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로 돌아오라(사도행전 14:15) / 주일 설교 원고(2020-06-14) 이승혁목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사도행전 14:15)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Men, why are you doing this? We too are only men, human like you. We are bringing you good news, telling you to turn from these worthless things to the living God, who made heaven and earth and sea and everything in them. 

하나님께로 돌아오라!(Turning to God)”

성경을 읽을 때에 "돌아오라"는 말씀은 "회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주제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오라"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회개에 대한 구약적 의미(슈브, ב ש )

슈브의 의미는 "버리고 돌아오라"신(ש)이란 ‘파괴 시킨다(destroy)’베트(ב)는 ‘집(the house)’ 을 말합니다.
구약의 회개(슈브)는 "예전에 살던 집(베트. ב ) 즉 옛 성품과 구습과 행동을 불로 태워 신(신. ש) 부셔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다시 옛집으로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회개에 대한 신약적 의미(메타노이아, μετάνοια)

메타노이아는 "방향을 바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은 이제까지 가던 길에서 방향을 바꾸고 옛 생활에 붙잡혔던 집을 완전히 부숴버린 후에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세례 요한의 외침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서 잘 알려진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날 회당에서 스승과 제자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밤의 어두움이 지나고 새날이 밝아 온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동창이 밝아 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니니라."
"창문을 열어 모든 사물의 형체를 구별할 수 있으면 새날이 밝은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니라."
"그렇다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네가 창문을 열고 내다보았을 때,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이 너의 형제로 보이면 그때 비로소 새날이 밝은 것이니라."

사도행전 14장은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 지방에서 복음을 전할 때 마침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 바울이 복음전하는 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사람에게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며 “바나나”는 “쓰스”(헬라의 주신 제우스, 로마의 주피터)라고 하고 “바울”은 “허매”(교역의 신인데 루가오니아 지방에서는 웅변과 연설의 신, 헬라의 헤르매스, 로마의 머큐리)라고 불렀습니다.

심지어 ‘쓰스 신당’의 제사장은 소와 화관을 갖고 바울과 바나바가 머물고 있던 집의 대문 앞에 와서 제사하고자 하므로 바울과 바나바는 그 사람들에게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헛된 일을 버리고 모든 것을 지으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은 오늘날 성도들이 복음대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내 삶을 지켜본 사람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바나바처럼 선교지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지의 복음”도 필요하지만 선교지로 갈 수 없을 때는 내 삶의 자리에서 복음대로 살아갈 때 나를 지켜본 누군가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면 그것이 “삶의 복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데이비드 웰스” 목사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그의 저서에서 오늘날 선교의 문이 닫힌 이유는 “회심이 없는 기독교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에 회심이 없는 이유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다원주의다원화 문화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보면, 1980년대 이후 미국의 플러 신학교에서 시작한 "교회 성장학"이란 학문은 전 세계적으로 교회를 열광시켰습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프로그램은 성장에 묶여 있었습니다. 40일 새벽기도회의 목표는 성장입니다. 제자훈련도 성장이 목표입니다. 총동원전도 또한 성장이 목표이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분명히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성장한 만큼 세상은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모든 교회의 프로그램이 교회 성장으로 집중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성장한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 성장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의 삶을 닮아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역사를 생각할 때에도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2020년 6월 25일은 6. 25 전쟁 70주년을 맞이합니다.
성경에서 70년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포로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해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 자유대한민국은 오히려 잘못된 지도자의 판단과 선택에 의해서 점점 더 이상한 방향으로 가려고 합니다. 이때 교회는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현대사회의 특성을 알 수 있는 용어가 있습니다.

첫째는 내로남불

내가 하는 것은 로맨스이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불륜이다.
철저하게 자기 중심의 삶을 좋아하고 즐기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이것과 비슷한 말은 “아시타비(我是他非)”란 “나는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
또한 반대되는 말은 “관인엄기(寬人嚴己)‘란 “남에게는 관대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라”

둘째는 칠포사무 시대

7포 4무의 청년들은 반드시 예수를 만나야 해결 할 수 있습니다.

