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동행 304일 - 10월 30일(화) / 누가복음 19-20장
태풍 샌디(Sandy)가 뉴욕 지방을 휘젓고 있습니다.
지하철과 버스는 멈추었고 거의 대부분 상점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물론 학교와 공공기관들도 문을 닫았습니다.
자연의 바람 앞에 초라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며 조용히 창밖을 응시합니다.
오늘은 누가복음 19장과 20장을 읽습니다
19장은 여리고 성에서 세리장 삭개오가 뽕나무 위에 올라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 나무 아래에서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내가 오늘 너의 집에서 머물겠다고 하십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에게 내가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로 갚아주겠고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고백합니다.
삭개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구원이 이 집에 머무실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
므나의 비유는 달란트의 비유와 비슷한 내용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맡았느냐가 아니라 지금 내가 맡은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을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가장 중요한 시간은?
가장 중요한 일은?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이며 바로 이 시간이며 지금 해야 할 일이라고 합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의 일입니다.
오늘 읽어야 할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짐작하시겠지요?
아마 오늘 먹을 밥을 내일 먹겠다고 미루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20장은 성전에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에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주신 이가 누구인지 말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아니면 사람에게로서냐 하시며 묻습니다.
포도원을 농부에게 맡기고 타국에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종을 보냈더니 심히 때리고 거저 보냈습니다. 또 다른 종을 그리고 세 번째 종을 보냈으나 동일한 행동으로 종들을 때려 보냈습니다. 마지막에는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상속자이므로 죽이라고 합니다.
이 비유의 의미를 알게 된 제사장과 서기관 및 장로들은 눈에 독기가 오릅니다. 드디어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합니다.
기다리던 사람이 오셨는데 그 사람을 밀쳐버리고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어리석은 것이 믿음의 세계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은 믿음의 눈을 떠야만 가능합니다.
믿음의 눈은 심령의 눈입니다.
내 심령을 열어 새롭게 하시고 주의 영을 볼 수 있도록 충만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20:38)
- He is not the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for to him all are alive.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