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스교회 요한계시록 주해 설교 목록
시작일 / 2019년 3월 17일∼6월 30일
번호 |
제목 |
본문 |
설교일 |
비고 |
1 |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
1:1, 22:21 |
03-17-19 |
파트리스 |
2 |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인가? |
1:1∼3 |
03-24-19 |
파트리스 |
3 |
속히 될 일 |
1:1 |
03-31-19 |
파트리스 |
4 |
그리스도의 계시 |
1:1 |
04-07-19 |
파트리스 |
5 |
가죽 옷과 어린 양의 피 |
창 3:21, 계 19:8 |
04-14-19 |
파트리스 |
6 |
부활 생명의 주 |
1:13∼16, 행 3:15 |
04-21-19 |
파트리스 |
7 |
네가 본 것 |
1:19∼20 |
04-28-19 |
파트리스 |
8 |
이 일 후에 |
4:1 |
05-05-19 |
파트리스 |
9 |
열린 문 |
4:1 |
05-12-19 |
파트리스 |
10 |
하늘 보좌 #.1 |
4:1∼5 |
05-19-19 |
파트리스 |
11 |
하늘 보좌 #.2 |
4:1∼5 |
05-26-19 |
파트리스 |
12 |
네 생물의 정체 |
4:6∼11 |
06-02-19 |
파트리스 |
13 |
어린 양과 두루마리 |
5:1∼8 |
06-09-19 |
파트리스 |
14 |
어린 양과 새 노래 |
5:9∼14 |
06-16-19 |
파트리스 |
15 |
인과 나팔과 대접 |
6:1, 8:7, 16:2 |
06-23-19 |
파트리스 |
16 |
흰옷 입은 주의 백성 |
7:14, 19:8 |
06-30-19 |
파트리스 |
파트리스교회 요한계시록 강해 #. 1 / 2019-3-17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한계시록 1:1, 22:21) |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which God gave him to show his servants what must soon take place. He made it known by sending his angel to his servant John.)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The grace of the Lord Jesus be with God's people. Amen.)
(도입 이야기)
부모의 혈액형이 모두 O형인 경우 태어날 자녀의 혈액형은 반드시 O형이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O형 부모에게서 A형 자녀와 B형의 자녀가 태어났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느 가정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날 유치원에 다니던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응급실에 입원했습니다. 수혈을 받기 위해 아들의 혈액형을 검사했는데 B형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아버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의 혈액형과 아내의 혈액형이 모두 O형이었는데 아들은 B형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남편은 “이 아들은 과연 누구의 아들일까?”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행복했던 집안의 분위기가 갑자기 냉랭해지면서 아내를 보면 자꾸만 어떤 남자일까? 하는 생각이 치솟습니다. 그때마다 아내는 남편에게 “나는 절대로 다른 남자와 부정한 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며 이혼했다고 합니다.
몇 년 후에 남편은 O형의 부모에게서 A형이나 B형 자녀가 태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더구나 부모 중 한 사람이 ‘봄베이(Bombay) O형’인 경우에는 A형도 B형도 태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두 사람 모두 ‘봄베이(Bombay) O형’ 이라면 AB형도 태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남편은 이혼할 때보다 더 심각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들의 혈액형이 B형인 것은 아내의 부정한 행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전개 이야기)
봄베이(Bombay) O형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에 이혼할 수밖에 없었던 한 가정의 비극적인 이야기처럼 요한계시록에 대한 잘못된 믿음과 지식 때문에 교회를 떠나거나 심지어 가족들과 헤어지는 안타까운 일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92년 10월 28일 시한부종말론의 가르침에 따라 공중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자녀들을 다니던 학교에서 자퇴하였고, 직장인들은 직장에 사표를 제출하고, 심지어 집을 팔아 전 재산을 바친 후에 주님과 함께 휴거될 것이라고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종말론에 대한 잘못된 지식과 믿음 때문에 사회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다미선교회 이장림목사).
최근에는 남태평양 피지섬이 지구상에서 마지막 도피처로 예비 된 곳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그곳으로 교인들을 집단 이주시킨 후에 함께 합숙하며 농장의 일을 하거나 상점에서 종업원으로 일을 시키며 심지어 집단 구타를 행하므로 인권을 유린했다는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던 사건도 있었습니다(은혜로교회 신옥주목사).
이러한 사건의 배경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잘못된 믿음과 지식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요한계시록을 읽기 전에 먼저 잘못된 정보와 지식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만일 잘못된 정보와 지식을 버리지 않는다면 봄베이(Bombay) O형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아내를 부정한 여인이라고 생각하여 이혼 할 뿐만 아니라 행복했던 가정을 한 순간에 포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어지럽히는 가르침이 아니라 종말에 대한 믿음을 깨우치기 위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대한 잘못된 신앙과 지식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선지식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잘못된 지식과 정보들 몇 가지만 소개하려고 합니다.
첫째, 칼빈이 요한계시록을 주석하지 않은 이유
칼빈은 성경 66권 중에서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65권의 주석을 발표했지만 요한계시록을 주석하지 못한 것은 요한계시록이 난해하고 어렵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칼빈이 요한계시록을 주석하지 않은 다양한 이유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칼빈이 활동하던 시대에 요한계시록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너무 많이 소개되어 어떤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분위기가 계속되므로 개혁자 츠빙글리와 루터는 요한계시록을 정경으로 받아드리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때에 칼빈은 또 다른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을 소개하여 더 혼란스럽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직통계시를 받아 칼빈도 하지 못한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수 있다고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잘못된 가르침이 교인들을 유혹하기도 합니다.
둘째, 부분적인 가르침과 해석
교인들은 요한계시록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곳을 찾아다닙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내용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과 또는 설교자들이 요한계시록 전체를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부분만 선택하여 가르치고 설교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에 대한 궁금증만 더 커졌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궁금증은 커져만 가는데 교회에서 들을 수 없었던 내용을 마치 신비하게 해석한다면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며 교회를 떠나고 심지어 가족들과도 헤어질 수 있는 용감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사례가 나타나게 됩니다.
셋째, 종말에 대한 잘못된 신앙
요한계시록의 결론은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합니다. 문제는 주님이 언제 어디에 오시는지 알려고 하는 지나친 관심과 호기심이 신앙의 질서를 흔들게 됩니다.
종말과 마지막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말일(The Last Day)은 최후 심판의 날을 말합니다.
말세와 종말(Last Day)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말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종말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한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강도가 주님과 함께 들어간 그 낙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종말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부터 마지막 날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그 때까지 그 모든 기간이 종말의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문제는 어느 날 어느 장소에서 누구와 함께 라고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강조하는 것은 성경적인 종말 신앙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도 그 날과 그 시는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이 알고 계신다고 분명하게 밝혀주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No one knows about that day or hour, not even the angels in heaven, nor the Son, but only the Father.)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읽고 해석하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직통계시(直通啓示)가 아니라 요한계시록을 성경 전체의 한 부분으로 읽을 수 있는 ‘통전적(通全的) 성경 읽기’ 라고 하겠습니다.
통전적(通全的)이란 ‘통할 통(通), 온전 전(全), 과녁 적(的)’이란 한자어로 성경을 성경 전체의 문맥과 주제를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통전적 성경 읽기라는 말을 평소에 자주 듣지 못하는 용어이기에 오히려 “예수로 성경 읽기” 라고 소개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주제는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에서는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말씀합니다.
신약에서는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아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예수로 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도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로 읽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반드시 예수로 읽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을 예수로 읽지 못하는 대표적인 거짓 정보는 짐승의 수 666과 베리 칩에 대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3:16∼18
16.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베리칩을 받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구원의 기준은 베리칩(VeriChip, Verification Chip) 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입니까?
구원의 기준이 분명하면 베리칩이나 다른 어느 것에 의해서도 흔들릴 수 없습니다.
구원에 대한 두 가지 가르침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둘째는 베리칩을 받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
두 명제를 놓고 구원의 기준이 예수님이라면 베리 칩이 구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예수로 읽어야만 합니다.
사도행전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요한계시록 7: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십사만 사천이란 수
요한계시록 7: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4: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문자적 해석 방법
십사만 사천이란 수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정확하게 십사만 사천 명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특정한 교단과 교주에게 소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상징적 해석 방법
십사만 사천이란 수를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라는 수를 곱하면 144가 됩니다. 144에 가장 많은 수 최고의 수 1000을 곱하면 십사만 사천이 됩니다. 따라서 십사만 사천이란 구약의 백성과 신약의 백성들 중에서 구원받은 백성들을 말합니다.
이제 요한계시록 1장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요한계시록은 누구의 계시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해석 방법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주체가 직통계시를 받은 교주가 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어떤 특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요한계시록을 해석하실 수 있는 주체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요한계시록에서 그 주체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5:1∼7
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인으로 봉하였더라.
2.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4.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양이더라.
7.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요한계시록 6: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인으로 봉한 것을 누가 뗄 수 있습니까?
어느 교단도 아니고 교주가 아니라 그 어린 양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어린 양은 2천 년 전에 갈보리 언덕에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성도들이 종말의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깨우치신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The grace of the Lord Jesus be with God's people. Amen.)
요한계시록은 1장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시작하여 22장 21절에서 ‘주 예수의 은혜’로 막을 내립니다. 성경 전체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요한계시록의 주제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이외의 것을 가르칠 때 주의해야 합니다.
주 예수의 은혜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 예수의 은혜는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요한계시록 22:16∼20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204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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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뉴욕나사렛교회 요한계시록 강좌 자료(주후 2015-12-10)
②. 파트리스교회 요한계시록 강해 #. 2 / 2019-3-17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인가?(요한계시록 1:1∼4) |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지난주일에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라는 주제로 설교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반드시 ‘예수로 읽어야 합니다.’ 예수로 읽어야 할 이유를 혈액형에 대한 이야기를 비유로 소개했습니다.
봄베이(Bombay) O형의 부모가 낳을 수 있는 자녀들의 혈액형은 O형뿐만 아니라 A형, B형, AB형의 자녀들이 태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혈액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면 배우자를 의심하여 단란한 가정이 파탄날 수 있습니다. 만일 요한계시록에 대한 성경적인 지식이 없다면 마지막 때에 부끄러운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예수로 읽는다는 것은 예수 이외에는 구원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을 가르치면서 어느 특정한 인물과 교회와 교단과 장소를 제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인가?
본문을 함께 읽겠습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세 개의 단어에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세 개의 단어가 요한계시록이 어떤 책인가를 알려주는 키워드(Keyword)가 됩니다.
1절에서는 계시(啓示, revelation)
3절에서는 예언(豫言, prophecy)
4절에서는 편지(便紙, epistle)
요한계시록은 계시, 예언, 편지라는 정의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997년 이란 단기 선교에 참여했던 ‘댄 바우만(Dan Baumann)’은 간첩죄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9주간 동안 고문을 받았는데 그때의 일을 회고하며 ‘아름다운 능력의 길 예수’ 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댄 바우만은 감옥에서 속히 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마음속에 ‘내가 이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댄 바우만은 그들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았고 감옥에서 빨리 나가는 것만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하나님, 억울한 죄를 뒤집어씌우고 고문하며 폭행하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댄 바우만은 자신을 심문하던 그 사람들의 영혼이 불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지옥과 같은 몇 주를 보내고 어느 날 감방에 들어와서 쓰러져 있는데 밖에서 간수들이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기독교인들을 이해할 수 없어. 그들은 매를 맞고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자꾸 오는지.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우리가 그들을 죽이려 하는데도 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때 댄 바우만은 자기 방에 도청장치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감방에서자기를 고문하던 간수와 이란을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
을 모두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 또 다른 간수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좀 알아. 전에 한번 들은 적이 있어.”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놀란 것은 그 중에 세 명이 예수를 영접했다고 합니다.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복음을 나누면서 “나도 저 사람들과 같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싶어. 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나도 가지고 싶어.”
그렇게 9주가 지났습니다. 이제 마지막 사형 판결을 받는 법정에 섰습니다. 그런데
판사가 판결문을 낭독하는데 무혐의로 석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내려와서 댄
바우만을 끌어안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렸기 때문에 댄 바우만은 육체적으로 고통스럽던 이란의 감옥에서 영적으로 자유로운 새 하늘과 새 땅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오직 예수로 읽어야 합니다. 예수로 읽는다는 것은 예수는 유일한 구세주가 되시며 영원한 생명이 되신다는 믿음과 하늘로 올라가신 그대로 오실 것을 확신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뿐만 아니라 성경을 읽을 때 댄 바우만과 같이 세상에서 육신적으로는 고통과 질병과 가난과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영적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인가?
Ⅰ.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일부분(2절)
②.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요한계시록은 성경 66권 중의 한 권으로 정경(正經, κανων. canon)으로 공인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정경이란 “하나님의 영감을 통해서 특정한 기간에 저술된 한정된 수량의 현존 문헌을 가리키는 것”을 말합니다(요세푸스 contra Apionem 1.42, 43).
구약 성경 39권은 AD 90년 얌니아 랍비 회의에서 공인되었습니다.
신약 성경 27권은 AD 397년 카르타고회의에서 공인되었습니다.
1.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2.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Ⅱ. 요한계시록은 특별한 책(1절, 3절, 4절)
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③.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④.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1. 계시의 책 - 계시서(啓示書)
계시란?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란 하나님의 구원 방법과 계획을 말합니다.
2. 예언의 책 - 예언서(豫言書)
예언이란? 믿음을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예언이 필요한 때는 좋은 시절이 아니라 힘들고 두렵고 고통스런 날입니다. 이런 때를 견디게 하는 것은 예언입니다.
3. 편지의 책 - 서신서(書信書)(2:1, 8, 12, 18, 3:1, 7, 14)
편지란? 말씀을 듣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방법으로 전달 할 수 없었던 시대에 편지를 써서 전달하므로 그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 시대에 기독교에 대한 핍박은 도미티안 황제 때에 가장 극심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도미티안 황제는 로마의 황제가 너희들의 주(Lord)가 되신다고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계시란 무엇인가?
계시를 다른 말로 묵시(黙示, Απōκάλυψις, apocalypsis, 아포칼립시스, 잠잠할 黙, 보일 示)” 라고도 합니다.
계시란 숨겨진 어떤 것이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이라고 하기 때문에 마치 요한이 계시의 주체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의 주체는 요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 계시가 필요할까요?
잠언 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계시를 다른 말로 묵시라고도 합니다. 계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할 수 있기 때문에 계시를 주셨습니다. 어떤 계시를 주셨습니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방법입니다.
골로새서 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계시란 구원의 방법을 각 시대에 따라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묵시는 아무 때나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별히 고난의 시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끝까지 참고 견딜 수 있는 믿음을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묵시가 왕성하게 주어진 시대는 구약의 마지막 말라기 선지자의 활동이 끝나고 더 이상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아 백성들은 신앙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환상(幻想. 변할 幻, 헛보일 幻. 생각 想)을 통한 묵시가 발달했습니다. 이 시대에 묵시문학이란 장르가 생겼습니다.
예언(prophecy)이란 무엇인가?
미래에 되어질 일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근거로, 현재에 경험되고 또한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구속사건을 알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그리스도와 구속의 이야기 그리고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
예언(豫言) -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
예언(預言) - 말씀을 맡아 전하는 것
성경에서 예언을 말할 때는 주로 말씀을 맡아서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서신이란 무엇인가?
서신이란 편지(便紙)를 말합니다. 편지는 사적 편지와 공적 편지로 구분합니다. 사적 편지는 개인에게 보낸 것으로 받는 사람이 읽어야 합니다. 공적 편지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읽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공적 편지로 회람 서신이라고 합니다. 회람 서신이란 아시아 일곱 교회가 편지를 돌려가며 읽는 것을 말합니다.
(맺는 이야기) 이솝 우화 ‘까마귀와 여우’
까마귀가 고깃덩이를 물고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여우가 어떻게 하면 고기를 빼앗아 먹을까 하고 꾀를 냈습니다.
여우는 까마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까마귀님, 까마귀님, 어쩌면 그리 아름다우십니까? 당신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한 번만 들어보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밑에서 들려오는 온갖 감언이설에 한껏 우쭐해진 까마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까악, 까악” 하고 울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까마귀가 물고 있던 먹이는 아래로 떨어져 여우의 차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단이 바로 이런 것을 노립니다.
