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복음(로마서 1:1-4)


06-02-2021(수) 오후 7:00
복음(福音)


마가복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The beginning of the gospel about Jesus Christ, the Son of God.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로마서 1:1-4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The gospel is Jesus Christ, the Son of God.

왜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인가?
중보자가 되시기 때문(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中保)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1. 예수는 참 사람
2. 예수는 참 하나님

독일 전쟁사에 보면 2차 세계 대전 중, 장렬하게 전사한 한 통신병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한 여름 밤에 프랑스에서 벌어진 어느 전쟁터로부터 아군본부에 걸려온 전화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우리는 적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긴급하게 구조를 요청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도중에 통화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도움을 요청하던 통신병이 사고를 조사하다 보니, 폭풍우에 의해 전선줄이 잘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것을 이으려고 했지만, 1m 가량이 모자랐습니다.
생각다 못한 통신병은 양쪽의 전선줄을 벗겨서 양 손가락에 전선줄을 묶고 자기의 몸을 통하여 S.O.S.가 아군본부로 에게 전해지게 했습니다.
결국 도움을 요청받은 본부에서 구조대를 파견하여 위기에 빠져있던 아군을 무사히 구조했습니다.
그런데 본부에 긴급히 도움을 요청했던 그 통신병은 감전사로 죽어 있었다고 합니다.
독일 교회에서는 그 숭고한 통신병의 죽음을 일컬어, ‘중보기도의 전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원조 중보자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끊어졌던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구원받은 우리들을 위해서 중보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8장 34절을 보면,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고 계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중보 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예기치 않은 큰 풍랑을 만났을 때 가만히 구경만 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풍랑에 휩싸여 고통당하는 제자들을 구원하시고자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가 건져주셨듯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기다리고 계실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질과 건강과 사업의 풍랑에 빠져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쉼과 안식과 평안의 생명줄을 던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전도입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들을 가까이하시고 함께 식사하면서 교제를 나누셨는데, 한국교회 성도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이 아니면 교제를 나누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쳐다보면서 가까이하려고 하지도 않아요. 그런 마음으로 예수를 믿다보니 자기는 구원받기 원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은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이 오더라도 대환영이라 할 만큼 우리의 마음 문이 열려 있습니까? 우리 구역과 가정의 문이 열려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과연 창기나 세리들이 다가올 수 있을 만큼 열려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기만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과연 그런 사람을 보고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이 과연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를 기뻐하실까요?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까요? 대답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들을 절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에 보면, 베뢰아 교회 성도들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보다 신사적이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영국 신사와 같은 Gentlman이 아니라 Open Mind, 즉 마음이 크게 열린 사람을 뜻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넓게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넓은 가슴을 담아야 합니다. “아무나 와도 좋소! 누구나 와도 좋습니다!”는 넒은 가슴과 품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뵈레아 교회 성도들처럼 신사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중보자(메시테스. μεσίτης)


중재인, 판사, 심판, 결정자
- 두 당사자 사이에서 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중개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

1. 중개인(mediator) 

2. 화해자(conciliator)


중보자의 자격
 

1. 사람(人間) - 인성(人性) 빌 2:7
 

빌립보서 2:7 /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2. 무죄(無罪) - 동정녀 탄생(童貞女 誕生) 마 1:16
 
마태복음 1:16 /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3. 신적 인격(神的 人格) - 신성(神性) 요 1:14

요한복음 1:14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갈라디아서 3:20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A mediator, however, does not represent just one party; but God is one.

히브리서 9: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브리서 12: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to Jesus the mediator of a new covenant, and to the sprinkled blood that speaks a better word than the blood of Abel.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오늘 말씀의 제목은 ❝왜 예수냐?❞이다. 

