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총회 평양 서문외 예배당 1938년 9월 9일 - 16일 신사참배 결의 자료


1938년 신사참배를 결의한 제27회 총회

신사참배 가결,
1. 하나님 말씀의 위반,
2. 장로회 헌법과 규칙 위반,
3. 일본 국법인 종교자유헌장에 위반,
4. 보통회의법의 위반

1938년 9월(9-16일) 오후 8시에 평양서문외예배당에서 제27회 총회가 개회되었다.
총회가 개회되고 제1부 경건예배를 마치고 정회한 후 2일째 되는 날 새벽 6시에 임종순 목사가 요한복음 16:25-33절 말씀을 읽고 “그리스도를 힘입어 안심함을 얻음”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오전 9시 30분에 속회되어 새 총회장으로 선출된 홍택기 목사가 히브리서 10:5-7절, 요한복음 4:34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 후 10시 40분에 안건 심의에 들어갔다.

공천부장의 함태영 목사의 보고를 별지로 받고 곧바로 신사참배 안건 심의에 들어갔다.
제27회 총회가 경건예배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신사참배 문제를 거론하여 결의를 했다는 것은 이미 신사참배의 가결을 몇 달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고 제27회 총회는 이를 실행에 옮기는 총회가 되었다.

총회가 소집되는 날 서문외교회당 안팎에는 수백 명의 사복 경찰관들이 둘러싸고, 강대상 아래는 평남경찰부장 등 수십 명의 고위 경찰들이 칼을 찬 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총대들 사이에는 각기 그 지방에서 올라온 경관 2명이 끼어 앉아 있고 총대석 좌우와 후면에도 무술경관 100명이 상엄하게 둘러싼 채 회가 시작되었다. 먼저 평남도지사의 축사를 시작으로 경건회에 이어 공천부 보고는 별지로 받기로 한 후 신사참배 안건을 상정했다.

전국 27개 노회(만주 4노회 포함) 목사 회원 86명, 장로 총대 85명, 선교사 22명, 합계 193명이 참석한 가운데 동 안건을 가결에 붙이자 떨리는 목소리로 가(可)만 묻고 부(否)는 묻지 않은 채 신사참배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음을 선언했다. 이 때 자리 사이에 끼어 앉아 있던 경찰이 일제히 일어나 경계태세에 들어갔는데 선교사 20여명이 일어나 “불법이오”, “항의합니다”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결국 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말았다.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후 곧바로 “부총회장과(임원대표) 각노회장으로(회원대표) 본 총회를 대표하여 즉시 신사 참배를 실행하기로 가결”하였다.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난 시간이 12시였다. 오후 2시에 속회할 때까지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의 안내에 따라 평양 신사로 가서 절하고 돌아왔다.

이와 같은 신사참배를 하고 난 이후 속회된 회의에서 “신사참배 결의안을 조선 총독, 총감, 경무국장, 학무국장, 조선군사령관, 총회대신, 척무대신, 제 각하에게 전보를 발송하기로 가결”하게 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같은 날(10일) 오후 1시에 따로 모임을 갖고 신사참배 가결를 무효화 시키기 위하여 “신사참배 가결은 하나님 말씀의 위반이요, 장로회 헌법과 규칙을 위반함이요, 일본 국법인 종교자유헌장에 위반이요, 이번 처사는 보통회의법의 위반”이라는 항의서를 총회에 긴급동의안으로 제출했다.
 
총회 12일에는 권찬영 외 25명도 연서날인으로 “이번 총회의 결의는 하나님의 계율과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에 위배 될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발언을 허락하지 않고 강제로 회의를 진행한 것은 일본 헌법에 부여한 종교자유의 정신에도 어긋난다”라는 항의서를 총회에 제출했다. 총회는 경찰의 강압에 못이겨 이들 항의서를 토론에 붙일 기회마저 주지 않고 무조건 기각시켜 버렸다.

총회가 파회(罷會)되고 석 달 후, 신사참배 결의가 가져온 비극적인 일들이 총회 산하 전국교회에 하달되었다.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회장으로 신사참배를 가결시킨 것도 부족해서 각 교회에 신사참배 반대한 행위에 대해 처벌할 것에 대한 총회장 서한을 보내게 되었는데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총회의 결의를 경멸하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주님의 뜻에 위배되는 유감 천만의 행동이다. 이런 비상 시국하에서 만일에 아직도 옛 습관으로 해서 이를 보류하거나, 주저하는 자가 있다면, 저들은 결코 신민으로 인정될 수 없으며, 교인으로도 인정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교회의 입장으로 볼 때도 이러한 반대하는 무리나 요소는 마땅히 처벌되어야 한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그 후 한국교회로 하여금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하였다.
총회 결의가 있는 이후 일본 경찰은 즉시 친일적인 목회자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그 시대 양심의 소리가 있었다는 점은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소재열 목사 근간,『한국장로교신학 전통』중에서.





신사참배 강요(神社參拜強要)


일제 강점기에 조선 곳곳에 신사를 세운 뒤 조선인에게 참배하도록 강제한 정책을 가리킨다.
신사참배는 신토의 신사에 참배하는 종교 의식이다.
종교의 교리가 신사참배와 충돌하는 기독교 신자들은 신사참배 강제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여 이에 저항하다가 피해를 입기도 했다.


배경

신토는 조선에  1876년 개항 이래 문화 침략의 일환으로 도입되었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조선통족부의 보호 아래 동화 정책의 일환으로 보급되었다.
특히 1930년대에 일본 제국이 중국 침략을 계획하면서 점차 강제적인 정책으로 변화했다.
일본 천황 신격화와 강제 신사참배는 조선을 정신적으로 지배함으로써 효율적인 식민 통치와 전쟁체제의 구축을 노린 것이었다.

추진 과정

1930년대 경성소방서 직원 신사참배

일제는 각지에 신사를 세우고 학교와 가정에도 소형 신사를 설치하도록 하여 황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주로 기독교 계열의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이같은 정책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조선에는 개화기 이래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 학교들이 다수 있었고, 우상 숭배를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기독교의 교리는 신사 앞에서 절하는 신사참배 의식과 충돌을 낳았다.

기독교계는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가 1935년을 기점으로 조선총독부의 강경책에 신사참배 용인파와 반대파로 분열되면서 큰 갈등이 시작되었다.

1937년 중일 전쟁 무렵부터는 조선총독부가 일부 학교를 폐교시키면서까지 신사참배 강행 의지를 보여 문을 닫지 않은 학교들은 신사참배를 실시해야 했다.

조선총독부는 기독교계 학교에 보급된 신사참배를 교회로까지 확장시키기 위하여 압력을 행사했고,
1938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계기로 각 교파의 목회자들이 솔선해 신사참배에 나서면서 급격히 황민화 정책에 동조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반대파의 강경론자인 주기철, 최상림이 옥사하는 등 희생자도 발생했다.

한편 평양에 있던 기독교 계열의 숭실대학은 1912년 11월 25일 조선 통독부 학무국이 학교 인가를 했으나,
1925년 대조선 교육방침(소위, 문호통치)으로 숭실대학교를 전문학교로 격을 낮추었다.

1938년 3월 4일 일본 제국의 억압적인 통치와 강제적 신사참배에 반대한 숭실전문학교는 자진 폐교 결정을 내린다.

신사참배와 친일활동을 했던 당시의 다른 대학들에 비교해 볼 때 이는 진정으로 민족을 위한 대학이었다는 평가가 의식있는 국민들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신사참배에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 등 다른 종교 성직자와 신자들도 참여해야 했으나, 상대적으로 마찰은 적었다.

영향

신사참배는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강요한 것으로서, 신사는 일본의 민간종교인 신도(神道, Shintoism)의 사원으로 일본 왕실의 조상신이나 국가 공로자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일제는 합방 후 신사사원규칙을 발표, 서울에 조선신궁을 세우는 한편, 각 지방에 신사를 세웠다.
조선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은 1935년경부터인데, 우선 각급학교 학생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으나 기독교계 학교에서는 이를 거부하다가 평양 숭실학교·숭의학교 등이 폐교되었고 학생·선교사·목사들의 반대운동은 계속되었으며, 주기철 목사와 같이 적극적으로 반대하다가 투옥되어 순교한 일이 발생하였다.

중일전쟁(1937∼1945년)을 전후하여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재차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천주교는 로마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신사참배에 응했고,
감리교도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장로교는 한때 반대했으나, 총독부의 요구와 일부 친일목사들에 의해 제27회 총회에서 찬성결의를 함으로써 결국 굴복했다.

1945년 8월 15일 지국주의 야욕의 일제가 패전으로 종전되었지만 신사참배와 관련하여 아직까지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등 문제와 논란이 발생되고 있다.

신사참배에 기독교계 전체가 공식적으로 동원된 것은 그 후유증이 상당히 컸다.
일제 패망 후 며칠만에 신사를 불태워 버렸을 만큼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조선인의 반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특히 신사참배에 앞장선 이들이 법적 책임을 지는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문제가 잠복해 있었다.
후에 이로 인한 상처를 씻기 위해 공산주의를 사탄으로 삼는 지나친 반공주의와 보수주의적 흐름이 나타났을 정도로 한국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가 있다.

2006년 대한민국의 소장파 목회자들이 모여 결성한 한국 기도굑 목회자 협의회가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한 일과 독재정권 시절에 권력층과 야합해 정의를 뒤엎기도 한 죄악에 대해 마음을 찢으며 참회한다."
내용으로 반성문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교단 차원의 공식적인 인정이나 참회는 현재까지 하지 않고 있다.








제27회 총회서 17개 노회 수치스런 결의 ... 전국 노회서 공식 취소 결의 잇따라야



▲ 제27회 총회회의록 중 신사참배 결의 내용을 담은 성명서가 기록된 부분.

1938년 9월 9일부터 15일까지 평양서문밖교회에서 조선과 만주 27개 노회의 총대 193명(목사 86명, 장로 85명, 선교사 22명)이 모여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를 개최하였다. 개회 당시 총회장은 이문주 목사(경북노회·대구남산교회)였다.

첫날 저녁 8시에 개회하여 임원을 선출하니 총회장으로 평북노회 홍택기 목사가 선출됐다. 이튿날 오전 9시 30분 속회하여 박응률 목사로 기도하게 하고 회무를 시작한 후 1시간이 지나서 10시 50분경, 평양노회장 박영률 목사가 평양노회 평서노회 안주노회의 연합대표로 신사참배를 결의하자는 제안을 하여 즉시 가결하였다. 그리고 성명서를 발표한다.

“아등(我等)은 신사(神社)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한다. 그러므로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려행(勵行)하고 나아가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 있어서 총후(銃後) 황국 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한다.

소화13년(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총회는 신사참배 가결 후 후속조치로 부총회장과 각 노회장이 총회를 대표하여 즉시 신사를 참배할 것을 결정하여, 12시 정회 후 평양 신사에 참배하고 돌아와서 오후 2시부터 속회했다.

평북노회는 총회 개회 이전인 1938년 2월에 이미 신사참배를 가결하였고, 전북노회도 6월 8일 제32회 정기노회 중에 가결하였으며(‘전북노회록’ 참고), 경북노회는 8월 19일 제36회 2차 임시노회에서 신사참배하기로 가결하고 이에 찬성하는 회원들을 총대로 선정하였다(‘경북노회105년사’ 참고).
▲ 신사참배를 결의한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표들이 1938년 9월 10일 평양신사를 찾아가 참배하는 모습이 당시 조선일보에 게재됐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전남노회였다. 전남노회(당시 노회장 박연세 목사)는 전국 27개 노회 중에 유일하게 노회 보고서에 신사참배를 결의한 내용을 총회에 제출하여 총회록에 남겼다. 1938년 5월 6일부터 10일까지 목포양동교회에서 열린 전남노회의 제30회 정기노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노회록에 담았다.

“광주 4교회 도당회와 목포양동교회 당회의 헌의안을 받아 다음과 같이 보고하나이다.

1.신사참배는 국민정신통일에 순연한 국가의식임으로 본 노회로서는 혼연히 참배함이 당연한 국민의 의무인 동시에 교회지도상 선명한 태도인줄을 아오며.” (만장 일치 가결)

이와 관련해 제27회 총회회의록(121쪽)의 제9호 각 노회 상황보고에서 전남노회 해당 부분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특별사항은 금춘 정기노회에 오랫동안 문제로 되어오던 참배 문제에 대하여 당국의 지시대로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참배는 국민정신 통일을 위한 국가 의식임을 인식하고 본 노회로서도 참배함이 국민의 당연한 의무인 동시에 교회 지도상 선명한 태도일줄 알고 이를 결의 실행하는 동시에 관내 각교회에 통지하여 일반 교인으로 취할 것을 보였사오며.”

제27회 총회에 참석한 전체 27개 노회 중에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한 노회는 17개였다. 이때 일제는 총회에 참석할 총대들은 신사참배를 찬동하는 자들로 선정할 것을 지시하였다. 당시 총회에 참석하고 상황을 목격한 김양선 목사는 당시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일제는 각 지방 경찰서를 통하여 총대로 선정된 노회 대표들에게 다음 3개의 조건 중 택일할 것을 강요하였다. 3개의 조건은 ‘1.총회에 참석하면 신사참배가 죄가 아니라는 것을 동의할 것 2.신사참배 문제가 상정되며 침묵할 것 3.상기 양안을 실행할 의사가 없으면 총대를 사퇴하고 참석하지 말 것’ 등이었다. 그리고 이 세 조건을 모두 불응하는 사람들을 구속 투옥하였다.

뿐만 아니라 총회 석상에서 경찰서 지도부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총대석 옆에도 정복 경찰이 서 있었으며, 총대석에도 사복경찰이 포진해 있었다.

이처럼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일제의 엄청난 강압에 의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스스로 수치스러운 결의를 한 것이며, 또한 당일 12시에 총회 대표가 직접 평양 신사에서 참배를 실시함으로 범죄를 저지르는데 이르고 말았다.

해방 후 1946년 남부총회에서 신사참배 취소 결의를 하였으나, 이는 남한 노회들만의 것으로 인정됐다. 이후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남북한 노회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안건(권연호 목사 제안)으로 받아, 신사참배 결의가 불법인 것으로 취소하는 정식 결의를 한다. 당시 총회 기간 중 회개의 성찬과 3시간 특별기도회를 열고, 6월 한 주일 전국교회가 회개하는 의미로 연보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들의 가족을 위로하는 일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총회와는 달리 과거 신사참배를 결의한 노회가 정식으로 회개하고 취소한 기록은 오랫동안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2016년 7월 31일 산정현교회에서 평양노회에서 분립한 7개 노회(경평, 남평양, 동평양, 서평양, 평양, 평양제일, 북평양)들이 과거 신사참배에 앞장선 노회 결의를 무효로 선언하는 취소결의를 했다.

또한 이 자리에서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복직도 결의한 후, 각 노회 대표들과 노회원들 그리고 총회역사위원회가 함께 모여 ‘주기철 목사 복권 감사예배’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과거 신사참배에 앞장선 노회와 선배 노회원들의 불의와 허물을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아가 신사 참배 거부운동에 앞장선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결의도 하였다,
▲ 장영학 목사(한국교회역사자료박물관 관장)

올해는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지 80주년을 맞는 해이다. 전국의 노회들은 총회의 치욕적인 신사참배 결의에 대해 공동 책임을 지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취소 결의를 하고, 회개하며 참회하는 성찬을 받아야 할 것이다. 비록 총회 차원에서 취소 결의를 했지만, 해방 이후 노회들이 정식으로 취소 결의를 한 흔적을 찾을 수 없으니 이에 대해 부담감을 갖고 노회들마다 정식 취소 결의를 해야 할 것이다, 모두가 역사적 책임을 지는 마음으로 참회를 해야 할 것이다.
▲ 평양 금수산에 세워진 신사.

이름도 예쁜 ‘금수산’ 자락에 ‘광풍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서있던 자리였다. 모란대와 을밀대 그리고 대동강 등 평양의 온갖 장관을 한 눈에 볼 수 있던 바로 그 자리. 하지만 이미 빼앗긴 조국의 산하였고, 거기에는 치욕의 상징인 일본 신사(神社)가 서있었다.

일행은 왼손, 오른손, 입을 차례로 씻고 옷깃을 여민 후 본격적인 신사참배 의식에 들어갔다. 정해진 순서대로 절을 하고, 손뼉을 치는 행위가 반복됐다. 바로 몇 시간 전 예배당에서 찬송을 부르던 그 입술이었고, 기도하기 위해 모았던 그 손이었다.

신사는 일본의 국교 신도(神道)의 사당이다. 당초 신도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선조나 자연을 숭배하던 토착신앙이었다. 그러나 1868년 일본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천황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신도를 적극 활용하면서 국가종교로 부각되었다.

대륙침탈의 야욕을 불태우던 일제는 자신들이 진출한 지역에는 반드시 신사를 세워 자국민의 단합과 상대민족의 사상통일을 꾀했고, 우리나라에도 1876년 개항 이후 전국에 수많은 신사를 설치한다. 처음에는 일본 거류민들 중심의 민간차원에서 건립과 운영이 이루어졌지만, 1910년 한일병탄 뒤부터는 본격적으로 국가 차원의 육성이 시작됐다.
▲ 서울 남산에 건립된 조선신궁.

1925년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이 건립된 것을 계기로 일제는 본격적으로 신사참배를 우리 민족에 강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립학교, 그 다음에는 일반 사립학교, 나중에는 기독교학교와 교회들까지 주요 공략대상이 됐다.

처음에는 ‘우상숭배’라며 강력히 맞섰던 한국기독교의 대오는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부르짖으며 강력한 식민정책을 펼친 일제의 탄압 앞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로마 교황청의 훈령을 받고 투항한 가톨릭에 이어, 개신교에서는 감리교회가 앞장서 1936년에 백기를 들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주도했던 장로교회마저 1938년 9월 10일 평양서문밖교회에서 개회한 제27회 총회를 기점으로 변절하며, 한국교회는 결국 패배의 쓴잔을 받아든다. 일본 경찰들이 대놓고 자행하는 감시와 통제 속에서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한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대표들은 회의까지 멈추고, 평양신사로 향했다.

평양신사는 일본인들이 ‘천조대신(天照大神)’이라 부르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를 제신으로 섬기는 사당이었다.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린 이들은 ‘기독교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다’ ‘애국적 국가의식이다’고 스스로 강변했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는 우상숭배이자 배교행위였다.

한국교회는 그렇게 쓰러졌다. 한 번 내준 신앙의 정절은 속절없이 내팽개쳐졌다. 이후 장로교 총회 기간에는 신사참배가 당연한 절차처럼 실시됐고, 전국 교회로부터 돈과 종을 거두어 일본군대의 무기 구입자금으로 헌납하기도 했다. 1942년에는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이 붙은 전투기가 등장했다.

