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봉석(崔鳳奭, 1869-1944) 목사 / 최권능목사


예수 천당! 불신지옥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최봉석(崔鳳奭, 1869-1944) 목사가 바로 그 인물로, 세인들에게는 최권능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는 그의 삶과 사역이 놀라운 기사와 이적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주어진 명예였다.
그는 한국교회 외침 전도의 대명사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은 그의 브랜드였다.
이로 인해 그는 불신자들은 물론 신자들로부터도 미친 사람이라고 조롱당하거나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언행은 언제나 반듯했고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1902년 평안북도 삭주에서였다.
구한말 관리로 지내던 그가 공금횡령사건에 연루되어 삭주로 유배되었는데, 거기서 삭주교회를 설립한 백유계(白留溪)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노블(W. A. Noble) 선교사가 건네준 쪽복음서를 탐독하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벼락에 맞아죽는 꿈”을 꾼 후 그는 성령의 역사로 중생의 체험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으며, 평양 시내에서 그의 전도를 듣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에게 따라다니는 몇몇 유명한 일화들이 있다.

하루는 그가 장터에서 전도를 하다가 방탕한 시절의 옛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최권능을 보고 놀려댔다.
자리에 앉히고는 술을 권하고, 마시지 않으니까 입을 벌려서 억지로라도 마시게 하려고 했다.
그래도 마시지 않자 한 친구가 그의 얼굴에다 술잔을 부어버리고 말았다.
그때 옆에 있던 친구들은 이제 큰 일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아는 한 최봉석은 그런 일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저 친구 오늘 장례 치르는 날이겠구먼!”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최권능은 자기 옷을 털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태연히 앉아 있는 것이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친구가 하도 신기해서 “괜찮으냐, 어떻게 그렇게 참고 넘어가느냐”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최권능은 “이전의 최봉석이는 다 죽었어. 지금 살아 있는 것은 전도하는 최권능이야”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 하루는 평양의 백동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고 있었다.
그때 한 일본군 연대장이 시장터를 지나가고 있었다.
최권능은 그 일본군 연대장을 향해서 큰 소리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외치며 전도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우렁찼든지 연대장의 말이 깜짝 놀라는 바람에 말에 탔던 연대장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화가 난 연대장은 최권능을 일본군 주재소로 끌고 가 온갖 매질을 하며 심문했다.
그런데 최권능은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위축당하지 않고 일본 군인이 내리칠 때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하고 외쳤다.
세게 때리면 때릴수록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소리도 그에 따라 커졌다.
그러자 일본 군인은 최권능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조롱하듯이 “당신은 건들기만 하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냐” 하고 물었다.
이에 최권능은 “내 속에는 예수님 밖에 들어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건들기만 하면 예수님이 나오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일본 군인들은 그를 그대로 풀어주었다.

또 한번은 최권능이 평안도 구성에서 전도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그가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 들어가 전도한 뒤 그 옆집에서 전도하고 있었다.
그때 자신이 전도한 김씨가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곧 김씨의 아들이 찾아와 그를 향해서 아버지를 죽인 자라고 욕하면서 잡아가 자기 집에 가두었다.
이때 그는 오히려 그 아들에게 “네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내가 기도해서 아버지를 살려 줄 터이니 예수를 믿겠느냐?”고 묻자,
그 아들은 “믿겠다”고 대답했다.
이에 최 목사는 곧 죽은 그 김씨를 붙잡고 땀을 흘리면서 기도하는데,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결과 그 가족과 이웃들이 예수를 믿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최권능은 오직 예수의 사람이었다.
예수의 영으로 충만했던 그의 삶은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기생집에도 들어가서 전도하고, 남의 부엌에서도 전도하고, 얼굴도 알지 못하는 목사와 장로들에게도 전도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신자다”라고 하면 그는 “당신이 신자면 왜 내게 전도하지 아니하느냐?”라고 무섭게 책망할 정도로 구령의 열정으로 가득했다.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원초적이고 순수한 신앙으로 전도에 헌신했던” 한국교회사 속의 위대한 ‘전도대장’이었고, 예수 복음의 맛을 깊이 알았던 진짜 예수꾼이었다.
일신(一身)의 안일과 명예보다 주님의 명예가 더욱 소중함을 깨달았던 예수의 충복(忠僕)이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그가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일제에 잡혀가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변치 않았다.
오히려 고문의 강도가 혹독하면 할수록 그의 입에서 나오는 “예수천당”의 외침소리도 더욱 커졌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수로 가득 차 있어서 예수 밖에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이 움직일 때마다 예수가 내 입에서 튀어 나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병보석으로 풀려난 자신을 병원으로 옮겨가는 인력거꾼에까지도 “예수천당”을 외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옥에서 나온 지 나흘만인 1944년 4월 15일에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나를 오라고 하신다” 그리고 “부디 승리하시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가 무엇을 바라보며 살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한마디로 그는 예수 의식에 철저한 삶을 담아냈던 것이다.

