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저와 성경책 챙겨 이화장으로
이승만은 4‧19가 일어나기 전까지 3‧15 부정선거가 얼마나 심각하게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4월 19일 화요일, 예정대로 오전 9시에 경무대 소회의실에서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부정을 보고서 항거하지 못하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야. 내가 그만두면 돼” 하고 하야를 선언했다.
1960년 4월 23일, 이승만은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는 4·19 부상 학생들을 위문하러 갔다. 병실에 대통령이 들어서자 부상 학생들은 모두 대통령을 “할아버지” 하고 부르며 손을 잡고 얼싸안으며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병실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병원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침통한 음성으로 “내가 맞아야 할 총알을 우리 소중한 애들이 맞았어…. 이 바보 같은 늙은 것이 맞았어야 할 그 총알을 말이야” 하며 비통해 했다. 그날 밤 대통령은 죄 없는 애들의 고통을 덜어주시고 자기를 벌해달라고 기도했다.
4월 27일 오후 이승만은 마지막으로 경무대 뒷산과 정원을 산책했다. 손때가 묻은 사랑하던 나무, 바위, 정자, 약수터와 마음속으로 작별을 하는 듯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그리고 다음날인 1960년 4월 28일, 대통령에서 하야하고 경무대를 떠나 사저인 이화장으로 돌아갔다. 이 대통령이 하야 직전 외무장관으로 임명해 과도정부 수반이 된 허정과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가 들어와 이사를 만류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직을 갖지 않은 사람이 국가 건물에 살 수는 없어. 내 집이 있으니 그리로 가야해.”
하야 당일 이승만 대통령은 “나는 하야했으니 관1호 차(대통령 전용 차량)를 타선 안 돼. 그러니 이화장까지 걸어가겠다”고 말했다. 장면, 윤치영 등 여러 사람이 경무대로 와서 대통령 전용 차량을 타고 가시라고 말렸다. 이 박사는 “인파에 밀려 걸어서는 갈 수도 없으니 타고 가야한다”는 강권에 고집을 꺾고 관1호 차의 번호판을 가리고서야 이날 오후 차에 올랐다.
연도에는 이 박사의 하야를 지켜보거나 배웅하려는 사람으로 인산인해였다. 효자동에서 중앙청까지는 그래도 괜찮았으나 거기서부터는 차도까지 사람으로 막혀 차가 달릴 수 없었다. 천천히 이화장으로 향하던 차는 몇 차례 정차해야 했다. 연도에 모인 시민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고, 돈화문 앞에서는 “이 박사 만세”를 부르는 군중도 있었다. 침통한 얼굴에 입을 꽉 다문 할아버지의 눈에서는 눈물이 죽죽 흘렀다. 그러면서도 연신 손을 흔들어 시민들의 인사에 답례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도착하기 전부터 이화장 부근엔 인파가 넘치고 있었다. 대문 옆 담에는 “평안하시라 여생” “할아버지 만세!”라고 쓰여진 백지가 붙어있었다. 차에서 내린 이 대통령은 바로 문안으로 들어갔다. 곧 담 위에 올라와 시민들에게 손짓을 하며 “놀러들 오시오”라고 인사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에서 하야하던 날의 정황을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다음과 같이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하야를 결심하자 나는 산책할 때 신던 헌 신발을 신겨드리고, 대통령의 수저와 아침마다 식탁에서 읽던 성경을 챙겨서 경무대를
나왔다. 걸어서 가겠다는 대통령이었지만 여러 사람의 만류로 차를 타게 되었다. 연도의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손을 흔들어주었고,
이화장 앞에는 동네사람들과 시민들이 모여 대통령을 박수와 만세로 맞아주었다….’
이화장의 이승만 박사
쌀 살 돈 없어 온실 화초 팔아 쌀 구입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던 날 경무대 근무 직원들은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이 대통령 내외가 이화장으로 돌아왔을 때 난방용 기름이 없어 총무처에 기름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쌀을 살 돈이 없어 온실의 화초를 팔아 쌀을 구입했다. 경무대 내실 근무자였던 방재옥 씨는 대통령께서 돈이 없어서 우리들에게 월급을 못 주실 거라는 걸 알았지만 두 분을 너무 존경하고 좋아했기 때문에 모두 이화장까지 따라가 근무를 했다.
이화장 본채는 그 동안 손을 보지 않아 엉망이었다. 마루에는 먼지가 쌓여 실내화를 신지 않고는 움직일 수도 없었다. 전력은 약하고 스팀도 들어오지 않을 뿐더러 수세식 변소마저 쓸 수 없어 불편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벤치와 곰팡이 핀 등의자 외에는 의자조차 쓸 만한 것이 없어 실내에서는 의자생활을 하지 못했다. 손을 보지 않아 정원의 나무가 제멋대로 자라 이승만은 하야하는 날부터 전지와 정원 가꾸기로 소일했다.
