 싱그러운

    늘찬
    늘 옹골차게

    다빈

    빈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

    다소니
    사랑하는 사람

    다슬
    모든 일을 슬기롭게

    다솜
    애틋한 사랑

    다온
    모든 좋을 일이 다 오다

    다올
    하는 일 마다 복이 오다

    다은
    다사롭고 은은하게 자라는

    다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

     

    다흰
    다흰 모두 다 하얗고 순수한

    단미
    사랑스러운 여자

    도담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두빛나래
    두개의 빛나는 날개

    든해
    집안으로 가득 들어온 햇빛처럼 밝게


    라온

    '즐거운'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 늘 즐겁게

    라라
    흥겹고 즐거운 삶을 살거라

    라미
    '동그라미'에서 따온 말, 동글동글 부드럽게

    루리
    '이루리' 모든 뜻을 이루다

    마루
    산 꼭대기 정상에 우뚝 서길

    마루한
    으뜸가는 큰 사람이 되거라

    마리
    '머리'의 옛말, 으뜸가는 사람

    모아
    늘 뜻을 모아 사는 삶을 살거라

    미나
    미덥게 자라나길

    미르
    '용'을 뜻하는 말, 용처럼 씩씩하고 멋지게

    미리내
    은하수를 뜻하는 예쁜 순우리말  

    바다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갖거라

    바론
    '바른'의 옛 순우리말로 바르게 살길

    벼리
    '일이나 어떤 글의 뼈대가 되는' 중심이 되다 

    별하
    별처럼 높고 빛이 나는 사람 차고 미덥게 

    산다라
    굳세고 꿋꿋하게

    소아
    소담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길

    소미
    솜처럼 깨끗한

    솔찬
    소나무처럼 푸르고 옹골찬

    수련
    몸과 마음씨가 맑고 고운 사람이 되길

    수피아
    숲의 요정

    슬기
    언제나 슬기로운 사람

    슬아
    슬기로움과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

    설아
    눈과 같이 깨끗한 아이

    슬예
    슬기롭고 예쁜 사람

    슬옹
    슬기롭고 옹골찬 사람

    슬우
    슬기롭고 우람하고 씩씩한

    슬찬
    슬기로움으로 가득찬 사람

    시내
    시냇물처럼 말고 깨끗한 사람

    아라

    '바다'의 우리말, 바다처럼 넓게 살거라

    아란
    아름답게 자란

    아람
    가을햇살에 충분히 익어 저절로 벌어진 과일

    아리수
    '한강'의 우리말

    아리아
    '요정'의 우리말

    아롱별
    아롱다롱 빛나는 별처럼 아름답게 자라길

    움찬
    돋아오르는 싹처럼 힘차게 자라길

    윤슬
    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물결

    으뜸
    이 세상의 최고라는 뜻

    은가람
    '은은히 흐르는 강' 이라는 뜻의 순우리말

    이든
    착하고 어질다

    이솔
    소나무 같은 곧은 품성을 지닌 아이

    자올
    원만한 성격

    잔디
    잔디처럼 끈기를 가진 사람이 되어라

    주나
    사랑과 기쁨을 주는

    주리
    즐거움을 주리

    지니
    많은 복을 지니다

    지은
    세상을 바르게 하는 좋은 글을 지은 사람이 되길

    지음
    지금의 삶을 아름답게

    진이
    진달래처럼 곱고 예쁜 사람

     

     

    찬솔

    알차게 잘 자란 소나무처럼

    찬슬
    슬기로움으로 가득차다

    초롱
    맑고 영롱하게

    큰솔

    크게 잘 자란 소나무처럼

    토리

    도토리처럼 작지만 야무지고 옹골차게

    티나
    어디서나 예쁘고 고운 티가 나는 사람이 되길

    푸르내

    푸른 물이 가득 흐르는 맑은 시내

    푸르니
    마음이 늘 푸른

    하나

    이세상에 단 하나

    하늬
    '하늬바람'처럼 시원한 사람

    하람
    하늘이 내린 소중한

    하랑
    함께 사는 세상에서 높은 사람이 되길

    한결
    한결같은 지조

    한빛
    큰 빛, 세상을 이끄는 환한 빛

    한울
    큰 울타리처럼 포근한 사람

    해나
    해가 나듯 따뜻한 사람

    해솔
    해처럼 밝고 소나무처럼 바르다

    해찬솔
    햇빛이 가득찬 푸르른 소나무처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https://atodtoa.tistory.com/104





    # 8. 세례(洗禮), 성령세례, 불세례 / 마태복음 3:11

                                                                                                               파트리스교회 수요 성서 연구 #. 1 물세례와 불세례(2020-06-10)

    세례(洗禮)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구약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입니다.
    신약의 첫 번째 책은 “마태복음”입니다.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 사이는 “대략 400년” 이란 긴 세월이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 시대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의 400년의 기간을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 라고 합니다.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를 “신구약 중간 시대”라고도 합니다. (아래 난외 주 참조)

    기독교 이외에 가톨릭교회와 유대교에서는 신구약 중간 시대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셨다는 것을 강조하여 “외경”이란 말씀을 인정하고 사용합니다.

    오래 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던 때에 어느 날 광야에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 거주하는 낯선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라고 외쳤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광야로 나와 요한의 외치는 소리를 들을 때 바로 이 사람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나는 너희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아니라 다만 물로 세례를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실 그 분은 너희들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며 실망하던 유대인들에게 메시아 신앙을 깨우쳤습니다. 요한의 외침을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서 세 종류의 세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 ; 회개와 구원을 위한 세례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 ; 구원의 확신과 보증을 위한 세례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 ; 심판을 위한 알곡과 죽정이를 구분하는 세례(불심판)

    그런데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것은 분명하게 성경에 소개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셨을까요?

    세 종류의 세례를 베푸셨던 수여자(授與者)를 살펴봅시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예수님 당시에는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마태복음 3:5∼6,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People went out to him from Jerusalem and all Judea and the whole region of the Jordan.
    Confessing their sins, they were baptized by him in the Jordan River.

    그러나 오늘날은 교회에서 목사가 세례를 베풉니다.
    "주 예수를 믿는 (아무개)에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and this water symbolizes baptism that now saves you also--not the removal of dirt from the body but the pledge of a good conscience toward God. It saves you by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세례는 요한의 증거대로 분명히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제 성령세례를 베푸셨으며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When the Counselor comes, whom I will send to you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goes out from the Father, he will testify about me.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사람들에게 보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령을 “보혜사(保惠師)” 라고 합니다.

    “보혜사(保惠師)”란 무엇인가?
    -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
    보혜사란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가르치시는 선생님” 이란 뜻입니다.

    보혜사를 영어 성경에서 찾아보면 NIV에서는 “상담자(the Counselor)”, KJV에서는 “위로자(the Comforter)”, NASB에서는 “돕는자(the Helper)” 라고 합니다.

    보혜사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étos)” 라고 합니다.
    스트롱 번호 3875

    1. 옹호자(an advocate), 중보자(intercessor),
    2. 위로자(a consoler), 위로자(a comforter), 돕는자(helper),
    3. 변호사(Paraclete)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한일서 2:1.
    3. 요한복음 14:16
    발음 : 파라클래토스(paraklētŏs)
    어원: 387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26, 16:7), 대언자(요일 2:1)
    신약 성경 : 5회 사용

    예수님께서 언제 누구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셨습니까?

    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When the day of Pentecost came, they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Suddenly a sound like the blowing of a violent wind came from heaven and filled the whol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All of them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in other tongues as the Spirit enabled them.

    오순절날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때 불세례도 함께 베푸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자세히 관찰하면 성령과 불이라는 용어가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는 사용하였으나 마가복음 1장과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성령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라고 모든 복음서에서 말씀하셨다면 불세례도 오순절 날 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그러므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세례자 요한에 의하면 성령세례와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성경을 폭 넓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과 불세례에 대한 말씀을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제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clear his threshing floor, gathering his wheat into the barn and burning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불세례”는 불로 심판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9절,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리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At that time Jesus came from Nazareth in Galilee and was baptized by John in the Jordan.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John answered them all,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one more powerful than I will come, the thongs of whose sandals I am not worthy to untie.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17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to clear his threshing floor and to gather the wheat into his barn, but he will burn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I would not have known him, except that the one who sent me to baptize with water told me, 'The man on whom you see the Spirit come down and remain is he who will baptize with the Holy Spirit.'

    34절,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I have seen and I testify that this is the Son of God.

    참조 / 성령세례(사도행전 1:5, 11:16, 고린도전서 12:3)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해서 언급한 성경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이외 성경에서는 오직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에서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분명하게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진다는 것은 불이 다양하게 갈라져서 오순절 날 한 자리에 모여 있었던 다양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재 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불세례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사도행전 2: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When the day of Pentecost came, they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Suddenly a sound like the blowing of a violent wind came from heaven and filled the whol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오순절 날 성령의 임재가 나타났을 때 마치 성령은 강한 바람 소리로 들렸습니다.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바람이 아닙니다.
    성령은 불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은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βαπτίσει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
    - will baptize with the Spirit Holy and fire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장차 오실 그 분께서는 “성령(프뉴마)과 불(푸르)”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외쳤던 요한의 증언은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그 분이 그토록 기대하던 “메시아”라고 기다렸으나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사십일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사도행전 1:3).

    이렇게 번역된 데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καὶ)”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카이”는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 라고 하여 앞의 것과 뒤의 것을 동등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령과 불”이라고 할 때 성령과 불을 동등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제까지 성령과 불을 이렇게 등위 접속사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등위 접속사가 아니라 우위 접속사로 해석하면 전혀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세례는 특별한 용법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위 접속사”인 “또는(or)”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위 접속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는 “성령 또는 불안에서” 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 사(四)복음서를 비교하여 연구해보면 더욱 확실히 증명된다.
    먼저 우리는 “성령과 불로”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과 불로”가 아닌 “성령으로” 라고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 라고만 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11:16과 고린도전서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라고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여러 성구들을 참조할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 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 보더라도 “침례” 라는 말이 의미를 더 잘 통하게 한다. 만일 “세례”라고 하면 “성령으로 씻긴다”는 말이 되므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성령은 영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요 14:18∼19)이므로 '성령 안에서 침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하되 '생명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침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행 2:38, 행 19:2)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고전 3:16-17)'과도 같은 말이 되는데 결국 우리와 주님과의 상호내주(Inter-Residence)를 뜻한다.

    한편 요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신령으로'라는 말은 “엔 프뉴마”로서 원 뜻은 “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의미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의미가 모두 해석되는 것이다. 즉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물 안에 잠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상징하는 뜻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 안에 잠긴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리가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로 세(침)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불 속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로서 신자와는 전혀 관계없고 불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즉 불신자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하는 대신에 '불 속에 잠기게 한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제 세례에 대한 용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세례(밥티조, βαπτίζω)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물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완전히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올 때는 과거의 나 즉 옛 사람은 죽었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물세례는 회개와 구원의 표시라고 하겠습니다.

    βαπτίζω, ον 스트롱번호 907

    1. 잠그다
    2. 결례를 행하다
    3. 세례를 베풀다
    발음 : 밥티조(baptizō)
    어원 : 미래 βαπτίσω, 제1부정과거 ἐβάπ- τισα, 제1부정과거중간태 ἐβαπτισά- μην, 미완료수동태 ἐβαπτιζόμην,
    완료수동 분사 βεβαπτισμένος, 제1부정과거수동 ἐβαπτίσθην, 미래수동태 βαπτισθήσομαι, 911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세례 받다(마 3:6,16, 막 16:16), 씻다(막 7:4), 세례 베풀다(요 1:25,26, 고전 1:14).
     [명] 세례(마 3:11, 막 1:4, 눅 3:16)
    신약 성경 : 77회 사용

    그런데 회개와 구원의 표를 받았지만 공중권세를 잡은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살면서 때로는 알게 모르게 죄를 짓게 됩니다.
    이렇게 죄를 짓게 될 때 사탄은 정말 네가 구원을 받았느냐?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아직도 그렇게 살아가느냐? 하며 조롱하고 비난할 때 정말 내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는가? 하고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성령세례가 구원을 보증합니다.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set his seal of ownership on us, and put his Spirit in our hearts as 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

    고린도후서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Now it is God who has made us for this very purpose and has given us the Spirit as 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

    히브리서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Because of this oath, Jesus has become the guarantee of a better covenant.

    성령세례가 보증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로마서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because through Christ Jesus the law of the Spirit of life set me fre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불세례는 심판 즉 소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명기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For the LORD your God is a consuming fire, a jealous God.

    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for our "God is a consuming f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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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약 자료

    주제 ; 세례(洗禮)
    - 세례(씻을 洗, 예도 禮)와 침례(잠길 沈, 예도 禮)
    - 밥티조(물속에 잠기다)

    성경 ; 마태복음 3:11

    종류 ;

     1. 물세례(회개와 구원) 베드로전서 3:21

     2. 성령세례(생명의 보증) 보혜사(요한복음 15:26)
     - 로마서 8:2, 요한복음 6:63, 고린도후서 1:22, 5:5, 히브리서 12:29

     3. 불세례(심판, 알곡과 죽정이)
    - 신명기 4:24, 히브리서 12:29
    - 마태복음 3:12, 누가복음 3:17

    *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
    - 전치사 "과"(카이)
     등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을 같은 것으로 이해
     우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은 서로 다른 것으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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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11-2022(금)
    성령세례

    "오순절 사건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

    이와 같은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다.
    이 속성은 한 마디로 "영원성(永遠性)"이다.
    영원이란 어느 시대에는 나타나고 어느 시대에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사건은 지금도 앞으로도 마지막 그 날까지 지속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

    "아니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며 그 영은 지금도 계속적으로 역사하는 영이다.

    셋째, 바울의 증거


    고린도전서 2:9-10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바울의 성령은 통찰하는 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영은 구약에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통하여 계속된다.

    신명기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명기 30:6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레위기 18: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로마서 11: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다.
    그런데 그 율법을 그의 백성들이 지킬 수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의 백성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강조하였다.

    로마서 2:28-29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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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외 주)

    신구약 중간시대

    신구약 중간 시대를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구약과 신약을 시작하려고 하니 중간에 400년의 공백이 있습니다.
    성경책으로는 말라기와 마태복음은 한 장 차이인데 말입니다. 

    구약 이야기가 끝난 연대가 BC 400년경이고 그 때부터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400년의 역사가 바로 신약과 구약의 중간시대입니다.
    이 기간은 포로 귀환 공동체를 제국들이 다스리는 실제 세계사 기간입니다.
    성경은 에스라 포로 귀환 공동체, 이후 이야기가 없지만, 그래도 페르시아로마 역사는 실제로 흘러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성경이 입을 다물고 있는 이 기간의 실제 세계사는 성경에서 예언한 그대로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을 앞두고 있는 이 상황에서 종속국으로 살아간 이 400년을 한마디로 말할 수 있다면 무엇일까요?

    바로 유대인의 신앙, 유대교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고난, 그리고 죽으심과 부활 승천, 사도바울을 일평생 추적하며 괴롭힌 신약의 이야기의 또 다른 주인공의 실체는 "유대교"와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사실이 전제 되어야 신약 성경을 대하기가 쉽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유대교는 바로 구약의 끝 장면인 "에스라의 종교개혁"때 생겼습니다.
    예레미아의 예언대로 정말 70년 만에 포로로 잡혀갔던 그들이 돌아 오게 되니, 어느 누구도 예언의 말씀을 부정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신뢰하게 되고 그러면서 "말씀공부"를 하면서 자신들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신들의 민족이 대단함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을 배우다 보니 정신이 든 겁니다. 정체성의 변화가 일어나고 의식의 전환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역사를 갖고 있으며, 말씀대로, 율법. 안식일, 절기를 시키면서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구별하며 살아야 할 거룩한 백성들 이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기룩하라" 당부한 것을 순종해야 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포로로 잡혀간 이유는 거룩함을 버리고 이방 종교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순결해야 합니다.
    섞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말씀이 기준이 된 것입니다.

    마치 노예 공동체에게 모세가 출애굽으로 새 민족 정신을 심어준 것처럼 에스라가 그 역할을 한 것입니다.
    시내산 언약을 깨뜨리고 우상을 따른 것이 화의 근원이었다는 것을 민족이 포로가 되어 깨달은 것입니다. 

    말씀 성취를 공동 체험하고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와 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놀랍도록 전부 맞는 겁니다.
    말씀과 역사와 민족성과 정체성, 그리고 모세의 재발견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정체성을 가르쳐준 말씀(율법,모세오경)이 얼마나 우월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앗수르(앗시리아), 바벨로니아(바벨론), 바사(페르시아)시대를 지나면서 다른 민족에 비교하여 월등한 민족이라는 정체성에 확신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말씀공부를 통해서 쉽게 없어지지 않을 지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깨닫음은 감격이 되어, 통곡과 회개를 하게 했고, 자연히 삶에도 개혁이 일어나 감동적인 공동체 경험으로 까지 이어지고 그 공동체의 확신은 무서운 힘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결단하고 서약서까지 남겨, 제도화할 정도였는데, 구약시대 마지막 장면은 이처럼 느헤미야 10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명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중략) 이 밖에도 나머지 백성 모두가 귀족 지도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종 모세가 전하여 준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기로 하고, 우리 주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에 복종하기로 하였으며 그것을 어기면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다음과 같이 맹세하였다"

    "우리는 딸을 이 땅의 백성과 결혼 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아들을 이들의 딸과 결혼 시키지 않는다. 이 땅의 백성이 안식일에나 성일에 물건이나 어떤 곡식을 내다 팔더라도 우리가 사지 않는다. 일곱 해마다 땅을 쉬게 하고 육 년이 지난 빚은 모두 없애준다.(성도로서의 거룩한 삶을 지키겠다고 문서화함)

    하나님의 성전 비용으로 쓰도록 우리는 해마다 삼분의 일 세겔씩 바친다. 집안별로 주사위를 던져서, 해마다 정한 때에 하나님의 성전에 땔 나무를 바칠 순서를 정한다. 해마다 우리 밭에서 나는 맏물과 온갖 과일 나무의 첫 열매를 주님의 성전에 바친다. (성전 운영을 위해서 재정을 책임지겠다)  처음 난 맏새끼들을 성전 제사장들 생활비를 위해서 바친다."(성전이 운영 되는데 필요한 인건비도 서포트하겠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아무렇게나 버리두지 않을 것이다."(서약)
    바로 이것이 유대교, 유대인, 유대 성격입니다.

    창세기 12장부터 출발된 이스라엘의 민족역사를 잇는 공동체는 "유대인"(사마리이인, 아님)이라고 이렇게 개명한 것입니다. 이 때부터 이들은 "이스라엘=유대인"이라는 새 정체성을 갖는 것입니다.

    히브리 정신을 잇는 정통성 있는 유일한 공동체, 포로귀환 공동체 유대인 이렇게 그들은 크고 두려운 "여호와의 날", "구원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갔습니다.
    후손들도 선조들의 뒤를 이어 BC 300년대 바사(페르시아) 제국시대을 숨을 죽이고 지나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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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트리스교회 수요 성서 연구 #. 1 물세례와 불세례(2020-06-10)

    세례(洗禮)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서 세 종류의 세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

    그런데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것은 분명하게 성경에 소개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셨을까요?

    세 종류의 세례를 베푸셨던 수여자(授與者)를 살펴봅시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예수님 당시에는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마태복음 3:5∼6,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그러나 오늘날은 교회에서 목사가 세례를 베풉니다.
    주 예수를 믿는 (아무개)에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성령세례는 요한의 증거대로 분명히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제 성령세례를 베푸셨으며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사람들에게 보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령을 “보혜사(保惠師)” 라고 합니다.

    “보혜사(保惠師)”란 무엇인가?
    -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
    보혜사란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가르치시는 선생님” 이란 뜻입니다.
    보혜사를 영어 성경에서 찾아보면 NIV에서는 “상담자(the Counselor)”, KJV에서는 “위로자(the Comforter)”, NASB에서는 “돕는자(the Helper)” 라고 합니다.
    보혜사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étos)” 라고 하여
    (a) 옹호자(an advocate), 중보자(intercessor),
    (b) 마법사(a consoler), 위로자(a comforter), 돕는자(helper),
    (c) 낙하산(Paraclete)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세례자 요한에 의하면 성령세례와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성경을 폭 넓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과 불세례에 대한 말씀을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제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마가복음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참조 / 성령세례(사도행전 1:5, 11:16, 고린도전서 12:3)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해서 언급한 성경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이외 성경에서는 오직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에서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지만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풀 수도 있고 베풀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불세례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사도행전 2: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오순절 날 성령의 임재가 나타났을 때 마치 성령은 강한 바람 소리로 들렸습니다.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바람이 아닙니다. 성령은 불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은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βαπτίσει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
    - will baptize with the Spirit Holy and fire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장차 오실 그 분께서는 “성령(프뉴마)과 불(푸르)”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외쳤던 요한의 증언은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그 분이 그토록 기대하던 “메시아”라고 기다렸으나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사십일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사도행전 1:3).

    이렇게 번역된 데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καὶ)”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카이”는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로 많이 사용하지만 간혹 “우위 접속사”인 “또는(or)”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위 접속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는 “성령 또는 불안에서” 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 사(四)복음서를 비교하여 연구해보면 더욱 확실히 증명된다. 먼저 우리는 '성령과 불로'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과 불로'가 아닌 '성령으로'라고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라고만 되어 있으며 행 11:16과 고전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라고만 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령으로 세례'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 보더라도 '침례'라는 말이 의미를 더 잘 통하게 한다. 만일 '세례'라고 하면 '성령으로 씻긴다'는 말이 되므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성령은 영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요 14:18∼19)이므로 '성령 안에서 침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하되 '생명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침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행 2:38, 행 19:2)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고전 3:16-17)'과도 같은 말이 되는데 결국 우리와 주님과의 상호내주(Inter-Residence)를 뜻한다.

     

    한편 요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신령으로'라는 말은 “엔 프뉴마”로서 원 뜻은 “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의미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의미가 모두 해석되는 것이다. 즉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물 안에 잠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상징하는 뜻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 안에 잠긴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리가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로 세(침)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불 속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로서 신자와는 전혀 관계없고 불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즉 불신자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하는 대신에 '불 속에 잠기게 한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세례의 의미를 소개합니다.
    세례는 물속에 잠긴다는 뜻입니다.
    물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씻어낸다, 죽는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성령에 들어가서 씻어내고 죽는 것을 말합니다.
    불세례는 불속에 들어가서 태워버리고 죽는 것을 말합니다.

    Ⅰ. 세례(洗禮)란 무엇인가?

    세례를 헬라어로 “밥티조(βαπτίζω)” 라고 합니다.
    ‘밥티조(baptizó)’의 뜻은 “담그는 것(to dip)”, “가라앉다(sink)” 라고 합니다.
    “밥티조”라는 동사가 명사로는 “밥티스마(βάπτισμα)”가 되며 “세례자(침례자)”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될 때는 “밥티스테스(βαπτιστής)”라고 합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밥티스테스 요안네스”로서 “세례 요한”이 아니라 “세례자(침례자) 요한” 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세례를 히브리어로 “라하츠(rachats, רְחֲצוּ)” 라고 합니다.
    “라하츠(rachats, רְחֲצוּ)”의 뜻은 “씻다(to wash)” “빨다” “목욕하다”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라하츠”의 행위는 정결 작업으로 나타납니다.
    제사장이 위임 받을 때는 먼저 회막문에서 물로 깨끗이 몸을 씻고, 의복을 입고, 관을 쓰고, 예식을 행하게 됩니다. 물로 깨끗하게 씻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되고 성별된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0:20,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여호와 앞에 사를 때에도 그리할찌니라.  

    제사장들이 회막에서 여호와의 일에 참여하기 위해서 준비된 물두멍에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또 레위기 22:6, 민수기 19:7에 보면 부정함을 입은 사람이 물로 씻어서 정결함을 얻는 법이 나와 있습니다. 레위기 8:21, 9:14에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물로 깨끗이 씻으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26:6에서 ‘라하츠’ 행위는 무죄함 곧 의인의 반열에 속해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로마서 6:3∼5에는 “예수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곧 그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세례는 영적으로 예수 안에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태어났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세례의 의미는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태어났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물속에 들어갈 때는 이미 죽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올 때는 죽었던 존재가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2. 세례의 중요성

    오늘날 세례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마태복음 28장의 말씀에 기초하여 행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세례가 신앙생활에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유언적으로 이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세례가 단순한 통과의례적인 의식이었다면 외식적인 것을 가장 싫어하신 주님이 명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세례를 베푸는 것’과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참 성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고, 예수님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하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받음으로 법적 교인이 되지만, 말씀 순종으로 참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입니다.
    신약의 첫 번째 책은 "마태복음"입니다.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 사이는 대략 400년 이란 긴 세월이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 시대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의 400년의 기간을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라고 합니다.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를 "신구약 중간 시대"라고도 합니다.

    세례
    洗禮

    수여자
    授與者

    성구
    聖句

    의미
    意味

     

    참고

    불세례

    성령

    고린도전서 12:13

    삶(능력)

     

    법적 기능

    성령세례

    예수
    행 11:17

    마가복음 1:8

    복음의 증인(권능)

     

    능력적 기능

    물세례

    요한(목사)
    마 3:11

    베드로전서 3:21

    죄를 씻음(구원)

     

    의식적 기능


    * 수여자(授與者)
    증서나 훈장 따위를 주는 사람
    줄 수(授),  줄 여(與), 놈 자(者)


    Ⅰ. 세례(洗禮)란 무엇인가?

    세례를 헬라어로 “밥티조(βαπτίζω)” 라고 합니다.
    ‘밥티조(baptizó)’의 뜻은 “담그는 것(to dip)”, “가라앉다(sink)” 라고 합니다.
    “밥티조”라는 동사가 명사로는 “밥티스마(βάπτισμα)”가 되며 “세례자(침례자)”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될 때는 “밥티스테스(βαπτιστής)”라고 합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밥티스테스 요안네스”로서 “세례 요한”이 아니라 “세례자(침례자) 요한” 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Ⅱ. 물세례란 무엇인가?

    Strong's Greek 5204. ὕδωρ(hudór) - water

    Englishman's Concordance.
    Matthew 3:11 N-DNS GRK: βαπτίζω ἐν ὕδατι εἰς μετάνοιαν
    NAS: As for me,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

    //biblehub.com/str/greek/5204.htm - 32k



    Ⅲ. 성령세례란 무엇인가?

    마태복음 3:11

    마가복음 1:8

    사도행전 1:5

    고린도전서 12:13

    성령과 불

    성령

    성령

    성령

    누가복음 3:16

    요한복음 1:33

    사도행전 11:16

     

    성령과 불

    성령

    성령

     


    성령세례를 이해하려면 먼저 성령의 특수한 기능을 살펴야 한다.

    보증하는 성령()

    인치는 성령(에베소서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디모데후서 1: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에베소서 3: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



     

    에베소서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Ⅳ. 불세례란 무엇인가?



    불세례란 무엇인가?
    Strong's Greek: 4442. πῦρ(pur) - fire

    ... 10 (cf. Luke 16:24); βαπτίζειν τινα πυρί (see βαπτίζω, II.

    b. bb.), Matthew 3:11; Luke 3:16. the tongue ...

    “성령과 불” 이라는 말이 마태복음(3:11)과 누가복음(3:16)에서만 사용되었고, 마가복음(1:8)과 요한복음(1:33)에는 “성령”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 라고만 표현하였다. 사도행전 11:16과 고린도전서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 라고만 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 이라고 할 때 성령은 보증하는 일을 합니다.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린도후서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물세례는 누가 베풀었습니까?
    요단강에서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까?
    유대 풍속은 세례를 베푸는 사람이 세례를 받는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해가 없도록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불세례

     

    불세례가 무엇이며 그 근거는 무엇인가? 불세례라는 말은 마태복음 3:11과 누가복음 3:16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들은 불세례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 채 성령 체험의 일종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것은 앞의 두 곳의 성경 본문에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 라는 말씀에서 “성령과 불로” 라는 표현을 흔히 “성령과 동시에 불로” 라는 말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을 “성령”과 “불”로 동시에 세례 받는 것으로 오해하여 “성령불” 또는 “불성령” 등의 말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성령 받으라”는 말을 “불 받으라”는 말로 바꾸기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사실은 “성령”과 “불”은 함께 받는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존재인 것이다.

     

    이렇게 번역된 데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 )”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카이”는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의 뜻으로 많이 사용하지만 간혹 “우위 접속사”인 “또는(Or)”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위 접속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는 “성령 또는 불안에서” 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 사(四)복음서를 비교하여 연구해보면 더욱 확실히 증명된다. 먼저 우리는 '성령과 불로'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과 불로'가 아닌 '성령으로'라고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라고만 되어 있으며 행 11:16과 고전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라고만 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령으로 세례'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 보더라도 '침례'라는 말이 의미를 더 잘 통하게 한다. 만일 '세례'라고 하면 '성령으로 씻긴다'는 말이 되므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성령은 영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요 14:18-19)이므로 '성령 안에서 침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하되 '생명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침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행 2:38, 행 19:2)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고전 3:16-17)'과도 같은 말이 되는데 결국 우리와 주님과의 상호내주(Inter-Residence)를 뜻한다.

     

    한편 요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신령으로'라는 말은 “엔 프뉴마”로서 원 뜻은 “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의미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의미가 모두 해석되는 것이다. 즉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물 안에 잠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상징하는 뜻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 안에 잠긴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리가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로 세(침)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불 속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로서 신자와는 전혀 관계없고 불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즉 불신자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하는 대신에 '불 속에 잠기게 한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물세례는 공적인 선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씻음 받았다는 약속과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물세례를 받았지만 여전히 과거의 삶이 나도 모르게 반복되어 나를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합니다. 이러한 반복되는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물세례”와 “성령 세례” “불세례”를 외쳤습니다.
    물세례는 회개케 하기 위한 세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결혼식을 하지 못하고 동거하며 아이들을 세 명씩이나 양육하던 어느 부인이 면사포를 쓰고 결혼식 한 번 해 봤으면 원이 없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미 혼인신고도 마쳤습니다. 아이들도 세 명씩이나 낳고 키우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부부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결혼식을 하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부담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진관에 가서 부부가 결혼식 사진을 찍고 응접실 벽에 걸어놓고 지내는 부부를 만났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때로는 어느 교인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세례를 꼭 받아야만 합니까?”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세례 받는 것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고, 세례를 받지 않고서는 못 견딜 것입니다. 세례는 죄 용서함의 표시와 증거로 받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세례는 구원 받은 사람들이 그 표징으로써 받는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는 “참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세례는 죄 사함의 방법이요, 날인이다. 하나님은 초대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이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에게도 죄 사함을 베풀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은 “세례가 군인들이 충성 맹세의 표시로써 국가 원수의 휘장을 붙이고 다니는 것과 같이 사람들 앞에서 신앙을 나타내는 표시나 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 즉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약속과 함께 받아야 하는 것을 알지 못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믿음과 회개와 세례입니다.


    세례받기를 거절하거나 주저하시는 분들이여, 당신이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세례를 받는 것을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산소와 수소의 결합체(H₂O)이며 지구의 4분의 3을 덮고 있을 뿐 아니라 인체의 70%를 차지하는 물질이다.


     최초로 언급된 창세기 1:6절의 '물'은 지구 표면을 덮고 있던 물(2절)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수분(水分)을 가리킨다.


     물은 모든 생명체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성경에서도 650회 이상 언급되었다. 특별히 물이 부족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더욱 중요시되었으며, 모든 것의 기본이 되었다.


     물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음료수였다(창 21:14, 민 20:11, 막 9:41, 요 2:7). 이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시기 전에 물로 옷을 빠는 등 정결케 할 것을 명하셨다(출 19:10-15). 제사장은 물두멍에 담긴 물로 수족을 씻어서 정결케 한 뒤 회막에 들어갔다(출 30:18-20).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으며(행 8:36-39),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그의 신부인 교회가 성별되어 흠없는 성화의 몸이 된 것을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셨다'고 표현했다(엡 5:26).


     또한 물은 여러 가지를 상징했다.
    먼저 물은 영적 축복과 회복을 상징했다(시 23:2, 사 12:3, 사 35:6-7).
    물이 모자라란 것은 가장 심각한 일 중 하나이며, 선지자들은 이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기도 했다(렘 14:1-9, 욜 1:15-20, 암 4:7-8).
    물은 자제력을 잃은 불안정한 상태(창 49:4)나 아이 성에서 패전하여 겁먹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수 7:5),
    평화로운 상태(시 23:2),
    환난이나 괴로움(사 43:2),
    박해(시 124:4-5),
    만국에 미칠 복음(사 11:9),
    구원(사 55:1) 등도 상징했다.
    또한 물은 영혼의 갈급함(시 42:1),
    하나님의 축복하심(겔 47:1-12),
    영생(계 22:17),
    그리스도(요 4:10-15),
    거듭남(요 7:37-38)을 상징했다.  




    성령



    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질문) 오순절 날 왜 성령이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 같이 임하셨는가?

    성경의 모든 계시는 점진적으로 진행됩니다.
    이것을 “점진적 계시(progressive revelation)”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도 구약과 신약을 거쳐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마지막에 완성될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령에 대한 이해도 오순절 날 갑자기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 같이 임한 것이 아니라 점진적 과정을 거쳐 오순절 날 드디어 분명하게 나타났다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애급에서 고통을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을 때 홍해를 물  세례라고 합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생활 할 때 낮에는 구름 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이 나타나서 광야 생활을 지켜주셨다고 합니다. 이때 구름 기둥은 물세례, 불기둥은 성령 세례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오순절 날 불과 바람으로 임했던 성령의 점진적 계시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세례 요한의 증거(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광야에서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장차 메시아가 나타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βαπτίσει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
    - will baptize with the Spirit Holy and fire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장차 오실 그 분께서는 “성령(프뉴마)과 불(푸르)”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외쳤던 요한의 증언은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그 분이 그토록 기대하던 “메시아”라고 기다렸으나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사십일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사도행전 1:3).

    둘째는 부활하신 예수의 증거(사도행전 1:1:4∼5)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이제까지 단 한 사람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던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향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때 먼저 찾아가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고자 갈망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을 오백 명의 사람들이 목격했습니다(고린도전서 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세례 요한이 외쳤던 그 분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 분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분께서는 단 한 사람에게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실망했던 사람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성경의 증거는 실망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사도행전 1:15a)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부활하셨던 예수를 목격했던 사람들이 오백 명이라고 사도 바울은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함께 모였던 사람들은 120명이었다고 합니다. 380명은 실망하여 함께 모이지 않았습니다.

    셋째는 오순절 날의 증거(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순절 날 드디어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쳤던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말씀이 함께 모였던 사람들이 들었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재 하여 방언으로 말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방언은 당시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함께 모였지만 서로 의사소통이 잘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유대인들의 절기(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히브리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 제자들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증거 할 때 갑자기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나타나서 성령 충만한 상태가 되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모여 있던 유대인들이 각자 자기들이 사용하던 언어로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Ⅰ. 세례(洗禮)의 의미

    세례를 헬라어로 “밥티조(βαπτίζω)” 라고 합니다.
    ‘밥티조(baptizó)’의 뜻은 “담그는 것(to dip)”, “가라앉다(sink)” 라고 합니다.
    밥티조라는 동사가 명사로는 밥티스마( )가 되며 세례자(침례자)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될 때는 밥티스테스( )가 된다. 세례 요한은 밥티스테스 요안네스( )로서 세례자(침례자) 요한이라고 번역해야 옳은 것이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에 사람을 물속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끌어올리는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을 “침례(浸禮)” 라고 합니다.

    이러한 침례가 생활환경의 변화에 따라 물속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물을 뿌리는 예식으로 진행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물속에 들어갔다 나와야 세례를 받은 것이라며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교회와 교단도 있습니다.

    Ⅱ. 물세례(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오래 전에 모태 신앙의 두 젊은이가 어렸을 때는 유아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대학생이 되어 입교 문답을 하고 세례 교인으로 인정을 받는 입교예식을 마치고 교회 근처 커피숍에 들어가서 커피를 주문한 후에 담배를 피우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세례 교인이 된 후에 처음 피우는 담배가 세례 교인이 되기 전에 피우던 그 담배 와 맛이 똑같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면서도 커피 맛이 똑같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를 받던 침례를 받던 음식 맛이 변하고 습관적으로 행하던 것들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겉 사람의 변화가 아니라 속사람의 변화가 나타나야 합니다.

    ‘물세례’는 구원의 표가 됩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세례 요한의 물세례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인물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무슨 죄가 있어서 세례를 받으셨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의를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마태복음 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매우 불편한 진실이었습니다. 세례를 베푼 사람은 세례를 받은 사람보다 영적인 권위가 높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것은 확실하지만 예수님이 영적으로 훨씬 앞선다는 사실을 강조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을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었지만 예수 보다 영적으로 우월하지 않다는 것을 증거 하려고 “요한의 세례는 물세례”로, “예수의 세례는 성령과 불세례”로 표현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왔습니다. 그에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중적 카리스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장에서도 그런 카리스마가 넘칩니다. 낙타털 옷을 입었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만 먹었습니다. 일단 겉모습만으로도 영적인 뭔가가 있어 보입니다. 요한은 단순히 있어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영적인 내공을 갖추었습니다.

    5-7절 말씀이 그 상황을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이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요한의 설교는 대중들의 양심을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다그쳤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의 설교를 들은 당시 사람들은 간담이 서늘했을 겁니다. 뭔가 삶을 바꿔서 새롭게 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다짐도 했을 겁니다. 그것을 가리켜 성경은 “물세례” 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도덕적인 변화와 의로운 삶과 같은 변화는 지금도 요구됩니다.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삶의 태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비난받는 이유에서 가장 큰 것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대한 열정은 지대하지만 그것이 삶의 변화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힘드니 그저 교회에서 위로 받는다는 생각에만 치우쳐 있습니다. 기복적이고, 이기적이고, 개 교회 중심적이고, 반역사적이고, 반통일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경향을 많이 보입니다. 세례 요한의 물세례가 시급합니다. 이런 세례는 기독교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입니다.

    Ⅲ. 불세례(마태복음 3:11b)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불세례의 사전적 의미는 “신도가 성령의 충만으로 죄악과 부정(不淨)을 불살라 성결(聖潔)하게 됨을 일컫는 말.”
     
     '침례' 즉 '물속에 들어감'의 뜻은 무엇인가? 물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롬 6:3-4에서 말씀하듯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음을 상징한다. 즉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에서 침(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하는 상징적 행위라고 가르친다.

     

    골 2:12에서도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라고 함으로써 역시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 이로 보더라도 '세례' 즉 '물로 씻음'이란 표현이 사망을 상징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물속에 잠긴다'는 뜻의 '침례'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침(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이는 곧 죄 사함의 상징이다. 결국 '침례'는 벧전 3:21의 말씀대로 '구원하는 표'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침례교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교파는 '세례'의 형식으로 의식을 거행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침례교를 제외한 나머지 교회가 모두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교회는 의식의 상징적 의미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또한 엡 5:26에서 말씀하는 '물로 씻음'을 '세례'의 근거로 삼기도 한다.

     

    아무튼 '세례'는 '침례'의 오역이지만 교회가 이를 영적으로 해석하는 오래된 전통을 바꿀 수는 없으므로 '세례'라는 표현을 그대로 인정하여 '침(세)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교회에서 '세례'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세례'의 성경적 의미를 알고 사용한다면 신앙이 왜곡되거나 하기까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불세례

     

    불세례가 무엇이며 그 근거는 무엇인가? 불세례라는 말은 마태복음 3:11과 누가복음 3:16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들은 불세례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 채 성령 체험의 일종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것은 앞의 두 곳의 성경 본문에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 라는 말씀에서 “성령과 불로” 라는 표현을 흔히 “성령과 동시에 불로” 라는 말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을 “성령”과 “불”로 동시에 세례 받는 것으로 오해하여 “성령불” 또는 “불성령” 등의 말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성령 받으라”는 말을 “불 받으라”는 말로 바꾸기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사실은 “성령”과 “불”은 함께 받는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존재인 것이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βαπτίσει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
    - will baptize with the Spirit Holy and fire  

    이렇게 번역된 데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καὶ)”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카이”는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로 많이 사용하지만 간혹 “우위 접속사”인 “또는(or)”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위 접속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는 “성령 또는 불안에서” 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 사(四)복음서를 비교하여 연구해보면 더욱 확실히 증명된다. 먼저 우리는 '성령과 불로'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과 불로'가 아닌 '성령으로'라고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라고만 되어 있으며 행 11:16과 고전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라고만 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령으로 세례'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 보더라도 '침례'라는 말이 의미를 더 잘 통하게 한다. 만일 '세례'라고 하면 '성령으로 씻긴다'는 말이 되므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성령은 영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요 14:18∼19)이므로 '성령 안에서 침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하되 '생명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침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행 2:38, 행 19:2)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고전 3:16-17)'과도 같은 말이 되는데 결국 우리와 주님과의 상호내주(Inter-Residence)를 뜻한다.

     

    한편 요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신령으로'라는 말은 “엔 프뉴마”로서 원 뜻은 “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의미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의미가 모두 해석되는 것이다. 즉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물 안에 잠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상징하는 뜻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 안에 잠긴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리가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로 세(침)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불 속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로서 신자와는 전혀 관계없고 불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즉 불신자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하는 대신에 '불 속에 잠기게 한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심판을 상징하는 불

     

    성경에서 “불”은 “심판”을 상징한다.
    불은 헬라어로 “퓌르(πῦρ, pur)”인데 성경에서 퓌르는 예외 없이 심판을 통한 형벌의 수단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심판이라 함은 종말의 최후 정점에서 신 불신간에 단회적으로 받게 될 최후의 심판(광의적 심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별로 받는 정죄의 심판(협의적 심판)을 뜻한다.

     

    요한복음 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심판을 받는다'고 할 때 '정죄를 받는다'는 뜻과 같은 것이다. 즉 이미 심판 받았다라는 말씀은 정죄받기로 정해졌다는 뜻이며 이러한 자는 불로 태워지는 운명이 되어 최후 정점의 심판 때 시행되리라는 것이다.

     

    불이 심판을 가리킨다고 하는 것은 누가복음 3:17으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쭉정이'가 '불'에 태워질 것이라는 비유로 볼 때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마태복음 3:12에서도 같이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문장 구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타나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즉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 안에서 침(세)례를 주신다'라고만 되어서 '불'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불'의 의미를 설명하는 '쭉정이를 불에 태우신다'라고 하는 비유 역시 나타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각각 '불'에 대한 해석이 반드시 따라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두 복음서에는 마 3:12과 눅 3:17에서 각각 쭉정이를 불에 태우는 비유가 덧붙여 진 것이다. 즉 '불'은 쭉정이와 직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비유에서 신자는 알곡이므로 불과는 관계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와 유사한 내용으로 마 13장의 가라지 비유에서 '세상 끝에 가라지를 불사른다'라고 할 때의 '불' 역시 '심판'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불이 심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성경 구절은 많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히 12:29)이라고 할 때 불은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한편 행 2:3에서 성령 강림 때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여'라는 말씀에서 혹자들이 잘못 인용하여 성령과 불을 서로 관련시키는 것도 보게 되는데 이는 문맥을 잘 살피지 않고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성령이 불과 같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불의 혀'의 수없이 갈라진 형상을 비유하여 한 성령이 여러 사람에게 나뉘어져서 임하신 것을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성령'은 '불의 뜨거움'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고 단지 '불의 혀의 갈라지는 모양'만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성령이 보인다고 한 것도 물질이 아니신 하나님의 영이 보일리 없건만 '영적으로 보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보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호라오(ὁράω, horaó: to see, perceive, attend to)”는 주로 마음의 눈으로 영적인 것을 보는 것(마 26:64, 행 7:55∼56)을 뜻한다. 눈으로 물질을 보는 것을 뜻할 때는 “블레포(βλέπω, blepó. to look at)” 라는 동사가 주로 사용된다.

     

    한편 구약에서도 단 7:9-11에서 알 수 있듯이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뜻한다. 그 밖에 출 3:2의 떨기나무의 불꽃과 렘 5:14의 하나님의 말씀의 불과 렘 23:29의 불같은 말씀과 방망이 등에서 하나님과 관련된 불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들 역시 하나님의 위엄과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 불의 뜨거운 속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는 모두 물질적인 불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떨기나무 불꽃은 불꽃의 극히 밝고 빛나는 영광과 위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성경에서 뜨거움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은 오직 성경 말씀을 풀어 주실 때(눅 24:32)와 서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라(벧전 1:22)고 했을 때뿐으로 이상으로 볼 때 성령과 불을 동시에 받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따라서 불세례를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성경의 뜻 그대로라면 심판을 받게 해달라는 말이 되므로 주의해야 한다. 혹자는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찬송 부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도를 다 아시므로 알아서 해주실 것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잘못된 것은 무엇이든지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는 정확한 성경 지식을 가질 필요도 없고 사사 시대처럼 각자의 생각에 좋은 대로 신앙 생활을 해나가면 된다(삿 21:25)는 말과 같다. 진실된 하나님의 자녀라면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일획이라도 변개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서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해야지 그런 식으로 견강부회(牽强附會)한다면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리가 없다.

     

    간혹 간증집 등에는, 기도원 등에서 기도하던 중에 '뜨거운 불세례를 받았다'라고 하거나 심지어는 '불세례를 받고 뜨거워서 데굴데굴 굴렀다'라고 간증하는 것도 있는데 이는 물론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들이다. 정말 뜨거움을 맛보았다면 그것은 성령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의 정죄의 불을 체험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성령 받을 때 뜨거움을 느꼈다고 가르친 구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체험을 하였다면 성경과는 무관한 기묘한 체험이기 때문인 것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성도의 마음을 뜨겁게 하시는 뜨거움은 물질적인 뜨거움이 아니라, 마음의 감동이며 내적인 뜨거움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고 또한 열정과 희열 같은 뜨거움을 주신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물세례를 교회의 중심으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더 본질적인 세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불세례입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물세례는 어느 정도 손에 잡히지만 성령과 불세례는 그렇지 못합니다. 흔히 교회에서 말하듯이 “성령을 받으라”는 말인가 하는 정도입니다. 이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본문에 성령과 불이 나란히 소개됩니다.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
    창세기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육축과 온 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우리라는 복수 명사를 사용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닌가?
    이슬람교 창시자 마호멧은 하나님은 괴물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한 몸에 머리가 셋이나 달린 그런 하나님을 믿는가?
    기독교의 신관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라고 하겠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먼저 살펴야 한다.
    첫째는 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
    둘째는 사랑으로 존재하는 하나님
    셋째는 창조하시는 하나님
    넷째는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
    - 마태복음 28:19,
    - 요한일서 5:8, 증거하는 이가 셋 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성령론(요한복음 14, 15, 16장)
    - 보혜사(保惠師),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선생님
    -


    물(水)과 성령의 관계에 대하여


    물(水)

    מַיִם (마임)

    창세기 1장을 보면 빛의 창조 이전에 '물'이 있었다는 진술이 나온다. 2절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개역개정)란 말씀이 있다. “수면”(水面)이 ‘물’의 존재를 가리킨다. 물은 히브리어로는 מַיִם (마임)이다. ‘물’(마임)이 무엇이기에 ‘영’(루악흐)의 운동과 연동하는지 의아하다. 창1:2은 빛이 창조되기 이전의 상태를 진술한다. 빛이 있기 전에 ‘물’이 있었으며 “하나님의 영”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히브리어로 ‘루악흐 하엘로임’이고(רוּחַ אֱלֹהִים), “수면 위에”는 ‘알 퍼네-하마임’이다(עַל־פְּנֵי הַמָּיִם). “하나님의 영”이라고 번역된 רוּחַ (루악흐)는 ‘기’ 내지 ‘기운’, 또는 ‘바람’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루악흐’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창조의 능력이며 우주를 일정한 이치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구체적인 힘이다. 물리학이 발견한 ‘중력’과 같은 것을 우리는 이 ‘루악흐’와 견줄 수 있다. 하지만 ‘루악흐’가 활동하는 영역이 “수면 위”라고 하는 창1:2의 진술은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물’이 무엇이기에 ‘영’과 함께 작용하는가?

    “수면 위에”란 어구는 공간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다. 둘째 날 “궁창”을 창조할 때 비로소 공간이 생겨난다. 아직 시간과 공간이 없는 상태에서 ‘루악흐’와 ‘물’이 상호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창세기의 독자들은 이 점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개역성경의 동사 ‘운행하다’란 단어는 רָחַף (락하프)이다. 이는 어떤 사물이 진동하며 매우 세차게 떨고 있는 동작을 가리킨다. <루악흐>가 물 위에서 진동하니 물이 함께 소용돌이치듯 서로 감응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רוּחַ (루악흐)가 움직이면 ‘물’, 곧 מַיִם (마임)도 덩달아 움직였다. 성령은 물을 움직이는 힘이고, 물은 성령을 따라서 움직인다.

    이 사상은 창2:6에 나타난다. 땅 밑 곧 궁창에서 물이 솟아올라 온 땅을 적셨다(창2:6). 하나님은 이처럼 젖은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다(창2:7). 물이 사람의 몸에는 75%나 들어 있고 세포의 원형질에는 물이 95%나 차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하나님의 영”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רוּחַ (루악흐)는 중력의 법칙을 지어냈다. 사람도 그 기운에 감응하여 움직이고 활동한다. 성령은 사람의 몸 속에 있는 물, 곧 מַיִם (마임)을 통하여 사람을 감동시킨다. 이처럼 물은 성령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천지운행을 따라 사는 사람을 ‘농인(農人)’이라고 부른다. ‘농'(農)은 별 '진'(辰) 자 위에 노래 '곡'(曲)이 붙은 글자이다. 이 글자는 우주 만물이 황도를 따라 움직일 때 그 운동에 따라 덩실덩실 춤추며 노래하며 살아가는 존재를 가리킨다. 농인 몸 속에 들어있는 ‘물’이 성령과 감응하여 그 농인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게 된다.

    물이 성령의 감동에 따라 움직이는 사례는 성경에 가득하다. 예컨대, 땅 밑에서 솟아나는 물(창2:6), 에덴동산에서 발원하는 물(창2:10-14), 노아의 대홍수(창6-9장), 애굽의 하수가 피로 변함(출7:17), 홍해가 갈라진 사건(출14:16), 마라의 쓴물(출15:25),, 므리바 바위(출17:6; 민20:11), 요단강이 갈라진 사건(수4:7), 엘리야와 엘리사가 요단강을 가른 사건(왕하2:8, 14), 에스겔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겔47:1), 등등 구약성경에 수두룩하게 등장한다. 신약성경에도 예수님의 기적들에 물이 언급된다. 가나의 혼인잔치, 베데스다의 연못, 소경을 침으로 고침, 풍랑을 꾸짖음, 물위를 걸으심, 등등 부지기수이다. 요한계시록에는 마지막 날에 새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가 환상으로 펼쳐지는 가운데 성경이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할만한 신학사상은 요한복음에 나온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신 대목이다(요3:5). 여기서 “물과 성령”은 창1:2의 “영”과 “물”에 연결된다. 주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도 하셨다(요3:3). ‘거듭나다’란 헬라어는 ἄνωθεν (아노텐)이란 부사로 표현되는데 이 부사는 ‘위로부터/from above’라는 뜻도 된다.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죄로 인하여 혈과 육의 존재이며, 아래로부터 태어나서 세상의 종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백성은 물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작용하여 죄의 저주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피조물로 회복된다. 이처럼 거듭나는 데에는 영과 물의 상호작용이 있어야 한다.

    더 폭을 넓혀 보자. 우리가 파괴한 환경, 그로 인한 기후변화, 특히 수질오염은 죄의 결과이다. 환경의 회복은 우리가 거듭나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 ‘영’(루악흐)이 작용하면 ‘물’(마임)이 변하게 된다. 성령을 받으면 우리 인간의 몸 속에 있는 물이 맑아진다. 죄인이 지어낸 물질문명은 창조세계를 파괴하고 있지만, 물과 영으로 거듭난 우리는 참 인간을 회복하고 마침내 오염된 물을 회복할 것이다.




    성령은 헬라어 “프뉴마” 이고, 불은 “푸르” 입니다.

    “프뉴마”는 “영”이라는 뜻만이 아니라 “바람”과 “숨”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히브리인이나 헬라인 모두 영과 바람을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구 안에서 벌어지는 공기의 대류현상입니다. 물리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고대인들에게는 그런 물리학적인 정보가 전혀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는 어떤 것을 느꼈습니다. 봄이 오면 따뜻한 기운이 돌면서 죽은 듯이 보였던 땅에서 풀과 나무의 순이 돋아납니다. 찬 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자연에 생기가 없어집니다. 사람이 어머니 배에서 나오면 숨을 쉬기 시작하고, 죽으면 숨이 끊깁니다. 바람과 숨이 세상과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대 히브리인들은 영과 바람을 똑같은 단어인 “루아흐”라고 하였고 헬라인들은 “프뉴마”라고 말했습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생명을 주는 힘이지만 불은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생명을 결정하는 힘입니다. 고대인들에게 불이 얼마나 신비롭게 보였을지 상상해보십시오. 2백만 년 전 유인원들이 처음으로 불을 보았을 때 살아있는 생물로 보았을 겁니다. 무시무시한 괴물로 말입니다. 천천히 불을 관찰하고 다루면서 불이 생명의 원천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헬라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을 만물의 근원으로 보았습니다. 그게 틀린 말도 아닙니다. 불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태양이 지구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전기와 가스, 그리고 핵에 이르기까지 모든 에너지도 역시 불입니다. 고대 여러 문명이 태양을 신으로 섬겼다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닙니다. 구약성경에도 불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메타포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1 이하에 오순절 성도강림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 예루살렘의 마가 다락방에 모였던 2백여 제자들에게 성령이 바람과 불로 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 2:2∼3,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세례 요한이 말한 ‘프뉴마와 푸르’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바람과 불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바람과 불이 고대인들에게 절대적인 생명의 능력이었던 것처럼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 생명이었습니다. 절대 생명 경험이 바로 성령 강림이자 불세례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바람직한 삶의 변화라 할 수 있는 물세례에 머물지 말고 불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붙들었습니다.

