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손 / 알버트 듈러(Albrecht Durer. 1471∼1528)

기도하는 손 
알버트 뒤러( Durer, Albrecht. 1471∼1528)  

설교자들이 자주 소개하는 "기도하는 손"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던 "듀러"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는 스승을 찾아 그림 수업을 받기 위해 집을 떠났어요.
그러다가 그는 자기와 같은 꿈을 지닌 친구를 만났어요.
하지만 두 사람은 너무 가난해 매끼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공부와 생계를 함께 꾸려 나가는 것이 벅차 번번이 그림 공부를 중단해야만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친구는 '듀러'가 공부하는 동안 자기는 일을 하겠다고 제안했어요.

“지금 이대로는 우리 둘 다 꿈을 이룰 수 없네.
자네가 먼저 공부를 마치게.
그러면 그 뒤 자네의 그림을 팔아 내가 공부를 하도록 하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자네도 그림을 그리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인데.”

처음에 듀러는 친구의 제안을 완강히 거절했지만 친구의 꾸준한 설득으로 마침내 듀러가 먼저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어느 날, 듀러의 재능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작품이 잘 팔리게 되었어요.
이제 약속대로 듀러의 친구는 다시 그림을 그리러 화실로 돌아오게 되었어요.
그런데 친구는 그 동안 너무 힘든 노동을 한 탓에 손가락이 심하게 휘고 굳어져 버려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어버렸어요.
듀러는 울부짖으며 친구를 껴안았지만 친구는 조용히 웃으며 듀러의 눈물을 닦아줄 뿐이었어요.
하지만 그 뒤에도 죄책감으로 듀러는 방황하며 그림을 그릴 수 없었어요.

어느 날 듀러는 우연히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어요.
친구가 그의 화실에서 실의에 빠진 듀러를 위해 뒤틀리고 휘어진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고 있었던 거에요.
듀러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 친구의 우정에 보답하겠다고 생각하고 혼신을 다해 그림을 그렸어요.
그 작품이 바로 유명한 ‘기도하는 손’이라는 작품이에요.

이 그림의 손은 손가락이 다 휘어지고 주름지고 거칠고 투박해요.
아까 우리가 봤던 그 예쁜 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못생긴 손이지요.
그렇지만 이 ‘기도하는 손’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이에요.
이 손에는 친구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우정과 사랑과 섬김이 배어있기 때문이죠.

내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남을 위해 기도하는 손이기 때문이에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마음이 뭉클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의심많은 도마처럼 그 이야기가 진짜일까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네델란드의 둑이 무너지는 것을 어느 소년이 손을 틀어막아 구했다는 얘기를 수없이 듣고 자랐지만 정작 네델란드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얘긴지 알지도 못합니다. 

누군가 창작해낸 얘기를 인용하고 인용하다보니 교과서에까지 나오게 되고 우리 국민창작동화가 된 것이죠.
사실은 그런 일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의심많은 저는 이 그림에 얽힌 것도 다분히 꾸며낸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그래도 그 작자를 발견하고 그가 실제 인물이라는 것, 그리고 이 작품도 그의 실제 작품이라는것을 안 것만 해도 행복했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의 미술적 가치만을 평가하는 미술전문 평론에는 이 따뜻한 얘기는 나오지는 않더군요. 
미술외적인 얘기라서 그럴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놀란 것은 이 작가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시대, 무려 500여년 전의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그 기도하는 손은 현대인의 손이 아니라 몇 백년 전의 사람의 손입니다.
그러나 긴긴 세월 그 설화는 사라지지 않고 따뜻하게 남아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군요.

 

알버트 뒤러의 자화상 / Albrecht Durer (1471∼1528)

 

<작가 / 해설> 독일 화가· 판화가· 조각가· 미술이론가. 
뉘른베르크 출생.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완성자이다.
헝가리에서 이주한 금세공사인 아버지와 금세공업 집안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18명의 자녀 중 셋째로 출생.
1490∼1494년 콜마르·바젤 등지를 편력, 목판제작에 정진했다.
95년 귀국하여 공방을 차리고 동판화를 시도했다.
작풍(作風)은 처음에 M.숑가우어의 자극을 받고, 이어서 베네치아파 화가 벨리니 일파의 영향을 받았다.
1490∼1494년 바젤·스트라스부르 등 각지를 편력, 판화기술을 연마하고 수채화(水彩畵)의 새 분야를 개척했다.
목판화로 시작한 뒤러의 미술은 금세공가인 아버지로부터 받은 훈련과 선배 화가 마르틴 숀가우어의 영향을 받아 이내 동판화의 대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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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막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도가 막히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치명타다.
사람에게 있어서 혈관이 막히는 것과 같다.
기도가 막히면 신앙생활에 모든 것이 막힌다.
기도 없는 회개는 상상도 할 수가 없다.
기도하는 자가 성경도 읽고 싶고 전도도 하게 되며 교회생활에도 적극적이다.

기도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는 뻔뻔함을 보일 수밖에 없다.
기도는 우리의 양심을 흔들어 깨우는 촉매제와 같은 것이다.
성령충만함이 기도에서 나온다.
기도할 때에 성령의 생생한 체험을 하게 된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체험한 자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모든 죄를 털고 일어날 힘을 얻게 된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임재 하시는 성령은 소멸하는 불이기 때문에 모든 죄된 것들을 살라 불태워 버리실 수 있다.

기도는 비틀어진 우리의 심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킬 뿐더러 인간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역활을 한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신앙은 기도의 유무에 달려 있다.
 
우리가 왜 기도를 안하게 되는 것일까?

첫째,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대화가 막힌다.
사랑하면 서로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 한다.

둘째, 게으름 때문

게으름은 신악생활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종양과 같다.
서서히 신앙생활을 마비시키며 마침내는 하나님과의 단절로도 이어지게 하는 무서운 영적 질병이다.

​셋째, 우선 순위의 잘못

하나님보다 더 우선하는 세상적인 것 때문에 기도를 안하게 되는 것이다.
올바른 신앙생활은 무엇보다 우선순위가 똑바로 세워져야 가능하다.

넷째, 성령충만함이 없기 때문

기도하지 않으면 성령충만함을 받지 못하고 성령충만하지 못하면 기도할 수 없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기도하면 성령충만하고 성령충만하면 기도할 수 있다는 선순환으로 바꾸어야 한다.

다섯째, 교만하기 때문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자만심과 교만함이 기도를 안하게 만든다.
이런 사람들은 고난을 맛보고 나서야 비로소 기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일이 닥치기 전에 먼저 기도하는 습관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역동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할 수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쉬지말고 기도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7

기도한 후에 일을 시작하라
기도하는 마음을 일을 하라
일을 마치고 기도하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에베소서 6:18


성 그레고리오
「신학 강론」을 통해 『기도란 마음의 기억을 새롭게 하여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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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단어의 기도 


לִי 3627 [kelîy]

  • 1. 남성형 명사 기도, 도구, 그릇, 가정용품, 장신구, 창31:37, 45:20, 출3:22, 11:2, 스1:7,사52:11, 렘46:19
  • 2. 남성형 명사 의복, 의류, 피복, 장식, 멍에, 신22:5,삼하24:22, 사61:10.
  • 3. 남성형 명사 배[항해를 위한] 사18:2.


לַחַשׁ 3908 [lachash]
  • 1. 남성형 명사 속삭임, 기도, 사26:16
  • 2. 남성형 명사 마술, 요술, 마법, 전10:11, 사3:3, 렘8:17.
  • 3. 남성형 명사 복수׃לְחָשִׁים부적, 주문, 미신적인 장식, 사3:20.
מְזִמָּה 4209 [mezimmâh]
  • 1. 여성형 명사 의논, 조언, 권고, 충언, 계획, 기도[특히 악한 것에 대해 사용], 욥42:2, 시10:2, 21:12(11), 37:7, 렘23:20
  • 2. 여성형 명사 신중, 세심, 사려분별, 교활함, 교묘함,음모, 모략, 잠1:4, 3:21, 5:2, 8:12.
  • 3. 여성형 명사 사악함, 심술궂음, 욥21:27, 시139:20.


תַּחֲנוּן 8469 [tachănûwn]
  • 1. 명사 기도, 간구, 시28:2,6, 31:23(22),116:1.
  • 2. 명사 [주]תַּחֲנוּנוֹת, 시86:6.


בְּעִי 1164 [beʽîy]
  • 남성형 명사 기도, 간청, 욥30:24.

בָּעוּ 1159 [bâʽûw]
  • 여성형 명사 간청, 청원, 기도, 단6:8(7),14(13).


חַנּוֹת 2589 [channôwth]
  • 명사 간구, 기원, 기도.시77:10(9).


מִשְׁאָלָה 4862 [mishʼâlâh]
  • 명사 기도, 기원, 탄원, 청원, 간구, 시20:5, 37:4.


