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출애굽기 3:6)
또 이르시되 ㅇ나는 네 조상(祖上)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ㅈ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 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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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꿰다 2. 뚫다 3. 이루다 4. 달성하다(達成--) 5. 섬기다 6. 통과하다(通過--) 7. 익숙하다 8. 이름을 열기한 문서(文書)
9. 조리(條理) 10. 돈꿰미 11. 명적(名籍: 이름 문서)
ㅇ
출애굽기 4:5, 또 가라사대 이는 그들로 그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함이니라 하시고
창세기 28: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열왕기상 18: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마태복음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마가복음 12:26,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하였느냐.
누가복음 20:37,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ㅈ
열왕기상 19: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사야 6: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사야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불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불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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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요성서학당 시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
첫째는 언약(言約)의 하나님
둘째는 생명(生命)의 하나님
셋째는 순종(順從)의 하나님
첫째, 언약의 하나님
언약이란 약속하신 땅으로 반드시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요한복음 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처소(τόπος. 토포스, topos) - a place
* 종교통합을 위한 계획
1. 2018년 9월 26일(수) 발표
2. 2020년 6월 23일(화) 발표 - 네델란드 유엔 평화의 궁전(Peace Place)에서 세계 종교대통합 발표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연기
4-5년 후에 역학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찾아오셨다며 선교하라는 명을 받아 아프리카에 가서 사역을 하는데 흑인들 어울려 일을 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학원을 차렸으나 코로나에 의해서 문을 닫을 위기를 맞았다.
너무 답답하여 무당 점집을 찾아가서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러자 무당이 여자가 문으로 들어올 때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아멘!" 하며 노래를 한다.
그리고 점을 치는데 "당신은 실력이 없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끝까지 죽도록 믿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의 문제는 끈기가 없다.
그러므로 사주에 따라 무녀가 되든지 아니면 절에 가서 스님 밑에서 글을 써주는 일을 하라.
오늘은 두번째 "산 자의 하나님"에 관한 말씀을 소개합니다.
산 자의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산 자(The Living) - 자오(ζάω, 2198. zaó: to live)
Cognate: 2198 záō – to live, experience God's gift of life.
조에(ζωή, 2222. zóé: life) - both of physical (present) and of spiritual (particularly future) existence.
산 자라는 용어 자오에서 조에라는 단어가 파생합니다.
조에는 성경에서 현실세계에서는 육체적인 생명을 말하지만 부활 때에는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가복음 12:26,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하였느냐.
누가복음 20:37,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 이라고 합니다.
"산 자"를 영어 성경에서(마태복음 22:32) 찾아보겠습니다.
I am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He is not the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the living"이란 "살아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 생명(生命, ζωή)
* 주(主, ἀρχηγός) - archégos : founder, leader
* 생명의 저자, 생명의 지도자, 생명의 창설자
성경을 해석할 때 어느 한 구절만 인용하는 것보다 그 말씀의 전후 배경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읽어보겠습니다(마태복음 22:23-32).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계대 결혼
계대 결혼이란 고대 중근동 문화권 내에서 주로 행해지던 풍습으로서 죽은 형제에게 자손이 없을 경우 그 대를 이어주기 위해 죽은 자의 남은 형제가 미망인과 결혼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이는 가계의 보존과 재산권을 중시하던 당신의 상황 속에서 생겨난 풍습이다.
이때 그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아이는 법적으로 죽은 형제의 자손이 되어, 그 죽은 자의 모든 권리를 이어받게 된다.
한편 이 계대 결혼의 풍습은 사회적으로 아주 강한 구속력을 갖는 것이었으며, 만약 남은 형제가 이 결혼을 거부할 경우 심한 사회적 비난과 수치를 당해야만 했다. 이후 이 풍습은 이스라엘 사회 내에서 하나의 율법으로 정착되어 예수님 당시까지 이어져 내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성경의 예 / 창세기 38 : 6-11
유다는 큰 아들 엘이 죽어 둘째 아들 오난에게 큰 며느리 다말과 결혼하게 된다.
이 관습을 이행치 않은 오난은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로 보아 하나님께서도 이 관습을 허용하신 듯 하다.
