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생(生)과 사(死)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로마서 14:8)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뒤 흔들고 있을 때 내 몸에 이상한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과 비슷한 증세가 온 몸을 더듬고 있었다.
몇날 몇일을 생각하던 중 코로나 감염을 검사하는 응급진료센터를 찾아가 등록을 한 후 검사를 의뢰하였다(9월 15일).
다음 주 월요일 오전에 전화로 확인한 결과 음성이라고 하는 판정을 받았다(9월 21일).
아직은 내 주위에서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세상을 떠난 사람은 없었지만 나 자신도 안전한 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며 지난 날 내가 경험하였던 생과 사의 사건들을 정리하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 1
형질이 생기기 전부터(시편 139:6)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Your eyes saw my unformed body. All the days ordained for me were written in your book before one of them came to be.
나는 누구인가?
나는 1949년 10월 16일에 태어난 "이승혁(李勝赫)" 이라고 합니다.
제가 태어난 가족의 배경은 할아버지(祖父) "이성봉(李聖奉)장로"와 외할아버지 "김창하(金昌河)장로"가 만주에서 북한 원산으로 피난을 내려와서 원산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던 중 노회에서 만나 자신의 아들과 딸을 혼인시키자고 약속한 후 아들(이영복)과 딸(김은신)에게 알려주므로 시작됩니다(대략 1947년).
당시 조부 이성봉장로와 외조부 김창하장로는 "아들을 낳으면 목사로 바치고, 딸을 낳을 경우 평생 독신 여자 전도사로 살도록 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만일 내가 딸로 태어났다면 나는 평생 결혼도 못하고 독신으로 살아야 할 인생이었겠지요!
당시만 하여도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의 미덕인지라 어른들의 가르침을 받아 첫 아들이 태어나므로 "장래 목사" 라고 하셨답니다.
부모님이 원산교회에서 합동 결혼식을 하셨는데 당시에는 희귀한 사례라고 합니다.
한쌍은 부친 이영복, 모친 김은신
다른 한쌍은 박계로, 김선희(부산 수영로교회 정필도 목사 사모의 부모)
훗날 박계로씨는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가계도를 먼저 소개하는 이유는 신앙의 배경을 알면 그 사람을 좀 더 친근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의 인생은 시작되었습니다.
철인(哲人) 소크라테스의 명언(名言) "너 자신을 알라!(Know yourself)"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아니라 어느 날 소크라테스가 그의 제자들과 델포이 신전을 거닐던 중 신전 기둥에 누군가 낙서처럼 적은 말에( γνῶθι σεαυτόν) 관심을 갖고 즐겨 사용하므로 마치 소크라테스의 명언이 된 것처럼 저의 조부 이성봉장로와 외조부 김창하장로의 첫 손주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기에 이름을 "승혁(勝赫)" 이라고 작명하셨다고 합니다.
"승혁(勝赫)" 이란 이름은 "이길 승(勝)" "빛날 혁(赫)" 이라는 한문자 이름이다.
이겨서 빛이 나야 할 이름을 갖고 2000년 7월 4일 전 가족이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습니다.
이주하게 된 이유는 앞으로 설명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2020년 10월 23일을 맞으면서 아직도 이겨서 빛을 내지 못한 나는 누구일까?
새롭게 나를 생각해 봅니다.
다음 서신에서 다시 만나뵙겠습니다.
10-23-2020. 오후 10:11
1차 수정 / 06-02-2024(주일)
시카고 문숭인목사
문목사의 사모와 나의 생년월일이 똑같다고 한다.
어쩐지 예전부터 친근감이 더 강한 것이 이런 이유가 아닐까 하며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이 서로 더 잘 알아가며 남은 사역에 하나님의 은총을 기도하며 살아갈 것을 약속하였다.
시카고 조영숙권사
일찍 예수를 영접하신 명문 가문이군요.
참고 자료 / 박계로목사 이야기
“너는 네 떡을 물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전도서11:1)
원로 목사회 초기 때부터 출석하신 87세의 박 계로 목사는 건장한 체격에 힘 있는 목소리로 말씀을 시작한다.
박 목사와 사모는 모두 무속신앙 가정에서 태어나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으로 부름 받았다.
약 20년간의 선원선교사의 사명을 마치게 하신 것, 물질적인 축복을 주신 것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가장 많은 복을 받은 가정이라고 전제를 하면서 말씀을 이어간다.
출생과 성장 과정
1923년12월 4일 중국 남만주 삼원포에서 부친 박영식씨, 모친 백응식씨 , 3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곳은 독립군이 활동하는 농가였는데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7살 때 심양과 길림 중간에 위치한 산성진으로 이사했다.
이곳은 남만노회의 중심지로 교회가 흥왕하여 신앙생활을 활기있게 하는 고장이었다.
11살 때 가족 중 신앙의 전도자인 누님의 안내로 처음으로 교회에 출석했다.
김석찬 목사, 김병희 목사, 한병혁 목사, 이학인 목사들에게서 신앙지도를 받아 노회성경학교, 부흥회 등 참석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이 때 신앙의 초석을 다졌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봉천신학교 수학의 꿈은 깨지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8.15 해방 후 생활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자 조국 땅이 그리워 평안북도 간계군 만포진으로 온가족이 이사를 했다.
25세 된 박 목사는 부친 김용성 씨와 모친 정금화 씨의 4남매 중 장녀인 김선희(지금의 사모)씨와 결혼했다.
두 분은 만포 교회에서 성가대로 섬겼다.
이곳에는 민청, 여성동맹 등 공산당들의 활동이 많아 공산권을 피해 1948년 6월 박 목사와 사모는 다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게 되었다.
평양을 거쳐 원산, 철원으로 10여명이 함께 도보로 한탄강을 넘어서 포천, 의정부로 오게 되었다.
이때의 피난길은 너무도 험난해서 기도 없이는 한발작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적으로 남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근거지가 만주였던 박 목사는 남한에 친척이나 연고자가 없었다.
갈 곳을 몰라 헤맬 때 우연히 한 멋있는 세단 차에 노부부를 태워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백병원 원장의 부모라고 했다.
“아! 나도 예수님께서 언젠가는 나를 저렇게 데려갈 것이다.” 라고 생각되어 큰 위로가 되었다.
의정부 피난민 수용소에서 마침 영어통역관으로 있는 초등학교 동창 이인재 씨를 만나 그의 배려로 화물차를 보내주어 서울로 오게 되었다.
서울시 마포구 염리동에 있고 창립 초창기에 있는 염산교회에 나가 창립예배위원으로 섬겼다.
후에 전관묵 목사를 모셨다.
정부소속인 사회부의 도움으로 연립주택을 얻게 되어 주택문제는 해결되었고 생계문제로 아이스크림 장사에 이어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 ‘신일사’ 라는 공업 재료상을 시작했다.