1. 사람들은 기독교를 너무 독선적이라고 한다. ❛예수❜만 유일한 길이라고 한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2. 예화 : 인슐린과 타이레놀 

어느 날 한 환자에게 의사가 말했다. ❝당뇨병이 있네요. 그런데 좋은 소식이 있어요. 인슐린을 복용하면 정상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선생님! 저는 인슐린이 싫은데 타이레놀을 복용하면 안 됩니까?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의사가 ❝당뇨병을 치료하려면 인슐린을 먹어야 합니다.❞라고 자세히 설명해주자 그가 따지듯이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은 정말 편협하고 고집스런 분이네요. 시야를 넓게 보세요. 인슐린만 약입니까?❞ 얼마나 잘못된 말인가? 의사는 편협하고 완고한 마음을 가져서가 아니라 당뇨병을 치료하는 것은 인슐린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경도 그렇다. 예수 밖에는 없다! 

3. ❝왜 예수인가?❞ 우리는 왜 예수님만 믿고, 예수님만 의지하고, 예수님만 섬기는가? 본문이 두 가지 답을 제공한다. 

 

첫째, 예수님만이 우리의 담보가 되시기 때문이다(20~22절). 

0.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담보 또는 보증인이 꼭 필요하다(직장, 사업, 학교…). 그렇듯이 예수님이 영혼의 담보가 되신다. 

1. 20~22절을 보자. ❝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a. ❝제사장❞은 죄인들을 속죄제물을 통해 하나님께로 인도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그렇다. 

    b. ❝맹세 없이❞ 구약 제사장들은 임시적이고 변한다는 말이다. 반면 예수님은 영원하고 완전한 인도자라는 말이다. 

    c. ❝더 좋은 언약의 보증❞ : ❝보증❞은 ❝담보❞ 또는 ❝보증인❞이다. 자신의 인격과 생명을 담보로 보증한다는 말이다. 

    d. 그리스도는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의 구원에 대한 담보로 구원의 영원한 보증이 되어주신다. 틀림 없다. 

    e.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 자기 외아들을 담보로 내어주셨다. 왜냐하면 아들 예수만이 담보와 보증인이 될 수 있기에. 

2. 누구든지 그 연약한 믿음으로 자신을 믿으면 담보와 보증인이 되어주시는 예수를 믿고 따름이 얼마나 축복인가! 

    a. 겨자씨 한 알 정도의 믿음으로 예수를 믿고 맡기면 된다. 그 작고 연약한 믿음일지라도 담보가 되어주신다. 

    b. 이렇게 고백하자. ❝예수님, 저의 이 작고 연약한 믿음이지만 믿고 맡깁니다. 저의 구원의 담보가 되어주십시오!❞ 

    c. 예수님은 구원의 담보, 용서의 담보, 천국 담보, 은혜의 담보, 응답의 담보, 축복의 담보가 되어주신다. 

    d. 로마서 8:38~39. 예수님이 구원과 천국 담보, 은혜와 축복의 담보(보증인)가 되시니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3. 예화 : 후지다 덴과 맥도날드 

일본에 후지다 덴이라는 회사원은 맥도날드를 창업하려는 꿈이 있었습니다. 평범한 회사를 다니던 그는 더 늦기 전에 꿈을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맥도날드 일본 지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퇴직금을 더해도 창업을 하기에는 돈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동안 저축한 5만 엔의 10배가 넘는 75만 엔의 비용에 신용보증까지 받아와야 했습니다. 후지다 씨는 평소에 거래하던 스미토모 은행의 지점장을 찾아가 대출을 요청했습니다. ❝지난 6년 동안 한 푼도 낭비하지 않고 예금을 했습니다. 필요한 생활비 외에는 한 푼도 쓰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돈을 쓸 일이 생기면 점심을 굶었습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지점장은 후지다 씨가 거래했던 직원을 불러 신상을 물어봤고, 직원은 후지다씨가 거래 고객 중 가장 믿을 수 있는 분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지점장은 이 직원의 말을 담보로 요구하는 만큼의 금액을 대출해주었고 신용보증까지 서주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 후지다씨의 매장은 일본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리는 매장이 되었고 또 맥도날드 일본지사의 최고 경영자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거짓 없으신 하나님이 그 아들을 담보로 삼았다. 예수가 담보가 되고 보증인이 되면 가장 확실하다. 

