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기준을 바로 세우는 것(하박국 2:4) 수요성서학당 #. 19(10-21-20)

수요성서학당 # 19(10-21-20)

믿음이란 기준을 바로 세우는 것(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NIV) See, he is puffed up; his desires are not upright--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KJV) Behold, his soul which is lifted up is not upright in him: but the just shall live by his faith.
(NASB) Behold, as for the proud one, His soul is not right within him;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소개하기 전에 최근 제가 경험했던 한 사례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어느 의사는 방문하는 환자들을 대할 때마다 할렐루야! 아멘! 하나님의 은혜! 감사합니다!
이런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의사가 이런 기독교 용어를 자주 사용하면 마치 믿음이 좋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가족 중 누가 자기 집 근처에 약국을 시작했는데 진찰을 받은 환자들의 약 처방전을 동의도 없이 그 약국으로 보냅니다.
원래 약국은 환자가 지정하는 약국으로 처방전을 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환자들이 D약국에서 60% 정도 라고 합니다.
결국은 가족이 운영하는 약국을 위하여 이미 지정된 약국을 마음대로 변경한 것입니다.
마치 믿음이 좋은 것처럼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일을 처리하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가?
과연 이런 것이 믿음일까?

결론부터 소개합니다.

" 믿음이란 기준을 바르게 정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성경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1st. 하박국 2:4b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믿음"이란 단어에 "" 라는 정관사가 있습니다.
"그" 라는 정관사가 사용될 때는 "믿음"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일부분을 말합니다.
제한된 믿음을 말합니다.

킹제임스 한글 성경에서는 "그 믿음"을 "자기 믿음"이라고 번역합니다.
믿음의 기준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의 기준이 사람이 될 때부터 이미 복음에서 어긋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을 히브리어로 "에무나" 라고 합니다.
에무나의 뜻은 "진실" "성실"입니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진실하게 살리라" 또는 "성실하게 살리라"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방법도 진실해야 합니다.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는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닙니다.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For in the gospel a righteousness from God is revealed, a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from first to last, just as it is written: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믿음의 기준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세워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따라야 합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의 의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익과 유익을 따라 살아갈 때는 이미 복음의 의를 벗어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활동 무대를 남 유다북 이스라엘로 구분합니다.
남 유다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들은 "오바댜, 요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라고 하겠습니다.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들은 "요나, 아모스, 호세아" 라고 하겠습니다.

하박국서의 특징지혜문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특이한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시기오놋(3:1)" "영장(3:19)"과 같은 전문 음악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레위 자손으로 측정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의 정의"라고 하겠습니다.
왜 이 세상에서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받고 살아야 하는가?

하박국 선지자의 대답은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무관심하신 분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좁은 생각과 의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지 않는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는 나타날 것이고 실현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현 대통령 트럼프를 지지해야 하느냐? 아니면 바이든을 지지해야 하느냐?
이런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누구를 선택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조금 더 많은 사람을 선택해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현 대통령 문재인과 여당을 지지해야 하느냐? 아니면 우파 정당을 지지해야 하느냐? 이런 의견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사정은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습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언론에서 국민들에게 장확하게 알려야 합니다. 사법부에서는 잘못된 것을 법대로 판단하여 어느 쪽으로도 치우칠 수 없도록 법질서를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도 입법부와 사법부와 행정부 심지어 치안을 맡은 경찰과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군부까지도 때로는 판단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만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또한 반대로 이제는 기도할 때가 아니라 거리로 나가서 행동해야 할 때라고 주장합니다.

미국이나 한국 물론 다른 나라들도 비슷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한 믿음의 정의가 요구되는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믿음은 가치 기준을 바르게 세우는 것" 이라고 서두에 소개했습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이제까지 인류 역사에서 발생했던 문명들이 외부의 침략에 의해서 무너지고 망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부정과 부패에 때문에 무너지고 망했다고 강조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미국의 문명고 한국의 문명도 무너질 때는 외부의 침략적인 전쟁보다는 내부의 부정과 부패에 의해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의 경우 기독교 인구 비율이 전체 인구의 20-25%라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 정도라고 한다면 부정과 부패가 세상을 주도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 북한과 남한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체재를 갖고 설명하려고 합니다.
물론 체재는 북한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김일성주의라고 하겠습니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한 마디로 "공감(共感)"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표기한다면 Sympathy, Empathy 라고 하겠습니다.
공감대(共感帶)를 Bond of Sympathy
공감이란 단어의 뜻은
1. 다른 사람의 의견(意見)이나 주장(主張)에 대하여 자기(自己)도 똑같이 느끼는 것.
2.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자기도 같은 감정을 같는 것.