무엇인가를 주는 것 같지만 우리가 그것을 잡으려는 순간 우리가 가진 것을 빼앗아가는 것이 사단의 수법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신비하게 해석하는 것처럼 성도들을 미혹하게 한 후에 구원의 신앙을 교주와 교단과 교회로 바꾼 후에 기존 교회들을 비난하고 오직 구원은 여기에만 있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면류관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세속의 것을 붙잡으려고 영생의 면류관을 내려놓으면 사단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빼앗아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일부분입니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소식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완성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예언과 계시와 편지의 형식으로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백성들이 교회를 어떻게 섬겨야 하며 마지막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계시(啓示) -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주는 것
* 구원의 방법과 계획
잠언 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골로새서 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예언(預言, 豫言) - 믿음을 지키게 하려는 것
* 예수에 대한 믿음
요한계시록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서신(便紙, 書信) - 말씀을 듣게 하려는 것
*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
요한계시록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니라.
2:11, 17, 29. 3:6, 13, 22.
인(引) - 어린 양, 징조(sign)
나팔 - 천사, 경고(warning)
대접 - 천사, 심판(judge)
♪ 235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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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스교회 요한계시록 강해 #.3 (2019-3-31)
속히 될 일(요한계시록 1:1, 22:6)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which God gave him to show his servants what must soon take place. He made it known by sending his angel to his servant John.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The angel said to me, "These words are trustworthy and true. The Lord, the God of the spirits of the prophets, sent his angel to show his servants the things that must soon take place."
* 속히 될 일(What must soon take place) - 곧 일어날 일
속담에 ‘구슬이 세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단편적인 지식과 정보를 하나로 연결해야만 바르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지난 두 주일에 소개했던 설교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요한계시록은 오직 예수로만 읽어야 합니다.
프리즘(Prism)은 빛을 굴절 분산시키는 광학도구를 사용하여 햇빛을 통과시키면 프리즘을 통과한 햇빛은 무지개 색으로 분해되어 영롱하게 나타납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들었던 성경에 관한 모든 단편적인 정보들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렌즈로 통과시켜 주님 오실 그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일까?
요한계시록은 계시의 말씀입니다. 계시란 하나님의 구원 방법과 계획이란 비밀을 알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언의 말씀입니다. 예언이란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주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편지의 말씀입니다. 편지는 직접 찾아가서 전할 수 없는 내용을 글로 적어 보낼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였고 예언하셨던 말씀을 글로 적어 보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속히 될 일’이란 무엇일까?
요한계시록을 읽고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자세는 먼저 요한계시록의 범위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범위를 성경 전체로 확장하는 것이 바람직한 성경의 교훈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22장 19절에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속히 될 일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속히”라는 단어가 요한계시록과 성경에서 사용된 말씀을 살펴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속히”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 수가 본문을 포함하여 8구절로 소개됩니다(1:1, 2:6, 3:11, 11:14, 22:6, 22:7, 22:12, 22:20).
“속히” 라는 단어가 사용된 모든 구절들을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제한된 시간 때문에 설교의 주제에 합당한 구절들을 살펴보면 ‘속히 될 일’이란 22장 6절에서 “속히 되어질 일” 이라고 소개합니다. 이어서 “속히 될 일” 이란 3장 11절, 22장 7절과 12절 그리고 20절에서 “속히 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히 될 일”은 “속히 오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기가 대략 기원 후 96년이라고 합니다. 2천 년 전에 속히 될 일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직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속히 될 일 즉 주님의 재림이 아직도 실현되지 않은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시간(時間) 개념(槪念)
속히 될 일에 대해서 시간 개념으로 해석하면 ‘빠르다’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속히 이루어질 일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당장 오늘 아니면 내일 아니면 내 생전에 오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목격했던 제자들은 그들이 살아있을 동안에 주님이 오실 것으로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면서 제자들은 그들이 만났던 주님에 대한 증거를 후대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복음서를 시작으로 신약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만일 주님이 제자들 생전에 오셨다면 성경이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실 주님이 오시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베드로후서 3장 8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다르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인위적인 방법이므로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1:6∼7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장소(場所) 개념(槪念)
속히 될 일에 대한 해석을 시간적으로 해석하면 반드시 오실 장소에 대한 궁금증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어디에’ 오실 것을 찾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느 특별한 장소를 마치 계시를 통해 받은 것처럼 소개합니다.
예를 들면 과천, 피지 섬, 브라질, 계룡산과 같은 곳이 될 것이라며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인물(人物) 개념(槪念)
속히 될 일을 시간과 장소로 해석하면 그 다음에는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어느 특정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1992년 시한부종말론의 이장림,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지상낙원 피지 섬으로 집단 이주시키는 사례(은혜로교회 신옥주), 두 증인 중 한 사람이라며 영원불멸의 교주(전도관 박태선),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므로 교인들은 전 재산을 정리해서 브라질에 마련한 4천만평의 땅으로 집단 이주하여 마지막 때를 준비하라는 교회도 있습니다.
영적(靈的) 개념(槪念)
속히 될 일이란 시간과 공간과 인물 중심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묵시문학의 특징인 영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영적 세계에서는 시간 개념과 장소 개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속히’라는 말은 ‘확실히’ ‘틀림없이’ 라는 속뜻으로 ‘반드시 될 일’이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속히” 라는 의미를 ‘문자적’으로 또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해석하면 본질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묵시문학의 특성을 전제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묵시문학에서 “속히” 라는 의미는 “확실히” 또는 “틀림없이” 라는 뜻으로 “속히 될 일”이란 “반드시 일어날 일”이란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속히 될 일’이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이므로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2천년이 지나도 오시지 않았기에 아마 오시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반드시 실현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전개 이야기)
미국 여성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펄벅 여사는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느 해 중국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그녀가 살던 마을에 백인 선교사의 가족들이 우리 마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신이 분노하여 가뭄이 계속 된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소문은 점점 분노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밤에 마을 사람들이 삽, 곡괭이, 쇠스랑 등 농기구를 들고 펄벅의 집으로 몰려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외국 출장 중이라 집에는 어머니와 어린 펄벅밖에 없어서 아무런 대책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집안에 있는 찻잔을 모두 꺼내 차를 준비하고 케이크와 과일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손님들을 초대한 것처럼 대문과 집안의 모든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어린 펄벅에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도록 하시고 어머니는 바느질감을 잡았습니다.
얼마 뒤 농기구를 든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대문이 굳게 잠기고 집안은 깜깜할 것이라고 여기고 횃불을 들고 펄벅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대문이 열려있어 마당으로 들어섰더니 모든 방문이 열려 있고 방마다 불이 환하게 켜진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또한 방마다 차와 케이크 그리고 과일이 차려진 것을 보고 어리둥절하여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멈칫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정중하게 마을 분들을 맞이하며 “어서 오십시오. 정말 잘 오셨습니다. 방으로 들어오셔서 차라도 한 잔씩 드시면서 말씀하십시오.” 그 말을 듣고 더 어리둥절 하는데 그들 중 어느 한 사람이 횃불을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가자 다른 사람들도 그를 뒤따라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구석에서 놀고 있는 아이와 어머니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차를 마시고 케이크와 과일을 먹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그토록 기다리던 비가 내렸습니다. 훗날 어머니는 어른이 된 펄 벅 여사에게 그날 밤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고 합니다.
“그날 밤 조금이라도 도망칠 방법이 있었다면 도망치다가 잡혀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살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막다른 골목에서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인지라 모든 것을 각오하고 그런 용기를 내어 보았단다.”
그리고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용기는 절망에서 생긴다.” 이 말은 펄 벅 여사가 절망적인 순간에 항상 떠올리는 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속히 될 일은 속히 오리라는 약속으로 반드시 오실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 주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았다는 것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사랑을 새롭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왜 주님께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직 오시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주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속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5: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ταχύ)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 급히(ταχύ) 사화하라 - 속히(ταχύ) 사화하라
(현대인 성경) 타협하라
(공동번역) 화해하여라
(새번역) 화해하도록 하여라
‘사화하다’(유노온, 능동형)는 상처를 준 사람이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사화(사과)는 상처를 준 사람이 해야 하고, 화해는 상처를 받은 사람이 해야 합니다. 사화와 화해가 이루어진 것을 합의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8: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 빨리(ταχύ) - 속히(ταχύ)
성도들이 속히 해야 할 일은 부활의 소식을 빨리 가서 알려야 합니다. 종말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부활의 소식을 빨리 알리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적인 종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만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지라도 여전히 유대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활의 소식을 전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소식을 함께 나누며 주님 오실 그 날을 함께 준비할 수 있는 믿음으로 무장해야 하겠습니다.
속히 될 일이란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께서 속히 오실 것이라는 사건입니다. 주님이 속히 오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속히 오실 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까?
20:15 -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21:27 -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그러므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야 합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이름은 등과 기름을 예비하는 사람입니다.
등과 기름을 예비하기 위해서 속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것으로 구원받은 것으로 신앙생활의 감격이 없고 감사가 없다면 교회에 다닌다는 것뿐이지 신앙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부족한 것이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을 자랑하며 즐거워 할 것입니다.
아쉬운 것은 요한계시록을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사람들이 “속히 될 일”에 대한 주제를 현실 세계에서 나타는 현상과 징조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시대의 징조와 현상은 잘 몰라도 등과 기름을 예비한 지혜로운 사람들만이 주님을 영접할 수 있다는 비유의 가르침과 같이 “속히 될 일”을 말씀하신 감추어진 은혜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속히 될 일”이란 용어가 요한계시록에서 두 번 사용된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1, 속히 될 일
22:6, 속히 되어질 일
속히 될 일 또는 속히 되어질 일은 무엇인가?
3:11, 속히 오리니(I am coming soon.)
22:7, 속히 오리니(I am coming soon!)
22:12, 속히 오리니(I am coming soon!)
22:20, 속히 오리라(I am coming soon.)
속히 될 일은 속히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속히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때는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기를 기준으로 대략 2천
년 전의 예언입니다. 2천 년 전에 예언한 내용이 아직도 성취되지 않았다면 그 예언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정말 그 예언을 믿고 기다리고 있을까요? 인간의 평균 수명이 80 또는 90이라고 한다면 속히 오실 것이란 예언을 믿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속히 오리라고 예언하셨을까요?
미래에 나타날 현상과 징조들을 알려고 할 것이 아니라 짧은 인생을 살면서 반드시 속히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신앙적인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신앙적인 삶은 무엇일까요? 속히 라는 단어가 사용된 성경에 소개된 말씀을 찾아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학창 시절에 시험을 치룬 줄 압니다. 시험 일자가 발표되면 모든 학생들이 시험공부를 합니다. 시험 일자가 중요합니까? 시험을 잘 치룰 수 있는 공부가 중요합니까? 시험이 목적이 아니라 시험을 통하여 학생들의 실력을 향상시키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속히 될 일은 반드시 오실 것을 의미합니다. 반드시 오실 주님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기다리는 것보다 다시 오실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삶이 중요합니다.
속히 오시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에게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입니까? 하고 질문했을 때 부활의 주님께서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속히 오실 주님의 때와 기한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는 성령을 받고 증인의 삶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 162장 신랑 되신 예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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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스교회 주일설교 요한계시록 강해 #.4 / 2019-4-7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요한계시록 1:1)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which God gave him to show his servants what must soon take place. He made it known by sending his angel to his servant John.
(도입 이야기)
어느 유치원 원생들이 야외학습으로 공원에 모였습니다. 원장선생님이 교사에게 보물찾기를 진행하기 위하여 아이들 모르게 보물을 감추라고 했습니다. 보물찾기 시간에 원장님이 아이들에게 이제부터 보물을 찾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도 아이들이 보물을 찾지를 못합니다. 아이들이 보물을 찾지 못하자 원장님은 보물을 감춘 교사에게 ‘보물을 어디에 숨겼느냐?’ 하고 물었더니 ‘아이들이 볼 수 없고 찾을 수 없는 교사의 눈높이에 맞춰 보물들을 감춘 것’이었습니다. 원장님은 보물이 감추어진 곳을 찾아다니며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돌멩이 위에 또는 작은 나뭇가지 위에 아니면 풀밭과 꽃밭에 보물들을 던져놓았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신나게 보물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전개 이야기)
성경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성경에 감추어진 메시아 예언은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도 있고 쉽게 찾을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라는 메시지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계시란 감추어진 것을 찾아내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메시아 예언에 대한 최초의 말씀은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최초의 메시아 예언을 ‘원시복음(primitive gospel)’ 이라고 합니다.
최초의 메시아 예언이 선포된 배경은 에덴동산의 모든 열매는 먹을 수 있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먹지 말라고 하셨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먹지 말라고 하였던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에게는 땀을 흘리면 일을 해야 한다고 하셨고 하와에게는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뱀은 저주를 받고 흙을 먹고 땅을 기어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최초의 메시아 예언이 선포된 후에 성경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끊임없는 싸움의 연속이라고 하겠습니다.
뱀의 정체는 사탄입니다.
여자는 물론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세상에 오시기 위해 선택된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마리아 숭배 사상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면 여자를 마리아라고 하면 풀리지 않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 그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2: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최초의 메시아 예언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원수가 될 것이고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지만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뱀이 여자에게 완전히 굴복당하고 쫓겨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 말씀에서 사탄은 큰 용, 옛 뱀,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뱀은 여자에게 내쫓김을 당했습니다.
이제 여자에 대해서 성경의 마지막 예언의 말씀 요한계시록에서 어떻게 말씀하는지를 찾아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2:1∼5
1. 하늘에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2.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4.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요한계시록 12장 5절의 말씀에서 여자가 낳은 아들의 정체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 최초의 메시아 예언으로 선언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12장 1절부터 읽어보면 이 말씀이 과거의 사건입니까? 아니면 미래에 나타날 사건입니까? 말씀의 문맥을 바르게 관찰한다면 미래의 사건입니다. 아들은 분명히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메시아 즉 예수를 낳은 여자는 마리아가 맞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사건은 과거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왜 미래의 사건으로 말씀하셨습니까?
문자적인 해석 즉 표면적인 해석은 여자가 마리아가 맞는 것 같지만 여자에 대한 이면적인 해석은 마리아라고 해석하면 문맥이 맞지 않습니다.
여자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여자는 마리아가 아니라 교회를 말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교회가 사탄의 유혹을 받게 될 것이지만 반드시 이길 것을 선언한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절을 읽겠습니다.
하늘에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하늘에 이적이 보이니 -
하늘이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늘이란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곳입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이 위로 올려져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이란 성 삼위가 되신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보좌가 있는 하늘이란 한 마디로 계시의 출처를 말합니다.
이적이란?
이적이란 헬라 단어는 성경에서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테라스(τέρας)는 기적을 의미합니다.
세메이온(σημείων)은 표적을 의미합니다. 표적이란 용어는 주로 요한복음에 사용합니다. 세메이온은 기적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싸인(sign) 즉 표시를 의미합니다.
하늘에 이적이 보였다는 말씀은 ‘하늘에 표시 즉 사인이 나타났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해를 옷 입은 한 여자란?
여자에 대한 해석을 다양하게 설명합니다.
1. 이스라엘 백성
2. 마리아
3. 교회(영적 이스라엘)
앞으로 12장을 읽게 될 때 자세한 내용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주제에 맞게 여자를 결론적으로 ‘교회’라고 해석합니다.
해와 달과 별이란?
성경에서 해와 달과 별은 왕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시편 89:36∼37
그의 후손이 장구하고 그의 왕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인 달 같이 영원히 견고하게 되리라 하셨도다.
시편 8: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이사야 26:17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음 같이 우리가 주 앞에서 그와 같으니이다.
해와 달과 별은 자손을 상징합니다.
요셉의 경우 어려서부터 아버지 야곱은 요셉에게만 채색옷을 입혔습니다. 채색옷이란 유대 전통에 의하면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는 상속자를 말합니다. 둘째는 가장 사랑받는 자를 말합니다. 다른 형제들에게 요셉은 미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런 요셉이 꿈 이야기를 하며 형제들의 마음을 더 괴롭혔습니다.