    Ⅳ. 절대 생명

    MRA 라는 단체가 있습니다(Moral Re Armament). 우리말로 “도덕재무장” 이라고 합니다. 이 단체가 주장하는 네 가지 목표는 “정직, 순결, 무사, 사랑” 이라는 정신으로 “새 사랑, 새 가정, 새 사회, 새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세례에 대한 신앙을 바르게 가르치고 전달된다면 도덕재무장과 같은 목표가 반드시 실현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순절 날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를 통해서 절대 생명을 경험했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함께 가르침을 받았던 것도 십자가 사건으로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부활 후에는 부활을 의심했던 제자도 있었고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나고 드디어 부활 생명에 대한 믿음이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이 불의 혀같이 바람같이 임한 것과 방언을 말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부활 생명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믿음을 갖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The Spirit gives life; the flesh counts for nothing. The words I have spoken to you are spirit and they are life.  

    생명(生命)이란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살아있다는 것을 사람의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이집트에서 3천 년 전에 건설된 피라밑을 발굴하던 중 그 안에서 아주 오래된 씨앗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학자들은 그 씨앗을 심었습니다. 얼마 후 그 씨앗이 싹이 나서 자란 후에 그 씨앗이 완두콩 씨앗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오래 된 씨앗이라도 그 안에 생명이 있으면 반드시 자라날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무엇을 통해서 자기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뜨겁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현실적으로 말한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건강하게, 더 오래 사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재미있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삶을 성취하기 위해서 날마다 분투하며 최선을 다 합니다. 그런 삶의 태도를 잘못된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이 세상에 큰 어려움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소망하며 바랍니다. 그런데 과연 그와 같은 삶이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개인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한마디로 말하기는 힘듭니다만 방향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의 것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황소개구리라는 동화를 기억하십니까?
    어느 연못에 개구리 떼가 모여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새끼 개구리가 연못 밖으로 나갔다가 커다란 황소가 지나가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얼른 연못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개구리에게 연못 밖에 나갔다가 아주 커다란 황소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아버지 개구리는 그래 얼마나 크더냐 하며 배를 내밀었다고 합니다. 새끼 개구리가 그것보다 더 커요! 하자 또 다시 힘껏 배를 내밀며 이만큼! 이렇게 반복하다 결국 황소개구리는 배가 터져 죽었다고 합니다.

    욕심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교훈의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노인 어부가 황금빛 용왕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살려주면 원하는 것을 허락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아내에게 말하자 좋은 집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게 이루어지자 점점 욕심이 많아져 여왕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이루어지자 바다까지 다스릴 수 있는 왕이 되어야겠다고 했습니다. 쫄딱 망해서 옛 오막살이에서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아무리 넓은 집에서 없는 거 없이 다 갖추어도 결국 오막살이의 삶을 면치 못하게 만듭니다. 초라한 거지요. 이게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생명입니다. 물론 다르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서리가 묻은 토끼풀을 손으로 만지면서 무한한 생명의 신비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에 영혼의 무게를 걸어두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망을 성취하는 것에서만 삶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이런 우스개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하던 중 갑자기 비행기가 기체 고장을 일으켜 아주 위태로운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기장은 승객들에게 안전하게 준비된 낙하산을 착용하고 뛰어 내리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승객들의 수보다 낙하산이 한 개가 부족했다고 합니다. 한 사람씩 승무원들의 안내를 받아 조심스럽게 뛰어내리는데 낙하산이 2개가 남았을 무렵 갑자기 한 사람이 뛰어내렸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장과 어린 소년이 남아있었는데 기장은 소년에게 나는 기장으로서 마지막까지 나의 임무를 완수 할 테니 네가 이 낙하산을 짊어지고 뛰어내리라고 이야기를 할 때 소년은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 낙하산이 2개가 남아 있어요! 하더랍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하였더니 방금 전에 혼자 뛰어 내린 사람이 소년의 배낭을 낙하산으로 알고 그것을 짊어지고 뛰어내렸다고 합니다. 결국 기장과 소년은 마지막 남은 2개의 낙하산을 이용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욕심의 끝 결말이 어떤 것인지 느끼게 하는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박내수전도사의 이야기
    밥상에서 김치가 올라왔는데 누런 황새기가 김치 그릇에 있기에 얼른 젓가락을 사용하여 자기 입속으로 넣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입안에 넣고 씹는데 황새기 젓이 아니라 볏짚이 김치 속에서 누렇게 물든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왜 그것을 입에 넣느냐? 하더랍니다.
    아버지는 그것이 볏짚인 줄 알고 꺼내려고 젓가락을 가져갔는데 아들은 그것을 아버지가 먼저 먹으려는 줄 알고 젓가락을 가져다가 얼른 입안에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인간의 욕망이 참 어리석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도사님이 목사가 된 후 어느 여름 날 하기 수양회에 학생들을 인솔하여 가셨다가 학생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 물속에 뛰어들었다가 심장마미를 일으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절대 생명을 경험했다는 것은 이런 세상에서 제공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그게 실제로 있기는 있는 것일까요? 현실성 없는 허황한 기독교 교리에 불과한 것일까요?

    마태복음 기자는 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말을 하고 이어서 4장에서 예수의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5장에서 그 유명한 ‘팔복’을 말합니다.

    복이 있는 사람에 대한 목록이 거기 나옵니다. 복이 있다는 것은 생명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 목록에는 우리의 세상살이 경험과 다른 내용이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등등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세상에서 경쟁력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 자체가 이런 여덟 가지 복에 해당되는 분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방증입니다. 세상 경험에 따르면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은 아예 말이 되지 않아 보입니다. 가난과 애통 자체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가요? 팔복에 열거된 사람들은 세상에서 의존할 게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만 의존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완전한 절망을 경험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만 의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만 의존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구원을 얻고, 생명을 얻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런 절대 생명에 대한 경험에 근거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3:13∼17에는 예수님이 세례 받는 장면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하늘로부터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사도신경에도 예수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에게 신성 모독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나 분명한 진리였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신성모독이라는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를 통해서 절대 생명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사랑, 생명 경험

    저는 지금 예수가 왜 생명인지에 대해서 주변적인 설명만 하고 있을 뿐이지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답이 까다롭기도 하고 제가 경험하고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기에 어쩔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으니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을 비롯해서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 무덤에 묻혔던 예수가 실제로 자신들의 일상에 나타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부활 경험입니다. 예수를 부활로 경험하니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비슷한 경험을 우리도 간혹 합니다.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일반적으로는 자식을 생각할 때도 그런 경험을 할 겁니다. 사람에게서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두말 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이들은 예수를 특별한 생명 존재로 경험한 것입니다. 죄와 죽음을 넘어서는 경험입니다. 죄와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 바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이는 거꾸로 죄와 죽음으로 빠져드는 게 생명을 잃는 길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성취해야 한다는 유혹과 갈망, 그리고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에 빠지면 생명을 잃습니다. 겉으로 살아있으나 죽은 거와 다를 게 없습니다. 그게 심리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면 우울증이 됩니다. 약물로 우울증을 치료한다고 해도 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가 쉽게 벗어나는 게 아닙니다. 복음서 기자들과 다른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서 생명을 얻는다고 믿었고, 그렇게 선포했습니다. 그러니 마태복음 기자가 세례요한의 입을 빌려서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푼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그런 경험도 없고 믿음도 없는 거 같다.’고 걱정하는 분들이 여기 계신가요? 거꾸로, 확신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어느 쪽에 속하든지 여러분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예수와의 실질적인 만남입니다.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건 한번 경험했다고 해서 계속 이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테니스를 1979년부터 쳤으니까 37년의 구력이 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잘 안 되는 게 공을 끝까지 보는 겁니다. 공을 라켓으로 쳐서 튕겨나가는 순간까지 집중해서 봐야만 공도 잘 나가고 몸도 망가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예수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른 데 한눈을 팔면 영적인 ‘엘보’가 옵니다. 예수를 생명으로 경험하여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를 더 깊이 아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노력을 해보신 적이 있나요? 그런 노력이 없으면서 기독교가 말하는 절대생명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변명이고, 불행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세례로 만족하는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서 칭찬을 받을만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기독교 근본에서는 거리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반드시 불세례가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여러분은 예수 주위를 맴도는 신앙이 아니라 예수께로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을 성령 충만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신앙을 그리스도 안에 라고도 합니다.

    이번 주 암송할 말씀은 요한복음 6장 63절입니다.
    다음 주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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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youtube.com/watch?v=4WgFGso7y3M 


    세례의 의미

    로마서 6:4,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세례의 의미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씻음의 의미로, 죄를 물로 씻을 수는 없지만 십자가의 보혈로 죄 사함 받았다는 것을 뜻하고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새 생명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물속에 잠긴다는 의미는 옛 사람이 죽는다는 뜻입니다(롬 6:3).
    즉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가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세례는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며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교회와 회중 앞에 고백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갈 2:20).

    눈물의 세례식

    어제 드디어 기다리던 세례를 받았다. 한마디로 완전히 망가진 세례식이었다. 세례식 때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린다고 홍 집사님이 말했을 때, 나는 안 그럴 거라고 말한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 세례를 받는 그 좋은 날, 왜 우냐고…. 그런데 내가 그렇게 심하게 망가질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원래 마이크 체질로 통했다. 학창 시절에는 운동장에 모인 학우들이 내 한마디에 웃고, 내 한마디에 감동받곤 했다. 세례받기 전날 밤, 나는 5분에 맞춘 간증을 서너 번 읽고 연습했고, 한국에 전화해서 아내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아내는 너무 감동적이라고, 나는 정말 남편 잘 만난 것 같다고 그랬다. 목사님이 무릎 꿇고 앉은 내 머리에 손을 얹고 힘을 주셨다. ‘이제 시작이다’ 하며 마음을 굳게 먹고 있는데 물이 내 머리를 타고 흐르자 감정이 복받치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물로 죄를 씻는 형식을 취한다고 했는데, 그건 단순한 형식이 아니었다. 자리에 돌아와 앉았는데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왜 그렇게 힘들었고 또 오래 걸렸을까? 결국 이렇게 될 것을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버텼을까? 사람들을 펑펑 울리겠다고 자신하던 나는 없었고 죄를 용서받고 눈물 흘리는 초라한 나만 있었다. 내가 흘린 눈물에는 과거에 대한 서러움도 담겨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죄를 용서받고 든든한 하나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격한 행복의 눈물이었다. 하나님은 멋지게 간증하겠다는 나의 교만함도 여지없이 무너뜨리셨다. 하나님은 잔머리 굴리는 교만한 나를 원하시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 그래도 나의 그 진심을 하나님이 들으셨으니 만족하고 행복했다.
    - 아름다운 시작, 주선태

    피지 선교사

    뉴질랜드 가까이에 솔로몬 群島가 있다. 여기 사는 원주민 피지 족속에게 선교했던 선교사가 쓴 책이다. 선교해서 그들이 예수 믿게 되면 세례를 주는데 '킬링 스톤'이라고 하는 바위 옆에서 베풀었다. 킬링 스톤이란 사람을 처형하는 바위이다. 처형법도 여러 가지가 있지 않은가? 목을 쳐 죽이는 일도 있고, 교수하는 일도 있고, 불태워 죽이는 일도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아주 특별한 방법이 행해졌다. 동네 한가운데에 큰 바위가 있는데 사람이 못된 죄를 짓게 되면 사형에 처하게 되고, 처형을 할 때에는 사람을 꽁꽁 묶어서 붙들고 머리를 그 바위에 짓이겨서 죽인다. 그래서 피가 그 바위에 흐른다. 그 피를 절대로 닦지 못하게 한다. 그대로 피가 벌겋게 흐르면 사람들이 '아! 죄 지으면 저렇게 된다'하고 일벌백계의 무서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 믿게 된 자들을 늘 붉은 피가 묻어 있는 그 바위에 데려가서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당신은 지금 죽는 거요. 옛사람이 완전히 죽는 시간입니다'하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콘스탄티누스

    우스운 얘기가 있다. 꼭 전설 같은 이야기인데 기록에 있으니까 사실인 것 같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라고 하면 기독교의 자유를 선포한 대단히 중요한 로마 황제가 아닌가? 그러나 그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까지 세례를 안 받았다고 한다. 왜 안 받았는고 하니, 나는 왕이니까 사람도 죽여야 되고 전쟁도 해야 된다, 그런고로 세례 받을 수가 없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 임종이 임박하여 세례 받을 때에도 전설에 의하면 오른손은 남겨놓고 물속에 들어갔다고 한다. 오른손 가지고 험한 짓 많이 하는 것이니까 그랬다는 것이다. 그분 생각에는 내가 세례 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완전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되는데 나는 그렇게 살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가 죽기 전에는 세례를 받았다. 받고 죽었다.

    /곽선희목사 설교예화 중

    세례의 참뜻

    갈라디아서 3:26∼2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반드시 알아야 할 세례의 영적 뜻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 가를 알기 위해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가. 예수 안에서 하나 되게 함(엡 4:5)

    물세례란(마 3:11, 벧전 3:21)
    성령 세례란(행 2:38, 고후 1:21∼22, 엡 1:13, 요 3:5, 엡 4:22∼24)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 받은 자 주와 하나 됨(롬 6:4∼5, 고전 6:17, 고전 12:13, 엡 4:5, 5:30)

    나. 예수 안에서 옷을 입게 됨(갈 3:27)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 받은 자 그리스도와 함께 옷 입은 자임(갈 3:27, 롬 6:3∼4, 10∼11)
    빛으로 옷 입은 자가 됨(요 8:12, 엡 5:8, (롬 13:12, 14)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 그 안에서 새로워짐(엡 4:13, 15∼6), (고후 5:17, 골 3:10)

    다. 예수 안에서 유업을 얻게 됨(갈 3:29)

    예수 안에서 자녀 되는 권세 얻음(요 1:12, 롬 8:15∼16, 갈 4:46)
    예수 안에 있으면 죄에서 자유 함 얻게 됨(요 8:31-32, 롬 8:1-2)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됨(갈 3:28-29, 갈 4:7, (벧전 1:5-7, 벧후 1:10-11)

    세례의 참 뜻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죽고 함께 살림을 받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사랑 선물 입니다. 우리 모두 세례의 참 뜻 바로 베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천국 백성 되시기를 바랍니다.

    * 참조: 롬 6:1-11

    세례, 그 영광스러운 의식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즉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모든 일을 하기 위해 세례를 받았다. 세례 요한의 선지자적 계명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 백성에게 새로운 요구를 하셨다. 그것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기 위해서 깨끗이 씻음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종 되신 분은 이스라엘이 하도록 요구받은 것은 무엇이든 그 백성을 위해 성취하셔야 했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세례의 요구를 포함한 자기 백성의 모든 짐을 짊어지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가되시기 위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이루셔야만 했다. 요단강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스스로 취하신 비하의 모습을 본다. 그런데 이 행위는 아무런 영광 없이 끝나지 않는다.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 1:10~11).

    우리는 이 기사를 단지 예수님의 세례에 대한 후기쯤으로 알고 지나쳐 버린다. 하지만 그곳에서 발생한 일은 땅을 뒤흔들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하늘이 열렸다.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는 시각적 상징이 위에서 내려오는 비둘기의 형상으로 임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예수님은 세례 받으심을 통해 목수로서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일을 드디어 감당하시게 된 것이다.

    - 「그리스도의 영광」/ R. C. 스프룰

    목숨을 건 세례

    한국 선교가 시작된 것은 1884년이다. 하지만 복음 전파의 자유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선교사들이 정식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허가를 받은 것은 1898년이 되어서였다. 복음 전파의 문은 서서히 열렸다. 한국인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금지되어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움트기 시작한 호기심은 법으로 막을 수 없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노도사라고 알려진 노춘경(盧春京)이었다. 그는 우연히 한문으로 된 기독교 배척문서를 읽고 호기심이 생겼다. 그는 선교사들에게 접근하여 기독교를 알고자 하였으나 선교사들은 주저하였다. 노춘경은 포기하지 않고 선교사 앨런의 집에 가서 그의 책상위에 놓여 있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몰래 가져가 열심히 읽었다.

    노춘경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는 구할 수 있는 대로 많은 기독교 서적을 읽었고 선교사들의 주일예배에도 참석하였다. 그는 정식으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언더우드에게 세례문답을 받았다. 언더우드는 마지막으로 이 나라의 법이 아직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고 있으며 한번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 마음을 바꾸어 돌아서면 안 된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노춘경은 자신의 결심은 분명하며 최악의 경우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다고 대답했다.

    선교사들은 이 세례문제에 민감했다. 아펜젤러는 자신의 느낌을 1886년 7월 24일자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로서는 그 의식이 대단히 진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한국인들의 분노를 사게 될 매우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신 분께서 그를 지키시리라고 확신한다.” 이런 논의와 기도 과정을 거쳐서 1886년 7월 18일 주일에 헤론 선교사의 집에서 노춘경은 세례를 받았다. 한국 땅에서 한국인에게 준 최초의 세례인 것이다. 그리고 그 세례는 목숨을 건 세례였다.

    * 박명수 <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

    1862년 중국선교를 시작한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는 1872년 맥킨타이어와 로스를 만주에 파송하여 만주선교를 시작하였다. 로스는 만주의 개항장인 영구(營口)를 거점으로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 무렵 로스는 평양 대동강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토머스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한국선교에 대한 꿈을 갖게 되었다. 로스는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 1874년 10월9일 영구를 출발하여 고려문을 방문하였다. 고려문은 봉황성 아래 놓여있는 작은 마을로서 청국과 조선국 사이의 합법적인 무역이 이루어지던 공식적인 관문이었다.

    로스는 이곳에서 한국 상인들을 만나서 한문성경을 팔면서 전도했으나 한국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복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국산 양목에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여관에 있는 로스에게 50대의 남자상인 한 명이 찾아왔다. 그는 조선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서양종교를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다고 했다. 이 때 로스는 그 상인에게 한문으로 된 신약성경과 번즈목사가 번역한 ‘훈아진언’이라는 기독교소개서를 전해 주었다. 로스는 별 성과 없이 고려문을 떠났다. 하지만 로스의 노력이 열매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로스를 직접 찾아가 성경과 소책자를 받아간 상인은 자기의 고향인 의주로 돌아가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것을 전해 주어서 읽게 하였다.

    1879년 초,두 명의 한국인이 만주에 있던 맥킨타이어 선교사를 찾아와서 기독교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매킨타이어는 한국교회의 첫 개종자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해야 하며, 또한 고향에 가서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두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얼마 후에 다시 돌아왔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어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돌아왔으나 세례 받을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여기에 나타난 무명의 의주 출신 청년이 한국개신교회 최초의 세례자이다.

    /박명수<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

    ▣ 내 영혼의 생일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기념하는 신성한 의식입니다. 저는 이것을 육체의 생일과 구별해 ‘영혼의 생일’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말하면 웃으실지 모르지만, 저는 나이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머니한테 태어난 미네노는 63세,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 미네노는 43세!”

    제 육적 자아에는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교만함이 있었습니다. 또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자신을 위장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저에게 호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평판과는 달리 제 뱃속에는 허영심과 야망이 꽉 차 있었습니다. 마음으로는 여전히 사람들을 비웃고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더럽고 교만한 인간입니까? 그러던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세례식이 시작되기 직전, 저는 목사님께 저의 더럽고 추한 죄를 빠짐없이 고백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세례의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이 날이야말로 제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영혼의 생일’입니다. 세례를 받자 제 생활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태어났고 변화되었습니다. 제2의 탄생일, 영혼의 생일에 말입니다.
    * 인생은 아름다워」/ 미네노 다쓰히로

    세례와 표심

    나의 군목 시절 교회와 성당, 법당을 왔다 갔다 하는 철새 장병들이 있었다. 그들은 세례와 영세와 수계를 다 받아놔서 천국이 있든 극락이 있든 염려 없다고 큰소리쳤다. 상관의 말 한 마디에 종교생활까지 영향을 받던 엄혹한 시절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현실이었다. 지휘관의 종교적 성향에 따라 병사들까지 쉽게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 대선 후보의 부인이 법회에 참석해 법명을 받은 것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장로 부인이자 권사이기에 기독교인들의 의혹이 컸다. 당사자는 사실이 와전되었다며 극구 해명했다. 불교 행사에 참석했는데 본인이 원치 않는 법명을 일방적으로 선사받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그분이 기독교에서 불교로 개종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그러므로 법명 파동은 해명 그대로 불교를 존중하려는 호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타의에 의해 일어난 해프닝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다. 불교의 표심을 얻기 위해 절에 갔을 것이란 사실이다. 불교쪽의 지원을 얻겠다는 생각이 앞섰기에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에 혼란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깊이 발을 들여놓은 것 같다.

    수계는 어떤지 모르지만 세례는 매우 중요한 기독교 예전이다. 물로 죄를 씻어 구원받았다는 표시(sign)가 세례인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을 얻는데”(롬 10:10), 그 구원 얻은 객관적 징표가 세례다. 세례가 중하였기에 초대 교인들은 함부로 세례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세례 받은 이후의 죄는 용서받기가 더 어렵다고 믿었기 때문에 콘스탄틴 대제는 임종 시에 가서야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세례는 기독교 입문의 자격증 그 이상을 의미한다.

    선거철만 되면 종교계를 기웃거리는 정치인이 많다. 단지 한 표라도 더 얻을 요량으로 자신이 세례 받은 교회 중직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타종교에 지나치게 굽실거리는 이들도 있다. 타종교를 존중한다는 정신은 귀한 것이다. 그러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그럴 필요는 없다. 내 신앙을 확고히 지키면서도 얼마든지 타종교인들과 융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은 무조건 교인 후보를 찍어야만 한다고 선동하는 지도자들도 잘못이다. 자질과 역량을 먼저 저울질해야지 단지 나와 종교가 같다고 해서 편드는 것은 미숙한 발상이다. 대선을 앞두고 후보자나 유권자나 간에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 받은 이들의 숭고한 신앙 양심을 엄히 물어야 할 때다.

    /김흥규(내리교회 담임)

    ▣ 청소년은 오늘의 주역

    하기수련회를 한 주 앞둔 주일, 우리 교회 학생 3남매가 포장마차에서 술장사를 하는 어머니의 전도를 위해 3일 금식을 했다. 중2 여학생이 울먹이며 “목사님, 우리 어머니 교회 나오게 해주세요. 꼭 한번만 만나주세요.” 어머니의 영혼구원을 위해 금식하는 3남매에게 감동을 받아 다음날 어머니의 포장마차를 찾았다. “아이고, 목사님이 어떻게 이런 곳엘…. 소주 한잔 하실래요.” 그녀는 농담을 했다.

     

    남편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술장사를 시작한 분이다. “수고 많습니다. 조금씩 쉬어가며 일하세요. 다음 주 교회에서 대둔산에 가는데 같이 가시지요.” “나 같은 사람이 가도 되나요?” 한 번도 교회에 온 일이 없는 분이 수련회에 참석했다. 그때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 술과 담배도 끊었다. 포장마차를 접고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시작했다. 지금은 권사가 되었고 그의 딸은 목사 사모님이 되었다. 청소년은 미래의 주역이 아니다. 그들을 은혜 받게 하라. 그들은 오늘의 주역이다.

    /최낙중 목사<해오름교회>

    얼굴이 부끄럽지 않게

    어느 날 이웃 동네에 있는 카 센타에를 갔다. 오래 전부터 자동차의 워셔액 분출이 되지 않아 앞 유리를 닦을 수가 없었는데 크게 불편한 것도 없고 사용하는 일도 별로 없고 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시간여유가 있고, 집으로 오는 길이어서 그 작은 것 하나를 고치려고 들렸다. 그런데 부품 업체에서 주문을 한지 한참이 되었는데도 얼른 물건을 배달해 오지 않았다. 카센타 주인과 나는 짧고 일상적인 대화 몇 마디를 나누었는데 정부에 대한 불만과 양심적 병역거부문제 등에 관한 것이었다. 주로 그분이 얘기를 했지만 그냥 국민들의 일상적인 불만이었다. 그렇게 얘기를 했어도 자동차 부품은 얼른 오지 않았다. 나는 교회 얘기를 할까하다고 그만두고 나 혼자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서 휘파람으로 찬송가를 불렀다.

     

    그가 찬송가 곡조를 알아듣고 "교회 다니세요?" 하고 묻는다. 자기도 달포 전부터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는데 '아멘이 무슨 뜻인지 할렐루야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또 세례는 얼마나 교회를 다녀야 받는 것이냐고도 물었다. 나는 적절한 대답을 해 주고 '우리 교회에도 한 번 와보라'고 하니 대뜸 "목사님이세요?" 하고 묻는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어쩐지 선해 보이고 평안해 보인다."고 한다. 나는 그분의 말을 듣고 가슴이 뜨끔했다. 만일에 부품을 늦게 가져온다고 짜증을 내고 정부에 대한 비판에 앞장을 서고 어줍 잖게 예수 믿는 것을 늘어놓으면서 불평을 했다면 나중에 나의 신분이 드러났을 때 얼마나 민망하고 미안했을까 더군다나 처음 믿는 교인 앞에서 말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어디에 가든 누구를 만나든 매사에 조심을 하지 않으면 주님의 영광을 가리 우고 교회를 욕되게 할 수 있다고 말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 한 사람의 영향

    1517년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던 비텐베르크 시는 마르틴 루터 시로 개명된 지 오래다. 오늘날 독일 전 국민의 98%가 루터교인이다. 하나님이 함께한 종교개혁자 한 사람의 영향은 시대를 초월한다. 독일 학교의 방학은 모두 기독교와 연관되어 있다. 매년 10월 1일부터 두 주간은 추수감사절 방학이고 추수감사절과 성탄절, 부활절에도 각각 두 주간 방학을 한다. 모든 국민은 교회를 위해 종교세를 낸다. 목사는 정부 공무원이며 모든 아이는 유아세례를 받고 13세가 되면 1년간 매주 두 시간씩 100시간 이상 성경을 배워서 14세가 되면 입교식을 한다. 이 날은 부모님과 일가친척이 다 모여 축하잔치를 연다. 독일은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통일을 이루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헐고 하나 되는 것이 십자가 정신이다. 새해에는 하나님의 손에 잡힌 그리스도인이 되자.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이 새 역사를 만든다.

    /최낙중 목사(관악교회)

    ▣ 지혜롭지 못한 보수

    하루는 한 권사님이 목사님을 찾아왔다. “목사님, 제 딸의 결혼식 주례를 부탁드립니다.”

    “네, 그러지요. 두 분 다 세례교인입니까?” “신랑은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권사님,ㅍ그럼 내가 주례를 설 수 없어요. 장로님께 부탁하십시오.” 주례를 못 서겠다는 대답을 들은 후부터 권사님의 마음이 변했다. 평소 목사님을 ‘큰 종’이라고 자랑하던 권사님이 목사님을 헐뜯기 시작했다. 권사님은 장로님들을 부추겨서 교회가 운영하는 신학교를 도와주면 안 된다고 했다. 목사님이 하면 안 되는 주례를 장로님은 해도 되는 것인가? 목사님이 사위가 될 청년을 미리 만나서 복음을 전해주고 세례를 받게 해서 결혼주례를 해줄 수는 없었을까. 청년을 구원하고 권사 가정도 돕고 목사님도 편안할 수 있었을 텐데…. 때로는 우리의 불필요한 형식주의와 보수주의가 삶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김상복 목사 (할렐루야교회)

     

     

    ▣ 세례에 관한 성경 말씀

    0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3:16)

    0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막 1:8)

    0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 3:23)

    0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2:41)

    0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행 8:36)

    0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 하리요 하고 라고 합니다. (행 10:47)

    0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합니다. (벧전 3:21)



    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분명한 말씀이 있습니다(사도행전 1:4∼5).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광야에서 세례 요한이 외쳤던 것을 부활 후에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 메시아만을 기다렸던 유대인들은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 세상에 머무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 하신 후에 예수님을 보았던 사람들이 무려 오백 명이라고 합니다(고린도전서 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예수께서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실 때
    그런데



    마가복음 3:11,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 참조 /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 참조 / 사도행전 11: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로마서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3: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골로새서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고린도전서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란도전서 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세례(洗禮)는 “물세례”와 “불세례”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세례(洗禮)

    물세례

    불세례

    구원의 표(베드로전서 3:21)

     

     

     


    ‘물세례’는 “요한의 세례” 라고 한다면 ‘불세례’는 “성령 세례”라고 합니다.
    ‘물세례’는 구원의 표가 됩니다(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불세례’는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사도행전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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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에 기록된 세례의 종류 : 물세례와 성령세례

    Ⅰ. 성종현 목사가 말하는 세례의 종류


    신약성서에는 첫째는 세례 요한의 세례(물세례), 둘째는 예수 제자들의 세례(요 4:1-2), 셋째는 불세례(마 3:11; 눅 3:16), 넷째는 성령의 세례(막 1:8; 행 1:5)가 언급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물세례는 회개와 정결, 불세례는 심판과 능력, 그리고 성령세례는 메시아의 구원과 영적 무장의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세례(물세례)와 성령세례(막 1:9-11)를 받으셨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세례 요한의 세례(물세례)와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았다(행 2:1-4).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은 성령의 오심으로 시작된다. 예수님은 성령 충만함을 받으신 후에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예수의 제자들도 성령의 불세례를 받은 후에 역사를 바꾸는 능력의 공동체로 탄생하게 되었다. (성종현 목사, ‘교회와 신학’ 장로회신학대학교 논문집 제26집 1994, p.228, 231)

    이상에서 성종현 목사는 “물세례는 회개와 정결, 불세례는 심판과 능력, 그리고 성령세례는 메시아의 구원과 영적 무장의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고 하여 불세례와 성령 세례는 다르다고 하였고, 한편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았다. 예수의 제자들도 성령의 불세례를 받았다”라고 하여 성령세례와 성령의 불세례는 같은 뜻으로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세례의 종류를 “세례 요한의 세례, 예수 제자들의 세례, 불세례, 성령세례”의 4종류로 구분했다가, 성령의 불세례를 더 첨가하여 횡설수설한 주장을 하고 있다.

    이렇게 모순된 주장을 하게 된 이유는 마 3:11, 눅 3:16에 나오는 “성령과 불세례,” 그리고 막 1:8, 요 1:33, 행 1:5에 나오는 “성령세례”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즉 성령 세례의 요소와 수단 그리고 도구에 대한 이해를 못하며, 막 1:8, 요 1:33, 행 1:5에서는 마 3:11, 눅 3:16에 나오는 ‘불’이란 단어가 생략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Ⅱ. 베이커 성경주석이 말하는 세례의 종류

    가장 낮은 수준의 세례, 즉 물의 세례는 죄의 외적인 정화와 회개를 언급하며, 이와는 달리 성령의 세례는 믿음에 의한 내적인 정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의 세례는 그 특수한 본성으로 다시 태어난 보다 더 고상한 삶의 정화, 즉 변화를 표현한다(베이커 성경주석 ‘누가복음’[상] 157).

    주제설교 : 불세례 성령강림. 유월절 다음에 오는 국가의 명절인 오순절 날은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는 약속에 놀랍게도 꼭 들어맞는다”(베이커 성경주석, ‘사도행전’ [상] p.102). 에베소 교인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오순절의 불세례가 물세례 의식의 반복을 불필요하게 했을 것이다. (베이커 성경주석 ‘사도행전’ [하] p.254)

    이상에서 베이커 성경주석은 세례의 종류를 물세례, 성령의 세례, 불세례의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또한 행 1:5에 나오는 성령 세례를 오순절에 받았고, ‘에베소 교인들은 오순절의 불세례’라고 하여 불세례와 성령세례를 같이 취급하고 있다. 이상에서 세례는 세 가지로 구분했다가 여기에서는 두 가지로 구분하여 일치하지 않고 서로 모순되게 주장하고 있다. 이상의 “물의 세례는 죄의 외적인 정화와 회개를 언급하며, 이와는 달리 성령의 세례는 믿음에 의한 내적인 정화를 의미한다.”는 주장은 전혀 그릇된 것이다. 물세례는 내적인 죄의 정화 곧 회개를 위한 외적인 의식이다. 물세례는 내적인 죄의 정화를 위한 외적인 상징이다. 즉 외적인 물세례를 받을 때 내적인 죄의 정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물세례의 의미이다. 따라서 “성령의 세례는 믿음에 의한 내적인 정화를 의미한다.”는 주장은 천부당만부당한 그릇된 것으로 행 1:5, 행 1:8에 기록된 성령세례의 뜻이란 예수님의 증인의 사역을 위한 성령님의 권능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릇된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Ⅲ. 그랜드 종합주석이 말하는 세례의 종류


    성경에서 언급하는 세례에는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있다.
    물세례는 기독교 공동체에 공식으로 가입한다는 입교의식이다. 즉 과거의 죄를 씻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믿으며 그의 말씀에 그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고백하는 자에 대해 교회가 그를 인정하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행하는 외적 의식이다. 물세례가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입문하는 의식이라면 성령세례는 구주로 영접토록 하고 회개 중생케 하는 성령님의 사역이다.

    따라서 성령세례를 받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죄 씻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사단의 지배하에 있던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중생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랜드종합주석 제16권 p.225)

    이상의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세례에는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있다”는 주장은 바른 것이다.

    “물세례”가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입문하는 의식이라면 “성령 세례”는 구주로 영접토록하고 회개 중생케 하는 성령님의 사역이라는 주장 가운데 “물세례가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입문하는 의식이라면” 이라는 주장은 맞는 것이지만, “성령 세례는 구주로 영접토록하고 회개 중생케 하는 성령님의 사역이라는 것은 그릇된 주장이다. 또한 “성령세례를 받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죄 씻음을 받는 것”이라는 주장은 행 1:5, 행 1:8에 기록된 성령세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것으로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Ⅳ. 김의환 목사가 말하는 세례의 종류

    마 3:11 ‘성령과 불로,’ 신자들에게 선물로 주어져 중생한 새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성령 세례는 오순절에 최초로 이루어졌고(행 1:5), 불세례는 인간과 세상을 성결케 하는 성령의 정화 및 심판을 가리킨다. (편찬대표 김의환 목사 ‘큰 성경’ 1995)

    김의환 목사가 편찬한 ‘큰 성경’에서 “마 3:11의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를 성령 세례와 불 세례의 두 가지의 세례로 구분하였는데, 이는 전혀 그릇된 것이다. 왜 그릇된 것이냐 하면 물세례의 경우에 세례를 베푸는 요소와 수단과 도구는 물이다. 마 3:11에 나오는 불을 불세례라고 할 경우 성령 세례의 요소와 수단과 도구는 성령님이다. 이렇게 성령님이 물과 같이 요소/수단/도구가 될 경우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를 근본부터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성령 하나님은 절대로 세례를 베푸는 요소/수단/도구가 될 수 없고, 대신에 “불”이 요소/수단/도구가 되어야 한다.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김의환 목사는 마 3:11에 나오는 세례를 성령세례와 불세례의 두 가지로 그릇된 구분을 하게 된 것이다. 김의환 목사의 “불세례는 인간과 세상을 성결케 하는 성령의 정화 및 심판을 가리킨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성경의 근거는 한 구절도 없다.

    Ⅴ. 하용조 목사가 말하는 세례의 종류

    신약성경에는 (1) 세례 요한의 세례(물세례), (2) 예수 제자들의 세례(요 4:1-2), (3) 불 세례(마 3:11; 눅 3:16) , (4) 그리고 성령의 세례(막 1:8; 행 1:5)가 언급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물세례는 회개와 정결, 불세례는 심판과 능력, 그리고 성령세례는 메시아의 구원과 영적 무장의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마 3:11). 여기에서 불로 세례를 주는 것은 보통 불신자들에게 임할 마지막 심판에 대한 언급으로 보기도 한다(마 3:12).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신자들 위에 머물렀던 ‘불의 혀들’(행 2:3)로 오순절에 나타났던 신자들을 정결케 하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언급으로 본다. (하용조 목사 편찬, ‘비전성경사전’ p.639,663)

    이상에서 하용조 목사는 세례의 종류를 “세례 요한의 세례(물세례), 예수 제자들의 세례 (요 4:1-2), 불세례(마 3:11; 눅 3:16), 그리고 성령의 세례(막 1:8; 행 1:5)”의 네 가지로 구분하는데 이는 그릇된 것이다. 요 4:1-2에 나오는 “예수 제자들의 세례”는 물세례였다. 따라서 “세례 요한의 세례(물세례), 예수 제자들의 세례”(요 4:1-2)의 두 가지로 구분한 것은 의미가 없다. 이 두 가지의 세례를 물세례라고 해야 한다. 사도행전 1장과 2장을 지나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베푼 세례는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두 가지의 세례였다. 또한 하용조 목사는 “불세례, 성령의 세례”라고 하여 불세례와 성령세례를 따로 구분하는데 이렇게 될 경우에 성령세례를 베푸는 요소/수단/도구는 자동적으로 성령님이 될 수밖에 없다. 이 경우에 성령님을 물과 같이 물질 취급하는 것이 되어 삼위일체의 하나님 교리에 전적으로 위배 된다. 따라서 마 3:11과 눅 3:16을 근거로 하여 성령세례와 불세례로 구분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그릇된 주장이다. 바른 주장은 ‘성령세례 즉, 성령의 불세례”이어야 한다.

    Ⅵ. 강경호 목사가 말하는 세례의 종류

    할례, 물세례, 성령세례, 불세례, 고난의 세례가 있다. 마 3:11, 눅 3:16의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는 것을 어떤 주석가는 이것이 오순절 날에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그 근거로는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이 불의 혀같이 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의 문맥적 연결구에서 연구해 보면 이 구절들은 심판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의 설립 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강경호 목사, ‘성령론’ 1996, p.195-196. 장로회신학대, 대학원 졸, 강경호 목사가 저술했다고 하는 '성령론'은 장로회 학장이었던 이종성 목사가 저술한 '성령론'을 저자의 이름과 출판사를 바꾸고 새로운 인쇄와 새로운 포장으로 강경호 목사 자신이 저술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상의 “할례, 물세례, 성령세례, 불세례, 고난의 세례가 있다”고 하여 세례를 네 가지로 구분하는데, 세례의 종류는 오직 “물세례, 성령세례”의 두 가지만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마 3:11, 눅 3:16의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는 것에 대하여 어떤 주석가는 이것이 오순절 날에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그 근거로는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이 불의 혀같이 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는 해석은 바른 해석이다. “마 3:11, 눅 3:16의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다”는 기록에서 바른 번역은 “성령(님)의 불로 세례를 줄 것이다”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성령세례와 불세례로 구분하여 불세례를 심판의 세례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성경의 근거는 한 구절도 없다.

    Ⅶ. 조용기 목사가 말하는 세례의 종류

    세례에는 세 가지의 세례가 있습니다. 즉 중생의 세례, 물세례, 권능의 세례(일명 성령세례)가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 ‘고린도전서 강해’ 1997, p.270)

    Ⅷ. 명성훈 목사가 말하는 세례의 종류

    조용기 목사는 그가 저술한 ‘성령론’에서 고전 12:13의 전반부는 일체 취급하지 않고 있음으로 한국순복음계통에서 이 구절을 어떻게 번역하고 해석하느냐를 알기 위해서는 조용기 목사 소속의 순복음신학교 교수와 교회성장연구소 소장인 명성훈 목사가 저술한 ‘성령과 함께’라는 책에 나오는 다음의 내용을 살펴보아야 한다.

    “히브리서 6:1∼2에 보면 ‘세례들’이 나오는데 학자들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분류하는데 필자는 여기서 세 가지 세례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Therefore let us leave the elementary teachings about Christ and go on to maturity, not laying again the foundation of repentance from acts that lead to death, and of faith in God, instruction about baptisms, the laying on of hands,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eternal judgment.  

    세례들과 안수와 - '세례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밥티스몬'은 기독교의 '세례'(밥티스마)를 의미하지 않고(롬 6:4; 엡 4:5; 골 2:12) 유대교의 일반적인 정결 예식을 의미한다(레 11-15장, Bruce, Morris).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죄 씻음을 받은 표징(表徵)을 세례로 볼 것인가 아니면 유대인들의 정결 의식으로 볼 것인가에 대하여 논란이 많았으며(요 3:25; 행19:1-5) 처음 믿는 개종자들은 이 '세례들'에 관한 교훈에 접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안수'는 구약시대부터 널리 시행되던 관습이었다(민 8:10; 신 34:9). 신약시대에도 새로운 개종자(행 8:17)나 전도 사역자(딤전 4:14)에게 종종 안수를 시행하기도 하였다(행 8:17-19).

    본절의 '안수'는 주로 개종자들에게 행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도록 하는 것을 가리킨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 - 이것은 '그리스도 도의 초보'에 관한 마지막 세 번째 쌍으로서 미래에 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주제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중대 관심사인 종말론적 교리이다(사 26:19; 단 7:9, 10; 12:2; 눅 20:37,38; 행 23:8; 마카비2서 7장, Bruce). 이러한 교리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책임적 존재로서 마지막 때에 회개해야 함을 시사한다.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 '완전'의 헬라어 '텔레이오테타'는 '성숙'이라는 의미로 공동체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인격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가리킨다(Lane).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개종한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그러한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권한에 순종하기를 권면한다. 

    첫째, 중생 세례(고린도전서 12:12∼13)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요한복음 3장에서 유대의 관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요 3: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에서 '물과 성령'을 "물 세례와 성령 세례"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성령 세례"를 "거듭남을 위한 세례" 즉 "중생 세례" 라고 하겠습니다.

    첫 번째 세례는 중생 세례 혹은 몸의 세례(baptism into the body of Christ)입니다. 이것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지게 하는 세례입니다. 이 몸의 세례는 성령께서 주시는 것으로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수가 없습니다(고전 12:3). 중생 세례 혹은 몸의 세례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연합하는 세례입니다.


    둘째, 물세례(baptism in the water)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Water symbolizes baptism that now saves you also not the removal of dirt from the body but the pledge of a good conscience toward God. It saves you by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사도행전 8: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성경에서 물은 씻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베소서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To make her holy, cleansing her by the washing with water through the word.

    (예화) 세례를 받기 전의 담배 맛과 세례를 받은 후의 담배 맛이 똑같구나!
    - 세례식을 마친 후 교회 앞 다방에 모여 담배를 피우면서 서로 하는 말을 들어봅시다.

    (예화) 세례를 받기 전의 생활 습관은 세례를 받은 후에도 여전히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 변화된 생활을 회복할 것입니다.
    - 담배를 습관적으로 피우던 사람이 어느 날 성령의 임재를 확신한 후 담배가 써서 피울 수 없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물소리는 어린 양의 음성
    요한계시록 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His feet were like bronze glowing in a furnace, and his voice was like the sound of rushing waters.   

    참조 / 요한계시록 19: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참조 / 로마서 6:1∼4, baptism in the water)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물세례는 중생한 자 곧 ‘그리스도의 몸의 세례’를 받아 교회의 지체가 된 자들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 구원을 확증하는 세례입니다. 중생 세례 혹은 몸의 세례가 불가시적 세례라면 물세례는 가시적 세례입니다. 물세례는 교회의 목사가 주는 세례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함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증거가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셋째, 성령 세례(마가복음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몸의 세례’를 성령이 주시고 물세례를 목사가 주는 것이라면 성령의 세례(baptism in the Holy Spirit)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몸의 세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법적 기능이 있고, 물세례가 그것을 확증하는 의식적 기능이 있다면 성령의 세례는 실제적인 능력을 소유하는 기능을 보여 줍니다. 단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권능을 허락하시는 세례입니다(행 1:8).

    성령의 역사에 대한 오해와 오류가 나타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성령의 역사를 표현하는 용어 때문입니다. 개인이나 교파에 따라 성령에 대한 용어가 다양하기 때문에 각자의 주장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세례

    성구

    의미

    수여자

    참고

    중생세례

    고린도전서 12:13

    하나님의 자녀

    성령

    법적 기능

    성령세례

    마가복음 1:8

    하나님의 증인

    예수

    능력적 기능

    물세례

    베드로전서 3:21

    죄를 씻음

    목사

    의식적 기능

    물세례는 공적인 선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씻음 받았다는 약속과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물세례를 받았지만 여전히 과거의 삶이 나도 모르게 반복되어 나를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합니다. 이러한 반복되는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명성훈 목사, ‘성령과 함께’ p.80-82,99. 순복음신학교, 감리교신학대학원 졸업, 풀러신학교 Ph.D. 학위논문은 조용기 목사에 관한 것이었다. 순복음 베데스다신학대학 교수 역임, 여의도순복음교회 소속 한세대학교 교수 역임, 여의도순복음교회 교회성장연구소 소장 역임)

    명성훈 목사가 말하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오해와 오류가 나타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성령의 역사를 표현하는 용어 때문입니다. 개인이나 교파에 따라 성령에 대한 용어가 다양하기 때문에 각자의 주장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라는 주장은 전혀 그릇된 것이다. “성령의 역사에 대한 오해와 오류가 나타나는 가장 큰 이유”는 현재 동서양에 나와 있는 번역 성경은 성령론에 관한한 전혀 그릇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명성훈 목사는 이를 바른 번역으로 믿고 착각 속에서 성령론을 정립한다고 하였다. 이 그릇된 번역을 바로 번역하지 않고는 성령론의 혼란은 막을 길이 전무하다. 조용기 목사는 “중생의 세례, 물세례, 권능의 세례(일명 성령세례)가 있다”라고 하여 세례의 종류를 3가지로 구분하는데, 그의 제자인 명성훈 목사도 조용기 목사와 같이 3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명성훈 목사는 고전 12:13에 근거하여 ‘중생세례 혹은 몸의 세례’(baptism into the body of Christ)라는 용어를 만들어 세례를 중생세례, 물세례, 성령세례의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이는 그릇 번역된 고전 12:13을 맞는 번역으로 믿고 착각한 데서 온 것으로 비 성경적인 황당한 주장이다. 조용기 목사와 명성훈 목사는 그릇 번역된 고전 12:13에 근거하여 ‘중생세례 혹은 몸의 세례’를 만들어 냈는데 이는 고전 12:13을 근거로 해서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주장이다. 고전 12:13에 나오는 세례는 행 1:5에 나오는 성령 세례와 동사의 시제만 다를 뿐 전혀 일치하는 것으로 오직 성령세례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고전 12:13의 세례는 행 1:5의 동일한 성령세례이다.

    또한 명성훈 목사는 “성령세례란 단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권능을 허락하시는 세례이다”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요 1:12에 나오는 ‘권세’를 조용기 목사와 같이 행 1:8에 나오는 “권능”을 같은 뜻으로 잘못 해석했기에 생긴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한편 명성훈 목사는 “중생 세례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지게 하는 세례”라고 하면서 또한 “성령의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권능을 허락하시는 세례입니다”라고 주장한다. 즉, “성령의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가 권세를 가지게 하는 세례”라고 하여 중생세례와 성령의 세례를 같은 뜻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분명히 중생세례와 성령세례는 서로 구분되어 다른 의미의 세례라고 주장하다가 여기에서는 같은 의미라고 주장하여 스스로 자가당착의 모순 속에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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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의 식민통치에 시달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잊어버렸던 하나의 단어를 떠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단어는 “메시아(그리스도)” 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예언되었던 단어이었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보내실 구원자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제발 어서 속히 ‘메시아(그리스도)’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3장 15절에는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백성들이 바로 그 ‘그리스도’를 바라고 기다렸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세례 요한은 먹는 것과 입는 것이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의 외침은 너무나 시원했고 통쾌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자신들을 괴롭히던 세리들과 군인들을 향하여 돌직구를 날려주었고, 바리새인들과 헤롯 왕에게까지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세례를 베풀며 상쾌함을 주는 새로운 부흥사 세례요한에게 몰려들었고 그의 외침을 들으며 속으로 내심 기대를 하며 다가와 물었습니다. 혹시 당신이 구약 성경에서 예언하셨던 바로 그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세례요한은 오실 그분을 소개하면서 여러 가지 표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3:16∼17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그리고 그분은 세례 요한의 외침처럼 불세례를 주셨고, 능력을 행하사 많은 병든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셨고, 세례 요한 보다도 더 상쾌하고 통쾌하게 죄인들을 혼내주셨고, 명쾌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주셨습니다.


    특히 그분의 불세례는 많은 이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이 행했던 물세례는 신분의 변화에 대한 공식적인 선언적 의미가 강했습니다.

    - 죄 가운데 살았음을 인정하며 이제는 죄와 단절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겠다고 하는 공식적인 선언식이 세례이었습니다.


    - 내가 죄인이기에 내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는 증표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 새 사람이 되어 살겠다고 하는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 세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옛사람은 그대로 살아 있고, 욕심과 욕망과 허영과 헛된 자존심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하나님의 뜻 보다는 내 주장이 여전히 우선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물은 씻는 기능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로 깨끗이 씻었지만 그냥 두면 여전히 때가 끼고, 녹이 슬고, 찌든 때 묵은 때가 덕지덕지 붙기에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물은 겉은 씻지만 속 까지 씻을 수는 없었습니다.


    겉모양의 청결은 가능했지만 내부의 죄까지 씻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죄는 남아 있고 죄를 사랑하는 본성 또한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물세례를 받고도 죄를 반복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물은 결코 본질의 변화를 이루어 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불은 태워버립니다. 욕심과 욕망도 허영심도 낮은 자존감과 헛된 자존심도 다 태워버립니다.


    한번 불이 나면 흔적이 없어지고 본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그 불이 강할수록 원형은 완전히 회복이 불가능해집니다. 집에 불이 나면 집안에 있던 집기들이 형제를 알아 볼 수 없게 되고, 특히 인형이나 장갑이나 작은 장난감들은 그 형체를 완전히 잃게 됩니다. 원형복귀가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불세례가 필요합니다.

    물세례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내 안을 다 태워주셔야 합니다.

    죄의 본성을, 그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자아와 이기심을 태워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새 사람도 되고 그 태워 없어진 자리에 새로운 성령의 사람이 태어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큰 산불이 나도 이듬해 봄이 되면 새순이 올라옵니다. 아주 싱싱한 것들이 올라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의 고백이 있고, 용서의 확신이 있고, 삶의 결단이 있을 때 그 사람은 불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물 가지고는 안 됩니다. 불로 태워버려 형체를 없애고 새로운 창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외친 것입니다.


    나는 겉만 청소해주지만 그분은 네 심장과 폐부까지도 완전히 태워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해 주실 것이다.

    욕심에 이끌리는 옛사람이 아니라 성령에 이끌리는 새사람이 될 것임을 선포하였습니다.


    불세례의 경험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물세례에 머물고 계십니까?

    의지적 결단이나 감정만 가지고 새로운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내 안에 있는 죄를 이길 만큼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날마다 죽어야 했던 이유는 내가 죽어 완전히 태워지지 않고서는 하루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과 온전함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불을 던지로 오셨습니다.

    내 안을 완전히 태워주실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창조해주실 것입니다.

    이제 남은 일은,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요한을 찾아가 물세례를 자원했던 것처럼, 예수 앞에 나아와 불세례를 자원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기도합니다.

    주여 나를 태워주옵소서!

    내 안의 온갖 더러운 육체의 소욕들을 태우시고 새롭게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나로 창조하여 주시옵소서!


    이 기도가 오늘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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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의 뜻과 중요성

    본문/사도행전10:44-48

    설교/ 김윤배 목사


    본문은 로마의 백부장이었던 고넬료가 성령세례를 받는 장면으로, 이방인이 그리스도 교회에 받아들여지는 중요한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매우 배타적이고 엄격했으나 그들에게도 똑같이 성령의 세례가 임하는 것을 보고 그 담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고넬료 가정이 회심하는 과정을 그린 본문을 통해 세례의 의미와 그 중요성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1. 세례의 뜻

    ‘세례’란 ‘물로 씻는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세례’는 히브리어로 ‘라하츠’인데 ‘씻다. 빨다. 목욕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에서 ‘라하츠’의 행위는 정결작업으로 나타납니다. 제사장이 위임 받을 때는 먼저 회막문에서 물로 깨끗이 몸을 씻고, 의복을 입고, 관을 쓰고, 예식을 행하게 됩니다. 물로 깨끗하게 씻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되고 성별된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출30:20을 보면 제사장들이 회막에서 여호와의 일에 수종들려고 할 때 준비된 물두멍에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또 레22:6, 민19:7에 보면 부정함을 입은 사람이 물로 씻어서 정결함을 얻는 법이 나와 있습니다. 레8:21, 9:14에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물로 깨끗이 씻으라고 말씀합니다. 시26:6에서 ‘라하츠’ 행위는 무죄함 곧 의인의 반열에 속해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롬6:3-5에는 “예수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곧 그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세례는 영적으로 예수 안에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태어났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2. 세례의 중요성

    오늘날 세례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마태복음 28장의 말씀에 기초하여 행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세례가 신앙생활에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유언적으로 이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세례가 단순한 통과의례적인 의식이었다면 외식적인 것을 가장 싫어하신 주님이 명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세례를 베푸는 것’과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참 성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고, 예수님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하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받음으로 법적 교인이 되지만, 말씀 순종으로 참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3. 물세례와 불세례

    행 2:38이하에 보면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경은 그날에 삼천 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집단 세례라 할 수 있습니다. 

