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의 연습(디모데전서 4:7∼8) / 주일 설교 원고(2020-03-15) 이승혁목사


파트리스교회 주일 설교(2020-03-15)

경건의 연습(디모데전서 4:7∼8)

(개역 한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개역 개정)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에 관한 중요한 용어 몇 가지를 살펴보면 “경건의 연습(딤전 4:7)” “경건의 비밀(딤전 3:16)” “경건의 모양(딤후 3:5)” “경건의 능력(딤후 3:5)” 이라고 하겠습니다.

지난 한 주간 “경건이란 무엇일까?” 이런 주제를 생각하며 여러 사람에게 “당신은 경건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제가 들었던 대답은 “영혼 앓이” “영혼의 몸살” “하나님이 인정하는 신앙생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대답으로 마음에 울림이 없어 계속적으로 나 자신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얻은 대답은 “경건(敬虔)이란 육(肉)과 영(靈)의 조화(調和)” 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 이야기 #.1)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오늘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기도하게 했습니다. 얼마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러보셨을 때 모두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잠을 자는 제자들을 깨우고 책망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Watch and pray so that you will not fall into temptation. The spirit is willing, but the body is weak.   

제자들이 기도하지 못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마음의 생각이 육신을 따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성도들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육체의 삶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 이야기 #.2)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가이사랴에 이탈리아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를 가리켜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이렇게 소개했습니다(사도행전 10:2).

“고넬료(Cornelilus, 뿔)”를 경건하다고 했던 이유를 세 가지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
오늘날 세상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코로나 바이러스를 두려워합니다.

둘째는 백성을 많이 구제(물질을 나눌 수 있는 신앙)
물질을 나누는 모습보다는 오히려 마트로 몰려가 평소보다 더 많은 물건들을 구입하려는 소비자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물건은 진열대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합니다.

셋째는 항상 기도(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간구하는 신앙)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내 가족들이 안전하기만을 먼저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경건이란 무엇일까요?

(현실 이야기 #.1)
“황수안”이라고 하는 열일곱 살 된 소년이 너무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찾아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으로 건너왔을 때 마침 중국에서 사역하던 한국인 선교사를 만났다고 합니다. 선교사가 이 소년을 만났을 때 육체적으로 너무 연약하여 우선 건강을 회복시켜야 하겠다고 판단하여 잘 먹이고 쉬게 하면서 건강을 되찾을 때까지 3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20살이 되었을 때 ‘황수안’이란 소년은 말씀으로 무장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동안 보살펴주던 선교사에게 성경책 한 권을 달라고 하더니 나는 이제 북한으로 돌아가서 진리를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전해야 하겠다며 북한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탈북자들이 남한으로 가려고 몸부림을 치는데 ‘황수안’이란 청년은 성경책을 갖고 북한으로 건너갔습니다. 3년 동안 고향을 떠났던 사람이 다시 고향에 나타났기 때문에 보위부에서 체포하여 심문을 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무엇을 하였느냐?
누구를 만났느냐?
성경공부를 했느냐?
성경책은 갖고 있느냐?
어디에서 묵고 있었느냐?

‘황수안’이란 청년은 예수를 믿는 사람은 정직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솔직하게 중국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보위부원들은 ‘황수안’ 청년이 잠시 머물렀던 친구의 집을 수색하여 성경책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성경책을 갖고 있었고 더구나 중국에서 선교사를 만나서 성경공부를 했다고 하면 반드시 공개 총살을 시키는 것이 관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15년 형을 받고 함경북도 회령시 무산리에 위치한 전거리 교화소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전거리 교화소는 탈북자들에게는 그곳에 들어가면 죽어야 나올 수 있는 곳이라고 알려진 악명 높은 수용소라고 합니다. 

교화소에서 지내는 동안 다른 죄수들은 가족들이 면회를 와서 먹을 것을 주고 돈을 주고 가는데 ‘황수안’ 이란 청년은 찾아올 가족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죄수들이 먹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배가 고프기 때문에 “하나님, 제게도 먹을 것을 주세요!” 이렇게 기도할 것 같은데 이 청년은 오히려 “하나님, 먹고 싶은 생각을 없게 해 주세요!” “하나님, 먹고 싶은 생각을 없게 해 주세요!”

사람에게 세 가지 기본 욕구가 있다고 합니다.
세 가지 기본 욕구가 무엇일까요?
“식욕(食慾)” “수면욕(睡眠慾)” “성욕(性慾)” 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 생명과 직결되는 욕구는 “식욕”입니다. 다른 죄수들이 배부르게 먹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하나님 내게도 먹을 것을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이 청년은 “하나님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나게 해 주세요!” 이렇게 절제하는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15년 형을 언도 받았으나 감형을 받아 9년 8개월 만에 교화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한에 정착한 ‘황수안’ 청년의 누나가 브로커를 통하여 동생을 찾게 되었고 결국 남한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지금도 교화소에서 훈련된 절제의 삶은 남한에서 살아갈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훈련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남한에서 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지만 결코 먹는 것에 탐하지 않는 이유는 아직도 북한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동시에 9년 8개월 동안 “먹고 싶은 생각을 없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했던 것이 먹을 것이 풍부한 남한에서도 먹는 것으로 유혹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경책을 갖고 북한으로 들어가면 사형을 받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성경책을 갖고 북한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믿음(信仰)일까요? 아니면 용기(勇氣)일까요? 아니면 만용(蠻勇)일까요?

북한에서 강력범죄에 해당하는 죄가 성경책을 갖고 있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책을 갖고 있기만 해도 강력범죄가 된다는데 이 청년은 성경책을 갖고 북한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에게는 여섯 가지 감옥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자기도취의 감옥
자기도취는 “공주병” “왕자병”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둘째는 비판의 감옥
다른 사람의 단점과 비판을 좋아하는 경향으로 나타납니다.

셋째는 절망의 감옥
모든 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넷째는 과거지향의 감옥
현재보다는 옛날이 좋았다고 옛날을 그리워합니다.

다섯째는 선망의 감옥
내가 가진 것보다는 다른 사람의 것이 더 좋아 보이고 커 보이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질투의 감옥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것처럼 남이 잘 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경건이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육신이 따라가는 것으로 육과 영의 조화라고 하겠습니다.


경건의 연습을 세 가지로 설명한 영성학자가 있습니다.
그 학자가 미국의 리차드 포스터(Richard J. Foster) 라고 합니다.

영적 훈련은 삶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이다!”

경건의 연습에는 “내적 연습, 외적 연습, 집단 연습”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을 소개한 책이 “영성훈련과 성장”이란 책입니다. 오늘 이 책을 한 가정에 한 권씩 선물로 준비했습니다. 사순절 남은 기간 동안 앞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 다음으로 참고서처럼 활용하면 좋겠습니다.

내적 연습의 대표적인 것은 묵상(黙想)

묵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병을 고칠 수 있는 특별한 약을 제조할 수 있는 의사로부터 처방을 받은 약을 받았다면 그 약을 선반에 올려놓고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약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묵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을 말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편 1:2).

외적 연습의 대표적인 것은 복종(服從)

믿음이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복종과 같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 8:34).

단체 연습의 대표적인 것은 예배(禮拜)
예배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직접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을 삶과 죽음으로 설명한다면 삶이란 살아 있을 동안에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심판을 통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황수안이란 청년은 3년 동안 중국에서 경건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경건한 믿음으로 복음을 듣지 못한 북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알려주려고 성경책을 갖고 북한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전거리 교화소에서 15년 형을 받고 9년 8개월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심지어 교화소 안에서는 죄수들끼리 무슨 죄를 지어 들어왔느냐 하며 서로 이야기하는데 ‘황수안’씨는 종교 유포죄를 지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감형을 받고 9년 8개월 만에 교화소를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교화소에서 죄수들이 서로 싸울 때가 있는데 주먹으로 때리고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침을 뱉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먹은 것이 없어 배가 고프기 때문에 힘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침을 뱉는데 끝까지 계속하여 침을 뱉는 사람이 이긴다고 합니다.

남한에 정착하여 신앙생활을 하면서 깨닫는 것은 교화소에서 지낼 때 먹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일어났다면 아마 지금까지 살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 교화소에서 먹고 싶은 식욕을 없애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에 지금도 아주 적은 양에 만족할 수 있는데 이런 훈련에 의해서 남한 생활이 어려운 것이 없다고 합니다.

“황수안”씨와 같은 탈북자들이 경험한 신앙과 삶이 곧 경건이라고 하겠습니다.
먹을 것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싶은 생각이 없게 해 달라는 기도를 9년 8개월 동안 계속할 수 있었다는 것에서 경건이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 식욕에 대한 것을 억제할 수 있는 기도는 경건한 삶을 위한 능력의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경건의 예화)

심리학자들이 실험을 하려고 “곤들메기(catfish)”를 잡아 커다란 수족관에 넣고 그 수족관 안에 있는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먹을 수 있게 했습니다. 며칠 후 이 ‘곤들메기’와 먹이인 작은 물고기 사이를 얇은 유리 막으로 차단했습니다. ‘곤들메기’는 바로 눈앞에 먹이가 있었지만 아무리 잡아먹으려고 해도 유리막에 부딪힐 뿐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며칠이 지난 후 유리 막을 치워버렸습니다. 얼마든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을 수 있는 ‘곤들메기’는 먹이를 향해 돌진을 하여 포식할 때까지 사냥을 계속할 것 같았으나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나타내었습니다. 바로 머리 위에 놀고 있는 작은 물고기들을 보고도 이 ‘곤들메기’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곤들메기’에게 이들 작은 고기들은 이미 잡아먹을 수 없는 그림의 떡쯤으로 세뇌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끝내 ‘곤들메기’는 그 풍성한 만찬에의 참여를 거부하고 이 주일쯤 되는 어느 날 굶어죽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습관이라는 무서운 것입니다.

경건을 연습하는 것은 경건의 습관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디모데전서 4:7∼8)

채찍질을 하지 않고 말을 원하는 곳으로 끌고 갈 수 없습니다. 압력을 가하지 않고 수증기나 기체를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갈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동력기를 통과하지 않고 물을 빛이나 힘 에너지로 바꿀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도 어떤 한 가지 일에 집중해서 헌신하고 훈련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19는 박쥐로부터 전염되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시대에 나타날 전염병을 성경에서는 “온역(pestilence)”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발생했던 각종 전염병은 모두 동물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21:11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There will be great earthquakes, famines and pestilences in various places, and fearful events and great signs from heaven.

빌게이츠(Bill Gates)
인류가 멸망한다며 핵전쟁에 의한 것이 아니다. 동물의 바이러스에 의한 전염병 때문일 것이다. 동물의 바이러스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으며 세계 경제를 마비시킬 정도로 위험한 것이다.

야생동물에게는 160만 개의 이상의 바이러스가 존재하고 있다. 문제는 다른 동물에게 전이되면서 사람에게 침투할 수 있는 바이러스로 변이된다(인수침투바이러스).

14세기
흑사병(Black Death)) - 검은 쥐로부터 발병 확산, 7500만명∼2억 명
1차 대전 말(20세기)
스페인 독감(Spanish Influenza) - 조류에서부터 발병 확산 5천만 명 이상
메르스(Mers) - 낙타(camel)
에볼라(Ebola) - 박쥐(bat), 침팬지(chimpanzee)
사스(Sars) - 사향 고양이(Musk cat)
에이즈(Aids) - 원숭이
조류독감(Premature ejaculation flu) - 철새
광우병(Mad cow disease) - 소(cow)
구제역(Foot and mouth disease) - 소(cow), 돼지(pig)
코로나 바이러스 19(Corona Virus 19) - 박쥐(bat)

동물계 바이러스에 의해서 사람들은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징조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언약에 의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도해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이해를 생각해 봅시다.
예로부터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
짐승은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
무당은 죽으면 한복을 남긴다."
무당의 죽음은 아주 초라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죽음 이후에 반드시 있을 심판을 생각하며 그리스도인은 주님 앞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이 세상에 믿음의 발자취를 새겨야 할 것입니다.

왜 경건의 연습이 필요할까?
구약에서 메시아가 오실 것에 대한 예언 : 456회
하늘에 오르신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란 예언 : 1518회
신약에만 300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40일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마지막 남은 예언은 메시아로 오셨던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세 심판에 대한 예언 성구

하나님의 말세 심판에 대한 예언 성구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시편 96:13)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편 1:5)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사도행전 17:31)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요한복음 12:47~48)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요한복음 5:22)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요한복음 5:2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베드로전서 4:17)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다니엘 7:10)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시록 20:11~12)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계시록 14:7)

하나님의 말세 심판과 천국 가는 것의 관계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2:2~4)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스가랴 13:8~9)

그가 가로되 다니엘아 갈찌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다니엘 12:9~10)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계시록 22:1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시록 21:3~4)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계시록 11:15)




옥중서신(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옥중 서신이란 무엇인가?
 

에베소서 6: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문제.
옥중에서 쓴 것처럼 보이는 바울의 편지는 어디서 무슨 목적으로 어떤 순서로 기록되었는가?


해석.


1. 바울은 10년 동안에 걸친 제 1차, 2차, 3차전도 여행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편견과 핍박과 투옥이었다.

성전에서 폭도들에게 붙잡힌 바울은 천부장 루이사와 로마 군인들의 출동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다.
사도행전 22장에서, 피투성이의 바울은 층대 위에 서서 그를 죽이려하는 백성들에게 간증적인 설교를 한다.
23장에서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 불려가서 자기를 변명한다.
24장은 총독 빌릭스 앞에서, 25장은 총독 베스도 앞에서, 26장은 헤롯 대왕의 증손자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인 헤롯 아그립바 2세 앞에서 자서전적 간증을 한다.
그러나 2년이나 기다려도 석방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바울은 로마 시민의 마지막 권리를 사용하여 황제에게 호소하기를 결심한다.


사도행전 27장과 28장에서 바울은 드디어 로마로 출발한다.
그가 평소에 늘 복음 전파를 위해 가고 싶어 하던 것을 죄수의 모습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 길이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바울 일행은 바울과, 누가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 였으며,
총 276명의 죄수와 군인들 그리고 선원들이 승선한 (27:37)아드라뭇데노 배는 순풍에 돚을 달고 로마로 출발하였다. 율리오는 바울 일행에게 천절 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바울에게 호감을 가졌던 베스도의 배려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 일행은 큰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배를 버리고 상륙한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 난후 드리어 평생을 가고 싶어 하던 로마에 도착한다.
환호성 속에 영접 받는 사도로서가 아니라 감시받는 죄수로서 로마에 도착했다.
압비오와 삼관까지 마중 나온 형제들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셋집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살면서 2년 동안 열심히 복음을 전파한다.

그러면서 4권의 서신, 즉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기록하였다.
이 네 권의 책을 바울의 옥중서신이라고 부른다.

 

2. 옥중서신 중 바울이 제일 먼저 쓴 편지는 골로새서이다.

골로새서는 이단 문제에 시달린 골로새와 그 주변교회가 그들의 지도자인 에바브라를 로마의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파견하여 그의 지도를 구하자 바울이 써서 보낸 편지이다.
골로새 교인들을 괴롭힌 이단 문제는 주로 그리스도론에 관한문제이다.
바울은 여기서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골로새는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400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인구가 많고 번화한 도시였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는 아니었지만 간접 설립자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은 에베소를 중심으로 온 아시아에 3년 동안이나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에 각 교회의 지도자들은 다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었다.(행19:10).
에바브라는 바울의 제자로 골로새 교회를 개척하였고 골로새뿐만 아니라 라오디게아와 히에라풀리스 등 근방 교회의 개척에 선구자였다.


골로새 교인들을 괴롭힌 이단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영지주의자, 혹은 이교의 철학자들, 철학적 사고방식을 가진 유대인들, 에세네의 금욕주의자들 등이 추측할 수 있는 이단들이지만 확실히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의 초등학문”(2:8)을 가르치고 천사를 숭배하며(2:18), 금욕주의자(2:21)인 것을 보아 당시 교회들을 괴롭힌 원시 영지주의(Proto-Gnosticism)의 일파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것의 해답을 찾는다.
그리고 그 내용을 적은 골로새서를 두기고 에게 주면서 동시에 소아시아의 모교회인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교회론을 적은 편지와
자기에게 피신해 있는 골로새 교회 빌레몬의 노예 오네시모를 받아주기를 간청하는 편지도 같이 보낸다.
 
