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3월 31일(수)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6:1∼30
묵상을 위한 주제 : 옛적 길 선한 길(16절)
성구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善)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行)하라 너희 심령(心靈)이 평강(平康)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對答)이 우리는 그리로 행(行)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옛적 길 선한 길(the ancient paths & the good ways)”

예레미야 2장부터 6장은 유다의 심판에 대해서 증거 합니다. 특히 3장부터 6장은 멸망한 북이스라엘이 갔던 길을 남유다도 그 길을 가는 것에 대해서 심판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6장을 세 단락으로 구분합니다.
6:1∼8, 남유다 예루살렘의 함락
6:9∼21, 회개의 거부
6:22∼30, 북방에서 오는 침략자(바벨론 제국)

예루살렘이 반드시 무너질 것이므로 “베냐민 자손들아 피난하라”고 외칩니다.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가장 작은 지파입니다. 작은 지파를 명하여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무너질 수 없다며 떠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두 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예루살렘은 높은 고지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해발 827m)
둘째는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이기 때문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믿음은 신흥제국 바벨론에 의해서 처참하게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의식(歷史意識)이 없는 민족(民族)은 반드시 망(亡)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의 역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게 합니다.
오늘의 역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현실과 같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외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예루살렘아 훈계를 받으라(8절)
둘째는 슬퍼하며 통곡하라(26절)
청교도 신앙으로 세워진 나라 미국과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건국된 대한민국 땅에 선지자 예레미야의 외침이 더 크고 더 넓게 전파되어야만 미래가 보일 것입니다. 후손들에게 미래가 보장된 나라에서 평강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계속되기를 소망한다면 이제 믿음의 눈과 귀를 열어 현실을 직시하며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선택하는 일에 후회가 없어야 하겠습니다.

♪ 찬양 /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29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4:1∼31
♦ 묵상을 위한 주제 : 묵은 땅을 기경하라(3절)
♦ 성구 : 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播種)하지 말라.   

오늘은 사순절 제35일, 고난주간 첫째 날 월요일입니다.

“묵은 땅을 기경(起耕)하라(break up your unplowed ground)”
“묵은 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호세아 10:12).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세상이 요지경(瑤池鏡)과 같다고 합니다.
왜 세상이 요지경이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씨앗”에 비유하여 씨앗이 떨어지는 네 종류의 밭을 말씀하셨습니다. 네 종류의 밭은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을 말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결실하는 것을 말합니다(마 13:1∼23).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것은 묵은 땅을 좋은 땅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의 악을 씻어 버려야 합니다.”(14절)
악한 생각이 마음에 오래 머물면 선을 행할 수 없게 됩니다(22절).

마음의 악을 씻는 말씀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야고보서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주의 인자와 자비를 기도하라(시편 51:1∼2)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쫓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악행을 멈추라(이사야 1: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강제로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내가 직접 멈추고 버려야 합니다.
   
왜 마음의 악을 씻어야 할까요?
마음의 악을 씻지 못하면 악이 쌓이고 쌓여 황무지가 되기 때문입니다(26절).

맑은 물이 담겨진 유리잔에 잉크 한 방울이 떨어지면 처음에는 잉크가 흩어지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나 잉크를 한 방울씩 계속 떨어트리면 맑은 물은 잉크 색으로 변합니다.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좋은 땅을 만들기 위하여 묵은 땅을 기경한 후 진실과 사랑의 씨를 뿌리는 일에 성공하여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 은총의 하루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그치고

https://www.youtube.com/watch?v=SWHuskJPqiM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27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3: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15절)
♦ 성구 : 내가 또 내 마음에 합(合)하는 목자(牧者)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知識)과 명철(明哲)로 너희를 양육(養育)하리라. 


어느 개인 병원의 원장으로부터 “내가 내 돈을 주며 사람을 고용하지만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는 의미 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고 만나는 것도 어렵다면 누가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shepherds after my own heart)”가 될 수 있는 비결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은 “내가 믿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 다음에는 나는 예수님이 기뻐하는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명을 주시며 “너희는 나의 백성이며, 나는 너희 왕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계명을 주신 후에는 왕과 백성의 관계를 뛰어넘어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친밀한 관계가 되었고,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렇게 사랑하였는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집을 나간 탕자처럼, 남편을 버리고 떠난 타락한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첫째는 죄를 자복하라(13절)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둘째는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 있느니라(23절)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하나님 마음에 흡족한 사람이 되려면 신앙생활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스바냐 3:17)   

내 삶의 주인은 이제부터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된 나의 삶을 위하여 지혜와 총명을 기도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이사야 11:2∼3a)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지혜와 총명을 기도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의 갈 길 다가도록

https://www.youtube.com/watch?v=VZdMLgChd-8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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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26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2:1∼37
♦ 묵상을 위한 주제 : 두 가지 악(13절)
♦ 성구 : 내 백성이 두 가지 악(惡)을 행(行)하였나니 곧 생수(生水)의 근원(根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貯蓄)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두 가지 악(惡)(Two sins)”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째는 생수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

생수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한 죄를 말합니다.

