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상징 / 모세의 놋뱀(민수기 21:8) Nov. 03. 2021


기독교 신앙과 상징

기독교 신앙과 상징
- 우리는 무엇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가?

기호와 상징의 차이

1. 상징(das Symbol. symbol)

본래 가지고 있는 뜻을 정확히 부연 설명하거나 의미 전달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의 기호로 표현되어지는 것.

2. 기호(das Zeichen. sign)

상징을 주기 위한 하나의 신호적인 의미이므로 그 안에 아무런 의미나 뜻이 들어 있지 않다.

예를 들면 십자가는 예수의 고난을 상징한다.
십자가 그 자체는 하나의 예수의 고난을 상징하기 위한 하나의 기호(Zeichen)에 불과하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의 상징의 필요성

왜 기독교는 상징이 필요한가?
- 상징이 주는 신앙적 의미 

신앙은 참된 하나님의 상징성을 통하여 우리가 바라보는 믿음의 대상을 의지하고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의 대상은 상징적 요소를 통하여 하나님의 실재를 대변하게 된다.

기독교 상징을 통한 의미부여 :

우리가 하나님의 실재를 확인할 수 없기에 우리는 상징적인 요소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부분을 투영하며 그 본체에 가깝게 의미부여하는 것이다.  

상징이 주는 신앙의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

긍정적인 요소

1. 하나님에 대한 거룩성 수용

2. 타자로서의 하나님 이해

3. 하나님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의 가능성

부정적인 요소

1. 인간의 이해 방식에 따라 자의적 해석가능

2. 인간의 경험과 이성의 한계로 인한 하나님의 사고에 대한 고착화 우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신앙의 상징적인 요소가 있는가?

인간의 신앙의 자율성과 지속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특별히 신앙의 폐쇄성을 탈피하고 상징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와 투영을 가깝게 이해하게 하려는 것이다.

개신교는 상징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가?
가톨릭은 상징을 절대화하여 우상적인 요소가 있고, 개신교에서는 본질적 상징마저 잃어버린 현실의 상황이다.

나는 신앙에 대한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참된 기독교의 상징의 회복은 예배의 회복, 신앙의 회복, 삶의 회복이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참된 신앙의 자리를 갖기 위하여 상징의 의미를 회복하여야 한다.
상징이 고착화가 되면 우상이 될 수 있지만 상징이 사라지면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를 잃어버릴 수 있다. 특히 개신교는 상징의 신학이 회복되어야 한다. 예배, 찬양, 기도, 말씀에 대한 상징의 본질이 회복되어야 한다.

상징을 통하여 성서와 신앙을 위한 제언

성서는 과학적인 근거나 객관적인 자료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근거를 위한 텍스트로서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신앙인 들에게 부여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의 토대로서의 말씀이다.
자신을 어떤 대상물이나 상징적인 의미로 표현하고자 할 때, 대부분 그 자신이 투영하는 것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과 의미와 정신이 반영되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과 그릇된 편견 또는 자의적인 해석에 따라 자신을 마음대로 신앙을 판단하고 해석하고는 있지 않는가에 대한 진정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신앙은 소유가 아니라 개방이자 열림이다.
신앙은 자신의 삶만을 보호하는 방어막이 아니라 장애물과 난관을 헤쳐나가게 해주는 원동력이다.
신앙을 그러한 참된 의미를 각성하게 하고 자신의 나태한 모습을 새롭게 받아들이려는 믿음의 근거이다.

모세의 놋뱀(민수기 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The LORD said to Moses, "Make a snake and put it up on a pole; anyone who is bitten can look at it and live."

습관적인 불평과 불만에 사로잡힌 민족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항상 잊어버리고, 어려운 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습관적인 불평을 일삼아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쉽게 망각하는 자들입니다.

가나안을 향하는 길에 에돔 왕이 자기 영토로 이스라엘이 지나가는 것을 용납지 아니함으로 지름길을 제쳐 놓고(민 20:21),
에돔 땅을 우회하게 되어 백성의 마음이 상하게 되었습니다(민 21:4).
그들에게 있어서 광야 길은 육체적으로 고역스럽고 사람의 마음을 지치게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결국 인내심이 사라진 그들의 마음에 극한 분노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분노와 원망 즉 남의 탓으로 돌리는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했습니다.

하나님은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물게 하셨고 죽음의 사건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뱀을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러한 불뱀의 습격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해결책으로 자신들의 범죄함을 인정하게 되었고 모세에게 여호와께 기도해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마음을 보시고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8절)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고 그것을 쳐다본 자들은 모두 살았다고 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얻은 사망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로 생명을 얻은 사건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 습관적으로 나오는 불평과 불만이 나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고 원망의 말을 서슴지 않고 하게 됩니다.
죄를 지을 때 마다 나에게 찾아오는 불편한 마음과 평안을 깨트린 상황에서는 무엇을 해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나에게 찾아오는 감정은 분노, 짜증, 우울, 고독이 밀려옵니다.
결국 감사가 없는 마음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인내심의 결여는 나에게 영적으로 큰 손해를 입히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모든 것의 원인을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모든 상황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나에게 임하게 됩니다.

나의 잘못된 생각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던 것을 회개하며 내 삶을 돌이킬 때에 성령님이 내 마음 가운데 임하셔서 평안과 안식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을 바라본 것처럼 나또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인생의 여정을 나 혼자가 아닌 성령님과 함께하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 많은 적을 이기게 하신 것,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보호하신 것,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것,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신 것 등은 기억하지 않고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민수기 21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로 인해 마음이 상해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뱀에게 물린 자마다 쳐다본즉 살더라

하나님은 원망에 가득 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불뱀이 천막 안을 기어다니고,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 죽어갔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애원했습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제발 불뱀을 떠나게 해주소서!”

모세가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불뱀을 떠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 뱀을 쳐다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으로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습니다.
성경에는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뱀에게 물렸는데 놋뱀을 쳐다보면 어떻게 삽니까?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이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6)

성경에 등장하는 단어들에는 저마다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포도주는 기쁨을 나타냅니다.
기쁨이 있는 곳에는 포도주가 등장합니다.

기름은 성령을 나타냅니다.

금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은은 구속의 대가를 나타내며, 놋은 심판을 나타냅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심판받은 뱀’을 나타냅니다.
불뱀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고, 그 불뱀이 심판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고, 죄가 심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구원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과 그의 아들이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버지, 놋뱀을 쳐다보면 산대요. 놋뱀을 쳐다보세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몸에 독이 퍼져서 고통스러워 죽겠는데 놋뱀을 쳐다본다고 살 리 있냐?”

“아버지, 쳐다보세요.”

“글쎄, 헛소리하지 마라니까!”

“아버지, 그래도 한번 쳐다보세요.”

“그만하라잖아!”

“안 됩니다. 그러다가 아버지 죽습니다. 제가 강제로라도 아버지가 놋뱀을 보시게 하겠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놋뱀이 있는 곳까지 모시고 가서 얼굴을 들어 쳐다보게 했습니다.
그러자 몸 안에 있던 뱀의 독이 사라졌습니다.

“이거 진짜 신기하네! 놋뱀을 쳐다보니까 몸이 싹 나았다!”

구원은 아주 간단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해서 불뱀이 왔지.
죄로 인해 불뱀이 온 거야.
놋뱀은 그 뱀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니 우리 죄가 심판을 받았다는 의미구나. 그러면 죄가 끝났네!’
십자가는 단순히 기독교를 표시하기 위해, 혹은 보기 좋으라고 다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쳐다보십시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 죄가 심판받은 곳입니다. 죄가 끝나고, 저주가 끝나고, 심판이 끝나고, 고통이 끝난 곳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가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고통하다가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내 죄를 사하셨지!’


아리우스 가문의 반지

‘벤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등장인물인 벤허멧살라는 어릴 적에 친구였는데, 유대인인 벤허와 로마인인 멧살라는 자라면서 다른 이념을 가져 서로 원수가 됩니다.

멧살라는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호민관이 되어 유대로 돌아온 뒤 벤허를 로마군 함선에서 노를 젓는 노예로 만듭니다.
얼마 후, 로마의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 아리우스가 해적들을 소탕하려고 함대를 이끌고 바다로 나가면서 벤허가 노를 젓는 배에 탑니다.

곧 로마군과 해적들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싸움 중에 아리우스가 바다에 떨어집니다.
그 광경을 본 벤허가 바다로 뛰어들어 아리우스를 구해 부서진 배의 큰 나무판 위에 올려놓습니다.
아리우스가 정신을 차려 자신의 배가 불길에 휩싸인 것을 보고는 자결하려고 하는데, 벤허가 그의 팔을 잡아 칼을 빼앗습니다.
잠시 후 함선들이 몰려오고, 아리우스는 해적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배들이 가까이 와서 보니 로마군 함대였습니다.
아리우스가 배에 올라가자 한 장군이 ‘배 두 척만 잃고 해적들을 전멸시켰다’고 보고합니다.

로마로 돌아간 아리우스벤허를 양자로 삼고,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인장반지를 벤허의 손가락에 끼워 줍니다.
벤허는 어머니와 여동생 생각에 유대로 돌아가서 멧살라를 만나러 갑니다.
가기 전에 “아리우스의 아들로부터”라고 적은 선물을 멧살라에게 보냅니다.
멧살라가 선물을 보고 “집정관 아리우스에게 아들이 있었나?” 하자, 옆에 있던 장교가 최근에 양자로 삼은 아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때 벤허가 나타나 멧살라가 깜짝 놀랍니다.