שְׁאֵלָה 7596 [sheʼêlâh]
  • 1. 여성형 명사 요구, 청원, 기도, 삿8:24, 왕상2:16, 에5:6,8, 욥6:8
  • 2. 여성형 명사 청원, 요청, 삼상1:17.
  • 3. 여성형 명사 대부, 대여, 삼상2:20.
תְּפִלָּה 8605 [tephillâh]
  • 1. 여성형 명사 간청, 애원, 기도, 느1:6, 시4:2(1),6:10(9), 109:4, 시17, 86, 90, 102,142편.
  • 2. 여성형 명사 중재, 탄원, 왕하19:4, 사37:4, 렘7:16,11:14
  • 3. 여성형 명사 [넓은 의미로] 찬송, 거룩한 노래, 시72:20, 합3:1.
תְּחִנָּה 8467 [techinnâh]
  • 1.  명사 기도, 간구, 시6:10(9), 55:2(1), 119:170.
  • 2.  명사 은혜, 자비, 수11:20, 스9:8


חֵן 2580 [chên]
  • 1. 남성형 명사 탄원, 기원, 기도, 슥12:10.
  • 2. 남성형 명사 자비, 호의, 선의, 창6:8, 19:19,32:6(5), 33:8, 30:27, 47:29, 50:4, 출3:21, 11:3, 12:36, 전9:11
  • 3. 남성형 명사 품위, 아름다움, 우아함, 잠22:11, 31:30, 전10:12.
כָּשַׁף 3784 [kâshaph]
  • 1. 명사 기원하다,간구하다, 기도하다, 경백하다.
  • 2. 명사 피엘형 כִּשֵּׁף: 마법을 사용하다, 마술을 쓰다, 대하33:6.
  • 3. 명사 [주]분사 מְכַשֵּׁף: 마법사, 마술사, 술객, 출7:11, 신18:10, 단2:2,말3:5, 분사여성형 מְכַשֵּׁפָה 출22:17(18).


בְּרַךְ 1289 [berak]
  • 1. 원형 무릎을 꿇다, 절하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단6:11(10)
  • 2. 원형 축복하다, 단3:28.
  • 3. 원형 피엘형 בָּרִךְ: 찬양하다, 하나님을 축복하다, 단2:19, 4:31(34).
עֲנָת 6067 [ʽĂnâth]
  • 남성형 고유명사 대답, 기도의 응답, 삿3:31, 5:6.


צְלָא 6739 [tselâʼ]

  • 동사 기도하다, 단6:11(10),스6:10.


מָשָׁל 4913 [Mâshâl]
  • 고유명사 기도: 아셀 지파에 속한 한 레위인의 마을 ‘마살’, 수19:26,21:30.


מִשְׁאָל 4861 [Mishʼâl]
  • 고유명사 기도: 아셀 지파에 속한 레위인의 한 마을 ‘미살’, 수19:26,21:30.


טוֹפָפָה 2903 [tôwphâphâh]
  • 여성형 명사 이마에 두르는 머리띠[특히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모세율법이 기록된 양피지 두루마리를 머리띠로 사용했다],출13:16, 신6:9(8), 11:18.


עָתַר 6279 [ʽâthar]
  • 1. 원형 기도하다, 탄원하다[לְ나 אֶל이 수반됨], 창25:21, 출8:26(30), 10:18, 욥33:26.
  • 2. 원형 [신에게] 분향하다
  • 3. 원형 니팔형 : 간구를 듣다, 창25:21, 삼하21:14, 사19:22.


פָּצַר 6484 [pâtsar]
  • 1.  원형 기도로, 창19:3, 33:11.
  • 2. 원형 촉구하다, 압력을 가하다.
  • 3.  원형 적의로, 창19:9.


מַעֲנֶה 4617 [maʽăneh]
  • 1. 남성형 명사 들어줌, 응답[기도의], 잠16:1.
  • 2. 남성형 명사 대답, 응답, 회답, 욥32:3,5, 잠15:1,23.
  • 3. 남성형 명사 반박, 논박, 논파, 논증, 욥32:3,5.


פָּרַץ 6555 [pârats]
  • 1.  원형 터져나오다, 돌격하다, 출19:22,24,삼하6:8, 대상15:13, 욥16:14, 28:4.㉠ 나쁜 의미에서 격렬하게 행동하다,호4:2.㉡ 좋은 의미에서 촉구하다, 간곡히 구하다[기도에 있어서], 삼상28:23,삼하13;25,27.
  • 2. 원형 깨뜨리다, 분쇄하다, 왕하14:13, 느3:35(4:3), 시80:13(12), 잠25:28, 전3:3, 10:8, 사5:5, 미2:13.
  • 3. 원형 흩어지다, 분쇄하다, 삼하5:20, 시60:3(1), 백성이나 양떼가 흩어지다, 외국으로 퍼져나가다, 창28:14, 출1:12, 수가 증가하다, 창30:30, 욥1:10, 호4: 10, 사람의 재산이 늘어나는 데 사용됨, 창30:43, 소문이 퍼지다, 대하31:5, [은유적으로] 넘치는, 풍부한,잠3:10.


בָּקַשׁ 1245 [bâqash]
  • 1. 동사 추구하다, 찾다, 창37:15,16, 삼상10:14. ㉠ 왕의 얼굴을 보려 하다, 왕상10:24.[특히 청원을 하기 위해, 잠29:26]. ㉡ 하나님의 얼굴을 보려 하다 [특히 기도로], 삼하12:16, 시24:6, 27:8,105:3
  • 2. 동사 찾다.
  • 3. 동사 피엘형 בִּקֵּשׁ


נָשָׂא 5375 [nâsâʼ]
  • 1. 원형 기도와 찬양하다, 시28:2, 63:5(4),134:2.
  • 2. 원형 [기도] 사37:4.
  • 3. 원형 נָשָׂא פְּנֵי פ 어느 사람에 속한 사람을 영접하다[특히 욥13:10을 보라]. ㉠ [좋은 의미로] 어느 사람의 기도를듣다, 그 일에 호의를 베풀다, 청원자로서 그에 대해 존경하다, 창19:21, 32:21(20), 욥42:8, 잠6:35, 애4:16, 말1:8,9.


לָקַח 3947 [lâqach]
  • 1. 원형 조언을 받다, 기도를 인정하다, 훈계를 받다, 시6:10(9), 잠2:1, 4:10, 24:32.
  • 2. 원형 1) 취하다, 고정시키다, 부착하다.
  • 3. 원형 잡다, 쥐다, 붙들다, 창3:22, 18:7,8, 21:14,27, 22:6, 시18:17(16).


פָּגַע 6293 [pâgaʽ]
  • 1. 원형 [칼형의 의미] ㉠ 침범하다. ㉡ [기도로써] 어떤 것을 간구하다. (㉠ [전치사 בְּ가 수반되는 경우] 렘36:25.㉡ [전치사 לְ가 수반되는 경우] 사53:12, 59:16.)
  • 2. 원형 부딪다, 충돌하다.
  • 3. 원형 적의를 품고 달려들다, 삼상22:17,18, 룻2:22. [주] 특히 죽이기 위해 달려들 경우 사용됨, 삿8:21, 15:12,삼하1:15.


חָרַשׁ 2790 [chârash]
  • 1. 원형 [주]기도응답을 받지 못할 때 하나님에 대해 사용,시35:22, 39:13, 83:2(1), 109:1.
  • 2. 원형 새겨 넣다, 새기다, 다듬다, 렘17:1
  • 3. 원형 제조하다, 만들어 내다, 왕상7:14.


פָּלַל 6419 [pâlal]
  • 1.  동사 간구하다, 기도하다. ㉠ [특히 하나님께] 시5:3(2), 단9:4. ㉡ [사람에게] 느1:4. ㉢ [단순한 사용] 삼상2:1, 대하7:14.
  • 2.  동사 심판하다.
  • 3.  동사 피엘형


שָׁחָה 7812 [shâchâh]
  • 1.  원형 ㉠ 기도로 하나님을 경배하다, 창22:5, 삼상1:3. ㉡ [몸을 굽힘이 없이] 창47:31, 왕상1:47.
  • 2.  원형 굽히다, 사51:23
  • 3.  원형 가라앉다, 풀이 죽다.



헬라 단어의 기도 


εὐχή, ῆς, ἡ 2171 [ĕuchē]

  • 1. 기도, 약5:15.
  • 2. 맹세, 서약, 행18:18, 21:23.


  • 1. [문맥에 따라 의미 변화] ㉠ 너의 말, 마5:37. ㉡ 설명, 눅20:20. ㉢ 질문, ἐ- ρωτήσω ὑμᾶς λόγον: 내가 네게 물을 것이다, 마21:24. ㉣ 기도, 마26:44, 막14:39. ㉤ 예언, 요2:22, 18:32. ㉥ 명령, 계명, 눅4:36, 벧후3:5,7. ㉦ ...
  • 2. 말하기.
  • 3. [일반용법]
προσευχή, ῆς, ἡ 4335 [prŏsĕuchē]
  • 1.  기도, 마17:21, 막9:29, 눅22:45, 행3:1.
  • 2.  기도처, 기도소, 교회당, 행16:13,16.
  • 간구, [신약에서는 언제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눅1:13, 2:37, 행1:14, 롬10:1, 고후1:11, 9:14, 엡6:18, 빌1:4,19, 4:6, 딤전2:1, 5:5, 딤후1:3, 히5:7, 약5:16, 벧전3:12.

  • 기원, 탄원, 기도, 히5:7.

  • 1.  기도, 딤전2:1, 4:5.
  • 2.  시간, 요구.
오픈사전
εὔχομαι 2172 [ĕuchŏmai]
  • 1. [하나님께] 기도하다, 행26:29, 고후13:7,9, 약5:16.
  • 2. 바라다, 행27:29, 롬9:3, 요삼1:2.


προσεύχομαι 4336 [prŏsĕuchŏmai]
  • 기도하다, 막1:35, 눅1:10, 행1:24.

εὐχαριστέω 2168 [ĕucharistĕō]
  • 1. σὺ εὐχαριστεῖς: 너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고전14:17.
  • 2. 기도한다.
  • 3. 감사하다, 감사한 마음을 가지다, 눅18:11, 롬16:4.