    행 10:44 본문에 보면 고넬료 백부장이 천사의 계시를 받고 욥바의 베드로를 초청하여 말씀을 들을 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을 받으며, 베드로가 명하여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해서 세례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방 회심자들은 즉시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세례를 받은 후 베드로를 청하여 수일간 더 머물게 했습니다. 더 배울 필요를 느꼈던 것입니다. 

    이처럼 물세례와 불세례는 동시적일 수도 있고 개별적일 수도 있습니다. 물세례도 받아야지만 성령세례도 받아야 구원의 확신과 기쁨과 감사와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 세례를 받은 예루살렘 교인들은 담대하게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서로 유무상통하고 이웃을 돕는 일을 했습니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성령의 은혜를 받고 보니 자연히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실제로 성령을 받고나면 그것이 쉬워지게 되고 기쁨으로 하게 됩니다. 모름지기 신자라면 물세례뿐 아니라 성령세례까지 받아야만 할 것입니다. 머리로 믿는 것과 가슴으로 믿는 것은 다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세례를 기피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이는 주께서 명하시고 사도 때부터 행하여 온 예식을 거부함은 예수님의 말씀보다 자기 생각을 더 앞세우고 중시하는 교만한 태도요, 불신앙적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영적으로 무지하고 어리석은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도 자기본위방식으로 믿는다면 굳이 교회에 나올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 참신앙은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수한 신앙인이 되려면 자기주장과 고집을 꺾고 성경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수반되지 않으면 참신앙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세례의 참뜻과 중요성을 바로 알고, 이 세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성결한 성도가 되며, 물세례와 동시에 성령세례도 받아 뜨거운 마음, 기쁨 마음으로 주를 섬겨 대대로 복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2006년 4월 9일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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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blog.daum.net/truechildren/1105 

    이태수
    http://blog.daum.net/blueheavenaz/158 


    점진적 계시

     “점진적 계시(progressive revelation)”라는 용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획에 대한 다양한 측면을 일부 신학자들이 “세대(dispensations)”라고 일컫는 다양한 기간을 통해 드러내셨다는 개념과 가르침을 일컫습니다. 세대주의자들에게 세대란 하나님의 목적이 드러나는 외부 역사를 통해 구별 가능한 경륜(예: 사물의 정렬 조건)입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역사를 거치며 일어난 수많은 세대들에 대해 논의하면서도, 그들 전부는 하나님께서 각 세대에, 그리고 이전 세대를 기반으로 세워진 새로운 세대에도, 하나님 당신과 구원 계획에 대해 오직 특정한 면만을 드러내셨다고 믿습니다.


    세대주의자들이 점진적 계시를 믿는 것은 사실이지만, 점진적 계시를 받아들이기 위해 세대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거의 모든 학생들은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에 들어 있는 특정 진실을 이전 세대에 모두 알려주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오늘날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을 때 동물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나, 한 주의 마지막 날이 아닌 첫째 날에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관습과 지식의 차이가 역사를 거치며 점진적으로 밝혀지고 적용되어 왔다는 것을 압니다.


    추가적으로, 점진적 계시의 개념과 관련하여 좀 더 중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한 가지 예로 교회의 탄생과 구성에 관해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 과 같으니,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에베소서 3:1-6)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거의 비슷한 상황을 진술을 합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 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로마서 16:25-26).


    점진적 계시에 관한 논의에서, 사람들이 처음으로 갖는 질문은 이것이 어떻게 구원에 적용되는가입니다. 그리스도 초림 이전의 사람들은 오늘날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원을 받았을까요? 신약성경 시대에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치신 일을 믿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셨으며 그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을 믿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로마서 10:9-10, 사도행전 16:31). 그런데, 구약성경 전문가 알렌 로스 (Allen Ross)는 “[구약성경 시대에] 구원을 믿었던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믿었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지적합니다. 존 파인버그 (John Feinberg)도 “구약성경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예수가 메시아이고, 예수가 죽고, 그의 죽음이 구원의 근거가 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라고 덧붙입니다. 로스와 파인버그가 옳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정확히 무엇을 나타내셨으며, 구약성경 성도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을까요? 만일 구약성경의 구원이 있었다면, 신약성경의 구원과는 어떻게 달랐을까요?


    점진적 계시 – 구원, 두 번인가 한 번인가?

    일부 사람들은 구원에 두 가지 다른 방식—. 하나는 그리스도 초림 이전에 일어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일어났다고 여기는 점진적 계시를 믿는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L. S. 체이퍼 (L. S. Chafer)는 두 가지 구원 방식에 관한 주장을 다음과 같이 반박했습니다.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특별하든지 간에 구원은 언제나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 하나님을 위해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그러므로,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이것이 맞다면, 구원과 관련한 구약과 신약 성경의 계시가 어떻게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찰스 라이리 (Charles Ryrie)는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모든 시대에 있어 구원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모든 시대에 있어 구원의 필요 조건은 믿음이다. 모든 시대에 있어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다. 믿음의 내용은 다양한 시대에 따라 다양성을 갖는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살았던 시대와 상관없이, 구원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역사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획과 관련하여 사람이 알고 있는 지식의 양은 하나님의 점진적인 계시를 통해 시대가 흐르며 증가했습니다.


    구약성경 시대의 성도와 관련하여 노먼 가이슬러 (Norman Geisler)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합니다. “요컨대, 규범적인 구약성경의 구원적 필요 사항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분명한 신념이라는 면에서) (1) 하나님과의 연합을 믿음, (2) 인간의 죄에 대한 인정, (3)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또 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임, (4) 메시아가 오실 것임을 앎.”


    가이슬러의 주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증거가 성경 속에 있을까요? 첫 세 가지 필요 사항을 담고 있는 누가복음의 말씀을 살펴봅시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8:10-14).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전에 일어났으므로, 이 사람이 오늘날처럼 명확하게 표현된 신약성경 복음 메시지에 관한 지식을 갖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세리의 짧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우리는 (1) 하나님에 대한 믿음, (2) 죄에 대한 인정, 그리고 (3) 긍휼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매우 흥미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자기 집으로 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복음 메시지를 믿고,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된 신약성경 성도의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바울이 사용한 것과 정확히 같은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


    가이슬러 목록 중 네 번째 항목, 메시아가 오실 것임을 안다는 것은 누가복음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신약성경 구절들이 이 항목이 일반적인 가르침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예로, 우물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만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요한복음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4:25). 하지만, 가이슬러도 알고 있었듯, 메시아에 대한 믿음은 구약성경 구원을 위한 “필수 요소”가 아니었습니다.


    점진적 계시 – 성경의 더 많은 증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항상 구원으로 가는 길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다음의 구절들을 구약 및 신약 성경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세기 15:6)


    •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요엘 2:32)


    •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히브리서 10:4).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브리서 11:1-2).


    •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성경은 분명히 모든 역사 속에서 믿음이 모든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열쇠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자기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에 따라 반응한 것을 기반으로 그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자기들이 알 수 없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었던 반면, 오늘날의 믿는 자들은 볼 수 있는 과거의 사건을 돌아봅니다. 다음 그림이 이 개념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믿음을 실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계시를 주신다고 가르칩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역사가 이루어졌으니, 필요 조건이 바뀌었습니다. 즉 “무지의 시간”은 끝났습니다.


    •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사도행전 14:16)


    •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사도행전 17:30)


    •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로마서 3:25).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희생 체제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여 보여주셨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죄가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훈련시키셨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초등교사로서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갈라디아서 3:24). 하지만, 율법은 그 이전에 세워진 믿음에 근거한 아브라함 언약을 폐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구원을 위한 본은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로마서 4장). 하지만, 라이리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의 믿음의 세부적인 내용은 – 주어진 계시의 양 –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쌓여,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보다 직접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점진적 계시 – 결론


    존 칼빈 (John Calvin)은 하나님의 점진적 계시를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씁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긍휼의 언약을 주심으로써, 이 질서 있는 계획을 지키셨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완전한 계시의 날이 이르렀고,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 징후를 더욱 밝히셨다. 이에 따라, 태초에 첫 번째 구원 약속이 아담에게 주어졌을 때는 (창 3:15), 약한 불꽃처럼 빛났다. 그 이후, 빛이 더해지며 점점 더 밝은 빛이 되었고, 그것은 광범위하게 광채를 발산하며 충만해졌다. 마침내, 모든 구름이 흩어지고 의의 태양인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빛이 되셨다” (Institutes, 2.10.20).


    점진적 계시라고 해서 구약성경 시대 사람들이 계시를 아예 받지 못했다거나,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칼빈의 말에 의하면 그리스도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구원과 영생의 희망이 담긴 말씀을 듣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대낮처럼 완전히 볼 수 것을 오직 멀리서 잠깐 보거나 그림자 윤곽만 볼 수 있었”습니다 (Institutes, 2.7.16; 2.9.1; 갈라디아서 3:23에 대한 주석).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없이 구원받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은 성경에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요한복음 14:6). 구원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며 구원의 수단은 항상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내용은 언제나 특정한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주시는 계시의 양에 따라 결정되곤 했습니다. 

     


    07-14-2021(수)

    세례의 의미(마가복음 1:8-11)

    나는 너희에게 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세례 : 물 세례와 성령 세례

    물 세례는 구원의 표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의 세례 이야기
    로마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황제는 콘스탄틴 황제입니다.
    그가 임종 직전에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살아 있을 때는 전쟁을 해야 하고 전정터에서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데 세례를 받으면 전쟁을 할 수 없으므로 마지막에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를 받을 때에도 오른 손은 여전히 물 위로 올려 놓았다고 합니다.
    오른 손을 자주 사용하여 죄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령 세례는 구원의 확신


    린드버그는 1930년, 당시 프로펠러 하나 달린 단발 비행기를 몰고 대서양을 처음 횡단한 영웅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 일에 도전했다가 생명을 잃었습니다.

    어느 날 린드버그가 파리를 가게 되었는데, 그가 온다는 소문에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렸습니다.

    어느 큰 담배 회사 사장이 이 기회를 이용해서 자기 회사의 담배를 광고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린드버그에게 다가가 담배 한 개비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것을 손에 끼어도 좋고 입에 물어도 좋습니다.
    포즈 한 번만 취해 주십시오. 그러면 사진 한 장 당 5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5만 달러면 약 6천 만 원입니다.
    지금부터 80년 전에 5만 달러라면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그러나 엄격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린드버그는 사람들 앞에서 그 사람 정면에 쳐다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세례 받은 교인입니다. 담배 피울 수 없습니다.”

    린드버그는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었기 때문에 담배 회사 사장의 제안을 받아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린드버그의 그 말이 다음 날 바로 파리 신문에 대서특필되어 나왔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에게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모금을 하여 10만 달러를 모아서 린드버그에게 전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린드버그의 이러한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은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시지만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유?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마태복음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구원의 표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의 세례 이야기
    로마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황제는 콘스탄틴 황제입니다.
    그가 임종 직전에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살아 있을 때는 전쟁을 해야 하고 전정터에서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데 세례를 받으면 전쟁을 할 수 없으므로 마지막에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를 받을 때에도 오른 손은 여전히 물 위로 올려 놓았다고 합니다.
    오른 손을 자주 사용하여 죄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례는 죄를 씻는 표가 됩니다.
    세례가 구원을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세례 의식은 구원받은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예식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어느 부부 주례를 맡았었는데 동거하며 거의 10여년을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식을 꼭 해야 하겠다며 주례를 부탁하여 결혼예식을 진행했는데 결혼식을 하기 전에는 무슨 죄를 지은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는데 결혼식을 마치고 난 후에는 마음의 한구석에 응어리 진 것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결혼식이 그 부부에게 그렇게 소중한 의미가 된 것처럼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세례는 구원받은 확신의 증거가 됩니다.
    그렇다고 세례를 받으면 몸에 무슨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대학 시절 친구가 어느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를 받은 후에 교회 밖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담배를 피우면서 하는 말이 "야, 세례를 받기 전이나 세례를 받은 후에 담배 맛은 똑같구나!"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를 받았더니 담배맛이 갑자기 지독하게 쓰거나 담배 연기가 역겨워허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는 그런 것을 기대한다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구원의 확신


    옛날 김유신 장군이 젊은 시절 방탕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엣 생활을 정리하고 화랑도 정신으로 무장하여 동료들과 열심히 훈련을 마치고 모처럼 모여서 술자리를 가졌는데 그 날 그만 너무 취하여 말을 올라탔는데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엉뚱한 곳에 와서 누워있더랍니다.
    곰곰히 생각하더니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 저 말이구나!
    굉장히 좋은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김유신이 술이 취할 때마다 기생방으로 갔다는 것을 기억한 말이 그 날도 기생방으로 데려다 주었다고 합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김유신은 큰 칼을 들어 그 좋은 말의 목을 내리쳤다고 합니다.
    주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말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주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좋은 말을 내리쳤느냐? 하고 질문했을 때 주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말이 아무리 좋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세례의 참뜻 / 갈라디아서 3:26-2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최초의 옷은 가죽옷이었다(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죽옷은 죄를 덮어주는 기능으로 시작한 것이다.


    첫째, 아름답다

    속담에 "옷이 날개"라는 말처럼 옷을 잘 입으면 사람들의 눈에 좋게 보입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모양이나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의 것 즉 은혜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은혜라는 헬라어는 "카리스" 라고 합니다.
    카리스의 어원은 "카라"인데 '카라'는 기쁨을 말합니다.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 이유는 신부가 결혼식을 준비하며 철저하게 자기를 관리하고 가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아름답다는 것은 은혜 받은 사람의 표정이 기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매일 울상을 하거나 불평과 불만에 가득찬 사람은 은혜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보호하는 기능

    옷은 사람의 몸을 보호합니다.
    여름에는 여름 옷을 입어야 합니다.
    겨울에 여름 옷을 입는다면 정신이 올바르지 못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겨울에는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털옷을 입어야 합니다.
    여름에는여름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세례의 옷은 세상 죄악으로부터 우리들을 보호하는 옷을 말합니다.
    세례 교인이 되었기 때문에

    셋째, 활동하는 표시

    소방수의 옷과 경찰관의 옷은 다릅니다.
    군인들은 두 가지 옷을 갖추고 준비합니다.
    평상시에 입는 일상복과 전쟁에 나갈 때 입어야 할 전투복입니다.
    전투복을 입을 때는 반드시 군화를 신어야 하고 철모와 방독면 배낭을 짊어져야 합니다.
    긴급한 상황에서는 전투식량으로 배를 채우기도 합니다.

    세례를 받은 세례 교인의 활동을 착한 행실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요한복음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을 얻으리라.

    에베소서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이라 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사람에게 왜 그림자가 있는가?
    죽은 사람에게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그림자는 죄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검은 그림자 즉 죄가 따라다니므로 그림자가 없는 빛의 삶을 유지해야 한다고 합니다.


    로마서 3:12-15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흘리는데 빠른지라.

    요한계시록 7:13-14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세례는 예수님이 집의 주인으로 계시는 것

    이따금 가난한 백성들의 집을 예고 없이 방문해 민심을 헤아리곤 했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하루는신실한 과부의 집에 찾아가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과부의 신실한 믿음을 익히 알고 있던 여왕은 "당신의 집을 방문했던 이들 중에 가장 명예로운 손님은 누구였소?" 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과부는 망설임 없이 "예, 바로 여왕이십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대답을 기대했던 여왕은 조금 실망스러워 "혹시 당신 집을 방문했던 가장 명예로운 손님은 예수님이 아닐까요?"  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과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결코 손님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항상 저와 함께 계시는 이 집의 주인이십니다."




    링컨의 신앙생활 십계명

    1. 나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예배 생활에 힘쓸 것입니다.

    2. 나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매일 매일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을 실천 할 것입니다.

    3. 나는 도움을 베풀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날마다 겸손히 기도 할것입니다.

    4. 나는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 뜻에 순종 할 것입니다.

    5. 나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 할 것입니다.

    6. 나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 할 것입니다.

    7. 나는 하나님만을 높여 드리고 그분께만 영광을 올려 드릴 것입니다.

    8. 나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 모두는 자유하며 평등 하다고 믿습니다.

    9. 나는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실천 할 것입니다.

    10. 나는 이 땅위에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가 실현 되도록 기도 할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세례를 꼭 받아야만 합니까?"
    나는 그 분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세례받는 것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고, 세례를 받지 않고서는 못 견딜 것입니다.
    세례는 죄 용서함의 표시와 증거로 받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세례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그 표징으로써 받는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는 "참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세례는 죄 사함의 방법이요, 날인이다. 하나님은 초대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이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에게도 죄 사함을 베풀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은 "세례가 군인들이 충성 맹세의 표시로써 국가 원수의 휘장을 붙이고 다니는 것과 같이 사람들 앞에서 신앙을 나타내는 표시나 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 즉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약속과 함께 받아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믿음과 회개와 세례입니다.

    세례받기를 거절하거나 주저하시는 분들이여, 당신이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세례를 받는 것을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설교와 삶이 일치한 기도의 종 이원상 목사님

    설교와 삶이 일치한 기도의 종 故 이원상 목사님

    하나님이 섭리하신 목사 이원상

    이원상 목사님의 전기를 쓰기 위하여 토요일 새벽기도 후에 혹은 수요일 저녁 예배 후에 이 목사님을 직접 만나 뵈면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목사님은 신학교 교수를 원하였고 그 길을 향해 끊임없이 정진하였다. 계명대학교에서 경북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달라스 신학대학교에서 펜실바니아 대학(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신학(구약)을 공부할 때도 목사님은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한국으로 돌아가 신학교 교수가 되는 꿈과 목표를 간직하고 있었다.

    목사님은 순탄하게 공부하였고 박사학위를 위한 거의 모든 과정을 끝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목사님의 성격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인정하듯이 오히려 선생님이 어울리고 매우 내성적이며 부끄러움을 잘 타거니와 카리스마적이지도 않다. 목사님의 설교는 화려하지도 웅변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차분하고 다감하며 강의식이랄 수 있다. 목사님은 또한 스스로 교수의 직업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내려 주신 은사라고 믿고 정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은 이민 교회사에 보기 드문 대형 교회의 담임목회자로 우뚝 섰고 26년간 분쟁 없는 교회로 이끄는 우수한 리더십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나는 여기서 이원상 목사님께서 지난 26년간 섬겨 온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의 입지적 특성을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워싱턴은 미국의 수도요 세계의 수도이다. 이곳에는 각 나라의 대사관이 있고 당연히 한국 대사관도 있다. 한국의 주요 언론사 특파원들이 모두 여기 몰려 있고 조지워싱턴 대학, 조지타운 대학 등 명문 대학도 있어서 수 많은 인재들이 몰려온다.

    이러한 인재들이 워싱톤에 거주하는 동안 대개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를 찾는다. 그리고 그들이 귀국한 이후, 그들은 조국 대한민국의 장관도 되고 도지사도 되고 언론사 사장도 되고 국회의원도 되고 대학 총장도 되었다. 이른바 이들은 대한민국의 지도자요 오피니어 리더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는 이들을 양육하여 다시 고국으로 파송하는 교회가 되었고  이 교회의 담임 목회자가 이원상 목사님이므로 이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은 이원상 목사님을 통하여 예수의 말씀을 전해 듣고 가르침을 받아 변화되어 고국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들을 위해 이들, 조국의 지도자들을 위해 목사 이원상을 여기에 세우신 것이 아닐까? 그것이 달라스도 필라델피아도 아닌 연고도 없는 미국의 수도 워싱톤으로 이끄신 이유가 아니었을까? 세속과 영합하는 달변가가 높아지는 교회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시며 오직 초대형 교회를 꿈꾸는 수많은 오늘날의 목회자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주시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주님이 원하시는 목회자의 참된 모본을 보여 주시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65 세인 목사님은 지금 26년 전에 포기하여야만 했던 박사학위 공부를 다시 시작하였다. 박사 학위 논문의 제목은 “John Chrysostom`s Understanding of the Imitation of Christ and its Application to Christian Leadership Today". 

    이 논문의 제목처럼 이목사님은 지금 목회자를 꿈꾸는 후대들에게 자신의 참 모습을 직접 생생하게 정리하여 보여 주고 가르치며 하나님께서 목사님에게  주신 사명과 책임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려고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순간의 쉴틈조차 스스로 허용치 않는 삶을 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목사님으로 하여금 대학 교수의 꿈을 접게 하고 평생 목사로 살도록 이끄신 하나님의 고귀한 섭리가 아니었을까?

    1. 이성봉 장로의 아들로 태어나다

    이원상 목사는 1937년 압록강 건너편 만주 땅, 길림성 통화 북편의 산성진 이라는 마을에서 신앙심이 깊은 이성봉 장로와 윤봉선 성도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이성봉 장로는 20대에 한국에서 미국인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만주로 가서 청년기를 보냈으며 후일 북한을 거쳐 서울로 탈출하였다. 이러한 부친으로 인하여 이원상 목사는 태어 날 때부터 만주의 산성진 장로 교회(김석찬 목사)에서  말씀을 듣기 시작하여 1945년 해방 때까지 유치원과 주일학교 등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내는 동안 늘 말씀과 함께 살았다.

    만주에 살던 시절, 부친 이성봉 장로는 해방을 맞은후 중국 공산당이 결성되고 종교의 자유를 박탈 당하게 되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한으로 나왔다. 이곳이 압록강 남쪽 평안북도 만포진(현 자강도) 이다.

    압록강 변에 있는 만포진의 만포진 장로 교회(이무성 목사)에 다니며 1947년 까지 2년간 거기서 살았으나 다시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남한으로의 탈출을 결심하고 1947년에 서울로 들어왔다.

    이들이 만주에서 북한을 거쳐 남한으로의 탈출을 결행하게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부친 이성봉 장로의 중국인 친구가  중국 공산당 회의에서 “이성봉은 기독교 사상이 투철하여 위험하니 주목하여야 한다.” 고 말했다는 사실을 전하여 준 것이다. 부친 이성봉은 이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홀로 만포진으로 피난하였다가 다시 돌아와 가족을 동반하고 북한으로 탈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목사는 8.15 해방이후 지방의 유지들이 밤사이 소문 없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기독교 신앙이 아니었으면 평생 공산주의자로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목사는 부친의 기독교 신앙과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깊이 감사한다.

    2. 축복 받은 목회자 가문

    전술한 바와 같이, 이원상 목사는 이성봉 장로(산성진 교회에서 장립) 와 평신도인 윤봉선 성도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 세 명의 형님과 누님 한 분이 계셨는데 맏형인 이원조와 셋째 형인 이영복은 모두 교회 장로로 봉사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가족 중에는 조카 이승혁(뉴욕), 조카 손주 이인국(산호세), 조카 손주 이동훈(필라) 등이 현직 목사이며(Pastor Jacob Lee. 05. 04. 1984∼09. 28. 2020 am 9:42 )아들 이요셉은 버지니아텍 대학교(Virginia Tech University)를 졸업한 후, 같은 학교 출신인 이 에스더와 결혼하고 미국 메릴랜드 주, 게이더스버그에 있는 미국인 교회인 Covenant Life Church에서 청장년 담당 교역자로 사역 중이다. 외동딸 이유니스는 스탠포드 대학(Stanford University)을 졸업하였고, 같은 학교 출신으로 현재 뉴욕대학 의과 대학에 재학 중인 주흥원과  결혼한 후 현재 뉴욕에 거주하고 있다.

    이 목사는 황해도 출신으로 6.25 전쟁을 피해 경산에 와서 함께 경산 교회를 다니던 김영자와 결혼하였는데 고 김산봉 집사강옥화 권사의 5남매 중 오빠 다음으로 장녀인 김영자는 대구 신명여고와 효성여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경산에서 약국을 경영하였다. 이 목사는 장모인 강옥화 권사와 김영자(미국 명 이영자) 사모를 단순히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와 사위 장모의 관계를 넘어 평생 기도의 동역자로 매우 귀하게 여긴다. 그 만큼 이들은 평생 동역자로 함께 기도하며 같은 길을 걸었다. 곁에서 오래도록 이들을 지켜본 사람들 또한 이구동성으로 이를 증언한다.

    이 목사의 큰 처남은 일찍이 미국에 유학하여, 현재 미국 산타 클라라(Santa Clara) 대학에서 경영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3. 산 기도를 드린 똑똑한 소년 이원상

    이 목사의 가족이 3.8선을 넘는 과정에서는 안내인마저 달아나고 없는 상태에서 소련군에게 발각되어 3.8선 경계의 보안서에 수일간 감금 된적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본적이 남한인 사람은 보내 주는 기회를 얻어 무사히 서울로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이목사의 부친인 이성봉 장로는 해주에서 남한으로의 탈출을 준비하며 달빛이 없는 그믐밤을 기다리는 동안 무사 탈출을 위해 매일 해주 뒷산에 올라가 산 기도를 드렸는데 부친은 소년 이원상을 동반하였었다. 이때 부친과 함께 드린 산 기도의 경험은 목사 이원상의 기도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서울로 나온 소년 이원상은 청량리에 거주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동대문구 전농동 전농 국민학교를 다니며 창신 교회(권연호 목사)를 다녔고 해방 후인 1949년 국민학교 4학년 때 경북 경산으로 이사하여 경산에서 6.25를 겪었고 경산 국민학교를 다녔다.

    부친 이성봉 장로는 경산읍(현 경산시)의 경산 교회 시무장로로 봉사하였는데 동네에서 성자 칭호를 받는 분이었다. 이 목사가 미국에서 목회자로 시무하는 동안에 비록 아들의 목회를 직접 보지는 못하였으나 매일 서너 차례 이상 교회에 가서 아들을 위해 기도하였던 참 신앙인이었다.   

    부친은 소년 이원상이 5살 때부터 목사가 되기를 서원하였고 이때부터 소년 이원상의 마음에는 목사 이원상이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그는 당시 장래 희망 란에 목사라고 기재하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경산 국민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이원상은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하여 도시의 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경산 중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하여 거기서 성장하였다.

    4. 김윤국 목사의 사모를 만나다

    이때 여러 목회자들로부터 영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한번도 탈선 없이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최동진 목사, 윤철주 목사,  김형식 목사 등에게서 영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주선애 전도사(장신대 교수로 은퇴)를 기억하며 특히 최동진 목사의 영적 지도로 여러 학생들과 함께 산에서 드렸던 산 기도를 통해 큰 은혜를 받았다. 후일 소년 이원상이  한국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 데는 당시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 유학 중이었던 김윤국 목사의 이야기를 전해 주신 김유건 사모의 영향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을 피해 오신 김유건 사모가 소년 이원상이 다니는 경산 교회에 계셨던 것은 모든 일을 계획하고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원상 목사는 경산 교회를 잊지 못한다. 만주를 떠나 북한을 거쳐 경산에 온 국민학교 4학년 이후 대학 때 까지 거기 살며 경산 교회를 다녔는데 특히 기도 생활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종종 최동진 목사를 따라 경산의 성암산에서 철야로 기도하는 생활을 하였었다. 오늘날 기도하는 종으로서의 모본을 보여 주는 이원상 목사는 이때부터 이미 준비되고 훈련되기 시작한 것이다.

    5.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고교 시절

    이원상 목사는 경산 중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공부를 잘 하였으나 가난 때문에 대구 상고에 진학하여 은행원이 된 후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가 대구 상고에 진학한 후, 그에게 존재하던 세상 물욕이 사라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복음의 열정이 깊어져 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고교 시절은 영적으로 크게 성장한 시기였다. 특히 무학산 기도원을 설립하여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김순도 장로에게서 영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고 김천에 있는 용문산 기도원의 나운몽 장로의 집회에서도 큰 영적 감화를 받았다.  나운몽 장로가 초기에는 교계에서 인정받지 못하였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는 나운몽 장로의 교리 보다는 기도에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중3때 용문산 기도원 집회에서 영적 분위기에 크게 감화를 받았고 고교 시절 내내 그의 마음속에는 목사가 되기 위해 정진하려는 생각 외에는 아무런 잡념이 없었다.

    이원상 목사는 고교 시절 슈바이처를 동경하며 의대 진학의 꿈을 가진 적이 있었다. 당시 의사와 목사로 헌신하던 이일선 목사는 한국의 슈바이처로 그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부친 이성봉 장로가 오직 하나님만을 선택하라며 두 가지를 다 잘할 수는 없다고 가르침에 따라 이 생각을 버렸다. 이것은 그의 일생에 첫 번째 타의에 의한 포기로 기록된다.

    고교를 졸업할 즈음 그의 서울 진학은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하여 다시 한번 꺾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목회자의 꿈이 매우 강렬하였으므로 서슴없이 계명 기독 대학(현, 계명 대학교)을 지원하게 되었다. 이 목사는 당시 계명대의 설립 이념인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위하여' 등 기독교적 철학에 많은 도전을 받았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하나님 절대 우선 순위에 대한 신앙 교육, 그것은 바로 이 목사의 개인적 삶과 목회에 줄곧 중심적 철학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이유로 서울에 있는 대학은 물론 대구 지역의 타 대학도 스스로 포기하고 계명대학에 특차 수석으로 입학하여 장학금을 받는 혜택을 택했다. 계명 기독 대학은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에 의하여 1954년에 설립된 크리스천 대학이었다.

    그에게는 이러한 일화가 있다. 계명대 입학시험 때 당시 학장이던 감부열(미국인) 선교사가 입학 구두시험(면접)을 치루는 자리였다.

    " 왜 계명 대학에 입학하려고 합니까?"

    " 헌신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 무엇에 헌신하려고 합니까?"

    " 하나님께 나의 삶을 드려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이 되려고 합니다."

    당시의 학감은 한명수 교수였다. 한명수 교수는 그 후 독일 유학을 다녀와 경북 대학 대학원 철학과 교수로 부임하였는데 이 목사는 이때 한 교수를 다시 만나 그의 제자가 되는 인연도 있다.

    6. 목회자가 되려고 철학을 먼저 공부한 계명대학생

    그는 계명대 진학 당시 영문과를 선택하라는 주위 목사님들의 조언도 있었으나 목회자의 길을 가기 위해 철학과를 선택하였고 졸업 때도 역시 수석을 하여 당시 신태식 학장으로부터 큰 성경책을 부상으로 받았다. 이때 받은 큰 성경책은 이 목사가 유학을 떠나며 분실하였는데 이것이 지금 어디 있는지 궁금해 한다. 신 학장은 후에 총장을 역임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1963년 총회 신학교에 응시하였으나 이를 포기하고 경북대 대학원 철학과에 지원한다. 이것은 목회자의 길을 가기 위해 철학 공부를 더 하고 신학을 공부하려는 자신의 의지를 실천한 것이다. 그 당시 경북대 대학원 철학과는 3명이 정원이었는데 경북대에서 허재윤, 대구대에서 한명(이름 미상) 그리고 계명대에서는 이 목사가 합격하였다.

    그는 대학시절 군 복무를 하게 되었다(1959-1961). 군 복무 기간에 그는 남 춘천 505 병기단 512 대대에서 근무하며 남 춘천 감리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귀하신 은혜로 기억한다. 또한 대학시절에는 교목인 차태화 목사가 지도하는 채플 시간이 있었는데 성경이 필수 과목이었기 때문에 이때 신학적 지식을 얻게 되었고 미국인 선교사인 오천혜 교수의 지도로 주기도문을 영어로 암송하였던 것이 영어 공부에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는  구 의령 선교사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한명수 교수(서양 철학), 서준택 교수, 강도영 교수, 이정호 교수, 황성수 교수, 정명호 교수, 박종옥 교수, 김희섭 교수(기독교 윤리학), 김태한 교수(영어), 박봉목 교수(교육학), 이정빈 교수(교육학)등 에게 수학하였다. 노명식 교수(문화사, 후에 경북대 총장)에게서는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를 배우며 많은 감명을 받았다.

    이 목사는 목회자가 되려는 후배들에게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철학이나 역사, 문학 등 인문학을 먼저 공부하라고 권유한다. 이 목사 스스로 철학 공부가 신학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직 한 길로 올곧게 살아온 그에게는 후에 목회자 또는 교수가 된 친구들이 많다. 친구인 고환규 목사와는 장차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자고 막연하게 약속한 적이 있었는데 돌이켜 보면 이것이 목회자가 된 동기를 부여 한 것으로 기억한다. 대구 상고 시절 기독 학생 운동(SCM)을 함께 하였던 친구들이 있는데 김상규(L.A. 안디옥 교회 담임) 박영희 교수(전 총신대 총장), 홍응표 목사, 정재근 목사 등이 있고 경산 교회에서부터 고등학교 대학 까지 함께 수학하였던 친한 친구 중에 이상수 교수는 현재 신학대학의 역사학 교수로 활동 중이고 엄세현은 교회 장로로 현재 대구의 서문교회를 섬기고 있다. 특히 같은 철학과에서 수위를 다투던 친구 선철은은 안타깝게도 연대 대학원 진학 후 세상을 떠났다. 현 계명대 대학원장인 김남석 교수는 계명대 초창기부터 도서관에서 일하였음을 기억한다.

    이원상 목사는 대학시절 현재 계명대 교수인 김기한과 함께 계대 학보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학생회 종교 부장과 철학과 대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군 복무를 마친 그는 1962년 계명대 5회로 졸업하였다. 또한 계명대 출신 선배 중에서 후에 목회자가 된 추준호, 김명흥, 김진택을 기억하며 후배 중에서 손중철(싱가포르 선교사), 신상길 선교사, 김정국 목사(뉴욕 거주)를 기억한다. 또한 미국에서 정치학 교수로 있는 남태열과 현 계명대 교수인 송석우, 이약구, 조용상등과 함께 수학하였고 김상호 목사는 일찍 소천 하였다.

    7. 교회 건축을 경험한 청년 이원상

    이원상 목사는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 그러니까 대학원을 다니던 1963년부터 1968년 유학을 떠날 때까지 지금은 폐교가 된 메노나이트(Mennonite) 중 고등학교에서 영어와 역사를 가르친 경험이 있다.  거기서 계명대 출신인 김이봉 목사(교목), 이동근 목사(부 교장 거쳐 후에 교장이 됨. 현, 미국 침례교 목사) 등과 함께 사역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경산에서 가까운 평산의 평산 교회에서 전도사의 신분으로 담임 교역자가 된 경력이 있다.(1963-1967) 이것은 노회에서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그에게 특별히 시취(시험)를 통해 목회자의 자격을 부여하여 봉사하게 된 것인데 이것은 그의 신학과 목회의 기초가 되었다.

    특히 50-60명 정도였던 교인들과 함께 교회를 건축하는 경험을 가질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후에 미국의 수도 워싱톤에 수도권 최대 교회인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를 건축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미리 준비하신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다른 기록은 그 작은 시골 교회에서 목사가 4명이나 배출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를 도와 헌신하였던 김정자집사(현재 권사)의 아들 박무용(당시 국민학교 4년생)학생이 현재 대구 황금교회 담임목사가 되었고 3형제가 모두 목사가 되기도 하였는데 조의호, 조영길, 조은호 목사가 이들이다. 젊은 시절 그의 짧은 목회 기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실을 맺은 것은 예사롭지 않다.

    8. 천막교회 주일 학교를 개척하였다

    만주 산성진 교회에서 유치원과 주일학교를 다녔던 이 목사는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다니던 경산 교회에서 실질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그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당시 부흥사이기도 했던 김형식 담임 목사는 경산교회에서 가까운 곳에 개척 주일학교를 세워 이 목사를 파송하여 사역하게 하였다. 김 목사는 대학생이던 이원상에게 그의 부흥사 사례비중 일부를 장학금으로 주며 천막 주일학교를 이끌게 하였던 것이다. 지금은 경산 중앙 교회라는 이름으로 경산 교회보다 더 크게 성장한 이 교회에서의 사역은 전도와 선교의 의미를 깨닫게 한 중요한 경험으로 그의 신앙을 한층 성장 시켜 주었다. 이 목사는 김형식 목사에게서 신앙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9. 전도사와 약사의 결혼이야기

    이목사의 결혼 이야기로 돌아가자. 경산에서 약국을 경영하던 김영자는 혼담의 상대자가 목회자 지망생이라는 것에 부담감을 느꼈다. 김영자는 워낙 신실한 신앙인이었다. 황해도 수안에서 나서 서울 신당동에 살며 신당동 중앙 교회를 다녔고 경산으로 피난 온 이후에도 신앙생활은 지속되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새벽 기도를 쌓았고 이러한 생활은 그의 일상이었다. 김영자는 고아원 아이들을 돌보며 살기를 자원했었다. 외삼촌 이웃집에 고아원이 있어서 늘상 불쌍한 사람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고 아버지가 납치된 친한 친구가 고아원에 살기도 하여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런 그에게 전도사 이원상의 중매가 들어왔다. 고아원 사역을 꿈꾸던 그녀에게 목회자의 아내라는 새로운 도전이 다가온 것이다. 목회자의 사모가 된다는 생각을 해 본적도 없는 김영자는 사모의 사명과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았을 때 매우 부담스러웠다. 물론 그녀의 모친 강옥화 권사도 역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신앙심이 좋았던 이들 모녀는 자신들의 생각으로 결론을 내리기 전에 교회에서 철야하며 눈물의 기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였다. 그리고 이들 모녀는 동화처럼 한날한시에 똑 같은 꿈을 꾼다. 우리에게 보통 꿈 이야기는 마치 미신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으나 이들의 꿈이 요셉의 꿈처럼 워낙 생생하고 영몽 같아서 여기 소개하기로 한다.

     경산읍에 살고 있는 김영자는 꿈에 상복을 입은 거지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꿈속에서 중얼거렸다. “이 선생과 결혼했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남편은 죽고 자신은 거지가 되는 그런 꿈이었다. 장모 강옥화 권사도 한날한시에 같은 꿈을 꾸었다니 놀랍다.

    1966년, 마침내 전도사 이원상과 약사 김영자는 결혼하였고 오늘날 북미주를 대표하는 선교와 교육과 화합의 교회에서 헌신적인 동역자로 살아 가고 있다.

    10. 두려움과 외로움으로 지샌 미국에서의 첫밤

    그는 스스로의 약속대로 ‘65년에 경북 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66년 약사 김영자와 결혼하고 사랑하는 신부를 고국에 남겨 둔 채  1968년 6월, 미국 달라스 신학교에 4년 장학금을 받아 홀로 유학길에 오른다. 그는 미국 유학의 최종 결심을 확실한 굳혀 준 이상근 목사를 기억한다. 이상근 목사(대구 제일 교회 담임)는 달라스 신학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분으로 '목회와 성경 주석'으로 한국 교계와 신학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유명하다. 1968년, 이목사는 서울의 덕성여대에서 문교부(지금의 교육부)가 주관하는 영어와 국사 등 유학시험을 치르고 결혼한 아내를 고국에 남겨 둔 채 노스웨스트(Northwest)비행기를 탔다. 1968년 6월 25일, 당시 한국에서는 200불 이상 가지고 출국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단돈 200불만을 지참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YMCA 호텔에서 미국의 첫 밤을 맞는다. 그 첫 밤은 두려움과 외로움으로 가득하였다.

    이 목사가 미국에 온지 1년 반 뒤인 1970년에 김영자 사모는 미국으로와 달라스 장로교 병원 약국에서 일하다가  필라델피아에 있는 템플 대학(Temple University) 약대 4학년에 편입하고 1년 후 달라스 신학 대학을 졸업하여 펜실베니아 대학원으로 온 이 목사와 다시 만난다. 당시에는 유학생 아내에게는 여권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동반 유학을 할 수 없었다.

    11. 통조림 공장과 키니 목사의 사랑

    미국에 도착한 이 목사는 9월 개강까지 3개월간 취업을 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10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스탁턴(Stockton)이라는 곳의 복숭아 통조림 공장이었다. 이 회사의 이름은 캘리포니아 캐너스엔 그로워스(California Canners & Growers) 인데 하루 종일 10시간 이상 서서 일하다 보니 저녁에는 다리가 아파서 움직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 후 그는 복숭아 통조림을 결코 먹지 않았을 정도로 당시의 매우 극심하였던 고통을 기억한다.

    스탁턴에서 그는 하숙하던 집 앞에 있는 프리윌 침례교회(Freewill Baptists Church)를 다녔는데 여기서 그는 평생을 양 부모처럼 교제하던 아더 키니(Arthur Keeney) 목사 부부를 만난다. 키니 목사는 6.25 참전 용사 출신이기도 하였는데 그는 이 목사를 매우 사랑하였다.  월 50불로 정하여졌던 하숙비도 받지 않았으며 달라스 신학교로 떠날 때 교인들의 헌금으로 장학금을 마련하여 주었고 키니 목사의 사모는 걸어서 다니던 그를 매일 공장까지 데려다 주기도 하였다. 이 목사가 외국 땅에서 경험한 첫 번째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처럼 참 아름답고 구체적이었다.

    12. 공장에서 일하며 공부한 달라스 신학대학생

    3년제 없이(Master of Divinity) 처음부터 4년제(Th. M.)인 명문 달라스 신학대학은 미국에서도 가장 보수주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신학교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달라스 신학대학에 입학한 이 목사는 처음 1년은 교내 식당에서 일하며 공부하였다. 당시 룸메이트이며 함께 식당에서 일한 일본인 친구 케이타 다카끼(Keita Takaki)는 현재 오사카에서 목사로 재직 중이다.       

    그 후 3년간은 자동차 부속품을 만드는 존 미첼 회사(John E. Mitchell Company)에서 일하며 공부하였다. 개학기간에는 주 20시간씩 일하였고 방학 때는 주 40 시간씩 일하였다. 처음에는 기계공으로 일하였고 마지막 두 해는 공장 청소 일을 하였다.  이 공장의 사장은 달라스 신학교 이사이며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에 일을 시작하는 첫 1시간은 공부하는 시간을 주어 공부하도록 하는 등 신학생들을 많이 고용하며 편의를 제공하였다.

    달라스 신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던 이 목사는 당시 그의 석사 논문 지도를 맡아 준 케네드 바커(Kenneth Barker) 교수( NIV 주석성경 책임 편집자) 의 권유를 받아 당시 구약과 히브리어로 미국 내에서 가장 권위 있다고 알려 진 그의 모교 드랍시 (Dropsie) 대학에서 공부하기로 결정하였다. 한국인 중, 드랍시 대학 출신으로는 최의원 박사와 홍반식 박사가 있다.

    그러나 달라스 신학교를 졸업하였을 때 유태인 학교였던 드랍시 대학은 재정난으로 문을 닫아 이듬해인 1973년 펜실바니아 대학(University of Pennsylvania)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 목사는 여기서 근동연구(Near Eastern Study)중 구약과 히브리어를 연구하였다. 이 목사는 경북대학원에서는 목회의 이론적 기초를 다지기 위하여 철학을 공부하였고 달라스 신학교와 펜실바니아 대학에서는 구약을 중점적으로 공부하였다. 이것은 조직 신학 보다는 구약이나 신약을 공부하는 것이 말씀을 연구하고 설교자로서 지식을 얻는데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목사가 구약을 공부하게 된 배경에는 구약을 가르친 두 명의 교수의 영향이 컸다. 이 목사는 이들을 그의 영적인 지도자라고 말한다. 브루스 워키(Bruce Waltke)와 케네드 바커(Kenneth Barker) 교수가 그들인데, 이 두 교수는 이 목사의 석사 논문 ‘요엘서의 히브리어 문법적 연구(A Syntactical study of Hebrew of the book of Joel)’를 지도하기도한 저명한 구약 학자들이다. 

    이 목사는 1972년에 달라스 신학 대학에서 신학석사(Th. M.) 학위를 받았으며 이러한 성향의 목회 비전을 갖게 되었다.

    13. 하나님께서 워싱턴으로 부르시다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에 입학하여 수학한 이 목사는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과정의 전 과정을 이수한 후, 최종학위 시험을 준비하고 논문을 쓰려고 하는 중에 전혀 알지도 못하고 연고도 없던 워싱턴 지역의 중앙 장로 교회로부터  담임 교역자로 청빙을 받는다. 그러나 이 목사 부부는 공부가 끝나지 않았기도 하였거니와 곧 박사 학위를 받으면 신학 교수가 되려는 소망을 가지고 있던터라 이를 거절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당시 3살이던 아들 요셉이 이유 없이 밤낮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며 고열과 함께 계속 아프다고 하였다. 병원 네 군데를 다니며 진찰을 받았으나 원인 불명이라는 진단을 내릴 뿐, 아이의 고통은 지속되었다. 이들 부부는 몹시 당황하였다. 필라델피아의 노스펜 교회 황규석 목사는 가지 말라는 증거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문득 이 목사 부부에게는 자신들이 와싱턴 중앙 장로 교회의 청빙을 거절하면 하나님께서 장자인 이 아들을 데려 가실 것 같다는 강한 영감을 받았다. 이 목사 부부는 일단 가보기로 하였다. 아픈 아들을 데리고 주일 설교를 하는데 하나님의 강한 부르심을 받았다. 놀랍고도 강한 부르심을 받고 그 청빙을 승낙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후 아픈 아들은 즉시 쾌차하였다. 이 목사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 목사는 26년이 지난 지금, 이 일이 아니었으면 결코 자신들은 워싱턴에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증언한다. 그 3살짜리 아들은 지금 목회자가 되어 버지니아의 미국인 교회에서 청년을 담당하는 사역자로 헌신하고 있다.

    14. 평생 동역자 강옥화 권사, 이영자 사모

    그리고 그 이면에는  평생 기도 동역자였던 장모 강옥화 권사의 금식 기도가 있었다. 강옥화 권사는 오래도록 공부만 하고 목회를 하지 않던 이 목사에게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100일간 작정을 하고 다락방에서 오전 금식을 하며 사위의 목회지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 기도가 끝났을 때 와싱턴 중앙 장로 교회에서 청빙을 받은 것이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응답!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원상 목사 뒤에 부친 이성봉 장로의 기도와 가르침이 있었다면 이 목사 부부의 곁에는 강옥화 권사라는 기도의 동역자가 항상 함께 있었던 것이다. 이영자 사모(미국에서는 결혼 후 남편 성을 따르므로 이제부터는 이영자 사모로 칭하자.)는 이 목사의 그림자 동역자다. 이영자 사모는 물질에 관하여 욕심이 없고 적은 가운데 바치기를 기쁨으로 동참하고 늘 감사하며 산다. 대접하고 섬기기를 기뻐한다. 체면이나 강요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성도들의 아이들에게 까지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이 목사는 그의 아내를 영적으로 조용하면서도 깊은 기도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모든 성도들을 구역 별로 나누어 그 성도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는 생활을 하였고 부임 초기 5년 반 동안은 손에 잉크 묻혀가며 손수 주보를 제작하였다.

    15. 기도하는 컴퓨터 사모

    한 목회자의 성공적인 사역을 위하여 사모의 역할과 가정의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영자 사모는 컴퓨터가 없던 80년대에 기도하며 움직이는 고속 컴퓨터였다. 오랫동안 교회를 섬겨 온 성도들은 그를 그렇게 말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이 목사에게 필요한 목회 정보와 데이터를 일목요연하게 제공했다. 어느 성도가 출석을 하지 않았는지 한 눈에 알아내어 주보를 보내주는 일은 매우 기초적인 일에 불과했다. 그는 뛰어난 기억력과 부지런함으로 교회와 성도의 모든 상황을 항상 꿰고 있었고 그 현장에 있었다. 그는 언제나 이 목사가 알고자 하는 자료를 즉시 식별하고 분류하고 제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한 목회자의 사모가 아니었다.  그는 지난 25년 간 월터리드 육군 병원(Walter Reed  Army medical Center)에서 전업 약사로 일하며 이 목사를 내조하였다. 그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하였는데 늘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가 그의 근무시간이었다. 이것은 지난 26년간, 온 밤은 약사로서 지새고 낮에는 사모로 충실히 헌신하는 생활이었다는 이야기다. 온전한 목회자의 사모로 엄마로 정상적인 직장인으로 살기 위하여 이렇게 밤 시간을 스스로 선택하여 평생 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이 목사의 가정 심방에 빠지지 않고 동행하였다. 틴에이저인 두 자녀의 뒷바라지로 한창 바쁠 때인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영자 사모는 교인의 편에 서서 남편인 이 목사에게 대변하였으며 사모의 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교회의 문제점과 어려움을 찾아 적극 조언하였다.

    이영자 사모는 먼저 유학을 떠난 이 목사의 뒤를 이어 미국 땅을 밟은 후, 대학에서 2년 간 약사 공부를 하였음은 이미 전술하였다. 이영자 사모가 템플 대학 약학대에서 공부할때 한국에서 온 여느 유학생들 처럼 영어가 부족하여 많은 고생을 하였고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그는 주일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토요일은 밤 12시까지 책상을 떠나지 않았으며 주일 하루 종일 교회에서 예배와 헌신의 시간을 보낸 후, 주일밤 12시가 지나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등, 강행군을 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늘 월요일에 치르는 시험 성적이 나쁘지 않았음을 감사한다.

     “제가 미국에서 어려운 공부를 잘 마치도록 이끌어 주신 것은 복음과 목회자의 내조를 위해 이것을 사용하라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영자 사모는 이처럼 열심히 공부하였고 열심히 일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헌신하였고 내조하였고 희생하였다.

    자녀들은 이 목사 부부에게 생일이나 결혼 기념일 카드를 보낼 때마다 “좋은 본을 보여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러한 부모님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라고 쓴다.   

    시 어머니인 이영자 사모가 어느 날, 목회자 사모인 며느리의 헌금 관리를 확인하여 보니 수입의 50%를 건축 헌금으로 내더라는 것이다. 지금 미국 교회의 목회자로 사역하고 있는 아들 요셉 부부는 헌금을 더 많이 내기 위해 차고 위의 작은 방에 세 들어 살기도 하고, 혹은 처가 언니 집에서 얹혀살기도 하였다. 자식은 부모를 보고 자라는 것이 아니던가.

    이영자 사모는 자식들 때문에 아버지의 목회가 막히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하루 2-3시간은 교회와 자식을 위하여 반드시 기도하였다. 그는 이것을 기도의 십일조라고 말한다. 특히 이 목사의 설교 내용과 가정생활이 일치 되도록 하기 위하여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기도하며 최선을 다했다. 남편이 금식하면 함께 금식하였고 남편이 기도하면 함께 기도하였다. 그는 보통 사람의 두 배 인생을 밤낮으로 살며 그것도 부족하여 뛰면서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뛰어 다닌 범상치 않은 동역자였다.

    그는 교회에서의 결혼식 피로연 음식 봉사 활동을 주도하며 그것으로 선교비를 만들어 선교지에 보냈고 컬페퍼 기도원 건립기금과 워싱턴 디씨 커뮤니티 센터 구입 자금, 타쉬켄트 성전 건축 기금을 후원하였다. 더불어 목요 여성도 모임을 만들어 잠자는 여성도들을 일깨우고 가르치고 중보기도 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그에게 휴일은 없었다.

    16. 신학교수를 원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를 목회자로 이끄셨다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목사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막연하게 목회자의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대학에 입학한 이후, 본인의 내성적인 성격과 교육의 중요성 등을 인식하며 신학 교수의 꿈을 구체적으로 갖게 되었다. 달라스 신학대학에서 석사 학위 공부를 할 때도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할 때도 신학교수가 되는 계획과 목표 속에서 공부를 하였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교수 이원상이 아니고 목사 이원상이었음을 알게 하는 사건이 있다.

    그가 중앙 장로 교회의 담임 사역자 청빙을 승낙하고 필라델피아를 떠나 워싱턴에 부임하였지만 집은 메릴랜드주 아델파이에 얻었다. 거주지에서 보다 가까운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합킨스 대학을 다니며 목회와 학업을 동시에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델파이에 있는 그의 아파트가 불타 버리는 사고가 생겼다. 이 목사는 이때 교회와 가까운 버지니아 주로의 이주와 박사학위 공부의 포기를 결심하고 실천하였다. 하나님께서 목회에 전념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으로 받아 드린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오직 목회자로 헌신하도록 그가 은퇴할 때까지 쉼 없이 인도하셨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일생에 두 번째 포기로 기록된다.

    17. 순종과 기도로 시작한 목회

    77 년 12월 첫 주일, 전도사 이원상은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에 담임 교역자로 부임하였다. 당시 교회는 워싱턴 디씨의 구 한국 대사관 근처, 22가와 P 스트리트가 만나는 곳에 있는 미국인들의 필그림 장로 교회를 빌려 썼다. 부모와 자식세대를 분리하여 셀때 17가정이었고 아이들 까지 45명의 조촐한 교회였다. 이때 이 목사 부부가 처음 시작한 일은 새벽기도였다. 그 첫 새벽 기도회는 단지 이 목사 부부만이 출석하였다. 당시 워싱턴에는 10여개의 한인 교회가 있었으나 새벽 기도는 없었다. 이 목사 부부가 처음 시도한 것이다. 바로 이 첫 새벽기도를 통하여도 알 수 있듯이 이 목사는 중요한 고비마다 부부가 합심하여 기도하였고 금식하였고 새벽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6개월 후,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워싱턴 디씨를 떠나 버지니아로 이사하도록 역사하셨다. 예배 중에 자동차의 새 타이어를 도둑맞거나 옷, 지갑 등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3주간 지속되어 아무래도 버지니아로 이사를 가야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목사는 버지니아로의 이주를 결심하고 무작정 길도 모른 채 교회마다 찾아다니며  임대하여 사용할 수 있는 교회를 찾아 다녔다. 이 때 찾은 것이 버지니아주 맥클린이라는 타운에 소재한 루인스빌 장로 교회 (Lewinsville Presbyterian Church) 였다.  1978년 6월, 루인스빌 교회 시대는 이렇게 열렸고 85년 11월 지금의 비엔나 새 성전에서 입당 예배를 드릴 때 까지 7년 반의 초기 고난과 부흥의 역사가 거기에 있었다.  

