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주일 설교 원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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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설교 목록

2016. 1. 3 - 2016. 12. 25

설교제목

본문

시일

비고

1

쉬지 말고 기도하자!

살전 5:17

1. 3

신년주일

2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예레미야 33:3

1. 10

1월 성구

3

그리스도의 고난

벧전 2:18-25

1. 17

베드로전서

4

남편과 아내

벧전 3:1-7

1. 24

베드로전서

5

그의 나라와 그의 의

마태 6:33

1. 31

2월 성구

6

신앙의 유업

벧전 3:8-12

2. 7

베드로전서

7

고난에 대한 신앙

벧전 3:13-17

2. 14

베드로전서

8

예수님의 순종

벧전 3:18-22

2. 21

베드로전서

9

염려와 기도

빌 4:6-7

2. 28

3월 성구

10

남은 때

벧전 4:1-6

3. 6

베드로전서

11

마지막 때

벧전 4:7-11

3. 13

베드로전서

12

시련의 때

벧전 4:12-19

3. 20

고난주일

13

부활의 증인

행 2:22-32

3. 27

부활주일

14

정직한 자의 기도

잠 15:8

4. 3

4월 성구

15

바람직한 장로

벧전 5:1-6

4. 10

베드로전서

16

은혜의 하나님

벧전 5:7-11

4. 17

베드로전서

17

기도와 찬송

야고보 5:13

4. 24

5월의 성구

18

어린이와 천국

마가 10:13-16

5. 1

어린이주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출 20:12

5. 8

어버이주일

20

은혜에 굳게 서라

벧전 5:12-14

5. 15

베드로전서

21

창조주 하나님

창 1:1-5

5. 22

사도신조 1

22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

대하 7:14

5. 29

6월의 성구

23

아버지 하나님

신 32:1-7

6. 5

사도신조 2

24

주 예수 그리스도

마태 16:13-20

6. 12

사도신조 3

25

성령의 인도

갈 5:16-26

6. 19

사도신조 4

26

거룩한 교회

엡 1:17-23

6. 26

사도신조 5



설교제목

본문

시일

비고

27

기도를 들으시는 주

시편 65:2

7. 3.

7월 성구

28

성도의 복

시편 119:1∼8

7. 10

시편 119

29

성도의 행실

시편 119:9∼16

7. 17

시편 119

30

성도의 눈

시편 119:17∼24

7. 24

시편 119

31

성령으로 기도하라

유 1:20-21

7. 31

8월 성구

32

성도의 회복

시편 119:25-32

8. 7

시편 119

33

성도의 마음

시편 119:33-40

8. 14

시편 119

34

성도의 묵상

시편 119:41-48

8. 21

시편 119

35

성도의 소유

시편 119:49-56

8. 28

시편 119

36

정근기도

베드로전서 4:7

9.  4

9월 성구

37

성도의 은혜

시편 119:57-64

9. 11

시편 119

38

성도의 고난

시편 119:65-72

9. 18

시편 119

39

성도의 위안

시편 119:73-80

9. 25

시편 119

40

기도에 힘쓰라

골로새서 4:2

10.  2

10월 성구

40

성도의 영혼

시편 119:81-88

10.  9

시편 119

41

성도의 증거

시편 119:89-96

10. 16

시편 119

42

성도의 발

시편 119:97-104

10. 23

시편 119

43

반석 위에 세운 교회

마태 16:13-20

10. 30

종교개혁일

44

회복을 위한 기도

요나 2:1-10

11.  6

11월 성구

45

성도의 삶

시편 119:105-112

11. 13

 

46

감사하는 사람

시편 136:1-7

11. 20

추수감사주일

47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44

11. 27

12월 성구

48

십일조 신앙

창세기 14:17-24

12. 4

 

49

너희 신앙을 확증하라

고린도후서 13:5

12. 11

 

50

영의 사람으로 살아가자

요한 6:60-65

12. 18

 

51

성육신

요한복음 1:14

12. 25

 

52

 

 

 

 



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6-1-3

 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7)


뉴욕나사렛교회 표어는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순종하자!’ 입니다. 그리고 2016년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순종하기 위한 실천 목표는 ‘쉬지 말고 기도하자!’입니다.

2016년 첫 주일을 맞아 ‘쉬지 말고 기도하자!’ 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참조 - 2015년 10월 14일 수요 기도회, 쉬지 말고 기도하자!)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부터 18절의 말씀은 대부분의 성도들이 기억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다 같이 말씀을 기억해 보겠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문법적으로 이 말씀은 명령문이라고 합니다. 명령이란 무조건 따라야 합니다. 어떻게 쉬지 말고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쉬지 말고 기도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기도한다는 동사를 수식하는 세 가지 부사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항상(always)(evermore)

쉬지 말고(continually)(without ceasing) 

범사(in all circumstance)(In every thing) 


따라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명령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항상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기도하라!


첫째, 항상 기도하자!

- 항상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실망이 없다.


항상(恒常, constancy, always, at all times, continually, constantly)이란 늘, 언제나를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18: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시편 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히브리서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항상 기도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생활화해야 합니다.

기도가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생활화는 기도하는 시간과 기도하지 않는 시간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생활이 하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수도원에서 사용하는 ‘기도는 노동, 노동은 기도’ 라는 표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도와 생활을 하나 되게 하려면 생활하는 것에서 문제가 된 것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엘가나에게는 한나와 브닌나라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습니다. 브닌나는 자식이 있었지만 한나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엘가나는 두 부인과 자녀들을 데리고 실로에 올라가 매년 제사를 드렸는데 한나에게는 갑절의 제물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것이 브니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혔습니다. 마음이 상한 한나는 통곡하며 기도하기를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한나는 문제를 기도했습니다. 그 문제가 해결되어 아들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항상 기도하려면 내 삶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문제를 기도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기도는 문제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아닌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요나는 문제를 만들고 그 문제에서 해답을 찾아낸 선지자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가 아니라 니느웨의 반대 방향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라탔습니다. 요나가 타고 있던 배가 순탄하게 항해를 하던 중 갑자기 풍랑을 만났습니다. 선원들과 승객들은 모든 짐을 바다로 던졌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풍랑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섬기는 신을 향하여 기도할 때 요나는 배 밑창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문제가 일어났을 때에도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선장은 요나를 깨우며 지금은 잠을 자야 할 때가 아니라 깨어 기도해야 할 때라 요나를 깨웠습니다. 요나가 눈을 뜨자마자 깨달은 것은 이 문제가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를 바다로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습니다. 내가 문제를 깨닫는 순간 풍랑은 가라앉습니다.


문제를 찾아내고 그 문제를 기도하므로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는 항상 기도하는 사람으로 세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 쉬지 말고 기도하자!

-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패배가 없다.


쉬지 말고란 중단하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려면 내가 하는 일을 기도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승화시키려면 뜨거운 열이 필요합니다. 뜨거운 열이란 에너지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물이 끓으면 수증기가 됩니다.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어 비가 되기도 하고 눈이 되기도 합니다. 물이 보이지 않는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려면 짧은 시간이 아니라 물을 끓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매 순간 기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때로는 뜨거워지기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제자들과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감람산에서 돌아온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락에 모여 기도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때 모였던 120명의 무리들이 성령강림이란 체험을 하였고 그 결과 초대교회가 부흥할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며 기도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주님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며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할 때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무엘상 7:8,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어거스틴은 방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었을 때 암브로시우스 감독을 찾아갔습니다. 암브로시우스 감독은 모니카에게 ‘기도하는 자식은 망하지 않습니다!’ 하며 어머니를 위로 했습니다. 어머니의 쉬지 않는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소개합니다.

어거스틴은 도저히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만 있다면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을 정말 믿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어머니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방탕한 삶에도 진력이나 곤고해진 어거스틴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정말 살아계신다면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당신을 보여 주십시오. 나도 믿고는 싶지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진절머리 나는 삶에서, 당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당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던 어느 날 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파도가 철썩 밀려왔다 밀려가는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 위로 그의 발자취를 남기며 걸어가고 있는데 한 소녀가 홀로 앉아 모래구덩이를 파 놓고는 하얀 조개껍데기로 바닷물을 떠 담고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물었습니다. 

‘얘야, 거기서 혼자서 뭘 하고 있니?’
‘예, 아저씨, 바닷물을 이 모래구덩이에 퍼 담고 있는 거예요.’
‘바닷물을? 그래 그 바닷물을 얼마나 퍼 담으려고?’
‘저 바닷물을 다 이 모래구덩이에 퍼 담을 거예요.’
‘얘야, 바다가 안 보이니? 바다가 얼마나 넓고, 바닷물이 얼마나 많은데, 그 작은 조개껍데기로 그 작은 모래구덩이에 다 퍼 담을 수 있겠니?’ 
‘그렇지만, 계속 퍼서 담다가 보면 언젠가는 바닷물이 다 마를 것 아니예요?’
‘얘야, 그렇지 않단다. 저 큰 바다를 그 작은 모래구덩이에 담기란 불가능하단다. 네가 종일 퍼 담았어도 바닷물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잖니?’
‘그렇지만 아침부터 계속 물을 떠서 담았으니까 조금은 줄어들었을 것 아니예요?’
‘아니란다. 네가 퍼 담는 바닷물보다 강에서 바다로 흘러들어 오는 물이 훨씬 더 많은 걸. 또 네가 모래구덩이에 바닷물을 떠 담아도 바닷물은 모래 속으로 스며들고 말지 않니? 해가 저무는데 빨리 집으로 돌아가려 무나, 부모님이 걱정하신단다.’
그 때 그 소녀가 어거스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아저씨! 저 바다보다 큰 하나님의 세계를, 조개껍데기보다 작은 아저씨의 생각으로, 모래구덩이 만한 아저씨의 머릿속에 담는 일이 훨씬 더 어렵지 않을까요? 아저씨의 인생이 저물고 있어요. 아저씨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가 가까워지고 있어요.’ 
어거스틴은 깜짝 놀라서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예사롭지 않은 꿈을 통해 자기의 보잘 것 없는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받아들였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에 대한 톨스토이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외딴 섬에 세 명의 러시아 수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곳에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주교가 세 명의 수사들이 살고 있는 외딴 섬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주교가 수사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수사들이 주기도문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교는 정성껏 수사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방문을 매우 만족해하며 그 섬을 떠났습니다. 주교가 타고 있던 배가 섬을 떠나 먼 바다로 나갔을 무렵 갑자기 세 명의 수사들이 물위로 뛰어와서 주교에게 ‘주교님,  가르쳐주신 기도문을 잊어 버렸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주교는 눈앞의 광경에 깜짝 놀라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기도하는가?’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수사들은 ‘사랑하는 하나님, 저희도 셋이고, 하나님도 세 분이시니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기도문을 가르쳤던 주교는 수사들의 거룩함과 단순성에 감격하여 ‘그대들의 땅으로 돌아가 평안히 거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톨스토이의 기도에 대한 교훈은 쉬지 말고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하는 것처럼 일하고 일하는 것처럼 기도하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모든 수도원에는 ‘기도는 노동, 노동은 기도’ 라는 표어가 붙어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명령은 다른 일은 하지 말고 오직 기도에만 전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일과 기도를 구분하지 말고 일을 하듯 기도하고 기도하듯 일을 하라는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모압 여인 과부 룻은 여자로서의 행복과 소망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붙잡으려고 과부가 된 시어머니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을 찾아왔습니다. 시어머니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려고 추수가 끝난 밭에 나가 추수하며 떨어진 곡식을 주웠습니다. 소망의 하나님께서 보아스라는 사람을 통하여 룻에게 많은 곡식을 얻게 하였고 룻은 보아시의 아내가 되어 남편 가문의 기업을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범사에 기도하자!

- 범사에 기도하는 사람은 형통함을 누린다.


범사(凡事, all matters, all things, everything)란 모든 일, 사사로운 일을 의미합니다. 매우 중요한 일도 있지만 아주 평범한 일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입학시험은 중요한 일입니다. 반면에 매일 같이 출근하는 일은 평범한 일입니다. 중요한 일에는 기도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평범한 일에는 기도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기도하는 것은 중요한 일에도 기도하고 평범한 일에도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범사에 기도하는 일에 본을 보였던 사람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창세기 12:7-8,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단을 쌓았다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은 곧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기도했습니다.


범사에 기도하려면 기도하는 마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사무엘하 7:27, (역대상 17:2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창세기 24:1,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아브라함의 삶의 특징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았습니다. 단을 쌓았다는 것은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왜 기도해야 했습니까? 편하게 살 수 있는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정착해야 하기에 의지할 대상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창세기 39:3,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베이컨은 사람을 세 종류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거미와 같은 사람

거미는 어둡고 구석진 곳에 거미줄을 치고 거미줄에 걸린 곤충을 잡아먹는 일을 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개미와 같은 사람

개미는 부지런히 일만 합니다. 자기가 먹을 것을 모아 창고에 쌓기만 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세상에서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꿀벌과 같은 사람

꿀벌은 꽃송이에서 꿀을 얻고 꽃가루를 다른 꽃에 옮겨 주어 열매를 맺게 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세상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이 요구하는 사람은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2016년 모든 성도들이 쉬지 말고 기도하여 세상이 필요로 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바르게 세워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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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2016-01-10)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NIV. Call to me and I will answer you and tell you great and unsearchable things you do not know.   

CEV. Ask me, and I will tell you things that you don't know and can't find out.


2016년 1월의 성구 - 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18세기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 때 윤리적 도덕적 영적으로는 타락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시골에서 살길을 찾아 런던으로 올라온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가까스로 전당포에 취직을 했습니다. 아침마다 골목을 청소하기 위해 가게 문을 열 때마다 지난밤의 광란이 지나간 거리를 바라보면서 마음 아파했습니다. 어린 소년은 하나님을 향하여 울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살아 계십니까? 런던 거리에 희망이 있습니까?” 성경책을 펼쳐들었을 때 그는 시편 5편 3절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아침마다 하나님 앞에 빗자루를 손에 들고 거리를 쓸기 전에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쓰는 것은 런던 거리지만 이 민족의 쓰레기 같은, 영적인 쓰레기를 치우는 내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이 도시를 깨끗하게 하는 청소부가 아니라 이 백성의 영혼을 청소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내가 복을 받아서 내가 받은 복으로 이 도시를 살리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나를 영향력 있는 인물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내가 변화되어져서 이 영향력으로 이 시대를 살리는 인물이 되고 싶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리더십이 영향력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누군지 아십니까? 당대의 영적인 거성, 산업혁명시대 영국을 살려냈던 인물 구세군의 창설자 윌리엄 부스대장입니다.


2015년 1월의 성구 -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2014년 1월의 성구 -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레미야서는 BC 587년경 남 유다의 예레미야 선지자가 왕궁의 감옥인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 하나님이 주신 예언으로 위로의 책(The Book of Consolation) 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Jeremiah) - 여호와께서 던지신다(Jehovas hurls)


예레미야는 스바냐, 하박국, 다니엘, 에스겔과 동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이었다.

시기는 대략 기원전 627년부터 580년까지 라고 하겠다.

이 시대는 격동기의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시리아제국의 몰락과 바벨론 제국의 발흥이라는 역사적 전환점에서 활동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다의 마지막 네 왕들의 시대에 나라의 종말에 대해서 에언 하며 실제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목도하기도 했습니다.

유다 나라는 주전 586년경에 바벨론 군대(갈대아 군대)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의 포위 끝에 결국 식량이 동이 나서 유다 왕과 군대가 밤중에 성벽을 뚫고 도망을 치다가 뒤쫓아 온 바벨론 군대에 잡혀서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다 나라는 망하고 다윗 왕조는 400여년 만에 종식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BC 588년 유다는 바벨론의 3차 침입을 받아 예루살렘 성을 포위당했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성을 공격하지 않고 성 주위에 진을 치고 1년 6개월 동안 성이 무너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성안의 왕과 백성들은 먹을 양식이 없어 밤중에 성벽을 뜷고 몰래 탈출을 시도하다 바벨론 군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이때가 BC 586년 경이었습니다. 다윗의 왕국은 400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대의 왕과 백성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왕은 선지자 예레미야의 외침을 듣고 왕궁의 감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감옥에 갇힌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찾으면 반드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하나님의 손을 잡는 것이다!

마태복음 8장에 한 문둥병자가 산에서 내려오시는 예수님을 찾아와 절을 하며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고 간청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문둥병자는 그 자리에서 즉시 깨끗해졌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가정으로 시집을 오게 된 어느 부인의 간증입니다. 시댁은 철저하게 미신을 붙잡고 있는 집안이었습니다. 문에 게를 매달았는데 그 게가 부패해서 냄새가 진동합니다. 새댁은 썩은 게를 쓰레기통으로 집어넣었습니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그 다음 날 다시 게를 매달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새댁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이 집안에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게 하시고 제가 지은 밥을 먹는 모든 가족들이 십자가를 바라보게 해 주십시오!

새댁은 날마다 소리 없는 부르짖는 눈물의 기도를 무려 3년 동안 계속했습니다. 그러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남편과 시어머니가 먼저 예수를 믿기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능력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던 도마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부르짖는 기도는 주님의 손을 붙잡고 의심을 확신과 믿음으로 바꾸게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도마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도마의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손을 잡으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미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어야 할 신앙의 사람들이 믿지 못하기 때문에 부르짖도록 역사하십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간절한 기도는 절박한 기도입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잠언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누가복음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 대군의 공격을 받아서 어려움을 당할 때 적장으로 받은 편지, 하나님을 모독하는 편지를 가지고 성전에 올라가서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도우시는데 그 밤에 매복군을 보내셔서 185,000명의 앗수르 군을 다 시체가 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 후에 히스기야가 범죄해서 중한 병이 들어 곧 죽게 되었는데 그가 자기 죄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벽을 향하여 눈물로 통곡하여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생명을 15년이나 연장시키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첫째, 응답하리라


예레미야가 이 음성을 들었을 당시에 유다는 바벨론에서 벗어날 능력이 없었으며, 자신도 감옥에 갇힌 상황이기에 희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짖으라고 기도를 명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기도를 듣기 원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유다 백성이 징계를 당하는 이유도 바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부르짖으라고 기도를 명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놀라운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을 통해 명령하십니다.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리라” 


응답하시는 하나님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우상은 응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우상을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답한 마음을 위로받고자 하는 것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아합 왕 시대에 바알과 아세라신을 섬기고 크게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는 땅에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선지자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모으고 단을 쌓은 후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우는 신이 참 하나님이심을 증명해 보이자고 제안했습니다(열왕기상 18:19).


갈멜산 위에 두 개의 단을 쌓았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쌓은 단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엘리야가 쌓은 단이 세워졌습니다. 단 위에는 송아지를 잡아 각을 떠서 올려놓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였습니다. 먼저 우상을 숭배하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불을 내려달라고 외칩니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고함을 치고 자기 몸을 칼로 찌르며 피를 흘리고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선지자들이 아무리 부르짖어도 불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 쯤 엘리야는 자기의 제단을 쌓고 송아지를 각을 떠서 얹어 놓고 물을 몇 동이나 부어서 도랑까지 물이 차게 하고 난 다음 그는 꿇어 엎드려서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이때 하늘로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았다고 했습니다(열왕기상 18:36-38).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 바알과 아세라 신의 제사장들은 850명이 되어도 불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불로 응답하여 제물을 다 태웠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엎드려서 야훼 그는 참 하나님이라고 고함을 부르짖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늘에서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요한복음 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엄청난 약속이 아닙니까? 무엇이든지 큰일이나 적은일이나 가능한 일이나 불가능한 일이나 야훼께 기도하면 주님께서 시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나 많은 일에 주님께 기도하지 않고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해결하려고 하다가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의 기도를 무사하지 않고 응답하셔서 우리 생활에 간섭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들의 모든 범사 가운데 주님께 부르짖어 응답받는 축복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George Muller)는 일생 동안 3만 번 이상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다. 한번은 뮬러가 브리스톨 거리를 걷다가 많은 고아들을 보았습니다.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어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결심하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호주머니에 단돈 2펜스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그 돈을 가지고 고아원을 시작하여 60년 동안 만 명의 고아들을 돌본 고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뮬러는 고아들을 위해 간증을 다니고 사역을 알리며 후원요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기도에 헌신했습니다. 수많은 고아들을 돌보며 기도제목이 많았기에 기도노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기도제목이 생길 때마다 기도노트에 기록하고 끈질기게 기도했습니다. 기도제목이 응답되면 응답된 표시를 하거나 감사의 글을 적었습니다. 그의 기도노트에 수많은 기도제목들이 3천페이지 이상 빽빽하게 기록되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 기도 노트를 검토하여 보았더니 무려 3만 번 이상 기도가 응답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뮬러가 스스로 3만 번 이상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후세 사람들이 그의 기도노트를 보고 3만 번 이상 응답을 받은 위대한 기도자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조지 뮬러와 같이 기도 노트를 가지고 기록한다면 우리의 기도도 이미 응답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 믿음에 근거하여 땀과 눈물이 담긴 기도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축복인 이유는 하나님이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듣기만 하셔도 감사한데 응답해주시고 크고 놀라운 비밀을 보여주시니 축복입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입니다.


기도하고 나서 우리는 기도한 내용을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가장 적절한 때에 응답해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능력을 경홀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기도가 주는 축복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짖는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여 주십니다. 부르짖을 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시는 하나님

-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앞이 보이지 않고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 나와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들을 보여 주십니다.


16세기 종교 개혁자 존 녹스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의 영국의 여왕 메리 여왕은 캐톨릭 교도이었습니다. 개신교도들을 너무나 싫어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개신교도들을 죽였기 때문에 피의 여왕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모든 개신교도들과 존 녹스를 죽일 것이라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존 녹스는 하나님 앞에 피를 토하며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개신교도들을 지켜달라고, 종교개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메리여왕이 이유를 알지 못하는 중병에 걸려서 회복되지 못하고 죽어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 녹스 한명의 기도가 백만의 대군의 힘보다 더 강하다.” 그렇습니다. 한사람의 기도가 그 큰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도가 이 민족을 회복시키고 이 땅을 다시 부흥케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싱가폴에 하가이 인스티튜트라는 신학 훈련소가 있습니다. 동남아 지역에서는 아주 유명한 곳입니다. 이 훈련소를 설립한 사람은 미국의 존 학개목사입니다. 오직 제3세계의 복음화를 위하여 일생을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175개국 5만 명의 지도자들을 훈련하여 본국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도록 훈련시켰습니다. 그가 이렇게 큰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들 때문이었다고 간증합니다.


그의 아들은 산부인과 의사의 실수로 심한 불구자로 태어났습니다. 단 두 마디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예와 아니오 라는 두 단어 야와 음으로 표현했습니다. 24년 동안 불구의 몸으로 살다 주님께로 갔습니다. 그 어머니가 곁에서 아들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아버지 학개목사님이 제3세계 선교를 위해 집을 떠나면 그때부터 아들은 몸은 불구라는 감옥에 갇혀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생명의 영이 약동했습니다. 어머니가 지금 아버지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면 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학개목사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일을 이룩할 수 있었다고 염려를 극복하는 길이란 책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영적 전쟁터입니다. 악한 사단은 우리를 육신의 생각대로 살게 합니다. 늘 넘어지게 합니다.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불평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믿음의 말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성취하실 약속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약속을 신뢰하고 믿음의 말을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우리가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일들을 보여주십니다. 여러분 모두 믿음으로 선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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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6-1-17 베드로전서 강해 #.10

 그리스도의 고난(베드로전서 2:18-25)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받는 고난과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좀 더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먼저 고난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지난 목요일 아침에 박태임권사님께서 쓰레기를 버리려고 2층 계단에서 내려오시다가 실족하여 계단에서 뒹굴고 말았습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결과 목요일에는 왼쪽 갈비뼈 3개가 부러졌다고 하였습니다. 금요일 오전 중에 MRI와 CT 촬영을 마치고 다른 이상 증세가 없어서 오늘 오후 1시경에 유니온 스트리트 너싱홈으로 퇴원하여 재활치료를 받게 됩니다. 속히 완쾌되어 집으로 복귀하여 일상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일생동안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고 육신적으로 평안히 지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할 때는 반드시 그 어떤 원인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의 원인을 본문에서 찾아봅니다.


애매한 고난(19)

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부당한 고난 또는 억울한 고난이라는 뜻입니다.

NIV, unjust suffering 

KJV, suffering wrongfully 

NASB, suffering unjustly 


애매히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디코스(unjust)” 라고 합니다. 아디코스는 “부당하다”는 뜻입니다. 부당하다는 말은 억울한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부부싸움을 하던 옆집에서 화가 난 남편이 불을 질렀습니다. 그 불이 번져서 여러 집을 태워버립니다. 어린 아이들이 아파트 옥상에서 벽돌을 던졌습니다. 그 벽돌에 맞아 지나가던 사람이 그 자리에서 즉사합니다. 교통법규를 준수하며 운전을 하는데 갑자기 술에 취한 운전자가 충돌 사고를 일으켜서 전신마비가 되는 사고를 당합니다. 세상을 포기한 젊은이가 술에 취하여 지나가던 행인을 칼로 찔러 중태에 빠트리는 사건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애매히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이런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에도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셨는가 하며 신앙적으로 성찰하며 기도합니다.


이러한 자세를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던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지하 감옥에 갇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던 것과 같은 고난이라고 하겠습니다. 억울한 고난 가운데서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을 생각하려고 찬송과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감옥의 문이 열렸습니다. 감옥의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는 믿음으로 고난을 감당한 것입니다.


죄의 결과에 의한 고난(20a)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는다는 것은 죄의 결과로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은 30을 포기했지만 결국은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습니다. 죄의 결과에 의한 고난이라고 하겠습니다.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하던 중 풍랑 가운데서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큰물고기 뱃속에서 삼일을 지내며 회개했습니다. 죄로 인한 고난은 회개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선을 행하므로 받는 고난(20b)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선한 일을 하려다가 고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여리고 성으로 가는 길에 강도 만난 사람을 보살폈던 사마리아 사람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돌보려고 가던 길을 멈췄습니다. 자기의 주머니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과 정성을 더하여 그 사람을 여인숙으로 데려다가 보살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시간과 돈과 힘을 포기한 것입니다. 이것은 선을 행하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누가 이웃이냐 하며 어려운 사람의 이웃이 되었다고 칭찬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21)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제 우리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입니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은 믿음의 본

당나귀가 빈 우물에 빠졌습니다. 농부는 슬프게 울부짖는 당나귀를 구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마침 당나귀도 늙었고 쓸모없는 우물도 파묻으려고 했던 터라 농부는 당나귀를 단념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우물을 파묻기 위해 제각기 삽을 가져와서는 흙을 파 우물을 메워갔습니다. 당나귀는 더욱 더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웬일인지 당나귀가 잠잠해졌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궁금해서 우물 속을 들여다보다가 놀라고 말았습니다. 당나귀는 위에서 떨어지는 흙더미를 털고 털어서 바닥에 떨어뜨리며 발밑으로 흙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흙더미를 타고 점점 높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당나귀는 자기를 묻으려는 흙을 이용해서 무사히 그 우물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당나귀처럼 곤경의 우물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을 통해서 또는 때로는 환경을 통해서 고난의 흙이 내게로 떨어집니다. 그때에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고 흙을 털어버려야 합니다. 흙에 묻히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고 흙을 털어버리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고난의 흙을 털어버릴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인내를 갖고 고난을 통하여 내 신앙이 한 단계 올라갈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털어버리시려고 겟세마네 동산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고난이 내게서 물러가기를 기도하시다가 기도를 바꾸셨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고난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길을 선택하는 기도이었습니다.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은 우리들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그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드리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을 때마다 속죄의 제물을 바쳐야 죄를 해결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받으신 십자가의 고난은 단 한 번의 속죄 제물이 되셔서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속죄의 제물이 되셨다는 것을 믿으면 죄의 문제를 해결 받는다는 언약입니다.


그런데 죄의 문제만 해결하신 것이 아니라 때로는 육체의 질고도 해결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지난 번 이원상목사님께서 6주간 물리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마치고 워싱톤으로 가신 후에 두 주일 전에 최종 검사를 하셨는데 담당 의사가 암세포가 하나도 없다고 진단 결과를 알려주셨다고 합니다. 첫 번 진단에는 식도암 3기가 되어 반드시 수술을 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는데 이제는 암세포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결과를 의사의 오진인가? 아니면 약속의 말씀대로 모든 질병과 질고를 이미 담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에 의한 것인가? 저는 주님의 고난으로 이미 모든 질병과 질고를 해결하셨다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믿는 자들에게만 약속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지난 주간 한국에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갑상선 암으로 판명 받아 최고의 갑상선 암의 전문 의사에게 최종 검사를 의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원상목사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마가복음 16장 17절과 18절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기도하자고 권면했습니다.


오래 동안 예수를 믿는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성경의 가르침이 실생활에 적용되지 못하는 신앙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순종하는 신앙의 사람에게는 과거에만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의 능력은 동일하게 역사되는 줄 믿습니다.


왜 이와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신앙의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던 우리들을 신앙의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신앙


고난에 대처하는 신앙을 건강한 신앙과 병든 신앙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합니다.
고난이란 어떤 고난이든지 고난을 겪는 사람에게 모두 같은 고난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동일한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병든 신앙의 사람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반면에 건강한 신앙의 사람은 고난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알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온실에 다양한 화분들이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화분은 완전히 덮여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온실을 관리하는 관리인에게 “왜 저 화분은 덮어놓았느냐?” 라고 물었을 때 관리인은 “저 화분은 주위를 어둡게 해야만 뿌리가 깊이 내리는 식물” 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고난이란 믿음의 뿌리를 깊게 내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어둡고 침침한 고난과 같은 것이 덮여질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는 즉시 깨달아야 합니다.


의로운 사람 욥은 그에게 닥쳐온 고난을 통해서 나를 순수한 신앙의 사람으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고난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닭과 독수리는 위험 앞에서 전혀 다른 반응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폭풍이 몰려오면 닭은 몸을 날개에 묻은 채 숨을 곳을 찾습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펴고 태풍에 몸을 싣고 유유히 날아올라 안전지대로 향합니다.

인생의 폭풍을 만날 때에도 사람은 닭과 독수리와 같은 두 유형으로 구분됩니다.  고통스러운 일, 억울한 일, 괴로운 일이 닥치면 몸을 숨기는 닭과 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담대하게 대처하는 독수리와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담대하게 고통을 극복한 사람들에 의해 다시 쓰여 집니다. 서양 속담에 ‘북풍이 바이킹을 만들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나운 바람으로 인해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전했습니다. 모진 바람과 추위를 이겨내며 자란 나무는 좋은 목재가 됩니다.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은 나약한 닭에서 강한 독수리로 만들어 갑니다.

찬송가 441장은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 높이 일 때에’ 라는 찬송입니다.


이 찬송을 우리가 부를 수 있게 된 배경은 찬송의 가사를 지은 찰스 웨슬리목사가 어느 날 서재의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작은 새 한 마리가 매에 쫓겨 그의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새는 공포에 싸여 방안을 몇 바퀴 돌더니 푸드득거리며 조용히 앉아 있는 그의 옷자락 속에 숨었습니다. 찰스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서 새가 하는 대로 맡겨 두었습니다. 할딱거리던 새는 잠시 후 평안해진 듯 보였습니다. 그는 어린 새를 쓰다듬어 창밖으로 놓아 보내고 일어나 불현듯 그 마음에 떠오르는 찬송이 되었습니다.

이 찬송을 짓게 된 동기가 또 하나 있습니다. 아메리카에 가서 전도하려고 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귀국하는 도중 풍랑을 만나서 처참한 곤경을 넘긴 일이 있는데, 그때 위기 중에서 전심을 주께 맡기고 고난을 극복한 경험을 되새기며 지은 찬송이라고 합니다.

이 노래는 황야 같은 세상을 사는 인생들이 참 생명의 주를 신뢰하도록 하는 데 큰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풍랑을 만날 때는 주님께 나아갈 때입니다. 질병, 고통, 전쟁, 가정적 풍파, 개인적 풍파, 교회와 사회와 국가적 풍파는 주님께 나아가도록 하는 채찍입니다. 


고난을 당하여 쓰러진다면 네 힘은 아직도 약하다는 것이다.


자기의 고난은 참아야 하고 남의 고난은 돌보아 주어야 한다.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5: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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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베드로전서 강해 #.11(2016-1-24)

남편과 아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준비하며 소와 사자라는 우화를 생각했습니다.
소와 사자는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결혼했습니다. 소는 사랑하는 사자를 위하여 매일 들에 나가 신선한 채소를 가져왔습니다. 사자는 소의 정성을 생각하며 참고 채소를 먹었습니다. 사자는 산속에 들어가 신선한 고기를 가져와 소에게 주었습니다. 소는 사자의 사랑을 생각하며 고기를 먹었습니다. 문제는 아무리 신선한 채소라도 사자에게는 맛있는 음식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아무리 신선한 고기라도 소에게는 맛있는 음식이 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사자와 소는 한바탕 싸움을 합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지만 함께 살 수 없다며 헤어졌다고 합니다.


무슨 이야기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자와 소는 서로 자기의 관점에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아무리 최선을 다했어도 상대방을 생각하지 못하는 최선은 최악이 될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남편이 살아온 환경과 삶의 방식은 아내가 살아온 환경과 삶의 방식이 마치 소가 풀을 먹어야 하고 사자는 고기를 먹어야 하는 것처럼 전혀 맞출 수 없는 관계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질문을 생각해보셨습니까?
만일 이 다음에 다시 태어난다고 하면 지금의 아내와 남편과 다시 결혼하겠느냐? 라는 질문에 대답은 마음속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남편과 아내들의 대답은 만약 이 다음에 다시 태어난다면 다른 남자와 다른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대답합니다. 심지어 어느 남편은 만일 그렇게 해야 한다면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절부터 7절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해서 무엇을 말씀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7.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3장 1절부터 7절까지의 내용은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1절부터 6절까지는 아내에 대한 말씀입니다.
다른 하나는 7절 한 구절인데 남편에 대한 말씀입니다.

왜 아내에 대해 권면하는 내용을 길게 소개했을까요?

어느 가정에서 형제가 자주 싸움을 합니다. 그러면 어른들은 먼저 형을 많이 나무라고 다음에 동생을 적게 훈계합니다. 까닭은 형제간의 관계는 형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이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정의 행복은 아내의 역할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먼저 아내에게 길게 말씀하십니다. 아내에게는 여섯 구절을 먼저 말씀하시고, 남편에게는 한 절만 나중에 말씀하십니다.   


또 다른 이유는 에덴동산에서 뱀의 유혹을 받아 먼저 선악과를 하와가 따 먹은 후에 남편 아담에게 주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첫째, 남편에게 순복하라(1절)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순복하라는 말은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뜻입니다.


2절에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아내가 남편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남편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한다는 표현입니다.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을 위하여 정결한 행동을 합니다. 어떻게 정결한 행동을 합니까?

3절에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아내가 남편을 위하여 몸단장을 하는데 고급 미용실에서 머리를 만지고 보석으로 장식하고 화려한 옷을 입는 것이 아닙니다.


4절에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외모를 가꾸고 단장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가꾸고 단장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고 합니다.


이런 아내가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의 기를 살려줍니다. 남자들이 세상을 오기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기는 더 센 기가 나타나면 금방 힘을 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기가 살아나면 남편이 밖에 나가 활동할 때 힘을 얻습니다. 어떤 힘도 두렵지 않습니다. 남편의 기가 살아나면 남편은 오기가 아니라 신나게 활동합니다. 신이 나면 피곤도 모릅니다. 불평도 없습니다.


만일 남편을 볼 때마다 아이구! 저 화상 내가 저것 때문에 내 일생이 망쳤지, 그때 저놈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은 이런 고생하지 않을텐데...... 하며 남편의 기를 꺽어버리는 아내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남편이 바보 온달과 같을지라도 남편에게 순복하며 살아간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을 무시하고 순복하지 않는다면 좋은 결과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둘째, 남편을 구원하라(1절)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믿음이 없는 남편일지라도 믿음이 있는 아내가 믿음이 없는 남편을 구원할 수 있는 비결은 남편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말없이 행하는 경건하고 순결한 행실을 보고 감동을 받습니다. 이런 감동이 예수가 누군지 모르지만, 결국 남편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웃음이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부인이 남편을 구원하려고 매일 새벽마다 남편의 신발을 가슴에 품고 교회에 와서 기도하는데 먼저 남편의 신발을 교회 강대상 앞에 내려놓고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 신발의 주인은 아직 교회에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발이라도 먼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이 신발을 신고 교회에 나올 수 있도록 주 성령께서 신발의 주인을 감동시켜 주시옵소서.

그리고 저녁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반갑게 맞아주고 남편이 씻으러 들어가면 얼른 신발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이 신발을 신고 건강하게 일을 마치고 돌아오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성령께서 이 신을 신을 때마다 함께 하셔서 모든 일을 잘 감당하게 하시고 속히 교회로 나올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여러 해를 기도하다보니 남편이 아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생각해 봅니다. 도대체 아내가 그토록 소원하는 것이라면 내가 함께 교회에 나가보자 이렇게 시작하여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거스틴은 ‘참회록’에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그녀의 주인으로 섬겼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일에 근면하셨습니다. 아버지에게 하나님을 행동으로 설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어머니로 하여금 남편에게 존경과 친절을 베풀게 하심으로써 저의 어머니를 치장하셨습니다.”


셋째, 마음을 가꾸라(3-6) 


여성들의 삶의 특징은 자신을 가꾸는 일입니다. 남성들은 세수하고 면도하고, 스킨로션 바르고, 밀크로션을 적당히 바른 후 머리 빗질 대충하면 나옵니다. 그런데 여성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거울 앞에 있는 시간이 남성보다 훨씬 길고 진지합니다. 이런 아내들에게 성경이 말합니다.   

외모에만 관심을 갖지 말라(3절)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아내들에게 하는 이 말씀은 외모에만 신경 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남의 눈을 혼란스럽게 할 만큼 화려하게, 요란하게 분에 넘치게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외모를 정숙하고 단정하게 하십시오. 아내는 남편의 자존감을 높여줍니다. 나야 밀크로션만 바르고 나왔지만 아내가 단정하면 남편은 우쭐해집니다.   


내면을 가꾸라(4절)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숨은 사람이란 속사람을 말합니다. 속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으로 단장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온유한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으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내 마음의 주인으로, 왕으로 모셔 들인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우리 마음의 주인으로 모신 거룩한 자녀입니다. 내 인격 속에 계시는 주 예수님을 인정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온유하고 거룩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한 부부가 두 딸들을 데리고 휴가를 갔다가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차에서 딸들이 보채고 짜증을 부리면서 아내를 몹시 피곤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모처럼 다녀오는 휴가 길인데 분위기가 영 말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운전하던 핸들을 꺾어 차를 몰아 조용한 시골길로 들어섰습니다. 점심식사를 하기 전에 아내와 조용한 시골길을 산책을 하였습니다. 그 때 아내가 무심코 한 묘비에 쓰여 진 글을 읽었습니다. 

“그녀는 우리 가정의 햇살이었다.” 

아내는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내 인생이 여기서 끝난다면, 딸들이 내 비석에 무엇이라고 쓸까?” 

아내가 결단하였습니다. 

‘그래, 나도 가정의 따듯한 햇살이 되자.’ 

점심을 먹고 난 다음 인생은 참으로 행복한 여정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의 속마음을 예수 믿는 마음으로 단장하십시오.  


남편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지 말라(5절)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하는 것은 소망입니다. 인생은 결국 소망입니다. 무엇을 소망하며 사느냐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남편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을 가지십시오. 남편이 거룩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성격이 거친 한 여성도의 말이 내 마음을 슬프게 했습니다. 

“내 남편이 예수 믿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습니다.”

이 말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얼마나 남편이 속을 썩였으면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박해자 사울을 위대한 바울을 만드셨습니다. 부정한 여인 막달라 마리아를 거룩한 성녀로 만드신 분이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탕자 ‘어거스틴’을 성자로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독일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쓴 책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내용을 간추려보면 이렇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향수를 만드는 회사에서 최고의 향수를 만들어내는 이야깁니다. 인간을 최고로 감동시킬 수 있는 향수는 "인간의 냄새“ 라는 데 착안하여 결국 사람을 죽여서 그 몸에서 채취하는 냄새를 모아 그 최고의 향수를 만든다는 내용입니다. 

이 작품에서 내 마음을 감동시킨 것은 바로 ‘인간의 냄새’가 이 세상의 최고의 향수라는 것입니다. 내 남편, 내 아내에게서 나는 사람 냄새가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냄새입니다.  


남편들에게 대한 권면
 

아내들에게는 길게 말씀하셨으면서 남편들에게는 딱 한절만 말씀 하셨습니다.

“남편 여러분, 이와 같이 여러분도 아내가 여성으로서 자기보다 약한 그릇임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을 사람으로 알고 존중해야합니다.”


짧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는 교훈 “지식을 따라” “이해하고” “함께 살라” 하십니다. 

남편이든 아내이든 꼭 알아야 하는 한 가지는 ‘남녀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에 다하여 이해해야 하는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아내는 약한 그릇 


아내는 남편보다 물론 육체적으로 약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아내는 남편보다 예민하고 섬세하다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남편보다 아내가 상처도 쉽게 받고, 감격도 쉽게 합니다. 여기서 남편의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둘째,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함께 누릴 사람
 

예수 안에서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까지 함께 살아야 할 사람입니다. 요즈음 나이가 든 남자들이 자주 하는 말은 “노후가 편하기를 원한다면 아내한테 잘하라” 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대부분 남편보다 아내가 건강하게 오래 삽니다. 이 말은 아내의 돌봄을 받아야하는 것이 남편입니다. 그런데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아이쿠 지겨워서 예수 못 믿겠다.’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지옥으로 가야하니까요! 예수 믿지 않고 혼자 지옥으로 가겠다면 몰라도, 예수 믿고 함께 천국 갈 것을 믿는다면 미리미리 더 잘합시다. 


셋째, 아내에게 잘하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라.

왜 성경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하도록 가르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관계가 곧 하나님과의 관계로 이어집니다. 특히 아내와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 관계가 어려워지면 기도가 막힙니다. 아내와 바른 관계 속에 있을 때 기도가 열리고 응답이 된다면 성공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아내와 남편, 남편과 아내로 이루어지는 가정은 작은 교회입니다. 

축복받은 남편, 행복한 아내, 바로 여러분 한분 한 분 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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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2016-01-31)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태복음 6:33)

2월의 성구 /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But seek first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given to you as well.)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을 산상복음이라고 합니다. 산상복음에서 ‘먼저’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마태복음 5:24, 6:33, 7:5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살펴봅니다.

예배보다는 형제와 화목하라.
다른 사람의 단점보다는 자기의 단점을 살피라.
세상의 삶을 위한 것보다 하나님을 기도하라.

먼저(프로톤) 라는 단어는 시간적으로 또는 일의 순서에서 먼저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삶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먼저라는 단어는 내가 삶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무엇일까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같은 세상의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 되려면

첫째는 회개(마가복음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 왔으니(임하여있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 왔으니 라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지금 임하여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바르게 믿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복음을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 임하여 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변화산 사건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변화하신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 나라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사람들마저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 찾지 않고 훗날 다가올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도입 이야기)

그레고리안 성가(Gregorian chant) 중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곡이 있는데 이 성가와 관련되어 전해져 내려오는 일화가 있다.

시베리아의 어느 형무소에 수녀들이 사상범으로 여럿이 잡혀왔다. 그들은 법적 절차를 모두 마치고 수감되기 직전에 탈의실로 보내져 수녀복을 벗고 죄수옷으로 갈아입게 되었다.

이때 수녀들이 우리는 절대로 수녀복을 벗고 죄수옷으로 갈아입을 수 없다고 강경하게 반항을 하였다. 그래서 간수들이 수녀들을 달래도 보고 위협을 하기도 하였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에 소장이 묘안을 내어 수녀들을 모두 목욕탕에 들어가게 하고 그 사이에 죄수옷을 주어 갈아입게 하였다. 그러나 목욕을 끝내고 밖으로 나온 수녀들은 옷이 바뀐 것을 보고 자신들의 뜻을 굽히지 않고 죄수복 입기를 거부하였다. 소장은 화가 나서 수녀들을 모두 알몸으로 영하 40도가 되는 눈이 쌓인 벌판에 세워두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들은 모두 눈 위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다.

‘하나님 저들을 용서하여 주세요.’ 그들은 죄수의 옷을 입을 수 없다고 끝까지 거절하였다. 이때 교도소 직원인 여의사가 그들을 타이르며 “여러분, 이러다가 모두 죽고 말거에요. 그만 고집을 버리고 옷을 입으세요.” 권하였다. 그러나 수녀들은 계속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소장은 수녀들이 모두 죽을 터이니 방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이때 수녀들이 들어올 때 그들의 입에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는 성가가 흘러나왔다. 다음 날 소장이 여자 의사에게 수녀들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그들이 당연히 얼어서 죽었을 터인데 살았으니 그들이 부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노래밖에는 설명을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요한복음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두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임재 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임재 해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나라에 집착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여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에 속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믿음을 위하여 회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는 거듭남(요한복음 3: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거듭나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이미 천국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간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먹을 것과 입을 것과 거할 곳을 찾겠습니까? 천국에는 이미 먹을 것도 입을 것도 거할 곳도 완전하게 갖추어진 곳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추구하던 가치는 찾지 않습니다. 따라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시며 이방인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과 거할 곳을 먼저 찾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이 천국이 아니라 세상에서 천국인의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도입이야기) 

독일이 통독되기 전에 동독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공산 사상을 가진 선생이 자기가 담임한 학생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가르치면서 학생들 한 명 한 명에게 일어나서 큰소리로 ‘하나님은 없다’고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모든 학생들이 한 학생씩 일어나서 하나님은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독실한 기독교인 가정에서 자라난 학생은 ‘하나님은 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학생은 선생으로부터 꾸지람을 받았다. 그리고 그 선생이 화를 내면서 학생에게 숙제를 주면서 오늘 집에 가서 ‘하나님은 없다’라는 말을 50번을 써 오라고 하였다.

그 학생은 집에 와서 ‘하나님은 없다’라고 쓰지 않고 ‘하나님은 있다’라는 말을 50번 써 가지고 다음날 선생에게 바쳤다. 다음 날 선생이 그것을 보고 참을 수 없어 큰소리로 학생을 책망하면서 오늘은 ‘하나님은 없다’라는 말을 500번을 써 오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처벌을 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학생은 ‘하나님은 있다’라는 말을 500번을 써 가지고 다음 날 선생에게 바쳤다. 그래서 선생은 자기 지시에 순종치 않음으로 크게 화가 나서 내일 아버지를 데리고 학교에 오라고 하면서 사상적으로 잘못되었으니 처벌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다음 날 학생과 아버지는 학교에 가니 담임선생이 없어 교장선생을 찾아가서 이 사연을 설명하며 어린이를 학교에 보낼 수 없다고 하였다.

이때 교장선생은 어린이와 아버지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 선생이 어젯밤에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하여 의식을 잃고 있는데 회복되기 어렵다고 하면서 기독교인인 교장은 이 문제는 하나님께서 잘 해결하여 주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걱정하지 말고 공부를 잘하며 예수를 잘 믿으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신앙이란 올바른 믿음이 아니었던 것을 회개하고 거듭난 사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의(로마서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의롭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모든 것’이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더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더하여졌을 때 어떤 현상이 나타나야 할까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므로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찾으려는 것은 아직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더하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복이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는 복을 얻게 됩니다.

세상의 복은 소유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반면에 세상을 다스리는 복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더하다(4369, 프로스티데미) - 스트롱 사전에서는 ‘더 놓다’ 즉 ‘옆자리에 놓다’ 부가하다, 반복하다, 덧붙이다, 더 주다, 증가하다, 더 나아가다, 더 이야기하다.

세상을 다스리는 복이란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소유를 줄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물질에 대한 개념이 바뀐 것을 말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물질에 대한 개념이 바뀌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빌립보서 4:11-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마태복음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내일 일은 내일의 염려할 것이요 내일 일은 하나님께서 생각하실 일입니다. 피조물이 소관이 아닙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뜻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창조주의 일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구나 염려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염려가 있다면 밖에 있는 것이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좋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염려를 맡겨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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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베드로전서 강해 #. 12 (2016-2-7)

신앙의 유업(베드로전서 3:8-12)


- 신앙의 유업(Inheritance of Faith)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단어 설명


8절, 체휼(體恤) - 몸 체(體), 구제할 휼(恤)
동정, 가엽게 여김,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랫사람의 곤란한 사정을 돌보고 구해 주는 일. 쉼파데오(συμπαθέω) sympathize


9절, 유업(遺業) - 끼칠 유(遺), 업 업(業)
선대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사업. inherit

10절, 궤휼(詭譎) - 속일 궤(詭), 속일 휼(譎)
야릇하고 간사스럽게 속임, 교활, 간교. deceit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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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이야기)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에서는 김일성이나 김정일에게서 받은 하사품이 있는데 귤 한 상자를 받았다면 귤을 먹은 후에 귤 상자를 가보처럼 아끼며 대를 이어 물려준다고 합니다. 그런 생활을 하다 남한에 와서 정착한 후에 귤도 별 것이 아니며 더구나 귤을 담았던 상자보다 더 좋은 상자들로 모두 쓰레기로 버리는 것을 보면 속아서 살았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합니다.

통제된 북한에서 생활하던 탈북자들처럼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으로 알지 못하고 살아온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찾아내어 바르게 고쳐야 하겠습니다.

예수를 믿는 이유를 복을 유업으로 받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9절).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복에 대한 이해는 세속적인 것과 성경적인 것으로 구분합니다.
세속적인 복은 부귀영화를 누리며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과 애착은 어려서부터 강하게 나타난다는 사례를 소개합니다.

어떤 아이가 주일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집을 나섭니다. 집을 나서는 아이에게 엄마가 동전 두 개를 손에 쥐어 줍니다. “하나는 헌금을 하고 하나는 과자를 사 먹어라.” 아이는 동전 두 개를 손에 꼭 쥐고 신이 나서 교회로 뛰어갑니다. 그러다가 그만 돌에 걸려 넘어집니다. 순간 손에 쥐었던 동전 하나가 굴러 하수구에 빠져 버립니다. 그 동전을 바라보면서 엎어진 아이가 소리칩니다. “아이쿠! 내 헌금할 돈이 하수구에 빠졌네!”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농촌에 어느 농부가 송아지 두 마리를 구입하고 한 마리는 가족을 위하여 한 마리는 교회를 위하여 사용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얼마 후 외양간의 소 한 마리가 갑자기 병이 들어 죽게 되었는데 주님의 소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하더랍니다.


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신앙이 성숙해지려면 물질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바뀔 때 시작합니다.


소설가 헤밍웨이의 아들 그레고리는 60살이 넘어 성전환 수술을 받았고 그 후 여성감옥에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인도의 정신적인 아버지 간디의 아들 할리랄은 술과 여자에 빠져 살다가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불효자가 되었습니다.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의 아들 토마스 주니어는 아버지의 이름을 사칭한 유령회사를 만들었다가 사기죄로 고발당했습니다.

영국의 위대한 정치가 처칠의 아들 랜돌프는 교만과 자기도취에 빠져 세계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선지자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니하스는 타락한 생활을 하다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법궤를 빼앗기는 날 전쟁터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헤밍웨이, 간디, 에디슨, 처칠, 엘리의 후손들처럼 유업을 바르게 물려받지 못하여 그 결과는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을 유업으로 물려주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적인 복은 주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12절).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복(福) - 하나님(示)과 첫(一) 사람(口)이 에덴동산(田)에서 사는 상태. 

보일 시(示), 한 일(一) 입 구(口), 밭 전(田) 


성경적인 복을 11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성경적인 복은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악에서 떠나고 선을 행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8절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신앙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형제를 사랑하는 신앙은 이웃을 사랑하는 신앙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려면


요한일서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9절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신앙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인간의 본성은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아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인간의 본성을 따르지 않도록 가르칩니다.

잠언 16:6,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고 오히려 신앙을 따라 행하라고 합니다.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10절에서 생명을 사랑하는 신앙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생명을 사랑하는 신앙은 생명에 대해서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 상태가 드러납니다.

아담은 하와를 만나는 순간 감격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창세기 2: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그런데 죄를 지은 후에는 아담의 언어가 불평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창세기 3: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의 언어를 아비가일에게서 찾아봅니다.

사무엘상 25:24-25,

내 주여 청컨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26절,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남편 나발은 비록 미련한 사람이었으나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 아비가일은 다윗으로 하여금 피를 흘리는 것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언어 사용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잠언 29:20,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언어에 조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언어에 조급하지 않으려면 말을 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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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 / 베드로전서강해 #. 11(2016-2-14)

고난에 대한 신앙(베드로전서 3:13-17)

- Faith in suffering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난(苦難)에 대한 이해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사자성어로 설명한다면 ‘만사형통(萬事亨通)’ ‘무병장수(無病長壽)’ ‘입신출세(立身出世)’ ‘부귀영화(富貴榮華)’ 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의식을 오래 동안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종교가 전래될지라도 종교 본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민족의식을 종교의 가르침으로 포장된 신앙을 유지해 왔다고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흐름을 살펴보면 불교(佛敎)는 고구려 소수림 왕 2년(372년)에 전래되어 호국불교라는 통치이념으로 이씨 왕조가 세워지기 전까지 대략 1천년 동안 번성했습니다. 그 후 이씨 왕조가 세워지면서 유교(儒敎)를 통치 이념으로 수용하여 대략 500년 동안 유교가 번성했습니다. 이씨 왕조가 무너질 무렵 1885년 기독교(基督敎)가 전래되어 대략 100년 동안 번성했습니다.

