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Ⅲ(요한계시록 14:13) / 설교 원고(2019-07-28)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Ⅲ(요한계시록 14:13)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복(福)”이란 ‘볼 시(示)’와 ‘부요할 부(富)’
- 부(돈, 재물, 부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

신명기의 복 - 베라카(28:1∼2)
시편의 복 - 에제르(1:1∼3) ☞ (복수형) 아쉬레이

선택받은 백성들에게 약속된 복은 '순종'입니다.
순종하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민족이 될 것이며,
마치 마르지 않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주로 물질적인 것을 기준으로 복을 결정한다.
그러나 성경은 물질보다는 사람이 우선이다.

마태복음 5:3∼10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요한계시록에서 증거 하는 일곱 가지 복

1st.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의 복(1:3)
2nd. 주 안에서 죽는 자의 복(14:13)
3rd. 자기의 옷을 지키는 자의 복(16:15)
4th.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자의 복(19:9)
5th.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의 복(20:6) 
6th.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복(22:7)
7th. 예수의 피로 두루마기를 빠는 자의 복(22:14)

모든 복의 기초는 영생(永生)입니다(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들어야 할 소리와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들어야 할 소리를 ‘하늘의 소리’라고 한다면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땅의 소리’라고 하겠습니다.

최초로 하늘의 소리와 땅의 소리가 충돌한 사건이 에덴동산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2:16∼17)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하나님은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 여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사탄(뱀)은 여자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창세기 3:1b∼6).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이때 여자가 사탄(뱀)에게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사탄(뱀)은 여자에게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라고 여자의 말에 더욱 강한 부정적인 생각을 강요합니다.

이때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는 순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고, 심지어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나타났습니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었습니다.

하늘의 소리와 땅의 소리가 충돌했을 때 여자는 땅의 소리가 더 크게 들렸습니다. 아담은 여자로부터 “내가 먼저 먹었는데 이렇게 죽지 않았어요.” 라는 땅의 소리를 듣습니다. 아담은 여자가 들려주는 땅의 소리를 듣고 그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아담으로부터 모든 인류가 받은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아담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고 주리셨을 때 다시 사탄이 찾아와서 땅의 소리를 들려줍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사탄은 사역을 시작하는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돌을 빵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며 땅의 소리로 유혹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 이라고 또다시 하늘의 소리와 땅의 소리를 함께 들려주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또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사탄이 예수님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첫째 아담은 땅의 소리에 마음을 빼앗겼지만 둘째 아담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온전히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우렸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땅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위에서 자주 듣는 소리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좋으냐? 돈만 있으면 마음대로 편리하게 먹을 수 있고 다닐 수 있고 입을 수 있고 쉴 수 있고 이런 세상을 구경 못한 옛날 사람들이 참 불행하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땅의 소리는 세상을 즐기려고 합니다. 반면에 하늘의 소리는 하나님을 즐기려고 합니다.

오늘 요한계시록의 말씀에서 하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누구일까요?

여기서 주 안에서(in christ) 죽는 자들을 헬라어 성경에서 “호이 네크로이 호이 엔 쿠리오 아포드네스콘테스(οἱ νεκροὶ οἱ ἐν Κυρίῳ ἀποθνῄσκοντες)” 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문맥상으로 볼 때는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성도들과 순교한 성도들을 말합니다. 이기는 성도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계 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그러나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누구일까요?

첫째,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를 믿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두 강도들이 함께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때 한 강도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을 조롱했지만 다른 한 강도는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고통을 받는다는 믿음을 갖고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해도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을 보여준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신앙고백이 분명한 사람입니다(마태복음 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둘째,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

구원받은 강도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후에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빌레몬서에 오네시모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오네시모는 태어날 때부터 종의 신분이었습니다. 빌레몬이란 주인의 집에서 종으로 살아가면서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며 자기 삶을 정리하고 주인처럼 살아보려고 주인집에서 몰래 귀중한 물건을 들고 도망쳤습니다. 오네시모가 도망하여 세상을 나름대로 잘 살아보려고 했지만 그만 붙잡혀서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네시모가 갇힌 감옥에 사도 바울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에게서 어떻게 여기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듣게 됩니다. 놀랍게도 오네시모의 주인이 빌레몬이란 사실을 알고 오네시모가 감방에서 나갈 때 편지 한 장을 써서 오네시모에게 주며 이것을 갖고 빌레몬을 찾아가라고 합니다. 그 편지가 빌레몬서입니다.
당시 종이 주인집에서 물건을 훔쳐 도망하다가 붙잡힐 경우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는데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하여 주인 빌레몬에게 이제부터는 너희 집의 종이 아니라 형제로 인정하고 만일 오네시모가 손해를 입힌 것이 있다면 사도 바울이 모두 갚아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렇게 오네시모는 예수를 영접한 후에 그의 삶은 빌레몬과 동등한 믿음의 형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죄의 종으로 붙잡혀 죽음의 노예가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들은 예수님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있을 동안에 우리가 힘써야 할 삶은 주와 연합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즐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행동하는 신앙의 사람입니다(야고보서 2:17, 26)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리고 성경에서는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을 가리켜 잠을 자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은 잠에서 깨어날 사람입니다(요한복음 11:10)

