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후회(後悔)(사무엘상 15:11)



하나님의 후회(後悔)(사무엘상 15:11)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질문) 하나님이 후회하실까?

후회(나함. nâcham. נָחַם ) / 슬퍼하다, 불쌍히 여기다

한탄하다(창 6:6,7), 후회하다(삼상 15:11,35, 렘4:28), 위로받다(삼상 13:39, 겔 14:22,시 77:2), 회개하다(욥 42:6), 뜻을 돌이키다(시 106:45, 렘 18:8, 욜 2:14), 뉘우치다(렘 31:19, 슥8:14), 변개하다(삼상 15:29), 돌아오다(시 90:13), 변하다(시 110:4), 보응하다(사 1:24), 위로하다(룻 2:13, 사 51:3, 렘 16:7), 안위하다(창 5:29, 슥 1:17), 조상하다(삼하 10:2, 대상 19:2), 긍휼히 여기다(시 135:14),풀다(창 27:42). [명] 위로(창 24:67, 겔 16:54),위안(시 119:76), 조객(삼하 10:3), 조문사절(대상 19:3), 위로자(욥 16:2, 전 4:1),
안위(사 54:11), 후회(민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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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후회에 대해서 언급하는 두 개의 본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아 홍수의 원인에 대해 설명하는 창세기 6:6과 불순종하는 사울을 향한 하나님의 실망감을 담고 있는 사무엘상 15:11

창세기 6:6절을 보도록 하자.
개역이나 개역 개정판은 “(하나님이)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6)라고 번역한다.

그런데 영어 번역은 조금 다르다:
“And the LORD was sorry that He had made man on the earth, and He was grieved in His heart”(NASB);
“The LORD was grieved that he had made man on the earth, and his heart was filled with pain”(NIV);
“And the LORD was sorry that He had made humankind on the earth, and it grieved him to his heart”(NRSV).

이 세 가지 영어 번역에 기초한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뉘우치고 후회(한탄)하신 것이 아니라 땅 위에 인간을 창조하신 일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셨다는 얘기가 된다.
인간의 행동에 대하여 섭섭하게 또는 안타깝게 생각하셨다는 얘기다. 슬픔이나 배신감을 느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 점은 본 절의 후반부에 있는 “마음에 근심하시고”또는 “마음 아파하시고”(표준새번역)에 의해 충분히 뒷받침된다.

사무엘상 15:11도 마찬가지이다.

개역과 개역 개정판은 하나님이 사울을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신다고 번역하나, 영역본들은 히브리어 원문에 충실하게 하나님이 사울을 왕 삼은 일을 유감으로 생각하셨다고 번역한다:
“I regret that I have made Saul king”(NASB); “I am grieved that I have made Saul king”(NIV); “and it grieved him to his heart”(NRSV).

앞의 홍수 관련 본문에서처럼 하나님은 사울이 한 일들로 인하여 슬퍼하시고 그러한 일을 행한 사울을 안타깝게 생각하셨다는 얘기가 된다. 결코 하나님이 인간처럼 이랬다저랬다 하는, 변덕스러운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두 구절은 주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근심과 걱정, 그리고 그러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유감스럽고 서글프고 안타까운 마음을 인간적인 언어로 실감나게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후회에 대해 언급하는 본문들을“이전의 잘못을 뉘우치신다”는 사전적인 의미에서의 후회 개념으로 읽는다는 것은 너무도 부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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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하나님께서 '후회'를 하시는가?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 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 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 함이니라 하시니라(창 6:6-7)."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셨다고 들었거든여..
하나님께선 이미 창세 전에 후회하실 것을아시고 사람을 지으셨나여? 좀 이해가 안되네여!

민수기 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신명기 32:3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고 그 종들을 인하여 "후회"하시리니 곧 그들의 무력함과 갇힌 자나 놓인 자가 없음을 보시는 때에로다.

사무엘상 15:11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 하셨더라(삼상 15:35)."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사자를 보내셨더니 사자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사자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 곁에 선지라(대상 21:15)."

예레미야 4:28
이로 인하여 땅이 슬퍼할 것이며 위의 하늘이 흑암할 것이라 내가 이미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하였은즉" 또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로다.

렘 20장 16절에서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로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예레미야 42:10
너희가 이 땅에 여전히 거하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니라"
 

하나님께서도 후회를 하시나요?


1. 한 나라 말을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하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러한 일은 히브리어나 헬라어로 된 성경을 우리 말로 번역할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질문하신 예를 보면 우리가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2. "후회한다"는 말은 히브리어 "니함"이란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대부분 "후회한다"는 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한 가지 뜻이 아니라, "가엾다, 동정하다, 위로받다, 후회하다, 슬퍼하다, 안심하다, 편케하다, 한탄한다, 뜻을 돌이킨다"는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맥을 잘 살펴서 이 단어가 그 문맥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말 성경의 경우 이 단어를 대부분 후회로 번역함으로 때로 문맥의 흐름을 어색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질문하신 구절에서 이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고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 하사(창 6:6-7)  이 구절에서는 니함이란 단어를 "한탄하셨다"(심히 슬퍼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끝까지 하나님을 거역하였으며, 그 결과로 사람들의 죄악은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의 모습에 대해 깊은 슬픔을 느끼고 한탄하셨습니다. 


2) "하나님은...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민 23:19)."  이 구절에서는 "니함"이란 단어가 "후회"라는 뜻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택한 백성에 대한 언약을 철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발람 선지자는 궤계를 써서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몰아 멸망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기는 했지만, 그들과 맺은 언약을 취소하지는 않았습니다.


3) "여호와께서...그 종들을 인하여 "후회"하시리니 곧 그들의 무력함과 갇힌 자나 놓인 자가 없음을 보시는 때에로다(신 32:36)."  이 구절에서는 "니함"이란 단어가 "가엾게 여기다, 동정하다"란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은 자비가 많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자기 백성을 죄로 인해 징계하신 후에 그들을 가엾게 여기고 동정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징계로 인해 무력해지고, 포로가 되어 갇히고, 종이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그들에 대해 깊은 동정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결국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다시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4)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 하노니(삼상 15:11)..."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 하셨더라(삼상 15:35)..."   이 두 개의 구절은 니함이란 단어가 "슬퍼하다, 한탄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경우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안 사무엘 역시 슬퍼하며 근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대상 21:15) 이 구절에서 니함은 고통 받는 자기 백성을 보고 하나님께서 징계를 철회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의미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6) "내가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하였은즉" 또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로다(렘 4:28 ."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렘 20:16 "   이 구절들은 니함이 "후회하다, 돌이킨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니함은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되어 나타날 때는 항상 그 언약이 불변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7)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니라(렘 42:10)."   이 구절에서는 니함이란 단어가 우리 말 성경 번역대로 "뜻을 돌이킨다"는 의미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이 경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들의 죄로 인해 징계하신 후에 그들이 받는 고통과 부르짖음을 보고 징계를 거두기로 작정하셨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니함이란 단어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이 되고 있으며, 따라서 다음과 같이 각 문맥에 따라 가장 적절한 의미를 선택해야 합니다.


1. 나함이 인간의 완악함과 타락과 연결되는 경우에는 이 말은 크게 슬퍼하다, 탄식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합니다.

이 경우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참고 기다려 주시다가 결국 그들을 징계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을 때에 한탄하고 슬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나함이 이미 징계를 받고 고통하는 하나님의 백성과 연결되는 경우에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고통받는 자기 백성을 보시고 그들에게 "동정심을 느낀다"는 경우
두번째는 그들의 고통이 극심한 것을 보고 징계를 철회하기로 "뜻을 돌이키신"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1번과는 반대로 징계를 받던 백성이 징계의 기간이 끝이 나고 다시 은총의 때가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나함 하나님의 언약과 연결되어 나타나는 경우에는 하나님의 언약의 불변성을 강조하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을 옳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이 단어를 후회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하나님의 백성의 패역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과 맺은 언약은 무효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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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지난 삶을 돌이켜 볼 때 후회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후회(後悔)란 이전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무지한 존재이다.
따라서 살아오면서 판단미숙과 계산착오로 씻을 수 없는 실수를 하므로 후회스런 과거를 갖고 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결코 후회를 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민수기 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사무엘상 15: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시편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예레미야 4:28

이로 인하여 이 슬퍼할 것이며 위의 하늘이 흑암할 것이라 내가 이미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하였은즉 또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로다.

에스겔 24:14

나 여호와가 말하였은즉 그 일이 이룰찌라 내가 돌이키지도 아니하며 아끼지도 아니하며 뉘우치지도 아니하고 행하리니 그들이 네 모든 행위대로 너를 심문하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히브리서 7:21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사람처럼 이전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쳐야 하는 후회가 없으시다.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후회하시고 뉘우치셨다’(Lord repented: “여호와께서 후회하셨다”, “주께서 유감스럽게 생각하셨다”, “야훼께서 뉘우치셨다”, “주께서 회개(悔改)하셨다”)라고 무려 열 번이나 말씀하셨다(창 6: 6, 출 32: 14, 삿 2; 18, 삼상 15: 35, 삼하 24: 16, 대상 21; 15, 시 106: 45, 렘 26: 19, 암 7: 3-6, 욘 3: 10).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여섯 번이나 말씀하셨는데, 열 번이나 “여호와께서 후회하셨다”고 했다면 성경이 잘못되거나 성경기록이 잘못된 것인가?

야훼 하나님이 후회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비통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인간의 언어로 설명했을 때에 표현이지 결코 하나님이 계산착오나 판단력부족으로 실수를 하셔서 그 일을 후회하셨다는 말씀은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신 후에 후회하실 정도로 지혜나 지식이 부족한 분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후회와 뉘우치심’은 하나님의 통탄(痛歎)탄식과 통초(痛楚)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성경에 열 번이나 “야훼 하나님이 후회하셨다, 주께서 뉘우치셨다”고 하신 것은 크게 네 가지 후회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천사와 인간의 타락 때에 후회하심(창세기 6:6)
둘째, 주의 종들의 중보기도를 보실 때에 후회하심(출애굽기 32:14)
셋째, 개인이 회개하고 슬피 부르짖으며 악한 길을 떠날 때(사사기 2:18, 시편 106:44-46, 삼하 24:16, 대상 21:15, 렘 26:19, 욘 3:10)
넷째, 사울의 불순종과 멸망을 보실 때(사무엘상 15:35)

첫째, 천사와 인간의 타락 때에 후회하심(창세기 6:6)

창세기에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들을 홍수로 심판하실 당시에 하나님의 심정을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恨歎)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했다.

아담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할 때도 한탄하거나 근심하거나 후회하지 않으셨던 하나님이 노아 600세 때인 아담 창조 1656년, 지구촌을 홍수심판하시기 바로직전, 지구에 인간들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하신 것이다.

우리말로 표현한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것을 땅을 치며 통곡하셨다’는 말인데, 이것은 사랑하는 자식이 살인죄나 국가반역의 중죄를 짓고 부모가 보는 앞에서 사형을 당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보아야 하는 부모의 참담한 심정처럼 하나님의 마음이 ‘차라리 인간들을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며 마음을 아파하며 후회하셨다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인간창조를 한탄하시고 근심하셨는가?
하나님이 사람 지으심을 후회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창세기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음으로 그들이 육체가 됐기 때문이라”(Because(For that) he also is flesh: “그 이유는 그(천사들)가 육체가 됐기 때문이다”; 창 6: 2-3)고 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들’(The sons of God)을 하늘에 있는 천사(天使)들로 세 번이나 기록했다(욥 1: 6, 2: 1, 38: 7)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 창조를 후회하시고 근심하시며 한탄하신 것은 하늘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여야할 천사들이 지상으로 내려와 지상의 여인들과 성적방종을 탐닉하여 네피림 거인들을 낳으므로 천사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그들이 육체가 됐기 때문에 천사들과 인간들을 홍수심판으로 멸망시켜야 했으므로 후회하셨다는 말씀이다.

훗날 베드로는 이 사건을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다”(벧후 2: 4-5)고 첨가하여 설명했고, 예수님의 친 동생이며 속사도인 유다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를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천사들)와 같은 모양으로(About them in like manner) 간음(姦淫)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Giving themselves over to fornication, and going after strange flesh)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으므로 거울이 되었다”고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다른 색(Strange flesh)의 헤테로스는 자연스러운 남자와 여자의 결합 같은 것에 반대되는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또는 천사와 여자의 성교(性交)같은 “별스럽고 이상한 종류의 다른 색욕”을 의미함; Another of a different kind: Men with men and women with women and angels with women, all living contrary to nature)

이렇게 베드로와 유다는 모세가 기록한 ‘천사타락’의 사건기록을 더 충실하게 보충해서 설명했다. 그렇다. 천사들의 타락은 ‘원천지의 루시퍼 타락’이 아니라 또 다른 천사들의 타락이다. 루시퍼가 아닌 또 다른 높은 지위의 천사가 자기 졸개 무리를 데리고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The angels which kept not their first estate) 자기 처소인 하늘을 무단이탈하여 지상으로 내려와서 세상의 여인들을 보고 무차별로 그 몸을 탐닉하며 성적으로 타락했던 천사였다. 사도 요한은 그때 타락한 천사의 우두머리를 아바돈이라고 했고, 아바돈을 추종해 땅으로 내려와 여인들과 타락에 빠졌던 천사들을 황충 귀신이라고 했다(계 9: 1-11)

이 말씀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천사들과 여자들의 다른 색을 탐닉한 성적인 타락이었고, 더 중요한 것은 오늘날도 다른 색을 따르는 것은 육체적 타락과 영적타락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색을 따르는 육체적 타락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사이에 있는 동성연애와 인간과 짐승사이의 있는 수간(獸姦)이다.

이제 미국의 동성애문제는 14개주가 동성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수준을 지나 오바마가 이것을 전적으로 지원하는 연방정부지원 수준까지 올라왔고, 이것을 미연방대법원이 확인해 주는 사법절차를 밟은 상태고, 유럽이나 한국 일본 중국 세계 모든 나라에 숨어있었던 동성애자들이 공개적으로 Coming out하는 시대가 됐고, 유럽에서는 고등학생들에게 성교육을 가르치기 위해 공공연하게 사람과 짐승의 성교를 시연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제 지구촌은 노아시대처럼 천사들이 지상에 내려온다면 여자뿐 아니라 남자들까지도 서슴없이 ‘다른 색’에 빠져버릴 음란하고 더러운 시대가 됐다. 남은 것은 하나님의 불 심판뿐이다.

다른 색을 따르는 영적타락

베드로의 가르침

1.  예수의 피로 자기들을 사신 것을 부인하는 종교다원주의에 빠지는 것과 멸망케 할 각종 이단에 빠지거나 이단을 받아들이는 것
2.  많은 사람 특히 목사들까지 음탕과 호색하는 것을 좇는 것(Many shall follow their pernicious; “많은 사람들이 해롭고 사악한 음탕함과 호색을 좇을 것이다”. ‘좇으리라’, 엨사콜루데수신: “대단히 밀접하게 따라가는 것”)이라고 했다.

유다의 가르침

1. 영적인 직분을 맡은 자들이 자기 지위(Their first estate; 제 일급 되는-으뜸 되는 자기들의 신분과 처지)를 떠나고 지키지 않는 것
2.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의 욕구를 따라서 동성연애로 자기육체를 더럽히는 것(Defile the flesh)
3. 하나님과 예수님의 권위(Dominion-통치권, 퀴리오테타: “주권”)를 업신여기는 것
4. 영광을 훼방하는 것(Speak evil of dignities; 영광(榮光, Dignity): “거룩함, 품위, 고귀함, 존엄”, 돜사스는 “천사들을 지칭”함)이라고 했다. 모세의 율법을 사람들에게 전달했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를 유지시키는 존재(행 7: 38, 53, 히 2: 2)인 천사들을 멸시하고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분리시키고 율법을 악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영광을 훼방하는 행위’였는데, 유다 당시 거짓 교사들은 천사들을 멸시하였다(유 1: 9, 10) 

하나님은 아바돈 천사가 자기 졸개 천사들을 데리고 몰래 하늘을 탈출하여 지상으로 내려와서 사람의 딸들을 보고 무분별하게 성적으로 타락한 것을 보시고 그들을 홍수로 심판하실 것을 계획하시면서,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고 마음에 근심하시며 후회하셨다. 그리고 21세기 오늘날, 세상뿐 아니라 교회까지도 동성애로 타락한 것과 ‘예수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에 미혹된 현대교회와 영적지도자들이 자기 지위를 벗어나 있는 것, 그리고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기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는 것을 보시고 지구촌 인류의 심판을 생각하시면서 하나님은 후회하시고 계신다. 이런 때에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는 우리만이라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효자성도가 되고 충성된 종과 성도가 되어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홍수심판에서 구원받은 노아 가족처럼 심판의 날에 구원받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둘째, 주의 종들의 중보기도를 보실 때에 후회하심(출애굽기 32: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아모스 7:3, 6에서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고 가라사대 이것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모세를 향해 하셨던 하나님의 후회는 모세가 40일을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있을 동안에, 아론을 충동질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이스라엘을 진멸하고, ‘모세를 통해 큰 나라가 되게 하겠다’ 생각하시고 그 계획을 모세에게 전했을 때, 모세가 범죄한 백성들의 죄를 대신 회개하며 중보기도를 할 때 하셨던 후회였고, 아모스를 향해 하셨던 후회는 하나님이 황충 메뚜기를 보내서 자라고 있는 풀을 다 먹어버리는 환상을 통해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여주셨을 때,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하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중보 기도할 때 그리고 거대한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삼키려는 환상을 통해 이스라엘의 멸망이 가까운 것을 보고 하나님께 중보기도로 부르짖어 간구할 때 하셨던 하나님의 후회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진멸하고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는 그들을 없애버리고 싶었을 때, 하나님의 종들, 모세와 아모스가 범죄한 이스라엘을 위해 대신 회개하고 그들을 위해 중보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파멸계획을 후회하시고 뜻을 돌이키셨다. 그러한 주의 종들의 중보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후회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런데 주의 종, 목사들 가운데는 자기가 사는 도시의 파멸을 막는 중보기도의 종이 있고, 카운티의 파멸을 막는 종도 있으며, 자기가 살고 있는 주(State)에서 나라의 멸망까지 막는 주의 종들이 있고, 반대로 자기 가정이나 가문의 비극은 물론 자신에게 밀려오는 저주까지도 막아내지 못하는 무능한 목사도 있다. 당신의 중보기도의 능력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

그래서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전쟁의 위기 때마다 기도로 나라를 건져준 선지자 엘리사가 죽을병에 걸려 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 더 이상 나라를 지켜줄 방패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구국의 대부 엘리사를 찾아가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My father, my father, the chariot of Israel and the horsemen thereof; 왕하 13; 14)를 처절하게 외쳤던 것이다. 메대 파사의 아하수에로 왕비가 됐던 에스더가 “내 민족을 내게 달라”(에 7: 3, 8: 6)고 요청함으로 70만 디아스포라를 구원한 것을 보자. 그리고 16세기 스코틀랜드의 신앙과 독립을 지켜낸 청교도의 선구자 존 낙스(1513-1572)가 “스코틀랜드를 내게 달라”며 하나님께 기도한 것을 보자. 그만큼 존 낙스의 중보기도는 나라까지 지키고 보호할 능력의 기도였던 것이다.

야훼하나님은 선지자 에스겔에게 당시 선지자들의 배역과 제사장들의 패역과 방백들과 백성들의 죄까지 이스라엘의 총체적인 타락을 통렬하게 책망케 하면서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다”(겔 22: 20)고 외치게 하셨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파멸하는 이스라엘을 위해 중보기도 하는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방백이나 백성을 찾지 못했다는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이다.

그렇다. 하나님이 당신을 천에 하나, 만에 하나로 선택해 주의 종, 목사로 만드신 것은 백성들의 파멸과 저주와 징계채찍을 막아서서 중보 기도하라고 세운 것이다. 직업이 없어서 목사를 직업으로 세운 것도 아니고, 감투가 좋아서 목사직을 감투로 씌어준 것도 아니며,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편안한 직업이니 잠만 자라고 목사 되게 한 것이 아니다. 당신의 기도로 성도들을 살리고 가정들을 살리며 성도들의 사업도 살리고 나라와 민족을 살리라고 목사로 세우신 것이다. 당신의 중보기도로 성도들에게 내리고자 하셨던 심판을 하나님이 후회하시고, 저주를 후회하시며 파멸의 손을 거두시는 역사들이 일어나길 축원한다.

셋째, 개인이 회개하고 슬피 부르짖으며 악한 길을 떠날 때(사사기 2:18, 시편 106:44-46, 삼하 24:16, 대상 21:15, 렘 26:19, 욘 3:10)
 

1. 지은 죄를 뉘우치고 슬피 부르짖을 때(사사기 2:18, 시편 106: 44-46)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의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어늘.

그러나 여호와께서 저희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 고통을 권고하시며
저희를 위하여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많은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저희로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


2. 인구조사를 한 후 하나님이 진노로 내리신 염병으로 7만 명이 죽게 되자 죄를 뉘우치고 부르짖어 기도했을 때(사무엘하 24:16, 역대상 21:15)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있는지라.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사자를 보내셨더니 사자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사자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 곁에 선지라.

3. 히스기야가 여호와께 간구할 때(예레미야 26:19)

유다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고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 생명을 스스로 크게 해하는 일이니라.

4. 니느웨 성이 죄를 회개하며 기도할 때(요나 3:10)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그들을 향했던 진노와 저주를 후회하시고 돌이키셨다고 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물 앞에 마음이 약하신 분이다.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하고 부르짖어 기도하면 언제라도 들어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이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서로 싸우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세 아이 모두 회초리나 가죽 벨트로 손바닥이나 종아리를 때려서 싸우는 것을 화해하게 만들었고, 잘못들을 고쳐주었다.

하나님도 죄와 실수를 핑계하거나 남에게 전가하는 사람에겐 죄를 물으시고 죄 값을 치르게 하시지만,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부르짖어 구하는 사람에겐 한없는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     

하나님은 개인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쳐 회개하며 부르짖어 기도할 때, 그들을 향했던 하나님의 진노 계획, 저주와 재앙계획, 몽둥이 계획을 철회하셨다.

오늘도 하나님은 아담이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죄를 전가하고 변명했듯 자신의 죄와 실수를 변명하거나 남에게 전가하지 않고 솔직하게 회개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지은 죄와 실수를 슬퍼하며 야훼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을 보실 때, 쏟아 부으려던 분노와 저주를 후회하시고 마음을 돌이키신다.

넷째, 사울의 불순종과 멸망을 보실 때(사무엘상 15:35)

사무엘이 죽는 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아이가 잘 생겼든 못 생겼든, 첫째 아이를 향한 부모의 사랑과 관심은 유난히 크다.
그래서 대부분의 엄마들은 둘째 셋째보다도 첫째에게 관심이 더 많아서 첫아이는 날 때부터 젖을 떼는 때까지 육아일기도 쓰고, 아이 사진도 많이 찍으며, 첫째를 먹이고 돌보는 것이 유별나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기 혈육의 시작인 첫째 아이에게 관심이 많다.

사울은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의 첫째 왕이었다.
그래서 사울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유별했다.
그런데 사울은 너무 빨리 교만했고 하나님을 쉽게 떠나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성경대로 사울은 이스라엘 초대왕으로 4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행 13: 21).
그런데 그의 통치 2년 만에 어려움을 참지 못하는 조급한 마음과 교만으로 사사요 선지자인 사무엘이 번제를 드리기 위해 기다리라고 했는데 자기가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의 눈 밖에 난다.
그래서 사무엘은 번제를 드린 사울에게 “왕이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고 망령되이 행하므로, 야훼하나님이 왕의 나라를 이스라엘 위에 영영히 세우시려고 했었지만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다”고 통보하였다(삼상 13:13-14).

"사무엘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그럼에도 하나님은 사울에게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38년이나 주셨다. 그러나 교만에 빠졌던 사울은 결정적으로 아말렉을 지상에서 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에게 고통을 당하는 저주로 반미치광이, 중증 치매, 정신병자로 고생하다가 전쟁터에서 세 아들과 함께 전사당한다.

사울이 ‘아말렉 전멸’의 하나님 명령을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한다”(It repented Me that I have set up Saul to be king: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이 후회스럽다”-I regret that I have made Saul king; 삼상 15: 11)고 하셨다. 오늘날 사람들이 가슴을 치면서 “내가 그를 국무총리로 세운 것이 후회스럽다, 내가 그를 대기업의 총수로 세운 것, 대학총장으로 임명한 것, 안수집사와 장로로 세운 것, 부목사로 음악목사로 세운 것, 내 사업경영과 가정사까지 모든 것을 맡긴 것, 내가 그를 친구로 삼은 것이 후회스럽다”고 외치는 말과 같은 말이다.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세우셨다가 그를 포기하고 버리셔야 했을 때,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이 후회스럽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날, 얼마나 많은 목사들을 보시고, 그를 유명한 부흥사로 만든 것, 큰 교회를 섬기는 대목회자로 만드신 것, 은사의 종으로 세우신 것, 유명한 목사가 되게 한 것, 뛰어난 신학자로 만드신 것을 후회하고 계실까? 그리고 사업에 성공한 장로를 만드신 것, 신유의 은사로 많은 병을 고치는 유명한 기도원 원장으로 세운 것, 가난에서 건져내 큰 축복을 받게 한 장로 권사 집사를 후회하고 계실까?
그들이 그렇게까지 유명해지지 않았다면, 그들이 성공하여 부자가 되지 않았다면, 그들이 병 고침 받아 건강해지지 않았다면... 박태선, 문선명, 이만희 신천지이단은 되지 않았을 텐데, 그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별로 지금처럼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초라한 목사는 되지 않았을 텐데, 맛을 잃은 소금처럼 소나 말, 개나 사람에게 짓밟히는 초라한 신세는 되지 않았을 텐데...하시면서 하나님이 후회하실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지금 하나님이 우리들을 보시고 후회를 하신다면, 나를 향한 후회는 어떤 후회일까? 나를 보시고 하나님이 후회하신다면, 나는 어떤 후회에 속한 사람인가? 하늘의 아바돈 천사와 지구촌 여인들의 타락으로 세상을 심판하여 버리셔야 하듯 자기 위치를 망각하고 범죄 하므로 하나님이 포기하고 버리셔야 하는 주의 종들을 향한 후회인가? 처음엔 겸손하게 잘 순종하다가 축복을 받은 후 교만하고 불순종하므로 후회하여 사울을 포기하신 것처럼, 그들의 교만과 불순종과 회개치 않음을 보시고, 축복주신 것, 사업 잘되게 하신 것, 영주권 주신 것, 행복한 가정을 허락한 것을 거두시며 하셔야 할 후회인가? 아니면 주의 종들의 중보기도를 보시고, 당신을 그렇게 징계하여 망하게 한 것을 후회하시고 돌이키는 후회인가? 아니면 당신이 인생 밑바닥에서 질병과 저주와 절망에서 회개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므로 뜻을 돌이키시려는 후회인가?

회개하고 울부짖어 기도하므로 풍전등화와 절체절명 위기의 운명이 하나님이 후회하시므로 죄 용서와 구원의 감격을 누렸던 예루살렘의 다윗과 히스기야와 요나의 니느웨 같은 하나님의 축복과 기적이 당신의 삶 속에 충만하게 나타나길 축원한다. 새벽마다 당신의 이름을 불러가며 당신의 안타까운 사정들을 낱낱이 아뢰며 부르짖어 기도하는 주의 종들의 중보기도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당신에게 미쳐 징계의 채찍과 몽둥이를 꺾으시고 다시 사랑과 긍휼과 인자함을 베푸시는 역사들이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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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상징 / 모세의 놋뱀(민수기 21:8) Nov. 03. 2021


기독교 신앙과 상징

기독교 신앙과 상징
- 우리는 무엇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가?

기호와 상징의 차이

1. 상징(das Symbol. symbol)

본래 가지고 있는 뜻을 정확히 부연 설명하거나 의미 전달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의 기호로 표현되어지는 것.

2. 기호(das Zeichen. sign)

상징을 주기 위한 하나의 신호적인 의미이므로 그 안에 아무런 의미나 뜻이 들어 있지 않다.

예를 들면 십자가는 예수의 고난을 상징한다.
십자가 그 자체는 하나의 예수의 고난을 상징하기 위한 하나의 기호(Zeichen)에 불과하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의 상징의 필요성

왜 기독교는 상징이 필요한가?
- 상징이 주는 신앙적 의미 

신앙은 참된 하나님의 상징성을 통하여 우리가 바라보는 믿음의 대상을 의지하고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의 대상은 상징적 요소를 통하여 하나님의 실재를 대변하게 된다.