“네가 무슨 요술로 아리우스의 아들이 되었지?”

“요술의 주인공은 바로 너다! 네가 나를 노예선으로 보내 내가 전쟁터에서 아리우스를 구했다.”

그러고는 “표식은 알겠지?” 하고 서판에 인장반지의 문양을 찍어 멧살라에게 보여 줍니다.
벤허가 이전의 벤허가 아닌 로마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집정관의 아들이기에 멧살라가 쩔쩔맵니다.
벤허가 말합니다.

“내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소식을 알려다오. 그러면 모든 걸 잊겠다.”

“그건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허가를 받아내!”

벤허가 아리우스의 아들이 되어 가문의 반지를 껴도 그 능력을 모르면 멧살라에게 여전히 수모를 당해야 했겠지만, 벤허는 ‘아리우스 가문의 인장반지’가 가진 힘을 알았습니다.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라

십자가에는 힘이 있습니다.
사탄이 자주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너, 거짓말했잖아! 너, 나쁜 짓 했잖아!”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로 우리를 슬퍼하고 괴로워하게 만듭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근심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쉬지 않고 우리를 정죄합니다.

“네가 죄를 지었으니까 하나님이 너를 미워하고 벌하고 버리실 거야!”

그때 우리가 놋뱀을, 십자가를 쳐다보는 것입니다.

‘사탄아, 맞아. 내가 죄를 지었어. 하지만 저 십자가 앞에서는 죄가 죄가 아니야. 저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가 사해졌어. 거기서 죄가 끝났어! 심판이 끝났어!’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 고통하다가 놋뱀을 쳐다보면 모두 나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이 죄로 인해 우리를 조소하고 괴롭힐 때 십자가를 바라보면 그 고통에서 해방됩니다.

“너, 거짓말했잖아!”라고 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어! 거기에서 내가 거짓말한 죄가 끝나고 모든 죄가 끝났어!’ 하면 됩니다.

성경은 확실히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가 지은 죄의 기록이 없습니다. 본래 가지고 있는 뜻을 정확히 부연 설명하거나 의미 전달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의 기호로 표현되어지는 것.

2. 기호(das Zeichen. sign)

상징을 주기 위한 하나의 신호적인 의미이므로 그 안에 아무런 의미나 뜻이 들어 있지 않다.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피로 모두 도말塗抹했습니다. 어디에도 우리를 정죄할 자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모든 죄를 눈처럼 희게 씻었습니다.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속죄함 받은 것 아니요
거룩한 하나님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이 찬송을 옛날에는 입으로 불렀지만 이제는 마음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우리의 선한 행위로도 아니고, 노력이나 수고로도 아니고,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우리 죄를 씻었는지 가르쳐 주시기 위해 성경 구석구석에 구원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아놓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해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다가 놋뱀을 쳐다보고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이 성경 이야기를 내용만 압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거기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됩니다. 놋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십자가에서 끝났습니다. 심판받을 죄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죄에서 해방되어 참된 자유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마음에서 저주가 끝나고 고통과 슬픔이 끝나 밝게 삽니다. 사탄에게 속아서 죄를 지었을 때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저기서 내 죄의 심판이 끝났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쁘고 즐거운 삶을 값 없이 은혜로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이 복음을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모세의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한다.


모세의 놋뱀(민 21:9)은 타우형(헬라어 T자) 십자가라고 한다.
이 십자가는 예로부터 모세가 광야에서 치켜들었던 십자가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모세의 놋뱀(민 21:9)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하기 때문에 이 십자가는 예언(의) 십자가라고도 불린다.
타우형 십자가는 축 늘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힘겨운 어깨를 상기시킨다.
가로막대와 교차하는 세로막대의 윗부분이 생략된 모습은 십자가의 고통을 한층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예수는 자기의 십자가 죽음을 예언하고, 영적 의의를 모세 때 있은 놋뱀 사건을 인용하여, 부활의 예수를 바라봄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하였다.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고 요한복음 3장 14~15절에 나타나 있다.

요르단에서 꼭 가봐야 할 역사적 기독교 유적가운데 하나는 해발 835m의 느보산이다.
눈치 챘겠지만 모세의 출애굽 여정 중 마지막 기착지이기 때문이다.
40년 광야생활을 청산한 모세는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가나안 땅을 조망하고 숨을 거둔다.(신 32:49)

모세기념교회 옆 전망대에 서면 멀리 사해와 예리코(여리고) 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으면 예루살렘의 올리브산(감람산)까지 보인다고 한다.
4세기 비잔틴제국 시대에 모세의 무덤위에 지었다고도 전해지는 모세기념교회는 지금도 그 교회 터가 남아 있다.
이 교회 정원에는 이탈리아 조각가 지오반니 판토니의 ''모세의 지팡이'' 작품이 세워져 있다.
놋뱀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복합시킨 작품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에게 불평하여 불뱀이 그들을 물었다.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을 낫게 하기 위해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로 놋뱀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을 장대에 매달고 그것을 보는 자는 살게 된다고 민수기 21장에 기록되어 있다.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본 자는 모두 치료됐다.
나중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우상으로 섬기게 됐는데, 히스기야는 이것을 부숴 버렸다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열왕기하 18:4)고 기록돼 있다.

모세는 40년간 광야를 헤매다 결국 가나안 땅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느보산에서 가나안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숨을 거뒀다.
느보산에 거대하게 세워진 모세의 지팡이 ''놋뱀''이 은혜를 잊고 하나님을 원망하다 불뱀에 물려죽은 이스라엘 백성의 ''어리석음''을 닮지 말라고 오늘도 경고하고 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 21:9)."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놋 뱀 사건을 예수께서 니고데모와 대화중에 자신에게 닥칠 사건과 비교하여 언급하신 내용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이 분분하기에 서로 비교하고 그 해답을 찾아보기로 하자.

다섯 부류의 주장이 있다.

1. 전통적 주장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놋 뱀을 달게 하여 이를 쳐다본즉 뱀에 물린 자가 살게 되었으므로 놋 뱀은 예수의 십자가를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놋 뱀을 예수라 할 수 없으니 여호와께서 은혜의 선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모순(矛盾) :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가 십자가를 쳐다봄으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으라(마 16:24) 하였으며 육체와 합하여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매달아야(갈 5:24)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뱀은 무엇인가?
뱀에 대한 해명이 뒤따라야지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은혜로 포장하고 있다.

2. 일부 주장 (1)

놋 뱀은 사탄이므로 사탄이 매달렸으니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내 자신 안에 있는 사탄의 속성을 독배로 마시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모순(矛盾) : 예수는 죽을 권세도 있고 살 권세도 있어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려고(롬 8:2, 갈 4:5) 바리새인들의 손을 빌어서 죽으신 것이지 사탄의 독배를 마신 것이 아니다.

3. 일부 주장 (2)

놋 뱀은 예수님이다.
놋 뱀 사건은 예수님 십자가 사건의 상징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놋 뱀에 대하여 무엇이라 분명하게 말하지 않으므로 '놋 뱀이 예수이다' 주장하는데 주장하는 이유로는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도 뱀같이 지혜롭게 하라 했으니 뱀을 예수라 주장한다.

모순(矛盾) : 뱀은 사탄이다.
뱀같이 지혜롭게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신중하라(프로니모스)고 하셨으니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뜻이지 뱀을 지혜롭다고 오역한 부분을 가지고 뱀과 예수를 동일시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신중하고 순수하라는 것은 방법이 선해야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는 당부이다.

4. 전통적인 주장 (2)

어떤 주장도 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입장으로 침묵하겠다는 부류가 있다.

모순(矛盾) : 해답을 내놓지 않고 있음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해석과 주장이 있어 오늘과 같은 혼란을 초래하였다.

5. 새로운 주장

놋 뱀사탄이지 예수님이 될 수 없다.
놋 뱀 사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가 아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의 상황이다.
그 해답은 요한복음 3장 14절에 있다(스타우로스 원어성경연구원).

요한복음 3장 14절 번역에 문제가 있어 다시 번역한다.

"그리고 모세가 광야 안에서 뱀을 높인 것같이 이같이 인자를 높이게 됨이 마땅하다(요 3:14)."

뱀을 들었다는 것은 매단 것으로 보았고 인자가 들려야 하는 것도 십자가 사건으로 보았기에 내용이 풀리지 않고 꼬이기 시작했던 것인데 든 것이 아니라 높인 것이다.

아래에서 동일한 단어가 사용된 예를 살펴보자.

높이다(5312, 휘프소오)에 대한 고찰

휘프소오(
hüpsŏō) ὑψόω
1. 높이 올리다.
2. 높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5312)(마 23:1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5312)(눅 1:52)."

"무리가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삶은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에 이르도록 머무신다고 들었는데도 당신은 어찌하여 인자를 높임을 받아야(5312) 한다고 말하느냐? 이 사람의 아들이 누구냐?(요 12:34)."

사도행전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혹시 내가 너희가 높임을 받게(5312) 하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내가 죄를 지었느냐?(고후 11:7)."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의 삶을 높이실 것이다(5312)(약 4:10)."

