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세례(洗禮), 성령세례, 불세례 / 마태복음 3:11

                                                                                                           파트리스교회 수요 성서 연구 #. 1 물세례와 불세례(2020-06-10)

세례(洗禮)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구약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입니다.
신약의 첫 번째 책은 “마태복음”입니다.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 사이는 “대략 400년” 이란 긴 세월이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 시대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의 400년의 기간을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 라고 합니다.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를 “신구약 중간 시대”라고도 합니다. (아래 난외 주 참조)

기독교 이외에 가톨릭교회와 유대교에서는 신구약 중간 시대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셨다는 것을 강조하여 “외경”이란 말씀을 인정하고 사용합니다.

오래 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던 때에 어느 날 광야에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 거주하는 낯선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라고 외쳤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광야로 나와 요한의 외치는 소리를 들을 때 바로 이 사람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나는 너희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아니라 다만 물로 세례를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실 그 분은 너희들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며 실망하던 유대인들에게 메시아 신앙을 깨우쳤습니다. 요한의 외침을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서 세 종류의 세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 ; 회개와 구원을 위한 세례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 ; 구원의 확신과 보증을 위한 세례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 ; 심판을 위한 알곡과 죽정이를 구분하는 세례(불심판)

그런데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것은 분명하게 성경에 소개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셨을까요?

세 종류의 세례를 베푸셨던 수여자(授與者)를 살펴봅시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예수님 당시에는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마태복음 3:5∼6,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People went out to him from Jerusalem and all Judea and the whole region of the Jordan.
Confessing their sins, they were baptized by him in the Jordan River.

그러나 오늘날은 교회에서 목사가 세례를 베풉니다.
"주 예수를 믿는 (아무개)에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and this water symbolizes baptism that now saves you also--not the removal of dirt from the body but the pledge of a good conscience toward God. It saves you by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세례는 요한의 증거대로 분명히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제 성령세례를 베푸셨으며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When the Counselor comes, whom I will send to you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goes out from the Father, he will testify about me.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사람들에게 보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령을 “보혜사(保惠師)” 라고 합니다.

“보혜사(保惠師)”란 무엇인가?
-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
보혜사란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가르치시는 선생님” 이란 뜻입니다.

보혜사를 영어 성경에서 찾아보면 NIV에서는 “상담자(the Counselor)”, KJV에서는 “위로자(the Comforter)”, NASB에서는 “돕는자(the Helper)” 라고 합니다.

보혜사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étos)” 라고 합니다.
스트롱 번호 3875

1. 옹호자(an advocate), 중보자(intercessor),
2. 위로자(a consoler), 위로자(a comforter), 돕는자(helper),
3. 변호사(Paraclete)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한일서 2:1.
3. 요한복음 14:16
발음 : 파라클래토스(paraklētŏs)
어원: 387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26, 16:7), 대언자(요일 2:1)
신약 성경 : 5회 사용

예수님께서 언제 누구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셨습니까?

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When the day of Pentecost came, they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Suddenly a sound like the blowing of a violent wind came from heaven and filled the whol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All of them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in other tongues as the Spirit enabled them.

오순절날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때 불세례도 함께 베푸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자세히 관찰하면 성령과 불이라는 용어가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는 사용하였으나 마가복음 1장과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성령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라고 모든 복음서에서 말씀하셨다면 불세례도 오순절 날 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그러므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세례자 요한에 의하면 성령세례와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성경을 폭 넓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과 불세례에 대한 말씀을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제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clear his threshing floor, gathering his wheat into the barn and burning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불세례”는 불로 심판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9절,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리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At that time Jesus came from Nazareth in Galilee and was baptized by John in the Jordan.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John answered them all,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one more powerful than I will come, the thongs of whose sandals I am not worthy to untie.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17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to clear his threshing floor and to gather the wheat into his barn, but he will burn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I would not have known him, except that the one who sent me to baptize with water told me, 'The man on whom you see the Spirit come down and remain is he who will baptize with the Holy Spirit.'

34절,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I have seen and I testify that this is the Son of God.

참조 / 성령세례(사도행전 1:5, 11:16, 고린도전서 12:3)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해서 언급한 성경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이외 성경에서는 오직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에서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분명하게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진다는 것은 불이 다양하게 갈라져서 오순절 날 한 자리에 모여 있었던 다양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재 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불세례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사도행전 2: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When the day of Pentecost came, they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Suddenly a sound like the blowing of a violent wind came from heaven and filled the whol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오순절 날 성령의 임재가 나타났을 때 마치 성령은 강한 바람 소리로 들렸습니다.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바람이 아닙니다.
성령은 불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은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βαπτίσει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
- will baptize with the Spirit Holy and fire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장차 오실 그 분께서는 “성령(프뉴마)과 불(푸르)”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외쳤던 요한의 증언은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그 분이 그토록 기대하던 “메시아”라고 기다렸으나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사십일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사도행전 1:3).

이렇게 번역된 데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καὶ)”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카이”는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 라고 하여 앞의 것과 뒤의 것을 동등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령과 불”이라고 할 때 성령과 불을 동등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제까지 성령과 불을 이렇게 등위 접속사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등위 접속사가 아니라 우위 접속사로 해석하면 전혀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세례는 특별한 용법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위 접속사”인 “또는(or)”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위 접속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는 “성령 또는 불안에서” 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 사(四)복음서를 비교하여 연구해보면 더욱 확실히 증명된다.
먼저 우리는 “성령과 불로”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과 불로”가 아닌 “성령으로” 라고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 라고만 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11:16과 고린도전서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라고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여러 성구들을 참조할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 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 보더라도 “침례” 라는 말이 의미를 더 잘 통하게 한다. 만일 “세례”라고 하면 “성령으로 씻긴다”는 말이 되므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성령은 영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요 14:18∼19)이므로 '성령 안에서 침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하되 '생명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침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행 2:38, 행 19:2)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고전 3:16-17)'과도 같은 말이 되는데 결국 우리와 주님과의 상호내주(Inter-Residence)를 뜻한다.

한편 요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신령으로'라는 말은 “엔 프뉴마”로서 원 뜻은 “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의미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의미가 모두 해석되는 것이다. 즉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물 안에 잠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상징하는 뜻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 안에 잠긴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리가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로 세(침)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불 속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로서 신자와는 전혀 관계없고 불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즉 불신자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하는 대신에 '불 속에 잠기게 한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제 세례에 대한 용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세례(밥티조, βαπτίζω)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물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완전히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올 때는 과거의 나 즉 옛 사람은 죽었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물세례는 회개와 구원의 표시라고 하겠습니다.

βαπτίζω, ον 스트롱번호 907

1. 잠그다
2. 결례를 행하다
3. 세례를 베풀다
발음 : 밥티조(baptizō)
어원 : 미래 βαπτίσω, 제1부정과거 ἐβάπ- τισα, 제1부정과거중간태 ἐβαπτισά- μην, 미완료수동태 ἐβαπτιζόμην,
완료수동 분사 βεβαπτισμένος, 제1부정과거수동 ἐβαπτίσθην, 미래수동태 βαπτισθήσομαι, 911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세례 받다(마 3:6,16, 막 16:16), 씻다(막 7:4), 세례 베풀다(요 1:25,26, 고전 1:14).
 [명] 세례(마 3:11, 막 1:4, 눅 3:16)
신약 성경 : 77회 사용

그런데 회개와 구원의 표를 받았지만 공중권세를 잡은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살면서 때로는 알게 모르게 죄를 짓게 됩니다.
이렇게 죄를 짓게 될 때 사탄은 정말 네가 구원을 받았느냐?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아직도 그렇게 살아가느냐? 하며 조롱하고 비난할 때 정말 내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는가? 하고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성령세례가 구원을 보증합니다.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set his seal of ownership on us, and put his Spirit in our hearts as 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

고린도후서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Now it is God who has made us for this very purpose and has given us the Spirit as 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

히브리서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Because of this oath, Jesus has become the guarantee of a better covenant.

성령세례가 보증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로마서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because through Christ Jesus the law of the Spirit of life set me fre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불세례는 심판 즉 소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명기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For the LORD your God is a consuming fire, a jealous God.

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for our "God is a consuming f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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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자료

주제 ; 세례(洗禮)
- 세례(씻을 洗, 예도 禮)와 침례(잠길 沈, 예도 禮)
- 밥티조(물속에 잠기다)

성경 ; 마태복음 3:11

종류 ;

 1. 물세례(회개와 구원) 베드로전서 3:21

 2. 성령세례(생명의 보증) 보혜사(요한복음 15:26)
 - 로마서 8:2, 요한복음 6:63, 고린도후서 1:22, 5:5, 히브리서 12:29

 3. 불세례(심판, 알곡과 죽정이)
- 신명기 4:24, 히브리서 12:29
- 마태복음 3:12, 누가복음 3:17

*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
- 전치사 "과"(카이)
 등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을 같은 것으로 이해
 우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은 서로 다른 것으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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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1-2022(금)
성령세례

"오순절 사건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

이와 같은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다.
이 속성은 한 마디로 "영원성(永遠性)"이다.
영원이란 어느 시대에는 나타나고 어느 시대에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사건은 지금도 앞으로도 마지막 그 날까지 지속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

"아니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며 그 영은 지금도 계속적으로 역사하는 영이다.

셋째, 바울의 증거


고린도전서 2:9-10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바울의 성령은 통찰하는 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영은 구약에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통하여 계속된다.

신명기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명기 30:6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레위기 18: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로마서 11: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다.
그런데 그 율법을 그의 백성들이 지킬 수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의 백성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강조하였다.

로마서 2:28-29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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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외 주)

신구약 중간시대

신구약 중간 시대를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구약과 신약을 시작하려고 하니 중간에 400년의 공백이 있습니다.
성경책으로는 말라기와 마태복음은 한 장 차이인데 말입니다. 

구약 이야기가 끝난 연대가 BC 400년경이고 그 때부터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400년의 역사가 바로 신약과 구약의 중간시대입니다.
이 기간은 포로 귀환 공동체를 제국들이 다스리는 실제 세계사 기간입니다.
성경은 에스라 포로 귀환 공동체, 이후 이야기가 없지만, 그래도 페르시아로마 역사는 실제로 흘러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성경이 입을 다물고 있는 이 기간의 실제 세계사는 성경에서 예언한 그대로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을 앞두고 있는 이 상황에서 종속국으로 살아간 이 400년을 한마디로 말할 수 있다면 무엇일까요?

바로 유대인의 신앙, 유대교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고난, 그리고 죽으심과 부활 승천, 사도바울을 일평생 추적하며 괴롭힌 신약의 이야기의 또 다른 주인공의 실체는 "유대교"와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사실이 전제 되어야 신약 성경을 대하기가 쉽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유대교는 바로 구약의 끝 장면인 "에스라의 종교개혁"때 생겼습니다.
예레미아의 예언대로 정말 70년 만에 포로로 잡혀갔던 그들이 돌아 오게 되니, 어느 누구도 예언의 말씀을 부정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신뢰하게 되고 그러면서 "말씀공부"를 하면서 자신들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신들의 민족이 대단함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을 배우다 보니 정신이 든 겁니다. 정체성의 변화가 일어나고 의식의 전환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역사를 갖고 있으며, 말씀대로, 율법. 안식일, 절기를 시키면서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구별하며 살아야 할 거룩한 백성들 이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기룩하라" 당부한 것을 순종해야 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포로로 잡혀간 이유는 거룩함을 버리고 이방 종교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순결해야 합니다.
섞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말씀이 기준이 된 것입니다.

마치 노예 공동체에게 모세가 출애굽으로 새 민족 정신을 심어준 것처럼 에스라가 그 역할을 한 것입니다.
시내산 언약을 깨뜨리고 우상을 따른 것이 화의 근원이었다는 것을 민족이 포로가 되어 깨달은 것입니다. 

말씀 성취를 공동 체험하고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와 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놀랍도록 전부 맞는 겁니다.
말씀과 역사와 민족성과 정체성, 그리고 모세의 재발견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정체성을 가르쳐준 말씀(율법,모세오경)이 얼마나 우월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앗수르(앗시리아), 바벨로니아(바벨론), 바사(페르시아)시대를 지나면서 다른 민족에 비교하여 월등한 민족이라는 정체성에 확신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말씀공부를 통해서 쉽게 없어지지 않을 지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깨닫음은 감격이 되어, 통곡과 회개를 하게 했고, 자연히 삶에도 개혁이 일어나 감동적인 공동체 경험으로 까지 이어지고 그 공동체의 확신은 무서운 힘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결단하고 서약서까지 남겨, 제도화할 정도였는데, 구약시대 마지막 장면은 이처럼 느헤미야 10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명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중략) 이 밖에도 나머지 백성 모두가 귀족 지도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종 모세가 전하여 준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기로 하고, 우리 주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에 복종하기로 하였으며 그것을 어기면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다음과 같이 맹세하였다"

"우리는 딸을 이 땅의 백성과 결혼 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아들을 이들의 딸과 결혼 시키지 않는다. 이 땅의 백성이 안식일에나 성일에 물건이나 어떤 곡식을 내다 팔더라도 우리가 사지 않는다. 일곱 해마다 땅을 쉬게 하고 육 년이 지난 빚은 모두 없애준다.(성도로서의 거룩한 삶을 지키겠다고 문서화함)

하나님의 성전 비용으로 쓰도록 우리는 해마다 삼분의 일 세겔씩 바친다. 집안별로 주사위를 던져서, 해마다 정한 때에 하나님의 성전에 땔 나무를 바칠 순서를 정한다. 해마다 우리 밭에서 나는 맏물과 온갖 과일 나무의 첫 열매를 주님의 성전에 바친다. (성전 운영을 위해서 재정을 책임지겠다)  처음 난 맏새끼들을 성전 제사장들 생활비를 위해서 바친다."(성전이 운영 되는데 필요한 인건비도 서포트하겠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아무렇게나 버리두지 않을 것이다."(서약)
바로 이것이 유대교, 유대인, 유대 성격입니다.

창세기 12장부터 출발된 이스라엘의 민족역사를 잇는 공동체는 "유대인"(사마리이인, 아님)이라고 이렇게 개명한 것입니다. 이 때부터 이들은 "이스라엘=유대인"이라는 새 정체성을 갖는 것입니다.

히브리 정신을 잇는 정통성 있는 유일한 공동체, 포로귀환 공동체 유대인 이렇게 그들은 크고 두려운 "여호와의 날", "구원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갔습니다.
후손들도 선조들의 뒤를 이어 BC 300년대 바사(페르시아) 제국시대을 숨을 죽이고 지나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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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스교회 수요 성서 연구 #. 1 물세례와 불세례(2020-06-10)

세례(洗禮)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서 세 종류의 세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

그런데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것은 분명하게 성경에 소개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셨을까요?

세 종류의 세례를 베푸셨던 수여자(授與者)를 살펴봅시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예수님 당시에는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마태복음 3:5∼6,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그러나 오늘날은 교회에서 목사가 세례를 베풉니다.
주 예수를 믿는 (아무개)에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성령세례는 요한의 증거대로 분명히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제 성령세례를 베푸셨으며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사람들에게 보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령을 “보혜사(保惠師)” 라고 합니다.

