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믿는 자에게 따를 표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은사자에게 따를 표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6:15-20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믿는 자에게 따를 표적
믿는 자에게 따를 표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은사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정말 예수님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새 방언을 말할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뱀을 집을 수 있습니다.
뱀은 동물에 속한 뱀이 아니라 사탄을 잡을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습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을 빋는다면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즉시 나음을 얻습니다.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 마가복음에서 증언하신 그 말씀을 직접 증거하며 보여주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째, 귀신을 쫓아내며
둘째, 새 방언을 말하며
셋째, 뱀을 집으며
넷째,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다섯째,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귀신(鬼神)을 쫓아내며
민간신앙은 귀신이란 죽은 조상의 혼(넋)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자기 수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혼이 귀신이 되어 자기 수명만큼 활동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은 조상의 혼이 아니라 사탄의 수하에서 활동하는 보이지 않는 악마와 같은 존재를 말합니다.
귀신은 거짓된 말씀을 들고 등장합니다.
진리가 들어오면 거짓된 말씀은 내 안에서 사라집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다른 어떤 이름이 아니라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귀신(φάντασμα) :
예수 : 죄에서 구원할 이름
이름 : 오노마(όνομα)
- 말씀
이름 = 말씀 = 오노마 4번
귀신 = 비진리의 영(다이모니온) 5번
새 방언을 말하며
거짓 방언(비진리)은 내 입에서 나오지 않고 오직 그 새 방언(진리)만 내 입에서 흘러 나옵니다.
새 방언(새로운 소리 = 진리) 7번 카이노스 글롯사
뱀을 집으며
예수를 장대에 높이 올려 죽이고 진짜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진리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율법으로 오신 예수 상징 = 뱀(오피스는 옵타노마이에서 유래) : 표피적을 보는 것
- 뱀을 집다에서 집다는 들어올리다의 아이로라는 단어를 씀.
-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자기부인으로 산자가 되면...
무슨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음
-> 이제 사망이나 적신이나 곤고나 그 어떤 것도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게 되며
- 독은 율법으로 죽고 진리로 사는 거듭남을 말함. 다나시모스
- 다나시모스는 다나토스에서 유래
;진리로 보고 듣고 말하게 되면 피조세계의 모든 것을 통해 그 율법적 행위는 결국 사랑으로 완성되기
때문에 진리를 가진 자에게 무엇이 그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다.
병든자에게 손을 얻으면 나음
나를 통해 그 진리가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면 눈먼자 , 앉은뱅이, 귀머거리였던 그 이웃들까지도 회복의 은혜를 누릴 것이다.
첫째는 나자신과 그 생수에 강이 내 배에서 흘러 넘침으로 비진리속에서 허우적되던 영적으로 병든 자들이 낫게되는 기적이 내 주변에서 일어납니다.
- 병든자 : 론뉘미(4517)는 강하게 하다,강하다
신약성경 행 15:29에 한 번 나오는데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브니엘 사전 참조)
진리안에서 안녕과 평안을 가지지 못한자.
- 손 : 케이르로 능력, 진리, 군대,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행위 등
- 얻으면 : 위에 것으로 덧입다. 에피티데미.
- 나으리라 : 칼로스 에코. 참선으로 마음에 간직하게 되다.
마가복음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NASB.
"These signs will accompany those who have believed: in My name they will cast out demons, they will speak with new tongues;
they will pick up serpents, and if they
drink any deadly poison, it will not hurt them; they will lay hands on
the sick, and they will recover."
NIV.
And these signs will accompany those who believe: In my name they will drive out demons; they will speak in new tongues;
they will pick up snakes with their hands;
and when they drink deadly poison, it will not hurt them at all; they
will place their hands on sick people, and they will get well."
KJV.
And these signs shall follow them that believe; In my name shall they cast out devils; they shall speak with new tongues;
They shall take up serpents; and if they
drink any deadly thing, it shall not hurt them; they shall lay hands on
the sick, and they shall recover.
이 구절은 믿는 자에게 따르는 다섯 가지 표적을 말하고 있다.
“표적”이란 사도들의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입증하는 초자연적 사건들이다.
표적들은 초대 교인들이 선포한 그 신앙의 확실성을 보증해 주는
것이지 그들 중의 누가 임의로 행사할 수 있는 개인적 능력이 아니었다. 사명을 완성하는 데 있어서 신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할 능력을 받을 것이다.
2. 새 방언을 말하며
3. 뱀을 집으며
4.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5.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이대환박사의 성경적 치유론에서 발췌함
제 3장 C 항목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이곳에 올립니다.
치유론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막16장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야합니다. 개혁주의는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1.1.1. 마가 16:17의 진정성
사도들은 복음을 온 세계로 효과적으로 전파했다. 그런데 예수님의 2년 반 동안의 단독사역에서 보여 주었던 치유사역이 12명의 제자들과 그들의 제자 등이 AD 30-90년까지의 약60년 동안의 효과적 사역에서 치료의 사건은 4.5%에 그친다는 것은 중요한 시사점을 보여준다. 이들의 사역의 핵심이 부여받은 권세와 능력을 따라 복음전파에 집중되었으며 치유사역에 매달리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대 사명선언에서도 (마28:18-20, 막16:15-6, 눅24:45-49, 행1:8, 요20:21-23) 강조점은 회개, 죄 사함을 위해 권능 또는 능력이 사용될 것을 말한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일부 사본에서는 종결부에 17-20 믿은 자들에게 표적이 나타날 것을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이 왜 다른 성경에서는 없는지, 또한 마가복음의 일부번역에서는 없는지, 아니면 일부 사본에서는 추가로 채택되었는지를 밝혀야 한다.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J. E. Ladd 는 마가복음의 결말이 서로 다른 다섯 가지의 사본이 있다고 했다. 그는 비평학적 관점에서 대부분의 사본이 16:8절로 마가복음이 끝이 난다고 했다. 9-20은 그 후 추가된 본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많은 증거를 제시하여 최초의 원본은 8절로 종결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원본에서는 분명히 더 분명한 결론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그 원본의 끝 부분이 망실되어 8절까지 밖에 남지 않았고 그 이유로 다른 사본들이 8절에서 끝날 수밖에 없었고 사본을 기록하던 사람들에 의해 미려한 결론을 위해 조금씩 추가되는 과정에서 삽입된 것으로 본다. 이 특징은 이 추가된 9-20절이 대부분 소문자로 작게 기록되었음을 지적했다. 초대교회의 Jerome은 ‘그리스 사본은 거의 모두 이 결말 부분을 갖고 있지 않다'(Ladd 1987, 83) 고 한다. 이 추가부분은 원본 비평의 뒷받침이 너무 약하여 진짜라고 여겨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 문체와 단어의 사용에서도 앞의 것과 너무 상이하다.
