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40"의 의미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수치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러 번 반복되면서 시험, 준비, 심판, 변화, 새로운 시작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주요 의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시험과 훈련의 기간

  •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

    •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40밤 하나님과 함께하며 율법을 받음 (출애굽기 24:18, 34:28)

    •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 방황하며 시험을 겪음 (민수기 14:33)

  • 예수님

    •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사탄에게 시험을 받음 (마태복음 4:2)

🔹 “40”은 인간이 어떤 영적 준비와 시험을 통과하는 기간을 상징합니다. 

2. 심판과 재앙

  • 노아의 홍수

    • 비가 40일 40밤 내림 (창세기 7:12, 17)

  • 이스라엘과 아모리 족속

    • 광야에서 방황하며 세대가 심판받는 기간 (민수기 14:33–34)

🔹 “40”은 하나님이 심판 또는 징계를 통해 정화하시는 기간을 나타냅니다. 

3. 변화와 새 출발

  • 예수의 사역 시작

    • 광야에서의 40일 시험 후,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

  •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

    • 광야 40년 후, 새로운 세대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감

🔹 “40”은 옛 것을 마감하고 새 것을 시작하는 준비 기간을 의미합니다. 

4. 대표적 40 등장 예시

사건 성경 구절 의미
노아의 홍수 창 7:12 심판과 정화
모세의 시내산 체류 출 24:18 하나님의 계시와 준비
이스라엘의 광야 방황 민 14:33 시험과 심판
엘리야 금식 1왕 19:8 영적 회복과 준비
예수 광야 시험 마 4:2 시험과 사역 준비 

5. 정리

  • 시험/훈련: 40일/년 → 영적 성장과 준비

  • 심판/정화: 40일/년 → 죄와 불순종에 대한 경고

  • 새로운 시작: 40일/년 → 변화, 새로운 사역, 새로운 세대

즉, 성경에서 “40”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고,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새로움을 준비하는 신성한 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속 ‘40’ 연표

사건 성경 구절 기간 의미 비고
노아 홍수 창세기 7:12, 17 40일 40밤 심판/정화 인간과 세상을 정화하는 심판의 비
모세 시내산 체류 출애굽기 24:18, 34:28 40일 40밤 시험/훈련 하나님의 율법을 받음
모세 금식 신명기 9:9, 18 40일 40밤 시험/훈련 하나님께 간구하고 금식
이스라엘 광야 방황 민수기 14:33–34 40년 시험/훈련 & 심판 불순종으로 새 세대 준비
사사들 기간 사사기 3:11 40년 새 출발/평화 기드온, 입다 등 사사 지배
엘리야 금식 1열왕 19:8 40일 40밤 시험/훈련 & 회복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준비
예수 광야 시험 마태복음 4:2 40일 시험/훈련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사역 시작
엘리사 사역 후 열왕기하 2:23–24 40년 심판/징계 불순종한 세대에 대한 경고
모세의 지도 기간 출애굽기, 민수기 40년 지도/훈련 민족 지도와 준비
다윗 통치 초기 사무엘상/열왕기상 40년 새 출발/사역 왕으로서 이스라엘 통치 시작

🔹 의미별 요약

  1. 시험/훈련

    • 모세, 엘리야, 예수 → 금식·광야·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준비

  2. 심판/정화

    • 노아 홍수, 이스라엘 광야 방황 → 불순종과 죄에 대한 경고

  3. 새 출발/변화

    • 다윗 통치, 사사 지배 → 새 시대 시작, 하나님 계획 성취



성경에서“40”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알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어떠해야 되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 땅의 고난의 수자인 “4”에다 꽉 찬 수인 “10”을 더한 “40”이라는 수자는 성경에서 이 땅에 있어서의 시험과 환난을 나타내는 숫자로 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40”이라는 숫자는 반드시 통과하고 승리해야 온전한 하나님의 신앙인이 되는 숫자입니다.

모세는 호렙 산에 올라가 “40일 40야”를 물도 마시지 않고, 금식하면서 여호와의 명을 기다렸고(신 9:9)
예언자 엘리야는 “40일 40야”를 먹지 않고 같은 호렙 산에 이르렀고(왕상 19:8),
노아의 홍수는 “40일”일 동안 계속되었고
이스라엘 민족이 “40년”동안“광야“를 방황했고(민 14:33)
“애급“은 “40년”동안 황무한 땅으로 있으리라고 했습니다(겔 29:12).
 
또 예언자 에스겔은 “40일” 동안 유다의 죄를 지고 엎드렸고(겔 46)
악인의 형벌로서 매 “40대“를 때리게 하였고(신 25:3)
사도바울도 유대인들에게 "40"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고후 11:24)
산모는 산후 ”40일“을 지나지 않으면 성소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레 12:1-4).
예수께서”40일 40야“를”광야“에서 금식하셨다고 하는 것도(마4:2)이 예를 본받은 것입니다. 즉 고난이나 괴로움이라고 하면"40"이라고 말했으며, 반드시“40”의 정수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께서“40일”동안 금식하셨다는 것을 보고, 즉시 이 사실을 생리학적으로 설명하려고 초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모세도 엘리야와 같이“40일”동안 금식했다는 것입니다.“40”은 고난을 잘 통과할 때에만 빛나는 수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40일”동안"광야"에서 금식하며 마귀의 시험을 슬기롭게 통과함으로 공생애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이“40”으로 상징되는 고난과 시련을 극복해야만 하는 것을 성경은 처음부터 보여 주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시련을 세상과 싸워서 이기는 숫자입니다. 이것을“십자가의 도”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3:4)니느웨는 종교적인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 모든 도시들이 그러했습니다. 니느웨에는 하나님께 닿게 하기 위해 하늘까지 높이 쌓았던 바벨탑들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당시생활을 지배했으므로 그 사회는 질서와 안전을 보장 받았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제사와 의식을 지키고 규율에 복종함으로써 위험요소를 제거했습니다.
그렇게 신은 인간에게 봉사하는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사람들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도시로 모여듭니다. 또한 편리함과 예술과 음악과 문학으로 하늘의 기쁨을 만끽하고 편리함을 누리기 위해 도시를 선호합니다,“40”이라는 숫자는 그 핵심에 소망이 담겨 있는 전형적인 성경 용어입니다.“40일”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한 시험을 치루는 기간입니다. 나를 낮추시며 시험하셔서 내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달아 보는 기간입니다.“40일”은 자기 삶의 실체를 시험할 수 있는 기간입니다. 자신이 따르는 진리와 온전 성을 시험할 수 있는 기간입니다. 자신의 삶이 진정한 삶인가, 아니면 교묘한 문화가 만들어낸 하찮은 모조품인가?
나의 말과 행동은 나 자신의 것인가, 아니면 내가 하는 일을 나보다 더 알지 못하는 자들로부터 빌려온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을 능숙하게 다듬어 나가고 지혜롭게 인도하시는가, 아니면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나의 변덕과 어린아이 죄악이 나를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가장 낮은 수준으로 약화시키고 있는가? 이런 식으로 나의 여생을 보내야 하는가? 우리의 모든 경우에서“40”이라는 숫자는 종말론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마지막 날인“40번”째 날이 도래하려면 그 이전에 서른아홉 번의 날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서른아홉 번의 날 동안“40일”의 현실성에 걸 맞는 종말론적인 압박감을 경험합니다. 그날들을 신앙으로 예배하는 삶을 위한 훈련장이 됩니다. 그날들은 십자가에 순종해야 한다는 인식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40일”의 기간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면 생명은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됩니다.“40일”을 무시하면 생명은 파멸됩니다. 이와같이 성경은 일상 용어로 기록했으나 글자 하나 하나가 깊은 뜻이 감춰져 것입니다
 






십일조


십일조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shorts/Scz1jhRP6pg


גְּנֵבָה Storng number 1591

1. 잃어버린 것.  2. 도둑질.  3. 절도 
Pronunciation [ genêbâh ]
Etymology /  1589에서 유래
Old Testament  / 2회 사용
  • 1. 명사, 여성 잃어버린 것, 도둑질, 절도, 출22:3.
  • 관련 성경  / 도둑질(출 22:3,4).


גָּנַב Storng number 1589

1. 훔치다.  2. 속이다.  3. 피엘형 
Pronunciation [ gânab ]
Old Testament  /  40회 사용
  • 1. 원형 훔치다, 몰래 가져가다, 창31:19,30,39,삼하19:42(41), 신24:7, 욥21:18
  • 2. 원형 속이다, 창31:27.
    • a. 원형 피엘형
    • b.원형 훔치다, 렘23:30
    • c. 원형 속이다 [לֵב가 수반됨], 삼하15:6.
  • 문법설명  /  미완료형 יִגְנֹב
  • 관련 성경  /  도둑질하다(창 31:30, 잠 6:30, 렘 23:30, 수7:11, 왕하11:2, 삼하15:6), 가만히 가져오다(삼하21:12), 날려가다(욥21:18), 앗아가다(욥27:20), 도둑을 맞다(출22:7,12), 가만히떠나다(창31:20), 가만히 도망하다(창31:27), 유인하다(신24:7), 도둑맞다(창31:39), 끌려오다(창40:15), 가만히 이르다(욥4:12),
    [명] 도둑질(호 4:2)








안식일과 주일


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는가?

창세기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made it holy, because on it he rested from all the work of creating that he had done.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카도쉬)하셨다.
안식일의 시작은 날을 거룩하게 하신 것에서 출발합니다.

출애굽기 3: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Do not come any closer," God said. "Take off your sandals, for the place where you are standing is holy ground.

날의 거룩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창세기 2:3)

공간의 거룩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출애굽기 3:5)

회막의 거룩(출애굽기 28:43)
아론과 그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지어서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의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성전의 거룩(시편 11:4)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교회의 거룩(마태복음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4복음서 중에서 교회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마태복음에서 2구절 뿐이다.

마태복음 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히브리어 카할 - 주도자가 누구인가? 누가 모이게 하셨는가?(한스 큉의 견해)
헬라어 에클레시아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유대교와 기독교로 구분된다.
 
유대교 - 회당 - 여호와(하나님)

기독교 - 교회 -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 그리스도   

천국 열쇠 : 은혜의 수단 <말씀> <성령> <기도> 

성경적 교회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기능 - 말씀 선포, 권징, 성례 





날에 대한 거룩한 것을 공간의 거룩으로 발전합니다.
모세가 호렙산 가시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을 목격하고 그가 섰던 자리를 거룩한 곳으로 알게 됩니다.



그런데 날(시간)ㅇ-시간이렇게 시작한 안식이

안식일(安息日)과 주일(主日)

  • "Remember the Sabbath day by keeping it holy.
  • Six days you shall labor and do all your work,
  • but the seventh day is a Sabbath to the LORD your God. On it you shall not do any work, neither you, nor your son or daughter, nor your manservant or maidservant, nor your animals, nor the alien within your gates.
  • For in six days the LORD made the heavens and the earth, the sea, and all that is in them, but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Therefore the LORD blessed the Sabbath day and made it holy.

  • 출애굽기 20:8-11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 같이 안식하게 할찌니라
  •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 신명기 5:13-15 

  • Six days you shall labor and do all your work,
  • but the seventh day is a Sabbath to the LORD your God. On it you shall not do any work, neither you, nor your son or daughter, nor your manservant or maidservant, nor your ox, your donkey or any of your animals, nor the alien within your gates, so that your manservant and maidservant may rest, as you do.
  • Remember that you were slaves in Egypt and that the LORD your God brought you out of there with a mighty hand and an outstretched arm. Therefore the LORD your God has commanded you to observe the Sabbath day.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거듭남



    거듭남의 진정한 의미 :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이름을 통한 영의 탄생



    많은 사람들이 ‘거듭난다’는 말을 일상에서 자주 접합니다. “두 번 다시 이런 행동을 하지 않겠습니다. 거듭나겠습니다.”라는 표현을 우리는 종종 듣습니다. 특히 잘못을 했거나 물의를 일으켰을 때 “앞으로 우리가 거듭나겠습니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안 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거듭남’은 이런 일상에서 쓰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거듭남’의 정확한 의미는 영어로 ‘Born again’입니다. 즉, 두 번의 탄생이 있다는 뜻이며,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6절에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합니다. 첫 번째 태어나는 주체는 육이고, 두 번째 태어나는 주체는 영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니고데모의 방문과 예수님의 가르침

    요한복음 3장에는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이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왜 예수님은 이런 대답을 하셨을까요? 요한복음이 기록된 목적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요 20:31)”입니다. 즉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아닌 ‘선생님’으로 불렀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부른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예수님만의 독보적인 이름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장 26절을 보면 세례 요한도 ‘선생님’이라고 불렸습니다. 따라서 ‘선생님’이라는 이름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호칭이며, 그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자와 독생자: 예수님의 두 이름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 자신을 ‘인자’와 ‘독생자’라는 두 가지 이름으로 소개하십니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독생자’는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3장 13절에서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 즉 ‘사람의 아들’로 소개하셨습니다. 비록 하늘에서 내려오셨지만, 마리아의 몸에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은 죽을 수 있는 인간의 몸으로 하늘에서 오신 이름인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독생자’는 ‘아버지와 어머니 없이 홀로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을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독생자’는 ‘독생하신 하나님’, 즉 ‘아들이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부활과 거듭남의 연결

    많은 사람들은 ‘거듭남’을 ‘죄 사함’과 연결시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거듭남’을 ‘부활’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3-4절에서 바울은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영’으로는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부활하기 전에도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1장 4절에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고 말합니다. 이 예수님이 ‘육신’으로 다윗의 혈통에서 나시고, ‘영’으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것은 요한복음 3장에서 말하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는 ‘거듭남’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도 같은 맥락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는 우리가 ‘부활’을 통해 ‘거듭났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육의 탄생과 영의 탄생

    예수님은 육으로 한 번, 영으로 한 번, 두 번 태어나셨습니다. 육으로는 마리아의 몸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셨고, 영으로는 부활하심으로써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모델입니다.

    사도행전 13장 33절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시편을 인용하여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원래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일시적으로 하나님에게 버림을 당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지위를 잃었버렸습니다. 이는 마태복음 26장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십자기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그 몸은 무덤에 있고 그 영혼은 이사야 53장에서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라는 예언대로 음부로 가시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써 다시 아들의 지위를 회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우리도 ‘거듭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두 번 태어나야 함을 말합니다. 첫 번째는 육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영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육으로 태어나는 것은 모태에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이고, 영으로 태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과 성령’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6-8절에서는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물과 피’는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요소들입니다. 그리고 성령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3장 5절의 ‘물과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특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거듭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듯이, 우리도 그분의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됩니다.

    독생자의 이름을 통한 새 생명

    요한복음의 핵심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그분의 이름을 통해 우리가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우리가 생명을 얻는 방법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입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행동을 바꾸거나 죄를 용서받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의 진정한 의미는 영적인 탄생입니다. 모든 사람은 육신의 아버지가 있듯이, 영의 아버지인 하나님이 계십니다. 거듭남은 우리의 영이 예수가 ‘독생자’인 ‘하나님의 아들’라는 이름을 통해 아버지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처음에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죽음 후 부활하심으로써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로마서 1장 4절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고백한 것은 맞지만, 단지 ‘선생’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성육신(成肉身) εἰσέρχομαι



    성육신(成肉身)이란?

    라틴어 / 인까르나시오(Incarnatio)
    영어 / 인카네이션(Incarnation)
    독일어 / 멘쉬베아둥(Menschwerdung)


    εἰσέρχομαι Storng number 1525

    1. 오다   2. 마 8:5   3. ㉠ 히9:12,24,25   
    Pronunciation [ ĕisĕrchŏmai ]

    Etymology  /  미래 εἰσελεύσομαι, 제2부정과거 εἰσῆλθον , 과거 완료분사 εἰσεληλυ- θώς, 1519와 2046에서 유래
    •  I. 오다, 가다, 들어가다, 들어오다.
      •  1. [장소]
        •  a. [도시의 명칭과 함께] 마8:5, 21:10, 막2:1, 11:11, 눅7:1, 행10:24, 23:33.
        •  b. [기타 장소] ㉠ [성소 안으로] 히9:12,24,25. ㉡ [성전 안으로] 눅1:9, 계15:8. ㉢ [집 안으로] 마10:12, 12:29, 막7:17, 눅1:40, 8:41, 행11:12, 16:15, 21:8. ㉣ [회당 안으로] 막1:21, 3:1, 눅4:16, 6:6, 행14:1, 18:19, [참조] 약2:2. ㉤ [성 안으로] 마10:11, 27:53, 막1: 45, 눅10:8, 22:10, 행9:6, 14:20. ㉥ [마을 안으로] 막8:26, 눅9:52. ㉦ [관청 안으로] 요18:28, 19:9, [참조]마6:6, 24:38, 눅9:34, 17:27, 요10:1, 18:1, 20:6, 행25:23.
        •  c. [일반적으로] 롬 5:12.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하여, 히 10:5.
        •  d. [흔히 장소가 언급되지 않지만 문맥상 유추할 수 있음] 마9:25, 막13:15, 눅19:1, 행1:13, 5:7,10, 10:25, 고전14:23, 24.
      •  2. εἴς τινα
        •  a. ~중에 들어가다[군중 속에], 행19:30, εἰς ὑμᾶς, 행20:29.
        •  b. ~에게 들어가다[특히 귀신이] 막9: 25, 눅8:30. ㉠ [귀신에 대하여] 막5:12,13, 눅8: 32,33. ㉡ [사탄에 대하여 유다에게] 눅22:3, 요13:27. ㉢ [기타] 눅9:46, 계11:11.
      •  3. πρός τινα: ~에게 오다, 가다, 막15:43, 행10:3, 11:3, 16:40, 계3:20.
      •  4. ἐπί τινα, 행1:21.
      •  5. [출발한 장소에 대한 언급과 함께] 마7:13, 19:24, 눅13:24, 18:25, 요10:1,2,9.
      •  6. [ὑπὸ τὴν στέγην과 함께] 지붕 아래로 즉 집에 들어가다, 마8:8, 눅7:6.
      •  7. [부사 εἰ. ἔσω와 함께] 안쪽으로, 내부로 가다, 마26:58, 22:12, 막14:14, 히6:20.
    •  II. [비유적으로]
      •  1. [사람에 대하여] ~것 안으로 들어가다=~을 나누다, 공유하다, ~을 누리 기에 이르다, 마5:20, 7:21, 19:24, 막9:47, 10:15,23,24, 눅18:17,25, 요3:5.
        •  a.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다=그것을 얻다, 마18:8,9, 19:17, 막9:43, 45.
        •  b. 안식으로 들어가다, 히3:11,18, 4:1
        •  c. 그의 영광으로 들어가다, 눅24:26.
        •  d. 시험에 들어가다, 마26:41, 눅22: 40,46
        •  e. 은혜 안으로, 마25:21,23.
        •  f. 수고 안으로 들어가다=수고의 열매를 누리다, 요4:38.
        •  g. [이 용법과 함께 목표가 언급될 필요는 없으나 함축될 수 있는 경우] 마7:13, 23:13, 눅11:52, 롬11:25.
      •  2. [사물에 대하여] 음식에 대하여, 마15:11, 행11:8, 사상에 대하여, 눅9: 46, 히6:19, 약5:4.
    • 관련 성경  / 들어가다(마5:20, 눅4:16, 히9:12), 들어오다(마8:8, 눅7:45, 고전14:24), 참여하다(마25:21, 23), 들다(마26:41, 눅22:40,46), 나가다(막10:25), 오다(눅8:41), 일어나다(눅9: 46), 데리다(눅14:23), 돌아오다(눅17:7), 출입하다(행1:21), 이르다(행11:20).
    성육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가지신 상태에서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과 교리를 의미합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 하나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역사 속에 오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육신은 헬라어로 "로고스(Logos)"가 "육신(Sarx)"이 되었다는 요한복음 1:14에 근거를 둡니다. 
    이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음을 강조합니다.

    성육신의 교리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성육신은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동시에 가지신 두 본성의 신비를 포함합니다. 

    교회는 이를 "단일 인격의 두 본성"으로 정의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본성을 취했지만, 그의 신성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음을 믿습니다. 

    둘째, 성육신은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시작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죄에서 구원받을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감당하신 것입니다(히브리서 2:14-17).

    셋째, 성육신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과 고난을 경험하셨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이해하고 동정하실 수 있는 중보자가 되셨습니다(히브리서 4:15). 
    또한, 성육신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스스로 낮아지셨음을 보여줍니다(빌립보서 2:6-8).

    결론적으로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속량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이루신 놀라운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에서 구속사적 핵심이며,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는 데 중요한 교리적 기반이 됩니다.

    성경에서 성육신과 관련된 구절들을 추려 정리했습니다.

    1.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은 성육신 교리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구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표현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속에 실제로 존재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말씀(로고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그는 창조와 구원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본체입니다. 성육신을 통해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입으셨지만, 여전히 신성을 가지신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단순히 인간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말합니다. 헬라어 "스케노오"는 "장막을 치다"라는 뜻으로, 구약에서 하나님이 성막을 통해 백성과 함께하신 것처럼, 이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만남의 장소가 되셨음을 상징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와 고통에 직접 참여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며 구원의 길을 여셨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는 표현은 성육신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온전히 드러내셨음을 말합니다. 그의 은혜와 진리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나타내며, 성육신이야말로 그 영광의 최고 표현임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1:14은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과 가까이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구체적이고도 신비로운 사건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2.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 1:23은 성육신의 본질을 명확히 보여주는 구절로,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은 이사야 7:14의 예언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으로,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이 인류 역사 속에 실현되었음을 드러냅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탄생, 즉 성령의 역사로 잉태되셨다는 점에서 성육신의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특성을 강조합니다. 처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신 예수님은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지만, 죄로 물들지 않은 완전한 인성을 가지셨습니다. 동시에 그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신성과 인성을 온전히 결합한 존재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성육신의 목적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와 고통에 동참하시고, 인간과 함께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은 성육신이 단순한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구원의 역사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스스로 낮아지셨다는 은혜의 표현이며, 성육신을 통해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길을 여신 구세주로 임하셨음을 보여줍니다.

    3. 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라디아서 4:4-5는 성육신의 목적과 의의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먼저, "때가 차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되는 정해진 시점에 성육신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와 섭리 속에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탄생으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음을 가리킵니다. 이는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으로서 인간의 연약함과 고난을 경험하셨지만, 그의 탄생이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암시하며 그의 신성을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또한,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율법의 요구를 완벽히 순종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시고, 율법의 정죄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라는 구절은 성육신의 구속적 의미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순종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인간을 율법의 얽매임에서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완성을 이루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설명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얻게 되었으며, 단순한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은 은혜의 놀라운 표현입니다. 갈라디아서 4:4-5는 성육신이 단순히 역사적 사건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과 사랑이 집약된 신비로운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4. 빌립보서 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5. 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시믄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6.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7. 로마서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서 죄를 정하사."

    8. 요한일서 4:2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9.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0. 누가복음 1: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니라."