사업모토는 ‘신용제일주의’로 했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업은 나날이 잘되어갔다.
한편 야간에는 대한신학교에 입학했다가 장로교 총회신학교로 전학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재학 중 6.25동란이 일어났다.
6.25 때의 생활
1950년6월25일 주일 새벽 예기치 않았던 6.25동란이 일어났다.
피난 갈 기회를 놓친 박 목사 가정은 서울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식량이 부족상태여서 자전거로 지방으로 다니며 쌀이나 밀을 구하러 다녔다.
밤이면 이북에 남아 있는 부모형제가 그리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1.4후퇴당시 “내 목숨이 살아 있는한 나라를 위하여 싸워야겠다.
그래서 통일이 되면 부모형제도 만날 수 있다.“라는 신념아래 사모와 1살 난 딸아이를 선교사와 목사님께 맡겨 피난가게 하고 박 목사는 육군의 간부후보생시험을 치기로 했다.
결과 발표 날 인천에서 LST수송선을 타고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부산 보충대에서 대기하다가 입교해서 간부 후보생 24기로 3개월간 훈련을 받아 소위가 되었다.
식구를 찾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목사들과 선교사들에게 전단지를 보냈지만 무소식이었다.
몇 달 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1사단 12연대 3대대에서 소대장으로 임관 2주 동안 실전에 임했다.
참전했던 소위 5명 중 3명(박 목사, 변 태섭, 이 윤제)만 살아남았다.
그 해 8월15일 서울 신림동에서 극적으로 식구를 만났다.
그 후 대전차공격대대로, 20사단 창설요원으로 인재에서 근무했고 대구를 거쳐 서울에서 1955년 10월 10일 학창복귀로 제대했다.
서울에서의 생활
6.25전에 청파동에서 경영했던 ‘신일사’를 동자동에서 재건하고 또 한편으로는 충북 제천에 ‘한국산소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66년에는 대표이사가 되어 7년 동안 운영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적인 축복을 넘치도록 주셨다.
주경야독,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남은시간에는 학업에 정진하여 그렇게 소원하던 총회 신학교를 졸업하고(1956년), 국민대학 졸업(1962년), 연세대 경영대학원(1972년)을 졸업했다.
한편으로 염리동 염산교회에서 장로 장립했다.(1957년 6월30일)
3년 후 신현교회(이화여대 입구)에서 미국으로 이주하기까지 장로로 사역했다.
박목사는 해외진출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서울 필동에 있는 ‘신흥 물산 주식회사’에서 일하면서 1973년 10월1일 미국 LA 지사장 내정으로 미국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1974년 5월 Fast Food Chain Store를 시작하여 약10년 동안 경영했다.
선원 선교와 목사 안수
1977년 2월에 박 목사가정은 캐나다로 이민을 했다.
박 목사는 미국에서 Fast Food Chain Store를 경영하면서 동양선교교회에서 목사 안수 받을 때까지 장로로 사역하다가 노이심 목사와 대화중 선원선교에 뜻을 품고 1983년 3월 선원선교회를 조직하였다.
29년의 장로사역에 이어 1986년 9월 1일 미주 보수노회에서 63세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장소는 Fullerton 에덴 장로교회).
목사안수와 동시에 미주신우선교회에서 선원선교사로 파송 받아 1986년부터 밴쿠버에서 선원선교회를 시작했다.
1989년 12월 2일 밴쿠버신우세계선교회를 밴쿠버 필라델피아 교회에서 창립했다.
많은 단체에서 도움을 받아 선원선교의 불을 붙였다.
시온성가대, 순복음교회, 중앙장로교회, 필라델피아교회, 제일장로교회, 밴쿠버한인장로교회, 수영로교회(부산), 밴쿠버신우세계선교회, Cornerstone선교회
협력자 : 김상열선교사(CCC 간사), 노신익목사(영어권), William Pan(중국인 선교사), David Wang(중국인 선교사).
선교활동
North Vancouver, Vancouver, Port Moody, Fraser River, Robert Bank 등에 들어오는 외향선을 찾아가 선원들을 만나는 것이다.
외향선은 수만 톤에서 20만톤급 까지 석탄, 원목, 유황, 펄프재료, 동광석, 액체 화학, 비료, 콘테이너, 곡물(콩 종류, 완두콩, 옥수수, 보리, 밀, 유채 씨 등)을 운반하는 외향선인데 밴쿠버 통계로 일 년에 3600척 정도 들어오고, 선원 8만 명 정도가 움직이게 된다.
사관들은 물론 일반 선원들도 학식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인도, 중국, 남미, 북미 등 세계 90개국에서 오는 외향선 들이다.
선원들을 위한 선박교회(선박 안에 설치)를 설립했고, 밴쿠버 시내로 나가 일반교회에서 주일과 수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개인전도,체육활동, BBQ, 관광, Shopping등으로 도움을 주었다.
환자가 생길 때는 병원으로 안내하며 도움을 주었다.
선원들은 밴쿠버를 아름다운 관광지요, 신앙이 충전되는 곳이라고 선호했다.
1990년대에는 한국선박이 많았지만 10여 년 전 부터는 한국선박은 차츰 줄고 필립핀, 중국선박이 많아져 영어와 중국어로 선원들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선교 중 배포한 책자는 중국 성경책을 위시해 다양했고 1만 5000권을 초과했다.
Cornerstone선교회를 통해서 Light House, ECBC (Evangelical Christian Bible Church) 중국교회, 필라델피아 선원선교회(미국), 오크랜드 에 중국어 성경책을 직접 공급받게 했다.
그 실적은 3000권 정도에 달했다.
1987년 1월에 인천에서부터 Saint Lawrence 라는 선박이 15일 동안 항해 하여 North Vancouver 에 정박하게 되었다.
이 배의 선장은 한국인(대전 감리교회 권사)이었는데 갑작스럽게 병이 났다.
내일이면 배는 떠나야 되므로 병원에 갈 시간이 없었다.
임시로 약 처방은 했지만 병은 악화되어 할 수 없이 박 목사의 사모의 침술로 정성을 다해 치료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이 선장은 일 년 후 다시 돌아와 그때 치유함 받고 직무에 복귀할 수 있었음에 깊이 감사의 마음을 표시했다.
또 한 번은 동광석을 실은 배에서 한 삼등기관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기독교인이라면서 목사를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문제점을 의식하고 대화를 시도했다.
이 배의 기관장은 기관사의 학교 선배인데 6개월간 일하면서 늘 괴롭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교육을 위해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의도적으로 괴롭게 했다는 것이다.