불교와 유교 그리고 기독교가 한 때는 번성했으나 예전처럼 번성하지 못하는 이유는 교리의 가르침 보다는 누구에게나 자리 잡고 있는 의식이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가르치고 실천하도록 깨우쳐야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고난에 대한 이해라고 하겠습니다.


6. 25 전쟁으로 인하여 북에 거주하던 많은 기독교인들이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공산주의가 싫어서 남으로 내려왔다고 하지만 그 결과는 잘 먹고 잘 살아보려는 의식이 강하게 지배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강한 불을 지핀 것이 예수를 믿으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고 복을 받는다는 신앙 때문에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던 시절에 자주 들을 수 있었던 설교는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고 자손 대대로 그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물론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무조건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풍토에서 복을 받지 못하거나 고난을 당하게 되면 무슨 흉악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고난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본문에서 가르치는 고난에 대한 신앙을 살펴보겠습니다.


13절,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선한 일을 한다고 누가 너희를 해치겠느냐? 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 2장 1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어봅니다.

여러분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선한 생활을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악을 행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의 선한 행실을 보고 그들이 회개하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선(善)에 대한 기준이 분명해야 합니다.
어느 부장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생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 청년에게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무슨 계명입니까? 라고 다시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청년은 이 모든 계명을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영생을 사모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물질에 붙잡혀 살아가는 인생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주신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선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호세아 4장 6절에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면 선한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베드로전서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
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4절을 읽습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의(義)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선(善)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의(義)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말씀을 사모해야 하고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하여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도입 이야기)
기독교 학교에서 있었던 목회 현장에서 얻은 교훈

나사렛교단의 방침은 십일조 헌금의 20%를 지방회에 보내면 지방회에서 다시 교단 본부로 보내도록 합니다. 저희 교회는 이제까지 철저하게 교단의 방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렛교단의 목표는 선교와 구제입니다. 개 교회 중심의 선교가 아니라 교단 차원에서 세게 도처에 필요한 선교와 구제를 정책적으로 실시하고 있습니다. 만일 각 교회에서 십일조의 20%를 담당하지 못한다면 선교와 구제는 실현될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어려운 중에서도 우리들은 교단의 방침을 지켜왔습니다. 어느 교회가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가 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계속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께서 기뻐하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기독교 여론조사 기관에서 아주 흥미로운 기사를 발표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예배를 많이 하면 사람이 양심적이 되고 인격적으로 변화할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결론은 별로 변화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 George Barna, The Second Coming Of The Church, Word Publishing, 1998. p. 6


한국의 경우 어느 기독교 계통의 대학에서 예수를 믿는 학생들과 예수를 믿지 않는 학생들의 윤리 의식을 조사한 보고서에 의하면 예수를 믿는 것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를 바르게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정말 예수를 바르게 믿는다면 반드시 변화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까요?

기독교학교에서 설립한 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 어느 교인이 승용을 구입하라고 특별헌금을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당장 승용차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중학교 예배 때에 피아노로 반주하며 예배하는 것이 안타까워 차라리 그 돈으로 예배를 위해서 알렌 올겐을 구입하겠다고 제안하여 올겐을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몇몇 선생님들이 좋은 차가 아니라서 차를 구입하지 않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선생님들 모두가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봉사하는 신앙인들이었기에 마음 한편에서는 신앙인의 의식이 이렇겠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주위에서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고 올바른 길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 그래도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또 다른 예를 소개합니다.
나사렛교단은 기존 교회는 십일조의 2/10에 해당하는 헌금을 지방회와 교단 본부에 선교와 구제를 위한 부담금을 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뉴욕나사렛교회는 이와 같은 방침을 100% 실천합니다. 그러나 교회 재정이 어려운데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느냐 하며 반대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세계 선교와 구제 그리고 지방회와 교단 본부를 어떻게 운영하겠습니까? 교회가 어렵더라도 반드시 교단의 방침을 따르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15절을 읽겠습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거룩이란 예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신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사람에게서 거룩한 인격을 엿보게 됩니다. 거룩한 인격이란 겉사람과 속사람이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겉사람은 교회의 목사가 될 수도 있고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사람이 목사가 되지 못하고 장로와 권사가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거룩한 사람의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16절을 읽겠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한 양심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선한 양심이란 영적지수가 높은 사람입니다.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크게 세 가지 라고 합니다.
첫째는 지능지수(IQ)
둘째는 감성지수(EQ)
셋째는 도덕지수(MQ)
넷째는 영적지수(SQ)

선한 양심이란 영적지수가 높은 사람을 말합니다.
축복을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여러 가지 능력과 조건을 갖추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고매한 도덕성을 갖추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인격화가 중요합니다. 신앙의 인격화가 곧 신앙의 성숙입니다.


17절을 읽겠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희랍의 철인 소크라테스가 감옥에 갇혔을 때 그의 제자들이 찾아와 소크라테스에게 간청하기를 이제까지 가르친 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한 마디만 하시면 감옥에서 풀려나올 수 있습니다. 제발 거짓이라고 한마디만 하십시오! 이렇게 애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내가 살기 위해서 진리를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다며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는 죽으로 가고, 너희들은 살기 위하여 간다. 그러나 어느 길이 행복한 길인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철학자도 이렇게 살았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철학자보다 더 높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선한 일을 위한 삶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농촌 친구도 별로 없이 인색한 부인이 어느 날 자기 채소밭에서 채소를 가꾸고 있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배고픈 거지가, "마님! 먹을 것 하나만 주세요."하고 구걸을 했다. 그러나 이 인색한 부인은 탐스럽게 열린 토마토나 오이, 가지 같은 것은 아깝게 생각하고, 다른 것이 없나 하고 돌아보니 밭고랑 언덕에 씨가 잘못 떨어져 자라고 있는 무 한 포기가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뽑아서는 선심이나 쓰듯이 거지에게 던졌다. 인색한 부인으로서는 그 나마 평생 처음 좋은 일을 한 셈이었다. 얼마 후, 이 부인이 죽게 되어 세상을 떠나간 곳이 지옥이었다. 지옥에서 고생을 하고 있을 때에 한동안 부인을 맡고 있던 천사가 그 위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부인은 큰 소리로 천사를 불렀다. 그리고는, "나는 세상에서 착한 일을 많이 하였는데 왜 이런 지옥에 보냈느냐?"고 항의를 했다. 그러자 이 천사는, "무슨 착한 일을 하였느냐?"고 물었더니, 부인은 대답하기를 "아무 때나 배가 고파하는 거지에게 무 한 포기를 준 일이 있다."고 했다. 이때에 천사는, "한번 확인하고 오겠다."고 하고는, 창고에 들어가서 여인이 행한 착한 일을 찾아보니 과연 시들시들한 무 한 포기가 여인의 이름밑에 놓여져 있었다. 천사는 그 무 한 포기로 부인을 건질 수 있을까 하여 무잎을 들고는 부인더러 무 밑둥을 단단히 잡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지옥에서 낙원을 향하여 날아올라갔다. 부인은 너무 기뻐서 옆을 바라보니 평소 원수처럼 지내던 이웃집 부인도 무엇을 붙잡고 따라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순간 이 부인은 눈을 흘기면서 '원, 저 따위가 다 낙원에 가다니'하고는 옆에 있는 부인을 발길로 걷어찼다. 그랬더니 무를 잡고 올라가던 부인은 그네를 뛰듯이 흔들거리다가 줄기가 끊어지는 바람에 지옥으로 다시 떨어지고 알았다는 것이다. 적은 것이라도 구제하는 일은 귀한 것이지만 이웃과의 원수 맺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을 알게 하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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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베드로는 가 환상 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로마로 가고 있는 로마로 그 유명한 쿼바디스예수님께서 간청해한 마것이jrt선생님 선생님이히고 는 합니다. 하나니답게 살아보는 것이거루예수를 고모습과 속
무슨 직분을 가졌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인격으이 니라 의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인격을


wkfahta 을까요?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서 민어하이밎기독 대학에서도 기독교 대학생과 비기독교 대학생의 윤리 의식을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학생들의 윤리관이나 양심 수준은 고등 종교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좌우되지 않고 심지어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그들의 기도 생활, 성경 지식, 예배하는 횟수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핍박을 받거나 기독교인의 수가 많지 않았을 때는 사회가 인정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 좋은 예가 백범 김구 선생은 “경찰서 열 개보다 교회 하나를 신설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라고 기독교인들을 칭찬했다고 합니다.

최근 중국의 경우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확실히 한국의 기독교인들보다 더 윤리적이고 정직하다고 합니다. 중국의 목회자들이 한국으로 유학을 와서 지내는 동안 기독교인들의 비리에 놀란다고 합니다. 중국에는 부정부패가 많아도 기독교인들이 연루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국 교회도 요즘 급성장하다 보니 형식적이고 입술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교인 수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합니다. 중국 교회 기독교인들은 아직 소수이기에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것 같지만 만일 더 부흥하고 성장한 후에는 어떻게 변화할지 모른다고 합니다.

15절부터 17절을 읽겠습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 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ㅓ를 므로 기당시 그 요차 한 대예수 믿는 자들을 향하여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비방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에 그렇습니까? 세상의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보다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일을 행할 때입니다. 또한 예수 믿는 자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이기적이고 세속적일 때에 비방을 받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일반적으로 종교인이란 비 종교인보다 깨끗하고 바르게 사는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그러한 일들로 인하여 비방을 받지 않도록 2:11-25절에서 인간이 세운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할 것과 종들이 주인에게 범사에 두려워하며 순복하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이와 같이 증거 하였습니다. 로마서 13:1절에 보면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2:2절에서도 보면 바울 사도는 기도에 대해 권면하면서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을 세상에서 이기적이고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욕을 하다가도 자기 주변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양심적으로 사는 것을 보면 그들이 입을 막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되는 세상이 아닙니다. 아무리 선행을 행해도 비방을 받습니다.









성경에서 몇 구절을 소개합니다.


예레미야애가 3:1,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당한 자는 내로다.


시편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마가복음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요한계시록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예수를 잘 믿으면 만사형통하고 고난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예수를 잘 믿는 기준이 만사형통과 고난이 없는 것일까요? 성경은 이러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4절,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그러나’라는 말은 선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난이란 의를 위한 고난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윤리 도덕적으로 옳고 세상에서 양심적인 사람이라는 평가를 들으면 고난과 핍박이 아니라 오히려 존경이 따라 올 것입니다.

이미 죽었지만 데레사 수녀를 욕하는 사람이 것의 없는 것처럼 교회나 성도가 세상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도우는 일에 온 힘을 쓰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일조를 한다면 욕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수많은 종교단체들이 이런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곧 사회에 봉사를 열심히 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대한 이미지를 제고(提高)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자들이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반드시 이 세상에서 의를 위한 고난과 핍박이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가 복되도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5:10-1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자신이 잘못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의를 위하여 즉 예수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선지자들도 이같이 핍박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에게 예수님 때문에 오는 핍박으로 인해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성경적인 축복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까지 자주 들을 수 있었던 가르침은 세상에서 열심히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잘 하면 반드시 인정을 받고 성공할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도 많은 상급을 받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믿음으로 열심히 산다고 해서 세상에서 무조건 성공하고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잘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다가 잘못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으로 살다가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고 순교를 당하는 믿음의 선진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으로 열심히 살면 세상에서도 인정받고 하늘에서도 큰 상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비성경적인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세상에서 보상을 받은 자는 하늘에서는 받을 보상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1-4,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그렇다면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왜 고난이 닥쳐옵니까? 세상이 의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의(義)란 단지 세상에서 착하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 외에 나타난 한 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롬 3:19-30).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하는 것을 믿는 사람들을 세상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 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에 마귀가 가만히 두지를 않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면 이 세상의 선악체제가 근본적으로 무너지기 때문에 그런 자를 가만히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과 핍박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이 그런 고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그렇다고 자기는 자기 욕심대로 마음대로 살아가면서 그 말을 이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곧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자신이 율법대로 바르게 살았다고 하여도 주님 앞에서 자신이 근본적으로 부패한 죄인임을 알게 될 때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다니엘, 사도 바울, 사도 요한이 보았던 그 주님의 영광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알게 되었을 때에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고백이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따라 살면서 하는 말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 곧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소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사야 8:12-13절을 보면 “이 백성이 맹약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맹약한 자가 있다 하지 말며,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북 이스라엘 왕 베가와 아람 왕 르신이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하려고 할 때에 남쪽 유다의 왕 아하스와 백성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연합군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앗수르에 원조를 요청하는 유다의 정책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왜 두려워하고 놀라는가 하면서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말고 소동하지 말고 여호와만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당하는 자들은 눈에 보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눈에 보이는 힘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어떻게 하든지 세상의 힘을 의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신앙의 싸움은 이 싸움인 것입니다. 곧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가, 세상 힘을 의지할 것인가 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8:14-15절에 보면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만이 우리의 피할 곳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는 걸려 넘어지게 되고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세상의 힘을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에 민감한 것입니다. 정권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 자기의 손익을 저울질 합니다. 경제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의 일들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온 우주와 만물을 지으시고 지금도 통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서 두려워하는 일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기에 미움을 받고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보이는 세상을 믿는 것이 아니기에 보이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경천동지 할 일이라 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소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6절에서 사라가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 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벧전 3:6). 사라가 믿음 없는 아브라함과 살면서 얼마나 많은 두려운 일을 당했습니까? 남의 남자에게 두 번이나 팔려가야 하는 상황을 맞기도 하였습니다(창 12장, 20장) 그러나 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을 주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며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가운데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까지 자신을 의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다면 우리는 사라와 같이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되신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뜻대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5-16절을 보면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어떤 일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주로 삼고 살기에 그렇습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 불에 들어갈 때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미 주를 섬기고 있었기에 그렇게 담대한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서 3:13-18절에 보면 “느부갓네살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 오라 명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 온지라.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주님께서 우리를 구하시겠지만 구하여 주지 아니하여도 당신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이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그들의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있습니까? 단지 나를 구원하는 주 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통치자며, 주인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세상의 일들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이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이 불살라 없어질 것을 믿는 사람들인데 조그마한 세상의 일들로 인하여 죽을 둥 살 둥 바둥거리며, 악을 쓰면서 두렵고 놀라면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도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으려고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세상의 두려운 일들로 인해 놀라거나 요동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때 도리어 세상 사람들이 이런 담대한 우리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당신들은 어떻게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까?’ 하며 우리의 소망에 대해 물어올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 이유는 우리도 똑 같이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죽음의 종노릇 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기에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정말로 주를 그리스도로 마음에 모신 사람은 거룩하게 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두려워하는 일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거룩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요동치는 세상을 믿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주변에서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세상에서 두렵고 힘들어하면서 헉헉거리다가도 물어오는 사람이 나올 것입니다. ‘도대체 당신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그렇게 두렵지 않고 소동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해 물어보는 자에게 우리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우리에게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어오기나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 세상의 꿈을 실현하여 준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소망을 이루는 비결에 대하여 물으려고 몰려가지 누가 이런 조그마한 교회에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소망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고서 물으러 오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를 마음에 모시고 보이는 소망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 묻기 위하여 오는 것도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물으러 오는 자들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15절을 다시 보면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런 소망을 우리가 원해서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변화무상한 세상의 것들에 소망을 두지 않고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는 그 십자가 안에서 이루어진 약속을 믿는 자들이라면 그런 소망은 사람들이 스스로 가질 수가 없는 소망입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로 주어진 소망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소망을 가진 것이 마치 자기가 잘나서 가지게 된 것인 양 교만을 떨고 자기를 자랑 하게 될 것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17절)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1:6-7절에서 배운 것처럼 믿음의 시련은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악을 행하다가 고난 받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알게 되고, 그 고난에 참예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선을 행하다가 오는 고난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고난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두려워하지 않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주어지는 약속과 그 소망으로 인하여 고난이 온다면 도리어 그것을 복으로 여기며 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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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베드로전서 강해 #. 14(2016-2-21)

순종의 기적(베드로전서 3:18-22)


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22.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베드로전서는 공동서신(Catholic Epistles) 또는 일반서신(General Epistles)이라고 합니다. 공동서신이란 편지를 받는 수신인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알려주는 말씀이라는 특징을 갖습니다. 공동서신에 해당하는 책들은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를 말합니다.

특별히 베드로전서는 기독교를 핍박하던 시대에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던 성도들에게 세례와 세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보낸 편지입니다.

그렇다면 핍박을 피하여 흩어진 성도들에게 왜 세례를 강조했을까요?
20절과 21절을 읽습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세례를 강조한 이유는 구원의 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핍박과 탄압을 피하여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던 성도들에게 세례 의식은 환난과 핍박 중에서도 반드시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견고케 하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 증거를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사건에서 찾아봅니다.
마태복음 3장 15절,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모든 의를 이루셨습니다. 세례는 죄가 있는 사람이 죄 사함을 위하여 받는 정결예식입니다. 그런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죄를 그 몸으로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속죄의 제물을 제사장에게 가져오면 먼저 제사장 앞에서 제물 위에 손을 얹어 모든 죄가 제물에게로 전가된다는 의식을 거행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죄를 속죄제물이 되어 죄를 전가 받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두 가지 순종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과 다른 하나는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순종이란 나의 생각과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어느 유명한 수도원에 두 젊은이가 찾아와서 이곳에서 훈련을 받고 싶다고 간청했습니다. 수도원 원장은 두 젊은이에게 밭에 가서 배추를 심는데 뿌리가 하늘을 행하도록 배추를 심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수도원 원장이 밭에서 배추를 심는 두 젊은이들을 지켜봅니다. 한 사람은 수도원 원장이 지시한대로 뿌리가 하늘을 향하도록 심고 있었는데 또 한 사람은 뿌리가 땅속에 들어가도록 심고 있었습니다. 수도원 원장은 두 젊은이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뿌리가 하늘을 향하도록 심은 젊은이에게 자네는 오늘부터 수도원에서 훈련을 받을 자격을 얻었다고 하였고 또 다른 젊은이에게는 자네는 누구의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혼자 힘으로 얼마든지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니 세상에 나가서 자네 마음대로 살아가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순종이란 나의 경험과 생각과 이치에 합당하기에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나의 생각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무엇을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26장 39절,
네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태복음 26장 42절,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왜 예수님께서 순종하셨나?(18절)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우리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고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구원의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
히브리서 5:8-9,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로마서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예수님의 순종은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구원의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순종(19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영들이란 노아 시대에 타락한 천사들을 말합니다. 천주교회에서는 옥을 지옥이라고 해석하여 연옥이라는 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본래 의미는 노아 시대에도 구원의 방주에 들어가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죽은 자들이란 타락한 천사들을 의미합니다.

옥이란 단어로 사용하는 헬라어가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1. 게헨나(불못)
2. 하데스(음부)
3. 탈타루스(감옥)

탈타루스에 대한 성경을 소개합니다.

베드로후서 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지옥이란 단어는 탈타루스라고 하는 감옥을 말합니다.

유다서 1: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예수님의 순종은
첫째,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구원의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
둘째, 노아 홍수 때부터 구원의 방주로 들어가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전파하셨습니다.

22절을 읽습니다.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까? 다시 오시기 위해서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사도행전 1:11,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고린도후서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하늘로 올라가셨던 예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러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순종하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순종하는 믿음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세 가지 은혜를 약속하셨습니다.
첫째는 순종함으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구원의 기적을 약속하셨습니다.
둘째는 누구든지 어느 시대에든지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전파하셨습니다.
셋째는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순종하는 믿음으로 약속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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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6-02-28

 염려와 기도(빌립보서 4:6-7)


오늘은 2월의 마지막 주일이며 또한 삼일절 97주년 기념주일입니다.
2016년 신앙생활의 목표는 쉬지 말고 기도하자 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신앙을 위한 매월의 성구를 확인해 봅니다.

1월의 성구 예레미야 33장 3절을 다함께 암기하겠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기도는 하나님과 나의 일대 일의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2월의 성구 마태복음 6장 33절을 다함께 암기하겠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모든 것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3월의 성구 빌립보서 4장 6-7절을 함께 암기하겠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3월의 성구에서 기도에 대한 정의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기도는 바꾸는 것이다.
둘째는 기도는 집중하는 것이다.
셋째는 기도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첫째는 기도는 바꾸는 것이다.

신앙이란 염려를 기도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 세상에는 염려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왕이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왕을 섬기는 신하들은 왕의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나라 안에 유명한 의원들을 불러다가 진찰하고 처방을 했지만 좀처럼 왕의 우울증세는 점점 더 심각해졌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느 노인이 나타나서 왕을 진찰한 후에 한 가지 비법을 알려주었는데 날마다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을 찾아내어 그 사람의 속옷을 가져다가 왕에게 입히면 왕의 우울증세가 없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신하들이 전국을 다니며 날마다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산골에 나무꾼이 바로 신하들이 찾던 사람이었습니다. 신하들은 나무꾼에게 전후사정 이야기를 하고 왕의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당신의 속옷을 달라고 하자 그 나무꾼은 '나는 속옷이 없다'고 하더랍니다.

속옷이 없는 나무꾼의 이야기는 행복과 즐거움은 물질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입니다.

신앙이란 염려를 기도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염려를 기도로 바꿀 수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5장 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염려는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누가복음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염려는 마음을 둔하게 합니다. 마음을 둔하게 한다는 것은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국에 화이트렉이라고 하는 귀족이 있었습니다. 그가 크롬웰의 특사로 스웨덴에 갔는데 당시에 영국의 정세가 불안하므로 잠을 자지 못하고 불면증이 생겼습니다. 거기에 믿음이 좋은 비서가 동행했는데 잠을 못자는 화이트렉 경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경이시여, 왜 주무시지 못하시나요?"
"나라가 이렇게 어지러운데 어떻게 잠을 잘 수 있나"
그때 그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기 전부터 하나님은 영국을 다스렸겠죠?"
"내가 이 세상에 나기 전부터 영국은 있었지"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에도 영국은 존재하겠죠?" 
"그렇지 영국은 있겠지"
"지금도 영국은 선생님이 염려하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고 믿으십니까?"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지." 
"선생님 편안하게 주무시지요."

이 말을 한 후에 비서가 겸손하게 절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비서가 자리를 떠난 후에 화이트렉이 경은 '이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인 것을 내가 쓸데없이 걱정했구나!'


경북 대구의 근교에 지산이란 지역에 지산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에 재정적으로 한 몫을 담당하던 오부자가 있었습니다. 오부자란 다섯 형제가 모두 지산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는데 모두 부자이기 때문에 오부자라고 불렸습니다. 오부자가 사업 관계상 지산을 떠나 대구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오부자가 모두 이사를 하게 되자 지산교회의 제직들은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교회를 꾸려 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직들은 대구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를 찾아갔습니다. 선교사에게 사정을 말하고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보려고 선교사 앞에 앉아서 한숨만 푹푹 내 쉬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는 한숨을 쉬는 지산교회 제직들에게 "아니 왜들 그러십니까? 교회에 무슨 걱정되는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그러자 제직들은 "예, 목사님! 저희 교회의 오부자가 대구로 모두 이사를 갔지 뭡니까? 그러니 저희 교회를 유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자 선교사는 "그래요? 그것 참 문제로군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걱정이 있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제직들은 "왜요? 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선교사는 지산교회 제직들에게 "그럼요 문제지요.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없습니다. 지산교회의 여러분들은 하나님은 믿지 않고 그 오부자만 믿고 계셨으니 그게 어떻게 문제가 아닙니까?" 재직들은 선교사의 깨우침을 듣고 교회로 돌아와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의 믿음 없음을 회개하고 교회를 주님이 지켜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지산교회는 오부자가 있을 때보다도 오히려 더욱 풍성해 지는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둘째는 기도는 집중하는 것이다.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

기도, 간구, 아뢰라는 단어는 모두 기도를 의미합니다. 염려를 맡겨 버리려면 기도에 집중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집중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계속적으로 기도하려면 사소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은 사소한 것에 마음을 갖도록 유혹합니다.
사람은 영혼육으로 구성된 존재입니다. 신앙생활은 영적생활이므로 항상 영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영이 아니라 육에 관심을 갖도록 자극하고 유혹합니다. 그러므로 육에 관심을 갖게 되면 육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영에 관심을 갖게 되면 영이 우선됩니다.

사도행전 16: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 이유는 육이 우선이 아니라 영이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하나님을 찬미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영이 우선되었을 때 놀랍게도 육이 감옥에서 자연스럽게 풀려나는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바울과 실라가 육을 먼저 생각했다면 여전히 그 감옥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등산객이 시골의 한적한 길을 지나가게 됐다. 그런데 길 옆 조그마한 쪽문에 ‘다불유시(多不有時)’라는 한자어가 적혀 있었다. 등산객은 그 말뜻이 알쏭달쏭했다. 시간은 있는데 많지가 않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문구였다. 그는 옆에 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주인을 불렀다. 허리가 굽은 노인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뭔 일인가요.” 등산객이 정중하게 물었다. “저 한자성어는 누구 작품인가요. 그리고 무슨 뜻인가요.” 노인은 여전히 귀찮은 표정이었다. “내가 쓴 거요.” “그럼 뜻을 좀 가르쳐 주시지요.” 등산객은 노인에게 정중히 말했다. 그때 노인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뜻은 뭔 뜻? 그냥 다불유시(WC)야. 화장실도 몰라?”


우리는 가끔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지나친 관심을 가질 때가 있다. 헛된 것에 미혹되는 것이 인간의 나약한 모습이다.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붙잡는 일에 더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셋째는 기도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빌립보서 4:6-7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의 응답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기도한 것을 그대로 응답받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도한 것을 응답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응답을 더 좋아합니까?
말할 것도 없이 기도한대로 받는 응답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기도한대로 응답받지 못하는 것도 분명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마태복음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은 내가 기도한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십니다.


예를 들면 병이 들었을 때 기도하고 병에서 깨끗함을 받았을 때 응답이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병이 들었을 때 기도하였으나 병은 여전히 괴롭힙니다. 그런데 마음에는 평강이 있습니다. 아프기 전에는 누리지 못했던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응답입니다.

응답은 기쁨으로 오는 응답과 평강으로 오는 응답이 있습니다. 문제는 기쁨으로 오는 응답은 일시적일 수 있습니다. 반면에 평강의 응답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어떤 교인의 가정에서 외동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대학입학 시험을 준비합니다. 일 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고 가족들은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응답입니까? 응답이 아닙니까? 대부분의 교인들은 응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응답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응답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집에서는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합격했다고 좋아합니다. 응답입니까? 응답이 아닙니까?

물론 합격하면 기쁩니다. 그러나 합격이 평강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불합격이 좋은 것입니다. 합격하는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기도할 때에 내가 기도한 그대로 응답되는 것만이 응답이 아닙니다. 때로는 내가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응답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런 때에는 내 안에 하나님의 평강이 있다면 그것이 응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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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 / 베드로전서 강해 #15(2016-3-6)

남은 때(베드로전서 4:1-6)


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4.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베드로전서 4장에서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할 때 어떤 신앙으로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4:1-6, 육체의 남은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4:7-11, 마지막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4:12-19, 시련의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교회 안에 세 종류의 교인들이 모여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는 육에 속한 신앙(고전 2:14)

육에 속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은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돈을 벌기 위해서 세속적인 방법을 주저하지 않고 사용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제자가 되었으나 은 30에 예수를 팔아넘긴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육신에 속한 신앙(고전 3:1)

육에 속한 신앙과 육신에 속한 신앙을 구분해야 합니다. 육에 속한 신앙이란 세속적 방법을 믿고 따라갑니다. 육신에 속한 신앙이란 율법대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율법대로 정직하게 살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은 영생을 찾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왔던 어느 부자 청년이었습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의 돈을 나를 위해서만 사용해야지 이웃을 위해서는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셋째는 영에 속한 신앙(고전 2:15)

영에 속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성령의 법에 따라 신앙생활을 합니다. 성령의 법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육신의 사람이 신령한 사람이 되려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으려면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율법의 전통에 따라 살아왔습니다. 율법 이외에는 어느 것도 신앙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바울이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바울은 눈은 떴으나 볼 수 없었습니다. 내 마음대로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물렀던 바울이었지만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끌려 다녀야 하는 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에게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찾아와 바울에게 안수하므로 바울은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율법에서 은혜로 옮겨진 놀라운 사건이 바울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에 붙잡힌 육신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붙잡힌 신령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의 어려운 부분이 이런 변화가 내 몸으로 느껴지고 체험되어야 하는데 그런 현상이 없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답답하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민족들이 애급에서 노예로 430년 동안 살았습니다. 430년 동안 노예로 살았다는 것은 그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애급에서 벗어날 수 없는 육신에 속한 존재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민족에게 애급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이 소개되었습니다. 그 방법은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더니 그 다음 날 아침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히브리민족이 직접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같은 시간에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방법을 체험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율법입니다. 육체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방법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은혜는 육체가 체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몸의 변화가 나타나면 쉽게 이해되고 느낄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육체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육체의 남은 때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육체의 남은 때를 육체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아 신령한 방식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어렵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야 하는가를 본문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영원한 속죄를 믿으라(1절)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셨으므로 비록 내가 육체에 갇혀 있지만 육체의 방식대로 믿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그 고난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실 때 육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신 아버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은 마음으로 고난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히브리서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둘째, 하나님의 뜻을 따르라(2-3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하나님의 뜻의 반대는 이방인의 뜻이라고 합니다.
이방인의 뜻이란 음란, 정욕, 술 취함, 방탕, 연락, 우상 숭배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은 방탕한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이방인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는 애급에 머물던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히브리 민족들이 애급에서 거주하던 삶의 방식이 육체가 애급에서 벗어나 광야에서 머물 때에 마실 물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먹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육체가 애급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육체는 여전히 애급의 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기로 결심했으면 비록 육체를 갖고 살아가야 하지만 육체의 방식을 따르지 말고 영의 방식 즉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심판을 생각하라(5, 6절)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를 갖고 살아가야 하지만 육체가 전부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를 심판하실 심판의 날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은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도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들도 살아있을 때에 복음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들었을지라도 육체의 사람이므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그들이 죽었을지라도 이미 과거에 복음을 들었으므로 심판의 날에 그들의 육체는 복음을 들었던 사람으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노아 홍수 때에 구원을 받은 사람은 노아의 가족이었습니다. 노아의 가족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방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방주를 만드는 노아를 보면서도 왜 방주를 만드는지 관심도 없었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드는 이유를 수도 없이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악하여 노아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육체만 생각하며 살았던 육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민족이 애급에서 나와 홍해를 건널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자주 육체의 욕구에 따라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했기 때문에 애급에서 나왔지만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육체의 남은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박종열목사의 생애

1921년 5월 충북 청원(현 청주시)의 한 완고한 유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한학을 배웠고 사서삼경을 모두 암기하여 마을에서는 신동이라 부를 만큼 총명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대동아전쟁이 한참 치열할 때에 동네에 작은 교회가 세워지고 열다섯 살 때에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러자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쳐 집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많은 고생을 했지만 주님의 영이 살아계셔서 자기중심에 임재하심을 확신했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도 아들을 따라 교회에 다니며 독실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목회자가 절대 부족한 시대이므로 순회 전도사가 여러 교회를 순회해야 하기 때문에 주일이면 한 달에 한 번 정도밖에 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배 인도자가 안 오는 주일에는 예배 인도를 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열일곱 살이었습니다.

평양 요한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으나 신사참배에 불참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가장 악랄하다는 일본 형사 여러 명이 살기등등하게 어린 학생을 상대로 신문을 했습니다. 그때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스데반같이 순교하게 해 주세요!”
고문실에서도 기도하는 것을 보고 일본 경찰은 “대일본제국의 천황폐하가 높으냐? 네가 믿는 하나님이 높으냐?” 라고 질문하면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이신데 당연히 하나님이 세상에서 제일 높으신 분” 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제일 무섭게 생긴 형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피비린대가 진동하는 고문실로 끌고 가서 고문을 했습니다. 그때마다 속으로 ‘주여 스데반같이 순교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했습니다.

고문실 바닥에는 핏자국이 흥건했습니다. 두들겨 맞기도 하고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 신기한 것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마음이 평안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문을 받을 때면 비명을 지르고 죽겠다고 몸부림을 치는데 오히려 태연하게 고문을 받는 것을 보며 ‘너 같이 지독한 놈은 처음 보겠다!’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후 집으로 돌아왔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온 몸이 퉁퉁 부어 자리에 누워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이 심한지 하나님 차라리 나를 데려가 달라고 눈물로 애원하기도 했습니다. 또는 마당의 강아지를 바라보며 너는 나 보다 낫구나! 하며 강아지를 부러워했습니다. 이런 고통의 시간이 4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때는 전쟁의 막바지라 젊은 사람들은 모두 전쟁의 총알받이로 동원되어야 했는데 자리에 누워 지내야 하므로 전쟁에 동원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해방을 맞이한 후에 깨닫게 된 것은 고문을 받을 때에도 고통을 몰랐는데 감옥에서 나온 후 집에서 고통에 시달리며 4년 동안 자리에 눕게 하셨던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된 것은 전쟁의 총알받이로 동원되지 않도록 인도하신 주님의 은혜이었습니다.

아마 그 때 전쟁에 동원되었다면 불구자가 되었거나 아니면 죽었을 것이지만 이렇게 생명을 보존해 주신 주님의 섭리를 고통을 받을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해방을 맞이했다는 감격의 소식을 듣는 순간 갑자기 머리끝에서부터 뜨거운 불이 내려와 목구멍으로 불덩어리가 내려오며 온 몸을 태우는데 너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해방과 더불어 고통의 사슬에서 벗어나 남은 때를 복음의 증거자로 살아가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목회자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2004년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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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베드로전서 강해 #. 16(52016-3-13)

마지막 때(베드로전서 4:7-11)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베드로전서 4장에서는 세 가지 때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육체의 남은 때(4:1-6)
둘째는 마지막 때(4:7-11)
셋째는 시련의 때(4:12-19)

육체의 남은 때는 내 생명의 남은 시간을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은 영적 생활이므로 육을 위하여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는 신앙과 육신을 위하여 받기만을 기대하는 신앙생활에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르치는 신앙생활은 신령한 것으로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영원한 속죄를 믿는 신앙
둘째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거룩한 삶의 신앙
셋째는 심판을 생각하는 신앙


오늘은 두 번째 마지막 때에 대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성경에서 마지막 때의 현상을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4:3-1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디모데후서 3:1-5,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마지막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개인의 마지막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의 마지막입니다. 마지막을 종말(終末)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말씀은 역사의 마지막과 개인의 마지막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의 마지막이 되면 개인의 삶도 마지막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말세의 현상은 한 마디로 경건의 능력이 없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경건의 능력이란 경건한 삶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큰 교회는 있어도 큰 믿음은 없습니다.
작은 교회는 있어도 작은 믿음도 없습니다.
경건의 삶이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경건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불법이 성행하고 사랑이 식어집니다.
자기를 사랑합니다.
돈을 사랑합니다.
자긍합니다(뽐내는 것).
교만합니다.
훼방합니다(하나님을 모독하는 것).
부모를 거역합니다.
감사할 줄 모릅니다.
거룩하지 않습니다.
무정합니다(사랑이 없다).
원통해 합니다(용서하지 않는다). 
참소합니다(다른 사람을 헐뜯는다).
절제하지 않습니다(자제하지 못한다).
사납습니다.
타합니다.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배반하여 팔며(배반합니다).
조급합니다.
자고합니다(거만합니다).
쾌락을 즐깁니다(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좋아합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신앙 세 가지를 본문에서 소개합니다.

첫째는 기도하라(7절)

둘째는 사랑하라(8-9절)
셋째는 봉사하라(10-11절)

첫째는 기도하라(7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기도할 때 두 가지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근신해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
1. 건전한 마음
2. 온전한 정신
3. 술 취하지 않음

근신하여 기도하라!
1. 분별(악한 영의 분별)
2.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

둘째는 사랑하라(8-9절)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하고.


사랑의 특징은 평범하게 볼 수 있는 것을 아주 비범하게 보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덮어서 보기 때문입니다.

미움은 허물만 보이고 사랑은 허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평범한 것을 비범하게 보는 것이다!
사랑은 죄와 허물을 덮어주기 때문에 쉽게 보는 것을 볼 수 없고볼 수 없는 것을 드러내어 보게 한다.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잠언 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셋째, 봉사하라(10-11절)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봉사는 은사에 따라 감당해야 합니다. 은사란 섬김의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35-36,
내가 주를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태복음 25:40,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봉사하는 일에 불평과 원망과 시비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과 결단과 감정을 따르면 반드시 실망하고 낙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봉사하려면 오직 주님의 이름을 주장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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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개최한 워크 캠프 참석 차 한국에 방문했다가 종교를 이유로 난민신청서를 냈던 케냐의 한 젊은이가 광주의 한 PC방 화장실에서 PC방 종업원을 살해하고 손님의 패딩 점퍼와 휴대전화를 빼앗은 혐의로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피해자의 사망원인은 폭행으로 인한 과다출혈과 목 부분 골절로 추정되었고 피해자의 입에 젓가락과 숟가락 등 이물질을 쑤셔 넣었다고 합니다.

사건 #.2

주행 중 자신의 차량 앞에 끼어들었다는 이유로 자전거 운전자에게 보복 운전을 한 혐의(특수폭행)로 강모(41)씨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11일 밝혔다.


승합차를 운전하던 사람이 왕복 4차로 도로 중 1차로로 달리다가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던 사람이 앞으로 끼어들자 경적을 울리며 비켜주지 않고 이어지는 사거리에서 최씨와 나란히 좌회전해 왕복 2차로 도로에 진입하면서 수차례 자전거 운전자를  인도 난간 쪽으로 밀어붙이거나 바로 앞에서 급제동했다. 또 자전거를 타고 가던 사람이 경찰에 신고하겠다며 중앙선을 넘어 운전자를 피하려 하자 중앙선을 따라 넘어간 뒤 운전석 창문을 열고 담배꽁초를 든 왼손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던 사람을  막는 등 300m가량 위협 운전을 한 혐의로 특수폭행죄로 불구속 입건되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개인의 마지막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의 마지막입니다. 마지막을 종말(終末)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개인의 마지막은 개인의 종말이라고 하겠고 역사의 마지막은 역사의 종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윌리엄 보든(William Whiting Borden, 1887-1913)은 미국의 낙농그룹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그의 부모는 그에게 세계 여행을 다녀오게 하였습니다. 그는 아시아, 중동을 여행하던 중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보고 예수님을 전하는 선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경책에 문장 하나를 썼습니다. 
“남김없이”(No Reserves!)

예일대학에 들어가서도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졸업 후, 그는 성경책의 뒷면에 다시 한 문장을 썼습니다. 
“후퇴 없이”(No Retreats!)

그는 선교사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중국의 회족(모슬렘)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회족(回族)은 7세기경부터 아라비아인들이 한족과 혼혈된 소수민족으로, 중서부에 흩어져 삽니다. 인구 천만 명 가량으로 이슬람교를 믿는 중국 내 최대의 집단이며, 종교 언어는 아랍어를 사용합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모하메트를 한자로 그대로 옮겨서 마(馬)씨 성이 많습니다.   

중국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아랍어를 배우고 이슬람 지역 선교를 준비하기 위해 먼저 이집트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척수막 염에 걸리고, 한 달 뒤 스물여섯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척수막 염이란(폐렴쌍구균, 연쇄구균, 포도상 구균 등에 의하여 발병합니다. 환자와의 접촉에 의하여 감염되며 혈액과 함께 순환하여 수막(중추 신경인 뇌와 척수를 싸고 있는 결합 조직의 막)에 도달하여 증세를 나타냅니다. 1세 미만의 어린이가 병에 걸릴 확률이 높습니다. 잠복기는 1~5일정도이며 갑작스런 고열, 심한 두통과 구토 간혹 경련이나 의식장애도 동반할 수 있습니다. 폐렴, 관절염, 심내막염(심장 내부를 싸고 있는 막에 생기는 염증)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성경책에는 또 하나의 말이 추가되어 있었습니다.

“후회 없이!(No Regrets!)”

2013년은 윌리엄 보든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윌리엄 보든은  참된 제자의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남김없이(No Reserves!), 후퇴 없이(No Retreats!), 후회 없이(No Regrets!)

그는 후회 없이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월은 빨리 지나가고,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주께서 맡기신 일에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며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이런 질문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오늘밤 내게 오신다면 어떻게 살겠는가? 여전히 이런 모습으로 살아도 괜찮겠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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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_____________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베드로전서 강해 #. 16 (20160320)

시련의 때(베드로전서 4:12-19)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도입 이야기) 개성 공단에 설립된 닥터 그린피스에 의해서 운영하던 개성병원은 자원 봉사자들에 의해서 무보수로 운영되었다고 합니다. 개성병원의 행정부원장으로 봉사했던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시무하던 교회를 사임하고 개성병원에서 무보수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아내는 친정에서 지냈고 아들은 대학을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에 군에 입대했다고 합니다. 이런 가족들의 고통을 지켜보며 몸부림치며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네 은혜가 족한 줄 알라’고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도대체 뭐가 은혜입니까?’ 하고 불평했는데 그 때 ‘너는 그래도 남한에서 태어났지 않느냐?’ 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남한에서 태어난 것이 무슨 은혜일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한번은 북한 군 장교가 발에 부상을 입고 급하게 병원을 찾았는데 물론 북한 사람들은 북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도 개성병원을 찾은 것은 개성병원이 의약품이 풍성하고 의료기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북한군 장교는 특별대우를 받는다고 하는데도 겨울철에 양말이 없어서 발싸개로 발을 보호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북한군을 생각할 때 남한에서 태어난 것이 은혜라고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북한 병원에는 의약품이 부족하여 자주 일회용 주사기를 공급하였는데 일회용 주사기를 한 번 사용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대야에 물을 떠놓고 그 안에 담갔다가 다시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비위생적이라고 하지 말라고 하면 주사기가 없는데 어떻게 하겠느냐 하더랍니다.

심지어 치과에서 이를 뽑는데도 마취약이 없고 의료 장비가 부족하여 목수들이 사용하는 연장을 갖고 이를 뽑는 것을 목격한 것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그때서야 남한에서 태어난 것도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뉴욕의 이민자로 살아가는 것도 주님의 은혜라고 믿습니까?
시련 때문에 주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고난주일입니다.
고난주일을 성지주일 또는 종려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옷을 벗어 길을 덮었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 하고 소리치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는 모두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십자가 사건에 대한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의 생각을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이것이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돌이며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사건이 유대인들에게는 거치는 돌이었고,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왜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은 십자가의 사건을 거치는 돌과 어리석은 것이라고 하였을까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목수가 만드는 물건입니다. 그런데 목수이셨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자기가 만든 물건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목수와 십자가의 관계를 좀 더 확대하여 해석하면 창조주(목수)가 피조물(십자가)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창조주가 피조물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문제는 기독교인들이 십자가의 사건은 인류를 위한 구속의 사건이라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유대인과 헬라인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잘 믿으면 세상에서 고난과 시련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앙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주일을 맞이하여 본문에서 시련에 대한 신앙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시련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12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예수를 믿을 때에 불 시험과 같은 시련이 찾아오는 것을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상한 일이란 부끄러운 일을 의미합니다.

왜 고난과 시련이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요?

첫째는 예수님께서도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고난이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장로님 가정에 자식이 없습니다. 장로님은 자식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겠습니까? 그럼에도 자식이 없자 하루는 장로님 집으로 밥을 얻으러 온 거지를 만났습니다. 그 거지는 고아라고 합니다. 그 거지를 아들로 입양하여 공부를 시키고 마지막에는 신학을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하여 결국 목회자로 헌신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녀를 주지 않았지만 믿음으로 양자를 얻어 가문을 이어가게 하고 그 양자를 잘 키워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그 가문에 무려 24명의 목회자를 만든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픔을 주시지만 그 아픔을 통하여 더 큰 복을 받도록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저녁에 마을을 돌아다니며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집에 쌀을 보내어 밥을 짓도록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결혼 후 자식이 없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버려진 고아들을 입양하여 훌륭하게 키워서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일군으로 세웠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부끄러워 할 시련은 15절에서 찾아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베드로전서 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둘째, 시련을 기쁘게 받으라(13-14절)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시련을 기쁘게 받으면 하나님의 영이 임재 하는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시력이 있는데 비전이 없는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은 시련을 당하면 재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시련을 당할 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영의 임재를 경험하는 은혜가 됩니다.

다니엘서 3장에서 바벨론 포로가 되었던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이란 유대의 젊은이들은 느브갓네살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을 때는 풀무불에 던져 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 젊은이들은 여호와 하나님만 경배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왕의 명령에 따라 평소보다 7배나 더 뜨거워진 풀무불 속에 던져졌습니다. 풀무불에 던져 질 시련이 닥쳐왔을 때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라고 고백했습니다(다니엘 3:17-18).


얼마나 불길이 강하였든지 풀무불에 던져 넣던 군사들은 그 불에 타서 죽었고 세 사람은 그 풀무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왕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고 명한 다음에, 모든 신하 앞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라고 말했습니다.

또, 하나님에 대하여 좋지 않게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몸을 갈기갈기 찢고 그의 집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려라. 이같이 사람을 구원한 신은 천하에 없다고 명령했습니다.

아벳느고과 사드락과 메삭은 불같은 시험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러분, 모든 믿음의 시련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7:55-56,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사도행전 7:59-60,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시련을 기쁘게 받으면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히브리서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셋째, 그리스도인으로 받는 시련을 기뻐하라(16-19절)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는다면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심판은 하나님 집에서 시작합니다. 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될까요? 하나님의 집은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 안에는 알곡과 죽정이가 섞여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될 것입니다.

문화평론가 이어령씨가 예수를 믿게 된 동기는 실명 직전의 딸을 문병하려고 딸이 살고 있던 하와이를 방문했을 때 믿음으로 고침 받은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와이에 머물면서 딸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딸에게서 빛을 거둬가지 않으신다면 남은 삶은 주님의 자녀로 살겠습니다.’

딸이 실명의 위기에서 치유를 받는 것을 보며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세례 받은 후 3주가 지났을 때 딸의 장남이었던 손자(유진, 2007년 사망, 25세)를 잃게 되었습니다. 손자의 죽음 앞에서 절규할 수밖에 없었던 이어령씨가 만일 내가 하나님의 기적을 믿었다면 시련 앞에서 배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영성의 세계로 들어오면서 간절하게 원한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그 자체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어령씨는 ‘절망해 보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영성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며 영성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자기파괴’ 라는 극적인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왜 사랑의 하나님께서 시련과 시험을 허락하셨을까요? 그 까닭은 깊은 영성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야고보서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결단의 기도
1.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주소서.
2. 나의 죄로 인하여 고난당하지 않게 하소서. 

내 삶에 고난이 곧 기쁨이 될 줄로 믿고 확신하는가? 

나의 욕심으로 인하여 고난 받고 있지 않은가?  

가장 힘쓰고 있는 부분이 경건을 위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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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을 읽어 보면 우리는 참으로 편안한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믿음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수많은 고난 가운데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녀를 주지 않았지만 믿음으로 양자를 얻어 가문을 이어가게 하고 그 양자를 잘 키워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그 가문에 무려 24명의 목회자를 만든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픔을 주시지만 그 아픔을 통하여 더 큰 복을 받도록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시련이란 내가 예수를 잘 믿느냐 아니면 잘 믿지 못하느냐를 결정하는 기준이 아닙니다. 시련을 통하여 진리를 깨닫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시험이란 단어를 헬라어로 ‘페라조’ 라고 합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temptation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페라조는 두 가지로 번역하여 사용합니다. 같은 단어를 두 가지로 번역을 하는데 하나는 ‘시험’이고 다른 하나는 ‘시련’ 이라고 합니다. 시험이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의미라고 한다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로서는 시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건은 같은 사건입니다. 똑같은 사건인데 어느 측면에서 이해하느냐에 따라 시련이 되기도 하고 이것이 시험이 되기도 합니다.


시험이란 엄격한 의미에서 언제나 있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는 이런 때는 시험이 있고 저런 때는 시험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한마디로 말하면 병드는 것만이 시험이 아니다. 건강한 것도 시험이다. 건강하니까 죄를 짓습니다. 잘 안 되는 것만이 시험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잘 되는 게 시험이다. 언제나 시험은 있어 절대로 시험에서 떠날 수 없다.


또 하나, 누구에게나 시험은 있다. 누구에게나. 죄악 중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믿는 사람에게 시험이 있고 기도하는 중에 시험이 있고, 더 잘 믿어 보려고 할 수록 더 큰 시험을 받게 된다. 시험은 떠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선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험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언제나 무엇이나 시험이 될 수 있다 하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시련이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뜻을 잘 헤아리고, 고난 중에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며, 모든 상황의 주인 되시는 이에게 이 모든 고난을 맡겨야 합니다.



12, 13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상식에 도무지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신을 찾는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이유는 자신에게 올 수 있는 모든 재앙에서 벗어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너희를 시련하려고 하는 불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과연 어떤 사람에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 할 수 있겠습니까? 고난을 회피대상 1호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사람인데 과연 누가 고난으로 즐거워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바로 신자라는 것입니다.

또한 14절에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이 원하는 복은 말씀드리지 않아도 뻔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복을 원하십니까? 사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고난이든 욕을 받는 것이든 세상은 결코 복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물론 모든 고난과 모든 욕이 복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는 것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연단하기 위해 불 시험을 주신다고 하시는데, 대개 연단이라는 말에서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연단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의미도 있겠지만, 먼저 생각할 것은 믿음이 강해지는 것을 내가 강한 믿음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는 것에서 주님만 사랑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사랑하는 신앙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신자를 연단하시는 것은, 신자로 하여금 주님만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신자에게 주어지는 고난이나 시련의 이유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주님께 더욱 마음을 두게 되는 믿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단의 의미입니다.

때문에 주님만 사랑하기를 원하는 신자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을 마다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13절에서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시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되는 것으로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즐거움을 누가 원하고 이해하겠습니까?

신자가 서로 사랑하고 대접하고 봉사하며 산다고 해서 세상이 그것을 알아주고 높여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사랑을 베푸셨고, 자신의 생명으로 죄인들을 대접하셨고, 피를 흘리심으로써 봉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예수님을 세상은 핍박하고 죽이는 것으로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신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이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믿으면서 자신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원하고, 대접받기를 원하고,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야 말로 그 마음에 주님을 두지 않고 있는 흔적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되는 것을 즐거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고난이 즐거움이 되려면, 고난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사도는 영광으로 말합니다.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가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그 마지막은 하늘의 영광 보좌였습니다. 즉 하늘의 영광에 참예될 자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에 참예된 자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 봉사했다고 해서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가시고 영광으로 들어가셨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의 고난의 길에 참예되는 것만이 하늘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늘의 영광에 참예되기를 원하십니까? 영광의 면류관을 소원하십니까? 예수님이 받으신 영광에 참예되기를 진심으로 원하신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에 되는 것을 싫어할 리 없습니다. 오히려 즐거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되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이 예수를 말할 뿐, 예수님의 영광도 고난도 생명에도 관심이 멀어진 채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본 채 살아가기 때문에 고난도 시련도 벗어날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높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사람을 높일 리가 만무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았던 사도들이 세상으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았습니까? 그들 모두 하나같이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갔습니다. 그럼에도 그 길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사도들이 그 길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15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악한 행동으로 인해서 욕을 먹는 것은 없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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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부활주일 설교 / 2016-3-27

부활의 증인(사도행전 2:22-31)


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5.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관찰해 보겠습니다.

22절 -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23절 -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24절 -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고통과 사망의 매임을 푸시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5~28절 -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구약 성경인 시편 16편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시편 16편은 다윗이 쓴 시입니다.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29절 - 이스라엘 백성이 존경하는 다윗도 죽었고 그의 묘가 오늘까지 있다는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31절 - 다윗이 선지자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예언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절 -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도입 이야기)
탈무드에 소개된 교회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교회학교에서 성경을 배우고 집으로 돌아온 아들에게 엄마가 ‘오늘은 무엇을 배웠느냐?’ 라고 묻습니다.

아이는 엄마에게 ‘오늘은 모세가 애급의 군대와 싸워서 이긴 것을 배웠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엄마는 ‘모세가 어떻게 싸웠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신이 나서 ‘모세 장군이 홍해에 도착하여 다리를 만들고 그 다리를 건너간 후에 뒤를 따라오는 애급의 군대가 다리를 건너려고 할 때 무전으로 본부에 연락하여 폭격기를 지원 요청하자 폭격기가 나타나 폭탄을 떨어트려 다리를 부숴버려 애급 군대가 모두 죽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엄마는 아들에게 ‘정말 교회학교 선생님이 그렇게 가르쳤느냐?’ 하고 아들에게 물어봅니다. 그때 아들은 엄마에게 ‘내가 교회학교에서 배운 대로 이야기를 하면 엄마는 절대로 믿지 못할걸요!’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탈무드의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을 현대인들이 믿지 못한다는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현대인들이 믿지 못하는 사건 중의 하나가 부활입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부활을 믿습니까?
부활을 어떻게 믿습니까?

