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에 합당한 일(사도행전 26:20) / 주일설교 원고(2020-06-28) 이승혁목사


회개에 합당한 일(사도행전 26:20)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First to those in Damascus, then to those in Jerusalem and in all Judea, and to the Gentiles also, I preached that they should repent and turn to God and prove their repentance by their deeds.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첫번째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 방향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두번째 종류의 사람들은 세상 방향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세상 방향이 더 좋다고 느껴집니다.
세상 방향이 얼마나 좋은가를 교훈하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두 친구가 두 개의 문자를 놓고 서로 자기 생각이 맞다고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논쟁의 주제는 어느 것이 큰 대자가 맞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친구가 주장하는 것은 "큰 대(大)"자가 맞다고 합니다.
다른 친구는 "개 견(犬)"자가 맞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두 친구는 스승을 찾아가서 확인 한 후에 진 사람이 이긴 사람에게 점심을 사주기로 합의했습니다.
스승에게 두 문자를 보이며 어느 것이 큰 대자인가요?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개 견자를 가리키며 이것이 큰 대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결국 옳은 것을 주장하던 친구가 틀린 것을 주장하던 친구에게 점심을 사 준 후에 다시 스승을 찾아왔습니다.
도대체 왜 틀린 것을 맞다고 하셨습니까?

그 때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친구에게 점심을 한 그릇 사 준 것은 상을 받은 것과 같지만,
틀린 것을 옳다고 믿고 주장하는 것은 벌을 받은 것이라네......"

그렇습니다.
틀린 것을 모르고 마치 틀린 것이 옳은 것처럼 믿고 살아가는 것은 벌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25장 26장은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아그립바 2세)"을 설득하여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내용입니다.

아그립바 : 아그립바 2세를 말합니다.
로마의 행정관 포르시우스 페스투스(신약 성서의 베스도)와 함께 가이사랴에서 사도 바울을 심문하였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을 설득해 전도하려고 하였다(사도행전 25~26장).
아그립바 2세베레니스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공식적으로는 그의 외숙모였다.
그녀는 후에 로마의 황제가 된 로마의 장군 티투스의 첩이 되었다.

헤롯 아그립바 2세는 누구인가? - 헤롯 왕가의 마지막 통치자

"아그립바"는 "독자"라는 뜻입니다.
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며, 헤롯 대왕의 증손입니다.
 로마 황실에서 교육받았습니다.
로마의 하수인으로서 맹충성한 자로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간교하고 처세술이 뛰어난 자입니다.
누나와 근친상간으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지지를 못 받을 정도로 행실이 방종했던 자입니다.
복음에 대한 바울의 확신 있는 설교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 되기를 거부한 것으로 보아 매우 굳은 마음을 소유한 자입니다.

아그립바 2세는 AD 50년에 칼키스의 지역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으며, 후에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누이 버니게와의 근친상간을 범하여 유대인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가이사랴의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갔을 때 구류되어 있는 사도 바울을 보게 되었으며 바울의 변증을 듣게 되었지만 바울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이사에게 호소하였기 때문에 석방시킬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헤롯 왕가의 마지막 통치자로 AD 70년에 예루살렘이 정복되었을 때 로마로 가서 로마의 행정관이 되었다.
AD 100년경에 죽었습니다.

아그립바 왕은(2세) 예수가 메시아임을 설교를 통하여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적 편견 때문에 또는 주변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인정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처럼 남의 시선에 급급해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편견은 자신의 구원의 길까지 막는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 앞에 담대히 나아가지 못하고 있지나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받아 아그립바 왕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바울이 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소개합니다.
바울도 한 때는 열심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감옥에 넣기도 하였고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할 때 찬성표를 던지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메섹이란 도시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기 위하여 예루살렘 공회에서 발행한 공문서를 갖고 가던 중 갑자기 하늘로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음성을 듣고 "당신은 누구시냐?" 물었더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말을 듣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를 증거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회개에 합당한 일이란 예수를 믿지 않던 사울에게 예수를 믿고 예수를 증거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두 가지로 구분해야 합니다.