    11. 요한복음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12. 히브리서 10: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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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요한복음 1:14)

    “말씀”이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다른 방식으로 사용됩니다. 

    신약에서 “말씀”으로 번역된 두 개의 헬라어가 있습니다. 
    레마(rhema)와 로고스(logos)입니다. 

    이 두 단어는 의미가 약간 다릅니다. 

    “레마”는 일반적으로 “구어”를 뜻합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38에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말하자, 마리아가 대답합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레마]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그러나 “로고스”는 더 광범위하고 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 1장에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일반적으로 전체적인 메시지를 의미하고 대부분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와 연관되어 사용됩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4:32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시자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로고스]이 권위가 있음이러라”고 말합니다. 
    이때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특별한 말씀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전하신 전체적인 메시지를 듣고 놀랐습니다.

    요한복음 1장의 “말씀”(로고스)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전하기를 원하시는 메시지의 전부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기 전,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계셨고(1절), 만물의 창조에 참여하셨으며(3절), “사람들의 빛”이십니다(4절). 말씀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십니다(골 1:19; 2:9; 요 14:9).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영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사랑과 구속의 메시지는 수세기 동안 무시되어 왔습니다(겔 22:26; 마 23:37).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쉽게 무시하고 죄와 반역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로 인해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게 되었습니다(마 1:23; 롬 8:3; 빌 2:5–11).

    헬라인들은 “마음”이나 “이성” 또는 “지혜”를 지칭하기 위해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요한은 이 헬라어의 개념을 사용하여 삼위일체의 두 번째 인격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표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주를 존재하게 만들고(시 33:6) 궁핍한 자를 구원했습니다(시 107:20). 요한복음 1장에서 요한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영원하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호소합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20:9–16에서 왜 말씀이 육신이 되어야 했는지를 설명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그들이 선지자들을 거부했고 이제 아들을 거부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로고스”는 이제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질 것입니다(요 10:16; 갈 2:28; 골 3:11). 말씀이 육신이 되었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약함도 온전히 이해하시는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같이 모든 면에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십니다(히 4:15).













    기도하는 손 / 알버트 듈러(Albrecht Durer. 1471∼1528)

    기도하는 손 
    알버트 뒤러( Durer, Albrecht. 1471∼1528)  

    설교자들이 자주 소개하는 "기도하는 손"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던 "듀러"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는 스승을 찾아 그림 수업을 받기 위해 집을 떠났어요.
    그러다가 그는 자기와 같은 꿈을 지닌 친구를 만났어요.
    하지만 두 사람은 너무 가난해 매끼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공부와 생계를 함께 꾸려 나가는 것이 벅차 번번이 그림 공부를 중단해야만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친구는 '듀러'가 공부하는 동안 자기는 일을 하겠다고 제안했어요.

    “지금 이대로는 우리 둘 다 꿈을 이룰 수 없네.
    자네가 먼저 공부를 마치게.
    그러면 그 뒤 자네의 그림을 팔아 내가 공부를 하도록 하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자네도 그림을 그리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인데.”

    처음에 듀러는 친구의 제안을 완강히 거절했지만 친구의 꾸준한 설득으로 마침내 듀러가 먼저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어느 날, 듀러의 재능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작품이 잘 팔리게 되었어요.
    이제 약속대로 듀러의 친구는 다시 그림을 그리러 화실로 돌아오게 되었어요.
    그런데 친구는 그 동안 너무 힘든 노동을 한 탓에 손가락이 심하게 휘고 굳어져 버려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어버렸어요.
    듀러는 울부짖으며 친구를 껴안았지만 친구는 조용히 웃으며 듀러의 눈물을 닦아줄 뿐이었어요.
    하지만 그 뒤에도 죄책감으로 듀러는 방황하며 그림을 그릴 수 없었어요.

    어느 날 듀러는 우연히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어요.
    친구가 그의 화실에서 실의에 빠진 듀러를 위해 뒤틀리고 휘어진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고 있었던 거에요.
    듀러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 친구의 우정에 보답하겠다고 생각하고 혼신을 다해 그림을 그렸어요.
    그 작품이 바로 유명한 ‘기도하는 손’이라는 작품이에요.

    이 그림의 손은 손가락이 다 휘어지고 주름지고 거칠고 투박해요.
    아까 우리가 봤던 그 예쁜 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못생긴 손이지요.
    그렇지만 이 ‘기도하는 손’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이에요.
    이 손에는 친구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우정과 사랑과 섬김이 배어있기 때문이죠.

    내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남을 위해 기도하는 손이기 때문이에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마음이 뭉클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의심많은 도마처럼 그 이야기가 진짜일까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네델란드의 둑이 무너지는 것을 어느 소년이 손을 틀어막아 구했다는 얘기를 수없이 듣고 자랐지만 정작 네델란드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얘긴지 알지도 못합니다. 

    누군가 창작해낸 얘기를 인용하고 인용하다보니 교과서에까지 나오게 되고 우리 국민창작동화가 된 것이죠.
    사실은 그런 일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의심많은 저는 이 그림에 얽힌 것도 다분히 꾸며낸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그래도 그 작자를 발견하고 그가 실제 인물이라는 것, 그리고 이 작품도 그의 실제 작품이라는것을 안 것만 해도 행복했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의 미술적 가치만을 평가하는 미술전문 평론에는 이 따뜻한 얘기는 나오지는 않더군요. 
    미술외적인 얘기라서 그럴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놀란 것은 이 작가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시대, 무려 500여년 전의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그 기도하는 손은 현대인의 손이 아니라 몇 백년 전의 사람의 손입니다.
    그러나 긴긴 세월 그 설화는 사라지지 않고 따뜻하게 남아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군요.

     

    알버트 뒤러의 자화상 / Albrecht Durer (1471∼1528)

     

    <작가 / 해설> 독일 화가· 판화가· 조각가· 미술이론가. 
    뉘른베르크 출생.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완성자이다.
    헝가리에서 이주한 금세공사인 아버지와 금세공업 집안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18명의 자녀 중 셋째로 출생.
    1490∼1494년 콜마르·바젤 등지를 편력, 목판제작에 정진했다.
    95년 귀국하여 공방을 차리고 동판화를 시도했다.
    작풍(作風)은 처음에 M.숑가우어의 자극을 받고, 이어서 베네치아파 화가 벨리니 일파의 영향을 받았다.
    1490∼1494년 바젤·스트라스부르 등 각지를 편력, 판화기술을 연마하고 수채화(水彩畵)의 새 분야를 개척했다.
    목판화로 시작한 뒤러의 미술은 금세공가인 아버지로부터 받은 훈련과 선배 화가 마르틴 숀가우어의 영향을 받아 이내 동판화의 대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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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가 막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도가 막히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치명타다.
    사람에게 있어서 혈관이 막히는 것과 같다.
    기도가 막히면 신앙생활에 모든 것이 막힌다.
    기도 없는 회개는 상상도 할 수가 없다.
    기도하는 자가 성경도 읽고 싶고 전도도 하게 되며 교회생활에도 적극적이다.

    기도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는 뻔뻔함을 보일 수밖에 없다.
    기도는 우리의 양심을 흔들어 깨우는 촉매제와 같은 것이다.
    성령충만함이 기도에서 나온다.
    기도할 때에 성령의 생생한 체험을 하게 된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체험한 자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모든 죄를 털고 일어날 힘을 얻게 된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임재 하시는 성령은 소멸하는 불이기 때문에 모든 죄된 것들을 살라 불태워 버리실 수 있다.

    기도는 비틀어진 우리의 심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킬 뿐더러 인간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역활을 한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신앙은 기도의 유무에 달려 있다.
     
    우리가 왜 기도를 안하게 되는 것일까?

    첫째,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대화가 막힌다.
    사랑하면 서로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 한다.

    둘째, 게으름 때문

    게으름은 신악생활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종양과 같다.
    서서히 신앙생활을 마비시키며 마침내는 하나님과의 단절로도 이어지게 하는 무서운 영적 질병이다.

    ​셋째, 우선 순위의 잘못

    하나님보다 더 우선하는 세상적인 것 때문에 기도를 안하게 되는 것이다.
    올바른 신앙생활은 무엇보다 우선순위가 똑바로 세워져야 가능하다.

    넷째, 성령충만함이 없기 때문

    기도하지 않으면 성령충만함을 받지 못하고 성령충만하지 못하면 기도할 수 없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기도하면 성령충만하고 성령충만하면 기도할 수 있다는 선순환으로 바꾸어야 한다.

    다섯째, 교만하기 때문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자만심과 교만함이 기도를 안하게 만든다.
    이런 사람들은 고난을 맛보고 나서야 비로소 기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일이 닥치기 전에 먼저 기도하는 습관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역동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할 수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쉬지말고 기도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7

    기도한 후에 일을 시작하라
    기도하는 마음을 일을 하라
    일을 마치고 기도하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에베소서 6:18


    성 그레고리오
    「신학 강론」을 통해 『기도란 마음의 기억을 새롭게 하여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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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 단어의 기도 


    לִי 3627 [kelîy]

    • 1. 남성형 명사 기도, 도구, 그릇, 가정용품, 장신구, 창31:37, 45:20, 출3:22, 11:2, 스1:7,사52:11, 렘46:19
    • 2. 남성형 명사 의복, 의류, 피복, 장식, 멍에, 신22:5,삼하24:22, 사61:10.
    • 3. 남성형 명사 배[항해를 위한] 사18:2.


    לַחַשׁ 3908 [lachash]
    • 1. 남성형 명사 속삭임, 기도, 사26:16
    • 2. 남성형 명사 마술, 요술, 마법, 전10:11, 사3:3, 렘8:17.
    • 3. 남성형 명사 복수׃לְחָשִׁים부적, 주문, 미신적인 장식, 사3:20.
    מְזִמָּה 4209 [mezimmâh]
    • 1. 여성형 명사 의논, 조언, 권고, 충언, 계획, 기도[특히 악한 것에 대해 사용], 욥42:2, 시10:2, 21:12(11), 37:7, 렘23:20
    • 2. 여성형 명사 신중, 세심, 사려분별, 교활함, 교묘함,음모, 모략, 잠1:4, 3:21, 5:2, 8:12.
    • 3. 여성형 명사 사악함, 심술궂음, 욥21:27, 시139:20.


    תַּחֲנוּן 8469 [tachănûwn]
    • 1. 명사 기도, 간구, 시28:2,6, 31:23(22),116:1.
    • 2. 명사 [주]תַּחֲנוּנוֹת, 시86:6.


    בְּעִי 1164 [beʽîy]
    • 남성형 명사 기도, 간청, 욥30:24.

    בָּעוּ 1159 [bâʽûw]
    • 여성형 명사 간청, 청원, 기도, 단6:8(7),14(13).


    חַנּוֹת 2589 [channôwth]
    • 명사 간구, 기원, 기도.시77:10(9).


    מִשְׁאָלָה 4862 [mishʼâlâh]
    • 명사 기도, 기원, 탄원, 청원, 간구, 시20:5, 37:4.


    שְׁאֵלָה 7596 [sheʼêlâh]
    • 1. 여성형 명사 요구, 청원, 기도, 삿8:24, 왕상2:16, 에5:6,8, 욥6:8
    • 2. 여성형 명사 청원, 요청, 삼상1:17.
    • 3. 여성형 명사 대부, 대여, 삼상2:20.
    תְּפִלָּה 8605 [tephillâh]
    • 1. 여성형 명사 간청, 애원, 기도, 느1:6, 시4:2(1),6:10(9), 109:4, 시17, 86, 90, 102,142편.
    • 2. 여성형 명사 중재, 탄원, 왕하19:4, 사37:4, 렘7:16,11:14
    • 3. 여성형 명사 [넓은 의미로] 찬송, 거룩한 노래, 시72:20, 합3:1.
    תְּחִנָּה 8467 [techinnâh]
    • 1.  명사 기도, 간구, 시6:10(9), 55:2(1), 119:170.
    • 2.  명사 은혜, 자비, 수11:20, 스9:8


    חֵן 2580 [chên]
    • 1. 남성형 명사 탄원, 기원, 기도, 슥12:10.
    • 2. 남성형 명사 자비, 호의, 선의, 창6:8, 19:19,32:6(5), 33:8, 30:27, 47:29, 50:4, 출3:21, 11:3, 12:36, 전9:11
    • 3. 남성형 명사 품위, 아름다움, 우아함, 잠22:11, 31:30, 전10:12.
    כָּשַׁף 3784 [kâshaph]
    • 1. 명사 기원하다,간구하다, 기도하다, 경백하다.
    • 2. 명사 피엘형 כִּשֵּׁף: 마법을 사용하다, 마술을 쓰다, 대하33:6.
    • 3. 명사 [주]분사 מְכַשֵּׁף: 마법사, 마술사, 술객, 출7:11, 신18:10, 단2:2,말3:5, 분사여성형 מְכַשֵּׁפָה 출22:17(18).


    בְּרַךְ 1289 [berak]
    • 1. 원형 무릎을 꿇다, 절하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단6:11(10)
    • 2. 원형 축복하다, 단3:28.
    • 3. 원형 피엘형 בָּרִךְ: 찬양하다, 하나님을 축복하다, 단2:19, 4:31(34).
    עֲנָת 6067 [ʽĂnâth]
    • 남성형 고유명사 대답, 기도의 응답, 삿3:31, 5:6.


    צְלָא 6739 [tselâʼ]

    • 동사 기도하다, 단6:11(10),스6:10.


    מָשָׁל 4913 [Mâshâl]
    • 고유명사 기도: 아셀 지파에 속한 한 레위인의 마을 ‘마살’, 수19:26,21:30.


    מִשְׁאָל 4861 [Mishʼâl]
    • 고유명사 기도: 아셀 지파에 속한 레위인의 한 마을 ‘미살’, 수19:26,21:30.


    טוֹפָפָה 2903 [tôwphâphâh]
    • 여성형 명사 이마에 두르는 머리띠[특히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모세율법이 기록된 양피지 두루마리를 머리띠로 사용했다],출13:16, 신6:9(8), 11:18.


    עָתַר 6279 [ʽâthar]
    • 1. 원형 기도하다, 탄원하다[לְ나 אֶל이 수반됨], 창25:21, 출8:26(30), 10:18, 욥33:26.
    • 2. 원형 [신에게] 분향하다
    • 3. 원형 니팔형 : 간구를 듣다, 창25:21, 삼하21:14, 사19:22.


    פָּצַר 6484 [pâtsar]
    • 1.  원형 기도로, 창19:3, 33:11.
    • 2. 원형 촉구하다, 압력을 가하다.
    • 3.  원형 적의로, 창19:9.


    מַעֲנֶה 4617 [maʽăneh]
    • 1. 남성형 명사 들어줌, 응답[기도의], 잠16:1.
    • 2. 남성형 명사 대답, 응답, 회답, 욥32:3,5, 잠15:1,23.
    • 3. 남성형 명사 반박, 논박, 논파, 논증, 욥32:3,5.


    פָּרַץ 6555 [pârats]
    • 1.  원형 터져나오다, 돌격하다, 출19:22,24,삼하6:8, 대상15:13, 욥16:14, 28:4.㉠ 나쁜 의미에서 격렬하게 행동하다,호4:2.㉡ 좋은 의미에서 촉구하다, 간곡히 구하다[기도에 있어서], 삼상28:23,삼하13;25,27.
    • 2. 원형 깨뜨리다, 분쇄하다, 왕하14:13, 느3:35(4:3), 시80:13(12), 잠25:28, 전3:3, 10:8, 사5:5, 미2:13.
    • 3. 원형 흩어지다, 분쇄하다, 삼하5:20, 시60:3(1), 백성이나 양떼가 흩어지다, 외국으로 퍼져나가다, 창28:14, 출1:12, 수가 증가하다, 창30:30, 욥1:10, 호4: 10, 사람의 재산이 늘어나는 데 사용됨, 창30:43, 소문이 퍼지다, 대하31:5, [은유적으로] 넘치는, 풍부한,잠3:10.


    בָּקַשׁ 1245 [bâqash]
    • 1. 동사 추구하다, 찾다, 창37:15,16, 삼상10:14. ㉠ 왕의 얼굴을 보려 하다, 왕상10:24.[특히 청원을 하기 위해, 잠29:26]. ㉡ 하나님의 얼굴을 보려 하다 [특히 기도로], 삼하12:16, 시24:6, 27:8,105:3
    • 2. 동사 찾다.
    • 3. 동사 피엘형 בִּקֵּשׁ


    נָשָׂא 5375 [nâsâʼ]
    • 1. 원형 기도와 찬양하다, 시28:2, 63:5(4),134:2.
    • 2. 원형 [기도] 사37:4.
    • 3. 원형 נָשָׂא פְּנֵי פ 어느 사람에 속한 사람을 영접하다[특히 욥13:10을 보라]. ㉠ [좋은 의미로] 어느 사람의 기도를듣다, 그 일에 호의를 베풀다, 청원자로서 그에 대해 존경하다, 창19:21, 32:21(20), 욥42:8, 잠6:35, 애4:16, 말1:8,9.


    לָקַח 3947 [lâqach]
    • 1. 원형 조언을 받다, 기도를 인정하다, 훈계를 받다, 시6:10(9), 잠2:1, 4:10, 24:32.
    • 2. 원형 1) 취하다, 고정시키다, 부착하다.
    • 3. 원형 잡다, 쥐다, 붙들다, 창3:22, 18:7,8, 21:14,27, 22:6, 시18:17(16).


    פָּגַע 6293 [pâgaʽ]
    • 1. 원형 [칼형의 의미] ㉠ 침범하다. ㉡ [기도로써] 어떤 것을 간구하다. (㉠ [전치사 בְּ가 수반되는 경우] 렘36:25.㉡ [전치사 לְ가 수반되는 경우] 사53:12, 59:16.)
    • 2. 원형 부딪다, 충돌하다.
    • 3. 원형 적의를 품고 달려들다, 삼상22:17,18, 룻2:22. [주] 특히 죽이기 위해 달려들 경우 사용됨, 삿8:21, 15:12,삼하1:15.


    חָרַשׁ 2790 [chârash]
    • 1. 원형 [주]기도응답을 받지 못할 때 하나님에 대해 사용,시35:22, 39:13, 83:2(1), 109:1.
    • 2. 원형 새겨 넣다, 새기다, 다듬다, 렘17:1
    • 3. 원형 제조하다, 만들어 내다, 왕상7:14.


    פָּלַל 6419 [pâlal]
    • 1.  동사 간구하다, 기도하다. ㉠ [특히 하나님께] 시5:3(2), 단9:4. ㉡ [사람에게] 느1:4. ㉢ [단순한 사용] 삼상2:1, 대하7:14.
    • 2.  동사 심판하다.
    • 3.  동사 피엘형


    שָׁחָה 7812 [shâchâh]
    • 1.  원형 ㉠ 기도로 하나님을 경배하다, 창22:5, 삼상1:3. ㉡ [몸을 굽힘이 없이] 창47:31, 왕상1:47.
    • 2.  원형 굽히다, 사51:23
    • 3.  원형 가라앉다, 풀이 죽다.



    헬라 단어의 기도 


    εὐχή, ῆς, ἡ 2171 [ĕuchē]

    • 1. 기도, 약5:15.
    • 2. 맹세, 서약, 행18:18, 21:23.


    • 1. [문맥에 따라 의미 변화] ㉠ 너의 말, 마5:37. ㉡ 설명, 눅20:20. ㉢ 질문, ἐ- ρωτήσω ὑμᾶς λόγον: 내가 네게 물을 것이다, 마21:24. ㉣ 기도, 마26:44, 막14:39. ㉤ 예언, 요2:22, 18:32. ㉥ 명령, 계명, 눅4:36, 벧후3:5,7. ㉦ ...
    • 2. 말하기.
    • 3. [일반용법]
    προσευχή, ῆς, ἡ 4335 [prŏsĕuchē]
    • 1.  기도, 마17:21, 막9:29, 눅22:45, 행3:1.
    • 2.  기도처, 기도소, 교회당, 행16:13,16.
    • 간구, [신약에서는 언제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눅1:13, 2:37, 행1:14, 롬10:1, 고후1:11, 9:14, 엡6:18, 빌1:4,19, 4:6, 딤전2:1, 5:5, 딤후1:3, 히5:7, 약5:16, 벧전3:12.

    • 기원, 탄원, 기도, 히5:7.

    • 1.  기도, 딤전2:1, 4:5.
    • 2.  시간, 요구.
    오픈사전
    εὔχομαι 2172 [ĕuchŏmai]
    • 1. [하나님께] 기도하다, 행26:29, 고후13:7,9, 약5:16.
    • 2. 바라다, 행27:29, 롬9:3, 요삼1:2.


    προσεύχομαι 4336 [prŏsĕuchŏmai]
    • 기도하다, 막1:35, 눅1:10, 행1:24.

    εὐχαριστέω 2168 [ĕucharistĕō]
    • 1. σὺ εὐχαριστεῖς: 너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고전14:17.
    • 2. 기도한다.
    • 3. 감사하다, 감사한 마음을 가지다, 눅18:11, 롬16:4.


    ἐπί 1909 [ĕpi]
    • 1. τῇ σῇ εὐχαριστίᾳ: 너희 감사의 기도에, 고전14:16, 히8:1, ἐ. πᾶσι τούτοις: 이 모든 것 위에, 눅16: 26, 골3:14. ㉢ 어떤 상태, 행동, 결과 등의 기반과 근거가 되는 것을...
    • 2. [속격과 함께 쓰일 때]
    • 3. [장소에 대하여].
    • 1. πρὸς ἑαυτὸν προσεύχεσθαι: 속으로 기도하다, 눅18:11, ἀπέρχεσθαι πρ ὸς αὑτούς: 집으로 가다, 요20:10.
    • 2. [삼인칭 단수나 복수에 대해 그것이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과 동일인임을 지시해준다]
    • 3. [주]
    αἴρω 142 [airō]
    • 1. αἴτοὺς ὀ- φθαλμοὺς ἄνω: [기도 중에] 눈을 들어 우러러 보다, 요11:41.
    • 2. 들어올리다, 높이다, 집어 올리다, 데리고 올라가다.
    • 3. [문자적으로]
    ἀξιόω 515 [axiŏō]
    • 1. [일반적인 뜻] 구하다, 요구하다, 청구하다, 기도하다, 행13:42.
    • 2. 고려할 만하다, 숙고할 만하다, 딤전5:17, 히3:3. [주]
    • 3. [나쁜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 히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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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을 더욱 알고 사랑하고 나에 대한 하나님 계획을 충실히 알아듣고 따르게 되도록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런 목적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개인적인 심리적 위안이나 현세적 만족을 위한 것이라면 올바른 기도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도할 때 불교식 좌선 형식을 고집하는 등 방법에 치중하는 모습들도 많은 것 같다.
    이러한 것은 손으로 「달」을 가리킨다고 할 때 정작 중요한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경우와 같을 수 있다.