7포란 "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인간관계, 꿈, 희망"을 말합니다.
4무란 "무감각, 무능력, 무기력, 무책임"을 말합니다.

회개하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단어는 “성정(性情)” 이란 단어라고 하겠습니다. 성정이란 단어가 한글개역성경에서 두 번 사용되었습니다(사도행전 14:15, 야고보서 5:17).

야고보서 5: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성정이란 단어가 “(현대인, 공동번역) 사람” “(새번역) 성정” “(NIV) human” "(헬라어) 호모이오파데스(ὁμοιοπαθής, homoiopathés) 감정과 애정이 비슷한(of like feelings or affections)"

엘리야가 살았던 시대에 엘리야 이외 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능력의 기도를 했습니다. 엘리야가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세상 풍조의 지배를 받는 믿음이 아니라 성정을 극복하는 믿음을 지녔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야 주위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세상이었습니다.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도 엘리야와 같은 믿음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엘리야는 갈멜산의 영적 싸움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850명이 모였습니다.

엘리야는 비를 내리게도 하시고 가뭄으로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그 결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의 결과는 영혼 구원입니다. 엘리야 한 사람 때문에 믿음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오늘날 너희들은 누구를 섬길 것이냐? 바알과 아세라를 섬길 것인가? 아니면 만물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베드로전서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

회개하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단어는 “성정(性情)” 이란 단어라고 하겠습니다. 성정이란 단어가 한글개역성경에서 두 번 사용되었습니다(사도행전 14:15, 야고보서 5:17).

야고보서 5: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성정이란 단어가 “(현대인, 공동번역) 사람” “(새번역) 성정” “(NIV) human” "(헬라어) 호모이오파데스(ὁμοιοπαθής, homoiopathés) 감정과 애정이 비슷한(of like feelings or affections)"

엘리야가 살았던 시대에 엘리야 이외 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능력의 기도를 했습니다. 엘리야가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세상 풍조의 지배를 받는 믿음이 아니라 성정을 극복하는 믿음을 지녔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야 주위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세상이었습니다.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도 엘리야와 같은 믿음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엘리야는 갈멜산의 영적 싸움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850명이 모였습니다.

엘리야는 비를 내리게도 하시고 가뭄으로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그 결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의 결과는 영혼 구원입니다. 엘리야 한 사람 때문에 믿음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오늘날 너희들은 누구를 섬길 것이냐? 바알과 아세라를 섬길 것인가? 아니면 만물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베드로전서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You are receiving the goal of your faith, the salvation of your souls.

바울과 바나바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 편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한 것이 아니라 비록 불편할지라도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길은 선택하고 루스드라 지방을 방문했습니다. 루스드라 지방의 사람들은 “쓰스”와 “허매”라는 신을 좋아했습니다.

“쓰스”라는 신은 헬라에서는 최고의 신 “제우스”를 말합니다. 로마에서는 “주피터”라고 합니다.

“허매”라는 신은 “교역의 신”을 말합니다. 루가오니아 지방에서는 “웅변과 연설의 신” 이라고 하였습니다. 헬라에서는 “헤르매스”라고 합니다. 로마에서는 “마큐리”라고 합니다.

엘리야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재물과 건강이 아닐까요? 돈만 있으면 최고의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강만 있으면 세계 어느 곳이든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우한 바이러스 때문에 돈이 있어도 재미가 없습니다. 건강이 있어도 재미가 없습니다. 누가 이런 날이 다가올 줄 알았을까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쓰스”와 “허매”를 섬기며 돈과 재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신앙을 “신관(神觀)”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신을 세 종류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범신론(汎神論, Pantheism)

범신론이란 자연의 모든 것을 신이라고 믿고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인들이 섬기는 토속신(土俗神)으로 무려 800만 종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하나님은 800만의 신(가미)들 중에 하나 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일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한 신이 아니라 그 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결혼식을 한 후에 다시 신사에 가서 결혼식을 한 번 더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이혼율이 높다고 합니다.
  