부활을 믿어야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전개 이야기)

알지 못하면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하게 됩니다.
현재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의 수가 대략 3만 명 정도라고 합니다.
함경북도 은덕지구에서 탈북한 어느 여성이 남한에 정착한 후 제일 먼저 받은 것이 주민등록증이라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국가 모든 것을 배급하는 제도에서 살았기 때문에 주민등록증만 있으면 모든 것을 배급받는다고 생각하여 제일먼저 휴대전화 상점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휴대전화를 판매하는 대리점에 가서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며 전화기를 받으러 왔다고 하자 무슨 서류를 작성한 후 사인을 하고 전화기를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과연 남한은 살기 좋은 곳이구나! 하며 제일 먼저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방금 전화기를 받았다고 자랑을 했더니 ‘그러면 이제는 자동차를 받으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것도 좋은 생각이구나 하고 자동차 판매 대리점에 가서 또 다시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며 자동차를 사러 왔다고 하였더니 매장에 있는 여러 종류의 자동차를 보여주며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자동차를 선택했더니 무슨 서류를 작성한 후에 5천만 원을 내라고 하더랍니다. 무슨 돈을 내느냐? 국가에서 배급으로 주는 것이 아니냐? 하고 당당하게 이야기를 했는데 자동차 판매 대리점의 직원은 ‘당신 도대체 어디서 온 사람이냐?’ 하고 묻기에 ‘북한에서 탈북한 사람’ 이라고 대답했더니 ‘잘 모르시는군요. 자동차를 구입하려면 계약서를 작성하고 계약금을 지불해야 하고 나머지 돈은 매월 할부로 지불해야 한다’고 하더랍니다. 할부가 무엇인지 계약금이 무엇인지 모르므로 ‘그러면 자동차 안 갖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남한과 북한이 다른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이와 동일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주일마다 교회에 다녔습니다. 성경도 읽었습니다. 기도하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이 신앙이 아니라고 하면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합니까?


부활의 증인이 되려면 부활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첫째, 부활의 의미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부활의 사건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 제자들에 의해서 신화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신격화하기 위하여 꾸며낸 이야기라고 합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되지 못한 당시 사람들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이론을 제시하여 반박합니다.

1. 기절설
잠시 기절했는데 돌무덤에 안장하므로 정신이 돌아와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2. 무덤을 잘못 찾았다
어두운 새벽길에 잘 못 찾아서 빈 무덤을 보고 주님이 부활한 것으로 오해했다고 합니다.


3. 도난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옮겨 놓고는 부활했다고 소문을 퍼트렸다고 합니다.


4. 환상설
부활이 없었는데 돌아가신 후 죄송한 뉘우침에 부활을 말하신 것을 굳게 믿고 심히 피곤하여 머리 속에 그리다가 마침내 환상을 보고서 이것을 실제인양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5. 신비설
바벨론 신화, 동방신화에 나오는 부활설을 예수에 적용했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역사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을 확증할 수 있는 증거는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변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가족들의 변화

요한복음 7: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마가복음 3:21,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그러나 예수님의 가족들은 부활을 목격한 후에 변했습니다.

사도행전 1: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예수를 믿으면서 가족들에게 신뢰를 줄 수 없는 신앙이라면 반드시 그 신앙생활을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가족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신비한 능력을 가족들을 위하여 사용하거나 유익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을 때 그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둘째는 사도들의 변화


사도란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았던 소수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며 가르침을 받았고 또한 예수님께서 분부하셨던 일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도들도 모두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목격한 후에 사도들의 삶에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베드로의 변화 - 사도행전 2:21-22, 4:8-10

사도행전 2:21-2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하였느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사도행전 4:8-10,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


마태복음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부활의 증인이 되려면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려면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제자가 되어 성령의 지배를 받았던 럿셀 코넬의 이야기

미국 보스톤 교외에는 골든 코넬 신학대학원이 있습니다. 이 코넬 신학대학원은 시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럿셀 코넬이라는 지휘관이 전쟁에서 후퇴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지휘관이 그만 자신의 지휘도를 잊어버리고 왔습니다. 코넬 대령은 링이라는 소년을 시켜서 그 칼을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소년은 목숨을 걸고 적진 속에 들어가 칼을 가져왔으나 그만 총에 맞았습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자기의 임무를 완수하려고 코넬 대령의 천막에 들어와서 칼을 바친 후 눈을 감으며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링이라는 어린 소년의 죽음을 지켜본 럿셀 코넬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 소년의 시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오! 주여, 이 어린이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여 이 어린이가 찾는 하나님을 위해서 제가 몸을 바치겠습니다.”

그 후에 럿셀 코넬은 신학을 공부하고 자기의 전 재산을 기부하여 골든 코넬 신학원을 세웠다고 합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의 면류관도 없다!
No cross, No crown!


부활 

미국의 노부부가 성지순례차 고향 땅 이스라엘을 찾았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남편은 장의사를 찾아 시신 처리와 장례 절차를 물었다. 장의사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 묻힐 경우 축복도 받고 비용도 150달러면 충분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시신을 방부 처리해 미국으로 공수하는 방식인데, 절차도 번거롭고 비용도 5000달러나 된다는 것이었다. 노인은 망설이다 결심했다. 비싸더라도 미국으로 시신을 옮겨 묘지에 묻겠다는 것이었다. 유대 땅에 묻히면 그 옛날 어느 분처럼 자기 아내가 부활할지도 모르는데, 그게 감당하기 어렵다는 ‘뼈 있는’ 이유였다. 우리는 부활을 바란다. 지금의 아내와 남편들도 함께 부활을 바라는가. 부활의 생명이 오늘의 유한한 생명 속에 꽃피고 열매 맺기를 정녕 바라는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오늘을 내일처럼 사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열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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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6-4-3

정직한 자의 기도(잠언 15:8)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The LORD detests the sacrifice of the wicked, but the prayer of the upright pleases him.


1월의 성구 - 예레미야 33:3
2월의 성구 - 마태복음 6:33
3월의 성구 - 빌립보서 4:6∼7
4월의 성구 - 잠언 15:8

악한 사람과 정직한 사람에 대한 성경적인 정의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정의 그리고 도덕적인 정의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악인이란 사회적인 정의는 ‘성질이 악한 사람(bad man)’ 이라고 합니다.
정직이란 ‘마음이 바르고 곧음(honesty)’ 라고 합니다.
반면에 잠언 15장 8절에서 악인과 정직한 사람에 대한 정의를 살펴봅니다.
악인이란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를 드리지 않는 사람’ 이라고 합니다.
정직한 사람이란 ‘하나님이 기뻐하는 기도를 하는 사람’ 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악인의 제사를 살펴봅니다(참조 창세기 4:1∼26).

아담과 하와가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일을 하고 아벨은 양을 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바칩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제물을 바칩니다. 그런데 아벨과 그 제물은 하나님이 기뻐하셨고 가인과 그 제물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자신이 바친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므로 얼굴의 빛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4:6∼7,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가인의 제사는 선을 행함이 없는 제사와 제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악인의 제사는 선을 행하지 않고 바치는 제물과 제사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

히브리서 13: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정직한 자의 기도를 솔로몬의 제사에서 찾아봅니다(열왕기상 3:4∼10).
정직한 기도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기도입니다(열왕기상 3:5, 10).
5절과 10절을 읽어봅니다.
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솔로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었습니다. 과연 정직한 자의 기도는 무엇인가를 살펴봅니다.

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6.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8.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첫째, 시간을 바치는 기도(열왕기상 3:4)

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예루살렘과 기브온의 거리가 대략 9km라고 합니다. 20리가 넘는 거리라고 하겠습니다. 10리 길을 보통 어른들의 걸음으로 한 시간 거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20리 길은 대략 두 시간이 조금 넘는 거리라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솔로몬은 2시간을 걸어서 기브온에서 제사를 드리려고 올라갔습니다. 그러므로 일반인의 시간보다 왕의 시간은 매우 소중한 시간입니다. 그 시간을 바친 것입니다.

어느 교회 사모님은 병원에서 약사로 근무하는데 평일에는 오후 10시가 넘어서 퇴근한다고 합니다. 온몸이 피곤하여 당장 자리에 눕고 싶지만 집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교회 강대상 앞에 앉아서 1시간 이상을 기도하느라고 몸부림을 친다고 합니다. 때로는 졸다가 잠에서 깨어 집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하루 24시간 중 시간의 십일조라도 바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고 그와 같은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민자들의 생활은 누구나 분주하고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생활에서 시간을 바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시간을 바치지 않는다면 솔로몬과 같은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시간 전례’ 라는 의식을 가르칩니다.
시간 전례의 의식 중에 아침과 저녁으로 한 시간씩 기도해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둘째, 물질을 바치는 기도(열왕기상 3: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솔로몬 왕이 기브온은 찾은 이유는 그 곳에 큰 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큰 단이란 한 번에 많은 제물을 바칠 수 있을 만큼 큰 단이었습니다. 그 단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일천 번제에 대해서 천 번의 제사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천 번제란 천 번의 제사가 아니라 천 마리의 제물을 말합니다.

당시 기브온 산당의 성막에서 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던 사람은 사독이었습니다.  때문에 그가 주도하고 많은 제사장이 참여하는 제사였을 것입니다(역대상 16:39, 제사장 사독과 그 형제 제사장들로 기브온 산당에서 여호와의 성막 앞에 모시게 하여).

사독을 비롯한 많은 제사장들이 솔로몬 왕이 바친 제물을 제사로 드렸을 것입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솔로몬은 그 많은 양의 제물을 바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물질이 많다고 제물을 많이 바치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을 바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1998년 7월 5일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은 황소 1001마리를 몰고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세계의 많은 언론들이 그 사건을 생중계하며 보도했습니다. 과거 미국과 중국의 핑퐁외교가 있었다면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 사건에서 황소외교라는 유행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주영 회장이 황소를 몰고 간 배경에는 열일곱 살 때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가출을 시도하려는데 마침 누이를 시집보내려고 소를 팔았던 돈을 훔쳐 가지고 집을 나왔다고 합니다. 소떼는 아버지에 대한 불효를 몇 배로 보답하고 싶은 생각에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더구나 천 마리가 아니라 한 마리를 더 추가한 것은 앞으로도 계속하여 황소를 보낼 것이라는 암시였다고 합니다.

한 개인이 황소 천 마리를 보낸 것도 세계적인 사건으로 보도가 되었다면 솔로몬 왕이 일천 번제를 위하여 황소 천 마리를 바쳤다는 것도 대단한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 은혜를 깨닫는 기도(열왕기상 3:6-7a)

6.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솔로몬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 은혜는 아버지 다윗 대에서부터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를 깨닫는 사람이 정직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녀에게 고기를 남겨주고
생각이 있는 사람은 자녀에게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신앙을 물려준다.

두 종류의 은혜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은혜’와 ‘보이는 은혜’ 라고 하겠습니다.

흔히 보이는 은혜만 은혜인 줄 알지만 보이지 않는 은혜가 더욱 큰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불치의 병에 걸렸다가 완쾌되었다는 보이는 은혜보다 작은 종양이 암이 되지 않는 보이지 않는 은혜가 더욱 큰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은 보이는 은혜를 더 크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 은혜를 찾아낼 줄 알아야 합니다.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이 대략 3만 명이라고 합니다. 탈북하게 된 동기는 남한에 먼저 정착한 가족이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을 위하여 탈북 브로커를 고용하여 탈북하도록 돕는다고 합니다. 탈북을 돕는 브로커들이 대게는 3-4명이 한 조가 되어 탈북을 돕는다고 합니다. 첫 번째 브로커는 북한 지역에서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인도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두 번째 브로커가 중국에서 라오스와 캄보디아 국경까지 인도합니다. 세 번째 브로커는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 한국 영사관으로 인도하는 브로커를 거쳐 남한으로 들어오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려면 한 사람당 대략 1,500에서 3,000만원의 경비가 소요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런 과정도 없이 남한 땅에서 태어나서 지금은 미국의 뉴욕이란 도시에서 정착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넷째, 지혜를 위한 기도(열왕기상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얻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지혜란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의좋은 두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해 가을 추수를 마치고 각자의 집 마당에 거둬드린 볏단을 쌓아두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형은 동생을 생각하고 볏단을 집어 들고 동생의 집으로 향합니다. 동생이 갓 결혼하여 생활이 미숙하여 돈이 많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하고 더 많은 볏단을 옮겨놓았습니다. 그리고 동생은 형을 생각하고 볏단을 집어 들고 형의 낟가리에 볏단을 올려놓고 가버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 형과 동생은 낟가리에 볏단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일이 며칠 계속 반복하던 중 어느 날 밤 두 형제가 서로 볏단을 들고 만났습니다. 그제 서야 두 형제는 볏단이 줄어들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어 서로 끌어안고 감격했다고 합니다.

(삶을 위한 적용)

정직한 사람의 기도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알 수 있듯이 선을 행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선을 행하는 길은 성실한 것을 말합니다.

어느 해 한국의 여러 대학의 책임자들이 영국의 유명한 대학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날따라 비가 내려 대학을 방문하는 일이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였는데 비가 오는데도 어떤 사람이 호수를 들고 잔디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너무 이상해서 그 사람에게 ‘아니 비가 오는데 왜 잔디에 물을 뿌리시나요?’ 라고 물었을 때 그 사람의 대답은 ‘이것은 내가 할 일이기 때문’ 이라고 하였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것이 한국과 영국의 차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비가 오는데 오늘은 물을 뿌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영국 사람은 비가 오더라도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정신이 영국이란 나라를 세웠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직한 기도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내가 해야 할 일을 책임지고 완수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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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 / 2016-4-10

바람직한 장로(베드로전서 5:1-6)


남자 셋이 모이면 군대 이야기를 하고, 여자 셋이 모이면 아이 낳는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교인 셋이 모이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를 생각했습니다. 교인 셋이 모이면 바람직한 장로 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임직예식에 순서를 맡아 참여하면서 느낀 것은 정말 교회를 바르게 섬기기 위한 예식인지 아니면 교회에 소속된 사람을 외부에 알리고 자랑하려는 것인지 아리송한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은 바람직한 장로에 대해서 설교하려고 합니다.

(도입 이야기 #. 1)

목회 현장에서 기억나는 장로님을 소개합니다.

교회를 시작하고 교인이 대략 50명 정도 모일 때입니다. 예배 후 성도의 교제를 위한 모임을 준비해야 하는데 어느 장로님께서 토요일마다 유명 제과점에 두 종류의 빵을 주문한 후 주일 아침마다 교회에 오실 때에 빵을 찾아오셔서 성도의 교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 예배 후 한 교인이 점점 교인이 늘어나면 어떻게 하실 것이냐? 하고 질문했을 때 장로님은 교인이 100명이 될 때까지 계속할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어느 교인이 성도의 교제를 위한 준비를 장로님에게만 맡기지 말고 자원하는 교인에게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장로님께 그동안 좋은 본을 보여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하고 교인들에게도 섬기는 훈련이 필요하므로 자원하는 교인에게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교인들이 서로 자원하기 시작하고 일 년이 지나지 않아 출석교인이 100명이 넘게 되었습니다.

(도입 이야기 #. 2)


대부분 교회에서 임직예식을 거행하려면 행사 진행을 위한 예산에 따라 금액을 분담합니다. 이러한 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드려지고 있습니다.

나사렛교단의 경우 장로가 되려면 정규 신학의 과정을 마쳐야 합니다. 그리고 개 교회에서 임직예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총회에서 임직예식을 합니다. 따라서 나사렛교회에서 임직을 받았으면 다른 나라 다른 지방의 나사렛교회에 출석하더라도 그 직분은 계속됩니다. 그리고 나사렛교단의 특징은 장로는 교회 행정을 맡는 장로와 설교와 성경공부를 맡는 장로로 구분합니다. 설교와 성경공부를 맡는 장로를 장로 목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사렛교단에서 장로 목사가 되면 임직증서를 본인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교단 본부에 제출하고 본부에서 그 증서를 관리합니다. 그러므로 세계 어느 교회를 가든지 목사로서 활동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에서 임직을 받으면 다른 교회로 옮겼을 때는 그 직분은 계승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민교회의 경우 대게 적은 수의 교인들이 모여서 여러 해 동안 신앙생활을 하면 모두가 제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과연 바람직한 장로 상에 대해서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제가 군대 생활을 할 때에 부대의 구호는 ‘당백(當百)’ 이었습니다. 당백의 의미는 한 사람이 백 명의 적군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 구호라고 하겠습니다.

뉴욕나사렛교회 교인들은 당백의 구호처럼 한 사람이 백 명을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이런 신앙을 갖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베드로전서 5장 1절부터 6절의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①. 너희 중에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②.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③.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④.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⑥.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먼저 본문에서 장로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절을 함께 읽어봅니다.

①.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라.

첫째,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구원의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장로가 될 사람은 고난의 십자가를 즐겁게 짊어질 수 있는 믿음으로 무장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고난의 증인은 십자가에 대한 신앙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현장은 당시의 제자들도 두렵고 무서워서 도망쳤던 자리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은 그동안 예수님만 따라다니면 먹을 것도 해결되었고 심지어 귀신도 내쫓기고 병든 사람도 고침을 받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좋아할만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하기도 싫은 사건이었습니다.

아직도 예수를 믿으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야 하고 하는 일마다 성공해야 하며 자녀들을 세상에서 출세하고 세상에서 어떤 질병에 시달리지도 않는 것이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십자가의 신앙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어떤 믿음을 보여주셨습니까?

빌립보서 2:20,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내가 죽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 되는 길입니다.

2절을 함께 읽어봅니다.
②.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둘째, 양 무리를 보살필 줄 아는 신앙


양 무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장로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칠 줄 알아야 합니다. 양 무리를 친다는 말씀은 양 무리를 보살핀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양 무리란 교인들 말합니다. 교인은 교회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교인들을 보살피는 자세를 네 가지로 소개합니다.


1.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라
2.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원함으로 하라
3.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라
4. 즐거운 뜻으로 하라

3절을 함께 읽어봅니다.
③.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셋째, 본이 되는 신앙

양 무리의 본이 되라는 가르침은 교인들의 본보기가 되라는 교훈입니다.

옆으로 기어 다니는 게가 자식들에게 너희는 옆으로 기어 다니지 말고 제발 앞으로 걸어 다니라고 가르칩니다. 새끼들이 앞으로 걸어가려고 몸부림을 쳐 보지만 도저히 앞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자 새끼들이 어미에게 ‘한번만 앞으로 가는 것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어미가 새끼들에게 ‘지, 발 봐라’ 하며 앞으로 가려는데 자꾸만 옆으로 기어 갑니다. 결국 새끼들은 어미도 못하는 것을 왜 저희들에게 하라고 하느냐 하며 불평했다고 합니다.


본이 되려면 자기의 본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사 시대에 기드온에게 많은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들 중에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되려고 기드온의 70명의 아들들을 모두 죽인 후에 왕이 되었습니다. 기드온의 마지막 남은 아들 요담이 그리심산에 올라가 세겜 사람들에게 소리치기를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그리고 포도나무에게 우리들의 왕이 되라고 간청하였으나 감람나무는 성전의 기름으로 드려져야 하고(삿 9:9), 무화과나무는 나의 단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겠느냐 하고 거절하였고(삿 9:11), 포도나무는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하고 거절했습니다(삿 9:13).

그러나 가시나무는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라고 합니다(삿 9:14).

가시나무는 가시나무의 본분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비유라고 하겠습니다.

이민 교회가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이유는 처음 이민 와서는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려고 매일 분주하게 생활하였으나 어느 정도 의식주 문제가 안정된 후에는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인정의 욕구를 충족하려고 미국 교회에 나갈 수 없으므로 결국 한인들이 모여 있는 교회를 찾게 되는데 교회는 이런 욕구의 사람들이 열심히 섬기는 것을 신앙이라고 판단하고 일군으로 세운다고 합니다. 드디어 일군으로 세워진 후에는 인정의 욕구가 우선되어 섬김이 아니라 자기주장을 할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양 무리의 본이 되려면 종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20:26∼28,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5절을 함께 읽어봅니다.
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넷째, 겸손한 신앙


장로가 될 사람은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사탄의 유혹에 넘어지게 됩니다.

겸손하려면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겸손하려면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하나님은 전능하신 주권자입니다. 하나님이 세우면 세워질 것이고 하나님이 파하면 파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이면 높아질 것이고 하나님이 낮추면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무엘상 2:6-7,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때에 우리를 높이 들어 쓰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들을 결코 쓰지 않으실 것입니다.

바람직한 장로에게는 약속된 은혜가 있습니다.
나타날 영광에 참여하는 은혜(1절)
너희 중에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나타날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어떤 영광일까요?
영광의 면류관을 얻는 은혜(4절)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예수님께로부터 마지막 심판의 때에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영광의 면류관은 마지막 심판 때에만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도 반드시 그 은혜를 누리게도 하십니다(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때가 되면 예수님께서 높여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과 조직으로부터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직한 장로는 네 가지 신앙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
둘째, 양 무리를 보살필 줄 아는 신앙

셋째, 본이 되는 신앙

셋째, 겸손한 신앙


결단을 위한 통성 기도

주여,
저희들을 바람직한 신앙의 사람들로 세워주시고
이 시대에 부흥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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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2016-4-17)

은혜의 하나님(베드로전서 5:7∼11)


⑦.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⑧.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⑨.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⑩.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⑪.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전서는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핍박이라는 고난이 닥쳐왔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도시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핍박을 받던 성도들이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순교하지 못한 자신의 약함과 핍박을 피하여 도망친 것이 부끄럽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성도들에게 ‘너희 믿음을 굳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왜 믿음을 굳게 해야 합니까?
믿음이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고난이나 환난 그리고 핍박을 모두 물리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환난과 고난 그리고 핍박을 당할지라도 그 가운데서도 믿음을 견고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을 견고하게 하려면 모든 염려를 맡겨 버려야 합니다.

7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아멘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는 말씀은 온갖 염려가 성도들에게 찾아오지만 염려를 맡겨 버리면 주님께서 보살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서울 상도동에서 목회를 하시던 어느 목사님께서 며느리가 사업을 한다면 시아버님이 목회를 하시던 교회뿐만 아니라 이웃 교회 심지어 시어머니가 근무하던 학교의 선생님들에게 돈을 빌려 사업을 확장하다가 그만 부도가 났습니다.
목사님께서 모든 채권자들을 불러 모은 후에 목사님이 소유한 모든 것을 공개하고 가져가라고 하신 후에 결국 강원도 탄광 지대 황지교회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교회 봉고차를 타고 가던 중 높은 운전 부주의로 높은 곳에서 차가 굴러 떨어지는 큰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안전벨트를 했기 때문에 큰 부상이 없었고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사모님은 안전벨트를 하지 않아 차가 뒹굴면서 차의 문이 열려 찰과상만 입었습니다.

사고 소식을 듣고 어떤 사람은 결국은 며느리 때문에 몹쓸 교통사고를 당했구나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사고를 당한 목사님은 이번 사고로 인하여 초기에 암을 발견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다며 오히려 이것을 계기로 더 큰 일을 계획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에 황지에서 많은 복지 사업을 펼치셨고 정부로부터 사회봉사상도 받으셨습니다.

은혜가 무엇일까요?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은혜입니다.

어느 수도원에 젊은 수도사가 들어왔습니다. 수도원 원장은 젊은 수도사에게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계속 강조했습니다. 그러자 하루는 젊은 수도사가 원장님께 “은혜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원장은 수도사를 데리고 바다 한 가운데로 배를 타고 들어간 후에 배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 수도사에게 “자네, 지금 어디에 있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수도사는 “바다 안에 있습니다.” 그러자 수도원 원장은 젊은 수도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바다 물과 같다네. 자네를 둘러싼 전부가 하나님의 은혜일세!” 라고 깨우쳤다고 합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강원도 황지에서 목회하셨던 이정규목사님은 교회 봉고차를 타고 가던 중 그만 높은 언덕에서 차가 뒹굴어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고로 인하여 목사님의 내 몸 안에 있던 병의 원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통사고는 불행한 사건이지만 그 불행이 알 수 없었던 병을 찾아내는 기회가 되어 오히려 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은혜가 아닌 것을 은혜라고 주장하는 잘못된 믿음입니다.

은혜가 아닌 것을 은혜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전 교인을 대상으로 일 년 동안 누가 성경을 가장 많이 읽는가를 확인하여 년 말에 상을 주기로 결정하고 매주일 성경을 읽는 범위를 확인하는데 모든 교인들 중에서 항상 일등을 하는 교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교인은 직장생활을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성경을 많이 읽는지 모두가 궁금해 하여 목사님이 그 교인에게 직장 생활을 하며 어떻게 그렇게 성경을 많이 읽을 수 있느냐? 라고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예, 저는 직장에서도 성경을 읽는다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아니 직장에서 어떻게 성경을 읽느냐? 다시 질문을 했는데 그 사람의 대답은 예, 성경 프로그램을 컴퓨터 화면에 띄우고 읽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근무를 하는 줄 안다고 하더랍니다. 목사는 그 교인에게 당신은 성경을 읽는 죄를 범하고 있다고 깨우쳤다고 합니다. 직장에서의 근무 시간은 철저하게 직장의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무 시간에 성경을 읽는 것을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독교 대학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모두 교인들입니다. 더구나 직급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교회에서 중직을 맡습니다. 한번은 어느 과장이 근무 중에 잠시 외출을 하겠다고 하더랍니다. 이유를 묻자 오늘 자기 집에 심방을 오기 때문에 가야한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차라리 휴가를 내고 가라고 했더니 믿음이 없는 상사라고 비난하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을 은혜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10절을 읽겠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교통사고가 없는 것이 좋지만 때로는 교통사고가 성도들에게도 찾아옵니다. 그것은 불행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고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믿음입니다.

며느리 때문에 서울에서 목회를 하지 못하고 가원도 탄광촌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경찰이 교통사고 현장을 검증하며 ‘도대체 이런 곳에서 차가 굴렀는데도 사람이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고 하더랍니다.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병원에 입원하여 건강검진을 받을 이유가 없었기에 하나님은 사고로 인하여 몸 안에 감추어져 있던 암을 발견하여 그 암을 제거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정체성, identity).

둘째, 하나님 안에서 나의 일을 발견하는 것이다(소명, calling)

셋째, 하나님 안에서 나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사명, mission)

첫째, 하나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정체성, identity)


모세는 120년 동안 세상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120살이 되도록 눈이 흐리지 않았다고 합니다(신명기 34:7).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120년 동안 세상에 머물렀던 모세의 삶을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성장기 40년
애급의 궁궐에서 화려한 삶을 누렸습니다.


둘째는 수련기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목동의 삶이었습니다.

셋째는 구출기 40년
애급에서 탈출하여 약속의 땅을 향하여 광야에서 백성들을 인도하던 삶이었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그의 일생에서 구출기의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을 발견했던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은 모세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습니다.

히브리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애급에서 히브리 사람과 애급 사람이 다툴 때에 그 싸움에 관여하지 않았다면, 모세가 이렇게 광야에서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을 때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불이 다른 곳으로 번져나가지 않는 이상한 불이었습니다. 모세가 가까이 가서 그 광경을 보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출 3:5).

모세야, 모세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지난 80년 동안 모세가 알 수 없었던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은혜는 하나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지 못하면 삶이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들이 즐겨 부르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복음송은 신상우씨가 작곡한 곡입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신상우씨가 이 곡을 작곡하게 된 동기는 대학을 졸업 후 카나다 토론토에 부모님을 따라 이민을 가서 작은 그로서리를 운영하는 부모님을 돕기 위하여 가족 들 중에서 영어를 잘 하기 때문에 매일 새벽 홀세일에 가서 물건을 구입하고 하루 종일 가게에서 일을 하면서 점점 자기 삶이 황폐해 지고 있는 것을 느끼며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고형원이라는 복음송가 가수로 활동하던 고형원씨를 만났을 때 그를 통하여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결단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복음성가 작곡자로 활동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침 카나다에서 활동하던 조은아 작사가에게 가사를 부탁하여 다음 날 그 가사를 받고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만든 곡이라고 합니다.

둘째, 하나님 안에서 나의 일을 발견하는 것이다(소명, calling)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는 음성을 듣습니다(출 3:10).


모세는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낼 수 있느냐? 하며 묻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던 모세에게 갑자기 애급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내라는 명령을 듣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나를 발견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겨주십니다.

에스더는 부모도 없는 고아였습니다. 그러나 삼촌은 에스더를 자기 딸같이 양육했습니다. 그리고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가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죽임을 당할 큰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너는 왕궁에 있다고 안전할 줄 아느냐 네가 왕후가 된 것은 바로 이 때를 위한 것이라며 에스더에게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우쳤습니다.

에스더 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에스더는 삼촌 모르드개의 깨우침에 따라 금식합니다. 그리고 죽을 각오를 하고 왕 앞에 나갔습니다. 에스더는 그가 해야 할 일을 알았습니다.

셋째, 하나님 안에서 나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사명, mission)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는 것이 자기 일이라고 믿었던 바울은 어느 날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는 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이후부터 바울은 이방인의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그의 일을 마치려고 할 때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디모데후서 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일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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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6-4-24 

기도와 찬송(야고보서 5:13)


2016년 신앙생활의 목표는 ‘쉬지 말고 기도하자!’
신앙생활의 목표를 실천하기 위하여 매월 기도에 관한 성구를 암송합니다.
1월부터 4월까지의 성구를 먼저 함께 암송해 봅니다.


1월의 성구 / 예레미야 33:3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Call to me and I will answer you and tell you great and unsearchable things you do not know.)


2월의 성구 / 마태복음 6:33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But seek first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given to you as well.)

    

3월의 성구 / 빌립보서 4:6∼7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petition, with thanksgiving, present your requests to God. And the peace of God, which transcends all understanding, will guard your hearts and your minds in Christ Jesus.) 


4월의 성구 / 잠언 15:8 - 악인의 제사는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The LORD detests the sacrifice of the wicked, but the prayer of the upright pleases him.)


5월의 성구 / 야고보서 5:13 -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Is any one of you in trouble? He should pray. Is anyone happy? Let him sing songs of praise.)  


야고보서는 행동하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신앙을 이행득의(以行得義) 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5장은 행동하는 믿음에 대한 결론으로 특수한 상황에서 믿음으로 행동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특수한 상황 또는 특수한 환경 세 가지를 알려주는 야고보서 5장 13∼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⑬.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⑭.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세 가지 특수한 환경이 내게 닥쳐왔을 때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첫째는 고난당하는 자(trouble, suffering) 
둘째는 즐거워하는 자(happy, cheerful) 
셋째는 병든 자(sick) 


첫째는 고난당하는 자(trouble, suffering)


고난당하는 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고난의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면 고난의 원인을 찾습니다. 그러나 이미 내게 닥쳐온 고난의 원인을 찾아서 무엇 합니까? 고난을 당하면 기도해야 합니다. 고난의 터널을 빨리 지나가야 합니다. 고난의 터널을 지나가노라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고기를 잡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나를 따라 오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저하지 않고 그물과 배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제는 죽으러 가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는다면 베드로는 더 이상 예수님을 따라 다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베드로는 더 이상 따라 다닐 대상이 없으므로 3년 전에 포기했던 그물을 들고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았습니다. 어느 날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수고했지만 고기를 잡지 못하고 몹시 피곤해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1:6).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졌습니다. 배를 중심으로 왼편과 오른편의 차이는 크지 않습니다. 다만 방향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졌을 때 이제까지 잡아볼 수 없었던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방향을 바꾸는 순간 놀라운 경험을 갖게 되었습니다. 고난의 원인이 아니라 고난을 당하면 기도하면 됩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방향을 바꾸지 못하고 고난의 원인과 경과와 결과에 붙잡혀 있습니다.

고난당하는 자가 기도하는 것은 방향을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어제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난에 40년 만에 불교에서 기독교로 돌아온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 박사이자 40년간 승려생활을 했던 김진열(63· 아산 예은교회)씨가 최근 학창 시절에 믿었던 기독교 신앙을 회복하고 제2의 삶을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5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형수의 보살핌을 받으며 형수와 함께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구역예배와 통신 성경공부를 하며 장차 목회자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신앙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1970년 대학 입시에 실패한 후 ‘교회에 다니는 내가 왜 대학을 낙방해?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인생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주와 관상 책을 구입했습니다. 불교 책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한 김진열씨는 대한불교 조계종 종립 동국대 종비생 석림회 장학생이 되어 공부를 계속하였고 1992년 불교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박사 학위 논문의 제목은 대승불교 후기 경전인 ‘능엄경 연구’ 라고 합니다.

법명과 호가 보현(普賢)이라고 합니다. 불교계에서는 보현스님으로 널리 알려졌다고 합니다.

동국대와 중앙 승가대에서 9년간 강의했으며, 불교계에서 촉망받는 학자이고 승려로 ‘종교학개론’ ‘불교사회학’ ‘교단발달사’ ‘율전개설’ 등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20년간 수원과 천안에서 ‘감로향사’라는 작은 암자를 운영하기도 했고 교회를 비판하며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기독교 성시화운동을 비판하며 불교의 우월성을 주장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는 계기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3년 전, 꿈속에서 거칠게 생긴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와 저승에서 왔다며 끌고 가려 했답니다. 너무 놀라 잠을 깬 뒤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날이 반복되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밝은 대낮에도 전화나 컴퓨터가 이유 없이 켜지는 등 이상한 일에 연일 시달리니 삶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점점 그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어릴 때 읽은 성경구절이 문득 생각났다고 합니다. 로마서 10장 9∼10절이 눈앞에 펼쳐졌다고 합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어린 시절 교회에 다녔던 그 때를 기억하고 기독교 신앙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순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지난 1월 17일부터 본격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며 지난 4월 20일에는 세례도 받았다고 합니다.

이제 남은 생애는 신학교에 입학하여 더 깊이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고난이란 방향을 바꾸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신호등과 같습니다.

둘째는 즐거워하는 자(happy, cheerful) 

즐거워하는 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찬송을 부르는 것이 행동하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찬송이란 다양한 용어 중에 ‘테힐라’ 라는 단어를 소개합니다.
찬송 테힐라는 ‘감사의 고백’이란 뜻입니다.
감사는 감사의 조건이 있을 때에 감사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테힐라의 찬송은 감사의 조건이 있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닥쳐온 특수한 환경이나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찬송의 능력(Power in Praise)이란 책에서 어느 청년이 그의 아버지가 알콜 중독자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청년은 아버지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님, 저희 아버지를 알콜 중독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테힐라의 찬송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 후에는 ‘주님, 저희 아버지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해 주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은 알콜 중독에 빠진 인생도 아름답게 사용하실 수 있음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지난 30년 동안 알콜 중독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할 때는 응답이 없었는데 알콜 중독 증세에도 감사할 것을 찾아 기도할 때 응답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테힐라의 찬송은 감사의 조건이 없을지라도 감사할 수 있는 찬송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들은 감옥이란 특수한 환경에서 찬송하며 기도했을 때 감옥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감사할 조건이 아니라도 감사의 찬송을 부릅시다.
찬송을 부를 환경이 아니더라도 감사의 찬송을 부릅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


찬송은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려울 때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즐거울 때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어려우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고 즐거우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셨습니다. 고난을 당하기 때문에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러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떡과 포도주를 갖고 제자들에게 이 떡은 나의 몸으로 생명의 떡이며, 이 잔은 나의 피로 생명의 잔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찬미하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도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것도 십자가를 앞에 놓으시고 찬송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즐거울 때 찬송을 부르지 못하는 사람은 고난 때에 기도하지 못합니다.

셋째는 병든 자(sick) 


병든 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병든 자는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고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는 것이 행동하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병이란 두 가지 의미의 병을 말합니다. 하나는 육체적인 질병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질병을 말합니다. 육체적인 질병도 영적인 질병도 모두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해야 병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게 됩니다.


기도는 곡이 없는 찬송
찬송은 곡이 있는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찬송은 특수한 환경에서 기도하는 방법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기도하면 두 가지 유익을 얻습니다.
첫째는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둘째는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습니다.
셋째는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5월을 맞이하며 특수한 환경과 상황 가운데서 절망하지 말고 일어나서 기도하고 찬송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복된 신앙의 주인공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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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어린이 주일 설교 / 2016-5-1

 어린이와 천국(마가복음 10:13∼16)


⑬.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⑭.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⑮.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⑯.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아멘  


마가복음의 본문과 비슷한 내용을 누가복음 18:15-17

⑮.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⑯.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모세는 무엇이라고 하였느냐?’ 하고 묻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 주기만하면 좋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모세의 법은 너희가 고집이 세고 악하기 때문에 이혼증서를 써 주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사람이 자기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되게 하셨으므로 둘이 아니라 한 몸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 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예수님께서 어느 집에 들어갔을 때 제자들이 방금 전에 바리새인들에게 깨우쳤던 말씀에 대하여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좀 더 구체적으로 ‘누구든지 자기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본처에게 간음죄를 짓는 것이며, 또 아내가 자기 남편과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도 간음죄를 짓는 것.’ 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손을 얹어 축복해달라고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왔으나 제자들이 그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모습을 보고 분개하시며 ‘어린 아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 이라고 제자들을 깨우쳤습니다.
그리고 강조하시기를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그 나라에 절대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배경을 통하여 어린 아이들에 대한 생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부모의 생각

세상 모든 부모의 공통된 마음은 내 아이가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내 아이가 축복을 받는 존재가 되려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콩 심은 곳에 콩이 나고 팥 심은 곳에 팥이 난다는 속담처럼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신앙과 생활은 축복을 심지 않고 복을 받게 하려는 것은 바람직한 신앙이 아닙니다.

어느 교인의 가정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한번은 그 교인의 집을 목사 몇 명의 교인이 방문하게 되어 예배를 드리려는데 그 교인이 아이에게 ‘어서 엄마 방에서 책을 가져오너라!’ 라고 이야기를 하자 아이가 엄마 방을 달려가서 손에 화투를 들고 오더랍니다. 그러자 엄마는 아이를 나무라며 누가 그 책을 가져오라고 했느냐 성경과 찬송을 가져와야지 하고 아이에게 말하더랍니다.

평소에 그 교인이 아이 앞에서 어떤 생활을 하였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제자의 생각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집에 들어왔을 때는 좀 한가롭게 여유를 갖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들어왔는데도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와서 예수님을 귀찮게 하려는 것을 보고 꾸짖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부모와 아이들을 꾸짖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에게 그렇게 행동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때 사람의 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하느라고 몸과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보고만 있습니까? 마리아에게 가서 마르다를 도와주라고 하십시오 하고 부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는 이 좋은 것을 선택했으니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며 많이 준비하려고 하지 말고 몇 가지만 하든지 아니면 한 가지라도 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내 집을 찾아오신 예수님께 많은 것을 대접하려고 생각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집으로 오셨으니 예수님 가까이서 말씀 듣기를 원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위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생각을 좋다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예수의 생각


예수님께서는 부모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어린 아이들을 보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 아이들처럼 받아드려야 한다고 깨우쳤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야 합니다.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태복음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어린 아이처럼 천국을 받아드리기 위한 신앙의 자세를 두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씀은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말씀은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은 사람에게 의롭다고 하신 약속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각을 배우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생각도 제자들의 생각도 예수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생각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은 어린 아이처럼 받아드려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받아드린다는 말씀을 심리학 용어로 지고체험(至高體驗)이라고 합니다.


지고체험이란 무슨 일에든지 열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듭난 사람(요한복음 3:3, 5)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혈과 육으로 받을 수 없는 나라(고린도전서 15:50)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어린 아이와 같이 섬기라(마태복음 18:4)


어린 아이와 같이 섬긴다는 것은 어린아이의 열정과 열중을 의미합니다.

열정과 열중을 ‘지고(至高)체험' 이라고 합니다.

지고 체험이란 ‘아브라함 매스로우’가 ‘존재에 대한 심리’ 라는 저서 처음으로 소개한 용어입니다.


예를 들면 어린 아이를 출산하는 산모가 산고의 통증으로 몸부림을 치면서도 새 생명이 출산되는 순간 산고의 통증과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놀이에 열중하면 다른 것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것도 지고체험의 한 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와 같이 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신 것은 어린 아이처럼 신앙생활에만 열정을 갖고 열중하라는 것입니다.


참고자료 / 자녀의 행복한 인생을 약속하는 부모의 지혜

          웨인 W. 다이어박사, 이일남옮김 p. 217-220



아이는 부모가 기대하는 만큼 성장한다.

만일 자녀에 대하여 기대를 갖지 않는다면 그 자녀는 성장하지 못한다,

 


이토스(Ethos) 파토스(Pathos) 로고스(Logos)


- 이토스는 인격적인 측면, 파토스는 감정적인 측면, 로고스는 논리적 측면을 의미한다.


사람은 보통 이성보다는 감성적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그 점에 유의하고 매사에 합리적이고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흡연과 음주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이성적인 인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흡연과 과음을 하게 되는 것은 감성 때문이다. 흡연하는 사람은 이성적으로는 분명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흡연은 스트레스 해소에 효과적’ 이라는 감성으로 이성적 판단을 누른다. 즉 감성을 이용해 자신의 결정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만, 감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상대방을 변화하고 싶을 때 혹은 상대방을 설득하고 싶을 때는 그들의 이성에 호소하는 것보다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사람은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만 이성적이다. 상대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면 아무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자료를 제시하더라도 상대방은 잘 설득되지 않는다.


감정이 나쁘면 상대방과 관련된 모든 것이 싫어지고, 상대방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은 것이 좋은 것으로 느껴진다. 상대방이 믿지 않으면 아무리 말을 잘 할지라도 상대를 설득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늘 상대가 좋은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누군가를 변화시키고 싶다면, 논리에 앞서 감정을 터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군가를 설득할 때는 ‘3요소’를 생각하라고 했다. 3요소란 이토스, 파토스, 로고스를 말한다. 성공적인 설득은 이토스(인격적인 측면)를 거쳐 파토스(상대방의 감정에 호소)를 한 후, 로고스를 통해 논리적 근거를 제시한 다음 상대방이 마음을 바꾸지 않도록 다시 이토스로 끝내는 것이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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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스(Ethos) : 명성, 신뢰감, 호감 등 메세지를 전달하는 사람에 대한 인격적인 측면으로, 설득 과정에 60퍼센트 정도 영향을 미친다.

파토스(Pathos) : 공감, 경청 등으로 친밀감을 형성하거나 유머, 공포나 연민 등 감정을 자극해 마음을 움직이는 감정적 측면으로, 설득에 30퍼센트 정도 영향을 미친다.

로고스(Logos) : 논리적인 근거나 실증적인 자료 등으로 상대방의 결정을 정당화 시킬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논리적 측면으로, 설득에 10퍼센트 정도 영향을 미친다.

성공적인 설득은 다음과 같은 순환과정을 거친다.

호감을 사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이토스).
그 다음에는 상대방의 감정에 호소한다(파토스).
그리고 행동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제공한다(로고스).
그런 다음 상대방이 마음을 바꾸지 않도록 다시 (이토스)를 사용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이런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더구나 이민 생활을 하면서 모두가 시간에 쫓기고 몸과 마음이 피곤한 생활입니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교인들이 직접 참여하고 실천해야 하는 일을 내가 먼저 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교회 주방의 봉사와 교회를 관리하는 일을 교인들이 피곤하기 때문에 내가 알아서 해야지 하고 먼저 해 버리는 것이 결코 옳은 일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비록 몸과 마음이 피곤하고 힘들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을 내가 직접 참여하고 자발적으로 실천하면서 신앙이 자라고 믿음이 왕성해지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가로막은 제자들의 생각이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천국을 확장하는 일에 걸림돌이 된 것처럼 내가 알아서 먼저 하고 행동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받을 섬김의 은혜와 상급을 가로막는 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어른들입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천국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어떻게 천국 가는 길을 막고 있을까요?
첫째는 고정관념(固定觀念) Stereotypes
둘째는 선입관(先入觀), 선입견(先入見) Preoccupation 

어른들의 어린이에 대한 고정관념과 선입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1. 무시(無視) Ignore, disregard 
- 어린 것이 무엇을 알겠는가?
- 어린 것이 무슨 힘이 있는가?
- 어린 것이 얼마나 하겠는가?

2. 귀찮은 존재(存在) Nuisance 
- 어린 것이 어른들의 일에 왜 간섭하는가?

이러한 생각은 비록 한국 사회에서만 나타는 현상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서양문화 즉 헬라와 로마 문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특히 구약에서는 어린 아이에 대하여 매우 귀중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히브리 문화라고 합니다.

어린 아이에 대한 히브리 문화를 성경에서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예를 찾아보면 아기 예수께서 탄생했을 때 헤롯왕은 2살 이하의 모든 어린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만큼 어린아이의 생명까지도 왕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었던 사회이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문화 즉 구약에서 어린아이에 대한 이해를 살펴봅니다.

라헬의 간절한 소원(창세기 30: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자식을 낳지 못했던 라헬은 남편 야곱에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겠다고 하며 아이를 낳기를 소원했습니다.

한나의 소원(사무엘상 1:11)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시편 127:3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구약 즉 히브리 문화는 예수님 당시에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어린아이들에 대해서 어른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 오는 것을 금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런 자는 어린아이를 말합니다. 그렇다고 어린아이들이 모두 천국에 들어간다는 가르침은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인 천국을 받들어야 합니다.

어린이와 천국이란 설교 제목에서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은 천국은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다는 의미를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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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란 어떤 존재일까요?

어린아이같이 순수한 존재
어린아이같이 겸손한 존재
어린아이같이 연약한 존재
어린아이같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존재

예수님은 천국을 설명할 때 어린아이를 가지고 설명하셨는데 3가지 면에서 교훈하셨습니다.

 

1. 첫 번째의 교훈은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하셨습니다. (뭐라고요?) 어린아이처럼. 그렇습니다. 그 말씀이 3절에 나와 있지요. 같이 한 번 읽겠습니다.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어쩐다고요? 어쩐다고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여러분, 예수님이 허튼 말씀을 하실 분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보려는 사람은 될지언정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자신의 주님으로 믿는 사람은 아닌 것이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아버지의 말씀을 가지고 오셔서 대언해 주신 분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아버지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하나님 아버지 말씀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엄격한 조건을 내걸었습니까? 그것은

1) 천국은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더러운 것들, 악한 것들이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고, 2) 그런 것들이 들어가면 천국의 아름답고 선하고 좋은 것이 변질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뭐라고요) 변질되기 때문. 그렇습니다. 죄가, 욕심이 들어가 버리면 사랑과 우정도 변질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드라마나 역사물들 보고 계시잖아요. 돈 욕심, 권력욕심 들어가니까 친구도, 형제도, 심지어 부모도 몰라보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천국입주 자격을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아버지의 말씀을 가지고 오셔서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말씀을 그러려니 하고 가볍게 생각하면 그건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성도님들은 하나님아버지 말씀을 아담과 하와처럼 가볍게 여기는 분들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어린아이처럼 되라는 말은 어떻게 되라는 말입니까? 두 가지를 기억하기 바랍니다.

1) 하나님아버지와 우리와 관계를 어린아이와 부모와 관계처럼 되라는 말입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절대의존관계, 사랑의 관계인 것처럼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머니와 어린아이를 생각해보면 예수님 말씀이 쉽게 이해가 됩니다. 부모의 피와 육신을 통해서 아이가 나왔듯 우리 모든 인생은 하나님께 로서 지음 받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완섭집사님 아들 승민이가 얼마나 이쁜 짓을 합니까? 우리 사모가 승민이 하는 짓을 보고 우리 은아가 손자를 나면 그 손자에게 뽁 빠져 목회 일을 소홀이 할까 저는 그게 벌써부터 염려가 됩니다. ㅎㅎ

 

2) 어린아이같이 되라는 말은 순수성 면에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뭐라고요?)순수성 면에서. 그렇습니다. 거짓이 없는 순수성 면에서 어린아이같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배고프면 울고, 배부르면 웃고, 가르쳐주면 가르쳐 준대로 따라서 하고, 아빠가 엄마가 이쁜 짓하라면 이쁜 짓 하고 그게 어린아이의 순수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욕심이란 게 들어가면 아이들이 머리가 돌아가고 계산하기 시작합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거짓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어른이 되면 욕망이란 것에 끌려 사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마음이 죄란 놈이, 욕망이란 놈이 들어가서 그렇게 되었으니 회개하고 어린아이 마음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천국에 들어올 자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의 관계가 되고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야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마음이 끊임없이 순수해지기를 빼놓지 않고 기도해고 사모해야 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꼭 알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에 머물지 말고 장성한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뭐라고요?) 어린아이에 머물지 말고 장성한 자가 되라. 아니 목사님, 지금까지는 어린아이같이 되라고 하시더니 이제는 어린아이에 머물지 말고 장성한 자가 되라니 그게 뭔 말입니까? 하고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실 분이 계시지요?

 

그건 관계성과 성장측면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제가 어린아이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하나님아버지와 저와 여러분의 관계성,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 부모와 자식관계처럼 되었으니 하나님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으니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께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고, 어린아이에 머물지 말고 장성한 자가 되라고 하는 것은 아이가 갓난아이로 머물러서는 안 되고 자라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말씀은 성장적인 면에서 하는 말이라 그런 말인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면 아멘.

 

그래서 신앙적으로 성장해야 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4:20에는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고 했고, 베드로전서 2:2에는 신앙이 성장하도록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을 세운 것은 성도들의 신앙이 온전해지고 행동하는 것이 예수님처럼 하도록 성장시켜라 고 에베소서 4장 11-15절까지에서 말씀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찬송가에도 있지 않습니까? ♪ 예수 더 알기 원함은 크고도 넓은 은혜와 대속해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내 평생의 소원 내 평생의 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성경 히브리서 5장 12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아직도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먹지를 못한다고 했고, 그래서 에베소서 4장 14절에 신앙이 성장한 자가 되어 사람들이 하는 속임수나 간사한 유혹에 빠져 이단 사설에 현혹되지 말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공부도 해야지만 신앙이치를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고 국어나 산수공부는 백점을 못 받아도 신앙이치를 깨우치는 데는 뒤 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2. 두 번째 교훈은 어린아이를 섬기라.(뭐라고요?) 어린아이를 섬기라. 이 어린아이를 섬기라고 한 것은 천국의 서열 측면에서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지난 주일도 오늘도 천국에서 큰 자, 인정받는 자가 되려면 어린아이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4절에 말씀하셨고 지난 주일에 본 마가복음 8장 35절에는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가끔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데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고 내 글을 인정해주면 기분이 좋더라고요.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우리 모든 사람이 다 사람들이 자기를 인정해주고 높여주면 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연예인들을 좋아합니다. 알아주고 박수를 보내니까요.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도 필요하지요.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알아주셔야 될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인정해줘야 그것이 인생을 잘 산사람이고 영원한 복된 인생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아버지께서 잘 살았다고, 천국에서 상 받을 자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들이냐? 어린아이처럼 자기가 주님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겸손한 사람이고 세상에서 힘없는 어린이, 노약자, 소외받는 자를 주님의 심정으로 돌보고 섬기는 자들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세상 여러 나라 가운데서도 그 정부가 돌보지도 못하는 나라 사람들, 특히, 전쟁 통에 부모도 잃고 약 한 번 써 보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아이들 위해 육신의 문제도 도우면서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받는 이치를 알려주는 선교사들을 돕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높은 곳에 마음 두지 말고, 하나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알고 겸손해져서 정말 힘없고 소외 받는 자에게 마음을 두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이 높여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왜 그래야만 되는지 천국의 특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천국은 어린아이들과 같이 아름답고 순수한 마음들이 가는 곳인데 그곳에서 자기를 안 알아준다고 삐지고, 서로 많이 가지겠다고 욕심 부리고, 싸우고 미워한다면 그건 천국이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령, 천국의 길바닥이 황금으로 쫙 깔리고 좌우편에는 아름다운 꽃들과 기묘한 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각종 보석으로 꾸며진 집이 주어진다고 해도 서로 높아지려는 마음을 가지려 한다면 그런 사람은 천국을 흐려 놀 사람이고 망칠 사람인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사단 아닙니까? 사단이란 놈이 천국에서 어떤 자였습니까? 최고 서열인 그룹 천사 장 아니었습니까? 그런데도 사단이 자기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반역하다 쫓겨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우리 사람이 사단처럼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남 섬기는 자에게 그래서 최고의 선물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천국은 최고로 멋지고 아름답게 꾸며진 곳이기도 하지만 그 만큼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가는 곳인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아버지를 신뢰하고 아버지 하나님말씀을 따르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리고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여 하나님나라를 맡겨도 항상 남을 섬기는 신앙 인격을 갖춘 자들이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천국이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통해서 이런 천국이치를 철저하게 실물 교훈시킨 것입니다. 이런 이치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잘 난 척하면 나는 망한다! 아는 척하면 나는 망한다! )

 

그런고로 우리 모두 순수한 신앙을 가지기를 사모하고 남과 더불어 화평하고 서로 섬기는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 잠간 주신 말씀 붙잡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어린 아이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두 가지를 살펴봅니다.
어린이 같이 유치한(childish)
어린아이같이 순진한(childlike)

에베소서 6:4,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어린이는 잘 모르고 배워야 하기 때문에 교훈하고 훈계하며 양육해야 합니다.
교훈 - 말씀
훈계 - 잘못하면 이 따끔 야단도 맞고, 바르게 교정되어야 합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채찍이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요사이 학교에서 채벌을 금하니까, 학생들이 말을 안 듣고, 오히려 학생이 교사를 때린다는 뉴스보도가 자주 나옵니다.

성경은 채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쫒아 내니라”(잠22:15)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 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음부,지옥)에서 구원하리라”(잠23:13-14)


그렇다고 무조건 폭력적으로 때려서는 안 됩니다. 합당한 이유가 있고, 정당한 방법과 범위에서 채벌해야할 것입니다. 막 신경질적으로 채벌한다든지, 무자비하게 채벌해서도 안 됩니다. 왜 채벌을 받는지 설명하고 정해 놓은 한도 내에서 해야 할 것입니다.


또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또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엡6:4) 자녀들을 너무 이해하지 못한다든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을 강요한다든지, 무시하는 말이나 낙심시키는 말을 하거나, 자녀들의 정당한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면 노엽게 될 것입니다.