    기도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만나는 길, 통로이고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 중심적 사고 행동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가는 것인데 이를 생각지 않고 정화되지 않은 자신의 바람과 욕구 충족에 기도의 목적을 둔다면 「내 만족의 도구 방편」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는 분명 기본적인 충실성이 요구된다』

    『기도가 결코 쉽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즉 변화의 노력 없이 그저 받기만 하는 자세는 곤란하다』
    『결국 하느님은 모든 이가 거룩히 되도록 초청하셨지만 그에 따르기 위해서는 합당한 정성과 시간적 투자가 있어야 한다』
    ​『기도에 대한 열망을 채우는 관심들은 좋지만 그 본질은 잊지 말아야 하고 또 삶과 기도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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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 새벽기도회 유래는 어떻게 시작됐나?

    기독일보 (la@christianitydaily.com)
    7~9분

    어떤 이는 예수께서 새벽기도회를 맨 처음 시작했다는 주장을 하는데 이것 역시 잘못된 주장이다. 예수께서 새벽에 기도하신 이유는 식사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바쁘셔서 새벽에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던 것이다. 새벽기도회에 무슨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는 누가 언제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여기에 옥성득 교수의 한국교회 새벽기도회에 강의를 들어본다.


    옥성득 교수(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석좌 부교수, 한국기독교)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2002년부터 UCLA에서 한국근대사와 한국종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한반도 대부흥' 등이 있다.

    대개 초대 한국교회의 새벽 기도회는 4시 30분이나 5시에 드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새벽 4시 30분이라는 시간은 도성(都城)의 새벽 파루(罷漏)와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큰 도시는 4대 문과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세종 때 만든 자격루(自擊漏, 물시계)로 정확한 시간을 알았다. 따라서 같은 시각에 종을 쳐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했다. 새벽 4시에는 파루(罷漏)로 33번 종을 쳐서 성문을 열고 통행을 시작했다. 밤 10시에는 인정(人定, 인경)으로 28번 타종하여 우주의 일월성신 28개 별자리를 쉬게 하고 성문을 닫고 통행금지를 실시했다. 파루 때 했던 33번 타종은 불교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다.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있는 33개의 하늘을 깨우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사찰처럼 새벽 3시나 5시가 아니라 도성에서 4시에 파루를 친 것은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노동을 해야 했던 농경시대의 산물이었다. 수천 년 간 그때 일어나 일하던 인간의 생체리듬에 맞춘 것이었다. 새벽 기도회를 4시 30분이나 5시에 시작한 것은 4시에 통행이 시작되던 습관을 따라 한 것이다. 도성의 종각에서 타종하지 않아도 4시에 일어나 예배당에 오면 4시 30분이 되었고 먼 곳에서 오는 자들이 많으면 5시에 모여 기도할 수 있었다. 즉 파루와 연관한 하루 일상의 시작 시간에 일어나 교회로 와서 새벽 기도회로 모였다.

    그러나 절에서는 하루 다섯 번 범종을 울리고 예불을 드렸다. 초경(밤 8시), 이경(밤 10시), 삼경(자정, 108번), 사경(새벽 3시, 5번), 오경(새벽 5시, 28번 타종으로 28세계가 깨달음을 얻기를 기원) 등이었다. 사찰의 상가 공동체는 성(城) 안에 있지 않고 산속에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새벽 3시에 예불, 다시 새벽 5시에 운판(나무판)을 치고 목어(목탁)를 울리고, 법고(북)를 울린 다음에 범종(梵鍾)을 28번치고 승려들이 함께 모여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기를 구했다.

    사찰의 그것은 일과에 따라 기도했던 중세 유럽 수도원의 수도사들처럼 생체리듬에 반하는 시간에 일어나 묵상하고 잠과 욕망을 끊는 행위로 드린 염불이었다. 즉 사찰의 새벽종은 세속 도시의 하루를 시작하는 파루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종으로 속세를 떠난 수도승의 정좌와 묵상과 예불을 위한 시공간이었다. 그 피안의 공간에서 매일 자정과 새벽 3시에도 일어나 육체성을 거부하고 전문 종교인 집단의 집회를 만들었다. 따라서 그것은 새벽기도와 달랐고 둘 사이의 연관성은 적었다.

    정리하면 새벽기도는 불교 사찰의 범종이나 전문 종교인들이 드린 피안적 예불과 상관이 없다. 오히려 세속 도성의 새벽 파루와 함께했던 하루 일상의 시작과 연관된다. 그와 같은 세속성 안에서 거룩성을 회복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했던 신자들이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던 데서 창출되었다. 긴장감이 있는 성속(聖俗)의 경계에서 밤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문지방과 같은 틈새 시간에 새롭게 넣은 기도시간이었다.

    (3) 한국교회 새벽기도는 무교적 민속신앙이 그 유래인가?

    1905년 초 송도(개성)서 열린 남감리회 부인사경회 때 캐롤(A. Carroll)이 경험한 내용을 보자. "아침 여섯 시가 되자 마치 아침을 알리는 시계처럼 건너에 있던 여자 교인들이 일어나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하는 바람에 나도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다음 날은 새로 몇 사람이 더 오더니 새벽 4시에 사람들을 깨워 무려 한 시간 반 동안이나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이덕주 교수는 이 글을 해석하면서 과거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 조왕신(竈王神)에게 빌던 여자들의 습관이 사경회 기간 중에 새벽 기도회로 모습을 바꾸었다고 보았다.(이덕주,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0, 348~350쪽) 그런데 이 자료를 가지고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부엌에서 조왕신에게 노래로 찬양을 드렸던가? 아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치성(致誠)을 드릴 때 옆 사람들과 한 시간 반 동안 대화를 나누었던가? 아니다. 자료에 나오는 일시적인 새벽 기도회와 무속의 조왕신이나 치성사이에는 시공간, 성격, 의례 모든 면에서 연속성을 찾기 어렵다.

    2.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시작

    새벽기도의 유래에 대해서는 필자가 발표한 논문이 있다. 
    자세한 논의는 '평양 대부흥과 길선주 영성의 도교적 영향'(한국기독교와 역사, 25호, 2006년 9월, 7~35쪽)을 보라. 
    필자는 이 논문에서 선도(仙道)의 수행자였던 평양의 길선주와 그의 동료들이 청일전쟁 후에 개종하고 평소 수행(修行)을 하던 새벽기도, 통성기도, 철야기도 등을 1905년 전후 사경회(査經會)에 도입했으며, 1909년 전후에 교회 프로그램인 기도회로 만들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새벽기도가 길선주와 그 친구들의 도교(道敎) 수행에서 유래했다는 나의 이 주장에 대해 아직 반론을 들은 적이 없다.

    필자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길선주가 중심이 되어 선도(仙道)에서 기독교로 토착화한 새벽기도와 통성기도는 1910년 전후부터 한국교회에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사적인 소원을 빌었던 도교(道敎)의 기도와 비교하면 개신교의 기도는 민족적 위기에 교회와 민족 공동체를 위한 공공성(公共性)을 지니고 있었다."

    이 논문에서는 또한 집단적인 '새벽기도'는 장로교회 사경회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1898년 2월 황해도 강진교회 사경회에서 일반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새벽 기도회를 시작했으며, 황해도의 다른 사경회(1901년 2월)에서도 교인들이 새벽 기도회를 시작한 것을 처음 소개했다. 이와 같이 사경회(査經會) 때 소규모 일시적으로 모이던 새벽 기도회가 1905년 평양 도(道) 사경회 때 정식 프로그램으로 채택되었으며 1909년에 개교회의 프로그램으로 전환되었다고 정리했다.

    3. 1890~1905년 사경회와 새벽기도회

    선교사들은 1892년 10명 정도의 한국인 남자 지도자들과 조사를 모아 한 달 정도 집중적으로 성경, 교리, 전도법, 설교법, 교회 치리법 등을 가르치는 사경회(査經會)를 조직했다. 1891년 채택한 네비어스의 방법에 따라 본토인 목회자와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1892년 11월 28일부터 12월 24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첫 신학반에 참석한 백홍준, 한석진 외 참석자들이 새벽에 일어나 자발적인 기도회로 모였다. 이후 이 조사 사경회(査經會)에서 새벽에 일어나 찬송하고 기도하는 모임이 계속되었다. 조사 사경회의 새벽 기도회가 황해도에서 일반 사경회 새벽 기도회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말테의 논문 '한국 개신교회 새벽기도의 초기에 대한 연구'(신학과 실천 31호, 2012년 5월, 183~225쪽)에는 1892년 조사 사경회(査經會) 전 백홍준, 마포삼열, 한석진 등의 새벽기도 사례를 소개한 후 여러 사경회에서 행해진 새벽 기도(회) 사례를 잘 정리해 놓았다. 후자는 필자가 소개한 황해도 강진교회 사경회 새벽기도(1898년 2월)와 다른 황해도 사경회 새벽기도(1901년 2월)에 이어 평북 초산(1901), 원산(1903), 평양(1904), 서울 이화학당(1904), 송도(1905) 등의 사경회(査經會)에서 이루어진 새벽기도 사례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어서 필자가 정리한 1909년 길선주와 박치록 장로가 주도한 평양 장대현교회의 새벽 기도회를 마지막으로 언급했다. 이 가운데 1909년 새벽 기도회만 교회에서 광고한 후 일반 신도들이 모인 기도회였고 나머지는 사경회 때 이루어진 일주일 정도의 한시적인 기도회였다.

    이말테는 새벽 기도를 남성들이 시작한 것에 주목했다. 여성들의 무속적 새벽 치성에서 새벽 기도가 유래했다는 통설을 비판했다. 또한 1893년 평양 지부를 개척하던 마페트(S. A. Moffett) 선교사와 조사 한석진 가정의 새벽기도를 근거로 마페트가 새벽기도 창시에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페트가 새벽기도를 시작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더 검토되어야 한다. 만일 그가 새벽기도에 관심이 많았다면 1895년 이후 가정에서 새벽기도를 꾸준히 드리거나 평양 널다리교회 혹은 장대현교회가 준공된 1900년에 새벽 기도회를 창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페트가 남긴 글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또한 개인적으로 잠시 드린 새벽기도를 교회의 '새벽 기도회'의 유래로 보기는 어렵다.

    (1) 길선주의 첫 장대현교회 새벽 기도회는 1906년 아닌 1909년

    많은 책이나 온라인 블로그에 보면 다음과 같은 잘못된 글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새벽기도는 1906년 가을 길선주 장로의 주도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하였다. 이 새벽 기도회는 1907년 평양에서 촉발된 한국 기독교 부흥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길선주 장로는 국가가 어려운 상황(당시 일제강점기)에 놓여 있는 것을 걱정하여 새벽에 교회에 나가 기도하였고 많은 교인들이 같이 기도하기 시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300~500명에 이르는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길선주의 새벽 기도회가 1906년 가을에 시작했다. 길선주의 새벽 기도회가 1907년 부흥의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였다는 세 가지 주장은 오류다. 1906년으로 알려진 것은 김인서가 1930년대 '신앙생활'에 길선주 소전을 쓰면서 그렇게 잘못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 새벽 기도회는 부흥운동이 끝난 후 열기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냉랭해졌을 때 다시 부흥의 불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1909년에 시작한 새로운 부흥회 방법이었다. 또한 아직 한국이 일제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기 이전이었다.

    (2) 새벽 기도회가 정착한 것은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반

    1907년 대(大) 부흥 이후 1910년대에 새벽 기도회가 한국교회에 널리 시행되고 매일 새벽에 모인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런 기록은 없다. 이덕주 교수가 지적한 대로 1914년에 시작한 강화도 마리산 부흥회 때나 여러 사경회 때의 새벽 기도회 모두 일주일을 사경회(査經會)와 부흥회 때 드린 것이 전부 다이다. 그러므로 아직 개 교회 차원에서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또 교회에 홀로 새벽에 나가 30일이나 100일 개인 기도를 드린 예들이나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신석구 목사의 개인 새벽기도 등에서 보듯이 1919년 이전에는 매일 새벽 기도회로 모이는 교회가 없었다.

    1920년대 후반에 정착하는 새벽 기도회 자료는 더 수집해서 정리해야 할 주제다. 이때 새벽 기도회가 매일 드리는 일상의 기도로 거의 모든 교회에서 자리 잡은 것은 식민지 치하에서 더욱 기도가 간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하루하루가 종말인 가난한 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3) 새벽 시간의 기독교화로 파루를 대신한 교회의 새벽 종소리

    1910년대 사경회 때의 새벽 기도회는 도시의 새벽 시간을 기독교화하기 시작했다. 1910년 전후 일제 총독부는 문명의 발전과 도로 확장과 신작로 개설이라는 명목으로 서울과 다른 도시들의 성벽(城壁)을 다 허물었다. 사대문(四大門)을 지키는 일본 순경의 호각 소리와 칼 소리가 새벽 소리가 되었다. 성벽이 없는 경성(京城)에 보신각(普信閣)은 무용지물이라 폐쇄(閉鎖)되었다. 서울은 영혼(靈魂)의 종소리를 잃어버렸다. 성(城)이 없는 경성은 보신각 종소리(聲)가 사라진 경성이었고 종소리 없는 도시는 성스러움(聖)이 사라진 식민지의 경성이었다.

    이러한 때에 도시와 시민들에게 다시 종소리를 준 것이 교회와 성당이었다. 명동성당에서는 아침 6시, 정오 12시, 저녁 6시에 하루 3번 종을 쳤다. 주일마다 각 도시 교회와 그리고 점차 교회마다 사경회를 다른 기간에 하면서 새벽에 종을 쳤다. 여러 교회에서 퍼져 나간 종소리는 다시 새벽시간을 구별하고 도시의 새벽을 살리는 영성(靈聲)이 되었다. 도시의 혼이 살아나는 소리였다. 성수주일이 일주일을 시작하는 안식일의 성화였다면 새벽기도는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의 성화였다.

    3. 한국교회 새벽기도는 성도들이 확보한 시공간

    성(城) 안에 사는 시민들은 새벽 4시에 성문이 열리면 일어나던 습관을 따라 성(城)의 종소리가 사라진 후에도 대개 4시에 거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교회에 도착하는 4시 30분이나 5시에 새벽 기도회로 모이고 이어 일하러 가면 시간이 적절했다. 따라서 4시 30분이나 5시에 시작한 교회의 새벽 기도회는 격리된 산속에 있는 사찰에서 새벽 3시나 5시에 승려들끼리 모여 조용하고 엄숙하게 예불을 드리는 것과 달랐다.

    세속 도시 속에서 거룩성을 느끼고 영성을 유지하려는 노동자와 주부들의 기도회였다. 그 예배는 곧 다가올 일상의 무거움 앞에 하늘의 도움을 구하는 시간이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넘어가는 하루의 문지방과 같은 경계선의 시간의 사이(時間), 그래서 긴장이 팽팽한 틈새 시간, 변혁을 품고 있는 전이의 시공간에 새벽을 깨우는 자들이 모여 하나님을 구했다. 새벽에 일어나야 생존할 수 있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노동자들과 밤낮 쉼 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이 함께하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잠자는 하늘을 깨우거나 중생을 계몽하려는 사찰의 예불과 달랐으며 여성들이 홀로 칠성신(七星神)에게 비는 민간신앙의 치성과 달랐다. 전자에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 없었고 후자에는 남녀가 함께 하는 공동체성이 없었다. 양자 모두 공적(公的) 기도가 없었다. 새벽 기도회가 한국 개신교를 상징하는 의례가 된 것은 피안(彼岸)의 기도나 사적 기복인 기도와 달리 세속 안에서 일반 교인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공적(公的)인 기도회로 기독교화 했기 때문이다.

    소리가 세상을 구한다. 거룩한 영혼의 종소리가 사라진 한국교회에 다시 종을 치는 종지기들이 필요하다. 남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새벽마다 종을 치던 사찰 집사님의 매일의 헌신이 있던 교회 어릴 때 들었던 교회의 그 종소리가 그립다. 기도가 세상을 구한다. 새벽 미명에 무릎 꿇고 자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어머니들의 눈물로 지금 청년과 장년들이 그나마 살고 교회가 살아 있다. 진정한 새벽기도가 세상을 구한다. 한 손에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수직성을 담고 다른 한 손에는 세속 성자로서 민족을 위해 도고하는 수평성을 담아 두 손을 모아 함께 드리는 새벽 기도로 교회가 산다.












    중요한 세가지 형태

    1. 소리기도

    1) 자유기도

    기도하는 사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는 가장 생생함을 줄 수 있다. 기도자가 하느님께 직접 자기 말로 자신의 통회와 열망 기쁨 그리고 청원과 감사를 드린다면 가장 기초적이고 원초적인 가치 있는 기도인 것이다.

    마음에 가득 찬 것이 절로 터져 나와 쉽게 기도를 드릴 수도 있고 때로 마음은 텅 비고 머리 안에서도 아무런 말을 찾을 수 없을 때도 있는데 이렇게 적당한 기도를 드릴 수 없는 것 같다해도 염려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우리 자신보다도 더 잘 알아들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소박하고 어눌한 말로 드리는 기도이지만 그 말들이 진실한 말이 되도록 염려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어쩌면 본질적인 것, 즉 신앙 경외심 신뢰심 그리고 각오를 드러내는 소박한 말들이 소박하다 해서 풍성히 넘치는 말보다 결코 못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강론선집」을 통해 『우리의 기도가 받아들여지는 것은 말을 많이 하는데 달린 것이 아니라 마음의 열성에 달린 것』이라고 밝힌바 있다. 이런 이유로 자유기도를 바치는 것이 어렵다하여 쉽게 만들어 놓은 기도로 눈을 돌려선 안된다.

    2) 만들어진 기도문에 의한 기도

    무슨 기도를 해야 좋을지 모를 때에는 자신을 너무 들볶지 말고 다른 곳으로부터라도 기도를 가져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 입에서 나온 올바른 기도말을 사용해도 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서 배우는 의미도 가질 수 있다. 경건한 사람들이 하는 기도의 말들은 그들의 경험과 위기의 극복 체험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들 말로 기도할 때 우리도 배움을 얻게 된다.

    성서의 여러 구절들은 그 자체가 기도다. 예를들어 시편은 개인의 체험에서 생겨난 것이면서도 모든이의 경험을 대변한다. 성모마리아의 찬미가 「마니피캇」(루가1, 47∼55)이나 즈가리야의 찬미가 「베네딕투스」(루가 1, 68∼79) 또는 나이많은 시메온의 「찬미가」(루가 2, 29∼32) 등이 그것이다.

    바오로 서간에서도 풍부한 기도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에 앞서 그 자체로 유효하고 모든 이에게 필요한 기도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주님의 기도」이다.

    같은 등급은 아니지만 전례에 포함돼 있는 「교회의 기도」들도 권할 수 있다. 미사에서 드리는 「대영광송」이나 성령강림절의 「성령이여 오소서」, 성무일도의 「찬미가」 엄격하면서도 맑은 「미사 기도문」 등이다. 이 기도문들은 초기 교회에서 생긴 것들로 잘 조화돼 있고 하느님에 관한 고상하고 아름다운 생각으로 가득하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올바른 기도를 찾는 것이다. 기도는 무엇보다 진실해야 한다. 소박한 어조를 버리거나 과장하는 기도, 정상적인 정신으로는 가질 수 없는 감정들을 전제로 하는 달콤하고 감상적인 기도도 진실하지 못하다. 잘못된 방법으로 하느님 앞에서 비하하고 자신을 흉하게 만들고 자신의 죄에 대한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는 그런 기도들도 진실되지 못하다. 기존에 나와있는 기도책 들에도 쓸데없는 내용이나 내적 생활에 있어 우리 몸에 맞지 않는 상한 음식과 같은 책들도 적지 않음을 밝히고 싶다.

    3) 반복·음미하는 기도

    소리기도와 마음기도 사이에 있으면서 그리스도교 생활에서 큰 역할을 하는 기도방식이 있다. 물론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된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에는 이방인들처럼 수다를 떨지 마시오. 그들은 많은 말을 해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합니다』(마태 6, 7).

    하느님께 말하는 사람은 소박하고 경건하게 신뢰를 가지고 해야하며 내적으로 올바른 것 외에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한사람에게 여러번 같은 것을 말하듯 같은 기도를 반복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느끼는 것을 단숨에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복해서 말하더라도 그때마다 훌륭하고 순수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기도의 예가 「삼종기도」다. 또 오늘날 도시인들에게 잊혀져 있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바치고 있는 묵주기도 역시 반복되는 머무름과 천천히 나아감의 두 순간을 잘 조화시키고 있다.

    이렇게 소리기도는 관상의 효과를 동반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느 나이들고 학력도 없는 할머니가 성당에서 묵주기도를 바친다고 할때 그분이 비록 자신의 입으로 읊조리는 기도문의 뜻을 다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조용히 의식적으로 반복하면서 하느님 오시길 바라고 성모님께 은총을 전구해 주시길 구하고 있다면 어쩌면 관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면에서 소리기도가 진정한 기도가 될 때 그것은 또한 마음의 기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묵상에 대한 설명에 앞서 「마음의 기도 (oratio mentalis)」에 대해 알아보자. 묵상은 흔히 마음의 기도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마음의 기도는 말을 삼가고 고요를 추구하는 특징을 띄고 있으며 온전한 묵상(meditatio)에 비해서 다양한 정신 활동을 벗어나서 단순한 기도행위(관상기도: contemplatio)로 건너가려는 경향, 즉 침묵과 단순함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강조되는 단어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기도 역시 묵상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역시 마음의 기도(oratio mentalis)는 어떤 면으로는 본래적 의미의 관상과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묵상은 관상적(contemplative) 기도 형태의 하나로서 일반적으로 의지와 지성의 여러 가지 특별한 행위들을 통해 하느님 뜻을 이해하고 탐색하는 관상 형태를 말한다.

    묵상의 어원학적 의미는 「영의 반성(숙고 성찰)」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이는 군인들이나 연주자들의 「연습과 반복」에 상응하는 것이다. 귀로 들은 것, 눈으로 본 것, 기억된 것을 동화 융화하기 위한 작업이며 하나의 생각을 완전히 꿰뚫기 위한 숙고와 저작(詛嚼)을 말한다. 이같은 동화 작업을 그리스도교 신앙 내용에 적용할 때 그리스도교적 묵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 묵상과 그리스도교적 삶

    묵상은 영을 신앙의 신비에 동화하도록 준비시킨다. 이는 오직 하나의 준비를 의미하는 것이다. 묵상활동을 어떤 기계적인 방법으로 얻어지는 어떤 효과와 관련시킨다거나 묵상하는데 있어 영을 사용하는 강렬함 정도에 따라 그만큼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잘못일 것이다. 하느님은 자신의 선물을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허락하신다.

    그러나 한편 성령이 묵상 활동 자체 안에서 활동 못할 이유가 어디 있으며 왜 영과 마음의 자발성 안에서만 오직 일정한 방법으로 활동하겠는가.