그러나 이 본문이 개역성경에 [괄호] 안에 넣어 각주 형태로 추가한 것은 혹시 적은 확률이지만 원본에 있는 것 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안전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추가되었다.(84)
그런데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했다’는 말이 원래 있었지만 다른 복음서는 기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원래 없던 것을 마가복음에 추가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본문이 추가된 것이 아니라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 은사가 계속 재현될 수 있다는 증거로 삼기는 불가능하다. B. Warfield 는 ‘이런 은사는 교회를 설립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권위 있는 대리인으로서 사도들에게 주는 일종의 신임장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 은사들은 사도시대와 함께 필연적으로 지나갔다’ 이 은사의 목적은 세상 속에 교회를 설립하고 굳게 하는데 있다. 이제는 정경이 마무리 되고 교회가 완전하게 설립되어 굳게 되었으므로 이 은사가 끝났다. (Chrysostom, Augustinus, Jonathan Edwards, Mattew Henry, G. Whitefield, C. H. Spurgeon, Abraham Kuyper 등이 이 견해에 따른다)
B. B. Warfield는 ‘이런 항목들은 묵시 문학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그 본문이 정경과 무관하며 영감받지 않은 것이라는 충분한 외적 증거에 상응하는 내적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1991, 282)
위 구절의 진정성을 제공한다고 은사주의자들이 제시하는 행28:3절은 그들의근거가 될 수없다. 우연히 독사에게 물린 바울은 전혀 해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의도적으로 독사로 시험을 한 것이 아니다. 진정성을 확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독을 마시고도 살았다는 기록은 성경과 역사에 전혀 없다. 이 구절은 독으로부터 성도가 자유로움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광신자들이 이 말씀을 시험하다가 죽은 자가 많다.
1.1.2. 막16:17 잘못된 적용
필자는 이 은사가 계속 되는가? 중지되었는가? 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다. 이 능력이 중단되지 않았고 지금도 믿음을 갖고 기도하면 된다는 일반론을 경계하는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은 이런 능력이 계속되며 지금도 ‘성령을 제한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이같은 은사를 사모하라고 한다. 성령께서 인간의 제한에 제한 당하신다면 그분이 참으로 성령인지 의심받아야 한다. 실상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성령을 빙자한 몇 사람의 스스로의 열정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능력은 자신에게도 일어나지 않는다. Web surfing을 통해 search 한 결과 한국 교회의 대표할 만한 어떤 목사는 아래의 칼럼을 썼다.
아래는 네이버에서 인용한 하OO목사의 08년 신년칼럼이다.
성령이 임하면 표적이 따릅니다
현재 당신 안에는 어떤 성령의 능력이 따르고 있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어떤 기적이나 능력도 행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옆에 계시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언제부터 기적과 능력을 행할 수 있었을까요?
성령이 그들에게 들어갔을 때부터 입니다.
마가복음 16장에 놀라운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 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잡으며 무슨 독을 마
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이런 일을 누가 합니까? /당신이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성령이 임하면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기를 갈망하십시요. (하 # #)목사
http://kr.blog.yahoo.com/hosook_kim/1387557 2008,1,28일 naver
위의 칼럼은 성령이 임하시면 표적이 따른다고 마가복음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확신에 찬 필체로 성령을 갈망하라고 전한다. 필자는 이 글이 실린 곳에 꼬릿말Replies을 달았다.
성령의 임재를 갈망하라고 하는 그의 교회는 매년 성령컨퍼런스를 개최하고 성령의 임재훈련, 예언, 방언 등의 세미나를 쉼 없이 행한다. 그런데 OOO목사는 유감스럽게도 암으로 수차례 수술을 하고 있다. 한 때 성령의 대단한 능력을 받은 예언자를 미국에서 초청하여 세미나를 했는데 그는 ‘성령이 말씀하셨습니다. OOO목사님의 암은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라고 선언하였고 하나님이 치료하셨다고 전국 네트워크를 통해 홍보까지 했다. 필자는 그것이 참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그 후 들린 소문에 의하면 그 후에도 계속 재발하여 암 수술을 받고 있다. 필자가 확인 한 최근의 소식은 ‘생명에 대하여 더 이상 기대와 소원이 없다. 이제는 하나님께 온전히 맡겼다. 언제든지 오라고 하면 하나님께로 간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야 제대로 되어간다고 믿고 안도하던 차에 2008년 신년 메시지는 여전히 같은 말씀을 계속하고 있어서 필자의 실망은 적지 않다.
위의 글대로라면 그는 아직도 성령을 받지 않았거나, 그의 주변에서 성령임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아직도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이 된다. 남들보고 성령임재를 갈망하라고 하면서 정작 본인은 아직도 임재하지 않았다. 아니면 아직 한 번도 손을 얹지 않았거나..., 성령임재를 본인부터 받고, 그리고 그 교회가 운영하는 TV와 위성방송망에 생방송으로 손을 얹어 기도하고, 독을 마시고 코브라에게 물려보고 예수 믿으면, 또는 성령 받으면 이와 같이 죽지 않습니다. 라고 방송한다면 누가 믿음을 거절하겠으면 누가 기독교를 욕할 수 있겠는가? 본인도 하지 않는, 하지 못하는 일을 남에게 하라고 요구하니 세상 사람들이 비난하는 근거로 삼게 되는 것이다.
1.1.3. 마가16:18절의 긍정적 해석 ‘케칼-하토브 해석법’
필자는 이 본문이 이것을 열망하던 분파에 의해 추가된 것으로 믿는다. 이것이 또한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이 본문을 긍정적으로 전제하고 해석을 해도 케칼하토브의 방법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단 은사주의자들의 열망처럼 이것을 공식화, 상시화하려는 것은 심각한 오류에 빠져드는 것임을 명백히 한다.
케칼하토브의 원리를 통해 이 본문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1.1.3.1.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표적을 주신다. 믿고 순종하는 백성은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 사역의 보증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사역자에게 함께 하시는 증거는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것이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증거를 남겼다. 이것에 관하여 필자의 ‘능력신학을 재고하라’에서 ‘가시적 현현의 비 비상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가시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또 그것은 비상한 은혜가 아니라 당연한 은혜이다.(1997,159) David Powlison은 ‘성령님과 그 말씀의 능력이 수많은 방법으로 어둠에 빛을, 멍에에 자유를 혼동이 있는 곳에 건전함을 부여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성경이 실천 신학의 능력을 갖고 있으며 실천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 산 증인’ (1996, 18)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사역의 지원으로서 하나님은 당신의 선한 뜻과 인간의 머리로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능력으로 기이한 일을 행하신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지원을 경험한다.
1.1.3.2. 내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본인의 사역의 경험으로도 속칭 귀신들린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랑, 죄에 대한 인식, 예수님의 용서 등을 전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였을 때 즉시 온전하여 지고 회복된 것을 경험하였다. 필자는 은사주의자들이나 귀신론자들이 하는 축사행위 즉, 귀신의 이름을 묻고,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등의 방법을 거부한다. 예수의 이름이나 성경 등이 마술적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름은 예수님과 의 인격적 관계를 전제하는 말이다. 예수님의 통치가 온전히 구현되는 것은 귀신과의 대화나, 명령으로가 아니다. 비록 귀신들린 사람일 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그에게 복음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현재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처럼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오류이다. 그렇다면 여러 번의 축사, 금식, 안찰 등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즉시 온전케 하셨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즉시 치료되지 않고 다시 재발하며 거듭 반복해야 한다.