어린 아이 같이(childlike)


성경에 어린이 같이 라는 말이 긍정적으로 쓰인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 같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어른이 어린 아이의 좋은 점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어린이 같이 순수하면 말씀의 계시를 잘 받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귀한 말씀을 하신 후에 이렇게 감사 기도했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5-27)


스스로 똑똑하다는 자에게는 말씀의 깊은 의미와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계시를 열어주지 않으시고,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어린 아이 같은 자에게는 나타내(계시)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어린 이이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길 가면서 서로 누가 높은가에 대하여 격한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제자들 사이에 이에 대한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결론을 내 주셨습니다. 한 어린 아이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매우 심각한 말씀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높아지려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든지, 공부를 많이 해서 지위를 얻든지 성공을 해서 어떻게 하든지 높아지려 하는 것, 세상의 만연한 흐름입니다.


다른 한 예가 바리세인들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지식과 행위로 자신을 높였습니다. 그들은 많은 율법 공부를 하고 가르쳤고, 한 주에 두 번 금식기도를 하고, 헌금을 남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했습니다. 그들 스스로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높은 사람이며, 더 의(義)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의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충격적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세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서기관과 바리세인의 의는 ‘회칠한 무덤’같은 가식적인 의입니다. 아주 어린 아이는 그런 교만한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4)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은 나는 의롭다, 저 사람보다 높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내 의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 주님을 믿음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고 낮추는 사람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이 어린이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4)하셨습니다.

저의 경우, 주님의 은혜로 여러 단체나 조직의 지도자의 위치를 맡았었는데, 제가 낮출 때에 제가 속한 단체나 모임이 더 잘 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를 매우 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가정에서의 어린 아이, 주일 학교에 있는 어린 아이, 학교나 유치원, 어린이 집, 그리고 이웃의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를 영접하여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곧 주님의 사랑과 뜻을 가지고, 또 주님의 말씀대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를 주님께 데려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훌륭한 랍비로 알고 그 축복을 받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꾸짖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아니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19: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주변의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에게로 데려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에만 데려오지 말고 교회 안에 계신 예수님에게로 데려오게 해야 합니다.


가정 안에 계신 예수님에게로 데려오게 해야 합니다.

최근 이런 좋은 간증을 들었습니다. 어느 교회에 주일학교, 중고등부가 방학 때에 어느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 받고 와서는 부흥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예배마다 학생들이 앞자리에 차지하여 예배드리고, 매일 한 시간씩 기도하고 가고, 전도를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학생은 한 시간 이상 차를 타고 와서 예배를 참석합니다. 그가 양육하는 10명의 친구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음 세대’(next generation)를 이어가는 아름다운 모습니다.


또 우리 안의 어린이, 우리의 어린 시절을 주님 앞으로 데려가야 합니다. 주님의 축복이 필요합니다.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장면에서 한 마디 말씀을 더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8:17)


어린 아이는 잘 모르고 순진하기에 잘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공부나 언어 음악이나 미술, 예를 들어 김 연아 같은 스포츠선수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야 잘 수용하게 됩니다. 너무 늦으면 안 됩니다.


영적인 문제도 이미 어른이 되어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렵습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단코 거기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같이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 곧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르는 것입니다. 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잘 따라가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어른이 된 사람은 자기 생각과 주장이 있어서 말씀을 잘 받지 않고, 말씀을 순종하여 사는 것은 더더욱 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인도와 감동도 자기 뜻과 주장이 있고 자기 육적인 욕망이 있기에 따르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같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고, 이곳에서도 날마다 천국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어린 아이처럼 천국을 받아들이십시오!

우리의 심령 안에서 천국은 계속 더욱 확장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19:14,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누가복음 18:17,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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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5-8 어버이주일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애굽기 20:12, 마태복음 15:1∼11)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부모님이 생존해 계신 가정도 있지만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가정도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된 사람도 있지만 아직 부모가 되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내리신 십계명이 나타나 있다. 그 중 다섯 번째 계명은 부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계명은 잘 지키기 때문에 주셨을까요? 아니면 잘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주셨을까요? 계명이란 잘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법으로 명령하신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포함된 십계명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십계명은 구약 성경의 율법 가운데에서 특별한 법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직접 주신 법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율법들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하지만 십계명만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직접 들려주셨습니다(출 20:18-21, 신 5:4).

출애굽기 20: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신명기 5:4, 여호와께서 산 위 불 가운데서 너희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에 십계명은 하나님이 직접 써 주셨습니다(출 34:1).


출애굽기 34: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하나님이 직접 십계명을 기록하셨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십계명 가운데에서도 부모공경의 계명은 여러모로 특별한 계명입니다.
십계명을 간단히 요약한 형태로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일 - 일절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
이 - 이상한 우상을 섬기지 말라. 

3.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삼 - 삼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사 - 사업을 하지 말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오 - 오마니 아버지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말라.
육 - 육혈포로 살인하지 말라. (육혈포는 대포 일종 살인 무기)

7. 간음하지 말라.
칠 - 칠보단장한 여인을 간음하지 말라.

8. 도둑질하지 말라.
팔 - 팔로 도적질하지 말라.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
구 - 구차한 변명으로 거짓증거 하지 말라. 

10.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십 - 십 원이라도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암기하기 쉬운 십계명


일 - 일절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이 - 이상한 우상을 섬기지 말라. 
삼 - 삼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지 말라. 
사 - 사업을 하지 말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오 - 오마니 아버지를 공경하라.
육 - 육혈포로 살인하지 말라. (육혈포는 대포 일종 살인 무기)
칠 - 칠보단장한 여인을 간음하지 말라.
팔 - 팔로 도적질하지 말라. 
구 - 구차한 변명으로 거짓증거 하지 말라. 
십 - 십 원이라도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십계명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필요한 계명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필요한 계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으뜸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십계명 중 제5계명입니다.
첫 번째부터 네 번째 계명까지가 하나님을 섬길 때 지켜야 할 계명이고, 다섯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가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인간 사이에서 지켜야 할 으뜸이 되는 계명입니다.

둘째, 긍정 계명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긍정 계명입니다. 십계명 중에서 부모 공경과 안식일에 대한 계명은 긍정 계명입니다. 나머지 다른 계명은 부정 계명으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셋째, 숙명적 계명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선택해서 결정할 수 있다면 모든 자녀들은 보다 부유하고 행복한 부모에게서 태어나기를 희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선택적 관계가 아니라 숙명적 관계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숙명적 계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중국 유가의 경전으로 공자와 그 후예들이 지은 예기(禮記)라는 책에 의하면 ‘군자(君子)는 그 어버이의 과오를 잊어버리고 그 장점만을 들어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의 학문이나, 재산, 벼슬이나 명예 때문에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 때문에 귀중히 여기고 공경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효(孝)자는 효도 효(孝)라고 합니다.
흙 토(土), 삐침 별(丿), 아들 자(子)
늙을 노(老)의 약자(耂), 아들 자(子)
자식이 늙은이를 받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조 숙종 때 개성근방에 이름난 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나이 들어 거동을 못하시는 어머니를 정성스럽게 모시고 있는데, 임금님이 그 고을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임금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에 어머니가 행차를 보고 싶어 하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지게에 태우고서 나갔다가 임금의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임금님은 그의 효성을 칭찬하시면서 송아지 한 마리와 쌀 열가마를 하사하였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이웃 마을의 소문난 불효자가 시샘을 냈습니다. 자기도 상을 받아야 되겠다고 벼르게 됩니다. 몇 달 후에 임금님이 지나가시자 병석에 누워 계신 어머니를 억지로 지게에 지고서 임금님 눈에 띄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임금이 지나가다 또 이것을 보았고, 그 고을의 원님을 불러 사연을 물었습니다. 그 때 원님은 저놈은 아주 못된 놈이라고 하면서 벌을 주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임금님은 효자와 똑같이 송아지 한 마리 쌀 열가마를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효도는 흉내 내기도 어려운 것이다.” 라고 칭찬했다고 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공경(恭敬) 공손 공(恭) 공경 경(敬)

공손하게 존경하고 높이는 것. 공손이란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자세를 말합니다.


공경이란 히브리어는 ‘키베드’ 라고 합니다.
키베드란 ‘가장 무겁게 여긴다’ ‘간’ 이라고 합니다. 간(肝)
히브리 문학에서 사람의 인체의 일부인 간은 생명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공경이란 이처럼 없어서는 안 될 가장 귀중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부모님께 이렇게 해드리는 것이 효도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은혜의 문화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문화는 시대에 따라 유행이 바뀔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말을 타고 다니거나 아니면 가마를 타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동차를 타고 다닙니다. 문화는 그 시대에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전에는 서점에서 책을 구입했지만 요즈음은 인터넷으로 주문합니다. 심지어 종이에 인쇄된 책이 아니라 전자책이 점점 늘어가는 추세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구약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는 계명입니다. 세상에는 완벽한 부모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은혜의 문화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23:22,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청종이란 단어를 다른 번역 성경에서는 순종이라고도 합니다(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너를 낳아 준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늙은 어머니를 업신여기지 말아라.
너를 낳아 준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늙은 너의 어머니를 업신여기지 말아라.   


공경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느 왕이 신하에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명했습니다. 신하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항아리에 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물을 아무리 부어도 항아리에 물이 차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신하는 왕의 명령인지라 밤새도록 우물에서 물을 길어 항아리에 계속 부었습니다. 날이 밝아질 무렵 항아리의 바닥이 드러났습니다. 그 안에서 반짝 빛나는 황금 덩어리를 발견했습니다. 신하는 왕을 찾아가 밤새도록 물을 채우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항아리 바닥에서 이 황금덩어리를 발견했다며 황금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왕은 신하에게 바닥이 깨진 항아리에 물을 채울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항아리에 물을 채우려고 밤새도록 수고한 신하에게 그것을 주려고 감춘 것이니 그것을 갖고 가서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며 신하를 위로했다고 합니다.

청종이란 말을 잘 듣는 것입니다(공동번역)
너를 낳은 아비의 말을 듣고 늙은 어미를 업신여기지 마라.


공경은 말을 잘 듣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선택적 관계라고 한다면 모든 자녀들이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공경하는 마음만이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이상적인 환경에서 아담과 하와는 쫓겨났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룻기를 살펴보면 엘리멜렉과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 기룐은 모압 지방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십 년 동안 지내면서 가장 엘리멜렉은 죽었고 두 아들도  부인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에게 나는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너희들은 각자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이 시어머니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를 공양하기 위하여 밭에 나가서 떨어진 이삭을 주워 시어머니를 섬겼습니다.

두 며느리 중에서 누가 시어머니의 말을 잘 들었을까요? 물론 처음에는 오르바가 시어머니의 말을 잘 들은 것처럼 보여 집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후에 룻이 시어머니의 말을 잘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은 문자적인 이해가 아니라 의미를 깨닫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직장에 출근을 할 수 없을 때 제일 먼저 어떤 결정을 합니까? 직장에 연락하여 오늘 출근을 할 수 없게 된 사정을 이야기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주일 예배에 참석할 수 없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교회에 연락을 하여 사정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락을 하지 않고 연락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을 하면서도 몸과 마음은 전혀 사랑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치 이러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해야 합니다. 교회와 직장 모두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심이 드러나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부모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계명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왜 당신의 제자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하는 전통을 지키지 않느냐?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고르반이라는 전통으로 무시하느냐고 책망합니다.
        
예수님 당시 부모를 공경하려면 물질을 사용해야 하는데 모든 물질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하면 그 물질을 부모를 공경하는 것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잘못된 것이라고 깨우치셨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부모가 아니라 물질을 중심으로 정하고 부모에게 해야 할 도리를 하지 않는 것은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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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베드로전서 강해 #. 21 / 2016-05-15

은혜에 굳게 서라(베드로전서 5:12-14)


오늘의 본문은 베드로전서의 결론입니다.
베드로전서의 저작 년대를(AD 63∼64년) 추측하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핍박하던 시대를 알아야 합니다.
1. 네로 시대(54∼68년)
2. 도미티안 시대(81∼96년)
3. 트라얀 시대(98∼117년)

베드로전서는 네로 시대에 기록된 것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져 있던 기독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이었습니다. 당시 이 지역에는 이방인들이 더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편지를 마치면서 ‘은혜에 굳게 서라’고 권면합니다.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 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베드로전서에서 은혜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모두 8구절입니다(1:2, 10, 13, 3:7, 4:10, 5:5, 10, 12). 은혜라고 사용한 말씀을 정리하면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택하심의 은혜(1:2)
둘째는 구원의 은혜(1:10)
셋째는 고난을 통한 은혜(5:10)
넷째는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은혜(5:5)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받은 은혜를 계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택하심의 은혜(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세계 인구의 수가 대략 72억 명이라고 합니다. 이 가운데서 기독교 인구의 수는 대략 22억 명이라고 합니다. 아직도 50억의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50억의 사람들도 택함을 받은 사람으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다고 하겠습니다.

왜 나를 선택하셨을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사람을 선택하신 이유를 히브리 민족을 선택하신 이유에서 찾아봅니다.

신명기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사람은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합니다. 예를 들면 상점에서 어떤 물건을 구입할 때 여러 종류 상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합니다. 과일을 고를 때에도 가장 신선하고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작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구원의 은혜(1:9∼10)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내가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은혜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은혜를 유지하려면 구원을 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은혜의 삶을 유지하려면 잊지 말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은 행위로 받은 것이 아니므로 자랑할 수 없습니다.

셋째는 고난을 통한 은혜(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과 실라가 점을 치는 여종을 붙잡고 있는 귀신을 내쫓아낸 것 때문에 여종의 주인에게 고소를 당하여 매를 맞고 옷은 벗겨지고 발에는 쇠사슬이 채워지고 깊은 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밤중이 되었을 때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찬송과 기도를 감옥에 갇혀있던 모든 죄수들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감옥이 흔들리며 모든 옥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죄수들은 모두 감옥에서 도망쳤습니다. 그렇지만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은혜에 굳게 세워졌는지 아닌지는 바울과 실라와 같이 고난을 당할 때에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고난이 여러분들을 힘들게 합니까? 고난을 탓하지 말고 고난 가운데서 은혜에 굳게 일어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깊은 감옥도 천국으로 바뀝니다.
병실도 천국으로 바뀝니다.
고난의 밤은 은혜에 굳게 세워졌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축복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실라와 같이 뜨겁고 강한 영성을 가진 자는 고통 가운데에도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찬송하며 주님께서 그 마음에 성령을 부어주셔서 기쁨을 주시고 승리하게 해주십니다.

욥기 35:10a,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며.

루이자 스테드(Stead)라는 영국 여성이 젊었을 때에 “주님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하고 헌신하였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가서 선교 훈련을 받던 도중에 건강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테드라는 미국 남성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남편이 물에 빠진 사람 구하려다가 그만 죽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그녀는 1882년 찬송가 340장을 지어서 불렀습니다.

1.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허락하심 받았으니 의심 아주 없도다.
(후렴)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

바울과 실라처럼 스테드 여사처럼 고통의 밤에도 주님을 찬송할 수 있는 은혜게 굳게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넷째는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은혜(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사울이 왕으로 추대되었을 때 그는 매우 겸손한 모습으로 백성들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사울은 교만해져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겸손이란 지위가 낮아도 높아도 변함이 없는 믿음의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사무엘상 13: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택함의 은혜, 구원의 은혜, 고난을 통한 은혜, 겸손의 은혜를 굳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굳게 하다는 헬라어는 히스테미(ἱστήμι) 라고 합니다. 마치 가로수를 심은 후에 나무가 흔들리지 않도록 버팀목을 세워주는 것처럼 히스테미란 신앙의 버팀목과 같습니다.


히스테미란 길가에 가로수를 심은 후 뿌리가 내려 잘 자라나도록 돕기 위해서 나무 주위에 버팀목을 세웁니다. 그 버팀목을 히스테미 라고 합니다.

가로수에 버팀목을 대주는 것은 나무가 흔들려도 뿌리가 잘 내려 나무가 든든하게 자라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말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나무와 같습니다.
나무가 거친 세상에 심겨졌는데 거친 세상에서도 견고하게 자라날 수 있도록 든든하게 세워주십니다. 그것을 구원의 은혜라고 합니다.

나무가 옮겨서 심어진 후에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도록 버팀목을 세워주는 것처럼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도 버팀목이 필요합니다. 어떤 버팀목을 세워야 할까요?

첫째는 말씀의 버팀목

둘째는 기도의 버팀목
셋째는 성령의 버팀목


버팀목을 오래도록 견고하게 세워줄 수 있는 것이 성령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지상에 머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결단을 위한 통성 기도

- 주여, 저희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으로 충만케 하셔서 이 세상에서 오직 주의 말씀만 붙잡고 기도하므로 마지막까지 승리하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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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조 강해 설교 #.1
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 / 2016-5-22


(도입 이야기) 스마트 폰과 신앙

스마트 폰의 기능이 무려 200여 가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그 많은 기능을 알지도 못하고 다만 몇 가지 기능만 사용한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스마트 폰으로 야간 응급 진료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만일 한 밤중에 가족 중에 한 사람이 갑작스런 통증과 고열로 시달릴 때 병원으로 가는 것이 어려울 때 스마트 폰의 영상으로 환자의 상태를 야간 응급 진료소에 전달하면 의사가 영상을 보며 환자를 진찰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응급조치를 하도록 돕는다고 합니다.

다양한 스마트 폰의 기능을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비유해 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십니다. 아마 스마트 폰의 기능 보다 더 다양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하나님 전부가 아니라 극히 일부분에 붙잡혀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을 J. B 필립스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네 하나님은 너무 작다(Your GOD is too Small)(규장, 20050512)’


창조주 하나님이란 곧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표하는 신앙의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사도신조의 첫 문장을 함께 고백하겠습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전개 이야기) 창조주 하나님
성경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창세기 1장 1절에서 창조주라고 선언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은 선언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목적을 갖고 만드신 것이라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언은 그 내용을 그대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선언(宣言)입니다.
선언이란 ‘널리 펴서 알리는 것’ 또는 ‘외부에 정식으로 표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양심선언, 독립선언, 인권선언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 1절의 선언은 첫째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피조물이므로 창조주에게 복종해야 하는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피조물로서 인간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창조를 통한 하나님의 선언에 대한 말씀을 구약과 신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이사야 45:12,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친수로 하늘을 펴고 그 만상을 명하였노라. 

에베소서 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세상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라는 것을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이란 어떤 신앙입니까?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세 가지 신앙을 확신해야 합니다.

첫째는 만물의 주인
둘째는 만물의 목적
셋째는 만물의 책임

첫째,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에게 창조되되 - 그 분에 의해서


요한계시록 10:6,
세세토록 살아 계신 자 곧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은 창조주이심을 믿습니까?
창조주는 곧 만물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욥의 고백(욥기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내게 주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의 뜻대로 쓰시옵소서! 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스개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엿 장수가 가위를 몇 번 두드리는가? 엿 장수 마음대로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대로 결정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고백할 때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드신 분으로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을 쓰는 것이 합당합니다. 


시편 104:24,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

금도 내 것이요, 은도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시편 134:3,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는 참으로 부요한 자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내 아버지가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이니 나도 아버지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상속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화) 부자이신 아버지 


비행기로 여행을 떠나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첫 눈에도 그가 매우 부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부자는 은근히 자기 재산과 번창하는 사업에 대해 자랑하더니 옆 사람에게
‘선생님에 대해서도 제게 좀 말씀해 주시지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제 아버님은 엄청난 부호랍니다. 실은 이 비행기를 포함한 모든 비행기들이 그 분의 소유지요.’ 그러자 부자는 재미있기도 하고 잘 믿기지도 않아 ‘그래요’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이 세계의 모든 재산이 다 그분의 것이랍니다. 그 분의 아들인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는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상속자가 되었지요.’
 

부자는 이윽고 그가 말하는 것이 자기로서는 전혀 몰랐던, 알아야 극히 조금밖에 알지 못했던 영적인 재산들에 관한 것임을 눈치 채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가 부자에게 주님을 믿으라고 권하자 부자가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내게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영적인 재산에 대해 당신처럼 확신에 차서 확실하게 이야기해 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것의 주인이며, 나의 모든 것도 그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쓰는 성도가 되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니 내 것이라는 부요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둘째, 만물의 목적(이사야 45:18)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모든 것은 만든 목적이 있습니다. 자동차를 만드는 이유는 자동차를 타고 이동을 편리하게 만든 것입니다. 시계를 만든 사람이 장식하기 위해서 시계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시계는 정확하게 시간을 가리켜야 합니다. 마이크를 만든 목적은 소리를 잘 전달하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전등은 밝게 비추라고 만든 것이며, 온풍기는 따뜻한 바람을 나오게 만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목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헛되이 창조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지은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피조물을 지은 목적은 무엇인가?

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시편 103:22,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만드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찬송을 돌리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아주 비싼 차가 있습니다. 좋은 엔진을 달고, 비싼 장식을 했는데 가지를 않는다면 그 자동차는 폐차를 시켜야 합니다. 버려야 합니다. 저 뒤에 온풍기가 따듯한 바람을 내지 않고 소리만 시끄럽고, 기름만 먹고, 찬바람이 나온다면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고백을 할 때 우리는 나를 만드신 목적을 깨닫고 이루겠다는 믿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셋째, 만물의 책임(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지명하여 불렀다는 말씀의 의미

첫째는 잘 아신다(이사야 43:1)
둘째는 사랑하신다(이사야 43:4)
셋째는 증거자의 자격을 주셨다(이사야 43:10)


신상품을 구매하면 그 상품에는 반드시 품질보증서와 사용설명서가 있습니다. 품질보증서는 물건을 사용할 때에 제품에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새 물건으로 교환해 준다는 약속의 증서라고 하겠습니다.

품질보증서는 물건을 만든 회사가 제품에 대한 책임을 약속하는 증서라고 하겠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나에 대해서 보증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책임지겠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분명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카우치를 사용하던 중 전원이 작동되지 않아 황실침대 뉴욕지사에 전화를 했더니 어느 회사 제품이냐고 묻습니다. 전원을 작동하는 상자를 분리하여 가져오라고 합니다. 단 자기 회사 제품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직원에게 회사 제품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회사 로고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원상자를 분리하여 살펴보았더니 회사 로고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 회사 제품이 아니라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일지라도 전원이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방안에 위치를 점령하는 물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누가 만들었든지 만든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자식은 그 부모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무슨 문제든지 하나님께 갖고 나오면 됩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32:17,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

시편 121:2,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약점과 문제와 그리고 치료와 회복에 대해서 가장 잘압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그분에게 나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를 책임지십니다. 

이사야 40:28-31,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말은 바로 그분이 나를 책임지시는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님께 문제를 가지고 나아와 확실히 해결 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창조주 하나님 

모든 것이 그의 것입니다. 그만 위해 쓰고, 부요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만든 목적을 분명히 깨닫고 영광, 찬송, 그 뜻을 행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만드신 분이 책임지십니다. 그에게만 나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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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역대하 7:14)

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 / 2016-5-29


(도입 이야기) 불(不, 아니 불) 혹(惑, 의혹할 혹)

사람의 나이를 한자어로 표기할 때 40을 불혹(不惑) 또는 강사(强仕)라고 합니다. 불혹이란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를 말합니다.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 절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한 사람을 데려와서 링컨에게 추천하며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링컨은 추천한 사람을 바라보더니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고 합니다. 난처한 친구가 왜 거절하는지 그 이유를 물었을 때 링컨은 대답하기를 ‘사람은 나이 40이 되면 자기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는데 책임을 질 만한 얼굴이 아니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야곱은 에서를 만나는 순간 형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창세기 33:10).

야곱은 에서가 받아야 할 장자의 축복을 아버지를 속이고 대신 받았습니다. 그리고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므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였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모든 가족들과 가축들을 먼저 강을 건너가게 한 후에 혼자서 강 건너 편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야곱은 강을 건넌 후 에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에서를 보는 순간 야곱은 마치 형의 얼굴을 보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에서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과 같다는 것은 에서로부터 은혜를 입겠다는 고백이라고 하겠습니다.

6월의 성구는 구약 역대하 7장 14절 말씀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아멘

역대하는 구약 성경을 구분할 때 역사서라고 합니다. 역사서로 분류되는 구약 성경은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모두 12권입니다.
역사(歷史)란 무엇입니까?
영토를 잃어버린 민족은 다시 일어날 수 있어도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은 다시 일어날 수 없다.

히브리민족은 수천 년 동안 영토를 잃어버렸어도 어디를 가든지 그들의 역사는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란 언약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역사관은 역사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역사(history)란 영어 단어를 분석하면 그의(his) 이야기(story)라고 합니다. 과연 그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분이 곧 창조주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역대하의 내용을 두 부분으로 구분합니다.
1장에서부터 9장까지는 솔로몬의 통치에 대한 내용입니다.
10장부터 36장까지는 유다의 역대 왕들의 통치에 대한 내용입니다.

역대하 7장 14절은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한 후 성전 봉헌식을 위한 기도를 드린 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아멘

솔로몬 왕의 업적은 성전을 건축한 것입니다. 성전 건축 후에 서언 봉헌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솔로몬 왕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역대하 7장 12절부터 1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전을 삼았으니,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여호와 하나님은 솔로몬 왕에게 성전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교회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3절(막 11:17, 눅 19:46)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성전은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곳으로 세워졌습니다. 교회도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곳으로 세워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는 기도가 아니라 분쟁과 다툼의 장으로 타락했습니다. 왜 이렇게 타락했을까요? 그 이유는 잘못 구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왕은 왕위에 오른 후에 제일 먼저 기브온으로 올라가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꿈에 여호와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르게 세워갈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의 이와 같은 자세에 대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부와 재물이나 존영이나 원수의 생명을 멸하는 힘과 장수하기를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백성을 바르게 지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였기에 지혜 이외의 것도 더하여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전 건축 후 봉헌 기도를 마쳤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다시 솔로몬 왕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너희 땅에 재앙이 임하거든 성전에서  먼저 서언에봉헌

이제 솔로몬 왕에게 약속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약속으로 성취되기 위한 자세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그 악한 길에서 떠나라
둘째는 스스로 겸비하라
셋째는 얼굴을 구하라

첫째는 그 악한 길에서 떠나라

막연한 악한 길이 아니라 그 악한 길에서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분명한 죄를 말씀하셨습니다. 회개는 막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깨우치는 분명한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역대하 7장 14절에서 말씀하는 죄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난 날 애급에서 나와 약속의 땅에 정착한 후에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에 정착한 후 주위 여러 나라들이 섬기는 다른 신들을 눈 여겨 보았습니다. 그 결과 히브리 민족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악한 길이란 곧 하나님을 떠난 죄악을 말합니다.

둘째는 스스로 겸비하라

스스로 겸비하라는 스스로 낮추라는 말씀입니다. 히브리 민족은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은 히브리 민족뿐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부심이 너무 고질화 되어 이제는 교만하여 다른 민족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수 없는 이방민족이라고 멸시하게 되었습니다.

셋째는 얼굴을 구하라

얼굴을 구하려면 얼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얼굴을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영광(고린도후서 4:6)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하나님의 얼굴은 평강(민수기 6: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 

하나님의 얼굴은 은혜(민수기 6: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려고 행하신 행동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장 17절,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이제 역대하 7장 14절의 말씀을 오늘 우리들의 신앙에 적용해야 하겠습니다.
미국 내에 여러 도시에 세워진 이민 교회들이 1세대 목회자들의 은퇴와 더불어 여러 교회들이 소용돌이 치고 있습니다.

교회는 믿음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는 믿음보다는 교회법에 호소하고 교회법에서도 인정받지 못할 때는 심지어 교회법을 떠나 교단을 탈퇴한 후에는 다시 세상 법에 호소합니다. 도저히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악한 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1957-58년 대구 동산기독병원 사무엘 마펫 원장의 의료선교 보고에 의하면 “60살 된 어느 교회 장로가 교회건축을 완공하기 위하여 눈 하나를 팔려고 동산병원에 찾아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몸의 한 부분을 돈을 받고 파는 것은 합당하지 않지만 장로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이런 헌신적인 성도에 의해 성장해 온 것입니다. 헛된 일에 생명을 바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존귀한 가치와 목적을 위하여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은 참으로 보람된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주인입니다(마태복음 16:18)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민교회가 덕을 세우지 못하는 이유는 교회를 내가 세웠고 시작했다는 인간의 욕심과 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세워진 곳입니다(사도행전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한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을 믿는 다른 사람들과 형제가 됩니다. 형제는 사랑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요한일서 3:14-15).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한계시록 2: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지난 날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한 후 그곳에서 기도했을 때 언약의 하나님은 재앙이 임하였을지라도 성전에서 기도하며 악한 길에서 떠나고 겸손하게 행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 반드시 땅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는 곳이었습니다.
교회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곳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이와 같은 진리를 잊어버렸습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 세워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잘못을 버리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 이 땅을 회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957년부터 58년 사이에 미국 장로교회의 의료 선교 보고에 의하면 어느 60세가 넘은 장로님이 교회 건축을 완공하려고 당시 동산병원 원장이었던 선교사를 찾아와 자기의 한 쪽 눈을 팔아 교회 건축을 완공하고 싶다고 간청했던 사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교회를 사랑했던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기에 한국교회가 크게 부흥할 수 있었습니다. 부흥의 원동력을 회복하여 이민교회를 바르게 세워 후손들에게 교회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증거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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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조 강해 설교 #.2
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 / 2016-6-5하


신명기 32:1-7

①.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찌어다 
②.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비로다
③. 내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위엄을 우리 하나님께 돌릴찌어다 
④.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⑤.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로다  

⑥.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

⑦.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로마서 5:6∼11
⑥.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⑦.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⑧.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⑨.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⑩.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⑪.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구약 신명기의 말씀은 광야 생활이 끝나갈 무렵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율법을 되풀이하여 설명하고 가르친 것입니다. 따라서 신명기의 말씀은 지난 광야 40년을 회상하며 백성들을 깨우치는 유언서로 하나님은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며 영적인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신약 로마서는 모든 인류의 영적인 상태는 모두가 죄인이며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보여주셨는가를 강조한 말씀입니다.

신앙고백을 위하여 암송하는 사도신조의 첫 문장은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라는 고백에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앙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신앙은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 만물의 목적, 만물의 책임이 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영(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사람은 육체로 존재합니다.
육체의 특징은 피를 생명이라고 합니다(레위기 17:14)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 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육체의 사람에게 보여 지고 느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육체 즉 피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육체의 몸을 갖고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사랑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물과 기름은 서로 섞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면 물과 기름도 섞일 수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KRISS(신기능재료표준센터)라는 기관의 추민철박사연구팀이 물과 기름을 섞는 방법을 개발했다고 합니다.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이유는 물과 기름의 형태를 구성하는 분자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은 극성 분자이고 기름은 무극성 분자라고 합니다. 극성 분자는 극성 분자끼리 섞이고 무극성 분자는 무극성 분자끼리 섞입니다. 마치 영은 영과 섞이고 육체는 육체와 섞이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원리를 파악한 후에 기름의 분자 구조를 쪼개어 아주 작은 입자로 만든 후에 물과 기름을 섞을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육체로 존재하는 서로 다른 두 존재를 서로 통하게 하시려고 선택한 방법은 영이 육체가 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이 육체가 되셨습니다. 이런 기술은 과학자들이 물과 기름을 섞는 것보다 더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과거 봉건시대 또는 왕조국가에서 연좌제(連坐制)는 죄인의 죄를 가족과 친지들에게도 함께 묻는 제도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모든 가족들이 똑같이 죄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제도가 현재 북한에서는 아직도 시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탈북 여성 김희경씨는 북한 정치국 관리로 근무하였고 남편은 미그기 조종사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비행을 마치고 세 사람의 동료들과 술을 마시며 다른 나라에서 조종사들을 대우하는 것과 북한에서 조종사들을 대우하는 것이 다르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불평이 당국에 보고되어 정치수용소로 쫓겨나게 되었는데 아들은 무조건 아버지를 따라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국에서 부인에게 이혼을 할 것이냐 아니냐를 확인하는데 이혼을 하면 남편의 죄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현재 근무하는 자리에서 쫓겨나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혼을 결정하고 남편과 아들은 정치수용소로 끌려가고 김희경씨는 평양에서 살 수 없고 지방으로 쫓겨나야 6만 불을 갖고 탈북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어떤 것으로도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야기 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나눌 수 없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님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셨을까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로마서 본문에서 세 가지 때를 통해서 나타내셨습니다.

첫째는 연약할 때(부족할 때)
둘째는 죄인 되었을 때(죽음에 이르렀을 때)
셋째는 원수 되었을 때(서로 만날 수 없을 때)

첫째, 연약한 자를 사랑하신 아버지 하나님(로마서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연약하다는 말은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어느 상점에 들어가서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정가표를 보았더니 내가 가진 돈에서 부족합니다.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그 물건을 나는 가질 수 없습니다. 그것이 부족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하나님은 내가 부족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경건하지 못한 존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연약하다 부족하다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마치 애급에서 430년 동안 노예 생활에 지치고 지쳐버린 히브리 백성들을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애급에서 이끌어내시려고 모세를 부르셨고 그 모세를 애급으로 보내셨습니다.

고려말기에 둔촌(遁村) 이집(李集, 1314~1387)은 학문이 뛰어난 학자이었는데 신돈(辛旽)의 횡포에 직언을 하였기 때문에 큰 화를 입게 되어 경북 영천에 살고 있던 최원도(崔元道)를 찾아가서 숨겨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러자 친구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망하려거든 혼자나 망할 것이지, 왜 나까지 망치려고 이곳 까지 왔단 말인가.” 하고 내쫓습니다. 둔촌은 별수 없이 늙은 아버지를 다시 등에 업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둔촌이 떠나자 천곡은 역적이 앉았던 자리는 없애야 된다며 둔촌이 앉았던 툇마루에 불을 질러 태워 버렸다. 둔촌은 걸으면서 천곡이 자신을 진심으로 쫓아낸 것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여 멀리 가지 않고 길 옆 산으로 들어가 밤을 보내려 하였다. 천곡은 둔촌이 멀리 가지 못 했으리라 생각하고, 손님들이 돌아가자 등불을 켜들고 찾아 나섰다. 천곡은 둔촌 부자를 발견하고, 밤이 깊은 후에 산에서 내려와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집 다락방에 숨겼다. 이렇게 하여 둔촌은 4년 동안 천곡의 다락방에서 피신생활을 시작하였다. 

천곡은 가족들에게도 비밀로 했다. 식욕이 왕성해졌다며 밥을 큰 그릇에 고봉으로 담게 하고, 반찬도 많이 달라 해서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대소변도 방안에서 보아 갖다 내버렸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수상하게 여긴 여종이 염탐하여 다락에 두 사람을 숨기고 주인이 그들을 섬기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마님에게 말했다. 사태는 심각해졌으나 함구령 이외에는 별수가 없었다. 만약 이 비밀이 새어나가는 날에는 두 집안이 멸문(滅門)이 되리라는 것은 뻔한 것이었다.

부인은 이 비밀이 밖에 알려질까 걱정을 하다가 스스로 혀를 깨물어 벙어리가 되었다. 여종은 목을 매어 자결함으로써 주인댁의 비밀을 영원히 묻었다. 그 뒤에 천곡의 집에 포졸들이 들이닥쳤으나, 부인은 말을 못하고, 마을 사람들은 천곡이 둔촌 부자를 쫓아버린 상황을 목격한 대로 증언하여 무사히 모면하였다.

이듬해인 1369년 둔촌의 부친이 작고했다. 천곡은 자기의 수의(壽衣)를 입혀 자신이 묻힐 어머니 산소 아래에 장사지냈다. 이곳이 광주(廣州) 이씨 시조인 이당의 무덤이다. 이에 얽힌 사연은 지난 2001년부터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생활의 길잡이’(이호연과 최원도의 우정이야기)에 실려 있다. 일제 때 교과서에 ‘진우(眞友)’란 제목으로 둔촌과 천곡의 이야기가 실렸다.

공민왕 20년(1371) 신돈이 실각하여 주살된 후에, 둔촌은 개경으로 돌아왔다. 둔촌이 떠날 때 천곡은 시로써 전별했다.

의분과 슬픔으로 눈물이 옷깃을 적시고, 집 떠나 헤매면서도 효성은 저승까지 다달았네. 한산 땅은 멀고멀어 구름안개에 막혀 있고, 나현 땅은 회돌아서 풀과 나무가 깊구나. 하늘이 선후로 두 무덤을 점지하였으니, 누가 그대와 나 이 둘의 마음을 알겠는가. 바라건대 세세로 길이길이 이와 같이 하여, 모름지기 정을 주고받음으로 쇠라도 끊게 하세나(慷慨傷時淚滿襟 流離孝懇達幽陰 漢山超諦雲烟沮 羅峴盤回草樹深 天點後先雙馬鬱 誰知君我兩人心 願吉世世長如此 須使交情利斷金)
 

둘째, 죄인 되었을 때 사랑하신 아버지 하나님(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죄인으로 있을 때란 죽어야 할 때를 말합니다. 죽어야 할 운명이 내게 닥쳐왔습니다. 그런데 누가 내 대신 죽음을 대신었을 E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희랍의 신화에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기원전 4세기경 피시아스라는 젊은이가 교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효자였던 그는 집에 돌아가 연로하신 부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왕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사형수가 도망을 하면 더 큰 문제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때 피시아스의 친구 다몬이 친구를 위하여 대신 붙잡혀 있겠다고 했습니다.
폐하, 제가 그의 귀환을 보증합니다. 그를 보내주십시오.
만일 피시아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찌하겠느냐?
어쩔 수 없죠, 그렇다면 친구를 잘못 사귄 죄로 제가 대신 교수형을 받겠습니다.
너는 피스아스를 믿느냐?
폐하, 그는 제 친구입니다.
왕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습니다.
피시아스는 돌아오면 죽을 운명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돌아올 것 같은가? 만약 돌아오려 해도 그의 부모가 보내주지 않겠지. 너는 지금 만용을 부리고 있다.
저는 피시아스의 친구가 되길 간절히 원했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 부탁드리오니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폐하.
왕은 어쩔 수 없이 허락했습니다. 다몬은 기쁜 마음으로 피시아스를 대신해 감옥에 갇혔습니다. 교수형을 집행하는 날이 밝았습니다. 그러나 피시아스는 돌아오지 않았고 사람들은 바보 같은 다몬이 죽게 됐다며 비웃었습니다. 정오가 가까워졌습니다. 다몬이 교수대로 끌려나왔습니다. 그의 목에 밧줄이 걸리자 다몬의 친척들이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우정을 저버린 피시아스를 욕하며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러자 목에 밧줄을 건 다몬이 눈을 부릅뜨고 화를 냈습니다.
나의 친구 피시아스를 욕하지 마라. 당신들이 내 친구를 어찌 알겠는가.
죽음을 앞둔 다몬이 의연하게 말하자 모두 조용해졌습니다. 집행관이 고개를 돌려 왕을 바라보았습니다. 왕은 주먹을 쥐었다가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렸습니다. 집행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말을 재촉하여 달려오며 고함을 쳤습니다. 피시아스였습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다가와 말했습니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이제 다몬을 풀어주십시오. 사형수는 접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작별을 고했습니다. 피시아스가 말했습니다.
다몬, 나의 소중한 친구여, 저 세상에 가서도 자네를 잊지 않겠네.
피시아스, 자네가 먼저 가는 것뿐일세.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도 우리는 틀림없이 친구가 될 거야.
두 사람의 우정을 비웃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다몬과 피시아스는 영원한 작별을 눈앞에 두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담담하게 서로를 위로할 뿐이었습니다. 이들을 지켜보던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를 외쳤습니다.
피시아스의 죄를 사면해 주노라!
왕은 그 같은 명령을 내린 뒤 나직하게 혼잣말을 했습니다. 바로 곁에 서있던 시종만이 그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 모든 것을 다 주더라도 이런 친구를 한번 사귀어보고 싶구나.

사람은 사람을 버리고 죽이기도 합니다. 보험금을 타기 위해서 아내와 자식을 살해하고 불을 지른 짐승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은 잘못 인도하거나 도중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하고 끝까지 인도하십니다. 안전하고 평탄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셋째, 원수 되었을 때 사랑하신 아버지 하나님(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갑작스런 사태에 다윗은 예루살렘을 떠나며 열 명의 후궁들을 남겨두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는 다윗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돕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울의 친족 중 시므이라는 사람은 다윗을 향하여 조롱하기를 ‘피를 흘린 자여 너는 피를 흘린 대가를 받아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비새는 다윗에게 ‘왕을 저주하는 저 사람을 당장 죽여 버리자’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하여 저주하게 하신 것이라며 멈추게 합니다. 압살롬을 지지하는 군사와 다윗을 추종하는 군사들이 서로 싸움을 하여 결국 다윗을 추종하는 군사들이 승리했습니다. 반란을 일으켰던 압살롬은 요압의 손에 죽고 말았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반란을 일으켰던 원수와 같은 아들이었으나 다윗과 압살롬은 아버지와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을 슬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없을 때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희생의 제물로 내려놓으시고 우리들에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아버지를 내쫓은 아들이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그러자 압살롬과 더불어 싸움을 했던 장군들과 군사들은 다윗에게 만일 왕이 아들을 위해 계속해서 슬퍼한다면 아들과 싸워 승리한 군사들은 모두 죄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눈물을 멈추고 싸워서 승리한 군사들과 백성들을 위로해야 한다고 하므로 다윗은 눈물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앙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연약할 때 사랑하셨습니다.
부족한 것이 있어도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죄인 되었을 때 사랑하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죽으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원수 되었을 때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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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조 강해 설교 #.3
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 / 2016-6-12


예배 때마다 신앙고백을 위하여 암송하는 새 번역 사도신조는 한국교회 27개 교단과 교회협의회,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 대한성서공회에서 파송한 62명의 번역위원이 모여 교회연합을 목적으로 새롭게 번역한 것입니다. 같은 내용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기도하므로 먼저 교회가 연합하고 남과 북이 신앙으로 일치할 수 있는 신앙의 근거가 될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신앙고백과 주기도라고 하겠습니다.

신앙고백의 내용을 몇 가지로 요약한다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그리고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지난 두 주일 동안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과 어버지 하나님으로 소개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앙으로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 만물의 목적, 만물의 책임이 되신다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앙으로 우리가 연약할 때,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에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에 대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아는 것만큼 믿고, 믿는 것만큼 사랑하고, 사랑하는 것만큼 행동합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과 믿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Lord)

1. 절대적 충성(노예가 주인에게, 백성이 왕에게)

2. 주인(역사, 세계, 모든 피조물)

3. 구주(구원의 주)

4. 승리(율법, 죄, 사망)

5. 신성(거룩함의 대표)


사사시대에 미디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침략하여 모든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기드온은 추수한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포도주 큰 틀 속에 들어가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기드온에게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라고 말합니다(6:12). 그러자 기드온은 너무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에게 추수한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포도주 큰 틀 속에 숨어 밀을 타작하는 자신의 모습을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여호와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6:17)

 (Give me a sign, You are the Lord)


왜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주가 되시는 표징을 원했을까요?’

미디안 족속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므로 이스라엘 벡성들은 산으로 도망하여 굴속에 숨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씨를 뿌려 농사를 짓고 수확하려고 할 때면 미디안 족속들이 나타나 농산물과 가축들을 모두 빼앗아갔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포도주 틀 속에 숨어 타작을 하는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부른 것은 기드온이 큰 용사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가 되신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큰 용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은 날마다 이스라엘 진영을 향하여 ‘너희가 정말 하나님의 군대냐? 그렇다면 한 사람을 보내어 나와 싸우게 하라 만일 그가 이기면 우리가 너희에게 항복할 것’ 이라며 조롱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어느 한 사람도 골리앗 앞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선의 형들을 찾아왔던 다윗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내가 나가서 싸우겠다고 합니다. 사울 왕이 벗어주는 갑옷과 칼과 방패가 다윗에게는 너무 커서 사용하지 못하고 다윗은 평소 양을 지킬 때 사용하던 막대기와 돌멩이를 들고 골리앗을 대항하려고 나갔습니다. 골리앗은 다윗에게 이것이 무슨 동네 병정놀이인줄 아느냐 하며 다윗을 조롱할 때 다윗은 당당하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왔다’ 하며 물맷돌을 던져 골리앗을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 이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다윗과 같이 아무도 나서지 못하는 전투에 당당하게 나가 승리한 사람을 큰 용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포도주 틀 속에 숨어 타작을 하고 있는 기드온을 ‘큰 용사’ 라고 부르셨습니다.


큰 용사는 세상에서 가장 작고 연약한 사람을 세워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가 되심을 나타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Jesus)


1. 여호와는 구원(예수아, 여호수아, 호세아, 예수)

2. 역사적 존재(인성을 강조, 내가 목마르다)

3. 신앙적 사건(부활, 승천)

4. 다윗의 자손(정치적 메시아)

5. 인자(신성을 강조, 죄를 사하는 권세, 안식일의 주인)

6. 고난 받은 종(세상 죄를 짊어진 어린 양)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밤중이 되었을 때 다른 죄수들은 모두 편안하게 잠을 자려고 할 때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했습니다(사도행전 16:25). 그런데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송을 감옥 안에 모든 죄수들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감옥의 터가 흔들리며 모든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착고에 매였던 죄수들은 자유의 몸이 되어 감옥 밖으로 도망쳤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 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때 바울과 실라를 지키던 간수가 칼을 뽑아들고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으려고 합니다. 바울은 그 간수에게 우리가 여기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간수는 깜짝 놀라서 바울과 실라를 그의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하며 질문합니다. 바울은 그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구원의 길을 알려주었습니다(사도행전 16:31).

그리스도(Christ)


1. 히브리어 메시아, 헬라어 예수

2. 예수(이름), 그리스도(직분)

3. 왕, 제사장, 선지자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에게 기름을 부은 후 기업의 지도자로 세웠습니다. 그러자 사울에게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여 예언을 하였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평범했던 사울이었지만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는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사무엘상 10:1, 6).

오늘날도 기름부음을 받는다면 평범했던 사람이 주님의 일에 쓰임을 받는 사람으로 세워질 것입니다.

아는 것만큼 믿고, 믿는 것만큼 사랑하고, 사랑하는 것만큼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는 것과 믿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 좋은 예를 베드로의 생애에서 살펴봅니다.

첫째는 믿음의 시기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알게 하신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둘째는 사랑의 시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려고 수고했으나 아무 것도 잡이 못한 베드로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한마디로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이때까지도 베드로는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지라고 말씀하신 그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그냥 어부의 본능으로 그물을 오른편으로 던졌을 때 그물을 당기면서 많은 고기가 그물에 잡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베드로는 믿음을 행동하는 제자로서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고백은 아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고백한 후에는 반드시 삶의 자리에서 사랑으로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만큼 희생과 헌신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신앙고백으로 사도신조를 암송하고 주기도를 함께 기도하는 것은 두 가지 신앙의 자세를 말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믿는다(credimus)
둘째는 나는 믿는다(credo)

신앙고백으로 암송하는 사도 신조의 내용에서 중요한 세 가지 신앙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과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니다.
그동안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아버지 하나님에 대하여 소개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 만물의 영광, 만물의 책임이 되십니다. 오늘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1985년 미국으로 이주한 케네스 배선교사가 북한에 억류되어 15년 교화형을 받고 노동교화소에 수용되었다가 735일 만에 미국으로 돌아온 후 지난 6월 1일 서울에서 ‘잊지 않았다’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가 평양에서 세 차례 예배에 참여하면서 느꼈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예배의 형식과 분위기는 한국 교회에 다른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예배 중에 ‘아멘’ 하고 화답하는 열정도 볼 수 있었는데 한 가지 다른 것은 설교 마지막에는 반드시 김일성주석을 찬양하고, 남한을 비방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한다고 합니다.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북한에서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김일성 주석을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북한 주민들과 지도원들이 자주 하는 말은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우리는 김일성 주석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김일성 주석은 눈으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무엇을 주느냐? 만일 하나님이 당신을 보호하시고 지켜주신다면 왜 당신이 여기 억류되어 있느냐? 하며 반문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도신조를 열심히 암송할지라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을 온전히 믿지 않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

첫째는 예수는 나의 구원자
둘째는 예수는 나의 주
셋째는 예수는 나의 사명


예수는 구세주(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유명한 설교자가 영국의 캠브리지대학의 채플에서 ‘예수의 구주되심’ 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마쳤습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오늘 선생님께서 예수는 본받아야 할 위대한 스승이라고 말했다면, 우리 모두는 선생님에게 박수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예수는 구세주이다’ 라는 기독교의 교리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때 그 설교자는 학생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자네는 정말 예수가 완벽한 모델이라고 생각하는가?”
“아, 그럼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면 이 완벽한 모델이신 예수를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믿는가?”
“그렇지요.”
“그러면 자네에게 묻겠네. 자네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모델이신 예수를 자네가 완전히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학생은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했습니다. 
“완전하게 따라갈 수는 없겠지요!”
“아, 그러면 자네도 도덕적 실패를 인정하는군. 그렇다면 자네의 삶 속에서 실수가 있었고, 죄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가?”
“아, 인정하지요!”
“그렇다면 자네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적 모델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자네의 도덕적인 실패와 죄에서부터 자네를 구원할 수 있는 구세주이신 예수가 먼저 필요하다네. 죄인에게는 도덕적인 모델로서의 예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세주로서의 예수가 필요하다네.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 비로소 그분은 자네에게 도덕적인 모델이 될 수가 있다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속주가 되셨습니다.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첫 번째 신앙의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존 뉴턴의 마지막 고백은 “내가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린다 할지라도,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내가 과거에 엄청난 죄인이었다는 것과, 또 한 가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불쌍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를 구원해주셨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기 때문에, 나는 내 목숨이 다하는 그 시간까지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다.”

1807년 12월 21일, 죽기 한 달 전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그리고 육체와 마음이 쇠할 때, 우리 마음의 힘이요, 우리의 기업으로서 영원히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나는 내가 의뢰한 분을 알며, 그 분이 내가 그에게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후로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니, 그것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께서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다.”

사도행전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예수는 생명의 주(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생명이란 새 생명을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과학자가 씨앗 하나를 들고 씨앗의 성분을 분석합니다. 씨앗은 질소, 수소, 탄소가 들어있다고 합니다. 과학자는 씨앗과 똑같은 모양과 화학적 성분을 섞어 씨앗을 만들 수 있습니다. 겉모양은 씨앗입니다. 그러나 씨앗을 땅 속에 심었을 때에 생명을 갖는 씨앗에서는 싹이 납니다. 그러나 인공적인 씨앗은 땅 속에서 썩어버립니다.

여러분에게 예수 생명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전의 경험과 아픔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자주 옛날의 상처와 아픔과 경험을 잊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아직도 예수 생명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바닷가에서 교회의 여름 수련회가 열리고 있었다. 목회자는 참석자들에게 조개껍질을 하나씩 주워오라고 했다. 참석자들은 영문도 모르고 신이 나서 조개껍질들을 주워왔다. 조개껍질이 생긴 이유를 목회자가 묻자 참석자들의 대답이 쏟아졌다. 갖가지 대답을 들은 후 목회자는 웃으며 말했다.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없으니 조개껍질은 분리될 수밖에 없고 여기저기 흩어져 쓸모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이 없는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사도행전 2:28,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예수는 사명의 주(사도행전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내게 맡겨 주신 사명을 깨닫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일터의 사명자로 부름을 받았다!”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하고 있는 그 일에 대해서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급과 월급이 우선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을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기 전에는 율법학자로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삶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증거 하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현장에서 증인으로 나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후에 바울은 만물의 쓰레기와 같은 나를 이방인을 위한 전도자로 살아가도록 부르셨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소명(召命, calling)은 나를 불러주신 은혜입니다.
사명(使命, mission)은 나에게 맡겨주신 일을 말합니다.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 3. 19~1873. 5. 1)은 스코트랜드 조합교회(Congregationalist)에 속한 선교사이며 탐험가로서 자기 생애의 전기를 쓰면서 ‘천직을 다할 때까지 죽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는 시간 동안은 아무도 죽일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죽음 속에서 주님이 저를 건져 주셨던가? 저는 이 말을 깨달았습니다. 천직을 다할 때까지는 죽지 않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일터의 사명자가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는 그 일이 곧 나의 사명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위에는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그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지 못한 같은 사업을 하는 사람들과 비교할 때 정직하고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일터의 사명자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그 일은 하나님께서 나를 그 자리에 복음을 증거할 수 있도록 나를 그 자리에 세우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목회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많은 교인과 예산과 건물을 갖고 있느냐가 성공적인 목회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내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는 것이 기준이라고 하겠습니다.

증거 할 신앙고백을 갖고 있는 사람은 매일 자기와 함께 일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비난받지 않기 위해서 신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기로 했다면 당신은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제일로 삼는 이들에 대해 요구하는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성공에 대한 당신의 목표, 기준, 방법 그리고 성공을 재는 척도에 대해서도 다시 평가를 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맡겨진 청지기 사명을 잘 감당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는 일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주님을 섬기는 마음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근심. 걱정. 번민 등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만다. 나는 오늘까지 무척 괴로운 일을 당하기도 하고, 칼날로 위협당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한 어떤 때에는 얻어맞고 아래위의 이빨이 부러지기도 하고 하여, 그 때문에 나는 때때로 생명의 위험의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예수의 제자 바울 역시 그러했다. 그는 신변에 위기가 닥치면 주 예수의 모습을 우러러 사모했다. 그리스도는 "바울아! 힘을 내어라"고 격려해주셨다. 앞이 막막할 때에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일그러진 마음을 또 한 번 돌이켜 보고 마음을 돌리는 일이 우리들의 종교이다. "아 감당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신기한 힘이 솟아오른다. 우리들의 속죄를 위해 못박히신 주님의 모습을 앙모하여라! 우리들의 이 마음가짐을 맛보게 된다면 온갖 근심과 걱정 불경기도 충분히 타게되어질 것이다."


