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예화 자료


한국적 예화 자료


1. 이성만, 이순 형제의 효제비(孝悌碑)

예전에 국민학교 교과서에 이야기로 실렸던 우애좋은 형제 이야기
낟가리를 서로에게 옮기는 형제가 달 밤에 서로 만나는 순간 감격적인 순간

충남 예산군 대흥면에 가면 ‘의좋은 형제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성만이순 형제의 효제비가 있다고 합니다.  
이 비석은 1978년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개뱅이다리’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예당저수지가 생기면서 물에 잠길 위험이 있자, 지금은 동서리의 대흥 동헌 앞으로 옮겨 놓았다고 합니다. 
예당저수지가 생기면서 인근 마을 어떤 사람이 기다란 돌을 주어, 마루 댓돌로 사용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울로 공부를 떠났던 자녀가 방학 때 집에 왔다가 댓돌에 한문이 쓰인 것을 보고서 읽어보니, 구전으로 전해왔던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실화임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의좋은 형제’는 1956-2000년까지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던 내용으로 형제의 우애를 보여주는 가슴 찡한 실화인데, 이 이이야기’는 농경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추수가 한창이던 가을, 형제는 땀으로 익힌 곡식을 거두어 똑같이 나눴습니다. 

각자 집으로 돌아간 형제는 서로를 생각했습니다. 
“이제 새살림을 차린 동생은 씀씀이도 많을 텐데….” 
형은 지게를 지고 낟가리가 있는 논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볏단을 동생의 낟가리에 옮겨 쌓았습니다. 
동생은 곡식을 똑같이 나눈 것이 잘못한 것 같았습니다. 
“형님은 부모님도 모시고 제사도 받들어야 하는데….” 
동생도 지게를 지고 논으로 나갔습니다. 
이튿날 형은 깜짝 놀랐습니다. 
낟가리가 조금도 줄지 않은 것입니다. 
동생도 놀랐습니다. 
그날 밤 형제는 각기 지게를 다시 지고 논으로 갔습니다. 
“너였구나! 볏단을 갖다 놓은 사람이….” 
“아니 바로 형님이셨군요.” 
형제는 어둠속에서 두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가슴 찡한 의좋은 형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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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조년, 이억년 형제의 투금탄

투금강(投金江)
서울시 영등포구 양화동(楊花洞)에 있었던 양화도(楊花渡)의 다른 이름.

서울의 여의도와 마포 사이 양천 앞 한강을 ‘투금탄’이라고 부르는데, 
우리의 전통적 금전관을 엿보게 하는 고사가 깃들어있는 강입니다. 
고려말기 이조년, 이억년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금덩이를 주었습니다. 
형제는 똑같이 나눠가지고 나루를 건너려고 나룻배를 탔습니다. 
배가 여울을 건너던 중 동생이 갑자기 나눠가진 금덩이를 강에 던졌습니다. 
깜짝 놀란 형이 “그 귀한 금덩이를 왜 버리느냐”고 아쉬워하자 동생이 말했습니다. 

“평소에 형님을 존경하여 따르는 마음이 지극했는데, 금덩이를 갖고 보니 자꾸만 형이 가진 금덩이가 큰 것 같은 사특한 마음이 들고, 형제의 우애를 깰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동생의 말을 들은 형도 가졌던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형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후일에 사람들이 이 강을 금덩어리를 던져버린 강이라고 해서 ‘투금탄’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후 형제가 재산 문제로 다투면 나룻배를 태워 이 투금탄 이야기를 들려주어 화해하도록 하는 형제 우애를 위한 교훈의 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 자료 사용 / 01-03-2024 새벽기도회 예수의 모친과 동생(누가 8:19-21)
세상 사람들도 물질을 초월하여 형제우애를 지키는데 하물며 복음을 갖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의 수준보다 더 낮은 삶에 허덕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도 나를 죽이지 못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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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정 박상길

조선 말기에 박상길이라는 백정(신분 사회에 천민 취급)이 장터에 푸줏간을 내었다한다.
어느 날 인근에 사는 양반 두 사람이 고기를 사러왔다.
그 중 한 사람이 먼저 고기를 주문한다.
"얘 상길아! 소고기 한근 다오"하니 칼로 고기를 베어 건네 주었다.
함께 온 다른 양반은 비록 천한 신분이긴 하지만 말을 함부로 하기가 거북했다.
그래서 "박서방! 나도 소고기 한근 주시게!"하였다.
선뜻 고기를 잘라 주었는데 먼저 산 양반이 보니 자기가 받은 것 보다 갑절은 더 많아보였다.
그래서 화를 내면서 "이놈아 똑같이 한근씩 샀는데 어째서 이 사람 것은 많고 내 것은 적으냐?" 하니 푸줏간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손님 고기는 상길이가 자른 것이고 이 어른 고기는 박서방이 자른 것입니다."

같은 입에서 나오는 말일지라도 어떤 말은 장미꽃처럼 향기가 있고 어떤 말은 가시처럼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는 교훈일 것이다.
문제는 말로 입은 상처는 칼로 입은 상처보다 훨씬 더 아프다는 것이다.
말 한 마디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 말의 마법 

옛날에 박만득이라는 백정이 있었다.
어느 날 두 양반이 그에게 고기를 사러 왔다.
그 중 한 양반은 습관대로 "야, 만득아! 고기 한 근 다오"라고 말했다. 만득은 "네"하며 고기를 한 근 내 주었다.
다른 양반은 "박 서방, 고기 한 근 주게"라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 고기는 언뜻 봐도 먼저 산 양반의 것보다 훨씬 더 커 보였다.
똑같이 한 근이라고 말했는데 차이가 많이 나자 앞의 양반이 화가 나 따졌다.

"이놈아, 같은 한 근인데 이 양반의 것은 많고 내 것은 왜 이렇게 적으냐?"
그러자 만득은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손님 것은 만득이가 자른 것이고, 저 손님 것은 박서방이 자른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때로는 한 마디 말이 그 어떤 치료약보다 효험을 발휘해 생명을 구하고, 또 때로는 비수가 돼 남의 마음을 도려내기도 합니다.
"졸라, 짱나" 등 비속어를 쓴다고 아이들을 나무라기에 앞서 어른들부터 말을 가려 써야되지 않을까요?


* 예화 사용 / 05-30-2023(화)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창세기 44:16)


철학자 하이덱거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말에도 색깔을 지니고 있다

집에서도,
직장에서 일을 할 때도
어느 공간이라도
우리는 항상 말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말투에 따라서
상황과 관계가 악화되기도 하고
긍정적으로 바뀌기도 하는데요,
이렇게 말투는 중요한 순간에서
결정적으로 좌지우지하곤 합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설득의 기법으로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에토스(ἔτος)는 신뢰, 호감을 말하고,
파도스(πάθος)는 공감, 감성을 뜻하며,
로고스(λόγος)논리와 이성을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상대를 설득하려면
에토스 60%, 파토스 30%, 로고스 10%로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런 방식으로 전달해야 합니다.

먼저 에토스를 통해 신뢰를 형성하고,
파토스를 통해 마음의 문을 열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은 마음의 지표이자, 거울입니다.
항상 필요한 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면
유연한 인간관계, 인생의 선순환을 불러오는
긍정적인 마음가짐까지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줄 행복의 선순환은
따뜻한 한마디 말에서 시작됩니다.

좋은 말을 남에게 베푸는 것은
비단옷을 입히는 것보다 따뜻하다.
– 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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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충성스런 일군 고 박태준박사

제가 대학 시절에 성가대원으로 봉사할 때 저희 성가대 지휘자는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이셨던 박태준박사님이었습니다.
당시 당회장이셨던 배명준목사님으로부터 성가대 지휘자의 신앙적인 삶을 들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대부분 예배 한 시간 전에 성가대원들이 모여서 연습을 합니다.
물론 예배를 마치고도 한 시간 이상을 연습을 했습니다.
어느 주일에 성가대 연습을 마치고 예배를 위하여 입장하려고 할 때 박태준박사님에게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고 합니다.
전화의 내용은 교수님의 딸이 세브란스병원에서 마지막 임종하기 전에 아버지를 뵙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연락을 받고 교수님은 주일 예배를 마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이미 딸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모님이 교수님에게 "아니 마지막으로 딸이 한 번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데 왜 이제 나타나느냐?" 하고 불평과 원망의 쓴소리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교수님께서 "사랑하는 딸은 훗날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오늘의 예배는 다시는 드릴 수 없지 않는가? 더구나 지휘자는 예배의 음악을 맡은 제사장과 같은 신분인데 어떻게 그 일을 멈풀 수 있겠는가?"


충성(忠誠) / 충성 충, 정성 성

충성이란 한자를 분해하면 가운 데 중 + 마음 심. 말씀 언 + 이룰 성
사람의 마음 중심에 말씀을 두고 그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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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백낙준박사 / 부모님의 헌신(아버지 백사금집사)

한국 기독교 초창기 때, 백사금 집사님이라고 하는 남자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이 집사님이 나가는 교회에 부흥사경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미국 선교사님이 오셔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백집사님이 나가는 교회는 조그마한 오막살이 교회였습니다.
폐가가 된 것을 수리해서 예배당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부흥회를 하면서 선교사님이 “이 교회도 성전 건축을 해야겠습니다.
주님은 희생할 자를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서 주님을 위해서 희생할 사람은 없습니까?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서 얼마큼 희생하느냐에 따라서 주님은 여러분의 앞날을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했을 때. 이 백집사님이 그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합니다.
눈물이 쏟아졌다고 합니다.
‘나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시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에 대해서 내가 무슨 희생인들 못하겠느냐’ 이렇게 결심을 하고는 집회가 끝난 다음에 선교사님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선교사님 땅이 얼마나 있어야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선교사 말씀이 천 평의 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 미국 사람들은 교회를 지을 때, 땅을 넓게 차지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천 평을 이야기 했나 봅니다.
“또 성전 건축을 하는데는 돈이 얼마나 들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 얼마 얼마쯤 들겠습니다”하고 대답해 주시더랍니다.

그 백집사님이 집에 돌아와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다짐하는 기도를 했어요.
‘그래 이번에 내가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자, 주님께 한 번 멋지게 희생하고 그리고 내가 주님께 가자, 하루 세끼야 못 먹고 살겠느냐’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밭 중에서 제일 좋은 위치의 천 평을 떼어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논과 밭을 팔아서 성전 건축비로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다른 사람들은 바치고 싶어도 없어서 못 바치는데 제겐 바칠 것이 있어서 이렇게 바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주여 감사합니다.”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를 건축하다가 보니 건축비가 모자라게 되었습니다.
결국 할 수 없어서 백집사님이 갖고 있는 집도 팔아서 그것을 건축비로 내놓았습니다.
이 백집사님이 순진해 가지고는 그 선교사님의 말에 그대로 순종해서 있는 집까지 팔아 가지고 그만 교회 건축비로 내놓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자기가 살 것은 남겨 놓고 바쳐야 되는데 그만 순진한 마음에 몽땅 다 바치고 말았습니다.

성전은 멋지게 지어졌는데 그만 이 백집사님이 농사를 짓고, 살집이 없게 되었습니다.
있을 거처도 없습니다.
교회를 아름답게 짓고 목사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부임해 오셔서 보니까 교회는 아름답게 지어졌는데 이 백집사님의 형편이 말이 아닙니다.
살길이 막막한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목사님이 백집사님 부부를 불러 놓고 “그러면 집사님, 교회에 들어와서 사시지요”라고 해서 백집사님이 교회 사찰로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자기 땅을 다 바치고 자기 집을 다 바치고 이제 교회 사찰로 봉사하면서 완전히 희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동네 사람들이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적당히 믿어야지 저렇게 미쳐서야 되겠느냐”고 “저렇게 빈 털털이가 되가지고 저거 무슨 꼴이냐”며 동네 사람들이 백집사님을 상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그런데도 백집사님 부부는 사찰로 살면서 두 부부가 교회 마루에 엎으려서 매일매일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날마다 엉엉 울면서 어깨를 들먹거리면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그 우는소리를 들으니까 얼마나 가슴이 뜨끔뜨끔하겠습니까?
백집사님 부부가 교회에서 엎드려 울면서 기도할 때마다 목사님 간이 콩알만해지는 것입니다.
“아이고 저 부부가 옛날 집과 농토를 다 바치고 저렇게 살길이 막막하니까 그게 안타까워서 우는가 보다 얼마나 그게 생각날까” 하고 그 기도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저 간이 콩알만해지는 것입니다.
그 부부가 무엇을 기도하는가 알고 싶어서 한 번은 몰래 가서 들어봤답니다.

이렇게 기도를 드리더랍니다.

“주님! 우리는 이대로 살다가 천국을 가면 됩니다.
주님 만나면 거기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러나 하나 밖에 없는 이 아들을 공부시킬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부모 때문에 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공부시킬 길을 막아만 놓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공부시킬 길이 없겠습니까” 하며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전 재산을 하나님께 몽땅 바치고 나니까 자식을 공부시킬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부모 때문에 자식의 장래를 막아 놓은 것 같아서 그게 안타까워 이 부부가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이 기도 소리를 듣고서는 너무나 감격해서 “그러면 내가 이 일을 해결해 주어야 겠다”고 생각하고서 친구 목사님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했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 옛날 기독교 초창기 때만 하더라도 목사님들의 생활이 다 어려웠습니다.
다 가난하고 그래서 아무도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문이 결국 목사님의 입을 통해서 어디까지 퍼졌느냐 하면 결국 서울까지 퍼지게 되고 연세 대학교 뒤에 선교사들이 살고 있는 곳까지 퍼졌습니다.
마침 백집사님이 있는 교회에 와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했던 그 선교사님의 귀에까지 이 소식이 들리게 되었습니다.

이 선교사님이 마침 안식년이 되어서 미국으로 들어가려고 귀국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급히 평양으로 가서 그 백집사님을 만나 보게 되었습니다.

“집사님 참 큰일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크게 기뻐하고 계실 것입니다.
천국 가셔도 집사님 내외분께는 큰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집사님 소원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 선교사님 제게 하나 밖에 없는 이 아들을 공부시키는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미국에 데리고 가서 공부를 시켜 주기로 하되 공부하는 동안 서로 절대 편지 왕래를 하지 않기로 하고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선교사가 이 백집사님의 외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시켰습니다.
미국에서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공부를 시키고 대학원까지 보내서 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프린스턴 신학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세월이 19년이 흘렀습니다.

서울에 있는 연세 대학교에서 한국인 총장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미국인 총장 언더우드 박사가 총장으로 계시다가 이제 한국에서의 일을 끝내고 미국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후임자로 총장 감을 찾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총장 감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총장이 되는 조건이 첫째, 목사이어야 되고, 둘째는 교수 신분이어야 하며, 그리고 박사 출신이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한국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세 대학에서 세계 각지로 수소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프린스턴 신학대학에서 한국인 목사로서 교수로 있고 박사 학위를 취득한 분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연세 대학교에서 사람을 보내어서 그분을 모셔 오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백낙준 박사였습니다.
바로 그 백사금 집사님의 외동아들이었습니다.
이분이 초대 연세 대학교 총장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십니다.

“주라 그러면 그러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누가복음 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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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황해도 두메산골에서 한 소년이 석양에 산을 바라보며 "도대체 저 산은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서 끝나는 것일까?" 라고 중얼거리고있었다.
그가 바로 고산자 김정호였다.
그는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이루 말할 수 없는 역경속에 일생을 보냈다.
수 만리를 걸어야 했고 굶주리며 길가에서 잠을 자고 모아놓은 자료를 몽땅 잃어버리고 병이 나서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아내의 만류에도 김정호는 "나는 평생 소원이 좋은 지도를 만들어 보는 것이요. " 하며 20년 동안 전국을 세 번이나 돌고 백두산을 일곱 차례나 오르내렸다.

김정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아내는 이미 죽고 딸만 혼자서 외로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김 정호는 딸의 도움을 받아 판목을 하나씩 새겼으며 10년 후에는 판목을 완성하였고 1861년 철종 12년에는 종이에 찍어냈다.

절망의 시간에 지지 말고, 끝까지 견디어 승리의 면류관을 얻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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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남대문교회 고 배명준 목사

목사님이 어린 시절 마을에서 섬기던 '부근나무' 경상도 지방에서는 '당수나무'라고 합니다.
황해도 지방에서는 "부근나무"라고 한다고 합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숭배하는 나무가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성경책을 찢어서 풀을 칠한 후에 나무에 붙였다고 합니다.
다음 날 마을 사람들이 '부근나무'을 보더니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는가?" 하며 그 일을 행한 사람을 찾았는데 마침 배씨 집안의 아들이 그와같은 일을 하였다는 것을 알고 그 마을에서 추방했다고 합니다.

갑자기 마을에서 쫓겨난 배씨 집안의 가족들은 당장 먹을 것도 거주할 곳도 없어 난감하던 차에 마침 평양에 있던 선교사가 그 이야기를 듣고 찾아와서 예수님 때문에 쫓겨났으니 선교사가 책임을 질 것이라고 하여 배씨 가족들을 보살피며 나중에 어린 소년을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 신학을 공부케 하고 결국은 목회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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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채필근목사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교회를 순회하는 채필근 목사님은 가끔 선교부 돈을 가지고 각 교회에 나누어주곤 했다.
한번은 돈을 잔뜩 넣고 순회하는 도중 외딴 곳에 이르러 객주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손님들이 많아서 둘이 묵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서로 잠자리에 누웠으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혹시 저놈이 내 가 잠든 사이에 돈을 훔쳐가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난 다음날 주인이 차려다 준 상에서 겸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둘은 할 수 없이 서로 마주 앉아 식사기도를 하고 식사를 했다.
그랬더니 마주 앉았던 사람이 "선생님, 예수 믿는 어른입니까?" 해서 "네, 저는 채필근 목사입니다. " 했다.
그는 깜짝 놀라면서 "저는 0 0 교회 장로입니다. "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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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유관 - 감사와 청빈

김동인의 사초집을 보면 고려 말년인 1430년경 과거에 급제하여 세종대왕 때에는 우의정을 지낸 바 있는 유관이란 사람은 그의 생활이 청빈하였을 뿐만 아니라 감사하기를 잘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그가 청빈한 생활을 하였던지 우의정을 지내기 전까지만 해도 자기 집 하나도 변변한 것을 갖지 못하고 동대문 밖, 그것도 울타리와 대문도 없는 초가집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제때 지붕을 덮지 못하여 군데군데 하늘이 보일 만큼 구멍이 뚫어져 있었기 때문에 비가 오면 새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러나 유관은 조금도 불평하는 일이 없이 매사에 감사하였다.
5, 6월 장마철이 되어 비는 매일같이 내리고 방 안에는 편히 누울 곳도 없이 빗방울이 소리를 내며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유관 부부는 비가 새지 않는 곳으로 이리저리 옮겨 앉으며 비를 피하다가 나중에는 너무도 많은 비가 쏟아지므로 우산을 받쳐들고 마주 앉아서야 겨우 비를 피하게 되었다.
한참이나 소동을 벌인 후 기가 막혀 화가 나 있는 아내에게 유관은 위로하여 말하기를, "여보! 그래도 우리는 우산이 있으니 이와 같이 심한 비를 피할 수라도 있는 것이 아니오. 우리처럼 우산도 없는 집이야 지금 이 비에 오죽이나 하겠오. 그러니 감사하십시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불행 중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이 끝내 성공할 수 있음을 알게 하는 말이다.

S. 존슨이란 사람은 말하기를 "감사하는 마음은 높은 교양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서 저속한 인간에게서는 이것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

프랑스 혁명사를 집필하여 그 이름을 전 세계에 떨친 영국의 역사가이며 평론가인 칼라일은, "나는 암흑을 사랑하고 암흑 속에서 살았으며 죄인들의 괴수로 빛을 미워하고 경건한 생활을 비웃었으나 하나님은 나에게 풍성한 자비를 베푸셨으므로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노라."고 하였던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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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애가승무노인탄(哀歌僧舞老人歎)



이조 숙종대왕때의 일입니다.
그때에「哀歌僧舞老人歎」이란 말이 있는데 무슨 뜻인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숙종 대왕은 간간이 야간에 민정 시찰을 다니셨습니다.
어느 날 밤도 역시 신하를 한 사람 데리고 민정시찰을 나와서 어느 골목을 들어가니까 초라한 어느 오두막집에서 불빛이 새나오는데 노인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장고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노랫소리도 들립니다.
문틈으로 드려다 보니 노인은 초라한 밥상을 앞에 놓고 울고 있고, 아들인 듯한 젊은 아들은 장고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머리를 깎은 여승은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하도 이 광경이 기이하여 주인을 찾아 물어보니 기막힌 사연을 이야기 해 주는데 참으로 가상하기 이를 데 없는 사연이었습니다.
그 사연인즉슨 그날이 아버지의 생일인데 끼니가 없어 며느리가 머리를 잘라 팔아 가지고 시아버지의 생일 상을 보고 아버지 기뻐하시라고 아들이 장고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니 며느리가 춤을 추는데 이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목이 메어 밥을 먹지 못하고 탄식하며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임금은 말하기를 자신은 지금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인데 그 아들보고 내일 과거를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은 출제를 한 것이 바로「애가승무노인탄」이란 문제를 냈습니다.
그 뜻이 바로 "슬픈 노래를 부르는데 승려와 같이 머리를 깎고 춤을 추고 노인은 탄식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은 바로 자기의 어제 저녁 일이 시험문제에 나왔기 때문에 장원급제를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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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공짜 복음

한 생선 장수가 추운 겨울에 어떤 동네에 가서 생선을 사라고 외치고 다녔다.
그러나 아무리 돌아다녀도 누구 한 사람 값조차 묻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가장 큰 대문 집에 이르렀을 때 한 신사가 나와서 생선을 보더니 "그 생선 전부 얼마요?"하고 물었다.
생선 장수가 "네, 10만 내십시오" 하니 "자, 생선 값 외에 5만원을 더 줄테니 이 생선을 집집마다 골고루 나누어주시오." 하면서 돈을 지불하였다.
생선 장수는 뜻밖의 횡재에 기뻤다.
그래서 동네에 다니면서 "자, 거저 주는 생선이요. 거저 주는 생선.."하고 외쳤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받으려 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생선 장수를 미친 사람이라고 비웃기까지 했다.
생선 장수는 하는 수 없이 신사에게 도로 갖고 와서 "아무리 거저 준다고 해도 받으려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신사는 "그럼 나와 함께 다녀 봅시다."하여 둘이서 "거저 주는 생선이요. 누구든지 와서 받아 가시오."하고 외쳤으나 역시 아무도 나오는 이가 없었다.
그러던 중 어떤 작은 아이 하나가 와서 생선을 달라고 했다.
그들은 큼직한 것으로 집어 주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그제서야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생선을 받아갔고 생선을 금새 동이 났다.
어떤 부인이 다가와서 "누구는 주고 나같이 구제 받을 사람은 왜 안 주는 거요?"하며 불평하였다.
생선 장수가 그 부인을 보고 "아까는 미친놈이라고 욕을 하더니 왜 이제 와서 불평을 하는 거요?"하자 그 여인은 얼굴이 붉어지며 돌아가 버렸다.
생선 장수가 신사에게 물었다.
"생선을 사서 동네 사람들에게 거저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동네는 가난한 동네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아무리 생선 사라고 외쳐도 사먹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도울 겸 동네 사람들에게 선사도 할 겸해서 생선을 다 사서 나누어 준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양식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복음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생선 장수처럼 외치고 또 외쳐야 한다.
"거저 주는 생선이요. 누구든지 받아가시오!"
"거저 주는 복음이요. 누구든지 받아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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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정동교회의 빚

1914년 당시 정동교회는 미화로 200달러 정도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빚은 1893년에 시작한 교회 건축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목사님은 빚을 갚기 위해 헌금을 하자고 했지만 그날 걷힌 헌금은 50달러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교인은 이화학당 학생이 많았습니다.
기숙사로 돌아온 학생들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바치기로 의논하고 주일 저녁 교회에 다시 모였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찬송을 부른 후 한사람 씩 나와 가진 것을 바쳤습니다.
동전 17달러 정도, 반지 35개, 손거울, 자명종 2개, 양먈, 내의, 구두, 혼수감으로 어머니가 주신 붉은 명주도 있었습니다.
어떤 여학생은 댕기머리를 잘라서 주님께 드린다며 내어 놓았습니다.
그날 그 교회의 빚은 해결되었습니다.
빚 바랜 이화여대 학생들의 요즘 세태에 비기면 고전소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누가 주의 일에 더욱 힘쓸 수 있습니까?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누가 자신의 댕기머리를 잘라서 드릴 수 있습니까?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한평생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서 교회 섬기고 직분 감당하고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내 대신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오! 주여,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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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남대문교회 김성섭장로님

장로님은 마포에서 공덕의원을 운영하셨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남대문교회 주일학교 부장으로 섬기셨던 장로님입니다.
제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는 주일학교 반사가 되어 장로님과 함께 주일학교에서 섬기고 있었을  무렵
어느 주일에 교사회 시간에 늦게 되었는데 교회 문앞에서 교사들을 기다리시던 장로님께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나를 부르시더니
"이선생, 아침도 먹지 못하고 오느라고 수고하네" 하시며 지갑을 열어 돈을 주시며 다음 주일부터는 아침을 먹고 택시를 타고 오라고 하신다.
인품으로나 모든 생활에서 이러한 인격을 소유한 장로님이 그리워진다.

내가 어렸을 때 그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진료를 받으면 진료비를 오히려 내 호주머니에 넣어주셨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열심히 공부하라며 영어사전과 한영사전을 선물로 주시기도 하셨다.
오늘날 이러한 섬김의 본이 되시는 장로님을 그리워하는 것은 교회가 너무 변질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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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강남제일병원장 최낙원 박사

60년대 겨울,
서울 인왕산 자락엔 세칸 초가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그날그날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빈촌 어귀에 길갓집 툇마루 앞에 찜솥을 걸어 놓고 만두 쪄서 파는 조그만 가게가 있었습니다.  
쪄낸 만두는 솥뚜껑 위에 얹어 둡니다.  
만두소 만들고 만두피 빚고 손님에게 만두 파는 모든 일을 혼자서 다 하는 만두가게 주인 이름은 순덕 아지매였습니다
입동 지나자 날씨가 제법 싸늘해 졌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어린 남매가 보따리를 들고 만두가게 앞을 지나다가  추위에 곱은 손을 솥뚜껑 위에서 녹이고 가곤 했습니다.  

어느 날 순덕 아지매가 부엌에서 만두소와 피를 장만해 나갔더니 어린 남매는 이미 떠나서 골목길 끝자락을 돌고 있었습니다.  
얼핏 기억에 솥뚜껑 위에 만두 하나가 없어진 것 같았습니다,  
남매가 가는 골목길을 이내 따라 올라갔습니다.  
저 애들이 만두를 훔처 먹은 것 같아 혼을 내려고 했었습니다.
그때 꼬부랑 골목길을 막 쫓아 오르는데, 아이들 울음소리가 났습니다.
바로 그 남매였습니다,  흐느끼며 울던 누나가 목 멘 소리로 말했습니다.  
"나는 도둑놈 동생을 둔 적 없어. 이제부터 누나라고 부르지도 말아라."
예닐곱 살쯤 되는 남동생이 울며 말했습니다.  
"누나야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담 옆에 몸을 숨긴 순덕 아지매가 남매를 달랠까 하다가 더 무안해 할 것 같아 가게로 돌아 왔습니다.  
이튿날도 보따리 든 남매가 골목을 내려와 만두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누나가 동전 한 닢을 툇마루에 놓으며 중얼 거렸습니다.  
"어제 아주머니가 안 계셔서  외상으로 만두 한 개 가지고 갔구먼요."  
어느 날 저녁 나절 보따리 들고 올라가던 남매가 손을 안 녹이고 지나 치길래 순덕 아지매가 남매를 불렀습니다.  
"얘들아  속 터진 만두는 팔 수가 없으니  우리 셋이서 먹자꾸나."   
누나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맙습니다만 집에 가서 저녁을 먹을래요."  하고는 남동생 손을 끌고 올라 가면서
"얻어 먹는 버릇 들면 진짜 거지가 되는 거야. 알았니?" 하는거였습니다.  
어린 동생 달래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찬바람에 실려 순덕 아지매 귀에 닿았습니다
어느 날 보따리를 또 들고 내려가는 남매에게 물었습니다.
"그 보따리는 무엇이며 어디 가는 거냐?"  
누나 되는 여자 아이는 땅만 보고 걸으며 "할머니 심부름 가는 거예요."  
메마른 한마디 뿐이었습니다.
더욱 궁금해진 순덕 아지매는 이리저리 물어봐서 그 남매 집사정을 알아냈습니다.
얼마 전 이곳 서촌으로 거의 봉사에 가까운 할머니와 어린 남매 이리 세 식구가 이곳으로 이사와 궁핍 속에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할머니 바느질 솜씨가 워낙 좋아 종로통 포목 점에서 바느질 꺼리를 맡기면 어린 남매가 타박타박 걸어서 자하문을 지나 종로 통까지 바느질 보따리를 들고 오간다는 것입니다.  
남매의 아버지가 죽고 나서 바로 이듬해 어머니도 유복자인 동생 낳다가  그만 모두 이승을 갑자기 하직했다는 것입니다,  
응달 진 인왕산 자락 빈촌에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남동생이 만두 하나 훔친 이후로도 남매는 여전히 만두가게 앞을 오가며 다니지만.  
솥뚜껑에 손을 녹이기는 고사하고 아예 고개를 돌리며 외면하고 지나 다니고 있었습니다
"너희 엄마 이름 봉임이지 신봉임 맞지?"  
어느 날 순덕 아지매가 가게앞을 지나가는 남매를 잡고 물었습니다.  
깜짝 놀란 남매가 발걸음을 멈추고 쳐다 봅니다.  
"아이고 봉임이 아들딸을 이렇게 만나다니  천지 신명님 고맙습니다."
남매를 꼭 껴안은 아지매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합니다, 
"너희 엄마와 나는 어릴 때 둘도 없는 친구였단다.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고. 
너희 집은 잘 살아 인정 많은 너희 엄마는 우리집에 쌀도 퍼담아 주고 콩도 한 자루씩 갖다 주었단다."
그날 이후 남매는 저녁 나절 올라갈 때는 꼭 만두가게에 들려서 속 터진 만두를 먹고,  순덕 아지매가 싸주는 만두를 들고 할머니께 가져다 드렸습니다.  
순덕 아지매는 동사무소에 가서 호적부를 뒤져 남매의 죽은 어머니 이름이 신봉임 이라는 것을 알아냈고.  
그 이후로 만두를 빚을 때는 꼭 몇개는 아예 만두피를 일부러 찢어 놓았습니다.  
인왕산 달동네 만두 솥에 속 터진 만두가 익어갈 때 만두 솥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30여 년 후 어느 날 만두가게 앞에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서고 중년신사가 내렸습니다.   
신사는 가게 안에 꾸부리고 만두 빗는 노파의 손을 덥석 잡습니다.  
신사는 눈물을 흘리며 할머니를 쳐다봅니다,     
"누구 이신가요?"   
신사는 할머니 친구 봉임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만두집 노파는 그때서야 옛날 그 남매를 기억했습니다.  
두 사람은 말없이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명문 미국대학 유학까지  다녀와 병원 원장이 된 봉임의 아들  최낙원  강남제일병원 원장입니다.

* 이 글을 읽고 오늘 아침도 감동의 눈물로 하루를 출발합니다.

누나의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운 품격 있는 가치관,
그리고 만두가게 주인의 고상한 품격에 고개 숙여집니다.

화려한 학력과 경력이 과연 이들의 삶에 비교 우위에 있었을까요?
우리 주변에서 오늘날도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훗날 쓰여질 수 있는 일들이
혹시나 나 자신이나 주위에 있는지 묻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이 세상 아이들도 모두 이런 아이들로 성장할 수 있을런지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또한 내 이웃은 누구인가?
내 친구는 누구인가?

사람이 60세를 넘기면 살아온 나이를 세지 말고
내 주위에 술 한 잔이나 싸구려 음식 하나라도
가끔 함께 먹을 친구나 이웃이 몇 명이나 되는지 세어 보아야 한답니다.  

많을수록 인생성공 아니지만
그래도 인생을 이기적으로 헛되이 살지 않은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강남제일병원장 최낙원 박사의 실화 눈물 어린 감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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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김창인 목사의 설교 속에 등장하는 실화이다.

이북의 남포에 예배당이 한 곳도 없을 때의 이야기이다.
선교사들이 평양에 와서 교회를 세우고 선교하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평양에는 교회가 한두 곳 있었다.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서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던 한 부인이 평양에서 남포로 이사를 했다.
문제는 남포에는 교회가 없으니 주일날이면 평양으로 예배드리러 간다.

그것도 주일날 가는 것이 아니라 토요일에 미리 가는데 소달구지를 타고 간다.
소달구지는 사람의 걸음보다도 느리다.
그렇게 토요일 올라가 잠을 자고,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저녁 예배까지 드린 후에 또 그 밤을 지내고 월요일에 다시 남포로 돌아왔다.
옛날 우리의 조상들은 주일 하루를 지키기 위해서 이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그 부인의 평생소원이 하나 있었으니, 곧 남포에 예배당을 세우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의 힘 나의 재산을 가지고는 예배당을 지을 수 없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예배당을 하나 세워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1년이 가고 3년이 가고 5년이 가도 아무런 징조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부인은 인내로 기도를 끊지 않았다.

그날도 평양으로 예배를 드리러 가는데, 아들 두 형제를 데리고 갔다.
교대로 소를 몰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들이 빨리 가느라고 채찍을 휘두르며 소를 몰았다.
그렇게 하면 소가 빨리 가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길이 신작로일지라도 넓지는 않았다.
옆으로는 말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소를 몰던 아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고 소에게 채찍을 휘두르다가 그만 그 말을 때리고 말았다.
말이 깜짝 놀라서 뛰는 바람에 말을 타고 지나가던 나이가 제법 지긋한 사람이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경찰서로 갔지만 화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검찰로 넘어가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정에서 두 아들 중에서 도대체 누가 채찍질을 잘못해서 남의 말을 때려 떨어지게 하여 중상을 입혔는지가 문제였다.
둘이 한꺼번에 했을 리는 없고 진짜 범인을 잡아서 벌을 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때 형제 중에 형이 이렇게 대답한다.
“제가 했습니다. 저를 벌주십시오.”
그러자 이번엔 동생이 나서더니 “아닙니다.
그땐 형님이 자고 있었고, 내가 소를 몰고 있었으니 내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또 형은 아니라고 자기가 했다고 하고 동생은 또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검사는 어머니한테 “도대체 누가 잘못을 했습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나는 그때 너무 피곤해서 졸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아들이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기어이 벌을 주어야 한다면 작은아들을 벌주어 감옥에 보내십시오.”라고 말한다.
검사가 이상하다 생각되어 “왜 그렇습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답한다. “큰아들은 전처소생이요 작은 아들은 제가 이 집에 와서 낳은 친아들입니다.
그러니 전처소생은 가만히 놔두시고 내가 낳은 친아들을 벌주십시오.”

검사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날의 재판이 끝난 후에 검사가 부인에게 묻는다.
“당신 소원이 무엇입니까?”
어머니는 “나는 이렇게 평양으로 예배드리러 가지 않게 남포에 예배당을 하나 세우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만 해도 검사들이 괜찮을 때이다.
감동받은 검사는 자기 사재를 털어 남포에 예배당을 하나 세워 주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 참으로 묘하다.
1년, 3년, 5년,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렸는데 도움은 고사하고 어째서 예배드리러 가는 길에 그런 사고가 난단 말인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이럴 수 있느냐고, 다시는 예배당에 안 간다고, 그따위 하나님은 믿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었을 게다.

그런데 그 사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전화위복의 은혜를 주셨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섬기고 찬양하는 아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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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오성에 관한 일화
-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


조선 중기 정승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친구 사이
오성(鰲城)은 이항복의  봉호인 오성부원군에서 따왔고, 한음(漢陰)은 이덕형의 호라고 한다.

1. 서당에서 공부할 때 수업 도중 훈장님이 졸고 있었는데 오성이 몰래 껍질을 까지 않은 생밤을 화로에 넣에 폭발시켜 훈장님과 학생들을 놀라게 했다.
어린이용 문고판에서는 보통 이 때 한음과 처음 만난 것으로 나온다.

2. 오성이 본인의 집의 잘 익은 감을 따 먹으려고 하인을 하나 호출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하인이 옆집 권철[9] 대감의 자택으로 넘어간 가지의 감은 하나도 손을 안 대는 것이었다.
오성이 왜 그러는 거냐고 의아해하자 저쪽 감을 땄다가는 (하인) 본인이 옆집 하인한테 볼기를 맞기에 그럴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오성이 무슨 이유로 옆집 하인이 너를 구타할 자격이 있는 거냐고 묻자 옆집이 권철 대감의 집으로써 더 지체 높은 사람의 하인이니 그렇다는 것이다.
이에 오성이 옆집으로 가서 권철의 방 창호지를 손으로 뚫어 손을 넣고 권철에게 "대감, 이 손이 누구 손입니까?"라고 물었다.
권철은 황당해하며 "그게 당연히 네 손이지 누구 손이냐?"라고 대답했고, 이에 오성은 또다시 "이 손이 대감의 방으로 들어갔는데 대감의 손 아닙니까?"라고 다시 물었고, 권철은 "네 손에 달렸으니 당연히 네 손이지."라고 재차 답했다.
그리고 잠시 후 오성은 "그럼 저희 집 감나무에서 대감댁으로 넘어간 가지에 달린 감은 누구 감입니까?"라고 되묻자 권철이 웃으면서[10] "그야 당연히 너희 집 감이지."라고 하였고 이에 오성이 "그러면 왜 대감님댁 하인들이 담장 너머로 넘어간 감들을 못 따게 한 것입니까?"라고 다시 묻자 권철은 "아마도 우리 집 하인들이 배움이 부족해서 그랬던 모양이다.[11]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잘 교육하마."라고 하였고, 감들을 마저 다 따 가게 허가하였고, 이후 권철은 오성의 모습에 감탄했고, 이후 오성은 권율의 사위가 되면서 한집안 식구가 되었다.

3. 오성이 어린시절 대장간에 자주 놀러 갔는데 집에 가면서 몰래 못(이야기에 따라서는 편자)을 한두개씩 슬쩍해갔다.
당시에는 소위 말하는 개구멍바지라고 해서 엉덩이가 뚫려 있는 바지가 있었는데, 이걸 이용해서 개구멍바지를 입고 방문 후 훔치고 싶은 물건 위로 앉고서 슬쩍한 것.
이를 눈치챈 대장장이가 오성을 혼꾸녕을 내주기 위해 불에 달군 못을 맨 위에 올려놓았는데, 이를 몰랐던 오성이 못을 깔고 앉았다가 엉덩이에 화상을 입었다.
전승에 따라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뒷이야기가 더 있기도 하다.
이 일 이후에 대장간이 모종의 불운을 당해 망하게 되었는데, 오성이 그동안 훔쳤던 못들을 단지에 넣어 전부 돌려주며 다시 재기하게 도와주었다는 결말.

4. 오성이 한음에게 "내가 네 부인과 정을 통하였다"고 말하자, 이 말을 들은 한음 부인은 오성을 초청해서 떡에 똥을 넣어 오성에게 먹였다.
오성은 뭣도 모르고 똥이 든 떡을 먹었다가 호되게 당했다.
한음 부인은 거짓말을 하는 입에는 똥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5. 오성은 신붓감을 선보려고 인절미를 해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몽둥이로 자기를 쫓으며 때리라고 시킨 뒤 도망치는 체하며 신부의 치마폭 속으로 들어갔다.
신부는 이에 당황하지 않고 “선을 보려면 겉선이나 보시지 속선까지 보십니까.”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6. 한음으로부터 한밤중에 전염병으로 일가족이 몰살한 집에 시체 감장(勘葬)을  부탁받은 오성이 혼자 그 집에 이르러 시체를 감장하다가 갑자기 한 시체가 벌떡 일어나며 볼을 쥐어박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였는데,  알고 보니 시체인 척 누워 있었던 한음의 장난이었다.

7. 오성의 아버지는 오성의 담력을 시험하려고 한밤중에 외딴 숲 속의 고목나무 구멍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 오라고 시키고, 먼저 가서 나무 구멍 속에 숨어 있다가 오성이 구멍 속으로 손을 넣을 때 안에서 그의 손을 잡았는데, 오성은 놀라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체온이 느껴지자 귀신이 아니고 사람의 장난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8. 오성과 한음이 참새를 잡아 키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참새가 죽어버렸다.
이에 슬퍼한 오성과 한음은 새를 묻어주고 축문을 써주며 곡을 했는데 이를 본 오성의 아버지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장례식 놀이나 하냐?"고 오해하며 꾸중했다.
이에 오성은 "저희 때문에 참새가 억울하게 죽었는데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참새의 명복을 비는 축문을 아버지에게 보여주었다.
축문의 내용을 읽은 아버지가 그 문장 솜씨에 감탄하여 "한 번만 용서해줄 터이니 앞으로는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마라."고 주의를 주었다.

9. 둘이 어린 시절 시골 외갓집에 놀러갔는데, 그 곳에는 구두쇠 영감이 수박농사를 짓고 있었다.
오성과 한음은 맛있어 보이는 수박을 하나 따서 먹어봤는데, 이 영감이 거름을 안 줘서 비리고 맛도 더럽게 없었다.
이에 둘은 수박밭에 말뚝을 박아 수박들을 몽땅 못 쓰게 만들었으며, 둘은 "이를 본 영감이 정신을 차릴 것이다.",
"아니다, 정신을 차리기는 커녕 더 길길이 날뛸 것이다."라고 큭큭대며 상경했고, 다음날 이 모습을 보고 영감은 분기탱천해서 "어떤 놈이 우리 수박밭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거야? 당장 잡아서 모가지를 꺾어놔야지!"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나 그래놓고도 영감은 개과천선했는지 이듬해에 썩어버린 수박이 거름이 돼 맛 좋은 수박이 열렸고, 오성과 한음은 다시 그 시골을 찾았고, 영감은 둘에게 고마워하며 맛 좋은 수박을 대접했다.

10. 허 서방이라는 이름을 가진 농부가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기 위해 어느 날 오성과 한음을 찾아왔다.
사정인 즉슨, 얼마 전 본인의 아내가 길을 걷다가  화장실이 너무 급한 나머지 이 마을의 최고 부자인 황대감의 밭머리에서 소변을 봤는데, 운나쁘게도 그만 황대감에게 들켜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 극대노한 황대감은 허 서방의 처를 꾸중하면서 집의 황소를 가져오라는 어이없는 퀘스트를 내렸고,  마을 사람들도 이게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면서 황대감을 원망했단다.
오성과 한음은 본인들이 해결해주겠다고 하고 허 서방을 돌려보낸 뒤 다음날 황대감이 출입하는 타이밍에 맞춰 짜고서 갑자기 대판 싸우는 척 연극을 하였다.
황대감이 무슨 일인고 하며 의아해하자 오성 曰 "제가 얼마전에 길을 가다가 하도 급해서 이 밭에다가 본의 아니게 오줌을 눴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가 이 모습을 봐버렸고, 여기서 오줌을 눴다가는 황소 한 마리를 빼앗기게 된다며 날뛰는 게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말이냐고 맞섰고, 그래서 그 문제로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성이 이렇게 또박또박 얘기하자 황 대감은 뜨끔했다.
"저는 정말 이 고을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들었기에 이 친구를 말린 겁니다.
자기 밭에다 오줌을 누었다고 그 사람의 전 재산인 황소를 끌고 갔다고 하던데 혹시 대감님께서는 그 이야기 모르시나요?"
이번에는 한음이 맞장구를 치자 황 대감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딴전을 피웠다.
"저것 보십시오.
현재 저 친구는 끝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번에 암행어사가 되신 제 숙부께 말씀드려서 혼을 내주라고 할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렇게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어르신?"
암행어사라는 말을 듣자 황 대감은 표정이 굳어졌다.
"얘들아, 그만 가마를 돌려라. 갑자기 속이 좋지 않구나!"
황 대감은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허 서방을 호출했고, 그에게 황소를 돌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내가 자네 부인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려고 잠시 황소를 맡아두었던 것이니 오해는 말게. 자네도 생각해 보게.
상식적으로 아직 젊은 여자가 길바닥에서 방자스럽게 치마를 벌렁 까 내리고 소변을 보는 모습이 좋아 보이는가?
그래, 내 생각한 바가 있어서 한 일이니 그리 알게."
황 대감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허 서방의 등을 두드려주었고, 허 서방은 그렇게 소를 뺏기는 일은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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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안이숙 - 죽으면 죽으리라

‘살아 있는 순교자’로 알려진 안이숙은 1908년 평안북도 박천에서 무역상을 경영했던 부호 안중호의 넷째 딸로서 팔삭동이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의 상당한 재력으로 풍요롭게 자라난 그녀는 아들이 없어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불협화음을 경험하며 자라게 된다.

자라면서 총명이 남달리 뛰어난 안이숙은 박천 공립보통학교를 거쳐 평양 서문여고를 졸업한 후에 그 당시 보통 사람들로는, 더구나 여자의 몸으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본 유학을 떠났으며, 일본 경도여전과 귀족학교인 동경 가정학원 연구과를 졸업했다. 그러므로 일본에서의 생활은 그 후 안이숙의 사역과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이숙이 21세가 되던 1929년에 귀국하여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 임용되어 근무했고, 1937년에는 평북 선천 사립 보성여학교에서 음악 및 일어교사로 교편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일제 말엽인 1939년 전교생이 합동으로 신사에 가서 행했던 신사참배시 의연히 꼿꼿하게 하나님 이외의 어떤 신에게도 절을 하지 않는 믿음의 절개를 보이며 신사참배를 거부한 후 신의주에 사는 제자의 집으로 피신하게 된다.

일본 형사의 눈을 피해 신의주 근교로 피신하던 중 “평양성으로 가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평양에 가게 된다. 거기서 평남 개천읍 십자의원의 의사인 박관준 장로를 만나 하나님의 대사로서 1940년 2월, 귀신의 땅 일본에 건너가서 위정자를 위시한 장관들을 만나 일본의 망국행동을 경고하고 그들의 한국 기독교 박해에 항의했다. 또한 제 74회 일본제국회의 때 의사당에서 ‘일본은 유황불로 망한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대사명을 전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 투옥되어(일본 국회의사당 수위가 쓴 기록에서 이날 사건이 자세하게 열거되어 있음) 평양형무소에 이감 후 6년의 옥고를 치렀다.

 안이숙이 세상에 알려진 연유는 바로 옥중생활에서 착한 양 착한 목자로서 주님의 참사랑을 몸소 실행한 것이다. 주님은 안이숙을 통해 각색 죄수들과 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하나님과의 사랑을 회복시키셨던 놀라운 사건들이 <죽으면 죽으리라>에 실려 있다.

  이러한 안이숙의 꼿꼿한 신앙은 일찍이 미국 선교사로부터 말씀공부를 배운 어머니의 영향에서 비롯된다. <죽으면 죽으리라>에 나와 있듯이 안이숙 어머니의 신앙은 참으로 놀랍고 대단하다. 옥중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추위와의 싸움이었다. 평양형무소의 추위는 안이숙의 눈을 얼게 할 정도로 혹독했다. 그녀의 눈에서는 고름이 나오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실명의 위기를 맞게 된다. 군의관의 배려로 일시 출감하여 치료할 수 있었는데, 이때 면회 온 안이숙 어머니의 말씀은 우리 가슴을 무척 감동케 한다.

  여기 안이숙 어머니가 그 당시 말씀하신 내용을 소개한다.

  “얘! 너 왜 눈을 위해 염려하니? 네가 네 생명을 주님께 바쳤을 때 넌 네 눈도 같이 바치지 않았느냐?”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감을 느꼈다.

“아무렴요. 눈도 바치고 모든 것 다 바쳤어요. 어머니! 알았어요.”

“주님께 일단 드렸으면 주님의 것이지 네 것이 아닐 게 아니냐? 주님께 한번 바친 네 몸과 네 생명은 주님이 알아서 잘하실 것인데, 너는 왜 네 것같이 염려하며 네 재간으로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주님이 그 능한 지혜로 다 좋게 하시는 것인데, 너나 내가 눈이 어두워야 좋을 것인고로 어둡게 하시는 것이 아닐까? 주 목사님은 도라홈으로 벌써 눈을 못 쓰게 되셨고 그로 인해서 더 충성하시는 것 잊어버렸냐? 사도 바울도 눈에 가시 때문에 순교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 눈을 뜨고 보지 못할 것을 보고 마음이 더 상하는 것보다 눈을 감고 아무 것도 안 보는 것이 너를 위해서 좋은 것인 줄 생각해 본 일이 없지?”

 

나는 이러한 위대한 대선생이 내 어머니인 것에 또 한번 탄복했다. 언제나 그는 내게 이런 대선생이었다. 주는 내게 합당한 신앙 모범의 어머니를 주셔서 지금까지 나를 기르시고 권면하시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얼굴에 웃음을 띄우면서

“자! 우리는 용사들인데 무엇 눈 같은 것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하겠어요. 자, 어머니 진정하세요. 저도 용진 맹진하겠어요.”

그리고 바라만 보고 섰던 여간수와 부장과 남간수에게

“미안합니다. 저는 제 갈 곳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하고 사무소를 나왔다. 여간수는 기가 막혀서

“나는 세상에 살다가 이런 일은 처음 봐요. 딸도 딸이지만 어머니는 더하시는군요.”

그 당시 안이숙과 함께 옥중생활을 했던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이기선 목사, 이광록 집사, 박관준 장로, 박신근 집사, 이인재 전도사, 조수옥 여집사, 최덕지 선생 등등과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최봉석 목사(최권능 목사), 그리고 위대한 설교자 주기철 목사이다.

‘아! 용사여! 신앙의 용사들이여! 참 장하고 존귀하여라!’

1945년 사형집행 몇 시간을 앞두고 안이숙은 8.15 광복과 함께 8월 17일 출옥했으며, 1948년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미국에서 김동명 목사님과 결혼했고, 미네아 폴리스에 있는 서북대학에서 영어와 음악공부를 마친 후, 텍사스 서남 침례신학교에서 기독교 교육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그 학교에서 교회음악을 연구했다.

1957년 미국 남침례교 국내선교부에서는 김동명 목사를 미국 선교사로 파송했으며 김 목사님은 Berendo Street Baptist Church를 개척하게 되며 이때 한 설교가 그 유명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이다.

교회 개척 이후 참으로 아름다운 간증이 많이 있는데, 이는 <죽으면 죽으리라>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안이숙이 미국으로 건너간 지 20년 만인 1968년에 귀국하여 <죽으면 죽으리라>를 출간했을 때 한국 교회 안팎에 큰 충격을 주었고 장기 베스트셀러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1976년에 그 후편 <죽으면 살리라>를 출간했으며, 1989년에는 또다시 <당신은 죽어요 그런데 안 죽어요>를 출간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후 1990년 <그럴 수도 있지>, <낫고 싶어요>, <솔직한 노래>, <자랑이 되는 자랑>, 1993년 <信情>, <지나가는 순례자>, 1995년 <온 세상 내 세상> 등 총 10편을 저술했다.

 

이후 1995년 11월 안이숙 사모님과 김동명 목사님이 힘을 모아 대전 대덕연구단지 내 새누리교회를 세운다.

 

그리고 1997년 10월 18일 미국 나성의 선한사마리아병원에서 89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나성 Hollywood Memorial Park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져 있다.

 

“주님을 위하여 일제 밑에서 6년 간 옥고, 사형을 앞두고 출옥한 실격한 순교자. 죽으면 죽으리라(If I Perish, I Perish) 죽으면 살리라(If I Perish, I Live).”

 

<죽으면 죽으리라 안이숙 이야기> pp27~36, 안이숙 저, 기독교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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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옛날 김유신 장군이 젊은 시절 방탕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엣 생활을 정리하고 화랑도 정신으로 무장하여 동료들과 열심히 훈련을 마치고 모처럼 모여서 술자리를 가졌는데 그 날 그만 너무 취하여 말을 올라탔는데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엉뚱한 곳에 와서 누워있더랍니다.
곰곰히 생각하더니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 저 말이구나!
굉장히 좋은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김유신이 술이 취할 때마다 기생방으로 갔다는 것을 기억한 말이 그 날도 기생방으로 데려다 주었다고 합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김유신은 큰 칼을 들어 그 좋은 말의 목을 내리쳤다고 합니다.
주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말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주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좋은 말을 내리쳤느냐? 하고 질문했을 때 주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말이 아무리 좋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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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마취도 없이 허벅지살 25㎝ 어머니에게 이식한 아들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당한 임우영... 남겨진 가족에게 생긴 일들


송병순은 꼴머슴을 앞세워 집을 나섰다. 보리 방아를 찧으러 가는 길이다. 지게에 보리를 잔뜩 싣고 뚜벅뚜벅 걷는 꼴머슴은 얼마 안 가서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8월 말의 날씨는 여전히 뜨거웠기 때문이다. "잠시 쉬었다 가자." "네." 송병순과 꼴머슴은 손부채로 땀을 식히고 횡기에 있는 방앗간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송병순이 사는 충북 영동군 용화면 자계리 중자작(새땀)에서 횡기까지는 800m에 불과했지만 늦여름의 따가운 햇살은 그들의 걸음을 더디게 했다. 더군다나 송병순은 황달이 걸려 눈자위는 노랗고 빈혈기가 있었기에 식은땀마저 흘렸다.


"더운데 오느라 고생했어요." 방앗간 주인은 환한 웃음을 지며 송병순을 맞이했다. "잘 좀 찧어줘요." 주인은 보리를 찧기 위해 분주히 몸을 움직였다. 당시 용화면 자계리에 있던 방앗간은 전기나 석유로 발동기를 돌리는 곳이 아니었다. 참숯을 때어 그 화력으로 발동기를 돌리는 방식이었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제국주의가 부족한 연료난을 해결하기 위해 숯을 자동차 연료로 썼던 목탄차(木炭車)의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잠시 후 '쉭쉭' 하는 소리와 함께 발동기가 돌아갔다.

방앗간 주인은 이마의 땀을 훔치고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송병순은 보리가 잘 찧어지는지 보기 위해 기계 앞으로 갔다. "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쓰러졌다. 주인과 꼴머슴이 황급히 달려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송병순의 치마가 발동기 피댓줄에 휘감기면서 그녀의 하반신이 기계에 끌려간 것이다. 하반신이 파열되면서 피가 사방에 튀었다. "아이고 이 일을 어쩌나!" 손을 부들부들 떨던 주인은 밖으로 뛰어가더니 잠시 후에 트럭을 타고 왔다. 군용트럭을 이용해 벌채된 나무를 운송하던 트럭이었다. 당시 충북 영동군은 산림지대로 목재 생산의 주요 지역이었다. 트럭에 실린 송병순은 영동군 구세군병원으로 옮겨졌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허벅지 살 25cm 잘라내
 
해방 후 임우영의 모습박만순
 
피도 부족했지만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간 살을 이식하는 게 중요했다. 응급실 의사는 가족들에게 그녀의 상황을 설명하고, "피부이식 수술을 해야만 살아날 가능성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가족들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그 순간 붉어진 얼굴에 눈물이 빗물처럼 흘리던 큰 아들 임세환(당시 16세)이 "선생님, 제 허벅지 살을 잘라 내주세요"라고 말했다. 모두 눈이 동그래졌지만 어느 누구도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달리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임세환은 수술실 안의 어머니 옆 침대에 누웠다. 간호사들은 헝겊으로 그의 손목을 침대에 묶었다. 1954년 당시 영동 구세군병원은 마취시설이 안 되어 있을 만큼 시설이 열악했다.

"악~~~" 병원이 떠나가는 소리가 났다. 중학교 3학년 학생의 허벅지 생살을 25cm나 잘라 냈으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집도하는 의사나 돕는 간호사의 얼굴은 땀으로 번질거렸지만 이들은 묵묵히 수술에 전념했다. 몇 시간 만에 수술실에서 나온 의사에게 가족들이 몰려들었다. "선생님, 결과는 어떻습니까?" "글쎄, 경과를 봐야 합니다."

하지만 아들의 생살을 이식받은 어머니 송병순은 건강이 악화되기만 했다. 당시 의료기술 수준으로는 그녀의 삶을 소생시킬 수는 없었다. 사고 6개월 만인 1955년 3월 2일 송병순은 사망했다.

'효자선생' 가족 돕기 성금
 
임세환 사망 관련 기사-경향신문박만순
 
"지난 10일 영동역 광장에는 60여명 의 어린이들과 교육계인사들이 열차에서 내리는 말 없는 유해를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효자 선생으로 불리던 임세환 교사(31세)의 유해는 발을 구르며 울부짖는 제자들의 울음 속에 장지로 향했다." (경향신문 1968년 2월 19일자)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 살을 25cm나 잘라낸 임세환은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68년 1월 9일 부산복음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수술한 일로, 작고하기 전까지 병마와 싸웠다. 과다 수혈과 피부 이식 수술의 후유증으로 악성빈혈에 시달린 것이다.

영동중학교와 영동농고를 졸업한 그는 명지대학교의 전신인 서울 문리대 사범대를 나와 고향 영동에서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영동초등학교에서 조회를 할 때에 빈혈로 쓰러지기 일쑤였고, 사정을 알고 있던 교사들의 마음은 새카맣게 탔다. 그러다 결국 만 30세의 나이에 아내와 어린 딸 둘을 남겨놓고 세상을 하직했다.

고인이 담임을 맡았던 영동초등학교 3학년 4반 학생들을 포함한 전교생이 유가족을 돕기 위해 모금에 나섰고 12만원을 전달했다. 1968년 12만원은 2019년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500만원이다. 초등학생 모금액으로는 거액임을 알 수 있다.

임세환이 어린 나이부터 가장(家長) 역할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송병순의 남편은 어디 있었기에 아내와 어린 자식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아무런 힘도 되지 못했을까?

아버지에 대한 추억
 
용화면사무소 근무시절의 임우영대전호적사무협회영동지부기념사진 - 둘째 줄 우측 두번째가 임우영박만순
 
아버지 임우영은 둘째 아들 임두환에게 '맥가이버' 같은 존재였다. 뚝딱하면 책상이 만들어졌다. 또한 집에서 필요한 공구나 물품 웬만한 것은 아버지 손을 거쳐 탄생했다. 한국전쟁 전에 아버지는 집에서 책상을 당신 손으로 손수 만들었다. 그 책상을 아들 임두환은 70년 동안 보관해오고 있다. 이제는 낡아 색이 바래고, 실제 사용되지는 않지만 의미가 남다른 물건이다.

70년 된 책상에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녹아 있다. 색 바랜 책상은 70년 동안 보존되어 왔는데, 아버지는 69년 전 생을 달리했다. 현재는 대전광역시가 되어 있는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된 것이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최소 1800명에서 최대 7000명까지 사망했다는 이곳에서 충북 영동군 용화면 자계리 임우영도 사망한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전 대전형무소는 전국 각지에서 온 정치범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형무소에는 대전·충남 지역 정치범들과 제주 4.3사건 관련자, 여순사건 관련자, 타 지역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헌병대의 지휘를 받은 군인과 경찰은 대전형무소 재소자 1800명 이상을 처형했다. 학살지는 대전 산내 골령골이다. 산내에서는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대전충남 보도연맹원들이 함께 처형되었다.

충북 영동군에 거주하던 주민 중 전쟁 전에 국가보안법 등 시국사범 위반자들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영동과 옥천은 행정구역이 충북이지만 생활권은 대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영동군 정치범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들이 산내에서 학살된 것이다.

영동군 용화면 자계리에 살았던 임우영이 산내에서 학살된 이유는 무엇일까?

수배자를 숨겨주다
 
영동경찰서가 작성한 의견서철박만순
 
용화면 임우영(1916년생)은 용화면 자계리 출신으로 해방 후(1947.4.1.~11.15)에 용화면사무소 호적계에 근무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공무원이었던 그는 해방 후에도 그 직을 이어나갔다. 임우영의 활동내역과 전쟁기 학살정황은 지역주민들의 구술증언과 더불어 영동경찰서의 관련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임우영은 1948년 1월 송재웅 사건으로 인해 1948년 4월 1차 구속을 당했는데, 송재웅 사건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948년 1월 31일 제10구경찰서(영동경찰서) 용화지서 소속 순경 곽순영은 1946년 10월 3일 영동에서 발생한 좌익 폭동의 주모자로서 포고령 위반으로 수배를 받아오던 이필영이 용화면 자계리 임우영가에 은신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동 지서 순경 조용두, 안정희, 김대석, 정해걸 등 4명과 함께 동 가옥을 급습하자 마침 이곳에서 벌목을 위해 기숙하고 있던 피해자인 송재웅이 갑작스런 경찰의 출현에 놀라 도주를 하므로 마당에서 경비를 서던 동인이 이를 수배자로 오인하고 추격하여 격투를 벌이다, 곽순경이 총기를 탈취하려는 피해자에게 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소지하고 있던 99식 장총을 발사하여 현장에서 사망케 한 사건이 발생했다"(영동경찰서, <의견서철>, 1949)

위 사건이 임우영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임우영은 좌익 활동 혐의로 1949년 10월에 다시 영동경찰서에 연행되어 1949년 말에 재판을 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석방을 1년여 앞둔 시점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후퇴하는 군·경에 의해 불법적으로 학살당했다.

대를 이은 사랑

임우영이 학살된 후 아내 송병순은 자식 셋을 키워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런데 1954년 불의의 사고로 1년 후인 1955년에 사망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임세환 남매는 뜻하지 않게 천애고아가 되었다.

그러자 임세환의 숙부 임만영(1930년생)은 팔을 걷고 임세환 남매를 챙겼다. 그는 서울대 사범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영동고등학교를 시작으로 교직의 길을 걸었다. 이때부터 세환, 두환, 숙자 3남매를 한 집에서 데리고 살면서 모든 숙식과 생활을 챙겼다. 결국 큰 조카 세환은 대학까지 가르치고 나머지 조카들은 고등학교까지 가르쳤다.

당시는 경제적 형편이 어려우면 자기 자식들도 초등학교·중학교까지만 가르치던 것이 일반적 상황이었다. 그런데 조카들을 고등학교·대학교까지 가르친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임만영은 현대 세종대학교의 전신인 수도여자사범대학교를 나온 이부영과 결혼 후 2남3녀의 자식을 모두 교육자로 키워 '교육 집안'으로 호를 날렸다. 그는 이후 한양대학교와 인하전문대학 강사를 거쳐 서울교육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특히 1996년에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았다.

내리사랑의 바통은 임두환이 이어받았다. 임두환은 1968년 형 세환이 사망한 후 조카 둘을 책임졌다. 형수가 개가했기 때문에 부모의 역할을 대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는 숙부가 자신의 형제들에게 했던 것처럼, 조카 둘을 자신의 집에 데리고 살면서 고등학교까지 보내고, 시집을 보냈다. 대(代)를 이은 내리사랑이다.

영동대교에 세워진 모자(母子)상
 
영동대교 앞에 세워진 모자상박만순
 
2010년 11월 22일 충북 영동군 영동대교 앞에는 영동군 주민 300여명이 모였다. '효자 임세환 선생상' 건립식이 있었다. 임세환의 선행을 기려 영동군이 1억 원을 들여 모자상(母子상)을 건립한 것이다. 임두환(영동군 영동읍·80세)은 평생 자신의 삶의 과제로 삼았던 두 번째 일을 마무리해 흡족한 얼굴이었다.

그는 생의 첫 번째 과제였던 부친 임우영의 명예회복도 해결한 상태였다. 2002년부터 시작한 부친의 명예회복운동이 '대전·충청지역 형무소사건'으로 분류되어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규명 결정되었기 때문이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활동 중간에 암이 발생해 오랜 기간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약 10년 만에 부친의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을 일궈냈다.

임두환은 부친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진 후에 심혈을 기울여 형님의 선행에 대한 공론화와 동상건립운동을 추진했다. 그 결실이 2010년 말에 이루어졌다. 임두환은 "형님의 선행이 교과서에 수록되어 청소년들이 가족에 대한 사랑과 효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라고 밝혔다.

한국전쟁기에 국가폭력에 의해 많은 가족공동체가 붕괴되었다. 이후 연좌제에 의해 또 한 번의 고통을 받아 사회와 이웃으로부터 단절된 삶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가족밖에 없었다. 한국의 현대 산업사회 속에서는 주로 여성의 희생에 의한 남성의 성공신화가 주를 이룰 뿐이었다.

그런데 임두환 가족은 그렇지 않았다. 임우영이 국가폭력에 의해 학살되었음에도 서로가 밀어주고 끌어주는 가족애를 발휘함으로써 가족공동체를 온전히 유지하고 지역사회의 귀감이 된 것이다. 임만영-임세환-임두환으로 이어진 가족사랑·인간사랑의 정신은 개인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현대사회 속에서 시금석으로 삼아야 할 가치이지 않을까?
 
아버지 70년 전에 손수 만든 책상 앞에 있는 임두환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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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향덕의 효도 이야기

향덕(向德)은 웅천주(熊川州) 판적향(板積鄕) 사람이다. 아버지 이름은 선(善)이고 자(字)는 반길(潘吉)인데, 천성이 온후하고 착하여 마을에서 그 행실을 칭찬하였다. 어머니는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향덕 역시 효성스럽고 순하기로 당시에 소문이 났다. 천보(天寶) 14년(755년 경덕왕 14년) 을미(乙未)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고 더구나 전염병이 돌았다. 부모가 굶주리고 병이 났으며, 어머니는 또한 종기가 나서 모두 거의 죽게 되었다. 향덕이 밤낮으로 옷을 벗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편안히 위로하였으나 봉양할 것이 없어 이에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떼어 내어 먹게 하고, 또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 모두 완쾌시켰다. 향사(鄕司)가 주(州)에 보고하니, 주에서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은 명을 내려 벼 300섬과 집 한 채, 구분전(口分田) 약간을 내려주고, 담당 관청에 명하여 비석을 세워서 일을 기록하고 드러내도록 하였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은 그곳을 ‘효가(孝家)’라고 부른다.

向德態川州板積鄕人也. 父名善, 字潘吉, 天資溫良, 鄕里推其行. 母則失其名. 向德亦以孝順, 爲時所稱. 天寶十四年乙未, 年荒民饑, 加之以疫癘. 父母飢且病, 母又發㿈, 皆濱於死. 向德日夜不解衣, 盡誠安慰, 而無以爲養, 乃刲髀肉以食之, 又吮母㿈, 皆致之平安. 鄕司報之州, 州報於王. 王下敎, 賜租三百斛宅一區口分田若干, 命有司立石紀事, 以標之. 至今人號其地云孝家.

이 사료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대에 살았던 효자 향덕(向德)에 관한 내용이다. 향덕 이야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효선(孝善) ‘향득사지할고공친(向得舍知割股供親)’조와 『삼국사기 』권9, 경덕왕 14년(755)조에도 전하는 데, 『삼국사기 』 열전의 내용이 가장 자세하다. 한편 『삼국유사 』에는 향덕의 이름이 ‘향득(向得)’으로 되어 있다.

향덕은 웅천주(熊川州, 충청남도 공주) 판적향(板積鄕) 사람이다. 755년(경덕왕 14년)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많은 백성이 굶주리고 전염병까지 돌았는데, 향덕의 부모도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었다. 이에 향덕은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떼어 내어 부모에게 먹이고,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내어 낫게 하였다. 지방 관청에서 그의 효행을 왕에게 보고하니, 왕이 큰 상을 내렸다고 한다.

이 기록으로 볼 때, 755년 봄 신라에는 심각한 기근이 전국을 휩쓸었고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돌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신라 경덕왕 대에는 유난히 자주 흉년과 기근이 발생했다. 『삼국사기 』 신라본기에 기록된 것만 보아도 745년(경덕왕 4년) 5월, 746년(경덕왕 5년) 가을과 겨울, 754년(경덕왕 13년) 8월에 가뭄과 전염병 등이 발생하였다. 특히 13년 8월에 있었던 가뭄과 병충해는 이듬해인 755년(경덕왕 14년) 봄의 전국적인 기근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재해는 국가적으로도 크게 문제되어 756년(경덕왕 15년) 2월에는 상대등(上大等) 김사인(金思仁)이 해마다 갖가지 재난이 발생하는 일을 가지고 왕에게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당시 정치의 득실을 논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해마다 가뭄이 발생하고 전국적으로 기근이 만연하자 향덕은 부모 공양의 길이 막연해지게 되었다. 『삼국유사 』에는 ‘향덕’이 ‘향득사지(向得舍知)’로 기록되어 있는데, 사지(舍知)는 신라 17관등 중 13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대체로 4두품에 해당하는 관등이다. 따라서 향덕이 원래 4두품에 해당하는 신분이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그가 사지라는 관등에 오른 것이 포상 후일 가능성도 있으므로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향덕이 4두품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그의 실제 생활은 극히 빈곤해서 일반 백성과 별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근에 역병까지 겹쳐 부모가 모두 거의 죽게 되자 향덕은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떼어 내어 부모에게 먹이는 ‘할고(割股)’와,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내는 극단적인 방법을 써서 부모의 병을 낫게 하였다.

향덕의 효행에 대해 주(州)의 보고를 통해서 알게 된 경덕왕은 향덕에게 포상하였다. 즉, 곡식과 집⋅토지를 내리고 거기에 더하여 비석을 세워 향덕의 효행을 기록하고 드러내도록 한 것이다. 이와 같은 할고 효행과 그 효행에 대한 국가의 표창은 모두 우리 역사상 처음 보이는 사례이다. 특히 비석, 즉 정려비(旌閭碑)를 세우도록 한 조치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사실 당시 당(唐)나라의 경우는 효자⋅효녀나 열녀 등에 대하여 그 가문과 고을을 정표(旌表)

나라에서 정려비, 정려문 등을 세워 선행을 한 인물을 칭찬하고 널리 알리는 행위

하는 것이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경덕왕 대에 이르러 향덕에 대한 것이 처음이다. 따라서 경덕왕이 취한 향덕의 효행에 대한 조치는 대민 교화를 목적으로 한 일종의 교화 정책으로서, 우리나라 정표 정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경덕왕은 재위 기간 동안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한화정책(漢化改策)을 꾸준히 추진하였다. 또한 당나라와의 밀접한 교류를 통하여 한문화(漢文化)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향덕의 효행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포상은 바로 당시 중국에서 보편화한 유교적 윤리, 또는 일종의 효치주의(孝治主義)의 구현과 짝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 동시에 당시 민심의 동요가 우려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덕치(德治)의 규범을 보이고 대민 교화를 지향함으로써 계속되는 재해로 인한 민심 이반을 막아 보고자 한 의도도 엿볼 수 있다.

향덕의 이야기는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효행 포상 사례이자 포상의 첫 사례로서, 유교적 윤리의 수용과 그 시행의 초기적 모습을 보여 준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향덕의 이야기가 『삼국사기 』 신라본기에도 기록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타난 효자 ‘향덕’⋅‘향득’에 대하여」,『백제문화』18⋅19,강헌규,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1989.
「삼국유사 효선편 검토」,『동양학』3,김상현,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2000.
「『삼국유사』‘향득사지’조로 본 신라인의 효행」,『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30,김수태,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2009.
「『삼국유사』효선편의 이해」,『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30,김영하,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2009.
「신라시대 『효경』의 수용과 그 사회적 의의」,『이기백선생고희기념한국사학논총』(상),노용필,일조각,1994.
「삼국유사에 나타난 효선사상」,『인문과학』3⋅4,민병하,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1974.
「『삼국유사「효선」편 분석 연구」,『한자한문교육』21,엄선용,한국한자한문교육학회,2008.
「신라 효자 향덕과 그 유적」,『백제문화』11,윤용혁,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1978.
「신라 불교에서의 효관념-『삼국유사』효선편을 중심으로-」,『동아연구』2,이기백,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1983.

저서

『신라화엄사상사연구』, 김두진,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신라사상사연구』, 이기백, 일조각,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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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판단의 잣대

​인조때 큰 가뭄이 들어서 농작물이 모두 타들어 가고 민심은 흉흉해 졌습니다.
인조대왕은 베옷을 입고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에 올라가 기우제를 올렸습니다.
기우제에 하늘이 감동을 했는지,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 오더니 굵은 빗방울의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 했습니다.
얼마나 기다린 비 입니까.
더욱이 임금님이 친히 베옷을 입고 기우제를 드린 후에 내리는 비가 아닙니까.
만조백관들과 백성들은 얼싸안고 비를 맞으며 춤을 추며 기뻐했습니다.
인조대왕도 기뻐서 같이 비를 맞으며 춤을 추며 기뻐했습니다.
그때 임금의 눈에 아주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자가 보였습니다.
그건 한 선비가 갑자기 비가 오니까, 황급히 갓 끝을 붙잡고 비를 피해 처마밑으로 후다닥 피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비를 맞으며 춤을 추어도 모자랄 판에 그 비를 맞지 않겠다고 비를 피해서 처마 밑으로 피하다니 저런 고연놈이 있단 말인가.
화가 난 임금의 불호령이 내렸습니다.
"저놈을 당장 잡아서 끌어내려라!"
선비는 졸지에 비를 피한 죄로 잡혀왔습니다.
"네 이놈. 지금 오는 이 비가 무슨 비 인줄 아느냐?
3년동안 내리 가물어서 짐이 신하들과 함께 베옷을 입고 이곳에 올라와 하늘에 죄를 청하고 지성을 드리니 하늘이 감복 하시어 비를 내리셨고 만조백관들과 백성들은 너무 기뻐서 비를 맞으며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데 너는그 비를 피해 처마에 피하다니 비를 맞는게 그렇게 싫은거냐?"
"여봐라~~~" 저놈을 당장 형틀에 묶고 주리를 틀도록 하여라!"
그때 잡혀온 선비가 외쳤습니다.
"전하! 소인의 말을 한 번만 들어 주시옵소서!"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느냐?"
"그래 무슨 말이냐?"
"전하! 지금 오고있는 비가 얼마나 귀한 비 입니까?
내리 3년동안 내리지 않던 비가 임금님께서 베옷을 입고 기우제를 드리니, 하늘이 감복 하시어 비를 주셨습니다.
빨리 한 방울의 비라도 메마른 땅을 적셔야지, 이런 비를 저같은 비천한 몸이 맞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처마밑으로 피한 것이옵니다."
인조 임금이 그 말을 들으니 자기의 생각도 틀렸고, 비를 맞으며 춤을 춘 신하와 백성들 보다 비를 피한 선비가 더 충성 스런 백성이 아니던가? ​

"어리석은 사람이 현명해 지기도 하고, 악한 사람이 착해지기도 한다.
그러니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마라!"고"톨스토이" 말했습니다.

의외로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자신의 판단이 정확하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정치인들은 이념의 잣대로, 종교인들은 자기 신앙의 잣대로, 지식인들은 학문의 잣대로, 상식의 잣대로, 경험의 잣대로,지역의 잣대로, 모두 한가지씩 잣대를 가지고 주관적인 판단을 내립니다.
내가 경험한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가진 지식이 전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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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방송인 안문숙씨의 경우

방송인 안문숙씨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탤런트가 되어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연예인이 되어 생각지 못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힘이 들어 큰 좌절을 겪고 있을 때 주님께서 이분을 찾아오셨다고 합니다.

어느 날 집에 초인종이 울려 엄마가 나가보았습니다.
어떤 여자 분이 전도지를 전해주면서 “예수 믿으세요.”하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소심해 보이고 자신이 없어 보였습니다. 엄마가 문전 박대하며 내쫓았고 소금까지 뿌렸습니다.

그 후 이분을 다시 만나게 됐을 때 물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자신도 없으면서 왜 우리 집에 전도하러 왔습니까?”
그 때 이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만 하면 안문숙씨가 떠올랐습니다.
한 번도 누구에게 전도한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전도하라는 명령이라 생각해서 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이 분의 집 문을 두드리신 것입니다.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주님께서 직접 개입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엄마부터 식구들이 차례로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불교신자들이 원래 꿈을 잘 믿고 꿈에 약합니다.
엄마가 밤에 꿈속에 십자가를 보고는 자다가 깨서 소리를 지르면 달려 나왔습니다.
이분도 꿈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런 일이 연속되자 엄마가 찜찜해서 안문숙씨에게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교회에 가야할까 보다.
너 먼저 지난번 전도하러 온 사람 따라서 교회에 가봐라.”
그래서 교회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자기 인생에 개입하신 뒤 자기 인생에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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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수맥을 차단하는 하나님의 말씀

여러 해 전에 한인사회에 수맥을 찾아주는 어느 분이 저희 집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저희 집은 와이스톤(Whitestone)이란 지역에 거주할 때이었습니다.
수맥을 찾는 엘보 봉을 잡고 방을 이곳 저곳 다니면서 수맥을 찾는데 이상하다고 합니다.
분명히 수맥이 흐르고 있는데 수맥이 잡히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한동안 수맥을 찾다가 결국 이런 질문을 합니다.
"혹시 예수를 믿으십니까?"
"아, 예 제가 목사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어쩐지, 집안에 성경책이 있지요?"
"그럼요 당연히 방마다 성경책이 있지요."
그 때 그 사람이 말하기를 "성경책이 있으면 수맥이 잡히지 않습니다."

바로 옆집에서는 커다란 수맥이 저희 집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왜 저희가 거주하는 곳에는 수맥이 잡히지 않았을까?
성경은 노아 홍수 후에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라며 무지개 언약을 세웠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집 특히 성경책이 있는 자리에서 수맥은 그 꼬리를 감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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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김일성과 김정일의 기독교 경험

1.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 김형직

김일성은 만경대에서 1912년 4월 15일에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 사이에 큰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형직은 1911년 평양의 기독교 계통의 학교인 숭실중학교(당시 숭실아카데미로 불림)에 입학하여 1913년까지 수학한 후 순화 보통학교, 명신 보통학교에서 교사 생활과 독립운동을 병행했다.

숭실중학교는 당시 미국계 미션스쿨로서 한국에서 기독교를 전파할 기독교 지도자를 야성하는 교육 기관이었다.
당시 김형직이 기독교가 대중화되지 않은 시기에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는 사실은 그의 기독교 신앙의 독실성을 말해 준다.
김형직은 기독교 신앙은 당시 기독교 일반의 경우처럼 독립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김형직은 1917년 3월 23일 장일환, 배민수, 백세빈 등과 함께 조선 국민회를 결성했다.
조선 국민회는 기독교 항일 운동단체로 당시 한국의 젊은 기독교인들이 전국적으로 모이는 평안장로신학교 개교일을 전후하여 많은 조직원을 확보함으로써 막강한 세력을 발전했다.
김형직은 항일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극심한 옥살이로고생을 했으며 그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 김일성 주석의 어머니 강반석

어머니 강반석은 창덕학교 교장으로 있던 강돈욱 장로의 둘째딸로서 장로교 계통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이었다.
강반석의 반석이라는 이름이 베드로의 별명인 반석에 어울리게 신앙심이 두터운 교인이었음은 분명하다.
강반석은 고향 칠골에 있던 교회에서 집사로 봉직했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이 1992년 4월, 봉수교회와 장충성당 건립에 이어 어머니의 고향 칠골에 `칠골 교회' 를 건립했다.

