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생명의 주(사도행전 3:15, 요한계시록 1:13∼16) / 설교 원고(2019-04-21)

부활 생명의 주(사도행전 3:15, 요한계시록 1:13∼16)

요한계시록 1:13∼16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부활 생명의 주란?
아주 오래 전에 남대문교회 배명준목사님이 권사님과 함께 심방을 가려고 당시 전차에 올라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이 갑자기 옆에 앉아있는 어느 대학생에게 전도하기 시작했답니다. 대학생은 손에 육법전서라는 두꺼운 책을 들고 있는 법대생이었다고 합니다. 권사님이 그 대학생에게 “학생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라고 말을 하자 대학생은 권사님에게 “나는 불자요! 석가모니를 믿습니다.” 하고 단호하게 거절하더랍니다. 목사님께서 차라리 가만히 있으면 좋으련만 왜 대학생과 논쟁을 하는지 어떻게 도와 줄 수 없을까 생각하는데 갑자기 권사님이 대학생에게 “석가모니 무덤이 있습니까?” 하고 묻더랍니다. 그러자 대학생이 “그럼요 당연히 무덤이 있지요!” 라고 대답을 하자 권사님이 “아니 왜 죽은 석가모니를 믿습니까? 살아있는 예수님을 믿어야지!” 라고  말을 하는데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 때 목사님께서 “지혜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생명의 주(the author of life, δὲ Ἀρχηγὸν τῆς ζωῆς)란 성경 전체에서 사도행전에서 단 한 번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생명의 주’란 여러 번역을 참조하여 살펴보겠습니다.

헬라어 - 생명의 저자(Ἀρχηγὸν τῆς ζωῆς)  
새번역 - 생명의 근원이 되는 주님
공동번역 -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
NASB, NIV - 생명의 왕자(the Prince of life)

저자(著者)란? “책이나 글을 지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저자’란 ‘생명을 지은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생명을 지은 사람 그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생명을 지으셨기에 생명을 죽여도 그 생명은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이라고 하겠습니다.

지난 목요일 아침에 ‘실험실의 비밀’ 이란 동영상을 교회 카톡 단체방에 올렸습니다. 그 동영상을 확인하셨다면 거듭나야 하는 이유와 부활의 증거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분명하게 증거 한 것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기독론의 완성’입니다. 기독론이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죄 값을 지불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가 되셨으므로 사망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오르시어 보좌에 앉아계시다가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것을 말합니다. 

기독론의 기초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이며, 또한 ‘교회론의 완성’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의 확실한 증거를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의 모습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인자 같은 이”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소개됩니다.
첫째, 예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
둘째, 영체로 오신 예수님

그러나 제가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인자 같은 이”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라고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나타나신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인자라는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사람의 아들과 같은 모습(요한계시록 14:14)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체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영의 실체를 눈으로 보여주신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 후 주님의 몸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몸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몸이셨기에 제자들이 만지려고 할 때 만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지금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영을 육체로 보여주신 사건 - 성육신 사건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육체를 영으로 보여주신 사건 - 변화산 사건
마태복음 17:1∼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둘째는 대 제사장의 옷(출애굽기 28:4)

그들이 지을 옷은 이러하니 곧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라 그들이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아론이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발에 끌리는 옷과 가슴에 금띠를 띠셨다는 모습은 대제사장의 의복을 갖춘 모습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의 속죄제물을 바침으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이신 예수님(다니엘 7:9)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다니엘 7장은 인자에 대한 예언을 말씀합니다. 인자는 곧 장차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 소개된 예수님의 모습과 다니엘 7장에 소개된 인자의 모습은 동일한 모습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인자 같은 이는 곧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이십니다.

공생애 기간 중 변화산에서 변모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은 천상에서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밧모섬에 갇힌 요한에게 자세하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모습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부활하신 영광스런 주님의 모습에서 장차 우리들도 이와 같이 변화될 아름다운 모습을 생각하며 현실에서 받은 아픔과 상처와 질병과 장야를 모두 털어버리고 그 날의 기쁨을 사모하며 믿음으로 당당하게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께서 인자와 같은 이로 나타나셨다면 훗날 부활 때에 우리들은 어떤 모습일까요? 주님과 같은 이로 일어설 것이 아닐까요?

비록 현실에서는 내 몸이 건강한 몸이 아닐 수 있습니다. 병들고 사고를 당하고 몸의 한 부분이 제 기능을 상실하고 그러나 그 날에는 반드시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을 기대하며 현실의 어려움과 고통을 견딜 수 있고 절망의 시간을 소망의 시간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신앙이 바로 생명의 주를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생명의 주를 믿기 때문에 현실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찾게

됩니다.

부활주일을 맞아 장차 우리들도 영광스런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그 날을 기다리며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부활의 주 생명의 주를 믿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삶의 자세를 부활이란 단어에서 찾아봅니다.