둘째는 다신론(多神論, Polytheism)

다신론이란 헬라와 로마의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과 같이 많은 신들을 섬깁니다. 예를 들면 제우스, 아폴로, 아프로디테, 포세이돈 등을 말합니다.

다신론의 현대적인 예는 힌두교로서 3억이 넘는 신들이 있다고 합니다. 특히 힌두교에서는 신을 남신을 “데바(Deva)”라고 하고 여신을 “데비(Devi)”라고 합니다. 바알이 남신이라면 아세라는 여신입니다. 신의 세계에 남신과 여신이 있다는 것은 성적으로 문란하게 됩니다.

셋째는 유일신론(唯一神論, Monotheism)

유일신이란 오직 하나 뿐인 신을 섬기는 것으로 기독교에서 믿는 여호와 하나님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호세아 13:4,
그러나 네가 애급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이와 같은 신관에 의해서 신앙생활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인본주의(人本主義,  안드로포센트리즘. Anthropocentrism)적 신앙입니다.
둘째는 신본주의(神本主義, 데오센트리즘(Theocentrism)적 신앙입니다.

인본주의의 중심은 “사람”이며, 신본주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성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신본주의 신앙의 길을 선택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의 삶은 형들의 시기와 미움 때문에 어린 나이에 애급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리고 애급의 총리가 될 때까지 참 험한 세월을 지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고통스럽던 지난 세월을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무장했습니다. 그 결과 형들이 애급을 찾아와 먹을 식량을 구하려고 엎드려 절을 할 때 비로써 어릴 때 요셉이 말하던 해와 달이 절을 하고 형제들이 절을 한다는 것을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형들에게 “하나님이 우리 가족을 사랑하셔서 나를 먼저 애급으로 보내셨다”고 말하며 위로했습니다.

인본주의 신앙에서 신본주의 신앙으로 돌아서기 위해서는 기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인본주의 신앙에서도 기도합니다. 신본주의 신앙에서도 기도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기도하느냐에 따라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로 구분될 것입니다.

인본주의 신앙은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기도할 것입니다.
신본주의 신앙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기도할 것입니다.
건강과 행복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신본주의 신앙으로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이사야 55: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Let the wicked forsake his way and the evil man his thoughts. Let him turn to the LORD, and he will have mercy on him, and to our God, for he will freely pardon.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면 두 가지를 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그 길을 버리라(forsake his way)
둘째는 그 생각을 버리라(forsake his thoughts)

길이란 방법”을 말합니다.
영어 성경에서 길을 “웨이(way)”라고 합니다. “웨이”는 “방법”이란 뜻으로도 사용합니다.

옛날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대장간의 주인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일군에게 말발굽을 주며 이것과 똑같은 말발굽 100개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일군은 주인의 분부에 따라 열심히 말발굽을 100개 만들었습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일군이 만든 말발굽을 살펴보니 모양은 말발굽 모양이지만 크기가 전부 달랐습니다. 주인은 일군에게 도대체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 하고 물었더니 일군은 “예, 처음 것은 주인님이 주신 말발굽을 보고 그대로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만들어 놓은 말발굽을 보고 만들고 그 다음에도 방금 만는 말발굽을 보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교회가 본받아야 할 신앙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는 성경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목회에 성공했다는 어느 교회와 어느 목사를 본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이제 이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인본주의에서 신본주의”로 바꿔야 합니다.

생각이란 선택”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선택한 것은 곧 행동으로 옮겨지기 때문입니다.

원수 마귀는 가룟 유다에게 예수를 팔아넘길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유다는 그 생각을 지워버린 것이 아닐 생각을 받아드린 후에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사탄은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악한 생각을 갖게 하여 악한 일을 하게 합니다. 음란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음란한 생각을 주어 음란한 행동을 하게 합니다. 거짓된 사람에게는 거짓된 생각을, 불의한 사람에게는 불의한 생각을 자꾸 넣어줍니다. 이 모든 잘못된 것이 생각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 편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한 것이 아니라 비록 불편할지라도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길은 선택하고 루스드라 지방을 방문했습니다. 루스드라 지방의 사람들은 “쓰스”와 “허매”라는 신을 좋아했습니다.