첫째는 회개(悔改)

회개란 "예수를 믿지 않던 사람이 예수를 영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아야 한다는 선포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광야에서 세례 요한이 외쳤던 내용입니다.
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눠주는 것도 이와 같은 내용을 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회심(回心)

회심이란 예수를 영접한 후에 예수 믿는 삶을 살지 못했던 사람이 마음과 생각을 고친 후에 올바른 믿음의 삶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서는 회개를 강조한 말씀입니다.
야고보서는 회심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회개와 회심이 비슷한 내용같지만 엄연히 구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미 예수를 믿고 있는 성도들에게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까요?
회개가 아니라 회심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회개는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회심이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받은 삶의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없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감사와 기쁨과 찬양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회개는 방향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라는 대표적인 헬라 단어헬라 단어가 "메타노이아" 라고 합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1797년에 영국에서 에드워드 모트(Edward Mote)라는 한 어린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매우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사춘기의 시절을 반항과 원망과 열등의식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캐비넷을 제조하는 제조소의 목공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열등의식 때문에 그의 성격은 반항적이었고 원망하며 거리를 방황하며 지냈습니다.
마음의 상태가 어지럽기 때문에 그는 많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 날 런던의 거리를 방황하다가 문득 종소리가 울리는 교회에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교회당 안에 들어갔더니 존 하이야트라는 목사님이 요한복음 3장을 주제로 거듭나야 한다는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이야트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거듭나야 할 필요를 강력하게 느꼈습니다.
그날 밤 에드워드 모트는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로 하여금 마음을 열어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고 그는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그 체험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이 거듭나자마자 내 눈동자는 내 생애 처음으로 생기를 되찾았고 내 마음에는 생수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목공소에서 내가 들고 있는 이 망치는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행복한 목공이 되어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게 되었습니다.

37살이 되었을 때 에드워드 모트는 커다란 목공소도 차릴만하게 되었습니다.
55살이 되었을 때 그는 자기를 거듭나게 하신 그 주님을 위해서 전 생애를 완전히 던지고 싶은 열망이 그 속에 솟구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벌었던 모든 재산을 모아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그리고 주의 부르심을 받은 목사로서 여생을 그리스도 앞에 바쳤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기를 거듭나게 해주었던 그 교회 곁을 지나면서 언덕을 오르며 자기가 거듭났을 때 주께서 그에게 주셨던 놀라운 인생의 소망을 생각하며 찬송가를 하나 작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드워드 모트가 지은 찬송은 "이 몸의 소망 무엔가"
(E. Mote 작사, W. B. Bradbury 작곡)

1.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후렴) 주 나의 반석 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2. 무섭게 바람부는 밤 물결 높이 설렐 때 우리 주 크신 은혜에 소망의 닻을 주리라
(후렴) 주 나의 반석 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3.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 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후렴) 주 나의 반석 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4.  바라던 천국 올라가 하나님 앞에 뵈올 때 구주의 의를 힘입어 어엿이 바로 서리라
(후렴) 주 나의 반석 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오늘 온라인으로 예배 하는 모든 성도들이 에드워드 모트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비록 우환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생각하지도 못한 환경을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예수를 믿고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여 날마다의 삶이 감사와 찬양과 기쁨으로 넘쳐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떻게 회심해야 할까요?

종교개혁자 칼빈은 “성도의 삶은 회개하는 삶이어야 한다.”
실낙원이란 작품을 남겼던 존 밀턴은 "회개는 영원의 궁전을 여는 황금 열쇠와 같다."

첫째, 허물을 자복하자(시편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허물을 자복하는 것은 잘못을 시인(是認)하는 것입니다.

둘째, 죄과를 알자(시편 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죄과를 아는 사람은 잘못을 고백(告白)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의 회개 시로 널리 알려진 말씀입니다.
다윗은 참회시에서 죄에 대한 세 가지 용어를 소개합니다.