ἐπί 1909 [ĕpi]
  • 1. τῇ σῇ εὐχαριστίᾳ: 너희 감사의 기도에, 고전14:16, 히8:1, ἐ. πᾶσι τούτοις: 이 모든 것 위에, 눅16: 26, 골3:14. ㉢ 어떤 상태, 행동, 결과 등의 기반과 근거가 되는 것을...
  • 2. [속격과 함께 쓰일 때]
  • 3. [장소에 대하여].
  • 1. πρὸς ἑαυτὸν προσεύχεσθαι: 속으로 기도하다, 눅18:11, ἀπέρχεσθαι πρ ὸς αὑτούς: 집으로 가다, 요20:10.
  • 2. [삼인칭 단수나 복수에 대해 그것이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과 동일인임을 지시해준다]
  • 3. [주]
αἴρω 142 [airō]
  • 1. αἴτοὺς ὀ- φθαλμοὺς ἄνω: [기도 중에] 눈을 들어 우러러 보다, 요11:41.
  • 2. 들어올리다, 높이다, 집어 올리다, 데리고 올라가다.
  • 3. [문자적으로]
ἀξιόω 515 [axiŏō]
  • 1. [일반적인 뜻] 구하다, 요구하다, 청구하다, 기도하다, 행13:42.
  • 2. 고려할 만하다, 숙고할 만하다, 딤전5:17, 히3:3. [주]
  • 3. [나쁜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 히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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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을 더욱 알고 사랑하고 나에 대한 하나님 계획을 충실히 알아듣고 따르게 되도록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런 목적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개인적인 심리적 위안이나 현세적 만족을 위한 것이라면 올바른 기도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도할 때 불교식 좌선 형식을 고집하는 등 방법에 치중하는 모습들도 많은 것 같다.
이러한 것은 손으로 「달」을 가리킨다고 할 때 정작 중요한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경우와 같을 수 있다.

기도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만나는 길, 통로이고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 중심적 사고 행동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가는 것인데 이를 생각지 않고 정화되지 않은 자신의 바람과 욕구 충족에 기도의 목적을 둔다면 「내 만족의 도구 방편」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는 분명 기본적인 충실성이 요구된다』

『기도가 결코 쉽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즉 변화의 노력 없이 그저 받기만 하는 자세는 곤란하다』
『결국 하느님은 모든 이가 거룩히 되도록 초청하셨지만 그에 따르기 위해서는 합당한 정성과 시간적 투자가 있어야 한다』
​『기도에 대한 열망을 채우는 관심들은 좋지만 그 본질은 잊지 말아야 하고 또 삶과 기도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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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새벽기도회 유래는 어떻게 시작됐나?

기독일보 (la@christianitydaily.com)
7~9분

어떤 이는 예수께서 새벽기도회를 맨 처음 시작했다는 주장을 하는데 이것 역시 잘못된 주장이다. 예수께서 새벽에 기도하신 이유는 식사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바쁘셔서 새벽에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던 것이다. 새벽기도회에 무슨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는 누가 언제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여기에 옥성득 교수의 한국교회 새벽기도회에 강의를 들어본다.


옥성득 교수(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석좌 부교수, 한국기독교)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2002년부터 UCLA에서 한국근대사와 한국종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한반도 대부흥' 등이 있다.

대개 초대 한국교회의 새벽 기도회는 4시 30분이나 5시에 드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새벽 4시 30분이라는 시간은 도성(都城)의 새벽 파루(罷漏)와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큰 도시는 4대 문과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세종 때 만든 자격루(自擊漏, 물시계)로 정확한 시간을 알았다. 따라서 같은 시각에 종을 쳐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했다. 새벽 4시에는 파루(罷漏)로 33번 종을 쳐서 성문을 열고 통행을 시작했다. 밤 10시에는 인정(人定, 인경)으로 28번 타종하여 우주의 일월성신 28개 별자리를 쉬게 하고 성문을 닫고 통행금지를 실시했다. 파루 때 했던 33번 타종은 불교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다.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있는 33개의 하늘을 깨우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사찰처럼 새벽 3시나 5시가 아니라 도성에서 4시에 파루를 친 것은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노동을 해야 했던 농경시대의 산물이었다. 수천 년 간 그때 일어나 일하던 인간의 생체리듬에 맞춘 것이었다. 새벽 기도회를 4시 30분이나 5시에 시작한 것은 4시에 통행이 시작되던 습관을 따라 한 것이다. 도성의 종각에서 타종하지 않아도 4시에 일어나 예배당에 오면 4시 30분이 되었고 먼 곳에서 오는 자들이 많으면 5시에 모여 기도할 수 있었다. 즉 파루와 연관한 하루 일상의 시작 시간에 일어나 교회로 와서 새벽 기도회로 모였다.

그러나 절에서는 하루 다섯 번 범종을 울리고 예불을 드렸다. 초경(밤 8시), 이경(밤 10시), 삼경(자정, 108번), 사경(새벽 3시, 5번), 오경(새벽 5시, 28번 타종으로 28세계가 깨달음을 얻기를 기원) 등이었다. 사찰의 상가 공동체는 성(城) 안에 있지 않고 산속에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새벽 3시에 예불, 다시 새벽 5시에 운판(나무판)을 치고 목어(목탁)를 울리고, 법고(북)를 울린 다음에 범종(梵鍾)을 28번치고 승려들이 함께 모여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기를 구했다.

사찰의 그것은 일과에 따라 기도했던 중세 유럽 수도원의 수도사들처럼 생체리듬에 반하는 시간에 일어나 묵상하고 잠과 욕망을 끊는 행위로 드린 염불이었다. 즉 사찰의 새벽종은 세속 도시의 하루를 시작하는 파루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종으로 속세를 떠난 수도승의 정좌와 묵상과 예불을 위한 시공간이었다. 그 피안의 공간에서 매일 자정과 새벽 3시에도 일어나 육체성을 거부하고 전문 종교인 집단의 집회를 만들었다. 따라서 그것은 새벽기도와 달랐고 둘 사이의 연관성은 적었다.

정리하면 새벽기도는 불교 사찰의 범종이나 전문 종교인들이 드린 피안적 예불과 상관이 없다. 오히려 세속 도성의 새벽 파루와 함께했던 하루 일상의 시작과 연관된다. 그와 같은 세속성 안에서 거룩성을 회복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했던 신자들이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던 데서 창출되었다. 긴장감이 있는 성속(聖俗)의 경계에서 밤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문지방과 같은 틈새 시간에 새롭게 넣은 기도시간이었다.

(3) 한국교회 새벽기도는 무교적 민속신앙이 그 유래인가?

1905년 초 송도(개성)서 열린 남감리회 부인사경회 때 캐롤(A. Carroll)이 경험한 내용을 보자. "아침 여섯 시가 되자 마치 아침을 알리는 시계처럼 건너에 있던 여자 교인들이 일어나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하는 바람에 나도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다음 날은 새로 몇 사람이 더 오더니 새벽 4시에 사람들을 깨워 무려 한 시간 반 동안이나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이덕주 교수는 이 글을 해석하면서 과거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 조왕신(竈王神)에게 빌던 여자들의 습관이 사경회 기간 중에 새벽 기도회로 모습을 바꾸었다고 보았다.(이덕주,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0, 348~350쪽) 그런데 이 자료를 가지고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부엌에서 조왕신에게 노래로 찬양을 드렸던가? 아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치성(致誠)을 드릴 때 옆 사람들과 한 시간 반 동안 대화를 나누었던가? 아니다. 자료에 나오는 일시적인 새벽 기도회와 무속의 조왕신이나 치성사이에는 시공간, 성격, 의례 모든 면에서 연속성을 찾기 어렵다.

2.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시작

새벽기도의 유래에 대해서는 필자가 발표한 논문이 있다. 
자세한 논의는 '평양 대부흥과 길선주 영성의 도교적 영향'(한국기독교와 역사, 25호, 2006년 9월, 7~35쪽)을 보라. 
필자는 이 논문에서 선도(仙道)의 수행자였던 평양의 길선주와 그의 동료들이 청일전쟁 후에 개종하고 평소 수행(修行)을 하던 새벽기도, 통성기도, 철야기도 등을 1905년 전후 사경회(査經會)에 도입했으며, 1909년 전후에 교회 프로그램인 기도회로 만들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새벽기도가 길선주와 그 친구들의 도교(道敎) 수행에서 유래했다는 나의 이 주장에 대해 아직 반론을 들은 적이 없다.

필자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길선주가 중심이 되어 선도(仙道)에서 기독교로 토착화한 새벽기도와 통성기도는 1910년 전후부터 한국교회에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사적인 소원을 빌었던 도교(道敎)의 기도와 비교하면 개신교의 기도는 민족적 위기에 교회와 민족 공동체를 위한 공공성(公共性)을 지니고 있었다."

이 논문에서는 또한 집단적인 '새벽기도'는 장로교회 사경회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1898년 2월 황해도 강진교회 사경회에서 일반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새벽 기도회를 시작했으며, 황해도의 다른 사경회(1901년 2월)에서도 교인들이 새벽 기도회를 시작한 것을 처음 소개했다. 이와 같이 사경회(査經會) 때 소규모 일시적으로 모이던 새벽 기도회가 1905년 평양 도(道) 사경회 때 정식 프로그램으로 채택되었으며 1909년에 개교회의 프로그램으로 전환되었다고 정리했다.