    성령의 전적인 자유를 조금도 손상하지 않는 가운데 기도 영역에서 우리가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묵상의 연습이다. 즉 영성지도자의 역할은 무엇보다 묵상자의 용기를 북돋우고 그의 기도생활에 있을 수 있는 장애물들을 피하도록 도움을 주는데 있는 한편 성령이 뒤에 관상으로 이끌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 묵상기도 배경

    중세 수도자들은 전례적 기도에만 오직 전심하지는 않았다. 또한 개인적인 마음의 기도(oratio mentalis) 도움을 받아 신앙의 신비와 동화하려 하였다. 이들 마음의 기도는 항상 「성서 독서(lectio divina)」에 기초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묵상은 복합적 관상 행위 속의 한 순간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체르토사 수도회의 수사 귀고 2세(Guigo II, il Certosino)는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독서(lectura)는 성서에 대한 영의 사용이요 묵상(meditatio)은 이성의 도움을 통해 시도하는 숨겨진 진리에 대한 주의 깊은 탐구이며 기도는 악에서 떠나고 선을 구하기 위한 하느님을 향한 마음의 헌신적인 긴장이며 관상은 영원한 기쁨의 맛에 빠진 영혼이 갖는 하느님께로의 거양(擧揚)이다. 독서는 복된 삶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달콤함을 탐구하며, 묵상은 그 달콤함을 찾아 얻으며, 기도는 그것을 청하며 관상은 그것을 맛본다. 이는 「구하라 찾을 것이요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는 주님의 말씀 자체를 말한다. 즉 「읽으면서 구하라, 묵상하면서 찾아 얻으리라, 기도하면서 두드려라, 관상을 통해 들어가리라. 독서는 음식을 입에 넣으며, 묵상은 그 음식을 잘게 씹으며, 기도는 그것을 맛보며, 관상은 기쁨으로 가득 채우며 원기를 주는 맛 자체이다』

    묵상은 이런 면에서 독서와 기도 사이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독서와의 관계에 있어서 묵상은 영으로 하여금 텍스트의 뜻을 심화하고 그것으로부터 영양을 취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노작(勞作)이다. 그에 뒤따르는 기도는 하느님께로 향한 하나의 간청인데, 묵상은 정확히 하느님의 선물일 수 밖에 없는 진정한 영적 양분을 받기 위한 하나의 준비라고 할 수 있다.

    ■ 다양한 묵상기도 방법

    수도자들의 기도생활에서 마음의 기도(preghiera mentale)는 「독서-묵상-기도-관상」순으로 단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 단계들은 신앙의 신비에 대해 정신 마음 의지 등을 써서 집중하고 저작하고 음미하는, 서로 이어지는 순간들로 파악됐다.

    수도자들에 있어서도 일과 기도를 병행하는 삶의 리듬에 따라 독서와 묵상(meditatio)이 시간적 간격을 두고 서로 나뉘어 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러한 모습은 중세 말기 무렵 묵상기도에 열중하던 평신도들에게도 아주 일상적인 경우로 자리잡았다.

    직업의 다양성은 그들에게 묵상기도를 위한 시간을 따로 갖게 했으나 모두가 성서를 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그들을 위한 별도의 묵상 방법들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했다.

    묵상 방법이 제대로 적용되려면, 무엇보다 그것이 단순화될 필요가 있다.

    중세말기에 제시된 첫 방법들은 상당히 복잡했다. 예를 들면 어떤 것은 모든 묵상 주제들에 적용될 수 있는 스케마를 제시했는데 그것은 스물 세개의 단계로 나뉘어지기도 했다. 그러한 복잡성은 부정적 의미로 해석되기보다는 묵상을 쉽게 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됐다.

    물론 이러한 것들의 적용은 어느 정도 자유로웠다. 각 묵상은 어떤 신비를 탐구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더욱 지성의 사용에 중점을 두고, 또 어떤 이들은 상상 혹은 정서적 발로들을 강조했는데 무엇보다 묵상의 실천을 정리하는 것들이었다. 이와함께 영성적 특징들을 갖는 다양한 기도 자세들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방법들도 제시됐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하느님 현존에 대한 입문적 훈련에 중점을 두었는데, 성인이 제시한 기도의 결론은 실천되는 것, 즉 감사 봉헌 청원의 행위들이었다. 한편 술피스의 기도는 하느님 위격들과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여기서는 「찬미」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지금까지 전해 오는 묵상 방법들 중에서 제일 잘 알려진 것은 「세가지 능력에 의한 방법」, 즉 묵상할 신비의 여러 측면들에 연이어 적용되는 「기억 지성 그리고 의지」에 의한 묵상 방법이다. 여기서 이 세가지 다른 행위의 연결은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우리들이 행하는 반성의 일반적인 과정을 존중하는 것이다.

    묵상의 본론에 들어가기 전, 먼저 필요한 전제들을 빼지 않는 작업이 중요하다. 하느님 현존 앞에 자신을 놓고 자신의 지향을 정화하며 심상(imago)을 응시하고 묵상을 통해 얻고자 하는 은총을 명백히 한다.

    그것은 심상이 다른 능력의 활동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심상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묵상된 장면을 더욱 구체화하기 위해, 그리고 그리스도의 위격을 향한 좀더 깊은 개인적 관심을 고무하기 위한 것이다.

    위격들과의 대화 순간은 기도에 있어 본질적인 것이다. 그 순간은 개인적 일치와 주님께 봉사하기 위한 구체적 노력을 고무하고 지성적인 고찰을 보충한다. 사실 이 대화의 시간이 없다면 묵상이란 단지 추상적인 사색에 머무르게 될 뿐이다.

    이 세가지 능력에 의한 묵상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 성인은 「복음의 장면에 대한 묵상」도 권한다. 각 복음 장면 안에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말을 들으며, 행동들을 고찰하도록 한다.

    이 형태의 기도는 앞의 기도와 구별된다. 왜냐하면 영적 눈길을 추상적일 수 밖에 없는 진리들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이 기도는 일상적으로 더 깊은 정신 집중을 요하며 정서적인 인격에 적합할 수 있다. 또한 성서에 대해 일상적인 친밀함을 진작시키고 정통하게 한다.

    이밖에도 이냐시오 성인은 친숙한 내용을 묵상하면서 기도하는 형식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 양에 상관하지 말고 기도를 하게 만드는 내적인 맛을 느끼도록 해야한다고 성인은 권고한다.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맛보고 느끼는 것이 영혼을 충족시킨다』(Esercizi Spirituali n. 2). 또한 숨의 리듬에 기도하는 방법도 권하고 있다. (Esercizi Spirituali nn. 258∼260).

    ■ 묵상의 행동

    묵상 때 영혼의 행위란 결코 단순한 지혜의 행위가 아니다. 지혜의 행동이란 예를들어 묵상 제목을 듣는다건가 혹은 준비를 위해 책을 읽고 그 문장에 크게 감동되어 아주 열심히 그 줄거리나 설명을 깨달으려고 공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결코 묵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또한 하느님 것에 특별히 호기심을 가지고 그 지식을 구하는 것도 단지 그 지식에만 머문다고 할때 그것도 묵상은 아니다.

    그 때 만큼은 하느님 가르침을 인식하고 즐겁다고 하겠지만 그 즐거움은 참된 사랑에서 나온다기 보다는 자기 만족이기 쉽기 때문이다. 참된 묵상은 하느님께로 부터의 사랑에서 나와 하느님 사랑으로 결합한다.

    묵상을 할 때 우선적인 준비는 「먼저 묵상할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는 먼저 내가 하느님 앞에서 무엇인가를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묵상 초기에는 「나는 무(無)다」라는 것을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 「내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죄를 범했기에 무(無)보다도 못한 존재다」.

    이러한 겸손과 통회로 시작하면 하느님 은혜를 방해하는 교만은 제거될 것이다. 참된 겸손은 절망보다는 하느님 은총에 마음을 도달하게 한다.

    또한 여기서는 신덕과 행동이 중요하다. 하느님과 그 온갖 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 혹은 사명, 사람의 목적, 죄, 직무 등과 각 축일의 신비 등을 묵상한다. 이렇게 기억력, 상상력을 움직여 어느정도 생각해 내려고 노력 하지만 후에 「그것을 믿는다」 혹은 「더욱 믿고 싶다」는 마음을 분명히 일으킨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고 오히려 점점 이론을 줄여 반성을 적게 하고 단지 단순히 하느님을 바라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같은 말을 몇번이라도 마음속에 반복하는 것이 좋다. 또한 일단 정해진 주제와 다른 자연스런 감정이 일어난다면 정해진 주제나 방법에 너무 끼워 맞추려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어서 실제적인 결심과 행동이 뒤따라 나온다. 특히 무엇보다 명심할 것은 한번에 누구나 묵상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유념할 것은 우선적으로 묵상하려는 마음이 앞서야 한다.

    ■ 묵상생활의 지속

    묵상 방법 연구에 부심하기 보다는 마음을 잘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묵상의 은혜를 받고 싶다는 의지를 지니고 겸손하게 되는 것이 필요하다. 보잘 것 없이 보이는 것을 좋아하고 눈에 띄는 것을 싫어하여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것, 경멸 당해도 자신 같은 죄인에게는 당연하다고 여기며 신경쓰지 않고 더 나아가 이것을 예수님과 함께 겪는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다.

    둘째, 보속과 이탈의 정신이다. 세간의 일에 사로잡혀 영혼의 평화를 잃은 결과 질투하고 다른 이가 내게 저지른 잘못을 언제까지나 기억하는 등의 상태에서는 예수님과 대화가 되지 않는다.

    셋째, 하루에도 몇번씩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을 하기전, 혹은 축일에 더욱 더 많은 사랑의 행위를 하는 등 수시로 예수님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넷째, 내적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스스로 마음을 소란하게 하고 자신의 것에만 몰두하는 영혼에게는 예수님의 인자하고 유순한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묵상의 이런 먼 준비는 가까운 준비보다 더 중요하다. 즉 자신의 마음속에 사랑을 증진하기 위한 일상의 움직임이 중요하다.

    묵상의 지속을 위해서는 우선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영적 태만에 대해서 악마에 대해서 끊임없이 싸움을 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인내와 싸움을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과 성령께 깊은 신뢰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택하셨던 길을 걸어 예수를 따라야 한다.

    이렇게 모든 것을 하느님이 주셨기에 시련도 즐겁고 그 시련이 하느님 영광 그리고 자비와 애련함의 표징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이를 묵상생활이라 할 수 있다. 아침 저녁의 묵상은 하나의 준비에 지나지 않는다.

    묵상생활에 장애가 되는 중요한 것들은 「작은 것에 대한 불충실」, 「희생 거절하기」, 「뿌리깊은 이기주의」 등 이다.

    1) 작은 것이 중요

    우리들의 영성생활은 수많은 작은 선한 일들로 이뤄진다. 그런 면에서 아주 작고 사소하게 보이는 행위들도 하느님께 봉사한다는 의식을 지닌다면 하느님과의 관계에 의해 위대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작은 것이라고 소홀히 한다면 우리들은 조금씩 큰것도 소홀히 하게 될 수 있다. 예를들어 성당에 가는 것을 좋아하여 다른 일들은 소홀히 한다면 성당가는 즐거움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매일의 해야 할 일을 중요치 않게 생각한다면 나중에는 신심도 없어진다. 또 일 때문에 성체 조배나 여러 다른 신심 행사에 의무적으로 참여하기를 계속한다면 나중에는 일에 대한 흥미나 헌신적인 태도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반대로 일에만 너무 열중하여 자기 만족을 구하는 태도도 좋지 않다. 자기 만족의 추구는 제일 중요한 것을 중요시 않고, 또 활동에 있어서 하느님과 영혼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단지 자기 자신을 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2) 희생을 거부하는 것

    이는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지 않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께 불리운 데 대한 느낌을 갖고 겸손하고 진실한 묵상 생활에 들어가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간접적으로라도 끊어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내적 생활을 구하지 않고 어떤 일에 열중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남기려 하지만 영혼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지키려 하지도 않고 자존심을 희생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점점 영적 태만에 빠지고 어떤 소죄에 집착하고 만다. 예를 들면 허영심은 누구에게나 있는 경향이기에 곧 깨닫게 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소죄에의 집착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을 바로 잡을 의지가 없게 되고, 여기에 경솔까지 보태지면서 작은 거짓말을 하게 될 수 있다. 진실을 말해야 할 때 고통도 느끼지만 이런 영혼의 병을 지니고 있으면 거짓말을 예사로 하게되고 영적인 싸움도 중단해 버리고 만다.

    성토마스에 의하면 이같은 영적 태만의 또 하나 원인은 사람을 비웃는 것이다. 비웃음은 상대를 상해하려는 고의의 조롱을 말한다. 위대한 사람의 작은 결점을 화제로 하여 대화 방법을 흉내낸다던가 하는 것들….

    이런 결점에서 빠져 나온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3) 이기주의

    우리는 먼저 자신의 이기주의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나는 무엇을 구하는가? 내 결점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 등등.

    이기주의를 없앨수록 우리들에게 있는 하느님 모습은 더욱 아름답게 될것이고 사람은 자기 자신의 것을 생각하기 보다 항상 하느님 것을 생각하게 될 수 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된다면 우리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하느님을 더욱 깊이 알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관상으로의 이해

    모든 그리스도교 저작자들은 기도생활에 있어서 묵상 뒤에는 관상이 따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연결은 자동적이지도 필요하지도 않으나 매우 자주 일어난다. 문제는 바로 묵상에서 관상으로 연결되는 과정의 표지들을 알아내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십자가의 성요한이 제시한 이론을 몇가지 소개하겠다.

    십자가의 성요한은 저서 「갈멜의 산길」, 「어둔 밤」을 통해 기도생활 영성생활에서의 상황 변화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성인은 영혼을 관상으로 이끌기 위해 『정화를 위한 메마름은 가끔 우울증이나 영혼의 다른 상태를 이용한다』고 말한바 있다. 그처럼 자연적인 요소들과 초자연적인 요소들이 혼합될 경우는 매우 자주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묵상에서 관상적 삶으로의 진입을 식별해내기는 쉽지 않다.

    우선 두가지 부정적인 표지들과 하나의 긍정적인 표지들이 변화를 특징짓는다는 것이다.

    첫째는 하느님 것들과 창조된 것들에 대한 맛의 상실이다. 감각과 상실들로 묵상하거나 이야기하는 것의 불가능성, 즉 의지와 지식의 특별한 행위들을 할 수 없음을 말한다.

    긍정적인 표지는 영혼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 깊은 주의로 특별한 숙고들 없이 내적인 평화 속에서 오직 홀로 하느님과 있음을 기뻐하는 사실에 있다.

    이 표지는 외적으로 우울한 기간과 흡사한 그리고 자신이 쉽게 묘사하지 못하는 상태를 평가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요한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 어린 집중은 관상 첫 단계에서는 거의 알아챌 수 없다고 밝혔다. 묵상에의 몰입 불가능성이 하느님과의 일치에 대한 커다란 열망과 영성생활에 있어서 일상적인 열심과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이 기간이 일시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사실 묵상과 관상의 상반성을 너무 과장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이가 오랫동안 관상상태에 있다가 다시 그가 떠났던 묵상과 더 가까운 기도 형태로 돌아올 수 도 있기 때문이다.

    결론

    기도생활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느님 신비와의 더욱 더 깊은 개인적인 일치라는 성격을 신앙에 부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관상은 신앙을 좀 더 단순한 방법으로 단련하는 반면 묵상은 묵상하는 이의 모든 상상적 지성적 정서적 수단들을 움직이는 노력을 말한다.

    우리는 기도 때 이뤄지는 인간 활동이 하느님 은총에 대한 하나의 협력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도로 이끄는 것도 하느님의 은총이요, 기도하는 이의 행위를 지탱하는 것 또한 은총이다. 묵상 안에서 이뤄지는 신앙의 신비에로의 영과 마음의 몰입을 위한 노력은 하느님 은총을 받아들이기 위한 가장 일상적인 준비를 이룬다.

    기도가 하느님과의 일치를 더 깊게 하기 위한 왕도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표지는 많은 성인들과 위대한 영성가들이 그동안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수없이 역설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자신들이 지닌 최선의 방법을 제시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얘기해온 묵상이 길고 어려운 영성적 상승의 첫 단계를 이룬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또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관상으로 들어가게 하실 시기에 신비들의 의미와 적절한 기도 방법에 대해 당신 스스로 배려하실 것이다. 그분은 자주 묵상으로써 자신을 헌신적으로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관상의 은혜를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본래적 의미의 관상

    단순한 작업을 통해 어떤 영적 실재를 포착하기에 이르는 활동을 본래적 의미의 관상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교적 영성에서는 공통적으로 이를 둘로 구분한다. 하나는 묵상 활동의 마지막에 위치하는 단순 작업으로서 능동적 또는 「수득(收得)된 관상」이라고 부르는 것과 묵상이다.

    또다른 하나는 묵상과 즉각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며 하느님 역사 앞에서 수동적인 측면으로 특징 지워진, 하나의 특별한 영적 상태를 이루는 「신비적 또는 수동적 관상」이 그것이다.

    신비적 관상은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 직접 활동하실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으며 한편 영혼이 직관-정서적 형태의 단순한 작업을 할 수 있는 가능성에 근거하고 있다.

    관상이란 선물은 「본질적으로 영혼이 자신 안에서 초자연적으로 현존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느님에 대해 인식하는 사실」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러한 인식 방법과 정도는 다양하다.

    보통 그러한 인식은 점점 더 심화되는 내면화의 방향으로 발달한다. 대 데레사 성녀가 사용한 상징들을 빌려서 설명해보면, 내면에 지어진 성은 많은 방을 지니고 있고 그 중심에 하느님께서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상적 인식은 하느님 현존 체험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관상적 인식은 「함께 있음」의 양상을 통한 인식이다.

    우리가 우리 곁에 실재하는 한 친구를 알고 사랑하듯이, 자신안에 살고 계신 하느님 나라에로 달아드는 영적 인식은 필요한 은총을 주시면서 영적 인식을 끌어 당겨 그러한 일치를 이루게 하시는 하느님 자신을 감지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능동적 현존에 대한 인식을 주시느냐 하는 것과 그리고 그 인식의 방법들과 정도를 정하는 것은 하느님 자유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 당신 자신과 삼위일체 신비, 예수님의 인성과 예수님께서 사셨던 신비들에 대해 영혼을 밝혀주시느냐 하는 것은 개개인의 자유다. 그러한 하느님의 자유가 영혼에게는 자신의 수동성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은 영혼이 어떠한 작용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하느님의 이 현존에 달아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시의 주도권이 그 기간과 형태와 함께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게다가 시선이 단순하고 정신적 에너지의 소모를 크게 요청하지 않으며 하느님을 깊게 향유하는 사실 등에서 관상행위는 기도의 여러 다른 형태에서 표현된 활동과 비교할 때 마치 휴식과 같아 보인다. 수동성은 당신이 원하실 때 원하시는 방법으로 움직이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사의 정을 동반한다. 모든 당신의 현시는 하나의 은총으로 느껴지며 흠모와 감사의 감정들을 일으킨다. 이러한 관상의 주요 열매는 하느님 실재에 대한 깨달음이다.

    관상의 단계

    주부(注賦)적 관상은 하느님과의 관계로 들어가는 두가지 방법과 접해 있다. 묵상(meditatio)이 그 전 단계이고 관상의 정점에 지복직관(visio beatifica)이 있다.

    그중에서 지복직관은 향주덕 믿음의 테두리를 넘어 「어두움」 없는 관상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서 하셨던 일들이 그 예에 속한다.

    관상은 「불완전한 관상」, 「완전한 관상」 두가지로 단순화 할 수 있다.

    첫째는 가벼운 수동성(주입) 형태로 간헐적이고 순간적인 관상 행위(하나의 상태를 형성하지 못한다), 영(정신 의지 정서)의 산발적 영역과 힘의 개입으로 신비에 대해 아주 부족한 이해(예를 들어 우리 안에서, 당신 말씀 안에서, 혹은 교회와 다른 이들 안에서의 하느님 현존에 대한 희박한 포착)들로 특징지어진다.

    둘째 완전한 관상은 그의 최종 단계에서 대단한 힘을 지닌다. 눈에 띠는 정도의 단절이 없다. 왜냐하면 영은 자신의 가장 깊은 뿌리 속으로 하느님께서 들어오셔서 이미 민감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또한 격렬한 외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주의 깊게 하느님께 항구하게 열려있고 집중한다.

    신앙과 사랑 주의 정성의 일치는 관상 행위속에서 다른 영의 활동들과 동반하며 하느님 위격과 인간의 일치에 힘입어 「신비」에로 가득 진입한다.

    관상으로의 첫 걸음은 엄격한 극기 생활로 유지되는 묵상에 의해 시작되며 이는 잠심과 단순화로 향하게 한다.

    단순성과 잠심에 더욱 깊이 젖어들면서 하느님의 조명은 더욱 풍성해지고 점점 기도의 모든 시간을 주님과의 일치 속에서 보내게 된다.

    지금까지는 묵상적 수고를 통해 영혼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 안에 하느님이 직접 역사하시어 사람인 우리는 그저 수동적으로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을 알아보는 과정이다.

    우리 감각이 영에 대해 적응하기 위해서는 감각적 격정과 유혹적인 것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그러한 사막 횡단은 육적인 차원에서 영적인 차원에로 넘어가기 위한 필수 이행 조건이다.


    ■ 주부적 관상

    성녀 대 데레사는 묵상의 단계와 관련, 수덕적 잠심의 묵상(수득적 관상)에서 주부적 관상에로 들어갈 때는 장기간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겸손과 극기와 이탈의 순수성 및 여러 가지 덕을 닦는 노력 등을 보시고 주님께서 선사하시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완덕의 길」을 통해 제시한 관상의 단계는 다음과 같이 진전된다.

    1) 잠심의 기도(28장)

    능동적 관상으로 단순화되고 애정 있는 묵상을 말한다. 그러나 영혼이 자신 안에 틀어박혀 분심에서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점에 노력이 엿보인다.

    2) 고요의 기도(30, 31장)

    수동적이고 초자연적인 순수 관상의 시초다. 여기에서도 세 단계의 시기가 작용한다.

    첫째시기는 특별한 하느님 은총의 결과로 자유 의지를 집중하는 수동적 잠심이 생기는 때를 말하고 둘째 시기는 참된 고요(정온(靜穩))로서 의지가 완전히 하느님께 향해 있는 것이다. 셋째 시기는 의지가 사로잡히고 오성도 고찰을 중지하며 하느님께 사로잡혀 있지만 상상력과 기억력은 아직 산만한 단계. 그러나 이 단계들은 성령이 주신 특은의 결과이므로 이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억지로 노력해서는 안된다. 하느님이 주시지 않는 한 스스로 도달할 수 없다.

    3) 수동적-초자연적 관상(32장)

    영혼의 내적 능력이 전부 사로잡히는 시기다. 때로는 외적인 감각도 일시적으로 그 활동이 중지된다.