예수님을 높임 받게 한 사건은?

예수님이 높임을 받는 전제 조건은 낮아짐이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낮아졌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를 높이시는 부활과 승천의 영광을 주신 것이다.
우리에게도 주시는 동일한 은혜의 말씀은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의 삶을 높이실 것이다(5312)(약 4:10)."
십자가의 죽음까지 자신을 낮추면 주께서 높여 주신다는(5312)약속이다.

광야에서 뱀을 높였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고린도전서 10:7-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씩 죽었고 시험하다 뱀에게 멸망하였고 원망하다가 멸망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러다간 다 죽이게 생겼기에 뱀(사탄)을 깃대(닛시) 위에 높이고 이를 쳐다봄으로 살도록 하여서, 구세주 예수를 보내시기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서 종살이하게 두신 것이다.

이후 이스라엘은 뱀(사탄)을 높인 깃발을 들고 행진하기 시작하여 가나안에 들어갔고, 이후 히스기야 왕 이전까지 산당에서 분향하며 섬기고 있었으나, 여호와께서 놋 뱀을 파기하라 명한 적이 없었다는 점을 유념하여 볼 필요가 있다.

놋 깃대는 히스기야 왕에 의해 부서지게 된다(열왕기하 18:3~4)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 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왜 하나님께서는 뱀(사단)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맡기신 것인가?

포도원인 이스라엘을 맡겨 두심(사 5:7)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눅 20:9~15)."

유대인들 : 마귀 자식

"어찌하여 내 말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씀을 들을 수 없음이로다. 너의 삶은 마귀인 아비에게서 난 삶이니 너희 아비의 정욕을 너의 삶도 행하려 하는구다. 저는 시작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안에 없으므로 진리 안에 서지 못한 것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면 자기 삶에서 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의 아비가 거짓말쟁이더라(요 8:43~44)."

서기관 바리새인 : 후견인과 청지기

"내가 또 말하나니 상속자가 모든 삶의 주인이지만 미숙아로 있는 기한에는 아무도 종에서 옮겨 가지 못한다. 오히려 아버지의 작정함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도다. 이와 같이 우리도 미숙아로 있는 기한에 세상 초등 학문 아래서 종살이 당하고 있더니 기한의 충만이 이르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율법 아래 속하여 아내에게서 낳아 내어 보내셨으니 율법 아래 있는 삶을 속량하려 함이요, 나의 삶이 아들의 명분을 쟁취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에 이르고자 내어 보내사 아버지 아빠라 외치게 하셨느니라(갈 4:1~6)."

뱀이란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뱀은 창세기 3장 1절에서 처음 등장하며 창세기 3장 15절에서는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이며 뱀의 후손은 머리요, 여자의 후손은 발꿈치로서 서로 상하게 할 것이라 하였으며 마태복음 4장에서는 예수를 시험하는 자로 등장하며 요한계시록 20장 2절에서는 옛 뱀, 마귀, 사탄, 천하를 꾀는 자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어디 한군데도 뱀이 예수를 예표하는 성구는 없다.

은 히브리어로 '5175(스트롱번호) 나하쉬'라 하는데, 동사 '5172 나-하쉬 : 점치다'에서 유래한다.
동의어로는 '5173 나하쉬 : 점, 예지력'
'5174 네하쉬 : 놋쇠, 구리'
'5178 네호세트 : 청동, 놋쇠'

놋 뱀이란 뜻은 히브리어로 '네하쉬(뱀) 네호세트(놋) :
예지력 있는 점쟁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기어 다니는 뱀의 히브리어 이름은 '텓트'이지만 성경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나하쉬
(뱀)은 예지력을 가진 자, 점쟁이로 언급하고 있다는 데 주의해야 한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구원 계획을 미리 수립하시고 각 날에 해당하는 시나리오를 정하셔서 그 과정을 학습하고 통과하게끔 하시고 일정한 날에 메시아를 보내 주셔서, 죄와 사망의 법에 붙여서 종살이하면서 믿음으로 낮아지고 순종하는 자들을 해방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쟁취하고 하나님나라를 상속하는 데까지 높이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하시는 말씀이다.


느후스단 우상 (열왕기하 18:1~4)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경제 살리기에 나서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각 나라를 순방하며 국제 외교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상징적으로 농민들과 함께 모내기를 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행동은 “내가 앞으로 이 나라를 다스릴 때 이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만큼 한 나라의 통치자가 취임하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성군 중 하나라 일컫는 히스기야 임금은 아버지 아하스의 뒤를 이어 25세에 왕에 오르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우상 타파였습니다.

이것은 “내가 앞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길 일은 바로 우상을 타파하고 하나님만 섬기는 나라로 만드는 일이다!” 하고 선포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전국에 있는 산당(山堂)을 제거하고 각종 우상들을 깨뜨려 없애는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산당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 위에 우상을 섬기기 위해 세운 집들인데 이 산당이 이스라엘 전국에 산마다 널려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얼마나 우상 숭배가 만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신(男神)인 바알 신과 여신(女神)인 아세라를 비롯해 정말 수많은 종류의 우상을 섬겼는데 그 가운데 히스기야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당시 ‘느후스단’이라 불리던 특이한 우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모세가 만든 놋뱀입니다.

민수기 21장 4절부터 보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다가 길이 멀고 험하니까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어떤 원망을 했나 들어볼까요? 5절에 나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한 마디로 애굽에서 잘 살고 있는 우리를 왜 이런 황량한 광야로 끌고 나와서 죽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여기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다며 불평합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주셨지만 백성들은 만나를 보고 “이 하찮은 음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하찮은 음식 싫다는 것입니다.
애굽에 있을 때 살려달라고, 우리를 해방시켜 달라고 아우성치던 것은 또 언제고 이제 와서 “왜 애굽에서 잘 살고 있는 우리를 여기까지 끌어냈냐”고 불만입니다.

광야에서 처음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주실 때는 환호하고 감격하더니 이제 와서 “이따위 하찮은 음식”에 이제 질렸다고 투덜거립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신 것 다 잊어버리고 지금은 뭐가 없다, 뭐도 없다, 뭐가 불편하다며 원망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는 오늘 우리에게서도 종종 나타납니다.
과거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리는 영적 건망증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홍해를 갈라 건너게 하신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와서 부족한 것만 보이고 불편한 것만 보이니 원망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미 받은 놀라운 은혜는 다 잊어버리고 지금 없는 것, 부족한 것, 불편한 것만 보는 배은망덕한 죄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하고 찬송은 잘 부르는데 정작 지금까지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그 한량없는 은혜와 도우심은 다 잊어버리고 삽니다. 

이미 베풀어 주신 것에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지금 뭐가 부족하다고, 뭐가 불편하다고 투덜거리며 원망하기에 급급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영적 건망증에 걸린, 배은망덕한 사람들을 어떻게 하실까요?

그 벌은 불뱀들을 보내 백성들을 물게 한 것입니다.
불뱀은 한 번 물리면 몇 분 만에 즉사하는 맹독을 지닌 독사 종류입니다.
특히 사막에 사는 독사는 더 독합니다.
미국 사막지역에 사는 방울뱀은 물리면 수십 분 내에 즉사합니다.
하나님은 무서운 맹독을 지닌 불뱀을 보내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어 죽이게 한 것이지요.
이대로 간다면 모든 백성들이 다 뱀에 물려 죽게 생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잔인한 분이 아닙니다. 자비의 하나님이시지요. 그래서 백성들이 회개하자 모세에게 뱀에 물린 자가 살 방법을 일러 주십니다. 바로 놋으로 불뱀의 모양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매달게 하고 그 놋뱀을 보는 자는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때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고 살아난 사람들은 “이제 다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자” 하고 교훈을 얻게 끝냈어야 하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놋뱀을 소중하게 보관한 것입니다.

민수기에는 놋뱀을 보관했다는 말이 안 나오지만 이 놋뱀이 세월이 흘러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보관되었다는 것을 보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이 놋뱀을 보관했을까요?

놋으로 만들었으니 무게도 만만치 않을 텐데 그 힘든 광야생활에서도 이 놋뱀을 끝까지 보과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그 까닭을 충분히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신기했던 것입니다. 이 놋뱀 자체에 무슨 신비한 힘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 내가 불뱀에 물려 다 죽어갈 때 장대 위에 달린 이 놋뱀을 한 번 쳐다보기만 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해지더라구요.”

사람들은 너무나 신기해하면서 이 놀라운 힘을 지닌 놋뱀을 잘 보관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놋뱀을 아예 우상으로 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마 병이 들면 그 놋뱀 우상 앞에 가서 분향(향으로 제사 드림)하며 그 신기한 힘으로 고쳐달라고 빌었겠지요.

아무튼 히스기야 임금은 왕이 되자마다 이 놋뱀 우상을 부수어 버립니다.
다른 수많은 우상도 부수었는데 특히 이 놋뱀 우상을 부순 것을 본문이 기록한 데는 뭔가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상은 우상일 뿐

첫째로, 히스기야가 이 놋뱀 우상을 부순 후 그 이름을 ‘느후스단’이라고 부릅니다.