4. 하나님이 나를 보면 정말 형편없는데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담보와 보증인이 되시니 믿어주시고 복을 주신다. 

    a. 자신을 지나치게 신뢰하지 말라. 어느날 실망이 몰려온다. 죄책감이 몰려온다. 예화 : 조용기 ❝위에서 보내서 왔다!❞ 

    b. 대신에 우리의 담보와 보증인이 되어주시는 예수님을 지나치도록 신뢰하라. 그분이 힘과 소망을 주신다. 

    c. 나의 담보와 보증인이 되어줄 사람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지라도 예수님은 기꺼이 나의 담보와 보증인이 되어주신다. 

    d. 예수님이 계시면 든든하다. 최후의 심판 앞에서 예수 담보(보증인) 없이 돈, 빽, 명예, 지위, 마귀는 쓸모없다.  

5. 예화 : 아버지 담보에 거지 신세 ➜ 하나님도 그 아들을 담보로 제공하실 때 찢어지는 고통과 수치를 당하셨다. 

6. 예화 : 필리핀에 장애아들 버린 한의사父(부산, 47, 48). 마산, 네팔, 괴산 사찰, 필리핀 유기. 정신분열 한쪽 눈 실명. 

7. 히브리서 13:5~6. 돈과 사람, 세상을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고 우리 담보와 보증인이 되신 주님만 더욱 붙들자. 

 

둘째, 예수님만이 우리의 중보가 되시기 때문이다(23~25절). 

0. 중보는 ❛두(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일이 성사(화해)되도록 주선하는 사람❜이다. 주님이 이런 중보가 되신다. 

1. 23~25절을 보자. ❝제사장 된…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a. 제사장직 대물림(아론에서 AD70 84명)은 제사장의 최후 죽음은 불완전함과 한계를 말한다. 모든 종교처럼. 

    b. 반면에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분은 완전하시다. 그분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기 때문이다. 

    c. 예수님은 그 작은 믿음으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중보가 되신다. 

        ❶ ❝온전히 구원❞하신다는 말은 ❛영원한 구원❜을 말한다(시간적). 십자가 보혈의 효력은 영원하다. 철회가 없다. 

        ❷ ❝온전히 구원❞하신다는 말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모두 만족시킴❜을 말한다(질적). 최고의 만족이다. 물과 콜라. 

    d. 왜냐하면 그분은 ❝항상 살아 계셔서 간구❞해주시는, 연약한 우리의 완전하고 영원한 중보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❶ ❝간구하심❞은 ❛다른 사람을 위해 중재하다❜는 말이다. 

        ❷ 이 단어는 어떤 사람을 위해 왕에게 간청을 올리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❸ 랍비들은 천사를 중보자로 간주했다. 그러나 저자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중보자임을 명확히 설명한다. 

        ❹ 오늘날 허다한 가짜 중보자들이 있다. 사이비 교주, 종교, 용한 무당, 예언 은사 받은 사람… 가짜다. 속지 말라. 

    e.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항상 살아 계셔서 중보하시는 예수밖에 없다. 

2. 이 땅에 오셔서 이미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분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중보(중재)하신다. 

    a. 우리가 육신이 연약하여 넘어지고 죄를 지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마다 예수님은 중재해 주신다. 

    b. 주를 믿을 수 있는 최상의 기회, 주를 섬길 수 있는 최상의 기회를 무시해버리는 우리를 위해 다시 중재하신다. 

    c. 누가복음 13:7~9. 주님은 신앙과 삶에서 아무런 열매 없는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는 중보가 되신다. 

    d. 누가복음 22:31~32. 마귀가 밀까부르듯 하려고 하는 우리를 위해 하늘 보좌 우편에서 중보하셔서 우리가 있다. 

3. 예화 : 마약을 끊은 청년 

미국에 오랫동안 마약 중독과 싸웠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 잘못된 아이들과 어울린 후 40대 초반까지 계속 마약에 중독된 상태로 있었다.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었고 가정환경도 좋은 편이었기에 여러 카운슬링도 받고 여러 치료 센터에도 갔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그가 마약을 끊고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다. 그렇게 마약을 끊을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사투를 잘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끊도록 도와주셨기 때문이다. 한 친구가 물었다. ❝어떤 좋은 치료 프로그램을 받았니?❞ 그가 말했다. ❝아니야.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면서 그냥 끊어졌어.❞ 예수님이 간구하신 결과다. 