물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심지어 인간의 생명과 행복과 번영 그리고 구원과 영생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을 버린 것은 죽음이 아니라 완전한 파멸입니다(사 12:3, 55:1, 겔 4:1∼9).

둘째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

스스로 웅덩이를 팠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방나라를 의지한 죄를 말합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물이 귀하기 때문에 수원을 확보하기 위해 흐르는 물을 가두어 놓을 저수지를 막거나 빗물을 모아두기 위해 웅덩이를 팠습니다. 그 웅덩이에 물이 스며들지 않기 위해 석회를 발랐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석회에 균열이가 물이 새어 나가고 맙니다. 유다 백성은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물을 얻기 위해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모든 복의 근원인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살 길을 찾으려고 우상을 좇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터진 웅덩이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필요성을 거부하고 스스로 잘 살아 보기 위해 자신의 지혜를 따라 돈, 사람, 단체 등에 모든 생애를 거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학 1:2∼6, 눅 12:16∼21). 

유다의 우상 숭배하는 모습을 이렇게 탄식합니다(11절)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방 나라를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따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기 전에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믿음의 통찰력(spiritual insight)을 기도합시다.
이 세상은 보는 만큼 알게 됩니다.
이 세상은 듣는 만큼 생각하게 합니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씀을 보고 들으면서 이 세상에 던져진 우리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을 찾아 책임을 바르게 감당하고 세상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곳으로 다듬어가는 일에 보람과 희망과 기쁨을 함께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 찬양 / 내 주는 강한 성이요

https://www.youtube.com/watch?v=mXtv57vLuw8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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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월 25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1:1∼19
♦ 묵상을 위한 주제 : 네가 무엇을 보느냐(13절)
♦ 성구 :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臨)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對答)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면(面)이 북(北)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예레미야”라는 이름은 “일메”와 “야후”의 합성어으로 “여호와가 던지셨다” “주께서 세우신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나라가 멸망해서 왕이 눈이 뽑히고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비참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죽임을 당하고, 심지어 여인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자기의 자식을 삶아 먹는 것도 보았습니다.

예레미야는 기적은 한 번도 행한 적이 없었고 그의 예언도 언제나 절망적이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나라가 망해도 2∼3년만 지나면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70년이 지나야 돌아온다고 예언하므로 사람들은 그를 매국노라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예레미야서를 더 잘 이해하려면 그 배경을 우리나라의 1800년대 후반부터 한일합방인 1910년까지의 역사를 생각해 봅니다. 1905년에 을사늑약이 채결되었을 때, 황성신문의 발행인이었던 장지연선생이 “이날을 목 놓아 통곡한다”는 의미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썼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나라가 기울어가다가 망하는 모습을 보고, 목을 놓아서 울며 써내려간 글이 “예레미야”와 “예레미야애가” 입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What do you see?)
예언서를 읽으려면 상징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합니다.
끓는 가마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가마가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두 개의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살구나무 가지의 환상”과 “끓는 가마의 환상”이었습니다. 12절의 “지켜” 앞에 아라비아 숫자 (1)이라 쓰여 있습니다. 난외에서 “히, 살구나무라는 말과 지킨다는 말의 음이 비슷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살구나무”는 “샤켓(shaqed)”이고, “지키다”는 “쇼켓(shoqed)”입니다. 살구나무는 매화처럼 가장 먼저 피어 봄이 왔음을 알리는 나무였습니다. 살구나무가 봄을 알리는 것처럼 심판이 임박했으니 잘 살펴보라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끓는 가마가 기울어진 것”은 그 안에 있는 것이 쏟아진다는 의미로 심판이 곧 실행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팬데믹(pandemic) 세상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과 같습니다. 시작은 코로나 바이러스이었으나 깨닫지 못하면 더 심각한 변형 바이러스가 사람들을 무너트릴 것이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가 무엇을 보느냐?”

믿음의 눈으로 보고
믿음의 귀로 듣고
믿음으로 행동하게 하소서.

♪ 찬양 /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24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66:1∼24
♦ 묵상을 위한 주제 : 소위와 사상(18절)
♦ 성구 : 내가 그들의 소위(所爲)와 사상(思想)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열방(列邦)과 열족(列族)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榮光)을 볼 것이며.

이사야서 마지막 장을 읽게 됩니다.
이사야서 1~39장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이며 40~66장은 회복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66장은 이사야서의 축소판처럼 ‘심판과 회복’이란 말씀의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1~14절은 악인과 의인에 대해, 15~24절은 심판과 회복에 대해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배교하는 악인에게는 심판이 있고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에게는 회복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대가 열릴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주제는 “소위(所爲)와 사상(思想)”입니다.
‘소위와 사상’이란 “하는 짓 즉 소행(所行)과 생각”을 말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NIV) “행동(actions)과 상상력(imaginations)” 이라고 번역합니다.