예를 들면 아직도 남한에서는 어려운 이웃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어느 동네에 자기 집을 온갖 쓰레기로 채워놓고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모두가 외면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기관의 사회복지사와 정신과 의사를 비롯하여 동네 부녀회와 청소 업체에서 발벗고 나서 그 사람은 병원으로 안내하여 검사를 받게 하고 입원하여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면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모두가 힘을 모아 쓰레기가 선더미처럼 쌓였던 집을 깨끗하게 청조하고 정리한 후 심지어 새로운 가구까지 들여놓고 다시는 이웃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관심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공감이란 것이 있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이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미국이나 남한 모두 먼저 주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가치 기준을 바르게 세워야 할 때라고 하겠습니다.


2nd. 데살로니가후서 3:2b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 For all men have not faith.)

세상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습니다.
특히 불교와 이슬람교와 기독교를 세계삼대 종교라고 합니다.
일반적인 분류이지만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일반적인 분류에 에 따라 신앙생활을 할 경우의 믿음과 생명으로 믿는 것은 분명하게 다릅니다.
생명의 믿음이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먼저 생각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3rd. 마태복음 5:26-30

공중
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믿음에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이란 첫째는 도덕, 둘째는 상식, 셋째는 양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 66권 중에서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을 산상복음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 17을 다락방 복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기준을 바르게 찾고 정하려면 먼저 산상복음과 다락방 복음을 다시 읽어야 합니다.

4th. 고린도전서 12:9a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To another faith by the same Spirit.)

기독교를 생명으로 믿는 성도들은 믿음을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은사로 받은 믿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다양한 은사가 많은 교회이었습니다.
그런데 은사를 받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분쟁하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 당파를 만들었습니다(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방언의 종류에 따라 분쟁했습니다(어떤 방언을 하느냐?)

- 김종수목사님(태능 영세교회), 천국 방언(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 왜 방언이 필요한가?
  (어느 농촌교회의 목회자와 가정부의 아들)

5th. 누가복음 17: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And the Lord said, If ye had faith as a grain of mustard seed, ye might say unto this sycamine tree, Be thou plucked up by the root, and be thou planted in the sea; and it should obey you.)

겨자씨 한알 만한 믿음이라고 하였는데 겨자씨는 모든 씨앗들 중에서 가장 작은 씨앗을 말합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면 아마 채송화 씨앗처럼 아주 작은 씨앗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겨자씨 한 알을 방바닥에 떨어트린다면 마치 먼지처럼 보일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씨앗만한 믿음이 있다면 뽕나무가 뿌리채 뽑혀 바다에 던져질 수 있다고 합니다.

6th. 디모데전서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Holding on to faith and a good conscience. Some have rejected these and so have shipwrecked their faith).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양심을 버리면 그 믿음은 파선한 믿음입니다.

7th. 야고보서 2:26

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As the body without the spirit is dead, so faith without deeds is dead.)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죽은 믿음이란 결국 믿음이 없다는 것이 아닐까요?
죽은 믿음은 무엇일까요?

8th. 베드로전서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Receiving the end of your faith, even the salvation of your souls.)

죽은 믿음이란 영혼 구원을 받을 수 없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하박국서소선지서에 속한 책으로 3장으로 구성된 비교적 내용이 짧은 말씀입니다.
하박국이란 이름의 뜻은 "포옹하다" 라고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활동 무대를 남 유다북 이스라엘로 구분합니다.
남 유다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들은 "오바댜, 요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라고 하겠습니다.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들은 "요나, 아모스, 호세아" 라고 하겠습니다.

하박국서의 특징지혜문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특이한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시기오놋(3:1)" "영장(3:19)"과 같은 전문 음악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레위 자손으로 측정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의 정의"라고 하겠습니다.
왜 이 세상에서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받고 살아야 하는가?