    워싱턴 부임 초기, 그는 자신을 위한 기도를 많이 하였다고 고백한다.  30-40여명의 작은 교회는 이 목사 부부의 전교인에 대한 주 1회 심방과 기도로 평탄하였으나 부 교역자 경험도 없이 신학 공부 마치고 갑자기 부임하여 담임 교역자가 되고 보니 자신의 부족을 절감하였고 자연히 자신의 영적성장을 위한 기도에 열중하게 되었다고 했다. 더불어 이 목사는 전 교인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였다. 이것은 그가 담임 교역자로 사역하는 지난 26년 동안 빠짐없이 지속된 매우 중요한 일과 중에 하나이다.

    18. 오직 목양에만 집중한 목회

    루인스빌로 옮긴 후, 첫 1년은 아무 문제가 없이 나날이 부흥할 수 있었다.

    이 목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매일 새벽 기도와 수요 성경 공부 시간의 성경 강해를 통하여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 교회 부흥의 배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목회는 교회의 외적 성장을 목표로 하거나 추구한 적이 없다. 그의 목회는 단순히 양들을 진실로 사랑하는 목양에 집중되어 있었다. 수요 성경 공부, 주일예배, 새벽 기도, 그리고 예배를 위한 말씀 준비와 심방에 온 정열을 기울였다.

     “교회 외적, 양적 성장은 생각해 본적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양들에 대한 사명과 책임만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렇다. 그는 교회를 위하여 광고하지 않는 것은 자타가 인정한다. 교회 예배를 늘려 2부 3부가 추가 될때도 광고하지 않았다. 오히려 타 교회의 목회에 방해를 줄까 염려할 뿐이었다. 

    그의 목회는 기도에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났다. 단순하고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다. 목회자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하던 기도도 아니다. 그가 워싱턴에 부임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는 교우 주소록에 기록된 모든 교인들을 위해 매일 하루 한번씩 기도하였다. 교인 수가 늘고 더 이상 하루에 다 감당할 수 없게 된 후, 그것을 6개로 나누어 일주일에 한번씩 기도하였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자연스럽고 순결한 사랑이었다.  단언하건데 이것은 결코 가식이나 형식으로 할 수 있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니리라.

    이 목사는 스스로 실천하고 먼저 본을 보이므로 성도들이 스스로 따라 오도록 하였다. 결코 말로써 강요하거나 목회자의 권위를 내세워 교회를 이끌지 않았다. 겸손과 충성과 온유가 그가 성도들에게 보여준 모습의 전형이다.

    82 년 10월 이 목사는 스스로 마나사스에 있는 임마누엘 교회의 전도 폭발 훈련의 수강자가 되어 훈련을 받았고 이것을 교회에 적용하였다. 84년 3월에는 네비게이토에서 실시하는 2:7제자 훈련을 받기 위해 필라델피아의 제 10장로 교회(The 10th Presbyterian Church)를 다녀왔고 이것을 즉시 교회에 적용하였다.  이 두 가지 훈련은 지금까지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를 받쳐준  대표적인 소그룹 활동이 되었고 교회 부흥의 힘이 되었다.

    19. 교회 초기의 어려움과 화합의 중요성

    이 목사의 26년 목회 사역은 늘 평탄하였으나 한차례의 고난기가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부 교역자의 경험도 훈련도 없이 담임 목회자가 되었던 이 목사에게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초기의 아픈 경험은 그의 이후 목회기간 전체를 화목과 단합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고 교훈이 되었다. 이것은 교회 지도자와의 영적인 갈등과 당시의 미숙하였던 목회 지도력이 문제였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크게 사용하시기 위한 훈련의 시간이었으리라. 당시 그는 사임을 결심하였다. 아무래도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달라스로 떠나려는 시도를 구체적으로 시행하였다. 미루어 두었던 박사 학위 공부를 마무리하기 위해 달라스 신학교로부터 입학 허가서도 받았고, 이영자 사모는 달라스 병원의 약사로 일하기로 결정하였으며 달라스 지역의 방원곤 장로, 강희구 장로와 개척 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담임 목사 취임의 약속도 되어 있었다. 이러한 결정은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희망적인 좋은 기회였고 교회를 위해서도 합당한 결정이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목표, 개인의 평안함을 추구한 것이지 하나님 보시기에는 합당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 목사의 회고다.

    달라스에서 돌아온 이 목사가 교회에 사표를 냈을 때, 교인들은 그의 거처인 베드포드 아파트(Fairfax병원옆, Bedford Apartment)에 몰려와 밤늦도록 그의 사임을 만류하였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 순종하였다. 이것은 그의 일생의 세번째 포기로 기록된다.

    그리고 그 83년 이후 20년 동안 그가 이끄는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는 탄탄대로를 달려갔다. 당시 상당히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났고 지금도 그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많이 아프다고 이 목사는 말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교회의 문제점들이 정비되는 전화 위복의  기회가 되었고 이후 조금씩 부흥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분쟁도 다툼도 없는 화목한 교회가 되었으며 축복의 통로가 되었다.

    “하나님의 축복은 화목한 것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화목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임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의 증언이다.

    그는 목회 초기 교회 리더십과의 갈등을 경험하였으나 지속적으로 안수 집사를 세우고 장로를 추천하였다. 특히 장로를 세울때 사모와 함께 3일 금식 기도를 한후 모든 것을 하나님 뜻에 맡기고 그들을 지도자로 세웠다. 교회 리더십과의 분쟁을 우려하여 지도자를 세우는데 소극적인 목회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신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지도자를 세우고 양육하여 화목한 교회를 만드는데 주력한 결과 오늘날 든든한 교회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도자를 세울 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지도자를 세우기 위하여 목회자는 기도를 많이 하여야 한다고 권면한다. 이 목사는 개인적으로는 금식 기도를 통하여 영적인 충만함을 얻었고 제자 훈련과 선교에 중점을 두어 교회를 지도하였다. 이것은 26년 목회 동안 언제나 동일한 기준이었다.

    20. 포기를 통하여 얻은 귀한 축복

    이 목사는 전술한 바와 같이 그의 일생에 3가지를 포기하였다. 그 첫째는 의사와 목사를 동시에 택하고자 하였던 그에게 오직 목사로서 충실하기를 원하셨던 부친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의사의 길을 포기 한 것이고 필라델피아에서 워싱턴으로 부임하기 위해 거의 마무리 중이던 박사학위를 포기하였던 것이 두 번째며 다시 달라스로 돌아가 중단하였던 박사학위도 끝내고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려던 것을 포기한 것이 세 번째이다. 이 목사는 세 가지를 포기하였으나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요청에 순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포기를 통한 순종에서 얻은 나의 결론은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결국 다 갚아 주신 다는 것입니다.”  이 목사의 간증이다.

    하나님은 순종하며 헌신한 그를 위해 그의 약점과 부족을 모두 채워 주셨으며 그가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보다 훨씬 더 많이 그를 귀하게 사용하셨음을 감사한다.

    21. 그의 롤 모델은 사도바울

    바울 사도는 이 목사의 롤 모델이었다. 바울 사도의 삶과 행적이 바로 이 목사가 따라가고자 하였던 모델이었던 것이다. 바울 사도는 우선 목회자였다. 성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목회자였다. 데살로니가서나 빌립보서에 기록된 사도 바울처럼 이 목사는 성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목회자가 되기를 소원하였다. 바울은 또한 선교사였다. 가는 곳 마다 교회를 세우고 전도하였던 사도 바울처럼 이 목사는 선교사로서의 목회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또한 바울은 신학 성경의 기본을 이룬 신학자였다. 이 목사는 역시 바울과 같은 신학자로서의 목회자가 되기를 원하였고 그 길을 끊임없이 추구하였다.  그는 이것을 잔잔하고 신념에 찬 목소리로 증언한다.

    “나의 목회 26년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사도 바울과 같이 성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목양자로서의 목회자, 선교사로서의 목회자, 신학자로서의 목회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목회 3대 철학은 기도, 겸손 그리고 충성이다

     “은혜를 구하는 것은 기도이며, 은혜 받은 자는 겸손과 충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즉 자기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니 겸손하여야 하고 그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는 기도하여야 하고 기도하여 은혜를 받은 자는 당연히 최선을 다하여 충성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목사의 목회는 끊임없는 기도와 은혜 받은 자로서 겸손과 최선을 다하는 충성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그는 교인들을 볼 때 이상하리만치 부모가 자식 대하듯 사랑과 애정을 느낀다고 한다. 그의 설교는 한 마디 한 마디에 간절함이 묻어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이 목사가 훌륭한 목회자 이전에 고결한 인격자였음을 반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22. 성전 건축과 수요 금식기도

    그가 워싱턴에 부임하였을 때 교회는 1만 5천불 정도의 건축헌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2년 후인 80년 5월, 15만 불을 주고 비엔나에 성전 대지를 구입하였다. 그후 1982년부터 이 목사는 전교인과 함께 교대로 매일 한 사람씩 금식 기도 운동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교인 수가 많지 않으므로 1년을 모두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이 목사 부부가 이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매주 수요일마다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목사는 늘 건강하였다. 목회 26년 동안 특별히 병으로 고생한 적이 없고 늘 건강하도록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건강의 축복을 내려 주셨다. 이 목사의 기도 생활은 1996년 버지니아 지역에 유사 이래 최대의 폭설로 장기간 길이 막혔을 때 그 뉴스를 접한 이 목사가 교회에서 밤을 지새며 홀로 새벽 기도를 드렸을 만큼 철저하다.

    성전 건축 이야기에 읽힌 이야기를 좀더 하려고 한다. 당시 이 목사는 미국인 교회인 루인스빌 장로 교회(Lewinsville United Presbyterian Church)를 빌려 사용하고 있었음은 전술한 바와 같다. 그러던 중 1982년 루인스빌 장로 교회의 개리 핀더(Gary Pinder)목사가 한 건물에서 두 교회가 사용하기에는 비좁다며 이사 나가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이 목사는 이들에게 간청하여 1년의 시간을 얻었다. 그런데 당시 루인스빌 교회 옆에 루인스빌 국민학교가 있었는데 그 학교가 문을 닫게 되었음을 알았다. 이 목사는 매일 새벽 이 학교를 사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새벽마다 학교 앞 마당에서 기도하고 교회에 가서 또 기도하였다. 이 학교는 루인스빌 교회에서 두 블럭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이었다. 주차장등 여러 가지 여건이 매우 좋았다. 새벽마다 학교 앞길에서 기도하는 이들을 수상하게 여긴 경찰이 따라오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학교로의 이전을 원하였던 이 목사의 기도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 학교는  지금 노인 복지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금 생각하니 당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이유가 있습니다. 만일 그 장소를 허락하셨다면 지금과 같이 부흥하기 힘들었을 테니까요.”

    그것도 좁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더 크게 사용하시기 위하여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학교를 주지 않으시고 비엔나 성전을 허락하셨음으로 오늘날 미국 수도권 제일의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23. 온 성도의 금식기도로 지은 성전

    전술한 바와 같이 한국에서 청년기에 임시 전도사의 신분으로 교회 건축을 경험한 이 목사는 이렇게 준비된 목회자로서 교회를 건축하게 된다.

    성전 건축과 관련하여 이 목사는 건축위원장이었던 고 김충흠 박사(집 사) 이영기 집사 부부와 수많은 성도들의 눈물겨운 헌신을 기억한다. 성도들은 성전 건축을 위해 휴가도 가지 않았고 새로운 자동차 구입도 포기하였다. 매일 교대로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이 성전은 이 목사 부부와 성도들의 금식기도로 지은 교회라 할만 하다. 이 금식 기도자 명단은 교회 주춧돌 안에 보관되어 있다. 교인들은 금요일마다 철야로 기도하였고 이 목사 부부는 수요일 마다 또 금식 기도하였고 공사 중이던 교회의 시멘트 바닥에서 잠자며 3일간 금식 기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150만 불이나 되는 건축비를 충당하기에는 교세가 역부족이었다. 이때 김충흠 집사등 10여 가정이 개인적으로 보증을 서서 건축비를 융자 받을 수 있었다. 교회 건축을 위해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은행 융자금의 보증을 섰던 것이다. 이것이 제때 잘 상환되어 아무 문제없이 정리되었음은 물론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칭찬 받을 만한 헌신이었습니다. 금식기도가 형식적으로 보이지만, 성도들 마음이 하나 되고 하나님께 정성을 보여 드리는 일로 은혜 받는 지름길입니다. 이것은 나의 산 경험으로 입증 되었습니다.” 이 목사의 간증이다.

    건축을 통하여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성전 건축을 기뻐하신다. 건축은 헌금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데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하신 바와 같이 성도들의 마음, 성도들의 정성이 모이니 하나님이 축복하셨고 교회가 세워지니 자연 주일 학교 교육이 원활하여 졌고 이것은 교회 부흥으로 이어졌다.

    이 목사는 교회를 지을 당시부터 2세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교실을 6개로만 하자며 반대하는 성도들도 있었으나 교육을 위해 12개 교실을 굽히지 않았고 이러한 교육에의 투자는 자연 교회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중에도 이 목사와 교회는 선교사를 후원하는 일을 쉬지 않았다. 이은무, 김병선, 안성원, 신홍식, 윤수길, 김정웅 선교사 등을 교회 건축 전부터 시작하여 교회를 건축하는 중에도 중단 없이 지속적으로 후원하였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였음으로 우리 교회를 축복하여 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목회자는 모름지기 성전 건축과 선교에 열심이어야 합니다. 성전건축과 선교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성전 건축의 역사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성막을 짓고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에 옮겨왔으며 솔로몬은 시온산에 성전을 짓고 솔로몬의 성전이 불타고 바빌론 포로  이후에 다시 제2의 성전을 짓고……. 이 목사는 “성전 건축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요 목회자의 큰 사명 중에 하나다.” 라고 길고 오랫동안 강조한다.

    1985 년 12월 7일, 착공한지 1년여 만에 그는 새 성전을 완성하였다. 새 성전은2층 좌우 발코니와 500석의 본당과 본당 아래층에는 150여명이 예배드릴 수 있는 소예배실, 친교실, 그리고 12개의 교실과 부엌등이 있었다. (대지 3.5에이커, 총 건평 22,000 평방 피트) 입당 예배후 온성도는 담요을 가지고 와서 철야기도를 하며 환호하고 감사하였다. 오랫동안 미국인 교회를 빌어 예배드리던 성도들이 자체 성전을 갖게된 감격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제2의 성전을 건축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희에 비견할만할 일이었으리라.

    필자는 자못 궁금하였다. “목사님! 그 작은 교회로 어떻게 그렇게 큰 교회 지으실 용기를 내셨습니까?”

    “인간의 용기가 무슨 힘이 있나요. 하나님의 주시는 확신이지요. 이것은 용기가 아니고 기도 중에 얻은 확신입니다.”

    24. 서울 구역, 한국의 선교사들

    이 목사가 담임하는 와싱톤 중앙장로교회를 다니다가 한국으로 돌아간 이들의 모임인 서울특별시 구역은 유명하다. 현재 SEED International 한국 후원회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지금도 350여 가족이 매년 손꼽아 기다리는 모임이 되어 선교를 후원하는 귀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워싱턴을 떠나 귀국한 후, 이 목사님과의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추억하기 원하고 이 목사님과 나눈 믿음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기 원하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이같은 정근모 장로(호서대 총장)의 언급처럼 이 모임에는 순수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거듭 태어난 수많은 한국의 지도자들의 모임이 되었다. 아무리 바빠도 이 모임만은 반드시 나오려고 한다는 이명박 서울시장의 말처럼 이 모임은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의 역사적인 역할과 이목사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별표 1, 주요 인사 명단)

    25. 교육과 선교에 열중한 사역

    성전을 건축한 후 그의 사역은 교육과 선교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승렬 전도사(현, 탈봇신학교 신약 교수)를 교육전도사로 처음 임명하였고 85년도에 교육담당 전임 목회자(이주영 목사)를 초빙하였으며, 88년에는 교육관 부지를 새로 구입하여 교육관을 건립하였고, 한국어에 취약한 영어권 2세들을 위한 영어 예배를 신설하였다. 특히 이민 교회에서 필수적으로 만나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은 이민 2세에 대한 사랑과 교육적 가치관의 확립을 통하여 넘을 수 있는 당면한 과제였다. 이를 위해 노창수 전도사(현, 후임 담임 목사)와 양춘호 목사가 동역하였다.  드디어 2세들이 저들의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말씀을 배우게 되었고 현재 2명의 전임교역자와 400여명의 회중들이 주일 2부 영어 예배를 드릴 만큼 자라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에서의 이민이 늘어나기 시작하며 갓 이민 오는 청소년들이 증가하자 영어에 어려움을 느끼는 한국어권 2세들을 위한 한국어 예배인 아가페(Agape) 예배를 신설하고 조주은 전도사를 영입하여 전담하게 하였으며 장진명 목사(대학부, 아가페), 유익상(영어예배), 서준택(한국어 어린이)전도사 등이 가세하여 장 단기 선교, 교육, 선교회 그리고 교구 사역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목사는 선교에도 더욱 힘을 내기 시작한다. 87년에는 파라과이에 첫 단기 선교 팀을 파송하였고, 88년에는 페루에 두 번째 팀을 파견하였다. 이어서 89년에는 미주 최초로 선교 전담 교역자를 세웠는데, 박신욱 선교사에 이어 정강현 목사(당시 강도사)를 영입하였음은 그의 선교에 대한 열정이 어떠한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이들을 통하여 선교 훈련과 활동을 보다 조직화 구체화하게 되었고 특히 단기 선교도 멕시코, 페루, 아르헨티나, 우즈베키스탄, 중국 등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이어서 88년에는 안성식 강도사를 GMF(Global Missionary Fellowship) 본부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90년에는 박신욱 선교사를 아르헨티나 선교사로 이평강 선교사를 동아시아 선교사로 파송함으로 장기 선교사 파송의 문을 열어나가는 등 92년에 10가정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김요한, 신영선, 유익상, 서문안, 이은섭, 오지영, 김현일, 김홍기선교사등이 그들이다.

    이 목사는 평신도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를 위해 스스로 교육을 받는 겸손함이 돋보인다. 이 목사 스스로 87년 서울의 한국 사랑의 교회(옥한흠 목사)에서 실시하는 “평신도를 깨우라.” 는 주제의 제자 훈련을 먼저 받은 후 돌아와 이미 시행중이던 2:7제자 훈련과 함께 장년 지도자들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을 실행하였고 이를 위해 권형인 전도사를 심방 전도사로 영입 하였으며 또한 홍원기 목사와 양춘호 목사를 교구 및 교육 담당 목회자로 영입하였다. 더불어 어린이 교육을 위하여 김미희 전도사를 주일학교 전담 교역자로 영입하여 교회적으로 교육이 전문화되는 기틀을 확립하였음은 그의 교육에 대한 인식과 의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26. 중앙 시니어 센터와 노인 교육

    이 목사는 노인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교회가 성장하며 점차 노인인구가 늘어나기도 하였고 언어와 습관과 문화의 차이로 인하여 소외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노인들의 문제가 평소 어른을 공경하며 성도를 사랑하여 온 이 목사에게 중요한 과제가 된 것은 당연하다.  

    94년도에 이광수 장로를 중심으로 노인 프로그램을 시작한 후,  노인 교육의 귀한 뜻을 가진 김윤한 집사, 변영환 집사등에 의해 더욱 확장되고 노인 교육 전문가인 전혜성 권사의 참여로 중앙시니어 센터라는 이름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현재 범 교회적으로 350여명의 노인들이 매주 화요일에 정기적으로 모여 다양한 교육과 프로그램에 참여하는데 미국 정부 카운티 당국에서도 적극 지원하는 중요한 커뮤니티 활동 중에 하나로 자리 잡았다.  2001년에는 버지니아의 주지사가 수여하는 최우수 봉사기관상(Virginia Gorvernment Award)을 받았다.

    27. 커뮤니티 센터와 컬페퍼 기도처소

    교회 창립 25주년을 맞은 98년 즈음, 한국 민족을 위한 한인 이민 교회를 이끌어 오던 이 목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난  25년간의 은혜가 매우 크고 감사하여 기도하는 중에 내 교회를 벗어나 타 인종을 위해서도 무언가 일을 하여야겠다는  강한 사명감을 느꼈다. 이것은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만민교회 건축으로 나타났고, 미국의 수도 워싱턴 디씨에 특별히 어려운 환경에 있는 타 인종들을 위하여 뭔가 하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커뮤니티 센터 건립 구상이었다. 처음에는 미국인 교회인 워싱턴 디씨 3가 교회와 연합, 그 교회를 사용하여 동역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막상 하려고 하니 그 교회는 건물 보수가 불가능 할 만큼 낡고 헐어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와 이웃한 곳에 건물을 한 동 구입하였다. 이것은 교회가 메시아 공연 등을 통하여 얻은 헌금과 교인들의 정성이 모아져 가능하였다.

    일화가 있다. 처음 이 건물을 사고 한 집사님이 맡아 수리를 하려고 방문 중이었는데, 대낮에 흑인이 총을 들이대고 돈을 빼앗아 갔다. 이에 놀란 집사님은 이 장소를 수리하는 일을 포기하였다. 그후 함준길 장로님이 맡아 말끔히 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평화 나눔 공동체(최상진 목사)에 무상으로 대여되어 마약과 술에 젖은 수많은 홈리스(Homeless)들의 안식처로 선교 센터로 사용되고 있다. 형편없는 빈민가였고 대낮에도 총에 맞아 죽는 이가 속출하던 이곳이 지금은 백악관에서 불과 15분 거리에 위치한 도심으로 변모하면서 새로운 도약과 변화를 재촉하고 있기도 하다.

    더불어 평생 기도로 살아 온 이 목사에게 기도 처소는 무엇보다 중요한 명제였다. ‘성도를 훈련시켜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를 주제로 내걸었을 만큼 평신도 교육에 헌신하였던 이 목사는 성도를 훈련시키기 위해 교회라는 환경도 중요하나 교회 밖의 시설도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였다. 소그룹 영적 훈련장소로서 마음 놓고 목 놓아 기도하기 원하는 이들의 안식처로서 지난 2002년 5월 1일 문을 연 컬페퍼 기도처소는 어둠을 뚫고 밝은 미래를 열고자 하는 순례자의 애 끓는 기도 소리로 가득 찰 것이다.

    28. 안디옥 교회를 닮기 원하였다

    이 목사는 사도행전 13장에 선교의 기원으로 기록된 안디옥 교회를 닮기 원하였다. 그는 2000년 까지 10가정의 전임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교회 자체에서 선교사를 교육하고 파송하는 기관으로 중앙 선교회(CMF)를 설립하고 91년 박신욱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그리고 2000년 9월 ROW라는 뉴욕의 선교 단체와 병합하여 만든 것이 SEED INTERNATIONAL(www.seedusa.org) 이라는 선교 기관이다. 이 선교회는 미국 내 한국인으로 구성된 유일한 국제선교 단체이다.  교회에서는 독립된 기관으로 15교회가 연합하여 운영하며 현재 46가정의 선교사를 17나라에 파송하고 있으며 미국의 선교단체 연합 기구인 EFMA(EVANGELICAL FELLOWSHIP OF MISSION AGENCIES )에도 정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주목할만한 것은 와싱톤 중앙장로 교회를 섬기던 성도들중에서33명의 선교사나 목회자가 탄생되었다는 사실이다. (별표 2, 선교사, 목회자 명단)

    이 목사는 현재 SEED 선교회의 대표(President)인데 이것은 은퇴 후에 그가 감당할 주요 사역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최근 그는  시드(SEED) 선교회 국제센터 건립을 위해 기도중이다.

    이 목사는 더불어 은퇴 후에 에스라 연구원(EZRA STUDY CENTER) 설립을 구상중이다. 이것은 선교사와 목회자 그리고 평신도 지도자 및 제3세계 교회 지도자를 훈련시키는 교육기관으로써 교회와는 상관없이 그의 마지막 무게가 이 사역을  향해 실려 있다.

    29. 미국 연방의회에서 개원기도를 하다

    이 목사는 버지니아 주 의회의 개원 기도를 하였으며 연방의회(하원)에서 개원기도를 맡기도 하였다. 그의 기도문과 약력은 의회 속기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지난 2002년 10월 10일, 미국 하원 107차 개원 기도 때는 미 의회가 이라크 공격을 결정한 중요한 날이기도 하다. 이 시대 유일한 분단 국가인 대한민국 출신의 목회자가 미국에 의해 북한과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된 이라크를 공격하는 중요한 결정을 앞둔 그 날의 기도를 맡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버지니아 주 의회 개원 기도문(2002년 1월 15일)

    왕이신 하나님, 이나라를 당신의 거룩한 지혜와 은혜로 다스리시니 감사합니다. 

    당신은 휘몰아치는 물결 위에 있는 반석 이십니다. 

    부정과 패배로 고통스러워 하는 자들의 위로자 이십니다.  의로운자 들의 방어자 이십니다.

    진리와 영광이시며 매 해마다 항상 계시며 신실하신 분 이십니다.

    주여,  버지니아 주 의회를 축복하셔서 이나라와 세계의 빛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rayer for the General Assembly of Virginia of Representatives

    Sovereign God, we adore you for ruling our nation with your holy wisdom and grace. You are a Rock above turbulent waters; a Comforter to those who suffer from injustice and loss; the Defender of Righteousness. Truth, and Honor; ever present, ever faithful with each new year.

    Bless this General Assembly to be a light for the nation and the world.

    In His name we prayed, Amen.

     

    미국 연방 의회 개원 기도문(2002년 10월 10일)



    하늘과 땅의 창조자 이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

    당신은 이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삶과, 사랑하는것들 그리고 추구하는 기쁨을 축복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을 “하나님 아래 한 나라” 로 세워 주시니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주여, 이곳에 남녀 종들을 이나라의 충실하고 진실된 하원으로 부르시니 감사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 국회의 남녀 종들이 이 나라를 정직성과 열성,

    그리고 동정심을 가지고 이끌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함을 서로 받아들이고 사용하여

    우리 나라를  강화시키고 분단 되지 않게 하도록게 하소서.  

    그들에게 초자연적인 담대함과 결단력을  허락하셔서

    우리의 자유를 위협하는 자들을 막게 하소서.  

    그들을 지혜와 공평함으로 채우셔서 우리 모두를 위한 정의가 있게 하소서.

    당신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며 이 모든 말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Player for the United States House of Representatives

     

    Heavenly Father, creator of the heavens and the earth,

    you are the Sovereign Lord over all.

     

    We thank you for blessing us with our lives,

    our loves and all our pursuits of happiness.

    We thank you for forming us as

    “one nation under God.”

    And Lord, we thank you for calling these men and women

    to be for this nation faithful and true representatives,

    Heavenly Father, may you now enable these men and women of our Congress

    to lead our country with integrity, zeal, and compassion.

    Help them to embrace and utilize their diversity

    To strengthen our country and keep it indivisible.

    Give them supernatural courage and determination

    To oppose any who threaten our liberty,

    Fill them with wisdom and impartiality

    To meet our justice for all.

     

    For your glory and honor we pray all these things

     

    In Jesus name,

    AMEN

     

    30. 예수님을 친구로 삼은 이원상 목사

    이 목사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평생을 살아왔다. 목회자들, 교인들, 불신자들 그리고 미국의 정계의 여러 인사들과도 교분을 쌓았다. 그리고 그는 유나이티드 웨이(UNITED WAY) 훨스처치, 페어팩스 카운슬 멤버로 3년간 봉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찾아오는 수많은 미국 정계 인사들을 반갑게 맞아 주었고 여러 가지 사유로 찾는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장벽도 차별도 두지 않았다. 어느 누구든 겸손한 모습으로 반가이 맞아 주었고 손을 잡아 주었다. 그는 또한 장로 교단의 노회장등 여러 단체의 대표로 일하였으며 지난 26년간 오직 한 교회를 다툼 없이 올곧게 섬겨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종종 그에게는 친구가 없다고 말한다. 

      “그렇게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이로 인하여 교회를 공평하고 편파적이지 않은 평화로 이끌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이 목사의 언급처럼 이것은 오히려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온 목회자 이원상의 장점이었고 중요한 덕목이었다.

     

    31. 물질에 깨끗하고 헌금에 본을 보여준 목회자

    이원상 목사는 물질에 초연하고 겸손하게 최선을 다하여 바치는 사람이었다. 출장비로 사용하고 남은 페니 하나 까지도 내어 놓았으며 자신이 받은 교회 외부의 사례금을 교회에 헌금 하거나 시드 선교회(Seed International)에 선교비로 보냈다. 이러한 물질 관리로 인해 성도들에게 존경과 신망을 얻을 수 있었고 26년의 사역이 평화스럽고 화목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교육관 신축 공사를 할때 성도들의 건축 헌금이 부진하자 자신의 은퇴 연금 구좌(IRA)를 해약하여 전액 헌금하였던 것도 알려지지 않은 일화이다.

     “지금 생각해도 놀랍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이 생각하기 어려운 결단입니다.”일반적으로 은퇴 구좌는 절대로 해약하지 않고 끝까지 지키는 것이 미국에 사는 이들의 상식이라며 전해 준 김병춘 원로 장로(당시의 재정위원장)의 귀뜀이다.

      83 년부터 85년도 사이에 교회 건축을 할 때는 건축 헌금을 위해 자식들에게 그 흔한 치즈나 우유도 사주지 않고 헌금부터 하였다. 헌금부터 하고 남은 것을 생활비로 사용하려고 하니 늘 부족한 생활이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이 목사 사모의 엄격한 신앙 관리와 내조에 기인한다. 종이 한 장도 교회 것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교회 경비 사용에 엄격하였다. 교회 경비는 헌금에서 나온 것이고 헌금은 교인의 핏값이라는 생각 때문에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부부가 함께 출장을 떠나는 경우, 이들은 서로 구분하여 비용을 지출하였다.

      이 목사 부부는 건축 헌금을 작정할 때도 헌금 액수를 정하기 위하여 부부가 각자 기도하고는 그 금액을 정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놀랍게도 동일한 금액을 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서로 상이한 금액일 경우에는 더 많은 금액을 따르는 원칙을 지키며 헌금 생활에 충실하였다.

      이 목사는 교회에서 그의 은퇴를 앞두고 퇴직 사례금으로 지급하기로 결정한 5만불을 전액 교회 건축 헌금으로 내어 놓기도 하였다.

     

    32. 설교와 삶이 일치한 하나님의 대변자

    설교자는 하나님의 대변자이다. 구약의 선지자라는 말은 대변자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대변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전달자여야 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전달자이기 때문에 그 삶이 바르고 합당하여야 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말과 생활이 일치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이 목사가 늘 지켜온 그의  설교관이다. 그의 설교는 항상 말씀 중심이었고 잡다한 세상적 비유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그의 삶은 그의 설교와 항상 일치하는 곧고 바름 그 자체였다. 

      “이 목사님과의 목회자- 성도간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동역자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겸손함과 헌신 때문입니다. 바쁘지 않고 조용함을 잃지 않는 이 목사님과의 대화는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주님과의 대화를 연상케 합니다.” 25년간 신앙안의 교제를 나누어 온 정근모 장로(호서대 총장)의 지적은 진지하고 평화롭게 이어진다.  

      “조 급한 결론만으로 성도들을 몰아치는 목자가 아니라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는 질문으로 우리들 생각을 이끄는 그 분과의 만남은 항상 미소를 띠는 각별한 기도와 함께 끝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당황함이 없고 아무리 기쁜 일이 있더라도 교만이 없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충성하는 믿음의 자세를 가진 분이지요.”

     

    33. 겸손 정직 충성의 목회자가 되라

    그는 후배 목회자들에게 성경을 많이 읽고 정독하며 성경에서 깊은 은혜와 지식과 영향을 받도록 힘쓰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기도에 충실하라고 권유한다. 기도 생활을 통하여 영적인 능력, 인간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라고 말한다. 기도는 불완전이 완전하여 지는 중요한 통로이기 때문이며 인간의 불완전한 요소가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져서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인격적으로 3가지 기준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고 사람을 섬기는 모습을 실행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리고 정직함과 최선을 다하는 충성이 결합 될 때 완전한 인격에 이른다고 말한다. 이 목사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온 사람이기도 하다.

     

    34. 계명대, 명예박사 학위의 남다른 의미

    이 목사는 은퇴를 1년 앞둔 지난 2002년 뜻하지 않게 모교인 계명대학으로부터 명예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것은 계명 대학의 설립이념과 정신을 잘 드러낸 사역자로 평가 받은 그에게 주어진 명예박사 학위였으나 그에게는 남 다른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왔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는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박사학위 전 과정을 이수하고 마무리를 하는 시점에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가 지난 26년간 섬겨온 중앙 장로 교회의 담임 교역자로 부임하게 되어 박사 학위를 포기하는 등, 두 차례에 걸쳐 박사학위는 그의 의지와는 달리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포기되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느 주일 설교 강단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 명예박사 학위는 26년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며  희생과 봉사로 헌신하여 온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두 번에 걸쳐서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포기하며 하나님께 순종하였던 보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

     

    35. 계명의 후배들아 먼저 그의 나라와 의의를 구하라

    미 북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하여 설립된 계명대학 출신인 이원상 목사는 그가 하나님 중심의 생활, 하나님 우선 순위의 생활을 그의 생활 철학으로 삼아 왔던 것처럼 사랑하는 계명 후배들에게 그의 대학 생활에서의 삶의 철학이었던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을 권면한다.

      “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 는 또한 철저한 시간관리를 권면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천부의 자산이므로 이것은 인생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관건이 된다는 철학이다.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시간관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삶의 우선 순위로 하는 것이고 사람 앞에서의 시간관리는 책임성 있는 사람이 되는 기초라는 설명이다.

     

    36. 1.5세 후임 목회자를 위한 기도

    이원상 목사가 섬겨온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는 지난 26년간 다툼도 분열도 없는 모범적인 이민 교회로 성장하여 왔고 거기에는 기도의 종 이원상 목사가 조용히 묵상하며 앉아 있다. 그는 어려운 일을 만나면 금식하였고 기도하였다. 가장 이른 새벽에 교회 앞자리에 무릎 꿇어  온 교회 온 교인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였다. 쉴 새 없는 심방으로 저들의 형편을 살피고 위하여 또 기도하였다. 누구의 손도 차별 없이 잡아 주었으며 그 손은 언제나 따뜻하고 다정하여 한 가득 정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그도 그러나 세월 앞에서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어서 원만하게 후임을 세워 흔들림 없는 교회로 지속적인 발전을 하기 위하여 물러날 준비를 하여야 했다. 그리고 그가 스스로 정한 네 가지의 후임 목회자 선임 기준을 가지고 기도하였다.

       한 인 교회는 인종적으로 한인이요 문화적으로 미국에 가까우니 한국 문화와 미국 문화를 잘 이해하고 두 문화간의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 1세와 2세의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검증된 사람을 찾았다. 추상적이거나 혹은 전해들은 것에 의하지 아니하고 직접적인 목회와 사역을 통하여 그 열매가 검증된 사람을 찾았음이 두 번째이다. 교회의 시대적 사명과 비젼을 소유한 인격적으로 존경 받을 만한 겸손한 지도자를 찾는 것이 세 번째 조건이며 가장 중요한 네 번째 조건으로는 성경에 충실하고 복음적인 말씀의 능력을 갖춘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 사람의 젊은 목회자를 기쁨과 기대와 감사로 맞았다.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수줍은 모습으로 잔잔히 미소를 지으며 조용하게  오직 기도로써 수많은 양들과 후임 목회자를 바라보고 있다.

     

    37. 센터빌 성전의 건축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원상 목사는 두번의 교회 건축을 경험하였다. 하나는 한국에서 임시 전도사로 사역 중에 지은 평산교회 이고, 현재의 버지니아 비엔나 성전이 두번째이다. 그리고 그는 세번째로 버지니아 남서부에 위치한 센터빌 성전 건축을 구상하였다. 

      “교 회는 특별히 구별된 예배처소로 성경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430년 동안 훈련하시며 가나안으로 나아가기 전에 가장 먼저 명령하신 일이 성막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출발입니다.”

      성 막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가장 구체적인 성전이다. 그는 출애굽기 25장에서 40장에 이르는 성전에 관한 구절을 길고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성전 건축의 중요성을 설명하므로써 그가 얼마나 성전 건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를 느끼게 하였다.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의 역사를 살펴 보아도 성전 건축이 완성되었을때 그리고 교육관 건축이 완료된 후 크게 부흥하였음을 알수 있다.

      본 래 현 비엔나 성전은 13에이커, 1000석, 6만 평방 피트의 새 본당 건축 허가를 받고 주민 공청회도 끝났으나 이웃 주민의 재심 청구로 이것이 부결된후 새로운 교회의 건축 계획은 급속히 진행되었고 당회와 공동의회는 74에이커(88,800평)의 센터빌 새 성전의 건축을 결의하였다.

      “10만 수도권 교포들을 위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라시는 구체적인 명령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새 성전을 위한 그의 열정은 대단하다. 틈나는 대로 전 미국의 주요 교회와 한국의 여러 교회들을 직 간접 방문하며 장단점을 조사하였는가 하면 건축 계획 하나 하나에 온 정성을 기울이며 수 십년 앞을 바라보고 있다.

      그 의 구상은 단순한 교회 건축에 머물러 있지 않다. 교회와 학교와 문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1단계로 프리스쿨(Pre-school)에서 2학년까지 수용하는 사립 학교를 겸하도록 하고 장차 12학년 까지 수용하는 시설로 확대 되는 꿈을 꾸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신앙 교육을 할 수 있는 사립 학교의 운영은 복음의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더 불어서 한국어 예배는 물론 영어 예배를 성장 시켜 나갈수 있도록 구별된 성전의 필요성을 기대하고 있다. 10-20년 앞을 내다보면 20만 평방 피트 정도의 성전을 지어야 한다고 믿는다. 1단계로는 10만 평방 피트를, 2단계로 5만 평방 피트를 추가하고 3단계로 5만 평방 피트를 증축하는 방식에 대하여도 생각해 본다. 1200대를 수용하는 주차장과 2000석의 본당, 주일학교를 위하여 500석의 예배실,  풀 사이즈의 체육관, 축구, 배구, 농구, 테니스등 모든 스포츠 활동과 피크닉이 가능한 공원 조성까지 다양한 시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설은 교회 가족들은 물론 교회 주변의 커뮤니티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이 가능하도록 오픈하여야 한다고 판단한다.

      성 도와 가족들의 편안한 휴식처로 안식의 터로 이용 가능하도록 정원이 잘 갖추어진 공원 시설도 하기를 원한다.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개방된 교회, 자녀들이 교회 중심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시설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게스트(GUEST)하우스를 지어 교회 손님이나 선교사들이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방학 중에도 주말에도 주중에도 언제든지 사용 가능한 대형 도서관 시설도 필요하고 컴퓨터 정보 시스템도 전문적으로 갖추어 시대에 맞는 복음 전파의 기능을 갖도록 하기를 원한다. 교회 홈페이지의 활성화에도 적극적이다.

      “새로운 성전은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온 성도가 합심하여 기도하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성전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 의 꿈은 한없이 이어진다. 젊은 어떤 사람 보다도 진취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은퇴를 앞두고 있다. 2003년 9월 27일, 그는 원로 목사가 된다. 그날 그 순간까지 그는 최선을 다하여 새 성전 건축을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는 다만 기도하며 우리 후대들을 바라 보게 될 것이다.

     

    38. 2003년 9월 27일 이후의 기도

    그가 매일 새벽, 교인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여 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 26년간 줄곧 그렇게 지켜왔다. 그러나 이제 그의 기도 제목과 대상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다. 원로 목사가 되어 새 신자를 접할 기회도 상실하게 될 것이고 매 주일 한마디 한 구절 간곡함이 묻어 나던 설교의 말씀도 듣기 어려워 질것이다. 교인 한사람 한사람을 만나 꼬옥 손 잡아 주는 일도  그 만큼 줄어 들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교회와 교회 리더쉽과 선교사를 위한 기도로 변화 될 것이다. 시드(SEED) 선교회 가족들을 위한 기도와 에스라 연구원(Ezra study center)를 위하여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찌 그가 평생 먹이며 가꾸어 온 양 무리를 위한 기도를 내려 놓을 수 있으리오.

     

      아 니다 어쩌면 이제는 우리가 그를 위해 기도하여할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가 우리 위하여 평생을 기도하였던 것처럼, 26년간 수요일 마다 금식하며 우리 모두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였던 것처럼, 새벽마다 교회 맨 앞자리에 앉아 한 사람 한 사람 양 무리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여 온 것처럼, 이제 우리가 새벽 무릎을 꿇어 금식하며 한 은퇴 목사의 건강하고 평안한 마감을 위해 기도하여야 하지 않을까? 이제 우리의 차례가 아닐까?

     

    39. 그의 뒷 모습

    미국 수도권 최대 교회로 성장한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의 담임 사역자인 이원상 목사,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은 언제나 조심스럽고 진지하고 간절하였다.

      “여 러 가지로 어려움이 있었던 교회에 부임하시어 이 교회를 북미지역의 가장 헌신적인 선교 중심교회로 그리고 기도의 불이 활 활 타오르는 영성의 제단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의 평가는 결코 수사가 아니다.

      그 는 그에게 주어진 24시간을 철저히 관리하며 빈틈없는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아쉬움이 있다. 교회가 성장하고 후반기에 접어들어 업무량이 많아지며 양과 목자의 관계성에서 작은 일보다 큰일에 열중하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한 사람 한 영혼 개인 개인에게 골고루 마음을 주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 리더십에 대하여 제자 훈련, 지도자 훈련을 더 많이 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는 참으로 맑은 영혼 따뜻한 심성을 가진 목회자이다.

      “그 는 틀림없이 아씨시의 성자 프랜시스처럼 우리 주님의 사랑의 상흔 스티그마를 그리워하며 기도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서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중앙장로교회와 한국교회, 그리고 세계교회를 위해 중보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가끔은 선교지를 방문하시며 그의 기도를 나누어 주실 것입니다”(이동원 목사)

      “제 일먼저 생각하는 것이 중앙 장로교회의 새벽 기도시간입니다. 양육한 성도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면서 중보기도를 드리는 이 목사님의 경건한 모습은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중앙 교회에서 믿음생활을 한 모든 성도들이 잊지 못하고 고마워하는 『신뢰의 관계』이지요. 나는 25년간을 이 목사님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의 관계를 맺어온 사연 인지라. 그 분의 기도 속에서 나 자신도 성령 충만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고 신앙 고백하는 것입니다.” (정근모 장로)

      “외 유내강하여 겉으로는 온유한 모습 밖에 보이지 않지만 섬기는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교계와 특히 선교 사역 분야에서 탁월한 리더십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는 교회나 자신을 위한 프로모션 한번 하시지 않았지만 늘 동역자들과 후배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끊임없이 부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배우는 분이십니다” (김원기 목사)

      “목사님은 정직하고 깨끗한 삶을 살아 오셨습니다. 그의 인상, 목소리, 언행은 언제나 깨끗함과 정직함입니다.”(최연홍 박사)

      이원상 목사, 그러나 그는 이렇게 자신의 26년을 말한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린도 전서 15:10)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뿐입니다.

      우 리는 종종 그의 따뜻한 미소, 가볍게 꼬옥 쥐어 주는 정겨운 악수, 간절한 기도가 그리워 질 것이다.  그의 설교와 그의 삶이 언제나 하나로 일치하는 고귀한 인격자였으며, 가장 이른 새벽마다 성전 맨 앞줄에 앉아 온 성도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로 간구하는 기도의 종이었으며, 깨끗한 꽃의 아름다움을 극명하게 보여 준 하나님의 참된 사도였음이 분명하므로….  (끝)

     

     

    (표 1)

      학계에서는 정근모 박사를 비롯하여, 정학성, 김승환, 황의각, 박을용, 모종린, 김숙현, 신은숙, 김판석, 노영무, 유진, 김명희, 모영기, 김정만, 김준형 등

      언론계에서는 문명호, 이문희, 정일화, 류근찬, 나형수, 이청수, 이경형, 이인용, 백낙천, 이문노, 문창극, 양봉진, 강효상, 김재열씨 등.

      정계에서는 신구범 제주지사, 임창열, 손학규 전 현직 경기 지사, 이명박 서울시장, 맹형규, 이경재의원, 신낙균, 송태호 장관 등.

      군에서는 이갑진 해병대사령관, 박용옥 국방부 차관, 노정기, 신원배, 이종만, 김은기, 배상기, 이정수, 박세헌, 문영한, 윤삼성등.

      외교관으로는 이한춘, 이재춘, 임성준, 노정기, 이병호, 문봉주 대사등 전 현직 대사가 있고,

      그밖에도 위성용, 박상우, 유득환 정호영, 이영래, 김경용, 권오갑, 김병기, 남경우, 권성철, 강석인, 경종철, 송종환, 윤웅섭, 전광우, 최종화, 김성엽, 정동수, 노정기, 김준길등 그밖에도 수많은 분들이 있다.

     

    (표2)

    목사, 선교사

       정강현, 김요한, 안성식, 장진명, 유익상, 권오봉, 김종홍, 장성균, 오지명, 

       이우진, 이은섭, 주영호, 진재혁, 김현일, 이해천, 주경로, 송재은, 조주은

    전도사

       김재선, 김종협, 이우대, 김재영(David Kim), 강명훈, 구본구, 김경훈,

       김향숙, 임창수

    평신도 선교사

       고석문, 신영철, 이경은, 김혜련, 김선숙, 김충녕(Jonathan Kim)



    미국 남침례교가 모범교회로 뽑은 와싱톤중앙장로교회 이원상 목사 인터뷰


    미 전국 13개 모범교회의 하나로 선정, "참목회자상 보여준 '어른', 청렴한 물질관 화제 모아..."  

     미국 개신교 최대 교단인 남침례회(SBC) 소속 남침례신학원(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이 지난해 전국 5만 2,333개 교회 가운데 선정한 13개 모범교회(Good-to-Great Church)에 한인교회가 하나 포함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미국의 유수한 신학교가 2세 교육, 선교사 지원, 지역사회 봉사 등 여러 항목에 걸친 심사 끝에 엄선한 13개 모범교회에 한인교회가 들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미주 한인교계는 물론 한인사회 전체로서도 상당한 자부심을 지닐 만한 일로 평가됐다.

     한인교회 중 유일하게 남침례신학원으로부터 모범교회로 뽑힌 교회는 바로 버지니아주 비엔나에 위치한 '와싱톤중앙장로교회'. 지금은 40대 중반의 노창수 목사가 담임을 맡고 있지만 남침례신학원의 평가작업이 진행될 당시의 담임목회자는 이원상 목사(67)였다.

     이 교회 담임교역자로 26년간 봉직하다 2003년 9월 은퇴한 이원상 목사의 지도 아래 와싱톤중앙장로교회가 미국을 대표하는 교회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한국 및 미국 내 다른 지역 한인교계에 와싱톤중앙장로교회 원로목사보다 SEED선교회 대표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이원상 목사는 워싱턴 한인사회에서는 누가 뭐래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원로로 대접받고 있다. 올해 67세라는 나이로만 따지자면 아직 원로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인사회에 대한 이 목사의 영향력과 이 목사에 대한 한인들의 긍정적 평가를 감안하면 원로라는 말이 결코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 워싱턴 지역의 분위기다.

     이 목사가 자신이 담임했던 중앙장로교회와 교계의 울타리를 벗어나 이처럼 워싱턴 한인사회 전반을 대표하는 지도적 인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이민교회 목회자로서의 본분과 사명에 한평생 충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지역민들의 의견이다. 즉 "교회는 이민사회의 구심체여야 하며 이민교회 목회자는 이민자들의 아픔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이민사회의 논리를 몸으로 실천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이 목사의 목회여정을 돌아볼 때 그의 목회는 교회뿐 아니라 항상 한인사회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구체적 예로 중앙시니어센터와 중앙복지상조회의 설립을 꼽을 수 있다.

     연장자 교육기관 시니어센터와 장례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복지상조회는 교회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지만 혜택은 한인사회 전체에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 교회 출석 여부에 관계 없이 일정 연령에 달한 한인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특히 회원들이 자신들의 사후를 대비해 생전에 기금을 적립하는 복지상조회의 경우 이원상 목사와 중앙장로교회라는 신뢰할 수 있는 후원처가 없었다면 한인사회에 뿌리내리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목회자로서 이원상 목사 개인에 대한 평가 역시 무척 긍정적이다. 무엇보다 그에게서 대형교회 담임목사들이 흔히 지니기 쉬운 권위주의적 요소를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특징이다. 교인수 4,000-5,000명에 달하는 대형교회 담임목사면서 은퇴하기 전날까지 교인들을 직접 심방다녔으며, 교인들과 거리감을 없애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음은 한인사회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교회 강단에서의 설교와 기도만으로 이민자들의 아픔과 외로움을 함께 나눌 수는 없다는 것이 이 목사의 신념이다.

     이 목사는 또 워싱턴 지역에서 가장 큰 한인교회 담임목사로서 분주한 일정에도 불구 중소형 교회 목회자들과 친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해 왔다. 동시에 교계 연합사업이나 각종 한인사회단체들이 벌이는 사업도 적극 후원해왔다. 중소형 교회들을 배려해 지역 언론에 중앙장로교회를 광고하는 것도 자제했다.

     비기독교 신자뿐 아니라 많은 교인들로 하여금 목회자에 대해 회의를 품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인 금전문제에 있어서도 이원상 목사는 한평생 정도를 걸어왔다는 말을 듣고 있다. 출장비로 사용하고 남은 페니 하나까지도 교회에 반납했으며, 교회 외부에서 받은 사례금은 교회에 헌금하거나 SEED선교회에 선교비로 보냈다고 한다.

     중앙장로교회 교육관 신축 공사를 할 때 성도들의 건축 헌금이 부진하자 자신의 은퇴연금구좌(IRA)를 해약해 전액 헌금했으며, 개인 용도로는 종이 한 장 교회 것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교인들은 말한다.

     간혹 부부가 함께 출장을 떠나는 경우 이 목사와 사모의 경비를 엄격히 구분해 부인몫은 별도로 부담했다고 한다. 지난해 이 목사가 중앙장로교회 담임목사직을 물러날 때 교회에서 받은 은퇴사례비 10만 달러도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푼도 사용하지 않았다. 1만 달러는 십일조로, 5만 달러는 건축헌금으로 다시 교회에 헌금했고, 나머지는 두 자녀의 목회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나누어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목사는 최근 한국과 미주 한인교계에서 가장 큰 이슈의 하나로 등장한 북한인권문제에도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 북한인권법안의 미의회 통과와 북한선교는 이 목사의 중요한 기도제목이다. 동족의 아픔을 외면할 수는 없으며 외면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다. 지난 4월 워싱턴DC에서 거행된 북한자유의 날 행사에서는 북한인권 회복을 위해 전세계인의 양심에 호소하기도 했다.

     목회자로서 "받는 것 보다 주는 것이 행복하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앞장서 실천하고 있는 이원상 목사는 본인의 3대 목회 철학을 기도, 겸손, 충성으로 정리한다. "은혜를 구하는 것은 기도며 은혜 받은 자는 겸손과 충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즉 자기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니 겸손해야 하고, 그 은혜를 구하기 위해 기도해야 하며, 기도하여 은혜를 받은 자는 당연히 최선을 다해 충성해야 합니다."

     어린 아들을 산기도에 동행하고 다닐 정도로 신앙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고 이성봉 장로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이원상 목사의 고교시절 꿈은 의사였다. 적도의 성자 슈바이처 박사를 존경했던 그는 의사면서 목사로 활동했던 이일선 목사처럼 신학과 의학을 병행하려 했지만 "오직 하나님만을 선택하라"는 선친의 가르침을 따라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후회는 없고 오직 감사함뿐이라고 한다. 한인목회자로는 유일하게 2002년 미연방하원 개원기도를 맡는 명예를 누리기도 했다.

     이원상 목사의 앞으로 남은 꿈은 선교에의 헌신이다. 자신이 대표로 있는 SEED선교회를 더욱 확대 활성화시키고 선교사들을 훈련시키는 데 주력할 생각이다. 특히 의료선교에 대한 꿈은 강렬하다. 고교시절 제2의 슈바이처를 꿈꾸었던 이 목사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이민교회와 이민사회를 위한 목회자로서 이원상 목사의 진짜 사역은 어쩌면 이제부터인 셈이다.

     이원상 목사 인터뷰

     -평생 중요하게 지켜온 목회원칙이 있다면?

     "다른 목회자들처럼 훌륭한 담임목사님 밑에서 목회훈련을 받지 못하고 곧바로 담임목사로 목회를 시작했다. 나 자신에 대한 부족함을 많이 느꼈다. 어려운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는 기도생활을 가장 중요한 목회원칙으로 삼았다."

     -흔히 교회를 이민사회의 중심이라고 말한다. 워싱턴에서 가장 큰 교회를 담임하면서 이민사회에서 교회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우선 교회로서 지역사회와 동포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시민권 신청 및 시민권자들의 투표 참여를 유도해야 하며 지역사회 봉사활동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할 필요가 있다."

     -지금 한국교회는 위기상황이라고 말한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무엇이라고 보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는 과거 일제 36년과 6·25 동란 등 위기를 겪으며 성장해왔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물질적, 정치적 고난에서 해방되면서 교계에도 안일한 신앙의 자세가 자리잡게 됐다. 교회가 너무 권위주의적인 현상도 문제라고 생각된다. 특히 담임목사들의 권위가 지나치게 큰 모습이다. 목회자들이 예수님이 보여준 섬기는 삶의 의미를 생각해야 된다."

