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없는 세대(마가복음 9:19) 주일 설교 원고(2020-4-26)


믿음이 없는 세대(마가복음 9:19)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O unbelieving generation, Jesus replied, how long shall I stay with you? How long shall I put up with you? Bring the boy to me.)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한자는 "믿을 신(信)"이라고 합니다.
"믿을 신(信)"자를 파자(破字)하면 "사람 인(人)"과 "말씀 언(言)"이 연합하여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사람이 말씀과 연합한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씀은 하나님이며 또한 예수님"입니다(요한복음 1:1, 1:14).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은 곧 하나님입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은 곧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 또는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하시며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그"가 누구입니까?
마태복음에서는 간질로 고생하는 아들이라고 합니다(마태 17:15)
마가복음에서는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이라고 합니다(마가 9:17)
누가복음에서는 귀신들려 경련을 일으키고 부르짖고 거품을 물고 심하게 고통을 받는 아들이라고 합니다(누가 17:39)

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그 아들은 귀신이 들려 간질과 말을 하지 못하는 불과 물에 자주 넘어지는 아주 심각한 상태로 고통을 받는 아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9장 1-2절을 살펴보면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으며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1.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그런데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믿음이 없는 세대”(마가 9:19), 또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마태 17:17, 누가 9:41) 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패역한 세대”는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라고 합니다(빌립보서 2:15).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말씀하셨던 배경을 살펴보면 변화산 사건 후에 일어난 것입니다.
변화산 사건은 이미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을 때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같이 희어졌는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와 주를 위하여 초막 세 개를 짓고 여기에 머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을 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에 제자들은 두려워 엎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말고 일어나라 하실 때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니 예수만 보였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경험을 하고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누가복음 9:22,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마가복음 9:9,
저희가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마가복음 9:31,
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32절,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것은 죽임을 당하고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말씀은 두 가지 내용이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의 죽으심
둘째는 부활

십자가의 죽으심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자가의 죽음이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말합니다.

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십자가의 피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요한일서 1:7b,
그 아들 예수의 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의 피는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죄에서 깨끗하게 되었으므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부활이란 영생의 삶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믿음의 기준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영원한 삶을 누릴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이란 예수의 피와 예수의 생명을 믿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서 "베드로"를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가 믿음이 있었을까요? 아니면 믿음이 없었을까요?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는 믿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랐던 자세를 살펴봅시다.

갈릴리 해변을 거닐다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을 때(마태 4:19)
베드로는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태 4:20)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마태 16:16)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변화된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과정들을 살펴볼 때 베드로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세대” 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생각하셨던 믿음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산에서 내려왔을 때 마침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끓어 엎드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예수께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고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이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께서는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겨자씨만한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란 겨자씨만한 믿음조차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무엇입니까?(마태복음 17: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겨자씨 만한 믿음이란 기도하여 귀신을 내쫓고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우라 하면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사건을 일으키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귀신을 내쫓는 능력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여러분에게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습니까?

변화산에서 내려 왔을 때 어느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아들은 귀신에 붙잡혀 자주 불과 물에 넘어질 뿐만 아니라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벙어리 귀신, 마가 9:17).
이런 아들을 데리고 먼저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가서 아들을 고쳐달라고 하였으나 제자들이 고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신 후에 아이들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며 귀신을 꾸짖어 내쫓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우리는 어찌하여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하였을 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기도하는 것만이 믿음의 본질인 것처럼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믿음의 기준은 기도일까요?

마태복음에서는 “믿음이 적은 연고”라고 하셨습니다(마태 17:20).
그러면 기도가 적으면 믿음이 적은 것일까요?

물론 예수님께서 기도와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어느 정도는 맞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을 하지 말라고 부탁한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메시아 고백이 있은 후에 수난에 대한 첫 번째수난에 대한 예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마태 16:21).

변화산 사건 후에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태 17:9).

얼마 후 갈릴리에 모였을 때에 제자들에게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17:22∼23).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기준이란 기도를 많이 하여 귀신을 내쫓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을 믿고 따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요한이 예수님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않으므로 금하였다”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면 나를 비방할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마가 9:38∼39).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누가복음 10:20)

귀신을 내쫓는 것이 믿음의 기준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을 온전하게 믿고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고백을 할지라도, 변화산 사건의 놀랍고 신비한 체험을 하였을지라도, 귀신을 내쫓는 능력을 행할지라도 십자가의 죽음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야기) 믿음은 복원력(dynamic stability)과 같습니다.