5. 우리의 기도가 더디게 응답될지라도 결코 낙심하지 말라. 포기하지 말라. 의심하지 말라. 

    a. 예수님은 우리의 서투른 기도, 부족한 기도, 잊혀진 기도를 모아서 아버지께 자신의 기도로 다시 바친다. 

    b. 우리의 연약한 기도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 기도를 그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바치니까 응답이 되는 것이다. 

    c. 때로는 ❛기도의 잔❜이 차야 응답이 된다. 그러니 기도의 잔이 차도록 낙심 말고 인내하며 꾸준히 기도하라. 

    d. 사도행전 4:31. 기도의 잔이 차니까 모인 곳이 진동하며 응답됐다. 한반도의 1907 부흥도 기도의 잔의 결과다. 

5. 예화 : 임현수 목사님의 북한 석방기(주보) / 모친들의 중보기도와 백세노인의 치유 ➜ 드디어 기도의 잔이 찼다. 

북한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지만 나는 그들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받은 연단을 통해 온전함을 입었기 때문이다. 노동 교화소에서는 힘든 일도 많았지만 작은 배려도 받았다. 내 체중이 현격하게 줄어든 것을 보고 음식도 적지 않게 주어서 회복이 되었다. 어디에나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대다수의 보안원들은 나를 선대해주었다. 또 아플 때 병원에 갈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도 감사하다. 노동 교화소는 하나님께서 내게 마련해주신 수도원과 같았다. 노동과 기도와 말씀 묵상이 2년 7개월 9일 동안 내 생활의 전부였다. 내가 감옥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조르며 기도를 드릴 때마다 주신 말씀이 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 욥 23:10 ❝내가 가는 길을 주가 아신다❞는 말씀이 가슴 깊이 와닿았다. ❛그러면 더 이상 조를 필요가 없지 않나? 하나님 뜻이 있어서 허락하신 연단이라면 주님의 시간을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누가 힘들게 하면 ❝수도원에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자. 

 

에필로그. 

1. 로마서 1:7. ❝OO에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축하하는 초대교회 신자 사이의 표준적인 인사말 ❝당신에게 은혜가!❞ 

2. 왜 예수냐? 세상 거짓 신들의 전쟁 가운데서 우리는 왜 예수님만 믿고, 예수님만 의지하고, 예수님만 섬기는가? 

    a. 예수님만이 우리의 담보가 되시기 때문이다. 주님이 우리의 담보가 되시니 걱정 말고 믿음으로 행하자. 

    b. 예수님만이 우리의 중보가 되시기 때문이다. 주님이 우리의 중보가 되시니 맡기고 의지하며 기도의 잔을 채우자.



출처: https://modeni.tistory.com/entry/왜-예수냐히-72025-1 [하나님의 좋은계획 모든이교회]


성경 딤전2:5, 히7:25절, 이 두절을 종합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한분뿐이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일하신 중보자 이신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셔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십자가로 원수된 것을 소멸하시므로 허물과 죄로 죽어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던 우리로 하여금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 영원히 거하는 완성된 구원을 받게 하셨는데 이 구원으로부터 한 사람도 탈락하지 않도록 중보자 이신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쉬지 않고 중보 기도를 해 주시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인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말씀하는 것이다. 요6:39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증언 하셨다.

멸망할 수밖에 없는 타락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 안에 영원히 거하는 완성된 구원을 받는 것은 유일한 중보자이신 주께서 이 구원으로부터 한 사람도 탈락하지 않도록 지금도 쉬지 않고 행하시는 중보 기도를 포함한 중보 사역 없이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이를 역으로 말하면 화목제물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중보기도를 포한한 중보 사역은 허물과 죄로 죽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하나님 안에 영원히 거하는 완성된 구원을 받음에 있어서 조금도 부족함 없이 넘치게 충족되고 만족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요14:6절과 행4:1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다.