 




"예수 천당"으로 유명한 일명 최권능목사로 더 알려진 유명한 목사 최봉석은 1869년 1월 7일 평양에서 최준서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고 "예수 천당"의 외침으로전도의 권능이 있어 "최권능"목사라는 이름이 더적합하다. 1939년 신사참배 반대로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1944년 40일 금식기도를 마치고 하늘나라 로갔다.

 

평양신학교 졸업
1907년 벽동교회 조사
1913년 만주 파송 전도목사

부친은 평양의 강동현 미곡창장으로 재직했고 그는 16세까지 구학문을 익히다가 1885년 평양감영의 통인으로 발탁이 되어 공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공직수행 중 국고 손실로 귀양을 가있는 사이에 아내의 산후조리로 의원이었던 상주교회 배유계 영수를 찾았을 때에 "예수믿고 회개하여 새사람되어야 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그의 머리에서 '회개'라는 말이 떠나지 않고 있던 중 재산 한푼 없는 거지 행색으로 잠시 평양 본가로 돌아왔다가 감리교 노블선교사를 만나 회심하고 평양뿐 아니라 상주까지 내려가 예수를 증거하기 시작했다.


아내와 처가에서는 미친 사람으로 취급되어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에게 "여보 어찌 천륜을 이렇게 매정하게 끊을 수 있겠오 다시 한번 생각합시다."하는 최봉석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결국 두 아들을 하나씩 맡기로하고 헤어지면서도 그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더욱 예수에 미쳐 능력있는 전도자가 되었다.

1907년 최봉석의 나이 38세에 벽동교회 조사가 되었다.
최봉석의 목회는 그 성격만큼이나 고집스러웠다.
교인들의 담뱃대를 모아 꺾어버리고, 첩있는 사람은 원입을 못하게 했고 성수주일 못하면 세례를 불허하고 한달 결석이면 책벌, 우상제물 금지, 불신영혼 엄금 등 엄격하기만 했다.

신학교를 7년 다녔는데도 유급이 되자 교수들을 찾아가 기도하자고 해놓고 "교수님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졸업장을 주어 목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고 아멘시키고 졸업장을 받았다.

1913년 만주 파송 전도목사로 14년간 만주에서 고독과 배고픔, 모진 배척과 싸우며 전도에 전념해 28개 교회를 개척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14년 만에 평양에 돌아왔을 때 그가 외치는 "예수, 천당" 소리는 평양의 새벽을 깨웠고 전도 못하는 교역자들을 '벙어리' '송장'이란 말을 거침없이 했다.

1938년 신사참배결의에 "총회는 사탄의 회로 전락했다"고 반대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39년 5월 15일 70세에 6년간의 긴 옥고가 시작되었다.

일경은 그를 세가지 죄목
1. 항일사상 선동 국체문란
2. 일본천황 무시하고 하나님을 높이는자.
3. 선교사를 통한 미국비밀공작원으로 몰아 두 차례에 걸쳐 무려 6년의 옥고를 치루게 했다.

그는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듯 40일 금식기도에 돌입했다.
의사들의 만류에도 40일 금식을 마치고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미 눈동자가 풀어져 있었고 병원에서 5일간 버티다가 1944년 4월 15일 오후 1시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오라하신다"며 찬송 289장(고생과 수고 다 지나간후--) 찬송을 가족들과 함께 부르고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했으니 그의 나이 75세였다.