     -목회자로서 한인사회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해외선교의 가장 효율적인 수단 중 하나는 의료선교다. 한국의 세브란스병원이나 동산병원 등 기독교 계통 병원들은 소속 의사들이 해외 의료선교를 나가도록 여건을 마련해주고 있지만 미주 한인사회에는 그같은 기독교계통의 병원이 없는 게 현실이다. 미주한인교회나 크리스찬들이 중심이 되어 세브란스 병원 같은 기독교 계통 병원을 설립했으면 한다."

    고 이원상 목사님의 장례 일정 

    고별예배 12월 9일(금) 오후 7:00,  와싱톤중앙장로교회(KCPC) 제 1 예배실

    발인예배 12월 10일(토) 오전 10:00, 와싱톤중앙장로교회 제 1 예배실

    하관예배 12월 10일(토) 정오 12:00, Fairfax Memorial Park 중앙동산

    * 설교 :  류응렬 목사,  노창수 목사,  Joseph Lee 목사

    * 금요일 예배 후에 viewing이 있고, 토요일은 예배 전 오전 9시부터 viewing이 가능합니다.

    * 연락: 조상우 목사 703-939-7898 / 교회 사무실703-815-1200

              SEED International 연락처:  703-586-8925

    * 조화와 조의금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 핸드폰 App으로 통역이 제공되기에 필요하신 분은 개인 이어폰을 가져오시면 됩니다.

    와싱톤중앙장로교회

    The Korean Central Presbyterian Church

    15451 Lee Hwy

    Centreville, VA 20121 USA.

    703-815-1200 (교회)  




    이원상 목사는 1968년에 신학공부를 위해 미국에 왔다고 한다. 지난 45년간의 미국생활을 회고해 달라고 했다.

    이원상 목사: 제가 물론 1968년도에 미국에 올 때는 다른 목적이 아니고 김포공항을 떠날 때 한국에서 바꿔주는 돈이 200불 바꿔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댈러스 텍사스에 있는 댈러스 신학교에 4년간 공부하기 위해서 장학금을 받아서 왔지요. 그때는 전혀 미국에 오래 영주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고 그 당시 댈러스 신학교에 재학할 때 댈러스에 한인들이 (지금은 한 5만 명 가까이 된다는데) 그 당시에는 300명 정도가 있었고 그나마도 파크랜드 병원에 간호사들 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민자들이 많이 오심으로 참 미국에도 목회자가 필요하다는 것, 교회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정착한 게 여기까지 왔네요.

    이원상 목사가 와싱톤중앙장로교회로 오게 된 동기도 들어보자!

    이원상 목사: 와싱톤중앙장로교회는 원래 1973년도에 윤명호 목사님이 설립하셨는데 4년 지나시고 난 다음 교회를 떠나시게 됐습니다. 제가 왔을 때는 1977년에 처음 왔고 그때 교회 어려운 일로 인해서 교인들이 많이 흩어지고 소수 사람들이 남아서 그때부터 2003년까지 26년 동안 워싱톤중앙장로교회를 담임하게 됐습니다.

    당시 한인 이민자들의 수가 적었던 시절 한인과는 떨어질 수 없는 음식 김치, 이원상 목사에게 이민 초창기 김치와 관련해 회고해 달라고 했다.

    이원상 목사: 물론 댈러스에 있을 때는 전혀 한인들과 접촉이 불가능했고 신학교에도 단지 김호식 박사 가정과 저희 두 가정이 있었으니까? 그런 애로가 많았지요. 그런데 워싱턴에 77년도에 와서 부터는 이곳에 김치 집이라고 한인 가게가 있어서 불편은 느끼지 않았네요. 댈러스 있을 때는 한국 음식을 잘 먹지 못해서 캐비지(CABBAGE)로 김치를 만들어 먹던 그런 생각이 납니다.

    이원상 목사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 철학 박사 학위를 따냈다. 철학박사 학위를 따기까지 과정도 들어본다.

    이원상 목사: 제가 원래는 한국에서 올 때 미국서 공부해서 한국으로 돌아가서 대학이나 신학교에서 가르칠 마음이 있었고 그렇게 공부를 해 왔는데 워싱톤 중앙장로교회에 부름 받은 것은 1977년도인데 제가 그때 필라델피아에 있었습니다. 댈러스 신학교를 졸업하고 필라델피아에 있는 유니버시티 펜실바니아에서 구약 신약 공부로 박사 학위를 공부하고 있었을 때였는데 이 교회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특별한 당권적인 역사로 제가 공부를 중단하고 워싱톤 중앙장로교회에 와서 목회하는 동안에는 공부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일단 2003년도에 은퇴한 후에 제가 한 5-6년 동안 본격적으로 공부했는데 영국 웨일스 있는 유니버시티 웨일스에서 철학박사 공부를 했는데 그 공부한 내용이 기독교 초대 교회의 교부 가운데 한 명인 존 크리소스 톰이라고 407년에 돌아가신 분인데 우리 성경에서 말하는 안디옥 교회를 담임으로 목회를 했고, 그 후에는 지금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에 와서 교부가 됐던 유명한 , 바로 그분에 대한 연구와 제가 26년동안의 목회를 비교연구해서, 목회 원리는 1600년이라는 간격이 있지만 동일하다는 것을 연구를 해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게 2010년도에 받았으니까? 제가 72살 때 받았습니다.

    이원상 목사가 박사 학위를 받으러 영국에 갔을 때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다.

    이원상 목사: 글쎄 대부분 우리 교회는 65세에 은퇴를 하는데, 은퇴하고 난 다음에 제가 이 연구에 몰두했기 때문에 그나마 26년 동안 목회하던 그 목회의 정신이 이어져 갔다고 생각이 되고 2010년 7월에 박사학위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는데 그 이민국에서 저보고 영국에 왜 오느냐! 그래서 졸업식에 참석을 위해 온다고하니까? 너의 아들이나 손자 졸업식에 오느냐! 그래서 그게 아니고 제가 늙어서도 공부 해서 제가 졸업을 한다고하니까? 그분들도 놀라면서 웃더라고요.

    이원상 목사가 한인 젊은이들에게 주는 충언이다.

    이원상 목사: 나이들어도 뭐든지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다. 시작이 반 이라고 하는 것처럼 벌써 학위를 받고도 수년이 지났는데요. 이제는 공부하는 연령이 높아지니까? 젊은이들도 낙심하지말고 포기하지 말고 무엇이든 목적을 가지면 할 수있다는 것이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이원상 목사는 수년 전부터 워싱톤 한인 라디오 방송(AM 1310)에서 이른 아침 설교를 하고 있다. 이 목사는 특히 북한동포, 탈북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이원상 목사: 물론 제가 아침 방송 하는 게 10년은 넘었는데요. 처음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탈북자들에 대한 고충 또 북한의 사정들을 들으면서 정말 우리가 남다르게 한 민족이라고 그러는데 우리가 언젠가 때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로 통일되고 마음놓고 살 수 있는 날이 왔으면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생각하는 건데 특별히 탈북자들의 고충을 생각하고 북한의 사정을 와서 말씀하는 것들을 들으면서 그래도 한마디의 기도를 통해서 방송을 듣는 사람들의 뜻을 모으고 그런 날이 오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역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시작하게 됐는데 얼마나 오래됐는지 저도 기억이 안 나지만 수년이 지난 것 같습니다.

    이원상 목사는 7 순이 넘은 지금도 시드 선교회를 이끌고 있다. 시드 선교회에 대한 설명이다.

    이원상 목사: 원래 제가 목회하면서 우리 교회 청년들 중에 선교에 뜻을 두고 나가겠다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때 이 청년들을 선교 단체로 보내야 하는데 우리가 미국땅에 와서 교회가 왕성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계시다 생각해서 우리 한국 선교단체가 있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해서 우리가 1989년도에 중앙장로교회 자체에서 만든 기관이 CMF(CENTRAL MISSIONARY FOLLOWSHIP)이라는 단체로 버지니아에 등록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10여년 지나면서 너무 자기교회 중심적이다고해서 뉴욕에 있는 뉴욕 장로교회에서 세운 ROW(RICH OUT TO THE WORLD)라는 단체와 같은 이념이기 때문에 둘이 병합을 해서 2000년부터 시드(SEED)라고 하는 이름으로 선교사를 모집해서 훈련시키고 파송하는 기관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2000년도부터 지금까지 은퇴한 후에도 이 기관을 섬기고 있는데 지금은 시드 USA, 시드 KOREA, 시드 브라질, 시드 캐나다 이렇게해서 나가있는 선교사 수가 한 130가정 한 36개국에 나가서 섬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한인 선교기관으로서 미국내에서 유일하게 선교사 연합회인 MISSIO NEXUS기관에 속해 있습니다.

    시드 선교회가 북한에 선교사를 파견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이원상 목사: 그렇지요.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렀고 1907년에 평양 대 부흥운동으로 인해서 전 한국이 영적으로 깨어나던 때라고 생각이 되는데 지금은 문이 닫혀 있기 때문에 선교사 파송은 못하지만, 물론 북한에 지하교회도 있고 선교활동도 비밀리에 하고 있다고 믿는데 그분들은 생명을 걸고 하는 선교하는 거지요. 우리 시드 선교회에서도 북한선교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북한에 직접 들어가서 하는 선교사들은 없고 다만----

    전 세계 한인들 많이 퍼져 나가 살고 있다. 혹 기독교적 영향 때문이냐고 물었다.

    이원상 목사: 한인 디아스포라가 700만명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전혀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물론 사회학자들의 설명도 있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건 하나님이 우리 백성을 세계에 보내는거다 그리고 한인들이 가 있는 곳에는 교회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한인 선교사들도 지금 2만 3천 3백명 정도가 되어서 미국 다음으로 혹은 브라질 다음으로 한국이 선교사 파송 국가로서 전 세계 2위내지는 3위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뜻이라고 봅니다.

    자유아시아방송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72살에 철학박사 된 이원상 목사의 이야기로 함께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교역사

    성경의 중심은 예수님이다. 창조로 시작된 인류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종결이 되는데 창조의 타락에서 부터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인류의 역사의 핵심은 전도이고 선교이다. 그 이유는 복음이 결국은 전파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교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된다.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요한복음 5:39)라고 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는 이유는 아직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같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아직도 구원받을 사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별계시인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기록인 것이다. 그래서 아더 그레스라는 성경전체는 선교사의 책이라고 했다. 그는 기록하기를 "구약과 신약 전체 성경은 선교사 책이다. 왜냐하면 신구약 66권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선교적인 계획이 처음부터 마지막 까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선교적인 관점에서 해석해야만 하나님의 바른 뜻을 깨닫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성경을 하나님의 관심인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선교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의 바른 목적,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을 명확하게 깨닫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선교적 해석학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성경을 선교적인 관점, 잃은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전체 성경을 해석하면 성경전체는 선교적인 책이다.

    유명한 영국인 잔 스타트 목사의 후임인 크리스토퍼 라잇은 "성경의 선교적인 해석은 성경자체의 존재와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성경본문들과 우리의 창조자 하나님의 자기계시와의 사이에 어떤 관계성이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성경전체 경전이 선교적인 현상이다"고 했다. 요약해서 말하면 성경전체를 해석함에 있어서 선교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풀어나가야만 성경의 참된 의미를 깨닫을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성경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교의 산물이며 또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난 이후 예수님이 오시고 예수님이 다시오실 때 까지 전체 인류의 역사의 핵심은 이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아담아 어디에 있느냐고 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성경전체에서 관점이 이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성경을 바라보어야 한다.

    선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선교의 주인이시다. 그래서 선교의 출발점은 하나님으로 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동산에 숨어있는 아담을 찾아가 부르시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선교의 근원이 하나님으로 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데이빗 부쉬는 남아프리카에 있었던 선교학자이며 후에는 프린스톤신학교에서 가르쳤는데 도중에 자동차 사고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성경적인 선교에 대해 권위가 있는 분이다.

    이 분이 쓴 책을 보면 "선교는 근본적으로 교회가 하는 활동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활동이다. 선교는 교회가 선교하는 것 같지만 실지로는 하나님이 하시는 활동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교사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구원의 선교를 세상에서 성취하는 것은 교회가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교회를 포함해서 아버지를 통해서 아들과 성령님의 선교이다"고 했다. 이분이 강조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교회가 선교하고 전도하는 것은 교회는 다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쓰임 받는 하나의 도구가 되는 것이고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선교의 주인이시고 복음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이다.

    안경을 통해서 내가 바르게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복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교의 주인이시고 교회는 주인되신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여 쓰임을 받는 하나의 도구이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오늘날 하나님의 목적인 선교를 이루는데 날을 잘 세워서 아름다운 도구로 쓰여지는가 아니면 무딘 도구로 쓰여지는가. 그것이 오늘의 이땅에 있는 교회의 사정이다.

    미국교회가 40만개가 있다는데 한 교회에서 선교사 한사람을 파송한다면 40만 선교사가 미국에서 나가야 할텐데 미국 선교사의 수는 10만정도로 4개 교회에서 한사람을 파송하는 것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선교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선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가 있기 때문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선교가 교회보다 먼저 있었다는 말이다. 에덴동산에서는 교회가 없었다. 선교가 먼저 있어서 선교를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로 하나님이 교회를 부르시는 것이다. 만약에 교회들이 하나님의 복음사역에 목적을 완성하는 도구로서의 쓰임을 받는다면 한국의 6만교회가 2만3천명 선교사가 파송되었는데 한교회가 한명의 선교사를 파송한다면 6만명이 나가야 한다.

    오늘날 세계선교의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하면 교회들로 하여금 교회의 진정한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이다. 교회안에 여러가지 활동이 있지만 전체의 조직구조적인 목적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선교를 동참하는 것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움직임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을 보내시는 근본이시다. 선교는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출발이고 교회는 다만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기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예수님을 주셨고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의 복음을 완성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을 완성했다. 제약회사를 예를 들면 췌장암 치료가 어려운데 연구하고 실험하여 마침내 약이 개발되었다면 문제는 널리 팔아야 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을 완성하셨다면 복음은 결국은 영원히 멸망하는 병을 고치는 약이다. 약은 널리 전파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보면 교회는 복음이라는 죽음의 병을 고치는 약의 세일즈맨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선교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잔 스타트는 "선교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에서 부터 우리의 마음에 전달되는 것이다. 선교는 세계적인 하나님이 세계적인 인류를 향한 세계적인 복음전달"이라고 했다. 그래서 잔 스타트 목사는 살아있는 하나님은 선교하는 하나님이시라고 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교사로 부르셨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선교의 주인이 되신다. 첫 번째 하신 일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교사로 부르신 것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다. 선교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선교적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여 메시야를 보내시는 과정에서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선교적인 사명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면서 축복이 모든 민족에게 전달될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통해 만민을 축복하시고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온세계에 하나님을 전하는 선교사로 부르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씨인 이삭을 허락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시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만민에게 전할 선교적인 사명을 주셨다. 출애굽기 19:6에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제사장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부르신 이유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온 세계에 하나님을 전하라는 것인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교적인 사명을 거절했다. 골든코넬신학교 부총장 있다가 은퇴한 월터 타이저 교수는 "시편 67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선교적인 사명을 주신 것을 확인하는 시편"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시편 67편)"

    우리는 선교가 신약에 와서 이루어진 줄 알지만 하나님은 선교의 주인이신데 이스라엘 백성을 선교사로 부르신 것이다. 시편 67편에 나와 있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할 뿐 아니라 이방을 향한 선교적인 사명도 버린 것이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했다면 하나님의 역사는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선교적인 부름에 불순종한 이스라엘은 오늘날도 고통을 당하고 있다.

    아이를 잃어버렸으면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아기를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시다. 예수님의 99마리의 양을 우리에 두고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온 세계에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전하는 선교적인 사명을 주신 것이다. 그런데 그 사명을 거절하고 메시야까지 죽였다. 계시록 7:1-10을 보면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는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선교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하나님의 선교에 순종하는 것이 최선의 복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교사이다.

    선교사는 문화와 언어와 지역의 장벽을 넘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위해 보냄을 받은 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하늘 보좌를 떠나 낮고 천한 땅에 첫 번째 선교사로 오신 것이다. 그럼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범적인 모델 선교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갈라디아서 4:4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라고 하신 것 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교사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시키신 것도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하신 것은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교사이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보내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떠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타문화권에 완전히 적응하셔서 그 사람들 중의 하나로 사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이 오시기 740년 전부터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언함으로 그리스도의 선교적인 사명을 알린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그대로 주님은 우리 가운데 오셨다.

    요한복음 1: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을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얼마나 진실되게 새문화권에 완벽하게 적응하셔서 그들의 언어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다만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해 탄식할 뿐이셨다.

    예수님은 오셔서 선교적인 삶을 사신 것이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그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선교적 삶의 원리를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서 말한다. 그리스도의 겸손과 순종과 복음의 성취를 보여준 것이다. 이와 같은 삶의 본은 주님의 3년간의 제자훈련의 원리가 된 것이다. 예수님이 본을 보이시는 원리는 요한복음 10장에서 나는 선한 목자이라고 하신데서 알 수 있다.

    선교사는 복음의 메세지를 삶을 통해서 전달하는 자이다.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인 구속자의 값을 보혈로 지불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복음을 완성하신 것이다. 상품으로 말하면 판매가 가능한 완전한 상품이 된 것이다. 이제는 이 구원의 복음이 땅 끝까지 구원받을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이 남은 사역이다. 주님은 이일을 위하여 교회를 세우실 것을, 성령님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고 승천하신 것이다.

    성령은 선교의 능력이시다

    조지 피터스 교수는 성령님은 선교의 경영자이시다고 했다. 하나님은 선교가 능력있게 교회를 통해 역사하시도록 성령님을 보내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위에서 우리의 빚을 다 갚으셨다. 다른 말로는 복음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완성된 복음은 이제 상품이 된 것이다. 이것을 판다는 의미에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달하고 세일즈맨과 같은 그런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교사의 모델이시다. 말씀이 육신되셔서 우리가운데 거하시고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 영광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가는 곳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원의 복음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낮아지셔서 우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은혜와 진리를 알게하시는 것이 곧 선교의 본질적인 과업인 것을 본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럼으로 선교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교는 완성이 되어가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말씀은 주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오셔서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하시고 그 본을 본받아서 우리도 섬기는 종으로서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널리널리 복음이 팔려서 복음을 받고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데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신 것이다. 성령은 선교의 능력이시다. 이제는 예수님이 완성하신 구원의 복음을 선교적인 차원에서 복음이 선교적으로 능력있게 나타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은 교회가 선교가 가장 필요로 한 것이다. 성령은 기도를 통해서 오는 것이기에 시드선교회에서도 중보기도의 사명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성령은 선교의 능력이시다.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예수님은 이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는 선교적인 사명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시면서 이일은 반드시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고 말씀하셨다. 사도행전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신 것은 성령의 능력은 곧 선교의 능력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으면 선교는 불가능한 것이다.

    조지 피터스 박사는 성령의 선교적 역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본적으로 궁극적으로 선교사역은 성령님께 위임된 것이다. 궁극적으로 성령님의 구원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것이라면 이 구원의 복음이 실질적으로 경영되고 구체화되는 일을 위해서는 성령님께 의지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궁극적으로 선교사의 과업은 성령께 위임된 것이다. 구원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서 시작된 것처럼 구원의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본인에 의해서 얻어진 것처럼 구원의 경영과 실현이 성령께 위임된 것이다. 성령만이 구원이 갈보리 십자가위에서 참된 경험적으로 얻어지게 할수있다. 성령은 구원뿐만 아니라 선교의 현재 경영자이시다."

    조지 피터스는 처음으로 "성령님은 선교의 경영자이시다"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를 위해서 성령에 의지해야 하는데 그것은 기도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성령께서 선교의 경영자 되심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다. 그러므로 선교의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와 순종으로 성령님께 의존할 때 성령의 능력으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임을 선교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상에 파송하신 선교사이다

    교회는 예수님이 파송하신 선교사이다. 예수님의 선교전략은 제자를 양육하여 교회를 설립함으로 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그리고 땅끝까지 전파하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이 파송하신 선교사이다. 교회안에는 교육, 친교, 찬양 등 여러가지가 다 있지만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되는 것이다.

    리디머 처치 팀 켈러 목사가 최근에 쓴 책을 통해 수십 년 목회의 결론을 나누었는데 복음이 교회의 생명이라고 강조했다. 교회가 운동이 필요한데 결론적인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선교적인 삶을 살도록 양육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성도들이 선교적인 삶을 살도록 훈련시키고 양육시키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말이다.

    교회는 예수님이 파송하신 선교사이다. 제자를 양육하여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예수님의 선교전략이었다. 마태복음 28장, 마가복음 16장, 누가복음 24장, 요한복음 20장등 4복음서의 결론은 예수님이 제자를 양육해서 보내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가되 성령님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라이슨은 교회를 선교적인 사명을 가진 교회로서 소개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세상이 보내신 첫 번째 선교사로서 십자가에서 그래서 사명을 완성하시고 다 이루셨다고 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남은 선교적인 과업을 교회에 위임하신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이 파송하신 선교사이다.

    예수님은 33년의 지상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의 바른 본을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그리스도가 남긴 본을 따라오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신 것은 제자도의 원리 곧 모델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복음 선교의 과제는 교회가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 선교를 해야 하는 것이 가장 본질적인 교회의 사명인 것이다.

    74 로젠 모임서 선포된 것은 모든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백성들의 사명은 하나님의 선교를 헌신적인 사명으로 출발하고 마쳐야 하는 것이다. 패트릭 쟌스터는 "교회는 당신이 생각한 것 보다 더 큽니다"라는 책에서 선교가 없는 신학은 성경적인 신학이 아니며, 선교가 없는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가 아니며, 선교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참제자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남은 삶을 선교적인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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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의 '황태자'로 불렸던 영국의 찰스 스펄전은 평생 일주일에 6권 정도, 거의 매일 1권의 책을 읽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오전에는 항상 독서를 했다.

    교회 역사에서 최고의 설교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19세기 영국의 찰스 스펄전(1834~1892)과 20세기 영국의 마틴 로이드 존스(1899~1981)라고 대답할 것이다.

    설교의 황태자 스펄전의 설교문은 그가 21세이던 1855년부터 매주 발간돼 세계 여러 지역 서점과 신문 가판대에서 1페니에 판매되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1892년까지 1800만부나 팔렸다.
    매주 1편씩 간행된 설교문은 해마다 한 권의 책으로 발간됐고, 스펄전의 사후 1917년 1차대전으로 종이가 부족해 인쇄할 수 없을 때까지 63년간 계속돼 63권의 설교집으로 남아있다.

    복음주의 신학자 제임스 패커는 그의 유명한 책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1855년 스펄전이 한 설교를 한 페이지 이상 길게 소개하면서 극찬한다.
    스펄전의 63권 설교집에 담긴 3500편 이상의 설교들은 매주 읽으면 60년 이상, 매일 읽으면 10년 정도 걸린다.
    양과 질에 있어 교회사 최고의 설교집이다.

    20세기 로이드 존스는 강해설교의 왕자다.
    로이드 존스가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주일 오전마다 약 8년 동안 설교한 에베소서 강해서 8권과 1955년부터 1968년까지 매주 금요일 저녁에 약 14년간 설교한 로마서 강해서 14권은 강해설교의 금자탑이다.
    로이드 존스의 강해설교는 20세기 후반 영미권과 우리나라의 수많은 설교자의 권별 강해설교의 모범과 모델이 되었다.

    이렇게 최고의 설교자로서 쌍벽을 이루는 스펄전과 로이드 존스에게는 놀라운 공통점이 하나 있다. 둘은 오늘날로 치면 정식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지 않았다. 스펄전은 17세에 목회를 시작했기 때문에 최종 학력은 농업고등학교 졸업 정도였고, 로이드 존스는 의대를 졸업하고 의학박사가 됐지만 신학교에서 공부한 적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위대한 설교자가 된 것일까. 그 비결은 독서를 통한 폭넓은 신학 공부였다.

    스펄전과 로이드 존스는 각각 당대 최고의 독서가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목사였던 스펄전은 아주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는데, 목회자가 된 이후 평생 40여년 동안 일주일에 6권 정도, 거의 매일 1권 정도의 책을 읽었고, 자신의 서재에 있던 1만 2000권의 책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한다. 스펄전은 ‘주해와 주해서’라는 책을 통해서는 3000~4000권의 책을 읽고 선별, 또 선별해 66권 성경 각 권에 대한 최고의 책들을 추천하는 목록을 제시하기도 했다. 스펄전의 설교 비결은 엄청난 성경공부와 1만권 독서를 통한 신학 공부였다.

    로이드 존스도 마찬가지였다. 로이드 존스는 평생 오전에는 독서를 했고, 휴가 때는 두꺼운 전집류의 책을 읽으면서 평생 성경공부, 신학 공부를 지속했다. 스펄전과 로이드 존스는 둘 다 훌륭한 주석가요 조직신학자요 교회사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통합적인 목사 신학자들이었다.

    미국의 찰스 시므온 트러스트라는 설교 교육 기관의 대표인 데이비드 헬름이 쓴 ‘강해설교’는 강해설교가 무엇인지를 간결하고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이 책의 핵심은 강해설교는 먼저 성경 본문을 주해해서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발견하고, 그다음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을 통해 성경 전체에 비추어 이해하며, 마지막으로 우리 상황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장점은 성경 본문의 해석에서 적용에 이르는 과정에 있어 성경주해와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설교에 있어 성경주해 성경신학 조직신학의 중요성을 아는 것이 좋은 강해설교의 승패를 가른다. 야구 경기에 비유하자면 강해설교는 성경 본문에서 출발해 성경주해라는 1루, 성경신학이라는 2루, 조직신학이라는 3루 베이스를 거쳐 적용이라는 홈으로 들어와야 한다.

    헬름이 말하는 강해설교의 이론은 스펄전과 로이드 존스의 사례를 통해 강력하게 입증된다. 교회사의 모든 훌륭한 강해설교자들도 마찬가지다. 헬름의 강해설교에 대한 견해는 내가 그동안 경험하고 가르쳐온 것과도 일치한다. 나는 신학교 졸업 이후 지난 30여년 동안 내가 읽고 공부한 성경주석과 성경신학서와 조직신학서, 그리고 일반 학문과 교양서에 비례해 내 설교의 내용도 점점 좋아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언할 수 있다.

    나와 함께 동역했던 많은 목사들의 경험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좋은 설교자가 되는 길은 주경신학 성경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의 5중 신학을 평생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해왔다. 우물에 가 숭늉 찾아서는 안 된다. 좋은 선수, 좋은 무술가, 좋은 예술가, 좋은 기술자, 좋은 학자가 되는 비결은 모두 동일하다. 선천적인 재능에 더해 반드시 시간과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좋은 설교자도 마찬가지다.

    좋은 설교는 설교학 책을 몇 권 읽거나 설교 세미나를 몇 번 참석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평생에 걸쳐 매일 성경공부와 신학 공부에 쏟은 피와 땀의 양에 비례해 좋은 설교가 이루어진다. 좋은 설교에는 성경과 신학에 대한 평생 공부에 더하여 기도와 성령의 조명과 감동 감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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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후회(後悔)(사무엘상 15:11)



    하나님의 후회(後悔)(사무엘상 15:11)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질문) 하나님이 후회하실까?

    후회(나함. nâcham. נָחַם ) / 슬퍼하다, 불쌍히 여기다

    한탄하다(창 6:6,7), 후회하다(삼상 15:11,35, 렘4:28), 위로받다(삼상 13:39, 겔 14:22,시 77:2), 회개하다(욥 42:6), 뜻을 돌이키다(시 106:45, 렘 18:8, 욜 2:14), 뉘우치다(렘 31:19, 슥8:14), 변개하다(삼상 15:29), 돌아오다(시 90:13), 변하다(시 110:4), 보응하다(사 1:24), 위로하다(룻 2:13, 사 51:3, 렘 16:7), 안위하다(창 5:29, 슥 1:17), 조상하다(삼하 10:2, 대상 19:2), 긍휼히 여기다(시 135:14),풀다(창 27:42). [명] 위로(창 24:67, 겔 16:54),위안(시 119:76), 조객(삼하 10:3), 조문사절(대상 19:3), 위로자(욥 16:2, 전 4:1),
    안위(사 54:11), 후회(민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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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후회에 대해서 언급하는 두 개의 본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아 홍수의 원인에 대해 설명하는 창세기 6:6과 불순종하는 사울을 향한 하나님의 실망감을 담고 있는 사무엘상 15:11

    창세기 6:6절을 보도록 하자.
    개역이나 개역 개정판은 “(하나님이)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6)라고 번역한다.

    그런데 영어 번역은 조금 다르다:
    “And the LORD was sorry that He had made man on the earth, and He was grieved in His heart”(NASB);
    “The LORD was grieved that he had made man on the earth, and his heart was filled with pain”(NIV);
    “And the LORD was sorry that He had made humankind on the earth, and it grieved him to his heart”(NRSV).

    이 세 가지 영어 번역에 기초한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뉘우치고 후회(한탄)하신 것이 아니라 땅 위에 인간을 창조하신 일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셨다는 얘기가 된다.
    인간의 행동에 대하여 섭섭하게 또는 안타깝게 생각하셨다는 얘기다. 슬픔이나 배신감을 느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 점은 본 절의 후반부에 있는 “마음에 근심하시고”또는 “마음 아파하시고”(표준새번역)에 의해 충분히 뒷받침된다.

    사무엘상 15:11도 마찬가지이다.

    개역과 개역 개정판은 하나님이 사울을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신다고 번역하나, 영역본들은 히브리어 원문에 충실하게 하나님이 사울을 왕 삼은 일을 유감으로 생각하셨다고 번역한다:
    “I regret that I have made Saul king”(NASB); “I am grieved that I have made Saul king”(NIV); “and it grieved him to his heart”(NRSV).

    앞의 홍수 관련 본문에서처럼 하나님은 사울이 한 일들로 인하여 슬퍼하시고 그러한 일을 행한 사울을 안타깝게 생각하셨다는 얘기가 된다. 결코 하나님이 인간처럼 이랬다저랬다 하는, 변덕스러운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두 구절은 주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근심과 걱정, 그리고 그러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유감스럽고 서글프고 안타까운 마음을 인간적인 언어로 실감나게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후회에 대해 언급하는 본문들을“이전의 잘못을 뉘우치신다”는 사전적인 의미에서의 후회 개념으로 읽는다는 것은 너무도 부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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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하나님께서 '후회'를 하시는가?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 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 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 함이니라 하시니라(창 6:6-7)."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셨다고 들었거든여..
    하나님께선 이미 창세 전에 후회하실 것을아시고 사람을 지으셨나여? 좀 이해가 안되네여!

    민수기 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신명기 32:3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고 그 종들을 인하여 "후회"하시리니 곧 그들의 무력함과 갇힌 자나 놓인 자가 없음을 보시는 때에로다.

    사무엘상 15:11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 하셨더라(삼상 15:35)."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사자를 보내셨더니 사자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사자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 곁에 선지라(대상 21:15)."

    예레미야 4:28
    이로 인하여 땅이 슬퍼할 것이며 위의 하늘이 흑암할 것이라 내가 이미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하였은즉" 또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로다.

    렘 20장 16절에서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로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예레미야 42:10
    너희가 이 땅에 여전히 거하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니라"
     

    하나님께서도 후회를 하시나요?


    1. 한 나라 말을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하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러한 일은 히브리어나 헬라어로 된 성경을 우리 말로 번역할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질문하신 예를 보면 우리가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2. "후회한다"는 말은 히브리어 "니함"이란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대부분 "후회한다"는 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한 가지 뜻이 아니라, "가엾다, 동정하다, 위로받다, 후회하다, 슬퍼하다, 안심하다, 편케하다, 한탄한다, 뜻을 돌이킨다"는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맥을 잘 살펴서 이 단어가 그 문맥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말 성경의 경우 이 단어를 대부분 후회로 번역함으로 때로 문맥의 흐름을 어색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질문하신 구절에서 이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고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 하사(창 6:6-7)  이 구절에서는 니함이란 단어를 "한탄하셨다"(심히 슬퍼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끝까지 하나님을 거역하였으며, 그 결과로 사람들의 죄악은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의 모습에 대해 깊은 슬픔을 느끼고 한탄하셨습니다. 


    2) "하나님은...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민 23:19)."  이 구절에서는 "니함"이란 단어가 "후회"라는 뜻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택한 백성에 대한 언약을 철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발람 선지자는 궤계를 써서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몰아 멸망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기는 했지만, 그들과 맺은 언약을 취소하지는 않았습니다.


    3) "여호와께서...그 종들을 인하여 "후회"하시리니 곧 그들의 무력함과 갇힌 자나 놓인 자가 없음을 보시는 때에로다(신 32:36)."  이 구절에서는 "니함"이란 단어가 "가엾게 여기다, 동정하다"란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은 자비가 많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자기 백성을 죄로 인해 징계하신 후에 그들을 가엾게 여기고 동정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징계로 인해 무력해지고, 포로가 되어 갇히고, 종이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그들에 대해 깊은 동정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결국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다시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4)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 하노니(삼상 15:11)..."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 하셨더라(삼상 15:35)..."   이 두 개의 구절은 니함이란 단어가 "슬퍼하다, 한탄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경우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안 사무엘 역시 슬퍼하며 근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대상 21:15) 이 구절에서 니함은 고통 받는 자기 백성을 보고 하나님께서 징계를 철회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의미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6) "내가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하였은즉" 또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로다(렘 4:28 ."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렘 20:16 "   이 구절들은 니함이 "후회하다, 돌이킨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니함은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되어 나타날 때는 항상 그 언약이 불변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7)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니라(렘 42:10)."   이 구절에서는 니함이란 단어가 우리 말 성경 번역대로 "뜻을 돌이킨다"는 의미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이 경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들의 죄로 인해 징계하신 후에 그들이 받는 고통과 부르짖음을 보고 징계를 거두기로 작정하셨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니함이란 단어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이 되고 있으며, 따라서 다음과 같이 각 문맥에 따라 가장 적절한 의미를 선택해야 합니다.


    1. 나함이 인간의 완악함과 타락과 연결되는 경우에는 이 말은 크게 슬퍼하다, 탄식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합니다.

    이 경우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참고 기다려 주시다가 결국 그들을 징계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을 때에 한탄하고 슬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나함이 이미 징계를 받고 고통하는 하나님의 백성과 연결되는 경우에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고통받는 자기 백성을 보시고 그들에게 "동정심을 느낀다"는 경우
    두번째는 그들의 고통이 극심한 것을 보고 징계를 철회하기로 "뜻을 돌이키신"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1번과는 반대로 징계를 받던 백성이 징계의 기간이 끝이 나고 다시 은총의 때가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나함 하나님의 언약과 연결되어 나타나는 경우에는 하나님의 언약의 불변성을 강조하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을 옳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이 단어를 후회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하나님의 백성의 패역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과 맺은 언약은 무효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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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마다 지난 삶을 돌이켜 볼 때 후회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후회(後悔)란 이전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무지한 존재이다.
    따라서 살아오면서 판단미숙과 계산착오로 씻을 수 없는 실수를 하므로 후회스런 과거를 갖고 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결코 후회를 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민수기 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사무엘상 15: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시편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예레미야 4:28

    이로 인하여 이 슬퍼할 것이며 위의 하늘이 흑암할 것이라 내가 이미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하였은즉 또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로다.

    에스겔 24:14

    나 여호와가 말하였은즉 그 일이 이룰찌라 내가 돌이키지도 아니하며 아끼지도 아니하며 뉘우치지도 아니하고 행하리니 그들이 네 모든 행위대로 너를 심문하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히브리서 7:21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사람처럼 이전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쳐야 하는 후회가 없으시다.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후회하시고 뉘우치셨다’(Lord repented: “여호와께서 후회하셨다”, “주께서 유감스럽게 생각하셨다”, “야훼께서 뉘우치셨다”, “주께서 회개(悔改)하셨다”)라고 무려 열 번이나 말씀하셨다(창 6: 6, 출 32: 14, 삿 2; 18, 삼상 15: 35, 삼하 24: 16, 대상 21; 15, 시 106: 45, 렘 26: 19, 암 7: 3-6, 욘 3: 10).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여섯 번이나 말씀하셨는데, 열 번이나 “여호와께서 후회하셨다”고 했다면 성경이 잘못되거나 성경기록이 잘못된 것인가?

    야훼 하나님이 후회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비통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인간의 언어로 설명했을 때에 표현이지 결코 하나님이 계산착오나 판단력부족으로 실수를 하셔서 그 일을 후회하셨다는 말씀은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신 후에 후회하실 정도로 지혜나 지식이 부족한 분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후회와 뉘우치심’은 하나님의 통탄(痛歎)탄식과 통초(痛楚)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성경에 열 번이나 “야훼 하나님이 후회하셨다, 주께서 뉘우치셨다”고 하신 것은 크게 네 가지 후회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천사와 인간의 타락 때에 후회하심(창세기 6:6)
    둘째, 주의 종들의 중보기도를 보실 때에 후회하심(출애굽기 32:14)
    셋째, 개인이 회개하고 슬피 부르짖으며 악한 길을 떠날 때(사사기 2:18, 시편 106:44-46, 삼하 24:16, 대상 21:15, 렘 26:19, 욘 3:10)
    넷째, 사울의 불순종과 멸망을 보실 때(사무엘상 15:35)

    첫째, 천사와 인간의 타락 때에 후회하심(창세기 6:6)

    창세기에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들을 홍수로 심판하실 당시에 하나님의 심정을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恨歎)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했다.

    아담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할 때도 한탄하거나 근심하거나 후회하지 않으셨던 하나님이 노아 600세 때인 아담 창조 1656년, 지구촌을 홍수심판하시기 바로직전, 지구에 인간들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하신 것이다.

    우리말로 표현한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것을 땅을 치며 통곡하셨다’는 말인데, 이것은 사랑하는 자식이 살인죄나 국가반역의 중죄를 짓고 부모가 보는 앞에서 사형을 당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보아야 하는 부모의 참담한 심정처럼 하나님의 마음이 ‘차라리 인간들을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며 마음을 아파하며 후회하셨다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인간창조를 한탄하시고 근심하셨는가?
    하나님이 사람 지으심을 후회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창세기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음으로 그들이 육체가 됐기 때문이라”(Because(For that) he also is flesh: “그 이유는 그(천사들)가 육체가 됐기 때문이다”; 창 6: 2-3)고 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들’(The sons of God)을 하늘에 있는 천사(天使)들로 세 번이나 기록했다(욥 1: 6, 2: 1, 38: 7)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 창조를 후회하시고 근심하시며 한탄하신 것은 하늘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여야할 천사들이 지상으로 내려와 지상의 여인들과 성적방종을 탐닉하여 네피림 거인들을 낳으므로 천사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그들이 육체가 됐기 때문에 천사들과 인간들을 홍수심판으로 멸망시켜야 했으므로 후회하셨다는 말씀이다.

    훗날 베드로는 이 사건을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다”(벧후 2: 4-5)고 첨가하여 설명했고, 예수님의 친 동생이며 속사도인 유다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를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천사들)와 같은 모양으로(About them in like manner) 간음(姦淫)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Giving themselves over to fornication, and going after strange flesh)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으므로 거울이 되었다”고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다른 색(Strange flesh)의 헤테로스는 자연스러운 남자와 여자의 결합 같은 것에 반대되는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또는 천사와 여자의 성교(性交)같은 “별스럽고 이상한 종류의 다른 색욕”을 의미함; Another of a different kind: Men with men and women with women and angels with women, all living contrary to nature)

    이렇게 베드로와 유다는 모세가 기록한 ‘천사타락’의 사건기록을 더 충실하게 보충해서 설명했다. 그렇다. 천사들의 타락은 ‘원천지의 루시퍼 타락’이 아니라 또 다른 천사들의 타락이다. 루시퍼가 아닌 또 다른 높은 지위의 천사가 자기 졸개 무리를 데리고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The angels which kept not their first estate) 자기 처소인 하늘을 무단이탈하여 지상으로 내려와서 세상의 여인들을 보고 무차별로 그 몸을 탐닉하며 성적으로 타락했던 천사였다. 사도 요한은 그때 타락한 천사의 우두머리를 아바돈이라고 했고, 아바돈을 추종해 땅으로 내려와 여인들과 타락에 빠졌던 천사들을 황충 귀신이라고 했다(계 9: 1-11)

    이 말씀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천사들과 여자들의 다른 색을 탐닉한 성적인 타락이었고, 더 중요한 것은 오늘날도 다른 색을 따르는 것은 육체적 타락과 영적타락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색을 따르는 육체적 타락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사이에 있는 동성연애와 인간과 짐승사이의 있는 수간(獸姦)이다.

    이제 미국의 동성애문제는 14개주가 동성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수준을 지나 오바마가 이것을 전적으로 지원하는 연방정부지원 수준까지 올라왔고, 이것을 미연방대법원이 확인해 주는 사법절차를 밟은 상태고, 유럽이나 한국 일본 중국 세계 모든 나라에 숨어있었던 동성애자들이 공개적으로 Coming out하는 시대가 됐고, 유럽에서는 고등학생들에게 성교육을 가르치기 위해 공공연하게 사람과 짐승의 성교를 시연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제 지구촌은 노아시대처럼 천사들이 지상에 내려온다면 여자뿐 아니라 남자들까지도 서슴없이 ‘다른 색’에 빠져버릴 음란하고 더러운 시대가 됐다. 남은 것은 하나님의 불 심판뿐이다.

    다른 색을 따르는 영적타락

    베드로의 가르침

    1.  예수의 피로 자기들을 사신 것을 부인하는 종교다원주의에 빠지는 것과 멸망케 할 각종 이단에 빠지거나 이단을 받아들이는 것
    2.  많은 사람 특히 목사들까지 음탕과 호색하는 것을 좇는 것(Many shall follow their pernicious; “많은 사람들이 해롭고 사악한 음탕함과 호색을 좇을 것이다”. ‘좇으리라’, 엨사콜루데수신: “대단히 밀접하게 따라가는 것”)이라고 했다.

    유다의 가르침

    1. 영적인 직분을 맡은 자들이 자기 지위(Their first estate; 제 일급 되는-으뜸 되는 자기들의 신분과 처지)를 떠나고 지키지 않는 것
    2.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의 욕구를 따라서 동성연애로 자기육체를 더럽히는 것(Defile the flesh)
    3. 하나님과 예수님의 권위(Dominion-통치권, 퀴리오테타: “주권”)를 업신여기는 것
    4. 영광을 훼방하는 것(Speak evil of dignities; 영광(榮光, Dignity): “거룩함, 품위, 고귀함, 존엄”, 돜사스는 “천사들을 지칭”함)이라고 했다. 모세의 율법을 사람들에게 전달했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를 유지시키는 존재(행 7: 38, 53, 히 2: 2)인 천사들을 멸시하고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분리시키고 율법을 악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영광을 훼방하는 행위’였는데, 유다 당시 거짓 교사들은 천사들을 멸시하였다(유 1: 9, 10) 

    하나님은 아바돈 천사가 자기 졸개 천사들을 데리고 몰래 하늘을 탈출하여 지상으로 내려와서 사람의 딸들을 보고 무분별하게 성적으로 타락한 것을 보시고 그들을 홍수로 심판하실 것을 계획하시면서,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고 마음에 근심하시며 후회하셨다. 그리고 21세기 오늘날, 세상뿐 아니라 교회까지도 동성애로 타락한 것과 ‘예수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에 미혹된 현대교회와 영적지도자들이 자기 지위를 벗어나 있는 것, 그리고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기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는 것을 보시고 지구촌 인류의 심판을 생각하시면서 하나님은 후회하시고 계신다. 이런 때에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는 우리만이라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효자성도가 되고 충성된 종과 성도가 되어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홍수심판에서 구원받은 노아 가족처럼 심판의 날에 구원받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둘째, 주의 종들의 중보기도를 보실 때에 후회하심(출애굽기 32: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아모스 7:3, 6에서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고 가라사대 이것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모세를 향해 하셨던 하나님의 후회는 모세가 40일을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있을 동안에, 아론을 충동질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이스라엘을 진멸하고, ‘모세를 통해 큰 나라가 되게 하겠다’ 생각하시고 그 계획을 모세에게 전했을 때, 모세가 범죄한 백성들의 죄를 대신 회개하며 중보기도를 할 때 하셨던 후회였고, 아모스를 향해 하셨던 후회는 하나님이 황충 메뚜기를 보내서 자라고 있는 풀을 다 먹어버리는 환상을 통해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여주셨을 때,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하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중보 기도할 때 그리고 거대한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삼키려는 환상을 통해 이스라엘의 멸망이 가까운 것을 보고 하나님께 중보기도로 부르짖어 간구할 때 하셨던 하나님의 후회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진멸하고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는 그들을 없애버리고 싶었을 때, 하나님의 종들, 모세와 아모스가 범죄한 이스라엘을 위해 대신 회개하고 그들을 위해 중보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파멸계획을 후회하시고 뜻을 돌이키셨다. 그러한 주의 종들의 중보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후회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런데 주의 종, 목사들 가운데는 자기가 사는 도시의 파멸을 막는 중보기도의 종이 있고, 카운티의 파멸을 막는 종도 있으며, 자기가 살고 있는 주(State)에서 나라의 멸망까지 막는 주의 종들이 있고, 반대로 자기 가정이나 가문의 비극은 물론 자신에게 밀려오는 저주까지도 막아내지 못하는 무능한 목사도 있다. 당신의 중보기도의 능력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

    그래서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전쟁의 위기 때마다 기도로 나라를 건져준 선지자 엘리사가 죽을병에 걸려 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 더 이상 나라를 지켜줄 방패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구국의 대부 엘리사를 찾아가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My father, my father, the chariot of Israel and the horsemen thereof; 왕하 13; 14)를 처절하게 외쳤던 것이다. 메대 파사의 아하수에로 왕비가 됐던 에스더가 “내 민족을 내게 달라”(에 7: 3, 8: 6)고 요청함으로 70만 디아스포라를 구원한 것을 보자. 그리고 16세기 스코틀랜드의 신앙과 독립을 지켜낸 청교도의 선구자 존 낙스(1513-1572)가 “스코틀랜드를 내게 달라”며 하나님께 기도한 것을 보자. 그만큼 존 낙스의 중보기도는 나라까지 지키고 보호할 능력의 기도였던 것이다.

    야훼하나님은 선지자 에스겔에게 당시 선지자들의 배역과 제사장들의 패역과 방백들과 백성들의 죄까지 이스라엘의 총체적인 타락을 통렬하게 책망케 하면서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다”(겔 22: 20)고 외치게 하셨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파멸하는 이스라엘을 위해 중보기도 하는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방백이나 백성을 찾지 못했다는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이다.

    그렇다. 하나님이 당신을 천에 하나, 만에 하나로 선택해 주의 종, 목사로 만드신 것은 백성들의 파멸과 저주와 징계채찍을 막아서서 중보 기도하라고 세운 것이다. 직업이 없어서 목사를 직업으로 세운 것도 아니고, 감투가 좋아서 목사직을 감투로 씌어준 것도 아니며,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편안한 직업이니 잠만 자라고 목사 되게 한 것이 아니다. 당신의 기도로 성도들을 살리고 가정들을 살리며 성도들의 사업도 살리고 나라와 민족을 살리라고 목사로 세우신 것이다. 당신의 중보기도로 성도들에게 내리고자 하셨던 심판을 하나님이 후회하시고, 저주를 후회하시며 파멸의 손을 거두시는 역사들이 일어나길 축원한다.

    셋째, 개인이 회개하고 슬피 부르짖으며 악한 길을 떠날 때(사사기 2:18, 시편 106:44-46, 삼하 24:16, 대상 21:15, 렘 26:19, 욘 3:10)
     

    1. 지은 죄를 뉘우치고 슬피 부르짖을 때(사사기 2:18, 시편 106: 44-46)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의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어늘.

    그러나 여호와께서 저희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 고통을 권고하시며
    저희를 위하여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많은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저희로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


    2. 인구조사를 한 후 하나님이 진노로 내리신 염병으로 7만 명이 죽게 되자 죄를 뉘우치고 부르짖어 기도했을 때(사무엘하 24:16, 역대상 21:15)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있는지라.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사자를 보내셨더니 사자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사자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 곁에 선지라.

    3. 히스기야가 여호와께 간구할 때(예레미야 26:19)

    유다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고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 생명을 스스로 크게 해하는 일이니라.

    4. 니느웨 성이 죄를 회개하며 기도할 때(요나 3:10)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그들을 향했던 진노와 저주를 후회하시고 돌이키셨다고 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물 앞에 마음이 약하신 분이다.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하고 부르짖어 기도하면 언제라도 들어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이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서로 싸우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세 아이 모두 회초리나 가죽 벨트로 손바닥이나 종아리를 때려서 싸우는 것을 화해하게 만들었고, 잘못들을 고쳐주었다.

    하나님도 죄와 실수를 핑계하거나 남에게 전가하는 사람에겐 죄를 물으시고 죄 값을 치르게 하시지만,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부르짖어 구하는 사람에겐 한없는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     

    하나님은 개인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쳐 회개하며 부르짖어 기도할 때, 그들을 향했던 하나님의 진노 계획, 저주와 재앙계획, 몽둥이 계획을 철회하셨다.

    오늘도 하나님은 아담이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죄를 전가하고 변명했듯 자신의 죄와 실수를 변명하거나 남에게 전가하지 않고 솔직하게 회개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지은 죄와 실수를 슬퍼하며 야훼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을 보실 때, 쏟아 부으려던 분노와 저주를 후회하시고 마음을 돌이키신다.

    넷째, 사울의 불순종과 멸망을 보실 때(사무엘상 15:35)

    사무엘이 죽는 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아이가 잘 생겼든 못 생겼든, 첫째 아이를 향한 부모의 사랑과 관심은 유난히 크다.
    그래서 대부분의 엄마들은 둘째 셋째보다도 첫째에게 관심이 더 많아서 첫아이는 날 때부터 젖을 떼는 때까지 육아일기도 쓰고, 아이 사진도 많이 찍으며, 첫째를 먹이고 돌보는 것이 유별나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기 혈육의 시작인 첫째 아이에게 관심이 많다.

    사울은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의 첫째 왕이었다.
    그래서 사울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유별했다.
    그런데 사울은 너무 빨리 교만했고 하나님을 쉽게 떠나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성경대로 사울은 이스라엘 초대왕으로 4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행 13: 21).
    그런데 그의 통치 2년 만에 어려움을 참지 못하는 조급한 마음과 교만으로 사사요 선지자인 사무엘이 번제를 드리기 위해 기다리라고 했는데 자기가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의 눈 밖에 난다.
    그래서 사무엘은 번제를 드린 사울에게 “왕이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고 망령되이 행하므로, 야훼하나님이 왕의 나라를 이스라엘 위에 영영히 세우시려고 했었지만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다”고 통보하였다(삼상 13:13-14).

    "사무엘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그럼에도 하나님은 사울에게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38년이나 주셨다. 그러나 교만에 빠졌던 사울은 결정적으로 아말렉을 지상에서 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에게 고통을 당하는 저주로 반미치광이, 중증 치매, 정신병자로 고생하다가 전쟁터에서 세 아들과 함께 전사당한다.

    사울이 ‘아말렉 전멸’의 하나님 명령을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한다”(It repented Me that I have set up Saul to be king: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이 후회스럽다”-I regret that I have made Saul king; 삼상 15: 11)고 하셨다. 오늘날 사람들이 가슴을 치면서 “내가 그를 국무총리로 세운 것이 후회스럽다, 내가 그를 대기업의 총수로 세운 것, 대학총장으로 임명한 것, 안수집사와 장로로 세운 것, 부목사로 음악목사로 세운 것, 내 사업경영과 가정사까지 모든 것을 맡긴 것, 내가 그를 친구로 삼은 것이 후회스럽다”고 외치는 말과 같은 말이다.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세우셨다가 그를 포기하고 버리셔야 했을 때,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이 후회스럽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날, 얼마나 많은 목사들을 보시고, 그를 유명한 부흥사로 만든 것, 큰 교회를 섬기는 대목회자로 만드신 것, 은사의 종으로 세우신 것, 유명한 목사가 되게 한 것, 뛰어난 신학자로 만드신 것을 후회하고 계실까? 그리고 사업에 성공한 장로를 만드신 것, 신유의 은사로 많은 병을 고치는 유명한 기도원 원장으로 세운 것, 가난에서 건져내 큰 축복을 받게 한 장로 권사 집사를 후회하고 계실까?
    그들이 그렇게까지 유명해지지 않았다면, 그들이 성공하여 부자가 되지 않았다면, 그들이 병 고침 받아 건강해지지 않았다면... 박태선, 문선명, 이만희 신천지이단은 되지 않았을 텐데, 그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별로 지금처럼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초라한 목사는 되지 않았을 텐데, 맛을 잃은 소금처럼 소나 말, 개나 사람에게 짓밟히는 초라한 신세는 되지 않았을 텐데...하시면서 하나님이 후회하실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지금 하나님이 우리들을 보시고 후회를 하신다면, 나를 향한 후회는 어떤 후회일까? 나를 보시고 하나님이 후회하신다면, 나는 어떤 후회에 속한 사람인가? 하늘의 아바돈 천사와 지구촌 여인들의 타락으로 세상을 심판하여 버리셔야 하듯 자기 위치를 망각하고 범죄 하므로 하나님이 포기하고 버리셔야 하는 주의 종들을 향한 후회인가? 처음엔 겸손하게 잘 순종하다가 축복을 받은 후 교만하고 불순종하므로 후회하여 사울을 포기하신 것처럼, 그들의 교만과 불순종과 회개치 않음을 보시고, 축복주신 것, 사업 잘되게 하신 것, 영주권 주신 것, 행복한 가정을 허락한 것을 거두시며 하셔야 할 후회인가? 아니면 주의 종들의 중보기도를 보시고, 당신을 그렇게 징계하여 망하게 한 것을 후회하시고 돌이키는 후회인가? 아니면 당신이 인생 밑바닥에서 질병과 저주와 절망에서 회개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므로 뜻을 돌이키시려는 후회인가?