이름 있는 목사들은 겨레 청년들을 점령국의 용병으로 내몰고, 일제의 대동아전쟁에 협력하도록 교회를 독려하는 시국강연회 연사로 등장했다. 한 때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었던 ‘대부흥’의 성지 평양의 교회들은 신사참배 결의 이후 쇠락의 길을 걷다가 결국 해방 이후에도 회복되지 못했다. 무서운 암흑기가 도래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2018년 9월 10일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며

한국 장로교회 신사참배 결의와 1940년대의 부일과 배교

 

나삼진 목사 (Joyful Educational Ministries 원장)

2018년 9월 10일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를 “솔선 여행하고, 비상시국하에서의 총후 황국 신민으로서의 적성을 다하기로” 결의하고 성명서를 낸 지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는 한국 장로교회 50주년 희년잔치를 마친 후 불과 4년 만의 일이었는데, 오늘날까지 134년의 한국 장로교회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이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여 관심은 갖지만 매우 피상적으로 알고 있으며, 그 이후 1945년 해방 때까지 교회가 어떤 범과를 저질렀는가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여 회개 집회를 갖는다는 보도가 있지만,1)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학문적인 평가와 반성도 빈약한 실정이다. 더구나 올해는 한국 장로교회 중요 교단 총회가 신사참배 결의 80주년 기념일에 개회하는 데도, 이에 대한 의미있는 행사가 준비되지 않고 있는 것은 한국 교회의 빈곤한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한국 장로교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여, 그 이후 1940년대 한국장로교회의 부일과 배교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한다. 이 사건은 우리 시대에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그 역사적인 경계를 삼고자 한다. 이 논의를 통해 한국 장로교회가 새롭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1.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1) 일제강점기 기독교 탄압의 배경과 신사참배 강요

일본 제국주의(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정치적 억압정책, 경제적 수탈정책, 문화적 말살정책 등 세 가지 정책으로 나타났다.2) 정치적 억압정책은 한국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한국인의 정치적 참여를 봉쇄하는 것이었고, 경제적 수탈정책은 농업 방면과 상공업 방면에서의 수탈이 중심이 되었으며, 문화적 수탈정책은 교육정책과 언어정책, 역사왜곡 등이 중심이 되었다. 거기다가 종교적 탄압정책도 함께 나타났는데, 일제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극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천황숭배와 신사신앙을 축으로 하는 그들의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기독교와는 조화, 공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제에게는 당시 기독교가 민족운동과 깊은 연대를 가진 배일세력으로 인식되었으며, 일본과 경쟁, 혹은 적대관계에 있는 영국과 미국 등 서구 여러 나라들과 선교사를 매개로 연결되어 통제나 지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3) 일제가 기독교를 유독 탄압했던 것은 이렇게 일본의 제국주의적 본성과 갚은 관련을 갖는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은 그 야욕을 중국으로 뻗히게 되었는데, 1932년에 허수아비 정권으로 만주국을 수립했다. 일제의 이러한 야욕은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노골화되어, 1937년 7월 선전포고 없는 중일전쟁을 도발한 후에는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며 중국대륙을 병탄하려 했다. 이는 전쟁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었으므로, 그들이 즐겨 사용했던 ‘총후(銃後, 후방을 의미)의 지원과 협력을 위해 국민정신의 통일이 중요했다. 이에 조선과 일본이 하나임을 강조하는 내선일체 정신 계몽에 적극적이었다.

1936년 8월 관동군 사령관 출신의 미나미가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조선민족을 말살하는 대대적인 억압정책을 폈다. 일제는 1937년에 들면서 9월 6일 애국일 제정, 10월 2일 ‘황국신민의 서사’의 제정과 일상적 제창 강요, 1938년 2월 6일 지원병제 실시, 3월 4일 민족성 말살을 위한 조선교육령 개정, 1939년 1월 10일 창씨개명 강요, 1942년 5월 징병제 실시, 1942년 초등교육 배가계획 등의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4)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시작한 후 그들의 종교 신도(神道)를 한국에 이식하기 시작했다. 1925년 조선신궁을 건립한 이래 도처에 신사를 건립하면서 1936년에는 전국에 54개의 신사(神社)와 293개의 신사(神祠)를 보유하게 되었다. 일제는 신사참배로 국민들의 정신적 통일을 이루려 하였다.

신사참배의 강요의 첫 시도는 1932년 춘기 황령제의 제례에 각급학교의 참여를 요구한 데서 시작되었다.5) 이러한 요구가 1935년부터 기독교 학교 신사참배 강요로 나타났고, 1936년부터는 교회와 교회기관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1937년 7월에 1면 1신사 정책이 추진되면서, 신사가 급격히 늘어 1945년에는 신사(神社) 79개와 신사(神祠) 1,062개가 되었다.6) 최근 공개된 1942년 5월 경 전남 담양면장의 공문에 의하면, 일제는 신사운영비까지 주민이 부담하게 했다.7)

2)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신사참배는 기독교 여러 교파에 요구되어 장로교에서는 1938년 2월 9일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후 8월에는 평양노회, 9월에는 경안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고, 전국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일제의 강요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8) 이 시기에 각 종교단체나 다른 교파들 가운데 천주교는 교황청의 정책에 따라 일찍이 1936년 5월에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였고, 안식교는 1935년에, 감리교는 1938년 9월 3일 총리사 양주삼의 명의로 신사참배 여행 성명서를 발표했다. 마지막으로는 장로교 총회가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 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추히 국민정신총동원 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期)함

소화 13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제27회 총회에서는 이 결의 후 평양기독교친목회 심익현 목사가 신사참배 즉시 실행을 특청하자, 총회가 이를 받아들여 김길창 부총회장의 인솔로 전국노회장 23명이 총회를 대표하여 평양 신사에 참배하였다.9) 이어 총회에서 김길창이 제출한 건의안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10)

1) 당국과 조선교회와 선교사단과의 삼각적 관계의 원만을 도모할 일

2) 총후보국(銃後報國)에 물자헌납운동은 물론 우선 정신 동원의 일부로서 내지교회와의 연락을 위한 친선사절을 보낼 일

3) 국방헌금은 교회가 일정한 시일에 애국예배를 보는 동시에 국방헌금대로서 조직할 일

4) 신사참배는 사대절(四大節)에 일반시민과 같이 참배하도록 당국과 교섭할 일.

12월 12일에는 장로교 홍택기, 김길창, 감리교의 양주삼, 김종우, 성결교의 이명직 등 5인이 한국교회 대표단으로 일본의 이세신궁과 가시하라신궁 참배를 떠났다.11)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겠지만, 총회에서의 부속 결의와 그 이후 지도자들의 행적으로 볼 때 신사참배는 일제의 강요와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3) 기독교 학교의 폐쇄와 신사참배 반대운동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저항의 반작용도 있었는데,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기 위해 1938년 졸업생들에게 우편으로 졸업장을 보내고 스스로 휴교했다. 주한 각 선교부들은 신사참배에 응하지 않기 위해 그동안 설립, 운영해오던 기독교 학교를 폐교했다. 이들 선교부들 가운데는 남장로교회 선교부가 강력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사참배 강요가 본격화 되면서 선교본부 풀톤 총무가 내한하여 신사참배 반대의 의지를 분명히 함에 따라 그해 9월 6일 전라남북도의 도지사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전라지역의 네 학교를 강제로 폐교하였다. 순천 매산학교, 전주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등의 세 학교도 스스로 폐교 신청을 해 폐교되었다.12) 이같은 반응은 부산경남지역을 관할하던 호주장로교회도 1938년 6월에 학교들을 폐쇄하였다.

신사참배 반대에 따른 일제의 종교적 탄압이 가속화되면서 다른 교파들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1942년 2월 20일 미국감리교회 해외선교부에서 선교사들은 모든 선교지역에서 철수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고,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철수하였다.13)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후 전국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평안남도 주기철, 평안북도 이기선, 경상남도 한상동, 만주 한부선 등이었다.14) 집단적, 조직적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한 이들은 1940년 9월 20일 새벽 4시 일제검거로 체포되었다. 한국 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로 200여 교회가 폐문되고, 2천여 명이 투옥되었으며 이중 50여 명이 순교하였다.15) 8월 17일 밤 이기선, 주남선, 한상동 등 20명이 평양감옥에서, 손양원이 청주감옥에서, 또다른 소수가 부산감옥에서 출옥했다.16)

 

2. 신사참배 결의 이후의 한국 장로교회의 훼절과 배교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가의식으로 결의한 이후 교회는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9월에 있은 제28회 총회에서는 일제에 협력하기 위한 기구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조직했다. 총회 파회 후 산회되는 총회와는 달리 이 기구는 상시체제를 유지하였는데, 이사장은 총회장이 맡고, 각 노회장은 이사로, 총대들은 평의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전국에 26개 노회 지맹이 결성되고, 731개 애국반이 조직되었다. 1937년 7월부터 1940년 8월까지 장로회 총회연맹에 보고된 장로교의 친일행위는 전승축하회 604회, 무운장구기도회 8,953회 국방헌금 15,803.46원, 휼병금 1,726.46원, 유기 308점, 시국강연회 1355회, 위문 181회, 위문대 1,580개였다.17)

1940년대의 한국 장로교회 총회는 개회 이후 총대 일동이 신사에 참배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18) 제30회 총회에서는 시난극복의 결의문을 작성, 총회장 명의로 발표하고, 이를 지나주둔황군사령관에게 보내기로 결의하였다.19)

동양평화를 확보하고 팔기일우의 대이상을 구현한다는 황국부동의 국시를 지금은 적성국 가의 제국에 대한 도전적 태도가 일일 노골화되어 아국의 국시수행에 방해를 위해 광분 하는 현 시국의 긴박하고 비상의 때인 가을에 기독교도로서 초연하지 않고 장로교파 36 만 신도는 불퇴전의 결의를 가지고 국책에 순응하여 결전태도를 실천확립하고 시난극복 의 정신을 갖도록 한다.

소화 16년 11월 22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1940년대의 한국 장로교회가 얼마나 부일과 배교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는 제31회 총회 회의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20)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개회되었던 제31회 총회는 개회예배 전에 먼저 필승 기원선언문을 채택하고,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회의록은 “일동은 크게 감격해서 박수를 하였다”고 기록하였다.21)

천황의 덕분으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고, 그로 인해 세계 신질서를 완성한 것 이 우리 제국의 국시입니다. 우리의 황군 장병은 하늘에서 바다에서 육지에서 큰 전과를 거둬가 고 있는 것에 대하여 전장의 뒤에 있는 국민은 감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가을에 우리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천황의 은혜에 감격해 눈물을 흘리고, 협심 전력으로 성스러운 업적을 완수하도록 매진할 것을 결심합니다.

왼쪽과 같이 선언합니다.

소화 17년 10월 16일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31회 총회에서는 이 선언문 채택뿐만 아니라 개회 이튿날 1942년 10월 17일 오전 9시 30분 총대원들이 일제히 평양 신사에 가서 참배하였으며, 이어 평안남도 고등감찰과장의 시국강연, 국민의례, 특별강연회, 전승기도예배가 있었다. 주일에는 성만찬 예식이 있은 후 창무 조선군 보도부장의 강연, 저녁에는 오후 7시에 전승기도예배를 가졌다. 총회 주최로 대동아전쟁 목적 관철과 기독교도의 실무를 재삼 격려하기 위하여 호남선, 경부선, 함경선, 황해선, 경의선 등 다섯 조로 나누어 전조선 중요도시에서 시국순회 강연대를 파송하기도 했다.22) 총회의 경건회에서도 설교를 맡은 목사가 로마서 13장 1-3절을 중심으로 ‘기독교인의 국민적 각오’라는 친일적 설교를 하기도 했다.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이후 불과 4년 안에 총회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는 더 이상 장로교회의 총회일 수가 없었다.23)

1940년대에는 황민화 사상이 기독교 안에 까지 깊숙이 들어왔는데, 전국 교회에 가미다나(信朋)을 설치하고, 예배 전에 천조대신의 신패에 경배하고, 동쪽을 행해 일본 왕에게 절하고, 황국신민서사 낭독과 국기배례를 한 후 예배를 드렸다. 더구나 서울의 한강이나 부산의 송도 앞바다에서 천조대신 이름으로 신도침례(미소기 바라이)를 받도록 했다. 또 구약성경 사용을 폐지하고, 찬송가도 부분적으로 삭제되었다.24) 한부선은 그 시대에 모든 교회가 총독부의 선전도구가 되기 위해 하나의 교회로 묶여 총독부의 통제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증언한다. 성경도 구약성경에서 종말론과 연관이 있는 부분들은 사용이 금지되었고, 복음서를 중심으로 설교하게 했으며, 기독교인들이 주일에도 ‘전쟁을 위한 노력 동원’이 되었다고 전한다.25) 찬송도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금주가 등 21곡이 삭제되었다.26) 이같은 일은 감리교에서 더 협조적이었는데 1939년 1월 히라누마 내각에 의해 종교단체법이 통과된 후에 일본 기독교 조선 감리교단 정춘수 통리가 전국교회에 시도한 공문에서 확인된다. 공문에는 구약성서와 신약의 묵시록을 사용하지 않고, 사복음서에 기인하여 교의를 선포하기로 교회에 통달이 있었다.27)

3. 1940년대 한국 장로교회의 부일, 배교 행적들

제31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1942년 10월 16일 서문밖교회당에서 26개 노회 총대 목사 69명, 장로 66명, 모두 135명이 참석한 가운데 회집했다. 이 총회에 각 노회에서 상황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총회 회의록 79면부터 90면까지에 수록되어 있다. 각 노회는 감사의 건, 교회상황, 특별상황, 교육상황, 장래 계획, 교세 통계 등을 보고하는데, 노회는 특별상황과 장래 계획이라는 항에서 부일, 배교 행적들을 상세하게 남기고 있다. 이를 내용별로 분류,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애국기 헌납 헌금

1841년 8월 ‘조선장로교도 애국기 헌납기성회’가 조직되고, 모금을 시작하였다. 이어 이 일은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연맹’을 통해 이루어졌다. 다수의 노회에서는 애국기 헌납을 위해 헌금하였는데, 충청노회는 4,051.60원을, 전북노회는 4,000여 원을, 군산노회는 4,500원을, 용천노회 25,000원, 평서노회 8,000여 원을 헌금했고, 삼산노회와 제주노회는 금액을 밝히지는 않지만 애국기 헌금을 위해 후방국민으로서 정성을 다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모든 헌금은 기성회를 통해 모금되어 군에 전달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계속되자 일제는 무기 제작을 위한 물자 확보를 위해 교회의 종을 징발했다. 충청노회는 82개 교회 가운데 80개 교회의 종을 헌납하였고, 평서노회는 68교회에서 국방헌금 외에 조종 77개와 놋그릇 152개를 헌납하였으며, 전북노회는 종과 함께 금속류 회수운동을 전개하여 놋그릇 수 천점과 교회 조종을 헌납했다고 보고하고 있다.28) 이렇게 수납된 종은 1941년 10월부터 1942년 10월 15일까지 전국적으로 1,540개, 총액 약 11만 9,832원에 달했으며, 놋그릇 등 잡종기 헌납은 2,165점이었다.29)

이렇게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1942년 2월 10일 육해군에 애국기 1대 또는 기관총 7정의 대금으로 150,317.50원을 헌납하였고, 그 후 들어온 자금으로 같은 해 6월 조선군 사령부를 방문하여 육군환자용 자동차 3대 기금으로 23,221.28원을 납부했다.30) 1942년 9월 20일 해군성으로 헌납한 애국기 명명식이 경성운동장에서 개최되었는데, 총회 대표가 함께해 감사장과 수납서를 받았으며, 해군보국호 선상전투가 한 대와 육군 기관총 두 정에 대한 명명은 ‘조선장로호’로 명하고, 당일 헌납 보국호 사진을 해군성으로부터 받았다는 총회 연맹 보고를 하고 있다.31)

총회 연맹은 1944년 반도인에 대한 징병령 계획에 따라 “이 감격을 안고 동 준비운동을 함에 있어 실제적 운동으로서 전 조선 기독교 가정 부인계몽운동을 하기로”하고, “전 조선 기독교 지도자는 일본적 기독교 정신 아래 교회원을 지도하도록 함에 있어서 본 총회 연맹은 그 지도자에 대한 황도정신에 함량과 함께 기독교 신학사상의 명랑화를 기해서 철저하게 연성운동을 하도록 함”이라 보고한다.32) 이 시기 한국 장로교회의 부일협력과 반민족적인 행위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2) 시국강연회와 전승축하대회

이 시기에 여러 노회에서 시국강연회도 실시하였다. 충청노회는 관내 82개 교회 가운데 80교회에서 시국강연회를 실시하고, 조종을 헌납하고, 부여신궁 제조에 근로봉사대 3인을 파견했다. 이와 함께 충청노회가 교파합동 청원서를 총회에 제출하였다.33) 삼산노회는 징병제 실시 경연과 애국예배를 실하였고, 제주노회도 1938년 2월 지원징병제 실시에 따라 축하 강연을 도경찰서 고등계의 후원 아래 제주도내 20여 개 교회에서 개최하였다.

일본군이 전장에서 승리하면서 노회에서는 전승축하대회도 개최하였다. 이 일에 가장 앞장섰던 노회는 서울을 교구로 하는 경성노회였는데, 결전 체제강화 신도대회를 개최하고, 전승기원대회와 남방 출정 황군장병을 위한 일장기 500본을 발송했으며, 싱가포르 함락 축하 신도대회 및 징병제 실시 감사대회를 개최하였다.34) 노회 관내 여러 교회는 국어(일본어) 강습회 개최, 황군장병에 대한 위문품, 위문금을 종전대로 발송하였다는 보고로 보아 이전부터 계속된 사업임을 알 수 있다.

