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생활(육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


영적 생활(에베소서 6:12)


영적 생활은 영적 예배와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영적 생활에 성공하면 영적 예배에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영적 생활에 성공할 수 없을 때는 영적 예배에도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영적 생활을 신앙생활과 생활신앙 두 가지 측면으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신앙생활(信仰生活)이란 쉽게 설명한다면 “교회 중심의 생활” 이라고 하겠습니다.
생활신앙이란 “예수 중심의 생활” 이라고 하겠습니다.

순교자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자리에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그리고 제게 돌은 던지는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며 돌을 던지는 무리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 무리들 가운데 사울이란 청년이 함께 있었는데 스데반의 순교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 예수가 누구이기에 자기 목숨을 던지면서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잘못된 신앙의 길을 걷는다고 확신하며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심지어 잡아다가 예루살렘 공회에 고소하는데 스데반의 신앙은 무엇이고 나의 신앙은 도대체 무엇인가?

한국교회사에서도 이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순교자 주기철목사는 일본 형사들로부터 온갖 고문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나무송판에 못을 거꾸로 박아놓고 그 위를 맨발로 걸어가라고 합니다. 발바닥에 뾰쪽한 못이 박히며 붉은 피가 떨어질 때에도 목사님은 찬송을 부르며 그 위를 걷습니다. 보다 못한 일본 형사는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며 멈추게 합니다.

스데반과 주기철목사는 왜 그런 고통과 핍박을 견딜 수 있었습니까?
만일 신앙이란 교회에서만 행동하는 것이었다면 결코 그와 같은 고통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예수 중심이었다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고통의 자리에서도 예수님을 찬송할 수 있었고 증거 할 수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생활신앙이란 신앙이 내 삶을 통하여 삶의 현장에서 증거 되는 신앙을 말합니다.
반면에 신앙생활이란 신앙이 소통되는 자리에서만 드러나는 신앙을 말합니다. 교회에서는 대부분 거룩한 모습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밖에서는 도저히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이런 신앙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생활신앙이란 일상생활에서 주 예수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이란 유대의 젊은이들은 바벨론 왕이 세운 금으로 만든 신상에 절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의 신앙은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믿음의 대상이며 경배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왕은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을 평소보다 일곱 배 더 뜨거운 풀무불 속에 세 젊은이들을 던져 넣으라고 명령합니다.

바벨론의 군사들이 세 젊은이들을 결박하여 풀무불 속에 던져 넣는데 바벨론의 군사들은 너무 뜨거워 그 불에 타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세 젊은이들은 풀무불 속에서 쓰러지지도 않고 걷고 있었는데 그 곁에는 또 한 사람이 함께 동행 하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왕은 너무 놀라서 세 젊은이들에게 풀무불 속에서 나오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세 젊은이들은 머리털 한가락도 불에 그슬리지 않고 풀무불 속에서 당당하게 걸어 나왔습니다. 바벨론 식의 생활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 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오늘 우리들은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영적생활을 위한 신앙생활과 생활신앙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에베소서 6장 12절의 말씀을 함께 읽으며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영적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혈과 육이란 세속적 방법과 가치를 말합니다.
세상이 마치 돈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 집니다. 그러나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돈이 아니라 돈으로 보게 하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린 다윗이 블레셋 장군 골리앗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나가서 싸우겠다고 한 것은 어린 마음에 울컥하는 분노가 아닙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는 것은 골리앗과 같은 장군이 아니라 세상을 움직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왕의 갑옷으로 다윗을 무장시키려고 합니다. 왕의 갑옷이 어린 다윗에게는 갑옷이 아니라 거추장스런 것입니다. 어른들은 세상을 여전히 갑옷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갑옷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라고 외치며 평소에 다윗이 사용하던 물매 돌을 갖고 골리앗 앞에 나갔습니다. 다윗의 형은 동생 다윗에게 너는 집에서 양이나 지켜야지 왜 이런 곳에 나타났느냐고 책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만군의 여호와이심을 확신합니다.

혈과 육이란 세속적인 가치와 세상 방법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영적 싸움의 대상을 두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는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둘째는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것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을 갖는 통치자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통치자들을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라고 합니다. 어두움은 빛이 들어가면 모두 물러가야 합니다.
어두움은 참된 것이 아니라 거짓입니다.

거짓의 힘과 능력 앞에서 진실과 참된 것이 물러서거나 아니면 무너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수고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싸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고린도서 14:20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시편 37:27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아모스 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찌어다.

악을 악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이기라고 하셨습니다.
악을 선으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기적을 일으키거나 사람이 행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므로 이기는 것만이 아닙니다. 악으로 하여금 다시는 악한 일을 할 수 없도록 완전하게 물리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 사정을 들었던 어느 분이 너무 마음이 아파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며 목사님, 힘내세요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위로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번 주부터 당장 예배할 수 없다면 저희 사업장에 오셔서 예배하세요!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며 만난 적도 없는 사람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닐까요?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 교회 밖의 사람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팔아넘기려는 유다와 같은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또는 교단 안에서도 그런 사람을 앞으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방법으로 싸우면 그것은 선한 방법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방법으로 싸워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생활을 잘 하려면 믿음의 흔드는 주된 세력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에덴동산을 낙원과 같다고 말합니다.
낙원이란 악한 것이 없는 가장 아름다운 장소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 간교한 뱀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뱀의 간교함은 하늘에 있는 악한 영의 도구로 등장한 것입니다.