이 사실을 롬6:3-5절에 의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허물과 죄로 죽어서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때 우리들도 주님과 연합되어 함께 죄의 사람이 멸해지고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우리들도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되어 함께 영원히 살아나서 하나님과 화목하고 연합되어 하나님 안에 영원히 거하게 되는 완성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함께 죄의 사람을 죽게 하고 함께 의의 사람으로 살게 하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코 일어날 수도 없고 이루어질 수 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주가 되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로 다 제거 하시는 중보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케 하고 연합하게 해서 하나님 안에 거하는 영원한 구원을 완성하셨는데, 이 완성된 구원을 위해서 중보사역을 다 이루시고 지금도 우리들로 하여금 이 구원을 잃지 않도록 계속 중보 기도를 하시는 한 분뿐인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주이시기 때문에 기독교만이 유일한 구원 종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만이 중보 기도를 포함한 중보 사역을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중보자되심을 좀 더 자세히 상고해 보자

중보의 히브리어는 מליץ(melts)이고 헬라어는 μεσιτης(mesites)이다. 이 중보에 대해서 성경 사전을 찾아 보니 중보(Mediator)란 서로 대립, 또는 적대관계에 있는 양자사이에 서서, 대적하게 하는 원인을 제거하는 것에 의해 화해와 일치를 가져오게 하는 것을 중보라고 하고, 이 중보 사역을 하는 자를 중보자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어서는, 그리스도 에수께서는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서 대적하게 하는 죄를 제거하고 소멸하므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성립케 하고, 화목을 가져오게 하고 일치하게 할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이 구원에서 탈락하지 않도록 항상 중보 기도하시는 오직 유일하신 중보자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 딤전2:5절을 다시 한 번 읽겠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구약에 있어서는, 중보자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는 있지 않으나, 실제로 중보의 역할을 한 사람들의 사역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족장으로서 그 종족을 대표하여 하나님과의 언약(계약) 관계에서 중보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나고(창2:7이하)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율법을 받아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언약(계약) 관계를 확립하는데 있어서 중보의 역할을 하고, 또한 백성을 위해 실제로 중보한 사실이 나타난다. 출30:30-32절에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라고 했다.(출3:7-12; 신5:1이하) 뿐만 아니라 선지자와 제사장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의해 혹은 백성을 대신하여 기도를 하는 일에 의해,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보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단9:19-24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내가 이 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환상을 깨달을지니라.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기록되었다.

그러나 구약에 나타난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선지자, 제사장의 중보 역할은 지극히 부분적이고 온전치 못한 것으로 다만 참되고 완전한 의미의 중보자로 오실 메시야를 예표하고 예언하는 것에 지나지 아니하였음을 보여 준다. (사11:1이하).

신약에 있어서는, 참되고 완벽한 중보기도를 포함한 중보 사역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인간에 의한 부분적, 예표적 중보는 결코 용납 될 수 없는 것이므로 신약에서는 사람으로서 중보 기도를 포함한 중보 사역을 했다는 근거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고, 다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라고 기록 되었다.(딤전2:5, 히7:25)

중보자는 어느 한편에만 속한 자가 아니라는 말씀처럼(갈3:20),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의 본체의 참 형상,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는 하나님으로서(요1:1, 히1:3;7:26-28) 혈육을 갖추신 모든 점에 있어서 사람과 같이 되시고, 인간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분, 인간의 모든 죄를 담당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히2:14-18; 4:
14-16) 중보자로서의 완전한 자격을 갖추신 분이시다. 이같이 중보자로서의 완전한 자격을 갖추신 그리스도는