3) 교회 통폐합

일제는 교회의 통폐합에도 적극적이었다. 일제는 기독교 세력의 약화를 기하기 위해 지역교회의 통폐합을 강요하여 1941년 3,624교회에서 1942년에는 2,543교회로 줄어들었다.35) 한 해 동안 모두 1,081교회가 폐쇄되었는데, 이는 당시 총 장로교교회 수의 30%가 되는 것이다. 그중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 경남노회로, 노회 상황보고에서 “통제에 의해 교회의 통폐합을 실행한 결과, 335교회 중에 108교회가 감소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36) 이는 총회산하 교회 감소분의 꼭 10%를 차지하는 수로, 전국 26노회인 것을 고려하면 가장 많은 수의 교회가 폐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일제의 박해에 의해 기독교 신앙과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지만, 노회의 보고를 볼 때 노회가 일제의 뜻을 따라 적극적으로 교회 통폐합에 협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일본적 기독교 추진

일제는 기독교를 일본적 기독교로 바꾸기에 혈안이 되었고, 교회들이 이에 협력했다. 충청노회는 일본적 기독교로 진일보 전환했다고 보고하고, 함북노회는 교역자 하기 수련회를 개최하여 일본정신사 강의를 한 주 동안 청강을 보고하고 있다. 황해노회는 신도의 신앙에 충실하기 위해 힘을 쏟았음을 보고하고, 평양노회는 비상시국에 임하여 각 시찰부에서 활동하는 선교 대신에 목사를 파견하여 순회하도록 하고 있다. 삼산노회에서는 일요학교에서 일본어로 가르치고, 일요학교 지도수련회를 개최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또한 여러 노회가 일본적 기독교화에 앞장서겠다는 장래 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경성노회는 신도로서 충성보국의 전신을 철저하게 하도록 하며, 전북노회는 일본적 기독교 확립에 매진하며, 전남노회도 황국길에 따라서 일본 기독교 완성에 매진할 계획을 보고하고 있다. 제주노회도 국어 보급을 장려하고, 일본적 기독교에 매진하며, 경남노회도 교회의 지도자 및 신도 등을 노회 또는 지방적으로 각각 훈련시켜 일본적 기독교 건설에 매진하며, 경동노회도 신도들에게 철저히 시국인식을 하게 하여 전도 사업 및 종교교육에 임하여 일본적 기독교 건설에 매진토록 하는 것을 장래 계획으로 보고하고 있다. 경북노회와 함북노회 등도 유사한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

5) 교파의 통폐합

한국 장로교회의 이같은 부일협력과 배교행위가 따르는 사이, 일제는 기독교를 효율적으로 통제, 관리하기 위해 교파통합을 추진, 각 교파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폐합하려 했다. 교파통합을 위한 일제의 뜻을 파악하였던 충청노회와 평양노회는 교파 통합청원서를 총회에 제출하였다. 이 청원은 정치부로 보내졌다가, 정치부 보고를 받아 가결하고 중앙상치위원회에 위임되었다.37)

교파의 통폐합은 제31회 총회 이전에 이미 추진되고 있었는데, 1942년 1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일본기독교 조선교구, 구세군 등 다섯 교파 대표가 모여 조선기독교합동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통합을 추진하다가 감리교의 이탈로 실패로 돌아갔다. 교파 통합이 결렬되자, 장로교 총회는 상치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1943년 5월 총회를 해산하고,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 되었다.38) 이어 일제는 전세가 이미 기울었음에도 불구하고 1945년 8월 1일에 다시 모든 교파들을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합되었다.39) 초대 통리는 장로교 김관식, 부통리에는 감리교 정춘수가 맡았다. 이것이 불과 해방 두 주 전의 일이었다.

장대현교회 목사로 평양노회 총대로서 교파 통합안을 헌의하고,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설립에 앞장서 통리가 되었던 김관식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재빠르게 변신해 해방과 함께 조선교단의 기구적인 재건에 앞장섰다. 그는 1945년 9월 8일 새문안교회당에서 남부대회를 소집해 대회장을 맡아 교단을 이끌기를 원했으나 감리교와 장로교 대표들이 각각 교파로 환원을 원하면서 단일교단 유지가 무산되었다. 기독교계 친일인사들이 이렇게 해방 후 자숙없이 한국교회 대표로 등장하였고, 그에 비해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쇄신론자들은 분리주의자로 매도되고, 결국 1951년 장로교 총회에서 축출되고 말았다.40)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국가의 체계를 갖추기에 급급한 나머지 친일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아 민족정기가 바로 서지 못한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불행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정권에 협력하였던 독일 교회가 1945년 8월에 프랑크푸르트에서, 10월에 슈투트가르트에서 모여 지난날의 잘못을 참회하고 ‘슈투트가르트 죄책 고백’을 발표하고 하고, 책임있는 사람들은 독일교회의 재건과정에서 물러난 것과 대비되고 있다.41)

맺는 말

지금까지 일제의 기독교 탄압과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 그 후 1940년대 한국 장로교회가 어떻게 훼절되고 배교의 길을 걸었는가를 논의하였다. 이제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하며 이 소론을 마치려 한다.

첫째,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 결의 80년을 맞아 부끄러운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회개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당시의 우상은 신사에 절하는 것이었는데, 이 시대에 어떤 우상들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에 침투하고 있는가를 인식하고, 이를 청산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심각한 우상은 돈과 명예와 권력일 것이다.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의 재정비리는 교회가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에 어느 정도 성취를 경험한 이들이 감투에 대한 욕심이 연합기관을 만들어 명예를 추구하고, 비상식적인 기관 운영으로 자주 물의를 일으킨다. 또 교회의 역량을 넘어선 거대한 예배당을 건축하고, 이를 유지하지 못해 이단교회에 넘기는 일까지 발생되는 것은 교계 지도자들이 명예의 우상을 섬기기 때문이다. 또 오늘의 한국 교회에 교권주의가 판을 치고, 교회 지도자들이 국가권력과 결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것은 권력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국 교회에서 더 이상 교권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

둘째, 한국 장로교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이후 발생한 교회의 훼절과 배교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가 이루어지고 그 방파제가 무너진 후 1940년대에 모든 것이 일시에 무너지는 도미노 현상을 경험했다. 1940년대에 목사들이 신도 침례까지 받았고, 한국 장로교회 총회는 애국기 헌납 헌금, 시국강연회와 전승축하대회, 교회 통폐합, 일본적 기독교화 추진, 교파 통폐합 등에 앞장서 부일과 반민족적 배교의 길을 걸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한 매체의 보도에 의하면 한국 교회 총회장이나 중요 기관장들의 상당수가 교회를 자녀에게 세습했다. 한국 장로교회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예장통합의 총회 재판국이 총회 헌법의 규정을 벗어나 명성교회의 세습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함에 따라 이 문제가 제103회 총회의 핫이슈가 되어 있다. 한국 교회 희년 잔치를 벌인 후 4년 만에 이루어진 신사참배 결의와 같이 이 사건은 한국장로교회 총회 설립 100년 잔치를 벌인 후 불과 6년 만에 일어났다. 한국 장로교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가 한국 교회의 일제강점기의 부일과 배교의 본격적인 출발이 된 것과 같이 명성교회 세습의 용인은 한국 장로교회가 향후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을 것인가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이 문제의 통합총회의 최종 결정이 한국 교회의 미래의 결정적인 방향타가 될 것이 분명하다. 한국 교회는 지금 흥망의 기로에 서 있다.

셋째, 한국 교회와 교계는 법과 상식으로 목회와 행정이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최근 비리 혐의로 총신대 총장과 이사들이 해임되어 임시이사가 파송되었고, 피어선성경학교의 백년 역사를 이은 평택대 총장은 20년 동안 여직원 성추행이라는 파렴치한 사건으로 법정 구속되었다. 대형교회들에서 발생한 목회자 비리와 윤리적인 문제들이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있으며, 많은 기독교계 대학들이 비리로 몸살을 앓고, 이러한 여러 문제들이 자주 방송에 노출되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있다. 한국 교회는 교회 행정과 재정운영에서 사회에서 통용되는 기준도 따르지 못해 사법부의 판단과 정죄를 받고 있다. 한국 교회는 공적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넷째, 한국 교회와 연합기관은 지난 수년 동안 정치적인 행사에 참여하면서 극단적인 수구세력으로 지목되고, 지성사회의 혐오를 받고 있다.

지도자들이 역사의식을 갖지 못하고 교회를 정치집회에 동원하면서 교회의 영광이 손상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한국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지만, 이 땅에 속한 기관이 아니다.

한국 교회가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아 이 중대한 역사적 범죄를 깨닫고, 이를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사로잡고 있는 우리 시대의 돈과 명예와 권력의 우상을 척결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한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교회에 주어진 사명에 충실해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하여 한국 교회 200년의 새로운 역사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 한국 선교 원년 : 1885년 4월 5일 / 2021년은 선교 136주년



신사참배는 ‘차금법’ 문제 바로 볼 수 있게 하는 거울



한국교회가 지은 신사참배의 죄에 대해 되돌아보면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된다.

첫째, 만일 모든 한국교회가 힘을 합하여 저항했더라면 그것은 막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저항을 포기한 사람들에 의해 지도자들의 의견들이 분열되었고, 결국 신사참배의 강요에 굴복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것은 모든 교회사가가 아쉬워하는 대목이다.

둘째, 마귀는 그 죄악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일제는 이 신사참배가 종교 행위가 아니라 국민의례라는 명분을 들고 나왔고, 많은 지도자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 가운데는 실제로 그렇게 믿은 사람들도 있었고, 강요 때문에 굴복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렇게 믿고 싶어 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거짓이었음이 드러났다.

셋째, 마귀는 처음에는 조그만 것부터 시작하며, 일단 그것을 받아들이면 점점 더 심한 요구로 나아간다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는 국민의례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자, 일제는 더 심한 것들을 강요했다.

천조대신이나 천황이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높은 신이라고 주장해도 받아들여야 했다. 교회당 안에 간이신사를 설치하고 그것에 절하라고 해도, 예배시간에 신도예배를 함께 드리라고 해도, 목회자들에게 신도침례를 받으라고 해도,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신사참배는 종교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수용했기 때문이다.

넷째, 마귀는 처음에는 양처럼 접근해서는 폭군으로 돌변한다

신사참배가 처음에는 국민의례라는 부드러운 얼굴로 나타났지만, 일단 결의가 이루어지자 곧바로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무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다섯째, 법적 결의가 중요하다

날치기 결의였지만, 총회에서 일단 결의가 이뤄지자 그것은 모든 배도의 근거가 되었고,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빌미가 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총회의 결의나 법은 그것이 나쁜 것이라면 어떤 형태든 방관해서도 안 되고 함부로 통과되게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교훈은 오늘날 문제가 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평등법과 같은 악법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차별금지법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신사참배 문제와 유사성이 있다.

첫째, 신사참배가 그 속의 죄악을 감추기 위해 국민의례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 것처럼, 차별금지법도 그 속에 들어있는 죄악을 숨기기 위해 인권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나고 있다.

소위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명분은 참으로 그럴듯해 보이고 선한 동기가 들어있는 것 같지만,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엄청난 죄일 뿐이다. 우리는 그 가면에 속아서는 안 된다.

둘째, 신사참배가 조그만 것에서 시작해서 더 큰 배도로 이어진 것처럼, 동성애도 하나를 양보하면 더 큰 것을 양보하게 되어 있다.

동성애도 처음에는 동성 간의 애정을 허용하는 것에서 시작하다가 지금은 동성 간 결합까지도 허용하고 있다. 또 처음에는 육체적 성전환만을 트랜스젠더로 인정하다가 나중에는 육체적 성전환 없이 본인의 성정체성 주장만으로도 트랜스젠더로 인정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확대해 나간다면 나중에는 일부다처제도 소위 성소수자의 인권이라는 명분으로 보호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셋째, 신사참배가 국민의례라는 부드러운 얼굴로 시작했다가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폭군이 됐다.

차별금지법 역시 성소수자의 인권 보호라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무서운 얼굴로 돌변하게 된다. 이미 이 법은 동성애 반대자에 대한 탄압과 처벌 조항을 담고 있다. 신사참배의 가장 큰 피해자가 기독교였듯 차별금지법의 가장 큰 피해자도 기독교가 될 것이다.

넷째, 신사참배가 총회에서 결의되자 다른 모든 배도의 근거가 된 것처럼, 동성애 역시 법으로 합법화되면 교육이나 문화적인 면에서 다른 모든 죄악을 허용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이 법에 따라 학교에서는 동성애 옹호 조장교육이 진행될 것이다. 언론과 문화 예술에서는 동성애를 미화하게 될 것이고, 삶의 현장에선 동성애가 만연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법이 제정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다섯째,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교회지도자들이 일치단결하여 반대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사참배가 한국교회에 강요된 것처럼 차별금지법 문제에 대해서도 교회가 일치단결되지 않는다면 이 법이 제정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교회는 하나 된 목소리로 차별금지법에 반대하고 행동으로 나서야 한다. 이런 면에서 신사참배 문제는 차별금지법 문제를 바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좋은 ‘거울’이다. 팬데믹 시대 신앙을 위협하는 갖가지 시도에 대응하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라도 교회사를 더욱 깊이 연구해 나아갈 길을 찾자.








가치의 우선순위



가치의 우선순위

평소 두터운 우정을 자랑하던 두 친구가 함께 여행을 나섰고 외진 산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반나절 동안 쉬지 않고 걸은 탓에 고단해진 두 친구는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수풀 사이로 반짝거리는 것이 있었고, 이를 발견한 한 친구가 다가가 수풀 사이를 살펴보니 금덩이가 하나 떨어져 있던 것입니다.
그가 금덩어리를 주워 다른 친구에게 보여주자 그 친구는 기뻐하며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건 금 아닌가! 우리 횡재했구려!”

그러자 금덩어리를 주운 친구는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지며 다른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이보게, 우리라고 하지 말게 주운 사람은 나니까.”

그리곤 두 친구는 어색한 상태로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길을 가다 요란한 소리에 뒤를 보니 금덩어리를 잃어버린 산적들이 금을 찾기 위해서 두 사람을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금덩어리를 가진 친구는 이를 보곤 다급하게 다른 친구에게 외쳤습니다.

“이걸 어쩌나! 저 산적들에게 잡혀서 금덩어리가 있다는 것이 발견 되면 우리는 정말 죽게 생겼네.”

그러자 친구는 무표정한 채로 말했습니다.

“우리라고 하지 마시게. 금덩이를 주운 사람은 자네 아닌가.”

소유의 속성 중에는 물질에 대한 끊임없는 욕심과 이기적인 탐욕이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은 없다가도 생기고, 있다가도 사라지는 유동적인 것입니다.

잠시 찾아온 물질에 삶의 가치를 두기보단 늘 곁을 지켜주는 《‘믿음’》, 《‘사랑’》, 《‘우정’》 등 보이지 않는 것의 값짐을 깨닫는다면 더욱 행복한 삶이 될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욕심의 반대는 욕심이 없음이 아닌, 잠시 내게 머무름에 대한 만족입니다.


오이가 이렇게 좋은 것인 줄 몰랐습니다!



오이가 이렇게 좋은 것인 줄 몰랐습니다!

오이를 먹어야 하는 이유

1. 오이는 사람이 하루에 필요한 영양소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오이 한 개는 비타민B1, B2, B3, B5, B6, 비타민C, 엽산, 칼슘, 철분,마그네슘, 인, 카리, 아연 등을 포함하고 있다.

2. 가령, 오후에 피로를 느낄 때는 카페인이 들어있는 소다수(콜라등)보다는 오이 하나를 먹는것이 낫다.

오이는 비타민B와 탄수화물을 섭취할 수 있어서 속히 원기를 회복하고 몇시간 지탱 할 수 있다.
(오이 샌드위치)


3. 샤워를 하고 나서 옥실 거울에 뿌연 김이 서리는 것이 싫으시면 오이를 가로 로 썰어서 거울 표면에 문질러 주면 김이 말끔히 가시고 스파처럼 상쾌한 향기가 풍깁니다.
 

4. 텃밭과 화단에 굼뱅이와 달팽이가 창궐하면, 납작하고 빈 알루미늄 깡통 속에 가로 썬 오이를 몇 쪽씩 넣어 두면 여름 한철 밭에서 그런 벌레들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오이의 화학성분이 깡통표면의 알루미늄과 반응하여 사람의 코로는 맡을수 없는 냄새를 발산하는데 벌레들은 이 냄새를 견디지 못하여 밭에서 달아납니다.

5. 외출할 때 얼굴에돋은  뾰루지 또는 수영복으로 갈아 입을때 노출되는 뾰루지를 간편하게 감추는 방법을 알고 싶으세요?

오이를 썰어서 한두쪽을 그 부위에 몇 분동안 문질러 주면 오이의 식물성화확 성분이 피부의 교원질(膠原質)을 긴장시켜 외피를 팽팽하게 만들고 뾰루지를 감춰줍니다.
주름살을 일시 감추는데도 효과가 있습니다.


6. 숙취나 두통을 예방하려면,

잠들기 전에 오이를 몇 조각 먹고 자면 아침에 일어나서투통이 없고 상쾌하여집니다.
오이에는 숙취나 두통을 막아주는 우리 몸에  필요한 당과 비타민B군,전해질과 같이 소모된 영양을  보충하고 균형을 잡아주는 영양소가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7. 출출한 오후나 저녁에 간식을 먹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고 싶으면 오이를 드세요.

유럽에서는 수 백년동안 사냥꾼, 탐험대원 등이 야외에서 손쉽게 허기를 채우는 수단으로 오이를 먹었습니다.


8. 중요한 회합이나 취직면접 장소에 서둘러 나가야 하는데 구두 닦을 시간이 없습니까?

오이를 가로 잘라서 구두 표면에 문질러 주면 광택이 오래 유지될 뿐만 아니라 물방울도 배퇴합니다.


9. 삐걱거리는 돌쩌귀 (경칩)를 윤활해주고 싶은데 WD-40이 떨어졌습니까?

마찰 부위에 오이를 문질러서 오이즙을 스며주면 어느 새 삐걱거리지 않게 됩니다.
 

10. 여인이 일과에 지쳐서 얼굴 마사지나 스파를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습니까?
 
오이 한개를 몽땅썰어서 냄비에 담아 물을 부어서  끓이면 오이의 화학물질과 영양소가 증발해서 편안하고 그윽한 향기를 발산하는데 그것은  산모나 학기말 시험을 치루는 여대생들의 신체적 스트레스를 경감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11. 직무상 고객들과 오찬을 나눈 후입냄새가  걱정되는데 껌이나 박하사탕 준비가 없습니까?
 
오이를 가로썬 얇은 조각 하나를 혓바닥에 올려 입천장에 밀어부치고 30초 동안 입을 다물고 있으면 오이의 식물성 화학물질이 입냄새를 발생하는 박테리아를 죽여서 입 냄새를  제거합니다.


12. 수도꼭지, 싱크 또는 스텐레스 용기 등을 친환경적인 방법으로 닦고 싶습니까?

닦고 싶은 용기 표면에 오이 조각을 문지르면, 여러 해 묵은 때를 벗겨내서 광택을 회복시킬뿐만  아니라 얼룩도 남기지 않고,닦는 동안  손가락과 손톱에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13. 펜으로 쓴 글씨를지우고 싶습니까?