3.김일성 주석

김일성은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모태 신앙을 갖고 성장했다.
김일성 주석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매주 교회에 출석했다는 사실을 자신의 회고록에 기록하고 있다.
김일성은 모태 신앙을 가진 기독교 신자로 양육되었다.
김일성 주석은 국민학교 5~6학년 2년동안 외조부댁에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할아버지 강돈욱과 삼촌 강양욱의 여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또한 그의 회고록에서 개인적으로 손정도 목사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길 만큼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4. 그의 아들 김정일

김정일의 기독교 경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김정일은 7세에 친어머니를 여윈 관계로 친척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이들의 신앙 정도에 대해 알 수 없기 때문에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이들 역시 기독교 집안의 사람들로서 김정일을 키우면서 기독교적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김일성도 김정일을 후계자로 양성시키는 과정에서 아버지로부터 조부모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을 것이며 기독교인맥을 통하여 기독교에 대해서도 정보와 지식을 접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기독교 경험과 기독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등에 관한 체험담도 들려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김정일도 강양욱 목사를 통해서 기독교를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정일은 정치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1970년대에 부주석으로까지 활약한 강약욱으로부터 기독교에 대한 지식을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모 강씨 집안의 인물들과 접촉에서는 기독교에 얽힌 가족 관계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일은 이러한 기독교 경험을 바탕으로 기독교의 조직 통합 기술을 당선전동부에서 활동하던 시기부터 유익하게 활용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1967년부터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시작하여 1974년에는 "유일사상 체계확립의 10대 원칙"을 명문화하고 사상 학습을 생활 주기에 따라 체계화하는 등 종교적 성격으로 사회를 조직화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김일성, 김정일은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한국인에 비하면 기독교적 영향을 훨씬 많이 받았고 기독교에 대해서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의 기독교적 가정 배경과 기독교인 들과의 접촉, 그리고 기독교 세력의 도전 경험 등으로 기독교 교리와 교훈, 생활 방식을 접할 기회를 빈번하게 가졌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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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김익두(金益斗) 목사의 생애와 부흥운동(1910~1940)

“한국의 베드로”
"이적과 치유의 안악산 호랑이”로 알려진 김익두 목사
1910년대로부터 1930년대에 이르는 한국부흥운동의 산 증인이었습니다.
776회의 부흥집회를 인도하고 28,000회의 설교를 하며 인생의 3분의2를 하나님께 드린 김익두 목사는 1874년 11월3일,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리에서 부친 “김응선”과 모친 “전익선” 사이에서 독자로 출생하였습니다. 
부친 김응선은 기와집에 터전을 잡고 사는 중산층이었으며 지역에 사는 걸인들을 구제하고 평촌리의 노인들을 공경하여 주민들에게 신임과 존경을 받는 대원면 유지였습니다. 
김익두는 6세때, 서당에서 한문을 배워 10세의 나이에 사서삼경을 통독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소년으로 성장하였습니다.
13세되던 해, 모친이 장질부사라는 전염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을 때, 30리길(12km) 거리를 달려가 한의사를 모셔오는 지극한 효심에 감동하여 의사는 정성으로 치료하고 모친을 낫게 하였으며 치료비도 받지 않은 일이 있었습니다.
 
김익두는 6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과거시험에 응시하였으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채 낙방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총명한 두뇌와 천재성을 가진 김익두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예선탈락은 아버지에게도 충격이었습니다. 
이 일로 몸져 누우신 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채 그대로 운명하셨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는 유언을 뒤로 한 채 부친을 잃은 김익두는 날마다 부친 산소에 가서 아버지를 부르며 눈물로 시간을 보냈지만 응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인생무상에 빠진 김익두는 구월산 패엽사에 들어가 불교에 귀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사상에 환멸을 느끼고 더 큰 고민의 늪에 빠진 김익두는 다시 세상밖으로 나왔습니다.
 
부친이 별세하고 집안의 가장이 된 김익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장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김익두는 안악지방 토산물을 구매하여 평양에 가서 판매하고 평양에서 생활용품과 일용잡화를 재 구매하여 안악에서 판매하는 이중소득으로 가정생계를 원활하게 하였습니다. 
하루는 길에 떨어진 돈주머니를 줍게 되었는데 주머니 안에는 큰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김익두는 며칠을 돌아다니며 주인을 찾아 그 돈주머니를 그대로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 돈의 주인은 안악읍내 가장 큰 상점을 경영하는 상인이었고 김익두의 정직한 마음에 감동한 주인은 상점의 지배인으로 고용하였습니다.
김익두는 영업능력이 좋고 정직하여서 많은 손님들이 상점을 찾아와 수익은 날로날로 증가하였습니다.
특별히 김익두의 고객은 그의 정직함과 성실함에 매우 신뢰하였고, 자기집 귀중품을 맡기고 보관하는 전당포 역할까지 겸하게 되었습니다.
 
안악읍 최고 상점의 지배인으로서 좋은 직업을 가진 김익두에게 곳곳에서 혼사처가 들어왔고 18세의 나이에 16세의 “전익선”과 혼인을 하였습니다.
신혼생활에 하루하루가 즐거운 어느날, 친구가 찾아와 동네에 큰 공장이 입주하는데 이곳에 투자하면 큰 돈을 벌수 있다고 하여 연대보증을 요구하였습니다. 
김익두는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수 없어서 보증서의 도장을 찍어 주었는데 그것은 친구의 사기행각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조상 전래의 토지와 집이 몰수되고 김익두는 하루 아침에 걸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김익두는 세상을 한탄하며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술에 취한 김익두는 거리에서 사람들과 시비하고 폭력을 휘두르며 위협을 가하였습니다.
장날에는 부녀자들과 할머니들의 노점상을 갈아 엎거나 던지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날이 하루, 한주, 한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나자 시장 상인들이 오늘은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성황당에 비는 일이 있을 정도로 상황은 심각해졌습니다.
 
이렇게 방탕의 날을 보내던 어느날이었습니다.
김익두는 오늘도 장터에서 사람들에게 시비거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서양 여선교사가 시장에서 전도하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여선교사는 김익두에게도 전도지를 주며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였습니다.
전도지를 건네받은 김익두는 “뭐라고? 나보고 서양귀신을 믿으라고?” 하면서 전도지로 코를 풀어서 바닥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그 선교사는 “청년!! 전도지로 코를 풀면 코가 썩어요!!”하며 꾸중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김익두를 잘 알지 못했던 여선교사와 여선교사가 전해주는 복음을 알지 못했던 김익두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 보라고 건네주는 선교사의 전도지를 구겨서 호주머니에 넣은채로 집으로 돌아온 김익두는 무심코 구겨진 전도지를 읽어 보았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이 꽃과 같으나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
김익두는 “세세토록”이라는 네 글자에 심장이 떨리는 느낌을 받고 스스로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선교사가 전해준 종이에 적혀 있는 말씀은 세세토록 있는 것이라고 했고 그 세세토록은 “영원하다”는 말이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했기 때문에 그 말씀이 영원하다는 것일까?
이 말씀은 며칠동안 김익두의 머릿속을 흔들어 놓으며 잠을 설치도록 하였습니다.
 
며칠째 고민에 빠져 두문불출하고 있을 때, 친구이며 예수교를 신앙하는 “박태환”(후일금산교회 장로로 피택되었음)이 김익두를 찾아 왔습니다. 
훌륭한 선교사가 오셔서 부흥사경회를 하는데 함께 교회에 가자는 권유를 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평소때의 김익두 라면 “교회는 무슨? 조상도 모르는 서양귀신에게 홀려서 잘하는 짓이다!”라고 해야 당연한 것인데 그날은 박태환의 권유를 못이긴 척 하고 받아 주었습니다.
 
1900년 3월, 금산교회에서 개최된 남자 부흥사경회에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 “스왈렌”(소안론, Swallen. W. L.)이 강사로 초빙되어 “영생”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김익두는 서양사람이 한국말에 능숙한 것에 한번 놀라고, 서양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수없이 몰려든 한국사람들에 또 한번 놀라고, 방탕한 생활로 교회라면 치를 떨었던 자신이 교회당에 앉아 있는 현실에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물론 주먹깡패 김익두를 바라보는 교인들과 사람들도 모두 놀라며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시골장터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어야 할 사람이 부흥사경회에 앉아 있으니 혹시 무슨 행패라도 부려서 집회를 망치게 될까 염려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선입견이었고 기우였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실패하고 술이 아니면 하루도 살수 없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것을 바라본 김익두는 스왈론의 설교속에서 녹아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받아들게 된 전도지 한 장과 박태환이라는 친구의 소개와 스왈론 선교사의 만남을 우연하게 여기기 않았습니다. 김익두는 스왈렌 선교사님 앞에 무릎을 꿇고 지난날을 통회하고 자복하며 회개하였습니다. 지난날의 무섭고 두려웠던 모든 죄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없는 자복의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을까요? 김익두는 아직도 통회하며 얼굴과 온몸은 땀과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깨를 짓눌러 왔던 인생의 죄짐들은 이제 가벼워 졌습니다. 집회를 인도하였던 스왈론 선교사님도 김익두의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스왈론 선교사는 처음 만나는 김익두를 축복하였습니다. “하나님, 죄인이었던 김익두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앞으로 하나님의 귀한 종이 되어서 불의 사자로 일하게 하옵소서”라는 놀라운 기도를 하였습니다. 스왈론 선교사는 김익두에게 순한문 신약성경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부흥사경회를 통하여 새롭게 태어난 김익두는 이제 주먹깡패와 술주정군이 아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김익두는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성경을 읽었으며, 전도를 하였습니다. 오랜 술친구였던 김선봉을 전도한 김익두는 그와 함께 교회 안팎의 궃은 일과 힘든 일들을 척척 해내는 등 좋은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기생집에 가서 전도하기로 결심하고 김익두는 김선봉과 함께 술집을 찾았습니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기생, 월선과 옥화를 전도한 김익두와 김선봉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이별주 한잔씩 하자고 무심코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술을 마시던 김익두가 감전사를 일으키며 충격을 받고 쓰러져 기절을 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김선봉이 깜짝 놀라 겨우 집까지 업고 돌아 왔으나 1주일 동안 혼수상태를 거듭하며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후 겨우 일어나게 된 김익두는 예수 믿은 후 다시 술을 마신 것을 회개하며 3일간 금식하고 통회하며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닌지 1개월째, 김익두를 바라보는 교인들과 사람들은 의구심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김익두는 교인들 앞에서 공개 자복을 하고 하나님께 헌신을 선포하였습니다. 김익두는 장에 나가서 쓰레기를 줍고 거리를 청결하게 하며 예전과 달라진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김익두의 변화에 교인들은 점차 신뢰를 보냈고 그는 친구인 김선봉과 함께 교회의 환경정리와 크고 작은 일들에 솔선수범하였습니다.
 
모펫 선교사와 함께 한국 부흥의 주역이었던 스왈론 선교사와 김익두의 만남은 이렇게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진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김익두는 스왈론 선교사로부터 받아든 순한문신약성경을 1년간 100독을 하였습니다. 성경을 읽는 과정에서 김익두는 가슴을 칼로 찢는 것 같은 불세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40일 금식기도에 도전한 김익두가 산에서 금식기도를 마치고 하산하던 중 하늘에서 큰 불덩어리가 가슴에 떨어져 견딜수 없는 놀라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김익두야! 김익두야!” 하며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신 것이 너무나 감사해 한없이 울고 찬송하며 밤을 맞도록 기도 하였습니다.
 
1900년 7월, 세례를 받기로 예정하여 부부가 각방을 쓰고 매일 목욕재개하며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여 세례를 준비하였으나 선교사의 순례가 늦어져 1901년 7월에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그때에 어머니와 아내까지 함께 스왈렌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은 김익두는 전도왕이었습니다. 불신자를 바라볼 때 김익두의 영혼은 견딜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한동안 시야에서 사라졌던 김익두가 안악장터에 다시 나타나자 장사꾼들은 모두 당황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김익두가 진정으로 예수를 믿고 있을까 의구심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몽둥이와 쇠망치를 들었던 김익두의 손에는 성경과 전도지가 주어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나는 김익두입니다. 안악장터에서 여러분을 괴롭히고 못살게 하였던 깡패 김익두입니다. 이제는 예수를 믿고 여러분앞에 용서를 빌고 회개하려고 나왔습니다. 그동안 저에게 당했던 여러분들께서 저를 한없이 때려 주시고 용서하여 주십시오!” 어떤 상인들은 예전의 앙심이 있었던지 보복적으로 때리고 발로 차며 욕설을 하기도 하였지만 진심어린 반성에 함께 울며 용서해 주시는 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김익두의 진심과 용서에 감동을 받은 일부 상인들은 예수를 믿기로 결신하고 그와 함께 교회를 다니기로 작정하였습니다.
 
1901년, 28세의 변화된 김익두에 관한 소문이 전국으로 알려 지면서 “재령교회”에서 전도사로 청빙하겠다는 교섭이 들어왔습니다. 같은 시기 서울의 큰 약방에서도 150원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김익두에게 채용 의사를 밝혀 왔습니다. 재령교회의 사례가 30원이었으니 김익두에게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익두는 순간 기도하며 생각하였습니다. 서울의 약방도 종살이고, 교회의 전도사도 종살이인데 같은 종살이라면 사람의 종보다 하나님의 종이 옳은 것이라는 확신으로 재령교회에 부임하였습니다. 김익두가 재령교회에 부임하였을 때 그곳에는 남자 1명과 여자 10명의 교인이 있었습니다. 부임즉시, 김익두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여름성경학교를 개설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름성경학교에 등록한 어린이들이 김익두 전도사의 설교를 듣고 회개를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이 회개를 하자 그들의 부모들도 이어서 회개를 시작하였고 교회는 온통 자복함과 통회함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임재하심을 통한 놀라운 역사였으며 재령교회에서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재령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힘을 잃은 성도들은 전도하기 시작했고, 어린이들은 친구들을 교회로 인도하였습니다. 김익두의 첫 번째 사역은 이렇게 대성공을 이루며 한국교회의 새로운 부흥을 예고하였습니다.
 
재령교회의 부흥은 신천교회로 이어졌습니다. 김익두는 그후 신천교회의 선교사와 동사전도사로 청빙을 받고 사역지를 이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천교회는 교회만 있고 교인이 한명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교회에서 전도사가 된 김익두는 6개월간 매일 철야기도를 하고 애원하는 중에 초라하고 남루한 옷을 입은 절름발이 장애인 여자 한명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사람이 그리웠을까요? 장애인 거지 여자라도 한사람이 함께 있으니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익두는 장애인 거지 여자를 보통의 정상적인 교인으로 자라게 하며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리고 6개월후, 이번엔 남자 거지 한사람이 김익두를 찾아 왔습니다. 그도 돌려 보내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보살핌으로 보통의 일 잘하는 교인으로 성장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변화한 김익두 전도사에 관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신천교회를 찾아왔고 한주일에 10명, 어떤 주일에는 20명이 찾아와 교회에 등록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3년간의 노력 끝에 한사람의 교인도 없었던 신천교회는 300명의 교인으로 부흥을 하였습니다. 김익두는 매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하였고, 하루에 세 번씩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기도하고 성경읽는 것을 숨쉬는 것처럼 하였고, 길에서는 사람들을 만나 전도하기를 습관처럼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김익두 전도사를 평양신학교에 파송하여 목사가 되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평양신학교는 장로교의 유일한 신학교로서 1901년에 설립되어 1907년, 길선주와 서경조 등 제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김익두 전도사는 김관근, 박정찬, 김종섭, 안승원, 우종서, 주공삼, 채정민 등 27명과 함께 1910년 제3회 졸업생이었습니다. 1910년 9월20일, 37세의 김익두는 평안북도 선천군 염수동교회에서 개최된 제4회 독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김익두가 목회한 신천교회는 날로 성장하여 700명의 교세로 확장되었습니다. 한명도 없었던 신천교회는 이제 협소하다 못해 교인들이 밖에서 까지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새로운 성전건축이 절실하게 요구되었습니다. 3일 금식기도를 마친 김익두 목사의 환상중에 노아의 방주모양을 한 대예배당이 눈앞에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인 김익두 목사는 교인들에게 성전건축을 선포하고 건축헌금을 작정하였습니다. 한주만에 쏟아진 교인들의 작정헌금은 힘에 겨울 정도로 지나친 액수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설계를 마친 교회당 건축비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기도하는 중에 선천지역 유지들에게 가서 교회 건축헌금을 요청하였습니다. 도저히 말이 않되는 김익두 목사의 제안에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돌렸을까요? 그렇게 인색하고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던 유지들이 큰 기쁨으로 호응하며 김익두목사를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이같은 불신자들의 헌금에 충격을 받은 성도들이 추가로 헌금을 하여 신천교회 대성전은 재정부담없이 여유롭게 완공될 수 있었으며, 그 때 건축헌금을 하였던 지역의 유지들도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신천교회 성전헌당식을 끝낸 후, 김익두 목사는 신천 시내 길가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찾았습니다. 베드로의 이적을 기록한 성경을 믿는 김익두 목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했지만 그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불신감과 확신없는 믿음이 그를 일으키지 못했다고 생각한 김익두 목사는 하나님앞에 자복하고 회개하였으며 다시 1주일간 금식기도를 마친후 앉은뱅이를 찾았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앉은뱅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상적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향후 39년간 수십만명의 병자를 치유하는 신유의 은사를 일으킨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신유집회로 명성을 더 높여가던 어느 여름날, 김익두 목사가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 산고개를 넘어 가던중 너무나 더워서 상의를 탈의하고 나무그늘에서 잠시동안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술에 취한 남자가 올라와 “왜 당신이 여기에 먼저 올라와 있느냐”면서 시비를 걸고 폭행을 하였습니다. 이때 김익두 목사는 그 사람이 휘두르는 주먹을 피하지 않고 다 맞고 있었습니다. 얼마동안 폭력을 일삼던 사람이 폭력을 멈추자 김익두 목사가 “형님, 이제 다 때렸소?”라고 말을 건네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래! 다 때렸다, 왜? 어쩔건데!” 하면서 다시 폭력을 휘두르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김익두 목사가 정색을 하고 “내가 김익두라는 사람이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당신이 받았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얼굴이 반쪽이 되어 머리를 땅에 엎드리고 “형님! 제가 이제 어찌하면 되겠습니까?”하면서 어쩔줄 몰라 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 나를 따라와!”하면서 그 사람을 자기가 인도하는 부흥회에 데리고 가서 참석케 하였고 그는 훗날 그 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예전의 사람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김익두는 이제 주먹쟁이로 알려진 것이 아니라 “성경다독”으로 유명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의 대부분을 암송하고 있을 정도로 많이 읽었습니다. 교인들에게도 성경다독을 권유하였고 김익두 목사의 영향을 받은 신천교회 교인들 또한 성경을 많이 읽기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는 일설에 구약을 100독, 신약을 1,000독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설교주제도 언제나 성경이었습니다. 성경은 김익두의 신앙생활의 기본원칙이었고 주제였으며 생활법률과 규범이었습니다.
 
1919년 12월25일, 대구 달성군 현풍읍내 현풍교회에서 김익두 목사는 부흥사경회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박수진”이란 거지가 집회현장에 나타났는데 그는 10년전 사고로 아래턱이 떨어져 음식을 누워서만 먹던 자였습니다. 거지로서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던 사람이었지만 김익두 목사는 그 사람을 위해서 금식하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집회시간에 다시 그를 불러 기도를 하였는데 박수진의 아래턱이 올라가 붙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스스로도 놀라고 주위에서 바라보던 사람들도 다 놀라게 되었습니다.아래턱이 나은 박수진은 그 길로 동네를 다니며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면서 춤을 추며 뛰어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김익두 목사는 신유의 역사를 이어갔고, 곱사등이 소녀가 펴지고, 소경이 눈을 뜨는 역사가 계속되었습니다. 대구 경산읍교회에서는 수십명의 환자들이 집단으로 치유를 받았고, 대구교회 집회에서도 수백병의 병자들이 한꺼번에 치유를 받는 기적같은 일이 눈앞에서 목도되었습니다. 김해군 진영리교회에서는 23년된 혈루증 여인이 나음을 입었고, 평양교회에서는 11년된 벙어리 여인이 말문이 열리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동아일보는 이러한 김익두 목사의 능력을 대서 특필하고 그의 능력은 전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신유사역은 병자 자신의 회개와 기도와 함께 역사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대구집회에서 “김경애”라는 기생은 1년간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김익두 목사의 기도를 받고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다시 기생으로 돌아간 그녀는 중풍이 재발하였고 다시는 회복되지 못하였습니다. 안악군 동문면에 사는 “최석황”이라는 사람은 30년된 종기로 평생을 고생하며 살다가 김익두 목사의 기도를 받고 완전히 치료받았지만 후에 타락한 인생을 살면서 병이 재발함은 물론 그 병으로 죽음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1920년 10월20일, 2주간의 금식기도를 마친 김익두 목사는 제8회(1919) 마펫 선교사에 이어 서울 안동교회당에서 제9회 장로교 총회의 총회장에 취임하였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서울 승동교회 부흥회를 인도하였습니다. 도로와 교통이 편리하지 않던 시대, 1만명이 회집한 부흥회에는 교회당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마당과 인도변까지 명석을 깔고 앉아 부흥회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당시 승동교회 집회에는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만국주일학교대회에 참석하고 귀국길에 올랐던 미국, 영국, 캐나다 선교지도자들도 김익두의 명성을 듣고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신유집회를 반대하였던 “밀스” 선교사는 회심하였으며 “로스” 선교사 등 해외교계 지도자들은 매우 감탄하였습니다. 1920년, 19세의 나이로 승동집회에 참석한 “김재준”은 훗날 목사와 대 신학자가 되었고, 1920년 5월27일, 마산 문창교회에서 개최된 부경사경회에 지수광, 배익자, 이약신과 함께 참석한 “주기철” 목사는 “성신을 받으라”는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놀라운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1922년 3월, 주기철 목사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고 훗날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1922년, 동아일보(5월9일자신문)는 초기에 김익두 목사의 치유를 사람을 미혹시키는 행위라고 비난하며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바라 보았습니다. 그러자 황해노회 “임택권” 목사는 노회 산하에 “이적증명회”를 조직하고 김익두가 이적을 행할 때 그 당사자들의 사진을 모두 찍어서 “이적증명서”라는 노회차원의 공식적인 책자를 발간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신유이적은 과학으로 증명할수 없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의심의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오랫동안 시달려왔던 질병이 있었고, 김익두 목사의 말씀과 기도와 환자의 회개로 온전히 치유되었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기적이 아닐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이러한 치유가 자신의 능력이나 힘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오직 성령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환자 자신의 회개와 믿음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언론의 대표지였던 기독신문 259호는 김익두 목사의 신유집회를 “세계3대 불가사의“라고 보고 하였고, 동아일보 58호와 매일신보 4645호에도 대서특필 되는 등 김익두 목사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북새통을 이루며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부산경남20개지역, 대구경북 25개지역, 전남광주외 21개지역, 전북전주외 15개지역, 충남보령외17개지역, 충북제천외 10개지역, 강원횡성외 22개지역, 경기수원외 20개지역, 황해재령외 24개지역, 평남평양외 17개지역, 평북연변외 22개지역, 함북나진외 16개지역, 함남원산외 22개지역, 제주도 전역 등 전국 258개지역에서 776회의 집회가 있었습니다. 28,000회의 설교와 1천5백만명이 참석하여 288만명이 결신하는 놀라운 일이 김익두의 집회에 있었습니다. 150개의 교회가 새롭게 설립되었고, 140개 교회는 넘쳐나는 성도들로 인하여 증축이 시급하였으며, 120여개의 유치원을 신설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가 치유한 완전 장애인이 1만여명에 달하였고, 김익두 목사를 통하여 주기철, 유원봉, 유해천, 유만식, 오윤호, 김정묵, 양석진, 김재준, 이성봉, 전재선 등 58명의 목사가 나왔습니다. 그가 인도한 집회에서 반지, 비녀 등 귀금속을 비롯하여 당시 헌금액수로 1억8천5백만원이 모금되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1938년 9월9일, 제27회 장로교 “홍택기” 총회장은 평양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습니다.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조선국민의 의무”라는 이유로 총회가 결의한 이 내용은 기독교 사상 가장 천박한 결정으로 알려져 있고 돌이킬 수 없는 수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평양 장대현교회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5차례의 구속과 7년간의 옥중 고난 가운데 1944년 4월21일, 순교자의 길을 갔습니다. 최봉석과 박관준 목사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중에서 끝내 순교하였습니다.
 
1938년 당시, 당시, 김익두 목사는 서울 승동교회의 담임목사로 8년간 시무중이었습니다. 종로경찰서는 한국의 대표적인 부흥강사인 김익두 목사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협박하며 회유를 동반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는 자신이 읽었던 성경에서 신사참배가 하나님 앞에서 위배되는 것이라는 확신을 하였고, 종로경찰서는 김익두 목사를 강제 연행하여 체포, 구금하였습니다. 회유책에 실패한 일본경찰은 몽둥이와 극심한 고문으로 1개월동안 압박하였고 결국 빈사상태가 된 김익두 목사가 반응이 없자 가족들에게 데려가라고 통보하였습니다. 종로경찰서는 종교적 아무런 권한이 없는 가운데 일방적으로 김익두 목사를 파면하고, 승동교회에서의 설교를 금하였으며, 경성에서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1938년 12월28일, 김익두 목사는 승동교회에서 파면당한채 황해도 은율군 장연면 직전리 피아골이라는 첩첩산중으로 정배(지정된 장소로의 유배)를 떠나야 했습니다. 오랜 고문으로 김익두 목사는 피폐해져 있었고 3개월이라는 회복기가 필요하였습니다. 1939년 3월, 김익두 목사는 사과나무 600주를 심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언덕바위에 자리를 정하고 매일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위해 기도를 하였습니다. 한때 하나님께서는 신유의 부흥강사로 김익두를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잠시라도 교만을 하였을까요?첩첩산중 사람 한명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그를 보내어 다시금 자신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그의 몸은 기도와 함께 조금씩 치유되었고 그의 영혼은 평강을 찾아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1941년, 일본경찰의 함구령에도 불구하고 김익두 목사는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일본경찰들이 강제로 신의주 신사당으로 끌고 갔는데 그중에는 교인 몇사람도 함께 연행되었습니다. 신의주 신사당앞에서 일본형사들은 김익두의 머리를 휘어잡고 강제로 고개를 숙이게 하며 “최경례”라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처절한 반항으로 끝내 고개를 숙이지 않으며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종로경찰서로 복귀한 일본경찰들은 김익두 목사가 신사에 참배를 하였다는 거짓 보고를 하였습니다. 일본경찰의 보고서를 들고 장로회 총회를 찾아간 종로경찰서장은 친일파 목사들을 불러 놓고 김익두 목사가 신의주 신사당에서 참배를 하였다고 거짓 증언하고 이러한 유언비어를 급속하게 유포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1945년 8월, 조국은 해방되었고 평양신학교 대강당에서 장로교 총회차원의 대각성회개와 부흥집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전직 총회장이며 부흥강사 자격으로 부흥집회의 개회설교를 맡았습니다. 이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광복으로 출옥한 “채정민” 목사가 강단으로 올라가 김익두 목사를 제지하며 신사참배를 한 자가 이곳에 서 있을 수 없다고 강변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채정민 목사의 고문과 고통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1개월간 모진 고문을 이겨야 했고, 지금은 억울한 누명까지 쓰고 있으니 모든 것이 참담한 심경이었을 것입니다. 조국광복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장로교는 친일행적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내가 잘하였고 나는 여기 서 있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모든 교회 지도자들이 회개해야 할 때라는 진실이 있음을 말했을 뿐이었습니다.
 
1945년 9월, 김익두 목사는 다시 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예전과 같은 신유의 은사나 능력같은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은 목사인 자신을 통하여 전파되어야 할 소중한 명령이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직전리 교회의 담임으로 새롭게 부임을 하였습니다. 그후 재령 해창교회로 이동하였고, 다시 신천서부교회로 이동하여 목회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일본제국이 아니라 공산주의였습니다. 민족의 해방이후 정치적으로 남북은 38도선을 경계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북한지역은 국민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무신론의 종주국인 소련이 진주하였고 군사정권이 수립되고 있었습니다. 만주지역 독립운동을 하던 김성주를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켜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에는 40만명의 기독교인이 있었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이들은 모두 경계대상이었습니다. 유물론과 무신론을 주장하는 김일성 정권은 기독교를 모두 궤멸시켜야만 했습니다. 감언이설과 공갈협박의 양날개로 기독교를 급박하였지만 신앙의 힘을 위협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김일성은 기독교는 기독교로서 대항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외조부이며 목사 출신인 “강량욱”을 내세워 “기독교도연맹”을 조직하였습니다. 이 조직에 곽희정, 신영철, 나시산, 이웅, 심익현, 김치근, 황기황 등이 가담하고 조직적인 기독교 탄압에 착수하였습니다.
 
당시 북한지역에는 장로교 산하 5도연합노회가 이미 조직되어 있었고 이들은 모두 정상적인 공교회들을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김진수 회장 목사를 비롯하여 김화식, 강문구, 이유택, 김길수, 허천기, 이기혁 목사위원 등 신앙에 헌신적인 분들이 생명을 각오하고 공산주의에 저항하였습니다. 1946년 11월3일, 주일 1차 대의원선거를 주일에 개최하였으나 기독교가 전면 반대하여 불참하고 선거 자체가 실패하자 공산주의자들은 5도연합노회 임원들을 모두 체포하고 구금하여 교회의 지도체계를 사실상 와해 시켰습니다. 이 기간을 틈타 기독교도연맹은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총회장에 김익두 목사를 추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는 이러한 조직 자체를 알지 못하였으며 총회장을 수락한 사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강량욱이 신천으로 김익두 목사를 찾아와 만난 사실이 있고, 강량욱으로부터 명의만 빌려 달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거절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평양에 돌아온 강량욱은 김익두 목사가 총회장직을 승낙하였다고 거짓 선전을 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강량욱과 기독교도연맹 임원들은 김익두 목사의 이름을 이용해 산하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기독교도연맹가입을 강요하였으며, 가입을 거부하는 목사와 교인들을 검거하거나 추방하는 등 불법을 자행하였습니다. 중요하고 정확한 내용을 모르는 목사와 교인들은 김익두 목사가 변절하였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를 맹 비난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장남 김용식은 서울에서 김익두 목사의 월남을 간청하였습니다.그러나 김익두 목사는 신천서부교회 500명 성도들의 생명과 신앙을 버려두고 갈 수 없음을 고백하며 76세의 노인이 이제 얼마나 더 살까 하면서 이들과 마지막까지 함께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49년 5월1일, 노동절은 북한에서 가장 성대하게 여기는 명절이었습니다. 
노동절 행사에 김일성 장군은 특별하게 김익두 목사를 초청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큰 성경을 가지고 입장하였고 그의 차례가 되었을 때, 김익두 목사는 “들으라, 부한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고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의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것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의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너희 밭을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하는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여호와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옳은 사람을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치 아니 하였느니라”(야고보서5:1~6) 
그러나 북한은 또다시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조작하고 김일성 장군을 찬양하였다고 거짓 선전을 하였습니다.
1949년 10월, 정치보위부에서 김익두 목사를 찾아와 다른 교회에서는 모두 스탈린 수상 사진과 김일성 장군의 사진을 게시하였으니 김익두 목사의 교회에도 게시를 강요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내 목을 칼로 자르라. 교회 강단에 예수님의 사진도 걸지 않는데 누구의 사진을 건다는 것인가?” 하며 강력하게 저항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돌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현장에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월남한 후 서울 천호동 광성교회 장로로 봉직한 한태선 집사의 증언으로 증명되었습니다.
 
1950년 10월, 6.25 전쟁 이후 UN의 참전으로 조기에 끝날 것 같았던 전쟁이 장기화하고 김익두 목사가 거주하는 신천지구까지 UN군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10월13일 국군이 입성할 것이라는 소문이 전달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김익두 목사는 감격한 나머지 10월 14일 새벽종을 울리며 새벽기도회 시간에 육군 입성을 광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20명의 사람들이 남아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을때였습니다.
당시 패퇴하던 북한군 병사가 김익두 목사의 광고를 들은 후 교회안으로 습격해 김익두 목사 등 6명이 사망하였고 나머지는 총경상을 입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10월19일, 육군이 평양을 탈환하고 11월 29일, 김익두 목사의 장례는 향년 76세로 마감하였습니다.
 
안악산 호랑이, 주먹깡패왕 김익두가 예수를 믿고 목회자가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였습니다. 
천성이 나쁜 사람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친구를 잘못 만나 한 번 삐둘어지기 시작한 인생으로 김익두는 젊은날을 술과 계집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장터에서 우연하게 만난 여선교사의 전도지 한 장은 김익두의 인생을 180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김익두는 성경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을 내려 놓았을때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기도를 멈추었을땐 전도의 사람이었습니다.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의 고질적인 질병을 치유하고, 2백만명이 넘는 불신자들이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되게 한 훌륭한 한국의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오해와 누명의 옷을 입어야 했고, 그것으로부터 평생토록 자유롭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다면 월남하여 남한땅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살수 있었지만 신천 서부교회의 500명 어린양들을 버릴 수 없어서 죽음을 선택한 참된 목자였으며 이로서 억울함과 누명을 증명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 그가 깡패로 살았던 시간은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반면 그가 목사로 살았던 시간은 50년에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김익두 하면 목사를 먼저 떠 올리는 것이 아니라 주먹왕을 먼저 생각합니다.
진실보다 거짓을 더 신뢰하고 변화의 삶보다 그 이전의 삶을 더 오래도록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김익두는 그렇게 변절자이고 주먹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익두 목사를 통하여 1920년대 한국은 부흥의 절정기를 맞이하였고 수많은 고통의 사람들을 온전케 하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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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사도행전 11:25-26) / 육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신령한 사람(고린도전서 2:14-3:1) / 사도 바울의 인간관

그리스도인 - 간절히 찾는 자가 되어야 하는 사람

간절히 찾는 사람에게는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 즉 보혜사 성령이 내주하신다.

잠언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I love those who love me, and those who seek me find me.

* 간절히 찾는 자(7836) 솨하르(shâchar)
구하다(잠 11:27, 사 26:9, 호 5:15), 찾다(욥 7:21, 시 78:34, 잠 7:15), 갈망하다(시 63:1), 근실히(잠 13:24).

שָׁחַר 스트롱번호 7836
1. 날이 새다.  2. 찾다. 3.피엘형 שִׁחַר
발음 [ shâchar ]
구약 성경 / 13회 사용

고린도후서 8:8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I am not commanding you, but I want to test the sincerity of your love by comparing it with the earnestness of others.

간절함(스푸데. spŏudē) σπουδή, ῆς, ἡ 스트롱번호 4710
1. 서두름. 2. 열심
발음 [ spŏudē ]
어원 / 4692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서두름, 급속, 속력, 신속, 막 6:25, 눅 1:39.
2. 열심, 전심, 부지런함, 열정, 롬 12:11, 고후 7:11, 8:7, 롬 12:8, 고후 7:12, 8:16, 히 6:11, 벧후 1:5.

연관 단어 관련 성경
서두름, 부지런함(벧후1:5), 열심(고후7:11). [부] 급히(막6:25), 빨리(눅1:39). [형] 부지런한(롬12:8,11), 간절한(고후7:12, 8:16, 유1:3).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


-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도로서의 권위가 있었고(10:8; 13:10) 따라서 그의 성도들에게 유익한 일이라면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결코 명령으로 고린도 교인들의 행위를 이끌지 않고 다만 방향만을 지시하며 권유하거나 호소할 뿐이었다.
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는
1. 마게도냐의 교회들 이행했던 행동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자발적인 사랑을 행하도록 촉진하고,
2. 또한 자원함으로 드려진 연보만이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 대한 내적 헌신이라는 동기에서 비롯되지 않은 구제헌금을 하였다면 그것은 바리새인의 외식 행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눅 21:1-4).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증명코자 함이로라

- 본절의 정확한 의미는, 마게도냐 교인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사랑에 견주어 고린도 교인들의 사랑이 과연 진실한것인가를 증명해 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게도냐 교인들의 헌신적 사랑은 다른 교인들의 신앙과 사랑의 표준이 되고 있다(Mar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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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사도행전 11:25-26) 


바나바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Χριστιανούς(크리스티아누스) /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1. 그리스도에게 배우는 사람
2.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
3.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안디옥교회는 두 가지 특징을 갖습니다.

첫째는 최초의 이방인 교회
둘째는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들은 교회


"그리스도인" 이라는 말이 신약 성경에서 세 번 사용되었습니다.

첫째는 사도행전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둘째는 사도행전 26:28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셋째는 베드로전서 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예화)
한국의 선교 역사에는 수많은 신앙의 거인들이 있었다.
한국 초기 선교사로서 연동교회의 담임목사였던 게일은 자신이 만난 가장 위대한 신앙인으로 연동교회 초대장로였던 고찬익을 소개합니다.

고찬익은 원래 원산에서 게일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아 신자가 되었다.
그때부터 원산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곤 하였다.
가난한 신자들의 방 자리 밑에서 알 수 없는 돈이 나오고, 혹은 뜰에서 쌀자루가 발견되었다.
또 원산 거리에서 거지가 매우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 모습도 종종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궁금했으나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고찬익이 게일을 따라서 서울로 가게 되었고 그후에는 이런 이상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그 사건들이 고찬익이 행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온 고찬익은 게일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서 연동교회에서 전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고찬익이 하루는 20세 전후의 청년을 만나서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나는 의식이 빈궁해서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고찬익은 “노동을 하면 먹을 것이 나오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청년은 양반 출신이어서 노동을 천하게 생각했다.
고찬익은 청년에게 “내일 아침 일찍 아침식사 전에 우리집으로 오라”고 말했다.

고찬익은 집에 가서 지게와 수건을 둘씩 준비하고 아내에게 밥을 한 그릇 더 지으라고 했다.
다음날 청년이 약속시간에 고찬익의 집에 왔다.
고찬익은 청년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지게를 하나씩 지고 인근 선교사댁 건축 공사장에 가서 함께 종일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일을 마치고 받은 노임을 그 청년에게 주었다.
고찬익은 청년에게 복음을 전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의 소중함까지 가르쳐주었다.

길선주 목사는 고찬익 장로를 “경성교회 기초사역에서 가장 유능한 전도자”라고 평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I am a Christian) 또는 나는 신자입니다(I am a believer)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다(This man is a Christian)"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내 주위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야! 라는 말을 들을만한 믿음생활을 하고 있었는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라는 뜻에서 찾아야 합니다.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제사장" "선지자" "왕"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제사장은 죄를 대신하여 자기의 생명을 내려놓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선지자는 혼돈된 세상에서 진리를 위하여 가야 할 길을 찾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은 적군을 대항하여 싸워서 이겨야 하는 사람입니다.
적군이란 마귀의 유혹을 물리쳐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만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만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파트리스교회 교인들이 비로서 뉴욕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왜냐하면 사람이란 "삶"의 주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예수를 믿는 내가 성경책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읽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비로서 복음이 전파될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7월 26일) 동서데이케어 사모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8월 2일부터 구은숙권사님께서 동서데이케어에서 네일 봉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사모님께서 재료비를 주시겠다고 하여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봉사는 권사님이 하실 것이며 재료비는 선교비에서 지출합니다.
재료를 구입한 금액이 $123이라고 합니다.
선교란 복음이 사람을 만나야 전달됩니다.
봉사자가 사람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 것입니다.
더구나 사모님의 경우 예전에는 교회에 출석하였으나 지금은 성당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에서 실망하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런 것이 복음이 아닐까요?
또 이런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닐까요?

자유대한민국에서 펼쳐지는 시대적 흐름을 지켜볼 때 꼭 기억해야 할 것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비핵화"
둘째는 "인권 회복"

북한을 돕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북한에 국수 공장을 짓고 국수를 생산할 때 국수는 생산 후 3-4일이 지나면 변질되기 때문에 즉각 분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생산하는대로 그 지역에 나눠줄 수 있습니다.
더구나 공장의 기계들을 모두 철거하면 교회당으로 사용하도록 계획하고 진행했습니다.
또한 비닐 하우스를 짓고 수경재배를 하는 기술자를 호주의 김은각집사님을 초청하여 사역을 맡겼는데 평신도이지만 모든 재료는 남한에서 가져와야 한다며 주장을 굽히지 않으므로 결국 남한에서 북으로 모든 자재를 실어 운반하는데 북한의 실무진들은 남한의 재료들 비늴, 철재 골조와 같은 것이 남한 상표가 표기되었기에 처음에는 완강하게 반대하였다고 합니다.

만일 곡식을 주면 곡식을 팔아서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돈이 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중국에 다시 팔아버리고 돈으로 환산할 뿐만 아니라 제공하는 것도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해결할 과제가 비핵화와 인권 회복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이러한 주장에 동의할 때 그만큼 물자를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교회에 대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불낙지교회에 대한 목표를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거나 만족을 얻지 못하여 교회를 옮기는 성장은 공동묘지에 무덤의 수가 늘어가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여 교회로 인도해야 합니다.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아 교회를 떠난 낙심한 영혼에게 주님의 치유가 임하여 교회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세상의 재미에 사로잡혀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지체하는 세상 풍조에 흔들리는 사람을 굳게 세워 교회를 찾도록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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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26 교회에 일년 간 모여 있어

바나바는 사울을 애써서 찾은 결과 그를 만나게 되었고 그를 안디옥으로 인도하였다. 그런 후 그들은 일년 간 교회에 함께 모여 있었다. 여기서 '간'으로 번역된 ‘흘론’은 ‘전체의', ‘온(whole)’이라는 뜻으로 그들이 일년 전부의 시간을 온전하게 함께하였음을 나타낸다. 이렇게 일정한 기간을 기록하는 것은 누가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행 18 :11; 19:8, 10 ; 24:27 ; 28:30). 안디옥 교회에서 그들은 함께 머무르면서 교회의 지도자로서 큰 무리를 가르쳤다. 

이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고 무리를 가르쳤던 것은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제 막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였기 때문에 기본적인 신앙 교육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년이라는 시간을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신앙 성숙을 위하여 전적으로 헌신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 부활, 승천, 보혜사 성령의 보내심, 현재의 일과 장래 일어날 일 등에 관한 여러 가지의 사실들과 그에 따른 의미들을 배웠을 것이다. 또한 이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방향을 설정하여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희생적인 봉사와 교육의 결과 안디옥 교회는 모범적인 교회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얻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에 부조를 보냈으며(29~30절) 후에 이방 선교의 전초 기지가 되었다. 실로 훌륭한 신앙의 지도자에 의한 지속적인 신앙 교육이 얼마나 위대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안디욱 교회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11: 26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이 안디옥에서 생겨났음을 보여 주며, 신약 성경에서 처음 등장함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 해당하는 ‘크리스티아누스’는 ‘크리스티아노스’의 복수형이다. ‘크리스티아노스’에서 접미사 ‘이아노스’는 ‘~에게 속한 자',  ~의 종’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쓰였으므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 ‘그리스도의 종들’ 즉 그리스도의 완전한 추종자들이란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렇게 일컬음을 받은 사람들은 바로 안디옥에 있던 제자들이다.

여기서 ‘제자들’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그들은 '형제들’(행 1:16 ; 9:30), ‘구원받는 사람들’(행 2:47), '주의 도를 쫓는 사람들’(행 9:2), '성도들’(행 9:13), '믿는 사람들’(행 10:45)이라고도 불리워지는 사람들로서 그리스도에게 모든 희망을 두고 그리스도만을 최종 목표로 하고 따르는 자들이다. 이들에게 드디어 그들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새로운 명칭이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안디옥의 이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첫째, 유대인들일 가능성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메시야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의미하며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분명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이 지어준 것은 아닐 것이다.

둘째, 제자들 스스로가 지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것도 가능성에 그칠 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들 사이에서 ‘제자들’ 혹은 ‘형제들’이라고 부르면서 서로가 그리스도인임을 확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안디옥의 불신자들일 가능성이다. 바로 이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고 늘 그에 대해서만 말을 하는 제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람들(the christ-people)이라는 뜻으로(F. F. Bruce), 그리고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을 유대인들과 구별하기 위해(Robertson)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붙였을 것이다. 이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그러나 그 이름으로 불리우게 된 제자들은 그 이름을 기분 나빠하거나 수치스럽게 여기거나 주변 유대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조롱과 야유의 의미로 불리워진 이 명칭이 후대에는 존귀한 이름으로 바뀌었다.

한편,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이는 안디옥의 이방인 신자들이 더 이상 어떤 유대교의 한 종파에 속한 사람들로 인식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유대교와 구별되는 완전히 새로운 신앙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 당시 로마 시저의 군인들을 시저인이라고 불렀고, 폼페이의 군인들을 폼페이인이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 그래서 안디옥에 었던 신자들도 그런 식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그리스도의 군인, 그리스도의 종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워져 그들의 특징을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제자들이 이러한 표현을 거절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정말로 그리스도의 군사로 전신갑주를 입었기 때문이다(엡 6:11-18). 신약에서 이 단어는 행 26:28과 벧전 4:16에 두 번 더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교회용어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헬라어로 '크리스티아노스' 곧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란 뜻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소유로서 그분을 믿고 구주로 고백한 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예수님의 제자', '기독교인', '성도', '하나님의 백성'을 말한다.

이처럼 거룩한 호칭인 '그리스도인'은 초대교회 당시 수리아 안디옥 교회 성도에게 처음 사용되었다(행11:26; 26:28). 즉,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1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을 때 주위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고 '그리스도인'이라 부른 것이다. 처음 그 호칭은 경멸의 뜻, 멸시의 뉘앙스로 사용되었다(행24:5).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전도할 때에 아그립바가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할 때도 분명 홀대의 호칭으로 사용하였다(행26:28).

그러나 이 호칭은 점차 영광스럽고 복된 이름으로 쓰이게 된다. 사도 베드로는 고난받는 성도를 향해 그리스도인으로 고난받는 것을 부끄러워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이라는 영광스런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 권면하면서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얼마나 영광스런 것인지를 강조한 바 있다(벧전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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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1:1-5   이 시대의 거울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에는 마지막 시대의 특징을 일곱 가지로 말씀합니다.
“어떻게”라는 부사를 관찰합니다.

1. 불평(1:2b),
2. 원망(1:6b),
3. 합리화(1:7),
4. 정당화(2:17),
5. 핑계(3:7),
6. 자기방어(3:8),
7. 자기 칭의(3:13)


    1.말라기서는 구약의 마지막 책이다.후에 신약에 등장하는 세레요한은 구약의 사람이다.사실 말라기에서 요한 까지는 약 400여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2.말라기 부터 요한의 때까지 400여년동안 성경이 기록되지 못한 것은 그 시대가 영적으로 어두웠기 때문이다.

  I.한 시대의 끝이 왔다.

   A.말라기 선지자에 대하여

    1.그는 파사나라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와 에언을 하였다.그의 전임 학개나 스가랴와는 약 100년의 기간이 경과한 후였다(주전432- 424사이).

    2.말라기의 활동은 구약의 시대를 마감하는 마무리 작업이었다.말라기는 변혁의 시대에 활동하던 에언자였다.

    3.어느 시대나 변혁기에 활동하는 지도자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옛 시대도 아니고 새 시대도 아닌 시기이면서 과거를 청산해야 하고 새 것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다.

   B.말라기의 멧세지.

    1.말라기선지자는 과거와 더불어 미래도 봐야만 했다.그래서 마태17:10절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는 말씀이 있다.여기서 엘리야란 말라기 3:1에"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에비할 것이요"의 '내 사자"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2.말라기 선지자는 엘리야의 심장을 가지고 오는 요한을 기다리면서 에언을 마쳤다.말라기는 과거만 본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입장을 보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그래서 우리가 이 시대를 보려면 말라기서를 보면될 것이다.

    3.말라기서에는 시대의 모습이 거울에 비춰지듯 나오는데 여기서 "어떻게"라는 말이 일곱번 나온다.

 II.마지막 시대의 일곱가지의 특징이 있다.

   1.쓴 원망(1:2하).
    1)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는 말은 감사의 말일까?원망의 말일까?이것은 원망의 소리였다.
    2)하나님의 사랑은 선택적 사랑이다.하나님이 에서와 야곱 중에서 하나를 선택 하시듯이 우리를 택하여 사랑하신다.

   2.큰 원망(1:6하).
    1)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 하였나이까?
    2)때로는 눈먼 짐승을 바  고,때로는 저는 것을 바쳤다.그럼에도 이들은 우리가 언제 그랬느냐는 것이다.
    3)말로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돼이 일컫는 행위다.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웠다고 모두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다.

   3.거짓을 합리화(1:7).
    1)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2)자신들이 더러운 것,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을 단에 드렸음에도 주를 향하여 대항하는 것은 주님을 멸시함이요,자기행위를 합리화하는 행위다.

   4.자기정당성 주장(2:17).
    1)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이까?
    2)말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괴롭히는 행위다.
    3)가정에서 부부가 서로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끝장이다.그래서 행복한 가정을 원하는 우리는 자기 정당성을 포기해야 한다.

   5.핑계(3:7)
    1)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2)돌아가는데는 복잡한 방법과 절차가 필요없다.
    3)이유를 대고 핑게를 대는 것은 싫다는 말이요,않겠다는 말이다.

   6.자기방어(3:8)
    1)이들은 십일조를 도적질하였다.그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라고 하는 것이다.
    2)도적질은 다른 것이 아니다.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못햇거나 않았으면 그것이 도적질이다.

   7.자기 칭의 주장(3:13)
    1)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2)여기서 무슨말로의 뜻은 "어떻게'라는 말이다.이는 매우 완악한 말이다.

    결  론
    1.말라기 시대의 특징과 말라기서의 특징을 살펴 보았다.지금의 상황과 어떤가?비슷한 것이 많이 있는 것 같다.
    2.이 말씀은 에수님 탄생 400년전의 것만이 아니다.바로 오늘의 문제요,바로 나 자신의 문제다.
    3.주의 말씀 앞에서 잃었던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스도인(I'm a believer)

16개월 만에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에는 마지막 시대의 특징을 일곱 가지로 말씀합니다. “어떻게”라는 부사를 관찰합니다.
  1. 불평(1:2b), 2. 원망(1:6b), 3. 합리화(1:7), 4. 정당화(2:17),
   5. 핑계(3:7), 6. 자기방어(3:8), 7. 자기 칭의(3:13)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에게 자주 나타나므로 “고통 하는 때”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딤후 3:1).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는 “영적 혼란(미혹, 거짓 선지자)” “자연적 징조(난리, 기근, 지진)” “도덕적 징조(불법)”가 나타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태 24:3∼14).
어려운 시기를 지내면서 마지막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 세상을 이기는 믿음(요일 5:1∼5)
둘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히 11:5∼6)
셋째, 영적 성장(고전 2:10∼16)
넷째, 상급을 받을 만한 충성된 삶(계 22:10∼12)
다섯째, 파수꾼의 사명(사 62:1∼7)
여섯째, 말씀으로 무장(벧후 1:19∼21)
어려운 고비를 잘 견디고 모두 건장한 모습으로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시다.
그리고 마지막 시대를 믿음으로 승리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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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신령한 사람(고린도전서 2:14-3:1)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14. The man without the Spirit does not accept the things that come from the Spirit of God, for they are foolishness to him, and he cannot understand them, because they are spiritually discerned.
2:15. The spiritual man makes judgments about all things, but he himself is not subject to any man's judgment:
2:16. For who has known the mind of the Lord that he may instruct him?" But we have the mind of Christ.
3:1. Brothers, I could not address you as spiritual but as worldly--mere infants in Christ.

사도 바울의 인간관 또는 세 종류의 그리스도인 

육에 속한 사람(The man without the Spirit) - 자연인. 성령이 없는 사람. 비그리스도인. 세속인.  거듭나지 못한 성도

육신에 속한 사람(as spiritual but as worldly) - 영적이지만 세상적인 사람 / 어린아이와 같은 신자
                            The man of worldly
거듭났지만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성도

신령한 사람(The spiritual man) - 영적인 사람
거듭난 후에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

육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신령한 사람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사람을 세 종류로 분류하였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신령한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 : 육에 속한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 

따라서 영적인 것은 알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육신에 속한 사람 :  육신에 속한 사람은 거듭나기는 했으나 영적으로 자라지 못하여 어린 아이들과 같은 사람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신령한 사람 : 거듭난 사람의 영이 자라났을 때 이를 신령한 사람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신령한 사람이라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 -> 육신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이 거듭나면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고 육신에 속한 사람은 거듭나서 성령으로 믿게 되어(고전 12:3하)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는 거듭남은 사람의 생각과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주셔 수동적으로 거듭나게 됩니다(엡 2:1) 그리고 육에 속한 사람이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순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심판도 없습니다. 즉 선과 악에 관계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택한 자만 거듭나게 하십니다.

육신에 속한사람 -> 신령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은 믿음의 행함으로 인해 신령한 사람으로, 점진적으로 자라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행함이 없으면 자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약 2:17)

영에 속한 사람(고린도전서 2:10-16)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하나님께 받은 것이 무엇인가요?
사도 바울 시대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성령’님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종종 우리는 전단에 나오는 표현을 봅니다.
“성령 충만 대 성회, 폭포수 같은 성령을 경험하세요. 이 집회에서 성령 충만을 경험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 충만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그곳에서 인도하는 누군가가 ‘성령’을 준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죠.

제가 너무 부정적인지 모르지만, 그 집회와 강사가 그래서 특별히 신령하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하기는 민망한 부분도 있는데, 마치 무당이 굿을 하며 선전하듯이, 점쟁이가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자랑하듯이, 무슨 부적을 써주는 스님이 영험하다든지. 제가 이렇게 표현한 것이 민망한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본문의 구절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10절)

‘영적인 일’이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혹은 학교에서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일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흐트러뜨리는 일들은 하나님의 것을 영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고 세상의 방법으로 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누군가 대신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 조금 쉽게 알고자 하는 얄팍한 욕망은 아닐까요?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놀라는 것이 있습니다.

2천 년 전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문제가 어떻게 우리와 이렇게 같은지, 종교개혁을 공부하며 그 시대의 개혁이 오늘의 개혁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과 1960년대 가장 강력하게 복음을 전했던 A. W. 토저의 책을 보면서 그 시대를 향한 예언자의 외침이 오늘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교회도 너무 빈약하고 참 초라했던 때, 영성가였던 이용도 목사님의 삶과 설교가 어떻게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그렇게 적절하게 교훈이 되는지 말입니다. 한국교회 초대사에 영성가로 알려진 이용도 목사님이 1930년에 썼던 일기의 내용입니다.

현대의 교인은 ‘괴이한 예수’를 요구하매
현대 목사는 괴이한 예수를 전하다.
참 예수가 오시면 꼭 피살될 수밖에 없다.
참 예수는 저희들이 죽여 버리고 말았구나.
그리고 죄의 요구대로 마귀를 예수와 같이
가장하여 가지고 선전하는구나.
화 있을진저 현대 교회여!
저희의 요구하는 예수는 육(肉)의 예수, 영(榮)의 예수,
부(富)의 예수, 고(高)의 예수였고
예수의 예수는 영(靈)의 예수, 천(賤)의 예수,
빈(貧)의 예수, 비(卑)의 예수였나이다.
예수를 요구하느냐? 하나님의 아들을 찾으라,
인(人)의 예수 - 너희가 만들어 세운 예수 말고!
예수를 갖다가 너희 마음에 맞게 할 것이 아니라
너를 갖다가 예수에게 맞게 할 것이니라.

이용도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만주 용정에 신학교 동기이자 형 같았던 이호빈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던 교회에 초청을 받아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답니다.
설교하기 전 준비 찬송을 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용도 목사님이 강단에 오르지 않는 겁니다.
그저 강단 중앙 의자에 쪼그려 앉아 기도만 합니다. 시간이 자꾸 지나 강사 목사님을 쳐다보았지만, 요지부동입니다.
그때 쪽지가 하나 올라왔습니다.
“형님, 오늘은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지 않네요.”
그래서 그날 저녁 그렇게 찬양만 하다가 사람들이 돌아갔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강력한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답니다.

주님이 주셔야 하는 것,
성령이 오셔야 하는 것,
이것이 복음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쉐인 클레어본이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라는 책에서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사람들이 우리를 착하다 칭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처럼 살려고 하면 십자가에 매달 것입니다.”
영적인 흉내를 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세요.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여기서 “통달하신다”라는 말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라는 말입니다. ‘통달’이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보니까 ‘어떤 것을 막힘이 없이 환히 다 알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 부분을 ‘search’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구석구석 다 검색해서 알아낸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 엠파스나 네이버와 같은 search engine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다와 같은 인터넷을 샅샅이 이 잡듯이 뒤져서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정보를 찾아주는 검색 사이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성령께서 ‘통달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라고 말씀합니다. 강력한 search engine을 가지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어떤 부분에 어떻게 관여하시는지를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영적인 사람이 되어 갑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에게 약속하신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본문 1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그럼 우리에게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죄인 하나까지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요? ‘거룩하심’입니다. 더러운 죄가 하나님 앞에서 대낮같이 드러납니다. 그 거룩하심 앞에서 우리의 존재가 순결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는 겸손함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교만하게 머리를 뻣뻣하게 들고 있다면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아니, 지식적으로는 알아도 영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을 영적으로 알게 된 후에 어떤 고백을 하나요? 빌립보서 3장 8절 말씀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아는 특권을 누리게 된 후에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위해 가장 귀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
이것이 영적인 일이 아닐까요?

[삶의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페리 노블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지옥에 간다고 말한다. 인생 최대의 문제점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잘못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상상 이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말 그대로 십자가를 건너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십자가 오른편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삶이 편해진다는 오해가 교회 안팎에 만연해 있다. 사람들은 크리스천이 완벽한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고 종일 찬양만 부르는 줄로 안다. 하지만 내가 20년 넘게 목회를 하면서 보니 십자가 저편만큼이나 이편에도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죄의 형벌에서는 완전한 구원을 받지만, 죄의 효과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구원을 받은 뒤에도 우리는 스스로 죄를 짓고 남들의 죄에 상처를 입으며 여전히 이 망가진 세상에서 살아간다.
그리스도를 만나 십자가 너머로 건너간 뒤에 우리가 할 일은 완벽한 이미지를 가꾸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더 절실히 깨닫고 날마다 그분과 더 깊은 사랑에 빠져야 한다.
예수님은 아무런 문제점이 없는 완벽한 사람들과 동행하시지 않았다. 그분이 완벽한 사람들을 부르시지 않았는데 왜 우리는 그분의 몸에 완벽한 사람들만 가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육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
이제 우리는 영적이라는 말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충만해져서, 하나님과 함께 인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성령께서 가능케 하시는 사역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안에는 ‘영적’인 것과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사이에 혼동이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조금 더 명백하게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을 대비하여 말하는 듯합니다. 오늘 본문 13~14절을 보세요.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육적인 사람을 희랍어에서는 ‘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라고 말하는데, 성경에서는 ‘영적인 사람’과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즉 감각적 성질, 자신의 욕구와 격정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앞부분과 연결해서 보면 성령님을 모르기 때문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즉 구원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가요? 하나님 없이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혜를 넘어선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만 분별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하시는 일들이 어리석게 보입니다. 육적인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욕심과 육혹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 어리석게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지난해 알래스카에 가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온 신혼부부가 당한 비참한 소식입니다. 앵커리지 인근 바다는 밀물과 썰물이 있습니다. 그런 바다의 갯벌에는 먹을 것이 많지요.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갯벌에 펼쳐진 커다란 조개를 마음껏 주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이겠습니까?
물이 들어오는 시간이 순식간이기 때문에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혼부부가 갯벌에서 조개를 잡다가 그만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매력적인 일이 눈에 보이면 지켜야 할 것들이 우습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말을 우리가 잘 듣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육적인 눈으로만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이 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14절)

언젠가 이 부분을 묵상하며 적었던 글이 있습니다. 좋은 예가 될 듯하네요.
고린도전서 2장 후반부에서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성경에서 이렇게 풀어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책을 읽거나 학교에 다녀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직접 배웠기 때문입니다. 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본질상 하나님의 영의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을 알 수 있는 통로는 영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은 막힘없이 서로 통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가졌습니다."

영적이다!
이 말은 때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다!’라는 말일 수도 있죠.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미국신학교 이사회에 참석했을 때 케노샤라는 지역에 사는 한인 가정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이민 와서 어느 정도 성공도 하고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입니다. 그래서 14년 전 한국에서 온 한 가정을 열심히 전도했답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 온 첫해 절에서 운영하는 수련회에 참석하고 온 아이들이 바로 교회 수련회를 가게 되었고 혼란스러웠죠. 계속해서 전도하는 이 가정 때문에 새로 이사 온 한국 분은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나는 교회는 안 다녀 혹시 아이 아빠가 목사가 되면 그 교회나 다닐까?"
그런데 어제 끝까지 신앙을 갖지 않은 그 사람이 식사를 도우려 함께 하게 되었고, 또 자연스럽게 전도하는 분위기가 되었죠.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도저히 목회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한 말이었는데, 그 집 아기 아빠가 지금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를 준비하고 있네요.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자매님! 당신 한 사람을 위해 저분이 목회를 하게 되었네요. 14년 전 한 그 말을 잘 지키세요."
참으로 신기하죠. 그때 상황을 모면하려고 한 말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구원하시려는 계획 말입니다. 그분이 왜 목회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하나님의 계획 속에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그런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이야기는 영으로 보이는 것과 이해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영의 눈을 들어보며, 나 하나를 위해 일하시는 세밀한 하나님의 손길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육적인 일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영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영분별은…
이제 중요한 문제가 남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 위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분별하느냐는 것이죠.
신앙생활의 영역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분별’입니다.
오늘 본문 15~16절을 보세요.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참 오해하기 쉬운 부분입니다. 대개 영적이라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2천 년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모든 이단이 주장하는 것이 “영적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이 판단할 근거가 없기에 맹목적으로 따라가기도 합니다.
지난해 또 한 번 세상을 현혹시킨 여자 선지자가 있습니다. “자칭 선지자”입니다. 아무리 봐도 무당 같은데 말입니다. 영적이라고 주장하고, 또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하니 사람들이 쉽게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아주 중요한 근거가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영적인 것의 기준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모호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아주 명백하게 하나님의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홍혜선 자칭 전도사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대한민국에 12월 14일 오전 4시 30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므로 피신하자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누군가의 집이 노아의 방주가 될 것이니, 그곳으로 피신하자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는데 자기 혼자 살기 위해 한국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것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조국과 가정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요? 그렇게 영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노아의 방주’란 단지 이생의 목숨을 건지는 것인가요?
참으로 신기한 말을 합니다. 땅굴을 부정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어떻게 땅굴의 존재로 인간의 구원이 좌우됩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념이 있고, 조국이 있지만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은 용서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야 합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인가요?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주님의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영이 아닌 것이 분명하지 않나요?
매번 이야기하지만,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돈을 요구한 적이 있으신가요? 삭개오의 집에 방문하셔서, 회당장의 딸을 고치시고, 돈을 요구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왜 이렇게 무지한가요? 영적인 것을 영적으로 분별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인격적이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의 말에 쉽게 놀아나는 것은 아닌가요?

바울은 로마서 8장 9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한, 로마서 8장 15절에서도 다시 말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이전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육에 속한 사람’이 감각적이고, 육신적이고, 욕망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대로 ‘신령한 자’는 영적인 사람인데, 성령을 받아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지배를 받을 수 있을까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더러운 곳에 거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거듭난 성도들을 향해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거룩한 성전임을 알지 못하느냐?”
구원받은 자의 진정한 고백이 있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성령님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하는 말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이십니다. 우리 속에 들어오실 수도 떠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에 대하여 인격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영적인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성령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주사 세상을 ‘판단하고 분별’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그렇게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들이 변하는 것을 봅니다.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사역자가 욕심이 생길 수 있는가?
어떻게 그렇게 자기중심적일 수 있는가?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영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면 성령이 떠나간 사람들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담대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분별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것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이것은 ‘비난’과 다른 것입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과 비난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단순한 비난은 상처로 사람을 아프게 하고 죽이게 하지만,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아픈 지적은 죽은 살을 제거하고 새살을 돋게 합니다. 그러므로 비난이 있는 곳에는 어둠과 죽음이 지배하지만, 성령님께서 임하시는 곳에는 새로운 생명을 향한 창조적 아픔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중요한 말씀이 있죠?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절)
이것은 교만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께만 판단을 받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세상의 정욕과 사탄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적어도 성도라면 이런 자신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도’가 무엇입니까? 목사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성도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성도와 목사에게 돈으로 사기를 당하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성적인 유혹에 넘어갑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육신의 소욕으로 접근하는 데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요한복음 14장 16~17절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입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현재 고린도 교회가 처한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분열’입니다. 이 문제의 근원이 무엇일까요? 신령한 판단이 아니라 사람의 판단 때문이라는 것이죠.
사람의 판단은 자기 기준에 의해 정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에 의해 자신을 드러내려는 이기심과 교만입니다. 육적인 판단은 남을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려고 합니다. 이것이 분열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영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성령이 가르치시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은 ‘신앙적 열심’을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나 교회에서 지난 일들을 생각하며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교인들과 장로님들을 설득해야겠다고, 가르쳐야겠다고, 변화시켜야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가르치고 변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생각의 깊숙한 곳에는 내가 ‘힘’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가장 편안했던 때가 언제인가를 생각해 보니, 제가 약하고 힘들 때였던 것 같습니다. 목사인 제가 누구를 이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저를 이해하고 도와주려고 할 때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 같지 않나요? 이 세상은 절대로 ‘힘’ ‘정의와 공평’의 논리로 하나 된 적이 없습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또 하나의 힘의 원리가 작용했을 뿐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신령한 자의 마음은 ‘하나 됨’에 있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신령한 것을 생각하며 신령한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라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성령님이 계신 사람이라야 신령한 사람이 되고, 신령한 생각을 합니다. 신령한 사람들이 모여야 분열이 치유됩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12절의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을 가진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은혜’를 압니다.
여러분은 경험하듯이 어린아이들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기가 막히게 압니다. 이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괜히 달라고도 안 하는데 미운 사람이 있고, 그냥 마구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인 것을 아시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을 받으면 마음이 압니다. 가슴으로 믿어지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용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열린 가슴은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열리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계실 때, 비로소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든 것이 은혜로 고백되기 시작할 때, 신령한 것이 여러분 속에 존재합니다.

여러분은 여름이 되면 가장 싫은 것이 무엇인가요? 더위죠?
더운 것이 은혜라는 것을 아시나요? 그 더위가 없으면 우리는 다 굶어 죽습니다. 더위가 있어야 가을의 감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위를 불평하지 않습니다. 불평하는 사람들은 늘 불평하고, 늘 사람들이 맘에 들지 않는데, 성령님이 마음속에 계신 사람은 늘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리는 그 많은 것이 여러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온 것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겸손이야말로 신령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보는 사람이야말로 신령한 것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어느 날 여러분의 삶에서 감사가 사라졌습니까?
모든 것이 허무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지십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바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주 근본적으로 성령을 받으면 우리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만족의 문제, 기쁨의 문제, 자기 존재의 문제, 자기실현의 문제 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서 아바 아버지로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아바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감사로 고백되기를 원합니다.

이 때 행함이란?

(1) 기도가 아닙니다. 물론 기도 생활은 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만 한다고 신령한 사람으로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2) 성경 말씀을 많이 아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많이 알고도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이 될 수도 있습니다.

(3)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닙니다. 불우 이웃을 도와주고 교회 행사에 열심히 봉사한다고 곧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4) 성령의 은사를 받고 그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신령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아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귀신을 쫒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면 신령한 사람인 줄로 오해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고전 1:7) 아홉 가지 은사를 다 받았습니다(고전 12:8-10) 그런데도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을 신령한 자가 아니고 육신에 속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육신에 속한 사람이 신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1)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2)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3) 그리고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이 때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일 15가지가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갈 5:19-21)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갈 5:24) 성령을 따라 행하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게 됩니다(갈 5:22-23)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은 이 성령의 열매에 비례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열매가 없으면 아무리 큰 업적을 남기고, 신비한 이적과 기사를 행할지라도 여전히 육신에 속한 사람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5-26)

신령한 사람 (고전 2:13~16)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약 일년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후,복음을 믿고 삶이 변화된 사람들에게 처음 붇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바로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부르는 호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영적인 삶이란 무엇인지,참된 영적인 삶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영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지적들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참된 영적인 삶을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현실에 확실하게 발을 딛고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참된 영적인 삶이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질적인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완전히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해드린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닮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영적인 삶란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닮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중심의 종교입니다. 내가 성화된다는 것도 그리스도 중심이요,영적이라고 하는 것도 그리스도 중심이며,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바로 그리스도 중심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참된 영적인 삶을 제대로 깨달은 분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모든 여건을 통해 모든 방법을 통해서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화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서는 이 순간에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성품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거룩됨 또는 성화라고 부릅니다.

사람의 모습
을 
육에 속한 자 곧 육적인 사람(고전 2:14) 프쉬키코스 데 안드로포스(ψυχικος δε ανθρωπος)
프쉬키코스(5591)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 '육에 속한 사람'의 헬라어 '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빛과 진리를 받지 못하여 구원얻지 못한 자연인의 상태'를 가리킨다.
이들은 복음에 대한 이해가 저급한 수준에 있어서 감각적이고 이기적인 정신을 가지고 단조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 용어가 신약성경과 교부 문헌에서는 성령과 초자연적인 세계와는 대조적인 자연 세계의 생명을 가리키는 말로 종종 사용되었다.
흠정역(KJV)에서는 이를 '자연인'(the natural man, KJV)으로 번역했는데, 자연인은 거듭나지 않은 생태적인 사람을 가리킨다.
그들은 성령의 일을 미련하게 보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1:23).
그들은 아무리 지혜롭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 지혜가 걸림돌이 된다.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 헬라어 본문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 '왜냐하면')가 있어서 본구절에 앞 구절의 이유가 됨을 나타낸다.
'미련하게'의 헬라어 '모리아'(*)는 고대 헬라에서 신체적으로 둔하거나 장애가 있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정신적인 우둔함을 의미한다.
거듭나지 않는 자연인은 모든 가치를 육체적 물질적 기준에서 평가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무익하고 무가치하다고 인식된다.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 '영적으로라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스'(*)는 '영'(*, 프뉴마)의 부사형으로서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분변함이니라'의 헬라어 '아나크리네타이'(*)는 13절의 '분별하느니라'의 헬라어 '슁크리논테스'(*)와는 달리 법정 용어로서 진술을 듣기 전에 심문받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가 원래 '검사한다', '시험한다'는 의미를 가졌으며 나중에는 '판단하다', '평가하다' 등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 바울은 육체에 속한 사람은 영적이 아님을 전제하고 성령의 일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이를 분별할 가치 기준도 가지지 못했다고 단언하고 있다.



육신에 속한 자(고전3:1) 사르키노이스(4560)

σάρκινος, η, ον 스트롱번호 4560

1. 살로 된.  2. 육신에 속한
발음 [ sarkinŏs ]
어원  /  4561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살로 된, 살의, 고후 3:3.
2. 육신에 속한, 롬 7:14, 고전 3:1, 히 7:16.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육(肉)의(고후 3:3).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 할 수 없어서

- '신령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이스'(πνευματικοις)는 2:14, 15과는 달리 본절에서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가리킨다.
2:14, 15에서는 이 단어가 구원받지 않은 사람과 대조되어 구원받은 사람을 의미하였지만, 본절에서는 영적으로 미숙한 상태에 있는 '어린아이'(네피오이스. νηπιοις)와 대조되고 있다.
즉 본절에서 '신령한 자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숙해 가는 자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상태가 여전히 성숙되지 못하고 정체(停滯)되어 육적인 편견과 기준을 가지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수준에 있다고 규정한다.



신령한 자 곧 영적인 사람(고전2:15)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ος)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ος) 4152


육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프쉬코스 데 안드로스) 새 생명을 얻지 못한 상태의 자연인(표준역)을 뜻하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 자연인(현대인의 성경)으로 영적이지 못한 사람(공동번역)으로 불신자에 해당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육적인 삶을 삽니다. 그러나 영적인 삶에 있어서는,영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육으로 한번 태어난 자연인은 영적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미련하게 보이며,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인에케는 영적인 진리들이 바보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사도 바울이 지적한 말씀이 있습니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예수님께서도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네가 한 번 더 태어나야 하겠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 말씀이 이해가 안되어서 어머니의 배속에 들어 갔다 나와야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한번 태어난 육신과 지성으로,한 차원 위인 영적인 것에 대해 이해를 하려니 안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예수님을 찾아다닌 무리들이 그 전날 예수님께서 수 많은 사람을 먹이셨던 것 때문에 다시 찾아온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썩지 않을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요6: 27).

예수님이 떡을 먹이신 것은 떡에 목적을 두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생명의 떡임을 알게 하려고 행하신 것입니다.
자연인은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복음에 대해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예수님께서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요3: 3).
따라서 안 믿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 욕하는 것에 대해 속상해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해가 안되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육적인 사람의 본성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심지어 선한 일을 해도 그 안에 이기적인 동기가 숨어 있습니다. 자아가 마음 보좌에 앉아 있고 예수님은 그의 삶 밖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영적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을 뿐더러,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고전2 : 14). 
이것은 자연인이 무식하다는 소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목사님이 기독교에 대한 강의를 하는데. 한사람이 자꾸 엉뚱한 질문을 해대고 반론을 하면서 강의를 방해하더랍니다. 그래서 참다 참다 “전공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핵공학이라고 하여서 “핵이 소금으로 만들어진 것을 아시요?”했더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린가 하고 의아해하더랍니다. 그래서 ’핵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내가 핵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 얼마나 웃깁니까?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대한 것은 내가 전공했으니 내가 좀 얘기하게 놔두시오”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무안해서 그냥 나가버리고 말더랍니다.
육적인 사람 영적인 생명이 그 안에 없어 진리에 대하여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

(고전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육신에 속한 자(사르키노이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하는 표현에서 보듯 성령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성숙하지 못한 신앙 때문에 성령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자연인의 본성에 더 지배 받아 육신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이들을 의미 한다고 봅니다.

σάρκινος, η, ον 스트롱번호4560

1. 살로 된.  2. 육신에 속한
발음 [ sarkinŏs ]
어원  /  4561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살로 된, 살의, 고후 3:3.
2.  육신에 속한, 롬 7:14, 고전 3:1, 히 7:16

관련 성경  /
육(肉)의(고후 3:3).

σαρκικός, ἡ, όν 스트롱번호4559
1.

육체에 관한

2.

지상적인

3.

육으로 된.

발음 [ sarkikŏs ]
어원
4561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육체에 관한, 육적인, 육신에 속한, 육신의 방식대로의, 육욕적인.
    • a.
      지상적인, 물질적인, 롬15:27, 고전9:11.
    • b.
      육으로 된.
    • c.
      육신에 속한, 고전3:3, 고후1:12, 10: 4, 히7:16.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육신의(고전3:3, 9:11), 사람의(고전3:4), 육체의(고후1:12, 벧전2:11).

예수는 믿는데 생각하고 사는 모습이 예수 안 믿는 것같은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표준역)으로 아직도 영적인 신앙인이 아니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에게처럼 말해봤자 못 알아들을 것이므로 그 수준에 맞게 말하겠다고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서신에서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의 본성은 자아가 마음 중심에 자리잡고 예수님은 한편구석에 위치하고 있는 세속적인 사람(현대인의 성경)입니다.

   거듭났다는 자체가 성화된 젓은 아닙니다. 이것이 가끔 혼동되는데,거듭났다는 것은 영적으로 태어났다는 것이지 영적으로 성숙한 것은 아닙니다. 마치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과 성인이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에 속한 자의 특징은  미성숙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 다루듯이 잘 보살피고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또한 영적인 진리를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잘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교인들에 대해 질투심이 많고 잘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남에 대해 못마땅한 것이 많습니다.

신령한 사람

(고전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신령한 자(프뉴마티코스) 성령께서 내주 하시는 영적인 사람(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 성령으로 거듭난 새 생명의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마음의 중심 보좌에 주님을 모시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떡하든지 나 자신이 점점 없어지고 그 대신 예수님이 성령님이 점점 내 삶을 점령하시게 됩니다.

πνευματικός, ἡ, όν 스트롱번호4152

1.

영에 관한

2.

영으로 말미암은

3.

㉠ 고전15:46

발음 [ pnĕumati-kŏs ]
어원
4151에서 유래

뜻풀이부

  • I.
    영에 관한, 영적.
    • 1.
      영으로 말미암은, 성령이 가득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령에 관한, 성령에 부합한.
      • a.
        [형용사] ㉠ [예수에 대하여] 고전15:46. ㉡ [비인격적 존재에 대해서] 롬7:14, 엡1:3, 골3:16.
      • b.
        [명사적으로] 롬15:27, 고전9:11. ㉠ 영적 선물, 은사, 고전12:1, 14:1, 고전15:46. ㉡ 성령을 가진 사람, 고전14:37. ㉢ 성령 충만한 사람, 고전3:1, 갈6:1.
    • 2.
      영에 속한, 악의 영적 세력, 엡6:12.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신령한(롬1:11, 벧전2:5), 영적인(고전2:13, 엡6:12).

   성령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 합니다.

그러나 내재하시되 얼마만큼 성령이 내 삶을 점령하셨는가는 또다른 이야기입니다.
만약 내 가슴 속에 질투,분노 욕심 등이 확 차 있다면 성령님이 눌려서 활동하시기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믿자마자 마음속의 욕심,악독,분노,질투 같은 것을 자꾸 내버러서 비워 드릴 때 성령께서 더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화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만 철저히 알아도 성령의 뜻을 대부분 알 수가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 외에는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신령한 사람 곧 영적인 사람은 진리릍 배우고 싶어할 뿐 아니라이해를 잘 합니다. 설교를 들은 후 그 설교가 귀에 쏙쏙 들어오며 참 좋은 것 배웠다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자가 특별히 설교를 잘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그 사람에게 들을 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 들은 것들이 금방 가슴으로 전해 집니다.

     신령한 사람 영적인 사람은 또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마음이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를 닮아갑니다. 그것은 지식이 늘어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를 닮는 것과 지식이 느는 것이 비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는다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마음을 갖는 것,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지식적으로 하나님 아는가 얼마나 봉사하고 있는가를 놓고 우리의 신령성을 가늠하시지 않습니다. 

평생 조용히 산골에 묻혀 살면서도 예수를 많이 닮아 신령성을 가진 사람이 기독교 역사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크게 이름 내며 일하지 않았어도 그저 자그마한 일이나마 예수님을 닮은 신앙으로 묵묵히 해내며 죽어간 사람들이 구석구석 많이 잇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모릍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기뻐하셨고 그들을 통해 영광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devotioo)하였나로 신령성의 척도틀 삼으십니다.
'헌신’(devotion)은 단순한 헌신이 아니라,헌신과 깊은 사랑이 합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나 자신을 바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자신을 바친다고 하는 것은 나의 재주와 찬송과 열정뿐 아니라 나의 고민과 슬픔도 바치는 것입니다. 찬송은 바치면서 고민은 내가 붇들고 있으면 온전한 헌신이 아닙니다. 제일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숨길 것 하나 없이 다 드리는 것,그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얼마나 친숙한가 하는 친숙도로 하나님은 신령성을 판단하십니다. 

   신령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숙합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만큼 친숙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신령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친숙하며,하나님의 말씀과 친숙하며,하나님께 기도하기에 친숙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친숙합니다. 하나님과 더 깊이 친숙할수록 아들이 아버지를 닮아가듯 하나님을 더 많이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는가 하는 것으로 신령성을 분별하십니다. 신령성은 주님을 얼마나 닮았는가 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사랑을 나누는 두 부부가 서로를 닮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친숙할수록 부부는 더 깊은 사랑과 교제률 나누게 되며 마침내 얼굴과 식성과 성격까지 닮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인격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나 하는 것으로 우리는 그가 신령성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신앙인인지 아닌지,또 어느 정도 영적인지 알아 보기릍 원한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내가 그 분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여기서‘안다’고 하는 것은 막연히 상대방의 배경이나 현실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친숙하게 상대방에 대해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스스로에게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새벽기도도 열심히히 다니고 성경공부를 열심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인 사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헛된 것입니다.
신령성은 얼마나 그분을 닮았는가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고 딸도 어머니를 닯습니다. 아버지만큼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머니만큼 자기 딸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알고 남편은 아내를 압니다. 부부 사이만큼 서로를 잘 알고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을 잘 알고 사랑한다면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을 닮아가게 됩니다.

   참된 영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예수님을 닮은 모습일 것입니다. 참된 영성이란 예수님을 닮아가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적인 사람 곧 신령한 사람은 성령에 감화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보이는 세계가 모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는 보이는 세계 저 너머에 보다 본질적이고 궁극적이며 영원한 세계가 있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관한 일보다는 저 세상에 관한 일에 삶의 비중을 두고 힘을 쓰고 노력을 합니다. 한마디로 그는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진 '육안'에 믿음의 눈인 '영안'을 하나 더 가진 사람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영적 분별력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 세상과 저 세상,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구분합니다. 그는 이 세상일을 멸시하거나 포기하지 않지만 거기에 얽매이거나 크게 영향 받지 않습니다. 세상일을 추구하거나 쾌락에 몰두하는 일이 하나님과 원수가 됨을 알기 때문에(약 4:4)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삽니다. 

