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오늘의 묵상 자료(3월)


2020 오늘의 묵상(3월)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3

1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우한 폐렴(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19)”의 영향으로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주일날 예배당에 모이지 못하고 동영상으로 또는 인터넷으로 각 가정에서 예배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예배를 어디에서 드려야 할까요?
사마리아 여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독서(讀書)는 앉아서 하는 여행(旅行)
여행(旅行)은 서서하는 독서(讀書)
예배(禮拜)는 앉아서 하는 천국(天國) 방문(訪問)
오늘도 예배(禮拜)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天國)를
경험(經驗)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祝福)합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3

2

데살로니가전서 5:1∼28

영과 혼과 몸(23절)

3

3

데살로니가후서 1:1∼12

심판의 표(5절)

3

4

데살로니가후서 2:1∼17

멸망의 아들(3절)

3

5

데살로니가후서 3:1∼18

사랑과 인내(5절)

3

6

디모데전서 1:1∼20

괴수(魁首)(15절)

3

7

디모데전서 2:1∼15

중보(中保)(5절)

3

8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3월 2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5:1∼28
♦ 묵상을 위한 주제 : 영과 혼과 몸(23절)
♦ 성구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사순절 제5일 아침을 맞이합니다.
오늘도 새 날을 맞이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감사합니다.
어제 밤에도 얼마나 많은 사건과 사고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문을 넘어갔습니다. 이런 와중(渦中)에도 이렇게 건강하게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귀합니까?

건강(健康)이란 육체적인 것만 아니라 영(靈, Spirit, πνεῦμα)과 혼(魂, Soul, ψυχὴ)과 육(肉, Body, σῶμα)의 창조적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창조적 조화란 최초의 사람 “아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셨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 하나님과의 건강한 관계는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창조적 조화는 하나님과의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죄가 인간에게 들어왔으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죽음 이후에는 영생(永生)과 영벌(永罰)의 갈림길에서 영생(永生)의 자리를 확보한 것입니다.

영생의 자리를 확보하는 방법을 영과 혼과 육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영과 혼과 육을 흠 없이 보존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경건의 훈련에 의해서 영과 혼과 육을 흠 없이 보존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영(靈)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동물의 값은 죽었을 때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소고기 한 근의 가격과 돼지고기 한 근의 가격은 시장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지만 사람의 고기는 시장에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판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동물의 가치는 고기 값이 아닙니다. 그 가치는 “영(靈)”에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태복음 16:26) 

사람의 목숨이 천하보다 값진 것은 동물의 고기 값보다 사람의 영(靈)의 가치를 그만큼 귀하게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3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데살로니가후서 1:1∼12
♦ 묵상을 위한 주제 : 심판(審判)의 표(標)(5절)
♦ 성구 :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심판(審判)이란 “살필 심(審)” “판단할 판(判)”
표(標)란 “표할 표(標)”

심판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살펴봅니다.
1. 어떤 일이나 상황, 문제 따위를 자세히 조사하여 잘잘못을 밝힘.
2. 경기 등에서, 규칙의 적부, 경기의 우열이나 승부를 판정하는 일.
3. 사람이 죽은 후나 역사의 종말에 가서 인간이나 세상의 잘잘못을 신이 판정함.

심판(審判)의 표(標)를 헬라어로 분석해 봅니다.
심판(κρίσεως)이란 “κρίσις(krisis)”(judgement)
표(ἔνδειγμα)란 “ἔνδειγμα(endeigma)”(proof, indication)    
심판의 표란 “심판의 증거” 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성경은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고 합니다(히브리서 8: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심판의 표”는 “온갖 박해와 고난을 참고 견디며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세상에서 무병장수 및 만사형통과 같은 삶을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심판의 표는 세상에서 온갖 핍박과 박해 그리고 고난을 받을 때에도 믿음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동방 우스 땅에 욥은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잃고 심지어 온 몸에 악한 피부병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과한 후에 욥의 재산은 갑절이 되었고 잃었던 자녀들을 다시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순절 제6일을 맞이합니다.
사순절이란 고난의 주님을 묵상하며 고난을 피하는 믿음이 아니라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회복하고 강화시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고난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빛을 드러낼 수 있는 믿음의 보석을 다듬어 부활의 아침에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으로 굳게 일어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4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데살로니가후서 2:1∼17
♦ 묵상을 위한 주제 : 멸망(滅亡)의 아들(3절)
♦ 성구 :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멸망의 아들”을 영어 성경(NIV)에서 “the man of lawlessness(무법의 아들)” 이라고 번역합니다. 과연 무법의 아들이란 어떤 존재를 말할까요? 

무법의 아들이란 적그리스도를 말합니다(요한일서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적그리스도(ἀντίχριστος)란 헬라어에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존재”
예수님의 행하시는 일을 대적하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대신하는 존재”
예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는 것은 마지막 시대를 알려주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적그리스도를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존재(요한일서 2: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둘째는 성육신 사건을 부인하는 존재(요한이서 1:7)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적그리스도는 무신론자들이 아닙니다.
복음을 외치되 거짓 복음을 가르치는 자들 또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린도후서 11:4).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린도후서 11:13∼15).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태복음 7:15).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복음 7:21∼23).

주의 재림(再臨) 때까지 적그리스도는 자주 나타날 것입니다.
분별의 영을 기도하며 사이비(似而非)와 이단(異端)을 구분하여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주의 백성들로 거듭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5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데살로니가후서 3: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사랑(愛)과 인내(忍耐)(5절)
♦ 성구 :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믿음이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2절)
왜냐하면 성도들이 주의 재림을 기다리면서도 재림의 날이 희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날마다 “악한 사람에게서 건져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과 인내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명한 것을 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것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어떻게 기다려야 할까요?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는 “사람을 시간”이라 하고 “하나님을 영원”이라 하며 사람과 하나님을 비교했습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영원한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시간인 사람이 어떻게 그 차이를 극복하고 만날 수 있을까?
영원하신 하나님 편에서 시간인 사람 편으로 스스로 다가와 만날 때 그 만남은 가능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태어난 사건 자체가 바로 영원이 시간으로 바뀐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자체가 영원이 시간 안으로 들어 온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신앙의 주인으로 모셔 들일 때 그는 시간에서 영원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었으니.”

시간에 속한 사람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비로써 하나님의 자녀 득 영원의 자녀로 거듭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때 그 사람의 삶이 곧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종말론적 삶을 실천하기 위한 비결이 곧 사랑과 인내입니다.