하루는 요셉이 꿈을 꾸었는데 밭에서 추수할 때 형제들의 단이 요셉의 단에 절을 하는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하늘의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요셉에게 절을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때 형제들은 요셉을 시기했지만 아버지는 요셉의 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꿈 이야기에서 해와 달과 별은 자손들을 상징합니다.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자손이 번성하듯 교회가 하늘의 은총을 받아 번성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붉은 용은 머리가 일곱 이며 뿔이 열이며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다고 합니다. 붉은 용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9절을 읽겠습니다.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옛 뱀 즉 창세기 3장 15절 말씀에서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에서 그 옛 뱀의 정체가 완전히 드러납니다. 옛 뱀의 정체를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정의합니다.
1. 큰 용
2. 옛 뱀
3. 마귀
4. 사탄
5. 온 천하를 꾀는 자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사탄의 음모가 교회를 무너트리려고 하지만 결국에는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가 반드시 사탄의 음모를 무너트릴 것이라고 분명하게 증거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탄의 전략에 대해서 미국의 몇몇 신학자들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사탄의 마지막 전략은 교회를 부흥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부흥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교회가 부흥하지만 복음이 없고 예수가 없는 교회와 복음으로 타락시키는 것이 최근 사탄의 전략이므로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두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1. 바벨탑에 갇힌 복음(행크 헤네그라프)
기독교 연구소를 설립하고 이단과 사이비 종교를 연구
2.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마이클 호튼)
형통복음과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교회에 대한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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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스교회 주일 설교 / 요한계시록 강해 #. 5 2019-4-14 고난주일
가죽 옷과 어린 양의 피(창세기 3:21, 요한계시록 7:14, 19:8) |
(도입 이야기)
덴마크의 작가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 4. 2~1875. 8. 4)’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새 옷을 입고 뽐내기를 좋아하는 임금님이 있었어요. 나라를 돌보는 것보다 옷 갈아입기를 더 좋아했어요. 임금님은 거울 앞에서 떠날 줄 몰랐답니다.
“내 모습 어때?”
“정말 멋있습니다.”
신하들은 임금님 앞에서는 칭찬했지만 돌아서면 흉을 보았어요. 뽐내기 좋아하는 임금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어요.
어느 날 두 사람이 임금님을 찾아왔어요. 이 사람들은 아주 특별한 옷감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었는데 그 옷감은 바보의 눈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신비한 옷감이라고 말했어요. 좋은 옷 입기를 좋아하는 임금님은 당장 이 사람들에게 궁궐의 방 하나를 주며 신하들에게 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언제든지 제공하라며 당장 그 옷을 만들게 하였어요. 두 사람은 베틀 앞에 앉아 마치 옷감을 짜듯이 베틀을 움직이고 있었어요. 여러 날이 지난 후 임금님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지요. 그래서 가장 신뢰하는 신하를 보내어 확인하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그 신하가 방으로 들어갔을 때 신하의 눈에는 아무 것도 안 보였어요. 그렇다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바보라고 말할까봐 아무 말도 못했어요. 드디어 임금님이 입을 바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신기한 옷이 완성되었다며 두 사람은 임금님에게 그 옷을 입혀주었어요. 임금님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옷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임금님도 바보가 되겠지요.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고 두 사람이 입혀주는 대로 옷을 입은 후 그 옷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려고 거리로 나갔답니다. 사람들은 임금님이 벌거벗은 것을 보도 아무 말도 못하고 뒤로 돌아서 웃기만 했답니다. 그러자 어느 한 어린이가 ‘임금님은 벌거벗었다!’ 하고 외쳤어요.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다 같이 ‘벌거벗은 임금님!’ 하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전개 이야기)
심판의 날에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 날에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부끄러운 모습일 수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의 옷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이사야 61:1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구원의 옷(Garments of Salvation)을 어떻게 입어야 할까요?
아담과 하와는 직접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옷을 만들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방법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직접 가죽옷으로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옷을 입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에 의한 구원의 옷을 성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가죽옷(창세기 3:21) - 죄를 덮어주는 옷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만든 옷은 “자기 의”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죄를 덮어주시려고 ‘가죽옷’을 만들어 입혔습니다. 가죽옷이란 죄를 용서받은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방법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 예증 #.1)
노아 홍수 때에 잣나무로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잣나무를 개역 개정 성경에서 ‘고페르나무’ 라고 합니다. 그리고 방주 안과 밖을 ‘역청’으로 바르게 하셨습니다. 역청을 ‘코페르’ 라고 합니다. 고페르와 코페르는 같은 문자로 발음을 나타내는 모음만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 고페르와 코페르의 뜻에는 ‘속죄’라는 뜻이 있습니다.
애급에서 나오기 전에 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른 집안에서는 장자의 죽음과 생축의 초태생이 죽는 일이 없었지만 양의 피를 바르지 않았던 집안에서는 장자의 죽음과 초태생의 죽음으로 인하여 큰 슬픔이 임했습니다.
(현실 예증 #.1)
2019년 10월 9일은 ‘욤 키퍼(Yom Kippur)’라는 공휴일은 ‘욤(Yom)’ ‘날(Day)’을 의미하고 ‘키퍼(Kippur)’는 ‘속죄(Atoinment)’를 의미합니다. 키퍼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고페르, 코페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곧 속죄를 받은 하나님의 의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 예증 #.2)
노아 홍수 후에 구원의 계시가 속죄제사로 말씀하셨습니다.
속죄제사는 개인이 바치는 제물과 백성 전체가 바치는 제물로 구분합니다. 개인적인 속죄제는 짐승의 머리에 개인이 안수하고 그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킨 후에 그 짐승을 잡은 후 피를 받아 제사장에게 드리면 제사장은 그 피를 성소 휘장 앞에서 일곱 번 뿌리고 그리고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회막 문 앞 번제단 밑에 쏟았습니다(레위기 4:6∼7).
그러나 백성 전체를 위한 속죄제사는 두 염소를 선택한 후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한 제물로 바치고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 염소라고 하여 광야로 보냈습니다. 이때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렸습니다(레위기 16:15, 18∼19).
속죄소가 있는 곳은 ‘지성소’입니다. 지성소까지 들어가야만 속죄가 해결됩니다. 이러한 속죄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마 27:51). 성소의 휘장이 둘로 나누어진 것은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히브리서 9: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세마포 옷 -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기 위한 예복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세마포 옷은 하얀 옷을 말합니다. 하얀 옷은 세탁을 잘 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 후 변화하신 주님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13∼15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은 인간의 방법에 의한 인간의 의라고 한다면 가죽옷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방법에 의한 의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로 약속하신 것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요한계시록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희어진 옷은 세마포 옷입니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적용)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요?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시편 132:16
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옷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이 외치리로다.
제사장의 옷을 입히셨습니다.
대제사장 옷은 청색, 자색, 홍색실로 만들었습니다. 에봇은 금실과 가는 베실로 만들었습니다.
청색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자색은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홍색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피 흘리신 것을 기억나게 합니다.
금실은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가는 베실은 흰색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나타냅니다.
오늘 우리들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인정받았으므로 반드시 제사장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제사장의 옷이란 가죽옷처럼 속죄의 피가 뿌려진 옷입니다. 가죽옷은 속죄제사를 통하여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일반적인 속죄제는 휘장 앞에 희생 제물의 피를 일곱 번 뿌렸습니다. 그러나 대속죄일에 드려지는 속죄제사는 아세셀 염소는 광야로 보내버리고 다른 염소는 그 피를 받아 지성소 안에 있는 속죄소 즉 시은좌에 뿌려야만 용서를 받았습니다.
구원의 완성을 계시하신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는 것은 세마포 옷을 입었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하나님의 의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 될 수 있습니다. 고난주간을 지내는 동안 하나님의 의로 인정받은 구원의 옷을 입고 내가 맡은 삶의 자리에서 구원받은 증거를 눈으로 보여주고 입으로 고백하는 구원의 증인으로 승리하는 복된 한 주간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184장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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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스교회
부활 생명의 주(사도행전 3:15, 요한계시록 1:13∼16) |
요한계시록 1:13∼16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부활 생명의 주란?
아주 오래 전에 남대문교회 배명준목사님이 권사님과 함께 심방을 가려고 당시 전차에 올라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이 갑자기 옆에 앉아있는 어느 대학생에게 전도하기 시작했답니다. 대학생은 손에 육법전서라는 두꺼운 책을 들고 있는 법대생이었다고 합니다. 권사님이 그 대학생에게 “학생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라고 말을 하자 대학생은 권사님에게 “나는 불자요! 석가모니를 믿습니다.” 하고 단호하게 거절하더랍니다. 목사님께서 차라리 가만히 있으면 좋으련만 왜 대학생과 논쟁을 하는지 어떻게 도와 줄 수 없을까 생각하는데 갑자기 권사님이 대학생에게 “석가모니 무덤이 있습니까?” 하고 묻더랍니다. 그러자 대학생이 “그럼요 당연히 무덤이 있지요!” 라고 대답을 하자 권사님이 “아니 왜 죽은 석가모니를 믿습니까? 살아있는 예수님을 믿어야지!” 라고 말을 하는데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 때 목사님께서 “지혜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생명의 주(the author of life, δὲ Ἀρχηγὸν τῆς ζωῆς)란 성경 전체에서 사도행전에서 단 한 번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생명의 주’란 여러 번역을 참조하여 살펴보겠습니다.
헬라어 - 생명의 저자(Ἀρχηγὸν τῆς ζωῆς)
새번역 - 생명의 근원이 되는 주님
공동번역 -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
NASB, NIV - 생명의 왕자(the Prince of life)
저자(著者)란? “책이나 글을 지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저자’란 ‘생명을 지은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생명을 지은 사람 그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생명을 지으셨기에 생명을 죽여도 그 생명은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이라고 하겠습니다.
지난 목요일 아침에 ‘실험실의 비밀’ 이란 동영상을 교회 카톡 단체방에 올렸습니다. 그 동영상을 확인하셨다면 거듭나야 하는 이유와 부활의 증거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분명하게 증거 한 것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기독론의 완성’입니다. 기독론이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죄 값을 지불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가 되셨으므로 사망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오르시어 보좌에 앉아계시다가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것을 말합니다.
기독론의 기초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이며, 또한 ‘교회론의 완성’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의 확실한 증거를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의 모습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인자 같은 이”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소개됩니다.
첫째, 예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
둘째, 영체로 오신 예수님
그러나 제가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인자 같은 이”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라고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나타나신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인자라는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사람의 아들과 같은 모습(요한계시록 14:14)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체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영의 실체를 눈으로 보여주신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 후 주님의 몸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몸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몸이셨기에 제자들이 만지려고 할 때 만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지금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영을 육체로 보여주신 사건 - 성육신 사건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육체를 영으로 보여주신 사건 - 변화산 사건
마태복음 17:1∼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둘째는 대 제사장의 옷(출애굽기 28:4)
그들이 지을 옷은 이러하니 곧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라 그들이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아론이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발에 끌리는 옷과 가슴에 금띠를 띠셨다는 모습은 대제사장의 의복을 갖춘 모습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의 속죄제물을 바침으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이신 예수님(다니엘 7:9)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다니엘 7장은 인자에 대한 예언을 말씀합니다. 인자는 곧 장차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 소개된 예수님의 모습과 다니엘 7장에 소개된 인자의 모습은 동일한 모습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인자 같은 이는 곧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이십니다.
공생애 기간 중 변화산에서 변모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은 천상에서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밧모섬에 갇힌 요한에게 자세하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모습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부활하신 영광스런 주님의 모습에서 장차 우리들도 이와 같이 변화될 아름다운 모습을 생각하며 현실에서 받은 아픔과 상처와 질병과 장야를 모두 털어버리고 그 날의 기쁨을 사모하며 믿음으로 당당하게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께서 인자와 같은 이로 나타나셨다면 훗날 부활 때에 우리들은 어떤 모습일까요? 주님과 같은 이로 일어설 것이 아닐까요?
비록 현실에서는 내 몸이 건강한 몸이 아닐 수 있습니다. 병들고 사고를 당하고 몸의 한 부분이 제 기능을 상실하고 그러나 그 날에는 반드시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을 기대하며 현실의 어려움과 고통을 견딜 수 있고 절망의 시간을 소망의 시간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신앙이 바로 생명의 주를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생명의 주를 믿기 때문에 현실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찾게
됩니다.
부활주일을 맞아 장차 우리들도 영광스런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그 날을 기다리며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부활의 주 생명의 주를 믿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삶의 자세를 부활이란 단어에서 찾아봅니다.
부활(復活, 다시 復. 살 活)이란 헬라어로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 라고 합니다.
anástasis는 ana(up, again) + histemi(to stand)의 합성어라고 합니다.
아나스타시스란 “다시 일어서다”는 뜻입니다. ‘다시 일어서다’는 의미를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회복(回復, 돌아올 回. 회복할 復)’ 이라고 하겠습니다. 회복이란 ‘원래의 상태를 되찾는 것’을 말합니다. 부활이란 세 가지 회복을 의미합니다.
1. 죽음에서 다시 일어서다(a resurrection from death) 죽음에서 회복
2. 도덕성의 회복(a moral recovery)
3. 영적 진리의 회복(a recovery of spiritual truth)
영적 진리의 회복(a recovery of spiritual truth)
영적 진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말합니다.
어느 장로님이 임종하기 직전에 목사님이 찾아와서 “이제 세상을 떠나게 되면 주님 계신 곳에서 영원한 생명의 삶을 누리게 될 줄 확신하십니까?” 하고 질문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장로님께서 “죽어봐야 알겠지요!” 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제가 성경 말씀 한 구절을 읽겠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하며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었다고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가장 잘 암송하는 말씀입니다. 함께 암송해볼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그런데 목사님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지 못 얻을지는 죽어봐야 알겠느니라.’ 이렇게 읽었더니 장로님께서 큰 소리로 ‘아니, 목사님! 왜 성경을 그렇게 읽습니까?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이렇게 읽어야지요!’ 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읽는 것을 바르게 읽으면서 왜 믿는 것은 바르게 믿지 못합니까? 하고 깨우치자 목사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바르게 읽고 바르게 믿겠습니다. 죽으면 영생을 얻는 줄 확신합니다. 이렇게 마지막 임종을 확인하고 그 다음 날 아침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영적 진리의 회복이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읽은 대로 믿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요한계시록 1:13∼16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영적 진리를 회복하려면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죽음에서 다시 일어서다(a resurrection from death)
세상에서 죽음이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죽음이란 영과 혼과 육의 기능이 죽은 것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는 육체의 죽음에서 반드시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죽음에서 다시 일어서야 할 것은 죽은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죽은 신앙이란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사도행전 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부활을 증언할 때 큰 무리가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사도들의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부활주일을 지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선지자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 말씀은 멸망할 니느웨 성을 향하여 가서 외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니느웨가 망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니느웨로 방향을 정하지 않고 정반대 방향 다시스로 가는 배를 선택했습니다. 당시 다시스로 가는 배는 자주 있는 것이 아니라 3년에 한 번 운항하는 것이었습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항구에서 만났다는 것을 정말 행운 중의 행운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욥바 항구를 떠난 배가 순탄하게 운행하던 중 갑자기 심한 풍랑을 만났습니다. 선원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많은 짐을 모두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돈을 포기하고 생명을 구하려는 상선의 선원들의 절박한 마음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풍랑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풍랑은 자연적인 원인이 아니라 신의 노여움이라 판단하고 각자 자기의 신을 향하여 풍랑이 잔잔해 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때 선지자 요나는 이 풍랑의 원인은 자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결국 바다에 던져진 요나 때문에 풍랑은 잔잔해졌습니다.
큰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니느웨로 가야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회복했습니다. 물고기가 요나는 니느웨로 토해내므로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대로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니느웨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늘은 파트리스교회가 세워진 후 처음을 맞이하는 부활주일입니다. 뜻 깊은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부활의 증인으로 다시 일어서는 것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도덕성 회복(a moral recovery)
양심에는 화인 맞은 양심과 선한 양심으로 구분합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은 도덕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원인은 언어의 질서를 파괴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목사를 주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교인들은 주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언어의 질서는 종이 자녀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자녀에게 종을 섬기라고 강조합니다. 이와 같은 언어의 질서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섬겨야 할 대상을 섬기라고 강요하기 때문에 세상도 언어의 질서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전서 3:16a
선한 양심을 가지라
keeping a clear conscience.
디모데전서 1: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히브리서 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줄을 확신하노니.
디모데전서 4: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도덕(道德)이란 사전적 정의는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나 바람직한 행동 규범”을 말합니다.