반면 그는 하나님이 요구하고 성령이 불러일으키는 거룩한 소욕에는 적극적입니다. 그는 '영원'과 비교하여 이 세상에서의 삶이 지극히 짧다는 것을 앎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영원'을 위하여 과감하게 투자합니다. 그는 삶에 있어서 모든 일의 우선순위를 압니다. 그에게는 모든 일의 판단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므로 그의 판단은 정확하며 오류가 없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만족할 만큼 실수 없이 사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로부터 지탄받고 비난받을 만큼 실수투성이의 삶은 살지 않습니다(15절).

영에 속한 신령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대속 교리와 가르침의 진정성을 압니다. 그의 가르침에 동조하고 굴복하며 순복하며 그 뜻에 따릅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내주하시는 영이 계시므로(롬 8:9) 그 영의 활동에 의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알게 되며(11절) 그 뜻에 굴복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학 청년부가 잠자는 영성을 깨우라는 주제로 수련회를 갖습니다. 영성이란 말을 성경에 없습니다. 신령함이 영성입니다. 신령한 사람으로서 참된 영성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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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에 속한 사람 : 신령한 사람(고린도전서 2:6-16)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으로 알게 된다는 말씀대로라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지혜인 사람의 존재의 목적이자 삶의 의미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지혜를 안다는 것과 삶의 목적을 안다는 건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거듭났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이기고 성공하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을 신령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으로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바울 사도 역시 하나님의 지혜를 안다는 건 곧 신령한 사람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의 본성 안에 있으니 당연한 말씀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곧 신령한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신령한 사람은 신비롭고 초인적이며 남다른 초월적 도덕성과 종교성을 가진 사람이다. 심지어 자신이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이건 사실 상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이지만 신앙 가치관을 지배하고 있다. 바울 사도의 말씀에 따르면 성령을 인하여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신령한 사람이지만 거듭났다면서 신령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누가, 어떤 사람이 신령한 사람인지는 매우 중요하다. 신령한 사람이 아니라면 육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육에 속했다는 건 곧 사망이다. 따라서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신이 곧 신령한 사람이란 믿음이 자기 안에 부인할 수 없는 지경이 아니라면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이다.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신령(神靈)하다는 건 신의 영이 함께 혹은 지배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신령함의 성격은 곧 신의 성격이다. 어떤 신을 믿는지에 따라 신령함이 달라진다. 신비하고 기적적인 능력을 행사하는 신의 신령함은 기적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 신령함은 신비한 기적과 일을 행하는 사람이다.

신비한 능력을 행한다는 건 말 그대로 행위다. 신의 정체성, 곧 의로움의 기준이 행위에 있다는 의미다.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신은 어떤 행위는 기뻐하고 어떤 행위는 노여워한다. 성경에 나오는 바알과 아세라가 대표적이다. 문제는 오늘날 아니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믿어 온 하나님의 정체성도 이랬다. 자신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지만, 주일날 짜장면 먹으면 안 된다(벌을 받는다)는 사고가 어떤 하나님을 믿는지 설명한다.

그러나 더 큰 쟁점이 있는데 그건 의롭게 행하려는 목적이다. 어떤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노력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 나에게 가져올 이익 곧 육신의 복이다.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목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 육신의 이익을 얻으려 한다. 육에 속한 육의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령한 사람은 육신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신령한 사람에게 육신은 복을 받고 평안을 누려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성령으로 잉태된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도구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가 된 육신은 말씀을 표현하는 형상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 창조된 사람 본연으로 살아간다. 이게 신령한 사람이다.

바울 사도가 말씀한 신령한 사람은 이처럼 성령으로 잉태되고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이 육신과 함께 한 존재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다. 흔히 말하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본질이 이것이다. 자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이렇게 살 수밖에 없어야 한다. 이게 성경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신령함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적적인 능력으로 생각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신령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건 어리석다. 생명은 날 때 온전한데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서 노력한다는 건 완전한 모순이다.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육신의 일을 구하는 것 역시 신령함이 아니라 육신의 일이다. 이런 육신의 일은 또한 세상의 가치 기준에서 비롯된다. 바울 사도가 세상 지식에 의지하는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는 이유다.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로마서 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 세상에는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구약성경은 이 땅에 사는 사람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선택한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로 나누는데, 성경은 그들을 이방인이라 부릅니다.

신약성경도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누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그리스도인과,

예수를 믿지 않는 비그리스도인으로 나눕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시어 예수를 주로 믿는 사람들을 모우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셨는데,

그 교회 안에도 두 부류의 사람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한 부류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그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과, 다른 한 부류는 자신의 영광과 축복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과 땅의 영광을 구하며 사람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사는 사람과 자신이 행한 선과 의를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영의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으로 나누어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3:11~14)

오늘의 많은 교인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말하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는 자신의 유익과 복을 구하며 자신의 영광과 자신의 이름을 위해 힘쓰며 사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늘 자신의 행복과 기쁨을 먼저 구하며 자기만족과 자신의 축복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며, 어떤 문제에 부딪치면 자기를 변명하고 합리화하며 자신은 잘못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지 못하기에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큰 기쁨과 하늘의 위로를 얻지 못하며 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될 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귀면, 그 사람과 자주 만나게 되고, 오랜 만남과 사귐을 통해서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고,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앎으로 서로를 신뢰하며 사랑하게 되고, 이제 서로 소중한 친구가 되어 기쁨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귀한 관계가 되지요.

이렇게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의 사귐은 너무 귀하고 중요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사귀고 느끼며 하나님을 알고, 이제 그분을 깊이 알아 감으로 내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며 의지하고 살아가는 실제적인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 사귐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알게 되고,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의 기쁨과 하늘로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복을 위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더 많은 축복을 받기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거나, 교회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복과 기쁨을 구하는 것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며, 자기를 예배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라고 말씀하신 이유인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의 임재하심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고 불행한 일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사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은 없습니다.

로렌스 형제는 그의 책 “하나님의 임재 연습”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는 것은 시종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어떤 비결이나 신비로운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잠자리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자신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한순간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주님의 숨결을 느끼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자신을 부인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갈망하십시오.

그리고 매 순간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사십시오.

일을 하면서도, 길을 가면서도, 누군가를 만나면서도, 매 순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과 사귀며 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며 하늘의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영에 속한 사람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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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21
여호와 하나님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본질(本質)


잠(3462)  יָשֵׁן 

1. 미완료형 יָשֵׁן       
2. 잠에 곯아 떨어지다, 3. 시편 44:24

발음 /  야센(yâshên) 
관련 성경 / 오래 살다(신 4:25), 오래다(레 13:11), 잠자다(시 13:3), 자다(왕상 19:5, 사 5:27), 잠들다(렘 51:39, 창 2:21), 주무시다(시44:23, 121:4).
구약 성경 / 25회 사용

깊은 잠(8639) תַּרְדֵּמָה 

1. 깊은 잠,  2. 창세기 2:21,  3. 창세기 15:12

발음  / 타르데마(tardêmâh) 
어원 / 729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깊은 잠(창 15:12, 욥 4:13).
구약 성경 / 7회 사용

아담을 만드신 후 잠을 재우셨다는 것은 아담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빗대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셨다.
십자가의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를 흘리신 사건으로 신랑이 되신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교회를 세우신 것을 예표한다.

본질(本質)

라틴어 / 나투라(natura), 영어 / 에쎈스(essence)

한글사전 / 1.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                 
                 2. 사물이나 현상을 성립시키는 근본적인 성질.               
                 3. 철학 실존(實存)에 상대되는 말로, 어떤 존재에 관해 ‘그 무엇’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성질.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 "십자가"

1. 자연인(自然人) / (Ψυχικὸς δὲ ἄνθρωπος)
-
φυσικό πρόσωπο

2. 성령인(聖靈人) /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ὸς)
-
Άγιο πνεύμα

3. 세속인(世俗人) / 사르키노이스(σαρκίνοις)
-
κοσμικός

자연인(自然人)

육에 속한 사람(고린도전서 2:14)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현대인의 성경 /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것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성령인(聖靈人)

신령한 사람(고린도전서 2:15)
-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현대인의 성경 / 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제대로 평가하지만 세상 사람은 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합니다.

세속인(世俗人)


육신에 속한 사람(고린도전서 3:1-3)
-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현대인의 성경 /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적인 사람을 대하듯이 말할 수가 없어서 세속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를 대하듯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젖을 먹이고 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그것을 소화시킬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시기와 다툼이 있는데 어찌 육적인 세상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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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에 있는 자냐 영에 있는 자냐(롬 8:8-9)'의 기준은, 거듭났느냐 아니냐로 결정됩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한 육으로 난 것과 영으로 난 것의 기준(요 3:6)이나 천국 입성의 자격도, 성령으로 거듭났느냐 여부에 있습니다(요 3:5).

바울 사도가 에서(Esau)를 '육체를 따라 난 자'로, 야곱(Jacob)을 '성령을 따라 난 자'로 구분한 기준도 거듭남 이었습니다(갈 4:29).

영역본 성경은 거듭나지 못한 '육신에 속한 자'를 자연인(natulal man)이라 번역했고(고전 15:46),
윌리엄 쉐드(William G. T. Shedd, 1820-1894) 역시 그의 명저 "Sernons to the Natulal man"에서, 육신에 속한 자를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the natulal man)으로 풀이했습니다.

식품은 자연산 그대로가 좋지만, 사람은 아담으로부터 난 자연산 그대로는 부패하고 더럽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부정한 짐승의 상징으로 언급한 돼지는(마 7:6), 거듭나지 못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유대인처럼 율법에 완벽한 이들이 없다고 공인되던 시대에, 그들이 부정함의 상징이 된 것은 파격입니다.
이는 부정하고 정결함의 기준이 인간 윤리가 아닌 거듭남의 여부에 달려있음을 말해주며, 기독교 윤리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새 기준의 출현이었습니다.

성경이 육신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한 것도(롬 8:8),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행위 이전에 존재 자체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라는(롬 9:11) 원천적 이유 외에, 성령을 따라 났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이는 기독교 인간론이 행위론적(behavioral) 이전에 존재론적(ontological)이며 관계론적(relational)이라는 확증이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물이고 하나님 의존적인 존재라는 사실과 직결됩니다.

인간은 고결한 덕행자냐 아니냐를 불문하고, 존재론적(ontological)으로 다시 나지 않는 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썩은 오물은 그 악취와 추한 몰골만으로도 능히 사람을 불쾌하게 하듯,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더 핑크(A. W. Pink, 1886-1952)가 "인간의 행위적인 죄는 부패한 인간 존재에서 나온 열매일 뿐,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근본 요인은 타락한 인간 존재 자체"라고 한 것은 올바른 지적입니다.

"인간은 교양이 있고 교육받고 세련되었고 종교적이기 조차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심히 부패'하였다(렘 17:9).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지는 것은 하나도 없기에...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다 타락한 자들이고 인간의 존재의 모든 부분은 죄로 인해 오염돼 있다. ... 그의 성향은 변질되어 버려서 그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사랑하시는 것을 미워한다.

그것은 몇 개의 잎사귀가 시들어버린 것이 아니라 나무 전체의 뿌리와 가지까지 썩어버린 것을 의미한다. ... 인간 안에는 그 존재의 근원과 기질 안에 본래부터 부패되고 원래 악마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그 열매에 지나지 않는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미워하심을 받을 뿐더러, 그 자신도 하나님을 본능적으로 싫어합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롬 3:10)"는 말씀은 다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소극적인 무관심(무지)을 넘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롬 1:28)' 의도적 반감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40)'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표하지 않는 단순 무관심자는 기독교의 적대자가 아니라는 낙관론을 폅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마 12:30)"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사실 그들의 무관심은 포장된 적대감의 표출입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우리 의식 세계는 자신이 싫어하는 것에 대해선 의도적으로 눈을 감는 속성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께 대해 무관심(무지)으로 일관 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이사야 선지자의 책망대로 미물 짐승보다 못합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사 1:3)."

성경이 하나님 무지(무관심)에 대한 인간의 변명이 심판 때에 그를 변호해주지 못할 것이라고 한 것은(롬 1:20), 그들의 숨겨진 적개심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직설 화법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을 심판받을 죄로 선언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 1:8)." 그들의 하나님 무지가 비의도적이고 소극적인 것이 아닌, 부러 잊으려는(willingly are ignorant, 벧후 3:5) 의도적인 것임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진주와 돼지 비유에서 사람이 진주를 던지면 돼지가 그것을 발로 밟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던져준 사람에게 덤비기까지 하는 것은(마 7:6),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무관심 뒤에 적개심이 도사리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 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드러내는 사람들의 냉소와 무반응은,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숨겨진 적개심의 표출입니다. 복음 전도자나 설교자들이 전도를 녹록한 태도로 접근할 수 없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반감으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이 하나님을 미워한 데서 연유됐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42)."

그는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이유 역시, 그들이 자신에게 속한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

동생 아벨을 형 가인이 돌로 쳐 죽인 것은, 가인을 미워해서라기보다는 아벨이 믿는 하나님을 미워한 때문입니다. 동생의 제사는 받고 자신의 제사는 안 받는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이, 동생을 향한 질투심으로 나타났습니다(창 4:3-8). 그리스도를 전하는 스데반에게, 유대인들이 귀를 막고 달려들어 돌로 쳐 죽인 것은 스데반이 전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적개심 때문이었습니다(행 7:57).

그리고 성경이 육신에 속한 자를 '육신을 좇는 자(롬 8:5)'로 지칭하는 것은, 그가 유별나게 저급한 육욕을 좇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타고난 본성에 충실한 거듭나지 못한 모든 자연인을 뜻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신령한 것에 대한 감각과 갈망이 없기에 본성적인 것만을 쫓기 마련입니다.

마치 사자가 풀을, 돼지가 진주를, 까마귀가 깨끗한 고기를 좋아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창 8:7-9). 망령된 에서가 장자의 기업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는 것은(창 25:33-34), 영적인 것의 가치를 모르고, 땅의 것만 탐하는 거듭나지 못한 자의 속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어서 거듭나지 못한 자의 '육신의 생각'과 그것이 갖다 주는 '사망'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성경이 육신의 생각이 사망이라고 한 것은(롬 8:6),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의 생각의 허망함(엡 4:17)과 거기에 따르는 심판을 말한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의(엡 2:1) 모든 생각은 죽음같이 허망하고, 그 허망한 생각이 그를 사망에 빠뜨립니다.

성경이 죄 된 행실을 죽은 행실과 동일시하고 있음도(히 6:1; 9:14) 같은 맥락이며, 그 생각의 내용은 선악을 불문합니다. 악하고 더러운 생각뿐만 아니라, 불쌍한 자들을 향한 선한 연민의 마음도 사망의 범주를 벗어나게 못합니다.

이는 그 선한 마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동기의 발로가 아닌, 자연인의 본성과 자기 의(義)의 발로에서이고, 선행의 원천적인 힘도 육신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선악을 불문하고 본능으로 행하는 모든 것을 멸망 받을 짓거리로 폄하합니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유 1:10)."

계신대학원대학교 설립자 이병규 박사가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을 해석하여-유별나게 짐승 같은 추잡한 속성을 쫓는 것이 아닌-짐승과 같이 오관(五官)으로 느껴지는 본능 따라 행하는 자기 자랑, 자기중심, 자기만족을 위해 하는 것이라 하고, '이성'을, 중생한 영혼이 사용하는 선한 기관으로 풀이한 것은 적절합니다.

죄인은 악을 행하면서도 죄를 쌓을 뿐더러 선을 행하면서도 죄를 쌓습니다. 이는  그의 선행 동기가 자기 본성과 의의 구현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고 한 것도 같은 관점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참된 행위를, '성령으로 행하며 예수를 높이고 육체의 힘으로 하지 아니하는 것'이라 규정했습니다(빌 3:3). 이 기준에 맞출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거듭난 사람뿐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이, 다만 거듭나지 못한 자에게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거듭난 사람임에도 그 안에 남아있는 옛사람이 내는 생각도 육신의 생각입니다. 베드로가 분노하며 말고의 귀를 자른 것(마 26:51), 외식(갈 2:13-14), 십자가를 지실 예수님의 대업 앞에서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한 것(마 16:22-23) 역시 다 육신의 생각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어 갈라선 것(행 15:39),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작정한 연보를 떼어먹은 것(행 5:1-10),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파당을 짓고 경쟁심과 교만에 빠진 것(고전 1:11-13)도 다 육신의 생각입니다.

그런 육신의 생각들로 인해 사망의 악취를 풍겨내며 타인을 실족케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거듭나지 못한 자들의 육신의 생각처럼 사망의 판결을 받게 하지는 않습니다. 거듭난 자들에게는 성화의 판결은 있겠지만 더 이상 칭의의 심판은 없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갖는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 된다는 것도(롬 8:7) 말하고자 합니다. 죄로 죽은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고후 10:5). 성경이 사람의 계획하는 바가 어릴 때부터 악하고(창 8:21),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하다(창 6:5)는 말은, 단지 인간은 어려서부터 도덕적으로 부패하다는 뜻이 아니라, 아담의 원죄를 유전 받은 인간은 날 때부터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존재로 난다는 뜻입니다.

존 번연(John Bunyun, 1628-1688)도 같은 견해를 피력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원수가 되나니(롬 8:7; 골 1:21)'는, '본래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원수이고 그의 마음에서 원수 된 자'라는 뜻이다."

나아가 거듭나지 못한 자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롬 8:7)'에 굴복할 수 도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법은 단순히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구원 얻는 '믿음의 법(롬 3:27)'이 그 핵심이며, 오직 성령으로만 받아들여집니다(고전 12:3). 거듭나지 못한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고전 2:9). 동물이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없듯, 성령 없는 자연인에게는 믿음의 법이 어처구니없게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오직 예수가 위하여 죽은 구원 예정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 예수 믿고 구원 얻는 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반면 영의 사람이 갖는 '영의 생각(롬 8:6)'도 있습니다. 이는 타계주의자들의 세속사를 초탈한 생각, 혹은 신비주의자들의 소위 탈혼(입신) 상태에서 나오는 계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는 자연인의 본성에는 없는, 성령의 거듭남으로 우리 안에 부어진 하나님을 향한 생각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가 정의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영적인 사람들이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것을 영혼이 의식하게 되는 것은 결과적으로 마음에 전적으로 새로운 지각이나 감각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 참된 성도는 새로운 영적 지각과 감각의 원리가 생긴다, 그리고 참된 성도는 이 새로운 감각으로 영적이고 신령한 것들을 알게 된다."

존 오웬(John Owen, 1616-1683) 의 견해 역시 같은 취지로 보입니다. "영의 생각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마음 자세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마음 상태이다."

'영과 영의 생각'에 대한 그의 견해도 탁월합니다. "성경에서 영은 '성령(롬8:9)'이나 '성령에 의해 신자 속에 생성되는 새로운 영적 생명(요 3:6)'을 뜻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영의 생각이란 '신자 속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영적 생명의 활동'을 뜻한다. 이 새로운 영적 생명은 신자가 영적인 생각을 하게하며 기뻐하게 한다. 회심하기 전에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불신자는 땅의 일들을 좋아하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일들을 우선시한다."

이렇게 성령으로 거듭나고 하나님과 화목한 영의 사람의 생각에는 생명과 평안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는 마인드 콘트롤(Mind-Control)이나 종교 수양으로 만들어진 심리학적인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화평과 초자연적인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이루어진 하나님나라의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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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사람 (고린도전서 2:13~16)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았느냐? 라는 질문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느냐?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했느냐? 하는 기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약 일년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후 복음을 믿고 삶이 변화된 사람들에게 처음 붇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바로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부르는 호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영적인 삶이란 무엇인지 참된 영적인 삶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영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참된 영적인 삶을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현실에 확실하게 발을 딛고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예)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참된 영적인 삶이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질적인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완전히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해드린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닮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영적인 삶란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닮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중심의 종교입니다.
내가 성화된다는 것도 그리스도 중심이요 영적이라고 하는 것도 그리스도 중심이며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바로 그리스도 중심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참된 영적인 삶을 제대로 깨달은 분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모든 여건을 통해 모든 방법을 통해서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화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서는 이 순간에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성품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거룩됨 또는 성화라고 부릅니다.
  
사람의 모습을 육에 속한 자 곧 육적인 사람(고전 2:14) 육신에 속한 자(고전 3:1) 그리고 신령한 자 곧 영적인 사람(고전 2:15)으로 말씀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자연인) 고린도전서 2:14 / 불신자

육에 속한 사람(프쉬코스 데 안드로스)
새 생명을 얻지 못한 상태의 자연인(표준역)을 뜻하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 자연인(현대인의 성경)으로 영적이지 못한 사람(공동번역)으로 불신자에 해당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육적인 삶을 삽니다.
그러나 영적인 삶에 있어서는 영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육으로 한번 태어난 자연인은 영적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미련하게 보이며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인에케는 영적인 진리들이 바보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사도 바울이 지적한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14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예수님께서도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네가 한 번 더 태어나야 하겠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 말씀이 이해가 안되어서 어머니의 배속에 들어 갔다 나와야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한번 태어난 육신과 지성으로 한 차원 위인 영적인 것에 대해 이해를 하려니 안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예수님을 찾아다닌 무리들이 그 전날 예수님께서 수 많은 사람을 먹이셨던 것 때문에 다시 찾아온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썩지 않을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요 6: 27).

예수님이 떡을 먹이신 것은 떡에 목적을 두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생명의 떡임을 알게 하려고 행하신 것입니다.
자연인은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복음에 대해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예수님께서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요 3:3).

따라서 안 믿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 욕하는 것에 대해 속상해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해가 안되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육적인 사람의 본성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심지어 선한 일을 해도 그 안에 이기적인 동기가 숨어 있습니다.
자아가 마음 보좌에 앉아 있고 예수님은 그의 삶 밖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영적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을 뿐더러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고전 2:14). 
이것은 자연인이 무식하다는 소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목사님이 기독교에 대한 강의를 하는데. 한사람이 자꾸 엉뚱한 질문을 해대고 반론을 하면서 강의를 방해하더랍니다.
그래서 참다 참다 “전공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핵공학이라고 하여서 “핵이 소금으로 만들어진 것을 아시요?” 했더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린가 하고 의아해하더랍니다.
그래서 ’핵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내가 핵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 얼마나 웃깁니까?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대한 것은 내가 전공했으니 내가 좀 얘기하게 놔두시오”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무안해서 그냥 나가버리고 말더랍니다.

육적인 사람 영적인 생명이 그 안에 없어 진리에 대하여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세속인)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육신에 속한 자(사르키노이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하는 표현에서 보듯 성령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성숙하지 못한 신앙 때문에 성령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자연인의 본성에 더 지배 받아 육신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이들을 의미 한다고 봅니다.

예수는 믿는데 생각하고 사는 모습이 예수 안 믿는 것같은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표준역)으로 아직도 영적인 신앙인이 아니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에게처럼 말해봤자 못 알아들을 것이므로 그 수준에 맞게 말하겠다고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서신에서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의 본성은 자아가 마음 중심에 자리잡고 예수님은 한편구석에 위치하고 있는 세속적인 사람(현대인의 성경)입니다.
  
거듭났다는 자체가 성화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가끔 혼동되는데 거듭났다는 것은 영적으로 태어났다는 것이지 영적으로 성숙한 것은 아닙니다.
마치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과 성인이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에 속한 자의 특징은  미성숙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 다루듯이 잘 보살피고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또한 영적인 진리를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잘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교인들에 대해 질투심이 많고 잘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남에 대해 못마땅한 것이 많습니다.


신령한 사람(성령인) 고린도전서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신령한 자(프뉴마티코스) 성령께서 내주 하시는 영적인 사람(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 성령으로 거듭난 새 생명의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마음의 중심 보좌에 주님을 모시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떡하든지 나 자신이 점점 없어지고 그 대신 예수님이 성령님이 점점 내 삶을 점령하시게 됩니다.
  
성령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 합니다.

그러나 내재하시되 얼마만큼 성령이 내 삶을 점령하셨는가는 또다른 이야기입니다.
만약 내 가슴 속에 질투,분노 욕심 등이 확 차 있다면 성령님이 눌려서 활동하시기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믿자마자 마음속의 욕심,악독,분노,질투 같은 것을 자꾸 내버러서 비워 드릴 때 성령께서 더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화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만 철저히 알아도 성령의 뜻을 대부분 알 수가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 외에는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신령한 사람 곧 영적인 사람은 진리릍 배우고 싶어할 뿐 아니라이해를 잘 합니다.
설교를 들은 후 그 설교가 귀에 쏙쏙 들어오며 참 좋은 것 배웠다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자가 특별히 설교를 잘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그 사람에게 들을 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 들은 것들이 금방 가슴으로 전해 집니다.
    
신령한 사람 영적인 사람은 또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마음이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를 닮아갑니다.
그것은 지식이 늘어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를 닮는 것과 지식이 느는 것이 비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는다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마음을 갖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지식적으로 하나님 아는가 얼마나 봉사하고 있는가를 놓고 우리의 신령성을 가늠하시지 않습니다. 

평생 조용히 산골에 묻혀 살면서도 예수를 많이 닮아 신령성을 가진 사람이 기독교 역사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크게 이름 내며 일하지 않았어도 그저 자그마한 일이나마 예수님을 닮은 신앙으로 묵묵히 해내며 죽어간 사람들이 구석구석 많이 잇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모릍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기뻐하셨고 그들을 통해 영광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devotioo)하였나로 신령성의 척도틀 삼으십니다.
'헌신’(devotion)은 단순한 헌신이 아니라 헌신과 깊은 사랑이 합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나 자신을 바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자신을 바친다고 하는 것은 나의 재주와 찬송과 열정뿐 아니라 나의 고민과 슬픔도 바치는 것입니다.
찬송은 바치면서 고민은 내가 붇들고 있으면 온전한 헌신이 아닙니다.
제일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숨길 것 하나 없이 다 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얼마나 친숙한가 하는 친숙도로 하나님은 신령성을 판단하십니다. 
  
신령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숙합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만큼 친숙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신령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친숙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친숙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기에 친숙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친숙합니다.
하나님과 더 깊이 친숙할수록 아들이 아버지를 닮아가듯 하나님을 더 많이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는가 하는 것으로 신령성을 분별하십니다.
신령성은 주님을 얼마나 닮았는가 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사랑을 나누는 두 부부가 서로를 닮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친숙할수록 부부는 더 깊은 사랑과 교제률 나누게 되며 마침내 얼굴과 식성과 성격까지 닮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인격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나 하는 것으로 우리는 그가 신령성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신앙인인지 아닌지 또 어느 정도 영적인지 알아 보기릍 원한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내가 그 분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여기서 ‘안다’고 하는 것은 막연히 상대방의 배경이나 현실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친숙하게 상대방에 대해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스스로에게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새벽기도도 열심히히 다니고 성경공부를 열심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인 사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헛된 것입니다.

신령성은 얼마나 그분을 닮았는가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고 딸도 어머니를 닯습니다.
아버지만큼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머니만큼 자기 딸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알고 남편은 아내를 압니다. 부부 사이만큼 서로를 잘 알고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을 잘 알고 사랑한다면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을 닮아가게 됩니다.
  
참된 영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예수님을 닮은 모습일 것입니다.
참된 영성이란 예수님을 닮아가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적인 사람 곧 신령한 사람은 성령에 감화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보이는 세계가 모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는 보이는 세계 저 너머에 보다 본질적이고 궁극적이며 영원한 세계가 있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관한 일보다는 저 세상에 관한 일에 삶의 비중을 두고 힘을 쓰고 노력을 합니다.
한마디로 그는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진 '육안'에 믿음의 눈인 '영안'을 하나 더 가진 사람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영적 분별력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 세상과 저 세상,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구분합니다.
그는 이 세상 일을 멸시하거나 포기하지 않지만 거기에 얽매이거나 크게 영향 받지 않습니다.
세상일을 추구하거나 쾌락에 몰두하는 일이 하나님과 원수가 됨을 알기 때문에(약 4:4)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삽니다. 

반면 그는 하나님이 요구하고 성령이 불러일으키는 거룩한 소욕에는 적극적입니다.
그는 '영원'과 비교하여 이 세상에서의 삶이 지극히 짧다는 것을 앎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영원'을 위하여 과감하게 투자합니다.
그는 삶에 있어서 모든 일의 우선순위를 압니다.
그에게는 모든 일의 판단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므로 그의 판단은 정확하며 오류가 없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만족할 만큼 실수 없이 사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로부터 지탄받고 비난받을 만큼 실수투성이의 삶은 살지 않습니다(15절).

영에 속한 신령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대속 교리와 가르침의 진정성을 압니다.
그의 가르침에 동조하고 굴복하며 순복하며 그 뜻에 따릅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내주하시는 영이 계시므로(롬 8:9) 그 영의 활동에 의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알게 되며(11절) 그 뜻에 굴복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성이란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신령함이 영성입니다.
신령한 사람으로서 참된 영성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하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무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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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영적인 사람인가?

들어가는 말 

우리의 몸을 축구 공으로 비유하여 보자 겉 가죽은 사람의 몸튜브는 혼공기는 영을 가리킨다.

또한 바울은 사람을 세 종류로 구분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 세속인(고전 3:1-3)
육에 속한 사람, 자연인(고전 2:14)
영적인 사람, 거듭난 사람, 성령인(고전 3:1)

예를 들어 봅시다.

사람을 축구공으로 비유해 봅시다.
축구공의 겉가죽은 사람의 육체
축구공의 튜브는 혼
튜브안에 채워진 공기는 영이라고 하겠습니다.

육체라는 몸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고, 느끼는 감각기관으로써 물질 세계를 접하고 있다.
혼은 육체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이용하여 물질 세계를 연구하고 사고하여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외부와 교류를 갖는 역할을 한다. 혼으로 들어가는 문은 상상, 의식, 기억, 사고, 감정이다. 

상상의 문(Imagination)은 육체의 시각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혼에 있어서 보는 눈과 같은 것이다.
의식의 문(Gate of Conscience)은 육체의 후각에 해당되며 혼이 선악의 존재를 구별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기억의 문(Memory)은 청각에 해당되며 전에 들은 것을 혼이 재생하도록 한다.
이성(사고)의 문(Reason)은 미각에 해당되며 맛으로 음식을 비교하듯이 혼이 사실을 비교하게 해준다.
감정(애정)의 문(Affection)은 촉각에 해당되는데.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져서 알 수 있듯이 혼이  느끼는 것이다.

"영"(spirit)은 "혼"(soul)과 "몸"(body)을 통하여  외부의 물질을 이해한다.
영의 감지능력은 영적인 것으로서, 믿음, 소망, 경배, 기도 등의 일을 한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인간의 영은 하늘로부터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하자 죄는 영의 창문을 닫고 커텐을 쳐버렸으며 "영의 방"은 "죽음의 방"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거듭나지 못한 영은 죽은 상태로 남아 있다.

성령의 능력으로 "빛"과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이 그 방안에 거해야 빛과 생명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왜 "자연인"이 "영적인 일"들을 이해할 수 없었는가를 알게 된다.
영적인 본성이 거듭나기까지는 영적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자연인의 영은 어둠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의지(Will)"가 문 앞에 있다가 성령이 들어오려는 것을 방해한다.
성령이 그 사람의 "영"에 들어와  거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칼"인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의지가 굴복해야만 한다.

 "선"과 "악"의 전쟁터는 인간의 "혼"이다. 성령이 사람의 "영"에 자리잡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령은 "혼"과 "육"에도 접근해야 한다.
그 때까지는 사람이 성화될(Sanctified) 수 없는데, 이는  "거룩함"이라는 것은 영과 혼과 몸이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혼과 영은 건강한 몸을 필요로 한다.
몸이 육신의 정욕으로 넘겨지거나  또는 심지어 몸을 쇠약하게 하는 지나친 금식으로  혼과 영이 함께 고통을 받으면 전체 인간이  영적으로 병들게 된다. 

이제 혼과 영이 몸을 떠나 뒤의 상태를 살펴보자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기사에서  우리는 지하 세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지하 세계"는 둘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사이는 건널 수 없는 구렁이 있으며 그것을 "끝없이 깊은   구렁"이라 한다. 이 곳은 악한 영들(마귀들)이 일시적으로 묶여 있을 곳이다. 그 곳의  왕은 "아폴루온(Apollyon)"인데 하나님께서 가두어 두셨다가 원하실 때에 천사를 시켜 잠깐 풀어 주실 것이다(계 9:1-11;17:8;20:1-3).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죽은 의로운 사람들의 혼과 영은 "지하 낙원"에 있었다. 거기서 그리스도는 십자가 상에서 죽었던 "회개한 강도"를 만나셨다. 그리스도의 혼과 영은 그가 부활하신 날 지상으로 돌아 오셨으나 주님은 혼자 오신 것이 아니었다. 낙원에 있던  자들을 함께 데리고 올라오셨으며, 그후 낙원의 문은 잠그셨고 지금은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갖고 계신다.(계 1:18) 여기에서 "사망"은 지하 세계의 "무덤"과 "하데스"를 나타낸다. 

그들은 몸을 입고 무덤에서 일어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첫 열매들로 주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마 27:52,53). 그들은 "셋째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곳은 사도 바울이 갔던 곳이었다(고후 12:1-4).  바울은 그곳을 낙원이라 불렀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 죽은 모든 의로운 자들은 그곳으로 가서 "주와 함께" 있을 것이다(빌 1:23,고후 5:8).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만나시려고 공중에 오실때 주님은 "셋째 하늘"의 낙원으로부터 이 의로운 혼들을 데려오실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14에는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잠든 자들"도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땅으로 내려와 자신들의 몸을 되찾아 무덤에서 일어나서 "변화 받은 성도들"과 함께 올라가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다.

 

  그러나 죽은 "악한 자"의 혼은 계속 "지하 세계"의 "한 부분"인 지옥에  갇혀 있다가, 두 번째 부활이 이루어질 때에야  땅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몸을 다시 입고 "큰백보좌 심판석" 앞에서 심판 받게 된다. 그들은 그 심판에서 "둘째 사망"의 선고를 받게 되며, 그 의미에서  그들은 다시 죽어서 육신을 잃게 되며, 몸에서 이탈된 혼은 불못에 던져져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게 된다. 혼은 불에 타지 않으므로 악한자의 혼은 불못(둘째 사망)에 던져져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게 된다. 혼은 불에 타지 않음으로, 악한 자의 혼은 글자 그대로 영원히 불 가운데  있게 된다.

 

땅이 "불로써 타버리면(Renovated)" 사탄을 비롯한 하늘의 모든 "악한 권세들"은 갇히게 될 것이며 그때 하늘은  반란을 일으켰던 모든 악한 영들로부터 "깨끗하게" 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람은 타락이전의 아담의 상태로 회복되며 자연계와 영의 세계 사이를 나누고 있던 "휘장"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2. 들어가는 말

 

 교회(모임체)에서는 "영적인 사람"은 그것을 알지만 영적인 사람이 아닌 사람은 이것을 모른다고 하면서 성별되어있는 채  회자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잘못된 생활을 하면서 당당할까?  왜 그들은 비성경적인 사업과 비리와 사회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영적인 사람으로 허세를 부리며 허풍를 떨까? 많은 의문이 난다. 하여, 성령이 가르쳐주시는대로 "영적인 사람"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1)  『사람의 일을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의 영이 아니면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아무도 모르느니라』(고전 2:11).

 

  (1)  영에는 세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영이며, 세 번째는 더러운 영, 즉 사탄의 영이다. 성경은 또 짐승에게도 영이 있다고 말씀한다. 『사람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땅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누가 알리요?』(전 3:21). 이렇게 보면, 이 우주에는 네 가지 유형의 영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지만, 짐승은 영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육체적인 필요를 충족하고 자신의 몸이 편안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운명에 맡긴 채 행복할 수 있느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짐승은 육신적인 욕구만 충족하면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하다. 인간도 육신을 갖고 태어났지만, 그것이 타고난 모든 요소의 핵심이 될 수 없다.

육신이 인간이 타고난 모든 요소의 핵심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이 죽어 썩으면 벌레들의 밥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육신만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서도 살려고 한다는 것을 보면 자명하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그 중심에 영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육신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으며, 인간은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영적인 필요를 충족해야만 비로소 행복을 느낀다. 인간은 육신을 위하여 밥만 먹으면 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짐승은 밥만 먹으면 한없이 행복하다. 인간은 육신을 위해 밥을 먹지만, 영에게도 무엇인가를 먹여야만 비로소 행복을 느낀다.

 

  (2)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도 새들은 갖가지 아주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과 짐승들 사이에 완전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느냐 하면, 결코 그게 아니다. 아무리 훈련을 잘 시키고 아무리 집에서 함께 산다고 해도 인간과 짐승들 사이에는 어딘가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기 마련이다.

이 틈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인데 반하여 짐승들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간격이며, 이 간격은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는 틈이다. 그래서 짐승은 사람의 일을 결코 알 수가 없다. 사람의 일은 사람의 영이 아니면 결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짐승이 사람의 일을 알려면 사람의 영을 소유해야만 한다. 그것이 만일 가능하다면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인간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알려면 하나님의 영을 소유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놓으셨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새 생명을 얻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을 넣어 주시는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세상의 영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이처럼 하나님의 영을 넣어 주시는 까닭이 무엇인가?

 

 2)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 (12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12절).

 

   (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면, 전에는 알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거듭나지 못했을 때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도 몰랐으며,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나에게 진리를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도 몰랐고, 그분께서 거룩하신 분이며, 진실하시며, 신실하시다는 사실들, 그 어느 것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었다. 도무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명철이 터럭만큼도 없었으며,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어떻게 개입하시는가에 대해서 눈꼽만치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마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마귀가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지도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거듭나고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이러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다.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 영은 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인격적인 성령, 그분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분”이 아니라 “그것”(it)으로 표현되는 “영”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거니와』라고 말씀하고 있는 로마서 8:16에서 성령을 대문자 “Spirit”로 표기하여 인격적인 분으로서의 그분을 나타내고는 있지만, “성령이 친히”에서 “Spirit himslef”가 아니라 “Spirit itself”로 표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령 그분 자신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 그것 자체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성령님을 인격적인 분으로서의 성령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하심, 또는 성령님의 영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것”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영을 소문자로 표기한 곳도 성경에는 나온다. 출애굽기 31:3,4이나 출애굽기 35:31,32에 보면 『하나님의 영으로 그를 충만케 하시어 지혜와 명철과 지식과 온갖 솜씨로 정교한 기술을 고안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일하게 하시며』에서 하나님의 “영”을 소문자 “spirit”로 표기하고 있다.

이처럼 소문자로 표기한 “영”은 하나님의 영의 영향력, 또는 그분이 행하시는 사역 자체를 의미한다. 고린도전서 2:12에서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소문자로 표기하고 있거니와, 이것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거듭난 사람들에게 인격체이신 성령님으로 오셔서 인도하시기도 하지만, 능력의 “영”을 주셔서 그 영향력으로 지혜를 깨닫도록 하시기도 한다.

캠벨주의자들은 인격적인 분으로서의 성령님을 인정하지 않고 어느 경우에나 성령은 하나의 “영향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 인격체이신 것을 부정하고 하나의 에너지적 존재로 간주하는 배교자들의 발상이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시며, 또 사역을 행하는 영향력이시다.

 

 3)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 (13절).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인간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하느니라』(13절).

 

『성령께서 가르치는 말』이란 곧 성경 말씀을 의미한다. 나블레 고블레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나 지껄이는 은사주의자들이 환각 속에서 들었다고 곧잘 주절대는 그런 말이 아니라 성령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분명한 말로 말을 한다.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하느니라.』 이 구절은 꼭 배워두어야 할 말씀이다. 영적인 일들이란 영적인 성경 말씀들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인간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에서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이 곧 성경을 의미한다는 데서 자명하다. 이처럼 영적인 일들에 관해서 말씀하는 성경은 영적으로 말씀하는 성경으로 비교해 보아야 이해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은 말씀으로 비교될 때 그 말씀의 온전한 뜻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들을 육신적이거나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세상적인 지식에 비추어서 이해하려고 하면, 아무리 해도 이해될 수가 없는 것이다.

 

 4)  자연인은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4절)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14절).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자연인 그대로 내팽겨쳐진 사람이다. 따라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들을 알 수도 없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모두 어리석게만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사람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짐승들이나 마찬가지다.

한편, 거듭났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육신적인 사람은 자연인이나 마찬가지로 성령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성령을 따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성령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여전히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육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육신의 일들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령의 일들을 생각하느니라』(롬 8:5).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지 못한 “자연인”과 구별되어야 하지만, 성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자연인이나 마찬가지다.

 

 5)  영적인 사람은 판단하나 (15절)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절).

 

   (1)  꼭 기억해 두어야 할 위대한 구절이다. “영적인 사람”이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소유한다.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하나님의 영을 받고 하나님의 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어라고 지껄여도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지혜나 인간의 생각으로 무엇을 판단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올바르게 판단하는 사람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생각으로 자신에게 이러쿵 저러쿵 판단하려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판단해서도 안된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가치 기준은 오직 성경 말씀에 있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으로 함부로 형제를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라』(마 7:1). 『그런즉 우리가 더 이상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형제들 앞에 거치는 것이나 방해물을 놓지 아니하였는지 판단해야 하리라』(롬 14:13).  

 

   (2)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라.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받을 것이며, 너희가 재는 그 자로 너희도 다시 측정을 받으리라.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생각지 못하느냐? 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도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마.’라고 네 형제에게 말할 수 있느냐?』(마 7:1-4) 


   ① 이 구절 역시 많은 기독교인들의 입에서 회자되는 말로써, 누가 누군가를 판단한다고 생각되면 즉시 이 구절을 들고 나와 “네 눈에서 들보를 먼저 빼내라.”고 말한다. 물론 이 구절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미덕으로 사용될 수 있는 구절이다. 우리는 남을 함부로 비판하고, 함부로 공격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러한 잘못을 저질렀을 수 있고, 또 저지를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구절을 지나치게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진리를 가지고 오류를 판단하는 것조차 “비판”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의 무지를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판단할 수 있다. 만약에 우리가 판단할 수 없다면 어떻게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판단하에, 적어도 그 사람이 구원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판단”하에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또 오류에 빠진 사람을 진리로 바로 잡으려면 그 사람의 오류를 “판단”해야 하며, 누군가에게 지식을 전달하거나 교육할 때 그들의 잘못을 “판단”해야만 그들을 올바로 가르칠 수 있다. 특별히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판단”은 더욱 명확하게 행해져야 하는데, 그것은 고린도전서 2:15의 말씀 때문이다.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2:15).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 그는 판단하여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어야 한다.

 

   ② 마태복음 7:1의 말씀과 고린도전서 2:15의 말씀이 서로 상충이 되는 것은 우리가 마태복음 5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두 말씀이 서로 다른 경륜(또는 세대)에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즉 고린도전서 2:15의 말씀은 교회 시대의 성도가 행해야 할 말씀이고, 마태복음 7:1은 왕국 시대의 백성들이 행해야 할 말씀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함부로 비판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2:15의 전제는 “영적인 사람”이다. 자신이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육신적인 판단은 또 다른 판단을 낳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3장에서 육신적인 판단을 금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신을 영적인 상태, 즉 성령충만한 상태로 유지하여 모든 것을 올바로 판단하는 가운데, 진리를 전파해야 한다. 절대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의 잣대로 모든 것을 과감히 판단하라.  

 

  (3)  『그런즉 우리가 더 이상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형제들 앞에 거치는 것이나 방해물을 놓지 아니하였는지 판단해야 하리라』(롬 14:13).

『우리가...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것이나 ...아니하였는지』, 그 일을 판단해야 한다고 말씀한다. 쉽게 말해서,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어떤 “것,” 즉 “일”을 판단하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판단해야 할 “것”으로는 가령, 『형제들 앞에 거치는 것이나 방해물을 놓지 아니하였는지』 하는 것들이다. 형제들 앞에 방해물을 놓아 그들이 실족하기라도 한다면 당신은 이에 대해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해명해야 할 것이고 이로 인해서 진땀을 흘려야 할 뿐더러 당신에게 돌아오는 상은 없다. 당신은 이것을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6)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 (16절)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다고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16절).

 

   (1)  당신이 구원받고 성령님께서 당신 안에 들어오시면, 당신이 그리스도와 동일한 생각을 하도록 그분께서 인도해 주신다. 당신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당신은 주님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도 있는 생각이라.』(빌 2:5)고 성경은 말씀한다.

거듭난 사람에게 성령님께서 들어오시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똑같은 생각과 마음을 가져야 하고, 주님께서 보시는 대로 보아야 하며, 지난날의 생각과 안목은 모두 버려야 한다.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롬 12:2). 그런데, 그리스도의 생각을 갖고는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생각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생각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로마서 12:2를 보라. 『너희는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고 성경은 명령하고 있다.

 

   (2)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그 생각을 행동으로 나타내어 입증할 수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런 사람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의 생각을 머리 속으로 상상만 하고 있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갖고 그 생각대로 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머리 속으로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고 생각할 수 있는 두뇌를 되돌려 받은 것이 아니라 마음이 새롭게 회복된 사람들이다. 새롭게 된 마음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생각과 똑같은 생각대로 살아가는 데에 대해서 겁먹을 필요는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라.』(딤후 1:7)고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3.  마치는 말

 

 1) 『너희는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롬 12:2).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가 이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세상 문제다. 마귀가 그리스도인에게 제공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 이것이고, 여기에 걸려 넘어져 세상과 일치하게 하려는 것이 마귀의 유일한 목표다. 당신이 비록 그리스도인이지만 세상과 일치하려고만 한다면 마귀는 당신에게 거의 모든 것을 제공할 것처럼 유혹해 온다.

당신이 세상에 일치하기만 하면 당신에 대하여 마귀가 할 일은 그것으로 종결되어 임무 끝이다. 그러나 당신이 세상과 일치하지 않고 있는 한 마귀는 당신에 대한 자신의 일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에 대한 공략을 계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최대의 골칫거리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슨 일이 있어도 세상과 일치하려고 하지 않는 바람에 박해를 받고 고문당하고 끝내는 순교까지 당하고 만 초기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처하였던 갖가지 상황을 책을 통해 읽고 연구하면 할수록 그들이 안고 있던 큰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더욱 여실히 발견되는데, 이른바 “인류에 대한 증오심”이라는 문제가 그것이었다. 초기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로마 측과는 사이좋게 지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그들은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마땅한 이유는 롬 11:36이었다. 모든 것이 그분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 이것이 헌신해야 하는 첫 번째 합당한 사유였다.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12:1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 이것이 헌신해야 하는 두 번째 정당한 사유다.

그리고 그 세 번째 합당한 이유가 여기 2절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이것이 당신의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하는 정당한 사유인 것이다. 이 세 번째 이유를 분명히 알기 위해서라도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당신은 확실하게 찾아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하는 합당한 이유는 이렇게 세 가지로 집약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 분명한 뜻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 이 세 가지가 당신의 헌신을 요구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인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롬 12:2).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세 가지 뜻이 모두 개진되고 있다.

선하신 뜻(good will)
기뻐하시는 뜻(acceptable will)
온전하신 뜻(perfect will)

하나님의 뜻은 선하라 선하게 행하라

첫 번째는 그릇되게 행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하라, 선하게 행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첫 번째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도 그릇되게 생각하고 죄 짓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어떤 뜻을 갖고 계실 때, 그 뜻의 첫 번째는 언제나 “선하라.”는 것, 이것이다.

 

하나님의 두 번째 뜻은 선한 행동

당신이 덮어놓고 어떤 “선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과연 그것을 기뻐하시느냐 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은 당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어떤 “선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가를 먼저 정확하게 헤아려 알고 난 다음에 그 선한 일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이 아무리 많은 선행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전혀 평가되지 않을 터인즉, 당연히 그에 대한 상도 없다.

​하나님의 세 번째 뜻은 온전하신 뜻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선하기를 바라시고 선한 행동을 하기 바라신다.
그래서 당신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이 무엇일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선한 일이라도 어떤 선한 일을 해야만 주님께서 기뻐 받으실까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들을 상고하면서 기도하고 묵상한다.
그런 다음 당신은 마침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알게 되고 그 뜻에 따라 행동한다.
따라서 당신이 행한 모든 선한 것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온전히 부합된다.
이것이 바로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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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이야기 / 김순호선교사 최초 중국 여자 선교사, 토마스 선교사



김순호선교사 이야기

< 중국산동의 "진꾸냥" >

존경하고 사랑하는 형님으로부터 귀한 원고를 받았습니다.

성탄 선물로 방금 탈고한 원고를 보내니 교정해달라는 부탁과 함께요.

형님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으시고 그저 베일 뒤에 계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죠.

베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섬머셋 모엄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Painted veil' 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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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중국에 거주하는 서양 부부의 애증을 그린 영화인데 후반부의 배경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지형을 가진 중국 시골에 형님이 사십니다.

페인티드 베일이라는 의미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위해 걷어내야 할 장막이나 면사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가식적인 결혼의 이면에서 뒤늦게 발견하는 참 사랑을 그리고 있지요.

우리 인생에서 벗겨야 할 장막이나 수건을 벋어 던지고 나면 인간은 자유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자유'라는 연결고리 삼아 형님께서 보내온 원고로 말머리를 돌려 봅니다.

원고의 제목은 '중국산동의 "진꾸냥" -김순호 선교사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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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형님은 1990년 중국 대련에서 만난 어느 조선족 할머니와의 대담에 소환된 한국인 여성 전도자를 소개합니다. 시아버지의 권유로 참여한 사경회에서 만난 조선인 여성 전도자는 힘있게 회개를 외쳤고 그 복음의 씨앗이 할머니의 마음 밭에 뿌려졌던 이야기 속에서 형님은 '김순호'선교사를 만납니다. 반갑고 놀랍기만 한 그 이름은 바로 저자의 이모할머님이셨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선교사인 김순호, 진꾸냥(김처자)의 족적을 따라가며 기록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의 기억과 기록속에서 발자취를 발굴하고 정리하여 작은 소책자를 완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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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에 의지하여 김순호 선교사님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1회 총회에서 해외선교사 파송을 결의한 이후로 1913년 황해노회로 부터 시초된 중국 산동선교사 파송은 1928년 17회 총회에 여선교사 파송이라는 획기적인 안건이 제기되고 드디어 31년 최초의 여성선교사로 김순호 선교사 파송예배가 드려집니다.

30세의 독신 여성 김순호는 파송뒤 2-3년의 현지어 습득을 마치고 산동사역을 시작합니다.

진꾸냥이라는 별명처럼 특유의 친화력으로 중국 여성의 전도의 문을 열어나가던 김선교사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귀국하라는 소환 명령을 받아 잠시 귀국하지만 다시 재정비하여 만주로 사역지를 변경하여 파송됩니다.

능숙한 현지어, 정결한 영성, 메인 바 없는 자유인으로서의 친화력, 뜨거운 구령의 열정이 혼합된 봉사와 섬김은 현지 중국 여성들에게는 마치 천사처럼 보였을 것이라고 저자는 소개합니다.

그러나 1942년 본부는 국제 정세 악화로 만주 사역을 종료하라고 통지하고 김선교사는 직을 사임합니다. 선교사직을 사임한 진꾸냥은 그러나 사역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히려 자비량 사역으로 전환하여 사역을 지속합니다.

김선교사는 그 삶의 마감 또한 큰 울림이 있습니다.

해방이후 평양에서 사역하던 김선교사는 월남하자는 권유를 물리치고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다 죽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오히려 북쪽으로 발걸음 옮겨 신의주 제2교회의 청빙을 받아들입니다.

안타깝게도 1951년 새벽기도 중에 폭도들에 끌려가 세상을 떠납니다. 50세의 안타까운 나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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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형님은 맺는 말에서 김순호 선교사를 '회개자', '자유자', '순교자'라는 세 단어로 그 삶을 요약합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개인 서신으로 혹시나 '자유자'라는 해석이 편견적인 해석이 아닌지 의견을 나눠달라고 했습니다.

이 부탁을 붙잡고 며칠 끙끙거리며 윈고를 다시 읽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고 글로 처음 소개받은 김순호선교사님의 몇몇 모습을 감히 캐리커쳐처럼 그려본다면 이렇습니다.

검소한 일상 생활, 현지어에 전념한 집중력, 정결을 향한 끊임없는 회개의 기도생활, 사역의 길이 막히자 홀연히 떠나는 자비량 사역,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나누는 손길, 죽음을 불사하고 오히려 험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구령의 열정 등으로 그려집니다.

이 모습들의 뒤편에는 저자이신 형님이 혹시나 편견에 의한 착해(錯解)가 아닌지 우려한다는 말씀에도 불구하고,김선교사님의 족적에서 온전히 아니 차고도 넘치는 자유인의 의식 세계가 감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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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유란 바로, 가족이나 친지나 인연이나 그 어떤 이 땅의 소중한 관계라 해도 주님과 맺은 관계에 우선할 수 없다는 '소속으로 부터 자유'가 첫째이고,

둘째로는 선교사님이 가졌거나 누리는 모든 소유물은 이땅에 속한 것이기에 하늘에 속한 자의 발걸음을 제한하지 못한다는 '소유물로 부터의 자유'이고,

셋째로는 자신의 영을 묶고 제한하는 '죄로부터의 자유'로서, 이를 위해서 선교사님은 부단히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죄의 결과로 응어리진 것들을 가루로 부숴, 고운 가루로 만들어 빚어 주앞에 '소제물(素祭物)이 되고자 하는 다짐하는 모습이 감지됩니다.

선교사님의 삶은 진정 이땅의 것으로 부터는 자유자이지만 주를 향해서는 주께 속한 종의 삶을 사셨습니다.

큰 울림이 있는 얇은 원고를 읽고, 이 귀한 원고가 속히 책으로 이땅에 소개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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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 후에도 계속 사역한 김순호 선교사

김순호 선교사는 정신여학교와 일본 교리츠여자신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정신 함북의 보신학교에서 교원사역을 했고, 재령의 동부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했다.

총회 여전도회 전국총회가 설립되며 중국선교를 결의하고 1931년 9월 김순호를 산둥지역의 선교사로 파송했다. 1931년 그를 중국에 파송할 당시 도마리아 선교사가 전국 여전도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선교사였다. 중국 여성을 상대로 사역해 부녀 신앙운동에 큰 공헌을 했다. 전국 여전도회는 그를 위해 봉급과 어학학습비 600원, 교통비 30원을 주었다. 김 선교사는 북경에서 중국어를 체계적으로 배워 발음도 정확하고 영성이 깊어 중국인 부녀자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방지일, 이대영, 박상순 목사와 동역하면서 화북 지역의 여전도회를 조직하고 지도했다. 방지일 선교사는 "그는 두 지역의 여성을 위해 사역하도록 파송됐으며 그의 선교지 부임은 선교 사역의 활력을 더해 주었다"고 말했다.

중국에서는 처녀를 구량이라고 부르는 탓에 사람들은 순호 선교사를 '김구량'이라고 불렀다. 파송된 선교사들과 협력해 여성을 중심으로 말씀을 가르치고, 상담하는 등의 여성사역을 시작했다. 여성들은 복음을 듣고 신앙이 성장했으며 교회 활동 영역도 조금씩 넓어졌다.

김순호 선교사는 현지 조선선교회를 통해 현지에서의 안전을 위한 보호 및 관리를 받았다. 또 조선선교회 임원으로 참여해 남성 선교사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1934년과 1935년 산둥 조선선교사회에서 서기의 직무를 맡아 선교사역과 관련한 의사결정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다. 이뿐 아니라 중국 노회인 라이양 노회에서 회계로 선임되기도 했다.

만 5년간 산둥에서 어학 학습과 선교활동을 하던 김순호 선교사는 1936년 8월 안식년으로 귀국한다. 총회에서는 1년의 안식년 동안 6개월은 안식하고 6개월은 교회를 순회하면서 지모(즉묵)에 성경학교를 건축할 건축비를 모금토록 하였다. 이 기간 동안 김 선교사는 전남부인조력회와 전북조력회의 초청으로 광주와 전주를 방문해 집회를 가졌다. 전남부인조력회는 여전도회 총회와 협력해 성경학교 건축비를 보탰고 그의 선교비도 보냈다.

그러나 안식년 1년이 지난 후에도 김 선교사는 선교지로 돌아가지 못했다. 1937년 전면적으로 중일전쟁이 전개되면서 산둥성 선교지가 일본의 점령지가 되어 위험한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칭다오(청도)시에 거주하면서 지모를 왕래하며 이전처럼 성경공부 모임을 개최해 중국 여성들을 지도했다. 칭다오시 태평촌교회와 중가와교회 설립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던 중 여전도연합대회는 시국관계를 이유로 김 선교사를 당분간 소환하기로 결정한다. 1939년 9월 귀국함으로 김순호 선교사의 산둥성 선교는 막을 내린다.

당시 일제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은 대소련 전략기지, 철강, 석탄, 농산 자원 공급지, 불황에 허덕이던 일본 농촌 과잉인구의 배출구로서, 수도인 신경(현 장춘)특별시 외에 19개의 성을 두었으며 4312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봉천노회의 헌의에 의해 만주에 선교하기로 결의하고, 1937년 최혁주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해 만주선교를 시작한 상황이었다.

김순호 선교사는 1942년 만주로 파송돼 신경에서 남쪽으로 120리 떨어진 지린성 슈양양 현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최혁주 목사와 동역했다. 이미 산둥에서 여성들을 상대로 선교한 경험이 있고 유창하게 중국어를 하는 김 선교사를 통해 쌍양현의 선교는 더욱 적극적으로 진행됐다.

김 선교사는 산둥에서처럼 만주국에서도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했다. 슈양양현교회, 슈앙허진교회 등 각 교회에서 1개월 과정의 부녀 도리반을 설립해 만주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글자를 모르는 여성들에겐 주음자모를 가르쳐 하나님의 말씀을 읽도록 도와줬다. 이러한 사역은 만주 지역사회, 특히 부녀자들 사이에서 큰 호평을 받았으며, 김순호 선교사는 어디를 가든지 천사 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김 선교사와 최혁주 목사는 부근 농촌을 순회하며 '장막전도'를 했다. 찾아간 마을에 장막을 치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나팔을 불고 찬송을 불러 사람들을 소집해 복음을 선포하고 전도지를 나눠주는 방식의 전도였다. 당시 만주선교 기록을 보면 이러한 사역에 대해 김 선교사는 매우 만족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순호 씨도 산둥선교보다는 물론 힘은 드나 재미는 무한하다고 하며, 이제야 선교의 취미를 본다고 한다. 산둥은 타인이 건설하여 놓은 것을 심방이나 하고 도리반이나 할 것뿐이었으나 만주선교는 그야말로 제일선 개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김창덕, '만주광야 부르짖는 소리')

선교사들은 가는 곳마다 열심히 전도하고 신도들 스스로 예배당을 세우는 가운데 교회들은 크게 부흥했다. 김순호 선교사는 이곳에서도 부녀자를 위한 도리반을 만들었고 많은 여성들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왔다.

김순호 선교사와 최혁주 목사는 만주인 선교사업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회만 있으면 재만 각 노회를 찾아가 사역을 보고했다. 그 결과 남만노회에서는 어떤 형제가 전도인 1인을 돕기로 했고, 김순호 선교사를 통해 동만노회에서도 전도인 1인과 자금을 지원하는 후원자가 나타났다. 또한 신경 등지의 여성계에서 김순호 선교사를 통해 선교후원을 감당하기도 했다.

김순호 선교사는 1940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제29회 총회에 참석해 슈양양현의 전도 상황을 보고했다. 그러나 194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37년부터 시작된 만주선교를 1942년 2월에 종료하기로 하고 이 사실을 만주기독교총회에 통지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김순호 선교사는 만주국 선교사직을 사면하게 되는데, 1942년 9월 22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제21회 여전도연합대회에서 사면이 접수돼 허락하기로 결의했다.

만주 선교사직을 사임한 후에도 김순호 선교사는 1년간 사역을 계속했다. 예산 1200원 중 1000원은 김순호 선교사가 만주에서 활동하면서 저축한 돈으로, 200원은 여전도연합대회가 부담하기로 했다. 즉 선교사를 사임한 이후 1년간 더 사역하면서 필요한 비용은 대부분 김 선교사 자신이 감당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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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호 '타문화 女선교사' 김순호

▲손상웅 목사(시드선교회 연구실장)

[기독일보=손상웅 목사] 1928년 창립한 장로교 전국여전도회는 하나님께 감사하여 중국에 여선교사를 파송할 것을 결의하였고, 1930년 장로교 총회는 전국 여전도회의 결의를 기쁘게 받아 중국 산동에 여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선교구조 (여전도회) 와 회중구조 (총회) 라는 풀러신학교 선교역사 교수 폴 피어슨의 이론을 검증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교 역사학적 의미가 크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 선발 조건으로 중등 이상의 학교와 성경 학원 혹은 동등 이상 과정의 신학을 졸업하고 현재 교역에 종사하는 만 25세에서 만 30세의 여성 장로교인으로 규정하였다는 데서 '충분한 성경 지식'과 '사역 경험'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인정한 것은 매우 돋보이는 부분이다.

중국선교사로 선발된 만 28세의 김순호는 타문화 여선교사 제1호라는 명예를 얻었다. 김순호는 1902년 5월 15일 황해도 재령 동북 교회 김두한 장로의 딸로 태어나 재령 명신보통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를 거쳐 일본 횡번여자신학교를 졸업한 후 황해도 신천 경신학교와 함북 선진 보신여학교에서 교사를 역임하였고, 황해도 재령 동부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했다.

1931년 9월 11일 금강산 수양관에서 제4회 조선 여전도회 연합대회 총회 마지막날에 김순호 선교사 파송 예배를 드린 후 전국여전도회는 사례비와 어학비로 600원 그리고 여비로 30원을 지불하였다. 어학비를 지불한 전국 여전도회나, 선교지의 첫 3년을 어학공부에 투자한 김순호는 오늘날 "빨리 빨리" 선교로 언어연수를 뒷전으로 두는 선교사에게 큰 교훈이 아닐 수없다. 김순호가 북경어에 능했다는 마지막 산동선교사였던 방지일목사의 회고는 언어연수의 중요성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김순호의 실제 선교는 1934년부터의 팀선교다. 동료 선교사가 개척해 둔 17교회를 순방하면서 설교하고 심방하고 성경 공부반을 인도하는 등 복음선교에 역점을 두었고, 특별히 여성선교에 힘을 쏟았다. 1936년 안식년으로 귀국한 김순호는 6개월간 전국 교회를 순방하며 산동선교를 보고하는가 하면, 산동 성경 학교 건축을 위한 건축비를 모금하기도 하였다. 산동선교 보고를 접한 모든 교회는 그녀의 선교정신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뜻에서 매년 1월 셋째 주일을 <여전도회 주일>로 결의하고 전국 교회가 지켰다면 김순호는 든든한 후원교회와 중보기도팀을 확보한 셈이다. 중일전쟁이 종료된 후 1938년 10월에 시작된 김순호의 2기 사역은 청도에 거주하면서 산동선교를 펼쳤는데 1939년 여전도회 총회의 소환 결정이 있기 6년간이다.

이후 김순호에게 4년 간의 만주사역이 열렸다. 김순호의 3기 사역은 1939년 만주국 쌍향에서의 최혁주목사와의 팀사역이었다. 김순호는 만주 부녀자를 대상으로 성경 공부반을 개설하여 성경말씀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글을 모르는 부인에게 중국어를 가르쳐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함으로 계몽에도 힘썼다. 1941년에는 동반 지방교회 전도부 총무를 역임하는 등 그녀의 선교사역은 기관선교에 까지 뻗쳤다. 김순호의 마지막 사역인 4기 사역은 1942년 9월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제12회 여전도회 연합 대회에서 만주국 선교사를 사면하면서 1년간 자비량으로 3기사역을 이어갔다.

귀국후 신의주 제2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는가 하면 평양신학교에 출강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내던 김순호는 무엇보다도 회개를 강조하였는데 오늘날 회개없는 복음에 경고가 되고 있다. 한국동란 중인 1951년, 월남하지 않고 교회를 지키던 그녀는 51세로 공산 당원에 의해 순교하면서 중국인이 기억하던 '김고랑'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순종했다.

글ㅣ시드선교회 연구실장 손상웅 목사(풀러신학교 선교역사 전공·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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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최초 장로교 여선교사 김순호(순교자)

“나는 복음전파하다 죽고자 북한에 간다”


타문화권에 첫 여선교사를 파송한 제4회 여전도회연합회 총회(1931년 9월 금강산수양관)

김순호는 한국교회 장로교 사상 최초로 총회와 여전도회의 인준을 받은 여자선교사로 중국 산둥성에서 9년여 봉직했고, 평양신학교 여자부 교수와 사감을 역임한 후 최북단 신의주 제4교회를 섬기다가 1951년 새벽제단에서 기도하던 중 공산군에 체포되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김순호는 일생동안 학문탐구와 선교생활로 일관한 한국교회의 여선지자였다.

김순호는 1902년 5월 15일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 재령동부교회 김두한 장로의 딸로 출생하였다. 가정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경건한 기독교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총기를 보인 그녀는 여자로서 접하기 힘든 신학문과 신학을 공부했다. 당시의 분위기로 보아 여성이 신학문을 공부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었다. 모든 것은 기독교사상으로 개화된 아버지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열정적으로 학문탐구에 매진

김순호는 재령의 명신학교(明信學校)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김순호가 다니는 재령읍교회(후에 재령동부교회)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 황해도 재령 갑부 정찬유(鄭纘裕) 장로가 세웠다. 정 장로는 “교회를 짓기 전에는 결코 내 집을 갖지 않겠다.” 서원하고, 전도사를 일본에 보내 교회건축 양식을 공부해오도록 한 후, 재령 동부교회를 세운 것이다. 3만평 대지 위에 7가지 색이 영롱하게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2층 교회는 당시 한국 최고의 교회였다. 정 장로는 이어 명신학교도 세웠다. 정 장로는 또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많은 장학금을 줬다고 전해진다.

김순호는 명신학교를 졸업을 하자마자 서울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기독교명문 정신학교(貞信學校)에 입학하여 1921년 졸업하고는 곧장 일본의 요코하마여자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그녀의 학문탐구 욕망은 그칠 줄 몰랐다. 다시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연구에 몰두했던 것이다. 이 학교를 졸업한 후 모교회인 재령 동부교회에서 4년간 전도사로 교회를 받들었다.

1912년 9월 1일 평양여자성경학원에서 총대 221명이 모여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창립총회의 최초 안건으로 중국 선교를 결의한 후 1913년 5월 박태로 선교사를 산둥성에 보내고, 1913년 11월에는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산둥성은 유교의 교조 공자의 출생지로 외국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어서 선교의 불모지였다. 총회는 다시 1917년 방효원, 홍승한 두 목사를 증파(增派)하였고, 1918년에는 박상순 목사를 파송하였다. 1923년에는 이대영 목사를, 1937년에는 방지일 목사를 파송하여 선교사업을 확장시켰다.

중국선교사들은 여자 선교사가 꼭 필요하다고 청원서를 냈다. 1930년 9월에 소집된 총회는 이를 접수했고, 여전도회가 선교비를 지원하기로 결의하고, 1931년 3월 여선교사 파송공고를 기독신보에 실었다. 그 자격요건은 다음과 같다.

“장로교인으로 중등 이상의 학교를 졸업하고 성경학원 혹은 동등 이상 과정의 신학을 졸업한 자, 내외지에서 교역(敎役)에 종사하는 자로 연령은 만 25에서 만 30세의 충분한 성경지식과 사역경험이 있는 자이다.”

지원자들이 나타났지만 그 중 여전도회연합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김순호 전도사가 선임됐다. 주위에서는 여자의 몸으로 낯선 이역만리에서 선교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며 만류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김순효 전도사는 고향 뒷산 장수산에 올라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해 기도했다. 그녀가 눈을 뜨자 호랑이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있음을 깨닫고 날이 밝도록 기도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호랑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확신했다.

하나님 뜻 깨닫고 선교사의 길로

1931년 9월 금강산 수양관에서 회집된 제4회 여전도회연합회는 김순호 선교사를 중국 산둥성에 파송하는 파송식을 거행했다. 봉급과 어학학습비 600원, 교통비 30원이라는 예산이 책정됐다.

김순호 선교사는 중국 산둥성(山東省) 라이양(萊陽) 임지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이방인 상대의 선교란 쉽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중국어 공부부터 시작해야 했다. 이듬해 9월에는 북경에 가서 중국어 공부를 했고, 1933년 4월 산둥성으로 돌아와 활동했다. 중국 언어와 풍습을 익혀가며 이방종교를 알려야 하는 선교사 수업은 대단히 힘들었을 것이다. 어느 날은 모진 마음까지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네가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너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를 아느냐? 힘써 기도하여 새 힘을 얻으라”는 음성을 듣고 3층 다락으로 올라가 100일 동안 기도하며 새 힘을 얻었다.

김 선교사는 1936년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기까지 17개 지역을 순회하며 중국여성들을 위한 성경공부모임 및 사경회와 부흥회 등을 인도했다. 김 선교사는 귀국하여 장로교 제25회 총회(9월)가 전남 광주양림교회에서 회집 되었을 때 총대들 앞에서 활동보고를 했다. 이에 총대들은 큰 박수로 격려하였고, 여전도회의 선교정신을 기리고 격려하는 뜻에서 매년 1월 셋째주일을 「여전도회주일」로 지키기로 결의했다.

1938년 10월 17일 김 선교사는 다시 여전도연합회의 파송으로 산둥성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칭다오(靑島)에서 거주하며 태평촌교회와 중가와교회 설립에 앞장섰다. 이듬해 겨울에는 만주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최혁주 선교사와 동역하며 만주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문맹퇴치에 앞장섰다. 특히 마을에 장막을 치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나팔을 불고 찬양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 뒤 전도지를 나눠주는 ‘장막전도’에 힘썼다. 그러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1942년 2월까지 만주선교를 종료하기로 결의하자 선교사직을 사임하였고, 동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제12회 여전도연합대회에서 사면허락을 받았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록에는 김순호 선교사가 중가와(仲家窪)교회 설립에 많은 협조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중가와교회 방지일 선교사는 저서 “임마누엘”(p. 213)에서 중가와교회 설립초기 상황을 다름과 같이 기록했다. “중가와는 아주 낮은 지대로 좋은 주택 지을 데도 못 되고, 무허가 빈민들이 한두 사람 믿게 되니 한 칸 방을 얻어 예배드리기 시작했다. 장봉준(張鳳俊) 장로라는 유력한 이가 그곳에 작은 집들을 넓은 대지에 입구 자로 방정하게 지어 한 촌락이 되었다. 그 빈민 중에서 좀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 그런 집에 세를 든다. 나도 한 칸을 얻어 거기서 예배를 드리니 주위에 주택이 많은 지라 비교적 교회성장이 빨랐다. 1940년 4월 17일부터 수요일마다 옥외 대전도를 한 달 동안 계속했는데, 평균 500여 명씩 큰 정원에 모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교회 지키다 순교 영광 얻어

1941년 장로회 총회는 1939년에 신사참배문제로 폐쇄됐던 평양신학교를 재건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여교역자의 양성을 목적으로 여자부를 설치하자는 계획도 세웠다. 1942년 여전도회는 기금 7천 원을 총회에 전달하여 평양신학교 여자부 설치를 도왔고, 여자 신학부 초대이사에 김순호, 김마리아, 유안심, 배명진, 이순남 씨 등 5인을 피선했다. 김순호 선교사는 평양신학교의 교수 겸 기숙사 사감으로 봉직했으나 학교는 공산당의 간섭으로 2년을 버티지 못하고 폐교조치 되었다.

신의주 제4교회가 김순효를 전도사로 청빙하는 청빙서가 왔을 때 그를 아끼는 이들은 가지 말라고 말렸다. 한걸음이라도 남쪽으로 가야 한다고 권유했다. 그러나 김 전도사는 “모두 살기 위해 남으로 가지만, 나는 복음을 위해 죽으러 북으로 간다”는 말과 함께 임지로 가서 교회를 지키다가 1951년 어느 날, 새벽기도회에서 기도하는 도중 갑자기 들이닥친 내무서원에게 개 끌려가듯 끌려가 갖은 매를 맞고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순교했다. 당년 51세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전국연합회는 그녀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김순호는 교단총회의 인준과 여전도회 인준을 받은 유일한 선교사였다. 단신의 젊은 여성의 헌신적인 선교사역은 여성의 목회를 인정받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고, 여전도회는 해외선교의 큰 몫을 잘 감당한 결실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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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도하다 죽으려고 지금 북으로 가겠습니다

여전도회 파송 첫 여선교사, 산동성과 만주서 사역
평양신학교 여교수로 후진 양성, 북으로 가 순교제물

 
[전도사, 선교사, 순교자]

가슴시린 이름들이다. 이 땅에서의 영화와는 거리가 먼 이들이지만 하늘나라의 가득한 상급을 품에 안은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몰라줄지라도 오직 그분만 바라보고 산 사람들이다.
하나의 이름만 있어도 영광이거늘 세 가지 칭호를 모두 가진 이가 있다. 그가 바로 '순교자 김순호'선교사이다.
당시 전국여전도회연합회가 단독 파송한 중국 선교사, 해방 후 평양신학교 여자부 교수 겸 사감, 한국전쟁으로 순교의 제물이 된 김순호이다.

 
[예비하신 길]
 
김순호는 1902년 5월 15일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 재령동부교회 김두한 장로의 딸로 태어났다. 재령 지역은 원래 가톨릭 교세가 강한 지역이었으나 미국 북장로교 윌리엄 헌트(William Hunt, 한국 이름 한위렴) 선교사의 헌신적 사역으로 기독교가 왕성한 고장이 되었다.
그래서 윌리엄 헌트 선교사를 '재령 선교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의 아들 브루스 헌터(Bruce Hunt, 한부선) 선교사 역시 한국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김순호는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았다. 재령의 명신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유학을 떠난다. 장로교회의 명문 여학교인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 3월 26일 제13회로 졸업하였다.
김순호는 정신여학교 재학중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적극 참여하였고 일본 경찰에 붙잡혀 심한 고문을 받았다. 이러한 환난 속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불굴의 신앙을 가졌으니 하나님의 연단의 방법이었다.
그는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요코하마 여자신학교에 유학하여 신학교육을 받는다. 졸업 후 함경북도 성진에 있는 보신여학교 교원으로 봉직하다가 고향 재령에 돌아와 재령동부교회 전도사로 4년간 시무하였다.

 
[선교사로서의 부름]
 
한국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로 발돋움하려고 노력하였다. 어린 교회이지만 복음을 해외에 선포하여야 한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감리교회에서는 인천내리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이민을 보낼 때에 1902년 홍승하 전도사를 선교사로 파송한 바 있다.
장로교회에서는 1907년 독노회 조직 기념으로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1912년 총회 조직 기념으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고 1913년에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계속하여 1917년 방효원 목사, 홍승한 목사, 1918년 박상순 목사, 1922년 이대영 목사, 1931년 김순호 전도사, 1937년 방지일 목사를 파송하여 1913년부터 1937년까지 5대에 걸쳐 8명의 목사와 1명의 여전도사를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1931년 9월에 모인 전국여전도회연합회 제4회 총회에서 김순호 전도사를 중국 산동성 선교사로 선정하고 단독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선교사로 선정된 과정에 이런 일화가 있다. 선교사로서의 영적 주장을 위해 황해도 재령의 장수산에서 산기도를 하였다. 기도를 하는데 큰 호랑이가 주위를 어설렁 그렸다고 한다. 겁에 질려 목사님께 호소하였더니 더욱 기도에 집중하라고 하였다. 날이 밝아 눈을 뜨니 호랑이는 물러가고 믿음의 담력을 얻었다고 한다.
중국에 가서 중국말을 배우는 데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언어의 어려움, 문화의 차이 등으로 고통을 겪을 때마다 기도로 이겨나갔다.
방지일 선교사는 '김순호 선교사는 여성 첫 선교사로서 비교적 과학적으로 어학을 습득하여 선교사 중에 북경 발음을 정확히 하였으며 기도도 많이 하셨다. 내가 중국에 갔을 때 중국인들은 金姑郞(김 처녀 라는 뜻)으로 애칭하였다. 부녀자 지도에 능하셨다.'고 기록하였다(방지일, 임마누엘, p.120).
김순호는 산동성 래양과 지미현에서 주로 사역하였는데 남자 선교사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여성사역을 하여 많은 결실을 거두었다.
중국 선교 1기를 마치고 1936년에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총회에 선교보고를 하고 5개월은 휴식하고 6개월은 전국 교회를 순회하며 선교보고를 하고 산동 성경신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기금을 모금하였다.
다시 중국에 가서 사역하다가 1938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방지일 목사가 사역하던 청도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주로 여성사역을 하였다. 단기 성경학교를 설립하여 성경을 가르쳤고 많은 집회를 인도하였다.
전국여전도회연합회는 1939년에 중일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김순호 선교사를 일시 귀국시켜 길림성 쌍양현에 다시 파송하여 선교사역을 하게 하였다.
1940년 안식년을 맞아 전국을 순회하면서 국내 전도를 하였다. 1942년에는 전국여전도회연합회에서 평양신학교 이사로 파송받고 일하였다.
1943년부터 해방되기까지 만주 용정을 중심으로 사역하였다. 일제 말기의 어려움 중에서 선교비 지급이 제대로 되지 못한 상황에서도 유창한 중국어 설교로 복음을 선포하며 '중국인의 신앙의 어머니'가 되었다.

 
[평양신학교 여교수로 사역]
 
김순호 선교사는 해방이 되자 만주 훈춘에서 함경북도 청진으로 왔다.
거기서 얼마있다가 1947년 9월에 평양신학교 여자부 교수 겸 사감으로 부임한다.
평양신학교에서 여학생들을 지도할 교수를 물색하던 중 선교사 경력이 있는 김순호를 초빙하였다.
김순호는 예과 2학년을 담임하였고 성경과 교회사를 가르쳤다.
그때 배운 제자들 중에 이연옥, 주선애, 이동선, 조순덕, 이성훈 등 한국교회 여성지도자들이 있다.
김순호는 기숙사 사감으로 학생들의 생활지도를 하였다. 당시 여자기숙사생은 50명 정도였고 한 방에 보통 여섯 명씩 기거하였다.
김순호는 새벽기도회부터 인도하며 학생들을 철저히 가르쳤다. 그의 제자들이 여성지도자로서 사역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바른 지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역에서 특이한 것은 신학교 바로 앞에 있는 서문밖교회에서 매일 아침 5시부터 7시까지 한 시간은 기도, 한 시간은 성경읽기의 특이한 집회를 하였는데 신학생은 물론 일반 성도들까지 참석하여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김순호의 제자인 이연옥은 한국교회 여성지도자로 우뚝 선 존재인데 그의 스승인 김순호를 '교회에서 봉사하도록 훈련하고 가르친 사랑의 실천자'라고 평가하여 그의 가르침을 사모하였다.

 
[순교의 면류관]
 
김순호가 좋아하는 성경은 베드로전서였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4)는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상 주심을 사모하였다.
북한에 공산정권이 자리를 잡아가자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기 시작했다.
1948년 초여름 여름방학을 하자마자 제자 이연옥과 조순덕이 비밀리 김순호를 찾았다. 같이 월남하자고 권하였다. 김순호는 '가다가 로스케(소련군인)를 만나면 뭐라고 하는가? 너희는 남한에 가서 많이 배워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라.'고 권하였다.
공산당의 압제로 신학교가 문을 닫을 때 신의주제2교회에서 김순호를 전도사로 청빙하였다. 당시 북한교회의 목사나 교인들의 월남이 날마다 이어지고 있는 때에 김순호는 거꾸로 북쪽인 신의주로 가기를 결정했다.
주변에서 만류해도 '다 이 땅을 버리면 최후로 살아남을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나는 남겠습니다. 나는 전도하다 죽으려고 지금 북으로 가겠습니다.'고 했다. 다들 남으로 가는데 그는 북으로 갔다.

1949년 6월 평양신학교 제44회 졸업식에 참석하고, 창동교회(채필근 목사 시무)에서 여전도회 주최 사경회를 인도하고 평양을 떠나 신의주로 갔다.

신의주제2교회 새벽강단을 지키다가 1951년 몰려든 공산당에 체포되어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그의 나이 49세. 미혼의 몸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다가 순교의 면류관을 썼다.

