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복음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Then Jesus said, “Did I not tell you that if you believed, you would see the glory of God?”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If you believed, you would see the glory of God?)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을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고 합니다.
공관복음이란 예수님에 대한 관점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출생고 성장 그리고 사역에 대한 말씀이 비슷한 내용으로 전개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제4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출생과 성장 과정은 생략하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지상 사역을 시작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변화의 복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의 주제를 크게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말씀
말씀은 곧 하나님입니다(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헬라 철학에서는 말씀을 로고스라고 합니다. 로고스는 진리(眞理)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는 로고스를 복음(福音)이라고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씀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육신으로 오신 말씀(예수 그리스도)
둘째는 기록된 말씀(성경)
셋째는 선포되는 말씀(설교)
둘째는 생명
생명은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적 생명은 비오스(βίος, 979, bios) physical life
거듭난 생명은 조에(ζωή, 2222, zóé) life, born again
셋째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αγάπη, 26, agápe) love
남자와 여자의 사랑 에로스(ερως)
지식에 대한 사랑 필로스(φίλος, 5384, philos )
가족의 사랑 스토르게(στοργος, 5387, storgos) φιλόστοργος
넷째는 믿음
믿음이란 πίστις(4102, pistis) faith, faithfulness
요한복음에서 믿음이란 "말씀이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믿는 것" 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은 변화를 일으키는 믿음에 관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공관복음에 속한 것이 아니라 사복음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복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을 표적(標蹟, 세메이온, σημειων. 4592, sémeion)이라고 합니다.
애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기 전에 바로의 술객들도 모세가 행했던 이적을 동일하게 행했습니다.
이러한 이적을 奇蹟 즉 테라스(τέρας, teras. 5059) 라고 하는데 단순하게 놀라운 일(a wonder, marvel)을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아가 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변화가 나타나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은 가나 혼인 잔치집에서 포도주가 부족할 때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던 첫번째 표적을 행하셨던 사건을 소개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일곱 번 표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2:1-11)
2.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치유하신 표적(4:46-54)
3. 예루살렘에서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신 표적(5:1-9)
4.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표적(6:1-13)
5. 바다 위를 걸어오신 표적(6:16-21)
6.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고치신 표적(9:1-41)
7.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11:1-44)
다른 표적들을 모두 살펴볼 시간적이 여유가 없기 때문에 오늘은 첫번째 표적을 살펴보겠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집을 교회로 비유합니다.
교회는 잔치집처럼 즐겁고 활기찬 예배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잔치집에서 손님들을 대접해야 할 포도주가 부족한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 즐거워해야 할 때에 포도주가 부족한 것처럼 성령이 없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고 그 물을 연회장에게 떠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없는 텅빈 돌항아리와 같은 교회에 물을 채워야 합니다.
물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에베소서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항아리에 채워진 물을 떠다 연회장을 찾은 손님들에게 공급하는 것처럼 이제는 교회에서 채워진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물은 아무리 좋은 물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변질됩니다.
그러나 포도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값이 올라갑니다.
따라서 가치가 없는 물이 값비싼 포도주로 변하는 것처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날마다 예배를 통하여 거룩한 성도들로 변화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변화가 없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모이는 교회를 모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먼저 모이기 전에 소금과 빛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기회에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변화를 일으켜서 변화된 믿음의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는 이전 보다 더 큰 빛으로 세상을 밝게 비출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일곱번째 표적은 베다니 마을에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의 집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개합니다.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에게 붓고 머리털을 씻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이만한 믿음은 오늘날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의 발을 씻어주고 수건을 발을 닦아주는 것도 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일년 동안 일한 댓가를 지불하여 가장 좋은 향유를 구입한후 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을 씻어주었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리아의 믿음에 대해서도 변화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32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께서 메시아가 되심을 여기 계실 때에만 믿는 믿음이 아닐까요?