 
초기한국교회 "예수천당" 최권능목사

최봉석(崔鳳奭)은 1869년 1월 7일 평양 장경문에서 아버지 준서(俊瑞)와 어머니 전씨(全氏) 사이의 3남으로 태어났다. 6세 때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1885년부터 평양관찰사 민병석의 통인(通引)으로 8년간 봉직했다. 이후 별장(別將) 포수(砲手) 도령장(都令將) 등의 벼슬을 지냈으나, 1900년 감찰(監察)로 있을 때 공금횡령사건으로 6개월간 감옥생활을 한 다음 평북 삭주(朔州)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그는 술도가와 금광업 등에 관계하며 방탕한 생활을 했다.

1902년 유배지에서 최봉석은 삭주교회 설립자인 백유계(白留溪)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고, 1903년 평양 본가를 찾았다가 감리교의 노블(W.A., Noble, 魯普乙) 선교사를 만나 감동받고 그가 건네준 쪽복음서를 열심히 읽었다. 그러던 중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벼락에 맞아죽는 꿈’을 꾼 최봉석은 성령의 역사로 중생의 체험을 받았다. 이후 그는 상투를 자르고 노블 선교사에게 세례받은 다음 쉬지않고 기도하며 성경을 탐독했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1904년에는 삭주교회 집사가 되었으며, 이듬해는 삭주교회 영수가 되었다. 이때 최봉석은 양전백(梁甸伯)의 추천으로 성경 매서인(賣書人)이 되어 김상준과 함께 벽동 강계 후장 초산 창성 구성 등 평북 산악지역은 물론이고 압록강 건너 만주 통화현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전도하여 4년간 30여 교회를 세웠다.

최봉석은 1907년 벽동읍교회에 조사(助師)로 부임하여 이후 8년간 시무한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1913년 신학교를 6년만에 6회로 졸업했는데, 재학중에도 공부보다는 새벽기도와 노방전도에 더 열중한 것으로 유명했다.

최봉석은 졸업하던 해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벽동읍교회에서 위임목사로 1년간 시무했으며, 1914년 장로교 평북노회에서 최성주(崔聖柱) 목사와 함께 전도목사로 남만주에 파송되었다. 1915년 삭주교회 목사로 시무하다 이듬해 목사직을 사면한후 봉천성 통화현을 중심으로 10여년 동안 순회하면서 흩어져 있던 동포들에게 전도하여 28개소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1923년에는 남만 노회장을 역임하여 노회로부터 개척전도 공로표창을 받았다.

1926년 귀국한 최봉석은 평양 근교의 강동(江東)교회와 무진교회에서 잠시 시무하면서 무진보통학교 교장직도 겸임했다. 1927년부터 최봉석은 길선주(吉善宙) 목사의 주선으로 평양 산정현교회 전도목사가 되어, 서문밖교회 옆 인덕서관(仁德書館) 2층에 전도관을 차리고 평양을 중심으로 각처를 다니며 전도활동을 계속했다. 평남과 황해도지방 특히 산간벽지를 누비며 전도하였으나 노년에는 주로 평양에서 전도하였다. 평양에서 전도할 때는 2년만에 3천여명의 신자를 얻었다.

최봉석은 평양신학교 학생시절부터 “예수 믿으면 천당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갑니다!”는 전도슬로건을 간략하게 “예수천당! 불신지옥!” 또는 “예수천당! 마귀지옥!”으로 축약시켜 만나는 사람마다 외쳤다. 한번 들으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 그의 강렬한 구호는 평생을 함께 했다. 이 구호에 대해 교계안팎의 평가는 ‘신앙적이다’는 의견에서 부터 ‘원초적이고 단순 무식하다’는 의견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그가 이 구호를 외친 이유는 기독교신앙에 다른 무엇이 더 있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본명보다 ‘최권능(崔權能) 목사’ 또는 ‘능력의 최권능’으로 더 잘 알려졌는데, 이는 그의 전도활동이 주변 목회자들조차 혀를 내두르게 할만큼 정력적이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려냈다는 전설같은 이적이 많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일생 대부분의 시간을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고, 낮에는 종일 길거리에 서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어 세우고 전도했다.