김순호… 전도사, 선교사, 신학교수로 사역하다가 마지막에는 순교자로 우리 곁을 떠났으나 그의 영맥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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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웨일즈, 하노버교회의 선교사 토마스 목사

부흥(復興, revival)이라는 단어와 헌신(獻身, dedication)이라는 단어를 늘 함께 떠올린다.
부흥의 현장 속에는 언제나 헌신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헌신(獻身)의 의미를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면 "the large amount of time and effort that someone spends on something(무엇인가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쓰는 것)"으로 설명한다.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보면, 하나님을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는가가 헌신이고, 그 실제적인 수치가 헌신의 척도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헌신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조금이라도, 하나라도 더 하나님을 위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해 필요한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을 위해 진심으로 헌신된 소수의 사람이 아닐까?

​자신의 젊음과 권리, 그리고 끝내 생명까지 복음을 위해 헌신한 사람의 이야기는 19세기 영국(英國)의 남서부에 위치한 웨일즈(Wales)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웨일즈
는 잉글랜드로부터 소외된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지만, 그 보상으로 깨끗한 자연환경을 물려받았다.
영국 남부에서는 볼 수 없는 산들을 비롯해, 잔디가 펼쳐진 드넓은 공원, 서쪽 해안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해변. 피부로 와 닿는 신선한 공기와 바람, 목장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양과 소의 모습은 그야말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목가적 마을의 분위기다.
게다가 아담한 집과 마을, 그리고 손으로 떠서 마실 수 있을 듯한 깨끗한 샛강까지, 웨일즈의 풍경은 필자의 마음을 무척이나 설레게 했다.
웨일즈의 수도 카디프에서 북쪽으로 자동차로 30분 정도 거리, 작은 마을 란오버(Llanover)에 하노버교회(Hanover Chapel)가 위치한다.
이야기는 이 작은 시골 교회에서 시작된다.

​1867년 3월, 하노버교회의 로버트 토마스 목사는 사택 책상에서, 자신의 둘째 아들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읽고 있었다.
3년 전 자신의 곁을 떠난 아들을 이제는 영원히 볼 수 없다는 슬픔에 가슴이 저며왔다.
그는 심지어 아들을 고향에 묻을 수조차 없었다.
이제 고작 27살이 된 아들의 시신이 머나 먼 조선(朝鮮) 땅, 평양(平壤)에 남겨졌기 때문이었다.
애끓는 부성의 그리움을 삭이던 그가 바로 우리나라에 온 최초의 선교사이자 순교자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의 부친이었다.

​웨일즈에서 태어난 토마스는 런던의 University College 에서 BA 과정을, New College에서 신학 공부한다.
졸업반이었던 1863년, 24살의 토마스는 두 살 연상의 캐롤라인(Caroline Godfrey)과 결혼하고(5/29), 결혼한 지 불과 5일 후, 그는 하노버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6/4), 2주 후에는 신학교를 졸업하고(6/14), 5주 후에는 아내와 함께 중국을 향해 떠난다(7/21).

그가 결혼하고, 안수를 받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지로 떠나기까지 불과 두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한참 젊음을 즐길만한 꽃다운 청춘의 나이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할 신혼의 행복마저 내려놓고, 왜 그는 그토록 서둘러 떠나야 했을까?
캐롤라인 역시 남편을 2년 전에 하늘나라로 보내고 홀로 된 62세의 어머니와 작별하고, 다시 만날 기약조차 없는, 낯선 곳으로 떠나야 했다.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 등 언어에 뛰어난 재능이 보였던 토마스는 자신의 언어적 능력이 복음 전파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언제나 확신했다.
그는 신학교 시절부터, 중국 선교를 자신의 의무(duty)로 여겼다.
그는 선교지로 떠나는 선교사들을 보면서, 자신도 하루빨리 선교지로 나가기 위해 - 비록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 신학교에 조기 졸업을 신청할 정도로, 선교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다.
그러나 중국은 호락호락한 곳이 결코 아니었다.
그 당시 중국에서는 박해(迫害)로 인해 적지 않은 예수회 사제들이 순교했고, 그가 떠나기 일년 전에도, 한 사제(司祭)가 처형당했던 것이다.
토마스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1863년 7월 21일, 중국을 향해 출발한다.
별도의 허니문은 없었다.
4개월 넘게 걸리는 상해까지의 항해가 그들에게는 신혼여행이었다.
그들은 매서운 겨울이 시작되는 12월 첫째 주, 중국 상해에 도착한다.
그가 살던 남웨일즈의 겨울은 상해에 비해 무척 온화하다.
중국의 매서운 겨울 추위가 토마스 부부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됐을 것이다.
그들의 선교 여정은 처음부터 천연두(天然痘)에 걸리는 등 순조롭지 않았다.

어려움 속에서도 활기차게 선교사역을 이끌어가던 토마스에게 예상치 못한 엄청난 아픔이 찾아오고 만다.
임신 초기의 아내가, 같은 지역에서 사역하던 미국인 선교사 아내의 죽음에 큰 쇼크를 받고 만 것이다.
그녀는 아이를 유산하고 급격히 악화되어, 결국 숨을 거두게 되는데, 그들이 중국에 온지 불과 4개월도 채 안 되는 시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더욱이 토마스는 아내의 임종마저 지키지 못했다.
임신한 캐롤라인의 건강을 위해, 더 좋은 지역을 찾아 잠시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아내를 잃은 그는, 선교사로의 부르심마저 흔들려, 결국 선교사의 직분을 사임하고 만다.
그는 '고통의 문제’라는 터널 속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가 들어선 '욥의 터널’은 가로등도, 이정표도, 언제 끝날지 기약도 없었다.
질문과 해답으로는 끝이 없었다.
영원히 도는 쳇바퀴 위에서 시간도, 열정도 다 타버릴 것이다. 이 터널에서 나오는 길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신뢰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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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祈禱)


도입 이야기

28 이라는 숫자

"2X8"은 학생들은 "16" 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청춘"이라고 대답한다.

어느 교인이 자녀의 이름으로 헌금을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28만원을 빌려서 헌금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이가 시험을 치루는데 어려운 문제 때문에 주저하는데 "이것이 답이야" 라는 강한 음성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 아이는 그의 마음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따라 답을 결정하였는데 시험에 통과되어 합격하였다고 합니다.
더구나 놀란 것은 장학생을 28명 선발하였는데 그 아이의 성적이 28등이 되어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 아이에게 "2X8"은 "기도의 응답"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러한 간증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기적같은 일을 일어나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적인 기도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내가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나에게 일어난 기적은 더 큰 기적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내가 바뀐 상태에서 일어난 기적은 그 기적의 은혜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습니다.

유명한 설교자 스펄젼의 명언

"기도하지 않고 성공했다면 성공한 그것 때문에 망한다."

(간증) 중학교 때 세계사 시험을 앞두고 공부하던 중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시험지가 내 앞에 나타나 그 시험지의 문제의 답을 적어가던 중 마지막 시험문제의 답을 적지 못하여 안타까워 하던 중 놀라서 깨었는데 그 날 세계사 시험을 치루려고 시험지를 받는 순간 꿈에 보았던 시험 문제가 그대로 내 앞에 놓여 있었다.
당연히 그 시험은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이후 시험 때마다 그런 꿈을 꾸려고 하였다.
문제는 시험 공부를 더 열심히 준비하는 것인데 시험지가 나타나기를 소원하는 것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기도라는 용어를 살펴봅니다.

4336. 기도 - 프로슈케(prŏsĕuchē) / προσευχή

4336. 기도 - 프로슈케(prŏsĕuchē) / προσευχή

1. 기도,  2. 기도처

골로새서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Devote yourselves to prayer, being watchful and thankful.

- 영적인 자각을 의미하는 깨어 있으라

4332. 항상 힘쓰라 - 프로세드류오(prŏsĕdrĕuō) / προσεδρεύω 

1. 가까이 앉다
2. 시중하다
3. 섬기다

- 끈질기게 매달리는, 지속적인 의미
- 기도의 열심과 지속성

335. 강청 - 아나이데이아(anaidĕia) / ἀναίδεια

1. 고집
2. 건방짐
3. 뻔뻔스러움
4. 파렴치함
5. 부끄러움을 모름

* 신약성경에서 1회 사용 ἀναίδεια
부정접두어 아(α) +  아이도스(부끄러움이 없음) (127) αἰδώς / 체면불구하고 간구하는 것

(KJV) impotunity(무력감)(NIV) boldness(대담, 뱃심, 배짱)

교훈
1. 요청에 즉각적으로 응하지 않으려는 집 주인과 쾌히 주시려는 하나님을 대비하므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반드시 응답된다는 것을 강조(9-13절)
2. 응답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끝까지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살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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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단호하고 분명한 것이었다.
즉 ‘기도’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란 어떤 초능력적 힘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게를 이루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촉구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기도에 관한 명언


우리 하나님은 예측 할 수 없는 비상사태가 없으며 응할 수 없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 죠지뮬러 -




* 마른 눈 가지고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 

- 스펄젼 - 

* 성자를 만들어 내는 것은 기도의 힘이다. 

-이 엠 바운즈- 

* 기도의 실패자는 생활의 실패자이다. 

-이 엠 바운즈-

* 잘 기도한 자는 잘 배운 자요 많이 기도한 자는 많이 운 자이다. 

-루터-

* 어려운 환경에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마저 없다면 우리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칼뱅-

"모든 것을 하나님께 기도로 가져 갈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특권이다. 그렇지 않은가.

-허드슨 테일러-

* 늙어 갈수록 기도를 더 많이 하라. 그러해야 신령한 일에 냉냉해 지지 않는다.

- 죠지 물러-

* 싸움터에 나갈 때는 한번 기도하라. 바다에 나갈 때는 두번 기도하라. 그리고 결혼할 때는 3번 기도하라. 

-러시아 격언-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할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다. 

-마클라 쉴란-

* 하나님의 자녀는 기도로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다. 
사탄이 교인들에게서 이 무기를 빼앗거나 그것의 사용을 제지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앤드류 머레이-

* 기도는 영혼의 피이다. 

-죠지 허비트-

* 우리의 기도는 지칠 줄 모르는 힘과 거부될 수 없는 인내와 꺾여지지 않는 용기로 강하게 구해야 한다. 

-이 엠 바운즈-

* 기도는 아침의 열쇠요 저녁의 자물쇠이다. 

-그레이엄-

* 정신을 집중할 수 있을 때에만 기도하라. 

-탈무드-

* 무릎을 꿇은 그리스도인은 발돋움을 한 천문학자 보다 더 멀리 본다. 

-토플레디-





기도는 하나님과 교감(交感)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감(交感)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 할 때에는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기도의 목적은 진정으로 갈급하는 것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강청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사도행전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All of them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in other tongues as the Spirit enabled them.

4130 / 플래도(plēthō) πλήθω
1. 채우다
2. 영향을 주다
3. 완수하다
4. 공급하다

가득하다(마 22:10, 눅 4:28, 행 5:17)
적시다(마 27:48)
충만함을 받다(눅 1:15, 41)
차다(눅 1:57, 2:6, 22)
채우다(눅 5:7)
충만하다(행 4:8, 31, 13:9)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Do not get drunk on wine, which leads to debauchery. Instead, be filled with the Spirit.

로마서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May the God of hope fill you with all joy and peace as you trust in him, so that you may overflow with hope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누가복음 1:15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for he will be great in the sight of the Lord. He is never to take wine or other fermented drink, and he will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even from birth.

누가복음 1: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누가복음 1: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예수님의 기도(Jesus Prayer)

“예수 기도”(Jesus Prayer)는 화살기도의 두 번째 유형입니다.
이것은 동방정교회(The Eastern Orthodox)의 교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해 오던 기도문입니다.
이것은 호흡의 리듬에 맞추어 기도할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기도는 많은 사람에게 “쉬지 않고 드리는 기도”가 됩니다.
그 기도 말은 단순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the Lord, Jesus Christ, the son of God, have mercy on me).

“예수 기도”는 이러한 기도를 반복해서 드립니다.
동방정교회 교인들은 정해진 기도 시간에 묵상 기도를 하기 위한 배경으로 이 기도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이 기도문은 차를 타고 가거나, 걸어가거나, 세수를 하거나, 아무 때나 반복해서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 기도”는
1.  우리 모두가 죄인이며
2.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만듭니다.

이런 반복적인 기도에 진실함이 들어가 있다면 강력한 영적 화살이 될 수 있습니다.
반복적인 기도에 대해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복 그 자체를 싫어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거룩하게 보이기 위해 중언부언하는 공허한 반복의 기도를 싫어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 기도하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기도는 절대로 공허한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 오늘도 주님 안에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저와 우리 가족을 지켜주세요.”

우크라이나의 정교회 사제이자 영국국교회의 목사였던 케네스 왈드론(Kenneth R. Waldron)은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취되기 전 의식이 있을 때 의사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스포디, 포밀루이, 고스포디, 포밀루이, 고스포디, 포밀루이”.
의사는 ‘주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라고 반복하여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왈드론 목사는 의사 선생의 입술로부터 이런 기도소리를 들으면서 큰 위로를 얻었고 편안한 마음으로 마취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기도가 듣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된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습니다.
반복 기도문으로서 화살 기도를 사용할 때는 자신이 애용하는 기도문을 생각해 놓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문 붙이기

화살 기도문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간단한 기도문을 어떤 장소에 붙여놓은 것도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예를 들어, 화장실에다가 “하나님 아버지, 항상 주님 안에서 기뻐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문을 붙일 수 있습니다.
직장의 책상에도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문을 붙여 놓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대화를 즐겨야 합니다.
기도의 목적은 단순히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우리가 늘 하나님과 함께 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화살 기도를 하게 되면 그냥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도 영원한 가치로 투자되는 시간으로 전환됩니다.

유의점

화살 기도문은 시간이 부족하거나 또는 순간적인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는 기도문이기 때문에 화살기도만으로 기도 생활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규칙적인 기도의 장소와 시간을 가지는 기도의 사람이 화살 기도를 함께 사용할 때는 강력한 기도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화살기도를 드릴 때는 장문의 기도는 지양하는 것이 좋습니다.
간단하고 힘있는 기도의 표현을 사용해야 하며 진솔한 마음을 담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익

화살 기도문을 자꾸 사용하면 습관적인 기도의 사람이 되는 데 유익합니다.
즉 기도하는 것이 체질이 되는 데 좋습니다.
죄인인 인간 본성은 본래 기도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습관으로 만듬으로써 자신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화살 기도는 기도하기 싫은 우리의 본성을 길들이는 데 유익합니다.
또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순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강력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좋은 화살 기도문을 꼭 만드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향해 쏘아 올리십시오.
주님의 임재하심이 느껴질 것입니다.

시간

화살 기도 하나를 쏘는 데는 5초-10초 정도면 됩니다.
양적으로는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기도의 질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기도의 화살을 틈 나는 대로 쏘아야 하지만 아침에 기상하자마자 또한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꼭 쏘는 것이 좋습니다.

생각해 볼 문제

1. 여러분이 매일 아침 화살 기도를 드린다면 어떤 기도문을 만드시겠습니까?
2. “예수 기도”(Jesus Prayer)의 의미를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3. 화살기도를 실천하기 위한 계획안을 세워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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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 기도


화살기도는 영혼의 활을 당겨서 하나님께 쏘아 올리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적절한 상황에서 짧고 단순한 기도문을 가지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입니다.

화살기도는 주로 자신이 애용하는 기도문을 만들어 적절한 상황 때마다 사용합니다.
화살 기도는 주님의 전적인 긍휼하심을 간구하는 마음으로 드릴 때 효과적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박히는 화살을 쏘라

화살 하나는 하나의 기도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활에 화살을 하나씩 당겨서 시간이 나는 대로 하나님께 쏘아올릴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의 화살을 한 개 쏠 수 있습니다.
또 밤에 자기 전에도 쏠 수 있습니다.
하루 중에서 틈이 나는 대로, 적절한 순간마다 기도의 화살을 쏠 수 있습니다.
화살 기도의 기도문은 장황해서는 안됩니다.
마치 화살이 너무 길면 활로 당겨 힘있게 쏘기가 어려운 것과 같은 것입니다.
화살기도는 간단하고 단순해야 합니다.
화살은 짧지만 힘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힘차게 멀리 날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투영해서 쏘아야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 오늘도 주님 안에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저와 우리 가족을 지켜주세요.”

이러한 기도문은 여러분 각자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 날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기뻐하게 해 주세요.”

나는 차에 탈 때도 간단하게 화살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안전운행을 하도록 지켜주십시오.”

밤에 자기 전에도 화살 기도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함께 하신 것 감사드립니다.
이 밤에도 주님의 보혈로 덮어주세요.”

하루 중 생활하면서
“주님,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저를 주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 주시옵소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간단한 기도를 통해서 화살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글을 쓰기 전에 “주님 글을 쓸 수 있는 아이디어와 지혜를 주세요” 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회사 취직을 위해 인터뷰를 하기 전에도 “주님 이 인터뷰에서 제 입술 의 말을 주관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버스를 타기 전에 “주님, 안전운행하도록 지켜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 “아이들이 오늘도 공부 잘하고 친구들과 잘 지내게 함께 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의 화살

화살 기도는 간단한 기도이지만 우리의 마음을 담아서 드려야 합니다.
내면의 진실은 화살이 날아가기 위한 좋은 활이 됩니다.
성자로 여겨지는 존 비아니(John Vianney)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에 대해,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아름답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향기로운 이슬이다.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만 그 이슬을 가슴속에 느낄 수 있다.
기도에는 마치 잘 익은 포도로 만든 쥬스와도 같은 달콤함이 느껴진다.
간절한 기도 앞에서 문제들은 봄볕의 눈처럼 녹아버린다.
사람은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서 마치 대포에서 발사된 탄알처럼 곧장 하나님께 달려가야 한다.
기도는 우리 영혼을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킨다.
마치 에드벌룬을 높이 올려주는 불길처럼 기도는 우리 영혼을 높은 곳으로 데려다준다.
우리는 더 많이 기도하면 할수록 더 기도하고 싶어진다.
처음에는 수면에서 헤엄치지만 나중에는 점점 더 깊이 들어가 밑바닥을 향해 가는 물고기처럼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즐거움 속에 빠져 들어간다.
기도는 거룩한 물로서 그것이 흐르는 곳에 우리의 소원은 힘을 얻어 꽃을 피우게 된다.
우리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고 우리 마음의 목마름을 해소시켜 준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가장 열정적인 기도가 나옵니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기도의 가장 강력한 힘이 발휘됩니다.
우리는 마음 밑바닥에 있는 거룩한 꿈과 소원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내면의 진실한 소원은 하나님께 날아가는 화살의 강력한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화살 기도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는,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드리는 짧은 화살기도입니다.
둘째는, 반복해서 드리는 화살기도문입니다.
셋째는, 정해진 장소에 기도문을 붙여놓고 드리는 화살기도입니다.

성벽 재건의 마음을 담아서 쏘아올린 느헤미야의 기도

성경에서 우리는 느헤미야를 통해 화살기도의 첫 번째 유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파괴의 비보를 접한 느헤미야는 몇 개월 동안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아닥사스다 왕 앞에 얼굴에 수색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왕은 느헤미야에게 마음에 근심이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그 때 느헤미야는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왕은 느헤미야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어봅니다.
왕에게 대답하기 전에 느헤미야는 잠시 동안 묵상 기도를 드립니다(느 2:4).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묵상으로 잠깐 기도했지만 마음 속으로 하나님께 “짧고 단순한 화살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 왕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제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하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화살기도는 이처럼 어떤 순간적인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정해진 시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흐르는 강물처럼 하루 종일 흘러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간단한 문장이나 말을 사용하면서 짧은 화살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화살 기도문은 자신의 마음에 맞는 것을 선택하여 반복형 기도로 사용하는 것도 효과적입니다.
이러한 기도문을 계속해서 사용하면 좋은 기도의 훈련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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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라



34. [요한복음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35. [요한복음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36.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37. [요한복음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38. [요한복음 16: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39.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40. [요한복음 16: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주로 새벽기도를 설명할 때 자주 찾는 성구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시간 개념에서는 새벽이 아닙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언제 시작할까요?

유대인의 하루는 해가 지면서(저녁6시) 시작하여 그 다음날 해질 때 끝납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하루종일 일하다 가도 해자 져서 어둠의 커튼이 드리우면
“아 하루가 끝났구나” 하면서 감사의 일몰 기도를 드리고 하루를 마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낮과 밤을 12시간씩 나누어 구분했습니다.

낮 시간은 대략 아침부터(해뜰때부터) 저녁(해질때까지) 까지로서 현재의 아침6시에서 저녁6시까지 정도였으며,
밤은 오후 6시부터 그 다음날 아침 6시까지 12시간이었습니다.

밤은 다시 3시간 단위로 묶어 “경”이라 불렀습니다.
제1경은 오후 6-9시, 제2경은 오후  9-12시, 제3경은 오후 12-3시, 제4경은 오후 3-6시 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밤 4경에 제자들이 씨름하던 바다위로 걸어가신 시간대가 언제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낮 시간은 아침 6시에서 저녁 6시까지 12시간으로 한 시간 단위로 제1시, 2시 등으로 구분했습니다.
제1시는 아침 7시, 제6시는 낮 12시, 제9시는 오후 3시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유대인의 시간 즉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을 오늘의 시간으로 환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6을 더해주면 됩니다.
(이것도 어려우면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에서 초침시계에서 시간을 가리키는 바늘의 반대편이 지금의 시간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

예를 들면 사도행전 3장 1절에서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 시간 제구시는 오후 9시가 아니라 오후 3시를 말합니다(9+6=15,즉 오후3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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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5~22)

기도를 영적 호흡이라고 합니다.
호흡을 할 때 호흡하는 방법을 배워서 숨을 내쉬고 들어바십니까?
생명이 있는 육체는 자연스럽게 호흡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중병에 걸렸을 때는 자기 힘으로 호흡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산소호흡기로 숨을 쉬도록 도와줍니다.

건강한 영혼
건강한 육체
건강한 신앙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땅에는 중단해야 될 일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쁜 생각과 나쁜 습관, 하나님의 계명에 위반되는 것과 불신앙에 대한 것, 어두움에 관한 것 등등 이러한 것들은 빨리 중단할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중단해서는 안 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육체가 호흡을 함으로 존재하듯이 영적 생활에서 가장 귀한 것은 바로 기도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기도 쉬는 것을 죄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삼상 12:23)
그는 기도 쉬는 것을 큰 죄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기도를 중단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어떠한 의미일까요?

첫째,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계속하라

출애굽기 33:11에 보면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친한 벗이라도 대화가 중단되면 마음에서도 멀어지고 또 정(情)도 멀어집니다.
우리는 항상 대화 속에 이해를 서로 주고받게 되고 정(情)도 서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영적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가 없이는 신앙생활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숨을 거둔다는 것은 바로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중단하는 것은 바로 신앙을 자살시키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떠한 환경과 처지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서가 아버지 이삭에게 받을 축복을 야곱이 가로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어머니 리브가 곁에 있으면서 대화를 자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생활을 통해서 늘 하나님과 영적인 대화를 계속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역대상 10:13에 보면 사울의 죽은 기록이 나옵니다.

사울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아 왕까지 되었지만 그가 결정적으로 생명을 잃게 된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고 신접한 사람 즉 귀신 들린 사람에게 가르쳐주기를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방신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올리는 경배를 중단하지 말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1년에 몇 번 정기적으로 드리고 끝나면 안됩니다. 우리는 평생토록 하나님 앞에 산 제물이 되어서 늘 경배하는 생활을 지속해야 합니다. 시편 95:6에 보면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경배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무릎을 꿇는 것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가 계속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경배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안전한 시간, 가장 하나님께 보장 받는 시간은 바로 예배하는 시간입니다. 예배가 살면 믿음이 삽니다. 예배가 살면 교회가 삽니다. 예배가 살면 여러분의 인격도 변화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했습니다(요 4:23).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일을 숨질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경배’라는 말은 ‘꿇어 엎드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 예배는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또 ‘주인의 발 앞에 하인 된 위치에서 엎드려 경의를 표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주인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중단하지 않는 가정과 교회와 민족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예배가 가장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향기로움을 계속 올려드리라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시 141:2) 기도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예물입니다. 요한계시록 5:8에도 보면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도가 얼마나 귀하면 금 대접에 담았을까요? 옛날에 귀한 음식은 임금님의 상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귀하면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가겠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항상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매일처럼 올라가는 기도의 향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기도를 하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게 되고, 기도 속에서 신앙이 성장하게 되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기도의 줄이 잡힌 사람은 항상 미리 예방의 기도도 하고, 처방의 기도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 26:41)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고 졸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시험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기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항상 기도함으로 깨어있기 때문에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항상 기도로 깨어서 주님과 영적 대화가 이어짐으로 여러분의 아름다운 기도의 향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항상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항상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것입니다.

시편 55:22에 보면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맡기는 것과 버리는 것은 다릅니다. 전당포에 맡기는 것은 다시 찾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맡겨 버리는 것은 다시 찾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올림픽대로를 타고 공항에 가다 보면 난지도에 쓰레기를 버리는 차량은 많이 보았지만 그 버린 쓰레기를 다시 싣고 가는 차량은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무거운 짐을 다 주께 맡겨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기도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잠언 16:3에도 보면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시편 37:5에도 보면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베드로전서 5:7에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여분의 모든 것을 기도로 하나님께 다 맡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인간이 견디기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 이를 때에도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계속하고, 하나님 앞에 올리는 경배를 중단하지 말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의 향을 계속 올려드리고, 항상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어서 늘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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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응답 11가지 유형

 

1. 예스(Yes)형 

우리의 기도와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즉각적인 응답이다. 
개인, 사회, 국가, 교회문제 등으로 기도할 때 즉각 주시는 응답.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에 응답.   

2. 노(NO)형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 거부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는 경우이다.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 반사회적, 비인격적, 비성경적인 기도에 침묵이나  거절로 응답. 이 외에도 형제를 용서치 못함, 교만, 혈기, 외식적인 기도,  죄, 두 마음, 의심, 잘못된 금식, 불순종 등에 거절하시는 응답. 

3. 주바라기형   

힘들고 지칠 때,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하나님만 믿고 의지할 때 기적적으로 주시는 응답.   
홍해 앞, 여호사밧 왕과 백성들의 찬양을 통해 하나님이 적군을 물리쳐 주시는 응답.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서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  

4. 업그레이드형 

우리의 기도와 믿음 그 이상의 것을 주시는 응답.  
어떠한 것을 구했는데 최상의 시간(때) 에 최고의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평소 믿음이 하나님의 뜻과 정확하게 일치할 때 상상과 기대를 초월해서 주시는  환상적인 기도응답이다.
솔로몬이 지혜만 구했는데 그가 구하지 아니한 부와 명예도 주셨다.  
전무후무한 지혜를 주셨다는 사실   

5. 웨이트(Wait)형   

인생은 먼 길을 여행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때로는 형통한 환경의 아스팔트길을 걸어갈 때도 있다. 
그러나 어려움의 진흙탕길, 가시밭길을 걸어갈 때도 있다.   
폭풍우나 비바람을 맞고 외로운 길을 걸어가야 할 때도 있다.   
가슴에는 비전을 품고 마음속에는 굳건한 의지와 강철 같은 체력으로  가야할 길을 가야한다.   
믿음과 기도로 앞길을 헤치고 걸어갈 때 지연된 응답이 있다.  
크로노스(인간의 시간)와 카이로스(하나님의 시간)는 다르다.  

웨이트형과 진주조개형의 차이는, 웨이트형은 믿음으로 지속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진주조개형은 먼저 계시나 응답을 받았지만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에 받게 되는 기도응답을 말한다.  

6. 진주조개형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환상, 계시 혹은 기도응답을 통해 그 일에 대해서 약속을 받게 된다.   
그런데 아픔과 시련, 연단, 회개, 불시험 등을 통과하고 받게 되는 응답이다.   
자아가 깨지고 교만이 제거되고 하나님 중심으로 패러다임이 변할 때 받게 되는 응답.   
하나님이 한 시대에 크게 쓰시는 사람들은 이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다윗의 "아둘람 굴"과 같은 과정을 거칠 때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이 임하게 된다.   

요셉의 예   

7. 물레방아형   

직선형 기도응답이 아니라 변환형 기도응답이다.  
우리가 A를 구했는데 B나 C, D를 주실 때도 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러 가려고 했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고 마게도냐(유럽)로 인도 하셨다.   
유럽에 기독교 문명이 획기적으로 열리는 전기가 된 것이다.   
자신의 기도와 고집만 주장하고 금식을 한다고 해서 자기 뜻대로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고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시대를 움직이는 사역을 펼칠 수 있다.  

8. 야베스형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 영, 혼, 육의 총체적인 전인적 축복을 주시는 경우이다.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인 모든 영역에서의 완전한 기도응답.   
이 기도에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지침이 있다.   
그것은 피(정의), 땀(노력), 눈물(양심)의 3대 액체가 필요하다.   
이것을 알고 야베스의 축복을 말해야 한다.  

씨를 뿌리고 기도해야 한다.  
이 시대의 야베스라면 한국의 100대 재벌(?) 정도는 될 것이다.   
관념의 유희는 위험하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9. 징검다리형   

하나의 목표나 프로젝트를 추진해 가기 위해서는 일의 시작 전, 과정,  후까지 기도를 해야 한다.   
지속적인 기도와 연속적인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기도응답이다.  
느헤미야의 성벽재건(방해자, 거짓 선지자 출현 때도 지속적인 기도)  

10. 지오디(GOD)형   


하나님의 방법을 말한다.  
인간의 기도나 믿음, 의지와는 무관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한다.  
주권적인 의지와 주권적인 권능을 말한다.  
인간의 생사화복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한다.   
창조와 보존, 통치, 성도의 고난, 선택과 유기, 징계 등.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요구에 응답해야 할 때가 있다.   

이사야 선지자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 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8).  

11. 미사일형   


교회, 전도, 구원, 부모의 기도, 성도를 위한 합심기도, 목회자의 중보형기도 등을 말한다.   
이러한 기도응답의 원리를 알고 365일, 24시간을 주님과 연합된 삶을 살게 될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과 그 분의 뜻 안에서  성공과 부와 명예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된다(전1:26).  

결론(結論)

기도와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무한한 하나님의 자원과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 신앙인 것이다.   
기도는 우리의 전 삶을 통해서 역사한다.   
심지어는 우리의 죽음 이후에 후손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사람은 인생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직립하여 설 수 있다.   
기도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관점은 기도를 하나님과의 거래관계로 보아서는 안 된다.   
'거래’가 아니라 ‘관계’여야 한다는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연합되고, 우리가 변화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우리의 삶과 모든 생활에서의 모습을 조율하고 일치시키는 대화,  즉 커뮤니케이션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기도100%은 우리가 신앙생활과 인격, 기도를 100%로 최선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뜻 안에서 360°의 다양한 환경과 방법으로 응답을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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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쎄(Hermann Karl Hesse. 1877. 7. 2~1962. 8. 9)의 기도

하나님이여,
우리 자신에 대하여 절망케 하옵소서.
하나님에게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 절망케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 자신이
더 이상 지탱할 아무 힘이 없을 때까지 절망케 하옵소서.
그래서 오직 하나님으로만
희망과 소망을 가지게 해 주옵소서.

* 오늘의 묵상(01-11-2021 소개)

라인홀드 니버(Karl Paul Reinhold Niebuhr. 1892∼1971)의 “평온을 비는 기도”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차이를 분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한 번에 하루를 살게 하시고

한 번에 한 순간을 누리게 하시며,

어려운 일들을 평화에 이르는 좁은 길로 받아들이며,

죄로 가득한 세상을, 내가 갖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그분께서 그러하셨듯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제가 그분의 뜻 아래 무릎 꿇을 때,

그분께서 바로잡으실 것을 믿게 하셔서

이 생에서는 사리에 맞는 행복을

내 생에서는 영원토록 그분과 함께 다함이 없는 행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아멘.


Serenity Prayer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Living one day at a time;

Enjoying one moment at a time;

Accepting hardships as the pathway to peace;

Taking, as He did, this sinful world

As it is, not as I would have it;

Trusting that He will make all things right

If I surrender to His Will;

So that I may be reasonably happy in this life

And supremely happy with Him

Forever and ever in the next.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의 기도

하나님께서 편한 길과 반쪽짜리 진리,
피상적인 관계를 불편하게 여기는 심령을 주셔서
마음 속 깊이 침잠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를 빕니다.
 
하나님께서 불의와 핍박, 인간에 대한 착취에
분노할 줄 아는 심령을 주셔서
정의와 자유,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시길 빕니다.
 
하나님께서 아픔과 거절,
굶주림과 전쟁으로 고난당하는 이들을 위해
눈물 흘릴 줄 아는 심령을 주셔서
기꺼이 손을 내밀어 세상의 고통을 어루만지며
괴로움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게 되기를 빕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어리석음의 복을 주셔서
스스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게 하시길 빕니다.
그리하여 다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모든 아이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정의와 사랑을 가져다 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Carol Wimmer)

“나는 기독교인이에요” 라고 말할 때
“난 구원 받았다!” 라고 외치는 게 아니에요.

“난 가끔 길을 잃어요. 
그래서 이 길을 택했어요.” 라고 말하는 거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교만함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발을 헛디뎌 비틀거려서 하나님께서 나의 인도자가 되길 바란다고 고백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강하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약해서 계속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한다고 말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성공했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실패해서 결코 빚을 다 갚을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는 혼돈에 처해 있어서 겸손하게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내가 완벽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 결점이 너무나 뚜렷하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나는 뼈아픈 고통을 여전히 느껴요.

내 마음이 아파서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구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나는 판단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내게는 그럴 권한이 없어요.

내가 사랑받는다는 사실 그 하나만을 안다는 것이에요.


기도(祈禱)는 친밀한 교통(交通)(intimate intercourse)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의 살아 있는 믿음의 표현으로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intimate intercourse)이라고 합니다. 

성부 하나님이 기도를 들었고 응답하시며 성자가 그의 이름으로 중보하시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기도를 활성화시켜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어지게 된다.
칼빈이 말한대로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은 우리에게 참된 지혜와 경건 그리고 건강한 믿음을 준다.

바운즈(E. M. Bounds)

"성도를 만드는 것은 기도의 힘이다. 기도하면 기도할 수록 참된 성도가 되어간다. 기도를 위하여 많은 시간, 특별히 아침 시간을 바치면 성스러운 생활에서 그 효과가 현저하게 나타나게 된다."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문이 열리고, 틀이 형성되며, 그 내용이 규제되기 때문에 철저하게 말씀의 묵상을 요구하며, 말씀 묵상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알기 때문에 확신과 소망을 갖게 합니다. 

또한 마음 속에 깊은 감동과 큰 감격을 심어 주어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므로 기도는 말씀 묵상과 찬미와 더불어 행하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찬미는 말씀에 기초해야 하고, 지나치게 감정적이거나 충동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특권이요, 의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의 은혜를 감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적 사랑에 감격하며 그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중보 기도를 본받아 온
인류와 우주적 교회를 위하여 드리는 우리의 중보기도는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의 지름길이요, 사랑과 믿음과 소망으로 하나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뿐 아니라 형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최상의 방편입니다.

기도(祈禱)의 법칙(法則)


칼빈은 성령과 말씀을 따라 기도함에 있어서 특별히 네 가지의 법칙
1. 경외하는 마음으로
2. 진심으로
3. 겸손하게
4. 믿음으로

첫째 법칙 - 경외하는 마음으로

구약성경에 보면, 에컨대 레위기에 나오는 의식법 등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초월성을 유념하게 하여 우리가 하나님께나 아갈 때 경외심을 가질 것을 강조한다.

신약에서도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위엄이 무한하며 그의 본질을 불가해하고 그의 권능이 한량없으며 그의 존재 또한 영원함을 알게 하려는데 있다고 칼빈은 해석한다.

주기도의 첫째 기원, "이름이 거룩하게 되오며"에 대해서도 칼빈은 이 기원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들려 드릴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큰 수치를 인하여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칼빈은 아주 강조한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대화하며 기도하려는 자들은 합당한 생각과 마음을 가져야 한다.

둘째 법칙 - 진심으로, 열정적으로

성경은 위선적인 기도를 정죄할 뿐만 아니라 기도를 진실하고 열정적으로 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한다.
예수님은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경고하셨고, 기도의 응답이 더딜 때 끈기 있게 기도할 것을 권하였다.
그리고 기도에는 열정적인 열망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여 기도한 세리는 자기의 감정이 고조되어 있음을 표현하여 자기의 가슴을 쳤으며, 그리스도의 기도들은 심한 통곡
과 눈물로 드려졌는데,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셨다.
엘리야도 간절하게 기도했던 것으로 성경은 말한다.
칼빈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자신의 무력함을 항상 느끼며,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필요한가를 간절하게 생각하고서 그것을 응답 받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이 기도에 가미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셋째 법칙 -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겸손한 기도의 전형적인 실례는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이다.
칼빈은 주장하기를 기도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모든 자만심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올바른 기도의 준비와 시작은 겸손하고 성실하게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간구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은 그 뜻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사실상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 결정되며 우리 스스로 기도의 내용을 조작하지 않게 된다.
이로써 겸손하고 순복하는 기도가 가능하다.

넷째 법칙 -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성경이 분명하게 지시하는 바에 의하면 믿음은 응답받는 기도의 필수 조건이다.
칼빈이 제시하는 넷째 법칙은 기도하되,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리라는 확실한 소망을 품고서 용기를 내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지는 것은 모두 믿음을 통해서 얻는다고 하는가 하면, 사람들은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것이요, 공포심 없이 그러나 경외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고 칼빈은 또한 말한다.

칼빈이 제시한바 네 가지 법칙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185문답)에 다음과 같이 진술되어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며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과 필요한 것들과 죄악들을 깊이 깨닫고 마음으로 회개하며 감사하고 열심을 품되 이해, 믿음, 신실, 열정, 사랑 그리고 인내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뜻에 겸손히 순복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祈禱) / 마태복음 6:7∼9a

7. 또 기도(프로슈코메노이)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아이테사이=아이테오)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어떤 것일까?

기도로 하나님에게 생각을 하게하고, 내 기도로 인해 하나님이 하나님의 계획을 별도로 세우거나 바꾸거나 하게 할 수 있는 것인가?
피조물인 사람의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왜 기도를 하나님은 또는 예수님은 하게 하신 것인가? 

여러분은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절대 주권자시며,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이나 생각을 인간이 하는 기도로 바꾸시거나 혹은 인간이 하는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과연 바꿀 수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열심히 기도를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속성을 속성대로 믿는 기도일까요?

아니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왜 자기가 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이 그 때 그 때 바뀌는 것처럼 생각이 돼서 열심히 기도를 하는 믿음이 생기는 것일까요?

지금 기도 자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할 때 누가 주어냐? 즉 누구를 위한 기도냐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 역시 돈 문제로 정말 너무너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정말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정확히 3년 동안 매달을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넘어갈 수 있도록 해주신 예수님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소중한 체험인데요, 그래서 지금도 저는 예수님 경리과장 같은 예수님이라는 말을 농담처럼 곧잘 합니다. 예수님처럼 정말 정확한 분은 없는 것을 저는 너무 잘 압니다. 그리고 많은 목사님들 역시 기도가 만능인 것으로 생각을 하는 목사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기도는 왜 하는가?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가 도대체 무엇인지 아는 것이 기도에 대해 이런 생각을 깊이 하면서 성경 말씀들을 찾아가보면, 기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팔랄
- 간섭하다, 판단하다, 중재하다, 기도하다.

“팔랄”이란 기도는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입니다.
히브리어 단어 해석이 사실은 참 어렵습니다.
히브리어를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 해석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도의 대표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어 “팔랄”은 “간섭하다, 판단하다, 중재하다, 기도하다”는 뜻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외에는 계시지 않는 것을 구약의 기도를 대표하는 “팔랄”이라는 단어에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팔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 . .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요나 2:1,2,10)


옛날 히브리 사람들은 기도를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브라함과 요나, 모세, 그리고 다윗에게 기도는 무엇을 의미하였던 것일까? 그들이 생각하던 기도의 개념은 오늘날 크리스천이 생각하는 기도의 개념과 어떻게 달랐을 것인가?


기도의 문자적 의미 - 입과 지팡이

구약성경에서 대표적으로 사용된 기도하다는 뜻의 히브리어는 ‘팔랄’이다.
앞에 접두사 테를 붙이면 테필라, 즉, 기도라는 명사가 된다.
팔랄의 어근은 ‘팔’인데 ‘페이’와 ‘라메드’의 두 글자로 되어있다.
‘페이’는 입을 뜻하는 상형문자로서 여기서는 말을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한편 ‘라메드’는 권위를 상징한다.
원래 라메드는 양치는 목자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긴 지팡이를 그린 상형문자이다.
목자는 그 지팡이를 가지고 양떼의 가고 멈춤과 모든 행동을 결정하며 다스린다.
양들의 입장에서 보면 또한 그 지팡이는 자기들을 맹수로부터 보호하는 강한 힘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팔’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권위자에게 말하다”라는 뜻이 된다.

한편 땅에 떨어지거나 엎드리다는 단어 ‘나팔’도 같은 어근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팔랄이라는 단어의 문자적 해석은 “권세를 가진 사람의 앞에 엎드려 송사를 올리거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옛날에는 성문이나 광장에 유력자가 모습을 나타내면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자신이 당한 억울함이나 부당한 일들에 대하여 고하며 이에 대하여 정의의 심판을 내려줄 것을 간구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사무엘하 15장에 보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하여 일찍 성문으로 나가 재판관을 자칭하며 모든 송사를 가진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고 왕의 신하를 대신하여 심판을 내려주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에는 누구든지 개인적으로 부당한 일을 당하여 곤경에 처하였든지 아니면 그 지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잘못된 관행이나 부정행위에 대하여 분개한 사람은 권세를 가진 사람에게 찾아가 목소리를 높여 진정을 올리고, 권세자가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고 상황에 개입하여 왜곡된 질서를 바로잡아 주기를 절실하게 구하였다.

그러면 그 권세자가 그 진정된 바를 토대로 잘잘못을 가리고 훼손되었던 정의를 다시 회복시켜 주었는데 그 것이 바로 심판이다.
그러므로 팔랄의 또 다른 뜻에 ‘심판하다’ 또는 ‘중재하다’가 있다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시편 106편에 비느하스가 하나님을 능멸한 악인들을 정죄하고 처벌한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정죄의 행위가 바로 같은 히브리어 ‘팔랄’이다. 하나님은 이를 영원하게 흔들리지 않을 의라고 여기셨다.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 때에 비느하스가 일어나 처벌하니(팔랄)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이 일을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 대대로 무궁하리로다” (시편 106:28-31)

따라서 팔랄(기도)의 본질적 의미는 다름 아니라 정의가 손상된 것에 대하여 강한 정의감을 가지고 권세자에게 진정함으로써 정의를 다시 바로잡는 행위를 뜻한다.
그 권세자 중에 가장 높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 지고의 권세자에게 하는 팔랄이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인간인 재판관에게 가서 말하면 송사라고 하고,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은 기도라고 완전히 서로 다른 단어로 분리하여 버렸지만, 옛 히브리어에서 재판관에게 하든지, 왕에게 하든지, 하나님에게 하든지 모두 팔랄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권세자에게 고하는 것이고, 정의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왕과 통치자는 모두 하나님의 대리인이므로 (로마서 13:1) 그들에게 송사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게 고하는 것이 된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로마서 13:1-2)

영적 의미 - 하나님의 정의를 위하여

정의가 손상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생명이 훼손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큰 영적 원리에서 보면 죄로 인하여 저주가 왔고 저주로 인하여 죽음이 온 세상을 덮어 다스리게 되었다. 그런 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짓밟힌 생명에 대하여 가슴 아파하며 그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에게 고하는 것이 기도이다. 고대 히브리 개념상 재판관은 생명을 회복시키는 자를 뜻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 즉, 법은 생명이고, 그 법을 확립하는 것은 생명을 지키고 살리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영적 원리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팔랄이다.

생명이 손상되고 정의가 무너져 가는 것은 개인적인 삶에서도 벌어지며, 지역사회와 나라 차원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자기와 자기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라 자기가 속한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불의와 생명의 파괴에 대하여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해될 것이다.


성경에 팔랄이 가장 처음 등장한 곳이 창세기 20장이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남방으로 이사가서 아비멜렉왕의 땅에 살게 되었는데,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사라가 아내인 것을 감추고 그녀를 누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비멜렉이 자칫 사라를 아내로 취하려고 하였는데, 그결과 아비멜렉에게 멸족의 재앙이 오게 되었다. 아비멜렉에게 잘못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꿈을 통하여 그에게 경고를 하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를 위하여 기도하도록 하셨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팔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줄 알찌니라 . . .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팔랄)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창세기 20:7, 17)


성경에 처음 나오는 기도의 상황치고는 약간 어이가 없는 것 같다. 아브라함이 두려움에서 지어낸 거짓말의 결과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고, 하나님은 급히 아비멜렉에게 재앙을 피할 방법을 제시하셔야 했는데, 그것이 아브라함의 기도였다. 그 상황이 어찌 되었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팔랄(기도)을 함으로써 억울한 죽음을 막고 생명을 회복시킨 점이다. 그 점이 팔랄의 본질을 보여준다. 기도를 하는 아브라함으로 치면 그리 떳떳한 입장도 아니었다. 아브라함이 완벽했냐 아니냐가 기도 응답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도가 이루어지고 아니고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 즉, 하나님의 법, 생명의 법을 세우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한편 누군가 죽을 죄를 범하고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할 경우에도 대변자가 나타나 권세자에게 탄원하고 긍휼을 구할 수 있다. 긍휼과 자비에 의한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에서 구하기 위해서 여러 번 ‘팔랄’을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닥칠 때 마다, 모세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서서 진정을 하고 송사를 하여 멸망을 막고,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오므로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였느니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멸하겠다 하셨으므로 내가 여전히 사십 주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리고 여호와께 간구(팔랄)하여 가로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위엄으로 속하시고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을 멸하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이 백성의 강퍅과 악과 죄를 보지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내신 그 땅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일 능력도 없고 그들을 미워도 하사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하여 내셨다 할까 두려워하나이다. 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였었노라” (신명기 9:24-29)


고개가 뻣뻣하고 끊임없이 거역하며 자기를 해하려고 까지 한 이스라엘 백성이 뭐가 예뻐서 모세가 그리하였겠는가? 끝 까지 오로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 하나님의 의를 지키기 위해서 모세는 개인적인 감정을 초월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중보자가 되었다. 우리의 판단과 감정을 따르는 대신,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것인가 만을 기준으로 기도할 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한 기도가 진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44)


열렬한 기도와 기적

권세자 앞에 엎드려 부당한 상황을 바로잡고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간절히 진정하는 히브리어 ‘팔랄’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유추할 수 있다.
사람들은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인간인 권세자 앞에서도 ‘아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열을 올리면서 항변을 하고 진정을 하지 않을 것인가?
하물며 최고의 권세자이신 하나님께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제가 뭐 알겠습니까. 그저 잘 알아서 하옵소서’ 하고 돌아서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화를 통하여 바로 그 점을 가르치려고 하셨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8:1-8)

팔랄은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나아가 ‘아니 이 세상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불의를 이대로 내버려 두시렵니까?’ 하면서 마치 따지기라도 하듯이 항변이라고 할 만큼 당당하게 하나님께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유다의 멸망을 앞둔 마지막 때 선지자 하박국이 패악이 만연하고 불법이 자행되는 현실을 보고 부르짖었던 것과 같이 ...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하박국 1:2-4)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성경은 말한다 (야고보서 5:16).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팔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아들 사무엘을 얻고 의를 회복한 것처럼 (사무엘상 1:10-11), 또 히스기야왕이 “사자의 손에서 글을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놓고 .....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으로 주만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하며 기도(팔랄)하여 아수르의 침략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지킨 것처럼 (이사야서 37:14-15, 20), 의인의 열렬한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기적을 가져 온다. 시편 118장에 보면 우리의 기도를 주께서 응답하실 때, 주가 행하신 것을 ‘우리 눈에 기이한 바’라고 칭송하였다. 그 '기이한 바'가 히브리어로 기사와 이적을 뜻하는 ‘팔라’인데, 바로 이 단어가 또한 ‘팔랄’과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형제어라는 사실이 참 인상적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드린 기도를 주께서 응답하시어 멋들어지게 정의를 행하신 것을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 때 우리의 영혼은 짜릿한 감동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감사를 경험하게 된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팔라)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시편 118:21-24)





카라 
- 기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카라”는 기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샤알
- 요구하다 기원하다

“샤알”은 “요구하다, 기원하다”라는 뜻입니다. 

파가
- 중재로서 탄원

“파가”는 “중재로서의 탄원”을 뜻합니다.

“할라”
- 은혜를 구할 때 사용하는 단어

“할라”는 흔히 은혜를 구할 때는 쓰이기도 하는 단어입니다(시편 119:58).

내가 전심으로 주의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I have sought your face with all my heart; be gracious to me according to your promise.    

자아크
-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 구하는 것

“자아크”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부르짖는 것을 말합니다(삿 3:9, 시 22:5).

라난
- “라난”은 “소리치다, 외치다”(시 17:1, 렘 31:12, 애 2:19)

샤와
“샤와”는 “도움을 청해서 부르짖다”

샤하르
“샤하르”는 “구하다”

‘나’는 부드럽고 신중한 요청으로 애원, 소원, 허락 등등

‘린나’는 슬픈 또는 진정성을 담은 느낌으로 외침, 함성, 부르짖음(시 17 : 1)

‘테필라’는 중재, 탄원, 간청, 애원, 기도 또 넓은 의미로는 찬송이나 거룩한 노래로 어근(語根)은 ‘팔랄’에서 온 변형 단어

תְּפִלָּה 테필라

‘말씀’과 ‘기도’는 기독교 신앙생활의 두 중심축이다.
히브리어로 <테필라 תְּפִלָּה>
동사 <팔랄 פָּלָל>에서 파생하였다.
히브리어에서 ‘기도하다’란 뜻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동사는 매우 다양하다.

예컨대 ‘말하다’란 동사 <아마르 אָמַר>는 하나님께 아뢰고 또 하나님께서 응답하는 대화의 동작을 묘사하는데 종종 ‘기도하다’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그 외에도 ‘요구하다’란 뜻의 동사 <샤알שָׁאַל >도 종종 ‘간구하다’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또 ‘간구’<터힌나 תְּחִנָּה>란 명사는 ‘기도’<터힐라>란 명사와 나란히 병렬되어 나오기도 한다.

‘기도’<테필라 תְּפִלָּה>를 더욱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사 <팔랄 פָּלָל>의 의미를 더 연구해 보아야 한다.

<팔랄>이란 동사가 무슨 뜻으로 쓰였는지 알기는 매우 어려워서 학설도 여러가지이다.
백여 년 전에 독일의 벨하우젠(J. Wellhausen)이라는 학자가 ‘칼날’과 관련된 아랍어 동사 <팔라>과 연관이 있어서 히브리어 <팔랄>은 ‘자상을 내다/상처를 내다’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았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제의 중에 광란하면서 자기 몸에 칼로 자상을 내는 관행을 가리킨다. 성경의 율법은 그러한 우상숭배의 관행을 금지한다(신 14:1).


벨하우젠의 주장과는 달리 아랍어 <팔라>와의 연관성은 인정하지만 그 의미는 ‘자르다’라고 보는학자들이 있다. 이 의미에서 ‘구별하다’란 뜻으로 확장되고 나중에는 ‘판결하다’란 뜻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 중에 <펄릴라>는 ‘재판관’이란 뜻인데 이러한 확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어떤 학자들은 동사 <팔랄>이 본디 ‘넘어지다’란 뜻이었는데 이것이 발전하여서 엎드려 절하는 동작과 연결되면서 ‘기도하다’란 의미로 발전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스파이저(Speiser)는 <팔랄>은 ‘평가하다, 고려하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창 48:11; 삼상 2:25; 겔 16:52; 시 106:30같은 구절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동사가 피엘로 쓰이면 ‘생각하다, 고려하다’란 뜻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성경에서 히브리어 <팔랄> 동사는 84회 나오는데 대부분 히트파엘(재귀형)로 사용되고 있다.
이동사가 히트파엘(재귀형)로 쓰이는 경우에 ‘기도하다’라고 번역한다.
본디 ‘자르다, 구별하다, 고려하다’란 뜻의 이 동사가 히트파엘(재귀형)로 사용되면 그 뜻이 변하여 ‘기도하다’란 뜻이 되는지 그 이유를 알기가 쉽지 않다.

동사 <팔랄>의 의미 중에 ‘구별하다’란 의미가 ‘재판하다’란 뜻으로 확장되었는데 이것이 히트파엘로 쓰이면서 ‘하나님을 재판관으로 삼다’란 뜻으로 의미가 더욱 확장되었다고 보는 주장이 있다.

골드만(Goldman)은 분들은 <팔랄>에 ‘자르다/깨뜨리다’란 뜻이 있음에 주목하여 이것이 히트파엘(재귀형)으로 되면 ‘자기 자신을 깨뜨리다’란 뜻이 되어서 ‘통한하며 뉘우치다’란 뜻이 되고, 이것이 ‘기도하다’란 뜻으로 정착되었다고 본다.


토마스(A. Thomas)는 ‘결정하다, 해결하다’란 뜻이 재귀형이 되어서 ‘중재자로 활동하다’란 뜻이 되는데 여기서 ‘기도하다’란 의미로 발전했다고 본다.

또 어떤 분들은 ‘평가하다’란 동사에서 히트파엘(재귀형)이 되어 ‘자신을 되돌아보다’란 뜻이 되면서 기도하는 행위를 가리키게 되었다고 본다.

이처럼 ‘기도’<테필라>란 단어에 관한 어원을 따져보는 학설은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주장들을 종합해 보면 일정한 공통성이 발견된다.
‘기도’는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자신의 행위를 평가하고 반성하는 행위가 기본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반성의 기준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세우는 행위가 기도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기도’에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말씀’이 없이는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가 될 수 없다.

무릇 종교라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모든 종교는 기도를 강조한다.
기도 없는 종교는 없다.
그러나 다른 종교의 기도와 기독교의 기도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기독교의 기도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기도를 말씀에 입각해서 드리도록 가르치고 있다.
바알종교는 기도자 자신의 여망을 이루기 위해서 바알 신에게 자신의 존재를 바치는 표현으로서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광란의 기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야훼 종교는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움으로써 늘 말씀의 실존으로 자신을 변화시켜가는 기도를 가르친다.

오늘 한국교회는 바알종교의 기도를 드리는가, 아니면 야훼종교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사람이 귀를 둘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언 28:9).





‘테힌나트’ ‘간구’로 번역되는 단어로, 불쌍히 여기다(욥 19 : 21)라는 뜻을 지닌 동사‘하난’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외에도 히브리어에서의 기도로 생각할 수 있는 단어들은 많이 있는데, 기도나 간구나 구함 등, 기도에 해당하는 단어로 번역이 될 수 있는 단어들에 대해 살펴본 것처럼, 구약의 모든 단어들은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나 제의(祭儀) 또는 예배, 왕과 백성 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구하거나 애원하거나 청원을 하거나 부르짖는 것 등이 모두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런 단어들이 쓰이는 점에서, 이 역시 구약의 기도는 기도에 대한 예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8:26∼30 

26. 그런즉 이스라엘 하나님이여 원컨대(나) 주는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 확실하게 하옵소서.
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28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테필라트=테필라)와 간구(테힌나트=테힌나)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하린나=린나)과 비(미트팔렐=팔렐)는 기도(핫테필라=테필라)를 들으시옵소서.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핫테필라=테필라)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이템팔렐루=팔랄=그들이 기도하게 될) 때에 주는 그 간구함(테힌나트=테힌나)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길게 솔로몬이 ‘그런즉’으로 기도와 간구를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얼핏 번역 말씀을 보면, 솔로몬이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에게 하나님의 귀한 백성을 위해 다윗의 후손들에게 왕권을 주시며 맡기신다고 말씀을 하셔놓고 왜 이제 와서 하나님이 딴 말씀을 하십니까? 이런 항변의 뜻으로 이런 기도와 간구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 솔로몬은 온 우주보다도 더 큰, 하늘 위의 하늘에 계시는 어마어마한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그 크신 하나님이 하찮은 자신이 짓는 지상에 있는 작은 건물 안에 하나님이 계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런 낮은 마음으로 ‘그런즉’으로 이어지며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와 간구입니다.

이 말씀에서 ‘기도’는 히브리어 ‘테필라트’로 원형이 ‘테필라’인데 어근이 ‘팔랄’입니다. 뜻은 앞에서 말씀을 드린대로 ‘판결하다(삼상 2:25)’, ‘기도하다(삼상 1:21)’라는 뜻과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드리는 중보기도’를 ‘팔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중보기도’를 할 때 ‘팔랄’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한‘테필라’는 의미가‘팔랄’보다 훨씬 더 낮은 자세로 애타게 애원하는 기도를, 솔로몬이 하나님이 아버지인 다윗에게 하신 언약의 말씀을 생각을 하면서 아주 낮은 자세로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가 ‘테필라’기도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간구’는 ‘테힌나트’인데, 뜻은 ‘긍휼이 여기다(단 4:27), 불쌍히 여기다(욥 19:21)라는 뜻을 지닌 동사 ‘하난’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간구’는 자신이 떳떳하게 하나님에게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명사 수 11 : 20)로 탄원(명사 렘 37 : 20)을 간구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시고 제 간구를 들어달라는 뜻이 ‘간구’라는 ‘테힌나트’라는 단어의 뜻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린나’는 ‘외치다(시 78 : 65)’, ‘기뻐하다(시 32 : 11), ’‘부르짖다(애 2 : 19)의 뜻을 가진 ’‘라난’에서 온 명사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이 말씀에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이 왕권을 주실 것을 언약하신 다윗과 그 후손을 포함한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대표하는 중보자로써의 기도를 하나님의 은혜로 불쌍히 여겨서 들어주실 것을 부르짖는 기도와 간구라는 것이 원어 의미의 기도와 간구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은 다윗에게 언약하신 말씀이 아니고, 모세에게 성막 성전을 짓게 하실 때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실 것을 스스로 말씀하신 것을 상고하면서, 29절에서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거하실 곳에 대한 말씀이 계속 나옵니다. 이 말씀에서 이곳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세상을 예표하는 애굽에서 구원을 해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모세에게 짓도록 한 성막 성전인데, 성막성전이기 때문에 이동을 하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덮으시며 하나님이 인도를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화인줄을 알게 하시고 또 자신이 그런 하나님인 것을 하나님의 백성은 알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이런 기도와 간구는 열왕기 상 9절 3절에서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은 이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하나님의 눈이 바라보시는 성전을 향해서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믿고 이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향해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을 계속 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떤가?

 

왕상 9 : 1-9

1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의 무릇 이루기를 원하던 일이 마친 때에

2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3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 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이 말씀에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 구약의 모든 율법이나 계명은 율법이 완성이 되고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신약으로 다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대속으로 인한 죄 사함과 그로 인해서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진리와 복음입니다. 따라서 이 진리와 복음 외에 다른 진리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것이 곧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기복신앙, 율법신앙, 성경 말씀에서 벗어난 신비주의를 생각하면 무슨 말씀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기도에 대한 단어가 훨씬 더 명료해지고 간단해집니다.

 

프로슈케 : ‘프로슈케’는 명사인데, 동사인 ‘프로슈코마이’와 함께 70인 역에서 히브리어 기도를 번역하는 단어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프로슈케’는 명사로는‘요청’이고, ‘프로슈코마이’는 동사로 ‘요청하다’라는 뜻인데, 중요한 것은 ‘프로슈케’나 ‘프로슈코마이’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요청이라는 단어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데오마이 : ‘요청하다’‘바라다’라는 뜻인데 하나님이나 사람 등 모두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데에시스 : ‘요구하다’‘요청하다’‘바라다’라는 뜻인데, 이 단어 역시 하나님이나 사람들 모두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엔테우시스 : ‘애원’이라는 뜻으로 지배자 또는 왕에게 청원이나 애원을 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

아이테오 : 구하다. 요청하다. 사람끼리도 당연히 해당되는 단어.

유카리스티아 : ‘감사’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토스’인데 ,‘유’는 ‘좋은’이라는 뜻이고, ‘카리스토스’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감사’로 번역이 되는‘유카리스토스’는 ‘하나님의 좋은 은혜’‘의롭고 선하신 은혜’를 ‘유카리스토스’로 ‘성경적인 감사’라는 뜻이 어떤 감사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온 단어가 기도로 번역이 되는 ‘유카리스티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은 은혜’‘의롭고 선하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좋은 은혜는 삯이 아닌 은혜로 거져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얻는 죄 사함과 이로 인해서 얻는 성령에 의한 거듭남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음으로써 신약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 은혜를 감사하며 드리는 것이 예표적이 아닌, 본체적 의미에서의 기도임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약적 의미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성경적인 기도는 무엇이겠습니까?

​신약적 의미의 본체적 기도는 구약의 예표적인 기도와는 다르게 사람이 사람을 대신하는 중보기도는 인간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딤전 2 : ​5, 6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그러면 사람들은 왜 기도를 하는가?

첫째로 사람들이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시간과 공간에 가두어서 창조를 해서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에 인간은 미래의 일을 알 수 없고 그래서 무엇엔가 또 자신이 원하고 구하는 것들을 기도를 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창조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는 누군가를 향해서 하는 것인데, 기도나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닌, 사단 마귀의 미혹에 빠져서 사단 마귀가 기뻐하는, 생명의 길이 아닌, 사망의 길로 인도하는 내용의 기도를 부지불식 간에 우리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도는 안테나의 방향이 달라지고, 기도하는 대상이 달라지면 기도의 응답이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담 부부나 예수님이 성령에게 이끌려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말씀을 생각하면 분명히 알 것입니다.

 

둘째 기도를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육적 결핍과 영적인 결핍 때문에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은 육적 결핍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은 아주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육의 결핍을 채우려는 기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 세상에 속한 백성들이 하는 기도인 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육적인 결핍을 채워달라고 하는 기도는, 원어적으로 보면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프로슈케’또는‘프로슈코마이’가 아닌, 데오마이, 데에시스, 엔테우시스에 해당하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 6 : 53- 63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래서 어떤 이유로든지 살리는 것에 무익한, 육을 위한 것은 기도가 됐건, 예배가 됐건, 설교가 됐건, 찬양이 됐건, 영광을 돌리는 것이 건 간에 그 어떤 것도, 살리는 것에는 무익한 것이 대상이 되면 안 됩니다.

 

사 29 :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계명과 율법의 마침이 되는 분시신 것을 생각을 하면, 신약적으로 왜 하나님이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시는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원어로 보았을 때, 프로슈코마이와 유카리스티아 기도 두 단어 외에는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한, 자랑할 것은 오직 자신의 연약함과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대속과 성령으로의 거듭남을 생각하면, 신약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원어로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유카리스티아로 인해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프로슈코마이 기도가 되지 않는 것(거져 받은 죄 사함의 은혜와 거듭남의 은혜와 사랑)때문에 예수님이 여기서 벗어나는 기도를 싫어하신다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요 16 : 1-3 ; 6-20

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3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말씀이 길었습니다만, 복음교실은 침례교는 어떻고 감리교는 어떻고 이단들은 어떻고 가톨릭은 어떻고 이런 말 하는 것 아닙니다.

또 예수님은 얼마나 열심히 크게 부르짖는 기도를 하느냐 이런 것이 아니라 네가 진정으로 ‘프로슈코마이와 유카리스티아 기도를 하느냐?’ 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친히 자신이 알려주시는 주의 기도인 것을 예수님은 제자들인 깨닫게 하시려는 기도에 해한 말씀인 알아야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배나 찬송이나 기도나 모든 것은 복음교실이 수없이 반복을 하며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예배, 찬송, 기도가 되어야 하고, 이것은 결국 과연 나는 진정한 주어를 누구로 믿느냐의 문제이고, 따르느냐의 문제로 연결이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주어 문제는 결국 하나님의 속성을 속성대로 모두 빼놓지 않고 믿느냐, 믿지 않는 믿음이냐에 연결이 되고, 이 신앙으로 참 신앙과 짝퉁 신앙이 나누어지는 T형 분기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왕으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에게만 돌린다고 하면서도, 늘 사실은 자신이 주어가 되는, 그런 기도가 되면 안 되는 것을 예수님은 주의 기도를 알려주시기 전 제자들에게 당부로 하신 말씀이 주의 기도에 대한 선행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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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크리스천투데이에서 크리스천이 기도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증상에 관해 소개한 글이 눈길을 끈다.
다음은 우리가 기도의 능력을 간과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 4가지를 소개한다.

1. 진리로 거짓에 맞서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나 계시 그리고 하늘의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해달라고 기도할 때이다.
기도는 의사소통이다.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끊어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진리가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의 능력의 터 위에 확실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의 이름의 능력을 알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다.

2.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

실제로 모든 상황에서 기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분명히 말한다.
우리가 모든 일에 대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매번 당신에게 모든 능력으로 나타나신다.

3. 너무 쉽게 걱정한다.

빌립보서 4장 6절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한다.

기도는 독립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불안에 대한 강력한 대안이다. 걱정할 때 우리는 나 자신, 직장 또는 외부 환경을 신뢰한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선포하는 기도와 간구를 통해 우리는 그분이 완성하신 십자가 사역을 의존하게 된다.

4. 스스로의 대안을 먼저 찾는다.

우리는 항상 기도의 능력을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의 기본값은 계획과 전략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간절하고 신실한 기도에 담을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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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祈禱)

여러분과 나의 생활에서 기도가 없다면 주님과 나 사이가 숨 막히고, 죽어 버린 불모지와도 같을 것입니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있듯이,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있듯이 무의식중에라도, 잠 속에서도 무시로 불러보듯 주님을 향한 우리의 생각을 멈출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언어 없는 침묵의 기도도, 신음도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기도 없이 지나친 적이 없듯 우리의 전 존재가 기도일 것입니다.
때로는 탄식처럼 호소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기뻐서 찬송이 온통 기도일 때가 있고, 죄악을 자백하면서 눈물 흘릴 때도, 간구로 몇 날을 지날 때도 있습니다. 물질적인 필요, 건강의 필요, 가족과 자녀에 관한 문제, 진로, 그리고 민족과 세계를 위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기도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을 위해 생명을 걸고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버림을 받을지라도, 사도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짐을 받더라도, 존 낙스는 죽음이냐 스코틀랜드냐,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결사적인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저절로는 안 되는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구할 때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해 특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경 말씀과 주님을 생각하면서 모든 언어가 정지된 상태에서 전 존재의 문을 다 열고 주 앞에서 기도의 일광욕을 하면 많은 변화를 받고 깊은 은혜에 젖어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함을 받았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중 하나가 기도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하려 함이라”(요 14:13)

테니슨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이냐? 나는 어린아이처럼 이것저것 달라고 조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아이처럼 기도하는 자세, 피조물 의식을 갖고 모든 것을 신뢰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기도의 제목으로 너무 큰 것도, 너무 작은 것도 없습니다. 기독교의 4대 인물은 사도 바울, 어거스틴, 루터, 요한 웨슬레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의 생활 역시 기도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였고, 어거스틴은 기도의 생활 속에 깊은 경건이 있었습니다. 루터는 하루에 3~4시간 동안 기도 속에서 전투를 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퍼드대학에서 홀리 클럽(Holy Club)운동을 벌이면서, 학생 시절과 교수 생활까지 합해서 15년 동안 20여 명의 우수한 학생들을 모아 놓고 매일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기도와 성경 읽는 것을 일과로 삼았습니다.


1727년 독일의 헤른후트라는 곳에서 경건파 지도자들이 모여서 시작한 모라비안 운동은 처음부터 기도를 제일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48명이 24시간 연쇄(連鎖)기도를 시작한 이래로 100년 동안 그 제단에 기도의 불이 꺼진 일이 없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도 이 모라비안의 모임에서 변화를 받아 감리교를 창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100년 동안 불을 끄지 않고 24시간 연쇄기도를 한 단체는 이 모라비안 선교단 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성숙한 크리스천이라도 하나님의 우주 드라마 속에서는 작은 나사못 역할밖에 못합니다.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작은 부분을 완전히 감당해 내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기도는 힘을 생산해 냅니다. 기도는 없는 것을 있게 합니다. 기도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가져오게 합니다. 기도는 사물을 변화시킵니다. 자기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창조력이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이 생겨나고, 터널이 뚫리고, 돌같이 굳은 마음이 살같이 부드러워집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늘 규칙적으로 기도하시고, 밤 새워 기도하시고,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시고, 제자들을 택하시기 전에, 그리고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신 기도의 생활이었습니다. 기도 최우선의 삶을 젊었을 때부터 길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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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도로 말하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내게 말하지 않은 기도는 독백이다. 
공상에 흐르고 만다. 
주님과 만나지기만 하면 결코 밤이 그대로 밤일 수 없다. 
소경은 눈이 잠긴 채로 있을 수 없다. 
죽은 자도 그대로 무덤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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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무엇엔가 얽매이고 쫓기는 삶을 살고 있다. 
고요한 시간, 주님과 나만의 장소, 묵상과 기도와 성경 속에 파묻히는 하루의 30분이 없이 영적 생명이 유지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잠자는 시간을 줄이더라도, 하고 있는 일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려서라도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회복해야 한다. 
여기에 크리스천의 산실(産室)이 있고, 생존의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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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꿈을 심고 가꾸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사람의 생각 속에 꿈을 잉태시킨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임신이 되듯이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던 것을 “나는 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환상과 꿈과 가능성을 심어 주신다. 내게 심어진 꿈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것이 기도의 열매라고 하겠다. 2021년 나의 꿈을 내 가슴에 심고 그 꿈을 기도와 말씀으로 가꾸면서 2021년 마지막 날에 열매가 어떻게 맺혔는지 결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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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祈禱)
마태복음 6:7∼9a


7. 또 기도(프로슈코메노이)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아이테사이=아이테오)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성경 원어로 풀어보는 기도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어떤 것일까?
기도로 하나님에게 생각을 하게하고, 내 기도로 인해 하나님이 하나님의 계획을 별도로 세우거나 바꾸거나 하게 할 수 있는 것인가?
피조물인 사람의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왜 기도를 하나님은 또는 예수님은 하게 하신 것인가? 

여러분은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절대 주권자시며,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이나 생각을 인간이 하는 기도로 바꾸시거나 혹은 인간이 하는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과연 바꿀 수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열심히 기도를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속성을 속성대로 믿는 기도일까요?

아니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왜 자기가 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이 그 때 그 때 바뀌는 것처럼 생각이 돼서 열심히 기도를 하는 믿음이 생기는 것일까요?

지금 기도 자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할 때 누가 주어냐? 즉 누구를 위한 기도냐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 역시 돈 문제로 정말 너무너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정말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정확히 3년 동안 매달을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넘어갈 수 있도록 해주신 예수님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소중한 체험인데요, 그래서 지금도 저는 예수님 경리과장 같은 예수님이라는 말을 농담처럼 곧잘 합니다. 예수님처럼 정말 정확한 분은 없는 것을 저는 너무 잘 압니다. 그리고 많은 목사님들 역시 기도가 만능인 것으로 생각을 하는 목사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기도는 왜 하는가?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가 도대체 무엇인지 아는 것이 기도에 대해 이런 생각을 깊이 하면서 성경 말씀들을 찾아가보면, 기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팔랄
- 간섭하다, 판단하다, 중재하다, 기도하다.

“팔랄”이란 기도는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입니다. 히브리어 단어 해석이 사실은 참 어렵습니다. 히브리어를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 해석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도의 대표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어 “팔랄”은 “간섭하다, 판단하다, 중재하다, 기도하다”는 뜻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외에는 계시지 않는 것을 구약의 기도를 대표하는 “팔랄”이라는 단어에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카라 
- 기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카라”는 기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샤알
- 요구하다 기원하다

“샤알”은 “요구하다, 기원하다”라는 뜻입니다. 

파가
- 중재로서 탄원

“파가”는 “중재로서의 탄원”을 뜻합니다.

“할라”
- 은혜를 구할 때 사용하는 단어

“할라”는 흔히 은혜를 구할 때는 쓰이기도 하는 단어입니다(시편 119:58).

내가 전심으로 주의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I have sought your face with all my heart; be gracious to me according to your promise.    

자아크
-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 구하는 것

“자아크”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부르짖는 것을 말합니다(삿 3:9, 시 22:5).

라난
- “라난”은 “소리치다, 외치다”(시 17:1, 렘 31:12, 애 2:19)

샤와
“샤와”는 “도움을 청해서 부르짖다”

샤하르
“샤하르”는 “구하다”

‘나’는 부드럽고 신중한 요청으로 애원, 소원, 허락 등등

‘린나’는 슬픈 또는 진정성을 담은 느낌으로 외침, 함성, 부르짖음(시 17 : 1)

‘테필라’는 중재, 탄원, 간청, 애원, 기도 또 넓은 의미로는 찬송이나 거룩한 노래로 어근(語根)은 ‘팔랄’에서 온 변형 단어

‘테힌나트’‘간구’로 번역되는 단어로, 불쌍히 여기다(욥 19 : 21)라는 뜻을 지닌 동사‘하난’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외에도 히브리어에서의 기도로 생각할 수 있는 단어들은 많이 있는데, 기도나 간구나 구함 등, 기도에 해당하는 단어로 번역이 될 수 있는 단어들에 대해 살펴본 것처럼, 구약의 모든 단어들은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나 제의(祭儀) 또는 예배, 왕과 백성 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구하거나 애원하거나 청원을 하거나 부르짖는 것 등이 모두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런 단어들이 쓰이는 점에서, 이 역시 구약의 기도는 기도에 대한 예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8:26∼30 

26. 그런즉 이스라엘 하나님이여 원컨대(나) 주는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 확실하게 하옵소서.
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28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테필라트=테필라)와 간구(테힌나트=테힌나)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하린나=린나)과 비(미트팔렐=팔렐)는 기도(핫테필라=테필라)를 들으시옵소서.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핫테필라=테필라)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이템팔렐루=팔랄=그들이 기도하게 될) 때에 주는 그 간구함(테힌나트=테힌나)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길게 솔로몬이 ‘그런즉’으로 기도와 간구를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얼핏 번역 말씀을 보면, 솔로몬이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에게 하나님의 귀한 백성을 위해 다윗의 후손들에게 왕권을 주시며 맡기신다고 말씀을 하셔놓고 왜 이제 와서 하나님이 딴 말씀을 하십니까? 이런 항변의 뜻으로 이런 기도와 간구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 솔로몬은 온 우주보다도 더 큰, 하늘 위의 하늘에 계시는 어마어마한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그 크신 하나님이 하찮은 자신이 짓는 지상에 있는 작은 건물 안에 하나님이 계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런 낮은 마음으로 ‘그런즉’으로 이어지며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와 간구입니다.

이 말씀에서 ‘기도’는 히브리어 ‘테필라트’로 원형이 ‘테필라’인데 어근이 ‘팔랄’입니다. 뜻은 앞에서 말씀을 드린대로 ‘판결하다(삼상 2:25)’, ‘기도하다(삼상 1:21)’라는 뜻과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드리는 중보기도’를 ‘팔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중보기도’를 할 때 ‘팔랄’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한‘테필라’는 의미가‘팔랄’보다 훨씬 더 낮은 자세로 애타게 애원하는 기도를, 솔로몬이 하나님이 아버지인 다윗에게 하신 언약의 말씀을 생각을 하면서 아주 낮은 자세로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가 ‘테필라’기도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간구’는 ‘테힌나트’인데, 뜻은 ‘긍휼이 여기다(단 4:27), 불쌍히 여기다(욥 19:21)라는 뜻을 지닌 동사 ‘하난’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간구’는 자신이 떳떳하게 하나님에게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명사 수 11 : 20)로 탄원(명사 렘 37 : 20)을 간구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시고 제 간구를 들어달라는 뜻이 ‘간구’라는 ‘테힌나트’라는 단어의 뜻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린나’는 ‘외치다(시 78 : 65)’, ‘기뻐하다(시 32 : 11), ’‘부르짖다(애 2 : 19)의 뜻을 가진 ’‘라난’에서 온 명사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이 말씀에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이 왕권을 주실 것을 언약하신 다윗과 그 후손을 포함한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대표하는 중보자로써의 기도를 하나님의 은혜로 불쌍히 여겨서 들어주실 것을 부르짖는 기도와 간구라는 것이 원어 의미의 기도와 간구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은 다윗에게 언약하신 말씀이 아니고, 모세에게 성막 성전을 짓게 하실 때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실 것을 스스로 말씀하신 것을 상고하면서, 29절에서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거하실 곳에 대한 말씀이 계속 나옵니다. 이 말씀에서 이곳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세상을 예표하는 애굽에서 구원을 해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모세에게 짓도록 한 성막 성전인데, 성막성전이기 때문에 이동을 하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덮으시며 하나님이 인도를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화인줄을 알게 하시고 또 자신이 그런 하나님인 것을 하나님의 백성은 알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이런 기도와 간구는 열왕기 상 9절 3절에서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은 이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하나님의 눈이 바라보시는 성전을 향해서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믿고 이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향해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을 계속 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떤가?

 

왕상 9 : 1-9

1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의 무릇 이루기를 원하던 일이 마친 때에

2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3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 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이 말씀에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 구약의 모든 율법이나 계명은 율법이 완성이 되고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신약으로 다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대속으로 인한 죄 사함과 그로 인해서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진리와 복음입니다. 따라서 이 진리와 복음 외에 다른 진리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것이 곧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기복신앙, 율법신앙, 성경 말씀에서 벗어난 신비주의를 생각하면 무슨 말씀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기도에 대한 단어가 훨씬 더 명료해지고 간단해집니다.

 

프로슈케 : ‘프로슈케’는 명사인데, 동사인 ‘프로슈코마이’와 함께 70인 역에서 히브리어 기도를 번역하는 단어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프로슈케’는 명사로는‘요청’이고, ‘프로슈코마이’는 동사로 ‘요청하다’라는 뜻인데, 중요한 것은 ‘프로슈케’나 ‘프로슈코마이’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요청이라는 단어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데오마이 : ‘요청하다’‘바라다’라는 뜻인데 하나님이나 사람 등 모두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데에시스 : ‘요구하다’‘요청하다’‘바라다’라는 뜻인데, 이 단어 역시 하나님이나 사람들 모두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엔테우시스 : ‘애원’이라는 뜻으로 지배자 또는 왕에게 청원이나 애원을 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

아이테오 : 구하다. 요청하다. 사람끼리도 당연히 해당되는 단어.

유카리스티아 : ‘감사’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토스’인데 ,‘유’는 ‘좋은’이라는 뜻이고, ‘카리스토스’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감사’로 번역이 되는‘유카리스토스’는 ‘하나님의 좋은 은혜’‘의롭고 선하신 은혜’를 ‘유카리스토스’로 ‘성경적인 감사’라는 뜻이 어떤 감사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온 단어가 기도로 번역이 되는 ‘유카리스티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은 은혜’‘의롭고 선하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좋은 은혜는 삯이 아닌 은혜로 거져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얻는 죄 사함과 이로 인해서 얻는 성령에 의한 거듭남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음으로써 신약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 은혜를 감사하며 드리는 것이 예표적이 아닌, 본체적 의미에서의 기도임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약적 의미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성경적인 기도는 무엇이겠습니까?

​신약적 의미의 본체적 기도는 구약의 예표적인 기도와는 다르게 사람이 사람을 대신하는 중보기도는 인간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딤전 2 : ​5, 6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그러면 사람들은 왜 기도를 하는가?

첫째로 사람들이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시간과 공간에 가두어서 창조를 해서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에 인간은 미래의 일을 알 수 없고 그래서 무엇엔가 또 자신이 원하고 구하는 것들을 기도를 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창조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는 누군가를 향해서 하는 것인데, 기도나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닌, 사단 마귀의 미혹에 빠져서 사단 마귀가 기뻐하는, 생명의 길이 아닌, 사망의 길로 인도하는 내용의 기도를 부지불식 간에 우리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도는 안테나의 방향이 달라지고, 기도하는 대상이 달라지면 기도의 응답이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담 부부나 예수님이 성령에게 이끌려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말씀을 생각하면 분명히 알 것입니다.