양심의 어원
양심의 사전적 정의는 자기 행위의 옳고 그름과 선악을 분별하는 마음.
양심(conscience)이라는 말은 원래 ‘함께(con)’ ‘안다(science)’는 두 단어의 합성어라고 합니다. 양심이란 ‘함께 아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와 함께 아느냐? 우선은 내가 나와 함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과 내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양심이란 하나님과 함께 아는 것을 말합니다.
가룟 유다(누가복음 22:3)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사단이 가룟 유다의 육체에 들어간 것이 아니겠지요. 영에게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는 영의 지배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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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스교회 주일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 #.7 / 2019-4-28
네가 본 것(요한계시록 1:19∼20) |
⑲.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⑳.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Write, therefore, what you have seen, what is now and what will take place later. The mystery of the seven stars that you saw in my right hand and of the seven golden lampstands is this: The seven stars are the angels of the seven churches, and the seven lampstands are the seven churches.
(도입 이야기)
교회 전통에 따르면 부활주일 다음 맞이하는 주일을 “신생아주일(新生兒主日)” 또는 “성(聖) 도마주일” 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여드레가 지난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있는 곳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했던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한 후에 인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도마가 잠시 쉬려고 지팡이를 땅에 꽂았는데 그 지팡이에서 싹이 나서 자라나 큰 나무가 되었는데 그 나무 옆에 성 도마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한 소년이 길을 걷다가 우연히 5달러 지폐를 주웠다고 합니다. 소년은 5달러를 줍고 얼마나 좋았던지 이런 일을 기대하며 매일 땅만 쳐다보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렇게 걷는 습관 때문에 허리는 굽어졌고 일생동안 길에서 주웠던 것은 단추 29,519개, 머리핀 54,172개, 수백 개의 동전뿐이었다고 합니다.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찾고,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과 방향이 결정된다는 교훈입니다.
(전개 이야기)
두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첫째는 왜 교회에 다니는가?
둘째는 왜 파트리스교회에 다니는가?
속담에 ‘시작이 반이다’ 라는 말처럼 시작이 정말 중요합니다.
서양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좋은 시작은 절반을 한 것이다(Well begun is half done)’
교회에 대한 성경적 신앙
첫째, 교회는 성전이 아니다!
예수님이 성전(요한복음 2:19∼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성도들이 성전(고린도전서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둘째, 누구 때문에 그 교회에 간다!
교회에 다니게 된 동기는 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예수님 때문에 그 교회에 가야 합니다. 만일 사람 때문에 누구 때문에 그 교회에 가는 것은 반드시 시험에 빠질 위험성이 아주 큽니다.
셋째, 예수님이 교회(사도행전 9:4∼5)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여러분, 사울이 예수님을 박해한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사울은 예수님을 박해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과 예수님을 전하는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곧 교회와 예수님은 동격이란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교회론(敎會論) 1:11∼16
⑪.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두아리다,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보내라 하시기로 ⑫.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⑬.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⑭.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⑮.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⑯.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아멘
사도 요한은 일곱 금 촛대에 거니시는 영광스런 예수님의 모습을 목격한 후에 그 발 아래 죽은 사람처럼 엎드렸습니다.
일곱 교회는 칭찬을 받은 교회도 있었고 책망을 받은 교회도 있었으며 칭찬과 책망을 동시애 받는 교회도 있었습니다. 세상 교회는 칭찬도 받을 수 있고 책망도 받을 수 있으며 칭찬과 책망을 동시에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교회는 영광스런 예수님께서 거니시는 교회라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실의 교회에 대해서 비난하거나 비판하면 곧 사울처럼 예수를 비난하고 예수를 비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네가 본 것(what you have seen)’입니다. 본문에서 본 것을 세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첫째는 네가 본 것
둘째는 지금 있는 일
셋째는 장차 될 일
장차 될 일(what will take place later)
장차 될 일은 ‘요한계시록 4장부터 마지막 22장’까지의 내용을 말합니다.
장차 될 일은 인과 나팔과 대접에 대한 말씀으로 유대 묵시문학의 표현 방식에 의하면 일곱 인(seal)은 징조(sign)를 말하고, 일곱 나팔(trumpet)은 경고(warning), 일곱 대접(bowl)은 실질적인 재앙(disaster)에 대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교회)에 관한 말씀입니다.
지금 있는 일(what is now)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소개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말합니다. 소아시아 지방은 현재 터키 지역을 말합니다.
네가 본 것은(what you have seen)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를 말합니다. 일곱 금 촛대는 교회라고 설명했기 때문에 의미가 분명합니다. 그런데 일곱 별에 대해서는 일곱 사자라고 설명했기 때문에 사자에 대한 해석이 다양합니다.
사자라는 단어를 직역하면 ‘천사’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2:16 -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1 -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요한계시록 3:1 -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사자에 대한 해석은 다양합니다.
1. 주의 종(servant)
2. 목사(pastor)
3. 지도자(leader)
4. 사자(angel) - 교회들을 위하여 증언하는 자(messenger)
5. 천사(영적 진리를 전하는 자) - ἄγγελοι(the angeles) * 32 ἄγγελος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은 영광스런 예수님입니다(계 1:13∼16).
칭찬만 받은 교회는 어느 교회이었습니까?
- 서머나교회, 빌라델비아교회
책망만 받은 교회는 어느 교회이었습니까?
- 라오디게아교회
칭찬도 받고 책망도 받은 교회는 어느 교회이었습니까?
- 에베소교회, 버가모교회, 두아디라교회, 사데교회
자 이제 질문을 합니다.
영광스런 예수님께서 거니시는 교회는 어느 교회일까요?
칭찬만 받은 교회일까요?
아니면 책망만 받은 교회일까요?
칭찬도 받고 책망도 받은 교회일까요?
모든 교회에 영광스런 예수님께서 거닐고 계십니다. 거닌다는 것은 ‘함께 한다’ ‘지켜준다’ ‘곁에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열 명의 자녀를 두셨던 어머니의 마음을 잘 표현한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말처럼 성공한 자녀와 실패한 자녀가 있을 때에 모든 자녀를 향한 사랑은 동일합니다. 아마 실패한 자녀에게 더 큰 관심과 사랑을 쏟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곧 영광스런 예수님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느 교회에 다니든지 그 교회에서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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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파트리스교회 주일설교 요한계시록 강해 #.8 / 2019-5-5
이 일 후에(요한계시록 4:1) |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After this I looked, and there before me was a door standing open in heaven. And the voice I had first heard speaking to me like a trumpet said, Come up here, and I will show you what must take place after this.
(도입 이야기)
‘스타인메츠(Charles Proteus Steinmetz, 1865. 4. 9~1923. 10. 26)’라는 미국의 전설적인 전기 기술자가 있었습니다. 원래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출생하여 브레슬라우, 취리히,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 전기 공학, 화학을 전공했습니다.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 회사의 기술자로 취업되었고 유니온 대학 물리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벼락을 연구하여 피뢰침을 개량했으며 발전기와 전동기에 관한 200개 이상의 특허를 받았다고 합니다.
어느 공장에서 발전기가 고장이 나서 작동되지 않을 때 여러 기술자들을 불러 발전기를 수리하도록 의뢰하였으나 도저히 수리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스타인메츠에게 발전기 수리를 의뢰하였다고 합니다. 스타인메츠가 발전기 이곳저곳을 작은 망치로 두들겨 보더니 즉시 고장 난 부분을 알려주며 그곳에 하얀 분필로 표시한 후에 그곳을 뜯어서 고치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여러 날 동안 많은 기술자들이 동원되어 고장의 원인을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는데도 스타인메츠는 망치로 몇 번 두드리더니 고장 난 부분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공장 앞으로 발전기 수리비로 1만 불의 청구서가 배달되었습니다. 공장장은 스타인메츠에게 작은 망치로 몇 번 두들겨 본 것이 전부인데 수리비용이 너무 비싸다고 하였더니 그 때 스타인메츠가 공장장에게 ‘분필로 고장 난 부분 표시한 수고비는 $100. 그리고 어디를 고쳐야 하는지를 찾아내는 기술은 $99,900 이라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결국 공장장은 스타인메츠에게 1만 불을 지불했다고 합니다.
스타인메츠의 이야기는 ‘구조를 알고 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어렵다고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이해하려면 몇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편지(便紙) - 서신서(書信書)
요한계시록은 계시서, 예언서 그리고 서신서라고 소개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한 통의 편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편지를 받은 후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단번에 읽어야 합니까? 아니면 한 문장씩 두고두고 해석하면서 읽어야 합니까? 편지는 받는 즉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단번에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편지의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두루마리에 기록된 회람 편지이기 때문에 일곱 교회가 돌아가며 읽어야 하므로 단번에 읽고 다음 교회로 전달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에 두루마리에 기록된 편지는 ‘파피루스’라는 특수한 종이에 기록했는데 요즘처럼 장과 절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 모두 연결된 긴 문장이었습니다. 더구나 당시 통용되던 코이네 헬라어로 쓰여 진 편지는 구두점도 없고, 띄어쓰기도 없으며, 모두 대문자로 쓰여 졌기 때문에 읽을 수 있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알려주는 구절이 요한계시록 1장 3절입니다. 특히 개역한글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개역 개정 성경에서는 정확한 표현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개역 개정)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는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과 지키는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입니다.
당시 교회에는 파피루스에 기록된 두루마리를 읽는 전문 낭독자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두루마리를 펼쳐서 읽으면 회중들은 그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듣기만 해도 편지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요한계시록이 기록되고 거의 2천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누구나 성경책을 갖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는 파피루스는 부자들만이 가질 수 있었기에 회중들이 쉽게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돌려가며 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인쇄술이 발달하여 성경책을 누구나 갖고 다닐 수 있습니다. 만일 그 당시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만난다면 여러분들은 굉장한 부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둘째는 공간적 구조
1장부터 3장은 밧모 섬에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4장부터 11장은 사도 요한이 하늘로 올라간 후에 본 환상의 사건입니다.
12장부터 22장은 사도 요한이 다시 땅으로 내려온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셋째는 내용적 구조
1:19∼20, 사도 요한이 본 것
2∼3장, 지금 있는 일(일곱 교회에 관한 말씀)
4∼22장, 장차 일어날 일
항상 요한계시록에 대한 구조를 기억하고 말씀을 읽어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 이제 오늘 소개한 본문을 읽겠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통하여 본문을 읽었을 때 사도 요한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 맞습니다. 요한은 지금 하늘로 올라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 후에’ 라는 말씀은 문법적으로 정확한 번역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일 후에는 단수형으로 표현했지만 헬라어 원문에서는 복수형으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 후에’ - ‘메타 타우타(Μετὰ ταῦτα, After these things)’ 직역 하면 ‘이 일들 후에’ 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들이란 어떤 일이냐?” 이 일들을 어디와 연결하느냐에 따라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결정됩니다.
첫째는 3장 21절과 연결하는 해석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3장 21절과 연결하는 이유는 요한계시록을 역사적 사건의 순서라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해석을 주장하는 것을 ‘세대주의 신학’ 이라고 합니다. 세대주의는 신학의 특징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세대주의 신학은 “성경을 역사적으로 일곱 시대로 구분”합니다. 일곱 교회를 일곱 시대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일곱 번째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를 4장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3장 21절에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이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에 이때부터 공중으로 들려올라간 상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4장은 이미 모든 성도들이 하늘로 들림을 받은 휴거 상태라고 가르칩니다. 그 이유는 ‘보좌’ 라는 단어에 필이 꽂혔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가 역사적으로 마지막 시대라고 해석합니다. 마지막 시대의 특징은 ‘대형교회의 미지근한 신앙’을 갖는 시대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성도들은 모두 하늘로 올라간 후에 재앙이 임하게 될 것이며 성도들은 환난을 받지 않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둘째는 1장 17절과 연결하는 해석입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영광스런 예수님의 모습을 환상으로 보게 된 사도 요한은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환상 계시를 받고 있습니다. 먼저 받은 것은 일곱 교회와 일곱 교회의 사자에 관한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1:17∼20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지금 사도 요한은 영광스런 예수님의 모습을 본 후에 그의 발 앞에 엎드려있습니다. 그리고 일곱 교회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일곱 교회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모두 받은 후에 비로써 4장 1절로 연결됩니다. 이제 4장 1절을 읽겠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이 일 후에’ 라는 말씀이 단수형으로 소개되었지만 원래는 복수형입니다(메타 타우타, Μετὰ ταῦτα. After these things). 그러므로 문법적으로 정확하게 번역하면 ‘이 일들 후에’ 라고 하겠습니다. 이 일들이란 2장과 3장에서 일곱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말합니다.
이 일 후에 - 일곱 교회에 대한 메시지를 받은 후에
내가 보니 - 엎드려 있던 요한이 고개를 들고 보았다
처음에 내게 말하던 음성 - 나타나셨던 예수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음성만 들렸다
역사적 시간 순서가 아니다. 요한이 경험한 계시의 순서이다.
한국교회가 과거에 세대주의 신학을 공부했던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선교사들을 통해서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선교사들이 배웠던 것에 의해서 전달되었기 때문에 세대주의 신학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와 지금은 또 다른 시대일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대한 연구가 많은 발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학문도 중요하지만 과거의 학문의 자리에서 더 발전되고 말씀의 진가를 높이 드러낼 수 있는 연구 자료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일곱 교회에 대한 예언의 말씀들을 받은 후에 라고 하면 문맥상 그 순서가 맞는다고 하겠습니다.
내가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실 것이라는 말씀과 연결하여 보좌에 앉게 된다고 해석을 하면 휴거 된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4장 1절에서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이리로 올라오라고 하셨으므로 하늘 보좌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고 해석합니다. 이와 같은 해석이 과거 한국교회에 가장 많이 소개된 해석입니다. 그 이유는 초기 한국 교회에 복음을 전했던 미국 선교사들이 이와 같은 해석 방법과 신학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결론 이야기)
메시아 초림 예언 구약 456회
재림 예언 신구약 1,518회 - 구약 1200회, 신약 318회
초림의 예언 456회 모두 성취되었다.
재림의 예언 반드시 성취 될 것이다.
‘우리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믿고 있다. 단지 그의 도착이 늦어지고 있을 뿐이다!’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벽에 새겨진 글,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참고 기다릴 수 있었던 신앙은 주님은 오실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주님과 동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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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파트리스교회 주일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 #.9(2019-5-12)
열린 문(요한계시록 4:1) |
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명심해야 할 것은 요한계시록은 어려운 말씀이 아니라 구조를 알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구조는 계시의 내용적 구조와 공간적 구조입니다. 계시의 내용적 구조는 사도 요한이 본 것(1:19∼20)과 지금 있는 일(2∼3장)과 장차 될 일(4∼22장)을 말합니다. 공간적 구조는 밧모섬에서(1∼3장), 하늘에서(4∼11장), 땅에서(12∼22장) 일어나는 사건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4장의 본문은 내용적으로는 장차 될 일을 말하고 구조적으로는 하늘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첫째, 하늘에 문이 있을까요? (있다, 없다)
둘째, 하늘에 문이 없다면 왜 하늘 문이라고 표현했을까요? (상상력, 성경적)
셋째, 하늘 문으로 누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종교인, 기독교인)
넷째, 하늘 문은 누가 열까요? (성도, 예수님)
오늘 설교 제목은 ‘열린 문’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하늘에 열린 문(a door standing open in heaven)’ 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정말 하늘에 문이 있을까요? 하늘에는 문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요한은 하늘에 열린 문을 보았다고 합니다. 과연 사도 요한이 보았다는 하늘에 열린 문이란 무엇일까요?
* 열린 문(θύρα ἠνεῳγμένη) thura eneogmene
2374 - θύρα, door
455 - ἀνοίγω, open
‘열린 문’이란 문법적으로 ‘현재완료형’입니다. 현재완료형이란 “문이 과거에 열려졌고 지금까지 계속하여 열려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현재완료형이란 경험, 완료, 계속, 결과를 포함합니다.
예를 들면 ‘구원받았다’는 신앙은 경험과 완료와 계속과 결과를 모두 포함한 내용입니다.
첫째는 경험(Experience) - 과거에 구원을 받았다.
둘째는 완료(Completion) - 구원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다.
셋째는 계속(Continuously) - 구원받은 사건은 지금도 계속된다.