미국 알펜스라고 하는 곳에 어떤 여자가 반신불수가 되어 오랫동안 그저 침대에만 누워 있는데 그는 이러한 생활을 하면서도 "내가 누워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결심하고 시작한 것이 그림 그리기였다. 유명한 화가가 된 그는 특별히 알펜스주에 있는 모든 들꽃, 즉 야생화들을 전부 다 모아 오라고 해서 야생화를 전부 그려 500여 종류를 그렸다. 그것을 다른 사람이 다 보고 어떻게 잘 그렸는지 하버드 대학에서 사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주 당국은 이런 보배를 다른데 보낼 수 없다하여 주의 보배로서 예술품으로 잘 보관한다고 한다. 불치의 병으로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발견한 사람이 사명감에 불타 고난을 승리로 극복한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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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6-6-19

성령의 인도(갈라디아서 5:16-26)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두 가지 사건에서 찾아봅니다.


지난 5월 22일 오하이오 주 이스트 리버풀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인사말을 맡은 조나단 몽고메리는 연단에 선 후 잠시 졸업생들과 축하객들을 둘러본 후 양두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앉아있던 졸업생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고 한 목소리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뤄지이다.” 이렇게 주기도문을 암송했다고 합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학부모들은 어른들이 지키지 못하는 진리를 지키려고 저렇게까지 행동하는 졸업생들의 용기에 손뼉을 치며 격려하고 축하했다고 합니다.

이스트 리버풀 고등학교는 지난 70년 동안 졸업식 때마다 졸업생들이 주기도문을 합창하는 전통을 지켜왔는데 2015년 졸업식에 참여했던 어느 학부형이 종교로부터의 자유재단(Freedom from Religious Foundation)이라는 미국의 최대 무신론 재단에 공공학교에서 주기도문을 합창하는 것은 법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제보하므로 경고의 편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편지를 받은 이사회에서는 만일 재단으로부터 고소를 받으면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는데 그만한 비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차라리 그런 비용이 있다면 교사를 한 사람 더 채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기 때문에 금년부터는 졸업식에서 주기도문을 합창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졸업생들은 합창을 할 수 없다면 주기도문을 암송하기로 준비했다고 합니다.

지난주일 새벽 2시경 플로리다 올랜도 시에서 일어났던 게이 나이트클럽에서 총격 사건으로 50명이 사망하고 53명이 부상을 입은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사건을 일으킨 범인은 이슬람 극단주의에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한편에서는 전통을 지키기 위한 고등학교 졸업생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또 한편에서는 주말에 나이트클럽을 찾아 즐거움을 찾던 사람들에게 잘못 선택된 진리를 따라 행동하므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최악의 총기 사고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러한 사회에 속해있고 또 그와 같은 사회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므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본문에서 두 가지 삶을 소개합니다.
하나는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르면 그 결과를 19절에서부터 21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술수, 원수를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야 하는 성도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 성령께서 원하시는 두 가지를 성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첫째는 기도생활
둘째는 말씀생활
첫째, 기도생활(로마서 8:26)
- 기도에 대한 성령의 인도를 따르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께서 탄식하시며 간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상에서 성도들이 하는 기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기도의 내용이 개인적인 것에서 벗어나 우주적인 것을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상에서는 개인적인 요구들만 계속하여 하늘로 올라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탄식하시며 간구합니다.

요한계시록 6장은 일곱 인에 대한 말씀입니다. 첫째 인을 뗄 때 흰말이 등장합니다. 둘째 인을 뗄 때에 붉은 말이 등장합니다. 셋째 인을 뗄 때에 검은 말이 등장합니다. 넷째 인을 뗄 때에 청황색 말이 등장합니다. 다섯째 인을 뗄 때에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를 찾아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6:9∼11,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하늘 제단 아래에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참되신 대 주재시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않으십니까?’ 라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그런데 죽임을 당한 영혼들은 왜 죽임을 당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가 가진 증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므로 때로는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영혼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경험하면서도 왜 믿음을 지켰습니까?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임을 당한 영혼들의 큰 소리로 외칠 때 어떤 반응이 나타났습니까?


요한계시록 6: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죽임을 당한 영혼들의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 응답되었습니까? 아니면 아직 응답되지 않았습니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잠시 동안 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이 말씀에서 기도에 대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배워야 합니다. 지상에서 그렇게 열심히 간구하며 부르짖던 기도가 하늘 보좌에서도 아직 응답되지 않을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당장 응답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이런 신앙에 대해서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에 대한 신앙을 바르게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말씀생활(디모데후서 3:16∼17)

- 말씀에 대한 성령의 인도를 따르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세상은 세상의 법의 질서를 따라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법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법 보다 더 우월한 법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법이 허락을 하고 교회법이 인정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허락하지 않는 것은 따라가면 안 됩니다.


헤롯 왕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야고보를 잡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무교절이므로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고 4명이 한조가 된 군사 4개조를 편성하여 베드로를 지키며 유월절이 지나면 베드로를 야고보처럼 죽이려고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헤롯 왕은 세상 법을 쥐고 있습니다. 세상 법이 잘못 사용되어 야고보를 죽였고 이제는 베드로도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행전 12장 5절에 보면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은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기도할 때에 감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도


6.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7.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8.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대

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 쌔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4. 베드로의 음성인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1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6.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17.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던 사람들도 베드로에게 일어났던 일을 믿지 못하고 베드로의 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겠으며 무슨 소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따라야 합니다.

미국이 이만큼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은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 한 것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미국이 세워지기를 기도했던 신앙의 사람들 때문에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다음의 세대들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누리는 것을 계속하여 누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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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예배 / 2016-6-26

거룩한 교회(에베소서 1:17∼23)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에베소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풍성한 은혜의 삶을 누려야 할 성도들이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된 것을 깨우쳐서 교회를 중심으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권면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도입을 위한 이야기)
어느 가톨릭 신자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성당에 나오기 전에는 성당에 다니는 교인들이 모두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성당에 다니면서 천주교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어느 천주교회 교인을 개신교회 교인으로 또 성당을 교회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를 수 있을까요? 교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교회를 거룩한 교회라고 말할까요?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는 교인들이 다니는 성당과 교회를 거룩한 교회라고 말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머무는 곳도 거룩한 곳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을 거룩한 세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은 모두 같은 사람인데 어떤 곳은 거룩한 곳이 되고 어떤 곳은 거룩한 곳이 될 수 없다고 할까요?


그 이유는 교회가 세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제 신약 성경 마태복음(Mat) 16장 18절을 찾겠습니다. 이 말씀에서 교회에 대한 두 가지 약속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는 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또 다른 하나는 교회가 세워진 목적이 무엇인가?

첫째,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And I tell you that you are Peter, and on this rock I will build my church, and the gates of Hades will not overcome it.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셨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이 비록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지만 교회는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에 거룩한 교회라고 말합니다.

둘째,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And I tell you that you are Peter, and on this rock I will build my church, and the gates of Hades will not overcome it.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말씀은 교회는 예수님의 몸과 같기 때문에 세속의 방법으로 교회를 유지하거나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절대로 분쟁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만일 분쟁이 일어났다면 누구의 편에 서야 하는가 보다는 오직 예수님의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먼저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고통스런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 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는 은혜가 가득한 곳입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분쟁하므로 오히려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면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을 배반하는 행동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워진 목적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도록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거룩한 교회로 세워지려면 두 가지 훈련이 필요합니다.
다시 한 번 성경을 찾겠습니다. 신약 성경 디모데전서 4장 5절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For it is sanctifi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교회의 기초만 거룩하면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기초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기초가 되신 예수님은 교인들로부터 드러나야 합니다.

탈무드의 이야기

유대 어느 마을에 혼인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잔치는 무려 일주일동안 계속됩니다. 혼인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그 집에 함께 먹고 지냅니다. 잔치가 마치는 날 해가 지고 어두워 질 무렵 잔치에 참여했던 손님들이 한사람씩 집으로 돌아갈 때 손님으로 찾아왔던 시각장애인이 돌아가려고 하자  주인은 그 시각장애인에게 등불을 손에 쥐어 주며 등을 들고 가라고 합니다. 시각장애인은 앞을 볼 수 없는데 이런 등불이 왜 필요하냐 하며 주인에게 불평합니다. 그러자 주인은 어두운 밤길에 등불을 들고 걸어가면 상대방이 등불을 보고 비켜갈 것이라며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시각장애인은 참으로 친절하고 자상한 주인이라며 등불을 들고 밤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다가 그만 좁은 길에서 마주오던 사람과 부딪쳐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시각장애인은 마주오던 사람에게 ‘당신은 내 손에 든 등불이 보이지 않느냐?’ 하며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마주오던 사람이 시각장애인에게 ‘꺼진 등불을 무엇 때문에 들고 다니느냐?’ 하며 오히려 시각장애인을 책망합니다.

거룩한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은 세상으로 나갈 때 등불을 들고 나가야 합니다. 성도들이 들어야 할 등불은 거룩함 입니다. 그런데 거룩함이란 등불이 꺼지고 말았습니다. 꺼져버린 등불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우리와 다를 것이 없다며 교회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꺼진 등불에 불을 켜야 합니다. 거룩함이란 등불을 켜기 위해서 두 가지를 회복해야 합니다.
신약 성경 디모데전서(1Tim) 4장 5절을 찾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For it is sanctifi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거룩이란 등불에 불을 밝히려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할까요?


노아가 살고 있던 시대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창세기 6장 5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The LORD saw how great man's wickedness on the earth had become, and that every inclination of the thoughts of his heart was only evil all the time.    

그런데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창세기 6장 8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But Noah found favor in the eyes of the LORD. 

노아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는 무엇이었나요?
모든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살아갈 때 노아는 높은 산 위에 올라가 잣나무로 방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노아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노아가 만드는 방주와 노아의 행동을 바보 같은 짓이라고 비웃었습니다. 노아의 이와 같은 삶이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매일같이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살아갈지라도 나는 그 길을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말씀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다윗 왕은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옮깁니다. 이때 다윗은 즐겁게 춤을 추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팔을 불며 즐거워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왜 다윗 성으로 옮겼습니까?
하나님의 궤에는 언약의 십계명 돌비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집에 들어오는 것을 즐거워한 것입니다.
말씀을 회복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지난 수요일에 요한계시록 6장에서 첫째 인을 뗄 때에 등장한 흰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소개했습니다.

수요일에 참여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위하여 다시 한 번 소개합니다.
이제까지 흰 말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기독교 복음화 운동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
셋째는 적그리스도

세 가지 해석은 모두 성경적인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흰말을 탄자가 면류관을 썼고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지만 그의 손에는 활을 잡고 있었습니다. 활이란 사람을 죽이는 공격용 무기로 로마시대에 모든 황제들은 손에 활을 잡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활은 권력을 의미합니다. 세상 권력을 갖고 사람들을 공격하려는 것은 복음 운동이 될 수 없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도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가짜 예수라고 하겠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가짜가 많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여 진리 편에서 마지막까지 승리해야 합니다. 말씀을 회복하려면 말씀을 바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할 때 거룩한 교회는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로마의 멸망사라는 책에서 로마가 멸망한 이유는 계속되는 전쟁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에서 죽었던 것과 내일을 이끌어 갈 인재양성을 등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 문화가 로마를 멸망시켰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왜 무너졌습니까?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너진 나라를 위해 기도했던 선지자 느헤미야는 52일 만에 3Km의 무너진 성벽 재건 공사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학사 에스라를 초청하여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느헤미야(Nehemiah) 8:1∼6 


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2.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4. 그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오른쪽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의 왼쪽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하나님의 말씀만이 무너진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며, 또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건강하게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제일 먼저 한 것이 에스라를 통하여 율법의 말씀을 온 종일 읽게했습니다.

느헤미야에게는 무너진 성벽을 쌓는 것도 중요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백성들의 영혼을 새롭고 반듯하게 세워가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백성들을 수문 앞 광장에 모은 후 에스라를 통하여 선포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일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기도를 회복할까요?


누가복음(Luke) 18: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Then Jesus told his disciples a parable to show them that they should always pray and not give up.   


사사시대의 특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족속에게 핍박을 받고 모든 양식과 가축들을 빼앗기며 살아야 했던 때를 말합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민족들에게 핍박을 받고 약탈을 당했을까요?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미디안 사람들에게 7년 동안 핍박을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멈추었던 백성들이 부르짖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기드온을 부르셨습니다.

기드온이 포도주 큰 틀 속에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며 기드온을 부르셨습니다.

기드온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 사람에게 핍박을 받고 살아가야 합니까? 정말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은총의 표적으로 보여 달라고 기도하며 양털 뭉치를 타작마당에 내려놓고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알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일찍이 일어나 양털을 취하여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했습니다.

기드온은 또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여 내게 진노하지 마옵소서! 하며 다시 한 번 양털을 타작마당에 내려놓고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밤에 하나님께서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지만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기드온을 세워주셨습니다.

기도가 회복 되면 하나님이 지도자를 세워주실 것입니다.

지난 18일부터 25일까지 미국장로교(PCUSA) 제222회 정기총회가 오리건 주 포틀랜드 오리건 컨벤션센터에서 열렸습니다. 18일 총회 개회예배 중 올랜도 테러사건과 2015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톤교회 테러 사건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도시간에 포틀랜드 무슬림 커뮤니티 리더인 와지디 세이드(Wajidi Said)씨가 강단에 올라가 이렇게 기도를 인도했습니다.


“알라신이여, 우리와 우리 가정을 축복하소서. 우리를 곧은 길로 인도하시되, 모든 선지자들이 걸었던 길 아브라함, 이스마엘, 이삭, 모세, 예수, 무함마드의 길로 인도하소서. 저 선지자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비나이다. 아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예수는 이슬람들이 믿는 선지자 중의 한 사람뿐이라는 기도가 미국 장로교회 총회 개회 예배 때에 시행되었다는 사례는 장차 미국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한편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라디오 진행자 에릭 메탁사스(Eric Metaxas)는  “미국인들이 종교의 자유와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일어서지 않는다면, 미국은 이름뿐인 국가로 전락하게 될 것이며, 건국의 아버지들은(Founding Fathers) 미국을 전 세계와 공유하기 위해 세웠기 때문에 전 세계의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본이 되는 삶의 중심은 기독교 신앙이지 세속적 개념이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고 기도를 회복한다는 것은 교회에 다니기만 하지 말고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교회가 될 때 교회가 세워진 기초처럼 거룩한 사람이 될 것이며, 교회가 세워진 목적처럼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힘을 잃어가는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탈랜트 김혜자씨가 최근 TV조선 ‘인생 다큐 마이웨이’ 라는 프로에서 34년 동안 담배를 피웠는데 담배를 끊게 된 동기를 소개했습니다. 김혜자씨의 이야기를 들었던 최불암씨는 34년 동안 피웠던 담배를 끊는 것을 보며 지독한 여자라고 평했다고 합니다.

김혜자씨가 담배를 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미국에 거주하던 딸이 엄마의 건강을 위해 매일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담배를 끊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김혜자씨는 딸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요즘 이상하다. 담배를 피우려고 하는데 갑자기 담배가 써서 피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커피도 맛이 없어 마실 수 없게 되었는데 아마 죽을병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딸이 엄마의 이야기를 들은 후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고 합니다.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딸이 엄마 내가 새벽마다 엄마를 위해서 기도했어. 엄마는 담배가 건강에 얼마나 해로운지 모르지 그래서 하나님 우리 엄마 담배를 끊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했다고 하더랍니다.

34년 동안 피우던 담배를 금단 현상 없이 끊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딸의 간절한 기도 덕분이었다고 합니다.

기도는 사람의 습관도 바꿀 수 있게 합니다.


사랑하는 뉴욕나사렛교회 성도들이여!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까요?

미국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는 교회에 다니지만 말고 성도들은 거룩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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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나사렛교회 주일예배 / 2016-7-3

 기도를 들으시는 주(시편 65:2)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O you who hear prayer, to you all men will come.    


새번역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 육신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주님께로 나아옵니다.


기도 이야기 -

한국인으로 최경주(2002년, 32살), 양용은(2009년, 37살)에 이어 세 번째로 미국 프로 골프(PGA) 경기에서 우승한 배상문(2013년, 27살)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배상문 선수가 우승한 후에 어느 기자가 배상문 선수에게 “프로 데뷔 후 10년, 미국 진출 2년 만에 어떻게 우승할 수 있었느냐?” 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배상문 선수는 ‘어머니의 기도 때문’ 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아마 배상문 선수의 어머니가 교회에 다니시는구나!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배상문 선수의 어머니 시옥희씨는 아들이 9살에 골프를 시작할 때부터 항상 염주를 손에 들고 쫓아다니며 아들을 위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미국에서 골프 경기가 진행되는 시간은 한국 시간은 새벽이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하지 않을 때는 언제나 해인사와 혜국사 라는 절에 머물며 아들을 위하여 기도했다고 합니다.

배상문 선수 어머니에게 아들이 우승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질문을 하였을 때 “부처님이 기도를 들어주셨어요.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기독교에서 기도하는 것과 불자가 기도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만일 배상문 선수가 기독교인이었고 그의 어머니도 교인이므로 교회에 가서 기도했기에 우승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면 기독교인들은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배상문 선수와 그의 어머니는 불자이었습니다. 문제는 이와 같이 이방 종교에서도 기도합니다. 그리고 기도가 응답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기도하는 것과 다른 종교에서 기도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부처에게도 기도하고, 알라에게도 기도하며, 심지어 우상에게도 기도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종교에서 기도하는 이유는 인간은 육체를 갖고 살아야 하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그러나 이방 종교에서 행하는 기도와 기독교의 기도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알지 못하면 올바른 기도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내 소원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다!
Prayer is not to tell my wishes but to seek the will of God!


예수님의 기도(마태복음 26:36∼45)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기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9절)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42절)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느부가 국경을 지킨다) 왕은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신상의 크기가 높이가 60규빗(27m), 넓이는 6규빗(2.7m) 이었습니다. 이 거대한 신상을 두라 평지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들은 금 신상에게 절을 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만일 엎드리어 절하지 않는 사람은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는다고 했습니다.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은 바벨론 왕이 임명하여 지역을 다스리게 하는 임무를 맡겼으나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 왕에게 끌려온 세 젊은이들은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입니다.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세 젊은이들은 결박되어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거워진 풀무 속으로 던졌습니다. 얼마나 불이 뜨거웠든지 그들을 붙든 사람들을 태워 죽였습니다. 그런데 풀무 속에는 세 사람이 아니라 결박되지 않은 네 사람이 불 가운데 다니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극렬히 타는 풀무아구 가까이 가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고 하였을 때 세 사람이 불 가운데서 나왔습니다.

그들의 몸에서는 불에 탄 냄새도 없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아벳느고과 사드락과 메삭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다! 하며 그들을 더욱 높여주었습니다.

이미 결정된 하나님의 뜻은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정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십니다.

기도는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다!
Prayer is self sacrifice!


모세의 기도(출애굽기 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므로 백성들은 우리를 인도할 신이 필요하다며 금 귀걸이를 모아 송아지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너희를 애급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 이라고 말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산에서 내려가라 하시며 네가 애급에서 인도해낸 네 백성이 부패했으니 내가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출 32:10).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어찌하여 큰 권능으로 애급에서 인도하여 낸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십니까? 차라리 내 이름을 주의 책에서 지워버리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Prayer is facing only God!


요나의 기도(요나 2:1)
4절,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
주의 성전을 바라본다는 고백은 하나님을 바라보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려면 지난 날 내가 있던 그 자리가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인지 아닌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가 아니었다면 당장 그 자리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는 회개하는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유대 나라 13대 왕으로 29년간 통치했습니다. 그런데 15년은 하나님의 은혜로 덤으로 통치한 기간이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왕위 되고 14년이 되었을 무렵 왕은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이제는 죽을 때가 되었으니 모든 것을 정리하라고 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얼굴을 벽을 향하고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합니다.

지난 날 내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보려고 노력한 것을 기억해 주시기를 간구하며 통곡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통곡과 간구를 들으시고 생명을 15년 더 연장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히스기야는 내 생명이 15년 연장된 것에 대한 징조를 구하여 해 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가기를 구합니다. 해 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가면 하루 24시간 중에 40분입니다. 그런데 40분의 시간이 15년으로 연장된 것입니다.

7월의 성구를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
자기를 희생하는 기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7월은 특별히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달입니다.
우리는 미국과 한국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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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6-07-10


1.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2.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3. 실로 저희는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4. 주께서 주의 법도로 명하사 우리로 근실히 지키게 하셨나이다 
5. 내 길을 굳이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6.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7.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8.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성경은 기독교인의 교과서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The Bible is like a textbook of Christian. 

본문에서 성경에 대한 정의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절 - 여호와의 법(the law of the LORD) 
2절 - 여호와의 증거(his statutes, His testimonies)   
3절 - 주의 도(his ways)
4절 - 주의 법도(your precepts)
5절, 8절 - 주의 율례(your decrees, Your statutes)
6절 - 주의 모든 계명(all your commands, Your commandments)
7절 - 주의 의로운 판단(Your righteous laws, Your righteous judgments)

예수를 믿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What is the purpose of believing in Jesus?

예수를 믿는 목적을 사람마다 모두 다르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목적을 예수님께서 제일 처음 하셨던 설교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설교하신 말씀을 산상복음이라고 합니다. 산상복음은 마태복은 5장부터 7장에 기록되었습니다. 산상복음의 첫 말씀 마태복음 5장 3절을 읽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예수를 믿는 목적은 복을 받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복이란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입니다.

시편의 말씀도 1편에서 복 받을 수 있는 비결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시편의 가르침도 복이란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내면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시편 119편도 복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Blessed are they whose ways are blameless, who walk according to the law of the LORD. 

산상복음의 복과 시편의 복은 그 내용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사람이 복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가 ‘성도의 복’입니다.

애급으로 가는 거룩한 가족 - 희랍의 화가 미네르바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값비싼 미술품들은 모두 팔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작품이 남았습니다. 작가의 이름도 모르는 그림이었기에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을 갖지 못한 그림이었습니다. 결국 그 그림은 14불 75센트에 팔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그림은 미네르바의 작품이라고 알려졌습니다. 미네르바는 희랍 화가로 그림의 제목은 “애급으로 가는 거룩한 가족” 이었다고 합니다.

아기 예수께서 애급으로 피난 가는 장면을 그린 아주 유명한 그림이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이탈리아에서 17세기에 잃어버린 것이었는데 시카고의 그림 경매장에서 보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림의 작가가 알려지면서 그림은 다시 5만 불에 팔렸다고 합니다.

5만 불도 넘는 귀한 그림을 14불 75센트에 구입한 사람이나 그림을 판사람 모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를 믿는 목적을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읽어야 하고 그 말씀을 우리들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성도의 복(福)이 무엇일까요?

복(福)이란 한자는 하나님(示)과 첫 사람 즉 한 일(一)과 입 구(口)자로 에덴동산(田)에 머물고 있는 것을 형상화한 문자라고 합니다. 복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의 복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첫째, 완전한 믿음(1절) - Perfect Faith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행위 완전하여 라는 말씀은 내 행실이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나의 믿음이 완전하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완전한 행실을 자랑할 수 없는 죄인으로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전도서(Ecclesiastes) 7: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로마서(Romans) 3:10,
기록한바 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하박국(Habakkuk)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시편(Psalms) 5:12,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For surely, O LORD, you bless the righteous; you surround them with your favor as with a shield.    

로마서(Romans)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의인이란 행위가 완전하여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온전하게 믿어 모든 죄를 용서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로마서(Romans)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예수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습니다. 마치 그렇게 믿고 행동하면 마음이 넓고 생각이 깊으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오직 하나 뿐입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 이외에는 다른 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Acts)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Neither is there salvation in any other: for there is none other name under heaven given among men, whereby we must be saved.   

이방 여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시어머니 나오미를 쫓아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룻은 남편도 죽고 두 아들마저 죽은 후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시어머니를 나오미를 따라 이방 땅을 찾았습니다.

아마 룻이 그녀의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이삭을 줍기 위하여 추수를 마친 밭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베들레헴을 찾아온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룻이 왜 하나님을 찾았습니까?
모압의 신을 따라가는 것은 완전한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룻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며,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고집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구하는 믿음(2절) - Faith that seek for God
2.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하나님을 찾는 믿음을 말합니다.
왜 하나님을 찾습니까?
내가 해결 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통과 질병과 환난이 내게 닥쳐왔기 때문입니다.

잠언(Proverbs) 28:5,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
Evil man do not understand justice, but those who seel the Lord understand it fully.

유라굴로 광풍에 배에 타고 있던 276명의 사람들이 사경을 해매고 있을 때 바울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응답하시기를 모두 배에 타고 있으면 작은 섬에 상륙하게 될 것이라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배가 출항할 때 바울의 말보다는 선원과 선주의 말을 믿었던 관원들도 이번에는 바울의 말을 들었습니다. 결국 멜리데 라는 섬에 상륙하여 모두가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사도행전 27:22∼25)

시편 14:1, (시편 53: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전도서 7:25,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궁구하여 악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더니.

나실인으로 태어난 삼손에게는 두 가지 금지된 것이 있었습니다(사사기 13:5, 7)
첫째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머리를 자르지 않는 것입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죽을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사사기 16:28∼30,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 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집을 버틴 두 가운데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셋째, 정직한 믿음(7절) - Honest Faith
7.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I will praise you with an upright heart as I learn your righteous laws.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읽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정직한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를 오랫동안 믿었어도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그 안에 예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고 존귀케 하신 이유는 다윗이 정직한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행위가 온전하여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다윗도 많은 허물과 죄를 범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나단 앞에서 왕의 체면과 지위를 모두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 나단은 하나님이 세우신 예언자이며 선지자라고 인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수가 없고 죄가 없기 때문에 정직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할 수 있는 믿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마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그 말씀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사야(Isaiah) 26:7,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  

탈북자 신영순씨의 이야기 - 정직해야 멀리 간다.

현재 남한에 정착한 새터민 즉 탈북자들은 대략 3만명이라고 합니다. 3만 명 중에 남자는 30% 여자는 70%라고 합니다. 대부분 남한 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어려운 현실에서도 성공적인 삶의 본보기가 되는 탈북자들 중에 신영순씨를 소개합니다.

신경순씨는 중국에서 인신매매 조직단에 의해 밤을 생산하는 농촌으로 팔려갔는데 중국말을 하지 못하므로 멸시를 받아야 하므로 악착같이 중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책을 구할 수 없어 학생들이 버린 교과서를 주워 혼자서 1년 6개월을 연습하고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해 질 무렵 농촌보다는 도시로 나가 의류공장에 취직했다고 합니다. 마침 그 기숙사에서 중국여성들과 생활하면 중국어를 거의 완벽하게 습득하였는데 마침 중국에서 물건을 수입하는 남한의 회사 직원이 통역을 찾고 있었는데 그 일을 소개받아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한 결과 회사의 유통과정과 수입한 물건을 가공하여 다시 동남아 시장으로 수출하는 것도 모두 알게 되었는데 마침 중국 공장의 사장이 남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이유 때문에 신고하여 북한으로 북송되었다고 합니다. 신영순씨가 하던 일을 어느 조선족이 맡아서 처리하는데 신영순씨가 받던 임금보다 너무 많은 금액을 요구하게 되어 결국 남한 회사의 사장들이 차라리 북한에 북송된 신영순씨를 데려오자고 결의하여 중국으로 탈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중국에 도착하여 남한 회사를 돕기 위해 결국 남한에 정착하게 되었고 남한 회사에 취직이 되었는데 갑자기 IMF가 터져 다니던 회상에 더 이상 다닐 수 없게 되자 차라리 내가 사업을 시작하려고 그동안 모은 돈과 정부에서 지원하는 지원금 모두 합하여 900만원으로 밤을 수입하여 가공하여 다시 수출하는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년 간 몇 십억 정도 수출을 하는 사업가로 성공할 수 있었는데 성공의 비결은 정직하면 멀리 갈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중국 회사들이 신영순씨의 신용을 믿고 50톤의 밤을 외상으로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다고 합니다. 당시 50톤의 밤은 대략 2억 5천만 원이나 되는 상당히 많은 양이지만 사양한 후 나하고 거래하려면 내가 갖고 있는 자금 800만원어치를 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외상으로 물건을 제공받으면 그만큼 제약하는 조건이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시편(Psalm) 7:10,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My defence is of God, which saveth the upright in heart.)    

가인이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인 후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동생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에게 내가 알지 못합니다.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라고 대답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피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인이 왜 정직할 수 없었을까요?
가인이 바친 제사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제물을 드렸고,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기쁘게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물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가인은 얼굴빛이 변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왜 화를 내며 얼굴빛이 바뀌느냐 하시며 가인에게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직한 마음을 회복하려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내가 예배하는 것은 가인의 제물과 같지만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는 아벨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예배에 성공하지 못하면 정직할 수 없습니다.

무수옹의 이야기

옛날에 근심 걱정이 없다고 널리 알려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열두 명 그리고 딸이 하나 있었는데 모두 결혼하여 아들과 딸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열세 명의 자녀들은 모두 효성이 지극하여 서로 부모님을 모시겠다고 하여 아들은 한 달씩 그리고 딸은 사 년마다 한 번 씩 돌아오는 윤달에 부모님을 모시기로 했습니다. 자식들 집에 갈 때마다 따뜻한 방과 맛난 음식과 손자들의 재롱이 즐겁게 했습니다. 이런 소문을 들은 임금은 그 사람을 불러 오색찬란한 구슬을 주면서 다시 만날 때까지 잘 간직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중 뱃사공이 그 구슬을 구경하다가 그만 강물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사공이 구슬을 강물에 빠트린 것은 임금이 사공에게 미리 지시하여 근심거리를 만들기 위해 몰래 꾸민 일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당황스러웠지만 사공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얼마 후 임금은 그 사람에게 구슬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자식들은 모두 모여서 걱정하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라. 어떻게든 될 것이다.” 라며 자식들을 타일렀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맏며느리가 시장에서 생선을 사와 요리를 하려고 배를 가르는데 이상한 구슬이 굴러 나왔습니다. 그 사람이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강에서 잃어버린 구슬이었습니다. 구슬을 되찾은 사연을 들은 임금은 “하늘이 준 복을 인간이 어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소. 과연 무수옹(無愁翁)이군.” 이라며 탄복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무수옹이란 “근심ㆍ걱정이 없이 지내는 복력이 좋은 늙으신네” “어리석은 탓으로 근심 걱정을 도무지 모르고 지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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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6-07-17

성도의 행실(시편 119:9∼16)


9.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10.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11.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12.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13. 주의 입의 모든 규례를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
14.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15.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16.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설교 제목은 ‘성도의 행실’입니다.

빙점이라는 소설을 발표했던 일본의 미우라 아야꼬는 한 때 남편의 월급만으로 생활해야 했기에 어렵던 생활을 해결하려고 집 앞에 작은 구멍가게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돈만 벌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구멍가게는 사람들의 신용을 얻게 되었고 장사도 잘되어 나중에는 트럭으로 물건을 들여올 만큼 번창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바쁘게 일하는 아내에게 “여보, 우리 가게가 이렇게 잘되는 것은 좋지만 이웃이 다 어려운 사람들뿐인데 우리 가게로만 손님이 몰려와서 다른 가게들이 문을 닫게 되면 어떡하지?” 


미우라 아야꼬 여사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래서 곧 가게 물건을 줄였습니다. 어떤 물건은 아예 가져다 놓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손님이 찾으면 “그 물건은 저 집에 가면 사실 수 있다”고 다른 구멍가게로 손님을 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녀에게는 남모르는 기쁨과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틈틈이 글을 쓰기 시작하여 빙점이라는 소설을 완성시켰다고 합니다.

서울 양평동에 홀트 양자회라는 입양기관이 있습니다.
홀트 양자회의 회장으로 송재천목사님이 취임을 하고 직원 예배에 설교를 맡아 방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직원들이 점심시간이 되면 회사 밖으로 나가 점심을 먹어야 하므로 매우 불편하다며 구내식당을 운영하자는 제안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송재천 목사님께서 근처 식당이 직원의 수만큼 영업에 어려움을 겪게 될 텐데 차라리 식당에 나가서 점심을 해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며 구내식당 운영에 대해서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 근처 식당의 업주들이 후원회에 가입하여 홀트 양자회가 펼치는 사업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성도의 행실은 자기의 이익보다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할 줄 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시편 119편은 알파벳 시(Alphabet Psalm)라고 소개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히브리 알파벳 첫 문자로 시작하는 알렙(א)의 시 1절부터 8절의 본문으로 성도의 복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성도의 복이란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을 강조합니다.

완전한 믿음 즉 죄를 짓지 않는 완벽한 행동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믿음 즉 무슨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문제 해결을 받을 수 있는 믿음입니다.

정직한 믿음 즉 모든 일에 진실한 것으로 만일 내가 잘못한 것일지라도 두려워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믿음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두 번째 단락으로 히브리어 알파벳 두 번째 문자 벧(ב)으로 시작하는 벧(ב)의 시로 9절부터 16절 말씀입니다.

벧엘(Bethel)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집’ 이란 뜻입니다.
벧(Beth)은 집을 의미하고 엘(El)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배경은 “마음이 하나님 말씀의 집” 이라고 합니다(Heart is the home of the Word of God).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How can a young man keep his way pure? By living according to your word. 

9절의 청년이란 육체적으로 왕성한 청년의 시기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청년이란 일찍 깨닫는 시기라고도 합니다.

일찍 깨닫는 사람이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마음이 심령이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심령(心靈)이란 영이 거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영은 거룩한 영과 악한 영으로 구분됩니다.

예를 들면 가룟 유다의 마음에 사단이 들어갔습니다(누가복음 22:3).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Then Satan entered Judas, called Iscariot, one of the Twelve. 

요한복음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The devil had already prompted Judas Iscariot, son of Simon, to betray Jesus.

반면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거룩한 영의 인도를 받은 것이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Jesus replied, "Blessed are you, Simon son of Jonah, for this was not revealed to you by man, but by my Father in heaven.   

악한 영의 지배를 받은 유다에 대해서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앆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24,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The Son of Man will go just as it is written about him. But woe to that man who betrays the Son of Man! It would be better for him if he had not been born.

신앙생활은 자기 마음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잘 다스려서 거룩한 영이 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에 거룩한 영이 거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하는 이유는 마음을 거룩한 영이 거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시편 119편 9절부터 11절은 내 마음이 거룩한 영의 지배를 받게 하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에 둔다는 것을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마음에 감추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에 감추는 것은 곧 암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암기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깊숙한 곳에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암기하는 것과 마음에 두는 것은 같은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9절부터 11절을 읽겠습니다.

9.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10.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11.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암기한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말씀을 배우려는 믿음(12절)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Praise be to you, O LORD; teach me your decrees.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요즈음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함께 공부합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이며 신앙생활의 결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어렵다고 생각했던 말씀을 함께 읽고 공부하며 새롭게 깨닫고 있습니다.

특별히 성경을 공부할 때 주 성령님께서 인도하는 선생님이 되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을 선포하는 믿음(13절)

주의 입의 모든 규례를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

주의 말씀을 입술로 선포한다는 것은 입으로 말하거나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마르틴 루터도 “구원에 관한 고백이 입으로 고백되지 않고 마음으로만 의롭게 되었다고 믿는 것은 결코 충분한 것이 못된다.”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믿음(14절)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주의 도를 즐거워한다는 말씀은 즐거운 것은 기억하고 불쾌한 것은 잊는 것이 건강한 정신 상태의 특징입니다. 만약에 이와 반대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잊지 않는 길은 본 시편 기자의 말처럼, 그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단히 훌륭한 한 방법은 정규 교회 예배를 찬송과 함께 기쁘게 드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믿음(15절)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묵상이란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것”을 말합니다. 기억해둔 것을 충실한 이해와 적용을 위해서 반복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19절을 찾아보겠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But Mary treasured up all these things and pondered them in her heart. 

  
마리아는 이미 예수님께서 탄생을 하셨는데도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마리아의 깨끗한 심령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즐거워하며 잊지 않는 믿음(16절)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16절의 즐거워함과 14절의 즐거워함은 같은 단어가 아닙니다.

14절.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영어 성경으로 살펴보면 16절은 “Delight” 14절은 “Rejoice” 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16절의 즐거워함은 규모가 크고 동적인 환희를 말하고, 14절의 즐거워함은 차분한 정적인 희락을 말합니다. 하지만 둘 다 같은 감정의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16절에서의 새로운 부가사항은 “성경 공부를 잊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다시 말해서, 긴급한 일의 횡포가 성경공부를 제외시키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의 시제는 미래 시제인데, 이제 본 시편기자는 자기가 한 일과 또 현재 습관적으로 하고 있는 일들로부터, 앞으로 할 일들로 옮겨갑니다. 그가 말하는 바는 성경을 잊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공부하기로 결심한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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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 / 2016-7-24

 성도의 눈(시편 119:17-24)

17.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19.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20.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21.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에서 떠나는 자를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 

22. 내가 주의 증거를 지켰사오니 훼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23. 방백들도 앉아 나를 훼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를 묵상하였나이다 

24.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 


성경에서 눈은 보는 것으로 제한되지 않고 어떤 때는 죄를 짓게 하는 통로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눈이 잘못 사용된 때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본 후에 그 열매를 따 먹은 것이었습니다.

창세기(Genesis) 3:6∼7,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When the woman saw that the fruit of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pleasing to the eye, and also desirable for gaining wisdom, she took some and ate it. She also gave some to her husband, who was with her, and he ate it. Then the eyes of both of them were opened, and they realized they were naked; so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coverings for themselves.      

사무엘하(2Samuel) 11:2,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와 보이는지라.
One evening David got up from his bed and walked around on the roof of the palace. From the roof he saw a woman bathing. The woman was very beautiful.


욥의 눈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욥기(Job)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My ears had heard of you but now my eyes have seen you.   

반면에 하나님의 눈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 능력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역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For the eyes of the LORD range throughout the earth to strengthen those whose hearts are fully committed to him. 

오늘의 시는 히브리 알파벳 세 번째 문자 기멜(Gimel, ג) 시라고 하겠습니다.
1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Do good to your servant, and I will live; I will obey your word.


잘 살게 해주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겠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멈추면 기복신앙입니다. 그러나 1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Open my eyes that I may see wonderful things in your law.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해 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기복신앙(Relief Faith)과 축복신앙(Blessed Faith)은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기복신앙이란 사람이 중심이 되는 신앙의 형태로 ‘오래 살게 해 주세요!(Please live long!)’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세요!(Please eat well and live well!)’ 라고 바라는 것을 말합니다.

축복신앙이란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신앙의 형태로 잠언 30장 8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Keep falsehood and lies far from me; give me neither poverty nor riches, but give me only my daily bread.   


시편 기자는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해주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Open my eyes that I may see wonderful things in your law.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해 달라는 기도를 영어 성경에서 살펴보면 그 의미가 좀 더 분명하게 이해됩니다.
기이한 것을 원더풀 띵스(wonderful things) 라고 합니다. 놀라운 것들 또는 신기한 것들이란 뜻입니다.


영의 눈을 뜨게 되면 놀라운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주간 우리들은 영의 눈을 열어 주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영의 눈을 뜨게 되면 놀라운 것을 보게 됩니다.
선지자 엘리사는 이스라엘 군대와 아람 군대가 전쟁을 할 때마다 아람 진영의 전략을 미리 알고 대비케 하므로 이스라엘 군대가 승리했습니다. 아람 왕은 매번 전투에서 실패하므로 아람 진영에 이스라엘의 첩자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람 왕의 신하가 이스라엘 진영에는 선지자 엘리사가 있어서 아람 진영에서 계획하는 모든 것을 미리 알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그러자 아람 왕은 이스라엘 군대와 싸울 것이 아니라 선지자 엘리사를 잡으려고 엘리사가 머물고 있던 도단이란 성을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선지자 엘리사의 사환이 밤중에 숙소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에 아람 군대가 완전히 포위한 것을 알고 놀라서 엘리사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사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다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열왕기하 6:17,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O LORD, open his eyes so he may see.   

엘리사의 사환의 눈이 열리면서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한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영의 눈이 열리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영의 눈이 열려야 합니까?

19절을 읽겠습니다.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I am a stranger on earth; do not hide your commands from me. 
 
객이란 나그네를 말합니다. 나그네와 같은 인생으로 태어났지만 주의 계명을 깨닫게 되면 나그네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그네와 같은 인생을 살았지만 죽은 후에 나그네가 아니었음을 깨우치는 진리의 말씀을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Luke) 16:25,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Son, remember that in your lifetime you received your good things, while Lazarus received bad things, but now he is comforted here and you are in agony.   

비록 일생동안 거지의 신분으로 나그네처럼 살았던 나사로이었지만 그가 죽어서 위로를 받는 자리에 머물게 되었고 부자는 세상에서 즐거웠으나 영원한 고통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는 것은 주의 말씀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20절을 읽겠습니다.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My soul is consumed with longing for your laws at all times. 

내 영혼이 주의 율례를 사모하다가 지쳤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칠 정도로 사모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그 말씀을 사모하였던지 온 몸이 지칠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요즈음은 너무 쉽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유혹합니다.
전 세계 유명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가만히 앉아서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이기에 쉽게 말씀을 듣고 쉽게 행동합니다.

쉽게 듣고 쉽게 행동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습관이 되어 나를 멸망의 자리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에스키모인들이 늑대를 잡기 위해서 힘들게 사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늑대의 습성을 잘 알기 때문에 늑개가 좋아하는 고기 덩어리에 예리한 칼을 꽂아 놓고 칼의 손잡이를 바닥에 세워두면 밤새도록 피가 흐르는 고기가 얼어버립니다. 늑대는 고기 덩어리 속에 예리한 칼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열심히 얼어붙은 고기 덩어리를 혀 바닥으로 핥습니다. 열심히 얼음 덩어리가 된 고기를 핥다보면 결국 예리한 칼날을 핥게 되어 피를 흘리고 그 자리에서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늑대가 죽은 후에 쉽게 늑대를 잡는다고 합니다.

사탄은 성도들을 아주 쉽고 편리하게 유혹합니다. 교회에 가야 되느냐? 교회에 가지 않아도 어디서든지 하나님은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마음에 맞는 설교를 들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오히려 다투고 분쟁하는 교회에 가서 상처를 받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쉽고 편한 것이 결국에는 내 영혼의 그늘이 되고 그늘이 절망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주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21절부터 23절까지 읽겠습니다.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에서 떠나는 자를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 

You rebuke the arrogant, who are cursed and who stray from your commands. 
내가 주의 증거를 지켰사오니 훼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Remove from me scorn and contempt, for I keep your statutes. 
방백들도 앉아 나를 훼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를 묵상하였나이다
Though rulers sit together and slander me, your servant will meditate on your decrees. 

사탄은 영적 존재이므로 성도들을 유혹하는 방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탄은 영혼을 무너트리기 위해 인간이 좋아하는 돈, 명예, 학식, 자식 출세등과 같은 것을 미끼로 던집니다. 이러한 전략은 이미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사용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인간은 그 덫에 걸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탄은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께도 그런 유혹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유혹을 이기셨다.

주님은 사탄의 유혹 속에 존재하는 영혼을 죽이는 칼날을 아셨다.

주님은 말씀으로 그 유혹을 이기셨다.

이렇듯 말씀은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갖게 한다.

성령께서 말씀으로 역사하시면, 세상의 이면에 사탄이 유혹하는 모든 것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24절을 읽겠습니다.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
Your statutes are my delight; they are my counselors. 

모사라는 단어는 상담자 또는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생의 상담자가 되시고 선생이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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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6-7-31

성령으로 기도하라(유다서 1:20-21)


8월의 성구 / 성령으로 기도하라(유다서 1:20-21)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But you, dear friends, build yourselves up in your most holy faith and pray in the Holy Spirit. Keep yourselves in God's love as you wait for the mercy of our Lord Jesus Christ to bring you to eternal life.  


성령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은 성령의 도움을 받아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20절, 공동번역 성경 -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장 고귀한 믿음의 터전 위에 스스로를 세우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기도하십시오.

왜 성령의 도움을 받아 기도해야 할까요?
육신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기도하시려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깨어 있어 기도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에 제자들을 찾았을 때 모든 제자들이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잠을 자는 제자들을 보시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마음과 육신이 일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거짓 증인을 세워 스데반을 죽이려고 할 때 스데반은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을 보며 돌에 맞아 죽는 자리에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돌을 던지는 사람들의 손에서 돌이 떠나지 말게 하소서! 아니면 돌을 나를 칠지라도 그 돌이 다시 튕겨나가 돌을 던진 사람들을 치게 하소서! 이런 기도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의 도움을 받아 순교의 영광스런 자리를 보여주었습니다(사도행전 7:59∼60).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성령의 도움을 받아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 무엇을 기도해야 할까요?
첫째는 자기를 건축하기 위한 기도
둘째는 자기를 지키기 위한 기도
셋째는 긍휼을 기다리기 위한 기도


첫째는 자기를 건축하기 위한 기도
-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건축학에서 세 가지 중요한 요소는 설계도와 시공과 관리라고 합니다.
자기를 어디에 세워야 합니까?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세워야 합니다.
거룩한 믿음이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닮을 수 있습니까?
생각( 思考 (사고) ), 언어( 言語 (언어) ), 행동( 行動 (행동) )이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9:1∼3,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길을 가던 중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선생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의 육신적 고통과 불편이 죄를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과 불편함으로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제 한국서적에 잠시 들러 주문한 책과 2017년 달력 주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서점에서 일을 하시는 나이 지긋하신 어른이 목사님 요즘 사모님은 좀 어떠신가요?하시며 그 어른의 부인도 안화선사모와 비슷한 시기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는데 최근에는 백내장으로 97% 실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모님이 그만하신 것이 얼마나 다행이며 감사합니까? 하시며 자리에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래도 실명이 되었어도 함께 산에 오를 수 있어서 좋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통의 자리에서 당장 일어나 마음대로 뛰어다니고 하나님을 찬양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그런 것만이 아니라 어떤 절망과 고통의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믿음을 유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육신의 문제가 있을 때에 무슨 죄 때문이냐 하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문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요한복음 8:1∼11,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올라가셨다가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자 많은 사람들이 따라왔습니다. 그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붙잡힌 한 여인을 세우고 모세는 이런 사람을 돌로 치라고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하며 예수님을 고소하기 위하여 매우 난처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돌을 들고 모여든 군중들은 돌을 내려놓고 모두 흩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시며 그 여자를 보냈습니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잘못과 죄를 들추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를 덮어주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생각을 바꾸면 언어가 바뀌고, 언어를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을 바꾸면 운명이 바뀐다.

복음성가에 사랑의 주님 닮기 원하네
사랑의 주님 닮기 원하네 그 아름다운 주 예수를 이 세상에서 저 천국까지 닮기 원하네 주님 예수

둘째는 자기를 지키기 위한 기도
-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자기를 지킨다는 것은 자기를 보호하고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닮은 사람, 예수 믿는 사람, 예수의 종으로 나를 건축했으면 그 집을 올바르게 보호하고, 유지하고, 지켜야 합니다.


자기를 어디에서 지켜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켜야 합니다.

요한일서 2:5∼6,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   


하나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드러납니다.

요한일서 3:14∼15,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까? 먼저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형제는 가장 가까운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형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관계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법정에 혹 서게 된다면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증거입니다. 아무리 내가 옳다고 주장하여도 증거가 없다면 결코 인정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반복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자에게 그 증거로 형제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를 했다고 주장한 자들을 향하여 나는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한 것을 기억한다면 오늘 이 말씀도 우리가 경히 여겨서는 안 되는 말씀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라고 고백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증거로 형제사랑을 요구하게 된다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일은 그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함의 증거로 드러낼 수 있는 나를 위한 행동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사랑하는 자가 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잘못된 자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실력 있는 오르간 연주자이며 신학 교수였던 슈바이처는 여행 중에 우연히 벌거벗은 흑인상을 보고서 남은 생애를 밀림의 불쌍한 원주민들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그를 아끼는 모든 사람들의 충고를 듣지 않고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5년 뒤 의사가 된 그가 헬레네와 사랑에 빠지자 주변 사람들은 그가 사랑 때문에 그 동안 계획해 왔던 아프리카여행을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슈바이처는 사랑하는 헬레네와 자신의 결심 앞에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와의 만남을 피하고 방황했다. 

슈바이처가 자신 때문에 고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헬레네가 어느 날 그를 찾아왔다. 슈바이처는 헬레네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결심이 선 듯 단호하게 말했다. 

'헬레네, 난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하지만 오랫동안 계획해 왔던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돕는 의사의 꿈을 버릴 수 없소. 당신의 남은 생애를 밀림 속에서 나와 함께 할 수 있겠소? 만일 당신이 이러한 나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도 난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거요.
 

헬레네는 슈바이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핼쓱해진 모습은 그 동안 그가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지 알게 해주었다. 헬레네는 사랑하는 슈바이처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슈바이처, 그 동안 왜 혼자서만 그렇게 많은 고민을 하셨나요. 저도 정식으로 간호 교육을 받은 사람이에요. 간호사인 저 없이 당신 혼자 그 일을 모두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셨어요?

그 뒤 헬레네는 진심으로 아프리카를 사랑하였고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을 위한 간호사이자 슈바이처의 아내로서 평생 동안 헌신적인 봉사자로 살았다. 

셋째는 긍휼을 기다리기 위한 기도

-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긍휼은 큰 사랑이다.
에베소서 2:4∼5,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보좌 주위에 있는 천사들과 의논을 하셨다고 합니다.

정의의 천사는 ‘하나님에게 사람을 만들면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온갖 종류의 사악을 자행할 것이고, 또 사람은 강퍅하고 잔인하고 부정직하여 세상은 불의로 가득 차게 될 것이기 때문’ 이라고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진리의 천사가 반발하며 ‘사람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 사람은 거짓되고, 그의 형제들을 속일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 당신도 속일 것’ 이라고 반대했다고 합니다.

거룩의 천사도 ‘사람을 절대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의 이름을 더럽힐 것’ 이라고 반대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비의 천사가 ‘사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죄를 짓고 정의와 진리와 거룩의 길에서 멀어질 때, 제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감싸고 사랑스런 음성으로 그에게 말하여 다시 당신께 데리고 오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입니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는 구제불능의 존재입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허물을 덮어주시고, 실수도 눈감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영생에 이르도록 긍휼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은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자신의 행동으로 영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얻기에는 모두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긍휼 때문에 구원을 얻었고 구원 얻은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에 이르도록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긍휼함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옛날 어느 집에 두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두 며느리가 시어머니께 친정에 다녀오게 해달라고 청을 드렸다. “오냐, 그러나 조건이 있다. 돌아올 때 큰며느리는 바람을 종이에 싸오고, 작은며느리는 불을 종이에 싸 가지고 오너라.” 두 며느리는 친정에 갈 수 있다는 것이 기뻐서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친정으로 달려갔다. 

며칠 후 돌아갈 날이 되었습니다. 두 며느리가 보따리를 한 아름씩 이고 각각 친정을 나섰다. 시집이 있는 마을 어귀에서 두 며느리가 만났습니다. 두 며느리는 마을 어귀에서 더 이상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가 말한 것이 두 며느리의 마음이 무겁기 때문입니다.

두 며느리는 너무 속이 타서 한탄을 하다가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마을 노인이 우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며느리들의 사연을 들은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바람을 종이에 싸는 건 종이로 만든 부채를 이르는 것이요, 불을 종이에 싸라는 건 종이로 만든 초롱을 말하는 것이요. 그러니 ‘종이부채’와 ‘종이 초롱’을 구해 가지고 들어가시오.”

노인이 며느리에게 말한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아무리 지혜가 귀해도 죄에 빠져 죽을 인생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개혁자 마틴 루터는 참된 지혜, 최고의 지혜, 영원한 지혜는 자신과 하나님을 참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것이 죄인과 하나님을 참되게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와 같은 자녀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은총으로 구원하시려고 열망하시는 긍휼을 베푸십니다.

요한복음 17:3,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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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6-8-7

  성도의 회복(시편 119:25∼32)


25.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26. 내가 나의 행위를 고하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으니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27.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사를 묵상하리이다 

28.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29.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30. 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를 내 앞에 두었나이다   

31. 내가 주의 증거에 밀접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로 수치를 당케 마소서 

32.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25. I am laid low in the dust; preserve my life according to your word 

26. I recounted my ways and you answered me; teach me your decrees.

27. Let me understand the teaching of your precepts; then I will meditate on your wonders.
28. My soul is weary with sorrow; strengthen me according to your word.

29. Keep me from deceitful ways; be gracious to me through your law.
30. I have chosen the way of truth; I have set my heart on your laws 
31. I hold fast to your statutes, O LORD; do not let me be put to shame.

32. I run in the path of your commands, for you have set my heart free. 

시편 119편은 신명기의 명령을 좇아(6:1-9)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시로 성경 중에서 가장 긴장으로 176절로 편집된 말씀입니다. 히브리어 알파벳 22자를 한자에 8절씩 구성하여 22부로 나누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4번째 자음 달렏(ד)에 해당하는 달렏(ד)의 시라고 하겠습니다. 히브리 알파벳은 아라비아 숫자로도 사용합니다. 따라서 달렏은 4에 해당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성도의 회복’입니다.