 

둘째 기도를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육적 결핍과 영적인 결핍 때문에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은 육적 결핍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은 아주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육의 결핍을 채우려는 기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 세상에 속한 백성들이 하는 기도인 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육적인 결핍을 채워달라고 하는 기도는, 원어적으로 보면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프로슈케’또는‘프로슈코마이’가 아닌, 데오마이, 데에시스, 엔테우시스에 해당하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 6 : 53- 63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래서 어떤 이유로든지 살리는 것에 무익한, 육을 위한 것은 기도가 됐건, 예배가 됐건, 설교가 됐건, 찬양이 됐건, 영광을 돌리는 것이 건 간에 그 어떤 것도, 살리는 것에는 무익한 것이 대상이 되면 안 됩니다.

 

사 29 :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계명과 율법의 마침이 되는 분시신 것을 생각을 하면, 신약적으로 왜 하나님이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시는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원어로 보았을 때, 프로슈코마이와 유카리스티아 기도 두 단어 외에는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한, 자랑할 것은 오직 자신의 연약함과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대속과 성령으로의 거듭남을 생각하면, 신약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원어로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유카리스티아로 인해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프로슈코마이 기도가 되지 않는 것(거져 받은 죄 사함의 은혜와 거듭남의 은혜와 사랑)때문에 예수님이 여기서 벗어나는 기도를 싫어하신다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요 16 : 1-3 ; 6-20

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3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말씀이 길었습니다만, 복음교실은 침례교는 어떻고 감리교는 어떻고 이단들은 어떻고 가톨릭은 어떻고 이런 말 하는 것 아닙니다.

또 예수님은 얼마나 열심히 크게 부르짖는 기도를 하느냐 이런 것이 아니라 네가 진정으로 ‘프로슈코마이와 유카리스티아 기도를 하느냐?’ 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친히 자신이 알려주시는 주의 기도인 것을 예수님은 제자들인 깨닫게 하시려는 기도에 해한 말씀인 알아야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배나 찬송이나 기도나 모든 것은 복음교실이 수없이 반복을 하며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예배, 찬송, 기도가 되어야 하고, 이것은 결국 과연 나는 진정한 주어를 누구로 믿느냐의 문제이고, 따르느냐의 문제로 연결이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주어 문제는 결국 하나님의 속성을 속성대로 모두 빼놓지 않고 믿느냐, 믿지 않는 믿음이냐에 연결이 되고, 이 신앙으로 참 신앙과 짝퉁 신앙이 나누어지는 T형 분기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왕으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에게만 돌린다고 하면서도, 늘 사실은 자신이 주어가 되는, 그런 기도가 되면 안 되는 것을 예수님은 주의 기도를 알려주시기 전 제자들에게 당부로 하신 말씀이 주의 기도에 대한 선행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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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크리스천투데이에서 크리스천이 기도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증상에 관해 소개한 글이 눈길을 끈다. 다음은 우리가 기도의 능력을 간과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 4가지를 소개한다.

1. 진리로 거짓에 맞서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나 계시 그리고 하늘의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해달라고 기도할 때이다. 기도는 의사소통이다.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끊어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진리가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의 능력의 터 위에 확실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의 이름의 능력을 알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다.

2.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

실제로 모든 상황에서 기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분명히 말한다. 우리가 모든 일에 대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매번 당신에게 모든 능력으로 나타나신다.

3. 너무 쉽게 걱정한다.

빌립보서 4장 6절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한다.

기도는 독립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불안에 대한 강력한 대안이다. 걱정할 때 우리는 나 자신, 직장 또는 외부 환경을 신뢰한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선포하는 기도와 간구를 통해 우리는 그분이 완성하신 십자가 사역을 의존하게 된다.

4. 스스로의 대안을 먼저 찾는다.

우리는 항상 기도의 능력을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의 기본값은 계획과 전략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간절하고 신실한 기도에 담을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99048#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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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祈禱)

여러분과 나의 생활에서 기도가 없다면 주님과 나 사이가 숨 막히고, 죽어 버린 불모지와도 같을 것입니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있듯이,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있듯이 무의식중에라도, 잠 속에서도 무시로 불러보듯 주님을 향한 우리의 생각을 멈출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언어 없는 침묵의 기도도, 신음도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기도 없이 지나친 적이 없듯 우리의 전 존재가 기도일 것입니다.
때로는 탄식처럼 호소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기뻐서 찬송이 온통 기도일 때가 있고, 죄악을 자백하면서 눈물 흘릴 때도, 간구로 몇 날을 지날 때도 있습니다. 물질적인 필요, 건강의 필요, 가족과 자녀에 관한 문제, 진로, 그리고 민족과 세계를 위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기도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을 위해 생명을 걸고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버림을 받을지라도, 사도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짐을 받더라도, 존 낙스는 죽음이냐 스코틀랜드냐,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결사적인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저절로는 안 되는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구할 때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해 특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경 말씀과 주님을 생각하면서 모든 언어가 정지된 상태에서 전 존재의 문을 다 열고 주 앞에서 기도의 일광욕을 하면 많은 변화를 받고 깊은 은혜에 젖어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함을 받았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중 하나가 기도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하려 함이라”(요 14:13)

테니슨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이냐? 나는 어린아이처럼 이것저것 달라고 조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아이처럼 기도하는 자세, 피조물 의식을 갖고 모든 것을 신뢰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기도의 제목으로 너무 큰 것도, 너무 작은 것도 없습니다. 기독교의 4대 인물은 사도 바울, 어거스틴, 루터, 요한 웨슬레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의 생활 역시 기도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였고, 어거스틴은 기도의 생활 속에 깊은 경건이 있었습니다. 루터는 하루에 3~4시간 동안 기도 속에서 전투를 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퍼드대학에서 홀리 클럽(Holy Club)운동을 벌이면서, 학생 시절과 교수 생활까지 합해서 15년 동안 20여 명의 우수한 학생들을 모아 놓고 매일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기도와 성경 읽는 것을 일과로 삼았습니다.


1727년 독일의 헤른후트라는 곳에서 경건파 지도자들이 모여서 시작한 모라비안 운동은 처음부터 기도를 제일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48명이 24시간 연쇄(連鎖)기도를 시작한 이래로 100년 동안 그 제단에 기도의 불이 꺼진 일이 없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도 이 모라비안의 모임에서 변화를 받아 감리교를 창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100년 동안 불을 끄지 않고 24시간 연쇄기도를 한 단체는 이 모라비안 선교단 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성숙한 크리스천이라도 하나님의 우주 드라마 속에서는 작은 나사못 역할밖에 못합니다.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작은 부분을 완전히 감당해 내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기도는 힘을 생산해 냅니다. 기도는 없는 것을 있게 합니다. 기도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가져오게 합니다. 기도는 사물을 변화시킵니다. 자기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창조력이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이 생겨나고, 터널이 뚫리고, 돌같이 굳은 마음이 살같이 부드러워집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늘 규칙적으로 기도하시고, 밤 새워 기도하시고,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시고, 제자들을 택하시기 전에, 그리고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신 기도의 생활이었습니다. 기도 최우선의 삶을 젊었을 때부터 길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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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도로 말하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내게 말하지 않은 기도는 독백이다. 
공상에 흐르고 만다. 
주님과 만나지기만 하면 결코 밤이 그대로 밤일 수 없다. 
소경은 눈이 잠긴 채로 있을 수 없다. 
죽은 자도 그대로 무덤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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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무엇엔가 얽매이고 쫓기는 삶을 살고 있다. 
고요한 시간, 주님과 나만의 장소, 묵상과 기도와 성경 속에 파묻히는 하루의 30분이 없이 영적 생명이 유지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잠자는 시간을 줄이더라도, 하고 있는 일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려서라도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회복해야 한다. 
여기에 크리스천의 산실(産室)이 있고, 생존의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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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꿈을 심고 가꾸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사람의 생각 속에 꿈을 잉태시킨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임신이 되듯이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던 것을 “나는 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환상과 꿈과 가능성을 심어 주신다. 내게 심어진 꿈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것이 기도의 열매라고 하겠다. 2021년 나의 꿈을 내 가슴에 심고 그 꿈을 기도와 말씀으로 가꾸면서 2021년 마지막 날에 열매가 어떻게 맺혔는지 결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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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를  총체적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신문은 범죄백서 같다. 이런 일들은 기도와 금식 외에는 해결되지 않는다. 영적 싸움에 있어서 공중 권세를 잡은 자의 세력을 꺾는 가장 강렬한 힘은 기도다.

구국적 차원에서 기도운동을 전개해야 하겠다. 구국 금식기도는 성서적이다. 블레셋의 굴레에서 미스바의 금식성회, 모압과 암몬의 새일산 연합군 침략 때 여호사밧 왕의 회개금식 선포, 니느웨 성의 삼일 간 회개 금식기도, 하만의 유대인 말살 음모에 대항한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전 유대인들의 삼일 간 금식기도, 요엘서의 금식성회 등 거국적 회개 금식기도가 오늘의 우리에게 국난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는데 본이 될 것 같다.

루터의 기도가 유럽 일천년의 암흑시대에 종교개혁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죤 낙스의 기도가 스코틀랜드를 개혁했다. 허드슨 테일러의 기도가 중국 대륙선교의 길을 개척했다. 리빙스턴의 기도가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에 복음의 길을 열었다. 윌리암 케리의 기도가 인도의 23개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했고, 아도니람 저드슨의 기도가 미얀마 성경을 번역했다. 모라비안 교도의 100년에 걸친 쉼 없는 연쇄기도가 세계 도처에 복음의 문을 열었다.

빅토리아 영국여왕은 왕위 계승을 통고받는 순간 엎드려 기도했다. 64년간의 영국 통치를 성경과 기도로 했다. 영국 역사상 그녀만큼 위대한 왕은 없었다. 중국을 위한 수많은 기도가 지하교인을 낳게 했다. 기도가 동구와 소련의 철의 문을 열게 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공산화되고 북한의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한반도의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던 1976년 12월 나는 19명의 CCC 간사들과 민족을 위한 40일 금식기도를 드렸다. 1980년 3·1절을 앞두고는 거국적으로 40일 간 금식기도 캠페인을 했고, 3·1절 때는 3일 간 3만 명이 산에 가서 금식기도한 일이 있다. 1984년 세계기도성회 때는 연 10만 명이 3일 간 뚝섬에서 금식성회를 했다. 지난 해 연말에는 CCC 대학생 1만 2천명이 여의도 에어돔에 모여 3일 간 금식하며 국난극복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십시일반으로 모은 1억 원의 성금을 어려운 이웃을 돕는 단체에 기증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데 모아진 기도 이상 효과적이고 강렬한 것은 없다. 기도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최대의 원동력이다. 기도는 교회가 가진 도덕적, 영적 부흥, 사회 부흥의 최대 에네르기다. 이 힘이 가동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주님을 위해, 민족의 구원과 통일과 세계 선교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은 기도폭탄을 터뜨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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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공호흡과 기도

흔히들 기도는 호흡과 같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호흡은 누가 가르쳐서 호흡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호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호흡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면 기도하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왜 호흡하는 것을 배워야 할까요?
호흡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호흡이 잘못되어 목숨을 빼앗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목숨을 빼앗는 것은 아니지만 잘못된 호흡은 사람 몸의 기운을 약하게 합니다.

단공호흡법은 말 그대로 ‘단(丹)’을 비우는 호흡법이다. 다음은 변 선생의 설명이다. ‘우리 몸에는 항상 기운이 흐르고 있다. 기(氣)와 혈(血)이다. 혈 흐름의 중심은 심장이며 기 흐름은 단전(丹田)이 주관한다. 단전은 그 작용에 따라 세 곳으로 나눌 수 있다. 생각을 주관하는 상단(머리), 느낌을 주관하는 중단(가슴), 행을 주관하는 하단(아랫배)이다. 일반적으로 단전은 하단을 가리킨다. 단전 기운의 원활한 흐름이 건강한 신체의 기본이 된다. 스트레스 등으로 기가 흐르지 못하고 막히면 몸에 이상이 온다. 호흡법으로 단을 비워 새로운 기를 넣어주면 흐름이 원활해진다.’ 

지난 5월 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경찰의 폭력에 희생된 흑인 조지 플로이드(46) 사건은 플로이드가 경찰이 무릎으로 그의 목을 누르고 있을 때 “나는 숨을 쉴 수 없다!(I can't breath!)”라는 외침이 동영상으로 되면서 각 지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사건으로 발전되었다.


미 전역으로 확산된 시위에서는 플로이드가 숨가쁘게 말했던 “숨 쉴 수 없다”와 더불어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가 단골 문구로 등장한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흑인의 인권 유린을 규탄하는 시위 상황을 알리는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에선 “BLACK LIVES MATTER”가 디폴트처럼 따라붙는다.


호흡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생체 활동 중의 하나입니다. 호흡은 인간에게 필요한 산소를 공급해주고 몸에는 필요치 않은 이산화탄소를 밖으로 배출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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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금식
- 기도와 금식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기도와 금식 사이의 관계는 성경 안에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둘을 연결하는 공통점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도와 금식의 사례에 나타납니다. 구약에서는 기도와 함께 금식하는 것이 실제 또는 예기된 재앙에 직면하여 필요와 의존 의식, 비참한 무력감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도와 금식은 애통과 회개, 깊은 영적 필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 1장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고뇌 때문에 기도하며 금식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의 여러 날의 기도는 눈물과 금식, 그의 백성을 대신하는 죄의 자백, 그리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간청으로 그 특징을 나타냅니다. 그의 걱정이 너무 강하게 나타난 것으로 보아서 그가 기도 중에 먹고 마실 쉼의 시간을 취할 가능성은 거의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임한 황폐함을 알게 된 다니엘도 비슷한 태도를 보입니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단 9:3). 다니엘은 느헤미야처럼 금식하며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범죄 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옵니다”(5절).


구약의 여러 경우에서, 금식은 중보기도와 연관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병든 아이를 놓고 주 앞에서 울며 간절하게 중보기도(삼하 12:21∼22)하면서 금식합니다(삼하 12:16). 에스더는 그녀의 남편인 왕에게 나아갈 계획을 한 후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에게 그녀를 위해 금식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에 4:16). 분명히 금식과 간청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도 기도와 금식이 있지만 회개 및 죄의 자백과 관련되지는 않습니다. 여선지자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눅 2:37) 섬겼습니다. 그녀는 84 세의 나이에 이스라엘의 약속된 구세주를 기다리면서 성전에서 기도와 금식으로 주를 섬겼습니다. 또한 신약 성경에서 안디옥 교회는 성령께서 사울과 바나바에게 주의 사역을 위임하라고 말씀하실 때 예배와 관련해서 금식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도하고 금식하며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환송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례에서 기도와 금식은 주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은총을 구하는 요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식이 동반될 때 주께서 기도에 응답하실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기도와 함께 금식을 하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들의 진실성과 그들이 처한 상황이 매우 중대한 특성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상황이 더욱 심각할수록 금식과 기도는 더욱 적절하여집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어떤 소년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제자들은 이전에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세를 받았지만(마 6:7) 그 소년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왜 자신들은 귀신으로부터 그 아이를 해방시키는데 실패하였는지를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에는 ‘금식’이 추가되어 있습니다(마 17:21). 이 특별한 경우에, 귀신은 예외적으로 악하고 완강했습니다(막 9:21∼22). 예수께서는 고집 센 원수는 똑같이 강하고 확고한 믿음으로 대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기도는 영적 전투를 위해 준비된 무기이며(엡 6:18), 금식은 기도에 집중하고 결단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금식에 대한 신학은 신자들의 우선순위에 대한 신학으로서 신자들은 주님께 나뉘지 않은 집중적인 헌신과 영적 삶에 대한 관심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헌신은 음식과 음료와 같은 정상적이고 좋은 것들로부터 잠시 동안 삼가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와의 중단 없는 교제의 시간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은 것”(히 10:19)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더 나은 것들 중”에 가장 기쁜 것입니다. 기도와 금식은 짐이나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되며 도리어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에 대한 축하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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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를  총체적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신문은 범죄백서 같다. 이런 일들은 기도와 금식 외에는 해결되지 않는다. 영적 싸움에 있어서 공중 권세를 잡은 자의 세력을 꺾는 가장 강렬한 힘은 기도다.

구국적 차원에서 기도운동을 전개해야 하겠다. 구국 금식기도는 성서적이다. 블레셋의 굴레에서 미스바의 금식성회, 모압과 암몬의 새일산 연합군 침략 때 여호사밧 왕의 회개금식 선포, 니느웨 성의 삼일 간 회개 금식기도, 하만의 유대인 말살 음모에 대항한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전 유대인들의 삼일 간 금식기도, 요엘서의 금식성회 등 거국적 회개 금식기도가 오늘의 우리에게 국난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는데 본이 될 것 같다.

루터의 기도가 유럽 일천년의 암흑시대에 종교개혁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죤 낙스의 기도가 스코틀랜드를 개혁했다. 허드슨 테일러의 기도가 중국 대륙선교의 길을 개척했다. 리빙스턴의 기도가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에 복음의 길을 열었다. 윌리암 케리의 기도가 인도의 23개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했고, 아도니람 저드슨의 기도가 미얀마 성경을 번역했다. 모라비안 교도의 100년에 걸친 쉼 없는 연쇄기도가 세계 도처에 복음의 문을 열었다.

빅토리아 영국여왕은 왕위 계승을 통고받는 순간 엎드려 기도했다. 64년간의 영국 통치를 성경과 기도로 했다. 영국 역사상 그녀만큼 위대한 왕은 없었다. 중국을 위한 수많은 기도가 지하교인을 낳게 했다. 기도가 동구와 소련의 철의 문을 열게 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공산화되고 북한의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한반도의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던 1976년 12월 나는 19명의 CCC 간사들과 민족을 위한 40일 금식기도를 드렸다. 1980년 3·1절을 앞두고는 거국적으로 40일 간 금식기도 캠페인을 했고, 3·1절 때는 3일 간 3만 명이 산에 가서 금식기도한 일이 있다. 1984년 세계기도성회 때는 연 10만 명이 3일 간 뚝섬에서 금식성회를 했다. 지난 해 연말에는 CCC 대학생 1만 2천명이 여의도 에어돔에 모여 3일 간 금식하며 국난극복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십시일반으로 모은 1억 원의 성금을 어려운 이웃을 돕는 단체에 기증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데 모아진 기도 이상 효과적이고 강렬한 것은 없다. 기도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최대의 원동력이다. 기도는 교회가 가진 도덕적, 영적 부흥, 사회 부흥의 최대 에네르기다. 이 힘이 가동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주님을 위해, 민족의 구원과 통일과 세계 선교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은 기도폭탄을 터뜨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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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공호흡과 기도

흔히들 기도는 호흡과 같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호흡은 누가 가르쳐서 호흡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호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호흡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면 기도하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왜 호흡하는 것을 배워야 할까요?
호흡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호흡이 잘못되어 목숨을 빼앗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목숨을 빼앗는 것은 아니지만 잘못된 호흡은 사람 몸의 기운을 약하게 합니다.

단공호흡법은 말 그대로 ‘단(丹)’을 비우는 호흡법이다. 다음은 변 선생의 설명이다. ‘우리 몸에는 항상 기운이 흐르고 있다. 기(氣)와 혈(血)이다. 혈 흐름의 중심은 심장이며 기 흐름은 단전(丹田)이 주관한다. 단전은 그 작용에 따라 세 곳으로 나눌 수 있다. 생각을 주관하는 상단(머리), 느낌을 주관하는 중단(가슴), 행을 주관하는 하단(아랫배)이다. 일반적으로 단전은 하단을 가리킨다. 단전 기운의 원활한 흐름이 건강한 신체의 기본이 된다. 스트레스 등으로 기가 흐르지 못하고 막히면 몸에 이상이 온다. 호흡법으로 단을 비워 새로운 기를 넣어주면 흐름이 원활해진다.’ 

지난 5월 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경찰의 폭력에 희생된 흑인 조지 플로이드(46) 사건은 플로이드가 경찰이 무릎으로 그의 목을 누르고 있을 때 “나는 숨을 쉴 수 없다!(I can't breath!)”라는 외침이 동영상으로 되면서 각 지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사건으로 발전되었다.


미 전역으로 확산된 시위에서는 플로이드가 숨가쁘게 말했던 “숨 쉴 수 없다”와 더불어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가 단골 문구로 등장한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흑인의 인권 유린을 규탄하는 시위 상황을 알리는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에선 “BLACK LIVES MATTER”가 디폴트처럼 따라붙는다.


호흡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생체 활동 중의 하나입니다. 호흡은 인간에게 필요한 산소를 공급해주고 몸에는 필요치 않은 이산화탄소를 밖으로 배출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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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지 뮬러(George Muller, 1805-1898)
프러시아 크로펜스타트(Kroppenstaedt)에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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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동기 다섯 가지
- 기도는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1. 순수한 마음
 - 고아들을 사랑하는 마음

2.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마음
 - 주님 생각에 가장 좋은 것으로 하여 주옵소서!
   (나의 생각이 아니다)

3. 정직한 마음
 -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직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허물이 있어도 정직한 삶의 바탕 즉 잘못을 변명하거나 합리롸 하지 않는 것)

4. 말씀의 묵상
 -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편 81:10)
 -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시편 68:5)

5.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
 - 나의 기도와 삶을 통하여 얼마나 하나님을 잘 나타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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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가장 친밀한 방법 중 하나이다.
기도할 때 우리의 감정, 생각, 깊은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감사한 것을 하나님께 공유하게 된다.
또한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바를 듣고 성령께서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도록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도의 한 가지 매력적인 특징은 세상의 아무도 똑같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 기독교 사이트 바이블스터디툴즈( Biblestudytools)는 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10가지 종류를 소개했다.

1. 경배의 기도(시편 148:13)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찌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심이로다"

이런 종류의 기도는 깊은 사랑, 존경, 그리고 감사함으로 주님께 경배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주님이 누구시고 하시는 모든 것에 대한 경외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2. 감사의 기도(역대상 16:33-34)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여 만국 가운데서 건져 내시고 모으시사 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할찌어다"

어떤 이들에게는 매일 감사 기도로 시작하는 것이 그들이 생활 습관이다.
감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시고 자비로운 분인지에 대한 인식이자 우리에게 주신 새 생명에 대한 감격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다.

3. 고백의 기도(시편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우리 죄를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 따르는 크리스천으로 기도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죄에 대한 고백 기도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신다는 점을 많이 확인할 수 있다.

4. 서약의 기도(사무엘상 1:10-11)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약속은 하나님의 힘과 인도,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기도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불경건한 생활을 하지 말 것을 맹세할 것이다.
여기 한나의 서원에서 보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그것은 큰 사려와 확신을 가지고 해야 한다.

5. 조용한 성찰의 기도(시편 63: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침묵의 기도는 우리를 말로 가득 찬 기도에서 벗어나 조용히 성찰하고 반성할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한다.
이러한 기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묵상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배우고 그 분이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게 하는 것이다.

6. 치유를 위한 기도(시편 119:25)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I am laid low in the dust; preserve my life according to your word.

이 기도는 보통 우리가 육체적, 정신적, 또는 감정적 상처를 회복하려고 할 때 나온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육체적으로 변등이들을 치료하시는 것이었다.
성경은 우리가 모든 종류의 병들로부터 치유될 것을 구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7. 구원과 도움을 위한 기도(시편 107:6)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Then they cried out to the LORD in their trouble, and he delivered them from their distress.

우리가 도전, 고난 또는 어떠한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이를 위한 돌파구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8. 중보의 기도(골로새서 1:9-12)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For this reason, since the day we heard about you, we have not stopped praying for you and asking God to fill you with the knowledge of his will through all spiritual wisdom and understanding.
And we pray this in order that you may live a life worthy of the Lord and may please him in every way: bearing fruit in every good work, growing in the knowledge of God,
being strengthened with all power according to his glorious might so that you may have great endurance and patience, and joyfully
giving thanks to the Father, who has qualified you to share in the inheritance of the saints in the kingdom of light.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중재할 것을 말한다.

예로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기 전 마지막 시간 동안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음을 알고 있다.

9. 변화를 위한 기도(시편 139:23-24)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Search me, O God, and know my heart; test me and know my anxious thoughts.
See if there is any offensive way in me, and lead me in the way everlasting.

이러한 삶의 종류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처럼 살고, 그 길을 따라 행하고, 거룩해지는 과정에 들어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10. 축복의 기도(빌립보서 1:9-11)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And this is my prayer: that your love may abound more and more in knowledge and depth of insight,
so that you may be able to discern what is best and may be pure and blameless until the day of Christ.
filled with the fruit of righteousness that comes through Jesus Christ--to the glory and praise of God.

축복의 기도는 종종 선교사들, 다른 곳으로 떠나는 교인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 등을 위해 행해진다.
이러한 축복의 기도는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으며,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는 강력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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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규례가 아닌 진정으로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4)

기도는 어떤 형식적인 절차를 거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외우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기도는 말을 따라 하거나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 하나님과 마음을 나눔으로써 감동받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치레 행위를 기뻐하시지 않고 입으로만 가까이하는 것을 열납하지 않으시며 신령과 진정으로 기도하고 경배하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진실한 기도를 해 봤던 사람이라면 경험했을 것입니다.
예배할 때 혹은 큐티할 때 혹은 어떤 일이 생길 때 마음을 평온히 하고 전념해서 성실하게 하나님께 기도드리면 감동받고 평안과 기쁨을 느낍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에 신령으로 기도해 하나님과 가까이하기는커녕 규례를 지키고 형식적으로 몇 마디 하는 등 진심 어린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무심한 기도가 어찌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예컨대, 새벽(밤) 기도, 식전(식후) 기도 등은 오랫동안 규례적인 행위가 되어 형식적으로 하지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가끔은 하나님께 기도할 내용이 없으면서도 신앙인으로서 의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 말이나 중얼거립니다.
이러한 기도는 형식적인 것인데 하나님이 들어주실까요?
결코 들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규례를 지키는 무심한 기도는 듣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드리는 기도만이 하나님께 상달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을 평온히 하기를 중요시해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2.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0~14)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주님은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고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염증을 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입에 발린 말이고 자신의 공로와 좋은 행위를 자랑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상을 받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리는 자신이 죄인이므로 하나님 앞에 천한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세리는 기도할 때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터놓고 자신의 패괴를 인정하며 하나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해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세리와 같은 겸허한 마음을 갖췄나요?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늘 외식하며 자기 자랑을 합니다. 예컨대, 다른 사람이 기도를 길게 했을 때,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적지만 우습게 보일까 봐 반복적으로 말을 해서 기도 시간을 늘립니다. 일부러 많은 성경 구절을 외운다거나 듣기 좋은 말을 해서 돋보이려고 합니다. 열심히 사역해서 성과를 거두면 스스로를 주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는 자로 여기며 기도로 축복과 면류관을 요구하고 천국에 들어가 상을 받으려 합니다. 이렇듯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실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하려면 세리를 본받아 어떤 일이 임하든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실제 정형을 털어놓아야 합니다. 거짓과 꾸밈이 없고 외식하지 않으며, 어떤 패괴를 유로했든지 하나님께 고하며 구원해 달라고 빌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확한 기도법이고 이렇게 기도해야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3. 이성적으로 피조물의 위치에서 기도하라

성경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겟세마네라는 곳에서 세 번 기도했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마 26:39~44)

예수님은 구하는 마음, 순종의 자세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구하였지 하늘 아버지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피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거나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의 기도를 마친 후 예수님은 천부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성육신하게 된 이유는 인류를 십자가에서 구원하는 사역을 하기 위함이었기에 예수님은 완전히 순종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자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나 피조물의 위치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드리며 그의 뜻을 구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이성적으로 기도하고, 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어 피조물의 각도에서 기도함으로 우리의 모델이 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반성해 보면 우리는 이성적인 기도를 했을까요? 피조물의 위치에서 하나님께 구하고 순종하는 기도를 한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비이성적인 기도를 드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뜻대로 이렇게 저렇게 해 주세요 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께 강요합니다. 예컨대, 몸이 아플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보다 우리의 병을 고쳐 달라는 기도를 하기에 바쁩니다. 병에 호전이 없으면 하나님을 오해하고 불평하지요. 하나님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 좀 있고 헌신하거나 본분을 조금 하게 되면 우리가 평안하고 모든 것이 순조롭도록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고, 심지어는 가족들의 복까지 구합니다. 또 핍박과 환난이 임했을 때 하나님의 보호를 구하며 그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구하는 등 이러한 기도는 다 비이성적인 것입니다. 구하는 자세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드린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의 욕망을 채워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고 우리의 뜻대로 해 주십사 강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비이성적인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는 진실한 기도가 아주 적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기도할 줄 모른다. 사실 기도는 주로 마음속의 말을 하는 것인데, 평소에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기만 하면 위치를 잘못 선다. 하나님의 뜻에 맞든 맞지 않든, 하나님께 베풀어 달라고 억지로 구하는데, 그 결과 기도하면 할수록 무미건조해진다. 기도할 때 네가 마음속으로 어떤 것을 구하든, 어떤 것을 사모하든, 어떤 것을 얻으려고 요구하든, 혹은 어떤 일을 처리하려고 할 때 꿰뚫어 볼 수 없어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하든, 힘을 더해 달라고 하든, 혹은 하나님께 깨우쳐 달라고 하든, 이런 말하는 방식에도 *이지가 있어야 한다. 만약 네가 이지 없이 무릎 꿇자마자 “하나님, 저에게 힘을 더해 주십시오. 제 본성을 보게 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해 주십시오. 혹은 저에게 무엇 무엇을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어떻게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이 ‘주십시오’ 안에 강박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반드시 그렇게 해 주어야 한다고 압력을 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네가 스스로 사전에 다 정해 놓은 것이다. 네가 비록 그렇게 기도할지라도 성령은 그런 기도에 대해 ‘네가 이미 스스로 정해 놓고 그렇게 하려고 한 이상, 그런 기도가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라고 여긴다. 기도할 때에는 마땅히 찾고 구하고 순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너에게 일이 임할 때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면 너는 이렇게 말하여라. “하나님, 저에게 이런 일이 임했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일에서 당신을 만족게 하기를 원하고, 당신의 뜻을 찾고 구하기를 원하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저의 뜻대로 하지 않고 당신의 뜻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뜻은 다 당신의 뜻을 어기는 것이고, 당신을 대적하는 것이고,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것임을 당신께서 아십니다. 저를 깨우쳐 주시고, 이 일에서 인도해 주셔서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런 어조의 기도는 적합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하려면 이성을 갖춰 기도해야 합니다. 피조물의 위치에서 기도하며 자신의 선택과 요구와 계획이 없이 하나님께 구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가령 천재지변이나 인재로 인한 사고 등의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났을 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자기가 원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보호를 강요하며, 그런 고난을 옮겨 달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을 마련해 주신 뜻이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고 온전케 하시기 위함이거나 우리의 증언을 보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순종하는 자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한 자세로 기도해야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고, 우리가 기도하는 문제를 알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시고, 나아갈 방향을 가리켜 주실 것입니다.

4. 개인을 위한 기도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9~13)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바람은 하나님 당신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사탄에 의해 패괴된 후로, 하나님은 계속 구원 사역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진정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를 얻기 바라시며, 그리스도의 나라가 땅에 펼쳐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또한 자기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취지가 담긴 기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취지가 담긴 기도, 하나님께서 더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도록 힘쓰는 기도, 그리스도의 나라가 땅에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한 기도가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입니다.

성경에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의 소원은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여호와의 성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다윗은 항상 그 소원을 가지고 간구하며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기뻐해 다윗을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라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잘 다스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잘 예배할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제사와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지혜만 주신 것이 아니라 솔로몬이 구하지 않은 장수와 부귀영화까지 더해 주셨습니다. 욥은 언제나 악에서 떠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큰 시련 속에서도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1:21), “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백으로 사탄을 부끄럽게 하고, 하나님 편에 서서 울림 있는 증거를 보이며 후세들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 진리를 실천하기 위해 드리는 기도가 가장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이며, 반드시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드리는 기도를 살펴보면, 대부분 육의 욕심을 위한 기도일 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가 별로 없습니다. 예를 들면, 자녀의 대학 진학을 위한 기도,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간구하는 기도를 비롯해 전부 개인의 이익을 구하는 기도이자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기도가 태반입니다. 계속 하나님께 손 내밀며 축복과 은혜를 갈취하려고만 할 뿐,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기도를 드리는 경우가 없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기도를 드리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한 기도여야 합니다.
예를 들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히거나 뒷걸음치게 될 때, 하나님께 힘을 더해 달라고 간구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전파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간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 설교하거나 사역을 할 때면, 항상 책임감으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고,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길로 이끌 수 있게 성령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간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늘 이런 문제를 놓고 기도한다면,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와 빛 비춤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네 가지 기도법의 실행 원칙에 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도에 관한 올바른 실천 원칙을 파악하면, 기도가 어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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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Amen)

05-15-2022(주일)

아멘의 어원(語源) : 아만
아만의 의미 :
어떤 대상을 '지지하다' 혹은 '신임하다

여기서부터 이 말은 기도나 찬양 및 선언이 종결되어지는 종지부나 끝맺음에서 '진실로 그렇습니다' 또는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
'라는 동의나 소원의 뜻을 가진 '아멘'으로 발전되었다.

'아멘'이란 말은 단순한 종결(終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곧 어떤 선포나 찬양 그리고 기도 등을 지지하거나 확인 또는 시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나의 삶 속에 적용시키겠다는 결단의 의지(意志)까지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한편 신약 시대에 '아멘'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강조 용법('진실로 진실로'란 말은 헬라어로 '아멘 아멘'이다)으로 자주 사용되었고, 바울 사도에 의해서는 축복과 찬양(Doxology)의 결미어(結尾語)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계시록 서신에서 이 말을 인격화시켜 존재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하였다(계 3:14).
이 모든 배경하에서 '아멘'을 복창(復唱)하던 일은 유대인들의 습관이 되어 왔으며, 또한 그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기독교 공동체에 전달되어져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05-08-2022

Grhard Tersteegen(게르하르트 터스티겐) 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은혜로운 임재를

우리 안에 새롭게 일깨워 주십시오

그리하여 인생의 순례 길을 가는 동안

우리 안에 평화와 진실함과 용기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당신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당신을 굳세게 붙들게 하시고

당신에 대한 사랑이 식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당신과 연합된 우리의 마음이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하는 무슨 일에든지

항상 이어지게 해 주십시오


우리에게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마음속에서 들리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게 해주시고

당신께서 주시는 경고를 묵살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보십시오.

우리의 가난한 마음을

당신께 제물로 드립니다.

오서서 당신의 지성소를 채워 주시고

그곳에 더러운 것이 들어가지 못하게 지켜주십시오


오 사랑의 주님,

당신의 거룩한 영이 우리의 모든 영혼 속에 강같이 흐르게 하시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까지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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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7:11-26


11 모세가 당일에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이른 후, 그곳 세겜 땅 북쪽에 있는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반드시 이행하여야 할 '축복과 저주의 의식'을 언급한 부분이다. 이 의식은 이스라엘 12지파가 각기 6지파씩 양편 산에 갈라서서 축복과 저주를 각기 선포하는 의식인데, 여호수아 8:30-35에서 그대로 실행되었다.

한편,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왜 축복과 저주의 산으로 각각 선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2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산에 서고

ㅇ요단을 건넌 후에 - 2, 3, 4절에 이어 본장에서 벌써 네번째 언급되고 있는 구절이다. 이는 그만큼 요단(Jordan)을 건너는 일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임을 시사해준다.

ㅇ시므온과...베냐민 - 모두 야곱의 정부인(正婦人)인 레아와 라헬에게서 태어난 후손이다(창 29:31-30:24;35:16-18). 그러나 그중 레아의 막내 아들인 스불론의 지파와 서모(庶母) 빌하를 범하였던 장자 르우벤(창 35:22)의 지파는 여기서 제외되었다.

ㅇ축복하기 위하여 - 야곱의 정부인에게서 난 아들들이 이처럼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에 대하여 카일(Keil)은 '적자(嫡子)가 서자(庶子)보다 신분이 높고, 축복이 저주보다 품격이 높은 만큼 적자가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평하였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433).

ㅇ그리심 산 - 사마리아 성읍 부근에 위치한 오늘날의 '예벨 엣 투르'(Jebel et Tur)이다. 남북으로 에발 산과 마주보고 있는데, 특별히 그리심 산(Mt. Gerizim)이 축복을 선포하는 산으로 선택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3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고

ㅇ르우벤...납달리 -

전술한 것처럼 르우벤과 스불론 외에는 모두 야곱의 첩이었던 빌하와 실바의  후손이다(창 29:31-30:34). 르우벤과 스불론이 여기에 속하게 된 이유는 아마 르우벤은 서모 간통 사건으로  인한 장자권 박탈 때문이었을 것이고(창 35:22; 49:4; 대상 5:1), 스불론은 레아의 막내 아들이었기 때문(창 35:23)이었을 것이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ㅇ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

혹자들은 그리심 산에 선 지파들을 축복받은 지파들로, 에발 산에 선 지파들을 저주받은 지파들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단정
은 무리이다. 왜냐하면 에발 산에 서게 될 지파들 중에도 단, 아셀, 납달리 지파처럼 야곱의 축복을 받은 지파들이 있으며 그리심 산에 서게  된 지파들 중에도 시므온, 레위와 같이 야곱의 저주를 받은 지파도 있기 때문이다(창 49:1-27).

따라서 축복의 산에 오른 자들은 율법에 순종하는 자들을, 저주의 산에 오른 자들은 율법을 거역하는 자들을 각기 상징할 뿐으로 이해함이 좋다. 한편 에발 산(Mt. Ebal)이 특별히 저주를 선포하는 장소로 선택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4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ㅇ레위 사람 - 여기서는 레위 지파에 속한 모든 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언약궤
를 메고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의 중앙 부분에 서서 모세의 말을 전달받아 양편에 갈
라 서 있는 백성들에게 큰소리로 외칠 '레위 제사장'(9절;수 8:33)을 가리킨다
(Delitzsch, Lange, Alexander, Wycliffe)
ㅇ큰 소리로...이르기를 - 혹자들은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서 외치는 사람의 목
소리가 양편 산 중턱에 운집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들릴 수 있었겠는가라는
점에 의문을 표시한다. 그러나 성서 고고학자들에 의한 정밀 조사 결과 양쪽 산의 음
향 효과가 매우 훌륭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또 여러 차례의 실험 결과 여러 사람이
외칠경우 충분히 들려진다는 사실도 입증되었다(Stanley, Syria & Palestine;
Tristram, Land of Israel ;Hastings, Bonar, E.G. Kraeling).

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찌니라

ㅇ장색 -

각양 물건을 정교하게 만드는 기술자(craftsman)를 가리킨다. 당시 이들은 우상을 만들어 파는 일로 많은 이익을 보곤 하였다(행 19:24).

ㅇ가증하니 - 23:18 주석 참조.

ㅇ은밀히 세우는 자 -

십계명 중 제 2계명(5:8-10;출 20:4-6)을 은밀히 범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은밀히'에 해당하는 원어 '바사테르'는 '은밀
한 장소에'(KJV, in a secret place)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은밀한 장소'로 꼽을 만한 곳은 어디이겠는가? 물론 눈에 잘 안 띄는 골방이나 비밀 장소를 들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곳으로는 역시 사람의 마음 속을 꼽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보다 더 큰 비중으로 자기 마음 속에 은밀하게 품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 숭배이다.

ㅇ모든 백성은...아멘 할지니라 -

'아멘'(amen)이란 말은 본래 '확실하다', '신실하다'는 뜻의 '아만'에서 유래한 단어로 문장이나 대화의 끝에서 사용될 때 '과연 그렇습니다',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경홀히 여기는(칼라) -

원뜻은 '가볍다'로, 곧 상대방을 업신여기거나 비천히 여기는 것(잠 12:9), 절하(切下) 평가하거나 모독을 주는 것(사 16:14), 그리고 지독히 경멸하는 것 따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부모를 이처럼 업신여기는 것은 곧 자신의 근본(根本)을 망각한 행동일 뿐 아니라, 급기야는 부모를 통해 그 생명을 부여하신 하나님을 경홀히 하는 짓거리이다(21:18).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고 권면하였다. 출 20:12 주석 참조.

ㅇ저주를 받을 것이라(아루르) -

기본형은 '아라르'로 '버림을 받다'란 뜻이다. 즉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한다면, 버림을 받는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자신임을 잘 증거해 준다(Calvin).

17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 '여기서 지계표'(地界標;KJV,landmark;NIV,
boundary stone)란 땅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세운 돌이나 푯말을뜻한다(창 31:51,
52). 따라서 이러한 지계표를 마음대로 옮기거나 없애 버리는 것은 타인의 재산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 행위이다. 한편 성경 뿐 아니라 고대 바빌로니아의 법도 지계표를
침해하는 행위를 큰범법 행위로  규정하고  매우 엄격하게 다스렸다.19:14 주석 참조.

18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

고대 근동에는 여러 가지 환경적 요인과 풍토(風土)로 인하여 의외로 소경이 많았다.
즉 고온 건조한 기후와 쉴 새 없이 이는 먼지, 그리고 비위생적인 생활 환경 및 가난으로 인한 영양 실조 등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실명(失明)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로부터 이러한 소경을 일부러 괴롭히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따라서 본절이 의미하려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영역본 Living Bible은 본절을 '소경을 이용하여 그 이(利)를 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Cursed is he who takes advantage of a blind man)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이웃을 하나님의 계명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유혹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영적으로 해석하였다. 아뭏든 이는 보다 광범위한 의미로, 장애자의 약점을 이용하여 불의한 이(利)를 취하거나 또 는 그들을 괴롭히며 실족케 하는 일 따위를 엄격히 금하고 있는 조항임에는 틀림없다(레 19:14;롬 15:1). 실로 율법은 그러한 약자들의 약점을 악용하는 죄악에 대해서는 보다 혹독한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레 19:14 주석 참조.

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객이나 고아나 과부 -

가난하며 약한자, 그리고 억눌리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을 대표하는 구약 시대의 3대 약자들이다(14:29;16:11, 14;24:21;26:12, 13).

ㅇ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 

여기서  '억울케  하다'에  해당하는 '나타'는 '비틀다', '굽게 하다', '벗어나게 하다'는 뜻으로,
정당한 판결을 내리지 아니하고 힘 있는 자를 두호(斗護)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서는 이미 24:17에서도 엄금했던 바, 실로 하나님께서는 '공법(公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河水)같이' 흘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암5:24)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 계모와 구합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계모와 구합하는 자 -

'구합하다'에 해당하는 '솨카브'는 성(性) 관계를 갖기 위해  '잠자리를 같이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계모'에 해당하는 '에쉐트 아비'는 '아버지의 여자'란 뜻이다.
따라서 비단 이는 계모 뿐 아니라 아버지의 첩과도 성 행위를 하는 것을 포함한다.

ㅇ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

영역본 RSV는 이를 '아버지의 여자를 벌거벗겼으니'로, NIV는 '아버지의 침소를 더럽혔으니'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Living Bible은 '그녀는 그의 아버지에게 속하였으니'로 번역하고 있으며, 공동 번역은 '아비의 이불자락을 들치고'로 의역하고 있다. 아뭏든 이처럼 아버지의 침소, 아버지의 여자를 넘보는 행위는 인간의 기본 윤리를 저버리는 패역(悖逆)이니, 저주를 면할 길 없다(22:30). 레 18:8 주석참조.

21 무릇 짐승과 교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짐승과 교합하는 자 -

동성애, 근친 상관 등과 더불어 변태적인 성 행위 중의 하나인 수간(獸姦)을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수간자(獸姦者)는 근친 상간자 및 남색자(男色者)와 더불어 땅을 더럽히는 추악한 성범죄자로서 아스라엘 사회에서 반드시 제거되어야 했다(출 22:19;레 20:15, 16).
성경은 결코 생리적인 성적 욕망이나 충동을 죄악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性)의 창조자로서 하나님께서는 성을 인간들이 누릴 수 있는 지극한 기쁨으로 간주하셨다(잠 5:18; 전 9:9; 요 3:29).
이것은 창조시 아담의 독처(獨處)를 좋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한 여자 하와를 창조하여 준 사실(창 2:18, 22)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바로 이 남녀 창조 사건에서도 분명히 예시되었듯이 남녀간의 성적 욕망은 일부 일처의 신성한 결혼 제도에 의해서만 충족되어야 한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요 비밀이었다.

여기서 '비밀'이라고 한 것은 훗날 사도 바울이 설파했듯이 신랑과 신부의 한몸 되는 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순결한 일체성'을 상징하고 또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22:13-30; 엡 5:31, 32).
따라서 하나님의 신성한 창조 질서가 반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오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 내포되어 있는 일부 일처의 결혼 제도를 떠난 모든 성(性) 남용은, 더욱이 수간, 근친 상간, 동성애(同性愛) 등 타락한 인간의 어그러진 심성(心性)에 기인하고 있는(롬 1:26, 27) 모든 변태적(變態的)인 성행위는 단순한 도덕적 범죄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죄에까지 이르는 추악한 성범죄 행위인 것이다.

특히 고대 이방의 문란하고 타락한 제사 의식이나 설화 등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수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엄한 인간의 가치를 하등 동물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극악한 소행이므로 거룩한 공동체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결단코 용납될 수 없었다.  따라서 성경은 일관성 있게 이러한 모든 성범죄를 보다 엄격히, 그리고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는 성(性)의 타락으로 인해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가나안 족속의 멸절 그리고 로마의 패망 등을 거울삼아 성(性)개방 풍조로 인해 성(性)을 가볍게 취급하거나 심지어 상품화시키는 타락한 세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빛된 자녀답게 고결하고 아름다운 성(性) 윤리관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레 18:23; 20:15, 16 주석 참조).

22 그 자매 곧 그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과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23 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자매...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

누이는 항렬상 자기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자이다.
따라서 그러한 누이를 범하는 것은 우생학적(優生學的) 폐단은 차치하고라도, 곧 자기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는 짓이나 마찬가지 행위이므로 저주를 면할 길 없다. 레 18:9
주석 참조.

ㅇ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

성경은 자신의 장모와 성 관계를 갖는  파렴치한에 대하여서는 그들 모두를 반드시 화형(火刑)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레 18:17;20:14 주석 참조.

24 그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

과실치사(過失致死)가 아닌 한, 그 어떠한 살인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  결코 정당시킬 수 없다. 특히 암살(暗殺) 행위는 더욱 그러한
데,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상대방이 미처 방어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기습하는 도발 행위이기 때문이다. 죄를 은폐하려는 의도하에서 저지르는 계획적 살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출 20:13;민 35:16-21 주석 참조.

25 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

살인의 대가로 뇌물을 받는 행위는 곧 인간의 값어치를 추잡한 뇌물보다도 낮게 취급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비록 사람의 눈을 피해 그같은 죄를 자행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결국 하나님의 공의의 눈은 피할 수 없기에 저주를 면할 길 없다. 출 23:7, 8 주석 참조.

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

사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자란 아무도 없다(롬 3:10).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출애굽의 영웅 모세도, 그리고 성군(聖君) 다윗도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던 죄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짐짓 범죄치 아니하려고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율법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라 하겠다<창 6:9>.





기도(祈禱)

자료 / 예수님의 중보기도 / 워렌 위어스비 지음, 조은주 역. 은성출판사

01-9-2022(제2주)

허버트 록키어(Herbert Lockyer. 영국 1886-미국 1984)박사는 "성경에는 650편의 기도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곧 기도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국 침례교회 목사이었던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 6. 19-1892. 1. 3)은 "진정한 기도는 길이가 아니라 무게에 의해서 측정됩니다."라고 합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일생동안 예수를 믿으며 수 많은 기도를 했을 때 그 모든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만일 하늘에 상달되지 않는 기도를 했다면 무게가 없는 기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요한복음 17장)
17:1-5, 예수께서 자신을 위해 기도하시다
17:6-19,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다
  제자들의 안전(17:6-12)
  제자들의 거룩(17:13-19)
17:20-26, 예수께서 전체 교회를 위해 기도하시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드린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라고 정의합니다.
제사장의 기도를 다른 말로 "왕의 기도"라고도 합니다.

제사장으로서의 기도가 위대한 네 가지 이유를 소개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이므로 위대하다
둘째, 기도를 요구한 상황 때문에 위대하다
셋째, 기도에 있는 간구 때문에 위대하다
넷째, 승리 때문에 위대하다


01-16-2022(제3주)

잔느 귀용(Jeanne Guyon, 1648~1717)의 작품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하기(The Simplicity of Prayer)"에서 "기도는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에게 집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기도는 사탄이 침입 할 수 없는 요새입니다.
사탄은 그 요새 주위를 포위하고 공격하며 소란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기도에 집중할 때 사탄은 절대로 해칠 수 없습니다.
요즈음 어떤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의 기도의 자리를 점검해야 합니다.
혹시 나의 기도의 자리가 흔들려서 사탄이 공격할 수 있는 틈을 만들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디모데전서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For it is sanctifi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2022년 제3주간을 시작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앞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은총의 한 주간이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01-23-2022(제4주)

요한복음 17장을 '왕의 기도' 또는 '예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라고 합니다.
왕의 기도로서 첫번째는 하나님의 아들의 기도라는 것 때문에 위대한 기도라고 합니다.

첫째, 성부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셨다(17:3, 18, 21, 25)
선지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으셨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셨다.

둘째, 성부 하나님의 것은 나의 것(17:8, 16:28)
성도는 나의 모든 것이 아버지의 것이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것은 나의 것이라고 한다(17:10).

셋째, 성부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17:11-12)

예수님의 기도는 그 분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거한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 내 하나님께로 올라가신다고 하셨다(요 20:17)

01-30-2022(제5주)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
Prayer is the breathing of the soul.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기도가 없으면 영혼이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육체는 호흡이 없으면 곧 죽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시작해야 한다(로마서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합니다.
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려면 영을 받아야 합니다.
영을 받는 것을 "성령을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기도하려면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사도행전 19:2)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02-06-2022(제6주)


기도하다(요 17:9, 15, 29)는 뜻의 "비옵나니"라는 단어는 "동등한 상태로부터의 부탁" 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이 단어를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단어를 세 번 사용하셨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곧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원하옵나이다(요 17:24)
이 말은 간청이 아니라 명령이다.
성도들은 이런 권위를 가질 수 없지만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은혜를 누리며 신앙생활에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02-13-2022(제7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야고보서 5:15)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게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십니다.
병들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시는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간구 하옵기는 김영희권사님이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 가운데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김영희권사님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못하여 답답합니다.
그러나 질병으로 고통 당할 때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여 낙심하지 않게 하옵시고
오히려 고통 가운데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찾아 알게 하옵소서. 
질병 중에 있을 때 인생의 모든 것과 바꿀 수 있는 영원한 보물을 찾고 기뻐하며 믿음 위에 더욱 굳게 설 수 있는 믿음만을 주장하게 하옵소서. 

언제까지 육체의 고통으로 시달릴지 모르지만 질병으로 인하여 몸은 고통스럽고 불편한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강한 빛을 받아  성령의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또한 육신이 건강한 사람과 비교함으로 낙심하지 않고
고통 가운데서 십자가의 아픔을 몸소 겪으셨던 주님을 바라보며 그 사랑을 깊이 깨닫는 은혜가 넘쳐나게 하옵소서.
 
몸의 불편함을 불평하는 대신 이미 허락하신 은혜로 인하여 주님을 뜻을 나타낼 수 있는 은사를 찾게 하옵소서. 
질병도 그 가운데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다면 불행이 아니라 복이요, 재앙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은사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의사를 통하여 치료를 받을 때에 빨리 회복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고, 장기적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없도록, 병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만병의 의원이시고, 치료자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을 공부하므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행함으로 복을 받는다.


야고보서 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기도의 영을 구하라!

스가랴 12:10a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I will pour out on the house of David and the inhabitants of Jerusalem a spirit of grace and supplication.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In the same way, the Spirit helps us in our weakness. We do not know what we ought to pray for, but the Spirit himself intercedes for us with groans that words cannot express.

기도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는 "기도는 영혼의 호흡" 이라고 합니다.
호흡이란 생명이 있는 증거입니다.
죽은 사람은 호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영혼과 육이 하나로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호흡이 필수적인 것처럼 또한 영혼이 육체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정의한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생명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이 호흡을 하는 것처럼
살아있는 사람은 육체와 영혼이 하나가 된 것처럼
기도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의 흔적과 같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기도를 합시다!

나의 하나님이여
그리스도를 보사
나의 작별의 순간을 평안하게 하옵소서!

내 비록 흙에 지나지 않사오니
하나님 앞에 서서 기도하옵기는
쾌락을 구함도 아니오며
금을 요구함도 아니오라
그보다 더 큰 것을 구하오
하나님이 내게 주실 가장 큰 선물
내가 누를 영원한 생명일세.

내 마음 이제 기도와 찬송으로 넘치네
그리고 부드러운 그의 마음에
내 마음 가까이 끌어올리는
그 한 숨결 한 숨결을
내 하늘 아버지는 알고 계시네
내 기쁨과 평안 여기 있고
내 구원 당신 안에서 보니
아, 내 영혼을 지키시는 이여.

* 기도의 영 p. 180, 181, 182
- 기도(오 할레스비)

삶의 지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데이비드 케슬러가 쓴 "인생 수업"에 나오는 일화 입니다.

어느 기분 좋은 여름날, 갓 결혼한 부부가 저녁을 먹고 숲으로 산책을 나갔다.
둘이서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멀리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꽥, 꽥!"

아내: "저 소릴 들어봐, 닭이 틀림없어."

남편 : "아니야, 저건 거위야."

아내 : "아니야 닭이 분명해."

남편 :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건 말도 안돼. 닭은 '꼬꼬댁 꼬꼬!'하고 울지만, 거위는 '꽥, 꽥!' 하고 울거든. 저건 거위라고."

또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꽥, 꽥!"

남편 : "거봐 거위잖아!"

아내 : (한발로 땅을 구르며)  "아니야 저건 닭이야. 내가 장담할 수 있어."

남편 : (화가 나서)
 "잘 들어 여보! 저건 거위라니까! 당신은 정말이지..."

남편이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을 내뱉으려는 찰나 또 다시 "꽥, 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내가 눈물을 글성이며 말했다.
"저봐, 닭이잔아."

그 순간 남편은 아내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왜 그녀와 결혼했는가를 기억했다.
그는 얼굴을 누구러뜨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미안해, 여보 생각해 보니 당신말이 옳아. 저건 닭이야."

그러자 아내는 남편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여보"

두 사람이 사랑 속에 산책을 계속하는 동안 숲에서는 다시금 소리가 들려왔다. "꽥, 꽥!"

남편은 생각했다. '그것이 닭이든 거위든 무슨 상관인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기분 좋은 여름날 저녁 함께 산책을 즐기는 것이였다.

그렇다! 그것이 닭이든 거위든 무슨 상관인가?

우리가 상대에게 상처주고 결국은 관계가 단절되는 이유 중에 많은 부분이 멀리서 들려오는 동물의 소리가 닭인지 거위인지 같은 사소한 분쟁에서 비롯된다.

내 신념을 저버려야 할 일이 아니라면 내게 회복하지 못할 손해가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면 인정해 준들 무엇이 문제일까?

- 인생수업 중에서 -

"찰리 채플린" 명언

88세에 세상을 떠난 "찰리 채플린"이 남긴 4가지 명언

1.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우리들의 문제 조차도.

2. 난 빗속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아무도 내 눈물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3. 우리 삶에서 가장 의미 없는 날들은 웃지 않은 날 들이다.

4.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의사 6명은
* The sun ( 태양 )
* Rest ( 휴식 )
* Exercise ( 운동 )
* Diet ( 다이어트 )
* Self - Respect  ( 자존감 )
* Friends ( 친구 )

이 모든것들과 함께 당신의 삶을 즐기세요.
삶은 여행일 뿐입니다.
그러니 오늘을 충실히 사십시요.
내일은 안 올지도 모르니까요.

찰리 채플린
웃음은 몸 안의 조깅 입니다.

찰스 스펄전
진정한 기도는 길이가 아니라 무게에 의해서 측정된다.

허버트 록키어 박사
성경에는 650편의 기도들이 기록되어 있다.
기도 중에서 요한복음 17장의 주님의 제사장으로서의 기도가 가장 으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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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기도는 항상 하나님과의 역동적인 대화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을 때 주기도문은 우리가 매일 하나님께 이야기하는데 도움이 되는 모범이 됩니다.
여기 도움이 될 만한  여섯 단계 기도 가이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다시 집중하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깊이 숨을 들이 마시고 다음 단어에 집중해 보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천천히 숨을 내쉬며 다음과 같이 말해 보세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여러 번 반복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하나님의 성품에 주의를 기울여 보세요. 그리고 또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초점을 맞추어 보세요.

    여러분의 뜻을 다시 맞추어 보세요.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은 늘 그 분의 뜻을 이 땅에 이루고 계십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뜻을 그분의 뜻에 맞추는 것은 그분의 나라를 찾는 일입니다.

    주변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 보여주시기를 기도해 보세요.

    염려를 내려 놓으세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언가를 받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이 하나님께 여러분의 염려를 드릴 때 그분은 여러분께 무엇을 주실까요?

    여러분의 염려를 적어보세요. 그리고 하나씩 읽어 보세요. 염려를 소리 내어 읽을 때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마음 속으로 기도하세요.

    이 단계를 필요한 만큼 계속하세요.

    회개하고 응답하세요.

    사하여 준 것 같이.. 사하여 주시옵고

    여러분이 주님께 내려 놓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지금 주님께 고백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깊은 상처, 좋지 않은 행동, 어쩔 수 없는 중독, 반복되는 실수 등등일 까요?

    하나님은 여러분이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 생각을 그분께 말씀 드리고 그분의 음성을 들어 보세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구하세요.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우리는 모두 무언가로부터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셨나요?

    주님의 신실함에 감사 드리세요. 그리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말씀해 보세요. 주님의 보호가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보세요. 상황이 절망적으로 보일 때에도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기억 하세요.

    기뻐하며 돌아보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행하신 일을 기뻐하고 오늘 하루를 보내며 그분을 예배 할 방법을 찾으세요.

    그리고 잠시 하나님과 함께 한 이 시간을 곰곰이 돌아 보세요. 그분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보여 주셨나요? YouVersion기도 목록에 생각나는 것을 적어 보세요

예수님처럼 기도를 시작하면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가 우리 삶의 방식을 바꿀 때, 우리는 언제든지 확신, 의뢰함,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께 다가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 주기도문은 단순한 기도가 아니다.
이 기도는 이 땅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비전이다 ”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는 동안 불량한 질문을 꽤나 했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눅 9:54). 그러나 가끔은 멀쩡할 때도 있었다.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눅 11:1). 제자들이 그럴 때면, 우리 주님은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아버지와 즐거이 교제하는 법을 가르칠 기회가 생겼다며 퍽 기뻐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어느 날 오후 제자들과 열성 넘치는 군중이 산 중턱에 모였을 때 그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다. 누가복음 11:2-4에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가장 유명한 말씀 중 하나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짤막한데다 어린아이도 쉽게 외울 수 있지만, 이 기도의 간결함이나 익숙함에 현혹되지는 말자. 우리는 주님의 기도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기도라고 바르게 알고 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는 또한 그 이상이다. J. I. 패커는 주님의 기도를 “복음의 요약”이라고 부른 테르툴리아누스를, 그리고 “신성의 몸”이라고 부른 토마스 왓슨을 인용한다. 패커 자신은 주님의 기도는 “생활 전반의 열쇠”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기도보다 더 명확하게 가르치는 것은 없다”고 덧붙였다.

주기도문은 단순한 기도가 아니다. 이 기도는 이 땅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비전이다. 이 기도는 망가진 이 세상에 불의와 굶주림과 악이 있음을 인지한다. 이 기도는 믿음의 선언이요, 예배로의 부름이요, 하나의 외침이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사회의 개혁을, 이 땅에 천국이 임하게 해 달라는 변혁의 탄원이다.

그리하여, 주기도문은 단순히 그렇게 기도하라는 기도가 아니다. 주님의 기도는 그렇게 살라는 기도이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의 기도를 기도하면, 어린아이처럼 의지하는 마음가짐으로,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로,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선교에의 동참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자세: 어린아이와 같은 의존

마태복음 6장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이렇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으로 시작하신다. 예수님은 기도를 대하는 두 가지 방식을 대조하신다. 하나는 과시형 영성의 자세이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려고 종교 활동을 하는 자세이다. 다른 하나는 어린아이와 같은 의존, 곧 하늘 아버지께 우리가 완전히 의지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주기도문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과 의존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나라가 우리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임을 인정한다. 우리의 생존과 번영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불가능함을 알기에, 우리는 겸손히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 어린아이가 밤에 잠잘 준비를 하면서 도움과 안전을 구하는 것처럼 우리는 용서와 보호와 구원을 간청한다.

우리가 선하고 사랑 많으신 아버지의 발아래 있는 굶주리고 궁핍한 자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의 초점: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시편이다. 주기도문은 찬양, 탄식, 간구(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 중보(타인을 위한 기도)를 포함한 많은 요소가 시편의 구조와 흐름을 따른다. 주기도문은 우리를 자기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전심으로 예배하는 삶으로 초대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뿐만 아니라 주님과 왕으로서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전심으로 예배하는 자세로 기도하고 살아가라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끊임없이, 한눈팔지 말고 걸으라고 우리를 초청하신다. 진심으로 드리는 예배(시 86:11)는 우상 숭배(출 34:11-17), 탐욕(마 6:19-21), 처음 사랑에서 멀어짐(계 2:4)을 없애는 해독제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 삶의 중심을 예수님과 그의 영원한 나라에 두는 것이다. 남의 칭찬을 받으려는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인기를 얻고자 하는 욕심을 거부하는 것이며, 명성을 쌓으려고 거창한 일을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 존재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고 그분께 온전히 복종할 때 오는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의 관계들: 서로 사랑

단수 대명사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주기도문에서 간과되고 있는 아름다운 차원이다. 주기도문에는 “나”(“I” 또는 “me”)가 없다. 그 대신에 예수님은 공동 대명사 “우리”(“We” “us” “our”)로 기도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주기도문은 우리의 개인주의적 틀을 재고하고 우리가 교회와 얼마나 상호 연결되어 있는지 인정하고 맛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의 기도를 단수의 기도에서 공동의 기도로 바꾸심으로써,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두 번째 큰 계명(마 22:39)을, 그리고 주님께서 새 계명이라 이름 붙이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요 13:34-35)을 우리가 잊지 않게 하신다.

주기도문을 기도하면 우리는 형제자매의 실제적인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자원과 평화와 희망이 부족한 동료 신자들을 알아가는 것이다.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잘못할 때가 있으며 그럴 때마다 앙갚음을 일삼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며, 서로 용서하고 쓴 뿌리를 뽑아버리는 것이다.

주기도문을 정직하게 드린다는 것은 신속하고 철저하게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사명: 하나님의 일에 참여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깨어진 이 세상에 발을 들이지 않고서는 주기도문을 기도할 수 없다.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사역에 참여하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능력을 심어준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거나 그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한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게 될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온 세상 사람들의 (육체와 영의) 굶주림을 인식하고 그들을 먹이며 세계 빈곤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용서를 구하고(“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과 용서한 사실을 아뢰는(“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기도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자주 이웃과 동료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악의 잔혹하고 불의한 계략에서 사람들을 구하는 일에 나선다는 것이다.

주기도문을 기도하고 주기도문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기도하시며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요 17:18)

프레드릭 비크너가 말했듯이,

주기도문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게 좋다. 주님의 기도로 기도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 기도문을 입 밖에 낸다는 것은 호랑이를 우리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며, 원자력을 미풍처럼 보이게 하는 힘을 내뿜는 것이다.

비크너는 주기도문은 언젠가 성취될 약속의 노래임을 우리에게 되새겨 준다. 언젠가,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 잘될 거다. 그때까지, 우리는 기도한다.

원제: The Lord’s Prayer Is Meant to Be Lived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일용할 양식

τὸν ἄρτο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톤 아르톤 톤 에피우시온)

"일용할 양식"에 대한 헬라어는 τὸν ἄρτο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톤 아르톤 톤 에피우시온)이다. 
아르톤ἄρτον은 "빵"이다. 
신약의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던 음식이다.
여기서 빵은 부분으로 전체를 대표하는 제유법으로 사용되어, "양식" 일반 혹은 더 나아가 "물질" 일반을 의미한다. 

“일용할”로 번역되어 있는 헬라어 단어 “에피우시온"ἐπιούσιον은 주의 기도에 사용된 전체 헬라어 중에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단어이다. 이 단어를 해석하기 어려운 이유는 성경에 이 단어가 오직 주기도문에만 나오기 때문이고, 성경 밖에서도 그 용례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잘 안쓰이는 단어이기 때문에 정확한 뜻을 알기 어렵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상당히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신 셈이다.
이렇게 일상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사용하셨을 때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테니, 더 세심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에피우시온”이 무슨 뜻인지를 밝히기 위한 많은 학문적 연구가 있었다.

초대교회 시절부터 문제가 되었으니 긴 논란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 안에 용례가 없으니, 성경 밖 문서나 비문을 다 뒤져서 이 단어가 사용된 흔적이 있으면 그것에 근거해서 뜻을 찾아내려 하였는데, 노력에 비하여 결실이 적다.

이 단어가 쓰여있는 비문이 그리스의 어느 섬(Rhodes)에서 새로 발견되었을 때 거기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쏟았고, 이 단어가 쓰여있는 파피루스가 런던의 어느 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되었을 때에도 학계가 들썩 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직도 그 뜻을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말 주기도문이 “일용할”이라고 에피우시온을 번역했는데, 그건 기본적으로 에피우시온의 뜻을 “오늘”이라고 본 것이다. 영어로 daily bread라고 번역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새로운 발견을 반영하면 에피우시온은 "다음"이라는 뜻이 된다.
에피우시온에 "날"을 뜻하는 헤메라가 붙여써진 파피루스가 발견되었는데, 문맥에서 볼 때 "다음 날 곧 내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발견을 주의기도 해석에 적용하면  τὸν ἄρτο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톤 아르톤 톤 에피우시온) "다음 먹을 빵"이 된다.
그리고 이것을 의역하면 "생존에 필요한, 삶을 꾸려가는 데 필요한” 빵이 된다. 

에피우시온(ἐπιούσιον)이라는 단어 자체에 집중한 해석 역시 이런 해석과 궤를 같이 한다.
에피우시온은 "에피"라는 전치사와 "우시온"이라는 명사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에피(ἐπί)는 "~위에"를 뜻하는 전치사로 영어의 on이나 upon에 해당한다.
"우시온"이 나온 "우시아(οὐσία)"는 그리스 철학은 물론 삼위일체 교리에도 사용된 단어인데 그 기본 의미는 "존재(being, existence)"이다.

그러므로 에피우시온은 "존재를 떠받치는"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고, 이는 에피우시온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맥이 통한다. 

이런 이해를 고려한다면, 주의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하라 하신 "일용할 양식"이 하루 먹을 양식이 아닌 것으로 조심스레 해석할 수 있다.

"일용할 양식"은 문학적 표현으로 참 좋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단지 하루치 양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떠받치는 물질",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물질 전반"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라 하셨다. 

내게는 어디까지가 "일용할 양식"일까? 물어보고 묵상할 질문이다. 


주기도문의 신학(마태복음 6:9~15)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의 이곳과 누가복음의 평행문(11:2~4), 디다케(Didache)라는 2세기 교회사 문헌에 세 군데 실려 있다.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모범 기도를 가르쳐두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기도를 가르쳐달라는 요구에 이 기도를 전하는 것이 그 맥락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중언부언과 자기과시의 기도를 비판하며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는 맥락에서 모범적인 기도의 사례로 주기도문을 제시한다. 이러한 편집 맥락의 차이는 애당초 주기도문의 기원이 예수의 신학적 유산을 요약하는 가르침의 일환으로 제자들에게 전수되었고 그것이 다양한 맥락에서 실천적으로 응용되어갔음을 암시한다.

먼저 이 기도는 '우리'를 기도의 주체로 설정한 집단 기도(group prayer)로 규정된다. 개인으로 은밀하게 골방에서 드리는 묵상기도로서나 축귀를 위한 주술적 차원에서 이 기도가 활용된 것은 후대의 일이다. 이 기도의 내용만으로 판단할 때 주기도문은 두세 명 이상의 제자들이 모여 드리는 공적인 기도로 당시 유대교의 회당예배에서 유통된 카디쉬 기도(Kaddish prayer)를 그 원천자료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 유대교 기도가 하나님을 3인칭으로 설정한 기도라면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2인칭으로 설정해 기도하는 주체와의 긴밀한 인격적 대화와 소통을 전제로 깔고 있다. 나아가 신학사상이란 측면에서도 주기도문은 예수의 신학을 응집한 결정체라고 할 만한 중요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 기도가 짧고 중언부언을 방지한다는 점에서 앞의 기도 교훈과 일맥 상통하지만, 개인이 골방에서 드리는 은밀한 기도가 아니라 공적인 '집단기도'라는 점에서는 상기 맥락을 이탈한다.

먼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호명하며 이 기도는 시작된다. '하늘'의 초월성과 친근하게 옆에 계시는 '아버지'의 내재성이 동시에 강조된 이 기도의 서두는 그 보편적 보호자로서의 그 아버지를 '우리'의 아버지로 호칭함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의 개인적 편향과 편익을 위해 편파적으로 이용되거나 오남용되는 문제를 사전에 방지한다. 나아가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게 하시옵소서'라는 간구도 하나님의 이름이 세속적 이해관계에 엮여 함부로 오남용되지 않도록 극진하게 배려한 점이 도드라진다. 이는 나아가 십계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교훈의 연장선상에 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옵소서'라는 문구는 하나님의 왕적인 주권(basileia)이 이 땅에 온전히 실현되길 간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의와 사랑, 평화와 자비 등으로 요약되는 하나님이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간구한 세 번째 항목은 제 위치를 지키거나 제 순환궤도를 돌며 피조물 본연의 역할에 착실하게 순종하는 하늘의 일월성신, 나아가 그 아래 구름과 새들처럼 경계 없는 하나님의 자유를 구현하는 창공의 피조물과 달리 이 땅의 청지기로 세운 인간만이 유일하게 패역하며 하나님의 창조 뜻을 위반하는 현실을 암시한다. 그래서 타락과 죄악의 근원이 되는 이 땅의 인간 현실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구현되길 갈망하는 간구가 이어진 것이다.

다음으로 세 가지 인간을 위한 간구 중 첫째가 일용할 양식이다. 영적인 양식을 굳이 배제할 필요는 없지만 예수의 의중 가운데 이 양식은 무엇보다 육체적 양식이었다고 봐야 한다. 음식을 먹지 않고 생명이 온전히 건사될 수 없다. 이러한 현실적 판단 아래 당시 굶주림에 지친 가난한 생명을 배려하여 이로써 인간을 위한 중요한 첫째 간구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렇게 보존된 생명이라야 죄악과 싸우며 용서하고 용서받는 일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죄지은 자의 용서에 대한 간구는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빚의 탕감에 대한 내용이다. 사회경제적인 맥락에서 이 땅의 현실은 비대칭과 불균형, 그리고 양극화이다. 그것은 조건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마찬가지로 은혜로써 상대방의 빚을 탕감해줄 때 극복 가능한 과제다. 용서의 본질도 인간사회에 인간의 탐욕으로 불거진 이러한 비대칭, 불균형의 인간관계를 극복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시험'(peirasmos)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유혹'과 '시련'으로 달리 번역될 수도 있다. 여기서 시험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그 대상은 제자들을 포함한 인간이다. 하나님의 시험은 욥의 고전적 사례가 암시하듯 수수께끼 투성이다. 그것을 극복할 때 인간을 연단하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 치여 치명적인 타격으로 죽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파멸적인 최후로 종결되는 시험으로 더 이상 우리 인간을 끌어들이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그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각종 유형무형의 '악'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당신'께서 피조물인 인간을 향해 이런 구제와 구원의 의무가 있음을 자식의 도리로 상기시켜드리는 데 이 주기도문의 주된 목적이 있다. 이어지는 14절은 주기도문의 예전적 완성도를 살리기 위해 후대에 첨가된 송영구이고 14~15절은 주기도문의 구절 중 12절의 빚 탕감과 용서의 교훈을 한 번 더 강조하여 추가로 논평한 것이다.

주기도문은 짧지만 예수의 행적과 교훈을 압축한 심오한 신학사상을 품고 있다. 그 한 구절마다 수많은 해석과 논쟁을 유발할 뿐 아니라 신앙적인 도전이 지대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초창기부터 이 주기도문을 애용하며 자신의 기도를 비추는 거울로 삼았을 뿐 아니라 경건한 신앙과 삶의 훈련을 위한 기준으로 삼았다. 오늘날 수많은 주기도문 강해가 나왔지만 그 중에는 보충되고 교정되어야 할 부분들이 많다. 아울러, 그 심층을 추가로 탐구하면서 그 핵심 교훈을 치열하게 실천해야 할 것이다. 주기도문은 이렇듯 예수님의 가르침을 현대화하는 데 첨단의 기수로 재발굴하고 재정립해야 할 중요한 과제를 담고 있다.

신명기 27:11-26


11 모세가 당일에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이른 후, 그곳 세겜 땅 북쪽에 있는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반드시 이행하여야 할 '축복과 저주의 의식'을 언급한 부분이다. 이 의식은 이스라엘 12지파가 각기 6지파씩 양편 산에 갈라서서 축복과 저주를 각기 선포하는 의식인데, 여호수아 8:30-35에서 그대로 실행되었다.

한편,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왜 축복과 저주의 산으로 각각 선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2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산에 서고

ㅇ요단을 건넌 후에 - 2, 3, 4절에 이어 본장에서 벌써 네번째 언급되고 있는 구절이다. 이는 그만큼 요단(Jordan)을 건너는 일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임을 시사해준다.

ㅇ시므온과...베냐민 - 모두 야곱의 정부인(正婦人)인 레아와 라헬에게서 태어난 후손이다(창 29:31-30:24;35:16-18). 그러나 그중 레아의 막내 아들인 스불론의 지파와 서모(庶母) 빌하를 범하였던 장자 르우벤(창 35:22)의 지파는 여기서 제외되었다.

ㅇ축복하기 위하여 - 야곱의 정부인에게서 난 아들들이 이처럼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에 대하여 카일(Keil)은 '적자(嫡子)가 서자(庶子)보다 신분이 높고, 축복이 저주보다 품격이 높은 만큼 적자가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평하였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433).

ㅇ그리심 산 - 사마리아 성읍 부근에 위치한 오늘날의 '예벨 엣 투르'(Jebel et Tur)이다. 남북으로 에발 산과 마주보고 있는데, 특별히 그리심 산(Mt. Gerizim)이 축복을 선포하는 산으로 선택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3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고

ㅇ르우벤...납달리 - 전술한 것처럼 르우벤과 스불론 외에는 모두 야곱의 첩이었던
빌하와 실바의  후손이다(창 29:31-30:34). 르우벤과 스불론이 여기에 속하게 된 이
유는 아마 르우벤은 서모 간통 사건으로  인한 장자권 박탈 때문이었을 것이고(창
35:22;49:4;대상 5:1), 스불론은 레아의 막내 아들이었기 때문(창 35:23)이었을 것
이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ㅇ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 혹자들은 그리심 산에 선 지파들을 축복받은 지
파들로, 에발 산에 선 지파들을 저주받은 지파들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단정
은 무리이다. 왜냐하면 에발 산에 서게 될 지파들 중에도 단, 아셀, 납달리 지파처럼
야곱의 축복을 받은 지파들이 있으며 그리심 산에 서게  된 지파들 중에도 시므온,
레위와 같이 야곱의 저주를 받은 지파도 있기 때문이다(창 49:1-27). 따라서 축복의
산에 오른 자들은 율법에 순종하는 자들을, 저주의 산에 오른 자들은 율법을 거역하는
자들을 각기 상징할 뿐으로 이해함이 좋다. 한편 에발 산(Mt. Ebal)이 특별히 저주를
선포하는 장소로 선택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4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ㅇ레위 사람 - 여기서는 레위 지파에 속한 모든 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언약궤
를 메고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의 중앙 부분에 서서 모세의 말을 전달받아 양편에 갈
라 서 있는 백성들에게 큰소리로 외칠 '레위 제사장'(9절;수 8:33)을 가리킨다
(Delitzsch, Lange, Alexander, Wycliffe)
ㅇ큰 소리로...이르기를 - 혹자들은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서 외치는 사람의 목
소리가 양편 산 중턱에 운집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들릴 수 있었겠는가라는
점에 의문을 표시한다. 그러나 성서 고고학자들에 의한 정밀 조사 결과 양쪽 산의 음
향 효과가 매우 훌륭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또 여러 차례의 실험 결과 여러 사람이
외칠경우 충분히 들려진다는 사실도 입증되었다(Stanley, Syria & Palestine;
Tristram, Land of Israel ;Hastings, Bonar, E.G. Kraeling).

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찌니라

ㅇ장색 - 각양 물건을 정교하게 만드는 기술자(craftsman)를 가리킨다. 당시 이들은
우상을 만들어 파는 일로 많은 이익을 보곤 하였다(행 19:24).
ㅇ가증하니 - 23:18 주석 참조.
ㅇ은밀히 세우는 자 - 십계명 중 제 2계명(5:8-10;출 20:4-6)을 은밀히 범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은밀히'에 해당하는 원어 '바사테르'는 '은밀
한 장소에'(KJV, in a secret place)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은밀한
장소'로 꼽을 만한 곳은 어디이겠는가? 물론 눈에 잘 안 띄는 골방이나 비밀 장소를
들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곳으로는 역시 사람의 마음 속을 꼽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보다 더 큰 비중으로 자기 마음 속에 은밀
하게 품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 숭배이다.
ㅇ모든 백성은...아멘 할지니라 - '아멘'(amen)이란 말은 본래 '확실하다', '신실하
다'는 뜻의 '아만'에서 유래한 단어로 문장이나 대화의 끝에서 사용될 때
'과연 그렇습니다',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장 11-26절 강해, '아멘 연구'를 참조하라.

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경홀히 여기는(칼라) - 원뜻은 '가볍다'로, 곧 상대방을 업신여기거나
비천히 여기는 것(잠 12:9), 절하(切下) 평가하거나 모독을 주는 것(사 16:14), 그리
고 지독히 경멸하는 것 따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부모
를 이처럼 업신여기는 것은 곧 자신의 근본(根本)을 망각한 행동일 뿐 아니라, 급기야
는 부모를 통해 그 생명을 부여하신 하나님을 경홀히 하는 짓거리이다(21:18). 그러므
로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고 권면하였다. 출 20:12 주석 참조.
ㅇ저주를 받을 것이라(아루르) - 기본형은 '아라르'로 '버림을 받다'란 뜻이다. 즉 이
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한다면, 버림을 받는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자신임을 잘 증거해 준다(Calvin).

17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 '여기서 지계표'(地界標;KJV,landmark;NIV,
boundary stone)란 땅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세운 돌이나 푯말을뜻한다(창 31:51,
52). 따라서 이러한 지계표를 마음대로 옮기거나 없애 버리는 것은 타인의 재산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 행위이다. 한편 성경 뿐 아니라 고대 바빌로니아의 법도 지계표를
침해하는 행위를 큰범법 행위로  규정하고  매우 엄격하게 다스렸다.19:14 주석 참조.

18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 고대 근동에는 여러 가지 환경적 요인과
풍토(風土)로 인하여 의외로 소경이 많았다. 즉 고온 건조한 기후와 쉴 새 없이 이
는 먼지, 그리고 비위생적인 생활 환경 및 가난으로 인한 영양 실조 등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실명(失明)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로부터 이러한 소경을 일부러 괴롭
히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따라서 본절이 의미하려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단정
하기 어렵다. 그래서 영역본 Living Bible은 본절을 '소경을 이용하여 그 이(利)를
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Cursed is he who takes advantage of a blind man)
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이웃을 하나님의 계명의 길에
서 벗어나도록 유혹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영적으로 해석하였다. 아뭏든
이는 보다 광범위한 의미로, 장애자의 약점을 이용하여 불의한 이(利)를 취하거나 또
는 그들을 괴롭히며 실족케 하는 일 따위를 엄격히 금하고 있는 조항임에는 틀림없다
(레 19:14;롬 15:1). 실로 율법은 그러한 약자들의 약점을 악용하는 죄악에 대해서는
보다 혹독한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레 19:14 주석 참조.