1. 죄과(罪過)

죄과를 히브리어로 "페샤(pesha)" 라고 합니다.
페샤란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정치적 반역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의지적으로 거스리며 반역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2. 죄악(罪惡)

죄악이란 히브리어로 "아온(awon)" 이라고 합니다.
아온이란 왜곡된 성격에서 나오는 비정상적인 행동과 바른 길을 떠난 상태에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격과 행동의 왜곡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3. 죄(罪)

죄를 히브리어로 "하타(hatta)" 라고 합니다.
하타란 돌팔매질을 하는 사람이 표적을 맞추지 못하는 것(사사기 20:16).
여행자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잠언 19:26).
죄의 강렬성을 말합니다.

셋째, 죄를 자복하고 버리자(잠언 28: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사람은잘못을 바꾸는 사람입니다(方向 轉換).

이 시간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갖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주님 앞에 쏟아 놓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쏟아 놓은 것들 중에서 신앙생활에 꼭 필요하고 유익한 것은 다시 내 안에 넣고 만일 신앙생활에 필요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을 십자가 밑에 묻어버려야 합니다.

(예화) 군 복무 시절 신병들을 예하 부대로 배치하기 전에 주특기 별로 심사 후 앞으로 근무할 부대로 분류하는 일을 할 때 있었던 어느 신병이 갖고 있던 모나미 볼펜 사건이 주는 교훈.

(적용)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내 삶의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잘못된 것들을 찾아내어 이제는 모두 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길에서 좌우로 치우침이 없는 예수를 믿는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넘쳐나는 회복된 영의 사람으로 승리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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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성서에 헤롯 왕가의 왕들이 여러 명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크게 세 명의 헤롯 왕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헤롯 대왕

"헤롯 그레이트(Herod Great)" 라고 불렸던 "헤롯 대왕"은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태어난 장소를 가르쳐 주지 않고 떠나버리자, 베들레헴에 있는 아기들을 모두 살해하라고 명령했던 왕이었습니다.

둘째는 헤롯 안티파스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는 헤롯 대왕의 여러 아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고, 그를 위해 춤을 추었던 살로메의 딸의 요청대로 세례 요한의 목을 잘라서 주었던 왕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대제사장에게 잡히시던 날에 예수님은 빌라도에 의해 헤롯 안티파스에게 보내졌고, 그리고 다시 헤롯 안티파스는예수님을 다시 빌라도 총독에게 보냈던 왕입니다.

셋째는 헤롯 아그립바 1세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사도행전에 등장합니다.
그는 헤롯 대왕의 손자이며,  전임의 왕 헤롯 안티파스의 조카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리스토불루스"인데 헤롯 대왕은 자신의 아들인 아리스토불르수를 반역죄명으로 직접 죽임니다.

그 후 헤롯 대왕은 아리스토불르수의 아들이며, 자신의 친손자인 아그립바를 로마로 보내어 거기서 교육을 받게 합니다. 아그립바는 로마에서 로마 귀족들의 자제와 함께 자라면서 나중에 로마 황제가 되는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와 가까운 사이가 됩니다. 후에 자기 삼촌 헤롯 안티파스를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죄로 고발하여, 왕위를 박탈하고 유배지로 쫒아내고, 헤롯 아그립바 자신은 칼리굴라 황제에 의해 유대 지역의 왕이 됩니다.
왕이 된 헤롯 아그립바는 초대 교회를 박해하여서, 먼저 예루살렘에서 야고보 사도를 감옥에 넣고 칼로 쳐 죽였습니다. (사도행전 12:2)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이를 보고 자신을 지지하자, 사도 베드로도 죽이려고 그를 감옥에 가두었으나, 천사에 의해 베드로는 감옥에서 탈출합니다. 그러자 헤롯 아그립바는 화가 나서  베드로를 다시 찾으려고 애를 썻으나 찾지 못하자, 베드로가 갇혔던 감옥을 지켰던 군인들을 모두 처형해 버렸다고 나옵니다. (사도행전 12:6:-19)
사도행전 12:23절에서 헤롯 아그립바의 죽임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가 왕의 복장을 하고 연설을 하자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헤롯왕의 연설을 신의 소리라고 소리치자, 주님의 천사가 헤롯을 쳐서, 헤롯은 벌레에 먹혀 죽고 말았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2:23)