교회에서는 믿음이 있는 것같은데 교회 밖에서는 믿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창조 신앙(말씀)
둘째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신 신앙(임마누엘)
셋째는 십자가 구속의 신앙(죄 사함)
넷째는 부활 신앙(영생)
마리아는 메시아가 반드시 여기 오셔야만 표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33절,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절,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울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눈물에는 어떤 원망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향유를 발에 붓고 나의 머리털로 씻었던 사람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사람을 보내어 어서 속히 오셔서 안수하여 주시기를 소망했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기다렸는데 이제는 죽어서 나흘이 지나 무덤에 안장되었으며 냄새가 나는 무덤에 왜 이제 오셨습니까?
36절,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37절,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절,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예수님께서 통분히 여기시며
- 탄식하시며(현대인),
- 비통한 심정으로(공동번역).
- 비통하게(새번역)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예수님을 찾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가 죽었을 때는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원망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과 다른 것이 있습니까?
문제가 있을 때 주님을 찾았지만 문제가 더 악화되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의 구덩이에서는 원망과 탄식에 붙잡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믿음은 아니었습니까?
이와 같은 믿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증거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네가 믿으면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기적과 같은 사건이 아니라 죽은 것같은 믿음이 회복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코로나 바이라스가 우리들의 삶을 축소시킬 수 있지만 우리들의 믿음은 축소시킬 수 없습니다.
도리어 우리들의 믿음은 독수리처럼 높은 하늘을 향하여 솟구쳐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금번 기회를 넘어서면 이전 보다 더욱 주님 사랑하며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승리의 삶을 고배갛ㄹ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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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 생명과 죽음에 관한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셨습니다.
첫째는 죽음에 대한 표현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돌아가셨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잠을 잔다"고 하셨습니다.
돌아가셨다는 표현은 원래 있던 곳으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창조의 질서에 따르면 사람을 만든 재료는 흙이므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깨우러 가느냐 하고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둘째, 믿음의 언어
나사로가 죽은 후 사일이 지났습니다.
무더운 유대 지방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즉시 무덤에 안장합니다.
왜냐하면 시체가 곧 썪기 때문입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 이라는 표현보다 더 강력한 언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의 언어는 선포할 때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돌문은 얼마든지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돌문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언어를 인정할 수 있는 동기를 갖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시체가 썩는 냄새가 진동할지라도 창조의 주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것처럼 죽어 냄새가 나는 시신일지라도 생명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것은 잠을 자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믿으면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을 부여하셨고 생명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사명과 책임을 갖고 있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Examine yourselves to see whether you are in the faith; test yourselves. Do you not realize that Christ Jesus is in you unless, of course, you fail the test?
믿음을 시험하고 확증하자!
Let's test and corroborate our faith!
Let's test and confirm your faith!
오늘은 우리 모두 나사로의 시신이 안장된 동굴 앞에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날에는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마지막 날에는 다시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마지막 날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이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믿는 것과 지금 일어날 일을 믿는 것 그리고 과거에 일어난 일을 믿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시제에 따라 세 가지 형태로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믿는 것(과거의 믿음)
둘째는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믿는 것(미래의 믿음)
셋째는 현재에 일어날 사건을 믿는 것(현재의 믿음)
과거의 믿음은 갈보리 언덕 위에 세워졌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미래의 믿음은 천군천사들의 나팔 소리와 함께 영광의 예수님께서 심판의 주로 임하실 것입니다. 이때 영벌과 영생으로 나눌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현재의 믿음은 지금도 나와 함께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 현재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 미래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과거
베드로전서 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이 말씀이니라.