잘못 쓴 글자를 오이 껍질로 살살 문지르면 지워집니다.
또 아이들이 벽에그린 크레욘, 마크등
낙서 자국을 지우는데도 효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Being Christian) 08-01-2021 제1회 성찬주일을 기다리며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셨다.
그러므로 나도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문제는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철저하게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세상과 충돌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웃을 사랑하라 또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 말씀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예수님처럼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종 세상에서 충돌을 경험하고 있다.

로마 군병에게 붙잡힐 때 베드로가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내리치며 예수님을 붙잡는 로마 군인들에게 저항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꾸짖으며 칼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시며 떨어진 말고의 귀를 다시 말고의 귀에 붙여주셨다.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가?
과연 내가 그 입장이라면 나는 그 칼을 멈추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도저히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도 나의 믿음은 성숙하지 못한 철부지 어린아들의 모습과 똑같다고 하겠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었다.
그 길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을 갖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영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마치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 위로 올라오실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렸다.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셨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성령이 육신의 모습을 드러나셨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육으로 태어나 육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기도할 뿐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고난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게 된 사람이다.

왜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하는가?
마치 왕관을 닮았기 때문이다.
왕관이란 권력과 권위의 상징이다.
코로나 비아로스는 우리와 창조 세계의 관계 즉 창조 세계와 우리의 관계가 비틀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처형되시기 전에 그의 머리에 쓰여졌던 가시면류관을 기억하는가?
코로나 비이러스는 큰 확성기와 같다.
아주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고 있다.

"너희들의 힘으로 이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인간의 교만을 무너트리는 하나님의 큰 소리가 이번에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매체로 들려왔을 뿐이다.

세상의 악은 두 가지 경로로 다가온다.

첫째는 자연적 악
둘째는 도적적 악

때로는 이 두 가지가 서로 깊은 연관을 갖고 작용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네 개의 기둥(柱)

"기둥"이란 한자 "주(柱)"는 "나무 목(木)"과 "주인 주(主)"가 합성된 것입니다.
특별히 "나무 목(木)"를 더 세분하면 "열 십(十)"과 "사람 인(人)"이란 자가 합성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기둥(柱)"이란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 십자가의 주인 노릇하는 것" 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자기 십자가를 찾아야 하고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달려가야 합니다.

지난 16개월동안 팬데믹이란 환경에 의해서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일상적인 생활이 중단되었습니다.
그 결과 전혀 새로운 "온라인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나마 우리들은 거의 휴대 전화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쉽게 온라인 예배로 전환이 가능했습니다.
이민교회는 고령화 되는 추세이므로 대부분의 교인들이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 어르신들이 주를 이루는 교회에서는 온라인 예배가 어렵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장차 환난의 시대에는 이런 것보다 더 심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므로 금번 팬데믹 환경을 신앙의 훈련 과정으로 생각하고 환난의 날을 준비는 지혜와 믿음을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1. 세례(洗禮)

세례는 "참다운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 위로 올라오시는 예수님은 하늘이 열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세례는 하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2. 성경(聖經)
그리스도인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귀 기울이는 공동체 존재로 구성하는 것

3. 성찬례(聖餐禮)
하나님께서 원하고 기뻐하고 기다리시는 존재를 발견하는 것

4. 기도(祈禱)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가 내 안에 일어나게 하는 것

세례(洗禮)

누가복음 3:21-22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첫째,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것
둘째, 참다운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
-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 성공을 추구하고 사물을 지배하는 인간성이 아니라 혼돈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자 손을 뻗어 맡기는 것.

(예) 창조의 질서는 혼돈의 깊음 가운데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드러났다. 

예수께서는 자기 앞길에 놓인 고난과 죽음을 가리켜 자신이 받아야 할 세례라고 하셨다.

마가복음 10: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누가복음 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사도 바울은 세례 받는 것을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로마서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리스도인의 적

1. 내부의 적 / 비인간성인 무질서
2. 외부의 적 / 외부의 혼돈

혼돈 : 인간의 죄와 무질서

성령의 바람 : 혼돈 위에 성령의 바람이 불러온다

하나님의 사랑 : 성령의 바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려 물속으로 잠겼다가 다시 찬란한 빛속으로 올라옵니다.

음성 :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사랑하는 아들이 된 후에 비로서 "기도"할 수 있는 은총을 입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 가지 칭호가 곧 인간성 회복의 요소

1. 왕(王)
2. 제사장(祭司長)
3. 예언자(豫言者)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聖經)


그리스도인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귀 기울이는 공동체 존재로 구성하는 것



성찬례(聖餐禮)


하나님께서 원하고 기뻐하고 기다리시는 존재를 발견하는 것


기도(祈禱)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가 내 안에 일어나게 하는 것









진실과 세 가지 형벌 이야기

 

진실은 돈으로 살 수 없다

페르시아 황제 코스로스는 사람들의 기대를 뒤엎고 중병에서 회복되었다.
그는 고문관들을 모두 불러놓고 말했다.

"여러분이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보오. 여러분은 내가 좋은 황제라고 생각하오?  거짓없이 말하시오. 그러면 그 보답으로 내가 값진 것을 선물하겠소."

고문관들은 한 사람씩 황제 앞에 나아가 온갖 아첨을 다 떨었다. 현자 엘림의 차례가 되었다.

"폐하, 저는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진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소. 그대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을 테니 솔직하게 말해보시오."

"폐하께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약점이 있고 실수를 저지르는 한 인간입니다. 폐하께서 축제나 궁전 건축, 특히 전쟁에 많은 예산을 낭비하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은 지금 과도한 세금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황제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약속한 대로 고문관들에게 각각 보석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엘림에게는 수상직을 임명했다. 다음날, 고문관들이 황제를 알현하러 왔다. 그들 중 대표가 말했다.

"폐하께서 저희에게 주신 그 보석들을 판 상인은 교수형에 처해야 마땅합니다. 그 보석들은 모두 가짜였습니다."

황제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너희들 말이 가짜인 것처럼 그 보석들도 가짜였다."



삶에 관한 예화 모음

 

성결한 삶 

 

미국의 기독실업으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아더 미다스 장로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한때 미국의 10대 재벌 중의 한 사람이었고, 한국의 대학생 선교단체에 50만 달러를 기증하고, 7억 달러를 들여 선교재단을 설립하는 등 남을 돕는 일에 물질을 사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기자가 그에게 ‘신앙과 인생에 성공비결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내게는 아주 간단한 다섯 가지의 신앙철학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첫째, 주일성수 

둘째, 온전한 십일조 

셋째, 하루의 첫 시간을 기도로 시작하는 것 

넷째, 내 가정의 주인을 예수님으로 모셔 들이는 것 

다섯째, 시간과 돈을 선한 사업에 사용하는 것

하나님은 우리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신의 뱃속만 차리는 부자는 부유할지는 몰라도 행복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알지는 못합니다. 당신은 미다스 장로의 신앙철학 중에 몇 가지를 실천하며 살고 계십니까? 

 

정결한 삶

 

본문: 시편 41 장 7 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시41:7) 

 

안데르센의 동화 중에 『미운 오리 새끼』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엄마 오리가 알을 품어서 새끼들이 알을 깨고 나왔는데 아무리 봐도 이상스럽게 생긴 새끼 오리가 한 마리 섞여 있었습니다. 다른 오리 새끼들은 그 이상한 형제를 미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혼자 쓸쓸히 호수 위를 헤엄치던 미운 오리 새끼는 자기와 똑같이 생긴 어미 새를 만났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는 바로 아름다운 백조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살아나갈 때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미운 오리 새끼와 같은 취급을 받기가 쉽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은 의미가 없고 하늘나라의 삶만을 고대하면서 최면 걸린 것처럼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구별된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왕자가 평상복을 입고 궁 밖으로 나가더라도 왕자 의식을 가지고 구별되게 행동해야 하듯이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세상의 박대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외로움을 극복할 때 우리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 세상의 악과 구별되어 정결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더욱 고귀한 삶 

 

데이빗 리빙스턴은 1813년 영국 스코틀랜드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0살부터 공장에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일하면서도 책을 사서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종교서적을 통하여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의 의무요, 가장 고귀한 특권이라는 것을 깨닫고 구원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을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미지의 아프리카에 건너가 그곳에서 33년동안 복음을 전하며 의술을 가르쳤고, 말라리의 한 오두막에서 조용히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반면 그의 형은 카나다로 건너가서 사업에 크게 성공하여 부자가 되었지만 무덤 비문에는 오직 "아프리카 선교사 데이빗 리빙스턴 형의 무덤"이라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이 두 형제 가운데 누가 더 고귀한 삶을 살다가 갔습니까? 

 

의로운 삶

 

성경 :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의리는 죽음을 면케 하느니라.”(잠11:4)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기 위해 무척 애를 쓰던 젊은이가 어느 날,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젊은이를 두 개의 방에 차례차례 데리고 가셨는데 첫 번째 방은 화려했으며 방에 있는 책상에는 많은 돈이 쌓여 있었으나, 두 번째 방은 전혀 볼품이 없는데다 방에 놓여있는 책상 위에는 몇 푼 되지 않는 돈이 있었습니다. 그 때, 다음과 같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책상 위의 돈은 당신이 지금까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 돈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본 첫 번째 방 책상 위의 돈은 당신이 당신을 위해 사용한 돈입니다’ 그 날 이후 젊은이는 돈을 쓸 때마다 ‘나는 지금 이 돈을 나 자신만을 위해 쓰는 것인가, 아니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는 것인가’라고 생각한 다음 신중하게 사용했습니다. 재물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 우리를 구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는 의리, 즉 죽음을 면케 하는 의로움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얻는 의를 가리킵니다. 행위로써 의롭게 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의 옷을 입고,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은 ‘용서받은 의인’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의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세 가지 의문 

 

톨스토이는 ‘세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첫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둘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셋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톨스토이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현재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대하고 있는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이다. 인간은 그것을 위해서 세상에 온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날마다 그때그때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사랑과 선을 다하여야 한다.”

이것은 톨스토이의 실천적 신앙 원리였습니다. 날마다의 삶속에서 기억되고 지켜져야 함에도 잊고 사는 시간, 사람, 일의 개념을 명쾌하게 정리해놓은 톨스토이의 세 가지 의문에 대한 해답은 오늘 우리의 삶의 태도를 점검해보게 하는 좋은 지침이 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사람 속에 무엇이 깃들어 있고,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무엇이며, 사람이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이 질문은 톨스토이의 작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속에서 하나님의 명을 거역한 천사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과연 해답은 무엇일까요? 

벌거벗은 몸으로 이 땅에 내려온 천사는 세 번 웃었습니다.

외투 살 돈으로 술을 먹고 정체 모를 부랑자를 데리고 들어온 

남편에게 욕을 퍼붓다가, 그 부랑자가 불쌍한 듯 저녁 밥상을 

차려주는 구둣방 주인의 아내를 보고 처음 웃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날 죽을 부자가 거드름을 피우며 일 년 신을 구두를 주문했을 때 웃었고, 세 번째는 고아가 된 이웃집 쌍둥이를 자식으로 삼아 기르는 부인을 보고 웃었습니다. 천사가 얻은 해답을 짐작하시겠습니까?

“사람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은 사랑이고,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지혜이며,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진정한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가 아닐 런지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어느 날 한 왕이 거울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거울 속에서 왕과 똑같이 생긴 사나이가 튀어나오더니 질문을 합니다. “자네, 어떻게 왕이 되었는가?” 왕은 말합니다. “남보다 잘나고 남보다 능력이 있어서 내가 왕이 됐지요.” 이 말을 들은 거울 속 사나이는 “이 세상에서 자네보다 능력 있고 자네보다 잘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자네는 아는가?”라고 말합니다. 

“자네는 어떻게 왕이 되었는가?” 또 질문합니다. “내 아내가 뛰어나기 때문에 왕이 되었지요.” 거울 속의 사나이는 또 말합니다. “이 세상에 자네 아내보다 뛰어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 그러면서 거울 속 사내는 계속 “자네는 어떻게 왕이 되었는가?” 하고 질문을 합니다. 왕은 곤혹스러웠습니다. 이말 저말 하면서 이렇게 왕이 됐지요, 저렇게 왕이 됐지요 하다 보니 몸에서 진땀이 납니다. 궁색한 변명만 늘어놓습니다. 그래도 이 사나이는 계속 말합니다. “자네는 어떻게 왕이 되었는가?” 결국에는 이 왕이 두 손 들고 말합니다. “제가 뭐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그저 하늘의 은총 덕분이지요.” 그러자 비로소 사나이가 거울 속으로 들어가더랍니다. 이 웃지 못 할 이야기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즉 ‘삶의 원동력은 무엇인가’에 대한 삶의 모범 답안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예측 못할 삶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이며 철학자였던 솔론이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를 만났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가?” 라는 왕의 질문에 솔론은 대답했다. 

“아테네의 텔로스입니다. 그는 자녀를 잘 길렀고 행복한 가정을 꾸몄으며 나라를 위해 전사했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는 누구인가?” 

“올림픽에서 월계관을 쓴 사람들입니다.” 

“솔론, 왜 자네는 나를 행복한 사람으로 지목하지 않는가?” 

“전하, 인생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 때문에 비석이 서기 전까지 행복한 사람인지 불행한 사람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중국 선교를 준비하고 있는 어느 미국 공과대 학생의 이야기입니다.
이 청년은 미국 동부에 있는 어느 공과대 학생인데 그의 아버지는 과거에 한국에서 20여년 간 선교사로 일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한국을 언제나 동경하며 특별히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공과대학에서 2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중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하던 중 한국 여학생을 만나 결혼을 하고 중국 선교에 대한 소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신학을 마치고는 다시 전에 다니던 공과대학으로 들아와서 남은 기간을 공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중국에 목사로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에 기술자로 들어가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저에게 그분에 대해 말씀을 전해준 분은 그와 대학에서 같이 공부하고 그가 결혼한 후에는 그들과 이웃해서 살던 부부인데 그 부인의 말에 의하면 그 미국인 대학생 부부는 여름에도 소매가 긴 옷을 입고 있고 밤에 잠을 잘 때에도 베개를 베지 않고 그냥 바닥에 누워 자고, 그리고 슈퍼마켓에 식품을 사러 가서도 꼭 낱개로 헤아려서 산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장차 선교하러 갈 중국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쉽고 안일하게 살아가도 되는 그러한 값싼 것이 아닙니다.
부단한 자기 훈련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는 값비싼 것입니다. 

 

후회 없는 삶

윌리암 보덴 씨는 1904년, 시카고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큰 낙농장의 법적 상속인으로 이미 백만장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세계 일주를 시켰습니다. 그는 아시아, 중동 그리고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고통받는 사람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는 마음에 큰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다 “나는 일생을 전도사업과 그 일에 대한 준비에 바치겠습니다.”라고 썼습니다. 그가 이러한 결심을 했을 때 그의 성경 뒷 표지에 “지체할 수 없음(No Reserve)"이라고 썼습니다. 예일대학을 졸업하면서 좋은 보수가 보장된 일자리를 거절하고 성경 뒷장에 이번에는“후퇴 없음(No Reter at)"이라고 썼습니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중국에 있는 회교도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항해하던 중 선교준비를 하려고 우선 이집트에 들렀습니다. 이곳에서 그만 뇌막염이 발병하여 한 달도 못되어 사망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겠지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던 게야. 헛된 일을 했었군!” 그러나 그의 성경 뒷장에는 위에 썼던 두 가지의 결심 밑에 “후회 없다(No Regret)"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 생애의 어떤 때든지 적용이 됩니다. 지금 나는 이 순간에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내 가슴에서 타오르는 열정은 무엇입니까. 남은여생을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잊혀진 땅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것인가? 

2008년에는 우리 자신을“지체함이 없이”,“후회함이 없이”그리스도께 순종하도록 결심합시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성공하든지 고난을 만나든지 간에 언제라도 하나님의 본향으로 부르실 때 “후회는 없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육적인 삶, 영적인 삶 

 

미국의 전도자 무디는 자기의 생일을 묻는 이에게 항상 자신에게는 두 가지 생일이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하나는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육신의 생일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를 믿고 거듭난 날이라고 했다. 우리 크리스천은 모두 이 두 가지의 생일을 갖고 있으며 그에 따른 두 가지의 삶을 누리고 있다. 하나는 생리적인 삶 곧 육체적인 생명이요, 또 하나는 신앙적인 삶 곧 영적인 생명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육적인 생명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육신의 생명을 화학적으로 분해하면 전부 3000여원어치에 해당하는 값싼 것이라고 한다. 호흡이 끊어지면 죽고 만다. 우리는 죽고 나면 한줌의 흙으로 변한다. 아무리 얼굴이 아름다워도 얼마 안가서 주름이 지고 만다. 시편 90편은 ‘인생은 70이 지나면 아침 햇살에 사라지는 이슬처럼 이 땅에서 사라지는 존재’라고 했다. 성경의 주제는 참 생명이다. 육신의 생명이 아닌 영적인 생명, 영원한 생명이 성경의 주제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또 새로운 나 자신을 발견할 때 또 하나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삶은 계란, 100원 

 

본문: 마태복음 25:24∼30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 25:26)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삶이 무엇인가? 삶의 가치는 얼마나 되는가?”를 적어오는 숙제를 냈습니다. 고민하다 시장을 걷던 한 학생이 기가 막힌 대답을 찾아냈습니다. 어느 분식집 앞에 붙어 있는 ‘삶은 계란 100원’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삶을 무엇이라 답하시겠습니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무한가치의 삶을 병아리로 부화시키지도 못한 채 삶은 계란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소중한 삶을 수많은 오해와 번민, 게으름으로 땅에 묻은 채 없애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애의 주인공인 한 달란트의 종처럼….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비애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선 삶에 대한 바른 자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마25:24∼25)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마25:24∼27)라는 말씀은 그의 오해가 낳은 비참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결단코 피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현세 뿐 아니라 영원한 삶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또 다른 비애는 ‘예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셔서 모든 것을 결산하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예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마지막에 모든 것을 결산하시리라는 바른 예견이 있었다면 오늘의 삶에 바른 통찰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살았을 것입니다. 다가올 결산을 바로 볼 수 있는 예견의 능력이 결여돼 있으면 오늘의 삶에 대한 바른 통찰 없이 그저 한철 메뚜기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에 중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나침반’과 ‘시계’입니다. 바로 가고 있는지,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늘 살펴봐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삶은 계란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귀한 현재의 삶 뿐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미래를 땅에 묻어두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삶은 ‘삶은 계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 

삶과 죽음의 차이 

어느 의과 대학생이 쓴 글을 소개합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해부학 첫 실험 시간에 해부실로 들어갔다.
해부 도구와 수술용 고무장갑 그리고 비닐로 된 앞치마에 흰 실험복까지 갖춰 입고 실험실의 문을 여니, 거기에는 실험대마다 한 구씩 모두 32구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시체의 피부를 벗기는 것이 첫 해부학 실험 시간의 과제였는데.
그 작업을 하는 동안 그것이 단지 시체일 뿐 사람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공 모형 배를 가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착각과 함께 나의 뇌리를 스치며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이 사람들도 살아 있었을 때에는 모두 자기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며 살았겠지.
돈도 있었고, 명예도 있었고, 사랑도 있었고, 또 죄를 짓고자 하는 사악한 마음도 있었겠지.
그런데 이제 그들은 자신의 머리털조차 다 깎인 채 실험대에 누워 있다.
부끄러움도 없이 발가벗긴 채로 말이다.
이제는 옷이 아니라 피부가 벗겨지고, 근육이 잘리고, 내장이 도려내지고, 뼈가 추려지고 있다.
그것도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한 신출내기 의사지망생에 의해서 말이다.
이 아주머니의 얼굴에 평생 동안 발라졌던 화장품은 얼마어치나 되었을까?
저 아저씨는 저 손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만졌으며 그것으로부터 얼마만큼의 만족을 얻었을까?
그 순간 갑자기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지금의 나 자신과 이 시체들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굳이 차이점을 찾는다면 그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대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단 말인가?
우리가 살아있지만 삶과 죽음의 차이가 그리 멀지 않다. 