(1) 하나님을 계시하는 일에 있어서, 요1:1절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와 요1:18절, “본래 하 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는 구절, 그리고 요10:30절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이시라고 빌2:6절에 기록 되었다.
(2) 이처럼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은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육체로 허셨다고 했고(엡2:14), 이어서 엡2:16절에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므로 허물과 죄로 죽어서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셨는데, 곧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다고 말씀한다. 이처럼 인자이신 예수께서 화목제물이 되시므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원수 되었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연합하게 하셔서 하나님 안에 영원히 거하는 완성된 구원을 받음에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유일하신 구세주이시고 중보자이시라는 것이다(롬3:23-26, 고후5:19).
(3)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고, 자신이 구원하신 자 중에 한 사람도 잃지 않기 위해서 쉬지 않고 중보기도 하시고 있음을 롬8:33,34절에서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그들에게 무죄를 선언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우리의 이 완전한 구원을 위해서 지금도 계속 중보 기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라고 말씀 한다.
위의 세 가지의 내용을 잘 나타내는 빌2:5-11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위의 모든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이같은 중보 기도를 포함한 중보 사역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 유일하신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는 일인데, 중보 기도가 남을 위한 기도로 일반화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결코 중보자일 수 없는 이들에 의해 중보 기도가 오늘 날, 남용(일정한 기준이나 한도를 넘어서 마구 쓰는 것)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따라서 중보는 한분이라는 말씀을 받들어서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겸손 하게 남을 위한 기도로 적합한 도고 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권한다.

딤전2:1절에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했다.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라는 4개의 단어, 곧 명사 목적격인 단어들을 컴마 없이 연속해서 사용한 것은 눅11:9절에 기도의 다른 표현으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세 번 반복하므로 쉬지 말고 열심히 기도할 것을 강조한 것과 같이 간구 기도 도고는 기도의 다른 표현으로 하나님에게 남을 위한 기도를 할 때 항상 열심히 기도하며 감사할 것을 강조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대인의 성경은 이 의미를 잘 살려서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을 권합니다. 그대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며 감사하시오.” 라고 했다. 다음 2절에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1절의 말씀에 이어서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말씀 한다.

본문 딤전2:1절에 나오는 도고(禱告)라는 단어는 기도로 고한다는 뜻인데 헬라어는 εντευξις로 누구를 위한 기도, 탄원 등, 주로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주로 사용 하는 단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가족과 친척들, 교회와 성도들, 국가와 위정자들, 선교지와 선교사 및 선교단체들 그 밖에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간단한 하나의 단어를 사용하기를 원한다면 도고기도로 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적절하다고 본다.






'중보'란 무엇인가?

1.  '중보'의 어원(語原)
(1) 히브리어 : 아라브(arab: 보증하다,사 38:14), 파가쉬(pagash: 만나다,출 4:24),
파가(paga: 화해하다,사 53:6, 59:16;렘 7:16)
(2) 헬라어 : 메시테스(mesites 중보,히 8:6), 헤메시투세.

2. '중보'의 의미(意味)
중보하다(intersecede)는 '사이로 들어가거나 통과하다', '서로 다투거나 사람들을 화해시킬 목적으로 당사들 사이에서
활동하다', '중재하다', '조정하거나 중재하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중보(仲保, mediator)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일을 주선하는 일(딤전 2:5; 히 8:6)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3. 중보자(仲保者)는 누구인가?

1) 중보자의 어원(語原)
(1) 히브리어 : '멜-리-쯔'(meli-ts) = 영어 '인터프리터'(interpreter: 해석자,욥33:23;통변,通辯,창42:23)
(2) 헬라어 : '메시테-스'(mesites) = 영어 '미디에이터'(Mediator: 중보자,딤전2:5).
신약성경에는 '중보자'(mesites:,메시테스)라는 용어가 6회(갈3:19,20;히8:6,9:15,12:24) 사용되어 있다.

2) 중보자의 의미(意味)중보자(仲保者, mediator)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서 그 관계를 성립케 하고, 화해를 가져오는 사람(욥9:33;갈3:19,20;딤전2:5;히8:6,9:15,12:24)이다.

3) 중보자의 필요성(必要性)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다. 또한 인간은 살아가면서 죽을 때까지 죄를 짓고 살아가는 죄인이다. 이처럼 사람은 죄를 가지고 태어나고, 또한 살아가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회복할 수 없는 원수의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결정적인 화해자로서의 중보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역할을 맡은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딤전2:5). 다른 인간적인 중보는 인정되어 있지 않다. 히브리서는 특히 이것을 중심으로 하여, 그리스도를 영원하신 대제사장이시라는 사실이 말해지고 있다(히6:20,9:15).
예수님의 중보자로서의 역할은 십자가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즉 일회적인 희생제물이 됨으로써 영원한 화해가 이루어졌다.