“보혜사(保惠師)”란 무엇인가?
-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
보혜사란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가르치시는 선생님” 이란 뜻입니다.
보혜사를 영어 성경에서 찾아보면 NIV에서는 “상담자(the Counselor)”, KJV에서는 “위로자(the Comforter)”, NASB에서는 “돕는자(the Helper)” 라고 합니다.
보혜사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étos)” 라고 하여
(a) 옹호자(an advocate), 중보자(intercessor),
(b) 마법사(a consoler), 위로자(a comforter), 돕는자(helper),
(c) 낙하산(Paraclete)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세례자 요한에 의하면 성령세례와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성경을 폭 넓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과 불세례에 대한 말씀을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제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마가복음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참조 / 성령세례(사도행전 1:5, 11:16, 고린도전서 12:3)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해서 언급한 성경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이외 성경에서는 오직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에서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지만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풀 수도 있고 베풀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불세례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사도행전 2: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오순절 날 성령의 임재가 나타났을 때 마치 성령은 강한 바람 소리로 들렸습니다.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바람이 아닙니다. 성령은 불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은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βαπτίσει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
- will baptize with the Spirit Holy and fire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장차 오실 그 분께서는 “성령(프뉴마)과 불(푸르)”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외쳤던 요한의 증언은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그 분이 그토록 기대하던 “메시아”라고 기다렸으나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사십일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사도행전 1:3).

이렇게 번역된 데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καὶ)”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카이”는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로 많이 사용하지만 간혹 “우위 접속사”인 “또는(or)”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위 접속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는 “성령 또는 불안에서” 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 사(四)복음서를 비교하여 연구해보면 더욱 확실히 증명된다. 먼저 우리는 '성령과 불로'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과 불로'가 아닌 '성령으로'라고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라고만 되어 있으며 행 11:16과 고전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라고만 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령으로 세례'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 보더라도 '침례'라는 말이 의미를 더 잘 통하게 한다. 만일 '세례'라고 하면 '성령으로 씻긴다'는 말이 되므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성령은 영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요 14:18∼19)이므로 '성령 안에서 침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하되 '생명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침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행 2:38, 행 19:2)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고전 3:16-17)'과도 같은 말이 되는데 결국 우리와 주님과의 상호내주(Inter-Residence)를 뜻한다.

 

한편 요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신령으로'라는 말은 “엔 프뉴마”로서 원 뜻은 “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의미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의미가 모두 해석되는 것이다. 즉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물 안에 잠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상징하는 뜻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 안에 잠긴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리가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로 세(침)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불 속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로서 신자와는 전혀 관계없고 불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즉 불신자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하는 대신에 '불 속에 잠기게 한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세례의 의미를 소개합니다.
세례는 물속에 잠긴다는 뜻입니다.
물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씻어낸다, 죽는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성령에 들어가서 씻어내고 죽는 것을 말합니다.
불세례는 불속에 들어가서 태워버리고 죽는 것을 말합니다.

Ⅰ. 세례(洗禮)란 무엇인가?

세례를 헬라어로 “밥티조(βαπτίζω)” 라고 합니다.
‘밥티조(baptizó)’의 뜻은 “담그는 것(to dip)”, “가라앉다(sink)” 라고 합니다.
“밥티조”라는 동사가 명사로는 “밥티스마(βάπτισμα)”가 되며 “세례자(침례자)”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될 때는 “밥티스테스(βαπτιστής)”라고 합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밥티스테스 요안네스”로서 “세례 요한”이 아니라 “세례자(침례자) 요한” 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세례를 히브리어로 “라하츠(rachats, רְחֲצוּ)” 라고 합니다.
“라하츠(rachats, רְחֲצוּ)”의 뜻은 “씻다(to wash)” “빨다” “목욕하다”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라하츠”의 행위는 정결 작업으로 나타납니다.
제사장이 위임 받을 때는 먼저 회막문에서 물로 깨끗이 몸을 씻고, 의복을 입고, 관을 쓰고, 예식을 행하게 됩니다. 물로 깨끗하게 씻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되고 성별된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0:20,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여호와 앞에 사를 때에도 그리할찌니라.  

제사장들이 회막에서 여호와의 일에 참여하기 위해서 준비된 물두멍에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또 레위기 22:6, 민수기 19:7에 보면 부정함을 입은 사람이 물로 씻어서 정결함을 얻는 법이 나와 있습니다. 레위기 8:21, 9:14에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물로 깨끗이 씻으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26:6에서 ‘라하츠’ 행위는 무죄함 곧 의인의 반열에 속해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로마서 6:3∼5에는 “예수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곧 그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세례는 영적으로 예수 안에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태어났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세례의 의미는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태어났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물속에 들어갈 때는 이미 죽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올 때는 죽었던 존재가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2. 세례의 중요성

오늘날 세례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마태복음 28장의 말씀에 기초하여 행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세례가 신앙생활에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유언적으로 이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세례가 단순한 통과의례적인 의식이었다면 외식적인 것을 가장 싫어하신 주님이 명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세례를 베푸는 것’과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참 성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고, 예수님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하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받음으로 법적 교인이 되지만, 말씀 순종으로 참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입니다.
신약의 첫 번째 책은 "마태복음"입니다.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 사이는 대략 400년 이란 긴 세월이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 시대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의 400년의 기간을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라고 합니다.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를 "신구약 중간 시대"라고도 합니다.

세례
洗禮

수여자
授與者

성구
聖句

의미
意味

 

참고

불세례

성령

고린도전서 12:13

삶(능력)

 

법적 기능

성령세례

예수
행 11:17

마가복음 1:8

복음의 증인(권능)

 

능력적 기능

물세례

요한(목사)
마 3:11

베드로전서 3:21

죄를 씻음(구원)

 

의식적 기능


* 수여자(授與者)
증서나 훈장 따위를 주는 사람
줄 수(授),  줄 여(與), 놈 자(者)


Ⅰ. 세례(洗禮)란 무엇인가?

세례를 헬라어로 “밥티조(βαπτίζω)” 라고 합니다.
‘밥티조(baptizó)’의 뜻은 “담그는 것(to dip)”, “가라앉다(sink)” 라고 합니다.
“밥티조”라는 동사가 명사로는 “밥티스마(βάπτισμα)”가 되며 “세례자(침례자)”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될 때는 “밥티스테스(βαπτιστής)”라고 합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밥티스테스 요안네스”로서 “세례 요한”이 아니라 “세례자(침례자) 요한” 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Ⅱ. 물세례란 무엇인가?

Strong's Greek 5204. ὕδωρ(hudór) - water

Englishman's Concordance.
Matthew 3:11 N-DNS GRK: βαπτίζω ἐν ὕδατι εἰς μετάνοιαν
NAS: As for me,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

//biblehub.com/str/greek/5204.htm - 32k



Ⅲ. 성령세례란 무엇인가?

마태복음 3:11

마가복음 1:8

사도행전 1:5

고린도전서 12:13

성령과 불

성령

성령

성령

누가복음 3:16

요한복음 1:33

사도행전 11:16

 

성령과 불

성령

성령

 


성령세례를 이해하려면 먼저 성령의 특수한 기능을 살펴야 한다.

보증하는 성령()

인치는 성령(에베소서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디모데후서 1: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에베소서 3: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



 

에베소서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Ⅳ. 불세례란 무엇인가?



불세례란 무엇인가?
Strong's Greek: 4442. πῦρ(pur) - fire

... 10 (cf. Luke 16:24); βαπτίζειν τινα πυρί (see βαπτίζω, II.

b. bb.), Matthew 3:11; Luke 3:16. the tongue ...

“성령과 불” 이라는 말이 마태복음(3:11)과 누가복음(3:16)에서만 사용되었고, 마가복음(1:8)과 요한복음(1:33)에는 “성령”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 라고만 표현하였다. 사도행전 11:16과 고린도전서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 라고만 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 이라고 할 때 성령은 보증하는 일을 합니다.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린도후서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물세례는 누가 베풀었습니까?
요단강에서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까?
유대 풍속은 세례를 베푸는 사람이 세례를 받는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해가 없도록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불세례

 

불세례가 무엇이며 그 근거는 무엇인가? 불세례라는 말은 마태복음 3:11과 누가복음 3:16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들은 불세례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 채 성령 체험의 일종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것은 앞의 두 곳의 성경 본문에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 라는 말씀에서 “성령과 불로” 라는 표현을 흔히 “성령과 동시에 불로” 라는 말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을 “성령”과 “불”로 동시에 세례 받는 것으로 오해하여 “성령불” 또는 “불성령” 등의 말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성령 받으라”는 말을 “불 받으라”는 말로 바꾸기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사실은 “성령”과 “불”은 함께 받는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존재인 것이다.

 

이렇게 번역된 데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 )”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카이”는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의 뜻으로 많이 사용하지만 간혹 “우위 접속사”인 “또는(Or)”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위 접속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는 “성령 또는 불안에서” 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 사(四)복음서를 비교하여 연구해보면 더욱 확실히 증명된다. 먼저 우리는 '성령과 불로'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과 불로'가 아닌 '성령으로'라고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라고만 되어 있으며 행 11:16과 고전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라고만 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령으로 세례'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 보더라도 '침례'라는 말이 의미를 더 잘 통하게 한다. 만일 '세례'라고 하면 '성령으로 씻긴다'는 말이 되므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성령은 영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요 14:18-19)이므로 '성령 안에서 침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하되 '생명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침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행 2:38, 행 19:2)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고전 3:16-17)'과도 같은 말이 되는데 결국 우리와 주님과의 상호내주(Inter-Residence)를 뜻한다.

 

한편 요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신령으로'라는 말은 “엔 프뉴마”로서 원 뜻은 “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의미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의미가 모두 해석되는 것이다. 즉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물 안에 잠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상징하는 뜻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 안에 잠긴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리가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로 세(침)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불 속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로서 신자와는 전혀 관계없고 불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즉 불신자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하는 대신에 '불 속에 잠기게 한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물세례는 공적인 선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씻음 받았다는 약속과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물세례를 받았지만 여전히 과거의 삶이 나도 모르게 반복되어 나를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합니다. 이러한 반복되는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물세례”와 “성령 세례” “불세례”를 외쳤습니다.
물세례는 회개케 하기 위한 세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결혼식을 하지 못하고 동거하며 아이들을 세 명씩이나 양육하던 어느 부인이 면사포를 쓰고 결혼식 한 번 해 봤으면 원이 없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미 혼인신고도 마쳤습니다. 아이들도 세 명씩이나 낳고 키우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부부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결혼식을 하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부담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진관에 가서 부부가 결혼식 사진을 찍고 응접실 벽에 걸어놓고 지내는 부부를 만났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때로는 어느 교인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세례를 꼭 받아야만 합니까?”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세례 받는 것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고, 세례를 받지 않고서는 못 견딜 것입니다. 세례는 죄 용서함의 표시와 증거로 받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세례는 구원 받은 사람들이 그 표징으로써 받는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는 “참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세례는 죄 사함의 방법이요, 날인이다. 하나님은 초대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이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에게도 죄 사함을 베풀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은 “세례가 군인들이 충성 맹세의 표시로써 국가 원수의 휘장을 붙이고 다니는 것과 같이 사람들 앞에서 신앙을 나타내는 표시나 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 즉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약속과 함께 받아야 하는 것을 알지 못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믿음과 회개와 세례입니다.


세례받기를 거절하거나 주저하시는 분들이여, 당신이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세례를 받는 것을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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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와 수소의 결합체(H₂O)이며 지구의 4분의 3을 덮고 있을 뿐 아니라 인체의 70%를 차지하는 물질이다.


 최초로 언급된 창세기 1:6절의 '물'은 지구 표면을 덮고 있던 물(2절)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수분(水分)을 가리킨다.


 물은 모든 생명체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성경에서도 650회 이상 언급되었다. 특별히 물이 부족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더욱 중요시되었으며, 모든 것의 기본이 되었다.


 물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음료수였다(창 21:14, 민 20:11, 막 9:41, 요 2:7). 이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시기 전에 물로 옷을 빠는 등 정결케 할 것을 명하셨다(출 19:10-15). 제사장은 물두멍에 담긴 물로 수족을 씻어서 정결케 한 뒤 회막에 들어갔다(출 30:18-20).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으며(행 8:36-39),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그의 신부인 교회가 성별되어 흠없는 성화의 몸이 된 것을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셨다'고 표현했다(엡 5:26).


 또한 물은 여러 가지를 상징했다.
먼저 물은 영적 축복과 회복을 상징했다(시 23:2, 사 12:3, 사 35:6-7).
물이 모자라란 것은 가장 심각한 일 중 하나이며, 선지자들은 이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기도 했다(렘 14:1-9, 욜 1:15-20, 암 4:7-8).
물은 자제력을 잃은 불안정한 상태(창 49:4)나 아이 성에서 패전하여 겁먹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수 7:5),
평화로운 상태(시 23:2),
환난이나 괴로움(사 43:2),
박해(시 124:4-5),
만국에 미칠 복음(사 11:9),
구원(사 55:1) 등도 상징했다.
또한 물은 영혼의 갈급함(시 42:1),
하나님의 축복하심(겔 47:1-12),
영생(계 22:17),
그리스도(요 4:10-15),
거듭남(요 7:37-38)을 상징했다.  




성령



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질문) 오순절 날 왜 성령이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 같이 임하셨는가?

성경의 모든 계시는 점진적으로 진행됩니다.
이것을 “점진적 계시(progressive revelation)”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도 구약과 신약을 거쳐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마지막에 완성될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령에 대한 이해도 오순절 날 갑자기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 같이 임한 것이 아니라 점진적 과정을 거쳐 오순절 날 드디어 분명하게 나타났다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애급에서 고통을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을 때 홍해를 물  세례라고 합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생활 할 때 낮에는 구름 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이 나타나서 광야 생활을 지켜주셨다고 합니다. 이때 구름 기둥은 물세례, 불기둥은 성령 세례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오순절 날 불과 바람으로 임했던 성령의 점진적 계시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세례 요한의 증거(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광야에서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장차 메시아가 나타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βαπτίσει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
- will baptize with the Spirit Holy and fire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장차 오실 그 분께서는 “성령(프뉴마)과 불(푸르)”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외쳤던 요한의 증언은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그 분이 그토록 기대하던 “메시아”라고 기다렸으나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사십일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사도행전 1:3).

둘째는 부활하신 예수의 증거(사도행전 1:1:4∼5)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이제까지 단 한 사람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던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향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때 먼저 찾아가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고자 갈망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을 오백 명의 사람들이 목격했습니다(고린도전서 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세례 요한이 외쳤던 그 분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 분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분께서는 단 한 사람에게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실망했던 사람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성경의 증거는 실망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사도행전 1:15a)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부활하셨던 예수를 목격했던 사람들이 오백 명이라고 사도 바울은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함께 모였던 사람들은 120명이었다고 합니다. 380명은 실망하여 함께 모이지 않았습니다.