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객이나 고아나 과부 - 가난하며 약한자, 그리고 억눌리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
을 대표하는 구약 시대의 3대 약자들이다(14:29;16:11, 14;24:21;26:12, 13).
ㅇ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  여기서  '억울케  하다'에  해당하는 '나타'
는 '비틀다', '굽게 하다', '벗어나게 하다'는 뜻으로, 정당한 판결을 내리
지 아니하고 힘 있는 자를 두호(斗護)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서
는 이미 24:17에서도 엄금했던 바, 실로 하나님께서는 '공법(公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河水)같이' 흘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암5:24)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 계모와 구합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계모와 구합하는 자 - '구합하다'에 해당하는 '솨카브'는 성(性) 관계
를 갖기 위해  '잠자리를 같이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계모'에 해당하는 '에쉐트 아
비'는 '아버지의 여자'란 뜻이다. 따라서 비단 이는 계모 뿐 아니
라 아버지의 첩과도 성 행위를 하는 것을 포함한다.
ㅇ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 영역본 RSV는 이를 '아버지의 여자를 벌거벗겼으
니'로, NIV는 '아버지의 침소를 더럽혔으니'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Living Bible은
'그녀는 그의 아버지에게 속하였으니'로 번역하고 있으며, 공동 번역은 '아비의 이불
자락을 들치고'로 의역하고 있다. 아뭏든 이처럼 아버지의 침소, 아버지의 여자를 넘
보는 행위는 인간의 기본 윤리를 저버리는 패역(悖逆)이니, 저주를 면할 길 없다
(22:30). 레 18:8 주석참조.

21 무릇 짐승과 교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짐승과 교합하는 자 - 동성애, 근친 상관 등과 더불어 변태적인 성 행위 중의 하
나인 수간(獸姦)을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수간자(獸姦者)는 근친 상간자 및 남색자
(男色者)와 더불어 땅을 더럽히는 추악한 성범죄자로서 아스라엘 사회에서 반드시 제
거되어야 했다(출 22:19;레 20:15, 16). 성경은 결코 생리적인 성적 욕망이나 충동을
죄악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性)의 창조자로서 하나님께서는 성을 인간들이 누릴 수
있는 지극한 기쁨으로 간주하셨다(잠 5:18;전 9:9;요 3:29). 이것은 창조시 아담의 독
처(獨處)를 좋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한 여자 하와를 창조하여 준 사실(창
2:18, 22)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바로 이 남녀 창조 사건에서도 분명히 예시
되었듯이 남녀간의 성적 욕망은 일부 일처의 신성한 결혼 제도에 의해서만 충족되어야
한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요 비밀이었다. 여기서 '비밀'이라고 한 것은
훗날 사도 바울이 설파했듯이 신랑과 신부의 한몸 되는 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순결한 일체성'을 상징하고 또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22:13-30;엡 5:31, 32).
따라서 하나님의 신성한 창조 질서가 반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오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 내포되어 있는 일부 일처의 결혼 제도를 떠난 모든 성(性) 남용은, 더
욱이 수간, 근친 상간, 동성애(同性愛) 등 타락한 인간의 어그러진 심성(心性)에
기인하고 있는(롬 1:26, 27) 모든 변태적(變態的)인 성행위는 단순한 도덕적 범죄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죄에까지 이르는 추악한 성범죄 행위인 것이
다. 특히 고대 이방의 문란하고 타락한 제사 의식이나 설화 등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
는 수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엄한 인간의 가치를 하등 동물의 수준으
로 격하시키는 극악한 소행이므로 거룩한 공동체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결단코 용납될
수 없었다.  따라서 성경은 일관성 있게 이러한 모든 성범죄를 보다 엄격히, 그리고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는 성(性)의 타락으로 인해 마침내 하나님
의 심판을 초래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가나안 족속의 멸절 그리고 로마의 패망 등
을 거울삼아 성(性)개방 풍조로 인해 성(性)을 가볍게 취급하거나 심지어 상품화시키
는 타락한 세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빛된 자녀답게 고결하고 아름다운 성(性) 윤리관
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레 18:23;20:15, 16 주석 참조).

22 그 자매 곧 그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과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23 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자매...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 누이는 항렬상 자기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자이다.
따라서 그러한 누이를 범하는 것은 우생학적(優生學的) 폐단은 차치하고라도, 곧 자기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는 짓이나 마찬가지 행위이므로 저주를 면할 길 없다. 레 18:9
주석 참조.
ㅇ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 성경은 자신의 장모와 성 관계를 갖는  파렴치한에
대하여서는 그들 모두를 반드시 화형(火刑)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레
18:17;20:14 주석 참조.

24 그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 과실치사(過失致死)가 아닌 한, 그 어떠한 살인 행
위도 하나님  앞에서  결코 정당시킬 수 없다. 특히 암살(暗殺) 행위는 더욱 그러한
데,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상대방이 미처 방어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기습하는 도
발 행위이기 때문이다. 죄를 은폐하려는 의도하에서 저지르는 계획적 살인 행위이
기 때문이다. 출 20:13;민 35:16-21 주석 참조.

25 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 살인의 대가로 뇌물을 받는 행위는
곧 인간의 값어치를 추잡한 뇌물보다도 낮게 취급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비록 사람
의 눈을 피해 그같은 죄를 자행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결국 하나님의 공의의 눈은 피
할 수 없기에 저주를 면할 길 없다. 출 23:7, 8 주석 참조.

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

사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자란 아무도 없다(롬 3:10).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출애굽의 영웅 모세도, 그리고 성군(聖君) 다윗도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던 죄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짐짓 범죄치 아니하려고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율법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라 하겠다<창 6:9>.

ㅇ아멘(Amen) -

이 말의 어원(語源)인 '아만'은 본래 어떤 대상을 '지지하다' 혹은 '신임하다'란 뜻이었다.
여기서부터 이 말은 기도나 찬양 및 선언이 종결되어지는 종지부나 끝맺음에서 '진실로 그렇습니다' 또는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
'라는 동의나 소원의 뜻을 가진 '아멘'으로 발전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아멘'이란 말은 단순한 종결(終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곧 어떤 선포나 찬양 그리고 기도 등을 지지하거나 확인 또는 시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나의 삶 속에 적용시키겠다는 결단의 의지(意志)까지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한편 신약 시대에 '아멘'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강조 용법('진실로 진실로'란 말은 헬라어로 '아멘 아멘'이다)으로 자주 사용되었고, 바울 사도에 의해서는 축복과 찬양(Doxology)의 결미어(結尾語)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계시록 서신에서 이 말을 인격화시켜 존재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하였다(계 3:14).
이 모든 배경하에서 '아멘'을 복창(復唱)하던 일은 유대인들의 습관이 되어 왔으며, 또한 그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기독교 공동체에 전달되어져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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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보내시면서 제자들이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를 묻자, 친히 가르쳐주신 기도문이다.
기도드리는 사람들의 눈을 고치어 하나님의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주기도문은 하늘에 속한 사항 3가지(여호와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아버지의 뜻)와 땅에 속한 사항 3가지(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악에서 보호)를 합하여 6가지를 담고 있다.

인간 삶에 관한 대부분을 포괄하는 것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직면하는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게 해준다. 즉, 신이 행한다는 신위(神爲)의 차원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순종과 청종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사무엘상 15:22절)

 

기독교란 ?

기독교(Christianity)는 로마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와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 그리고 개신교회(Protestantism)의 3교회를 합하여 일컫는다.

세계의 모든 교회가 함께 추구하는 주제이며, 기독교의 신학으로나 교회 현장에서 공통되게 추구하고 있는 주제는 ;

첫째 올바른 영성(Spirituality)이다.
둘째 건강한 공동체(Community)이다.
셋째 병들어가는 지구 공동체에 대한 치유(Healing)이다

하나님의 형상

미국의 여류신학자인 Betty Russel은 하나님의 형상을 4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영적인 하나님이다.
둘째 사랑의 하나님이다.
셋째 창조적인 하나님이다.
넷째 공동체로 계시는 하나님이다.

온주 상권(溫州 商權)과 기독교

중국은 기독교 인구가 줄잡아 5% 미만이다.
온주는 15%에 이르고 있다.
그 유명한 문화혁명(文化革命) 시절에도 교회에서의 예배를 중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곳의 젊은 크리스천들의 모임을 접하면서 중국 기독교의 밝은 미래를 보는 듯 했다.
생각해 볼 점은 중국교회 지도자들이 한국교회를 벤치마킹하려는 마음이 절실하다는 점이다.

감사와 기도

제일동포 3세인 의사 하루야마 시게오(春山茂雄)박사가 “뇌내혁명(腦內革命)”(3권)을 출간하여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됬다.
조선에서 한의원을 했던 할아버지로부터 어린 시절부터 침술, 지압술 등을 배웠고, 8세에 이미 일본정부로터 침술사의 자격증을 받았다. 동경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후 의사가 되었고, 한의학과 양의학을 융합하여 치료와 건강지도에 활용하였다.

“뇌분비 호르몬이 당신의 인생을 바꾼다”는 부제(副題)가 붙어있다.

원래 사람은 자신의 체내에 모든 질환에 대한 방어 기능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잘못된 생활습관과 삶의 방식으로 인해 걸리지 않아야 할 질병에 걸린다.

하루야마 시게오 박사는 자신의 병원에서 ‘음식, 운동, 기도’의 3가지 방법으로 각종 질병을 치료한다.

화를 내거나 누군가를 미워할 때 뇌 속에서 아드레날린(Adrenalin) 혹은 노르아드레날린(Noradrenalin) 호르몬이 분비된다. 이 호르몬은 강한 독소를 지니고 있어 사람을 병들게 하고 늙게 한다.

그러나, 감사하거나 기뻐할 때 그리고 기도와 명상에 깊이 빠져들 때 엔돌핀(Endorphin) 이나 베타엔돌핀(β-Endorphin) 호르몬이 분비되어 병을 낫게 하고 젊어지게 하며 행복감을 누리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감사하는 생활습관과 기도·명상에 젖어드는 영성의 삶에 통해 건강과 장수 그리고 행복과 행운을 동시에 붙잡을 수 있게 된다.

가난 (Poverty)이란?

I realize, of course, that it's no shame to shame to be poor.

But it's no (great) honor, either.

가난은 창피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위대한) 명예도 역시 아니다.

Luxury Shame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때를 만나게 되니 사람들의 의식이 다소 변해간다.
그동안 일부 지각없는 인사들이 부(富)를 뽐내기 위해, 또는 빈자(貧者)의 삶을 한탄하며 허파에 바람만 잔뜩 집어넣은 허영의 속물(俗物)들이 고가의 명품을 사서 온 몸에 휘감고 다녔다.
주체할 수 없는 부(富)를 가진 Super Rich 계층에서 고가의 명품을 소비하는 행태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바람직한 인사들이 생겨났다. 이때 느끼는 부끄러움을 Luxury Shame이라 한다. 신조어(新造語)다.
시대가 바뀌면서 인간 의식의 전환의 때가 왔나보다.

인생은 B to D

B는 Birth(태어남)이고, D는 Death(죽음)이다.
즉 인생은 태어났다가 죽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럼 B와 D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C가 있다.
C는 무엇인가?
바로 Choice(선택)이다.
즉 인생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선택하는 대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시다.
모든 일들이 그분의 선택의 역사다.
거룩한 하나님께서 거룩한 백성을 선택하시고지극히 사랑하시어서 천국으로 이끄신다.

B는 주님의 창조의 역사이고, D는 주님이 선택하신 백성들이 가는 목적지이다.
즉 영생(永生)의 삶을 사는 부활의 현장이요, 승리의 종착역인 것이다.

C는 주님의 선택이다.
주님은 범죄 하면서 사는 우리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부활하는 역사(役事)를 통해 우리 인류 전체의 죄를 값없이 용서해 주셨다.

우리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위대한 선택을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인간을 천국의 영생의 삶으로 이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자에 의한 리빙스턴의 부상 - 토마스 벤느 作)

(주님께서 동행하는 자도 시련과 고난을 당하지만, 능히 극복해 낸다)

 

우리 죄 많은 인간에 대한 그분의 지극한 사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이를 거부하고 헛된 우상을 만들고 이생의 자랑과 교만에 취해 스스로 드러내려고 애쓰면서 살아간다.


주님께서 이미 행하신 위대한 사랑의 선택을 망각하거나 거부하면, 살아있어도 죽은 자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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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다섯 가지를 영어 단어의 첫 글자를 따서 ‘5F’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F로 시작하는 다섯 가지가 행복한 노후를 만들어 준다”고 했습니다.

첫째, 파이낸스(Finance)

파이낸스는 돈을 의미합니다.
노후에도 돈이 부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전략으로 ‘LED 전략’을 제시 했습니다.

L은 ‘Long Work’의 약자로 오래 일하자는 의미입니다. 
E는 ‘Early Start’로 노후 대비를 젊을 때부터 일찍 시작하자는 의미입니다.
D는 맞벌이를 의미하는 ‘Double Income’입니다.

“100세 시대에는 맞벌이를 해야 노후 준비가 손쉬워진다”라고 했습니다.

둘째, 필드(Field)

필드는 일을 하는 분야를 의미합니다.
“노후에도 친구들과 함께 공통의 취미를 갖고 활동할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며

“100세 시대인 만큼, 은퇴 후 30~40년을 어떻게 보낼 건지 은퇴 전에 준비하는 게 좋겠다”라고 했습니다.
노후에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비용도 고려하면서 취미를 만드는 게 좋다고 했습니다.

셋째, 펀(Fun)

펀은 재미를 의미합니다.

“기부 활동, 취미 활동 등을 하면서 시간을 어떻게 재미있게 보낼 것인가도 미리 고민하고 준비해야 할 포인트”라고 했습니다.

넷째, 프랜드(Friend)

프랜드는 재미를 같이 즐길 가족이나 친구를 의미합니다.

“나이가 들어서는 노후를 같이 즐길 수 있는 알짜배기 친구들을 만들어 가는 관계의 다이어트가 필요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섯째, 피트니스(Fitness)

피트니스는 건강을 의미합니다.

행복한 노후에는 건강이 뒷받침 되야한다는 것입니다.
“피트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걷기와 근육 키우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즐기는 구호라며 ‘청바지’와 ‘백두산’이라는 문구를 소개했습니다.

‘청바지’는 ‘청춘은 바로 지금부터’를 줄인 것이고, ‘백두산’은 ‘백 세까지 두 발로 산에 가자’를 줄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노후에 필요한 ‘오자’는 ‘놀자, 쓰자, 베풀자, 웃자, 걷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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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 야이로,



야이로(Jairus,  Ἰάειρος) / 빛남, 그가 살린다, 하나님의 깨우침을 받은 자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마가복음 5:22-23)

• 회당장의 직무

'회당장 중 하나'는 "한 회당장"으로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가버나움에 있는 한 회당장으로 이해된다.
당시 회당의 조직은 회당장, 핫잔(Hazzan), 랍비 그리고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중에서 특별히 "집회의 우두머리"로 일컬어지는 회당장은 건물을 관리하며, 예배 순서의 작성 및 질서 유지, 심지어 재판과 같은 사무 증을 관할하던 장로 출신의 지도자였다(눅 4:13 ; 8:41 ; 행 18:8,17).
실로 이들은 제사장 계급의 상대적 실추(失墜)로 인해 소위 종교 민주화를 통해 등장한 평신도 계급(the laymen classes)들로서 이들의 등장은 곧 종교적 관심을 일반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제사장은 아니지만 예배를 주관하고 회당을 관리하며 다스리는 사람들이다.
때로 "회당장"이라는 명칭은 명예직으로서 행정적인 의무는 없으나 회중 가운데 탁월한 인물에게 이 직위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당시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의 대상이었다.
야이로(Jairus)는 바로 이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야이로 역시 그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었다고 보는데는 의심할 바 없다.

• 회당장 야이로

야이로( Ἰάειρος)는 "깨달은 사람" 내지는 "그는 빛난다"는 뜻의 히브리어 이름 "야일"의 헬라식 발음으로 이해된다(민 32:41 ; 삿 10:3).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최대의 존경을 표현하는 것이다.
회당장의 신분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존경받는 사회적 지위를 가졌다면 이 장면은
① 예수를 최고의 지위로 높이는 절대 겸손의 모습니다.
사실 그 당시 예수는 일반적으로 한 새로운 랍비 정도에 불과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던 터였기 때문에 유대의 종교를 대표할 만한 종교 지도층 인사가 그 앞에 무릎 꿇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② 예수의 치료이적이 그 지방에 아주 신빙성있고 믿을 만한 소문으로 알려져 있음을 암시한다.
즉 그 지방의 존경받는 회당장이 기적을 요청한 사실은 예수의 이적 행위에 대한 공적인 신뢰감을 증명하는 것이다.
③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철저한 믿음과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취한 회당장의 신앙적 행동을 보여 준다.
회당장이 직접 바닷가에 많은 무리가 모인 곳으로 예수를 찾아왔고 그러한 행동에 옮기기까지는 예수에 대한 믿음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 회당장 야이로 간절함

회당장은 마치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한 자처럼 필사적(必死的)으로 거듭 반복해서 예수께 간절히 매어달렸다.

1.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회당장이 예수께로 온 목적을 밝히고 있다. 이유는 "어린 딸이 다 죽게 된" 때문이다. 여기서 "어린 딸(뒤가트리온, θυγάτριον)이란 조그마한 여아를 깊은 애정으로 부를 때 사용하던 말이다. 이를 통해 야이로의 자식에 대한 애끓는 심정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죽게 되었사오니"(에스카토스 에케이, ἐσχάτως ἔχει)란 지금 즉음이 문 앞에 서 있을 만큼 그 병세가 최악의 상태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물론 그 딸의 병명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한편 누가 복음에서는 회당장이 직접 말하지 않고 기록자 누가가 담담히 설명하고 있는데, 어린 딸의 나이가 12살임을 밝히고 있다(눅 8:42).

그리고 회당장은 다만 예수께서 자기 집으로 가주기만을 간청한다(눅 8:41).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마 9:18)라고 말함으로써 절망적인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즉 마가와 누가복음은 "죽게 된 지경"을 말하고 마태복음은 이미 죽은 것으로 묘사한다. 이 같은 차이점은 마태가 마가복음에도 뒤에 기술되고 있는(35절) 이미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본시점과 종합하여 서술한 째문인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어쨌든 세 복음서의 공통된 점은 사태가 매우 급박(急迫)하다는 것이다.

2. 손을 얹으사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께서 그 손을 딸의 몸위에 얹으면 곧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 실로 회당장의 간청은 확신적이고 매우 구체적이다. 이는 병 치유에 대한 전권을 인정한 것이다. 여기 손을 얹어 안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바라는 행위이자 치병을 이한 일반적 행위로 알려져 있다(6:5 ; 8:23, 25 ; 약 5:14-16). 따라서 회당장의 이 같은 안수에서 요청은 예수의 능력과 권위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ㅣ며 그의 은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여기서 "구원을 얻어"(소데)란 "구원하다", "보전하다", "놓아주다", "병을 고치다"는 뜻을 지닌(소조, σωθῇ)의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로서 예수로 인한 병의 회복, 곧 건강을 기원한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재해석하면 "(당신으로부터) 건강을 회복하여 (계속) 살게 하소서"가 된다.

•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전령

마가의 현장감 넘치는 서술 기법이 또 한 번 돋보인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여기서 이야기는 급전환된다. 혈루증 치유 기적으로 무리들과 함께 멈추어서 지체하는 사이에 야이로의 집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물론 지금껏 예수 곁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야이로의 마음은 탈대로 다 타버린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한 애타는 상황 가운데 전해 진 내용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혈루증 치유와 예수의 구원 선언으로 고조된 분위기를 잠재우는 소식이었다.

여기서 "죽었나이다"(아페다넨, ἀπέθανεν)는 제 2과거 직설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그 죽음이 변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임을 보고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더 이상 손 쓸 필요가 없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어찌하여 선생을 괴롭게 하나이까", 이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상황을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 즉 야이로의 딸의 죽음을 전한 자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의 바르고 합리적인 발상으로써 예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 것을 간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괴롭게 하다"란 뜻의 원어(스퀼로, σκύλλω)는 원래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의 껍질을 벗길 때 사용하던 말로서 가혹하리만치 혹독한 고통이나 쓰라림을 뜻한다(마 9:36). 따라서 이 말은 더 이상 예수를 "귀찮게 하거나 마음에 부담을 주지 말라"는 매우 단호한 요청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전한 말을 아예 무시하셨다. 실로 예수의 생명을 구원하는 사역 앞에서 이같은 절망적 소식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계속 당신이 목적하신 바를 추진해 가셨고, 더불어 딸의 죽음 소식 앞에 절망하고 있는 야이로를 격려하셨다. 이에 예수는 절망에 사로잡힌 야이로를 향해 희밍을 선언한다.

•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워 말라", "믿기만 하라"는 이 이중 명령은 모두 현재형을 취하고 있어 그 같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엄명이다. 이는 곧 죽음의 소식에 마음 흔들리지 말고 지금껏 나를 향해 지니고 있었던 그 믿음, 그것을 계속하여 지니라는 말씀이다(롬 4:20, 21). 실로 예수는 당신의 신적 본성을 의지하고 죽음을 훨씬 뛰어넘는 당신의 초월적인 능력을 계속 바라보게 하신 것이다 두려움과 믿음은 항상 적대적 관계이다. 따라서 극한 절망 속에 있을 바로 그 시점에 모든 부정적 요소(두려움)를 떨치고 절대적 존재이신 예수를 절대 신뢰하는 것은 참 용기요 참믿음이다. 예수께 지속적 신뢰를 갖는 이 믿음이야말로 곧 생명의 유일한 열쇠이다.

• 죽음을 받아들이고 체념한 야이로의 사람들

"훤화함과.....울며.....통곡함" - 여기서 "훤화함"이란 어지러울 정도로 시끄러이 떠드는 것을, "심히 통곡함"이란 마치 꽹과리가 울려 대듯이 크게 울어대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집안은 초상집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여서 시끄럽게 떠들며 통곡하고 있었다. 마태복음에서는 피리를 불고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음을 묘사한다(마 9:23). 유대인들의 장례식은 흔히 정중한 분위기 보다는 조금 격앙스럽게 피리를 불고 통곡하며 소란하다. 또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여 피리를 불고 울게도 하였다. 이처럼 직업적으로 울어 주는 자들은 주로 여인들로서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대성통곡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 통곡 소리는 가슴 또는 손바닥을 치며 함창 혹은 교창(交昌)으로 이뤄 다. 한편 사회적으로 유력한 인사였던 야이로 집안이었기에 이러한 고용 통곡꾼 뿐 아니라 많은 조문객(弔問客)과 가족 친지들을 합한다면 야이로의 집은 참으로 혼란스러웠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풍경은 죽음의 절망감과 함께 정신 못차릴 정도의 소음과 호란스러움으로 인해 또다른 절망감으로 들어가게 한다. 어쨌든 야이로 집에 모여든 사람들은 다만 슬퍼하거나 그 아이의 죽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길 뿐 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야이로 집안에 궁극적인 평안을 제공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예수께서는 절망적인 초상집 분위기를 극적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즉 장례 풍습에 따라 통곡하며 소란스럽게 떠드는 행위를 급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어찌하여 이처럼 야단들이냐 이제 그만 치우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아이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혹자는 이를 축어적(逐語的)으로 해석하여 아이가 정말 죽지 않고 단지 기절한 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가의 기록(눅 8:55) 중 "그 영이 돌아와"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그 아이는 분명 영(靈)과 육(肉)이 분리된 죽은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죽은사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헬레니즘(Hellenism)과 유대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완곡 어법이다(창 47:30 ; 단 12:2 ; 요 11:11 ; 행 7:60 ; 고전 15:18 ; 살전 5:10).

특별히 생명과 부활(Resurrection)의 주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죽음을 바라보실 때 그것은 영원한 허무나 절망이 아니라 잠시 잠간의 잠에 불과한 상태였음이 분명하다. 특별히 이 말씀은 그 소녀의 소생을 전제한 말씀이라는 점에서 볼 때 비록 죽음의 실재성은 명확한 사실이나 그것은 단지 한시적(限時的)인 수면 상태와 같은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고전 15:51). 진정 죽음과 삶의 지배권을 가지신 이 예수의 말씀은 모든 죽은 자와 죽어가는 우리 인생들에게 부활의 아름다운 희망을 갖게 하는 복음이 아닐 수 없다(욥 19:25-27).

• 저희가 비웃더라(사람들의 반응)

예수께서 선언한 희망의 믿음이 다시 한 번 절망의 벽에 부딪힌다. 즉 인간의 죽음을 영구한 종말로 보았던 주변의 사람들이 본질적(本質的)으로 무지한 자신들의 실상은 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의 무지를 비웃었던 것이다. 여기서 "비웃더라"(카테게론)는 단어는 미완료 시제로서 그들의 조롱섞인 비웃음이 계속되었음을 보여 준다. 어쨌든 이 비웃음은 결과적으로 그 소녀의 죽음이 현상적(現象的)으로 명확한 사실이었다는 점과 또 이후에 그 소녀를 살리신 예수의 능력은 참으로 신비하고 초월한 이적이었음을 반증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

• 저희를 다 내어 보내셨다

여기 "내어 보내셨다"(에크발론, ἐκβαλὼν)는 말은 강압적으로 몰아내셨다는 뜻으로 위엄에 찬 예수의 권위를 엿보게 한다. 실로 예수는 당신의 능력과 존재를 부인하고 의심하는 자들은 생명의 기적을 체험하는 특권에서 제외시키고자 비난과 조소로 일관하는 무리들을 매몰차게 쫓아내셨다. 그리고 그곳에 당신의 이적의 세 증인(제자들)과 그 아이의 부모만을 동참케 하셨다. 이 장면은 한 방문객에 불과한 예수가 그 집의 참 주인으로 행사하시는 기이한 모습을 보여 준다(Benger, Robertson). 실로 예수가 주인으로 있는 가정은 곧 생명의 기적을 맛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질 것이다.

탈리타 쿰, Ταλιθά κοῦμι, 소녀야 네게 말한다. 일어나야지!

• 아이의 손을 잡고

예수의 치유 행위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여기서는 아이의 손을 잡는다. 이는 죽음을 향해 뻗는 생명의 손길로서 처음 야이로가 바닷가에 찾아와 예수께 간청할 때 아이에게 손을 얹어 달라고 한 사실을 기억나게 하는 장면이다(23절). 이처럼 어린아이의 손을 잡는 예수의 모습은 참으로 진지하고 애정어린 인자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절망에 처한 사람을 주님이 손잡아 주리라는 표현은 출 3:20 ; 7:5 ; 시 37:24 ; 눅 1:66 ; 행 11:21 등 여러 군대 나타난다. 진정 주님은 절망 속에 헤메이는 영혼들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시고 참생명에로 인도하시는 친절한 안내자요 신실한 보호자가 되신다(시 23:2, 4).

• 달리다굼(탈리타 쿰, Ταλιθά κοῦμι)

예수 당시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던 아람어 탈리타 쿰에서 유래한 말로서 "탈리다(Ταλιθά)"(소녀야란 뜻)와 "쿰(κοῦμι)"(일어나라는 뜻)의 합성어이다.
이를 번역하면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해석할 때 "내가 네게 말하노니"라는 말을 첨가시키고 있다.
이것은 "달리다굼"이라는 말이 어머니가 아침에 아이를 깨울 때 사용하는 평범한 일상어라고 보았을 때, 그 말의 신적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마가가 추가시켜 해석한 첨가어로 보인다.
"달리다굼"이라는 말은 여기서만 나오고 마태복음(일으키시는 행동만 기록)과 누가복음(번역문만을 기술)에서는 이 말이 없다.
여기서도 사실성과 생동감(生動感)을 특히 강조하는 마가의 문장 기법이 돋보인다.
즉 마가는 주님께서 친히 사용하신 아람어의 이 단문을 마치 현장을 재현하듯 분명히 기록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 아람어와 함께 번역문을 병기함으로써 아람어에 생소한 이방 독자들을 향해 성실한 노력을 보여 주고 있다.

"소녀야........일어나라"

여기서 "일어나라"는 뜻의 "에게이레(ἔγειραι)"는 2인칭 단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단호하고도 권위에 찬 예수의 명령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사실 이 말은 앞에도 언급했듯이 해가 뜨는 아침에 부모가 아이를 사랑스러운 어조로 깨울 때 흔히 쓰던 말이었다는 점에서 본 장면은 새 아침의 환희와 정겨움을 더해 준다.
실로 생명(生命)과 부활(復活)의 새 지평을 여신 예수께서는 친히 그 아침을 마련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죽어 있는 영혼들에게 그 아침을 맞이하도록 "달리다굼"으로 친히 깨우고 계신 것이다.

•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었다

여기서는 치유의 결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즉 예수의 말씀대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걸었다고 묘사한다.
더욱이 마가는 "일어난"(아네스테, ἀνέστη) 동작을 단순 과거 시제로 처리하고 곧이어 "걸어다닌"(페리에파테이, περιεπάτει) 동작을 미완료 시제로 묘사하여, 즉각적으 로깨어나 계속 방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닌 사실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녀의 나이가 12세였다는 사실은 그녀의 동작이 얼마나 가볍고 발랄했을까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실로 그녀는 생명은 물론 원기(元氣)까지 회복하였던 것이다(Swete).

한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걸었다는 이야기가 없다.
그 이유는 소녀가 다시 살아난 사실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켜 기술하고자 했던 기록적 특징 때문이었을 것이다.

• 야이로의 딸과 혈루증 여인의 공통점

그런데 소녀의 나이가 12살이라는 사실을 누가복음에서는 이 이야기의 첫 부문에서 밝혔지만(눅 8:42) 마가는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밝히고 있다.
실로 이 12살이라는 나이는 인생에 있어서 이제 막 꽃이 피려는 시기(유대법상으로는 만 12년 6새월 이후에는 겨혼 가능 연령이 됨)이다. 특이한 점은 소녀의 나이와 이야기의 중간에 일어났던 혈루증에 걸린 여인의 투병 기간이 같은 12년으로 일치하고 있는 점이다.
성경에서 이 "12"라는 숫자가 완전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의 성취를 나타내는 수라는 사실과 연결하여 생각해 봄직하다(창 49:28 ; 겔 43:16 ; 계 21:12, 14).

•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소녀의 소생과 원기 회복은 주위 사람들에게 정신을 잃게 할 만큼 큰 충격으로 다가갔다.
여기서 놀라는 사람들은 40절에서 언급한 사실로 미루어 소녀의 부모와 요한, 베드로, 야고보이었을 것이다.
그 중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그 부모가 가장 큰 충격을 맏은 것으로 나타난다(눅 8:56).
특히 마가는 그들이 놀란 것을 "크게"라는 말과 "놀라거늘"이라는 반복법을 통하여 그들이 마치 황홀지경(恍惚之境)에라도 빠진 듯이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기적은 군중 속에서 공개적으로 일어난 혈루증 치유 기적과는 전혀 달리 실내에서 그리고 몇 명 안되는 목격자만 있는 은밀한 곳에서 조용하게 일어난 점이 특징적이다.

•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

여기서 예수는 또 다시 기적적인 사건에 대해 목격자들에게 비밀로 할 것을 명령한다(1:44 ; 3:12 ; 마 12:16 ; 16:20 ; 17:9 ; 눅 8:56).
이것은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고 그 사실을 알리라고 한 점과(19절) 혈루증 환자의 치유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사실(34절)과는 대조적이다.
예수의 이 같은 행위는 메시야의 자기 공개 시기가(마 16장) 이를 때까지 언제나 그러했듯이 당신의 놀라운 이적과 가사에 관한 소문이 대중들에 의해 문제화(問題化) 되지 않게 되기를 바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아이가 살아난 것을 비밀로 하기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에(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이의 죽음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 부모들이 그 아이들을 숨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마가는 메시야 은닉의 주제(Messianjc-secret motif)를 인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해 혹자(Cranfield)는, 예수께서 그러한 말씀을 한 것은 그 일을 절대적으로 비밀에 붙이라는 의미로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가능한 한 그 일이 널리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즉 알 필요가 없는 자들에게까지 그 기적에 대해 알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로 메시야로서 예수의 신성은 그것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공개되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감춰진다.
어쨌든 마태는 그 소문이 온 땅에 퍼진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마 9:26).

•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이 명령은 소녀가 완벽하게 다시 살아났음을 확인하게 한다.
즉 모든 몸의 기능이 정상적인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느 즉각적이면서도 완전한 인간 회복이요, 부분적 구원이 아니라 전체적인 구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예수의 치유 기적을 소개한 본장에서 치유 받은 모든 사람들의 완전한 회복이 강조되었다.
귀신들린 자는 가족과 사회 공동체로 복귀함으로써 구원을 받았고 혈루증 환자 역시 근본적 치료로써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
야이로의 딸도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것이라고 말하심으로써 소녀에게 전혀 이상이 없음을 알리면서 정상적으로 잠에서 막 깨어난 아이처럼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이다.

한편 예수의 이 같은 명령은 전인적인 생명을 다시 제공하신 크나큰 사랑과 더불어 그 아이가 몹시 아파있을 동안 매우 굶주려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고 그 아이에게 자상하게 먹을것까지 제공하게 하시는 당신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랑을 보여 준다.
진정 예수는 영혼의 문제뿐 아니라 육신의 문제까지도 해결하시는 궁극적인 해결자이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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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저자와 기록 연대

모세오경을 쓴 모세를 비롯해서,
구약성경은 대략 32명의 저자들에 의하여 기록되었고
신약은 바울을 포함하여 8명의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구약의 모세오경은 대략 주전1500년에 기록되었고
마지막책인 말라기는 주전 약400년에 기록되었다.
구약은 모두 1100여 년에 걸쳐 완성된 반면,
신약은 50여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전체 성경이 완성되는데는
구약에서 신약으로의 이행되던 시기인 400년을 포함하여
대략 1500년에서 1600년의 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여기서 주전은 기원전, B.C 이고 주후는 기원후, A.D 입니다.)

▶ 창세기

새벽을 깨우리로다 창세기(創世記) Genesis 06-06-2023(화) , 창세기 38-50장
오늘의 묵상 창세기(Genesis) 04-10-2023 / 06-06-2023(화)


1. 저자 : 모세
애급 궁중에서 양육을 받은 학자, 정치가, 장군이었다.
세상의 관념에 따르면 그는 종교 지도자였다. 

2. 장소 : 시내 산과 광야에서 기록


3. 시기 : 주전 4004년과 주전 1689년 사이에 발생한 것이며,
기록은 주전 1500년경에 했다.



▶ 출애굽기

1) 저자 : 성경의 처음 5권은 모두 모세가 쓴 것으로 `모세 오경`이라 불린다. 출애굽기 17장 14절과 34장 27절은 이 책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쓰도록 명하신 것임을 증명한다. 

2) 시기 : 이 책에서 기록한 사건들은 주전 1706년과 1490년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 레위기

1) 저자 : 이 책의 저자는 모세이다. 전체의 내용이 모두 모세에 대한 여호와의 `고하여 이름`, `분부`이다. 

2) 장소 : 장소는 시내 광야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곳에서 머물렀고 조금도 이동하지 않았다. 


3) 시기 : 이 책에 기재된 법도와 명령은 하나님께서 일 개월 반에 걸쳐 모세에게 분부하신 것으로 그 기간은 대략 이스라엘의 정월 일 일, 곧 회막이 건축될 때(출 40:2, 17, 레 1:1)부터 2월 20일, 즉 그들이 시내 광야를 떠날 때까지이다(민 10:11-12). 


▶ 민수기

1) 저자 : 모세가 기록하였다.
2) 장소 : 시내 산과 광야이다.
3) 시기 : 이 책에서 기록한 사건들은 주전 1490년부터 1451년 사이에 발생하였다.

▶ 신명기

1) 저자 :`신명기(Deuteronomy)`라는 단어는 `제 2의 율법`을 의미한다. 즉, `다시 말해 주는 것`, `되풀이해 말하는 것`, `다시 들려 주는 것`이란 뜻이다. 이 책의 저자는 하나님의 종인 모세가 분명하다. 처음에는 입으로 전하다가 이후에 책으로 쓴 것이다(1:3, 31:24-26 참조). 

2) 장소 : 이 책은 앞의 민수기의 마지막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이 두 권의 책의 기록 시기와 장소는 같다. 모두 출애굽 이후 제 40년이고 장소는 모압 평원이다. 


3) 시기 : 이 책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 시간은 약 사십 년으로 주전 1491년부터 주전 1451년까지이다. 


▶ 여호수아

1) 저자 : 여호수아서의 저자는 여호수아이며(1:1), 그의 이름은 `여호와 구원자`, `여호와의 구원`을 뜻한다(민 13:16). 

2) 장소 : 여호수아서를 쓴 장소는 모압 평지이다(신 34:8-9). 


3) 시기 : 이 책을 쓴 시기는 주전 1451년에서 1426년까지이다. 


▶ 사사기

1) 저자 : 사사기의 저자에 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으나 그것을 입증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많은 권위자들은 사무엘이 기록한 것으로 추정한다. 

2) 시기 : 사사기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는 주전 1425년경에서(여호수아의 죽음 후) 주전 1120년경까지(삼손이 죽었을 때―16:30-31)로 약 305년간이다. 다음 목록은 역사에 따른 연대순이다. ① 2:6-9(주전 1426년경) ② 1:1-36(주전 1425년경) ③ 2:1-5(주전 1425년경) ④ 2:10-13(주전 `) ⑤ 17:1-21:25(주전 1406년경) ⑥ 2:14-16:31(주전 `-1120년경)


▶ 룻기

1) 저자 : 룻기는 역사와 시기에 있어서 앞의 책 사사기와 다음의 책 사무엘서와 연관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무엘이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2) 시기 :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는 말씀에 따라(4:22) 저작 시기는 사사들의 통치 이후 열왕의 때다. 이 책에서 다루는 역사의 기간은 주전 1322년경부터 1312년경까지 약 11년 간이다. 기록한 역사는 모압과 유다에서 발생했다(1:1, 22). 


▶ 사무엘상

1) 저자 : 사무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들으심` 또는 `하나님께 구함`을 의미한다. 사무엘상 1장부터 24장까지는 사무엘이 쓴 것이다. 사무엘상의 나머지 부분과 사무엘하 전부는 선지자 나단과 선견자 갓이 썼다(대상 29:29). 

2) 장소 : 저술 장소는 에브라임과 유다였다. 


3) 시기 : 사무엘상`하의 저술 시기는 주전 1171년에서 1017년경이다. 


▶ 사무엘하

1) 저자 : 기록자들은 나단과 갓이었다. 

2) 시기 : 가나안 땅에서 주전 1056년부터 1017년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하였다.


▶ 열왕기상

1) 저자 : 열왕기의 저자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나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가 그 저자라고 생각한다. 

2) 장소 : 이 책은 아마 가나안 땅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3) 시기 : 열왕기상에서 기록된 것은 주전 1015년부터 897년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다.


▶ 열왕기하

1) 저자 : 예레미야가 이 책을 썼을 것이다.

2) 장소 : 아마도 가나안 땅에서 기록했을 것이다. 


3) 시기 : 이 책에 기록된 일들은 주전 896년부터 588년 사이에 일어났다. 


▶ 역대상/하

1) 저자 : 역대상`하의 저자는 아마도 에스라였을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역대하 36장 22절과 23절을 에스라 1장 1절에서 3절 상반절까지와 비교해서 보아야 한다. 이 두 부분이 반복된 것은 역대상`하를 에스라서의 저자인 에스라가 썼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2) 시기 : 상권은 주전 1056년에서 1015년까지 약 사십일 년이라는 기간을 포함하고 있는데, 열조의 계보를 포함하지 않는다. 하권은 주전 1015년에서 536년까지 약 사백칠십구 년이라는 기간을 포함하고 있다. 이 두 권의 책은 아마도 에스라가 포로됨에서 귀환한 후에 예루살렘에서 썼을 것이다


▶ 에스라

1) 저자 : 에스라서의 저자는 `도움` 또는 `돕는 자`를 의미하는 이름을 가진 에스라였다. 그는 아론의 자손으로서(7:1-5) 모세의 율법에 능한 제사장이요, 서기관이었다(7:6, 11-12). 

2) 장소 : 그의 책들은 예루살렘에서 기록되었다. 


3) 시기 : 이 책의 내용은 주전 536년부터 457년까지 약 팔십 년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 느헤미야

1) 저자 : 이 책의 저자는 느헤미야로 그의 이름은 `여호와의 위로`를 뜻한다. 그는 왕의 술 관원이었다(1:11하). 

2) 장소 : 이 책 전체는 느헤미야가 그의 대적들의 시험과 공격을 받는 가운데서 위로이신 하나님을 신뢰한 내용으로 예루살렘에서 기록되었다. 


3) 시기 : 이 책의 내용은 주전 446년부터 434년까지 약 십이 년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 에스더

1) 저자 : 에스더의 저자는 아마 모르드개였을 것이다(에 9:20, 23). 에스더의 삼촌인 그는 그녀를 양육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유대인들을 사랑한 자였다. 

2) 장소 : 아마도 수산 성에서 기록됐을 것이다.


3) 시기 : 이 책의 내용은 아하수에로가 통치하던 기간(주전 486-465년) 중 적어도 10년의 기간을 다룬다.


▶ 욥기

1) 저자 : 이 책의 제목은 저자인 욥의 이름을 따라 붙여졌다. 욥은 `미움을 받다`또는`핍박을 받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욥이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에게서 어떠한 고통을 겪었는지를 나타내 준다. 에스겔 14장 12, 14, 20절과 야고보서 5장 11절은 이 책을 욥이 썼다는 것을 확증해 준다. 

2) 장소 : 이 책이 쓰인 장소는 에돔에 속하는 우스 땅으로서(애 4:21) 아라비아 광야 서쪽이다. 


3) 시기 : 이 책이 쓰인 시기는 욥의 유목 생활(욥 1:3)과 그가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린 방식(욥 1:5, 창 22:13, 31:54)에 따르면, 주전 약 2000년경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시대이다.


▶ 시편

1) 저자 : 시편의 대부분을 다윗이 기록하였기 때문에 시편을 다윗의 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시편의 머리말에 따르면 다윗이 일흔 세 편을 기록하였고, 아삽이 열두 편을, 그리고 헤만과 에단이 각각 한 편씩을 썼다. 또 고라의 자손이 열 편, 솔로몬이 두 편, 모세가 한 편을 기록하였으며, 머리말이 없는 것도 오십 편이 된다. 머리말이 없는 것 중에서 몇 편 예를 들면 시편 2편(행 4:25), 95편(히 4:7), 96편(대상 16:23-33), 105편(대상 16:8-22)은 다윗이 기록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편을 썼지만, 그것은 모두 한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2) 장소 : 시편은 모세가 광야에서 기록한 90편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이스라엘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3) 시기 : 가장 초기의 시편은 주전 1500년에 모세가 쓴 것(시편 90편)이며, 마지막 시편은 137편일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포로로 잡혀간 뒤 기록한 것이다.


▶ 잠언

1) 저자 : 잠언은 현자들의 말을 모은 것이다. 주된 기자와 수집자는 솔로몬으로서 그는 삼천 개의 잠언을 지었다(왕상 4:32, 전 12:9 참조). 또한 히스기야는 25장에서 29장까지에 있는 열조들의 몇몇 잠언들을 추가하였다. 

2) 장소 : 잠언은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쓰였을 것이다.


3) 시기 : 솔로몬의 잠언들은 주전 1000년경에 쓰였고, 히스기야의 잠언들은 그로부터 약 삼백 년 후에 쓰인 것이다. 


▶ 전도서

1) 저자 : 전도서의 저자는 지혜로운 왕 솔로몬이다(1:1, 12, 12:9, 왕상 4:32).

2) 장소 : 그는 이 책을 예루살렘에서 썼다(1:1, 12). 


3) 시기 : 저작 시기는 주전 977년경으로 솔로몬이 타락한 후이다.


▶ 아가서

1) 저자 : 아가서는 솔로몬이 말년에 이스라엘에서 기록한 것으로 잠언이나 전도서보다 이해하기가 어렵다. 

2) 시기 : 솔로몬의 통치 시기는 주전 970-931년이었다


▶ 이사야

1) 장소 : 이사야서는 저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이다. 일반적인 성경 해석가들은 흔히 이사야를 선지자 중에서 가장 큰 선지자라고 칭한다. 그가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가장 상세하고 광범위하게 썼기 때문이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는 이스라엘 왕국의 선지자 아모스와 호세아, 그리고 유다 왕국의 선지자 미가와 동시대 사람이었다. 역사가였던 그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에 이르는 네 왕조에 걸쳐 가장 긴 기간 동안 선지자로서 사역했다(1:1). 유대인들 사이에서 믿을 만한 유전(tradition)과 2세기의 몇몇 랍비들의 저서에 따르면 그는 므낫세의 재위 기간에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다(왕하 21:16, 24:4, 마 5:12, 행 7:52). 

2) 장소 : 예루살렘에서 기록되었다.


3) 시기 : 이사야서는 주전 760년경부터 698년 사이이다.


▶ 예레미야

1) 저자 :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는 아나돗 사람이었다(1:1). 그는 제사장으로 태어났으며 요시야 왕 십삼 년에 선지자로 부르심받았다. 그는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힐 때까지 주님을 위해서 예언했다(1:2-3, 5-7). 그는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 중에서 가장 핍박을 많이 받은 선지자로 왕과 지도자들과 제사장과 백성들 중 소수를 제외하고 모두가 그를 반대하고 증오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체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특히 그의 예언에 관하여 그릇되게 말하고 반박했으며 아사랴와 요하난과 같은 친 애굽파들이 그를 억지로 애굽으로 가게 했다(43:2-7). 

2) 장소 : 이 책의 대부분은 유다에서 기록하였고, 마지막 장들은 애굽에서 썼다. 


3) 시기 : 그 기간은 주전 629년부터 588년까지이다


▶ 예레미야애가

1) 저자 : 예레미야 애가의 저자는 울며 애통해 하는 선지자 예레미야이다(대하 35:25 참조). 이 책은 한 때 예레미야서의 일부였으나, 어느 때부터인가 `예레미야 제 2권`으로 불렸다. 유대의 전통과 70인 역의 번역가들에 따르면 이 책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함락시킨 후에 예레미야가 기록하였다. 

2) 장소 : 이 책은 대부분이 예루살렘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 밖 골고다(갈보리로 불리기도 함) 맞은편에 예레미야의 동굴로 불리는 감춰진 동굴이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예레미야가 거기 앉아서 황무한 성을 바라보고 애통해 하면서 애가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3) 시기 : 이것으로 볼 때 그 책은 주전 588년에 쓰였을 것이다.


▶ 에스겔

1) 저자 : 에스겔은 부시의 아들로 제사장이었다(1:3). 에스겔이란 이름은 `하나님께서 강화하실 것이다` 혹은 `전능자가 너의 힘이다`를 의미하며, 부시는 `경멸받은`이라는 뜻이다.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멸받은 선지자 였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강화시키셨다. 

2) 시기 : 그는 사역을 주전 595년부터 574년까지 바벨론에서 수행하였다. 


▶ 다니엘

1) 저자 : 이 책의 저자는 유다 지파의 후손인 다니엘이다(1:6). 그의 이름은 `하나님은 심판자`라는 의미이다. 

2) 장소 : 이 일이 발생한 장소는 바벨론 성과 엘람 성 등이다. 


3) 시기 : 이 책의 내용이 포함하고 있는 시간은 약 73년간으로 주전 607년부터 주전 534년까지이다. 


▶ 호세아

1) 저자 : 저자인 호세아는 브에리의 아들이었다(1:1).
그의 이름은 `구원` 혹은 `여호와는 구원`을 의미한다.


2) 장소 : 그의 사역의 장소는 북이스라엘이었다.


3) 시기 : 호세아의 사역 시기는 주전 785년부터 725년까지 육십 년 동안이며, 그가 사역하던 때에는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 두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호세아의 사역의 대상은 음란하고 변절한 이스라엘 왕국이었다. 음란은 이스라엘의 상태를 말하며, 변절은 이스라엘의 위치를 가리킨다. 상태로 말하자면 그들은 간음했으며, 위치로 말하자면 그들은 변절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내인 이스라엘의 상황이었다.


▶ 요엘

1) 저자 : 요엘은 브두엘의 아들이었다(욜 1:1). 그의 이름은 `여호와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2) 장소 : 요엘은 이 책을 유다에서 기록하였다.


3) 시기 : 그 기간은 대략 주전 870년부터 865년 사이일 것이다.


▶ 아모스

1) 저자 : 히브리어에서 `아모스`는 `짐을 진 자`를 의미한다. 

2) 장소 :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의 벧엘에서 사역했다. 


3) 시기 : 아모스의 사역 시기는 주전 787년경이었고(1:1상), 그의 사역의 대상은 북이스라엘이었다(1:1하). 


▶ 오바댜

1) 저자 : 오바댜는`여호와의 종`을 의미한다. 

2) 시기 : 오바댜는 이 책을 아마도 주전 880년에 유다에서 기록했을 것이다. 


▶ 요나

1) 저자 : 히브리어로 요나는 `비둘기`를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나가 평강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비둘기처럼 나아가기 원하셨음을 상징한다. 

2) 장소 : 요나의 사역의 대상은 앗수르의 수도인 큰 성 니느웨 사람들이었으며, 사역의 장소 또한 니느웨였다.


3) 시기 : 요나의 사역 시기는 선지자 엘리사 시대인 주전 862년경이었다.


▶ 미가

1) 저자 : 모레셋 사람 미가는 유다 열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예언하였다(1:1). 그는 이사야와 호세아와 동시대 사람이었으며(사 1:1, 호 1:1), 아마도 아모스와도 동시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라는 뜻이다(7:18). 

2) 장소 : 유다에서 기록되었다.


3) 시기 : 이 책은 주전 약 750년에서 710년 사이이다.


▶ 나훔

1) 저자 : 히브리어에서 나훔이라는 말은`위로`와`보복`을 의미한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민 이스라엘을 위로하시고, 이스라엘의 원수 니느웨에게 보복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2) 장소 : 나훔의 사역 장소는 유다였다. 그는 큰 성 니느웨를 대상으로 사역했다. 바벨 성과 니느웨 성은 니므롯이 건축한 것으로(창 10:8-11) 바벨론과 앗수르의 수도가 되었다. 적그리스도의 첫 번째 예표인 니므롯은 하나님을 반대한 첫 번째 사람이었으며, 이 나라들 둘은 하나님을 반대하는 인류의 강한 예표들이었다.

시기 : 나훔의 사역 시기는 주전 713년경이었다. 그것은 앗수르 왕 산헤립이 이스라엘을 침략한 해였다. 

▶ 하박국

1) 저자 : 하박국이라는 이름은 `품에 안다`혹은`달라붙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품에 안기고 그분께 달라붙을 필요가 있다. 

2) 장소 : 그가 사역한 장소는 유다였다. 


3) 시기 : 하박국의 사역 시기는 주전 626년경이었다. 이것은 바벨론이 침입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간 시기와 매우 가깝다. 


▶ 스바냐

1) 저자 : 스바냐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숨겨 주신 자`혹은 `여호와께서 보배로 여기신 자`라는 의미이다. 

2) 장소 : 그는 유다와 수도 예루살렘을 대상으로 사역했다. 


3) 시기 : 스바냐의 사역 시기는 하박국과 예레미야의 시대인 주전 630년경으로 사역 장소는 유다였다.


▶ 학개

1) 저자 : 학개는 스가랴와 동시대에 살았으며(스 5:1), 다리오 왕 이 년에 하나님을 위해 예언하였다. 그의 이름은 `나의 절기` 혹은 `여호와의 절기`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가 일찍 고국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절기를 회복하기를 얼마나 사모했는가를 보여 준다. 

2) 시기 : 이 책에서 기록한 일들은 주전 약 520년에 예루살렘에서 석 달 스무나흘 동안에 발생한 것이다.


▶ 스가랴

1) 저자 : 스가랴는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슥 1:1)로서 포로된 땅에서 태어났다가 스룹바벨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다. 잇도는 돌아온 최초의 제사장 무리에 속해 있었다(느 12:4, 16). 그러므로 스가랴는 예레미야와 에스겔처럼 제사장 겸 선지자였다. 
잇도는 `정한 때`를 베레갸는 `여호와께 복을 받음`을, 스가랴는 `여호와의 기억하심을 입음`을 의미한다. 이 세 이름을 함께 모아 볼 때 `정한 때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고 기억하심`이란 뜻이 나타난다. 분명히 하나님은 정하신 날에 백성에게 복 주시고 기억하실 것이다. 

2) 장소 : 유다에서 기록했다. 


3) 시기 : 이 책은 주전 520년이다.


▶ 말라기

1) 저자 : 말라기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나의 사자(使者)`를 의미한다. 이는 말라기가 여호와의 말씀을 그분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사역하는 하나님의 사자였음을 나타낸다. 

2) 시기 : 그의 사역 시기는 주전 400년경으로서 느헤미야 시대였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상으로 사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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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신약 27권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입니다.
대략 주후 50-51년 경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복음서에서는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되었다고 하는데 예루살렘이 망한 것을 소개하므로 적어도 기원 후 70년 이후라고 추정합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전서가 기록된 후 20년이 지났을 무렵 마가복음서가 기록된 것을 이해합니다.



▶ 마태복음

1. 저자 : 레위라고도 불리는 마태는 세리였는데 사도가 되었다(9:9, 눅 5:27).
이것은 9장 10절의 `그 주인`과 10장 3절의 `세리`라는 특별한 언급에 의해 증명된다. 


2) 장소 : 유대 땅일 것이다.


3. 시기 : 주님께서 부활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은(28:15) 주후 37년과 40년 사이,
성전이 파괴되기(24:2) 전에 유대 땅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평범한 유대인들을 위해서 기록되었다.
왜냐하면 이 책에는 유대의 관습과 절기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 마가복음 /

오늘의 묵상  - 마가복음(Mark) 06-07-2023 /  06-24-2023

새벽을 깨우리로다 마가복음(Mark) 06-08-2023(금) / 06-24-2023(토)

1. 저자 : 요한이라고도 불리는 마가(행 12:25) 

그는 여러 마리아들 중 한 마리아의 아들이자, 바나바의 조카(골 4:10)
그는 바나바와 사울의 사역에 동행했는데(행 12:25)
바울의 첫 번째 이방을 위한 사역 여행에 함께했다가 버가에서 그를 떠나 돌아왔다(행 13:13).
그 때문에 바울의 두 번째 여행에는 거절당했다.
그러자 마가는 바나바와 함께 일하러 갔다.
이 시점에서 바나바는 바울과 갈라섰다(행 15:36-40).
그러나 마가는 바울의 후반기에 이르러 그와 가까웠으며(골 4:10, 몬 24절),
바울이 순교할 때까지 그에게 유용했다(딤후 4:11).
베드로가 그를 아들로 간주한 것으로 보아(벧전 5:13) 아마도 그는 베드로와도 줄곧 가까웠던 것 같다. 

2. 장소 : 로마(딤후 4:11)


3. 시기 : 주후 67년에서 70년 사이에 쓰였다.

13장 2절의 내용은 이 책이 성전의 파괴전, 아마도 사도 바울의 죽음 후에 기록되었음을 증명한다.
마가의 책은 유대의 이름과 관습과 절기들을 많이 설명한다(3:17, 5:41, 7:3, 11, 14:12, 15:42).
이것은 이 책이 이방인들, 특히 로마인들에게 쓰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마가복음을 상징하는 형상은 "송아지" 또는 "황소"라고 한다.
송아지와 황소는 종(노예)을 상징하므로 마가복음의 수신자들은 로마에 흩어져 살아가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다.
당시 세계는 로마가 패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만일 예수께서 이 세상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라고 강조한다면 마치 로마 정부에 대한 반역을 일으킬 수 있다는 오해를 일으키게 되므로 메시아는 종으로 오신 예수라고 강조하였다.

▶ 누가복음

1. 저자 : 초대 교회는 누가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로 간주했다.
이 두 책의 문체와 작문을 볼 때 누가가 저자임이 분명하다.
누가는 의사였으며 아마도 아시아계 헬라인이었을 것이다(골 4:14).
그는 드로아에서부터 바울의 사역에 동참했으며,
바울의 세 차례 사역 여행에 동행했다(행 16:10-17, 20:5-21:18, 27:1-28:15).
그는 바울이 순교할 때까지 그의 신실한 동반자였다(몬 24, 딤후 4:11).
그러므로 그의 복음은 마가가 베드로의 관점을 대표한 것처럼,
바울의 관점을 나타냈을 것이다. 


2. 시기 : 사도행전이 쓰이기 전인, 주후 약 60년,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의 감옥에 있을 때 썼을 것이다.
이 책은 데오빌로에게 보내졌다(1:3).


▶ 요한복음

1. 저자 : 사도 요한이 기록했다(21:20, 24).
그는 세베대의 아들이었고(마 10:2),
그의 형은 야고보, 어머니는 살로메였다.
살로메는 주님을 따르고 섬기던 자매이다(마 27:55-56, 막 15:40).


2. 장소 : 에베소


3. 시기 : 주후 약 90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유대와 이방의 모든 믿는 이에게 쓴 것이다.
1장 38절과 5장 2절, 그리고 19장 13절의 설명으로 보아 이것을 알 수 있다. 


▶ 사도행전

1. 저자 : 이 책은 바울의 동역자였던 누가가 자신의 여행 기록을 기초로 해서 기록한 것이다. 

2. 장소 : 이 책은 아마도 로마에서 기록됐을 것이다(몬 24, 딤후 4:11).


3. 시기 : 완성 시기는 아마 이 책에 쓰인 사건들이 끝난 직후인 주후 67년과 68년 사이로 추정된다(1:1).
수신자는 데오빌로였다(1:1, 눅 1:3).


▶ 로마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 : 고린도


3. 시기 : 이 책은 사도 바울이 주후 60년경 제3차 전도 여행이 끝날 무렵,
고린도에서(15:25-32, 행 19:21, 20:1-3)
3개월간 머무는 동안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1:7) 쓴 것이다.


▶ 고린도전서

1. 저자 : 사도 바울(1:1, 9:1-2)

2. 장소 : 에베소(행 19:21-22, 고전 16:3-8, 19)


3. 시기 : 부르심받은 지 이십오 년 후(행 9:3-6, 15-16),
이방인들에게 보내심을 받은 지는 십사 년이 지났을 때(행 13:1-4, 9) 이 서신을 썼다.
대략 주후 59년경이라고 보는데
그 시기는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렀던 삼 년간의 기간이 끝나갈 무렵이다(행 20:31, 고전 16:8)


▶ 고린도후서

1. 저자 : 사도 바울(1:1). 

2. 장소 : 마게도니아(7:5-6, 8:1, 9:2, 4).


3. 시기 : 대략 주후 60년경으로 로마서를 쓰기 이전이다.
고린도후서 2장 13절을 볼 때,
이 서신은 바울의 제 3차 전도 여행 때 에베소에 체류한 후 마게도니아에서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 갈라디아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 : 고린도, 바울이 일 년 반 동안 거기에서 머무는 중에 썼을 것이다(행 18:1-11). 


3. 시기 : 대략 주후 54년경 바울이 두 번째 전도 여행을 하는 동안,
곧 갈라디아를 통과하여 여행하고 고린도에 도착한 후에 썼을 것이다


▶ 에베소서

1. 저자 : 사도 바울(1:1)

2. 장소 : 로마, 그때 바울은 투옥되어 있었다(엡 3:1, 4:1, 6:20, 행 28:30). 


3. 시기 : 대략 주후 64년경


▶ 빌립보서

1. 저자 :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바울과 디모데(1:1)

2. 장소 : 로마, 바울은 그때 투옥 되어 있었다(빌 1:13, 행 28:30). 


3. 시기 : 대략 주후 64년경,
아마도 에베소서를 쓴 다음에 이 서신을 썼을 것이다(1:25, 2:24 참조).


▶ 골로새서

1. 저자 : 사도 바울과 형제 디모데

2. 장소 : 로마 감옥


3. 시기 : 주후 64년에 빌레몬서와 거의같은 시기에 썼다(4:9-10, 몬 10-12).


▶ 데살로니가전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 :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동역자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함께 고린도에 머무르면서(1:1, 3:6, 행 18:1, 5) 쓴 것이다.


3. 시기 : 주후 54년경


▶ 데살로니가후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와 시기 : 데살로니가후서는 전서와 같은 장소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연이어 기록되었다.
주후 54년경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동역자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함께 고린도에 머무르면서(1:1, 3:6, 행 18:1, 5) 쓴 것이다


▶ 디모데전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와 시기 : 바울이 로마의 첫 번째 투옥에서 풀려난 뒤인 주후 65년경,
즉 바울이 처음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후에 마게도니아(1:3)에서 썼다.


▶ 디모데후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와 시기 : 바울이 순교 직전인 주후 67년경,
2차 투옥시 로마 감옥에서 썼을 것이다


▶ 디도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 : 1장 5절과 3장 12절을 볼 때 기록 장소는 니고볼리


3. 시기 : 대략 주후 65년경 바울이 첫 번째로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후
그레데를 거쳐 니고볼리에 도착했을 때(1:5, 3:12) 썼을 것이다.


▶ 빌레몬서

1. 저자 : 사도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1절).

2. 장소 : 로마 감옥


3. 시기 : 대략 주후 64년경,
바울이 처음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나기 바로 전에(9, 22절) 썼을 것이다


▶ 히브리서

1. 저자 : 바울을 저자로 추정할 수 있다.
13장 23절에서 디모데를 언급한 것과 분위기로 보아 그가 저자임을 알 수 있다. 


* 전통적인 입장은 저자를 알 수 없다고 한다.

2. 장소와 시기 : 사도 바울이 로마 투옥에서 풀려난 후인
주후 67년경 밀레도에 머물 때(딤후 4:20 참조) 기록했을 것이다.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13:24)이라는 언급에서 이 책은 로마에서 쓰지 않았다는 것을 본다.
내용에 따르면 이것은 분명히 히브리 신자들에게 쓴 것이다.


▶ 야고보서

1. 저자 :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자,
주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1:1, 마 13:55)인 야고보가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쓴 것이다(1:1). 


2. 장소 : 야고보가 어느 때 예루살렘을 떠났다는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이것은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쓰였을 것이다.


3. 시기 : 그 내용에 교회의 하락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주후 50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 베드로전서


1. 저자 : 사도 베드로가 이방 나라들에 흩어져 있는 유대 믿는 이들에게 쓴 것이다(1:1). 

2. 장소 : 유프라테스 강의 큰 도시인 바벨론에서 이루어졌다(5:13). 


3. 시기 : 바울의 순교 이전임이 분명하다(5:13).
그러므로 이것은 주후 64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 베드로후서

1. 저자 : 사도 베드로가 이방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의 믿는 이들에게 쓴 것이다(벧전 1:1). 

2. 시기 : 2장의 교회의 타락한 상태와 3장 15절에서 16절의 사도 바울에 관한 천거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바울의 순교 후인, 아마도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함락 전인 주후 69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순교 직전에 기록되었음이 틀림없다(1:14).


▶ 요한일서

1. 저자 :사도 요한
이 서신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은 모든 믿는 이들에게 쓴 것이다(5:11-13).


2. 장소와 시기 : 교회 역사와 이 서신 전체의 내용에 따르면 요한이 밧모 섬의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인
아마도 주후 90년과 95년 사이에 그가 마지막으로 사역했던 에베소에서 기록했음에 틀림없다.


▶ 요한이서

1. 저자 : 요한이 택하심을 입은 자매와 그녀의 자녀에게 쓴 것이다(1절).
2. 장소와 시기 : 요한일서 이후에 쓰여졌을 것이다(요한일서의 이 부분을 참고하라). 교회 역사는 이 책이 기록된 당시, 요한이 에베소의 장로였음을 명확하게 진술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에베소에서 기록됐음이 틀림없다


▶ 요한삼서

1. 저자 : 요한이 에베소의 장로였을 때, 그곳에서 가이오에게 쓴 것이다(1절)

▶ 유다서

1. 저자 : 주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였던 유다(마 13:55)

2. 장소 : 예루살렘이거나 유대일 것이지만 어느 곳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3. 시기 : 교회의 타락한 상태는 베드후서를 기록한 당시의 상태와 유사하므로 예루살렘이 멸망한 주후 70년 이전인 주후 69년경에 베드로후서와 거의 동시에 기록했을 수 있다.


▶ 요한계시록

1. 저자 : 사도 요한

2.  장소와 시기 :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을 당시인 주후 90년경에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1:1, 4, 9)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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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대순으로 성경 읽기












국가 기념주일 / 6. 25 한국전쟁,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




대한민국 5대 국경일(國慶日)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






한국전쟁 / 6. 25  73주년, 정전협정 70주년 한국교회 성명서

대한민국은 격변의 20세기 일제의 침탈 가운데 발아하여, 야만적 태평양 전쟁과 6.25 한국전쟁을 겪으며 자유민주주의를 기치로 성장했다.
이념으로 갈린 동족상잔의 6.25는 서로 무고한 생명을 살육하고, 아름다운 강산을 초토화한 슬픈 전쟁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전쟁을 기억하며, 전쟁 후 70년간 평화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또한 목숨을 바쳐 조국을 지킨 숭고한 참전 용사들에게도 머리 숙여 감사의 마음을 바친다.

한국교회총연합은 6.25 전쟁 73주년,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 기념 예배>를 드리며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첫째, 한국교회는 한반도의 지속적인 평화와 안정, 복음적 통일을 위해 기도한다.

모든 교회는 평화의 하나님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평화의 시간이 더 길어지도록 행동하며 기도할 것이다. 생명을 존귀히 여기는 복음으로 이념과 삶의 방식이 다른 이들과 대화하며 협력할 것이다.

둘째, 정치 지도자들은 남북의 평화로운 공존과 국민통합으로 남남갈등 해소에 앞장서야 한다.

헌법 제4조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는 조문대로 평화적 통일의 방법을 강구해야 하며, 작금의 지나치게 적대적인 남남갈등의 해소를 위해 행동할 것을 촉구한다.

셋째, 한국교회는 저출산과 기후 위기 극복, 이웃과 함께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이 당면한 저출산과 지구적 문제인 기후 위기는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라 국민과 함께 저출산과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며, 주변의 이웃을 돌아보는 사랑 실천에 앞장설 것을 다짐한다.













제헌절(制憲節) Constitution Day


제헌절은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제헌 헌법)이 제정, 공포된 것을 기념하는 대한민국 국경일이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지정하는 법정 국경일 가운데 유일하게 공휴일이 아닌 기념일이기도 하다.







제헌절 노래
정인보작사, 박태준작곡 1984년

비구름 바람 거느리고
인간을 도우셨다는 우리 옛적
삼백예순 남은 일이 하늘뜻 그대로였다
삼천만 한결같이 지킬 새 언약 이루니
옛길에 새 걸음으로 발맞추리라
이날은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다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
손 씻고 고이 받들어서
대계의 별들 같이 궤도로만
사사없는 빛난 그 위 앞날은 복뿐이로다
바닷물 높다더냐 이제부터 쉬거라
여기서 저 소리나니 평화오리다
이날은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다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



5대 국경일의 하나로 7월 17일이다.
조선왕조 건국일이 7월 17일로서, 이 날과 맞추어 공포하였다.

이 날은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한 헌법의 제정(7월 12일) 및 공포(7월 17일)를 온 국민이 경축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며 헌법수호를 다짐하는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온 국민은 가정에 국기를 게양하여 이 날의 뜻을 높이고 있다. 중앙기념행사는 생존하는 제헌국회의원과 3부요인을 비롯한 각계 대표가 모여 의식을 거행한다.




광복절 노래










한글날 노래







제27회 총회 평양 서문외 예배당 1938년 9월 9일 - 16일 신사참배 결의 자료


1938년 신사참배를 결의한 제27회 총회

신사참배 가결,
1. 하나님 말씀의 위반,
2. 장로회 헌법과 규칙 위반,
3. 일본 국법인 종교자유헌장에 위반,
4. 보통회의법의 위반

1938년 9월(9-16일) 오후 8시에 평양서문외예배당에서 제27회 총회가 개회되었다.
총회가 개회되고 제1부 경건예배를 마치고 정회한 후 2일째 되는 날 새벽 6시에 임종순 목사가 요한복음 16:25-33절 말씀을 읽고 “그리스도를 힘입어 안심함을 얻음”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오전 9시 30분에 속회되어 새 총회장으로 선출된 홍택기 목사가 히브리서 10:5-7절, 요한복음 4:34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 후 10시 40분에 안건 심의에 들어갔다.

공천부장의 함태영 목사의 보고를 별지로 받고 곧바로 신사참배 안건 심의에 들어갔다.
제27회 총회가 경건예배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신사참배 문제를 거론하여 결의를 했다는 것은 이미 신사참배의 가결을 몇 달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고 제27회 총회는 이를 실행에 옮기는 총회가 되었다.

총회가 소집되는 날 서문외교회당 안팎에는 수백 명의 사복 경찰관들이 둘러싸고, 강대상 아래는 평남경찰부장 등 수십 명의 고위 경찰들이 칼을 찬 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총대들 사이에는 각기 그 지방에서 올라온 경관 2명이 끼어 앉아 있고 총대석 좌우와 후면에도 무술경관 100명이 상엄하게 둘러싼 채 회가 시작되었다. 먼저 평남도지사의 축사를 시작으로 경건회에 이어 공천부 보고는 별지로 받기로 한 후 신사참배 안건을 상정했다.

전국 27개 노회(만주 4노회 포함) 목사 회원 86명, 장로 총대 85명, 선교사 22명, 합계 193명이 참석한 가운데 동 안건을 가결에 붙이자 떨리는 목소리로 가(可)만 묻고 부(否)는 묻지 않은 채 신사참배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음을 선언했다. 이 때 자리 사이에 끼어 앉아 있던 경찰이 일제히 일어나 경계태세에 들어갔는데 선교사 20여명이 일어나 “불법이오”, “항의합니다”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결국 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말았다.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후 곧바로 “부총회장과(임원대표) 각노회장으로(회원대표) 본 총회를 대표하여 즉시 신사 참배를 실행하기로 가결”하였다.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난 시간이 12시였다. 오후 2시에 속회할 때까지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의 안내에 따라 평양 신사로 가서 절하고 돌아왔다.

이와 같은 신사참배를 하고 난 이후 속회된 회의에서 “신사참배 결의안을 조선 총독, 총감, 경무국장, 학무국장, 조선군사령관, 총회대신, 척무대신, 제 각하에게 전보를 발송하기로 가결”하게 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같은 날(10일) 오후 1시에 따로 모임을 갖고 신사참배 가결를 무효화 시키기 위하여 “신사참배 가결은 하나님 말씀의 위반이요, 장로회 헌법과 규칙을 위반함이요, 일본 국법인 종교자유헌장에 위반이요, 이번 처사는 보통회의법의 위반”이라는 항의서를 총회에 긴급동의안으로 제출했다.
 
총회 12일에는 권찬영 외 25명도 연서날인으로 “이번 총회의 결의는 하나님의 계율과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에 위배 될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발언을 허락하지 않고 강제로 회의를 진행한 것은 일본 헌법에 부여한 종교자유의 정신에도 어긋난다”라는 항의서를 총회에 제출했다. 총회는 경찰의 강압에 못이겨 이들 항의서를 토론에 붙일 기회마저 주지 않고 무조건 기각시켜 버렸다.

총회가 파회(罷會)되고 석 달 후, 신사참배 결의가 가져온 비극적인 일들이 총회 산하 전국교회에 하달되었다.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회장으로 신사참배를 가결시킨 것도 부족해서 각 교회에 신사참배 반대한 행위에 대해 처벌할 것에 대한 총회장 서한을 보내게 되었는데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총회의 결의를 경멸하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주님의 뜻에 위배되는 유감 천만의 행동이다. 이런 비상 시국하에서 만일에 아직도 옛 습관으로 해서 이를 보류하거나, 주저하는 자가 있다면, 저들은 결코 신민으로 인정될 수 없으며, 교인으로도 인정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교회의 입장으로 볼 때도 이러한 반대하는 무리나 요소는 마땅히 처벌되어야 한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그 후 한국교회로 하여금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하였다.
총회 결의가 있는 이후 일본 경찰은 즉시 친일적인 목회자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그 시대 양심의 소리가 있었다는 점은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소재열 목사 근간,『한국장로교신학 전통』중에서.





신사참배 강요(神社參拜強要)


일제 강점기에 조선 곳곳에 신사를 세운 뒤 조선인에게 참배하도록 강제한 정책을 가리킨다.
신사참배는 신토의 신사에 참배하는 종교 의식이다.
종교의 교리가 신사참배와 충돌하는 기독교 신자들은 신사참배 강제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여 이에 저항하다가 피해를 입기도 했다.


배경

신토는 조선에  1876년 개항 이래 문화 침략의 일환으로 도입되었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조선통족부의 보호 아래 동화 정책의 일환으로 보급되었다.
특히 1930년대에 일본 제국이 중국 침략을 계획하면서 점차 강제적인 정책으로 변화했다.
일본 천황 신격화와 강제 신사참배는 조선을 정신적으로 지배함으로써 효율적인 식민 통치와 전쟁체제의 구축을 노린 것이었다.

추진 과정

1930년대 경성소방서 직원 신사참배

일제는 각지에 신사를 세우고 학교와 가정에도 소형 신사를 설치하도록 하여 황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주로 기독교 계열의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이같은 정책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조선에는 개화기 이래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 학교들이 다수 있었고, 우상 숭배를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기독교의 교리는 신사 앞에서 절하는 신사참배 의식과 충돌을 낳았다.

기독교계는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가 1935년을 기점으로 조선총독부의 강경책에 신사참배 용인파와 반대파로 분열되면서 큰 갈등이 시작되었다.

1937년 중일 전쟁 무렵부터는 조선총독부가 일부 학교를 폐교시키면서까지 신사참배 강행 의지를 보여 문을 닫지 않은 학교들은 신사참배를 실시해야 했다.

조선총독부는 기독교계 학교에 보급된 신사참배를 교회로까지 확장시키기 위하여 압력을 행사했고,
1938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계기로 각 교파의 목회자들이 솔선해 신사참배에 나서면서 급격히 황민화 정책에 동조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반대파의 강경론자인 주기철, 최상림이 옥사하는 등 희생자도 발생했다.

한편 평양에 있던 기독교 계열의 숭실대학은 1912년 11월 25일 조선 통독부 학무국이 학교 인가를 했으나,
1925년 대조선 교육방침(소위, 문호통치)으로 숭실대학교를 전문학교로 격을 낮추었다.

1938년 3월 4일 일본 제국의 억압적인 통치와 강제적 신사참배에 반대한 숭실전문학교는 자진 폐교 결정을 내린다.

신사참배와 친일활동을 했던 당시의 다른 대학들에 비교해 볼 때 이는 진정으로 민족을 위한 대학이었다는 평가가 의식있는 국민들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신사참배에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 등 다른 종교 성직자와 신자들도 참여해야 했으나, 상대적으로 마찰은 적었다.

영향

신사참배는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강요한 것으로서, 신사는 일본의 민간종교인 신도(神道, Shintoism)의 사원으로 일본 왕실의 조상신이나 국가 공로자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일제는 합방 후 신사사원규칙을 발표, 서울에 조선신궁을 세우는 한편, 각 지방에 신사를 세웠다.
조선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은 1935년경부터인데, 우선 각급학교 학생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으나 기독교계 학교에서는 이를 거부하다가 평양 숭실학교·숭의학교 등이 폐교되었고 학생·선교사·목사들의 반대운동은 계속되었으며, 주기철 목사와 같이 적극적으로 반대하다가 투옥되어 순교한 일이 발생하였다.

중일전쟁(1937∼1945년)을 전후하여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재차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천주교는 로마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신사참배에 응했고,
감리교도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장로교는 한때 반대했으나, 총독부의 요구와 일부 친일목사들에 의해 제27회 총회에서 찬성결의를 함으로써 결국 굴복했다.

1945년 8월 15일 지국주의 야욕의 일제가 패전으로 종전되었지만 신사참배와 관련하여 아직까지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등 문제와 논란이 발생되고 있다.

신사참배에 기독교계 전체가 공식적으로 동원된 것은 그 후유증이 상당히 컸다.
일제 패망 후 며칠만에 신사를 불태워 버렸을 만큼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조선인의 반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특히 신사참배에 앞장선 이들이 법적 책임을 지는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문제가 잠복해 있었다.
후에 이로 인한 상처를 씻기 위해 공산주의를 사탄으로 삼는 지나친 반공주의와 보수주의적 흐름이 나타났을 정도로 한국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가 있다.

2006년 대한민국의 소장파 목회자들이 모여 결성한 한국 기도굑 목회자 협의회가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한 일과 독재정권 시절에 권력층과 야합해 정의를 뒤엎기도 한 죄악에 대해 마음을 찢으며 참회한다."
내용으로 반성문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교단 차원의 공식적인 인정이나 참회는 현재까지 하지 않고 있다.








제27회 총회서 17개 노회 수치스런 결의 ... 전국 노회서 공식 취소 결의 잇따라야



▲ 제27회 총회회의록 중 신사참배 결의 내용을 담은 성명서가 기록된 부분.

1938년 9월 9일부터 15일까지 평양서문밖교회에서 조선과 만주 27개 노회의 총대 193명(목사 86명, 장로 85명, 선교사 22명)이 모여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를 개최하였다. 개회 당시 총회장은 이문주 목사(경북노회·대구남산교회)였다.

첫날 저녁 8시에 개회하여 임원을 선출하니 총회장으로 평북노회 홍택기 목사가 선출됐다. 이튿날 오전 9시 30분 속회하여 박응률 목사로 기도하게 하고 회무를 시작한 후 1시간이 지나서 10시 50분경, 평양노회장 박영률 목사가 평양노회 평서노회 안주노회의 연합대표로 신사참배를 결의하자는 제안을 하여 즉시 가결하였다. 그리고 성명서를 발표한다.

“아등(我等)은 신사(神社)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한다. 그러므로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려행(勵行)하고 나아가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 있어서 총후(銃後) 황국 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한다.

소화13년(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총회는 신사참배 가결 후 후속조치로 부총회장과 각 노회장이 총회를 대표하여 즉시 신사를 참배할 것을 결정하여, 12시 정회 후 평양 신사에 참배하고 돌아와서 오후 2시부터 속회했다.

평북노회는 총회 개회 이전인 1938년 2월에 이미 신사참배를 가결하였고, 전북노회도 6월 8일 제32회 정기노회 중에 가결하였으며(‘전북노회록’ 참고), 경북노회는 8월 19일 제36회 2차 임시노회에서 신사참배하기로 가결하고 이에 찬성하는 회원들을 총대로 선정하였다(‘경북노회105년사’ 참고).
▲ 신사참배를 결의한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표들이 1938년 9월 10일 평양신사를 찾아가 참배하는 모습이 당시 조선일보에 게재됐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전남노회였다. 전남노회(당시 노회장 박연세 목사)는 전국 27개 노회 중에 유일하게 노회 보고서에 신사참배를 결의한 내용을 총회에 제출하여 총회록에 남겼다. 1938년 5월 6일부터 10일까지 목포양동교회에서 열린 전남노회의 제30회 정기노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노회록에 담았다.

“광주 4교회 도당회와 목포양동교회 당회의 헌의안을 받아 다음과 같이 보고하나이다.

1.신사참배는 국민정신통일에 순연한 국가의식임으로 본 노회로서는 혼연히 참배함이 당연한 국민의 의무인 동시에 교회지도상 선명한 태도인줄을 아오며.” (만장 일치 가결)

이와 관련해 제27회 총회회의록(121쪽)의 제9호 각 노회 상황보고에서 전남노회 해당 부분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특별사항은 금춘 정기노회에 오랫동안 문제로 되어오던 참배 문제에 대하여 당국의 지시대로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참배는 국민정신 통일을 위한 국가 의식임을 인식하고 본 노회로서도 참배함이 국민의 당연한 의무인 동시에 교회 지도상 선명한 태도일줄 알고 이를 결의 실행하는 동시에 관내 각교회에 통지하여 일반 교인으로 취할 것을 보였사오며.”