귀신과의 대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환자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환자의 인격이 사탄에게 지배당했다고 전제해도 참된 복음이신 예수님이 오셨다면 그 귀신은 환자에게 무력할 수밖에 없다. 은사주의의 귀신론은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복음이 바르면 귀신으로부터 해방은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한다.
기존의 정통주의 신학이 능력이 사도시대에 끝났다고 함으로서 마치 하나님의 치료하는 은사가 지금은 더 이상 없다는 말로 들려졌다. 그러나 복음은 여전히 초대교회 시절이나 현대에도 동일하게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준다. 표적은 끝이 났지만 은사는 여전히 행하여진다. 은사주의자들은 표적을 상시화(常時化) 하려고 하기 때문에 오류에 빠진 것이다.
특히 귀신으로부터의 해방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은 귀신론을 오해하여 귀신과 대화, 이름 밝히기 등의 오류를 범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범신론과 다원주의적 신관을 퍼트리고 있다.
1.1.3.3. 귀신과의 대화는 정당한가?
막 5:7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8)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귀신과 대화를 시도한 것처럼 보이는 구절로 귀신론자들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이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 많은 거짓이 나타난다.
첫째. 귀신의 말을 믿지 말라. 예수님이 귀신의 이름을 물을 때 단수로 호칭한다. 그런데 귀신은 자신을 ‘군대’라고 하면서 ‘우리가 많다’라고 하여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고 했다. 그러면 누구의 말이 옳은가? 예수님이 단수로 알았는데 귀신의 말을 듣고 여럿 인줄 알았단 말인가? 예수님은 ‘너희들의 이름이 무엇이냐?’ 라고 한 것이 아니다. 귀신의 말을 정말로 믿으면 안된다.
둘째, 귀신과 타협하지말라. 예수님은 해안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이 거라사에 가신 행위 자체가 이미 귀신에게는 나가라는 명령인 셈이다. 귀신은 더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예수님 앞에 끌려나와 서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곳에 가신 것이 곧 귀신에 대한 추방명령이다. 전도자를 하나님이 보냈다면 이미 귀신은 추방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과 타협, 거래 할 필요가 없다.
셋째, 귀신과 대화하지 말라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란 말은 귀신과의 대화가 아니다. 오히려 제자들과 청중에게 그가 귀신들린 것임을 확인시킨 것으로 예수님이 귀신까지도 제어하시는 분임으로 알리신 사건이다. 이 사건의 앞 문맥은 병자의 병을 통해 인간을, 바람과 바다의 순종을 통해 자연계를 복종케 하신 예수님이 이 사건으로 영계까지 굴복시키는 왕 되심을 보여준 사건이다.
넷째, 귀신은 거짓의 아비이다. 귀신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군대’는 이름이 아니다. 귀신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자신들의 상태를 말한 것이다. 귀신이 하는 말을 믿으면 안 된다. 귀신의 말을 믿으면 거짓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귀신의 거짓말에 대해 책망하지 않았고 옳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거짓말쟁이의 거짓말로 무시하셨다. 진정한 대화라면 그 말의 거짓임을 책망하고 진짜 이름을 말하라고 명령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와 대화하시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또 귀신의 요청을 따라 돼지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하신 것도 아니다. 귀신과 거래를 하거나 협상을 한 것이 아니라 귀신의 요청을 이용하여 돼지의 주인들을 나오게 한 것이다. 돼지의 주인들은 단순히 미친사람이 나았다는 말만 듣고 자신의 일을 접어두고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재산을 잃자 확인차 나왔고 예수님 앞에 서게 되었다. 그 후 온전해진 사람을 통해 전도를 받고 믿게 된다. 이 성경이 귀신과의 대화를 인정하는 구절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귀신과의 대화는 당연히 거부되어야 하고 성도는 하나님과 대화해야 한다. 귀신과는 대화하도록 말한 적이 없다. 바울의 빌립보 사역에서도 귀신의 계속된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귀신을 축출되었다. 귀신에게는 ‘나가라’는 명령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이 명령은 믿음으로 ‘예수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하는 예수 이름의 능력을 믿고 명령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귀신들린 여인이 여러 날 따라다니면서 소리 질렀지만 바로 귀신을 좇아내려 하지 않았다. 바울은 ‘심히 괴로웠다.’ 그러다가 이 귀신이 따라다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는 줄 알았고 귀신을 좇아내었다. 이 사건으로 바울은 감옥에 가고 거기서 간수를 만나며 교회가 시작된다. 이 귀신이 따라다니게 하신 사건은 하나님이 기획하신 사건이다. 바울은 ‘심히 괴로워’ 한 것을 보면 처음부터 안 것 같지는 않다.
행 16:17)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1.1.3.4. 새 방언을 말하며
방언문제는 상당히 어렵다. 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은 표적으로서의 방언이고, 로마서와 고린도서에는 은사로서 방언이 나온다. 표적은 상징적의미를 갖고 은사는 기능적 의미를 갖는다. 표적으로서의 방언은 일반적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특수한 상황 즉, 초대교회와 같이 처음 예수님을 듣고 있거나, 하나님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우상숭배지역의 선교지 등의 특수 상황은 개연성이 있다. 또 은사로서의 방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기도하는 은사로서 다른 사람이 들으면 곤란한 것을 위해 기도할 때 사용되는 비밀 기도의 방편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매우 조심성을 가지고 사용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방언의 은사는 계속된다.
1.1.3.4.1.1.1. 표적으로서의 방언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개인이나 종족이 표적을 스스로 경험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경우로서 불신자의 극적개종의 경험으로서, 미전도 지역의 초기 복음전파에서와 같이 특수한 상황에서 개연성이 보고된다.
성경에서는 오순절날의 예루살렘, 사마리아, 고넬료의 사건에서 나타난 것이 표적으로서의 방언이다. 그 후에는 사도행전에 더 이상 이런 표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에도 믿음이 없던 사람이 사모하지도 않았는데 방언을 경험한 예가 더러 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1.3.4.1.1.2. 고린도의 방언은 표적이 아니라 은사로서 방언이다.
고린도의 방언은 은사로서의 방언이다. 은사는 표적과 구분되어야 한다. 오순절의 방언은 사용되고 있는 타언어였고, 고린도의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비언어였다. 은사로서의 방언은 한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각각의 은사를 주시기 때문에 은사는 서로 다른 것을 주신다. 그러나 한국교회에는 방언 은사를 받은 사람이 너무 많다. 보편적으로 방언은사는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은사의 기본에 어긋난다. 마치 다 은사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문제을 일으킨 고린도 교회와 같다. 은사가 치우친 것이 아니라 방언을 강조한 나머지 모방방언, 학습방언, 사단의 거짓 방언이 많다.
1.1.3.4.1.1.3. 방언의 표적을 요청하거나 간구하는 것은 잘못이고 되지도 않는다.