기독교 상징을 통한 의미부여 :

우리가 하나님의 실재를 확인할 수 없기에 우리는 상징적인 요소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부분을 투영하며 그 본체에 가깝게 의미부여하는 것이다.  

상징이 주는 신앙의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

긍정적인 요소

1. 하나님에 대한 거룩성 수용

2. 타자로서의 하나님 이해

3. 하나님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의 가능성

부정적인 요소

1. 인간의 이해 방식에 따라 자의적 해석가능

2. 인간의 경험과 이성의 한계로 인한 하나님의 사고에 대한 고착화 우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신앙의 상징적인 요소가 있는가?

인간의 신앙의 자율성과 지속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특별히 신앙의 폐쇄성을 탈피하고 상징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와 투영을 가깝게 이해하게 하려는 것이다.

개신교는 상징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가?
가톨릭은 상징을 절대화하여 우상적인 요소가 있고, 개신교에서는 본질적 상징마저 잃어버린 현실의 상황이다.

나는 신앙에 대한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참된 기독교의 상징의 회복은 예배의 회복, 신앙의 회복, 삶의 회복이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참된 신앙의 자리를 갖기 위하여 상징의 의미를 회복하여야 한다.
상징이 고착화가 되면 우상이 될 수 있지만 상징이 사라지면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를 잃어버릴 수 있다. 특히 개신교는 상징의 신학이 회복되어야 한다. 예배, 찬양, 기도, 말씀에 대한 상징의 본질이 회복되어야 한다.

상징을 통하여 성서와 신앙을 위한 제언

성서는 과학적인 근거나 객관적인 자료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근거를 위한 텍스트로서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신앙인 들에게 부여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의 토대로서의 말씀이다.
자신을 어떤 대상물이나 상징적인 의미로 표현하고자 할 때, 대부분 그 자신이 투영하는 것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과 의미와 정신이 반영되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과 그릇된 편견 또는 자의적인 해석에 따라 자신을 마음대로 신앙을 판단하고 해석하고는 있지 않는가에 대한 진정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신앙은 소유가 아니라 개방이자 열림이다.
신앙은 자신의 삶만을 보호하는 방어막이 아니라 장애물과 난관을 헤쳐나가게 해주는 원동력이다.
신앙을 그러한 참된 의미를 각성하게 하고 자신의 나태한 모습을 새롭게 받아들이려는 믿음의 근거이다.

모세의 놋뱀(민수기 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The LORD said to Moses, "Make a snake and put it up on a pole; anyone who is bitten can look at it and live."

습관적인 불평과 불만에 사로잡힌 민족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항상 잊어버리고, 어려운 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습관적인 불평을 일삼아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쉽게 망각하는 자들입니다.

가나안을 향하는 길에 에돔 왕이 자기 영토로 이스라엘이 지나가는 것을 용납지 아니함으로 지름길을 제쳐 놓고(민 20:21),
에돔 땅을 우회하게 되어 백성의 마음이 상하게 되었습니다(민 21:4).
그들에게 있어서 광야 길은 육체적으로 고역스럽고 사람의 마음을 지치게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결국 인내심이 사라진 그들의 마음에 극한 분노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분노와 원망 즉 남의 탓으로 돌리는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했습니다.

하나님은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물게 하셨고 죽음의 사건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뱀을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러한 불뱀의 습격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해결책으로 자신들의 범죄함을 인정하게 되었고 모세에게 여호와께 기도해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마음을 보시고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8절)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고 그것을 쳐다본 자들은 모두 살았다고 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얻은 사망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로 생명을 얻은 사건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 습관적으로 나오는 불평과 불만이 나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고 원망의 말을 서슴지 않고 하게 됩니다.
죄를 지을 때 마다 나에게 찾아오는 불편한 마음과 평안을 깨트린 상황에서는 무엇을 해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나에게 찾아오는 감정은 분노, 짜증, 우울, 고독이 밀려옵니다.
결국 감사가 없는 마음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인내심의 결여는 나에게 영적으로 큰 손해를 입히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모든 것의 원인을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모든 상황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나에게 임하게 됩니다.

나의 잘못된 생각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던 것을 회개하며 내 삶을 돌이킬 때에 성령님이 내 마음 가운데 임하셔서 평안과 안식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을 바라본 것처럼 나또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인생의 여정을 나 혼자가 아닌 성령님과 함께하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 많은 적을 이기게 하신 것,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보호하신 것,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것,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신 것 등은 기억하지 않고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민수기 21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로 인해 마음이 상해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뱀에게 물린 자마다 쳐다본즉 살더라

하나님은 원망에 가득 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불뱀이 천막 안을 기어다니고,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 죽어갔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애원했습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제발 불뱀을 떠나게 해주소서!”

모세가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불뱀을 떠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 뱀을 쳐다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으로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습니다.
성경에는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뱀에게 물렸는데 놋뱀을 쳐다보면 어떻게 삽니까?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이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6)

성경에 등장하는 단어들에는 저마다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포도주는 기쁨을 나타냅니다.
기쁨이 있는 곳에는 포도주가 등장합니다.

기름은 성령을 나타냅니다.

금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은은 구속의 대가를 나타내며, 놋은 심판을 나타냅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심판받은 뱀’을 나타냅니다.
불뱀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고, 그 불뱀이 심판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고, 죄가 심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구원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과 그의 아들이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버지, 놋뱀을 쳐다보면 산대요. 놋뱀을 쳐다보세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몸에 독이 퍼져서 고통스러워 죽겠는데 놋뱀을 쳐다본다고 살 리 있냐?”

“아버지, 쳐다보세요.”

“글쎄, 헛소리하지 마라니까!”

“아버지, 그래도 한번 쳐다보세요.”

“그만하라잖아!”

“안 됩니다. 그러다가 아버지 죽습니다. 제가 강제로라도 아버지가 놋뱀을 보시게 하겠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놋뱀이 있는 곳까지 모시고 가서 얼굴을 들어 쳐다보게 했습니다.
그러자 몸 안에 있던 뱀의 독이 사라졌습니다.

“이거 진짜 신기하네! 놋뱀을 쳐다보니까 몸이 싹 나았다!”

구원은 아주 간단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해서 불뱀이 왔지.
죄로 인해 불뱀이 온 거야.
놋뱀은 그 뱀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니 우리 죄가 심판을 받았다는 의미구나. 그러면 죄가 끝났네!’
십자가는 단순히 기독교를 표시하기 위해, 혹은 보기 좋으라고 다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쳐다보십시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 죄가 심판받은 곳입니다. 죄가 끝나고, 저주가 끝나고, 심판이 끝나고, 고통이 끝난 곳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가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고통하다가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내 죄를 사하셨지!’


아리우스 가문의 반지

‘벤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등장인물인 벤허멧살라는 어릴 적에 친구였는데, 유대인인 벤허와 로마인인 멧살라는 자라면서 다른 이념을 가져 서로 원수가 됩니다.

멧살라는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호민관이 되어 유대로 돌아온 뒤 벤허를 로마군 함선에서 노를 젓는 노예로 만듭니다.
얼마 후, 로마의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 아리우스가 해적들을 소탕하려고 함대를 이끌고 바다로 나가면서 벤허가 노를 젓는 배에 탑니다.

곧 로마군과 해적들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싸움 중에 아리우스가 바다에 떨어집니다.
그 광경을 본 벤허가 바다로 뛰어들어 아리우스를 구해 부서진 배의 큰 나무판 위에 올려놓습니다.
아리우스가 정신을 차려 자신의 배가 불길에 휩싸인 것을 보고는 자결하려고 하는데, 벤허가 그의 팔을 잡아 칼을 빼앗습니다.
잠시 후 함선들이 몰려오고, 아리우스는 해적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배들이 가까이 와서 보니 로마군 함대였습니다.
아리우스가 배에 올라가자 한 장군이 ‘배 두 척만 잃고 해적들을 전멸시켰다’고 보고합니다.

로마로 돌아간 아리우스벤허를 양자로 삼고,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인장반지를 벤허의 손가락에 끼워 줍니다.
벤허는 어머니와 여동생 생각에 유대로 돌아가서 멧살라를 만나러 갑니다.
가기 전에 “아리우스의 아들로부터”라고 적은 선물을 멧살라에게 보냅니다.
멧살라가 선물을 보고 “집정관 아리우스에게 아들이 있었나?” 하자, 옆에 있던 장교가 최근에 양자로 삼은 아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때 벤허가 나타나 멧살라가 깜짝 놀랍니다.

“네가 무슨 요술로 아리우스의 아들이 되었지?”

“요술의 주인공은 바로 너다! 네가 나를 노예선으로 보내 내가 전쟁터에서 아리우스를 구했다.”

그러고는 “표식은 알겠지?” 하고 서판에 인장반지의 문양을 찍어 멧살라에게 보여 줍니다.
벤허가 이전의 벤허가 아닌 로마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집정관의 아들이기에 멧살라가 쩔쩔맵니다.
벤허가 말합니다.

“내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소식을 알려다오. 그러면 모든 걸 잊겠다.”

“그건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허가를 받아내!”

벤허가 아리우스의 아들이 되어 가문의 반지를 껴도 그 능력을 모르면 멧살라에게 여전히 수모를 당해야 했겠지만, 벤허는 ‘아리우스 가문의 인장반지’가 가진 힘을 알았습니다.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라

십자가에는 힘이 있습니다.
사탄이 자주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너, 거짓말했잖아! 너, 나쁜 짓 했잖아!”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로 우리를 슬퍼하고 괴로워하게 만듭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근심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쉬지 않고 우리를 정죄합니다.

“네가 죄를 지었으니까 하나님이 너를 미워하고 벌하고 버리실 거야!”

그때 우리가 놋뱀을, 십자가를 쳐다보는 것입니다.

‘사탄아, 맞아. 내가 죄를 지었어. 하지만 저 십자가 앞에서는 죄가 죄가 아니야. 저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가 사해졌어. 거기서 죄가 끝났어! 심판이 끝났어!’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 고통하다가 놋뱀을 쳐다보면 모두 나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이 죄로 인해 우리를 조소하고 괴롭힐 때 십자가를 바라보면 그 고통에서 해방됩니다.

“너, 거짓말했잖아!”라고 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어! 거기에서 내가 거짓말한 죄가 끝나고 모든 죄가 끝났어!’ 하면 됩니다.

성경은 확실히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가 지은 죄의 기록이 없습니다. 본래 가지고 있는 뜻을 정확히 부연 설명하거나 의미 전달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의 기호로 표현되어지는 것.

2. 기호(das Zeichen. sign)

상징을 주기 위한 하나의 신호적인 의미이므로 그 안에 아무런 의미나 뜻이 들어 있지 않다.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피로 모두 도말塗抹했습니다. 어디에도 우리를 정죄할 자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모든 죄를 눈처럼 희게 씻었습니다.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속죄함 받은 것 아니요
거룩한 하나님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이 찬송을 옛날에는 입으로 불렀지만 이제는 마음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우리의 선한 행위로도 아니고, 노력이나 수고로도 아니고,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우리 죄를 씻었는지 가르쳐 주시기 위해 성경 구석구석에 구원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아놓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해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다가 놋뱀을 쳐다보고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이 성경 이야기를 내용만 압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거기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됩니다. 놋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십자가에서 끝났습니다. 심판받을 죄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죄에서 해방되어 참된 자유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마음에서 저주가 끝나고 고통과 슬픔이 끝나 밝게 삽니다. 사탄에게 속아서 죄를 지었을 때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저기서 내 죄의 심판이 끝났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쁘고 즐거운 삶을 값 없이 은혜로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이 복음을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모세의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한다.


모세의 놋뱀(민 21:9)은 타우형(헬라어 T자) 십자가라고 한다.
이 십자가는 예로부터 모세가 광야에서 치켜들었던 십자가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모세의 놋뱀(민 21:9)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하기 때문에 이 십자가는 예언(의) 십자가라고도 불린다.
타우형 십자가는 축 늘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힘겨운 어깨를 상기시킨다.
가로막대와 교차하는 세로막대의 윗부분이 생략된 모습은 십자가의 고통을 한층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예수는 자기의 십자가 죽음을 예언하고, 영적 의의를 모세 때 있은 놋뱀 사건을 인용하여, 부활의 예수를 바라봄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하였다.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고 요한복음 3장 14~15절에 나타나 있다.

요르단에서 꼭 가봐야 할 역사적 기독교 유적가운데 하나는 해발 835m의 느보산이다.
눈치 챘겠지만 모세의 출애굽 여정 중 마지막 기착지이기 때문이다.
40년 광야생활을 청산한 모세는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가나안 땅을 조망하고 숨을 거둔다.(신 32:49)

모세기념교회 옆 전망대에 서면 멀리 사해와 예리코(여리고) 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으면 예루살렘의 올리브산(감람산)까지 보인다고 한다.
4세기 비잔틴제국 시대에 모세의 무덤위에 지었다고도 전해지는 모세기념교회는 지금도 그 교회 터가 남아 있다.
이 교회 정원에는 이탈리아 조각가 지오반니 판토니의 ''모세의 지팡이'' 작품이 세워져 있다.
놋뱀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복합시킨 작품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에게 불평하여 불뱀이 그들을 물었다.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을 낫게 하기 위해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로 놋뱀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을 장대에 매달고 그것을 보는 자는 살게 된다고 민수기 21장에 기록되어 있다.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본 자는 모두 치료됐다.
나중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우상으로 섬기게 됐는데, 히스기야는 이것을 부숴 버렸다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열왕기하 18:4)고 기록돼 있다.

모세는 40년간 광야를 헤매다 결국 가나안 땅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느보산에서 가나안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숨을 거뒀다.
느보산에 거대하게 세워진 모세의 지팡이 ''놋뱀''이 은혜를 잊고 하나님을 원망하다 불뱀에 물려죽은 이스라엘 백성의 ''어리석음''을 닮지 말라고 오늘도 경고하고 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 21:9)."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놋 뱀 사건을 예수께서 니고데모와 대화중에 자신에게 닥칠 사건과 비교하여 언급하신 내용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이 분분하기에 서로 비교하고 그 해답을 찾아보기로 하자.

다섯 부류의 주장이 있다.

1. 전통적 주장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놋 뱀을 달게 하여 이를 쳐다본즉 뱀에 물린 자가 살게 되었으므로 놋 뱀은 예수의 십자가를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놋 뱀을 예수라 할 수 없으니 여호와께서 은혜의 선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모순(矛盾) :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가 십자가를 쳐다봄으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으라(마 16:24) 하였으며 육체와 합하여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매달아야(갈 5:24)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뱀은 무엇인가?
뱀에 대한 해명이 뒤따라야지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은혜로 포장하고 있다.

2. 일부 주장 (1)

놋 뱀은 사탄이므로 사탄이 매달렸으니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내 자신 안에 있는 사탄의 속성을 독배로 마시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모순(矛盾) : 예수는 죽을 권세도 있고 살 권세도 있어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려고(롬 8:2, 갈 4:5) 바리새인들의 손을 빌어서 죽으신 것이지 사탄의 독배를 마신 것이 아니다.

3. 일부 주장 (2)

놋 뱀은 예수님이다.
놋 뱀 사건은 예수님 십자가 사건의 상징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놋 뱀에 대하여 무엇이라 분명하게 말하지 않으므로 '놋 뱀이 예수이다' 주장하는데 주장하는 이유로는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도 뱀같이 지혜롭게 하라 했으니 뱀을 예수라 주장한다.

모순(矛盾) : 뱀은 사탄이다.
뱀같이 지혜롭게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신중하라(프로니모스)고 하셨으니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뜻이지 뱀을 지혜롭다고 오역한 부분을 가지고 뱀과 예수를 동일시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신중하고 순수하라는 것은 방법이 선해야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는 당부이다.

4. 전통적인 주장 (2)

어떤 주장도 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입장으로 침묵하겠다는 부류가 있다.

모순(矛盾) : 해답을 내놓지 않고 있음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해석과 주장이 있어 오늘과 같은 혼란을 초래하였다.

5. 새로운 주장

놋 뱀사탄이지 예수님이 될 수 없다.
놋 뱀 사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가 아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의 상황이다.
그 해답은 요한복음 3장 14절에 있다(스타우로스 원어성경연구원).

요한복음 3장 14절 번역에 문제가 있어 다시 번역한다.

"그리고 모세가 광야 안에서 뱀을 높인 것같이 이같이 인자를 높이게 됨이 마땅하다(요 3:14)."

뱀을 들었다는 것은 매단 것으로 보았고 인자가 들려야 하는 것도 십자가 사건으로 보았기에 내용이 풀리지 않고 꼬이기 시작했던 것인데 든 것이 아니라 높인 것이다.

아래에서 동일한 단어가 사용된 예를 살펴보자.

높이다(5312, 휘프소오)에 대한 고찰

휘프소오(
hüpsŏō) ὑψόω
1. 높이 올리다.
2. 높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5312)(마 23:1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5312)(눅 1:52)."

"무리가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삶은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에 이르도록 머무신다고 들었는데도 당신은 어찌하여 인자를 높임을 받아야(5312) 한다고 말하느냐? 이 사람의 아들이 누구냐?(요 12:34)."

사도행전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혹시 내가 너희가 높임을 받게(5312) 하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내가 죄를 지었느냐?(고후 11:7)."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의 삶을 높이실 것이다(5312)(약 4:10)."

예수님을 높임 받게 한 사건은?

예수님이 높임을 받는 전제 조건은 낮아짐이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낮아졌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를 높이시는 부활과 승천의 영광을 주신 것이다.
우리에게도 주시는 동일한 은혜의 말씀은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의 삶을 높이실 것이다(5312)(약 4:10)."
십자가의 죽음까지 자신을 낮추면 주께서 높여 주신다는(5312)약속이다.

광야에서 뱀을 높였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고린도전서 10:7-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씩 죽었고 시험하다 뱀에게 멸망하였고 원망하다가 멸망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러다간 다 죽이게 생겼기에 뱀(사탄)을 깃대(닛시) 위에 높이고 이를 쳐다봄으로 살도록 하여서, 구세주 예수를 보내시기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서 종살이하게 두신 것이다.

이후 이스라엘은 뱀(사탄)을 높인 깃발을 들고 행진하기 시작하여 가나안에 들어갔고, 이후 히스기야 왕 이전까지 산당에서 분향하며 섬기고 있었으나, 여호와께서 놋 뱀을 파기하라 명한 적이 없었다는 점을 유념하여 볼 필요가 있다.

놋 깃대는 히스기야 왕에 의해 부서지게 된다(열왕기하 18:3~4)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 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왜 하나님께서는 뱀(사단)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맡기신 것인가?

포도원인 이스라엘을 맡겨 두심(사 5:7)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눅 20:9~15)."

유대인들 : 마귀 자식

"어찌하여 내 말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씀을 들을 수 없음이로다. 너의 삶은 마귀인 아비에게서 난 삶이니 너희 아비의 정욕을 너의 삶도 행하려 하는구다. 저는 시작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안에 없으므로 진리 안에 서지 못한 것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면 자기 삶에서 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의 아비가 거짓말쟁이더라(요 8:43~44)."

서기관 바리새인 : 후견인과 청지기

"내가 또 말하나니 상속자가 모든 삶의 주인이지만 미숙아로 있는 기한에는 아무도 종에서 옮겨 가지 못한다. 오히려 아버지의 작정함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도다. 이와 같이 우리도 미숙아로 있는 기한에 세상 초등 학문 아래서 종살이 당하고 있더니 기한의 충만이 이르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율법 아래 속하여 아내에게서 낳아 내어 보내셨으니 율법 아래 있는 삶을 속량하려 함이요, 나의 삶이 아들의 명분을 쟁취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에 이르고자 내어 보내사 아버지 아빠라 외치게 하셨느니라(갈 4:1~6)."

뱀이란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뱀은 창세기 3장 1절에서 처음 등장하며 창세기 3장 15절에서는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이며 뱀의 후손은 머리요, 여자의 후손은 발꿈치로서 서로 상하게 할 것이라 하였으며 마태복음 4장에서는 예수를 시험하는 자로 등장하며 요한계시록 20장 2절에서는 옛 뱀, 마귀, 사탄, 천하를 꾀는 자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어디 한군데도 뱀이 예수를 예표하는 성구는 없다.

은 히브리어로 '5175(스트롱번호) 나하쉬'라 하는데, 동사 '5172 나-하쉬 : 점치다'에서 유래한다.
동의어로는 '5173 나하쉬 : 점, 예지력'
'5174 네하쉬 : 놋쇠, 구리'
'5178 네호세트 : 청동, 놋쇠'

놋 뱀이란 뜻은 히브리어로 '네하쉬(뱀) 네호세트(놋) :
예지력 있는 점쟁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기어 다니는 뱀의 히브리어 이름은 '텓트'이지만 성경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나하쉬
(뱀)은 예지력을 가진 자, 점쟁이로 언급하고 있다는 데 주의해야 한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구원 계획을 미리 수립하시고 각 날에 해당하는 시나리오를 정하셔서 그 과정을 학습하고 통과하게끔 하시고 일정한 날에 메시아를 보내 주셔서, 죄와 사망의 법에 붙여서 종살이하면서 믿음으로 낮아지고 순종하는 자들을 해방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쟁취하고 하나님나라를 상속하는 데까지 높이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하시는 말씀이다.


느후스단 우상 (열왕기하 18:1~4)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경제 살리기에 나서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각 나라를 순방하며 국제 외교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상징적으로 농민들과 함께 모내기를 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행동은 “내가 앞으로 이 나라를 다스릴 때 이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만큼 한 나라의 통치자가 취임하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성군 중 하나라 일컫는 히스기야 임금은 아버지 아하스의 뒤를 이어 25세에 왕에 오르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우상 타파였습니다.

이것은 “내가 앞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길 일은 바로 우상을 타파하고 하나님만 섬기는 나라로 만드는 일이다!” 하고 선포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전국에 있는 산당(山堂)을 제거하고 각종 우상들을 깨뜨려 없애는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산당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 위에 우상을 섬기기 위해 세운 집들인데 이 산당이 이스라엘 전국에 산마다 널려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얼마나 우상 숭배가 만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신(男神)인 바알 신과 여신(女神)인 아세라를 비롯해 정말 수많은 종류의 우상을 섬겼는데 그 가운데 히스기야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당시 ‘느후스단’이라 불리던 특이한 우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모세가 만든 놋뱀입니다.

민수기 21장 4절부터 보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다가 길이 멀고 험하니까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어떤 원망을 했나 들어볼까요? 5절에 나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한 마디로 애굽에서 잘 살고 있는 우리를 왜 이런 황량한 광야로 끌고 나와서 죽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여기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다며 불평합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주셨지만 백성들은 만나를 보고 “이 하찮은 음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하찮은 음식 싫다는 것입니다.
애굽에 있을 때 살려달라고, 우리를 해방시켜 달라고 아우성치던 것은 또 언제고 이제 와서 “왜 애굽에서 잘 살고 있는 우리를 여기까지 끌어냈냐”고 불만입니다.

광야에서 처음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주실 때는 환호하고 감격하더니 이제 와서 “이따위 하찮은 음식”에 이제 질렸다고 투덜거립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신 것 다 잊어버리고 지금은 뭐가 없다, 뭐도 없다, 뭐가 불편하다며 원망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는 오늘 우리에게서도 종종 나타납니다.
과거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리는 영적 건망증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홍해를 갈라 건너게 하신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와서 부족한 것만 보이고 불편한 것만 보이니 원망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미 받은 놀라운 은혜는 다 잊어버리고 지금 없는 것, 부족한 것, 불편한 것만 보는 배은망덕한 죄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하고 찬송은 잘 부르는데 정작 지금까지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그 한량없는 은혜와 도우심은 다 잊어버리고 삽니다. 

이미 베풀어 주신 것에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지금 뭐가 부족하다고, 뭐가 불편하다고 투덜거리며 원망하기에 급급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영적 건망증에 걸린, 배은망덕한 사람들을 어떻게 하실까요?

그 벌은 불뱀들을 보내 백성들을 물게 한 것입니다.
불뱀은 한 번 물리면 몇 분 만에 즉사하는 맹독을 지닌 독사 종류입니다.
특히 사막에 사는 독사는 더 독합니다.
미국 사막지역에 사는 방울뱀은 물리면 수십 분 내에 즉사합니다.
하나님은 무서운 맹독을 지닌 불뱀을 보내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어 죽이게 한 것이지요.
이대로 간다면 모든 백성들이 다 뱀에 물려 죽게 생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잔인한 분이 아닙니다. 자비의 하나님이시지요. 그래서 백성들이 회개하자 모세에게 뱀에 물린 자가 살 방법을 일러 주십니다. 바로 놋으로 불뱀의 모양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매달게 하고 그 놋뱀을 보는 자는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때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고 살아난 사람들은 “이제 다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자” 하고 교훈을 얻게 끝냈어야 하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놋뱀을 소중하게 보관한 것입니다.

민수기에는 놋뱀을 보관했다는 말이 안 나오지만 이 놋뱀이 세월이 흘러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보관되었다는 것을 보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이 놋뱀을 보관했을까요?

놋으로 만들었으니 무게도 만만치 않을 텐데 그 힘든 광야생활에서도 이 놋뱀을 끝까지 보과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그 까닭을 충분히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신기했던 것입니다. 이 놋뱀 자체에 무슨 신비한 힘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 내가 불뱀에 물려 다 죽어갈 때 장대 위에 달린 이 놋뱀을 한 번 쳐다보기만 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해지더라구요.”

사람들은 너무나 신기해하면서 이 놀라운 힘을 지닌 놋뱀을 잘 보관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놋뱀을 아예 우상으로 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마 병이 들면 그 놋뱀 우상 앞에 가서 분향(향으로 제사 드림)하며 그 신기한 힘으로 고쳐달라고 빌었겠지요.

아무튼 히스기야 임금은 왕이 되자마다 이 놋뱀 우상을 부수어 버립니다.
다른 수많은 우상도 부수었는데 특히 이 놋뱀 우상을 부순 것을 본문이 기록한 데는 뭔가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상은 우상일 뿐

첫째로, 히스기야가 이 놋뱀 우상을 부순 후 그 이름을 ‘느후스단’이라고 부릅니다.

‘느후스단’은 히브리 말로 ‘놋조각’이라는 뜻입니다.
전에는 이 놋뱀 우상을 뭐라고 불렀는지 모릅니다.
아마 ‘전지전능하신 뱀님’ 이런 식으로 불렀겠지요.
하지만 이 놋뱀을 부숴버린 후 히스기야는 그 이름을 ‘느후스단’이라고 짓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존재하고 있을 때야 이름을 붙이는 것이 당연하지만 부수어 버린 후에 이름을 짓는 것은 이해가 안 갑니다.
마치 형산강 다리가 멀쩡하게 서있을 때는 이름도 안 붙이다가 다 철거해서 없어진 다음에야 이름을 ‘형산강 다리’ 하고 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여기에는 신실한 믿음을 가진 히스기야 임금의 깊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느후스단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교훈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느후스단’이란 ‘놋조각’이라는 뜻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이름은 이 놋뱀이 무슨 신비한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병을 고쳐주는 그런 능력을 가진 신이 아니라 그저 ‘놋조각’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상은 돌조각, 나무 조각, 쇳덩어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돌로, 나무로, 쇠로 만든 우상이 무슨 힘을 가지고 있거나 내 소원을 들어줄 리 만무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똑똑히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갓바위 부처 앞에서 기도하면 대학입학 시켜준다고 열심히 비는 사람들, 그것은 바위에 새겨놓은 돌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돌덩어리가 어떻게 내 소원을 들어주고 내 자녀를 대학에 들여보내 준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엎드려 절하는 대웅전의 부처상은 쇳덩어리에 불과하고, 우리가 지성을 드리는 영험한 바위와 영험한 나무는 바윗돌과 나뭇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에 붙이고 몸속에 지니고 다니는 부적은 붉은 글씨가 쓰인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무생물인 나뭇조각, 돌덩이, 쇳조각이 내 소원을 들어주고 종잇조각이 나를 지켜준다는 말입니까?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 한 분 만이 우리의 소망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응답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오. 우상은 돌덩이, 쇳조각, 나뭇조각에 불과합니다. 그 우상은 나를 고쳐줄 수도, 나를 지켜줄 수도, 내 소원을 들어줄 수도 없습니다.

