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생물의 정체(요한계시록 4:6∼11)
‘요한계시록’을 ‘계시록(啓示錄)’ 이라고 합니다. 계시록은 비밀이 아닙니다. 비밀(秘密)이란 보여주면 누구든지 알 수 있는 내용을 말합니다. 반면에 계시(啓示)란 보여줄지라도 알 수 없기 때문에 가르치거나 설명해 주어야만 알 수 있는 내용을 말합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비밀록(秘密錄)’이 아니라 ‘계시록(啓示錄)’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전체 내용은 404구절 입니다. 404구절 중에 구약에서 인용한 말씀이 278구절 입니다. 278구절은 대략 68% 분량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려면 구약과 관련된 말씀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어렵다고 말하면서도 구약의 말씀을 읽었을 때는 요한계시록처럼 어렵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에서 계시와 환상은 부분적으로 소개되었으나 요한계시록은 집중적으로 소개되었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연관된 구약의 말씀과 함께 읽어가면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도입 이야기)
어느 장로교회 목사님이 천국 문 앞에서 들어가지 않겠다고 천사와 다투고 있었다고 합니다. 천사가 “왜 천국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느냐?” 하고 물었더니 목사님의 대답이 “천국에 24장로들이 있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장로교회에서는 당회에서 모든 것을 결정을 합니다. 당회는 목사님과 장로님들로 구성된 교회에서 최고의 의결기관입니다. 목사님이 장로님들에게 얼마나 시달렸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겠느냐 하는 우스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지난주일 설교 요약)
지난주일은 ‘하늘 보좌’에 대해서 소개했습니다. 하늘 보좌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들은 세 개의 보석, 무지개, 24장로들 입니다.
세 개의 보석에는 ‘벽옥(Diamond)’은 ‘하나님의 거룩, 의, 빛’을 상징합니다. ‘홍보석(Ruby)’은 ‘하나님의 심판, 구속’을 상징합니다. ‘녹보석(Emerald)’은 ‘하나님의 자비, 은혜’를 상징합니다. ‘무지개(Rainbow)’는 ‘언약’을 의미합니다. ‘24 장로’들은 흰옷을 입고 금 면류관을 쓰고 있는 구약 시대에 성전 제사를 돕기 위하여 제비를 뽑아 선택된 수를 의미하며 동시에 구원받은 성도들을 대표하는 ‘천상적 존재(天上的 存在)’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네 생물의 정체’에 대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먼저 오늘의 본문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한계시록 4:6∼11
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9.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10.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묵시문학이란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후 100년 사이에 형성되었습니다. 묵시문학의 특징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속에 대한 내용을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징의 의미를 바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눈’의 기능은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이 네 생물의 안과 주위에 가득하다는 것은 ‘통찰력’을 말합니다.
오늘의 본문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 구약의 말씀은 에스겔 1:4∼11입니다. 에스겔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에스겔 1:4∼11
4.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5.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6.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7. 그 다리는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마광한 구리 같이 빛나며,
8. 그 사면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있더라 그 네 생물의 얼굴과 날개가 이러하니,
9.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10.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11. 그 얼굴은 이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리웠으며.
요한계시록 4장에서 소개된 네 생물의 정체를 이해하려면 먼저 구약 에스겔서에서 소개한 네 생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에스겔서의 역사적 배경
기원전 597년 여호야긴 왕 시대 유다 왕국은 바벨론의 침략으로 예루살렘 성은 포위되고 유다의 귀족들과 청년들 일만 여명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때 붙잡혀간 포로들 가운데 제사장 부시(멸시)의 아들 에스겔(하나님이 강하게 함) 선지자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에스겔의 나이가 30세쯤 되었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그발 강(경계)가에서 기도할 때 하늘이 열리고 세 개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에스겔 1장). 세 개의 환상이란 ‘네 생물에 대한 환상’과 ‘바퀴에 대한 환상’ 그리고 ‘보좌에 대한 환상’ 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기원 후 90∼96년 경 로마 황제의 기독교 탄압으로 밧모 섬에 유배되었을 때에 환상을 보게 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을 본 때는 기원전 597년이었고 사도 요한이 환상을 본 때는 기원 후 90∼96년 이었으므로 대략 그 시기의 차이는 700년입니다.