    대데레사가 제시한 주부적 관상에 도달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주께서 은총을 주셔야 한다. 아직 그 은혜를 주시지 않았는데도 지혜의 활동을 거절한다면 그사람 에게는 이익이 아니라 손해가 끼쳐 올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한 태만과 졸음에 지나지 않겠기 때문이다.

    주부적 관상에 이르기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활동은 피조물로부터 이탈하여 이탈의 정신을 자기 자신안에 배양하는 것이다.

    우선 평소의 잠심, 마음의 순결, 참된 겸손, 「묵상」 기도에 충실하면서 날마다 십자가를 초자연적으로 짊어지고 형제적 애덕과 성령에 충실하는 생활이 전제되어야 한다.

    ■ 정적(靜寂)주의의 오류

    조용하게 관상할 것만을 권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은 악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관상생활에 대해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1) 몰리노스의 정숙주의

    이 오류의 대표적인 주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람은 그 능력을 무(無)화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무엇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기만 해도 하느님을 모욕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우리 안에서 행동하시기 때문이다』

    이 주장에 의하면 행동하고 싶다는 생각만 해도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적으로 수동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활동이 은총에 적대하는 것이며 완덕에 방해가 된다고 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비판이 따른다. 우선 우리들의 기도 중에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행동하시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수동적 상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보통 장기간 수덕하여 묵상을 실행하고 나서 경험하게 된다. 이에 대해 몰리노스는 『도는 하나밖에 없다. 이것은 내적 길이며 사람이 획득할 수 있는 수동적 관상의 길이다. 이것은 행동을 중지함으로써 획득한다. 그레서 곧 그것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외에도 몰리노스의 설은 명백히 틀린 내용이 많기 때문에 그다지 큰 영향력을 끼치지는 않았지만 단 주의해야 할 것은 일반 신자들에게도 「수동적」이라는 의미가 「그다지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든가 또는 「구송보다도 묵상이 더 높다」고 보고 필요한 단계를 거치지 않는 경향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묵상에만 다다르려 생각, 감수성에 따른 움직임 등 이상한 방법만을 떠올리고 결국 정적주의와 비슷한 오류를 범할 위험이 없지 않다.

    2) 반(反)정적주의

    이 설은 특히 「순수한 사랑」에 대해 오류를 범하고 있다. 내용에 있어 정적주의와 비슷하나 몰리노스만큼 가톨릭 교의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

    예를들면 완전한 관상 생활 상태에 있어서는 영혼이 어떤 의미에서 무(無)가 되고 온전히 하느님 뜻에 의탁한 상태가 되니까 자기 자신의 구령에 관해서는 무관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들은 「순수한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구령에 대해 무관심해도 좋다는 것은 분명한 오류다.

    이것이야말로 망덕(望德)을 잊는 것으로서 성인들이 항상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사실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자기 구령에 대한 희망을 버린다는 것은 애덕 그 자체를 버리는 것이 된다.

    이외에 반정적주의는 높은 관상 생활 상태에 도달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도움이 되기 보다 방해가 된다고 주장하는데 그러나 대데레사는 대단히 높은 관상 생활 상태로 올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발현을 맛볼 은혜를 받은바 있다.

    가장 높은 단계 생활인 관상 생활에 빨리 도달하려는 데는 주의가 필요하다. 그것이 아직 무엇인지 모르는데도 더구나 준비 노력 희생심도 필요하다는 것은 인식하지 못하고 곧바로 관상 생활에 나아가려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래서 많은 경우 틀린 사고 방식으로 빠져버린다. 정적주의나 반정적주의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기도이야기 (7) 왜 마음의 기도 해야할까

    1) 처지가 매우 가난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내용은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내용이다. 예수님은 『나 없이 너희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 생활을 하는 가운데 자연적 측면에서의 생각이나 행동들은 마음대로 할 수 있으나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길과 방법이라는 점에서 볼 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포도나무 가지요 나는 포도나무이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말라 죽을 것이요, 열매를 맺을 수도 없을 것이다』고 하신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즉, 성령의 선물로서 그리스도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초자연적인 생활의 측면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완전히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으로 가난한 존재다.

    우리는 당신이 원하시는 조건으로 주시는 선물에 달려있고, 이를 하느님께서 조건으로 내세우셨으니 기도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주의기도」를 통해 몸소 기도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매일 우리에게 물질적인 음식이 필요한 것처럼 매일의 영적인 음식으로써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이유는 우리 인간을 잘 아시고 대단히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매일 기도하지 않을 때 우리는 가난함을 잊게 될 것이고 급기야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여기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존재임을 매일 깨닫기 원하셨다. 그것은 성부께서는 우리를 매우 사랑하시고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점 때문이다. 또 성부께 가까이 가고 친밀하게 지내는데서 부터 진정한 행복을 발견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마음이 이러할 진대 우리는 왜 매일 기도하지 않는 것일까. 그에대한 답은 우리 스스로 무한히 가난한 존재임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요,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무엇이든 하기에, 또 봉헌된 사람으로서 삶의 결실을 맺기에는 참으로 가난한 존재라는 진정한 진리를 깊이 깨닫는다면 매일 매일의 기도에 게으를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깊은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염경기도 뿐만 아니라 마음의 기도를 해야한다. 신자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또 일상 생활의 모습들에 대해 의식하지 못한다면 나에 대한 하느님 계획에 응답하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이 세상의 것과는 참으로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신자로서의 내 행위에 대한 의식은 매일 그같은 진리 앞에 서지 않는다면 지닐 수 없게 될 것이다.

    즉 조금씩 신앙의 동기들을 잊게 될것이고 또한 조금씩 무질서한 열정과 탐욕에 마음을 쓰게 되면서 하느님 계획과는 다른 행위, 습관, 다른 이들의 경향들을 습득하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삶은 무섭게 타락하게 될 것이며 은총을 잃게 될 것이다.

    2)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에 따라 그리스도의 모습에 따라 변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로마서 8장에서는 사람이 하느님에 의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도록 계획돼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매일 단지 겉모습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것과는 다른 그리스도의 모습과 그분의 동기 원칙들을 만나야 한다. 그에 대한 깨달음 없이는 당신이 주시길 원하고 보여주고자 하시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접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단 하루에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는 다른 세상의 온갖 유혹 매력 등과의 투쟁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데 이때 마음의 기도를 통한 성령의 이끄심으로 그리스도를 찾게 되지 못한다면 투쟁은 가능할 수 없을 것이다.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이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례를 통해 얻은 것은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받게된 성령의 선물인 성화 은총이며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할 어떤 능력, 즉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성화의 은총이라는 이 씨앗이 싹을 틔운다면 우리는 우리 전 존재의 변화에 도달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내면이나 외부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저항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깨달아가며, 매번 그분의 모습과 동화를 이루려고 노력할 때 발전할 수 있다.

    성령에 의해 마음의 기도 안에서 또 하느님 말씀 안에 계시하신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우리는 이러한 것을 깨달을 수 없다.

    한편 내가 그리스도와 닮도록 불려졌다면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왜 다르게 하지 않고 그렇게 하셨는지 생각하면서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행하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당신께서 말씀하시거나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오직 나를 보내신 아버지 뜻대로 그분 마음에 들도록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이를 말씀뿐 아니라 행동으로써 보여주시려고 했다.

    주변의 많은 것들로 인해 우리 마음은 쉽게 산만해 질 수 있다는 것을 그리스도께서는 아시기에 우리가 기도의 필요성을 자각하길 원하셨고 그래서 당신께서는 자주 아침 저녁 긴 시간 동안 기도하시면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드러내셨다.

    그 시간을 통해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본을 보여주셨고 우리도 그렇게 하느님께 온전히 의존하도록 가르치셨다. 이러한 모든 면에서 우리가 하느님 계획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염경기도 뿐만 아니라 마음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박일 신부의 기도이야기 (8) 마음의 기도 조건

    앞서 하느님 자녀인 우리들이 마음의 기도를 해야하는 이유를 「우리의 처지가 대단히 가난하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에 따라 그리스도의 모습에 따라 변할 필요가 있기 때문」임을 얘기했다.

    이외에 또 한가지 이유를 언급하자면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친구가 되도록 부르셨다」는 것이다.

    세례를 통해 우리가 받은 성화 은총은 하느님과의 우정을 깊게 할 씨앗이라 할 수 있다. 서로 알지 못하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겠는가? 그의 내면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친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친구는 친구가 될 수 있음을 기쁨으로 여긴다. 만일 우리가 친구이신 하느님과 서로 자주 만나지 않는다면 절대로 친구라는 위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한 교회내 기도학자가 마음의 기도 정의를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알고 있는 그분과의 잦은 우정의 만남」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측면으로 설명될 수 있다.

    1)기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한 일이다. 이를 알기 위해 특별히 많은 공부를 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당신의 신비를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보다 단순한 사람들에게 전해주시기를 더 원하신다』고 하셨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도를 진지하게 드려야 함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간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해야할 많은 일들 때문에 기도를 다음으로 미룬다면 우리는 끝내 기도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또 기도가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깨달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 존재인지를 확신하고 있다면 그 필요성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어떤 일보다 먼저 우선 순위를 두고 시간을 비워야 할 것이다.

    여기서 시간을 낸다는 것은 매일 매일 시간을 낸다는 의미를 넘어서 우리의 전 생애동안 기도 시간을 내고 기도에 끊임없이 매진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매일의 삶속에서 조금씩이라도 기도를 위해 시간을 낸다는 것은 중요하다. 또한 기도는 발전하고 진전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때 어려움에 부닥치게 되면 의논할 사람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기도생활의 발전은 주님 말씀에 대한 충성 어린 삶의 발전이며 그분에 대한 응답의 삶이 성장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점이 간과되면 「나는 높은 단계의 기도부터 시작할거야」라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수 있다.

    2)기나긴 우리 삶에서 기도가 성장하길 원한다면 다음의 세가지 내용을 유념해야 한다. 이 세가지 요소는 모든 기도 순간에 한꺼번에 구현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하루 여러 순간에 세 요소들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것의 첫째는 기도 안에 반드시 「청원」이라는 요소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항상 무엇이든지 선물을 청하라고 하셨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그것을 지니고 있다고 여기는 것 아니겠는가. 주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원하시지 않는다.

    둘째는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 삶이 변화되는 요소가 들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많은 기도 가운데 부족한 것이 바로 이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정신 안에서 그리스도의 삶과 동화를 이루도록, 말씀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형태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단순히 기쁨과 평온을 맛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켜 하느님 뜻을 더욱 더 잘 수행하기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 뜻이 아니라 당신 뜻이 이루어지도록」 말씀하시면서 인간 본성의 저항을 거슬러 주님 뜻을 수행하는데 항구하도록 노력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매일 주님 뜻에 따라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완수할 필요가 있다.
































    죄를 어떻게 용서하셨는가? 주 기 도 안 사






    주의 등 뒤로 던져버린다(이사야 38: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뒤에 던지셨나이다. 
    Surely it was for my benefit that I suffered such anguish. In your love you kept me from the pit of destruction; you have put all my sins behind your back.

    (현대인)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한 것은 나에게 유익이었습니다. 주는 내 영혼을 사랑하셔서 나를 죽음에서 건지시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공동번역) 이제 슬픔은 가시고 평화가 왔습니다. 당신께서는 나를 멸망의 구렁에서 건져주셨습니다. 나의 죄악을 당신의 뒤로 던져버리셨습니다.
    (새번역)  주님께서 이 몸을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져 주시고, 주님께서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하십니다.




    기억(記憶)하지 않는다(이사야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I , even I, am he who blots out your transgressions, for my own sake, and remembers your sins no more.

    (현대인) 그러나 나는 나를 위하여 너희 허물을 삭제하는 하나님이니 내가 다시는 너희 죄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공동번역) 네 죄악을 씻어 내 위신을 세워야겠다. 이 일을 나밖에 누가 하겠느냐? 너의 죄를 나의 기억에서 말끔히 씻어버리리라.
    (새번역) 그러나 나는 네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내가 너를 용서한 것은 너 때문이 아니다. 나의 거룩한 이름을 속되게 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한 것일 뿐이다. 내가 더 이상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



    히브리서 8:12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17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



    도말(塗抹)하신다(시편 51: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과를 도말하소서.
    Have mercy on me, O God, according to your unfailing love; according to your great compassion blot out my transgressions.

    9. 주의 얼굴을 내 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악을 도말하소서.
    Hide your face from my sins and blot out all my iniquity.


      









    안개같이 사라진다(이사야 44: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I have swept away your offenses like a cloud, your sins like the morning mist. Return to me, for I have redeemed you.

    (공동번역) 나는 너의 악행을 먹구름처럼 흩어버렸고 너의 죄를 뜬구름처럼 날려보냈다. 나에게 돌아오너라. 내가 너를 구해 내었다.
    (현대인) 구름이나 아침 안개가 사라지듯 내가 네 죄를 없애 버렸다. 너는 나에게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원하였다.
    (새번역) 내가 너의 죄를, 짙은 구름을 거두듯 없애 버렸으며, 너의 죄를 안개처럼 사라지게 하였으니,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내가 너를 구원하였다.




    사하여주신다(시편 79:9)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Help us, O God our Savior, for the glory of your name; deliver us and forgive our sins for your name's sake.

    (현대인)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를 구하시고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 



    (공동번역) 우리의 구원이신 하느님, 당신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의 죄를 없애시어 우리를 건져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소서
    (새번역)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 주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생각해서라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주님의 명성을 생각해서라도 우리를 건져 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사야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Come now, let us reason together," says the LORD. "Though your sins are like scarlet, they shall be as white as snow; though they are red as crimson, they shall be like wool 


    히브리서 8:12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For I will forgive their wickedness and will remember their sins no more.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and will forgive us our sins and purify us from all unrighteousness. 





    3. 당신이 회개한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

    다음 성구를 읽고 맞는 말에 번호를 쓰십시오.

    1. 주의 등 뒤로 던져버린다(이사야 44:22)

    2. 기억하지 않는다(시편 51:9)

    3. 도말하신다(이사야 38:17)

    4. 안개같이 사라진다(하브리서 8:12)

    5. 

    (1) 이사야 1:8 ( ) 사하심




    (6) 요한일서 ( )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심





     






































    고난주간 예수님의 발자취(行跡)


     고난주간 예수님의 행적(行跡)

    일(主日)(개선의 날) : 1. 예루살렘 입성(눅 19:28∼40)
                                      2. 무리의 반응과 예수님의 우심(눅 19:41∼44)

    월(月)(권위의 날) : 1. 무화과나무를 저주(마 21:18∼19, 막 11:12∼14)
                                   2. 두 번째 성전을 깨끗하게 하심(마 21:12∼17, 눅 19:45∼48)

    화(火)(변론의 날) : 1.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마 21:23∼27, 눅 20:1∼8)
                                   2. 경고의 세 가지 비유(마 21:28∼32, 33∼46, 22:1∼14) 
                                   - 두 아들, 악한 농부, 혼인잔치
                                   3. 지도자들의 논쟁(마 22:41, 눅 20:41∼44)
                                   4.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경고(마 24:25, 막 13장, 눅 21:5∼38)
                                   5. 유다의 반역(마 26:14∼16, 막 14:10∼11) 

    수(水)(음모의 날) : 1.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음모(마 26:3∼5, 막 14:1∼2, 눅 22:1∼2)

    목(木)(준비의 날) : 1. 유월절 식사(마 26:17∼25, 요  13:1∼7)
                                  2. 최후의 만찬(마 26:26∼29, 막 14:22∼25)
                                  3. 예수님의 고별 설교와 중보 기

    금(金)(수난의 날) : 1. 배반당하고 잡히신 예수님(마 26:30∼56, 막 14:26∼52)
                                   2. 공회 앞에 서신 예수님(마 26:57∼58, 눅 22:54∼55)
                                   3. 빌라도의 심문(마 27:21∼31, 눅 23:1∼25)
                                   4. 십자가의 죽으심(마 27:31∼50, 막 15:20∼46, 눅 23:26∼50)

    토(土)(예비의 날) : 1. 로마 병정 무덤을 지킴(마 26:62∼6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일

    주 제

    내 용

    성경 본문

    개선의 날

    1. 예루살렘에 입성하심

    2. 무리의 반응과 예수님 우심

    눅 19:28∼40

    눅 19:41∼44

    권위의 날

    1.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

    2. 두 번째 성전을 깨끗이 하심

    마 21:18-19막 11:12-14

    마  21:12-17눅 19:45-48

    변론의 날

    1.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

    2. 경고의 세 가지 비유

    (두 아들, 악한농부, 혼인잔치)

    3. 지도자들과 논쟁

    4.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경고

    5. 유다의 반역

    마 21:23-27눅 20:1-8

    마 21:28-32마 21:33-46
    마 22:1-14

    마 22:41눅 20:41-44

    마 24:25막 13장눅 21:5-38

    마 26:14-16막 14:10-11

    음모의 날

    1.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음모

    마 26:3-5막 14:1-2눅 22:1-2

    준비의 날

    1. 유월절 식사

    2. 최후의 성만찬

    3. 예수님의 고별설교와 중보기도

    마 26:17-25요 13:1-7

    마 26:26-29막 14:22-25

    요 17장요 13:31-35

    수난의 날

    1. 배반당하고 잡히신 예수님

    2. 공회앞에 서신 예수님

    3.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심

    4. 십자가의 죽으심

    마 26:3036-56, 막 14:2632-52

    마 26:57-58눅 22:54-55

    마 27:21-31눅 23:1-25

    마 27:31-50막 15:20-46눅 23:26-54

    예비의 날

    1. 로마병정 예수님의 무덤을 지킴

    마 27:62-6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5. 4. 14

    고난주간 월요일 기도문



    우리를 붙드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생명의 숨을 쉬게 하시고,
    이 거룩한 새벽에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이 고난주간의 여정 속에 동참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오늘도 주님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월요일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하신
    그 깊은 뜻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주님,
    예수님께서 고난주간 첫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 감격적인 순간이 지나고,
    오늘,
    그분의 발걸음은
    다시 성전으로 향하셨습니다.
    그 성전은
    본래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며,
    온 민족이
    경배해야 할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예루살렘 성전에 발을 디디신
    예수님의 눈에는 경건함이 아니라
    탐욕이 가득한 모습이 비추었습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노랫소리보다,
    장사꾼들의 외침과 돈 바꾸는 자들의 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모습을 보며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집이,
    기도의 집이,
    어찌하여 강도의 소굴이 되었는가?

    주님,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돌아봅니다.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셨는데,
    그 성전 안에 탐욕이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면서도,
    세상의 헛된 것들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거룩한 성전이 되어야 할 우리 안에
    돈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람들의 인정과
    세상의 쾌락을 쫓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
    우리의 성전을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우리 안에 자리한
    모든 탐욕과 이기심을 몰아내어 주옵소서.
    거룩한 주님의 임재가
    우리 심령을 다시 채우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그 날,
    제자들은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아
    마르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잎이 무성하여 생명을 간직한 듯 보였으나,
    실상은 열매 없는 나무였습니다.
    주님,
    그 나무는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우리는 겉으로는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손을 들고 찬양하며,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의 삶 속에서
    참된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사랑의 열매,
    온유의 열매,
    겸손의 열매,
    용서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주님,
    우리의 믿음이
    형식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하옵소서.
    입술로만 주님을 고백하는 신앙이 아니라,
    삶의 열매로 주님을 드러내는
    신앙이 되게 하옵소서.
    고난주간을 보내며,
    우리의 삶을 철저히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주님,
    고난주간의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더욱 단호하게 걸어가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꾸짖으시고,
    백성들의 영혼을 돌이키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의 믿음도
    그러한 용기와 결단을 품게 하옵소서.
    우리의 신앙이 타협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진리를 따르는
    용기 있는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유혹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주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오늘도 우리의 심령을 정결케 하시고,
    우리의 믿음이 형식이 아니라
    진정한 열매를 맺게 하시며,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결단을 내리게 하옵소서.
    이 새벽,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주님의 십자가를 더욱 깊이 묵상하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로 돌아가는
    거룩한 시간 되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의 성전을 정결케 하시고,
    참된 믿음의 열매를 원하시는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고난주간 월요일 기도문

    치밀하게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아버지,
    죄인된 저희를 사랑하시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고난의 길을 걸으시게 하신 주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찬양합니다.
    이 새벽,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오늘은 고난주간 첫날,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하나님의 전을 거룩하게 하셨던 날을 기억합니다.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탄식하신 주님의 음성이 오늘 우리 가슴을 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의 삶이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할 우리의 심령이 세상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용서하여 주옵소서.

    지난 한 주간도 주님 앞에 온전히 서지 못한 저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의 말과 행실이 거룩하지 못하였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정작 주님보다 세상을 더 의지하며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던 자들처럼 신앙의 이름으로 자기 욕망을 채우고자 했던 죄악들을 회개하오니,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 주옵소서.

    주님,
    우리 안에 성전의 거룩함을 회복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탐욕과 거짓을 몰아내고, 우리의 심령이 온전히 주님만을 예배하는 전이 되게 하옵소서.
    교회가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견고히 서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그날 성전을 청결케 하셨듯이, 오늘 이 시간 저희의 마음과 가정과 교회를 정결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예배가 형식이 아닌 진실한 마음으로 드려지게 하시고, 우리 입술에서 나오는 기도가 향기로운 제사로 주님 앞에 올려지게 하옵소서.

    주님,
    이 나라와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탐욕과 불의로 인해 성전이 더럽혀졌듯이, 오늘날 이 땅에도 죄악이 가득합니다.
    정의와 공의가 무너지고, 사람들의 마음이 돈과 권력을 더 사랑하고 있사오니 주님의 거룩한 손으로 이 민족을 정결케 하옵소서.

    고난주간을 보내며,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의 고난과 무관한 채, 편안함과 안일함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걸음을 걷게 하옵소서.

    오늘도 새벽을 깨워 주님을 찾는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각 가정과 삶에 주님의 은혜를 부어 주옵소서.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는 치유의 은혜를, 시험과 환난 중에 있는 이들에게는 믿음을, 연약한 심령들에게는 성령의 충만함을 더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말씀을 전하실 목사님에게 기름 부어 주시고,
    전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가 성령의 감동 속에 변화되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주님,
    이 한 주간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더욱 가까이 이끌어 주시고,
    주님의 고난과 사랑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구속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 4. 15

    고난주간 화요일 기도문

    아름다운 새벽,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며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세상의 어둠이 깊어질수록 주님의 빛을 사모하는 심령들이 이 시간 주님을 찾습니다. 오늘도 생명의 호흡을 허락하시고, 새벽의 신령한 은혜를 허락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오늘은 고난주간 화요일, 주님께서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질문을 받으셨던 날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속임을 아시고도 인내하셨으며,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신 주님의 음성이 오늘 우리 마음에 깊이 새겨지게 하옵소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한 제물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그러나 우리의 삶을 돌아볼 때, 우리는 주님의 권세를 인정하기보다 우리의 뜻과 욕망을 따라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말씀을 듣고도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세상의 기준에 얽매여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여전히 탐욕과 교만이 우리 마음 한편에 남아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시험하며 함정을 팠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생각으로 주님의 말씀을 재단하고, 믿음의 자리에서 타협했던 나약한 모습을 회개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성전에서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셨던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길을 앞에 두시고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셨던 주님의 결단이, 오늘 우리 안에도 자리 잡게 하옵소서.