드디어 기관사는 도주, 자살, 기관장사살 중 한 가지를 시도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박 목사는 열심히 기도해주었으나 별 반응이 없었다.
“아!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자.” 라는 생각으로 둘이 함께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찬송을 했다.
기관사는 얼굴이 환해지면서 이제는 속이 시원하다고하며 마음의 변화를 보였다.
박 목사는 그가 소지한 죽을 약과 칼을 압수하고 당신은 밴쿠버로 도주해도 살기 힘들다고 타일렀다.
이렇게 그는 변화되고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1992년 8월 15일 North Vancouver 에 정착한 소련으로 가는 외향선에서 장 집사라는 선원을 만났다.
이 분과 대화중 성경 47권을 소련에 보낼 마음을 주셨다.
우선 장 집사를 단기 선원선교사로 세우고 파송하기 위해 급히 성도들을 모아 파송식까지 하게 되었다.
소련 나훗가 항(연해주 주변)에 도착한 장 집사는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이배로 사명을 띠고 이곳에 왔는데 이 성경을 어디에 전하면 되겠습니까?”
마침 가까운 곳에 김 선교사라는 분이 사역하는 연해주 교회에 성경이 없어 곤란한 중에 기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장 집사는 이 교회에 모든 성경을 전달했다.
이러한 사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었다.
2004년 2월 23일 밴쿠버 신우세계선교회에 속해 있는 김연수선교사에게 인계하고 박 목사는 선원선교에서 은퇴했다.
가족 큰 모임(Family Reunion)
박 목사의 70세 생신(고희) 때 LA Fullerton 에서 딸 4, 아들 2 직계 자손들 28명이 모였다.
이때 은혜로운 모임이 되어 4년에 한 번씩 모임을 갖기로 했다.
5번째 모임은 2010년에 밴쿠버 Whistler에서 3박 4일로 43명이 8월에 모이기로 했다.
자손들은 한국, LA, 필라델피아(미국), 하와이, 밴쿠버, 싱가폴에서 살고 있다.
후손들은 목사 5명, 전도사 1명, 선교사 1명, 사모 3명, 장로 1명, 권사 2명, 안수집사 2명, 모두 믿음의 축복을 받은 가정들이다.
박 목사와 사모는 밴쿠버에서 요한3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말씀을 붙들고 자손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며 복되게 지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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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 2
쇠약한 병상에서(시편 41:3)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The LORD will sustain him on his sickbed and restore him from his bed of illness.
저희
부모님들이 만주 산성진에서 북한 원산으로 이주한 것은 중국이 공산화가 되므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주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산교회에서 결혼식을 마친 후에 다시 남한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것도 북한이 공산화가 되므로 안내자를 세워 남한으로 내려와
정착하였다고 합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당시 청량리 철도청 관사가 있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아버님은 안양교도소
교도관으로 근무하셨기 때문에 철도청 관사는 당시 수많은 피난민들이 모여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므로 아버님은 안양교도소의 죄수를 이송하기 위하여 열차편을 이용하여 먼저 남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서울에는 생후 8개월된 어린 나를 데리고 어머님은 먹은 것이 없으므로 젖이 나오지 않아 젖을 먹일 수 없어 마음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하지요.
때로는
양식을 구하러 어린 나를 업고 경기도 양평까지 걸어가서 양식을 구하러 다니기도 하셨는데 그때마다 젊은 부인이 어린 아기를 업고
양식을 구하러 다니는 것을 측은하게 여겨 어떤 마을에서는 차라리 난리 통에 어렵게 살지 말고 재가 하라며 마을에 홀아비를 소개해
주겠다고도 하였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버님의 생사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견딜 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내가 급성 폐염에 걸려 병원을 찾아갔더니 의사가 "왜 이렇게 아이를 늦게 데려 왔느냐? 살 가망이 없다"고 하였답니다.
난리
통에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젖을 물릴 수도 없었고 결국 급성 폐염으로 죽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어차피 죽을
생명이라면 하나님께 바친 생명이므로 교회 강대상 앞에 내려놓고 밤을 새워 울며 기도하면서 죽더라도 교회 강대상 앞에서 죽는 것이
좋겠다고 하며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날이 밝아 올 무렵 죽어가던 생명이 다시 활기를 되찾자 다시 의사를 찾아갔더니 "무슨 약을 먹였느냐? 난리 통에 그런 약이 있으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며 동업을 하자고 제안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 그 의사에게 " 이 난리 통에 무슨 약이 있겠느냐? 신약과 구약을 먹였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 의사가 신약과 구약의 의미를 몰랐을 것입니다.
이렇게 급성 폐염에서 위기를 넘겼기에 지금 이렇게 지난 날 나의 삶을 회상하는 글을 쓸 수 있도록 인도하신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할 뿐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죽음의 고비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교통사고와 동네 아이들이 모여 있을 때 지나가던 자동차가 인도로 뛰오올라 여러 명의 아이들이 다친 사고와 국민학교 재학 중 등교하는 길에 대한석탄공사 건물 신축 현장에서 인부들이 떨어트린 판넬에 의해거 전신주의 고압선이 끊어져 그 아래를 걸어 가던 나를 고압선이 스치고 지나난 사건 등을 생각하면 사람의 목숨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라는 진리를 새롭게 깨닫습니다.
인명재천(人命在天)이란 말처럼 내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OECD 국가 중에서 자살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불명예를 씻을 수 있는 방법은 생명의 주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리고 전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10-25 주일 새벽 1:57
1차 수정 / 06-03- 2024(월)
스웨덴 김현옥
눈물나는 목사님 삶의 이야기 감명깊히 읽었습니다.
주님 사랑 보여주심 감사드립니다.
나는 누구인가? #.3
사무엘상 20:3b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사심과 네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인생을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간단하게 정의합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인생의 네 개의 기둥을 말합니다.
첫번째 기둥은 세상에 태어나는 것
두번째 기둥은 나이가 들면 늙어가는 것
세번째 기둥은 육체에 병이 들어 약해지는 것
네번째 기둥은 죽음을 말합니다.
첫번째 죽음은 제 기억에 전혀 없는 것이었습니다.
잣난 아이 때에 겪었다는 급성 폐염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야기는 어머님으로 들어서 각인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죽음에 대한 기억은 굉장한 충격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정확한 나이는 모릅니다.
어릴 적 저희가 살던 동네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서소문동 75번지" 이었습니다.
(현재는 중구 서소문동)
길 건너편에 "경전병원"이 있었습니다.
(후에는 한일병원)
병원 입구에 검은색 지프차가 자주 세워져 있었는데 하루는 나하고 제 또래의 여자 아이가 지프차 뒤에 앉아 있었습니다.