하박국 선지자의 대답은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무관심하신 분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좁은 생각과 의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지 않는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는 나타날 것이고 실현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현 대통령 트럼프를 지지해야 하느냐? 아니면 바이든을 지지해야 하느냐? 이런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누구를 선택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조금 더 많은 사람을 선택해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현 대통령 문재인과 여당을 지지해야 하느냐? 아니면 우파 정당을 지지해야 하느냐? 이런 의견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사정은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습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언론에서 국민들에게 장확하게 알려야 합니다. 사법부에서는 잘못된 것을 법대로 판단하여 어느 쪽으로도 치우칠 수 없도록 법질서를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도 입법부와 사법부와 행정부 심지어 치안을 맡은 경찰과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군부까지도 때로는 판단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만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또한 반대로 이제는 기도할 때가 아니라 거리로 나가서 행동해야 할 때라고 주장합니다.

미국이나 한국 물론 다른 나라들도 비슷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한 믿음의 정의가 요구되는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믿음은 가치 기준을 바르게 세우는 것" 이라고 서두에 소개했습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이제까지 인류 역사에서 발생했던 문명들이 외부의 침략에 의해서 무너지고 망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부정과 부패에 때문에 무너지고 망했다고 강조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미국의 문명고 한국의 문명도 무너질 때는 외부의 침략적인 전쟁보다는 내부의 부정과 부패에 의해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의 경우 기독교 인구 비율이 전체 인구의 20-25%라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 정도라고 한다면 부정과 부패가 세상을 주도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 북한과 남한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체재를 갖고 설명하려고 합니다.
물론 체재는 북한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김일성주의라고 하겠습니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한 마디로 "공감(共感)"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표기한다면 Sympathy, Empathy 라고 하겠습니다.
공감대(共感帶)를 Bond of Sympathy
공감이란 단어의 뜻은
1. 다른 사람의 의견(意見)이나 주장(主張)에 대하여 자기(自己)도 똑같이 느끼는 것.
2.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자기도 같은 감정을 같는 것.

예를 들면 아직도 남한에서는 어려운 이웃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어느 동네에 자기 집을 온갖 쓰레기로 채워놓고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모두가 외면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기관의 사회복지사와 정신과 의사를 비롯하여 동네 부녀회와 청소 업체에서 발벗고 나서 그 사람은 병원으로 안내하여 검사를 받게 하고 입원하여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면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모두가 힘을 모아 쓰레기가 선더미처럼 쌓였던 집을 깨끗하게 청조하고 정리한 후 심지어 새로운 가구까지 들여놓고 다시는 이웃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관심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공감이란 것이 있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이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미국이나 남한 모두 먼저 주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가치 기준을 바르게 세워야 할 때라고 하겠습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파트리스교회가 후원하는 기관들의 후원을 멈추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후원을 받는 기관의 책임자의 말이 흔들렸던 제 마음과 생각을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도록 멈추게 했습니다.
"너무 많은 후원자들이 더 이상 후원을 할 수 없다"며 후원을 끊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코로나 19에 의해서 어려움을 겪는데 파트리스교회마저 끊어야 하겠는가?
정말 끊어여 하는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후원을 계속해야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적은 믿음과 큰 믿음

믿음이 자은 자들은 누구인가?

첫째,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힌 자(마태복음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믿음이 적은(a little faith)

둘째, 문제에 당면했을 때, 무서워 하는 사람(마태복음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셋째, 두려워하는 사람(마태복음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믿음이 큰 사람은 누구인가?

첫째,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마태복음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 이만한 믿음 (Great Faith)

둘째, 주인을 아는 사람(마태복음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아닌 것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여러분 손에 손톱이 있습니다. 발에는 발톱이 있습니다.
손톱과 발톱이 누구 것인지 아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톱과 발톱이 내 손과 내 발에 있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착각입니다.
왜 착각이냐 하면 내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손톱과 발톱이 내 말을 듣습니까?
내 삶의 내 생명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내 삶의 내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그럼 누가 주인입니까?

개들의 주인이 있는 것처럼
인생의 주인도 있습니다.
그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예수를 설득하는 믿음을 보며 그과부가  큰믿음을 가졌다고 칭찬하면서 그딸을 고쳐 주었다 (마 15:21-28)

(예화) 바람 몸살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바람 몸살이란 나무를 옮겨서 이식할 때 옮겨진 곳에서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려면 악력(握力)이 4배로 필요하다고 합니다.
악력(握力, 쥘 握. 힘 力. Grip)이란 "물건을 쥐는 힘"을 말합니다.