3. 1890~1905년 사경회와 새벽기도회

선교사들은 1892년 10명 정도의 한국인 남자 지도자들과 조사를 모아 한 달 정도 집중적으로 성경, 교리, 전도법, 설교법, 교회 치리법 등을 가르치는 사경회(査經會)를 조직했다. 1891년 채택한 네비어스의 방법에 따라 본토인 목회자와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1892년 11월 28일부터 12월 24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첫 신학반에 참석한 백홍준, 한석진 외 참석자들이 새벽에 일어나 자발적인 기도회로 모였다. 이후 이 조사 사경회(査經會)에서 새벽에 일어나 찬송하고 기도하는 모임이 계속되었다. 조사 사경회의 새벽 기도회가 황해도에서 일반 사경회 새벽 기도회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말테의 논문 '한국 개신교회 새벽기도의 초기에 대한 연구'(신학과 실천 31호, 2012년 5월, 183~225쪽)에는 1892년 조사 사경회(査經會) 전 백홍준, 마포삼열, 한석진 등의 새벽기도 사례를 소개한 후 여러 사경회에서 행해진 새벽 기도(회) 사례를 잘 정리해 놓았다. 후자는 필자가 소개한 황해도 강진교회 사경회 새벽기도(1898년 2월)와 다른 황해도 사경회 새벽기도(1901년 2월)에 이어 평북 초산(1901), 원산(1903), 평양(1904), 서울 이화학당(1904), 송도(1905) 등의 사경회(査經會)에서 이루어진 새벽기도 사례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어서 필자가 정리한 1909년 길선주와 박치록 장로가 주도한 평양 장대현교회의 새벽 기도회를 마지막으로 언급했다. 이 가운데 1909년 새벽 기도회만 교회에서 광고한 후 일반 신도들이 모인 기도회였고 나머지는 사경회 때 이루어진 일주일 정도의 한시적인 기도회였다.

이말테는 새벽 기도를 남성들이 시작한 것에 주목했다. 여성들의 무속적 새벽 치성에서 새벽 기도가 유래했다는 통설을 비판했다. 또한 1893년 평양 지부를 개척하던 마페트(S. A. Moffett) 선교사와 조사 한석진 가정의 새벽기도를 근거로 마페트가 새벽기도 창시에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페트가 새벽기도를 시작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더 검토되어야 한다. 만일 그가 새벽기도에 관심이 많았다면 1895년 이후 가정에서 새벽기도를 꾸준히 드리거나 평양 널다리교회 혹은 장대현교회가 준공된 1900년에 새벽 기도회를 창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페트가 남긴 글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또한 개인적으로 잠시 드린 새벽기도를 교회의 '새벽 기도회'의 유래로 보기는 어렵다.

(1) 길선주의 첫 장대현교회 새벽 기도회는 1906년 아닌 1909년

많은 책이나 온라인 블로그에 보면 다음과 같은 잘못된 글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새벽기도는 1906년 가을 길선주 장로의 주도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하였다. 이 새벽 기도회는 1907년 평양에서 촉발된 한국 기독교 부흥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길선주 장로는 국가가 어려운 상황(당시 일제강점기)에 놓여 있는 것을 걱정하여 새벽에 교회에 나가 기도하였고 많은 교인들이 같이 기도하기 시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300~500명에 이르는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길선주의 새벽 기도회가 1906년 가을에 시작했다. 길선주의 새벽 기도회가 1907년 부흥의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였다는 세 가지 주장은 오류다. 1906년으로 알려진 것은 김인서가 1930년대 '신앙생활'에 길선주 소전을 쓰면서 그렇게 잘못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 새벽 기도회는 부흥운동이 끝난 후 열기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냉랭해졌을 때 다시 부흥의 불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1909년에 시작한 새로운 부흥회 방법이었다. 또한 아직 한국이 일제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기 이전이었다.

(2) 새벽 기도회가 정착한 것은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반

1907년 대(大) 부흥 이후 1910년대에 새벽 기도회가 한국교회에 널리 시행되고 매일 새벽에 모인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런 기록은 없다. 이덕주 교수가 지적한 대로 1914년에 시작한 강화도 마리산 부흥회 때나 여러 사경회 때의 새벽 기도회 모두 일주일을 사경회(査經會)와 부흥회 때 드린 것이 전부 다이다. 그러므로 아직 개 교회 차원에서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또 교회에 홀로 새벽에 나가 30일이나 100일 개인 기도를 드린 예들이나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신석구 목사의 개인 새벽기도 등에서 보듯이 1919년 이전에는 매일 새벽 기도회로 모이는 교회가 없었다.

1920년대 후반에 정착하는 새벽 기도회 자료는 더 수집해서 정리해야 할 주제다. 이때 새벽 기도회가 매일 드리는 일상의 기도로 거의 모든 교회에서 자리 잡은 것은 식민지 치하에서 더욱 기도가 간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하루하루가 종말인 가난한 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3) 새벽 시간의 기독교화로 파루를 대신한 교회의 새벽 종소리

1910년대 사경회 때의 새벽 기도회는 도시의 새벽 시간을 기독교화하기 시작했다. 1910년 전후 일제 총독부는 문명의 발전과 도로 확장과 신작로 개설이라는 명목으로 서울과 다른 도시들의 성벽(城壁)을 다 허물었다. 사대문(四大門)을 지키는 일본 순경의 호각 소리와 칼 소리가 새벽 소리가 되었다. 성벽이 없는 경성(京城)에 보신각(普信閣)은 무용지물이라 폐쇄(閉鎖)되었다. 서울은 영혼(靈魂)의 종소리를 잃어버렸다. 성(城)이 없는 경성은 보신각 종소리(聲)가 사라진 경성이었고 종소리 없는 도시는 성스러움(聖)이 사라진 식민지의 경성이었다.

이러한 때에 도시와 시민들에게 다시 종소리를 준 것이 교회와 성당이었다. 명동성당에서는 아침 6시, 정오 12시, 저녁 6시에 하루 3번 종을 쳤다. 주일마다 각 도시 교회와 그리고 점차 교회마다 사경회를 다른 기간에 하면서 새벽에 종을 쳤다. 여러 교회에서 퍼져 나간 종소리는 다시 새벽시간을 구별하고 도시의 새벽을 살리는 영성(靈聲)이 되었다. 도시의 혼이 살아나는 소리였다. 성수주일이 일주일을 시작하는 안식일의 성화였다면 새벽기도는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의 성화였다.

3. 한국교회 새벽기도는 성도들이 확보한 시공간

성(城) 안에 사는 시민들은 새벽 4시에 성문이 열리면 일어나던 습관을 따라 성(城)의 종소리가 사라진 후에도 대개 4시에 거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교회에 도착하는 4시 30분이나 5시에 새벽 기도회로 모이고 이어 일하러 가면 시간이 적절했다. 따라서 4시 30분이나 5시에 시작한 교회의 새벽 기도회는 격리된 산속에 있는 사찰에서 새벽 3시나 5시에 승려들끼리 모여 조용하고 엄숙하게 예불을 드리는 것과 달랐다.

세속 도시 속에서 거룩성을 느끼고 영성을 유지하려는 노동자와 주부들의 기도회였다. 그 예배는 곧 다가올 일상의 무거움 앞에 하늘의 도움을 구하는 시간이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넘어가는 하루의 문지방과 같은 경계선의 시간의 사이(時間), 그래서 긴장이 팽팽한 틈새 시간, 변혁을 품고 있는 전이의 시공간에 새벽을 깨우는 자들이 모여 하나님을 구했다. 새벽에 일어나야 생존할 수 있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노동자들과 밤낮 쉼 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이 함께하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잠자는 하늘을 깨우거나 중생을 계몽하려는 사찰의 예불과 달랐으며 여성들이 홀로 칠성신(七星神)에게 비는 민간신앙의 치성과 달랐다. 전자에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 없었고 후자에는 남녀가 함께 하는 공동체성이 없었다. 양자 모두 공적(公的) 기도가 없었다. 새벽 기도회가 한국 개신교를 상징하는 의례가 된 것은 피안(彼岸)의 기도나 사적 기복인 기도와 달리 세속 안에서 일반 교인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공적(公的)인 기도회로 기독교화 했기 때문이다.

소리가 세상을 구한다. 거룩한 영혼의 종소리가 사라진 한국교회에 다시 종을 치는 종지기들이 필요하다. 남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새벽마다 종을 치던 사찰 집사님의 매일의 헌신이 있던 교회 어릴 때 들었던 교회의 그 종소리가 그립다. 기도가 세상을 구한다. 새벽 미명에 무릎 꿇고 자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어머니들의 눈물로 지금 청년과 장년들이 그나마 살고 교회가 살아 있다. 진정한 새벽기도가 세상을 구한다. 한 손에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수직성을 담고 다른 한 손에는 세속 성자로서 민족을 위해 도고하는 수평성을 담아 두 손을 모아 함께 드리는 새벽 기도로 교회가 산다.












중요한 세가지 형태

1. 소리기도

1) 자유기도

기도하는 사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는 가장 생생함을 줄 수 있다. 기도자가 하느님께 직접 자기 말로 자신의 통회와 열망 기쁨 그리고 청원과 감사를 드린다면 가장 기초적이고 원초적인 가치 있는 기도인 것이다.

마음에 가득 찬 것이 절로 터져 나와 쉽게 기도를 드릴 수도 있고 때로 마음은 텅 비고 머리 안에서도 아무런 말을 찾을 수 없을 때도 있는데 이렇게 적당한 기도를 드릴 수 없는 것 같다해도 염려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우리 자신보다도 더 잘 알아들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소박하고 어눌한 말로 드리는 기도이지만 그 말들이 진실한 말이 되도록 염려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어쩌면 본질적인 것, 즉 신앙 경외심 신뢰심 그리고 각오를 드러내는 소박한 말들이 소박하다 해서 풍성히 넘치는 말보다 결코 못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강론선집」을 통해 『우리의 기도가 받아들여지는 것은 말을 많이 하는데 달린 것이 아니라 마음의 열성에 달린 것』이라고 밝힌바 있다. 이런 이유로 자유기도를 바치는 것이 어렵다하여 쉽게 만들어 놓은 기도로 눈을 돌려선 안된다.

2) 만들어진 기도문에 의한 기도

무슨 기도를 해야 좋을지 모를 때에는 자신을 너무 들볶지 말고 다른 곳으로부터라도 기도를 가져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 입에서 나온 올바른 기도말을 사용해도 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서 배우는 의미도 가질 수 있다. 경건한 사람들이 하는 기도의 말들은 그들의 경험과 위기의 극복 체험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들 말로 기도할 때 우리도 배움을 얻게 된다.

