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출애굽기 3:16) 수요성서학당(07-29-20)

수요성서학당(07-29-20) 제7강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출애굽기 3:16)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실로 너희를 권고하여 너희가 애급에서 당한 일을 보았노라
Go, assemble the elders of Israel and say to them, 'The LORD, the God of your fathers--the God of Abraham, Isaac and Jacob--appeared to me and said: I have watched over you and have seen what has been done to you in Egypt.


첫째, 조상의 하나님

조상(祖上)이란 "한 집안이나 한 민족의 옛 어른"을 말합니다.

"여호와 너희 하나님" 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던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은 애급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과 다른 신이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이란 명칭을 영어로 "갓(God)"이라고 합니다.
"갓(God)"이란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가톨릭교회에서는 하느님, 다른 종교에서는 신(神)이라고 합니다.
더구나 모세가 가야 할 애급에는 다양한 신들(Gods)이 있었습니다.
애급에 내렸던 열 가지 재앙들은 애급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란 다른 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어떤 조상일까요?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은 조상을 말합니다.

창세기 50:24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조상의 하나님이란 조상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 공통점을 언약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
이삭에게 약속하신 말씀
야곱에게 약속하신 말씀
이러한 말씀을 언약이라고 하며 하나님을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2: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출애굽기 6: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조상의 하나님은 언약으로 맥을 이어갑니다.
언약이란 “맹세하신 땅으로 인도할 것”을 의미합니다(창세기 50:24).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사도행전 3:13a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도 베드로는 설교할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라고 했습니다.
그냥 하나님이라고 해도 잘 알아들을 텐데 하나님 앞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수식어를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고, 이삭의 하나님이시고,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의 신들과 다른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이 설교를 할 당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신들을 모두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하는 하나님은 그런 신들과 다른 신이라는 것을 구별하려고 이렇게 부른 것입니다.

예를 들면 룻기서에서 모압 지방의 여인 룻은 모압 지방의 신을 섬기고 살았으나 출가하여 나오미의 집안 사람이 된 후에 하나님이란 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압 지방에서 섬기던 신은 인간에게 좋은 일만 제공하는 신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사람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불행과 고통과 어려움을 줄지라도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은 죽었지만 시어머니가 모압의 친정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도 된다고 허락했지만 모압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신약 성경에서는 데오스(θεός)라고 하고 영어에서는 God이라고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천주교에서는 하느님 우리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통 데오스(θεός)나 God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신들을 데오스(θεός) God으로 씁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을 잘 모르면서 무슨 어려운 일을 만나면 “아이고 하나님!” 하고 부릅니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Oh, my God!" 이라고 소리칩니다.
그냥 인간이 아닌 신을 부르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동안 신으로 알고 있던 것들을 부르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을 부를 때는 그 앞에 수식어를 붙여서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세상 신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라고 부르거나 아니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고 다른 말로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올 때 감히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대신 "주님(아도나이)"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거짓 선생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특별한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고 모든 신들 중에 한 신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종교다원주의, 종교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란 이 세상에 많은 종교들이 있는데 그 종교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다양성을 인정해야 되고 그런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님하고 신부하고 심지어 목사들까지 함께 모여서 각기 자기 신을 부르고 종교행사를 하고 서로 평화를 누리고 서로 잘 해보자고 합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을 좋아합니다.
종교인들끼리 서로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지내니까 좋고 또 자기가 가진 종교가 우월하다고 다른 사람 깔보지 않으니까 좋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유교 불교 기독교의 좋은 사상만 뽑아가지고 혼합하여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철저하게 이런 종교다원주의나 종교혼합주의를 배격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그런 잡신들과 다른 참 하나님이시고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성령님이 그 마음에 와 계시지 않아서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주장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무슨 말로 우리를 설득하고 유혹을 한다고 해도 우리 하나님은 특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특별하신 하나님이시오 참 신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비를 베푸시고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그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거나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는 단순하게 다른 신들과 구별하여 부르려고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가장 중점적으로 하시는가를 알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되어서 구걸이나 해서 먹고 사는 불쌍한 인생을 일어서게 하고 걷고 뛰면서 성전에 들어가게 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인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모두 다가 사실은 스스로 걸을 수도 뛸 수도 하나님을 섬길 수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이렇게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되고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게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예배를 드리게 해 주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 구원의 하나님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위해서 천지 만물을 창조해 주시고 우리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을 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런 인간이 욕심 때문에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께서 쫓겨나고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을 빼앗기고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으며 죽은 후에 최후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고 세상에서 지은 모든 죄로 인해서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처하게 된 저주받은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모든 인생은 아니지만 특별한 사람들을 구원해서 죄를 용서받게 해서 다시 영원한 생명을 주고 다시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게 하시기 위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 일을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믿게 해주셨고 천하 만민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받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 아브라함에 주신 복의 약속을 아들 이삭에게 주셨고 또 이삭의 아들 야곱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의 열두지파가 되게 해 주셔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특별한 나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그들을 구원할 구주로 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나 우리 조상의 하나님으로 부를 때는 그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를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부를 때 그렇게 부른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세상의 잡신들이 아니라 참신이신 하나님이시오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낼 때 쓰는 호칭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을 세상의 신들 중에 하나라고 말하는 어리석은 거짓 선생들에게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위대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 자손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특별히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앞에서는 우리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말씀하고 있다면 이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설명해주는 말씀입니다.