사람의 행동은 그의 생각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언어가 사용되고 언어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것은 언어로, 언어는 행동으로, 행동은 습관으로 습관은 인생을 만들어간다고 합니다.

사람의 욕망은 아담과 하와처럼 좀 더 높아지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욕망은 마지막에는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는 본을 보여주시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아주 작고 연약한 나라이며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연약하고 작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강한 나라가 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마치 자기 힘으로 강한 나라가 되었다고 교만해졌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소위이며 사상입니다.
우리도 같은 성향으로 살아갑니다.
일이 잘 되면 내가 잘해서 일이 실패하면 사람을 탓하고 환경을 탓하며 심지어 하나님을 탓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외식적인 일과 생각들을 다 아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자신의 보좌로 땅을 발판으로 삼으실 정도로 높고 크고 위대한 능력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와 생각들을 다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기 때문에 좋은 것이 좋다고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것이 좋은 것이므로 잘못된 것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려고 할 때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찾아 나오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아야 할 하나님이 지으신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것이라는 약속을 기대하며 매 순간마다 거짓이 없는 우리들의 생각과 행동에 의해서 팬데믹 세상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으로 회복하는 은혜를 구하는 복된 하루가 펼쳐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참 아름다워라

https://www.youtube.com/watch?v=XMFR-8-EMjY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23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65: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진리(眞理)의 하나님(16절)
♦ 성구 :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自己)를 위(爲)하여 복(福)을 구(求)하는 자는 진리(眞理)의 하나님을 향(向)하여 복(福)을 구(求)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盟誓)하는 자(者)는 진리(眞理)의 하나님으로 맹세(盟誓)하리니 이는 이전(以前) 환난(患難)이 잊어졌고 내 눈앞에 숨겨졌음이니라.
  

“진리의 하나님(the God of truth)”이란 “아멘의 하나님((the God of amen)”을 말합니다. 진리의 하나님에 아라비아 숫자 1자를 따라 난외의 주를 살펴보면 고린도후서 1:20, 요한계시록 3:14이라고 표기합니다. 난외의 주를 따라 “아멘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아멘(고후 1:20b)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아멘”이라고 화답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믿음의 결단과 고백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가리키는 아멘(계 3:14b)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

예수님은 아멘으로 세상에 오셔서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하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신 하나님과 동등한 창조의 근본입니다.

셋째는 진실의 아멘(요한복음 5:24a)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의 화법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진실로 진실로”는 “아멘 아멘 레고(내가 진실하게 말한다)” 라는 표현을 번역한 것입니다.

“아멘”이란 용어가 주로 찬송가를 마칠 때, 기도를 마칠 때 또는 설교를 듣고 마음으로 감동할 때 “아멘”이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아멘”을 너무 강조하여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멘”이란 “동의 한다” “그렇게 이루어 질 것은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멘”을 바르게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 찬양 / 신자되기 원합니다(518장)

https://www.youtube.com/watch?v=GllpAWnYa8Y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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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22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64:1∼12
♦ 묵상을 위한 주제 : 선대(善待)와 진노(震怒)(5절)
♦ 성구 : 주(主)께서 기쁘게 의(義)를 행(行)하는 자(者)와 주(主)의 길에서 주(主)를 기억(記憶)하는 자(者)를 선대(善待)하시거늘 우리가 범죄(犯罪)하므로 주(主)께서 진노(震怒)하셨사오며 이 현상(現狀)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救援)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선대(善待)”란 “친절(親切)하게 잘 대접(待接)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노(震怒)”란 “하나님이 죄(罪)를 지은 인간(人間)에 대(對)하여 노여워하고 심판(審判)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진노”를 “angry” 라고 하며, “선대”를 “help”라고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언제 “진노”하실까요?
“범죄 할 때”(5절) 진노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바람같이 몰아칩니다(6절)
하나님의 진노가 소멸시켜버립니다(7절)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의 선대”로 바뀔 것을 기도합니다.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십시오!”(9절)
그러면 이제부터 이렇게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의를 행하겠습니다!”(5절)
“주를 기억하겠습니다!”(5절)
“주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7절)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에 열중하던 백성들에게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깨닫게 하셨듯이 오늘날도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주의 백성들을 깨우치십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쌓아올린 팬데믹 고개를 넘어가면 새로운 광야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날의 거짓된 삶과 헛된 것을 기도하던 자리에서 떠나야 한다. 그리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선대하심을 기다리며 사순절 제29일을 승리하는 하루가 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분명하고 정확하게 체험하는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구원으로 인도하는

https://www.youtube.com/watch?v=i1UbpDjlDtU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20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63:1∼19
♦ 묵상을 위한 주제 : 주는 우리 아버지(16절)
♦ 성구 : 주(主)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認定)치 아니할찌라도 여호와여 주(主)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上古)부터 주(主)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救贖者)라 하셨거늘.

But you are our Father, though Abraham does not know us or Israel acknowledge us; you, O LORD, are our Father, our Redeemer from of old is your name.