배가 큰 파도에 넘어질 듯하다가 다시 세워져 앞을 향해 가는 것을 ‘복원력’이라 합니다.
넘어질 듯하다 다시 일어나고, 넘어질 듯하다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복원력이라고 합니다.
인생에선 수많은 복원력이 필요합니다.
넘어지지 않으면 좋겠지만 삶이란 우리의 바람대로 순탄하게만 흐르지 않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선 우리를 가장 낮은 곳에 머물게 하십니다.
우리로서는 처참한 상태 같으나 시간이 지나면 그 순간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엎어져 보지 않았던 사람은 땅 바닥에 쓰인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없습니다.
자빠져 벌렁 누워보지 못한 사람은 하늘에 쓰인 글씨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가슴과 지경을 넓혀주시기 위해 위기, 아픔, 고통의 순간을 부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넘어질듯 해도 곧 균형을 잡고 다시 일어납니다.
마지막 바닥을 치려는 순간 하나님의 손길이 그를 붙잡아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러기에 다시 일어날 때를 생각해 나를 보호해야 합니다.
훗날을 생각해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넘어진 그 자리에서 일어나 진정한 승리를 일구어 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믿음으로 이루는 복원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믿음의 세 가지 요소

첫째, 믿어야 할 사실(Facts)
둘째, 순종해야 할 명령(Commands)
셋째, 누려야 할 약속(Promise)

(이야기) 종의 믿음과 아들의 믿음

종의 믿음이란 억지로 하는 것
아들의 믿음이란 은혜와 축복을 믿고 기쁨을 누리는 것

(이야기) 공산당에 대한 이론과 실천을 위한 신앙

공산당을 이긴 기도 대만의 주연화 목사는 장개석 총통의 장례식을 집행한 자유중국의 대표적인 목사이었다.
그는 중국 본토가 공산당에게 점령당하기 전, 상해에서 신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공산당에게 점령당하기 전 평화로울 때에는 교수와 신학생들이신학에 관한 이론을 가르치고 공부했었지만,
중국의 본토가 공산당의 발에 짓밟힐 위기에 처하자 교수와 신학생들은 학업을 전폐하고 강의실에 모여 하루 종일 "하나님이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고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목사님은 "공산당이 눈앞에 다가오게 되자 신학적 이론은 뒤에 두고 하늘과 땅과 세계를 지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이 되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교수와 신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일심으로 부르짖어 기도를  시작하자, 그곳에 성령의 불이 임하여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령충만함을받고 방언으로 말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충만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많은 사람들이 성령충만함을 받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체험을 했기 때문에, 공산당이 중국 본토를 점령하고 기독교인에 대해 말할수 없는 핍박을 가해도, 그 시련을 능히 이기고 복음의 불씨를  간직했다가 지하교회의 구역예배를 통해 복음의  불길을 번지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학문적인 예수, 철학적인 예수, 의식적인  예수만  알아다면공산당에게 점령 당한 중국 대륙에서 기독교는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충만함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살아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만난 체험을 했기 때문에, 복음의 불씨를 간직하게 될  수있었던 것이다.

(이야기) 열 두 사도의 최후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주후 68년 네로 박해 때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서 죽었고,
안드레는 헬라국 밧으라에서 X형으로된 형틀에서 못 박혀 죽었다.
야고보는 주후 44년 예루살렘에서 헤롯에 의해 목이 잘려 죽었으며,
요한은 끊는 물에 넣어졌다가 살아나 밧모섬에 유배 당했다가 주후 100년경 에베소에서 죽었고,
빌립은 부루기아에서 기둥에 매인 채 맞아 죽었다.
그리고 바돌로매는 산채로 가죽이 벗겨져 죽었으며,
도마는 인도에서 쇠몽둥이와 창에 찔려 죽었고,
마태는 애급에서 칼에,
다대오는 버시아에서 활에 맞아 죽었으며,
작은 야고보는 주후 62년 유대인들에 의해 성전에서 밀쳐진 뒤 돌과 망치에 맞아 죽었고,
시몬은 예루살렘에서 못박혀 죽었다.

이들은 단지 그리스도만을 전하다 비참하게 죽어갔지만 그들이 전한 사랑의 복음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죽어가는 많은 영혼들을 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