20장 유대인의 왕 헤롯 아그립바


1. 유대인의 왕 아그립바의 출생과 등장 배경 :

황제 글라우디오와 헤롯 아그립바는 같은 해에 출생하였습니다. 아그립바의 아버지 아리스토불루스가 주전 7년에 처형당하고 나서 그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로마로 보내졌는데, 그곳에서 어머니 버니게는 글라우디오의 어머니 안토니아와 막역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글라우디오와 헤롯 아그립바는 동갑내기 사이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서로 간에 잘 알고 지냈습니다.

가이오가 살해된 이후에 글라우디오가 권좌에 오른 후에, 그는 가장 먼저 아그립바의 왕국에 유대 땅을 더하여 주었고, 집정관의 지위로 승격시켜 주었습니다. 글라우디오가 이런 조치를 한 것은 그가 가이오 황제가 살해당했을 당시에, 글라우디오에게 큰 도움이 된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아그립바가 유대 땅을 로마에게 유익이 되도록 유대인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그립바는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적 관례들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전의 헤롯 대왕과는 달리 유대인들에게 매우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유대인들의 율법과 종교적 관례들을 매우 존중했습니다.

미쉬나에 나오는 한 사건은 이를 잘 보여주는 데, 신명기 31:10 이하에 규정되기를, 매 7년 끝 해에, 곧 정기 면제년의 가을 초막절에 중앙 성소에 모인 백성들에게 신명기 율법을 큰 소리로 낭독하여 그들로 듣게 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주후 41년 10월에 아그립바는 유대인의 왕으로서 그의 직무를 수행하였는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신 17:15)”를 서서 낭독하다가, 그의 혈통이 유대 혈통이 아닌 것 때문에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아그립바 왕의 이러한 유대인의 종교적 감정에 대한 그의 각별한 경의로 인해 그를 매우 좋아했고 칭찬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그는 그의 금사슬을 성전에 헌납하였고, 서원의 기간이 만료되어 감사제를 드려야 했던 나 실인들의 비용을 부담해주기도 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그의 행동들을 보고 그를 의롭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한편 그는 유대 바깥쪽의 지역에서는 유대인의 종교적 관례들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통치하였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통치 방식이 아그립바에 대한 유대인들의 인기를 위태롭게 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유대에서 3년을 통치하는 동안에 세 명의 대제사장 들을 사면시키고, 세 명을 임명시켰다.

2. 기독교를 핍박하는 아그립바 :

신약 성경에서 아그립바에 대한 언급은 그의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적의에 찬 정책들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는 사도행전 12:1 이하에서 열두 사도 들 중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를 처형하고, 베드로를 투옥시킵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도 사도들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았지만,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이방인 들과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고, 그의 동료 사도들이 베드로의 행동을 묵인한데에서, 이전까지만 해도 그들을 존경했던 많은 유대인들이 돌변하여 태도를 바꾸어 버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아그립바와 마르수스의 갈등 :

한편 주후 42년 경 아그립바의 북쪽 국경에서 멀지 않은 도라라는 베니게(Phoenician) 항구에서 어떤 젊은이들이 그 도시의 회당 안에 글라우디오의 형상을 세우고 만 사건이 발생하였다. 아그립바는 페트로니우스에게 항의하였고, 페트로니 우스는 이에 유대인들의 권리들을 보호하였던 칙령에 준하여 범법자들을 가혹하게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페트로니우스의 후임으로 부임한 마르수스와 아그립바의 관계는 그다지 원활 하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마르수스는 아그립바가 성전 지역의 북쪽 벳세다 주위를 막기 위해서 예루살렘의 북쪽까지 쌓기 시작한 ‘제3의 성벽’을, 예루살렘 백성들 간에 지나친 독립심을 조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에 아그립바에게 성벽 건축을 중지하도록 명령 하였습니다. 또 한 번은 아그립바가 공통의 관심사들을 논의하기 위하여 디베랴에 소집한 분봉 왕들을 본 마르수스가 디베랴에 도착하여 참석한 왕들을 집으로 돌아가도록 명령한 사건이었습니다.