‘느후스단’은 히브리 말로 ‘놋조각’이라는 뜻입니다.
전에는 이 놋뱀 우상을 뭐라고 불렀는지 모릅니다.
아마 ‘전지전능하신 뱀님’ 이런 식으로 불렀겠지요.
하지만 이 놋뱀을 부숴버린 후 히스기야는 그 이름을 ‘느후스단’이라고 짓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존재하고 있을 때야 이름을 붙이는 것이 당연하지만 부수어 버린 후에 이름을 짓는 것은 이해가 안 갑니다.
마치 형산강 다리가 멀쩡하게 서있을 때는 이름도 안 붙이다가 다 철거해서 없어진 다음에야 이름을 ‘형산강 다리’ 하고 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여기에는 신실한 믿음을 가진 히스기야 임금의 깊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느후스단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교훈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느후스단’이란 ‘놋조각’이라는 뜻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이름은 이 놋뱀이 무슨 신비한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병을 고쳐주는 그런 능력을 가진 신이 아니라 그저 ‘놋조각’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상은 돌조각, 나무 조각, 쇳덩어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돌로, 나무로, 쇠로 만든 우상이 무슨 힘을 가지고 있거나 내 소원을 들어줄 리 만무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똑똑히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갓바위 부처 앞에서 기도하면 대학입학 시켜준다고 열심히 비는 사람들, 그것은 바위에 새겨놓은 돌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돌덩어리가 어떻게 내 소원을 들어주고 내 자녀를 대학에 들여보내 준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엎드려 절하는 대웅전의 부처상은 쇳덩어리에 불과하고, 우리가 지성을 드리는 영험한 바위와 영험한 나무는 바윗돌과 나뭇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에 붙이고 몸속에 지니고 다니는 부적은 붉은 글씨가 쓰인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무생물인 나뭇조각, 돌덩이, 쇳조각이 내 소원을 들어주고 종잇조각이 나를 지켜준다는 말입니까?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 한 분 만이 우리의 소망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응답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오. 우상은 돌덩이, 쇳조각, 나뭇조각에 불과합니다. 그 우상은 나를 고쳐줄 수도, 나를 지켜줄 수도, 내 소원을 들어줄 수도 없습니다.

교회 안의 우상

둘째로, 느후스단은 본디 장대 위에 단 놋뱀이었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보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바로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요한복음 3장 16절 정말 유명한 말씀 아닙니까? 그런데 그 바로 앞에 이 놋뱀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장대 위에 놋뱀을 달아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것처럼 인자(人子)이신 예수님도 들려야 할지니, 즉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죽어가는 사람들, 사망권세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살리신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외에는 그 무엇도 우리의 숭배나 섬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이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은 그 놋뱀이 사람들을 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놋뱀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대상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자신을 살리신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그 상징에 불과한 놋뱀을 숭배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느후스단 우상은 오늘날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숭배하는 우상을 뜻합니다. 특히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것인데 하나님 외에 그 상징을 숭배할 때 아주 위험한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심지어 십자가조차도 우리의 숭배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분들은 십자가를 보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잘못입니다. 눈으로는 십자가를 보더라도 우리는 십자가가 아닌 오직 거기 달리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십자가를 몸에 지니고 다니면 이 십자가가 나를 지켜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목걸이로 귀걸이로 십자가를 가지고 다닙니다. 마치 영화에 보면 흡혈귀 드라큘라가 덤벼들 때 십자가로 물리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보수적인 교단은 아예 예배당 안에 십자가를 달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십자가조차도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뿐만 아닙니다. 교회도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모임일 뿐 교회 자체가 결코 숭배 대상이 아닙니다. 자기 교회를 사랑하고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지만 이것이 너무 심한 나머지 교회 자체를 우상시하고 내 교회만 옳고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숭배 우상에 빠진 것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를 존중하고 사랑해 주시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목회자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선포하고 가르치는 대리인에 불과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주인이 심부름꾼을 보냈을 때 그 심부름꾼이 마치 자기가 주인인 양 착각하거나 아니면 주인이 받을 영광을 대신 받으면 안 되는 것처럼 목회자는 하나님 대신 영광을 받으면 안 됩니다. “저는 목사님 보고 교회 다닙니다.” 이런 말이 저 듣기에는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큰 함정입니다. 어느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큰 힘을 가진 목회자들이 이런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정리해 볼까요? 느후스단이 자신이 아니라 그 느후스단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살린 것처럼,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하고 하나님 받으실 경배를 대신 받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또 우리 신앙에 대단히 중요한 존재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느후스단을 “교회 안의 우상”이라고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신앙 안에 있지만 하나님을 대신한 우상이 되기 쉬운 것은 목회자나 어떤 사람(person), 재정이나 전통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조심해야 합니다.

표적의 우상

셋째로, 느후스단은 진정한 기적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너무도 기적을 바라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마가복음 8장 11절부터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비난하며 이렇게 시험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봐라. 그러면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어주마.” 그러자 예수님은 깊이 탄식하시면서 “내가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하고 말씀하시곤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떠나가십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바리새인들이 구한 ‘표적’을 구합니다. 표적이란 영어로는 사인(sign)입니다. 어떤 특별한 사인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이적, 기적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표적’(sign)을 구하고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처럼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사인이 있어야 예수 믿겠다는 것입니다. 지루한(?) 일상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특별한 체험이나 사인을 받아야 예수 잘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간증집회에 나와 간증하는 사람들처럼 죽을병이 고침 받거나 망해가는 사업이 다시 일어나거나 하는 이적이나 기적도 체험하면 금상첨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날마다 ‘특별한 은혜’를 구합니다. ‘특별한 체험’을 구합니다. 기적을 구하며 삽니다. 이것을 ‘표적(sign)의 우상’이라고 불러봅시다.

물론 이런 태도가 다 잘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체험이나 사인은 지치거나 낙심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줍니다.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에 젖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어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끔 사람들에게 특별한 체험이나 이적을 베푸십니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체험이나 은혜만 사모한 나머지 일상적인 신앙생활은 지루하고 능력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특별한 표적이나 이적이 반드시 일상적인 신앙생활보다 우월하다고 믿고 나는 이런 특별 은혜 받았다, 나는 이런 특별한 체험했다고 자랑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목회를 하면서 가장 안타까울 때가 이때입니다. 

누구누구가 어떤 분에게 기도 받으러 다닌답니다. 어디 가면 신령한 분이 있답니다. 기도 받으러 가고 신령한 것 찾아가는 것이 뭐가 문제겠습니까? 저도 신령한 체험을 많이 한 사람이고 또 기도 받으면서 힘을 많이 얻은 사람이라 이런 일에 전혀 거부감이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입니다. 신령한 것, 특별한 것 좋아하다가 기도해준다는 그 사람이, 그 장소가 과연 건전한지 아닌지도 생각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찾아다니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디 기도 받으러 갈 때나 기도원이나 집회 갈 때 꼭 저에게 먼저 의논하라는 것이 이것 때문입니다. 제가 감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도와주려는 거예요. 과연 그 곳이, 그 사람이 건전한 신앙을 가진 사람인지 아니면 아주 위험한지 미리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또 그런 곳에 가서 무슨 특별한 체험하고 은혜 받았다며 멀쩡하게 교회 잘 다니고 일상적인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 그런 식으로 예수 믿으면 안 돼. 그게 뭐야? 시시하잖아? 나처럼 특별한 은혜 체험해야지” 하고 깔보듯이 이야기한다면 그 분은 이미 교만의 우상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특별한 은혜나 체험도 좋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정말 우리가 꼭 필요할 때 특별히 허락하는 별식(別式)과도 같은 것입니다.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먹고 어쩌다 한 번 별식으로 메추라기 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매일 먹고 사는 것은 이 만나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면서 매일 별식으로 메추라기 달라고 조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매일 만나 먹으면서 하나님 잘 섬기는 사람들 보고 “너희는 어떻게 매일 그 지겨운 만나만 먹고 사냐?”고 깔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모든 신자들에게 내 교회와 내 지도자, 내 목회자를 허락하신 까닭은 다른 무엇보다 내 교회를, 또 내 지도자와 내 목회자를 우선 중심으로 신앙생활 하도록 하신 것인데 별미만 좋아하며 거기에 우선권을 두고 쫓아다닌다면 어떻게 신앙이 건강하게 자라겠습니까?