“쓰스”라는 신은 헬라에서는 최고의 신 “제우스”를 말합니다. 로마에서는 “주피터”라고 합니다.

“허매”라는 신은 “교역의 신”을 말합니다. 루가오니아 지방에서는 “웅변과 연설의 신” 이라고 하였습니다. 헬라에서는 “헤르매스”라고 합니다. 로마에서는 “마큐리”라고 합니다.

엘리야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재물과 건강이 아닐까요? 돈만 있으면 최고의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강만 있으면 세계 어느 곳이든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우한 바이러스 때문에 돈이 있어도 재미가 없습니다. 건강이 있어도 재미가 없습니다. 누가 이런 날이 다가올 줄 알았을까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쓰스”와 “허매”를 섬기며 돈과 재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신앙을 “신관(神觀)”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신을 세 종류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범신론(汎神論, Pantheism)

범신론이란 자연의 모든 것을 신이라고 믿고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인들이 섬기는 토속신(土俗神)으로 무려 800만 종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하나님은 800만의 신(가미)들 중에 하나 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일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한 신이 아니라 그 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결혼식을 한 후에 다시 신사에 가서 결혼식을 한 번 더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이혼율이 높다고 합니다.
  
둘째는 다신론(多神論, Polytheism)

다신론이란 헬라와 로마의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과 같이 많은 신들을 섬깁니다. 예를 들면 제우스, 아폴로, 아프로디테, 포세이돈 등을 말합니다.

다신론의 현대적인 예는 힌두교로서 3억이 넘는 신들이 있다고 합니다. 특히 힌두교에서는 신을 남신을 “데바(Deva)”라고 하고 여신을 “데비(Devi)”라고 합니다. 바알이 남신이라면 아세라는 여신입니다. 신의 세계에 남신과 여신이 있다는 것은 성적으로 문란하게 됩니다.

셋째는 유일신론(唯一神論, Monotheism)

유일신이란 오직 하나 뿐인 신을 섬기는 것으로 기독교에서 믿는 여호와 하나님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호세아 13:4,
그러나 네가 애급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이와 같은 신관에 의해서 신앙생활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인본주의(人本主義,  안드로포센트리즘. Anthropocentrism)적 신앙입니다.
둘째는 신본주의(神本主義, 데오센트리즘(Theocentrism)적 신앙입니다.

인본주의의 중심은 “사람”이며, 신본주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성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신본주의 신앙의 길을 선택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의 삶은 형들의 시기와 미움 때문에 어린 나이에 애급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리고 애급의 총리가 될 때까지 참 험한 세월을 지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고통스럽던 지난 세월을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무장했습니다. 그 결과 형들이 애급을 찾아와 먹을 식량을 구하려고 엎드려 절을 할 때 비로써 어릴 때 요셉이 말하던 해와 달이 절을 하고 형제들이 절을 한다는 것을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형들에게 “하나님이 우리 가족을 사랑하셔서 나를 먼저 애급으로 보내셨다”고 말하며 위로했습니다.

인본주의 신앙에서 신본주의 신앙으로 돌아서기 위해서는 기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인본주의 신앙에서도 기도합니다. 신본주의 신앙에서도 기도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기도하느냐에 따라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로 구분될 것입니다.

인본주의 신앙은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기도할 것입니다.
신본주의 신앙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기도할 것입니다.
건강과 행복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신본주의 신앙으로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이사야 55: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Let the wicked forsake his way and the evil man his thoughts. Let him turn to the LORD, and he will have mercy on him, and to our God, for he will freely pardon.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면 두 가지를 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그 길을 버리라(forsake his way)
둘째는 그 생각을 버리라(forsake his thoughts)

길이란 방법”을 말합니다.
영어 성경에서 길을 “웨이(way)”라고 합니다. “웨이”는 “방법”이란 뜻으로도 사용합니다.