부활(復活, 다시 復. 살 活)이란 헬라어로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 라고 합니다.

anástasis는 ana(up, again) + histemi(to stand)의 합성어라고 합니다.
아나스타시스란 “다시 일어서다”는 뜻입니다. ‘다시 일어서다’는 의미를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회복(回復, 돌아올 回. 회복할 復)’ 이라고 하겠습니다. 회복이란 ‘원래의 상태를 되찾는 것’을 말합니다. 부활이란 세 가지 회복을 의미합니다.

1. 죽음에서 다시 일어서다(a resurrection from death) 죽음에서 회복
2. 도덕성의 회복(a moral recovery)
3. 영적 진리의 회복(a recovery of spiritual truth)

영적 진리의 회복(a recovery of spiritual truth)

영적 진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말합니다.

어느 장로님이 임종하기 직전에 목사님이 찾아와서 “이제 세상을 떠나게 되면 주님 계신 곳에서 영원한 생명의 삶을 누리게 될 줄 확신하십니까?” 하고 질문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장로님께서 “죽어봐야 알겠지요!” 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제가 성경 말씀 한 구절을 읽겠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하며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었다고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가장 잘 암송하는 말씀입니다. 함께 암송해볼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그런데 목사님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지 못 얻을지는 죽어봐야 알겠느니라.’ 이렇게 읽었더니 장로님께서 큰 소리로 ‘아니, 목사님! 왜 성경을 그렇게 읽습니까?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이렇게 읽어야지요!’ 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읽는 것을 바르게 읽으면서 왜 믿는 것은 바르게 믿지 못합니까? 하고 깨우치자 목사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바르게 읽고 바르게 믿겠습니다. 죽으면 영생을 얻는 줄 확신합니다. 이렇게 마지막 임종을 확인하고 그 다음 날 아침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영적 진리의 회복이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읽은 대로 믿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요한계시록 1:13∼16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영적 진리를 회복하려면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죽음에서 다시 일어서다(a resurrection from death)

세상에서 죽음이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죽음이란 영과 혼과 육의 기능이 죽은 것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는 육체의 죽음에서 반드시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죽음에서 다시 일어서야 할 것은 죽은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죽은 신앙이란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사도행전 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부활을 증언할 때 큰 무리가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사도들의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부활주일을 지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선지자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 말씀은 멸망할 니느웨 성을 향하여 가서 외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니느웨가 망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니느웨로 방향을 정하지 않고 정반대 방향 다시스로 가는 배를 선택했습니다. 당시 다시스로 가는 배는 자주 있는 것이 아니라 3년에 한 번 운항하는 것이었습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항구에서 만났다는 것을 정말 행운 중의 행운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욥바 항구를 떠난 배가 순탄하게 운행하던 중 갑자기 심한 풍랑을 만났습니다. 선원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많은 짐을 모두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돈을 포기하고 생명을 구하려는 상선의 선원들의 절박한 마음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풍랑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풍랑은 자연적인 원인이 아니라 신의 노여움이라 판단하고 각자 자기의 신을 향하여 풍랑이 잔잔해 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때 선지자 요나는 이 풍랑의 원인은 자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결국 바다에 던져진 요나 때문에 풍랑은 잔잔해졌습니다.

큰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니느웨로 가야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회복했습니다. 물고기가 요나는 니느웨로 토해내므로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대로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니느웨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늘은 파트리스교회가 세워진 후 처음을 맞이하는 부활주일입니다. 뜻 깊은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부활의 증인으로 다시 일어서는 것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도덕성 회복(a moral recovery)

양심에는 화인 맞은 양심과 선한 양심으로 구분합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은 도덕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원인은 언어의 질서를 파괴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목사를 주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교인들은 주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언어의 질서는 종이 자녀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자녀에게 종을 섬기라고 강조합니다. 이와 같은 언어의 질서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섬겨야 할 대상을 섬기라고 강요하기 때문에 세상도 언어의 질서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전서 3:16a
선한 양심을 가지라
keeping a clear conscience.

디모데전서 1: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히브리서 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줄을 확신하노니.

디모데전서 4: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도덕(道德)이란 사전적 정의는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나 바람직한 행동 규범”을 말합니다.

양심의 어원
양심의 사전적 정의는 자기 행위의 옳고 그름과 선악을 분별하는 마음. 
양심(conscience)이라는 말은 원래 ‘함께(con)’ ‘안다(science)’는 두 단어의 합성어라고 합니다. 양심이란 ‘함께 아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와 함께 아느냐? 우선은 내가 나와 함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과 내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양심이란 하나님과 함께 아는 것을 말합니다.

가룟 유다(누가복음 22:3)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사단이 가룟 유다의 육체에 들어간 것이 아니겠지요. 영에게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는 영의 지배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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