    회개하고 울부짖어 기도하므로 풍전등화와 절체절명 위기의 운명이 하나님이 후회하시므로 죄 용서와 구원의 감격을 누렸던 예루살렘의 다윗과 히스기야와 요나의 니느웨 같은 하나님의 축복과 기적이 당신의 삶 속에 충만하게 나타나길 축원한다. 새벽마다 당신의 이름을 불러가며 당신의 안타까운 사정들을 낱낱이 아뢰며 부르짖어 기도하는 주의 종들의 중보기도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당신에게 미쳐 징계의 채찍과 몽둥이를 꺾으시고 다시 사랑과 긍휼과 인자함을 베푸시는 역사들이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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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과 상징 / 모세의 놋뱀(민수기 21:8) Nov. 03. 2021


    기독교 신앙과 상징

    기독교 신앙과 상징
    - 우리는 무엇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가?

    기호와 상징의 차이

    1. 상징(das Symbol. symbol)

    본래 가지고 있는 뜻을 정확히 부연 설명하거나 의미 전달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의 기호로 표현되어지는 것.

    2. 기호(das Zeichen. sign)

    상징을 주기 위한 하나의 신호적인 의미이므로 그 안에 아무런 의미나 뜻이 들어 있지 않다.

    예를 들면 십자가는 예수의 고난을 상징한다.
    십자가 그 자체는 하나의 예수의 고난을 상징하기 위한 하나의 기호(Zeichen)에 불과하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의 상징의 필요성

    왜 기독교는 상징이 필요한가?
    - 상징이 주는 신앙적 의미 

    신앙은 참된 하나님의 상징성을 통하여 우리가 바라보는 믿음의 대상을 의지하고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의 대상은 상징적 요소를 통하여 하나님의 실재를 대변하게 된다.

    기독교 상징을 통한 의미부여 :

    우리가 하나님의 실재를 확인할 수 없기에 우리는 상징적인 요소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부분을 투영하며 그 본체에 가깝게 의미부여하는 것이다.  

    상징이 주는 신앙의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

    긍정적인 요소

    1. 하나님에 대한 거룩성 수용

    2. 타자로서의 하나님 이해

    3. 하나님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의 가능성

    부정적인 요소

    1. 인간의 이해 방식에 따라 자의적 해석가능

    2. 인간의 경험과 이성의 한계로 인한 하나님의 사고에 대한 고착화 우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신앙의 상징적인 요소가 있는가?

    인간의 신앙의 자율성과 지속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특별히 신앙의 폐쇄성을 탈피하고 상징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와 투영을 가깝게 이해하게 하려는 것이다.

    개신교는 상징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가?
    가톨릭은 상징을 절대화하여 우상적인 요소가 있고, 개신교에서는 본질적 상징마저 잃어버린 현실의 상황이다.

    나는 신앙에 대한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참된 기독교의 상징의 회복은 예배의 회복, 신앙의 회복, 삶의 회복이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참된 신앙의 자리를 갖기 위하여 상징의 의미를 회복하여야 한다.
    상징이 고착화가 되면 우상이 될 수 있지만 상징이 사라지면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를 잃어버릴 수 있다. 특히 개신교는 상징의 신학이 회복되어야 한다. 예배, 찬양, 기도, 말씀에 대한 상징의 본질이 회복되어야 한다.

    상징을 통하여 성서와 신앙을 위한 제언

    성서는 과학적인 근거나 객관적인 자료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근거를 위한 텍스트로서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신앙인 들에게 부여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의 토대로서의 말씀이다.
    자신을 어떤 대상물이나 상징적인 의미로 표현하고자 할 때, 대부분 그 자신이 투영하는 것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과 의미와 정신이 반영되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과 그릇된 편견 또는 자의적인 해석에 따라 자신을 마음대로 신앙을 판단하고 해석하고는 있지 않는가에 대한 진정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신앙은 소유가 아니라 개방이자 열림이다.
    신앙은 자신의 삶만을 보호하는 방어막이 아니라 장애물과 난관을 헤쳐나가게 해주는 원동력이다.
    신앙을 그러한 참된 의미를 각성하게 하고 자신의 나태한 모습을 새롭게 받아들이려는 믿음의 근거이다.

    모세의 놋뱀(민수기 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The LORD said to Moses, "Make a snake and put it up on a pole; anyone who is bitten can look at it and live."

    습관적인 불평과 불만에 사로잡힌 민족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항상 잊어버리고, 어려운 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습관적인 불평을 일삼아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쉽게 망각하는 자들입니다.

    가나안을 향하는 길에 에돔 왕이 자기 영토로 이스라엘이 지나가는 것을 용납지 아니함으로 지름길을 제쳐 놓고(민 20:21),
    에돔 땅을 우회하게 되어 백성의 마음이 상하게 되었습니다(민 21:4).
    그들에게 있어서 광야 길은 육체적으로 고역스럽고 사람의 마음을 지치게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결국 인내심이 사라진 그들의 마음에 극한 분노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분노와 원망 즉 남의 탓으로 돌리는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했습니다.

    하나님은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물게 하셨고 죽음의 사건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뱀을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러한 불뱀의 습격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해결책으로 자신들의 범죄함을 인정하게 되었고 모세에게 여호와께 기도해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마음을 보시고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8절)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고 그것을 쳐다본 자들은 모두 살았다고 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얻은 사망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로 생명을 얻은 사건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 습관적으로 나오는 불평과 불만이 나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고 원망의 말을 서슴지 않고 하게 됩니다.
    죄를 지을 때 마다 나에게 찾아오는 불편한 마음과 평안을 깨트린 상황에서는 무엇을 해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나에게 찾아오는 감정은 분노, 짜증, 우울, 고독이 밀려옵니다.
    결국 감사가 없는 마음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인내심의 결여는 나에게 영적으로 큰 손해를 입히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모든 것의 원인을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모든 상황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나에게 임하게 됩니다.

    나의 잘못된 생각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던 것을 회개하며 내 삶을 돌이킬 때에 성령님이 내 마음 가운데 임하셔서 평안과 안식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을 바라본 것처럼 나또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인생의 여정을 나 혼자가 아닌 성령님과 함께하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 많은 적을 이기게 하신 것,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보호하신 것,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것,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신 것 등은 기억하지 않고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민수기 21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로 인해 마음이 상해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뱀에게 물린 자마다 쳐다본즉 살더라

    하나님은 원망에 가득 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불뱀이 천막 안을 기어다니고,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 죽어갔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애원했습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제발 불뱀을 떠나게 해주소서!”

    모세가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불뱀을 떠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 뱀을 쳐다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으로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습니다.
    성경에는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뱀에게 물렸는데 놋뱀을 쳐다보면 어떻게 삽니까?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이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6)

    성경에 등장하는 단어들에는 저마다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포도주는 기쁨을 나타냅니다.
    기쁨이 있는 곳에는 포도주가 등장합니다.

    기름은 성령을 나타냅니다.

    금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은은 구속의 대가를 나타내며, 놋은 심판을 나타냅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심판받은 뱀’을 나타냅니다.
    불뱀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고, 그 불뱀이 심판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고, 죄가 심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구원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과 그의 아들이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버지, 놋뱀을 쳐다보면 산대요. 놋뱀을 쳐다보세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몸에 독이 퍼져서 고통스러워 죽겠는데 놋뱀을 쳐다본다고 살 리 있냐?”

    “아버지, 쳐다보세요.”

    “글쎄, 헛소리하지 마라니까!”

    “아버지, 그래도 한번 쳐다보세요.”

    “그만하라잖아!”

    “안 됩니다. 그러다가 아버지 죽습니다. 제가 강제로라도 아버지가 놋뱀을 보시게 하겠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놋뱀이 있는 곳까지 모시고 가서 얼굴을 들어 쳐다보게 했습니다.
    그러자 몸 안에 있던 뱀의 독이 사라졌습니다.

    “이거 진짜 신기하네! 놋뱀을 쳐다보니까 몸이 싹 나았다!”

    구원은 아주 간단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해서 불뱀이 왔지.
    죄로 인해 불뱀이 온 거야.
    놋뱀은 그 뱀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니 우리 죄가 심판을 받았다는 의미구나. 그러면 죄가 끝났네!’
    십자가는 단순히 기독교를 표시하기 위해, 혹은 보기 좋으라고 다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쳐다보십시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 죄가 심판받은 곳입니다. 죄가 끝나고, 저주가 끝나고, 심판이 끝나고, 고통이 끝난 곳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가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고통하다가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내 죄를 사하셨지!’


    아리우스 가문의 반지

    ‘벤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등장인물인 벤허멧살라는 어릴 적에 친구였는데, 유대인인 벤허와 로마인인 멧살라는 자라면서 다른 이념을 가져 서로 원수가 됩니다.

    멧살라는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호민관이 되어 유대로 돌아온 뒤 벤허를 로마군 함선에서 노를 젓는 노예로 만듭니다.
    얼마 후, 로마의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 아리우스가 해적들을 소탕하려고 함대를 이끌고 바다로 나가면서 벤허가 노를 젓는 배에 탑니다.

    곧 로마군과 해적들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싸움 중에 아리우스가 바다에 떨어집니다.
    그 광경을 본 벤허가 바다로 뛰어들어 아리우스를 구해 부서진 배의 큰 나무판 위에 올려놓습니다.
    아리우스가 정신을 차려 자신의 배가 불길에 휩싸인 것을 보고는 자결하려고 하는데, 벤허가 그의 팔을 잡아 칼을 빼앗습니다.
    잠시 후 함선들이 몰려오고, 아리우스는 해적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배들이 가까이 와서 보니 로마군 함대였습니다.
    아리우스가 배에 올라가자 한 장군이 ‘배 두 척만 잃고 해적들을 전멸시켰다’고 보고합니다.

    로마로 돌아간 아리우스벤허를 양자로 삼고,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인장반지를 벤허의 손가락에 끼워 줍니다.
    벤허는 어머니와 여동생 생각에 유대로 돌아가서 멧살라를 만나러 갑니다.
    가기 전에 “아리우스의 아들로부터”라고 적은 선물을 멧살라에게 보냅니다.
    멧살라가 선물을 보고 “집정관 아리우스에게 아들이 있었나?” 하자, 옆에 있던 장교가 최근에 양자로 삼은 아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때 벤허가 나타나 멧살라가 깜짝 놀랍니다.

    “네가 무슨 요술로 아리우스의 아들이 되었지?”

    “요술의 주인공은 바로 너다! 네가 나를 노예선으로 보내 내가 전쟁터에서 아리우스를 구했다.”

    그러고는 “표식은 알겠지?” 하고 서판에 인장반지의 문양을 찍어 멧살라에게 보여 줍니다.
    벤허가 이전의 벤허가 아닌 로마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집정관의 아들이기에 멧살라가 쩔쩔맵니다.
    벤허가 말합니다.

    “내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소식을 알려다오. 그러면 모든 걸 잊겠다.”

    “그건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허가를 받아내!”

    벤허가 아리우스의 아들이 되어 가문의 반지를 껴도 그 능력을 모르면 멧살라에게 여전히 수모를 당해야 했겠지만, 벤허는 ‘아리우스 가문의 인장반지’가 가진 힘을 알았습니다.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라

    십자가에는 힘이 있습니다.
    사탄이 자주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너, 거짓말했잖아! 너, 나쁜 짓 했잖아!”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로 우리를 슬퍼하고 괴로워하게 만듭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근심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쉬지 않고 우리를 정죄합니다.

    “네가 죄를 지었으니까 하나님이 너를 미워하고 벌하고 버리실 거야!”

    그때 우리가 놋뱀을, 십자가를 쳐다보는 것입니다.

    ‘사탄아, 맞아. 내가 죄를 지었어. 하지만 저 십자가 앞에서는 죄가 죄가 아니야. 저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가 사해졌어. 거기서 죄가 끝났어! 심판이 끝났어!’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 고통하다가 놋뱀을 쳐다보면 모두 나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이 죄로 인해 우리를 조소하고 괴롭힐 때 십자가를 바라보면 그 고통에서 해방됩니다.

    “너, 거짓말했잖아!”라고 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어! 거기에서 내가 거짓말한 죄가 끝나고 모든 죄가 끝났어!’ 하면 됩니다.

    성경은 확실히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가 지은 죄의 기록이 없습니다. 본래 가지고 있는 뜻을 정확히 부연 설명하거나 의미 전달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의 기호로 표현되어지는 것.

    2. 기호(das Zeichen. sign)

    상징을 주기 위한 하나의 신호적인 의미이므로 그 안에 아무런 의미나 뜻이 들어 있지 않다.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피로 모두 도말塗抹했습니다. 어디에도 우리를 정죄할 자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모든 죄를 눈처럼 희게 씻었습니다.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속죄함 받은 것 아니요
    거룩한 하나님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이 찬송을 옛날에는 입으로 불렀지만 이제는 마음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우리의 선한 행위로도 아니고, 노력이나 수고로도 아니고,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우리 죄를 씻었는지 가르쳐 주시기 위해 성경 구석구석에 구원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아놓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해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다가 놋뱀을 쳐다보고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이 성경 이야기를 내용만 압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거기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됩니다. 놋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십자가에서 끝났습니다. 심판받을 죄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죄에서 해방되어 참된 자유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마음에서 저주가 끝나고 고통과 슬픔이 끝나 밝게 삽니다. 사탄에게 속아서 죄를 지었을 때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저기서 내 죄의 심판이 끝났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쁘고 즐거운 삶을 값 없이 은혜로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이 복음을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모세의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한다.


    모세의 놋뱀(민 21:9)은 타우형(헬라어 T자) 십자가라고 한다.
    이 십자가는 예로부터 모세가 광야에서 치켜들었던 십자가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모세의 놋뱀(민 21:9)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하기 때문에 이 십자가는 예언(의) 십자가라고도 불린다.
    타우형 십자가는 축 늘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힘겨운 어깨를 상기시킨다.
    가로막대와 교차하는 세로막대의 윗부분이 생략된 모습은 십자가의 고통을 한층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예수는 자기의 십자가 죽음을 예언하고, 영적 의의를 모세 때 있은 놋뱀 사건을 인용하여, 부활의 예수를 바라봄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하였다.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고 요한복음 3장 14~15절에 나타나 있다.

    요르단에서 꼭 가봐야 할 역사적 기독교 유적가운데 하나는 해발 835m의 느보산이다.
    눈치 챘겠지만 모세의 출애굽 여정 중 마지막 기착지이기 때문이다.
    40년 광야생활을 청산한 모세는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가나안 땅을 조망하고 숨을 거둔다.(신 32:49)

    모세기념교회 옆 전망대에 서면 멀리 사해와 예리코(여리고) 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으면 예루살렘의 올리브산(감람산)까지 보인다고 한다.
    4세기 비잔틴제국 시대에 모세의 무덤위에 지었다고도 전해지는 모세기념교회는 지금도 그 교회 터가 남아 있다.
    이 교회 정원에는 이탈리아 조각가 지오반니 판토니의 ''모세의 지팡이'' 작품이 세워져 있다.
    놋뱀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복합시킨 작품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에게 불평하여 불뱀이 그들을 물었다.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을 낫게 하기 위해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로 놋뱀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을 장대에 매달고 그것을 보는 자는 살게 된다고 민수기 21장에 기록되어 있다.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본 자는 모두 치료됐다.
    나중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우상으로 섬기게 됐는데, 히스기야는 이것을 부숴 버렸다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열왕기하 18:4)고 기록돼 있다.

    모세는 40년간 광야를 헤매다 결국 가나안 땅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느보산에서 가나안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숨을 거뒀다.
    느보산에 거대하게 세워진 모세의 지팡이 ''놋뱀''이 은혜를 잊고 하나님을 원망하다 불뱀에 물려죽은 이스라엘 백성의 ''어리석음''을 닮지 말라고 오늘도 경고하고 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 21:9)."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놋 뱀 사건을 예수께서 니고데모와 대화중에 자신에게 닥칠 사건과 비교하여 언급하신 내용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이 분분하기에 서로 비교하고 그 해답을 찾아보기로 하자.

    다섯 부류의 주장이 있다.

    1. 전통적 주장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놋 뱀을 달게 하여 이를 쳐다본즉 뱀에 물린 자가 살게 되었으므로 놋 뱀은 예수의 십자가를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놋 뱀을 예수라 할 수 없으니 여호와께서 은혜의 선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모순(矛盾) :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가 십자가를 쳐다봄으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으라(마 16:24) 하였으며 육체와 합하여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매달아야(갈 5:24)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뱀은 무엇인가?
    뱀에 대한 해명이 뒤따라야지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은혜로 포장하고 있다.

    2. 일부 주장 (1)

    놋 뱀은 사탄이므로 사탄이 매달렸으니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내 자신 안에 있는 사탄의 속성을 독배로 마시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모순(矛盾) : 예수는 죽을 권세도 있고 살 권세도 있어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려고(롬 8:2, 갈 4:5) 바리새인들의 손을 빌어서 죽으신 것이지 사탄의 독배를 마신 것이 아니다.

    3. 일부 주장 (2)

    놋 뱀은 예수님이다.
    놋 뱀 사건은 예수님 십자가 사건의 상징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놋 뱀에 대하여 무엇이라 분명하게 말하지 않으므로 '놋 뱀이 예수이다' 주장하는데 주장하는 이유로는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도 뱀같이 지혜롭게 하라 했으니 뱀을 예수라 주장한다.

    모순(矛盾) : 뱀은 사탄이다.
    뱀같이 지혜롭게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신중하라(프로니모스)고 하셨으니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뜻이지 뱀을 지혜롭다고 오역한 부분을 가지고 뱀과 예수를 동일시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신중하고 순수하라는 것은 방법이 선해야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는 당부이다.

    4. 전통적인 주장 (2)

    어떤 주장도 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입장으로 침묵하겠다는 부류가 있다.

    모순(矛盾) : 해답을 내놓지 않고 있음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해석과 주장이 있어 오늘과 같은 혼란을 초래하였다.

    5. 새로운 주장

    놋 뱀사탄이지 예수님이 될 수 없다.
    놋 뱀 사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가 아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의 상황이다.
    그 해답은 요한복음 3장 14절에 있다(스타우로스 원어성경연구원).

    요한복음 3장 14절 번역에 문제가 있어 다시 번역한다.

    "그리고 모세가 광야 안에서 뱀을 높인 것같이 이같이 인자를 높이게 됨이 마땅하다(요 3:14)."

    뱀을 들었다는 것은 매단 것으로 보았고 인자가 들려야 하는 것도 십자가 사건으로 보았기에 내용이 풀리지 않고 꼬이기 시작했던 것인데 든 것이 아니라 높인 것이다.

    아래에서 동일한 단어가 사용된 예를 살펴보자.

    높이다(5312, 휘프소오)에 대한 고찰

    휘프소오(
    hüpsŏō) ὑψόω
    1. 높이 올리다.
    2. 높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5312)(마 23:1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5312)(눅 1:52)."

    "무리가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삶은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에 이르도록 머무신다고 들었는데도 당신은 어찌하여 인자를 높임을 받아야(5312) 한다고 말하느냐? 이 사람의 아들이 누구냐?(요 12:34)."

    사도행전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혹시 내가 너희가 높임을 받게(5312) 하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내가 죄를 지었느냐?(고후 11:7)."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의 삶을 높이실 것이다(5312)(약 4:10)."

    예수님을 높임 받게 한 사건은?

    예수님이 높임을 받는 전제 조건은 낮아짐이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낮아졌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를 높이시는 부활과 승천의 영광을 주신 것이다.
    우리에게도 주시는 동일한 은혜의 말씀은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의 삶을 높이실 것이다(5312)(약 4:10)."
    십자가의 죽음까지 자신을 낮추면 주께서 높여 주신다는(5312)약속이다.

    광야에서 뱀을 높였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고린도전서 10:7-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씩 죽었고 시험하다 뱀에게 멸망하였고 원망하다가 멸망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러다간 다 죽이게 생겼기에 뱀(사탄)을 깃대(닛시) 위에 높이고 이를 쳐다봄으로 살도록 하여서, 구세주 예수를 보내시기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서 종살이하게 두신 것이다.

    이후 이스라엘은 뱀(사탄)을 높인 깃발을 들고 행진하기 시작하여 가나안에 들어갔고, 이후 히스기야 왕 이전까지 산당에서 분향하며 섬기고 있었으나, 여호와께서 놋 뱀을 파기하라 명한 적이 없었다는 점을 유념하여 볼 필요가 있다.

    놋 깃대는 히스기야 왕에 의해 부서지게 된다(열왕기하 18:3~4)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 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왜 하나님께서는 뱀(사단)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맡기신 것인가?

    포도원인 이스라엘을 맡겨 두심(사 5:7)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눅 20:9~15)."

    유대인들 : 마귀 자식

    "어찌하여 내 말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씀을 들을 수 없음이로다. 너의 삶은 마귀인 아비에게서 난 삶이니 너희 아비의 정욕을 너의 삶도 행하려 하는구다. 저는 시작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안에 없으므로 진리 안에 서지 못한 것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면 자기 삶에서 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의 아비가 거짓말쟁이더라(요 8:43~44)."

    서기관 바리새인 : 후견인과 청지기

    "내가 또 말하나니 상속자가 모든 삶의 주인이지만 미숙아로 있는 기한에는 아무도 종에서 옮겨 가지 못한다. 오히려 아버지의 작정함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도다. 이와 같이 우리도 미숙아로 있는 기한에 세상 초등 학문 아래서 종살이 당하고 있더니 기한의 충만이 이르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율법 아래 속하여 아내에게서 낳아 내어 보내셨으니 율법 아래 있는 삶을 속량하려 함이요, 나의 삶이 아들의 명분을 쟁취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에 이르고자 내어 보내사 아버지 아빠라 외치게 하셨느니라(갈 4:1~6)."

    뱀이란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뱀은 창세기 3장 1절에서 처음 등장하며 창세기 3장 15절에서는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이며 뱀의 후손은 머리요, 여자의 후손은 발꿈치로서 서로 상하게 할 것이라 하였으며 마태복음 4장에서는 예수를 시험하는 자로 등장하며 요한계시록 20장 2절에서는 옛 뱀, 마귀, 사탄, 천하를 꾀는 자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어디 한군데도 뱀이 예수를 예표하는 성구는 없다.

    은 히브리어로 '5175(스트롱번호) 나하쉬'라 하는데, 동사 '5172 나-하쉬 : 점치다'에서 유래한다.
    동의어로는 '5173 나하쉬 : 점, 예지력'
    '5174 네하쉬 : 놋쇠, 구리'
    '5178 네호세트 : 청동, 놋쇠'

    놋 뱀이란 뜻은 히브리어로 '네하쉬(뱀) 네호세트(놋) :
    예지력 있는 점쟁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기어 다니는 뱀의 히브리어 이름은 '텓트'이지만 성경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나하쉬
    (뱀)은 예지력을 가진 자, 점쟁이로 언급하고 있다는 데 주의해야 한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구원 계획을 미리 수립하시고 각 날에 해당하는 시나리오를 정하셔서 그 과정을 학습하고 통과하게끔 하시고 일정한 날에 메시아를 보내 주셔서, 죄와 사망의 법에 붙여서 종살이하면서 믿음으로 낮아지고 순종하는 자들을 해방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쟁취하고 하나님나라를 상속하는 데까지 높이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하시는 말씀이다.


    느후스단 우상 (열왕기하 18:1~4)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경제 살리기에 나서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각 나라를 순방하며 국제 외교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상징적으로 농민들과 함께 모내기를 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행동은 “내가 앞으로 이 나라를 다스릴 때 이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만큼 한 나라의 통치자가 취임하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성군 중 하나라 일컫는 히스기야 임금은 아버지 아하스의 뒤를 이어 25세에 왕에 오르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우상 타파였습니다.

    이것은 “내가 앞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길 일은 바로 우상을 타파하고 하나님만 섬기는 나라로 만드는 일이다!” 하고 선포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전국에 있는 산당(山堂)을 제거하고 각종 우상들을 깨뜨려 없애는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산당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 위에 우상을 섬기기 위해 세운 집들인데 이 산당이 이스라엘 전국에 산마다 널려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얼마나 우상 숭배가 만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신(男神)인 바알 신과 여신(女神)인 아세라를 비롯해 정말 수많은 종류의 우상을 섬겼는데 그 가운데 히스기야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당시 ‘느후스단’이라 불리던 특이한 우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모세가 만든 놋뱀입니다.

    민수기 21장 4절부터 보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다가 길이 멀고 험하니까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어떤 원망을 했나 들어볼까요? 5절에 나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한 마디로 애굽에서 잘 살고 있는 우리를 왜 이런 황량한 광야로 끌고 나와서 죽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여기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다며 불평합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주셨지만 백성들은 만나를 보고 “이 하찮은 음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하찮은 음식 싫다는 것입니다.
    애굽에 있을 때 살려달라고, 우리를 해방시켜 달라고 아우성치던 것은 또 언제고 이제 와서 “왜 애굽에서 잘 살고 있는 우리를 여기까지 끌어냈냐”고 불만입니다.

    광야에서 처음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주실 때는 환호하고 감격하더니 이제 와서 “이따위 하찮은 음식”에 이제 질렸다고 투덜거립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신 것 다 잊어버리고 지금은 뭐가 없다, 뭐도 없다, 뭐가 불편하다며 원망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는 오늘 우리에게서도 종종 나타납니다.
    과거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리는 영적 건망증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홍해를 갈라 건너게 하신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와서 부족한 것만 보이고 불편한 것만 보이니 원망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미 받은 놀라운 은혜는 다 잊어버리고 지금 없는 것, 부족한 것, 불편한 것만 보는 배은망덕한 죄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하고 찬송은 잘 부르는데 정작 지금까지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그 한량없는 은혜와 도우심은 다 잊어버리고 삽니다. 

    이미 베풀어 주신 것에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지금 뭐가 부족하다고, 뭐가 불편하다고 투덜거리며 원망하기에 급급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영적 건망증에 걸린, 배은망덕한 사람들을 어떻게 하실까요?

    그 벌은 불뱀들을 보내 백성들을 물게 한 것입니다.
    불뱀은 한 번 물리면 몇 분 만에 즉사하는 맹독을 지닌 독사 종류입니다.
    특히 사막에 사는 독사는 더 독합니다.
    미국 사막지역에 사는 방울뱀은 물리면 수십 분 내에 즉사합니다.
    하나님은 무서운 맹독을 지닌 불뱀을 보내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어 죽이게 한 것이지요.
    이대로 간다면 모든 백성들이 다 뱀에 물려 죽게 생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잔인한 분이 아닙니다. 자비의 하나님이시지요. 그래서 백성들이 회개하자 모세에게 뱀에 물린 자가 살 방법을 일러 주십니다. 바로 놋으로 불뱀의 모양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매달게 하고 그 놋뱀을 보는 자는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때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고 살아난 사람들은 “이제 다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자” 하고 교훈을 얻게 끝냈어야 하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놋뱀을 소중하게 보관한 것입니다.

    민수기에는 놋뱀을 보관했다는 말이 안 나오지만 이 놋뱀이 세월이 흘러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보관되었다는 것을 보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이 놋뱀을 보관했을까요?

    놋으로 만들었으니 무게도 만만치 않을 텐데 그 힘든 광야생활에서도 이 놋뱀을 끝까지 보과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그 까닭을 충분히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신기했던 것입니다. 이 놋뱀 자체에 무슨 신비한 힘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 내가 불뱀에 물려 다 죽어갈 때 장대 위에 달린 이 놋뱀을 한 번 쳐다보기만 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해지더라구요.”

    사람들은 너무나 신기해하면서 이 놀라운 힘을 지닌 놋뱀을 잘 보관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놋뱀을 아예 우상으로 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마 병이 들면 그 놋뱀 우상 앞에 가서 분향(향으로 제사 드림)하며 그 신기한 힘으로 고쳐달라고 빌었겠지요.

    아무튼 히스기야 임금은 왕이 되자마다 이 놋뱀 우상을 부수어 버립니다.
    다른 수많은 우상도 부수었는데 특히 이 놋뱀 우상을 부순 것을 본문이 기록한 데는 뭔가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상은 우상일 뿐

    첫째로, 히스기야가 이 놋뱀 우상을 부순 후 그 이름을 ‘느후스단’이라고 부릅니다.

    ‘느후스단’은 히브리 말로 ‘놋조각’이라는 뜻입니다.
    전에는 이 놋뱀 우상을 뭐라고 불렀는지 모릅니다.
    아마 ‘전지전능하신 뱀님’ 이런 식으로 불렀겠지요.
    하지만 이 놋뱀을 부숴버린 후 히스기야는 그 이름을 ‘느후스단’이라고 짓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존재하고 있을 때야 이름을 붙이는 것이 당연하지만 부수어 버린 후에 이름을 짓는 것은 이해가 안 갑니다.
    마치 형산강 다리가 멀쩡하게 서있을 때는 이름도 안 붙이다가 다 철거해서 없어진 다음에야 이름을 ‘형산강 다리’ 하고 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여기에는 신실한 믿음을 가진 히스기야 임금의 깊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느후스단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교훈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느후스단’이란 ‘놋조각’이라는 뜻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이름은 이 놋뱀이 무슨 신비한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병을 고쳐주는 그런 능력을 가진 신이 아니라 그저 ‘놋조각’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상은 돌조각, 나무 조각, 쇳덩어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돌로, 나무로, 쇠로 만든 우상이 무슨 힘을 가지고 있거나 내 소원을 들어줄 리 만무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똑똑히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갓바위 부처 앞에서 기도하면 대학입학 시켜준다고 열심히 비는 사람들, 그것은 바위에 새겨놓은 돌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돌덩어리가 어떻게 내 소원을 들어주고 내 자녀를 대학에 들여보내 준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엎드려 절하는 대웅전의 부처상은 쇳덩어리에 불과하고, 우리가 지성을 드리는 영험한 바위와 영험한 나무는 바윗돌과 나뭇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에 붙이고 몸속에 지니고 다니는 부적은 붉은 글씨가 쓰인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무생물인 나뭇조각, 돌덩이, 쇳조각이 내 소원을 들어주고 종잇조각이 나를 지켜준다는 말입니까?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 한 분 만이 우리의 소망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응답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오. 우상은 돌덩이, 쇳조각, 나뭇조각에 불과합니다. 그 우상은 나를 고쳐줄 수도, 나를 지켜줄 수도, 내 소원을 들어줄 수도 없습니다.

    교회 안의 우상

    둘째로, 느후스단은 본디 장대 위에 단 놋뱀이었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보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바로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요한복음 3장 16절 정말 유명한 말씀 아닙니까? 그런데 그 바로 앞에 이 놋뱀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장대 위에 놋뱀을 달아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것처럼 인자(人子)이신 예수님도 들려야 할지니, 즉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죽어가는 사람들, 사망권세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살리신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외에는 그 무엇도 우리의 숭배나 섬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이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은 그 놋뱀이 사람들을 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놋뱀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대상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자신을 살리신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그 상징에 불과한 놋뱀을 숭배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느후스단 우상은 오늘날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숭배하는 우상을 뜻합니다. 특히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것인데 하나님 외에 그 상징을 숭배할 때 아주 위험한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심지어 십자가조차도 우리의 숭배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분들은 십자가를 보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잘못입니다. 눈으로는 십자가를 보더라도 우리는 십자가가 아닌 오직 거기 달리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십자가를 몸에 지니고 다니면 이 십자가가 나를 지켜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목걸이로 귀걸이로 십자가를 가지고 다닙니다. 마치 영화에 보면 흡혈귀 드라큘라가 덤벼들 때 십자가로 물리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보수적인 교단은 아예 예배당 안에 십자가를 달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십자가조차도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뿐만 아닙니다. 교회도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모임일 뿐 교회 자체가 결코 숭배 대상이 아닙니다. 자기 교회를 사랑하고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지만 이것이 너무 심한 나머지 교회 자체를 우상시하고 내 교회만 옳고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숭배 우상에 빠진 것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를 존중하고 사랑해 주시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목회자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선포하고 가르치는 대리인에 불과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주인이 심부름꾼을 보냈을 때 그 심부름꾼이 마치 자기가 주인인 양 착각하거나 아니면 주인이 받을 영광을 대신 받으면 안 되는 것처럼 목회자는 하나님 대신 영광을 받으면 안 됩니다. “저는 목사님 보고 교회 다닙니다.” 이런 말이 저 듣기에는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큰 함정입니다. 어느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큰 힘을 가진 목회자들이 이런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정리해 볼까요? 느후스단이 자신이 아니라 그 느후스단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살린 것처럼,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하고 하나님 받으실 경배를 대신 받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또 우리 신앙에 대단히 중요한 존재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느후스단을 “교회 안의 우상”이라고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신앙 안에 있지만 하나님을 대신한 우상이 되기 쉬운 것은 목회자나 어떤 사람(person), 재정이나 전통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조심해야 합니다.

    표적의 우상

    셋째로, 느후스단은 진정한 기적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너무도 기적을 바라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마가복음 8장 11절부터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비난하며 이렇게 시험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봐라. 그러면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어주마.” 그러자 예수님은 깊이 탄식하시면서 “내가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하고 말씀하시곤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떠나가십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바리새인들이 구한 ‘표적’을 구합니다. 표적이란 영어로는 사인(sign)입니다. 어떤 특별한 사인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이적, 기적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표적’(sign)을 구하고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처럼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사인이 있어야 예수 믿겠다는 것입니다. 지루한(?) 일상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특별한 체험이나 사인을 받아야 예수 잘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간증집회에 나와 간증하는 사람들처럼 죽을병이 고침 받거나 망해가는 사업이 다시 일어나거나 하는 이적이나 기적도 체험하면 금상첨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날마다 ‘특별한 은혜’를 구합니다. ‘특별한 체험’을 구합니다. 기적을 구하며 삽니다. 이것을 ‘표적(sign)의 우상’이라고 불러봅시다.

    물론 이런 태도가 다 잘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체험이나 사인은 지치거나 낙심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줍니다.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에 젖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어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끔 사람들에게 특별한 체험이나 이적을 베푸십니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체험이나 은혜만 사모한 나머지 일상적인 신앙생활은 지루하고 능력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특별한 표적이나 이적이 반드시 일상적인 신앙생활보다 우월하다고 믿고 나는 이런 특별 은혜 받았다, 나는 이런 특별한 체험했다고 자랑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목회를 하면서 가장 안타까울 때가 이때입니다. 

    누구누구가 어떤 분에게 기도 받으러 다닌답니다. 어디 가면 신령한 분이 있답니다. 기도 받으러 가고 신령한 것 찾아가는 것이 뭐가 문제겠습니까? 저도 신령한 체험을 많이 한 사람이고 또 기도 받으면서 힘을 많이 얻은 사람이라 이런 일에 전혀 거부감이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입니다. 신령한 것, 특별한 것 좋아하다가 기도해준다는 그 사람이, 그 장소가 과연 건전한지 아닌지도 생각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찾아다니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디 기도 받으러 갈 때나 기도원이나 집회 갈 때 꼭 저에게 먼저 의논하라는 것이 이것 때문입니다. 제가 감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도와주려는 거예요. 과연 그 곳이, 그 사람이 건전한 신앙을 가진 사람인지 아니면 아주 위험한지 미리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또 그런 곳에 가서 무슨 특별한 체험하고 은혜 받았다며 멀쩡하게 교회 잘 다니고 일상적인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 그런 식으로 예수 믿으면 안 돼. 그게 뭐야? 시시하잖아? 나처럼 특별한 은혜 체험해야지” 하고 깔보듯이 이야기한다면 그 분은 이미 교만의 우상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특별한 은혜나 체험도 좋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정말 우리가 꼭 필요할 때 특별히 허락하는 별식(別式)과도 같은 것입니다.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먹고 어쩌다 한 번 별식으로 메추라기 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매일 먹고 사는 것은 이 만나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면서 매일 별식으로 메추라기 달라고 조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매일 만나 먹으면서 하나님 잘 섬기는 사람들 보고 “너희는 어떻게 매일 그 지겨운 만나만 먹고 사냐?”고 깔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모든 신자들에게 내 교회와 내 지도자, 내 목회자를 허락하신 까닭은 다른 무엇보다 내 교회를, 또 내 지도자와 내 목회자를 우선 중심으로 신앙생활 하도록 하신 것인데 별미만 좋아하며 거기에 우선권을 두고 쫓아다닌다면 어떻게 신앙이 건강하게 자라겠습니까?

    나아가 기적이나 특별한 이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적이나 기적을 하나님이 주실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특별한 경우입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를 인정하려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기적”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구한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할 만한 사인이었습니다. 주님은 깊이 탄식하며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표적이나 이적 자체가 나쁘지는 않지만 잘못된 의도로 구하는 것은 단호하게 거부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전제로 표적이나 기적을 구하는 태도, 이런 것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신앙을 경고하신 것이지요.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일어난 가장 놀라운 기적은 다름 아닌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 자체가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기적인 것입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우리가 이 기적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작은 기적이나 이적에 매여 살며 그것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느후스단 우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 설교 중에 나온 용어가 몇 가지 있지요. ‘영적 건망증’이나 ‘배은망덕의 죄’, 또한 우상은 쇳조각, 돌덩이에 불과하지 결코 우리를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 ‘교회 안의 우상’ 그리고 ‘표적의 우상, 기적의 우상’ 등 꽤 많습니다. 이것을 다 기억하지 못해도 좋습니다. 한 가지만 분명히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의 은혜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놋뱀이 느후스단 우상이 되어버린 것처럼 교회 안에도 우상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우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우상은 마치 열심 있는 신앙, 뜨거운 신앙처럼 위장하고 우리의 건강한 신앙을 위협합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이 우상임을 깨닫고 하루빨리 버리고 건강한 신앙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하나님 잘 믿는 줄 알고, 나는 아주 특별하게 잘 믿는 줄 착각하고 살다가 마지막 주님 앞에 섰을 때 그만 주님이 “나는 너를 모른다” 하시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을 가장한 우상의 무서운 점입니다. 따라서 열심히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르게 믿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열심 있는 것도 좋고 뜨거운 것도 좋지만 바르게 믿지 않으면 오히려 훨씬 위험합니다. 올바른 신앙관 위에 건전하게 바르게 믿어야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따라 하세요. “바르게 믿자!” 아무쪼록 오늘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만 바라보며 건강하고 건전한 신앙관 위에 바로 서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만을 바라보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기독교의 상징들

     

    기독교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우선 십자가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보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적십자나 병원이 떠오르는 분도 계시겠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십자가는 고대 근동의 앗수르, 이집트, 페르시아 그리고 로마에서 죄수를 처형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형틀입니다. 십자가 형벌은 죄수의 양팔을 사람의 키보다 약간 큰나무에 못박아 고정 시켜 매달려 있게 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피가 몸의 밑으로 몰리게 되고 혈액 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아 호흡이 빨라지며 심한 고통을 격게 됩니다. 십자가 형벌은 사람을 한번에 죽이는 것이 아니고 3-5일간을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이는 매우 가혹하고 치욕적인 형벌로써 로마시대에는 정치범이나 반역자들에게만 적용했던 사형법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던 강도들은 단순한 좀도둑들이 아니라 정치범이거나 반정부세력의 테러리스트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죄와 형벌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잔인하고, 끔직한 십자가를 교회의 상징으로 여기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씀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요? 차라리 사도바울처럼 참수를 당하시거나, 사도 도마처럼 창에 찔려 죽으시면 간단할 텐데 왜 하필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을까요?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3)그러나 너희는 그 주검을 나무에 매달아 둔 채로 밤을 지내지 말고, 그 날로 묻어라. 나무에 달린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유산으로 준 땅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를 포함해서 나무에 매달려 죽는 것은 매우 치욕스럽고 ‘하나님게 저주를 받았다’는 상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대신 짊어지신 우리의 죄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으셔야 했을 만큼’ 크고 심각한 죄였습니다.

     

    그러기에 이 은혜를 경험한 우리들은 십자가에서 형벌과 저주를 보기 전에, 우리가 받아야할 형벌과 저주를 대신 짊머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보면서 눈물 흘리는 이유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주님이 죽으시고, 대신 내가 살게 된 은혜의 상징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오랜 역사와 전통에는 Icon (아이콘) 또는 Symble (심볼) 로 불리는 여러가지 신앙적 상징들이 있습니다.

     

     

    1. 익투스 (ἰχθύς)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익투스 (고대 그리스어 :  ἰχθύς 이크투스, 대문자 표기로 ΙΧΘΥΣ)

     

    Ιησους (예수) 

    Χριστος (그리스도 - 크리스토스) 

    θεου (데우) 하나님의  

    Υιος(휘오스)  아들 

    Σωτηρ (소테르) 구원자

     

    '익투스'라는 단어는 '물고기'라는 뜻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 물고기라는 단어를 상징적으로 생각했으며 위 단어의 첫 글자를 따서 익트스가 되었다는 학설이 유력합니다.

    박해를 받았던 초대 기독교인들은 피아식별의 방법으로 물고기 그림을 암호처럼 그려서 활용했고, 물고기를 그린 사람의 뒤를 따라가면 기독교인들의 은신처 '카타콤'에 찾아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익투스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또는 '주는 나의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라는 뜻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2. 키로(XP) 십자가

     

    그리스도(Χριστοσ) 라는 헬라어의 단어 첫번째와 두번째 알파벳

     

     

     

    영어 스펠링 PX 를 겹합한 것 처럼 보이는 이 아이코은 그리스도 Χριστοσ (크리스토스) 라는 헬라어의 첫번째와 두번째의 알파벳을 결합시켜 놓은 것 입니다.

    X 를 헬라어로 [ㅎ키], P 를 [로ㅎ-] 로 부르기 때문에 키로 십자가 입니다.

     

    이 아이콘은 기독교를 로마의 공인 국교로 삼은 '콘스탄틴 황제'가 꿈에서 본 것을 깃발로 삼아 전쟁터에 나갔다고 해서 널리 알려진 문장입니다.

     

    키노문자는 가톨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표식인데 '그리스도'의 헬라어 표기 'Χριστοs'의 첫째자와 둘째자를 겹친 것입니다. 이 글자는 헬라어이므로 '키로'(Chi Ro)로 읽어야지 '엑스 피'가 아닙니다. 이 표식의 유래는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대제에서 시작이 됩니다. 콘스탄틴은 312년 로마의 티버강 너머 밀비안 다리에서 막센티우스와 격전을 벌이기 전날 밤 하늘에 십자가가 보였는데 십자가에는 “이 부호를 가지고 정복하라 In this sign, conquer”고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부호가 바로 키로문자였습니다. 그래서 콘스탄틴은 자신의 헬멧과 군기에 이 키로문자로 장식을 했고, 실제로 전투에서 정말로 승리해서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로 군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313년 그 유명한 밀라노 칙령을 내려 로마에서 기독교의 박해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그러기에 키로문자는 이제 로마가 기독교 제국으로 바뀌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똑같은 기독교의 상징이지만 물고기와 키로문자는 서로 완전히 상반된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전자는 숨어있는 기독교를, 후자는 제국을 점령한 기독교입니다.

     3. INRI

     

    (라틴어 :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 예수님의 십자가 명패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I.N.R.I.) 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요한복음 19:19~19:22]  

     

    라틴어 성경 요한복음 Evangelium Secundum Ioannem 19:19~19:22

    scripsit autem et titulum Pilatus et posuit super crucem erat autem scriptum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hunc ergo titulum multi legerunt Iudaeorum quia prope

    civitatem erat locus ubi crucifixus est Iesus et erat scriptum hebraice graece et latine dicebant

    ergo Pilato pontifices Iudaeorum noli scribere rex Iudaeorum sed quia ipse dixit rex sum

    Iudaeorum respondit Pilatus quod scripsi scripsi

     

     

    위 라틴어 성경에 나타난 바와 같이 INRI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붙인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의 라틴어(로마어) 첫글자만을 딴 것입니다.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 영어 / Jesus of Nazareth, King of the Jews)

     

      

     

     

     

     

     

        

    4. IHS

     

    고대 그리스어로 예수 'Ιησους' 의 첫번째, 두번째, 마지막 스펠링의 약자    

    또는 라틴어라 'Iesus Hominum Salvator'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HIS 는 예수(Jesus) 를 뜻하는 약어 입니다. 

    희랍어는 'Ιησους'라고 표기하며 ...η (에타)는 라틴어로 표기할 때  대문자로 'H' , σ(시그마) 는 대문자 'S' 가 되며, 양피지로 필사하던 시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단어들을 약자로 기록하던 시절의 유래입니다. 

    그후, 라틴어로 새로운 의미가 부가되었는데 옮겨쓰는 과장에서 새로운 의미를 더했다고도 추정되며 뜻에 비중을 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Iesus

        Hominum

        Salvator'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라틴어에서 I J는 종종 구별되지 않고 혼용됩니다.

        예수Iesus 를 지저스Jesus라고 부르게 되는 과정이 이 I와 J가 구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IHS라는 글은 JHS로 표기되기도 했습니다.

     


     

     

     

     

     

     

     5. 알파와 오메가

     

     

    [계 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계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의 처음과 마지막 입니다.

    세계와 인류의 처음이시고 마지막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표기]

     

    그리스어 알파벳 기호 θ (세-타) theta; 를 하나님으로 표기합니다.

    이는 헬라어 '테오스' (하나님 θεοs =Θεου) 의 머릿 글자와도 같으며 세계 각국의 표기는 아래와 같습니다. 

     

    한   국 : 하나님

    일   본 :    神

    중   국 : 上   帝

    미   국 : God

    독   일 : Gott

    터   키 : Tanrı

    프랑스 : Dieu

    그리스 : θεός

    러시아 : бог

    이태리 : Dio

    스페인 : Dios

    폴란드 : Bóg

    아랍어 : الله

    페르시아 : خداوند

    포르투갈 : deus

    우크라이나 : Бог

    인도네시아 : Tuhan

     

    6. 닭

     

     

    마지막으로 소개할 기독교의 상징물은 ‘닭’입니다. 상징에는 긍정적인 기억을 위한 상징물도 있지만 부정적이고, 부끄러운 의미를 가진 상징물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닭’이라고 생각됩니다. 닭은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사도 베드로와 관련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밤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 상징 용어 설명

    • by 메리 페어차일드

    그리스도인의 상징에 대한 예시 여행

    의심의 여지없이, 라틴 십자가 - 소문자, t 자 모양의 십자가는 오늘날 기독교에서 가장 인정받는 상징입니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많은 다른 표식, 식별자, 구별되는 표식들이 기독교 신앙을 대표합니다. 이 기독교 상징의 수집은 가장 쉽게 확인 된 기독교 상징의 그림과 묘사를 포함합니다.

    크리스티앙 크로스

     셔터 잭 / 게티 이미지

    라틴 십자가는 오늘날 기독교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널리 인정 받고있는 상징입니다.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십자가에 못 박힌 구조의 형태 였을 것입니다.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가 있었지만 라틴 십자가는 두 개의 나무 조각으로 이루어져 네 개의 직각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십자가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희생함으로써 죄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냅니다.

    십자가의 로마 가톨릭 묘사는 십자가에 아직도 그리스도의 몸을 계시합니다. 이 형태는 십자가로 알려져 있으며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통에 중점을 둔다. 개신교 회는 부활 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강조하면서 빈 십자가를 묘사하는 경향이있다. 그리스도를 믿는자는 예수의이 말씀을 통해 십자가를 식별합니다 (마태 복음 10 장 38 절, 마가 복음 8 장 34 절, 누가 복음 9 장 23 절).

    예수 께서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다. "너는 내 추종자가되기를 원한다면, 네가 이기적 인 길에서 돌아 서서 네 십자가를지고 나를 따라야한다." (마태 16:24, NIV )

    기독교 물고기 또는 Ichthys

       Ichthys 기독교 기호는 용어 설명 기독교 물고기 또는 Ichthys. 이미지 © 수에 Chastain

    예수 물고기 (Jesus Fish) 또는 이시스 (Ichthys)라고도 불리는 기독교 물고기는 초기 기독교에 대한 비밀의 상징이었습니다.

    Ichthys 또는 물고기 상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로 확인하고 기독교에 그들의 친화력을 나타내는 초기 기독교인에 의해 사용되었습니다. 이시스 (Ichthys)는 그리스어로 "물고기"라는 단어입니다. "기독교 물고기"또는 "예수 물고기"기호는 물고기의 윤곽을 따라가는 두 개의 교차 호로 구성됩니다 (가장 일반적으로 물고기는 왼쪽으로 "수영"합니다). 그것은 신원을 밝히는 비밀의 상징으로 초기 핍박받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사용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어로 물고기 (Ichthus)라는 단어는 "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의 아들, 구주"라는 약어를 형성합니다.

    기독교의 추종자들은 흔히 물고기가 그리스도의 사역에 나타 났으므로 물고기를 상징으로 식별합니다. 그들은 성경 시대의 필수품이었고 물고기는 종종 복음서에 언급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께서는 마태 복음 14 장 17 절에 있는 두 개의 물고기와 다섯 개의 빵 덩어리를 곱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가 복음 1:17 절에 "와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되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NIV)

    기독교 비둘기

    기독교 기호 용어 해설을 설명합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비둘기는 기독교에서 성령 또는 성령을 나타냅니다. 성령 은 요르단 강에서 침례받을 때 비둘기처럼 예수님 께 내려 왔습니다.

    ... 그리고 성령은 비둘기 같이 육체적 인 형태로 그에게 내려 왔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났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이요, 너와 함께하면 나는 기쁘다." (눅 3:22)

    비둘기도 평화의 상징입니다. 창세기 8 장 홍수 후에 비둘기가 그 부리에 올리브 가지를 가진 노아 에게로 돌아와 하나님의 심판의 종말과 인간과의 새로운 언약의 시작을 나타 냈습니다.

    가시 왕관

     Dorling Kindersley / 게티 이미지

    기독교의 가장 생생한 상징 중 하나는 예수님십자가에 못 박으시기 전에 입었던 가시관의 면류관입니다.

    ... 그리고 나서 가시관을 뒤틀어 머리에 씌워 라. 그들은 오른손에 스탭을 배치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조롱했습니다. "우박, 유대인의 왕!" 그들은 말했다. (마태 복음 27:29)

    성서에서 가시는 종종 죄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가시 면류관은 적합합니다 - 예수 께서 세상의 죄를 담당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왕관은 기독교의 고난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 왕의 왕, 그리고 주님의 군주를 상징하기 때문에 왕관도 적합합니다.

    트리니티 (Borromean Rings)

     Borromean Rings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 삼위 일체 (Borromean Rings)를 나타냅니다.

    기독교에는 삼위 일체의 상징이 많이 있습니다. Borromean Rings은 신성한 삼위 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연동 서클입니다.

    " 삼위 일체 "라는 단어는 라틴어 명사 "trinitas"에서 유래했습니다. "trinitas"는 "three is one"을 의미합니다. 삼위 일체는 하나님이 하나라는 믿음을 나타냅니다.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 님 과 동등하고, 영원한 교제 속에 존재하는 세 분명한 인격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음 구절은 삼위 일체 개념을 표현합니다 : 마태 복음 3 : 16-17; 마태 복음 28:19; 요한 복음 14 : 16-17; 고후 13:14; 행 2 : 32-33; 요한 복음 10:30; 요한 17 : 11 & 21.

    트리니티 (트리 케라)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 트리니티 (Triquetra)를 묘사했습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Triquetra는 그리스도교의 삼위 일체를 상징하는 3 부분으로 구성된 연상 기호입니다.

    세계의 빛

     기독교 기호는 세계의 빛을 용어로 설명했습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성경에서 하나님이 "빛"이신 것에 대한 언급이 너무 많으므로 양초, 불, 램프와 같은 빛의 표현은 기독교의 공통된 상징이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에게서들은 메시지이며, 여러분에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가볍습니다. 그에게는 전혀 어둠이 없다. (요일 1 : 5, NIV)

    예수 께서 백성들에게 다시 말씀하실 때, "나는 세상의 빛이며, 나를 따라 오는자는 결코 어두움에 다니지 않을 것이나,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요한 복음 8:12)

    여호와는 나의 빛 이요 나의 구원 이시라.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할까? (시편 27 : 1)

    빛은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불타는 덤불모세 에게 불꽃의 기둥으로 나타나 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원한 불꽃은 예루살렘에있는 성전에서 항상 켜져 있어야했습니다. 사실 유대인 의 헌신 축제 또는 "빛의 축제"에서 우리는 마카비의 승리와 그레코 - 시리아의 포로 생활 속에서 신성 모독을당한 이후의 성전 재 헌법을 기억합니다. 비록 그들은 단지 하루 동안 충분한 성스러운 기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더 많은 정화 된 기름이 처리 될 수있을 때까지 8 일 동안 그의 존재의 영원한 불꽃을 기적적으로 일으켰습니다.

    빛은 또한 하나님의 지시와 인도를 나타냅니다. 시편 119 편 105 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발에 등불이고 우리의 길에 비춰 진다고 말합니다. 사무엘 하 22 장은 주님은 등불 이시며 어둠을 빛으로 변하게하십니다.