사순절 제8일을 맞이합니다.
오늘 하루도 사랑과 인내로 무장하여 다시 오실 주님을 믿음으로 기다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승리하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오 주님
이곳에 오셔서
환난과 질고 가운데서
불안한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강건케 하여
주님 기다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6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모데전서 1:1∼20
♦ 묵상을 위한 주제 : 괴수(魁首)(15절)
♦ 성구 :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괴수(魁首)”란 “악당의 우두머리”라는 뜻입니다.
“괴수”란 한자의 “훈(訓)”은 “으뜸 괴(魁), 괴수 괴(魁)” “머리 수(首)”라고 합니다.
“괴수”를 영어 성경에서는(NIV) “I am the wors(나는 최악입니다)” 라고 합니다. 
“괴수”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프로토스(πρῶτός)” 라고 하며, 뜻은 “first, chief” 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죄인 중에 가장 나쁜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의 죄에 대한 절대적 개념을 표현한 것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절대적인 표현보다는 상대적 표현을 더 좋아합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죄가 없다”며 자기의 의(義)를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참조 누가복음 18:9∼14).

사순절 제9일을 맞이합니다.
사순절이란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절기로서 이전 보다 좀 더 경건하고 거룩한 삶에 관심을 갖고 자기를 성찰(省察)하는 시간입니다.

지난 화요일 참회의 기도 “높은뜻 덕소교회 오대식 목사”의 회개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주님, 코로나19로 인해 불과 한 달 동안 우리의 생활 모든 것이 너무나 많이 바뀌었습니다. 요즘 상황을 보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분명 있음을 보게 하시고, 우리가 잘못 가고 있었던 길을 반성하며 다시금 주 앞에 바르게 서는 기간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1. 주님, 우리는 지금 평범한 일상이 다시 오기를 간구합니다.

매일 매일의 일상이 가장 큰 축복임을 이제라도 알게 하시니 감사드리며, 그동안 주님이 주신 행복을 곁에 놔두고 행운을 찾아 헤맸던 죄를 용서하시며 무엇이 가장 소중한 축복인지 깨닫게 하여 주십시오.

2. 한국인 입국을 막는 나라가 현재 92개국이 넘었습니다.

주님, 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나치리만큼 해외여행을 다니는 한국인에게 이제는 좀 절제하라는 주님의 사인 같이 느껴집니다. 남들과 관계없이 나만 즐기면 된다는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들을 이제는 바꿔주시고, 어려운 이웃에 대한 공감과 나에 대한 절제가 조금 더 삶에서 많이 나타나게 하여 주십시오.

3. 주님, 동남아와 중동국가들, 그리고 아프리카 나라들까지도 한국인을 무시하고 강제 격리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한국인들이 철저하게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을 무시해 온 것에 대한 정확한 인과응보 같이 느껴집니다. 앞으로 한국에 와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더욱 인격적으로 대하게 하시고 소중히 여기게 하여 주십시오. 나그네와 고아를 사랑하고 대접하라는 주님의 마음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게 하여 주십시오.

4. 주님, 마스크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그동안 너무 많이 무책임한 말을 내뱄고 거짓 뉴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퍼 날랐던 우리들에게 조금 더 침묵하며 살라는 주님의 명령 같습니다. 앞으로 조금 더 내 입을 막으며 적게 말하고 진실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게 하여 주십시오.

5. 주님, 모이는 교회를 막으시는 것은 그동안 한국교회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전혀 감당하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 모이는 일에만 힘 쓴 것에 대한 벌처럼 느껴집니다.

우리의 믿음의 현장이 교회가 아닌 세상임을 알려주시는 주님의 교훈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교회보다 교회 밖에서 더 빛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우리가 모두 다시 노력하게 하여 주십시오.

6. 교인이 5만 이니 10만 이니 하는 것이 모두 거품인 것을 알게 하신 주님, 하루  아침에 예배당의 교인들은 없어질 수 있음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목사의 관심이 교인의 수에만 있고, 교회의 자랑이 그 크기에만 있었다면 이제 그 마음을 돌이켜 우리의 참된 자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여 주십시오. 나의 자랑이 천박한 '교회크기'가 되지 않게 하시고, 내 기도의 간구가 경쟁에서의 승리가 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오직 존귀한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의 자랑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7. 주님, 이 어려움이 다 지나고 난 후, 이 땅의 교회들이 다시 새로워지며 주 안에서 하나의 교회로, 같은 교회로, 함께 천국을 향해 나가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와 같이 거룩한 공교회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텅 빈 예배당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동안의 나의 잘못을 참회합니다. 주님, 교인들과 함께 마주하며 예배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도록 주님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언제나 우리를 위로해 주시며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들이여!
사순절 경건의 시간을 지내며 내가 고백할 회개의 기도문을 적어보며 주님 앞으로 더 가까기 다가설 수 있는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7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모데전서 2:1∼15
♦ 묵상을 위한 주제 : 중보(中保)(5절)
♦ 성구 :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중보(中保)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두 사람 사이에서 일을 주선하는 사람.
2. 신과 사람의 사이를 화해시키고 교제를 유지하도록 하는 일.

그러나 성경에서 중보란 죄인과 창조주 하나님의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것을 말합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死亡)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生命)입니다.

죽음과 영원한 생명을 연결시켜 줄 수 있는 역할을 “중보자” 라고 합니다.

중보란 헬라어는 “메시테스(μεσίτης, mesites)” 라고 합니다.
‘메시테스’는 “meditator(중재자), arbitrator(중매인)”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중보하심을 알고 있습니까?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로마서 8:26∼27)   

예수를 믿는 것은 전도자로서 중보역할을 맡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전도(傳道)란 사망의 그늘에 갇힌 사람을 생명의 울타리 안으로 인도하는 거룩한 구원 사역입니다.

사순절 제10을 맞이합니다.

사망의 그늘에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구원의 길을 경험한 믿음으로 오늘도 주위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전도자가 되어 생명을 구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3

9

디모데전서 3:1∼16

경건의 비밀(16절)

3

10

디모데전서 4:1∼16

경건에 이르는 연습(7절)

3

11

디모데전서 5:1∼25

선한 행실의 증거(10절)

3

12

디모데전서 6:1∼21

하나님의 사람(11절)

3

13

디모데후서 1:1∼18

거짓이 없는 믿음(5절)

3

14

디모데후서 2:1∼26

예수의 좋은 군사(3절)

3

15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3월 9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모데전서 3:1∼16
♦ 묵상을 위한 주제 : 경건(敬虔)의 비밀(秘密)(16절)
♦ 성구 :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호주의 전직 TV프로듀서인 “론다 번(Rhonda Byrne)”은 “씨크릿(Secret)”이라는 저서에서 세계 유명 인사들이 성공을 하고 부자가 된 놀라운 비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끌어당김의 법칙(the law of attraction)” 이라고 합니다.

의식(意識)과 생각(生覺)에는 힘이 있고 긍정적인 것은 긍정적인 것을 끌어당긴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 중심에 부자가 되고 싶고, 성공을 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진정 중요하고도 꼭 필요한 크고도 놀라운 참된 비밀은 “경건의 비밀”이라고 합니다.

