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믿음(하박국 2:4, 야고보서 2:26) / 주일 설교 원고(2020-2-6)

행동하는 믿음(하박국 2:4, 야고보서 2:26)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See, he is puffed up; his desires are not upright--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As the body without the spirit is dead, so faith without deeds is dead.

행동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중국의 영적 지도자이었던 "워치만 니(Watchman Nee, 倪柝声(聲). 1903. 11. 4~1972. 5. 30)의 가르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도입 이야기 #.1)

옛날 계단 식 논에서 농사를 짓던 기독교인 농부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해 몹시 가물었던 때에 계단 식 맨 위 논의 주인이었던 농부는 모내기를 마치고 밤을 새워 아래 골짜기에서 물을 길어 논에 물을 채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논을 살펴보니 바로 아래 논 주인이 위 논의 둑을 허물고 위 논의 물을 전부 아래로 흘려 내려 보냈습니다.
화가 치민 위 논의 농부는 또다시 아래 골짜기에서부터 물지게를 짊어지고 물을 길어 논에 물을 채웠습니다.
다음 날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이 세 차례 반복되었을 때는 도저히 참기 어려웠습니다.
위 논의 주인 농부는 당시 영적 지도자 "워치만 니"를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고 질문했다고 합니다.
그때 “워치만 니”는 위 논 주인이었던 기독인 농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방법을 바꾸세요! 이번에는 아래 논에 물을 채운 후 그리고 당신의 논에 물을 채우세요!”

위 논의 주인 농부는 힘든 일이지만 가르침대로 하고 비록 몸은 매우 힘들었으나 마음은 편안하게 잠을 청했습니다.
다음 날 아래 논 주인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믿는 예수를 나도 믿고 싶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당신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라면........"

행동하는 믿음이란 "믿음이란 추상명사동사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이런 행동이 가능할까요?
그 이유는 성경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You diligently study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that b them you possess eternal life.
These are the Scriptures that testify about me.

2020년 오늘의 묵상을 위한 성경 읽기는 요한일서야고보서 그리고 로마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주간에는 에베소서를 읽게 됩니다.

요한일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生命)"
야고보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본(本)"
로마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의(義)" 라고 합니다.

야고보서에서 믿음은 행동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로마서에서 믿음은 구세주를 믿는 것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구약 하박국서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See, he is puffed up; his desires are not upright--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하박국서 2장 4절에서 "믿음"이란 단어는 히브리어 "에무나"를 번역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에무나"라는 단어가 49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박국서 2장 4절에서만 "믿음"으로 번역하였고 48회는 "진실(眞實)" "성실(誠實)"이라고 번역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박국서 2장 4절에서만 "에무나"라는 단어를 "믿음"이라고 번역했는지 역사적 배경을 살펴야 합니다.