성서의 여러 구절들은 그 자체가 기도다. 예를들어 시편은 개인의 체험에서 생겨난 것이면서도 모든이의 경험을 대변한다. 성모마리아의 찬미가 「마니피캇」(루가1, 47∼55)이나 즈가리야의 찬미가 「베네딕투스」(루가 1, 68∼79) 또는 나이많은 시메온의 「찬미가」(루가 2, 29∼32) 등이 그것이다.

바오로 서간에서도 풍부한 기도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에 앞서 그 자체로 유효하고 모든 이에게 필요한 기도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주님의 기도」이다.

같은 등급은 아니지만 전례에 포함돼 있는 「교회의 기도」들도 권할 수 있다. 미사에서 드리는 「대영광송」이나 성령강림절의 「성령이여 오소서」, 성무일도의 「찬미가」 엄격하면서도 맑은 「미사 기도문」 등이다. 이 기도문들은 초기 교회에서 생긴 것들로 잘 조화돼 있고 하느님에 관한 고상하고 아름다운 생각으로 가득하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올바른 기도를 찾는 것이다. 기도는 무엇보다 진실해야 한다. 소박한 어조를 버리거나 과장하는 기도, 정상적인 정신으로는 가질 수 없는 감정들을 전제로 하는 달콤하고 감상적인 기도도 진실하지 못하다. 잘못된 방법으로 하느님 앞에서 비하하고 자신을 흉하게 만들고 자신의 죄에 대한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는 그런 기도들도 진실되지 못하다. 기존에 나와있는 기도책 들에도 쓸데없는 내용이나 내적 생활에 있어 우리 몸에 맞지 않는 상한 음식과 같은 책들도 적지 않음을 밝히고 싶다.

3) 반복·음미하는 기도

소리기도와 마음기도 사이에 있으면서 그리스도교 생활에서 큰 역할을 하는 기도방식이 있다. 물론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된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에는 이방인들처럼 수다를 떨지 마시오. 그들은 많은 말을 해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합니다』(마태 6, 7).

하느님께 말하는 사람은 소박하고 경건하게 신뢰를 가지고 해야하며 내적으로 올바른 것 외에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한사람에게 여러번 같은 것을 말하듯 같은 기도를 반복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느끼는 것을 단숨에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복해서 말하더라도 그때마다 훌륭하고 순수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기도의 예가 「삼종기도」다. 또 오늘날 도시인들에게 잊혀져 있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바치고 있는 묵주기도 역시 반복되는 머무름과 천천히 나아감의 두 순간을 잘 조화시키고 있다.

이렇게 소리기도는 관상의 효과를 동반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느 나이들고 학력도 없는 할머니가 성당에서 묵주기도를 바친다고 할때 그분이 비록 자신의 입으로 읊조리는 기도문의 뜻을 다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조용히 의식적으로 반복하면서 하느님 오시길 바라고 성모님께 은총을 전구해 주시길 구하고 있다면 어쩌면 관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면에서 소리기도가 진정한 기도가 될 때 그것은 또한 마음의 기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묵상에 대한 설명에 앞서 「마음의 기도 (oratio mentalis)」에 대해 알아보자. 묵상은 흔히 마음의 기도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마음의 기도는 말을 삼가고 고요를 추구하는 특징을 띄고 있으며 온전한 묵상(meditatio)에 비해서 다양한 정신 활동을 벗어나서 단순한 기도행위(관상기도: contemplatio)로 건너가려는 경향, 즉 침묵과 단순함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강조되는 단어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기도 역시 묵상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역시 마음의 기도(oratio mentalis)는 어떤 면으로는 본래적 의미의 관상과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묵상은 관상적(contemplative) 기도 형태의 하나로서 일반적으로 의지와 지성의 여러 가지 특별한 행위들을 통해 하느님 뜻을 이해하고 탐색하는 관상 형태를 말한다.

묵상의 어원학적 의미는 「영의 반성(숙고 성찰)」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이는 군인들이나 연주자들의 「연습과 반복」에 상응하는 것이다. 귀로 들은 것, 눈으로 본 것, 기억된 것을 동화 융화하기 위한 작업이며 하나의 생각을 완전히 꿰뚫기 위한 숙고와 저작(詛嚼)을 말한다. 이같은 동화 작업을 그리스도교 신앙 내용에 적용할 때 그리스도교적 묵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 묵상과 그리스도교적 삶

묵상은 영을 신앙의 신비에 동화하도록 준비시킨다. 이는 오직 하나의 준비를 의미하는 것이다. 묵상활동을 어떤 기계적인 방법으로 얻어지는 어떤 효과와 관련시킨다거나 묵상하는데 있어 영을 사용하는 강렬함 정도에 따라 그만큼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잘못일 것이다. 하느님은 자신의 선물을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허락하신다.

그러나 한편 성령이 묵상 활동 자체 안에서 활동 못할 이유가 어디 있으며 왜 영과 마음의 자발성 안에서만 오직 일정한 방법으로 활동하겠는가.

성령의 전적인 자유를 조금도 손상하지 않는 가운데 기도 영역에서 우리가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묵상의 연습이다. 즉 영성지도자의 역할은 무엇보다 묵상자의 용기를 북돋우고 그의 기도생활에 있을 수 있는 장애물들을 피하도록 도움을 주는데 있는 한편 성령이 뒤에 관상으로 이끌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 묵상기도 배경

중세 수도자들은 전례적 기도에만 오직 전심하지는 않았다. 또한 개인적인 마음의 기도(oratio mentalis) 도움을 받아 신앙의 신비와 동화하려 하였다. 이들 마음의 기도는 항상 「성서 독서(lectio divina)」에 기초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묵상은 복합적 관상 행위 속의 한 순간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체르토사 수도회의 수사 귀고 2세(Guigo II, il Certosino)는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독서(lectura)는 성서에 대한 영의 사용이요 묵상(meditatio)은 이성의 도움을 통해 시도하는 숨겨진 진리에 대한 주의 깊은 탐구이며 기도는 악에서 떠나고 선을 구하기 위한 하느님을 향한 마음의 헌신적인 긴장이며 관상은 영원한 기쁨의 맛에 빠진 영혼이 갖는 하느님께로의 거양(擧揚)이다. 독서는 복된 삶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달콤함을 탐구하며, 묵상은 그 달콤함을 찾아 얻으며, 기도는 그것을 청하며 관상은 그것을 맛본다. 이는 「구하라 찾을 것이요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는 주님의 말씀 자체를 말한다. 즉 「읽으면서 구하라, 묵상하면서 찾아 얻으리라, 기도하면서 두드려라, 관상을 통해 들어가리라. 독서는 음식을 입에 넣으며, 묵상은 그 음식을 잘게 씹으며, 기도는 그것을 맛보며, 관상은 기쁨으로 가득 채우며 원기를 주는 맛 자체이다』

묵상은 이런 면에서 독서와 기도 사이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독서와의 관계에 있어서 묵상은 영으로 하여금 텍스트의 뜻을 심화하고 그것으로부터 영양을 취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노작(勞作)이다. 그에 뒤따르는 기도는 하느님께로 향한 하나의 간청인데, 묵상은 정확히 하느님의 선물일 수 밖에 없는 진정한 영적 양분을 받기 위한 하나의 준비라고 할 수 있다.

■ 다양한 묵상기도 방법

수도자들의 기도생활에서 마음의 기도(preghiera mentale)는 「독서-묵상-기도-관상」순으로 단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 단계들은 신앙의 신비에 대해 정신 마음 의지 등을 써서 집중하고 저작하고 음미하는, 서로 이어지는 순간들로 파악됐다.

수도자들에 있어서도 일과 기도를 병행하는 삶의 리듬에 따라 독서와 묵상(meditatio)이 시간적 간격을 두고 서로 나뉘어 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러한 모습은 중세 말기 무렵 묵상기도에 열중하던 평신도들에게도 아주 일상적인 경우로 자리잡았다.

직업의 다양성은 그들에게 묵상기도를 위한 시간을 따로 갖게 했으나 모두가 성서를 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그들을 위한 별도의 묵상 방법들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했다.

묵상 방법이 제대로 적용되려면, 무엇보다 그것이 단순화될 필요가 있다.

중세말기에 제시된 첫 방법들은 상당히 복잡했다. 예를 들면 어떤 것은 모든 묵상 주제들에 적용될 수 있는 스케마를 제시했는데 그것은 스물 세개의 단계로 나뉘어지기도 했다. 그러한 복잡성은 부정적 의미로 해석되기보다는 묵상을 쉽게 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됐다.

물론 이러한 것들의 적용은 어느 정도 자유로웠다. 각 묵상은 어떤 신비를 탐구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더욱 지성의 사용에 중점을 두고, 또 어떤 이들은 상상 혹은 정서적 발로들을 강조했는데 무엇보다 묵상의 실천을 정리하는 것들이었다. 이와함께 영성적 특징들을 갖는 다양한 기도 자세들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방법들도 제시됐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하느님 현존에 대한 입문적 훈련에 중점을 두었는데, 성인이 제시한 기도의 결론은 실천되는 것, 즉 감사 봉헌 청원의 행위들이었다. 한편 술피스의 기도는 하느님 위격들과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여기서는 「찬미」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지금까지 전해 오는 묵상 방법들 중에서 제일 잘 알려진 것은 「세가지 능력에 의한 방법」, 즉 묵상할 신비의 여러 측면들에 연이어 적용되는 「기억 지성 그리고 의지」에 의한 묵상 방법이다. 여기서 이 세가지 다른 행위의 연결은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우리들이 행하는 반성의 일반적인 과정을 존중하는 것이다.