(현대인의 성경) 주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과 야곱은 우리를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주는 항상 우리를 구원하시는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십니까?       


“우리 아버지(Our Father)”
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까요?

첫째, 하나님은 영의 아버지(말라기 2:15)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찌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둘째, 하나님은 용서의 아버지(누가복음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셋째,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요한일서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어버이 수령이라고 부릅니다.
어려서부터 아이들에게 육체의 부모는 나를 낳으셨고 길러주시는 아버지는 어버이 수령이라고 가르치며 영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아이들을 세뇌시킴으로 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종교를 탄압하기 때문에 기독교를 핍박합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기독교 말살 정책을 시도합니다. 따라서 북한은 공산국가가 아닙니다.

공산주의는 세습정치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대를 이어가며 통치하므로 공산주의가 아니라 세습 왕조라고 하겠습니다.

역사에도 없는 정치를 시도하는 북한을 찬양하고 지지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자유대한민국을 이상한 나라로 세워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영의 아버지라고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분별력을 갖고 나라와 민족을 위한 바람직한 일군을 선거를 통하여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셨던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구속자(救贖者)가 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고 예수님의 몸과 같은 교회를 인정할 줄 아는 지도자를 선택하므로 후손들에게 자유대한민국을 유산으로 물려주어 “자유대한민국이여 영원 하라!” 이렇게 외쳐 봅시다.

 
♪ 찬양 / 천부여 의지 없어서

https://www.youtube.com/watch?v=AaVIJJINHVc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19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62:1∼12
♦ 묵상을 위한 주제 : 헵시바와 쁄라(4절)
♦ 성구 :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者)라 칭(稱)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荒蕪地)라 칭(稱)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結婚)한바가 될 것임이라. 

No longer will they call you Deserted, or name your land Desolate. But you will be called Hephzibah, and your land Beulah ; for the LORD will take delight in you, and your land will be married.  


(현대인의 성경) 사람들이 다시는 너를 버려진 땅이나 황무지라고 부르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뜻으로 “헵시바”, “결혼을 했다”는 뜻으로 “쁄라”라 부를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너를 기쁘게 여기실 것이며 그가 너에게 결혼한 남편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으로 약속합니다.

버리운 자는 “아주바(Azubah, Forsaken)”라고 합니다.
버려진 땅 황무지는 “셰마마(Shemamah, Sesolate)”라고 합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을 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주바(버리운 자)”이었으며, 예루살렘은 “셰마마(버려진 땅 황무지)”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고향 땅으로 돌아온 백성들을 “헵시바(Hephzibah, 나의 기쁨)”라고 부르고 예루살렘은 “쁄라(Beulah, 결혼한 여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실 때 먼저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창 17:5)
야곱을 이스라엘(창 32:28)
로루하마는 루하마(호 1:6, 2:1)
로암미는 암미(호 1:9, 2:1)  
시몬을 게바, 베드로(마 16:18, 요 1:42)
또한 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롬 8:9)

새 이름을 얻었으므로 그 이름에 합당한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일 믿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지 못할 때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디도서 1:1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야고보서 2:26)

사순절 제27일째 날을 맞이합니다.
사순절이란 기념 절기가 아니라 삶을 결단하고 실천하는 행동하는 절기라고 하겠습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할 신부들의 숫자가 증가하면 할수록 세상은 점점 더 어지럽다고 탄식합니다. 그 이유는 정결한 신부들이 아니라 거짓 신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등과 기름을 준비한 정결한 신부들로 주님을 맞이할 준비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은총의 삶이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 찬양 / 나 어느 곳에 있든지

https://www.youtube.com/watch?v=_IpTk9hOiu4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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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8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61:1∼11
♦ 묵상을 위한 주제 : 구원의 옷(10절)
♦ 성구 : 내가 여호와로 인(因)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靈魂)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因)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救援)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義)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新郞)이 사모(紗帽)를 쓰며 신부(新婦)가 자기(自己) 보물(寶物)로 단장(丹粧)함 같게 하셨음이라.

I delight greatly in the LORD; my soul rejoices in my God. For he has clothed me with garments of salvation and arrayed me in a robe of righteousness, as a bridegroom adorns his head like a priest, and as a bride adorns herself with her jewels.


(현대인의 성경)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로 너가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이 즐거워하는구나. 그가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의 겉옷을 걸쳐 주시니 결혼식을 위해 단장한 신랑 신부처럼 되었구나.     


“구원의 옷(garments of salvation)”이란 모든 죄과를 제하여 버린 후에 입을 수 있는 아름다운 옷을 말합니다(스가랴 3:4). 구원의 옷은 하나님의 의로운 팔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의롭다고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게 된 것입니다(이사야 59:16∼17).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얻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에베소서 2:8).

구원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구원받은 주의 자녀들의 삶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요 14:15).

둘째는 죄를 미워하고 물리치는 삶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죄의 유혹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죄의 유혹이 손짓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를 물리치는 것입니다(요일 3:9).