본문은 바울이 에베소교회 감독으로 있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당시 에베소를 사도행전 19장에서는 “아데미 신”을 숭상하며 제물을 바치는 우상에 빠진 도시였다고 말합니다. “아데미 여신”은 풍요와 다산, 쾌락의 신이었고 그 축복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데미여신은 가짜고 그녀가 주는 복이 크고도 놀라운 비밀이 아니라, 하나님이 진짜요 하나님이 주시는 복, 즉 경건한 삶이야말로 크고도 놀라운 비밀이라고 깨우치고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풍요와 쾌락과 다산이 큰 복이 아니라고, 그걸 누리도록 해주는 것이 크고 위대한 비밀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장 큰 복이요, 그분을 누리는 경건한 삶이야말로 크고도 놀라운 비밀이라고 강조합니다.

이와 같은 진리를 어디에서 배워야 할까요?
교회에서 이 진리를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왜녀하면 교회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집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들이여!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예수님처럼 살다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주 예수여,
주 닮기 원하오니
닮음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주님만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10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모데전서 4:1∼16
♦ 묵상을 위한 주제 : 경건(敬虔)에 이르는 연습(7절)
♦ 성구 : 경건(敬虔)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사순절 제12일을 맞이합니다.

경건(敬虔)이란 무엇일까요?
경건(敬虔)이란 한자는 “공경 경(敬)” “공경할 건(虔)” “삼갈 건(虔)”
경건(敬虔)이란 영어 성경(NIV)에서는 “godly(경건한)” 이라고 합니다.
경건(敬虔)이란 헬라어는 “유세배이안(εὐσέβειαν)” 이라고 합니다.
원형은 “유세배이아(εὐσέβεια, eusebeia)” 라는 여성 명사입니다.
뜻은 “경건함(godliness, piety)”, “헌신(devotion)” 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경건”이란 단어가 사용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야고보서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디모데후서 2: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야고보서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히브리서 12:28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시편 32:6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찌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디모데전서 2:1∼2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경건이란 예배와 기도에 힘쓰는 삶을 통해 얻어진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경건은 유전(遺傳)이 아니라 연습(練習)에 의해서 얻어지는 결과물입니다.

연습(練習)이란 “굼나제(γύμναζε)”의 동사 원형은 “굼나조(γυμνάζω, gumnazó)” 라고 하며 뜻은 “train(훈련)”입니다.

“피나는 훈련” “피나는 연습”이 있어야 경건한 사람으로 경건한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리차드 포스터(Richard J. Foster)” 라는 영성신학자는 그의 저서 “영적 훈련과 성장(Celebration of Discipline)”에서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는 내적(內的) 연습(The Inward Disciplines)

내적 연습에는 “묵상(黙想)”과 “기도(祈禱)”와 “금식(禁食)” 그리고 “성경공부(聖經工夫)”를 말합니다.

둘째는 외적(外的) 연습(The Outward Disciplines)
외적 연습에는 “봉사(奉仕)”와 “홀로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집단(集團) 연습(The Corporate Disciplines)
집단 연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禮拜)”입니다. 예배의 연장선으로 “수련회(修鍊會)” “부흥회(復興會)”와 같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순절 제12일 맞이합니다.
사순절이란 경건의 훈련을 위한 계절입니다.
새 봄을 맞이하듯 사순절 절기에 경건의 훈련에 동참하여 경건에 이를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기대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11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모데전서 5: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선한 행실의 증거(10절)
♦ 성구 :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 

사순절 제13일을 맞이합니다.

오늘 읽어야 할 말씀의 주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라고 하겠습니다. ‘사회적 약자’로서 대표적인 사람을 “과부”라고 합니다(참조. 구약 신명기 14:29, 객과 고아와 과부).
과부의 명부에 올릴 수 있는 사람을 “참 과부”라고 합니다(참조, 3, 5. 16절).

‘참 과부’란 연고가 없는 사람으로 어느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약자(弱者)를 말합니다. 선한 행실의 증거는 주를 믿는 믿음의 표현으로 그리스도인의 높은 생활(higher life)을 통하여 “성화(sanctification)”와 “완전(perfection)”을 실천하는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뜬다.”고 그리스도인들을 비웃는 이야기는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한 책망입니다.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것 보다 하나를 알아도 실천할 수 있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무엇이 믿음이 있는 것이고, 또 무엇이 믿음이 없는 것입니까?

믿음이 있는 것은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은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가르침은 힘이 없고 메마르고 위선으로 보여서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듣고 알았다면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묵상) 삶 가운데 적용하면 하나님께서 그 적용하는 행동 가운데 “총명(聰明)”을 더해주십니다. 총명은 영적인 분별력과 깨달음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총명을 받은 사람은 비록 그의 말이 어눌하다 할지라도 그 어떤 설교보다도 큰 감동을 줍니다.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디모데후서 2:7)

사순절 제13일을 맞이합니다.
선한 행실의 증거는 믿음을 실천하는 현장에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열매를 소개하기 전에 먼저 우리들이 선한 행실의 증거를 회복하여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열매를 맺는 영적인 삶을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승리하는 은총의 하루가 펼쳐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12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모데전서 6:1∼21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나님의 사람(11절)
♦ 성구 :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하나님의 사람(Man of God)은 하나님의 능력을 행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행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 이름”으로 행하는 힘을 말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사도행전 3:6)

오늘의 교회는 물질은 풍부하지만 예수 이름의 능력은 거지와 같습니다.
사순절 제14일을 맞이합니다.
2020년 사순절의 기간을 보내며 베드로와 같은 믿음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믿음이란 물질의 풍부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이름을 사용할 줄 아는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이 땅에서 떠나갈지어다!
예수 이름은 능력의 이름입니다.
능력의 이름은 능력을 회복한 사람에 의해서 사용될 때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 이름의 능력을 회복한 후에는 축복을 기도하는 사람으로 세워지기 를 기대하며 독일의 신학자 "요르그 징크(Jörg Zink, 1922~2016)"의 여행자를 위한 축복 기도를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네게 있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너보다 앞서 가시며,
네가 나아가야 할 바른 길을 보여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네 곁에 계시며,
그 팔로 너를 감싸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네 뒤에 계시며,
어두운 세력이 너를 해치지 못하게 보호하시고,
하나님이 네 아래 계시며,
네가 넘어지려 할 때에 너를 든든히 받쳐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네 옆에 계시며,
네가 슬퍼할 때에 너를 위로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네 안에 계시며,
너를 치유해주시고,
하나님이 너를 감싸주시어,
근심에 싸여 있을 때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노라.

마치 하늘에 태양이 있듯이 하나님이 네 위에 계시며,
그 능력으로 너를 강건케 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멘

주 예수여!
능력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내 구멘!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13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모데후서 1: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거짓이 없는 믿음(5절)
♦ 성구 :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매사에 부정적인 남자가 있었습니다.
전쟁 중에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였다는 이유로 총살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형 집행 얼마 전에 총살형이 교수형으로 바뀌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부정적인 남자는 “이 놈의 나라. 그렇게 전쟁을 하더니 결국 총알이 다 떨어졌군.” 이렇게 불평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는 다시 말하기를 “망할 놈의 나라. 밧줄도 다 떨어졌네.”