첫째, 네 생물의 환상(에스겔 1:5, 10, 참조 4∼14절)
5절,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 그들에게 사람의 형상이 있더라.
10절,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탈무드에서 네 생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사람(Man)은 피조물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존재를 상징합니다.
사자(Lion)는 들짐승가운데 가장 용감한 존재를 상징합니다.
소(Cow)는 모든 가축 중에서 재물과 헌신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소를 ‘송아지’라고 합니다.
독수리(Eagle)는 새(鳥類)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존재를 상징합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복음서를 네 생물에 비유하여 가르쳤습니다.
마태복음의 수신자는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왕으로 오신 메시아라고 하여 마태복음을 ‘사자복음’ 이라고 합니다.
마가복음의 수신자는 로마인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섬기려고(종) 오신 메시아라고 하여 마가복음을 ‘황소복음’ 또는 ‘송아지복음’ 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의 수신자는 헬라인들이었습니다. 헬라인들의 관심은 철학이었습니다. 철학은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로 오신 메시아라고 하여 ‘사람복음’ 또는 ‘인자복음’ 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의 수신자는 모든 인류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라고 하여 ‘독수리복음’ 이라고 합니다.
복음서의 특징으로 표현된 네 생물의 모습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자는 하나님의 통치의 지존하심
송아지(황소)는 하나님의 통치의 능력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의 지혜
독수리는 하나님의 통치의 신속함(탁월함)
그런데 오늘날은 에스겔 선지자 시대처럼 바벨론의 포로가 된 시대가 아닙니다. 사도 요한의 시대처럼 밧모 섬에 유배되는 시대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네 생물을 통해서 오늘의 성도들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을 본문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요한계시록 4:8)
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묵시문학에서 눈은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눈이 가득하다는 것은 통찰력이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임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도행전 1:11). 그런데 하늘로 올라가신 그 예수님은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신다고 하셨습니다(요한계시록 1:4, 16:5, 4:8). 지금 이 자리에서 날마다 우리들이 생활하는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함께 계신다는 믿음을 갖고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하고 들어야 하고 지켜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말씀을 네 생물처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자와 같이 깨달아야 합니다.
사자는 모든 동물들 중에서 가장 힘이 강합니다. 힘이 강하다는 것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한 영적인 힘을 회복해야 합니다. 말씀의 힘과 말씀의 능력은 악한 영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말씀의 능력으로 악을 물리치고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하나님의 말씀을 송아지와 같이 깨달아야 합니다.
송아지와 황소는 예로부터 재산과 부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송아지와 같이 깨닫는다는 것은 말씀에 부요한 신앙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부자가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 말씀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요한계시록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명하여 더러운 귀신아 나오라!
예수님께서는 병든 사람에게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이렇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과 같이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과 같이 깨닫는다는 것은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최고의 지혜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신앙이 지혜로운 성도들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시편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편 8: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하나님의 말씀을 독수리 같이 깨달아야 합니다.
독수리 같이 깨닫는다는 것은 분별력(分別力)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독수리는 높은 하늘에서 땅 위를 기어 다니는 작은 동물 닭과 쥐와 같은 것도 분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순식간에 날아와서 낚아챕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력을 회복하여 악한 영의 가르침과 지배를 받지 않고 거룩한 영의 가르침과 지배를 받아 마지막까지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열왕기상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둘째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앙(요한계시록 4:9∼11)
9.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10.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네 생물들과 24장로들은 하늘 보좌 주위에서 찬양하는 일을 계속합니다.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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