바울은 예언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은사를 더욱 좋은 은사라고 했다. 그런데 방언은 많이 하려고 하는데 말씀 전하는 것은 ‘나는 몰라요, 못해요’ 라고 한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은사가 잘못되었음을 증명한다. 알아듣지 못하는 일만 마디 방언보다 알아듣는 한 마디 말씀이 더욱 값진 것이다.
1.1.3.4.1.1.4. 은사를 만들어 주려는 시도를 버려야한다.
교회는 방언 은사를 받게 하려고 애를 쓴다. 이런 시도가 거짓된 은사에로 나아가도록 길을 열어준다. 은사는 다양하게 발굴되고 훈련되어야 한다.
1.1.3.5.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으며
뱀을 잡고 독을 마시는 일을 믿음의 증거로 주신 것이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제자가 어쩔 수 없이 고난을 받는 중에 뱀을 잡거나 독을 마시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때 하나님은 그 전도자를 구원하시고 대적자를 굴복시키는 방법으로 해를 받지 않도록 도우시는 경우가 있다.
이런 보고는 열악한 선교지에서 선교사가 죽음의 위협을 받을 때 일어난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필자의 케칼하토브 해석으로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열악한 사역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전파하는 전도자가 현지인들을 대신하여 뱀에게 물리거나 독을 대신 마셔줌으로서 죽음을 당한 후에 이것이 계기가 되어 복음을 영접하게 되는 경우도 선교 역사에 자주 있는 일이다.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으로 하나님은 어떤 독도 이길 수 있도록 표적을 주시기도 하며, 반대로 피할 수 있지만 선교지의 영혼을 위해 죽음을 자처하는 그래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복을 받고 죽은 전도자도 많다. 이 전도자는 해를 받지 않고 오히려 복을 누린 사역자이다. 이것이 필자가 주장하는 Kecal-hatob 원리이다.
이 원리에서는 결과를 정형화 하지 않는다. 결과는 오직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인간 사역자는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오직 순종할 뿐이다. 그 결과 하나님이 하시는 행위는 무조건 선하고 옳으시다. 하나님의 결과가 항상 인간 편에서 좋은 것 즉 ‘반드시 치료해 준다.’ ‘반드시 살려준다.’ 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은사주의자들은 항상 ‘반드시...’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도 몰래 약을 먹고, 의사를 만난다. 그들의 집이나 사무실의 서랍에는 여러 약이 있을 것이다. 남에게는 ‘기도하면 다 된다’, ‘하나님만 믿고 기도하라’고 하면서 말이다.
1.1.3.6. 병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손을 얹는 것은 그들과 관계를 맺음을 말한다. 손을 얹으라는 말을 안수 기도하라는 것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안수기도는 사도적 표시였다. 사도는 손을 얹을 때 나았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바울은 제자 디모데의 위염을 위해 안수 받으러 오라거나 내가 가서 안수하려 하지 않고 포도주를 조금 마시라고 권했다. 안수가 치료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안수는 환자와 인격적 관계를 가지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회개하게 하고 잘못된 삶이 무엇인지 종합적인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한다. 현대인들은 의학적 치료를 의사에게 의탁하지만 P. Tournier가 말한 대로 장로라고 일컫는 영적 지도자로부터 영적 도움을 받아야 한다. 병이 오직 의학적 원인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영적, 사회적, 등 수많은 요소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에 전인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기도하며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게 된다.
또한 필자의 원리를 따르면 병이 치료되지 않더라도 병을 통해 영적 회복과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에 질병의 치료보다 더욱 본질적인 영적치료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몸은 병으로 죽어도 영적 구원을 얻는 복을 누리게 된다. 질병의 치료에 매달리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 하나님께 맡기고 선한 삶을 사는 것이 의학적으로도 더 유익한 치료의 수단이 된다. 이것은 현대 심리학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류에 빠진 사람들은 육체의 질병 치료자체에 목적을 둔다.
1.1.4. 가시적 현현의 비 비상성(非 非常性)
이 개념은 필자의 ‘능력신학을 재고하라’(1997)에서 주장한 개념이다. John Wimber, Peter Wagner로 대표되는 능력과 표적에 열광하는 선교신학파의 능력치유 능력전도 등의 능력신학의 허구를 밝혔던 책이다. 필자의 주장을 아래에 싣는다.
1.1.4.1. 특수한 지역이나 상황에 대하여.
특수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비상한 일을 행하신다. 즉, 첫째 비복음화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 둘째 사역자가 긴급한 위기를 당할 때 그를 보호하기 위해, 셋째 기타 특수한 조건에서 하나님은 행하시기도 한다.
가시적 현현이 주로 비복음화 지역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을 모르는 지역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방법이다. 구약에서 행하시던 형태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러나 비 복음화 지역에서도 지속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초기에 잠시 자신을 계시하고 이어서는 성경과 사역자를 통해 인격적 방법으로 전환하신다. 예수님도 초기 사역에는 표적을 행하셨으나 자기 계시가 끝난 후에는 표적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아직도 표적을 구한다고 책망했다. 그래서 후기 사역에는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이 대부분이다. 이것이 ‘계시의 점진성’인데 ‘성경에 있는 것은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치유론자는 모든 성경을 재현하려는 유혹을 받았다. John Wimber와 Fuller Seminary의 성장학파가 대표적이다.
1.1.4.2. 기독론적 접근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성이 세상과 사탄에 대하여 절대적이고 최종적이며 완전한 승리이다. 다만 그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느냐 아니면 불신앙 하느냐의 문제가 남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과 말씀 속에 충만히 거하심을 확신해야 한다. 이 확신으로 담대히 사역을 해야 한다. 이때 사역자는 하나님의 능력의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Kecal-hatob) 나타난다.
첫째,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능력의 현현이 필요할 때는 기적적 치유, 독을 이김, 죽음에서 건짐, 천사의 나타남 등의 놀라운 일을 주신다.
둘째,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고난의 잔이 필요할 때 그의 능력으로 죽임 당함, 매 맞음, 파선, 고생 등을 담대히 당하는 능력을 나타내신다.
기독론적 의미의 승리는 늘 능력대결 양상에서 일방적 승리로 끝나는 것만은 아니다. 기독론적 승리는 마귀를 추방하고, 바다를 잠잠케 하며, 병자를 일으켜 세우는 것만이 아니다. 침뱉음을 당하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렸다가 극적으로 내려와서 원수를 굴복시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성경의 예언대로 묵묵히 고난의 잔을 받아 마시는 순종하는 모습이 기독론적 승리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 죽음도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행한 것으로 멋진 순종과 승리이다. 때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면 고난 받는 것이 승리하는 것임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배울 수 있다.