    크리스티앙 스타

    기독교 기호 용어 설명 스타. 이미지 © 수에 Chastain

    데이비드 스타는 두 개의 연동하는 삼각형에 의해 형성된 여섯 개의 별 모양의 별입니다. 하나는 위로 향하고 하나는 아래로 향하게됩니다. 그것은 다윗 왕의 이름을 딴 것으로 이스라엘의 국기에 나타납니다. 유대교와 이스라엘의 상징으로 널리 인식되고있는 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데이비드 스타와도 동일시합니다.

    다섯개의 별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탄생 과 관련된 기독교의 상징이기도합니다. 마태 복음 2 장에서 동방 박사 (또는 현자)는 신생아 왕을 찾아 예루살렘을 향한 별을 따라 갔다. 거기에서 그 별은 베들레헴 으로 예수님이 태어난 바로 그 위치로 인도했습니다 . 그 아이가 어머니와 함께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절하고 경배하며 선물로 선물했습니다.

    계시록 에서 예수님은 아침 별 (계 2:28, 요한 계시록 22:16)이라고 불립니다.

    빵과 와인

     기독교 기호는 빵 & 와인 용어를 보여줍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빵과 포도주 (또는 포도)는주의 만찬이나 성만찬을 상징합니다.

    빵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영양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날마다 마나를 저장 하시거나 "하늘에서 나는 빵"을 주셨습니다 . 예수님은 요한 복음 6 장 35 절에서 "나는 생명의 떡 이니 나에게 오는자는 결코 주 리지 아니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NIV)

    빵은 또한 그리스도의 육신을 나타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께서는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 하셨다. "이것은 내 몸이 너에게 주어 졌음 이니라."(눅 22:19).

    포도주는 인류의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 쏟아 부은 피의 하나님 언약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누가 복음 22 장 20 절에서 "이 잔은 내 피의 새 언약 이니 너희를 위하여 부어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NIV)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그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에서 우리를 위해했던 모든 것을 기억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성찬을 취합니다.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자기 점검과 참여의 시간입니다.

    무지개

     쥬타 쿠스 / 게티 이미지

    그리스도교의 무지개는 하나님의 신실 하심에 대한 상징이며 다시는 홍수로 지구를 파괴하지 않겠다는 그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노아와 홍수에 관한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홍수가 있은 후,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무지개를 놓아 노아 와 언약을 맺으셔서 땅과 모든 피조물을 홍수로 다시는 결코 멸망시키지 않으 셨습니다.

    지평선 위로 높이 솟아 오르기 때문에, 무지개는 은혜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충실 함을 완전히 포용하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 를 믿는 신앙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는 일부 소수 영혼들만을위한 것이 아닙니다. 무지개처럼 구원복음 은 모든 것을 포괄하며 모든 사람은 그것을 보도록 권유받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 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임 이니라. 하나님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세상을 정죄하지 않으시 고 세상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요한 복음 3 : 16-17, NIV)

    성경의 저자들은 무지개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묘사했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 구름 속에있는 활 모양처럼, 모든 주위에 밝기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한 것은 주님의 영광을 닮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보았을 때, 나는 내 얼굴에 떨어졌고, 나는 말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에스겔 1 장 28 절, ESV)

    계시록 에서 사도 요한하늘계신 하나님 보좌 주위에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즉시 나는 성령 안에 계셨고, 나 앞에 하늘에 앉은 누군가가 앉아있는 보좌가있었습니다. 그곳에 앉은 사람은 재스퍼와 카네 리안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에메랄드를 닮은 무지개가 왕좌를 둘러 쌌다. (계시 4 : 2-3, NIV)

    신자들이 무지개를 볼 때, 그들은 신의 충실 함,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은총, 그의 영광스러운 아름다움, 그리고 우리의 삶의 보좌에 거룩하고 영원한 존재가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크리스천 서클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을 묘사했습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끝이없는 원이나 결혼 반지는 영원의 상징입니다. 기독교인 부부 의 경우, 결혼 반지 교환은 내재적 인 유대의 외적 표현입니다. 두 개의 마음이 하나로 결합되고 서로를 영원히 충실히 지키겠다고 약속합니다.

    마찬가지로 결혼 계약과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 인 교회 사이의 관계를 묘사 한 것입니다. 남편은 희생적인 사랑과 보호를받으며 목숨을 바칠 것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의 안전하고 소중한 포옹에서 아내는 자연스럽게 제출과 존중으로 응답합니다. 끝이없는 순환계에서 상징되는 결혼 관계 가 영원히 지속되도록 설계된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모든 영원을 위해 견디게됩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Agnus Dei)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이미지 © 수에 Chastain

    하나님의 어린 양은 사람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하나님 께서 주신 완전하고 죄가없는 희생 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합니다.

    그는 압제 받고 괴롭힘을 당했지만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살장에 어린 양 같이 인도되었다. (사 53 : 7)

    그 다음날 요한은 예수님 께서 자기에게 다가와서 "보라, 세상 죄를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로구나!"하고 외쳤다. (요한 1시 29 분, NIV)

    그리고 그들은 큰 소리로 외쳤다. "구원은 보좌에 앉으 신 우리 하나님, 어린 양에게 달려있다." (계시 7:10, NIV)

    성경

    기독교 기호 용어 설명 성경입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성경 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생활 수첩입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 - 그의 연애 편지 -는 성경의 페이지에 들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을받은 것이며의를 가르치고, 책망하고, 교정하고, 훈련하는 데 유용합니다 ... ( 디모데 둘째 3:16)

    나는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사라질 때까지, 하나님의 율법의 가장 작은 부분조차 그 목적이 성취 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태 복음 5:18, NLT )

    십계명

    기독교 기호는 10 가지 계명을 보여줍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십계명 또는 율법은 이집트에서 그들을 이끌어 낸 모세 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입니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구약의 법에서 발견 된 수백 가지 법칙을 요약 한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 및 도덕적 생활을위한 행동의 기본 규칙을 제공합니다. 십계명이야기는 출 20 : 1-17과 신명기 5 : 6-2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와 크라운

      기독교 상징 십자가 및 왕관 용어 설명. 이미지 © 수에 Chastain

    십자가와 왕관은 기독교 교회에서 친숙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믿는 자들이 지상에서의 삶의 고통과 시련 (십자가) 후에 받게 될 하늘 (크라운)에서 기다리고있는 보상을 나타냅니다.

    시련을 견디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시험을 치른 후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삶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서 1:12)

    알파 그리고 오메가

     기독교 상징은 알파 & 오메가를 보여줍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알파는 그리스 알파벳의 첫 글자이고 오메가가 마지막 글자입니다. 이 두 문자는 함께 예수 그리스도 의 이름 중 하나 인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모노그램 또는 상징을 이룹니다. 요한 계시록 1 장 8 절에 나오는 용어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 다"라고 주 하느님이 말합니다, "전능하신 분이 누구 시며 누구이며 앞으로 올 것인가?" 요한 계시록 에서 예수님에 대한이 이름이 두 번 더 나옵니다 .

    "나는 끝났어.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이야. 목이 말린 사람에게는 생명수 샘물을 마시지 않고 마실 것이다."(계 21 : 6 , NIV)

    "나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끝이다." (요한 계시록 22:13)

    예수님에 의한이 진술은 그리스도교에있어 결정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 께서 창조 전에 존재 하셨고 모든 영원 토록 존재할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것도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창조에 참여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처럼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원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상징 인 알파와 오메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을 상징합니다.

    Chi-Rho (그리스도의 모노그램)

    Chi Rho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 Chi-Rho (그리스도의 모노그램)를 보여줍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치로 (Chi-Rho)는 그리스도를위한 가장 오래된 알려진 모노그램 (또는 문자 기호)입니다. 어떤 이들은이 상징을 "크리스 그램 (Christogram)"이라고 부르며 로마 황제 콘스탄틴 (Constantine) (AD 306-337)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이야기의 진실은 의심 스럽지만, 콘스탄티누스는 결정적인 전투가 있기 전에 하늘에서이 상징을 보았고, 그는 "이 표식으로 정복하십시오."라는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의 군대에 상징을 채택했다. Chi (x = ch)와 Rho (p = r)는 그리스어로 "Christ"또는 "Christos"의 처음 세 글자입니다. Chi-Rho에는 여러 변형이 있지만 가장 일반적으로 두 글자의 겹침으로 구성되며 종종 원으로 둘러 쌉니다.

    예수님의 모노그램 (Ihs)

    Ihs  기독교 기호는 Ihs (예수의 모노그램)를 설명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Ihs는 1 세기로 거슬러 올라간 고대 모노그램 (또는 문자 기호)입니다. 그리스어 "Jesus"의 처음 세 글자 (iota = i + eta = h + sigma = s)에서 유래 된 약어입니다. 서기관은 문자 위에 줄을 쓰거나 줄을 써 약어를 나타냅니다.


    예배와 상징

     

    가. 상징으로 가득 찬 예배 :

    우리가 예배드리는 자리에는 각 종 상징물들이 놓여져 있다. 십자가, 설교대, 성찬상, 세례대, 촛대와 헬라어 알파와 오메가(Α Ω) 혹은 키로(☧) 등이 그것들이다. 예배 봉사자들은 회중과는 다른 복장(vestment)을 하고 있으며, 설교자는 설교대에 올라선다. 그러면 회중들은 선포될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며 조용히 앉아서 귀를 기울인다. 함 께 신앙을 고백하고 주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찬송을 부를 때면 회중은 일어선다. 또 한 기도 인도자가 기도를 드릴 때면 마지막에 반드시 “아멘!”이라는 화답을 하기도 한다. 이런 모든 예배의 내용과 행위들이 사실은 상징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상징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 하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종교적인 내 용과 행위들은 상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상징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상징은 우리 예배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 런데 불행스럽게도 이런 상징이 갖는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예배나 신앙생활에서 상징자체를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그 리고는 상징이 우상처럼 될까 염려가 된다는 엉뚱한 해석을 한다. 상징과 우상을 구 별하지 못한다면, 거기엔 더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바로 교육이 부재하다는 현 실이다. 잘못 이해하고 잘못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상징 이외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해서 눈을 딱 감고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상징의 의미를 제대로 배우는 일 밖에 없다고 하겠다.

    나. 예수님과 성경 그리고 역사는 상징을 창조해 나갔다

    예수님은 상징적인 용어들을 많이 창조하셨다.

    가령 자신을 <선한 목자>(요 10:11),  <양의 문>(요 10:7), <세상의 빛>(요 8:12)과 <포도나무>(요 15:1-5)로 말씀하셨다.
    제자들에게 대부분 비유로 가르치셨음을 알 수 있다(막 4:34).
    이런 비유들은 대체로 상징들로 가득 찬 내용들이었다. 천국에 관한 비유들은 상징어들이다. <밭에 숨겨진 보화>(마13:44)나 <진주 장사꾼>(마14:45-46), <씨 뿌리는 농부>(마13:2-8), 그리고 <가만히 자라는 씨>(막4:26-29)와 같은 이야기들이다. 천국을 일상의 말로 소개하거 나 설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들이 땅에서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다른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득불 땅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말씀하 셨던 것이다.

    역시 성경 안에는 상징 언어가 풍부하다. 역사의 여명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 들의 신앙을 상징을 창조해서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는 아직 성전도 없었 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없었다. 오직 그들은 상징 언어를 만들어 하나님을 만났 고 관계를 맺었다. 가령,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후 거기에 돌단을 쌓았다. 그리고 거 기에 “하나님의 집” 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창28:10-19). 가령 보통 일반인과 구별 되는 하나님의 사람을 일컫는 <나실인>이라는 사람을 세웠는데, 그들은 머리털을 깎 지않고, 독주를 마시지 않으며, 사체에 손을 대지 않음으로 <나실인>의 지위를 유지 하였다(민6:1-21). 그렇게 함으로 누구든지 그를 보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두 려워하였다. 또한 예배를 섬기는 제사장들에게는 특별한 예복(에봇)을 입도록 규정하 였다(출28:1-4).

    이런 상징의 발전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풍부하게 이루어졌다. 가장 오래된 예전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 교회의 성직 서품의식도 7세기 후반기에서야 나타나는데, 거기에 보면 특별한 예복(vestments)이나 목사의 목에 두르는 영대(stole) 같은 것이 없었다.

    이렇듯 상징은 우리로 영적인 것들에게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데 크게 도움을 준다. 뿐만 아니라, 상징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이고,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들 의 관심사, 그리고 중요한 기독교의 가르침들을 기억나게 해 준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상징들은 예배드릴 마음을 갖도록 도와준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상징들은 예배 자들의 순례생활에 있어서 필수인 이정표와 같은 구실을 한다고 하겠다.

    다. 상징에 대한 일반적인 의미 :

    일반적으로 상징이란 의사표현의 한 도구로,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하거나 나타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그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전달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제한적이다. 이렇듯 언어는 무엇인가를 말하지만, 상징은 그것을 나타내 보여준다. 언어가 한계에 부딪히게 될 때, 상징은 말하기 시작한다. 상징이 말하기 시작하면 언어는 침묵을 지킬 수 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을 흔들거나, 반갑게 누군가를 포옹할 수 있다. 물론 이런 행동을 대신해서 언어로 전달한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우리의 삶에서 많은 아름다움이나 색채를 잃게 될 것이다. 말보다는 이상과 같은 상징적인 행동들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존경’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 하고 있는지를 생각할 때, 왠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느낄때가 있다. 그러나 만일 존경의 표시로 <큰 절>을 올려드릴 수 있다. 그 때 언어가 주는 의미보다 훨씬 더 분명하고 깊은 감동을 전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상징들이 신앙생활에 사용 될 때, 얼마나 풍부하고 심오한 신앙으로 이끄는 도구가 되는지 모른다.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이란 무한하고 영원하신 절대자와의 관계맺기 이기 때문에 상징은 가 장 적절한 대화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신앙적인 표현 가운데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 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며, 이런 경우에 상징보다도 더 적합한 도구가 없다고 하겠다.

       어느 예배당 제단 뒤 벽면에는 알파와 오메가란 희랍어 글자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만일 그 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교인이라고 한다면, 예배당에 들어섰을 때, 그는 처음이 되실 뿐 아니라, 끝이 되시는 하나님이 여전히 자 신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생각에(계1:8), 그가 조금전까지 자신을 사로잡고 있었던 온 갖 근심과 걱정들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라. 예배와 관계된 상징의 종류들 : 상징에는 다양한 종류들이 있다.

    첫째, 시간의 상징

    생활의 리듬을 암시해 주는 한 주간(레 23:3),

    언제나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계1:10),

    작은 창조로써 아침(창1:1-31),

    활동과 구별되는 시간인 저녁(창1:1-31),

    수면과 침묵 그리고 죽음으로써 밤(요9:4)이 그런 것들이다.

    둘째,  장소의 상징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행2:46-47),

    세상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나그네의 집(시119:54, 고후5:1-3, 벧전2:11),

    주님의 살고 피를 겸격으로 나누는 제단(마26:26-28),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단,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자리 찬양대석, 등이 그런 것들이다.

    셋째, 상징적인 사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성도(고전1:2-3),

    하나님의 사자(使者)인 목사(딛1:7-9),

    천국 음악으로 섬기는 찬양대원(대하29:25-28),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서 직분자들(고전4:1-2),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돌보는 관리인(대상9:17-27), 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넷째, 거룩한 용어

    하나님과 대화인 기도(마6:5-15),

    마음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막8:29),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는 찬송(시95:1-2),

    말없는 기도인 묵상(시19:14, 119:97),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잠30:5-6, 롬3:2, 벧전4:11),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봉헌(시96:8),

    하나님의 은총을 비는 인사(삿6:12, 눅1:28) 등이다.

     

    다섯째, 거룩한 행동

    세례를 기억하는 십자성호,

    화해와 용서로써 악수와 포옹(벧전5:14),

    천국으로 향하는 순례로써 행진(시95:2),

    권위와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로서 안수(막10:16),

    하나님의 은총을 선포하는 강복의 손(민6:22-26) 등이다.

     

    여섯째, 예배를 돕기 위해 준비된 상징

    두 개의 촛대와 촛불은 주님의 두 성품인 신성과 인성(마16:16, 요1:1-14),

    촛불은 세상을 밝히는 빛이신 주님의 임재(시27:1, 요1:4-5),

    생명의 근원인 세례대의 물(요한7:37, 행8:38),

    승리를 말하는 깃발(렘50:2),

    예배를 섬기기 위해서 입는 예복(출28:2-43, 삼상2:18),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돕는 오르간-악기(대하29:25-28),

    주님의 사랑의 결정체인 십자가(고전1:18-24) 등이다.

     

    일곱째, 경건한 자세들의 상징

    하나님을 높여 드리기 위한 일어 섬(수7:10, 삼상9:26, 사60:1),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위한 앉음(대상17:16-27, 막3:34-35),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무릎꿇음(시95:6, 엡3:15),

    목적지를 향한 걸음(사40:31, 행3:6),

    사람 사이의 교량으로서 인사(눅1:28) 등이다.

     

    여덟째, 거룩한 의미를 전하는 글자의 상징

    신앙고백을 요약한 물고기란 글자(Ιχθυς는 물고기라는 희랍어인데, ‘예수 그리스도 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란 신앙고백의 첫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과 나중 되시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Α Ω(알파와 오메가)
    우리의 구주가 되신 주님을 의미하는 ☧(희랍어 크리스토스의 처음 두 글자)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ΙΗΣ(희랍어 예수의 줄임말) 등이다.

    상징의 특징

    모든 상징은 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관계하는 매체요, 그것이 바라보는 주체를 섬기는 매체이다. 그런데 이런 상징들은 외적이고 내 적인, 그리고 영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상징의 외적 특징이라함은, 십자가나 어떤 의식을 집례하면서 행동하는 동작과 같은 유형적인 실재를 말하며, 내적인 특징은 한 집단이 그 상징에 부여하는 해석을 말하며, 영적인 특징이란 개인이나 집단이 외적인 상징과 내적인 의미와의 관련 속에서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말한다. 가령, 십자가는 고 난과 죽음을 외적으로 암시하는 외적 상징과,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해석하는 내적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로써 십자가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주는 영적 에너지를 발산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상징은 이런 특징 외에도, 역설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상징은 어떤 사람들 에게는 의미를 분명히 드러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깊은 의미가 감추어진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의 비유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진 의미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런 상징들에 대한 교육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상징은 의미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징들 속에서 살고 있는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의 실제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상징은 폭 넓게 사용되고 있다. 이런저런 상징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고, 우리의 신앙이 자라날 수 있다. 어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영적 의미를 전달해 주는 상징이라는 점에서 더욱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상징은 이렇듯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의미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수단이 아닐 수 없다(마13:13-43).

        그런데 문제가 있다.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상징들 중에는 잘 알려지고 이해 되는 것들이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상징들이 많이 있다는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상징이 갖는 본래적인 의미를 알지 못할 때 심각한 괴리 현상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상징은 공감대가 형성된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 처음 상징의 의미를 바르고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할 때, 자칫 우상을 섬긴다는 오해를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징에 대한 교육이 절실하 다. 그리고 그 상징들을 신앙과 삶에서 나눌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 신앙의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을 여행할때, 대부분의 교회당 지 붕에 큰 장닭 한 마리가 앉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옆에 앉은 아이가 물을 수 있다. “엄마, 저게 뭐야?” 그 때 “저건 말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 했거든(마26:69-75).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장닭이 세 번 울었지. 엄마는 저 장 닭을 볼때마다, 나는 지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자신을 돌아본단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면, 그 아이는 그 장닭을 예사롭게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예배에서 말과 상징의 균형과 전망 :

    예배에서 말과 상징 사이에 균형이 깨지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예배에서 필요이상으로 말을 많이 하려고 하지만, 실제로 전달되는 의미는 그리 많지 못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모국어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에 상징이 서 있을 자리를 잃은 것이다.
    그리스도인도 아니요, 종교인도 아닌 에리히 프롬은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상징적 언어를 우리 각자가 배워야 할 외국어라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배우면, 지혜의 의미심장한 출처 가운데 하나인 신화와의 관계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그것은 내용과 형식에서 전인류에게 공통적이기 때문에 특히 인간적이라고 하는 체험분야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악수와 인사말이 서로 상충되지 않으면서, 서로의 따스함과 의미를 강화시켜 주듯, 언어와 상징행위는 서로를 보완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현대 기독자들이 말의 홍수속에서 살지만 실제로 그들의 마음에 오랫토록 남아있는 말이란 과연 얼마나 될 까?
    오히려 이와같은 우리의 빈약한 언어를 보완해 주기 위해서 상징언어를 사용한다고 하면서 함께 공유하고 익히도록 할 때, 지금보다 훨씬 더 풍성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상징의 의미는 마음속에서 잘 보존될 뿐 아니라, 말보다는 훨씬 더 용이하게 기억되는 장점도 있기 때문이다.

    예배에서 말과 상징이 균형을 이루므로 더욱 풍성한 신앙의 의미를 살려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오늘 교회 지도자들에게 달린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 자료출처 : https://lutherfriend.tistory.com/6246 [lutherfriend.tistory.com]



    믿는 자에게 따를 표적(마가복음 16:17-18)


    성경은 믿는 자에게 따를 표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은사자에게 따를 표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6:15-20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믿는 자에게 따를 표적

    믿는 자에게 따를 표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은사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정말 예수님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새 방언을 말할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뱀을 집을 수 있습니다.
    뱀은 동물에 속한 뱀이 아니라 사탄을 잡을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습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을 빋는다면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즉시 나음을 얻습니다.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 마가복음에서 증언하신 그 말씀을 직접 증거하며 보여주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째, 귀신을 쫓아내며
    둘째, 새 방언을 말하며
    셋째, 뱀을 집으며
    넷째,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다섯째,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귀신(鬼神)을 쫓아내며

    민간신앙은 귀신이란 죽은 조상의 혼(넋)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자기 수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혼이 귀신이 되어 자기 수명만큼 활동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은 조상의 혼이 아니라 사탄의 수하에서 활동하는 보이지 않는 악마와 같은 존재를 말합니다.

    귀신은 거짓된 말씀을 들고 등장합니다.
    진리가 들어오면 거짓된 말씀은 내 안에서 사라집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다른 어떤 이름이 아니라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귀신(φάντασμα) :

    예수 : 죄에서 구원할 이름
    이름 : 오노마(όνομα)

    - 말씀

    이름 = 말씀 = 오노마 4번
    귀신 = 비진리의 영(다이모니온) 5번

    새 방언을 말하며
       
    거짓 방언(비진리)은 내 입에서 나오지 않고 오직 그 새 방언(진리)만 내 입에서 흘러 나옵니다.
    새 방언(새로운 소리 = 진리) 7번 카이노스 글롯사
     
    뱀을 집으며 

    예수를 장대에 높이 올려 죽이고 진짜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진리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율법으로 오신 예수 상징 = 뱀(오피스는 옵타노마이에서 유래) : 표피적을 보는 것
    - 뱀을 집다에서 집다는 들어올리다의 아이로라는 단어를 씀.
    -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자기부인으로 산자가 되면...

    무슨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음

    -> 이제 사망이나 적신이나 곤고나 그 어떤 것도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게 되며
    - 독은 율법으로 죽고 진리로 사는 거듭남을 말함. 다나시모스
    - 다나시모스는 다나토스에서 유래

    ;진리로 보고 듣고 말하게 되면 피조세계의 모든 것을 통해 그 율법적 행위는 결국 사랑으로 완성되기
    때문에 진리를 가진 자에게 무엇이 그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다.
     
    병든자에게 손을 얻으면 나음

    나를 통해 그 진리가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면 눈먼자 , 앉은뱅이, 귀머거리였던 그 이웃들까지도 회복의 은혜를 누릴 것이다.

    첫째는 나자신과 그 생수에 강이 내 배에서 흘러 넘침으로 비진리속에서 허우적되던 영적으로 병든 자들이 낫게되는 기적이 내 주변에서 일어납니다.
     
    - 병든자 : 론뉘미(4517)는 강하게 하다,강하다

    신약성경 행 15:29에 한 번 나오는데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브니엘 사전 참조)


    진리안에서 안녕과 평안을 가지지 못한자.

    - 손 : 케이르로 능력, 진리, 군대,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행위 등
    - 얻으면 : 위에 것으로 덧입다. 에피티데미.
    - 나으리라 : 칼로스 에코. 참선으로 마음에 간직하게 되다.




    마가복음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NASB.
    "These signs will accompany those who have believed: in My name they will cast out demons, they will speak with new tongues;
    they will pick up serpents, and if they drink any deadly poison, it will not hurt them; they will lay hands on the sick, and they will recover."

    NIV.
    And these signs will accompany those who believe: In my name they will drive out demons; they will speak in new tongues;
    they will pick up snakes with their hands; and when they drink deadly poison, it will not hurt them at all; they will place their hands on sick people, and they will get well."

    KJV.
    And these signs shall follow them that believe; In my name shall they cast out devils; they shall speak with new tongues;
    They shall take up serpents; and if they drink any deadly thing, it shall not hurt them; they shall lay hands on the sick, and they shall recover.


    이 구절은 믿는 자에게 따르는 다섯 가지 표적을 말하고 있다.
    “표적”이란 사도들의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입증하는 초자연적 사건들이다.
    표적들은 초대 교인들이 선포한 그 신앙의 확실성을 보증해 주는 것이지 그들 중의 누가 임의로 행사할 수 있는 개인적 능력이 아니었다. 사명을 완성하는 데 있어서 신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할 능력을 받을 것이다.

    1.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2. 새 방언을 말하며
    3. 뱀을 집으며
    4.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5.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이대환박사의 성경적 치유론에서 발췌함

       제 3장 C 항목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이곳에 올립니다.

    치유론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막16장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야합니다. 개혁주의는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1.1.1. 마가 16:17의 진정성

    사도들은 복음을 온 세계로 효과적으로 전파했다. 그런데 예수님의 2년 반 동안의 단독사역에서 보여 주었던 치유사역이 12명의 제자들과 그들의 제자 등이 AD 30-90년까지의 약60년 동안의 효과적 사역에서 치료의 사건은 4.5%에 그친다는 것은 중요한 시사점을 보여준다. 이들의 사역의 핵심이 부여받은 권세와 능력을 따라 복음전파에 집중되었으며 치유사역에 매달리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대 사명선언에서도 (마28:18-20, 막16:15-6, 눅24:45-49, 행1:8, 요20:21-23) 강조점은 회개, 죄 사함을 위해 권능 또는 능력이 사용될 것을 말한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일부 사본에서는 종결부에 17-20 믿은 자들에게 표적이 나타날 것을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이 왜 다른 성경에서는 없는지, 또한 마가복음의 일부번역에서는 없는지, 아니면 일부 사본에서는 추가로 채택되었는지를 밝혀야 한다.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J. E. Ladd 는 마가복음의 결말이 서로 다른 다섯 가지의 사본이 있다고 했다. 그는 비평학적 관점에서 대부분의 사본이 16:8절로 마가복음이 끝이 난다고 했다. 9-20은 그 후 추가된 본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많은 증거를 제시하여 최초의 원본은 8절로 종결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원본에서는 분명히 더 분명한 결론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그 원본의 끝 부분이 망실되어 8절까지 밖에 남지 않았고 그 이유로 다른 사본들이 8절에서 끝날 수밖에 없었고 사본을 기록하던 사람들에 의해 미려한 결론을 위해 조금씩 추가되는 과정에서 삽입된 것으로 본다. 이 특징은 이 추가된 9-20절이 대부분 소문자로 작게 기록되었음을 지적했다. 초대교회의 Jerome은 ‘그리스 사본은 거의 모두 이 결말 부분을 갖고 있지 않다'(Ladd 1987, 83) 고 한다. 이 추가부분은 원본 비평의 뒷받침이 너무 약하여 진짜라고 여겨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 문체와 단어의 사용에서도 앞의 것과 너무 상이하다.

    그러나 이 본문이 개역성경에 [괄호] 안에 넣어 각주 형태로 추가한 것은 혹시 적은 확률이지만 원본에 있는 것 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안전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추가되었다.(84)

    그런데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했다’는 말이 원래 있었지만 다른 복음서는 기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원래 없던 것을 마가복음에 추가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본문이 추가된 것이 아니라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 은사가 계속 재현될 수 있다는 증거로 삼기는 불가능하다. B. Warfield 는 ‘이런 은사는 교회를 설립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권위 있는 대리인으로서 사도들에게 주는 일종의 신임장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 은사들은 사도시대와 함께 필연적으로 지나갔다’ 이 은사의 목적은 세상 속에 교회를 설립하고 굳게 하는데 있다. 이제는 정경이 마무리 되고 교회가 완전하게 설립되어 굳게 되었으므로 이 은사가 끝났다. (Chrysostom, Augustinus, Jonathan Edwards, Mattew Henry, G. Whitefield, C. H. Spurgeon, Abraham Kuyper 등이 이 견해에 따른다)

    B. B. Warfield는 ‘이런 항목들은 묵시 문학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그 본문이 정경과 무관하며 영감받지 않은 것이라는 충분한 외적 증거에 상응하는 내적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1991, 282)

    위 구절의 진정성을 제공한다고 은사주의자들이 제시하는 행28:3절은 그들의근거가 될 수없다. 우연히 독사에게 물린 바울은 전혀 해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의도적으로 독사로 시험을 한 것이 아니다. 진정성을 확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독을 마시고도 살았다는 기록은 성경과 역사에 전혀 없다. 이 구절은 독으로부터 성도가 자유로움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광신자들이 이 말씀을 시험하다가 죽은 자가 많다.

    1.1.2. 막16:17 잘못된 적용

    필자는 이 은사가 계속 되는가? 중지되었는가? 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다. 이 능력이 중단되지 않았고 지금도 믿음을 갖고 기도하면 된다는 일반론을 경계하는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은 이런 능력이 계속되며 지금도 ‘성령을 제한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이같은 은사를 사모하라고 한다. 성령께서 인간의 제한에 제한 당하신다면 그분이 참으로 성령인지 의심받아야 한다. 실상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성령을 빙자한 몇 사람의 스스로의 열정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능력은 자신에게도 일어나지 않는다. Web surfing을 통해 search 한 결과 한국 교회의 대표할 만한 어떤 목사는 아래의 칼럼을 썼다.

    아래는 네이버에서 인용한 하OO목사의 08년 신년칼럼이다.

    성령이 임하면 표적이 따릅니다

       현재 당신 안에는 어떤 성령의 능력이 따르고 있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어떤 기적이나 능력도 행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옆에 계시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언제부터 기적과 능력을 행할 수 있었을까요?

       성령이 그들에게 들어갔을 때부터 입니다.

       마가복음 16장에 놀라운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 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잡으며 무슨 독을 마 

        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이런 일을 누가 합니까? /당신이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성령이 임하면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기를 갈망하십시요. (하 # #)목사

        http://kr.blog.yahoo.com/hosook_kim/1387557 2008,1,28일 naver

    위의 칼럼은 성령이 임하시면 표적이 따른다고 마가복음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확신에 찬 필체로 성령을 갈망하라고 전한다. 필자는 이 글이 실린 곳에 꼬릿말Replies을 달았다.

    성령의 임재를 갈망하라고 하는 그의 교회는 매년 성령컨퍼런스를 개최하고 성령의 임재훈련, 예언, 방언 등의 세미나를 쉼 없이 행한다. 그런데 OOO목사는 유감스럽게도 암으로 수차례 수술을 하고 있다. 한 때 성령의 대단한 능력을 받은 예언자를 미국에서 초청하여 세미나를 했는데 그는 ‘성령이 말씀하셨습니다. OOO목사님의 암은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라고 선언하였고 하나님이 치료하셨다고 전국 네트워크를 통해 홍보까지 했다. 필자는 그것이 참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그 후 들린 소문에 의하면 그 후에도 계속 재발하여 암 수술을 받고 있다. 필자가 확인 한 최근의 소식은 ‘생명에 대하여 더 이상 기대와 소원이 없다. 이제는 하나님께 온전히 맡겼다. 언제든지 오라고 하면 하나님께로 간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야 제대로 되어간다고 믿고 안도하던 차에 2008년 신년 메시지는 여전히 같은 말씀을 계속하고 있어서 필자의 실망은 적지 않다.

    위의 글대로라면 그는 아직도 성령을 받지 않았거나, 그의 주변에서 성령임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아직도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이 된다. 남들보고 성령임재를 갈망하라고 하면서 정작 본인은 아직도 임재하지 않았다. 아니면 아직 한 번도 손을 얹지 않았거나..., 성령임재를 본인부터 받고, 그리고 그 교회가 운영하는 TV와 위성방송망에 생방송으로 손을 얹어 기도하고, 독을 마시고 코브라에게 물려보고 예수 믿으면, 또는 성령 받으면 이와 같이 죽지 않습니다. 라고 방송한다면 누가 믿음을 거절하겠으면 누가 기독교를 욕할 수 있겠는가? 본인도 하지 않는, 하지 못하는 일을 남에게 하라고 요구하니 세상 사람들이 비난하는 근거로 삼게 되는 것이다.

    1.1.3. 마가16:18절의 긍정적 해석 ‘케칼-하토브 해석법’

    필자는 이 본문이 이것을 열망하던 분파에 의해 추가된 것으로 믿는다. 이것이 또한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이 본문을 긍정적으로 전제하고 해석을 해도 케칼하토브의 방법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단 은사주의자들의 열망처럼 이것을 공식화, 상시화하려는 것은 심각한 오류에 빠져드는 것임을 명백히 한다.

    케칼하토브의 원리를 통해 이 본문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1.1.3.1.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표적을 주신다. 믿고 순종하는 백성은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 사역의 보증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사역자에게 함께 하시는 증거는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것이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증거를 남겼다. 이것에 관하여 필자의 ‘능력신학을 재고하라’에서 ‘가시적 현현의 비 비상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가시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또 그것은 비상한 은혜가 아니라 당연한 은혜이다.(1997,159) David Powlison은 ‘성령님과 그 말씀의 능력이 수많은 방법으로 어둠에 빛을, 멍에에 자유를 혼동이 있는 곳에 건전함을 부여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성경이 실천 신학의 능력을 갖고 있으며 실천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 산 증인’ (1996, 18)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사역의 지원으로서 하나님은 당신의 선한 뜻과 인간의 머리로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능력으로 기이한 일을 행하신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지원을 경험한다.

    1.1.3.2. 내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본인의 사역의 경험으로도 속칭 귀신들린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랑, 죄에 대한 인식, 예수님의 용서 등을 전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였을 때 즉시 온전하여 지고 회복된 것을 경험하였다. 필자는 은사주의자들이나 귀신론자들이 하는 축사행위 즉, 귀신의 이름을 묻고,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등의 방법을 거부한다. 예수의 이름이나 성경 등이 마술적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름은 예수님과 의 인격적 관계를 전제하는 말이다. 예수님의 통치가 온전히 구현되는 것은 귀신과의 대화나, 명령으로가 아니다. 비록 귀신들린 사람일 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그에게 복음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현재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처럼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오류이다. 그렇다면 여러 번의 축사, 금식, 안찰 등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즉시 온전케 하셨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즉시 치료되지 않고 다시 재발하며 거듭 반복해야 한다.

    귀신과의 대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환자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환자의 인격이 사탄에게 지배당했다고 전제해도 참된 복음이신 예수님이 오셨다면 그 귀신은 환자에게 무력할 수밖에 없다. 은사주의의 귀신론은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복음이 바르면 귀신으로부터 해방은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한다.

    기존의 정통주의 신학이 능력이 사도시대에 끝났다고 함으로서 마치 하나님의 치료하는 은사가 지금은 더 이상 없다는 말로 들려졌다. 그러나 복음은 여전히 초대교회 시절이나 현대에도 동일하게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준다. 표적은 끝이 났지만 은사는 여전히 행하여진다. 은사주의자들은 표적을 상시화(常時化) 하려고 하기 때문에 오류에 빠진 것이다.

    특히 귀신으로부터의 해방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은 귀신론을 오해하여 귀신과 대화, 이름 밝히기 등의 오류를 범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범신론과 다원주의적 신관을 퍼트리고 있다.

    1.1.3.3. 귀신과의 대화는 정당한가?

    막 5:7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8)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귀신과 대화를 시도한 것처럼 보이는 구절로 귀신론자들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이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 많은 거짓이 나타난다.

    첫째. 귀신의 말을 믿지 말라. 예수님이 귀신의 이름을 물을 때 단수로 호칭한다. 그런데 귀신은 자신을 ‘군대’라고 하면서 ‘우리가 많다’라고 하여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고 했다. 그러면 누구의 말이 옳은가? 예수님이 단수로 알았는데 귀신의 말을 듣고 여럿 인줄 알았단 말인가? 예수님은 ‘너희들의 이름이 무엇이냐?’ 라고 한 것이 아니다. 귀신의 말을 정말로 믿으면 안된다.

    둘째, 귀신과 타협하지말라. 예수님은 해안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이 거라사에 가신 행위 자체가 이미 귀신에게는 나가라는 명령인 셈이다. 귀신은 더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예수님 앞에 끌려나와 서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곳에 가신 것이 곧 귀신에 대한 추방명령이다. 전도자를 하나님이 보냈다면 이미 귀신은 추방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과 타협, 거래 할 필요가 없다.

    셋째, 귀신과 대화하지 말라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란 말은 귀신과의 대화가 아니다. 오히려 제자들과 청중에게 그가 귀신들린 것임을 확인시킨 것으로 예수님이 귀신까지도 제어하시는 분임으로 알리신 사건이다. 이 사건의 앞 문맥은 병자의 병을 통해 인간을, 바람과 바다의 순종을 통해 자연계를 복종케 하신 예수님이 이 사건으로 영계까지 굴복시키는 왕 되심을 보여준 사건이다.

    넷째, 귀신은 거짓의 아비이다. 귀신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군대’는 이름이 아니다. 귀신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자신들의 상태를 말한 것이다. 귀신이 하는 말을 믿으면 안 된다. 귀신의 말을 믿으면 거짓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귀신의 거짓말에 대해 책망하지 않았고 옳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거짓말쟁이의 거짓말로 무시하셨다. 진정한 대화라면 그 말의 거짓임을 책망하고 진짜 이름을 말하라고 명령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와 대화하시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또 귀신의 요청을 따라 돼지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하신 것도 아니다. 귀신과 거래를 하거나 협상을 한 것이 아니라 귀신의 요청을 이용하여 돼지의 주인들을 나오게 한 것이다. 돼지의 주인들은 단순히 미친사람이 나았다는 말만 듣고 자신의 일을 접어두고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재산을 잃자 확인차 나왔고 예수님 앞에 서게 되었다. 그 후 온전해진 사람을 통해 전도를 받고 믿게 된다. 이 성경이 귀신과의 대화를 인정하는 구절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귀신과의 대화는 당연히 거부되어야 하고 성도는 하나님과 대화해야 한다. 귀신과는 대화하도록 말한 적이 없다. 바울의 빌립보 사역에서도 귀신의 계속된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귀신을 축출되었다. 귀신에게는 ‘나가라’는 명령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이 명령은 믿음으로 ‘예수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하는 예수 이름의 능력을 믿고 명령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귀신들린 여인이 여러 날 따라다니면서 소리 질렀지만 바로 귀신을 좇아내려 하지 않았다. 바울은 ‘심히 괴로웠다.’ 그러다가 이 귀신이 따라다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는 줄 알았고 귀신을 좇아내었다. 이 사건으로 바울은 감옥에 가고 거기서 간수를 만나며 교회가 시작된다. 이 귀신이 따라다니게 하신 사건은 하나님이 기획하신 사건이다. 바울은 ‘심히 괴로워’ 한 것을 보면 처음부터 안 것 같지는 않다.

    행 16:17)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1.1.3.4. 새 방언을 말하며

    방언문제는 상당히 어렵다. 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은 표적으로서의 방언이고, 로마서와 고린도서에는 은사로서 방언이 나온다. 표적은 상징적의미를 갖고 은사는 기능적 의미를 갖는다. 표적으로서의 방언은 일반적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특수한 상황 즉, 초대교회와 같이 처음 예수님을 듣고 있거나, 하나님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우상숭배지역의 선교지 등의 특수 상황은 개연성이 있다. 또 은사로서의 방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기도하는 은사로서 다른 사람이 들으면 곤란한 것을 위해 기도할 때 사용되는 비밀 기도의 방편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매우 조심성을 가지고 사용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방언의 은사는 계속된다.

    1.1.3.4.1.1.1. 표적으로서의 방언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개인이나 종족이 표적을 스스로 경험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경우로서 불신자의 극적개종의 경험으로서, 미전도 지역의 초기 복음전파에서와 같이 특수한 상황에서 개연성이 보고된다.

    성경에서는 오순절날의 예루살렘, 사마리아, 고넬료의 사건에서 나타난 것이 표적으로서의 방언이다. 그 후에는 사도행전에 더 이상 이런 표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에도 믿음이 없던 사람이 사모하지도 않았는데 방언을 경험한 예가 더러 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1.3.4.1.1.2. 고린도의 방언은 표적이 아니라 은사로서 방언이다.

    고린도의 방언은 은사로서의 방언이다. 은사는 표적과 구분되어야 한다. 오순절의 방언은 사용되고 있는 타언어였고, 고린도의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비언어였다. 은사로서의 방언은 한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각각의 은사를 주시기 때문에 은사는 서로 다른 것을 주신다. 그러나 한국교회에는 방언 은사를 받은 사람이 너무 많다. 보편적으로 방언은사는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은사의 기본에 어긋난다. 마치 다 은사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문제을 일으킨 고린도 교회와 같다. 은사가 치우친 것이 아니라 방언을 강조한 나머지 모방방언, 학습방언, 사단의 거짓 방언이 많다.

    1.1.3.4.1.1.3. 방언의 표적을 요청하거나 간구하는 것은 잘못이고 되지도 않는다.

    바울은 예언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은사를 더욱 좋은 은사라고 했다. 그런데 방언은 많이 하려고 하는데 말씀 전하는 것은 ‘나는 몰라요, 못해요’ 라고 한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은사가 잘못되었음을 증명한다. 알아듣지 못하는 일만 마디 방언보다 알아듣는 한 마디 말씀이 더욱 값진 것이다.

    1.1.3.4.1.1.4. 은사를 만들어 주려는 시도를 버려야한다.

    교회는 방언 은사를 받게 하려고 애를 쓴다. 이런 시도가 거짓된 은사에로 나아가도록 길을 열어준다. 은사는 다양하게 발굴되고 훈련되어야 한다.

    1.1.3.5.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으며

    뱀을 잡고 독을 마시는 일을 믿음의 증거로 주신 것이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제자가 어쩔 수 없이 고난을 받는 중에 뱀을 잡거나 독을 마시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때 하나님은 그 전도자를 구원하시고 대적자를 굴복시키는 방법으로 해를 받지 않도록 도우시는 경우가 있다.

    이런 보고는 열악한 선교지에서 선교사가 죽음의 위협을 받을 때 일어난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필자의 케칼하토브 해석으로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열악한 사역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전파하는 전도자가 현지인들을 대신하여 뱀에게 물리거나 독을 대신 마셔줌으로서 죽음을 당한 후에 이것이 계기가 되어 복음을 영접하게 되는 경우도 선교 역사에 자주 있는 일이다.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으로 하나님은 어떤 독도 이길 수 있도록 표적을 주시기도 하며, 반대로 피할 수 있지만 선교지의 영혼을 위해 죽음을 자처하는 그래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복을 받고 죽은 전도자도 많다. 이 전도자는 해를 받지 않고 오히려 복을 누린 사역자이다. 이것이 필자가 주장하는 Kecal-hatob 원리이다.

    이 원리에서는 결과를 정형화 하지 않는다. 결과는 오직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인간 사역자는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오직 순종할 뿐이다. 그 결과 하나님이 하시는 행위는 무조건 선하고 옳으시다. 하나님의 결과가 항상 인간 편에서 좋은 것 즉 ‘반드시 치료해 준다.’ ‘반드시 살려준다.’ 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은사주의자들은 항상 ‘반드시...’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도 몰래 약을 먹고, 의사를 만난다. 그들의 집이나 사무실의 서랍에는 여러 약이 있을 것이다. 남에게는 ‘기도하면 다 된다’, ‘하나님만 믿고 기도하라’고 하면서 말이다.

    1.1.3.6. 병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손을 얹는 것은 그들과 관계를 맺음을 말한다. 손을 얹으라는 말을 안수 기도하라는 것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안수기도는 사도적 표시였다. 사도는 손을 얹을 때 나았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바울은 제자 디모데의 위염을 위해 안수 받으러 오라거나 내가 가서 안수하려 하지 않고 포도주를 조금 마시라고 권했다. 안수가 치료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안수는 환자와 인격적 관계를 가지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회개하게 하고 잘못된 삶이 무엇인지 종합적인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한다. 현대인들은 의학적 치료를 의사에게 의탁하지만 P. Tournier가 말한 대로 장로라고 일컫는 영적 지도자로부터 영적 도움을 받아야 한다. 병이 오직 의학적 원인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영적, 사회적, 등 수많은 요소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에 전인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기도하며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게 된다.

    또한 필자의 원리를 따르면 병이 치료되지 않더라도 병을 통해 영적 회복과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에 질병의 치료보다 더욱 본질적인 영적치료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몸은 병으로 죽어도 영적 구원을 얻는 복을 누리게 된다. 질병의 치료에 매달리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 하나님께 맡기고 선한 삶을 사는 것이 의학적으로도 더 유익한 치료의 수단이 된다. 이것은 현대 심리학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류에 빠진 사람들은 육체의 질병 치료자체에 목적을 둔다.

    1.1.4. 가시적 현현의 비 비상성(非 非常性)

    이 개념은 필자의 ‘능력신학을 재고하라’(1997)에서 주장한 개념이다. John Wimber, Peter Wagner로 대표되는 능력과 표적에 열광하는 선교신학파의 능력치유 능력전도 등의 능력신학의 허구를 밝혔던 책이다. 필자의 주장을 아래에 싣는다.

    1.1.4.1. 특수한 지역이나 상황에 대하여.

    특수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비상한 일을 행하신다. 즉, 첫째 비복음화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 둘째 사역자가 긴급한 위기를 당할 때 그를 보호하기 위해, 셋째 기타 특수한 조건에서 하나님은 행하시기도 한다.

    가시적 현현이 주로 비복음화 지역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을 모르는 지역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방법이다. 구약에서 행하시던 형태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러나 비 복음화 지역에서도 지속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초기에 잠시 자신을 계시하고 이어서는 성경과 사역자를 통해 인격적 방법으로 전환하신다. 예수님도 초기 사역에는 표적을 행하셨으나 자기 계시가 끝난 후에는 표적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아직도 표적을 구한다고 책망했다. 그래서 후기 사역에는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이 대부분이다. 이것이 ‘계시의 점진성’인데 ‘성경에 있는 것은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치유론자는 모든 성경을 재현하려는 유혹을 받았다. John Wimber와 Fuller Seminary의 성장학파가 대표적이다.

    1.1.4.2. 기독론적 접근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성이 세상과 사탄에 대하여 절대적이고 최종적이며 완전한 승리이다. 다만 그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느냐 아니면 불신앙 하느냐의 문제가 남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과 말씀 속에 충만히 거하심을 확신해야 한다. 이 확신으로 담대히 사역을 해야 한다. 이때 사역자는 하나님의 능력의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Kecal-hatob) 나타난다.

    첫째,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능력의 현현이 필요할 때는 기적적 치유, 독을 이김, 죽음에서 건짐, 천사의 나타남 등의 놀라운 일을 주신다.

    둘째,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고난의 잔이 필요할 때 그의 능력으로 죽임 당함, 매 맞음, 파선, 고생 등을 담대히 당하는 능력을 나타내신다.

    기독론적 의미의 승리는 늘 능력대결 양상에서 일방적 승리로 끝나는 것만은 아니다. 기독론적 승리는 마귀를 추방하고, 바다를 잠잠케 하며, 병자를 일으켜 세우는 것만이 아니다. 침뱉음을 당하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렸다가 극적으로 내려와서 원수를 굴복시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성경의 예언대로 묵묵히 고난의 잔을 받아 마시는 순종하는 모습이 기독론적 승리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 죽음도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행한 것으로 멋진 순종과 승리이다. 때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면 고난 받는 것이 승리하는 것임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배울 수 있다.

    선교사들이나 복음 사역자들이 당하는 고난은 그 자체로서 승리와 영광의 행진곡이다. 이런 관점에서 Rechard Gaffine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성도들도 동일한 십자가와 부활에 연합할 것을 논증했다.(1989, 8-10)

    1.1.4.3. 사역자의 유혹

    교회성장의 침체와 퇴보로 위기에 빠진 사역자들은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능력에 대한 환상을 갖는다. 베드로가 기적과 함께 삼천 명 오천 명이 세례를 받는 것을 흠모하여 능력을 받으면 동일한 일을 일으킬 것이라는 환상을 갖는다. 또 그것을 만들어낼 잘 짜여진 많은 프로그램으로 사역자를 유혹한다. 사역자들의 심성에 흐르는 성공환상이 깨어져야 한다. 성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베드로와 같이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힘써야한다. 참으로 하나님의 종이라면 말씀대로 전하면서 참된 회개를 불러오려고 외쳐야한다. 성공과 안녕을 보장하고 심상한 위로를 전하는 창기의 메시지를 버리고 ‘음란하고 악한세대여 회개하라’고 외쳐야한다. 그래서 고난 받고, 침 뱉음을 당하고, 미친 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말씀을 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다. 전도자가 바른 신앙을 가지고 바르게 전할 때 하나님이 어느 날에는 귀신이 굴복하고 병자가 낫는 기적이 주시고, 전도자를 죽이려고 독사가 물게 해도 죽지 않게 하실 수 있다. 그리고 또 어느 날은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굴하기 않고 당당히 십자가로 나아가는 능력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참된 사역자는 병 고치는 기술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복음의 진정성과 받는 고난의 삶으로 증명될 것이다. 성경은 거짓선지자의 특징을 기적, 귀신 쫓음, 능력을 행하는 것이라고 이미 선언했다.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살후 2: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만 했지 그 결과에 대해서는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놀라운 말씀을 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16:17-18).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눈을 들어 현실을 보면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들이 따르기도 하지만 따르지 않는 경우가 더 많고, 또 나를 보아도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든 자에게 손을 얹어 낫게 한 적이 없는데 주님은 이런 표적이 따른다고 말했다. 예수님의 말씀과 교회의 현실에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표적이 따르지 않는 자들은 믿지 않는 자들이란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사도 시대와 함께 표적도 막을 내렸다고 강변해야할까? 아니면 이런 표적들이 나타나게 해달라고 금식하며 기도해야할까? 강한 믿음을 달라고 회개해야할까?

    가신 주님, 다시 오신 주님

    이 문제는 표적이 뭔지, 또 누가 표적을 행하는지를 이해해야만 풀 수 있는 문제다. 우선 누가 표적을 행하는지부터 살펴보자. 마가의 증언은 이렇다. "제자들이 두루 나가서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16:20). 마가의 이 증언, 특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라는 증언에 따르면 표적을 행한 자는 믿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이다. 주께서 제자들의 복음 전파 사역에 함께 하셨고, 함께 일하셨다고 분명하게 증언했다.

    그런데 바로 앞에 나오는 또 다른 증언(16:19)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 주님은 이미 제자들을 떠났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그 어디에도 현존하지 않는다. 그런데 마가는 놀랍게도 제자들을 떠난 주님이 제자들의 복음전파 사역에 함께 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 조화일까? 제자들을 떠난 주님이 어떻게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있을까? 마가는 여기에 대해 일체 말이 없다. 단지 이루어진 사실만을 간단명료하게 기술할 뿐 세세한 설명이 없다. 하지만 요한은 예수님의 설명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7-8,13).

    그렇다. 제자들을 떠난 주님은 사실 떠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은 보혜사 성령으로 다시 오셨다.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다. 또 표적을 행함으로써 복음을 확실하게 증거하셨다. 마가는 오신 주님을 보혜사 성령이라고 하지 않고 '주'라고 불렀다. '성령'과 '주'를 동일시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성령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하여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과 활동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그 자신의 펼쳐진 팔이며, 그의 부활의 능력 안에서, 그 부활과 함께, 그의 부활 안에서 시작되는, 그리고 거기서부터 효력을 미치는 그의 계시의 능력 안에 있는 그 자신이다."라고 상당히 어렵게 말했다. 하지만 핵심은 단순하다. 성령은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이며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이해할 때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이것은 성령 이해의 핵심이요 기본이다. 이 기본을 놓치면 성령 이해가 엉뚱한 방향으로 왜곡되기 쉽다. 열광적 몰입이나 신비한 초월 영성으로 흐르기 쉽고, 믿음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의 도구로 휘두르기 쉽다. 그러나 성령은 이런 것하고는 본질과 차원이 다르다.

    성령은 결코 교회의 기능으로 도구화되지 않는다. 성령은 교회의 가르침과 교리 속에 갇히지도 않는다. 성령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의지와 뜻대로 처리하고 조작할 수 있는 것으로 사물화되지도 않는다. 성령은 결코 휘둘리는 법이 없다. 성령은 최고의 인격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자유에 따라 역사하고 싶은 대로 역사할 뿐이다(요3:8).

    성령은 진리의 영이요, 자유의 영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성령은 만물을 새롭게 하는 분(계21:5)의 영으로서 과거의 모든 억압과 어둠과 한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한다(고후5:17). 나아가 새로운 해방활동을 하도록 격려하고 힘을 준다. 어둠에 종노릇하고 우상 앞에 엎드려 삶을 조아리는 비참함에서 해방시켜 진정한 주체자로 서게 한다. 신학자 크라우스는 성령의 자유하게 하는 사역에 대해 말했다.

