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祈禱)


도입 이야기

28 이라는 숫자

"2X8"은 학생들은 "16" 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청춘"이라고 대답한다.

어느 교인이 자녀의 이름으로 헌금을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28만원을 빌려서 헌금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이가 시험을 치루는데 어려운 문제 때문에 주저하는데 "이것이 답이야" 라는 강한 음성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 아이는 그의 마음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따라 답을 결정하였는데 시험에 통과되어 합격하였다고 합니다.
더구나 놀란 것은 장학생을 28명 선발하였는데 그 아이의 성적이 28등이 되어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 아이에게 "2X8"은 "기도의 응답"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러한 간증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기적같은 일을 일어나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적인 기도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내가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나에게 일어난 기적은 더 큰 기적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내가 바뀐 상태에서 일어난 기적은 그 기적의 은혜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습니다.

유명한 설교자 스펄젼의 명언

"기도하지 않고 성공했다면 성공한 그것 때문에 망한다."

(간증) 중학교 때 세계사 시험을 앞두고 공부하던 중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시험지가 내 앞에 나타나 그 시험지의 문제의 답을 적어가던 중 마지막 시험문제의 답을 적지 못하여 안타까워 하던 중 놀라서 깨었는데 그 날 세계사 시험을 치루려고 시험지를 받는 순간 꿈에 보았던 시험 문제가 그대로 내 앞에 놓여 있었다.
당연히 그 시험은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이후 시험 때마다 그런 꿈을 꾸려고 하였다.
문제는 시험 공부를 더 열심히 준비하는 것인데 시험지가 나타나기를 소원하는 것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기도라는 용어를 살펴봅니다.

4336. 기도 - 프로슈케(prŏsĕuchē) / προσευχή

4336. 기도 - 프로슈케(prŏsĕuchē) / προσευχή

1. 기도,  2. 기도처

골로새서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Devote yourselves to prayer, being watchful and thankful.

- 영적인 자각을 의미하는 깨어 있으라

4332. 항상 힘쓰라 - 프로세드류오(prŏsĕdrĕuō) / προσεδρεύω 

1. 가까이 앉다
2. 시중하다
3. 섬기다

- 끈질기게 매달리는, 지속적인 의미
- 기도의 열심과 지속성

335. 강청 - 아나이데이아(anaidĕia) / ἀναίδεια

1. 고집
2. 건방짐
3. 뻔뻔스러움
4. 파렴치함
5. 부끄러움을 모름

* 신약성경에서 1회 사용 ἀναίδεια
부정접두어 아(α) +  아이도스(부끄러움이 없음) (127) αἰδώς / 체면불구하고 간구하는 것

(KJV) impotunity(무력감)(NIV) boldness(대담, 뱃심, 배짱)

교훈
1. 요청에 즉각적으로 응하지 않으려는 집 주인과 쾌히 주시려는 하나님을 대비하므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반드시 응답된다는 것을 강조(9-13절)
2. 응답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끝까지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살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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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단호하고 분명한 것이었다.
즉 ‘기도’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란 어떤 초능력적 힘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게를 이루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촉구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기도에 관한 명언


우리 하나님은 예측 할 수 없는 비상사태가 없으며 응할 수 없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 죠지뮬러 -




* 마른 눈 가지고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 

- 스펄젼 - 

* 성자를 만들어 내는 것은 기도의 힘이다. 

-이 엠 바운즈- 

* 기도의 실패자는 생활의 실패자이다. 

-이 엠 바운즈-

* 잘 기도한 자는 잘 배운 자요 많이 기도한 자는 많이 운 자이다. 

-루터-

* 어려운 환경에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마저 없다면 우리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칼뱅-

"모든 것을 하나님께 기도로 가져 갈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특권이다. 그렇지 않은가.

-허드슨 테일러-

* 늙어 갈수록 기도를 더 많이 하라. 그러해야 신령한 일에 냉냉해 지지 않는다.

- 죠지 물러-

* 싸움터에 나갈 때는 한번 기도하라. 바다에 나갈 때는 두번 기도하라. 그리고 결혼할 때는 3번 기도하라. 

-러시아 격언-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할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다. 

-마클라 쉴란-

* 하나님의 자녀는 기도로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다. 
사탄이 교인들에게서 이 무기를 빼앗거나 그것의 사용을 제지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앤드류 머레이-

* 기도는 영혼의 피이다. 

-죠지 허비트-

* 우리의 기도는 지칠 줄 모르는 힘과 거부될 수 없는 인내와 꺾여지지 않는 용기로 강하게 구해야 한다. 

-이 엠 바운즈-

* 기도는 아침의 열쇠요 저녁의 자물쇠이다. 

-그레이엄-

* 정신을 집중할 수 있을 때에만 기도하라. 

-탈무드-

* 무릎을 꿇은 그리스도인은 발돋움을 한 천문학자 보다 더 멀리 본다. 

-토플레디-





기도는 하나님과 교감(交感)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감(交感)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 할 때에는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기도의 목적은 진정으로 갈급하는 것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강청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사도행전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All of them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in other tongues as the Spirit enabled them.

4130 / 플래도(plēthō) πλήθω
1. 채우다
2. 영향을 주다
3. 완수하다
4. 공급하다

가득하다(마 22:10, 눅 4:28, 행 5:17)
적시다(마 27:48)
충만함을 받다(눅 1:15, 41)
차다(눅 1:57, 2:6, 22)
채우다(눅 5:7)
충만하다(행 4:8, 31, 13:9)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Do not get drunk on wine, which leads to debauchery. Instead, be filled with the Spirit.

로마서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May the God of hope fill you with all joy and peace as you trust in him, so that you may overflow with hope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누가복음 1:15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for he will be great in the sight of the Lord. He is never to take wine or other fermented drink, and he will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even from birth.

누가복음 1: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누가복음 1: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예수님의 기도(Jesus Prayer)

“예수 기도”(Jesus Prayer)는 화살기도의 두 번째 유형입니다.
이것은 동방정교회(The Eastern Orthodox)의 교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해 오던 기도문입니다.
이것은 호흡의 리듬에 맞추어 기도할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기도는 많은 사람에게 “쉬지 않고 드리는 기도”가 됩니다.
그 기도 말은 단순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the Lord, Jesus Christ, the son of God, have mercy on me).

“예수 기도”는 이러한 기도를 반복해서 드립니다.
동방정교회 교인들은 정해진 기도 시간에 묵상 기도를 하기 위한 배경으로 이 기도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이 기도문은 차를 타고 가거나, 걸어가거나, 세수를 하거나, 아무 때나 반복해서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 기도”는
1.  우리 모두가 죄인이며
2.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만듭니다.

이런 반복적인 기도에 진실함이 들어가 있다면 강력한 영적 화살이 될 수 있습니다.
반복적인 기도에 대해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복 그 자체를 싫어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거룩하게 보이기 위해 중언부언하는 공허한 반복의 기도를 싫어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 기도하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기도는 절대로 공허한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 오늘도 주님 안에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저와 우리 가족을 지켜주세요.”

우크라이나의 정교회 사제이자 영국국교회의 목사였던 케네스 왈드론(Kenneth R. Waldron)은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취되기 전 의식이 있을 때 의사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스포디, 포밀루이, 고스포디, 포밀루이, 고스포디, 포밀루이”.
의사는 ‘주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라고 반복하여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왈드론 목사는 의사 선생의 입술로부터 이런 기도소리를 들으면서 큰 위로를 얻었고 편안한 마음으로 마취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기도가 듣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된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습니다.
반복 기도문으로서 화살 기도를 사용할 때는 자신이 애용하는 기도문을 생각해 놓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문 붙이기

화살 기도문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간단한 기도문을 어떤 장소에 붙여놓은 것도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예를 들어, 화장실에다가 “하나님 아버지, 항상 주님 안에서 기뻐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문을 붙일 수 있습니다.
직장의 책상에도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문을 붙여 놓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대화를 즐겨야 합니다.
기도의 목적은 단순히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우리가 늘 하나님과 함께 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화살 기도를 하게 되면 그냥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도 영원한 가치로 투자되는 시간으로 전환됩니다.

유의점

화살 기도문은 시간이 부족하거나 또는 순간적인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는 기도문이기 때문에 화살기도만으로 기도 생활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규칙적인 기도의 장소와 시간을 가지는 기도의 사람이 화살 기도를 함께 사용할 때는 강력한 기도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화살기도를 드릴 때는 장문의 기도는 지양하는 것이 좋습니다.
간단하고 힘있는 기도의 표현을 사용해야 하며 진솔한 마음을 담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익

화살 기도문을 자꾸 사용하면 습관적인 기도의 사람이 되는 데 유익합니다.
즉 기도하는 것이 체질이 되는 데 좋습니다.
죄인인 인간 본성은 본래 기도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습관으로 만듬으로써 자신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화살 기도는 기도하기 싫은 우리의 본성을 길들이는 데 유익합니다.
또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순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강력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좋은 화살 기도문을 꼭 만드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향해 쏘아 올리십시오.
주님의 임재하심이 느껴질 것입니다.

시간

화살 기도 하나를 쏘는 데는 5초-10초 정도면 됩니다.
양적으로는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기도의 질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기도의 화살을 틈 나는 대로 쏘아야 하지만 아침에 기상하자마자 또한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꼭 쏘는 것이 좋습니다.

생각해 볼 문제

1. 여러분이 매일 아침 화살 기도를 드린다면 어떤 기도문을 만드시겠습니까?
2. “예수 기도”(Jesus Prayer)의 의미를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3. 화살기도를 실천하기 위한 계획안을 세워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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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 기도


화살기도는 영혼의 활을 당겨서 하나님께 쏘아 올리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적절한 상황에서 짧고 단순한 기도문을 가지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입니다.

화살기도는 주로 자신이 애용하는 기도문을 만들어 적절한 상황 때마다 사용합니다.
화살 기도는 주님의 전적인 긍휼하심을 간구하는 마음으로 드릴 때 효과적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박히는 화살을 쏘라

화살 하나는 하나의 기도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활에 화살을 하나씩 당겨서 시간이 나는 대로 하나님께 쏘아올릴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의 화살을 한 개 쏠 수 있습니다.
또 밤에 자기 전에도 쏠 수 있습니다.
하루 중에서 틈이 나는 대로, 적절한 순간마다 기도의 화살을 쏠 수 있습니다.
화살 기도의 기도문은 장황해서는 안됩니다.
마치 화살이 너무 길면 활로 당겨 힘있게 쏘기가 어려운 것과 같은 것입니다.
화살기도는 간단하고 단순해야 합니다.
화살은 짧지만 힘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힘차게 멀리 날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투영해서 쏘아야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 오늘도 주님 안에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저와 우리 가족을 지켜주세요.”

이러한 기도문은 여러분 각자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 날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기뻐하게 해 주세요.”

나는 차에 탈 때도 간단하게 화살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안전운행을 하도록 지켜주십시오.”

밤에 자기 전에도 화살 기도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함께 하신 것 감사드립니다.
이 밤에도 주님의 보혈로 덮어주세요.”

하루 중 생활하면서
“주님,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저를 주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 주시옵소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간단한 기도를 통해서 화살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글을 쓰기 전에 “주님 글을 쓸 수 있는 아이디어와 지혜를 주세요” 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회사 취직을 위해 인터뷰를 하기 전에도 “주님 이 인터뷰에서 제 입술 의 말을 주관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버스를 타기 전에 “주님, 안전운행하도록 지켜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 “아이들이 오늘도 공부 잘하고 친구들과 잘 지내게 함께 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의 화살

화살 기도는 간단한 기도이지만 우리의 마음을 담아서 드려야 합니다.
내면의 진실은 화살이 날아가기 위한 좋은 활이 됩니다.
성자로 여겨지는 존 비아니(John Vianney)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에 대해,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아름답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향기로운 이슬이다.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만 그 이슬을 가슴속에 느낄 수 있다.
기도에는 마치 잘 익은 포도로 만든 쥬스와도 같은 달콤함이 느껴진다.
간절한 기도 앞에서 문제들은 봄볕의 눈처럼 녹아버린다.
사람은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서 마치 대포에서 발사된 탄알처럼 곧장 하나님께 달려가야 한다.
기도는 우리 영혼을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킨다.
마치 에드벌룬을 높이 올려주는 불길처럼 기도는 우리 영혼을 높은 곳으로 데려다준다.
우리는 더 많이 기도하면 할수록 더 기도하고 싶어진다.
처음에는 수면에서 헤엄치지만 나중에는 점점 더 깊이 들어가 밑바닥을 향해 가는 물고기처럼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즐거움 속에 빠져 들어간다.
기도는 거룩한 물로서 그것이 흐르는 곳에 우리의 소원은 힘을 얻어 꽃을 피우게 된다.
우리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고 우리 마음의 목마름을 해소시켜 준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가장 열정적인 기도가 나옵니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기도의 가장 강력한 힘이 발휘됩니다.
우리는 마음 밑바닥에 있는 거룩한 꿈과 소원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내면의 진실한 소원은 하나님께 날아가는 화살의 강력한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화살 기도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는,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드리는 짧은 화살기도입니다.
둘째는, 반복해서 드리는 화살기도문입니다.
셋째는, 정해진 장소에 기도문을 붙여놓고 드리는 화살기도입니다.

성벽 재건의 마음을 담아서 쏘아올린 느헤미야의 기도

성경에서 우리는 느헤미야를 통해 화살기도의 첫 번째 유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파괴의 비보를 접한 느헤미야는 몇 개월 동안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아닥사스다 왕 앞에 얼굴에 수색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왕은 느헤미야에게 마음에 근심이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그 때 느헤미야는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왕은 느헤미야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어봅니다.
왕에게 대답하기 전에 느헤미야는 잠시 동안 묵상 기도를 드립니다(느 2:4).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묵상으로 잠깐 기도했지만 마음 속으로 하나님께 “짧고 단순한 화살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 왕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제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하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화살기도는 이처럼 어떤 순간적인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정해진 시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흐르는 강물처럼 하루 종일 흘러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간단한 문장이나 말을 사용하면서 짧은 화살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화살 기도문은 자신의 마음에 맞는 것을 선택하여 반복형 기도로 사용하는 것도 효과적입니다.
이러한 기도문을 계속해서 사용하면 좋은 기도의 훈련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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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라



34. [요한복음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35. [요한복음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36.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37. [요한복음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38. [요한복음 16: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39.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40. [요한복음 16: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주로 새벽기도를 설명할 때 자주 찾는 성구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시간 개념에서는 새벽이 아닙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언제 시작할까요?

유대인의 하루는 해가 지면서(저녁6시) 시작하여 그 다음날 해질 때 끝납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하루종일 일하다 가도 해자 져서 어둠의 커튼이 드리우면
“아 하루가 끝났구나” 하면서 감사의 일몰 기도를 드리고 하루를 마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낮과 밤을 12시간씩 나누어 구분했습니다.

낮 시간은 대략 아침부터(해뜰때부터) 저녁(해질때까지) 까지로서 현재의 아침6시에서 저녁6시까지 정도였으며,
밤은 오후 6시부터 그 다음날 아침 6시까지 12시간이었습니다.

밤은 다시 3시간 단위로 묶어 “경”이라 불렀습니다.
제1경은 오후 6-9시, 제2경은 오후  9-12시, 제3경은 오후 12-3시, 제4경은 오후 3-6시 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밤 4경에 제자들이 씨름하던 바다위로 걸어가신 시간대가 언제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낮 시간은 아침 6시에서 저녁 6시까지 12시간으로 한 시간 단위로 제1시, 2시 등으로 구분했습니다.
제1시는 아침 7시, 제6시는 낮 12시, 제9시는 오후 3시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유대인의 시간 즉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을 오늘의 시간으로 환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6을 더해주면 됩니다.
(이것도 어려우면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에서 초침시계에서 시간을 가리키는 바늘의 반대편이 지금의 시간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

예를 들면 사도행전 3장 1절에서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 시간 제구시는 오후 9시가 아니라 오후 3시를 말합니다(9+6=15,즉 오후3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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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5~22)

기도를 영적 호흡이라고 합니다.
호흡을 할 때 호흡하는 방법을 배워서 숨을 내쉬고 들어바십니까?
생명이 있는 육체는 자연스럽게 호흡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중병에 걸렸을 때는 자기 힘으로 호흡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산소호흡기로 숨을 쉬도록 도와줍니다.

건강한 영혼
건강한 육체
건강한 신앙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땅에는 중단해야 될 일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쁜 생각과 나쁜 습관, 하나님의 계명에 위반되는 것과 불신앙에 대한 것, 어두움에 관한 것 등등 이러한 것들은 빨리 중단할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중단해서는 안 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육체가 호흡을 함으로 존재하듯이 영적 생활에서 가장 귀한 것은 바로 기도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기도 쉬는 것을 죄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삼상 12:23)
그는 기도 쉬는 것을 큰 죄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기도를 중단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어떠한 의미일까요?

첫째,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계속하라

출애굽기 33:11에 보면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친한 벗이라도 대화가 중단되면 마음에서도 멀어지고 또 정(情)도 멀어집니다.
우리는 항상 대화 속에 이해를 서로 주고받게 되고 정(情)도 서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영적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가 없이는 신앙생활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숨을 거둔다는 것은 바로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중단하는 것은 바로 신앙을 자살시키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떠한 환경과 처지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서가 아버지 이삭에게 받을 축복을 야곱이 가로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어머니 리브가 곁에 있으면서 대화를 자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생활을 통해서 늘 하나님과 영적인 대화를 계속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역대상 10:13에 보면 사울의 죽은 기록이 나옵니다.

사울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아 왕까지 되었지만 그가 결정적으로 생명을 잃게 된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고 신접한 사람 즉 귀신 들린 사람에게 가르쳐주기를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방신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올리는 경배를 중단하지 말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1년에 몇 번 정기적으로 드리고 끝나면 안됩니다. 우리는 평생토록 하나님 앞에 산 제물이 되어서 늘 경배하는 생활을 지속해야 합니다. 시편 95:6에 보면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경배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무릎을 꿇는 것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가 계속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경배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안전한 시간, 가장 하나님께 보장 받는 시간은 바로 예배하는 시간입니다. 예배가 살면 믿음이 삽니다. 예배가 살면 교회가 삽니다. 예배가 살면 여러분의 인격도 변화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했습니다(요 4:23).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일을 숨질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경배’라는 말은 ‘꿇어 엎드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 예배는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또 ‘주인의 발 앞에 하인 된 위치에서 엎드려 경의를 표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주인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중단하지 않는 가정과 교회와 민족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예배가 가장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향기로움을 계속 올려드리라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시 141:2) 기도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예물입니다. 요한계시록 5:8에도 보면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도가 얼마나 귀하면 금 대접에 담았을까요? 옛날에 귀한 음식은 임금님의 상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귀하면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가겠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항상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매일처럼 올라가는 기도의 향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기도를 하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게 되고, 기도 속에서 신앙이 성장하게 되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기도의 줄이 잡힌 사람은 항상 미리 예방의 기도도 하고, 처방의 기도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 26:41)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고 졸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시험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기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항상 기도함으로 깨어있기 때문에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항상 기도로 깨어서 주님과 영적 대화가 이어짐으로 여러분의 아름다운 기도의 향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항상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항상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것입니다.

시편 55:22에 보면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맡기는 것과 버리는 것은 다릅니다. 전당포에 맡기는 것은 다시 찾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맡겨 버리는 것은 다시 찾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올림픽대로를 타고 공항에 가다 보면 난지도에 쓰레기를 버리는 차량은 많이 보았지만 그 버린 쓰레기를 다시 싣고 가는 차량은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무거운 짐을 다 주께 맡겨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기도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잠언 16:3에도 보면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시편 37:5에도 보면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베드로전서 5:7에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여분의 모든 것을 기도로 하나님께 다 맡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인간이 견디기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 이를 때에도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계속하고, 하나님 앞에 올리는 경배를 중단하지 말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의 향을 계속 올려드리고, 항상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어서 늘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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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응답 11가지 유형

 

1. 예스(Yes)형 

우리의 기도와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즉각적인 응답이다. 
개인, 사회, 국가, 교회문제 등으로 기도할 때 즉각 주시는 응답.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에 응답.   

2. 노(NO)형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 거부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는 경우이다.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 반사회적, 비인격적, 비성경적인 기도에 침묵이나  거절로 응답. 이 외에도 형제를 용서치 못함, 교만, 혈기, 외식적인 기도,  죄, 두 마음, 의심, 잘못된 금식, 불순종 등에 거절하시는 응답. 

3. 주바라기형   

힘들고 지칠 때,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하나님만 믿고 의지할 때 기적적으로 주시는 응답.   
홍해 앞, 여호사밧 왕과 백성들의 찬양을 통해 하나님이 적군을 물리쳐 주시는 응답.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서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  

4. 업그레이드형 

우리의 기도와 믿음 그 이상의 것을 주시는 응답.  
어떠한 것을 구했는데 최상의 시간(때) 에 최고의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평소 믿음이 하나님의 뜻과 정확하게 일치할 때 상상과 기대를 초월해서 주시는  환상적인 기도응답이다.
솔로몬이 지혜만 구했는데 그가 구하지 아니한 부와 명예도 주셨다.  
전무후무한 지혜를 주셨다는 사실   

5. 웨이트(Wait)형   

인생은 먼 길을 여행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때로는 형통한 환경의 아스팔트길을 걸어갈 때도 있다. 
그러나 어려움의 진흙탕길, 가시밭길을 걸어갈 때도 있다.   
폭풍우나 비바람을 맞고 외로운 길을 걸어가야 할 때도 있다.   
가슴에는 비전을 품고 마음속에는 굳건한 의지와 강철 같은 체력으로  가야할 길을 가야한다.   
믿음과 기도로 앞길을 헤치고 걸어갈 때 지연된 응답이 있다.  
크로노스(인간의 시간)와 카이로스(하나님의 시간)는 다르다.  