3. 골로새 교회의 이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골로새서를 쓴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장로인 빌레몬에게 극히 개인적인 편지를 써서 골로새서와 함께 보낸다.

그때 마침 골로새의 빌레몬 장로 집에서 도망쳐 온 한 노예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바울을 시중들고 있었다.
바울은 이 노예 오네시모를 옛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그를 용서하여 주기를 탄원하고 있다.
그러므로 빌레몬서는 주인에게서 도망친 한 노예를 위한 바울의 탄원을 담은 극히 개인적인 서신이다.
웅대한 신학을 담은 그의 다른 서신과 좋은 대조를 이루지만 빌레몬서는 바울의 교리와 신학을 뒷받침하는 그의 인격과 사랑을 잘 나타내고 있다.

도망친 일개 노예를 형제로 대접하면서 그가 용서받도록 하기 위하여 참을성 있게 간곡히 허락을 구하는 바울의 모습은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비천한 노예 문제를 다루는 이 서신에서 우리는 고귀한 인간 정신의 승리와 인간 바울의 참 모습을 본다.

4. 에베소서는 바울의 옥중서신 중 세 번째로 쓴 책일 것이다.

로마로 바울을 찾아온 골로새 교회의 장로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의 문제들을 바울에게 고하였고
골로새 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바울이 쓴 편지를 두기고가 가지고 아시아로 가는 길에 빌레몬서와 에베소서도 전달하도록 에베소서를 기록하였다.
에베소서의 수신자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이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3년이나 머물면서 눈물로 목양한 교회이다(행20:17~35).
에베소서의 주제는 교회론이다(행20:17~35).
에베소는 소아시아 여러 교회들의 중심이었고 어머니 교회였다.
따라서 에베소 교인들은 올바르고 건전한 교회 관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장엄한 찬송과 명상으로 시작하는 에베소서는 예수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했으며 기독교 교회관의 내용들과 새로운 의미를 제시했다.

기록 연대와 목적은 다음과 같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 골로새 교회의 에바브라가 찾아와 골로새 교회의 긴급한 문제들을 상의하고 바울의 지도를 구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권면하는 편지를 써서 두기고 편에 보내면서 에베소와 빌레몬서도 같이 기록하여 보냈다.
물론 빌레몬의 종 오내시모도 이때 주인에게 돌려보내졌다. AD 61~63년경 바울이 오마의 감옥에 있을 때였다.
문제를 가지고 바울에게 의논하러 왔던 에바브라는 오네시모 대신 바울을 돕느라고 골로새로 돌아가지 못했다.

5. 빌립보서는 바울의 옥중서신 중 제일 나중에 쓰여진 편지서이다(AD61~63).

복음이 온 시위대 안에 전파되었다는 말이 그것을 증명한다(1:13).
옥중서신 중 다른 편지서들(에베소서,골로새서,빌레몬서)은 두기고가 가지고 소아시아에 가서 전달했으나 빌립보서는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파견한 에바브로디도가 직접 전달하였다(빌2:25).
로마에 온 에바브로디도는 죽을병이 들었고 그의 병은 바울과 빌립보 교회를 근심하게 하였으나(빌2:26).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 병이 나아 빌립보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유럽의 첫 성이다.
빌립보에서 바울은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나 회집시켰으며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을 만나 그를 치료해 주었기 때문에 많이 맞고 감옥에 갇혔으며 거기서 만난 간수를 구원하였다.(사도행전 16장을 자세히 읽을 것).
그런 특별한 인연 때문인지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특별히 사랑하여 그의 쓸 것들을 공급하고 감옥에 있을 때는 그의 옥바라지를 도맡았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그런 정성을 감사히 여겨 그의 편지에서 여러 번 그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고후11:9,빌4:16).


빌립보서의 특징
 
첫째로 기쁨과 감사의 편지라는 것이다(1:3,4,18,25; 2:17,18; 3:1; 4:4,10,18).

성경의 어느책, 바울 편지서의 어떤 책보다도 기쁨과 감사에 대해 많이 언급하고 있다.
감옥에서 쓰여진 편지가 기쁨과 감사에 넘친다는 것은 바울의 믿음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둘째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가 교리적인 데 비하여 빌립보서는 실천적이고 간증 적이다.

물론 빌립보서에도 교리적인 부분이 있지만(빌2:6~11) 일반적으로 권면과 간증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따라서 일견 비조직적인 글로 보이기도 하지만 빌립보 교회와 그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따뜻한 감사가 절절히 배어 있는 편지서이다.

요약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네 권의 책을 바울의 옥종서신이라 부른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 골로새 교회의 장로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의 이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로마로 바울을 찾아왔다.
바울은 즉시로 펜을 들어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쓰면서 아울러 골로새 교회의 장로인 빌레몬에게서 도망친 그의 종을 용서하라는 편지도 썼다.
편지를 가지고 가는 두기고가 분명히 에베소 항구에 들를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3년 동안이나 목회했던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도 같이 써서,
빌립보에서 파견되어 바울을 돕다가 죽을병에 걸렸었지만 이제 완쾌되어 돌아가는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냈다.

 


목회서신(the Pastoral Letters)(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목회서신이란?

디모데에게 보낸 두개의 편지와 디도에게 보낸 한개의 편지를 가리켜 "목회서신"(the Pastoral Letters)
또는 "목자 서신"(the Shepherd Letters)이라고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1227-1274)가 "이 세서신은 하나같이 목회규칙을 취급하고 있다"고 말한데서 기인하며,
1849년 영국 성경 학자 헨리 알포드가 "목회서신"이라는 명칭으로 공식 사용할 것을 주창함으로 일반화되었다.
이 세 서신만이 지역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개인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디모데는 에베소지역을, 디도는 그레데섬을 책임맡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서신은 지역 교회를 잘 지도하도록 훈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유대적 영지주의 형태의 이단적 교훈들로부터 신앙을 방어할 것을 교훈한다.

1. 수신자

디모데(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는 소아시아의 루스드라 태생(행 16:1이하)이다.
바울이 두번째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 들렸고 이때 디모데가 바울의 일행이 되어 전도 여행에 나섰으며
그 이후로 디모데는 바울의 가장 충실한 동역자가 되었다(빌 2:19-22).

디도는 바울에 의해 개종되었다(딛 1:4).
갈 2:1이하에서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동역자로 나타나고 있으며,
바울은 3차 전도여행 때 디도를 고린도로 보냈고,
마게도니아에서 만나 다시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모금을 위해 고린도로 돌려보냈다(고후 7:5이하, 8:23이하).
신실한 주의 종(참 아들 딛 1:4, 동무 고후 8:23) 개인적으로 보내진 것이지만
이 편지들은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딤전 6:21, 딤후 4:22, 딛 3:15).

2. 기록 시기

바울이 1차 로마 감옥 생활을 마친 후부터 순교하기까지의 기간동안에 목회서신이 기록되었다고 본다.
로마에서 석방된 시기가 62-63년으로 추정되기에 석방된 이후 계속 전도여행을 하면서 마게도냐 지방에서
디모데전서를(딤전 1:3), 아가야의 니고볼리에서 디도서를(딛 3:12), 그 이후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때에
디모데 후서(딤후 4:6-11)를 기록했다.

3. 기록 목적

사도들의 시대는 임박한 종말 기대로 특징지어져 있었고, 이로 인해 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재림의 지연과 더불어 사도이후 시대에 세상에 대한무관심적 혹은 부정적 태도도 조정되어야 했다.
어떻게, 언제 종말을 맞아야 될까에서 종말이 오기까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적응해 가며 생활해야 할까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에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의 기구와 조직이 필요했다.
그것은 내적으로는 "이단"의 위협이, 외적으로는 "박해"라는 위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적 안정을 위해 교회의 제도화를 추구했으며,
외적인 안정을 위해서 세상에 대한 올바른 적응을 꾀해 나갔다.
그리고 정통 신조와 교회 성직자에 대한 순종만이 외적인 반대나 내적인 분열로부터 교회를 지키는 최선의 방편임을 가르쳤다.
이것이 목회서신의 목적이다.

1). 성육신 부인, 도덕 폐기론 주장하는 영지주의와 편협한 유대주의로부터 교회보호 (딤전 1:4-7 / 딤후 2:23-26 /딛 1:1-13)

2). 영적 나태를 막고 경건의 훈련과 도덕적 품성을 고양하도록(딤전 5:1-25/ 딤후 3: 14-17 /딛 2:1-10)

3). 교직제도와 그에 따른 교역자들의 자질을 규정함(딤전 3:1 / 딛 1:5)

4. 내용구분

 디모데 전서

1) 인사 / 1:1-2

2) 거짓 교사들의 교리에 대한 공격 / 1:3-20
거짓 교훈은 유대적 요소를 가진 영지주의 형태이며, "꾸며낸 이야기와 지리한 족보 이야기"(4절)는 영지주의적 경향을, 그리고 "율법"(8-9절)에 대한 언급은 유대적 요소를 가리킨다.

3)교회질서 / 2:1-3:16 교회의 기구적 조직에 대한 관심이 나타난다.
가. 교회예배 / 2:1-15 : 세상과의 관계 개선을 꾀하는 후대의 시도이다.
나 성직제도 /  3:1-16 : 감독의 자격과 집사의 자격이 규정되고 있으며 기독론적 찬양시(16절)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4) 거짓교사들의 윤리에 대한 공격 /4:1-10 거짓교사들의 윤리가 참 교사들에게 기대되는 행위와 대조되고 있다.

5) 교회질서 / 4:11-6:19 기독교 성직자의 이상을 제시하고 있으며(4;11-5:2) 과부들에 관한 규정도 밝히고 있다.

6) 결론 / 6:20-21

디모데 후서

1) 인사/1:1-2

2) 바울을 본받아 증거한 것에 대한 권면(1:3-2:13) 바울로부터 들은 "건전한 말씀"을 본받고 따르며 지킬 것을 권면하고 있다.

3) 모든 면에서 선한 행동을 보이라는 권면(2:14-4:8) 피해야 할 거짓교사들의 본보기와 따라야 할 사도 바울의 본보기가 제시되고 있다. 속되고 헛된 것(2:16)-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는 말(2:18)-허탕한 이야기(4:4)는 거짓 교훈을 말하며, 이에 반해 성경은 "영감된"것, 유익된 것으로 성경을 말하고 있다(3:16).

디도서

그레데 교회가 상당히 혼란스럽고 믿음의 선한 행위가 없었기에 교회 내의 질서 확립과 바른 신앙관의 정립이 시급한 상태였다(1:10-13 / 2:1-10). 이 그레데 교회에서 목회하는 디도에게 올바른 권면과 격려가 필요하였다.

1)인사 /1:1-4

2) 성직제도 / 1:5-9 감독과 장로의 자격 및 그들에 대한 지시
* 두 직분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점을 살펴볼 수 있다.

3) 거짓 교훈에 대한 공격 / 1:10-16

4) 올바른 기독교적 행동에 대한 권면 / 2:1-3:7 표준적인 도덕 교훈이 나온다.

5) 거짓 교훈에 대한 또다른 공격 / 3:8-11

6) 개인적 언급 / 3:12-14

7) 마지막 인사 / 3:15



목회서신의 5 가지 주제들

목회서신은 바울의 말년에 자신의 선교팀의 일원이었다가 도움이 필요한 교회들로 파송되었던 디모데와 디도를 위해 바울이 쓴 서신들이다. 바울 자신이 먼저 많은 교회를 세우고 돌보았던 목회자로서 경험을 후배 목회자들에게 나누고 교회의 당면한 현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알려주기 위해 쓴 것이다.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가 그 서신들인데 목회에 관한 바울의 신학을 가장 잘 엿볼 수 있기 때문에 목회서신이라 불리운다. 시기와 저작 동기가 비슷해서 서로 다른 세 권의 편지에 쓰여져 있지만 공통된 내용들이 많이 나타난다. 이 공통된 내용들을 크게 다섯 가지, 교회 직분자의 조건, 이단에 대한 대처, 공적인 예배에 대한 지침, 목회자의 사역과 영성, 참된 신자의 경건으로 묶어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교회의 직분자의 조건

목회 서신의 중요 주제 중 하는 교회의 직분을 맡을 자의 조건이다. 왜 사도 바울은 목회 서신에서 직분자의 조건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일까? 이는 목회 서신을 쓰게 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바울이 목회서신을 쓰게 된 배경 가운데 하나는 에베소 교회와 그레데 교회 가운데 이단의 거짓 가르침이 큰 위협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단의 거짓 교리를 물리치려면 탁월한 신학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물론 교리에 대한 무장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본래 이단은 바이러스처럼 늘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건강한 교회는 이단 바이러스를 능히 물리칠 수 있다. 반면 건강하지 못한 교회는 이단 바이러스에 맥을 못 추고 넘어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건강한 교회는 무엇보다도 직분을 맡은 자들이 건강한 교회이다.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먼저 경건의 바른 모범을 보여줄 때 그들의 영향력이 교회 구석 구석에까지 미쳐서 교회의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직분을 맡을 사람을 신중하게 세워야 한다. 문제는 그 기준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직분자를 세울 때 세속적인 기준을 그대로 교회 안에 적용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된다. 세속적인 기준이란 나이, 재산 정도, 학벌, 현재 직위, 인맥 관계, 능력 등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교회들이 이런 세속적인 기준에 의해 직분자를 실제로 세우곤 한다. 그 결과 교회의 건강성을 잃게 되고 교회 답지 못한 교회로 전락하는 모습을 많이 목격한다. 우리는 직분자를 세울 때 바른 기준에 대해서 목회 서신을 통해 가이드를 얻을 수 있다.

디모데전서 3:1-13은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 대해서, 디도서 1:5-9은 장로와 감독의 자격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이 중에서 장로와 감독은 사실상 같은 직분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장로는 유대 전통에서 온 이름이고 감독은 헬라 전통에서 온 이름으로 보이나 역할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본문들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직분을 맡을 사람에 대한 성경적 기준은 무엇인가?

첫째로 가정을 잘 다스린 사람이어야 한다. 모든 직분에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이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조건이다. 이 말은 일부일처제 원칙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직분자는 한 명의 아내에 대한 신실함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단, 이 말이 재혼을 한 사람을 배제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또한 직분자는 자녀를 바르게 양육한 사람이어야 한다. 바울은 왜 직분자에게 가정 생활의 열매를 요구하는 것일까? 이는 가정과 교회 간의 연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집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형제 자매라는 호칭을 통해 성도 간의 관계가 가족 관계임을 나타내었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열매를 맺은 사람만이 교회 공동체에서도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가정 생활이 엉망인데 교회 직분자로 잘 섬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둘째로 절제할 수 있는 품성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도 리더에게 도덕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바울이 교회의 직분자의 자격 조건으로 세우는 도덕성의 조건은 매우 엄격하고 수준이 높다. 여러 도덕적 자질 중에서도 특별히 바울은 절제하는 능력을 지도자의 조건으로 꼽고 있는 듯 하다. 방탕하여 술을 즐기거나 쉽게 화를 내어 다투는 사람은 곤란하다. 왜 하필 바울은 절제하는 능력에 중요성을 부여할까? 이는 지도자가 충동적이어서 한 번 사고를 내면 그 일이 자기 개인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게 큰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신중하고 절제하는 능력을 우선으로 여긴다. 한 마디로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지도자의 허물은 공동체의 분열과 상호 비난의 꼬투리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셋째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목회서신의 본문은 지도자는 일단 결혼하고 어느 정도 성장한 자녀를 둔 사람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이를 보면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새로 입교한 사람도 적합하지 않다고 않다. 이 두 가지 조건이 말해주는 바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여러 모로 검증이 된 사람, 누가 보더라도 성숙을 이룬 사람이 직분자로 적합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또한 깨끗한 양심을 갖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조건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재리의 유혹에 취약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직분자는 나이가 들었더라도 물질의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를 부패로 이끌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람은 한 마디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모든 직분에 대한 요구 사항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 중에서 감독의 직분에는 가르치는 일을 잘 할 것을 요구한 반면에 집사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감독이나 장로의 직분은 말씀을 가르치는 직무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말씀을 잘 가르치는 일은 장로나 감독 직분에 합당한 사람에게 부여된 은사이다. 앞에서 능력보다는 도덕성을 위주로 기준을 제시했지만 또한 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직분을 맡게 되면 그 직분에 합당한 역할을 수행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무능한 사람은 아무리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 할지라도 공동체 전체에 해악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2. 이단에 대한 대처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바울이 목회 서신을 보낸 교회들의 당면한 위협은 이단 세력이었다. 바울의 선교팀은 일단 교회를 세운 후에는 그 교회를 지역 지도자에게 맡기고 다른 지역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이동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설립되었던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있을 때 다시 선교팀의 동역자를 파송하기도 했다.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를 각각 에베소와 그레데에 파견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이단에 잘 대처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당시에 교회를 위협하던 이단은 어떤 종류의 이단이었을까?