제27회 총회에 참석한 전체 27개 노회 중에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한 노회는 17개였다. 이때 일제는 총회에 참석할 총대들은 신사참배를 찬동하는 자들로 선정할 것을 지시하였다. 당시 총회에 참석하고 상황을 목격한 김양선 목사는 당시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일제는 각 지방 경찰서를 통하여 총대로 선정된 노회 대표들에게 다음 3개의 조건 중 택일할 것을 강요하였다. 3개의 조건은 ‘1.총회에 참석하면 신사참배가 죄가 아니라는 것을 동의할 것 2.신사참배 문제가 상정되며 침묵할 것 3.상기 양안을 실행할 의사가 없으면 총대를 사퇴하고 참석하지 말 것’ 등이었다. 그리고 이 세 조건을 모두 불응하는 사람들을 구속 투옥하였다.

뿐만 아니라 총회 석상에서 경찰서 지도부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총대석 옆에도 정복 경찰이 서 있었으며, 총대석에도 사복경찰이 포진해 있었다.

이처럼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일제의 엄청난 강압에 의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스스로 수치스러운 결의를 한 것이며, 또한 당일 12시에 총회 대표가 직접 평양 신사에서 참배를 실시함으로 범죄를 저지르는데 이르고 말았다.

해방 후 1946년 남부총회에서 신사참배 취소 결의를 하였으나, 이는 남한 노회들만의 것으로 인정됐다. 이후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남북한 노회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안건(권연호 목사 제안)으로 받아, 신사참배 결의가 불법인 것으로 취소하는 정식 결의를 한다. 당시 총회 기간 중 회개의 성찬과 3시간 특별기도회를 열고, 6월 한 주일 전국교회가 회개하는 의미로 연보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들의 가족을 위로하는 일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총회와는 달리 과거 신사참배를 결의한 노회가 정식으로 회개하고 취소한 기록은 오랫동안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2016년 7월 31일 산정현교회에서 평양노회에서 분립한 7개 노회(경평, 남평양, 동평양, 서평양, 평양, 평양제일, 북평양)들이 과거 신사참배에 앞장선 노회 결의를 무효로 선언하는 취소결의를 했다.

또한 이 자리에서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복직도 결의한 후, 각 노회 대표들과 노회원들 그리고 총회역사위원회가 함께 모여 ‘주기철 목사 복권 감사예배’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과거 신사참배에 앞장선 노회와 선배 노회원들의 불의와 허물을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아가 신사 참배 거부운동에 앞장선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결의도 하였다,
▲ 장영학 목사(한국교회역사자료박물관 관장)

올해는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지 80주년을 맞는 해이다. 전국의 노회들은 총회의 치욕적인 신사참배 결의에 대해 공동 책임을 지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취소 결의를 하고, 회개하며 참회하는 성찬을 받아야 할 것이다. 비록 총회 차원에서 취소 결의를 했지만, 해방 이후 노회들이 정식으로 취소 결의를 한 흔적을 찾을 수 없으니 이에 대해 부담감을 갖고 노회들마다 정식 취소 결의를 해야 할 것이다, 모두가 역사적 책임을 지는 마음으로 참회를 해야 할 것이다.
▲ 평양 금수산에 세워진 신사.

이름도 예쁜 ‘금수산’ 자락에 ‘광풍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서있던 자리였다. 모란대와 을밀대 그리고 대동강 등 평양의 온갖 장관을 한 눈에 볼 수 있던 바로 그 자리. 하지만 이미 빼앗긴 조국의 산하였고, 거기에는 치욕의 상징인 일본 신사(神社)가 서있었다.

일행은 왼손, 오른손, 입을 차례로 씻고 옷깃을 여민 후 본격적인 신사참배 의식에 들어갔다. 정해진 순서대로 절을 하고, 손뼉을 치는 행위가 반복됐다. 바로 몇 시간 전 예배당에서 찬송을 부르던 그 입술이었고, 기도하기 위해 모았던 그 손이었다.

신사는 일본의 국교 신도(神道)의 사당이다. 당초 신도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선조나 자연을 숭배하던 토착신앙이었다. 그러나 1868년 일본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천황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신도를 적극 활용하면서 국가종교로 부각되었다.

대륙침탈의 야욕을 불태우던 일제는 자신들이 진출한 지역에는 반드시 신사를 세워 자국민의 단합과 상대민족의 사상통일을 꾀했고, 우리나라에도 1876년 개항 이후 전국에 수많은 신사를 설치한다. 처음에는 일본 거류민들 중심의 민간차원에서 건립과 운영이 이루어졌지만, 1910년 한일병탄 뒤부터는 본격적으로 국가 차원의 육성이 시작됐다.
▲ 서울 남산에 건립된 조선신궁.

1925년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이 건립된 것을 계기로 일제는 본격적으로 신사참배를 우리 민족에 강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립학교, 그 다음에는 일반 사립학교, 나중에는 기독교학교와 교회들까지 주요 공략대상이 됐다.

처음에는 ‘우상숭배’라며 강력히 맞섰던 한국기독교의 대오는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부르짖으며 강력한 식민정책을 펼친 일제의 탄압 앞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로마 교황청의 훈령을 받고 투항한 가톨릭에 이어, 개신교에서는 감리교회가 앞장서 1936년에 백기를 들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주도했던 장로교회마저 1938년 9월 10일 평양서문밖교회에서 개회한 제27회 총회를 기점으로 변절하며, 한국교회는 결국 패배의 쓴잔을 받아든다. 일본 경찰들이 대놓고 자행하는 감시와 통제 속에서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한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대표들은 회의까지 멈추고, 평양신사로 향했다.

평양신사는 일본인들이 ‘천조대신(天照大神)’이라 부르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를 제신으로 섬기는 사당이었다.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린 이들은 ‘기독교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다’ ‘애국적 국가의식이다’고 스스로 강변했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는 우상숭배이자 배교행위였다.

한국교회는 그렇게 쓰러졌다. 한 번 내준 신앙의 정절은 속절없이 내팽개쳐졌다. 이후 장로교 총회 기간에는 신사참배가 당연한 절차처럼 실시됐고, 전국 교회로부터 돈과 종을 거두어 일본군대의 무기 구입자금으로 헌납하기도 했다. 1942년에는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이 붙은 전투기가 등장했다.

이름 있는 목사들은 겨레 청년들을 점령국의 용병으로 내몰고, 일제의 대동아전쟁에 협력하도록 교회를 독려하는 시국강연회 연사로 등장했다. 한 때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었던 ‘대부흥’의 성지 평양의 교회들은 신사참배 결의 이후 쇠락의 길을 걷다가 결국 해방 이후에도 회복되지 못했다. 무서운 암흑기가 도래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2018년 9월 10일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며

한국 장로교회 신사참배 결의와 1940년대의 부일과 배교

 

나삼진 목사 (Joyful Educational Ministries 원장)

2018년 9월 10일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를 “솔선 여행하고, 비상시국하에서의 총후 황국 신민으로서의 적성을 다하기로” 결의하고 성명서를 낸 지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는 한국 장로교회 50주년 희년잔치를 마친 후 불과 4년 만의 일이었는데, 오늘날까지 134년의 한국 장로교회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이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여 관심은 갖지만 매우 피상적으로 알고 있으며, 그 이후 1945년 해방 때까지 교회가 어떤 범과를 저질렀는가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여 회개 집회를 갖는다는 보도가 있지만,1)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학문적인 평가와 반성도 빈약한 실정이다. 더구나 올해는 한국 장로교회 중요 교단 총회가 신사참배 결의 80주년 기념일에 개회하는 데도, 이에 대한 의미있는 행사가 준비되지 않고 있는 것은 한국 교회의 빈곤한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한국 장로교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여, 그 이후 1940년대 한국장로교회의 부일과 배교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한다. 이 사건은 우리 시대에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그 역사적인 경계를 삼고자 한다. 이 논의를 통해 한국 장로교회가 새롭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1.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1) 일제강점기 기독교 탄압의 배경과 신사참배 강요

일본 제국주의(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정치적 억압정책, 경제적 수탈정책, 문화적 말살정책 등 세 가지 정책으로 나타났다.2) 정치적 억압정책은 한국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한국인의 정치적 참여를 봉쇄하는 것이었고, 경제적 수탈정책은 농업 방면과 상공업 방면에서의 수탈이 중심이 되었으며, 문화적 수탈정책은 교육정책과 언어정책, 역사왜곡 등이 중심이 되었다. 거기다가 종교적 탄압정책도 함께 나타났는데, 일제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극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천황숭배와 신사신앙을 축으로 하는 그들의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기독교와는 조화, 공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제에게는 당시 기독교가 민족운동과 깊은 연대를 가진 배일세력으로 인식되었으며, 일본과 경쟁, 혹은 적대관계에 있는 영국과 미국 등 서구 여러 나라들과 선교사를 매개로 연결되어 통제나 지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3) 일제가 기독교를 유독 탄압했던 것은 이렇게 일본의 제국주의적 본성과 갚은 관련을 갖는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은 그 야욕을 중국으로 뻗히게 되었는데, 1932년에 허수아비 정권으로 만주국을 수립했다. 일제의 이러한 야욕은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노골화되어, 1937년 7월 선전포고 없는 중일전쟁을 도발한 후에는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며 중국대륙을 병탄하려 했다. 이는 전쟁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었으므로, 그들이 즐겨 사용했던 ‘총후(銃後, 후방을 의미)의 지원과 협력을 위해 국민정신의 통일이 중요했다. 이에 조선과 일본이 하나임을 강조하는 내선일체 정신 계몽에 적극적이었다.

1936년 8월 관동군 사령관 출신의 미나미가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조선민족을 말살하는 대대적인 억압정책을 폈다. 일제는 1937년에 들면서 9월 6일 애국일 제정, 10월 2일 ‘황국신민의 서사’의 제정과 일상적 제창 강요, 1938년 2월 6일 지원병제 실시, 3월 4일 민족성 말살을 위한 조선교육령 개정, 1939년 1월 10일 창씨개명 강요, 1942년 5월 징병제 실시, 1942년 초등교육 배가계획 등의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4)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시작한 후 그들의 종교 신도(神道)를 한국에 이식하기 시작했다. 1925년 조선신궁을 건립한 이래 도처에 신사를 건립하면서 1936년에는 전국에 54개의 신사(神社)와 293개의 신사(神祠)를 보유하게 되었다. 일제는 신사참배로 국민들의 정신적 통일을 이루려 하였다.

신사참배의 강요의 첫 시도는 1932년 춘기 황령제의 제례에 각급학교의 참여를 요구한 데서 시작되었다.5) 이러한 요구가 1935년부터 기독교 학교 신사참배 강요로 나타났고, 1936년부터는 교회와 교회기관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1937년 7월에 1면 1신사 정책이 추진되면서, 신사가 급격히 늘어 1945년에는 신사(神社) 79개와 신사(神祠) 1,062개가 되었다.6) 최근 공개된 1942년 5월 경 전남 담양면장의 공문에 의하면, 일제는 신사운영비까지 주민이 부담하게 했다.7)

2)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신사참배는 기독교 여러 교파에 요구되어 장로교에서는 1938년 2월 9일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후 8월에는 평양노회, 9월에는 경안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고, 전국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일제의 강요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8) 이 시기에 각 종교단체나 다른 교파들 가운데 천주교는 교황청의 정책에 따라 일찍이 1936년 5월에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였고, 안식교는 1935년에, 감리교는 1938년 9월 3일 총리사 양주삼의 명의로 신사참배 여행 성명서를 발표했다. 마지막으로는 장로교 총회가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 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추히 국민정신총동원 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期)함

소화 13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제27회 총회에서는 이 결의 후 평양기독교친목회 심익현 목사가 신사참배 즉시 실행을 특청하자, 총회가 이를 받아들여 김길창 부총회장의 인솔로 전국노회장 23명이 총회를 대표하여 평양 신사에 참배하였다.9) 이어 총회에서 김길창이 제출한 건의안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10)

1) 당국과 조선교회와 선교사단과의 삼각적 관계의 원만을 도모할 일

2) 총후보국(銃後報國)에 물자헌납운동은 물론 우선 정신 동원의 일부로서 내지교회와의 연락을 위한 친선사절을 보낼 일

3) 국방헌금은 교회가 일정한 시일에 애국예배를 보는 동시에 국방헌금대로서 조직할 일

4) 신사참배는 사대절(四大節)에 일반시민과 같이 참배하도록 당국과 교섭할 일.

12월 12일에는 장로교 홍택기, 김길창, 감리교의 양주삼, 김종우, 성결교의 이명직 등 5인이 한국교회 대표단으로 일본의 이세신궁과 가시하라신궁 참배를 떠났다.11)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겠지만, 총회에서의 부속 결의와 그 이후 지도자들의 행적으로 볼 때 신사참배는 일제의 강요와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3) 기독교 학교의 폐쇄와 신사참배 반대운동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저항의 반작용도 있었는데,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기 위해 1938년 졸업생들에게 우편으로 졸업장을 보내고 스스로 휴교했다. 주한 각 선교부들은 신사참배에 응하지 않기 위해 그동안 설립, 운영해오던 기독교 학교를 폐교했다. 이들 선교부들 가운데는 남장로교회 선교부가 강력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사참배 강요가 본격화 되면서 선교본부 풀톤 총무가 내한하여 신사참배 반대의 의지를 분명히 함에 따라 그해 9월 6일 전라남북도의 도지사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전라지역의 네 학교를 강제로 폐교하였다. 순천 매산학교, 전주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등의 세 학교도 스스로 폐교 신청을 해 폐교되었다.12) 이같은 반응은 부산경남지역을 관할하던 호주장로교회도 1938년 6월에 학교들을 폐쇄하였다.

신사참배 반대에 따른 일제의 종교적 탄압이 가속화되면서 다른 교파들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1942년 2월 20일 미국감리교회 해외선교부에서 선교사들은 모든 선교지역에서 철수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고,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철수하였다.13)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후 전국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평안남도 주기철, 평안북도 이기선, 경상남도 한상동, 만주 한부선 등이었다.14) 집단적, 조직적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한 이들은 1940년 9월 20일 새벽 4시 일제검거로 체포되었다. 한국 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로 200여 교회가 폐문되고, 2천여 명이 투옥되었으며 이중 50여 명이 순교하였다.15) 8월 17일 밤 이기선, 주남선, 한상동 등 20명이 평양감옥에서, 손양원이 청주감옥에서, 또다른 소수가 부산감옥에서 출옥했다.16)

 

2. 신사참배 결의 이후의 한국 장로교회의 훼절과 배교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가의식으로 결의한 이후 교회는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9월에 있은 제28회 총회에서는 일제에 협력하기 위한 기구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조직했다. 총회 파회 후 산회되는 총회와는 달리 이 기구는 상시체제를 유지하였는데, 이사장은 총회장이 맡고, 각 노회장은 이사로, 총대들은 평의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전국에 26개 노회 지맹이 결성되고, 731개 애국반이 조직되었다. 1937년 7월부터 1940년 8월까지 장로회 총회연맹에 보고된 장로교의 친일행위는 전승축하회 604회, 무운장구기도회 8,953회 국방헌금 15,803.46원, 휼병금 1,726.46원, 유기 308점, 시국강연회 1355회, 위문 181회, 위문대 1,580개였다.17)

1940년대의 한국 장로교회 총회는 개회 이후 총대 일동이 신사에 참배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18) 제30회 총회에서는 시난극복의 결의문을 작성, 총회장 명의로 발표하고, 이를 지나주둔황군사령관에게 보내기로 결의하였다.19)

동양평화를 확보하고 팔기일우의 대이상을 구현한다는 황국부동의 국시를 지금은 적성국 가의 제국에 대한 도전적 태도가 일일 노골화되어 아국의 국시수행에 방해를 위해 광분 하는 현 시국의 긴박하고 비상의 때인 가을에 기독교도로서 초연하지 않고 장로교파 36 만 신도는 불퇴전의 결의를 가지고 국책에 순응하여 결전태도를 실천확립하고 시난극복 의 정신을 갖도록 한다.

소화 16년 11월 22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1940년대의 한국 장로교회가 얼마나 부일과 배교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는 제31회 총회 회의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20)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개회되었던 제31회 총회는 개회예배 전에 먼저 필승 기원선언문을 채택하고,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회의록은 “일동은 크게 감격해서 박수를 하였다”고 기록하였다.21)

천황의 덕분으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고, 그로 인해 세계 신질서를 완성한 것 이 우리 제국의 국시입니다. 우리의 황군 장병은 하늘에서 바다에서 육지에서 큰 전과를 거둬가 고 있는 것에 대하여 전장의 뒤에 있는 국민은 감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가을에 우리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천황의 은혜에 감격해 눈물을 흘리고, 협심 전력으로 성스러운 업적을 완수하도록 매진할 것을 결심합니다.

왼쪽과 같이 선언합니다.

소화 17년 10월 16일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31회 총회에서는 이 선언문 채택뿐만 아니라 개회 이튿날 1942년 10월 17일 오전 9시 30분 총대원들이 일제히 평양 신사에 가서 참배하였으며, 이어 평안남도 고등감찰과장의 시국강연, 국민의례, 특별강연회, 전승기도예배가 있었다. 주일에는 성만찬 예식이 있은 후 창무 조선군 보도부장의 강연, 저녁에는 오후 7시에 전승기도예배를 가졌다. 총회 주최로 대동아전쟁 목적 관철과 기독교도의 실무를 재삼 격려하기 위하여 호남선, 경부선, 함경선, 황해선, 경의선 등 다섯 조로 나누어 전조선 중요도시에서 시국순회 강연대를 파송하기도 했다.22) 총회의 경건회에서도 설교를 맡은 목사가 로마서 13장 1-3절을 중심으로 ‘기독교인의 국민적 각오’라는 친일적 설교를 하기도 했다.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이후 불과 4년 안에 총회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는 더 이상 장로교회의 총회일 수가 없었다.23)

1940년대에는 황민화 사상이 기독교 안에 까지 깊숙이 들어왔는데, 전국 교회에 가미다나(信朋)을 설치하고, 예배 전에 천조대신의 신패에 경배하고, 동쪽을 행해 일본 왕에게 절하고, 황국신민서사 낭독과 국기배례를 한 후 예배를 드렸다. 더구나 서울의 한강이나 부산의 송도 앞바다에서 천조대신 이름으로 신도침례(미소기 바라이)를 받도록 했다. 또 구약성경 사용을 폐지하고, 찬송가도 부분적으로 삭제되었다.24) 한부선은 그 시대에 모든 교회가 총독부의 선전도구가 되기 위해 하나의 교회로 묶여 총독부의 통제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증언한다. 성경도 구약성경에서 종말론과 연관이 있는 부분들은 사용이 금지되었고, 복음서를 중심으로 설교하게 했으며, 기독교인들이 주일에도 ‘전쟁을 위한 노력 동원’이 되었다고 전한다.25) 찬송도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금주가 등 21곡이 삭제되었다.26) 이같은 일은 감리교에서 더 협조적이었는데 1939년 1월 히라누마 내각에 의해 종교단체법이 통과된 후에 일본 기독교 조선 감리교단 정춘수 통리가 전국교회에 시도한 공문에서 확인된다. 공문에는 구약성서와 신약의 묵시록을 사용하지 않고, 사복음서에 기인하여 교의를 선포하기로 교회에 통달이 있었다.27)

3. 1940년대 한국 장로교회의 부일, 배교 행적들

제31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1942년 10월 16일 서문밖교회당에서 26개 노회 총대 목사 69명, 장로 66명, 모두 135명이 참석한 가운데 회집했다. 이 총회에 각 노회에서 상황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총회 회의록 79면부터 90면까지에 수록되어 있다. 각 노회는 감사의 건, 교회상황, 특별상황, 교육상황, 장래 계획, 교세 통계 등을 보고하는데, 노회는 특별상황과 장래 계획이라는 항에서 부일, 배교 행적들을 상세하게 남기고 있다. 이를 내용별로 분류,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애국기 헌납 헌금

1841년 8월 ‘조선장로교도 애국기 헌납기성회’가 조직되고, 모금을 시작하였다. 이어 이 일은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연맹’을 통해 이루어졌다. 다수의 노회에서는 애국기 헌납을 위해 헌금하였는데, 충청노회는 4,051.60원을, 전북노회는 4,000여 원을, 군산노회는 4,500원을, 용천노회 25,000원, 평서노회 8,000여 원을 헌금했고, 삼산노회와 제주노회는 금액을 밝히지는 않지만 애국기 헌금을 위해 후방국민으로서 정성을 다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모든 헌금은 기성회를 통해 모금되어 군에 전달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계속되자 일제는 무기 제작을 위한 물자 확보를 위해 교회의 종을 징발했다. 충청노회는 82개 교회 가운데 80개 교회의 종을 헌납하였고, 평서노회는 68교회에서 국방헌금 외에 조종 77개와 놋그릇 152개를 헌납하였으며, 전북노회는 종과 함께 금속류 회수운동을 전개하여 놋그릇 수 천점과 교회 조종을 헌납했다고 보고하고 있다.28) 이렇게 수납된 종은 1941년 10월부터 1942년 10월 15일까지 전국적으로 1,540개, 총액 약 11만 9,832원에 달했으며, 놋그릇 등 잡종기 헌납은 2,165점이었다.29)

이렇게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1942년 2월 10일 육해군에 애국기 1대 또는 기관총 7정의 대금으로 150,317.50원을 헌납하였고, 그 후 들어온 자금으로 같은 해 6월 조선군 사령부를 방문하여 육군환자용 자동차 3대 기금으로 23,221.28원을 납부했다.30) 1942년 9월 20일 해군성으로 헌납한 애국기 명명식이 경성운동장에서 개최되었는데, 총회 대표가 함께해 감사장과 수납서를 받았으며, 해군보국호 선상전투가 한 대와 육군 기관총 두 정에 대한 명명은 ‘조선장로호’로 명하고, 당일 헌납 보국호 사진을 해군성으로부터 받았다는 총회 연맹 보고를 하고 있다.31)

총회 연맹은 1944년 반도인에 대한 징병령 계획에 따라 “이 감격을 안고 동 준비운동을 함에 있어 실제적 운동으로서 전 조선 기독교 가정 부인계몽운동을 하기로”하고, “전 조선 기독교 지도자는 일본적 기독교 정신 아래 교회원을 지도하도록 함에 있어서 본 총회 연맹은 그 지도자에 대한 황도정신에 함량과 함께 기독교 신학사상의 명랑화를 기해서 철저하게 연성운동을 하도록 함”이라 보고한다.32) 이 시기 한국 장로교회의 부일협력과 반민족적인 행위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2) 시국강연회와 전승축하대회

이 시기에 여러 노회에서 시국강연회도 실시하였다. 충청노회는 관내 82개 교회 가운데 80교회에서 시국강연회를 실시하고, 조종을 헌납하고, 부여신궁 제조에 근로봉사대 3인을 파견했다. 이와 함께 충청노회가 교파합동 청원서를 총회에 제출하였다.33) 삼산노회는 징병제 실시 경연과 애국예배를 실하였고, 제주노회도 1938년 2월 지원징병제 실시에 따라 축하 강연을 도경찰서 고등계의 후원 아래 제주도내 20여 개 교회에서 개최하였다.

일본군이 전장에서 승리하면서 노회에서는 전승축하대회도 개최하였다. 이 일에 가장 앞장섰던 노회는 서울을 교구로 하는 경성노회였는데, 결전 체제강화 신도대회를 개최하고, 전승기원대회와 남방 출정 황군장병을 위한 일장기 500본을 발송했으며, 싱가포르 함락 축하 신도대회 및 징병제 실시 감사대회를 개최하였다.34) 노회 관내 여러 교회는 국어(일본어) 강습회 개최, 황군장병에 대한 위문품, 위문금을 종전대로 발송하였다는 보고로 보아 이전부터 계속된 사업임을 알 수 있다.

3) 교회 통폐합

일제는 교회의 통폐합에도 적극적이었다. 일제는 기독교 세력의 약화를 기하기 위해 지역교회의 통폐합을 강요하여 1941년 3,624교회에서 1942년에는 2,543교회로 줄어들었다.35) 한 해 동안 모두 1,081교회가 폐쇄되었는데, 이는 당시 총 장로교교회 수의 30%가 되는 것이다. 그중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 경남노회로, 노회 상황보고에서 “통제에 의해 교회의 통폐합을 실행한 결과, 335교회 중에 108교회가 감소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36) 이는 총회산하 교회 감소분의 꼭 10%를 차지하는 수로, 전국 26노회인 것을 고려하면 가장 많은 수의 교회가 폐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일제의 박해에 의해 기독교 신앙과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지만, 노회의 보고를 볼 때 노회가 일제의 뜻을 따라 적극적으로 교회 통폐합에 협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일본적 기독교 추진

일제는 기독교를 일본적 기독교로 바꾸기에 혈안이 되었고, 교회들이 이에 협력했다. 충청노회는 일본적 기독교로 진일보 전환했다고 보고하고, 함북노회는 교역자 하기 수련회를 개최하여 일본정신사 강의를 한 주 동안 청강을 보고하고 있다. 황해노회는 신도의 신앙에 충실하기 위해 힘을 쏟았음을 보고하고, 평양노회는 비상시국에 임하여 각 시찰부에서 활동하는 선교 대신에 목사를 파견하여 순회하도록 하고 있다. 삼산노회에서는 일요학교에서 일본어로 가르치고, 일요학교 지도수련회를 개최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또한 여러 노회가 일본적 기독교화에 앞장서겠다는 장래 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경성노회는 신도로서 충성보국의 전신을 철저하게 하도록 하며, 전북노회는 일본적 기독교 확립에 매진하며, 전남노회도 황국길에 따라서 일본 기독교 완성에 매진할 계획을 보고하고 있다. 제주노회도 국어 보급을 장려하고, 일본적 기독교에 매진하며, 경남노회도 교회의 지도자 및 신도 등을 노회 또는 지방적으로 각각 훈련시켜 일본적 기독교 건설에 매진하며, 경동노회도 신도들에게 철저히 시국인식을 하게 하여 전도 사업 및 종교교육에 임하여 일본적 기독교 건설에 매진토록 하는 것을 장래 계획으로 보고하고 있다. 경북노회와 함북노회 등도 유사한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

5) 교파의 통폐합

한국 장로교회의 이같은 부일협력과 배교행위가 따르는 사이, 일제는 기독교를 효율적으로 통제, 관리하기 위해 교파통합을 추진, 각 교파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폐합하려 했다. 교파통합을 위한 일제의 뜻을 파악하였던 충청노회와 평양노회는 교파 통합청원서를 총회에 제출하였다. 이 청원은 정치부로 보내졌다가, 정치부 보고를 받아 가결하고 중앙상치위원회에 위임되었다.37)

교파의 통폐합은 제31회 총회 이전에 이미 추진되고 있었는데, 1942년 1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일본기독교 조선교구, 구세군 등 다섯 교파 대표가 모여 조선기독교합동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통합을 추진하다가 감리교의 이탈로 실패로 돌아갔다. 교파 통합이 결렬되자, 장로교 총회는 상치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1943년 5월 총회를 해산하고,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 되었다.38) 이어 일제는 전세가 이미 기울었음에도 불구하고 1945년 8월 1일에 다시 모든 교파들을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합되었다.39) 초대 통리는 장로교 김관식, 부통리에는 감리교 정춘수가 맡았다. 이것이 불과 해방 두 주 전의 일이었다.

장대현교회 목사로 평양노회 총대로서 교파 통합안을 헌의하고,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설립에 앞장서 통리가 되었던 김관식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재빠르게 변신해 해방과 함께 조선교단의 기구적인 재건에 앞장섰다. 그는 1945년 9월 8일 새문안교회당에서 남부대회를 소집해 대회장을 맡아 교단을 이끌기를 원했으나 감리교와 장로교 대표들이 각각 교파로 환원을 원하면서 단일교단 유지가 무산되었다. 기독교계 친일인사들이 이렇게 해방 후 자숙없이 한국교회 대표로 등장하였고, 그에 비해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쇄신론자들은 분리주의자로 매도되고, 결국 1951년 장로교 총회에서 축출되고 말았다.40)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국가의 체계를 갖추기에 급급한 나머지 친일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아 민족정기가 바로 서지 못한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불행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정권에 협력하였던 독일 교회가 1945년 8월에 프랑크푸르트에서, 10월에 슈투트가르트에서 모여 지난날의 잘못을 참회하고 ‘슈투트가르트 죄책 고백’을 발표하고 하고, 책임있는 사람들은 독일교회의 재건과정에서 물러난 것과 대비되고 있다.41)

맺는 말

지금까지 일제의 기독교 탄압과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 그 후 1940년대 한국 장로교회가 어떻게 훼절되고 배교의 길을 걸었는가를 논의하였다. 이제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하며 이 소론을 마치려 한다.

첫째,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 결의 80년을 맞아 부끄러운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회개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당시의 우상은 신사에 절하는 것이었는데, 이 시대에 어떤 우상들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에 침투하고 있는가를 인식하고, 이를 청산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심각한 우상은 돈과 명예와 권력일 것이다.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의 재정비리는 교회가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에 어느 정도 성취를 경험한 이들이 감투에 대한 욕심이 연합기관을 만들어 명예를 추구하고, 비상식적인 기관 운영으로 자주 물의를 일으킨다. 또 교회의 역량을 넘어선 거대한 예배당을 건축하고, 이를 유지하지 못해 이단교회에 넘기는 일까지 발생되는 것은 교계 지도자들이 명예의 우상을 섬기기 때문이다. 또 오늘의 한국 교회에 교권주의가 판을 치고, 교회 지도자들이 국가권력과 결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것은 권력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국 교회에서 더 이상 교권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

둘째, 한국 장로교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이후 발생한 교회의 훼절과 배교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가 이루어지고 그 방파제가 무너진 후 1940년대에 모든 것이 일시에 무너지는 도미노 현상을 경험했다. 1940년대에 목사들이 신도 침례까지 받았고, 한국 장로교회 총회는 애국기 헌납 헌금, 시국강연회와 전승축하대회, 교회 통폐합, 일본적 기독교화 추진, 교파 통폐합 등에 앞장서 부일과 반민족적 배교의 길을 걸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한 매체의 보도에 의하면 한국 교회 총회장이나 중요 기관장들의 상당수가 교회를 자녀에게 세습했다. 한국 장로교회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예장통합의 총회 재판국이 총회 헌법의 규정을 벗어나 명성교회의 세습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함에 따라 이 문제가 제103회 총회의 핫이슈가 되어 있다. 한국 교회 희년 잔치를 벌인 후 4년 만에 이루어진 신사참배 결의와 같이 이 사건은 한국장로교회 총회 설립 100년 잔치를 벌인 후 불과 6년 만에 일어났다. 한국 장로교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가 한국 교회의 일제강점기의 부일과 배교의 본격적인 출발이 된 것과 같이 명성교회 세습의 용인은 한국 장로교회가 향후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을 것인가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이 문제의 통합총회의 최종 결정이 한국 교회의 미래의 결정적인 방향타가 될 것이 분명하다. 한국 교회는 지금 흥망의 기로에 서 있다.

셋째, 한국 교회와 교계는 법과 상식으로 목회와 행정이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최근 비리 혐의로 총신대 총장과 이사들이 해임되어 임시이사가 파송되었고, 피어선성경학교의 백년 역사를 이은 평택대 총장은 20년 동안 여직원 성추행이라는 파렴치한 사건으로 법정 구속되었다. 대형교회들에서 발생한 목회자 비리와 윤리적인 문제들이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있으며, 많은 기독교계 대학들이 비리로 몸살을 앓고, 이러한 여러 문제들이 자주 방송에 노출되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있다. 한국 교회는 교회 행정과 재정운영에서 사회에서 통용되는 기준도 따르지 못해 사법부의 판단과 정죄를 받고 있다. 한국 교회는 공적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넷째, 한국 교회와 연합기관은 지난 수년 동안 정치적인 행사에 참여하면서 극단적인 수구세력으로 지목되고, 지성사회의 혐오를 받고 있다.

지도자들이 역사의식을 갖지 못하고 교회를 정치집회에 동원하면서 교회의 영광이 손상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한국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지만, 이 땅에 속한 기관이 아니다.

한국 교회가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아 이 중대한 역사적 범죄를 깨닫고, 이를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사로잡고 있는 우리 시대의 돈과 명예와 권력의 우상을 척결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한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교회에 주어진 사명에 충실해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하여 한국 교회 200년의 새로운 역사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 한국 선교 원년 : 1885년 4월 5일 / 2021년은 선교 136주년



신사참배는 ‘차금법’ 문제 바로 볼 수 있게 하는 거울



한국교회가 지은 신사참배의 죄에 대해 되돌아보면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된다.

첫째, 만일 모든 한국교회가 힘을 합하여 저항했더라면 그것은 막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저항을 포기한 사람들에 의해 지도자들의 의견들이 분열되었고, 결국 신사참배의 강요에 굴복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것은 모든 교회사가가 아쉬워하는 대목이다.

둘째, 마귀는 그 죄악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일제는 이 신사참배가 종교 행위가 아니라 국민의례라는 명분을 들고 나왔고, 많은 지도자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 가운데는 실제로 그렇게 믿은 사람들도 있었고, 강요 때문에 굴복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렇게 믿고 싶어 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거짓이었음이 드러났다.

셋째, 마귀는 처음에는 조그만 것부터 시작하며, 일단 그것을 받아들이면 점점 더 심한 요구로 나아간다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는 국민의례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자, 일제는 더 심한 것들을 강요했다.

천조대신이나 천황이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높은 신이라고 주장해도 받아들여야 했다. 교회당 안에 간이신사를 설치하고 그것에 절하라고 해도, 예배시간에 신도예배를 함께 드리라고 해도, 목회자들에게 신도침례를 받으라고 해도,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신사참배는 종교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수용했기 때문이다.

넷째, 마귀는 처음에는 양처럼 접근해서는 폭군으로 돌변한다

신사참배가 처음에는 국민의례라는 부드러운 얼굴로 나타났지만, 일단 결의가 이루어지자 곧바로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무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다섯째, 법적 결의가 중요하다

날치기 결의였지만, 총회에서 일단 결의가 이뤄지자 그것은 모든 배도의 근거가 되었고,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빌미가 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총회의 결의나 법은 그것이 나쁜 것이라면 어떤 형태든 방관해서도 안 되고 함부로 통과되게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교훈은 오늘날 문제가 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평등법과 같은 악법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차별금지법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신사참배 문제와 유사성이 있다.

첫째, 신사참배가 그 속의 죄악을 감추기 위해 국민의례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 것처럼, 차별금지법도 그 속에 들어있는 죄악을 숨기기 위해 인권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나고 있다.

소위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명분은 참으로 그럴듯해 보이고 선한 동기가 들어있는 것 같지만,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엄청난 죄일 뿐이다. 우리는 그 가면에 속아서는 안 된다.

둘째, 신사참배가 조그만 것에서 시작해서 더 큰 배도로 이어진 것처럼, 동성애도 하나를 양보하면 더 큰 것을 양보하게 되어 있다.

동성애도 처음에는 동성 간의 애정을 허용하는 것에서 시작하다가 지금은 동성 간 결합까지도 허용하고 있다. 또 처음에는 육체적 성전환만을 트랜스젠더로 인정하다가 나중에는 육체적 성전환 없이 본인의 성정체성 주장만으로도 트랜스젠더로 인정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확대해 나간다면 나중에는 일부다처제도 소위 성소수자의 인권이라는 명분으로 보호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셋째, 신사참배가 국민의례라는 부드러운 얼굴로 시작했다가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폭군이 됐다.

차별금지법 역시 성소수자의 인권 보호라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무서운 얼굴로 돌변하게 된다. 이미 이 법은 동성애 반대자에 대한 탄압과 처벌 조항을 담고 있다. 신사참배의 가장 큰 피해자가 기독교였듯 차별금지법의 가장 큰 피해자도 기독교가 될 것이다.

넷째, 신사참배가 총회에서 결의되자 다른 모든 배도의 근거가 된 것처럼, 동성애 역시 법으로 합법화되면 교육이나 문화적인 면에서 다른 모든 죄악을 허용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이 법에 따라 학교에서는 동성애 옹호 조장교육이 진행될 것이다. 언론과 문화 예술에서는 동성애를 미화하게 될 것이고, 삶의 현장에선 동성애가 만연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법이 제정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다섯째,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교회지도자들이 일치단결하여 반대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사참배가 한국교회에 강요된 것처럼 차별금지법 문제에 대해서도 교회가 일치단결되지 않는다면 이 법이 제정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교회는 하나 된 목소리로 차별금지법에 반대하고 행동으로 나서야 한다. 이런 면에서 신사참배 문제는 차별금지법 문제를 바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좋은 ‘거울’이다. 팬데믹 시대 신앙을 위협하는 갖가지 시도에 대응하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라도 교회사를 더욱 깊이 연구해 나아갈 길을 찾자.





순 우리말 모음

다소니 : 사랑하는 사람

다소다 : 애틋하게 사랑하다 

가람 : 강의 우리말

그린비 : 그리운 남자

여우별 : 궂은 날 잠깐 보였다가 사라진 별 

볼우물 : 보조개 

아람치 : 자기의 차지가 된 것

미르 : 용

푸르미르 : 청용

미리내 : 은하수

그린내 : 연인

아라 : 바다

꼬꼬지 : 아주 오랜 엣날 

눈바래기 : 멀리 가지않고 눈으로 마중

마루 : 하늘

그린나래 : 그린듯이 아름다운 날개

예그리나 : 사랑하는 우리사이

비나리 : 축복의 말 

어리연히프제 : 치마를입고 활쏘는 여자들

가시버시 : 아내 , 남편을 뜻하는 말

늘솔길 : 언제나 솔바람이 부는 길

한울 : 우주

꽃가람 : 꽃이 있는 강

수피아 : 숲의 요정

아토 : 선물

희나리 : 마른장작

샛별 : 새벽 동쪽 하늘에서 빛나는 금성

닻별 : 카시오페아 별자리

산돌림 : 옮겨다니며 내리는 소나기

듀륏체리 : 늦게 얻은 사랑스러운 딸자식

물비늘 : 잔잔한 물결이 햇살에 비치는 모양

타니 : 귀걸이 

하람 : 꿈의 뜻

사시랑이 : 가늘고 힘 없는 사람

도투락 : 어린아이 머리댕기

가우리 : 고구려 

미쁘다 : 진실하다

아띠 : 친구 

새라 : 새롭다

나린 : 하늘이 내린

라온하제 : 즐거운 내일

라온제나 : 기쁜 우리

라온힐조 : 즐거운 이른아침

꽃 잠 : 신혼부부의 첫날밤

나르샤 : 날아오르다

흐노니 : 누군가를 그리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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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우리말
1 해오름달 새해 아침에 힘있게 오르는 달
2 시샘달 잎샘 추위와 꽃샘 추위가 있는 겨울의 끝달
3 물오름달 뫼와 틀에 물오르는달
4 잎새달 물오른 나무들이 저마다 잎 돋우는 달
5 푸른달 마음이 푸른 모든이의 달
6 누리달 온 누리에 생명의 소리가 가득 차 넘치는 달
7 견우직녀달 견우직녀가 만나는 아름다운 날
8 타오름달 하늘엔 해, 땅위에선 가슴이 타는 정열의 달
9 열매달 가지마다 열매 맺는 달
10 하늘연달 밝달뫼에 아침의 나라가 열린 달
11 마름달 가을에서 겨울로 치닫는 달
12 매듭달 마음을 가다듬는 한해의 끄트머리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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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강의 옛말' 강처럼 넓고 부드럽게 흐르듯이

가람슬기
강처럼 푸르게 그리고 슬기롭게

가온
'가운데의 옛말' 세상에 중심이 되어라

그린나래
그린듯한 아름다운 날개처럼

고운
'고운' 말 그대로 고운 삶을 살아라

나래 '날개를 이르는 말' 자유롭고 창조적

나린
하늘이 내린

나르샤
비상하다, 날아오르다

나봄
봄에 태어난 아이

나예
나비처럼 예쁜 아이

난새
한껏 날아오른 새처럼 힘차게

노을
노을처럼 곱고 예쁘게 자라거라

누리
온세상에 너의 뜻을 펼치며 살거라

누리봄
세상을 봄처럼 희망차게 가꾸는 사람

늘봄
늘 봄처럼 싱그러운

늘찬
늘 옹골차게

다빈

빈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

다소니
사랑하는 사람

다슬
모든 일을 슬기롭게

다솜
애틋한 사랑

다온
모든 좋을 일이 다 오다

다올
하는 일 마다 복이 오다

다은
다사롭고 은은하게 자라는

다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

 

다흰
다흰 모두 다 하얗고 순수한

단미
사랑스러운 여자

도담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두빛나래
두개의 빛나는 날개

든해
집안으로 가득 들어온 햇빛처럼 밝게


라온

'즐거운'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 늘 즐겁게

라라
흥겹고 즐거운 삶을 살거라

라미
'동그라미'에서 따온 말, 동글동글 부드럽게

루리
'이루리' 모든 뜻을 이루다

마루
산 꼭대기 정상에 우뚝 서길

마루한
으뜸가는 큰 사람이 되거라

마리
'머리'의 옛말, 으뜸가는 사람

모아
늘 뜻을 모아 사는 삶을 살거라

미나
미덥게 자라나길

미르
'용'을 뜻하는 말, 용처럼 씩씩하고 멋지게

미리내
은하수를 뜻하는 예쁜 순우리말  

바다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갖거라

바론
'바른'의 옛 순우리말로 바르게 살길

벼리
'일이나 어떤 글의 뼈대가 되는' 중심이 되다 

별하
별처럼 높고 빛이 나는 사람 차고 미덥게 

산다라
굳세고 꿋꿋하게

소아
소담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길

소미
솜처럼 깨끗한

솔찬
소나무처럼 푸르고 옹골찬

수련
몸과 마음씨가 맑고 고운 사람이 되길

수피아
숲의 요정

슬기
언제나 슬기로운 사람

슬아
슬기로움과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

설아
눈과 같이 깨끗한 아이

슬예
슬기롭고 예쁜 사람

슬옹
슬기롭고 옹골찬 사람

슬우
슬기롭고 우람하고 씩씩한

슬찬
슬기로움으로 가득찬 사람

시내
시냇물처럼 말고 깨끗한 사람

아라

'바다'의 우리말, 바다처럼 넓게 살거라

아란
아름답게 자란

아람
가을햇살에 충분히 익어 저절로 벌어진 과일

아리수
'한강'의 우리말

아리아
'요정'의 우리말

아롱별
아롱다롱 빛나는 별처럼 아름답게 자라길

움찬
돋아오르는 싹처럼 힘차게 자라길

윤슬
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물결

으뜸
이 세상의 최고라는 뜻

은가람
'은은히 흐르는 강' 이라는 뜻의 순우리말

이든
착하고 어질다

이솔
소나무 같은 곧은 품성을 지닌 아이

자올
원만한 성격

잔디
잔디처럼 끈기를 가진 사람이 되어라

주나
사랑과 기쁨을 주는

주리
즐거움을 주리

지니
많은 복을 지니다

지은
세상을 바르게 하는 좋은 글을 지은 사람이 되길

지음
지금의 삶을 아름답게

진이
진달래처럼 곱고 예쁜 사람

 

 

찬솔

알차게 잘 자란 소나무처럼

찬슬
슬기로움으로 가득차다

초롱
맑고 영롱하게

큰솔

크게 잘 자란 소나무처럼

토리

도토리처럼 작지만 야무지고 옹골차게

티나
어디서나 예쁘고 고운 티가 나는 사람이 되길

푸르내

푸른 물이 가득 흐르는 맑은 시내

푸르니
마음이 늘 푸른

하나

이세상에 단 하나

하늬
'하늬바람'처럼 시원한 사람

하람
하늘이 내린 소중한

하랑
함께 사는 세상에서 높은 사람이 되길

한결
한결같은 지조

한빛
큰 빛, 세상을 이끄는 환한 빛

한울
큰 울타리처럼 포근한 사람

해나
해가 나듯 따뜻한 사람

해솔
해처럼 밝고 소나무처럼 바르다

해찬솔
햇빛이 가득찬 푸르른 소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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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todtoa.tistory.com/104





설교와 삶이 일치한 기도의 종 이원상 목사님

설교와 삶이 일치한 기도의 종 故 이원상 목사님

하나님이 섭리하신 목사 이원상

이원상 목사님의 전기를 쓰기 위하여 토요일 새벽기도 후에 혹은 수요일 저녁 예배 후에 이 목사님을 직접 만나 뵈면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목사님은 신학교 교수를 원하였고 그 길을 향해 끊임없이 정진하였다. 계명대학교에서 경북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달라스 신학대학교에서 펜실바니아 대학(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신학(구약)을 공부할 때도 목사님은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한국으로 돌아가 신학교 교수가 되는 꿈과 목표를 간직하고 있었다.

목사님은 순탄하게 공부하였고 박사학위를 위한 거의 모든 과정을 끝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목사님의 성격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인정하듯이 오히려 선생님이 어울리고 매우 내성적이며 부끄러움을 잘 타거니와 카리스마적이지도 않다. 목사님의 설교는 화려하지도 웅변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차분하고 다감하며 강의식이랄 수 있다. 목사님은 또한 스스로 교수의 직업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내려 주신 은사라고 믿고 정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은 이민 교회사에 보기 드문 대형 교회의 담임목회자로 우뚝 섰고 26년간 분쟁 없는 교회로 이끄는 우수한 리더십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나는 여기서 이원상 목사님께서 지난 26년간 섬겨 온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의 입지적 특성을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워싱턴은 미국의 수도요 세계의 수도이다. 이곳에는 각 나라의 대사관이 있고 당연히 한국 대사관도 있다. 한국의 주요 언론사 특파원들이 모두 여기 몰려 있고 조지워싱턴 대학, 조지타운 대학 등 명문 대학도 있어서 수 많은 인재들이 몰려온다.

이러한 인재들이 워싱톤에 거주하는 동안 대개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를 찾는다. 그리고 그들이 귀국한 이후, 그들은 조국 대한민국의 장관도 되고 도지사도 되고 언론사 사장도 되고 국회의원도 되고 대학 총장도 되었다. 이른바 이들은 대한민국의 지도자요 오피니어 리더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는 이들을 양육하여 다시 고국으로 파송하는 교회가 되었고  이 교회의 담임 목회자가 이원상 목사님이므로 이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은 이원상 목사님을 통하여 예수의 말씀을 전해 듣고 가르침을 받아 변화되어 고국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들을 위해 이들, 조국의 지도자들을 위해 목사 이원상을 여기에 세우신 것이 아닐까? 그것이 달라스도 필라델피아도 아닌 연고도 없는 미국의 수도 워싱톤으로 이끄신 이유가 아니었을까? 세속과 영합하는 달변가가 높아지는 교회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시며 오직 초대형 교회를 꿈꾸는 수많은 오늘날의 목회자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주시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주님이 원하시는 목회자의 참된 모본을 보여 주시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65 세인 목사님은 지금 26년 전에 포기하여야만 했던 박사학위 공부를 다시 시작하였다. 박사 학위 논문의 제목은 “John Chrysostom`s Understanding of the Imitation of Christ and its Application to Christian Leadership Today". 

이 논문의 제목처럼 이목사님은 지금 목회자를 꿈꾸는 후대들에게 자신의 참 모습을 직접 생생하게 정리하여 보여 주고 가르치며 하나님께서 목사님에게  주신 사명과 책임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려고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순간의 쉴틈조차 스스로 허용치 않는 삶을 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목사님으로 하여금 대학 교수의 꿈을 접게 하고 평생 목사로 살도록 이끄신 하나님의 고귀한 섭리가 아니었을까?

1. 이성봉 장로의 아들로 태어나다

이원상 목사는 1937년 압록강 건너편 만주 땅, 길림성 통화 북편의 산성진 이라는 마을에서 신앙심이 깊은 이성봉 장로와 윤봉선 성도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이성봉 장로는 20대에 한국에서 미국인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만주로 가서 청년기를 보냈으며 후일 북한을 거쳐 서울로 탈출하였다. 이러한 부친으로 인하여 이원상 목사는 태어 날 때부터 만주의 산성진 장로 교회(김석찬 목사)에서  말씀을 듣기 시작하여 1945년 해방 때까지 유치원과 주일학교 등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내는 동안 늘 말씀과 함께 살았다.

만주에 살던 시절, 부친 이성봉 장로는 해방을 맞은후 중국 공산당이 결성되고 종교의 자유를 박탈 당하게 되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한으로 나왔다. 이곳이 압록강 남쪽 평안북도 만포진(현 자강도) 이다.

압록강 변에 있는 만포진의 만포진 장로 교회(이무성 목사)에 다니며 1947년 까지 2년간 거기서 살았으나 다시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남한으로의 탈출을 결심하고 1947년에 서울로 들어왔다.

이들이 만주에서 북한을 거쳐 남한으로의 탈출을 결행하게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부친 이성봉 장로의 중국인 친구가  중국 공산당 회의에서 “이성봉은 기독교 사상이 투철하여 위험하니 주목하여야 한다.” 고 말했다는 사실을 전하여 준 것이다. 부친 이성봉은 이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홀로 만포진으로 피난하였다가 다시 돌아와 가족을 동반하고 북한으로 탈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목사는 8.15 해방이후 지방의 유지들이 밤사이 소문 없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기독교 신앙이 아니었으면 평생 공산주의자로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목사는 부친의 기독교 신앙과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깊이 감사한다.

2. 축복 받은 목회자 가문

전술한 바와 같이, 이원상 목사는 이성봉 장로(산성진 교회에서 장립) 와 평신도인 윤봉선 성도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 세 명의 형님과 누님 한 분이 계셨는데 맏형인 이원조와 셋째 형인 이영복은 모두 교회 장로로 봉사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가족 중에는 조카 이승혁(뉴욕), 조카 손주 이인국(산호세), 조카 손주 이동훈(필라) 등이 현직 목사이며(Pastor Jacob Lee. 05. 04. 1984∼09. 28. 2020 am 9:42 )아들 이요셉은 버지니아텍 대학교(Virginia Tech University)를 졸업한 후, 같은 학교 출신인 이 에스더와 결혼하고 미국 메릴랜드 주, 게이더스버그에 있는 미국인 교회인 Covenant Life Church에서 청장년 담당 교역자로 사역 중이다. 외동딸 이유니스는 스탠포드 대학(Stanford University)을 졸업하였고, 같은 학교 출신으로 현재 뉴욕대학 의과 대학에 재학 중인 주흥원과  결혼한 후 현재 뉴욕에 거주하고 있다.

이 목사는 황해도 출신으로 6.25 전쟁을 피해 경산에 와서 함께 경산 교회를 다니던 김영자와 결혼하였는데 고 김산봉 집사강옥화 권사의 5남매 중 오빠 다음으로 장녀인 김영자는 대구 신명여고와 효성여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경산에서 약국을 경영하였다. 이 목사는 장모인 강옥화 권사와 김영자(미국 명 이영자) 사모를 단순히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와 사위 장모의 관계를 넘어 평생 기도의 동역자로 매우 귀하게 여긴다. 그 만큼 이들은 평생 동역자로 함께 기도하며 같은 길을 걸었다. 곁에서 오래도록 이들을 지켜본 사람들 또한 이구동성으로 이를 증언한다.

이 목사의 큰 처남은 일찍이 미국에 유학하여, 현재 미국 산타 클라라(Santa Clara) 대학에서 경영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3. 산 기도를 드린 똑똑한 소년 이원상

이 목사의 가족이 3.8선을 넘는 과정에서는 안내인마저 달아나고 없는 상태에서 소련군에게 발각되어 3.8선 경계의 보안서에 수일간 감금 된적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본적이 남한인 사람은 보내 주는 기회를 얻어 무사히 서울로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이목사의 부친인 이성봉 장로는 해주에서 남한으로의 탈출을 준비하며 달빛이 없는 그믐밤을 기다리는 동안 무사 탈출을 위해 매일 해주 뒷산에 올라가 산 기도를 드렸는데 부친은 소년 이원상을 동반하였었다. 이때 부친과 함께 드린 산 기도의 경험은 목사 이원상의 기도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서울로 나온 소년 이원상은 청량리에 거주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동대문구 전농동 전농 국민학교를 다니며 창신 교회(권연호 목사)를 다녔고 해방 후인 1949년 국민학교 4학년 때 경북 경산으로 이사하여 경산에서 6.25를 겪었고 경산 국민학교를 다녔다.

부친 이성봉 장로는 경산읍(현 경산시)의 경산 교회 시무장로로 봉사하였는데 동네에서 성자 칭호를 받는 분이었다. 이 목사가 미국에서 목회자로 시무하는 동안에 비록 아들의 목회를 직접 보지는 못하였으나 매일 서너 차례 이상 교회에 가서 아들을 위해 기도하였던 참 신앙인이었다.   

부친은 소년 이원상이 5살 때부터 목사가 되기를 서원하였고 이때부터 소년 이원상의 마음에는 목사 이원상이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그는 당시 장래 희망 란에 목사라고 기재하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경산 국민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이원상은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하여 도시의 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경산 중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하여 거기서 성장하였다.

4. 김윤국 목사의 사모를 만나다

이때 여러 목회자들로부터 영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한번도 탈선 없이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최동진 목사, 윤철주 목사,  김형식 목사 등에게서 영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주선애 전도사(장신대 교수로 은퇴)를 기억하며 특히 최동진 목사의 영적 지도로 여러 학생들과 함께 산에서 드렸던 산 기도를 통해 큰 은혜를 받았다. 후일 소년 이원상이  한국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 데는 당시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 유학 중이었던 김윤국 목사의 이야기를 전해 주신 김유건 사모의 영향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을 피해 오신 김유건 사모가 소년 이원상이 다니는 경산 교회에 계셨던 것은 모든 일을 계획하고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원상 목사는 경산 교회를 잊지 못한다. 만주를 떠나 북한을 거쳐 경산에 온 국민학교 4학년 이후 대학 때 까지 거기 살며 경산 교회를 다녔는데 특히 기도 생활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종종 최동진 목사를 따라 경산의 성암산에서 철야로 기도하는 생활을 하였었다. 오늘날 기도하는 종으로서의 모본을 보여 주는 이원상 목사는 이때부터 이미 준비되고 훈련되기 시작한 것이다.

5.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고교 시절

이원상 목사는 경산 중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공부를 잘 하였으나 가난 때문에 대구 상고에 진학하여 은행원이 된 후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가 대구 상고에 진학한 후, 그에게 존재하던 세상 물욕이 사라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복음의 열정이 깊어져 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고교 시절은 영적으로 크게 성장한 시기였다. 특히 무학산 기도원을 설립하여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김순도 장로에게서 영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고 김천에 있는 용문산 기도원의 나운몽 장로의 집회에서도 큰 영적 감화를 받았다.  나운몽 장로가 초기에는 교계에서 인정받지 못하였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는 나운몽 장로의 교리 보다는 기도에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중3때 용문산 기도원 집회에서 영적 분위기에 크게 감화를 받았고 고교 시절 내내 그의 마음속에는 목사가 되기 위해 정진하려는 생각 외에는 아무런 잡념이 없었다.

이원상 목사는 고교 시절 슈바이처를 동경하며 의대 진학의 꿈을 가진 적이 있었다. 당시 의사와 목사로 헌신하던 이일선 목사는 한국의 슈바이처로 그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부친 이성봉 장로가 오직 하나님만을 선택하라며 두 가지를 다 잘할 수는 없다고 가르침에 따라 이 생각을 버렸다. 이것은 그의 일생에 첫 번째 타의에 의한 포기로 기록된다.

고교를 졸업할 즈음 그의 서울 진학은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하여 다시 한번 꺾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목회자의 꿈이 매우 강렬하였으므로 서슴없이 계명 기독 대학(현, 계명 대학교)을 지원하게 되었다. 이 목사는 당시 계명대의 설립 이념인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위하여' 등 기독교적 철학에 많은 도전을 받았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하나님 절대 우선 순위에 대한 신앙 교육, 그것은 바로 이 목사의 개인적 삶과 목회에 줄곧 중심적 철학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이유로 서울에 있는 대학은 물론 대구 지역의 타 대학도 스스로 포기하고 계명대학에 특차 수석으로 입학하여 장학금을 받는 혜택을 택했다. 계명 기독 대학은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에 의하여 1954년에 설립된 크리스천 대학이었다.

그에게는 이러한 일화가 있다. 계명대 입학시험 때 당시 학장이던 감부열(미국인) 선교사가 입학 구두시험(면접)을 치루는 자리였다.

" 왜 계명 대학에 입학하려고 합니까?"

" 헌신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 무엇에 헌신하려고 합니까?"

" 하나님께 나의 삶을 드려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이 되려고 합니다."

당시의 학감은 한명수 교수였다. 한명수 교수는 그 후 독일 유학을 다녀와 경북 대학 대학원 철학과 교수로 부임하였는데 이 목사는 이때 한 교수를 다시 만나 그의 제자가 되는 인연도 있다.

6. 목회자가 되려고 철학을 먼저 공부한 계명대학생

그는 계명대 진학 당시 영문과를 선택하라는 주위 목사님들의 조언도 있었으나 목회자의 길을 가기 위해 철학과를 선택하였고 졸업 때도 역시 수석을 하여 당시 신태식 학장으로부터 큰 성경책을 부상으로 받았다. 이때 받은 큰 성경책은 이 목사가 유학을 떠나며 분실하였는데 이것이 지금 어디 있는지 궁금해 한다. 신 학장은 후에 총장을 역임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1963년 총회 신학교에 응시하였으나 이를 포기하고 경북대 대학원 철학과에 지원한다. 이것은 목회자의 길을 가기 위해 철학 공부를 더 하고 신학을 공부하려는 자신의 의지를 실천한 것이다. 그 당시 경북대 대학원 철학과는 3명이 정원이었는데 경북대에서 허재윤, 대구대에서 한명(이름 미상) 그리고 계명대에서는 이 목사가 합격하였다.

그는 대학시절 군 복무를 하게 되었다(1959-1961). 군 복무 기간에 그는 남 춘천 505 병기단 512 대대에서 근무하며 남 춘천 감리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귀하신 은혜로 기억한다. 또한 대학시절에는 교목인 차태화 목사가 지도하는 채플 시간이 있었는데 성경이 필수 과목이었기 때문에 이때 신학적 지식을 얻게 되었고 미국인 선교사인 오천혜 교수의 지도로 주기도문을 영어로 암송하였던 것이 영어 공부에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는  구 의령 선교사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한명수 교수(서양 철학), 서준택 교수, 강도영 교수, 이정호 교수, 황성수 교수, 정명호 교수, 박종옥 교수, 김희섭 교수(기독교 윤리학), 김태한 교수(영어), 박봉목 교수(교육학), 이정빈 교수(교육학)등 에게 수학하였다. 노명식 교수(문화사, 후에 경북대 총장)에게서는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를 배우며 많은 감명을 받았다.

이 목사는 목회자가 되려는 후배들에게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철학이나 역사, 문학 등 인문학을 먼저 공부하라고 권유한다. 이 목사 스스로 철학 공부가 신학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직 한 길로 올곧게 살아온 그에게는 후에 목회자 또는 교수가 된 친구들이 많다. 친구인 고환규 목사와는 장차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자고 막연하게 약속한 적이 있었는데 돌이켜 보면 이것이 목회자가 된 동기를 부여 한 것으로 기억한다. 대구 상고 시절 기독 학생 운동(SCM)을 함께 하였던 친구들이 있는데 김상규(L.A. 안디옥 교회 담임) 박영희 교수(전 총신대 총장), 홍응표 목사, 정재근 목사 등이 있고 경산 교회에서부터 고등학교 대학 까지 함께 수학하였던 친한 친구 중에 이상수 교수는 현재 신학대학의 역사학 교수로 활동 중이고 엄세현은 교회 장로로 현재 대구의 서문교회를 섬기고 있다. 특히 같은 철학과에서 수위를 다투던 친구 선철은은 안타깝게도 연대 대학원 진학 후 세상을 떠났다. 현 계명대 대학원장인 김남석 교수는 계명대 초창기부터 도서관에서 일하였음을 기억한다.

이원상 목사는 대학시절 현재 계명대 교수인 김기한과 함께 계대 학보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학생회 종교 부장과 철학과 대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군 복무를 마친 그는 1962년 계명대 5회로 졸업하였다. 또한 계명대 출신 선배 중에서 후에 목회자가 된 추준호, 김명흥, 김진택을 기억하며 후배 중에서 손중철(싱가포르 선교사), 신상길 선교사, 김정국 목사(뉴욕 거주)를 기억한다. 또한 미국에서 정치학 교수로 있는 남태열과 현 계명대 교수인 송석우, 이약구, 조용상등과 함께 수학하였고 김상호 목사는 일찍 소천 하였다.

7. 교회 건축을 경험한 청년 이원상

이원상 목사는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 그러니까 대학원을 다니던 1963년부터 1968년 유학을 떠날 때까지 지금은 폐교가 된 메노나이트(Mennonite) 중 고등학교에서 영어와 역사를 가르친 경험이 있다.  거기서 계명대 출신인 김이봉 목사(교목), 이동근 목사(부 교장 거쳐 후에 교장이 됨. 현, 미국 침례교 목사) 등과 함께 사역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경산에서 가까운 평산의 평산 교회에서 전도사의 신분으로 담임 교역자가 된 경력이 있다.(1963-1967) 이것은 노회에서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그에게 특별히 시취(시험)를 통해 목회자의 자격을 부여하여 봉사하게 된 것인데 이것은 그의 신학과 목회의 기초가 되었다.

특히 50-60명 정도였던 교인들과 함께 교회를 건축하는 경험을 가질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후에 미국의 수도 워싱톤에 수도권 최대 교회인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를 건축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미리 준비하신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다른 기록은 그 작은 시골 교회에서 목사가 4명이나 배출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를 도와 헌신하였던 김정자집사(현재 권사)의 아들 박무용(당시 국민학교 4년생)학생이 현재 대구 황금교회 담임목사가 되었고 3형제가 모두 목사가 되기도 하였는데 조의호, 조영길, 조은호 목사가 이들이다. 젊은 시절 그의 짧은 목회 기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실을 맺은 것은 예사롭지 않다.

8. 천막교회 주일 학교를 개척하였다

만주 산성진 교회에서 유치원과 주일학교를 다녔던 이 목사는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다니던 경산 교회에서 실질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그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당시 부흥사이기도 했던 김형식 담임 목사는 경산교회에서 가까운 곳에 개척 주일학교를 세워 이 목사를 파송하여 사역하게 하였다. 김 목사는 대학생이던 이원상에게 그의 부흥사 사례비중 일부를 장학금으로 주며 천막 주일학교를 이끌게 하였던 것이다. 지금은 경산 중앙 교회라는 이름으로 경산 교회보다 더 크게 성장한 이 교회에서의 사역은 전도와 선교의 의미를 깨닫게 한 중요한 경험으로 그의 신앙을 한층 성장 시켜 주었다. 이 목사는 김형식 목사에게서 신앙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9. 전도사와 약사의 결혼이야기

이목사의 결혼 이야기로 돌아가자. 경산에서 약국을 경영하던 김영자는 혼담의 상대자가 목회자 지망생이라는 것에 부담감을 느꼈다. 김영자는 워낙 신실한 신앙인이었다. 황해도 수안에서 나서 서울 신당동에 살며 신당동 중앙 교회를 다녔고 경산으로 피난 온 이후에도 신앙생활은 지속되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새벽 기도를 쌓았고 이러한 생활은 그의 일상이었다. 김영자는 고아원 아이들을 돌보며 살기를 자원했었다. 외삼촌 이웃집에 고아원이 있어서 늘상 불쌍한 사람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고 아버지가 납치된 친한 친구가 고아원에 살기도 하여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런 그에게 전도사 이원상의 중매가 들어왔다. 고아원 사역을 꿈꾸던 그녀에게 목회자의 아내라는 새로운 도전이 다가온 것이다. 목회자의 사모가 된다는 생각을 해 본적도 없는 김영자는 사모의 사명과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았을 때 매우 부담스러웠다. 물론 그녀의 모친 강옥화 권사도 역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신앙심이 좋았던 이들 모녀는 자신들의 생각으로 결론을 내리기 전에 교회에서 철야하며 눈물의 기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였다. 그리고 이들 모녀는 동화처럼 한날한시에 똑 같은 꿈을 꾼다. 우리에게 보통 꿈 이야기는 마치 미신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으나 이들의 꿈이 요셉의 꿈처럼 워낙 생생하고 영몽 같아서 여기 소개하기로 한다.

 경산읍에 살고 있는 김영자는 꿈에 상복을 입은 거지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꿈속에서 중얼거렸다. “이 선생과 결혼했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남편은 죽고 자신은 거지가 되는 그런 꿈이었다. 장모 강옥화 권사도 한날한시에 같은 꿈을 꾸었다니 놀랍다.

1966년, 마침내 전도사 이원상과 약사 김영자는 결혼하였고 오늘날 북미주를 대표하는 선교와 교육과 화합의 교회에서 헌신적인 동역자로 살아 가고 있다.

10. 두려움과 외로움으로 지샌 미국에서의 첫밤

그는 스스로의 약속대로 ‘65년에 경북 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66년 약사 김영자와 결혼하고 사랑하는 신부를 고국에 남겨 둔 채  1968년 6월, 미국 달라스 신학교에 4년 장학금을 받아 홀로 유학길에 오른다. 그는 미국 유학의 최종 결심을 확실한 굳혀 준 이상근 목사를 기억한다. 이상근 목사(대구 제일 교회 담임)는 달라스 신학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분으로 '목회와 성경 주석'으로 한국 교계와 신학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유명하다. 1968년, 이목사는 서울의 덕성여대에서 문교부(지금의 교육부)가 주관하는 영어와 국사 등 유학시험을 치르고 결혼한 아내를 고국에 남겨 둔 채 노스웨스트(Northwest)비행기를 탔다. 1968년 6월 25일, 당시 한국에서는 200불 이상 가지고 출국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단돈 200불만을 지참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YMCA 호텔에서 미국의 첫 밤을 맞는다. 그 첫 밤은 두려움과 외로움으로 가득하였다.

이 목사가 미국에 온지 1년 반 뒤인 1970년에 김영자 사모는 미국으로와 달라스 장로교 병원 약국에서 일하다가  필라델피아에 있는 템플 대학(Temple University) 약대 4학년에 편입하고 1년 후 달라스 신학 대학을 졸업하여 펜실베니아 대학원으로 온 이 목사와 다시 만난다. 당시에는 유학생 아내에게는 여권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동반 유학을 할 수 없었다.

11. 통조림 공장과 키니 목사의 사랑

미국에 도착한 이 목사는 9월 개강까지 3개월간 취업을 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10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스탁턴(Stockton)이라는 곳의 복숭아 통조림 공장이었다. 이 회사의 이름은 캘리포니아 캐너스엔 그로워스(California Canners & Growers) 인데 하루 종일 10시간 이상 서서 일하다 보니 저녁에는 다리가 아파서 움직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 후 그는 복숭아 통조림을 결코 먹지 않았을 정도로 당시의 매우 극심하였던 고통을 기억한다.

스탁턴에서 그는 하숙하던 집 앞에 있는 프리윌 침례교회(Freewill Baptists Church)를 다녔는데 여기서 그는 평생을 양 부모처럼 교제하던 아더 키니(Arthur Keeney) 목사 부부를 만난다. 키니 목사는 6.25 참전 용사 출신이기도 하였는데 그는 이 목사를 매우 사랑하였다.  월 50불로 정하여졌던 하숙비도 받지 않았으며 달라스 신학교로 떠날 때 교인들의 헌금으로 장학금을 마련하여 주었고 키니 목사의 사모는 걸어서 다니던 그를 매일 공장까지 데려다 주기도 하였다. 이 목사가 외국 땅에서 경험한 첫 번째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처럼 참 아름답고 구체적이었다.

12. 공장에서 일하며 공부한 달라스 신학대학생

3년제 없이(Master of Divinity) 처음부터 4년제(Th. M.)인 명문 달라스 신학대학은 미국에서도 가장 보수주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신학교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달라스 신학대학에 입학한 이 목사는 처음 1년은 교내 식당에서 일하며 공부하였다. 당시 룸메이트이며 함께 식당에서 일한 일본인 친구 케이타 다카끼(Keita Takaki)는 현재 오사카에서 목사로 재직 중이다.       

그 후 3년간은 자동차 부속품을 만드는 존 미첼 회사(John E. Mitchell Company)에서 일하며 공부하였다. 개학기간에는 주 20시간씩 일하였고 방학 때는 주 40 시간씩 일하였다. 처음에는 기계공으로 일하였고 마지막 두 해는 공장 청소 일을 하였다.  이 공장의 사장은 달라스 신학교 이사이며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에 일을 시작하는 첫 1시간은 공부하는 시간을 주어 공부하도록 하는 등 신학생들을 많이 고용하며 편의를 제공하였다.

달라스 신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던 이 목사는 당시 그의 석사 논문 지도를 맡아 준 케네드 바커(Kenneth Barker) 교수( NIV 주석성경 책임 편집자) 의 권유를 받아 당시 구약과 히브리어로 미국 내에서 가장 권위 있다고 알려 진 그의 모교 드랍시 (Dropsie) 대학에서 공부하기로 결정하였다. 한국인 중, 드랍시 대학 출신으로는 최의원 박사와 홍반식 박사가 있다.

그러나 달라스 신학교를 졸업하였을 때 유태인 학교였던 드랍시 대학은 재정난으로 문을 닫아 이듬해인 1973년 펜실바니아 대학(University of Pennsylvania)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 목사는 여기서 근동연구(Near Eastern Study)중 구약과 히브리어를 연구하였다. 이 목사는 경북대학원에서는 목회의 이론적 기초를 다지기 위하여 철학을 공부하였고 달라스 신학교와 펜실바니아 대학에서는 구약을 중점적으로 공부하였다. 이것은 조직 신학 보다는 구약이나 신약을 공부하는 것이 말씀을 연구하고 설교자로서 지식을 얻는데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목사가 구약을 공부하게 된 배경에는 구약을 가르친 두 명의 교수의 영향이 컸다. 이 목사는 이들을 그의 영적인 지도자라고 말한다. 브루스 워키(Bruce Waltke)와 케네드 바커(Kenneth Barker) 교수가 그들인데, 이 두 교수는 이 목사의 석사 논문 ‘요엘서의 히브리어 문법적 연구(A Syntactical study of Hebrew of the book of Joel)’를 지도하기도한 저명한 구약 학자들이다. 

이 목사는 1972년에 달라스 신학 대학에서 신학석사(Th. M.) 학위를 받았으며 이러한 성향의 목회 비전을 갖게 되었다.

13. 하나님께서 워싱턴으로 부르시다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에 입학하여 수학한 이 목사는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과정의 전 과정을 이수한 후, 최종학위 시험을 준비하고 논문을 쓰려고 하는 중에 전혀 알지도 못하고 연고도 없던 워싱턴 지역의 중앙 장로 교회로부터  담임 교역자로 청빙을 받는다. 그러나 이 목사 부부는 공부가 끝나지 않았기도 하였거니와 곧 박사 학위를 받으면 신학 교수가 되려는 소망을 가지고 있던터라 이를 거절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당시 3살이던 아들 요셉이 이유 없이 밤낮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며 고열과 함께 계속 아프다고 하였다. 병원 네 군데를 다니며 진찰을 받았으나 원인 불명이라는 진단을 내릴 뿐, 아이의 고통은 지속되었다. 이들 부부는 몹시 당황하였다. 필라델피아의 노스펜 교회 황규석 목사는 가지 말라는 증거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문득 이 목사 부부에게는 자신들이 와싱턴 중앙 장로 교회의 청빙을 거절하면 하나님께서 장자인 이 아들을 데려 가실 것 같다는 강한 영감을 받았다. 이 목사 부부는 일단 가보기로 하였다. 아픈 아들을 데리고 주일 설교를 하는데 하나님의 강한 부르심을 받았다. 놀랍고도 강한 부르심을 받고 그 청빙을 승낙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후 아픈 아들은 즉시 쾌차하였다. 이 목사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 목사는 26년이 지난 지금, 이 일이 아니었으면 결코 자신들은 워싱턴에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증언한다. 그 3살짜리 아들은 지금 목회자가 되어 버지니아의 미국인 교회에서 청년을 담당하는 사역자로 헌신하고 있다.

14. 평생 동역자 강옥화 권사, 이영자 사모

그리고 그 이면에는  평생 기도 동역자였던 장모 강옥화 권사의 금식 기도가 있었다. 강옥화 권사는 오래도록 공부만 하고 목회를 하지 않던 이 목사에게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100일간 작정을 하고 다락방에서 오전 금식을 하며 사위의 목회지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 기도가 끝났을 때 와싱턴 중앙 장로 교회에서 청빙을 받은 것이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응답!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원상 목사 뒤에 부친 이성봉 장로의 기도와 가르침이 있었다면 이 목사 부부의 곁에는 강옥화 권사라는 기도의 동역자가 항상 함께 있었던 것이다. 이영자 사모(미국에서는 결혼 후 남편 성을 따르므로 이제부터는 이영자 사모로 칭하자.)는 이 목사의 그림자 동역자다. 이영자 사모는 물질에 관하여 욕심이 없고 적은 가운데 바치기를 기쁨으로 동참하고 늘 감사하며 산다. 대접하고 섬기기를 기뻐한다. 체면이나 강요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성도들의 아이들에게 까지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이 목사는 그의 아내를 영적으로 조용하면서도 깊은 기도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모든 성도들을 구역 별로 나누어 그 성도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는 생활을 하였고 부임 초기 5년 반 동안은 손에 잉크 묻혀가며 손수 주보를 제작하였다.

15. 기도하는 컴퓨터 사모

한 목회자의 성공적인 사역을 위하여 사모의 역할과 가정의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영자 사모는 컴퓨터가 없던 80년대에 기도하며 움직이는 고속 컴퓨터였다. 오랫동안 교회를 섬겨 온 성도들은 그를 그렇게 말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이 목사에게 필요한 목회 정보와 데이터를 일목요연하게 제공했다. 어느 성도가 출석을 하지 않았는지 한 눈에 알아내어 주보를 보내주는 일은 매우 기초적인 일에 불과했다. 그는 뛰어난 기억력과 부지런함으로 교회와 성도의 모든 상황을 항상 꿰고 있었고 그 현장에 있었다. 그는 언제나 이 목사가 알고자 하는 자료를 즉시 식별하고 분류하고 제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한 목회자의 사모가 아니었다.  그는 지난 25년 간 월터리드 육군 병원(Walter Reed  Army medical Center)에서 전업 약사로 일하며 이 목사를 내조하였다. 그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하였는데 늘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가 그의 근무시간이었다. 이것은 지난 26년간, 온 밤은 약사로서 지새고 낮에는 사모로 충실히 헌신하는 생활이었다는 이야기다. 온전한 목회자의 사모로 엄마로 정상적인 직장인으로 살기 위하여 이렇게 밤 시간을 스스로 선택하여 평생 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이 목사의 가정 심방에 빠지지 않고 동행하였다. 틴에이저인 두 자녀의 뒷바라지로 한창 바쁠 때인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영자 사모는 교인의 편에 서서 남편인 이 목사에게 대변하였으며 사모의 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교회의 문제점과 어려움을 찾아 적극 조언하였다.

이영자 사모는 먼저 유학을 떠난 이 목사의 뒤를 이어 미국 땅을 밟은 후, 대학에서 2년 간 약사 공부를 하였음은 이미 전술하였다. 이영자 사모가 템플 대학 약학대에서 공부할때 한국에서 온 여느 유학생들 처럼 영어가 부족하여 많은 고생을 하였고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그는 주일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토요일은 밤 12시까지 책상을 떠나지 않았으며 주일 하루 종일 교회에서 예배와 헌신의 시간을 보낸 후, 주일밤 12시가 지나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등, 강행군을 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늘 월요일에 치르는 시험 성적이 나쁘지 않았음을 감사한다.

 “제가 미국에서 어려운 공부를 잘 마치도록 이끌어 주신 것은 복음과 목회자의 내조를 위해 이것을 사용하라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영자 사모는 이처럼 열심히 공부하였고 열심히 일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헌신하였고 내조하였고 희생하였다.

자녀들은 이 목사 부부에게 생일이나 결혼 기념일 카드를 보낼 때마다 “좋은 본을 보여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러한 부모님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라고 쓴다.   

시 어머니인 이영자 사모가 어느 날, 목회자 사모인 며느리의 헌금 관리를 확인하여 보니 수입의 50%를 건축 헌금으로 내더라는 것이다. 지금 미국 교회의 목회자로 사역하고 있는 아들 요셉 부부는 헌금을 더 많이 내기 위해 차고 위의 작은 방에 세 들어 살기도 하고, 혹은 처가 언니 집에서 얹혀살기도 하였다. 자식은 부모를 보고 자라는 것이 아니던가.

이영자 사모는 자식들 때문에 아버지의 목회가 막히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하루 2-3시간은 교회와 자식을 위하여 반드시 기도하였다. 그는 이것을 기도의 십일조라고 말한다. 특히 이 목사의 설교 내용과 가정생활이 일치 되도록 하기 위하여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기도하며 최선을 다했다. 남편이 금식하면 함께 금식하였고 남편이 기도하면 함께 기도하였다. 그는 보통 사람의 두 배 인생을 밤낮으로 살며 그것도 부족하여 뛰면서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뛰어 다닌 범상치 않은 동역자였다.

그는 교회에서의 결혼식 피로연 음식 봉사 활동을 주도하며 그것으로 선교비를 만들어 선교지에 보냈고 컬페퍼 기도원 건립기금과 워싱턴 디씨 커뮤니티 센터 구입 자금, 타쉬켄트 성전 건축 기금을 후원하였다. 더불어 목요 여성도 모임을 만들어 잠자는 여성도들을 일깨우고 가르치고 중보기도 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그에게 휴일은 없었다.

16. 신학교수를 원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를 목회자로 이끄셨다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목사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막연하게 목회자의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대학에 입학한 이후, 본인의 내성적인 성격과 교육의 중요성 등을 인식하며 신학 교수의 꿈을 구체적으로 갖게 되었다. 달라스 신학대학에서 석사 학위 공부를 할 때도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할 때도 신학교수가 되는 계획과 목표 속에서 공부를 하였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교수 이원상이 아니고 목사 이원상이었음을 알게 하는 사건이 있다.

그가 중앙 장로 교회의 담임 사역자 청빙을 승낙하고 필라델피아를 떠나 워싱턴에 부임하였지만 집은 메릴랜드주 아델파이에 얻었다. 거주지에서 보다 가까운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합킨스 대학을 다니며 목회와 학업을 동시에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델파이에 있는 그의 아파트가 불타 버리는 사고가 생겼다. 이 목사는 이때 교회와 가까운 버지니아 주로의 이주와 박사학위 공부의 포기를 결심하고 실천하였다. 하나님께서 목회에 전념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으로 받아 드린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오직 목회자로 헌신하도록 그가 은퇴할 때까지 쉼 없이 인도하셨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일생에 두 번째 포기로 기록된다.

17. 순종과 기도로 시작한 목회

77 년 12월 첫 주일, 전도사 이원상은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에 담임 교역자로 부임하였다. 당시 교회는 워싱턴 디씨의 구 한국 대사관 근처, 22가와 P 스트리트가 만나는 곳에 있는 미국인들의 필그림 장로 교회를 빌려 썼다. 부모와 자식세대를 분리하여 셀때 17가정이었고 아이들 까지 45명의 조촐한 교회였다. 이때 이 목사 부부가 처음 시작한 일은 새벽기도였다. 그 첫 새벽 기도회는 단지 이 목사 부부만이 출석하였다. 당시 워싱턴에는 10여개의 한인 교회가 있었으나 새벽 기도는 없었다. 이 목사 부부가 처음 시도한 것이다. 바로 이 첫 새벽기도를 통하여도 알 수 있듯이 이 목사는 중요한 고비마다 부부가 합심하여 기도하였고 금식하였고 새벽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6개월 후,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워싱턴 디씨를 떠나 버지니아로 이사하도록 역사하셨다. 예배 중에 자동차의 새 타이어를 도둑맞거나 옷, 지갑 등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3주간 지속되어 아무래도 버지니아로 이사를 가야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목사는 버지니아로의 이주를 결심하고 무작정 길도 모른 채 교회마다 찾아다니며  임대하여 사용할 수 있는 교회를 찾아 다녔다. 이 때 찾은 것이 버지니아주 맥클린이라는 타운에 소재한 루인스빌 장로 교회 (Lewinsville Presbyterian Church) 였다.  1978년 6월, 루인스빌 교회 시대는 이렇게 열렸고 85년 11월 지금의 비엔나 새 성전에서 입당 예배를 드릴 때 까지 7년 반의 초기 고난과 부흥의 역사가 거기에 있었다.  