“그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종”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여기 종이라는 말은 아들이라는 뜻도 있기는 하지만 하인 신하 종이라는 뜻도 있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종이라고 하신 것은 종처럼 낮은 신분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하신 일을 맡기신 특별한 일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일을 하게 하시려고 특별한 일꾼으로 세워서 이 세상에 보내신 특별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에 특별하게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특별한 임무를 가진 분을 그의 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딛 1:1)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을 “고난의 종”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모진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실 분으로 예언을 했던 것입니다.
그 고난의 종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그 하나님의 종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은 아주 높여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아들 자리로 높여 주셨고 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실 구주가 되게 해 주셨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자리에 오르게 하셨고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게 해 주셨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심판할 최후의 재판장이 되게 해 주셨고 영원한 왕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리며 살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원래 영화로우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성부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해 주시지 않으신다고 해도 원래 하나님과 동등한 영광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삼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즉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하나님 이렇게 세분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유일하시다 한분이시다고 표현하는 것은 이 세분의 본질과 영광과 모든 것이 동일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그의 종이라고 부르고 또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임무를 수행하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 그 영광의 자리를 버리고 낮아지셨습니다. 
사람이 되셨어도 우리와 똑 같은 연약함까지 가지셨습니다.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까지 지내신바 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다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로 올려주셨다는 것입니다. 
몸을 가졌으되 신비하고 완전한 몸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심판하실 만왕의 왕이 되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더 이상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던 그런 예수님이 아닙니다. 엄청난 권능과 능력을 가지시고 천사와 함께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영원하고 완전한 하나님나라에서 살게 해 주실 분이십니다.
사대성인 중에 한 사람이라거나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시고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을 보여주신 분이라거나 가난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러 오셨다거나 믿고 따르면 마음이 좀 행복해진다거나 그런 사람들 중에 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다른 신을 믿어도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거나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스스로 의롭고 선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영화롭게 되신 예수님을 모욕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신들과 전혀 다른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수천 년 동안 우리의 역사 가운데서 이 일을 진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님을 그의 종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 임무를 수행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영생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주시는 구원의 주님이 되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을 하셔서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하시는 심판주가 되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들의 믿음만큼 나타나시고 역사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


아브라함(Abraham)

뜻 : 열국의 아버지

부친은 데라, 아우는 나홀과 하란이다.(창 11:26).
구명 아브람을 여호와가 아브라함이라 고쳐 주었다(창 17:5).

노아의 12대 손으로 갈대아 우르에서 출생하였다.
얼마후 메소보다미아 하란에 이거하는 중에 부친상을 당하고 여호와가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크게 창대하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 말씀을 순종하여 아내 사라와 조카 롯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갔다(창 12:).
흉년으로 인하여 잠시 애급에 가 있는 중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일이 있다(창 12:13).

가나안에 다시 돌아왔을 때 노복과 우양이 많으므로 롯이 거주하는 지방에 전쟁이 일어나 롯이 포로 되었다 하는 말을 듣고 아브라함이 쫓아가 롯과 재물을 찾아 가지고 오는 중에 살렘왕이오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고 그에게 소득의 10분의 1을 바치니 이것이 십일조의 규례가 되었다(창 14:9-20).

그 후 하나님이 나타나서 그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땅의 티끌같이 번창할 것과 애굽에서 4백년간 고난 당할 것을 예언하셨다(창 13:1615:522:1715:13). 사라가 생산치 못하여 그의 종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으니 이 사람이 아라비아인의 시조요 회교의 교조 모하멧의 시조이다.

사라의 생산할 것과 그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할 것 그리고 할례법을 창설하였다(창 17:8-10,19).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여 소돔 멸망에서부터 롯을 구하였다(창 18:1-8,20:32).

백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다(창 21:1,14).

여호와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하여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하셨다(창 22:1-19).

사라가 죽은 후 며느리 리브가를 얻고 175세에 별세하니 이삭과 이스 라엘이 그 모친 사라를 장사한 막벨라 굴에 합장하였다(창24:6725:7-10).