첫째로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신화이다. 디모데전서 1:3-11, 디도서 1:10-16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 교회의 이단은 유대교에 뿌리를 두었거나 그 영향을 깊숙하게 받은 이단이었다. 유대교의 영향을 크게 두 가지 방면에서 받은 것으로 보인다. 먼저는 율법주의이다. 구원의 조건으로 믿음 외에 특정 율법 준수 행위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은 물론 할례였다. 이단의 교사들은 자신들의 율법 선생으로 자처했다. 그러면서 마치 바울이 성경과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것처럼 왜곡하면서 바울이 가르치지 않은 율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성도들을 미혹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을 뿐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바리새인으로서 교육을 받은 바울이 가진 율법에 대한 이해와 지식의 깊이는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이런 바울이 보기에 율법 선생을 자처하는 거짓 교사들이 얼마나 가소롭게 보였을까 싶기도 하다. 유대주의에 의한 두번째 영향은 신화에 지나친 관심으로 나타났다. 유대교 특별히 신구약 중간기에 유대교는 구약 성경에 기반을 하되 자신들의 상상력이 가미된 수많은 이야기들이 범람하던 종교였다. 그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호기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잡다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구원의 핵심과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 마디로 겉으로 보기에만 화려할 뿐 알맹이는 없는 허탄한 이야기들이었다. 거짓 교사들은 이런 허탄한 이야기들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허탄한 이야기들을 단순한 흥미거리로 취급한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겠으나 이 신화들을 지속적으로 탐닉하게 되면 결국에는 정작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일들을 간과하게 되고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된다는 점에 있다.

둘째로 금욕주의이다. 디모데전서 4:1-5을 보면 거짓 교사들은 특정 종류의 음식물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고 또한 결혼을 하지 말 것을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바로 식욕과 성욕인데 이단 교사들은 일종의 금욕주의를 가르쳤던 것이다. 이 같은 금욕주의는 본래 헤브라이즘 전통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영과 육의 극단적인 이원론을 가졌던 헬레니즘 전통 속에서는 익숙한 것이다. 바울 당시보다 후기에 나타나기는 했지만 영지주의가 바로 이 같은 헬레니즘 전통에 기반한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를 위협하던 이단 세력은 유대교의 강한 영향력 아래 있었지만 동시에 헬레니즘의 이원론 전통도 일정 부분 흡수한 혼합주의였음을 알 수 있다. 근원이 어찌되었던 금욕주의는 의외로 사람들에게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금욕적인 룰에 따르는 사람들은 무언가 특별한 사람, 남들보다 더 경건한 사람으로 쉽게 간주되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욕주의 추종자들은 남다른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고 실제로 주변에서도 대단한 사람들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금욕주의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전면으로 부인하는 매우 잘못된 가르침이었다. 하나님은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와 물질 세계도 선하게 창조하신 분이시다. 욕망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치 않는 욕망의 무한 추구가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단의 거짓 교사들은 금욕주의를 통해 오히려 그들의 은밀한 욕구를 만족시키려 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로 탐욕과 쾌락의 추구이다. 디모데전서 6:3-10, 디모데후서 3:1-9을 통해서 보면 이단의 교사들은 경건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속으로는 매우 탐욕적이며 쾌락을 추구하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현재의 이단 사이비 교주들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단 교사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순한 양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마음 속에는 양들을 잡아 먹고자 하는 늑대 같은 본심을 감추고 있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실은 재물이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접근하지만 확실하게 자기 편 사람이 되었다고 여기는 순간에 본색을 드러내서 재물을 갈취한다. 그야말로 벗겨 먹을대로 벗겨 먹어서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을 때까지 이들은 결코 한 번 물은 먹이를 놓으려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쾌락을 추구하기도 한다. 특히 음란한 쾌락을 남몰래 추구한다. 이단 교사들은 자신들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거나 혹은 종교적 명분으로 포장된 종교 의식을 통해서 이를 은밀하게 추구한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전혀 없는 얼마나 세속적인 인물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단에 미혹된 사람들의 눈에는 그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이단에 대한 대응책으로 디모데전서 1:18-20에서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한다. 목회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기 양떼를 먹이고 돌보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외부의 위협으로 양떼를 지키는 것이다. 전자의 영역에서는 목회자가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모습이어야 하겠지만 후자에서는 주먹을 불끈 쥔 용기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어야 한다. 이단은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교묘히 사람들을 속여서 잡아 먹는 원수들이기 때문이다. 이단의 정체를 드러내고 그들을 교회 공동체로부터 추방해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모함과 오해와 핍박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회자는 이런 힘든 과정을 감수하면서라도 이단으로부터 자기에게 맡겨 주신 양떼들을 지켜내야 한다.

3. 공적인 예배에 대한 지침

바울 당시의 교회에는 두 종류의 예배 모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각 가정 교회별로 모이는 모임 속에서의 예배이다. 이 예배는 좀 더 친밀하고 일상적인 예배였을 것이다.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예배가 드려졌을 것이다. 둘째는 온 교회가 모이는 예배이다. 특정 지역 내에서 모든 가정 교회들이 한 자리에서 모이는 예배이다. 이와 같은 예배는 다수의 인원이 참석하기 때문에 좀 더 다양한 은사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대신에 가정 교회의 예배에 비해 좀 더 공적인 성격이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온 교회가 드리는 공예배에 있어서 질서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관심은 고린도전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뿐만 아니라 목회 서신에서도 이 같은 공적인 예배에서의 지침에 대해서 일부 언급하고 있다. 그 내용은 디모데전서 2:1-15에 잘 나타나 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공예배의 지침은 무엇인가?

첫째는 공예배에서 기도, 특히 중보기도의 필요성이다. 바울은 공예배의 기도에 있어서 권력자들에 대한 중보기도를 요청한다. 이 말은 여러 모로 오해하기 쉬운 말씀이다. 마치 교회가 친정부 혹은 친권력자 편에 서야한다는 말씀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 당시 권력자들로부터 교회가 얼마나 큰 핍박을 받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런 해석은 전혀 맞지 않는다. 교회가 권력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바울의 당부는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어야 선교와 신앙 생활에 있어서 방해를 받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라는 뜻이다. 결코 현 권력자들의 통치를 옹호하거나 지지하기 위해 기도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정치와 사회가 안정이 되려면 하나님의 통치 원리인 공평과 정의, 인애와 자비에 따른 통치를 권력자들이 행해야 한다. 권력자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할 때 바로 이와 같은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남자들은 분쟁하지 말고 기도에 힘써야 한다. 남성들은 여성들에 비해 천성이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다 보니 공예배 모임에서 작은 일에 분노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툼을 일으키기 쉽다. 당시의 예배는 지금의 예배보다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였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자들은 성내고 다투기보다는 기도하기에 힘써야 한다. 특별히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권한다. 손을 들어 기도하는 모습이 당시 전형적인 기도의 자세이었던 것 같다. 다툴 때도 역시 손을 들 때가 많다. 똑같이 손을 든다 하더라도 기도하기 위해서 손을 드는 것과 다투기 위해 손을 드는 것은 천양지차이다. 기도하는 남자는 아름답다. 남자다운 남자는 싸우는 남자가 아니라 손을 들어 기도하는 남자이다.

셋째로 여자들은 정숙해야 한다. 복음이 전파된 곳마다 뚜렷한 변화의 표지가 남녀 차별의 철폐이다. 우리 나라만 해도 조선 시대 남존여비 사상을 깨트리고 새 시대 연 장본인들이 바로 선교사들이었다는 점을 봐도 그렇다. 그런데 이렇게 남녀 차별이 철폐되었다고 해서 여자들이 지나치게 공예배 가운데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다 보면 실족하는 남성 성도들이 나올 수 있었다. 혹은 보수적인 여성 성도들에게도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 가운데 여성이 교회에서 가르치거나 의사 결정을 주도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아 아예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사도 바울은 공예배에서 여성들은 잠잠히 있도록 지침을 주었다. 차별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하지만 서로에게 종노릇하라는 바울의 일관된 입장의 피력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바울은 여자들이 소박하게 차려 입고 공예배에 나오도록 권면한다. 공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들은 그들의 경제적 수준이 각기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부유하겠지만 상당수는 가난하다. 만약 부유한 성도가 화려하고 값비싼 옷을 차려 입고 공예배에 나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가난한 성도들은 위화감과 위축감이 들어서 가까이 가기 힘들 것이다. 결국 하나됨과 가족 공동체성은 상실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공예배에서는 최대한 검소하고 소박한 옷차림을 할 필요가 있다. 남녀 공히 해당되는 사항이겠지만 특히 여자에게 더욱 적용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여자에게는 옷차림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가 남자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외적인 아름다움보다 더욱 아름다운 것은 내적인 아름다움이다. 선한 행실과 인격과 거짓 없는 믿음만큼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4. 목회자의 사역과 영성

목회 서신은 사도 바울이 선배 목회자로서 후배 목회자들에게 남긴 충고이자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목회 서신을 통해서 목회자의 사역과 영성에 대한 풍성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목회 서신에서 바울은 목회자를 그리스도의 일꾼, 그리스도의 군사,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로 정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 디모데전서 4:12-16, 디모데후서 1:3-18, 디모데후서 2:14-26 등이 말씀을 보면 바울은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다. 여기서 일꾼이라는 말은 청지기 혹은 사명자와 비슷한 개념이다. 즉 목회자는 그리스도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사명을 부여 받은 존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목회자에게 갖추어야 할 영성은 무엇인가? 맡은 일에 대한 충성과 신실함일 것이다. 가장 나쁜 일꾼은 게으른 일꾼이다. 그보다 더 나쁜 일꾼은 부패한 일꾼이다. 목회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자는 부지런해야 한다. 전심전력해야 한다. 다른 일에 한눈 팔지 말고 목회에 전념해야 한다. 목회자는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해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목회서신에서는 지키라는 말로 이를 표현하고 있다. 또 일꾼에게 있어서 최고의 보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에게 일을 맡긴 주인에게서 인정과 칭찬을 받는 일이다. 목회자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인정을 받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인정받는 일꾼이 되기 위해 사도 바울은 특히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큰 그릇이든 작은 그릇이든지 더러운 그릇은 쓸 수 없다. 목회자는 도덕성에 있어서 치명적인 결함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능력이 많고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도덕적 결함과 하자가 있는 사람은 목회자로 합당하지 않다. 부도덕한 목회자는 주께서 쓰실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바울은 디모데전서 6:11-16, 디모데후서 2:1-13에서 사역자를 군인에 비유한다. 군인의 특징은 자기 생활이 없다는 점이다. 지금도 군인들은 몇 년에 한 번 씩 수시로 근무지를 이동한다. 이 때문에 군인 자신에게 고통이 있고 무엇보다도 군인 가족에게 고난이 많다. 그러나 이는 군인으로서 감수할 수 밖에 없는 고난이다. 목회자에게 있어서도 고난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고난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감수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영성 중에 중요한 것은 인내이다. 인내가 없으면 끝까지 사역자의 길을 갈 수 없고 사역의 영광을 맛보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사는 또한 싸우는 사람이다. 항상 적을 상대하는 직업이 군인이다. 마찬가지로 목회자 역시 수많은 대적들 가운데서 믿음이 선한 싸움을 하는 사람이다. 앞에서 말한 이단의 세력이 그 대적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단만이 싸움의 상대는 아닐 것이다. 목회자는 사람들을 권면하여 복음을 따르도록 책임과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사람들 속에 있는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과 싸워야 한다. 그래야만 성도들의 경건과 믿음의 성숙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적은 바로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이다. 자기와 싸우지 않고서는 누구와도 싸울 수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영성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승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 디모데후서 3:10-4:8, 디도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서 디모데와 디도에게 강조한다. 목회자는 무엇보다 말씀을 수종드는 사람이다. 이 일을 위해 은사를 부여 받았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다른 무엇보다 말씀에 탁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의 세력도 말씀의 검으로 물리칠 수 있다. 성도들이 경건에 이르도록 양육하는 수단 역시 말씀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바르게 전하여지지 않은 성도들이 결코 성숙에 이를 수 없다. 건강한 교회는 목회자에 의해 안전하고 풍성한 말씀이 공급되는 교회이다. 목회자는 그러므로 그 누구보다 말씀 연구에 전심전력하여야 한다. 말씀 속으로 깊숙이 침잠해 들어가야 한다. 목회자의 영성의 핵심은 말씀의 영성이다.

5. 참된 신자의 경건

목회 서신에서 공통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신자의 참된 경건이다. 목회자의 역할은 성도들이 참된 경건에 이르도록 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참된’이라는 말이 붙은 것은 거짓된 경건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는 경건이라고 불렀다. 거짓 교사들과 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경건이 바로 거짓된 경건이다. 거짓된 경건은 겉모습만 경건해 보일 뿐 사실 상 속이 비어있는 깡통 같은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에서 참된 경건의 표지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다른 바울 서신에서도 일관하게 말해 왔던 대로 바로 사랑이다. 또한 이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강조하셨던 내용이기도 하다. 경건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경건의 능력이다. 그러나 이 사랑이 구체적인 삶의 정황 속으로 들어가면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면 디모데전서 6장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물질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그 외에도 직분자에 대한 조건, 혹은 목회자가 힘써야 할 직무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 등등 목회 서신 전반에 걸쳐 참된 경건에 대해 선한 행실, 도덕성, 절제, 깨끗한 양심 등등 다양한 언어들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참된 경건은 어디서부터 올 수 있는 것일까?

첫째로 참된 경건은 바른 교훈에 의해 지도를 받은 삶이다. 경건은 바른 교훈에서부터 온다. 이단들의 거짓된 가르침은 참된 경건을 낳지 못한다. 그저 경건을 흉내낼 수 있을 뿐이다.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면 성도들은 그 말씀에 의해 양육을 받게 된다. 바른 말씀에 의해 양육된 성도들은 내면에 변화를 받아 점점 성숙에 이르게 되고 그 열매를 외적으로도 나타내게 된다. 그것이 경건이다. 바른 교훈의 선포는 말씀 사역자의 의무라면 바른 말씀을 분별하게 듣는 것은 모든 성도들의 의무이다. 이단들이 교회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려면 목회자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 바른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한 그 말씀을 자주 듣는 것도 중요하다. 아무리 영양가가 좋은 음식이라 할지라도 띄엄띄엄 먹는다면 아이가 자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성도는 자랄 수 없다. 또한 듣기만 하고 끝난다면 역시 자랄 수 없다. 먹은 것을 완전히 소화시켜야 영양분이 온 몸에 퍼질 수 있듯이 성도가 참된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는 받은 바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의 삶에 이 말씀을 적용시키려는 노고가 필요하다.

둘째로 참된 경건은 은혜에 합당한 삶이다. 이는 디도서 2장에 잘 나타나 있다. 경건에 이르게 하는 원동력과 에너지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은혜로부터 온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은혜를 아는 만큼 경건해진다. 은혜를 모르면 참된 경건은 없다.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율법주의자들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지만 그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드러내주지 못하는 말씀이었다. 인간의 공로와 의를 내세우는 말씀은 힘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킨다. 경건은 내 편에서 하나님을 향해 무엇인가 하는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먼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은혜를 받은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강력한 동기를 얻는다. 그 동기가 성도를 참된 경건으로 이끌어 간다. 이 은혜의 크기를 아는 것이 경건의 시작이요 끝이다.