죽은 자와 산 자와의 차이는 산 자는 뭔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아직도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빠른 인생을 사는 동안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 것인가?"

모파상의 삶   

"여자의 일생"이라는 작품을 쓴 작가 모파상이라는 유명한 작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신학교를 퇴학 맞은 학생입니다.
그가 신학교에서 방황하고 방탕한 생활을 한 후에 신앙과 결별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가 주인 된 인생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이 된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후에 그는 문학에 뜻을 두고 정진해서 10년 만에 유명한 작가가 되고 돈을 많이 벌기 시작합니다.
지중해에 요트를 가지고 있었고, 노르망디에 저택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면, 파리에는 호화아파트를 가지고 쉴 새 없이 아내와 애인을 바꾸며 살았습니다.

비평가들은 그에게 찬사를 보냈고, 군중들은 그를 흠모했고, 그의 은행에는 쓰고도 남는 여유분의 돈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그는 안질병과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잠을 자지 못합니다.
1892년 1월1일 밝아온 새해.
그렇지만 이 한해를 살아야할 아무런 이유를 갖지 못한 모파상은 자기가 항상 사용했던 종이칼로 자기의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합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지만 정신이 파탄 난 그는 정신병동에서 몇 달 동안 알 수없는 말을 하며 허공을 향해서 절규하다가 그의 나이 43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칩니다.
그의 무덤 묘비명에는 그의 말년에 쉴 세 없이 하던 말이 적혀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 것도 갖지 못했다"

그는 부자의 꿈을 이룬 것 같았지만 실상은 처절하게 가난했던 일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야!  

미국의 대부호로 알려진 하워드 휴즈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영화사, 방송국, 비행기회사, 호텔, 도박장 등 50개 업체를 가진 경제계의 실력자이었습니다.
한 때는 헐리웃 영화배우들과 염문을 뿌리면서 많은 가십거리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 배우들 가운데는 에바 가드너라는 당시 최고의 여배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휴즈가 죽기 십 수년 전부터 결벽증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는 심한 결벽증 때문에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십 년 동안 무균 상태의 유리관을 만들어 놓고 외부와 차단된 채 그 안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증세는 더욱 악화되어 자가용 비행기로 병원으로 가던 중에 사망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1977년에 사망하면서 남긴 유산은 우리 돈으로 2조 4천억 원 정도로 그 당시에는 아무도 따를 수 없는 거액이었습니다.
휴즈가 남긴 마지막 말 한 마디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Nothing. Nothing“(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니야). 

이 말을 반복하면서 그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돈도, 미녀도, 명예도 죽어 가는 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보다 나은 삶의 조건 

인간은 누구나 성공하고 싶어 한다.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
그러나 누구나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성공한 사람도 있고 실패한 사람도 있다.
행복한 사람도 있고 불행한 사람도 있다.
성공과 행복은 사람들에게 성취감과 만족감을 준다.
반면 실패와 불행은 사람들의 마음에 심한 박탈감과 자괴감을 심어준다.
그리하여 삶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원하신다.
우리의 성공을 원하신다.
우리가 성공하고 행복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이런 삶에 도달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삶의 자산은 무엇일까?
그것은 삶에 흥미를 느끼며 사는 것이다.
삶에 흥미를 느낀다는 것은 단순한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향상된 차원의 삶을 맛보게 한다.
공부에 흥미를 느껴야 공부를 잘 할 수 있듯이 삶에 흥미를 느낄 때 비로소 삶에 성취감을 맛볼 수 있다.
환경이 삶에 영향을 준다는 생각은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이보다 더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자산 곧 삶에 흥미를 느끼며 사는 것이다.
닭이 달걀을 품으면 왜 병아리가 되는 것일까?
이 관심과 흥미는 에디슨으로 하여금 세계적인 발명왕이 되게 했다.
자신의 하는 일에 흥미를 가지는 것은 이렇게 중요하다.
얼마 전에 일어난 한 여배우의 자살사건은 우리 국민에게 우울증에 대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전 국민의 8%에 해당하는 320만 명을 고통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우울증이란 과연 어떤 병인가? 

우울증은 뇌 활성물질에 의해 뇌에 슬픔과 절망, 낙담 같은 정서장애를 일으켜 삶에 흥미를 잃게 하는 마음의 병이다.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사람이 해 아래서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한 말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고 흥미를 느끼는 일을 하라는 권고의 말씀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성공과 행복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우리 마음속에 흥미와 관심을 불어넣어주셨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게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병행케 하사 사람으로 장래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신 것은 예측 불가능한 미래야말로 우리에게 흥미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신비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흥미와 관심을 잃는다는 것은 생에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부부간의 애정이 그러하며 모든 인생 문제가 그래서 생긴다.
사탄은 우리 인생을 파멸시키려고 우리에게서 흥미와 관심을 앗아가지만 하나님은 우리 삶의 행복을 위해서 흥미와 관심을 불어넣어주신다.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마음에 일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불어넣어 삶에 활력을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인 것이다.

 

예수 없는 곳의 삶

지금으로부터 37년 전 1968년 미국의 함정 푸에블로호가 동해상에서 북한으로 납치가 되었습니다.
이 함정은 일본의 요코스카 항에 정박해 있었습니다.
주일날이 되어서 군목이 예배를 인도하러 배에 올라갔는데 그 배의 승무원과 수병들이 예배를 거부하였습니다.
할 수 없어서 군목은 그 날 주일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그랬는데 이튿날 원산 앞 바다로 출동을 하였다가 북한의 경비정에 나포되어 북한으로 끌려갔습니다.
1년이 지나서 80명의 승무원들이 풀려나서 기자회견을 하는데 1년 동안 포로로 지내면서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빵도 먹고 농구도 하였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하나님 없고 예수 없는 곳에서의 생활은 지옥과 같았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삶의 원칙 

1924년 파리 올림픽 육상 400m에 출전한 에릭 리델은 예선에서 최고의 기록으로 수립, 금메달 획득이 유력했다.
그는 예선 때 출발선에서 흑인 선수와 악수를 나누는 등 숱한 화제를 뿌렸다.
인종차별이 심한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망의 결승전이 주일에 열리기로 결정됐다.
그러자 리델은 주저 없이 출전을 포기했다.

“나는 지금까지 몇 가지 원칙을 지키며 살아왔다. 그것은 주일성수와 인간 평등의 정신이다.”

리델은 후에 중국 선교사로 헌신했다.
그의 가시밭길 인생은 ‘불수레’란 제목으로 영화화돼 1982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

최근 독실한 크리스천인 여류 국수 조혜연 6단도 “주일에는 예배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신념을 깨고 싶지 않다”며 바둑대회 출전 포기를 선언했다.

당신에게는 어떤 삶의 원칙이 있는가.
행여 ‘그까짓 거 뭐 대충’의 인생을 살지는 않는가?

하늘 기준으로 사는 삶 

며칠 전 새벽 기도가 끝난 뒤 우연히 교회 쓰레기통을 열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라이터와 한두 개 정도 피우고 남은 담배 한 갑이었습니다.
저는 한참 동안 그것을 바라보았습니다.
담배를 버리기까지 갈등을 겪고 결단했을 그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참 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인생의 기준을 바꾸면 전에는 대단히 귀하고 소중하던 것이 별것 아니게 됩니다.
대신 예배 시간이나 봉사 그리고 감사와 기도와 찬송이 나에게 소중한 자산으로 남습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삶을 아름답게 가꾸고 싶은 마음도 새롭게 생길 것입니다.
소중했지만 가치를 몰라서 버렸던 수많은 것들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의 복이 중요하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세상이 말하는 복이라는 것을 통해서 무엇을 하기 원하는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나를 슬프게 하고 화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말 화날 일에 화가 납니까?
정말 슬퍼할 일에 슬퍼합니까?
나는 실패라고 말하는데 주님이 보실 때에는 성공인 경우가 많습니다.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낙심하거나 즐거워하지 말고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승리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슬픔의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교만이나 자만의 자리에서도 내려오십시오.
세상의 잘못된 기준으로 자신을 보지 마십시오.
이 땅을 살지만 우리는 하늘의 기준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천국의 시민들입니다.
이보다 더 소중한 자리는 없습니다. 

 

삶의 여유 

어느 날 소크라테스가 친한 친구의 방문을 받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화가 난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계속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소크라테스는 아내의 분노를 애써 무시하고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아내가 갑자기 커다란 물통을 들고 거실에 들어오더니 소크라테스의 머리에 물을 쏟아버렸다.
순식간에 봉변을 당한 소크라테스는 수건으로 천천히 물을 닦아내며 친구에게 말했다.

“여보게, 너무 놀라지 말게. 천둥이 친 후에는 반드시 소나기가 내리는 법이라네.”

이 한 마디에 친구는 손뼉을 치며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조크를 즐기는 사람은 삶에 여유가 있다.
외부의 공격에 직격탄을 날리면 곧 분쟁이 시작된다.
타인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보라. 상대방에게는 검지 하나만 향하고 있지만 나를 향한 손가락은 셋이나 되지 않는가?

성경은 말한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잠언 10:12)

풍성한 삶을 위한 지혜  

파푸아뉴기니 여인들은 그물로 된 자루처럼 생긴 '비룸'을 애용합니다.
비룸은 물건을 담아 다닐 때도 사용하지만, 아기를 재울 때도 사용합니다.
어느 날, 가난한 젊은 엄마가 일을 하려고 밭에 나왔습니다.
잠자는 아이를 비룸에넣고 나무 그늘에 걸어놓았습니다.
그런 다음, 비룸에 들꽃을 꽂았습니다.
그러자 낡고 허름한 비룸이 어떤 고급 유아침대로도 흉내 낼 수 없는 향기로운 꽃 침대가 되었습니다.
허름한 비룸을 들꽃 몇 송이로 단번에 아름답게 꾸며낸 이 여인의 삶의 지혜는 참 아름답습니다.

프랑스 유아복을 입히고 이태리제 유아침대에 아이를 눕혀야만 삶이 풍성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낡은 비룸일지라도, 들꽃 몇 송이를 꽂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삶을 변화시키는 인생관 

관광지에 위치한 호텔은 같은 평수의 방이라도 전망에 따라 가격차가 상당히 납니다.
똑같은 설계에 똑같은 재질을 사용하고, 똑같은 평수에 똑같은 인테리어를 해도 어느 쪽에 방을 만드느냐, 객실에서 창밖을 내다볼 때 바다가 잘 보이느냐 산이 잘 보이느냐에 따라 가격차가 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지오웰은 천재적인 머리를 가졌으나 부정적인 인생관 때문에 생긴 우울증과 폐결핵으로 젊은 나이에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엘리너 루스벨트는 어릴 때 고아가 되었으나 미국의 역대 대통령 부인들 가운데 가장 호감 가는 여성으로 손꼽히게 되었습니다.

벌은 물을 마셔서 꿀을 만들고,
뱀은 물을 마셔서 독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인생관을 갖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과 삶이 달라집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의 창을 열면 어떤 곳이 보이나요?

삶의 전부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시편 73:25)
 

영국의 전쟁 영웅이었던 허버트 크래그가 한번은 아주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 쓰인 글귀는 이후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 무엇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매우 적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삶의 전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 삶의 일부로 만들지 말라.
주님을 당신 삶의 전부로 맞으라.
그분을 최우선에 두라.

세상의 영원한 가치
- 항상 예수님이 모든 것을 대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또한 아무 것도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도 기억하십시오.


거침없이 질주하는 삶

 

만사형통 쭉쭉 빵빵 위풍당당 거침없이 질주하는 삶을 산다면... 그래서 "나를 보라, 예수를 잘 믿으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축복하시지 않느냐... 우하하 내가 바로 축복의 증인이다. 나를 보고 예수님을 믿으라" 하고 전도를 한다면 전도가 잘될 것 같지요? 하지만 내 모습을 돌아보면, 몸도 여기저기 아파서 골골 하고, 돈을 잘 버는 것 같지도 않고, 형통으로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지도 않고, 사이가 안 좋은 이웃도 있고, 별로 자랑할 만한 것도 없고, 한마디로 예수 믿는다면서 내세울만한 변변한 것 하나 없는 모습 아닙니까? 실망하지 마세요. 대 사도였던 바울도 만사형통 쭉쭉 빵빵 위풍당당 거침없이 질주하는 삶을 사신 분이 아닙니다. "마게도냐에 도착하였을 때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쉬운 성경은 "어려움은 사면에서 우리를 가로막고 있었고 끊임없는 다툼으로 마음은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습니다."(고린도후서 7:5) 하고 속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고백을 들어보면 그분의 고민이나 오를 나의 고민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낙심한 사람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디도를 보내어 우리를 위로하셨습니다."(고후7:6)하고 진실하게 그 마음을 열어 놓고 고백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감사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마음을 여는 모습은 '만사형통 쭉쭉 빵빵 위풍당당 거침없이 질주하는 삶' 보다는 연약한 모습을 드러내놓는 진실하고 솔직한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삶은 찾아 나서는 것 

커다란 강가에 수많은 낚시꾼들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바구니는 거의 비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앉아 왜 이렇게 고기가 안 물리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렸습니다.
그런데 아까부터 홀로 멀리 떨어져 낚시를 하다가 다시 배를 타고 강가 깊숙한 곳에 들어가 낚시를 하던 한 청년이 큰 어항에 대어들을 가득 채우고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습니다.

바구니에 고기 한 마리 담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놀라며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까?"

청년은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빙긋 웃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더욱 궁금해진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도대체 그 신기한 비결이 무엇입니까?" 청년은 그 비결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뭐, 별 거 아닙니다. 기다리지 말고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삶에 적용되는 법칙이니까요."

목표 없는 삶 

스프링 팍 영양(羚羊)이라고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산에서 수천 마리씩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산양의 일종입니다.
이 양은 이유 없이 집단으로 달리기를 시작하여 나중에는 모두 다 절벽에 떨어져 죽는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동물학자들은 이 양들이 집단으로 자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자살할 수 있는 동물은 유일하게 사람밖에 없습니다.
사람 외에는 자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프링 팍 영양이 혼자서도 아니고 집단으로 자살한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어느 학자가 결국 스프링 팍 영양이 집단으로 몰사하는 이유를 밝혀 냈습니다.

수천 마리가 무리 지어 가다가 풀밭을 만나 풀을 뜯어먹을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앞에 있는 양들이 풀을 뜯어먹고 짓밟으며 가기 때문에 뒤에 있는 양들은 도무지 풀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뒤쪽에 있는 양들이 풀을 먹기 위해 자꾸 앞으로 나가려고 한답니다.
그런데 양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앞으로 나갈 수가 없어서 자꾸 뒤에서 민답니다.
앞에 있는 양은 뒤에 있는 양이 미니까 걸음이 빨라지게 되고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뛰게 됩니다.
앞에 있는 양이 뛸 때 뒤에 있는 양은 천천히 풀을 뜯어먹으면 될 텐데 양의 본능에는 집단에서 이탈하지 않으려고 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뒤에 있는 양은 풀도 못 먹고 앞에 가는 양을 따라 같이 뜁니다.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본능 때문에 결국 모든 양이 초원을 달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양들이 자기들이 뛰는 이유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저 앞에서 뛰니까 뒤에서 뛰고 뒤에서 뛰니까 앞에서 뛸 뿐입니다.
생각 없이 달리기 때문에 어디로 뛰는 지도 모릅니다.
멈출 생각도 안 합니다.
그냥 열심히 달립니다.
벼랑에 다다라서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뒤에서는 벼랑인지 모르고 계속 달리기 때문에 앞의 양들은 떠밀려서 벼랑으로 떨어집니다.
뒤에 오던 양도 속도를 줄이지 못해 수천 마리가 다 몰사한다는 것입니다.
스프링 팍 영양들의 무작정 달리기와 죽음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참 열심히 삽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까지 일합니다.
그런데 이 영양과 같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숨차게 뛰는지 모릅니다.
왜 그렇게 죽어라 하고 공부하는지를 모릅니다.
요즈음에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 입시 방향에 맞추어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과외공부가 성행합니다. 그런데 학생들이나 학부모나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공부에 열을 올립니까? 특별한 목표가 있어서 공부에 정진하는 학생이나 부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스프링 팍 영양과 똑같습니다. 집단에서 이탈되는 것이 두려워서 공부합니다. 남들은 다 대학 가는데 나만 못 가면 소외되니까, 뒤쳐지기 싫으니까 그저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무슨 목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자가용 사고, 고급 사치품으로 집안을 장식하는 것도 다 이웃집과 비교해서 내가 뒤쳐지는 것이 아닌가 하여 무리를 해서라도 장만하는 것입니다. 이는 짐승적인 본능에 따라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지 진정한 삶의 목표가 있어서 피땀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모르고 열심히 살면 그만큼 빨리 망합니다. 확실하게 망합니다. 성실하고 열심히 뛰면서 사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생의 목표가 뚜렷할 때에만 가치를 발휘합니다. 목표 없이 뛰는 것은 죽음을 향해 뛰는 것입니다. 사단이 우리를 시험할 때 사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삶의 목표를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 사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부화뇌동(附和雷同)하게 만드는 것이 사단의 전략입니다. 현대인들은 몹시 바쁩니다 바깥일 하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바쁘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바쁘고 심지어 아이들도 바쁜 세상입니다. 특별한 목표 없이 남을 따라 사느라 바쁜 것은 멸망의 위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펠프스는 말했습니다. “삶을 지배하는 거대한 힘 가운데 하나는 뚜렷한 목적을 갖는 것이다.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할 때 목소리와 옷차림, 외모와 동작 하나 하나까지 변화하게 마련이다.” 