웨이트형과 진주조개형의 차이는, 웨이트형은 믿음으로 지속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진주조개형은 먼저 계시나 응답을 받았지만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에 받게 되는 기도응답을 말한다.  

6. 진주조개형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환상, 계시 혹은 기도응답을 통해 그 일에 대해서 약속을 받게 된다.   
그런데 아픔과 시련, 연단, 회개, 불시험 등을 통과하고 받게 되는 응답이다.   
자아가 깨지고 교만이 제거되고 하나님 중심으로 패러다임이 변할 때 받게 되는 응답.   
하나님이 한 시대에 크게 쓰시는 사람들은 이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다윗의 "아둘람 굴"과 같은 과정을 거칠 때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이 임하게 된다.   

요셉의 예   

7. 물레방아형   

직선형 기도응답이 아니라 변환형 기도응답이다.  
우리가 A를 구했는데 B나 C, D를 주실 때도 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러 가려고 했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고 마게도냐(유럽)로 인도 하셨다.   
유럽에 기독교 문명이 획기적으로 열리는 전기가 된 것이다.   
자신의 기도와 고집만 주장하고 금식을 한다고 해서 자기 뜻대로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고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시대를 움직이는 사역을 펼칠 수 있다.  

8. 야베스형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 영, 혼, 육의 총체적인 전인적 축복을 주시는 경우이다.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인 모든 영역에서의 완전한 기도응답.   
이 기도에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지침이 있다.   
그것은 피(정의), 땀(노력), 눈물(양심)의 3대 액체가 필요하다.   
이것을 알고 야베스의 축복을 말해야 한다.  

씨를 뿌리고 기도해야 한다.  
이 시대의 야베스라면 한국의 100대 재벌(?) 정도는 될 것이다.   
관념의 유희는 위험하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9. 징검다리형   

하나의 목표나 프로젝트를 추진해 가기 위해서는 일의 시작 전, 과정,  후까지 기도를 해야 한다.   
지속적인 기도와 연속적인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기도응답이다.  
느헤미야의 성벽재건(방해자, 거짓 선지자 출현 때도 지속적인 기도)  

10. 지오디(GOD)형   


하나님의 방법을 말한다.  
인간의 기도나 믿음, 의지와는 무관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한다.  
주권적인 의지와 주권적인 권능을 말한다.  
인간의 생사화복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한다.   
창조와 보존, 통치, 성도의 고난, 선택과 유기, 징계 등.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요구에 응답해야 할 때가 있다.   

이사야 선지자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 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8).  

11. 미사일형   


교회, 전도, 구원, 부모의 기도, 성도를 위한 합심기도, 목회자의 중보형기도 등을 말한다.   
이러한 기도응답의 원리를 알고 365일, 24시간을 주님과 연합된 삶을 살게 될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과 그 분의 뜻 안에서  성공과 부와 명예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된다(전1:26).  

결론(結論)

기도와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무한한 하나님의 자원과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 신앙인 것이다.   
기도는 우리의 전 삶을 통해서 역사한다.   
심지어는 우리의 죽음 이후에 후손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사람은 인생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직립하여 설 수 있다.   
기도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관점은 기도를 하나님과의 거래관계로 보아서는 안 된다.   
'거래’가 아니라 ‘관계’여야 한다는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연합되고, 우리가 변화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우리의 삶과 모든 생활에서의 모습을 조율하고 일치시키는 대화,  즉 커뮤니케이션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기도100%은 우리가 신앙생활과 인격, 기도를 100%로 최선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뜻 안에서 360°의 다양한 환경과 방법으로 응답을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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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쎄(Hermann Karl Hesse. 1877. 7. 2~1962. 8. 9)의 기도

하나님이여,
우리 자신에 대하여 절망케 하옵소서.
하나님에게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 절망케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 자신이
더 이상 지탱할 아무 힘이 없을 때까지 절망케 하옵소서.
그래서 오직 하나님으로만
희망과 소망을 가지게 해 주옵소서.

* 오늘의 묵상(01-11-2021 소개)

라인홀드 니버(Karl Paul Reinhold Niebuhr. 1892∼1971)의 “평온을 비는 기도”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차이를 분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한 번에 하루를 살게 하시고

한 번에 한 순간을 누리게 하시며,

어려운 일들을 평화에 이르는 좁은 길로 받아들이며,

죄로 가득한 세상을, 내가 갖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그분께서 그러하셨듯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제가 그분의 뜻 아래 무릎 꿇을 때,

그분께서 바로잡으실 것을 믿게 하셔서

이 생에서는 사리에 맞는 행복을

내 생에서는 영원토록 그분과 함께 다함이 없는 행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아멘.


Serenity Prayer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Living one day at a time;

Enjoying one moment at a time;

Accepting hardships as the pathway to peace;

Taking, as He did, this sinful world

As it is, not as I would have it;

Trusting that He will make all things right

If I surrender to His Will;

So that I may be reasonably happy in this life

And supremely happy with Him

Forever and ever in the next.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의 기도

하나님께서 편한 길과 반쪽짜리 진리,
피상적인 관계를 불편하게 여기는 심령을 주셔서
마음 속 깊이 침잠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를 빕니다.
 
하나님께서 불의와 핍박, 인간에 대한 착취에
분노할 줄 아는 심령을 주셔서
정의와 자유,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시길 빕니다.
 
하나님께서 아픔과 거절,
굶주림과 전쟁으로 고난당하는 이들을 위해
눈물 흘릴 줄 아는 심령을 주셔서
기꺼이 손을 내밀어 세상의 고통을 어루만지며
괴로움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게 되기를 빕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어리석음의 복을 주셔서
스스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게 하시길 빕니다.
그리하여 다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모든 아이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정의와 사랑을 가져다 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Carol Wimmer)

“나는 기독교인이에요” 라고 말할 때
“난 구원 받았다!” 라고 외치는 게 아니에요.

“난 가끔 길을 잃어요. 
그래서 이 길을 택했어요.” 라고 말하는 거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교만함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발을 헛디뎌 비틀거려서 하나님께서 나의 인도자가 되길 바란다고 고백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강하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약해서 계속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한다고 말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성공했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실패해서 결코 빚을 다 갚을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는 혼돈에 처해 있어서 겸손하게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내가 완벽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 결점이 너무나 뚜렷하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나는 뼈아픈 고통을 여전히 느껴요.

내 마음이 아파서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구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나는 판단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내게는 그럴 권한이 없어요.

내가 사랑받는다는 사실 그 하나만을 안다는 것이에요.


기도(祈禱)는 친밀한 교통(交通)(intimate intercourse)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의 살아 있는 믿음의 표현으로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intimate intercourse)이라고 합니다. 

성부 하나님이 기도를 들었고 응답하시며 성자가 그의 이름으로 중보하시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기도를 활성화시켜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어지게 된다.
칼빈이 말한대로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은 우리에게 참된 지혜와 경건 그리고 건강한 믿음을 준다.

바운즈(E. M. Bounds)

"성도를 만드는 것은 기도의 힘이다. 기도하면 기도할 수록 참된 성도가 되어간다. 기도를 위하여 많은 시간, 특별히 아침 시간을 바치면 성스러운 생활에서 그 효과가 현저하게 나타나게 된다."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문이 열리고, 틀이 형성되며, 그 내용이 규제되기 때문에 철저하게 말씀의 묵상을 요구하며, 말씀 묵상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알기 때문에 확신과 소망을 갖게 합니다. 

또한 마음 속에 깊은 감동과 큰 감격을 심어 주어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므로 기도는 말씀 묵상과 찬미와 더불어 행하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찬미는 말씀에 기초해야 하고, 지나치게 감정적이거나 충동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특권이요, 의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의 은혜를 감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적 사랑에 감격하며 그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중보 기도를 본받아 온
인류와 우주적 교회를 위하여 드리는 우리의 중보기도는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의 지름길이요, 사랑과 믿음과 소망으로 하나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뿐 아니라 형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최상의 방편입니다.

기도(祈禱)의 법칙(法則)


칼빈은 성령과 말씀을 따라 기도함에 있어서 특별히 네 가지의 법칙
1. 경외하는 마음으로
2. 진심으로
3. 겸손하게
4. 믿음으로

첫째 법칙 - 경외하는 마음으로

구약성경에 보면, 에컨대 레위기에 나오는 의식법 등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초월성을 유념하게 하여 우리가 하나님께나 아갈 때 경외심을 가질 것을 강조한다.

신약에서도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위엄이 무한하며 그의 본질을 불가해하고 그의 권능이 한량없으며 그의 존재 또한 영원함을 알게 하려는데 있다고 칼빈은 해석한다.

주기도의 첫째 기원, "이름이 거룩하게 되오며"에 대해서도 칼빈은 이 기원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들려 드릴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큰 수치를 인하여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칼빈은 아주 강조한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대화하며 기도하려는 자들은 합당한 생각과 마음을 가져야 한다.

둘째 법칙 - 진심으로, 열정적으로

성경은 위선적인 기도를 정죄할 뿐만 아니라 기도를 진실하고 열정적으로 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한다.
예수님은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경고하셨고, 기도의 응답이 더딜 때 끈기 있게 기도할 것을 권하였다.
그리고 기도에는 열정적인 열망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여 기도한 세리는 자기의 감정이 고조되어 있음을 표현하여 자기의 가슴을 쳤으며, 그리스도의 기도들은 심한 통곡
과 눈물로 드려졌는데,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셨다.
엘리야도 간절하게 기도했던 것으로 성경은 말한다.
칼빈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자신의 무력함을 항상 느끼며,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필요한가를 간절하게 생각하고서 그것을 응답 받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이 기도에 가미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셋째 법칙 -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겸손한 기도의 전형적인 실례는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이다.
칼빈은 주장하기를 기도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모든 자만심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올바른 기도의 준비와 시작은 겸손하고 성실하게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간구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은 그 뜻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사실상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 결정되며 우리 스스로 기도의 내용을 조작하지 않게 된다.
이로써 겸손하고 순복하는 기도가 가능하다.

넷째 법칙 -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성경이 분명하게 지시하는 바에 의하면 믿음은 응답받는 기도의 필수 조건이다.
칼빈이 제시하는 넷째 법칙은 기도하되,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리라는 확실한 소망을 품고서 용기를 내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지는 것은 모두 믿음을 통해서 얻는다고 하는가 하면, 사람들은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것이요, 공포심 없이 그러나 경외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고 칼빈은 또한 말한다.

칼빈이 제시한바 네 가지 법칙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185문답)에 다음과 같이 진술되어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며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과 필요한 것들과 죄악들을 깊이 깨닫고 마음으로 회개하며 감사하고 열심을 품되 이해, 믿음, 신실, 열정, 사랑 그리고 인내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뜻에 겸손히 순복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祈禱) / 마태복음 6:7∼9a

7. 또 기도(프로슈코메노이)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아이테사이=아이테오)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어떤 것일까?

기도로 하나님에게 생각을 하게하고, 내 기도로 인해 하나님이 하나님의 계획을 별도로 세우거나 바꾸거나 하게 할 수 있는 것인가?
피조물인 사람의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왜 기도를 하나님은 또는 예수님은 하게 하신 것인가? 

여러분은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절대 주권자시며,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이나 생각을 인간이 하는 기도로 바꾸시거나 혹은 인간이 하는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과연 바꿀 수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열심히 기도를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속성을 속성대로 믿는 기도일까요?

아니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왜 자기가 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이 그 때 그 때 바뀌는 것처럼 생각이 돼서 열심히 기도를 하는 믿음이 생기는 것일까요?

지금 기도 자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할 때 누가 주어냐? 즉 누구를 위한 기도냐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 역시 돈 문제로 정말 너무너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정말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정확히 3년 동안 매달을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넘어갈 수 있도록 해주신 예수님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소중한 체험인데요, 그래서 지금도 저는 예수님 경리과장 같은 예수님이라는 말을 농담처럼 곧잘 합니다. 예수님처럼 정말 정확한 분은 없는 것을 저는 너무 잘 압니다. 그리고 많은 목사님들 역시 기도가 만능인 것으로 생각을 하는 목사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기도는 왜 하는가?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가 도대체 무엇인지 아는 것이 기도에 대해 이런 생각을 깊이 하면서 성경 말씀들을 찾아가보면, 기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팔랄
- 간섭하다, 판단하다, 중재하다, 기도하다.

“팔랄”이란 기도는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입니다.
히브리어 단어 해석이 사실은 참 어렵습니다.
히브리어를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 해석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도의 대표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어 “팔랄”은 “간섭하다, 판단하다, 중재하다, 기도하다”는 뜻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외에는 계시지 않는 것을 구약의 기도를 대표하는 “팔랄”이라는 단어에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팔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 . .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요나 2:1,2,10)


옛날 히브리 사람들은 기도를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브라함과 요나, 모세, 그리고 다윗에게 기도는 무엇을 의미하였던 것일까? 그들이 생각하던 기도의 개념은 오늘날 크리스천이 생각하는 기도의 개념과 어떻게 달랐을 것인가?


기도의 문자적 의미 - 입과 지팡이

구약성경에서 대표적으로 사용된 기도하다는 뜻의 히브리어는 ‘팔랄’이다.
앞에 접두사 테를 붙이면 테필라, 즉, 기도라는 명사가 된다.
팔랄의 어근은 ‘팔’인데 ‘페이’와 ‘라메드’의 두 글자로 되어있다.
‘페이’는 입을 뜻하는 상형문자로서 여기서는 말을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한편 ‘라메드’는 권위를 상징한다.
원래 라메드는 양치는 목자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긴 지팡이를 그린 상형문자이다.
목자는 그 지팡이를 가지고 양떼의 가고 멈춤과 모든 행동을 결정하며 다스린다.
양들의 입장에서 보면 또한 그 지팡이는 자기들을 맹수로부터 보호하는 강한 힘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팔’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권위자에게 말하다”라는 뜻이 된다.

한편 땅에 떨어지거나 엎드리다는 단어 ‘나팔’도 같은 어근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팔랄이라는 단어의 문자적 해석은 “권세를 가진 사람의 앞에 엎드려 송사를 올리거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옛날에는 성문이나 광장에 유력자가 모습을 나타내면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자신이 당한 억울함이나 부당한 일들에 대하여 고하며 이에 대하여 정의의 심판을 내려줄 것을 간구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사무엘하 15장에 보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하여 일찍 성문으로 나가 재판관을 자칭하며 모든 송사를 가진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고 왕의 신하를 대신하여 심판을 내려주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에는 누구든지 개인적으로 부당한 일을 당하여 곤경에 처하였든지 아니면 그 지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잘못된 관행이나 부정행위에 대하여 분개한 사람은 권세를 가진 사람에게 찾아가 목소리를 높여 진정을 올리고, 권세자가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고 상황에 개입하여 왜곡된 질서를 바로잡아 주기를 절실하게 구하였다.

그러면 그 권세자가 그 진정된 바를 토대로 잘잘못을 가리고 훼손되었던 정의를 다시 회복시켜 주었는데 그 것이 바로 심판이다.
그러므로 팔랄의 또 다른 뜻에 ‘심판하다’ 또는 ‘중재하다’가 있다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시편 106편에 비느하스가 하나님을 능멸한 악인들을 정죄하고 처벌한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정죄의 행위가 바로 같은 히브리어 ‘팔랄’이다. 하나님은 이를 영원하게 흔들리지 않을 의라고 여기셨다.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 때에 비느하스가 일어나 처벌하니(팔랄)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이 일을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 대대로 무궁하리로다” (시편 106:28-31)

따라서 팔랄(기도)의 본질적 의미는 다름 아니라 정의가 손상된 것에 대하여 강한 정의감을 가지고 권세자에게 진정함으로써 정의를 다시 바로잡는 행위를 뜻한다.
그 권세자 중에 가장 높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 지고의 권세자에게 하는 팔랄이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인간인 재판관에게 가서 말하면 송사라고 하고,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은 기도라고 완전히 서로 다른 단어로 분리하여 버렸지만, 옛 히브리어에서 재판관에게 하든지, 왕에게 하든지, 하나님에게 하든지 모두 팔랄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권세자에게 고하는 것이고, 정의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왕과 통치자는 모두 하나님의 대리인이므로 (로마서 13:1) 그들에게 송사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게 고하는 것이 된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로마서 13:1-2)

영적 의미 - 하나님의 정의를 위하여

정의가 손상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생명이 훼손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큰 영적 원리에서 보면 죄로 인하여 저주가 왔고 저주로 인하여 죽음이 온 세상을 덮어 다스리게 되었다. 그런 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짓밟힌 생명에 대하여 가슴 아파하며 그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에게 고하는 것이 기도이다. 고대 히브리 개념상 재판관은 생명을 회복시키는 자를 뜻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 즉, 법은 생명이고, 그 법을 확립하는 것은 생명을 지키고 살리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영적 원리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팔랄이다.

생명이 손상되고 정의가 무너져 가는 것은 개인적인 삶에서도 벌어지며, 지역사회와 나라 차원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자기와 자기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라 자기가 속한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불의와 생명의 파괴에 대하여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해될 것이다.


성경에 팔랄이 가장 처음 등장한 곳이 창세기 20장이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남방으로 이사가서 아비멜렉왕의 땅에 살게 되었는데,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사라가 아내인 것을 감추고 그녀를 누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비멜렉이 자칫 사라를 아내로 취하려고 하였는데, 그결과 아비멜렉에게 멸족의 재앙이 오게 되었다. 아비멜렉에게 잘못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꿈을 통하여 그에게 경고를 하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를 위하여 기도하도록 하셨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팔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줄 알찌니라 . . .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팔랄)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창세기 20:7, 17)


성경에 처음 나오는 기도의 상황치고는 약간 어이가 없는 것 같다. 아브라함이 두려움에서 지어낸 거짓말의 결과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고, 하나님은 급히 아비멜렉에게 재앙을 피할 방법을 제시하셔야 했는데, 그것이 아브라함의 기도였다. 그 상황이 어찌 되었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팔랄(기도)을 함으로써 억울한 죽음을 막고 생명을 회복시킨 점이다. 그 점이 팔랄의 본질을 보여준다. 기도를 하는 아브라함으로 치면 그리 떳떳한 입장도 아니었다. 아브라함이 완벽했냐 아니냐가 기도 응답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도가 이루어지고 아니고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 즉, 하나님의 법, 생명의 법을 세우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한편 누군가 죽을 죄를 범하고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할 경우에도 대변자가 나타나 권세자에게 탄원하고 긍휼을 구할 수 있다. 긍휼과 자비에 의한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에서 구하기 위해서 여러 번 ‘팔랄’을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닥칠 때 마다, 모세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서서 진정을 하고 송사를 하여 멸망을 막고,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오므로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였느니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멸하겠다 하셨으므로 내가 여전히 사십 주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리고 여호와께 간구(팔랄)하여 가로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위엄으로 속하시고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을 멸하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이 백성의 강퍅과 악과 죄를 보지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내신 그 땅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일 능력도 없고 그들을 미워도 하사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하여 내셨다 할까 두려워하나이다. 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였었노라” (신명기 9:24-29)


고개가 뻣뻣하고 끊임없이 거역하며 자기를 해하려고 까지 한 이스라엘 백성이 뭐가 예뻐서 모세가 그리하였겠는가? 끝 까지 오로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 하나님의 의를 지키기 위해서 모세는 개인적인 감정을 초월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중보자가 되었다. 우리의 판단과 감정을 따르는 대신,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것인가 만을 기준으로 기도할 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한 기도가 진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44)


열렬한 기도와 기적

권세자 앞에 엎드려 부당한 상황을 바로잡고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간절히 진정하는 히브리어 ‘팔랄’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유추할 수 있다.
사람들은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인간인 권세자 앞에서도 ‘아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열을 올리면서 항변을 하고 진정을 하지 않을 것인가?
하물며 최고의 권세자이신 하나님께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제가 뭐 알겠습니까. 그저 잘 알아서 하옵소서’ 하고 돌아서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화를 통하여 바로 그 점을 가르치려고 하셨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8:1-8)

팔랄은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나아가 ‘아니 이 세상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불의를 이대로 내버려 두시렵니까?’ 하면서 마치 따지기라도 하듯이 항변이라고 할 만큼 당당하게 하나님께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유다의 멸망을 앞둔 마지막 때 선지자 하박국이 패악이 만연하고 불법이 자행되는 현실을 보고 부르짖었던 것과 같이 ...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하박국 1:2-4)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성경은 말한다 (야고보서 5:16).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팔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아들 사무엘을 얻고 의를 회복한 것처럼 (사무엘상 1:10-11), 또 히스기야왕이 “사자의 손에서 글을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놓고 .....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으로 주만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하며 기도(팔랄)하여 아수르의 침략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지킨 것처럼 (이사야서 37:14-15, 20), 의인의 열렬한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기적을 가져 온다. 시편 118장에 보면 우리의 기도를 주께서 응답하실 때, 주가 행하신 것을 ‘우리 눈에 기이한 바’라고 칭송하였다. 그 '기이한 바'가 히브리어로 기사와 이적을 뜻하는 ‘팔라’인데, 바로 이 단어가 또한 ‘팔랄’과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형제어라는 사실이 참 인상적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드린 기도를 주께서 응답하시어 멋들어지게 정의를 행하신 것을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 때 우리의 영혼은 짜릿한 감동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감사를 경험하게 된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팔라)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시편 118:21-24)





카라 
- 기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카라”는 기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샤알
- 요구하다 기원하다

“샤알”은 “요구하다, 기원하다”라는 뜻입니다. 