셋째로 참된 경건은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된 삶이다. 이는 디도서 3장에 언급되어 있다. 새 언약 시대의 특징은 성령의 내주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중생하게 하시고 중생하게 하신 후에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며 우리 속에서 내주하시면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시고 우리에게 말씀이 깨달아 알아지도록 역사하시며 우리의 생각과 삶을 지도하시고 인도하신다. 성령님에 의해 이끌어지는 삶이 경건한 삶이다. 성령의 열매가 경건이다. 성령 충만함을 입을 때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다. 거짓된 경건은 여전히 성령에 속하지 않고 육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불경건이다. 자신의 힘으로 경건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령께서 추동하시는 그 힘에 의해 경건에 이를 수 있다. 또한 성령에 의한 경건은 자기 혼자 이루어가는 일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공동체에 각기 다양한 은사를 주신다. 이 은사들을 통해 성도들은 경건에 이르는 길에서 크고 작은 도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령의 임재와 은사가 나타나는 예배를 통해서 참된 경건을 갖춘 성도로 빚어지게 된다.

지금까지 목회 서신에 나타난 공통 주제 다섯 가지를 살펴 보았다. 비록 지금으로부터 이 천년 전에 한국 땅도 아닌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을 목회하던 디모데와 디도에게 쓰여졌던 편지이지만 놀랍게도 지금 여기의 현실에도 정확하게 부합하고 필요한 말씀임을 새삼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 교회 역시 각종 이단들, 거짓된 가르침, 잘못된 신학에 의해 오염되고 공격받고 있다. 그러나 누구를 비난하고 탓하고 있을 수 만은 없다. 부지런히 내 자신을 연단하여 주님께 인정 받을 수 있는 일꾼이요 그리스도의 군사로 준비되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하이델베르그 제16문, 17문, 18문, 19문

16문 : 중보자는 왜 참인간이고 의로운 분이셔야 합니까?

답 : 하나님의 의는 죄지은 인간이 죄값 치르기를 요구하나①, 누구든지 죄인인 사람으로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값을 치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②


17문 : 중보자는 왜 동시에 참 하나님이셔야 합니까?

답 : 그의 신성(神性)의 능력으로③,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④ 그의 인성(人性)에 짊어지시며⑤, 또한 의와 생명을 획득하여 우리에게 돌려주시기 위함입니다.⑥


18문 : 그러나 누가 참하나님이시며⑦ 동시에 참인간이고⑧ 의로우신 그 중보자입니까?⑨

답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⑩, 즉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신 분입니다.⑪


19문 : 당신은 이것을 어디에서 압니까?

답 : 거룩한 복음에서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을 처음에 낙원에서 친히 계시하셨고⑫, 후에는 족장들과⑬ 선지자들을⑭ 통해 선포하셨으며, 또한 율법의 제사들과 다른 의식(儀式)들로써 예표하셨고⑮, 마지막에는 그의 독생자를 통해 완성하셨습니다.⑯


①. 사 53:3-5; 렘 33:15; 겔 18:4, 20; 롬 5:12,15; 고전 15:21; 히 2:14-16

②. 시 49:7-8; 히 7:26-27; 벧전 3:18

③. 사 9:6; 롬 1:4; 히 1:3

④. 신 4:24; 시 130:3; 나 1:6

⑤. 사 53:4,11; 요 10:17-18

⑥. 사 53:5,11; 54:8; 요 3:16; 행 20:28; 고후 5:21; 벧전 3:18

⑦. 렘 23:6; 말 3:1; 롬 8:3; 갈 4:4; 요일 5:20

⑧. 눅 1:42; 2:6-7; 롬 1:3; 빌 2:7; 히 2:14, 17; 4:15        

⑨. 사 53:9,11; 렘 23:5; 눅 1:35; 요 8:46; 히 4:15; 7:26; 벧전 1:19; 2:22; 3:18; 요일 3:5

⑩. 마 1:23; 눅 2:11; 요 1:1,14; 14:6; 롬 9:5; 딤전 2:5; 3:16; 히 2:9        

⑪. 고전 1:30; 고후 5:21

⑫. 창 3:15

⑬. 창 12:3; 22:18; 26:4; 28:14; 49:10

⑭. 사 42:1-4; 43:25; 49:6; 52:13-53:12; 렘 23:5-6; 31:32-33; 미 7:18-20; 요 5:46; 행 3:22-24; 10:43; 롬 1:2; 히 1:1                

⑮. 레 1-7장; 골 2:17; 히 10:1,7

⑯. 롬 10:4; 갈 3:24; 4:4-5; 골 2:17; 히 1:1-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창조, 타락, 십자가, 부활, 재림)


1 창조

성경은 이 세상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시작과 끝이 있음을 얘기합니다. 성경의 시작은 시간의 시작 즉 태초에 하나님이 이 세상 만물을 만드셨음을 선언하며 시작합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은 완벽했으며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는 어떠한 흠도 없었고, 어떠한 저주도 없었으며, 그 저주로 인한 죽음도 없었던 하나님 스스로 보시기에 아주 좋은 아름다운 세상이었습니다.

그 세상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만드시고 그들과 교제 하셨습니다. 그 사람에게 죄가 없었기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어떠한 거리낌도 없는 사랑과 우정 그리고 교제가 가능했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허락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서 지음을 받았고, 에덴 동산과 이 세상의 모든 별들, 강과 바다, 동물들, 식물과 그 열매들은 인간을 위해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셨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함께 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하나님을 위해 지어졌습니다.

이는 그분에 의해 모든 것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라.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왕좌들이나 통치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창조되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노라. <골로새서 1:16>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며 또 자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그분께서  <히브리서 2:10a>

오 주여, 주는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시오니 주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또 그것들이 주를 기쁘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나이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4:10>

인간은 이 세상의 왕이었고,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있었지만, 오직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실과만은 먹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실과를 먹을 때, 반드시 죽게 될 것을 경고 하셨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은 네가 마음대로 먹어도 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6~17>

 

2 타락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살고 있을 때, 뱀 곧 사탄이 하와에게 접근합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하나님이 모든 나무의 열매를 다 못 먹게 하셨어?"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선악과를 제외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어도 된다고 하셨지만, 모든 나무의 열매를 다 못먹게 하셨는지를 물어봅니다. 그리고는 거짓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못먹게 하는 이유는 너희의 눈이 열려서 선악을 구분할 수 있는 하나님처럼 될까봐 그러는거야."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이 땅에 왕이 되게 하셨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지만, 하와의 마음에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를 먹었고, 아담도 함께 먹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반란 이었습니다. 이 땅의 왕인 아담과 하와에게 필요한 유일한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 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삶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창조주 되신 하나님의 것 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유일한 법을 어김으로 하나님의 소유였던 그들의 삶을 그들이 훔쳤습니다. 

범죄의 결과는 끔찍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던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스스로의 수고로 살아남았어야 했으며, 생명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죽음이 그들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처럼 그들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 같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더 이상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5:2> 

 또한 이 세상 역시 인간의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 땅에 저주로 인해 모든 피조물들은 고통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죄로 인해 일어난 일 이었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토록 고통 중에 땅의 소산을 먹으리라. <창세기 3:17>

또 전체 창조물이 지금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르는 줄을 우리가 아나니 <로마서 8:22>

그 어떤 저주 보다도 끔찍한 저주는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것 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속성상 죄가 있는 우리들과 함께 하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끊어졌고,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의 반역자가 되어 하나님과 완전히 등진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 ... <로마서 5:10>

타락 이전에 선을 행할 수 있었던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 합니다. 이제는 사탄이 우리의 마음에 죄를 넣지 않아도 우리 안에 죄가 생겨 하나님도 알아 볼 수 없고, 함께 할 수도 없게 됩니다. 그리고 선의 기준 되시는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써 만드신 이 세상의 법이 아닌 인간의 자의적인 선악 기준을 통해 법을 정하고 그것을 옳다고 여기게 됩니다.

죄가 있으면 심판하셔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항하여, 하나님을 적으로 규정하고 대놓고 반란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따른 인간의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방법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배제하고 유토피아를 만들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하나님이 없는 유토피아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에녹 성을 쌓은 가인, 바벨탑을 쌓은 니므롯, 공산주의 체제를 다진 스탈린, 모든 사람이 주인이 되자는 민주주의,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자본주의 까지 어떠한 방법과 시스템도 인간을 진정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저주받은 이 세상에서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천국을 만들어 보려 했지만 그 모든 노력은 실패했습니다.

3 십자가

그럼에도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스스로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을 입고 인간을 대신해서 모든 죄를 뒤집어 쓰는 것 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분명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입니다. 인간의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어떠한 소망도 없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란을 일으킨 모든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아야 마땅 합니다. 인간은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 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누군가가 그 죄값을 대신 받겠다고 나선 것 이었습니다. 그것은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린 것은 유대인 지도자들의 의지가 아니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심판을 내린 것은 빌라도가 아니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은 것 이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것을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가 복음 15:34>

반역자가 달리는 십자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가 달리는 나무에서 예수님은 우리 대신에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21:23>

이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 십자가에 동참하는 사람들과 연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죄로 인해 교제할 수 없었던 하지만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과 교제할 수 있게 되셨습니다. 그 둘 사이를 연결한 것은 그 둘을 갈라 놓았던 벽을 허문 것은 십자가의 사랑 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화평이시니라. 그분께서 둘을 하나로 만드사 우리 사이의 중간 벽을 허무시고 <에베소서 2:14>

이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루어지는 것 입니다. 이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믿음을 얻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그래서 예수님과 하나됨으로 얻을 수 있는 것 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갈라디아서 2:20>

나는 이제 죄와 상관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죄를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을 제거하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알거니와 그분 안에는 죄가 없느니라. 누구든지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누구든지 죄를 짓는 자는 그분을 보지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한 1서 3:5~6> 

4 부활

하지만 우리의 구원 이전에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예수님께서 세상의 저주인 죽음 곧 사망을 이길 수 있으시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지시고도 죽음을 이겨내실 수 있으신가의 여부 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실 수 없었다면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실 능력이 없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신다면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도 생명으로 나아올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지 못하신 것이 되어 여전히 우리의 죄를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는 헛된 믿음을 가진 이 세상에서도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결국은 지옥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 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아니하셨으면 너희의 믿음이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너희 죄들 가운데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도 멸망하였느니라. 만일 우리가 이 세상 삶을 사는 동안에만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갖는다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가장 비참한 자니라. <고린도전서 15:17~19>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3일째 되는 날, 예수님의 시신을 보러 갔던 여인들은 예수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곳에서는 천사들이 남아 있어, 그 여인들에게 소식을 전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느냐?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아니하고 일어나셨느니라." <누가복음 24:5~6>

그러므로 부활은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가장 커다란 승리의 증거 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되었다는 확신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죽은자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음을 목격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 묶인바 되어 그 분과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5 재림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승리하였습니다. 우리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이 하나님께서 승리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원수를 물리치셨음으로 죄를 이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상대명령을 내리고 우리의 거처를 준비하러 다시 올라 가셨습니다. 그 명령은 성령을 받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것 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졌을 때, 주님은 다시 오실 것 입니다.

또 내가 보니 다른 천사가 하늘 한가운데로 날아가는데 그가 땅에 거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족속과 언어와 백성에게 선포할 영존하는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 그분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으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들을 만드신 분께 경배하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4:6~7>

 

예수님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를 잊어버리고 비웃을 때 다시 오실 것 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이 재림을 조롱할 때 다시 오실 것 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씻지 않은 사람들,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반란을 일으키고, 자신의 죄로 인해 받는 마땅한 고통으로 하나님을 저주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 입니다.

이르되, 그분께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모든 것이 창조의 시작 이후에 있던 것 같이 그대로 계속되느니라, 하리니 그들은 이 사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고 또 땅이 물에서 나와 물 가운데 서 있는 것을 일부러 알려 하지 아니하느니라. <베드로후서 3:5~6>

또 무게가 각각 일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에서 나와 사람들 위에 떨어지매 사람들이 우박의 재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모독하니 이는 그것의 재앙이 지극히 컸기 때문이더라. <요한 계시록 16:21>

주님이 다시 오시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완벽하게 처음 창조하셨던 대로 다시 돌아갈 것 입니다. 모든 만물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회복 하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창조물이 간절히 기대하며 기다리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라. <로마서 8:19>




2020 오늘의 묵상 자료(3월)


2020 오늘의 묵상(3월)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3

1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우한 폐렴(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19)”의 영향으로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주일날 예배당에 모이지 못하고 동영상으로 또는 인터넷으로 각 가정에서 예배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예배를 어디에서 드려야 할까요?
사마리아 여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독서(讀書)는 앉아서 하는 여행(旅行)
여행(旅行)은 서서하는 독서(讀書)
예배(禮拜)는 앉아서 하는 천국(天國) 방문(訪問)
오늘도 예배(禮拜)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天國)를
경험(經驗)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祝福)합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3

2

데살로니가전서 5:1∼28

영과 혼과 몸(23절)

3

3

데살로니가후서 1:1∼12

심판의 표(5절)

3

4

데살로니가후서 2:1∼17

멸망의 아들(3절)

3

5

데살로니가후서 3:1∼18

사랑과 인내(5절)

3

6

디모데전서 1:1∼20

괴수(魁首)(15절)

3

7

디모데전서 2:1∼15

중보(中保)(5절)

3

8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3월 2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5:1∼28
♦ 묵상을 위한 주제 : 영과 혼과 몸(23절)
♦ 성구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사순절 제5일 아침을 맞이합니다.
오늘도 새 날을 맞이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감사합니다.
어제 밤에도 얼마나 많은 사건과 사고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문을 넘어갔습니다. 이런 와중(渦中)에도 이렇게 건강하게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귀합니까?

건강(健康)이란 육체적인 것만 아니라 영(靈, Spirit, πνεῦμα)과 혼(魂, Soul, ψυχὴ)과 육(肉, Body, σῶμα)의 창조적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창조적 조화란 최초의 사람 “아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셨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 하나님과의 건강한 관계는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창조적 조화는 하나님과의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죄가 인간에게 들어왔으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죽음 이후에는 영생(永生)과 영벌(永罰)의 갈림길에서 영생(永生)의 자리를 확보한 것입니다.

영생의 자리를 확보하는 방법을 영과 혼과 육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영과 혼과 육을 흠 없이 보존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경건의 훈련에 의해서 영과 혼과 육을 흠 없이 보존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영(靈)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동물의 값은 죽었을 때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소고기 한 근의 가격과 돼지고기 한 근의 가격은 시장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지만 사람의 고기는 시장에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판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동물의 가치는 고기 값이 아닙니다. 그 가치는 “영(靈)”에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태복음 16:26) 

사람의 목숨이 천하보다 값진 것은 동물의 고기 값보다 사람의 영(靈)의 가치를 그만큼 귀하게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3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데살로니가후서 1:1∼12
♦ 묵상을 위한 주제 : 심판(審判)의 표(標)(5절)
♦ 성구 :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심판(審判)이란 “살필 심(審)” “판단할 판(判)”
표(標)란 “표할 표(標)”

심판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살펴봅니다.
1. 어떤 일이나 상황, 문제 따위를 자세히 조사하여 잘잘못을 밝힘.
2. 경기 등에서, 규칙의 적부, 경기의 우열이나 승부를 판정하는 일.
3. 사람이 죽은 후나 역사의 종말에 가서 인간이나 세상의 잘잘못을 신이 판정함.

심판(審判)의 표(標)를 헬라어로 분석해 봅니다.
심판(κρίσεως)이란 “κρίσις(krisis)”(judgement)
표(ἔνδειγμα)란 “ἔνδειγμα(endeigma)”(proof, indication)    
심판의 표란 “심판의 증거” 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성경은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고 합니다(히브리서 8: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심판의 표”는 “온갖 박해와 고난을 참고 견디며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세상에서 무병장수 및 만사형통과 같은 삶을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심판의 표는 세상에서 온갖 핍박과 박해 그리고 고난을 받을 때에도 믿음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동방 우스 땅에 욥은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잃고 심지어 온 몸에 악한 피부병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과한 후에 욥의 재산은 갑절이 되었고 잃었던 자녀들을 다시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순절 제6일을 맞이합니다.
사순절이란 고난의 주님을 묵상하며 고난을 피하는 믿음이 아니라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회복하고 강화시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고난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빛을 드러낼 수 있는 믿음의 보석을 다듬어 부활의 아침에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으로 굳게 일어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4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데살로니가후서 2:1∼17
♦ 묵상을 위한 주제 : 멸망(滅亡)의 아들(3절)
♦ 성구 :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멸망의 아들”을 영어 성경(NIV)에서 “the man of lawlessness(무법의 아들)” 이라고 번역합니다. 과연 무법의 아들이란 어떤 존재를 말할까요? 