성경적 믿음이 내 삶에 뿌리를 내리려면 얼마의 힘이 필요할까요?
나무가 4배의 악력이 필요하다면 사람은 그 보다 더 강한 힘이 필요합니다.
제 생각에는 대략 10배가 더 필요하다고 환산하면 약 40배의 힘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성경적인 믿음을 내 삶에 적용하려면 성령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은 악력이 필요한 사람에게 권능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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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않음과 믿음의 결핍

믿음에 반대되는 것은 믿지 않음 즉 불신(不信)이라고 하겠다.
불신이란 믿음의 결핍 현상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임에서는 예수님도 기적을 일으킬 수없었다(마가복음 6:1-6).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요셉유다시몬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예수님은 그의 부활을 본 증인들의 말을 믿지않은 그의 제자들의 믿음을 결핍했다고 꾸짖기도 하였다(마가복음 16:14).

   14.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믿음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완악한 증거라고 하겠다.


약한 믿음과 강한 믿음(로마서 14:1-23)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이는 신앙하는 데 필요한 지식이 많아서 분별력이 있어서 현실을 잘 처리하는 사람들이 강한 믿음을 가졌다고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서 약한 믿음을 가졌다고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는 강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배려해서 처신할 것을 권하는 의도가 있다.   

믿음은 바뀐다

성경이 제시하는 믿음은 바뀐다.
일시적으로 있다가 없어지는 것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누가복음 8:13).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또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에서 제자들이 자신을의 믿음을 증가시켜 달라고 요청한 것과
예수님이 믿음을 겨자씨에 비유하는 것(누가복음 17:5-6)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믿음의 조심성

성경은 믿음이 선별적임을 보여 주면서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으니, 곧 오직 어리석은 자들만 아무거나 다 믿으나 지혜있는자는 행동하기전에 심사숙고 한다는 것이다(잠언 14:15)  

   15.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그 행동을 삼가느니라.


정리

믿음은 봄으로, 체험으로, 실험을 통해서 무언가를 인정하고 의심않는 것뿐만 아니라, 보지 않고도 미리 알지 못했어도 신뢰할 만한 사람들의 증언이나 말만으로도 생기게 된다.
이것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보는 경우이고 우리 삶에서 겪는 것이다.
어렸을 때, 또 자라면서, 우리는 부모를 비롯해서 많은 권위적인 사람들과 상징들, 선생님들, 정치 사회 지도자들의 교훈, 우리가 읽는 고매한 사상가들의 책들, 전통, 풍습, 언어 등, 문화의 영향에 무의식적으로 믿음의 자세로 대하는 것이다.

과정을 통해서 우리 인간은 천차만별의 자기만의 믿음의 모양을 만들어 간다.
곧 “마음으로 꼭 그렇게 인정하거나 생각하고 의심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각하는”과정에서 무한한 각자의 공통점과 상이점을 확인해 간다.
“생각하는” 나는 이 믿음이라는 창을 형성하면서 동시에 믿음을 통해서 일생동안 나의 사고의 틀과 내용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믿음에 대해서 기독교의 성경은 훨씬 특정된 의미의 믿음을 정의하고 있으니, 곧 천지 창조자와 그가 보내서 세상에 온 예수에 대한 믿음을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곧, 그전능자와 그가 인간에게 그의 사자들을 통해서 인간 역사를 통해서 인류에게 전해 준 모든 교훈과 그 장래에의 약속에 대한 신앙과 신뢰라는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에 관련된 모든 것, 곧 믿음의 결과인 복종의 요구, 행동에의 필연성, 또 모든 선택과 결정이 믿음을 선행해야 한다는 조건의 논리는 결코 신중한 사고와 행동에의 책임을 묻는 데서 성숙을 기대한다.
그러나  참으로 격려적인 것은 신앙은 성장한다는 사실이다.
신앙에 수준이 있는 데, 곧 갓태여난 어린 아이가 자라면서 점점 철이 들고 분별력이 생기고 성숙해지면서 지혜자가 되듯이, 우리의 신앙도 성숙해간다는 것이다.
신앙 정도가 있어서 약한 믿음이 지식을 얻음으로 강한 믿음, 성숙하는 믿음, 큰 믿음으로 바뀌는 과정이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허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과정은 일생에 걸쳐서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믿음에는 첫믿음이 있다.