룻기에 소개된 계대결혼 및 기업 무르기(고엘)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주님께서 사데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Sardis)란 "남은 물건" 이란 뜻입니다.
사데란 남은 물건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죽었다는 것은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이 있는 것 같았는데 믿음이 없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고 수고했어요.
그러다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데 천국에서 여기 들어올 수 없다고 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비참합니까?
이런 믿음이 죽은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봅시다.
우리는 믿음이 살아 있습니까?
아니면 죽었습니까?
전도서에 보면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전 9:4).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도 죽은 자가 되지 말고, 산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살아서 생기가 넘치고, 싱싱하고,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생화와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이냐?
죽은 후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나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지요.
이 세상은 제한된 세상이지만 저 하나님 나라는 제한을 받지 않는 영원한 세상이거든요.
본문에서 겉으로 볼 때는 산 자처럼 보이지만 그 속 내면은 죽은 자인 사두개인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인들이 세 부류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구약의 율법을 고수하고자 하는 철저한 보수주의자들이었습니다.
둘째는 엣세네파들 입니다.
타락한 세상을 거부하고 동굴 속에 들어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고 수도사같이 사는 은둔주의자들이었습니다.
셋째는 사두개인들입니다.
모세오경을 믿으면서도 세속 권력자들과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논리는
‘하나님을 잘 믿으면 현실에서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치권과 결탁해서 종교정치를 일삼았습니다.
당시에 대제사장들이 대부분 사두개파였습니다.
그들은 종교 귀족들이요, 기득권층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이 곳, 현실이 좋았기
때문에 사후 세계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과 사후 세계를 인정하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이 부담되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라면 부활도, 천사도, 내세도, 심판도 없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꾸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25 -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실제로 죽은 나사로를 살려 내셨습니다.
이 땅의 삶보다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19-20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예수님은 분명히 심판에 대해서 경고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29
선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세상 권력자들과 적당히 타협해서 지금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자 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이 예수님은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려서 제거하고자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부활을
부정하고 내세가 없다고 할 것인가?
며칠동안 고민 끝에 한 가지 기발한 스토리를 만들어 가지고 나왔습니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당시 이스라엘에는
계대결혼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형이 결혼했는데 자식이 없이 죽으면 가문을 보존하고, 과부된 여자의 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사는 경우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극히 일부분의 일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이런 일이 한
가정에서 7형제 사이에 계속해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영적인 세계를
부정하고, 부활과 영생, 내세와 심판을 부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별의 별 이상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나와서 반박을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세상에 불행이 존재하는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왜 세상이 이처럼 불공평하고 불쌍한 사람, 장애인들이 있는가?”
자꾸 세상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켜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영적세계를 대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자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본문의
사두개인들처럼 주로 비극적인 스토리만 늘어 놓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현대판
사두개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활이나 하나님 나라의 상급, 그리고 마지막에 있을 심판에 대해서는 별 관심 없습니다.
“주님, 그저
자녀들 공부 잘하고, 남편 사업 잘 되고, 가족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부처님에게
비는 것인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제목이 자기와 현실문제 이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 가운데 이 땅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 그런 것은 관심 없습니다.
정말 내 인생에 기적이
나타나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양성하고, 태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고, 척박한 오지를 개척하는 세계선교를
감당하고, 그래서 한 나라, 한 캠퍼스가 뒤집어지고.
그런 꿈과 기대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겨우 이 땅에서 나 한
사람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신앙이라면, 하나님을 현실의 상자 속에 가두어 두는 현대판 사두개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가리켜서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너희가 성경을 잘 모르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해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곡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크고 놀라운 세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우리가 부활하게 되면 전혀 차원이 달라지게 됩니다.
시집도 장가도 아니가고 천사들과 같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부활 후의 세계를 1차원적으로 평면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부활한 뒤에 천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입체적이고
다차원적인 세계입니다.
성경에서 반드시 찾아야 할 신앙의 삼대 원칙은 무엇일까요?
창조 신앙
구원 신앙
부활 신앙.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절. 이 말씀은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창조주이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7절.
우리 하나님은 흙덩이에 불과한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살아 있는 존재, 영의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신비 아닙니까?