4. 아그립바의 죽음 :

아그립바의 죽음은 누가와 요세푸스 저자에 의해서 극적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그는 글라우디오의 생일 축하연인 듯한 자리에서 백성들의 그를 칭송하는 신적 인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죽을병에 걸리고 말았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의 죽음의 원인은 충양돌기로 인하여 발생한 복막염으로 대게 진단되는데 그는 그 일이 있은 후 5일 후에 죽음을 맞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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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개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준비 운동


신약에서 제일 먼저 회개에 합당한 일을 외쳤던 선지자는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 율법 시대가 끝나고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지 않는 신앙적으로 암흑과 같은 시대를 무려 400년 동안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리고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많은 유대인들이 요한을 찾아왔습니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었고,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주로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요한은 나는 메시아가 아니라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내 뒤에 오시는 그 분이 메시아라며 세례 받기 위하여 몰려드는 유대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책망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유대인들을 향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친 것은 선택받은 민족을 자랑하지 말고 선택받는 민족의 삶을 회복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특별한 민족이 된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명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모태 신앙으로 태어난 것은 특별한 은혜를 받은 것이지만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특별한 사명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400년 동안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리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친 것은 신앙생활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깨우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성도들을 향한 세례 요한의 외침을 바르게 들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본문에서도 회개란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합당한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회개(悔改)라는 말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헬라어 “메타노이아”라는 단어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메타노이아”라는 단어는 “방향을 바꾸다”는 뜻입니다.

성경적인 회개를 요한일서 1장 9절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and will forgive us our sins and purify us from all unrighteousness.   

“죄(ἁμαρτίας)”를 자백하면(ὁμολογῶμεν)” 이라고 할 때 “죄(罪)”는 “하마르티아( ἁμαρτία)” 라고 합니다. “하마르티아(hamartia)”란 “죄(a sin)” 또는 “실패(failure)” 라고 합니다. “자백(自白)”이란 “호모로게오( ὁμολογέω)” 라고 합니다. “호모로게오(homologeó)”란 “같은 말을 하다(to speak the same)” 또는 “동의하다(to agree)”는 뜻입니다. 

자백이란 내가 생각하고 기억하고 있는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모든 것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아시는 죄를 고백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알고 있고 기억하는 죄를 회개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러한 회개는 인위적인 회개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외침과 성경에서 강조하는 회개는 인위적인 회개가 아니라 영적인 회개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영이신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있는 모든 죄를 내가 회개하려면 내 생각과 기억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성령의 임재와 충만”을 기도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주의 영이 내게 임할 때 내가 생각할 수도 없었던 죄를 모두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 성령이여 내게 오셔서 내 모든 죄를 기억나게 하시고 모든 죄를 자백하게 하옵소서!”

거룩한 주의 영의 인도를 받아 자백하는 회개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시편 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잠언 28: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시편 143:1,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로마서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자백(自白)하는 회개(悔改)의 특징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 잘못을 시인(是認)하는 것입니다.

시편 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둘째, 잘못을 고백(告白)하는 것

시편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4절에서 다윗은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다윗은 죄로 인하여 그의 몸에 무슨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육체의 이상으로 인하여 다윗은 허물을 자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육체의 질고가 죄악에 의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것이 100% 맞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질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어떤 질병은 죄를 깨우치려는 것도 있습니다.

다윗은 죄를 깨닫고 자복할 때 그의 육신에 고통을 해결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셋째, 잘못을 바꾸는 것(方向 轉換)

잠언 28: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죄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영적 번영이 불가능합니다.
자기의 죄를 변명하는 것은 죄를 깨닫게 하는 성령의 역사를 거절합니다(요한복음 16:8~11).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마침내 의에 대한 더 큰 욕망과 회개에 대한 충동이 없어질 정도로 마음이 굳어지는 위험을 겪게 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죄의 죄 됨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죄인은 그의 죄를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하신 힘으로 유혹에 성공적으로 저항해야 한다(롬 8:3, 4; 빌 2:13; 딤후 2:22; 요일 3:6).