교회 안의 우상

둘째로, 느후스단은 본디 장대 위에 단 놋뱀이었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보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바로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요한복음 3장 16절 정말 유명한 말씀 아닙니까? 그런데 그 바로 앞에 이 놋뱀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장대 위에 놋뱀을 달아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것처럼 인자(人子)이신 예수님도 들려야 할지니, 즉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죽어가는 사람들, 사망권세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살리신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외에는 그 무엇도 우리의 숭배나 섬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이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은 그 놋뱀이 사람들을 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놋뱀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대상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자신을 살리신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그 상징에 불과한 놋뱀을 숭배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느후스단 우상은 오늘날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숭배하는 우상을 뜻합니다. 특히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것인데 하나님 외에 그 상징을 숭배할 때 아주 위험한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심지어 십자가조차도 우리의 숭배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분들은 십자가를 보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잘못입니다. 눈으로는 십자가를 보더라도 우리는 십자가가 아닌 오직 거기 달리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십자가를 몸에 지니고 다니면 이 십자가가 나를 지켜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목걸이로 귀걸이로 십자가를 가지고 다닙니다. 마치 영화에 보면 흡혈귀 드라큘라가 덤벼들 때 십자가로 물리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보수적인 교단은 아예 예배당 안에 십자가를 달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십자가조차도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뿐만 아닙니다. 교회도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모임일 뿐 교회 자체가 결코 숭배 대상이 아닙니다. 자기 교회를 사랑하고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지만 이것이 너무 심한 나머지 교회 자체를 우상시하고 내 교회만 옳고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숭배 우상에 빠진 것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를 존중하고 사랑해 주시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목회자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선포하고 가르치는 대리인에 불과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주인이 심부름꾼을 보냈을 때 그 심부름꾼이 마치 자기가 주인인 양 착각하거나 아니면 주인이 받을 영광을 대신 받으면 안 되는 것처럼 목회자는 하나님 대신 영광을 받으면 안 됩니다. “저는 목사님 보고 교회 다닙니다.” 이런 말이 저 듣기에는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큰 함정입니다. 어느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큰 힘을 가진 목회자들이 이런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정리해 볼까요? 느후스단이 자신이 아니라 그 느후스단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살린 것처럼,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하고 하나님 받으실 경배를 대신 받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또 우리 신앙에 대단히 중요한 존재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느후스단을 “교회 안의 우상”이라고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신앙 안에 있지만 하나님을 대신한 우상이 되기 쉬운 것은 목회자나 어떤 사람(person), 재정이나 전통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조심해야 합니다.

표적의 우상

셋째로, 느후스단은 진정한 기적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너무도 기적을 바라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마가복음 8장 11절부터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비난하며 이렇게 시험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봐라. 그러면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어주마.” 그러자 예수님은 깊이 탄식하시면서 “내가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하고 말씀하시곤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떠나가십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바리새인들이 구한 ‘표적’을 구합니다. 표적이란 영어로는 사인(sign)입니다. 어떤 특별한 사인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이적, 기적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표적’(sign)을 구하고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처럼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사인이 있어야 예수 믿겠다는 것입니다. 지루한(?) 일상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특별한 체험이나 사인을 받아야 예수 잘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간증집회에 나와 간증하는 사람들처럼 죽을병이 고침 받거나 망해가는 사업이 다시 일어나거나 하는 이적이나 기적도 체험하면 금상첨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날마다 ‘특별한 은혜’를 구합니다. ‘특별한 체험’을 구합니다. 기적을 구하며 삽니다. 이것을 ‘표적(sign)의 우상’이라고 불러봅시다.

물론 이런 태도가 다 잘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체험이나 사인은 지치거나 낙심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줍니다.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에 젖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어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끔 사람들에게 특별한 체험이나 이적을 베푸십니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체험이나 은혜만 사모한 나머지 일상적인 신앙생활은 지루하고 능력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특별한 표적이나 이적이 반드시 일상적인 신앙생활보다 우월하다고 믿고 나는 이런 특별 은혜 받았다, 나는 이런 특별한 체험했다고 자랑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목회를 하면서 가장 안타까울 때가 이때입니다. 

누구누구가 어떤 분에게 기도 받으러 다닌답니다. 어디 가면 신령한 분이 있답니다. 기도 받으러 가고 신령한 것 찾아가는 것이 뭐가 문제겠습니까? 저도 신령한 체험을 많이 한 사람이고 또 기도 받으면서 힘을 많이 얻은 사람이라 이런 일에 전혀 거부감이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입니다. 신령한 것, 특별한 것 좋아하다가 기도해준다는 그 사람이, 그 장소가 과연 건전한지 아닌지도 생각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찾아다니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디 기도 받으러 갈 때나 기도원이나 집회 갈 때 꼭 저에게 먼저 의논하라는 것이 이것 때문입니다. 제가 감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도와주려는 거예요. 과연 그 곳이, 그 사람이 건전한 신앙을 가진 사람인지 아니면 아주 위험한지 미리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또 그런 곳에 가서 무슨 특별한 체험하고 은혜 받았다며 멀쩡하게 교회 잘 다니고 일상적인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 그런 식으로 예수 믿으면 안 돼. 그게 뭐야? 시시하잖아? 나처럼 특별한 은혜 체험해야지” 하고 깔보듯이 이야기한다면 그 분은 이미 교만의 우상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특별한 은혜나 체험도 좋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정말 우리가 꼭 필요할 때 특별히 허락하는 별식(別式)과도 같은 것입니다.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먹고 어쩌다 한 번 별식으로 메추라기 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매일 먹고 사는 것은 이 만나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면서 매일 별식으로 메추라기 달라고 조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매일 만나 먹으면서 하나님 잘 섬기는 사람들 보고 “너희는 어떻게 매일 그 지겨운 만나만 먹고 사냐?”고 깔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모든 신자들에게 내 교회와 내 지도자, 내 목회자를 허락하신 까닭은 다른 무엇보다 내 교회를, 또 내 지도자와 내 목회자를 우선 중심으로 신앙생활 하도록 하신 것인데 별미만 좋아하며 거기에 우선권을 두고 쫓아다닌다면 어떻게 신앙이 건강하게 자라겠습니까?

나아가 기적이나 특별한 이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적이나 기적을 하나님이 주실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특별한 경우입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를 인정하려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기적”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구한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할 만한 사인이었습니다. 주님은 깊이 탄식하며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표적이나 이적 자체가 나쁘지는 않지만 잘못된 의도로 구하는 것은 단호하게 거부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전제로 표적이나 기적을 구하는 태도, 이런 것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신앙을 경고하신 것이지요.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일어난 가장 놀라운 기적은 다름 아닌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 자체가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기적인 것입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우리가 이 기적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작은 기적이나 이적에 매여 살며 그것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느후스단 우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 설교 중에 나온 용어가 몇 가지 있지요. ‘영적 건망증’이나 ‘배은망덕의 죄’, 또한 우상은 쇳조각, 돌덩이에 불과하지 결코 우리를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 ‘교회 안의 우상’ 그리고 ‘표적의 우상, 기적의 우상’ 등 꽤 많습니다. 이것을 다 기억하지 못해도 좋습니다. 한 가지만 분명히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의 은혜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놋뱀이 느후스단 우상이 되어버린 것처럼 교회 안에도 우상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우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우상은 마치 열심 있는 신앙, 뜨거운 신앙처럼 위장하고 우리의 건강한 신앙을 위협합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이 우상임을 깨닫고 하루빨리 버리고 건강한 신앙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하나님 잘 믿는 줄 알고, 나는 아주 특별하게 잘 믿는 줄 착각하고 살다가 마지막 주님 앞에 섰을 때 그만 주님이 “나는 너를 모른다” 하시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을 가장한 우상의 무서운 점입니다. 따라서 열심히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르게 믿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열심 있는 것도 좋고 뜨거운 것도 좋지만 바르게 믿지 않으면 오히려 훨씬 위험합니다. 올바른 신앙관 위에 건전하게 바르게 믿어야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따라 하세요. “바르게 믿자!” 아무쪼록 오늘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만 바라보며 건강하고 건전한 신앙관 위에 바로 서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만을 바라보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기독교의 상징들

 

기독교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우선 십자가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보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적십자나 병원이 떠오르는 분도 계시겠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십자가는 고대 근동의 앗수르, 이집트, 페르시아 그리고 로마에서 죄수를 처형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형틀입니다. 십자가 형벌은 죄수의 양팔을 사람의 키보다 약간 큰나무에 못박아 고정 시켜 매달려 있게 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피가 몸의 밑으로 몰리게 되고 혈액 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아 호흡이 빨라지며 심한 고통을 격게 됩니다. 십자가 형벌은 사람을 한번에 죽이는 것이 아니고 3-5일간을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이는 매우 가혹하고 치욕적인 형벌로써 로마시대에는 정치범이나 반역자들에게만 적용했던 사형법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던 강도들은 단순한 좀도둑들이 아니라 정치범이거나 반정부세력의 테러리스트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죄와 형벌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잔인하고, 끔직한 십자가를 교회의 상징으로 여기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씀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요? 차라리 사도바울처럼 참수를 당하시거나, 사도 도마처럼 창에 찔려 죽으시면 간단할 텐데 왜 하필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을까요?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3)그러나 너희는 그 주검을 나무에 매달아 둔 채로 밤을 지내지 말고, 그 날로 묻어라. 나무에 달린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유산으로 준 땅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를 포함해서 나무에 매달려 죽는 것은 매우 치욕스럽고 ‘하나님게 저주를 받았다’는 상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대신 짊어지신 우리의 죄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으셔야 했을 만큼’ 크고 심각한 죄였습니다.

 

그러기에 이 은혜를 경험한 우리들은 십자가에서 형벌과 저주를 보기 전에, 우리가 받아야할 형벌과 저주를 대신 짊머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보면서 눈물 흘리는 이유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주님이 죽으시고, 대신 내가 살게 된 은혜의 상징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오랜 역사와 전통에는 Icon (아이콘) 또는 Symble (심볼) 로 불리는 여러가지 신앙적 상징들이 있습니다.

 

 

1. 익투스 (ἰχθύς)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익투스 (고대 그리스어 :  ἰχθύς 이크투스, 대문자 표기로 ΙΧΘΥΣ)

 

Ιησους (예수) 

Χριστος (그리스도 - 크리스토스) 

θεου (데우) 하나님의  

Υιος(휘오스)  아들 

Σωτηρ (소테르) 구원자

 

'익투스'라는 단어는 '물고기'라는 뜻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 물고기라는 단어를 상징적으로 생각했으며 위 단어의 첫 글자를 따서 익트스가 되었다는 학설이 유력합니다.

박해를 받았던 초대 기독교인들은 피아식별의 방법으로 물고기 그림을 암호처럼 그려서 활용했고, 물고기를 그린 사람의 뒤를 따라가면 기독교인들의 은신처 '카타콤'에 찾아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익투스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또는 '주는 나의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라는 뜻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2. 키로(XP) 십자가

 

그리스도(Χριστοσ) 라는 헬라어의 단어 첫번째와 두번째 알파벳

 

 

 

영어 스펠링 PX 를 겹합한 것 처럼 보이는 이 아이코은 그리스도 Χριστοσ (크리스토스) 라는 헬라어의 첫번째와 두번째의 알파벳을 결합시켜 놓은 것 입니다.

X 를 헬라어로 [ㅎ키], P 를 [로ㅎ-] 로 부르기 때문에 키로 십자가 입니다.

 

이 아이콘은 기독교를 로마의 공인 국교로 삼은 '콘스탄틴 황제'가 꿈에서 본 것을 깃발로 삼아 전쟁터에 나갔다고 해서 널리 알려진 문장입니다.

 

키노문자는 가톨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표식인데 '그리스도'의 헬라어 표기 'Χριστοs'의 첫째자와 둘째자를 겹친 것입니다. 이 글자는 헬라어이므로 '키로'(Chi Ro)로 읽어야지 '엑스 피'가 아닙니다. 이 표식의 유래는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대제에서 시작이 됩니다. 콘스탄틴은 312년 로마의 티버강 너머 밀비안 다리에서 막센티우스와 격전을 벌이기 전날 밤 하늘에 십자가가 보였는데 십자가에는 “이 부호를 가지고 정복하라 In this sign, conquer”고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부호가 바로 키로문자였습니다. 그래서 콘스탄틴은 자신의 헬멧과 군기에 이 키로문자로 장식을 했고, 실제로 전투에서 정말로 승리해서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로 군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313년 그 유명한 밀라노 칙령을 내려 로마에서 기독교의 박해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그러기에 키로문자는 이제 로마가 기독교 제국으로 바뀌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똑같은 기독교의 상징이지만 물고기와 키로문자는 서로 완전히 상반된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전자는 숨어있는 기독교를, 후자는 제국을 점령한 기독교입니다.

 3. INRI

 

(라틴어 :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 예수님의 십자가 명패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I.N.R.I.) 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요한복음 19:19~19:22]  

 

라틴어 성경 요한복음 Evangelium Secundum Ioannem 19:19~19:22

scripsit autem et titulum Pilatus et posuit super crucem erat autem scriptum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hunc ergo titulum multi legerunt Iudaeorum quia prope

civitatem erat locus ubi crucifixus est Iesus et erat scriptum hebraice graece et latine dicebant

ergo Pilato pontifices Iudaeorum noli scribere rex Iudaeorum sed quia ipse dixit rex sum

Iudaeorum respondit Pilatus quod scripsi scripsi

 

 

위 라틴어 성경에 나타난 바와 같이 INRI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붙인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의 라틴어(로마어) 첫글자만을 딴 것입니다.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 영어 / Jesus of Nazareth, King of the Jews)

 

  

 

 

 

 

 

    

4. IHS

 

고대 그리스어로 예수 'Ιησους' 의 첫번째, 두번째, 마지막 스펠링의 약자    

또는 라틴어라 'Iesus Hominum Salvator'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HIS 는 예수(Jesus) 를 뜻하는 약어 입니다. 

희랍어는 'Ιησους'라고 표기하며 ...η (에타)는 라틴어로 표기할 때  대문자로 'H' , σ(시그마) 는 대문자 'S' 가 되며, 양피지로 필사하던 시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단어들을 약자로 기록하던 시절의 유래입니다. 

그후, 라틴어로 새로운 의미가 부가되었는데 옮겨쓰는 과장에서 새로운 의미를 더했다고도 추정되며 뜻에 비중을 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Iesus

    Hominum

    Salvator'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라틴어에서 I J는 종종 구별되지 않고 혼용됩니다.

    예수Iesus 를 지저스Jesus라고 부르게 되는 과정이 이 I와 J가 구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IHS라는 글은 JHS로 표기되기도 했습니다.

 


 

 

 

 

 

 

 5. 알파와 오메가

 

 

[계 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계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의 처음과 마지막 입니다.

세계와 인류의 처음이시고 마지막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표기]

 

그리스어 알파벳 기호 θ (세-타) theta; 를 하나님으로 표기합니다.

이는 헬라어 '테오스' (하나님 θεοs =Θεου) 의 머릿 글자와도 같으며 세계 각국의 표기는 아래와 같습니다. 

 

한   국 : 하나님

일   본 :    神

중   국 : 上   帝

미   국 : God

독   일 : Gott

터   키 : Tanrı

프랑스 : Dieu

그리스 : θεός

러시아 : бог

이태리 : Dio

스페인 : Dios

폴란드 : Bóg

아랍어 : الله

페르시아 : خداوند

포르투갈 : deus

우크라이나 : Бог

인도네시아 : Tuhan

 

6. 닭

 

 

마지막으로 소개할 기독교의 상징물은 ‘닭’입니다. 상징에는 긍정적인 기억을 위한 상징물도 있지만 부정적이고, 부끄러운 의미를 가진 상징물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닭’이라고 생각됩니다. 닭은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사도 베드로와 관련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밤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 상징 용어 설명

  • by 메리 페어차일드

그리스도인의 상징에 대한 예시 여행

의심의 여지없이, 라틴 십자가 - 소문자, t 자 모양의 십자가는 오늘날 기독교에서 가장 인정받는 상징입니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많은 다른 표식, 식별자, 구별되는 표식들이 기독교 신앙을 대표합니다. 이 기독교 상징의 수집은 가장 쉽게 확인 된 기독교 상징의 그림과 묘사를 포함합니다.

크리스티앙 크로스

 셔터 잭 / 게티 이미지

라틴 십자가는 오늘날 기독교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널리 인정 받고있는 상징입니다.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십자가에 못 박힌 구조의 형태 였을 것입니다.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가 있었지만 라틴 십자가는 두 개의 나무 조각으로 이루어져 네 개의 직각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십자가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희생함으로써 죄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냅니다.

십자가의 로마 가톨릭 묘사는 십자가에 아직도 그리스도의 몸을 계시합니다. 이 형태는 십자가로 알려져 있으며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통에 중점을 둔다. 개신교 회는 부활 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강조하면서 빈 십자가를 묘사하는 경향이있다. 그리스도를 믿는자는 예수의이 말씀을 통해 십자가를 식별합니다 (마태 복음 10 장 38 절, 마가 복음 8 장 34 절, 누가 복음 9 장 23 절).

예수 께서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다. "너는 내 추종자가되기를 원한다면, 네가 이기적 인 길에서 돌아 서서 네 십자가를지고 나를 따라야한다." (마태 16:24, NIV )

기독교 물고기 또는 Ichthys

   Ichthys 기독교 기호는 용어 설명 기독교 물고기 또는 Ichthys. 이미지 © 수에 Chastain

예수 물고기 (Jesus Fish) 또는 이시스 (Ichthys)라고도 불리는 기독교 물고기는 초기 기독교에 대한 비밀의 상징이었습니다.

Ichthys 또는 물고기 상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로 확인하고 기독교에 그들의 친화력을 나타내는 초기 기독교인에 의해 사용되었습니다. 이시스 (Ichthys)는 그리스어로 "물고기"라는 단어입니다. "기독교 물고기"또는 "예수 물고기"기호는 물고기의 윤곽을 따라가는 두 개의 교차 호로 구성됩니다 (가장 일반적으로 물고기는 왼쪽으로 "수영"합니다). 그것은 신원을 밝히는 비밀의 상징으로 초기 핍박받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사용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어로 물고기 (Ichthus)라는 단어는 "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의 아들, 구주"라는 약어를 형성합니다.

기독교의 추종자들은 흔히 물고기가 그리스도의 사역에 나타 났으므로 물고기를 상징으로 식별합니다. 그들은 성경 시대의 필수품이었고 물고기는 종종 복음서에 언급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께서는 마태 복음 14 장 17 절에 있는 두 개의 물고기와 다섯 개의 빵 덩어리를 곱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가 복음 1:17 절에 "와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되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NIV)

기독교 비둘기

기독교 기호 용어 해설을 설명합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비둘기는 기독교에서 성령 또는 성령을 나타냅니다. 성령 은 요르단 강에서 침례받을 때 비둘기처럼 예수님 께 내려 왔습니다.

... 그리고 성령은 비둘기 같이 육체적 인 형태로 그에게 내려 왔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났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이요, 너와 함께하면 나는 기쁘다." (눅 3:22)

비둘기도 평화의 상징입니다. 창세기 8 장 홍수 후에 비둘기가 그 부리에 올리브 가지를 가진 노아 에게로 돌아와 하나님의 심판의 종말과 인간과의 새로운 언약의 시작을 나타 냈습니다.

가시 왕관

 Dorling Kindersley / 게티 이미지

기독교의 가장 생생한 상징 중 하나는 예수님십자가에 못 박으시기 전에 입었던 가시관의 면류관입니다.

... 그리고 나서 가시관을 뒤틀어 머리에 씌워 라. 그들은 오른손에 스탭을 배치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조롱했습니다. "우박, 유대인의 왕!" 그들은 말했다. (마태 복음 27:29)

성서에서 가시는 종종 죄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가시 면류관은 적합합니다 - 예수 께서 세상의 죄를 담당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왕관은 기독교의 고난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 왕의 왕, 그리고 주님의 군주를 상징하기 때문에 왕관도 적합합니다.

트리니티 (Borromean Rings)

 Borromean Rings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 삼위 일체 (Borromean Rings)를 나타냅니다.

기독교에는 삼위 일체의 상징이 많이 있습니다. Borromean Rings은 신성한 삼위 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연동 서클입니다.

" 삼위 일체 "라는 단어는 라틴어 명사 "trinitas"에서 유래했습니다. "trinitas"는 "three is one"을 의미합니다. 삼위 일체는 하나님이 하나라는 믿음을 나타냅니다.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 님 과 동등하고, 영원한 교제 속에 존재하는 세 분명한 인격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음 구절은 삼위 일체 개념을 표현합니다 : 마태 복음 3 : 16-17; 마태 복음 28:19; 요한 복음 14 : 16-17; 고후 13:14; 행 2 : 32-33; 요한 복음 10:30; 요한 17 : 11 & 21.

트리니티 (트리 케라)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 트리니티 (Triquetra)를 묘사했습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Triquetra는 그리스도교의 삼위 일체를 상징하는 3 부분으로 구성된 연상 기호입니다.

세계의 빛

 기독교 기호는 세계의 빛을 용어로 설명했습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성경에서 하나님이 "빛"이신 것에 대한 언급이 너무 많으므로 양초, 불, 램프와 같은 빛의 표현은 기독교의 공통된 상징이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에게서들은 메시지이며, 여러분에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가볍습니다. 그에게는 전혀 어둠이 없다. (요일 1 : 5, NIV)

예수 께서 백성들에게 다시 말씀하실 때, "나는 세상의 빛이며, 나를 따라 오는자는 결코 어두움에 다니지 않을 것이나,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요한 복음 8:12)

여호와는 나의 빛 이요 나의 구원 이시라.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할까? (시편 27 : 1)

빛은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불타는 덤불모세 에게 불꽃의 기둥으로 나타나 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원한 불꽃은 예루살렘에있는 성전에서 항상 켜져 있어야했습니다. 사실 유대인 의 헌신 축제 또는 "빛의 축제"에서 우리는 마카비의 승리와 그레코 - 시리아의 포로 생활 속에서 신성 모독을당한 이후의 성전 재 헌법을 기억합니다. 비록 그들은 단지 하루 동안 충분한 성스러운 기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더 많은 정화 된 기름이 처리 될 수있을 때까지 8 일 동안 그의 존재의 영원한 불꽃을 기적적으로 일으켰습니다.

빛은 또한 하나님의 지시와 인도를 나타냅니다. 시편 119 편 105 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발에 등불이고 우리의 길에 비춰 진다고 말합니다. 사무엘 하 22 장은 주님은 등불 이시며 어둠을 빛으로 변하게하십니다.

크리스티앙 스타

기독교 기호 용어 설명 스타. 이미지 © 수에 Chastain

데이비드 스타는 두 개의 연동하는 삼각형에 의해 형성된 여섯 개의 별 모양의 별입니다. 하나는 위로 향하고 하나는 아래로 향하게됩니다. 그것은 다윗 왕의 이름을 딴 것으로 이스라엘의 국기에 나타납니다. 유대교와 이스라엘의 상징으로 널리 인식되고있는 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데이비드 스타와도 동일시합니다.

다섯개의 별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탄생 과 관련된 기독교의 상징이기도합니다. 마태 복음 2 장에서 동방 박사 (또는 현자)는 신생아 왕을 찾아 예루살렘을 향한 별을 따라 갔다. 거기에서 그 별은 베들레헴 으로 예수님이 태어난 바로 그 위치로 인도했습니다 . 그 아이가 어머니와 함께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절하고 경배하며 선물로 선물했습니다.

계시록 에서 예수님은 아침 별 (계 2:28, 요한 계시록 22:16)이라고 불립니다.

빵과 와인

 기독교 기호는 빵 & 와인 용어를 보여줍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빵과 포도주 (또는 포도)는주의 만찬이나 성만찬을 상징합니다.

빵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영양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날마다 마나를 저장 하시거나 "하늘에서 나는 빵"을 주셨습니다 . 예수님은 요한 복음 6 장 35 절에서 "나는 생명의 떡 이니 나에게 오는자는 결코 주 리지 아니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NIV)

빵은 또한 그리스도의 육신을 나타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께서는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 하셨다. "이것은 내 몸이 너에게 주어 졌음 이니라."(눅 22:19).

포도주는 인류의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 쏟아 부은 피의 하나님 언약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누가 복음 22 장 20 절에서 "이 잔은 내 피의 새 언약 이니 너희를 위하여 부어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NIV)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그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에서 우리를 위해했던 모든 것을 기억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성찬을 취합니다.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자기 점검과 참여의 시간입니다.

무지개

 쥬타 쿠스 / 게티 이미지

그리스도교의 무지개는 하나님의 신실 하심에 대한 상징이며 다시는 홍수로 지구를 파괴하지 않겠다는 그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노아와 홍수에 관한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홍수가 있은 후,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무지개를 놓아 노아 와 언약을 맺으셔서 땅과 모든 피조물을 홍수로 다시는 결코 멸망시키지 않으 셨습니다.

지평선 위로 높이 솟아 오르기 때문에, 무지개는 은혜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충실 함을 완전히 포용하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 를 믿는 신앙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는 일부 소수 영혼들만을위한 것이 아닙니다. 무지개처럼 구원복음 은 모든 것을 포괄하며 모든 사람은 그것을 보도록 권유받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 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임 이니라. 하나님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세상을 정죄하지 않으시 고 세상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요한 복음 3 : 16-17, NIV)

성경의 저자들은 무지개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묘사했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 구름 속에있는 활 모양처럼, 모든 주위에 밝기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한 것은 주님의 영광을 닮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보았을 때, 나는 내 얼굴에 떨어졌고, 나는 말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에스겔 1 장 28 절, ESV)

계시록 에서 사도 요한하늘계신 하나님 보좌 주위에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즉시 나는 성령 안에 계셨고, 나 앞에 하늘에 앉은 누군가가 앉아있는 보좌가있었습니다. 그곳에 앉은 사람은 재스퍼와 카네 리안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에메랄드를 닮은 무지개가 왕좌를 둘러 쌌다. (계시 4 : 2-3, NIV)

신자들이 무지개를 볼 때, 그들은 신의 충실 함,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은총, 그의 영광스러운 아름다움, 그리고 우리의 삶의 보좌에 거룩하고 영원한 존재가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크리스천 서클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을 묘사했습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끝이없는 원이나 결혼 반지는 영원의 상징입니다. 기독교인 부부 의 경우, 결혼 반지 교환은 내재적 인 유대의 외적 표현입니다. 두 개의 마음이 하나로 결합되고 서로를 영원히 충실히 지키겠다고 약속합니다.

마찬가지로 결혼 계약과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 인 교회 사이의 관계를 묘사 한 것입니다. 남편은 희생적인 사랑과 보호를받으며 목숨을 바칠 것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의 안전하고 소중한 포옹에서 아내는 자연스럽게 제출과 존중으로 응답합니다. 끝이없는 순환계에서 상징되는 결혼 관계 가 영원히 지속되도록 설계된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모든 영원을 위해 견디게됩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Agnus Dei)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이미지 © 수에 Chastain

하나님의 어린 양은 사람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하나님 께서 주신 완전하고 죄가없는 희생 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합니다.

그는 압제 받고 괴롭힘을 당했지만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살장에 어린 양 같이 인도되었다. (사 53 : 7)

그 다음날 요한은 예수님 께서 자기에게 다가와서 "보라, 세상 죄를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로구나!"하고 외쳤다. (요한 1시 29 분, NIV)

그리고 그들은 큰 소리로 외쳤다. "구원은 보좌에 앉으 신 우리 하나님, 어린 양에게 달려있다." (계시 7:10, NIV)

성경

기독교 기호 용어 설명 성경입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성경 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생활 수첩입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 - 그의 연애 편지 -는 성경의 페이지에 들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을받은 것이며의를 가르치고, 책망하고, 교정하고, 훈련하는 데 유용합니다 ... ( 디모데 둘째 3:16)

나는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사라질 때까지, 하나님의 율법의 가장 작은 부분조차 그 목적이 성취 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태 복음 5:18, NLT )

십계명

기독교 기호는 10 가지 계명을 보여줍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십계명 또는 율법은 이집트에서 그들을 이끌어 낸 모세 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입니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구약의 법에서 발견 된 수백 가지 법칙을 요약 한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 및 도덕적 생활을위한 행동의 기본 규칙을 제공합니다. 십계명이야기는 출 20 : 1-17과 신명기 5 : 6-2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와 크라운

  기독교 상징 십자가 및 왕관 용어 설명. 이미지 © 수에 Chastain

십자가와 왕관은 기독교 교회에서 친숙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믿는 자들이 지상에서의 삶의 고통과 시련 (십자가) 후에 받게 될 하늘 (크라운)에서 기다리고있는 보상을 나타냅니다.

시련을 견디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시험을 치른 후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삶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서 1:12)

알파 그리고 오메가

 기독교 상징은 알파 & 오메가를 보여줍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알파는 그리스 알파벳의 첫 글자이고 오메가가 마지막 글자입니다. 이 두 문자는 함께 예수 그리스도 의 이름 중 하나 인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모노그램 또는 상징을 이룹니다. 요한 계시록 1 장 8 절에 나오는 용어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 다"라고 주 하느님이 말합니다, "전능하신 분이 누구 시며 누구이며 앞으로 올 것인가?" 요한 계시록 에서 예수님에 대한이 이름이 두 번 더 나옵니다 .