    "모든 외적 결정에 항거하는 자유의 영을 통해 하나님은 의존, 소외, 속박, 그리고 금기에 빠진 인간의 주체성을 갱신한다. 항상 역사의 객체로 비하되고 사건들의 희생물로 격하되는 인간이 자유의 영을 통해서 역사의 주체가 되고, 하나님나라의 세계 변혁적 운동에 부응하여 모든 상황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다. 자유의 영은 인간을 역사의 주체로서 그의 운명의 형성자로서 등장시킨다. 영 안에서 인간은 주체자로서 행동한다."(조직신학. 376).

    바울은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했다. '너희는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다'(롬8:15).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멜 필요가 없는 자유자다'(갈5:1). 그렇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인 성령은 제자들에게 오셔서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일들을 행하셨다. 모든 억압과 묶임, 죄로부터 해방시켰다. 성령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제자들과 함께, 제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셨다. 복음을 듣고 믿게 하는 것도 성령의 사역이고, 십자가의 도를 깨닫게 하는 것도 성령의 사역이다. 하여, 주님은 내가 너희를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했던 것이다(요16:7).

    암튼 성령은 자유의 영이다. 성령은 기계적으로 역사하지 않는다. 어떤 법칙에도 구속받지 않는다.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도 그렇다(요3:8). 그러기 때문에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들이 따른다고 해서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들이 기계적으로 따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표적이 따르지 않으면 믿는 자가 아니라고 판단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성령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요 성령의 역사를 기계적으로 법칙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본성에 어긋난다.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

    그렇다면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른다는 말씀은 뭘 말하는 것일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주님이 약속하신 표적들이 모두 주께서 친히 행하였던 표적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외적인 증표로서 주님이 행하였던 일들 중 일부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표적들을 살펴보자.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데, 이 말씀은 뒤에 나오는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와 묶어 읽어야 한다.
    그래야 그 의미의 핵심을 파악할 수가 있다.
    우선 뱀은 성경에서 사탄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그러니까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사탄의 어떤 공격에 휩싸인다 해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다는 확약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쳤고, 사탄의 머리를 짓밟았으며, 귀신을 쫓아내 이미 승리했기 때문에 우리도 넉넉히 승리할 수 있다는 약속이며,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힘찬 격려라고 할 수 있다.

    바울도 말했다. "누가 정죄하리요?…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이랴…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로마서 8:34-37).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세상의 무슨 독이라도 씻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황폐해도 그것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 안에는 귀신이 발붙일 곳이 없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고 있기 때문에 귀신이 자리를 잡고 버텨낼 공간도 없거니와 능력도 없다.

    '새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새 방언'이라 하면 즉각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하는 것으로, 방언을 못하면 참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는 식으로 읽는 사람이 많다.
    또 방언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분류하는 것은 말씀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는 유치한 발상이며, 문자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유아적인 문자주의의 우물에 빠져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문자주의가 매우 성경적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문자주의는 하나님의 뜻과 존재의 깊이를 문자에 한정하는, 아니 문자로 가두어버리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존재의 깊이를 오히려 해치게 된다. 말(문자)이란 단지 말이 아니다. 말이란 그 사람의 세계, 그 사람의 존재 방식을 나타내는 양식이다. 말은 존재를 담는 그릇이다. 사람을 관찰해보라. 한 사람의 세계가 달라지면 그 사람의 말이 달라지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그렇다. 말은 존재를 담는 그릇이다. 말은 곧 존재다. 하지만 존재의 일부요 존재의 껍질이다. 말은 존재이면서 동시에 존재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에 충실해야 하지만 말에 매여서도 안 된다. 말은 존재를 열어주지만 존재를 가리기도 하니까 말이다. 바로 이것이 말(문자)과 존재의 변증법적 관계다.

    그렇다면 '새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결국 뭘 뜻하는 것으로 읽어야할까?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말을 하는 것으로 읽어야할까? 사람의 말과는 다른 성령의 말이 따로 있는 것일까? 아니다. 성령의 말이란 것이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읽어야할까? 성령의 말이 아니라 성령에 속한 것, 즉 성령의 세계에 속한 것을 말한다는 뜻으로 읽으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덧붙여 사람이 달라졌다는 뜻으로, 그 사람의 존재와 존재 양식이 달라졌다는 뜻으로 읽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무릇 존재가 달라지면 언어가 달라지는 법이다. 그러기 때문에 새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말하는 내용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말하는 내용이 달라졌다는 것은 삶의 양식이 새로워졌고, 삶의 차원이 달라졌으며, 존재의 세계가 새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자들을 보라.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 전에는 부활의 이전의 세계에 속한 삶을 살았고, 부활 이전의 세계에 속한 것들을 말하며 살았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부터는 부활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 되었고, 부활의 세계를 증언하며 살았다. 부활 이전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살았다. 존재의 자리가 예수 밖에서 예수 안으로 달라지니 말하는 내용도 달라졌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방언이다. 예전에는 할 수 없었던 말을 하는 것, 하나님나라의 세계에 속한 것들을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방언이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방언인 이유는 하나님나라에 속하지 않은 자들은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권세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낫는다'는 말씀은 어떤가?
    이 말씀도 기계적으로 읽으면 문제가 생긴다. 문자적으로 읽고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믿는 자들이 병든 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할 때마다 다 나아야 한다.
    무슨 병이든 병원이나 의사를 찾아갈 것이 아니라 믿는 자를 찾아가야 한다.

    병원에 가는 것보다 더 좋은 길이 있는데 뭣 때문에 병원에 가겠는가.
    정말 문자적으로 믿는 자에게 이런 표적이 따라야 한다면 세상에 병든 자들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병원마다 믿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죽을병에 걸려 고생하는 자들이 한 둘이 아니다.
    병원마다 목사들 발걸음이 바쁘다. 입원한 성도를 찾아가서 위로하고 기도하느라 정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은 항상 만원사례다. 왜 그럴까? 손을 얹고 기도하면 나아야하는데 왜 낫지 않는 것일까? 왜 고생하는 것일까? 믿음이 없어서일까?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고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믿음이 없어서라고 말해야 한다. 여의도순복음 교회에 한 명의 환자라도 있으면 조용기 목사는 믿음이 없는 자로 판명되어야 한다. 아니, 모든 성도 모든 목사들이 다 믿음이 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문자주의의 비현실성이다. 문자를 문자로만 읽으면 문자와 현실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다. 그러기 때문에 문자를 문자로만 읽으면 안 된다. 또 문자를 기계적으로 적용해도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읽어야 할까?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 즉 낫는다'는 말씀은 믿는 자에게 따르는 권세를 말하는 것이라고 읽으면 좋을 듯싶다.
    믿는 자에게는 권세가 주어졌다.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 사용할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다. 사탄을 물리칠 권세, 세상을 이길 권세, 명예와 탐심을 물리칠 권세, 죽음까지도 극복할 권세, 병을 물리칠 권세, 돈에 휘둘리지 않을 권세, 등등 수많은 권세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졌다.

    그리스도인은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는 예수님의 권세 안에 있고, 그 권세가 그리스도인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통해 권세가 나타난다. 그런데 마가가 병을 낫게 하는 표적을 언급한 것은 그것이 가장 일상적이고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지 그것이 유일하기 때문에 언급한 것은 아니다. 바울도 말했다. "다 사도이겠느냐? 더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고전12:29-30). 바울이 말한 것처럼 믿는 자라고 해서 모두가 병 낫게 하는 자일 수 없다. 모두가 방언하는 자일 수 없고, 모두가 능력을 행하는 자일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자유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믿는 자에게는 권세가 따른다는 것이다.

    이 모든 권세는 표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표적과 관련해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게 있다.
    표적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과 같이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기 위해 허락된 것이지 개인의 믿음과 능력을 증거하기 위해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표적을 특정인의 전매특허인 것처럼 내세우면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표적을 사유화하는 것으로서 영적 사기행각이라고 해야 한다. 또한 표적이 표적을 위해 동원되어서도 안 된다. 표적은 오직 하나님나라를 위해 동원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듯 표적은 하나님나라를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끝나야 한다. 손가락은 손가락일 뿐이다. 결코 달이 될 수 없다. 표적도 마찬가지다. 표적은 결코 하나님나라가 될 수 없다. 표적이 하나님나라를 대신하려 들면 그때부터 표적은 하나님나라를 가리키는 고유한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특정인의 전매특허나 종교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권세와 관련해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이 있다. 믿는 자들에게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이 꼭 고난이나 질병이 있어서는 안 된다거나 필요가 없어졌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더 이상 약함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하나님은 선과 복으로 인도하기도 하지만 고난을 통해서 연단하시고 성화시키며 구원하기도 하신다. 고난이 구원의 통로일 경우가 참 많다.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고, 고난을 통해 구원 사역을 이루셨듯이 우리에게도 고난이 유익이 되는 경우가 많다. 약함이 곧 강함인 경우도 많다. 그러기 때문에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이 꼭 약함이나 고난을 제거하는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주께 받은 권세를 통해 약함이나 고난을 극복하고 정복할 수 있다. 아니, 극복하고 정복해야 한다. 권세에는 그런 힘이 충분히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때로, 아니 종종 권세를 무력화시킬 때가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권세의 주체는 내가 아니다. 권세의 주권도 나에게 있지 않다. 권세의 주체는 언제나 하나님이며, 권세의 주권은 하나님의 자유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권세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권세를 주시고, 또 믿는 자들을 통해 권세를 사용하시는 것은 믿는 자들의 유익보다는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기 위해서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책무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선포했다. 온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이처럼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위임한 주님은 제자들에게만 책임을 맡긴 채 훌훌 떠나지 않았다. 하늘로 떠나가신 그분은 보혜사 성령으로 다시 오셨다. 성령으로 오신 그분은 제자들과 함께, 또 제자들을 통해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셨다.

    믿는 자들에게 권세도 주셨다. 오늘도 복음을 증거하시는 분은 그분이시다. 그분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으로 오셨고,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되셨으며,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증거하셨고, 지금도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증거하신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듯이 그분의 모든 사역은 오직 하나님나라를 증거하는 것으로 모아진다. 우리의 삶도 예수님처럼 하나님나라를 증거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모든 권세, 모든 은사, 모든 삶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믿는 자의 삶이다. 진정한 제자의 삶이다. 하나님나라가 아닌 나만의 부귀영화는 신념의 세계, 종교의 세계, 자기 암시와 자기 확신의 세계일 뿐 예수의 세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예수의 세계엔 오직 하나님나라가 있을 뿐이다.

    1. 귀신을 쫓아내며

    눈에 안보이지만 우리 배후에는 귀신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눈에 안 보이는 공기 속에 사는 것처럼 영적인 귀신이 득실거리는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귀신을 쫓아내지 아니하면 귀신으로 말미암아 많은 축복을 빼앗깁니다. 우리는 귀신을 쫓아낼 권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보혈의 능력과 성령의 권세로 귀신을 쫓아낼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더러운 귀신이 있다고 말합니다. 도덕적으로 더러운 환경을 만들고 더러운 생각이 일어나게 하고 더러운 친구를 만나게 해서 더러운 죄를 짓고 부패하게 합니다. 방송을 들어도 더러운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인터넷에도 더러운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잡지도 더럽고 온 세상에 더러운 것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그 더러움의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더러운 귀신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야 됩니다. 

    또 성경에는 악한 귀신이 있다고 말합니다. 악한 귀신은 악을 가져옵니다. 서로 미워하고 싸우게 하고 해악을 가져오고 평안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악한 남편을 만나면 그 부인은 엄청난 고통을 당합니다. 악은 고통을 가져옵니다. 또 악한 부인을 만나면 남자는 괴롭습니다. 악한 형제는 형제간에 못살게 만들고 악한 이웃은 이웃을 도저히 고통스러워 못살고 이사를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악한 마귀는 악한 환경을 만들고 악한 친구를 만들고 악한 사람을 만들어서 고통을 가져오기 때문에 기도와 믿음으로 악한 마귀를 내어 쫓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회적인 악도 기도로써 물리쳐야 하고 가정적인 악도 기도로써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배후에 원수 마귀가 악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고 “악한 귀신아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고 계속해서 대적하면 귀신은 물러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릴 때 이를 뽑을 때가 있습니다. 그냥 뽑지않고 한 번 흔들고 있다가 또 흔들고 또 있다가 또 흔듭니다. 나중에 흔들흔들하게 되면 실로 이를 묶어 문고리에 걸어 놓고 하나, 둘, 셋하고 잡아 당기면 이가 싹 뽑혀집니다. 마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뽑듯이 자꾸 흔들어야 합니다. 자꾸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 자꾸 흔들어서 나중에 한 번에 호통을 치면 마귀가 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거짓말하는 귀신이 있습니다. 이 거짓말하는 귀신이 들어오면 앉으나 서나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거짓말 하는 배후에는 귀신이 있습니다. 우리들도 거짓말 하면 ‘귀신이 나의 혀를 잡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고 ‘사탄아 물러가라!’고 쫓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병도 대부분 귀신이 줍니다. 의학적으로는 폐병이다, 관절염이다, 심장병이다, 온갖 병의 이름을 말하지만 성경에는 그 배후에 마귀가 눌러서 병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고친 모든 병은 마귀에게 눌린 병이라고 한 것입니다. 마귀가 눌러서 병이 들게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초등학교 다닐 때 먼 산길을 걸어서 논 뜰을 지나서 학교까지 갔습니다. 가다가 길옆에 보면 봄철인데도 풀이 노랗게 떠서 잘 자라지 못합니다. 돌을 옮겨보면 풀뿌리를 돌이 누르고 있습니다. 돌을 옮겨주고 며칠만 지나면 풀이 새파랗게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폐를 누르면 폐병이 되고 심장을 누르면 심장병이 되고 관절을 누르면 관절염이 되고 허리를 누르면 허리 병이 되고 눈을 누르면 눈병이 됩니다. 아마 의학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은 “무식하기 짝이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성경에는 배후의 세력이 우리를 누르기 때문에 병이 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알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약 먹고 수술받고 난 다음에도 또 그 병이 들고 또 병이 들지 않습니까?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도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2. 새 방언을 말하며

    새 방언이란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언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성령 충만을 간구하면 성령이 우리를 충만히 채우시고 우리를 통해서 새 방언을 주십니다. 그리고 또 방언의 은사를 받아서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절에 보면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방언을 하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려면 성령 충만하게 해달라고 주님께 간구하고 기도해야 주십니다. 방언기도가 우리에게 유익 되는 것은 내가 마음으로 사람의 말로 할 수 없는 기도를 방언을 통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통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 상달되고 놀라운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구역장 한 분이 내게 와서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어느 부흥회 낮 예배 시간에 참석해서 목사님 설교를 듣고 있는데 설교는 귀에 안 들어오고 마음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머리를 숙여서 방언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목사님 설교가 끝날 때쯤 되니까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이후에 집에 갔는데 저녁이 되니 남편이 새하얀 얼굴로 집에 돌아와서는 “여보 오늘 내가 살아온 것은 기적이야”라고 했답니다. 

    남편은 시외버스 운전사였는데 시외버스를 운전해 가다가 벼랑 옆을 지나가다가 엔진이 고장이 났습니다. 그래서 버스를 세우고 승객들을 다 내리게하고 돌로 타이어를 받히고 올라가서 핸들을 조작하는데 그만 돌이 빠져 버스가 뒤로 밀려 앞 바퀴 두 개만 벼랑에 달랑달랑 걸렸습니다. 떨어졌으면 큰 사고가 났을 텐데 바로 그때 기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알아보니 바로 부인이 방언으로 기도할 때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도할지 모르고 마음은 다급한데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방언으로 기도하니 하나님의 성령이 직접 기도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우리를 통해서 친히 간구합니다. 우리는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이 없습니다.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은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서 방언으로 기도해 주시므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50년의 목회생활 동안에 수없이 많은 어려운 고비를 겪었습니다. 답답해서 도저히 인간의 말로써 기도할 수 없을 때 엎드려서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30분도 1시간도 2시간도 좋고 계속해서 기도하면 그 마음속에 막힌 담이 헐어지고 답답한 것이 사라졌습니다. 불안과 공포가 사라지며 은혜가 넘쳐나고 하나님의 응답이 다가오는 체험을 수없이 했습니다. 방언기도는 굉장한 효과가 있고 굉장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아직 못하는 사람은 성령 충만하여 방언하도록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3. 뱀을 집어올리며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의 주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치면 뱀의 독도 물러갑니다. 바울 선생이 파선해서 멜리데 섬에 들어갔을 때 추워서 사람들이 다 검불을 모아다가 불을 붙였습니다. 바울 선생도 검불을 잔뜩 손에 쥐어서 불에 던지려고 보니 맹렬한 독사가 손에 물고 달렸습니다. 멜리데섬 사람들이 바울을 보고 난 다음 “죄를 많이 지었구나. 바다에서는 살아 나왔으나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구나. 육지에서 뱀에 물려 죽는구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뱀을 불에 털어 버리고 손만 턱턱 털어 버렸습니다. 당장 퉁퉁 부어서 쓰러져 죽을 줄 알았는데 끄덕없는 바울의 모습에 멜리데섬 사람들이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신이다. 신! 신이 사람의 몸을 쓰고 나왔다”고 놀라워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앞으로 병자들을 불러와서 안수 받게 해 수많은 병자들이 고침을 받은 기적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연히 뱀에게 물렸을 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뱀의 독도 물러가는 것입니다. 뱀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꾀인 것도 이 뱀 아닙니까? 마귀가 뱀 속에 들어가서 아담과 하와를 꾀어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선악과를 따먹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도 이 뱀인 원수 마귀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거짓말 하고 우리를 속이고 우리에게 사기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뱀을 잡는다는 것은 거짓을 버리고 진리를 따라 살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거짓과 진실을 분별하는 지혜를 하나님이 주십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속에 모시고 예수 중심으로 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면 언제나 뱀을 잡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뱀이 우리에게 와서 거짓말을 해도 우리는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어리석게 보이더라도 예수님 말씀은 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참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거짓에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4. 해(害)를 받지 아니하며

    한국전쟁 이후에 가정이 다 파괴되어 많은 어린 소녀들이 창녀로 팔리던지 남의 집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흥회를 하는데 14살 내지 15살 되는 소녀가 입술에 전부 피가 묻었고 피멍이 들고 갈라졌고 너무 말라 뼈만 남은 상태로 나타났습니다. 기도 받으러 왔기에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물어보니 그는 전쟁 고아로 남의 집에 들어가서 식모 노릇하고 밥을 얻어 먹고 사는 아이였습니다. 이 소녀는 옛날부터 예수를 잘 믿었습니다. 주일에 꼭 교회가고 새벽기도회도 나가니까 그 집 주인이 불교를 믿으므로 이 아이를 굉장히 싫어하고 미워하여 채찍으로 때리고 나가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에 자다가 너무나 목이 말라서 물이 마시고 싶은데 문소리를 내다가는 주인에게 큰 혼이 나기 때문에 조심 조심 부엌에 가서 더듬거리며 그릇에 담긴 물을 찾아 먹었는데 그 물이 양잿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쓰러졌습니다. 전쟁 때이니 주인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이가 양잿물을 마시고 쓰러져 있기에 그냥 길거리에 내버렸습니다. 그런데 안 죽고 살아났습니다. 살아나서 구걸하고 밥을 얻어 먹다 부흥회에 왔습니다. 그래서 루피 리처드 선교사님이 데리고 병원에 데려갔습니다. 병원에 데려가서 조사를 해보니 입술만 탔지 식도도, 위장도 타지 않은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께서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독을 마시면 큰일 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되고 우리가 실수로 독을 마셨으면 예수 이름으로 우리가 대적하면 독을 물리쳐 주시고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독보다 인간관계 속에서 체험하는 언어의 독이 더 무섭습니다. 분노와 절망을 일으키는 말을 들었을 때 예수님 이름으로 물리치면 독이 사라집니다. 분노와 절망을 일으키는 말을 하거나 들으면 사람은 독이 오릅니다. 사람이 독이 오르면 얼굴이 시빨개지고 이성을 잃어버리고 흉악하게 행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독이 올랐을 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고 대적하면 독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모간 블레이즈라는 사람이 쓴 글입니다. “나는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힘과 기술이 있다. 나는 상대방을 죽이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다. 나는 가정과 국가 그리고 어떤 조직도 파괴할 수 있고, 수많은 사람을 파멸 시킬 수 있다. 아무리 순결한 사람이라도 내게는 무력하고 아무리 깨끗한 사람이라도 내게는 더럽다. 내 이름은 비난이다” 비난은 치명적인 타격을 갖다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파멸시키고 절망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입술에서 나오는 욕이나 비난이나 부정적인 공격은 어마어마한 독입니다. 쥐 잡는 독보다 더 무서운 독입니다. 자기는 지나가는 말로 뱉었지만 말로써 사람을 죽이고 말로써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부부간에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힘을 주면 굉장한 보약이 되지만 비난하고 공격하고 욕을 하면 독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이 다 우리를 그렇게 대해 주나요? 우리에게 독약을 먹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고 대적하면 독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5. 병을 치료함

    우리 기독교 신앙은 치료하는 신앙입니다.
    성경에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할 때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 친아버지인데 그 친아버지가 의사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의사가 되시고 예수님이 우리의 치료자가 되심을 수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25절로 26절에 “네 하나님 야훼를 섬기라 그리하면 야훼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기독교는 병 고치는 종교입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야훼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임이라”고 말씀합니다. 치료하는 야훼이십니다. 예수님도 그의 대속을 통하여 우리를 치료하십니다. 불과 짧은 3년 동안 목회한 예수님은 3년의 3분의 2는 병 고치는데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귀신을 미워하고 병을 고치기를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4:23-24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난 다음에 곧장 귀신을 쫓아내고 병 고치는 일에 열심을 다하셨습니다.
    주님은 치료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우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 나오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병 고침을 받고 마귀에서 해방되는 역사를 얻게 됩니다.
    우리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하는 예수님의 역사를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의사이시고 예수님도 우리의 의사이십니다.
    주님은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반드시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에 “예수께서 그의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증거 하러 가는 사도들에게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라고 말했었습니다.

    이제부터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십시오.
    성령 충만하고 새 방언기도를 하십시오.
    거짓의 뱀을 잡아 내십시오.
    언어적인 폭력으로 독이 오를지라도 주의 이름으로 해소하십시오.
    병든 자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십시오.
    기적이 일어나는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삽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있는 원수 귀신을 대적하여 이기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우리들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 이야기 / “물질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우주는 완벽하게 창조된 것”



    “물질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우주는 완벽하게 창조된 것”

    제12회 크리스천리더스포럼



    장순흥 한동대 총장이 지난 28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빌딩에서 열린 제12회 크리스천리더스포럼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세계적 원자력공학자이자 교육자인 장순흥(67) 한동대 총장은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창조 세상의 원리’를 일관되게 강조했다. 하나님을 믿는 과학자로서 그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완벽하신 분이며, 피조세계와 인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만드셨는지를 증언했다.

    장 총장은 지난 28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빌딩 컨벤션홀에서 열린 제12회 크리스천리더스포럼(CLF·회장 김영훈 대성그룹 회장)에서 ‘나는 왜 창조를 믿고 구원을 믿는가’라는 주제로 간증했다. CLF는 정·관계 학계 경제계 등 각계각층의 크리스천 오피니언 리더들이 강연과 신앙 간증 등을 나누는 모임이다.

    장 총장은 1976년 서울대 핵공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MIT에서 핵공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82년에는 카이스트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 교수로 부임해 인재를 양성했고, 2009년에는 우리나라 원자력발전소의 기술을 자립·수출에 힘썼다. 2014년에는 과학자로 최고 영예를 상징하는 ‘과학기술훈장 창조장(1등급)’을 받았다.

    장 총장은 “경복고 1학년 때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던 중 ‘삶의 모든 끝은 죽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순간 모든 것이 허무했다”면서 “고등학교 2학년 때 교회를 나가 회심하게 됐고, 그해 여름수련회 때 로마서를 읽으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고 고백했다.

    하나님을 알게 된 뒤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은 복음이었다. 장 총장은 성경을 5분 동안 5가지(창조 죄 구세주 교회 천국) 카테고리로 전하는 ‘5C 전도법’을 직접 만들어 청년과 유학생 복음 전도에 적용했다.

    그는 과학자로서 창조를 믿는 이유에 대해 “무에서 유는 나올 수 없다”면서 “빅뱅이론이 성립하기 위해선 최초의 순간에 에너지나 물질이 있어야 가능하지만, 에너지나 물질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생명체를 다루고 있는 기본 단백질이 스스로 만들어질 확률은 10의 500승분의 1, 즉 제로에 가깝다. 간단한 세포 하나도 스스로 만들어질 확률은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진화론에 따르면 무척추동물, 척추동물(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 유인원 현생인류에 이르는 점진적 진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진화를 입증할 중간단계의 화석이 발견되지 않았고 이론적으로도 중간 화석은 공식적으로 한 개도 인정받지 못했다”고 전했다.

    집을 지을 때 설계도면이 필요하듯 생명체에도 설계자와 창조자가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장 총장은 “세포마다 DNA와 RNA로 구성된 설계도가 있고, 끊임없이 설계도가 전달되고 있다”면서 “하나님의 창조섭리로 만들어진 우주와 지구는 생명체가 살아가도록 완벽하게 설계된 환경”이라고 말했다.

    유신 진화론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그는 “최초의 세포는 하나님이 창조했지만 수십억 년에 걸쳐 인간은 진화됐다고 주장하는 유신 진화론의 가장 큰 문제는 성경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라면서 “이 논지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장 총장은 “과학자로서 삶의 경험을 통해 성경이 진실하다고 믿게 됐다”면서 “성경은 읽을수록 진실했고 논리적으로도 합당했으며 천국의 소망을 갖고 구원을 믿게 됐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임을 인식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에 따라 살아가자”고 전했다.


    홍정길 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가 지난 28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빌딩에서 열린 제12회 크리스천리더스포럼에서 설교를 전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설교자로 나선 홍정길 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신 축복’(딤후 1:7)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홍 목사는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보면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재산과 능력, 성취가 아닌 마음”이라면서 “이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닌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홍 목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을 향해서는 담대한 마음을 가지되 이웃을 향해서는 사랑하라”고 강조했다. 그는 “세상에서 성취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인생엔 사랑만 남는다”면서 “신자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권면했다.

    차기 포럼은 19일 오후 7시 서울 광림교회에서 젊은이들과 함께하는 갓플렉스 오픈포럼으로 진행된다. 오픈포럼은 김정석 목사의 설교와 가수 소향의 공연, 유튜버 박위, 존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손주은 메가스터디 회장의 강연과 토크 콘서트로 열린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16024&code=23111111&sid1=chr

    세대주의. 뉴에이지 운동. 종교다원주의



    세대주의(dispensational)란 용어는 세대 혹은 시대를 뜻하는 dispensation이란 말에서 나왔는데 이 말은 헬라어의 οικονομαι(오이코노마이)란 말에서 나왔다.

    οικονομαι는 οικοs (오이코스;집)와 νομοs(노모스;법)을 합쳐서 된 말로서 번역하면 집을 다스리는 법 이란 뜻이다.

    이 세계를 하나님이 운영하는 집으로 본다고 할 때 세대주의는 시대에 따라 하나님이 집을 운영하시는 방법을 달리 했다고 믿는데, (마치 아버지가 자식을 다루는 방법이 유년기 장년기 청년기 등 성장 과정에 따라 다르듯이) 이 구별되는 시대를 세대(dispensation)라고 부르며 세대주의는 이 세대 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대주의자들은 세대의 구분이 세대주의 본질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세대주의는 언약신학이나 오순절 신학처럼 하나의 신학 체계이기는 하지만, 스코필드 이후 많은 교리적 발전을 이루고 있는 오늘날 상황에서는 세대주의가 어떤 신학인가를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세대주의자란 용어는 세대 주의를 주장하는 자신들까지도 여러 용어로 사용할 정도로 그 의미는 혼란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대주의 역사가 잘 나타난 현대 미국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에 잘 나타나고 있는데 그들은 모두 동일한 점을 가지고 있다.

    그 신학적인 공통적 특징을 요약한다면, 1)성경의 권위에 대한 확신 2)교회의 독특성 주장 3)우주적인 교회의 실재 강조 4)하나님 구속의 계획에 있어 성경 예언의 중요성 강조 5)종말론에 있어 전천년설 지지(환난전 휴거설) 6)이스라엘의 미래 믿음 7)세대에 따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이 다르다는 사실 강조 등이다.

    이들은 세대를 나눈다는 의미에서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라고 불리지만, 세대주의의 최초 주창자 이름을 따서 다비주의(darbyism)라고도 하고, 이스라엘과 교회의 운명을 별개로 본다는 의미에서 이중운명주의(dual destinationism)라고도 하고, 이스라엘과 교회를 위한 의의를 분리하여 해석한다는 의미에서 이분수신자주의(addressee bifurcationism)이라고도 한다.

    세대주의의 발전과 동향, 세대주의의 성경 해석 방법, 세대주의의 종말론, 세대주의 신학이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 등 더 자세한 내용을 보기 원하면 이단자료 실에 있는 세대주의에 대한 소고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뉴 에이지 운동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다. 사람들은 서로의 행복을 위하여 함께 모여 살게 되었는데 이러한 결합체를 사회(社會) 라고 부르며, 사회가 더 발전한 것이 곧 국가(國家) 이다. 사회는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문화(文化) 와 문명(文明) 이다. 문화 는 사회의 정신적인 영역을 말하며, 문명 은 사회의 물질적인 영역을 가리킨다. 문명은 돌이나 불을 사용했던 원시 사회로부터 컴퓨터와 인공위성을 사용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기술적이며, 물질적인 발전을 말한다.

    그러나 문화 는 그 사회의 정신적인 상태의 표현으로서 전통적인 풍속과 예술, 음악, 시, 춤, 문학, 건축, 철학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정신세계에 담겨진 중심 내용의 표현이라 하겠다. 어느 한 사회의 문화를 보면 그 사람들의 정신영역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는 인간들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다. 가치관은 인생관, 세계관, 국가관, 가족관에 따라 형성되는데, 이렇게 형성된 가치관은 종교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종교(宗敎) 는 신(神)과 인간과의 관계를 말하는데 그 사회가 갖고 있는 종교에 따라 가치관이 형성되며, 그 가치관은 문화를 낳고, 문화는 문명을 지배하게 된다. 따라서 어떤 신(神)과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인 행복이나 불행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모두 종교인이다. 세계의 대표적인 종교로는 힌두교의 다신론으로부터 불교의 부처신과 유교의 조상신 그리고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의 유일신이 있다. 여기에 수없이 많은 미신과 같은 무속신앙까지 합치면 종교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혹, 신(神)이 없다 고 생각하는 무신론자(無神論者)가 있다면, 그는 자기 스스로 자신이 신(神)의 자리에 앉아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며, 그가 갖고 있는 가치관이나 문화의 배경은 이미 그의 조상이나 여러 사람의 종교에 영향을 받은 또 하나의 잡(雜) 종교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모든 종교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그것은 조물주(造物主) 즉,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종교와 피조물(被造物)을 신격화(神格化)한 종교(사실상 이것은 피조물에 대한 숭배로서 종교라고 할 수 없음)이다.

    뉴에이지(New Age) 란 영어로 새 시대 란 뜻이다. 이것은 새로운 신흥 종교 운동으로서 겉으로는 세계의 평화를 외치며 모든 종교의 통합(이는 피조물 숭배종교의 결합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종교적 쿠데타임)을 주장하고 있는데, 뉴에이지는 현대판 무신론 사상으로써, 나도 하나님, 너도 하나님,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다 라고 인간 스스로를 신격화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의 신(神)은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는 타락한 천사인 사탄으로서 사탄의 지배를 받아 사탄의 가치관을 형성하여 사탄의 타락한 문화를 확산시킴으로써 문명을 지배하고 결국에는 그의 목적인 인간과 가정의 행복, 사회, 국가, 세계 모든 것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


    오늘날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종교다원화 상황 가운데서 살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국교를 인정하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상황에서 특정 종교에 편중되어지지 않도록 모든 정치와 사회, 매스컴 등이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다. 그리고 종종 이 균형이 깨어지는 사건이 발생하면 매스컴들은 요란하게 이를 보도하며 타종교를 인정, 존중하지 않는 것을 비난하곤 한다. 이전 군에서 있었던 훼불(毁佛)사건 등이 예민한 이슈로 사회에 보도되어지는 것을 보았고 최근의 조계종 사건에서도 일반 비신앙인들 보다 타종교인들은 더욱 이 일에 연루되어지지 않도록 말조심하는 모습을 보았다. 신앙의 교리적인 요구와는 상관없이 한 사회 가운데서 여러 종교가 서로 피부를 접촉하며 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있다.


    특히 한국교회가 세계선교의 무대에 뛰어들게 된 이후로 특히 아시아권 선교에서 다양한 타종교에 대한 선교적 접근법에 상당한 곤욕을 치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태국에서도 한국 선교사가 훼불사건으로 강제 출국되어지기도 하였고 러시아에서는 정교회와 한국선교사들 간에 극히 불편한 관계가 형성되어지기도 하였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출 20:3)라는 계명을 십계명의 제1계명으로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종교다원화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신앙의 길인가에 대해서 혼란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적절한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이해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대처방안에 대한 제안들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왜 최근들어 종교다원주의가 전세계적인 이슈가 되어있는가?

    최근 전세계적으로 종교다원주의가 폭넓은 수용적인 가치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먼저는 이러한 종교다원주의가 전세계적인 이슈로 자리를 잡게 된 배경들을 살펴보아야 하겠다.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이 배경을 볼 수 있는데 첫째는 급속한 세계의 변화와 세속화 경향으로부터 오는 영향과 둘째는 기독교 내부로부터 오는 도전, 그리고 세 번째는 타종교로부터 오는 영향 등이다.

    첫째로 급속한 세계의 변화와 세속화 경향으로부터 오는 영향은 크게 보면 지구촌화 (globalization)와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변화라고 하겠다. 급격한 기술의 발달로 이제 세계는 하나의 지구촌으로 변하여 가고 있다. 이전에 지역을 가르던 시간과 공간의 간격이 거의 없어지게 되었고 서로가 하나의 커다란 커뮤니케이션 체계 안에 있는 하나의 공동체로 발전해 가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체계로 발전해 감에 따라서 지구촌은 피할 수없이 점차 개방된 사회가 되어져 가고 있다. 죤 나이스빗은 『메가트랜즈』에서 지적하기를 전통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이 가진 사상이나, 받아들이는 믿음이나, 감상하는 예술품은 모두 한정된 공간에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이용 가능하다. 힌두교의 만트라, 탄트라 경전의 만다라, 일본의 프린트 문양, 아프리카의 조각, 라틴음악과 인도의 라가 등, 이 모두가 서구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실시간 에 서로 어울려 있다. 이러한 사상과 종교의 개방, 공존 흐름 가운데서 한 종교의 배타성을 주장하기가 점차 어려워져 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던주의 시대가 가지고 있었던 특징인 객관적 이성에 근거한 일원화된 체계와 합리성의 권위가 실추되면서 등장한 사조이다. 1985년 포스트모더니즘은 연극, 무용, 음악, 예술, 건축, 문학, 철학, 심리학, 자연과학 등의 모든 분야에서 나타났는데 그 특징은 불확실성, 파편성, 표준의 해체, 자아 상실, 기반 상실, 명시할 수 없는 다양함 등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에서 종교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문화의 전반적 분위기가 어느 종교의 유일성, 배타성을 거부하고 종교의 다원화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가게 되었다.

    두 번째 기독교 내부로부터 오는 도전은 현대신학으로부터의 도전이었다. 현대사회에서 신학자들은 타종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선교신학의 한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이러한 고민에 전통적인 신학 방법론의 틀을 깨뜨리는 현대적 신학의 신학방법론이 가미되면서 오늘날 선교신학에서 타종교에 대한 종교 신학적 태도는 크게 종교다원주의와 포괄주의, 배타주의의 세 부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즉 기독교 신학자들 내부에서도 타종교에 대해서 구원을 인정해 주거나 아니면 기독론 자체를 넓게 포괄적으로 해석해서 구원이 가능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보수 기독교회의 배타주의를 독선적이고 서구 제국주의적 선교의 산물이라고 공격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기독교 내부의 종교다원주의나 포괄주의적 입장이 보수 기독교가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더 커다란 도전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 번째 도전은 타종교로부터 오는 도전이다. 즉 현대세계에서 여러 종교인들은 기독교의 구원에 대한 배타적 주장이 여러 종교들이 공존하고 있는 현대의 종교 다원화 세계 속에서 서로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깨뜨리는 비윤리적인 독선이라고 공격한다. 특히 동양권 전통종교들의 특징이 포용성과 범신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고 서구 기독교 국가들의 식민통치의 아픔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아시아권 국가에서는 기독교의 배타적인 구원입장이 더 많은 지탄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도전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상당한 호소력을 가지게 되며 이러한 입장을 철저히 지지하게 된다.

    종교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인의 존재방식은 무엇인가?

    이러한 다원주의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어떤 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앞부분에서 이미 언급하였지만 신학자들은 이러한 종교다원화 상황하에서 기독교인들의 위치를 잡는 일에 무심하였고 현대까지 대략 세 가지 부류의 입장들이 제시되어졌다. 종교다원주의와 포괄주의, 그리고 배타주의이다.

    1) 종교다원주의는 모든 종교의 구원진리 가능성을 인정해주는 것으로 현대적 신약 성서학의 영향, 역사적 상대성에 대한 현대의 문화적 경험, 그리고 보다 넓어진 다른 종교들에 대한 지식 등에 근거하여서 등장하게 된다. 이들의 주장은 몇 가지 다른 방향에서 이루어지는데 존 힉은 모든 종교의 배후에 하나의 실재가 존재하나 역사와 문화의 특수성 때문에 여러 종교가 생겼다 고 보며, 레이몬드 파니카는 우주적 그리스도론을 주장하며 범 우주적인 신-인 양성적 실재로서의 그리스도는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성육신 되었으나 그것은 모든 역사적 형태를 뛰어넘는 것이기에 모든 종교는 일정한 방식으로 이러한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있다 고 주장한다. 사마르타는 역사적 상대성에 기초하여 어떤 종교나 종교인물도 신의 전적인 신비 앞에서 자신을 궁극적인 말, 충만한 의미로 말할 수 없기에 하나의 종교는 자신의 추종자에게 결정적임을 주장할 수는 있으나 어느 종교인에게도 결정적임을 주장할 수는 없다 고 한다. 해방신학 혹은 정치신학은 윤리적 실천을 진술의 진위를 가리는 판단기준으로 삼고 전통적 그리스도론이 세계의 역사에서 비도덕적 태도, 우월성, 불관용, 몰지각한 판단을 유발시켰음으로 그것을 철저히 재평가하고 패러다임 전환을 해야 한다고 말하며 존 힉의 신중심적 다원주의에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시도를 한다.

    2) 포괄주의는 성서만을 유일한 규범의 근원으로 보지 않고 다양한 신앙전통을 용납하는 가톨릭이나 정교회 등에서 주로 볼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종교다원주의와 포괄주의는 신학적 주장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실천적인 면에서 볼 때는 실제 알갱이가 거의 같은 주장으로 보인다. 로마 가톨릭의 바티칸Ⅱ보고서라든지 칼 라너 같은 사람들의 익명의 그리스도 주장을 보면 교회 밖의 타종교인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능력이 미치는데 이 말은 타종교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아니다. 즉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지만 그리스도 밖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개념인데 이 그리스도는 예수와 분리되어진 그리스도의 개념이다. 이 견해는 신학적으로는 종교다원주의와 배타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없이는 구원이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기독교 신학자들의 개념적 주장이고 실제적으로 익명의 그리스도론 에 따르면 타종교인은 그리스도라는 이름도 모르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 종교다원주의와 실천적인 면에서 별 차이가 없다고 하겠다. 이들은 타종교 안에 있는 자연계시를 인정해주고 강조한다. 일괄하면 백두산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가지 많은데 그 마지막 접근로에 그리스도라는 이름만을 올려놓은 모양이 된다. 가톨릭 안에서 한스 큉과 같은 사람들은 이런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이용하는 것에 반대하며 아예 기독교밖에 구원이 있다고 선포하자고 하기도 한다. 한국 내에서도 일부 신학교 교수들이 이런 기독교 밖의 구원의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일부 제3세계 신학자들도 이 포괄주의의 입장에서 타종교들 안에 존재한 보편적 구원 가능성을 인정한다.

    3) 배타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사건 이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고수하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성경 계시의 절대성과 무오성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1:8-9).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1:12).

    단순히 성경에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성경은 타종교와는 분명하게 구분이 되는 구원 사건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회심이다. 이 대속과 회심을 중심으로 한 속죄론은 타종교에는 없는 기독교만의 유일한 구원요구이다. 또한 피터 베이어하우스는 우리가 복음을 타종교인에게 전하고 개종을 요구할 수 있는 성서적 근거는 부활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만약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즉 예수께서 죽음 너머로 가셨다고 그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생명으로 돌아오신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내세와 영혼에 대한 기독교의 주장은 절대적으로 진리이며 우리는 감히 타종교에게 우리의 구원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변적인 학자들간에는 역사적 이라는 말의 의미를 두고 논쟁을 벌일 수 있지만 쉽게 생각하는 의미에서 기독교는 이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여러 면에서 크레머는 타종교 내에 일반계시(일반진리)가 존재할 수 있지만 이것은 기독교의 특별 계시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불연속성(discontinuity)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보수 기독교인은 실제 이 배타주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 타종교에 일반진리조차도 없다는 편협한 배타주의는 최근 들어서 그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타종교에 일반적 진리(이를 일반계시라고 표현하든 그 표현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가 있음을 인정할지라도 구원의 진리까지를 받아준다는 것은 보수 기독교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현대의 사회와 문화가 다원화 상황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할지라도 구원의 진리를 양보한다면 기독교는 그 존재 의미 자체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WCC 종교다원주의적 견해를 받아들이면서 선교사의 숫자가 급감한 것이 이를 증거 해 준다. 즉 보수 기독교는 타종교에 일반진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이면을 존중해주되 구원진리에 있어서는 타협할 수 없는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

    종교다원주의 상황에서 어떻게 종교간 윤리 를 만들어낼 것인가?

    보수 기독교의 위치가 배타주의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면 본고의 첫 부분의 문제제기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타종교와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해 나가야 할 것인가? 사회가 요구하는 평화 공존의 방법은 어떤 근거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가?

    WCC신학자들은 대화 (dialogue)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 대화 라는 개념도 보수 기독교와 WCC측의 이해가 서로 다르다. 보수측은 타종교와 대화가 필요함을 인정하되 이는 타종교인을 개종시키기 위한 접촉점으로서의 대화를 주장하고, WCC측은 기독교 구원의 유일성을 버렸으므로 타종교와의 관계를 개종 의도 없이 단지 서로 이해를 위한 도구로서의 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빙크와 같은 선교학자는 보수측의 대화개념을 구분해서 엘렝틱스 (elenctics)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고전적 입장에서 별 진보를 보여주지 못하는 견해라고 보인다.

    필자는 존 P. 뉴포트 등이 주장하는 종교자유에 근거한 타종교간 상호전도 (interfaith witness and religious freedom)를 소개하고 이를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이는 오늘날 현대 사회가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개념이며 국제적으로 이렇지 않은 국가에 대해서 강하게 요구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종교 자유를 근거로 해서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자신의 종교를 선택할 권한이 있으므로 모든 종교는 타종교의 전도에 상호 개방하자는 주장이다. 기독교인은 불교인에게 전도하고 개종을 권할 수 있고 동시에 불교인도 자유롭게 기독교인에게 전도하고 개종을 권할 수 있는 상호 자유를 인정하고 존중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인이 기독교의 진리를 인정하면 개종하는 것이고 또한 기독교인이 불교를 구원진리로 인정하면 불교로 개종하는 것을 강제적으로 서로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종교는 단순한 종교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사회와 문화의 한 구성요소로서 복잡한 관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단순한 해결책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종교다원화 상황에서 서로 자기 종교의 절대성을 주장하면서 불필요한 갈등과 불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는 피해서는 안될 상호 윤리가 되어야 한다. 또한 기독교의 배타주의는 구원의 진리에 대한 배타성이지 사람이나 상대에 대한 배타성은 아니다. 하나님의 복음에 근거하되 타종교인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그들의 종교를 인격적인 차원에서 또 일부 일반진리가 존재한다는 면에서 인정하고 존중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어떤 관계를 논하기 전에 기본적인 양식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인격적인 존중과 종교의 자유에 근거한 상호간 전도의 인정이 오늘날 필요한 관계이다.


    『종교 다원주의』

    <정승원교수의 현대신학해설>

    종교 다원주의나 타종교간의 대화 문제는 최근에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포스 트모던 시대에 들어와서 어느 때보다 더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이 전에는 타종교를 어느 정도까지 인정하느냐 혹은 어떤 것이 다르고 어떤 것이 비슷하냐 식의 생각을 해 왔다. 즉 한 쪽 종교 입장에서 다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종교 다원주의에서는 한 쪽 입장에서 다른 입장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입장에서 자신의 종교만을 보는 것을 요구한다. 즉 다른 종교를 판단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나름대로의 모든 종교들의 정당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 종교의 관점에서 다른 종교들을 보는 것은 스스로 우월성 내지는 절대성 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다른 종교들은 그 한 종교처럼 돼야 한다는 것이 전제된다. 그것은 바로 다원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포스트 모던이즘의 특징 중 하나는 어떤 한가지 절대적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텍스트에 내재하는 고유의 의미를 부정한다. 어떤 초-설화적(meta- narrative) 의미를 부정한다. 이러한 특징은 바로 종교 다원주의에도 연결이 된다. 한 종교의 절대적 진리란 있을 수 없고, 한 종교의 고유의 의미란 없고, 다른 종교들이 따라야 할 초 설화적 혹은 초 신학적 가르침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유일성 혹은 하나님 되심은 종교 다원주의의 No. 1 敵인 것이다. 한마디로 다원주의는 어떤 동질성(consensus)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질성(dissensus)을 인정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tolerance)을 주창하는 것이 종교 다원주의인데 이 관용이 란 한 쪽 편에서 다른 쪽을 관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관용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절대적 진리로 관용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 어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기독교의 가르침과 알라가 참 신이라는 이슬람의 가르침은 둘 다 관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두 주장은 절대적 진리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종교 다원주의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다원주의라는 것이 절대적이라는 일종의 교조주의적 색채가 있다고 하겠다.

    종교 다원주의 대표 주자인 죤 힉(John Hick)은 기독교의 성육신의 교리야말로 다원주의의 최대의 걸림돌이라고 말한다. 그는 주장하기를 모든 종교가 궁극적 실재 (ultimate reality), 즉 신을 추구하고 있다고 한다. 단지 문화적 역사적 배경만 달랐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모든 종교가 정당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예수-중심의 모델에서 하나님-중심의 모델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윌리암 스미스 (William C. Smith)는 진리란 객관적이 아니라고 한다. 더욱이 진리란 명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어떤 객관적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란 의미는 단지 각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또한 인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주장하기를 종교의 진리 혹은 실재가 무슨 뜻이었냐 라는 역사적 질문은 현재의 진리와 실재에 대한 신학적 질문과 다르다고 한다. 즉 역사적 질문을 버리게 되면 참다운 종교 다원주의가 성립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한다. 그는 또 주장하기를 만약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났다면 그것은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게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데이비드 트레이시(David Tracy)는 주장하기를 인간의 모든 지식은 제한적이며 다각적(perspectival)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대화는 이러한 제한적이고 다각적인 특징을 인지한 포스트모던 지식 소통이며 취득 방법이고 대화는 언어와 역사의 애매성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종교가 대화에 있어서 우월한 입장에 있던지 대화를 일방적으로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를 실재로 받아들이고 그 실재를 텍스트로 놓고 대화를 해석의 방편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종교의 해석을 절대적인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웨슬리 아리아라자(S. Wesley Ariarajah)는 주장하기를 기독교를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게 보는 것은 영적 테러리즘이라고 한다. 그는 배타적 성경 구절들을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절대적 의미의 진리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니, 단순히 바울이나 성경이 그렇게 말했다고 예수가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이 믿는 기준에 의해 비슷한 주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절대적 주장은 단순히 상대적일 뿐이라고 아리아라자는 주장한다.

    그러나 종교 다원주의가 풀어야 할 두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여러 종교가 어떻게 다 정당 혹은 타당(legitimate)할 수 있는가? 즉 다원성을 위하여 각 개체성 (particularity)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둘째로 어떤 개체성이 주어진다고 해도 상호 연관성이(consensus)가 없으면 상대주의에 빠지게 될 수 있지 않은가? 즉 서로간의 아무런 관계없이 개인적 특수성만을 가지면 페쇄적이 될 수 있고, 아니면 너도 맞고 나도 맞고 하는 무관심적 상대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떤 절대적 기준이나 추구하는 바가 있어야 하거나, 아니면 모든 종교가 중립적인 열림(openness)을 순수하게 유지해야 한다. 다원주의는 결코 어떤 절대적인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순수한 열림이 가능한 것인지 의심할 만하다. 왜냐면 그 열림을 유지하는 데는 어떤 기준이나 조건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종교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가 관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절대적이지는 않아도 나름대로의 진리성 혹은 정당성(legitimacy)을 모든 종교들이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떤 모양이든 각 종교의 진리성 혹은 정당성이 유지되지 않으면 다원주의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각 종교의 진리성 혹은 정당성은 다른 종교를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나 허용되는 것이다. 각 종교들의 유일성 혹은 절대성은 불허한다 하면서도 다원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각 종교들이 어떤 식으로든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성을 부정하지만 한편 상대적 차원에서 자기 종교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다원주의를 위해 각 종교의 상대적 진리성 내지는 정당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 진리성 혹은 정당성이 가능한지 의심스럽다. 즉 모든 종교들이 다원주의 아래에서 나름대로의 진리성 혹은 정당성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실 ‘상대적 진리성’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왜냐면 진리성이란 절대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당성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떤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이러한 모순을 탈피하기 위해 각 종교들의 진리성 보다는 다원주의 자체가 진리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도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한다. 만약 근거가 없다면 ‘다원주의 자체가 진리다’라는 말이나 ‘다원주의는 진리가 아니다’라는 말의 차이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다원주의 자체가 진리라는 것을 어떤 식이든 증명해 보였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는 많은 종교적 신념들 중에 한가지 일 뿐이다. 이러한 신념은 상대적 신념이 아니라 절대적 신념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다원주의가 정죄한 절대주의를 스스로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 다원주의도 일종의 한 종교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가 진리이기 위해서는 그것의 절대성이 주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다원주의도 어떤 절대적 기준이나 신념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다원주의가 원하는 ‘100% 순수한 열림’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다 옳을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다원주의는 무의미한 상대주의에 빠지던가 아니면 다원주의를 포함해서 각 종교들이 자신들만의 절대성을 주장함으로 서로간의 어떤 반위성(antithesis)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기독교와 불교가 반위적이고 불교와 이슬람교이 반위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다원주의가 ‘궁극적 실재’ 혹은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도 또 하나의 반위적 특징을 지닌 종교적 신념 일 뿐이다. 혹 다원주의적 발상에서 모든 종교는 진리라고 주장한다면 굳이 진리를 위한 대화를 할 필요 가 있겠는가? 즉 다원주의를 굳이 주장할 필요가 있겠는가? 어떤 면에서는 반위적 종교의 모습이 더 종교적이라 할 수 있다. 다원주의라는 미명아래 모든 종교를 사로잡으려는 것은 오히려 나름대로 절대성을 추구하려는 각 종교들의 진지한 종교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또한 종교들의 고유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믿는 신앙은 다른 종교들과 같은 범주에 속한 것이 아니다).

    종교 다원주의는 새로운 사상이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다신론주의이며, 구약이나 신약 당시 사회에서도 다원주의적 종교의 세계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성경은 이러한 것을 우상으로 정죄하고 있다. 또한 다원주의에서 추구하는 궁극성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떤 나름대로의 ‘초월적 절대성’이다. 이러한 절대성은 인간이 추론(postulate)한 것에 불과하다. 또한 다원주의는 모든 것을 관용하는 것 같지만, 다원주의를 믿지 않는 자는 가차없이 정죄한다. 기독교에서처럼 사랑이라는 것이 없다. 기독교는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동시에 모든 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다원주의는 다른 모든 종교가 다원주의가 되기를 원하면서 그 다원주의(즉 다원주의라는 종교)는 다른 종교가 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독단을 갖고 있다. 다원주의는 ‘상생(相生)’이 아니라 사실은 ‘독생(獨生)’인 것이다. 이런 독단적인 발상은 인간의 자율성을 기초로 한 인본주의에 근거한 것에 불과하다.

    고후2:14-16에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라고 말씀한다. 복음은 구원 얻는 자들에게만 향기가 아니다. 망하는 자들에게도 향기가 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다른 종교들에게는 악취요 우리에게만 향기가 아니라 모두에게 향기가 되는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이 향기가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 진리 자체가 타종교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진리는 그들에게도 구원의 소식인 것이다. 단지 그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그들 스스로 멸망을 쌓고 있는 것이다. 모든 종교들의 희망은 종교 다원주의가 아니다. 복음뿐이다. 참 진리의 향기를 맡는 길 뿐이다. 진리 자체가 동시에 악취이며 향기일 수가 없다. 진리는 언제나 향기일 뿐이다. 문제는 종교 다원주의자들에게 있는 것이지 기독교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벨리알이 동시에 참 신이 될 수 없다. 동시에 둘이 참 신이라고 하는 것은 참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타종교에도 전해야 한다. 이것만이 그들이 살길인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상생(相生)이 아니라 전멸(全滅)인 것이다.

    기독교는 우리만 살자는 것이 아니다. 다 같이 살자는 것이다.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