파가
- 중재로서 탄원

“파가”는 “중재로서의 탄원”을 뜻합니다.

“할라”
- 은혜를 구할 때 사용하는 단어

“할라”는 흔히 은혜를 구할 때는 쓰이기도 하는 단어입니다(시편 119:58).

내가 전심으로 주의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I have sought your face with all my heart; be gracious to me according to your promise.    

자아크
-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 구하는 것

“자아크”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부르짖는 것을 말합니다(삿 3:9, 시 22:5).

라난
- “라난”은 “소리치다, 외치다”(시 17:1, 렘 31:12, 애 2:19)

샤와
“샤와”는 “도움을 청해서 부르짖다”

샤하르
“샤하르”는 “구하다”

‘나’는 부드럽고 신중한 요청으로 애원, 소원, 허락 등등

‘린나’는 슬픈 또는 진정성을 담은 느낌으로 외침, 함성, 부르짖음(시 17 : 1)

‘테필라’는 중재, 탄원, 간청, 애원, 기도 또 넓은 의미로는 찬송이나 거룩한 노래로 어근(語根)은 ‘팔랄’에서 온 변형 단어

תְּפִלָּה 테필라

‘말씀’과 ‘기도’는 기독교 신앙생활의 두 중심축이다.
히브리어로 <테필라 תְּפִלָּה>
동사 <팔랄 פָּלָל>에서 파생하였다.
히브리어에서 ‘기도하다’란 뜻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동사는 매우 다양하다.

예컨대 ‘말하다’란 동사 <아마르 אָמַר>는 하나님께 아뢰고 또 하나님께서 응답하는 대화의 동작을 묘사하는데 종종 ‘기도하다’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그 외에도 ‘요구하다’란 뜻의 동사 <샤알שָׁאַל >도 종종 ‘간구하다’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또 ‘간구’<터힌나 תְּחִנָּה>란 명사는 ‘기도’<터힐라>란 명사와 나란히 병렬되어 나오기도 한다.

‘기도’<테필라 תְּפִלָּה>를 더욱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사 <팔랄 פָּלָל>의 의미를 더 연구해 보아야 한다.

<팔랄>이란 동사가 무슨 뜻으로 쓰였는지 알기는 매우 어려워서 학설도 여러가지이다.
백여 년 전에 독일의 벨하우젠(J. Wellhausen)이라는 학자가 ‘칼날’과 관련된 아랍어 동사 <팔라>과 연관이 있어서 히브리어 <팔랄>은 ‘자상을 내다/상처를 내다’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았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제의 중에 광란하면서 자기 몸에 칼로 자상을 내는 관행을 가리킨다. 성경의 율법은 그러한 우상숭배의 관행을 금지한다(신 14:1).


벨하우젠의 주장과는 달리 아랍어 <팔라>와의 연관성은 인정하지만 그 의미는 ‘자르다’라고 보는학자들이 있다. 이 의미에서 ‘구별하다’란 뜻으로 확장되고 나중에는 ‘판결하다’란 뜻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 중에 <펄릴라>는 ‘재판관’이란 뜻인데 이러한 확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어떤 학자들은 동사 <팔랄>이 본디 ‘넘어지다’란 뜻이었는데 이것이 발전하여서 엎드려 절하는 동작과 연결되면서 ‘기도하다’란 의미로 발전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스파이저(Speiser)는 <팔랄>은 ‘평가하다, 고려하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창 48:11; 삼상 2:25; 겔 16:52; 시 106:30같은 구절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동사가 피엘로 쓰이면 ‘생각하다, 고려하다’란 뜻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성경에서 히브리어 <팔랄> 동사는 84회 나오는데 대부분 히트파엘(재귀형)로 사용되고 있다.
이동사가 히트파엘(재귀형)로 쓰이는 경우에 ‘기도하다’라고 번역한다.
본디 ‘자르다, 구별하다, 고려하다’란 뜻의 이 동사가 히트파엘(재귀형)로 사용되면 그 뜻이 변하여 ‘기도하다’란 뜻이 되는지 그 이유를 알기가 쉽지 않다.

동사 <팔랄>의 의미 중에 ‘구별하다’란 의미가 ‘재판하다’란 뜻으로 확장되었는데 이것이 히트파엘로 쓰이면서 ‘하나님을 재판관으로 삼다’란 뜻으로 의미가 더욱 확장되었다고 보는 주장이 있다.

골드만(Goldman)은 분들은 <팔랄>에 ‘자르다/깨뜨리다’란 뜻이 있음에 주목하여 이것이 히트파엘(재귀형)으로 되면 ‘자기 자신을 깨뜨리다’란 뜻이 되어서 ‘통한하며 뉘우치다’란 뜻이 되고, 이것이 ‘기도하다’란 뜻으로 정착되었다고 본다.


토마스(A. Thomas)는 ‘결정하다, 해결하다’란 뜻이 재귀형이 되어서 ‘중재자로 활동하다’란 뜻이 되는데 여기서 ‘기도하다’란 의미로 발전했다고 본다.

또 어떤 분들은 ‘평가하다’란 동사에서 히트파엘(재귀형)이 되어 ‘자신을 되돌아보다’란 뜻이 되면서 기도하는 행위를 가리키게 되었다고 본다.

이처럼 ‘기도’<테필라>란 단어에 관한 어원을 따져보는 학설은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주장들을 종합해 보면 일정한 공통성이 발견된다.
‘기도’는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자신의 행위를 평가하고 반성하는 행위가 기본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반성의 기준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세우는 행위가 기도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기도’에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말씀’이 없이는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가 될 수 없다.

무릇 종교라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모든 종교는 기도를 강조한다.
기도 없는 종교는 없다.
그러나 다른 종교의 기도와 기독교의 기도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기독교의 기도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기도를 말씀에 입각해서 드리도록 가르치고 있다.
바알종교는 기도자 자신의 여망을 이루기 위해서 바알 신에게 자신의 존재를 바치는 표현으로서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광란의 기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야훼 종교는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움으로써 늘 말씀의 실존으로 자신을 변화시켜가는 기도를 가르친다.

오늘 한국교회는 바알종교의 기도를 드리는가, 아니면 야훼종교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사람이 귀를 둘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언 28:9).





‘테힌나트’ ‘간구’로 번역되는 단어로, 불쌍히 여기다(욥 19 : 21)라는 뜻을 지닌 동사‘하난’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외에도 히브리어에서의 기도로 생각할 수 있는 단어들은 많이 있는데, 기도나 간구나 구함 등, 기도에 해당하는 단어로 번역이 될 수 있는 단어들에 대해 살펴본 것처럼, 구약의 모든 단어들은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나 제의(祭儀) 또는 예배, 왕과 백성 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구하거나 애원하거나 청원을 하거나 부르짖는 것 등이 모두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런 단어들이 쓰이는 점에서, 이 역시 구약의 기도는 기도에 대한 예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8:26∼30 

26. 그런즉 이스라엘 하나님이여 원컨대(나) 주는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 확실하게 하옵소서.
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28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테필라트=테필라)와 간구(테힌나트=테힌나)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하린나=린나)과 비(미트팔렐=팔렐)는 기도(핫테필라=테필라)를 들으시옵소서.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핫테필라=테필라)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이템팔렐루=팔랄=그들이 기도하게 될) 때에 주는 그 간구함(테힌나트=테힌나)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길게 솔로몬이 ‘그런즉’으로 기도와 간구를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얼핏 번역 말씀을 보면, 솔로몬이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에게 하나님의 귀한 백성을 위해 다윗의 후손들에게 왕권을 주시며 맡기신다고 말씀을 하셔놓고 왜 이제 와서 하나님이 딴 말씀을 하십니까? 이런 항변의 뜻으로 이런 기도와 간구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 솔로몬은 온 우주보다도 더 큰, 하늘 위의 하늘에 계시는 어마어마한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그 크신 하나님이 하찮은 자신이 짓는 지상에 있는 작은 건물 안에 하나님이 계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런 낮은 마음으로 ‘그런즉’으로 이어지며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와 간구입니다.

이 말씀에서 ‘기도’는 히브리어 ‘테필라트’로 원형이 ‘테필라’인데 어근이 ‘팔랄’입니다. 뜻은 앞에서 말씀을 드린대로 ‘판결하다(삼상 2:25)’, ‘기도하다(삼상 1:21)’라는 뜻과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드리는 중보기도’를 ‘팔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중보기도’를 할 때 ‘팔랄’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한‘테필라’는 의미가‘팔랄’보다 훨씬 더 낮은 자세로 애타게 애원하는 기도를, 솔로몬이 하나님이 아버지인 다윗에게 하신 언약의 말씀을 생각을 하면서 아주 낮은 자세로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가 ‘테필라’기도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간구’는 ‘테힌나트’인데, 뜻은 ‘긍휼이 여기다(단 4:27), 불쌍히 여기다(욥 19:21)라는 뜻을 지닌 동사 ‘하난’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간구’는 자신이 떳떳하게 하나님에게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명사 수 11 : 20)로 탄원(명사 렘 37 : 20)을 간구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시고 제 간구를 들어달라는 뜻이 ‘간구’라는 ‘테힌나트’라는 단어의 뜻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린나’는 ‘외치다(시 78 : 65)’, ‘기뻐하다(시 32 : 11), ’‘부르짖다(애 2 : 19)의 뜻을 가진 ’‘라난’에서 온 명사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이 말씀에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이 왕권을 주실 것을 언약하신 다윗과 그 후손을 포함한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대표하는 중보자로써의 기도를 하나님의 은혜로 불쌍히 여겨서 들어주실 것을 부르짖는 기도와 간구라는 것이 원어 의미의 기도와 간구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은 다윗에게 언약하신 말씀이 아니고, 모세에게 성막 성전을 짓게 하실 때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실 것을 스스로 말씀하신 것을 상고하면서, 29절에서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거하실 곳에 대한 말씀이 계속 나옵니다. 이 말씀에서 이곳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세상을 예표하는 애굽에서 구원을 해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모세에게 짓도록 한 성막 성전인데, 성막성전이기 때문에 이동을 하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덮으시며 하나님이 인도를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화인줄을 알게 하시고 또 자신이 그런 하나님인 것을 하나님의 백성은 알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이런 기도와 간구는 열왕기 상 9절 3절에서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은 이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하나님의 눈이 바라보시는 성전을 향해서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믿고 이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향해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을 계속 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떤가?

 

왕상 9 : 1-9

1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의 무릇 이루기를 원하던 일이 마친 때에

2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3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 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이 말씀에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 구약의 모든 율법이나 계명은 율법이 완성이 되고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신약으로 다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대속으로 인한 죄 사함과 그로 인해서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진리와 복음입니다. 따라서 이 진리와 복음 외에 다른 진리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것이 곧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기복신앙, 율법신앙, 성경 말씀에서 벗어난 신비주의를 생각하면 무슨 말씀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기도에 대한 단어가 훨씬 더 명료해지고 간단해집니다.

 

프로슈케 : ‘프로슈케’는 명사인데, 동사인 ‘프로슈코마이’와 함께 70인 역에서 히브리어 기도를 번역하는 단어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프로슈케’는 명사로는‘요청’이고, ‘프로슈코마이’는 동사로 ‘요청하다’라는 뜻인데, 중요한 것은 ‘프로슈케’나 ‘프로슈코마이’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요청이라는 단어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데오마이 : ‘요청하다’‘바라다’라는 뜻인데 하나님이나 사람 등 모두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데에시스 : ‘요구하다’‘요청하다’‘바라다’라는 뜻인데, 이 단어 역시 하나님이나 사람들 모두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엔테우시스 : ‘애원’이라는 뜻으로 지배자 또는 왕에게 청원이나 애원을 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

아이테오 : 구하다. 요청하다. 사람끼리도 당연히 해당되는 단어.

유카리스티아 : ‘감사’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토스’인데 ,‘유’는 ‘좋은’이라는 뜻이고, ‘카리스토스’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감사’로 번역이 되는‘유카리스토스’는 ‘하나님의 좋은 은혜’‘의롭고 선하신 은혜’를 ‘유카리스토스’로 ‘성경적인 감사’라는 뜻이 어떤 감사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온 단어가 기도로 번역이 되는 ‘유카리스티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은 은혜’‘의롭고 선하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좋은 은혜는 삯이 아닌 은혜로 거져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얻는 죄 사함과 이로 인해서 얻는 성령에 의한 거듭남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음으로써 신약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 은혜를 감사하며 드리는 것이 예표적이 아닌, 본체적 의미에서의 기도임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약적 의미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성경적인 기도는 무엇이겠습니까?

​신약적 의미의 본체적 기도는 구약의 예표적인 기도와는 다르게 사람이 사람을 대신하는 중보기도는 인간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딤전 2 : ​5, 6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그러면 사람들은 왜 기도를 하는가?

첫째로 사람들이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시간과 공간에 가두어서 창조를 해서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에 인간은 미래의 일을 알 수 없고 그래서 무엇엔가 또 자신이 원하고 구하는 것들을 기도를 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창조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는 누군가를 향해서 하는 것인데, 기도나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닌, 사단 마귀의 미혹에 빠져서 사단 마귀가 기뻐하는, 생명의 길이 아닌, 사망의 길로 인도하는 내용의 기도를 부지불식 간에 우리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도는 안테나의 방향이 달라지고, 기도하는 대상이 달라지면 기도의 응답이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담 부부나 예수님이 성령에게 이끌려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말씀을 생각하면 분명히 알 것입니다.

 

둘째 기도를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육적 결핍과 영적인 결핍 때문에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은 육적 결핍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은 아주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육의 결핍을 채우려는 기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 세상에 속한 백성들이 하는 기도인 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육적인 결핍을 채워달라고 하는 기도는, 원어적으로 보면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프로슈케’또는‘프로슈코마이’가 아닌, 데오마이, 데에시스, 엔테우시스에 해당하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 6 : 53- 63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래서 어떤 이유로든지 살리는 것에 무익한, 육을 위한 것은 기도가 됐건, 예배가 됐건, 설교가 됐건, 찬양이 됐건, 영광을 돌리는 것이 건 간에 그 어떤 것도, 살리는 것에는 무익한 것이 대상이 되면 안 됩니다.

 

사 29 :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계명과 율법의 마침이 되는 분시신 것을 생각을 하면, 신약적으로 왜 하나님이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시는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원어로 보았을 때, 프로슈코마이와 유카리스티아 기도 두 단어 외에는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한, 자랑할 것은 오직 자신의 연약함과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대속과 성령으로의 거듭남을 생각하면, 신약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원어로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유카리스티아로 인해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프로슈코마이 기도가 되지 않는 것(거져 받은 죄 사함의 은혜와 거듭남의 은혜와 사랑)때문에 예수님이 여기서 벗어나는 기도를 싫어하신다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요 16 : 1-3 ; 6-20

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3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말씀이 길었습니다만, 복음교실은 침례교는 어떻고 감리교는 어떻고 이단들은 어떻고 가톨릭은 어떻고 이런 말 하는 것 아닙니다.

또 예수님은 얼마나 열심히 크게 부르짖는 기도를 하느냐 이런 것이 아니라 네가 진정으로 ‘프로슈코마이와 유카리스티아 기도를 하느냐?’ 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친히 자신이 알려주시는 주의 기도인 것을 예수님은 제자들인 깨닫게 하시려는 기도에 해한 말씀인 알아야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배나 찬송이나 기도나 모든 것은 복음교실이 수없이 반복을 하며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예배, 찬송, 기도가 되어야 하고, 이것은 결국 과연 나는 진정한 주어를 누구로 믿느냐의 문제이고, 따르느냐의 문제로 연결이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주어 문제는 결국 하나님의 속성을 속성대로 모두 빼놓지 않고 믿느냐, 믿지 않는 믿음이냐에 연결이 되고, 이 신앙으로 참 신앙과 짝퉁 신앙이 나누어지는 T형 분기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왕으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에게만 돌린다고 하면서도, 늘 사실은 자신이 주어가 되는, 그런 기도가 되면 안 되는 것을 예수님은 주의 기도를 알려주시기 전 제자들에게 당부로 하신 말씀이 주의 기도에 대한 선행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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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크리스천투데이에서 크리스천이 기도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증상에 관해 소개한 글이 눈길을 끈다.
다음은 우리가 기도의 능력을 간과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 4가지를 소개한다.

1. 진리로 거짓에 맞서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나 계시 그리고 하늘의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해달라고 기도할 때이다.
기도는 의사소통이다.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끊어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진리가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의 능력의 터 위에 확실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의 이름의 능력을 알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다.

2.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

실제로 모든 상황에서 기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분명히 말한다.
우리가 모든 일에 대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매번 당신에게 모든 능력으로 나타나신다.

3. 너무 쉽게 걱정한다.

빌립보서 4장 6절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한다.

기도는 독립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불안에 대한 강력한 대안이다. 걱정할 때 우리는 나 자신, 직장 또는 외부 환경을 신뢰한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선포하는 기도와 간구를 통해 우리는 그분이 완성하신 십자가 사역을 의존하게 된다.

4. 스스로의 대안을 먼저 찾는다.

우리는 항상 기도의 능력을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의 기본값은 계획과 전략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간절하고 신실한 기도에 담을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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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祈禱)

여러분과 나의 생활에서 기도가 없다면 주님과 나 사이가 숨 막히고, 죽어 버린 불모지와도 같을 것입니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있듯이,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있듯이 무의식중에라도, 잠 속에서도 무시로 불러보듯 주님을 향한 우리의 생각을 멈출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언어 없는 침묵의 기도도, 신음도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기도 없이 지나친 적이 없듯 우리의 전 존재가 기도일 것입니다.
때로는 탄식처럼 호소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기뻐서 찬송이 온통 기도일 때가 있고, 죄악을 자백하면서 눈물 흘릴 때도, 간구로 몇 날을 지날 때도 있습니다. 물질적인 필요, 건강의 필요, 가족과 자녀에 관한 문제, 진로, 그리고 민족과 세계를 위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기도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을 위해 생명을 걸고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버림을 받을지라도, 사도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짐을 받더라도, 존 낙스는 죽음이냐 스코틀랜드냐,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결사적인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저절로는 안 되는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구할 때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해 특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경 말씀과 주님을 생각하면서 모든 언어가 정지된 상태에서 전 존재의 문을 다 열고 주 앞에서 기도의 일광욕을 하면 많은 변화를 받고 깊은 은혜에 젖어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함을 받았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중 하나가 기도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하려 함이라”(요 14:13)

테니슨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이냐? 나는 어린아이처럼 이것저것 달라고 조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아이처럼 기도하는 자세, 피조물 의식을 갖고 모든 것을 신뢰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기도의 제목으로 너무 큰 것도, 너무 작은 것도 없습니다. 기독교의 4대 인물은 사도 바울, 어거스틴, 루터, 요한 웨슬레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의 생활 역시 기도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였고, 어거스틴은 기도의 생활 속에 깊은 경건이 있었습니다. 루터는 하루에 3~4시간 동안 기도 속에서 전투를 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퍼드대학에서 홀리 클럽(Holy Club)운동을 벌이면서, 학생 시절과 교수 생활까지 합해서 15년 동안 20여 명의 우수한 학생들을 모아 놓고 매일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기도와 성경 읽는 것을 일과로 삼았습니다.


1727년 독일의 헤른후트라는 곳에서 경건파 지도자들이 모여서 시작한 모라비안 운동은 처음부터 기도를 제일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48명이 24시간 연쇄(連鎖)기도를 시작한 이래로 100년 동안 그 제단에 기도의 불이 꺼진 일이 없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도 이 모라비안의 모임에서 변화를 받아 감리교를 창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100년 동안 불을 끄지 않고 24시간 연쇄기도를 한 단체는 이 모라비안 선교단 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성숙한 크리스천이라도 하나님의 우주 드라마 속에서는 작은 나사못 역할밖에 못합니다.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작은 부분을 완전히 감당해 내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기도는 힘을 생산해 냅니다. 기도는 없는 것을 있게 합니다. 기도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가져오게 합니다. 기도는 사물을 변화시킵니다. 자기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창조력이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이 생겨나고, 터널이 뚫리고, 돌같이 굳은 마음이 살같이 부드러워집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늘 규칙적으로 기도하시고, 밤 새워 기도하시고,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시고, 제자들을 택하시기 전에, 그리고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신 기도의 생활이었습니다. 기도 최우선의 삶을 젊었을 때부터 길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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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도로 말하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내게 말하지 않은 기도는 독백이다. 
공상에 흐르고 만다. 
주님과 만나지기만 하면 결코 밤이 그대로 밤일 수 없다. 
소경은 눈이 잠긴 채로 있을 수 없다. 
죽은 자도 그대로 무덤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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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무엇엔가 얽매이고 쫓기는 삶을 살고 있다. 
고요한 시간, 주님과 나만의 장소, 묵상과 기도와 성경 속에 파묻히는 하루의 30분이 없이 영적 생명이 유지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잠자는 시간을 줄이더라도, 하고 있는 일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려서라도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회복해야 한다. 
여기에 크리스천의 산실(産室)이 있고, 생존의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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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꿈을 심고 가꾸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사람의 생각 속에 꿈을 잉태시킨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임신이 되듯이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던 것을 “나는 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환상과 꿈과 가능성을 심어 주신다. 내게 심어진 꿈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것이 기도의 열매라고 하겠다. 2021년 나의 꿈을 내 가슴에 심고 그 꿈을 기도와 말씀으로 가꾸면서 2021년 마지막 날에 열매가 어떻게 맺혔는지 결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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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祈禱)
마태복음 6:7∼9a


7. 또 기도(프로슈코메노이)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아이테사이=아이테오)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성경 원어로 풀어보는 기도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어떤 것일까?
기도로 하나님에게 생각을 하게하고, 내 기도로 인해 하나님이 하나님의 계획을 별도로 세우거나 바꾸거나 하게 할 수 있는 것인가?
피조물인 사람의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왜 기도를 하나님은 또는 예수님은 하게 하신 것인가? 