(예화)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신나게 하루를 보냈다. 저녁에 헤어지면서 메뚜기가 내일 만나자고 하자 하루살이가 내일이 무엇이냐? 하루살이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오늘로서 우리 인생이 끝나기 때문에 밤새도록 날아다닌다고 하자 메뚜기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랍니다. 이제 메뚜기와 개구리가 재미있게 놀다가 개구리가 헤어지면서 우리 내년에 만나자고 했더니 메뚜기가 내년이 무엇이냐? 우리에게 내년이란 없다. 금년 겨울이 다가오면 우리 삶은 끝이라고 하자 개구리가 알 수 없다고 하더랍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은 오늘, 내일, 내년, 그리고 내세에, 이 땅과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살 수 있는 영생의 존재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나사로를 어떻게 살릴 수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이 있다고 합니다. ‘운동력’을 영어로는 Power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Power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힘이냐 하면 죽은 시체를 불러일으키는 힘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 속에 까지 침투되고 또 그것들을 분리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의 죽음이 무엇인 가를 먼저 알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죽음이란 영과 몸의 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되었는데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영과 몸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몸은 영으로 부터 분리되면 시체가 됩니다. 그래서 흙으로부터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도록 흙에 묻고, 영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영이 구원받았으면 몸에서 분리된 후에 낙원으로 갑니다. 살아 있을 동안에 거듭나지 못한, 몸에서 분리된 불신자의 영은 음부로 내려가서 영원한 불의 고통과 형벌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 죽은 시체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죽은 시체도 살려내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시체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말하는 것은 몸에서 떠났던 영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8:52∼56,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장면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말씀이 죽은 시체를 향해 아이야 일어나라 명령했을 때 분리되어 나갔던 영이 다시 돌아옴으로 다시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7:14,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는 장면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청년의 시체를 향하여 명령했지만 실제로는 분리되어 나간 영을 다시 불러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3, 나사로를 살리신 말씀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나사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둘째, 죽은 영을 살리는 능력(요한복음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시체를 살리는 능력보다 더 큰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죽은 시체가 살아나더라도 영원한 부활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죽습니다. 이것은 목숨을 조금 더 연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영혼을 살리는 것은, 영은 한번 살아나면 영원한 것입니다.
만약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나 야이로의 딸들이 예수님께서 다시 살렸지만 이들이 다시 살아서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이들이야 말로 가장 불쌍한 자들입니다. 영혼이 거듭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영을 살린다는 사실을 더 중요시 여깁니다.
요한복음 5:25,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다.
죽은 자들이란 살아 있으나 아직 그 영이 거듭나지 못한 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며, 아직도 예수 믿지 않은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25절에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에서 '곧 이 때라’는 것은 예수님이 살아 계셨던 그 때로부터 오늘 날까지 입니다. 바로 오늘 , 지금 이 시간이 ‘그 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오늘, 아직도 거듭나지 않은 자들이 있다면 이 말씀을 듣고 믿으면 영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육체도 살리고 죽은 영도 살리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전한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게 되고 믿으면 영생을 갖게 되고 심판을 받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오셔서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잘 듣고 영이 거듭날 뿐만 아니라 말씀은 우리의 영의 양식이라 했습니다. 근심 걱정을 물리치고 질병도 치료받으며 생명력이 차고 넘쳐서 기쁨이 충만해지고 마음에 평강이 넘쳐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무덤에 있는 자들을 살리는 것
우리 본문 말씀 28절에,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했습니다. 여기에 ‘무덤 속에 있는 자’란 죽어 장사되어 1년 혹은 5년 혹은 10, 50년, 1백년, 5백년, 1000년, 2000년, 5000천년 되어 뼈가 녹아 흙이 된 상태의 시체들도 다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재림 하실 때 성도들의 몸을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영혼육의 완전한 부활이요, 영광의 부활을 말합니다. 신학적으로는 ‘Glorification’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주께서 호령하신다는 말씀에서 ‘호령’은 NIV 영어 성경에는 ‘A Loud Command ’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큰 소리로 명령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공중에서 이 지구뿐만 아니라 온 우주상에 흩어져 있는 죽은 사람들을 향해 ‘자녀들아 일어나라’고 명령하실 때에 예수 믿고 죽은 자들의 영혼이 그 시체 속으로 들어가서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 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이 말씀에서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란 예수 믿고 구원받고 죽어 낙원에 있는 영혼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예수 안에서 잔다’고 말씀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공중강림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이 영들을 데리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이 각각의 시체 속으로 들어가서 부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영들이 여러분과 나일 것입니다. 이 부활은 영원한 부활인 것입니다.