선교사들이나 복음 사역자들이 당하는 고난은 그 자체로서 승리와 영광의 행진곡이다. 이런 관점에서 Rechard Gaffine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성도들도 동일한 십자가와 부활에 연합할 것을 논증했다.(1989, 8-10)
1.1.4.3. 사역자의 유혹
교회성장의 침체와 퇴보로 위기에 빠진 사역자들은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능력에 대한 환상을 갖는다. 베드로가 기적과 함께 삼천 명 오천 명이 세례를 받는 것을 흠모하여 능력을 받으면 동일한 일을 일으킬 것이라는 환상을 갖는다. 또 그것을 만들어낼 잘 짜여진 많은 프로그램으로 사역자를 유혹한다. 사역자들의 심성에 흐르는 성공환상이 깨어져야 한다. 성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베드로와 같이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힘써야한다. 참으로 하나님의 종이라면 말씀대로 전하면서 참된 회개를 불러오려고 외쳐야한다. 성공과 안녕을 보장하고 심상한 위로를 전하는 창기의 메시지를 버리고 ‘음란하고 악한세대여 회개하라’고 외쳐야한다. 그래서 고난 받고, 침 뱉음을 당하고, 미친 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말씀을 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다. 전도자가 바른 신앙을 가지고 바르게 전할 때 하나님이 어느 날에는 귀신이 굴복하고 병자가 낫는 기적이 주시고, 전도자를 죽이려고 독사가 물게 해도 죽지 않게 하실 수 있다. 그리고 또 어느 날은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굴하기 않고 당당히 십자가로 나아가는 능력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참된 사역자는 병 고치는 기술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복음의 진정성과 받는 고난의 삶으로 증명될 것이다. 성경은 거짓선지자의 특징을 기적, 귀신 쫓음, 능력을 행하는 것이라고 이미 선언했다.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살후 2: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만 했지 그 결과에 대해서는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놀라운 말씀을 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16:17-18).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눈을 들어 현실을 보면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들이 따르기도 하지만 따르지 않는 경우가 더 많고, 또 나를 보아도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든 자에게 손을 얹어 낫게 한 적이 없는데 주님은 이런 표적이 따른다고 말했다. 예수님의 말씀과 교회의 현실에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표적이 따르지 않는 자들은 믿지 않는 자들이란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사도 시대와 함께 표적도 막을 내렸다고 강변해야할까? 아니면 이런 표적들이 나타나게 해달라고 금식하며 기도해야할까? 강한 믿음을 달라고 회개해야할까?
가신 주님, 다시 오신 주님
이 문제는 표적이 뭔지, 또 누가 표적을 행하는지를 이해해야만 풀 수 있는 문제다. 우선 누가 표적을 행하는지부터 살펴보자. 마가의 증언은 이렇다. "제자들이 두루 나가서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16:20). 마가의 이 증언, 특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라는 증언에 따르면 표적을 행한 자는 믿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이다. 주께서 제자들의 복음 전파 사역에 함께 하셨고, 함께 일하셨다고 분명하게 증언했다.
그런데 바로 앞에 나오는 또 다른 증언(16:19)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 주님은 이미 제자들을 떠났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그 어디에도 현존하지 않는다. 그런데 마가는 놀랍게도 제자들을 떠난 주님이 제자들의 복음전파 사역에 함께 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 조화일까? 제자들을 떠난 주님이 어떻게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있을까? 마가는 여기에 대해 일체 말이 없다. 단지 이루어진 사실만을 간단명료하게 기술할 뿐 세세한 설명이 없다. 하지만 요한은 예수님의 설명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7-8,13).
그렇다. 제자들을 떠난 주님은 사실 떠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은 보혜사 성령으로 다시 오셨다.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다. 또 표적을 행함으로써 복음을 확실하게 증거하셨다. 마가는 오신 주님을 보혜사 성령이라고 하지 않고 '주'라고 불렀다. '성령'과 '주'를 동일시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성령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하여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과 활동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그 자신의 펼쳐진 팔이며, 그의 부활의 능력 안에서, 그 부활과 함께, 그의 부활 안에서 시작되는, 그리고 거기서부터 효력을 미치는 그의 계시의 능력 안에 있는 그 자신이다."라고 상당히 어렵게 말했다. 하지만 핵심은 단순하다. 성령은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이며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이해할 때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이것은 성령 이해의 핵심이요 기본이다. 이 기본을 놓치면 성령 이해가 엉뚱한 방향으로 왜곡되기 쉽다. 열광적 몰입이나 신비한 초월 영성으로 흐르기 쉽고, 믿음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의 도구로 휘두르기 쉽다. 그러나 성령은 이런 것하고는 본질과 차원이 다르다.
성령은 결코 교회의 기능으로 도구화되지 않는다. 성령은 교회의 가르침과 교리 속에 갇히지도 않는다. 성령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의지와 뜻대로 처리하고 조작할 수 있는 것으로 사물화되지도 않는다. 성령은 결코 휘둘리는 법이 없다. 성령은 최고의 인격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자유에 따라 역사하고 싶은 대로 역사할 뿐이다(요3:8).
성령은 진리의 영이요, 자유의 영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성령은 만물을 새롭게 하는 분(계21:5)의 영으로서 과거의 모든 억압과 어둠과 한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한다(고후5:17). 나아가 새로운 해방활동을 하도록 격려하고 힘을 준다. 어둠에 종노릇하고 우상 앞에 엎드려 삶을 조아리는 비참함에서 해방시켜 진정한 주체자로 서게 한다. 신학자 크라우스는 성령의 자유하게 하는 사역에 대해 말했다.
"모든 외적 결정에 항거하는 자유의 영을 통해 하나님은 의존, 소외, 속박, 그리고 금기에 빠진 인간의 주체성을 갱신한다. 항상 역사의 객체로 비하되고 사건들의 희생물로 격하되는 인간이 자유의 영을 통해서 역사의 주체가 되고, 하나님나라의 세계 변혁적 운동에 부응하여 모든 상황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다. 자유의 영은 인간을 역사의 주체로서 그의 운명의 형성자로서 등장시킨다. 영 안에서 인간은 주체자로서 행동한다."(조직신학. 376).
바울은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했다. '너희는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다'(롬8:15).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멜 필요가 없는 자유자다'(갈5:1). 그렇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인 성령은 제자들에게 오셔서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일들을 행하셨다. 모든 억압과 묶임, 죄로부터 해방시켰다. 성령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제자들과 함께, 제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셨다. 복음을 듣고 믿게 하는 것도 성령의 사역이고, 십자가의 도를 깨닫게 하는 것도 성령의 사역이다. 하여, 주님은 내가 너희를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했던 것이다(요16:7).
암튼 성령은 자유의 영이다. 성령은 기계적으로 역사하지 않는다. 어떤 법칙에도 구속받지 않는다.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도 그렇다(요3:8). 그러기 때문에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들이 따른다고 해서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들이 기계적으로 따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표적이 따르지 않으면 믿는 자가 아니라고 판단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성령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요 성령의 역사를 기계적으로 법칙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본성에 어긋난다.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
그렇다면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른다는 말씀은 뭘 말하는 것일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주님이 약속하신 표적들이 모두 주께서 친히
행하였던 표적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외적인 증표로서 주님이 행하였던 일들 중 일부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표적들을 살펴보자.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데, 이 말씀은 뒤에 나오는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와 묶어 읽어야 한다.