나아가 기적이나 특별한 이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적이나 기적을 하나님이 주실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특별한 경우입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를 인정하려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기적”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구한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할 만한 사인이었습니다. 주님은 깊이 탄식하며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표적이나 이적 자체가 나쁘지는 않지만 잘못된 의도로 구하는 것은 단호하게 거부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전제로 표적이나 기적을 구하는 태도, 이런 것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신앙을 경고하신 것이지요.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일어난 가장 놀라운 기적은 다름 아닌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 자체가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기적인 것입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우리가 이 기적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작은 기적이나 이적에 매여 살며 그것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느후스단 우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 설교 중에 나온 용어가 몇 가지 있지요. ‘영적 건망증’이나 ‘배은망덕의 죄’, 또한 우상은 쇳조각, 돌덩이에 불과하지 결코 우리를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 ‘교회 안의 우상’ 그리고 ‘표적의 우상, 기적의 우상’ 등 꽤 많습니다. 이것을 다 기억하지 못해도 좋습니다. 한 가지만 분명히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의 은혜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놋뱀이 느후스단 우상이 되어버린 것처럼 교회 안에도 우상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우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우상은 마치 열심 있는 신앙, 뜨거운 신앙처럼 위장하고 우리의 건강한 신앙을 위협합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이 우상임을 깨닫고 하루빨리 버리고 건강한 신앙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하나님 잘 믿는 줄 알고, 나는 아주 특별하게 잘 믿는 줄 착각하고 살다가 마지막 주님 앞에 섰을 때 그만 주님이 “나는 너를 모른다” 하시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을 가장한 우상의 무서운 점입니다. 따라서 열심히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르게 믿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열심 있는 것도 좋고 뜨거운 것도 좋지만 바르게 믿지 않으면 오히려 훨씬 위험합니다. 올바른 신앙관 위에 건전하게 바르게 믿어야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따라 하세요. “바르게 믿자!” 아무쪼록 오늘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만 바라보며 건강하고 건전한 신앙관 위에 바로 서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만을 바라보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기독교의 상징들

 

기독교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우선 십자가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보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적십자나 병원이 떠오르는 분도 계시겠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십자가는 고대 근동의 앗수르, 이집트, 페르시아 그리고 로마에서 죄수를 처형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형틀입니다. 십자가 형벌은 죄수의 양팔을 사람의 키보다 약간 큰나무에 못박아 고정 시켜 매달려 있게 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피가 몸의 밑으로 몰리게 되고 혈액 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아 호흡이 빨라지며 심한 고통을 격게 됩니다. 십자가 형벌은 사람을 한번에 죽이는 것이 아니고 3-5일간을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이는 매우 가혹하고 치욕적인 형벌로써 로마시대에는 정치범이나 반역자들에게만 적용했던 사형법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던 강도들은 단순한 좀도둑들이 아니라 정치범이거나 반정부세력의 테러리스트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죄와 형벌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잔인하고, 끔직한 십자가를 교회의 상징으로 여기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씀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요? 차라리 사도바울처럼 참수를 당하시거나, 사도 도마처럼 창에 찔려 죽으시면 간단할 텐데 왜 하필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을까요?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3)그러나 너희는 그 주검을 나무에 매달아 둔 채로 밤을 지내지 말고, 그 날로 묻어라. 나무에 달린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유산으로 준 땅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를 포함해서 나무에 매달려 죽는 것은 매우 치욕스럽고 ‘하나님게 저주를 받았다’는 상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대신 짊어지신 우리의 죄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으셔야 했을 만큼’ 크고 심각한 죄였습니다.

 

그러기에 이 은혜를 경험한 우리들은 십자가에서 형벌과 저주를 보기 전에, 우리가 받아야할 형벌과 저주를 대신 짊머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보면서 눈물 흘리는 이유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주님이 죽으시고, 대신 내가 살게 된 은혜의 상징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오랜 역사와 전통에는 Icon (아이콘) 또는 Symble (심볼) 로 불리는 여러가지 신앙적 상징들이 있습니다.

 

 

1. 익투스 (ἰχθύς)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익투스 (고대 그리스어 :  ἰχθύς 이크투스, 대문자 표기로 ΙΧΘΥΣ)

 

Ιησους (예수) 

Χριστος (그리스도 - 크리스토스) 

θεου (데우) 하나님의  

Υιος(휘오스)  아들 

Σωτηρ (소테르) 구원자

 

'익투스'라는 단어는 '물고기'라는 뜻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 물고기라는 단어를 상징적으로 생각했으며 위 단어의 첫 글자를 따서 익트스가 되었다는 학설이 유력합니다.

박해를 받았던 초대 기독교인들은 피아식별의 방법으로 물고기 그림을 암호처럼 그려서 활용했고, 물고기를 그린 사람의 뒤를 따라가면 기독교인들의 은신처 '카타콤'에 찾아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익투스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또는 '주는 나의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라는 뜻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2. 키로(XP) 십자가

 

그리스도(Χριστοσ) 라는 헬라어의 단어 첫번째와 두번째 알파벳

 

 

 

영어 스펠링 PX 를 겹합한 것 처럼 보이는 이 아이코은 그리스도 Χριστοσ (크리스토스) 라는 헬라어의 첫번째와 두번째의 알파벳을 결합시켜 놓은 것 입니다.

X 를 헬라어로 [ㅎ키], P 를 [로ㅎ-] 로 부르기 때문에 키로 십자가 입니다.

 

이 아이콘은 기독교를 로마의 공인 국교로 삼은 '콘스탄틴 황제'가 꿈에서 본 것을 깃발로 삼아 전쟁터에 나갔다고 해서 널리 알려진 문장입니다.

 

키노문자는 가톨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표식인데 '그리스도'의 헬라어 표기 'Χριστοs'의 첫째자와 둘째자를 겹친 것입니다. 이 글자는 헬라어이므로 '키로'(Chi Ro)로 읽어야지 '엑스 피'가 아닙니다. 이 표식의 유래는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대제에서 시작이 됩니다. 콘스탄틴은 312년 로마의 티버강 너머 밀비안 다리에서 막센티우스와 격전을 벌이기 전날 밤 하늘에 십자가가 보였는데 십자가에는 “이 부호를 가지고 정복하라 In this sign, conquer”고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부호가 바로 키로문자였습니다. 그래서 콘스탄틴은 자신의 헬멧과 군기에 이 키로문자로 장식을 했고, 실제로 전투에서 정말로 승리해서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로 군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313년 그 유명한 밀라노 칙령을 내려 로마에서 기독교의 박해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그러기에 키로문자는 이제 로마가 기독교 제국으로 바뀌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똑같은 기독교의 상징이지만 물고기와 키로문자는 서로 완전히 상반된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전자는 숨어있는 기독교를, 후자는 제국을 점령한 기독교입니다.

 3. INRI

 

(라틴어 :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 예수님의 십자가 명패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I.N.R.I.) 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요한복음 19:19~19:22]  

 

라틴어 성경 요한복음 Evangelium Secundum Ioannem 19:19~19:22

scripsit autem et titulum Pilatus et posuit super crucem erat autem scriptum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hunc ergo titulum multi legerunt Iudaeorum quia prope

civitatem erat locus ubi crucifixus est Iesus et erat scriptum hebraice graece et latine dicebant

ergo Pilato pontifices Iudaeorum noli scribere rex Iudaeorum sed quia ipse dixit rex sum

Iudaeorum respondit Pilatus quod scripsi scripsi

 

 

위 라틴어 성경에 나타난 바와 같이 INRI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붙인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의 라틴어(로마어) 첫글자만을 딴 것입니다.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 영어 / Jesus of Nazareth, King of the Jews)

 

  

 

 

 

 

 

    

4. IHS

 

고대 그리스어로 예수 'Ιησους' 의 첫번째, 두번째, 마지막 스펠링의 약자    

또는 라틴어라 'Iesus Hominum Salvator'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HIS 는 예수(Jesus) 를 뜻하는 약어 입니다. 

희랍어는 'Ιησους'라고 표기하며 ...η (에타)는 라틴어로 표기할 때  대문자로 'H' , σ(시그마) 는 대문자 'S' 가 되며, 양피지로 필사하던 시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단어들을 약자로 기록하던 시절의 유래입니다. 

그후, 라틴어로 새로운 의미가 부가되었는데 옮겨쓰는 과장에서 새로운 의미를 더했다고도 추정되며 뜻에 비중을 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Iesus

    Hominum

    Salvator'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라틴어에서 I J는 종종 구별되지 않고 혼용됩니다.

    예수Iesus 를 지저스Jesus라고 부르게 되는 과정이 이 I와 J가 구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IHS라는 글은 JHS로 표기되기도 했습니다.

 


 

 

 

 

 

 

 5. 알파와 오메가

 

 

[계 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계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의 처음과 마지막 입니다.

세계와 인류의 처음이시고 마지막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표기]

 

그리스어 알파벳 기호 θ (세-타) theta; 를 하나님으로 표기합니다.

이는 헬라어 '테오스' (하나님 θεοs =Θεου) 의 머릿 글자와도 같으며 세계 각국의 표기는 아래와 같습니다. 

 

한   국 : 하나님

일   본 :    神

중   국 : 上   帝

미   국 : God

독   일 : Gott

터   키 : Tanrı

프랑스 : Dieu

그리스 : θεός

러시아 : бог

이태리 : Dio

스페인 : Dios

폴란드 : Bóg

아랍어 : الله

페르시아 : خداوند

포르투갈 : deus

우크라이나 : Бог

인도네시아 : Tuhan

 

6. 닭

 

 

마지막으로 소개할 기독교의 상징물은 ‘닭’입니다. 상징에는 긍정적인 기억을 위한 상징물도 있지만 부정적이고, 부끄러운 의미를 가진 상징물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닭’이라고 생각됩니다. 닭은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사도 베드로와 관련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밤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 상징 용어 설명

  • by 메리 페어차일드

그리스도인의 상징에 대한 예시 여행

의심의 여지없이, 라틴 십자가 - 소문자, t 자 모양의 십자가는 오늘날 기독교에서 가장 인정받는 상징입니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많은 다른 표식, 식별자, 구별되는 표식들이 기독교 신앙을 대표합니다. 이 기독교 상징의 수집은 가장 쉽게 확인 된 기독교 상징의 그림과 묘사를 포함합니다.