교훈과 적용

첫째
, 아브라함의 특수한 신앙과 전적인 순종을 우리 각자가 신앙에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 아브라함은 갈바는 몰랐어도 인도자는 알았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의존하십니까.
셋째
, 율법과 복음,선민과 이방인까지 모든 사람에게 신앙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삭(Isaac)

뜻 : 웃음

1.
아브라함 100세에(B.C. 1890) 사라의 몸에서 출생한 아들(창 21:-3, 마 1:2).
2. 성품이 온유하고 겸손하고 정직하여서 농업에만 전심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이나 야곱같이 다사한 생활을 하지 않고 평온 하였다.
3.  25세에 부친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모리아산에 데리고 가서 결박하여 제단에 올려 놓고 잡아 제사하려고할 때 효심이 극진한 그는 조금도 원망이나 반항이 없었으나 이 광경은 흡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의 태도와 같은 모형이다(창 20:1-5,22:2-13).
4.  40세에 외종형 부두엘의 딸 리브가를 아내로 취하여 60세에 쌍동이를 낳으니 곧 에서와 야곱이다(창 24:6725:20-26).
5.  흉년을 피하여 그랄에 거하는 중 그 아내를 누이라 하였다가 탄로되고 농사로 거부가 되니 그곳 사람들이 시기하여 우물을 메우니 다른 곳에 옮겨 팠더니 또 메우고 이같이 4차나 따라 다니며 메웠다. 그 다음에 파매 메우지 않는고로 그 우물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였다(창 26:1).
6. 나이 많아서 장자 에서에게 축복하려는 것을 야곱이 알고 가장하여 들어 가니 눈이 어두운 이삭은 속아서 축복하였고 에서가 축복을 빼앗기고 야곱을 죽이려 하니 야곱을 불러 다시 축복하고 이르기를 밧단 아람에 가서 외삼촌 라반의 딸에게 장가들라 하여 보냈다(창 27:28:1-4).
7. 180세에 헤브론에서 별세하니 막벨라굴에 장사하였다(창 35:28-29).

      이삭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열국의 어미 사라 사이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출생한 아들이다. 이삭(Issak)이라는 이름의 뜻은 [웃음]이며 그의 출생지는 브엘세바이다. 왜 그의 이름을 [웃음 ]이라 불렀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면 그의 출생목적과 생애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그의 아내 사라의 나이 90세때 하나님께선 그들에게 아들이 있을 것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라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창 17:15-16).

      이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은 [백세된 사람이 어찌 아들을 낳을 수 있으며 사라의 나이 구십세인데 어찌 생산이 가능하리오]하며 웃었다. 이 웃음은 하나님의 해학적 언약에 대한 반신반의의 웃음이며 그의 합리적 사고에서 발생된 불가능의 웃음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언약하신대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안기심으로 그들의 해학적 웃음을 참된 기쁨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은혜를 히브리어로[핸](친절)이라 하며, 헬라어로 [카리스](기쁨)라 한다. 이삭은 인간의 합리성과 자연질서를 초월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얻은 생명이기 때문에 은혜의 동사격인 [웃음]이 그의 이름이 되었던 것이다.

      이삭은 모리야산의 제사 경험을 통하여 다시한번 그의 이름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었다. 자기의 생명 대신에 예비하신 한마리 양으로 인하여 다시 살아나게 된 생명, 그는 이러한 은혜의 체험으로 인하여 다시 한껏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 은혜가 동기가 되어 그는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이상적 가정의 장막을 치며 자신 과 이웃의 번영을 위하여 우물을 파는 자가 되엇다. 이러한 이삭의 모습에서 우리는 참 신자상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삭의 가정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입니다. 그가 어머니 사라를 여의도 수심에 잠긴 날을 보낼 때 아브라함은 아들의 결혼을 위해 종을 고향땅 메소보다미아에 보내어 밧담아람에서 신부 리브가를 데리고 오는데, 오늘 본문은 이삭이 신부 리브가를 만나는 광경을 기록한 대목 입니다. 새로운 가정을 이루게 된 이삭에게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모친 상사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오늘 우리는 이삭의 가정을 통해서 주시는 교훈을 받아 복된 가정을 이루시기를 원합니다. 이삭의 가정은 어떤 가정입니까?

      1.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이루어진 가정입니다.

      나이 많은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배우자를 구하려 그의 종을 보내며 몇가지 부탁을 하였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모르는 가나안 족속중 에서 신부를 구하지 말고 내고향 족속에게서 아내를 택할것이며,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였으니 그가 사자를 네앞 에 보내실 것이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해 아내를 택할지니라"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 그 자손이 하늘의 별, 땅의 모 래같이 무수히 많은 것을 약속하신것을 믿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아내를 분명하게 준비해 놓으신 것을 믿고 종을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종은 주인의 말을 순종하여 참으로 순적하게 밧단아람에서 아름다운 믿음의 신부감인 리브가를 만나서 데려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안에서 주신 가정이었습니다. 믿는 성도의 가정은 이같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시는 가정입니다. 때문에 주안 에서 믿음으로 결혼한 가정은 서로 나누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막10:9). 또한 성도는 믿지 않는 불신자와의 결혼을 삼가해야 하는 것은 마땅한 도리입니다.

      2. 믿음으로 결합된 가정이었습니다.