    주님, 고난주간을 보내며 십자가를 더욱 깊이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셨던 천국의 진리를 붙잡고, 세상의 거짓과 속임수에 흔들리지 않도록 우리 믿음을 견고히 세워 주옵소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삶을 다시금 비추어 보고, 주님의 보혈로 정결케 되는 한 주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저주하셨던 무화과나무처럼, 우리의 삶이 겉으로는 화려하나 열매 맺지 못하는 신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이 찾으실 때 언제든 기쁨으로 내어 드릴 신실한 믿음과 순종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기도가 되게 하옵소서.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 진리와 정의가 무너진 이 땅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지도자들에게 지혜를 허락하시고, 교회가 먼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바른 길로 인도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새벽을 깨우며 주님 앞에 나온 성도들의 기도를 기억하시고, 십자가의 은혜로 충만케 하옵소서. 육신의 질병과 마음의 상처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치유의 손길을 더하시고, 낙심한 자들에게 믿음의 새 힘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말씀을 전하실 목사님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시고, 그 입술을 통해 선포되는 말씀이 살아 역사하여 우리 영혼을 새롭게 하옵소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한 주간을 온전히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하며,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고난주간 새벽 예배 대표기도문 (수요일 사건 중심)

    항상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른 새벽에 저희를 주의 은혜로 깨우시고, 십자가를 묵상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의 어둠이 짙어질수록, 주님의 빛을 더욱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아오게 하시고, 우리의 심령이 주의 말씀 앞에 겸손히 엎드리게 하옵소서.

    오늘은 고난주간 수요일, 주님께서 침묵 가운데 십자가를 준비하셨던 날입니다. 겉으로는 아무런 일이 없는 듯 보였으나, 어둠의 세력은 조용히 주님을 팔아넘길 계획을 세웠고, 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주님을 넘겨주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오신 주님께서, 제자에게 배신당하는 순간을 묵묵히 받아들이신 날이었습니다.

    주님, 우리는 얼마나 쉽게 세상을 사랑하며, 유다처럼 주님을 배신하였는지 돌아봅니다. 말로는 주님을 따른다 하면서도, 세상의 유혹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은 삼십처럼 값싸게 팔아버리지는 않았는지 회개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기보다 편안한 길을 찾고, 주님께 헌신하기보다 나의 유익을 먼저 생각했던 우리의 연약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옵소서.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입었다 하면서도, 여전히 우리의 삶에서 주님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입술로는 “주여, 주여” 부르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리에서 기도하지 않고, 주님께서 사랑하신 영혼들을 품지 못한 채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주님, 우리의 교만과 나태를 용서하시고, 이 고난주간 동안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게 하옵소서.

    주님, 가룟 유다가 주님을 팔아넘기던 그날, 주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조용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주님을 대적하고, 십자가를 무너뜨리려 하지만, 오히려 그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온전히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고난 속에서, 침묵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섭리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고난주간을 보내며 우리의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기까지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 사랑을 본받아 주님을 따르게 하옵소서.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되게 하시고,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이 나라와 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오늘도 탐욕과 불의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겸손히 나아가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의 가정과 삶 가운데 주님의 평안을 허락하시고, 연약한 이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옵소서.

    이 시간 말씀을 전하실 목사님을 성령의 능력으로 붙드시고,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들의 마음이 깨끗이 정결케 되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고난주간 새벽 예배 대표기도문 (목요일 사건 중심)

    긍휼과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봄의 향기 가득한 이 새벽,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며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를 붙드심을 믿으며, 주님의 발걸음을 따라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고난주간 목요일,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날입니다. 떡을 떼어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라” 하시고, 잔을 들어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새 언약의 피니라” 하신 주님의 음성이 우리의 심령을 울립니다. 주님, 우리는 자격 없는 죄인이지만, 그 보혈의 은혜로 새 언약의 백성이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그날 밤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사랑으로 떡을 떼시고, 피로 맺으신 언약을 선포하셨건만, 제자들은 주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유다는 은 삼십에 주님을 팔았고,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하였으며, 다른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모든 배신과 외면 속에서도 사랑을 끝까지 지키셨고, 온 인류를 위한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주님을 잊고, 세상의 염려에 휩싸이며, 주님보다 우리의 뜻을 앞세우며 살아왔는지 돌아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세상과 타협하고, 은밀한 죄에 빠지고, 십자가 앞에서 침묵하며 물러서지 않았습니까? 주님,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 주님의 기도는 고통과 순종이었습니다. 우리도 삶의 모든 순간마다 “아버지의 뜻”을 구하며 살게 하옵소서.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도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님, 십자가의 길은 외로움과 고통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곧 영광과 승리의 길이 되었음을 믿습니다. 이 한 주간, 우리가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게 하시고, 우리의 신앙이 더욱 성숙해지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며,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으로 더욱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이 나라와 민족이 주님의 공의와 사랑 안에서 새롭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을 전하실 목사님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고, 듣는 모든 성도들의 마음이 부드럽게 변화되며, 십자가 앞에서 새로운 결단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십자가를 묵상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이 한 주간이 되기를 소망하며, 우리를 사랑하사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고난주간 새벽 예배 대표기도문 (금요일 사건 중심)

    변함 없이 저희를 사랑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이 새벽, 십자가 앞에 나아가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봅니다.
    세상이 잠든 시간,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깨어 기도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하옵소서.

    오늘은 금요일,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날입니다.
    새벽부터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거짓 증인들의 증언을 모아 주님을 정죄하였고, 빌라도는 군중들의 소리를 두려워하여 무죄한 주님을 십자가에 넘겼습니다. 주님은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셨으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그 길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가시는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주님, 그 무거운 십자가가 우리의 죄 때문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 길을 묵묵히 걸으시며 우리를 바라보셨던 주님의 눈빛을 기억합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조롱하는 무리 속에서도 용서를 외치신 주님의 음성이 오늘 우리의 마음을 찌릅니다.
    주님, 우리는 얼마나 쉽게 분노하고 정죄하며 용서하기를 주저했는지 돌아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닮아가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 (요 19:30) 하시며 운명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죄로 인해 닫혀 있던 하나님과의 길이 열렸고,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가 임하였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보혈로 새 생명을 얻은 우리가, 이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주님, 우리는 때로 십자가 없는 신앙을 추구하며 편안한 길을 선택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길은 고난과 눈물, 그리고 희생의 길이었음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오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며, 우리의 신앙이 더욱 견고해지고 거룩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이 나라와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십자가의 사랑이 온 땅에 충만하여, 죄악이 떠나가고 진리와 정의가 세워지게 하옵소서.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을 담대히 선포하게 하시고, 성도들이 그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게 하옵소서.

    오늘도 십자가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성도들의 심령을 새롭게 하옵소서.


    연약한 자들에게 힘을 주시고, 아픈 자들에게 치유를 베푸시며, 슬픈 자들에게 위로를 내려 주옵소서.
    이 시간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시고, 성령의 감동이 충만한 예배 되게 하옵소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나아가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고난주간 새벽 예배 대표기도문 (토요일 사건 중심)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이 새벽, 침묵의 날을 묵상하며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어둠이 깊어진 듯한 이 날, 십자가의 사건이 끝난 것처럼 보였던 이 날,
    그러나 주님의 구원 계획은 멈추지 않으셨음을 믿으며,
    우리의 심령도 소망을 품고 주님을 바라봅니다.

    오늘은 고난주간 토요일, 주님께서 무덤에 계셨던 날입니다.
    “그 후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향품을 넣어 세마포로 쌌더라” (요 19:38-40).
    제자들은 흩어졌고, 무덤은 돌로 굳게 막혔으며,
    세상은 주님의 죽음이 끝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침묵 속에서도 일하고 계셨고,
    인류 구원의 역사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주님, 우리의 삶에도 어둠의 시간이 있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눈물로 씨를 뿌려도 열매를 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침묵하시는 듯한 순간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심을 믿게 하옵소서.
    고난의 시간을 견디게 하시고, 무너진 믿음이 다시 세워지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는 때때로 부활을 기다리지 못하고,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 낙심할 때가 많습니다.
    제자들처럼 절망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숨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십자가를 넘어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고난을 통해 정결케 하시고, 연단을 통해 믿음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우리의 마음에 묻힌 돌을 굴려 주옵소서.
    주님 없이 살아가는 삶의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고,
    두려움과 불신앙이 주님의 생명의 빛 앞에서 떠나가게 하옵소서.
    오직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며, 부활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 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고난주간을 지나며 교회가 다시금 십자가 앞에 서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깊이 묵상하는 은혜를 허락하옵소서.
    세상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이 땅의 어둠 속에서도 주님의 빛을 밝히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새벽을 깨우며 나온 성도들의 기도를 기억하여 주옵소서.
    낙심한 자에게 소망을, 아픈 자에게 치유를, 연약한 자에게 힘을 더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을 성령의 능력으로 붙드시고,
    듣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복된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를 넘어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며,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부활주일 새벽 예배 대표기도문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이 새벽,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며 기쁨과 감격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무덤에서 나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며,
    우리의 어둠을 거두고 생명의 빛을 비추신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주님,
    “너희가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눅 24:5-6).
    이른 새벽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에게 전해진 이 놀라운 소식이
    오늘 우리 영혼에도 동일하게 임하게 하옵소서.
    절망과 슬픔 속에 갇혀 있던 우리를 부활의 소망으로 다시 일으켜 주시고,
    십자가에서 끝난 것처럼 보였던 우리의 인생이
    부활의 능력으로 새롭게 시작되게 하옵소서.

    주님,
    사망을 이기신 그날, 무덤의 돌문이 굴려지고
    절망 속에 갇혀 있던 제자들은 다시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의심과 두려움 속에서 주저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는 때때로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심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의 눈을 열어 주옵소서.
    우리의 삶 속에서도 부활의 능력이 역사하고 있음을 믿게 하시고,
    주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의 삶이 이제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의지하여 죄와 두려움, 절망과 실패의 무덤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로 담대하게 살게 하옵소서.
    고난주간을 지나며 십자가를 묵상했사오니,
    이제는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부활의 기쁜 소식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시고,
    이 땅의 교회가 다시 살아나 주님의 영광을 선포하게 하옵소서.
    절망에 빠진 영혼들에게 부활의 복음이 생명의 소식이 되게 하시고,
    우리가 가는 곳마다 주님의 부활의 빛을 비추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이 나라와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부활의 소망이 이 땅을 새롭게 하게 하옵소서.
    교회마다 예배가 회복되게 하시고,
    부활의 아침이 새로운 영적 부흥의 시작이 되게 하옵소서.

    이 시간 말씀을 선포하실 목사님에게 성령의 능력을 부어 주시고,
    듣는 모든 성도들의 심령이 뜨겁게 변화되게 하옵소서.

    부활의 감격이 오늘 예배를 통하여 우리 마음 깊이 새겨지게 하시고,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사망을 이기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쁨과 감사의 찬양을 올려드리며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칼빈 - 기독교 강요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제1권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

    제1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 그 연결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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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향하게 함
        2.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 자신의 진면목을 깨닫게 함
        3.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인간의 모습


    제2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또한 그를 아는 지식은 어떤 목적을 이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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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경건의 관계
        2.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은 신뢰와 경외로 이어짐


    제3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사람의 마음속에 본성적으로 심겨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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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본성적으로 심겨진 신에 대한 관념
        2.종교는 인위적으로 꾸며낼 것이 아님
        3.신에 대한 지각은 없어지지 않음

    제4장 무지에 의해서나 악의에 의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짓눌리거나 더럽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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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사람의 무지와 미신
        2.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부인
        3.진리와 결합하여야만 순전한 종교임
        4.악인의 외식이 신에 대한 지각을 억누름


    제5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주의 창조와 그 지속적인 운행에서 분명히 드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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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그의 창조하신 만물에 드러내셨음, 1-10)
        1.하나님의 영광의 증표가 세상 만물에 분명히 새겨져 있음
        2.하늘과 땅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지혜의 증거
        3.사람이 하나님의 지혜의 탁월한 증거임
        4.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의 배은망덕함
        5.창조주와 피조물을 서로 혼동하는 오류
        6.우주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이 그를 바라보게 함 
        7.사람을 향한 섭리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 
        8.인간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 
        9.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올바른 길 
        10.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목적 

        (사람은 하나님을 깨닫고 경배하지 못하며 미신과 혼란 속에 빠짐, 11-12)
        11.세상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가 사람에게 유익이 없음 
        12.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인간의 미신과 철학 

        (오류 가운데 있기를 고집하므로, 도저히 핑계할 수 없음, 13-15)
        13.인간이 만들어낸 그릇된 종교는 오류 가운데서 하나님을 거역함 
        14.하나님의 영광이 자연에 밝히 나타나 있으나 사람은 자기의 길을 고집함 
        15.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처신은 변명의 여지가 없음  

    제6장 창조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데에는 성경이라는 안내자와 교사가 필요함


    제7장 성령의 증거가 성경의 권위의 확립에 필수적임. 성경의 신빙성이 교회의 판단에 달려 있다는 논리는 사악한 거짓임


    제8장 성령의 신빙성은 인간의 이성 범주 내에서도 충분히 입증됨


    제9장 성경을 버리고 계시들을 좇는 광신자들은 경건의 모든 원리를 파괴시킴


    제10장 성경은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제시하여 모든 이방 신들을 물리치고 모든 미신을 교정함


    제11장 하나님께 눈에 보이는 형상을 부여하는 것을 불경스러운 행위이며, 우상을 세우는 것은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임


    제12장 하나님은 우상과 전적으로 구별되시므로 오직 그에게만 완전한 존귀를 드려야 함


    제13장 성경은 태초부터 하나님이 한 본질이시며 그 안에 삼위(三位)가 계심을 가르침


    제14장 우주와 만물의 창조에 있어서까지 성경은 명확한 표지들로써 참되신 하나님을 거짓 신들과 구별지음


    제15장 사람의 창조된 본성, 영혼의 기능, 하나님의 형상, 자유의지, 원시의(原始義)


    제16장 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신 세계를 그의 권능으로 양육하시고 유지하시며, 그의 섭리로 그 모든 부분을 다스리심


    제17장 섭리 교리의 올바른 적용


    제18장 하나님은 불경한 자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심판을 시행하시며, 동시에 스스로 부정함이 없이 순결을 유지하심


    제2권 율법 아래에서 조상들에게 나타나셨고,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구속주 하나님, 곧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제1장 아담의 타락과 반역으로 온 인류가 저주를 받았고 원시상태에서 부패하였음, 원죄론(原罪論)


    제2장 사람의 비참한 현 상태 : 의지의 자유를 빼앗긴 채 종의 상태에 매여 있음


    제3장 사람의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다 저주받을 것뿐임


    제4장 사람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제5장 자유 의지를 변호하여 제기되는 흔한 반론들을 반박함


    제6장 타락한 인간은 마땅히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구해야 함


    제7장 율법이 주어졌으나, 이는 구약 백성을 그 아래 가두어두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 대한 소망을 그가 오시기까지 견고히 하기 위함이었음


    제8장 도덕법(십계명)의 해설


    제9장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에서 유대인들에게도 알려지셨으나 오직 복음 안에서 분명히 알려지셨음


    제10장 구약과 신약의 유사점


    제11장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


    제12장 그리스도께서는 중보자의 직분을 행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셔야 했음


    제13장 그리스도께서 인간 본성의 참 본질을 취하셨음


    제14장 중보자의 두 본성이 한 위격을 이룸


    제15장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선지자직, 왕직, 제사장직 등, 그의 세 가지 직분을 보아야 함


    제16장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구속자의 기능을 어떻게 행하셨는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에 관한 논의


    제17장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우리를 위해 얻으셨다는 진술은 올바르고도 적절함


    기독교 강요 (중) 목차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제1장 그리스도의 은혜는 성령의 은밀한 역사로 말미암아 베풀어짐


    제2장 믿음 : 그 정의와 특성


    제3장 믿음으로 말미암는 중생, 그리고 회개


    제4장 스콜라 신학자들의 회개론 : 복음의 순결성과는 전혀 다름 : 고해와 보속에 대한 논의


    제5장 보속설을 보충하기 위한 장치들 : 면죄부와 연옥


    제6장 그리스도인의 삶과 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제7장 그리스도인의 삶의 요체 : 자기를 부인함


    제8장 십자가를 지는 일 : 자기 부인의 일부


    제9장 영생에 대한 묵상


    제10장 이 세상의 삶을 사는 자세


    제11장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 용어 정의와 문제의 요점


    제12장 값없는 칭의의 교리를 확실히 납득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우러러 하나님의 심판대를 바라보아야 함


    제13장 값없는 칭의의 교리에서 유념해야 할 두 가지 사실


    제14장 칭의의 시작과 그 이후의 과정


    제15장 행위의 공로에 대한 자랑은 의를 베푸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구원에 대한 확신을 무너뜨림


    제16장 칭의의 교리에 오명을 씌우기 위한 교황주의자들의 거짓 비난에 대한 반박


    제17장 율법의 약속과 복음의 약속의 일치


    제18장 행위의 의는 상급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됨


    제19장 그리스도인의 자유


    제20장 기도: 믿음의 주요 활동, 그리고 기도로써 얻는 일상적인 유익


    제21장 영원한 선택 : 하나님은 이로써 어떤 이들은 구원에 이르도록, 또 어떤 이들은 멸망에 이르도록 예정하셨음


    제22장 성경적 증거들을 통하여 선택 교리를 확증함


    제23장 이 교리를 항상 공격해 온 거짓된 비방들에 대한 반박


    제24장 선택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해 확증되며, 악인은 그들에게 정해진 공의로운 멸망을 자초함


    제25장 최후의 부활


    기독교 강요 (하) 목차

    제4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회(會)에 들이셔서 그 속에서 지키시는 외적인 수단 혹은 목표


    제1장 모든 경건한 자들의 어머니로서 연합을 유지해야 할 참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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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자의 어머니인 거룩한 공교회, 1-4)
        1.교회의 필연
        2.가시적 교회와 보편 교회 
        3.교회의 통일성 
        4.신자의 어머니인 가시적 교회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사역자들, 5-6)
        5.교회를 통한 교육, 그 가치와 의무
        6.인간의 사역과 그 한계성 

        (가시적 교회: 그 구성원과 표지, 7-9)
        7.불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 
        8.인간의 판단의 한계와 하나님의 배려 
        9.교회의 표지 

        (교회에 이런 표지가 있는 한 아무리 다른 결점들이 있더라도 거거서 분리해서는 안됨, 10-16)
        10.무시해서는 안 될 교회의 권위
        11.교회의 표지의 중요성   
        12.교회의 표지를 근거로 부당한 분리를 방지하여야 함
        13.도덕적인 결점도 분리의 이유가 될 수 없음 
        14.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의 예 
        15.악인과의 교제 
        16.분열을 조장하는 자들의 거짓된 동기

    제2장 거짓 교회와 참 교회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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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된 교리와 예배에서 벗어난 사실이 참된 교회의 주장을 무효화시킴, 1-6)
        1.교회의 존재 여부를 가늠하는 기본 원리
        2.로마 교회의 주장
        3.거짓 교회의 모습: 말씀을 청종치 않고 인간적인 계승만을 주장함
        4.교회는 말씀 위에 세워짐
        5.분열과 이단의 비난에 대한 답변
        6.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이 교회의 연합의 근거임

        (로마 교회와 고대 이스라엘 비교, 7-11)
        7.로마 교회와 패역한 이스라엘 교회의 상태
        8.유다와 이스라엘의 비교
        9.로마 교회의 부패성
        10.로마 교회는 교회가 아님
        11.교황제도 아래 남아 있는 교회의 자취

        12.로마 교회와 남은 자들

    제3장 교회의 교사들과 사역자들 : 그들의 선출과 직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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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 주신 사역: 그 높고 절실한 기능들, 1-3)
        1.하나님께서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목적
        2.사람의 사역의 의의
        3.사람의 사역의 위엄과 특권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각종 직분들, 4-9)
        4.에베소서 4장에 나타난 교회의 직분들
        5.일시적인 직분들과 영구적인 직분들
        6.사도와 목사
        7.목사와 개교회
        8.장로
        9.집사

        (사역자를 세우는 정당한 질서, 10-16)
        10.정당한 질서의 필요성
        11.외적인 부르심과 내적인 부르심
        12.사역자의 자격과 세울 때의 자세
        13.누가 사역자들을 택하는가?
        14.하나님의 택하심과 교회의 질서
        15.회중의 선출
        16.임직의 예식

    제4장 고대 교회의 상태와 교황제 확립 이전의 교회 정치의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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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사역의 제도적 발전, 1-4)
        1.고대 교회는 성경의 전례를 충실히 따랐음
        2.감독과 장로
        3.감독과 장로의 주요 임무
        4.대감독과 총대감독

        (집사직과 교회 재산의 운용, 5-9)
        5.집사직
        6.교회 재산의 용도
        7.교회 수입의 네 가지 용도
        8.교회의 재물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임
        9.사역자들을 위한 예비적인 훈련

        (사역자들의 선출과 임직의 역사적 발전, 10-15)
        10.사역자들의 임직 절차
        11.감독 선출과 교인들의 동의
        12.라오디게아 공의회의 법령
        13.성직자의 선출과 정치적 통치자의 인준
        14.임직의 절차
        15.수도대주교가 임직을 거행함

    제5장 고대 교회의 정치 형태가 교황제의 횡포로 인하여 완전히 붕괴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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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의 선택이 없이 무자격자들을 임직시킴, 1-3)
        1.주교 선출에서 나타나는 부패함
        2.주교 선출의 권한을 빼앗김
        3.주교 선출권에 대한 군주들의 개입

        (성직 수여 및 성직록과 관련한 악행들, 4-7)
        4.사제와 부제의 서품과 관련한 부패상
        5.성직 수여의 부패상
        6.성직록의 비리
        7.엄청난 악행들

        (성직을 가진 수도사, 참사회원, 기타 성직자들의 부패상, 8-10)
        8.수도사들의 성직 임명
        9.세속 사제들의 부패상
        10.성직의 남발과 부패상

        (주교들, 사제들, 부제들과 관련한 부패상, 11-19)
        11.교회와 상관 없는 주교와 교구 사제들
        12.그레고리우스와 베르나르 시대의 형편
        13.교황 제도 하의 교회의 실상
        14.사제들의 부패한 행실
        15.부제직의 부패함
        16.교회 수입의 운영의 부패함
        17.교회의 화려한 치장
        18.교회 수입의 부당한 사용
        19.성직자들의 보유 재산