4) 중보자의 자격(資格)
(1)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한다. (2) 무죄 하여야 한다. (3) 신.인 양성을 가지신 분으로 참 하나님과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대속사역을 완수키 위한 조건인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고, 죄인 위해 중보를 하시는데 있어서(롬8:34;히7:22-25), 중보자의 자격을 완전히 갖추셨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5) 예수님이 중보자인 성경적인 근거(根據)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Westminster, Larger Catechism) <제 41문> 어찌하여 우리 중보를 예수라 칭하였는가? (답)우리의 중보를 예수라 칭한 까닭은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때문이었다. (마1:21) <문 42> 왜 우리의 중보를 그리스도라 칭하였는가?
(답) 우리의 중보를 그리스도라 칭한 것은 낮아지고 높아지신 그의 신분에서 그의 교회와 선지자 제사장 및 왕의 직분을 행하게 하시려고 한량없이 성령으로 기름부으심을 받고 성별되시어 모든 권위와 재능을 충만히 받으셨기 때문이었다. (요3:34;시45:7;요6:27;마28:18-20;행3:21,22;눅4:18,21;히5:5-7,4:14-15;시2:6;마21:5;사9:6,7;빌2:8-11)








로마서 1:1-4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이 복음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예수 그리스도(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마귀의 일(창세기 3:15)

한글 개역 /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공동번역 /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

마귀의 일(이사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왜 하필이면 홍해인가?



출애굽기 14:21
모세가 바다 위로 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는 은혜와
기도할 때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에 정복당하라!

주여
주의 말씀에 정복당하게 하옵소서!

첫째, 하나님이 길(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사람들이 실망하고 절망하는 이유는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길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려고 홍해 길로 일부러 인도하셨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까지 장애물이 계속 나타날 것이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는 나의 방패시요

둘째, 온전하신 길(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출애굽기 14:21
모세가 바다 위로 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사람들이 길을 만들 때는 산을 깎든지, 굴을 뚫든지, 산을 돌아가든지 하여 길을 만들려고 한다.

바다가 갈라졌을 때 그 바닥은 젖은 땅입니다.
그런데 그 땅은 마른 땅이 되었다는 것은 완전한 길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질병이 아무리 깊을지라도,
가난이 아무리 깊을지라도,
고통이 아무리 깊을지라도
바다를 마른 땅 되게 하신 하나님이 마른 땅 되게 하실 것입니다.

셋째, 말씀을 말씀으로 들어라(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출애굽기 14:21
모세가 바다 위로 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넷째, 과정(이사야 41:4)

개역 한글 성경에서는 "과정"이란 단어가 사용된 것이 없다.
그러나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과정"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이 3번 사용되었다(다니엘 1:5, 18, 이사야 41:4)

다니엘서 1:5
왕은 또 자기가 먹는 제일 맛있는 음식과 포도주 가운데서 날마다 그들에게 일정한 양을 공급하였으며 3년 동안의 수련 과정이 끝나면 왕 앞에서 섬길 수 있도록 하였다.

다니엘서 1:18
왕이 정한 3년 동안의 수련 과정이 끝나자 궁중 대신은 그들을 느부갓네살왕 앞으로 데리고 갔다.

이사야서 41:4
누가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였느냐? 누가 역사의 과정을 정하였느냐?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도 있었고 세상 끝날에도 있을 나 여호와가 아니냐?

현대인의 성경 / 누가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였느냐? 누가 역사의 과정을 정하였느냐?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도 있었고 세상 끝날에도 있을 나 여호와가 아니냐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하는 고난, 고통, 질병, 실패, 실망은 결과가 아니다.
과정입니다.
과정은 잘 견뎌야 합니다.

과정신학(Process theology)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으로부터 발전된 신학이다.
찰스 하츠혼 좁 캅에 의해서 유명해졌다.
과정신학과 과정철학은 과정의 사상에 연관된다.
황트 헤드와 찰스 하츠혼은 신의 본질적 속성은 일시적인 과정에 의해서 영향을 주고 그리고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유신론은 신은 모든 면에서 영원하고, 세계에 의해 변화되지 않으며, 세계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본다.
과정신학은 바로 이런 요소들을 부정하는 것이다.