묵상의 본론에 들어가기 전, 먼저 필요한 전제들을 빼지 않는 작업이 중요하다. 하느님 현존 앞에 자신을 놓고 자신의 지향을 정화하며 심상(imago)을 응시하고 묵상을 통해 얻고자 하는 은총을 명백히 한다.

그것은 심상이 다른 능력의 활동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심상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묵상된 장면을 더욱 구체화하기 위해, 그리고 그리스도의 위격을 향한 좀더 깊은 개인적 관심을 고무하기 위한 것이다.

위격들과의 대화 순간은 기도에 있어 본질적인 것이다. 그 순간은 개인적 일치와 주님께 봉사하기 위한 구체적 노력을 고무하고 지성적인 고찰을 보충한다. 사실 이 대화의 시간이 없다면 묵상이란 단지 추상적인 사색에 머무르게 될 뿐이다.

이 세가지 능력에 의한 묵상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 성인은 「복음의 장면에 대한 묵상」도 권한다. 각 복음 장면 안에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말을 들으며, 행동들을 고찰하도록 한다.

이 형태의 기도는 앞의 기도와 구별된다. 왜냐하면 영적 눈길을 추상적일 수 밖에 없는 진리들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이 기도는 일상적으로 더 깊은 정신 집중을 요하며 정서적인 인격에 적합할 수 있다. 또한 성서에 대해 일상적인 친밀함을 진작시키고 정통하게 한다.

이밖에도 이냐시오 성인은 친숙한 내용을 묵상하면서 기도하는 형식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 양에 상관하지 말고 기도를 하게 만드는 내적인 맛을 느끼도록 해야한다고 성인은 권고한다.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맛보고 느끼는 것이 영혼을 충족시킨다』(Esercizi Spirituali n. 2). 또한 숨의 리듬에 기도하는 방법도 권하고 있다. (Esercizi Spirituali nn. 258∼260).

■ 묵상의 행동

묵상 때 영혼의 행위란 결코 단순한 지혜의 행위가 아니다. 지혜의 행동이란 예를들어 묵상 제목을 듣는다건가 혹은 준비를 위해 책을 읽고 그 문장에 크게 감동되어 아주 열심히 그 줄거리나 설명을 깨달으려고 공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결코 묵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또한 하느님 것에 특별히 호기심을 가지고 그 지식을 구하는 것도 단지 그 지식에만 머문다고 할때 그것도 묵상은 아니다.

그 때 만큼은 하느님 가르침을 인식하고 즐겁다고 하겠지만 그 즐거움은 참된 사랑에서 나온다기 보다는 자기 만족이기 쉽기 때문이다. 참된 묵상은 하느님께로 부터의 사랑에서 나와 하느님 사랑으로 결합한다.

묵상을 할 때 우선적인 준비는 「먼저 묵상할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는 먼저 내가 하느님 앞에서 무엇인가를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묵상 초기에는 「나는 무(無)다」라는 것을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 「내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죄를 범했기에 무(無)보다도 못한 존재다」.

이러한 겸손과 통회로 시작하면 하느님 은혜를 방해하는 교만은 제거될 것이다. 참된 겸손은 절망보다는 하느님 은총에 마음을 도달하게 한다.

또한 여기서는 신덕과 행동이 중요하다. 하느님과 그 온갖 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 혹은 사명, 사람의 목적, 죄, 직무 등과 각 축일의 신비 등을 묵상한다. 이렇게 기억력, 상상력을 움직여 어느정도 생각해 내려고 노력 하지만 후에 「그것을 믿는다」 혹은 「더욱 믿고 싶다」는 마음을 분명히 일으킨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고 오히려 점점 이론을 줄여 반성을 적게 하고 단지 단순히 하느님을 바라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같은 말을 몇번이라도 마음속에 반복하는 것이 좋다. 또한 일단 정해진 주제와 다른 자연스런 감정이 일어난다면 정해진 주제나 방법에 너무 끼워 맞추려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어서 실제적인 결심과 행동이 뒤따라 나온다. 특히 무엇보다 명심할 것은 한번에 누구나 묵상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유념할 것은 우선적으로 묵상하려는 마음이 앞서야 한다.

■ 묵상생활의 지속

묵상 방법 연구에 부심하기 보다는 마음을 잘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묵상의 은혜를 받고 싶다는 의지를 지니고 겸손하게 되는 것이 필요하다. 보잘 것 없이 보이는 것을 좋아하고 눈에 띄는 것을 싫어하여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것, 경멸 당해도 자신 같은 죄인에게는 당연하다고 여기며 신경쓰지 않고 더 나아가 이것을 예수님과 함께 겪는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다.

둘째, 보속과 이탈의 정신이다. 세간의 일에 사로잡혀 영혼의 평화를 잃은 결과 질투하고 다른 이가 내게 저지른 잘못을 언제까지나 기억하는 등의 상태에서는 예수님과 대화가 되지 않는다.

셋째, 하루에도 몇번씩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을 하기전, 혹은 축일에 더욱 더 많은 사랑의 행위를 하는 등 수시로 예수님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넷째, 내적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스스로 마음을 소란하게 하고 자신의 것에만 몰두하는 영혼에게는 예수님의 인자하고 유순한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묵상의 이런 먼 준비는 가까운 준비보다 더 중요하다. 즉 자신의 마음속에 사랑을 증진하기 위한 일상의 움직임이 중요하다.

묵상의 지속을 위해서는 우선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영적 태만에 대해서 악마에 대해서 끊임없이 싸움을 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인내와 싸움을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과 성령께 깊은 신뢰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택하셨던 길을 걸어 예수를 따라야 한다.

이렇게 모든 것을 하느님이 주셨기에 시련도 즐겁고 그 시련이 하느님 영광 그리고 자비와 애련함의 표징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이를 묵상생활이라 할 수 있다. 아침 저녁의 묵상은 하나의 준비에 지나지 않는다.

묵상생활에 장애가 되는 중요한 것들은 「작은 것에 대한 불충실」, 「희생 거절하기」, 「뿌리깊은 이기주의」 등 이다.

1) 작은 것이 중요

우리들의 영성생활은 수많은 작은 선한 일들로 이뤄진다. 그런 면에서 아주 작고 사소하게 보이는 행위들도 하느님께 봉사한다는 의식을 지닌다면 하느님과의 관계에 의해 위대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작은 것이라고 소홀히 한다면 우리들은 조금씩 큰것도 소홀히 하게 될 수 있다. 예를들어 성당에 가는 것을 좋아하여 다른 일들은 소홀히 한다면 성당가는 즐거움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매일의 해야 할 일을 중요치 않게 생각한다면 나중에는 신심도 없어진다. 또 일 때문에 성체 조배나 여러 다른 신심 행사에 의무적으로 참여하기를 계속한다면 나중에는 일에 대한 흥미나 헌신적인 태도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반대로 일에만 너무 열중하여 자기 만족을 구하는 태도도 좋지 않다. 자기 만족의 추구는 제일 중요한 것을 중요시 않고, 또 활동에 있어서 하느님과 영혼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단지 자기 자신을 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2) 희생을 거부하는 것

이는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지 않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께 불리운 데 대한 느낌을 갖고 겸손하고 진실한 묵상 생활에 들어가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간접적으로라도 끊어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내적 생활을 구하지 않고 어떤 일에 열중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남기려 하지만 영혼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지키려 하지도 않고 자존심을 희생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점점 영적 태만에 빠지고 어떤 소죄에 집착하고 만다. 예를 들면 허영심은 누구에게나 있는 경향이기에 곧 깨닫게 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소죄에의 집착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을 바로 잡을 의지가 없게 되고, 여기에 경솔까지 보태지면서 작은 거짓말을 하게 될 수 있다. 진실을 말해야 할 때 고통도 느끼지만 이런 영혼의 병을 지니고 있으면 거짓말을 예사로 하게되고 영적인 싸움도 중단해 버리고 만다.

성토마스에 의하면 이같은 영적 태만의 또 하나 원인은 사람을 비웃는 것이다. 비웃음은 상대를 상해하려는 고의의 조롱을 말한다. 위대한 사람의 작은 결점을 화제로 하여 대화 방법을 흉내낸다던가 하는 것들….

이런 결점에서 빠져 나온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3) 이기주의

우리는 먼저 자신의 이기주의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나는 무엇을 구하는가? 내 결점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 등등.

이기주의를 없앨수록 우리들에게 있는 하느님 모습은 더욱 아름답게 될것이고 사람은 자기 자신의 것을 생각하기 보다 항상 하느님 것을 생각하게 될 수 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된다면 우리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하느님을 더욱 깊이 알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관상으로의 이해

모든 그리스도교 저작자들은 기도생활에 있어서 묵상 뒤에는 관상이 따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연결은 자동적이지도 필요하지도 않으나 매우 자주 일어난다. 문제는 바로 묵상에서 관상으로 연결되는 과정의 표지들을 알아내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십자가의 성요한이 제시한 이론을 몇가지 소개하겠다.

십자가의 성요한은 저서 「갈멜의 산길」, 「어둔 밤」을 통해 기도생활 영성생활에서의 상황 변화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성인은 영혼을 관상으로 이끌기 위해 『정화를 위한 메마름은 가끔 우울증이나 영혼의 다른 상태를 이용한다』고 말한바 있다. 그처럼 자연적인 요소들과 초자연적인 요소들이 혼합될 경우는 매우 자주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묵상에서 관상적 삶으로의 진입을 식별해내기는 쉽지 않다.

우선 두가지 부정적인 표지들과 하나의 긍정적인 표지들이 변화를 특징짓는다는 것이다.

첫째는 하느님 것들과 창조된 것들에 대한 맛의 상실이다. 감각과 상실들로 묵상하거나 이야기하는 것의 불가능성, 즉 의지와 지식의 특별한 행위들을 할 수 없음을 말한다.