무법의 아들이란 적그리스도를 말합니다(요한일서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적그리스도(ἀντίχριστος)란 헬라어에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존재”
예수님의 행하시는 일을 대적하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대신하는 존재”
예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는 것은 마지막 시대를 알려주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적그리스도를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존재(요한일서 2: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둘째는 성육신 사건을 부인하는 존재(요한이서 1:7)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적그리스도는 무신론자들이 아닙니다.
복음을 외치되 거짓 복음을 가르치는 자들 또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린도후서 11:4).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린도후서 11:13∼15).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태복음 7:15).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복음 7:21∼23).

주의 재림(再臨) 때까지 적그리스도는 자주 나타날 것입니다.
분별의 영을 기도하며 사이비(似而非)와 이단(異端)을 구분하여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주의 백성들로 거듭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5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데살로니가후서 3: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사랑(愛)과 인내(忍耐)(5절)
♦ 성구 :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믿음이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2절)
왜냐하면 성도들이 주의 재림을 기다리면서도 재림의 날이 희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날마다 “악한 사람에게서 건져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과 인내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명한 것을 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것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어떻게 기다려야 할까요?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는 “사람을 시간”이라 하고 “하나님을 영원”이라 하며 사람과 하나님을 비교했습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영원한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시간인 사람이 어떻게 그 차이를 극복하고 만날 수 있을까?
영원하신 하나님 편에서 시간인 사람 편으로 스스로 다가와 만날 때 그 만남은 가능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태어난 사건 자체가 바로 영원이 시간으로 바뀐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자체가 영원이 시간 안으로 들어 온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신앙의 주인으로 모셔 들일 때 그는 시간에서 영원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었으니.”

시간에 속한 사람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비로써 하나님의 자녀 득 영원의 자녀로 거듭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때 그 사람의 삶이 곧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종말론적 삶을 실천하기 위한 비결이 곧 사랑과 인내입니다.

사순절 제8일을 맞이합니다.
오늘 하루도 사랑과 인내로 무장하여 다시 오실 주님을 믿음으로 기다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승리하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오 주님
이곳에 오셔서
환난과 질고 가운데서
불안한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강건케 하여
주님 기다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6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모데전서 1:1∼20
♦ 묵상을 위한 주제 : 괴수(魁首)(15절)
♦ 성구 :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괴수(魁首)”란 “악당의 우두머리”라는 뜻입니다.
“괴수”란 한자의 “훈(訓)”은 “으뜸 괴(魁), 괴수 괴(魁)” “머리 수(首)”라고 합니다.
“괴수”를 영어 성경에서는(NIV) “I am the wors(나는 최악입니다)” 라고 합니다. 
“괴수”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프로토스(πρῶτός)” 라고 하며, 뜻은 “first, chief” 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죄인 중에 가장 나쁜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의 죄에 대한 절대적 개념을 표현한 것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절대적인 표현보다는 상대적 표현을 더 좋아합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죄가 없다”며 자기의 의(義)를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참조 누가복음 18:9∼14).

사순절 제9일을 맞이합니다.
사순절이란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절기로서 이전 보다 좀 더 경건하고 거룩한 삶에 관심을 갖고 자기를 성찰(省察)하는 시간입니다.

지난 화요일 참회의 기도 “높은뜻 덕소교회 오대식 목사”의 회개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주님, 코로나19로 인해 불과 한 달 동안 우리의 생활 모든 것이 너무나 많이 바뀌었습니다. 요즘 상황을 보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분명 있음을 보게 하시고, 우리가 잘못 가고 있었던 길을 반성하며 다시금 주 앞에 바르게 서는 기간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1. 주님, 우리는 지금 평범한 일상이 다시 오기를 간구합니다.

매일 매일의 일상이 가장 큰 축복임을 이제라도 알게 하시니 감사드리며, 그동안 주님이 주신 행복을 곁에 놔두고 행운을 찾아 헤맸던 죄를 용서하시며 무엇이 가장 소중한 축복인지 깨닫게 하여 주십시오.

2. 한국인 입국을 막는 나라가 현재 92개국이 넘었습니다.

주님, 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나치리만큼 해외여행을 다니는 한국인에게 이제는 좀 절제하라는 주님의 사인 같이 느껴집니다. 남들과 관계없이 나만 즐기면 된다는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들을 이제는 바꿔주시고, 어려운 이웃에 대한 공감과 나에 대한 절제가 조금 더 삶에서 많이 나타나게 하여 주십시오.

3. 주님, 동남아와 중동국가들, 그리고 아프리카 나라들까지도 한국인을 무시하고 강제 격리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한국인들이 철저하게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을 무시해 온 것에 대한 정확한 인과응보 같이 느껴집니다. 앞으로 한국에 와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더욱 인격적으로 대하게 하시고 소중히 여기게 하여 주십시오. 나그네와 고아를 사랑하고 대접하라는 주님의 마음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게 하여 주십시오.

4. 주님, 마스크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그동안 너무 많이 무책임한 말을 내뱄고 거짓 뉴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퍼 날랐던 우리들에게 조금 더 침묵하며 살라는 주님의 명령 같습니다. 앞으로 조금 더 내 입을 막으며 적게 말하고 진실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게 하여 주십시오.

5. 주님, 모이는 교회를 막으시는 것은 그동안 한국교회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전혀 감당하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 모이는 일에만 힘 쓴 것에 대한 벌처럼 느껴집니다.

우리의 믿음의 현장이 교회가 아닌 세상임을 알려주시는 주님의 교훈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교회보다 교회 밖에서 더 빛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우리가 모두 다시 노력하게 하여 주십시오.

6. 교인이 5만 이니 10만 이니 하는 것이 모두 거품인 것을 알게 하신 주님, 하루  아침에 예배당의 교인들은 없어질 수 있음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목사의 관심이 교인의 수에만 있고, 교회의 자랑이 그 크기에만 있었다면 이제 그 마음을 돌이켜 우리의 참된 자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여 주십시오. 나의 자랑이 천박한 '교회크기'가 되지 않게 하시고, 내 기도의 간구가 경쟁에서의 승리가 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오직 존귀한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의 자랑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7. 주님, 이 어려움이 다 지나고 난 후, 이 땅의 교회들이 다시 새로워지며 주 안에서 하나의 교회로, 같은 교회로, 함께 천국을 향해 나가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와 같이 거룩한 공교회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텅 빈 예배당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동안의 나의 잘못을 참회합니다. 주님, 교인들과 함께 마주하며 예배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도록 주님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언제나 우리를 위로해 주시며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들이여!
사순절 경건의 시간을 지내며 내가 고백할 회개의 기도문을 적어보며 주님 앞으로 더 가까기 다가설 수 있는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7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모데전서 2:1∼15
♦ 묵상을 위한 주제 : 중보(中保)(5절)
♦ 성구 :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중보(中保)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두 사람 사이에서 일을 주선하는 사람.
2. 신과 사람의 사이를 화해시키고 교제를 유지하도록 하는 일.

그러나 성경에서 중보란 죄인과 창조주 하나님의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것을 말합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死亡)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生命)입니다.

죽음과 영원한 생명을 연결시켜 줄 수 있는 역할을 “중보자” 라고 합니다.

중보란 헬라어는 “메시테스(μεσίτης, mesites)” 라고 합니다.
‘메시테스’는 “meditator(중재자), arbitrator(중매인)”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중보하심을 알고 있습니까?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로마서 8:26∼27)   

예수를 믿는 것은 전도자로서 중보역할을 맡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전도(傳道)란 사망의 그늘에 갇힌 사람을 생명의 울타리 안으로 인도하는 거룩한 구원 사역입니다.

사순절 제10을 맞이합니다.

사망의 그늘에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구원의 길을 경험한 믿음으로 오늘도 주위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전도자가 되어 생명을 구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3

9

디모데전서 3:1∼16

경건의 비밀(16절)

3

10

디모데전서 4:1∼16

경건에 이르는 연습(7절)

3

11

디모데전서 5:1∼25

선한 행실의 증거(10절)

3

12

디모데전서 6:1∼21

하나님의 사람(11절)

3

13

디모데후서 1:1∼18

거짓이 없는 믿음(5절)

3

14

디모데후서 2:1∼26

예수의 좋은 군사(3절)

3

15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3월 9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모데전서 3:1∼16
♦ 묵상을 위한 주제 : 경건(敬虔)의 비밀(秘密)(16절)
♦ 성구 :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호주의 전직 TV프로듀서인 “론다 번(Rhonda Byrne)”은 “씨크릿(Secret)”이라는 저서에서 세계 유명 인사들이 성공을 하고 부자가 된 놀라운 비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끌어당김의 법칙(the law of attraction)” 이라고 합니다.

의식(意識)과 생각(生覺)에는 힘이 있고 긍정적인 것은 긍정적인 것을 끌어당긴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 중심에 부자가 되고 싶고, 성공을 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진정 중요하고도 꼭 필요한 크고도 놀라운 참된 비밀은 “경건의 비밀”이라고 합니다.

본문은 바울이 에베소교회 감독으로 있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당시 에베소를 사도행전 19장에서는 “아데미 신”을 숭상하며 제물을 바치는 우상에 빠진 도시였다고 말합니다. “아데미 여신”은 풍요와 다산, 쾌락의 신이었고 그 축복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데미여신은 가짜고 그녀가 주는 복이 크고도 놀라운 비밀이 아니라, 하나님이 진짜요 하나님이 주시는 복, 즉 경건한 삶이야말로 크고도 놀라운 비밀이라고 깨우치고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풍요와 쾌락과 다산이 큰 복이 아니라고, 그걸 누리도록 해주는 것이 크고 위대한 비밀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장 큰 복이요, 그분을 누리는 경건한 삶이야말로 크고도 놀라운 비밀이라고 강조합니다.

이와 같은 진리를 어디에서 배워야 할까요?
교회에서 이 진리를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왜녀하면 교회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집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들이여!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예수님처럼 살다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주 예수여,
주 닮기 원하오니
닮음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주님만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10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모데전서 4:1∼16
♦ 묵상을 위한 주제 : 경건(敬虔)에 이르는 연습(7절)
♦ 성구 : 경건(敬虔)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사순절 제12일을 맞이합니다.

경건(敬虔)이란 무엇일까요?
경건(敬虔)이란 한자는 “공경 경(敬)” “공경할 건(虔)” “삼갈 건(虔)”
경건(敬虔)이란 영어 성경(NIV)에서는 “godly(경건한)” 이라고 합니다.
경건(敬虔)이란 헬라어는 “유세배이안(εὐσέβειαν)” 이라고 합니다.
원형은 “유세배이아(εὐσέβεια, eusebeia)” 라는 여성 명사입니다.
뜻은 “경건함(godliness, piety)”, “헌신(devotion)” 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경건”이란 단어가 사용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야고보서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디모데후서 2: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야고보서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히브리서 12:28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시편 32:6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찌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디모데전서 2:1∼2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경건이란 예배와 기도에 힘쓰는 삶을 통해 얻어진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경건은 유전(遺傳)이 아니라 연습(練習)에 의해서 얻어지는 결과물입니다.

연습(練習)이란 “굼나제(γύμναζε)”의 동사 원형은 “굼나조(γυμνάζω, gumnazó)” 라고 하며 뜻은 “train(훈련)”입니다.

“피나는 훈련” “피나는 연습”이 있어야 경건한 사람으로 경건한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리차드 포스터(Richard J. Foster)” 라는 영성신학자는 그의 저서 “영적 훈련과 성장(Celebration of Discipline)”에서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는 내적(內的) 연습(The Inward Disciplines)

내적 연습에는 “묵상(黙想)”과 “기도(祈禱)”와 “금식(禁食)” 그리고 “성경공부(聖經工夫)”를 말합니다.

둘째는 외적(外的) 연습(The Outward Disciplines)
외적 연습에는 “봉사(奉仕)”와 “홀로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집단(集團) 연습(The Corporate Disciplines)
집단 연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禮拜)”입니다. 예배의 연장선으로 “수련회(修鍊會)” “부흥회(復興會)”와 같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순절 제12일 맞이합니다.
사순절이란 경건의 훈련을 위한 계절입니다.
새 봄을 맞이하듯 사순절 절기에 경건의 훈련에 동참하여 경건에 이를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기대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11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모데전서 5: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선한 행실의 증거(10절)
♦ 성구 :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 

사순절 제13일을 맞이합니다.

오늘 읽어야 할 말씀의 주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라고 하겠습니다. ‘사회적 약자’로서 대표적인 사람을 “과부”라고 합니다(참조. 구약 신명기 14:29, 객과 고아와 과부).
과부의 명부에 올릴 수 있는 사람을 “참 과부”라고 합니다(참조, 3, 5. 16절).

‘참 과부’란 연고가 없는 사람으로 어느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약자(弱者)를 말합니다. 선한 행실의 증거는 주를 믿는 믿음의 표현으로 그리스도인의 높은 생활(higher life)을 통하여 “성화(sanctification)”와 “완전(perfection)”을 실천하는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뜬다.”고 그리스도인들을 비웃는 이야기는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한 책망입니다.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것 보다 하나를 알아도 실천할 수 있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무엇이 믿음이 있는 것이고, 또 무엇이 믿음이 없는 것입니까?

믿음이 있는 것은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은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가르침은 힘이 없고 메마르고 위선으로 보여서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듣고 알았다면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묵상) 삶 가운데 적용하면 하나님께서 그 적용하는 행동 가운데 “총명(聰明)”을 더해주십니다. 총명은 영적인 분별력과 깨달음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총명을 받은 사람은 비록 그의 말이 어눌하다 할지라도 그 어떤 설교보다도 큰 감동을 줍니다.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디모데후서 2:7)

사순절 제13일을 맞이합니다.
선한 행실의 증거는 믿음을 실천하는 현장에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열매를 소개하기 전에 먼저 우리들이 선한 행실의 증거를 회복하여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열매를 맺는 영적인 삶을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승리하는 은총의 하루가 펼쳐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12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모데전서 6:1∼21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나님의 사람(11절)
♦ 성구 :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하나님의 사람(Man of God)은 하나님의 능력을 행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행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 이름”으로 행하는 힘을 말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사도행전 3:6)

오늘의 교회는 물질은 풍부하지만 예수 이름의 능력은 거지와 같습니다.
사순절 제14일을 맞이합니다.
2020년 사순절의 기간을 보내며 베드로와 같은 믿음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믿음이란 물질의 풍부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이름을 사용할 줄 아는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이 땅에서 떠나갈지어다!
예수 이름은 능력의 이름입니다.
능력의 이름은 능력을 회복한 사람에 의해서 사용될 때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 이름의 능력을 회복한 후에는 축복을 기도하는 사람으로 세워지기 를 기대하며 독일의 신학자 "요르그 징크(Jörg Zink, 1922~2016)"의 여행자를 위한 축복 기도를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네게 있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너보다 앞서 가시며,
네가 나아가야 할 바른 길을 보여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네 곁에 계시며,
그 팔로 너를 감싸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네 뒤에 계시며,
어두운 세력이 너를 해치지 못하게 보호하시고,
하나님이 네 아래 계시며,
네가 넘어지려 할 때에 너를 든든히 받쳐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네 옆에 계시며,
네가 슬퍼할 때에 너를 위로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네 안에 계시며,
너를 치유해주시고,
하나님이 너를 감싸주시어,
근심에 싸여 있을 때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노라.

마치 하늘에 태양이 있듯이 하나님이 네 위에 계시며,
그 능력으로 너를 강건케 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멘

주 예수여!
능력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내 구멘!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13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모데후서 1: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거짓이 없는 믿음(5절)
♦ 성구 :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매사에 부정적인 남자가 있었습니다.
전쟁 중에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였다는 이유로 총살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형 집행 얼마 전에 총살형이 교수형으로 바뀌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부정적인 남자는 “이 놈의 나라. 그렇게 전쟁을 하더니 결국 총알이 다 떨어졌군.” 이렇게 불평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는 다시 말하기를 “망할 놈의 나라. 밧줄도 다 떨어졌네.”

다행스럽게도 며칠 뒤에는 사면이 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이런 빌어먹을. 이제는 죄수들에게 먹일 식량도 다 떨어졌군.” 

