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계 2:7, 시 119:169) / 주일 설교 원고(2019-12-22) 이승혁목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라는 제목을 한자로 표현하면 “자각지성경(自覺之聖經)” 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라는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소개된 일곱 교회들을 향하여 공통적으로 계시된 말씀입니다. 칭찬을 받든지 책망을 받든지 모든 교회가 반드시 들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과연 성령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2020년 표어는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표어 성구는 시편 119편 169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May my cry come before you, O LORD; give me understanding according to your word.)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는 것이 무엇일까?

사울이란 청년은 유대교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교만이 유일한 신앙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반드시 무찔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은 확신 때문에 예수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기를 만일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다메섹 가까이 이르렀을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비추므로 땅에 엎드렸는데 하늘로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사울은 “주여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볼 수 없어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께서 아나니아 라는 제자를 환상 중에 불러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사울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입문하게 된 동기는 주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나를 깨닫기 위해서는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곧 주의 말씀에 주의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로운 왕 솔로몬은 말씀에 주의하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잠언 16:20).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말씀에 주의하는 자”에 아라비아 숫자 가 적혀 있고 난외에 ②를 찾으면 “일을 처리하는 자”라고 번역합니다.
따라서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는 것은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윗은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는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었을 때 어린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골리앗 앞으로 나갔습니다. 이스라엘 진영에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당당하게 외치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은 다윗뿐이었습니다. 다윗은 말씀에 주의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군사들이 두려워하는 것도 믿음으로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소년 다윗이 일고 있었던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당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모르고 있었을까요? 물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용할 줄 몰랐습니다. 왜 사용할 줄 몰랐을까요? 주의 말씀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020년 신앙생활을 위한 표어는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표어 성구는 시편 119:169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나를 깨닫기 위해서는 깨닫게 하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나를 깨닫는 네 단계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동물(動物)과 비교하라
둘째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라
셋째는 위인(偉人)과 비교하라
넷째는 예수와 비교하라(예수 앞에 서라)


금수(禽獸)보다 못한 놈!”
또는 “개만도 못한 놈”이란 말이 있지만 사람을 동물과 비교할 때 동물보다 더 우월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는 다소 못할 수도 있다고 할 것입니다.

위인과 비교할 때 대다수의 사람들이 나는 도저히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와 비교할 때 모든 사람은 “죄인(罪人)”이 될 것입니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는다!”는 말씀은 “내가 죄인(罪人)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영원한 죄인으로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달은 사람을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義人)”이라고 합니다.
내가 의롭기 때문에 의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해주셨기 때문에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은혜(恩惠)”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위인들과 비교해서 월등한 삶을 살았을지라도 어느 누구도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깨닫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깨닫는 것을 다른 말로 “아는 것” 즉 자각(自覺)이라고 합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은혜의 원천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덮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어떻게 죄를 덮어주셨을까요?

첫째, 도말(塗抹)하는 것(시편 51: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도말(塗抹)이란 한자는 “진흙 도(塗)” “지울 말(抹)”이란 훈으로 진흙을 발라 모두 지워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들이 지은 모든 죄를 사랑의 진흙으로 발라 지워버립니다.
사랑의 진흙을 십자가 보혈이라고 믿습니다.

시편 51: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골로새서 2: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의문에 쓴 증서를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율법의 채무 증서” 라고 합니다.

둘째, 기억(記憶)하지 않는 것(이사야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기억(記憶)이란 한자는 "적을 기(記)" "생각할 억(憶)"이란 훈으로 적어 놓은 것을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원수 사탄 마귀는 이미 모든 죄를 도말하여 덮어버린 것들을 틈만 나면 덮은 것을 벗겨버립니다.
그리고 죄악의 흔적들을 들추어 자꾸 괴롭히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사랑의 진흙 즉 십자가 보혈로 덮어버린 것을 다시 들추려는 원수 사탄 마귀를 예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

시편 25:7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히브리서 10:17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셋째, 용서(容恕)하는 것(시편 39:13)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용서(容恕)라는 한자는 "얼굴 용(容)" "용서할 서(恕)"라는 훈으로 얼굴을 보고 용서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났을 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대신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보기 싫다고 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시고 한번 만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십니다.
주님의 간청하심으로 나는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얼굴을 보고 용서하시는 것은 모든 죄를 등 뒤로 던져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38: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넷째, 씻어(洗濯)주는 것(요한계시록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씻는 것을 한자로 “세탁(洗濯)” 이라고 합니다.
세탁(洗濯)이란 한자의 훈은 “씻을 세(洗)” “씻을 탁(濯)”으로 씻어서 깨끗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 양의 피로 옷을 씻는다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진 내 모든 삶을 깨끗이 씻어 희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나를 깨닫는다는 것은 내가 죄인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내 방법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을 때 하나님은 사랑으로 죄를 해결하시려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보내셨고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모든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해결하신 방법으로는 “도말” “기억하지 않는 것” “용서”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도말(塗抹)과 망각(妄覺)과 용서(容恕)와 세탁(洗濯)이란 방법으로(도 망 용 세탁) 해결된 죄악의 문제를 원수 사탄 마귀가 들추거나 끄집어 낼 때 반드시 주님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