우리 친구 나사로는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은 슬픔으로 가득했습니다. 왜냐하면 베다니 마을에서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의 신앙은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을 만큼 소문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제자들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나사로가 잠자는 것이라면 그 병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나사라고 죽었으나 그는 잠을 자고 있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예수 안에서
- 디아 투 이에수(διὰ τοῦ Ἰησοῦ) through Jesus

예수 안에서 라고 번역된 것은 ‘예수로 말미암아’ 라는 뜻입니다.

에스커위드(Askwith)라는 신학자는 '예수로 말미암아' 라는 것을 "예수를 믿다가 죽은 자들과 부활하신 예수와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구약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주 안에서 죽는 사람으로 살아가면 철저하게 자기 사랑을 버리고 이웃 사랑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살았던 사람들을 성령께서 위로하십니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주 안에서 죽는 신앙의 삶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을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에 대한 공식적인 메시아 선언이 드러난 후에 제자들에게 부탁하셨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실예)

주 안에서 죽는다는 말씀의 의미

단순하게 교회에 다니거나 예수 믿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14장 12절에 보면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또한 13장에 보면 강한 권력과 권세를 가진 짐승이 등장합니다. 짐승이 갖고 있는 강력한 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짐승을 따라갑니다. 만일 이 짐승을 따르지 않는다면 삶이 고달프고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사로잡힐 수 있고, 칼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북한에서 먹을 것이 없어 중국으로 무작정 건너와 어느 교회에서 제공하는 음식을 먹으며 예수를 영접한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이 젊은이가 예수를 영접한 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북한으로 들어갔습니다. 북한에 들어가서 공안에 붙잡혔습니다. 젊은이를 신문하던 공안에게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를 설명했습니다.

북한이 이처럼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이렇게 세습하며 그들이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자 공안은 젊은이의 이야기에 동의하면서도 젊은이가 북한에서 가장 싫어하는 기독교 사상을 고집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살려주려고 수용소보다는 임시보호소와 같은 곳으로 보내려고 할 때 젊은이는 아닙니다. 수용소로 보내주시면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죽겠습니다. 결국 수용소로 보내진 젊은이가 얼마 후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얼마나 좋으면 젊은이가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아직도 북한 땅에 남아 있다는 것이 놀랍다고 했답니다.

이런 젊은이의 삶이 주 안에서 수고한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2019 25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목록





오늘의 말씀

7

29

대하 19:1∼20:37, 롬 12:1∼12:21, 시 116:1∼116:11

7

30

대하 21:1∼23:21, 롬 13:1∼13:14, 시 116:12∼116:19

7

31

대하 24:1∼25:28, 롬 14:1∼14:23, 시 117:1∼118:7

8

1

대하 26:1∼28:27, 롬 15:1∼15:21, 시 118:8∼118:17

8

2

대하 29:1∼30:27, 롬 15:22∼16:7, 시 118:18∼118:29

8

3

대하 31:1∼32:33, 롬 16:8∼16:27, 시 119:1∼119:8

8

4

대하 33:1∼34:33, 고전 1:1∼1:17, 시 119:9∼119:16




























말을 할 때와 들어야 할 때

말을 해야 할 때와 들을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두 마리의 기러기가 매년 하던 대로 남쪽으로 이동할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개구리 한 마리가 자기도 데려가 줄 수 있으냐고 물었습니다.

두 마리의 기러기는 ‘그래’라고 대답했지만 그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가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러자 무척이나 꾀 많은 이 개구리는 길고 튼튼한 풀잎 줄기를 구해 와서는 두 마리의 기러기들에게
자기는 풀잎 줄기 중간에 입으로 매달려 있을 테니 양쪽 줄기 끝을 발로 잡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마침내 두 마리의 기러기와 개구리는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한참을 날아오르자 저 아래로 사람들과 집들이 보였습니다.