뱀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하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창 3:1b)

여자가 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2∼3).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도록 유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와에게 말씀하셨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하와는 남편 아담으로부터 정확하게 그 말씀 즉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을 전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한 몸입니다. 한 몸이란 아는 것도 하나가 되어야 하고 믿는 것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 부부가 되었으면서도 아직 믿음으로 하나 될 수 없고 아는 것도 하나 될 수 없었다면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신 후에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므로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우셨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창 2:18).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달하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정체가 곧 악한 영들입니다. 영적 생활을 하면서 자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혈과 육에 대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화를 잘 내는 사람에게 왜 화를 내느냐? 하고 묻는다면 내 성질이 그렇다고 말합니다. 성질을 그렇게 만들고 반응하도록 주도하는 세력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거하는 악한 영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면 얼마든지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사 시대에 기드온이란 인물은 아주 연약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겁이 많았던지 밀을 타작하며 넓은 마당에서 타작을 하지 못하고 포도주 틀 속에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습니다. 겁이 많고 두려워하던 기드온이 용사로 돌변하여 주위 적들을 당당하게 물치 칠 수 있는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것이 악을 선으로 이길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활에 성공하려면 두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주관하는 어두움의 세력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신앙생활의 범위를 이제는 생활신앙의 자리로 확장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경은 이 시대의 풍조를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는 적그리스도의 등장(요한일서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 인줄 아노라.

적그리스도의 특징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부정합니다. 육체의 몸으로 세상을 어떻게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느냐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타난 영지주의 사상을 말합니다.

적그리스도라는 용어가 신약성경에서만 4번 사용되었습니다(요한일서 2:18, 2:22, 4:3, 요한이서 1:7)

요한이서 1:7,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둘째는 기롱하는 자들(유다서 1:18)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기롱하는 자들이란 믿음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신앙생활은 잘 하면서도 생활신앙은 무시하는 사람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셋째는 불법의 성행(마태복음 24:12)

마태복음 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Because of the increase of wickedness, the love of most will grow cold. 

사랑이 식어진다는 것은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삶을 말합니다. 사랑은 용서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의 특징은 지켜줄 수 있는 신앙입니다.

노아가 포도 농사 후에 어느 날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습니다. 안방에 누워 벌거벗고 잠이 들었을 때 “함” 이란 아들이 방에 들어갔다가 아버지가 벌거벗은 것을 보고 두 형제들 “셈”과 “야벳”에게 아버지의 모습을 알렸습니다. 함이 두 형제들에게 했던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런데 잠에서 깬 후에 노아는 함을 저주했다고 합니다.

함의 잘못이 무엇일까요?
함의 잘못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한 것뿐입니다. 함은 내가 본 것을 본 그대로 전달한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아버지가 아들을 저주했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왜 함을 저주했을까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즉 가족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용서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스데반의 간구는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기도이었습니다. 정말 기도하는 사람은 용서하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는 기도가 무르익어 성숙할 때 행동까지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어느 수요일 날 수요기도회를 마치고 교인들이 모두 삶의 자리로 돌아갈 때 마침 어느 장로님의 부인되는 권사님에게 집사님이 “권사님, 요즈음 왜 장로님은 수요기도회에 나오시지 않아요?” 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권사님은 “나도 잘 몰라요! 그런데 공장의 일이 요즘 바쁘다고 해요! 나도 우리 장로님 미워 죽겠어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권사님에게 “권사님, 장로님을 주님이 사랑하시는데 주님이 사랑하는 장로님을 권사님이 미워하면 될까요?” 그러자 권사님께서 “잘못했습니다. 제가 더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당회로 모였을 때 마침 그 장로님에게 수요기도회를 마치고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후 장로님은 수요기도회에 정말 열심히 참석하셨는데 외지로 출타하는 일이 없다면 반드시 그 시간을 지켰습니다.

사랑은 지켜줄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장왈복이란 사형수에 대한 누나의 사랑은 누가 들어도 충격적입니다. 왜 모두가 외면하는 사형수를 그토록 가까이 다가가서 감싸주고 사랑하려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남매지간이기 때문이며 누나의 마음에는 동생의 생명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용서할 수 있는 사랑
지켜줄 수 있는 사랑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사람의 모습을 고린도전서에서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는 육에 속한 사람(the Natural Man)
- 재능에 붙잡힌 사람
* She took to flying like a natural.(그녀는 마치 타고난 듯이 비행에 빠져들었다.)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일은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이며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입으로만 우리 교회 주인이 예수님이라고 말만 하지 말고 진심으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려면 먼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둘째는 육신에 속한 사람(the Carnal Man)
- 육욕에 붙잡힌 사람(sexual desire, sex drive, (formal) carnal desire, (formal) libido) 

고린도전서 3:1∼3,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셋째는 영에 속한 사람(the Spiritual Man)
- 영적 지도자(a Spiritual Leader) 

고린도전서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영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16절을 읽겠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스데반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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