작은 아이들이 지프차 뒤에 앉아 있었으므로 운전석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운전사가 차량을 후진하므로 나는 기절하여 응급실로 옮겨졌고 함께 있던 여자 아이는 자동차 바퀴가 머리를 지나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응급실에서 회복하여 병원 밖으로 나왔을 때 여자 아이의 엄마는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 있었는데 머리가 깨져 흰 골이 흘러내렸는데 정신을 잃은 여자 아이의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너는 살았는데 왜 내 딸은........" 하며 나를 향하여 달려오므로 얼른 병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전쟁 후에 남편을 잃고 생명의 끈과 같은 딸을 데리고 살았던 과부이었기에 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경험했던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기억에도 없는 급성 폐염에 의한 죽음의 문턱을 지나 이번에는 정확한 기억 속에 새겨져 있는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죽음은 나하고 한 걸음 차이라는 말씀을 떠 올리게 됩니다.
한문자에서 죽을 사(死)자는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라고 합니다.
死자는 뼈 알(歹)자와 비수 비(匕)자가 결합하여 만든 문자이지요.
비수 비(匕)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죽을 수(死)자를 보면 사람 인(人)자와 저격 섯(歹) 자가 그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시신 앞에서 애도하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으로 해서에서부터 人자가 匕자로 바뀌기는 했지만 死자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모습에서 ‘죽음’을 표현한 상형문자라고 하겠습니다.
망할 망(亡)자는 ‘망하다’, ‘도망가다’, ‘잃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라고 합니다.
亡자는 亠(돼지해머리 두)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돼지머리와는 관계가 없다고 하지요.
亡자의 갑골문을 보면 칼날 부분에 획이 하나 그어져 있는데, 이것은 칼날이 부러졌다는 뜻을 표현한 것을 말합니다.
칼날이 부러졌다는 것은 적과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亡자는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의미에서 ‘멸망하다’ 또는 ‘도망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쟁에서의 패배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亡자에는 ‘죽다’, ‘잃다’라는 뜻도 파생되었습니다.
사망(死亡)에 관한 성구를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야 할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신 30:19-20).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믿음의 어른들이 선책하고 결정한 신앙의 길을 물려받은 후손으로 그 믿음의 열매를 위하여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해 봅니다.
10-29-20(목) 오후 1:07
1차 수정 / 06-06-2024(목)
김화자목사님
목사님!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적용.그리고 남다른 치우침이 없는 해석.
그리고 자신의 삶의 팩트를 통하여 적용하심으로 공감을 불러 감동을 연발하게 하는 능력.
계속 이렇게 써내려가서 책으로 엮으면 정말 귀한보고가 되겠읍니다.
정말 사망과 생명은 한 걸음밖에 안 되지만 코의 호홉과도 같음을 실감합니다.
몇일전 함께 일하는 임선옥장로와 함께 목욕탕에 갔는데 임장로가 싸우나탕에서 전혀 의식이 없는 상태로 누워있는것을 발견하여 끌어내어 인공호흡시키고 입안에다 숨을 불어넣고 그래서 깨어나는 모습을 실감있게 보았지만 이미 부른 엠브란스가 도착하여 병원에 실려가서 검진한 결과 다른 이상은 다행히 없었읍니다.
갑자기 싸우나탕에 오래있으면 동맥이 팽창하여갑자기 저혈압이 되어 의식을 잃게되는 모양인데 조금만 늦게 발견되었으면 하느나라로 가는것이였읍니다.
우리앞에 순간 순간 너무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어 우리영혼을 깨우치고 겸손히 하나님앞에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침 받고 있읍니다.
다음 4탄이 기대됩니다.
오늘도 주님안에서 승리를!
황규선목사님(이복영사모님)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려고 살리신 은혜였었네요.
감사합니다.
시카고 조영숙권사님
아멘 아멘 입니다~^^
흔하지 않은 어릴적 경험을 하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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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Who am I?) #. 4
시편 139: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자기 자신의 지난 일을 드러내는 이유 중 하나는 내 자녀들이 세상을 나처럼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큰 아들 사무엘에게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거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가족들 중에는 특히 사무엘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대를 이어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자주 말을 했습니다.
제가 사무엘에게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나의 아버지(이영복장로)와 어머니(김은신권사)는 나의 할아버지(이성봉장로)와 외할아버지(김창하장로)의 약속을 믿음으로 인정하여 첫 아들을 주의 종으로 바칠 것이라고 순종했지만 나는 조부와 외조부 그리고 부모의 생각과 다른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결단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 가문에서 반드시 제사장이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구약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원하는 믿음과 결단에 의해서 목사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첫 아들 사무엘에게 목사가 되라고 말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목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무엘의 이러한 생각이 국민학교 4학년 무렵 갑자기 미국으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목사가 되려면 일찍 미국으로 가서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하겠다고 어린 나이에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밝혔기 때문에 조기유학이란 제도가 없을 때에 먼저 뉴욕으로 전학할 수 있는 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학기를 지낸 후에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겠다고 생각을 바꾸었기에 다시 한국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뉴욕으로 이주한 후에 대학을 졸업할 때 잠간 미국에서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려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신은 목회자 보다는 신학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자신에게 적합하다며 결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을 포기하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전공한 후 현재 그 업종에서 일을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볼 때 사람은 내가 무엇을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이 마치 나의 의지라고 생각하지만 결국에는 나의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계획 아래 놓여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제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국민학교 2학년 때 쯤 여러 아이들과 학교로 가려고 집을 나섰다가 아주 위험한 감전 사고를 만났습니다.
당시 저희 집에서 덕수국민학교로 가는 지름길은 대법원 후문을 지나 정문으로 나가면 덕수궁 돌담길을 만납니다.
대법원 정문에서 왼쪽 방향은 이화여고와 서대문국민학교로 가는 길이었고 곧장 앞으로 직진하면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미국대사관 관저를 지나 광화문 방향으로 계속 걸어가면 왼편에는 경기여고 오른편에는 덕수국민학교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국민학교 수업은 오전반과 오후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반이 되어 등교하려고 집 앞의 큰 도로를(서소문로) 건너 대법원 후문을 향하겨 걷던 중 갑자기 거리에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대법원 후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왼편에 당시 대한석탄공사라는 건물을 짓고 있었는데 4층 정도 위치에서 건물 외벽 공사를 마치고 콘크리트 강화 판넬을 떼내는 작업을 하던 중 인부들이 실수로 판넬을 떨어트렸는데 그 판넬이 마침 전신주와 연결되는 고압선을 잘라버렸습니다. 그 전선이 제 왼쪽을 내리쳤고 나는 그 자리에서 잠시 정신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후 빨리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학교로 행했습니다.