"나는 끝났어.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이야. 목이 말린 사람에게는 생명수 샘물을 마시지 않고 마실 것이다."(계 21 : 6 , NIV)

"나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끝이다." (요한 계시록 22:13)

예수님에 의한이 진술은 그리스도교에있어 결정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 께서 창조 전에 존재 하셨고 모든 영원 토록 존재할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것도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창조에 참여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처럼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원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상징 인 알파와 오메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을 상징합니다.

Chi-Rho (그리스도의 모노그램)

Chi Rho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 Chi-Rho (그리스도의 모노그램)를 보여줍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치로 (Chi-Rho)는 그리스도를위한 가장 오래된 알려진 모노그램 (또는 문자 기호)입니다. 어떤 이들은이 상징을 "크리스 그램 (Christogram)"이라고 부르며 로마 황제 콘스탄틴 (Constantine) (AD 306-337)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이야기의 진실은 의심 스럽지만, 콘스탄티누스는 결정적인 전투가 있기 전에 하늘에서이 상징을 보았고, 그는 "이 표식으로 정복하십시오."라는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의 군대에 상징을 채택했다. Chi (x = ch)와 Rho (p = r)는 그리스어로 "Christ"또는 "Christos"의 처음 세 글자입니다. Chi-Rho에는 여러 변형이 있지만 가장 일반적으로 두 글자의 겹침으로 구성되며 종종 원으로 둘러 쌉니다.

예수님의 모노그램 (Ihs)

Ihs  기독교 기호는 Ihs (예수의 모노그램)를 설명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Ihs는 1 세기로 거슬러 올라간 고대 모노그램 (또는 문자 기호)입니다. 그리스어 "Jesus"의 처음 세 글자 (iota = i + eta = h + sigma = s)에서 유래 된 약어입니다. 서기관은 문자 위에 줄을 쓰거나 줄을 써 약어를 나타냅니다.


예배와 상징

 

가. 상징으로 가득 찬 예배 :

우리가 예배드리는 자리에는 각 종 상징물들이 놓여져 있다. 십자가, 설교대, 성찬상, 세례대, 촛대와 헬라어 알파와 오메가(Α Ω) 혹은 키로(☧) 등이 그것들이다. 예배 봉사자들은 회중과는 다른 복장(vestment)을 하고 있으며, 설교자는 설교대에 올라선다. 그러면 회중들은 선포될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며 조용히 앉아서 귀를 기울인다. 함 께 신앙을 고백하고 주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찬송을 부를 때면 회중은 일어선다. 또 한 기도 인도자가 기도를 드릴 때면 마지막에 반드시 “아멘!”이라는 화답을 하기도 한다. 이런 모든 예배의 내용과 행위들이 사실은 상징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상징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 하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종교적인 내 용과 행위들은 상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상징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상징은 우리 예배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 런데 불행스럽게도 이런 상징이 갖는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예배나 신앙생활에서 상징자체를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그 리고는 상징이 우상처럼 될까 염려가 된다는 엉뚱한 해석을 한다. 상징과 우상을 구 별하지 못한다면, 거기엔 더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바로 교육이 부재하다는 현 실이다. 잘못 이해하고 잘못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상징 이외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해서 눈을 딱 감고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상징의 의미를 제대로 배우는 일 밖에 없다고 하겠다.

나. 예수님과 성경 그리고 역사는 상징을 창조해 나갔다

예수님은 상징적인 용어들을 많이 창조하셨다.

가령 자신을 <선한 목자>(요 10:11),  <양의 문>(요 10:7), <세상의 빛>(요 8:12)과 <포도나무>(요 15:1-5)로 말씀하셨다.
제자들에게 대부분 비유로 가르치셨음을 알 수 있다(막 4:34).
이런 비유들은 대체로 상징들로 가득 찬 내용들이었다. 천국에 관한 비유들은 상징어들이다. <밭에 숨겨진 보화>(마13:44)나 <진주 장사꾼>(마14:45-46), <씨 뿌리는 농부>(마13:2-8), 그리고 <가만히 자라는 씨>(막4:26-29)와 같은 이야기들이다. 천국을 일상의 말로 소개하거 나 설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들이 땅에서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다른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득불 땅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말씀하 셨던 것이다.

역시 성경 안에는 상징 언어가 풍부하다. 역사의 여명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 들의 신앙을 상징을 창조해서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는 아직 성전도 없었 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없었다. 오직 그들은 상징 언어를 만들어 하나님을 만났 고 관계를 맺었다. 가령,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후 거기에 돌단을 쌓았다. 그리고 거 기에 “하나님의 집” 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창28:10-19). 가령 보통 일반인과 구별 되는 하나님의 사람을 일컫는 <나실인>이라는 사람을 세웠는데, 그들은 머리털을 깎 지않고, 독주를 마시지 않으며, 사체에 손을 대지 않음으로 <나실인>의 지위를 유지 하였다(민6:1-21). 그렇게 함으로 누구든지 그를 보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두 려워하였다. 또한 예배를 섬기는 제사장들에게는 특별한 예복(에봇)을 입도록 규정하 였다(출28:1-4).

이런 상징의 발전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풍부하게 이루어졌다. 가장 오래된 예전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 교회의 성직 서품의식도 7세기 후반기에서야 나타나는데, 거기에 보면 특별한 예복(vestments)이나 목사의 목에 두르는 영대(stole) 같은 것이 없었다.

이렇듯 상징은 우리로 영적인 것들에게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데 크게 도움을 준다. 뿐만 아니라, 상징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이고,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들 의 관심사, 그리고 중요한 기독교의 가르침들을 기억나게 해 준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상징들은 예배드릴 마음을 갖도록 도와준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상징들은 예배 자들의 순례생활에 있어서 필수인 이정표와 같은 구실을 한다고 하겠다.

다. 상징에 대한 일반적인 의미 :

일반적으로 상징이란 의사표현의 한 도구로,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하거나 나타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그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전달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제한적이다. 이렇듯 언어는 무엇인가를 말하지만, 상징은 그것을 나타내 보여준다. 언어가 한계에 부딪히게 될 때, 상징은 말하기 시작한다. 상징이 말하기 시작하면 언어는 침묵을 지킬 수 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을 흔들거나, 반갑게 누군가를 포옹할 수 있다. 물론 이런 행동을 대신해서 언어로 전달한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우리의 삶에서 많은 아름다움이나 색채를 잃게 될 것이다. 말보다는 이상과 같은 상징적인 행동들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존경’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 하고 있는지를 생각할 때, 왠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느낄때가 있다. 그러나 만일 존경의 표시로 <큰 절>을 올려드릴 수 있다. 그 때 언어가 주는 의미보다 훨씬 더 분명하고 깊은 감동을 전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상징들이 신앙생활에 사용 될 때, 얼마나 풍부하고 심오한 신앙으로 이끄는 도구가 되는지 모른다.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이란 무한하고 영원하신 절대자와의 관계맺기 이기 때문에 상징은 가 장 적절한 대화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신앙적인 표현 가운데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 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며, 이런 경우에 상징보다도 더 적합한 도구가 없다고 하겠다.

   어느 예배당 제단 뒤 벽면에는 알파와 오메가란 희랍어 글자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만일 그 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교인이라고 한다면, 예배당에 들어섰을 때, 그는 처음이 되실 뿐 아니라, 끝이 되시는 하나님이 여전히 자 신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생각에(계1:8), 그가 조금전까지 자신을 사로잡고 있었던 온 갖 근심과 걱정들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라. 예배와 관계된 상징의 종류들 : 상징에는 다양한 종류들이 있다.

첫째, 시간의 상징

생활의 리듬을 암시해 주는 한 주간(레 23:3),

언제나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계1:10),

작은 창조로써 아침(창1:1-31),

활동과 구별되는 시간인 저녁(창1:1-31),

수면과 침묵 그리고 죽음으로써 밤(요9:4)이 그런 것들이다.

둘째,  장소의 상징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행2:46-47),

세상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나그네의 집(시119:54, 고후5:1-3, 벧전2:11),

주님의 살고 피를 겸격으로 나누는 제단(마26:26-28),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단,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자리 찬양대석, 등이 그런 것들이다.

셋째, 상징적인 사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성도(고전1:2-3),

하나님의 사자(使者)인 목사(딛1:7-9),

천국 음악으로 섬기는 찬양대원(대하29:25-28),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서 직분자들(고전4:1-2),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돌보는 관리인(대상9:17-27), 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넷째, 거룩한 용어

하나님과 대화인 기도(마6:5-15),

마음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막8:29),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는 찬송(시95:1-2),

말없는 기도인 묵상(시19:14, 119:97),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잠30:5-6, 롬3:2, 벧전4:11),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봉헌(시96:8),

하나님의 은총을 비는 인사(삿6:12, 눅1:28) 등이다.

 

다섯째, 거룩한 행동

세례를 기억하는 십자성호,

화해와 용서로써 악수와 포옹(벧전5:14),

천국으로 향하는 순례로써 행진(시95:2),

권위와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로서 안수(막10:16),

하나님의 은총을 선포하는 강복의 손(민6:22-26) 등이다.

 

여섯째, 예배를 돕기 위해 준비된 상징

두 개의 촛대와 촛불은 주님의 두 성품인 신성과 인성(마16:16, 요1:1-14),

촛불은 세상을 밝히는 빛이신 주님의 임재(시27:1, 요1:4-5),

생명의 근원인 세례대의 물(요한7:37, 행8:38),

승리를 말하는 깃발(렘50:2),

예배를 섬기기 위해서 입는 예복(출28:2-43, 삼상2:18),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돕는 오르간-악기(대하29:25-28),

주님의 사랑의 결정체인 십자가(고전1:18-24) 등이다.

 

일곱째, 경건한 자세들의 상징

하나님을 높여 드리기 위한 일어 섬(수7:10, 삼상9:26, 사60:1),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위한 앉음(대상17:16-27, 막3:34-35),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무릎꿇음(시95:6, 엡3:15),

목적지를 향한 걸음(사40:31, 행3:6),

사람 사이의 교량으로서 인사(눅1:28) 등이다.

 

여덟째, 거룩한 의미를 전하는 글자의 상징

신앙고백을 요약한 물고기란 글자(Ιχθυς는 물고기라는 희랍어인데, ‘예수 그리스도 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란 신앙고백의 첫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과 나중 되시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Α Ω(알파와 오메가)
우리의 구주가 되신 주님을 의미하는 ☧(희랍어 크리스토스의 처음 두 글자)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ΙΗΣ(희랍어 예수의 줄임말) 등이다.

상징의 특징

모든 상징은 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관계하는 매체요, 그것이 바라보는 주체를 섬기는 매체이다. 그런데 이런 상징들은 외적이고 내 적인, 그리고 영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상징의 외적 특징이라함은, 십자가나 어떤 의식을 집례하면서 행동하는 동작과 같은 유형적인 실재를 말하며, 내적인 특징은 한 집단이 그 상징에 부여하는 해석을 말하며, 영적인 특징이란 개인이나 집단이 외적인 상징과 내적인 의미와의 관련 속에서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말한다. 가령, 십자가는 고 난과 죽음을 외적으로 암시하는 외적 상징과,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해석하는 내적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로써 십자가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주는 영적 에너지를 발산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상징은 이런 특징 외에도, 역설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상징은 어떤 사람들 에게는 의미를 분명히 드러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깊은 의미가 감추어진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의 비유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진 의미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런 상징들에 대한 교육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상징은 의미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징들 속에서 살고 있는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의 실제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상징은 폭 넓게 사용되고 있다. 이런저런 상징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고, 우리의 신앙이 자라날 수 있다. 어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영적 의미를 전달해 주는 상징이라는 점에서 더욱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상징은 이렇듯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의미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수단이 아닐 수 없다(마13:13-43).

    그런데 문제가 있다.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상징들 중에는 잘 알려지고 이해 되는 것들이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상징들이 많이 있다는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상징이 갖는 본래적인 의미를 알지 못할 때 심각한 괴리 현상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상징은 공감대가 형성된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 처음 상징의 의미를 바르고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할 때, 자칫 우상을 섬긴다는 오해를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징에 대한 교육이 절실하 다. 그리고 그 상징들을 신앙과 삶에서 나눌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 신앙의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을 여행할때, 대부분의 교회당 지 붕에 큰 장닭 한 마리가 앉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옆에 앉은 아이가 물을 수 있다. “엄마, 저게 뭐야?” 그 때 “저건 말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 했거든(마26:69-75).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장닭이 세 번 울었지. 엄마는 저 장 닭을 볼때마다, 나는 지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자신을 돌아본단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면, 그 아이는 그 장닭을 예사롭게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예배에서 말과 상징의 균형과 전망 :

예배에서 말과 상징 사이에 균형이 깨지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예배에서 필요이상으로 말을 많이 하려고 하지만, 실제로 전달되는 의미는 그리 많지 못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모국어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에 상징이 서 있을 자리를 잃은 것이다.
그리스도인도 아니요, 종교인도 아닌 에리히 프롬은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상징적 언어를 우리 각자가 배워야 할 외국어라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배우면, 지혜의 의미심장한 출처 가운데 하나인 신화와의 관계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그것은 내용과 형식에서 전인류에게 공통적이기 때문에 특히 인간적이라고 하는 체험분야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악수와 인사말이 서로 상충되지 않으면서, 서로의 따스함과 의미를 강화시켜 주듯, 언어와 상징행위는 서로를 보완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현대 기독자들이 말의 홍수속에서 살지만 실제로 그들의 마음에 오랫토록 남아있는 말이란 과연 얼마나 될 까?
오히려 이와같은 우리의 빈약한 언어를 보완해 주기 위해서 상징언어를 사용한다고 하면서 함께 공유하고 익히도록 할 때, 지금보다 훨씬 더 풍성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상징의 의미는 마음속에서 잘 보존될 뿐 아니라, 말보다는 훨씬 더 용이하게 기억되는 장점도 있기 때문이다.

예배에서 말과 상징이 균형을 이루므로 더욱 풍성한 신앙의 의미를 살려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오늘 교회 지도자들에게 달린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 자료출처 : https://lutherfriend.tistory.com/6246 [lutherfriend.tistory.com]



믿는 자에게 따를 표적(마가복음 16:17-18)


성경은 믿는 자에게 따를 표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은사자에게 따를 표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6:15-20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믿는 자에게 따를 표적

믿는 자에게 따를 표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은사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정말 예수님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새 방언을 말할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뱀을 집을 수 있습니다.
뱀은 동물에 속한 뱀이 아니라 사탄을 잡을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습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을 빋는다면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즉시 나음을 얻습니다.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 마가복음에서 증언하신 그 말씀을 직접 증거하며 보여주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째, 귀신을 쫓아내며
둘째, 새 방언을 말하며
셋째, 뱀을 집으며
넷째,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다섯째,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귀신(鬼神)을 쫓아내며

민간신앙은 귀신이란 죽은 조상의 혼(넋)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자기 수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혼이 귀신이 되어 자기 수명만큼 활동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은 조상의 혼이 아니라 사탄의 수하에서 활동하는 보이지 않는 악마와 같은 존재를 말합니다.

귀신은 거짓된 말씀을 들고 등장합니다.
진리가 들어오면 거짓된 말씀은 내 안에서 사라집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다른 어떤 이름이 아니라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귀신(φάντασμα) :

예수 : 죄에서 구원할 이름
이름 : 오노마(όνομα)

- 말씀

이름 = 말씀 = 오노마 4번
귀신 = 비진리의 영(다이모니온) 5번

새 방언을 말하며
   
거짓 방언(비진리)은 내 입에서 나오지 않고 오직 그 새 방언(진리)만 내 입에서 흘러 나옵니다.
새 방언(새로운 소리 = 진리) 7번 카이노스 글롯사
 
뱀을 집으며 

예수를 장대에 높이 올려 죽이고 진짜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진리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율법으로 오신 예수 상징 = 뱀(오피스는 옵타노마이에서 유래) : 표피적을 보는 것
- 뱀을 집다에서 집다는 들어올리다의 아이로라는 단어를 씀.
-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자기부인으로 산자가 되면...

무슨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음

-> 이제 사망이나 적신이나 곤고나 그 어떤 것도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게 되며
- 독은 율법으로 죽고 진리로 사는 거듭남을 말함. 다나시모스
- 다나시모스는 다나토스에서 유래

;진리로 보고 듣고 말하게 되면 피조세계의 모든 것을 통해 그 율법적 행위는 결국 사랑으로 완성되기
때문에 진리를 가진 자에게 무엇이 그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다.
 
병든자에게 손을 얻으면 나음

나를 통해 그 진리가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면 눈먼자 , 앉은뱅이, 귀머거리였던 그 이웃들까지도 회복의 은혜를 누릴 것이다.

첫째는 나자신과 그 생수에 강이 내 배에서 흘러 넘침으로 비진리속에서 허우적되던 영적으로 병든 자들이 낫게되는 기적이 내 주변에서 일어납니다.
 
- 병든자 : 론뉘미(4517)는 강하게 하다,강하다

신약성경 행 15:29에 한 번 나오는데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브니엘 사전 참조)


진리안에서 안녕과 평안을 가지지 못한자.

- 손 : 케이르로 능력, 진리, 군대,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행위 등
- 얻으면 : 위에 것으로 덧입다. 에피티데미.
- 나으리라 : 칼로스 에코. 참선으로 마음에 간직하게 되다.




마가복음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NASB.
"These signs will accompany those who have believed: in My name they will cast out demons, they will speak with new tongues;
they will pick up serpents, and if they drink any deadly poison, it will not hurt them; they will lay hands on the sick, and they will recover."

NIV.
And these signs will accompany those who believe: In my name they will drive out demons; they will speak in new tongues;
they will pick up snakes with their hands; and when they drink deadly poison, it will not hurt them at all; they will place their hands on sick people, and they will get well."

KJV.
And these signs shall follow them that believe; In my name shall they cast out devils; they shall speak with new tongues;
They shall take up serpents; and if they drink any deadly thing, it shall not hurt them; they shall lay hands on the sick, and they shall recover.


이 구절은 믿는 자에게 따르는 다섯 가지 표적을 말하고 있다.
“표적”이란 사도들의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입증하는 초자연적 사건들이다.
표적들은 초대 교인들이 선포한 그 신앙의 확실성을 보증해 주는 것이지 그들 중의 누가 임의로 행사할 수 있는 개인적 능력이 아니었다. 사명을 완성하는 데 있어서 신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할 능력을 받을 것이다.

1.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2. 새 방언을 말하며
3. 뱀을 집으며
4.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5.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이대환박사의 성경적 치유론에서 발췌함

   제 3장 C 항목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이곳에 올립니다.

치유론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막16장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야합니다. 개혁주의는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1.1.1. 마가 16:17의 진정성

사도들은 복음을 온 세계로 효과적으로 전파했다. 그런데 예수님의 2년 반 동안의 단독사역에서 보여 주었던 치유사역이 12명의 제자들과 그들의 제자 등이 AD 30-90년까지의 약60년 동안의 효과적 사역에서 치료의 사건은 4.5%에 그친다는 것은 중요한 시사점을 보여준다. 이들의 사역의 핵심이 부여받은 권세와 능력을 따라 복음전파에 집중되었으며 치유사역에 매달리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대 사명선언에서도 (마28:18-20, 막16:15-6, 눅24:45-49, 행1:8, 요20:21-23) 강조점은 회개, 죄 사함을 위해 권능 또는 능력이 사용될 것을 말한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일부 사본에서는 종결부에 17-20 믿은 자들에게 표적이 나타날 것을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이 왜 다른 성경에서는 없는지, 또한 마가복음의 일부번역에서는 없는지, 아니면 일부 사본에서는 추가로 채택되었는지를 밝혀야 한다.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J. E. Ladd 는 마가복음의 결말이 서로 다른 다섯 가지의 사본이 있다고 했다. 그는 비평학적 관점에서 대부분의 사본이 16:8절로 마가복음이 끝이 난다고 했다. 9-20은 그 후 추가된 본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많은 증거를 제시하여 최초의 원본은 8절로 종결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원본에서는 분명히 더 분명한 결론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그 원본의 끝 부분이 망실되어 8절까지 밖에 남지 않았고 그 이유로 다른 사본들이 8절에서 끝날 수밖에 없었고 사본을 기록하던 사람들에 의해 미려한 결론을 위해 조금씩 추가되는 과정에서 삽입된 것으로 본다. 이 특징은 이 추가된 9-20절이 대부분 소문자로 작게 기록되었음을 지적했다. 초대교회의 Jerome은 ‘그리스 사본은 거의 모두 이 결말 부분을 갖고 있지 않다'(Ladd 1987, 83) 고 한다. 이 추가부분은 원본 비평의 뒷받침이 너무 약하여 진짜라고 여겨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 문체와 단어의 사용에서도 앞의 것과 너무 상이하다.

그러나 이 본문이 개역성경에 [괄호] 안에 넣어 각주 형태로 추가한 것은 혹시 적은 확률이지만 원본에 있는 것 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안전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추가되었다.(84)

그런데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했다’는 말이 원래 있었지만 다른 복음서는 기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원래 없던 것을 마가복음에 추가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본문이 추가된 것이 아니라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 은사가 계속 재현될 수 있다는 증거로 삼기는 불가능하다. B. Warfield 는 ‘이런 은사는 교회를 설립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권위 있는 대리인으로서 사도들에게 주는 일종의 신임장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 은사들은 사도시대와 함께 필연적으로 지나갔다’ 이 은사의 목적은 세상 속에 교회를 설립하고 굳게 하는데 있다. 이제는 정경이 마무리 되고 교회가 완전하게 설립되어 굳게 되었으므로 이 은사가 끝났다. (Chrysostom, Augustinus, Jonathan Edwards, Mattew Henry, G. Whitefield, C. H. Spurgeon, Abraham Kuyper 등이 이 견해에 따른다)

B. B. Warfield는 ‘이런 항목들은 묵시 문학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그 본문이 정경과 무관하며 영감받지 않은 것이라는 충분한 외적 증거에 상응하는 내적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1991, 282)

위 구절의 진정성을 제공한다고 은사주의자들이 제시하는 행28:3절은 그들의근거가 될 수없다. 우연히 독사에게 물린 바울은 전혀 해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의도적으로 독사로 시험을 한 것이 아니다. 진정성을 확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독을 마시고도 살았다는 기록은 성경과 역사에 전혀 없다. 이 구절은 독으로부터 성도가 자유로움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광신자들이 이 말씀을 시험하다가 죽은 자가 많다.

1.1.2. 막16:17 잘못된 적용

필자는 이 은사가 계속 되는가? 중지되었는가? 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다. 이 능력이 중단되지 않았고 지금도 믿음을 갖고 기도하면 된다는 일반론을 경계하는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은 이런 능력이 계속되며 지금도 ‘성령을 제한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이같은 은사를 사모하라고 한다. 성령께서 인간의 제한에 제한 당하신다면 그분이 참으로 성령인지 의심받아야 한다. 실상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성령을 빙자한 몇 사람의 스스로의 열정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능력은 자신에게도 일어나지 않는다. Web surfing을 통해 search 한 결과 한국 교회의 대표할 만한 어떤 목사는 아래의 칼럼을 썼다.

아래는 네이버에서 인용한 하OO목사의 08년 신년칼럼이다.

성령이 임하면 표적이 따릅니다

   현재 당신 안에는 어떤 성령의 능력이 따르고 있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어떤 기적이나 능력도 행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옆에 계시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언제부터 기적과 능력을 행할 수 있었을까요?

   성령이 그들에게 들어갔을 때부터 입니다.

   마가복음 16장에 놀라운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 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잡으며 무슨 독을 마 

    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이런 일을 누가 합니까? /당신이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성령이 임하면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기를 갈망하십시요. (하 # #)목사

    http://kr.blog.yahoo.com/hosook_kim/1387557 2008,1,28일 naver

위의 칼럼은 성령이 임하시면 표적이 따른다고 마가복음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확신에 찬 필체로 성령을 갈망하라고 전한다. 필자는 이 글이 실린 곳에 꼬릿말Replies을 달았다.

성령의 임재를 갈망하라고 하는 그의 교회는 매년 성령컨퍼런스를 개최하고 성령의 임재훈련, 예언, 방언 등의 세미나를 쉼 없이 행한다. 그런데 OOO목사는 유감스럽게도 암으로 수차례 수술을 하고 있다. 한 때 성령의 대단한 능력을 받은 예언자를 미국에서 초청하여 세미나를 했는데 그는 ‘성령이 말씀하셨습니다. OOO목사님의 암은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라고 선언하였고 하나님이 치료하셨다고 전국 네트워크를 통해 홍보까지 했다. 필자는 그것이 참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그 후 들린 소문에 의하면 그 후에도 계속 재발하여 암 수술을 받고 있다. 필자가 확인 한 최근의 소식은 ‘생명에 대하여 더 이상 기대와 소원이 없다. 이제는 하나님께 온전히 맡겼다. 언제든지 오라고 하면 하나님께로 간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야 제대로 되어간다고 믿고 안도하던 차에 2008년 신년 메시지는 여전히 같은 말씀을 계속하고 있어서 필자의 실망은 적지 않다.

위의 글대로라면 그는 아직도 성령을 받지 않았거나, 그의 주변에서 성령임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아직도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이 된다. 남들보고 성령임재를 갈망하라고 하면서 정작 본인은 아직도 임재하지 않았다. 아니면 아직 한 번도 손을 얹지 않았거나..., 성령임재를 본인부터 받고, 그리고 그 교회가 운영하는 TV와 위성방송망에 생방송으로 손을 얹어 기도하고, 독을 마시고 코브라에게 물려보고 예수 믿으면, 또는 성령 받으면 이와 같이 죽지 않습니다. 라고 방송한다면 누가 믿음을 거절하겠으면 누가 기독교를 욕할 수 있겠는가? 본인도 하지 않는, 하지 못하는 일을 남에게 하라고 요구하니 세상 사람들이 비난하는 근거로 삼게 되는 것이다.

1.1.3. 마가16:18절의 긍정적 해석 ‘케칼-하토브 해석법’

필자는 이 본문이 이것을 열망하던 분파에 의해 추가된 것으로 믿는다. 이것이 또한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이 본문을 긍정적으로 전제하고 해석을 해도 케칼하토브의 방법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단 은사주의자들의 열망처럼 이것을 공식화, 상시화하려는 것은 심각한 오류에 빠져드는 것임을 명백히 한다.

케칼하토브의 원리를 통해 이 본문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1.1.3.1.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표적을 주신다. 믿고 순종하는 백성은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 사역의 보증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사역자에게 함께 하시는 증거는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것이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증거를 남겼다. 이것에 관하여 필자의 ‘능력신학을 재고하라’에서 ‘가시적 현현의 비 비상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가시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또 그것은 비상한 은혜가 아니라 당연한 은혜이다.(1997,159) David Powlison은 ‘성령님과 그 말씀의 능력이 수많은 방법으로 어둠에 빛을, 멍에에 자유를 혼동이 있는 곳에 건전함을 부여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성경이 실천 신학의 능력을 갖고 있으며 실천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 산 증인’ (1996, 18)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사역의 지원으로서 하나님은 당신의 선한 뜻과 인간의 머리로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능력으로 기이한 일을 행하신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지원을 경험한다.

1.1.3.2. 내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본인의 사역의 경험으로도 속칭 귀신들린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랑, 죄에 대한 인식, 예수님의 용서 등을 전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였을 때 즉시 온전하여 지고 회복된 것을 경험하였다. 필자는 은사주의자들이나 귀신론자들이 하는 축사행위 즉, 귀신의 이름을 묻고,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등의 방법을 거부한다. 예수의 이름이나 성경 등이 마술적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름은 예수님과 의 인격적 관계를 전제하는 말이다. 예수님의 통치가 온전히 구현되는 것은 귀신과의 대화나, 명령으로가 아니다. 비록 귀신들린 사람일 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그에게 복음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현재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처럼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오류이다. 그렇다면 여러 번의 축사, 금식, 안찰 등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즉시 온전케 하셨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즉시 치료되지 않고 다시 재발하며 거듭 반복해야 한다.

귀신과의 대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환자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환자의 인격이 사탄에게 지배당했다고 전제해도 참된 복음이신 예수님이 오셨다면 그 귀신은 환자에게 무력할 수밖에 없다. 은사주의의 귀신론은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복음이 바르면 귀신으로부터 해방은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한다.

