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돌보게 될 환자는 닥터 승만 리
하와이로 이민을 간 박만상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4·19로 하야한 다음 하와이 생활을 할 때 요양병원에서 이승만을 돌봤다. 서울대 사범대 생물학과 출신으로 1960년 하와이대학으로 유학을 왔고, 미국에서 면역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난 것은 하와이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1962년 여름이었다.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오아후 섬의 마우나라니 요양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아르바이트 신청을 했는데, 병원 담당자가 “당신이 돌보게 될 환자는 닥터 승만 리”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군사혁명 정부의 주선으로 고국에 돌아갈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하루는 서울로부터 귀국해도 좋다는 연락이 와서 비행기를 타려고 공항까지 나갔는데, 출발 직전 귀국이 취소됐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 이 대통령은 가벼운 중풍 증세가 와서 하반신을 잘 못썼고, 언어중추에 이상이 생겨 영어를 거의 못하고 한국어로만 대화했다.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도 한국어 의사소통이 안 돼 병원에서는 한국어 통역을 급히 찾았는데, 이 와중에 박만상이 그 병원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처음 병실에 들어가면서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하니까 ‘나 잘 있네. 자네 어디서 왔는가’ 하고 물으시더군요. 서울서 왔다고 하니까 ‘명륜동이 종로구에 있지? 요즘 한국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궁금하군. 젊은 사람들(군사정권 지도자들을 지칭)이 잘 하겠지?’ 하고 혼잣말을 하시더군요. 두 달여 그 분과 대화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이 박사 부부의 검소함에 감동했습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옷이 몇 벌 없어 거의 같은 옷을 계속 입었고, 방에는 이 박사의 헌 구두 두 켤레와 다 떨어진 옷 서너 벌이 전부였어요.”
박만상 씨는 남자 조수로서 이 박사를 돌보며 병원 측과의 의사소통을 맡았다. 목욕을 시키면서 보니 이 박사의 근육에 탄력이 거의 없었고, 생각했던 것보다 눈이 훨씬 작았다. 침대 난간을 붙잡은 오른팔이 심히 떨리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다고 한다. 몸을 씻을 때 보면 오른쪽 볼기에 네모난 도장 형태의 흉터가 두 개 있었는데, 영화에서 죄인이나 노예들에게 찍는 화인(火印) 같았다고 한다.
이승만은 고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3년 여 동안 하와이에서 힘든 투병생활을 계속하다가 90세가 되던 1965년 7월 19일 망명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목수, 미장이 대통령
1945년 10월 16일, 33년 만에 귀국한 이승만은 미군정 사령관 하지 장군이 마련해준 조선호텔에 잠시 머물다가 10월 24일 서울 동소문동 4가 103번지, 조선타이어 사장이었던 장진영의 집을 빌려 2년 여 생활했는데, 이것이 돈암장이다.
이승만 박사와 미군정이 신탁통치 문제로 불편한 관계가 되자 입장이 난처해진 집주인 장진영이 집을 비워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이승만의 거처가 마땅치 않자 하지 장군이 마포 언덕 위에 위치한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여름 별장을 주선해 주었는데, 이것이 마포장이다.
마포장은 집이 협소하고 교통이 불편한데다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어 수돗물도 잘 나오지 않고 강바람이 세찼다. 이승만은 문짝이 잘 맞지 않고 공사해 놓은 것이 날림인 것을 보고 혀를 차며 “내가 한 것만도 못 하구만. 저 밖에 있는 나무 궤짝 좀 끌르게” 하고 윤석오 비서에게 지시했다.
그 궤짝에는 이승만이 미국에서 쓰던 대패, 톱, 끌, 망치, 칼 등 연장이 가득했다. 작업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이승만은 대패를 망치로 톡톡 쳐 맞췄다. 맞지 않는 문짝을 떼 자로 대어 줄을 긋고 대패질을 한 뒤 문 손잡이를 분해하여 고쳤다. 솜씨나 태도가 완전히 전문가였다.
윤석오 비서가 “선생님, 미국서 목수노릇 하셨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내가 하와이에서 교포학교 지을 때 목수 일도 하고 돌층계도 쌓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매일 부지런히 정원수를 다듬고 고목나무는 잘라 도끼질을 했다. 1년 이상 손을 안대 무성한 정원의 풀은 아무도 손대지 말고 그대로 두도록 엄명을 내렸다.