크리스티앙 크로스

 셔터 잭 / 게티 이미지

라틴 십자가는 오늘날 기독교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널리 인정 받고있는 상징입니다.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십자가에 못 박힌 구조의 형태 였을 것입니다.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가 있었지만 라틴 십자가는 두 개의 나무 조각으로 이루어져 네 개의 직각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십자가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희생함으로써 죄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냅니다.

십자가의 로마 가톨릭 묘사는 십자가에 아직도 그리스도의 몸을 계시합니다. 이 형태는 십자가로 알려져 있으며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통에 중점을 둔다. 개신교 회는 부활 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강조하면서 빈 십자가를 묘사하는 경향이있다. 그리스도를 믿는자는 예수의이 말씀을 통해 십자가를 식별합니다 (마태 복음 10 장 38 절, 마가 복음 8 장 34 절, 누가 복음 9 장 23 절).

예수 께서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다. "너는 내 추종자가되기를 원한다면, 네가 이기적 인 길에서 돌아 서서 네 십자가를지고 나를 따라야한다." (마태 16:24, NIV )

기독교 물고기 또는 Ichthys

   Ichthys 기독교 기호는 용어 설명 기독교 물고기 또는 Ichthys. 이미지 © 수에 Chastain

예수 물고기 (Jesus Fish) 또는 이시스 (Ichthys)라고도 불리는 기독교 물고기는 초기 기독교에 대한 비밀의 상징이었습니다.

Ichthys 또는 물고기 상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로 확인하고 기독교에 그들의 친화력을 나타내는 초기 기독교인에 의해 사용되었습니다. 이시스 (Ichthys)는 그리스어로 "물고기"라는 단어입니다. "기독교 물고기"또는 "예수 물고기"기호는 물고기의 윤곽을 따라가는 두 개의 교차 호로 구성됩니다 (가장 일반적으로 물고기는 왼쪽으로 "수영"합니다). 그것은 신원을 밝히는 비밀의 상징으로 초기 핍박받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사용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어로 물고기 (Ichthus)라는 단어는 "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의 아들, 구주"라는 약어를 형성합니다.

기독교의 추종자들은 흔히 물고기가 그리스도의 사역에 나타 났으므로 물고기를 상징으로 식별합니다. 그들은 성경 시대의 필수품이었고 물고기는 종종 복음서에 언급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께서는 마태 복음 14 장 17 절에 있는 두 개의 물고기와 다섯 개의 빵 덩어리를 곱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가 복음 1:17 절에 "와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되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NIV)

기독교 비둘기

기독교 기호 용어 해설을 설명합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비둘기는 기독교에서 성령 또는 성령을 나타냅니다. 성령 은 요르단 강에서 침례받을 때 비둘기처럼 예수님 께 내려 왔습니다.

... 그리고 성령은 비둘기 같이 육체적 인 형태로 그에게 내려 왔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났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이요, 너와 함께하면 나는 기쁘다." (눅 3:22)

비둘기도 평화의 상징입니다. 창세기 8 장 홍수 후에 비둘기가 그 부리에 올리브 가지를 가진 노아 에게로 돌아와 하나님의 심판의 종말과 인간과의 새로운 언약의 시작을 나타 냈습니다.

가시 왕관

 Dorling Kindersley / 게티 이미지

기독교의 가장 생생한 상징 중 하나는 예수님십자가에 못 박으시기 전에 입었던 가시관의 면류관입니다.

... 그리고 나서 가시관을 뒤틀어 머리에 씌워 라. 그들은 오른손에 스탭을 배치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조롱했습니다. "우박, 유대인의 왕!" 그들은 말했다. (마태 복음 27:29)

성서에서 가시는 종종 죄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가시 면류관은 적합합니다 - 예수 께서 세상의 죄를 담당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왕관은 기독교의 고난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 왕의 왕, 그리고 주님의 군주를 상징하기 때문에 왕관도 적합합니다.

트리니티 (Borromean Rings)

 Borromean Rings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 삼위 일체 (Borromean Rings)를 나타냅니다.

기독교에는 삼위 일체의 상징이 많이 있습니다. Borromean Rings은 신성한 삼위 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연동 서클입니다.

" 삼위 일체 "라는 단어는 라틴어 명사 "trinitas"에서 유래했습니다. "trinitas"는 "three is one"을 의미합니다. 삼위 일체는 하나님이 하나라는 믿음을 나타냅니다.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 님 과 동등하고, 영원한 교제 속에 존재하는 세 분명한 인격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음 구절은 삼위 일체 개념을 표현합니다 : 마태 복음 3 : 16-17; 마태 복음 28:19; 요한 복음 14 : 16-17; 고후 13:14; 행 2 : 32-33; 요한 복음 10:30; 요한 17 : 11 & 21.

트리니티 (트리 케라)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 트리니티 (Triquetra)를 묘사했습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Triquetra는 그리스도교의 삼위 일체를 상징하는 3 부분으로 구성된 연상 기호입니다.

세계의 빛

 기독교 기호는 세계의 빛을 용어로 설명했습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성경에서 하나님이 "빛"이신 것에 대한 언급이 너무 많으므로 양초, 불, 램프와 같은 빛의 표현은 기독교의 공통된 상징이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에게서들은 메시지이며, 여러분에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가볍습니다. 그에게는 전혀 어둠이 없다. (요일 1 : 5, NIV)

예수 께서 백성들에게 다시 말씀하실 때, "나는 세상의 빛이며, 나를 따라 오는자는 결코 어두움에 다니지 않을 것이나,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요한 복음 8:12)

여호와는 나의 빛 이요 나의 구원 이시라.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할까? (시편 27 : 1)

빛은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불타는 덤불모세 에게 불꽃의 기둥으로 나타나 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원한 불꽃은 예루살렘에있는 성전에서 항상 켜져 있어야했습니다. 사실 유대인 의 헌신 축제 또는 "빛의 축제"에서 우리는 마카비의 승리와 그레코 - 시리아의 포로 생활 속에서 신성 모독을당한 이후의 성전 재 헌법을 기억합니다. 비록 그들은 단지 하루 동안 충분한 성스러운 기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더 많은 정화 된 기름이 처리 될 수있을 때까지 8 일 동안 그의 존재의 영원한 불꽃을 기적적으로 일으켰습니다.

빛은 또한 하나님의 지시와 인도를 나타냅니다. 시편 119 편 105 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발에 등불이고 우리의 길에 비춰 진다고 말합니다. 사무엘 하 22 장은 주님은 등불 이시며 어둠을 빛으로 변하게하십니다.

크리스티앙 스타

기독교 기호 용어 설명 스타. 이미지 © 수에 Chastain

데이비드 스타는 두 개의 연동하는 삼각형에 의해 형성된 여섯 개의 별 모양의 별입니다. 하나는 위로 향하고 하나는 아래로 향하게됩니다. 그것은 다윗 왕의 이름을 딴 것으로 이스라엘의 국기에 나타납니다. 유대교와 이스라엘의 상징으로 널리 인식되고있는 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데이비드 스타와도 동일시합니다.

다섯개의 별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탄생 과 관련된 기독교의 상징이기도합니다. 마태 복음 2 장에서 동방 박사 (또는 현자)는 신생아 왕을 찾아 예루살렘을 향한 별을 따라 갔다. 거기에서 그 별은 베들레헴 으로 예수님이 태어난 바로 그 위치로 인도했습니다 . 그 아이가 어머니와 함께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절하고 경배하며 선물로 선물했습니다.

계시록 에서 예수님은 아침 별 (계 2:28, 요한 계시록 22:16)이라고 불립니다.

빵과 와인

 기독교 기호는 빵 & 와인 용어를 보여줍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빵과 포도주 (또는 포도)는주의 만찬이나 성만찬을 상징합니다.

빵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영양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날마다 마나를 저장 하시거나 "하늘에서 나는 빵"을 주셨습니다 . 예수님은 요한 복음 6 장 35 절에서 "나는 생명의 떡 이니 나에게 오는자는 결코 주 리지 아니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NIV)

빵은 또한 그리스도의 육신을 나타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께서는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 하셨다. "이것은 내 몸이 너에게 주어 졌음 이니라."(눅 22:19).

포도주는 인류의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 쏟아 부은 피의 하나님 언약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누가 복음 22 장 20 절에서 "이 잔은 내 피의 새 언약 이니 너희를 위하여 부어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NIV)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그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에서 우리를 위해했던 모든 것을 기억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성찬을 취합니다.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자기 점검과 참여의 시간입니다.

무지개

 쥬타 쿠스 / 게티 이미지

그리스도교의 무지개는 하나님의 신실 하심에 대한 상징이며 다시는 홍수로 지구를 파괴하지 않겠다는 그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노아와 홍수에 관한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홍수가 있은 후,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무지개를 놓아 노아 와 언약을 맺으셔서 땅과 모든 피조물을 홍수로 다시는 결코 멸망시키지 않으 셨습니다.