옛날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대장간의 주인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일군에게 말발굽을 주며 이것과 똑같은 말발굽 100개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일군은 주인의 분부에 따라 열심히 말발굽을 100개 만들었습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일군이 만든 말발굽을 살펴보니 모양은 말발굽 모양이지만 크기가 전부 달랐습니다. 주인은 일군에게 도대체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 하고 물었더니 일군은 “예, 처음 것은 주인님이 주신 말발굽을 보고 그대로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만들어 놓은 말발굽을 보고 만들고 그 다음에도 방금 만는 말발굽을 보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교회가 본받아야 할 신앙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는 성경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목회에 성공했다는 어느 교회와 어느 목사를 본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이제 이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인본주의에서 신본주의”로 바꿔야 합니다.

생각이란 선택”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선택한 것은 곧 행동으로 옮겨지기 때문입니다.

원수 마귀는 가룟 유다에게 예수를 팔아넘길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유다는 그 생각을 지워버린 것이 아닐 생각을 받아드린 후에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사탄은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악한 생각을 갖게 하여 악한 일을 하게 합니다. 음란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음란한 생각을 주어 음란한 행동을 하게 합니다. 거짓된 사람에게는 거짓된 생각을, 불의한 사람에게는 불의한 생각을 자꾸 넣어줍니다. 이 모든 잘못된 것이 생각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두 대의 차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한 대는 고통 받는 사람을 도와주려고 달리는 구급차 이었고, 다른 한 대는 최신식 고급 승용차 이었습니다. 두 대가 마구 달리면서 다른 차들을 추월하고 중앙선을 침범하여 위험스럽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구급차와 고급 승용차의 차이는 누가 운전대를 잡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급차의 운전대는 구급요원이 잡고 있었지만 고급 승용차는 술에 취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가 운전하고 있습니까?
성령님께서 운전을 하십니까?
아니면 원수 사탄 마귀가 운전하고 있습니까?

성령께서 운전하게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내가 예수 안에 들어갔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온다는 것은 말씀을 암기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생명이 나를 지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님에게로 예수님으로부터 보혜사 성령님에게 보혜사 성령으로부터 이제 우리 모두에게 생명이 흘러넘쳐야 하겠습니다.
이런 생명이 넘쳐나는 은혜가 이번 한 주간 모든 성도들과 교회와 자유대한민국 위에 넘쳐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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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의 특성을 알 수 있는 용어가 있습니다.

기성 세대들에게는 자기를 합리화하려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내로남불

내가 하는 것은 로맨스이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불륜이다.
철저하게 자기 중심의 삶을 좋아하고 즐기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이것과 비슷한 말은 “아시타비(我是他非)”란 “나는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
또한 반대되는 말은 “관인엄기(寬人嚴己)‘란 “남에게는 관대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라”

마래의 주역이 될 젊은이들에게는 세상을 등지려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둘째는 칠포사무 시대

7포 4무의 청년들은 반드시 예수를 만나야 해결 할 수 있습니다.

7포란 "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인간관계, 꿈, 희망"을 말합니다.
4무란 "무감각, 무능력, 무기력, 무책임"을 말합니다.



종교가 처음 우리를 찾아 왔을 때 우리는 땅이 있었고 그들은 경전을 들고 왔다.
그들은 우리에게 눈 감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쳤다.
눈을 떠보니 그들은 땅을 가졌고 우리는 경전을 들고 있었다.

# 코로나-19가 분명히 알려준 사실은

1. 종교는 단 한 명의 환자도 살리지 못한다.

2. 축구 스타보다 의료인들이 훨씬 값어치 있다.

3. 유럽은 생각했던 것만큼 선진국이 아니었다.

4.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태리 일본은 우리보다 후진국이더라.

5. 부자라고 가난한 사람보다 면역력이 좋은 건 아니었다.

6. 우리가 격리되어 보니 동물원의 동물들 심정을 알겠다

7. 소비 없는 사회에 석유는 쓸모없다.

8. 인간들이 활동을 덜하면 지구는 회복된다.

9.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에서도 일을 잘 해낸다.

10. 외식, 회식 없어도 사는 데 지장이 없다.

출처 : 시니어매일(http://www.senior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