      이삭은 믿음의 남편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를 모리아산 제단에서 제물로 드리려할때 순종한 아들이었으며 그는 일생을 온유, 겸손한 성품의 인격으로 살았습니다. 때문에 그는 블레셋 사람들이 그가 판 우물을 세번이나 빼앗아도 양보하고 물러섰으며, 이런 그의 신앙의 성품은 180세 일생을 큰 대가없이 지나게 하였습니다. 리브가도 또한 믿음의 아내였습니다. 먼 밧단아람 나흘의성 우물가에서 아브라함의 종과 약대를 물을 길러 대접한 사건과 그가 아브라함의 종을 따라서 아브라함의 가정으로 오는 결단의 모습에서 그의 신앙의 인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정은 사랑과 신뢰로 이루어진 행복한 가정이었습니다.

      1) 리브가는 이삭에게 모친 상사후에 큰 위로가 된 아내였습니다.
      F.Bacon은 "아내는 청년에게는 연인이고 중년에는 친구이며 노년에는 간호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모두 부부간의 사랑과 신뢰를 통한 행복한 가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부부간엔 서로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2) 그들은 피차 예의를 지킨 가정입니다.
      오늘 본문 64-65절에 그들의 첫 만남의 장면중에(리브가가 눈을 들어 이삭을 보고 약대에서 내려.. 면박을 취하여 스스로 가리우더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가정은 부부간의 예의가 매우 소중합니다.

 (1)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 나는 아내(남편)때문에 떳떳한 사회인이 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2) 나에게 맞추려 하면 실패합니다. - 완전한 아내 (남편)가 되어 주기를 
     바라지 않는 아내(남편)가 가장 완전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3) 아내는 남편에게 (주안에서) 복종하라고 하였습니다. - 정숙한 아내는 
     순종함으로 남편을 뜻대로 움직입니다.
 (4) 남편은 아내에게 양보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5)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6) 양가의 부모를 잘 섬겨야 합니다.
 (7) 단정한 용의모를 관리해야 합니다.

3) 이삭은 일생동안 일부일처의 가정이었습니다. - 성도는 부부외에 다른 권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말2:15) 에 하나님께서 영이 유여하여도 한 아내를 주신것은 경건한 자녀를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부모외에 다른 사람이 개입되면 부부의 신뢰가 금이 가게 되고 이것은 일생동안 회복되지 못하는 상처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3. 기도하고 가는 곳마다 먼저 제단을 쌓았습니다.

결혼후 20년동안 자녀가 없이도 기다리다가 기도하여 마침내 에서, 야곱,쌍동이를 얻은 가정이었습니다 (25:19-26) 그리고 어디를 가던지 먼저 제단을 쌓고 그 곁에 장막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예배중심, 교회 중심의 삶을 의미하며, 그리고 자기의 집을 세우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가정은 언제나 예배중심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그리고 자기의 집을 세울줄도 알아야 합니다. 성도중에는 하나님제단을 쌓을줄은 알면서 자기집을 세우지 못하면, 도리어 하나님 영광을 가리우게 됩니다. (1) 물질자립 (2) 자녀교육 (3) 교회봉사로 가정을 세워야 합니다.

4. 이웃에게 인정받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들은 블레셋왕 아비멜렉이 와서 "내가 보니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보았다."고 칭찬하고 화평을 청하였습니다.이웃에게 인정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은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야곱(Jacob)

레아가 낳은 1. 르우벤  2. 시므온  3. 레위  4. 유다  5. 잇사갈  6. 스블론. 디나
라헬이 낳은 7. 베냐민  8. 요셉
빌하(라헬의 종)가 낳은 9. 10. 납달리
실바(레아의 종)가 낳은 11. ] 12. 아셀

뜻 : 발 뒤축을 잡음


1.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손자요 부친은 이삭 모친은 리브가이다(주전 1836년 곧 이삭의 나이 60세에 쌍둥이의 동생으로 나면서 그 형 에서의 발 뒤축을 잡아 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창 25:26).

그 형 에서는 성질이 용맹하고 사상이 천박하고 들에서 사냥을 잘하나 야곱은 대조적으로 위인이 유순하고 지혜가 예민하여 집에 있어 양을 치니 이삭은 사냥 고기를 좋아하여 에서를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여성적인 야곱을 편애 하였다(창 25:27-28).

    어떤 날 형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 올 때 주린 기색을 알고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샀다(창 25:20-34).
    그후 이삭이 에서를 불러 네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오면 먹고 축복하 여 주겠다는 말을 듣고 그 모친 리브가가 야곱을 에서의 모양으로 꾸며 진미를 만들어 가지고 들어가서 눈이 어두어 잘 보이지 않는 부친을 속여 형의 받을 축복을 대신 받고 축복을 빼앗은 원한과 분노를 형으로부터 받고 해침을 받을까 두려워 하여 부모를 이별하고 1천 8백리 되는 하란에 있는 외가로 피하여 가게 되었다(창 27:).

    2. 마태복음(마 1:16) 예수님의 족보에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부친으로 나온다.


    야곱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의 손자이며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아의 동생이다.
    그의 이름의 뜻은 "발꿈 치를 잡았다"는 뜻인데 상당히 경쟁적이며 투쟁적인 성품의 소유자임을 말해준다.