    제6장 로마 관구의 수위권(首位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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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의 수위권 가설 반박, 1-7)
        1.로마 관구에 굴복해야 한다는 주장
        2.구약의 대제사장직은 그리스도의 모형임
        3.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도 교황의 수위권과는 관계 없음
        4.열쇠에 대한 왜곡된 주장
        5.베드로의 특권
        6.교회의 터
        7.베드로와 사도들의 관계에 대한 성격의 증거

        (교회의 통치권은 오직 그리스도께 있음, 8-10)
        8.교회의 통치권
        9.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심
        10.교회의 하나 됨

        (베드로의 수위권을 인정해도 그것은 로마의 영구한 수위권과 무관함, 11-13)
        11.베드로의 수위권과 로마의 수위권
        12.수위권이 안디옥으로부터 로마로 옮겨졌다는 주장
        13.교회들의 서열

        (베드로의 로마 거주는 근거가 없고, 바울의 거주가 분명히 드러남, 14-15)
        14.베드로의 로마 거주에 대하여
        15.베드로의 로마 감독직은 그 근거가 희박함

        (로마 교회가 칭송을 받았으나 전 교회에 대한 수위권은 없음, 16-17)
        16.초기 로마 교회의 위상
        17.교부들은 로마 관구의 수위권에 대해서 몰랐다

    제7장 로마 교황제의 기원과 성장 : 스스로 최고의 자리로 부상(浮上)하여 결국 교회의 자유를 억압하고 모든 제어 장치를 무너뜨리기에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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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의 로마 관구의 위상, 1-4)
        1.니케아와 에베소 공의회에서의 로마 관구의 위상
        2.칼케돈, 콘스탄티노플, 카르타고, 아퀼레이아 공의회에서의 로마 관구의 위상
        3.초기에는 로마 주교의 교만한 칭호들이 없었음
        4.'전세계적 주교'란 칭호에 대한 그레고리우스 1세의 태도

        (로마 교황의 권위의 제한성: 황제 및 다른 주교들과의 관계, 5-10)
        5.로마의 막강한 재판권의 기원
        6.고대의 로마 관구의 권세의 특징
        7.주교들 상호 간의 훈계와 견책
        8.공의회 소집의 권한
        9.상소와 관련한 부패상
        10.로마 교황의 위상에 대한 결정적인 역사적 증거

        (로마 관구의 보상, 11-16)
        11.거짓 조작과 월권 행위
        12.그레고리우스 1세 때의 로마 관구의 위상
        13.그레고리우스 1세 주교의 직무
        14.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수위권 다툼
        15.콘스탄티노플에 관한 공의회의 결정에 대한 레오의 반발
        16.콘스탄티노플 주교의 교만과 그레고리우스의 태도

        (왕위 찬탈자들과의 협력에 의한 로마 관구의 수위권의 확립과 강화, 17-18)
        17.로마 관구의 수위권의 확립
        18.베르나르 시대의 교회의 부패상

        (후대의 교황주의의 주장은 그레고리우스와 베르나르의 원리들과 모순됨, 19-22)
        19.오늘날의 교황들의 주장
        20.교황권 확립을 위하여 거짓 문서들을 사용함
        21.그레고리우스 교황의 정죄
        22.부패한 교황제의 현실

        (후대의 교황제를 고발함, 23-30)
        23.로마에 과연 교회와 주교의 직분이 존재하는가?
        24.로마의 배교(背敎)
        25.로마 교황은 적그리스도임
        26.교황제는 교회의 질서와 정반대 됨
        27.교황들의 사악한 행위와 이단적인 신앙
        28.교황 요한 22세의 오류
        29.교황들의 부패한 도덕성
        30.추기경직의 문제성

    제8장 신조에 대한 교회의 권세 : 교황제의 무절제한 방종으로 이한 순결한 교리의 부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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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교회의 권세, 1-9)
        1.교회의 권세의 목적과 제한성
        2.모세와 제사장들의 권위
        3.선지자들의 권위
        4.사도들의 권위
        5.하나님의 계시의 다양한 방법
        6.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말씀
        7.아들을 통한 완전하고 영원한 계시
        8.사도들의 사명
        9.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의 한계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교리적 무오성의 거부, 10-16)
        10.교회의 권세에 대한 로마 교회의 입장
        11.교회와 신자들 개개인에게 주어진 약속들
        12.교회는 무오하지 않음
        13.말씀과 성령은 반드시 함께 역사함
        14.사도들의 글과 교회의 전통
        15.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함
        16.교황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실례에 대한 반론

    제9장 공의회들과 그 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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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의회들의 진정한 권위, 1-2)
        1.두 가지 예비적 발언
        2.참된 공의회와 거짓된 공의회

        (목자들의 타락과 공의회의 부패, 3-7)
        3.교회의 존재와 목회자
        4.목회자들의 타락에 대한 성경의 예언
        5.목자들을 분별해야 함
        6.거짓된 공의회는 진리를 거스름
        7.요 11:47의 공회의 실례

        (공의회도 성경의 표준에서 벗어나 타락할 수 있으며, 또한 모든 공의회에는 인간적인 연약함이 상존함, 8-11)
        8.공의회의 권위의 근거
        9.공의회들 사이의 모순
        10.공의회에서 범한 인간적인 과오들
        11.공의회들의 인간적인 연약함에 대한 바른 자세

        (공의회의 권위는 절대적이 아님, 12-14)
        12.맹종은 있을 수 없음
        13.공의회의 성경 해석의 의의
        14.공의회의 성경해석권에 대한 그릇된 주장

    제10장 법을 제정하는 권세, 그 권세를 빌미로 영혼들에게 저질러진 교황과 그 신복들의 극히 야만적인 횡포와 살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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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법과 전통,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신자의 양심, 1-4)
        1.인간의 전통
        2.양심을 얽어매는 로마 교회의 법들
        3.양심의 본질
        4.양심의 속박과 자유

        (인간의 법과 양심의 문제: 오직 하나님만이 입법자이심, 5-8)
        5.인간의 법과 양심
        6.교황주의가 제정한 교회법의 부당함
        7.다스림은 오직 하나님의 대권임
        8.사람의 법의 타당성을 판별하기 위한 지침

        (예배 의식에 관한 교회법들의 부당함과 어리석음, 9-18)
        9.양심을 얽어매는 교회법의 부당함
        10.하나님의 법을 저버리는 교회법
        11.교회법의 무용성과 어리석음
        12.로마 교회의 의식들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음
        13.로마 교회는 무수한 전통들로 신자의 양심을 억압함
        14.의식은 그리스도를 감추지 말고 그를 드러내어야 함
        15.의식들의 부패성
        16.인간의 법을 구별하는 영구한 진리
        17.로마 교회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지 말라는 금령을 무시한 것들임
        18.로마 교회의 전통들은 사도들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님

        (로마 교회의 무용한 온갖 의식들은 사도들과 관계 없음, 19-22)
        19.사도 시대 이후부터 무용한 의식들이 생겨났음
        20.한 가지 시례: 성수(聖水)
        21.행 15:20의 사도들의 법령
        22.사도들의 법령의 의의

        (인간이 만든 예배의 전통과 의식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정죄를 받음, 23-26)
        23.인간이 만들어낸 예배는 말씀에서 떠난 것으로 하나님께 가증한 것임
        24.하나님께서 인간이 만들어낸 예배를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이유
        25.사무엘과 마노아의 예
        26.바리새인의 누룩에 대한 주님의 경계

        (정당한 교회법의 필요성과 그 올바른 시행에 대한 지침, 27-32)
        27.교회 질서 유지를 위한 법의 필요성
        28.정당한 교회의 법들을 구별하는 표지
        29.정당한 교회법들의 실례
        30.정당한 교회법들과 관련한 위험 요소
        31.정당한 교회법들의 시행 지침
        32.오류를 방지하여야 함

    제11장 교회의 재판권과 교황제에서 저지른 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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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판권과 권징: 열쇠의 권세와 국가의 관원들, 1-5)
        1.교회의 재판권의 기초인 열쇠의 권세
        2.매고 푸는 권세
        3.교회의 재판권과 세속의 재판권
        4.교회와 그리스도인 관원들의 관계
        5.교회의 재판권은 영적인 성격을 띰

        (감독들이 부당하게 권세를 취함으로서 나타난 부패한 현실, 6-10)
        6.교회의 재판권은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님
        7.재판권과 권징의 부패
        8.주교들이 세속의 권세를 갖는 것은 정도에 어긋나는 것임
        9.주교들이 집권자들의 권세를 취함
        10.주교들이 세속의 권세를 차지하게 된 경위
        11.교황이 세속적인 권력을 소유하게 된 경위
        12.콘스탄티누스의 헌정에 대한 어리석은 주장
        13.하인리히 4세 황제와 힐데브란트의 관계
        14.교회 재산 탈취에 대한 그레고리우스 1세의 조치
        15.로마의 성직자들의 면책 특권
        16.그레고리우스 교황의 실례

    제12장 교회의 권징 : 징계와 출교로 나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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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징의 본질, 목적, 그리고 시행 절차, 1-7)
        1.교회의 권징의 필연성과 그 본질
        2.교회의 권징의 절차
        3.은밀한 죄와 공개적인 죄
        4.가벼운 죄와 무거운 죄
        5.권징의 세 가지 목적
        6.권징의 실제적인 시행 방법
        7.권징의 대상에는 예외가 없음

        (권징은 정도에 알맞게 온유함으로 시행되어야 함, 8-13)
        8.권징의 시행은 가혹해서는 안 됨
        9.권징은 온유하게 시행되어야 함
        10.출교는 교정을 목적으로 하는 것임
        11.권징 시행의 필수적인 지침
        12.도나투스주의자들과 재세례파의 오류
        13.권징 시행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권면

        (금식의 용도와 목적과 본질, 그리고 금식과 관련한 오류들, 14-21)
        14.권징의 나머지 부분들
        15.금식의 세 가지 목적
        16.금식과 기도
        17.회개의 표시로서의 금식
        18.금식의 본질
        19.금식에 대한 그릇된 사고들
        20.금식과 관련한 사순절 행사의 폐해
        21.금식을 구실로 호사를 누리는 부패한 실태

        (성직자의 결혼 금지 관행의 폐해, 22-28)
        22.성직자들의 권징과 그 부패의 실태
        23.성직자의 결혼 금지는 성경과 모순됨
        24.교황주의자들의 그릇된 성경 해석
        25.성경에 근거한 그릇된 논지에 대한 반론
        26.고대 교회와 성직자의 독신
        27.사제들의 독신에 대한 관행
        28.고대 교회를 구실로 한 결혼 금지론에 대한 반박

    제13장 서원(誓願) : 경솔한 서원은 자신을 비참하게 얽어매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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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원의 본질, 그리고 서원과 관련한 오류들, 1-7)
        1.사람들의 불신앙과 경솔한 서원
        2.서원은 하나님께 하는 것임
        3.서원을 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4.감사의 서원과 회개의 서원
        5.미래와 관련되는 서원들
        6.정당한 서원들
        7.서원과 관련된 미신

        (수도사의 종신 서원과 수도원의 실태, 8-10)
        8.고대 교회의 수도원의 실태
        9.고대 교회의 수도원의 실태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진술
        10.고대의 수도원주의와 후대의 수도원주의의 비교

        (수도사 생활의 완전함에 대한 그릇된 주장들, 11-16)
        11.수도원 지상주의의 허구성
        12.그리스도 삶의 규범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됨
        13.마태복음 19:21의 의미
        14.수도원의 분파주의
        15.수도사들의 타락상
        16.고대의 수도원주의의 부족한 점

        (수도사의 독신의 서원의 오류, 17-19)
        17.수도사의 독신의 서원
        18.디모데전서 5장의 과부들의 경우
        19.수녀들의 경우

        (부당하며 미신적인 서원의 폐기, 20-21)
        20.부당한 서원을 했을 경우의 처신
        21.독신의 서원을 폐기하는 문제

    제14장 성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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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례의 정의와 역할, 1-6)
        1.성례의 정의
        2."사크라멘툼"의 의미
        3.성례의 역할
        4.말씀이 외형적인 표징을 해명하여야 함
        5.약속의 인(印)인 성례
        6.언약의 표징인 성례

        (성례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갖가지 반론들을 반박함, 7-19)
        7.악인들도 성례를 받는다는 사실에 근거한 어리석은 반론
        8.성령의 역사하심에 근거한 어리석은 반론
        9.성령과 성례
        10.인간사의 사례를 통하여 성례와 성령의 관계를 설명함
        11."씨"를 통하여 성례와 성령의 관계를 설명함
        12.성례는 오로지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함
        13."사크라멘툼"이라는 단어는 용례
        14.마술적인 성례관의 오류
        15.물질과 표징의 구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
        16.성례와 관련하여 경계해야 할 두가지 악
        17.성례의 참된 기능
        18.넓은 의미에서의 성례
        19.교회의 일상적인 성례

        (구약의 성례들과 신약의 성례들, 20-26)
        20.구약의 성례들: 그리스도를 지향함
        21.할례, 결례, 희생 제사의 의미
        22.신약 시대의 성례들이 그리스도를 더욱 충만히 드러낸ㅁ
        23.구약의 성례와 신약의 성례의 유사점과 차이점
        24.할례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25.구약의 의식들에 대한 신약의 가르침에 대한 해명
        26.구약과 신약의 성례의 비교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진술

    제15장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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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의 목적과 세례를 통하여 얻는 세가지 도움, 1-6)
        1.세례의 목적
        2.세례가 주는 첫 번째 도움: 우리의 죄 씻음을 보증함
        3.세례는 전 생애를 씻음 받는 표임
        4.세례와 죄 사함의 관계
        5.세례가 주는 두 번째 도움: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새생명을 얻는 표징임
        6.세례가 주는 세 번째 도움: 그리스도와 연합을 보증함

        (요한의 세례와 사도들의 세례, 그리고 구약에 나타난 세례의 상징물들, 7-9)
        7.요한의 세례와 사도들의 세례
        8.세례 베푸는 자가 달라도 세례는 동일함
        9.구약에 나타난 세례의 상징물들

        (세례 받은 신자와 원죄, 세례의 신앙고백으로서의 역할, 10-13)
        10.세례와 원죄, 신자의 의
        11.우리 속에 있는 죄와의 싸움
        12.죄와의 싸움에 대한 바울 자신의 진술(로마서 7장)
        13.세례는 공적인 고백의 표지임

        (세례의 주인은 하나님 자신이시며 재세례는 부당함, 14-18)
        14.세례에 나타나는 주님의 역사하심
        15.믿음을 확증케 하고 우리의 고백을 상징하는 세례
        16.세례의 가치는 그 시행자에게 있는 것이 아님
        17.회개가 지연된다 해도 세례가 무효화되는 것은 아님
        18.바울이 재세례를 시행했다는 논지에 대한 반박

        (세례의 구체적인 시행, 여자가 세례를 베푸는 문제, 19-22)
        19.세례의 구체적인 시행 방식
        20.세례는 개인이 사사로이 행할 것이 아님
        21.여자는 세례를 베풀 수 없음
        22.십보라의 예를 따르는 것은 부당함

    제16장 유아 세례 :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바와 일치함, 그리고 그 표징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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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아 세례의 의미와 아브라함 언약을 통한 그 정당성의 입증, 1-6)
        1.유아 세례에 대한 공격
        2.세례의 의미
        3.세례와 할례의 관계
        4.세례와 할례의 차이는 외형적인 의식의 차이뿐임
        5.유아 세례의 정당성
        6.방식은 다르나 동일하게 언약을 확증함

        (그리스도의 모범과 유아 세례의 유익, 7-9)
        7.그리스도와 어린아이들
        8.유아 세례는 믿음의 원칙으로 보아야 함
        9.유아 세례가 주는 유익

        (재세례파의 주장에 대한 반박, 10-16)
        10.세례와 할례가 서로 다르다는 재세례파의 주장
        11.할례의 약속은 영적인 약속이었음
        12.육체적 자녀와 영적 자녀
        13.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임
        14.유대인들의 특권
        15.약속의 문자적 성취
        16.세례와 할례의 차이에 대한 주장을 반박함

        (유아에게는 믿음의 능력이 없다는 반론에 대한 답변, 17-20)
        17.유아도 그리스도 안의 생명을 누려야 함
        18.그리스도의 모범에 근거한 논지
        19.유아에게는 지식이 없다는 반론
        20.유아에게는 회개나 믿음의 능력이 없다는 반론

        (택하신 유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하심, 21-22)
        21.세례의 표징이 그것에 대한 이해보다 앞선다
        22.유아 세례를 공격하는 나머지 논리들

        (초기 교회의 유아 세례, 23-24)
        23.사도행전의 증거에 근거한 반론
        24.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에 근거한 논지

        (성경 본문에 근거한 각종 반론에 대한 논박, 25-30)
        25.세례와 중생을 연관짓는 반론
        26.세례가 구원에 필수 조건이라는 반론
        27.세례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근거로 한 반론
        28.막 16:16에 근거한 논지에 대한 반론
        29.예수님의 수세(受洗)에 근거한 논지에 대한 반론
        30.세례와 성찬

        (세르베투스의 반론에 대한 논박과 결론, 31-32)
        31.세르베투스의 반론
        32.유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에 대한 우리의 감사

    제17장 그리스도의 성찬, 그리고 성찬으로 말미암아 얻는 유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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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찬은 떡과 포도주를 통하여 신령한 양식을 제공해 줌, 1-3)
        1.성찬의 신비
        2.성례가 주는 확신과 기쁨
        3.떡과 포도주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유사성

        (성찬에 인쳐진 약속과 신비 - 이는 설명보다 느낌을 통해서 아는 것임, 4-7)
        4.성찬과 십자가
        5.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참여함
        6.아우구스티누스와 크리소스톰의 진술
        7.성찬의 신비는 인간의 말과 생각으로는 완전히 파악할 수 없음

        (생명을 주는 교제와 성령의 역사하심, 8-10)
        8.그리스도의 내주하심
        9.그리스도의 육체가 생명을 준다는 말씀의 의미
        10.성찬의 상징과 그리스도의 몸의 임재

        (외형적 표징과 영적 실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스콜라 학자들의 오해와 화체설의 허구성, 11-15)
        11.성례의 실체와 표징의 효과
        12.그리스도의 임재
        13.떡을 하나님으로 여기는 스콜라 학자들의 오류
        14.화체설의 허구
        15.화체설의 실질적인 근거와 그것에 대한 논증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성 개념에 근거한 그리스도의 성찬 임재론에 대한 반론, 16-31)
        16.또 다른 그릇된 주장
        17.그리스도의 몸과 관련한 오류
        18.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
        19.그리스도의 임재를 생각할 때에 지켜야 할 두 가지 원칙
        20.성찬 제정시 하신 주님의 말씀
        21.주님의 말씀에 대한 환유법적 해석
        22."이것은 ...이다"라는 구문의 의미
        23.완전한 문자적 해석은 불가능함
        24.우리의 해석이 인간의 이성의 지배를 받는다는 비난에 대한 반박
        25.말씀은 이해와 해석이 필요함
        26.그리스도의 임재에 관한 해명
        27."승천"의 의미
        28.아우구스티누스의 증언
        29.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30.그리스도의 편재성 개념의 허구
        31.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마지막 정리

        (성령을 통하여 신자들이 참여하는 육체적 임재의 참된 본질, 32-24)
        32.그리스도의 임재는 하늘의 신비임
        33.영적이면서 실질적인 그리스도의 몸에의 참여
        34.불신자들의 성찬 참여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증언

        (성찬물 숭배 행위에 대한 논의, 35-37)
        35.성찬물 숭배 행위를 배격함
        36.성찬물 숭배 행위는 미신이며 우상숭배임
        37.성찬물 숭배와 관련된 미신적인 예식들의 허구성

        (신자 간의 사랑, 말씀 선포, 합당한 참여, 성찬 시행의 적절한 형식과 횟수 등, 성찬과 관련하여 특별히 강조할 문제들, 38-46)
        38.성찬과 신자 상호 간의 사랑
        39.성찬에는 반드시 말씀이 있어야 함
        40.합당치 못한 자들이 성찬에 참여하는 문제
        41.과연 누가 성찬에 합당한가?
        42.믿음과 사랑이 합당함의 요건임
        43.성찬의 적절한 시행
        44.성찬은 자주 시행하여야 함
        45.성찬 참여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와 크리소스톰의 증언
        46.매년 한 차례 성찬을 시행하는 관례를 배경함

        (평민에게 잔을 금하는 행위에 대한 반박, 47-50)
        47.평민에게 잔을 금하는 폐단
        48.잔을 금하는 논리에 대한 반론
        49.잔을 모두에게 분배한 교회사의 실례
        50.성찬 제정 시의 말씀에 나타난 증거

    제18장 교황제의 미사 : 그리스도의 성찬을 더럽힐 뿐 아니라 말살시키기까지 하는 모독 행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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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사는 주의 성찬을 무효화시키는 불경한 것임, 1-7)
        1.로마 교회의 가르침
        2.미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임
        3.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은폐함
        4.말라기 1:11의 근거에 대한 반박
        5.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망각하게 함
        6.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은택을 제거함
        7.미사는 성찬을 무효화시킴

        (초기의 관례와 오류의 발생, 8-11)
        8.사적인 미사는 하나 된 교제를 부인하는 것임
        9.미사는 고대 교회에도 그 전례가 없었음
        10.교부들의 증거에 근거한 논리를 반박함
        11.성찬과 관련한 고대 교부들의 오류

        (성찬을 제사와 연관짓는 사고와 "제사"의 성경적 용례, 미사는 참람한 것임, 12-18)
        12.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성찬의 차이
        13."제사"의 의미와 그 두가지 종류
        14.미사를 파는 불경한 자들
        15.제사의 허구성에 대한 플라톤의 진술
        16."감사의 제사"
        17."감사의 제사"에 대한 성경적 증거
        18.미사 그 자체가 불경임

        (17, 18장의 결론: 성례는 세례와 성찬밖에 없음, 19-20)
        19.세례와 성만찬이 성례임
        20.두 가지 성례 외에는 성례가 없음

    제19장 다섯 가지 다른 의식들 : 지금까지 잘못 성례로 간주되어 전반적으로 그렇게 인정받아왔으나, 그 허구성이 입증 됨 : 그 의식들의 진정한 본질을 규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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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와 성찬 외의 소위 성례라는 것들은 성경의 근거도, 고대 교회의 근거도 없음, 1-3))
        1.일곱 성례, 특히 종부성사의 허구성
        2.오직 하나님만이 성례를 세우심
        3.고대 교회는 "일곱" 성례를 알지 못했음

        (견진례(堅振禮)는 성례가 아님, 4-13)
        4.고대 교회의 관례
        5.견진례에 대한 로마 교회의 가르침
        6.사도들의 전례에 근거한 논지에 대한 반론
        7."구원의 기름"은 허구임
        8.견진례는 세례를 욕되게 하는 마귀의 교리임
        9.견진례가 구원에 필수라는 논리의 허구성
        10.견진례의 우월성에 대한 교황주의자들의 사고
        11.견진례의 우월성에 대한 논지들의 유치함
        12.고대에는 견진례라는 성례가 없었음
        13.참된 의미의 견진이란?