성도는 거룩한 백성이란 뜻으로 세상 사람과 구별하는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성도와 세상 사람들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25절,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I am laid low in the dust; preserve my life according to your word.


진토(塵土, 아파르, dust)란 ‘흙’ ‘먼지’ ‘땅’을 의미합니다.
진토에 대한 성구를 찾아보겠습니다.

사람은 진토로 만들어진 존재(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The LORD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the man became a living being.  

사람이 죽으면 진토로 돌아간다(창세기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By the sweat of your brow you will eat your food until you return to the ground, since from it you were taken; for dust you are and to dust you will return. 


진토를 무덤이라고도 한다(이사야 26: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But your dead will live; their bodies will rise. You who dwell in the dust, wake up and shout for joy. Your dew is like the dew of the morning; the earth will give birth to her dead. 


진토는 사람을 만든 재료입니다. 육체가 진토에 붙은 것이 아니라 영혼이 진토에 붙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영혼이 진토에 붙을 수 있습니까? 이러한 표현은 시적인 표현입니다. 영혼이 진토에 붙었다는 표현은 내가 지치고 곤하여 죽은 사람과 같이 땅에 착 달라붙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살아있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죽은 것과 같다는 표현입니다.

붙었사오니(다바크)는 ‘착 달라붙다, 결합하다, 접근하다’는 뜻입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다는 말씀은 내가 지치고 곤하여 죽은 사람과 같이 땅에 착 달라붙었다는 것입니다.

내 육신이 진토에 붙은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생의 온갖 문제는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는 고백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진토는 가치가 없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가치가 없다는 것으로 사용하는 대표적인 단어가 먼지와 안개라고 하겠습니다.


야고보서 4: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You adulterous people, don't you know that friendship with the world is hatred toward God? Anyone who chooses to be a friend of the world becomes an enemy of God.
 

인간은 가치가 없는 진토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진토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있는 생명으로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진토가 아니라 생기가 회복해야 살아납니다. 왜냐하면 진토는 여전히 진토일 뿐입니다. 그러나 진토에 담겨진 생기는 진토를 생령으로 살아나게 합니다. 따라서 진토를 살아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소성케(하야)는 ‘살다’ ‘살아 있다’ ‘재생시키다’ ‘회복시키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되살아나는 것 같은 새 힘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새 힘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주의 말씀대로 얻어집니다.


아모스 5: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This is what the LORD says to the house of Israel: Seek me and live. 
  

신명기 30: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The LORD your God will circumcise your hearts and the hearts of your descendants, so that you may love him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live. 

특별히 인생의 고난 중에서 갑작스런 죽음과 사고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로 정년 퇴임한 국제정신분석가 이무석 박사가 의과대학에 다닐 때의 일입니다. 

당시 교수님 중에는 고함지르고 욕도 하시는 매우 무서운 분이 한 분 계셨는데, 심지어 수술 중에 실수한 레지던트를 때려서 발로차서 내쫓았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수술실력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해 우리나라 최고라는 찬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무석 박사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그 분이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주일 예배 시간에 헌금 위원으로 봉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무석 박사가 교수님을 만나 그 경위를 묻자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나는 신을 믿지 않았어. 비과학적이라 생각했지. 의사 생활을 하면서 말기 암 환자들이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고 욕을 하며 불안에 떨다가 죽어 가는 모습을 자주 보면서 그분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지. 그런데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환자가 있었는데, 그분의 얼굴은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어. 그 분은 지독한 통증을 잘 참으면서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위로해 주었어. 내가 회진 나가면 그분은 언제나 나에게 웃으며 감사하다고 했어. 나중에 그 이유를 알았는데 그분은 예수님을 믿고 있었어. 그 분에게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지. 그 후 주위를 살펴보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도 다르더라.” 

28절,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My soul is weary with sorrow; strengthen me according to your word.


눌림(투가)는 ‘억압, 고통, 슬픔, 근심’을 의미합니다.
곧 환난과 곤고로 인하여 영혼이 고통당하는 것으로 가슴이 짓눌린 상태를 말합니다.


녹사오니(다라프)는 ‘똑똑 떨어지다, 눈물을 흘리다, 새다’는 뜻입니다. 한꺼번에 쏟아 붓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오랜 시간에 걸쳐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가슴을 짓누르는 고통을 인하여 오랜 세월동안 눈물을 흘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세우소서(쿰)은 ‘일으키다, 일어나다, 강하게 하다, 세우다, 확정하다’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나를 세우소서’ 라는 말씀은 ‘나를 다시 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를 소성케 하소서’ 라는 말과 같은 내용입니다.

시편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Why are you downcast, O my soul? Why so disturbed within me? Put your hope in God, for I will yet praise him, my Savior.
 
시편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 43: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신앙의 문제는 육체가 아니라 영혼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먼저 회복해야 합니다. 영혼의 회복은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선지자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니느위가 아닌 다시스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항구에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순조롭게 배를 타고 다시스로 가는 중에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선장과 선원 그리고 배에 탔던 사람들은 모든 짐을 바다에 던져 버리고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배 밑창에서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선장은 잠이 든 요나를 깨우며 어서 일어나 너의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재촉합니다. 요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이 모든 풍랑의 원인이 자신의 잘못임을 깨닫고 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큰 물고기 뱃속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요나 2:5,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The engulfing waters threatened me, the deep surrounded me; seaweed was wrapped around my head. 
요나 2: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When my life was ebbing away, I remembered you, LORD, and my prayer rose to you, to your holy temple. 


선지자 요나는 바다에 던져진 후 그가 받는 육체적인 고난이 영혼을 깨우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영혼의 회복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째, 행위를 고하라(26절)

내가 나의 행위를 고하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으니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I recounted my ways and you answered me; teach me your decrees.


29.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Keep me from deceitful ways; be gracious to me through your law.
 
30. 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를 내 앞에 두었나이다

I have chosen the way of truth; I have set my heart on your laws. 

둘째,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27절)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사를 묵상하리이다 

Let me understand the teaching of your precepts; then I will meditate on your wonders.


(새번역) 나를 도우셔서, 주님의 법도를 따르는 길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주님께서 이루신 기적들을 묵상하겠습니다.


법도(피쿠드) ‘교훈’ ‘계율’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24회 사용되어졌습니다만 특이하게도 시편에서만 사용되어졌고, 그것도 3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시편 119편에 사용되어졌습니다. 시편 19편 9절에서 "교훈"으로 번역되었고, 모두 "법도"로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다른 표현입니다.

깨닫는다는 것을 32절에서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마음을 넓히라!

32.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I run in the path of your commands, for you have set my heart free.


(새번역) 주님께서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시면, 내가 주님의 계명들이 인도하는 길로 달려가겠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이라는 말씀은 내가 내 마음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넓혀주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 마음을 넓혀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말씀을 믿고 받아드릴 수 있는 것도 내가 깨닫고 이해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음을 넓혀주셔야 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좁은 마음과 넓은 마음을 구분해야 합니다. 넓은 마음은 하나님이 뜻에 순종하는 마음이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넓은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는 우리의 목표인 주의 계명의 길을 향해서 달려갈 수 있습니다. 달려간다는 것은 목표를 향해서 빨리 간다는 말입니다. 빨리 가는 것은 목표에 빨리 도달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이 목표라고 한다면,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만이 달려간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입니까? 걸어가는 모습입니까? 아니면 기어가는 모습입니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제자리 걸음, 혹시 뒤로 물러서는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고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행위, 즉 신앙의 목표를 가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신앙의 목표를 향해서 말씀에 순종하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그 신앙의 목표에 빨리 도달할 수 있도록 달려가야 합니다.



넓은 마음은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큰일을 해야 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마음입니다.

열왕기상 4:29,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같이 하시니.
God gave Solomon wisdom and very great insight, and a breadth of understanding as measureless as the sand on the seashore.
 
바닷가의 모래와 같다는 것은 측량할 수 없이 많고 풍성한 것을 말합니다(창 32:12, 신 33:19).

30. 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를 내 앞에 두었나이다   

31. 내가 주의 증거에 밀접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로 수치를 당케 마소서


법도는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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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6-8-14

성도의 마음(시편 119:33∼40)


33.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34.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35.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36.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 

37.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38. 주를 경외케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 

39. 나의 두려워하는 훼방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주의 규례는 선하심이니이다 

40.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예수님은 좋은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좋지 않다 또는 교회는 좋은지 몰라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좋지 않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성도에 대한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성도란 인생의 모든 문제들을 성경적으로 해결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오늘은 성도의 마음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인생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해결한 후에는 반드시 내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만일 문제를 해결한 후에 또다시 이전의 삶을 지속한다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을 좋은데 예수를 믿는 사람은 좋지 않다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거룩해야 합니다. 사람을 거룩하게 회복하는 무기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디모데전서(1Timothy) 4장 5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For it is sanctifi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시편 119편은 매 구절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의를 소개합니다. 시편 119편은 히브리 알파벳 22문자를 중심으로 22개의 연으로 8구절씩 구성된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 시편 119편 41절부터 48절은 히브리 알파벳 다섯 번째 문자 ‘헤(ה)’로 시작하는 다섯 번째 연의 ‘헤(ה)’의 시라고 합니다. 아라비아 숫자로는 5라고 합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은 ‘성도의 마음’입니다.
마음이란 삶의 운전자라고 하겠습니다.

두 대의 자동차가 도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대의 자동차가 차선을 무시하고 심지어 신호를 무시하면서 다른 차들을 추월하며 달려갑니다. 하나는 응급 환자를 수송하는 앰브런스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급 승용차입니다. 도로를 달리는 방법은 같을지라도 한 대는 분명 잘못된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앰브런스는 환자를 빨리 후송하여 치료를 받게 하려는 것이지만 고급승용차는 다른 사람보다 빨리 가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대부분의 성도들은 빌립보서(Philippians) 2장 5절 말씀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성도의 마음을 히브리서(Hebrews) 13장 9절에서 소개합니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아멘   

성도는 마음을 은혜로 굳게 해야 합니다.
마음을 은혜로 굳게 하려면 다른 교훈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여러분은 여러 가지 이상한 교훈에 속지 마십시오. 마음은 은혜로 강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음을 은혜로 강하게 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다윗이 사울 왕의 시기와 미움을 받아 도망 다닐 때의 사건입니다.
갈멜이란 곳에 나발이란 사람이 양의 털을 깎는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젊은이들을 나발에게 보내어 다윗의 이름으로 문안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나발은 도대체 다윗이 누구며 일하기 싫어 주인을 떠나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다윗의 사람들이 부탁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화가 치솟아 400명의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나발을 습격하려고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마침 나발의 한 종이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주인이 행한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아비가일은 급하게 음식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달려오는 길목에서 다윗에게 이렇게 간청합니다.

사무엘상 24:24∼26,
내 주여 청컨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의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다윗은 아비가일이 말을 듣고 화를 가라앉히고 그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화가 났던 다윗이 아비가일의 말을 듣고 그의 마음을 은혜로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32∼33,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찌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찌며 또 네게 복이 있을찌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성도의 마음은 은혜로 굳게 해야 합니다. 은혜로 굳게 하므로 죄악 된 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항상 바르게 유지해야 합니다.

이탈리아의 문인이었던 조반니 파피니(Giovanni Papini, 1881∼1956)는 “오늘날 세계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며, 인간의 문제는 곧 마음의 문제이다.” 라고 역설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로 흔들림이 없도록 굳게 해야 합니다.
성도의 마음을 은혜로 굳게 하는 비결을 본문에서 소개합니다.

첫째, 주의 말씀을 배우자(33절) Learn to the Lord's word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Teach me, O LORD, to follow your decrees; then I will keep them to the end. 


말씀을 잘 배워야 합니다.

배운다는 것은 지식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계획을 찾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이라는 책을 저술한 파커 팔머는 “우리 삶의 깨어진 표면 밑에는 숨어 있는 온전성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근대 이후 교육에 팽배해 있는 객관주의로서는 숨어 있는 온전성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영적 전통으로 찾아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가르침이란 진리에 대한 순종이 실천되는 공간이라고 합니다(A space in which obedience to truth is practiced).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배운다는 것은 깨닫는 것입니다(34절).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Give me understanding, and I will keep your law and obey it with all my heart.

  

깨닫는다는 것은 곧 자기 안에 감추어진 진실을 찾는 것입니다.

제자 베드로가 순교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도망갈 때 베드로에게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버린 십자가 내가 대신 짊어지려고 로마로 간다는 음성을 듣고 베드로는 자기의 길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로마로 갈 수 있었습니다.

잘 가르치고 잘 배운 그 자리에는 언제나 진리가 활발하게 움직이고 역사될 것입니다.

35절입니다.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Direct me in the path your commands, for there I find delight.


둘째, 허탄한 것을 보지 말자(37절) Not to see the worthless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Turn my eyes away from worthless things; preserve my life according to your word.

 
허탄한 것이란 가치가 없는 것(worthless), 또는 헛된, 소용없는, 무익한 것(vanity)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진주목걸이라는 작품에서 어느 부인이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하려고 이웃집 부인에게 목걸이를 빌렸습니다. 그런데 목걸이를 잃어버렸습니다. 가난한 부인에게 그 목걸이를 구입하려고 일생동안 노력하고 수고하여 겨우 목걸이를 준비한 후 이웃 부인을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 목걸이를 건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부인은 그 목걸이는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고 합니다. 가짜를 위하여 일생을 고생한 것이 얼마나 억울하고 분합니까?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일생동안 목숨을 걸고 노력한 것이 헛수고가 된다면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아마 우리가 이 다음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이런 일들이 많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 다음이 아니라도 나이가 들고 난 후에 지난 날 별 것도 아닌 것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였고 시간과 물질을 낭비했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허탄한 것에 빼앗기지 않으려면 주의 말씀을 세워야 합니다(38절)

주를 경외케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

Fulfill your promise to your servant, so that you may be feared.

  
주의 말씀을 세운다는 것은 말씀이 나를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며 또한 말씀이 나를 통하여 지켜지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삶이 주의 말씀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통로가 되려면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5장에 베드로는 온밤을 새워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날이 밝아올 무렵 아무 것도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물을 정리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얼마나 고기를 잡았느냐? 하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밤을 새워 그물을 던졌으나 잡은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노련한 어부이었으나 예수님은 목수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지겠다고 하며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행동이 말씀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통로가 되려면 두려워하는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을 극복해야 합니다(39절)

나의 두려워하는 훼방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주의 규례는 선하심이니이다
Take away the disgrace I dread, for your laws are good. 

두려워하는 훼방이란 몸서리치는 모욕, 두려워하는 수치, 두려워하는 비난을 의미합니다.

두려워하는 훼방을 벗어난 후에는 주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주의 법을 사모해야 합니다(40절)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How I long for your precepts! Preserve my life in your righteousness. 


주의 법도를 사모한다는 것은 주의 말씀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오셨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앉아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마르다 예수님을 위하여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합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에게 마리아가 음식을 만드는 것을 도와주도록 하라고 부탁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마리아는 좋은 것을 선택했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것은 좋은 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42절,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but only one thing is needed. Mary has chosen what is better, and it will not be taken away from her.


하루 24시간 중에서 말씀을 읽는 시간과 기도하는 시간은 좋은 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Sanctus Aurelius Augustinus, 354. 11. 13∼430. 8. 28)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도 바르다.
If the heart is upright toward. Action is also right.

결단의 기도
주여, 나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하게 하여 온갖 유혹과 시련에서도 승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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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 / 2016-8-21

성도의 묵상(시편 119:41~48)


41.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

42. 그리하시면 내가 나를 훼방하는 자에게 대답할 말이 있사오리니 내가 주의 말씀을 의뢰함이니이다

43.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44. 내가 주의 율법을 항상 영영히 끝없이 지키리이다

45.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행보할 것이오며

46. 또 열왕 앞에 주의 증거를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겠하오며

47.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48. 또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에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를 묵상하리이다.

본문을 살펴보면 무엇을 묵상해야 하는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41절)
- 주의 계명을 즐거워한다(47절)
-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45절)

훼방하는 자에 대한 답변(42절)
- 진리의 말씀에 내 입에 있다(43절)
- 열왕 앞에서 주의 증거를 말한다(46절)
- 율법을 지속적으로 지킨다(44절)

시편 119편 41∼48절 말씀은 히브리 알파벳 여섯 번째 문자로 시작하는 와우(ו)의 시라고 하겠습니다. 아라비아 숫자로는 6에 해당합니다.

설교 제목을 성도의 묵상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묵상이란 단어가 48절에 소개됩니다.

또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에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를 묵상하리이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묵상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을 소개합니다.

창세기 24장 63절,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약대들이 오더라.  

여호수아 1장 8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 주야로 묵상하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암기한 후 그 말씀을 수시로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손을 들고 주의 율례를 묵상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왜 손을 들어야 합니까?
본문에서는 주의 계명을 사랑하기 때문에 손을 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손을 드는 것은 사랑으로 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손을 드는 경우는 다양합니다.
첫째는 항복할 때
둘째는 만세를 부를 때
셋째는 환영할 때
넷째는 기도할 때
다섯째는 축복할 때
여섯째는 약속할 때

찬양 이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찾아보면 ‘손을 들고, 손뼉 치며, 힘을 다해, 춤을 추며, 목소리 높여, 모든 악기와 비파와 수금으로’와 같은 표현이 자주 사용됩니다.

찬양을 예로 들면 열성적으로 손뼉을 치며 찬양을 했다면 열성적인 삶이 고백되어야 합니다. 만일 찬양은 열정적으로 불렀으면서도 삶의 현장에서는 찬양할 때와 같은 열정이 없다면 그와 같은 찬양은 바람직한 찬양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묵상이란 라틴어는 메디켈루스(medikelus)라고 합니다. 메디켈루스라는 단어에서 영어의 meditation, medicine과 같은 단어가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성도가 무엇을 어떻게 묵상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드려라

소련의 노벨문학상 작가인 솔제니친(Aleksander Solzhenitsyn, 1918. 12. 11-2008. 8. 3)은 소련이 6천만 명이 인명을 희생시키면서 붉은 혁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하여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으로 “소련인들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이 무서운  징계를 받게 되었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 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자식처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병들었을  때에 낫기를 원하시고, 여러분이 죄악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에 돌아오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어느 때에든지 예수님 앞에 구하기만 하면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용서해 주시고, 치유해 주시고,  해결해 주십니다.






연에 해당되는 시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므로 담대함을 얻고자 하는 시인의 신심이 담겨져 있는 시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주의 말씀이 더욱 깨달아지고 끝까지 주의 말씀대로 행할 수 있기를 간절히 구하였다. 오늘 말씀은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다.

첫째, 말씀이 우리 영혼에 참된 은혜를 주기 때문(41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한다. 

시편 19: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바로 썩지 아니할 씨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뿐 아니라 지혜롭게 한다.

둘째, 훼방하는 자 앞에서 굳굳한 믿음을 갖게 하기 때문(42절)

그리하시면 내가 나를 훼방하는 자에게 대답할 말이 있사오리니 내가 주의 말씀을 의뢰함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비방하는 자들에게 담대히 그를 반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시면 내가 나를 훼방하는 자에게 대답할 말이 있사오리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의 사랑을 체험한 자들은 어떤 대적자들의 비난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꿋꿋하게 믿음을 지키며 담대함을 잃지 않는다.

셋째, 변함없이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44절)

내가 주의 율법을 항상 영영히 끝없이 지키리이다.

요한복음 14:21,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받은 자가 진정 주를 사랑하고 끝까지 주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 시인은 더욱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원하여 주의 말씀을 의지하였다.

넷째, 말씀은 참 자유를 주기 때문(45절)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행보할 것이오며

말씀에 힘을 얻는 자는 악한 세상에서도 자유로이 활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얻은 자가 참 행복자이다.

다섯째, 말씀에 힘을 얻은 자가 담대할 수 있기 때문(46절)

또 열왕 앞에 주의 증거를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겠하오며.

말씀으로부터 힘을 얻은 자가 담대함을 얻고 수치를 당치 않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진정한 자유를 주고 담대할 수 있는 능력을 주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을 보라. 그들이 왕들 앞에서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요 능력이기 때문이다. 


시인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은혜와 확신과 능력을 힘입어 말씀대로 행할 뿐 아니라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시인의 고백을 47-48절에서 확인합니다.
47.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48. 또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에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를 묵상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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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 / 2016-8-28

성도의 소유(시편 119:49∼56)


49.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게 하셨나이다 

50.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51. 교만한 자가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52. 여호와여 주의 옛 규례를 내가 기억하고 스스로 위로하였나이다

53.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을 인하여 내가 맹렬한 노에 잡혔나이다

54. 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55.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56.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 


본문은 히브리어 22개의 알파벳 중에서 일곱 번째 문자 ‘자인(ז)’으로 시작하는 시입니다. 자인의 의미는 숫자로는 7에 해당하고, ‘무기’ ‘연장’ ‘칼’ ‘지팡이’를 의미합니다. 상징적으로는 방어 및 방어되는 대상인 ‘재산’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막대기와 지팡이가 종교적인 권위를 포함하여 일반적인 권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시편 23편 4절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지팡이는 나를 지켜주고 안위하시는 하나님 곧 하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의도에서 오늘 설교 제목을 ‘성도의 소유(Owned by Saints)’ 라고 결정했습니다. 


성도란 말씀의 진수를 아는 사람입니다.
Saints who knows the truth of the Bible.

제목을 정하게 된 말씀을 56절에서 찾아봅니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
This has been my practice: I obey your precepts. 


56절을 다양한 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새번역 - 주님의 법도를 따라서 사는 삶에서 내 행복을 찾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이것이 나에게는 큰 축복입니다. 

공동번역 -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것, 이것이 나에게는 전부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두 가지로 설명한 사회학자 에릭 프롬에 의하면 첫째는 소유 지향적 삶(having mode)과 둘째는 존재 지향적 삶(being mode)으로 구분합니다.

소유 지향적 삶이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갖고 있는 것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존재 지향적 삶이란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목표하며 살아가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는 삶은 소유와 존재를 종합한 새로운 삶의 모습을 말씀합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성도의 소유’ 라고 하겠습니다.

지난 목요일 아침 노숙을 하며 지내던 이남선씨가 찾아왔습니다. 요즈음은 맨하튼 요양원에서 월 250불씩을 지불하며 스튜디오에서 지낸다고 합니다. 가끔 이 지역을 방문하는데 오늘은 크레디 카드에 남은 돈이 없어서 찾아왔다고 합니다. 얼마가 필요하냐? 물었더니 10불만 있으면 된다고 합니다. 10불을 주었더니 평소에 하지 않던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 아버지가 목사님이셨고 작은 형님도 현재 미국에서 목사 활동을 한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목회자이었고 형이 목사라는 것이 자랑거리가 아니라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더니 성경에 의인의 자손은 유리하며 걸식함이 없다는 말씀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의인의 자손은 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의인의 자손이 망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뿌리가 있어야 합니다. 만일 뿌리가 썩었거나 뿌리가 뽑혔다면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나는 의인의 자손의 뿌리를 유지하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한다고 했더니 ‘목사 형님! 제가 꼭 한 번 주일 예배에 참석하겠습니다!’ 하며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과연 성도의 소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더(Alexander III Magnus, BC 356. 7. 20∼323. 6. 10)
그의 일화 중에 임종 전에 남겼던 유언을 소개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마지막 임종의 자리에서 자신의 시신을 관에 안치 할 때 관 옆에 두 개의 구멍을 뚫고 두 손은 그 구멍 밖으로 보이게 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세계를 정복한 대왕이었지만 마지막 죽을 때는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치는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글 사전에서 소유(所有)란 ‘가지고 있는 것’ 또는 ‘갖고 있는 물건’ 이라고 정의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정의한다면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내 몸도 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 것은 내 마음과 내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머리카락을 향하여 너는 이제부터 자라지 말라! 또는 손톱과 발톱에게 더 이상 자라지 말라! 이렇게 명령하여도 내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내 생명도 내 마음대로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몸도 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내 몸은 누구의 것입니까?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단어들을 살펴봅니다.
49, 50절에는 말씀,
49.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게 하셨나이다 

Remember your word to your servant, for you have given me hope.  


50.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My comfort in my suffering is this: Your promise preserves my life. 


51절에는 주의 법,
51. 교만한 자가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The arrogant mock me without restraint, but I do not turn from your law. 


52절에는 주의 규례,
52. 여호와여 주의 옛 규례를 내가 기억하고 스스로 위로하였나이다

I remember your ancient laws, O LORD, and I find comfort in them. 


53절에는 주의 율법,
53.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을 인하여 내가 맹렬한 노에 잡혔나이다

Indignation grips me because of the wicked, who have forsaken your law. 


54절에는 주의 율례,
54. 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Your decrees are the theme of my song wherever I lodge. 


55절에는 주의 법,
55.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In the night I remember your name, O LORD, and I will keep your law.

 
56절에는 주의 법도
56.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 

This has been my practice: I obey your precepts. 

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Then he said to them, Watch out! Be on your guard against all kinds of greed; a man's life does not consist in the abundance of his possessions.

예수님께서는 많은 것을 소유한 부자가 나쁜 사람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부자를 가리켜 ‘어리석은 사람’ 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Luke)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But God said to him, You fool! This very night your life will be demanded from you. Then who will get what you have prepared for yourself?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성도가 소유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성경은 모세로부터 기록이 시작되어 사도 요한에 의해 계시록이 기록됨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기원전 1400년부터 기원후 100년까지 약 1500년에 걸쳐서 성경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까? 아니지요. 요한복음 1장 1절에 의하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라는 말씀과 같이 말씀은 태초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존재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세상의 것은 그 무엇도 영원토록 존재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존재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 만물을 창조하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만들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하시기에 하나님의 말씀도 영원합니다. 여기에는 조금의 의심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소유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을 내 것으로 소유하기 위해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56절.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 


주의 법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마태복음 7:24∼25,(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홍수가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몰아쳐도 무너지지 않는 것은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성도의 소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나사로의 소유(누가복음 16:19∼31)


어느 도시에 한 부자가 날마다 즐기며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반면에 그 집 문 앞에는 온 몸에 부스럼투성이의 거지 나사로가 누워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워야 했고 심지어 개들까지 그의 몸에 헌데를 핥았습니다.

어느 날 거지는 죽어 천사들의 인도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도 죽어 땅에 묻혔습니다.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중에 쳐다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나사로는 그의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큰 소리로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다가 내 혀를 시원하게 해 주십시오.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입니다 하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생각해 보아라. 너는 살아 있을 때 좋은 것을 마음껏 누렸고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만 겪었다. 하지만 지금 나사로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거기서 고통을 받고 있다. 이뿐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 싶은 사람도 건너갈 수 없고 거기서도 우리에게 건너올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러자 부자는 “제발 부탁입니다. 그렇다면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에 보내 주십시오. 내 형제가 다섯인데 나사로를 보내 그들에게 경고하여 내 형제들만이라도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부자가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가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비록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이 믿지 않을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부자가 간절하게 부탁한 것은 자기 형제들에게 진리를 전해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은 곧 성경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생명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에 성도의 소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누가복음(Luke) 16:25,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으니라.
Now he is comforted here and you are in agony.

누가복음(Luke) 16:29,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They have Moses and the prophets. let them listen to them.

5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
This has been my practice: I obey your precepts. 


나의 소유, 나의 재산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해가 되는 말씀인가요? 

거지 나사로는 세상에서는 어느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 신분이었습니다. 반면에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즐기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삶을 생각하면 부자보다는 거지 나사로의 삶이 더 좋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믿음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일까요?
몇 대째 예수를 믿는 가문일까요?
신앙의 뿌리는 오늘 설교 제목처럼 신앙의 소유라고 하겠습니다.
신앙의 소유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발버둥치고 몸부림치며 지냈던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으시고, 택하셨기에 이스라엘이 바로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에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지요. 우리도 영적인 이스라엘이기에 우리 모두도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또한

시편(Psalms) 100: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는 지으신 자시오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Know that the LORD is God. It is he who made us, and we are his ; we are his people, the sheep of his pasture.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보호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책임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우리 자신의 책임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존재로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아이들이 무엇인가를 잘못 하면 사람들은 그 아이를 가리켜 “저 애는 뉘 집 아들이지!” 라고 말합니다. 자식이 잘못했지만 부모가 욕을 먹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되었는데, 우리가 잘못하면 결국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된 것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책임져 주신다는 약속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자로서 살아야 하는 우리의 책임을 포함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시편(Psalms) 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Indeed, he who watches over Israel will neither slumber nor sleep.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때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Matthew) 24:35,
천지는 없어지겠거니와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Heaven and earth will pass away, but my words will never pass away.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 근처에 가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기회가 전혀 없기에 하나님의 말씀과는 관계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 근처에는 있지만 그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수없이 많은 설교를 듣고 성경을 소유하고 있지만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교회에는 다니지만, 세상의 것을 소유하기에 힘쓰는 사람과 별로 다른 점이 없이 살아갑니다. 영원을 소유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별로 없다 라는 뜻입니다.

중국의 티벳 지방에는 티벳 불교가 성행합니다. 티벳 불교는 불교와 그들의 무속신앙이 합쳐진 것입니다. 티벳 불교의 특이한 풍습은 마니차라는 것입니다. 마니차는 불교의 경전을 기록한 종이를 담은 통입니다. 마니차를 여러 개 만들어서 사원이나, 동네에 세웁니다. 그리고 불교 신자들은 마니차를 손으로 돌립니다. 그러면 통 안에 들어 있는 경전을 한번 읽는 것과 같다고 믿습니다. 마니차는 그 종류가 다양하여 경전의 모든 내용을 담은 큰 마니차, 각각의 경전을 담은 작은 마니차 그리고 사람이 들고 다닐 수 있는 휴대용 마니차도 있습니다.

어느 여인은 자신의 동네에 있는 마니차를 아침, 점심, 저녁마다 3000번씩 9000번을 돌린다고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들이 아무리 마니차를 수천, 수만 번 돌린다 할지라도 그들은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통만 돌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경전의 내용을 알지도 못합니다. 경전의 말씀대로 사는 것도 아닙니다. 경전이 들어있는 통만 돌린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마니차를 돌리는 것이 신앙이라고 믿는 것처럼 교회에 다니는 것과 성경을 읽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믿고 있는 것과 다른 것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마니차를 돌리는 것은 불교의 경전 근처에 있는 것이지 경전의 내용을 알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의 말씀 근처에 있지만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을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은 저축하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하라! 사랑하라! 라는 말씀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들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그 말씀대로 살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당장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열심히 저축하면 목돈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나의 소유는 그만큼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나의 소유, 나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갑시다. 분명 크게 웃으며 기뻐할 때가 올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눈물을 흘리며 후회할 때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가장 귀한 소유는 영원한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만이 영원한 것입니다.

영원한 소유를 위해서 힘쓰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고린도후서(1Corinthians) 4:18,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For what is seen is temporary, but what is unseen is ete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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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6-9-4 (9월의 성구)

정근기도(베드로전서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The end of all thing is near. Therefore be clear minded and self-controlled so that you can pray. 


베드로전서와 후서는 사도 베드로가 순교하기 전에 쓴 편지입니다. 베드로가 순교한 연대가 정확하지 않지만 주후 67년 또는 주후 64년에 순교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박해 속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간절해지고, 또 자기의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생각하면서 성도들에게 당부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성도는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고, 개인적으로도 한 해씩 나이가 더해가기에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로마서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라는 말씀에서 종말(終末)에 대한 신앙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종말이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말세(末世) Last Days

말세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을 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9:30).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실 때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갈릴리 사람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셨습니다(행 1:11).

말세란 십자가 사건부터 시작하여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시간까지를 말세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현재 말세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둘째, 말일(末日) The Last Day

말일이란 마지막 날을 말합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심판하시는 그 날이 말일입니다. 그러므로 아직은 말일이 아닙니다.

9월의 성구를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을 간략하게 정근기도라고 제목을 정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는 것은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신앙의 기본자세라고 하겠습니다.

영국의 청교도 시대에 국회의원들이 모여 여러 사안을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이상한 징조와 기운이 감도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의회는 술렁거렸습니다. 당시 영국은 기독교 신앙 사회였고, 종말에 관해서도 늘 깨어 있으려고 힘쓰는 분위기였습니다. 하늘의 징조가 심상치 않자 몇몇 의원은 곧 주님이 재림하실지 모르므로 속히 국회를 폐회하고 주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고 들썩거렸습니다. 그때 한 의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의장, 우리는 오늘이 주님의 최후 심판의 날이든지 아니든지 상관없이 이 국회를 계속 진행해야 합니다. 만일 오늘 날씨가 단순히 이상 징조를 보인 것에 불과하고 주님의 최후 심판의 날이 아니라면 국회를 계속 진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이 정말 주님의 최후 심판 날이라 해도 우리는 하던 일을 계속 해야만 합니다. 주님이 임하실 바로 그때 우리 모두가 서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우리가 성실히 일하는 그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더욱 가까이 다가올수록 우리는 주어진 자리를 지키고 마땅히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까?
(성경적인 이유)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은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 보좌를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하늘 보좌에서 24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갖고 있는데 향은 성도의 기도라고 합니다.

땅에서 성도들이 수많은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금 대접에 담겨 하늘 보좌로 올라가는 기도가 있습니다(계 5: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그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는 모릅니다. 그렇다면 하늘 보좌에 올라갈 수 없는 기도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하늘 보좌에 올려지는 기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인 이유)
어느 대학의 강의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학적으로는 매우 유능한 교수이었으나 그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교수는 강의를 하면서 졸다가 머리를 칠판에 부딪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는데 강의실의 학생들은 아무도 그 모습에 놀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학생들도 모두 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시대의 심각성은 기도를 잠재우는 영적 전염병입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기도 없는 신앙의 삶에 안주하게 함으로 우리의 영혼을 잠들게 하고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영적 질병의 모습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도하되 잘못 기도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면서 기도하는 이유를 여섯 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항상 찾으며 사랑하며 섬기겠다는 소원과 열의가 우리 마음속에 불일듯 하기 위해서.
둘째, 하나님께 알려드리지 못할 부끄러운 욕망이나 소원이 우리 마음속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셋째,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실 때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넷째, 우리가 구하던 것을 얻고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여 주셨다는 확신으로 그의 인자하심을 더욱 열심히 명상하도록 하는 것
다섯째, 기도로 얻었다고 인정하는 것들을 더욱 큰 기쁨으로 받아드리도록 하기 위해서
여섯째, 우리의 연약한 정도에 따라서 습관과 경험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확인하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칼빈은 지극히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기도하여야 할 이유로 우리를 훈련시켜서,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께 간구해서 큰 유익을 얻도록 하시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Martin Luther'' 는 "기도 없이 기독교인이 되려는 것은 호흡 없이 살아가려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M 헨리'' 는 "네가 호흡하지 않고 사는 사람을 볼 수 없는 것 같이 기도 없이는 기독신자 됨을 볼 수 없다." 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말은 우리가 기도함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하게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하며 교제하며 대화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그곳에 그리스와 함께 함이 있고, 성령 안에 있음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함으로 우리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평강을 얻습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기도함으로 새 힘을 얻고 변화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삶은 우리로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참된 그리스인의 역사는 기도의 역사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 - 소프로네오(σωφρονηω)
- 올바른 마음으로 기도하라

근신하여 기도하라!
- 환경에 흔들리지 말고 중심을 잡고 기도하라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가까웠다는 말씀입니다.

속담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말처럼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바다를 항해하던 배가 파선 되어 모두가 바다에서 죽고 오직 한 사람만이 겨우 목숨을 구하여 어느 낯선 섬에 도착했습니다. 그 섬의 원주민들이 그 선원을 추장 앞으로 데려 갔습니다. 선원은 ‘이제 저 원주민들의 손에 죽겠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추장을 비롯하여 모든 원주민들이 그 선원을 섬의 왕으로 모시고 후대합니다. 죽을 줄 알았던 선원은 아무 것도 모른 체 왕의 자리에 앉아 권세를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하게 생각하여 원주민에게 도대체 낯선 나를 왜 섬의 왕으로 모시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섬의 풍속은 낯선 사람이 섬에 들어오면 1년 동안 왕으로 모셨다가 1년이 지난 후에는 다시 무인도로 보내버린다는 것입니다.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선원은 내가 이 섬에서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며칠 후 왕은 원주민들에게 배를 한 척 만들어서 그 배에 곡식과 과일 나무를 싣고 무인도에 가서 심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왕의 명령이므로 원주민들은 모두 순종 했습니다. 드디어 1년이 지나 원주민들은 왕을 무인도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선원은 그는 왕으로 있을 때에 무인도에서 살아날 수 있도록 준비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안전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영적 잠에서 깨어나 부지런히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한국교회가 정신을 차려야 하는 이유는 교회의 장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입니다.
장로교 통합측 교세 보고에 의하면 지난해 보다 2만 명의 교인이 줄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줄어든 연령층이 주일학교, 중고등부 학생들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미래가 점점 어둡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심지어 이제는 주일학교가 없어지는 교회들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이런 현실이 계속되면 머지 않아 과거의 구라파 교회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는 대학의 교수들이 자기 과의 학생들을 모집하려고 고등학교를 찾아다니며 홍보활동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학생이 없으면 교수직도 물러나야 하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예)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을 자던 제자들과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던 예수님

(예) 바벨론의 포로 생활 중에서도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던 다니엘

근신하여 기도하자!

남한에 정착하여 의사로 활동하는 어느 탈북자의 이야기입니다.
고난의 행군이라는 90년대 중반에 북한에서 소아과 의사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병원에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소아과에 약이 없기 때문에 죽어가는 아이들을 쳐다보고 있어야만 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중국에서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어 추운 겨울에 얼어붙은 강을 넘었다고 합니다. 막상 강을 건넜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한 때에 어느 할머니가 북에서 왔수? 어디로 갈 것이요? 하고 묻는데 막상 갈 곳이 없다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한심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그 할머니가 갈 곳이 없으면 우리 집으로 갑시다 하고 집으로 데려가서 매 끼니 때마다 흰 쌀밥에 국을 끓여 대접을 하는데 너무 고맙고 황송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데 마침 마당에 얼어붙은 흰밥과 고깃국이 있기에 할머니 밥을 하느라고 고생하지 마시고 제게는 저 마당에 있는 흰밥과 국을 데워주시면 안 될까요? 하고 이야기를 했더니 그 할머니가 그것은 사람이 먹는 것이 아니오, 개밥이오! 하더랍니다.

북한에서는 아이들이 굶어 죽어 가는데 중국에서는 개도 흰밥에 고깃국을 먹는구나! 내가 그동안 속아 살았구나! 전 인민들에게 흰밥과 고깃국을 먹이는 것이 소원이라던 수령의 가르침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죽더라도 남한으로 가서 죽어야 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남한으로 왔다고 합니다.

이제는 모든 성도들이 근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 것이라고 내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굶주린 이웃들을 위하여 특별히 북한의 동포들을 위하여 사용할 줄 아는 지혜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북한은 이번 겨울이 매우 위기라고 합니다. 아마 지난 고난의 행군과 같은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도 합니다. 한쪽에서는 풍성한 생활에 음식 쓰레기를 처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버려지는 음식이 많은데 한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고 겨울을 지낼 연료마저 없어 금년 겨울을 과연 제대로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도 합니다.

나를 지켜주기 때문(잠언 2:11)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근신하여 기도하는 것은?

나를 지키며 민족 공동체를 지키는 기도

(예) 에스더의 삼일 금식과 모르드개의 충고(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게 된 것이 바로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일 네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민족을 구원하실 것이며 너는 망하게 될 것이다)


근신하며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베드로전서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1: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 
Therefore, prepare your minds for action; be self-controlled; set your hope fully on the grace to be given you when Jesus Christ is revealed. 


성경에 예언된 것은 모두 1817구절이라고 합니다. 모든 예언들이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예언은 오직 하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온전한 은혜를 받을 수 있기 위해서 근신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Be self controlled and alert. Your enemy the devil prowls around like a roaring lion looking for someone to devour. 


말세란 사탄 마귀의 세력이 더욱 강해지는 때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므로 사탄의 유혹에 무너지지 않는 믿음의 사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음을 지키기 위한 근신(잠언 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Above all else, guard your heart, for it is the wellspring of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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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6-9-11

성도의 은혜(시편 119:57∼64)


57.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
You are my portion, O LORD; I have promised to obey your words.

58. 내가 전심으로 주의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I have sought your face with all my heart; be gracious to me according to your promise.
59.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로 내 발을 돌이켰사오며
I have considered my ways and have turned my steps to your statutes.
60.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였나이다   
I will hasten and not delay to obey your commands. 
61. 악인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을지라도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Though the wicked bind me with ropes, I will not forget your law.
62.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하리이다 
At midnight I rise to give you thanks for your righteous laws.
63.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 
I am a friend to all who fear you, to all who follow your precepts.
64.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The earth is filled with your love, O LORD; teach me your decrees.  

본문은 히브리 알파벳 여덟 번째 문자 ‘헤(ח)’에 해당하는 시라고 하겠습니다.
헤의 의미는 ‘울타리’ ‘생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 나올 마지막 재앙을 대비하여 양의 피를 문 인방(door plate)과 문 설주(door post)에 바르라고 하셨습니다(출 12:22∼23).

여호와께서 애급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23절)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성경적으로 깨닫는 사람이다.
러시아에 성경을 보급하는 일을 위하여 일생을 바쳤던 피터 다이넥가 선교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북 구라파의 사람들을 관광객 또는 무역상으로 위장시켜서 소련으로 보내어 소련 사람들에게 성경을 전해주는 일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 때는 지금보다 소련의 문이 더 견고하게 닫혀 있을 때라고 합니다. 한 번은 이 다이넥가 선교사가 보낸 사람이 소련의 어느 호텔에 묵으면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이 성경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제가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성경을 잘못 건네주면 큰일입니다. 그래서 성경 건네줄 사람들을 분별할 수 있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그는 기도 중에 성경을 펼쳐 놓았는데 호텔 여종업원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성경을 보더니 갑자기 그녀의 눈에 광채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하나님이 저 여인에게 이 성경을 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며 계속 그 여인을 주시했습니다. 그녀가 가까이 오더니 그 성경을 만져 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는 웃으면서 만져도 좋다고 말하며 이 성경을 갖고 싶으냐? 물었습니다. 그 여인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하다고 몇 번씩이나 인사를 하고 성경을 품에 안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는 이 성경을 갖기 위해서 30년간 기도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하나님 말씀을 제가 직접 읽어 보기를 얼마나 소원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는 성경이 너무 흔하게 상품화되어 우리 주변에 널려 있기 때문에 성경의 가치를 모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이 말씀의 가치를 얼마나 존중합니까? 말씀의 권위가 당신의 삶을 얼마나 지배하고 있습니까?

미국인의 90%가 성경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성경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질문에 대부분이 문 받침대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50%는 성경의 첫 번째 책이 창세기라는 것을 모른다고 합니다.

성경을 갖는 것은 문화가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도 문화가 아닙니다.
성경과 교회는 생명입니다.

은혜에 대한 말씀을 본문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본문에서 은혜에 해당하는 단어를 58절과 64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58절, 내가 전심으로 주의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I have sought your face with all my heart; be gracious to me according to your promise).

내가 전심으로 주의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라는 표현은 여호와와의 얼굴을 구하였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들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고 그분의 얼굴을 드러내길 원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64절,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The earth is filled with your love, O LORD; teach me your decrees.)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라는 고백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가르쳐 주십시오 라는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영혼의 네비게이션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셨습니까?
은혜를 받았단 성경적인 이해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구원의 은혜를 확신하였다는 고백입니다.
둘째는 부족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내게 부족한 것을 채워야 한다는 고백입니다.
셋째는 변화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변하여 새로운 삶을 계획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고백입니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한 후 일본 군국주의가 몰락되던 때 일본 동경대학 야나이 바라다다오 신임 총장 취임식이 있었다. 기독교인인 그는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취임연설에서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 하셨습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인류의 역사를 섭리하시고 주관하십니다." 하는 말씀을 하자 당시 고분학자의 권위 있는 교수였던 운천 교수가 반발을 일으켰다. "도대체 총장 취임연설이 마치 기독교 설교 같은데 저래서 되겠는가? 하고 불평을 토로했다고 합니다.

이런 불평을 들은 야나이 바라다다오 총장이 운천 교수를 만나 "기독교 성서를 읽은 일이 있으십니까?" 하고 묻자 운천 교수는 없다고 했다. 총장은 "한번이라도 성서를 읽어보시고 비판 하십시오." 라고 했다. 운천 교수는 비판하기 위하여 성경전서를 사서 창세기부터 읽어 내려가다가 여러 번 중단하였으나 시편, 잠언을 읽어가는 동안 기독교의 깊은 도리를 깨닫기 시작하여 예언서를 거쳐 누가복음에 이르자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기도와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내용을 읽고 기독교인이 되어 교수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유학하여 신학을 한 후 목사가 되었다. 성경은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지혜가 담겨있는 책이다.

은혜를 유지하며 살아가기 위한 세 가지 비결을 소개합니다.

첫째, 말씀을 지키라(57절, 60절, 63절) Keep the Word
둘째, 말씀을 기억하라(61절) Remember the Word
셋째, 말씀을 배우라(64절) Learn to the Word

말씀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곧 말씀입니다.
첫째, 말씀을 지키라(57절, 60절, 63절) Keep the Word

57.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
You are my portion, O LORD; I have promised to obey your words.


60.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였나이다   
I will hasten and not delay to obey your commands. 

63.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 
I am a friend to all who fear you, to all who follow your precepts.

요한복음 14:23,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요한일서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믿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자녀들이 내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모든 자녀들이 그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믿느냐?’ 라고 질문하신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왜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까? 믿음의 단계에서 사랑의 단계로 성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말씀을 기억하라(61절) Remember the Word

악인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을지라도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Though the wicked bind me with ropes, I will not forget your law.

요한복음 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가나 혼인 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을 행하신 후에 유월이 다가오므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는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 그리고 돈 바꾸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신 후 양과 소를 내쫓으시고 심지어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고 상을 엎으시며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어떻게 삼일 만에 일으킬 수 있겠느냐? 하며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성전이란 곧 예수님의 육체를 말씀하신 것이라는 진리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시고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셨을 때에 그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셋째, 말씀을 배우라(64절) Learn to the Word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The earth is filled with your love, O LORD; teach me your decrees.

말씀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곧 말씀입니다.

디모데후서 3:15,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어느 교인이 대학의 교수이었던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난 후에 세 명의 자녀들을 남편보다 더 훌륭하게 키우겠다고 다짐하고 정말 혼신을 다하여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모두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의 교수로 의사로 좋은 직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인에게 말 못할 고민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겉모양은 모두가 부러워하는데 매월 정신과 상담을 받으며 약물 치료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왜 아이들에게 이런 증세가 나타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성경을 옮겨 적으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최고가 되는 것은 강조하고 가르쳤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위하여 성경 필사본을 만들고 그것을 아이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며 너희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생명을 찾아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그 생명을 헬라어로 조에라고 합니다.
영생이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시간속으로 완전히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지금까지 아니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대주재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그 시간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잠언 4장 4절에 명령을 지키면(울타리 안에 있으면) 살리라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He taught me and said, Lay hold of my words with all your heart; keep my commands and you will live.
   
아모스 5장 6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울타리 안에 있으면) 그리하면 살리라
Seek the LORD and 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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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6-9-18

성도의 고난(시편 119:65∼72)


65.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66. 내가 주의 계명을 믿었사오니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68.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69. 교만한 자가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를 지키리이다

70. 저희 마음은 살쪄 지방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본문은 히브리 알파벳 22개의 문자 중에서 아홉 번째 ‘테드(ט)’로 시작하는 ‘테드시’ 라고 합니다. 테드는 ‘뱀’ 이란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뱀을 가장 간교하다고 말씀합니다(창 3:1). 이런 배경 때문에 ‘점쟁이(창 3:1)’ 또는 ‘예지력(창 30:27)’ 이란 의미로도 사용합니다. 아라비아 수자로는 9에 해당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고난에 대한 예지력(foresight of the Suffering) 이라고 하겠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고난에 대한 뱀 같은 지혜의 말씀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에 대한 이해가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고난을 당하면 자기를 성찰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거나 아니면 억울하다고 하소연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을 살펴보면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 유익하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무엇 때문에 고난을 당한 것을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두 가지를 확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주의 말씀을 지킨다고 합니다(I obeyed the Lord's word.)
둘째는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고 합니다(I learned the Lord's word.)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고통의 깊이는 진실의 깊이로 향하는 유일한 문.’ 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인내한 고통은 인생의 깊은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의 깊은 웅덩이로 이끄시는 것은 물에 빠져 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깨끗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환경 문제에서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쓰레기를 땅속에 파묻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해결책입니다. 땅속에 쓰레기를 파묻는다고 해서 땅이 바로 오염되지 않습니다. 토양에는 어느 정도 불순물들을 정화하고 분해하여 오히려 거기서 유용한 성분을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놀라운 능력을 가진 것은 비단 땅뿐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도 고난에 대한 자정능력이 있습니다. 땅이 쓰레기를 소화하여 비료로 삼듯 인간은 고난을 소화하여 성숙의 자양분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이 쓰레기를 소화해내지 못할 경우 쓰레기의 독성으로 인해 식물이 살 수 없는 죽은 토양으로 바뀝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난도 적절한 반응이 뒤따르지 않으면 영혼의 생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고난은 우리를 달아보시는 하나님의 저울이라고 하겠습니다.

폐업 때 드린 신앙 개업 예배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유능한 사업가는 자본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기업을 인수하지 못하고 부도로 인하여 문을 닫아야 하는 공장을 아주 헐값에 인수한 후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여 성장하는 사업으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 후 그 사업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렇게 회사가 성장하면서 사업가는 너무 바쁘기 때문에 주일예배도 잊어버렸습니다. 얼마 후 회사가 부도로 인하여 공장의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문을 닫게 되는 날 사업가는 폐업 예배를 드리려고 목사님을 청했습니다. 목사님께서도 이런 예배는 처음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왜 폐업 예배를 드리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사업가는 나는 무일푼으로 시작하여 큰 기업을 이루었습니다. 기업이 성장한 것은 내가 유능한 사업의 수완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부도를 맞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무일푼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것도 없는 무일푼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무일푼이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고난이 유익한 이유는 잃어버렸던 신앙을 되찾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67절,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Before I was afflicted I went astray, but now I obey your word.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한 후에 나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일본의 작가로 199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오에 겐자부로(大江 健三郎, 1935. 1. 31-)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소감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일찍이 문학계의 명성을 얻었던 유명한 문학평론가이며 작가였습니다. 그런데 나의 삶에 커다란 전환의 계기가 왔습니다. 그것은 우리 부부에게 히로키 라는 정박아가 태어난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현실을 거부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밝히고 싶은 것은 이 아이가 나의 문학에 새로운 빛을 던져 주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아이를 통해 생명의 신비로움과 그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의 소중한 아들, 히로키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나의 문학의 스승입니다.”

무엇 때문에 고난을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고난으로 인하여 이전에 몰랐던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만났기 때문입니다.

책상 위에 덮여있는 책이 한 권 놓여 있습니다. 책을 펼쳐보지도 않고 책의 내용을 알 수 있을까요? 그런데 최근에 덮여 있는 책을 펼쳐보지도 않고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전자파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최근 MIT 공대 바마크 헤시맷 박사는 전자파의 일종인 테라헤르츠(㎔)파를 이용하여 책을 펴지도 않고 그 안에 내용을 밝혀내는 카메라를 개발했다고 합니다. 테라헤르츠 파는 종이와 섬유 등과 같은 물질을 통과하는 성질이 있는데 이 테라헤르츠 파가 물체를 투과하면서 변하거나 반사되는 것을 분석하면 물체의 내부 구조를 정밀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합니다.

고난을 당할 때 신앙의 테라헤르츠 파가 발생합니다. 그 테라헤르츠 파가 고난에 감추어진 것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겪으면서 신앙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로마로 호송 당하던 사도 바울이 타고 있던 배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배는 파선되고 그 배 안에 타고 있던 276명의 사람들이 극적으로 멜리데라는 섬에 상륙합니다. 멜리데 섬의 토인들은 비가 오고 날이 추워 불을 피워 사람들을 영접했습니다. 바울이 나무단을 집어 들고 불에 넣는데 독사가 나와 바울의 손을 물고 있었습니다. 토인들은 독사가 바울의 손을 물고 있는 것을 보고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신다고 수군거렸습니다. 바울은 태연하게 독사를 불에 떨어버렸고 바울은 조금도 상함이 없었습니다. 토인들은 바울이 몸이 붓든지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것이라고 기다렸습니다. 오래 기다려도 바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생각을 바꿔 신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침 그 섬의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에 걸려 고생하는데 바울이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였고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당한 고난은 멜리데 섬의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메가폰과 같습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들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71절.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It was good for me to be afflicted so that I might learn your decrees. 

루이지애나 주 카빌(Carvill)에서 한센병자 재활원의 원장 폴 브랜드 박사는(Dr Paul Brand) 나환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의 몸이 썩어가도 고통을 느낄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떤 나환자는 감자를 구워먹다가 뜨거운 숯불 위에 손을 대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정원에서 일을 하던 또 다른 나환자는 삽으로 인해 손가락을 다쳐 그의 손에서 피가 흘러내려도 그것을 모른다고 합니다. 촛불을 손으로 꺼도 통증을 못 느낍니다. 깨진 유리조각 위를 거닐어도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나환자들의 문제는 나병 자체가 아니라 감각이 마비가 되어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환자는 한 밤중에 잠을 자는 동안 쥐가 와서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물어가도 통증을 못 느낄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브랜드 박사는 자기가 돌보는 나환자들로 하여금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무조건 고양이 한 마리씩을 데리고 잠들게 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의학적인 관찰을 통해 브랜드 박사가 도달한 결론은 고통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고통을 사랑하라!
고통은 우리 자신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교사이다.
고침을 받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첫 걸음은 통증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고난과 고통은 문제를 해결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고난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저주라고 하겠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는 시인의 고백은 고난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살았을 텐데 고난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되었고 그 말씀을 읽으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아주 교활한 뱀은 오늘날도 동일한 방법으로 성도들을 유혹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먹을 것을 주느냐? 돈을 주느냐?
차라리 그 시간에 잠을 더 자든지 아니면 즐거운 드라마를 더 즐기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살아가려면 이러한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만일 물리치지 못하면 사탄의 유혹에 무너져버릴 것입니다.