부정적인 사람의 특징입니다.

교황 “이노센트 4세(Innocentius PP. IV, 이탈리아어: Papa Innocenzo IV. 제180대 교황, 재위 기간 1243. 6. 25∼1254. 12. 7)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25 ~1274. 3. 7)”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지어 기증한 ‘라테란 성당’ 발코니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각 국에서 보내온 헌금주머니들이 속속 성당으로 도착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교황 이노센트 4세’가 “선생 보시오. 베드로 사도께서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는데 지금 교황청은 은과 금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깊은 한 숨을 쉬며 “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교황님! 오늘의 교회는 은과 금은 있지만 대신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수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현대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이란 “긍정적인 믿음”을 말합니다.

긍정적인 믿음의 특징은 “감사”라고 하겠습니다.

감사는 어떤 외부의 조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범사(凡事)에 감사(感謝)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13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모데후서 1: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거짓이 없는 믿음(5절)
♦ 성구 :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거짓이 없는 믿음(ἀνυποκρίτου πίστεως)” 이란 무엇일까요?

“아누포크리투”란 “ἀνυπόκριτος” 라는 형용사가 원형으로 “unhypocritical(위선적이지 않은)” “unfeigned(위조되지 않은)” “sincere(신실한)”이란 뜻입니다.

“피스테오스”란 “피스티스(πίστις)” 라는 동사가 원형으로 “faith(믿음)”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거짓이 없는 믿음”이란 “신실한 믿음(sincere faith)”을 말합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족들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디모데”는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거짓이 없는 믿음을 배웠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만큼 자녀들 앞에서 거짓이 없는 믿음의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7절).

첫째는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둘째는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

거짓이 없는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8절).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 때문입니다(14절).

이때 “거하시는” 이란 헬라 단어는 “충만하다(πληρόω, 플래로오, pléroó, 골 1:9)”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거짓이 없는 믿음은 성령으로 충만한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15일을 맞이합니다.
사순절이란 십자가의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사모하는 시간입니다.

두려움을 겁내지 않으려면 먼저 “성령으로 충만한 심령”을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믿음의 사람에게는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은혜가 넘쳐날 것입니다(골 1:9).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가정에서부터 거짓이 없는 믿음을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모두 함께 사순절 제15일을 맞이하는 이 날에 거짓이 없는 믿음의 가족들로 거듭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14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모데후서 2:1∼26
♦ 묵상을 위한 주제 : 예수의 좋은 군사(3절)
♦ 성구 :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예수의 “좋은 군사(καλὸς στρατιώτης. 칼로스 스트라티오테스)”가 됩시다.
사순절 제16일을 맞이합니다.
사순절 제16일을 맞이하는 아침에 “예수의 좋은 군사(good soldier of Christ Jesus)로 무장하는 은혜의 하루가 펼쳐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의 좋은 군사는 예수님은 물론 주위 모든 사람에게도 좋다는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나는 예수가 좋다고 노래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싫다고 한다면 과연 예수님은 나를 좋아하실까요?

어떻게 하면 예수의 좋은 군사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좋다”라는 헬라어에 두 가지 용어를 사용합니다.
첫째는 “아가도스(ἀγαθός, agathos)”란 “좋은(good)” 이란 뜻입니다. 
둘째는 “카로스(καλός, kalos)”는 “아름다운(beautiful” “좋은(good)”이란 뜻입니다.
 
“아가도스”라는 단어는 절대적으로 좋다는 의미를 말합니다.
“카로스”라는 단어는 상대적으로 좋다는 의미를 말합니다.
사람은 절대적으로 가장 좋은 예수의 군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좋은 군사로 무장해야 합니다.

좋은 군사의 특징은 평안한 날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서 승리한 후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군사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기뻐합니다(3절, 9절).

고난에 참여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째는 힘쓰라(15절)
하나님 앞에 자신을 온전히 바쳐야 합니다.

둘째는 버리라(16절, 23절)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려야 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려야 합니다.

셋째는 좇으라(22절)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아야 합니다.

영국의 소설가이며 성공회(Church of England, Anglican Church, Episcopal Church)의 평신도이었던 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 11. 29∼1963. 11. 22)가 캠브리지 채플에서 “예수의 구주되심”이라는 주제로 설교했을 때 한 학생이 다가와 “만약 오늘 선생님께서 예수는 본받아야 할 위대한 스승이라고 말했다면, 우리 모두는 선생님에게 박수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예수는 구세주’ 라는 기독교의 교리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C. S. 루이스는 그 학생에게 “자네는 정말 예수가 완벽한 모델이라고 생각하는가?” 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은 “아, 그럼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요.” 라고 말했지요.
“그러면 이 완벽한 모델이신 예수를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믿는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자네에게 묻겠네. 자네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모델이신 예수를 자네가 완전히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 학생은 한참 생각하다가 “완전하게 따라갈 수는 없겠지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떼 루이스는 “아, 그러면 자네도 도덕적 실패를 인정하는군. 그렇다면 자네의 삶 속에서 실수가 있었고, 죄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가?”

“아, 인정하지요”

“그렇다면 자네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적 모델로서의 예수가 아니네. 자네의 도덕적인 실패와 죄에서부터 자네를 구원할 수 있는 구세주이신 예수가 먼저 필요하다네. 죄인에게는 도덕적인 모델로서의 예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세주로서의 예수가 필요하다네.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 비로소 그분은 자네에게 도덕적인 모델이 될 수가 있다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는 구세주가 되신 주님을 믿고 따라가는 일에 무조건 순종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사순절 제16일을 맞이하는 이 아침에 좋은 군사로 무장하여 영적 싸움터에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3

16

디모데후서 3:1∼17

말세에 고통하는 때(1절)

3

17

디모데전서 4:1∼22

말씀을 전파하라(2절)

3

18

디도서 1:1∼16

가증한 자(16절)

3

19

디도서 2:1∼15

하나님의 은혜(11절)

3

20

디도서 3:1∼15

영생의 소망(7절)

3

21

빌레몬서 1:1∼25

믿음의 교제(6절)

3

22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3월 16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모데후서 3:1∼17
♦ 묵상을 위한 주제 : 말세에 고통 하는 때(1절)
♦ 성구 :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어보면 “말세에 어려운 때가 있으리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말세(末世, The Last)와 말일(末日, The Last Day)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말일(末日)”이란 “마지막 날” 즉 최후의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말세(末世)”란 “마지막 시대”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말세에 고통 하는 때의 시대적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1. 자기를 사랑(自己愛)(Self Love)(be lovers of themselves) 
2. 돈을 사랑(맘몬 思想)(lovers of money)
3. 자긍(自矜)(자랑)(boastful) 
4. 교만(驕慢)(proud) 
5. 훼방(毁謗)(abusive) 
6. 부모(父母)를 거역(拒逆)(disobedient to their parents) 
7. 불평(不平) 즉 감사(感謝)하지 않는 것(ungrateful) 
8. 세속(世俗) 즉 거룩하지 않은 것(unholy)
9. 무정(無情)(without love)
10. 원통(寃痛)함을 풀지 않는 것(unforgiving)
11. 참소(讒訴)(slanderous)
12. 무절제(無節制)(without self-control)
13. 사나움(亂暴)(brutal)
14. 선(善)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not lovers of the good)
15. 배반(背叛)(treacherous)
16. 조급(躁急)(rash)
17. 자고(自高)(conceited)
18. 쾌락(快樂)을 즐기는 것(lovers of pleasure)
19. 경건(敬虔)의 모양(模樣)만 갖춘 것(having a form of godliness)


1948년 유대인들의 극적인 팔레스타인 귀환과 이스라엘 국가 건설, 그리고 1967년 예루살렘의 재탈환은 종말론자들을 흥분시킨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예언에서 현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의해서 종말의 징조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은 아무도 알 수 없고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강조하셨던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기억합시다.

성경의 그리스도만이 그리스도입니다. 재구성된 그리스도는 그 어떤 모습이든지 적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만 생각합시다.
그리고 모르는 것은 보여주실 때까지 믿고 기다립시다.
그러나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날과 그 시는 알 수 없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17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모데후서 4: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말씀을 전파하라(2절)
♦ 성구 :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신약 성경에서 “목회서신”이란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를 말합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설교자의 직무”라고 하겠습니다.

요즈음은 설교가 너무 흔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설교는 많아도 설교대로 살아가는 설교자는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설교는 말이 아니라 삶이어야 합니다.

어느 장로님께서 제게 간곡하게 부탁했던 이야기를 항상 마음에 담고 설교자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목사님, 설교를 잘 하는 목사는 많습니다. 저희가 기대하는 것은 설교한대로 살아가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설교자가 전해야 할 말씀은 “복음 진리”입니다.

복음 진리란?
“바른 교훈” 즉 “바른 교리”와 “바른 생활”을 말합니다.

“전파하라”는 것은 “선포하라”는 뜻입니다.

설교는 대화나 토론이 아닙니다.
설교는 선포적 이어야 합니다.
설교는 사람들이 그것을 듣든지 안 듣든지, 그것을 좋아하든지 안 좋아하든지 관계치 말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견해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토론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토론할 것이 아니고 단순히 선포하는 것입니다.

“항상 힘쓰다”는 헬라어 “에피스테미(ἐπίστηθι)”는 “준비하다(be ready)”, “집중하다(concentrate)”는 뜻입니다.

예로부터 신앙의 전통은 설교자는 세 가지를 항상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첫째는 설교 준비(preach preparation)
둘째는 이사 갈 준비(prepare to move)
셋째는 죽음 준비(prepare for death)

설교자의 삶은 고독해야 합니다.
설교자의 삶은 부족함이 있어야 합니다.
설교자의 삶은 깊은 묵상이 있어야 합니다.

어렵던 시절에 설교자의 삶에 대한 어느 신학대학 학장의 고백은 지금도 설교자들이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교훈입니다.

교회에서 제공하는 한 달 사례비를 받으면 다섯 식구가 겨우 먹고 살 수 있었는데 요즈음은 한 달 사례를 받으면 거의 반년 정도 지낼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설교자로서 솔직한 고백은 어렵고 힘들 때의 설교에는 힘이 있었고 감동이 있었으나 요즈음의 설교에는 아무런 힘도 감동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전파하라.
능력 있는 말씀을 전파하라.
전파하는 일에 목숨을 맡겨야 한다.

듣는 설교에 익숙한 시대에 이제는 보여주는 설교를 실천하므로 세상의 변화를 자극할 수 있는 설교자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18일을 맞이합니다.
사순절 기간에 모든 성도들은 설교자와 같은 진실한 삶을 회복하여 코로나 바이러스로 세상이 어지럽고 두려워할 때 소망의 등불이 되어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용기를 갖게하는 무언의 설교자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18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도서 1:1∼16
♦ 묵상을 위한 주제 : 가증(可憎)한 자(16절)
♦ 성구 :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사순절 제19일을 맞이합니다.
가증한 자(They are detestable)란 어떤 사람일까요?

가증한 사람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합니다. 그러나 행위로는 부인합니다. 그러므로 복종하지 않는 사람으로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가증한 사람의 의미를 다양하게 살펴봅니다.
첫째, 혐오스런 사람(detestable, NIV)
둘째, 밉살스러운 사람(현대인, 공동번역 성경)셋째, 가증스러운 사람(새번역, 개역개정, 개역한글 성경)
넷째, 혐오스런 사람(βδελυκτοὶ, βδελυκτός. bdeluktos)(헬라어 성경)
다섯째, 매우 괘씸하고 얄미운 사람(한글사전) 

디도서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의 본이 되신 주님” 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행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하기 위하여 구원받은 것입니다(참조. 디도서 2:7, 14, 3:1, 8, 14).

구원이 우선입니다.
선한 일은 구원받은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본분입니다.

가증한 사람은 선한 일을 행했다고 자랑하는 것이 마치 구원받은 증거라고 말합니다.

스펄전은 1850년 1월 6일 주일 아침 많은 눈이 와서 목사가 설교하러 오지 못한  어느 감리교회의 예배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스펄전은 그곳에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설교자의 설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바라보라!”는 설교에서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서 아무런 편안함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의지하는 것은 미래의 일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를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성령이 일하시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그것은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성경은 ‘나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바라보라!
내가 수많은 핏방울을 흘리고 있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십자가에 매달려있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죽었고 묻혔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다시 일어났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아버지의 오른쪽에 앉아 있노라.

오, 불쌍한 죄인이여 나를 바라보라!

비록 어눌한 설교자이었지만 스펄젼을 향해 “젊은이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오! 바라보시오! 바라보시오! 당신이 할 일은 바라보며 사는 것뿐입니다!”

이 설교에 스펄젼은 모든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스펄젼은 지금까지 주님의 위대하심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의 죄인 됨만을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주님을 바라보았고 즉시로 구원받아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자로써 출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부터는 오직 구원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믿음을 온전케 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19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도서 2:1∼15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나님의 은혜(11절)
♦ 성구 :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사순절 제20일을 맞이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어느 특정한 민족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오직 유대인만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종합한 구원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들 즉 각 연령과 계층의 사람들에게도 나타났습니다. 그들 속에 종들까지도 포함합니다.

구원하신 후에는 “양육하신다”고 하셨습니다(12절).

‘양육한다’는 헬라어는 “파이듀오(παιδεύω)”라고 합니다. '파이듀오'는 ‘가르친다, 교육한다, 교훈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불경건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라는 것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는 불경건과 음란과 탐욕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둘째, 근신하며 의롭고 경건하게 살라는 것

구원의 은혜를 받은 우리들은 신중하고 사려 깊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의롭고 정당하게 살아야 하며 또 늘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을 바라라는 것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의 “복스러운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 라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대한 놀라운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요 1:1),
‘참 하나님’(요일 5:20),
‘크신 하나님’(딛 2:13) 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복스러운 소망이십니다.

복스러운 소망이란 주님의 영광스런 재림을 말합니다.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태 24:30)

사순절 제20일을 맞이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그 날이 사순절을 시작한 후 20일이 지났습니다.

주님 언제 다시 오실는지 알 수 없지만 다시 오실 주님의 그 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주님 맞이할 수 있는 믿음을 점검해 봅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Ἀμήν ἔρχου Κύριε Ἰησοῦ!
(아멘 에르쿠 쿠리에 이에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20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도서 3:1∼15
♦ 묵상을 위한 주제 : 영생의 소망(7절)
♦ 성구 :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영생(永生)의 소망(所望)
- the hope of eternal life
- 엘피다 조에스 아이오니우(elpida zoes aiōniou, ἐλπίδα ζωῆς αἰωνίου)   

희망(希望)과 소망(所望)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희망(希望)이란?
한자의 의미는 “바랄 희(希), 바랄 망(望)”
한글 사전적 의미는 “앞일에 대하여 좋은 결과를 기대함” 또는 “앞으로 어떤 일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 이라고 합니다.

소망(所望)이란?
한자의 의미는 “바랄 소(所), 바랄 망(望)”
한글 사전적 의미는 “바라고 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희망과 소망이란 문자적인 의미가 서로 비슷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는 비슷한 의미가 아닙니다.

희망이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소망이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확신”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아니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고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이해는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배울 수 없고 경험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알 수 있다.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경험이 지식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얻는 과정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배움의 과정
둘째는 경험의 과정
셋째는 신앙의 과정

문제는 죽음이란 배움과 경험으로 배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보편적 진리를 배울 수 없고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죽은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믿는 것을 신앙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신앙의 과정을 한 단어로 “믿음”이라고 합니다.

신약 성경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相)”이라고 합니다.

영생(永生)이란 죽음 후에 반드시 “심판(審判)”을 받고 “영벌(永罰)”과 “영생(永生)”으로 구분될 것을 확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순절 제21일을 맞이합니다.
영생의 소망이란 사람이 무슨 선한 일을 행했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동지들이여!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온 세상이 예측할 수 없는 내리막길을 치달리듯 달려가는 때에 정신 차리고 근신하여 회개와 기도하는 믿음으로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21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빌레몬서 1: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믿음의 교제(6절)
♦ 성구 :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믿음의 교제(交際)

교제(交際)라는 한자는 “사귈 교(交)” “사이 제(際)”
한글 사전적 의미는 “서로 사귀어 가까이 지냄” 또는 “어떤 일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과 가까이 사귐”
교제(交際)라는 헬라어는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ᾳ)”라고 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fellowship”이라고 합니다.