그래야 그 의미의 핵심을 파악할 수가 있다.
우선 뱀은 성경에서 사탄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그러니까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사탄의 어떤 공격에 휩싸인다 해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다는 확약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쳤고, 사탄의 머리를 짓밟았으며, 귀신을 쫓아내 이미 승리했기 때문에 우리도 넉넉히 승리할 수 있다는
약속이며,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힘찬 격려라고 할 수 있다.
바울도 말했다. "누가 정죄하리요?…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이랴…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로마서 8:34-37).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세상의
무슨 독이라도 씻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황폐해도 그것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 안에는 귀신이 발붙일 곳이 없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고
있기 때문에 귀신이 자리를 잡고 버텨낼 공간도 없거니와 능력도 없다.
'새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새 방언'이라 하면 즉각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하는 것으로, 방언을 못하면 참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는 식으로 읽는 사람이 많다.
또 방언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분류하는 것은 말씀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는 유치한 발상이며, 문자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유아적인
문자주의의 우물에 빠져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문자주의가 매우 성경적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문자주의는 하나님의 뜻과 존재의 깊이를 문자에 한정하는, 아니 문자로 가두어버리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존재의 깊이를 오히려 해치게 된다. 말(문자)이란 단지 말이 아니다. 말이란 그 사람의 세계, 그 사람의 존재 방식을 나타내는 양식이다. 말은 존재를 담는 그릇이다. 사람을 관찰해보라. 한 사람의 세계가 달라지면 그 사람의 말이 달라지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그렇다. 말은 존재를 담는 그릇이다. 말은 곧 존재다. 하지만 존재의 일부요 존재의 껍질이다. 말은 존재이면서 동시에 존재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에 충실해야 하지만 말에 매여서도 안 된다. 말은 존재를 열어주지만 존재를 가리기도 하니까 말이다. 바로 이것이 말(문자)과 존재의 변증법적 관계다.
그렇다면 '새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결국 뭘 뜻하는 것으로 읽어야할까?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말을 하는 것으로 읽어야할까? 사람의 말과는 다른 성령의 말이 따로 있는 것일까? 아니다. 성령의 말이란 것이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읽어야할까? 성령의 말이 아니라 성령에 속한 것, 즉 성령의 세계에 속한 것을 말한다는 뜻으로 읽으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덧붙여 사람이 달라졌다는 뜻으로, 그 사람의 존재와 존재 양식이 달라졌다는 뜻으로 읽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무릇 존재가 달라지면 언어가 달라지는 법이다. 그러기 때문에 새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말하는 내용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말하는 내용이 달라졌다는 것은 삶의 양식이 새로워졌고, 삶의 차원이 달라졌으며, 존재의 세계가 새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자들을 보라.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 전에는 부활의 이전의 세계에 속한 삶을 살았고, 부활 이전의 세계에 속한 것들을 말하며 살았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부터는 부활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 되었고, 부활의 세계를 증언하며 살았다. 부활 이전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살았다. 존재의 자리가 예수 밖에서 예수 안으로 달라지니 말하는 내용도 달라졌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방언이다. 예전에는 할 수 없었던 말을 하는 것, 하나님나라의 세계에 속한 것들을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방언이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방언인 이유는 하나님나라에 속하지 않은 자들은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권세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낫는다'는 말씀은 어떤가?
이 말씀도 기계적으로 읽으면 문제가 생긴다. 문자적으로 읽고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믿는 자들이 병든 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할 때마다 다 나아야 한다.
무슨 병이든 병원이나 의사를 찾아갈 것이 아니라
믿는 자를 찾아가야 한다.
병원에 가는 것보다 더 좋은 길이 있는데 뭣
때문에 병원에 가겠는가.
정말 문자적으로 믿는 자에게 이런 표적이 따라야 한다면 세상에 병든 자들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병원마다 믿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죽을병에 걸려 고생하는 자들이 한 둘이 아니다.
병원마다 목사들 발걸음이 바쁘다.
입원한 성도를 찾아가서 위로하고 기도하느라 정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은 항상 만원사례다. 왜 그럴까? 손을 얹고 기도하면
나아야하는데 왜 낫지 않는 것일까? 왜 고생하는 것일까? 믿음이 없어서일까?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고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믿음이 없어서라고 말해야 한다. 여의도순복음 교회에 한 명의 환자라도 있으면 조용기 목사는 믿음이 없는 자로 판명되어야 한다. 아니, 모든 성도 모든 목사들이 다 믿음이 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문자주의의 비현실성이다. 문자를 문자로만 읽으면 문자와 현실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다. 그러기 때문에 문자를 문자로만 읽으면 안 된다. 또 문자를 기계적으로 적용해도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읽어야 할까?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 즉 낫는다'는 말씀은 믿는 자에게 따르는 권세를 말하는 것이라고 읽으면 좋을 듯싶다.
믿는 자에게는 권세가
주어졌다.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 사용할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다. 사탄을 물리칠 권세, 세상을 이길 권세, 명예와 탐심을 물리칠
권세, 죽음까지도 극복할 권세, 병을 물리칠 권세, 돈에 휘둘리지 않을 권세, 등등 수많은 권세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졌다.
그리스도인은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는 예수님의 권세 안에 있고, 그 권세가 그리스도인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통해 권세가 나타난다. 그런데 마가가 병을 낫게 하는 표적을 언급한 것은 그것이 가장 일상적이고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지 그것이 유일하기 때문에 언급한 것은 아니다. 바울도 말했다. "다 사도이겠느냐? 더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고전12:29-30). 바울이 말한 것처럼 믿는 자라고 해서 모두가 병 낫게 하는 자일 수 없다. 모두가 방언하는 자일 수 없고, 모두가 능력을 행하는 자일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자유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믿는 자에게는 권세가 따른다는 것이다.
이 모든 권세는 표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표적과
관련해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게 있다.
표적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과 같이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기 위해 허락된 것이지 개인의 믿음과
능력을 증거하기 위해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표적을 특정인의 전매특허인 것처럼 내세우면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표적을 사유화하는 것으로서 영적 사기행각이라고 해야 한다. 또한 표적이 표적을 위해 동원되어서도 안 된다. 표적은 오직 하나님나라를 위해 동원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듯 표적은 하나님나라를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끝나야 한다. 손가락은 손가락일 뿐이다. 결코 달이 될 수 없다. 표적도 마찬가지다. 표적은 결코 하나님나라가 될 수 없다. 표적이 하나님나라를 대신하려 들면 그때부터 표적은 하나님나라를 가리키는 고유한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특정인의 전매특허나 종교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권세와 관련해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이 있다. 믿는 자들에게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이 꼭 고난이나 질병이 있어서는 안 된다거나 필요가 없어졌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더 이상 약함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하나님은 선과 복으로 인도하기도 하지만 고난을 통해서 연단하시고 성화시키며 구원하기도 하신다. 고난이 구원의 통로일 경우가 참 많다.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고, 고난을 통해 구원 사역을 이루셨듯이 우리에게도 고난이 유익이 되는 경우가 많다. 약함이 곧 강함인 경우도 많다. 그러기 때문에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이 꼭 약함이나 고난을 제거하는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주께 받은 권세를 통해 약함이나 고난을 극복하고 정복할 수 있다. 아니, 극복하고 정복해야 한다. 권세에는 그런 힘이 충분히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때로, 아니 종종 권세를 무력화시킬 때가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권세의 주체는 내가 아니다. 권세의 주권도 나에게 있지 않다. 권세의 주체는 언제나 하나님이며, 권세의 주권은 하나님의 자유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권세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권세를 주시고, 또 믿는 자들을 통해 권세를 사용하시는 것은 믿는 자들의 유익보다는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기 위해서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책무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선포했다. 온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이처럼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위임한 주님은 제자들에게만 책임을 맡긴 채 훌훌 떠나지 않았다. 하늘로 떠나가신 그분은 보혜사 성령으로 다시 오셨다. 성령으로 오신 그분은 제자들과 함께, 또 제자들을 통해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셨다.