우리의 인생은 쉼 없이 지금도 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는 종착역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자는 운전을 열심히 하되 목적지 없이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운전자가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자입니까? 열심히 달리고 또 기름을 새로 채워 달리지만 목적지를 모르는 채로 달리는 운전자,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운전자가 되기를 결코 바라시지 않습니다. 

 

보람 있는 삶을 살려면

 

성경: 시편 95 장 7 절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시95:7) 

 

히브리 잠언 중 ‘하루하루 조금씩 자살해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도 저 세상에도 속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금씩 자살을 한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말 같지만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물에 대해서 지나치게 고민하거나 또는 지나치게 후회하여 생기를 잃고 이로 인해 점점 정신적인 건강이나 육체적인 건강을 해쳐 나중에는 보람 없이 썩어버리는 인생이라는 의미입니다. 인생은 매일 새로운 기회의 혜택을 입으며, 또 그 기회가 제공하는 도전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날들을 어떻게 보람 있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매일 조금씩 자기를 죽여 가는 자는 ‘자기 뜻대로,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한정된 지혜와 자원으로는 영생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유한한 자원의 고갈로 인하여 매일 매일 죽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풍성한 지혜와 풍부한 자원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뿌리가 깊이 박혀서 양분을 잘 섭취하는 나무에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듯 우리의 삶을 윤택케 하는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풍성한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양육 받는 삶에 행복이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의 음성을 들으며, 누구의 양육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까? 

* 기도: 하나님의 양육을 받으며 보람 있는 삶을 살게 하소서. 

 

참 삶의 의미

날 때부터 꼽추였던 여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17세가 되기까지 집 밖에 나가 본적이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창피해서였습니다.
그 아이가 얼마나 자기 몸에 열등감을 갖고 있었던지 부모는 학교에 보낼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런데 17세가 되던 해에 그 집을 찾아온 교회 집사님의 설득에 의해서 이 소녀가 17년 만에 교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날 마침 성령님에 대해 설교를 하셨습니다.

"자, 이제부터 여러분에게 30분 정도의 시간을 드릴 테니까 교회 건물 밖에 나가셔서 교회 마당이든지 교회 옆의 동산이든지 어디든지 나가서 지금 성령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무엇을 깨닫게 해 주시는지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들어오십시오."

곱추 소녀도 나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교회 마당의 의자나 동산의 산자락 나무 아래에 좋은 자리를 다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만나기를 꺼려하는 이 소녀는 자연히 사람이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을 찾다가 한적한 곳에 앉게 되었습니다.
앉고 보니 쓰레기통 곁이었습니다.

"아, 나는 어딜 가나 쓰레기구나!" 소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 소년이 오더니 쓰레기통을 손으로 뒤지면서 무언가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곱추 소녀는 용기를 내서 난생 처음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보았습니다.

"저어.. 쓰레기통을 왜 뒤지는 거예요?"

"캔이나 종이를 찾고 있어요."

"그걸 찾아서 뭐 하려고요?"

"이걸 가지고 가면 돈이 되거든요. 팔아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편찮으신데 약을 사드리려구요."

그 순간 꼽추소녀는 성령님에 의해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아, 쓰레기도 쓸모가 있구나! 나 같은 쓰레기도 쓸모가 있구나! 저 쓰레기를 팔아서 노인들의 약값을 할 수 있다면 나처럼 쓰레기 같은 곱추도 병들어 누워있는 사람들의 약이 될 수 있겠구나" 그 순간 이 소녀는 마음으로 큰 결단을 내린 뒤, 양로원에 가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그 사람의 인생은 정말 바뀝니다. 내가 지금은 비록 연약하고 부족해도 하나님을 위하여 또 나보다 연약한 사람을 위해 봉사하며 귀하게, 아름답게, 향기롭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축복된 삶

테레사 수녀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한 여인이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고민을 얘기했습니다. 

"제 삶은 너무 권태롭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겠어요.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어요." 

테레사는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인도에 오시면 진정한 삶을 드리겠습니다. 죽기 전에 꼭 한번 와 보세요." 

그 후 그 여인은 인도로 갔고, 그 곳에서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 질병으로 거동도 못하고 앓고 있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테레사 수녀와 같이 그들을 돕고 보살피는 일에 전념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삶의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발견하여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새로운 기쁨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진정한 삶이 곧 축복된 삶인 것입니다.

 

형통한 삶 

형통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찰레아흐’입니다.
이 말은 ‘번성한’(prosperous)이란 뜻입니다.
영어성경에는 ‘번성한’ 또는 ‘성공적’(successful)이란 말로 번역돼 있습니다.

성경은 요셉의 삶을 형통한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써 형통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에 성실하여 그의 형통함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보게 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또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인정하면서 살았습니다.

로리 베스 존스는 ‘주식회사 예수’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성공에 대한 정의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성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형통의 뜻이 성공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형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형통이란 단어를 다른 말로 "지혜"라고 합니다.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 곧 형통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삶 

미국에 가면 '사망의 골짜기'가 있는데 그 골짜기 이름의 내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차가 발명되기 전, 남 캘리포티아 주에서 금이 많이 난다는 소문이 미국 전역에 알려지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마차를 타고 금을 캐러 남 캘리포니아주로 향했습니다.
가는 도중에는 큰 골짜기가 있는데 이곳은 도무지 비가 오지 않는 반 사막지대라 사람들은 기갈로 인해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끔씩 새파란 호수가 공중에 나타나는 일이 있는데 실물 같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일종의 환영으로, 이를 모르고 무작정 따라가면 마지막에는 사막에서 헤매다 죽고 맙니다.
이런 일은 아프리카 사막 지대에서도 가끔 나타난다고 하는데, 그 신기루에 속으면 헛수고 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각자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얻으려고, 어떤 사람은 권세를 , 어떤 사람은 지위를, 어떤 사람은 명예를, 어떤 사람은 학문을 얻으려고 동분서주합니다.
그런 것들은 붙잡기도 어렵지만 붙잡아도 잠시 동안 내 손안에 있을 뿐입니다.
마치 신기루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까?
유일한 방법은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세 가지 형벌(벌금, 채찍, 양파)

뇌물을 받아서 법정에 서게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현명한 판사는 죄인에게 세 가지 처벌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첫 번째는 벌금으로 황금 백 냥을 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채찍으로 50대를 맞는 것이고,
세 번째는 5kg의 양파를 먹는 것이었습니다.

죄인은 벌금을 내기는 매우 아까웠고 채찍으로 맞기는 무서웠기 때문에 세 번째 형벌을 택했습니다.
‘양파 먹는 것이 뭐 그리 어렵겠어’라고 생각한 이 남자는 자기 앞에 놓은 양파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양파를 먹으면 먹을수록 점점 견디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그가 2kg의 양파를 먹고 난 뒤에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도저히 양파는 못 먹겠습니다. 차라리 매를 맞겠습니다.”

죄인은 매를 맞을지언정 자신의 돈을 내기는 싫었습니다.
그러나 채찍이 등에 떨어지자 그는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질렀고, 10대 정도 맞고 나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만 때려 주십시오. 차라리 제가 벌금을 내겠습니다.”

 맞는 것도 싫었고 자신의 돈을 쓰기는 더더욱 싫었던 죄인은 결국은 세 가지 형벌을 모두 받은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문재인 처형 당한다!
- 정규재 글

<문재인, 당신을 용서 못한다>

문재인 당신이 신년기자회견에서,
자기 딴에는 그럴싸하게 보이려고 그랬는지 몰라도 퇴임 후엔 깨끗이 잊혀지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답은 "천만의 말씀"
당신은 지은 죄가 너무도 많기 때문에 결코 잊혀질 수가 없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례를 문재인 당신을 잘 알 것이다.
노무현은 도덕적 붕괴와 그게 이은 비극적 자살로 끝났지만 문재인 당신은 노무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치죄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당신을 결코 잊지 않을 작정이다.
잊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지 몰라도
그에게 당신이 일으킨 허다한 대한민국 파괴행위에 대한 법적 정치적 책임 추궁을 집요하게 요구할 것이다

잊혀지기를 원한다니?
왜 벌써 두려운 것인가?

당신은 맥베드에서 시작해 동키호테로 피노키오로 그리고 숱한 악마의 가면을 쓰고 너무도 많은 악행들을 저질러 왔기에 그 각각에 대해, 그리고 그런 악행들이 만들어낸 결과에 대해 <심판>을 받아야 한다.

■ 거짓을 선동해 전직 대통령을 탄핵한 것부터가 문재인 죄목 1호다.
거짓의 산을 지어올린 것이 문재인 본인은 아니더라도 결과적으로
그 악의 꽃이 피워올린 혜택은 모두 당신에게 집중되어 돌아갔다.

가장 큰 죄는?

1. 대한민국 국민들이 김정은의 발아래,
핵공갈의 공포 속에서 인 질 신세로 살아가도록 대한민국을 배신한 죄다.

2. 김정은을 지원하면서 북한의 2천만 동포들을 김정은의 독재에 신음하면서 살도록 한 죄다.
결코 지워지지 않을 범죄다.

3. 김정은과 결탁 하에, 9.19 군사합의라는 것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국가안보 체제를 붕괴시키고 적에게 서울까지의 진격대로, 남침대로를 활짝 열어젖힌 죄다.

4. 북한을 탈주해 온 주민의 손발을 묶고 눈까지 가려서 북으로 되돌려 보낸 것은 인류가 모두 치를 떨 만행이요 반인권적 잔혹 행위다.

5. 사법부를 겁박하고 사법부내 정치집단을 이용하여 온통 좌경적 재판부로 둔갑시켜 놓은 것은 실로 자유 민주주의를 파괴한 범죄다.

6. 대한민국을 전체주의 체제로 바꾸어볼 속 마음으로 개헌을 추진하였고 공수처를 도입하는 등 갖은 체제 전복시도를 해왔거나 실행한 것은 실로 용서할 수 없는 죄다.

7. 대한민국의 오랜 외교의 기본질서를 파괴하여 일본을 적대시하고 어리석은 국민을 선동하여 한미일 동맹 관계를 파괴하려고 시도했던 일은 심각한 범죄다.

8. 중국을 끌어들여 반사드 책동을 만들어 내고 패권주의에 불과한 중국몽을 지지하는 등 망발적 외교정책을 공공연히 획책해 왔던 것은 심각한 반문명적, 반대한민국 행위다.

9. 홍콩의 자유시민을 적대시하고, 대만 자유시민의 승리를 외면하는 등 대한민국의 지도자와는 전혀 다른 이념의 궤를 드러낸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10. 소주성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경제정책으로 서민의 삶을 도탄지경으로 몰아넣은 죄다.

11.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을 통해 수많은 자영업자와 저임금 근로자를 실업으로 내몰고 사업포기의 벼랑끝으로 몰아넣은 범죄다.

12. 국민연금을 통한 기업 규제, 경영권 간섭이 투자를 절멸시키기에 이르렀고 이는 연금 사회주의적 시도임이 명백하여 역시 체제전환 음모라 불러야 마땅하다.

13. 멀쩡한 원전을 오로지 문재인 당신의 무지와, 무지하기에 공포에 함몰되는 그런 저차원의 심리상태에서 모조리 폐기하고 있는 것은 중대한 국가 산업 파괴행위다. 실로 문명적 설비에 대한 홍위병적 몰이해다.

14. 소위 적폐수사라는 것을 통해 직업공무원제도를 파괴하고 대한민국을 조선의 사화 시대로 되돌려 놓은 당신의 증오범죄는 시대착오적 야만행위다.

15. 연동형 비례제라는 반민주적 악법으로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를 왜곡 대표하게 선거법을 개정한 것은 명백한 민주주의 파괴행위로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16. 선거에 개입하여 친구의 당선을 조작해 내거나 검찰의 정당한 수사를 방해하려고 갖는 악행을 저지른 죄는 이루헤아릴 수 없는 문재인 권력형 범죄의 작은 표본일 뿐이다.

17. 본인은 민주적 통제를 주장하지만 국회 청문회를 부정하는 등으로 국회의 민주적 통제를 거부한 것은 삼권분립의 취지를 정면에서 훼손한 것이다.

18. 깃털만한 실수를 바위덩어리같은 범죄로 둔갑시켜 전직 대통령을 3년씩이나 감옥에 가두어 둔 당신의 죄는 인간으로서 더는 용서할 수 없다.

대략 생각나는 것들만 떠올려 보아도 이런 지경이다.

문재인 당신은 잊혀질 수가 없다.
당신은 잊고 싶어도 국민들은 당신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문재인 그대는 벌써부터 목숨을 구걸하는 것인가?

코로나백신 가격

1. 시노팜 $ 72.5
2. 모더나 $ 32~37
3. 화이자 $ 19.5
4. 사노피 $ 21
5. 노박스 $ 16
6. 존슨앤존슨 $ 10
7. 아스트라 제네카 $ 4

우리국민이 맞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4
이게 진실이다.

개.싸구려...
세계10대 경제강국 대한민국이 맞는 아스트라제네카....

국민들에게 이런짓을?
이 좌빨 새끼들아
니 덜 눈에는 국민이 개 돼지로 보이냐?

부작용없는 비싼거 들여와라!
       
늙지 않는 비법 10가지

평소 습관만 잘들여도 늙지 않는 비법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매일 매일 아래의 방법대로만 해도 나이에 비해 엄청 젊은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01. 칼로리 섭취를 절반으로 줄인다.[鶴의 胃는 항시 절반만...]

02. 열을 가해 조리한 음식을 가능한 삼가고 단순한 재료를 단순하게 조리하여 적당량만 먹는다.

03. 물을 매일 2,000 cc 정도 마신다.
- 사람다운 체형 유지
- 식사 전 30분, 식후 2시간에 마신다.
- 취침 전. 취침 후에 꼭 마신다.

04. 매일 30분정도 걷는다.
- 다리는 제2의 심장이라고 한다.
- 노화는 다리로부터 온다.
- 시선은 15 도 상단을 보고 걷는다.
- 땅을 보고 걸으면 다리가 벌어진다.

05. 호흡을 깊게 서서히 고요히 한다.

06. 무리한 운동을 하지 않는다.
- 과도한 운동은 수명단축,
- 무리한 유산소 운동은 활성산소(세포毒)가 생겨 세포에 악영향

07. 즐겁게 살며 보람을 갖는다.
-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다.
- 현명한 이에게 존경받고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것
-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을 발견하는 것
-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으므로 해서 단 한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08. 항상 타인(他人)과 사귄다.
-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므로 타인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다양한 자극이 되어 생명력을 높인다.

09. 적당한 취미 생활을 한다.
- 몸이 둔하여 움직이기 싫지만 등산, 산책 등 가벼운 운동을 생활화하여유연성을 키우고
- 두뇌 활동을 많이 하게되어 치매예방 도움되는 독서, PC, 두뇌스포츠인 바둑, 당구 등 많이 하고

10. 자신에게 맞는 약제를 구입 복용한다.
- 延年 益壽開心益智, 건망증 및 불노환 등 관련 약초가 있다
- 식초를 물에 타서 자주 먹으면 血栓症(혈액이 막히는증세) 예방과 지방분해로 인해 혈액순환이 잘된다.



건강에 자신 만만한 사람이 예방 차원에서 의사를 찾아갔다.

"저, 선생님! 이만큼 건강하면 백살은 거뜬히 살겠지요?"

"술을 하시나요?"

"한 모금도안합니다."

"담배는 얼마나 피움니까?"

"일체 안피우지요."

"그러면 봉사 활동이나 다른 특별한 취미라도 있으신가요?
노래방, 춤방  등"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럼여자는 좋아하시나요?"

"근처에도 안갑니다."

"1인 1주차 모텔은 가보셨나요?"

"못 가봤습니다."

"묻지마 관광이나  산악회 관광은 가시나요?"

"노인들만 와서 안갑니다."

의사 왈
"그라모 씨발! 아무 것도 안 하면서 백 년씩이나 살 이유가 뭐있노?
만다꼬 그때까지 살끼고!
밥만축내고 병원에도 오지마라."




열 가지 재앙


개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출애굽 사건은 큰 영향력을 가진 사건이다.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열 가지 재앙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의미에 대한 정보가 제공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출애굽에 관련된 하나님의 구속사를 교회나 교회학교에서 교육할 때에 이 자료를 활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다. 보통 출애굽 재앙에 대해서 표면적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애굽의 신과 관련되어 재앙의 신학적 의미를 풀어내서 깊이 있는 의미를 제공하고자 이 주제를 정했다.

성경 본문의 증거 : 출애굽기 7장 15절 ~ 12장 36절

10가지 재앙의 내용

첫 번째 재앙: 피 (출 7:14-25)

여호와께서는 바로가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 재앙들을 내리기로 결정하셨고, 그 첫째 재앙이 바로 애굽의 젖이며, 신으로 숭배되는 나일 강이었던 것이다. 첫째 재앙은 애굽 사람들이 신으로 믿고 있는 것이 모두 헛된 것이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시며 전능한 창조주이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첫째 재앙은 눈에 보이는 모든 물을 피로 바뀌게 함으로써 생명의 근원인 물이 죽음의 상징인 피로 바뀌었음을 애굽 사람들이 보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 왜냐하면 애굽 사람들에게 ‘생명(물) ’을 ‘죽음(피) ’로 만드시는 분이 여호와이심을 보여줌으로써 여호와 하나님만이 생명을 좌우하시는 유일한 창조주이심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재앙은 무려 일주일동안 애굽 사람들이 그토록 자랑하던 나일 강을 죽음과 고통의 장소로 바뀌게 했다.

두 번째 재앙: 개구리 (출 8:1-15)

나일 강에 살고 있던 개구리는 ‘문나 모지리카’ (Moonna Mozirica) 라는 학명을 가진 개구리이다. 애굽인들은 나일 강이 범람했다 감해지는 때에 보이는 개구리가 애굽 땅을 기름지게 한다고 여겨서 신성시했다. 인간의 몸에 개구리의 머리를 가진 여신 ‘헤트’(Hekhet)를 풍요와 다산의 신이며, 나일 강에 장마를 가져다 주는 신으로 섬기고 있었다. 개구리들의 이른 침투로 인해서 왕은 오염된 음식을 먹게 되었고, 이것은 곧 건강에 해를 입게 되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만이 아니라 그의 신하들도 마찬가지고, 애굽 백성들도 마찬가지다. 즉 애굽 사람들 전체가 오염된 음식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걸 보면 개구리들이 애굽 온 땅에 가득하게 된 것은 애굽의 ‘땅’이 오염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결국에는 애굽 땅 자체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황폐하게 변한다는 ‘총체인 오염’을 의미한다.