학교에 도착한 후 왼쪽 발바닥 중간 쯤 작은 상처가 있었고 다리는 약간 검은색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생각하는데 4층 에서 일을 하던 인부들이 쓰러져 있는 나를 바라보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떠 올랐습니다. 그렇지만 걸을 수 있고 학교에 도착하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나쳤습니다.
당시 여름철이라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고압선 줄이 왼편 다리를 스쳐 발바닥 중간에 상처를 입히고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었다는 것을 훗날 알게 되었습니다.
고압선이 사람의 몸에 붙어서 떨어질 때 몸에 상처가 나면 그 자리에서 전기가 빠져 나가지만 만일 몸에 붙어 있다면 목숨을 잃어야 하거나 아니면 몸에 전류가 흘러 폐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훗날 목사가 되어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환자가 병원에 입원 중인데 그 환자는 갑자기 비가 쏟아져 옥상의 배수구가 막혀서 배수구를 뚫기 위해 긴 장대를 갖고 배수구를 뜷던 중 긴 장대가 마침 옥상 위를 지나던 고압선을 치면서 전기가 흘러 몸에 들어와서 몸 밖으로 빠져 나가지 않아 전류가 몸 안에서 흘러다닌다고 합니다.
그 전류가 몸안에서 여기저기 옮겨 다닐 때마다 고통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작은 사건 하나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간섭하였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그 당시에는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작은 사건과 사고 하나라도 무의미하게 일어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태복음 10:29-31)
그렇습니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작은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어질 수 없다고 하셨던 것처럼 급성 폐렴과 자동차 사고에서도 살려주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의도가 있었다면 아들 사무엘을 향한 의도 또한 반드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사무엘이 입학하려고 준비했던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 조카(고 이동훈목사)가 어느 날 갑자기 캘리포니아에서 그가 시작하던 사업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신학교에 입학을 하겠다며 뉴욕으로 찾아왔을 때 정말 주님의 부름이 맞는지 추수감사절 공휴일에 모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가족들 모두 주님의 부름이라고 기뻐했습니다.
뉴욕에서 나약 신학대학에서 과정을 마친 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 입학하한 후 공부를 마치고(M Div) 필라델피아 미국 교회의 부름을 받고 부목사로 사역하던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왜 하나님은 준비된 사역자를 이렇게 불러가셨을까? 생각하며 살아 있음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며 하나님의 계획과 사람의 계획이 다르다는 것을 또 한번 깨닫습니다.
은총의 계절을 맞이하며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어떤 사건과 사고가 닥쳐올지라도 그 일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는 믿음만을 사모합니다.
다음 제5서신에서 다시 뵙도록 준비하겠습니다.
10-31-2020(토) 오후 5:08
06-09-2024(주일) 오후 4:16 1차 수정
이동훈목사 죽음에 대한 신앙적 이해
조카 고(故) 이동훈목사(Pastor Jacob Lee)
05. 04. 1984∼09. 28. 2020 am 9:42
New Life Dresher Church
https://newlifedresher.org/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Then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진리가 자유하게 합니다.
진리는 예수님입니다(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진리가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이것은 신앙의 초보적 단계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Now the Lord is the Spirit, and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freedom.
진리가 자유케 한다는 말씀은 곧 영이 자유케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영을 체험해야 합니다.
영을 체험하는 것은 성령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을 받아야만 진리가 되시며 영으로 세상에 오신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영으로 예수님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혼과 몸으로 체험하는 정도로 멈추고 있습니다.
몸으로 체험하는 예수 몸으로 체험하는 예수는 "기적의 예수" 라고 하겠습니다.
기적의
예수란 벳새다 들판에서 굶주렸던 사람들에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개고 오천 명을 먹이셨고 남은 광주리가 12개 이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몸으로 체험하는 예수는 육신의 몸을 갖고 살아갈 때 육신의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기적을 기대하고 기다리기
때문에 육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는 예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암으로 고생하는 암 환우가 예수를 믿는다면 기적같이 암 덩어리가 모두 몸에서 없어지는 것만이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나타났던 기적의 사건에 참여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사건 앞에서 모두 외면했습니다.
혼으로 체험하는 예수 혼으로 체험하는 예수는 "이성적 예수"라고 하겠습니다.
혼이란 정신을 말합니다.
신앙을 정신적인 영역에 가두고 믿음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질문할 때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니고데모는 어른이 된 후에 어떻게 어머니의 모태에 들어갔다 다시 나올 수 있을까 하며 머리를 흔들고 돌아갑니다.
정신적인 위로자가 되는 예수님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영으로 세상에 오셔서 영으로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떤 부인은 남편을 잃고 세상살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며 어려움을 극복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업의 어려움에 자살을 시도했으나 극적으로 회복되어 주님을 만났다며 새 힘을 얻었으나 다시 사업이 기울고 어려워 질
때 왜 나를 버리셨느냐 하며 절망에 다시 붙잡히는 경우는 혼으로만 예수를 믿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으로 체험하는 예수
영으로 체험하는 예수는 "신령한 예수"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의 도리를 감당하려고 30세까지는 전혀 하늘의 일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30세가 되었을 때 세례를 받은 후 하늘의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공생애 3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적과 같은 사건을 보여주며 메시아가 되심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성령께서 임하지 않은 시대이었기에 예수님을 영으로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길이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도 제자로 부름을 듣기 전에 일을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에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난 후 베드로를 위시하여 그 자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두 영으로 예수를 체험하였고 그때부터 완전히 변화된 삶이
시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은 이미 성령강림이 일어난 이후의 시대이므로 직접 성령의 임재를 기도해야 하며 성령 체험이 있어야만 예수를 영적으로 믿을 수 있는 단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죽음이란 생명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몸과 혼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영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영원한 생명을 회복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임종을 맞이하는 환자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영적인 예수를 믿었다면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육체의 몸은 이 세상에서 온갖 질병과 사건과 사고로 인하여 고통과 아픔을 갖게 되지만 죽음 후에는 이 모든 질병과 사건과 사고 그리고 고통과 아픔으로부터 자유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동훈목사의 경우 36세의 젊은 나이입니다.
더구나 가족들은 아내 라헬과 두 아들 그리고 딸이 살아가야 할 과정이 너무 힘들게 느껴집니다.
이동훈목사 Jacob Lee(1984. 5. 4- 09. 28. 20 am 9:42) 36세
Wife / Rachel Tan Lee(1989. 12. 17-) 31세
Son / Zephaniah(2015. 9. 9-) 5세
Son / Jayden(2017. 6. 25-) 3세
Daughter / Kaelyn(2019. 6. 30-) 1세
몸과 혼으로만 생각하면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영으로 생각하면 가장 좋으신 하나님께서 몸과 혼으로는 알 수 없는 놀라운 계획을 갖고 있으므로 남은 가족들과 우리가 위로를 받습니다. 이제부터는 놀라운 주님의 계획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을 기도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The Spirit gives life; the
flesh counts for nothing. The words I have spoken to you are spirit and
they are life.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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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5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반을 잃은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전부 잃은 것이다.