이것은 시작인 만큼 미약한 것이지만, 이후의 모든 생애를 결정짓는 데 지대한 영향을 준다. 사전 지식이 있던지, 없던지 간에, 믿음은 관계의 시작이냐 아니냐를 결정하게 한다. 사람을 처음 만나는 경우도 그러하고 무언가를 시작하는데도 관심을 가져 보기로 작정하는 것의 중요성. 이것은 아주 쉬운, 가벼운 정도의 믿음이다.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않을 것인가하는 기로에서, 파스칼의 제안은, 하나님이 있다는 가정에 도박하라는 것은, 이런 첫단계를 말하는 것이다. 일단 있다는 쪽을 선택해서 계속 찾다 보면, 없을 수도 있을 수도 있음을 본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기독교인들이 비난을 받는 경우 그내용은 믿음의 정도, 수준의 문제임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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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사람은 그 믿음으로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현대인의 성경 /
악인은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므로 살아 남지 못할 것이나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고린도전서 12:1-11
다양한 은사들을 소개합니다.

1. 형제
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
9.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
10.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2장 은사장에서 다양한 은사들을 소개합니다.
은사의 종류를 헤아려 보면 9가지로 소개됩니다.

1. 지혜의 말씀
2. 지식의 말씀
3. 믿음
4. 병 고치는 은사
5. 능력 행함
6. 예언함
7. 영들 분별함
8. 각종 방언 말함
9. 방언들 통역함

다양한 은사들 9가지 중에 네번째 은사를 "믿음" 이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4:13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이야기)
어느 가정에서 할머니는 시골에 거주하시며 절에 다니시는 불자(佛者)입니다.
손녀딸을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인데 서울에 거주하며 교회에 다니는 신자(信者)입니다.
할머니가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며 손녀딸을 위하여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므로 대학에 입학해야 하므로 매일 불공을 드리고 부처님에게 손녀딸이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해 달라며 기도합니다.
손녀딸과 어머니는 교회에 출석하기 때문에 어머니는 교회에 가서 하나님에게 딸을 위하여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어느 날 할머니가 불자인 내 기도를 들어주실까?
아니면 며느리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생각하니 가슴디 답답하여 사찰의 주지 스님을 만나서 집안 사정 이야기를 하며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실까요?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사찰의 주지 스님께서 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실력이니 열심히 공부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더랍니다.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소문난 사찰의 스님을 찾아가서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스님께서는 부처님이 그렇게 속이 좁지 않다.
그러니 할머니가 열심히 불공을 드리고 기도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하더랍니다.

이러한 사례가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은사라고 합니다(고린도전서 12:9)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데살로니가후서 3:2)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And pray that we may be delivered from wicked and evil men, for not everyone has faith.


믿음이란 기준을 하나님(성경)으로 세워가는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동일한 업종의 가게를 운영하는 업주가 있습니다.
한 가게의 업주는 하나님을 향하여 가게가 잘 운영되기를 기도합니다.
또 다른 가게의 업주는 부처님을 향하여 가게가 잘 운영되기를 기도합니다.
어느 가게의 업주가 기도하는 것이 응답될까요?

아마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다니는 업주의 가게가 잘 되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반면에 절에 다니는 불자들은 부처님을 믿는 업주의 가게가 잘 되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부처님을 향하여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이 된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 된다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로마서 3: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As it is written: There is no one righteous, not even one.

마태복음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태복음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마태복음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마태복음 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마태복음 9:29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마태복음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마태복음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태복음 16:8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마태복음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마태복음 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태복음 21: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것이요

하박국
-
하나님과 대화로 의심의 해답을 찾은 선지자

1. 인적 사항
 (1) 하박국은 '껴안은 자', '매달리는 자'라는 뜻.
 (2) 남유다의 선지자(합 1:1).
 (3) 하박국서 저자.
 (4) 레위 지파 출신의 제사장 또는 성가대원으로 추정(합 3:19) 

2. 시대적 배경
하박국은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와 신바벨론 제국의 창건자 나보폴라살(B.C.625-605년)과 메대의 시악사레스(B.C.625-585년)의 연합군에 의해 함락된 B.C.612년부터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제1차 침입을 당했던 B.C.605년 사이에 주로 활동한 선지자다.
이 시기에 남유다는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의 통치 시대로서 B.C. 586년 바벨론 제국에 의한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직전이다.