긍정적인 표지는 영혼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 깊은 주의로 특별한 숙고들 없이 내적인 평화 속에서 오직 홀로 하느님과 있음을 기뻐하는 사실에 있다.

이 표지는 외적으로 우울한 기간과 흡사한 그리고 자신이 쉽게 묘사하지 못하는 상태를 평가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요한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 어린 집중은 관상 첫 단계에서는 거의 알아챌 수 없다고 밝혔다. 묵상에의 몰입 불가능성이 하느님과의 일치에 대한 커다란 열망과 영성생활에 있어서 일상적인 열심과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이 기간이 일시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사실 묵상과 관상의 상반성을 너무 과장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이가 오랫동안 관상상태에 있다가 다시 그가 떠났던 묵상과 더 가까운 기도 형태로 돌아올 수 도 있기 때문이다.

결론

기도생활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느님 신비와의 더욱 더 깊은 개인적인 일치라는 성격을 신앙에 부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관상은 신앙을 좀 더 단순한 방법으로 단련하는 반면 묵상은 묵상하는 이의 모든 상상적 지성적 정서적 수단들을 움직이는 노력을 말한다.

우리는 기도 때 이뤄지는 인간 활동이 하느님 은총에 대한 하나의 협력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도로 이끄는 것도 하느님의 은총이요, 기도하는 이의 행위를 지탱하는 것 또한 은총이다. 묵상 안에서 이뤄지는 신앙의 신비에로의 영과 마음의 몰입을 위한 노력은 하느님 은총을 받아들이기 위한 가장 일상적인 준비를 이룬다.

기도가 하느님과의 일치를 더 깊게 하기 위한 왕도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표지는 많은 성인들과 위대한 영성가들이 그동안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수없이 역설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자신들이 지닌 최선의 방법을 제시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얘기해온 묵상이 길고 어려운 영성적 상승의 첫 단계를 이룬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또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관상으로 들어가게 하실 시기에 신비들의 의미와 적절한 기도 방법에 대해 당신 스스로 배려하실 것이다. 그분은 자주 묵상으로써 자신을 헌신적으로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관상의 은혜를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본래적 의미의 관상

단순한 작업을 통해 어떤 영적 실재를 포착하기에 이르는 활동을 본래적 의미의 관상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교적 영성에서는 공통적으로 이를 둘로 구분한다. 하나는 묵상 활동의 마지막에 위치하는 단순 작업으로서 능동적 또는 「수득(收得)된 관상」이라고 부르는 것과 묵상이다.

또다른 하나는 묵상과 즉각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며 하느님 역사 앞에서 수동적인 측면으로 특징 지워진, 하나의 특별한 영적 상태를 이루는 「신비적 또는 수동적 관상」이 그것이다.

신비적 관상은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 직접 활동하실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으며 한편 영혼이 직관-정서적 형태의 단순한 작업을 할 수 있는 가능성에 근거하고 있다.

관상이란 선물은 「본질적으로 영혼이 자신 안에서 초자연적으로 현존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느님에 대해 인식하는 사실」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러한 인식 방법과 정도는 다양하다.

보통 그러한 인식은 점점 더 심화되는 내면화의 방향으로 발달한다. 대 데레사 성녀가 사용한 상징들을 빌려서 설명해보면, 내면에 지어진 성은 많은 방을 지니고 있고 그 중심에 하느님께서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상적 인식은 하느님 현존 체험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관상적 인식은 「함께 있음」의 양상을 통한 인식이다.

우리가 우리 곁에 실재하는 한 친구를 알고 사랑하듯이, 자신안에 살고 계신 하느님 나라에로 달아드는 영적 인식은 필요한 은총을 주시면서 영적 인식을 끌어 당겨 그러한 일치를 이루게 하시는 하느님 자신을 감지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능동적 현존에 대한 인식을 주시느냐 하는 것과 그리고 그 인식의 방법들과 정도를 정하는 것은 하느님 자유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 당신 자신과 삼위일체 신비, 예수님의 인성과 예수님께서 사셨던 신비들에 대해 영혼을 밝혀주시느냐 하는 것은 개개인의 자유다. 그러한 하느님의 자유가 영혼에게는 자신의 수동성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은 영혼이 어떠한 작용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하느님의 이 현존에 달아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시의 주도권이 그 기간과 형태와 함께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게다가 시선이 단순하고 정신적 에너지의 소모를 크게 요청하지 않으며 하느님을 깊게 향유하는 사실 등에서 관상행위는 기도의 여러 다른 형태에서 표현된 활동과 비교할 때 마치 휴식과 같아 보인다. 수동성은 당신이 원하실 때 원하시는 방법으로 움직이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사의 정을 동반한다. 모든 당신의 현시는 하나의 은총으로 느껴지며 흠모와 감사의 감정들을 일으킨다. 이러한 관상의 주요 열매는 하느님 실재에 대한 깨달음이다.

관상의 단계

주부(注賦)적 관상은 하느님과의 관계로 들어가는 두가지 방법과 접해 있다. 묵상(meditatio)이 그 전 단계이고 관상의 정점에 지복직관(visio beatifica)이 있다.

그중에서 지복직관은 향주덕 믿음의 테두리를 넘어 「어두움」 없는 관상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서 하셨던 일들이 그 예에 속한다.

관상은 「불완전한 관상」, 「완전한 관상」 두가지로 단순화 할 수 있다.

첫째는 가벼운 수동성(주입) 형태로 간헐적이고 순간적인 관상 행위(하나의 상태를 형성하지 못한다), 영(정신 의지 정서)의 산발적 영역과 힘의 개입으로 신비에 대해 아주 부족한 이해(예를 들어 우리 안에서, 당신 말씀 안에서, 혹은 교회와 다른 이들 안에서의 하느님 현존에 대한 희박한 포착)들로 특징지어진다.

둘째 완전한 관상은 그의 최종 단계에서 대단한 힘을 지닌다. 눈에 띠는 정도의 단절이 없다. 왜냐하면 영은 자신의 가장 깊은 뿌리 속으로 하느님께서 들어오셔서 이미 민감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또한 격렬한 외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주의 깊게 하느님께 항구하게 열려있고 집중한다.

신앙과 사랑 주의 정성의 일치는 관상 행위속에서 다른 영의 활동들과 동반하며 하느님 위격과 인간의 일치에 힘입어 「신비」에로 가득 진입한다.

관상으로의 첫 걸음은 엄격한 극기 생활로 유지되는 묵상에 의해 시작되며 이는 잠심과 단순화로 향하게 한다.

단순성과 잠심에 더욱 깊이 젖어들면서 하느님의 조명은 더욱 풍성해지고 점점 기도의 모든 시간을 주님과의 일치 속에서 보내게 된다.

지금까지는 묵상적 수고를 통해 영혼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 안에 하느님이 직접 역사하시어 사람인 우리는 그저 수동적으로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을 알아보는 과정이다.

우리 감각이 영에 대해 적응하기 위해서는 감각적 격정과 유혹적인 것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그러한 사막 횡단은 육적인 차원에서 영적인 차원에로 넘어가기 위한 필수 이행 조건이다.


■ 주부적 관상

성녀 대 데레사는 묵상의 단계와 관련, 수덕적 잠심의 묵상(수득적 관상)에서 주부적 관상에로 들어갈 때는 장기간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겸손과 극기와 이탈의 순수성 및 여러 가지 덕을 닦는 노력 등을 보시고 주님께서 선사하시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완덕의 길」을 통해 제시한 관상의 단계는 다음과 같이 진전된다.

1) 잠심의 기도(28장)

능동적 관상으로 단순화되고 애정 있는 묵상을 말한다. 그러나 영혼이 자신 안에 틀어박혀 분심에서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점에 노력이 엿보인다.

2) 고요의 기도(30, 31장)

수동적이고 초자연적인 순수 관상의 시초다. 여기에서도 세 단계의 시기가 작용한다.

첫째시기는 특별한 하느님 은총의 결과로 자유 의지를 집중하는 수동적 잠심이 생기는 때를 말하고 둘째 시기는 참된 고요(정온(靜穩))로서 의지가 완전히 하느님께 향해 있는 것이다. 셋째 시기는 의지가 사로잡히고 오성도 고찰을 중지하며 하느님께 사로잡혀 있지만 상상력과 기억력은 아직 산만한 단계. 그러나 이 단계들은 성령이 주신 특은의 결과이므로 이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억지로 노력해서는 안된다. 하느님이 주시지 않는 한 스스로 도달할 수 없다.

3) 수동적-초자연적 관상(32장)

영혼의 내적 능력이 전부 사로잡히는 시기다. 때로는 외적인 감각도 일시적으로 그 활동이 중지된다.

대데레사가 제시한 주부적 관상에 도달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주께서 은총을 주셔야 한다. 아직 그 은혜를 주시지 않았는데도 지혜의 활동을 거절한다면 그사람 에게는 이익이 아니라 손해가 끼쳐 올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한 태만과 졸음에 지나지 않겠기 때문이다.

주부적 관상에 이르기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활동은 피조물로부터 이탈하여 이탈의 정신을 자기 자신안에 배양하는 것이다.

우선 평소의 잠심, 마음의 순결, 참된 겸손, 「묵상」 기도에 충실하면서 날마다 십자가를 초자연적으로 짊어지고 형제적 애덕과 성령에 충실하는 생활이 전제되어야 한다.