다행스럽게도 며칠 뒤에는 사면이 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이런 빌어먹을. 이제는 죄수들에게 먹일 식량도 다 떨어졌군.” 

부정적인 사람의 특징입니다.

교황 “이노센트 4세(Innocentius PP. IV, 이탈리아어: Papa Innocenzo IV. 제180대 교황, 재위 기간 1243. 6. 25∼1254. 12. 7)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25 ~1274. 3. 7)”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지어 기증한 ‘라테란 성당’ 발코니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각 국에서 보내온 헌금주머니들이 속속 성당으로 도착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교황 이노센트 4세’가 “선생 보시오. 베드로 사도께서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는데 지금 교황청은 은과 금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깊은 한 숨을 쉬며 “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교황님! 오늘의 교회는 은과 금은 있지만 대신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수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현대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이란 “긍정적인 믿음”을 말합니다.

긍정적인 믿음의 특징은 “감사”라고 하겠습니다.

감사는 어떤 외부의 조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범사(凡事)에 감사(感謝)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13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모데후서 1: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거짓이 없는 믿음(5절)
♦ 성구 :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거짓이 없는 믿음(ἀνυποκρίτου πίστεως)” 이란 무엇일까요?

“아누포크리투”란 “ἀνυπόκριτος” 라는 형용사가 원형으로 “unhypocritical(위선적이지 않은)” “unfeigned(위조되지 않은)” “sincere(신실한)”이란 뜻입니다.

“피스테오스”란 “피스티스(πίστις)” 라는 동사가 원형으로 “faith(믿음)”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거짓이 없는 믿음”이란 “신실한 믿음(sincere faith)”을 말합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족들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디모데”는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거짓이 없는 믿음을 배웠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만큼 자녀들 앞에서 거짓이 없는 믿음의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7절).

첫째는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둘째는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

거짓이 없는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8절).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 때문입니다(14절).

이때 “거하시는” 이란 헬라 단어는 “충만하다(πληρόω, 플래로오, pléroó, 골 1:9)”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거짓이 없는 믿음은 성령으로 충만한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15일을 맞이합니다.
사순절이란 십자가의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사모하는 시간입니다.

두려움을 겁내지 않으려면 먼저 “성령으로 충만한 심령”을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믿음의 사람에게는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은혜가 넘쳐날 것입니다(골 1:9).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가정에서부터 거짓이 없는 믿음을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모두 함께 사순절 제15일을 맞이하는 이 날에 거짓이 없는 믿음의 가족들로 거듭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14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모데후서 2:1∼26
♦ 묵상을 위한 주제 : 예수의 좋은 군사(3절)
♦ 성구 :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예수의 “좋은 군사(καλὸς στρατιώτης. 칼로스 스트라티오테스)”가 됩시다.
사순절 제16일을 맞이합니다.
사순절 제16일을 맞이하는 아침에 “예수의 좋은 군사(good soldier of Christ Jesus)로 무장하는 은혜의 하루가 펼쳐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의 좋은 군사는 예수님은 물론 주위 모든 사람에게도 좋다는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나는 예수가 좋다고 노래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싫다고 한다면 과연 예수님은 나를 좋아하실까요?

어떻게 하면 예수의 좋은 군사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좋다”라는 헬라어에 두 가지 용어를 사용합니다.
첫째는 “아가도스(ἀγαθός, agathos)”란 “좋은(good)” 이란 뜻입니다. 
둘째는 “카로스(καλός, kalos)”는 “아름다운(beautiful” “좋은(good)”이란 뜻입니다.
 
“아가도스”라는 단어는 절대적으로 좋다는 의미를 말합니다.
“카로스”라는 단어는 상대적으로 좋다는 의미를 말합니다.
사람은 절대적으로 가장 좋은 예수의 군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좋은 군사로 무장해야 합니다.

좋은 군사의 특징은 평안한 날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서 승리한 후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군사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기뻐합니다(3절, 9절).

고난에 참여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째는 힘쓰라(15절)
하나님 앞에 자신을 온전히 바쳐야 합니다.

둘째는 버리라(16절, 23절)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려야 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려야 합니다.

셋째는 좇으라(22절)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아야 합니다.

영국의 소설가이며 성공회(Church of England, Anglican Church, Episcopal Church)의 평신도이었던 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 11. 29∼1963. 11. 22)가 캠브리지 채플에서 “예수의 구주되심”이라는 주제로 설교했을 때 한 학생이 다가와 “만약 오늘 선생님께서 예수는 본받아야 할 위대한 스승이라고 말했다면, 우리 모두는 선생님에게 박수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예수는 구세주’ 라는 기독교의 교리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C. S. 루이스는 그 학생에게 “자네는 정말 예수가 완벽한 모델이라고 생각하는가?” 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은 “아, 그럼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요.” 라고 말했지요.
“그러면 이 완벽한 모델이신 예수를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믿는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자네에게 묻겠네. 자네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모델이신 예수를 자네가 완전히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 학생은 한참 생각하다가 “완전하게 따라갈 수는 없겠지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떼 루이스는 “아, 그러면 자네도 도덕적 실패를 인정하는군. 그렇다면 자네의 삶 속에서 실수가 있었고, 죄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가?”

“아, 인정하지요”

“그렇다면 자네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적 모델로서의 예수가 아니네. 자네의 도덕적인 실패와 죄에서부터 자네를 구원할 수 있는 구세주이신 예수가 먼저 필요하다네. 죄인에게는 도덕적인 모델로서의 예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세주로서의 예수가 필요하다네.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 비로소 그분은 자네에게 도덕적인 모델이 될 수가 있다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는 구세주가 되신 주님을 믿고 따라가는 일에 무조건 순종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사순절 제16일을 맞이하는 이 아침에 좋은 군사로 무장하여 영적 싸움터에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3

16

디모데후서 3:1∼17

말세에 고통하는 때(1절)

3

17

디모데전서 4:1∼22

말씀을 전파하라(2절)

3

18

디도서 1:1∼16

가증한 자(16절)

3

19

디도서 2:1∼15

하나님의 은혜(11절)

3

20

디도서 3:1∼15

영생의 소망(7절)

3

21

빌레몬서 1:1∼25

믿음의 교제(6절)