여러분은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절대 주권자시며,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이나 생각을 인간이 하는 기도로 바꾸시거나 혹은 인간이 하는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과연 바꿀 수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열심히 기도를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속성을 속성대로 믿는 기도일까요?

아니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왜 자기가 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이 그 때 그 때 바뀌는 것처럼 생각이 돼서 열심히 기도를 하는 믿음이 생기는 것일까요?

지금 기도 자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할 때 누가 주어냐? 즉 누구를 위한 기도냐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 역시 돈 문제로 정말 너무너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정말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정확히 3년 동안 매달을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넘어갈 수 있도록 해주신 예수님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소중한 체험인데요, 그래서 지금도 저는 예수님 경리과장 같은 예수님이라는 말을 농담처럼 곧잘 합니다. 예수님처럼 정말 정확한 분은 없는 것을 저는 너무 잘 압니다. 그리고 많은 목사님들 역시 기도가 만능인 것으로 생각을 하는 목사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기도는 왜 하는가?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가 도대체 무엇인지 아는 것이 기도에 대해 이런 생각을 깊이 하면서 성경 말씀들을 찾아가보면, 기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팔랄
- 간섭하다, 판단하다, 중재하다, 기도하다.

“팔랄”이란 기도는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입니다. 히브리어 단어 해석이 사실은 참 어렵습니다. 히브리어를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 해석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도의 대표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어 “팔랄”은 “간섭하다, 판단하다, 중재하다, 기도하다”는 뜻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외에는 계시지 않는 것을 구약의 기도를 대표하는 “팔랄”이라는 단어에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카라 
- 기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카라”는 기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샤알
- 요구하다 기원하다

“샤알”은 “요구하다, 기원하다”라는 뜻입니다. 

파가
- 중재로서 탄원

“파가”는 “중재로서의 탄원”을 뜻합니다.

“할라”
- 은혜를 구할 때 사용하는 단어

“할라”는 흔히 은혜를 구할 때는 쓰이기도 하는 단어입니다(시편 119:58).

내가 전심으로 주의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I have sought your face with all my heart; be gracious to me according to your promise.    

자아크
-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 구하는 것

“자아크”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부르짖는 것을 말합니다(삿 3:9, 시 22:5).

라난
- “라난”은 “소리치다, 외치다”(시 17:1, 렘 31:12, 애 2:19)

샤와
“샤와”는 “도움을 청해서 부르짖다”

샤하르
“샤하르”는 “구하다”

‘나’는 부드럽고 신중한 요청으로 애원, 소원, 허락 등등

‘린나’는 슬픈 또는 진정성을 담은 느낌으로 외침, 함성, 부르짖음(시 17 : 1)

‘테필라’는 중재, 탄원, 간청, 애원, 기도 또 넓은 의미로는 찬송이나 거룩한 노래로 어근(語根)은 ‘팔랄’에서 온 변형 단어

‘테힌나트’‘간구’로 번역되는 단어로, 불쌍히 여기다(욥 19 : 21)라는 뜻을 지닌 동사‘하난’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외에도 히브리어에서의 기도로 생각할 수 있는 단어들은 많이 있는데, 기도나 간구나 구함 등, 기도에 해당하는 단어로 번역이 될 수 있는 단어들에 대해 살펴본 것처럼, 구약의 모든 단어들은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나 제의(祭儀) 또는 예배, 왕과 백성 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구하거나 애원하거나 청원을 하거나 부르짖는 것 등이 모두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런 단어들이 쓰이는 점에서, 이 역시 구약의 기도는 기도에 대한 예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8:26∼30 

26. 그런즉 이스라엘 하나님이여 원컨대(나) 주는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 확실하게 하옵소서.
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28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테필라트=테필라)와 간구(테힌나트=테힌나)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하린나=린나)과 비(미트팔렐=팔렐)는 기도(핫테필라=테필라)를 들으시옵소서.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핫테필라=테필라)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이템팔렐루=팔랄=그들이 기도하게 될) 때에 주는 그 간구함(테힌나트=테힌나)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길게 솔로몬이 ‘그런즉’으로 기도와 간구를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얼핏 번역 말씀을 보면, 솔로몬이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에게 하나님의 귀한 백성을 위해 다윗의 후손들에게 왕권을 주시며 맡기신다고 말씀을 하셔놓고 왜 이제 와서 하나님이 딴 말씀을 하십니까? 이런 항변의 뜻으로 이런 기도와 간구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 솔로몬은 온 우주보다도 더 큰, 하늘 위의 하늘에 계시는 어마어마한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그 크신 하나님이 하찮은 자신이 짓는 지상에 있는 작은 건물 안에 하나님이 계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런 낮은 마음으로 ‘그런즉’으로 이어지며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와 간구입니다.

이 말씀에서 ‘기도’는 히브리어 ‘테필라트’로 원형이 ‘테필라’인데 어근이 ‘팔랄’입니다. 뜻은 앞에서 말씀을 드린대로 ‘판결하다(삼상 2:25)’, ‘기도하다(삼상 1:21)’라는 뜻과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드리는 중보기도’를 ‘팔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중보기도’를 할 때 ‘팔랄’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한‘테필라’는 의미가‘팔랄’보다 훨씬 더 낮은 자세로 애타게 애원하는 기도를, 솔로몬이 하나님이 아버지인 다윗에게 하신 언약의 말씀을 생각을 하면서 아주 낮은 자세로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가 ‘테필라’기도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간구’는 ‘테힌나트’인데, 뜻은 ‘긍휼이 여기다(단 4:27), 불쌍히 여기다(욥 19:21)라는 뜻을 지닌 동사 ‘하난’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간구’는 자신이 떳떳하게 하나님에게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명사 수 11 : 20)로 탄원(명사 렘 37 : 20)을 간구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시고 제 간구를 들어달라는 뜻이 ‘간구’라는 ‘테힌나트’라는 단어의 뜻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린나’는 ‘외치다(시 78 : 65)’, ‘기뻐하다(시 32 : 11), ’‘부르짖다(애 2 : 19)의 뜻을 가진 ’‘라난’에서 온 명사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이 말씀에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이 왕권을 주실 것을 언약하신 다윗과 그 후손을 포함한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대표하는 중보자로써의 기도를 하나님의 은혜로 불쌍히 여겨서 들어주실 것을 부르짖는 기도와 간구라는 것이 원어 의미의 기도와 간구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은 다윗에게 언약하신 말씀이 아니고, 모세에게 성막 성전을 짓게 하실 때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실 것을 스스로 말씀하신 것을 상고하면서, 29절에서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거하실 곳에 대한 말씀이 계속 나옵니다. 이 말씀에서 이곳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세상을 예표하는 애굽에서 구원을 해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모세에게 짓도록 한 성막 성전인데, 성막성전이기 때문에 이동을 하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덮으시며 하나님이 인도를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화인줄을 알게 하시고 또 자신이 그런 하나님인 것을 하나님의 백성은 알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이런 기도와 간구는 열왕기 상 9절 3절에서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은 이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하나님의 눈이 바라보시는 성전을 향해서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믿고 이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향해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을 계속 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떤가?

 

왕상 9 : 1-9

1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의 무릇 이루기를 원하던 일이 마친 때에

2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3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 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이 말씀에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 구약의 모든 율법이나 계명은 율법이 완성이 되고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신약으로 다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대속으로 인한 죄 사함과 그로 인해서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진리와 복음입니다. 따라서 이 진리와 복음 외에 다른 진리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것이 곧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기복신앙, 율법신앙, 성경 말씀에서 벗어난 신비주의를 생각하면 무슨 말씀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기도에 대한 단어가 훨씬 더 명료해지고 간단해집니다.

 

프로슈케 : ‘프로슈케’는 명사인데, 동사인 ‘프로슈코마이’와 함께 70인 역에서 히브리어 기도를 번역하는 단어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프로슈케’는 명사로는‘요청’이고, ‘프로슈코마이’는 동사로 ‘요청하다’라는 뜻인데, 중요한 것은 ‘프로슈케’나 ‘프로슈코마이’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요청이라는 단어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데오마이 : ‘요청하다’‘바라다’라는 뜻인데 하나님이나 사람 등 모두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데에시스 : ‘요구하다’‘요청하다’‘바라다’라는 뜻인데, 이 단어 역시 하나님이나 사람들 모두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엔테우시스 : ‘애원’이라는 뜻으로 지배자 또는 왕에게 청원이나 애원을 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

아이테오 : 구하다. 요청하다. 사람끼리도 당연히 해당되는 단어.

유카리스티아 : ‘감사’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토스’인데 ,‘유’는 ‘좋은’이라는 뜻이고, ‘카리스토스’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감사’로 번역이 되는‘유카리스토스’는 ‘하나님의 좋은 은혜’‘의롭고 선하신 은혜’를 ‘유카리스토스’로 ‘성경적인 감사’라는 뜻이 어떤 감사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온 단어가 기도로 번역이 되는 ‘유카리스티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은 은혜’‘의롭고 선하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좋은 은혜는 삯이 아닌 은혜로 거져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얻는 죄 사함과 이로 인해서 얻는 성령에 의한 거듭남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음으로써 신약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 은혜를 감사하며 드리는 것이 예표적이 아닌, 본체적 의미에서의 기도임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약적 의미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성경적인 기도는 무엇이겠습니까?

​신약적 의미의 본체적 기도는 구약의 예표적인 기도와는 다르게 사람이 사람을 대신하는 중보기도는 인간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딤전 2 : ​5, 6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그러면 사람들은 왜 기도를 하는가?

첫째로 사람들이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시간과 공간에 가두어서 창조를 해서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에 인간은 미래의 일을 알 수 없고 그래서 무엇엔가 또 자신이 원하고 구하는 것들을 기도를 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창조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는 누군가를 향해서 하는 것인데, 기도나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닌, 사단 마귀의 미혹에 빠져서 사단 마귀가 기뻐하는, 생명의 길이 아닌, 사망의 길로 인도하는 내용의 기도를 부지불식 간에 우리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도는 안테나의 방향이 달라지고, 기도하는 대상이 달라지면 기도의 응답이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담 부부나 예수님이 성령에게 이끌려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말씀을 생각하면 분명히 알 것입니다.

 

둘째 기도를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육적 결핍과 영적인 결핍 때문에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은 육적 결핍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은 아주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육의 결핍을 채우려는 기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 세상에 속한 백성들이 하는 기도인 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육적인 결핍을 채워달라고 하는 기도는, 원어적으로 보면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프로슈케’또는‘프로슈코마이’가 아닌, 데오마이, 데에시스, 엔테우시스에 해당하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 6 : 53- 63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래서 어떤 이유로든지 살리는 것에 무익한, 육을 위한 것은 기도가 됐건, 예배가 됐건, 설교가 됐건, 찬양이 됐건, 영광을 돌리는 것이 건 간에 그 어떤 것도, 살리는 것에는 무익한 것이 대상이 되면 안 됩니다.

 

사 29 :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계명과 율법의 마침이 되는 분시신 것을 생각을 하면, 신약적으로 왜 하나님이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시는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원어로 보았을 때, 프로슈코마이와 유카리스티아 기도 두 단어 외에는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한, 자랑할 것은 오직 자신의 연약함과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대속과 성령으로의 거듭남을 생각하면, 신약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원어로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유카리스티아로 인해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프로슈코마이 기도가 되지 않는 것(거져 받은 죄 사함의 은혜와 거듭남의 은혜와 사랑)때문에 예수님이 여기서 벗어나는 기도를 싫어하신다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요 16 : 1-3 ; 6-20

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3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말씀이 길었습니다만, 복음교실은 침례교는 어떻고 감리교는 어떻고 이단들은 어떻고 가톨릭은 어떻고 이런 말 하는 것 아닙니다.

또 예수님은 얼마나 열심히 크게 부르짖는 기도를 하느냐 이런 것이 아니라 네가 진정으로 ‘프로슈코마이와 유카리스티아 기도를 하느냐?’ 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친히 자신이 알려주시는 주의 기도인 것을 예수님은 제자들인 깨닫게 하시려는 기도에 해한 말씀인 알아야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배나 찬송이나 기도나 모든 것은 복음교실이 수없이 반복을 하며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예배, 찬송, 기도가 되어야 하고, 이것은 결국 과연 나는 진정한 주어를 누구로 믿느냐의 문제이고, 따르느냐의 문제로 연결이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주어 문제는 결국 하나님의 속성을 속성대로 모두 빼놓지 않고 믿느냐, 믿지 않는 믿음이냐에 연결이 되고, 이 신앙으로 참 신앙과 짝퉁 신앙이 나누어지는 T형 분기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왕으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에게만 돌린다고 하면서도, 늘 사실은 자신이 주어가 되는, 그런 기도가 되면 안 되는 것을 예수님은 주의 기도를 알려주시기 전 제자들에게 당부로 하신 말씀이 주의 기도에 대한 선행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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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크리스천투데이에서 크리스천이 기도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증상에 관해 소개한 글이 눈길을 끈다. 다음은 우리가 기도의 능력을 간과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 4가지를 소개한다.

1. 진리로 거짓에 맞서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나 계시 그리고 하늘의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해달라고 기도할 때이다. 기도는 의사소통이다.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끊어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진리가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의 능력의 터 위에 확실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의 이름의 능력을 알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다.

2.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

실제로 모든 상황에서 기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분명히 말한다. 우리가 모든 일에 대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매번 당신에게 모든 능력으로 나타나신다.

3. 너무 쉽게 걱정한다.

빌립보서 4장 6절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한다.

기도는 독립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불안에 대한 강력한 대안이다. 걱정할 때 우리는 나 자신, 직장 또는 외부 환경을 신뢰한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선포하는 기도와 간구를 통해 우리는 그분이 완성하신 십자가 사역을 의존하게 된다.

4. 스스로의 대안을 먼저 찾는다.

우리는 항상 기도의 능력을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의 기본값은 계획과 전략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간절하고 신실한 기도에 담을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99048#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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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祈禱)

여러분과 나의 생활에서 기도가 없다면 주님과 나 사이가 숨 막히고, 죽어 버린 불모지와도 같을 것입니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있듯이,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있듯이 무의식중에라도, 잠 속에서도 무시로 불러보듯 주님을 향한 우리의 생각을 멈출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언어 없는 침묵의 기도도, 신음도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기도 없이 지나친 적이 없듯 우리의 전 존재가 기도일 것입니다.
때로는 탄식처럼 호소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기뻐서 찬송이 온통 기도일 때가 있고, 죄악을 자백하면서 눈물 흘릴 때도, 간구로 몇 날을 지날 때도 있습니다. 물질적인 필요, 건강의 필요, 가족과 자녀에 관한 문제, 진로, 그리고 민족과 세계를 위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기도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을 위해 생명을 걸고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버림을 받을지라도, 사도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짐을 받더라도, 존 낙스는 죽음이냐 스코틀랜드냐,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결사적인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저절로는 안 되는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구할 때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해 특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경 말씀과 주님을 생각하면서 모든 언어가 정지된 상태에서 전 존재의 문을 다 열고 주 앞에서 기도의 일광욕을 하면 많은 변화를 받고 깊은 은혜에 젖어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함을 받았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중 하나가 기도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하려 함이라”(요 14:13)

테니슨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이냐? 나는 어린아이처럼 이것저것 달라고 조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아이처럼 기도하는 자세, 피조물 의식을 갖고 모든 것을 신뢰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기도의 제목으로 너무 큰 것도, 너무 작은 것도 없습니다. 기독교의 4대 인물은 사도 바울, 어거스틴, 루터, 요한 웨슬레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의 생활 역시 기도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였고, 어거스틴은 기도의 생활 속에 깊은 경건이 있었습니다. 루터는 하루에 3~4시간 동안 기도 속에서 전투를 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퍼드대학에서 홀리 클럽(Holy Club)운동을 벌이면서, 학생 시절과 교수 생활까지 합해서 15년 동안 20여 명의 우수한 학생들을 모아 놓고 매일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기도와 성경 읽는 것을 일과로 삼았습니다.


1727년 독일의 헤른후트라는 곳에서 경건파 지도자들이 모여서 시작한 모라비안 운동은 처음부터 기도를 제일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48명이 24시간 연쇄(連鎖)기도를 시작한 이래로 100년 동안 그 제단에 기도의 불이 꺼진 일이 없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도 이 모라비안의 모임에서 변화를 받아 감리교를 창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100년 동안 불을 끄지 않고 24시간 연쇄기도를 한 단체는 이 모라비안 선교단 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성숙한 크리스천이라도 하나님의 우주 드라마 속에서는 작은 나사못 역할밖에 못합니다.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작은 부분을 완전히 감당해 내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기도는 힘을 생산해 냅니다. 기도는 없는 것을 있게 합니다. 기도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가져오게 합니다. 기도는 사물을 변화시킵니다. 자기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창조력이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이 생겨나고, 터널이 뚫리고, 돌같이 굳은 마음이 살같이 부드러워집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늘 규칙적으로 기도하시고, 밤 새워 기도하시고,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시고, 제자들을 택하시기 전에, 그리고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신 기도의 생활이었습니다. 기도 최우선의 삶을 젊었을 때부터 길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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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도로 말하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내게 말하지 않은 기도는 독백이다. 
공상에 흐르고 만다. 
주님과 만나지기만 하면 결코 밤이 그대로 밤일 수 없다. 
소경은 눈이 잠긴 채로 있을 수 없다. 
죽은 자도 그대로 무덤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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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무엇엔가 얽매이고 쫓기는 삶을 살고 있다. 
고요한 시간, 주님과 나만의 장소, 묵상과 기도와 성경 속에 파묻히는 하루의 30분이 없이 영적 생명이 유지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잠자는 시간을 줄이더라도, 하고 있는 일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려서라도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회복해야 한다. 
여기에 크리스천의 산실(産室)이 있고, 생존의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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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꿈을 심고 가꾸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사람의 생각 속에 꿈을 잉태시킨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임신이 되듯이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던 것을 “나는 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환상과 꿈과 가능성을 심어 주신다. 내게 심어진 꿈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것이 기도의 열매라고 하겠다. 2021년 나의 꿈을 내 가슴에 심고 그 꿈을 기도와 말씀으로 가꾸면서 2021년 마지막 날에 열매가 어떻게 맺혔는지 결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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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를  총체적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신문은 범죄백서 같다. 이런 일들은 기도와 금식 외에는 해결되지 않는다. 영적 싸움에 있어서 공중 권세를 잡은 자의 세력을 꺾는 가장 강렬한 힘은 기도다.

구국적 차원에서 기도운동을 전개해야 하겠다. 구국 금식기도는 성서적이다. 블레셋의 굴레에서 미스바의 금식성회, 모압과 암몬의 새일산 연합군 침략 때 여호사밧 왕의 회개금식 선포, 니느웨 성의 삼일 간 회개 금식기도, 하만의 유대인 말살 음모에 대항한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전 유대인들의 삼일 간 금식기도, 요엘서의 금식성회 등 거국적 회개 금식기도가 오늘의 우리에게 국난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는데 본이 될 것 같다.

루터의 기도가 유럽 일천년의 암흑시대에 종교개혁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죤 낙스의 기도가 스코틀랜드를 개혁했다. 허드슨 테일러의 기도가 중국 대륙선교의 길을 개척했다. 리빙스턴의 기도가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에 복음의 길을 열었다. 윌리암 케리의 기도가 인도의 23개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했고, 아도니람 저드슨의 기도가 미얀마 성경을 번역했다. 모라비안 교도의 100년에 걸친 쉼 없는 연쇄기도가 세계 도처에 복음의 문을 열었다.