    창세기를 읽을 때 그는 독자로 하여금 "어찌하여 이런 사람이 그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우선 그의 비정함과 교활함이 독자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고 형제간의 의리를 저버린 부도덕성도 무척 못마땅하게 느껴지도록 한다. 광야에 사냥을 나갔다가 허기져 돌아온 형의 곤경을 이용하여 팥죽 한그 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빼앗은 사실, 형으로 가장하여 눈 먼 아버지를 속이고 형님이 받아야할 축복을 가로챈 사건은 계명에 위배되는 범죄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야곱에게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셨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창 28:13-14)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은 인간행위의 보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맺은 계약과 하나님의 아들 명분(장자)으로 인하여 주어진다는 것이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 암아 유업을 이를 자니라." (갈라디아서 4:6-7)

    야곱의 위대한 점은 장자의 기업을 얻기 위한 인간적 수단과 재물을 얻기위한 20년간의 인간적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김)" 이라는 새 이름을 얻기 위하여 환도뼈가 위골되기까지 하나님의 사자와 겨룬 거룩한 체험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곱의 허리에서 온 국민과 왕들이 나오리라"(창 35:11 )는 예언은 십자가의 죽음이 있는 곳에 새 국민이 나오리라는 말과 같다. 이렇게 볼 때 야곱은 고난 신학의 실상을 보여준 구원사의 주역의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 앉아서 축복 기다리지 않는 적극적 행동파 ; 
    하나님 약속 투쟁으로 쟁취 야곱은 독특한 삶의 스타일을 보여준 인물이다.
    야곱의 신앙은 아브라함 같이 묵묵히 기다림도 아니요, 이삭과 같이 순종으로 일관된 유순한 삶도 아니었다.
    히브리적 사고는 사유가 아니라 행동에 있음을 보여준 최초의 히브리인이 야곱이다.

    야곱의 신앙은 곧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복을 믿는 것일뿐 아니라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그는 일어나서 싸우고 행동으로 쟁취했다.
    그는 인도주의자도 아니고 사변적인 사상가는 더욱 아니었다.
    기근과 전쟁이 많은 척박한 현실에서 피나는 노력을 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복도 현실화 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에서의 진노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간 타향살이를 하면서 아내를 넷이나 얻고 아들 열하나(또 하나는 그 후에)와 많은 가축을 이끄는 큰 부자가 되었다.
    야곱은 현실을 타개하고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속이기도 하고 끈질기게 찾기도 하고 대들기도 하며 기회를 놓치지 않는 고투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족과 가축을 모두 이끌고 밤중에 도망쳐 나온다.
    뒤늦게 이를 안 라반은 야곱을 추적해 따라잡았으나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 없이" (창 31:40) 외삼촌을 위해 20년간 일했다는 야곱의 항변에 오히려 수그러지 면서 돌무더기를 쌓아 불가침 평화조약을 맺고 헤어진다.

    라반과의 문제를 깨끗이 해결지은 야곱에게 남은 문제는 형 에서를 만나는 일이었다. 그는 우선 형 에서에게 사람을 보내어 최대의 경칭 어인 "주"라 부르고 자신은 "종"이라 비하하면서 "주께 은혜받기를 원하나이다"(창 32:5)라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형이 400명의 사병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야곱은 전략을 바꾼다.
    이번에는 선물공세를 펴는 것이다.
    또 야곱은 에서가 한 떼를 치면 나머지 한 떼는 피하라는 작전도 세웠다.
    그는 또 여종과 그 자식들을 제일 앞에,그 다음에 레아와 그 자식들, 그리고 사랑하는 라헬과 요셉을 그 다음에 두는 계략까지 만들어 놓았다.
    야곱의 이름에 "속이는 자, 간사한 자"라는 뜻이 있듯이 그는 모든 수단을 다 강구 했다.
    이처럼 야곱은 철저히 준비하고 나섬으로써 하나님의 복을 쟁취했던 것이다.

    본문 : 창 29:1-35
    요절 : 창 29:20


    1. 야곱의 가정은 연애로 이루어졌다.

    1) 야곱은 외삼촌의 둘째 딸 라헬을 사랑하므로 그를 자기의 아내로 삼기 위하여 외삼촌의 집에서 일을 하였다.

     (1) 라헬과 결혼하기 위한 계약 조건은?(창 29:15-20)
     (2) 야곱이 라헬을 아내로 얻지 못하고 언니인 레아와 결혼하게 된 원인은 누구에게 있나?(창 29:21-25)
     (3) 야곱은 그가 사랑하는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하여 몇 년이나 봉사하였나?(창 29:26-30)

    2) 야곱은 두 아내들의 질투와 경쟁에 의하여 그들의 여종들로부터 자녀를 낳게 된다.
     (1) 야곱과 라헬의 부부싸움의 내용은?(창 30:1-2)
     (2) 라헬의 몸종 빌하가 낳은 아들의 이름은?(창 30:4-8)
     (3) 레아의 몸종 실바가 낳은 아들의 이름은?(창 30:9-13)

    *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 머무를 때 결국 4명의 여인에게서 12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 생활은 혼란스러웠고 시기와 분쟁 속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2. 야곱의 가정은 고난 속에서 번성한 가정이다.