넷째는 결과(Result) - 구원의 사건은 하늘 문을 지날 때 결론을 맺는다.
목회 현장에서 경험했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매년 어버이주일을 맞이할 때마다 교인들 중에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신 가정의 자녀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역은 비록 나이가 들어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어렵지만 세상을 떠나기 전에 예수를 영접하고 주님 품에 안기도록 인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어버이주일을 맞이할 때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겠다는 약속과 신앙고백을 확인한 후에 어버이 세례식을 진행했습니다. 어느 해 5월 어버이주일에 세례를 받았던 어른이 그 해 초겨울 12월에 서대문 로터리에 있는 적십자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새벽기도회를 마치면 곧장 병실을 방문했습니다. 한번은 병실을 찾았는데 ‘목사님 어제 밤 꿈에 천국 문이 열리지 않아 못 들어갔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참 안타깝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하나님 천국 문을 열어주세요!’ 라고 기도하라고 당부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는데 ‘목사님, 어제 밤에 드디어 천국 문이 열렸어요!’ 하며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5월 어버이주일에 세례를 받았고 12월 성탄절이 다가오기 한 주일 전에 주님 품에 안기셨던 한 어른의 신앙여정은 불과 8개월 정도 이었지만 마지막은 분명히 하늘 문을 지나 주님 품에 안겼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갈보리 언덕에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가운데는 예수님의 십자가 오른편과 왼편에 두 강도의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점점 무거워질 때 한 강도는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너도 십자가 위에서 내려오고 그리고 나를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한다면 내가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강도는 ‘주여, 주님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구원받은 강도는 그 짧은 시간에 구원에 대한 경험과 완료와 계속과 결과를 완전하게 보여준 사례가 되었습니다.
천국 문이 안 열렸다 또는 천국 문이 열렸다는 꿈 이야기를 들으며 천국 문은 어떤 문일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문이 있을까요?
물론 천국에 들어가는 문은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이리로 올라오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과연 열린 문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열린 문의 의미를 성경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열린 문’과 ‘하늘 문’ 이란 말씀을 검색하면 열린 문과 하늘 문을 검색한 결과 다음과 같습니다.
열린 문 - 요한계시록 3:8, 요한계시록 4:1,
하늘 문 - 시편 78:23, 말라기 3:10
열린 문과 하늘 문은 사람이 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열어놓으셨습니다. 우리들은 그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이 되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그렇다면 하늘 문과 열린 문이란 무엇일까요?
첫째, 문은 방향(方向)
창세기 28:16∼17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축복 기도 후에 밧단 아람 외삼촌 라반의 집을 향하여 집을 떠났습니다. 길을 가던 중 날이 저물어 한 돌을 베개로 삼고 그곳에 누웠습니다. 그리고 꿈에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줄 것이며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갈 것이라. 네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을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자, 여러분 야곱이 꿈에 본 사닥다리의 용도는 올라가기 위한 것일까요? 아니면 내려오기 위한 것일까요? 땅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은 사닥다리는 오직 올라가기 위한 용도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은 내려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닥다리가 있어야 내려오실까요? 하나님은 사닥다리가 없어도 얼마든지 내려오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땅에 머물고 있는 야곱에게 하늘로 올라가는 방법은 사닥다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야곱을 위하여 사닥다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야곱이 본 사닥다리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향하는 방향을 알려주는 하늘 문입니다.
문은 방향입니다.
건물마다 비상구(非常口)가 있습니다. 만일 불이 났을 때 또는 지진이 일어났을 때에 사람들을 안전하게 빨리 대피할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비상사태를 만났을 때는 비상구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만일 그 방향을 찾지 못하면 끔찍한 사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낯선 밧단 아람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날이 어두워졌을 때 야곱은 두렵습니다. 언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릅니다. 형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합니다. 야곱은 비상사태와 같은 위기를 만났습니다. 더구나 시간적으로 캄캄한 밤을 맞이합니다. 아무런 소망이 보이지 않는 시간에 꿈에 하늘 문의 방향을 보게 된 것입니다.
천국 문은 천국의 방향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늘 문은 하늘의 방향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도들은 어느 방향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까요?
그 방향이 곧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천국 문을 향한 신앙은 이 땅에서도 천국을 살아야 합니다.
천국 문을 향한 신앙은 죽어서 천국이 아니라 내 삶의 자리가 천국이어야 합니다.
야곱은 지금 아버지의 집을 떠나 광야에 머물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야곱이 어느 방향을 보고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야곱은 오직 밧단 아람 외산촌 라반의 집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늘 꼭대기에 닿는 사닥다리가 세워졌고 찬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며 그 위에 여호와 하나님이 야곱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야곱의 방향은 외삼촌 라반의 집이 아니라 어디에 있는지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원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신앙의 원리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문은 임재(臨在)
임(臨) - 임할 臨
1. 임하다, 2. 곡하다, 3. 장례식에 참례하여 곡(哭)함, 4. 본떠 쓰다, 5. 임거(臨車)
재(在) - 있을 在
1. 존재하다, 2. …에 있다, 3. …에 머물러 있다, 4. (어떤 단체에) 참여하다, 5. …에 달려 있다
땅에서는 하늘 문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될 수 있지만 하늘에서는 땅으로 내려올 수 있는 문이 됩니다. 사람들은 땅에서 자꾸만 위로 올라가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편에서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통로가 됩니다.
성경에서 예를 들어봅시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오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마태복음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하늘 문은 임재를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사자들이란 하나님의 일을 돕는 천사들입니다.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사도행전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하늘이 열린 것은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늘 문이 열리면 영광스런 주님을 볼게 될 것입니다.
셋째, 문은 통로(通路)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라오디게아 교회는 열심을 잃어버린 신앙에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교회를 향하여 열심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어서 문을 열고 주님을 맞이하라고 권면합니다.
문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통로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문이 열려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생명이 되신 예수님은 문이 닫혀 있어도 얼마든지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 문과 천국 문은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문이 열려야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늘 문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반드시 들어가야 할 통로라고 하겠습니다.
(이야기) 어느 교회학교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교사가 아이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얘들아,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니?’
아이들은 ‘착한 일을 해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성경을 읽어야 한다.’
‘심부름을 잘 해야 한다.’
이런 대답을 할 때 한 아이가 손을 들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죽어야 갑니다.’
천국은 죽어야 갑니다.
여러분 천국은 죽어야 갑니까?
죽어서만 가는 천국이라면 왜 예수님께서 지금 너희에게 천국이 임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천국은 예수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신앙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누리려면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은 너무 간단명료(簡單明瞭)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스데반집사가 돌에 맞아죽는 현장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했을까요? 정말 스데반집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데 돌에 맞아죽는 그 자리가 천국이었을까요? 천국은 아닐지라도 천국을 체험할 수 있는 은혜의 자리이었고 축복의 자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하나님이 정하신 방향으로 가지 않고 정반대 방향으로 자리를 잡았을 때 요나에게 닥쳐온 것은 생각지도 못한 풍랑이었습니다. 그 풍랑으로 인하여 요나는 깨닫습니다. 내 생각과 감정에 따라 행동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넷째, 문은 경계(境界)
경계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1. 사물이 어떠한 기준에 의하여 나누어지는 한계
2. 어떤 지역과 다른 지역 사이에 일정한 기준으로 구별되는 한계
3. 인과응보의 이치에 따라 자기가 놓이게 되는 처지
예수님은 양의 문이 되셨습니다. 양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교회와 성도들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으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한계시록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믿음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서 참 평안과 기쁨과 찬송과 감사가 넘쳐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환경에 머물지라도 그곳에는 참 평안과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없습니다. 따라서 문은 경계를 의미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늘에 열린 문, 천국 문이란 예수님을 찾아갈 수 있는 방향입니다.
천국 문이란 예수님의 임재를 기다릴 수 있는 곳입니다.
천국 문이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천국 문이란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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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파트리스교회 요한계시록 강해 #.10 / 2019-5-19 하늘 보좌 4:1∼5
하늘 보좌(요한계시록 4:1∼5) |
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두 가지 구조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는 계시의 구조와 둘째는 공간적 구조라고 하겠습니다.
계시의 구조는 본 것(1:19∼20)과 지금 있는 일(2∼3장)과 장차 될 일(4∼22장)을 말합니다.
공간적 구조는 밧모섬(1∼3장)과 하늘(4∼11장)과 땅(12∼22장)에서 펼쳐질 일들을 말합니다.
밧모 섬이란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요한에게 갑자기 하늘 보좌를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늘 보좌를 보여주신 이유를 당시 로마의 역사적인 배경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로마 11대 도미티안(도미티아누스, 51. 10. 24∼96. 9. 18) 시대에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극심하던 때에 계시와 예언과 환상으로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갇혀 있었는데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이 앉아 있는 하늘나라의 보좌를 본 것입니다.
보좌(寶座)란 무엇인가?
보좌에 대한 사전적인 의미는 세 가지로 소개됩니다.
1. 임금이 앉는 자리
2. 부처가 앉는 자리
3. 하나님이 앉는 자리
보좌(寶座)란 한자어의 의미는 보배 보(寶), 자리 좌(座) 즉 ‘보배로운 자리’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로마 황제의 보좌는 사전적 의미와 한자의 의미를 능가하는 엄청난 자리를 말합니다. 과연 로마 황제의 보좌(寶座)는 어떤 자리이었을까요? 로마 황제의 보좌를 설명하기 위해서 몇 개의 단어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쿠리오스(κύριος)
‘쿠리오스’ 라는 단어를 들어보셨습니까? ‘쿠리오스’란 ‘주’라는 뜻입니다. 도미티안 황제는 로마 황제를 신격화 하려고 “가이사가 주가 되신다!(도미누스 에트 데우스, dominus et deus)” 라고 불러야 한다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성경에서는 애급 왕을 ‘바로’ 라고 불렀고, 로마 황제는 ‘가이사’ 라고 불렀습니다. 문제는 ‘가이사’ 라고만 부른 것이 아니라 “황제가 주가 되신다(도미누스 에트 데우스, dominus et deus)” 라고 불러야 했습니다. 이것을 로마의 11대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황제 우상화 작업이라고 합니다.
만일 황제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경제 활동에 참여할 수 없게 되어 의식주 생활이 몹시 어려웠다고 합니다. 이러한 제도를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오른손과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이 표가 없으면 매매를 할 수 없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받는 표를 짐승의 이름과 그 수 즉 사람의 수 666 이라고 합니다.
로마 황제 가이사를 가리켜 “주님이자 하나님(도미누스 에트 데우스, dominus et deus)” 이라고 부르게 하는 명령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칭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라는 헬라 단어 ‘쿠리오스(κύριος)’는 오직 예수님만이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일제 강점기 때에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신사에 가서 참배하도록 강요하는 것과 비슷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신사에 참배하면 편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참배를 거부하면 감옥에 갇히거나 고문을 받거나 아니면 죽을 수도 있었던 것처럼 로마 시대에도 동일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둘째, 파루시아(παρουσίᾳ)
파루시아(παρουσίᾳ) 라는 단어는 주로 ‘왕의 임재’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파루시아라’ 라는 단어가 ‘재림’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로마 황제가 어느 도시를 방문할 때 황제가 나타나는 것을 ‘파루시아(παρουσίᾳ)’ 라고 외쳤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하고 외쳤던 것처럼 로마 황제가 어느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황제를 향하여 ‘파루시아(παρουσίᾳ)’ 하며 외쳤습니다. 이것은 로마 황제가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에게 로마 황제는 주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가 되신다는 믿음을 배반하는 것이므로 시각한 도전을 받게 된 것입니다. 로마 황제의 엄청난 권력 앞에서 황제의 명령을 거역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것이었습니다.
셋째,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road lead to Rome)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Rome was not built in a day)”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When in Rome Do as the Romans do)”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road lead to Rome)”
이런 말을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말이 유래된 배경이 무엇일까요?
기원 전 312년 ‘아피우스’ 라는 설계자에 의해서 대략 550km의 군사도로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도로를 ‘아피아가도’ 라고 합니다. 아피아가도는 세계 최초의 포장 도로 라고 합니다.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1일 착공하여 1970년 7월 7일에 완공한 아시안 하이웨이 1호선이라고 합니다. 공사 기간이 2년 6개월이었기에 매우 놀라운 일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로마의 아피아가도는 기원전 312년 경부고속도로보다 2천 년 전에 건설된 포장도로이었고 경부고속도로보다 무려 100km 더 긴 도로라고 할 때 당시 로마의 권력과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인들은 아피아 가도를 ‘도로의 여왕’ 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갇혀 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로마 황제의 보좌는 엄청난 크기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또한 로마 황제의 보좌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이라고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의 보좌는 세 가지 자랑거리였습니다.
첫째는 통치(統治)
세계를 움직이는 권력은 로마 황제에게서 나온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로마 의 군사력은 막강한 힘을 갖고 세계를 제패하려고 했습니다.
둘째는 심판(審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명제에서 당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권한은 오직 로마 황제의 명령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로마 황제가 사형을 명령하면 죽임을 당하고 석방을 명령하면 살인자도 자유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셋째는 영광(榮光)
로마 황제가 되어 그 보좌에 앉는다는 것은 당시 최고의 영광을 누리는 자리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믿는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갇혀있습니다. 이러한 사도 요한에게 하늘 보좌를 보여주셨다는 것은 로마 황제가 속한 땅의 보좌와 하나님이 계신 하늘 보좌와 비교할 때 어느 것이 더 위대한 것인가를 알려주시는 환상이라고 하겠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이 집무하는 백악관을 방문했던 사람의 우스개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예전에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원들이 백악관을 방문한 후 숙소로 돌아와서 손을 씻지 않기에 왜 그러느냐? 하고 물었더니 이 손이 미국 대통령과 악수한 손이라고 자랑하더랍니다.
한국 대통령이 집무하는 곳은 청와대라고 합니다. 김영삼 대통령 재임 시 청와대 에 초청을 받아 당시 유행했던 점심 식사는 칼국수이었는데 한 번은 어느 목사님이 청와대에 초대를 받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칼국수를 먹었는데 양도 적고 너무 긴장해서 청와대에서 나오자마자 근처 식당에 가서 칼국수 한 그릇 더 먹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백악관에 초청을 받아도 그것은 땅에 속한 보좌입니다. 청와대에 초청을 받아도 그것은 땅에 속한 보좌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갇힌 초라한 모습이지만 열린 하늘 문으로 들어가서 하늘 보좌를 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요한은 예수님의 발아래에 죽은 자같이 엎드린 상태에서 일곱 교회에 대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열린 하늘 문으로 인도되어 하늘에 있는 보좌를 보고 있습니다.
밧모 섬에 갇혀 있을 때는 이 세상을 통치하는 사람이 로마 황제 가이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 보좌가 있는 곳으로 인도된 사도 요한은 로마 황제의 보좌가 아니라 하늘 보좌 즉 하나님의 보좌를 목격합니다. 세상에서는 로마 황제가 절대 권력을 갖고 통치하는 것 같았지만 하늘 보좌를 보는 순간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지금도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습니까?
하늘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하늘의 반대는 ‘땅’입니다.
하늘과 땅의 차이는 엄청난 차이를 의미합니다.
하늘과 땅은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과 땅의 차이와 크기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풍자하는 우스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정신병원에 두 환자가 입원했다고 합니다. 한 환자가 ‘내가 예수다!’ 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러자 또 다른 한 환자가 ‘나는 너와 같은 아들을 둔 적이 없다!’ 하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하늘과 땅의 차이와 크기를 모르는 사람을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한다는 우스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하늘 보좌와 땅 보좌의 차이를 모르고 하늘 보좌와 땅의 보좌의 크기를 모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런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4장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땅의 보좌와 하늘 보좌의 차이를 아는 사람은 현실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하늘 보좌를 보게 된 것은 땅의 보좌보다 더 크고 위대한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은총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영광스러운 예수님께서 그 오른 손에 일곱 별 즉 일곱 교회의 사자와 일곱 금 촛대 즉 일곱 교회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곱 교회에 대한 칭찬과 책망에 관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이 끝난 후 사도 요한은 열려진 하늘 문으로 들어가 하늘 보좌를 보게 됩니다.