3. 주요 생애

 (1) 출생
 (2) 남 유다의 종교적 도덕적 죄악의 심각성을 인식함  1:3-4
 (3) 남 유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의로 BC 612-605, 1:2-4
 (4) 갈대아로 인한 남유다의 심판에 대한 항변 1:12-2:1
 (5) 하박국서 기록 1:1
 (6) 죽음

4. 성품
 (1) 자기 백성의 죄악 됨을 보고 징계를 통해서라도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랄 만큼 진정한 애국심의 소유자(합 1:2-11)
 (2) 이해할 수 없는 신앙문제로 혼자 고민하지 않고 그 문제점을 하나님께 아뢰고 해답을 찾고자 한 것을 볼 때 용기 있고 지혜로운 자(합 1:2; 2:1)
 (3) 자신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에 재차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하고 그 답변을 기다리고 바랄 만큼 매우 진지하고 솔직한 사색가(합 2:1).

 

5. 구속사적 지위
 (1) 구약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찬송 중의 하나인 송시(頌詩)를 남긴 선지자(합 3장)
 (2)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위대한 진리를 처음으로 명시적으로 선포한 자(합 2:4) 

6. 평가 및 교훈

 (1) 하박국은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왜 악을 허용하는가'에 대한 회의가 끊임없이 일어날 때에 혼자 고민하며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해답을 얻고자 하였고 하나님께만 끈질기게 매달렸다(합 1:2-4).
 오늘 우리도 성도라면 누구나 품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신앙문제로 심각한 고민과 낙심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에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우주와 역사를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있는 줄을 알고 그 분께 매달리는 하박국과 같은 참된 지혜자가 되어야 하겠다(롬 11:33).

 (2) 자기 백성의 범죄 함을 보며 징계를 통해서라도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하박국처럼 우리는 이 나라와 민족의 범죄 함을 볼 때 안타까움과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가? 혹 온 사회에 만연하는 불의함 때문에 오히려 넘어지고 마는 힘없는 자는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3) 하박국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증거 한다(합 2:4).
이는 단지 습관적으로 입술로만 외치는 교리적 선언이 결코 아니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여러 가지 인생의 고통과 문제를 실제로 체험하고 깊이 상고해 본 결과 가슴 깊은 곳에서 말하는 신앙고백이다. 우리도 각자의 삶 속에서 이같은 신앙고백이 항상 있어야 할 것이다.

하바국

하박국서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3장(구약 929장), 56절(구약 23,191절), 670단어(구약 304,901단어), 약 2,500자(구약 약 116만자)로 이루어진다.

하박국서의 히브리어 이름은 ‘하박국( חֲבַקּוּק )'이다.
칠십인역에서 ‘암바쿰(Ἀμβακούμ)'이라고 한다.
불가타에서는 ‘Habacuc’, 영어성경에서는 ‘Habakkuk’, 그리고 중국어성경에서는 ‘哈巴谷書’이라 불린다.

신약성서에서는 하박국 1장 5절(행 13:41), 2장 3~4절(히 10:37~38), 2장 4절(롬 1:17, 갈 3:11, 히 11:1~12:2)이 인용된다.
사도 바울은 의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하박국을 인용한다.
하박국 선지자의 이름은 오직 이 책의 표제와 시에만 나오며(1:1; 3:1)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하박국은 왜 주님의 정의는 이렇게 악하고 부패한 시대와 사회와 인간들에게 시행되지 않는가 묻는다.
야훼 하나님은 불의한 백성과 왕들은 반드시 벌을 주고 징계할 것이라고 대답해 주신다.
갈대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채찍이 되어 범죄한 유대 민족과 왕들을 벌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하박국은 종교적 세계관의 중심 문제를 제시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궁극적 대답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것이다(하박국 2:4).