세 번째 재앙: 이 (출 8:16-19)

세 번째 재앙에서부터는 애굽 주술사들이 그들의 패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이 재앙이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고백하며 바로를 설득한다. 세 번째 재앙은 아무런 경고가 없었던 재앙 중 하나로 열 가지 재앙 중 길이가 가장 짧은 재앙이었다. 이 재앙은 땅으로부터 시작된 재앙으로 땅의 신 ‘게브’와 연관된다. 애굽인들은 밭을 갈 때마다 대지의 신 게브에게 감사를 드렸는데, 이들에게 흙은 생명과 풍요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들이 생명으로 여기는 흙을 통해 애굽인들에게 괴로움과 죽음을 내린다. 또한 애굽의 ‘땅’을 황폐화 시키시고, 동시에 땅의 신 게브와의 영적인 전쟁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애굽인들에게 알게 하셨다.

네 번째 재앙: 파리 (출 8:20-32)

이전의 첫째 재앙부터 셋째 재앙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포함되었는데 넷째 재앙부터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인과 애굽인들 사이를 구분지으셨다. 이를 통해 여호와께서 애굽땅을 관장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네 번째 재앙과 관련된 애굽의 신은 ‘케프라’이며, 풍뎅이의 모습을 하고 있고 하루 일정을 관리하는 신으로 숭배되고 있다. 네 번째 재앙은 두 번째, 세 번째 재앙과 한 세트를 이루는데, 네 번째 재앙인 파리는 물과 땅에 연관된 것이고 이 세 재앙은 여호와께서 물과 땅과 공기를 지배하는 분이심을 드러내심과 동시에 애굽의 물과 땅과 공기가 파괴되고 있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다섯 번째 재앙: 가축 돌림병 (출 9:1-7)

다섯 번째 재앙도 애굽인과 이스라엘 백성을 구분하신다. 애굽의 가축들만 심한 돌림병에 걸리게 된다. 또한 가축의 죽음을 통해 지금까지는 창조된 것들을 통해서 애굽을 심판하셨지만 이번 재앙은 창조된 것을 ‘죽이는 일’로 심판을 진행하여 ‘죽음 모티브’가 시작된다. 본문에 나오는 ‘여호와의 손’이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능력을 말할 때 쓰이는 특별한 단어이다. 그리고 이것은 돌림병이 여호와의 능력으로 일어난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다섯 번째 재앙을 통해 심판한 애굽의 신들 하토르(Hathor, 사랑과 미의 신이며, 호루스의 아내이고 암소의 모습이다), 아피스(Apis, 다산의 신이며 황소의 모습이다.), 헬리오폴리스(Heliopolis, 황소의 모습) 등이 있다.

여섯 번째 재앙: 악성 종기 (출 9:8-12)

여섯 번째 재앙은 세 번째 재앙처럼 아무런 경고 없이 애굽을 강타하여 어떤 경고에도 반응하지 않는 바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처음으로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재앙이다. 바로왕 앞에 날려진 재는 벽돌을 굽던 풀무에서 끄집어낸 재일 것이며 이것은 여호와의 백성이 당한 고난의 증거로 볼 수 있다. 특별히 눈여겨 볼 것은 주술사들도 바로와 그의 신하들도 악성 종기로 고통을 받아 여호와 앞에서 점점 애굽의 통치권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섯째 재앙을 통해 심판한 애굽의 신은 임호텝(Imhotep, 의약의 신)이다.

일곱 번째 재앙: 우박 (출 9:13-35)

대기와 공중에 관련된 재앙. 우박 재앙은 인간 생명을 대규모로 위협하는 첫번째 재앙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우박으로 인한 보리와 삼의 파손 -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짚을 구해다 벽돌을 만들라고 했던 바로의 요구에 대한 보복, 대기의 신 'Shu’와 농업의 신 ‘Isis’, 습기의 신 ’Tefnut’를 겨냥한 것이다. 여호와의 ‘구별’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던 고센 땅에는 전혀 피해가 없었다. 생명과 관련된 재앙으로 ‘경고’를 통해서 피할 방법을 알려주셨다.

여덟 번째 재앙: 메뚜기 (출 10:1-20)

농경 지역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재해 중에 하나이다. 왜냐하면 모든 곡식을 순식간에 파괴해버리는 재앙이었기 때문이다. 이 결과로 심각한 기근을 초래했다. 땅의 신 ‘Serajia’에 대한 영적 전쟁으로 내려진 재앙이다. 메뚜기로부터 땅의 소산을 지켜주는 땅의 신에 대한 무능함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위대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애굽의 신들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보았을 때, 애굽의 신앙은 산산히 무너지고 말았다.

아홉 번째 재앙: 흑암 (출 10:21-29)

이 재앙은 여호와께서 ‘세상에서 가장 해가 잘 드는 나라’ 위에 내리신 것이다. ‘태양의 집’ 을 의미하는 헬리오폴리스라 불리는 도시는 태양숭배의 중심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흑암 재앙은 애굽인들의 최고의 신인 태양신 Ra를 그들로부터 빼앗고 여호와만이 신 중의 신이심을 증명하는 재앙이었다. 3일동안 재앙이 일어났다.

열 번째 재앙: 장자의 죽음 (출 12:29-30)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장자와 처음 난 짐승들을 특별하게 생각했다. 땅에서 처음 난 것과 가축의 처음 난 것처럼 여인의 몸에서의 맏아들도 여호와께서 주신 첫 선물로 여겨졌고, 이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여호와께 돌려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애굽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신성시 되고 귀하게 여겨졌던 바로의 장자와 애굽의 모든 장자, 그리고 처음 난 것들을 죽이는 재앙이 바로 장자의 죽음 재앙이었다. 이 재앙은 다산의 신인 Osiris 와 생명의 신인 Isis에 대한 재앙이다. 바로는 태양신의 현신이며, 바로의 장자는 청년의 육체를 입은 Horus 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 신의 현신에 한 열 번째 재앙은 바로의 왕위 계승자를 없애는 재앙이었다. 그런 장자의 죽음을 통해 여호와의 완전한 승리가 나타나게 되었고, 이 재앙 이후에 바로는 패배를 인정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인정하게 된다.

신학적 의의

여호와께서는 애굽에서의 영적인 전쟁을 통해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드러내심으로 애굽인들 뿐만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쟁을 지켜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까지 그들의 조상들이 말하던 여호와가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게 드러내심으로써 ‘영적 전쟁’의 목적을 분명히 하셨다.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는 분명한 목적 아래 벌어진 여호와와 애굽 신들의 전쟁 가운데, 여호와께서는 애굽의 모든 신들에 대해서 승리를 나타내셨지만 성경에서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재앙의 원인은 바로의 완악함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출5:2) 바로는 여호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애굽 백성들과 함께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불신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신들과의 전쟁을 통한 승리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나타내신 것이다. 세 번째 재앙에서는 애굽의 주술사들이 여호와의 권능을 고백했고, 일곱 번째 재앙인 우박을 통해 바로의 신하들은 여호와의 재앙을 두려워해 종들과 가축들을 집으로 들임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여덟 번째 재앙인 메뚜기를 통해 바로는 여호와의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고, 아홉 번째 재앙인 흑암을 통해 모든 애굽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권능’을 인정하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출애굽기에서 나타난 열 가지 재앙에 대해서 그 재앙이 어떤 ‘애굽 신’을 가리키는 것이며, 여호와의 완전한 승리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았다. 출애굽기에서 나타나는 애굽의 열 가지 재앙은 애굽을 향한 단순한 재앙이 아닌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는 목적 아래에서 수 많은 애굽 신들을 대면하여 누가 참된 신이며, 참된 신이라 말하는 여호와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온 천하에 드러내신 ‘영적 전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보는대로 생각하고 아는 만큼 행동한다.

사람은 보는 대로 끌리고 듣는 대로 생각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존재'와 '되어짐'의 문제, 곧 사람이 being이냐 becoming이냐-----독립된 존재냐 환경의 산물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끝없이 왈가왈부합니다마는 쉽게 해답이 나올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은 엄연히 하나님 앞에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만물에 대해서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독립된 존재입니다. 사람은 환경이 낳은 사생아(私生兒)가 아닙니다. 만일 사람이 환경의 산물이라면 그에게는 아무 책임도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책임을 물어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하고, 책임으로 괴로워하여야 하는 것은 인간이 존재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보트로 보시지 않습니다. 책임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고 만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환경을 따라가라는 것도 아니요, 환경의 산물로서 살라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환경을 다스리라, 만물을 지배하라-----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적인 뜻입니다.

 나는 가난하니까 악해도 된다,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부하니까 교만할 수 있다, 통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고독하니까 원망할 수 있다, 역시 잘못된 생각입니다. 내 물건 도둑 맞았다고 남의 물건 도둑질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미움받았다고 내게 남을 미워할 권리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존재의 좌표입니다. 사회의 사생아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할 때에 더 깊이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가끔 사람들이 이렇게 다투는 모습을 봅니다. 본래는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닌데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내 성격이 당신 때문에 이렇게 못쓰게 되었다고…… 그러나 이런 핑계가 통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내 문제는 끝까지 내 문제입니다. 환경 탓으로 돌릴 수가 없습니다. 설사 그렇게 한다 해도 양심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바른 안목을 지녀야 합니다. right insight ----- 바른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듣고, 바로 보고, 바로 말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좀 거슬러 올라가 6절과 7절을 봅시다. 예레미야가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할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이라 하지 말라"-----"나는 어린아이처럼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저 따라갈 뿐입니다" 하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지시하십니다. "너는 아이라 하지 말아라. 내가 가라는 곳에 가서 내가 하라는 말을 하라." 우리는 좀더 깊이 보는 안목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대영 학술협회가 신경성 정신질환 500가지를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그 병의 원인이 외적 과로에 있는 것은 겨우 2%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연구 결과가 무엇을 말해줍니까? 병의 원인은 대다수가 개인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외적인 환경 탓이 아니라 나 자신이 원흉(元兇)이라는 것입니다. 돈 때문도 아니고, 누구 때문도 아닙니다. 문제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우리가 지녀야 할 것은, 깊은 곳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 그런 문제를 볼 줄 아는 안목입니다.

 제가 늘 섭섭하게 생각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말을 믿는 사람들이 똑같이 흉내내는 것을 보고 마음이 언짢을 때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면박을 주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그게 아닌데……' 할 때 말입니다. "왜 이리도 교회가 많으냐! 아래윗집이 다 교회요, 한 집 건너 교회인데 그것도 모자라서 저렇게 또 교회를 짓고 있으니……"하고 교회를 비난하는 말, 여러분도 더러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커다란 착각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한번 간단한 통계를 내볼까요? 함께 생각해봅시다. 편의상 우리 교회가 위치한 강남구를 예로 들겠습니다. 행정구역으로서의 강남구 인구는 얼추 70만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중 42%가 기독교인이라고 구청 통계에 나와 있습니다. 이처럼 교인이 많다고 해서 강남구에는 '교회구'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교회와 교인이 가장 많은 구가 강남구라는 말씀입니다. 줄잡아서 약 30만 명이 교인이라고 합니다. 이제 그 30만 교인을 놓고 생각해봅시다. 한 교회가 평균 200명을 수용한다면 교회가 몇 있나 있어야 하겠습니까? 1500 곳은 되어야 현재의 교인을 모두 수용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기존 교회들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 30만 교인 중에는 강북에서 이사와 아직 강북 교회를 찾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만약 강남 사람들이 모두 강남 교회를 찾는다면 교회는 현재보다 다섯 배는 더 많아져야 합니다.

 자, 이래도 교회가 너무 많다는 소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처럼 생각 없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마귀적이요 불 신앙적인 이야기입니다. 교회서는 것을 보고 짜증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공산당 아니면 마귀밖에 더 있겠습니까? 저는 아파트 위에 십자가가 세워진다는 것을 별로 생각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밤 비행기를 타고 내릴 때에 밑을 내려다보면 거기에 빨간 십자가들이 군데군데 서 있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그 광경을 볼 때에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이곳이 내가 사는 땅이다 생각하면 기분이 매우 좋아집니다.

 일본을 여행할 때에 가장 기분 나쁜 것은 어느 곳에서나 십자가를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믿는 사람한테는 교회가 둘이든 셋이든 많이 보이면 많이 보일수록 반가운 것입니다. 어찌 이것이 달리 보여질 수 있겠습니까?

 사도행정 18장을 봅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가서 전도를 하는데 핍박이 많고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도할 용기를 잃어버렸습니다.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그처럼 나약해 있을 때에 성령께서 사도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네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 여기에 아직도 많이 있다, 그런고로 두려워 말고 복음을 전하라-----하나님께서 독려하십니다.

 우리는 깊이, 그리고 멀리 볼 줄 알아야 합니다. 10년 후 20년 후 그 언젠가 우리 후손들이 오늘의 이 세대를 향하여 무엇이라고 할 것인지 바라볼 줄 아는 안목을 지녀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적인 눈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세상을 보고 나를 보는 영적 안목(spiritual insight) 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사물을 보는 기존을 이성과 감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이성에 근거한 통찰은 자기 지식이 기준이 됩니다. 합리적인 상식에 비추어 자기가 아는 것은 보고, 자기가 모르는 것은 부정합니다. 자기가 경험한 것은 인정하고, 자기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부정하려고 듭니다. 이렇듯 지식에 묶인 눈-----이것도 큰 병입니다. 세상에는 내가 못 본 것도 있습니다. 내가 모르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내가 못하는 일은 하나님도 못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못한다고 다른 사람도 못합니까? 자기 지식에 근거한 지나친 이성적 판단이 사람의 생각을 어리석게 만들고, 눈을 흐려놓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감정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도 문제를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모든 것을 기분으로, 감정으로 봅니다. 이를테면 '나와 친한 사람은 다 좋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다 나쁘다' 라는 식으로 판단하는 것이지요. 자기 사랑에 기준해서 좋다 나쁘다, 의다 불의다를 판단하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그렇다면 진실을 진실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믿음의 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을 때에 모세는 12명의 정탐군을 뽑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요단강을 건너가서 가나안 땅을 살펴보고 오게 합니다. 그중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경과 보고를 이렇게 합니다. "그곳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제 들어가서 살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믿음 없는 열 사람은 전혀 딴소리를 합니다. 성벽이 하늘에 닿았다고 말합니다(신 1:28). 하늘 만큼 높은 성벽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레 겁에 질려서 과장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한다는 소리가 '아낙 자손들은 장사요, 그들은 보고 우리를 보니 마치 메뚜기 같더이다' 하고 한심한 소리를 합니다(민 13:33). 믿음 없이 보면 저들처럼 됩니다. 만사를 불가능하게 보고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안목은 병중에서도 가장 큰 병입니다. 그야말로 고질병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볼 줄 아는 바른 안목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눈은 어떠한 눈입니까? 오늘의 본문은 무엇보다도 징조를 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인(sign)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을 말씀한 것으로 우리가 잘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살구나무는 히브리어로 '솨케트'인데 그 뜻이 재미있습니다. 솨케트에는 '성급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살구나무는 곧 '성급한 나무'입니다. 다른 나무들은 아직 모두 말라 있는 초봄에 살구나무만 가장 먼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결국 살구나무는 이스라엘에 있어서 봄의 선구자 격인 셈입니다. 살구나무 가지에 물이 오르고 꽃이 터지기 시작하면 이제 얼마 안 있어 다른 나무들도 겨울잠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살구나무 가지는 봄이 가까이 온 것을 말해주는 sign입니다. 징조입니다.



'징조'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전에 없이 허리가 뻐근하고 무릎이 시리다, 노곤해도 막상 누우면 잠이 오지 않는다…… 이런 것이 신호입니다. 무슨 신호입니까? 늙었다는 신호요, 앞으로 더욱 쇠약해질 것이라는 시호입니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아주 쉬게 될 것이라고 일러주는 징조입니다. 죽을 조짐이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입니까? 아닙니다. 시작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4, 25장에서 앞으로 일어날 환난을 예고하십니다. 전쟁이 있고 재난이 있고 기근이 있고 사랑이 식어지리라, 무서운 환난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큰 환난, 깜짝 놀랄 환난이 있겠으나 이것은 재난의 시작이다, 징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큰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버마 랑군 사건이 있었고 칼(KAL)기 사건이 있었습니다.

 각종 데모가 일어나고, 폭력이며 강도며 끔찍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습니다. 도처에 전쟁이 있고 기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할 뿐입니다. 끝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액땜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본격적인 환난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오늘 벌받는다고 합시다. 그 벌로써 끝나는 것입니까? 그 벌 다 받고나면 상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니지요. 지금 받는 벌은 영원한 형벌의 징조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본체입니다. 앞으로 더욱 엄청난 사건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건의 징조가 바로 오늘인 것입니다.

 여러분,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혹은 세계적으로 개인적으로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참기 힘든 환난이 있습니까? 그것은 재난의 징조입니다. 앞으로 있을 큰 사건에 대한 징조가 여기에 나타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인물 중에서 참으로 미련한 사람이라고 제가 늘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왕이 그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사람은 열 가지 재앙을 다 당했습니다. 한두 가지 재앙을 당했으면 그만 눈치채고 회개할 일이지, 글쎄 열 가지 재앙을 다 맛볼 것이 무엇입니까? 미련하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를 볼 때마다 답답합니다. 너댓 번 그러다가 그만두었으면 좋았지 않습니까? 끝내 고집을 부리고 완악하게 행하다가 열 가지 재앙을 다 뒤집어썼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바로 왕만의 미련함이 아닙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은 일생토록 매를 맞습니다. 열 번 정도가 아니라 백번 천번 두고두고 매를 맞아도 정신차리지 못하는 불쌍한 심령들을 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또 예레미야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무섭게 부글부글 끓는 가마가 북에서 남으로 기울어져 있다-----실로 무서운 징조입니다. 곧 쏴하고 쏟아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무사하다고 해서 무사한 것이 아닙니다. 내 집이 평안하다고 온 세상이 다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아무 일 없었다고 '내일도 안녕히'가 아닙니다. 우리 앞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짐짓 불의의 길을 고집하다면 반드시 사고가 터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나고야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보지 못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긍휼은 가리워지는 법입니다. 저 끓는 가마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죄악을 징계하십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아십니까? "내가 북방 모든 나라의 족속을 부를 것인즉……" 하나님께서 북쪽에 있는 느부갓네살과 그 포악한 사람들을 부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들이 유대를 노략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준엄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을 징계하십니다. 그 징계 속에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구원도 봅니다.