3

22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3월 16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모데후서 3:1∼17
♦ 묵상을 위한 주제 : 말세에 고통 하는 때(1절)
♦ 성구 :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어보면 “말세에 어려운 때가 있으리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말세(末世, The Last)와 말일(末日, The Last Day)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말일(末日)”이란 “마지막 날” 즉 최후의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말세(末世)”란 “마지막 시대”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말세에 고통 하는 때의 시대적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1. 자기를 사랑(自己愛)(Self Love)(be lovers of themselves) 
2. 돈을 사랑(맘몬 思想)(lovers of money)
3. 자긍(自矜)(자랑)(boastful) 
4. 교만(驕慢)(proud) 
5. 훼방(毁謗)(abusive) 
6. 부모(父母)를 거역(拒逆)(disobedient to their parents) 
7. 불평(不平) 즉 감사(感謝)하지 않는 것(ungrateful) 
8. 세속(世俗) 즉 거룩하지 않은 것(unholy)
9. 무정(無情)(without love)
10. 원통(寃痛)함을 풀지 않는 것(unforgiving)
11. 참소(讒訴)(slanderous)
12. 무절제(無節制)(without self-control)
13. 사나움(亂暴)(brutal)
14. 선(善)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not lovers of the good)
15. 배반(背叛)(treacherous)
16. 조급(躁急)(rash)
17. 자고(自高)(conceited)
18. 쾌락(快樂)을 즐기는 것(lovers of pleasure)
19. 경건(敬虔)의 모양(模樣)만 갖춘 것(having a form of godliness)


1948년 유대인들의 극적인 팔레스타인 귀환과 이스라엘 국가 건설, 그리고 1967년 예루살렘의 재탈환은 종말론자들을 흥분시킨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예언에서 현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의해서 종말의 징조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은 아무도 알 수 없고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강조하셨던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기억합시다.

성경의 그리스도만이 그리스도입니다. 재구성된 그리스도는 그 어떤 모습이든지 적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만 생각합시다.
그리고 모르는 것은 보여주실 때까지 믿고 기다립시다.
그러나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날과 그 시는 알 수 없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17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모데후서 4: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말씀을 전파하라(2절)
♦ 성구 :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신약 성경에서 “목회서신”이란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를 말합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설교자의 직무”라고 하겠습니다.

요즈음은 설교가 너무 흔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설교는 많아도 설교대로 살아가는 설교자는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설교는 말이 아니라 삶이어야 합니다.

어느 장로님께서 제게 간곡하게 부탁했던 이야기를 항상 마음에 담고 설교자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목사님, 설교를 잘 하는 목사는 많습니다. 저희가 기대하는 것은 설교한대로 살아가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설교자가 전해야 할 말씀은 “복음 진리”입니다.

복음 진리란?
“바른 교훈” 즉 “바른 교리”와 “바른 생활”을 말합니다.

“전파하라”는 것은 “선포하라”는 뜻입니다.

설교는 대화나 토론이 아닙니다.
설교는 선포적 이어야 합니다.
설교는 사람들이 그것을 듣든지 안 듣든지, 그것을 좋아하든지 안 좋아하든지 관계치 말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견해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토론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토론할 것이 아니고 단순히 선포하는 것입니다.

“항상 힘쓰다”는 헬라어 “에피스테미(ἐπίστηθι)”는 “준비하다(be ready)”, “집중하다(concentrate)”는 뜻입니다.

예로부터 신앙의 전통은 설교자는 세 가지를 항상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첫째는 설교 준비(preach preparation)
둘째는 이사 갈 준비(prepare to move)
셋째는 죽음 준비(prepare for death)

설교자의 삶은 고독해야 합니다.
설교자의 삶은 부족함이 있어야 합니다.
설교자의 삶은 깊은 묵상이 있어야 합니다.

어렵던 시절에 설교자의 삶에 대한 어느 신학대학 학장의 고백은 지금도 설교자들이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교훈입니다.

교회에서 제공하는 한 달 사례비를 받으면 다섯 식구가 겨우 먹고 살 수 있었는데 요즈음은 한 달 사례를 받으면 거의 반년 정도 지낼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설교자로서 솔직한 고백은 어렵고 힘들 때의 설교에는 힘이 있었고 감동이 있었으나 요즈음의 설교에는 아무런 힘도 감동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전파하라.
능력 있는 말씀을 전파하라.
전파하는 일에 목숨을 맡겨야 한다.

듣는 설교에 익숙한 시대에 이제는 보여주는 설교를 실천하므로 세상의 변화를 자극할 수 있는 설교자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18일을 맞이합니다.
사순절 기간에 모든 성도들은 설교자와 같은 진실한 삶을 회복하여 코로나 바이러스로 세상이 어지럽고 두려워할 때 소망의 등불이 되어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용기를 갖게하는 무언의 설교자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18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도서 1:1∼16
♦ 묵상을 위한 주제 : 가증(可憎)한 자(16절)
♦ 성구 :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사순절 제19일을 맞이합니다.
가증한 자(They are detestable)란 어떤 사람일까요?

가증한 사람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합니다. 그러나 행위로는 부인합니다. 그러므로 복종하지 않는 사람으로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가증한 사람의 의미를 다양하게 살펴봅니다.
첫째, 혐오스런 사람(detestable, NIV)
둘째, 밉살스러운 사람(현대인, 공동번역 성경)셋째, 가증스러운 사람(새번역, 개역개정, 개역한글 성경)
넷째, 혐오스런 사람(βδελυκτοὶ, βδελυκτός. bdeluktos)(헬라어 성경)
다섯째, 매우 괘씸하고 얄미운 사람(한글사전) 

디도서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의 본이 되신 주님” 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행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하기 위하여 구원받은 것입니다(참조. 디도서 2:7, 14, 3:1, 8, 14).

구원이 우선입니다.
선한 일은 구원받은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본분입니다.

가증한 사람은 선한 일을 행했다고 자랑하는 것이 마치 구원받은 증거라고 말합니다.

스펄전은 1850년 1월 6일 주일 아침 많은 눈이 와서 목사가 설교하러 오지 못한  어느 감리교회의 예배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스펄전은 그곳에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설교자의 설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바라보라!”는 설교에서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서 아무런 편안함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의지하는 것은 미래의 일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를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성령이 일하시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그것은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성경은 ‘나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바라보라!
내가 수많은 핏방울을 흘리고 있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십자가에 매달려있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죽었고 묻혔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다시 일어났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아버지의 오른쪽에 앉아 있노라.

오, 불쌍한 죄인이여 나를 바라보라!

비록 어눌한 설교자이었지만 스펄젼을 향해 “젊은이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오! 바라보시오! 바라보시오! 당신이 할 일은 바라보며 사는 것뿐입니다!”

이 설교에 스펄젼은 모든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스펄젼은 지금까지 주님의 위대하심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의 죄인 됨만을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주님을 바라보았고 즉시로 구원받아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자로써 출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부터는 오직 구원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믿음을 온전케 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19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도서 2:1∼15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나님의 은혜(11절)
♦ 성구 :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사순절 제20일을 맞이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어느 특정한 민족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오직 유대인만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종합한 구원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들 즉 각 연령과 계층의 사람들에게도 나타났습니다. 그들 속에 종들까지도 포함합니다.