4장부터 요한계시록의 본격적인 내용이 시작된다고 하겠습니다. 왜 하늘 보좌부터 보여주셨을까요? 그것은 하늘 보좌와 땅 보좌의 엄청난 차이를 알려주시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늘 보좌와 땅 보좌의 차이와 크기를 환상과 계시가 아니면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에게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권력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의 감격스런 마음으로 오늘의 본문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寶座)’ 라는 단어가 신약 성경에 45회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네 35번은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하늘 보좌는 하나님의 주되심(Lordship)과 통치(統治)와 권능(權能)과 권력(權力)을 말합니다. 로마 황제의 보좌와 비교할 때 로마 황제의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와 비교할 수 없다는 믿음과 확신을 갖게 하는 환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 때문에 로마 황제로부터 핍박을 받아 밧모 섬에 갇힌 초라한 신세 같지만 하늘 보좌를 보여주시므로 영원한 왕이 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주실 것이며 끝까지 인내하며 이긴 자에게는 승리의 상급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부귀영화와 비교하지 말고 하늘 보좌를 생각하며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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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파트리스교회 요한계시록 강해 #. 11 / 2019-5-26
하늘 보좌(요한계시록 4:1∼5) |
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지난주일 소개했던 하늘 보좌에 대해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하늘 보좌는 로마 황제가 앉아있는 땅의 보좌와 비교하여 어느 보좌가 더 위대한가를 알려주기 위한 메시지라고 하겠습니다.
로마 황제의 보좌는 세 개의 단어로 그 힘을 자랑했습니다. 첫째는 로마 황제는 주님이시다! 라는 ‘쿠리오스’, 둘째는 로마 황제가 입성하셨다! 라는 ‘파루시아’, 셋째는 기원전 312년 세계 최초의 군사 포장도로 550km를 건설한 ‘아파가도’ 라는 세 단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늘 보좌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자리를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갇혀 있습니다. 로마 황제가 밧모 섬에 있는 요한을 불러내면 즉시 처형당할 긴박한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환상을 통하여 하늘 보좌를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비록 육신은 밧모 섬에 갇혀 있지만 하늘 보좌를 보면서 땅에 속한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은 소아시아 지역에 있던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지상의 교회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4장과 5장은 하늘의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상의 교회에서는 칭찬과 책망을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상의 교회에서는 책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천상의 교회와 같은 교회로 발전하고 성장하기 위하여 영적 싸움에 승리해야 합니다.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려고 몸부림치며 나아갈 때 21장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땅에서는 아직도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한 예를 소개합니다.
(도입 이야기)
최근 한국에서 ‘백궁 명패’를 구입하는 사람은 죽어서 심판에서 제외된다고 선전하는데 ‘백궁 명패’ 한 개의 가격은 300만원이며 두 사람이 함께 구입할 때는 할인가 500만원으로 판매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백궁 명패’를 구입한 사람은 모든 질병을 치유 받을 수 있다고 선전합니다.
여러분, 백궁 명패를 구입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백궁 명패를 구입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종로 3가 피카디리 극장 건물 6층과 그 근처에 강의실을 구입했는데 그 강의실 가격 하나에 9억 원이라고 합니다. 강의실을 두 개를 구입했으면 18억입니다. 백궁 명패 몇 개를 팔아야 18억이 될까요? 600명 이상이 구입했다고 하겠습니다. 더구나 경기도 양주에 ‘하늘 궁’ 이란 집을 소유하고 있고 그 주위에 많은 땅을 매입하여 ‘우주 대통령’ ‘세계 황제’의 마을을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주말에 ‘하늘 궁’에 입장하는 비용은 10만원이라고 합니다. 하늘 궁에 입장한 사람들에게 트럼프 대통령과 찍은 사진을 기념으로 나눠주기도 하고 자랑한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줄 아십니까? 1997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기발하고 엉뚱한 공약을 제시했던 ‘허경영’씨입니다.
(전개 이야기)
사도 요한은 유대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에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소개되는 내용이 구약과 연관된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이 일 후에(메타 타우타, Μετὰ ταῦτα, After these things)’는 ‘이 일들 후에’ 라는 복수형으로 크게 두 가지 해석이 한국교회에서 소개됩니다.
첫째는 ‘휴거 이 후에’
이러한 해석은 세대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요한계시록은 역사적인 사건의 순서대로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소아시아 지역에 핍박을 받는 일곱 교회 중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와 연결할 때 가능한 해석입니다(3:21).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역사 시대적 배열이 아니라 환상과 계시의 순서에 따른 배열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해석이 아닙니다.
둘째는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사도 요한은 영광스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의 발아래 죽은 사람처럼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이 말씀과 연결하는 해석입니다(1:17∼19).
열린 문 -요한계시록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늘에 열린 문’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문은 열려 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임재
하늘에서 볼 때는 내려가기 위한 출구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입문(入門, 들어가는 것)
땅에서 바라볼 때는 들어가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열린 문으로 누가 들어갈 수 을까요?
열린 하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려주는 우스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날 천국에서 갑자기 거대한 잔치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천국에 이미 올라와 있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올 때는 잔치를 베풀어주지 않았는데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올라오기에 이렇게 성대한 잔치를 준비하는가 하며 어느 장로님이 잔치를 준비하던 천사에게 ‘누가 올라오는데 이렇게 성대한 잔치를 준비합니까?’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잔치를 주관하는 천사가 “오늘 모처럼 한국에서 목사 한 사람 올라온다.”고 대답하더랍니다. 우스개 이야기를 심각하게 들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은 맡았다고 열려진 하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목사라고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과연 누가 열려진 하늘 문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그렇다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사람은 열려진 하늘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불못(지옥)에 던져 진다(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짐승(우상)에게 경배한다(요한계시록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마땅히 될 일 - 요한계시록 1:1 / 반드시 속히 될 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이리로 올라오라 =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 요한계시록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4:2∼3, 보좌(寶座)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다니엘 7:9(王座)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사람들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배경이 본문에서 소개됩니다.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하늘 이외에 하나님이 계신 곳은 어디일까요? 그것은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책이 아니라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 속에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속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유대인의 전통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출애굽기 33: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이와 같은 전통을 이사야 선지자가 여호와 하나님을 뵙고 고백한 내용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이사야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디모데전서 6:15∼16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보좌는 통치와 심판과 영광의 자리를 상징합니다.
하늘 문이 열렸을 때 사도 요한은 하늘 보좌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요한이 목격했던 하늘 보좌를 지금 이 자리에서 보고 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모양을 특별히 세 가지 보석과 보좌 주위를 둘러있는 무지개로 설명합니다.
철학자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B.C 428년)은 하늘 보좌의 세 가지 보석을 “파이돈(Φαίδων)”이란 저서에서 ‘보석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에스겔 1:26∼28, 남보석, 무지개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내가 보니 그 허리 위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같고 내가 보니 그 허리 아래의 모양도 불같아서 사방으로 광채가 나며.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
그러나 성경적인 의미로 세 가지 보석은 구약 전통에 따라 하나님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전통에 익숙했던 사도 요한도 하나님의 모양을 오직 보석으로만 설명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돌과 보석의 차이는 무엇인가?
돌은 순수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지만 보석이란 갈고 닦아서 광채가 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의 문자는 돌과 같지만 성경의 문자를 읽고 듣고 지킬 때에 보석이 될 수 있습니다.
벽옥(碧玉)(Diamond) - 요한계시록 4:3, 21:11, 18, 19
‘벽옥’은 귀한 보석이라고 합니다(21:11). 벽옥은 하얗고 투명한 유리 같은 보석으로 빛과 거룩함을 상징합니다.
홍보석 - 요한계시록 4:3, 21:20
‘홍보석’은 붉은 빛의 보석으로 구속을 상징합니다.
녹보석(綠寶石) - 요한계시록 4:3, 21:19
‘녹보석’은 푸른색의 보석으로 소망을 상징합니다.
무지개(Rainbow) - 언약
무지개는 언약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공의로 심판하시는 재판장이 되십니다. 창세기 9장에서 홍수 심판 후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으로 보여주신 것이 언약의 무지개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으로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도 앞으로도 우리는 그 언약적인 사랑을 힘입어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할 수 있고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축복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비록 사도 요한처럼 밧모 섬에 갇혀 있지만 밧모 섬이 전부가 아닙니다.
보좌 주위에 24 장로들
4:4, 흰옷을 입고 금관을 쓴 24장로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요한계시록은 유대묵시문학이란 장르에 속합니다. 묵시문학의 특징은 ‘상징’을 많이 사용합니다. 물론 24란 수를 상징 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救援)받은 백성들의 대표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를 더하면(+) 24가 됩니다. 또한 12지파와 12사도를 곱하면(☓) 144가 되며 144에 1000을 곱하면 144,000이 됩니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에서 구원받은 백성들을 대표하는 수라고 해석합니다.
둘째는 천사(天使)
하나님이 거느리는 수많은 천사들 중에 마치 보좌 주위를 지키는 24 수호천사라고도 합니다.
셋째는 성전 제사에 필요한 수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24라는 수는 성전 제사에 반드시 필요한 수를 의미합니다.
역대상 24:7∼19
첫째로 제비 뽑힌 자는 여호야립이요, 둘째는 여다야요, 셋째는 하림이요, 넷째는 스오림이요, 다섯째는 말기야요, 여섯째는 미야민이요, 일곱째는 학고스요, 여덟째는 아비야요, 아홉째는 예수아요, 열째는 스가냐요, 열한째는 엘리아십이요, 열두째는 야김이요, 열셋째는 훕바요, 열넷째는 예세브압이요, 열다섯째는 빌가요, 열여섯째는 임멜이요, 열일곱째는 헤실이요, 열여덟째는 합비세스요, 열아홉째는 브다히야요, 스무째는 여헤스겔이요, 스물한째는 야긴이요, 스물두째는 가물이요, 스물셋째는 들라야요, 스물넷째는 마아시야라. 이와 같은 직무에 따라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그의 아버지 아론을 도왔으니 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하신 규례더라.
제비를 뽑아 성소에서 섬길 자를 뽑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성소를 담당할 사람은 24명이었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번개와 뇌성과 음성 - 출애굽기 20:18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요한계시록 16:18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요한계시록 8:5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요한계시록 11: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욥기 37:4
그 후에 음성을 발하시며 그의 위엄 찬 소리로 천둥을 치시며 그 음성이 들릴 때에 번개를 멈추게 아니하시느니라.
흰옷과 세마포의 의미
요한계시록 7:13∼15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밧모 섬과 같은 곳에 갇혀 있을지라도 열려진 하늘 문으로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믿음을 갖고 시련과 연단의 과정을 끝까지 인내하므로 날마다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5, 일곱 등불 하나님의 일곱 영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일곱이란 수는 ‘하늘의 수 3’과 ‘땅의 수 4’를 더한 것으로 ‘완전수’ ‘충족수’ ‘만족수’ ‘행복의 수(Luck Seven)’ 라고 합니다. 따라서 일곱 영이란 하나님의 완전한 성령을 상징합니다.
일곱 영에 대한 다른 명칭
첫째, 일곱 등불(요한계시록 4:5)
둘째, 일곱 눈(요한계시록 5:6, 스가랴 4:10) - 참조 스가랴 4:2∼10
스가랴 4: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스가랴 4:1∼10
①.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더라. ②.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해서 일곱 관이 있고. ③. 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기름 그릇 오른쪽에 있고 하나는 그 왼쪽에 있나이다 하고. ④.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이르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⑤.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하므로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⑥.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⑦.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⑧.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⑨.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⑩.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이사야 선지자의 일곱 영에 대한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이사야 11:1∼2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일곱 영은 일곱 가지 성품을 말합니다. 일곱 가지 성품이란 성령의 다양한 기능을 말합니다. 성령은 열매를 맺게 하는 영이라고 하겠습니다.
1. 여호와의 영(the Spirit of the Lord)
2. 지혜의 영(the spirit of wisdom)
3. 총명의 영(the spirit of understanding) - 슬기, 명철
4. 모략의 영(the spirit of counsel) - 모략, 상담
5. 재능의 영(the spirit of power) - 권능, 용기
6. 지식의 영(the spirit of knowledge)
7.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the fear of the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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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스교회 요한계시록 설교 #. 12 / 2019-6-2
네 생물의 정체(요한계시록 4:6∼11) |
‘요한계시록’을 ‘계시록(啓示錄)’ 이라고 합니다. 계시록은 비밀이 아닙니다. 비밀(秘密)이란 보여주면 누구든지 알 수 있는 내용을 말합니다. 반면에 계시(啓示)란 보여줄지라도 알 수 없기 때문에 가르치거나 설명해 주어야만 알 수 있는 내용을 말합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비밀록(秘密錄)’이 아니라 ‘계시록(啓示錄)’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전체 내용은 404구절 입니다. 404구절 중에 구약에서 인용한 말씀이 278구절 입니다. 278구절은 대략 68% 분량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려면 구약과 관련된 말씀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어렵다고 말하면서도 구약의 말씀을 읽었을 때는 요한계시록처럼 어렵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에서 계시와 환상은 부분적으로 소개되었으나 요한계시록은 집중적으로 소개되었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연관된 구약의 말씀과 함께 읽어가면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도입 이야기)
어느 장로교회 목사님이 천국 문 앞에서 들어가지 않겠다고 천사와 다투고 있었다고 합니다. 천사가 “왜 천국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느냐?” 하고 물었더니 목사님의 대답이 “천국에 24장로들이 있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장로교회에서는 당회에서 모든 것을 결정을 합니다. 당회는 목사님과 장로님들로 구성된 교회에서 최고의 의결기관입니다. 목사님이 장로님들에게 얼마나 시달렸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겠느냐 하는 우스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지난주일 설교 요약)
지난주일은 ‘하늘 보좌’에 대해서 소개했습니다. 하늘 보좌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들은 세 개의 보석, 무지개, 24장로들 입니다.
세 개의 보석에는 ‘벽옥(Diamond)’은 ‘하나님의 거룩, 의, 빛’을 상징합니다. ‘홍보석(Ruby)’은 ‘하나님의 심판, 구속’을 상징합니다. ‘녹보석(Emerald)’은 ‘하나님의 자비, 은혜’를 상징합니다. ‘무지개(Rainbow)’는 ‘언약’을 의미합니다. ‘24 장로’들은 흰옷을 입고 금 면류관을 쓰고 있는 구약 시대에 성전 제사를 돕기 위하여 제비를 뽑아 선택된 수를 의미하며 동시에 구원받은 성도들을 대표하는 ‘천상적 존재(天上的 存在)’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네 생물의 정체’에 대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먼저 오늘의 본문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한계시록 4:6∼11
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9.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10.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묵시문학이란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후 100년 사이에 형성되었습니다. 묵시문학의 특징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속에 대한 내용을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징의 의미를 바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눈’의 기능은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이 네 생물의 안과 주위에 가득하다는 것은 ‘통찰력’을 말합니다.
오늘의 본문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 구약의 말씀은 에스겔 1:4∼11입니다. 에스겔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에스겔 1:4∼11
4.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5.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6.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7. 그 다리는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마광한 구리 같이 빛나며,
8. 그 사면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있더라 그 네 생물의 얼굴과 날개가 이러하니,
9.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10.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11. 그 얼굴은 이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리웠으며.
요한계시록 4장에서 소개된 네 생물의 정체를 이해하려면 먼저 구약 에스겔서에서 소개한 네 생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에스겔서의 역사적 배경
기원전 597년 여호야긴 왕 시대 유다 왕국은 바벨론의 침략으로 예루살렘 성은 포위되고 유다의 귀족들과 청년들 일만 여명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때 붙잡혀간 포로들 가운데 제사장 부시(멸시)의 아들 에스겔(하나님이 강하게 함) 선지자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에스겔의 나이가 30세쯤 되었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그발 강(경계)가에서 기도할 때 하늘이 열리고 세 개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에스겔 1장). 세 개의 환상이란 ‘네 생물에 대한 환상’과 ‘바퀴에 대한 환상’ 그리고 ‘보좌에 대한 환상’ 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기원 후 90∼96년 경 로마 황제의 기독교 탄압으로 밧모 섬에 유배되었을 때에 환상을 보게 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을 본 때는 기원전 597년이었고 사도 요한이 환상을 본 때는 기원 후 90∼96년 이었으므로 대략 그 시기의 차이는 700년입니다.