이 부활은 물속에서 죽어 몇 백 년이 되어 그 살점이 녹아 바닷물 속에 다 풀어져 오대양에 흩어져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기본 구성 원소들을 다 찾아내서 시체를 만드는 것을 요한계시록 20:13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그리고 난 다음에 그 속에 각각의 영이 들어가서 완전한 부활체가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37장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의 환상의 골짜기에 있는 뼈들에게 명령하니까 본래 살아있을 때 그 사람에게 속했던 뼈들이 움직여서 서로 서로 맞추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에스겔에게 영들에게 명령하여 각 시체들 속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라고 해서 에스겔이 명령하였더니 이영들이 각 시체 속에 들어감으로 부활하게 했습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부활의 구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기야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 우주를 창조 하신 하나님이신대 그것에 비하면 부활 작업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시체도 살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영도 살려 영생을 주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덤에 있는 자들도 다시 일으켜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의 삶을 깨우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성경책을 말합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 죽은 자가 일어나고 죽은 영들이 살아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매 주일 듣는 설교가 이런 생명력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읍시다!’ 라는 외침도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며, 있을 수도 없을 것같은 것에 대한 믿음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
1.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은 이기적이다,
3. 행동거지를 바꾼다면 영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성숙하게 될 것이다.
4. 하나님께 맡기기만 하면 된다.
5. 회복되면 끝이다.
6. 과거는 잊어버려라
7. 하나님만 있으면 된다. 사람들은 필요하지 않다.
8. 해야 하는 것은 유익한 것이다.
9. 죄책감과 수치심은 유익한 것이다.
10. 바른 선택을 한다면 영적으로 성숙할 것이다.
11. 옳은 일을 그냥 하는 것이 그 일을 하는 이유보다 더 중요하다.
12. 진리를 알기만 한다면 성숙하게 될 것이다.
"잘못된 가르침들은 대부분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마치 그 잘못된 가르침들이 사람들을 회복시키고, 성숙하게 하는 건전한 기독교 교훈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고질적인 편견을 갖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생각 없는 믿음은 맹신을 만들고 이것이 지나치면 광신이 됩니다.
신앙은 성경을 통해 더 깊이 자신을 성찰하고 인생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위 책의 제목처럼 혹 나도 잘못된 믿음으로 미쳐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제대로 살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완고한 유교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던 청년이 예수를 영접한 후에 신앙을 지키려고 제사에 참여하지 않고 주일을 지킴으로 가족들과 대립관계가 되었다. 결국 결혼 후에는 가족들과 만나는 일도 없었다. 혼자의 믿음은 지켰을지 모르나 가족들을 구원하는 일에는 실패자가 되었다면 과연 이 믿음을 어떻게 받아드릴 것인가?
청년의 고백은 나는 날마다 가족들이 구원받기를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족들은 점점 더 장손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가족들의 모임에서 잊혀지고 말았다면 믿음이란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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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넷 조이는 christianwomentoday.com에 기고한 글에서 그러한 어두운 시간을 겪게 될 때 이 세상의 빛이신 주님께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행동방침을 이야기합니다.
* 기도로 당신의 마음을 밝히십시오. 마음이 괴로울 때 하나님께 당신의 마음을 다 토해놓으십시오(시62:8). 기도로 당신의 걱정을 그분께로 가져가십시오(빌4:6-7). 그리고 당신이 기도를 일기에 적거나 어떤 식으로든 기록해 둔다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기도에 응답하셨는지 뒤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진리로 당신의 마음을 밝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적어도 몇 분 동안이라도 읽으십시오. 삶에 희망이 없다는 당신의 잘못된 생각에 주님의 진리가 도전하고 침투하여, 그 생각을 변화시키도록 만드십시오(시46:1; 롬12:2).
*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함으로써 당신의 삶을 밝히십시오.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주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고 교제하며 섬길 수 있는 교회에 열심히 참석하십시오(히10:25). 이러한 행동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자라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둠이 우리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면,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주님은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이며(시62:7-8), 우리가 계속해서 나아가도록 힘을 주실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를까?
아브라함의 삶을 살펴보면 기근 때문에 애급으로 갔습니다.
아들을 얻지 못할 때는 아내가 아닌 아내으 종을 취하여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첫째는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이 지시할 땅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떠났습니다.