구원하신 후에는 “양육하신다”고 하셨습니다(12절).

‘양육한다’는 헬라어는 “파이듀오(παιδεύω)”라고 합니다. '파이듀오'는 ‘가르친다, 교육한다, 교훈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불경건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라는 것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는 불경건과 음란과 탐욕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둘째, 근신하며 의롭고 경건하게 살라는 것

구원의 은혜를 받은 우리들은 신중하고 사려 깊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의롭고 정당하게 살아야 하며 또 늘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을 바라라는 것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의 “복스러운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 라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대한 놀라운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요 1:1),
‘참 하나님’(요일 5:20),
‘크신 하나님’(딛 2:13) 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복스러운 소망이십니다.

복스러운 소망이란 주님의 영광스런 재림을 말합니다.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태 24:30)

사순절 제20일을 맞이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그 날이 사순절을 시작한 후 20일이 지났습니다.

주님 언제 다시 오실는지 알 수 없지만 다시 오실 주님의 그 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주님 맞이할 수 있는 믿음을 점검해 봅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Ἀμήν ἔρχου Κύριε Ἰησοῦ!
(아멘 에르쿠 쿠리에 이에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20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디도서 3:1∼15
♦ 묵상을 위한 주제 : 영생의 소망(7절)
♦ 성구 :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영생(永生)의 소망(所望)
- the hope of eternal life
- 엘피다 조에스 아이오니우(elpida zoes aiōniou, ἐλπίδα ζωῆς αἰωνίου)   

희망(希望)과 소망(所望)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희망(希望)이란?
한자의 의미는 “바랄 희(希), 바랄 망(望)”
한글 사전적 의미는 “앞일에 대하여 좋은 결과를 기대함” 또는 “앞으로 어떤 일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 이라고 합니다.

소망(所望)이란?
한자의 의미는 “바랄 소(所), 바랄 망(望)”
한글 사전적 의미는 “바라고 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희망과 소망이란 문자적인 의미가 서로 비슷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는 비슷한 의미가 아닙니다.

희망이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소망이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확신”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아니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고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이해는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배울 수 없고 경험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알 수 있다.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경험이 지식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얻는 과정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배움의 과정
둘째는 경험의 과정
셋째는 신앙의 과정

문제는 죽음이란 배움과 경험으로 배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보편적 진리를 배울 수 없고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죽은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믿는 것을 신앙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신앙의 과정을 한 단어로 “믿음”이라고 합니다.

신약 성경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相)”이라고 합니다.

영생(永生)이란 죽음 후에 반드시 “심판(審判)”을 받고 “영벌(永罰)”과 “영생(永生)”으로 구분될 것을 확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순절 제21일을 맞이합니다.
영생의 소망이란 사람이 무슨 선한 일을 행했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동지들이여!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온 세상이 예측할 수 없는 내리막길을 치달리듯 달려가는 때에 정신 차리고 근신하여 회개와 기도하는 믿음으로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21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빌레몬서 1: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믿음의 교제(6절)
♦ 성구 :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믿음의 교제(交際)

교제(交際)라는 한자는 “사귈 교(交)” “사이 제(際)”
한글 사전적 의미는 “서로 사귀어 가까이 지냄” 또는 “어떤 일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과 가까이 사귐”
교제(交際)라는 헬라어는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ᾳ)”라고 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fellowship”이라고 합니다.

교제를 다른 말로 “사귐”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제의 장소를 화려하고 멋진 곳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혔을 때 함께 감방에 수감된 “오네시모”라는 죄수를 만났습니다. 흔한 말로 “감방 동기”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에서는 감방 동기는 좋은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지식과 정보를 교환하여 또다시 잘못된 일을 함께 도모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교제를 나쁜 교제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하고 앞으로는 다른 사람의 물건을 탐내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는 삶을 가르쳤습니다. 오네시모는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감옥에서 나온 후에 이전에는 “쓸모 없는 사람” 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은 “쓸모 있는 자” 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이름을 누가 지었나요?
나의 이름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내 이름은 우연히 정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분명한 의미를 갖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 속담처럼 내 이름의 의미가 이 땅에서 아름답게 기억될 이름으로 새겨질 수 있는 주님의 은혜가 온 몸과 마음을 붙잡아 남은 생애가 온전히 주님의 것으로 사용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21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빌레몬서 1: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믿음의 교제(6절)
♦ 성구 :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믿음의 교제(交際)

교제(交際)라는 한자는 “사귈 교(交)” “사이 제(際)”
한글 사전적 의미는 “서로 사귀어 가까이 지냄” 또는 “어떤 일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과 가까이 사귐”
교제(交際)라는 헬라어는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ᾳ)”라고 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fellowship”이라고 합니다.

교제를 다른 말로 “사귐”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제의 장소를 화려하고 멋진 곳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혔을 때 함께 감방에 수감된 “오네시모”라는 죄수를 만났습니다. 흔한 말로 “감방 동기”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에서는 감방 동기는 좋은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지식과 정보를 교환하여 또다시 잘못된 일을 함께 도모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교제를 나쁜 교제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하고 앞으로는 다른 사람의 물건을 탐내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는 삶을 가르쳤습니다. 오네시모는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감옥에서 나온 후에 이전에는 “쓸모없는 사람” 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은 “쓸모 있는 자” 라고 합니다.

감방 동기로서 “사도 바울”과 “오네시모”의 ‘만남’과 ‘사귐’을 철학에서는 “실존적 교제(實存的 交際)”라고 합니다. ‘실존적 교제’를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 2. 23~1969. 2. 26)”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실존적 교제’는 ‘사랑의 교제’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을 누가 지었나요?
나의 이름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내 이름은 우연히 정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분명한 의미를 갖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 속담처럼 내 이름의 의미가 이 땅에서 아름답게 기억될 이름으로 새겨질 수 있는 주님의 은혜가 온 몸과 마음을 붙잡아 남은 생애가 철저하게 주님의 것으로 사용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기도합시다.

하나님과의 실존적 교제를 회복한 후에 이와 같은 교제의 신앙으로 어느 곳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복음으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멋진 이름으로 쓰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3

23

히브리서 1:1∼14

만유의 후사(2절)

3

24

히브리서 2:1∼18

마귀(魔鬼)(14절)

3

25

히브리서 3:1∼19

믿는 도리의 사도(1절)

3

26

히브리서 4:1∼16

은혜의 보좌(16절)

3

27

히브리서 5:1∼14

멜기세덱의 반차(6절)

3

28

히브리서 6:1∼20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2절)

3

29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3월 23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히브리서 1:1∼14
♦ 묵상을 위한 주제 : 만유의 후사(2절)
♦ 성구 :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사순절 제23일을 맞이합니다.

“만유의 후사(後嗣)”‘후사’란 “대를 잇는 아들”이란 뜻입니다.

후사란 한자는 “뒤 후(後)” “이을 사(嗣)”라는 훈(訓)입니다.