■ 정적(靜寂)주의의 오류

조용하게 관상할 것만을 권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은 악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관상생활에 대해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1) 몰리노스의 정숙주의

이 오류의 대표적인 주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람은 그 능력을 무(無)화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무엇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기만 해도 하느님을 모욕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우리 안에서 행동하시기 때문이다』

이 주장에 의하면 행동하고 싶다는 생각만 해도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적으로 수동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활동이 은총에 적대하는 것이며 완덕에 방해가 된다고 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비판이 따른다. 우선 우리들의 기도 중에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행동하시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수동적 상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보통 장기간 수덕하여 묵상을 실행하고 나서 경험하게 된다. 이에 대해 몰리노스는 『도는 하나밖에 없다. 이것은 내적 길이며 사람이 획득할 수 있는 수동적 관상의 길이다. 이것은 행동을 중지함으로써 획득한다. 그레서 곧 그것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외에도 몰리노스의 설은 명백히 틀린 내용이 많기 때문에 그다지 큰 영향력을 끼치지는 않았지만 단 주의해야 할 것은 일반 신자들에게도 「수동적」이라는 의미가 「그다지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든가 또는 「구송보다도 묵상이 더 높다」고 보고 필요한 단계를 거치지 않는 경향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묵상에만 다다르려 생각, 감수성에 따른 움직임 등 이상한 방법만을 떠올리고 결국 정적주의와 비슷한 오류를 범할 위험이 없지 않다.

2) 반(反)정적주의

이 설은 특히 「순수한 사랑」에 대해 오류를 범하고 있다. 내용에 있어 정적주의와 비슷하나 몰리노스만큼 가톨릭 교의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

예를들면 완전한 관상 생활 상태에 있어서는 영혼이 어떤 의미에서 무(無)가 되고 온전히 하느님 뜻에 의탁한 상태가 되니까 자기 자신의 구령에 관해서는 무관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들은 「순수한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구령에 대해 무관심해도 좋다는 것은 분명한 오류다.

이것이야말로 망덕(望德)을 잊는 것으로서 성인들이 항상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사실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자기 구령에 대한 희망을 버린다는 것은 애덕 그 자체를 버리는 것이 된다.

이외에 반정적주의는 높은 관상 생활 상태에 도달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도움이 되기 보다 방해가 된다고 주장하는데 그러나 대데레사는 대단히 높은 관상 생활 상태로 올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발현을 맛볼 은혜를 받은바 있다.

가장 높은 단계 생활인 관상 생활에 빨리 도달하려는 데는 주의가 필요하다. 그것이 아직 무엇인지 모르는데도 더구나 준비 노력 희생심도 필요하다는 것은 인식하지 못하고 곧바로 관상 생활에 나아가려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래서 많은 경우 틀린 사고 방식으로 빠져버린다. 정적주의나 반정적주의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기도이야기 (7) 왜 마음의 기도 해야할까

1) 처지가 매우 가난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내용은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내용이다. 예수님은 『나 없이 너희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 생활을 하는 가운데 자연적 측면에서의 생각이나 행동들은 마음대로 할 수 있으나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길과 방법이라는 점에서 볼 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포도나무 가지요 나는 포도나무이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말라 죽을 것이요, 열매를 맺을 수도 없을 것이다』고 하신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즉, 성령의 선물로서 그리스도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초자연적인 생활의 측면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완전히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으로 가난한 존재다.

우리는 당신이 원하시는 조건으로 주시는 선물에 달려있고, 이를 하느님께서 조건으로 내세우셨으니 기도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주의기도」를 통해 몸소 기도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매일 우리에게 물질적인 음식이 필요한 것처럼 매일의 영적인 음식으로써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이유는 우리 인간을 잘 아시고 대단히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매일 기도하지 않을 때 우리는 가난함을 잊게 될 것이고 급기야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여기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존재임을 매일 깨닫기 원하셨다. 그것은 성부께서는 우리를 매우 사랑하시고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점 때문이다. 또 성부께 가까이 가고 친밀하게 지내는데서 부터 진정한 행복을 발견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마음이 이러할 진대 우리는 왜 매일 기도하지 않는 것일까. 그에대한 답은 우리 스스로 무한히 가난한 존재임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요,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무엇이든 하기에, 또 봉헌된 사람으로서 삶의 결실을 맺기에는 참으로 가난한 존재라는 진정한 진리를 깊이 깨닫는다면 매일 매일의 기도에 게으를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깊은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염경기도 뿐만 아니라 마음의 기도를 해야한다. 신자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또 일상 생활의 모습들에 대해 의식하지 못한다면 나에 대한 하느님 계획에 응답하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이 세상의 것과는 참으로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신자로서의 내 행위에 대한 의식은 매일 그같은 진리 앞에 서지 않는다면 지닐 수 없게 될 것이다.

즉 조금씩 신앙의 동기들을 잊게 될것이고 또한 조금씩 무질서한 열정과 탐욕에 마음을 쓰게 되면서 하느님 계획과는 다른 행위, 습관, 다른 이들의 경향들을 습득하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삶은 무섭게 타락하게 될 것이며 은총을 잃게 될 것이다.

2)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에 따라 그리스도의 모습에 따라 변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로마서 8장에서는 사람이 하느님에 의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도록 계획돼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매일 단지 겉모습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것과는 다른 그리스도의 모습과 그분의 동기 원칙들을 만나야 한다. 그에 대한 깨달음 없이는 당신이 주시길 원하고 보여주고자 하시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접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단 하루에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는 다른 세상의 온갖 유혹 매력 등과의 투쟁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데 이때 마음의 기도를 통한 성령의 이끄심으로 그리스도를 찾게 되지 못한다면 투쟁은 가능할 수 없을 것이다.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이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례를 통해 얻은 것은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받게된 성령의 선물인 성화 은총이며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할 어떤 능력, 즉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성화의 은총이라는 이 씨앗이 싹을 틔운다면 우리는 우리 전 존재의 변화에 도달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내면이나 외부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저항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깨달아가며, 매번 그분의 모습과 동화를 이루려고 노력할 때 발전할 수 있다.

성령에 의해 마음의 기도 안에서 또 하느님 말씀 안에 계시하신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우리는 이러한 것을 깨달을 수 없다.

한편 내가 그리스도와 닮도록 불려졌다면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왜 다르게 하지 않고 그렇게 하셨는지 생각하면서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행하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당신께서 말씀하시거나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오직 나를 보내신 아버지 뜻대로 그분 마음에 들도록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이를 말씀뿐 아니라 행동으로써 보여주시려고 했다.

주변의 많은 것들로 인해 우리 마음은 쉽게 산만해 질 수 있다는 것을 그리스도께서는 아시기에 우리가 기도의 필요성을 자각하길 원하셨고 그래서 당신께서는 자주 아침 저녁 긴 시간 동안 기도하시면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드러내셨다.

그 시간을 통해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본을 보여주셨고 우리도 그렇게 하느님께 온전히 의존하도록 가르치셨다. 이러한 모든 면에서 우리가 하느님 계획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염경기도 뿐만 아니라 마음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박일 신부의 기도이야기 (8) 마음의 기도 조건

앞서 하느님 자녀인 우리들이 마음의 기도를 해야하는 이유를 「우리의 처지가 대단히 가난하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에 따라 그리스도의 모습에 따라 변할 필요가 있기 때문」임을 얘기했다.

이외에 또 한가지 이유를 언급하자면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친구가 되도록 부르셨다」는 것이다.

세례를 통해 우리가 받은 성화 은총은 하느님과의 우정을 깊게 할 씨앗이라 할 수 있다. 서로 알지 못하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겠는가? 그의 내면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친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친구는 친구가 될 수 있음을 기쁨으로 여긴다. 만일 우리가 친구이신 하느님과 서로 자주 만나지 않는다면 절대로 친구라는 위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한 교회내 기도학자가 마음의 기도 정의를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알고 있는 그분과의 잦은 우정의 만남」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측면으로 설명될 수 있다.

1)기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한 일이다. 이를 알기 위해 특별히 많은 공부를 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당신의 신비를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보다 단순한 사람들에게 전해주시기를 더 원하신다』고 하셨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도를 진지하게 드려야 함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간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해야할 많은 일들 때문에 기도를 다음으로 미룬다면 우리는 끝내 기도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또 기도가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깨달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 존재인지를 확신하고 있다면 그 필요성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어떤 일보다 먼저 우선 순위를 두고 시간을 비워야 할 것이다.

여기서 시간을 낸다는 것은 매일 매일 시간을 낸다는 의미를 넘어서 우리의 전 생애동안 기도 시간을 내고 기도에 끊임없이 매진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매일의 삶속에서 조금씩이라도 기도를 위해 시간을 낸다는 것은 중요하다. 또한 기도는 발전하고 진전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때 어려움에 부닥치게 되면 의논할 사람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기도생활의 발전은 주님 말씀에 대한 충성 어린 삶의 발전이며 그분에 대한 응답의 삶이 성장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점이 간과되면 「나는 높은 단계의 기도부터 시작할거야」라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수 있다.

2)기나긴 우리 삶에서 기도가 성장하길 원한다면 다음의 세가지 내용을 유념해야 한다. 이 세가지 요소는 모든 기도 순간에 한꺼번에 구현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하루 여러 순간에 세 요소들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것의 첫째는 기도 안에 반드시 「청원」이라는 요소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항상 무엇이든지 선물을 청하라고 하셨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그것을 지니고 있다고 여기는 것 아니겠는가. 주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원하시지 않는다.

둘째는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 삶이 변화되는 요소가 들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많은 기도 가운데 부족한 것이 바로 이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정신 안에서 그리스도의 삶과 동화를 이루도록, 말씀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형태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단순히 기쁨과 평온을 맛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켜 하느님 뜻을 더욱 더 잘 수행하기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 뜻이 아니라 당신 뜻이 이루어지도록」 말씀하시면서 인간 본성의 저항을 거슬러 주님 뜻을 수행하는데 항구하도록 노력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매일 주님 뜻에 따라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완수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