이것을 "순종" 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순종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인정을 받으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종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낳았을 때 하나님은 그 아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한 아들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아브라함의 아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른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뿌리가 아브라함에게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 후손 누구라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흔히 신앙인들은 ‘믿으면 다 된다.’라는 말을 한다.
그러면 그 다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과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이 같은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면서 믿는 것이, 또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브라함과 다르다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한 번도 밥 달라 돈 달라 한 적이 없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브라함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공급하실 것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간 것과,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한 아들을 낳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알고 보면 깔끔하게 믿었던 것도 아니다.
기근이 든다고 애굽으로 가기도 하고, 아들이 생기지 않자 아내가 아닌 아내의 종을 취하여 아들을 낳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잠깐 딴 이야기를 해 본다면 예전에 김도올이라는 학자가 성경을 읽는 것을 두고 우리나라 역사도 모르면서 남의 나라 역사책을 읽는다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을 인정하지 않아서 그랬다는 점에서 용서는 될 수 있지만 모든 인간이 공감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의 정체성을 제시도 못하면서 그런 비판이나 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바보 같은 소리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육신으로 어떤 민족이나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해당되는 말씀이 바로 성경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렇듯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을 사람이 수용하는 것에 관한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고, 또 아브라함을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순종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긴다면,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말씀하신 말씀을 믿고자 한다면 세상을 살면서 육신에 관한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믿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로 가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삶을 통하여 나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백세에 아들을 얻은 것을 두고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할 때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기를 기도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께 구한다. 사람에게 육신의 일이 있는 것은 육신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육신의 일은 육신으로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와서 육신의 일을 자꾸 구하고 그것을 해결해 주실 것을 믿는다. 그러면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면서 하나님께 자꾸 떼를 쓴다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은 단 한가지다.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 그것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성경을 부정하고 과학이든 미신이든 다른 종교든 뭐든 간에 사람이 존재한 이유가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바보 같이 박테리아가 사람이 되었다고, 원숭이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기는 해도 사람이 사람의 삶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할 수 없는 오직 한 가지는 사람을 존재하게 한 것, 그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의 존재 목적이 원숭이에게서 나왔겠는가? 그건 더 모욕이다. 혹성탈출 영화도 아니고.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 사람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구할 것은 단 한 가지다. 그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즉 사람이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존재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자리가 어딘지를 아는 것, 그 하나는 사람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고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사람의 존재목적이 이루어진 자리가 있으니 그리로 가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사람을 만드신 이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이 사람에게 이루어지기를 믿는 것, 그것이 믿음일진데 그것은 사람이 사람의 존재 목적의 자리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 사람의 자리가 어디인지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땅과 같다. 그것은 사람이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기로 할 때 생각하신 창조의 목적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믿는 것이다. 그 목적은 절대로 사람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지와 뜻이 온전히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순종하는 믿음인 것이다. 사람이 자기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아브라함의 여정을 통하여 보이신 것이다. 누가 백세에 아들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한 아들은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란 그런 사람이다. 즉 하나님께서 뜻하신 사람의 정체성이 회복되어 그 삶이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나타나심)과 성품을 표현하는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 아들은 하나님이 아니면 백세에 아들을 낳게 할 수 없듯이 하나님이 아니시면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믿음이 좋다, 믿음이 크다, 믿음이 있다”라는 말은 믿음이란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창조 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이란 히브리어로 ‘다바르’(Davar)인데 “말씀과 함께 그대로 이루어진 사건”이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또 헬라어로 ‘레마’(정확한 발음은 흐레마)도 “실천적인 말씀”이란 뜻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과 계획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노년에 자식이 없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4-5)하시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창 15:6, 롬 4:9, 22, 갈 3:6, 약 2:23). 지금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도(nothing), 하나님의 약속대로 자손이 뭇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음(everything)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장’)은 믿음의 정의로 시작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 11:1) 성경의 인물들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책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성경을 믿는 맘으로 읽으셔야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기 전에 반드시 기도를 해야 하며, 또 기도하는 맘으로 읽으시고, 다 읽고는 묵상하며, 이 말씀을 실천해야 성경읽기가 제대로 이루어집니다. 바울서신의 중심주제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이신득의, 以信得義). 이것이 바울신학의 핵심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들은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바울서신은 항상 교리면과 윤리면이 함께 있습니다. (롬 1-11 교리, 롬 12-16 윤리; 갈 1-3 교리, 갈 4-6 윤리; 엡 1-3 교리, 엡 4-6 윤리; 빌 1-2 교리, 빌 3-4 윤리 등)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갈 5:6). “믿음을 겸한 사랑” (엡 6:23)을 말씀하고 있으며,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살 1:3)이 모범적인 신앙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을 강조하고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도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르치며 (고전 13장, 롬 12:8-10), 야고보도 믿음이 수반된 행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약 1:6-7, 2:14-26).