건강할 때는 건강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건강에 무슨 문제가 닥쳐올 때는 비로서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대학 2학년 때 학군단(ROTC) 후보생에 응시하였으나 마지막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병명은 "폐결핵" 이라고 합니다.
결국 다음 학기부터 일 년간 휴학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체검사 결과를 부모님에게 알렸지요.
그러자 "너는 목사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죽을 수도 없다!"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 몹시 서운했습니다.
아들이 폐결핵으로 대학을 휴학해야 하는데도 아들의 건강은 문제가 없다고 확신하는 부모님의 마음은 도대체 무슨 마음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이번 기회에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이제는 물려받은 믿음이 아니라 내가 경험하는 믿음을 가져야만 목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삼각산 승리기도원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삼일 동안 물도 마시지 않을 것이고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십니까?"
"살아계시다면 나를 한 번만 만나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할텐데 만일 삼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응답이 없다면 그 이후에는 내 마음대로 내 길을 가겠다고 선언하고 기도원으로 올라갔습니다.
삼일동안 오직 한 가지 목적을 갖고 기도하며 살아계시다는 하나님을 뵙고자 했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삼일째 날 마지막 밤이 되어 오늘 밤만 지나면 나는 이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부푼 기대를 갖고 기도처소로 만든 작은 기도굴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속에서부터 뜨거운 눈물이 터져나왔습니다.
그 때 깨달은 것은 "나와 같은 더럽고 추한 죄인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겠다"고 하였는지 자신이 초라하고 부끄러워 더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작은 굴에서 나오자 아침 해가 떠 오르고 있었습니다.
배가 고픈 것도 없습니다.
목이 마른 것도 없습니다.
다만 기도원에서 여러 권사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도굴에서 내려오는 나를 보자마자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만났느냐?"
"무슨 은혜를 받았느냐?"
제가 권사님들에게 "무슨 환상을 본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했습니다. 무슨 은사를 받은 것도 없습니다. 다만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권사님들이 예배를 드리자며 찬송을 부르더니 제게 설교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대광고등학교 다닐 때에도 학급에서 가끔 홈룸(Home Room) 시간에 설교를 했었기에 마태복음 5장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말씀을 읽고 설교를 하는데 갑자기 방안에 시뻘건 불덩어리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불덩어리가 갑자기 내 속으로 들어오며 온 몸이 뜨거워졌습니다.
성령을 불과 같다고 하더니 이런 것이 성령이구나! 하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분명한 믿음을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무당이 되는 과정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가족 중에 누군가 무당이 되었기 때문에 그 모습을 늘 지켜보면서 무당이 되는 경우를 "세습무" 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가족들과 주위에 무당이 없었지만 어느 날부터 신병을 앓았기 때문에 신 내림을 받고 무당이 되는 경우를 "강신무" 라고 합니다.
부모님의 믿음에 의해서 목사가 되는 길을 "학습 목사"라고 한다면 이제는 학습에 의한 목사가 아니라 성령의 임재에 의한 "성령 목사" 라고 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세습에 의한 신앙이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신앙의 삶을 결단하는 새로운 삶과 신앙을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1부 생과 사에 대한 과정을 마치고 이제는 2부 부름의 길에 대해서 회고하는 은혜를 살펴보겠습니다.
11-02-20 오후 5:13
1차 수정 / 06-15-2024(토)
제1부 발송 대상자(10명)
이영심, 주미선, 조욱영, 김화자, 조경제, 최승희, 이복영, 김영희, 서순선, 임원석
김선옥, 오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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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뉴욕에서
제2부는 한국에서 목회 여정을 정리합니다.
먼저 제3부 뉴욕에서 목회를 소개합니다.
3-1 서울 예수와 뉴욕의 예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2000년 7월 4일 저희 가족들은 뉴욕에 도착하여 새로운 삶의 자리를 펼치게 되었습니다.
마침 이 날은 미국의 독립 기념일이라 이미 뉴욕으로 이주했던 가족들(부모님과 세 형제들)의 환영을 받으며 모두 함께 모였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워싱톤의 작은 아버님의 아들 이요셉의 결혼 예식이 있어서 모든 가족들은 국내선을 이용하여 워싱톤으로 이동하여 결혼식에 참여하고(이영복, 김은신, 이승혁, 안화선, 이사무엘, 이다니엘, 이경혁, 전한영, 이광혁, 최명희, 이상훈, 이신혁, 권혜선) 첫 주일 예배를 워싱톤 중앙장로교회에서 드리고 뉴욕으로 돌아왔습니다.
뉴욕에서 첫 주간을 보내고 두번째 주일을 맞이할 때 주일 예배를 잠시 머물고 있던 동생 이광혁집사님댁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영복장로님, 김은신권사님, 안화선사모, 이사무엘, 이다니엘)
뉴욕에서의 사역이 시작된 것입니다.
뉴욕에서의 사역을 방문객으로 잠시 머물며 지켜본 것과 막상 현장에서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민 교회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서울 예수와 뉴욕의 예수가 다르다!"
이미 뉴욕에서 오랫동안 이민목회를 했던 선배들의 넉두리와 같은 고백이다.
과연 서울 예수와 뉴욕의 예수가 다르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어느 누군가의 고백처럼 한국에서 사역하는 것은 목회라고 한다.
외국에서 사역하는 것은 선교라고 한다.
그런데 미국에서 사역하는 것은 순교라고 한다.
그만큼 이민목회가 어렵다는 표현이라고 하겠다.
뉴욕에서는 교회를 설립하려면 먼저 회계사를 통하여 주정부에 등록을 해야 한다.
그리고 주정부 등록과 더불어 연방정부에도 등록을 해야 한다.
대부분 교회들이 주정부에만 등록을 하고 연방정부에는 등록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에서 사역하는 것은 목회라고 하고, 외국에서 사역하는 것은 선교라고 한다면 특히 미국에서 사역하는 것은 순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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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부름의 길에서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여호수아 24:15b)
이 성구는 저희 부모님 특히 어머님의 평생 좌우명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 성구를 구체적으로 깨닫게 된 것은 어머니 김은신권사님의 자서전을 정리한 후 형제들에게 한 부씩 전달하면서 저희 가족의 성구로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자서전에 대하여 형제들의 의견은 책으로 출판하기를 원하였으나 제가 반대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 사람들의 간증을 들을 때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 아니라 개인에게로 영광이 쏠려가는 느낌을 가졌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신앙의 본을 받아야 할 것은 마음에 새기고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은 힘으로 모아 완수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심리학 용어중에 '워비곤 호수 효과' 라는용어가 있습니다.