넓게 펼쳐진 광경이 개구리에게는 무척이나 신기했습니다.

그때 두 마리의 기러기는 독특한 체험을 구상한 자신들의 창조력과 현명한 행동에 대해 큰 소리로 자화자찬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두 마리의 기러기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개구리는 허영심이 발동하여 그만 입을 벌리고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건 내 아이디어였잖아!”
그 순간, 개구리는 곧장 땅바닥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옛 속담 중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입을 다물고 있어라.
그러면 당신이 바보라도 바보인 줄 아는 사람이 절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입을 열면 모든 것이 다 탄로나고 만다.”

이런 옛말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말을 해야 할 때와 들어야 할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 자료출처 /  지그 지글러 지음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중에서
 


오늘의 묵상(2019-07-22)

7월 22일(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1:1∼3:17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자 하나님께서 지혜를 구한 솔로몬에게 지혜는 물론, 재물과 존영까지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는 두로 왕 후람의 도움으로 성전 건축 준비를 마치고 건축에 착수하였다.  

♦ 로마서 7:21∼8:17
바울은 성화의 과정 중에서 성도들이 반드시 겪게 되는 내적 갈등에 대하여 언급한 후, 이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성도는 생명의 법 아래 있는 자임을 증거하였다. 그리고 성도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의 후사이며,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 시편 110:1∼110:7
다윗은 만왕의 왕이며 영원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통치와 심판을 예언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편 110:3) 

헌신(獻身)과 희생(犧牲)의 결합된 단어를 히브리어로 “헤세드” 라고 합니다. 헤세드는 ‘자비(慈悲)’란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대자대비(大慈大悲)라고 하지요. 불교의 자비가 기독교의 자비보다 더 크다고 자랑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변화를 일으키는 자비는 기독교에서 자주 나타납니다. 너무 큰 자비를 입어서 도저히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어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자비가 아니라 비로 작지만 새로운 삶을 주도하는 기독교의 작은 자비일지라도 그 자비에 힘입어 헌신과 희생의 삶을 기도합니다.

평화의 기도
- 프랜시스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초대교회 대제사장 목록


로마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예루살렘은 두 명의 제사장이 세워집니다.
한 명은 율법에 따른 지파의 순서에 따라 한 명씩 제사장이 됩니다.
이것을 '반차를 따른다'고 표현합니다.

로마는 정치적을 압박하고 통치하기 위해 자신이 지목한 행정적 제사장을 더 세워 두 명이 됩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는 '대제사장들'이란 복수 형태를 사용합니다. 

요아자르 (보이투스​의 아들)

(유대​의 왕 아르켈라오스​에 의해 임명​됨—마 2:22)

엘르아살 (보이투스​의 아들)

예수 (시​에의 아들) (요아자르​가 민중​에 의해 복직​되었다)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에 의해 임명​됨—누 2:2)

안나스 (아나누스) (셋​의 아들) (퀴리니우스​에 의해 임명​되었다. 기원 15​년​경 유대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에 의해 해임​되었다. 안나스​는 가야바​의 장인​이었다. 그​는 해임​된 후​에도 계속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누 3:2; 요 18:13, 24; 행 4:6)

(유대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에 의해 임명​됨)

이스마엘 (파비​의 아들)

엘르아살 (안나스​의 아들)

시몬 (카미투스​의 아들)

요셉 가야바 (예수​의 지상 봉사 기간​과 사도​들​의 봉사 기간 초기​에 직무​를 수행​한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께서 산헤드린 앞​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대제사장​으로서 장인 안나스​와 함께 그 재판​을 주재​하였다.
[마 26:3, 57; 누 3:2; 요 11:49, 51; 18:13, 14, 24, 28]
그​와 안나스​는 베드로​와 요한​을 자기​들 앞​으로 불러서, 전파​하는 일​을 중단​하라고 명령​하였다. [행 4:6, 18]
가야바​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에 보내는 편지​들​을 받도록 사울​에게 권한​을 준 대제사장​이었다.—행 9:1, 2, 14)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에 의해 임명​됨)

요나단 (안나스​의 아들)

데오빌로 (안나스​의 아들)

(헤롯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임명​됨)

시몬 (칸테라스) (보이투스​의 아들)

맛디아 (맛다디아) (안나스​의 아들)