워싱턴 부임 초기, 그는 자신을 위한 기도를 많이 하였다고 고백한다.  30-40여명의 작은 교회는 이 목사 부부의 전교인에 대한 주 1회 심방과 기도로 평탄하였으나 부 교역자 경험도 없이 신학 공부 마치고 갑자기 부임하여 담임 교역자가 되고 보니 자신의 부족을 절감하였고 자연히 자신의 영적성장을 위한 기도에 열중하게 되었다고 했다. 더불어 이 목사는 전 교인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였다. 이것은 그가 담임 교역자로 사역하는 지난 26년 동안 빠짐없이 지속된 매우 중요한 일과 중에 하나이다.

18. 오직 목양에만 집중한 목회

루인스빌로 옮긴 후, 첫 1년은 아무 문제가 없이 나날이 부흥할 수 있었다.

이 목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매일 새벽 기도와 수요 성경 공부 시간의 성경 강해를 통하여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 교회 부흥의 배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목회는 교회의 외적 성장을 목표로 하거나 추구한 적이 없다. 그의 목회는 단순히 양들을 진실로 사랑하는 목양에 집중되어 있었다. 수요 성경 공부, 주일예배, 새벽 기도, 그리고 예배를 위한 말씀 준비와 심방에 온 정열을 기울였다.

 “교회 외적, 양적 성장은 생각해 본적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양들에 대한 사명과 책임만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렇다. 그는 교회를 위하여 광고하지 않는 것은 자타가 인정한다. 교회 예배를 늘려 2부 3부가 추가 될때도 광고하지 않았다. 오히려 타 교회의 목회에 방해를 줄까 염려할 뿐이었다. 

그의 목회는 기도에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났다. 단순하고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다. 목회자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하던 기도도 아니다. 그가 워싱턴에 부임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는 교우 주소록에 기록된 모든 교인들을 위해 매일 하루 한번씩 기도하였다. 교인 수가 늘고 더 이상 하루에 다 감당할 수 없게 된 후, 그것을 6개로 나누어 일주일에 한번씩 기도하였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자연스럽고 순결한 사랑이었다.  단언하건데 이것은 결코 가식이나 형식으로 할 수 있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니리라.

이 목사는 스스로 실천하고 먼저 본을 보이므로 성도들이 스스로 따라 오도록 하였다. 결코 말로써 강요하거나 목회자의 권위를 내세워 교회를 이끌지 않았다. 겸손과 충성과 온유가 그가 성도들에게 보여준 모습의 전형이다.

82 년 10월 이 목사는 스스로 마나사스에 있는 임마누엘 교회의 전도 폭발 훈련의 수강자가 되어 훈련을 받았고 이것을 교회에 적용하였다. 84년 3월에는 네비게이토에서 실시하는 2:7제자 훈련을 받기 위해 필라델피아의 제 10장로 교회(The 10th Presbyterian Church)를 다녀왔고 이것을 즉시 교회에 적용하였다.  이 두 가지 훈련은 지금까지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를 받쳐준  대표적인 소그룹 활동이 되었고 교회 부흥의 힘이 되었다.

19. 교회 초기의 어려움과 화합의 중요성

이 목사의 26년 목회 사역은 늘 평탄하였으나 한차례의 고난기가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부 교역자의 경험도 훈련도 없이 담임 목회자가 되었던 이 목사에게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초기의 아픈 경험은 그의 이후 목회기간 전체를 화목과 단합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고 교훈이 되었다. 이것은 교회 지도자와의 영적인 갈등과 당시의 미숙하였던 목회 지도력이 문제였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크게 사용하시기 위한 훈련의 시간이었으리라. 당시 그는 사임을 결심하였다. 아무래도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달라스로 떠나려는 시도를 구체적으로 시행하였다. 미루어 두었던 박사 학위 공부를 마무리하기 위해 달라스 신학교로부터 입학 허가서도 받았고, 이영자 사모는 달라스 병원의 약사로 일하기로 결정하였으며 달라스 지역의 방원곤 장로, 강희구 장로와 개척 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담임 목사 취임의 약속도 되어 있었다. 이러한 결정은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희망적인 좋은 기회였고 교회를 위해서도 합당한 결정이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목표, 개인의 평안함을 추구한 것이지 하나님 보시기에는 합당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 목사의 회고다.

달라스에서 돌아온 이 목사가 교회에 사표를 냈을 때, 교인들은 그의 거처인 베드포드 아파트(Fairfax병원옆, Bedford Apartment)에 몰려와 밤늦도록 그의 사임을 만류하였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 순종하였다. 이것은 그의 일생의 세번째 포기로 기록된다.

그리고 그 83년 이후 20년 동안 그가 이끄는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는 탄탄대로를 달려갔다. 당시 상당히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났고 지금도 그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많이 아프다고 이 목사는 말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교회의 문제점들이 정비되는 전화 위복의  기회가 되었고 이후 조금씩 부흥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분쟁도 다툼도 없는 화목한 교회가 되었으며 축복의 통로가 되었다.

“하나님의 축복은 화목한 것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화목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임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의 증언이다.

그는 목회 초기 교회 리더십과의 갈등을 경험하였으나 지속적으로 안수 집사를 세우고 장로를 추천하였다. 특히 장로를 세울때 사모와 함께 3일 금식 기도를 한후 모든 것을 하나님 뜻에 맡기고 그들을 지도자로 세웠다. 교회 리더십과의 분쟁을 우려하여 지도자를 세우는데 소극적인 목회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신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지도자를 세우고 양육하여 화목한 교회를 만드는데 주력한 결과 오늘날 든든한 교회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도자를 세울 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지도자를 세우기 위하여 목회자는 기도를 많이 하여야 한다고 권면한다. 이 목사는 개인적으로는 금식 기도를 통하여 영적인 충만함을 얻었고 제자 훈련과 선교에 중점을 두어 교회를 지도하였다. 이것은 26년 목회 동안 언제나 동일한 기준이었다.

20. 포기를 통하여 얻은 귀한 축복

이 목사는 전술한 바와 같이 그의 일생에 3가지를 포기하였다. 그 첫째는 의사와 목사를 동시에 택하고자 하였던 그에게 오직 목사로서 충실하기를 원하셨던 부친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의사의 길을 포기 한 것이고 필라델피아에서 워싱턴으로 부임하기 위해 거의 마무리 중이던 박사학위를 포기하였던 것이 두 번째며 다시 달라스로 돌아가 중단하였던 박사학위도 끝내고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려던 것을 포기한 것이 세 번째이다. 이 목사는 세 가지를 포기하였으나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요청에 순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포기를 통한 순종에서 얻은 나의 결론은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결국 다 갚아 주신 다는 것입니다.”  이 목사의 간증이다.

하나님은 순종하며 헌신한 그를 위해 그의 약점과 부족을 모두 채워 주셨으며 그가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보다 훨씬 더 많이 그를 귀하게 사용하셨음을 감사한다.

21. 그의 롤 모델은 사도바울

바울 사도는 이 목사의 롤 모델이었다. 바울 사도의 삶과 행적이 바로 이 목사가 따라가고자 하였던 모델이었던 것이다. 바울 사도는 우선 목회자였다. 성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목회자였다. 데살로니가서나 빌립보서에 기록된 사도 바울처럼 이 목사는 성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목회자가 되기를 소원하였다. 바울은 또한 선교사였다. 가는 곳 마다 교회를 세우고 전도하였던 사도 바울처럼 이 목사는 선교사로서의 목회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또한 바울은 신학 성경의 기본을 이룬 신학자였다. 이 목사는 역시 바울과 같은 신학자로서의 목회자가 되기를 원하였고 그 길을 끊임없이 추구하였다.  그는 이것을 잔잔하고 신념에 찬 목소리로 증언한다.

“나의 목회 26년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사도 바울과 같이 성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목양자로서의 목회자, 선교사로서의 목회자, 신학자로서의 목회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목회 3대 철학은 기도, 겸손 그리고 충성이다

 “은혜를 구하는 것은 기도이며, 은혜 받은 자는 겸손과 충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즉 자기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니 겸손하여야 하고 그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는 기도하여야 하고 기도하여 은혜를 받은 자는 당연히 최선을 다하여 충성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목사의 목회는 끊임없는 기도와 은혜 받은 자로서 겸손과 최선을 다하는 충성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그는 교인들을 볼 때 이상하리만치 부모가 자식 대하듯 사랑과 애정을 느낀다고 한다. 그의 설교는 한 마디 한 마디에 간절함이 묻어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이 목사가 훌륭한 목회자 이전에 고결한 인격자였음을 반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22. 성전 건축과 수요 금식기도

그가 워싱턴에 부임하였을 때 교회는 1만 5천불 정도의 건축헌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2년 후인 80년 5월, 15만 불을 주고 비엔나에 성전 대지를 구입하였다. 그후 1982년부터 이 목사는 전교인과 함께 교대로 매일 한 사람씩 금식 기도 운동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교인 수가 많지 않으므로 1년을 모두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이 목사 부부가 이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매주 수요일마다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목사는 늘 건강하였다. 목회 26년 동안 특별히 병으로 고생한 적이 없고 늘 건강하도록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건강의 축복을 내려 주셨다. 이 목사의 기도 생활은 1996년 버지니아 지역에 유사 이래 최대의 폭설로 장기간 길이 막혔을 때 그 뉴스를 접한 이 목사가 교회에서 밤을 지새며 홀로 새벽 기도를 드렸을 만큼 철저하다.

성전 건축 이야기에 읽힌 이야기를 좀더 하려고 한다. 당시 이 목사는 미국인 교회인 루인스빌 장로 교회(Lewinsville United Presbyterian Church)를 빌려 사용하고 있었음은 전술한 바와 같다. 그러던 중 1982년 루인스빌 장로 교회의 개리 핀더(Gary Pinder)목사가 한 건물에서 두 교회가 사용하기에는 비좁다며 이사 나가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이 목사는 이들에게 간청하여 1년의 시간을 얻었다. 그런데 당시 루인스빌 교회 옆에 루인스빌 국민학교가 있었는데 그 학교가 문을 닫게 되었음을 알았다. 이 목사는 매일 새벽 이 학교를 사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새벽마다 학교 앞 마당에서 기도하고 교회에 가서 또 기도하였다. 이 학교는 루인스빌 교회에서 두 블럭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이었다. 주차장등 여러 가지 여건이 매우 좋았다. 새벽마다 학교 앞길에서 기도하는 이들을 수상하게 여긴 경찰이 따라오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학교로의 이전을 원하였던 이 목사의 기도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 학교는  지금 노인 복지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금 생각하니 당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이유가 있습니다. 만일 그 장소를 허락하셨다면 지금과 같이 부흥하기 힘들었을 테니까요.”

그것도 좁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더 크게 사용하시기 위하여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학교를 주지 않으시고 비엔나 성전을 허락하셨음으로 오늘날 미국 수도권 제일의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23. 온 성도의 금식기도로 지은 성전

전술한 바와 같이 한국에서 청년기에 임시 전도사의 신분으로 교회 건축을 경험한 이 목사는 이렇게 준비된 목회자로서 교회를 건축하게 된다.

성전 건축과 관련하여 이 목사는 건축위원장이었던 고 김충흠 박사(집 사) 이영기 집사 부부와 수많은 성도들의 눈물겨운 헌신을 기억한다. 성도들은 성전 건축을 위해 휴가도 가지 않았고 새로운 자동차 구입도 포기하였다. 매일 교대로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이 성전은 이 목사 부부와 성도들의 금식기도로 지은 교회라 할만 하다. 이 금식 기도자 명단은 교회 주춧돌 안에 보관되어 있다. 교인들은 금요일마다 철야로 기도하였고 이 목사 부부는 수요일 마다 또 금식 기도하였고 공사 중이던 교회의 시멘트 바닥에서 잠자며 3일간 금식 기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150만 불이나 되는 건축비를 충당하기에는 교세가 역부족이었다. 이때 김충흠 집사등 10여 가정이 개인적으로 보증을 서서 건축비를 융자 받을 수 있었다. 교회 건축을 위해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은행 융자금의 보증을 섰던 것이다. 이것이 제때 잘 상환되어 아무 문제없이 정리되었음은 물론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칭찬 받을 만한 헌신이었습니다. 금식기도가 형식적으로 보이지만, 성도들 마음이 하나 되고 하나님께 정성을 보여 드리는 일로 은혜 받는 지름길입니다. 이것은 나의 산 경험으로 입증 되었습니다.” 이 목사의 간증이다.

건축을 통하여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성전 건축을 기뻐하신다. 건축은 헌금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데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하신 바와 같이 성도들의 마음, 성도들의 정성이 모이니 하나님이 축복하셨고 교회가 세워지니 자연 주일 학교 교육이 원활하여 졌고 이것은 교회 부흥으로 이어졌다.

이 목사는 교회를 지을 당시부터 2세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교실을 6개로만 하자며 반대하는 성도들도 있었으나 교육을 위해 12개 교실을 굽히지 않았고 이러한 교육에의 투자는 자연 교회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중에도 이 목사와 교회는 선교사를 후원하는 일을 쉬지 않았다. 이은무, 김병선, 안성원, 신홍식, 윤수길, 김정웅 선교사 등을 교회 건축 전부터 시작하여 교회를 건축하는 중에도 중단 없이 지속적으로 후원하였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였음으로 우리 교회를 축복하여 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목회자는 모름지기 성전 건축과 선교에 열심이어야 합니다. 성전건축과 선교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성전 건축의 역사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성막을 짓고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에 옮겨왔으며 솔로몬은 시온산에 성전을 짓고 솔로몬의 성전이 불타고 바빌론 포로  이후에 다시 제2의 성전을 짓고……. 이 목사는 “성전 건축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요 목회자의 큰 사명 중에 하나다.” 라고 길고 오랫동안 강조한다.

1985 년 12월 7일, 착공한지 1년여 만에 그는 새 성전을 완성하였다. 새 성전은2층 좌우 발코니와 500석의 본당과 본당 아래층에는 150여명이 예배드릴 수 있는 소예배실, 친교실, 그리고 12개의 교실과 부엌등이 있었다. (대지 3.5에이커, 총 건평 22,000 평방 피트) 입당 예배후 온성도는 담요을 가지고 와서 철야기도를 하며 환호하고 감사하였다. 오랫동안 미국인 교회를 빌어 예배드리던 성도들이 자체 성전을 갖게된 감격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제2의 성전을 건축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희에 비견할만할 일이었으리라.

필자는 자못 궁금하였다. “목사님! 그 작은 교회로 어떻게 그렇게 큰 교회 지으실 용기를 내셨습니까?”

“인간의 용기가 무슨 힘이 있나요. 하나님의 주시는 확신이지요. 이것은 용기가 아니고 기도 중에 얻은 확신입니다.”

24. 서울 구역, 한국의 선교사들

이 목사가 담임하는 와싱톤 중앙장로교회를 다니다가 한국으로 돌아간 이들의 모임인 서울특별시 구역은 유명하다. 현재 SEED International 한국 후원회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지금도 350여 가족이 매년 손꼽아 기다리는 모임이 되어 선교를 후원하는 귀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워싱턴을 떠나 귀국한 후, 이 목사님과의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추억하기 원하고 이 목사님과 나눈 믿음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기 원하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이같은 정근모 장로(호서대 총장)의 언급처럼 이 모임에는 순수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거듭 태어난 수많은 한국의 지도자들의 모임이 되었다. 아무리 바빠도 이 모임만은 반드시 나오려고 한다는 이명박 서울시장의 말처럼 이 모임은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의 역사적인 역할과 이목사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별표 1, 주요 인사 명단)

25. 교육과 선교에 열중한 사역

성전을 건축한 후 그의 사역은 교육과 선교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승렬 전도사(현, 탈봇신학교 신약 교수)를 교육전도사로 처음 임명하였고 85년도에 교육담당 전임 목회자(이주영 목사)를 초빙하였으며, 88년에는 교육관 부지를 새로 구입하여 교육관을 건립하였고, 한국어에 취약한 영어권 2세들을 위한 영어 예배를 신설하였다. 특히 이민 교회에서 필수적으로 만나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은 이민 2세에 대한 사랑과 교육적 가치관의 확립을 통하여 넘을 수 있는 당면한 과제였다. 이를 위해 노창수 전도사(현, 후임 담임 목사)와 양춘호 목사가 동역하였다.  드디어 2세들이 저들의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말씀을 배우게 되었고 현재 2명의 전임교역자와 400여명의 회중들이 주일 2부 영어 예배를 드릴 만큼 자라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에서의 이민이 늘어나기 시작하며 갓 이민 오는 청소년들이 증가하자 영어에 어려움을 느끼는 한국어권 2세들을 위한 한국어 예배인 아가페(Agape) 예배를 신설하고 조주은 전도사를 영입하여 전담하게 하였으며 장진명 목사(대학부, 아가페), 유익상(영어예배), 서준택(한국어 어린이)전도사 등이 가세하여 장 단기 선교, 교육, 선교회 그리고 교구 사역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목사는 선교에도 더욱 힘을 내기 시작한다. 87년에는 파라과이에 첫 단기 선교 팀을 파송하였고, 88년에는 페루에 두 번째 팀을 파견하였다. 이어서 89년에는 미주 최초로 선교 전담 교역자를 세웠는데, 박신욱 선교사에 이어 정강현 목사(당시 강도사)를 영입하였음은 그의 선교에 대한 열정이 어떠한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이들을 통하여 선교 훈련과 활동을 보다 조직화 구체화하게 되었고 특히 단기 선교도 멕시코, 페루, 아르헨티나, 우즈베키스탄, 중국 등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이어서 88년에는 안성식 강도사를 GMF(Global Missionary Fellowship) 본부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90년에는 박신욱 선교사를 아르헨티나 선교사로 이평강 선교사를 동아시아 선교사로 파송함으로 장기 선교사 파송의 문을 열어나가는 등 92년에 10가정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김요한, 신영선, 유익상, 서문안, 이은섭, 오지영, 김현일, 김홍기선교사등이 그들이다.

이 목사는 평신도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를 위해 스스로 교육을 받는 겸손함이 돋보인다. 이 목사 스스로 87년 서울의 한국 사랑의 교회(옥한흠 목사)에서 실시하는 “평신도를 깨우라.” 는 주제의 제자 훈련을 먼저 받은 후 돌아와 이미 시행중이던 2:7제자 훈련과 함께 장년 지도자들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을 실행하였고 이를 위해 권형인 전도사를 심방 전도사로 영입 하였으며 또한 홍원기 목사와 양춘호 목사를 교구 및 교육 담당 목회자로 영입하였다. 더불어 어린이 교육을 위하여 김미희 전도사를 주일학교 전담 교역자로 영입하여 교회적으로 교육이 전문화되는 기틀을 확립하였음은 그의 교육에 대한 인식과 의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26. 중앙 시니어 센터와 노인 교육

이 목사는 노인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교회가 성장하며 점차 노인인구가 늘어나기도 하였고 언어와 습관과 문화의 차이로 인하여 소외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노인들의 문제가 평소 어른을 공경하며 성도를 사랑하여 온 이 목사에게 중요한 과제가 된 것은 당연하다.  

94년도에 이광수 장로를 중심으로 노인 프로그램을 시작한 후,  노인 교육의 귀한 뜻을 가진 김윤한 집사, 변영환 집사등에 의해 더욱 확장되고 노인 교육 전문가인 전혜성 권사의 참여로 중앙시니어 센터라는 이름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현재 범 교회적으로 350여명의 노인들이 매주 화요일에 정기적으로 모여 다양한 교육과 프로그램에 참여하는데 미국 정부 카운티 당국에서도 적극 지원하는 중요한 커뮤니티 활동 중에 하나로 자리 잡았다.  2001년에는 버지니아의 주지사가 수여하는 최우수 봉사기관상(Virginia Gorvernment Award)을 받았다.

27. 커뮤니티 센터와 컬페퍼 기도처소

교회 창립 25주년을 맞은 98년 즈음, 한국 민족을 위한 한인 이민 교회를 이끌어 오던 이 목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난  25년간의 은혜가 매우 크고 감사하여 기도하는 중에 내 교회를 벗어나 타 인종을 위해서도 무언가 일을 하여야겠다는  강한 사명감을 느꼈다. 이것은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만민교회 건축으로 나타났고, 미국의 수도 워싱턴 디씨에 특별히 어려운 환경에 있는 타 인종들을 위하여 뭔가 하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커뮤니티 센터 건립 구상이었다. 처음에는 미국인 교회인 워싱턴 디씨 3가 교회와 연합, 그 교회를 사용하여 동역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막상 하려고 하니 그 교회는 건물 보수가 불가능 할 만큼 낡고 헐어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와 이웃한 곳에 건물을 한 동 구입하였다. 이것은 교회가 메시아 공연 등을 통하여 얻은 헌금과 교인들의 정성이 모아져 가능하였다.

일화가 있다. 처음 이 건물을 사고 한 집사님이 맡아 수리를 하려고 방문 중이었는데, 대낮에 흑인이 총을 들이대고 돈을 빼앗아 갔다. 이에 놀란 집사님은 이 장소를 수리하는 일을 포기하였다. 그후 함준길 장로님이 맡아 말끔히 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평화 나눔 공동체(최상진 목사)에 무상으로 대여되어 마약과 술에 젖은 수많은 홈리스(Homeless)들의 안식처로 선교 센터로 사용되고 있다. 형편없는 빈민가였고 대낮에도 총에 맞아 죽는 이가 속출하던 이곳이 지금은 백악관에서 불과 15분 거리에 위치한 도심으로 변모하면서 새로운 도약과 변화를 재촉하고 있기도 하다.

더불어 평생 기도로 살아 온 이 목사에게 기도 처소는 무엇보다 중요한 명제였다. ‘성도를 훈련시켜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를 주제로 내걸었을 만큼 평신도 교육에 헌신하였던 이 목사는 성도를 훈련시키기 위해 교회라는 환경도 중요하나 교회 밖의 시설도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였다. 소그룹 영적 훈련장소로서 마음 놓고 목 놓아 기도하기 원하는 이들의 안식처로서 지난 2002년 5월 1일 문을 연 컬페퍼 기도처소는 어둠을 뚫고 밝은 미래를 열고자 하는 순례자의 애 끓는 기도 소리로 가득 찰 것이다.

28. 안디옥 교회를 닮기 원하였다

이 목사는 사도행전 13장에 선교의 기원으로 기록된 안디옥 교회를 닮기 원하였다. 그는 2000년 까지 10가정의 전임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교회 자체에서 선교사를 교육하고 파송하는 기관으로 중앙 선교회(CMF)를 설립하고 91년 박신욱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그리고 2000년 9월 ROW라는 뉴욕의 선교 단체와 병합하여 만든 것이 SEED INTERNATIONAL(www.seedusa.org) 이라는 선교 기관이다. 이 선교회는 미국 내 한국인으로 구성된 유일한 국제선교 단체이다.  교회에서는 독립된 기관으로 15교회가 연합하여 운영하며 현재 46가정의 선교사를 17나라에 파송하고 있으며 미국의 선교단체 연합 기구인 EFMA(EVANGELICAL FELLOWSHIP OF MISSION AGENCIES )에도 정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주목할만한 것은 와싱톤 중앙장로 교회를 섬기던 성도들중에서33명의 선교사나 목회자가 탄생되었다는 사실이다. (별표 2, 선교사, 목회자 명단)

이 목사는 현재 SEED 선교회의 대표(President)인데 이것은 은퇴 후에 그가 감당할 주요 사역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최근 그는  시드(SEED) 선교회 국제센터 건립을 위해 기도중이다.

이 목사는 더불어 은퇴 후에 에스라 연구원(EZRA STUDY CENTER) 설립을 구상중이다. 이것은 선교사와 목회자 그리고 평신도 지도자 및 제3세계 교회 지도자를 훈련시키는 교육기관으로써 교회와는 상관없이 그의 마지막 무게가 이 사역을  향해 실려 있다.

29. 미국 연방의회에서 개원기도를 하다

이 목사는 버지니아 주 의회의 개원 기도를 하였으며 연방의회(하원)에서 개원기도를 맡기도 하였다. 그의 기도문과 약력은 의회 속기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지난 2002년 10월 10일, 미국 하원 107차 개원 기도 때는 미 의회가 이라크 공격을 결정한 중요한 날이기도 하다. 이 시대 유일한 분단 국가인 대한민국 출신의 목회자가 미국에 의해 북한과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된 이라크를 공격하는 중요한 결정을 앞둔 그 날의 기도를 맡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버지니아 주 의회 개원 기도문(2002년 1월 15일)

왕이신 하나님, 이나라를 당신의 거룩한 지혜와 은혜로 다스리시니 감사합니다. 

당신은 휘몰아치는 물결 위에 있는 반석 이십니다. 

부정과 패배로 고통스러워 하는 자들의 위로자 이십니다.  의로운자 들의 방어자 이십니다.

진리와 영광이시며 매 해마다 항상 계시며 신실하신 분 이십니다.

주여,  버지니아 주 의회를 축복하셔서 이나라와 세계의 빛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rayer for the General Assembly of Virginia of Representatives

Sovereign God, we adore you for ruling our nation with your holy wisdom and grace. You are a Rock above turbulent waters; a Comforter to those who suffer from injustice and loss; the Defender of Righteousness. Truth, and Honor; ever present, ever faithful with each new year.

Bless this General Assembly to be a light for the nation and the world.

In His name we prayed, Amen.

 

미국 연방 의회 개원 기도문(2002년 10월 10일)



하늘과 땅의 창조자 이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

당신은 이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삶과, 사랑하는것들 그리고 추구하는 기쁨을 축복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을 “하나님 아래 한 나라” 로 세워 주시니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주여, 이곳에 남녀 종들을 이나라의 충실하고 진실된 하원으로 부르시니 감사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 국회의 남녀 종들이 이 나라를 정직성과 열성,

그리고 동정심을 가지고 이끌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함을 서로 받아들이고 사용하여

우리 나라를  강화시키고 분단 되지 않게 하도록게 하소서.  

그들에게 초자연적인 담대함과 결단력을  허락하셔서

우리의 자유를 위협하는 자들을 막게 하소서.  

그들을 지혜와 공평함으로 채우셔서 우리 모두를 위한 정의가 있게 하소서.

당신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며 이 모든 말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Player for the United States House of Representatives

 

Heavenly Father, creator of the heavens and the earth,

you are the Sovereign Lord over all.

 

We thank you for blessing us with our lives,

our loves and all our pursuits of happiness.

We thank you for forming us as

“one nation under God.”

And Lord, we thank you for calling these men and women

to be for this nation faithful and true representatives,

Heavenly Father, may you now enable these men and women of our Congress

to lead our country with integrity, zeal, and compassion.

Help them to embrace and utilize their diversity

To strengthen our country and keep it indivisible.

Give them supernatural courage and determination

To oppose any who threaten our liberty,

Fill them with wisdom and impartiality

To meet our justice for all.

 

For your glory and honor we pray all these things

 

In Jesus name,

AMEN

 

30. 예수님을 친구로 삼은 이원상 목사

이 목사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평생을 살아왔다. 목회자들, 교인들, 불신자들 그리고 미국의 정계의 여러 인사들과도 교분을 쌓았다. 그리고 그는 유나이티드 웨이(UNITED WAY) 훨스처치, 페어팩스 카운슬 멤버로 3년간 봉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찾아오는 수많은 미국 정계 인사들을 반갑게 맞아 주었고 여러 가지 사유로 찾는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장벽도 차별도 두지 않았다. 어느 누구든 겸손한 모습으로 반가이 맞아 주었고 손을 잡아 주었다. 그는 또한 장로 교단의 노회장등 여러 단체의 대표로 일하였으며 지난 26년간 오직 한 교회를 다툼 없이 올곧게 섬겨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종종 그에게는 친구가 없다고 말한다. 

  “그렇게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이로 인하여 교회를 공평하고 편파적이지 않은 평화로 이끌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이 목사의 언급처럼 이것은 오히려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온 목회자 이원상의 장점이었고 중요한 덕목이었다.

 

31. 물질에 깨끗하고 헌금에 본을 보여준 목회자

이원상 목사는 물질에 초연하고 겸손하게 최선을 다하여 바치는 사람이었다. 출장비로 사용하고 남은 페니 하나 까지도 내어 놓았으며 자신이 받은 교회 외부의 사례금을 교회에 헌금 하거나 시드 선교회(Seed International)에 선교비로 보냈다. 이러한 물질 관리로 인해 성도들에게 존경과 신망을 얻을 수 있었고 26년의 사역이 평화스럽고 화목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교육관 신축 공사를 할때 성도들의 건축 헌금이 부진하자 자신의 은퇴 연금 구좌(IRA)를 해약하여 전액 헌금하였던 것도 알려지지 않은 일화이다.

 “지금 생각해도 놀랍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이 생각하기 어려운 결단입니다.”일반적으로 은퇴 구좌는 절대로 해약하지 않고 끝까지 지키는 것이 미국에 사는 이들의 상식이라며 전해 준 김병춘 원로 장로(당시의 재정위원장)의 귀뜀이다.

  83 년부터 85년도 사이에 교회 건축을 할 때는 건축 헌금을 위해 자식들에게 그 흔한 치즈나 우유도 사주지 않고 헌금부터 하였다. 헌금부터 하고 남은 것을 생활비로 사용하려고 하니 늘 부족한 생활이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이 목사 사모의 엄격한 신앙 관리와 내조에 기인한다. 종이 한 장도 교회 것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교회 경비 사용에 엄격하였다. 교회 경비는 헌금에서 나온 것이고 헌금은 교인의 핏값이라는 생각 때문에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부부가 함께 출장을 떠나는 경우, 이들은 서로 구분하여 비용을 지출하였다.

  이 목사 부부는 건축 헌금을 작정할 때도 헌금 액수를 정하기 위하여 부부가 각자 기도하고는 그 금액을 정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놀랍게도 동일한 금액을 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서로 상이한 금액일 경우에는 더 많은 금액을 따르는 원칙을 지키며 헌금 생활에 충실하였다.

  이 목사는 교회에서 그의 은퇴를 앞두고 퇴직 사례금으로 지급하기로 결정한 5만불을 전액 교회 건축 헌금으로 내어 놓기도 하였다.

 

32. 설교와 삶이 일치한 하나님의 대변자

설교자는 하나님의 대변자이다. 구약의 선지자라는 말은 대변자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대변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전달자여야 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전달자이기 때문에 그 삶이 바르고 합당하여야 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말과 생활이 일치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이 목사가 늘 지켜온 그의  설교관이다. 그의 설교는 항상 말씀 중심이었고 잡다한 세상적 비유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그의 삶은 그의 설교와 항상 일치하는 곧고 바름 그 자체였다. 

  “이 목사님과의 목회자- 성도간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동역자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겸손함과 헌신 때문입니다. 바쁘지 않고 조용함을 잃지 않는 이 목사님과의 대화는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주님과의 대화를 연상케 합니다.” 25년간 신앙안의 교제를 나누어 온 정근모 장로(호서대 총장)의 지적은 진지하고 평화롭게 이어진다.  

  “조 급한 결론만으로 성도들을 몰아치는 목자가 아니라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는 질문으로 우리들 생각을 이끄는 그 분과의 만남은 항상 미소를 띠는 각별한 기도와 함께 끝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당황함이 없고 아무리 기쁜 일이 있더라도 교만이 없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충성하는 믿음의 자세를 가진 분이지요.”

 

33. 겸손 정직 충성의 목회자가 되라

그는 후배 목회자들에게 성경을 많이 읽고 정독하며 성경에서 깊은 은혜와 지식과 영향을 받도록 힘쓰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기도에 충실하라고 권유한다. 기도 생활을 통하여 영적인 능력, 인간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라고 말한다. 기도는 불완전이 완전하여 지는 중요한 통로이기 때문이며 인간의 불완전한 요소가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져서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인격적으로 3가지 기준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고 사람을 섬기는 모습을 실행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리고 정직함과 최선을 다하는 충성이 결합 될 때 완전한 인격에 이른다고 말한다. 이 목사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온 사람이기도 하다.

 

34. 계명대, 명예박사 학위의 남다른 의미

이 목사는 은퇴를 1년 앞둔 지난 2002년 뜻하지 않게 모교인 계명대학으로부터 명예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것은 계명 대학의 설립이념과 정신을 잘 드러낸 사역자로 평가 받은 그에게 주어진 명예박사 학위였으나 그에게는 남 다른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왔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는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박사학위 전 과정을 이수하고 마무리를 하는 시점에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가 지난 26년간 섬겨온 중앙 장로 교회의 담임 교역자로 부임하게 되어 박사 학위를 포기하는 등, 두 차례에 걸쳐 박사학위는 그의 의지와는 달리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포기되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느 주일 설교 강단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 명예박사 학위는 26년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며  희생과 봉사로 헌신하여 온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두 번에 걸쳐서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포기하며 하나님께 순종하였던 보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

 

35. 계명의 후배들아 먼저 그의 나라와 의의를 구하라

미 북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하여 설립된 계명대학 출신인 이원상 목사는 그가 하나님 중심의 생활, 하나님 우선 순위의 생활을 그의 생활 철학으로 삼아 왔던 것처럼 사랑하는 계명 후배들에게 그의 대학 생활에서의 삶의 철학이었던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을 권면한다.

  “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 는 또한 철저한 시간관리를 권면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천부의 자산이므로 이것은 인생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관건이 된다는 철학이다.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시간관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삶의 우선 순위로 하는 것이고 사람 앞에서의 시간관리는 책임성 있는 사람이 되는 기초라는 설명이다.

 

36. 1.5세 후임 목회자를 위한 기도

이원상 목사가 섬겨온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는 지난 26년간 다툼도 분열도 없는 모범적인 이민 교회로 성장하여 왔고 거기에는 기도의 종 이원상 목사가 조용히 묵상하며 앉아 있다. 그는 어려운 일을 만나면 금식하였고 기도하였다. 가장 이른 새벽에 교회 앞자리에 무릎 꿇어  온 교회 온 교인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였다. 쉴 새 없는 심방으로 저들의 형편을 살피고 위하여 또 기도하였다. 누구의 손도 차별 없이 잡아 주었으며 그 손은 언제나 따뜻하고 다정하여 한 가득 정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그도 그러나 세월 앞에서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어서 원만하게 후임을 세워 흔들림 없는 교회로 지속적인 발전을 하기 위하여 물러날 준비를 하여야 했다. 그리고 그가 스스로 정한 네 가지의 후임 목회자 선임 기준을 가지고 기도하였다.

   한 인 교회는 인종적으로 한인이요 문화적으로 미국에 가까우니 한국 문화와 미국 문화를 잘 이해하고 두 문화간의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 1세와 2세의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검증된 사람을 찾았다. 추상적이거나 혹은 전해들은 것에 의하지 아니하고 직접적인 목회와 사역을 통하여 그 열매가 검증된 사람을 찾았음이 두 번째이다. 교회의 시대적 사명과 비젼을 소유한 인격적으로 존경 받을 만한 겸손한 지도자를 찾는 것이 세 번째 조건이며 가장 중요한 네 번째 조건으로는 성경에 충실하고 복음적인 말씀의 능력을 갖춘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 사람의 젊은 목회자를 기쁨과 기대와 감사로 맞았다.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수줍은 모습으로 잔잔히 미소를 지으며 조용하게  오직 기도로써 수많은 양들과 후임 목회자를 바라보고 있다.

 

37. 센터빌 성전의 건축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원상 목사는 두번의 교회 건축을 경험하였다. 하나는 한국에서 임시 전도사로 사역 중에 지은 평산교회 이고, 현재의 버지니아 비엔나 성전이 두번째이다. 그리고 그는 세번째로 버지니아 남서부에 위치한 센터빌 성전 건축을 구상하였다. 

  “교 회는 특별히 구별된 예배처소로 성경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430년 동안 훈련하시며 가나안으로 나아가기 전에 가장 먼저 명령하신 일이 성막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출발입니다.”

  성 막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가장 구체적인 성전이다. 그는 출애굽기 25장에서 40장에 이르는 성전에 관한 구절을 길고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성전 건축의 중요성을 설명하므로써 그가 얼마나 성전 건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를 느끼게 하였다.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의 역사를 살펴 보아도 성전 건축이 완성되었을때 그리고 교육관 건축이 완료된 후 크게 부흥하였음을 알수 있다.

  본 래 현 비엔나 성전은 13에이커, 1000석, 6만 평방 피트의 새 본당 건축 허가를 받고 주민 공청회도 끝났으나 이웃 주민의 재심 청구로 이것이 부결된후 새로운 교회의 건축 계획은 급속히 진행되었고 당회와 공동의회는 74에이커(88,800평)의 센터빌 새 성전의 건축을 결의하였다.

  “10만 수도권 교포들을 위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라시는 구체적인 명령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새 성전을 위한 그의 열정은 대단하다. 틈나는 대로 전 미국의 주요 교회와 한국의 여러 교회들을 직 간접 방문하며 장단점을 조사하였는가 하면 건축 계획 하나 하나에 온 정성을 기울이며 수 십년 앞을 바라보고 있다.

  그 의 구상은 단순한 교회 건축에 머물러 있지 않다. 교회와 학교와 문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1단계로 프리스쿨(Pre-school)에서 2학년까지 수용하는 사립 학교를 겸하도록 하고 장차 12학년 까지 수용하는 시설로 확대 되는 꿈을 꾸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신앙 교육을 할 수 있는 사립 학교의 운영은 복음의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더 불어서 한국어 예배는 물론 영어 예배를 성장 시켜 나갈수 있도록 구별된 성전의 필요성을 기대하고 있다. 10-20년 앞을 내다보면 20만 평방 피트 정도의 성전을 지어야 한다고 믿는다. 1단계로는 10만 평방 피트를, 2단계로 5만 평방 피트를 추가하고 3단계로 5만 평방 피트를 증축하는 방식에 대하여도 생각해 본다. 1200대를 수용하는 주차장과 2000석의 본당, 주일학교를 위하여 500석의 예배실,  풀 사이즈의 체육관, 축구, 배구, 농구, 테니스등 모든 스포츠 활동과 피크닉이 가능한 공원 조성까지 다양한 시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설은 교회 가족들은 물론 교회 주변의 커뮤니티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이 가능하도록 오픈하여야 한다고 판단한다.

  성 도와 가족들의 편안한 휴식처로 안식의 터로 이용 가능하도록 정원이 잘 갖추어진 공원 시설도 하기를 원한다.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개방된 교회, 자녀들이 교회 중심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시설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게스트(GUEST)하우스를 지어 교회 손님이나 선교사들이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방학 중에도 주말에도 주중에도 언제든지 사용 가능한 대형 도서관 시설도 필요하고 컴퓨터 정보 시스템도 전문적으로 갖추어 시대에 맞는 복음 전파의 기능을 갖도록 하기를 원한다. 교회 홈페이지의 활성화에도 적극적이다.

  “새로운 성전은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온 성도가 합심하여 기도하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성전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 의 꿈은 한없이 이어진다. 젊은 어떤 사람 보다도 진취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은퇴를 앞두고 있다. 2003년 9월 27일, 그는 원로 목사가 된다. 그날 그 순간까지 그는 최선을 다하여 새 성전 건축을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는 다만 기도하며 우리 후대들을 바라 보게 될 것이다.

 

38. 2003년 9월 27일 이후의 기도

그가 매일 새벽, 교인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여 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 26년간 줄곧 그렇게 지켜왔다. 그러나 이제 그의 기도 제목과 대상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다. 원로 목사가 되어 새 신자를 접할 기회도 상실하게 될 것이고 매 주일 한마디 한 구절 간곡함이 묻어 나던 설교의 말씀도 듣기 어려워 질것이다. 교인 한사람 한사람을 만나 꼬옥 손 잡아 주는 일도  그 만큼 줄어 들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교회와 교회 리더쉽과 선교사를 위한 기도로 변화 될 것이다. 시드(SEED) 선교회 가족들을 위한 기도와 에스라 연구원(Ezra study center)를 위하여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찌 그가 평생 먹이며 가꾸어 온 양 무리를 위한 기도를 내려 놓을 수 있으리오.

 

  아 니다 어쩌면 이제는 우리가 그를 위해 기도하여할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가 우리 위하여 평생을 기도하였던 것처럼, 26년간 수요일 마다 금식하며 우리 모두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였던 것처럼, 새벽마다 교회 맨 앞자리에 앉아 한 사람 한 사람 양 무리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여 온 것처럼, 이제 우리가 새벽 무릎을 꿇어 금식하며 한 은퇴 목사의 건강하고 평안한 마감을 위해 기도하여야 하지 않을까? 이제 우리의 차례가 아닐까?

 

39. 그의 뒷 모습

미국 수도권 최대 교회로 성장한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의 담임 사역자인 이원상 목사,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은 언제나 조심스럽고 진지하고 간절하였다.

  “여 러 가지로 어려움이 있었던 교회에 부임하시어 이 교회를 북미지역의 가장 헌신적인 선교 중심교회로 그리고 기도의 불이 활 활 타오르는 영성의 제단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의 평가는 결코 수사가 아니다.

  그 는 그에게 주어진 24시간을 철저히 관리하며 빈틈없는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아쉬움이 있다. 교회가 성장하고 후반기에 접어들어 업무량이 많아지며 양과 목자의 관계성에서 작은 일보다 큰일에 열중하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한 사람 한 영혼 개인 개인에게 골고루 마음을 주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 리더십에 대하여 제자 훈련, 지도자 훈련을 더 많이 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는 참으로 맑은 영혼 따뜻한 심성을 가진 목회자이다.

  “그 는 틀림없이 아씨시의 성자 프랜시스처럼 우리 주님의 사랑의 상흔 스티그마를 그리워하며 기도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서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중앙장로교회와 한국교회, 그리고 세계교회를 위해 중보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가끔은 선교지를 방문하시며 그의 기도를 나누어 주실 것입니다”(이동원 목사)

  “제 일먼저 생각하는 것이 중앙 장로교회의 새벽 기도시간입니다. 양육한 성도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면서 중보기도를 드리는 이 목사님의 경건한 모습은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중앙 교회에서 믿음생활을 한 모든 성도들이 잊지 못하고 고마워하는 『신뢰의 관계』이지요. 나는 25년간을 이 목사님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의 관계를 맺어온 사연 인지라. 그 분의 기도 속에서 나 자신도 성령 충만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고 신앙 고백하는 것입니다.” (정근모 장로)

  “외 유내강하여 겉으로는 온유한 모습 밖에 보이지 않지만 섬기는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교계와 특히 선교 사역 분야에서 탁월한 리더십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는 교회나 자신을 위한 프로모션 한번 하시지 않았지만 늘 동역자들과 후배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끊임없이 부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배우는 분이십니다” (김원기 목사)

  “목사님은 정직하고 깨끗한 삶을 살아 오셨습니다. 그의 인상, 목소리, 언행은 언제나 깨끗함과 정직함입니다.”(최연홍 박사)

  이원상 목사, 그러나 그는 이렇게 자신의 26년을 말한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린도 전서 15:10)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뿐입니다.

  우 리는 종종 그의 따뜻한 미소, 가볍게 꼬옥 쥐어 주는 정겨운 악수, 간절한 기도가 그리워 질 것이다.  그의 설교와 그의 삶이 언제나 하나로 일치하는 고귀한 인격자였으며, 가장 이른 새벽마다 성전 맨 앞줄에 앉아 온 성도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로 간구하는 기도의 종이었으며, 깨끗한 꽃의 아름다움을 극명하게 보여 준 하나님의 참된 사도였음이 분명하므로….  (끝)

 

 

(표 1)

  학계에서는 정근모 박사를 비롯하여, 정학성, 김승환, 황의각, 박을용, 모종린, 김숙현, 신은숙, 김판석, 노영무, 유진, 김명희, 모영기, 김정만, 김준형 등

  언론계에서는 문명호, 이문희, 정일화, 류근찬, 나형수, 이청수, 이경형, 이인용, 백낙천, 이문노, 문창극, 양봉진, 강효상, 김재열씨 등.

  정계에서는 신구범 제주지사, 임창열, 손학규 전 현직 경기 지사, 이명박 서울시장, 맹형규, 이경재의원, 신낙균, 송태호 장관 등.

  군에서는 이갑진 해병대사령관, 박용옥 국방부 차관, 노정기, 신원배, 이종만, 김은기, 배상기, 이정수, 박세헌, 문영한, 윤삼성등.

  외교관으로는 이한춘, 이재춘, 임성준, 노정기, 이병호, 문봉주 대사등 전 현직 대사가 있고,

  그밖에도 위성용, 박상우, 유득환 정호영, 이영래, 김경용, 권오갑, 김병기, 남경우, 권성철, 강석인, 경종철, 송종환, 윤웅섭, 전광우, 최종화, 김성엽, 정동수, 노정기, 김준길등 그밖에도 수많은 분들이 있다.

 

(표2)

목사, 선교사

   정강현, 김요한, 안성식, 장진명, 유익상, 권오봉, 김종홍, 장성균, 오지명, 

   이우진, 이은섭, 주영호, 진재혁, 김현일, 이해천, 주경로, 송재은, 조주은

전도사

   김재선, 김종협, 이우대, 김재영(David Kim), 강명훈, 구본구, 김경훈,

   김향숙, 임창수

평신도 선교사

   고석문, 신영철, 이경은, 김혜련, 김선숙, 김충녕(Jonathan Kim)



미국 남침례교가 모범교회로 뽑은 와싱톤중앙장로교회 이원상 목사 인터뷰


미 전국 13개 모범교회의 하나로 선정, "참목회자상 보여준 '어른', 청렴한 물질관 화제 모아..."  

 미국 개신교 최대 교단인 남침례회(SBC) 소속 남침례신학원(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이 지난해 전국 5만 2,333개 교회 가운데 선정한 13개 모범교회(Good-to-Great Church)에 한인교회가 하나 포함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미국의 유수한 신학교가 2세 교육, 선교사 지원, 지역사회 봉사 등 여러 항목에 걸친 심사 끝에 엄선한 13개 모범교회에 한인교회가 들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미주 한인교계는 물론 한인사회 전체로서도 상당한 자부심을 지닐 만한 일로 평가됐다.

 한인교회 중 유일하게 남침례신학원으로부터 모범교회로 뽑힌 교회는 바로 버지니아주 비엔나에 위치한 '와싱톤중앙장로교회'. 지금은 40대 중반의 노창수 목사가 담임을 맡고 있지만 남침례신학원의 평가작업이 진행될 당시의 담임목회자는 이원상 목사(67)였다.

 이 교회 담임교역자로 26년간 봉직하다 2003년 9월 은퇴한 이원상 목사의 지도 아래 와싱톤중앙장로교회가 미국을 대표하는 교회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한국 및 미국 내 다른 지역 한인교계에 와싱톤중앙장로교회 원로목사보다 SEED선교회 대표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이원상 목사는 워싱턴 한인사회에서는 누가 뭐래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원로로 대접받고 있다. 올해 67세라는 나이로만 따지자면 아직 원로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인사회에 대한 이 목사의 영향력과 이 목사에 대한 한인들의 긍정적 평가를 감안하면 원로라는 말이 결코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 워싱턴 지역의 분위기다.

 이 목사가 자신이 담임했던 중앙장로교회와 교계의 울타리를 벗어나 이처럼 워싱턴 한인사회 전반을 대표하는 지도적 인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이민교회 목회자로서의 본분과 사명에 한평생 충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지역민들의 의견이다. 즉 "교회는 이민사회의 구심체여야 하며 이민교회 목회자는 이민자들의 아픔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이민사회의 논리를 몸으로 실천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이 목사의 목회여정을 돌아볼 때 그의 목회는 교회뿐 아니라 항상 한인사회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구체적 예로 중앙시니어센터와 중앙복지상조회의 설립을 꼽을 수 있다.

 연장자 교육기관 시니어센터와 장례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복지상조회는 교회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지만 혜택은 한인사회 전체에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 교회 출석 여부에 관계 없이 일정 연령에 달한 한인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특히 회원들이 자신들의 사후를 대비해 생전에 기금을 적립하는 복지상조회의 경우 이원상 목사와 중앙장로교회라는 신뢰할 수 있는 후원처가 없었다면 한인사회에 뿌리내리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목회자로서 이원상 목사 개인에 대한 평가 역시 무척 긍정적이다. 무엇보다 그에게서 대형교회 담임목사들이 흔히 지니기 쉬운 권위주의적 요소를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특징이다. 교인수 4,000-5,000명에 달하는 대형교회 담임목사면서 은퇴하기 전날까지 교인들을 직접 심방다녔으며, 교인들과 거리감을 없애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음은 한인사회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교회 강단에서의 설교와 기도만으로 이민자들의 아픔과 외로움을 함께 나눌 수는 없다는 것이 이 목사의 신념이다.

 이 목사는 또 워싱턴 지역에서 가장 큰 한인교회 담임목사로서 분주한 일정에도 불구 중소형 교회 목회자들과 친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해 왔다. 동시에 교계 연합사업이나 각종 한인사회단체들이 벌이는 사업도 적극 후원해왔다. 중소형 교회들을 배려해 지역 언론에 중앙장로교회를 광고하는 것도 자제했다.

 비기독교 신자뿐 아니라 많은 교인들로 하여금 목회자에 대해 회의를 품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인 금전문제에 있어서도 이원상 목사는 한평생 정도를 걸어왔다는 말을 듣고 있다. 출장비로 사용하고 남은 페니 하나까지도 교회에 반납했으며, 교회 외부에서 받은 사례금은 교회에 헌금하거나 SEED선교회에 선교비로 보냈다고 한다.

 중앙장로교회 교육관 신축 공사를 할 때 성도들의 건축 헌금이 부진하자 자신의 은퇴연금구좌(IRA)를 해약해 전액 헌금했으며, 개인 용도로는 종이 한 장 교회 것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교인들은 말한다.

 간혹 부부가 함께 출장을 떠나는 경우 이 목사와 사모의 경비를 엄격히 구분해 부인몫은 별도로 부담했다고 한다. 지난해 이 목사가 중앙장로교회 담임목사직을 물러날 때 교회에서 받은 은퇴사례비 10만 달러도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푼도 사용하지 않았다. 1만 달러는 십일조로, 5만 달러는 건축헌금으로 다시 교회에 헌금했고, 나머지는 두 자녀의 목회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나누어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목사는 최근 한국과 미주 한인교계에서 가장 큰 이슈의 하나로 등장한 북한인권문제에도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 북한인권법안의 미의회 통과와 북한선교는 이 목사의 중요한 기도제목이다. 동족의 아픔을 외면할 수는 없으며 외면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다. 지난 4월 워싱턴DC에서 거행된 북한자유의 날 행사에서는 북한인권 회복을 위해 전세계인의 양심에 호소하기도 했다.

 목회자로서 "받는 것 보다 주는 것이 행복하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앞장서 실천하고 있는 이원상 목사는 본인의 3대 목회 철학을 기도, 겸손, 충성으로 정리한다. "은혜를 구하는 것은 기도며 은혜 받은 자는 겸손과 충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즉 자기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니 겸손해야 하고, 그 은혜를 구하기 위해 기도해야 하며, 기도하여 은혜를 받은 자는 당연히 최선을 다해 충성해야 합니다."

 어린 아들을 산기도에 동행하고 다닐 정도로 신앙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고 이성봉 장로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이원상 목사의 고교시절 꿈은 의사였다. 적도의 성자 슈바이처 박사를 존경했던 그는 의사면서 목사로 활동했던 이일선 목사처럼 신학과 의학을 병행하려 했지만 "오직 하나님만을 선택하라"는 선친의 가르침을 따라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후회는 없고 오직 감사함뿐이라고 한다. 한인목회자로는 유일하게 2002년 미연방하원 개원기도를 맡는 명예를 누리기도 했다.

 이원상 목사의 앞으로 남은 꿈은 선교에의 헌신이다. 자신이 대표로 있는 SEED선교회를 더욱 확대 활성화시키고 선교사들을 훈련시키는 데 주력할 생각이다. 특히 의료선교에 대한 꿈은 강렬하다. 고교시절 제2의 슈바이처를 꿈꾸었던 이 목사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이민교회와 이민사회를 위한 목회자로서 이원상 목사의 진짜 사역은 어쩌면 이제부터인 셈이다.

 이원상 목사 인터뷰

 -평생 중요하게 지켜온 목회원칙이 있다면?

 "다른 목회자들처럼 훌륭한 담임목사님 밑에서 목회훈련을 받지 못하고 곧바로 담임목사로 목회를 시작했다. 나 자신에 대한 부족함을 많이 느꼈다. 어려운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는 기도생활을 가장 중요한 목회원칙으로 삼았다."

 -흔히 교회를 이민사회의 중심이라고 말한다. 워싱턴에서 가장 큰 교회를 담임하면서 이민사회에서 교회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우선 교회로서 지역사회와 동포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시민권 신청 및 시민권자들의 투표 참여를 유도해야 하며 지역사회 봉사활동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할 필요가 있다."

 -지금 한국교회는 위기상황이라고 말한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무엇이라고 보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는 과거 일제 36년과 6·25 동란 등 위기를 겪으며 성장해왔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물질적, 정치적 고난에서 해방되면서 교계에도 안일한 신앙의 자세가 자리잡게 됐다. 교회가 너무 권위주의적인 현상도 문제라고 생각된다. 특히 담임목사들의 권위가 지나치게 큰 모습이다. 목회자들이 예수님이 보여준 섬기는 삶의 의미를 생각해야 된다."

 -목회자로서 한인사회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해외선교의 가장 효율적인 수단 중 하나는 의료선교다. 한국의 세브란스병원이나 동산병원 등 기독교 계통 병원들은 소속 의사들이 해외 의료선교를 나가도록 여건을 마련해주고 있지만 미주 한인사회에는 그같은 기독교계통의 병원이 없는 게 현실이다. 미주한인교회나 크리스찬들이 중심이 되어 세브란스 병원 같은 기독교 계통 병원을 설립했으면 한다."

고 이원상 목사님의 장례 일정 

고별예배 12월 9일(금) 오후 7:00,  와싱톤중앙장로교회(KCPC) 제 1 예배실

발인예배 12월 10일(토) 오전 10:00, 와싱톤중앙장로교회 제 1 예배실

하관예배 12월 10일(토) 정오 12:00, Fairfax Memorial Park 중앙동산

* 설교 :  류응렬 목사,  노창수 목사,  Joseph Lee 목사

* 금요일 예배 후에 viewing이 있고, 토요일은 예배 전 오전 9시부터 viewing이 가능합니다.

* 연락: 조상우 목사 703-939-7898 / 교회 사무실703-815-1200

          SEED International 연락처:  703-586-8925

* 조화와 조의금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 핸드폰 App으로 통역이 제공되기에 필요하신 분은 개인 이어폰을 가져오시면 됩니다.

와싱톤중앙장로교회

The Korean Central Presbyterian Church

15451 Lee Hwy

Centreville, VA 20121 USA.

703-815-1200 (교회)  




이원상 목사는 1968년에 신학공부를 위해 미국에 왔다고 한다. 지난 45년간의 미국생활을 회고해 달라고 했다.

이원상 목사: 제가 물론 1968년도에 미국에 올 때는 다른 목적이 아니고 김포공항을 떠날 때 한국에서 바꿔주는 돈이 200불 바꿔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댈러스 텍사스에 있는 댈러스 신학교에 4년간 공부하기 위해서 장학금을 받아서 왔지요. 그때는 전혀 미국에 오래 영주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고 그 당시 댈러스 신학교에 재학할 때 댈러스에 한인들이 (지금은 한 5만 명 가까이 된다는데) 그 당시에는 300명 정도가 있었고 그나마도 파크랜드 병원에 간호사들 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민자들이 많이 오심으로 참 미국에도 목회자가 필요하다는 것, 교회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정착한 게 여기까지 왔네요.

이원상 목사가 와싱톤중앙장로교회로 오게 된 동기도 들어보자!

이원상 목사: 와싱톤중앙장로교회는 원래 1973년도에 윤명호 목사님이 설립하셨는데 4년 지나시고 난 다음 교회를 떠나시게 됐습니다. 제가 왔을 때는 1977년에 처음 왔고 그때 교회 어려운 일로 인해서 교인들이 많이 흩어지고 소수 사람들이 남아서 그때부터 2003년까지 26년 동안 워싱톤중앙장로교회를 담임하게 됐습니다.

당시 한인 이민자들의 수가 적었던 시절 한인과는 떨어질 수 없는 음식 김치, 이원상 목사에게 이민 초창기 김치와 관련해 회고해 달라고 했다.

이원상 목사: 물론 댈러스에 있을 때는 전혀 한인들과 접촉이 불가능했고 신학교에도 단지 김호식 박사 가정과 저희 두 가정이 있었으니까? 그런 애로가 많았지요. 그런데 워싱턴에 77년도에 와서 부터는 이곳에 김치 집이라고 한인 가게가 있어서 불편은 느끼지 않았네요. 댈러스 있을 때는 한국 음식을 잘 먹지 못해서 캐비지(CABBAGE)로 김치를 만들어 먹던 그런 생각이 납니다.

이원상 목사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 철학 박사 학위를 따냈다. 철학박사 학위를 따기까지 과정도 들어본다.

이원상 목사: 제가 원래는 한국에서 올 때 미국서 공부해서 한국으로 돌아가서 대학이나 신학교에서 가르칠 마음이 있었고 그렇게 공부를 해 왔는데 워싱톤 중앙장로교회에 부름 받은 것은 1977년도인데 제가 그때 필라델피아에 있었습니다. 댈러스 신학교를 졸업하고 필라델피아에 있는 유니버시티 펜실바니아에서 구약 신약 공부로 박사 학위를 공부하고 있었을 때였는데 이 교회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특별한 당권적인 역사로 제가 공부를 중단하고 워싱톤 중앙장로교회에 와서 목회하는 동안에는 공부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일단 2003년도에 은퇴한 후에 제가 한 5-6년 동안 본격적으로 공부했는데 영국 웨일스 있는 유니버시티 웨일스에서 철학박사 공부를 했는데 그 공부한 내용이 기독교 초대 교회의 교부 가운데 한 명인 존 크리소스 톰이라고 407년에 돌아가신 분인데 우리 성경에서 말하는 안디옥 교회를 담임으로 목회를 했고, 그 후에는 지금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에 와서 교부가 됐던 유명한 , 바로 그분에 대한 연구와 제가 26년동안의 목회를 비교연구해서, 목회 원리는 1600년이라는 간격이 있지만 동일하다는 것을 연구를 해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게 2010년도에 받았으니까? 제가 72살 때 받았습니다.

이원상 목사가 박사 학위를 받으러 영국에 갔을 때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다.

이원상 목사: 글쎄 대부분 우리 교회는 65세에 은퇴를 하는데, 은퇴하고 난 다음에 제가 이 연구에 몰두했기 때문에 그나마 26년 동안 목회하던 그 목회의 정신이 이어져 갔다고 생각이 되고 2010년 7월에 박사학위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는데 그 이민국에서 저보고 영국에 왜 오느냐! 그래서 졸업식에 참석을 위해 온다고하니까? 너의 아들이나 손자 졸업식에 오느냐! 그래서 그게 아니고 제가 늙어서도 공부 해서 제가 졸업을 한다고하니까? 그분들도 놀라면서 웃더라고요.

이원상 목사가 한인 젊은이들에게 주는 충언이다.

이원상 목사: 나이들어도 뭐든지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다. 시작이 반 이라고 하는 것처럼 벌써 학위를 받고도 수년이 지났는데요. 이제는 공부하는 연령이 높아지니까? 젊은이들도 낙심하지말고 포기하지 말고 무엇이든 목적을 가지면 할 수있다는 것이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이원상 목사는 수년 전부터 워싱톤 한인 라디오 방송(AM 1310)에서 이른 아침 설교를 하고 있다. 이 목사는 특히 북한동포, 탈북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이원상 목사: 물론 제가 아침 방송 하는 게 10년은 넘었는데요. 처음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탈북자들에 대한 고충 또 북한의 사정들을 들으면서 정말 우리가 남다르게 한 민족이라고 그러는데 우리가 언젠가 때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로 통일되고 마음놓고 살 수 있는 날이 왔으면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생각하는 건데 특별히 탈북자들의 고충을 생각하고 북한의 사정을 와서 말씀하는 것들을 들으면서 그래도 한마디의 기도를 통해서 방송을 듣는 사람들의 뜻을 모으고 그런 날이 오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역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시작하게 됐는데 얼마나 오래됐는지 저도 기억이 안 나지만 수년이 지난 것 같습니다.

이원상 목사는 7 순이 넘은 지금도 시드 선교회를 이끌고 있다. 시드 선교회에 대한 설명이다.

이원상 목사: 원래 제가 목회하면서 우리 교회 청년들 중에 선교에 뜻을 두고 나가겠다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때 이 청년들을 선교 단체로 보내야 하는데 우리가 미국땅에 와서 교회가 왕성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계시다 생각해서 우리 한국 선교단체가 있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해서 우리가 1989년도에 중앙장로교회 자체에서 만든 기관이 CMF(CENTRAL MISSIONARY FOLLOWSHIP)이라는 단체로 버지니아에 등록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10여년 지나면서 너무 자기교회 중심적이다고해서 뉴욕에 있는 뉴욕 장로교회에서 세운 ROW(RICH OUT TO THE WORLD)라는 단체와 같은 이념이기 때문에 둘이 병합을 해서 2000년부터 시드(SEED)라고 하는 이름으로 선교사를 모집해서 훈련시키고 파송하는 기관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2000년도부터 지금까지 은퇴한 후에도 이 기관을 섬기고 있는데 지금은 시드 USA, 시드 KOREA, 시드 브라질, 시드 캐나다 이렇게해서 나가있는 선교사 수가 한 130가정 한 36개국에 나가서 섬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한인 선교기관으로서 미국내에서 유일하게 선교사 연합회인 MISSIO NEXUS기관에 속해 있습니다.

시드 선교회가 북한에 선교사를 파견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이원상 목사: 그렇지요.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렀고 1907년에 평양 대 부흥운동으로 인해서 전 한국이 영적으로 깨어나던 때라고 생각이 되는데 지금은 문이 닫혀 있기 때문에 선교사 파송은 못하지만, 물론 북한에 지하교회도 있고 선교활동도 비밀리에 하고 있다고 믿는데 그분들은 생명을 걸고 하는 선교하는 거지요. 우리 시드 선교회에서도 북한선교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북한에 직접 들어가서 하는 선교사들은 없고 다만----

전 세계 한인들 많이 퍼져 나가 살고 있다. 혹 기독교적 영향 때문이냐고 물었다.

이원상 목사: 한인 디아스포라가 700만명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전혀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물론 사회학자들의 설명도 있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건 하나님이 우리 백성을 세계에 보내는거다 그리고 한인들이 가 있는 곳에는 교회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한인 선교사들도 지금 2만 3천 3백명 정도가 되어서 미국 다음으로 혹은 브라질 다음으로 한국이 선교사 파송 국가로서 전 세계 2위내지는 3위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뜻이라고 봅니다.

자유아시아방송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72살에 철학박사 된 이원상 목사의 이야기로 함께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교역사

성경의 중심은 예수님이다. 창조로 시작된 인류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종결이 되는데 창조의 타락에서 부터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인류의 역사의 핵심은 전도이고 선교이다. 그 이유는 복음이 결국은 전파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교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된다.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요한복음 5:39)라고 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는 이유는 아직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같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아직도 구원받을 사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별계시인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기록인 것이다. 그래서 아더 그레스라는 성경전체는 선교사의 책이라고 했다. 그는 기록하기를 "구약과 신약 전체 성경은 선교사 책이다. 왜냐하면 신구약 66권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선교적인 계획이 처음부터 마지막 까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선교적인 관점에서 해석해야만 하나님의 바른 뜻을 깨닫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성경을 하나님의 관심인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선교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의 바른 목적,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을 명확하게 깨닫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선교적 해석학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성경을 선교적인 관점, 잃은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전체 성경을 해석하면 성경전체는 선교적인 책이다.

유명한 영국인 잔 스타트 목사의 후임인 크리스토퍼 라잇은 "성경의 선교적인 해석은 성경자체의 존재와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성경본문들과 우리의 창조자 하나님의 자기계시와의 사이에 어떤 관계성이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성경전체 경전이 선교적인 현상이다"고 했다. 요약해서 말하면 성경전체를 해석함에 있어서 선교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풀어나가야만 성경의 참된 의미를 깨닫을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성경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교의 산물이며 또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난 이후 예수님이 오시고 예수님이 다시오실 때 까지 전체 인류의 역사의 핵심은 이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아담아 어디에 있느냐고 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성경전체에서 관점이 이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성경을 바라보어야 한다.

선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선교의 주인이시다. 그래서 선교의 출발점은 하나님으로 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동산에 숨어있는 아담을 찾아가 부르시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선교의 근원이 하나님으로 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데이빗 부쉬는 남아프리카에 있었던 선교학자이며 후에는 프린스톤신학교에서 가르쳤는데 도중에 자동차 사고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성경적인 선교에 대해 권위가 있는 분이다.

이 분이 쓴 책을 보면 "선교는 근본적으로 교회가 하는 활동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활동이다. 선교는 교회가 선교하는 것 같지만 실지로는 하나님이 하시는 활동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교사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구원의 선교를 세상에서 성취하는 것은 교회가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교회를 포함해서 아버지를 통해서 아들과 성령님의 선교이다"고 했다. 이분이 강조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교회가 선교하고 전도하는 것은 교회는 다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쓰임 받는 하나의 도구가 되는 것이고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선교의 주인이시고 복음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이다.

안경을 통해서 내가 바르게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복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교의 주인이시고 교회는 주인되신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여 쓰임을 받는 하나의 도구이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오늘날 하나님의 목적인 선교를 이루는데 날을 잘 세워서 아름다운 도구로 쓰여지는가 아니면 무딘 도구로 쓰여지는가. 그것이 오늘의 이땅에 있는 교회의 사정이다.

미국교회가 40만개가 있다는데 한 교회에서 선교사 한사람을 파송한다면 40만 선교사가 미국에서 나가야 할텐데 미국 선교사의 수는 10만정도로 4개 교회에서 한사람을 파송하는 것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선교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선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가 있기 때문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선교가 교회보다 먼저 있었다는 말이다. 에덴동산에서는 교회가 없었다. 선교가 먼저 있어서 선교를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로 하나님이 교회를 부르시는 것이다. 만약에 교회들이 하나님의 복음사역에 목적을 완성하는 도구로서의 쓰임을 받는다면 한국의 6만교회가 2만3천명 선교사가 파송되었는데 한교회가 한명의 선교사를 파송한다면 6만명이 나가야 한다.

오늘날 세계선교의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하면 교회들로 하여금 교회의 진정한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이다. 교회안에 여러가지 활동이 있지만 전체의 조직구조적인 목적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선교를 동참하는 것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움직임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을 보내시는 근본이시다. 선교는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출발이고 교회는 다만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기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예수님을 주셨고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의 복음을 완성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을 완성했다. 제약회사를 예를 들면 췌장암 치료가 어려운데 연구하고 실험하여 마침내 약이 개발되었다면 문제는 널리 팔아야 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을 완성하셨다면 복음은 결국은 영원히 멸망하는 병을 고치는 약이다. 약은 널리 전파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보면 교회는 복음이라는 죽음의 병을 고치는 약의 세일즈맨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선교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잔 스타트는 "선교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에서 부터 우리의 마음에 전달되는 것이다. 선교는 세계적인 하나님이 세계적인 인류를 향한 세계적인 복음전달"이라고 했다. 그래서 잔 스타트 목사는 살아있는 하나님은 선교하는 하나님이시라고 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교사로 부르셨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선교의 주인이 되신다. 첫 번째 하신 일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교사로 부르신 것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다. 선교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선교적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여 메시야를 보내시는 과정에서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선교적인 사명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면서 축복이 모든 민족에게 전달될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통해 만민을 축복하시고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온세계에 하나님을 전하는 선교사로 부르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씨인 이삭을 허락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시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만민에게 전할 선교적인 사명을 주셨다. 출애굽기 19:6에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제사장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부르신 이유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온 세계에 하나님을 전하라는 것인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교적인 사명을 거절했다. 골든코넬신학교 부총장 있다가 은퇴한 월터 타이저 교수는 "시편 67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선교적인 사명을 주신 것을 확인하는 시편"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시편 67편)"

우리는 선교가 신약에 와서 이루어진 줄 알지만 하나님은 선교의 주인이신데 이스라엘 백성을 선교사로 부르신 것이다. 시편 67편에 나와 있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할 뿐 아니라 이방을 향한 선교적인 사명도 버린 것이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했다면 하나님의 역사는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선교적인 부름에 불순종한 이스라엘은 오늘날도 고통을 당하고 있다.

아이를 잃어버렸으면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아기를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시다. 예수님의 99마리의 양을 우리에 두고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온 세계에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전하는 선교적인 사명을 주신 것이다. 그런데 그 사명을 거절하고 메시야까지 죽였다. 계시록 7:1-10을 보면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는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선교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하나님의 선교에 순종하는 것이 최선의 복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교사이다.

선교사는 문화와 언어와 지역의 장벽을 넘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위해 보냄을 받은 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하늘 보좌를 떠나 낮고 천한 땅에 첫 번째 선교사로 오신 것이다. 그럼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범적인 모델 선교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갈라디아서 4:4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라고 하신 것 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교사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시키신 것도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하신 것은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교사이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보내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떠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타문화권에 완전히 적응하셔서 그 사람들 중의 하나로 사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이 오시기 740년 전부터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언함으로 그리스도의 선교적인 사명을 알린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그대로 주님은 우리 가운데 오셨다.

요한복음 1: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을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얼마나 진실되게 새문화권에 완벽하게 적응하셔서 그들의 언어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다만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해 탄식할 뿐이셨다.

예수님은 오셔서 선교적인 삶을 사신 것이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그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선교적 삶의 원리를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서 말한다. 그리스도의 겸손과 순종과 복음의 성취를 보여준 것이다. 이와 같은 삶의 본은 주님의 3년간의 제자훈련의 원리가 된 것이다. 예수님이 본을 보이시는 원리는 요한복음 10장에서 나는 선한 목자이라고 하신데서 알 수 있다.

선교사는 복음의 메세지를 삶을 통해서 전달하는 자이다.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인 구속자의 값을 보혈로 지불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복음을 완성하신 것이다. 상품으로 말하면 판매가 가능한 완전한 상품이 된 것이다. 이제는 이 구원의 복음이 땅 끝까지 구원받을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이 남은 사역이다. 주님은 이일을 위하여 교회를 세우실 것을, 성령님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고 승천하신 것이다.

성령은 선교의 능력이시다

조지 피터스 교수는 성령님은 선교의 경영자이시다고 했다. 하나님은 선교가 능력있게 교회를 통해 역사하시도록 성령님을 보내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위에서 우리의 빚을 다 갚으셨다. 다른 말로는 복음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완성된 복음은 이제 상품이 된 것이다. 이것을 판다는 의미에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달하고 세일즈맨과 같은 그런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교사의 모델이시다. 말씀이 육신되셔서 우리가운데 거하시고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 영광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가는 곳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원의 복음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낮아지셔서 우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은혜와 진리를 알게하시는 것이 곧 선교의 본질적인 과업인 것을 본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럼으로 선교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교는 완성이 되어가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말씀은 주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오셔서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하시고 그 본을 본받아서 우리도 섬기는 종으로서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널리널리 복음이 팔려서 복음을 받고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데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신 것이다. 성령은 선교의 능력이시다. 이제는 예수님이 완성하신 구원의 복음을 선교적인 차원에서 복음이 선교적으로 능력있게 나타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은 교회가 선교가 가장 필요로 한 것이다. 성령은 기도를 통해서 오는 것이기에 시드선교회에서도 중보기도의 사명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성령은 선교의 능력이시다.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예수님은 이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는 선교적인 사명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시면서 이일은 반드시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고 말씀하셨다. 사도행전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신 것은 성령의 능력은 곧 선교의 능력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으면 선교는 불가능한 것이다.

조지 피터스 박사는 성령의 선교적 역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본적으로 궁극적으로 선교사역은 성령님께 위임된 것이다. 궁극적으로 성령님의 구원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것이라면 이 구원의 복음이 실질적으로 경영되고 구체화되는 일을 위해서는 성령님께 의지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궁극적으로 선교사의 과업은 성령께 위임된 것이다. 구원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서 시작된 것처럼 구원의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본인에 의해서 얻어진 것처럼 구원의 경영과 실현이 성령께 위임된 것이다. 성령만이 구원이 갈보리 십자가위에서 참된 경험적으로 얻어지게 할수있다. 성령은 구원뿐만 아니라 선교의 현재 경영자이시다."

조지 피터스는 처음으로 "성령님은 선교의 경영자이시다"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를 위해서 성령에 의지해야 하는데 그것은 기도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성령께서 선교의 경영자 되심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다. 그러므로 선교의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와 순종으로 성령님께 의존할 때 성령의 능력으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임을 선교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상에 파송하신 선교사이다

교회는 예수님이 파송하신 선교사이다. 예수님의 선교전략은 제자를 양육하여 교회를 설립함으로 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그리고 땅끝까지 전파하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이 파송하신 선교사이다. 교회안에는 교육, 친교, 찬양 등 여러가지가 다 있지만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되는 것이다.

리디머 처치 팀 켈러 목사가 최근에 쓴 책을 통해 수십 년 목회의 결론을 나누었는데 복음이 교회의 생명이라고 강조했다. 교회가 운동이 필요한데 결론적인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선교적인 삶을 살도록 양육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성도들이 선교적인 삶을 살도록 훈련시키고 양육시키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말이다.

교회는 예수님이 파송하신 선교사이다. 제자를 양육하여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예수님의 선교전략이었다. 마태복음 28장, 마가복음 16장, 누가복음 24장, 요한복음 20장등 4복음서의 결론은 예수님이 제자를 양육해서 보내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가되 성령님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라이슨은 교회를 선교적인 사명을 가진 교회로서 소개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세상이 보내신 첫 번째 선교사로서 십자가에서 그래서 사명을 완성하시고 다 이루셨다고 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남은 선교적인 과업을 교회에 위임하신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이 파송하신 선교사이다.

예수님은 33년의 지상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의 바른 본을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그리스도가 남긴 본을 따라오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신 것은 제자도의 원리 곧 모델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복음 선교의 과제는 교회가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 선교를 해야 하는 것이 가장 본질적인 교회의 사명인 것이다.

74 로젠 모임서 선포된 것은 모든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백성들의 사명은 하나님의 선교를 헌신적인 사명으로 출발하고 마쳐야 하는 것이다. 패트릭 쟌스터는 "교회는 당신이 생각한 것 보다 더 큽니다"라는 책에서 선교가 없는 신학은 성경적인 신학이 아니며, 선교가 없는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가 아니며, 선교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참제자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남은 삶을 선교적인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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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황태자'로 불렸던 영국의 찰스 스펄전은 평생 일주일에 6권 정도, 거의 매일 1권의 책을 읽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오전에는 항상 독서를 했다.

교회 역사에서 최고의 설교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19세기 영국의 찰스 스펄전(1834~1892)과 20세기 영국의 마틴 로이드 존스(1899~1981)라고 대답할 것이다.

설교의 황태자 스펄전의 설교문은 그가 21세이던 1855년부터 매주 발간돼 세계 여러 지역 서점과 신문 가판대에서 1페니에 판매되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1892년까지 1800만부나 팔렸다.
매주 1편씩 간행된 설교문은 해마다 한 권의 책으로 발간됐고, 스펄전의 사후 1917년 1차대전으로 종이가 부족해 인쇄할 수 없을 때까지 63년간 계속돼 63권의 설교집으로 남아있다.

복음주의 신학자 제임스 패커는 그의 유명한 책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1855년 스펄전이 한 설교를 한 페이지 이상 길게 소개하면서 극찬한다.
스펄전의 63권 설교집에 담긴 3500편 이상의 설교들은 매주 읽으면 60년 이상, 매일 읽으면 10년 정도 걸린다.
양과 질에 있어 교회사 최고의 설교집이다.

20세기 로이드 존스는 강해설교의 왕자다.
로이드 존스가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주일 오전마다 약 8년 동안 설교한 에베소서 강해서 8권과 1955년부터 1968년까지 매주 금요일 저녁에 약 14년간 설교한 로마서 강해서 14권은 강해설교의 금자탑이다.
로이드 존스의 강해설교는 20세기 후반 영미권과 우리나라의 수많은 설교자의 권별 강해설교의 모범과 모델이 되었다.

이렇게 최고의 설교자로서 쌍벽을 이루는 스펄전과 로이드 존스에게는 놀라운 공통점이 하나 있다. 둘은 오늘날로 치면 정식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지 않았다. 스펄전은 17세에 목회를 시작했기 때문에 최종 학력은 농업고등학교 졸업 정도였고, 로이드 존스는 의대를 졸업하고 의학박사가 됐지만 신학교에서 공부한 적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위대한 설교자가 된 것일까. 그 비결은 독서를 통한 폭넓은 신학 공부였다.

스펄전과 로이드 존스는 각각 당대 최고의 독서가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목사였던 스펄전은 아주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는데, 목회자가 된 이후 평생 40여년 동안 일주일에 6권 정도, 거의 매일 1권 정도의 책을 읽었고, 자신의 서재에 있던 1만 2000권의 책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한다. 스펄전은 ‘주해와 주해서’라는 책을 통해서는 3000~4000권의 책을 읽고 선별, 또 선별해 66권 성경 각 권에 대한 최고의 책들을 추천하는 목록을 제시하기도 했다. 스펄전의 설교 비결은 엄청난 성경공부와 1만권 독서를 통한 신학 공부였다.

로이드 존스도 마찬가지였다. 로이드 존스는 평생 오전에는 독서를 했고, 휴가 때는 두꺼운 전집류의 책을 읽으면서 평생 성경공부, 신학 공부를 지속했다. 스펄전과 로이드 존스는 둘 다 훌륭한 주석가요 조직신학자요 교회사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통합적인 목사 신학자들이었다.

미국의 찰스 시므온 트러스트라는 설교 교육 기관의 대표인 데이비드 헬름이 쓴 ‘강해설교’는 강해설교가 무엇인지를 간결하고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이 책의 핵심은 강해설교는 먼저 성경 본문을 주해해서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발견하고, 그다음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을 통해 성경 전체에 비추어 이해하며, 마지막으로 우리 상황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장점은 성경 본문의 해석에서 적용에 이르는 과정에 있어 성경주해와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설교에 있어 성경주해 성경신학 조직신학의 중요성을 아는 것이 좋은 강해설교의 승패를 가른다. 야구 경기에 비유하자면 강해설교는 성경 본문에서 출발해 성경주해라는 1루, 성경신학이라는 2루, 조직신학이라는 3루 베이스를 거쳐 적용이라는 홈으로 들어와야 한다.

헬름이 말하는 강해설교의 이론은 스펄전과 로이드 존스의 사례를 통해 강력하게 입증된다. 교회사의 모든 훌륭한 강해설교자들도 마찬가지다. 헬름의 강해설교에 대한 견해는 내가 그동안 경험하고 가르쳐온 것과도 일치한다. 나는 신학교 졸업 이후 지난 30여년 동안 내가 읽고 공부한 성경주석과 성경신학서와 조직신학서, 그리고 일반 학문과 교양서에 비례해 내 설교의 내용도 점점 좋아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언할 수 있다.

나와 함께 동역했던 많은 목사들의 경험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좋은 설교자가 되는 길은 주경신학 성경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의 5중 신학을 평생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해왔다. 우물에 가 숭늉 찾아서는 안 된다. 좋은 선수, 좋은 무술가, 좋은 예술가, 좋은 기술자, 좋은 학자가 되는 비결은 모두 동일하다. 선천적인 재능에 더해 반드시 시간과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좋은 설교자도 마찬가지다.

좋은 설교는 설교학 책을 몇 권 읽거나 설교 세미나를 몇 번 참석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평생에 걸쳐 매일 성경공부와 신학 공부에 쏟은 피와 땀의 양에 비례해 좋은 설교가 이루어진다. 좋은 설교에는 성경과 신학에 대한 평생 공부에 더하여 기도와 성령의 조명과 감동 감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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