셋째는 오순절 날의 증거(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순절 날 드디어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쳤던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말씀이 함께 모였던 사람들이 들었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재 하여 방언으로 말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방언은 당시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함께 모였지만 서로 의사소통이 잘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유대인들의 절기(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히브리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 제자들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증거 할 때 갑자기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나타나서 성령 충만한 상태가 되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모여 있던 유대인들이 각자 자기들이 사용하던 언어로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Ⅰ. 세례(洗禮)의 의미

세례를 헬라어로 “밥티조(βαπτίζω)” 라고 합니다.
‘밥티조(baptizó)’의 뜻은 “담그는 것(to dip)”, “가라앉다(sink)” 라고 합니다.
밥티조라는 동사가 명사로는 밥티스마( )가 되며 세례자(침례자)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될 때는 밥티스테스( )가 된다. 세례 요한은 밥티스테스 요안네스( )로서 세례자(침례자) 요한이라고 번역해야 옳은 것이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에 사람을 물속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끌어올리는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을 “침례(浸禮)” 라고 합니다.

이러한 침례가 생활환경의 변화에 따라 물속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물을 뿌리는 예식으로 진행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물속에 들어갔다 나와야 세례를 받은 것이라며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교회와 교단도 있습니다.

Ⅱ. 물세례(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오래 전에 모태 신앙의 두 젊은이가 어렸을 때는 유아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대학생이 되어 입교 문답을 하고 세례 교인으로 인정을 받는 입교예식을 마치고 교회 근처 커피숍에 들어가서 커피를 주문한 후에 담배를 피우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세례 교인이 된 후에 처음 피우는 담배가 세례 교인이 되기 전에 피우던 그 담배 와 맛이 똑같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면서도 커피 맛이 똑같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를 받던 침례를 받던 음식 맛이 변하고 습관적으로 행하던 것들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겉 사람의 변화가 아니라 속사람의 변화가 나타나야 합니다.

‘물세례’는 구원의 표가 됩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세례 요한의 물세례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인물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무슨 죄가 있어서 세례를 받으셨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의를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마태복음 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매우 불편한 진실이었습니다. 세례를 베푼 사람은 세례를 받은 사람보다 영적인 권위가 높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것은 확실하지만 예수님이 영적으로 훨씬 앞선다는 사실을 강조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을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었지만 예수 보다 영적으로 우월하지 않다는 것을 증거 하려고 “요한의 세례는 물세례”로, “예수의 세례는 성령과 불세례”로 표현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왔습니다. 그에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중적 카리스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장에서도 그런 카리스마가 넘칩니다. 낙타털 옷을 입었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만 먹었습니다. 일단 겉모습만으로도 영적인 뭔가가 있어 보입니다. 요한은 단순히 있어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영적인 내공을 갖추었습니다.

5-7절 말씀이 그 상황을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이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요한의 설교는 대중들의 양심을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다그쳤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의 설교를 들은 당시 사람들은 간담이 서늘했을 겁니다. 뭔가 삶을 바꿔서 새롭게 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다짐도 했을 겁니다. 그것을 가리켜 성경은 “물세례” 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도덕적인 변화와 의로운 삶과 같은 변화는 지금도 요구됩니다.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삶의 태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비난받는 이유에서 가장 큰 것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대한 열정은 지대하지만 그것이 삶의 변화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힘드니 그저 교회에서 위로 받는다는 생각에만 치우쳐 있습니다. 기복적이고, 이기적이고, 개 교회 중심적이고, 반역사적이고, 반통일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경향을 많이 보입니다. 세례 요한의 물세례가 시급합니다. 이런 세례는 기독교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입니다.

Ⅲ. 불세례(마태복음 3:11b)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불세례의 사전적 의미는 “신도가 성령의 충만으로 죄악과 부정(不淨)을 불살라 성결(聖潔)하게 됨을 일컫는 말.”
 
 '침례' 즉 '물속에 들어감'의 뜻은 무엇인가? 물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롬 6:3-4에서 말씀하듯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음을 상징한다. 즉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에서 침(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하는 상징적 행위라고 가르친다.

 

골 2:12에서도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라고 함으로써 역시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 이로 보더라도 '세례' 즉 '물로 씻음'이란 표현이 사망을 상징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물속에 잠긴다'는 뜻의 '침례'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침(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이는 곧 죄 사함의 상징이다. 결국 '침례'는 벧전 3:21의 말씀대로 '구원하는 표'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침례교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교파는 '세례'의 형식으로 의식을 거행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침례교를 제외한 나머지 교회가 모두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교회는 의식의 상징적 의미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또한 엡 5:26에서 말씀하는 '물로 씻음'을 '세례'의 근거로 삼기도 한다.

 

아무튼 '세례'는 '침례'의 오역이지만 교회가 이를 영적으로 해석하는 오래된 전통을 바꿀 수는 없으므로 '세례'라는 표현을 그대로 인정하여 '침(세)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교회에서 '세례'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세례'의 성경적 의미를 알고 사용한다면 신앙이 왜곡되거나 하기까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불세례

 

불세례가 무엇이며 그 근거는 무엇인가? 불세례라는 말은 마태복음 3:11과 누가복음 3:16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들은 불세례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 채 성령 체험의 일종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것은 앞의 두 곳의 성경 본문에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 라는 말씀에서 “성령과 불로” 라는 표현을 흔히 “성령과 동시에 불로” 라는 말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을 “성령”과 “불”로 동시에 세례 받는 것으로 오해하여 “성령불” 또는 “불성령” 등의 말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성령 받으라”는 말을 “불 받으라”는 말로 바꾸기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사실은 “성령”과 “불”은 함께 받는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존재인 것이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βαπτίσει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
- will baptize with the Spirit Holy and fire  

이렇게 번역된 데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καὶ)”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카이”는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로 많이 사용하지만 간혹 “우위 접속사”인 “또는(or)”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위 접속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는 “성령 또는 불안에서” 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 사(四)복음서를 비교하여 연구해보면 더욱 확실히 증명된다. 먼저 우리는 '성령과 불로'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과 불로'가 아닌 '성령으로'라고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라고만 되어 있으며 행 11:16과 고전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라고만 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령으로 세례'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 보더라도 '침례'라는 말이 의미를 더 잘 통하게 한다. 만일 '세례'라고 하면 '성령으로 씻긴다'는 말이 되므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성령은 영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요 14:18∼19)이므로 '성령 안에서 침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하되 '생명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침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행 2:38, 행 19:2)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고전 3:16-17)'과도 같은 말이 되는데 결국 우리와 주님과의 상호내주(Inter-Residence)를 뜻한다.

 

한편 요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신령으로'라는 말은 “엔 프뉴마”로서 원 뜻은 “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의미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의미가 모두 해석되는 것이다. 즉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물 안에 잠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상징하는 뜻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 안에 잠긴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리가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로 세(침)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불 속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로서 신자와는 전혀 관계없고 불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즉 불신자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하는 대신에 '불 속에 잠기게 한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심판을 상징하는 불

 

성경에서 “불”은 “심판”을 상징한다.
불은 헬라어로 “퓌르(πῦρ, pur)”인데 성경에서 퓌르는 예외 없이 심판을 통한 형벌의 수단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심판이라 함은 종말의 최후 정점에서 신 불신간에 단회적으로 받게 될 최후의 심판(광의적 심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별로 받는 정죄의 심판(협의적 심판)을 뜻한다.

 

요한복음 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심판을 받는다'고 할 때 '정죄를 받는다'는 뜻과 같은 것이다. 즉 이미 심판 받았다라는 말씀은 정죄받기로 정해졌다는 뜻이며 이러한 자는 불로 태워지는 운명이 되어 최후 정점의 심판 때 시행되리라는 것이다.

 

불이 심판을 가리킨다고 하는 것은 누가복음 3:17으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쭉정이'가 '불'에 태워질 것이라는 비유로 볼 때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마태복음 3:12에서도 같이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문장 구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타나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즉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 안에서 침(세)례를 주신다'라고만 되어서 '불'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불'의 의미를 설명하는 '쭉정이를 불에 태우신다'라고 하는 비유 역시 나타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각각 '불'에 대한 해석이 반드시 따라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두 복음서에는 마 3:12과 눅 3:17에서 각각 쭉정이를 불에 태우는 비유가 덧붙여 진 것이다. 즉 '불'은 쭉정이와 직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비유에서 신자는 알곡이므로 불과는 관계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와 유사한 내용으로 마 13장의 가라지 비유에서 '세상 끝에 가라지를 불사른다'라고 할 때의 '불' 역시 '심판'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불이 심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성경 구절은 많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히 12:29)이라고 할 때 불은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한편 행 2:3에서 성령 강림 때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여'라는 말씀에서 혹자들이 잘못 인용하여 성령과 불을 서로 관련시키는 것도 보게 되는데 이는 문맥을 잘 살피지 않고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성령이 불과 같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불의 혀'의 수없이 갈라진 형상을 비유하여 한 성령이 여러 사람에게 나뉘어져서 임하신 것을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성령'은 '불의 뜨거움'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고 단지 '불의 혀의 갈라지는 모양'만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성령이 보인다고 한 것도 물질이 아니신 하나님의 영이 보일리 없건만 '영적으로 보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보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호라오(ὁράω, horaó: to see, perceive, attend to)”는 주로 마음의 눈으로 영적인 것을 보는 것(마 26:64, 행 7:55∼56)을 뜻한다. 눈으로 물질을 보는 것을 뜻할 때는 “블레포(βλέπω, blepó. to look at)” 라는 동사가 주로 사용된다.

 

한편 구약에서도 단 7:9-11에서 알 수 있듯이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뜻한다. 그 밖에 출 3:2의 떨기나무의 불꽃과 렘 5:14의 하나님의 말씀의 불과 렘 23:29의 불같은 말씀과 방망이 등에서 하나님과 관련된 불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들 역시 하나님의 위엄과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 불의 뜨거운 속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는 모두 물질적인 불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떨기나무 불꽃은 불꽃의 극히 밝고 빛나는 영광과 위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성경에서 뜨거움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은 오직 성경 말씀을 풀어 주실 때(눅 24:32)와 서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라(벧전 1:22)고 했을 때뿐으로 이상으로 볼 때 성령과 불을 동시에 받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따라서 불세례를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성경의 뜻 그대로라면 심판을 받게 해달라는 말이 되므로 주의해야 한다. 혹자는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찬송 부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도를 다 아시므로 알아서 해주실 것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잘못된 것은 무엇이든지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는 정확한 성경 지식을 가질 필요도 없고 사사 시대처럼 각자의 생각에 좋은 대로 신앙 생활을 해나가면 된다(삿 21:25)는 말과 같다. 진실된 하나님의 자녀라면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일획이라도 변개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서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해야지 그런 식으로 견강부회(牽强附會)한다면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리가 없다.

 

간혹 간증집 등에는, 기도원 등에서 기도하던 중에 '뜨거운 불세례를 받았다'라고 하거나 심지어는 '불세례를 받고 뜨거워서 데굴데굴 굴렀다'라고 간증하는 것도 있는데 이는 물론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들이다. 정말 뜨거움을 맛보았다면 그것은 성령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의 정죄의 불을 체험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성령 받을 때 뜨거움을 느꼈다고 가르친 구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체험을 하였다면 성경과는 무관한 기묘한 체험이기 때문인 것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성도의 마음을 뜨겁게 하시는 뜨거움은 물질적인 뜨거움이 아니라, 마음의 감동이며 내적인 뜨거움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고 또한 열정과 희열 같은 뜨거움을 주신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물세례를 교회의 중심으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더 본질적인 세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불세례입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물세례는 어느 정도 손에 잡히지만 성령과 불세례는 그렇지 못합니다. 흔히 교회에서 말하듯이 “성령을 받으라”는 말인가 하는 정도입니다. 이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본문에 성령과 불이 나란히 소개됩니다.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
창세기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육축과 온 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우리라는 복수 명사를 사용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닌가?
이슬람교 창시자 마호멧은 하나님은 괴물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한 몸에 머리가 셋이나 달린 그런 하나님을 믿는가?
기독교의 신관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라고 하겠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먼저 살펴야 한다.
첫째는 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
둘째는 사랑으로 존재하는 하나님
셋째는 창조하시는 하나님
넷째는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
- 마태복음 28:19,
- 요한일서 5:8, 증거하는 이가 셋 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성령론(요한복음 14, 15, 16장)
- 보혜사(保惠師),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선생님
-


물(水)과 성령의 관계에 대하여


물(水)

מַיִם (마임)

창세기 1장을 보면 빛의 창조 이전에 '물'이 있었다는 진술이 나온다. 2절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개역개정)란 말씀이 있다. “수면”(水面)이 ‘물’의 존재를 가리킨다. 물은 히브리어로는 מַיִם (마임)이다. ‘물’(마임)이 무엇이기에 ‘영’(루악흐)의 운동과 연동하는지 의아하다. 창1:2은 빛이 창조되기 이전의 상태를 진술한다. 빛이 있기 전에 ‘물’이 있었으며 “하나님의 영”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히브리어로 ‘루악흐 하엘로임’이고(רוּחַ אֱלֹהִים), “수면 위에”는 ‘알 퍼네-하마임’이다(עַל־פְּנֵי הַמָּיִם). “하나님의 영”이라고 번역된 רוּחַ (루악흐)는 ‘기’ 내지 ‘기운’, 또는 ‘바람’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루악흐’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창조의 능력이며 우주를 일정한 이치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구체적인 힘이다. 물리학이 발견한 ‘중력’과 같은 것을 우리는 이 ‘루악흐’와 견줄 수 있다. 하지만 ‘루악흐’가 활동하는 영역이 “수면 위”라고 하는 창1:2의 진술은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물’이 무엇이기에 ‘영’과 함께 작용하는가?

“수면 위에”란 어구는 공간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다. 둘째 날 “궁창”을 창조할 때 비로소 공간이 생겨난다. 아직 시간과 공간이 없는 상태에서 ‘루악흐’와 ‘물’이 상호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창세기의 독자들은 이 점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개역성경의 동사 ‘운행하다’란 단어는 רָחַף (락하프)이다. 이는 어떤 사물이 진동하며 매우 세차게 떨고 있는 동작을 가리킨다. <루악흐>가 물 위에서 진동하니 물이 함께 소용돌이치듯 서로 감응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רוּחַ (루악흐)가 움직이면 ‘물’, 곧 מַיִם (마임)도 덩달아 움직였다. 성령은 물을 움직이는 힘이고, 물은 성령을 따라서 움직인다.