 

엘리오나이우스 (칸테라스​의 아들)

 

(칼키스​의 왕 헤롯​에 의해 임명​됨)

 

요셉 (카미두스​의 아들)

 

아나니아 (네데바이우스​의 아들) (바울​이 재판​을 받을 때 산헤드린​을 주재​한 대제사장.—행 23:2; 24:1)

 

(헤롯 아그리파 2​세​에 의해 임명​됨)

 

이스마엘 (파비​의 아들)

 

요셉 (카비) (이전​에 대제사장​이었던 시몬​의 아들)

 

안나스 (아나누스) (안나스​의 아들)

 

예수 (담나이우스​의 아들)

 

예수 (가말리엘​의 아들)

 

맛디아 (맛다디아) (데오빌로​의 아들)

 

파나스 (판니아스 또는 비느하스. 사무엘​의 아들) (헤롯 아그리파​에 의해서가 아니라 로마​와의 전쟁 중​에 백성​에 의해 대제사장​이 되었다)



출처: https://392766.tistory.com/3836?category=343800 [Pensées]

머피의 법칙'(Murphy's law)과 샐리의 법칙'(Sally's law)


살다 보면 일이 꼬이는(go wrong) 경우가 있다.
하필이면(of all occasion) 빵의 버터 바른 면이 바닥을 향해 떨어진다(fall buttered side down).

그 확률은 카펫 가격에 정비례한다(be directly proportional to the value of the carpet).

버스가 늘 늦게 와서 늦게 나갔더니 그날은 제시간에 와서(come on time) 이미 떠나버렸다.
하릴없이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데(be obliged to wait for the next bus) 길 건너엔 같은 번호
버스가 잇달아 지나가건만 이쪽엔 감감무소식이다.

이런 현상을 '머피의 법칙'(Murphy's law)이라고 한다.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보편적 

현상(universal phenomenon)이어서 '법칙'이라는 말이 붙었다. 자신만 불운하다고

(have hard luck)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런 경우는 수시로 있다. 직장에 지각을 해

(be late for work) 타이어 펑크가 났다고(have a flat tyre) 둘러댔는데(make up a story), 

다음날 진짜 펑크가 난다(get a flat). 살까 말까 망설이다(dither over buying an item) 

큰 마음 먹고(take the plunge) 샀더니, 어디선가 세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줄을 섰는데 다른 줄이 더 빨리 줄어든다(move faster). 냉큼 다른 줄에 가서 섰더니 

아까 그 줄이 더 빨리 줄어들기 시작한다.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이 커피를 따라주는데, 

마침 그때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난다(encounter turbulence). 타고 간 비행기는 

연착했는데(be delayed) 갈아타야 할 비행기는 제시간에 이륙해버렸다(take off on 

scratch). 물건이 떨어져도 하필 가장 큰 충격을 받는 쪽으로 떨어진다(fall so as to do 

the most damage). 게다가 그 가격에 정비례해 부서진다(be shattered in direct 

proportion to its value).


그와는 반대로(on the contrary) 원하는 일은 그 간절함에 반비례해 일어난다(happen 

in inverse ratio to its desirability). 기회는 늘 가장 적절하지 않은 순간에 찾아온다

(knock at the least opportune moment). 마음에 드는 신발은 맞는 사이즈가 없고, 

맞는 사이즈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세차를 했다 하면 비가 온다. 라디오를 틀면 매번 

좋아하는 노래 끝 부분이 흘러나온다. 손톱을 깎고 나면(cut your fingernails) 꼭 

가려운 곳이 생긴다.


이런 머피의 법칙과 정반대 개념이 '샐리의 법칙'(Sally's law)이다. 우연히 유리한 

일만 계속 생기고, 나쁜 일도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는(turn evils into blessings) 

경우를 말한다. 맑은 날에(on a clear day) 우산을 들고 나왔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든지, 시험 직전에 펼쳐본 교과서 내용이 문제로 나온다든지….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그 사람의 태도(one's 

attitude toward life)다. 머피의 법칙을 믿는 사람에겐 머피의 법칙만 벌어지고, 

샐리의 법칙을 믿는 사람에겐 샐리의 법칙만 일어난다고 한다.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Ⅱ(요한계시록 1:3) 설교 원고(2019-07-21)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Ⅱ(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성경에서 강조하는 최고의 복은 ‘영생(永生)’입니다.
영생이란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죽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 부활의 때에 다시 살아날 줄 믿는다고 고백했던 마르다에게 분부하신 말씀입니다.   