과정 신학이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좀더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그 사상적 기초는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의 과정 철학(process philosophy)에 있다.

‘과정'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고정된 존재를 연구하며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변화성과 새로운 존재로의 끊임없는 움직임을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과정 철학이나 신학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인식되는 용어가 바로 ‘합생(concrescence) : 존재로 구체화되어가고 만들어져 감' 이다.

단어의 풀이에도 나와 있듯이 전통 서양 사상에서 발견되는 존재론적 사고와는 달리 이 존재의 형성이 마지막을 향해 끊임없이 변해간다는 의미가 과정이라는 말 속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정 신학에서 말하는 신의 개념도 이런 합생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단순히 물질적인 성분보다는 현실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계속적인 관계와 진행에 공헌하는 사건의 연속으로 신을 감지하려 한다.
존재론적 입장의 신처럼 자기 존재에 대해 강압적이지 않고 오히려 관계성을 중시하는 설득의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 과정 신학에서 말하는 신의 개념이다.

과정 철학에서 우주와 세계는 자유의지의 대행자에 의해 수행되는 과정과 변화로 그 특징과 성격이 정해진다고 한다.
그리고 신은 개체와 사건들 모두를 관여하고 통제하기보다는 연속되는 사건들과 개인의 일들에 가능성을 제공하며 끊임없이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로 인식된다.
다른 식으로 표현해 보면 신은 모든 것들에 대해 의지를 갖고 있지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결과가 신의 의지이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과정 신학에서의 신은 변화하는 모든 우주와 만물에 관련하는 신이며,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에 관여하는 신이기에, 시간의 진행에 따라 변화한다.
하지만 이 말은 신의 총체성이 변한다는 뜻이 아니다.
신의 추상적인 요소인 선함, 지혜와 같은 개념은 영원히 견고하게 신의 형상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런 과정신학의 신론은 이원론적 신론이다.
신은 살아있는 존재로서 꾸준히 변화하며 또한 영원한 근원으로서 변하지 않는 영속성을 함께 소유하는 존재이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서 시작되어 찰스 하트숀(Charles Hartshorne)을 거쳐 과정 신학자 존 콥(John B. Cobb), 데이비드 그리핀(David Ray Griffin)과 같은 신학자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서구 전통 사상 체계에서 중시되는 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아퀴나스식 형이상학에서, ‘되어짐(becoming)'보다 우선시 취급되는 ‘있음(being)'의 생각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정 신학에서 중점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몇가지 것이 있는데

첫째는 과학과 신학을 통합하려는 노력이다.
끊임없는 상호 대화를 통해 더 나은 새로운 지평을 열기를 소망한다.

둘째로 신학에서 언어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에 대해 꾸준히 대답한다.
또한 과정 신학은 신에 대한 각 개인들의 관점에 가능하고, 분명하며, 생동감 있는 설명을 제공하여 많은 상황 속에서도 관여하시는 신의 존재성을 제시해 준다.

몇 가지 의문도 함께 제시하는데 이렇게 개인적 신에 대한 이해들에 적합한 신학이라면 과연 그 중 어떤 이해가 옳은 것이며 이런 많은 신에 대한 이해들의 통합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야기시키기도 한다.

또 과정 신학에서의 신은 신의 무한한 능력과 전지전능의 개념에 충분하고 이성적인 답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 나아가 기독교를 포함한 전 인류에 있어서 종교의 한계성을 극명하게 표현하게 되어 종교 자체에 대한 회의를 제공할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과정신학 역시 그 자체로 완벽할 수 없다.
신학이라는 것이 신에 대한 이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연구하는 것이기에 여러가지 형태의 신학이 가능하다. 비록 거기에 모순이 있다고 해서 그 가치마저 사장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만의 가치로 인해 더 큰 연구와 업적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 신학을 되짚어보는 이유가 바로 더 나은 신과의 관계를 위함이고 더 나은 신학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욥기 3:25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바다를 밟고 걸어가라!


마태복음 14:25-26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복음(福音)의 비밀(秘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