NIV 영어 성경에서는 “만유의 후사”를 “모든 것의 상속인(heir of all things)” 이라고 소개합니다.

헬라어 성경에서는 “클래로노먼 판톤(κληρονόμον πάντων)” 이라고 합니다.

후사라는 “클래로노모스(κληρονόμος)”는 ‘남성 명사’로 “상속인(an heir)” 이란 뜻으로, “클래로스(κληρος)”와 “노모스(νόμος)”가 합성한 단어입니다.

“클래로스”란 “제비를 뽑아 얻은 기업” 또는 “제비 뽑는 물체”를 말하며, “노모스”는 “율법”을 말합니다.

따라서 후사란 율법에 의해서 인정된 상속자를 말합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만물의 후사가 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후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후사된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것만 상속받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이 세상에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입니다(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나 혼자만 후사가 된 것이 아니라 함께 후사가 되고 지체가 되고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에베소서 3: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후사가 되는 은혜가 유대인에게만 약속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백성과 자녀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갈라디아서 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사순절 제23일을 맞이하며 비록 이 세상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가택연금을 당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우리 모두는 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들로 인정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늘의 것만 상속받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이 세상에서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우리 모두의 믿음이 정금과 같은 순수한 신앙으로 회복되는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24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히브리서 2: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마귀(魔鬼)(14절)
♦ 성구 :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사순절 제24일을 맞이합니다.
마귀(魔鬼)의 정체를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라고 말씀합니다.

마귀(魔鬼), 귀신(鬼神), 사탄(Satan), 악령(惡靈)이란 서로 다른 존재일까요? 

한국의 전통 문화에서 “귀신은 자기 수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은 넋”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귀신은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라고 합니다.

한글성경은 악한 영들의 존재를 ‘사탄’ ‘사단’ ‘마귀’ ‘귀신’이라고 합니다. ‘사탄’ ‘마귀’ ‘귀신’에 관해 자주 듣게 되는 질문은 ‘사탄’과 ‘사단’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마귀’와 ‘귀신’은 어떻게 다른지에 관한 것입니다. 

‘사탄’과 ‘사단’은 같은 말이며 발음상의 문제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성경 원문이 두 단어를 혼용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로 번역할 때 다른 음역(音譯)을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1961년에 개정된 개역한글성경은 ‘사단’이라고 번역했지만, 98년에 개정된 후 대부분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성경과 공동번역, 현대어성경, 표준새번역 등은 ‘사탄’으로 번역했습니다.

'사단'과 '사탄' 두 용어에서 더 정확한 음역은 ‘사탄’(Satan)이며 ‘대적’ ‘대적자’ ‘고소자’라는 뜻입니다.

‘마귀’는 히브리어인 ‘사탄’의 뜻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 ‘디아볼로스’(Διάβολος) 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탄’은 “히브리어” 이고, ‘마귀’는 “헬라어” 라고 하겠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사건은 '마귀'와 '사탄'의 관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러 광야에 가셨다고 합니다(4:1).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 4:10).

마귀와 사탄과의 관계는 요한계시록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 라고 합니다(계 12:9).

사탄과 마귀는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헬라어로 "다이몬(δαιμων)"이라고 합니다. ‘다이몬’에서 영어의 ‘demon(악령)’이 파생했습니다. 성경은 ‘사탄’과 ‘마귀’를 단수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귀신’은 단수와 복수로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거라사인 지역에서 귀신을 쫓아냈을 때 많은 귀신이 귀신들렸던 사람에게서 나와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에 들어가도록 명령하셨습니다(막 5:13). 또한 예수님께서 ‘마귀와 그 사자들’(마 25:41)이라고 언급하신 것과 성경의 여러 본문을 참조할 때 ‘귀신’은 ‘사탄’ 혹은 ‘마귀’가 부리는 낮은 등급의 악한 영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구원받은 백성들과 구원받을 사람들을 미혹하여 구원의 자리에서 떨어트리려고 합니다.

반면에 천사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고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들의 죄를 구속(救贖)하시며 시험받는 자들을 도와주심으로 승리하게 합니다.

사순절 제24일 맞이합니다.
고난 받으신 주님께서 붙잡아주시는 은혜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집안에 머물러야 하는 때에 참 평안과 기쁨과 강건함을 누리는 특별한 은혜를 체험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25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히브리서 3:1∼19
♦ 묵상을 위한 주제 :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1절)
♦ 성구 :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사순절 제25일을 맞이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믿는 도리의 사도”(the apostle whom we confess)

둘째는 예수님은 “대제사장”(high priest whom we confess)

믿는 도리의 사도(τὸν Ἀπόστολον)
사도(使徒)란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은 제자를 말합니다(아포스톨로스apostolos, ἀπόστολος).

대제사장(Ἀρχιερέα)이란 구약 시대 때부터 내려온 직분으로 백성의 죄를 대신 중보하는 역할입니다.

신약에서는 메시아가 그 임무를 완성하므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직분입니다(아르키에류스. archiereus,  ἀρχιερεύς).

믿는 도리의 사도란 “믿음의 사도” “신앙의 사제” “신앙의 사도”를 말합니다.

신앙의 사도란 신앙의 길을 바르게 가르치고 안내하며 신앙의 삶을 몸소 보여주는 역할입니다.

신앙이란 가르침과 행함이 하나가 되는 조화를 이루어야만 온전한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이란 신앙의 사도가 없는 세상을 말합니다.

어두운 밤에 서울의 상공에서 수많은 네온의 붉은 십자가를 보며 공동묘지가 많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를 의미심장하게 들어야 합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깊이 생각하라(카타노에오, katanoeó. κατανοέω)

 왜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구원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성도(聖徒)” 라고 합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거룩하지 못한 공간입니다. 거룩한 백성들이 거룩하지 못한 세속적인 공간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믿는 도리(道理)”가 필요합니다.

‘믿는 도리’란 우리의 신앙고백의 내용을 말합니다. 사도신경(使徒信經)은 신앙고백의 내용의 핵심으로 그 내용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사도(使徒)”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예수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입은 아들입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는 중보자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백성들로서 세속적인 공간에서 살아가야 하므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온갖 환난을 당하셨으나 모두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25일을 맞이합니다.

거룩한 백성의 삶을 회복하기 위하여 믿음의 도리가 되시며 우리의 죄를 중보하기 위하여 십자가 제물이 되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며 코로나 바이러스를 극복할 수 있는 은혜를 기도합시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26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히브리서 4:1∼16
♦ 묵상을 위한 주제 : 은혜의 보좌(16절)
♦ 성구 :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아멘 

사순절 제26일을 맞이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뒤흔들기 때문에 교회에서 모여 예배하는 것도 금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오늘 함께 묵상할 주제는 “은혜의 보좌(the throne of grace)”입니다.