영생이란?
포기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유토피아(Utopia)라는 저서를 남긴 영국의 사상가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 2. 7~1535. 7. 6)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왕에게 항복하라고 그를 졸랐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오랫동안 함께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왜 당신은 꽃 같은 나이에 당신과 우리 가족에게 가장 비극적인 불행을 가져오려 하십니까?”

이 말을 들은 모어는 이렇게 되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최소한 20년은 사실 거예요.”
그러자 그는 소리쳤습니다.
“이 땅에서의 20년밖에 안 되는 삶을 위하여, 내가 영원한 삶을 포기하고 고통에 나를 내어 준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오! 영혼을 잃는 것보다는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을 잃는 편이 오히려 더 좋은 일이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소?”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이란 제목으로 두 번째 설교를 합니다.
지난 주일에 소개했던 설교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성경을 산(山)에 비유할 때 구약이란 산에는 39종류의 나무가 자라고 있고, 신약이란 산에는 27종류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나무들이 많이 우거진 곳을 삼림(森林)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다양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삼림(森林)과 같습니다.
삼림(森林)이란 한자에는 수풀 삼(森)자에 나무 목(木)자가 세 개 사용되었고,
수풀 림(林)자에는 나무 목(木)자가 두 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이란 삼림에 속한  요한계시록은 삼림의 나무들 중에서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요한계시록을 삼림 속에 있는 나무라고 해석하지 않고 많은 높은 산들이 줄지어 있는 산맥(山脈)으로 이해했습니다.
그 결과 산맥(山脈)은 아주 높고 험준한 곳이기에 요한계시록을 특별한 은사를 받은 교주만이 해석할 수 있다고 강조되었으며 심지어 특정한 교파에 가입해야만 마지막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삼림(山脈)의 한 나무처럼 성경의 줄기에 따라 한 주제로 읽을 때 요한계시록은 어렵고 난해한 말씀이 아니라 누구든지 읽을 수 있는 약속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주제로 읽는 첫 번째 방법은 ‘복(福)’이란 주제로 읽는 것입니다.

복(福)이란 한자는 볼 시(示)와 부요할 부(富)가 결합한 단어로
“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 또는 “부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부(富)’의 기준을 “돈” “자동차” “집”과 같은 외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세속적인 복”과 “내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신령한 복”으로 구분합니다.

구약에서 복이란 두 단어 ‘베라카(신명기 28:1∼2)’와 ‘에제르(시편 23:1∼3)’는 “순종의 복”을 말합니다.
순종하는 약속의 백성들은 뛰어난 민족이 될 것이며 마치 마르지 않는 시냇가(복수)에 심어진 나무처럼 그 뿌리가 마르지 않는 물가에 심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복은 영생(永生)입니다(시편 133:3).
영생의 복은 예수를 믿음으로 얻습니다(요한복음 3:16).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7:3).

예언의 말씀이란 그 예언의 그 말씀(요한계시록 1:3, 22:7, 10, 18, 19)을 말합니다.

예언의 말씀의 내용은 ‘속히 오리라! 가감하지 말라!’고 합니다.
‘속히(1:1, 2:16, 3:11, 11:14, 22:6, 7, 12, 20)’ 라는 말은 시간적인 의미보다는 영적 의미로 “반드시 오실 것”을 말합니다.

오늘은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두 번째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먼저 요한계시록 1장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예언의 말씀으로 소개된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특징을 세 가지 모습 즉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영생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복을 누리기 위해서 예언의 말씀 속히 오시리라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위한 세 가지 자세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읽는 자, 둘째는 듣는 자들, 셋째는 지키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첫째, 읽는 자(아나기노스콘, ἀναγινώσκων)

본문에서 ‘읽는 자’는 두루마리의 말씀을 회당에서 회중을 대표하여 전문적으로 읽는 낭독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성경을 읽는 자를 말합니다. 성경을 문자로만 읽는 것이 아닙니다.

