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Ⅱ(요한계시록 1:3) 설교 원고(2019-07-21)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Ⅱ(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성경에서 강조하는 최고의 복은 ‘영생(永生)’입니다.
영생이란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죽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 부활의 때에 다시 살아날 줄 믿는다고 고백했던 마르다에게 분부하신 말씀입니다.   


영생이란?
포기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유토피아(Utopia)라는 저서를 남긴 영국의 사상가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 2. 7~1535. 7. 6)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왕에게 항복하라고 그를 졸랐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오랫동안 함께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왜 당신은 꽃 같은 나이에 당신과 우리 가족에게 가장 비극적인 불행을 가져오려 하십니까?”

이 말을 들은 모어는 이렇게 되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최소한 20년은 사실 거예요.”
그러자 그는 소리쳤습니다.
“이 땅에서의 20년밖에 안 되는 삶을 위하여, 내가 영원한 삶을 포기하고 고통에 나를 내어 준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오! 영혼을 잃는 것보다는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을 잃는 편이 오히려 더 좋은 일이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소?”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이란 제목으로 두 번째 설교를 합니다.
지난 주일에 소개했던 설교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성경을 산(山)에 비유할 때 구약이란 산에는 39종류의 나무가 자라고 있고, 신약이란 산에는 27종류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나무들이 많이 우거진 곳을 삼림(森林)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다양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삼림(森林)과 같습니다.
삼림(森林)이란 한자에는 수풀 삼(森)자에 나무 목(木)자가 세 개 사용되었고,
수풀 림(林)자에는 나무 목(木)자가 두 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이란 삼림에 속한  요한계시록은 삼림의 나무들 중에서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요한계시록을 삼림 속에 있는 나무라고 해석하지 않고 많은 높은 산들이 줄지어 있는 산맥(山脈)으로 이해했습니다.
그 결과 산맥(山脈)은 아주 높고 험준한 곳이기에 요한계시록을 특별한 은사를 받은 교주만이 해석할 수 있다고 강조되었으며 심지어 특정한 교파에 가입해야만 마지막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삼림(山脈)의 한 나무처럼 성경의 줄기에 따라 한 주제로 읽을 때 요한계시록은 어렵고 난해한 말씀이 아니라 누구든지 읽을 수 있는 약속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주제로 읽는 첫 번째 방법은 ‘복(福)’이란 주제로 읽는 것입니다.

복(福)이란 한자는 볼 시(示)와 부요할 부(富)가 결합한 단어로
“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 또는 “부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부(富)’의 기준을 “돈” “자동차” “집”과 같은 외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세속적인 복”과 “내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신령한 복”으로 구분합니다.

구약에서 복이란 두 단어 ‘베라카(신명기 28:1∼2)’와 ‘에제르(시편 23:1∼3)’는 “순종의 복”을 말합니다.
순종하는 약속의 백성들은 뛰어난 민족이 될 것이며 마치 마르지 않는 시냇가(복수)에 심어진 나무처럼 그 뿌리가 마르지 않는 물가에 심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복은 영생(永生)입니다(시편 133:3).
영생의 복은 예수를 믿음으로 얻습니다(요한복음 3:16).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7:3).

예언의 말씀이란 그 예언의 그 말씀(요한계시록 1:3, 22:7, 10, 18, 19)을 말합니다.

예언의 말씀의 내용은 ‘속히 오리라! 가감하지 말라!’고 합니다.
‘속히(1:1, 2:16, 3:11, 11:14, 22:6, 7, 12, 20)’ 라는 말은 시간적인 의미보다는 영적 의미로 “반드시 오실 것”을 말합니다.

오늘은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두 번째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먼저 요한계시록 1장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예언의 말씀으로 소개된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특징을 세 가지 모습 즉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영생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복을 누리기 위해서 예언의 말씀 속히 오시리라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위한 세 가지 자세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읽는 자, 둘째는 듣는 자들, 셋째는 지키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첫째, 읽는 자(아나기노스콘, ἀναγινώσκων)

본문에서 ‘읽는 자’는 두루마리의 말씀을 회당에서 회중을 대표하여 전문적으로 읽는 낭독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성경을 읽는 자를 말합니다. 성경을 문자로만 읽는 것이 아닙니다.