기존의 정통주의 신학이 능력이 사도시대에 끝났다고 함으로서 마치 하나님의 치료하는 은사가 지금은 더 이상 없다는 말로 들려졌다. 그러나 복음은 여전히 초대교회 시절이나 현대에도 동일하게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준다. 표적은 끝이 났지만 은사는 여전히 행하여진다. 은사주의자들은 표적을 상시화(常時化) 하려고 하기 때문에 오류에 빠진 것이다.

특히 귀신으로부터의 해방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은 귀신론을 오해하여 귀신과 대화, 이름 밝히기 등의 오류를 범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범신론과 다원주의적 신관을 퍼트리고 있다.

1.1.3.3. 귀신과의 대화는 정당한가?

막 5:7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8)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귀신과 대화를 시도한 것처럼 보이는 구절로 귀신론자들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이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 많은 거짓이 나타난다.

첫째. 귀신의 말을 믿지 말라. 예수님이 귀신의 이름을 물을 때 단수로 호칭한다. 그런데 귀신은 자신을 ‘군대’라고 하면서 ‘우리가 많다’라고 하여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고 했다. 그러면 누구의 말이 옳은가? 예수님이 단수로 알았는데 귀신의 말을 듣고 여럿 인줄 알았단 말인가? 예수님은 ‘너희들의 이름이 무엇이냐?’ 라고 한 것이 아니다. 귀신의 말을 정말로 믿으면 안된다.

둘째, 귀신과 타협하지말라. 예수님은 해안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이 거라사에 가신 행위 자체가 이미 귀신에게는 나가라는 명령인 셈이다. 귀신은 더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예수님 앞에 끌려나와 서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곳에 가신 것이 곧 귀신에 대한 추방명령이다. 전도자를 하나님이 보냈다면 이미 귀신은 추방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과 타협, 거래 할 필요가 없다.

셋째, 귀신과 대화하지 말라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란 말은 귀신과의 대화가 아니다. 오히려 제자들과 청중에게 그가 귀신들린 것임을 확인시킨 것으로 예수님이 귀신까지도 제어하시는 분임으로 알리신 사건이다. 이 사건의 앞 문맥은 병자의 병을 통해 인간을, 바람과 바다의 순종을 통해 자연계를 복종케 하신 예수님이 이 사건으로 영계까지 굴복시키는 왕 되심을 보여준 사건이다.

넷째, 귀신은 거짓의 아비이다. 귀신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군대’는 이름이 아니다. 귀신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자신들의 상태를 말한 것이다. 귀신이 하는 말을 믿으면 안 된다. 귀신의 말을 믿으면 거짓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귀신의 거짓말에 대해 책망하지 않았고 옳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거짓말쟁이의 거짓말로 무시하셨다. 진정한 대화라면 그 말의 거짓임을 책망하고 진짜 이름을 말하라고 명령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와 대화하시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또 귀신의 요청을 따라 돼지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하신 것도 아니다. 귀신과 거래를 하거나 협상을 한 것이 아니라 귀신의 요청을 이용하여 돼지의 주인들을 나오게 한 것이다. 돼지의 주인들은 단순히 미친사람이 나았다는 말만 듣고 자신의 일을 접어두고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재산을 잃자 확인차 나왔고 예수님 앞에 서게 되었다. 그 후 온전해진 사람을 통해 전도를 받고 믿게 된다. 이 성경이 귀신과의 대화를 인정하는 구절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귀신과의 대화는 당연히 거부되어야 하고 성도는 하나님과 대화해야 한다. 귀신과는 대화하도록 말한 적이 없다. 바울의 빌립보 사역에서도 귀신의 계속된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귀신을 축출되었다. 귀신에게는 ‘나가라’는 명령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이 명령은 믿음으로 ‘예수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하는 예수 이름의 능력을 믿고 명령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귀신들린 여인이 여러 날 따라다니면서 소리 질렀지만 바로 귀신을 좇아내려 하지 않았다. 바울은 ‘심히 괴로웠다.’ 그러다가 이 귀신이 따라다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는 줄 알았고 귀신을 좇아내었다. 이 사건으로 바울은 감옥에 가고 거기서 간수를 만나며 교회가 시작된다. 이 귀신이 따라다니게 하신 사건은 하나님이 기획하신 사건이다. 바울은 ‘심히 괴로워’ 한 것을 보면 처음부터 안 것 같지는 않다.

행 16:17)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1.1.3.4. 새 방언을 말하며

방언문제는 상당히 어렵다. 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은 표적으로서의 방언이고, 로마서와 고린도서에는 은사로서 방언이 나온다. 표적은 상징적의미를 갖고 은사는 기능적 의미를 갖는다. 표적으로서의 방언은 일반적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특수한 상황 즉, 초대교회와 같이 처음 예수님을 듣고 있거나, 하나님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우상숭배지역의 선교지 등의 특수 상황은 개연성이 있다. 또 은사로서의 방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기도하는 은사로서 다른 사람이 들으면 곤란한 것을 위해 기도할 때 사용되는 비밀 기도의 방편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매우 조심성을 가지고 사용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방언의 은사는 계속된다.

1.1.3.4.1.1.1. 표적으로서의 방언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개인이나 종족이 표적을 스스로 경험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경우로서 불신자의 극적개종의 경험으로서, 미전도 지역의 초기 복음전파에서와 같이 특수한 상황에서 개연성이 보고된다.

성경에서는 오순절날의 예루살렘, 사마리아, 고넬료의 사건에서 나타난 것이 표적으로서의 방언이다. 그 후에는 사도행전에 더 이상 이런 표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에도 믿음이 없던 사람이 사모하지도 않았는데 방언을 경험한 예가 더러 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1.3.4.1.1.2. 고린도의 방언은 표적이 아니라 은사로서 방언이다.

고린도의 방언은 은사로서의 방언이다. 은사는 표적과 구분되어야 한다. 오순절의 방언은 사용되고 있는 타언어였고, 고린도의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비언어였다. 은사로서의 방언은 한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각각의 은사를 주시기 때문에 은사는 서로 다른 것을 주신다. 그러나 한국교회에는 방언 은사를 받은 사람이 너무 많다. 보편적으로 방언은사는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은사의 기본에 어긋난다. 마치 다 은사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문제을 일으킨 고린도 교회와 같다. 은사가 치우친 것이 아니라 방언을 강조한 나머지 모방방언, 학습방언, 사단의 거짓 방언이 많다.

1.1.3.4.1.1.3. 방언의 표적을 요청하거나 간구하는 것은 잘못이고 되지도 않는다.

바울은 예언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은사를 더욱 좋은 은사라고 했다. 그런데 방언은 많이 하려고 하는데 말씀 전하는 것은 ‘나는 몰라요, 못해요’ 라고 한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은사가 잘못되었음을 증명한다. 알아듣지 못하는 일만 마디 방언보다 알아듣는 한 마디 말씀이 더욱 값진 것이다.

1.1.3.4.1.1.4. 은사를 만들어 주려는 시도를 버려야한다.

교회는 방언 은사를 받게 하려고 애를 쓴다. 이런 시도가 거짓된 은사에로 나아가도록 길을 열어준다. 은사는 다양하게 발굴되고 훈련되어야 한다.

1.1.3.5.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으며

뱀을 잡고 독을 마시는 일을 믿음의 증거로 주신 것이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제자가 어쩔 수 없이 고난을 받는 중에 뱀을 잡거나 독을 마시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때 하나님은 그 전도자를 구원하시고 대적자를 굴복시키는 방법으로 해를 받지 않도록 도우시는 경우가 있다.

이런 보고는 열악한 선교지에서 선교사가 죽음의 위협을 받을 때 일어난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필자의 케칼하토브 해석으로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열악한 사역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전파하는 전도자가 현지인들을 대신하여 뱀에게 물리거나 독을 대신 마셔줌으로서 죽음을 당한 후에 이것이 계기가 되어 복음을 영접하게 되는 경우도 선교 역사에 자주 있는 일이다.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으로 하나님은 어떤 독도 이길 수 있도록 표적을 주시기도 하며, 반대로 피할 수 있지만 선교지의 영혼을 위해 죽음을 자처하는 그래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복을 받고 죽은 전도자도 많다. 이 전도자는 해를 받지 않고 오히려 복을 누린 사역자이다. 이것이 필자가 주장하는 Kecal-hatob 원리이다.

이 원리에서는 결과를 정형화 하지 않는다. 결과는 오직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인간 사역자는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오직 순종할 뿐이다. 그 결과 하나님이 하시는 행위는 무조건 선하고 옳으시다. 하나님의 결과가 항상 인간 편에서 좋은 것 즉 ‘반드시 치료해 준다.’ ‘반드시 살려준다.’ 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은사주의자들은 항상 ‘반드시...’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도 몰래 약을 먹고, 의사를 만난다. 그들의 집이나 사무실의 서랍에는 여러 약이 있을 것이다. 남에게는 ‘기도하면 다 된다’, ‘하나님만 믿고 기도하라’고 하면서 말이다.

1.1.3.6. 병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손을 얹는 것은 그들과 관계를 맺음을 말한다. 손을 얹으라는 말을 안수 기도하라는 것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안수기도는 사도적 표시였다. 사도는 손을 얹을 때 나았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바울은 제자 디모데의 위염을 위해 안수 받으러 오라거나 내가 가서 안수하려 하지 않고 포도주를 조금 마시라고 권했다. 안수가 치료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안수는 환자와 인격적 관계를 가지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회개하게 하고 잘못된 삶이 무엇인지 종합적인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한다. 현대인들은 의학적 치료를 의사에게 의탁하지만 P. Tournier가 말한 대로 장로라고 일컫는 영적 지도자로부터 영적 도움을 받아야 한다. 병이 오직 의학적 원인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영적, 사회적, 등 수많은 요소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에 전인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기도하며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게 된다.

또한 필자의 원리를 따르면 병이 치료되지 않더라도 병을 통해 영적 회복과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에 질병의 치료보다 더욱 본질적인 영적치료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몸은 병으로 죽어도 영적 구원을 얻는 복을 누리게 된다. 질병의 치료에 매달리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 하나님께 맡기고 선한 삶을 사는 것이 의학적으로도 더 유익한 치료의 수단이 된다. 이것은 현대 심리학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류에 빠진 사람들은 육체의 질병 치료자체에 목적을 둔다.

1.1.4. 가시적 현현의 비 비상성(非 非常性)

이 개념은 필자의 ‘능력신학을 재고하라’(1997)에서 주장한 개념이다. John Wimber, Peter Wagner로 대표되는 능력과 표적에 열광하는 선교신학파의 능력치유 능력전도 등의 능력신학의 허구를 밝혔던 책이다. 필자의 주장을 아래에 싣는다.

1.1.4.1. 특수한 지역이나 상황에 대하여.

특수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비상한 일을 행하신다. 즉, 첫째 비복음화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 둘째 사역자가 긴급한 위기를 당할 때 그를 보호하기 위해, 셋째 기타 특수한 조건에서 하나님은 행하시기도 한다.

가시적 현현이 주로 비복음화 지역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을 모르는 지역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방법이다. 구약에서 행하시던 형태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러나 비 복음화 지역에서도 지속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초기에 잠시 자신을 계시하고 이어서는 성경과 사역자를 통해 인격적 방법으로 전환하신다. 예수님도 초기 사역에는 표적을 행하셨으나 자기 계시가 끝난 후에는 표적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아직도 표적을 구한다고 책망했다. 그래서 후기 사역에는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이 대부분이다. 이것이 ‘계시의 점진성’인데 ‘성경에 있는 것은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치유론자는 모든 성경을 재현하려는 유혹을 받았다. John Wimber와 Fuller Seminary의 성장학파가 대표적이다.

1.1.4.2. 기독론적 접근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성이 세상과 사탄에 대하여 절대적이고 최종적이며 완전한 승리이다. 다만 그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느냐 아니면 불신앙 하느냐의 문제가 남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과 말씀 속에 충만히 거하심을 확신해야 한다. 이 확신으로 담대히 사역을 해야 한다. 이때 사역자는 하나님의 능력의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Kecal-hatob) 나타난다.

첫째,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능력의 현현이 필요할 때는 기적적 치유, 독을 이김, 죽음에서 건짐, 천사의 나타남 등의 놀라운 일을 주신다.

둘째,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고난의 잔이 필요할 때 그의 능력으로 죽임 당함, 매 맞음, 파선, 고생 등을 담대히 당하는 능력을 나타내신다.

기독론적 의미의 승리는 늘 능력대결 양상에서 일방적 승리로 끝나는 것만은 아니다. 기독론적 승리는 마귀를 추방하고, 바다를 잠잠케 하며, 병자를 일으켜 세우는 것만이 아니다. 침뱉음을 당하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렸다가 극적으로 내려와서 원수를 굴복시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성경의 예언대로 묵묵히 고난의 잔을 받아 마시는 순종하는 모습이 기독론적 승리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 죽음도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행한 것으로 멋진 순종과 승리이다. 때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면 고난 받는 것이 승리하는 것임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배울 수 있다.

선교사들이나 복음 사역자들이 당하는 고난은 그 자체로서 승리와 영광의 행진곡이다. 이런 관점에서 Rechard Gaffine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성도들도 동일한 십자가와 부활에 연합할 것을 논증했다.(1989, 8-10)

1.1.4.3. 사역자의 유혹

교회성장의 침체와 퇴보로 위기에 빠진 사역자들은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능력에 대한 환상을 갖는다. 베드로가 기적과 함께 삼천 명 오천 명이 세례를 받는 것을 흠모하여 능력을 받으면 동일한 일을 일으킬 것이라는 환상을 갖는다. 또 그것을 만들어낼 잘 짜여진 많은 프로그램으로 사역자를 유혹한다. 사역자들의 심성에 흐르는 성공환상이 깨어져야 한다. 성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베드로와 같이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힘써야한다. 참으로 하나님의 종이라면 말씀대로 전하면서 참된 회개를 불러오려고 외쳐야한다. 성공과 안녕을 보장하고 심상한 위로를 전하는 창기의 메시지를 버리고 ‘음란하고 악한세대여 회개하라’고 외쳐야한다. 그래서 고난 받고, 침 뱉음을 당하고, 미친 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말씀을 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다. 전도자가 바른 신앙을 가지고 바르게 전할 때 하나님이 어느 날에는 귀신이 굴복하고 병자가 낫는 기적이 주시고, 전도자를 죽이려고 독사가 물게 해도 죽지 않게 하실 수 있다. 그리고 또 어느 날은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굴하기 않고 당당히 십자가로 나아가는 능력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참된 사역자는 병 고치는 기술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복음의 진정성과 받는 고난의 삶으로 증명될 것이다. 성경은 거짓선지자의 특징을 기적, 귀신 쫓음, 능력을 행하는 것이라고 이미 선언했다.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살후 2: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만 했지 그 결과에 대해서는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놀라운 말씀을 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16:17-18).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눈을 들어 현실을 보면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들이 따르기도 하지만 따르지 않는 경우가 더 많고, 또 나를 보아도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든 자에게 손을 얹어 낫게 한 적이 없는데 주님은 이런 표적이 따른다고 말했다. 예수님의 말씀과 교회의 현실에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표적이 따르지 않는 자들은 믿지 않는 자들이란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사도 시대와 함께 표적도 막을 내렸다고 강변해야할까? 아니면 이런 표적들이 나타나게 해달라고 금식하며 기도해야할까? 강한 믿음을 달라고 회개해야할까?

가신 주님, 다시 오신 주님

이 문제는 표적이 뭔지, 또 누가 표적을 행하는지를 이해해야만 풀 수 있는 문제다. 우선 누가 표적을 행하는지부터 살펴보자. 마가의 증언은 이렇다. "제자들이 두루 나가서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16:20). 마가의 이 증언, 특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라는 증언에 따르면 표적을 행한 자는 믿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이다. 주께서 제자들의 복음 전파 사역에 함께 하셨고, 함께 일하셨다고 분명하게 증언했다.

그런데 바로 앞에 나오는 또 다른 증언(16:19)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 주님은 이미 제자들을 떠났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그 어디에도 현존하지 않는다. 그런데 마가는 놀랍게도 제자들을 떠난 주님이 제자들의 복음전파 사역에 함께 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 조화일까? 제자들을 떠난 주님이 어떻게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있을까? 마가는 여기에 대해 일체 말이 없다. 단지 이루어진 사실만을 간단명료하게 기술할 뿐 세세한 설명이 없다. 하지만 요한은 예수님의 설명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7-8,13).

그렇다. 제자들을 떠난 주님은 사실 떠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은 보혜사 성령으로 다시 오셨다.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다. 또 표적을 행함으로써 복음을 확실하게 증거하셨다. 마가는 오신 주님을 보혜사 성령이라고 하지 않고 '주'라고 불렀다. '성령'과 '주'를 동일시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성령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하여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과 활동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그 자신의 펼쳐진 팔이며, 그의 부활의 능력 안에서, 그 부활과 함께, 그의 부활 안에서 시작되는, 그리고 거기서부터 효력을 미치는 그의 계시의 능력 안에 있는 그 자신이다."라고 상당히 어렵게 말했다. 하지만 핵심은 단순하다. 성령은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이며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이해할 때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이것은 성령 이해의 핵심이요 기본이다. 이 기본을 놓치면 성령 이해가 엉뚱한 방향으로 왜곡되기 쉽다. 열광적 몰입이나 신비한 초월 영성으로 흐르기 쉽고, 믿음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의 도구로 휘두르기 쉽다. 그러나 성령은 이런 것하고는 본질과 차원이 다르다.

성령은 결코 교회의 기능으로 도구화되지 않는다. 성령은 교회의 가르침과 교리 속에 갇히지도 않는다. 성령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의지와 뜻대로 처리하고 조작할 수 있는 것으로 사물화되지도 않는다. 성령은 결코 휘둘리는 법이 없다. 성령은 최고의 인격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자유에 따라 역사하고 싶은 대로 역사할 뿐이다(요3:8).

성령은 진리의 영이요, 자유의 영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성령은 만물을 새롭게 하는 분(계21:5)의 영으로서 과거의 모든 억압과 어둠과 한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한다(고후5:17). 나아가 새로운 해방활동을 하도록 격려하고 힘을 준다. 어둠에 종노릇하고 우상 앞에 엎드려 삶을 조아리는 비참함에서 해방시켜 진정한 주체자로 서게 한다. 신학자 크라우스는 성령의 자유하게 하는 사역에 대해 말했다.

"모든 외적 결정에 항거하는 자유의 영을 통해 하나님은 의존, 소외, 속박, 그리고 금기에 빠진 인간의 주체성을 갱신한다. 항상 역사의 객체로 비하되고 사건들의 희생물로 격하되는 인간이 자유의 영을 통해서 역사의 주체가 되고, 하나님나라의 세계 변혁적 운동에 부응하여 모든 상황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다. 자유의 영은 인간을 역사의 주체로서 그의 운명의 형성자로서 등장시킨다. 영 안에서 인간은 주체자로서 행동한다."(조직신학. 376).

바울은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했다. '너희는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다'(롬8:15).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멜 필요가 없는 자유자다'(갈5:1). 그렇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인 성령은 제자들에게 오셔서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일들을 행하셨다. 모든 억압과 묶임, 죄로부터 해방시켰다. 성령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제자들과 함께, 제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셨다. 복음을 듣고 믿게 하는 것도 성령의 사역이고, 십자가의 도를 깨닫게 하는 것도 성령의 사역이다. 하여, 주님은 내가 너희를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했던 것이다(요16:7).

암튼 성령은 자유의 영이다. 성령은 기계적으로 역사하지 않는다. 어떤 법칙에도 구속받지 않는다.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도 그렇다(요3:8). 그러기 때문에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들이 따른다고 해서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들이 기계적으로 따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표적이 따르지 않으면 믿는 자가 아니라고 판단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성령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요 성령의 역사를 기계적으로 법칙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본성에 어긋난다.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

그렇다면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른다는 말씀은 뭘 말하는 것일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주님이 약속하신 표적들이 모두 주께서 친히 행하였던 표적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외적인 증표로서 주님이 행하였던 일들 중 일부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표적들을 살펴보자.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데, 이 말씀은 뒤에 나오는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와 묶어 읽어야 한다.
그래야 그 의미의 핵심을 파악할 수가 있다.
우선 뱀은 성경에서 사탄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그러니까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사탄의 어떤 공격에 휩싸인다 해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다는 확약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쳤고, 사탄의 머리를 짓밟았으며, 귀신을 쫓아내 이미 승리했기 때문에 우리도 넉넉히 승리할 수 있다는 약속이며,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힘찬 격려라고 할 수 있다.

바울도 말했다. "누가 정죄하리요?…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이랴…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로마서 8:34-37).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세상의 무슨 독이라도 씻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황폐해도 그것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 안에는 귀신이 발붙일 곳이 없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고 있기 때문에 귀신이 자리를 잡고 버텨낼 공간도 없거니와 능력도 없다.

'새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새 방언'이라 하면 즉각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하는 것으로, 방언을 못하면 참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는 식으로 읽는 사람이 많다.
또 방언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분류하는 것은 말씀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는 유치한 발상이며, 문자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유아적인 문자주의의 우물에 빠져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문자주의가 매우 성경적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문자주의는 하나님의 뜻과 존재의 깊이를 문자에 한정하는, 아니 문자로 가두어버리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존재의 깊이를 오히려 해치게 된다. 말(문자)이란 단지 말이 아니다. 말이란 그 사람의 세계, 그 사람의 존재 방식을 나타내는 양식이다. 말은 존재를 담는 그릇이다. 사람을 관찰해보라. 한 사람의 세계가 달라지면 그 사람의 말이 달라지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그렇다. 말은 존재를 담는 그릇이다. 말은 곧 존재다. 하지만 존재의 일부요 존재의 껍질이다. 말은 존재이면서 동시에 존재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에 충실해야 하지만 말에 매여서도 안 된다. 말은 존재를 열어주지만 존재를 가리기도 하니까 말이다. 바로 이것이 말(문자)과 존재의 변증법적 관계다.

그렇다면 '새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결국 뭘 뜻하는 것으로 읽어야할까?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말을 하는 것으로 읽어야할까? 사람의 말과는 다른 성령의 말이 따로 있는 것일까? 아니다. 성령의 말이란 것이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읽어야할까? 성령의 말이 아니라 성령에 속한 것, 즉 성령의 세계에 속한 것을 말한다는 뜻으로 읽으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덧붙여 사람이 달라졌다는 뜻으로, 그 사람의 존재와 존재 양식이 달라졌다는 뜻으로 읽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무릇 존재가 달라지면 언어가 달라지는 법이다. 그러기 때문에 새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말하는 내용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말하는 내용이 달라졌다는 것은 삶의 양식이 새로워졌고, 삶의 차원이 달라졌으며, 존재의 세계가 새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자들을 보라.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 전에는 부활의 이전의 세계에 속한 삶을 살았고, 부활 이전의 세계에 속한 것들을 말하며 살았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부터는 부활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 되었고, 부활의 세계를 증언하며 살았다. 부활 이전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살았다. 존재의 자리가 예수 밖에서 예수 안으로 달라지니 말하는 내용도 달라졌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방언이다. 예전에는 할 수 없었던 말을 하는 것, 하나님나라의 세계에 속한 것들을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방언이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방언인 이유는 하나님나라에 속하지 않은 자들은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권세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낫는다'는 말씀은 어떤가?
이 말씀도 기계적으로 읽으면 문제가 생긴다. 문자적으로 읽고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믿는 자들이 병든 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할 때마다 다 나아야 한다.
무슨 병이든 병원이나 의사를 찾아갈 것이 아니라 믿는 자를 찾아가야 한다.

병원에 가는 것보다 더 좋은 길이 있는데 뭣 때문에 병원에 가겠는가.
정말 문자적으로 믿는 자에게 이런 표적이 따라야 한다면 세상에 병든 자들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병원마다 믿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죽을병에 걸려 고생하는 자들이 한 둘이 아니다.
병원마다 목사들 발걸음이 바쁘다. 입원한 성도를 찾아가서 위로하고 기도하느라 정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은 항상 만원사례다. 왜 그럴까? 손을 얹고 기도하면 나아야하는데 왜 낫지 않는 것일까? 왜 고생하는 것일까? 믿음이 없어서일까?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고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믿음이 없어서라고 말해야 한다. 여의도순복음 교회에 한 명의 환자라도 있으면 조용기 목사는 믿음이 없는 자로 판명되어야 한다. 아니, 모든 성도 모든 목사들이 다 믿음이 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문자주의의 비현실성이다. 문자를 문자로만 읽으면 문자와 현실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다. 그러기 때문에 문자를 문자로만 읽으면 안 된다. 또 문자를 기계적으로 적용해도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읽어야 할까?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 즉 낫는다'는 말씀은 믿는 자에게 따르는 권세를 말하는 것이라고 읽으면 좋을 듯싶다.
믿는 자에게는 권세가 주어졌다.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 사용할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다. 사탄을 물리칠 권세, 세상을 이길 권세, 명예와 탐심을 물리칠 권세, 죽음까지도 극복할 권세, 병을 물리칠 권세, 돈에 휘둘리지 않을 권세, 등등 수많은 권세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졌다.

그리스도인은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는 예수님의 권세 안에 있고, 그 권세가 그리스도인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통해 권세가 나타난다. 그런데 마가가 병을 낫게 하는 표적을 언급한 것은 그것이 가장 일상적이고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지 그것이 유일하기 때문에 언급한 것은 아니다. 바울도 말했다. "다 사도이겠느냐? 더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고전12:29-30). 바울이 말한 것처럼 믿는 자라고 해서 모두가 병 낫게 하는 자일 수 없다. 모두가 방언하는 자일 수 없고, 모두가 능력을 행하는 자일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자유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믿는 자에게는 권세가 따른다는 것이다.

이 모든 권세는 표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표적과 관련해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게 있다.
표적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과 같이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기 위해 허락된 것이지 개인의 믿음과 능력을 증거하기 위해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표적을 특정인의 전매특허인 것처럼 내세우면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표적을 사유화하는 것으로서 영적 사기행각이라고 해야 한다. 또한 표적이 표적을 위해 동원되어서도 안 된다. 표적은 오직 하나님나라를 위해 동원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듯 표적은 하나님나라를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끝나야 한다. 손가락은 손가락일 뿐이다. 결코 달이 될 수 없다. 표적도 마찬가지다. 표적은 결코 하나님나라가 될 수 없다. 표적이 하나님나라를 대신하려 들면 그때부터 표적은 하나님나라를 가리키는 고유한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특정인의 전매특허나 종교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권세와 관련해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이 있다. 믿는 자들에게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이 꼭 고난이나 질병이 있어서는 안 된다거나 필요가 없어졌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더 이상 약함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하나님은 선과 복으로 인도하기도 하지만 고난을 통해서 연단하시고 성화시키며 구원하기도 하신다. 고난이 구원의 통로일 경우가 참 많다.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고, 고난을 통해 구원 사역을 이루셨듯이 우리에게도 고난이 유익이 되는 경우가 많다. 약함이 곧 강함인 경우도 많다. 그러기 때문에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이 꼭 약함이나 고난을 제거하는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주께 받은 권세를 통해 약함이나 고난을 극복하고 정복할 수 있다. 아니, 극복하고 정복해야 한다. 권세에는 그런 힘이 충분히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때로, 아니 종종 권세를 무력화시킬 때가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권세의 주체는 내가 아니다. 권세의 주권도 나에게 있지 않다. 권세의 주체는 언제나 하나님이며, 권세의 주권은 하나님의 자유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권세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권세를 주시고, 또 믿는 자들을 통해 권세를 사용하시는 것은 믿는 자들의 유익보다는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기 위해서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책무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선포했다. 온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이처럼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위임한 주님은 제자들에게만 책임을 맡긴 채 훌훌 떠나지 않았다. 하늘로 떠나가신 그분은 보혜사 성령으로 다시 오셨다. 성령으로 오신 그분은 제자들과 함께, 또 제자들을 통해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셨다.

믿는 자들에게 권세도 주셨다. 오늘도 복음을 증거하시는 분은 그분이시다. 그분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으로 오셨고,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되셨으며,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증거하셨고, 지금도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증거하신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듯이 그분의 모든 사역은 오직 하나님나라를 증거하는 것으로 모아진다. 우리의 삶도 예수님처럼 하나님나라를 증거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모든 권세, 모든 은사, 모든 삶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믿는 자의 삶이다. 진정한 제자의 삶이다. 하나님나라가 아닌 나만의 부귀영화는 신념의 세계, 종교의 세계, 자기 암시와 자기 확신의 세계일 뿐 예수의 세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예수의 세계엔 오직 하나님나라가 있을 뿐이다.