역사적 이해

하박국은 이스라엘 역사 구분에서 분열왕국시대라고 한다.
하박국은 갈대아 우르 사람들이 일어난 때인 기원전 7세기 후반부터 기원전 6세기 초까지 쓰여졌다.
이 때를 고려한다면 어쩌면 하박국예레미야, 스바냐, 나훔, 그리고 요엘 등과 동시대인이었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비평학계 일부에선 갈대아 인들을 깃딤인 곧 헬라인으로 간주하여 극단적으로 늦은 시기로 잡는 사람들도 있다.

갈대아 사람들이 일어난 시대(1:6)를 고려할 때, 이 책의 내적인 증거는 저작 연대에 대한 확고한 시기를 제시해 주는 것으로 보이지만, 비평학계는 이러한 자료에 언제나 만족하지는 않았다.

어떤 학자들은 이 책의 보다 이전의 판본이 정말 3장의 시로 끝이 났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는데. 이 시가 현재처럼 이 책의 결론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존재했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구조와 개요

구조는 글의 구성요소를 규명하는 단계, 각 요소의 배열을 분석하는 단계, 구조의 의미를 파악하는 단계로 이루어진다.
하박국 장르 이해는 설화, 시, 예언, 신탁 등에 대한 분석이다.

첫 부분은 선지자와 하나님과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선지자는 애가의 양식을 통해서 하나님께 불평을 함으로 시작한다.
악인의 형통에 대한 불평에 대해서 주님은 갈대아인을 통해서 벌하실 것을 말씀하시자, 보다 더 큰 불평이 이어진다.
주님께서 악인을 들어서 선민을 치시는 것에 대한 불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장에서 주님은 그 심판의 확실성을 재차 확인하셨다.
3장은 고어체적인 히브리 시로 구성되어 있다.

1. 일반적인 하박국 구조 : 하박국서의 선형 구조

A  최초의 대화(1:2~11)
 a 선지자의 불평(1:2~4)
 b 주님의 응답(1:4~11)

B 두 번째 대화(1:12~2:5)
 a 선지자의 불평(1:12~17)
 b 주님의 응답(2:1~5)

C 압제자들에 대한 저주의 신탁(2:6~10)
 a 노략자가 노략될 것임(2:6~8)
 b 정복자가 수치를 당할 것임(2:9~11)
 c 건축자가 헛됨(2:12~14)
 d 수치가 없는 자가 수치를 당할 것임(2:15~18)
 e 우상 숭배자들이 잠잠할 것임(2:19~20)

D 하박국의 순종의 시(3:1~19)
 a 기도(3:2)
 b 용사이신 하나님의 등장(3:3~15)
 c 믿음으로 사는 선지자(3:16~19)

하박국의 대칭 구조

A 하박국의 첫 번째 불평(1:2~4)
B 야훼의 첫 번째 대답(1:5~11)
C 하박국의 두 번째 불평(1;12~17)
D 의인은 믿음으로 살게 됨(2:1~5)
C' 두 번째 불평에 대한 주님의 대답(2:6~20)
B' 야훼의 마지막 대답(3:1~5)
A' 첫 번째 불평에 대한 하박국의 마지막 대답(3:16~19)

이 책의 첫 부분(1:2~2:5)은 하나님과 선지자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1:2~4와 1:12~17에서와 같은 애가 양식은 시편의 애가시들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

시편에서는 보통 이러한 애가시들은 주님께서 그 시편 기자의 불평을 들으시고, 그를 구원하고, 보호하시며 그나 이스라엘의 적들을 심판 하실 것을 확약하시는 주님의 응답으로 이어진다.

하박국은 “왜 악인이 번성하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던지며, 유다에 힁행하고 있는 악과 불의와 폭력에 대해서 불평했는데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선지자가 기대했던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한층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시되, 이를 위해서 유다의 악보다 더 악한 악을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며, 보다 악한 이들은 더욱 번성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이 선지자의 두 번째 불평을 도입하는데(1:12~17)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참아 보실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이 자신들보다 의로운 자들을 집어삼키도록 허락하실 수 있는가(13절)?
그들은 계속해서 번성하고 그들의 그물을 채우며, 계속해서 사치롭게 살 것인가(16~17)? 에 대한 주님의 대답을 보려고 파숫군처럼 인내하며 기다린다(2:1).