이 사상은 창2:6에 나타난다. 땅 밑 곧 궁창에서 물이 솟아올라 온 땅을 적셨다(창2:6). 하나님은 이처럼 젖은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다(창2:7). 물이 사람의 몸에는 75%나 들어 있고 세포의 원형질에는 물이 95%나 차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하나님의 영”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רוּחַ (루악흐)는 중력의 법칙을 지어냈다. 사람도 그 기운에 감응하여 움직이고 활동한다. 성령은 사람의 몸 속에 있는 물, 곧 מַיִם (마임)을 통하여 사람을 감동시킨다. 이처럼 물은 성령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천지운행을 따라 사는 사람을 ‘농인(農人)’이라고 부른다. ‘농'(農)은 별 '진'(辰) 자 위에 노래 '곡'(曲)이 붙은 글자이다. 이 글자는 우주 만물이 황도를 따라 움직일 때 그 운동에 따라 덩실덩실 춤추며 노래하며 살아가는 존재를 가리킨다. 농인 몸 속에 들어있는 ‘물’이 성령과 감응하여 그 농인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게 된다.

물이 성령의 감동에 따라 움직이는 사례는 성경에 가득하다. 예컨대, 땅 밑에서 솟아나는 물(창2:6), 에덴동산에서 발원하는 물(창2:10-14), 노아의 대홍수(창6-9장), 애굽의 하수가 피로 변함(출7:17), 홍해가 갈라진 사건(출14:16), 마라의 쓴물(출15:25),, 므리바 바위(출17:6; 민20:11), 요단강이 갈라진 사건(수4:7), 엘리야와 엘리사가 요단강을 가른 사건(왕하2:8, 14), 에스겔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겔47:1), 등등 구약성경에 수두룩하게 등장한다. 신약성경에도 예수님의 기적들에 물이 언급된다. 가나의 혼인잔치, 베데스다의 연못, 소경을 침으로 고침, 풍랑을 꾸짖음, 물위를 걸으심, 등등 부지기수이다. 요한계시록에는 마지막 날에 새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가 환상으로 펼쳐지는 가운데 성경이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할만한 신학사상은 요한복음에 나온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신 대목이다(요3:5). 여기서 “물과 성령”은 창1:2의 “영”과 “물”에 연결된다. 주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도 하셨다(요3:3). ‘거듭나다’란 헬라어는 ἄνωθεν (아노텐)이란 부사로 표현되는데 이 부사는 ‘위로부터/from above’라는 뜻도 된다.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죄로 인하여 혈과 육의 존재이며, 아래로부터 태어나서 세상의 종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백성은 물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작용하여 죄의 저주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피조물로 회복된다. 이처럼 거듭나는 데에는 영과 물의 상호작용이 있어야 한다.

더 폭을 넓혀 보자. 우리가 파괴한 환경, 그로 인한 기후변화, 특히 수질오염은 죄의 결과이다. 환경의 회복은 우리가 거듭나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 ‘영’(루악흐)이 작용하면 ‘물’(마임)이 변하게 된다. 성령을 받으면 우리 인간의 몸 속에 있는 물이 맑아진다. 죄인이 지어낸 물질문명은 창조세계를 파괴하고 있지만, 물과 영으로 거듭난 우리는 참 인간을 회복하고 마침내 오염된 물을 회복할 것이다.




성령은 헬라어 “프뉴마” 이고, 불은 “푸르” 입니다.

“프뉴마”는 “영”이라는 뜻만이 아니라 “바람”과 “숨”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히브리인이나 헬라인 모두 영과 바람을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구 안에서 벌어지는 공기의 대류현상입니다. 물리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고대인들에게는 그런 물리학적인 정보가 전혀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는 어떤 것을 느꼈습니다. 봄이 오면 따뜻한 기운이 돌면서 죽은 듯이 보였던 땅에서 풀과 나무의 순이 돋아납니다. 찬 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자연에 생기가 없어집니다. 사람이 어머니 배에서 나오면 숨을 쉬기 시작하고, 죽으면 숨이 끊깁니다. 바람과 숨이 세상과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대 히브리인들은 영과 바람을 똑같은 단어인 “루아흐”라고 하였고 헬라인들은 “프뉴마”라고 말했습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생명을 주는 힘이지만 불은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생명을 결정하는 힘입니다. 고대인들에게 불이 얼마나 신비롭게 보였을지 상상해보십시오. 2백만 년 전 유인원들이 처음으로 불을 보았을 때 살아있는 생물로 보았을 겁니다. 무시무시한 괴물로 말입니다. 천천히 불을 관찰하고 다루면서 불이 생명의 원천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헬라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을 만물의 근원으로 보았습니다. 그게 틀린 말도 아닙니다. 불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태양이 지구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전기와 가스, 그리고 핵에 이르기까지 모든 에너지도 역시 불입니다. 고대 여러 문명이 태양을 신으로 섬겼다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닙니다. 구약성경에도 불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메타포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1 이하에 오순절 성도강림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 예루살렘의 마가 다락방에 모였던 2백여 제자들에게 성령이 바람과 불로 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 2:2∼3,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세례 요한이 말한 ‘프뉴마와 푸르’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바람과 불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바람과 불이 고대인들에게 절대적인 생명의 능력이었던 것처럼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 생명이었습니다. 절대 생명 경험이 바로 성령 강림이자 불세례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바람직한 삶의 변화라 할 수 있는 물세례에 머물지 말고 불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붙들었습니다.

Ⅳ. 절대 생명

MRA 라는 단체가 있습니다(Moral Re Armament). 우리말로 “도덕재무장” 이라고 합니다. 이 단체가 주장하는 네 가지 목표는 “정직, 순결, 무사, 사랑” 이라는 정신으로 “새 사랑, 새 가정, 새 사회, 새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세례에 대한 신앙을 바르게 가르치고 전달된다면 도덕재무장과 같은 목표가 반드시 실현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순절 날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를 통해서 절대 생명을 경험했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함께 가르침을 받았던 것도 십자가 사건으로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부활 후에는 부활을 의심했던 제자도 있었고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나고 드디어 부활 생명에 대한 믿음이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이 불의 혀같이 바람같이 임한 것과 방언을 말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부활 생명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믿음을 갖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The Spirit gives life; the flesh counts for nothing. The words I have spoken to you are spirit and they are life.  

생명(生命)이란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살아있다는 것을 사람의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이집트에서 3천 년 전에 건설된 피라밑을 발굴하던 중 그 안에서 아주 오래된 씨앗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학자들은 그 씨앗을 심었습니다. 얼마 후 그 씨앗이 싹이 나서 자란 후에 그 씨앗이 완두콩 씨앗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오래 된 씨앗이라도 그 안에 생명이 있으면 반드시 자라날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무엇을 통해서 자기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뜨겁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현실적으로 말한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건강하게, 더 오래 사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재미있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삶을 성취하기 위해서 날마다 분투하며 최선을 다 합니다. 그런 삶의 태도를 잘못된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이 세상에 큰 어려움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소망하며 바랍니다. 그런데 과연 그와 같은 삶이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개인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한마디로 말하기는 힘듭니다만 방향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의 것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황소개구리라는 동화를 기억하십니까?
어느 연못에 개구리 떼가 모여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새끼 개구리가 연못 밖으로 나갔다가 커다란 황소가 지나가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얼른 연못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개구리에게 연못 밖에 나갔다가 아주 커다란 황소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아버지 개구리는 그래 얼마나 크더냐 하며 배를 내밀었다고 합니다. 새끼 개구리가 그것보다 더 커요! 하자 또 다시 힘껏 배를 내밀며 이만큼! 이렇게 반복하다 결국 황소개구리는 배가 터져 죽었다고 합니다.

욕심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교훈의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노인 어부가 황금빛 용왕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살려주면 원하는 것을 허락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아내에게 말하자 좋은 집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게 이루어지자 점점 욕심이 많아져 여왕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이루어지자 바다까지 다스릴 수 있는 왕이 되어야겠다고 했습니다. 쫄딱 망해서 옛 오막살이에서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아무리 넓은 집에서 없는 거 없이 다 갖추어도 결국 오막살이의 삶을 면치 못하게 만듭니다. 초라한 거지요. 이게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생명입니다. 물론 다르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서리가 묻은 토끼풀을 손으로 만지면서 무한한 생명의 신비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에 영혼의 무게를 걸어두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망을 성취하는 것에서만 삶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이런 우스개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하던 중 갑자기 비행기가 기체 고장을 일으켜 아주 위태로운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기장은 승객들에게 안전하게 준비된 낙하산을 착용하고 뛰어 내리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승객들의 수보다 낙하산이 한 개가 부족했다고 합니다. 한 사람씩 승무원들의 안내를 받아 조심스럽게 뛰어내리는데 낙하산이 2개가 남았을 무렵 갑자기 한 사람이 뛰어내렸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장과 어린 소년이 남아있었는데 기장은 소년에게 나는 기장으로서 마지막까지 나의 임무를 완수 할 테니 네가 이 낙하산을 짊어지고 뛰어내리라고 이야기를 할 때 소년은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 낙하산이 2개가 남아 있어요! 하더랍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하였더니 방금 전에 혼자 뛰어 내린 사람이 소년의 배낭을 낙하산으로 알고 그것을 짊어지고 뛰어내렸다고 합니다. 결국 기장과 소년은 마지막 남은 2개의 낙하산을 이용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욕심의 끝 결말이 어떤 것인지 느끼게 하는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박내수전도사의 이야기
밥상에서 김치가 올라왔는데 누런 황새기가 김치 그릇에 있기에 얼른 젓가락을 사용하여 자기 입속으로 넣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입안에 넣고 씹는데 황새기 젓이 아니라 볏짚이 김치 속에서 누렇게 물든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왜 그것을 입에 넣느냐? 하더랍니다.
아버지는 그것이 볏짚인 줄 알고 꺼내려고 젓가락을 가져갔는데 아들은 그것을 아버지가 먼저 먹으려는 줄 알고 젓가락을 가져다가 얼른 입안에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인간의 욕망이 참 어리석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도사님이 목사가 된 후 어느 여름 날 하기 수양회에 학생들을 인솔하여 가셨다가 학생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 물속에 뛰어들었다가 심장마미를 일으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절대 생명을 경험했다는 것은 이런 세상에서 제공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그게 실제로 있기는 있는 것일까요? 현실성 없는 허황한 기독교 교리에 불과한 것일까요?

마태복음 기자는 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말을 하고 이어서 4장에서 예수의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5장에서 그 유명한 ‘팔복’을 말합니다.

복이 있는 사람에 대한 목록이 거기 나옵니다. 복이 있다는 것은 생명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 목록에는 우리의 세상살이 경험과 다른 내용이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등등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세상에서 경쟁력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 자체가 이런 여덟 가지 복에 해당되는 분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방증입니다. 세상 경험에 따르면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은 아예 말이 되지 않아 보입니다. 가난과 애통 자체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가요? 팔복에 열거된 사람들은 세상에서 의존할 게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만 의존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완전한 절망을 경험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만 의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만 의존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구원을 얻고, 생명을 얻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런 절대 생명에 대한 경험에 근거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3:13∼17에는 예수님이 세례 받는 장면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하늘로부터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사도신경에도 예수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에게 신성 모독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나 분명한 진리였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신성모독이라는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를 통해서 절대 생명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사랑, 생명 경험

저는 지금 예수가 왜 생명인지에 대해서 주변적인 설명만 하고 있을 뿐이지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답이 까다롭기도 하고 제가 경험하고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기에 어쩔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으니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을 비롯해서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 무덤에 묻혔던 예수가 실제로 자신들의 일상에 나타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부활 경험입니다. 예수를 부활로 경험하니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비슷한 경험을 우리도 간혹 합니다.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일반적으로는 자식을 생각할 때도 그런 경험을 할 겁니다. 사람에게서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두말 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이들은 예수를 특별한 생명 존재로 경험한 것입니다. 죄와 죽음을 넘어서는 경험입니다. 죄와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 바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이는 거꾸로 죄와 죽음으로 빠져드는 게 생명을 잃는 길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성취해야 한다는 유혹과 갈망, 그리고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에 빠지면 생명을 잃습니다. 겉으로 살아있으나 죽은 거와 다를 게 없습니다. 그게 심리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면 우울증이 됩니다. 약물로 우울증을 치료한다고 해도 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가 쉽게 벗어나는 게 아닙니다. 복음서 기자들과 다른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서 생명을 얻는다고 믿었고, 그렇게 선포했습니다. 그러니 마태복음 기자가 세례요한의 입을 빌려서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푼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그런 경험도 없고 믿음도 없는 거 같다.’고 걱정하는 분들이 여기 계신가요? 거꾸로, 확신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어느 쪽에 속하든지 여러분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예수와의 실질적인 만남입니다.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건 한번 경험했다고 해서 계속 이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테니스를 1979년부터 쳤으니까 37년의 구력이 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잘 안 되는 게 공을 끝까지 보는 겁니다. 공을 라켓으로 쳐서 튕겨나가는 순간까지 집중해서 봐야만 공도 잘 나가고 몸도 망가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예수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른 데 한눈을 팔면 영적인 ‘엘보’가 옵니다. 예수를 생명으로 경험하여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를 더 깊이 아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노력을 해보신 적이 있나요? 그런 노력이 없으면서 기독교가 말하는 절대생명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변명이고, 불행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세례로 만족하는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서 칭찬을 받을만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기독교 근본에서는 거리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반드시 불세례가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여러분은 예수 주위를 맴도는 신앙이 아니라 예수께로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을 성령 충만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신앙을 그리스도 안에 라고도 합니다.

이번 주 암송할 말씀은 요한복음 6장 63절입니다.
다음 주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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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4WgFGso7y3M 


세례의 의미

로마서 6:4,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세례의 의미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씻음의 의미로, 죄를 물로 씻을 수는 없지만 십자가의 보혈로 죄 사함 받았다는 것을 뜻하고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새 생명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물속에 잠긴다는 의미는 옛 사람이 죽는다는 뜻입니다(롬 6:3).
즉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가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세례는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며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교회와 회중 앞에 고백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갈 2:20).