셋째는 의로운 삶
죄는 어둠을 의미하며 사랑은 빛을 의미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어둠 가운데 머물지 않고 빛 가운데 거합니다.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은 곧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요일 2:29).

넷째는 생명의 삶
생명의 삶이란 육체적인 만족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신령한 삶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삶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요일 3:14).

어둠의 세상을 빛으로 밝히려면 구원의 옷을 입고 나가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밝은 빛으로 찾아가서 신령한 은혜의 삶을 보여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신랑 되신 예수께서

https://www.youtube.com/watch?v=2mlMA_YA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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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7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60: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빛을 발하라(1절)
♦ 성구 :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Arise, shine, for your light has come, and the glory of the LORD rises upon you.    


(현대인의 성경) 예루살렘아, 일어나서 태양처럼 빛나라.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비치고 있다. 


이사야 59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온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60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받아 그 빛을 온 세상에 드러내야 할 사명을 말씀합니다.

빛을 발하는 것을 “발광체(發光體)”라고 하며, 자연계에서 발광체는 “태양(太陽)”을 말합니다. 빛을 발할 수 없는 것을 “비발광체(非發光體)”라고 하며 “달”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달과 같이 태양의 빛을 받아 빛을 발하는 것처럼 구속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빛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진리의 빛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빛을 발할 수 없는 존재가 빛을 발하려면 먼저 빛을 흡수할 수 있는 존재로 다듬어지기 위하여 감추어진 죄악을 모두 쏟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인에게는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시편 90:8)

빛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죄가 드러나면 그 죄를 뉘우치므로 하나님을 아는 일에 열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호세아 6:3)
여호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지식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요한일서 2:9∼10)

형제를 사랑하는 빛으로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비출 때에 드디어 빛 가운데 행한다고 말합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7)


성경은 죄에서 깨끗하게 하셨을 때를 다양한 모습으로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할 때 아들을 대신할 예비한 제물을 얻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타지 않는 불로 임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에 가득찬 구름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았습니다.
에스겔은 구름 속에서 빛으로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오늘 빛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받아 세상의 빛으로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원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이사야 60:21∼22)

♪ 찬양 / 사랑하는 주님 앞에

https://www.youtube.com/watch?v=Q9mUD99NS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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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내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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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6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59:1∼21
♦ 묵상을 위한 주제 : 분리(分離)(2절)
♦ 성구 : 오직 너희 죄악(罪惡)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罪)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But your iniquities have separated you from your God; your sins have hidden his face from you, so that he will not hear.  


(현대인의 성경) 너희 죄가 너희를 하나님과 분리시켜 놓았기 때문에 그가 너희를 외면하고 너희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는 것이다. 


태양이 하늘에서 밝게 빛나고 있을 깨 갑자기 검은 먹구름이 몰려와 태양을 덮어버리면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처럼 죄는 거룩하고 맑은 하나님을 가려 마치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한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죄는 분리시킨다고 말합니다.

"허물 죄(罪)"라는 한자를 분석하면 "넉 사(四)"와 "아닐 비(非)"가 합성된 것으로 "네 가지 아닌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는 네 가지 아닌 것들을 "불법(不法), 불신(不信), 불의(不義), 불선(不善)" 이라고 합니다.

죄는 법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죄는 의롭지 않은 것입니다(요한일서 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

죄를 선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야고보서 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죄는 구세주가 되신 예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마가복음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정죄를 받으리라.

"죄(罪)"란 한자는 서로 마주보며 사랑하던 두 사람이 미워하면서 등을 돌린 상태를 형상화한 모습에서 유래한 문자입니다.
가볍게 사랑하고 쉽게 헤어지는 풍토에서 진득하게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죄가 들어와서 사랑하는 관계를 끊어버리려고 합니다.
죄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끼어 구원의 은혜를 흔들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에 먼저 사람을 미워하거나 원망하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나도 모르게 숨어든 죄를 찾아내어 죄를 털어버리면 좋은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죄의 네 가지 더러운 성질을 은밀하게 드러냅니다.

첫째는 고착성(固着性)
죄가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 좀처럼 떠나지 않습니다. 지독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괴롭힐 것입니다.

둘째는 발육성(發育性)
죄는 황무지와 같은 땅에서도 마치 잡초와 같이 잘 자라납니다. 마지막에는 욕망의 끝으로 몰고 갈 것입니다.

셋째는 전염성(傳染性)
죄는 누구에게나 쉽게 옮겨갑니다. 누구나 죄의 유혹을 받을 때 죄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없으면 쉽게 무너질 것입니다.

넷째는 파멸성(破滅性)
죄의 결과는 완전히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의 결과를 영원한 죽음이라고 합니다.