1. 귀신을 쫓아내며

눈에 안보이지만 우리 배후에는 귀신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눈에 안 보이는 공기 속에 사는 것처럼 영적인 귀신이 득실거리는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귀신을 쫓아내지 아니하면 귀신으로 말미암아 많은 축복을 빼앗깁니다. 우리는 귀신을 쫓아낼 권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보혈의 능력과 성령의 권세로 귀신을 쫓아낼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더러운 귀신이 있다고 말합니다. 도덕적으로 더러운 환경을 만들고 더러운 생각이 일어나게 하고 더러운 친구를 만나게 해서 더러운 죄를 짓고 부패하게 합니다. 방송을 들어도 더러운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인터넷에도 더러운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잡지도 더럽고 온 세상에 더러운 것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그 더러움의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더러운 귀신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야 됩니다. 

또 성경에는 악한 귀신이 있다고 말합니다. 악한 귀신은 악을 가져옵니다. 서로 미워하고 싸우게 하고 해악을 가져오고 평안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악한 남편을 만나면 그 부인은 엄청난 고통을 당합니다. 악은 고통을 가져옵니다. 또 악한 부인을 만나면 남자는 괴롭습니다. 악한 형제는 형제간에 못살게 만들고 악한 이웃은 이웃을 도저히 고통스러워 못살고 이사를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악한 마귀는 악한 환경을 만들고 악한 친구를 만들고 악한 사람을 만들어서 고통을 가져오기 때문에 기도와 믿음으로 악한 마귀를 내어 쫓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회적인 악도 기도로써 물리쳐야 하고 가정적인 악도 기도로써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배후에 원수 마귀가 악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고 “악한 귀신아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고 계속해서 대적하면 귀신은 물러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릴 때 이를 뽑을 때가 있습니다. 그냥 뽑지않고 한 번 흔들고 있다가 또 흔들고 또 있다가 또 흔듭니다. 나중에 흔들흔들하게 되면 실로 이를 묶어 문고리에 걸어 놓고 하나, 둘, 셋하고 잡아 당기면 이가 싹 뽑혀집니다. 마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뽑듯이 자꾸 흔들어야 합니다. 자꾸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 자꾸 흔들어서 나중에 한 번에 호통을 치면 마귀가 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거짓말하는 귀신이 있습니다. 이 거짓말하는 귀신이 들어오면 앉으나 서나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거짓말 하는 배후에는 귀신이 있습니다. 우리들도 거짓말 하면 ‘귀신이 나의 혀를 잡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고 ‘사탄아 물러가라!’고 쫓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병도 대부분 귀신이 줍니다. 의학적으로는 폐병이다, 관절염이다, 심장병이다, 온갖 병의 이름을 말하지만 성경에는 그 배후에 마귀가 눌러서 병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고친 모든 병은 마귀에게 눌린 병이라고 한 것입니다. 마귀가 눌러서 병이 들게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초등학교 다닐 때 먼 산길을 걸어서 논 뜰을 지나서 학교까지 갔습니다. 가다가 길옆에 보면 봄철인데도 풀이 노랗게 떠서 잘 자라지 못합니다. 돌을 옮겨보면 풀뿌리를 돌이 누르고 있습니다. 돌을 옮겨주고 며칠만 지나면 풀이 새파랗게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폐를 누르면 폐병이 되고 심장을 누르면 심장병이 되고 관절을 누르면 관절염이 되고 허리를 누르면 허리 병이 되고 눈을 누르면 눈병이 됩니다. 아마 의학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은 “무식하기 짝이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성경에는 배후의 세력이 우리를 누르기 때문에 병이 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알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약 먹고 수술받고 난 다음에도 또 그 병이 들고 또 병이 들지 않습니까?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도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2. 새 방언을 말하며

새 방언이란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언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성령 충만을 간구하면 성령이 우리를 충만히 채우시고 우리를 통해서 새 방언을 주십니다. 그리고 또 방언의 은사를 받아서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절에 보면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방언을 하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려면 성령 충만하게 해달라고 주님께 간구하고 기도해야 주십니다. 방언기도가 우리에게 유익 되는 것은 내가 마음으로 사람의 말로 할 수 없는 기도를 방언을 통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통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 상달되고 놀라운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구역장 한 분이 내게 와서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어느 부흥회 낮 예배 시간에 참석해서 목사님 설교를 듣고 있는데 설교는 귀에 안 들어오고 마음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머리를 숙여서 방언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목사님 설교가 끝날 때쯤 되니까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이후에 집에 갔는데 저녁이 되니 남편이 새하얀 얼굴로 집에 돌아와서는 “여보 오늘 내가 살아온 것은 기적이야”라고 했답니다. 

남편은 시외버스 운전사였는데 시외버스를 운전해 가다가 벼랑 옆을 지나가다가 엔진이 고장이 났습니다. 그래서 버스를 세우고 승객들을 다 내리게하고 돌로 타이어를 받히고 올라가서 핸들을 조작하는데 그만 돌이 빠져 버스가 뒤로 밀려 앞 바퀴 두 개만 벼랑에 달랑달랑 걸렸습니다. 떨어졌으면 큰 사고가 났을 텐데 바로 그때 기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알아보니 바로 부인이 방언으로 기도할 때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도할지 모르고 마음은 다급한데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방언으로 기도하니 하나님의 성령이 직접 기도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우리를 통해서 친히 간구합니다. 우리는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이 없습니다.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은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서 방언으로 기도해 주시므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50년의 목회생활 동안에 수없이 많은 어려운 고비를 겪었습니다. 답답해서 도저히 인간의 말로써 기도할 수 없을 때 엎드려서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30분도 1시간도 2시간도 좋고 계속해서 기도하면 그 마음속에 막힌 담이 헐어지고 답답한 것이 사라졌습니다. 불안과 공포가 사라지며 은혜가 넘쳐나고 하나님의 응답이 다가오는 체험을 수없이 했습니다. 방언기도는 굉장한 효과가 있고 굉장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아직 못하는 사람은 성령 충만하여 방언하도록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3. 뱀을 집어올리며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의 주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치면 뱀의 독도 물러갑니다. 바울 선생이 파선해서 멜리데 섬에 들어갔을 때 추워서 사람들이 다 검불을 모아다가 불을 붙였습니다. 바울 선생도 검불을 잔뜩 손에 쥐어서 불에 던지려고 보니 맹렬한 독사가 손에 물고 달렸습니다. 멜리데섬 사람들이 바울을 보고 난 다음 “죄를 많이 지었구나. 바다에서는 살아 나왔으나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구나. 육지에서 뱀에 물려 죽는구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뱀을 불에 털어 버리고 손만 턱턱 털어 버렸습니다. 당장 퉁퉁 부어서 쓰러져 죽을 줄 알았는데 끄덕없는 바울의 모습에 멜리데섬 사람들이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신이다. 신! 신이 사람의 몸을 쓰고 나왔다”고 놀라워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앞으로 병자들을 불러와서 안수 받게 해 수많은 병자들이 고침을 받은 기적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연히 뱀에게 물렸을 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뱀의 독도 물러가는 것입니다. 뱀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꾀인 것도 이 뱀 아닙니까? 마귀가 뱀 속에 들어가서 아담과 하와를 꾀어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선악과를 따먹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도 이 뱀인 원수 마귀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거짓말 하고 우리를 속이고 우리에게 사기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뱀을 잡는다는 것은 거짓을 버리고 진리를 따라 살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거짓과 진실을 분별하는 지혜를 하나님이 주십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속에 모시고 예수 중심으로 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면 언제나 뱀을 잡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뱀이 우리에게 와서 거짓말을 해도 우리는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어리석게 보이더라도 예수님 말씀은 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참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거짓에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4. 해(害)를 받지 아니하며

한국전쟁 이후에 가정이 다 파괴되어 많은 어린 소녀들이 창녀로 팔리던지 남의 집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흥회를 하는데 14살 내지 15살 되는 소녀가 입술에 전부 피가 묻었고 피멍이 들고 갈라졌고 너무 말라 뼈만 남은 상태로 나타났습니다. 기도 받으러 왔기에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물어보니 그는 전쟁 고아로 남의 집에 들어가서 식모 노릇하고 밥을 얻어 먹고 사는 아이였습니다. 이 소녀는 옛날부터 예수를 잘 믿었습니다. 주일에 꼭 교회가고 새벽기도회도 나가니까 그 집 주인이 불교를 믿으므로 이 아이를 굉장히 싫어하고 미워하여 채찍으로 때리고 나가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에 자다가 너무나 목이 말라서 물이 마시고 싶은데 문소리를 내다가는 주인에게 큰 혼이 나기 때문에 조심 조심 부엌에 가서 더듬거리며 그릇에 담긴 물을 찾아 먹었는데 그 물이 양잿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쓰러졌습니다. 전쟁 때이니 주인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이가 양잿물을 마시고 쓰러져 있기에 그냥 길거리에 내버렸습니다. 그런데 안 죽고 살아났습니다. 살아나서 구걸하고 밥을 얻어 먹다 부흥회에 왔습니다. 그래서 루피 리처드 선교사님이 데리고 병원에 데려갔습니다. 병원에 데려가서 조사를 해보니 입술만 탔지 식도도, 위장도 타지 않은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께서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독을 마시면 큰일 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되고 우리가 실수로 독을 마셨으면 예수 이름으로 우리가 대적하면 독을 물리쳐 주시고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독보다 인간관계 속에서 체험하는 언어의 독이 더 무섭습니다. 분노와 절망을 일으키는 말을 들었을 때 예수님 이름으로 물리치면 독이 사라집니다. 분노와 절망을 일으키는 말을 하거나 들으면 사람은 독이 오릅니다. 사람이 독이 오르면 얼굴이 시빨개지고 이성을 잃어버리고 흉악하게 행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독이 올랐을 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고 대적하면 독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모간 블레이즈라는 사람이 쓴 글입니다. “나는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힘과 기술이 있다. 나는 상대방을 죽이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다. 나는 가정과 국가 그리고 어떤 조직도 파괴할 수 있고, 수많은 사람을 파멸 시킬 수 있다. 아무리 순결한 사람이라도 내게는 무력하고 아무리 깨끗한 사람이라도 내게는 더럽다. 내 이름은 비난이다” 비난은 치명적인 타격을 갖다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파멸시키고 절망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입술에서 나오는 욕이나 비난이나 부정적인 공격은 어마어마한 독입니다. 쥐 잡는 독보다 더 무서운 독입니다. 자기는 지나가는 말로 뱉었지만 말로써 사람을 죽이고 말로써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부부간에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힘을 주면 굉장한 보약이 되지만 비난하고 공격하고 욕을 하면 독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이 다 우리를 그렇게 대해 주나요? 우리에게 독약을 먹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고 대적하면 독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5. 병을 치료함

우리 기독교 신앙은 치료하는 신앙입니다.
성경에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할 때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 친아버지인데 그 친아버지가 의사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의사가 되시고 예수님이 우리의 치료자가 되심을 수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25절로 26절에 “네 하나님 야훼를 섬기라 그리하면 야훼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기독교는 병 고치는 종교입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야훼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임이라”고 말씀합니다. 치료하는 야훼이십니다. 예수님도 그의 대속을 통하여 우리를 치료하십니다. 불과 짧은 3년 동안 목회한 예수님은 3년의 3분의 2는 병 고치는데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귀신을 미워하고 병을 고치기를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4:23-24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난 다음에 곧장 귀신을 쫓아내고 병 고치는 일에 열심을 다하셨습니다.
주님은 치료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우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 나오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병 고침을 받고 마귀에서 해방되는 역사를 얻게 됩니다.
우리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하는 예수님의 역사를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의사이시고 예수님도 우리의 의사이십니다.
주님은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반드시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에 “예수께서 그의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증거 하러 가는 사도들에게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라고 말했었습니다.

이제부터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십시오.
성령 충만하고 새 방언기도를 하십시오.
거짓의 뱀을 잡아 내십시오.
언어적인 폭력으로 독이 오를지라도 주의 이름으로 해소하십시오.
병든 자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십시오.
기적이 일어나는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삽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있는 원수 귀신을 대적하여 이기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우리들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 이야기 / “물질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우주는 완벽하게 창조된 것”



“물질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우주는 완벽하게 창조된 것”

제12회 크리스천리더스포럼



장순흥 한동대 총장이 지난 28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빌딩에서 열린 제12회 크리스천리더스포럼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세계적 원자력공학자이자 교육자인 장순흥(67) 한동대 총장은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창조 세상의 원리’를 일관되게 강조했다. 하나님을 믿는 과학자로서 그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완벽하신 분이며, 피조세계와 인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만드셨는지를 증언했다.

장 총장은 지난 28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빌딩 컨벤션홀에서 열린 제12회 크리스천리더스포럼(CLF·회장 김영훈 대성그룹 회장)에서 ‘나는 왜 창조를 믿고 구원을 믿는가’라는 주제로 간증했다. CLF는 정·관계 학계 경제계 등 각계각층의 크리스천 오피니언 리더들이 강연과 신앙 간증 등을 나누는 모임이다.

장 총장은 1976년 서울대 핵공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MIT에서 핵공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82년에는 카이스트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 교수로 부임해 인재를 양성했고, 2009년에는 우리나라 원자력발전소의 기술을 자립·수출에 힘썼다. 2014년에는 과학자로 최고 영예를 상징하는 ‘과학기술훈장 창조장(1등급)’을 받았다.

장 총장은 “경복고 1학년 때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던 중 ‘삶의 모든 끝은 죽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순간 모든 것이 허무했다”면서 “고등학교 2학년 때 교회를 나가 회심하게 됐고, 그해 여름수련회 때 로마서를 읽으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고 고백했다.

하나님을 알게 된 뒤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은 복음이었다. 장 총장은 성경을 5분 동안 5가지(창조 죄 구세주 교회 천국) 카테고리로 전하는 ‘5C 전도법’을 직접 만들어 청년과 유학생 복음 전도에 적용했다.

그는 과학자로서 창조를 믿는 이유에 대해 “무에서 유는 나올 수 없다”면서 “빅뱅이론이 성립하기 위해선 최초의 순간에 에너지나 물질이 있어야 가능하지만, 에너지나 물질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생명체를 다루고 있는 기본 단백질이 스스로 만들어질 확률은 10의 500승분의 1, 즉 제로에 가깝다. 간단한 세포 하나도 스스로 만들어질 확률은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진화론에 따르면 무척추동물, 척추동물(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 유인원 현생인류에 이르는 점진적 진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진화를 입증할 중간단계의 화석이 발견되지 않았고 이론적으로도 중간 화석은 공식적으로 한 개도 인정받지 못했다”고 전했다.

집을 지을 때 설계도면이 필요하듯 생명체에도 설계자와 창조자가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장 총장은 “세포마다 DNA와 RNA로 구성된 설계도가 있고, 끊임없이 설계도가 전달되고 있다”면서 “하나님의 창조섭리로 만들어진 우주와 지구는 생명체가 살아가도록 완벽하게 설계된 환경”이라고 말했다.

유신 진화론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그는 “최초의 세포는 하나님이 창조했지만 수십억 년에 걸쳐 인간은 진화됐다고 주장하는 유신 진화론의 가장 큰 문제는 성경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라면서 “이 논지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장 총장은 “과학자로서 삶의 경험을 통해 성경이 진실하다고 믿게 됐다”면서 “성경은 읽을수록 진실했고 논리적으로도 합당했으며 천국의 소망을 갖고 구원을 믿게 됐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임을 인식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에 따라 살아가자”고 전했다.


홍정길 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가 지난 28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빌딩에서 열린 제12회 크리스천리더스포럼에서 설교를 전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설교자로 나선 홍정길 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신 축복’(딤후 1:7)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홍 목사는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보면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재산과 능력, 성취가 아닌 마음”이라면서 “이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닌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홍 목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을 향해서는 담대한 마음을 가지되 이웃을 향해서는 사랑하라”고 강조했다. 그는 “세상에서 성취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인생엔 사랑만 남는다”면서 “신자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권면했다.

차기 포럼은 19일 오후 7시 서울 광림교회에서 젊은이들과 함께하는 갓플렉스 오픈포럼으로 진행된다. 오픈포럼은 김정석 목사의 설교와 가수 소향의 공연, 유튜버 박위, 존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손주은 메가스터디 회장의 강연과 토크 콘서트로 열린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16024&code=23111111&sid1=chr

세대주의. 뉴에이지 운동. 종교다원주의



세대주의(dispensational)란 용어는 세대 혹은 시대를 뜻하는 dispensation이란 말에서 나왔는데 이 말은 헬라어의 οικονομαι(오이코노마이)란 말에서 나왔다.

οικονομαι는 οικοs (오이코스;집)와 νομοs(노모스;법)을 합쳐서 된 말로서 번역하면 집을 다스리는 법 이란 뜻이다.

이 세계를 하나님이 운영하는 집으로 본다고 할 때 세대주의는 시대에 따라 하나님이 집을 운영하시는 방법을 달리 했다고 믿는데, (마치 아버지가 자식을 다루는 방법이 유년기 장년기 청년기 등 성장 과정에 따라 다르듯이) 이 구별되는 시대를 세대(dispensation)라고 부르며 세대주의는 이 세대 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대주의자들은 세대의 구분이 세대주의 본질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세대주의는 언약신학이나 오순절 신학처럼 하나의 신학 체계이기는 하지만, 스코필드 이후 많은 교리적 발전을 이루고 있는 오늘날 상황에서는 세대주의가 어떤 신학인가를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세대주의자란 용어는 세대 주의를 주장하는 자신들까지도 여러 용어로 사용할 정도로 그 의미는 혼란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대주의 역사가 잘 나타난 현대 미국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에 잘 나타나고 있는데 그들은 모두 동일한 점을 가지고 있다.

그 신학적인 공통적 특징을 요약한다면, 1)성경의 권위에 대한 확신 2)교회의 독특성 주장 3)우주적인 교회의 실재 강조 4)하나님 구속의 계획에 있어 성경 예언의 중요성 강조 5)종말론에 있어 전천년설 지지(환난전 휴거설) 6)이스라엘의 미래 믿음 7)세대에 따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이 다르다는 사실 강조 등이다.

이들은 세대를 나눈다는 의미에서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라고 불리지만, 세대주의의 최초 주창자 이름을 따서 다비주의(darbyism)라고도 하고, 이스라엘과 교회의 운명을 별개로 본다는 의미에서 이중운명주의(dual destinationism)라고도 하고, 이스라엘과 교회를 위한 의의를 분리하여 해석한다는 의미에서 이분수신자주의(addressee bifurcationism)이라고도 한다.

세대주의의 발전과 동향, 세대주의의 성경 해석 방법, 세대주의의 종말론, 세대주의 신학이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 등 더 자세한 내용을 보기 원하면 이단자료 실에 있는 세대주의에 대한 소고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뉴 에이지 운동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다. 사람들은 서로의 행복을 위하여 함께 모여 살게 되었는데 이러한 결합체를 사회(社會) 라고 부르며, 사회가 더 발전한 것이 곧 국가(國家) 이다. 사회는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문화(文化) 와 문명(文明) 이다. 문화 는 사회의 정신적인 영역을 말하며, 문명 은 사회의 물질적인 영역을 가리킨다. 문명은 돌이나 불을 사용했던 원시 사회로부터 컴퓨터와 인공위성을 사용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기술적이며, 물질적인 발전을 말한다.

그러나 문화 는 그 사회의 정신적인 상태의 표현으로서 전통적인 풍속과 예술, 음악, 시, 춤, 문학, 건축, 철학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정신세계에 담겨진 중심 내용의 표현이라 하겠다. 어느 한 사회의 문화를 보면 그 사람들의 정신영역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는 인간들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다. 가치관은 인생관, 세계관, 국가관, 가족관에 따라 형성되는데, 이렇게 형성된 가치관은 종교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종교(宗敎) 는 신(神)과 인간과의 관계를 말하는데 그 사회가 갖고 있는 종교에 따라 가치관이 형성되며, 그 가치관은 문화를 낳고, 문화는 문명을 지배하게 된다. 따라서 어떤 신(神)과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인 행복이나 불행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모두 종교인이다. 세계의 대표적인 종교로는 힌두교의 다신론으로부터 불교의 부처신과 유교의 조상신 그리고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의 유일신이 있다. 여기에 수없이 많은 미신과 같은 무속신앙까지 합치면 종교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혹, 신(神)이 없다 고 생각하는 무신론자(無神論者)가 있다면, 그는 자기 스스로 자신이 신(神)의 자리에 앉아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며, 그가 갖고 있는 가치관이나 문화의 배경은 이미 그의 조상이나 여러 사람의 종교에 영향을 받은 또 하나의 잡(雜) 종교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모든 종교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그것은 조물주(造物主) 즉,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종교와 피조물(被造物)을 신격화(神格化)한 종교(사실상 이것은 피조물에 대한 숭배로서 종교라고 할 수 없음)이다.

뉴에이지(New Age) 란 영어로 새 시대 란 뜻이다. 이것은 새로운 신흥 종교 운동으로서 겉으로는 세계의 평화를 외치며 모든 종교의 통합(이는 피조물 숭배종교의 결합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종교적 쿠데타임)을 주장하고 있는데, 뉴에이지는 현대판 무신론 사상으로써, 나도 하나님, 너도 하나님,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다 라고 인간 스스로를 신격화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의 신(神)은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는 타락한 천사인 사탄으로서 사탄의 지배를 받아 사탄의 가치관을 형성하여 사탄의 타락한 문화를 확산시킴으로써 문명을 지배하고 결국에는 그의 목적인 인간과 가정의 행복, 사회, 국가, 세계 모든 것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


오늘날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종교다원화 상황 가운데서 살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국교를 인정하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상황에서 특정 종교에 편중되어지지 않도록 모든 정치와 사회, 매스컴 등이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다. 그리고 종종 이 균형이 깨어지는 사건이 발생하면 매스컴들은 요란하게 이를 보도하며 타종교를 인정, 존중하지 않는 것을 비난하곤 한다. 이전 군에서 있었던 훼불(毁佛)사건 등이 예민한 이슈로 사회에 보도되어지는 것을 보았고 최근의 조계종 사건에서도 일반 비신앙인들 보다 타종교인들은 더욱 이 일에 연루되어지지 않도록 말조심하는 모습을 보았다. 신앙의 교리적인 요구와는 상관없이 한 사회 가운데서 여러 종교가 서로 피부를 접촉하며 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있다.


특히 한국교회가 세계선교의 무대에 뛰어들게 된 이후로 특히 아시아권 선교에서 다양한 타종교에 대한 선교적 접근법에 상당한 곤욕을 치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태국에서도 한국 선교사가 훼불사건으로 강제 출국되어지기도 하였고 러시아에서는 정교회와 한국선교사들 간에 극히 불편한 관계가 형성되어지기도 하였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출 20:3)라는 계명을 십계명의 제1계명으로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종교다원화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신앙의 길인가에 대해서 혼란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적절한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이해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대처방안에 대한 제안들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왜 최근들어 종교다원주의가 전세계적인 이슈가 되어있는가?

최근 전세계적으로 종교다원주의가 폭넓은 수용적인 가치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먼저는 이러한 종교다원주의가 전세계적인 이슈로 자리를 잡게 된 배경들을 살펴보아야 하겠다.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이 배경을 볼 수 있는데 첫째는 급속한 세계의 변화와 세속화 경향으로부터 오는 영향과 둘째는 기독교 내부로부터 오는 도전, 그리고 세 번째는 타종교로부터 오는 영향 등이다.

첫째로 급속한 세계의 변화와 세속화 경향으로부터 오는 영향은 크게 보면 지구촌화 (globalization)와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변화라고 하겠다. 급격한 기술의 발달로 이제 세계는 하나의 지구촌으로 변하여 가고 있다. 이전에 지역을 가르던 시간과 공간의 간격이 거의 없어지게 되었고 서로가 하나의 커다란 커뮤니케이션 체계 안에 있는 하나의 공동체로 발전해 가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체계로 발전해 감에 따라서 지구촌은 피할 수없이 점차 개방된 사회가 되어져 가고 있다. 죤 나이스빗은 『메가트랜즈』에서 지적하기를 전통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이 가진 사상이나, 받아들이는 믿음이나, 감상하는 예술품은 모두 한정된 공간에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이용 가능하다. 힌두교의 만트라, 탄트라 경전의 만다라, 일본의 프린트 문양, 아프리카의 조각, 라틴음악과 인도의 라가 등, 이 모두가 서구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실시간 에 서로 어울려 있다. 이러한 사상과 종교의 개방, 공존 흐름 가운데서 한 종교의 배타성을 주장하기가 점차 어려워져 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던주의 시대가 가지고 있었던 특징인 객관적 이성에 근거한 일원화된 체계와 합리성의 권위가 실추되면서 등장한 사조이다. 1985년 포스트모더니즘은 연극, 무용, 음악, 예술, 건축, 문학, 철학, 심리학, 자연과학 등의 모든 분야에서 나타났는데 그 특징은 불확실성, 파편성, 표준의 해체, 자아 상실, 기반 상실, 명시할 수 없는 다양함 등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에서 종교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문화의 전반적 분위기가 어느 종교의 유일성, 배타성을 거부하고 종교의 다원화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가게 되었다.

두 번째 기독교 내부로부터 오는 도전은 현대신학으로부터의 도전이었다. 현대사회에서 신학자들은 타종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선교신학의 한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이러한 고민에 전통적인 신학 방법론의 틀을 깨뜨리는 현대적 신학의 신학방법론이 가미되면서 오늘날 선교신학에서 타종교에 대한 종교 신학적 태도는 크게 종교다원주의와 포괄주의, 배타주의의 세 부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즉 기독교 신학자들 내부에서도 타종교에 대해서 구원을 인정해 주거나 아니면 기독론 자체를 넓게 포괄적으로 해석해서 구원이 가능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보수 기독교회의 배타주의를 독선적이고 서구 제국주의적 선교의 산물이라고 공격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기독교 내부의 종교다원주의나 포괄주의적 입장이 보수 기독교가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더 커다란 도전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 번째 도전은 타종교로부터 오는 도전이다. 즉 현대세계에서 여러 종교인들은 기독교의 구원에 대한 배타적 주장이 여러 종교들이 공존하고 있는 현대의 종교 다원화 세계 속에서 서로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깨뜨리는 비윤리적인 독선이라고 공격한다. 특히 동양권 전통종교들의 특징이 포용성과 범신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고 서구 기독교 국가들의 식민통치의 아픔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아시아권 국가에서는 기독교의 배타적인 구원입장이 더 많은 지탄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도전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상당한 호소력을 가지게 되며 이러한 입장을 철저히 지지하게 된다.

종교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인의 존재방식은 무엇인가?

이러한 다원주의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어떤 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앞부분에서 이미 언급하였지만 신학자들은 이러한 종교다원화 상황하에서 기독교인들의 위치를 잡는 일에 무심하였고 현대까지 대략 세 가지 부류의 입장들이 제시되어졌다. 종교다원주의와 포괄주의, 그리고 배타주의이다.

1) 종교다원주의는 모든 종교의 구원진리 가능성을 인정해주는 것으로 현대적 신약 성서학의 영향, 역사적 상대성에 대한 현대의 문화적 경험, 그리고 보다 넓어진 다른 종교들에 대한 지식 등에 근거하여서 등장하게 된다. 이들의 주장은 몇 가지 다른 방향에서 이루어지는데 존 힉은 모든 종교의 배후에 하나의 실재가 존재하나 역사와 문화의 특수성 때문에 여러 종교가 생겼다 고 보며, 레이몬드 파니카는 우주적 그리스도론을 주장하며 범 우주적인 신-인 양성적 실재로서의 그리스도는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성육신 되었으나 그것은 모든 역사적 형태를 뛰어넘는 것이기에 모든 종교는 일정한 방식으로 이러한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있다 고 주장한다. 사마르타는 역사적 상대성에 기초하여 어떤 종교나 종교인물도 신의 전적인 신비 앞에서 자신을 궁극적인 말, 충만한 의미로 말할 수 없기에 하나의 종교는 자신의 추종자에게 결정적임을 주장할 수는 있으나 어느 종교인에게도 결정적임을 주장할 수는 없다 고 한다. 해방신학 혹은 정치신학은 윤리적 실천을 진술의 진위를 가리는 판단기준으로 삼고 전통적 그리스도론이 세계의 역사에서 비도덕적 태도, 우월성, 불관용, 몰지각한 판단을 유발시켰음으로 그것을 철저히 재평가하고 패러다임 전환을 해야 한다고 말하며 존 힉의 신중심적 다원주의에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시도를 한다.