    1) 야곱이 아내들을 위하여 일을 한 계약기간이 끝난 후에 외삼촌 라반의 제안을 따라(창 30:28) 일을 하되 야곱이 원하는대로 양과 염소의 점박이와 아롱진 것 검은 것을 가지기로 하고 일을 한다.

     (1) 야곱의 재산증식 방법은?(창 30:37-43)
     (2) 야곱의 성실한 면모를 기록하여 보자(창 31:36-42)

    2) 야곱은 20년간 외삼촌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1)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창 31:3)
     (2) 야곱의 가족회의 내용과 결론은?(창 31:4-16)
     (3) 야곱의 간증(창 32:10)

    * 하나님의 백성이 받는 축복은 고난을 통과하면서 이루어진다.
    야곱은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요단강을 건너와서 20년간 머슴살이를 하는 중에 그의 근면 성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앙 속에서 축복자가 되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출애굽기 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祖上)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 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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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주 성경(貫珠 聖經)


출애굽기 4:5, 또 가라사대 이는 그들로 그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함이니라 하시고

창세기 28: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열왕기상 18: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마태복음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마가복음 12:26,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하였느냐.

누가복음 20:37,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열왕기상 19: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사야 6: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사야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불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불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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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요성서학당 시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

첫째는 언약(言約)의 하나님
둘째는 생명(生命)의 하나님
셋째는 순종(順從)의 하나님

첫째, 언약의 하나님

언약이란 약속하신 땅으로 반드시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요한복음 14:2-3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처소(τόπος. 토포스, topos) -  a place

* 종교통합을 위한 계획
 1. 2018년 9월 26일(수) 발표
 2. 2020년 6월 23일(화) 발표 - 네델란드 유엔 평화의 궁전(Peace Place)에서 세계 종교대통합 발표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연기
 
4-5년 후에 역학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찾아오셨다며 선교하라는 명을 받아 아프리카에 가서 사역을 하는데 흑인들 어울려 일을 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학원을 차렸으나 코로나에 의해서 문을 닫을 위기를 맞았다.
너무 답답하여 무당 점집을 찾아가서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러자 무당이 여자가 문으로 들어올 때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아멘!" 하며 노래를 한다.
그리고 점을 치는데 "당신은 실력이 없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끝까지 죽도록 믿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의 문제는 끈기가 없다.
그러므로 사주에 따라 무녀가 되든지 아니면 절에 가서 스님 밑에서 글을 써주는 일을 하라.

오늘은 두번째 "산 자의 하나님"에 관한 말씀을 소개합니다.
산 자의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산 자(The Living) - 자오(ζάω, 2198. zaó: to live)
Cognate: 2198 záō – to live, experience God's gift of life.

조에(
ζωή, 2222. zóé: life) - both of physical (present) and of spiritual (particularly future) existence.

산 자라는 용어 자오에서 조에라는 단어가 파생합니다.
조에는 성경에서 현실세계에서는 육체적인 생명을 말하지만 부활 때에는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가복음 12:26,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하였느냐.

누가복음 20:37,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 이라고 합니다.
"산 자"를 영어 성경에서(마태복음 22:32) 찾아보겠습니다.

I am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He is not the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산 자"는 "the living"이라고 합니다.
"the living"이란 "살아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 생명(生命,  ζωή)
* (主, ἀρχηγός) - archégos : founder, leader
* 생명의 저자, 생명의 지도자, 생명의 창설자

성경을 해석할 때 어느 한 구절만 인용하는 것보다 그 말씀의 전후 배경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읽어보겠습니다(마태복음 22:23-32).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
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유대의 전통적인 풍속에 여러 형제들이 있을 때 맏형이 결혼 후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다음 형제가 형수를 아내로 맞아 후사를 이어주는 "계대결혼(繼代結婚)" 이란 전통이 있었습니다.

계대 결혼

 계대 결혼이란 고대 중근동 문화권 내에서 주로 행해지던 풍습으로서 죽은 형제에게 자손이 없을 경우 그 대를 이어주기 위해 죽은 자의 남은 형제가 미망인과 결혼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이는 가계의 보존과 재산권을 중시하던 당신의 상황 속에서 생겨난 풍습이다.
이때 그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아이는 법적으로 죽은 형제의 자손이 되어, 그 죽은 자의 모든 권리를 이어받게 된다.
한편 이 계대 결혼의 풍습은 사회적으로 아주 강한 구속력을 갖는 것이었으며, 만약 남은 형제가 이 결혼을 거부할 경우 심한 사회적 비난과 수치를 당해야만 했다. 이후 이 풍습은 이스라엘 사회 내에서 하나의 율법으로 정착되어 예수님 당시까지 이어져 내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성경의 예 / 창세기 38 : 6-11
유다는 큰 아들 엘이 죽어 둘째 아들 오난에게 큰 며느리 다말과 결혼하게 된다.
이 관습을 이행치 않은 오난은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로 보아 하나님께서도 이 관습을 허용하신 듯 하다.