로마서 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디모데후서 2:22,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요한일서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자비는 이 조건들이 충족 될 때에만 가능하다. 죄에 집착해 있는 사람을 용서하고 축복하는 것은, 그 길을 따르면 마침내 영원한 죽음으로 인도할 길을 따르고 있는 사람을 격려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롬 6:23; 약 1:13~15).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야고보서 1:13~15,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런 사람을 영원한 세계로 데리고 가면 죄 때문에 생긴 고통과 슬픔과 죽음을 영속시키게 될 것이다.

방향 전환(方向 轉換)

- 나아가는 방향을 다른 쪽으로 바꿈 

전환(轉換) 돌릴 전(轉), 바꿀 환(換)
- 다른 방향이나 다른 상태로 바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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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총장 김정준 박사의 회개 (1914. 11. 6∼1981. 2. 4)

어떤 소년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믿지 않는 부모님들이 심하게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믿는 일만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부모의 반대와 집안의 박해를 무릅쓰고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를 나와 목사가 되었습니다.
시골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목사가 된 것이 너무 감사하여 아주 열심히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심한 기침과 함께 목에서 많은 피가 넘어 왔습니다.
그는 병원엘 찾아 갔습니다.
병원에서는 큰 병원에 가 보라고 하였습니다.
큰 병원을 찾아가 진단해보니 결핵 3기였습니다.
그는 목회를 더 이상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살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마산에 있는 결핵 요양소를 찾아 갔습니다.

병원에서는 들어오는 환자들을 종합검사를 하고 병동에 목사님은 진단결과 가장 심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일명 「무덤 앞 병동」에 배치되었습니다.
그 병동에 들어 간 사람들 중에는 살아 퇴원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대부분 죽어 무덤으로 가기 때문에 붙혀진 이름입니다.
목사님은 3개월 정도 더 살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 침침한 병동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렇게 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예수 믿는 일만은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리고 정말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했는데 중병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떠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가지고 다니던 성경을 더 이상 읽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찬송도 부르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포기하려고 하였습니다.

후덥지근한 날이었습니다.
병실 안 공기가 탁하여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어 일어나 침대 모서리를 잡고 창가로 걸어 갔습니다.
그리고는 문을 열었습니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웠습니다.
얼마나 기운이 없었는지 창문을 열었을 뿐인데 이마에 땀이 맺혔습니다.
마침 그때 날아가던 나비 한 마리가 열린 창을 통하여 병실 안으로 날아 들어 왔습니다.
나비는 잘못된 곳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는지 나가기 위하여 창쪽으로 날아 갔습니다.
들어 올때는 열린 창을 통하여 병실안으로 들어 왔지만 나가려고 하면서는 유리에 부디쳐 퍼덕거리게 되었습니다.
나비는 유리창이라도 깨고 나갈 듯이 요란스럽게 퍼덕거렸습니다.
그러나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나비가 퍼덕거릴수록 나비의 날개가 조금씩 찢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비를 보고있던 목사님은 나비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병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고 나비는 날개가 조금씩 찢어 지면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 흡사하였습니다.
목사님은 나비를 살리기로 하였습니다.
자신은 희망이 없지만 나비만이라도 밝은 세상에서 살게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힘을 다하여 다시 일어나 나비를 잡아 창 밖으로 날려 보내기 위하여 가까이 갔습니다.

그런데 정작 나비는 어떤 위험이라도 닥친 듯이 아까보다 더 퍼덕거리면서 창 위로 날아 올랐습니다.
목사님이 나비를 잡아 구하려고 하면 할수록 나비는 힘을 써 날아 올랐습니다.
목사님은 나비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답답하여 목사님은 나비에게 해치기위해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살려주기 위함이라고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비는 알아듣지 못하고 더 힘을 써 날아 올랐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동안 나비는 더욱 날개가 찢어졌습니다.
결국 나비는 더 이상 날아 오를수 없게 지쳤습니다.