2) 포괄주의는 성서만을 유일한 규범의 근원으로 보지 않고 다양한 신앙전통을 용납하는 가톨릭이나 정교회 등에서 주로 볼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종교다원주의와 포괄주의는 신학적 주장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실천적인 면에서 볼 때는 실제 알갱이가 거의 같은 주장으로 보인다. 로마 가톨릭의 바티칸Ⅱ보고서라든지 칼 라너 같은 사람들의 익명의 그리스도 주장을 보면 교회 밖의 타종교인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능력이 미치는데 이 말은 타종교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아니다. 즉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지만 그리스도 밖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개념인데 이 그리스도는 예수와 분리되어진 그리스도의 개념이다. 이 견해는 신학적으로는 종교다원주의와 배타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없이는 구원이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기독교 신학자들의 개념적 주장이고 실제적으로 익명의 그리스도론 에 따르면 타종교인은 그리스도라는 이름도 모르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 종교다원주의와 실천적인 면에서 별 차이가 없다고 하겠다. 이들은 타종교 안에 있는 자연계시를 인정해주고 강조한다. 일괄하면 백두산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가지 많은데 그 마지막 접근로에 그리스도라는 이름만을 올려놓은 모양이 된다. 가톨릭 안에서 한스 큉과 같은 사람들은 이런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이용하는 것에 반대하며 아예 기독교밖에 구원이 있다고 선포하자고 하기도 한다. 한국 내에서도 일부 신학교 교수들이 이런 기독교 밖의 구원의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일부 제3세계 신학자들도 이 포괄주의의 입장에서 타종교들 안에 존재한 보편적 구원 가능성을 인정한다.

3) 배타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사건 이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고수하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성경 계시의 절대성과 무오성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1:8-9).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1:12).

단순히 성경에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성경은 타종교와는 분명하게 구분이 되는 구원 사건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회심이다. 이 대속과 회심을 중심으로 한 속죄론은 타종교에는 없는 기독교만의 유일한 구원요구이다. 또한 피터 베이어하우스는 우리가 복음을 타종교인에게 전하고 개종을 요구할 수 있는 성서적 근거는 부활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만약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즉 예수께서 죽음 너머로 가셨다고 그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생명으로 돌아오신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내세와 영혼에 대한 기독교의 주장은 절대적으로 진리이며 우리는 감히 타종교에게 우리의 구원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변적인 학자들간에는 역사적 이라는 말의 의미를 두고 논쟁을 벌일 수 있지만 쉽게 생각하는 의미에서 기독교는 이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여러 면에서 크레머는 타종교 내에 일반계시(일반진리)가 존재할 수 있지만 이것은 기독교의 특별 계시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불연속성(discontinuity)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보수 기독교인은 실제 이 배타주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 타종교에 일반진리조차도 없다는 편협한 배타주의는 최근 들어서 그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타종교에 일반적 진리(이를 일반계시라고 표현하든 그 표현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가 있음을 인정할지라도 구원의 진리까지를 받아준다는 것은 보수 기독교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현대의 사회와 문화가 다원화 상황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할지라도 구원의 진리를 양보한다면 기독교는 그 존재 의미 자체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WCC 종교다원주의적 견해를 받아들이면서 선교사의 숫자가 급감한 것이 이를 증거 해 준다. 즉 보수 기독교는 타종교에 일반진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이면을 존중해주되 구원진리에 있어서는 타협할 수 없는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

종교다원주의 상황에서 어떻게 종교간 윤리 를 만들어낼 것인가?

보수 기독교의 위치가 배타주의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면 본고의 첫 부분의 문제제기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타종교와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해 나가야 할 것인가? 사회가 요구하는 평화 공존의 방법은 어떤 근거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가?

WCC신학자들은 대화 (dialogue)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 대화 라는 개념도 보수 기독교와 WCC측의 이해가 서로 다르다. 보수측은 타종교와 대화가 필요함을 인정하되 이는 타종교인을 개종시키기 위한 접촉점으로서의 대화를 주장하고, WCC측은 기독교 구원의 유일성을 버렸으므로 타종교와의 관계를 개종 의도 없이 단지 서로 이해를 위한 도구로서의 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빙크와 같은 선교학자는 보수측의 대화개념을 구분해서 엘렝틱스 (elenctics)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고전적 입장에서 별 진보를 보여주지 못하는 견해라고 보인다.

필자는 존 P. 뉴포트 등이 주장하는 종교자유에 근거한 타종교간 상호전도 (interfaith witness and religious freedom)를 소개하고 이를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이는 오늘날 현대 사회가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개념이며 국제적으로 이렇지 않은 국가에 대해서 강하게 요구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종교 자유를 근거로 해서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자신의 종교를 선택할 권한이 있으므로 모든 종교는 타종교의 전도에 상호 개방하자는 주장이다. 기독교인은 불교인에게 전도하고 개종을 권할 수 있고 동시에 불교인도 자유롭게 기독교인에게 전도하고 개종을 권할 수 있는 상호 자유를 인정하고 존중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인이 기독교의 진리를 인정하면 개종하는 것이고 또한 기독교인이 불교를 구원진리로 인정하면 불교로 개종하는 것을 강제적으로 서로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종교는 단순한 종교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사회와 문화의 한 구성요소로서 복잡한 관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단순한 해결책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종교다원화 상황에서 서로 자기 종교의 절대성을 주장하면서 불필요한 갈등과 불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는 피해서는 안될 상호 윤리가 되어야 한다. 또한 기독교의 배타주의는 구원의 진리에 대한 배타성이지 사람이나 상대에 대한 배타성은 아니다. 하나님의 복음에 근거하되 타종교인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그들의 종교를 인격적인 차원에서 또 일부 일반진리가 존재한다는 면에서 인정하고 존중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어떤 관계를 논하기 전에 기본적인 양식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인격적인 존중과 종교의 자유에 근거한 상호간 전도의 인정이 오늘날 필요한 관계이다.


『종교 다원주의』

<정승원교수의 현대신학해설>

종교 다원주의나 타종교간의 대화 문제는 최근에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포스 트모던 시대에 들어와서 어느 때보다 더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이 전에는 타종교를 어느 정도까지 인정하느냐 혹은 어떤 것이 다르고 어떤 것이 비슷하냐 식의 생각을 해 왔다. 즉 한 쪽 종교 입장에서 다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종교 다원주의에서는 한 쪽 입장에서 다른 입장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입장에서 자신의 종교만을 보는 것을 요구한다. 즉 다른 종교를 판단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나름대로의 모든 종교들의 정당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 종교의 관점에서 다른 종교들을 보는 것은 스스로 우월성 내지는 절대성 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다른 종교들은 그 한 종교처럼 돼야 한다는 것이 전제된다. 그것은 바로 다원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포스트 모던이즘의 특징 중 하나는 어떤 한가지 절대적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텍스트에 내재하는 고유의 의미를 부정한다. 어떤 초-설화적(meta- narrative) 의미를 부정한다. 이러한 특징은 바로 종교 다원주의에도 연결이 된다. 한 종교의 절대적 진리란 있을 수 없고, 한 종교의 고유의 의미란 없고, 다른 종교들이 따라야 할 초 설화적 혹은 초 신학적 가르침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유일성 혹은 하나님 되심은 종교 다원주의의 No. 1 敵인 것이다. 한마디로 다원주의는 어떤 동질성(consensus)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질성(dissensus)을 인정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tolerance)을 주창하는 것이 종교 다원주의인데 이 관용이 란 한 쪽 편에서 다른 쪽을 관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관용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절대적 진리로 관용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 어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기독교의 가르침과 알라가 참 신이라는 이슬람의 가르침은 둘 다 관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두 주장은 절대적 진리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종교 다원주의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다원주의라는 것이 절대적이라는 일종의 교조주의적 색채가 있다고 하겠다.

종교 다원주의 대표 주자인 죤 힉(John Hick)은 기독교의 성육신의 교리야말로 다원주의의 최대의 걸림돌이라고 말한다. 그는 주장하기를 모든 종교가 궁극적 실재 (ultimate reality), 즉 신을 추구하고 있다고 한다. 단지 문화적 역사적 배경만 달랐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모든 종교가 정당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예수-중심의 모델에서 하나님-중심의 모델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윌리암 스미스 (William C. Smith)는 진리란 객관적이 아니라고 한다. 더욱이 진리란 명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어떤 객관적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란 의미는 단지 각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또한 인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주장하기를 종교의 진리 혹은 실재가 무슨 뜻이었냐 라는 역사적 질문은 현재의 진리와 실재에 대한 신학적 질문과 다르다고 한다. 즉 역사적 질문을 버리게 되면 참다운 종교 다원주의가 성립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한다. 그는 또 주장하기를 만약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났다면 그것은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게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데이비드 트레이시(David Tracy)는 주장하기를 인간의 모든 지식은 제한적이며 다각적(perspectival)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대화는 이러한 제한적이고 다각적인 특징을 인지한 포스트모던 지식 소통이며 취득 방법이고 대화는 언어와 역사의 애매성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종교가 대화에 있어서 우월한 입장에 있던지 대화를 일방적으로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를 실재로 받아들이고 그 실재를 텍스트로 놓고 대화를 해석의 방편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종교의 해석을 절대적인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웨슬리 아리아라자(S. Wesley Ariarajah)는 주장하기를 기독교를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게 보는 것은 영적 테러리즘이라고 한다. 그는 배타적 성경 구절들을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절대적 의미의 진리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니, 단순히 바울이나 성경이 그렇게 말했다고 예수가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이 믿는 기준에 의해 비슷한 주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절대적 주장은 단순히 상대적일 뿐이라고 아리아라자는 주장한다.

그러나 종교 다원주의가 풀어야 할 두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여러 종교가 어떻게 다 정당 혹은 타당(legitimate)할 수 있는가? 즉 다원성을 위하여 각 개체성 (particularity)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둘째로 어떤 개체성이 주어진다고 해도 상호 연관성이(consensus)가 없으면 상대주의에 빠지게 될 수 있지 않은가? 즉 서로간의 아무런 관계없이 개인적 특수성만을 가지면 페쇄적이 될 수 있고, 아니면 너도 맞고 나도 맞고 하는 무관심적 상대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떤 절대적 기준이나 추구하는 바가 있어야 하거나, 아니면 모든 종교가 중립적인 열림(openness)을 순수하게 유지해야 한다. 다원주의는 결코 어떤 절대적인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순수한 열림이 가능한 것인지 의심할 만하다. 왜냐면 그 열림을 유지하는 데는 어떤 기준이나 조건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종교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가 관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절대적이지는 않아도 나름대로의 진리성 혹은 정당성(legitimacy)을 모든 종교들이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떤 모양이든 각 종교의 진리성 혹은 정당성이 유지되지 않으면 다원주의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각 종교의 진리성 혹은 정당성은 다른 종교를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나 허용되는 것이다. 각 종교들의 유일성 혹은 절대성은 불허한다 하면서도 다원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각 종교들이 어떤 식으로든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성을 부정하지만 한편 상대적 차원에서 자기 종교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다원주의를 위해 각 종교의 상대적 진리성 내지는 정당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 진리성 혹은 정당성이 가능한지 의심스럽다. 즉 모든 종교들이 다원주의 아래에서 나름대로의 진리성 혹은 정당성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실 ‘상대적 진리성’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왜냐면 진리성이란 절대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당성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떤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이러한 모순을 탈피하기 위해 각 종교들의 진리성 보다는 다원주의 자체가 진리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도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한다. 만약 근거가 없다면 ‘다원주의 자체가 진리다’라는 말이나 ‘다원주의는 진리가 아니다’라는 말의 차이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다원주의 자체가 진리라는 것을 어떤 식이든 증명해 보였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는 많은 종교적 신념들 중에 한가지 일 뿐이다. 이러한 신념은 상대적 신념이 아니라 절대적 신념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다원주의가 정죄한 절대주의를 스스로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 다원주의도 일종의 한 종교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가 진리이기 위해서는 그것의 절대성이 주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다원주의도 어떤 절대적 기준이나 신념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다원주의가 원하는 ‘100% 순수한 열림’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다 옳을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다원주의는 무의미한 상대주의에 빠지던가 아니면 다원주의를 포함해서 각 종교들이 자신들만의 절대성을 주장함으로 서로간의 어떤 반위성(antithesis)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기독교와 불교가 반위적이고 불교와 이슬람교이 반위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다원주의가 ‘궁극적 실재’ 혹은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도 또 하나의 반위적 특징을 지닌 종교적 신념 일 뿐이다. 혹 다원주의적 발상에서 모든 종교는 진리라고 주장한다면 굳이 진리를 위한 대화를 할 필요 가 있겠는가? 즉 다원주의를 굳이 주장할 필요가 있겠는가? 어떤 면에서는 반위적 종교의 모습이 더 종교적이라 할 수 있다. 다원주의라는 미명아래 모든 종교를 사로잡으려는 것은 오히려 나름대로 절대성을 추구하려는 각 종교들의 진지한 종교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또한 종교들의 고유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믿는 신앙은 다른 종교들과 같은 범주에 속한 것이 아니다).

종교 다원주의는 새로운 사상이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다신론주의이며, 구약이나 신약 당시 사회에서도 다원주의적 종교의 세계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성경은 이러한 것을 우상으로 정죄하고 있다. 또한 다원주의에서 추구하는 궁극성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떤 나름대로의 ‘초월적 절대성’이다. 이러한 절대성은 인간이 추론(postulate)한 것에 불과하다. 또한 다원주의는 모든 것을 관용하는 것 같지만, 다원주의를 믿지 않는 자는 가차없이 정죄한다. 기독교에서처럼 사랑이라는 것이 없다. 기독교는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동시에 모든 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다원주의는 다른 모든 종교가 다원주의가 되기를 원하면서 그 다원주의(즉 다원주의라는 종교)는 다른 종교가 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독단을 갖고 있다. 다원주의는 ‘상생(相生)’이 아니라 사실은 ‘독생(獨生)’인 것이다. 이런 독단적인 발상은 인간의 자율성을 기초로 한 인본주의에 근거한 것에 불과하다.

고후2:14-16에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라고 말씀한다. 복음은 구원 얻는 자들에게만 향기가 아니다. 망하는 자들에게도 향기가 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다른 종교들에게는 악취요 우리에게만 향기가 아니라 모두에게 향기가 되는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이 향기가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 진리 자체가 타종교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진리는 그들에게도 구원의 소식인 것이다. 단지 그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그들 스스로 멸망을 쌓고 있는 것이다. 모든 종교들의 희망은 종교 다원주의가 아니다. 복음뿐이다. 참 진리의 향기를 맡는 길 뿐이다. 진리 자체가 동시에 악취이며 향기일 수가 없다. 진리는 언제나 향기일 뿐이다. 문제는 종교 다원주의자들에게 있는 것이지 기독교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벨리알이 동시에 참 신이 될 수 없다. 동시에 둘이 참 신이라고 하는 것은 참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타종교에도 전해야 한다. 이것만이 그들이 살길인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상생(相生)이 아니라 전멸(全滅)인 것이다.

기독교는 우리만 살자는 것이 아니다. 다 같이 살자는 것이다.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결혼(結婚)


세계 3대 악처

세계 3대 악처가 있다.
1.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
2.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
3. 욥의 아내 시티스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의 일화

하루는 크산티페가 책을 읽고 있는 소크라테스에게 마구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그러더니 물 한 바가지를 남편의 머리에 부어 버렸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기가 막혔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면 비가 오는 법이지"

소크라테스의 응답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질문하기를 "선생님, 결혼을 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 좋을까요?"
이때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좋은 아내를 만난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나쁜 아내를 만난 사람은 철학자가 될 것이다.

결론은 결혼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할까요?
결혼을 하라는 것입니다.
결혼하여 행복하든지 아니면 철학자가 되라는 교훈입니다.

* 자료출처 / 플라톤 심포지움(향연)이라는 저서에서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의 일화

소피아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려는 톨스토이와 갈등이 극에 달했다.
결국 톨스토이는 82세의 나이에  집을 나가 여행중에 객사했다.

욥의 아내 시티스의 일화

악처들 중에서 성경의 인물인 욥의 아내가 포함되었다는것이 흥미롭다.

욥의 아내는 욥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기 2:9)

참으로 모질고 악한 말이다.
갑작스럽게 닥친 재난으로 모든 재산과 자녀들까지 잃어버린 욥에게 이런 말을 하는 여자는 악처가 맞다.

Teaching Supervisor였던 Sandra가 반발하며 말했다.

"목사님, 저는 욥의 아내가 충분히 이해가 돼요.
사랑하는 자식들을 다 잃은 어머니가 그렇게 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냥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면 그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엄마지요"


세계 5대 악처
크산티페 - 소크라테스,
콘스탄체 - 모차르트,
소피아 - 톨스토이,
욥 - 시티스,
웨슬리 - 메리 바제일


세계 3대 악처라고 하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부인 <소피아>와 고전 음악의 대가인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 그리고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부인인 <크산티페>가 유명하다.

우리에게 이렇게 전설적이고 훌륭한 위인들의 부인들이 왜 이래?

톨스토이의 걸작 ‘안나카레리나’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자의 이유로 불행하다.”
아마도 이 구절은 톨스토이 본인의 경험담일지도 모른다.

<소피아>는 톨스토이를 따르는 제자들에 대한 질투와 유산문제로 자살하겠다고 협박하며 톨스토이의 애를 태웠다.
끝내 참다못한 톨스토이는 가출하여 <아스타포보>역에서 죽게 되었고, 그녀는 남편을 내 쫒아 죽게 만든 악처가 되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녀의 질투심과 톨스토이에 대한 협박이 나쁜 결과를 가지고 오게 한 악처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소피아는 남편을 도와 ‘전쟁과 평화’를 6번 씩 옮겨 적는 등, 톨스토이의 작품은 그녀의 손을 통해 태어났다.
톨스토이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대단한 악필이었지만 그녀만은 그의 글을 알아 볼 수 있었다.
톨스토이는 방탕한 바람둥이였지만 출산과 육아는 소피아만의 문제로 억척스레 가정을 지켜온 장본인이었다.

<콘스탄체>. 모차르트의 아내도 악처로 회자되는 인물 중에서 빠지지 않는다.
그녀의 악행은 매우 심한 낭비벽이었다. 남편 사후 6명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라지만, 모차르트의 자필 악보나 서책을 팔아서 생활했다.
남편이 죽고 새로운 남자 ‘닛센’과 재혼을 한 이유로 악처로 불려졌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말로는 “콘스탄체는 교양이 높고 가사에도 열심인 밝은 성격의 여성”이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모차르트 자신이 아내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편지를 많이 남기고 있었다.
사실 당대 음악가의 아내 모두 악처라는 평을 들었고, 다만 우리에게 바하의 아내 <빌케>, 슈만의 아내 <클라라>만이 현모양처로 남아있으니 후대의 콘스탄체의 평가는 박한 것이 아닌가.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가 아닐까?
친구 좋아하는 소크라테스에게 친구들 앞에서 바가지로 머리에 물을 쏟아 부은 사건은 유명해서 많은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벼락 뒤에는 비가 내리기 마련이지.” 라는 명언이 유명하게 전해져 온다.
그리고 아내에 대한 몇 개의 명언이 또한 유명하다.

“새미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말을 하지 않는 아내가 있기 때문에.” 
“꼭 결혼하세요. 좋은 아내를 가지면 행복해 질 수 있고, 나쁜 아내를 가지면 나처럼 철학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과 잘 해내면 누구와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청년사역연구소 대표 이상갑 목사가 8일 페이스북 페이지에 '결혼은 이벤트가 아닌 삶'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이 글에서 이 목사는 "청년들이 결혼을 앞두고 주례자로서 만나게 될 때 꼭 해 주는 말이 있다.

"결혼은 이벤트가 아닌 삶입니다."

그는 "누구나 사랑하여 결혼한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눈이 열려지면서 속았다고 한다.
속은 것이 아니라 제대로 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된 것이다.
사랑에 눈 먼 상태에서 드디어 눈이 뜨여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부터 문제가 생긴다."

이어 "내가 기대했던 결혼이 아니라는 것"이라며 "내가 생각했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꿈꾸던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은 다르다. 연애와 결혼의 차이처럼 말이다. 연애라는 것은 내가 보여 주고 싶은 것만 보여 주기 쉽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그런데 결혼이라는 것은 일시적으로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끝나는 쇼가 아니다. 함께 살아가는 일상이다"라며 "여러분은 셀카와 몰카의 차이를 알 것이다. 여러분은 셀카는 편할 것이다. 그러나 몰카는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고 했다.

또 "셀카는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준다. 싫으면 바로 삭제해 버린다. 몰카는 당신이 보여주기 싫은 은밀한 사생활도 다 드러낸다. 내 맘대로 삭제도 되지 않다"며 "연애는 셀카에 가깝지만 결혼 생활은 모두 노출되는 24시간 촬영되고 있는 공개 스튜디오와 같다. 모든 것이 투명하게 다 드러난다"고 했다.

이 목사는 결혼이란 동행이라고 분명히 했다. 그는 "결혼이란 누군가 당신을 24시간 당신과 함께 동행을 하는 것"이라며 "그런 면에서 결혼식은 이벤트지만 결혼이란 삶 그 자체"라고 했다.

결혼식과 결혼생활의 차이도 짚고 넘어갔다. 이 목사는 "결혼식은 이벤트다. 화려한 장식과 조명, 하얀 웨딩드레스의 아름다움, 얼굴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커버하는 놀라운 화장술까지 동원하여 모든 면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있게 표현하는 자리가 결혼식 자리다"라고 했다. 이어 "그런데 결혼생활은 삶이다. 상대방의 장점뿐 아니라 단점까지 그대로 노출되는 자리다. 성질, 성깔, 성품이 그대로 드러난다"며 "그래서 결혼생활이란 보여주고 싶은 것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보여주기 싫은 부분까지 고스란히 노출 시켜야 하는 다소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자리"라고 했다.

두 사람이 만나 사랑하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의 차이도 드러냈다. 그는 "연애는 두 사람의 문제다. 결혼은 가정과 가정이 만나고 가문과 가문이 만나고 친구와 친구가 만나면서 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복잡하게 어우러진 자리인 것이다"라며 "그런데 바로 그러한 관계 속에서 나의 자리를 지키고 나의 자리를 찾아가면서 삶의 모순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자리가 결혼생활이다"라고 했다.

이어 "그런 면에서 사랑한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은 다르다. 사랑한다는 것은 좋은 감정과 좋은 느낌과 좋은 포장이 가득하다. 살아간다는 것은 상대의 아픔과 상처와 긴장과 갈등과 지난 온 흔적들과 직면하면서 서로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돕는 배필로 함께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라는 창세기 2장 18절 말씀을 인용한 그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결혼이란 삶의 자리에서 서로를 책임지는 것이다. 너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내가 함께 감당하는 자리가 함께 살아가는 삶의 자리다"라며 "그래서 결혼은 환상이 아닌 삶의 실제다. 그 자리에 함께하면서 씨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성숙되어져 간다. 씨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다. 은혜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다. 그래서 나와 너 사이에 늘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란 공통분모가 있어서 모순으로 가득한 삶의 현실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며 "사랑하는 이여 결혼식은 이벤트지만 결혼은 삶이다"라고 덧붙였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3500#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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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에 물어야 할 13가지 질문


결혼과 관련된 일에서라면, 모르는 것이 정말로 독이 될 수 있다.

때로는 쑥스럽다는 이유로, 때로는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또 연애의 신비감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에, 많은 커플이 안정적인 결혼의 기반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될 어려운 질문을 서로에게 던지지 않는다는 것이 관계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요즘 사람들은 결혼을 생각할 때 함께 아이를 키우고 안정적인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에 더해 배우자가 가장 친한 친구이자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든든한 조력자이기를 기대한다. 헐리우드가 일조해 만들어낸 이러한 로맨틱코미디 수준의 기대치를 만족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연애 초기에 서로가 잘 맞는 상대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주고받을 수 있는 질문은 수도 없이 많겠지만, 솔직하게 인정하자. 실제로 그러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겠는가.

“결혼 전에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결혼 생활을 해가는 와중에 해결해야 하는 겁니다.” 미 관계개선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Relationship Enhancement) 로버트 스쿠카(Robert Scuka) 소장의 말이다. 수십 년을 같이 살면서 무언가를 계속 숨기기는 쉽지 않다. 결혼 전에 충분히 대화하는 것을 꺼린다면, 살아가면서 나중에 실망할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다음에서 이어질 사적이고, 조금 어색할 수도 있는 질문들은 솔직한 대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너무 늦기 전에 상대방에게 비밀을 털어놓을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1. 1. 당신의 가족은 의견 충돌이 있을 때 접시를 던졌나,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눴나, 아니면 입을 다물고 문제를 회피해버렸나?

    커플연구소(Couples Institute)의 설립자인 피터 피어슨(Peter Pearson)은 관계의 성공이 서로 간의 차이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성향은 가족 내 역학 관계에 영향을 받으므로, 이 질문을 통해 상대가 부모의 갈등 해결 방식을 모방할지, 부모의 방식 대신 다른 길을 택할지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 피어슨의 설명.

  2. 2. 아이를 낳을 것인가? 아이가 생긴다면 직접 기저귀를 갈아줄 수 있나?

    이혼/관계 컨설턴트 데비 마르티네스(Debbie Martinez)는 자녀 계획에 관련된 질문을 주고받을 때, 상대가 듣고 싶어 할 것 같은 말만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결혼 전, 아이를 원하는지에 대해 솔직하게 대화해야 한다. 낳는다면 몇 명이나 낳을 것인가? 어느 시점에 아이를 갖기를 원하는가? 부모로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어떤 그림을 갖고 있는가? 섹스/결혼 테라피스트인 마티 클라인(Marty Klein)은 임신 계획이 생기기 전까지 어떤 피임법을 택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3. 3. 이전 연인과의 경험이 우리 관계에 도움이 될 것인가, 걸림돌이 될 것인가?

    버지니아대학의 전국결혼프로젝트(National Marriage Project)의 책임자 브래드포드 윌콕스(Bradford Wilcox) 박사는 자신의 연구소에서 지원했던 한 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과거 진지한 연애를 여러 번 한 경험이 이혼 가능성을 높이고 결혼 생활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과거 진지한 연해 경험이 많다는 것은 곧 심각한 이별을 여러 번 경험했다는 것이고, 무의식중에 현재 상대를 과거 상대와 비교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윌콕스 박사는 이 문제를 관계 초기에 미리 거론하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마티 클라인 박사는 사람들이 “과거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망설”이면서도, 상대의 과거에 질투를 느끼거나 과거를 비난하려 들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런 대화를 친밀하면서도 생산적이고 애정어린 방식으로 나누는 방법은 상대에게도 ‘우리’ 이전의 삶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뿐입니다.”



  4. 4. 종교는 얼마나 중요한가? 종교와 관련된 명절은 기념한다면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

    두 사람의 종교적 배경이 서로 다르다면, 결혼 후 각자 따로 종교 생활을 영위할 것인가? 스쿠카 박사는 관계개선연구소 소장으로서, 커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솔직한 대화를 나눌 것을 장려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윌콕스 박사는 특히 아이가 생기면 부부 사이에 종교 문제로 갈등이 생겨날 가능성이 더 커진다고 지적한다. 만일 자녀를 갖기로 했다면 종교 관련 교육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하며, 미리 계획을 세우는 편이 낫다는 조언이다.



  5. 5. 나의 빚은 곧 너의 빚? 나의 채무를 대신 갚아줄 용의가 있나?

    이혼 전문 변호사 프레드릭 헤르츠(Frederick Hertz)는 상대가 재정적 자립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지, 부부라도 자산 관리는 각각 하기를 원하는지를 알아봐야 한다고 말한다. 채무 상황을 공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커플 간 소득 차이가 현격한 경우에는, 각자의 소득 비율에 따라 기본적인 예산을 꾸리라는 것이 스쿠카 박사의 조언이다. 재정 공유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커플이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는 것.

  6. 6. 차 한 대, 소파 하나, 신발 한 켤레에 쓸 수 있는 최대 액수는?

    경제관념과 소비 성향이 비슷한지를 알아보는 것도 필수다. 헤르츠 변호사가 추천하는 지표는 자동차 구입에 쓸 수 있는 액수다. 각자가 유별나게 큰돈을 쓰는 품목이 있다면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도 좋은 대화법이라고.



  7. 7. 상대가 나 없이 혼자 하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PAIRS (Practical Application of Intimate Relationship Skills) 친밀한 관계 기술의 실질적 적용) 프로그램의 책임자 세스 아이젠버그(Seth Eisenberg)는 많은 사람이 결혼을 앞두고 배우자와 파트너십을 쌓아가기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삶의 일정 영역에서 자율성을 지키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즉, 친구나 취미 등을 배우자와 공유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갈등의 소지가 되거나, 상대방에게 거부당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클라인 박사는 커플 사이에서도 “사생활”의 개념이 서로 다를 수 있다며, 이 문제에 관해서도 대화를 나눠야 한다고 말한다. 윌콕스 박사는 상대에게 언제 가장 혼자 있고 싶은지에 대해서 물어보라고 조언한다.