2. 돌시의 하박국 구조 : 돌시는 에스델 구조를 7중 대칭구조로 분석한다. 돌시의 하박국 구조

A 1:2~4 하박국의 첫 번째 불평
B 1:5~11 야훼의 첫 번째 응답
C 1:12~17 하박국의 두 번째 불평
D 2:1~5 기다리라는 권고
C′ 2:6~20 하박국의 두 번째 불평에 대한 야훼의 응답
B′ 3:1~15 야훼의 마지막 응답
A′ 3:16~19 야훼의 첫 번째 응답에 대한 깨달음

돌시는 하박국을 7중 대칭구조로 보았다.
이 구조에서는 핵심부분(D, 2:1~5)이 ‘기다리라는 권고’를 한다.

신학적 이해

하박국은 역사의 마지막 시기에 처한 유다와 예루살렘에 말씀을 선포했다.
내적으로는 부패하였으며, 신흥하는 바빌론의 세력으로 도전을 받고 있었다.
선지자는 이런 정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무관심하시다고 불평을 하고 있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어려움이 있어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하며, 나아가서 온 땅에 하나님이 공의를 행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했다.
결국 하박국은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며, 재난에 직면해서 자신의 구원자이신 야훼를 찬양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하박국은 내적인 부패로 썩어 있었으며 새롭게 부각하는 바빌론의 세력이 곧 성전과 도성을 멸망시킬 운명에 있는, 역사적 마지막 시기의 처한 유다와 예루살렘에 말씀을 선포했지만, 선지자의 시각으로는 이러한 이중의 악이 힁행하는 가운데 주님은 활동하시지 않고 무관심 하신 것처럼 보였다.

많은 학자들은 하박국의 불평들을 욥기와 비교 했는데, 욥처럼 이 선지자도 아무리 현상이 반대로 된 것처럼 보이고 아무리 정황이 어려워 보여도 계속해서 주님의 약속들을 믿고 신뢰해야 하며, 온 땅의 하나님이 공의를 행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함을 배웠다.

또한 믿음으로 사는 법과, 재난에 직면해서 자신의 구원자이신 야훼를 찬양하는 법까지 배웠다.
이후 수백년 후에 다시 악과 불의가 전에 자주 그랬던 것처럼 흥왕하고 있었는데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성전은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이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상징되는 성전이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조롱하였지만, 이 선지자는 주님을 신뢰했으며(마태복음 27:43: 히브리서 10:35상),
주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서 그를 변호하셨다(로마서 1:4).
예수의 부활은 멀리 계신 게 아니며, 악이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하나님 자신의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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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가?

노예 매매 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집에 죠(Joe)라는 노예있었는데 일을 잘했다.
그래서 주인은 죠를 사랑했고, 무엇을 하든지 의논을 해서 했다.

어느 날 주인은 몇 명의 노예를 사기 위해서 노예 시장을 죠와 같이 가게 되었는데 상품처럼 진열된 많은 노예 중에 늙고 야윈 검둥이 노예가 하나 있었다.

"죠"는 잠시 바라보다 주인에게 저 늙은 노예를 사라고 했다.
그때 주인이 아니 살찌고 젊은 노예가 많은데 왜 늙은 것을 사야 하느냐고 하면서 거절을 하였다.
그러나 "죠"는 계속 우겨 결국은 사오게 되었는데 "죠"는 정성스럽게 잘 돌봐 주었다.

이것을 주인은 먼 거리에서 유심히 지켜보았다.
어느 날 "죠"를 불러 너는 왜 늙은 노에를 사라고 했으며 정성을 다해 사랑하고 돌봐주는데, 혹 너의 아버지가 아니냐?"
"죠"는 아닙니다. 주인님! 그는 "나의 원수였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 그는 나를 유괴해서 지금 주인님께 판 자입니다.
우리가 시장에 나갔던 그날 거기서 그를 보았을 때, 한 작은 음성이 내 마음에 들려 왔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이마르거든 마시우라"(로마서 12:20)
저는 크리스챤이 되었는데 그를 돕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원수를 초월한다.

마태복음 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누가복음 6:26-28,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누가복음 6:3536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Be merciful, just as your Father is merciful.)

예를 들면 사랑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사랑의 기준은 곧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기록된 말씀 성경을 통해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거북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누가복음 6: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누가복음 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라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