 하나님은 죄를 타깃(target ; 과녁, 표적)으로 하여 회개할 때까지 화살을 쏘십니다. 그러나 죄를 징계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징계 속에 하나님의 구원이 있고, 당신 백성에 대한 그 사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죄를 치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북쪽 바벨론 왕을 시켜서 이스라엘이 회개할 때까지 저들을 치셨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심판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회개하면 그만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므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시다시피 이집트에는 피라밋이라고 하는 거대한 묘가 있습니다. 고대 국왕과 왕족들의 미이라가 그 속에 있습니다. 언젠가 발굴팀이 한 무덤을 발굴해보니 4000년 묵은 미이라의 주먹 속에서 밀알이 나왔다고 합니다. 아주 재미있는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밀알 몇 개가 옥토에 떨어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4000년이면 그것이 온 세상을 덮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 손바닥에 쥐어진 밀알은 그대로 밀알 몇 개로만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죽은 자의 손에서는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여러분, 우리는 바로 저 밀알 하나와 같이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쥐어질 때에는 마침내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대를 보고 있습니까? 내가 당한 어려운 일을 보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끝이라고는 보지 말아야 합니다. 시작입니다. 앞에 있는 큰 재난의 시작이요, 징조에 불과합니다. 앞에 있는 것들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끝났다 생각하지 말고 이제부터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 자체, 환난 그 자체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그 징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징계를 똑바로 보며, 그 앞에서 회개하면 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느부갓네살을 징계의 회초리로 쓰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회초리를 드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손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의 약속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견고한 성읍이 되고 쇠기둥이 되고 놋 성벽이 되게 하리라.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징계 저편에 있는 구원을 볼 줄 아는 바른 안목을 지니고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비커스의 학이 여기 원수 갚으려고 오누나

주전 약 五세기에 산 사람인데 이비커스는 유명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고린도에 가까운 촌에 여행을 갔다가 어떤 산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나 있는 것을 다 빼앗기고 매를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너무 억울해서 죽기 전에 크게 외치기를 마침 그 주위를 빙빙 떠돌고 있던 학을 보고 하는 말이『너 학은 내가 이런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니 내가 죽은 다음에도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 말을 강도가 다 들었습니다.

그 후 여러 달이 지나도 그 도적을 잡을 길이 없고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고린도의 노천 극장에서 연극을 하게 되어 많은 사람이 모여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학 몇 마리가 공중에 날아와서 빙빙 돌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은 어떤 사람에게 거의 머리에 닿게 날았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앉았던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외치는 말이『아 이비커스의 학이 여기 원수 갚으려고 오누나』하로 말을 했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그 말을 듣고 알아보니 그 사람이 도적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왜 그런 소리를 질렸습니까? 남이 다 가만있는데 학이 머리 위를 날아가면 어떻습니까? 죄가 그 사람의 양심 속에서 그 사람의 죄를 찾아내서 그 사람의 양심 속에서 그 사람이 범한 무서운 죄를 대면하게 했습니다.

죄는 사람의 생각을 처음에는 무척 괴롭히지만 자꾸 죄를 지으면 양심이 마비되어서 그 다음에는 죄를 양심 속에서 찾아 만날 길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 그럴 수도 있습니다. 죄로 인해서 양심이 마비되어 그를 찾아내지 못한다고 하지만 꼭 피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곳은 어디인지 아십니까? 사람의 성품 속에서 죄가 가를 찾아내고 맙니다.

사람이 한번 죄를 지으면 흰 손수건을 더러운 물에 한번 담그는 것과 같습니다. 이 손수건은 꺼낼지라도 더러운 물이 이 손수건에 듭니다. 한번 더 담그면 그만큼 더러운 물이 듭니다. 그래서 더 더러워지고 검어집니다.

사람이 한번 죄를 지으면 그 만큼 더 부패하여 집니다. 두 번 죄를 지으면 그만큼 더 그 성품이 부패하여지고 세 번 지으면 그 만큼 더 그 성품이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한번 주사 맞고, 두 번 세 번 주사 맞아서 마지막에는 아편쟁이가 되고, 한 잔 마시고 두 잔, 석 잔 마시고 그 다음날 마시고 하여 나중에는 고주망태가 되고, 거짓말 한번 두 번 세 번하여 나중에 거짓말쟁이가 되고 맙니다.

여러분 가룟 유다가 일조에 은 三十냥 받고 자기 선생을 판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요한의 기록대로 보면 저는 도적이라 맡긴 돈을 몰래 쓰더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 님과 十二제자를 위해서 회계의 직분을 맡아 가지고는 그 가운데서 한번 도적질해서 쓰고, 조금 도적질해 쓰고 나중에는 돈을 원하고, 돈을 사랑하고, 돈 때문에 부패한 성품이 결국은 자기의 선생님까지 팔아먹은 가룟 유다를 만들었습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죄는 부패한 그 사람의 성품 가운데 반듯이 찾아 만나서 대면시키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런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인도에 어떤 사람이 산에 가서 어떤 작은 호랑이 새끼를 잡아다 길렀는데 고양이처럼 집에서 먹이고 길렀습니다. 말 잘 듣고, 길을 잘 들어서 좋다고 하면서 길렀습니다.

어느덧 점점 자라서 중 호랑이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주인이 낮에 고단하여서 졸았습니다. 전에는 졸 때에도 작은 호랑이가 옆에 앉아서 손발을 핥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졸다가 갑자기 놀라 깨니까 그 호랑이가 그 사람의 손을 깨물고 있었습니다. 그 호랑이의 눈을 보니까 불처럼 되었는데 야수성이 나타나서 그의 손목뿐 아니라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야단하였습니다.

요행히 옆에 총이 있어서 곧 총을 가지고 쏘았습니다. 어떻게 되었나 하면 그 사람이 손을 상해서 붕대로 감았는데 이 호랑이가 핥는 바람에 그 붕대가 풀려서 피가 나왔습니다. 이 호랑이가 피 맛을 보고는 물고 늘어졌다고 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이 작은 호랑이 같아서 처음에는 별로 겁낼 것이 없었습니다. 크게 상하는 것도 없고 잘 커집니다. 그러나 점점 자라면 그 악한 성품이 죄를 통해서 결국은 그 사람을 망하게 만듭니다.

너희 죄가 정녕 저희를 찾아낼 줄 알라. 우리 사람의 성품에서만 찾아내는 것이 아니고 이 현세 그 사람의 당대에서도 죄라는 것은 흔히 찾아내고야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에서의 생활을 생각해 보세요. 야곱이 몰래 속여서 에서가 받을 축복을 받은 후에 에서의 격노를 사서 멀리 도망하지 않았습니까? 하란 이라는 자기 외삼촌 집에 가서 二十년이나 지냈습니다.

그 동안에 야곱이 전에 죄 지은 것을 다 잊어버렸고 에서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 동안에 거기 가서 아들 딸 낳고 재산을 많이 h아서 이제는 고향에 가서 살려고 가족과 재물을 가지고 자기 고향에 돌아오다가 들리는 말이 자기 형 에서가 四00명을 거느리고 마중 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을 때에 야곱은 겁이 나서 약복강을 건너지 못하고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을 하지 않았습니까? 자기형이 마중 오는데 왜 그렇게 무서워했습니까? 야곱은 자기 형 에서가 아니라 二十년 전에 지은 자기 죄를 그 때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요셉의 형제들을 기억하시지요. 요셉의 형제들이 어린 요셉을 이까짓 놈 멀리 팔아먹자고 해서 멀리 애굽의 종으로 팔았습니다. 그 다음에 그것을 다 잊어버리고 요셉도 잊고 죄 지은 것도 잊어버렸습니다.

三十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다가 큰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는데 자기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애굽에 가면 곡식이 있다고 하니 너희들이 애굽에라도 가서 곡식을 좀 사오라』고 하였습니다. 먹을 것이 없으니까 애굽이라도 곡식을 사려 떠났습니다. 갔다가 누구를 만났어요? 요셉을 만났습니다.

물론 반가운 형제입니다. 그러나 그 형제들은 동생 요셉을 만난 것이 아니고 三十년 전에 지은 자기 죄를 만났습니다. 三十년이나 잊어버렸던 죄를 그 때 만났습니다.『너희 죄가 정녕 너를 찾아낼 줄 알라.』제일 급할 때에 배고픈 때에 죄를 만났습니다.

재가 학생 때에 당한 경험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제가 학생으로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 가 있을 때에 한국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가 미국을 오겠는데 거기 대학의 허락과 여러 가지 수속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도와주었습니다.

그 때 우리 한국에서 여권 내기가 어려운 때인데도 이분이 많은 애를 써서 여행권을 얻어 가지고 내가 아무 날에는 일본에서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가게 되다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가 어서 오기를 기다렸는데 배가 도착한 후 일주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고 이 주일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도무지 소식이 없어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약 달 반쯤 되어서 샌프란시스코에서 그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 서두를 보니 형님께서 많은 애를 쓰셔서 여기까지 왔다가 결국 이민국에서 내가 상륙(上陸)을 허락 받지 못하고 눈물을 머금고 도로 돌아갑니다 라는 편지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이것은 아무의 죄도 아니고 내 죄 값입니다.』했습니다.

그 내용은 이 이야기는 가까운 형님에게도 하지 않았다가 지금 합니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내리는데 구름다리에서 발을 잘못 디뎌서 조금 넘어져서 발목을 상하였습니다. 그 때는 이민국에 데려다 신체 검사를 하고 내보냈는데 발목이 아파 걸을 수가 없어서 의사가 며칠 치료하라고 하여서 치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주일, 두 주일을 치료해도 도무지 낫지 않습니다. 세 주일 치료해도 낮지 않고 점점 더 부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의사가『이것은 당신 혈액이 깨끗지 못한 탓이니 당신 혈액을 검사하자』고 하였습니다. 혈액 검사를 하고 하는 말이『대단히 섭섭하지마는 당신 혈액 속에는 성병균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국법에 의해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그런데 이 친구 하는 말이『내가 아무 때에 북경에 가서 약 一년 있다 나왔는데 거기 있는 동안에 좋지 못한 친구를 만나서 마땅히 안 갈곳을 한번 갔었는데 그 후에 이 병을 얻고 그 병을 비밀히 고쳐 가지고 나와서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이 죄 값을 내가 이 때에 받을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했습니다.

너희 죄가 정녕 너를 찾아낼 줄 알라. 속담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는 말과 같이 죄가 졸졸 따라 다니다가 꼭 이런 때 만납니다. 도적놈들도 도적질 해다 가 잘 먹고 놀 때에 그 때 꼭 잡아갑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어떤 때에는 이 죄가 그냥 따라 가다가 자기 자신뿐만이 아니고 자기 자손의 삼 사대까지 내려가면서 이 죄가 만납니다.

성경에 보면 너희 죄가 삼 사대까지 이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유전 법칙을 연구해서 어떻게 죄가 자손에게 미치는가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또 유전 법칙 이외에 직접 부모의 죄가 자손에게 가서 갚아지는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합 왕의 경우를 보세요. 아합 왕이 이사벨과 같이 얼마나 악한 일을 했습니까. 그러나 당대에는 화를 면했지만 자손 대에 가서 七十이라는 아들이 하루아침에 학살을 당했습니다.

불란서 역사 중에 제일 사치한 와 루이 十四세라는 황제가 자기 원수 되는 불란서 황제의 무덤까지 파서 불 살은 일이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그로부터 꼭 一00년 후에 다른 사람들이 그 왕의 무덤을 파서 그와 같이 불을 놓고 재를 공중에 날렸습니다.

너희 죄가 정녕 너를 찾아낼 줄 알라. 이 현세에서뿐만 아닙니다. 죄가 내세까지 우리를 찾아 만납니다. 혹 어떤 사람이 세상에서 죄를 피했다고 합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한대로 우리가 하늘에 오를지라도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고 우리가 음부에 자리를 펼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며 우리가 새벽의 날개를 타고 저 바다 끝에 갈지라도 거기서 또한 주님께서 계시며 우리를 보십니다.

죄인이 피할 곳은 없습니다. 예수 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만일 네 눈이 범죄 하면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두 눈으로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나으리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아니하느니라.

이 세상에 있을 때에 너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있으면 눈 같이 귀한 것이라도 버리라. 한 눈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두 눈 가지고 구더기도 죽지 않고 꺼지지 않는 불 속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라』했습니다.

물론 이 말은 비유의 말입니다. 비유의 말이 이만큼 무섭거든 사실 지옥이야 얼마나 더 무섭겠습니까? 스스로 속지 맙시다. 하나님은 만홀(漫忽)히 여기심을 받는 하나님은 아니올시다.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되는 현상을 가만히 보면 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죄를 짓고도 무사히 지나갈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의 일이 분명치 않은 것이 많습니다. 내일 일을 우리가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모래 일을 우리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압시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죄의 값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값은 사망입니다. 죄가 정녕 나를 찾아서 대면할 때가 있습니다.

양심에서 대면하고 부패한 성품에서 대면하고 이 세상에서 내 자손에서 영원한 나라에서 대면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가 어떻게 무섭다는 것만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죄가 무서우므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시는 도리는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죄가 나를 찾기 전에 내가 먼저 죄를 찾아서 회개하고 자복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一서 一장 九절을 우리의 교훈으로 읽었는데 거기에는『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義)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했습니다.


좌파들은 왜 한명숙 구제에 발버둥칠까?

좌파들은 왜 한명숙 구제에 발버둥칠까?
-  받은글 / 210322

조선로동당의 직접 지령을 받는 남조선로동당통일혁명당이고,
통혁당의 최고위 서열은 현재 한명숙의 남편 박성준입니다.

통혁당사건의 주범 김종태 등 4명은 사형되었는데,
김일성은 김종태를 애도하여 해주사범대학을 김종태대학으로 개명하고,
평양에 김종태거리를 만들었지요.

김종태는 박헌영이 처형된 후 단연 최고위급입니다.

그 다음 서열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신영복인데, 
전향서를 쓰고 석방되었지만 얼마전에 죽었습니다.

그 다음 서열은 신영복에게 포섭되어 징역15년을 선고받은 박성준이지요.
한명숙의 남편 박성준은 신영복의 후계자 격으로 현재 남한내 간첩조직의 우두머리입니다.

박성준에 포섭된 자가 우상호, 오영식 등이고,
임종석, 조국 등은 한참 아래로 보이지도 않지요.

남한 내 로동당 최고 서열의 아내로 통혁당 사건 때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던 한명숙이 국무총리까지 지냈으니
어떡하든 우뚝 세워서 간첩들의 우상으로 삼아야 하는데,
뇌물로 감옥간 게 치명적이니 온갖 색칠을 해서 덮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부활절과 계란에 얽힌 이야기

[부활절과 삶은 계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11:25).

로잘린이라는 사람은 많은 농토와 커다란 저택,
 그리고 독실한 신앙생활로 결속된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잘린은 국가의 부름에 따라 십자군에 뽑혀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고,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자식들만을 남겨 놓은 채 집을 떠났습니다.

그가 집을 떠난 지 얼마 후에 그렇게 평화롭던 마을은 불한당들에 의해 온 마을이 점령을 당하고 주민들은 모두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로잘린의 가족들도 하루아침에 재산과 집을 잃은 채 마을에서 쫓겨나 이곳저곳을 헤매며 구걸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다행히도 어떤 마을에 도착하여 마음씨 고운 농장 주인을 만나 조그만 농토와 보금자리를 빌릴 수 있게 되었고 가족의 생명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로잘린의 아내는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농장 주인에게도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빌려준 농토에 정성을 다해 씨앗을 뿌리고 가꾸었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화살처럼 빨리 지나갔으나 전쟁터에 나간 로잘린은 아무런 소식조차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살림이 안정되자 부인은 부활절 전날 밤에 정성껏 과자를 굽고 그동안 길렀던 닭이 낳은 달걀을 모아 삶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온 동네 아주머니와 아이들을 모두 농장으로 초청을 했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어린이들을 이렇게 초대한 것은 오늘이 바로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쁜 날을 맞아 우리 모두 함께 노래 부르고 맛있는 과자와 삶은 계란도 함께 나누어 먹기 위해서입니다"

로잘린 부인은 이렇게 어린이들을 초청하게 된 배경을 말한 뒤 삶은 계란을 들어 보이며
 그곳에 쓰인 '사랑의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작은 글씨에 대해서도 설명했습니다.

"이 삶은 계란에 적힌 글씨는 저희 집에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교훈입니다.
먹기 전에 꼭 한 번 읽어보시고
그 의미를 생각하신다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동네 아주머니들과 어린아이들이 모두 돌아가고 아무도 없을 때 집 앞에서 서성거리는 낯선 소년 하나가 부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로잘린 부인은 얼른 그 소년에게 다가가 삶은 계란 몇 개를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이것은 부활절 선물이란다.
귀한 것이니까 맛있게 먹으렴"

소년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두 손으로 받아 안고 고개 넘어로 달려갔습니다.
이  소년이 고갯길을 넘어 내려오는데 길가에 너덜너덜한 군복을 입은 십자군 병사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소년은 깜짝 놀라 병사 가까이 가서 조심스럽게 흔들어 보았습니다.
그제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병사는 먹을 것을 좀 달라고 애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은 손에 쥐고 있던 부활절 기념선물로 받은 삶은 계란을 병사에게 주었습니다.

병사는 소년이 주는 삶은 계란을 받아들고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습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 계란 어디서 난거냐!"

소년은 겁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저씨,
그 계란은 훔치거나
빼앗은 게 아니라
고개 넘어 농장에 사시는 아주머니께서 부활절 선물로 저에게 주신 거에요"

병사는 계란 껍질에 작은 글씨로 쓰인 '사랑의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구절을 몇 번이고 중얼거리더니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건 바로 그토록 찾고 있던 내 아내의 글씨가 틀림없어!"

그리고는 계란을 든 채 쏜살같이 고갯길을 달려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집으로 돌아온 로잘린은 폐허가 된 고향집 외에는 사랑하는 아내도 자식도 어디론지 사라져버리고 없어서 이곳 저곳 헤매며 찾고 있던 중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선물로 삶은 계란을 어린이들에게 나누어 준 아내 때문에 다시 가족을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삶은 계란 속에 들어있는 또 하나의 사랑의 씨앗이 기적을 이루어 냈고 이후부터 해마다 부활절이 돌아오면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삶은 계란을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안에는,
마치 로잘린 부인의 부활절 계란처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소망과 기적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감사드리는 기쁜 부활절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큰은혜큐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