지평선 위로 높이 솟아 오르기 때문에, 무지개는 은혜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충실 함을 완전히 포용하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 를 믿는 신앙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는 일부 소수 영혼들만을위한 것이 아닙니다. 무지개처럼 구원복음 은 모든 것을 포괄하며 모든 사람은 그것을 보도록 권유받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 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임 이니라. 하나님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세상을 정죄하지 않으시 고 세상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요한 복음 3 : 16-17, NIV)

성경의 저자들은 무지개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묘사했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 구름 속에있는 활 모양처럼, 모든 주위에 밝기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한 것은 주님의 영광을 닮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보았을 때, 나는 내 얼굴에 떨어졌고, 나는 말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에스겔 1 장 28 절, ESV)

계시록 에서 사도 요한하늘계신 하나님 보좌 주위에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즉시 나는 성령 안에 계셨고, 나 앞에 하늘에 앉은 누군가가 앉아있는 보좌가있었습니다. 그곳에 앉은 사람은 재스퍼와 카네 리안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에메랄드를 닮은 무지개가 왕좌를 둘러 쌌다. (계시 4 : 2-3, NIV)

신자들이 무지개를 볼 때, 그들은 신의 충실 함,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은총, 그의 영광스러운 아름다움, 그리고 우리의 삶의 보좌에 거룩하고 영원한 존재가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크리스천 서클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을 묘사했습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끝이없는 원이나 결혼 반지는 영원의 상징입니다. 기독교인 부부 의 경우, 결혼 반지 교환은 내재적 인 유대의 외적 표현입니다. 두 개의 마음이 하나로 결합되고 서로를 영원히 충실히 지키겠다고 약속합니다.

마찬가지로 결혼 계약과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 인 교회 사이의 관계를 묘사 한 것입니다. 남편은 희생적인 사랑과 보호를받으며 목숨을 바칠 것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의 안전하고 소중한 포옹에서 아내는 자연스럽게 제출과 존중으로 응답합니다. 끝이없는 순환계에서 상징되는 결혼 관계 가 영원히 지속되도록 설계된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모든 영원을 위해 견디게됩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Agnus Dei)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이미지 © 수에 Chastain

하나님의 어린 양은 사람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하나님 께서 주신 완전하고 죄가없는 희생 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합니다.

그는 압제 받고 괴롭힘을 당했지만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살장에 어린 양 같이 인도되었다. (사 53 : 7)

그 다음날 요한은 예수님 께서 자기에게 다가와서 "보라, 세상 죄를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로구나!"하고 외쳤다. (요한 1시 29 분, NIV)

그리고 그들은 큰 소리로 외쳤다. "구원은 보좌에 앉으 신 우리 하나님, 어린 양에게 달려있다." (계시 7:10, NIV)

성경

기독교 기호 용어 설명 성경입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성경 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생활 수첩입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 - 그의 연애 편지 -는 성경의 페이지에 들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을받은 것이며의를 가르치고, 책망하고, 교정하고, 훈련하는 데 유용합니다 ... ( 디모데 둘째 3:16)

나는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사라질 때까지, 하나님의 율법의 가장 작은 부분조차 그 목적이 성취 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태 복음 5:18, NLT )

십계명

기독교 기호는 10 가지 계명을 보여줍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십계명 또는 율법은 이집트에서 그들을 이끌어 낸 모세 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입니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구약의 법에서 발견 된 수백 가지 법칙을 요약 한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 및 도덕적 생활을위한 행동의 기본 규칙을 제공합니다. 십계명이야기는 출 20 : 1-17과 신명기 5 : 6-2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와 크라운

  기독교 상징 십자가 및 왕관 용어 설명. 이미지 © 수에 Chastain

십자가와 왕관은 기독교 교회에서 친숙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믿는 자들이 지상에서의 삶의 고통과 시련 (십자가) 후에 받게 될 하늘 (크라운)에서 기다리고있는 보상을 나타냅니다.

시련을 견디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시험을 치른 후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삶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서 1:12)

알파 그리고 오메가

 기독교 상징은 알파 & 오메가를 보여줍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알파는 그리스 알파벳의 첫 글자이고 오메가가 마지막 글자입니다. 이 두 문자는 함께 예수 그리스도 의 이름 중 하나 인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모노그램 또는 상징을 이룹니다. 요한 계시록 1 장 8 절에 나오는 용어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 다"라고 주 하느님이 말합니다, "전능하신 분이 누구 시며 누구이며 앞으로 올 것인가?" 요한 계시록 에서 예수님에 대한이 이름이 두 번 더 나옵니다 .

"나는 끝났어.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이야. 목이 말린 사람에게는 생명수 샘물을 마시지 않고 마실 것이다."(계 21 : 6 , NIV)

"나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끝이다." (요한 계시록 22:13)

예수님에 의한이 진술은 그리스도교에있어 결정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 께서 창조 전에 존재 하셨고 모든 영원 토록 존재할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것도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창조에 참여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처럼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원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상징 인 알파와 오메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을 상징합니다.

Chi-Rho (그리스도의 모노그램)

Chi Rho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 Chi-Rho (그리스도의 모노그램)를 보여줍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치로 (Chi-Rho)는 그리스도를위한 가장 오래된 알려진 모노그램 (또는 문자 기호)입니다. 어떤 이들은이 상징을 "크리스 그램 (Christogram)"이라고 부르며 로마 황제 콘스탄틴 (Constantine) (AD 306-337)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이야기의 진실은 의심 스럽지만, 콘스탄티누스는 결정적인 전투가 있기 전에 하늘에서이 상징을 보았고, 그는 "이 표식으로 정복하십시오."라는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의 군대에 상징을 채택했다. Chi (x = ch)와 Rho (p = r)는 그리스어로 "Christ"또는 "Christos"의 처음 세 글자입니다. Chi-Rho에는 여러 변형이 있지만 가장 일반적으로 두 글자의 겹침으로 구성되며 종종 원으로 둘러 쌉니다.

예수님의 모노그램 (Ihs)

Ihs  기독교 기호는 Ihs (예수의 모노그램)를 설명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Ihs는 1 세기로 거슬러 올라간 고대 모노그램 (또는 문자 기호)입니다. 그리스어 "Jesus"의 처음 세 글자 (iota = i + eta = h + sigma = s)에서 유래 된 약어입니다. 서기관은 문자 위에 줄을 쓰거나 줄을 써 약어를 나타냅니다.


예배와 상징

 

가. 상징으로 가득 찬 예배 :

우리가 예배드리는 자리에는 각 종 상징물들이 놓여져 있다. 십자가, 설교대, 성찬상, 세례대, 촛대와 헬라어 알파와 오메가(Α Ω) 혹은 키로(☧) 등이 그것들이다. 예배 봉사자들은 회중과는 다른 복장(vestment)을 하고 있으며, 설교자는 설교대에 올라선다. 그러면 회중들은 선포될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며 조용히 앉아서 귀를 기울인다. 함 께 신앙을 고백하고 주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찬송을 부를 때면 회중은 일어선다. 또 한 기도 인도자가 기도를 드릴 때면 마지막에 반드시 “아멘!”이라는 화답을 하기도 한다. 이런 모든 예배의 내용과 행위들이 사실은 상징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상징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 하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종교적인 내 용과 행위들은 상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상징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상징은 우리 예배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 런데 불행스럽게도 이런 상징이 갖는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예배나 신앙생활에서 상징자체를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그 리고는 상징이 우상처럼 될까 염려가 된다는 엉뚱한 해석을 한다. 상징과 우상을 구 별하지 못한다면, 거기엔 더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바로 교육이 부재하다는 현 실이다. 잘못 이해하고 잘못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상징 이외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해서 눈을 딱 감고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상징의 의미를 제대로 배우는 일 밖에 없다고 하겠다.

나. 예수님과 성경 그리고 역사는 상징을 창조해 나갔다

예수님은 상징적인 용어들을 많이 창조하셨다.

가령 자신을 <선한 목자>(요 10:11),  <양의 문>(요 10:7), <세상의 빛>(요 8:12)과 <포도나무>(요 15:1-5)로 말씀하셨다.
제자들에게 대부분 비유로 가르치셨음을 알 수 있다(막 4:34).
이런 비유들은 대체로 상징들로 가득 찬 내용들이었다. 천국에 관한 비유들은 상징어들이다. <밭에 숨겨진 보화>(마13:44)나 <진주 장사꾼>(마14:45-46), <씨 뿌리는 농부>(마13:2-8), 그리고 <가만히 자라는 씨>(막4:26-29)와 같은 이야기들이다. 천국을 일상의 말로 소개하거 나 설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들이 땅에서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다른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득불 땅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말씀하 셨던 것이다.

역시 성경 안에는 상징 언어가 풍부하다. 역사의 여명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 들의 신앙을 상징을 창조해서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는 아직 성전도 없었 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없었다. 오직 그들은 상징 언어를 만들어 하나님을 만났 고 관계를 맺었다. 가령,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후 거기에 돌단을 쌓았다. 그리고 거 기에 “하나님의 집” 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창28:10-19). 가령 보통 일반인과 구별 되는 하나님의 사람을 일컫는 <나실인>이라는 사람을 세웠는데, 그들은 머리털을 깎 지않고, 독주를 마시지 않으며, 사체에 손을 대지 않음으로 <나실인>의 지위를 유지 하였다(민6:1-21). 그렇게 함으로 누구든지 그를 보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두 려워하였다. 또한 예배를 섬기는 제사장들에게는 특별한 예복(에봇)을 입도록 규정하 였다(출28:1-4).