이화장으로 돌아간 이승만 박사는 4·19의 충격으로 건강이 눈에 보이게 악화되었다. 하야를 전후하여 자주 설사를 했고, 이화장에 와서도 평소처럼 아침저녁 산책과 정원손질을 계속했지만 혼자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야 때 아무 준비 없이 나왔기 때문에 생활비도 넉넉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후 여러 외국 원수로부터 위로 서한을 받았다. 특히 장제스 자유중국 총통은 주한 대사를 이화장에 보내 위로 친서를 전달해왔다.
대통령 내외는 5월 29일 상오 8시 45분 김포공항을 떠났다. 측근 비서들에게조차 떠나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그 전날까지 장화를 신고 삽으로 도랑을 친 것이나 사랑하던 애견 해피까지 두고 간 것을 보면 돌아올 생각으로 간 것이 분명했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하와이로 떠난 후 경찰서에서 나와 가재도구에 딱지를 붙이고 물건을 실어 갔다. 모두들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구르며 울었다. 짐을 실어 내가고 폐가처럼 되어버린 이화장에서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다 뿔뿔이 흩어졌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서거한 후 거처할 곳이 없어 친정인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갔다가 이화장으로 돌아왔다. 이화장에 에어컨이 없다는 말을 듣고 1976년 금성사에서 에어컨을 기증했는데 프란체스카 여사는 “전력난이 심한데 에어컨을 사용할 수 없다”면서 돌려보냈다. 그 대신 금성사가 조그만 선풍기를 보냈는데, 이마저도 여름 한 철에 한두 차례만 사용해 지금도 이화장에 새 것처럼 보관되어 있다. 이화장에서 쓰던 냉장고는 1949년 타이완의 장제스 총통이 방한했을 때 마련한 것으로, 35년 동안 사용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육영수 여사의 장례식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본 후 가족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꽃은 사용하지 마라. 그게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비싼가. 쓸데없는 곳에 돈 쓰는 것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게 훨씬 낫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왜 그렇게 평생을 철저한 구두쇠 생활로 일관했을까. 프란체스카 여사는 며느리 조혜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가 북한 동포를 위해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무리 강대국들이라도 우리를 함부로 업신여기지 못할 거야.”
‘한국의 MIT’ 인하공대를 설립하다.
1960년 5월 29일 새벽,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이화장 근무 직원들에게 “돌아올 때까지 집을 잘 보라”는 말을 남기고 이화장을 떠나 호놀룰루로 갔다. 당시 미국 신문에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하와이에 올 때 17만 달러를 가져왔다는 오보가 실리는 바람에 호놀룰루 공항 세관에서 철저한 세관 검색을 받았다. 세관 직원이 프란체스카 여사의 가방을 열자 달러는 고사하고 헌 옷가지 몇 점이 나왔다. 이승만 내외는 교포인 윌버트 최가 마련한 별장에 잠시 머물다 마카키 스트리트 2033번지의 침실 하나에 부엌만 있는 작은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와이 릴리하 거리에서 자동차로 20여 분 정도 떨어진 칼리히 엘리멘터리 스쿨(초등학교)은 1913년 이승만 대통령이 학장을 맡았던 한인기독학원이 위치했던 곳이다. 과거의 한인기독학원 건물은 헐리고 그 자리에 깔끔한 흰색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승만 박사는 6·25 전쟁이 종전으로 치닫던 1952년 12월 “전쟁이 끝나고 전후복구를 위해서는 기술자 양성이 필요하다”면서 하와이에 연락하여 한인기독학원 건물과 부지를 매각하여 그 돈을 한국으로 보내라고 요청했다. 하와이 교민들은 이 건물 매각대금 및 성금을 모금하여 본국에 보냈는데, 이 자금이 인하공대(오늘날의 인하대) 설립의 종자돈으로 사용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 체류 시절 설립한 동지회의 사무실 건물인 ‘동지회관’도 매각하여 절반은 인하공대 설립자금으로, 나머지는 동지회 자녀들의 장학금으로 활용됐다. 호놀룰루 시 킹 스트리트에 위치한 동지회관 건물은 2층으로 된 일자형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남의 손에 넘어가 싸구려 제품들을 파는 상가로 변했다. 동지회는 이승만이 1921년 설립한 단체로서, 이 박사는 이 단체를 중심으로 독립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비롯한 애국단체 지원 사업을 전개했다.
1954년 개교한 인하공대란 교명은 인천과 하와이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인하공대를 설립하면서 이 학교가 한국의 MIT 같은 훌륭한 학교로 성장하기를 꿈꾸었다.
* 인하대 - 인천 + 하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