교제를 다른 말로 “사귐”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제의 장소를 화려하고 멋진 곳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혔을 때 함께 감방에 수감된 “오네시모”라는 죄수를 만났습니다. 흔한 말로 “감방 동기”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에서는 감방 동기는 좋은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지식과 정보를 교환하여 또다시 잘못된 일을 함께 도모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교제를 나쁜 교제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하고 앞으로는 다른 사람의 물건을 탐내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는 삶을 가르쳤습니다. 오네시모는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감옥에서 나온 후에 이전에는 “쓸모 없는 사람” 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은 “쓸모 있는 자” 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이름을 누가 지었나요?
나의 이름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내 이름은 우연히 정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분명한 의미를 갖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 속담처럼 내 이름의 의미가 이 땅에서 아름답게 기억될 이름으로 새겨질 수 있는 주님의 은혜가 온 몸과 마음을 붙잡아 남은 생애가 온전히 주님의 것으로 사용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21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빌레몬서 1: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믿음의 교제(6절)
♦ 성구 :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믿음의 교제(交際)

교제(交際)라는 한자는 “사귈 교(交)” “사이 제(際)”
한글 사전적 의미는 “서로 사귀어 가까이 지냄” 또는 “어떤 일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과 가까이 사귐”
교제(交際)라는 헬라어는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ᾳ)”라고 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fellowship”이라고 합니다.

교제를 다른 말로 “사귐”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제의 장소를 화려하고 멋진 곳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혔을 때 함께 감방에 수감된 “오네시모”라는 죄수를 만났습니다. 흔한 말로 “감방 동기”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에서는 감방 동기는 좋은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지식과 정보를 교환하여 또다시 잘못된 일을 함께 도모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교제를 나쁜 교제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하고 앞으로는 다른 사람의 물건을 탐내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는 삶을 가르쳤습니다. 오네시모는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감옥에서 나온 후에 이전에는 “쓸모없는 사람” 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은 “쓸모 있는 자” 라고 합니다.

감방 동기로서 “사도 바울”과 “오네시모”의 ‘만남’과 ‘사귐’을 철학에서는 “실존적 교제(實存的 交際)”라고 합니다. ‘실존적 교제’를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 2. 23~1969. 2. 26)”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실존적 교제’는 ‘사랑의 교제’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을 누가 지었나요?
나의 이름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내 이름은 우연히 정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분명한 의미를 갖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 속담처럼 내 이름의 의미가 이 땅에서 아름답게 기억될 이름으로 새겨질 수 있는 주님의 은혜가 온 몸과 마음을 붙잡아 남은 생애가 철저하게 주님의 것으로 사용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기도합시다.

하나님과의 실존적 교제를 회복한 후에 이와 같은 교제의 신앙으로 어느 곳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복음으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멋진 이름으로 쓰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3

23

히브리서 1:1∼14

만유의 후사(2절)

3

24

히브리서 2:1∼18

마귀(魔鬼)(14절)

3

25

히브리서 3:1∼19

믿는 도리의 사도(1절)

3

26

히브리서 4:1∼16

은혜의 보좌(16절)

3

27

히브리서 5:1∼14

멜기세덱의 반차(6절)

3

28

히브리서 6:1∼20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2절)

3

29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3월 23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히브리서 1:1∼14
♦ 묵상을 위한 주제 : 만유의 후사(2절)
♦ 성구 :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사순절 제23일을 맞이합니다.

“만유의 후사(後嗣)”‘후사’란 “대를 잇는 아들”이란 뜻입니다.

후사란 한자는 “뒤 후(後)” “이을 사(嗣)”라는 훈(訓)입니다.

NIV 영어 성경에서는 “만유의 후사”를 “모든 것의 상속인(heir of all things)” 이라고 소개합니다.

헬라어 성경에서는 “클래로노먼 판톤(κληρονόμον πάντων)” 이라고 합니다.

후사라는 “클래로노모스(κληρονόμος)”는 ‘남성 명사’로 “상속인(an heir)” 이란 뜻으로, “클래로스(κληρος)”와 “노모스(νόμος)”가 합성한 단어입니다.

“클래로스”란 “제비를 뽑아 얻은 기업” 또는 “제비 뽑는 물체”를 말하며, “노모스”는 “율법”을 말합니다.

따라서 후사란 율법에 의해서 인정된 상속자를 말합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만물의 후사가 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후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후사된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것만 상속받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이 세상에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입니다(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나 혼자만 후사가 된 것이 아니라 함께 후사가 되고 지체가 되고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에베소서 3: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후사가 되는 은혜가 유대인에게만 약속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백성과 자녀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갈라디아서 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사순절 제23일을 맞이하며 비록 이 세상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가택연금을 당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우리 모두는 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들로 인정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늘의 것만 상속받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이 세상에서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우리 모두의 믿음이 정금과 같은 순수한 신앙으로 회복되는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24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히브리서 2: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마귀(魔鬼)(14절)
♦ 성구 :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사순절 제24일을 맞이합니다.
마귀(魔鬼)의 정체를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라고 말씀합니다.

마귀(魔鬼), 귀신(鬼神), 사탄(Satan), 악령(惡靈)이란 서로 다른 존재일까요? 

한국의 전통 문화에서 “귀신은 자기 수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은 넋”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귀신은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라고 합니다.

한글성경은 악한 영들의 존재를 ‘사탄’ ‘사단’ ‘마귀’ ‘귀신’이라고 합니다. ‘사탄’ ‘마귀’ ‘귀신’에 관해 자주 듣게 되는 질문은 ‘사탄’과 ‘사단’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마귀’와 ‘귀신’은 어떻게 다른지에 관한 것입니다. 

‘사탄’과 ‘사단’은 같은 말이며 발음상의 문제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성경 원문이 두 단어를 혼용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로 번역할 때 다른 음역(音譯)을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1961년에 개정된 개역한글성경은 ‘사단’이라고 번역했지만, 98년에 개정된 후 대부분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성경과 공동번역, 현대어성경, 표준새번역 등은 ‘사탄’으로 번역했습니다.

'사단'과 '사탄' 두 용어에서 더 정확한 음역은 ‘사탄’(Satan)이며 ‘대적’ ‘대적자’ ‘고소자’라는 뜻입니다.

‘마귀’는 히브리어인 ‘사탄’의 뜻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 ‘디아볼로스’(Διάβολος) 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탄’은 “히브리어” 이고, ‘마귀’는 “헬라어” 라고 하겠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사건은 '마귀'와 '사탄'의 관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러 광야에 가셨다고 합니다(4:1).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 4:10).

마귀와 사탄과의 관계는 요한계시록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 라고 합니다(계 12:9).

사탄과 마귀는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헬라어로 "다이몬(δαιμων)"이라고 합니다. ‘다이몬’에서 영어의 ‘demon(악령)’이 파생했습니다. 성경은 ‘사탄’과 ‘마귀’를 단수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귀신’은 단수와 복수로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거라사인 지역에서 귀신을 쫓아냈을 때 많은 귀신이 귀신들렸던 사람에게서 나와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에 들어가도록 명령하셨습니다(막 5:13). 또한 예수님께서 ‘마귀와 그 사자들’(마 25:41)이라고 언급하신 것과 성경의 여러 본문을 참조할 때 ‘귀신’은 ‘사탄’ 혹은 ‘마귀’가 부리는 낮은 등급의 악한 영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구원받은 백성들과 구원받을 사람들을 미혹하여 구원의 자리에서 떨어트리려고 합니다.

반면에 천사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고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들의 죄를 구속(救贖)하시며 시험받는 자들을 도와주심으로 승리하게 합니다.

사순절 제24일 맞이합니다.
고난 받으신 주님께서 붙잡아주시는 은혜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집안에 머물러야 하는 때에 참 평안과 기쁨과 강건함을 누리는 특별한 은혜를 체험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25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히브리서 3:1∼19
♦ 묵상을 위한 주제 :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1절)
♦ 성구 :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사순절 제25일을 맞이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믿는 도리의 사도”(the apostle whom we confess)

둘째는 예수님은 “대제사장”(high priest whom we confess)

믿는 도리의 사도(τὸν Ἀπόστολον)
사도(使徒)란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은 제자를 말합니다(아포스톨로스apostolos, ἀπόστολος).

대제사장(Ἀρχιερέα)이란 구약 시대 때부터 내려온 직분으로 백성의 죄를 대신 중보하는 역할입니다.

신약에서는 메시아가 그 임무를 완성하므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직분입니다(아르키에류스. archiereus,  ἀρχιερεύς).

믿는 도리의 사도란 “믿음의 사도” “신앙의 사제” “신앙의 사도”를 말합니다.

신앙의 사도란 신앙의 길을 바르게 가르치고 안내하며 신앙의 삶을 몸소 보여주는 역할입니다.

신앙이란 가르침과 행함이 하나가 되는 조화를 이루어야만 온전한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이란 신앙의 사도가 없는 세상을 말합니다.

어두운 밤에 서울의 상공에서 수많은 네온의 붉은 십자가를 보며 공동묘지가 많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를 의미심장하게 들어야 합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깊이 생각하라(카타노에오, katanoeó. κατανοέω)

 왜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구원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성도(聖徒)” 라고 합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거룩하지 못한 공간입니다. 거룩한 백성들이 거룩하지 못한 세속적인 공간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믿는 도리(道理)”가 필요합니다.

‘믿는 도리’란 우리의 신앙고백의 내용을 말합니다. 사도신경(使徒信經)은 신앙고백의 내용의 핵심으로 그 내용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사도(使徒)”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예수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입은 아들입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는 중보자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백성들로서 세속적인 공간에서 살아가야 하므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온갖 환난을 당하셨으나 모두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25일을 맞이합니다.

거룩한 백성의 삶을 회복하기 위하여 믿음의 도리가 되시며 우리의 죄를 중보하기 위하여 십자가 제물이 되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며 코로나 바이러스를 극복할 수 있는 은혜를 기도합시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26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히브리서 4:1∼16
♦ 묵상을 위한 주제 : 은혜의 보좌(16절)
♦ 성구 :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아멘 

사순절 제26일을 맞이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뒤흔들기 때문에 교회에서 모여 예배하는 것도 금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오늘 함께 묵상할 주제는 “은혜의 보좌(the throne of grace)”입니다.

‘은혜의 보좌(τῷ θρόνῳ τῆς χάριτος)’ 앞에 나갈 때 돕는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열렸습니다.

어떻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갈 수 있을까요?
“믿는 도리(道理)” 즉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도리’라고 하겠습니다.

‘믿는 도리’의 주인이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연약함을 “체휼(體恤)”하셨습니다.
‘체휼’이란 “처지를 이해하여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갈 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치료의 광선으로 연약한 우리들을 온전하게 붙잡아 주실 것을 믿고 활기찬 삶을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27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히브리서 5:1∼14
♦ 묵상을 위한 주제 : 멜기세덱의 반차(6절)
♦ 성구 :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아멘 

사순절 제27일을 맞이합니다.
멜기세댁(Melchisedec)은 누구일까?
멜기세덱이란 "의의 왕"이란 뜻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에 예루살렘 제사장입니다(창 14:18).
후대에 이상적인 왕의 전형이 되어 이러한 왕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 사장"이라고 칭하게 되었습니다(시편 110:4).
히브리서에서는 멜기세덱의 특이한 지위를 묘사하여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말합니다(히브리서 5:6∼10, 7장).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이 세상에 오셨던 영원한 대제사장이셨습니다.

오직 예수님으로 코로나 바이러스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펼쳐봅시다.

소련이 공산화될 때 기독교인들은 핍박이 심해 비밀리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며 신앙을 지켰습니다. 열 명의 신실한 크리스천이 비밀경찰에 의해 전원 체포됐습니다. 단 한 사람 두목만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고문하고 죽이며 두목 이름을 대라 했으나 한결같이 결코 너희는 두목을 체포하지 못하리라 하고 죽었습니다. 마지막 아홉 번째 사람에게 고문할 때 그 이름을 대고 죽었습니다. 그 이름은 “예수”였습니다.

사순절 27일을 맞이하는 아침에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님의 이름으로 코로나 바이러스를 물리치고 새로운 세상을 세워나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28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히브리서 6:1∼20
♦ 묵상을 위한 주제 :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2절)
♦ 성구 :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아멘

사순절 제28일을 맞이합니다.
완전한데 나아가라!
여러분은 완전한 사람입니까?
완전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완전한데 나아갈 수 있을까요?

여러 성경을 참조하면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는 말씀은 개역 한글 성경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는 말씀은 “성숙한데로 나아갈니라”고 번역합니다(현대인의 성경 참조).

성숙하다는 것은 “철이 들었다”는 뜻입니다.

어린 자녀들이 언제 철이 들었다고 느낄까요?받는 것만 좋아하던 아이들이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생각할 때 “철이 들었다”고 느낍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사랑하는 자녀들이 성숙하다고 인정할 때는 초보적인 신앙에 머물지 않고 희생과 헌신의 삶을 자원할 때라고 하겠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말씀을(행 20:35) 되새겨 봅니다.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시간과 물질을 쏟을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상을 향하여 힘차게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3

30

히브리서 7:1∼28

언약의 보증(22절)

3

31

히브리서 8:1∼13

언약의 중보(6절)

4

1

히브리서 9:1∼28

심판(27절)

4

2

히브리서 10:1∼39

영원한 제사(12절)

4

3

히브리서 11:1∼40

믿음(1절)

4

4

히브리서 12:1∼29

예수를 바라보자(2절)

4

5

주일

설교 묵상(섬자, 교제, 봉사, 헌신)












































♦ 3월 30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히브리서 7:1∼28
♦ 묵상을 위한 주제 : 언약의 보증(22절)
♦ 성구 :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아멘  

사순절 제29일을 맞이합니다.
함께 묵상할 주제는 “언약(言約)의 보증(保證)”
“보증(保證)”이란 한글 사전적 의미는 “사람의 신용이나 사물의 품질 등에 대하여, 틀림이 없이 믿을 만함을 책임지고 증명함.” 또는 “채무자가 채무를 이행하지 아니할 경우, 채무자를 대신하여 채무를 이행할 것을 부담하는 일.” 이라고 합니다.

본문에서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언약의 보증(the guarantee of a better covenant)”
“개런티(guarantee)”란 용어를 일상생활에서 자주 듣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사람들과의 사회적 거리를 두고 만나야 합니다.
사람을 가까이서 만나야 거래를 형성하는 사업장에서 사람들과의 거리를 두어야 하기 때문에 이런 때는 상품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은 “개런티(guarantee)”의 기간을 연장하는 것입니다.

어느 자동차 회사에서 할부 차량을 판매하며 엔진 오일 교환을 무료로 3년까지 실행한다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언약의 중보가 되신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희생하며 영원한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죽음을 영원한 생명으로 십자가에서 중보하신 우리 주님을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헬라어로 보증이란 “엥구오스(ἔγγυος)” 라고 합니다.
‘엥구오스’의 뜻은 “철저한 보안(under good security)” 또는 “보증(guarantee)”을 말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힘들고 어려운 때에 언약의 보증이 되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철저한 보안으로 지켜주실 것을 보증하셨습니다.

평범하던 날 깨닫지 못했던 은혜를 깨닫고 주님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기회로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31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히브리서 8:1∼13
♦ 묵상을 위한 주제 : 언약의 중보자(6절)
♦ 성구 :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아멘  

함께 묵상할 주제는 “언약(言約)의 중보자(中保者)”
“중보(中保者)”란 단어의 한글 사전적 의미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일을 주선하는 사람.” 또는 “신과 사람의 사이를 화해시키고 교제를 유지하도록 하는 사람.” 이라고 합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과 우리들을 화해시키고 교제하도록 돕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를 지은 죄인의 사이는 도저히 건너갈 수 없는 사망의 깊은 골짜기가 놓여 있습니다. 이 골짜기를 쉽고 편리하게 건너갈 수 있도록 다리를 놓으셨는데 그 다리가 “언약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한 여인이 중병에 시달리는 외아들이 포도를 먹고 싶다고 하여 포도를 구하기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여인은 궁궐의 담벼락에 탐스런 포도가 주렁주렁 열린 것을 보고 관리인에게 사정했습니다.

“1백 달러에 포도를 파십시오!”