이 무성한 풀은 점심 식사 후 약 반시간씩 손으로 뽑아 한 달 만에 다 없애 버렸다. 이승만은 풀을 뽑으면서 외부인사 접견도 하고 비서들에게 성명을 구술하기도 했다. 풀이 억셀 때는 두 손에 힘을 주어 잡아 뽑으며 “이놈, 나한테 졌지, 졌어” 하는 혼잣말을 자주했다.
윤치영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과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활동하던 시절, 두 사람은 일당 1달러 50센트를 받고 농장에서 교민들과 함께 노동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이승만은 농사뿐만 아니라 어디서 익혔는지는 몰라도 목수 일, 미장이 일까지 못하는 일이 없었고, 솜씨도 대단해 모두가 감탄했다.
마포장은 여름 별장으로 쓰던
곳이라 바람이 심하고 추운 겨울을 지내기 쉽지 않았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이면 방에서도 외투를 입어야할 정도였다. 이승만이 집
때문에 고생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실업인 30여 명이 모금을 하여 종로구 이화동 1번지 낙산 아래 저택 이화장을 구입했다.
이승만은 이화장에서 대한민국 초대 내각을 조각했고, 정부 출범 직후인 1948년 8월 18일 하지 장군의 관저로 사용되던
경무대(景武臺)로 거처를 옮겼다.
구멍 난 모자, 구겨진 국산 양복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과 더불어 경무대로 이사를 갔는데, 경무대에는 변변한 가구조차 없었다. 이 대통령은 어려운 나라 살림을 감안하여 경무대 살림을 돌보는 직원을 두 명으로 줄였고 1층의 접견실과 사무실 2개, 2층의 침실 하나와 작은 식당, 거실을 제외하고는 폐쇄했다. 경무대의 농구 코트만한 연회장이 사용된 것은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해 방한한 덜레스 미 국무장관을 위한 만찬 때뿐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손수 기운 양말을 즐겨 신었으며, 하오에나 저녁에는 틈만 나면 붓글씨 연습을 했는데, 꼭 새 종이가 아닌 신문지나 쓰고 난 봉투를 뒤집어 사용했다.
경무대 내실 근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대통령 내외는 나물 두 가지에 국 한 가지로 간소하게 식사를 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경무대에 있을 때 미장원에 가지 않았으며 옷도 시장에서 천을 사다가 비서와 함께 블라우스를 손수 만들어서 입었다. 옷이나 속내의, 양말 등은 닳아서 헤지면 꿰매서 입곤 했다. 어느 날 이 대통령이 프란체스카 여사가 겹겹이 꿰맨 내복을 들고 방재옥 씨에게 “재옥아, 이 꿰맨 걸 나더러 또 입으란다”면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경무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몇 십 년 묵은 헌 중절모자와 구멍이 크게 뚫린 모자가 걸려 있었다. 이승만의 비서였던 박용만의 회고다.
‘우리네 서민 가정에서도 이런 따위의 고물 모자라면 벌써 엿장수한테 넘겼거나 쓰레기통에 버렸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고물 모자가 몇 개씩이나 귀빈들이 출입하는 국가원수의 관저에 걸려 있다는 것은 퍽 조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이 고물 모자를 치워버리거나 없앨 수는 없었다. 대통령은 모자 하나를 몇 년이고 쓰다가 보기 흉해지면 버리지 않고 모아 놓았다가 등산할 때, 낚시할 때, 노동이나 운동을 할 때 이를 애용했다.’
건국 직후엔 우리나라 방직기술이 미숙해 국산 양복지의 품질이 형편없었다. 그래서 양복 입는 사람들은 마카오에서 수입한 영국제 복지로 양복을 해 입고 다녔다. 박용만이 소개하는 이승만의 양복에 대한 일화다.
‘어느 날 대통령은 새로 만든 양복을 입고 중앙청으로 나가려고 차에 올랐다. 대통령을 모시려고 나도 급히 차에 탔다. 중앙청에서 내려 대통령 뒤를 바짝 따라가다 보니, 대통령의 새 양복은 마구 구겨져서 주름 투성이였고, 양복천을 훑어보았더니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도 입지 않는 국산 양복을 대통령은 입고 계시다…. 대통령은 조잡하고 구겨진 국산 양복을 입고 있는데, 대통령의 가방을 들고 그 뒤를 따르는 나는 기름이 흐르는 고급 마카오 양복을 걸치고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