첫째, 네 생물의 환상(에스겔 1:5, 10, 참조 4∼14절)
5절,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 그들에게 사람의 형상이 있더라.
10절,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탈무드에서 네 생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사람(Man)은 피조물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존재를 상징합니다.
사자(Lion)는 들짐승가운데 가장 용감한 존재를 상징합니다.
소(Cow)는 모든 가축 중에서 재물과 헌신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소를 ‘송아지’라고 합니다.
독수리(Eagle)는 새(鳥類)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존재를 상징합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복음서를 네 생물에 비유하여 가르쳤습니다.
마태복음의 수신자는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왕으로 오신 메시아라고 하여 마태복음을 ‘사자복음’ 이라고 합니다.
마가복음의 수신자는 로마인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섬기려고(종) 오신 메시아라고 하여 마가복음을 ‘황소복음’ 또는 ‘송아지복음’ 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의 수신자는 헬라인들이었습니다. 헬라인들의 관심은 철학이었습니다. 철학은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로 오신 메시아라고 하여 ‘사람복음’ 또는 ‘인자복음’ 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의 수신자는 모든 인류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라고 하여 ‘독수리복음’ 이라고 합니다.
복음서의 특징으로 표현된 네 생물의 모습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자는 하나님의 통치의 지존하심
송아지(황소)는 하나님의 통치의 능력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의 지혜
독수리는 하나님의 통치의 신속함(탁월함)
그런데 오늘날은 에스겔 선지자 시대처럼 바벨론의 포로가 된 시대가 아닙니다. 사도 요한의 시대처럼 밧모 섬에 유배되는 시대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네 생물을 통해서 오늘의 성도들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을 본문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요한계시록 4:8)
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묵시문학에서 눈은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눈이 가득하다는 것은 통찰력이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임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도행전 1:11). 그런데 하늘로 올라가신 그 예수님은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신다고 하셨습니다(요한계시록 1:4, 16:5, 4:8). 지금 이 자리에서 날마다 우리들이 생활하는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함께 계신다는 믿음을 갖고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하고 들어야 하고 지켜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말씀을 네 생물처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자와 같이 깨달아야 합니다.
사자는 모든 동물들 중에서 가장 힘이 강합니다. 힘이 강하다는 것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한 영적인 힘을 회복해야 합니다. 말씀의 힘과 말씀의 능력은 악한 영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말씀의 능력으로 악을 물리치고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하나님의 말씀을 송아지와 같이 깨달아야 합니다.
송아지와 황소는 예로부터 재산과 부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송아지와 같이 깨닫는다는 것은 말씀에 부요한 신앙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부자가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 말씀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요한계시록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명하여 더러운 귀신아 나오라!
예수님께서는 병든 사람에게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이렇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과 같이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과 같이 깨닫는다는 것은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최고의 지혜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신앙이 지혜로운 성도들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시편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편 8: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하나님의 말씀을 독수리 같이 깨달아야 합니다.
독수리 같이 깨닫는다는 것은 분별력(分別力)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독수리는 높은 하늘에서 땅 위를 기어 다니는 작은 동물 닭과 쥐와 같은 것도 분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순식간에 날아와서 낚아챕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력을 회복하여 악한 영의 가르침과 지배를 받지 않고 거룩한 영의 가르침과 지배를 받아 마지막까지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열왕기상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둘째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앙(요한계시록 4:9∼11)
9.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10.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네 생물들과 24장로들은 하늘 보좌 주위에서 찬양하는 일을 계속합니다.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①. 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 / 2017-8-13
②. 파트리스교회 주일설교 / 2019-6-9
어린 양과 두루마리(요한계시록 5:1∼8) |
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2.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4.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과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이라.
오늘 설교 제목은 ‘어린 양과 두루마리’입니다.
어린 양은 물론 세상 죄를 짊어지셨던 예수님입니다. 두루마리는 한글개역성경에서는 ‘책’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번역 성경 한글 개역 개정, 새번역, 공동번역 에서는 ‘두루마리’ 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은 영광스런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소개하는 서론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2장과 3장은 당시 로마 황제의 기독교 핍박 때문에 소아시아 지방으로 흩어진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회람 편지입니다. 4장은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을 벽옥과 홍보석과 녹보석과 같은 모습을 소개한 성부 하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5장은 어린 양이신 예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어린 양과 두루마리에 관한 말씀입니다.
1절,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내가 보매 - (사도 요한이)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 -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중 제일이신 하나님(예수님)
오른 손 - 하나님에게 오른 손과 왼손이 필요할까요? 이것은 문학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에게 오른 손이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主權, sovereignty)’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권능(權能, authority)’을 말합니다. 오른 손의 의미가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을 의미한다는 것을 7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7절,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하나님의 오른 손에 있는 책은 어느 누구도 취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그 책을 취하실 수 있습니다.
전도서 10:2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 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마태복음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태복음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태복음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책이 있으니 - 사도 요한이 살았던 시대에 책이란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두루마리(scroll) ; 양가죽과 파피루스에 기록한 것
둘째는 코덱스(codex) ; 오늘날의 책의 형태, 고문서(古文書)
안팎으로 썼고 - 아무리 종이가 귀한 시대이지만 안팎으로 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밖에 기록한 것은 쉽게 지워지거나 훼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안팎으로 썼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안과 밖이란 안은 ‘말씀의 속뜻’을 의미하고, 밖은 ‘말씀의 겉 뜻’을 의미합니다.
봉하였더라 - 당시 중요한 공적 문서는 그 내용의 일부를 밀랍 또는 진흙으로 봉인하여 그 위에 직인이나 도장을 찍어 함부로 열 수 없게 하였다고 합니다.
봉함하라는 의미
1. 어느 누구도 고칠 수 없다(다니엘 6:17)
이에 돌을 굴려다가 굴 어귀를 막으매 왕이 그의 도장과 귀족들의 도장으로 봉하였으니 이는 다니엘에 대한 조치를 고치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더라.
2.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는 것(다니엘 12: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봉함하라고 하신 후에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사람들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정보와 속도가 사람을 지배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봉함하라는 영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기 어려운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다니엘 12:9, 그가 가로되 다니엘아 갈찌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간수하고 봉함하라고 하셨습니다. 간수하고 봉함한다는 것은 가지고 있지만 봉해져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성경을 갖고 있지만 읽지 않는 상태라고 하겠습니다.
이사야 29:11∼12,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유식한 사람은 봉해졌기 때문에 읽지 못하고 무식한 사람은 글을 몰라서 읽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지식과 정보에 도취되어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을 봉함이라고 합니다.
봉함하였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를 말합니다.
말씀이 봉해진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말씀은 주어졌으나 말씀보다는 모든 관심이 말씀 이외의 것에 집중하는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회복이 중요합니다.
역사를 보면 말씀이 회복되지 않으면 종말적 현상이 심각하게 나타났습니다.
아모스 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봉하였다는 의미는 유식한 사람도 무식한 사람도 성경을 읽어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선포하는 지도자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를 말합니다.
성도들의 귀를 즐겁게 하고 삶을 행복하게 하려는 가르침을 좋아하는 시대가 올 것을 말씀합니다.
책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해석하기 위해서 구약 에스겔 2:9∼10을 찾아보겠습니다.
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을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는 애가(lament) - 현대인의 성경, 탄식
둘째는 애곡(mourning) - 현대인의 성경, 슬픔
셋째는 재앙(woe) - 현대인의 성경, 재앙의 말
세 가지 내용은 모두 심판에 관한 내용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의 징조들을 미리 알려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내용으로는 6장에서부터 계시된 여섯 가지 인과 나팔과 대접의 재앙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묵시문학의 표현 방법은 심판과 구속을 말씀할 때 사용하셨다.
다니엘 8:17, 그가 나의 선 곳으로 나아왔는데 그 나아올 때에 내가 두려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매 그가 내게 이르되 인자야 깨달아 알라 이 이상은 정한 때 끝에 관한 것이니라.
다니엘 8:19, 가로되 진노하시는 때가 마친 후에 될 일을 내가 네게 알게 하리니 이 이상은 정한 때 끝에 관한 일임이니라.
마지막 때의 특징을 성경에서는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말씀이 봉인된 시대라고 합니다.
이제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이 봉인되었습니까? 아니면 봉인되지 않았습니까?
분명하게 요한계시록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계시록을 유식한 사람도 읽지 못하고 무식한 사람도 읽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말씀에 대한 열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회복해야 합니다.
말씀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들의 일상생활의 습관을 점검하고 이제부터는 말씀이 우선되는 삶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2.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힘 있는 천사 - 힘 센 천사(요한계시록 10:1, 18:21)
요한계시록 10:1,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요한계시록 18:21,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천사의 종류가 다양하게 소개됩니다.
예를 들면
스랍(세라핌, Seraphim)은 보좌 주위에서 찬양을 맡은 천사(이사야 6:1∼4)
그룹(케루빔, Cherubim)은 수호천사(창세기 3:34, 히브리서 9:5, 에스겔 10:10∼14)
힘 있는 천사(a strong angel)는 강한 천사로 알려졌다(요한계시록 10:1, 18:21)
힘 있는 천사를 스웨덴의 스베덴보리라는 영성학자는 ‘말씀을 깨달은 존재’ 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4.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 확신이 아니라 추측입니다. 그러나 9절을 읽어보면 사실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 합니다.
9절,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유대 묵시문학에서 ‘사자’는 ‘메시아’를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봉인된 두루마리의 인을 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 이름으로만 살아가야 합니다.
뿔(horn)은 능력을 상징합니다.
눈(eye)은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영이라고 분명하게 해석을 합니다.
어린 양과 두루마리
어린 양은 세상 죄를 짊어지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두루마리는 책을 의미합니다. 그 두루마리가 인으로 봉해져 있으나 그 인을 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어린 양과 새 노래(요한계시록 5:9∼14) |
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하더라
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어린 양과 새 노래’ 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어린 양의 의미(意味)
12∼13절,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Ἀρνίον)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Ἀρνίῳ)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 어린 양 - 721. 아르니온(ἀρνίον), lamb
* 요한복음 21:15 - 내 어린 양(羊)을 먹이라. / 아르니온(ἀρνίον, Lamb)
- 요 21:15 - 어린 양(羊) ἀρνίον, 721. lamb
cf. 요 21:16, 17 - 양(羊) πρόβατον, 4263. a little sheep
부활 후 디베랴 바다에서 밤새도록 고기를 잡던 베드로에게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 말씀하셨을 때 153마리의 고기를 잡은 후 해변가에서 아침을 먹으며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첫 번째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했을 때 예수님께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어린 양을 ‘아르니온’이라고 합니다.
아르니온(ἀρνίον)이란 어린 양의 특징
1. 순한 양
2. 공격성이 없는 양
3. 외모적으로 보잘 것이 없는 양
4. 방어할 능력이 없는 양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Ἀμνὸς)이로다.
* 어린 양 - 암노스(Ἀμνὸς) / 순결함과 희생적인 용도의 양
286. 암노스(ἀμνός) as a type of innocence, and with sacrificial connotation
- 암노스란 어린 양은 순결하고 희생을 위한 양을 말합니다.
새 노래의 의미(意味)
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새 노래’를 헬라어로 ‘오덴 카이넨(ᾠδὴν καινὴν, a song new)’ 이라고 합니다.
‘오덴(ᾠδὴν)’ 이란 단어의 원형은 ‘ᾠδή’ 라고 하는데 그 뜻은 ‘노래’ ‘찬송’을 말합니다.
‘카이넨(καινὴν)’ 이란 ‘새로운(new)’ 이란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15: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새 노래의 특징을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노래의 내용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한 것을 노래합니다. 크고 기이란 일이란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 14: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크고 기이한 일이란 땅에서 구속함을 받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이라고 합니다.
‘새 노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믿고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불러야 할 노래로서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새 노래라고 말할 때는 세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구속의 노래(9절)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이것을 구속(救贖)이라고도 하며 구원(救援)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새 노래는 구속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12절.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찬양에 대한 유대인의 전설을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천사들에게 의견을 물으셨다고 합니다. 한 천사가 창조주를 찬양하는 음악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음악을 만드셔서 바람의 속삭임에도, 새들의 지저귐에도 그리고 사람들에게 음악을 선물로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람을 그냥 바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바람 소리를 들을 때에 음악 소리와 같다고 합니다. 또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노래한다고 합니다.
음악은 인간에게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찬양과 경배는 귀한 선물인 음악으로 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새 노래로 주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우리의 생각과 관심이 세상과 죄악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 마음속으로부터의 힘찬 노래를 부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삶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찬양은 힘을 얻고 진실해집니다. 우리의 감사와 순전한 기쁨으로 주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립시다.
시편 98편의 표제는 ‘시’ 라고 합니다. ‘시’를 히브리어로 ‘미즈몰’ 이라고 합니다. 시편에 속한 시를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단지 ‘미즈몰’ 이라는 표제어로 사용한 시는 시편 150편의 시들 중에서 단 하나 98편뿐 입니다. 시편 98편은 그만큼 순수한 시요 순수한 노래라는 뜻입니다.
1절,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
왜 ‘새 노래’로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했을까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 손과 거룩한 팔로 구원을 베푸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의 오른손’ 지난 주일에 소개했던 것처럼 권능과 주권을 말합니다.
‘거룩한 팔’이란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는 자들에게 내리시는 심판의 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오른손을 들어 애급으로부터 바벨론으로부터 당신의 백성들을 구해내시고 인도하셨으며, 거룩한 팔을 들어 애급과 바벨론을 치사 그들을 준엄하게 심판하셨습니다. 이는 실로 ‘기이한 일’이며 놀라운 구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인도하심을 입은 백성들이야말로 ‘새 노래’로, 가장 순수한 ‘시’로 하나님을 찬양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노래할 때 어떻게 노래해야 할까요?
시편 40:3,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He put a new song in my mouth, a hymn of praise to our God. Many will see and fear and put their trust in the LORD.
새 노래의 특징은 노래를 부르는 것에 멈추지 않고 노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노래를 보여줄 수 있을까요?
구속 받은 삶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출애굽 당시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가정에서는 초태생과 장자의 죽음의 재앙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놀라운 사건을 히브리 백성들과 애급에 거주하던 많은 사람들이 두 눈으로 분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9:8 - 세마포는 거룩한 행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오늘의 시대를 기독교와 교회의 위기라고 말하는 이유는 구속을 찬양하는 입은 많지만 구속을 보여주는 삶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새 창조의 노래
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하더라.
새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으로 세웠기 때문에 저희가 세상에서 왕 노릇해야 합니다. 새 노래는 죄인이었던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 땅에 죄의 종으로 살아가지 않고 죄를 이기셨던 예수님을 따라 죄를 물리치고 이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시편 149:1,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찌어다.
새 노래는 세상 사람들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닙니다. 새 노래는 거듭난 성도들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라고 하겠습니다.
셋째, 마지막 부를 노래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마지막 부를 노래를 다른 말로 종말론적 찬양이라고 하겠습니다.
새 노래는 주 예수를 믿던 성도들이 장차 주님의 나라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서 부를 노래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노래를 ‘종말론적 찬양’ 이라고 합니다. 또는 하늘나라 찬양이라고 하겠습니다.
새 노래에 대한 믿음의 근거는 어린 양입니다.