목사님은 그제야 나비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미련한 놈아 내가 너를 잡으려는 것은 해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밝은 세상으로 보내어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 일장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창밖에다 나비를 내 놓았습니다.
나비는 호흡을 조정하듯이 얼마를 쉬더니 힘을 얻었는지 다시 날아 올라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목사님은 나비가 부러웠습니다.
자유롭게 밝은 세계로 날아가 자유를 만끽하는 나비처럼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에 미치자 다시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아들들이 생각이 나면서 더욱 하나님께 대한 섭섭함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화가 났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목사님의 머리에 나비의 모습이 떠 올랐습니다.
도와주려는 자신의 손을 깨닫지 못하고 서서히 죽어가던 나비였습니다.
이 목사님은 자신도 지금 어리석은 나비처럼 하나님의 도움의 모르고 원망만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날개짓을 하면서 발버둥을 치듯 자신도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헛짓을 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목사님은 던졌던 성경과 찬송을 집어들고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은 그때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찬송을 부르면서 함께 있는 환자들을 위로하였습니다.
목사님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늘었습니다.
목사님은 일일이 찾아 갈 수가 없어 목사님의 병실로 찾아오게 하였습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모여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그곳을 지나가던 의사가 들어와 찬송을 부르지 말라고 하면서 꾸지람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결핵환자들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의사에게 찬송을 부르지 않으면 당신들이 살려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죽기 전에 기쁘게 살다가 죽으려는데 왜 막느냐고 따졌습니다.
의사는 아무말도 대답을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모이는 수가 늘어 병실에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공간을 찾게 되었습니다.
병원장의 허락을 받고 예배를 드릴 에배당을 짓게 되었습니다.
삼개월이면 죽는다던 목사님이 오히려 더 팔팔해 졌습니다.
종합진단을 해 보았습니다.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병이 점점 호전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삼년만에 요양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새로 주신 인생을 허비할 수 없어 열심히 공부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대학원에 들어가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독일로 유학을 가 박사가 되었습니다.
귀국하여 연세대학에서 교수로 있다가 대학원 원장이 되었습니다.
후에 한국신학대학 학장이 되어 봉사하신 김정준박사의 이야기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그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예수를 빋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분명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을 풍성함과 충만함이 넘치는 은혜 안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중국 은나라 탕왕의 회개

옛날 중국 은나라의 탕(湯, 기원전 1600년경)은 상나라(商, 은나라)의 건국자로, 이름은 리(履)이다.
왕이 천자가 되고 나서 무려 7년 동안이나 가뭄이 계속 되었습니다.
경험이 많은 한 노 대신이 “사람을 희생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비가 오지 않을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탕 왕은 목욕재계하고 흰 말이 끄는 장식이 없는 흰 수레를 타고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려고 들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아뢰었습니다.
“저의 정치가 절제가 없어 문란해졌기 때문에 가뭄이 온 것입니까?
백성이 직업을 잃고 곤궁에 빠져 있는데 제가 자상히 돌보지 못해 비가 오지 않는 것입니까?
뇌물이 성하여 바른 도를 해치고 있기 때문입니까?
참소하는 말로 인해 어진 사람이 배척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입니까?”
그러자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큰 비가 내려서 수 천리의 땅을 적시었다고 합니다.
지도자가 회개할 때 하늘도 움직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바로 전에 동료 미술가와 심한 말다툼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복수할 생각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가룟 유다의 얼굴에 그 동료의 모습을 그려 넣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의 얼굴에 그 동료의 얼굴을 넣으면, 그림을 감상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그가 경멸의 대상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작업을 진행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동료에 대한 미움이 그의 최고의 역작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죠.
다빈치는 즉시 그 동료를 용서하고 유다의 얼굴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해서 세계 최고의 걸작품 ‘최후의 만찬’을 완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