눈물의 세례식

어제 드디어 기다리던 세례를 받았다. 한마디로 완전히 망가진 세례식이었다. 세례식 때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린다고 홍 집사님이 말했을 때, 나는 안 그럴 거라고 말한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 세례를 받는 그 좋은 날, 왜 우냐고…. 그런데 내가 그렇게 심하게 망가질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원래 마이크 체질로 통했다. 학창 시절에는 운동장에 모인 학우들이 내 한마디에 웃고, 내 한마디에 감동받곤 했다. 세례받기 전날 밤, 나는 5분에 맞춘 간증을 서너 번 읽고 연습했고, 한국에 전화해서 아내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아내는 너무 감동적이라고, 나는 정말 남편 잘 만난 것 같다고 그랬다. 목사님이 무릎 꿇고 앉은 내 머리에 손을 얹고 힘을 주셨다. ‘이제 시작이다’ 하며 마음을 굳게 먹고 있는데 물이 내 머리를 타고 흐르자 감정이 복받치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물로 죄를 씻는 형식을 취한다고 했는데, 그건 단순한 형식이 아니었다. 자리에 돌아와 앉았는데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왜 그렇게 힘들었고 또 오래 걸렸을까? 결국 이렇게 될 것을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버텼을까? 사람들을 펑펑 울리겠다고 자신하던 나는 없었고 죄를 용서받고 눈물 흘리는 초라한 나만 있었다. 내가 흘린 눈물에는 과거에 대한 서러움도 담겨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죄를 용서받고 든든한 하나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격한 행복의 눈물이었다. 하나님은 멋지게 간증하겠다는 나의 교만함도 여지없이 무너뜨리셨다. 하나님은 잔머리 굴리는 교만한 나를 원하시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 그래도 나의 그 진심을 하나님이 들으셨으니 만족하고 행복했다.
- 아름다운 시작, 주선태

피지 선교사

뉴질랜드 가까이에 솔로몬 群島가 있다. 여기 사는 원주민 피지 족속에게 선교했던 선교사가 쓴 책이다. 선교해서 그들이 예수 믿게 되면 세례를 주는데 '킬링 스톤'이라고 하는 바위 옆에서 베풀었다. 킬링 스톤이란 사람을 처형하는 바위이다. 처형법도 여러 가지가 있지 않은가? 목을 쳐 죽이는 일도 있고, 교수하는 일도 있고, 불태워 죽이는 일도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아주 특별한 방법이 행해졌다. 동네 한가운데에 큰 바위가 있는데 사람이 못된 죄를 짓게 되면 사형에 처하게 되고, 처형을 할 때에는 사람을 꽁꽁 묶어서 붙들고 머리를 그 바위에 짓이겨서 죽인다. 그래서 피가 그 바위에 흐른다. 그 피를 절대로 닦지 못하게 한다. 그대로 피가 벌겋게 흐르면 사람들이 '아! 죄 지으면 저렇게 된다'하고 일벌백계의 무서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 믿게 된 자들을 늘 붉은 피가 묻어 있는 그 바위에 데려가서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당신은 지금 죽는 거요. 옛사람이 완전히 죽는 시간입니다'하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콘스탄티누스

우스운 얘기가 있다. 꼭 전설 같은 이야기인데 기록에 있으니까 사실인 것 같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라고 하면 기독교의 자유를 선포한 대단히 중요한 로마 황제가 아닌가? 그러나 그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까지 세례를 안 받았다고 한다. 왜 안 받았는고 하니, 나는 왕이니까 사람도 죽여야 되고 전쟁도 해야 된다, 그런고로 세례 받을 수가 없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 임종이 임박하여 세례 받을 때에도 전설에 의하면 오른손은 남겨놓고 물속에 들어갔다고 한다. 오른손 가지고 험한 짓 많이 하는 것이니까 그랬다는 것이다. 그분 생각에는 내가 세례 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완전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되는데 나는 그렇게 살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가 죽기 전에는 세례를 받았다. 받고 죽었다.

/곽선희목사 설교예화 중

세례의 참뜻

갈라디아서 3:26∼2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반드시 알아야 할 세례의 영적 뜻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 가를 알기 위해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가. 예수 안에서 하나 되게 함(엡 4:5)

물세례란(마 3:11, 벧전 3:21)
성령 세례란(행 2:38, 고후 1:21∼22, 엡 1:13, 요 3:5, 엡 4:22∼24)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 받은 자 주와 하나 됨(롬 6:4∼5, 고전 6:17, 고전 12:13, 엡 4:5, 5:30)

나. 예수 안에서 옷을 입게 됨(갈 3:27)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 받은 자 그리스도와 함께 옷 입은 자임(갈 3:27, 롬 6:3∼4, 10∼11)
빛으로 옷 입은 자가 됨(요 8:12, 엡 5:8, (롬 13:12, 14)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 그 안에서 새로워짐(엡 4:13, 15∼6), (고후 5:17, 골 3:10)

다. 예수 안에서 유업을 얻게 됨(갈 3:29)

예수 안에서 자녀 되는 권세 얻음(요 1:12, 롬 8:15∼16, 갈 4:46)
예수 안에 있으면 죄에서 자유 함 얻게 됨(요 8:31-32, 롬 8:1-2)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됨(갈 3:28-29, 갈 4:7, (벧전 1:5-7, 벧후 1:10-11)

세례의 참 뜻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죽고 함께 살림을 받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사랑 선물 입니다. 우리 모두 세례의 참 뜻 바로 베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천국 백성 되시기를 바랍니다.

* 참조: 롬 6:1-11

세례, 그 영광스러운 의식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즉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모든 일을 하기 위해 세례를 받았다. 세례 요한의 선지자적 계명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 백성에게 새로운 요구를 하셨다. 그것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기 위해서 깨끗이 씻음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종 되신 분은 이스라엘이 하도록 요구받은 것은 무엇이든 그 백성을 위해 성취하셔야 했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세례의 요구를 포함한 자기 백성의 모든 짐을 짊어지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가되시기 위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이루셔야만 했다. 요단강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스스로 취하신 비하의 모습을 본다. 그런데 이 행위는 아무런 영광 없이 끝나지 않는다.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 1:10~11).

우리는 이 기사를 단지 예수님의 세례에 대한 후기쯤으로 알고 지나쳐 버린다. 하지만 그곳에서 발생한 일은 땅을 뒤흔들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하늘이 열렸다.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는 시각적 상징이 위에서 내려오는 비둘기의 형상으로 임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예수님은 세례 받으심을 통해 목수로서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일을 드디어 감당하시게 된 것이다.

- 「그리스도의 영광」/ R. C. 스프룰

목숨을 건 세례

한국 선교가 시작된 것은 1884년이다. 하지만 복음 전파의 자유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선교사들이 정식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허가를 받은 것은 1898년이 되어서였다. 복음 전파의 문은 서서히 열렸다. 한국인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금지되어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움트기 시작한 호기심은 법으로 막을 수 없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노도사라고 알려진 노춘경(盧春京)이었다. 그는 우연히 한문으로 된 기독교 배척문서를 읽고 호기심이 생겼다. 그는 선교사들에게 접근하여 기독교를 알고자 하였으나 선교사들은 주저하였다. 노춘경은 포기하지 않고 선교사 앨런의 집에 가서 그의 책상위에 놓여 있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몰래 가져가 열심히 읽었다.

노춘경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는 구할 수 있는 대로 많은 기독교 서적을 읽었고 선교사들의 주일예배에도 참석하였다. 그는 정식으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언더우드에게 세례문답을 받았다. 언더우드는 마지막으로 이 나라의 법이 아직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고 있으며 한번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 마음을 바꾸어 돌아서면 안 된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노춘경은 자신의 결심은 분명하며 최악의 경우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다고 대답했다.

선교사들은 이 세례문제에 민감했다. 아펜젤러는 자신의 느낌을 1886년 7월 24일자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로서는 그 의식이 대단히 진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한국인들의 분노를 사게 될 매우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신 분께서 그를 지키시리라고 확신한다.” 이런 논의와 기도 과정을 거쳐서 1886년 7월 18일 주일에 헤론 선교사의 집에서 노춘경은 세례를 받았다. 한국 땅에서 한국인에게 준 최초의 세례인 것이다. 그리고 그 세례는 목숨을 건 세례였다.

* 박명수 <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

1862년 중국선교를 시작한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는 1872년 맥킨타이어와 로스를 만주에 파송하여 만주선교를 시작하였다. 로스는 만주의 개항장인 영구(營口)를 거점으로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 무렵 로스는 평양 대동강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토머스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한국선교에 대한 꿈을 갖게 되었다. 로스는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 1874년 10월9일 영구를 출발하여 고려문을 방문하였다. 고려문은 봉황성 아래 놓여있는 작은 마을로서 청국과 조선국 사이의 합법적인 무역이 이루어지던 공식적인 관문이었다.

로스는 이곳에서 한국 상인들을 만나서 한문성경을 팔면서 전도했으나 한국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복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국산 양목에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여관에 있는 로스에게 50대의 남자상인 한 명이 찾아왔다. 그는 조선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서양종교를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다고 했다. 이 때 로스는 그 상인에게 한문으로 된 신약성경과 번즈목사가 번역한 ‘훈아진언’이라는 기독교소개서를 전해 주었다. 로스는 별 성과 없이 고려문을 떠났다. 하지만 로스의 노력이 열매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로스를 직접 찾아가 성경과 소책자를 받아간 상인은 자기의 고향인 의주로 돌아가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것을 전해 주어서 읽게 하였다.

1879년 초,두 명의 한국인이 만주에 있던 맥킨타이어 선교사를 찾아와서 기독교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매킨타이어는 한국교회의 첫 개종자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해야 하며, 또한 고향에 가서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두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얼마 후에 다시 돌아왔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어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돌아왔으나 세례 받을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여기에 나타난 무명의 의주 출신 청년이 한국개신교회 최초의 세례자이다.

/박명수<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

▣ 내 영혼의 생일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기념하는 신성한 의식입니다. 저는 이것을 육체의 생일과 구별해 ‘영혼의 생일’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말하면 웃으실지 모르지만, 저는 나이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머니한테 태어난 미네노는 63세,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 미네노는 43세!”

제 육적 자아에는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교만함이 있었습니다. 또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자신을 위장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저에게 호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평판과는 달리 제 뱃속에는 허영심과 야망이 꽉 차 있었습니다. 마음으로는 여전히 사람들을 비웃고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더럽고 교만한 인간입니까? 그러던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세례식이 시작되기 직전, 저는 목사님께 저의 더럽고 추한 죄를 빠짐없이 고백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세례의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이 날이야말로 제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영혼의 생일’입니다. 세례를 받자 제 생활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태어났고 변화되었습니다. 제2의 탄생일, 영혼의 생일에 말입니다.
* 인생은 아름다워」/ 미네노 다쓰히로

세례와 표심

나의 군목 시절 교회와 성당, 법당을 왔다 갔다 하는 철새 장병들이 있었다. 그들은 세례와 영세와 수계를 다 받아놔서 천국이 있든 극락이 있든 염려 없다고 큰소리쳤다. 상관의 말 한 마디에 종교생활까지 영향을 받던 엄혹한 시절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현실이었다. 지휘관의 종교적 성향에 따라 병사들까지 쉽게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 대선 후보의 부인이 법회에 참석해 법명을 받은 것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장로 부인이자 권사이기에 기독교인들의 의혹이 컸다. 당사자는 사실이 와전되었다며 극구 해명했다. 불교 행사에 참석했는데 본인이 원치 않는 법명을 일방적으로 선사받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그분이 기독교에서 불교로 개종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그러므로 법명 파동은 해명 그대로 불교를 존중하려는 호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타의에 의해 일어난 해프닝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다. 불교의 표심을 얻기 위해 절에 갔을 것이란 사실이다. 불교쪽의 지원을 얻겠다는 생각이 앞섰기에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에 혼란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깊이 발을 들여놓은 것 같다.

수계는 어떤지 모르지만 세례는 매우 중요한 기독교 예전이다. 물로 죄를 씻어 구원받았다는 표시(sign)가 세례인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을 얻는데”(롬 10:10), 그 구원 얻은 객관적 징표가 세례다. 세례가 중하였기에 초대 교인들은 함부로 세례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세례 받은 이후의 죄는 용서받기가 더 어렵다고 믿었기 때문에 콘스탄틴 대제는 임종 시에 가서야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세례는 기독교 입문의 자격증 그 이상을 의미한다.

선거철만 되면 종교계를 기웃거리는 정치인이 많다. 단지 한 표라도 더 얻을 요량으로 자신이 세례 받은 교회 중직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타종교에 지나치게 굽실거리는 이들도 있다. 타종교를 존중한다는 정신은 귀한 것이다. 그러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그럴 필요는 없다. 내 신앙을 확고히 지키면서도 얼마든지 타종교인들과 융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은 무조건 교인 후보를 찍어야만 한다고 선동하는 지도자들도 잘못이다. 자질과 역량을 먼저 저울질해야지 단지 나와 종교가 같다고 해서 편드는 것은 미숙한 발상이다. 대선을 앞두고 후보자나 유권자나 간에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 받은 이들의 숭고한 신앙 양심을 엄히 물어야 할 때다.

/김흥규(내리교회 담임)

▣ 청소년은 오늘의 주역

하기수련회를 한 주 앞둔 주일, 우리 교회 학생 3남매가 포장마차에서 술장사를 하는 어머니의 전도를 위해 3일 금식을 했다. 중2 여학생이 울먹이며 “목사님, 우리 어머니 교회 나오게 해주세요. 꼭 한번만 만나주세요.” 어머니의 영혼구원을 위해 금식하는 3남매에게 감동을 받아 다음날 어머니의 포장마차를 찾았다. “아이고, 목사님이 어떻게 이런 곳엘…. 소주 한잔 하실래요.” 그녀는 농담을 했다.

 

남편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술장사를 시작한 분이다. “수고 많습니다. 조금씩 쉬어가며 일하세요. 다음 주 교회에서 대둔산에 가는데 같이 가시지요.” “나 같은 사람이 가도 되나요?” 한 번도 교회에 온 일이 없는 분이 수련회에 참석했다. 그때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 술과 담배도 끊었다. 포장마차를 접고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시작했다. 지금은 권사가 되었고 그의 딸은 목사 사모님이 되었다. 청소년은 미래의 주역이 아니다. 그들을 은혜 받게 하라. 그들은 오늘의 주역이다.

/최낙중 목사<해오름교회>

얼굴이 부끄럽지 않게

어느 날 이웃 동네에 있는 카 센타에를 갔다. 오래 전부터 자동차의 워셔액 분출이 되지 않아 앞 유리를 닦을 수가 없었는데 크게 불편한 것도 없고 사용하는 일도 별로 없고 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시간여유가 있고, 집으로 오는 길이어서 그 작은 것 하나를 고치려고 들렸다. 그런데 부품 업체에서 주문을 한지 한참이 되었는데도 얼른 물건을 배달해 오지 않았다. 카센타 주인과 나는 짧고 일상적인 대화 몇 마디를 나누었는데 정부에 대한 불만과 양심적 병역거부문제 등에 관한 것이었다. 주로 그분이 얘기를 했지만 그냥 국민들의 일상적인 불만이었다. 그렇게 얘기를 했어도 자동차 부품은 얼른 오지 않았다. 나는 교회 얘기를 할까하다고 그만두고 나 혼자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서 휘파람으로 찬송가를 불렀다.