복음을 믿고, 복음대로 살며, 복음에 의해 변화를 받은 성별된 무리가 나의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카이로스 시간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될 때 영적각성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찬송을 스피릿추얼 어웨이크닝(spiritual awakening) 즉 영적대각성 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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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스교회 요한계시록 강해 설교(2019-06-23)
요한계시록 6: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레 소리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요한계시록 8: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
요한계시록 16:2,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도입 이야기)
제가 어렸을 때 남산에 아카시아나무가 많았습니다. 아카시아나무가 많은 이유는 일본 강점기 시절에 일본인들이 한국의 산과 들을 황폐화 시키려고 일부러 아카시아 나무를 심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산림학자들이 한국의 산림을 연구하며 얻은 결론은 한국전쟁 후 땔감이 부족하여 산에 나무를 벌목하여 화목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산이 민둥산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만일 민둥산에 유실수와 용재수와 같은 나무를 심으면 자리를 잡을 수 없기 때문에 먼저 토양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토양을 회복시키려면 주로 생존력이 강한 아카시아나무와 오리나무를 심어서 땅을 회복시킨 후에 재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용재수(用材樹)와 열매를 얻을 수 있는 유실수(有實樹)와 같은 나무를 심어서 산림을 가꾸어야 한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어렸을 때 들었던 일본인들이 한국의 산에 아카시아나무를 심어 땅을 황폐화 시키려고 하였다는 것은 산과 나무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해도 그동안 잘못된 지식과 정보에 의해서 요한계시록의 의도와 목적에서 벗어난 해석들이 교회와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그러나 근자에 요한계시록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과 유대묵시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서 요한계시록의 목적과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설교자의 사명은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잘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이미 해석된 내용이 무엇인지 알려주어 더 이상 혼란이 없도록 바로 잡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 읽기만 해도 열리는 요한계시록. 김형종저. 솔로몬출판사 p. 6
예수님께서 요한계시록을 주시면서 혼란을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너무 오랫동안 종말론에 대한 잘못된 신앙으로 혼란을 일으켰고 지금도 혼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인터넷과 유트브의 발달로 인하여 제각기 자기들의 주장과 해석을 제공하기 때문에 여전히 요한계시록의 목적과 의도에서 벗어난 주장들이 끊임없이 제공되고 있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 실례가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을 세 번에 걸쳐 다가올 재앙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재앙을 피하려면 환난 전에 공중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계시록에서 소개하는 인과 나팔과 대접이란 한 번의 재앙에 대한 세 번의 다른 각도의 설명으로 이해하면 아주 간단합니다. 세 번의 다른 각도에서 설명한다는 것을 히브리 문학의 특징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 문학의 특징은 세 번씩 반복하여 강조하는 표현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 민족은 세 번씩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을 즐겨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삼위일체)
창세기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우리’ 라는 복수 명사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표현한 것입니다. 사람을 만드실 때에 세 분 하나님께서 함께 일을 하셨고 함께 경영하셨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성부(聖父) 하나님은 일을 계획하십니다. 성자(聖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며 일을 실행하십니다. 성령(聖靈)은 성자 예수님께서 실행하는 일을 도와 이루어 가십니다.
둘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출애굽기 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하나님께서는 구약과 신약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시고 약속하실 때 그들의 조상 세 명을 언급하심으로 완벽한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을 드러내셨습니다.
셋째,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이사야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요한계시록 4: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넷째, 믿음, 소망, 사랑
고린도전서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을 강조하기 위하여 먼저 믿음과 소망을 제시합니다.
다섯째, 길, 진리, 생명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여섯째,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일곱 인(6:1∼17, 8:1∼5)
일곱 나팔(8:6∼13, 11:15∼19)
일곱 대접(16:1∼21)
인과 나팔과 대접이라는 세 개의 재앙에서 동사(動詞)를 살펴봅시다.
일곱 인의 재앙에서 동사는 ‘떼다(아노이고, ἀνοίγω)’
요한계시록 6: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레 소리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 떼시는(ἤνοιξεν) 동사의 원형은 ‘떼다(ἀνοίγω)’ 455. Definition : to open
‘일곱 인’에서 동사는 ‘떼다’입니다. 인을 떼기 시작하므로 세상에 종말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인으로 봉한 것을 뗄 때 열어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것을 우주적 선언이라고 하며 징조(sign)라고 합니다.
일곱 나팔의 재앙에서 동사는 ‘불다(살피조, σαλπίζω)’ - salpizó
요한계시록 8: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
* 부니(ἐσάλπισεν)의 동사 원형은 ‘불다(σαλπίζω)’ 4537. Definition : to sound a trumpet
‘일곱 나팔’에서 동사는 ‘불다’입니다. 나팔을 부는 것은 심판이 곧 다가올 것을 알려주는 심판의 선언이며 경고(warning)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나팔을 불 때는 항상 이제부터 무엇인가 시작된다는 것을 재앙의 선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곱 나팔을 부는 것은 이제부터 이 세상에 재앙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접의 재앙에서 동사는 ‘쏟다(에크케오, ἐκχέω)’ - ekcheo
요한계시록 16:2,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 쏟으매(ἐξέχεεν)의 동사 원형은 ‘쏟다(ἐκχέω)’ 1632. ekcheo Definition : to pour out, to bestow
‘일곱 대접’에서 동사는 ‘쏟다’입니다. 쏟는다는 것은 드디어 징조와 경고를 거쳐 본격적으로 심판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재앙(disaster) 또는 심판(judge)을 의미합니다.
왜 히브리 문학은 삼중 구조로 강조할까요?
히브리민족은 움직이는 민족이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히브리 민족을 동사(動詞) 민족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히브리 민족의 신앙은 살아 움직이는 동사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움직이는 성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는 말씀에서 동사는 ‘창조하다’ 라는 동사가 성경 전체의 한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이 생겨나고 모든 사람들과 자연과 우주는 창조라는 단어 안에서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늘과 땅을 벗어나서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선언적인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움직이는 백성이었습니다. 유대인을 히브리인이라고 합니다.
‘히브리’라는 단어는 히브리어가 아닙니다. ‘히브리’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이브리’라고 합니다. ‘이브리’의 뜻은 ‘강을 건너다’ 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가나안땅으로 올 때 ‘유브라데 강’을 건넜습니다.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넜습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히브리인은 곧 강을 건넌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면 건너가는 사람들입니다.’
‘건너가다’는 단어의 1차적인 뜻은 ‘움직이다(move)’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에만 움직였습니다. 아무 곳이나 아무 강이나 건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따라가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히브리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인과 이스라엘인이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히브리인은 싸움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우물 때문에 서로 다툴 수밖에 없었을 때 조카 롯의 목자들과 좋은 목초지를 차지하려는 싸움을 하려고 할 때에도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인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적으로 싸움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히브리인은 목초지를 찾아다니는 유목민 생활을 하였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 정착해야 하기 때문에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는 ‘사람을 시간’이라 하였고 ‘하나님을 영원’이라 비유하며 사람과 하나님 사이는 영원한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사람, 영원과 시간 사이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성육신(聖肉身)
성육신이란 영원이신 하나님께서 시간인 사람을 찾아오심으로 영원과 시간의 만남을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재림(再臨)
성경에 재림(再臨)이란 단어가 사용된 말씀은 318구절이라고 합니다. 신약 성경은 7,959절이므로 25절마다 한 구절씩 재림이라는 단어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신약은 모두 260장입니다. 따라서 매 장마다 재림이란 단어가 한 번씩은 반드시 소개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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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옷을 입은 주의 백성들(요한계시록 7:14, 19:8) |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아멘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아멘
오늘 설교 제목은 ‘흰옷을 입은 주의 백성들’입니다.
한민족을 정의하는 두 단어는 ‘백의민족(白衣民族)’과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라고 하겠습니다.
백의민족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3세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고구려인들과 부여인들이 흰옷을 즐겨 입었다는 기록과 중국에서 고려인들은 흰옷을 즐겨 입는다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홍익인간이란 한민족의 시조 단군의 건국이념으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리라’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이란 말씀 때문에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가족관계를 파괴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도 한국뿐입니다. 이런 이유가 한민족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개천절(開天節, National Foundation Day)은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세운 것을 기념 하는 날입니다. 건국기념일을 하늘이 열린 날이라고 지키는 나라가 대한민국이 유일한 나라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애국가(愛國歌)의 가사에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이렇게 국가에 하느님이 보우한다는 가사를 사용하는 나라도 대한민국이 유일한 나라입니다.
제헌국회가 시작하는 1948년 5월 31일 당시 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박사는 기독교 국가가 아닌데도 제헌국회를 개회하며 당시 감리교 목사이었던 이윤영의원(이범석장군의 사위)에게 기도를 부탁하여 200명 제헌 의원들 중에 제주도에서는 4. 3항쟁으로 2명이 참석하지 못하고 198명 전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개회기도를 했다는 것도 대한민국입니다.
그런데 근자에 대한민국이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걱정합니다. 왜 대한민국이 이렇게 어지러워졌을까요? 그 이유는 교회가 어지럽기 때문입니다.
어느 지하철에서 젊은이 두 사람이 서로 말다툼을 하며 시끄럽게 싸움을 하는데 그 곁에서 젊은이들이 다투는 것을 목격했던 나이 지긋한 신사 한 분이 젊은이들에게 ‘이보게 젊은이들, 싸우려면 예배당에 가서 싸워야지 왜 지하철에서 싸움을 하는가!’ 하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심지어 북한의 지도자는 남한을 거의 접수했는데 단 한 곳 교회는 아직 접수하지 못했다고 한다고 합니다.
교회를 어지럽히는 비결은 성경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을 더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오늘날 세계교회들이 추구하는 신앙의 목표를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영성(靈性)입니다. 건강하고 올바른 영성을 갖춰야 합니다. 둘째는 치유(治癒)입니다. 육체적인 질병도 고쳐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질병에서 자유를 회복해야 합니다. 가끔 조울증에 의한 사고가 일어나는데 조울증이란 곧 정신적 질환을 말합니다. 셋째는 공동체(共同體) 회복입니다. 인터넷과 산업의 발달 그리고 대중문화의 발전에 의해서 세계가 마치 하나의 공동 운명체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황사먼지가 한국에 심각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러한 시대에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읽을 수 있도록 교인들을 훈련하여 어지러운 세상을 바르게 회복시킬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1919년 3. 1 운동 당시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의 2% 정도 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3. 1운동 당시 33인의 대표 중에 1/3이 기독교인이었다고 합니다. 무려 30%를 차지했다는 것은 그만큼 기독교가 세상을 향해서 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구원을 받는 방법을 계시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핍박을 받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끝까지 인내하며 교회를 지켜 믿음으로 승리하는 믿음을 격려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 주보와 함께 요한계시록을 이해 할 수 있는 자료 한 장을 나눠드렸습니다. 자료의 내용에 따라 말씀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핵심 되는 말씀은 ‘일곱 인’과 ‘일곱 나팔’ 그리고 ‘일곱 대접’ 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동안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인과 나팔과 대접을 각기 서로 다른 21가지 재앙으로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은 히브리 묵시 문학이라는 특별한 구조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인과 나팔과 대접은 각기 서로 다른 21가지 재앙이 아니라 반드시 일어날 일에 대한 히브리 문학의 강조 용법으로 세 번 반복하는 표현 형식입니다.
그러므로 21가지 재앙이 아니라 마지막 반드시 속히 될 일에 대한 재앙 심판을 말씀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도표를 보면서 하나씩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세 부분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기독론(基督論)과 교회론(敎會論) 그리고 종말론(終末論)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독론은 1장을 중심으로 영광스런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교회론은 2, 3장을 중심으로 아시아 지역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로 교회의 근거는 영광스런 예수님이시며 모든 교회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종말론은 일곱 인과 일곱 나팔 그리고 일곱 대접에 이어 재앙은 불신자들에 대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요한계시록 11:1∼2,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요한계시록 15:13∼14,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나눠드린 자료 인과 나팔과 대접에 대한 비교 도표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묵시문학(黙示文學) |
시기(時期) - 주전 200년 경 부터 시작하여 주후 100년
묵시(默示) - 아포칼립시스(Απōκάλυψις, apocalypsis)
1. 하나님이 선택받은 예언자에게 주셨다.
2. 비밀의 폭로(뚜껑을 열어서 보여주는 것)
* 비밀(秘密) ; 보여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
* 계시(啓示) ; 보여주어도 알 수 없고 설명해야 알 수 있는 것
3. 전달 방법 ; 신비적 환상, 꿈
4. 방법 ; 반복 강조 - 동사(動詞)
* 요한계시록의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란 각각 반복되는 재앙이 아니라 마지막 재앙을 강조하기 위한 히브리문학의 특별한 반복 강조 용법이라.
1. 일곱 인(引) - 징조(徵兆) Sign
2. 일곱 나팔(喇叭) - 경고(警告) Warning
3. 일곱 대접(大碟) - 심판(審判) Judge, 재앙(災殃) Disaster
동사(動詞) |
1. 일곱 인을 떼다 - 아노이고(ἀνοίγω) open
2. 일곱 나팔을 불다 - 살피조(σαλπίζω) sound
3. 일곱 대접을 땅에 쏟다 - 에크케오(ἐκχέω) pour
재앙 심판의 범위 |
6:8, 네 번째 인을 뗄 때 청황색 말의 등장, 땅 1/4의 권세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8:7∼13, 첫째 천사의 나팔(땅의 1/3), 둘째 천사의 나팔(바다의 1/3), 셋째 천사의 나팔(하늘의 별 1/3이 물샘), 넷째 천사의 나팔(해 달 별의 1/3 어둠)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지더라.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이 별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 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소리를 인함이로다 하더라.
9:15,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
9:18∼21,
이 세 재앙 곧 저희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을 인하여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이 말들의 힘은 그 입과 그 꼬리에 있으니 그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
16:1, 대접 재앙은 땅에 쏟아 붓는 것이다.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일곱째 재앙 징조(徵兆) |
요한계시록 4:5, 번개, 음성, 뇌성, 일곱 등불(일곱 영) * 지진이 없다.
-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큰 우박(11:19, 16:21)
요한계시록 11: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요한계시록 16:21,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 달란트 - 고대 그리스어 탈란톤(τάλαντον)
라틴어 탈렌툼(talentum), 영어 탈랜트(talent), 수메르어 구(Gu)
1달란트는 60 found 1파운드는 453.6gm, 1달란트는 27.216kg.
8:5 |
11:12∼13 |
16:18 |
11:19 |
16:21 |
뇌성(雷聲) |
|
뇌성 |
뇌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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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音聲) |
큰 음성 |
음성 |
음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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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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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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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地震) |
큰 지진 |
큰 지진 |
지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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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우박(雨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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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우박 |
큰 우박 |
8:5, 뇌성, 음성, 번개, 지진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11:12∼13, 큰 음성, 큰 지진,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16:18, 번개, 음성, 뇌성, 큰 지진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11: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16:21,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대상(對象) |
9:4∼5,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요한계시록 11:1∼2,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요한계시록 15:13∼14,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승리자(勝利者) |
요한계시록 3:4∼5, 사데교회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요한계시록 3:18, 라오디게아 교회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요한계시록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죄인으로 태어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내 죄를 대신하여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40일 동안 함께 계시다가 하늘로 오르시며 너희가 본 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그 신앙에 따라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을 했다는 것은 결코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것을 믿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방법입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요한계시록 7: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요한계시록 12: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요한계시록 19: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첨부 자료 #. 1
①. 파트리스교회 요한계시록 강해 자료 2019-06-30
흰 옷을 입은 주의 백성들(요한계시록 7:14)
종류(種類) |
인(引) |
나팔(喇叭) |
대접(大碟) |
본문(本文) |
6:1∼17 |
8:6∼13 |
16:1∼21 |
묵시문학 |
징조(徵兆) |
경고(警告) |
심판(審判, 災殃) |
동사(動詞) |
아노이고 |
살피조 |
에크케오 |
범위(範圍) |
지역적 |
지역적
8:7∼13, 9:15 |
세계적(우주적) |
일곱째 재앙 |
8:5 |
11:12∼13 |
16:18 |
대상(對象) |
9:4∼5, 11:1∼2, 15:13∼14, 16:15 |
||
승리자 |
3:4∼5, 18, 7:14 |
인(引)과 나팔(喇叭)과 대접(大碟)의 비교
요한계시록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 파트리스교회 요한계시록 강해 자료 2019-06-30
첨부 자료 #.2
①. 파트리스교회 요한계시록 강해 자료 2019-06-30
흰 옷을 입은 주의 백성들(요한계시록 7:14)
인자 |
일곱 교회 |
일곱 인 |
일곱 나팔 |
일곱 대접 |
신자 |
불신자 |
|||||
1:13∼18 |
2:1∼3:22 |
6:1∼17 |
8:6∼9:21 |
16:1∼21 |
17:1∼22:21 |
기독론 (基督論) Christology |
교회론 (敎會論) Ecclesiology |
종말론 |
요한계시록에서 재앙에 의한 심판과 징계는 신자들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을 심판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1∼2,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요한계시록 15:13∼14,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위치 및 공간적 배열
밧모섬 |
하늘 |
땅 |
1∼3장 |
4∼11장 |
12∼22장 |
환상과 계시의 배열
1:19 -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본 것 |
지금 있는 일 |
장차 될 일 |
1장 |
2∼3장 |
4∼22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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