룻기에 소개된 계대결혼 및 기업 무르기(고엘)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일곱 형제가 계대결혼에 따라 모두 한 아내를 맞이했는데 만일 부활 후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이냐? 라는 질문을 합니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시한 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며 부활 때에는 시집이나 장가를 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부활 생명의 하나님" 이란 뜻입니다.

조화(造花) 생화(生花)
조화가 아주 멋있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잘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조화가 잘 만들었어도 생화보다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조화와 같은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죽은 신앙이란 그 안에 부활생명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살아있는 신앙이란 교회 안과 밖에서 생활하는 것을 보면 별로 신앙이 없는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부활생명이 분명한 것을 말합니다.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란 가사를 작사했던 "존 뉴톤" 목사님의 간증에서 천국에 올라갔을 때 세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이 사람은 반드시 천국에 있겠구나 하던 사람이 천국에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사람은 천국에 없겠구나 하던 사람이 천국에 있다고 합니다.
셋째는 나와 같은 사람의 이름이 천국에 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갖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아주 열심히 봉사하고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런데 집에서는 모든 가족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열심도 없고 잘 참여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직장이나 가정에서는 모두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물론 직장에서 가정에서 모두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때로는 당황하게 됩니다.

부활 생명을 소유한 믿음의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주님께서 사데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
Sardis)란 "남은 물건" 이란 뜻입니다.
사데란 남은 물건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죽었다는 것은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이 있는 것 같았는데 믿음이 없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고 수고했어요.
그러다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데 천국에서 여기 들어올 수 없다고 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비참합니까?
이런 믿음이 죽은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봅시다.
우리는 믿음이 살아 있습니까?
아니면 죽었습니까?

전도서에 보면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전 9:4).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도 죽은 자가 되지 말고, 산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살아서 생기가 넘치고, 싱싱하고,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생화와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이냐?
죽은 후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나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지요.
이 세상은 제한된 세상이지만 저 하나님 나라는 제한을 받지 않는 영원한 세상이거든요.

본문에서 겉으로 볼 때는 산 자처럼 보이지만 그 속 내면은 죽은 자인 사두개인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인들이 세 부류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구약의 율법을 고수하고자 하는 철저한 보수주의자들이었습니다.

둘째는 엣세네파들 입니다.
타락한 세상을 거부하고 동굴 속에 들어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고 수도사같이 사는 은둔주의자들이었습니다.

셋째는 사두개인들입니다.
모세오경을 믿으면서도 세속 권력자들과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논리는 ‘하나님을 잘 믿으면 현실에서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치권과 결탁해서 종교정치를 일삼았습니다.
당시에 대제사장들이 대부분 사두개파였습니다.
그들은 종교 귀족들이요, 기득권층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이 곳, 현실이 좋았기 때문에 사후 세계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과 사후 세계를 인정하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이 부담되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라면 부활도, 천사도, 내세도, 심판도 없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꾸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25 -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실제로 죽은 나사로를 살려 내셨습니다.
이 땅의 삶보다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19-20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예수님은 분명히 심판에 대해서 경고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29
선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세상 권력자들과 적당히 타협해서 지금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자 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이 예수님은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려서 제거하고자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부활을 부정하고 내세가 없다고 할 것인가?
며칠동안 고민 끝에 한 가지 기발한 스토리를 만들어 가지고 나왔습니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당시 이스라엘에는 계대결혼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형이 결혼했는데 자식이 없이 죽으면 가문을 보존하고, 과부된 여자의 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사는 경우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극히 일부분의 일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이런 일이 한 가정에서 7형제 사이에 계속해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영적인 세계를 부정하고, 부활과 영생, 내세와 심판을 부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별의 별 이상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나와서 반박을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세상에 불행이 존재하는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왜 세상이 이처럼 불공평하고 불쌍한 사람, 장애인들이 있는가?”

자꾸 세상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켜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영적세계를 대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자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본문의 사두개인들처럼 주로 비극적인 스토리만 늘어 놓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현대판 사두개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활이나 하나님 나라의 상급, 그리고 마지막에 있을 심판에 대해서는 별 관심 없습니다.
“주님, 그저 자녀들 공부 잘하고, 남편 사업 잘 되고, 가족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부처님에게 비는 것인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제목이 자기와 현실문제 이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 가운데 이 땅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 그런 것은 관심 없습니다.
정말 내 인생에 기적이 나타나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양성하고, 태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고, 척박한 오지를 개척하는 세계선교를 감당하고, 그래서 한 나라, 한 캠퍼스가 뒤집어지고.
그런 꿈과 기대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겨우 이 땅에서 나 한 사람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신앙이라면, 하나님을 현실의 상자 속에 가두어 두는 현대판 사두개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가리켜서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너희가 성경을 잘 모르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해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곡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크고 놀라운 세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우리가 부활하게 되면 전혀 차원이 달라지게 됩니다.
시집도 장가도 아니가고 천사들과 같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부활 후의 세계를 1차원적으로 평면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부활한 뒤에 천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입체적이고 다차원적인 세계입니다.