1. 확실하게 아는 것(to know certainly)
2. 다시 아는 것(know again)
3. 인식하는 것(recognize), 알아차리는 것(discern)

요한계시록에 사용된 각종 상징과 숫자들의 의미를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결론입니다. 만일 상징과 숫자들과 인과 나팔과 대접의 의미는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결론을 모르거나 지나쳐 버린다면 큰 실수를 범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해외여행이 한창일 때 가이드가 신신당부하기를 많은 관광객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기 때문에 항상 가이드가 들고 있는 깃발을 보고 따라와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에게 이번 여행이 어떠했느냐? 하고 물었을 때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외국 땅에서 가이드가 들고 다니는 깃발만 보도 따라다녔기 때문에 아무 것도 기억이 없다고 했다는 우스개 이야기처럼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해가 상징과 숫자와 인과 나팔과 대접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성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잃어버린다면 그 결과는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며(창 1:1), 창조한 세상을 심판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계 22:20).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성경에서 예언의 결론은 '마라나타'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믿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복으로 읽는다는 것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믿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듣는 자(아쿠온테스, ἀκούοντες)

본문에서 듣는 자는 문법적으로 복수형입니다. 읽는 자는 한 사람이지만 듣는 사람은 여러 사람입니다. 회당의 예배는 성인 남자 10명 이상이 모였을 때에 예배가 시작되었으므로 최소한 10명 이상이 듣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1. 이해하는 것(to understanding)
2. 가르칠 수 있는 것(to teaching)

교육심리학에서는 죄(罪)에 대한 정의가 아주 새롭습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것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을 모르면서 특히 요한계시록을 모르면서 읽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구원의 진리를 알았으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말씀 처럼 다시 오실 심판의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깨우쳐야 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

알면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는 것은 내 안에 머물지만 행하는 것은 내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을 안다고 말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겠습니다.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깨달은 후에는 아직도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소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24장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 무렵 함께 유하려고 어느 집에 들어가서 음식을 먹으려고 할 때 주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 제자들에게 떼어 주셨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그 분이 주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을 눈이 밝아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주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주님이 보이기 시작하면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말씀은 실천하기 위하여 들어야 한다.

예수님은 많은 말씀들을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비유로 가르치실 때 사용하셨던 ‘들으라’ 또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들으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은 이미 증거 된 가르침들 즉 구약의 말씀에 대해서 실천하기 위해서 들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마가복음 4:3∼9).

셋째, 지키는 자(테룬테스, τηροῦντες) 

테룬테스(τηροῦντες)는 테레오(τηρέω)의 복수형으로 ‘지키는 것’ 그리고 ‘감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키는 자는 물론 예언의 말씀을 지킬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감시해야 합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잘못 전달되거나 가르치는 것을 감시하고 그와 같은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도록 생명을 사랑하고 영혼을 감시하는 책임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에 무당(巫堂)의 수가 대략 30만 명이라고 하며 무당에 의해서 창출되는 년 간 금액이 무려 6조원이라고 합니다. 교인의 수가 1,200만 목사의 수가 6만이라고 하는데 교인들이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였다면 어떻게 한국사회가 이렇게 무당의 수가 점점 더 늘어가고 있을까요?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한 책임을 교회가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28,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약속하신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8: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일서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요한계시록은 읽고 듣고 지키므로 복을 누립니다. 해석하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해가 될 때까지 읽고 들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2:7에서 지키는 것에 대한 복을 강조합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지킨다는 말은 실천한다는 뜻도 있지만 그 말씀을 변질되지 않도록 없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지킨다는 뜻이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영생의 복을 누리기 위하여 그 예언의 그 말씀 곧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켜야 합니다.

티벳 사람들의 종교는 라마 불교라고 합니다. 티벳 사람들은 라마 불교의 경전을 읽지 않기 때문에 라마 불교를 모른다고 합니다. 티벳의 불자들이 경전을 읽지 않기 때문에 라마 불교 사원 주위에 ‘마니차(摩尼車་)’ 라는 불교 도구를 만들어 놓습니다. ‘마니차’란 원통형 모양으로 표면에는 ‘만트라’가 새겨져 있고, 내부에는 롤로 경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마니차의 크기는 다양하여 손에 쥘 수 있는 크기부터 큰 것은 몇 미터에 달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둥근 원통 마니차를 손으로 돌리면 한 번 읽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라는 마니차를 한번 돌리면 창세기를 한 번 읽는 것입니다. 두 번 돌리면 두 번 읽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니차를 돌리기만 하기 때문에 경전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간혹 도로에서 자동차 뒤에 성경 찬송을 얹어놓고 다니는 운전자를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찬송을 마치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소원하는 부적과 같이 사용한다면 이런 것도 기독교식 마니차라고 하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요한계시록을 읽지 않고 듣지도 않으므로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영생(永生)의 복(福)을 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복이란 주제로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 영원한 삶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