1970년대 미국의 작가 게리슨 케일러는 라디오쇼 '프레리 홈 컴패니언(A Prairie Home Companion)'을 진행했습니다.
그것은 '워비곤 호수'라는 가상의 마을을 무대로 한 프로그램으로 이 마을은 '여자는 모두 강인하고, 남자는 모두 잘 생겼으며, 아이들은 모두 평균 이상인' 허구의 세계를 무대로 편성된 것입니다.
그런 세계를 가상하고 허구로 만든 마을임에두 불구하고 현실의 사람들도 이런 착각에 빠져 살아갑니다.
"우리애가 노력을 않해서 그렇지, 머리는 좋아요"
"착한 우리애가 나쁜 친구를 만나 이렇게 된거죠."
"저는 제대로 갔는데 저 사람이 운전을 험하게 한 겁니다"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과대평가하거나 약점에는그럴듯한 해석을 붙여 실제보다 나아 보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평균보다 더 낫다고 착각하는 경향을 심리학에서는 ‘워비곤 호수 효과’라고 합니다.
신앙은 가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각자 개인의 믿음과 결단에 의해서 결정될 것입니다.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책임을 짊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목회자로서 올바른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차라리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 모두에게 유익할 뿐만 아니라 덕이 될 것입니다.
2000년 7월 4일
이 날은 미국의 독립기념일 이었습니다.
저희 가족들이 한국을 떠나 뉴욕 땅에 도착한 매우 뜻 깊은 날입니다.
작은 아들 다니엘은 선천적으로 "자베트 증후군"이란 증세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병명을 알았던 것이 아니라 발육이 다른 아이들보다 다소 늦었기에 원인을 찾아 여러 병원을 찾았으나 호르몬 계통의 문제라고만 판명되어 그 계통의 약을 복용하려고 시도하면 모든 약을 토해내므로 약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마침 세브란스병원에 뉴욕에서 들어오신 고창준박사를 소개받고 진료를 한 결과 "자베트 증후군" 이란 병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담당 의사의 소견은 치료가 아니라 재활을 받는 것이 중요하므로 뉴욕에 가면 여러 종류의 프로그램이 있으므로 뉴욕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에 따라 뉴욕으로 이주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뉴욕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믿음의 고향 온산에서
장로회 신학대학 신대원을 졸업할 무렵 장로교 총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서는 두 가지 과정을 결의 했습니다.
첫째는 개척교회를 2년 이상 목회해야 한다.
당시 교계 분위기는 교회 확장과 전도에 힘쓰기 위한 목표를 정하고 이런 제도를 결정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특수목회를 2년 이상 목회해야 한다.
특수 목회란 기독교 학교에서 성경 교사로 활동하는 것과 또는 병원에서 환자들을 대상으로 상담과 기도하며 심신을 안정케 하는 사역을 목사 안수 조건으로 인정하는 제도라고 하겠습니다.
마침 모교 대광고등학교 교목 실장이셨던 김창주목사님께서 은퇴하실 때가 되었으므로 모교에서 봉사하기를 는 것이 어떠 성경 교사로 섬기자고 제안하셨습니다.
기독교 학교에서 성경 교사로 그것도 모교에서 교목으로 활동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친 신대원 후배가 제게 부탁하기를 "형님은 갈 곳이 많이 있으니 대광학원에 본인이 갈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하여 나는 평생에 단 한번 개척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개척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개척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이 없을 때 하루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꿈의 내용이 참 이상했습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제게 하얀 작은 상자를 건네주는 꿈이었습니다.
과연 이 꿈이 무엇일까?
처음에는 혹시 누가 죽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군부대에서 근무할 때 안전사고로 사병이 죽으면 영현 처리를 위해 화장을 한 후에 하얀 상자를 만들어 그 안에 시신을 화장한 후 처리한 것을 담아 국군묘지로 이송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죽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광나루 장로회 신학대학 앞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각종 신학 서적을 판매하시던 김재규집사님과 부인되는 집사님이 저를 붙잡고 한 가지 부탁을 하겠다며 울산 근처에 온산이라는 지역에 회사원들이 모여서 교회를 시작하려는데 설교자가 없다고 연락이 왔는데 주말에 울산으로 내려가서 주일 설교를 맡아 줄 수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마침 개척을 위해 기도하던 중이라 약속을 한 후 주말에 고속버스를 타고 울산으로 내려갔습니다.
울산 신정동 고속버스 터미널에 마중을 나오셨던 당시 박범식집사님과 최승희집사님을 만났습니다.
현재는 박범식장로님과 최승희권사님은 은퇴하신 믿음의 노장으로 지금까지 신앙의 좋은 동반자로 교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처음 사역지에서 만났던 믿음의 사람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박범식장로님(최승희권사님)
박장로님은 당시 회계 집사님으로 섬기셨는데 불시 가정에서 성장 후 믿음의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고 철저한 그리스도인으로 반듯하게 세워지는 모습에 모두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황규선목사님(이복영사모님)
황규선 목사님은 지난 6월 1일 암 투병 중 하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황규선목사님은 고려아연 황산부장으로 재직하셨습니다.
황규선부장님이 회사에 사표를 내고 성결교 신학대학원으로 진로를 바꿀 때 회사내에서는 예수님이 얼마나 좋으면 직장의 좋은 자리도 포기할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서윤덕권사님(김영희권사님)
서윤덕권사님과 김영희권사님은 주일마다 예배에 참여하면서 신앙의 터를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서윤덕권사님은 처음에는 부인을 교회에 데려다 주고 본인은 교회 밖에서 머뭇거렸으나 부부일심동체라는 말처럼 결국 신앙으로 하나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돌아보면 혼자인데......
돌아보면 혼자인데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동행하십니다.
돌아보면 혼자인데
가진 것 없는데
기도하니
천국이 나의 것입니다.
돌아보면 혼자인데
나약한데
기도하니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돌아보니
세상이 막혔는데
기도하니
하늘 문이 열려있습니다.
돌아보면 혼자인데
세상이 막막한데
기도하니
영원한 영생과 생명입니다.
돌아보면
내가 한 것 같은데
알고보니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아멘
1차 수정 / 06-22- 2024(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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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의 자서전을 출판하려고 어머님이 친필로 정리한 원고를 수정한 후에 컴퓨터에 입력한 후 작은 아버님 고 이원상목사님과(위싱톤 중앙장로교회 원로목사.1937∼2016. 12. 5) 형제들에게 한 부씩 전달했습니다.