한문자 사자성어에 “근묵자흑(近墨者黑)”이란 말은 “검은 것에 가까이 가면 나도 검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날마다 죄를 씻어버림으로 죄가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묵은 죄가 신앙생활의 즐거움을 서서히 빼앗아 절망과 타락의 골짜기로 데려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귀를 대적하는 성령의 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고 성령에 붙잡혀 살아가므로 죄와 싸워 당당하게 이길 수 있는 성령과 말씀의 사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주 믿는 사람 일어나

https://www.youtube.com/watch?v=xT1HDblQkp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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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내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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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5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58:1∼14
♦ 묵상을 위한 주제 : 금식(禁食)(6절)
♦ 성구 : 나의 기뻐하는 금식(禁食)은 흉악(凶惡)의 결박(結縛)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壓制) 당하는 자(者)를 자유(自由)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Is not this the kind of fasting I have chosen: to loose the chains of injustice and untie the cords of the yoke, to set the oppressed free and break every yoke?  

(현대인의 성경)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압박의 사슬을 풀어 주고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며 억압당하는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위한 4대 원리

첫째, 구제(救濟) 마태복음 6:2-4
대인관계(對人關係)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

둘째, 기도(祈禱) 마태복음 6:5-15
대신관계(對神關係)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마 6:6).

셋째, 금식(禁食) 마태복음 6:16-18
대아관계(對我關係)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마 6:17)

넷째, 보물(寶物) 마태복음 6:19-34
대물관계(對物關係)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19, 21)

이사야 58장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禁食)"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사야 58:5)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그리스도인에게 금식은 단순히 음식 섭취를 중단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억제하는 상징을 통해 자아를 완전히 포기하고 하나님께 나 자신의 생명과 삶을 온전히 맡기겠다는 표현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죄를 회개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회복하겠다는 의지입니다.

밥은 먹지 않지만 금식의 효과에 대하여 의심하고
오락을 찾아 즐기고 일상생활을 그대로 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하겠느냐.


금식에 관한 이야기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40일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하루를 남겨 놓은 39일째 되는 날 젊은 제자 하나가 맛있는 스프 냄새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한 숟가락을 입에 떠 넣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함께 금식을 하던 제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그 젊은 제자를 노려보았습니다.
그 눈길 속에는 유혹에 넘어간 불쌍한 영혼을 향한 애처로움이 아니라 분노에 찬 정죄의 따가운 시선이 들어 있었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았던 제자들은 유혹에 넘어간 젊은 제자를 엄하게 꾸짖어주기를 바라며 스승, 프란체스코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프란체스코는 말없이 수저를 집어 들더니 젊은 제자가 먹었던 스프를 천천히 떠먹기 시작했습니다.
경악의 눈길로 스승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프란체스코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며 기도를 드리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그분의 성품을 본받아 서로가 서로를 참으며 사랑하며 아끼자는 것입니다.
저 젊은이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스프를 떠먹은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를 정죄하고 배척하는 여러분들이야말로 지금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굶으면서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는 실컷 먹고 사랑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프란체스코의 금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사순절을 맞아 프란체스코는 사람이 살지 않는 섬에 들어가 금식하기로 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빵 두 덩이를 가지고 섬으로 건너갔습니다.
사순절 기간이 끝나 다시 배를 타고 갔을 때 프란체스코는 한 덩이 반을 들고 있었습니다.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잊지 않기 위해 금식 기간 동안 빵 반쪽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가 허기를 참지 못해 빵 반쪽을 먹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가 허문 것은 자신의 완벽함이었습니다.
언제라도 잘못 할 수 있는 인간임을 잊지 않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랑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 인격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 때로 종교에 실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떠실는지요?
프란체스코의 빵 반쪽을 기억하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자신의 완벽함을 버리고,
다른 이의 영혼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경건의 폭력을 제거할 수 있다면 우리들의 교회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평화로운 곳이 될 것입니다.

금식에 관한 이야기

신대원 재학 시절 몇몇 학우들이 40일 금식을 하러 기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떼 학급의 대표로 있던 학우가 그들을 찾아가서 이렇게 권면했다고 합니다.
40일에서 하나 부족한 39일에 금식을 마쳐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40일 금식을 하였다고 자랑하는 것보다 주님께서 금식한 날자보다 하루 부족하다는 것에 감사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금식에 관한 이야기

신대원 시절 성령론을 강의하던 강사 목사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어느 여름 기도원을 찾아갔는데 마침 기도원 입구 작은 원두막에 참외를 파는 아주머니가 있어서 참외를 하나 사서 먹고 기도원으로 가려고 자리를 잡았는데 마침 몇 사람이 기도원에서 나오며 참외를 구하려고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 아주머니가 "이 참외 얼마여?" 하고 물었을 때 참외를 팔던 주인이 "예, 한 개 얼마" 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가 "왜 이렇게 비싸요? 시장에 가면 더 싼 가격에 살 수 있는데....." 하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함께 동행하던 한 사람이 "여보시오, 이 사람이 누군줄 아시요?" "이 사람이 40일 금식을 마치고 나온 사람이오" 하더랍니다.
그러자 40일 금식을 했다는 사람이 "참외가 너무 비싸지 않소?"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40일 금식한 후에도 참외 값 비싸다며 불평하는 그 모습에 실망하며 다짐하기를 금식 한 후에도 자기 욕망 절제하지 못하는데 만일 금식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욕망에 붙잡혀 있을까? 생각했다고 합니다.