믿는 자들에게 권세도 주셨다. 오늘도 복음을 증거하시는 분은 그분이시다. 그분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으로 오셨고,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되셨으며,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증거하셨고, 지금도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증거하신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듯이 그분의 모든 사역은 오직 하나님나라를 증거하는 것으로 모아진다. 우리의 삶도 예수님처럼 하나님나라를 증거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모든 권세, 모든 은사, 모든 삶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믿는 자의 삶이다. 진정한 제자의 삶이다. 하나님나라가 아닌 나만의 부귀영화는 신념의 세계, 종교의 세계, 자기 암시와 자기 확신의 세계일 뿐 예수의 세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예수의 세계엔 오직 하나님나라가 있을 뿐이다.
1. 귀신을 쫓아내며
눈에 안보이지만 우리 배후에는 귀신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눈에 안 보이는 공기 속에 사는 것처럼 영적인 귀신이 득실거리는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귀신을 쫓아내지 아니하면 귀신으로 말미암아 많은 축복을 빼앗깁니다. 우리는 귀신을 쫓아낼 권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보혈의 능력과 성령의 권세로 귀신을 쫓아낼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더러운 귀신이 있다고 말합니다. 도덕적으로 더러운 환경을 만들고 더러운 생각이 일어나게 하고 더러운 친구를 만나게 해서 더러운 죄를 짓고 부패하게 합니다. 방송을 들어도 더러운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인터넷에도 더러운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잡지도 더럽고 온 세상에 더러운 것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그 더러움의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더러운 귀신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야 됩니다.
또 성경에는 악한 귀신이 있다고 말합니다. 악한 귀신은 악을 가져옵니다. 서로 미워하고 싸우게 하고 해악을 가져오고 평안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악한 남편을 만나면 그 부인은 엄청난 고통을 당합니다. 악은 고통을 가져옵니다. 또 악한 부인을 만나면 남자는 괴롭습니다. 악한 형제는 형제간에 못살게 만들고 악한 이웃은 이웃을 도저히 고통스러워 못살고 이사를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악한 마귀는 악한 환경을 만들고 악한 친구를 만들고 악한 사람을 만들어서 고통을 가져오기 때문에 기도와 믿음으로 악한 마귀를 내어 쫓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회적인 악도 기도로써 물리쳐야 하고 가정적인 악도 기도로써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배후에 원수 마귀가 악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고 “악한 귀신아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고 계속해서 대적하면 귀신은 물러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릴 때 이를 뽑을 때가 있습니다. 그냥 뽑지않고 한 번 흔들고 있다가 또 흔들고 또 있다가 또 흔듭니다. 나중에 흔들흔들하게 되면 실로 이를 묶어 문고리에 걸어 놓고 하나, 둘, 셋하고 잡아 당기면 이가 싹 뽑혀집니다. 마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뽑듯이 자꾸 흔들어야 합니다. 자꾸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 자꾸 흔들어서 나중에 한 번에 호통을 치면 마귀가 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거짓말하는 귀신이 있습니다. 이 거짓말하는 귀신이 들어오면 앉으나 서나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거짓말 하는 배후에는 귀신이 있습니다. 우리들도 거짓말 하면 ‘귀신이 나의 혀를 잡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고 ‘사탄아 물러가라!’고 쫓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병도 대부분 귀신이 줍니다. 의학적으로는 폐병이다, 관절염이다, 심장병이다, 온갖 병의 이름을 말하지만 성경에는 그 배후에 마귀가 눌러서 병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고친 모든 병은 마귀에게 눌린 병이라고 한 것입니다. 마귀가 눌러서 병이 들게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초등학교 다닐 때 먼 산길을 걸어서 논 뜰을 지나서 학교까지 갔습니다. 가다가 길옆에 보면 봄철인데도 풀이 노랗게 떠서 잘 자라지 못합니다. 돌을 옮겨보면 풀뿌리를 돌이 누르고 있습니다. 돌을 옮겨주고 며칠만 지나면 풀이 새파랗게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폐를 누르면 폐병이 되고 심장을 누르면 심장병이 되고 관절을 누르면 관절염이 되고 허리를 누르면 허리 병이 되고 눈을 누르면 눈병이 됩니다. 아마 의학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은 “무식하기 짝이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성경에는 배후의 세력이 우리를 누르기 때문에 병이 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알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약 먹고 수술받고 난 다음에도 또 그 병이 들고 또 병이 들지 않습니까?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도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2. 새 방언을 말하며
새 방언이란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언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성령 충만을 간구하면 성령이 우리를 충만히 채우시고 우리를 통해서 새 방언을 주십니다. 그리고 또 방언의 은사를 받아서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절에 보면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방언을 하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려면 성령 충만하게 해달라고 주님께 간구하고 기도해야 주십니다. 방언기도가 우리에게 유익 되는 것은 내가 마음으로 사람의 말로 할 수 없는 기도를 방언을 통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통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 상달되고 놀라운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구역장 한 분이 내게 와서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어느 부흥회 낮 예배 시간에 참석해서 목사님 설교를 듣고 있는데 설교는 귀에 안 들어오고 마음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머리를 숙여서 방언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목사님 설교가 끝날 때쯤 되니까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이후에 집에 갔는데 저녁이 되니 남편이 새하얀 얼굴로 집에 돌아와서는 “여보 오늘 내가 살아온 것은 기적이야”라고 했답니다.