창조의 신비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면 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역사를 이루실 수 없겠습니까?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
인정하였는데 모세오경 안에 부활에 대한 기사가 없기 때문에 부활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오경 안에
분명히 부활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증거로 출애굽기 3:6절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다같이 26절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모두 현재형을 사용하셨습니다.
I am the God of Abraham, I am the God of Isaac, I am
the God of Jacob.
‘I am’ 모두 현재형입니다.
아브라함은 모세보다 400년이나 이전에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자신을 현재형으로 소개하신 것은 하나님이 현재, 지금도 살아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도 지금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I am’ 입니다.
지금 살아계십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도, 모세시대에도, 예수님
시대에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도 항상 ‘I am’ 입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단절이
없고, 죽음이 없습니다.
항상 살아 계시고, 항상 능력이 충만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항상 살아 있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의 육체는 죽었지만, 그 영이 생명의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영이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육체도 살아날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1:25-2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담고 계시기 때문에, 그에게 붙어 있으면 우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죽어도 다시 삽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는
창조신앙과 부활신앙이 다 있었습니다.
로마서 4:17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며’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고자 결단할 수
있었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창조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라의 태가 말라서 전혀
임신할 가능성이 없었지만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해서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이미 창조신앙과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부활을 믿어야죠.
창세기 1:1절, 창조는
믿는데 부활은 못 믿는다.
그게 말이 됩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면 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지 못하시겠습니까?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인정하지 않고 자꾸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고 하나님을 반쪽으로 만드는
심각한 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상자 속에 가두어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좁은 자기 생각, 자신의 얄팍한 경험과 이성의 세계에
가두어 두고자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고, 크나큰 죄악입니다.
도덕적인 죄보다 더 큰 죄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고, 하나님을 자기 생각의 범주에 가두어 두고, 마음대로 하나님의 존재를 제단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때 마르시온이라는
유명한 이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열등한 하나님이요, 신약의 하나님은 우수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툭 하면 화를 잘 내시고, 심판하시고, 진멸하시는 무서운 하나님, 신경질적인 하나님, 진화가 덜 된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신약의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사랑과 자비가 풍성한 하나님, 더 발전된 하나님, 업그레이드
되고 진화한 하나님, 우수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얼마나 우습고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잘
모르니까 그런 헛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순교당하기 직전에 쓴 디모데후서 4:6-8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여 의의 면류관을 쓰고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을 누릴 것을 생각할
때 조금도 죽음이 두렵거나 염려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청년의 스피릿으로 복음역사를 진두지휘하며 이 곳 저
곳에 흩어져 있는 복음의 동역자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는 정말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처럼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아브라함이 100세 되었을 때 아들을 주셨다면 지금 나에게도 왜 지금 나에게도 소원있는 양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기근
가운데서도 이삭에게 100배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이라면 왜 내 인생과 장래를 책임지시지 않겠습니까?
사기군같은 야곱도 이스라엘
12지파의 아버지로 변화시키고 키우신 하나님이라면 왜 나를 변화시키셔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실 수 없겠습니까?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아브'는 '아버지'(창 2:24), '족장'(창 24:40), '선조'(왕하 14:3) 등 다양하게 사용되나 여기서는 선조를 뜻한다.
특히 본절에서는 대표적인 믿음의 조상들의 이름이 언급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이 추상적 관념속에 국한된 분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일찍이 선민을 대표하여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 되시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의 3대 족장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항상 이들과 맺은 언약에 근거하여 자신을
계시하셨고 또한 백성들을 보호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세 족장들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이 각각 연계된 것은
1. 그들
각자가 단독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으며, 직접 후손과 기업에 대한 약속을 얻었기 때문이다.
2. 각자에게 거듭 허락하신 언약을
환기시킴과 동시에 그 언약의 계속성과 불변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창 15:1-21; 26:2-5; 35:1-12).
한편 이
부분이 제공하는 중요한 의미는 천지를 지으시고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민족과 약속하신 한 분 하나님에 의해서 모세가 부르심을 받고,
또한 이스라엘 벡성들이 출애굽 하게 되며, 그리고 그 백성을 통해 만방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상을 나타내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