빅토리아 영국여왕은 왕위 계승을 통고받는 순간 엎드려 기도했다. 64년간의 영국 통치를 성경과 기도로 했다. 영국 역사상 그녀만큼 위대한 왕은 없었다. 중국을 위한 수많은 기도가 지하교인을 낳게 했다. 기도가 동구와 소련의 철의 문을 열게 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공산화되고 북한의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한반도의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던 1976년 12월 나는 19명의 CCC 간사들과 민족을 위한 40일 금식기도를 드렸다. 1980년 3·1절을 앞두고는 거국적으로 40일 간 금식기도 캠페인을 했고, 3·1절 때는 3일 간 3만 명이 산에 가서 금식기도한 일이 있다. 1984년 세계기도성회 때는 연 10만 명이 3일 간 뚝섬에서 금식성회를 했다. 지난 해 연말에는 CCC 대학생 1만 2천명이 여의도 에어돔에 모여 3일 간 금식하며 국난극복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십시일반으로 모은 1억 원의 성금을 어려운 이웃을 돕는 단체에 기증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데 모아진 기도 이상 효과적이고 강렬한 것은 없다. 기도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최대의 원동력이다. 기도는 교회가 가진 도덕적, 영적 부흥, 사회 부흥의 최대 에네르기다. 이 힘이 가동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주님을 위해, 민족의 구원과 통일과 세계 선교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은 기도폭탄을 터뜨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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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공호흡과 기도

흔히들 기도는 호흡과 같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호흡은 누가 가르쳐서 호흡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호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호흡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면 기도하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왜 호흡하는 것을 배워야 할까요?
호흡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호흡이 잘못되어 목숨을 빼앗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목숨을 빼앗는 것은 아니지만 잘못된 호흡은 사람 몸의 기운을 약하게 합니다.

단공호흡법은 말 그대로 ‘단(丹)’을 비우는 호흡법이다. 다음은 변 선생의 설명이다. ‘우리 몸에는 항상 기운이 흐르고 있다. 기(氣)와 혈(血)이다. 혈 흐름의 중심은 심장이며 기 흐름은 단전(丹田)이 주관한다. 단전은 그 작용에 따라 세 곳으로 나눌 수 있다. 생각을 주관하는 상단(머리), 느낌을 주관하는 중단(가슴), 행을 주관하는 하단(아랫배)이다. 일반적으로 단전은 하단을 가리킨다. 단전 기운의 원활한 흐름이 건강한 신체의 기본이 된다. 스트레스 등으로 기가 흐르지 못하고 막히면 몸에 이상이 온다. 호흡법으로 단을 비워 새로운 기를 넣어주면 흐름이 원활해진다.’ 

지난 5월 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경찰의 폭력에 희생된 흑인 조지 플로이드(46) 사건은 플로이드가 경찰이 무릎으로 그의 목을 누르고 있을 때 “나는 숨을 쉴 수 없다!(I can't breath!)”라는 외침이 동영상으로 되면서 각 지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사건으로 발전되었다.


미 전역으로 확산된 시위에서는 플로이드가 숨가쁘게 말했던 “숨 쉴 수 없다”와 더불어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가 단골 문구로 등장한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흑인의 인권 유린을 규탄하는 시위 상황을 알리는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에선 “BLACK LIVES MATTER”가 디폴트처럼 따라붙는다.


호흡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생체 활동 중의 하나입니다. 호흡은 인간에게 필요한 산소를 공급해주고 몸에는 필요치 않은 이산화탄소를 밖으로 배출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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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금식
- 기도와 금식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기도와 금식 사이의 관계는 성경 안에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둘을 연결하는 공통점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도와 금식의 사례에 나타납니다. 구약에서는 기도와 함께 금식하는 것이 실제 또는 예기된 재앙에 직면하여 필요와 의존 의식, 비참한 무력감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도와 금식은 애통과 회개, 깊은 영적 필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 1장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고뇌 때문에 기도하며 금식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의 여러 날의 기도는 눈물과 금식, 그의 백성을 대신하는 죄의 자백, 그리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간청으로 그 특징을 나타냅니다. 그의 걱정이 너무 강하게 나타난 것으로 보아서 그가 기도 중에 먹고 마실 쉼의 시간을 취할 가능성은 거의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임한 황폐함을 알게 된 다니엘도 비슷한 태도를 보입니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단 9:3). 다니엘은 느헤미야처럼 금식하며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범죄 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옵니다”(5절).


구약의 여러 경우에서, 금식은 중보기도와 연관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병든 아이를 놓고 주 앞에서 울며 간절하게 중보기도(삼하 12:21∼22)하면서 금식합니다(삼하 12:16). 에스더는 그녀의 남편인 왕에게 나아갈 계획을 한 후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에게 그녀를 위해 금식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에 4:16). 분명히 금식과 간청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도 기도와 금식이 있지만 회개 및 죄의 자백과 관련되지는 않습니다. 여선지자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눅 2:37) 섬겼습니다. 그녀는 84 세의 나이에 이스라엘의 약속된 구세주를 기다리면서 성전에서 기도와 금식으로 주를 섬겼습니다. 또한 신약 성경에서 안디옥 교회는 성령께서 사울과 바나바에게 주의 사역을 위임하라고 말씀하실 때 예배와 관련해서 금식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도하고 금식하며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환송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례에서 기도와 금식은 주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은총을 구하는 요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식이 동반될 때 주께서 기도에 응답하실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기도와 함께 금식을 하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들의 진실성과 그들이 처한 상황이 매우 중대한 특성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상황이 더욱 심각할수록 금식과 기도는 더욱 적절하여집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어떤 소년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제자들은 이전에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세를 받았지만(마 6:7) 그 소년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왜 자신들은 귀신으로부터 그 아이를 해방시키는데 실패하였는지를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에는 ‘금식’이 추가되어 있습니다(마 17:21). 이 특별한 경우에, 귀신은 예외적으로 악하고 완강했습니다(막 9:21∼22). 예수께서는 고집 센 원수는 똑같이 강하고 확고한 믿음으로 대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기도는 영적 전투를 위해 준비된 무기이며(엡 6:18), 금식은 기도에 집중하고 결단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금식에 대한 신학은 신자들의 우선순위에 대한 신학으로서 신자들은 주님께 나뉘지 않은 집중적인 헌신과 영적 삶에 대한 관심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헌신은 음식과 음료와 같은 정상적이고 좋은 것들로부터 잠시 동안 삼가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와의 중단 없는 교제의 시간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은 것”(히 10:19)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더 나은 것들 중”에 가장 기쁜 것입니다. 기도와 금식은 짐이나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되며 도리어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에 대한 축하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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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를  총체적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신문은 범죄백서 같다. 이런 일들은 기도와 금식 외에는 해결되지 않는다. 영적 싸움에 있어서 공중 권세를 잡은 자의 세력을 꺾는 가장 강렬한 힘은 기도다.

구국적 차원에서 기도운동을 전개해야 하겠다. 구국 금식기도는 성서적이다. 블레셋의 굴레에서 미스바의 금식성회, 모압과 암몬의 새일산 연합군 침략 때 여호사밧 왕의 회개금식 선포, 니느웨 성의 삼일 간 회개 금식기도, 하만의 유대인 말살 음모에 대항한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전 유대인들의 삼일 간 금식기도, 요엘서의 금식성회 등 거국적 회개 금식기도가 오늘의 우리에게 국난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는데 본이 될 것 같다.

루터의 기도가 유럽 일천년의 암흑시대에 종교개혁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죤 낙스의 기도가 스코틀랜드를 개혁했다. 허드슨 테일러의 기도가 중국 대륙선교의 길을 개척했다. 리빙스턴의 기도가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에 복음의 길을 열었다. 윌리암 케리의 기도가 인도의 23개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했고, 아도니람 저드슨의 기도가 미얀마 성경을 번역했다. 모라비안 교도의 100년에 걸친 쉼 없는 연쇄기도가 세계 도처에 복음의 문을 열었다.

빅토리아 영국여왕은 왕위 계승을 통고받는 순간 엎드려 기도했다. 64년간의 영국 통치를 성경과 기도로 했다. 영국 역사상 그녀만큼 위대한 왕은 없었다. 중국을 위한 수많은 기도가 지하교인을 낳게 했다. 기도가 동구와 소련의 철의 문을 열게 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공산화되고 북한의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한반도의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던 1976년 12월 나는 19명의 CCC 간사들과 민족을 위한 40일 금식기도를 드렸다. 1980년 3·1절을 앞두고는 거국적으로 40일 간 금식기도 캠페인을 했고, 3·1절 때는 3일 간 3만 명이 산에 가서 금식기도한 일이 있다. 1984년 세계기도성회 때는 연 10만 명이 3일 간 뚝섬에서 금식성회를 했다. 지난 해 연말에는 CCC 대학생 1만 2천명이 여의도 에어돔에 모여 3일 간 금식하며 국난극복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십시일반으로 모은 1억 원의 성금을 어려운 이웃을 돕는 단체에 기증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데 모아진 기도 이상 효과적이고 강렬한 것은 없다. 기도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최대의 원동력이다. 기도는 교회가 가진 도덕적, 영적 부흥, 사회 부흥의 최대 에네르기다. 이 힘이 가동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주님을 위해, 민족의 구원과 통일과 세계 선교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은 기도폭탄을 터뜨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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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공호흡과 기도

흔히들 기도는 호흡과 같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호흡은 누가 가르쳐서 호흡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호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호흡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면 기도하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왜 호흡하는 것을 배워야 할까요?
호흡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호흡이 잘못되어 목숨을 빼앗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목숨을 빼앗는 것은 아니지만 잘못된 호흡은 사람 몸의 기운을 약하게 합니다.

단공호흡법은 말 그대로 ‘단(丹)’을 비우는 호흡법이다. 다음은 변 선생의 설명이다. ‘우리 몸에는 항상 기운이 흐르고 있다. 기(氣)와 혈(血)이다. 혈 흐름의 중심은 심장이며 기 흐름은 단전(丹田)이 주관한다. 단전은 그 작용에 따라 세 곳으로 나눌 수 있다. 생각을 주관하는 상단(머리), 느낌을 주관하는 중단(가슴), 행을 주관하는 하단(아랫배)이다. 일반적으로 단전은 하단을 가리킨다. 단전 기운의 원활한 흐름이 건강한 신체의 기본이 된다. 스트레스 등으로 기가 흐르지 못하고 막히면 몸에 이상이 온다. 호흡법으로 단을 비워 새로운 기를 넣어주면 흐름이 원활해진다.’ 

지난 5월 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경찰의 폭력에 희생된 흑인 조지 플로이드(46) 사건은 플로이드가 경찰이 무릎으로 그의 목을 누르고 있을 때 “나는 숨을 쉴 수 없다!(I can't breath!)”라는 외침이 동영상으로 되면서 각 지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사건으로 발전되었다.


미 전역으로 확산된 시위에서는 플로이드가 숨가쁘게 말했던 “숨 쉴 수 없다”와 더불어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가 단골 문구로 등장한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흑인의 인권 유린을 규탄하는 시위 상황을 알리는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에선 “BLACK LIVES MATTER”가 디폴트처럼 따라붙는다.


호흡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생체 활동 중의 하나입니다. 호흡은 인간에게 필요한 산소를 공급해주고 몸에는 필요치 않은 이산화탄소를 밖으로 배출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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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지 뮬러(George Muller, 1805-1898)
프러시아 크로펜스타트(Kroppenstaedt)에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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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동기 다섯 가지
- 기도는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1. 순수한 마음
 - 고아들을 사랑하는 마음

2.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마음
 - 주님 생각에 가장 좋은 것으로 하여 주옵소서!
   (나의 생각이 아니다)

3. 정직한 마음
 -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직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허물이 있어도 정직한 삶의 바탕 즉 잘못을 변명하거나 합리롸 하지 않는 것)

4. 말씀의 묵상
 -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편 81:10)
 -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시편 68:5)

5.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
 - 나의 기도와 삶을 통하여 얼마나 하나님을 잘 나타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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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가장 친밀한 방법 중 하나이다.
기도할 때 우리의 감정, 생각, 깊은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감사한 것을 하나님께 공유하게 된다.
또한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바를 듣고 성령께서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도록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도의 한 가지 매력적인 특징은 세상의 아무도 똑같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 기독교 사이트 바이블스터디툴즈( Biblestudytools)는 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10가지 종류를 소개했다.

1. 경배의 기도(시편 148:13)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찌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심이로다"

이런 종류의 기도는 깊은 사랑, 존경, 그리고 감사함으로 주님께 경배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주님이 누구시고 하시는 모든 것에 대한 경외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2. 감사의 기도(역대상 16:33-34)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여 만국 가운데서 건져 내시고 모으시사 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할찌어다"

어떤 이들에게는 매일 감사 기도로 시작하는 것이 그들이 생활 습관이다.
감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시고 자비로운 분인지에 대한 인식이자 우리에게 주신 새 생명에 대한 감격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다.

3. 고백의 기도(시편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우리 죄를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 따르는 크리스천으로 기도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죄에 대한 고백 기도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신다는 점을 많이 확인할 수 있다.

4. 서약의 기도(사무엘상 1:10-11)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약속은 하나님의 힘과 인도,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기도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불경건한 생활을 하지 말 것을 맹세할 것이다.
여기 한나의 서원에서 보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그것은 큰 사려와 확신을 가지고 해야 한다.

5. 조용한 성찰의 기도(시편 63: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침묵의 기도는 우리를 말로 가득 찬 기도에서 벗어나 조용히 성찰하고 반성할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한다.
이러한 기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묵상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배우고 그 분이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게 하는 것이다.

6. 치유를 위한 기도(시편 119:25)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I am laid low in the dust; preserve my life according to your word.

이 기도는 보통 우리가 육체적, 정신적, 또는 감정적 상처를 회복하려고 할 때 나온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육체적으로 변등이들을 치료하시는 것이었다.
성경은 우리가 모든 종류의 병들로부터 치유될 것을 구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7. 구원과 도움을 위한 기도(시편 107:6)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Then they cried out to the LORD in their trouble, and he delivered them from their distress.

우리가 도전, 고난 또는 어떠한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이를 위한 돌파구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8. 중보의 기도(골로새서 1:9-12)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For this reason, since the day we heard about you, we have not stopped praying for you and asking God to fill you with the knowledge of his will through all spiritual wisdom and understanding.
And we pray this in order that you may live a life worthy of the Lord and may please him in every way: bearing fruit in every good work, growing in the knowledge of God,
being strengthened with all power according to his glorious might so that you may have great endurance and patience, and joyfully
giving thanks to the Father, who has qualified you to share in the inheritance of the saints in the kingdom of light.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중재할 것을 말한다.

예로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기 전 마지막 시간 동안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음을 알고 있다.

9. 변화를 위한 기도(시편 139:23-24)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Search me, O God, and know my heart; test me and know my anxious thoughts.
See if there is any offensive way in me, and lead me in the way everlasting.

이러한 삶의 종류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처럼 살고, 그 길을 따라 행하고, 거룩해지는 과정에 들어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10. 축복의 기도(빌립보서 1:9-11)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And this is my prayer: that your love may abound more and more in knowledge and depth of insight,
so that you may be able to discern what is best and may be pure and blameless until the day of Christ.
filled with the fruit of righteousness that comes through Jesus Christ--to the glory and praise of God.

축복의 기도는 종종 선교사들, 다른 곳으로 떠나는 교인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 등을 위해 행해진다.
이러한 축복의 기도는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으며,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는 강력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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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규례가 아닌 진정으로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4)

기도는 어떤 형식적인 절차를 거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외우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기도는 말을 따라 하거나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 하나님과 마음을 나눔으로써 감동받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치레 행위를 기뻐하시지 않고 입으로만 가까이하는 것을 열납하지 않으시며 신령과 진정으로 기도하고 경배하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진실한 기도를 해 봤던 사람이라면 경험했을 것입니다.
예배할 때 혹은 큐티할 때 혹은 어떤 일이 생길 때 마음을 평온히 하고 전념해서 성실하게 하나님께 기도드리면 감동받고 평안과 기쁨을 느낍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에 신령으로 기도해 하나님과 가까이하기는커녕 규례를 지키고 형식적으로 몇 마디 하는 등 진심 어린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무심한 기도가 어찌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예컨대, 새벽(밤) 기도, 식전(식후) 기도 등은 오랫동안 규례적인 행위가 되어 형식적으로 하지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가끔은 하나님께 기도할 내용이 없으면서도 신앙인으로서 의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 말이나 중얼거립니다.
이러한 기도는 형식적인 것인데 하나님이 들어주실까요?
결코 들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규례를 지키는 무심한 기도는 듣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드리는 기도만이 하나님께 상달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을 평온히 하기를 중요시해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2.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0~14)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주님은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고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염증을 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입에 발린 말이고 자신의 공로와 좋은 행위를 자랑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상을 받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리는 자신이 죄인이므로 하나님 앞에 천한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세리는 기도할 때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터놓고 자신의 패괴를 인정하며 하나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해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세리와 같은 겸허한 마음을 갖췄나요?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늘 외식하며 자기 자랑을 합니다. 예컨대, 다른 사람이 기도를 길게 했을 때,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적지만 우습게 보일까 봐 반복적으로 말을 해서 기도 시간을 늘립니다. 일부러 많은 성경 구절을 외운다거나 듣기 좋은 말을 해서 돋보이려고 합니다. 열심히 사역해서 성과를 거두면 스스로를 주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는 자로 여기며 기도로 축복과 면류관을 요구하고 천국에 들어가 상을 받으려 합니다. 이렇듯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실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하려면 세리를 본받아 어떤 일이 임하든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실제 정형을 털어놓아야 합니다. 거짓과 꾸밈이 없고 외식하지 않으며, 어떤 패괴를 유로했든지 하나님께 고하며 구원해 달라고 빌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확한 기도법이고 이렇게 기도해야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3. 이성적으로 피조물의 위치에서 기도하라

성경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겟세마네라는 곳에서 세 번 기도했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마 26:39~44)

예수님은 구하는 마음, 순종의 자세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구하였지 하늘 아버지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피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거나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의 기도를 마친 후 예수님은 천부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성육신하게 된 이유는 인류를 십자가에서 구원하는 사역을 하기 위함이었기에 예수님은 완전히 순종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자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나 피조물의 위치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드리며 그의 뜻을 구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이성적으로 기도하고, 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어 피조물의 각도에서 기도함으로 우리의 모델이 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반성해 보면 우리는 이성적인 기도를 했을까요? 피조물의 위치에서 하나님께 구하고 순종하는 기도를 한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비이성적인 기도를 드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뜻대로 이렇게 저렇게 해 주세요 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께 강요합니다. 예컨대, 몸이 아플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보다 우리의 병을 고쳐 달라는 기도를 하기에 바쁩니다. 병에 호전이 없으면 하나님을 오해하고 불평하지요. 하나님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 좀 있고 헌신하거나 본분을 조금 하게 되면 우리가 평안하고 모든 것이 순조롭도록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고, 심지어는 가족들의 복까지 구합니다. 또 핍박과 환난이 임했을 때 하나님의 보호를 구하며 그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구하는 등 이러한 기도는 다 비이성적인 것입니다. 구하는 자세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드린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의 욕망을 채워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고 우리의 뜻대로 해 주십사 강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비이성적인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는 진실한 기도가 아주 적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기도할 줄 모른다. 사실 기도는 주로 마음속의 말을 하는 것인데, 평소에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기만 하면 위치를 잘못 선다. 하나님의 뜻에 맞든 맞지 않든, 하나님께 베풀어 달라고 억지로 구하는데, 그 결과 기도하면 할수록 무미건조해진다. 기도할 때 네가 마음속으로 어떤 것을 구하든, 어떤 것을 사모하든, 어떤 것을 얻으려고 요구하든, 혹은 어떤 일을 처리하려고 할 때 꿰뚫어 볼 수 없어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하든, 힘을 더해 달라고 하든, 혹은 하나님께 깨우쳐 달라고 하든, 이런 말하는 방식에도 *이지가 있어야 한다. 만약 네가 이지 없이 무릎 꿇자마자 “하나님, 저에게 힘을 더해 주십시오. 제 본성을 보게 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해 주십시오. 혹은 저에게 무엇 무엇을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어떻게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이 ‘주십시오’ 안에 강박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반드시 그렇게 해 주어야 한다고 압력을 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네가 스스로 사전에 다 정해 놓은 것이다. 네가 비록 그렇게 기도할지라도 성령은 그런 기도에 대해 ‘네가 이미 스스로 정해 놓고 그렇게 하려고 한 이상, 그런 기도가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라고 여긴다. 기도할 때에는 마땅히 찾고 구하고 순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너에게 일이 임할 때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면 너는 이렇게 말하여라. “하나님, 저에게 이런 일이 임했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일에서 당신을 만족게 하기를 원하고, 당신의 뜻을 찾고 구하기를 원하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저의 뜻대로 하지 않고 당신의 뜻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뜻은 다 당신의 뜻을 어기는 것이고, 당신을 대적하는 것이고,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것임을 당신께서 아십니다. 저를 깨우쳐 주시고, 이 일에서 인도해 주셔서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런 어조의 기도는 적합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하려면 이성을 갖춰 기도해야 합니다. 피조물의 위치에서 기도하며 자신의 선택과 요구와 계획이 없이 하나님께 구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가령 천재지변이나 인재로 인한 사고 등의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났을 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자기가 원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보호를 강요하며, 그런 고난을 옮겨 달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을 마련해 주신 뜻이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고 온전케 하시기 위함이거나 우리의 증언을 보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순종하는 자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한 자세로 기도해야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고, 우리가 기도하는 문제를 알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시고, 나아갈 방향을 가리켜 주실 것입니다.

4. 개인을 위한 기도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9~13)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바람은 하나님 당신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사탄에 의해 패괴된 후로, 하나님은 계속 구원 사역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진정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를 얻기 바라시며, 그리스도의 나라가 땅에 펼쳐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또한 자기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취지가 담긴 기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취지가 담긴 기도, 하나님께서 더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도록 힘쓰는 기도, 그리스도의 나라가 땅에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한 기도가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입니다.