 

그가 찬송가 곡조를 알아듣고 "교회 다니세요?" 하고 묻는다. 자기도 달포 전부터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는데 '아멘이 무슨 뜻인지 할렐루야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또 세례는 얼마나 교회를 다녀야 받는 것이냐고도 물었다. 나는 적절한 대답을 해 주고 '우리 교회에도 한 번 와보라'고 하니 대뜸 "목사님이세요?" 하고 묻는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어쩐지 선해 보이고 평안해 보인다."고 한다. 나는 그분의 말을 듣고 가슴이 뜨끔했다. 만일에 부품을 늦게 가져온다고 짜증을 내고 정부에 대한 비판에 앞장을 서고 어줍 잖게 예수 믿는 것을 늘어놓으면서 불평을 했다면 나중에 나의 신분이 드러났을 때 얼마나 민망하고 미안했을까 더군다나 처음 믿는 교인 앞에서 말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어디에 가든 누구를 만나든 매사에 조심을 하지 않으면 주님의 영광을 가리 우고 교회를 욕되게 할 수 있다고 말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 한 사람의 영향

1517년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던 비텐베르크 시는 마르틴 루터 시로 개명된 지 오래다. 오늘날 독일 전 국민의 98%가 루터교인이다. 하나님이 함께한 종교개혁자 한 사람의 영향은 시대를 초월한다. 독일 학교의 방학은 모두 기독교와 연관되어 있다. 매년 10월 1일부터 두 주간은 추수감사절 방학이고 추수감사절과 성탄절, 부활절에도 각각 두 주간 방학을 한다. 모든 국민은 교회를 위해 종교세를 낸다. 목사는 정부 공무원이며 모든 아이는 유아세례를 받고 13세가 되면 1년간 매주 두 시간씩 100시간 이상 성경을 배워서 14세가 되면 입교식을 한다. 이 날은 부모님과 일가친척이 다 모여 축하잔치를 연다. 독일은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통일을 이루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헐고 하나 되는 것이 십자가 정신이다. 새해에는 하나님의 손에 잡힌 그리스도인이 되자.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이 새 역사를 만든다.

/최낙중 목사(관악교회)

▣ 지혜롭지 못한 보수

하루는 한 권사님이 목사님을 찾아왔다. “목사님, 제 딸의 결혼식 주례를 부탁드립니다.”

“네, 그러지요. 두 분 다 세례교인입니까?” “신랑은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권사님,ㅍ그럼 내가 주례를 설 수 없어요. 장로님께 부탁하십시오.” 주례를 못 서겠다는 대답을 들은 후부터 권사님의 마음이 변했다. 평소 목사님을 ‘큰 종’이라고 자랑하던 권사님이 목사님을 헐뜯기 시작했다. 권사님은 장로님들을 부추겨서 교회가 운영하는 신학교를 도와주면 안 된다고 했다. 목사님이 하면 안 되는 주례를 장로님은 해도 되는 것인가? 목사님이 사위가 될 청년을 미리 만나서 복음을 전해주고 세례를 받게 해서 결혼주례를 해줄 수는 없었을까. 청년을 구원하고 권사 가정도 돕고 목사님도 편안할 수 있었을 텐데…. 때로는 우리의 불필요한 형식주의와 보수주의가 삶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김상복 목사 (할렐루야교회)

 

 

▣ 세례에 관한 성경 말씀

0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3:16)

0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막 1:8)

0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 3:23)

0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2:41)

0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행 8:36)

0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 하리요 하고 라고 합니다. (행 10:47)

0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합니다. (벧전 3:21)



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분명한 말씀이 있습니다(사도행전 1:4∼5).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광야에서 세례 요한이 외쳤던 것을 부활 후에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 메시아만을 기다렸던 유대인들은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 세상에 머무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 하신 후에 예수님을 보았던 사람들이 무려 오백 명이라고 합니다(고린도전서 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예수께서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실 때
그런데



마가복음 3:11,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 참조 /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 참조 / 사도행전 11: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로마서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3: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골로새서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고린도전서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란도전서 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세례(洗禮)는 “물세례”와 “불세례”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세례(洗禮)

물세례

불세례

구원의 표(베드로전서 3:21)

 

 

 


‘물세례’는 “요한의 세례” 라고 한다면 ‘불세례’는 “성령 세례”라고 합니다.
‘물세례’는 구원의 표가 됩니다(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불세례’는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사도행전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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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기록된 세례의 종류 : 물세례와 성령세례

Ⅰ. 성종현 목사가 말하는 세례의 종류


신약성서에는 첫째는 세례 요한의 세례(물세례), 둘째는 예수 제자들의 세례(요 4:1-2), 셋째는 불세례(마 3:11; 눅 3:16), 넷째는 성령의 세례(막 1:8; 행 1:5)가 언급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물세례는 회개와 정결, 불세례는 심판과 능력, 그리고 성령세례는 메시아의 구원과 영적 무장의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세례(물세례)와 성령세례(막 1:9-11)를 받으셨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세례 요한의 세례(물세례)와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았다(행 2:1-4).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은 성령의 오심으로 시작된다. 예수님은 성령 충만함을 받으신 후에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예수의 제자들도 성령의 불세례를 받은 후에 역사를 바꾸는 능력의 공동체로 탄생하게 되었다. (성종현 목사, ‘교회와 신학’ 장로회신학대학교 논문집 제26집 1994, p.228, 231)

이상에서 성종현 목사는 “물세례는 회개와 정결, 불세례는 심판과 능력, 그리고 성령세례는 메시아의 구원과 영적 무장의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고 하여 불세례와 성령 세례는 다르다고 하였고, 한편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았다. 예수의 제자들도 성령의 불세례를 받았다”라고 하여 성령세례와 성령의 불세례는 같은 뜻으로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세례의 종류를 “세례 요한의 세례, 예수 제자들의 세례, 불세례, 성령세례”의 4종류로 구분했다가, 성령의 불세례를 더 첨가하여 횡설수설한 주장을 하고 있다.

이렇게 모순된 주장을 하게 된 이유는 마 3:11, 눅 3:16에 나오는 “성령과 불세례,” 그리고 막 1:8, 요 1:33, 행 1:5에 나오는 “성령세례”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즉 성령 세례의 요소와 수단 그리고 도구에 대한 이해를 못하며, 막 1:8, 요 1:33, 행 1:5에서는 마 3:11, 눅 3:16에 나오는 ‘불’이란 단어가 생략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Ⅱ. 베이커 성경주석이 말하는 세례의 종류

가장 낮은 수준의 세례, 즉 물의 세례는 죄의 외적인 정화와 회개를 언급하며, 이와는 달리 성령의 세례는 믿음에 의한 내적인 정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의 세례는 그 특수한 본성으로 다시 태어난 보다 더 고상한 삶의 정화, 즉 변화를 표현한다(베이커 성경주석 ‘누가복음’[상] 157).

주제설교 : 불세례 성령강림. 유월절 다음에 오는 국가의 명절인 오순절 날은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는 약속에 놀랍게도 꼭 들어맞는다”(베이커 성경주석, ‘사도행전’ [상] p.102). 에베소 교인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오순절의 불세례가 물세례 의식의 반복을 불필요하게 했을 것이다. (베이커 성경주석 ‘사도행전’ [하] p.254)

이상에서 베이커 성경주석은 세례의 종류를 물세례, 성령의 세례, 불세례의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또한 행 1:5에 나오는 성령 세례를 오순절에 받았고, ‘에베소 교인들은 오순절의 불세례’라고 하여 불세례와 성령세례를 같이 취급하고 있다. 이상에서 세례는 세 가지로 구분했다가 여기에서는 두 가지로 구분하여 일치하지 않고 서로 모순되게 주장하고 있다. 이상의 “물의 세례는 죄의 외적인 정화와 회개를 언급하며, 이와는 달리 성령의 세례는 믿음에 의한 내적인 정화를 의미한다.”는 주장은 전혀 그릇된 것이다. 물세례는 내적인 죄의 정화 곧 회개를 위한 외적인 의식이다. 물세례는 내적인 죄의 정화를 위한 외적인 상징이다. 즉 외적인 물세례를 받을 때 내적인 죄의 정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물세례의 의미이다. 따라서 “성령의 세례는 믿음에 의한 내적인 정화를 의미한다.”는 주장은 천부당만부당한 그릇된 것으로 행 1:5, 행 1:8에 기록된 성령세례의 뜻이란 예수님의 증인의 사역을 위한 성령님의 권능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릇된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Ⅲ. 그랜드 종합주석이 말하는 세례의 종류


성경에서 언급하는 세례에는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있다.
물세례는 기독교 공동체에 공식으로 가입한다는 입교의식이다. 즉 과거의 죄를 씻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믿으며 그의 말씀에 그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고백하는 자에 대해 교회가 그를 인정하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행하는 외적 의식이다. 물세례가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입문하는 의식이라면 성령세례는 구주로 영접토록 하고 회개 중생케 하는 성령님의 사역이다.

따라서 성령세례를 받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죄 씻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사단의 지배하에 있던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중생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랜드종합주석 제16권 p.225)

이상의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세례에는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있다”는 주장은 바른 것이다.

“물세례”가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입문하는 의식이라면 “성령 세례”는 구주로 영접토록하고 회개 중생케 하는 성령님의 사역이라는 주장 가운데 “물세례가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입문하는 의식이라면” 이라는 주장은 맞는 것이지만, “성령 세례는 구주로 영접토록하고 회개 중생케 하는 성령님의 사역이라는 것은 그릇된 주장이다. 또한 “성령세례를 받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죄 씻음을 받는 것”이라는 주장은 행 1:5, 행 1:8에 기록된 성령세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것으로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Ⅳ. 김의환 목사가 말하는 세례의 종류

마 3:11 ‘성령과 불로,’ 신자들에게 선물로 주어져 중생한 새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성령 세례는 오순절에 최초로 이루어졌고(행 1:5), 불세례는 인간과 세상을 성결케 하는 성령의 정화 및 심판을 가리킨다. (편찬대표 김의환 목사 ‘큰 성경’ 1995)

김의환 목사가 편찬한 ‘큰 성경’에서 “마 3:11의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를 성령 세례와 불 세례의 두 가지의 세례로 구분하였는데, 이는 전혀 그릇된 것이다. 왜 그릇된 것이냐 하면 물세례의 경우에 세례를 베푸는 요소와 수단과 도구는 물이다. 마 3:11에 나오는 불을 불세례라고 할 경우 성령 세례의 요소와 수단과 도구는 성령님이다. 이렇게 성령님이 물과 같이 요소/수단/도구가 될 경우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를 근본부터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성령 하나님은 절대로 세례를 베푸는 요소/수단/도구가 될 수 없고, 대신에 “불”이 요소/수단/도구가 되어야 한다.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김의환 목사는 마 3:11에 나오는 세례를 성령세례와 불세례의 두 가지로 그릇된 구분을 하게 된 것이다. 김의환 목사의 “불세례는 인간과 세상을 성결케 하는 성령의 정화 및 심판을 가리킨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성경의 근거는 한 구절도 없다.

Ⅴ. 하용조 목사가 말하는 세례의 종류

신약성경에는 (1) 세례 요한의 세례(물세례), (2) 예수 제자들의 세례(요 4:1-2), (3) 불 세례(마 3:11; 눅 3:16) , (4) 그리고 성령의 세례(막 1:8; 행 1:5)가 언급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물세례는 회개와 정결, 불세례는 심판과 능력, 그리고 성령세례는 메시아의 구원과 영적 무장의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마 3:11). 여기에서 불로 세례를 주는 것은 보통 불신자들에게 임할 마지막 심판에 대한 언급으로 보기도 한다(마 3:12).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신자들 위에 머물렀던 ‘불의 혀들’(행 2:3)로 오순절에 나타났던 신자들을 정결케 하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언급으로 본다. (하용조 목사 편찬, ‘비전성경사전’ p.639,663)

이상에서 하용조 목사는 세례의 종류를 “세례 요한의 세례(물세례), 예수 제자들의 세례 (요 4:1-2), 불세례(마 3:11; 눅 3:16), 그리고 성령의 세례(막 1:8; 행 1:5)”의 네 가지로 구분하는데 이는 그릇된 것이다. 요 4:1-2에 나오는 “예수 제자들의 세례”는 물세례였다. 따라서 “세례 요한의 세례(물세례), 예수 제자들의 세례”(요 4:1-2)의 두 가지로 구분한 것은 의미가 없다. 이 두 가지의 세례를 물세례라고 해야 한다. 사도행전 1장과 2장을 지나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베푼 세례는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두 가지의 세례였다. 또한 하용조 목사는 “불세례, 성령의 세례”라고 하여 불세례와 성령세례를 따로 구분하는데 이렇게 될 경우에 성령세례를 베푸는 요소/수단/도구는 자동적으로 성령님이 될 수밖에 없다. 이 경우에 성령님을 물과 같이 물질 취급하는 것이 되어 삼위일체의 하나님 교리에 전적으로 위배 된다. 따라서 마 3:11과 눅 3:16을 근거로 하여 성령세례와 불세례로 구분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그릇된 주장이다. 바른 주장은 ‘성령세례 즉, 성령의 불세례”이어야 한다.

Ⅵ. 강경호 목사가 말하는 세례의 종류

할례, 물세례, 성령세례, 불세례, 고난의 세례가 있다. 마 3:11, 눅 3:16의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는 것을 어떤 주석가는 이것이 오순절 날에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그 근거로는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이 불의 혀같이 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의 문맥적 연결구에서 연구해 보면 이 구절들은 심판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의 설립 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강경호 목사, ‘성령론’ 1996, p.195-196. 장로회신학대, 대학원 졸, 강경호 목사가 저술했다고 하는 '성령론'은 장로회 학장이었던 이종성 목사가 저술한 '성령론'을 저자의 이름과 출판사를 바꾸고 새로운 인쇄와 새로운 포장으로 강경호 목사 자신이 저술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상의 “할례, 물세례, 성령세례, 불세례, 고난의 세례가 있다”고 하여 세례를 네 가지로 구분하는데, 세례의 종류는 오직 “물세례, 성령세례”의 두 가지만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마 3:11, 눅 3:16의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는 것에 대하여 어떤 주석가는 이것이 오순절 날에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그 근거로는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이 불의 혀같이 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는 해석은 바른 해석이다. “마 3:11, 눅 3:16의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다”는 기록에서 바른 번역은 “성령(님)의 불로 세례를 줄 것이다”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성령세례와 불세례로 구분하여 불세례를 심판의 세례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성경의 근거는 한 구절도 없다.

Ⅶ. 조용기 목사가 말하는 세례의 종류

세례에는 세 가지의 세례가 있습니다. 즉 중생의 세례, 물세례, 권능의 세례(일명 성령세례)가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 ‘고린도전서 강해’ 1997, p.270)

Ⅷ. 명성훈 목사가 말하는 세례의 종류

조용기 목사는 그가 저술한 ‘성령론’에서 고전 12:13의 전반부는 일체 취급하지 않고 있음으로 한국순복음계통에서 이 구절을 어떻게 번역하고 해석하느냐를 알기 위해서는 조용기 목사 소속의 순복음신학교 교수와 교회성장연구소 소장인 명성훈 목사가 저술한 ‘성령과 함께’라는 책에 나오는 다음의 내용을 살펴보아야 한다.

“히브리서 6:1∼2에 보면 ‘세례들’이 나오는데 학자들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분류하는데 필자는 여기서 세 가지 세례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Therefore let us leave the elementary teachings about Christ and go on to maturity, not laying again the foundation of repentance from acts that lead to death, and of faith in God, instruction about baptisms, the laying on of hands,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eternal judgment.  