관리인은 안 된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지요.
여인은 다시 2백 달러를 제시했습니다.
관리인은 화를 벌컥 내며 여인을 궁궐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공주가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슬피 울고 있는 여인을 불렀습니다.

“부인, 당신은 지금 큰 실수를 했습니다. 이 포도의 주인은 이 나라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장사꾼이 아닙니다. 그분은 포도를 팔지 않고 그냥 주신답니다.”

공주는 포도를 따서 그녀의 품에 안겨주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구원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행과 성품으로 영생을 살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값없이 얻는 선물이 바로 “구원”입니다.
사망의 깊은 골짜기에서 헤매지 말고 구원의 은혜를 힘입어 승리하신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서는 은혜를 사모하여 코로나 바이러스가 생명을 위협하는 어려운 때를 잘 극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순절(lent)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교회력의 절기

사순절(lent)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교회력의 절기

사순절(四旬節)은 대속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그리스도가 겪으신 고난과 부활을 기억하기 위한 것으로,
부활절 전 40일간의 경건하게 지내는 기간을 말한다.

사순절을 정하는 방법은 부활 주일부터 거슬러 올라 가기 시작하여 주일을 뺀 40일 간의 기간이며,
특별히 사순절 절기가 시작되는 날은 '재의 수요일(Ash Wendnesday)' 이라고 한다.

사순절 기간이 40일로 처음 결정된 것은 A.D,325년 니케아 회의(council of Nicea)에서였다.
따라서 교회 역사 가운데는 꼭 40일이 아닌 기간 동안 사순절의 의미를 갖는 절기가 지켜지는 경우도 많았다.
과거 동로마 교회에서는 부활절 준비 기간으로 7주를 지키되 토요일은 제외하고 일요일도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신 '성 주일'만을 포함해 36일을 이 기간으로 지켰었다.
서로마 교회도 6주간을 지키되 주일을 제외한 36일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기간으로 정했다.
이러한 관습은 니케아 회의 후에도 게속되어 얼마 동안은 오늘날과 같은 40일간의 절기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후 7세기 무렵 서로마 교회가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절의 첫 주일까지의 4일을 포함하면서부터
오늘날과 동일한 40일간의 사순절을 지키게 되었다. 

한편 사순절은 항상 수요일부터 시작되는데, 이 날은 재의 수요일, 성회 수요일, 속죄일 등으로 불리워진다.
즉 사순절은 재를 이마에 바르며 죄를 회개하는 재의 수요일로 시작되며, 부활주일 전 40일의 기간 동안 지킨다.
이날에는 금식 등의 자기 절제와 회개를 한다.
사순절을 영어로 Lent라고 하는데, 그 어원은 만물의 소생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인류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요한 3:16)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에서는 개신교, 천주교, 성공회, 정교회에서 지키고 있다. 

사순절 절기 안에는 6번의 주일이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사순절의 각 주일에는 단계와 특색이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순절의 첫째 주일(Invocabit)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아들로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후 사단에게 시험받으셨음을 생각하며 지낸다(마 4:1-10).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시편 91:15)라는 라틴어의 초입송의 처음 말입니다.

사순절은 주님께 기도하는 거룩한 절기입니다.


사순절 둘째 주일(Reminiscere)

사단의 시험을 이기시고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예배를 드린다(마 4:11).

“기억하옵소서.”(시 25:6)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주님의 희생과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순절의 셋째 주일(Oculi)

빛과 어둠의 대립 즉, 빛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어둠의 세력인 사단과의 대립을 중심으로 한 말씀(요 1:1-18)을
생갹하며 예배를 드린다. 

“나의 눈이 늘 주께 향하나이다.”(시편 25:15)라는 뜻입니다.

사순절에 우리의 눈은 주님과 주님의 십자가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사순절의 넷째 주일(Laetare)

사순절 중간에 끼어 있어 '사순절중절' 또는 '휴양 주일'(休養週日)이라고 불린다.
이 주일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위한 고난과 사단과의 싸움 등을 다루는 사순절의 다른 주일과는 달리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것으로 말씀을 삼는다(마 14:13-21).

“너희는 예루살렘과 함께 즐거워하라”(이사야 66:10)라는 뜻 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의 소망을 가진 온 교회가 함께 기쁨을 누리는 절기입니다.


사순절 다섯째 주일(Judica)

고난 주일이라고도 하는데,
이 주일의 명칭은 주님이 자신에게 임할 고난을 제자들에게 예언하셨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이때는 가룟 유다에게 팔리어 고난받으셨던 주님에 대해 생각하며 예배를 드린다(마 20:18,19).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시편 43:1)에서 온 말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주님의 심판 대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준비하는 기간이 사순절입니다.


사순절 여섯째 주일(Procession)

종려 주일(Palm Sunday)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과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던
군중들에 관계된 말씀을 본다(마 21:1-11).

혹은 고난주일이라고도 합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십자가

언덕을 넘어 부활의 언덕으로 나아가는 사순절 마지막 주간입니다.

첫째 주일 1 First S. in Lent (Invocabit)

Gn 3:1–21 or 1Sm 17:40–51 2Co 6:1–10 or Heb 4:14–16 Mt 4:1–11 Mar. 8

둘째주일 Second S. in Lent (Reminiscere)
Gn 32:22–32 1Th 4:1–7 or Rm 5:1–5 Mt 15:21–28 Mar. 15

셋째주일 Third S. in Lent (Oculi)
Ex 8:16–24 or Jer 26:1–15 Eph 5:1–9 Lk 11:14–28 Mar. 22

넷째주일 Fourth S. in Lent (Laetare)
Ex 16:2–21 or Is 49:8–13 Gal 4:21–31 or Ac 2:41–47 Jn 6:1–15 Mar. 29

다섯째주일 Fifth S. in Lent (Judica)
Gn 22:1–14 Heb 9:11–15 Jn 8:(42–45) 46–59 Apr.

여섯째주일 Palm Sunday (Palmarum)
Zec 9:9–12 Php 2:5–11 Mt 26:1–27:66 or Sunday of the Passion Mt 27:11–54
Apr. 9 Holy (Maundy) Thursday 


종려주일(棕櫚主日, Palm Sunday)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마 21:1-11, 막 11:1-11, 눅 19:28-38, 요 12:12-19).
성경에서 종려나무는 "의와 아름다움, 승리" 등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날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으며,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다.

스가랴 9장 9절에 예언된 그대로였으며, 그래서 '호산나주일'이라 불리기도 했다. 

종려주일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385년경 에게리아(Egeria)의 순례집에 나오는데,
당시 동로마 교회에 속했던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축하의 의미로 종려 행렬이 나섰다.
반면 서로마 교회들은 축하 분위기 대신 애도의 성격을 띠었다고 한다.

6세기경 스페인 의식서를 보면, 5세기경 동로마 교회의 종려주일 풍습이 전해졌음을 볼 수 있다. 

중세에는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다음,
가까이 있는 다른 교회로 걸어가는 것이 종려주일의 관습이었다고 한다.
성도들은 종려주일이 되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되새겼다. 

축성 의식을 행하기도 했다.
축성이란 성례에 쓰이는 물건 등을 정해진 의식을 통해 성스러운 것으로 구별하는 것으로,
구약의 성별 의식(출 40:9-15)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중세 교회에서는 종려주일에 사용하는 종려나무 가지에 축성 의식을 행했다.
축성된 종려나무 가지는 귀신을 추방하거나 질병의 치유와 재앙을 막는 능력이 있다고 믿기도 했다.

군중들은 이렇듯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메시아 또는 선지자,
왕을 맞아들이는 예식을 거행했지만, 5일만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다. 

올해는 4월 9일이 종려주일이며,
다음날인 10일부터 부활절 전날인 15일까지는 '고난주간(苦難週間, passion week)'이다. 

'수난주간(受難週間)'으로도 불리는 고난주간은 잘 알려져 있듯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절기로,
종려주일 다음 날부터 부활 직전까지의 1주간을 말한다. 

예로부터 성도들은 고난주간이 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냈다.
특히 최후의 만찬과 세족식을 기념하는 목요일, '세족목요일(洗足木曜日)'과
주님이 십자가 달려 돌아가신 금요일,
'성금요일(聖金曜日, Good Friday)은 더욱 경건하게 보낸다.
오락을 금하고 금식을 하기도 한다. 

마르틴 루터(Luther)는 종교개혁을 통해 고난주간에 행해지던 로마 가톨릭 의식들을 대부분 폐지했으나,
츠빙글리(U. Zwingli)의 영향 아래 부분적으로 회복됐다.
오늘날에는 교파에 따라 다양하게 지켜지고 있으며,
특별 새벽기도회나 저녁모임 등을 열어 경건하게 보내고자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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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주일 전까지 40일의 기간을 일컫는 사순절은, '렌켄(lencten)' 이란 고대 영어에서 파생되었으며, 의미는 '봄'이다.
이것은 보통 무언가를 포기할 때 사용한 말이었다. 
사순절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구체적인 관행은 교회마다 다를 수 있다.
다음은 성스러운 계절에 관한 다섯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다.

1. 기원(Origins)

사순절에는 복잡한 역사가 있다. 4세기 전까지 구체적인 교회 절기로 인정되지 않았으며, 초기 교회의 금식과 참회의 의식에서 파생된 것으로 본다.

2013년 노트르담 대학의 예술과 문학과 교수인 니콜라스 루소 교수는 한 학술논문에서 "사순절은 점진적인 역사적 발전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그는 "부활절 이전 금식은 역사가 오래되고 널리 퍼진 것처럼 보이지만, 금식의 기간은 장소와 세대에 따라 크게 달랐다"고 설명했다. 이어 "40일 사순절에 대한 확실하고 명백한 최초의 증거는 니케아 공회 이후 나타났다. 이것을 볼 때, 사순절과 초기 부활절 전 짧은 금식 기간과는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2. 동 서양 교회의 다른 타임라인(시간대)

사순절은 동 서양 교회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하지만, 교회력(典禮曆年)에서 교파마다 그 구체적인 시간대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 교회에서 사순절은 부활절을 기준으로 6주 반전인 재의 수요일에 시작되어 부활절 토요일 자정에 끝이 난다. 반면 동양 교회에서 사순절은 부활절 전 7주전 월요일에 시작해 부활절 전 금요일에 끝이 난다.

3. 정확히 40일의 기간이 아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것을 비추어 종종 40일의 기간이라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순절 40일 기간에 주일은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의 40일의 기간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요일은 주님의 날로 영적인 기념일로 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사순절 기간 동안 주일은 사순절에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않느냐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에서 웹 사이트를 통해 주일에 금식을 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개인에 달려 있다고 밝혔다.

USCCB는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행하는 금식과 사순절 매주 금요일에 행하는 금식을 제외하고 사순절 기간 동안 추가적으로 회개의 날을 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4. 재의 상징성

서양 교회의 경우,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이때 예배자의 이마에 재를 십자가 모양으로 긋는 의식이 진행된다.

이 의식이 주는 핵심 메시지는 유한성과 참회이다. 이때 재는 주로 지난 해 종료주일에 사용한 나뭇가지를 태워 준비한다. 가톨릭 웹사이트에 따르면, 이 의식은 인간의 유한성과 회개의 필요성을 상징한다. 이것을 통해 우리의 삶은 짧고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5. 사순절과 맥도날드의 피쉬버거(Filet-O-Fish)의 유래

사순절 관행에 사탕과 고기 같은 것을 먹지 않는 관행이 사회 문화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다. 그 영향으로 미국 대중이 널리 즐기는 것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맥도날드의 피쉬버거(Filet-O-Fish)이다.

금요일마다 고기를 먹지 않는 전통적 가톨릭 관행에서 맥도날드의 피쉬버거가 나오게 되었다.

USA 투데이에 따르면, 오하이오주 신시네티 맥도날드 식당의 소유주인 루 그로엔(Lou Groen)은 1962년 처음 피쉬버거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그의 이웃 주민들이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고, 사순절 기간 동안 이 버거를 만들었다.

고기를 대체한 패트를 넣은 버거를 준비하던 맥도날드 대표 레이 크록은 "그가 피쉬버거를 만들어 본부로 가져왔다"고 말했다. 이후 맥도날드에서 그로엔의 피쉬 버거를 채택했으며, 이후 고기 대신 파인애플을 구워 만든 훌라 버거를 생산했다. 그러나 피쉬 버거가 훌라 버거보다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사순절(四旬節)이라는 말은 본래 '40일(라틴어로 quadragesima)'을 의미한다. 초대교회에서는 부활절 새벽에 세례가 베풀어졌는데, 세례 예비자들이 '회개'를 통해 세례를 준비하던 기간이 40일이었다. 이미 세례를 받은 신자들도 자신들이 받은 세례를 되돌아보고 자신을 갱신하는 일에 힘썼던 기간이다. 

'40일'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40일을 상징하기도 한다. 성도들은 사순절 기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하신 예수님의 수난에 초점을 맞추고, 예수님을 집중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나의 필요를 구하기보다는 예수님이 가신 희생의 길을 묵상하며 그 분께서 가신 길을 우리도 따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재의 수요일 


사순절의 첫날은 항상 수요일로, 교회는 이를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또는 '참회의 수요일'이라 부른다. 이렇게 불린 것은 이날 예배에서 재(Ash)를 사용했기 때문인데, 전통적으로 재의 수요일 예배에서는 목사가 성도들의 머리 혹은 이마에 물에 적신 재를 갖고 십자 성호를 그으면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임을 기억하라"는 순서를 가져왔다.

재의 수요일에는 인간의 죄와 유한성, 인생의 무상함을 분명히 인식하고 기억해 하나님의 용서와 도우심을 구하면서 살아갈 것을 깨우친다. '재'는 참회와 회개, 유한성, 정화와 순수, 농경문화에서는 새로운 생명과 성장을 위한 밑거름 등을 의미한다. 

특히 재의 예식에는 1년 전 종려주일에 사용했던 가지를 태워 만드는데, 1년 전부터 이를 준비하면서 우리 자신을 온전히 태우는 헌신을 통해 온전한 제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사순절의 시작, 주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최초의 교회에서는 부활절 전 하루나 이틀을 금식함으로써 부활주일을 준비했으나, 곧 부활절 전 한 주간을 통째로 거룩하게 지키는 관습이 생겨났다. 그 후 한 주간이 3주간으로 길어졌고,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후 최종적으로 6주간 40일로 정해졌다. 

특히 사순절의 마지막 한 주간은 부활절 준비의 절정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인데, 서방교회에서는 이를 '성 주간(Holy Week)', 동방교회에서는 '성 대주간(Great Week)'이라 불렀다. 

사순절의 주제는 예수님의 고난과 이를 대하는 성도의 참회를 뚜렷하게 하는 것들로 채워진다. 전통적으로 사순절 주제는 첫째 주에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유혹을 생각하고, 둘째 주는 죄를 물리치라는 명령을 생각한다. 셋째 주는 회개로의 요청을 묵상하고, 넷째 주는 치유와 회심을 생각한다. 넷째 주는 '장미 주일(Rose Sunday)'이라고도 불리는데, 주일의 강조점이 죄인의 회개에서 그리스도의 치유 능력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다섯째 주일은 종려주일로 부활절을 미리 맛보는 주일이다. 

사순절의 영성 

1세기 말 기록된 '디다케(Didache)' 문서는 세례 예비자들이 초대교회에서 사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를 보여준다. "세례를 베풀기 전 세례베풀 자와 받을 자, 할 수 있는 다른 이들도 금식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다른 이들'은 신앙공동체 전체를 뜻한다. 초대교회는 이처럼 세례받는 사람들과 함께 전체 공동체가 금식하면서 각자가 받은 세례를 기억하고 그때 했던 신앙의 다짐들을 다시 확인하는 언약 갱신의 기회로 사순절을 활용했다. 

사순절의 영성은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세례의 영성'과 '금식과 기도, 자선의 영성'이다. 세례의 영성은 사순절 영성의 핵심으로, 회개와 개종에 기초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음을 의미한다. 또 금식의 올바른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립하고 개선하며 변혁시키는 것이다. 

금식과 기도, 구제는 음식과 시간, 돈 등 우리 삶을 움켜쥐고 있는 것들을 스스로 포기하고 더 본질적인 무엇인가를 취하게 된다. 오늘날 범람하는 각종 매체에서 자신을 떼어놓는 '미디어 금식'도 이의 일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