인도의 우화를 소개합니다.
평소에 고양이를 아주 무서워하던 쥐가 있었습니다.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쥐를 불쌍하게 생각한 신은 쥐를 고양이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고양이가 된 쥐는 한동안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고양이는 사냥개가 너무 무서웠습니다. 또다시 신은 고양이가 된 쥐를 개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개가 된 쥐는 호랑이를 무서워했습니다. 호랑이는 사냥꾼이 무서웠습니다. 결국 신은 ‘너는 다시 쥐가 되어라. 내가 너를 무엇으로 만들어도 너는 쥐의 마음을 갖고 있으니 나도 어쩔 수 없다.’고 하였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을 때에 아담과 하와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만 하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아담과 하와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못마땅하여 아담과 하와에게 먹지 말라고 하는 그 열매를 따 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다고 유혹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지 않고 사탄의 유혹을 받아드리므로 결국 행복한 삶의 자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고난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의 유전자를 되찾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은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의지할 때에는 반드시 죄를 이길 수 있는 유전자를 갖게 됩니다.
요한복음 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In this world you will have trouble. But take heart! I have overcome the world.  

고난을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65절과 66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내가 주의 계명을 믿었사오니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고,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9월의 세 번째 주간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승리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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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6-9-25

성도의 위안(시편 119:73∼80)


73.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나로 깨닫게 하사 주의 계명을 배우게 하소서
74. 주를 경외하는 자가 나를 보고 기뻐할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연고니이다
75.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
76.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
77.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나로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78. 교만한 자가 무고히 나를 엎드러뜨렸으니 저희로 수치를 당케하소서 나는 주의 법도를 묵상하리이다
79. 주를 경외하는 자로 내게 돌아오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저희가 주의 증거를 알리이다
80. 내 마음으로 주의 율례에 완전케 하사 나로 수치를 당치 않게 하소서. 


본문은 히브리 22개 문자 중에서 열 번째 ‘요드(י)’로 시작하는 ‘요드 시’ 라고 합니다. ‘요드’는 손이란 뜻입니다. 손이란 의미에서 사역 또는 힘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성경에서 손은 하나님의 손과 사람의 손으로 구분됩니다.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But if I drive out demons by the finger of God, then the kingdom of God has come to you.  

사람의 손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the LORD God said, The man has now become like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He must not be allowed to reach out his hand and take also from the tree of life and eat, and live forever.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남자는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 여자는 아이를 낳는 해산의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위안이 필요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성도의 위안’입니다.

위안(慰安)이란 ‘위로하여 마음을 편하게 함’. 위로할 위(慰), 편안 안(安). 위안이란 위로로 평안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위안과 성도들이 기대하는 위안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고달픈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위안을 받기 위하여 구매하는 것이 복권입니다. 복권에 당첨되었던 사람들의 삶을 추적하여 알려주는 사이트에서 몇 가지 사례들을 소개합니다. 
 
1988년 미국 펜실베니아 복권에 당첨되어 1,620만 달러(약 179억 원)를 받은 윌리암 버드 포스트는 1년 만에 복권 당첨을 원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당첨금을 뜯어내기 위해 여자 친구는 소송을 제기하였고, 남동생은 그의 유산을 노리고 청부 살인까지 고용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적이 된 것입니다. 이후 가족 사업에 투자한 돈을 모두 잃었고 100만 달러(약 11억 원)의 빚에 허덕였으며, 심지어 요금징수원을 향해 총을 발사해 감옥 생활까지 했습니다. 그는 현재 매달 450달러(약 50만원)의 수입과 무료 급식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1991년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의사 남편과 함께 살던 이비 론카로리는 복권에 당첨되어 500만 달러(약 55억 원)를 받았습니다. 이비는 불륜남과의 사이에서 낳은 혼외 자식에게 200만 달러를 넘겨줬습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남편 조셉 론카로리는 이비에게 진통제를 먹여 살해했다고 합니다.

캐나다의 제럴드 무스웨건은 1,000만 달러(약 110억원)의 당첨금을 단 7년 만에 음주와 파티로 모두 날리고 2005년 부모의 집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합니다.

2003년 190만 파운드(약 32억원)에 당첨된 16살 영국 소녀 칼리 로저는 이 돈을 모두 파티와 여행, 친구들을 위한 선물 구매 등에 사용했다. 그는 현재 파산 상태이며 청소부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위안을 받으려고 구입했던 복권 당첨의 결과는 위안이 아니라 파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위안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안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안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소는 풀을 먹습니다. 호랑이는 고기를 먹습니다. 사람은 밥을 먹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을 위한 양식(food for soul)입니다. 

아프리카 오지의 한 추장에게 미국의 어느 부자로부터 그랜드 피아노가 선물로 배달되었습니다. 그런데 추장은 피아노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창고에 처박아 두었습니다. 어느 날 미국인이 추장을 방문했을 때 미국의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선물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선물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추장은 미국인을 창고로 데리고 가서 선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랜드 피아노를 엎어 놓은 것입니다. 깜짝 미국인이 피아노를 바로 놓게 하고 건반을 두드렸습니다. 아름다운 멜로디가 울려 퍼져 나왔습니다. 아무리 좋은 피아노도 사용할 줄 모르면 좋은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인생의 삶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어느 부자와 거지의 비유에서 부자는 육체의 즐거움에 만족했습니다. 거지에게는 육체의 즐거움은 없었습니다. 얼마 후 부자도 죽었고 거지도 죽었습니다. 죽은 후에 부자는 음부라는 곳에 있었고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습니다. 부자와 거지의 비유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교훈하는 삶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심판은 영벌과 영생으로 구분합니다.
마태복음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Then they will go away to eternal punishment, but the righteous to eternal life. 

영벌은 부자가 죽은 후에 머물고 있는 음부를 말하고, 영생은 거지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성경의 진리와 가르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상에서 부자와 같은 삶에서 위안을 얻으려고 합니다. 복권을 구매하는 것은 세상적인 노력의 한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위안을 받으며 살아가야 할까요?

개역 한글 성경에서 ‘위안’ 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성경 전체에서 세 구절에서 위안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시편 119:76, 시편 94:19, 골로새서 2:2).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위안을 받으라!
둘째는 영혼의 즐거움으로 위안을 받으라!
셋째는 하나님의 비밀을 통하여 위안을 받으라!

첫째, 하나님의 사랑(시편 119:76)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
May your unfailing love be my comfort, according to your promise to your servant.  

(현대인의 성경) 주의 종에게 약속하신 대로 주의 한결같은 사랑이 나의 위로가 되게 하소서.

성도의 위안은 주의 인자하심에서 찾아야 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이란(unfailing love) 한결같은 사랑, 끊임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 가지로 나타내셨습니다.

에덴동산의 사랑(창세기 1:27∼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에덴동산의 사랑은 창조적 사랑입니다. 창조적 사랑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것과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신 사랑입니다.

갈보리의 사랑(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갈보리의 사랑은 구원의 사랑입니다.

구원의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모든 사람들을 구속하시려고 죄 값을 자기 몸으로 지불하신 사랑이었습니다.

다락방의 사랑(사도행전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다락방의 사랑은 성령으로 나타나신 사랑입니다.
험하고 어려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약속하신 사랑으로 성령의 불로 임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히브리서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Jesus Christ is the same yesterday and today and forever.    

베들레헴 사람 시어머니 나오미와 모압 사람 며느리 룻은 서로 가까워질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선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 남편이 죽은 며느리의 입장, 더구나 전혀 다른 민족이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며느리에게 더 이상 남편의 집안에 얽매이지 말고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며느리 룻은 남편이 죽었고, 종족이 다르고,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불편한 관계일지라도 이러한 구조에 얽매이지 않고 시어머니를 쫓아 고향을 버리고 베들레헴으로 따라왔습니다. 그 이유는 시어머니의 하나님 여호와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 때문에 따라왔을지라도 현실은 가혹했습니다. 끼니를 해결하기 위하여 매일같이 추수를 마친 들판에서 추수 후 떨어진 이삭을 줍는 고달픔 생활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생활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들과 함께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영혼의 즐거움(시편 94:19)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When anxiety was great within me, your consolation brought joy to my soul. 
(현대인의 성경) 내 마음 속에 걱정이 태산 같았을 때 주의 위로가 내 영혼을 즐겁게 하였습니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걱정과 염려하는 일이 많다는 것을 말합니다. 걱정과 염려는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어니 젤린스키라는 분이 ‘모르고 사는 즐거움’ 이란 책에서 염려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염려의 30%는 이미 과거에 지나간 일에 대한 염려이고, 40%는 앞으로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해 하는 것이고, 22%는 아주 사소한 문제 때문에 염려하는 것이고(예를 들어,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등), 실제로 염려해야 할 염려는 4%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는 염려의 96%는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96%의 쓸데없는 걱정 때문에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려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종교(宗敎)라는 한자를 분석해 보면,

‘宀(갓머리 부, 집 ‘면’. 宀는 ‘하늘’을 상징)

示(보일 ‘시’),

孝(효도 ‘효’),1) 

攵(=攴 : 칠·채찍질할 ‘복’ → 채찍으로 쳐서 가르침)’이 되며,

따라서 동양에서는 종교란 말이 ‘으뜸가는 가르침’,

곧 ‘하늘의 것을 보고 듣고 그 뜻과 효를 가르치는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서양에서는 종교를 릴리젼(religion)이라 하였으니,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서 크리스찬 코칭 과목을 가르치는 서우경 교수는 불교의 가정에서 자라나 불교의 경전을 연구하여 대학원 논문을 마치고 불교계에서 경전을 가르치려는 큰 꿈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학원 논문이 통과된 후 그동안 논문을 준비하느라 몸과 마음이 지쳤기에 남편이 친정으로 가서 며칠 쉬고 오라는 말을 듣고 친정으로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친정집에 도착하였을 때 아버지가 반갑게 맞이하는데 아버지를 쳐다보며 ‘당신은 우리 아버지가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는 저 하늘에 계십니다.’ 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아버지를 보면 ‘아빠!’ 하며 달려가 아버지를 안았는데 딸의 이상한 행동에 가족들은 그동안 논문을 준비하느라고 너무 지쳤구나 생각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딸을 데리고 거실에 들어갔는데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하더랍니다. 어머니가 딸에게 방에 들어가 좀 쉬라고 하였답니다. 안방에 들어갔는데 벽에 그림이 걸려 있는데 그 그림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불교 집안인지라 달마대사와 부적 같은 것들만 있는데 갑자기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붉은 피를 흘리는 예수님의 형상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이렇게 피를 흘리며 고통을 받았다고 합니다.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철저하게 불자로 살아왔고 어린이들에게 경전을 가르쳤으며 결혼 후에는 아이를 갖기 위해 유명한 사찰을 찾아다니며 지극 정성으로 기도했는데도 두 번씩이나 유산하여 내 기도와 정성이 부족하다고 느끼기는 했어도 예수님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친정 집 앞에 교회가 있었지만 교회 마당도 한 번도 밟지 않고 다녔는데 갑자기 교회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작하여 결국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누가 전도한 것도 아닌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체의 즐거움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먼저 영혼의 즐거움을 회복해야 합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불행이 시작되었고 고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언제 이것이 회복되었습니까? 뉘우치고 회개하여 아버지께 돌아 올 때 비로소 회복되었습니다.

개혁교회의 신앙 즉 칼빈주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문답식으로 작성된 교리는  웨스트민스트 요리문답(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Heidelberger Katechismus. Catechesis Palatina)입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제1문과 2문을 소개합니다.


제1문 /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안은 무엇입니까?

답 / 사나 죽으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몸과 영혼이 모두 미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주께서 보배로운 피로 나의 모든 죄 값을 치러주셨고 마귀의 권세로부터 나를 자유 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는 나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듯이 주는 나를 지켜주십니다. 실로,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룹니다. 내가 주의 것이기에 주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시고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기꺼이 주를 위하여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위안입니다.


제2문 / 이러한 기쁜 위안 속에서 살고 죽기 위하여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나의 죄와 그 비참이 얼마나 심각하며
둘째 어떻게 그 죄와 비참에서 벗어나며
셋째 어떻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것인가 하는 일입니다.
영혼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회개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는 것(골로새서 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My purpose is that they may be encouraged in heart and united in love, so that they may have the full riches of complete understanding, in order that they may know the mystery of God, namely, Christ. 

(현대인의 성경) 내가 이처럼 애쓰는 것은 그들이 마음에 용기를 얻고 사랑으로 단합하며 이해함으로 얻게 되는 완전한 확신의 부요함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알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비밀이란 영어 단어 시크리트(secret)와 미스터리(mystery)를 살펴보면 시크리트는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미스터리는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잘 알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이란 미스터리와 같습니다. 분명하게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잘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오해 가운데 하나는 자신들이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예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교회다워지지 못하는 이유,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보다 자신이 원하는 예수님만을 골라서 믿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사람들이 은혜 받았다는 말을 종종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변화된 삶의 모습은 볼 수 없습니다. 여전히 인생의 주인은 자신이고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갑니다. 왜 이런 현상이 계속될까요? 하나님으로부터 위안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 까닭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알았다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영생을 위한 삶입니다.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을 위한 삶은 죄에서 자유를 얻었다는 믿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죄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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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6-10-2

기도에 힘쓰라(골로새서 4:2)


10월의 성구 / 기도에 힘쓰라(골로새서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Devote yourselves to prayer, being watchful and thankful.)   


새번역 성경
기도에 힘을 쓰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

 
현대인의 성경
항상 기도에 힘쓰십시오. 기도할 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10월의 성구 골로새서 4장 2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지난 8월 브라질 리우 올림픽에서 박상영 펜싱 선수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박상영 선수는 어려운 상황에서 “나는 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격려하며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박상영 선수는 내가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기도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박상영 선수의 어머니는 올림픽 대비 훈련 전부터 매일 전국 사찰을 돌며 기도를 올렸다 합니다. 그때마다 ‘펜싱 선수 박상영 리우 올림픽 파이팅!’이라는 기도 내용을 기왓장에 적어 올렸다고 합니다. 시합이 있던 8월 9일에는 경남 진주 인근 사찰에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자 많은 불자들이 사찰의 기왓장을 구입하면서 기도한다고 합니다. 특히 진주 인근의 사찰은 기도 응답이 잘 되는 영험한 사찰로 알려지고 간절한 기도 제목이 있는 불자(佛子)들로 붐비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종교마다 기도가 있습니다. 과연 어떤 기도가 바람직한 기도일까요?

요한계시록 8장에서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았습니다. 다른 천사가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습니다.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8:2∼4).

기도에 힘쓰기 위해서 세 가지 기도에 대한 자세를 소개합니다.

첫째, 항상 기도하라!(Always Prayer!)
둘째, 감사 기도하라!(Thanks Prayer!)
셋째, 깨어 기도하라!(Awaken and Prayer!)


골로새서는 AD 62년 경 사도 바울이 로마 1차 수감 중에(AD 61∼63)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이 기록한 다른 서신들과 비교하면 이전의 서신들에서 그리스도는 죄인을 의롭게 하고 평화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골로새서에서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 포함하시는 우주적 보편성을 소개합니다. 따라서 골로새서는 바울 서신에서 완성된 그리스도론이라고 하겠습니다. 골로새서를 쓰게 된 동기는 이단 세력들이 헛된 속임수와 세상 철학을 가지고 들어와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하므로 예수가 누구이며,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어떠한 관계이며, 참된 진리와 거짓 진리,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줄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골로새서를 보내게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둘째,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셋째, 참된 진리와 거짓 진리(2: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넷째, 그리스도인의 새 생활(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다섯째, 기도에 대한 교훈(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사도 바울은 거짓 사도들이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영적으로 혼란스러움에 있던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당부하는 것이 4장 2절의 말씀입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첫째, 항상 기도하라!(Always Prayer!) 


항상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깨닫게 하는 어느 개그맨 가정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최홍림씨의 이야기).

결혼 후 남편은 아내에게 남편은 하늘이라고 하며 남편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도록 강요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가는 줄 알고 남편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그대로 믿고 따랐다고 합니다. 심지어 남편 앞에서 방귀도 못 뀌게 했는데 어쩌다 방귀를 뀌면 ‘어디 하늘같은 남편 앞에서 여자가 방귀를 뀌느냐?’ 하고 말하면 당장 무릎을 꿇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용서를 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 후 5년이 지났을 무렵 아내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더니  하나님을 믿으니 행복하다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하루는 남편 앞에서 방귀를 뀌기에 어디 하늘같은 남편 앞에서 방귀를 뀌느냐! 당장 이혼이다 하고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른 때 같으면 얼른 무릎을 꿇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빌어야 하는데 그 날은 아내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아버지!’ 하며 기도하더랍니다. 기도하는 아내를 보는 순간 도저히 기도하는 아내에게 달리 할 말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날 이후부터는 아내가 방귀를 뀌든지 말든지 아무 말도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항상 기도하는 것이 삶에 유익이 되었다는 교훈입니다.

골로새서에 ‘항상’ 이란 단어가 3번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3번 모두 4장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2절, 6절, 12절).

2절과 12절은 기도에 대해서 항상 힘써야 한다고 합니다.
6절은 말을 항상 은혜롭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려면 두 가지 언어를 잘 사용하면 됩니다.
하나는 일상적인 언어(Everyday language)와 다른 하나는 기도하는 언어(Prayer language)라고 하겠습니다.

무엇을 위해 항상 기도해야 할까요?

골로새서 4장 3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And pray for us, too, that God may open a door for our message, so that we may proclaim the mystery of Christ, for which I am in chains.   

전도의 문을 열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뉴욕에서 교회를 시작할 때 교회의 목표는 다른 교회에 출석하던 교인들이 찾아오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에 다니지 않던 불신자들과 교회에 다니다가 교회가 싫어서 교회를 떠난 낙심한 사람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데 결단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믿음으로 세우기 위해 교회를 시작하여 15년이 지났습니다. 과연 어떤 열매를 얻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열매가 없다고 포기할 수 없습니다. 10월의 성구를 마음에 새기고 전도의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가 전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마가복음 3: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He appointed twelve, so that they would be with Him and that He could send them out to preach.

둘째, 감사 기도하라!

감사는 평범한 것에서 찾아야 합니다.


두 친구가 함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아주 맑고 화창한 가을이었습니다. 길가에는 꽃들이 아름답게 피었고, 과일 나무에는 탐스런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마침 하늘에서는 새들이 날고 있었고 들판에서는 소와 양떼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한 친구가 “정말 아름답다. 하나님은 위대한 창조주시다!” 하며 감격하며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같이 걷던 친구가 “그래 하나님은 정말 위대하십니다. 그런데 소는 몸집이 크니 먹을 것이 많이 필요하고, 새는 몸집이 작으니 조금만 먹어도 돼, 그런데 새에게는 날개를 주어 온 천지를 다니며 먹을 것을 찾아 먹게 하시고, 소에게는 왜 날개를 안 주셔서 주변에 있는 것만 먹게 하셨을까?” 

그때, 새 한 마리가 그 사람의 머리 위로 날아가면서 똥을 쌌습니다. 이마에 새똥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 때, 그 친구가 탄성을 지르며 “아! 이제야 알겠다. 하나님의  뜻을 알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만일 소가 하늘을 날아다니며 똥을 싸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소에게 날개가 없는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소가 날아다니다가 만일 지붕위에 앉거나 자동차 위에 앉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소에게 날개를 주시지 않은 것도 감사할 입니다.

감사가 없는 사람은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감사가 없는 사람은 모든 것을 불만과 불평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감사가 있는 삶은 모든 것이 감사 아닌 것이 없습니다.

내일을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성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합니다. 그것은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쉽지 않습니다. 앞길을 막는 홍해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여리고 성과 같은 거대한 장벽도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들의 구체적 삶 속에서 그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가장 평범한 것에서 찾아야 합니다.

감사가 있는 곳에 참 믿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대한 우리 인간의 유일한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참 믿음은 언제나 감사함으로 시작하여 감사함으로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원망, 투정, 불평, 불만은 자신의 영혼을 파멸시킵니다. 심지어 그가 속한 가정과 공동체에도 참 기쁨이 없습니다.

감사라는 비타민은 아무리 많이 먹고 사용해도 부작용도 없고, 손해도 없고, 문제도 생기지 않습니다. 자신을 풍요롭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환경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감사하며 기도하고, 기도하며 감사합시다.  


셋째, 깨어 기도하라!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것은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는 것을 말합니다.

왜 깨어 기도해야 합니까?

구원의 때가 가까웠기 때문에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로마서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마지막 남은 예언은 하늘로 올라가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재림의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깨어 있는 신앙인의 자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어제 죽으셨고, 오늘 아침 일어나셨으며, 내일 다시 오실 것처럼 살자!”


주님의 재림을 확신하지만, 그러나 언제 오실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개혁주의 종말론을 쓰신 안토니 후쿠마 교수는 이런 말을 합니다. 


“재림이 시간상으로 임박했다고 말하지 말고 상황적으로 임박해 있다.”


오늘의 시대가 재림이 임박한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오래 전 미국의 서부 개척사 시대에 있었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백인들이 아메리칸 인디언을 쫓아내기 위해서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 마을 주위에 불을 질렀습니다. 당시 인디언들은 사방에 옥수수를 심어놓고 그 가운데 부락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불길이 사방에서 안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몇 시간 뒤에는 마을까지 불길이 번질 상황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모두다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한 추장이 마을 사람들에게 “어서 빨리 마을 앞 옥수수 밭에 불을 질러라! 꾸물대지 말고 빨리 빨리 불을 질러라!” 중요한 결단의 순간추수를 기다리고 있던 옥수수 밭이 새까맣게 불타 버렸습니다. 추장은 다시금 마을사람들을 향하여 소리쳤습니다. “살고 싶거든 모두 다 불탄 자리에 올라서라!” 마을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젖먹이 어린 자녀들을 끌어안고 평생 살아오던 집에서 나와 불탄 옥수수 밭으로 올라가 그 엄청난 화염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추장은 이미 한번 불에 탄 곳은 다시는 불에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디언 추장의 이야기에서 복음의 진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무서운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심판 받으신 십자가의 자리에 나오기만 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우리가 받아야 하는 심판과 저주를 주님이 받으시고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제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비록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이미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받은 거룩한 주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구원받은 감격을 안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깨어 기도하는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맡은 그 일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깨어 있으므로 그곳으로 사탄은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일에 깨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 일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는 교훈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었습니다. 한 노부부가 낯선 도시의 밤길을 헤매며 하룻밤 묵을 방을 찾고 있었습니다. 주말을 맞은 작은 도시에서 방을 찾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마침 작은 호텔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갔습니다. 직원은 노부부에게 저희 호텔에는 빈 방이 없습니다. 어디에서도 방을 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노부부에게 이렇게 비바람이 치는 밤에 밤길을 헤매게 할 수 없으니 괜찮으시다면 제 방에서 하루 밤을 지내시라며 자기 방을 제공했습니다. 노부부는 그 직원의 친절에 감동을 받아 하룻밤을 잘 쉬고 다음 날 방 값을 계산하려는데 개인의 방이므로 방값을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비록 작은 호텔이지만 그 직원의 친절에 감사하며 “당신은 미국 전역에서 제일 좋은 호텔을 관리할 사람이군요!”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습니다. 

얼마 후 그 직원은 노부부의 초청을 받아 뉴욕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노인은 윌리엄 윌도프 아스토라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아스토리아 호텔을 운영하던 주인이었다고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뉴욕나사렛교회 교우들이여!
그리고 인터넷 방송을 설교를 듣는 모든 성도들이여!
열매를 맺는 10월을 맞이했습니다.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는 성구를 마음에 새기고 전도의 문을 열어봅시다. 그리고 내가 맡은 일을 통하여 주님을 증거하고 보여주며 자랑하는 축복의 삶의 자리로 회복시켜 나가시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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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 / 2016-10-9

성도의 영혼(시편 119:81∼88)

81.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오히려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82. 나의 말이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시겠나이까 하면서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니이다 
83. 내가 연기 중의 가죽병 같이 되었으나 오히려 주의 율례를 잊지 아니하나이다84. 주의 종의 날이 얼마나 되나이까 나를 핍박하는 자를 주께서 언제나 국문하시리이까 
85. 주의 법을 좇지 아니하는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나이다 
86. 주의 모든 계명은 신실하니이다 저희가 무고히 나를 핍박하오니 나를 도우소서87. 저희가 나를 세상에서 거의 멸하였으나 나는 주의 법도를 버리지 아니하였사오니 
88.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로 소성케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입의 증거를 내가 지키리이다 


오늘의 본문은 시편 119편 22연 중 11번째 연으로 ‘카프(כ)’ 라는 문자로 시작하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어 알파벳 카프(kaf)의 뜻은 ‘굽은 손’ ‘발바닥’ ‘반석’ 이라고 합니다.                                                                    


손은 일을 상징합니다

여러분의 손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까지 그 손으로 무슨 일을 하셨나요?
옛 어른들은 장례식을 준비하며 시신을 관에 안치할 때 죽은 사람의 손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작은 손으로 참 많은 일을 하였지!”
그렇습니다. 사람의 손은 일을 상징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삶이 행복하고 즐거울 때를 노래한 것이 아니라 삶이 고달프고 지치고 힘들 때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를 노래한 것입니다.

81절.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오히려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My soul faints with longing for your salvation, but I have put my hope in your word. 
믿음의 사람과 세상 사람의 차이는 삶이 고달프고 힘들 때에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세상 사람은 삶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육체가 힘들고 어렵지만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합니다.

83절. 내가 연기 중의 가죽병 같이 되었으나 오히려 주의 율례를 잊지 아니하나이다.
Though I am like a wineskin in the smoke, I do not forget your decrees. 


시인의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었는지 연기 중의 가죽병 같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가죽병은 가죽부대를 말합니다. 가죽부대는 물이나 포도주를 담는 생활도구입니다. 그런데 가죽부대를 연기와 불에 끄슬리면 가죽이 단단해져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시인은 고난과 염려로 인해 영육 모두가 심히 지쳐 있으며 끝내는 죽게 될 처지에 놓였음을 말한다.


84절. 주의 종의 날이 얼마나 되나이까? 나를 핍박하는 자를 주께서 언제나 국문하시리이까?

How long must your servant wait? When will you punish my persecutors? 


시인의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었든지 나의 남은 날이 얼마가 됩니까? 심지어 나를 핍박하는 자들을 언제까지 그대로 방치하실 것입니까? 하며 하소연합니다.

85절, 주의 법을 좇지 아니하는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나이다.
The arrogant dig pitfalls for me, contrary to your law. 

교만한 자는 자신의 힘과 지혜로 살 수 있다며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를 말합니다. 이런 교만한 자의 핍박이 빠져나올 수 없는 웅덩이와 같다고 합니다.

87절, 저희가 나를 세상에서 거의 멸하였으나 나는 주의 법도를 버리지 아니하였으니.

They almost wiped me from the earth, but I have not forsaken your precepts. 


원수들로 인하여 시인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시인의 삶은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소망을 이와 같은 형편에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갖는 근거가 있었습니다.

81절과 82절을 읽겠습니다.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오히려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My soul faints with longing for your salvation, but I have put my hope in your word. 

나의 말이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시겠나이까 하면서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니이다.
My eyes fail, looking for your promise; I say, When will you comfort me? 

육신의 삶이 힘들고 지치고 어려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므로 새 힘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 시인의 고백입니다.

설교 제목은 성도의 영혼(The Souls of the Saints)입니다.

성도는 영혼의 가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Saints are people who know the worth of souls.)

철학자 칸트는 세상에는 두 가지의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목적 가치(The purpose worth), 다른 하나는 수단 가치(The means worth) 입니다.

수단 가치는 때로는 변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전에는 물건을 구입하려면 반드시 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돈을 지불하기도 하지만 신용카드로도 결제가 가능합니다. 이러한 가치가 수단의 가치라고 합니다.

반면에 목적 가치는 절대 불변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의 생명은 수단 가치가 아니라 목적 가치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명을 대신할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성경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Matthew)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What good will it be for a man if he gains the whole world, yet forfeits his soul? Or what can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 


마가복음(Mark) 8: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What good is it for a man to gain the whole world, yet forfeit his soul? 


누가복음(Luke) 9: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What good is it for a man to gain the whole world, and yet lose or forfeit his very self?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인간의 행복과 편의를 위한 도구이며 수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 때문에 인간이 희생되는 것은 목적 가치를 수단 가치로 바꾸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회적 모순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이러한 사회에서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길을 보여주고 증거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영혼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했던 미국의 과학자 던컨 맥두걸(Duncan MacDougall. 1866~1920) 박사가 1907년 과학저널(Science Journal)에 발표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이 실험은 ‘인간의 영혼 역시 하나의 물질’ 이란 가설에서 시작했습니다. 맥두걸 박사는 ‘사람이 죽은 뒤 정말로 영혼이 육체를 떠난다면, 물리적으로 그 실재(physical presence)를 측정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의문을 품었다. 박사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초정밀 저울을 이용해 임종 환자의 무게를 측정했다. 그 결과 사람이 숨을 거둘 때 반드시 체중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땀· 속변 등의 수분과 폐에 들어있던 공기가 신체에서 빠져 나가기 때문”이란 것이다. 박사가 주목한 것은 이 부분이었다. 6명의 환자 몸무게를 정밀 측정한 결과 “수분과 공기를 합한 무게보다 21g이 더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맥두걸 박사는 “이 21g이 바로 영혼의 무게”라고 주장했다. 그는 “숨진 환자의 몸에 인위적으로 숨을 불어넣어 봤지만 한번 줄어든 의문의 21g은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며 “떠나간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개 15마리를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했다. 하지만 “사람과 달리 개는 죽을 때 몸무겐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박사는 그 이유에 대해 “사람에겐 영혼이 있지만, 개에게는 영혼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혼을 위하여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마테복음 4:19)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Come, follow me and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 


어부는 일생동안 고기 잡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고기를 잡으며 살아가야 할 인생을 불러 사람을 낚는 일군으로 선택하셨던 것처럼 오늘날도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맡겨주셨습니다.

영혼에 대한 기독교 신앙은 죽은 후에 영혼이 존재하는 곳이 다른 종교와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예를 들면 다른 종교에서는 영혼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다양한 부속들을 조립하여 자동차를 만들기도 하고 만들어진 자동차를 해체하기도 합니다. 완성된 자동차만 자동차가 아니라 해체된 부속들도 자동차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에스겔 18:4, 마태복음 10:28)


에스겔(Ezekiel) 18: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For every living soul belongs to me, the father as well as the son--both alike belong to me. The soul who sins is the one who will die.  

마태복음(Matthew)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Do not be afraid of those who kill the body but cannot kill the soul. Rather, be afraid of the One who can destroy both soul and body in hell.    

죽음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입니다(마태복음 27:50)


마태복음 27: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And when Jesus had cried out again in a loud voice, he gave up his spirit. 


죽은 사람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누가복음 16:22∼23,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The time came when the beggar died and the angels carried him to Abraham's side. The rich man also died and was buried. In hell, where he was in torment, he looked up and saw Abraham far away, with Lazarus by his side.   


요한계시록 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When he opened the fifth seal, I saw under the altar the souls of those who had been slain because of the word of God and the testimony they had maintained.

성경은 영혼이 거하는 상태를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평안히 거하는 영혼(시편 25:13)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He will spend his days in prosperity. 


시편 116:7,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Be at rest once more, O my soul, for the LORD has been good to you.
 

욥기 33:30,
그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돌이키고 생명의 빛으로 그에게 비취려 하심이니라. 
To turn back his soul from the pit, that the light of life may shine on him. 


시편 142:7,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케 하소서.   

Set me free from my prison, that I may praise your name.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보험에 가입을 합니다.
가장 보편적인 것이 자동차보험입니다. 자동차보험에 가입하는 이유는 만일 사고가 발생했을 때 혜택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영혼입니다. 그러므로 영혼도 보험에 가입해야 합니다. 영혼 보험이란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가장 큰 상급은 순교자들이 받습니다. 왜 순교자들에게 가장 큰 상급을 약속하셨습니까?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 자기 생명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가치는 목적 가치입니다.
그 어떤 것도 영혼의 가치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한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삶을 결단하고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정성을 쏟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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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 / 2016-10-16

성도의 증거(시편 119:89∼96)

89.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Your word, O LORD, is eternal; it stands firm in the heavens. 

90.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Your faithfulness continues through all generations; you established the earth, and it endures. 

91.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
Your laws endure to this day, for all things serve you. 

92.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If your law had not been my delight, I would have perished in my affliction. 
93. 내가 주의 법도를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로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I will never forget your precepts, for by them you have preserved my life. 
94.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를 찾았나이다 

Save me, for I am yours; I have sought out your precepts. 
95. 악인이 나를 멸하려고 엿보오나 나는 주의 증거를 생각하겠나이다 

The wicked are waiting to destroy me, but I will ponder your statutes. 
96.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은 심히 넓으니이다  

To all perfection I see a limit; but your commands are boundless. 


히브리 알파벳 열세 번 째  라메드(Lamead)(ל)로 시작하는 시
아라비아 숫자는 30에 해당하고, 뜻은 소몰이 막대기라고 합니다.

증거(證據, evidence. proof) - 증거 증(證), 근거 거(據)

어떤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

거짓 증거(false evidence),
내적 증거(internal evidence)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증거가 필요한 이유를 95절에서 찾아봅니다.
악인이 나를 멸하려고 엿보오나 나는 주의 증거를 생각하겠나이다.
(현대인의 성경) 악인들이 나를 죽일 기회를 찾고 있으나 나는 주의 법을 묵상하겠습니다. 

(도입 이야기)
지난 9월 26일 동해에서 링스 해상 작전헬기의 추락 사고로 정조종사 김경민 대위와 부조종사 박유신 대위, 조작사 황성철 중사 3명이 순직했습니다.
 

영결식에 참여했던 김혁수 예비역 해군 준장이 올린 페이스북의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고 있습니다.

김 제독은 헬기 추락사고 등으로 순직한 2명의 가족을 통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았다고 소개했습니다.  

나는 참 그리스도인인가? 

10월 2일 순직한 LYNX 조종사 김경민 대위와 조작사 황성철 중사의 영결식이 국군수도병원 체육관에서 해군장으로 치러졌다.

군 인권 센터는 당일까지도 유가족이 영결식을 반대하고 있다는 광고를 했다. 그러나 유가족 누구도 항의를 하지 않았고 그들의 회유와 선동을 단호히 거절했다.

김경민 소령의 아버지는(김재호목사) 아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이며 자랑스럽다고 했고, 1030m나 되는 깊은 수심에서 내 아들을 찾아 준 해군이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고 했다.


나라를 위해 순교한 자랑스런 아들을 만날 날을 인내하며 소망가운데 기다리겠다고 했다.


잠수정 사고로 순직한 김예빈 대위의 누나 김예은씨는 군인은 직업이 아니고 명예이며 대한민국 해군은 참으로 명예로운 직책이라고 했으며 내 동생이 이런 명예스런 해군이었음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해군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두 분을 통해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았고 내가 이런 어려움을 만나도 신앙인의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나는 참 그리스도인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김 제독은 국군수도병원 합동분향소와 세 조종사 각각의 빈소를 조문하고 와서 우리 사회가 순직한 군인에 대해 관심이 부족하다는 탄식의 글도 올렸습니다. 누구보다 소중한 자식의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유가족의 모습이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전개 이야기)
세상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믿음을 칭찬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을 무너트리려고 유혹하고 비난하며 시험하는 공중의 권세를 잡은 사탄이 믿는 자들을 넘어트리려고 최후의 발악을 하는 곳입니다. 이와 같은 세상에서 증거가 분명한 성도는 성숙한 믿음을 갖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의 증거가 필요한 이유를 철학자 데칼트의 경험에서 살펴봅니다.
회의 철학자 데칼트에 대한 어린 사절 일화를 소개합니다.
모든 것을 의심으로 시작하게 된 철학의 기초는 데칼트가 어려서 부모님의 심부를 하려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친척의 집을 방문할 때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좁은 둑길을 걷고 있는데 그의 눈앞에 뱀 한 마리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린 소년은 뱀이 무서워 그 길로 가지 못하고 뒤를 돌아 먼 길을 택했다고 합니다. 심부름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제 둑길에서 보았던 뱀은 잊저어 버리고 둑길로 돌아오던 중 어제 뱀이라고 판단했던 그 물체가 뱀이 아니라 썩은 새끼줄이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어린 마음에 내 눈이 보는 것이 정확한 것이 아니구나!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확인해야 한다고 다짐한 것이 학문의 기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내가 눈으로 본 것은 모두 정확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내 눈이 나를 속일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고 합니다. 사람을 속이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닙니다. 귀로 듣는 것도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도마는 부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본 후에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도마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네 손을 내밀어 내 손의 못 자국을 만져보고 내 옆구리에 네 손을 넣어본 후에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어떻게 믿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눈으로 똑똑하게 보셨습니까?
하늘로부터 음성을 들으셨습니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죽음 후의 세계를 경험하셨습니까?
성도들에게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은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요한복음(John)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서 자주 불렀던 찬양 중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 영생을 얻으리로다.”

기독교 신앙의 결론은 영생입니다. 본문에서 영생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소개합니다.
첫째, 영원의 증거(89, 96)

89절,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세상 모든 것은 변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세워집니다.

96절,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은 심히 넓으니이다

세상에서 완전하다는 것도 끝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심히 넓어 끝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의 삶을 약속받은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가 되십니다(90절)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하나님은 만물의 주가 되십니다(91절)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


한국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신앙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회적인 전통에 근거한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유교의 영향으로 이 세상에서 입신출세, 무병장수, 만사형통하는 것이 축복이라는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올바른 신앙을 위하여 눈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차라리 그 눈을 뽑아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고 좁은 문과 좁은 길을 선택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록 세상에서 입신출세하지도 못하고 무병장수하지 못하며 만사형통하지 못해도 위로의 은혜를 약속하셨습니다.

둘째, 위로의 증거(92)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시편 86:17,
은총의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저희가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심이니이다.


시편 119:50,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고린도후서 1:3∼4,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셋째, 구원의 증거(94, 95)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를 찾았나이다. 

악인이 나를 멸하려고 엿보오나 나는 주의 증거를 생각하겠나이다.


구원의 확신을 증거 하려면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위한 증거는 객관적 증거, 주관적 증거, 공동적 증거로 확인합니다.

객관적 증거(요한복음 3:15∼16, 1:12, 로마서 8:10, 10:13)
객관적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말씀에는 구원받는 방법이나 길에 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구절만이라도 자신이 구원받은 말씀의 확실한 증거로 삼아야 합니다.

가령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요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5~16).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8:10).“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5). 이런 말씀은 성경에 매우 많이 있습니다.

주관적 증거(로마서 8:16)

주관적 증거는 성령의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나의 영에게 구원받은 자임을 증거 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8:16)라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신비한 방법이나 체험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 자신에게 증거합니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받은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런 체험은 사람마다 모두 다릅니다.

공동적 증거(갈라디아서 5:22∼23)

공동적 증거는 열매 증거라고 합니다. 열매 증거를 공동체 증거라고도 합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의 삶과 생활 그리고 교회가 하는 일을 통하여 열매를 맺는 것으로 보여줄 수 있습니다.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는 것을 공동 증거라고 합니다(마태복음 7: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주관적 증거도 되고 객관적 증거도 되고 성령의 증거도 되고 내 영의 증거도 된다는 뜻입니다.

주관적 증거는 일반적으로 성령의 열매, 곧 사랑이며 그것을 풀면 기쁨, 평화,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감사, 소망 등입니다(갈 5:22~23). 객관적 열매는 선행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푼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종합적으로 말한다면 바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입니다. 그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따르려고 힘써 경주한다면 이보다 더 확실한 구원의 산 증거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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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 / 2016-10-23

성도의 발(시편 119:97∼104)

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Oh, how I love your law! I meditate on it all day long.

98.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Your commands make me wiser than my enemies, for they are ever with me.

99.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I have more insight than all my teachers, for I meditate on your statutes.

100.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I have more understanding than the elders, for I obey your precepts.  

101.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I have kept my feet from every evil path so that I might obey your word.

102.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I have not departed from your laws, for you yourself have taught me.

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How sweet are your words to my taste, sweeter than honey to my mouth!

104.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I gain understanding from your precepts; therefore I hate every wrong path 

성도의 발(The foot of the Saints)

101절,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I have kept my feet from every evil path so that I might obey your word.)

사람의 몸은 70%가 물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결정하는 70%는 입과 발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입은 말을 하는 기능으로 신앙고백과 회개와 기도할 때에 사용합니다. 발은 내 몸을 움직여서 가야 할 곳으로 가는 기능을 맡습니다. 그러므로 입과 발을 잘 관리하면 신앙생활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악한 길로 가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신앙생활과 발의 관계를 소개합니다.
한의학에서는 사람의 발바닥에는 인체의 오장육부와 연결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발바닥을 자극하면 오장육부를 자극하여 활동을 왕성하게 한다고 합니다.

발바닥을 영어로 sole이라고 합니다.
영혼이란 영어 단어는 soul 이라고 합니다.
발바닥이란 단어와 영혼이란 단어의 발음이 동일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발바닥을 영혼의 겉모습 즉 발바닥은 내적 영혼의 외적 표현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sole이란 단어의 철자를 바꾸면 lose가 됩니다. lose는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발바닥이 정상에서 벗어나면 잃어버린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발바닥이 정상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사람의 인체에서 마지막으로 발바닥에 도착한 후 다시 심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일 발바닥에 도달한 피가 심장으로 되돌아가는 기능이 약해지면 사람의 생명은 위태롭습니다. 그래서 발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장면이 요한복음 13장에 소개됩니다(13:1∼17).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해야 하는 때가 점점 더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장차 주님의 나라에서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제자들의 신앙을 지켜보시며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베드로의 발을 씻기려고 할 때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제 발만 씻겨주지 말고 몸도 씻어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미 목욕을 한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된다며 베드로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목욕과 발을 씻는 의미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욕이란 구원을 얻기 위하여 회개하고 속죄함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발을 씻는 것은 구원을 받은 후에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 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은 자기 발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제자들도 누가 크냐 하고 서로 말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누가 더 크냐 하고 논쟁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러한 곳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 신앙생활의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자기 발을 씻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발을 씻어주어야 합니다.

자기 발을 씻는다는 것은 자기의 잘못과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서로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오직 주님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의 발을 씻기 위하여 항상 주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Oh, how I love your law! I meditate on it all day long.

묵상한다는 것은 마치 거울 앞에 서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0: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고린도전서 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살펴보는 거울입니다. 말씀의 거울 앞에서 나의 모습을 보며 말씀에서 어긋난 것을 수정하는 것입니다.

98.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Your commands make me wiser than my enemies, for they are ever with me.

99.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I have more insight than all my teachers, for I meditate on your statutes.

100.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I have more understanding than the elders, for I obey your precepts.  

사탄이 유혹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처럼 바꾸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아니라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하더냐? 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러자 하와는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사탄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신다고 말씀의 내용을 교묘하게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최초의 사람을 유혹했던 사탄은 또다시 예수님을 말씀으로 유혹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102.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I have not departed from your laws, for you yourself have taught me.

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How sweet are your words to my taste, sweeter than honey to my mouth!

104.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I gain understanding from your precepts; therefore I hate every wrong path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다는 것은
얘수니d{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내용에는 신비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제자들의 갈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왜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습니까? 마귀가 유다 마음가운데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불어넣었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의 마음이 이처럼 지저분해졌습니까? 마귀가 그 마음에 지저분한 생각을 불어넣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선량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러한 생각들을 불어넣는 일이 마귀의 일입니다. 어떤 지저분한 생각들입니까? 다투는 생각입니다. 마귀의 조종을 받다가 보면 한 이불 덮고 사는 부부간에도 다툼이 생깁니다. 한 피 받은 형제끼리도 칼부림 나게 하고 한 교회에 다니는 성도끼리도 서로 다툽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조금 전에도 제자들이 어찌했습니까?


또 저희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눅 22:24).


세상은 자기 발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서로 자기 발이 크다, 아름답다고 자랑하려고 합니다. 어느 누구도 발을 씻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내 발을 씻기지 않느냐고 불평하고 짜증내고 고발하고 꿇게 하려는 세상입니다.


첫째, 발을 씻으라!(wash your feet)


발을 씻는다는 것은 회개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려고 할 때 베드로는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라고 간청했습니다(요 13:9).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3:10).

목욕이란 구원을 받기 위하여 자기의 죄를 고백한 회개를 말합니다.
발을 씻는 것은 구원을 받은 후에 지은 죄를 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기의 발을 씻어야 합니다.

먼저 내 눈 속에 들보를 빼야 하고 먼저 내 안을 깨끗케 해야 합니다.

성도는 죄 씻음 받은 의인들입니다. 그러나 발이 계속 더러워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내 속에 있는 옛사람 곧 죄를 향한 성향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 항상 나와 함께 따라 다니며 순간마다 죄를 범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발을 씻듯이 날마다 회개해야 하고 순간마다 내 죄를 어찌할꼬 가슴을 치며 회개해야 하는 것이 성도들입니다.

목욕은 원죄를 씻는 일이요, 발 씻음은 자범죄를 씻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서로 발을 씻기라!(Wash your feet together!)

서로 발을 씻기라는 것은 서로 섬기고 봉사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신앙생활의 본보기는 예수님입니다. 어느 교회도 아니고 어느 목사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이 신앙생활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다만 성도들은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Follow my example, as I follow the example of Chris.)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요한복음 13:14)

서로 섬기는 신앙인의 세 가지 자세를 소개합니다.
1. 평등한 입장에서 섬기라
2. 마음을 비우고 섬기라
3. 자기를 버리고 섬기라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내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심리학자 엘리 크론은 이기주의자는 다른 사람의 필요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자기  의 필요에만 관심이 있다고 강조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기주의자는 자기 외에는 누구도 볼 수 없기 때문이며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7:21,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셋째, 주님의 발을 씻겨드리라!(Let wash the feet of the Lord!)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린다는 것은 오직 주님만 섬기라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는 것은 곧 제자들의 믿음을 씻기셨다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만을 섬기려면 마음에 새겨진 온갖 비성경적인 요소들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예를 들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나 여전히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부유한 삶을 살아야 하고, 예수를 믿으면 질병과 사건 사고가 나를 괴롭히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도토리가 크면 얼마나 더 크겠습니까?
50보 100보라고 하겠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던 베드로는 아무 것도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날이 밝아올 때 그물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물을 깊은 곳에 내렸습니다.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엎드렸습니다(눅 5:1∼8).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을 때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세리가 바리새인 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다고 하셨고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8:11∼14).   




성 프랜시스가 어느 날 길거리에서 문둥병자를 만났습니다. 너무 불쌍해서 두 팔을 벌려 가슴에 끌어안았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그 순간 그 문둥병자가 예수님 모습으로 변했다는 신화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초라한 사람, 비루한 사람을 껴안고 발을 씻겨 줄 때에 그가 예수님 모습으로 변한다면 누가 발을 씻겨 주지 않겠습니까?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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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6-10-30

반석위에 세운 교회(마태복음 16:13∼20)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교회가 반드시 지켜야 할 전통은 성례전입니다.
성례전은 성찬식과 세례식을 말합니다.
오늘은 유아 세례식을 거행하는 종교개혁 499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먼저 유아 세례를 받는 가정과 유아 세례를 축하하는 모든 성도들이 뉴욕나사렛교회가 반석위에 세워진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다짐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교회론의 기초가 되는 말씀입니다.
설교 제목은 ‘반석 위에 세운 교회(Church founded on the rock)’

하나님이 지상에 세운 것은 가정과 교회라고 합니다. 가정과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교회는 가정과 같아야 합니다.
가정은 교회와 같아야 합니다.
가정 같은 교회, 교회 같은 가정
초대교회의 특징은 가정 같은 교회, 교회 같은 가정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도행전 2:44-46,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석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베드로(요한복음 1:42)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You are Simon son of John. You will be called Cephas. (which, when translated, is Peter)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고린도전서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and drank the same spiritual drink; for they drank from the spiritual rock that accompanied them, and that rock was Christ.   

셋째는 신앙고백(마태복음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Simon Peter answered,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는 신앙고백과 예수 그리스도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웠다고 하면 베드로가 초대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들리는 신앙 붙들어 주소서!’ 라는 글에서 이민생활 22년 동안 108번 교회를 옮겨 다니며 이상적인 교회를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상적인 교회를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났는데 장례를 집례 할 교회와 목사가 없어 결국 108번째 찾았던 교회에서 장례를 맡았다고 합니다.

이상적인 교회는 내 마음에 맞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적인 원리를 따르는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흠 없는 교회를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가르침과 원리를 따라가려는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좋은 교회는 좋은 교인을 양육합니다. 
좋은 교인은 좋은 교회를 세워갑니다.

첫째, 신앙고백이 분명한 교회(마태복음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Simon Peter answered,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교회는 신앙고백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는 주님입니다.

신앙고백이란 구원의 길을 선택하고, 구원을 증거 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와 같은 고통과 시련을 선택하겠다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은 잘못된 가르침이라며 신앙고백을 부정하고 거부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유혹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둘째는 예수님이 주인 되는 교회(에베소서 1:22)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And God placed all things under his feet and appointed him to be head over everything for the church.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파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위에 교회가 세워져야 한다고 깨우쳤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되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나사렛교단에 속한 교회는 두 가지 목표를 실천해야 합니다. 첫째는 선교, 둘째는 구제입니다.

셋째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교회(마태복음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And I tell you that you are Peter, and on this rock I will build my church, and the gates of Hades will not overcome it.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말씀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음부의 문을 닫고 천국의 문을 열어준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지난 날 교회사에서 음부의 권세가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기원 후 1세기 때 음부의 권세는 극심한 핍박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핍박은 무려 300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 결과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반면에 엄청난 핍박 가운데서도 영광스러운 순교의 믿음을 보여준 순교자들도 있었습니다.

기원 후 313년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된 후에 음부의 권세는 핍박이 아니라 영광의 자리로 교회와 성도들을 유혹했습니다.   
이때부터 교회는 핍박이 없고, 성직자들은 멋진 가운을 입고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중세교회는 더 화려하고 더 크고 웅장한 건물을 지으려고 부패하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시대에 음부의 권세는 평안이라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예수를 믿되 편안하게 믿어라! 이런 달콤하고 안일한 유혹을 받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되 아주 편안하게 부담 없게 마치 고급 음식점이나 백화점에서 고객 서비스를 받는 것과 같이 안내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VIP가 되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교회의 VIP는 오직 주님 한 분 뿐입니다.

넷째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교회(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최근 한국에서 정치적인 소용돌이가 대통령 하야하라는 시위가 대학의 교수협의회, 각 대학의 시국 선언문, 심지어 교회 단체들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강남의 유명한 여러 교회에 다니며 감사헌금을 하였고 심지어 주보에 기도 제목도 소개되었다고 합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삶의 현장에서 성령의 도움을 받아 진실한 삶을 살아야만 가능한 예배라고 하겠습니다.

구한말 시대에 백정이란 신분은 머리는 상투를 틀지 못했고, 갓이나 망건을 쓸 수 없었으며, 도포를 입을 수도 없었고, 집을 지을 때에 기와를 올릴 수 없었다고 합니다. 딸이 시집을 갈 때는 가마를 사용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업어서 보냈다고 합니다. 심지어 사람이 죽은 후에도 상여를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게에 짊어지고 산에 가서 묻어야 했다고 합니다.

백정 박성춘의 가정이 풍지박살 난 것은 허가 받지 않는 소를 몰래 잡아 주었다는 이유로 군관과 포졸들이 박성춘을 체포하려고 할 때 그의 부인이 결사적으로 막으려다 관리들이 휘두르는 육모 방망이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며칠 후 둘째 아들까지 병으로 사망하자 박성춘은 큰아들 봉출이 만큼은 백정으로서 멸시천대를 면하게 하기 위해서 공부를 시키기로 다짐하고, 당시 서울 을지로에 세워졌던 곤당골교회 예수 학당에서 아이들을 무료로 가르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박성춘은 아들 봉출을 학교에서 무료로 공부시켜 주는 것은 고맙지만 아들을 주일 예배에는 보내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입학을 시켰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들 봉출이는 대대로 내려온 백정 집안에서 처음으로 학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학당에서는 봉출이의 이름을 ‘상스러운 태양’이라는 뜻으로 ‘서양(瑞陽)’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박서양은 열심히 공부하여 모범학생이 되었고 선생님들은 서양이가 비록 백정의 아들이지만 성품이 바르고 오직 공부에만 열중하는 것을 보고 서양이를 친자식처럼 보살폈습니다.

1894년 동학운동이 일어났고, 청일전쟁이 일어나 구한말 조선반도는 열강들의 전쟁의 먹구름이 덮고 있었습니다. 한편 1894년 전국에 콜렐라가 번지기 시작하여 하루에 3백 명씩 죽어갈 때 박성춘도 전염병에 걸렸습니다. 무어 선교사는 고종 황제의 주치의 에버슨 박사와 함께 백정 마을의 박성춘의 집을 찾아가 치료하여 기적같이 회복되었습니다.