성경에 가르치는 믿음이란 사랑의 열매를 맺는 믿음입니다.
1. 순종(창 6:22, 22:12, 삼상 15:22, 눅 1:38, 5:5)
2. 겸손(사 7:9, 미 6:8)
3. 결단(수 24:15, 사 6:8)
4. 헌신(롬 12:1, 눅 7:47-50)
5. 능력(마 8:10, 26, 14:31, 행 3:10)
6. 회개(눅 24:47, 행 2:38)
7. 중생(요 3:5, 겔 36:26-28)
믿음은 역사가 따릅니다. 믿는 자는 의롭게 되고, 의롭다 하는 증거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성도들의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오며, 하나님의 영광이 묻어 나와야 합니다. 주일예배 때만 크리스천이 되지 말고, 풀타임 크리스천의 모습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을 열납 하셨습니다(창 4:4).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이처럼 우리의 평소의 삶 자체가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물은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온전한 것이어야 합니다. 심지어 내장에 이상이 있는지 점검하기 위해 제물이 받쳐지는 금요일 삼일전인 수요일까지 제물을 제사장에게 가지고 와서 삼일간 지켜보고 변도 점검한 후 아무 이상이 없고 건강하면 제물로 바친 것을 기억합시다.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보름 전 간암 3기 판정을 받고 매우 힘든 나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길 수 있는 좋은 메시지 부탁드립니다 - 박집사 (필라)
(답변)
우리의 생사화복은 온전히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집사님의 영혼을 보호해 주실 줄 믿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10)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으시고 나아가십시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 말라.” (사 43:1-5)
열두해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순간 주님의 능력이 들어와 모든 병이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만지다’(hapto) 는 헬라어 동사는 주님의 치유의 능력과 내 믿음이 뜨겁게 결합된다는 말입니다. 집사님, 이제 주님의 옷자락을 잡으시되 이 여인처럼 100% 믿고 나아가십시다. 주님과의 진정한 만남(합토)속에 우리 영혼이 구원을 받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믿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 4:2) 하신대로 주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믿음의 초심을 회복하여 전인적인 치유를 받읍시다.
리넷 조이는 christianwomentoday.com에 기고한 글에서 그러한 어두운 시간을 겪게 될 때 이 세상의 빛이신 주님께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행동방침을 이야기합니다.
* 기도로 당신의 마음을 밝히십시오. 마음이 괴로울 때 하나님께 당신의 마음을 다 토해놓으십시오(시62:8). 기도로 당신의 걱정을 그분께로 가져가십시오(빌4:6-7). 그리고 당신이 기도를 일기에 적거나 어떤 식으로든 기록해 둔다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기도에 응답하셨는지 뒤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진리로 당신의 마음을 밝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적어도 몇 분 동안이라도 읽으십시오. 삶에 희망이 없다는 당신의 잘못된 생각에 주님의 진리가 도전하고 침투하여, 그 생각을 변화시키도록 만드십시오(시46:1; 롬12:2).
*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함으로써 당신의 삶을 밝히십시오.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주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고 교제하며 섬길 수 있는 교회에 열심히 참석하십시오(히10:25). 이러한 행동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자라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둠이 우리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면,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주님은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이며(시62:7-8), 우리가 계속해서 나아가도록 힘을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