성경에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의 소원은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여호와의 성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다윗은 항상 그 소원을 가지고 간구하며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기뻐해 다윗을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라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잘 다스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잘 예배할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제사와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지혜만 주신 것이 아니라 솔로몬이 구하지 않은 장수와 부귀영화까지 더해 주셨습니다. 욥은 언제나 악에서 떠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큰 시련 속에서도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1:21), “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백으로 사탄을 부끄럽게 하고, 하나님 편에 서서 울림 있는 증거를 보이며 후세들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 진리를 실천하기 위해 드리는 기도가 가장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이며, 반드시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드리는 기도를 살펴보면, 대부분 육의 욕심을 위한 기도일 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가 별로 없습니다. 예를 들면, 자녀의 대학 진학을 위한 기도,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간구하는 기도를 비롯해 전부 개인의 이익을 구하는 기도이자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기도가 태반입니다. 계속 하나님께 손 내밀며 축복과 은혜를 갈취하려고만 할 뿐,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기도를 드리는 경우가 없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기도를 드리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한 기도여야 합니다.
예를 들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히거나 뒷걸음치게 될 때, 하나님께 힘을 더해 달라고 간구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전파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간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 설교하거나 사역을 할 때면, 항상 책임감으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고,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길로 이끌 수 있게 성령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간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늘 이런 문제를 놓고 기도한다면,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와 빛 비춤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네 가지 기도법의 실행 원칙에 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도에 관한 올바른 실천 원칙을 파악하면, 기도가 어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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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Amen)

05-15-2022(주일)

아멘의 어원(語源) : 아만
아만의 의미 :
어떤 대상을 '지지하다' 혹은 '신임하다

여기서부터 이 말은 기도나 찬양 및 선언이 종결되어지는 종지부나 끝맺음에서 '진실로 그렇습니다' 또는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
'라는 동의나 소원의 뜻을 가진 '아멘'으로 발전되었다.

'아멘'이란 말은 단순한 종결(終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곧 어떤 선포나 찬양 그리고 기도 등을 지지하거나 확인 또는 시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나의 삶 속에 적용시키겠다는 결단의 의지(意志)까지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한편 신약 시대에 '아멘'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강조 용법('진실로 진실로'란 말은 헬라어로 '아멘 아멘'이다)으로 자주 사용되었고, 바울 사도에 의해서는 축복과 찬양(Doxology)의 결미어(結尾語)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계시록 서신에서 이 말을 인격화시켜 존재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하였다(계 3:14).
이 모든 배경하에서 '아멘'을 복창(復唱)하던 일은 유대인들의 습관이 되어 왔으며, 또한 그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기독교 공동체에 전달되어져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05-08-2022

Grhard Tersteegen(게르하르트 터스티겐) 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은혜로운 임재를

우리 안에 새롭게 일깨워 주십시오

그리하여 인생의 순례 길을 가는 동안

우리 안에 평화와 진실함과 용기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당신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당신을 굳세게 붙들게 하시고

당신에 대한 사랑이 식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당신과 연합된 우리의 마음이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하는 무슨 일에든지

항상 이어지게 해 주십시오


우리에게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마음속에서 들리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게 해주시고

당신께서 주시는 경고를 묵살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보십시오.

우리의 가난한 마음을

당신께 제물로 드립니다.

오서서 당신의 지성소를 채워 주시고

그곳에 더러운 것이 들어가지 못하게 지켜주십시오


오 사랑의 주님,

당신의 거룩한 영이 우리의 모든 영혼 속에 강같이 흐르게 하시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까지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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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7:11-26


11 모세가 당일에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이른 후, 그곳 세겜 땅 북쪽에 있는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반드시 이행하여야 할 '축복과 저주의 의식'을 언급한 부분이다. 이 의식은 이스라엘 12지파가 각기 6지파씩 양편 산에 갈라서서 축복과 저주를 각기 선포하는 의식인데, 여호수아 8:30-35에서 그대로 실행되었다.

한편,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왜 축복과 저주의 산으로 각각 선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2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산에 서고

ㅇ요단을 건넌 후에 - 2, 3, 4절에 이어 본장에서 벌써 네번째 언급되고 있는 구절이다. 이는 그만큼 요단(Jordan)을 건너는 일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임을 시사해준다.

ㅇ시므온과...베냐민 - 모두 야곱의 정부인(正婦人)인 레아와 라헬에게서 태어난 후손이다(창 29:31-30:24;35:16-18). 그러나 그중 레아의 막내 아들인 스불론의 지파와 서모(庶母) 빌하를 범하였던 장자 르우벤(창 35:22)의 지파는 여기서 제외되었다.

ㅇ축복하기 위하여 - 야곱의 정부인에게서 난 아들들이 이처럼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에 대하여 카일(Keil)은 '적자(嫡子)가 서자(庶子)보다 신분이 높고, 축복이 저주보다 품격이 높은 만큼 적자가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평하였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433).

ㅇ그리심 산 - 사마리아 성읍 부근에 위치한 오늘날의 '예벨 엣 투르'(Jebel et Tur)이다. 남북으로 에발 산과 마주보고 있는데, 특별히 그리심 산(Mt. Gerizim)이 축복을 선포하는 산으로 선택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3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고

ㅇ르우벤...납달리 -

전술한 것처럼 르우벤과 스불론 외에는 모두 야곱의 첩이었던 빌하와 실바의  후손이다(창 29:31-30:34). 르우벤과 스불론이 여기에 속하게 된 이유는 아마 르우벤은 서모 간통 사건으로  인한 장자권 박탈 때문이었을 것이고(창 35:22; 49:4; 대상 5:1), 스불론은 레아의 막내 아들이었기 때문(창 35:23)이었을 것이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ㅇ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

혹자들은 그리심 산에 선 지파들을 축복받은 지파들로, 에발 산에 선 지파들을 저주받은 지파들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단정
은 무리이다. 왜냐하면 에발 산에 서게 될 지파들 중에도 단, 아셀, 납달리 지파처럼 야곱의 축복을 받은 지파들이 있으며 그리심 산에 서게  된 지파들 중에도 시므온, 레위와 같이 야곱의 저주를 받은 지파도 있기 때문이다(창 49:1-27).

따라서 축복의 산에 오른 자들은 율법에 순종하는 자들을, 저주의 산에 오른 자들은 율법을 거역하는 자들을 각기 상징할 뿐으로 이해함이 좋다. 한편 에발 산(Mt. Ebal)이 특별히 저주를 선포하는 장소로 선택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4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ㅇ레위 사람 - 여기서는 레위 지파에 속한 모든 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언약궤
를 메고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의 중앙 부분에 서서 모세의 말을 전달받아 양편에 갈
라 서 있는 백성들에게 큰소리로 외칠 '레위 제사장'(9절;수 8:33)을 가리킨다
(Delitzsch, Lange, Alexander, Wycliffe)
ㅇ큰 소리로...이르기를 - 혹자들은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서 외치는 사람의 목
소리가 양편 산 중턱에 운집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들릴 수 있었겠는가라는
점에 의문을 표시한다. 그러나 성서 고고학자들에 의한 정밀 조사 결과 양쪽 산의 음
향 효과가 매우 훌륭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또 여러 차례의 실험 결과 여러 사람이
외칠경우 충분히 들려진다는 사실도 입증되었다(Stanley, Syria & Palestine;
Tristram, Land of Israel ;Hastings, Bonar, E.G. Kraeling).

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찌니라

ㅇ장색 -

각양 물건을 정교하게 만드는 기술자(craftsman)를 가리킨다. 당시 이들은 우상을 만들어 파는 일로 많은 이익을 보곤 하였다(행 19:24).

ㅇ가증하니 - 23:18 주석 참조.

ㅇ은밀히 세우는 자 -

십계명 중 제 2계명(5:8-10;출 20:4-6)을 은밀히 범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은밀히'에 해당하는 원어 '바사테르'는 '은밀
한 장소에'(KJV, in a secret place)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은밀한 장소'로 꼽을 만한 곳은 어디이겠는가? 물론 눈에 잘 안 띄는 골방이나 비밀 장소를 들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곳으로는 역시 사람의 마음 속을 꼽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보다 더 큰 비중으로 자기 마음 속에 은밀하게 품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 숭배이다.

ㅇ모든 백성은...아멘 할지니라 -

'아멘'(amen)이란 말은 본래 '확실하다', '신실하다'는 뜻의 '아만'에서 유래한 단어로 문장이나 대화의 끝에서 사용될 때 '과연 그렇습니다',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경홀히 여기는(칼라) -

원뜻은 '가볍다'로, 곧 상대방을 업신여기거나 비천히 여기는 것(잠 12:9), 절하(切下) 평가하거나 모독을 주는 것(사 16:14), 그리고 지독히 경멸하는 것 따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부모를 이처럼 업신여기는 것은 곧 자신의 근본(根本)을 망각한 행동일 뿐 아니라, 급기야는 부모를 통해 그 생명을 부여하신 하나님을 경홀히 하는 짓거리이다(21:18).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고 권면하였다. 출 20:12 주석 참조.

ㅇ저주를 받을 것이라(아루르) -

기본형은 '아라르'로 '버림을 받다'란 뜻이다. 즉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한다면, 버림을 받는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자신임을 잘 증거해 준다(Calvin).

17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 '여기서 지계표'(地界標;KJV,landmark;NIV,
boundary stone)란 땅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세운 돌이나 푯말을뜻한다(창 31:51,
52). 따라서 이러한 지계표를 마음대로 옮기거나 없애 버리는 것은 타인의 재산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 행위이다. 한편 성경 뿐 아니라 고대 바빌로니아의 법도 지계표를
침해하는 행위를 큰범법 행위로  규정하고  매우 엄격하게 다스렸다.19:14 주석 참조.

18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

고대 근동에는 여러 가지 환경적 요인과 풍토(風土)로 인하여 의외로 소경이 많았다.
즉 고온 건조한 기후와 쉴 새 없이 이는 먼지, 그리고 비위생적인 생활 환경 및 가난으로 인한 영양 실조 등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실명(失明)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로부터 이러한 소경을 일부러 괴롭히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따라서 본절이 의미하려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영역본 Living Bible은 본절을 '소경을 이용하여 그 이(利)를 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Cursed is he who takes advantage of a blind man)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이웃을 하나님의 계명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유혹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영적으로 해석하였다. 아뭏든 이는 보다 광범위한 의미로, 장애자의 약점을 이용하여 불의한 이(利)를 취하거나 또 는 그들을 괴롭히며 실족케 하는 일 따위를 엄격히 금하고 있는 조항임에는 틀림없다(레 19:14;롬 15:1). 실로 율법은 그러한 약자들의 약점을 악용하는 죄악에 대해서는 보다 혹독한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레 19:14 주석 참조.

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객이나 고아나 과부 -

가난하며 약한자, 그리고 억눌리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을 대표하는 구약 시대의 3대 약자들이다(14:29;16:11, 14;24:21;26:12, 13).

ㅇ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 

여기서  '억울케  하다'에  해당하는 '나타'는 '비틀다', '굽게 하다', '벗어나게 하다'는 뜻으로,
정당한 판결을 내리지 아니하고 힘 있는 자를 두호(斗護)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서는 이미 24:17에서도 엄금했던 바, 실로 하나님께서는 '공법(公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河水)같이' 흘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암5:24)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 계모와 구합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계모와 구합하는 자 -

'구합하다'에 해당하는 '솨카브'는 성(性) 관계를 갖기 위해  '잠자리를 같이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계모'에 해당하는 '에쉐트 아비'는 '아버지의 여자'란 뜻이다.
따라서 비단 이는 계모 뿐 아니라 아버지의 첩과도 성 행위를 하는 것을 포함한다.

ㅇ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

영역본 RSV는 이를 '아버지의 여자를 벌거벗겼으니'로, NIV는 '아버지의 침소를 더럽혔으니'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Living Bible은 '그녀는 그의 아버지에게 속하였으니'로 번역하고 있으며, 공동 번역은 '아비의 이불자락을 들치고'로 의역하고 있다. 아뭏든 이처럼 아버지의 침소, 아버지의 여자를 넘보는 행위는 인간의 기본 윤리를 저버리는 패역(悖逆)이니, 저주를 면할 길 없다(22:30). 레 18:8 주석참조.

21 무릇 짐승과 교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짐승과 교합하는 자 -

동성애, 근친 상관 등과 더불어 변태적인 성 행위 중의 하나인 수간(獸姦)을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수간자(獸姦者)는 근친 상간자 및 남색자(男色者)와 더불어 땅을 더럽히는 추악한 성범죄자로서 아스라엘 사회에서 반드시 제거되어야 했다(출 22:19;레 20:15, 16).
성경은 결코 생리적인 성적 욕망이나 충동을 죄악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性)의 창조자로서 하나님께서는 성을 인간들이 누릴 수 있는 지극한 기쁨으로 간주하셨다(잠 5:18; 전 9:9; 요 3:29).
이것은 창조시 아담의 독처(獨處)를 좋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한 여자 하와를 창조하여 준 사실(창 2:18, 22)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바로 이 남녀 창조 사건에서도 분명히 예시되었듯이 남녀간의 성적 욕망은 일부 일처의 신성한 결혼 제도에 의해서만 충족되어야 한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요 비밀이었다.

여기서 '비밀'이라고 한 것은 훗날 사도 바울이 설파했듯이 신랑과 신부의 한몸 되는 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순결한 일체성'을 상징하고 또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22:13-30; 엡 5:31, 32).
따라서 하나님의 신성한 창조 질서가 반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오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 내포되어 있는 일부 일처의 결혼 제도를 떠난 모든 성(性) 남용은, 더욱이 수간, 근친 상간, 동성애(同性愛) 등 타락한 인간의 어그러진 심성(心性)에 기인하고 있는(롬 1:26, 27) 모든 변태적(變態的)인 성행위는 단순한 도덕적 범죄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죄에까지 이르는 추악한 성범죄 행위인 것이다.

특히 고대 이방의 문란하고 타락한 제사 의식이나 설화 등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수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엄한 인간의 가치를 하등 동물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극악한 소행이므로 거룩한 공동체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결단코 용납될 수 없었다.  따라서 성경은 일관성 있게 이러한 모든 성범죄를 보다 엄격히, 그리고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는 성(性)의 타락으로 인해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가나안 족속의 멸절 그리고 로마의 패망 등을 거울삼아 성(性)개방 풍조로 인해 성(性)을 가볍게 취급하거나 심지어 상품화시키는 타락한 세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빛된 자녀답게 고결하고 아름다운 성(性) 윤리관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레 18:23; 20:15, 16 주석 참조).

22 그 자매 곧 그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과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23 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자매...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

누이는 항렬상 자기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자이다.
따라서 그러한 누이를 범하는 것은 우생학적(優生學的) 폐단은 차치하고라도, 곧 자기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는 짓이나 마찬가지 행위이므로 저주를 면할 길 없다. 레 18:9
주석 참조.

ㅇ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

성경은 자신의 장모와 성 관계를 갖는  파렴치한에 대하여서는 그들 모두를 반드시 화형(火刑)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레 18:17;20:14 주석 참조.

24 그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

과실치사(過失致死)가 아닌 한, 그 어떠한 살인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  결코 정당시킬 수 없다. 특히 암살(暗殺) 행위는 더욱 그러한
데,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상대방이 미처 방어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기습하는 도발 행위이기 때문이다. 죄를 은폐하려는 의도하에서 저지르는 계획적 살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출 20:13;민 35:16-21 주석 참조.

25 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

살인의 대가로 뇌물을 받는 행위는 곧 인간의 값어치를 추잡한 뇌물보다도 낮게 취급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비록 사람의 눈을 피해 그같은 죄를 자행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결국 하나님의 공의의 눈은 피할 수 없기에 저주를 면할 길 없다. 출 23:7, 8 주석 참조.

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

사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자란 아무도 없다(롬 3:10).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출애굽의 영웅 모세도, 그리고 성군(聖君) 다윗도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던 죄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짐짓 범죄치 아니하려고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율법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라 하겠다<창 6:9>.





기도(祈禱)

자료 / 예수님의 중보기도 / 워렌 위어스비 지음, 조은주 역. 은성출판사

01-9-2022(제2주)

허버트 록키어(Herbert Lockyer. 영국 1886-미국 1984)박사는 "성경에는 650편의 기도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곧 기도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국 침례교회 목사이었던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 6. 19-1892. 1. 3)은 "진정한 기도는 길이가 아니라 무게에 의해서 측정됩니다."라고 합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일생동안 예수를 믿으며 수 많은 기도를 했을 때 그 모든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만일 하늘에 상달되지 않는 기도를 했다면 무게가 없는 기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요한복음 17장)
17:1-5, 예수께서 자신을 위해 기도하시다
17:6-19,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다
  제자들의 안전(17:6-12)
  제자들의 거룩(17:13-19)
17:20-26, 예수께서 전체 교회를 위해 기도하시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드린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라고 정의합니다.
제사장의 기도를 다른 말로 "왕의 기도"라고도 합니다.

제사장으로서의 기도가 위대한 네 가지 이유를 소개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이므로 위대하다
둘째, 기도를 요구한 상황 때문에 위대하다
셋째, 기도에 있는 간구 때문에 위대하다
넷째, 승리 때문에 위대하다


01-16-2022(제3주)

잔느 귀용(Jeanne Guyon, 1648~1717)의 작품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하기(The Simplicity of Prayer)"에서 "기도는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에게 집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기도는 사탄이 침입 할 수 없는 요새입니다.
사탄은 그 요새 주위를 포위하고 공격하며 소란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기도에 집중할 때 사탄은 절대로 해칠 수 없습니다.
요즈음 어떤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의 기도의 자리를 점검해야 합니다.
혹시 나의 기도의 자리가 흔들려서 사탄이 공격할 수 있는 틈을 만들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디모데전서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For it is sanctifi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2022년 제3주간을 시작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앞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은총의 한 주간이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01-23-2022(제4주)

요한복음 17장을 '왕의 기도' 또는 '예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라고 합니다.
왕의 기도로서 첫번째는 하나님의 아들의 기도라는 것 때문에 위대한 기도라고 합니다.

첫째, 성부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셨다(17:3, 18, 21, 25)
선지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으셨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셨다.

둘째, 성부 하나님의 것은 나의 것(17:8, 16:28)
성도는 나의 모든 것이 아버지의 것이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것은 나의 것이라고 한다(17:10).

셋째, 성부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17:11-12)

예수님의 기도는 그 분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거한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 내 하나님께로 올라가신다고 하셨다(요 20:17)

01-30-2022(제5주)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
Prayer is the breathing of the soul.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기도가 없으면 영혼이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육체는 호흡이 없으면 곧 죽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시작해야 한다(로마서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합니다.
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려면 영을 받아야 합니다.
영을 받는 것을 "성령을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기도하려면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사도행전 19:2)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02-06-2022(제6주)


기도하다(요 17:9, 15, 29)는 뜻의 "비옵나니"라는 단어는 "동등한 상태로부터의 부탁" 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이 단어를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단어를 세 번 사용하셨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곧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원하옵나이다(요 17:24)
이 말은 간청이 아니라 명령이다.
성도들은 이런 권위를 가질 수 없지만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은혜를 누리며 신앙생활에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02-13-2022(제7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야고보서 5:15)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게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십니다.
병들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시는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간구 하옵기는 김영희권사님이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 가운데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김영희권사님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못하여 답답합니다.
그러나 질병으로 고통 당할 때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여 낙심하지 않게 하옵시고
오히려 고통 가운데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찾아 알게 하옵소서. 
질병 중에 있을 때 인생의 모든 것과 바꿀 수 있는 영원한 보물을 찾고 기뻐하며 믿음 위에 더욱 굳게 설 수 있는 믿음만을 주장하게 하옵소서. 

언제까지 육체의 고통으로 시달릴지 모르지만 질병으로 인하여 몸은 고통스럽고 불편한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강한 빛을 받아  성령의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또한 육신이 건강한 사람과 비교함으로 낙심하지 않고
고통 가운데서 십자가의 아픔을 몸소 겪으셨던 주님을 바라보며 그 사랑을 깊이 깨닫는 은혜가 넘쳐나게 하옵소서.
 
몸의 불편함을 불평하는 대신 이미 허락하신 은혜로 인하여 주님을 뜻을 나타낼 수 있는 은사를 찾게 하옵소서. 
질병도 그 가운데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다면 불행이 아니라 복이요, 재앙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은사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의사를 통하여 치료를 받을 때에 빨리 회복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고, 장기적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없도록, 병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만병의 의원이시고, 치료자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을 공부하므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행함으로 복을 받는다.


야고보서 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기도의 영을 구하라!

스가랴 12:10a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I will pour out on the house of David and the inhabitants of Jerusalem a spirit of grace and supplication.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In the same way, the Spirit helps us in our weakness. We do not know what we ought to pray for, but the Spirit himself intercedes for us with groans that words cannot express.

기도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는 "기도는 영혼의 호흡" 이라고 합니다.
호흡이란 생명이 있는 증거입니다.
죽은 사람은 호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영혼과 육이 하나로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호흡이 필수적인 것처럼 또한 영혼이 육체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정의한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생명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이 호흡을 하는 것처럼
살아있는 사람은 육체와 영혼이 하나가 된 것처럼
기도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의 흔적과 같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기도를 합시다!

나의 하나님이여
그리스도를 보사
나의 작별의 순간을 평안하게 하옵소서!