금식 이야기

아시시의 성자 프란시스는 수도원에 들어가기 이전부터 음식과 의복 및 주거 생활 전반에 걸쳐 절제와 금욕을 철저하게 이행했습니다. 프란시스의 이러한 생활을 보고 수도원의 형제들도 고행과 노동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모두가 조용히 잠들었을 때
누군가 한 형제가 “아이고 죽겠네! 아이고 죽겠네!”하고
소리를 치는 바람에 형제들이 모두 깜짝 놀라 눈을 떴습니다.
프란시스가 등불을 켜들고 “지금 죽겠다고 한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물으니
형제 중 하나가 침상 위에서 매우 괴로운 소리로 “제가 그랬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프란시스가 왜 그렇게 괴로운지를 물었더니 그는 배가 고파 죽을 것같다고 했습니다.
이 형제는 며칠 동안 금식을 하였던 것입니다.

프란시스는 곧 죽을 끓여다가 금식한 형제와 다른 형제들에게도 먹게 했습니다.
금식한 형제만 먹으면 부끄러워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식사가 끝나자 프란시스는 형제들을 향하여 “형제들이여! 고행하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신체에 적당하게 하지 않으면 도리어 해롭습니다.
하나님은 회개를 기뻐하시나 무모한 희생은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사야 58:6)

나의 기뻐하는 금식(禁食)은 흉악(凶惡)의 결박(結縛)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壓制) 당하는 자(者)를 자유(自由)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결박당한 자 풀어주며, 굶는 사람 먹이는 것,
떠돌이를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이에게 옷을 입혀주는 것,
도움을 필요로 하는 동포를 도와주는 것


“금식”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
예수님 당시에 어떤 사람들은 금식하는 것을 자랑하려고 일부러 얼굴을 흉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경계하여 말씀하기를 금식하는 표시를 나타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철저하게 자기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드러내는 것을 금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이란 말씀에서 기뻐하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바훌" 이라고 합니다.
"바훌"이란 "시험하는, 선택하는, 인정하는" 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기뻐하는"이 아니라 "인정하는" 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금식은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은 애급에서 430년 노예생활을 경험한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벨론이 포로가 되어 70년 동안 또다시 포로가 되어야 합니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노예가 되어 500년을 지옥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430년의 경험을 근거로 70년을 노예생활을 하면서 깨닫는 것은 금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0월 금식, 4월 금식, 5월 금식, 7월에 정기 금식일로 정하고 금식을 했습니다.
이렇게 70년 동안 금식을 하면서 금식의 의미가 이상하게 변했습니다.
단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선지자 이사야는 금식의 의미를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사야 58:3-6

3.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5.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이라 하겠느냐
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도 계속 금식을 해야 되는지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스가랴 7:1-6).

 "다리오 왕 사 년 구  곧 기슬래 월 사  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  종자를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여러 해 동안에 행한 대로 오월간에 울며 재계하리이까 하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오 월과 칠 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 전혀 자기를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스가랴 8:16)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금식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이러한 금식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사야 시대에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다시 이사야서로  돌아가면,  그런 형식적인 밥을 굶는 금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무겁게 맨 멍에를  벗겨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금식이라고 한 것이다.

노예로 끌려와 압제 당하는 자의 멍에를 끌러주고, 어려운 사람,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을 보면 동정심을 발하여 도와주고, 어려운 형제 자매가 찾아오면 외면하지 말고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금식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밥을 굶는 금식을 기뻐하는 분이 아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 자'는 바로 이사야 58장에서 언급한 무리들, 즉 힘없고 연약한 자들, 배고픔에 주린 자들, 집 없이 유리하는 자들, 입을 옷이 없이 추위에 떠는 자들을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시면서 그런 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예수께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는가?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교회는 반드시 헌금의 일부를 이런 자들에게 돌려야 한다. 그런 선한 삶은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소리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동네 방네 나팔을 부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그렇게 삶을 사는 자들은 그날 주님의 오른 편에 설 하나님의 양들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선교와 구제이다.
땅끝까지 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지상명령의 준행과, 어려운 이웃에게(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푸는 구제가 바로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양들이 해야 할 일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잘못된 금식의 유래는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아합 왕의 기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합은 나봇이라는 농부에게 죄를 뒤집어 씌어서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아합에게 저주를 선언하였습니다.