최봉석은 “젊은이들을 가르치는데 의와 진리로 거듭난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오”라고 강조하면서, “사람의 마음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곧 지(知)와 정(情)과 의(意)라. 지로는 예수와 하나님의 진리를 배울 것이요, 정으로는 예수의 사랑을 배우게 할 것이요, 의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배울 것이다. 예수 안에 참사람의 요소인 진리와 사랑과 권능이 무한하시니, 다 예수를 배워서 완전한 사람, 참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고 설교했다.

최봉석은 너무 고지식하고 담대해 닥치는대로 전도하여 불신자는 물론 신자들까지 광인(狂人)시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의 언행은 언제나 권위가 있었고 바르기 때문에 오히려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평생을 전도하는 종으로서 개척전도, 노방전도를 하여 세운 교회가 무려 74개나 되었다.

1938년 9월 제27회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그는 주기철 목사 등과 함께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일경이 그를 체포하려 하자 평북 정주군 쑥섬으로 피신했으나 1939년 5월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에 대한 죄목은 1)일본천황을 무시하고 하나님만 높였다. 2)선교사인 미국인과 내통하여 비밀공작을 했다. 3)예수가 재림하여 천년왕국이 임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민심을 소요케 했다 4)교인들을 선동하여 민심을 소란케 하고, 항일사상을 선전했다 5)교회 원로로서 후배들에게 신사참배를 못하게 하고, 신사참배하는 사람들을 괴롭혔다는 등이다.

결국 최봉석은 평양형무소에 수감됐는데, 당시 신사참배 반대를 적극 주도한 교계 지도자인 주기철 채정민 이기선 방계성 한상동 고흥봉 김인희 최덕지 박관준 안이숙 주남선 등 전국 각지서 잡혀온 신앙동지들과 함께 옥중투쟁을 계속했다. 그는 육신의 고통으로 인한 불평이나 절망은 전혀 하지않았으며, 고문을 당하면서도 계속 “예수천당”을 외치며 "나는 머리부터 발 끝까지 예수로 가득차 있어서 예수 밖에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이 움직일 때마다 예수가 내 입에서 튀어 나옵니다"고 대답했을 정도였다. 또 최봉석은 감옥 안에서도 “예수천당”을 큰 소리로 외쳐 죄수와 간수들을 놀라게 했고, ‘예수’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면회온 부인에게도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만 했다고 한다.

1944년 그는 3월 1일을 기해 40일 금식기도를 시작하여 고문으로 육신이 매우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무사히 마쳤다. 그러나 4월 11일 병보석으로 잠시 풀려난 최봉석은 죽음을 앞둔 자신을 옮기는 인력거꾼에게도 “예수천당”을 외쳤을 정도로 강한 신앙인이었다.

평양 홀 기념병원에 입원하여 장기려(張基呂) 장로의 특별치료를 받았으나, 최봉석은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그해 4월 15일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나를 오라고 하신다”는 말과 함께 “부디 승리하시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4월 19일 평양 자택에서 임종순 목사 집례로 치뤄졌고, 유해는 돌박산 기독교인묘지에 안장되었다.

1946년 봄 산정현교회는 그의 순교기념비를 건립했다. 그리고 홍의봉 감독이 최봉석 목사의 삶과 신앙을 영화화한 <예수천당>(1991)이 있다.

최봉석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예수천당’을 큰소리로 외쳐 복음을 전했으며, 원초적이고 순수한 신앙으로 전도에 헌신했던 한국개신교사의 권능있는 위대한 ‘전도대장’이었다. 땀과 피와 눈물로 얼룩진 가시밭길을 헤치며 전도에만 전력해온 그는 초라한 옷과 거친 음식에도 행복했던 예수의 진실한 충복이었다. 때로는 광인으로 매도당하거나 지나치게 보수주의적 신앙인으로 비판받기도 했지만, 언제나 겸손하게 기도하고 찬송부르기를 좋아했으며 늘 감사하는 생활을 했다.

‘오직 예수’를 위한 반석같은 신앙심의 소유자였던 최봉석은 6년간의 투옥생활과 고문으로 믿음이 더욱 정화되고 단련되었으며, 정결한 신앙과 영혼을 끝까지 지켜 마침내 영광스럽게 순교한 ‘한국의 베드로’였다.

 자료 출처 /  초기한국교회 "예수천당" 최권능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