  8. 8. 상대의 부모를 좋아하는가?

    당신과 배우자가 합심해서 공동 전선을 펼칠 수만 있다면, 배우자의 부모와 관계가 좋지 않더라도 잘 헤쳐나갈 수 있다고 스쿠카 박사는 말한다. 만일 배우자가 자기 부모와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려 한다면 이는 멀리 내다봤을 때 부부 관계가 나빠질 징조일 수도 있다. 피어슨 박사는 자기 부모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잘 생각해보면 미래 부부 관계에서의 친밀도나 거리를 두는 패턴이 어떠할지 점쳐볼 수 있다고 말한다.

  9. 9. 섹스는 얼마나 중요한가?

    세스 아이젠버그는 요즘 커플들이 과거와는 달리 결혼 후에도 계속해서 배우자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기를 기대한다고 말한다. 클라인 박사는 배우자가 섹스에서 찾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또 관계는 얼마나 자주 하기를 원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건강한 관계의 일환이라고 말한다. 한 사람은 쾌락을, 다른 한 사람은 젊어지는 기분을 추구하는 식으로, 부부간 섹스를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서로 다르다면 어느 정도 타협을 통해 두 사람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10. 10.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시시덕거리는 것은 어느 선까지 용인할 수 있는가? 포르노 시청에 대한 의견은?

    클라인 박사는 커플들에게 포르노, 다른 사람과의 관계, 성적인 독점에 대한 기대치에 대해 의견을 나눌 것을 권장한다. 이런 주제에 대한 부부간의 합의는 시간이 지나면 변할 수도 있고, 또 실제로 변할 가능성이 크지만, 관계 초기에 이런 이야기를 편히 나눌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놓는 것이 좋다. 성적 독점에 대한 이야기도 다른 일상적인 문제와 마찬가지로 논의되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게 클라인 박사의 의견. 그래야 한쪽이 화가 나기 전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피어슨 박사는 상대에게 포르노에 대한 생각을 대놓고 물어보라고 제안한다. 많은 커플이 관계 초기에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나중에 이 문제가 갈등의 요인이 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고.



  11. 11. 내가 사랑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식을 상대가 잘 알고 있는가?

    게리 채프먼(Gary Chapman)의 1992년 작 “다섯 가지 사랑 언어(The 5 Love Languages)”는 결혼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한 사랑 표현법 분류 방식을 소개했다. 데비 마르티네스는 결혼을 앞둔 고객들에게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 리스트(긍정적인 표현으로 인정하기, 좋은 시간 함께 보내기, 선물 받기, 봉사하기, 신체 접촉하기)를 건네주고, 각자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두 가지 표현법을 순서대로 표시하도록 한다. 그리고 파트너가 가장 익숙하게 느낄 것 같은 표현법도 순서대로 두 가지를 선택하도록 한 후, 이에 대해 대화를 나누도록 한다. 세스 아이젠버그는 커플이 자신들에게 잘 맞는 방식으로 관계를 키워나갈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12. 12. 상대가 나에 대해 존경하는 점은 무엇인가? 상대가 견디지 못하는 것은?

    어려움이 서로에 대한 사랑을 압도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런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뉴욕윤리문화회(New York Society for Ethical Culture)를 이끄는 앤 클레이슨(Anne Klaeysen)은 두 번째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는 커플이 거의 없다고 말한다. 이상적으로라면 결혼은 평생을 약속하는 것이며, 많은 사람이 자신의 관계를 묘사할 때 말하는 것처럼 “죽이 잘 맞는”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결혼이란 초반의 “맘에 꼭 든다는 느낌”보다는 깊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13. 13. 10년 후에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면 커플이 관계의 최종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눈앞의 갈등을 잘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 세스 아이젠버그의 조언이다. 윌콕스 박사는 이 질문을 던져보면 상대가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이혼을 생각할지, 아니면 어떤 일이 있어도 결혼은 평생 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알아볼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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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브리 공동체


라브리공동체(L'Abri, 쉼터)

복음주의 기독교 공동체조직이다.
1955년 6월 5일 프란시스 쉐퍼와 그의 부인 에딧스위스 휴모즈 수르 올온에 세운 공동체이다.
여행자를 위한 사역지로 또 철학적 종교적 믿음을 논의하기 위한 포럼으로서 자신들의 알프스 집을 개방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오늘날 전 세계 여러 지역의 라브리공동체는 사람들이 여행할 때 머물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라브리 국제 주소록

https://www.labri.kr/etc/international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네 명의 마리아(Four Mary in New Testament)


1.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일찍이 창세로부터 계시되어온 하나님의 구원은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다. 그러나 이와 같이 구원의 정점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 육신 하는 데에는 한 여인의 희생적인 순종이 있었다. 한 때는 세상을 풍미하던 다윗 가문 출신으로 벽촌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순박한 처녀로써 수 천년 동안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열망하며 기다리던 메시야를 잉태하게 된 마리아인 것이다.

남자와 장래를 약속하고 새로운 생활에 대한 꿈에 부풀어 있는 마리아에게 있어 임신이란 모진 수모와 불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이는 율법의 시대에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각오하여야 함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을 알면서도 마리아는 자신의 잉태 사실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마리아의 겸손한 태도는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확고한 신앙의 결단이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마리아는 무사히 약혼자 요셉과 결혼하고 아기 예수님을 낳아 평범한 생활을 하게 된다.

예수님이 메시아 이심을 알고 있었던 마리아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인간적인 요구를 하는 조급함을 보인다. 또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건강을 돌보지 않고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예수님을 염려하여 집으로 데리고 가려는 불신앙의 모습도 보인다. 육신에 속한 자로서의 본능적인 모성과 메시아에 대한 신앙이 교차하고 있는 마리아의 마음에 갈등과 혼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세상 만민을 구원할 메시아를 낳았지만 마리아 역시 율법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러한 마리아에게 일생 최대의 사건이 발생한다. 사랑하는 아들 예수가 사형을 당하게 된 것이다. 삶의 한 기둥이었던 아들이 처형되는 광경을 지켜보는 그 시간은 마리아에게 가장 처절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최악의 상황은 최상의 축복의 문으로 들어서는 첫걸음이었다.

갈보리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는 마리아의 마음에는 자신의 아들이 아닌 구세주의 모습이 새겨진다. 그녀의 아들 예수의 육신은 처참하게 죽어갔지만 그녀의 심령 속에 영원한 메시아로 살아있게 된 것이다.

그 후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마리아는 성령 충만함을 받고 새 사람이 되어 참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을 위하여 믿음으로 선택한 고난의 길은 영광으로 이어진다. 선한 것이라고는 날 것 같지 않던 나사렛에서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묻혀 있던 마리아가 선택한 고난의 길은 영생의 문으로 들어서는 입구였다.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리아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랐듯이 오늘날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도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실천할 때 생명책에 그 이름이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2.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

성경에 그 이름을 남긴 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신은 물론 명단 속에서 그의 온 집안까지 구원으로 인도한 신앙인들이 있다.

그들의 명단 속에서 우리는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성경에는 마리아에 대하여 오직 한 번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행12:12).  그러나 우리는 단 한 군데에 농축되어 있는 마리아의 신실한 삶을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다. 마리아는 그녀의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구원의 장을 제공하고 아들 마가를 주님의 종으로 키움으로써 초대 교회의 숨은 공로자 역할을 한 여인이다. 바울의 동역자인 바나바의 누님이기도 한 마리아는 남편과 사별하고 예루살렘에서 홀로 자녀를 키우며 살았다. 재산은 많았으나 과부로서 쓸쓸히 살 수밖에 없는 처지인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심으로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또한 마리아에게는 무엇보다도 주 안에서 신앙으로 양육하는 아들 마가가 있었기에 오히려 보람과 기대에 찬 나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 경건한 마리아는 일찍이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활용하여 드리기를 자원하였다. 집을 개방하고 손님 접대하기에 인색하지 않은 마리아의 [실천하는 신앙]은 예수님의 방문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마리아의 집의 큰 다락방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시는 장소가 되었다. 마리아 스스로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예수님께 장소를 제공하고 후하게 대접하던 그녀의 행위가 주님의 성만찬을 예비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또한 그 다락방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던 성령 강림이 실현된 역사적인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 마리아의 집은 모일 장소가 없던 성도들에게 예배처로 제공되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믿음과 용기는 모든 이해타산과 생사를 초월할 수 있었다. 마리아의 집에는 성도들은 물론 사도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고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의 아들 마가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집안 일을 돕는 하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접하게 함으로써 식구들 모두가 구원받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

드러내지 않고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생활 가운데 실천하며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린 마리아의 헌신은 믿음의 결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의 아름다운 믿음에 축복하시어 마리아 자신은 물론 그 자녀와 온 집을 영화롭게 하셨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 집의 주인이 되시어 함께 하시고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 마리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여 주신 모든 것을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돌려 드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로 내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막달라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명의 마리아 가운데 예수님의 사역을 도운 막달라(Magdalene)출신의 마리아를 일컫는다.

갈릴리 호수 서쪽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막달라는 염색업과 직물업이 발달한 도시로서 특히 다른 지역들보다 도덕적으로 부패한 곳이었다. 이러한 곳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마리아의 생활에 대하여 성경은 아무런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날 당시 일곱 귀신에 들린 채 고향을 떠나 방랑하던 그녀의 처지를 통해 그녀의 생활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많은 괴로움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마리아의 영혼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인생의 장을 펼치게 된다.

그녀를 방탕한 길로 몰아 넣던 일곱 귀신이 다 떠나가고 육신의 병은 물론 정신적인 이상까지 깨끗이 고침을 받아 순수하고 온전한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마귀의 종”에서 해방되어 “주님의 종”으로 충성을 다하는 마리아의 헌신적인 새 삶이 시작된 것이다.

큰 은혜를 받고 많은 용서받은 사람은 진실 한 사랑으로 보답한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마리아는 늘 주님의 곁을 따르며 자신의 소유를 모두 바쳐 그 사역을 돕는다. 고향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하고 있는 여자로서 기업이 있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3년 반 동안 계속되는 예수님의 사역을 도왔다는 것은 주님을 향한 그녀의 사랑과 충성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준다.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일관된 사랑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마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한 위기의 상황에서 마리아는 아무 두려움 없이 “죽음의 자리”에 동참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아직 마리아에게는 사랑하는 한 인간의 죽음이었을 뿐이다.

그 후 예수님의 묘를 지키던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목격하는 영광을 누린다. 다시 살아나시어서 자신의 이름을 정답게 불러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마리아는 놀라움과 기쁨에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나 죄 중에 잉태되어 죄악 중에 출생한 한 죄인일 뿐인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본순간 “랍오니”(선생이라는 뜻)라고 부른다.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육에 거한 인간”은 자신을 구원해 주실 메시야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로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보인 마리아가 오순절날 성령 강림을 기다리며 기도하던 여인들 가운데 함께 있을 것임을 우리는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여인으로서의 평범한 행복을 추구하기 보다는 좁고 험난한 생명의 길로 택한 마리아의 이름은 예수님을 따르던 여성들 가운데 항상 첫번째로 언급된다. 마리아가 경험한 것처럼 오늘날도 귀신을 쫓아내고 병고침을 받는 신유의 역사는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

영혼이 잘 되고 강건해지는 축복을 믿는 자들 모두가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그의 변화된 삶을 통해 보어주듯이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된 우리들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주님께 헌신하고 사랑을 실천할 때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

4. 베다니의 마리아 

예루살렘에서 약 3km 떨어져 있는 베다니는 문둥병자와 소외된 사람들이 격리되어 사는 강림산 기슭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이처럼 사회로부터 냉대받은 베다니 마을에서 마리아는 마르다와 나사로와 함께 단촐하게 살고 있었다. 언니인 마르다는 실제적이고 활동적이었던 반면 사려깊고 내성적인 성격을 소유한 마리아는 영적으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집안 일을 도우며 마음 속에 항상 메시야를 소망하던 마리아의 생활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급격히 변화되기 시작했다. 베다니에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마리아는 메마른 심령에 생명의 생수를 공급받게 된 것이다. 능력있는 천국 복음을 증거하시고 많은 이사와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리아에게 인간의 격이 아닌 메시야의 말씀으로 받아 들여졌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영적인 제자로서 신앙을 성숙시켜 가고 있던 마리아에게 그 믿음을 흔들어보는 일이 발생하였다. 집안의 생계를 맡고 있는 오빠 나사로가 중병이 들어 죽은 것이다. 가장 역할을 하던 나사로의 죽음은 마리아에게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비탄에 잠긴 채 눈물을 토해내는 마리아의 호소는 예수님의 마음에 깊은 감동으로 다가가서 마침내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낳았다.

이 사건을 통하여 마리아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과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생겼다. 마리아의 마음 깊이 뿌리 내린 믿음은 현실적인 행동으로 표출된다.

자신의 삶 속에서 구원의 역사를 펼쳐 보여주시는 주님께 마리아는 가장 귀중한 소유를 아낌없이 드림으로 감사와 믿음을 나타내었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베다니에 오신 예수님께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주님의 머리와 발에 부음으로써 신앙고백을 대신한 것이다. 결혼 지참금으로 사용할 향유를 부은 것은 곧 여자로서의 행복한 미래를 포기하고 주님만을 사랑하며 헌신하겠다는 의지였다. 또한 이것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기도 했다.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 영적 통찰력이 개발된 마리아는 주님의 제자들조차 이해하지 못한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마리아의 행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 (마태복음 26:13)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소외받는 비천한 여인 마리아가 그 이름이 영원토록 기억되는 존귀한 신앙으로 남게 된 것은, 믿는 자 모두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영의 양식인 생명의 말씀을 늘 대하고 이를 통하여 주님과 끊임없이 교제하여야 함을 깨닫게 한다. 또한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리고 범사에 감사의 향기를 발하는 생활을 해야 함을 가르쳐준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넘치는 성도를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는 기쁨으로 칭찬하며 맞아 주실 것이다



6. 25(1950. 6. 25-1953. 7. 27) 3년 1개월 2일


6.25전쟁은 북한의 남한 침공으로 시작됐습니다. 
새벽 4시, 북한 인민군이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해 온 것이 그 시작입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2일 동안 벌어진 전쟁입니다. 
먼저 한국군 사망자 13만 8천 여명, 부상자 45만 여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하면 60만 9천 여명,
북한군 사망자와 부상자 52만 여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 80만 명,
유엔군 사망자 5만 8천 여명, 부상자 48만 여명, 실종자와 포로까지 포함하면 총 54만 6천 여명,
중공군 사망자 13만 6천 여명, 부상자 20만 8천 여명, 실종자와 포로, 비 전투 사상자까지 모두 포함 97만 3천 여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한국 전쟁은 그러나 군인보다 민간인 사망자가 더 많았던 전쟁으로도 기억되고 있습니다. 
남북한의 민간인 사망자 통계 살펴보겠습니다.

남한 민간인 사망자 24만 5천 여명, 학살된 민간인 13만 여명, 부상 23만 명, 납치 8만 5천 여명, 행방불명 30만 3천여 명으로 모두 100만 여명의 남한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한국 국방부와 군사 편찬 연구소의 자료입니다. 

그러나 한국 전쟁 유족회와 학자들은 학살된 한국인만 1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1953년 북한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북한 민간인 사망자는 28만 2천명, 실종자 79만 6천 명 입니다. 
이것은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의 1/5이 피해를 입었으며, 개인별로 보면 한 가족에 1명 이상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6.25 전쟁은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큰 피해를 남겼습니다. 
남한의 경우 일반 공업 시설의 40%, 북한은 전력의 74%, 연료 공업 89%, 화학공업의 70%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자유대한민국의 위기


제1차 위기 / 1945년부터 1950년
이승만 : 남로당 박헌영

이승만의 승리

제2차 위기 / 6. 25 전쟁

전쟁 전 남파 간첩 성시백에 의하여 남한 사회 조직을 장악하였다.
국회 부의장, 국방부 장관 최병덕, 육군참모총장 신성모
언론, 돈, 장악

미군 철수 1949년 6월 30일

에치슨국무장관의 발언 : 한반도에는 관심이 없다.
에치슨 라인 발표

애치슨 라인 선언(Acheson line declaration, 애치슨 선언)
1950년 1월 12일에 발표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딘 애치슨에 의해 발표된 선언이다.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은 그 선언에서 발표된 미국의 동북아시아에 대한 극동방위선을 의미한다.

1950년 1월 10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의 비밀회담에 참석한 애치슨은 미국의 극동방위선이 타이완의 동쪽 즉, 일본 오키나와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이라고 말하였다. 이틀 후(1월 12일), 외교위원장 톰 코널리는 이를 대외에 발표하였다.

애치슨은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열린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 참석하여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스탈린마오쩌둥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동북아시아 방위선을 재확인하는 발언을 하였다. 태평양에서 미국의 지역방위선을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대한민국중화민국, 인도차이나 반도가 미국의 방위선에서 사실상 제외되었다. 이 선언은 중화민국 정부가 국공내전으로 인하여 타이완으로 천도(국부천대)한 것에 대한 미국 조야의 충격을 반영한 것이다. 더욱이 한반도는 당시까지만해도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한국을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하게 됐다는 것이 후일의 평가다.[2]

애치슨의 이같은 선언 이후, 대한민국의 임병직 외무부장관은 즉시 주한 미국대사인 존 무초를 불러 애치슨 선언의 진의를 해명해 달라고 요구했다. 또 장면 대사에게 훈령을 보내 애치슨 발언의 경위를 신속히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애치슨은 한국이 미국의 극동방위권에서 제외된 이유에 대해 한마디 회답도 보내주지 않았다.[3] 이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애치슨의 선언에 그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한반도에서 소련군과 전쟁을 하면 심각한 피해가 있으므로 일본, 대만, 필리핀을 중심으로 전선을 형성한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빌리그래함 목사"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긴급 전화를 연결하여 한국에는 기독교인 50만명이 있으므로 당장 미군을 파송하라고 압박하므로 긴급하게 미군이 파송되어 한반도에 자유가 유지될 수 있었다.

제3차 위기 / 2021년


청와대 장악
국회 장악
언론 및 공중파 장악
돈을 장악(삼성 이재용 감옥)







정교 분리 원칙


대한민국 헌법 제20조

제1항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제2항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교회는 가장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고자 정치 투쟁을 할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국가를 대신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이성적인 토론의 길로 그러한 투쟁에 들어서야 하며, 그 정신적인 힘을 다시 일깨워야 합니다.
그러한 힘이 없으면, 언제나 희생을 요구하는 정의는 구현될 수도 없고 진보할 수도 없습니다.
정의로운 사회는 교회가 아닌 정치를 통해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공동선의 요구에 마음을 열고 의지를 불러일으키도록, 교회는 정의 증진을 위한 활동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 베네딕토 16세. 회칙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 2005. 12. 25, 28항 중에서









정교분리(政敎分離)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정치와 종교, 제도론적으로는 국가(정부)와 종교단체(교회)의 분리를 주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교분리의 출발은 미국헌법이 만들어질 때 국교를 부인하는데서 시작된다.
정교분리는 자유의 원리이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이용어 개념은 원래 미국 헌법 수정 1조 교회와 국가의 분리라는 말로 처음 사용됨으로써 이후 세계적으로 일반화되어 갔다.

하지만 서유럽과 북미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교회 –국가의 분리라는 말보다 ‘정교분리’가 더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정교분리란 추상적으로 국가는 국민의 세속적 , 현세적 생활에만 관여할 수 있고 내면적, 신앙적 생활은 국민의 자율에 맡겨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 내지 비종교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개념이 지닌 추상성 때문에 ‘정교분리’는 ‘정치의 종교에 대한 불간섭’이 아니라 ‘교회의 정치에 대한 불간섭’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개념(槪念)

정교분리란 정치와 종교, 국가와 교회 사원과의 분리의 원칙을 말하는데, 이것은 국가는 국민의 세속적(世俗的)· 현세적 생활에만 관여할 일이지 국민의 신앙적·내면적 생활에는 간섭해서는 안 된다.

즉 국가는 종교활동을 행하든가 특정의 종교단체를 지지해서는 안 되며 종교단체도 정치권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정교분리의 근거에 대하여서는 대체로 정교 각각의 특질에서 당연히 도출(導出)된다고 하는 견해이다.
정치의 목적은 국민에게 현세적(現世的) 행복을 부여하는 것이나 종교의 목적은 국민에게 영적(靈的)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다.
양자는 각자의 본질에 따라서 명확하게 구별되고 또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교관계는 정교 쌍방의 본질에서 곧장 추론(推論)되는 것과 같은 모범적 형태를 갖고 성립한 것은 아니다.
정교분리는 인류사(人類史)의 시작에서부터 행해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각종의 정교일치 또는 정교결합이 굉장히 오랜 기간 행해졌으나, 근대의 도래와 함께 거기에는 갖가기 약점이나 폐해가 있는 것이 분명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류로 하여금 정교결합을 버리고 정교분리를 채용시켰다.

국가(바르게는 정부)가 갑이라는 종교를 국교(國敎)로 하는 정교결합제도를 취하면 을이라는 종교의 신도는 정부에 심복(心腹)하는 선량한 시민이 되기 어렵다. 정부도 이 신자에 대하여 억압적으로 되어 정치의 비민주화를 초래하게 된다. 이것은 종교적 부자유와 정치적 부자유와의 일체화를 나타내는 예이다. 또 갑이란 종교의 신자는 권력의 보호에 익숙해지므로 스스로 교만해져 종교의 생명인 사람을 구제하는 힘을 상실한다. 종교가 빠지는 타락 중에서 최대의 것은 그것이 권력자에게 의뢰하는 데서 생겨난 타락이다. 요컨대 정교결합은 특히 국내에 복수의 종교가 병존하는 경우, 정치와 종교와의 쌍방에 폐해를 끼친다. 이것은 구미(歐美)의 기독교사, 한국 고려조의 불교사, 조선조의 유교사가 이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같은 정교분리라 하더라도 그 내용에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 전형적으로는 미국프랑스의 정교분리에서 엿볼 수 있다. 미국의 정교분리는 우호적 분리이나, 프랑스의 그것은 비우호적 분리이기 때문이다.

미국 정교관계의 우호성(友好性)은 예를 들면 독립선언에서 볼 수 있는 종교적 이상주의나 연방의회의 의사(議事)가 목사의 축도로써 시작되는 것 등에서 잘 나타나 있다. 미국은 종교에 대하여 우호적인 정교분리를 독립선언 11년 후에 만든 연방헌법(聯邦憲法, 1887)에 명문화 했다.

그 이유의 첫째는 당시 미국에는 종교나 교파(敎派)의 수가 많고 더욱이 그것들 중에 하나의 신도(信徒)를 갖고 전 국민의 과반수를 제압할 수 있는 유력한, 따라서 국교로서 정할 수 있는 유력한 종교·교파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이유는 헌법기초자(憲法起草者)가 연방을 구성하는 각 주의 단결의 강화에 최대의 관심을 갖고, 그 때문에 이 과제에 종교투쟁을 끌어넣어 문제의 혼란을 증대시키는 것을 피하려고 한 것이다.

종교투쟁이 얼마나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가를 그들은 경험을 통하여 잘 알고 있었다. 또 혁명의 상대인 영국과 결부된 영국 국교회(英國國敎會)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정교분리를 낳게 했다는 설도 있다. 프랑스의 정교분리는 공화주의(共和主義) 정권과 가톨릭 교회간의 장기간의 대립의 격화, 즉 양자의 싸움과 결별에 원인이 있다.

이런 공화정은 당연히 군주정 부활의 방지에 중대한 관심을 표시하여 온 데 반하여 프랑스 군주제는 수세기 동안 가톨릭, 따라서 바티칸 당국과 친밀히 결부되고 있었다. 또 가톨릭은 국민의 종교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하는 공화파와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자의 대립은 여러 가지 현실적 조건과 얽혀서 격화하였으나 제3공화정 정부는 1905년에 정교분리법(영어:1905 French law on the Separation of the Churches and the State)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분리 후, 가톨릭이 소수자인 프로테스탄트와 미증유(未曾有)의 우호관계를 실현시키고 있고, 가톨릭 교회가 거의 전국민을 포함한 이름뿐의 교회에서, 소수의 생명력 넘치는 신도집단으로 된 것은 정교분리의 정당함을 증명하는 한 예로 간주된다.


정교분리는, 국가와 교회·사원이 절대적으로, 또는 완전히 분리되는 것까지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구체적인 인간생활이 단순히 내면적인 것도 아니고, 또 단순히 외면적인 것도 아니기에 당연한 것이다. 셸러(Max Scheler, 1874-1928, 독일의 철학자)는 인간의 내면적 생활과 외면적 생활과는 밀접한 공속성(共屬性)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 종교단체가 스스로의 입장에서 정치를 윤리화하고 정치에 생명을 부여하기 위하여 정치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종교의 정치로부터의 절대적 초월을 주장하는 전세기적(前世紀的) 종교관을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이 문제는 서독의 기독교민주동맹(CDU)이나 일본의 공명당과 같이 일정한 종교를 창당의 이념으로 하는 종교정당에 있어서 특히 중요하다.

정교분리의 원칙은 거기에도 역시 타당하다. 즉 거기에서도 종교는 권력의 장악자(掌握者)나 널리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인격의 내면을 통하여, 말하자면 간접적으로만 정치에 감화를 미치도록 작용하여야 하는 것이다. 정교분리에서 최소한도로 요청되는 것은 특정 종교단체가 자기의 이름으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것을 그 신도에게 명하는 것은 피하라는 것이다.

신도는 일체의 정당 선택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교분리의 원칙이 방해됨과 동시에 특정 종교에 대한 신앙상의 열의(熱意)가 신앙에 의해서가 아니라 특정 정당에의 충성에 의하여 정해진다는 묘한 결과를 초래한다. 서독의 기독교민주동맹의 강령 전문(綱領前文)의 "하느님은 역사와 제국민과의 주(主)이고, 그리스도는 우리들 생활의 힘인 동시에 법이다"라는 생각은 좋다 하더라도, 1945년의 당대회에서 "우리 당은 이 신앙고백에 의하여 개개의 정책을 정하는 원칙적 지표(指標)가 주어져 있다"라고 말한 것은 정교분리의 원칙에 위배된다. 그 이유는 그것은 신앙이 국민의 인격의 내면을 통하지 않고 직접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요청하고 시인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는 기독교민주동맹의 정책을 비판할 자유가 보장되어 있을 뿐이고 정당 선택의 자유는 보장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서독내에서도 다음과 같은 비판이 있다. 즉 그리스도 교도는 다만 기독교민주동맹만이 아니라 독일사회민주당(獨逸社會民主黨, SPD)을 포함한 모든 정당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고, 또 모든 압력단체나 노동조합에서 활약할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기독교민주동맹은 신자를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교의 자유'는 다른 시민적 자유와 상호관계(相互關係)의 운명에 있고, 정치의 민주화에 의하여 추진되는 것이나, 신교의 자유는 정교분리에 의하여서만 실현된다는 것을 부언(附言)할 필요가 있다. 정치와 종교가 결탁(結託)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국민의 신교 자유의 보장은 반드시 불충분한 것이 된다. 그리고 그 자유의 보장의 범위는 결탁의 정도에 반비례한다. 신교의 자유를 목적으로 하면 그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은 정교분리이다.

그러나 정교분리는 신교의 자유에 봉사하는 수단이라고 하여 목적인 신교의 자유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목적을 실현하는 구체적 수단이 그 목적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것 없이는 목적은 언제까지나 단순한 추상적 관념(抽象的觀念)으로서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신교의 자유는 정교분리에 의하여 보장된다는 원칙에도 예외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영국에서는 영국국교회(Anglican Church)가 국교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국민 일반은 현재 충분한 신교의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

헤랄드 라스키(Harold Joseph Laski, 1893-1950, 영국의 정치학자·사회주의자)

태가 원활히 거기까지 진전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히 17세기의 엄격한 종교적·정치적 체험, 18-9세기에 있어서의 비국교도(非國敎徒) 중심의 관용(寬容)을 목표로 하는 싸움에 힘입은 바가 크다.

종교적 관용이란 각 개인이나 각 종교단체가 각자의 확신이나 신앙을 상호 승인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J. S. 밀
은 『자유론』에서 종교적 관용은 신교의 자유만이 아니라 다른 시민적 자유를 영국인에게 부여했다고 하였다.
요컨대 종교적 관용과 갖가지 시민적 자유가 고도로 발달한 영국에서조차도 국교제도 밑에서 신교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장기간의 고투(苦鬪)가 필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