세례들과 안수와 - '세례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밥티스몬'은 기독교의 '세례'(밥티스마)를 의미하지 않고(롬 6:4; 엡 4:5; 골 2:12) 유대교의 일반적인 정결 예식을 의미한다(레 11-15장, Bruce, Morris).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죄 씻음을 받은 표징(表徵)을 세례로 볼 것인가 아니면 유대인들의 정결 의식으로 볼 것인가에 대하여 논란이 많았으며(요 3:25; 행19:1-5) 처음 믿는 개종자들은 이 '세례들'에 관한 교훈에 접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안수'는 구약시대부터 널리 시행되던 관습이었다(민 8:10; 신 34:9). 신약시대에도 새로운 개종자(행 8:17)나 전도 사역자(딤전 4:14)에게 종종 안수를 시행하기도 하였다(행 8:17-19).

본절의 '안수'는 주로 개종자들에게 행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도록 하는 것을 가리킨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 - 이것은 '그리스도 도의 초보'에 관한 마지막 세 번째 쌍으로서 미래에 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주제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중대 관심사인 종말론적 교리이다(사 26:19; 단 7:9, 10; 12:2; 눅 20:37,38; 행 23:8; 마카비2서 7장, Bruce). 이러한 교리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책임적 존재로서 마지막 때에 회개해야 함을 시사한다.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 '완전'의 헬라어 '텔레이오테타'는 '성숙'이라는 의미로 공동체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인격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가리킨다(Lane).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개종한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그러한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권한에 순종하기를 권면한다. 

첫째, 중생 세례(고린도전서 12:12∼13)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요한복음 3장에서 유대의 관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요 3: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에서 '물과 성령'을 "물 세례와 성령 세례"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성령 세례"를 "거듭남을 위한 세례" 즉 "중생 세례" 라고 하겠습니다.

첫 번째 세례는 중생 세례 혹은 몸의 세례(baptism into the body of Christ)입니다. 이것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지게 하는 세례입니다. 이 몸의 세례는 성령께서 주시는 것으로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수가 없습니다(고전 12:3). 중생 세례 혹은 몸의 세례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연합하는 세례입니다.


둘째, 물세례(baptism in the water)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Water symbolizes baptism that now saves you also not the removal of dirt from the body but the pledge of a good conscience toward God. It saves you by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사도행전 8: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성경에서 물은 씻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베소서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To make her holy, cleansing her by the washing with water through the word.

(예화) 세례를 받기 전의 담배 맛과 세례를 받은 후의 담배 맛이 똑같구나!
- 세례식을 마친 후 교회 앞 다방에 모여 담배를 피우면서 서로 하는 말을 들어봅시다.

(예화) 세례를 받기 전의 생활 습관은 세례를 받은 후에도 여전히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 변화된 생활을 회복할 것입니다.
- 담배를 습관적으로 피우던 사람이 어느 날 성령의 임재를 확신한 후 담배가 써서 피울 수 없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물소리는 어린 양의 음성
요한계시록 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His feet were like bronze glowing in a furnace, and his voice was like the sound of rushing waters.   

참조 / 요한계시록 19: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참조 / 로마서 6:1∼4, baptism in the water)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물세례는 중생한 자 곧 ‘그리스도의 몸의 세례’를 받아 교회의 지체가 된 자들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 구원을 확증하는 세례입니다. 중생 세례 혹은 몸의 세례가 불가시적 세례라면 물세례는 가시적 세례입니다. 물세례는 교회의 목사가 주는 세례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함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증거가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셋째, 성령 세례(마가복음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몸의 세례’를 성령이 주시고 물세례를 목사가 주는 것이라면 성령의 세례(baptism in the Holy Spirit)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몸의 세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법적 기능이 있고, 물세례가 그것을 확증하는 의식적 기능이 있다면 성령의 세례는 실제적인 능력을 소유하는 기능을 보여 줍니다. 단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권능을 허락하시는 세례입니다(행 1:8).

성령의 역사에 대한 오해와 오류가 나타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성령의 역사를 표현하는 용어 때문입니다. 개인이나 교파에 따라 성령에 대한 용어가 다양하기 때문에 각자의 주장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세례

성구

의미

수여자

참고

중생세례

고린도전서 12:13

하나님의 자녀

성령

법적 기능

성령세례

마가복음 1:8

하나님의 증인

예수

능력적 기능

물세례

베드로전서 3:21

죄를 씻음

목사

의식적 기능

물세례는 공적인 선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씻음 받았다는 약속과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물세례를 받았지만 여전히 과거의 삶이 나도 모르게 반복되어 나를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합니다. 이러한 반복되는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명성훈 목사, ‘성령과 함께’ p.80-82,99. 순복음신학교, 감리교신학대학원 졸업, 풀러신학교 Ph.D. 학위논문은 조용기 목사에 관한 것이었다. 순복음 베데스다신학대학 교수 역임, 여의도순복음교회 소속 한세대학교 교수 역임, 여의도순복음교회 교회성장연구소 소장 역임)

명성훈 목사가 말하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오해와 오류가 나타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성령의 역사를 표현하는 용어 때문입니다. 개인이나 교파에 따라 성령에 대한 용어가 다양하기 때문에 각자의 주장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라는 주장은 전혀 그릇된 것이다. “성령의 역사에 대한 오해와 오류가 나타나는 가장 큰 이유”는 현재 동서양에 나와 있는 번역 성경은 성령론에 관한한 전혀 그릇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명성훈 목사는 이를 바른 번역으로 믿고 착각 속에서 성령론을 정립한다고 하였다. 이 그릇된 번역을 바로 번역하지 않고는 성령론의 혼란은 막을 길이 전무하다. 조용기 목사는 “중생의 세례, 물세례, 권능의 세례(일명 성령세례)가 있다”라고 하여 세례의 종류를 3가지로 구분하는데, 그의 제자인 명성훈 목사도 조용기 목사와 같이 3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명성훈 목사는 고전 12:13에 근거하여 ‘중생세례 혹은 몸의 세례’(baptism into the body of Christ)라는 용어를 만들어 세례를 중생세례, 물세례, 성령세례의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이는 그릇 번역된 고전 12:13을 맞는 번역으로 믿고 착각한 데서 온 것으로 비 성경적인 황당한 주장이다. 조용기 목사와 명성훈 목사는 그릇 번역된 고전 12:13에 근거하여 ‘중생세례 혹은 몸의 세례’를 만들어 냈는데 이는 고전 12:13을 근거로 해서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주장이다. 고전 12:13에 나오는 세례는 행 1:5에 나오는 성령 세례와 동사의 시제만 다를 뿐 전혀 일치하는 것으로 오직 성령세례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고전 12:13의 세례는 행 1:5의 동일한 성령세례이다.

또한 명성훈 목사는 “성령세례란 단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권능을 허락하시는 세례이다”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요 1:12에 나오는 ‘권세’를 조용기 목사와 같이 행 1:8에 나오는 “권능”을 같은 뜻으로 잘못 해석했기에 생긴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한편 명성훈 목사는 “중생 세례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지게 하는 세례”라고 하면서 또한 “성령의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권능을 허락하시는 세례입니다”라고 주장한다. 즉, “성령의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가 권세를 가지게 하는 세례”라고 하여 중생세례와 성령의 세례를 같은 뜻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분명히 중생세례와 성령세례는 서로 구분되어 다른 의미의 세례라고 주장하다가 여기에서는 같은 의미라고 주장하여 스스로 자가당착의 모순 속에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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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식민통치에 시달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잊어버렸던 하나의 단어를 떠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단어는 “메시아(그리스도)” 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예언되었던 단어이었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보내실 구원자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제발 어서 속히 ‘메시아(그리스도)’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3장 15절에는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백성들이 바로 그 ‘그리스도’를 바라고 기다렸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세례 요한은 먹는 것과 입는 것이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의 외침은 너무나 시원했고 통쾌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자신들을 괴롭히던 세리들과 군인들을 향하여 돌직구를 날려주었고, 바리새인들과 헤롯 왕에게까지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세례를 베풀며 상쾌함을 주는 새로운 부흥사 세례요한에게 몰려들었고 그의 외침을 들으며 속으로 내심 기대를 하며 다가와 물었습니다. 혹시 당신이 구약 성경에서 예언하셨던 바로 그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세례요한은 오실 그분을 소개하면서 여러 가지 표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3:16∼17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그리고 그분은 세례 요한의 외침처럼 불세례를 주셨고, 능력을 행하사 많은 병든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셨고, 세례 요한 보다도 더 상쾌하고 통쾌하게 죄인들을 혼내주셨고, 명쾌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주셨습니다.


특히 그분의 불세례는 많은 이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이 행했던 물세례는 신분의 변화에 대한 공식적인 선언적 의미가 강했습니다.

- 죄 가운데 살았음을 인정하며 이제는 죄와 단절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겠다고 하는 공식적인 선언식이 세례이었습니다.


- 내가 죄인이기에 내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는 증표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 새 사람이 되어 살겠다고 하는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 세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옛사람은 그대로 살아 있고, 욕심과 욕망과 허영과 헛된 자존심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하나님의 뜻 보다는 내 주장이 여전히 우선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물은 씻는 기능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로 깨끗이 씻었지만 그냥 두면 여전히 때가 끼고, 녹이 슬고, 찌든 때 묵은 때가 덕지덕지 붙기에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물은 겉은 씻지만 속 까지 씻을 수는 없었습니다.


겉모양의 청결은 가능했지만 내부의 죄까지 씻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죄는 남아 있고 죄를 사랑하는 본성 또한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물세례를 받고도 죄를 반복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물은 결코 본질의 변화를 이루어 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불은 태워버립니다. 욕심과 욕망도 허영심도 낮은 자존감과 헛된 자존심도 다 태워버립니다.


한번 불이 나면 흔적이 없어지고 본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그 불이 강할수록 원형은 완전히 회복이 불가능해집니다. 집에 불이 나면 집안에 있던 집기들이 형제를 알아 볼 수 없게 되고, 특히 인형이나 장갑이나 작은 장난감들은 그 형체를 완전히 잃게 됩니다. 원형복귀가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불세례가 필요합니다.

물세례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내 안을 다 태워주셔야 합니다.

죄의 본성을, 그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자아와 이기심을 태워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새 사람도 되고 그 태워 없어진 자리에 새로운 성령의 사람이 태어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큰 산불이 나도 이듬해 봄이 되면 새순이 올라옵니다. 아주 싱싱한 것들이 올라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의 고백이 있고, 용서의 확신이 있고, 삶의 결단이 있을 때 그 사람은 불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물 가지고는 안 됩니다. 불로 태워버려 형체를 없애고 새로운 창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외친 것입니다.


나는 겉만 청소해주지만 그분은 네 심장과 폐부까지도 완전히 태워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해 주실 것이다.

욕심에 이끌리는 옛사람이 아니라 성령에 이끌리는 새사람이 될 것임을 선포하였습니다.


불세례의 경험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물세례에 머물고 계십니까?

의지적 결단이나 감정만 가지고 새로운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내 안에 있는 죄를 이길 만큼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날마다 죽어야 했던 이유는 내가 죽어 완전히 태워지지 않고서는 하루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과 온전함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불을 던지로 오셨습니다.

내 안을 완전히 태워주실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창조해주실 것입니다.

이제 남은 일은,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요한을 찾아가 물세례를 자원했던 것처럼, 예수 앞에 나아와 불세례를 자원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기도합니다.

주여 나를 태워주옵소서!

내 안의 온갖 더러운 육체의 소욕들을 태우시고 새롭게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나로 창조하여 주시옵소서!


이 기도가 오늘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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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의 뜻과 중요성

본문/사도행전10:44-48

설교/ 김윤배 목사


본문은 로마의 백부장이었던 고넬료가 성령세례를 받는 장면으로, 이방인이 그리스도 교회에 받아들여지는 중요한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매우 배타적이고 엄격했으나 그들에게도 똑같이 성령의 세례가 임하는 것을 보고 그 담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고넬료 가정이 회심하는 과정을 그린 본문을 통해 세례의 의미와 그 중요성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1. 세례의 뜻

‘세례’란 ‘물로 씻는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세례’는 히브리어로 ‘라하츠’인데 ‘씻다. 빨다. 목욕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에서 ‘라하츠’의 행위는 정결작업으로 나타납니다. 제사장이 위임 받을 때는 먼저 회막문에서 물로 깨끗이 몸을 씻고, 의복을 입고, 관을 쓰고, 예식을 행하게 됩니다. 물로 깨끗하게 씻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되고 성별된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출30:20을 보면 제사장들이 회막에서 여호와의 일에 수종들려고 할 때 준비된 물두멍에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또 레22:6, 민19:7에 보면 부정함을 입은 사람이 물로 씻어서 정결함을 얻는 법이 나와 있습니다. 레8:21, 9:14에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물로 깨끗이 씻으라고 말씀합니다. 시26:6에서 ‘라하츠’ 행위는 무죄함 곧 의인의 반열에 속해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롬6:3-5에는 “예수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곧 그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세례는 영적으로 예수 안에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태어났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2. 세례의 중요성

오늘날 세례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마태복음 28장의 말씀에 기초하여 행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세례가 신앙생활에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유언적으로 이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세례가 단순한 통과의례적인 의식이었다면 외식적인 것을 가장 싫어하신 주님이 명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세례를 베푸는 것’과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참 성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고, 예수님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하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받음으로 법적 교인이 되지만, 말씀 순종으로 참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3. 물세례와 불세례

행 2:38이하에 보면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경은 그날에 삼천 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집단 세례라 할 수 있습니다. 

행 10:44 본문에 보면 고넬료 백부장이 천사의 계시를 받고 욥바의 베드로를 초청하여 말씀을 들을 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을 받으며, 베드로가 명하여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해서 세례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방 회심자들은 즉시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세례를 받은 후 베드로를 청하여 수일간 더 머물게 했습니다. 더 배울 필요를 느꼈던 것입니다. 

이처럼 물세례와 불세례는 동시적일 수도 있고 개별적일 수도 있습니다. 물세례도 받아야지만 성령세례도 받아야 구원의 확신과 기쁨과 감사와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 세례를 받은 예루살렘 교인들은 담대하게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서로 유무상통하고 이웃을 돕는 일을 했습니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성령의 은혜를 받고 보니 자연히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실제로 성령을 받고나면 그것이 쉬워지게 되고 기쁨으로 하게 됩니다. 모름지기 신자라면 물세례뿐 아니라 성령세례까지 받아야만 할 것입니다. 머리로 믿는 것과 가슴으로 믿는 것은 다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세례를 기피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이는 주께서 명하시고 사도 때부터 행하여 온 예식을 거부함은 예수님의 말씀보다 자기 생각을 더 앞세우고 중시하는 교만한 태도요, 불신앙적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영적으로 무지하고 어리석은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도 자기본위방식으로 믿는다면 굳이 교회에 나올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 참신앙은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수한 신앙인이 되려면 자기주장과 고집을 꺾고 성경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수반되지 않으면 참신앙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세례의 참뜻과 중요성을 바로 알고, 이 세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성결한 성도가 되며, 물세례와 동시에 성령세례도 받아 뜨거운 마음, 기쁨 마음으로 주를 섬겨 대대로 복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2006년 4월 9일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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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truechildren/1105 

이태수
http://blog.daum.net/blueheavenaz/158 


점진적 계시

 “점진적 계시(progressive revelation)”라는 용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획에 대한 다양한 측면을 일부 신학자들이 “세대(dispensations)”라고 일컫는 다양한 기간을 통해 드러내셨다는 개념과 가르침을 일컫습니다. 세대주의자들에게 세대란 하나님의 목적이 드러나는 외부 역사를 통해 구별 가능한 경륜(예: 사물의 정렬 조건)입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역사를 거치며 일어난 수많은 세대들에 대해 논의하면서도, 그들 전부는 하나님께서 각 세대에, 그리고 이전 세대를 기반으로 세워진 새로운 세대에도, 하나님 당신과 구원 계획에 대해 오직 특정한 면만을 드러내셨다고 믿습니다.