이런 상징의 발전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풍부하게 이루어졌다. 가장 오래된 예전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 교회의 성직 서품의식도 7세기 후반기에서야 나타나는데, 거기에 보면 특별한 예복(vestments)이나 목사의 목에 두르는 영대(stole) 같은 것이 없었다.

이렇듯 상징은 우리로 영적인 것들에게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데 크게 도움을 준다. 뿐만 아니라, 상징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이고,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들 의 관심사, 그리고 중요한 기독교의 가르침들을 기억나게 해 준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상징들은 예배드릴 마음을 갖도록 도와준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상징들은 예배 자들의 순례생활에 있어서 필수인 이정표와 같은 구실을 한다고 하겠다.

다. 상징에 대한 일반적인 의미 :

일반적으로 상징이란 의사표현의 한 도구로,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하거나 나타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그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전달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제한적이다. 이렇듯 언어는 무엇인가를 말하지만, 상징은 그것을 나타내 보여준다. 언어가 한계에 부딪히게 될 때, 상징은 말하기 시작한다. 상징이 말하기 시작하면 언어는 침묵을 지킬 수 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을 흔들거나, 반갑게 누군가를 포옹할 수 있다. 물론 이런 행동을 대신해서 언어로 전달한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우리의 삶에서 많은 아름다움이나 색채를 잃게 될 것이다. 말보다는 이상과 같은 상징적인 행동들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존경’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 하고 있는지를 생각할 때, 왠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느낄때가 있다. 그러나 만일 존경의 표시로 <큰 절>을 올려드릴 수 있다. 그 때 언어가 주는 의미보다 훨씬 더 분명하고 깊은 감동을 전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상징들이 신앙생활에 사용 될 때, 얼마나 풍부하고 심오한 신앙으로 이끄는 도구가 되는지 모른다.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이란 무한하고 영원하신 절대자와의 관계맺기 이기 때문에 상징은 가 장 적절한 대화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신앙적인 표현 가운데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 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며, 이런 경우에 상징보다도 더 적합한 도구가 없다고 하겠다.

   어느 예배당 제단 뒤 벽면에는 알파와 오메가란 희랍어 글자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만일 그 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교인이라고 한다면, 예배당에 들어섰을 때, 그는 처음이 되실 뿐 아니라, 끝이 되시는 하나님이 여전히 자 신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생각에(계1:8), 그가 조금전까지 자신을 사로잡고 있었던 온 갖 근심과 걱정들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라. 예배와 관계된 상징의 종류들 : 상징에는 다양한 종류들이 있다.

첫째, 시간의 상징

생활의 리듬을 암시해 주는 한 주간(레 23:3),

언제나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계1:10),

작은 창조로써 아침(창1:1-31),

활동과 구별되는 시간인 저녁(창1:1-31),

수면과 침묵 그리고 죽음으로써 밤(요9:4)이 그런 것들이다.

둘째,  장소의 상징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행2:46-47),

세상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나그네의 집(시119:54, 고후5:1-3, 벧전2:11),

주님의 살고 피를 겸격으로 나누는 제단(마26:26-28),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단,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자리 찬양대석, 등이 그런 것들이다.

셋째, 상징적인 사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성도(고전1:2-3),

하나님의 사자(使者)인 목사(딛1:7-9),

천국 음악으로 섬기는 찬양대원(대하29:25-28),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서 직분자들(고전4:1-2),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돌보는 관리인(대상9:17-27), 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넷째, 거룩한 용어

하나님과 대화인 기도(마6:5-15),

마음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막8:29),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는 찬송(시95:1-2),

말없는 기도인 묵상(시19:14, 119:97),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잠30:5-6, 롬3:2, 벧전4:11),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봉헌(시96:8),

하나님의 은총을 비는 인사(삿6:12, 눅1:28) 등이다.

 

다섯째, 거룩한 행동

세례를 기억하는 십자성호,

화해와 용서로써 악수와 포옹(벧전5:14),

천국으로 향하는 순례로써 행진(시95:2),

권위와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로서 안수(막10:16),

하나님의 은총을 선포하는 강복의 손(민6:22-26) 등이다.

 

여섯째, 예배를 돕기 위해 준비된 상징

두 개의 촛대와 촛불은 주님의 두 성품인 신성과 인성(마16:16, 요1:1-14),

촛불은 세상을 밝히는 빛이신 주님의 임재(시27:1, 요1:4-5),

생명의 근원인 세례대의 물(요한7:37, 행8:38),

승리를 말하는 깃발(렘50:2),

예배를 섬기기 위해서 입는 예복(출28:2-43, 삼상2:18),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돕는 오르간-악기(대하29:25-28),

주님의 사랑의 결정체인 십자가(고전1:18-24) 등이다.

 

일곱째, 경건한 자세들의 상징

하나님을 높여 드리기 위한 일어 섬(수7:10, 삼상9:26, 사60:1),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위한 앉음(대상17:16-27, 막3:34-35),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무릎꿇음(시95:6, 엡3:15),

목적지를 향한 걸음(사40:31, 행3:6),

사람 사이의 교량으로서 인사(눅1:28) 등이다.

 

여덟째, 거룩한 의미를 전하는 글자의 상징

신앙고백을 요약한 물고기란 글자(Ιχθυς는 물고기라는 희랍어인데, ‘예수 그리스도 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란 신앙고백의 첫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과 나중 되시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Α Ω(알파와 오메가)
우리의 구주가 되신 주님을 의미하는 ☧(희랍어 크리스토스의 처음 두 글자)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ΙΗΣ(희랍어 예수의 줄임말) 등이다.

상징의 특징

모든 상징은 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관계하는 매체요, 그것이 바라보는 주체를 섬기는 매체이다. 그런데 이런 상징들은 외적이고 내 적인, 그리고 영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상징의 외적 특징이라함은, 십자가나 어떤 의식을 집례하면서 행동하는 동작과 같은 유형적인 실재를 말하며, 내적인 특징은 한 집단이 그 상징에 부여하는 해석을 말하며, 영적인 특징이란 개인이나 집단이 외적인 상징과 내적인 의미와의 관련 속에서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말한다. 가령, 십자가는 고 난과 죽음을 외적으로 암시하는 외적 상징과,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해석하는 내적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로써 십자가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주는 영적 에너지를 발산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상징은 이런 특징 외에도, 역설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상징은 어떤 사람들 에게는 의미를 분명히 드러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깊은 의미가 감추어진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의 비유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진 의미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런 상징들에 대한 교육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상징은 의미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징들 속에서 살고 있는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의 실제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상징은 폭 넓게 사용되고 있다. 이런저런 상징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고, 우리의 신앙이 자라날 수 있다. 어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영적 의미를 전달해 주는 상징이라는 점에서 더욱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상징은 이렇듯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의미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수단이 아닐 수 없다(마13:13-43).

    그런데 문제가 있다.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상징들 중에는 잘 알려지고 이해 되는 것들이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상징들이 많이 있다는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상징이 갖는 본래적인 의미를 알지 못할 때 심각한 괴리 현상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상징은 공감대가 형성된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 처음 상징의 의미를 바르고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할 때, 자칫 우상을 섬긴다는 오해를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징에 대한 교육이 절실하 다. 그리고 그 상징들을 신앙과 삶에서 나눌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 신앙의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을 여행할때, 대부분의 교회당 지 붕에 큰 장닭 한 마리가 앉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옆에 앉은 아이가 물을 수 있다. “엄마, 저게 뭐야?” 그 때 “저건 말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 했거든(마26:69-75).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장닭이 세 번 울었지. 엄마는 저 장 닭을 볼때마다, 나는 지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자신을 돌아본단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면, 그 아이는 그 장닭을 예사롭게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예배에서 말과 상징의 균형과 전망 :

예배에서 말과 상징 사이에 균형이 깨지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예배에서 필요이상으로 말을 많이 하려고 하지만, 실제로 전달되는 의미는 그리 많지 못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모국어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에 상징이 서 있을 자리를 잃은 것이다.
그리스도인도 아니요, 종교인도 아닌 에리히 프롬은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상징적 언어를 우리 각자가 배워야 할 외국어라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배우면, 지혜의 의미심장한 출처 가운데 하나인 신화와의 관계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그것은 내용과 형식에서 전인류에게 공통적이기 때문에 특히 인간적이라고 하는 체험분야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악수와 인사말이 서로 상충되지 않으면서, 서로의 따스함과 의미를 강화시켜 주듯, 언어와 상징행위는 서로를 보완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현대 기독자들이 말의 홍수속에서 살지만 실제로 그들의 마음에 오랫토록 남아있는 말이란 과연 얼마나 될 까?
오히려 이와같은 우리의 빈약한 언어를 보완해 주기 위해서 상징언어를 사용한다고 하면서 함께 공유하고 익히도록 할 때, 지금보다 훨씬 더 풍성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상징의 의미는 마음속에서 잘 보존될 뿐 아니라, 말보다는 훨씬 더 용이하게 기억되는 장점도 있기 때문이다.

예배에서 말과 상징이 균형을 이루므로 더욱 풍성한 신앙의 의미를 살려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오늘 교회 지도자들에게 달린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 자료출처 : https://lutherfriend.tistory.com/6246 [lutherfriend.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