내 비록 흙에 지나지 않사오니
하나님 앞에 서서 기도하옵기는
쾌락을 구함도 아니오며
금을 요구함도 아니오라
그보다 더 큰 것을 구하오
하나님이 내게 주실 가장 큰 선물
내가 누를 영원한 생명일세.

내 마음 이제 기도와 찬송으로 넘치네
그리고 부드러운 그의 마음에
내 마음 가까이 끌어올리는
그 한 숨결 한 숨결을
내 하늘 아버지는 알고 계시네
내 기쁨과 평안 여기 있고
내 구원 당신 안에서 보니
아, 내 영혼을 지키시는 이여.

* 기도의 영 p. 180, 181, 182
- 기도(오 할레스비)

삶의 지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데이비드 케슬러가 쓴 "인생 수업"에 나오는 일화 입니다.

어느 기분 좋은 여름날, 갓 결혼한 부부가 저녁을 먹고 숲으로 산책을 나갔다.
둘이서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멀리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꽥, 꽥!"

아내: "저 소릴 들어봐, 닭이 틀림없어."

남편 : "아니야, 저건 거위야."

아내 : "아니야 닭이 분명해."

남편 :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건 말도 안돼. 닭은 '꼬꼬댁 꼬꼬!'하고 울지만, 거위는 '꽥, 꽥!' 하고 울거든. 저건 거위라고."

또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꽥, 꽥!"

남편 : "거봐 거위잖아!"

아내 : (한발로 땅을 구르며)  "아니야 저건 닭이야. 내가 장담할 수 있어."

남편 : (화가 나서)
 "잘 들어 여보! 저건 거위라니까! 당신은 정말이지..."

남편이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을 내뱉으려는 찰나 또 다시 "꽥, 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내가 눈물을 글성이며 말했다.
"저봐, 닭이잔아."

그 순간 남편은 아내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왜 그녀와 결혼했는가를 기억했다.
그는 얼굴을 누구러뜨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미안해, 여보 생각해 보니 당신말이 옳아. 저건 닭이야."

그러자 아내는 남편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여보"

두 사람이 사랑 속에 산책을 계속하는 동안 숲에서는 다시금 소리가 들려왔다. "꽥, 꽥!"

남편은 생각했다. '그것이 닭이든 거위든 무슨 상관인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기분 좋은 여름날 저녁 함께 산책을 즐기는 것이였다.

그렇다! 그것이 닭이든 거위든 무슨 상관인가?

우리가 상대에게 상처주고 결국은 관계가 단절되는 이유 중에 많은 부분이 멀리서 들려오는 동물의 소리가 닭인지 거위인지 같은 사소한 분쟁에서 비롯된다.

내 신념을 저버려야 할 일이 아니라면 내게 회복하지 못할 손해가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면 인정해 준들 무엇이 문제일까?

- 인생수업 중에서 -

"찰리 채플린" 명언

88세에 세상을 떠난 "찰리 채플린"이 남긴 4가지 명언

1.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우리들의 문제 조차도.

2. 난 빗속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아무도 내 눈물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3. 우리 삶에서 가장 의미 없는 날들은 웃지 않은 날 들이다.

4.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의사 6명은
* The sun ( 태양 )
* Rest ( 휴식 )
* Exercise ( 운동 )
* Diet ( 다이어트 )
* Self - Respect  ( 자존감 )
* Friends ( 친구 )

이 모든것들과 함께 당신의 삶을 즐기세요.
삶은 여행일 뿐입니다.
그러니 오늘을 충실히 사십시요.
내일은 안 올지도 모르니까요.

찰리 채플린
웃음은 몸 안의 조깅 입니다.

찰스 스펄전
진정한 기도는 길이가 아니라 무게에 의해서 측정된다.

허버트 록키어 박사
성경에는 650편의 기도들이 기록되어 있다.
기도 중에서 요한복음 17장의 주님의 제사장으로서의 기도가 가장 으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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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기도는 항상 하나님과의 역동적인 대화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을 때 주기도문은 우리가 매일 하나님께 이야기하는데 도움이 되는 모범이 됩니다.
여기 도움이 될 만한  여섯 단계 기도 가이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다시 집중하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깊이 숨을 들이 마시고 다음 단어에 집중해 보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천천히 숨을 내쉬며 다음과 같이 말해 보세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여러 번 반복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하나님의 성품에 주의를 기울여 보세요. 그리고 또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초점을 맞추어 보세요.

    여러분의 뜻을 다시 맞추어 보세요.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은 늘 그 분의 뜻을 이 땅에 이루고 계십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뜻을 그분의 뜻에 맞추는 것은 그분의 나라를 찾는 일입니다.

    주변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 보여주시기를 기도해 보세요.

    염려를 내려 놓으세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언가를 받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이 하나님께 여러분의 염려를 드릴 때 그분은 여러분께 무엇을 주실까요?

    여러분의 염려를 적어보세요. 그리고 하나씩 읽어 보세요. 염려를 소리 내어 읽을 때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마음 속으로 기도하세요.

    이 단계를 필요한 만큼 계속하세요.

    회개하고 응답하세요.

    사하여 준 것 같이.. 사하여 주시옵고

    여러분이 주님께 내려 놓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지금 주님께 고백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깊은 상처, 좋지 않은 행동, 어쩔 수 없는 중독, 반복되는 실수 등등일 까요?

    하나님은 여러분이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 생각을 그분께 말씀 드리고 그분의 음성을 들어 보세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구하세요.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우리는 모두 무언가로부터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셨나요?

    주님의 신실함에 감사 드리세요. 그리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말씀해 보세요. 주님의 보호가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보세요. 상황이 절망적으로 보일 때에도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기억 하세요.

    기뻐하며 돌아보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행하신 일을 기뻐하고 오늘 하루를 보내며 그분을 예배 할 방법을 찾으세요.

    그리고 잠시 하나님과 함께 한 이 시간을 곰곰이 돌아 보세요. 그분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보여 주셨나요? YouVersion기도 목록에 생각나는 것을 적어 보세요

예수님처럼 기도를 시작하면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가 우리 삶의 방식을 바꿀 때, 우리는 언제든지 확신, 의뢰함,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께 다가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 주기도문은 단순한 기도가 아니다.
이 기도는 이 땅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비전이다 ”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는 동안 불량한 질문을 꽤나 했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눅 9:54). 그러나 가끔은 멀쩡할 때도 있었다.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눅 11:1). 제자들이 그럴 때면, 우리 주님은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아버지와 즐거이 교제하는 법을 가르칠 기회가 생겼다며 퍽 기뻐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어느 날 오후 제자들과 열성 넘치는 군중이 산 중턱에 모였을 때 그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다. 누가복음 11:2-4에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가장 유명한 말씀 중 하나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짤막한데다 어린아이도 쉽게 외울 수 있지만, 이 기도의 간결함이나 익숙함에 현혹되지는 말자. 우리는 주님의 기도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기도라고 바르게 알고 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는 또한 그 이상이다. J. I. 패커는 주님의 기도를 “복음의 요약”이라고 부른 테르툴리아누스를, 그리고 “신성의 몸”이라고 부른 토마스 왓슨을 인용한다. 패커 자신은 주님의 기도는 “생활 전반의 열쇠”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기도보다 더 명확하게 가르치는 것은 없다”고 덧붙였다.

주기도문은 단순한 기도가 아니다. 이 기도는 이 땅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비전이다. 이 기도는 망가진 이 세상에 불의와 굶주림과 악이 있음을 인지한다. 이 기도는 믿음의 선언이요, 예배로의 부름이요, 하나의 외침이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사회의 개혁을, 이 땅에 천국이 임하게 해 달라는 변혁의 탄원이다.

그리하여, 주기도문은 단순히 그렇게 기도하라는 기도가 아니다. 주님의 기도는 그렇게 살라는 기도이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의 기도를 기도하면, 어린아이처럼 의지하는 마음가짐으로,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로,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선교에의 동참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자세: 어린아이와 같은 의존

마태복음 6장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이렇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으로 시작하신다. 예수님은 기도를 대하는 두 가지 방식을 대조하신다. 하나는 과시형 영성의 자세이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려고 종교 활동을 하는 자세이다. 다른 하나는 어린아이와 같은 의존, 곧 하늘 아버지께 우리가 완전히 의지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주기도문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과 의존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나라가 우리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임을 인정한다. 우리의 생존과 번영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불가능함을 알기에, 우리는 겸손히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 어린아이가 밤에 잠잘 준비를 하면서 도움과 안전을 구하는 것처럼 우리는 용서와 보호와 구원을 간청한다.

우리가 선하고 사랑 많으신 아버지의 발아래 있는 굶주리고 궁핍한 자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의 초점: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시편이다. 주기도문은 찬양, 탄식, 간구(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 중보(타인을 위한 기도)를 포함한 많은 요소가 시편의 구조와 흐름을 따른다. 주기도문은 우리를 자기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전심으로 예배하는 삶으로 초대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뿐만 아니라 주님과 왕으로서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전심으로 예배하는 자세로 기도하고 살아가라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끊임없이, 한눈팔지 말고 걸으라고 우리를 초청하신다. 진심으로 드리는 예배(시 86:11)는 우상 숭배(출 34:11-17), 탐욕(마 6:19-21), 처음 사랑에서 멀어짐(계 2:4)을 없애는 해독제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 삶의 중심을 예수님과 그의 영원한 나라에 두는 것이다. 남의 칭찬을 받으려는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인기를 얻고자 하는 욕심을 거부하는 것이며, 명성을 쌓으려고 거창한 일을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 존재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고 그분께 온전히 복종할 때 오는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의 관계들: 서로 사랑

단수 대명사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주기도문에서 간과되고 있는 아름다운 차원이다. 주기도문에는 “나”(“I” 또는 “me”)가 없다. 그 대신에 예수님은 공동 대명사 “우리”(“We” “us” “our”)로 기도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주기도문은 우리의 개인주의적 틀을 재고하고 우리가 교회와 얼마나 상호 연결되어 있는지 인정하고 맛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의 기도를 단수의 기도에서 공동의 기도로 바꾸심으로써,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두 번째 큰 계명(마 22:39)을, 그리고 주님께서 새 계명이라 이름 붙이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요 13:34-35)을 우리가 잊지 않게 하신다.

주기도문을 기도하면 우리는 형제자매의 실제적인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자원과 평화와 희망이 부족한 동료 신자들을 알아가는 것이다.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잘못할 때가 있으며 그럴 때마다 앙갚음을 일삼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며, 서로 용서하고 쓴 뿌리를 뽑아버리는 것이다.

주기도문을 정직하게 드린다는 것은 신속하고 철저하게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사명: 하나님의 일에 참여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깨어진 이 세상에 발을 들이지 않고서는 주기도문을 기도할 수 없다.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사역에 참여하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능력을 심어준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거나 그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한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게 될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온 세상 사람들의 (육체와 영의) 굶주림을 인식하고 그들을 먹이며 세계 빈곤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용서를 구하고(“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과 용서한 사실을 아뢰는(“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기도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자주 이웃과 동료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악의 잔혹하고 불의한 계략에서 사람들을 구하는 일에 나선다는 것이다.

주기도문을 기도하고 주기도문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기도하시며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요 17:18)

프레드릭 비크너가 말했듯이,

주기도문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게 좋다. 주님의 기도로 기도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 기도문을 입 밖에 낸다는 것은 호랑이를 우리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며, 원자력을 미풍처럼 보이게 하는 힘을 내뿜는 것이다.

비크너는 주기도문은 언젠가 성취될 약속의 노래임을 우리에게 되새겨 준다. 언젠가,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 잘될 거다. 그때까지, 우리는 기도한다.

원제: The Lord’s Prayer Is Meant to Be Lived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일용할 양식

τὸν ἄρτο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톤 아르톤 톤 에피우시온)

"일용할 양식"에 대한 헬라어는 τὸν ἄρτο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톤 아르톤 톤 에피우시온)이다. 
아르톤ἄρτον은 "빵"이다. 
신약의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던 음식이다.
여기서 빵은 부분으로 전체를 대표하는 제유법으로 사용되어, "양식" 일반 혹은 더 나아가 "물질" 일반을 의미한다. 

“일용할”로 번역되어 있는 헬라어 단어 “에피우시온"ἐπιούσιον은 주의 기도에 사용된 전체 헬라어 중에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단어이다. 이 단어를 해석하기 어려운 이유는 성경에 이 단어가 오직 주기도문에만 나오기 때문이고, 성경 밖에서도 그 용례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잘 안쓰이는 단어이기 때문에 정확한 뜻을 알기 어렵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상당히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신 셈이다.
이렇게 일상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사용하셨을 때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테니, 더 세심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에피우시온”이 무슨 뜻인지를 밝히기 위한 많은 학문적 연구가 있었다.

초대교회 시절부터 문제가 되었으니 긴 논란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 안에 용례가 없으니, 성경 밖 문서나 비문을 다 뒤져서 이 단어가 사용된 흔적이 있으면 그것에 근거해서 뜻을 찾아내려 하였는데, 노력에 비하여 결실이 적다.

이 단어가 쓰여있는 비문이 그리스의 어느 섬(Rhodes)에서 새로 발견되었을 때 거기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쏟았고, 이 단어가 쓰여있는 파피루스가 런던의 어느 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되었을 때에도 학계가 들썩 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직도 그 뜻을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말 주기도문이 “일용할”이라고 에피우시온을 번역했는데, 그건 기본적으로 에피우시온의 뜻을 “오늘”이라고 본 것이다. 영어로 daily bread라고 번역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새로운 발견을 반영하면 에피우시온은 "다음"이라는 뜻이 된다.
에피우시온에 "날"을 뜻하는 헤메라가 붙여써진 파피루스가 발견되었는데, 문맥에서 볼 때 "다음 날 곧 내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발견을 주의기도 해석에 적용하면  τὸν ἄρτο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톤 아르톤 톤 에피우시온) "다음 먹을 빵"이 된다.
그리고 이것을 의역하면 "생존에 필요한, 삶을 꾸려가는 데 필요한” 빵이 된다. 

에피우시온(ἐπιούσιον)이라는 단어 자체에 집중한 해석 역시 이런 해석과 궤를 같이 한다.
에피우시온은 "에피"라는 전치사와 "우시온"이라는 명사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에피(ἐπί)는 "~위에"를 뜻하는 전치사로 영어의 on이나 upon에 해당한다.
"우시온"이 나온 "우시아(οὐσία)"는 그리스 철학은 물론 삼위일체 교리에도 사용된 단어인데 그 기본 의미는 "존재(being, existence)"이다.

그러므로 에피우시온은 "존재를 떠받치는"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고, 이는 에피우시온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맥이 통한다. 

이런 이해를 고려한다면, 주의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하라 하신 "일용할 양식"이 하루 먹을 양식이 아닌 것으로 조심스레 해석할 수 있다.

"일용할 양식"은 문학적 표현으로 참 좋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단지 하루치 양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떠받치는 물질",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물질 전반"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라 하셨다. 

내게는 어디까지가 "일용할 양식"일까? 물어보고 묵상할 질문이다. 


주기도문의 신학(마태복음 6:9~15)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의 이곳과 누가복음의 평행문(11:2~4), 디다케(Didache)라는 2세기 교회사 문헌에 세 군데 실려 있다.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모범 기도를 가르쳐두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기도를 가르쳐달라는 요구에 이 기도를 전하는 것이 그 맥락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중언부언과 자기과시의 기도를 비판하며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는 맥락에서 모범적인 기도의 사례로 주기도문을 제시한다. 이러한 편집 맥락의 차이는 애당초 주기도문의 기원이 예수의 신학적 유산을 요약하는 가르침의 일환으로 제자들에게 전수되었고 그것이 다양한 맥락에서 실천적으로 응용되어갔음을 암시한다.

먼저 이 기도는 '우리'를 기도의 주체로 설정한 집단 기도(group prayer)로 규정된다. 개인으로 은밀하게 골방에서 드리는 묵상기도로서나 축귀를 위한 주술적 차원에서 이 기도가 활용된 것은 후대의 일이다. 이 기도의 내용만으로 판단할 때 주기도문은 두세 명 이상의 제자들이 모여 드리는 공적인 기도로 당시 유대교의 회당예배에서 유통된 카디쉬 기도(Kaddish prayer)를 그 원천자료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 유대교 기도가 하나님을 3인칭으로 설정한 기도라면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2인칭으로 설정해 기도하는 주체와의 긴밀한 인격적 대화와 소통을 전제로 깔고 있다. 나아가 신학사상이란 측면에서도 주기도문은 예수의 신학을 응집한 결정체라고 할 만한 중요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 기도가 짧고 중언부언을 방지한다는 점에서 앞의 기도 교훈과 일맥 상통하지만, 개인이 골방에서 드리는 은밀한 기도가 아니라 공적인 '집단기도'라는 점에서는 상기 맥락을 이탈한다.

먼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호명하며 이 기도는 시작된다. '하늘'의 초월성과 친근하게 옆에 계시는 '아버지'의 내재성이 동시에 강조된 이 기도의 서두는 그 보편적 보호자로서의 그 아버지를 '우리'의 아버지로 호칭함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의 개인적 편향과 편익을 위해 편파적으로 이용되거나 오남용되는 문제를 사전에 방지한다. 나아가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게 하시옵소서'라는 간구도 하나님의 이름이 세속적 이해관계에 엮여 함부로 오남용되지 않도록 극진하게 배려한 점이 도드라진다. 이는 나아가 십계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교훈의 연장선상에 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옵소서'라는 문구는 하나님의 왕적인 주권(basileia)이 이 땅에 온전히 실현되길 간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의와 사랑, 평화와 자비 등으로 요약되는 하나님이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간구한 세 번째 항목은 제 위치를 지키거나 제 순환궤도를 돌며 피조물 본연의 역할에 착실하게 순종하는 하늘의 일월성신, 나아가 그 아래 구름과 새들처럼 경계 없는 하나님의 자유를 구현하는 창공의 피조물과 달리 이 땅의 청지기로 세운 인간만이 유일하게 패역하며 하나님의 창조 뜻을 위반하는 현실을 암시한다. 그래서 타락과 죄악의 근원이 되는 이 땅의 인간 현실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구현되길 갈망하는 간구가 이어진 것이다.

다음으로 세 가지 인간을 위한 간구 중 첫째가 일용할 양식이다. 영적인 양식을 굳이 배제할 필요는 없지만 예수의 의중 가운데 이 양식은 무엇보다 육체적 양식이었다고 봐야 한다. 음식을 먹지 않고 생명이 온전히 건사될 수 없다. 이러한 현실적 판단 아래 당시 굶주림에 지친 가난한 생명을 배려하여 이로써 인간을 위한 중요한 첫째 간구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렇게 보존된 생명이라야 죄악과 싸우며 용서하고 용서받는 일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죄지은 자의 용서에 대한 간구는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빚의 탕감에 대한 내용이다. 사회경제적인 맥락에서 이 땅의 현실은 비대칭과 불균형, 그리고 양극화이다. 그것은 조건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마찬가지로 은혜로써 상대방의 빚을 탕감해줄 때 극복 가능한 과제다. 용서의 본질도 인간사회에 인간의 탐욕으로 불거진 이러한 비대칭, 불균형의 인간관계를 극복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시험'(peirasmos)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유혹'과 '시련'으로 달리 번역될 수도 있다. 여기서 시험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그 대상은 제자들을 포함한 인간이다. 하나님의 시험은 욥의 고전적 사례가 암시하듯 수수께끼 투성이다. 그것을 극복할 때 인간을 연단하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 치여 치명적인 타격으로 죽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파멸적인 최후로 종결되는 시험으로 더 이상 우리 인간을 끌어들이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그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각종 유형무형의 '악'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당신'께서 피조물인 인간을 향해 이런 구제와 구원의 의무가 있음을 자식의 도리로 상기시켜드리는 데 이 주기도문의 주된 목적이 있다. 이어지는 14절은 주기도문의 예전적 완성도를 살리기 위해 후대에 첨가된 송영구이고 14~15절은 주기도문의 구절 중 12절의 빚 탕감과 용서의 교훈을 한 번 더 강조하여 추가로 논평한 것이다.

주기도문은 짧지만 예수의 행적과 교훈을 압축한 심오한 신학사상을 품고 있다. 그 한 구절마다 수많은 해석과 논쟁을 유발할 뿐 아니라 신앙적인 도전이 지대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초창기부터 이 주기도문을 애용하며 자신의 기도를 비추는 거울로 삼았을 뿐 아니라 경건한 신앙과 삶의 훈련을 위한 기준으로 삼았다. 오늘날 수많은 주기도문 강해가 나왔지만 그 중에는 보충되고 교정되어야 할 부분들이 많다. 아울러, 그 심층을 추가로 탐구하면서 그 핵심 교훈을 치열하게 실천해야 할 것이다. 주기도문은 이렇듯 예수님의 가르침을 현대화하는 데 첨단의 기수로 재발굴하고 재정립해야 할 중요한 과제를 담고 있다.

신명기 27:11-26


11 모세가 당일에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이른 후, 그곳 세겜 땅 북쪽에 있는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반드시 이행하여야 할 '축복과 저주의 의식'을 언급한 부분이다. 이 의식은 이스라엘 12지파가 각기 6지파씩 양편 산에 갈라서서 축복과 저주를 각기 선포하는 의식인데, 여호수아 8:30-35에서 그대로 실행되었다.