하박국서는 기원전 606년경에 바벨론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을 잡아 죽이는 모습을 보면서 하박국의 마음에 의심의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면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 때문에 악인들이 의인들을 잡아 죽이는 것을 볼 수 없었을텐데 어찌하여 악인들의 악에 대하여 방관만 하시는지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대답은, "보라 그 바벨론 사람들은 그 마음은 교만(驕慢)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正直)하지 못해! 그래서 그들의 종말로 속히 이르게 될 것이야. 비록 더디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기다려 봐라! 정녕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바벨론 왕이 망하게 되는 이유가 그의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해서 망하는 것이라면, 만약 그 당시 어떤 사람이 의인이 되려면 교만하지 않고 겸손해야 하고 또 정직하고 성실해야만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 하박국 선지자에게 대답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셨을 때 그 믿음이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 "살리라"하신 말씀도 그 사람의 영혼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이 질문했던바 악인들이 의인들을 다 잡아다가 죽이고 있는 현실을 두고 하나님께 탄원을 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답변으로서 "살리라"하고 대답하신 말씀은 바울이 말하는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 시대가 예레미야 선지자가 사역을 하고 있었던 시대였고, 그때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 와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바벨론으로 끌어갈 때 나온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당시 역사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듣고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의로운 사람들이었고 또 비교적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되어 죽임을 당하지 않고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가서 거기서 살게 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 구절 즉 하박국서 2장 4절을 인용하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된다는 말은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성실(에무나)과 진실 정직함을 그 사람의 의(義)로 여겨주신다는 말씀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신구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믿는다 혹은 예수님을 믿는다 더 나아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그 사람의 성품과 행실이 착하지도 않고 충성되지도 않고 성실하지 않고 진실하지 않으며 정직하지 않고 행함도 없고 성화도 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거짓 믿음이요 죽은 믿음이며 능히 구원에 들어갈 수 없는 믿음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요 야고보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의 자손들 중에서 죄가 아주 없어서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 같이 원죄(原罪)가 있다고 하지만 그 중에 교만하고 정직하지 않고 성실하지 않고 착하지 않고 충성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겸손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고 착하고 충성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바로 그러한 믿음 즉 죄(罪)도 있고 허물도 있고 실수(失手)도 있고 약점(弱点)도 있는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근본적으로 착하고 충성되고 정직하고 성실하고 신실하고 진실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의 그 성실(에무나)를 그의 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예수를 믿기 때문에 밤새도록 아래 골짜기에서부터 밤새도록 힘들게 물지게에 물을 길어 논을 가득 채웠지만 순식간에 논둑을 터쳐 자기 논에 물을 흘러내려보내는 화가 나는 행실에 대하여 다투지 않고 논쟁하지 않고 영적 지도자의 가르침에 따라 아래 논에 물을 채우고 그 다음에 자기 논에 물을 채운다는 것이 현실에서 자주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그 일을 믿음으로 감당했을 때 아래 논 주인의 강퍅한 마음은 녹아내려서 나도 당신이 믿는 예수를 믿어야 하겠다는 결단한 것처럼 오늘날도 이와 같은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에무나와 같은 진실하고 성실한 믿음이라고 합니다.

열왕기상 3장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이 가로되 주(主)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誠實)과 공의(公義)와 정직(正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主)의 앞에서 행(行)하므로 주(主)께서 저에게 큰 은혜(恩惠)를 베푸셨고 주(主)께서 또 저를 위(爲)하여 이 큰 은혜(恩惠)를 예비(豫備)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의 대답은,
"네가 염려하는 의인들(예루살렘 사람들 중에 의인)은 그 믿음(에무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된단다." 이렇게 대답하신 것입니다.

이때 믿음이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고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의인들 중에 정말 성실하고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이 있다면 그 성실하고 진실하고 정직한 믿음(에무나)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니 네가 염려하지 않아도 내가 오히려 너보다 더 아끼고 있단다!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이란 말도 좀 더 심도 있게 살펴서 오해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믿음이란 말이 추상명사 혹은 동사로 된 단어지만 본래는 형용사성실한, 진실한, 정직한 등의 용어였습니다. 따라서 행위도 중요하지만 행위 이전에 존재의 성품이 더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이란?

첫째, 진실(眞實)한 믿음
둘째, 성실(誠實)한 믿음

행동하는 믿음이란?
첫째, 진실한 믿음

진실(眞實)이란 한자는 "참 진(眞)" "열매 실(實)"입니다.
진실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거짓이 없이 바르고 참됨."
"참되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 라고 합니다.

진실이란 히브리 단어는 "에메트
(אֱמֶת)" 라고 합니다.
에메트(אֱמֶת)라는 단어는 히브리 알파벳  첫문자 '알렙' 과 중간 문자 '엠므' 마지막 문자 '타우'가 합성하여 만든 단어입니다.
에메트란 단어는 처음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변함이 없는 것을 진리 또는 진실이라고 합니다.

구약 호세아 4장 1절에서
"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이 땅에 없는 것은 진실(에메트,
אֱמֶת)과 인애(헤세드, חֶסֶד)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다아트, דַּעַת)이라고 합니다.

환경에 따라 바뀌는 것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사랑은 바뀔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 결혼식에서 주례자는 신랑과 신부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 사랑하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면 믿음도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받은 사람이 건강할 수도 있고 건강이 나쁠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건강해야만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진실한 믿음은 변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왜 믿음이 변할까요?
무섭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가장 용감하고 결단력이 빠른 제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로 가야 할 것을 말씀하셨을 때에 앞장서서 절대 선생님에게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나도 같이 죽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자신의 믿음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믿음은 어린 여종의 한 마디 말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와 그 환경이 두렵고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환경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진실한 믿음입니다.

신명기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에무나)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시편 33: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에무나). 