형제들은 책으로 출판하기를 원했지만 아직 생존해 계신 어머님을 절대화 할 수 있으므로 살아계실 때에는 출판하는 것이 신앙의 덕이 아니라고 설명하므로 책으로 출판하는 것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2000년 7월 4일
가족들이 뉴욕 존 에프 케네디 공항으로 입국하였다.
이미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영주권 번호를 받았기에 입국 절차는 매우 간단하였다.
한국에서 이미 신체검사 자료를 준비하였기에 절차에 따라 공항을 나와 형제들의 환영을 받으며 첫 날을 맞이하였다.
이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의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있어서 모처럼 전 가족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미국에서의 사역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들 다니엘의 선천적 질병 "자베트신드롬"(한국 세브란스병원 소아과 고창준박사의 진단)에 대한 치료와 후속 교육이 목적이었다.
선천적 장애아를 위한 교육과 시설이 뛰어나다는 뉴욕으로 추천을 받았기에 이미 한국에서부터 필요한 자료들을 영문으로 번역하고 공증을 받아 준비하였다.
그러나 모든 일이 생각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구나!
한국에서 진단을 받은 결과에 따라 다시 진단을 받았을 때는 "댄디워커 증후군" 이라고 한다.
작은 뇌의 일부가 형성이 되지 않아 작은 뇌가 발달하지 않아서 나타나는 현상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그에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더구나 다니엘의 경우 외형적으로는 전혀 장애인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마치 정상인과 장애인의 경계선에 있는 것같다고 한다.
학술적으로는 이런 경우 아이큐(IQ)가 대략 40-50 정도라고 한다.
동물의 경우 영특한 개가 이런 정도의 지능지수를 갖는다고 하며 아무리 영특한 개라고 할지라도 글을 알 수 있겠느냐? 하며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래도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으로 우선 집에서 성경을 읽도록 훈련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마가복음을 읽는데 1장을 모두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모를 수밖에 없었다.
한 글자만이라도 말을 하도록 가르치고 노력한 결과 이제는 한글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으며 기초적인 영어 대화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의 마음을 만족하지 못하고 더 발전된 모습을 기대한다.
이것이 욕심일까?
아니면 바램일까?
이 ㄴ영ㄱ ㅗ에 ㅜ 서역ㅇ ㅜㅈㅇ
아ㅏㄹ고 읽고 쓰고 하ㅁ마이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왜냐하면 사람이란 "삶"의 주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예수를 믿는 내가 성경책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읽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비로서 복음이 전파될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7월 26일) 동서데이케어 사모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8월 2일부터 구은숙권사님께서 동서데이케어에서 네일 봉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사모님께서 재료비를 주시겠다고 하여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봉사는 권사님이 하실 것이며 재료비는 선교비에서 지출합니다.
재료를 구입한 금액이 $123이라고 합니다.
선교란 복음이 사람을 만나야 전달됩니다.
봉사자가 사람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 것입니다.
더구나 사모님의 경우 예전에는 교회에 출석하였으나 지금은 성당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에서 실망하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런 것이 복음이 아닐까요?
또 이런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닐까요?위장애인
러시아 작가 이반 끄르일로프가 지은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떤 사람의 집에 빈 자루가 하나 있었다.
가끔 걸레로나 쓰일 뿐 딱히 쓰임새가 없는 자루였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인이 그 자루에 금화를 잔뜩 담아서 금고 속에 넣자, 순식간에 귀한 존재가 되었다.
주인은 이 자루를 수시로 어루만지고 안을 들여다보며 기뻐했다.
뿐만 아니라 귀한 손님이나 친지들이 오면 이 자루를 열어 보여주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모두 아주 귀한 것을 대하는 손길로 자루를 쓰다듬고 어루만졌다.
이로 인해 자루는 자신이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자루가 으스대면서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척을 하지 시작했다.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면서 이런 저런 입바른 말들을 상황이나 분위기도 모르면서 마구 던져댔다.
사람들은 때로는 듣기 거북하고 불쾌하기도 하였지만 금화가 든 자루가 하는 말이라, 그 말을 높이 사는 척 굴었다.
그런던 어느 날 이 주인집에 도둑이 들어, 금화가 든 자루를 짊어지고 달아났다.
도둑은 금화만 빼고 자루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사라진 금화에만 관심을 가질 뿐 아무도 자루의 행방은 궁굼해 하지 않았다.
도시를 떠나지 마라!
뉴욕이란 대도시에서
마치 산속에서 살아가는
자연인처럼 멋지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기도합시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대도시에 적응하는
시티 미니멀 뉴 라이프(CMNL)
City Minimal New Life
새로운 삶의 가치를 창조하는
새로운 사역에 모두 힘을 모아 만들어 봅시다.
<랍비의 지혜와 함께하는 월요일 아침 5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평생을 사회 개혁 운동에 몸바친 자콥 리스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저임금 노동자, 온갖 범죄와 질병이 만연한 도시의 뒷골목 등을 카메라에 담아 미국이 각성하길 촉구한 인물로 유명하다.
애써 사회의 어두운 곳에 천착해 세계 최대 부국인 미국의 비극을 고발한 그였지만, 세상에 대한 증오로 시간을 보내는 빈민층 사람들에게는 항상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현실이 힘들고 고단할 때마다, 석공이 망치로 바위를 백 번 때려 금이 가게 하는 광경을 구경하러 간다. 바위가 백한 번재 망치질로 두 조각이 났다면, 나는 그것이 마지막 망치질 한 번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분명히 그것은 지난 망치질 백 번 덕분이기 때문이다."
척 콜슨은 [누가 하나님을 대변할 것인가]라는 책에서 미국의 대법관이었던 윌리엄 본 트레이저의 이야기를 했다.
트레이저 판사는 비교적 늦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지만,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 속에서 살았다.
어느 날 죄질이 나쁜 헤리 팔머라는 사람에 대한 재판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재판을 하다 보니 팔머가 교도소에서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고, “이 사람이 정말 변했구나!” 하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판사로서 공인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깊이 고민했다.
정상적인 판결에 의하면 한 10년쯤을 언도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트레이저 판사는 고민이 되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다. 교도하기는커녕 이 사람을 망칠 수도 있다.'
그는 금식 기도까지 하고 중대한 결단을 했다.
그리고 1년징역에 몇 년간의 사회봉사 명령을 판결했다.
이것은 파격적인 것이고,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이것 때문에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때 본 트레이저 판사는 주저 없이 대법관 사표를 냈다.
그리고 1년 후, 헤리 팔머가 형을 살고 출소하던 날 마중을 갔다.
그가 교도소에서 걸어 나올 때, 트레이저는 팔머를 끌어안았다.
팔머는 엎드려 굵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을 했다.
"판사님,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판사님,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본 트레이저는 그를 향해서 결연하게 말했다.
"이렇게까지라니요? 주님은 형제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목숨까지 주셨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