세대주의자들이 점진적 계시를 믿는 것은 사실이지만, 점진적 계시를 받아들이기 위해 세대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거의 모든 학생들은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에 들어 있는 특정 진실을 이전 세대에 모두 알려주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오늘날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을 때 동물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나, 한 주의 마지막 날이 아닌 첫째 날에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관습과 지식의 차이가 역사를 거치며 점진적으로 밝혀지고 적용되어 왔다는 것을 압니다.


추가적으로, 점진적 계시의 개념과 관련하여 좀 더 중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한 가지 예로 교회의 탄생과 구성에 관해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 과 같으니,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에베소서 3:1-6)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거의 비슷한 상황을 진술을 합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 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로마서 16:25-26).


점진적 계시에 관한 논의에서, 사람들이 처음으로 갖는 질문은 이것이 어떻게 구원에 적용되는가입니다. 그리스도 초림 이전의 사람들은 오늘날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원을 받았을까요? 신약성경 시대에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치신 일을 믿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셨으며 그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을 믿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로마서 10:9-10, 사도행전 16:31). 그런데, 구약성경 전문가 알렌 로스 (Allen Ross)는 “[구약성경 시대에] 구원을 믿었던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믿었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지적합니다. 존 파인버그 (John Feinberg)도 “구약성경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예수가 메시아이고, 예수가 죽고, 그의 죽음이 구원의 근거가 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라고 덧붙입니다. 로스와 파인버그가 옳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정확히 무엇을 나타내셨으며, 구약성경 성도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을까요? 만일 구약성경의 구원이 있었다면, 신약성경의 구원과는 어떻게 달랐을까요?


점진적 계시 – 구원, 두 번인가 한 번인가?

일부 사람들은 구원에 두 가지 다른 방식—. 하나는 그리스도 초림 이전에 일어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일어났다고 여기는 점진적 계시를 믿는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L. S. 체이퍼 (L. S. Chafer)는 두 가지 구원 방식에 관한 주장을 다음과 같이 반박했습니다.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특별하든지 간에 구원은 언제나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 하나님을 위해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그러므로,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이것이 맞다면, 구원과 관련한 구약과 신약 성경의 계시가 어떻게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찰스 라이리 (Charles Ryrie)는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모든 시대에 있어 구원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모든 시대에 있어 구원의 필요 조건은 믿음이다. 모든 시대에 있어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다. 믿음의 내용은 다양한 시대에 따라 다양성을 갖는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살았던 시대와 상관없이, 구원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역사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획과 관련하여 사람이 알고 있는 지식의 양은 하나님의 점진적인 계시를 통해 시대가 흐르며 증가했습니다.


구약성경 시대의 성도와 관련하여 노먼 가이슬러 (Norman Geisler)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합니다. “요컨대, 규범적인 구약성경의 구원적 필요 사항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분명한 신념이라는 면에서) (1) 하나님과의 연합을 믿음, (2) 인간의 죄에 대한 인정, (3)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또 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임, (4) 메시아가 오실 것임을 앎.”


가이슬러의 주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증거가 성경 속에 있을까요? 첫 세 가지 필요 사항을 담고 있는 누가복음의 말씀을 살펴봅시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8:10-14).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전에 일어났으므로, 이 사람이 오늘날처럼 명확하게 표현된 신약성경 복음 메시지에 관한 지식을 갖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세리의 짧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우리는 (1) 하나님에 대한 믿음, (2) 죄에 대한 인정, 그리고 (3) 긍휼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매우 흥미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자기 집으로 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복음 메시지를 믿고,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된 신약성경 성도의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바울이 사용한 것과 정확히 같은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


가이슬러 목록 중 네 번째 항목, 메시아가 오실 것임을 안다는 것은 누가복음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신약성경 구절들이 이 항목이 일반적인 가르침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예로, 우물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만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요한복음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4:25). 하지만, 가이슬러도 알고 있었듯, 메시아에 대한 믿음은 구약성경 구원을 위한 “필수 요소”가 아니었습니다.


점진적 계시 – 성경의 더 많은 증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항상 구원으로 가는 길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다음의 구절들을 구약 및 신약 성경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세기 15:6)


•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요엘 2:32)


•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히브리서 10:4).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브리서 11:1-2).


•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성경은 분명히 모든 역사 속에서 믿음이 모든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열쇠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자기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에 따라 반응한 것을 기반으로 그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자기들이 알 수 없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었던 반면, 오늘날의 믿는 자들은 볼 수 있는 과거의 사건을 돌아봅니다. 다음 그림이 이 개념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믿음을 실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계시를 주신다고 가르칩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역사가 이루어졌으니, 필요 조건이 바뀌었습니다. 즉 “무지의 시간”은 끝났습니다.


•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사도행전 14:16)


•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사도행전 17:30)


•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로마서 3:25).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희생 체제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여 보여주셨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죄가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훈련시키셨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초등교사로서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갈라디아서 3:24). 하지만, 율법은 그 이전에 세워진 믿음에 근거한 아브라함 언약을 폐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구원을 위한 본은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로마서 4장). 하지만, 라이리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의 믿음의 세부적인 내용은 – 주어진 계시의 양 –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쌓여,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보다 직접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점진적 계시 – 결론


존 칼빈 (John Calvin)은 하나님의 점진적 계시를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씁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긍휼의 언약을 주심으로써, 이 질서 있는 계획을 지키셨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완전한 계시의 날이 이르렀고,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 징후를 더욱 밝히셨다. 이에 따라, 태초에 첫 번째 구원 약속이 아담에게 주어졌을 때는 (창 3:15), 약한 불꽃처럼 빛났다. 그 이후, 빛이 더해지며 점점 더 밝은 빛이 되었고, 그것은 광범위하게 광채를 발산하며 충만해졌다. 마침내, 모든 구름이 흩어지고 의의 태양인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빛이 되셨다” (Institutes, 2.10.20).


점진적 계시라고 해서 구약성경 시대 사람들이 계시를 아예 받지 못했다거나,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칼빈의 말에 의하면 그리스도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구원과 영생의 희망이 담긴 말씀을 듣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대낮처럼 완전히 볼 수 것을 오직 멀리서 잠깐 보거나 그림자 윤곽만 볼 수 있었”습니다 (Institutes, 2.7.16; 2.9.1; 갈라디아서 3:23에 대한 주석).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없이 구원받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은 성경에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요한복음 14:6). 구원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며 구원의 수단은 항상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내용은 언제나 특정한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주시는 계시의 양에 따라 결정되곤 했습니다. 

 


07-14-2021(수)

세례의 의미(마가복음 1:8-11)

나는 너희에게 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세례 : 물 세례와 성령 세례

물 세례는 구원의 표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의 세례 이야기
로마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황제는 콘스탄틴 황제입니다.
그가 임종 직전에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살아 있을 때는 전쟁을 해야 하고 전정터에서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데 세례를 받으면 전쟁을 할 수 없으므로 마지막에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를 받을 때에도 오른 손은 여전히 물 위로 올려 놓았다고 합니다.
오른 손을 자주 사용하여 죄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령 세례는 구원의 확신


린드버그는 1930년, 당시 프로펠러 하나 달린 단발 비행기를 몰고 대서양을 처음 횡단한 영웅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 일에 도전했다가 생명을 잃었습니다.

어느 날 린드버그가 파리를 가게 되었는데, 그가 온다는 소문에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렸습니다.

어느 큰 담배 회사 사장이 이 기회를 이용해서 자기 회사의 담배를 광고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린드버그에게 다가가 담배 한 개비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것을 손에 끼어도 좋고 입에 물어도 좋습니다.
포즈 한 번만 취해 주십시오. 그러면 사진 한 장 당 5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5만 달러면 약 6천 만 원입니다.
지금부터 80년 전에 5만 달러라면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그러나 엄격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린드버그는 사람들 앞에서 그 사람 정면에 쳐다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세례 받은 교인입니다. 담배 피울 수 없습니다.”

린드버그는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었기 때문에 담배 회사 사장의 제안을 받아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린드버그의 그 말이 다음 날 바로 파리 신문에 대서특필되어 나왔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에게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모금을 하여 10만 달러를 모아서 린드버그에게 전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린드버그의 이러한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은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시지만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유?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마태복음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구원의 표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의 세례 이야기
로마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황제는 콘스탄틴 황제입니다.
그가 임종 직전에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살아 있을 때는 전쟁을 해야 하고 전정터에서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데 세례를 받으면 전쟁을 할 수 없으므로 마지막에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를 받을 때에도 오른 손은 여전히 물 위로 올려 놓았다고 합니다.
오른 손을 자주 사용하여 죄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례는 죄를 씻는 표가 됩니다.
세례가 구원을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세례 의식은 구원받은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예식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어느 부부 주례를 맡았었는데 동거하며 거의 10여년을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식을 꼭 해야 하겠다며 주례를 부탁하여 결혼예식을 진행했는데 결혼식을 하기 전에는 무슨 죄를 지은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는데 결혼식을 마치고 난 후에는 마음의 한구석에 응어리 진 것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결혼식이 그 부부에게 그렇게 소중한 의미가 된 것처럼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세례는 구원받은 확신의 증거가 됩니다.
그렇다고 세례를 받으면 몸에 무슨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대학 시절 친구가 어느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를 받은 후에 교회 밖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담배를 피우면서 하는 말이 "야, 세례를 받기 전이나 세례를 받은 후에 담배 맛은 똑같구나!"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를 받았더니 담배맛이 갑자기 지독하게 쓰거나 담배 연기가 역겨워허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는 그런 것을 기대한다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구원의 확신


옛날 김유신 장군이 젊은 시절 방탕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엣 생활을 정리하고 화랑도 정신으로 무장하여 동료들과 열심히 훈련을 마치고 모처럼 모여서 술자리를 가졌는데 그 날 그만 너무 취하여 말을 올라탔는데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엉뚱한 곳에 와서 누워있더랍니다.
곰곰히 생각하더니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 저 말이구나!
굉장히 좋은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김유신이 술이 취할 때마다 기생방으로 갔다는 것을 기억한 말이 그 날도 기생방으로 데려다 주었다고 합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김유신은 큰 칼을 들어 그 좋은 말의 목을 내리쳤다고 합니다.
주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말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주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좋은 말을 내리쳤느냐? 하고 질문했을 때 주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말이 아무리 좋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세례의 참뜻 / 갈라디아서 3:26-2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최초의 옷은 가죽옷이었다(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죽옷은 죄를 덮어주는 기능으로 시작한 것이다.


첫째, 아름답다

속담에 "옷이 날개"라는 말처럼 옷을 잘 입으면 사람들의 눈에 좋게 보입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모양이나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의 것 즉 은혜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은혜라는 헬라어는 "카리스" 라고 합니다.
카리스의 어원은 "카라"인데 '카라'는 기쁨을 말합니다.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 이유는 신부가 결혼식을 준비하며 철저하게 자기를 관리하고 가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아름답다는 것은 은혜 받은 사람의 표정이 기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매일 울상을 하거나 불평과 불만에 가득찬 사람은 은혜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보호하는 기능

옷은 사람의 몸을 보호합니다.
여름에는 여름 옷을 입어야 합니다.
겨울에 여름 옷을 입는다면 정신이 올바르지 못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겨울에는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털옷을 입어야 합니다.
여름에는여름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세례의 옷은 세상 죄악으로부터 우리들을 보호하는 옷을 말합니다.
세례 교인이 되었기 때문에

셋째, 활동하는 표시

소방수의 옷과 경찰관의 옷은 다릅니다.
군인들은 두 가지 옷을 갖추고 준비합니다.
평상시에 입는 일상복과 전쟁에 나갈 때 입어야 할 전투복입니다.
전투복을 입을 때는 반드시 군화를 신어야 하고 철모와 방독면 배낭을 짊어져야 합니다.
긴급한 상황에서는 전투식량으로 배를 채우기도 합니다.

세례를 받은 세례 교인의 활동을 착한 행실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요한복음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을 얻으리라.

에베소서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이라 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사람에게 왜 그림자가 있는가?
죽은 사람에게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그림자는 죄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검은 그림자 즉 죄가 따라다니므로 그림자가 없는 빛의 삶을 유지해야 한다고 합니다.


로마서 3:12-15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흘리는데 빠른지라.

요한계시록 7:13-14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세례는 예수님이 집의 주인으로 계시는 것

이따금 가난한 백성들의 집을 예고 없이 방문해 민심을 헤아리곤 했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하루는신실한 과부의 집에 찾아가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과부의 신실한 믿음을 익히 알고 있던 여왕은 "당신의 집을 방문했던 이들 중에 가장 명예로운 손님은 누구였소?" 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과부는 망설임 없이 "예, 바로 여왕이십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대답을 기대했던 여왕은 조금 실망스러워 "혹시 당신 집을 방문했던 가장 명예로운 손님은 예수님이 아닐까요?"  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과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결코 손님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항상 저와 함께 계시는 이 집의 주인이십니다."




링컨의 신앙생활 십계명

1. 나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예배 생활에 힘쓸 것입니다.

2. 나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매일 매일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을 실천 할 것입니다.

3. 나는 도움을 베풀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날마다 겸손히 기도 할것입니다.

4. 나는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 뜻에 순종 할 것입니다.

5. 나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 할 것입니다.

6. 나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 할 것입니다.

7. 나는 하나님만을 높여 드리고 그분께만 영광을 올려 드릴 것입니다.

8. 나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 모두는 자유하며 평등 하다고 믿습니다.

9. 나는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실천 할 것입니다.

10. 나는 이 땅위에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가 실현 되도록 기도 할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세례를 꼭 받아야만 합니까?"
나는 그 분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세례받는 것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고, 세례를 받지 않고서는 못 견딜 것입니다.
세례는 죄 용서함의 표시와 증거로 받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세례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그 표징으로써 받는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는 "참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세례는 죄 사함의 방법이요, 날인이다. 하나님은 초대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이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에게도 죄 사함을 베풀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은 "세례가 군인들이 충성 맹세의 표시로써 국가 원수의 휘장을 붙이고 다니는 것과 같이 사람들 앞에서 신앙을 나타내는 표시나 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 즉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약속과 함께 받아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믿음과 회개와 세례입니다.

세례받기를 거절하거나 주저하시는 분들이여, 당신이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세례를 받는 것을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