행동하는 믿음이란?
첫째, 진실(眞實)한 믿음
둘째, 성실(誠實)한 믿음

시편 89:1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에무나)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성실이란 한자의 훈(訓)은 “정성 성(誠), 열매 실(實)” 이라고 합니다.
성실이란 한자의 뜻은 “정성스럽고 참된” 이라고 합니다.

믿음에는 정성과 참된 것이 필수 조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정성의 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는 기도를 많이 하는 성도들과 신학 지식이 풍부한 성도들 그리고 말을 잘하는 성도들은 많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말씀과 계명대로 실행하는 성도들이 드물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외국에서는 기독교 인구가 20%가 넘으면 기독교 국가로 간주합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기독교 인구가 25%라고 합니다.
한국은 분명 기독교 국가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성공회 목사인 “죤 스토트”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교회와 사회를 둘러본 후에
한국에는 미숙한 크리스천이 많은 것 같다.’ 라고 말했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고 말씀을 부지런히 읽지만 그 말씀과 그 기도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불성실한 신앙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주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믿기 시작한 때부터 즉시 거룩한 삶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중생(重生)하는 시점과 성화(聖化)의 출발점이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세월이 흘러도 도무지 성화되지 않고 변화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아직 중생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고 사랑이 없고 성화가 되지 않는 사람의 믿음은 거짓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없는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원숭이 같은 신앙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앵무새와 같은 신앙입니다.
이제는 분명하게 변해야 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므로 나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행할 수 있는 믿음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을 행동하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은 두 가지 특별한 삶을 고백합니다.

첫째는 진실한 신앙

진실이란 변함이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신앙으로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주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둘째는 성실한 신앙

성실이란 거짓이 섞이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영어로 신시어(sincere)를 "성실한" 이라고 합니다.
신시어의 어원은 라틴어 "시네세라(sinecera)" 라고 합니다.
시네세라는 시네(sine)와 세라(cera) 두 단어가 합성한 단어로 시네(sine)는 없다는 뜻이며,
세라(cera)는 양초, 왁스(wax)를 말합니다.

고대 사회에 조각상(彫刻像)을 마당에 세워두는 것이 부자들의 풍습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각상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가끔 훼손된 조각품을 값싸게 판매하는 상인에게 그와 같은 조각상을 구임하여 마당에 세웠다고 합니다. 훼손된 조각품의 일부분을 왁스로 채우고 마치 완벽한 조각품처럼 장식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뜨거운 햇살에 의해서 훼손된 부분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런 조각품이 시장에 많이 나왔기 때문에 완벽한 조각품에는 반드시 "시네세라(sine cera)" 라는 보증서가 첨부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성실한 신앙이란 조금이라도 거짓이 없는 믿음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처럼 사자굴에 들어가는 신앙,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과 같은 풀무불에 던져질 때에도 주저하지 않는 신앙을 말합니다.


진실과 성실이란 두 기둥 외에 또 하나의 기둥을 찾는다면 "순종"이라고 하겠습니다.

순종하는 믿음

순종이란 내가 이해하고 인정하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내 생각과 내 방법과는 전혀 다르지만 하나님의 방법이며 하나님의 생각이라면 인정하고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인용했던 “믿음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이란 말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그냥 믿음이란 뭐 다른 뜻이 없고 예수님을 믿는 것 아닌가 하고 얼버무려 넘기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을 두고 말씀하실 때 처음부터 단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어 순종케 되는 믿음을 명시하였습니다.

로마서 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로마서 16:26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에무나)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4b)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순종(順從)이란 한자의 훈은 “순할 순(順)” “좇을 종(從)”입니다.
순종이란 뜻은 “다른 사람, 특히 윗사람의 말이나 의견 따위에 순순히 따르는 것.” 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순종이란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순순히 따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마태복음 18:22)”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셨던 말씀입니다. 주를 믿는 성도는 반드시 이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용서하며 살아오셨나요?
더구나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43∼45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믿음이란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못하는 믿음으로 이제까지 주를 믿는다고 자부하며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순종하는 신앙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가르침에도 순종해야 합니다.

히브리 백성 모두가 죽임을 당할 계획이 세워진 때에도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며 삼일 금식을 하고 왕 앞에 나가 하만의 계획을 폭로하여 히브리 민족을 위기에서 구원했던 에스더와 같은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