박성춘이 깜짝 놀란 것은 고종 황제의 주치의가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백정의 초라한 집까지 친히 찾아와서 치료했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아들 서양이가 다니는 예수교 학당을 찾아가서 이제부터 아들을 주일 예배에 참석시켜 달라고 부탁했으며 자신도 예수교 학당에서 공부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박성춘은 글을 배워 성경을 탐독하면서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그의 인생은 하루하루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회 안에는 양반과 백정과 같은 신분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양반들이 무어 선교사에게 상놈들과 함께 예배를 할 수 없으니 따로 자리를 만들어달라고 제안하였는데 무어 선교사는 예수님 안에서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없으므로 그럴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신령과 진정의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시작하여 반석위에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교회가 타락하여 가진 자 편에 서 있다면 결코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지러운 때에 다시 한 번 교회를 반석 위에 세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일생을 두 단어로 표현하면 ‘만남’과 ‘선택’ 이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누구를 만나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의 삶이 결정됩니다.
최근 한국 사회의 큰 소용돌이는 박근혜대통령이 최순실이란 사람을 만났고 그를 가까이 하므로 일어난 결과입니다.

반면에 박근혜대통령의 남동생 박지만씨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할 때 포항제철의 박태준회장을 만났습니다. 박회장은 나이 70이 되었을 때 몸에 이상이 생겨 8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고 뉴저지 딸의 집에서 지낼 때 어느 주일 아침 딸의 가족들이 교회에 간다고 하므로 혼자서 집에 있는 것보다 가족들이 가는 곳에 함께 가겠다며 교회에 처음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가 생소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삶의 철학이었던 정직과 너무 비슷할 뿐 아니라 어려운 환경에서 세계에서 3-4위가 되는 철강산업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하늘의 도움이 곧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70이 되어 예수를 영접했고 박지만씨가 방황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그에게 복음을 증거 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 박지만씨는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사회에 적응하여 바른 길을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겨야 합니다.
음부의 권세가 때로는 핍박으로, 때로는 영광의 자리로, 때로는 편안함으로 유혹할지라도 그 모든 것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주인이 되신 예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음부의 권세를 물리치기 위하여 신령과 진정의 삶과 예배를 회복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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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6-11-6

 회복을 위한 기도(요나 2:7)

11월의 성구 / 회복을 위한 기도(요나 2: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When my life was ebbing away, I remembered you, LORD, and my prayer rose to you, to your holy temple.)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던 사람이 갑자기 정전이 되거나 또는 고장으로 인하여 오랜 시간 그 안에 갇혀 있게 되면 정신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때 나타나는 정신적인 증세를 ‘공항장애(恐惶障碍, panic disorder)’ 라고 합니다.


공항장애란 극심한 불안이 갑자기 닥쳐와서 곧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을 말합니다.

선지자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죽음 앞에서 영혼을 생각했습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육체가 피곤하다는 말은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피곤하다는 말을 좀처럼 듣기 쉬운 말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눅 23:46).

선지자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갇혔습니다.
대한민국도 마치 큰 물고기 뱃속에 갇힌 요나와 같은 상황이 점점 더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위기 가운데서 영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생각한다는 것은 곧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9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선지자 요나에게 왜 위기가 닥쳐왔습니까?
요나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요나를 바르게 세우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위기는 대한민국을 무너트리려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국민소득이 세계 4위 국가로 발전하는 동안 모두의 관심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이었음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위기를 만난 지금은 지난날의 잘못을 깨닫고 바른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위기는 바른 믿음을 회복하기 위한 기회이다!


바른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요나 1장 1절,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요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너는 니느웨로 가서 쳐서 외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요나 1장 2절,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니느웨는 당시 강대국 앗수르의 수도이었습니다. 더구나 앗수르는 요나 선지자가 활동하던 이스라엘의 적국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나라의 수도에 가서 너희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라고 외치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생각과 정신이 올바른 사람은 자기 나라를 핍박하고 무너트리려는 나라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습니까?

요나 4장 10절,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니느웨에는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려 십 이만 여명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위기는 믿음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을 회복하려면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니느웨라는 도시가 이스라엘을 핍박하고 기회만 있으면 무엇을 빼앗기 위하여 침략하는 나라의 수도일지라도 그곳에는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위기는 믿음 회복하는 기회
믿음을 회복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을 구원하라고 강조합니다.
영혼을 구원하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2:29∼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


이웃을 사랑하려면 기도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위기는 기도를 회복하는 기회입니다.

마태복음 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성도들마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집중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그와 같은 신앙생활에 머물지 말고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헌신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도들은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것 보다 먼저 북한의 동포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


(현대인의 성경)

내 생명이 서서히 사라져 갈 때 내가 다시 한 번 여호와를 생각하며 기도하였더니 성전에 계시는 주께서 내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주의 성전에 미쳤다는 것은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2015년 11월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워싱통중앙장로교회 이원상원로목사님께서 식도암 3기라는 판명을 받고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하신 것은 만일 수술을 받으면 자리에 누워 잠을 잘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음식을 먹은 것이 자리에 누우면 모두 입으로 토해내기 때문에 앉아서 지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식도가 음식이 역류하는 것을 막아주는데 식도를 잘라내면 그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앉아서 지내야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담당 의사와 의논 후 뉴욕에서 6개월간 치료받기로 하고 6월에 뉴욕으로 오셨습니다. 목사님을 만나서 설교를 부탁했을 때 설교하기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11월을 맞이했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을 지나면 위싱톤으로 올라가신다고 하셔서 그러면 추수감사주일 설교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2015년 11월의 성구 마가복음 16:17∼18이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이원상목사님께 이 성구를 결정할 때는 이미 일 년 전의 시간이었는데 지금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이 말씀이 선택되었는지를 확신한다고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시편 103:1∼5을 본문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문제가 해결된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미국 대통령 선거가 8일에 실시됩니다.

대통령 후보 힐러리와 트럼프의 선거유세에서 정책 대결 보다는 상대 후보의 약점을 들추어 인신공격을 하는 흙탕물 싸움을 지켜봤습니다. 과연 이런 나라가 미국일까 하는 의심을 갖게 합니다.


조국 대한민국은 대통령의 지도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왜 우리 앞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하나님 앞으로 나오라는 신호라고 하겠습니다.

두 어린이가 뒤엉켜 심하게 싸움을 합니다.

마침 지나가던 어른이 두 아이를 떼어 놓은 후 서로 싸우지 말라고 타이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아이는 그 자리에서 도망을 칩니다. 또 한 아이는 어른의 이야기를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듣고 있습니다. 어른의 이야기가 끝이 난 후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어린 아이가 어른의 손을 꼭 잡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다시는 싸우지 않을게요!’


위기가 닥쳐왔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나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은 그 자리를 피하려고 도망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으로 나가 이전 보다 더 굳게 하나님의 손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을 굳게 붙잡기 위해서 11월의 성구 요나서 2장 7절을 마음에 새기고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릴 수 있는 은혜의 자리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위기는 기회!

말씀을 회복하는 기회!

기도를 회복하는 기회!

디모데전서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니라.


2015년 11월에도 기적을 보여주셨던 하나님

2016년 11월에도 기적을 보게 하시므로 이전 보다 더욱 주님만을 사랑하는 일에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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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6-11-13

성도의 삶(시편 119:105∼112)


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106. 주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107. 나의 고난이 막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108.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 입의 낙헌제를 받으시고 주의 규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109. 나의 생명이 항상 위경에 있사오나 주의 법은 잊지 아니하나이다 
110. 악인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 나는 주의 법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111. 주의 증거로 내가 영원히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112. 내가 주의 율례를 길이 끝까지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105. Your word is a lamp to my feet and a light for my path. 

106. I have taken an oath and confirmed it, that I will follow your righteous laws.

107. I have suffered much; preserve my life, O LORD, according to your word.

108. Accept, O LORD, the willing praise of my mouth, and teach me your laws.

109. Though I constantly take my life in my hands, I will not forget your law.

110. The wicked have set a snare for me, but I have not strayed from your precepts.
111. Your statutes are my heritage forever; they are the joy of my heart.

112. My heart is set on keeping your decrees to the very end.  


본문 소개

시편 119편은 두 가지 특징을 갖는 시입니다. 하나는 히브리 알파벳 시,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하는 시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의하는 다양한 표현을 찾아봅니다.

105. 107절. 주의 말씀  
106절. 주의 의로운 규례 
108절. 주의 규례 
109절. 주의 법 
110절. 주의 법도

111절. 주의 증거

112절. 주의 율례   

본문은 히브리 알파벳 14번째 ‘눈(nun. ן)’으로 시작하는 시입니다. 영어 발음으로 엔(N)에 해당하며, 아라비아 숫자로 ‘50’에 해당합니다. 눈은 ‘물고기’를 의미하며 ‘운명으로부터 탈출’, ‘구원’, ‘방향 전환’, ‘새로운 통로’ 라고 적용합니다.

로마 황제의 통치 아래에서 핍박을 받던 기독교인들은 카타콤이라는 땅굴을 파고 땅속으로 숨었습니다. 그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면 자기의 정체성을 알리기 위해 물고기를 그렸습니다. 물고기라는 헬라어가 익투스(ἰχθύς, ΙΧΘΥΣ)라고 합니다. 익투스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약자로 통용되었습니다.

제목 소개

성도(聖徒)의 삶
성도(聖徒)란 어떤 사람인가요?

문자적인 의미는 ‘거룩한 무리’를 말합니다.

성도(聖徒)라는 한자어는 ‘성인 성(聖)’ ‘무리 도(徒)’ 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성도가 살아가야 할 곳은 ‘세상(世上)’입니다.
성경은 세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5:19,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은 성도들을 미워합니다. 우리들은 우리를 미워하는 세상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구별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이란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요리문답 제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요리문답 제2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즐거워할 것인가를 지시하시기 위해 

주신 법칙이 무엇입니까?   
- 신구약 성경에 간직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즐거워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지시해 주는 유일한 법칙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몇 가지 유익을 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말씀은 삶의 안내자(105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a lamp         a light

하나님의 말씀은 등과 빛이라고 합니다. 등과 빛이 필요한 곳은 어두운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요한복음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오늘의 어둠은 어떤 현상일까요?


미국 대통령이 성탄절 카드에 ‘메리 크리스마스’ 라는 인사말을 사용하지 않고 ‘해피 홀리데이스’ 라고 사용한지가 40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미국인들을 배려해서 인권을 내세운 카터 대통령이 시작하여 레이건, 부시 대통령도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크리스마스는 여전히 공휴일이지만 백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온 최고 축제의 의미는 과거와 같지 않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성조기가 없는 학교는 소수자인 외국인 학생에게 국기를 내세우는 걸 차별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관청에선 ‘불법 입국자’ 용어가 없어지고 대신 ‘입국 증명서가 없는 노동자(undocumented worker)’ 라는 복잡한 말이 생겼습니다.

배려가 지나쳐 애국과 법치를 외면하는 수준이라는 불만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히스패닉과 동양계, 흑인을 싸잡아 ‘유색 인종’이라고 하므로 백인을 ‘무색 인종(person of non-color)’ 이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남자를 뜻하는 ‘man’이 성평등주의자에게 공격받은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합니다.  사람을 총칭할 때 이 말을 사용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공식적으로 폴리스맨은 ‘폴리스 오피서(officer)’, 세일즈맨은 ‘sales person’, 체어맨은 ‘체어’ 또는 ‘체어 퍼슨(chair person)’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뉴욕 시는 동성 연인의 권리를 배려한다며 결혼신고서를 ‘가정 내 파트너 신고서’라고 말합니다. 동물 평등론까지 가세하여 애완동물을 ‘반려동물’ 이라고 하고 동물 주인을 ‘반려인간’으로 부르자고 합니다.


이런 풍조를 ‘PC운동(Political Correctness) 운동’이라고 합니다. ‘정치적 올바름’ 이란 뜻입니다. 다문화주의에 근거해 차별적 언어나 활동을 바로잡자는 운동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기독교 윤리와 가족주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PC가 시작됐을 때부터 '반(反)PC 운동'도 시작됐다. 인종 평등, 종교 평등, 성 평등 운동을 백인의 정체성, 기독교 가치, 전통적 가족주의의 해체 신호로 받아들인 것이다.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106절, 주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을 지키려 할 때에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증거 합니다.

107절, 나의 고난이 막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주의 말씀을 준수하려 할 때에 고난이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이 닥쳐올 수 있다고 합니다. 고난을 받을 때 고난에 대해서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의 삶의 한 예

1865년 추운 겨울밤 영국의 사우스 웨일즈 라는 곳의 언덕길을 한 여인이 갓난아이를 안고 걷고 있었습니다. 앞을 볼 수 없는 눈보라 속에 아기를 가슴에 안고 언덕을 넘던 여인은 어두움과 눈보라로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이 여인은 아이가 잘못 될까봐 길을 찾으려고 넘어지고 자빠지면서도 가슴에 품은아이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그만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이 여인은 그 눈보라 속에서 얼어 죽고 말았습니다. 눈보라가 그친 다음날 아침 그 길을 지나던 행인에 의해 이 여인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앉은채 웅크리고 벌거벗은 알몸으로 죽어 있었습니다. 추위 속에 안고 있는 아기를 살리려고 옷을 하나씩 벗어 아이를 감싸느라고 이 엄마는 그만 알몸이 되어 추위 속에 동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 인의 품에 안겨있던 아이는 살아있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고 이 아이는 어느 가정에 입양되어 자랐습니다. 이 아이가 세계1차 대전 때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영국의 수상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 1. 17∼1945. 3. 26)입니다. 1916년 어머니가 죽은 지 51년이 되던 해에 그는 영국의 수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려서 부터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신 어머니, 나를 살리려고 알몸이 되어 죽으신 어머니를 늘 생

각하며 살았습니다.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고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우리를 살리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뜨거운 사랑과 감격 속에 우리도 살아야 합니다. 그 죽으심과 희생이 헛되거나 욕되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 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나를 위해 눈보라가 아닌 핍박과 박해의 폭풍 속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큰 사랑의 감격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108절,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 입의 낙헌제를 받으시고 주의 규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낙헌제(freewill offering)
화목제에 속하는 제사, 화목제에는 서원제와 감사제로 구분(레위기 7:11∼16).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린다는 것에서 감사제와 비슷하지만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건 받지 않았건 드려진다는 것이다. 또한 소제와 함께 드릴 수도 있었다(민수기 15:3∼4).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낙헌제(54:6)와 입의 낙헌제(119:108)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입의 낙헌제는 고난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했으나 여전히 고난이 떠나지 않고 계속될지라도 감사하겠다는 굳건한 신앙의 자세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105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106절, 주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108절,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 입의 낙헌제를 받으시고 주의 규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112절, 내가 주의 율례를 길이 끝까지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내 발의 등은 어두운 현실을 밝혀주고, 내 길의 빛은 어두운 미래를 밝은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방향을 알려줍니다.

최근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예상을 뒤 업고 트럼프가 당선되었습니다. 트럼프가 당선된 것은 ‘문화적 분노’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문화적 분노를 표출한 사람들은 ‘앵그리 화이트(분노한 백인)’ ‘블루칼라 노동자’ 그리고 ‘백인 부유층’이라고 합니다.


세상은 거룩한 것보다는 즐겁고 재미있는 것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때로는 거룩한 것을 외면하고 무시하므로 삶이 고달플 것입니다. 그래도 주의 말씀으로 힘을 얻어야 합니다.

109∼111절,

나의 생명이 항상 위경에 있사오나 주의 법은 잊지 아니하나이다. 
악인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 나는 주의 법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증거로 내가 영원히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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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 / 2016-11-20 (추수감사주일)

감사하는 사람(시편 136:1∼7)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3.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4.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5.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6.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7.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추수감사주일을 준비하며 나는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던 중 사람들이 감사하는 세 가지 모습을 생각했습니다.

첫째, 평범한 생활에 대한 감사(Thanks for plain life)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생활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건과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세상에서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놀라운 일에 대한 감사(Thanks for wonderful)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바로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나를 그 자리에서 옮겨주신 일을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셋째, 고통가운데서 감사(Thanks for sufferings)

영국의 성서 주석학자 메튜 헨리가 어느 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강도를 만났다고 합니다. 가진 돈을 모두 빼앗겼고 몸에 상처를 입고 집으로 돌아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내가 강도당한 입장인 것을 감사합니다. 돈을 빼앗겼으나 생명을 빼앗기지 않았으니 감사합니다. 나를 괴롭힌 그 강도를 위해 기도할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그가 다시는 강도로 살지 않도록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금요일 오전에 유니온 한아름에서 장을 보고 돌아와서 물건들을 내리는 중에 배추 한 상자와 무 한 상자를 카트에서 내리는데 배추상자가 카트에 꽉 끼어서 잘 나오지 않아 힘을 쓰는데 갑자기 허리에 통증을 느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통증이 없어지겠지 하며 허리에 파스를 부쳤는데 저녁이 될 때는 도저히 일어서기도 어려웠습니다. 토요일 아침을 맞아 어머니는 김치를 담든다고 주방에서 일을 하는데 도와줄 수 없어 안타까워하며 왜 이런 고통이 찾아왔을까 생각하던 중 이런 통증에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닥쳐왔을 때에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본문에서 감사하는 시인의 삶을 소개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감사(1절)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감사해야 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토브).
하나님은 인자하시다(헤쎄드).


선하심이란 히브리어 토브(ב ו ת, 2896)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좋은, 선한, 선한 것’입니다. 토브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후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을 토브라고 합니다. 특히 레위 여자가 아들을 낳았을 때 그 아들의 준수함을 보고 석 달을 숨겼다고 합니다(출애굽기 2:2,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 준수함이란 단어가 토브입니다.

선하심이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며 사람의 눈에도 준수하게 보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인자하심이란 히브리어 헤쎄드(דסה, 2617)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된 의미는 ‘인자, 아름다움, 은총, 자비’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선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에게 네가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한 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 뿐이라고 깨우쳤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것은 세상 모든 질서가 무너지고 가치가 흔들릴지라도 하나님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감사하려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아야 합니다(시편 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기독교 신앙은 머리로 인식하고 아는 정보가 아닙니다. 반드시 내가 구체적인 체험을 통하여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아야 한다고 고백합니다.

맛보아(타암) 라는 단어는 음식을 먹을 때 맛을 보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알지어다(라아)는 눈으로 직접 목격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맛보아 안다는 것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체험을 통한 앎을 말합니다.

야곱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들판에서 돌을 베개로 삼아 잠을 자려고 할 때 내가 언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생각하며 깊은 시름에 잠겼습니다. 야곱의 미래가 불투명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이 여기 계시는 것을 내가 몰랐구나 하고 그곳을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맛보아 알게 된 후의 야곱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근심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둘째, 모든 주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2∼3)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서울에 전차가 운행하던 때에 목사님과 권사님이 함께 전차를 타고 심방을 가던 중에 권사님이 어느 대학생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하더랍니다. 공교롭게도 그 대학생이 권사님에게 나는 불자라며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하더랍니다. 대학생은 손에는 커다란 법전이 들려있고 권사님은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목사님이 그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권사님이 대학생에게 불자면 한번 물어봅시다. 석가모니의 무덤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자 대학생이 석가모니의 무덤이 있다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때 권사님이 뭐 때문에 죽은 사람을 믿느냐?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다고 말하는데 목사님의 마음에 어떻게 저런 지혜가 있을까 하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뛰어나신 이유는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종교에서 신봉하는 신들과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다른 신들과 무엇이 다를까요?
그것은 다른 신들 예를 들면 불교의 석가모니와 이슬람교의 마호멧은 창조의 신이 아닙니다. 피조물 가운데서 다소 뛰어난 모습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신들보다 뛰어나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뛰어난 하나님으로 세상을 힘으로 능력으로 다스리신 것이 아니라 인자하심 즉 사랑으로 다스리셨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신들보다 뛰어나신 것이 무엇일까요?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기사를 현대인의 성경에서 큰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큰 기적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모든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후에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을 부활의 생명으로 회복하신 것이 큰 기적입니다.

셋째, 하늘을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5) 참조 4-9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을 지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늘은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가운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는 내용처럼 하늘은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실현된 곳입니다.

하늘은 부활 생명이 거하는 곳입니다.

세상 어느 신도 하늘로 올라간 신은 없습니다.
하늘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사람들의 눈으로 보는 푸른 창공과 같은 하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늘이란 하나님의 주권이 완전하게 실현되는 곳을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후 40일 동안 세상에 머무셨고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는 현장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늘이란 부활 생명이 거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이란 부활 생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을 말합니다.

무당이란 그의 몸에 신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각 나라마다 몸에 모시는 신이 그 나라와 문화의 특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한국의 무당은 주로 조상신들이 몸에 들어와서 거주한다고 합니다.
중국은 한국처럼 조상신이 아니라 영웅신들이 몸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서구사회에서는 조상신도 아니고 영웅신도 아닌 친구의 신이 몸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한국의 무당들이 조상신이 몸에 들어오는 이유는 유교문화의 전통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당의 몸에 조상신이 들어온다는 것은 귀신들이 조상의 신으로 가장하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푸른 하늘, 우리가 딛고 선 땅, 온 세상을 밝히는 해,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은 달과 별들을 보면 세상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 인자하신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영원토록 인자하신 하나님에게 감사합니다.

하늘(샤마임)을 지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늘이란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이루어진 곳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에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늘(샤마임)이란 사역, 비전, 실존
하늘을 창조하셨을 때는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기 이전입니다. 하늘을 만드신 사건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것을 아셨다는 것을 계시합니다. 왜냐하면 하늘이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곳이며 부활의 생명이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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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6-11-27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44)

12월의 성구 / 원수를 위한 기도(마태복음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But I tell you: Love your enemies and pray for those who persecute you.) 


2016년 매월 성구 암송 자료를 주보와 함께 나눠드렸습니다. 자료를 참조하여 지난 성구들을 함께 정리해보겠습니다.

오늘은 12월의 성구를 소개합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님의 말씀은 명령입니다.
과연 이 명령에 따라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까? 가장 어렵고 힘든 명령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려운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원수, 핍박하는 자, 기도, 사랑이라는 중요한 용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원수(怨讐)

한글사전에서는 ‘원한이 맺힐 정도로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나 집단’
 

헬라어 ‘에크트로스’는 ‘에크토스’에서 파생한 단어라고 합니다. 에크토스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합니다.


첫째는 대적(對敵), 원수(怨讐)


치명적인 손해를 준 사람

예를 들면 부모를 살해한 사람 또는 사업을 망하게 하거나 결정적인 피해를 준 사람을 말합니다.

둘째는 소극적인 의미로 미워하는


마태복음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서로 마주보고 섰을 때 상대방의 뺨을 치려면 나의 오른 손이 상대방의 왼편 뺨을 때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상대방의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상대방을 힐 수 있는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뒤에서 뺨을 치는 경우
둘째는 오른 손을 비틀어서 오른편 뺨을 치는 경우
셋째는 왼손잡이의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결국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만나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에서 원수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합니다.

어느 농촌 마을의 노부부들이 스피드 게임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자가 할머니 뒤에 ‘천생연분’이란 단어 카드를 들고 서 있으면 마주보고 있는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천생 연분’이라는 단어를 설명하여 할머니가 그 단어를 맞추는 게임입니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나와 당신과의 관계를 무엇이라 하느냐?’ 라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주저하지 않고 ‘원수’ 라고 대답합니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다시 ‘두 글자가 아니고 네 글자’ 라고 하자 할머니는 ‘평생 원수’ 라고 대답하여 모두가 크게 웃었습니다.

노부부가 오랫동안 함께 동거하며 살았지만 원수와 같은 관계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노부부의 모습에서 가족이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愛)


마태복음 5:40∼42,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사랑이란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사모님에게 어느 잡지사 기자가 ‘목사님과 살면서 혹 이혼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사모님이 대답하기를 ‘이혼은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죽이고 싶은 생각은 해본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부흥사도 농촌의 이름 없는 노부부 모두에게 공통된 것은 부부로 살아갈지라도 사랑이 충만한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목사님과 스님이 대화를 하던 중 스님이 기독교는 불교보다 낮은 차원의 윤리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는데 불교에서는 원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스님은 일생을 살면서 마음속에 미워하거나 싫어했던 사람이 없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스님이 있다고 대답을 하자 스님에게 그렇습니다. 성경은 그 사람을 원수라고 말한다고 깨우쳤다고 합니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가족들 중에 미운 사람은 없습니까?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의 출발점은 바로 미워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핍박자(逼迫者)

마태복음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

기도(祈禱)

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기도는 상황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기도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처럼 온전해지려는 것.

어떤 문제를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물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환경과 상황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 기도할 때 우리가 누리는 최대의 축복은, 기도하는 사람 자신이 변화된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미움을 해결하는 가장 실제적인 능력은 기도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자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신앙

예수님을 닮아가는 신앙

고린도전서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린도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빌립보서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첫째, 믿음의 사람(야고보서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믿음의 사람은 믿는 것을 행함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살아가겠다는 믿음을 날마다 고백하고 주장해야 합니다.
믿음이 만능열쇠처럼 인식되고 도깨비 방망이처럼 사용되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둘째, 소망의 사람(요한일서 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소망의 사람은 세상의 가치관과 유행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관리하고 지켜야 합니다.

오늘의 현실은 너무 많은 정보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넘치는 정보들에 의하여 시달리고 있습니다. 소망의 신앙은 분명한 정보를 가져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소망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사도행전 1:11,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소망의 신앙은 나는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는 확신만 갖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모두에게 임하기를 소원하며 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소망의 사람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지혜로운 처녀와 같이 등과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요한계시록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현대교회의 상징은 십자가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교회를 상징하는 것은 촛대입니다. 촛대를 메노라 라고 합니다. 메노라는 일곱 개의 촛대를 말합니다.

일곱 개의 촛대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숲에서 불이 피어오르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에서 나타난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출애굽기 25:31∼40에서 성막을 만들 시절의 메노라 제작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가 소개됩니다. 메노라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빛을 상징한다고 한다. 

성전은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합니다.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습니다.
성소에는 진설병상(떡상), 분향단, 등대(촛대)가 있습니다.
소망의 사람은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은 소망의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의 빛을 보게 됩니다.

셋째, 사랑의 사람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오늘의 교회가 받을 책망이라고 하겠습니다.

에베소교회를 행한 책망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의 신앙의 모델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지름길이라고 하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와 같은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6. 25 사변 직후 나병 환자 수용소에 미국 로터리 클럽 회원들이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미국에서 파견한 간호원 선교사가 나병 환자의 고름이 흐르고 있는 상처를 치료하는 모습이 포착되었습니다. 한 사업가가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사진을 찍으면서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백만 불짜리 가치가 있는 사진이다. 그러나 나는 누가 나에게 백만 불을 주어도 이 일은 못할 것이다.” 

간호원은 사업가에게 “나도 그 일을 못합니다.” 이 대답을 듣고 사업가는 당황하면서 말하기를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소?” 라고 물었습니다. 간호원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자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감정에게 이끌리기 보다는 의지의 지배를 받도록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없을 때는 감정이 먼저 작용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있으면 감정보다는 의지가 감정을 통제합니다.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lex talionis)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당한 것만큼만 보복하는 법
만일 눈을 잃었으면 눈만 상하게 해야 합니다. 만일 눈 이외의 몸에 해를 가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신분의 관계를 초월한 법
만일 주인이 해를 입은 것과 노예가 해를 입은 것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보상하지 않았던 시대에 신분에 관계없이 동일하게 보상하도록 법으로 규정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의 율법보다 앞선 함무라비 법전은 귀족(mārū awēlim)의 눈을 멀게 했을 때는 평민(muškēnu)의 눈을 멀게 하거나 뼈를 부쉈을 땐 은으로 지불할 수 있었고, 노예(warad awīlim)의 눈을 멀게 했을 경우 평민의 경우 지불해야 하는 돈의 반만 지불하면 됐다.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사회가 강조하던 법의 울타리를 넘어서 원수와 핍박자도 사랑의 대상으로 위하여 기도해야 할 대상으로 포용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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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 / 2016-12-4

십일조 신앙(창세기 14:17∼24)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21.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22.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23.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24. 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찌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 

성경을 어떤 관점으로 읽느냐에 따라 성경의 내용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읽게 됩니다.


예를 들면 어느 술주정뱅이가 신약 성경을 읽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것과 마지막 유월절 잔치에서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셨다는 이야기를 읽고 결론을 이렇게 내렸다고 합니다.


예수는 포도주로 시작하여 포도주로 일생을 마쳤다.

또 다른 사례는 구약 성경을 읽던 사람이 창세기 14장에서 십일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 3장에서 또 십일조 이야기를 읽은 후에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구약은 십일조로 시작하여 십일조로 마친다.

질문을 하겠습니다.

한 주간 수입이 999불이라며 십일조는 얼마를 드려야 할까요? 아마 모두가 99불 90전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99불 90전이란 성경적인 대답이 아니라 수학적인 대답입니다. 


십일조에 대한 성경적인 신앙을 소개하기 전에 십일조에 대한 잘못된 신앙을 몇 가지 정리해 봅니다.

첫째, 십일조의 구분 방법

십일조는 전체 수입의 1/10이 아니라 수입의 전체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 예를 출애굽당시 마지막 재앙으로 사람과 가축의 초태생에 대한 죽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출애굽기 13:2, 12, 15, 34:19, 민수기 8:16).

출애굽기 13:2,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초태생은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은 히브리인의 사고에 의하면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지만 처음 난 것으로 모든 것을 대신하고 모든 것을 대표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13:12,
너는 무릇 초태생과 네게 있는 생축의 초태생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출애굽기 13:15,
그 때에 바로가 강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급 나라 가운데 처음 낳은 것을 사람의 장자로부터 생축의 처음 낳은 것까지 다 죽이신 고로 초태생의 수컷은 다 여호와께 희생으로 드리고 우리 장자는 다 대속하나니. 

애급에서 장자와 초태생의 죽음은 단 한 사람과 한 마리가 아니라 전체가 모두 죽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계산적으로 1/10이 아니라 수입의 전체를 모두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십일조와 축복

말라기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십일조를 바치면 복을 받고, 십일조를 바치지 않으면 복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이러한 성경적인 근거가 말라기 3장 10절을 근거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말라기 3장 10절에서 십일조는 바치라는 것은 말라기 전체 문맥에서 십일조를 바치면 복을 주시고 바치지 않으면 바치지 않은 만큼 손해를 보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바쳐도 하나님이시고 십일조를 바치지 않아도 하나님이 되십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얼마를 드리면 그만큰 복을 약속하시고 드리지 않으면 그만큼 저주와 손해를 주시는 세속적인 가치관의 지배를 받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셋째, 십일조와 다양한 헌금

십일조를 구분한 후에 그것을 주일헌금, 감사헌금과 같은 여러 헌금으로 드려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분명하게 십일조로 드려야 합니다.

넷째, 부활 후 십일조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았다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며 신약 시대 특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십일조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았다며 십일조는 바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에 대한 성경적 신앙

성경에서 십일조를 처음 드린 사건은 창세기 14장에서 소개됩니다.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본문의 배경을 소개합니다.

십일조는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기 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창세기 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아브람 때에 있었던 것은 율법을 계시하기 전에 있었던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아브람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은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하였고 아브람은 조카 롯이 선택한 반대 방향의 땅을 선택했습니다. 당시 소돔과 고모라는 화려한 곳이었습니다.

창세기 13: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롯이 선택한 소돔과 고모라는 당시에 물이 넉넉하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급 땅과 같았다고 합니다(창 13:10).

소돔과 고모라 지역에 아홉 명의 왕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네 명의 왕들과 다섯 명의 왕들이 서로 동맹을 맺고 서로 전투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소돔과 고모라에 거주하던 롯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모든 소유가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아브람은 집에서 훈련한 318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롯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모든 소유를 되찾아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돌아오는 길에 소돔 왕과 살렘 왕이 아브람을 환영합니다.

이제 본문을 함께 읽어가며 소개하겠습니다.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제사장이었더라

소돔왕과 살렘 왕이 아브람을 환영할 때 살렘 왕은 아브람을 이렇게 환영했습니다.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아브람이 318명의 사람으로 다섯 왕의 동맹국과 싸워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아브람이 잘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니라 천지의 주재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아브람으로 하여금 이기게 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얼른 살렘 왕의 환영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고 얼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처음으로 드려진 십일조 사례입니다.

21.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소돔 왕은 사람만 내게 보내고 물품은 아브람이 취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소돔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2.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23.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24. 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찌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 

아브람이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드렸습니다. 과연 멜기세덱이 누구일까요?

히브리서 7:1∼3,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멜기세덱은 누구입니까?
1. 살렘 왕 - 평강의 왕
2. 지극히 높으신 제사장
3. 의의 왕 - 하나님과의 관계
4. 아비 어미도 없는 왕
5. 족보도 없는 왕
6.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왕
7. 하나님의 아들
8. 항상 제사장(영원한 제사장)

멜기세덱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곧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아브람이 십일조는 누구에게 드렸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십일조에 대하여 말씀하시거나 가르치신 않은 이유는 이미 세상에 오시기도 전에 율법이 주어지기도 전에 아브람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으셨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브람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았던 멜기세덱 왕은 아브람이 다섯 동맹의 왕들과 싸울 때에 이미 은혜를 베풀어 아브람으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전투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내가 잘 싸워 이긴 줄 알았으나 살렘 왕을 만났을 때 비로써 내가 잘 싸운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적극적인 후원과 지원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아브람이 전리품으로 얻은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드린 것입니다.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내 죄 값을 지불하여 주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은혜의 고백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가르침은 37가지라고 합니다. 그 중에 재물에 대한 비유는 17가지로 구분됩니다. 그만큼 재물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재물에 대한 신앙을 소개합니다.

마태복음 6:24b,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재물이란 헬라어는 ‘맘몬’ 이라고 합니다. 맘몬은 ‘돈 귀신’ 이란 뜻입니다. 돈이란 단순한 재물이 아니라 돈에 인격이 있고, 돈에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이 있다’(마태복음 6:21)

십일조 신앙은 내 삶이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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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 / 2016-12-11

너희 신앙을 확증하라(고린도후서 13:5)

- confirm your faith.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Examine yourselves to see whether you are in the faith; test yourselves. Do you not realize that Christ Jesus is in you--unless, of course, you fail the test?    

신앙을 기준으로 세 종류의 사람을 생각합니다.

첫째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
둘째는 다른 신을 믿는 사람
셋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을 믿지만 올바르게 믿는 사람과 잘못되게 믿는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확증하라고 하셨습니다.

한글개역 성경에서 ‘믿음’이란 단어를 검색하면 ‘믿음’ 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 수가 225구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225구절 중에서 구약에서는 단 한번만 사용되었고 나머지 224구절은 신약에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구약시대에 믿음이란 단어가 자주 사용되지 않았던 이유는 믿음이란 곧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신약에서 믿음이란 단어가 자주 사용된 것은 사도들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세계로 뻗어난 교회가 다양한 사회 문화와 종교들과 충돌하면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고백하고 나타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착한 양심(디모데전서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구약에서 믿음이란 단어가 하박국 2장 4절에서 한 번 사용되었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구약 하박국서에서 믿음이란 다른 말로 ‘정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정직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정직으로 부정하고 포기하는 것이 오늘의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어느 교회에 아주 대조적인 두 교인이 있었습니다.
한 교인은 만나는 사람에게 ‘할렐루야!’를 크게 외치며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반면에 또 한 교인은 사람을 대하는 것이 부끄럽고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조차 매우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런데 할렐루야를 외치던 교인의 시어머니가 노환으로 인하여 치매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자 얼른 노인 요양원으로 모셔놓고 찾아가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며 돌보지 않고 있었습니다. 또한 수줍어하며 부끄러움을 많이 타던 교인의 시어머니가 치매 증세로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하는데도 매주일 정성껏 시어머니를 모시고 주일 예배에 참석합니다. 두 교인의 모습에서 과연 어떤 교인이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믿음이란 사람들 앞에서 할렐루야를 크게 외치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는 용기가 없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부끄럽지만 치매로 인하여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운 행동을 할지라도 그 영혼을 사랑하고 그 생명을 사랑하여 주일마다 함께 모시고 나와 예배하는 예배자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오늘 우리 모두는 과연 내가 믿음에 있는가 우리 자신들을 시험하고 또 확증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착한 양심을 갖고 정직하게 살아가면 반드시 세상을 이기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요한일서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2016년 12월 11일 주일을 맞는 오늘의 성구는 출애굽기 23장 8절 말씀입니다.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매일 오늘의 성구를 카카오 톡으로 발송합니다. 제가 보내는 성구를 받는 사람이 대략 100명입니다. 이 성구를 받고 어떤 사람은 50명에게 전달한다고 합니다.


송나라 때 어느 재상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값진 보석을 들고 재상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보석은 쉽게 구할 수 없는 희귀한 보석입니다. 재상님께 드리려고 가져왔으니 받아주십시오.”

그러자 재상은 대답했습니다.

“나에게도 그에 못지않은 귀중한 보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값비싼 보석을 보고도 탐낼 줄 모르는 내 마음입니다. 만약 내가 그대의 보석을 받게 되면 그대는 값비싼 보석을 잃게 되고, 나도 내 마음의 보석을 잃게 되니, 어서 도로 가져가십시오. 나는 내가 가진 보석으로도 충분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죄의 유혹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착한 양심으로 정직함으로 세상을 다스려야 합니다.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가 좋은 나라가 아닙니다. 송나라의 재상처럼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일군들이 있는 나라가 좋은 나라라고 하겠습니다.

이민자들은 먼저 내 조국이 좋은 나라로 세워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들이 살아가는 미국 또한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도록 각자가 맡은 자리에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오늘 우리 모두는 과연 내가 믿음에 있는가 우리 자신들을 시험하고 또 확증해야 하겠습니다.

영혼 구원(베드로전서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믿음이란 착한 양심을 갖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착한 양심을 갖고 정직하게 살아가므로 죄와 유혹이 많은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반주자로 봉사하는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님은 불자로 사찰에 열심히 다니십니다. 한번은 반주자가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이 그 어머님을 만난 후에 반주자의 어머니를 전도 대상자로 결정하고 기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반주자의 어머니를 찾아가서 과일도 사드리고 어느 성공한 기독인의 간증집도 선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났을 때 이제부터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세요! 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반주자의 어머니가 제가 일생동안 부처님을 섬겼는데 나이 들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교회에 다니겠습니까? 하고 정중하게 거절했더니 그 목사님이 예수를 믿지 않으면 삼대가 저주를 받습니다! 라고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 후부터 반주자의 어머니는 내가 죽으면 죽었지 예수는 안 믿는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몸이 불편하여 어느 봉사 단체의 도움을 받아 병원에도 가고 때로는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기도 하는데 그 봉사 단체의 자원 봉사자가 목사님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목사님들이 한 두 세 차례 만나면 반드시 저희 교회에 나오세요! 하고 말하는데 이 목사님을 교회에 나오라는 말을 하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한 달이 지난 때에 반주자의 어머니가 자원 봉사자로 수고하는 목사님에게 ‘왜 목사님은 교회에 나오라’고 하지 않으세요?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교회에 나오라고 이야기해서 모두 교회에 나온다면 왜 교회에 나오라고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에 나올 수 있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 제가 할 일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처럼 능력이 있어서 한 번 설교하면 하루에도 수천 명씩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내게 베드로와 같은 능력은 없지만 자원봉사자와 같은 믿음의 삶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이 시간 과연 나는 믿음에 있는가를 내 믿음을 시험하고 확증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을 확증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는 착한 양심을 갖고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둘째는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셋째는 생명을 구원해야 합니다.

고대 희랍에 통나무 철학자라고 부르는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는 손에 양초를 켜들고 거리를 배회했다고 합니다. 왜 밝은 대낮에 양초를 켜들고 다니는가? 물어보면 ‘세상이 너무 어둡기 때문’ 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거짓이 정직을 무시하는 세상
권력으로 진리를 짓밟는 세상
생명을 구원하지 못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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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2016-12-18)

영과 육(요한복음 6:60∼65)


2017년 신앙 실천을 위한 목표를 ‘영의 사람으로 살아가자!’ 라고 정했습니다.
(Let’s live as a spiritual person.) 


왜 영의 사람으로 살아야 할까요?

(도입 이야기 #.1)
최근 일본에서 사후 이혼이 증가하는 추세라고 합니다. 사후 이혼을 신청하는 사람은 주로 여성들인데, 여성들이 사후 이혼을 신청하는 이유는 “결혼 생활 중 남편과 시댁 식구에 불만이 있었거나, 남편 사망 후 시부모 간병을 맡지 않으려는 여성들이 시댁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하기 때문” 이며, 심지어 ‘사후에 배우자와 다른 묘지에 안치되는 것을 희망하기 때문’ 이라고 합니다(일본의 가족 사회학 전문가 이노우에 하루요(井上治代) 도요(東洋)대학 교수).


사후 이혼이 급증하게 된 배경은 인간관계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도입 이야기 #.2)
어느 목사님께서 가슴에 통증을 느껴 병원에 갔더니 먼저 엑스레이 촬영을 해야 한다고 하여 촬영 후 결과를 살펴본 의사는 폐결절이 의심되므로 종합병원에 가서 컴퓨터 단층 촬영을 하라고 합니다. 컴퓨터 촬영 후에 진료를 맡았던 의사로부터 ‘암일 확률이 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좀 더 정확한 진단을 받으려고 서울의 암 전문 병원을 찾았습니다. ‘확실하지 않지만 CT상으로는 암 같으니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합니다. 입원 날짜를 정하고 집으로 돌아와 폐결절에 대해서 검색했는데 폐암 말기일 경우 20일 정도 생존할 수 있고, 수술할 수 있는 경우는 대략 5년 정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교회에 가서 엎드려 기도하는데 도저히 죽음을 받아드리기가 힘들었고, 오직 더 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주일 예배 시간에 교인들에게 건강 상태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하고 ‘살고 싶으니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교인들은 격려해주고 어떤 교인은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예약한 입원 날자가 되어 입원 후 각종 정밀 검사를 받고 나흘 때 되는 날 최종 검사 결과는 암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균이 폐에 침입해서 나타난 증상이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그 균은 생명을 위협하는 균은 아니라 3∼4개월간 약물 치료하면 될 것 같다고 합니다.  


퇴원 후 그간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교인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때 장로님께서 ‘고생하셨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크리스천으로서 죽을 준비가 안 되신 것 같네요. 하나님이 부르시면 따라가면 되는 건데. 그런 믿음도 없으세요?’ 라는 말을 듣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예, 아직 제 믿음이 부족한 것 같네요!’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만약 나에게 이런 일이 닥쳐왔다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요?

죽음은 누구나 겪어야 할 과정입니다. 문제는 그 죽음이 언제 어떻게 나를 찾아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나를 데려 가실지 모르지만 후회가 없는 삶을 살아가려면 육의 사람이 아니라 영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 63절은 영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육은 죽음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익한 것이지만 영은 죽음 앞에서 살려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The Spirit gives life; the flesh counts for nothing. The words I have spoken to you are spirit and they are life.   

요한복음 6장 63절의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이 어두워져서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빛에 대하여 증거 하려고 세례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때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주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갖다 주라는 말씀에 따라 하인들은 그대로 행했을 때 이제까지 맛 볼 수 없었던 최고의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을 찾아왔던 바리새인이며 유대의 관원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시며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이유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며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세상에서는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성공한 것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성공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수가 성에서 대낮에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자에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하시며 육신을 위한 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수를 마셔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38년 된 병자는 38년 동안 치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인생에 대해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으로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축사하신 후에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이 바로 그 선지자라며 그들의 왕으로 추대하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군중들의 심리를 아시고 나를 따르는 것은 표적을 인함이 아니라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의 사역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 현장에서 표적을 체험했던 사람들도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수천 년이 지난 후에 예수님의 사역을 성경의 문자를 통하여 알게 된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르게 믿는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육은 무익하고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영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스페인의 가수이며 작곡가 훌리오 이글레시아스(1943. 9. 23)는 장래가 기대되는 유망한 축구선수이었습니다. 1963년 10월 22일 자동차 사고로 일 년 반 동안 병원에 입원하면서 축구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 한 번의 사고 때문에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축구화를 신고 동료들과 함께 푸른 잔디를 마음껏 달릴 수 없었습니다. 그가 절망한 채 병상에 누워 있을 때 누구도 그를 위로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말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한창 뻗어 나가야 할 시기에 사고로 인하여 그의 꿈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이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간호사가 기타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는 간호사가 건네는 기타를 받아 들었고, 이날부터 그는 전혀 새로운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부상 때문에 축구 영웅이 되는 꿈을 접어야 했던 이 젊은이는 대신에 아름다운 음성으로 전 세계 사람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변화와 변질은 내용적으로는 변하는 것이지만 실은 전혀 다는 변화를 의미합니다. 변화는 긍정적인 변화라고 한다면 변질은 부정적인 변화라고 하겠습니다.

육체적인 사고 사람을 변질시킵니다. 더 이상 육체로 무엇을 할 수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은 육체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도록 자극하여 전혀 다른 일을 위하여 헌신하게 합니다. 이러한 것을 변화라고 합니다.

변화를 원하십니까?
변질을 원하십니까?

기독교는 변질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신앙입니다.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된 특별한 존재

육의 사람은 세상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육의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은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 아들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미리 받아 먼 도시로 나가 그곳에서 많은 유산을 갖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 많던 재물은 모두 없어졌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남의 집에서 돼지를 키우며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를 씹으면서 배고픔을 달랠 때 비로써 아버지의 집이 그리웠습니다. 이제는 아버지의 집에서 아들이 아니라 하인으로 살며 배부르게 먹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찾아가며 작은 아들은 내가 하나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다고 깨달았습니다. 육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 집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반갑게 맞아주며 너는 잃었다가 다시 얻은 내 아들이라고 하며 아들에게 새 옷을 입혀주었고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으며 발에는 새 신발을 신겨주고 송아지를 잡아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육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작은 아들로부터 깨달아야 합니다.


혼의 사람은 세상에서 인정을 받고 살기를 원합니다. 인정을 받으려고 어떤 사람은 지식을 쌓아 학위를 받고, 또 어떤 사람은 재능을 개발하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종교에 심취하기도 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은 작은 아들처럼 유산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돌아왔다고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풀어주는 아버지에게 분노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모든 것이 큰 아들의 것입니다. 이미 작은 아들은 자기의 유산을 모두 받아 다른 도시에 가서 방탕하게 살다가 아무 것도 없이 돌아왔습니다. 동생이 내 것을 축내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위해서 잔치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내 것을 내 허락도 없이 동생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에 화가 치솟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요!

혼의 사람은 자기 밖에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할까요?

영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육의 사람으로도 성공하였고, 혼의 사람으로도 성공했던 인물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고 바리새파 사람이었으며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당시에는 좋은 가문과 혈통 그리고 바리새인이라는 신앙으로 모두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대제사장으로부터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올 수 있는 공문서를 받았습니다. 그 공문서를 들고 당당하게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비추이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은 그 순간 땅에 엎드렸고 즉시 그의 눈은 어두워지고 말았습니다. 사울은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성안으로 들어갔으나 삼일동안 앞을 볼 수도 없었고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육의 사람도 혼의 사람도 모두 무너져버렸습니다. 그때 아나니아라는 제자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울을 찾아가 그에게 안수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찾아가 안수하여 그의 눈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사울은 육의 사람도 혼의 사람도 아닌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여러분 변화와 변질은 비슷한 내용 같지만 전혀 다릅니다.

변화는 긍적적인 의미로 사용하지만 변질은 부정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많은 지식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예전보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 사회 각계 각층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이전보다 더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지식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변화가 가능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사람은 영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2017년을 맞이할 때 모두가 영의 사람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쓰임받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람은 생명을 내려놓는 순교자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자기가 맡은 자리에서 말없이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바치려고 해도 이 시대가 생명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람은 오직 예수밖에 없다는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재벌의 아들과 딸이 자살하고 인기 연예인도 자살합니다. 그들이 자살을 하는 것은 돈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기와 명예가 없어서 자살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미혼 여성에게 한 남자가 다가와 사랑을 고백하더랍니다. 여자는 그 남자에게 나를 사랑하려면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남자는 여자를 사랑해야 하기에 하는 수 없이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이유가 예수를 믿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이렇게 교회를 출석하고 1년 10개월이 지났는데 어느 주일에 교회 맨 뒤 쪽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뭔가 온 몸에 전율이 흐르는데 곧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 이후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하여 교회에 출석한 것이 아니라 주님 없이 살 수 없다는 믿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런 신앙으로 거듭났더니 결혼도 쉽게 성사되었습니다. 

변화된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때문에 육체적인 고난이 닥쳐와도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순수하고 정결한 믿음의 사람으로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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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6-12-2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성육신이란 기독교 신앙의 매우 중요한 교리이며 동시에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육신 사건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영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십니다. 사람은 육체로 존재합니다. 육체는 영을 느낄 수 없고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이신 하나님이 육신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영을 느낄 수 있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성육신의 사건의 의미를 데미안 신부의 사역에서 찾아봅니다.

몰로카이 섬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찾아갔던 데미안 신부(Joseph Damien de Veuster, 1840∼1889)는 처음부터 나병환자들에게 ‘나의 형제들이여!’ 라고 그들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데미안 신부를 그들의 형제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형제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는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나병환자들을 움직이려고 데미안 신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와 나병환자들 사이에는 큰 벽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나병이 있고 나는 나병이 없습니다. 이 벽을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내가 나병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게도 나병을 주셔서 이들과 더불어 같이 살아가며 이들을 섬길 수 있게 하옵소서! 나의 전부를 드리겠습니다.”

얼마 후 데미안 신부의 몸에도 나병환자의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증세를 목격한 몰로카이 섬의 나병환자들은 데미안 신부가 ‘나의 형제여!’ 라고 부를 때 비로써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 사이에도 이렇게 큰 벽이 놓였는데 하물며 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과 육체로 존재하는 사람 사이에는 더 큰 벽이 놓여있습니다. 이 벽을 무너트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이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 즉 성육신((成肉身)이라고 하겠습니다.

성육신((成肉身)을 강생(降生, incarnatio) 이라고도 합니다. 강생이란 하나님이 사람으로 나타나신 것 곧 무한한 존재이신 하나님이 유한한 존재인 사람이 된 사건을 말합니다.

칼케돈신조에서는 성육신과 강생이란 예수님은 참 인간이며 참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니케아신조에서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셨다고 고백합니다.


성육신 사건의 의미를 소개합니다.

첫째, 구원을 위한 사건

불교가 성행하는 지역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던 어느 선교사가 하루는 스님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얼마를 걷다가 그만 선교사가 개미집을 밟았습니다. 선교사는 개미들을 향하여 ‘얘들아, 미안하다 그만 내가 너희 집을 밟았구나!’ 하고 개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선교사에게 ‘아무리 개미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할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정말 개미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하려면 이 다음에 반드시 개미로 태어나서 그 때에 개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라고 일러주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선교사는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는지 아십니까? 사람의 몸으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내가 개미가 되지 않으면 개미에게 말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도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 아들을 사람의 몸을 갖고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신 사건

하나님의 성품 중에 대표적인 것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십니다. 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육체로 존재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나타내려면 사람이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눈이 많이 내린 어느 겨울날 온 세상이 눈밭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참새 떼들은 눈 위에서 아무 것도 먹을 것을 찾지 못하고 하루 종일 하늘을 날아 다녔습니다. 날이 어두워 어느 초가집 처마 밑에서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마침 초가집 주인이 참새 떼를 보고 마당에 쌓인 눈을 쓸어버린 후 그 위에 참새들이 먹을 수 있는 잡곡들을 흩어놓고 참새 떼에게 소리칩니다. 얘들아, 이리로 내려와서 얼른 모이를 먹어라! 그러나 참새 떼는 주인이 서 있는 그곳으로 내려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베푸는 사랑이 참새 떼에게 전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시려는데 영적인 방법으로만 나타내신다면 사람들은 도저히 그 사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방법이 성육신 사건입니다.

셋째, 기독교 영성을 보여주신 사건

기독교 영성이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영지주의(靈知主義)라는 사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영지주의란 물질은 나쁜 것이므로 사람의 육체 또한 악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고 부정했습니다. 이와 같은 세상에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은 물질이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신 것입니다.

성육신 사건에서 드러난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과 세계를 분리하고 대립시키는 이원론을 거부하는 영성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세상을 부정하는 영성이 아니라 세상을 긍정하는 영성입니다. 중세 수도원 운동은 세상에서 거룩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수도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이 자신을 주셔서 사랑하신 이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영성에서 주의할 것은 피조물인 세상을 하나님의 위치에까지 높이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합니다.

로마서 1: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물론 세상은 잠시 동안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곳이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육신의 영성은 육체로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육체를 갖고도 얼마든지 거룩함을 드러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합니다.

성육신의 영성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을 추상적인 세계로 감추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드러내시려고 피조물의 세계 속으로 찾아오신 살아계신 인격입니다.

성육신의 영성이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죄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주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주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고 알려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성육신 사건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사건입니다.
성육신 사건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신 사건입니다.
성육신 사건은 타락한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영성을 약속하신 사건입니다.

결론

하나님은 특별한 인성을 새롭게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마리아를 통해 인성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죄와 모든 허물에서 자유롭게 된 인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두 가지는 첫째는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은 창조의 사역을 믿는 것입니다. 창조 사역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있는 영이 되게 하신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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