‘은혜의 보좌(τῷ θρόνῳ τῆς χάριτος)’ 앞에 나갈 때 돕는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열렸습니다.

어떻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갈 수 있을까요?
“믿는 도리(道理)” 즉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도리’라고 하겠습니다.

‘믿는 도리’의 주인이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연약함을 “체휼(體恤)”하셨습니다.
‘체휼’이란 “처지를 이해하여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갈 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치료의 광선으로 연약한 우리들을 온전하게 붙잡아 주실 것을 믿고 활기찬 삶을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27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히브리서 5:1∼14
♦ 묵상을 위한 주제 : 멜기세덱의 반차(6절)
♦ 성구 :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아멘 

사순절 제27일을 맞이합니다.
멜기세댁(Melchisedec)은 누구일까?
멜기세덱이란 "의의 왕"이란 뜻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에 예루살렘 제사장입니다(창 14:18).
후대에 이상적인 왕의 전형이 되어 이러한 왕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 사장"이라고 칭하게 되었습니다(시편 110:4).
히브리서에서는 멜기세덱의 특이한 지위를 묘사하여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말합니다(히브리서 5:6∼10, 7장).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이 세상에 오셨던 영원한 대제사장이셨습니다.

오직 예수님으로 코로나 바이러스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펼쳐봅시다.

소련이 공산화될 때 기독교인들은 핍박이 심해 비밀리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며 신앙을 지켰습니다. 열 명의 신실한 크리스천이 비밀경찰에 의해 전원 체포됐습니다. 단 한 사람 두목만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고문하고 죽이며 두목 이름을 대라 했으나 한결같이 결코 너희는 두목을 체포하지 못하리라 하고 죽었습니다. 마지막 아홉 번째 사람에게 고문할 때 그 이름을 대고 죽었습니다. 그 이름은 “예수”였습니다.

사순절 27일을 맞이하는 아침에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님의 이름으로 코로나 바이러스를 물리치고 새로운 세상을 세워나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28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히브리서 6:1∼20
♦ 묵상을 위한 주제 :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2절)
♦ 성구 :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아멘

사순절 제28일을 맞이합니다.
완전한데 나아가라!
여러분은 완전한 사람입니까?
완전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완전한데 나아갈 수 있을까요?

여러 성경을 참조하면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는 말씀은 개역 한글 성경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는 말씀은 “성숙한데로 나아갈니라”고 번역합니다(현대인의 성경 참조).

성숙하다는 것은 “철이 들었다”는 뜻입니다.

어린 자녀들이 언제 철이 들었다고 느낄까요?받는 것만 좋아하던 아이들이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생각할 때 “철이 들었다”고 느낍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사랑하는 자녀들이 성숙하다고 인정할 때는 초보적인 신앙에 머물지 않고 희생과 헌신의 삶을 자원할 때라고 하겠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말씀을(행 20:35) 되새겨 봅니다.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시간과 물질을 쏟을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상을 향하여 힘차게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3

30

히브리서 7:1∼28

언약의 보증(22절)

3

31

히브리서 8:1∼13

언약의 중보(6절)

4

1

히브리서 9:1∼28

심판(27절)

4

2

히브리서 10:1∼39

영원한 제사(12절)

4

3

히브리서 11:1∼40

믿음(1절)

4

4

히브리서 12:1∼29

예수를 바라보자(2절)

4

5

주일

설교 묵상(섬자, 교제, 봉사, 헌신)












































♦ 3월 30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히브리서 7:1∼28
♦ 묵상을 위한 주제 : 언약의 보증(22절)
♦ 성구 :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아멘  

사순절 제29일을 맞이합니다.
함께 묵상할 주제는 “언약(言約)의 보증(保證)”
“보증(保證)”이란 한글 사전적 의미는 “사람의 신용이나 사물의 품질 등에 대하여, 틀림이 없이 믿을 만함을 책임지고 증명함.” 또는 “채무자가 채무를 이행하지 아니할 경우, 채무자를 대신하여 채무를 이행할 것을 부담하는 일.” 이라고 합니다.

본문에서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언약의 보증(the guarantee of a better covenant)”
“개런티(guarantee)”란 용어를 일상생활에서 자주 듣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사람들과의 사회적 거리를 두고 만나야 합니다.
사람을 가까이서 만나야 거래를 형성하는 사업장에서 사람들과의 거리를 두어야 하기 때문에 이런 때는 상품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은 “개런티(guarantee)”의 기간을 연장하는 것입니다.

어느 자동차 회사에서 할부 차량을 판매하며 엔진 오일 교환을 무료로 3년까지 실행한다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언약의 중보가 되신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희생하며 영원한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죽음을 영원한 생명으로 십자가에서 중보하신 우리 주님을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헬라어로 보증이란 “엥구오스(ἔγγυος)” 라고 합니다.
‘엥구오스’의 뜻은 “철저한 보안(under good security)” 또는 “보증(guarantee)”을 말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힘들고 어려운 때에 언약의 보증이 되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철저한 보안으로 지켜주실 것을 보증하셨습니다.

평범하던 날 깨닫지 못했던 은혜를 깨닫고 주님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기회로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31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히브리서 8:1∼13
♦ 묵상을 위한 주제 : 언약의 중보자(6절)
♦ 성구 :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아멘  

함께 묵상할 주제는 “언약(言約)의 중보자(中保者)”
“중보(中保者)”란 단어의 한글 사전적 의미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일을 주선하는 사람.” 또는 “신과 사람의 사이를 화해시키고 교제를 유지하도록 하는 사람.” 이라고 합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과 우리들을 화해시키고 교제하도록 돕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를 지은 죄인의 사이는 도저히 건너갈 수 없는 사망의 깊은 골짜기가 놓여 있습니다. 이 골짜기를 쉽고 편리하게 건너갈 수 있도록 다리를 놓으셨는데 그 다리가 “언약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한 여인이 중병에 시달리는 외아들이 포도를 먹고 싶다고 하여 포도를 구하기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여인은 궁궐의 담벼락에 탐스런 포도가 주렁주렁 열린 것을 보고 관리인에게 사정했습니다.

“1백 달러에 포도를 파십시오!”

관리인은 안 된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지요.
여인은 다시 2백 달러를 제시했습니다.
관리인은 화를 벌컥 내며 여인을 궁궐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공주가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슬피 울고 있는 여인을 불렀습니다.

“부인, 당신은 지금 큰 실수를 했습니다. 이 포도의 주인은 이 나라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장사꾼이 아닙니다. 그분은 포도를 팔지 않고 그냥 주신답니다.”

공주는 포도를 따서 그녀의 품에 안겨주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구원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행과 성품으로 영생을 살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값없이 얻는 선물이 바로 “구원”입니다.
사망의 깊은 골짜기에서 헤매지 말고 구원의 은혜를 힘입어 승리하신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서는 은혜를 사모하여 코로나 바이러스가 생명을 위협하는 어려운 때를 잘 극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