남편은 시외버스 운전사였는데 시외버스를 운전해 가다가 벼랑 옆을 지나가다가 엔진이 고장이 났습니다. 그래서 버스를 세우고 승객들을 다 내리게하고 돌로 타이어를 받히고 올라가서 핸들을 조작하는데 그만 돌이 빠져 버스가 뒤로 밀려 앞 바퀴 두 개만 벼랑에 달랑달랑 걸렸습니다. 떨어졌으면 큰 사고가 났을 텐데 바로 그때 기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알아보니 바로 부인이 방언으로 기도할 때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도할지 모르고 마음은 다급한데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방언으로 기도하니 하나님의 성령이 직접 기도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우리를 통해서 친히 간구합니다. 우리는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이 없습니다.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은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서 방언으로 기도해 주시므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50년의 목회생활 동안에 수없이 많은 어려운 고비를 겪었습니다. 답답해서 도저히 인간의 말로써 기도할 수 없을 때 엎드려서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30분도 1시간도 2시간도 좋고 계속해서 기도하면 그 마음속에 막힌 담이 헐어지고 답답한 것이 사라졌습니다. 불안과 공포가 사라지며 은혜가 넘쳐나고 하나님의 응답이 다가오는 체험을 수없이 했습니다. 방언기도는 굉장한 효과가 있고 굉장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아직 못하는 사람은 성령 충만하여 방언하도록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3. 뱀을 집어올리며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의 주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치면 뱀의 독도 물러갑니다. 바울 선생이 파선해서 멜리데 섬에 들어갔을 때 추워서 사람들이 다 검불을 모아다가 불을 붙였습니다. 바울 선생도 검불을 잔뜩 손에 쥐어서 불에 던지려고 보니 맹렬한 독사가 손에 물고 달렸습니다. 멜리데섬 사람들이 바울을 보고 난 다음 “죄를 많이 지었구나. 바다에서는 살아 나왔으나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구나. 육지에서 뱀에 물려 죽는구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뱀을 불에 털어 버리고 손만 턱턱 털어 버렸습니다. 당장 퉁퉁 부어서 쓰러져 죽을 줄 알았는데 끄덕없는 바울의 모습에 멜리데섬 사람들이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신이다. 신! 신이 사람의 몸을 쓰고 나왔다”고 놀라워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앞으로 병자들을 불러와서 안수 받게 해 수많은 병자들이 고침을 받은 기적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연히 뱀에게 물렸을 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뱀의 독도 물러가는 것입니다. 뱀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꾀인 것도 이 뱀 아닙니까? 마귀가 뱀 속에 들어가서 아담과 하와를 꾀어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선악과를 따먹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도 이 뱀인 원수 마귀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거짓말 하고 우리를 속이고 우리에게 사기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뱀을 잡는다는 것은 거짓을 버리고 진리를 따라 살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거짓과 진실을 분별하는 지혜를 하나님이 주십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속에 모시고 예수 중심으로 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면 언제나 뱀을 잡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뱀이 우리에게 와서 거짓말을 해도 우리는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어리석게 보이더라도 예수님 말씀은 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참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거짓에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4. 해(害)를 받지 아니하며
한국전쟁 이후에 가정이 다 파괴되어 많은 어린 소녀들이 창녀로 팔리던지 남의 집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흥회를 하는데 14살 내지 15살 되는 소녀가 입술에 전부 피가 묻었고 피멍이 들고 갈라졌고 너무 말라 뼈만 남은 상태로 나타났습니다. 기도 받으러 왔기에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물어보니 그는 전쟁 고아로 남의 집에 들어가서 식모 노릇하고 밥을 얻어 먹고 사는 아이였습니다. 이 소녀는 옛날부터 예수를 잘 믿었습니다. 주일에 꼭 교회가고 새벽기도회도 나가니까 그 집 주인이 불교를 믿으므로 이 아이를 굉장히 싫어하고 미워하여 채찍으로 때리고 나가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에 자다가 너무나 목이 말라서 물이 마시고 싶은데 문소리를 내다가는 주인에게 큰 혼이 나기 때문에 조심 조심 부엌에 가서 더듬거리며 그릇에 담긴 물을 찾아 먹었는데 그 물이 양잿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쓰러졌습니다. 전쟁 때이니 주인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이가 양잿물을 마시고 쓰러져 있기에 그냥 길거리에 내버렸습니다. 그런데 안 죽고 살아났습니다. 살아나서 구걸하고 밥을 얻어 먹다 부흥회에 왔습니다. 그래서 루피 리처드 선교사님이 데리고 병원에 데려갔습니다. 병원에 데려가서 조사를 해보니 입술만 탔지 식도도, 위장도 타지 않은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께서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독을 마시면 큰일 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되고 우리가 실수로 독을 마셨으면 예수 이름으로 우리가 대적하면 독을 물리쳐 주시고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독보다 인간관계 속에서 체험하는 언어의 독이 더 무섭습니다. 분노와 절망을 일으키는 말을 들었을 때 예수님 이름으로 물리치면 독이 사라집니다. 분노와 절망을 일으키는 말을 하거나 들으면 사람은 독이 오릅니다. 사람이 독이 오르면 얼굴이 시빨개지고 이성을 잃어버리고 흉악하게 행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독이 올랐을 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고 대적하면 독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모간 블레이즈라는 사람이 쓴 글입니다. “나는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힘과 기술이 있다. 나는 상대방을 죽이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다. 나는 가정과 국가 그리고 어떤 조직도 파괴할 수 있고, 수많은 사람을 파멸 시킬 수 있다. 아무리 순결한 사람이라도 내게는 무력하고 아무리 깨끗한 사람이라도 내게는 더럽다. 내 이름은 비난이다” 비난은 치명적인 타격을 갖다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파멸시키고 절망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입술에서 나오는 욕이나 비난이나 부정적인 공격은 어마어마한 독입니다. 쥐 잡는 독보다 더 무서운 독입니다. 자기는 지나가는 말로 뱉었지만 말로써 사람을 죽이고 말로써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부부간에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힘을 주면 굉장한 보약이 되지만 비난하고 공격하고 욕을 하면 독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이 다 우리를 그렇게 대해 주나요? 우리에게 독약을 먹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고 대적하면 독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5. 병을 치료함
우리 기독교 신앙은 치료하는 신앙입니다.
성경에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할 때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 친아버지인데 그 친아버지가 의사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의사가 되시고 예수님이 우리의 치료자가 되심을 수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25절로 26절에 “네 하나님 야훼를 섬기라 그리하면 야훼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기독교는 병 고치는 종교입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야훼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임이라”고 말씀합니다. 치료하는 야훼이십니다. 예수님도 그의 대속을 통하여 우리를 치료하십니다. 불과 짧은 3년 동안 목회한 예수님은 3년의 3분의 2는 병 고치는데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귀신을 미워하고 병을 고치기를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4:23-24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난 다음에 곧장 귀신을 쫓아내고 병 고치는 일에 열심을 다하셨습니다.
주님은 치료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우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 나오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병 고침을 받고 마귀에서 해방되는 역사를 얻게 됩니다.
우리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하는 예수님의 역사를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의사이시고 예수님도 우리의 의사이십니다.
주님은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반드시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에 “예수께서 그의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증거 하러 가는 사도들에게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라고 말했었습니다.
이제부터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십시오.
성령 충만하고 새 방언기도를 하십시오.
거짓의 뱀을 잡아 내십시오.
언어적인 폭력으로 독이 오를지라도 주의 이름으로 해소하십시오.
병든 자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십시오.
기적이 일어나는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삽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있는 원수 귀신을 대적하여 이기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우리들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