한편,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왜 축복과 저주의 산으로 각각 선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2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산에 서고

ㅇ요단을 건넌 후에 - 2, 3, 4절에 이어 본장에서 벌써 네번째 언급되고 있는 구절이다. 이는 그만큼 요단(Jordan)을 건너는 일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임을 시사해준다.

ㅇ시므온과...베냐민 - 모두 야곱의 정부인(正婦人)인 레아와 라헬에게서 태어난 후손이다(창 29:31-30:24;35:16-18). 그러나 그중 레아의 막내 아들인 스불론의 지파와 서모(庶母) 빌하를 범하였던 장자 르우벤(창 35:22)의 지파는 여기서 제외되었다.

ㅇ축복하기 위하여 - 야곱의 정부인에게서 난 아들들이 이처럼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에 대하여 카일(Keil)은 '적자(嫡子)가 서자(庶子)보다 신분이 높고, 축복이 저주보다 품격이 높은 만큼 적자가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평하였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433).

ㅇ그리심 산 - 사마리아 성읍 부근에 위치한 오늘날의 '예벨 엣 투르'(Jebel et Tur)이다. 남북으로 에발 산과 마주보고 있는데, 특별히 그리심 산(Mt. Gerizim)이 축복을 선포하는 산으로 선택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3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고

ㅇ르우벤...납달리 - 전술한 것처럼 르우벤과 스불론 외에는 모두 야곱의 첩이었던
빌하와 실바의  후손이다(창 29:31-30:34). 르우벤과 스불론이 여기에 속하게 된 이
유는 아마 르우벤은 서모 간통 사건으로  인한 장자권 박탈 때문이었을 것이고(창
35:22;49:4;대상 5:1), 스불론은 레아의 막내 아들이었기 때문(창 35:23)이었을 것
이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ㅇ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 혹자들은 그리심 산에 선 지파들을 축복받은 지
파들로, 에발 산에 선 지파들을 저주받은 지파들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단정
은 무리이다. 왜냐하면 에발 산에 서게 될 지파들 중에도 단, 아셀, 납달리 지파처럼
야곱의 축복을 받은 지파들이 있으며 그리심 산에 서게  된 지파들 중에도 시므온,
레위와 같이 야곱의 저주를 받은 지파도 있기 때문이다(창 49:1-27). 따라서 축복의
산에 오른 자들은 율법에 순종하는 자들을, 저주의 산에 오른 자들은 율법을 거역하는
자들을 각기 상징할 뿐으로 이해함이 좋다. 한편 에발 산(Mt. Ebal)이 특별히 저주를
선포하는 장소로 선택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4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ㅇ레위 사람 - 여기서는 레위 지파에 속한 모든 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언약궤
를 메고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의 중앙 부분에 서서 모세의 말을 전달받아 양편에 갈
라 서 있는 백성들에게 큰소리로 외칠 '레위 제사장'(9절;수 8:33)을 가리킨다
(Delitzsch, Lange, Alexander, Wycliffe)
ㅇ큰 소리로...이르기를 - 혹자들은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서 외치는 사람의 목
소리가 양편 산 중턱에 운집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들릴 수 있었겠는가라는
점에 의문을 표시한다. 그러나 성서 고고학자들에 의한 정밀 조사 결과 양쪽 산의 음
향 효과가 매우 훌륭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또 여러 차례의 실험 결과 여러 사람이
외칠경우 충분히 들려진다는 사실도 입증되었다(Stanley, Syria & Palestine;
Tristram, Land of Israel ;Hastings, Bonar, E.G. Kraeling).

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찌니라

ㅇ장색 - 각양 물건을 정교하게 만드는 기술자(craftsman)를 가리킨다. 당시 이들은
우상을 만들어 파는 일로 많은 이익을 보곤 하였다(행 19:24).
ㅇ가증하니 - 23:18 주석 참조.
ㅇ은밀히 세우는 자 - 십계명 중 제 2계명(5:8-10;출 20:4-6)을 은밀히 범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은밀히'에 해당하는 원어 '바사테르'는 '은밀
한 장소에'(KJV, in a secret place)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은밀한
장소'로 꼽을 만한 곳은 어디이겠는가? 물론 눈에 잘 안 띄는 골방이나 비밀 장소를
들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곳으로는 역시 사람의 마음 속을 꼽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보다 더 큰 비중으로 자기 마음 속에 은밀
하게 품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 숭배이다.
ㅇ모든 백성은...아멘 할지니라 - '아멘'(amen)이란 말은 본래 '확실하다', '신실하
다'는 뜻의 '아만'에서 유래한 단어로 문장이나 대화의 끝에서 사용될 때
'과연 그렇습니다',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장 11-26절 강해, '아멘 연구'를 참조하라.

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경홀히 여기는(칼라) - 원뜻은 '가볍다'로, 곧 상대방을 업신여기거나
비천히 여기는 것(잠 12:9), 절하(切下) 평가하거나 모독을 주는 것(사 16:14), 그리
고 지독히 경멸하는 것 따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부모
를 이처럼 업신여기는 것은 곧 자신의 근본(根本)을 망각한 행동일 뿐 아니라, 급기야
는 부모를 통해 그 생명을 부여하신 하나님을 경홀히 하는 짓거리이다(21:18). 그러므
로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고 권면하였다. 출 20:12 주석 참조.
ㅇ저주를 받을 것이라(아루르) - 기본형은 '아라르'로 '버림을 받다'란 뜻이다. 즉 이
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한다면, 버림을 받는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자신임을 잘 증거해 준다(Calvin).

17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 '여기서 지계표'(地界標;KJV,landmark;NIV,
boundary stone)란 땅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세운 돌이나 푯말을뜻한다(창 31:51,
52). 따라서 이러한 지계표를 마음대로 옮기거나 없애 버리는 것은 타인의 재산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 행위이다. 한편 성경 뿐 아니라 고대 바빌로니아의 법도 지계표를
침해하는 행위를 큰범법 행위로  규정하고  매우 엄격하게 다스렸다.19:14 주석 참조.

18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 고대 근동에는 여러 가지 환경적 요인과
풍토(風土)로 인하여 의외로 소경이 많았다. 즉 고온 건조한 기후와 쉴 새 없이 이
는 먼지, 그리고 비위생적인 생활 환경 및 가난으로 인한 영양 실조 등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실명(失明)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로부터 이러한 소경을 일부러 괴롭
히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따라서 본절이 의미하려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단정
하기 어렵다. 그래서 영역본 Living Bible은 본절을 '소경을 이용하여 그 이(利)를
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Cursed is he who takes advantage of a blind man)
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이웃을 하나님의 계명의 길에
서 벗어나도록 유혹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영적으로 해석하였다. 아뭏든
이는 보다 광범위한 의미로, 장애자의 약점을 이용하여 불의한 이(利)를 취하거나 또
는 그들을 괴롭히며 실족케 하는 일 따위를 엄격히 금하고 있는 조항임에는 틀림없다
(레 19:14;롬 15:1). 실로 율법은 그러한 약자들의 약점을 악용하는 죄악에 대해서는
보다 혹독한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레 19:14 주석 참조.

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객이나 고아나 과부 - 가난하며 약한자, 그리고 억눌리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
을 대표하는 구약 시대의 3대 약자들이다(14:29;16:11, 14;24:21;26:12, 13).
ㅇ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  여기서  '억울케  하다'에  해당하는 '나타'
는 '비틀다', '굽게 하다', '벗어나게 하다'는 뜻으로, 정당한 판결을 내리
지 아니하고 힘 있는 자를 두호(斗護)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서
는 이미 24:17에서도 엄금했던 바, 실로 하나님께서는 '공법(公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河水)같이' 흘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암5:24)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 계모와 구합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계모와 구합하는 자 - '구합하다'에 해당하는 '솨카브'는 성(性) 관계
를 갖기 위해  '잠자리를 같이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계모'에 해당하는 '에쉐트 아
비'는 '아버지의 여자'란 뜻이다. 따라서 비단 이는 계모 뿐 아니
라 아버지의 첩과도 성 행위를 하는 것을 포함한다.
ㅇ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 영역본 RSV는 이를 '아버지의 여자를 벌거벗겼으
니'로, NIV는 '아버지의 침소를 더럽혔으니'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Living Bible은
'그녀는 그의 아버지에게 속하였으니'로 번역하고 있으며, 공동 번역은 '아비의 이불
자락을 들치고'로 의역하고 있다. 아뭏든 이처럼 아버지의 침소, 아버지의 여자를 넘
보는 행위는 인간의 기본 윤리를 저버리는 패역(悖逆)이니, 저주를 면할 길 없다
(22:30). 레 18:8 주석참조.

21 무릇 짐승과 교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짐승과 교합하는 자 - 동성애, 근친 상관 등과 더불어 변태적인 성 행위 중의 하
나인 수간(獸姦)을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수간자(獸姦者)는 근친 상간자 및 남색자
(男色者)와 더불어 땅을 더럽히는 추악한 성범죄자로서 아스라엘 사회에서 반드시 제
거되어야 했다(출 22:19;레 20:15, 16). 성경은 결코 생리적인 성적 욕망이나 충동을
죄악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性)의 창조자로서 하나님께서는 성을 인간들이 누릴 수
있는 지극한 기쁨으로 간주하셨다(잠 5:18;전 9:9;요 3:29). 이것은 창조시 아담의 독
처(獨處)를 좋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한 여자 하와를 창조하여 준 사실(창
2:18, 22)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바로 이 남녀 창조 사건에서도 분명히 예시
되었듯이 남녀간의 성적 욕망은 일부 일처의 신성한 결혼 제도에 의해서만 충족되어야
한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요 비밀이었다. 여기서 '비밀'이라고 한 것은
훗날 사도 바울이 설파했듯이 신랑과 신부의 한몸 되는 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순결한 일체성'을 상징하고 또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22:13-30;엡 5:31, 32).
따라서 하나님의 신성한 창조 질서가 반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오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 내포되어 있는 일부 일처의 결혼 제도를 떠난 모든 성(性) 남용은, 더
욱이 수간, 근친 상간, 동성애(同性愛) 등 타락한 인간의 어그러진 심성(心性)에
기인하고 있는(롬 1:26, 27) 모든 변태적(變態的)인 성행위는 단순한 도덕적 범죄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죄에까지 이르는 추악한 성범죄 행위인 것이
다. 특히 고대 이방의 문란하고 타락한 제사 의식이나 설화 등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
는 수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엄한 인간의 가치를 하등 동물의 수준으
로 격하시키는 극악한 소행이므로 거룩한 공동체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결단코 용납될
수 없었다.  따라서 성경은 일관성 있게 이러한 모든 성범죄를 보다 엄격히, 그리고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는 성(性)의 타락으로 인해 마침내 하나님
의 심판을 초래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가나안 족속의 멸절 그리고 로마의 패망 등
을 거울삼아 성(性)개방 풍조로 인해 성(性)을 가볍게 취급하거나 심지어 상품화시키
는 타락한 세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빛된 자녀답게 고결하고 아름다운 성(性) 윤리관
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레 18:23;20:15, 16 주석 참조).

22 그 자매 곧 그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과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23 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자매...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 누이는 항렬상 자기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자이다.
따라서 그러한 누이를 범하는 것은 우생학적(優生學的) 폐단은 차치하고라도, 곧 자기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는 짓이나 마찬가지 행위이므로 저주를 면할 길 없다. 레 18:9
주석 참조.
ㅇ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 성경은 자신의 장모와 성 관계를 갖는  파렴치한에
대하여서는 그들 모두를 반드시 화형(火刑)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레
18:17;20:14 주석 참조.

24 그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 과실치사(過失致死)가 아닌 한, 그 어떠한 살인 행
위도 하나님  앞에서  결코 정당시킬 수 없다. 특히 암살(暗殺) 행위는 더욱 그러한
데,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상대방이 미처 방어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기습하는 도
발 행위이기 때문이다. 죄를 은폐하려는 의도하에서 저지르는 계획적 살인 행위이
기 때문이다. 출 20:13;민 35:16-21 주석 참조.

25 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 살인의 대가로 뇌물을 받는 행위는
곧 인간의 값어치를 추잡한 뇌물보다도 낮게 취급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비록 사람
의 눈을 피해 그같은 죄를 자행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결국 하나님의 공의의 눈은 피
할 수 없기에 저주를 면할 길 없다. 출 23:7, 8 주석 참조.

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

사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자란 아무도 없다(롬 3:10).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출애굽의 영웅 모세도, 그리고 성군(聖君) 다윗도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던 죄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짐짓 범죄치 아니하려고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율법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라 하겠다<창 6:9>.

ㅇ아멘(Amen) -

이 말의 어원(語源)인 '아만'은 본래 어떤 대상을 '지지하다' 혹은 '신임하다'란 뜻이었다.
여기서부터 이 말은 기도나 찬양 및 선언이 종결되어지는 종지부나 끝맺음에서 '진실로 그렇습니다' 또는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
'라는 동의나 소원의 뜻을 가진 '아멘'으로 발전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아멘'이란 말은 단순한 종결(終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곧 어떤 선포나 찬양 그리고 기도 등을 지지하거나 확인 또는 시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나의 삶 속에 적용시키겠다는 결단의 의지(意志)까지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한편 신약 시대에 '아멘'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강조 용법('진실로 진실로'란 말은 헬라어로 '아멘 아멘'이다)으로 자주 사용되었고, 바울 사도에 의해서는 축복과 찬양(Doxology)의 결미어(結尾語)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계시록 서신에서 이 말을 인격화시켜 존재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하였다(계 3:14).
이 모든 배경하에서 '아멘'을 복창(復唱)하던 일은 유대인들의 습관이 되어 왔으며, 또한 그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기독교 공동체에 전달되어져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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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보내시면서 제자들이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를 묻자, 친히 가르쳐주신 기도문이다.
기도드리는 사람들의 눈을 고치어 하나님의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주기도문은 하늘에 속한 사항 3가지(여호와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아버지의 뜻)와 땅에 속한 사항 3가지(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악에서 보호)를 합하여 6가지를 담고 있다.

인간 삶에 관한 대부분을 포괄하는 것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직면하는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게 해준다. 즉, 신이 행한다는 신위(神爲)의 차원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순종과 청종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사무엘상 15:22절)

 

기독교란 ?

기독교(Christianity)는 로마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와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 그리고 개신교회(Protestantism)의 3교회를 합하여 일컫는다.

세계의 모든 교회가 함께 추구하는 주제이며, 기독교의 신학으로나 교회 현장에서 공통되게 추구하고 있는 주제는 ;

첫째 올바른 영성(Spirituality)이다.
둘째 건강한 공동체(Community)이다.
셋째 병들어가는 지구 공동체에 대한 치유(Healing)이다

하나님의 형상

미국의 여류신학자인 Betty Russel은 하나님의 형상을 4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영적인 하나님이다.
둘째 사랑의 하나님이다.
셋째 창조적인 하나님이다.
넷째 공동체로 계시는 하나님이다.

온주 상권(溫州 商權)과 기독교

중국은 기독교 인구가 줄잡아 5% 미만이다.
온주는 15%에 이르고 있다.
그 유명한 문화혁명(文化革命) 시절에도 교회에서의 예배를 중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곳의 젊은 크리스천들의 모임을 접하면서 중국 기독교의 밝은 미래를 보는 듯 했다.
생각해 볼 점은 중국교회 지도자들이 한국교회를 벤치마킹하려는 마음이 절실하다는 점이다.

감사와 기도

제일동포 3세인 의사 하루야마 시게오(春山茂雄)박사가 “뇌내혁명(腦內革命)”(3권)을 출간하여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됬다.
조선에서 한의원을 했던 할아버지로부터 어린 시절부터 침술, 지압술 등을 배웠고, 8세에 이미 일본정부로터 침술사의 자격증을 받았다. 동경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후 의사가 되었고, 한의학과 양의학을 융합하여 치료와 건강지도에 활용하였다.

“뇌분비 호르몬이 당신의 인생을 바꾼다”는 부제(副題)가 붙어있다.

원래 사람은 자신의 체내에 모든 질환에 대한 방어 기능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잘못된 생활습관과 삶의 방식으로 인해 걸리지 않아야 할 질병에 걸린다.

하루야마 시게오 박사는 자신의 병원에서 ‘음식, 운동, 기도’의 3가지 방법으로 각종 질병을 치료한다.

화를 내거나 누군가를 미워할 때 뇌 속에서 아드레날린(Adrenalin) 혹은 노르아드레날린(Noradrenalin) 호르몬이 분비된다. 이 호르몬은 강한 독소를 지니고 있어 사람을 병들게 하고 늙게 한다.

그러나, 감사하거나 기뻐할 때 그리고 기도와 명상에 깊이 빠져들 때 엔돌핀(Endorphin) 이나 베타엔돌핀(β-Endorphin) 호르몬이 분비되어 병을 낫게 하고 젊어지게 하며 행복감을 누리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감사하는 생활습관과 기도·명상에 젖어드는 영성의 삶에 통해 건강과 장수 그리고 행복과 행운을 동시에 붙잡을 수 있게 된다.

가난 (Poverty)이란?

I realize, of course, that it's no shame to shame to be poor.

But it's no (great) honor, either.

가난은 창피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위대한) 명예도 역시 아니다.

Luxury Shame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때를 만나게 되니 사람들의 의식이 다소 변해간다.
그동안 일부 지각없는 인사들이 부(富)를 뽐내기 위해, 또는 빈자(貧者)의 삶을 한탄하며 허파에 바람만 잔뜩 집어넣은 허영의 속물(俗物)들이 고가의 명품을 사서 온 몸에 휘감고 다녔다.
주체할 수 없는 부(富)를 가진 Super Rich 계층에서 고가의 명품을 소비하는 행태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바람직한 인사들이 생겨났다. 이때 느끼는 부끄러움을 Luxury Shame이라 한다. 신조어(新造語)다.
시대가 바뀌면서 인간 의식의 전환의 때가 왔나보다.

인생은 B to D

B는 Birth(태어남)이고, D는 Death(죽음)이다.
즉 인생은 태어났다가 죽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럼 B와 D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C가 있다.
C는 무엇인가?
바로 Choice(선택)이다.
즉 인생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선택하는 대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시다.
모든 일들이 그분의 선택의 역사다.
거룩한 하나님께서 거룩한 백성을 선택하시고지극히 사랑하시어서 천국으로 이끄신다.

B는 주님의 창조의 역사이고, D는 주님이 선택하신 백성들이 가는 목적지이다.
즉 영생(永生)의 삶을 사는 부활의 현장이요, 승리의 종착역인 것이다.

C는 주님의 선택이다.
주님은 범죄 하면서 사는 우리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부활하는 역사(役事)를 통해 우리 인류 전체의 죄를 값없이 용서해 주셨다.

우리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위대한 선택을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인간을 천국의 영생의 삶으로 이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자에 의한 리빙스턴의 부상 - 토마스 벤느 作)

(주님께서 동행하는 자도 시련과 고난을 당하지만, 능히 극복해 낸다)

 

우리 죄 많은 인간에 대한 그분의 지극한 사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이를 거부하고 헛된 우상을 만들고 이생의 자랑과 교만에 취해 스스로 드러내려고 애쓰면서 살아간다.


주님께서 이미 행하신 위대한 사랑의 선택을 망각하거나 거부하면, 살아있어도 죽은 자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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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다섯 가지를 영어 단어의 첫 글자를 따서 ‘5F’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F로 시작하는 다섯 가지가 행복한 노후를 만들어 준다”고 했습니다.

첫째, 파이낸스(Finance)

파이낸스는 돈을 의미합니다.
노후에도 돈이 부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전략으로 ‘LED 전략’을 제시 했습니다.

L은 ‘Long Work’의 약자로 오래 일하자는 의미입니다. 
E는 ‘Early Start’로 노후 대비를 젊을 때부터 일찍 시작하자는 의미입니다.
D는 맞벌이를 의미하는 ‘Double Income’입니다.

“100세 시대에는 맞벌이를 해야 노후 준비가 손쉬워진다”라고 했습니다.

둘째, 필드(Field)

필드는 일을 하는 분야를 의미합니다.
“노후에도 친구들과 함께 공통의 취미를 갖고 활동할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며

“100세 시대인 만큼, 은퇴 후 30~40년을 어떻게 보낼 건지 은퇴 전에 준비하는 게 좋겠다”라고 했습니다.
노후에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비용도 고려하면서 취미를 만드는 게 좋다고 했습니다.

셋째, 펀(Fun)

펀은 재미를 의미합니다.

“기부 활동, 취미 활동 등을 하면서 시간을 어떻게 재미있게 보낼 것인가도 미리 고민하고 준비해야 할 포인트”라고 했습니다.

넷째, 프랜드(Friend)

프랜드는 재미를 같이 즐길 가족이나 친구를 의미합니다.

“나이가 들어서는 노후를 같이 즐길 수 있는 알짜배기 친구들을 만들어 가는 관계의 다이어트가 필요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섯째, 피트니스(Fitness)

피트니스는 건강을 의미합니다.

행복한 노후에는 건강이 뒷받침 되야한다는 것입니다.
“피트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걷기와 근육 키우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즐기는 구호라며 ‘청바지’와 ‘백두산’이라는 문구를 소개했습니다.

‘청바지’는 ‘청춘은 바로 지금부터’를 줄인 것이고, ‘백두산’은 ‘백 세까지 두 발로 산에 가자’를 줄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노후에 필요한 ‘오자’는 ‘놀자, 쓰자, 베풀자, 웃자, 걷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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