1. 확실하게 아는 것(to know certainly)
2. 다시 아는 것(know again)
3. 인식하는 것(recognize), 알아차리는 것(discern)

요한계시록에 사용된 각종 상징과 숫자들의 의미를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결론입니다. 만일 상징과 숫자들과 인과 나팔과 대접의 의미는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결론을 모르거나 지나쳐 버린다면 큰 실수를 범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해외여행이 한창일 때 가이드가 신신당부하기를 많은 관광객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기 때문에 항상 가이드가 들고 있는 깃발을 보고 따라와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에게 이번 여행이 어떠했느냐? 하고 물었을 때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외국 땅에서 가이드가 들고 다니는 깃발만 보도 따라다녔기 때문에 아무 것도 기억이 없다고 했다는 우스개 이야기처럼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해가 상징과 숫자와 인과 나팔과 대접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성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잃어버린다면 그 결과는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며(창 1:1), 창조한 세상을 심판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계 22:20).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성경에서 예언의 결론은 '마라나타'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믿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복으로 읽는다는 것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믿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듣는 자(아쿠온테스, ἀκούοντες)

본문에서 듣는 자는 문법적으로 복수형입니다. 읽는 자는 한 사람이지만 듣는 사람은 여러 사람입니다. 회당의 예배는 성인 남자 10명 이상이 모였을 때에 예배가 시작되었으므로 최소한 10명 이상이 듣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1. 이해하는 것(to understanding)
2. 가르칠 수 있는 것(to teaching)

교육심리학에서는 죄(罪)에 대한 정의가 아주 새롭습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것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을 모르면서 특히 요한계시록을 모르면서 읽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구원의 진리를 알았으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말씀 처럼 다시 오실 심판의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깨우쳐야 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

알면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는 것은 내 안에 머물지만 행하는 것은 내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을 안다고 말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겠습니다.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깨달은 후에는 아직도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소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24장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 무렵 함께 유하려고 어느 집에 들어가서 음식을 먹으려고 할 때 주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 제자들에게 떼어 주셨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그 분이 주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을 눈이 밝아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주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주님이 보이기 시작하면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말씀은 실천하기 위하여 들어야 한다.

예수님은 많은 말씀들을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비유로 가르치실 때 사용하셨던 ‘들으라’ 또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들으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은 이미 증거 된 가르침들 즉 구약의 말씀에 대해서 실천하기 위해서 들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마가복음 4:3∼9).

셋째, 지키는 자(테룬테스, τηροῦντες) 

테룬테스(τηροῦντες)는 테레오(τηρέω)의 복수형으로 ‘지키는 것’ 그리고 ‘감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키는 자는 물론 예언의 말씀을 지킬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감시해야 합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잘못 전달되거나 가르치는 것을 감시하고 그와 같은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도록 생명을 사랑하고 영혼을 감시하는 책임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에 무당(巫堂)의 수가 대략 30만 명이라고 하며 무당에 의해서 창출되는 년 간 금액이 무려 6조원이라고 합니다. 교인의 수가 1,200만 목사의 수가 6만이라고 하는데 교인들이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였다면 어떻게 한국사회가 이렇게 무당의 수가 점점 더 늘어가고 있을까요?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한 책임을 교회가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28,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약속하신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8: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일서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요한계시록은 읽고 듣고 지키므로 복을 누립니다. 해석하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해가 될 때까지 읽고 들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2:7에서 지키는 것에 대한 복을 강조합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지킨다는 말은 실천한다는 뜻도 있지만 그 말씀을 변질되지 않도록 없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지킨다는 뜻이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영생의 복을 누리기 위하여 그 예언의 그 말씀 곧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켜야 합니다.

티벳 사람들의 종교는 라마 불교라고 합니다. 티벳 사람들은 라마 불교의 경전을 읽지 않기 때문에 라마 불교를 모른다고 합니다. 티벳의 불자들이 경전을 읽지 않기 때문에 라마 불교 사원 주위에 ‘마니차(摩尼車་)’ 라는 불교 도구를 만들어 놓습니다. ‘마니차’란 원통형 모양으로 표면에는 ‘만트라’가 새겨져 있고, 내부에는 롤로 경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마니차의 크기는 다양하여 손에 쥘 수 있는 크기부터 큰 것은 몇 미터에 달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둥근 원통 마니차를 손으로 돌리면 한 번 읽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라는 마니차를 한번 돌리면 창세기를 한 번 읽는 것입니다. 두 번 돌리면 두 번 읽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니차를 돌리기만 하기 때문에 경전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간혹 도로에서 자동차 뒤에 성경 찬송을 얹어놓고 다니는 운전자를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찬송을 마치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소원하는 부적과 같이 사용한다면 이런 것도 기독교식 마니차라고 하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요한계시록을 읽지 않고 듣지도 않으므로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영생(永生)의 복(福)을 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복이란 주제로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 영원한 삶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