        (고해성사는 성례가 아님, 14-17)
        14.고대 교회에서 고해의 관행
        15.고해는 성례가 아님
        16.사죄 선언을 성례로 보지 않는 모순
        17.세례가 진정한 고해의 성례임

        (종부성사는 성례가 아님, 18-21)
        18.종부성사의 성경적 근거에 대한 반론
        19.기름 바르는 행위는 효력이 없음
        20.종부성사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명령도 약속도 없음
        21.종부성사는 야고보의 말씀을 따라 진행되는 것이 아님

        (일곱 가지의 복잡한 소위 신품 성례의 허구성, 22-23)
        22.한 가지 성례인가, 아니면 일곱 가지 성례인가?
        23.그리스도께 일곱 직분을 다 적용시킴
        24.하급의 직분자들은 실제의 직무와는 전혀 관계 없음
        25.성직자의 삭발 의식
        26.삭발의 근거를 나실인과 바울에게서 찾는 처사는 모순임
        27.체발에 대한 역사적 이해
        28."사제"와 "장로"
        29.사제 임명과 관련된 의식들의 부당함
        30.아론의 후계자들로 자처하는 논리의 모순
        31.기름 붓는 의식도 근거가 없음
        32.부제(집사)
        33.차부제(주집사)

        (결혼이 성례라는 주장의 허구성과 결혼과 관련한 로마 교회의 횡포, 34-37)
        34.결혼은 성례가 아님
        35.에베소서 5:28의 오해
        36."뮈스테리온"의 번역 문제, 그리고 모순된 결혼관
        37.결혼과 관련한 교황제의 횡포

    제20장 국가의 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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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의 통치와 영적 통치의 상호 관계, 1-2)
        1.영적 통치와 국가의 통치는 서로 별개임
        2.두 "통치"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님

        (국가의 통치의 필연성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 3-7)
        3.국가의 통치가 시행하는 주요 임무
        4.통치자의 직위는 하나님께서 세우심
        5.세속의 통치를 부인하는 자들에 대한 반박
        6.통치자는 하나님의 대리인임
        7.통치자의 권력을 성경이 인정함

        (통치 형태, 통치자들의 의무, 전쟁과 세금의 문제, 8-13)
        8.다양한 통치 형태
        9.통치자들의 직책
        10.통치자의 무력 사용의 정당성
        11.전쟁 수행의 권한
        12.전쟁 수행의 지침
        13.세금 징수의 권한

        (법과 소송 절차와 그리스도인의 의무, 14-21)
        14.국가의 법과 모세의 율법
        15.율법의 세 가지 부분
        16.법들의 통일성과 다양성
        17.그리스도인과 소송
        18.그리스도인의 소송의 자세
        19.법적 소송을 부인하는 태도에 대한 반론
        20.그리스도의 명령과 신자의 법적 소송의 관계
        21.바울의 진술의 바른 이해

        (통치자에 대한 존경과 복종, 그리고 악한 군주에 대한 자세, 22-29)
        22.통치자를 향한 존경
        23.통치자에 대한 복종
        24.불의한 통치자에 대한 자세
        25.악한 통치자에 대한 자세
        26.악한 통치자에 대한 복종
        27.통치자에 대한 예레미야서의 예언
        28.통치자의 권위에 대한 성경의 증거
        29.통치자는 하나님께서 다루심

        (폭정에 대한 하나님의 처리와 하나님을 향한 순종, 30-32)
        30.통치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처리
        31.통치자들에 대한 합법적인 저지 수단
        32.하나님을 향한 순종이 가장 우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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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강요 1권 요약

    1장

    칼빈은 본장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 자신을 아는 지식을 연결 짓고 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인간에 의해 언급될 경우, 인간과의 관계적인 존재로 언급될 수 있으며, 인간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진 존재임을 의미한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바르게 알 때 유한한 인간의 현주소를 바르게 인식할 수 있다는 칼빈의 논리는 참으로 지당하다. 인간이 스스로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내면에만 갇혀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칼빈은 이에 대하여 “땅 너머의 세계를 향하여 시선을 돌려” 보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인간이 만일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면에서 스스로의 현주소를 찾지 못한다면 인간 스스로에 대한 인식은 너무 피상적인 것이 되어버릴 것이며, 거짓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한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 존재를 논할 경우,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말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 스스로에 대한 지식에는 유기적인 요소가 있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것의 순서를 뒤집어도 말이 된다. 즉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의 한계를 충분히 인식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 눈길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 칼빈의 입장이다. 이렇게 볼 때, 칼빈이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 스스로를 아는 지식은 서로 나선형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2장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 다루면서 경건한 자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진실로 아는 것에서 비롯됨을 언급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란 단지 이론적인 지식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더 나아가서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강조점은 신학에 있어서 인간의 학문성뿐만 아니라 신앙이 강조되어야 함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칼빈의 교리뿐만 아니라 그가 삶을 통해 보여준 경건성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3장

    자연계시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언급하면서 칼빈은 인간의 종교성을 다루고 있다. 교의신학의 서론이 칼빈의 이러한 논리의 순서를 본받아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종교성에 대해 다루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의 종교성에 대한 언급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종교성에 대한 칼빈의 언급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게 하며 그의 기독교 강요가 꾸며낸 것이 아닌 필연적인 산물임을 천명하는 역할을 한다.

    4-5장

    인간은 그가 가진 종교성으로 인해 하나님을 추구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히 타락하였으므로 하나님을 바르게 찾아갈 수 없으며, 오히려 인간 스스로의 무지로 인해 온갖 우상과 미신을 고안해내고 있다. 하나님으로 인해 창조된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를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이성이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타락한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칼빈은 여기에 인류역사와 인간 개인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덧붙여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한편 칼빈은 인간이 타락으로 인해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1장의 내용에 비춰볼 때, 이는 인간 존재의 비참함을 깊이 인식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이러한 일반은총의 한계는 하나님의 특별은총에 대한 필요성을 각인시키는 것이다.

    6장

    성경에 관한 교리는 교의신학의 서론에서 다루고 넘어가는 부분이다. 이것을 칼빈이 먼저 그의 기독교 강요의 초두에 언급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칼빈은 기독교 교리를 다루기에 앞서 그 기초적인 작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모든 교리는 성경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성경의 권위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교리는 마치 공중누각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록된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인가! 인간이 오직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오류를 시정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이 은혜를 무시하고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으니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7장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한다면 성경의 권위는 세상의 그 어떤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일 수 없다. 특히 교회가 성경의 권위를 확정한다는 것은 인간 공동체인 교회의 권위를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위에 두려는 그릇된 시도가 된다. 따라서 성경 말씀이 진리라면 그것은 인간 공동체가 그것을 진리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진리가 되는 게 아니다. 성경 말씀은 성령의 내적인 증거에 의해 진리로 확증되는 것으로서 인간이 그것을 인정할 수 있지만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자만이 성령의 내적인 증거로 성경 말씀을 진리로 믿고 따를 수 있다는 것은 구원의 놀라운 비밀이 된다.

    칼빈은 이와 같이 계시와 성경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하여 가톨릭교회의 오류를 지적하기 시작한다. 계시와 성경에 관한 교리는 가톨릭교회와 근본적인 차이를 두는 교리인 동시에 이는 기독교 교리를 다루기 위한 기초 단계에 해당되는 것이다. 칼빈은 이를 적절하게 다루고 있다.

    8장

    성경의 신빙성과 관련하여 칼빈은 말하기를 성경의 진리가 설득력 있는 것은 그것이 미사여구로 치장되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밝혔다. 성경은 그 자체의 진리로 인해 인간의 문학적 요소를 덧입지 않고도 인간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오늘날 성경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보려고 하는 시도는 자유주의 신학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문학작품 이상으로 보는 칼빈의 관점은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신빙성은 인간의 문학과 이성을 전혀 배제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칼빈은 성경의 일부 작품들이 인간의 문학성에 있어서도 전혀 뒤지지 않음을 언급하였다. 또 그는 모세오경을 중심으로 성경이 인간의 이성으로 볼 때에도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충분히 제시했다. 여기서 필자는 성경에 대한 칼빈의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었다. 본장을 읽으면서 필자가 깨달은 바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그 당시 칼빈이 가톨릭교회를 대항했던 것처럼) 신학의 정통성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성경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9장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다룸에 있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이해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언급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면서도 중요하다. 칼빈은 이를 잘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 이성의 작업만으로는 이해하기에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성경의 궁극적인 저자는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반면에 성경 말씀을 소홀히 하면서 성령의 인도를 따르려는 자세도 그릇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기록된 말씀을 통해 신앙의 기준을 제시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며, 칼빈은 또 말하기를 말씀이 성령의 조명을 베풀기 위한 도구라고 하였다.

    오늘날 교회의 사역과 개인의 신앙에 있어서 말씀과 성령의 사역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떤 이들은 성령의 조명이 간과된 신학의 학문성만 추구하며, 또 어떤 이들은 말씀을 무시한 성령운동에 심취해 있다. 이러한 현재의 시점에서 필자는 칼빈의 입장을 따르는 것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많은 사람들은 고신교단에 성령의 역사를 간과하는 폐단이 있다고 말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말씀을 강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성령의 조명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10-12장

    칼빈은 그 당시의 가톨릭교회가 성화상 숭배에 빠져있었던 점을 지적하면서 그것이 분명히 성경에서 죄악으로 규정하는 것임을 선언하였다.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형상이나 그림, 기타 상징물들로 표현하는 것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물론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상징물로 나타나신 적이 있다. 그러나 “구름 연기 화염은 하늘의 영광을 나타내는 상징물이었으나 하나님에 대해서 더 깊이 파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라는 칼빈의 해석은 얼마나 명쾌한가......

    한편 칼빈은 성화상 숭배의 책임을 교회교육의 부재에 두고 있다. 그는 “교회를 다스리는 자들이 가르침의 직분을 우상에게 떠넘겼다.” 라고 언급하였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필자는 교회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닌다고는 하지만 그들 중 대다수가 신앙교육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로 인해 그들이 가령 그릇된 신앙체계에 빠져있다면 그 책임은 교육을 담당한 일꾼들에게 있을 것이다. 적지 않은 교육자들은 교육의 책임을 어떤 프로그램이나 이벤트라는 일종의 수단에 떠넘기고 있다. 이것은 교회교육의 부실함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은 우상숭배를 인간의 어리석음에 귀결시키는 한편 신성에 속한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우상숭배에 대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에게 분배하는 행위로 규정하였다. 이것이 우상숭배라고 할 경우 우리의 삶에는 적지 않은 우상숭배가 습관처럼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칼빈 당시에는 이 우상숭배가 성화상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재물과 자기 자신을 포함한 많은 것들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이론적인 이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부터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께 돌이켜야 할 것이다.

    13장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그가 신학을 얼마나 성경에 비춰 정통적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선 칼빈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련하여 교부시대의 이해를 제대로 파악하고 열거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칼빈은 하나님의 위격에 대해 다루면서 ‘비공유적 특성’을 언급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비공유적’이라는 표현을 하나님의 삼위의 위격 중 한 위격과 다른 위격이 공유하지 않은 특성에 대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비공유적 특성’이 하나님께는 있으나 인간이 가지고 있지 않는 특성을 말하는 데 잘못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성경과 정통 교의에 비춰볼 때, 우리가 수정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임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공식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에서부터 예수님을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하게 경외의 대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칼빈은 신구약 성경에서 많은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성자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심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다시 한 번 칼빈이 성경에 대해 얼마나 박식한지를 느끼게 되었다. 우리가 기독교의 교리를 가르치고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성경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다.

    14장

    본장에서 칼빈은 물질세계와 영적세계의 창조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한 가지는 인간의 겸손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사색”은 부당하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천지창조가 인간의 인식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 안에 종속된 인간이 어찌 시간 밖의 일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천사에 대한 사변 역시 무의미한 것이라고 칼빈은 밝히고 있다. 이는 성경이 멈추는 데서 멈춰야 한다는 칼빈의 신학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필자는 고린도전서 11장 16절의 말씀을 떠올려보게 되었다.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본장에서 필자가 깨달은 다른 한 가지를 언급해보겠다. 필자는 과거 교의신학의 신론을 접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하여 천사와 마귀에 대한 논의가 구체적으로 언급된 데 대하여 의문을 가졌었다. 신론은 하나님에 관해 다루어야지 왜서 천사와 마귀가 마치 부록의 내용인 것처럼 다루어지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본장을 볼 때, 칼빈은 하나님께서 신성에 있어서 유일한 분이시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천사의 존재를 거론한 것이었다.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영광을 천사와 같은 영적인 존재에게 분배하는 그 당시 가톨릭교회의 그릇된 교리를 배경으로 생각할 때, 영적존재에 대한 정의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시대적인 배경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15장

    본장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교의신학에서는 인간론을 별도로 다루지만 칼빈은 신론 중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하여 인간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신학이 하나님 중심의 신학임을 보여준다. 인간의 창조와 관련하여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와 인간 영혼의 본질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필자는 칼빈이 인간의 영혼과 육체와 관련하여 이분설이나 삼분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인간을 통합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이분 혹은 삼분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야말로 그릇된 입장이라고 생각된다. 칼빈도 이를 직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칼빈은 타락한 상태 이전의 인간의 상태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급하였다.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에 인간은 완전한 존재였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타락이 어디로부터의 타락인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 회복은 어디로의 회복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인간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인간의 창조와 타락 및 구원의 전반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16-17장

    하나님의 창조의 연장선상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신 후 피조세계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그것이 제대로 운행하도록 섭리하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준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 때, 우리는 또한 이 상에 우연이란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우리 눈에 우발적인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실상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져가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편 칼빈은 이러한 섭리의 교리가 스토아 철학의 운명론과는 전연 다르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필자의 좁은 소견으로는 하나님의 섭리의 교리가 칼빈이 이해한 바와 같이 명쾌하게 이해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가 중요하게 깨달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인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느냐 라는 점이다.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모든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항상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시다는 것이며, 둘째로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를 핑계로 운명론에 빠지거나 자기 의무를 하나님께 전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8장

    세상에는 얼마간의 선이 있겠지만 악이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이러한 선하고 악한 일 모두는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즉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선하고 악한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주권자인 셈이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칼빈이 성경의 여러 군데에서 언급하였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악하다고 생각하는 일까지 계획하시고 이루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있어서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시다. 이것은 어쩌면 모순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칼빈은 본장에서 이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필자는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칼빈의 놀라울 만치 순수하고 확고한 신앙을 느끼게 되었다.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에 대한 이해는 그야말로 우리의 입술이 뭐라고 고백하는지와 상관없이 우리의 신앙의 자세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필자는 본장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과거에 필자는 이 양자를 분별없이 사용했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그렇지 않음을 발견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류역사와 인생사를 통해 자신의 뜻을 펼치시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인간이 자기 인생을 나름대로 살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포함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해서 전부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인간의 동기와 목적인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을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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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강요 : 1권. 1장

    제 1 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제 1 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 이 두 사이는 어떻게 서로 상호관계가 있는가?

    1. 자아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지혜, 곧 참되며 건전한 지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다.
    그러나 이 두 지식은 여러 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먼저이며, 어느 쪽의 지식이 다른 쪽의 지식을 만들어 내는가를 구별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먼저, 자기 생각을 돌려, 자기가 "힘입어 살며 기동"(행 17:28) 하고 있는 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살펴볼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은사들 중 그 어느 하나도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없으며, 심지어는 우리의 존재 자체도 오직 한분 하나님 안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늘에서 이슬처럼 떨어지는 이러한 축복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마치 시내를 따라 샘 근원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그 축복의 근원에까지 인도함을 받게 된다.
    실로 우리 자신의 빈곤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을 보다 더 확실하게 드러내 준다. 특별히 최초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빠지게 된 그 비참한 파멸은 우리들로 하여금 위를 바라보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굶주림과 배고픔 때문에 우리의 결함을 찾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에 눈을 뜨게 되어 겸손을 배우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참으로 비참한 세계가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신적 의상을 빼앗긴 후부터 우리의 벌거벗음의 수치는 수없이 많은 추행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의식하도록 자극을 받아 적어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다소나마 얻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 자신의 무지, 공허, 빈곤, 허약, 이보다 더한 타락과 부패를 자각함으로써, 지혜의 참된 광채, 건전한 덕, 차고 넘치는 선, 의의 순결함이 오직 주 안에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악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선하신 일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자신을 미워하기 전에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할 수가 없다.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곧 자신의 재능에 만족하고,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알지 못하거나, 잊어버리고 있는 한, 자신에 대하여 만족하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우리를 일깨워서 하나님을 찾게 한다. 뿐만 아니라, 마치 손으로 끄는 것처럼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2.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아에 대한 지식이 없다

    한편 인간은 분명히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나서, 다음으로 자신을 자세히 검토하지 않는 한, 결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지 못한다.
    왜냐하면 명백한 증거에 의해서 우리 자신의 불의, 더러움, 어리석음, 불결함을 스스로 확신하기 전에는, 우리는 항상 자신을 의롭고, 바르고, 현명하며, 거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이러한 교만은 온 인류에게 본래적인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자신만을 바라보고 이러한 판단의 유일한 표준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가 본래 위선으로 치우쳐져 있어서, 일종의 공허한 의의 형상이 의 그 자체를 대신하여 우리를 충분히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속과 주위는 너무나 타락하여 오염되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신이 인간 부패의 범위한도에서만 보게 되면, 적게 오염된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이 마치 가장 깨끗한 것처럼 우리를 즐겁게 한다.
    그것은 마치 검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눈이 희끄무레한 것이나 검으스레한 물체를 볼 때 완전히 횐 것으로 판단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실 우리가 영혼의 모든 능력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크게 속고 있는가 하는 것은 육체의 감각을 통해서 더욱 명백하게 깨닫게 된다.
    만일우리가 대낮에 땅을 내려다보거나, 주위에 있는 어떤 사물들을 본다면, 우리는 자신이 가장 강하고 가장 예리한 시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눈을 들어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게 될 때, 우리의 시력은 당장 그 큰 광채로 말미암아 눈이 부시고 혼란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구상의 사물을 볼 때에는 그렇게 예리하던 시력도 태양을 쳐다볼 때에는 아주 흐려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우리의 영적 은사를 평가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이 지상 너머를 바라보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의와 지혜와 덕으로 완전히 만족하고 있는 한 우리는 자신이 가장 훌륭한 존재인 양 우쭐대며 자신을 거의 반신적(半神的)인 존재로 착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 앞으로 향하며, 그의 속성을 생각하며, 마땅히 우리의 규범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의와 지혜와 권능이 절대적으로 완전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전에 의라는 가면을 쓰고 우리를 즐겁게 하던 것은 가장 사악하고 추한 것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혜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신기하게 감동시켰던 것은 가장 어리석은 것으로 역겨움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전에 능력의 가면을 쓰고 있던 것은 가장 비참한 무력자로 증명이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가장 완전하게 보이는 것도 하나님의 순결에 비하면 그 자체가 사악한 것이다.

    3.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의 인간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낄 때마다 충격을 받으며 압도당한다고, 성경이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그 두려움과 놀라움은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할 때에는 보통 안전하게 또는 확고하게 서 있지만, 일단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면, 죽음의 공포로 쓰러질 만큼 마음이 흔들리며 비참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사실 그들은 죽음의 공포에 압도되어 거의 혼비백산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엄과 비교해 보기 전에는, 결코 자신의 비천함을 깨닫거나 충분히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추론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는 이러한 놀라운 사건의 많은 실례를 사사기나 여러 예언서에서 자주 보게 된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말이 자주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공통적으로 표현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삿 13:22, 사 6:5, 겔 2:1, 1:28, 삿 6:22-23). 욥기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순결을 표현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능력, 그리고 부패를 인식케 하는 가장 강력한 논증을 사용한다(참조 욥 38:1이하). 그것은 아무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하여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자신이 "티끌과 재"(창 18:27)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했으며, 엘리야도 자기 얼굴을 겉옷으로 가리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심을 감히 견뎌낼 수가 없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매우 두려운 것이다(왕상 19: 13). 그룹들까지도 두려움을 피해 그들의 얼굴을 가리지 않으면 안 되었거늘(사 6:10) 하물며 부패하고,(욥 13:28) 버러지에 지나지 않는(욥 7:5, 시 22:6) 인간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하여 선지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왕이 되시고‥‥‥"(사 24:23)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광채를 나타내시며 보다 더 가까이 발하실 때에는, 가장 빛나던 광채들도 그 앞에서 어두워지게 된다는 것이다(사 2:10,19).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먼저는 전자에 대해 논하고 다음 후자를 논하는 것이 정당한 순서일 것이다.






    2025년 주일 저녁 주간 암송 성구를 위한 성경 공부


    1월 5일 /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Therefor,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1. "그런즉"과  연관된 앞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16절 참조)

    2. '누구든지'에는 당신도 포함됩니까?

    3.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됩니까?

    4.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다음 주 어떤 것입니까?
      a. 새로운 각오
      b. 더욱 계발된 인격
      c. 좀 더 나은 종교적인 삶
      d. 더욱 발전된 삶으로의 개선과 개량
      e. 새로운 영적 탄생

    5.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는 무슨 말입니까?

    6. 이전 것은 지나갔다는 말은 앞으로 전혀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까?

    7. 당신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기의 신분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자기의 신분 중 어느 것이 옳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 고린도후서 5:17. 암송하여 기록합니다!


    호스테 에이 티스 엔 크리스토 카이네 크티시스 타 아르카이아 파렐덴 이두 게고넨 카이나 타 판타
    ωστε      ει     τις  εν   χριστω   καινη    κτισις      τα    αρχαια   παρηλθεν ιδου γεγονεν καινα τα παντα
    5620                                        2537     2937                              3928               1096     2537     3956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표현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의미한다.
    이 연합의 비밀에 대해 사도 요한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관계로 설명했다(요 15:1-7).

    새로운 피조물
    - 인종과 성(性)을 초월하여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여(14절)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을 이루면(갈 2:19, 20)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여기서 '피조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티시스'( κτισις. 2937)는 창조행위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롬 1:20).
    즉 본 구절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영적인 교제를 갖게 되었을 때 그에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로운 창조 행위가 일어나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창조 행위를 오해하여 새로운 질료(質料)로 만들어지는 전혀 다른 모습을 상상해서는 안된다.
    그는 여전히 육의 몸을 입고 있고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육체의 욕망과 죄에 굴복당할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롬 6:12, 13).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그가 그리스도와 세계에 대하여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16절).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사람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활 방식사고 방식을 따라 살게 된다.
    과거에는 그리스도를 핍박하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고, 과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인정했으나 지금은 그런 차별을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만이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롬 2:28, 29;고전 5:12, 13;갈 3:28;엡2:11-22;골 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