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 / 설교 원고(20181111)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설교의 동기 #.1)
교회가 세상의 빛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어둡게 하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을까 생각할 때 그 이유는 날마다 죽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설교의 동기 #.2)
기독교 신앙은 “죽음”에서 출발합니다. 죽음이 기독교 신앙의 출발이 되는 두 가지 배경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기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24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마가복음 8: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위하여 세 번 기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39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태복음 26:42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마태복음 26:44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고, 기독교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날마다 죽기 위해서는 항상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6: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렇다면 날마다 죽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화가 렘브란트는 '예술가에게 행복은 독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화가 렘브란트의 말을 오늘의 기독인들에게 적용한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의 복은 타락의 지름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복을 소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도 살고 세상도 살 수 있습니다.

모멘토 모리(Momento Mori)
로마의 전성기 때에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이 백마를 타고 로마 시내로 들어올 때 대열의 뒤에 ‘모멘토 모리’ 라고 외치는 사람을 고용하여 크게 외치게 하였다고 합니다. ‘모멘토 모리’는 “지금은 네가 개선장군이 되어 로마 시내로 들어오지만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죽는다는 고백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믿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첫째는 부활의 소망
둘째는 십자가의 길

첫째는 부활의 소망

고린도전서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전서 15장을 부활장이라고 합니다. 부활장이란 십자가의 죽음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고린도전서 15:1∼9
①.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②.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③.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④.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⑥.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⑦.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⑧.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⑨.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예수를 믿고 복을 받으셨습니까?
무슨 복을 받으셨습니까?

최근에 어느 기독교 신문에 “간증이 한국교회를 망쳤다!” 라고 소개된 기사를 읽었습니다. “간증이 한국교회를 망쳤다!” 충격적인 주제입니다.

간증이란 영어로 “테스티모니(Testimony)” 라고 합니다. 테스티모니를 번역하면 “증언” “증거”라고 합니다. 간증이란 “내가 드러나는 발언이 아니라 내 삶을 통해서 내가 믿는 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간증의 내용에는 필연적으로 고백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둘째는 내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셋째는 하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과 하나님을 만난 후의 내 삶은 어떻게 다른가?

그런데 한국교회에서 소개되는 간증이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처럼 시작하여 결국에는 자기를 자랑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를 믿고 망하던 사업이 잘 되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고도 예수를 믿는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고 받은 복과 세상 사람이 받은 복이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를 믿고 건강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당으로부터 신병 치료를 받아 병을 고친 사람과 유명한 의사를 만나 치료를 받고 회복된 사람과 다를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를 믿고 복을 받아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지위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아도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예수를 믿고 받은 복과 세상 사람이 받은 복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고 받은 복은 무엇일까요?
그 복은 날마다 죽을 수 있는 복이라고 하겠습니다.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은 이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죽겠다! 죽겠다! 한다고 죽을 수 없습니다. 살겠다! 살겠다! 한다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죽어서도 살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산다는 것은 죽어서도 영원히 살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런 은혜를 사모하시고 또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일생을 사는 것은 날마다 자기를 죽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 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돈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옛 사람이 죽고 작은 희생을 통하여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 새로운 내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과거에 대하여 죽은 자요, 욕심에 대하여 죽은 자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죽은 자로 고백하고 예수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두 형제가 선산에 있는 묏자리 중 가장 명당인 자리를 놓고 서로 자기가 묻히겠다고 싸웠습니다. 결국 두 형제는 지혜로운 노인에게 해답을 구했을 때 노인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먼저 죽는 사람이 차지하는 것이 좋겠네. 자, 그럼 누가 먼저 죽을 텐가?”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둘째는 십자가의 길

바울이 가이사랴 빌립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 아가보 라는 선지자가 찾아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고 예언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가보의 예언을 듣고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그때 바울은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도 바울은 주저하지 않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을 것도 각오하였다는 믿음입니다.

바울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 신앙은 죽음으로 시작하며 죽음은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는 은혜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시대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고 절망할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결단하고 처음 사랑을 되찾아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기도를 회복하여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은혜를 함께 누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태복음 16: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