성경에서 반드시 찾아야 할 신앙의 삼대 원칙은 무엇일까요?

창조 신앙
구원 신앙
부활 신앙.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절. 이 말씀은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창조주이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7절.

우리 하나님은 흙덩이에 불과한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살아 있는 존재, 영의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신비 아닙니까?
창조의 신비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면 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역사를 이루실 수 없겠습니까?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 인정하였는데 모세오경 안에 부활에 대한 기사가 없기 때문에 부활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오경 안에 분명히 부활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증거로 출애굽기 3:6절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다같이 26절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모두 현재형을 사용하셨습니다.

I am the God of Abraham, I am the God of Isaac, I am the God of Jacob.

‘I am’ 모두 현재형입니다.
아브라함은 모세보다 400년이나 이전에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자신을 현재형으로 소개하신 것은 하나님이 현재, 지금도 살아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도 지금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I am’ 입니다.
지금 살아계십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도, 모세시대에도, 예수님 시대에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도 항상 ‘I am’ 입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단절이 없고, 죽음이 없습니다.
항상 살아 계시고, 항상 능력이 충만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항상 살아 있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의 육체는 죽었지만, 그 영이 생명의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영이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육체도 살아날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1:25-2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담고 계시기 때문에, 그에게 붙어 있으면 우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죽어도 다시 삽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는 창조신앙과 부활신앙이 다 있었습니다.

로마서 4:17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며’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고자 결단할 수 있었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창조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라의 태가 말라서 전혀 임신할 가능성이 없었지만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해서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이미 창조신앙과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부활을 믿어야죠.

 창세기 1:1절, 창조는 믿는데 부활은 못 믿는다.
그게 말이 됩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면 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지 못하시겠습니까?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인정하지 않고 자꾸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고 하나님을 반쪽으로 만드는 심각한 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상자 속에 가두어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좁은 자기 생각, 자신의 얄팍한 경험과 이성의 세계에 가두어 두고자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고, 크나큰 죄악입니다.
도덕적인 죄보다 더 큰 죄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고, 하나님을 자기 생각의 범주에 가두어 두고, 마음대로 하나님의 존재를 제단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때 마르시온이라는 유명한 이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열등한 하나님이요, 신약의 하나님은 우수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툭 하면 화를 잘 내시고, 심판하시고, 진멸하시는 무서운 하나님, 신경질적인 하나님, 진화가 덜 된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신약의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사랑과 자비가 풍성한 하나님, 더 발전된 하나님, 업그레이드 되고 진화한 하나님, 우수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얼마나 우습고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잘 모르니까 그런 헛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순교당하기 직전에 쓴 디모데후서 4:6-8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여 의의 면류관을 쓰고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을 누릴 것을 생각할 때 조금도 죽음이 두렵거나 염려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청년의 스피릿으로 복음역사를 진두지휘하며 이 곳 저 곳에 흩어져 있는 복음의 동역자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는 정말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처럼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아브라함이 100세 되었을 때 아들을 주셨다면 지금 나에게도 왜 지금 나에게도 소원있는 양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기근 가운데서도 이삭에게 100배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이라면 왜 내 인생과 장래를 책임지시지 않겠습니까?
사기군같은 야곱도 이스라엘 12지파의 아버지로 변화시키고 키우신 하나님이라면 왜 나를 변화시키셔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실 수 없겠습니까?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네 조상의 하나님(아비크 엘히)

'아브'는 '아버지'(창 2:24), '족장'(창 24:40), '선조'(왕하 14:3) 등 다양하게 사용되나 여기서는 선조를 뜻한다.
특히 본절에서는 대표적인 믿음의 조상들의 이름이 언급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이 추상적 관념속에 국한된 분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일찍이 선민을 대표하여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 되시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의 3대 족장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항상 이들과 맺은 언약에 근거하여 자신을 계시하셨고 또한 백성들을 보호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세 족장들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이 각각 연계된 것은

1. 그들 각자가 단독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으며, 직접 후손과 기업에 대한 약속을 얻었기 때문이다.

2. 각자에게 거듭 허락하신 언약을 환기시킴과 동시에 그 언약의 계속성과 불변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창 15:1-21; 26:2-5; 35:1-12).
한편 이 부분이 제공하는 중요한 의미는 천지를 지으시고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민족과 약속하신 한 분 하나님에 의해서 모세가 부르심을 받고, 또한 이스라엘 벡성들이 출애굽 하게 되며, 그리고 그 백성을 통해 만방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상을 나타내는 데 있다.

  • 貫(꿸 관, 당길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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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 돈꿰미 11. 명적(: 이름 문서) 
  • (구슬 주) 
    1. 구슬 2. 진주() 3. 방울 4. 붉은색(--) 5. 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