나 주가 말한다. 네가 살인을 하고, 또 재산을 빼앗기기까지 하였느냐?
나 주가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바로 그곳에서, 그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열왕기상 21:19)

아합은 예언자의 신탁을 받고, 무서워서 덜덜 떨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합은 금식하며 옷을 찢고 맨몸에 굵은 베옷을 걸치고 눈물로 회개하였습니다.
아합은 누울 때에도 굵은 베 옷을 입은 채로 눕고, 또 일어나서 거닐 때에도 슬픔에 잠겨 힘없이 걸어 다녔다고 합니다.
그의 금식기도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드리는 회개기도에 대하여 마음을 돌이키시고 징벌을 거두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인격의 하나님은 아합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용서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미담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잘못한 일이 있을 때, 아합처럼 금식기도를 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백성들의 금식기도는 지나치게 형식화되고 금식과 기도의 진정성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베옷을 입고 거리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이 백성들의 자랑거리가 되었고, 급기야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금식이 아니라, 하나님께 용서를 강요하는 주술이 되고 말았습니다.

금식과 기도가 너무 형식적이라 잘못되었다고 하면,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보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금식을 합니까?
하나님께서 알아주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행을 하겠습니까?”라고 항변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응답이 보장되어야 금식을 하겠으며, 사람들이 인정해 주어야 기도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언자 이사야에 의하면, 그들은 한쪽에서는 베옷을 입고 금식기도를 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향락을 즐기고, 일꾼들을 혹사시키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금식하면서 이웃과 주먹질을 하고,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소리치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사야는 진정성이 없는 그런 형식적인 금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런 가식적인 금식은 당장 집어치우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마도 처음에는 아합 왕처럼 눈물의 금식기도를 통하여 지은 죄를 용서받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생생한 리얼리티는 점차 추상적이고 형식적으로 바뀌고 말았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스토리텔링은 점차 관념적인 구호로 변질되고, 사람들은 믿거나 말거나 때가 되면 조상의 예를 따라 지극히 관습적인 금식과 기도를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날마다 우리와 대면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신앙생활의 대전제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신의 죽음을 운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예배행위마저도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도구로 이용하려고 하고, 인격의 하나님마저도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박제화된 주술적 도구로 만들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치고 또 외칩니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으며, 주님께서 너희를 기쁘게 반기실 날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5-6)”

죄의 현실 앞에서도 통회하고 괴로워하기를 기피하고, 오히려 위선적인 태도로 하나님께 용서와 사랑을 강요하는 인간들을 향하여 예언자 이사야는 진정한 금식을 선포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6-7)”

예언자 이사야는 금식이라는 신앙행위가 위선적이고 형식화된 것을 통탄하며 금식의 참 뜻을 말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관념적 구호가 아니라 행위적 실천이라는 것이며, 주술적 기도가 아니라 고백적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개인적 에고이즘이 아니라 사회적, 집단적 실천행위라는 것입니다.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금식의 참 의미라는 것이며, 기도를 통하여 성취할 수 있는 신앙적 가치이라는 것입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자신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금식의 실천적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자 이사야의 해석은 얼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신앙인들의 금식기도가 낮은 차원의 소박한 사회적 구제로 연결되는 경우는 있을 수 있지만, 금식이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는 것과 같은 사회적 구원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신앙인들의 금식기도가 사회적 문제를 푸는 데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요?

신앙인들의 진정한 금식행위는 분명히 오늘의 사회적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회적 정의는 우리 자신의 지위를 포기하는 곳에서 시작되고,
경제적 정의
는 우리 자신의 부를 나누는 곳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기독교의 금식과 기도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 땅이 남과 북으로 분단된 후에 남한에는 먹을 것이 너무 많습니다.
북한에는 먹을 것이 너무 없습니다.
심지어 중국에 불법적인 북한 동포들이 인권을 유린당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2021년 부활주일을 팬데믹이란 사슬에 묶여 맞이합니다.
이런 분위기가 고통 받는 사람들을 나의 이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3월 29일(월)부터 4월 3일(토)까지 고난주간(苦難週間)으로 지킵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하루에 한 끼씩 금식하며 금식한 한 끼 식사에 해당하는 금액을 결정하고 헌금으로 모아 북한 사역을 위하여 사용하려고 합니다.

저희들이 매월 후원하는 “유진벨 재단”과 “모퉁이돌 선교회”를 후원하는 사역에 조금 더 보탬이 되려고 합니다.

어서 속히 중국과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이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 그 날을 기도하며 기다립니다.
북한 지역이 공산화되므로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피난 내려온 성도들에 의해서 한국교회는 급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중국과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이 자유를 얻어 안일한 신앙생활에 만족하는 남한교회와 성도들에게 신앙의 본이 되어 자유대한민국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그 날을 기다리며 기도합니다.

예수 한국, 복음 통일을 이루어 자유대한민국이 세게 선교의 전진 기지로 쓰임 받는 그 날을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합시다.

♪ 찬양 / 사랑하는 주님 앞에

https://www.youtube.com/watch?v=Q9mUD99NSJo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3

15

이사야 58:1∼14

금식(禁食)(6절)

3

16

화 

이사야 59:1∼21

분리(分離)(2절)

3

17

이사야 60:1∼22

빛을 발하라(1절)

3

18

이사야 61:1∼11

구원의 옷(10절)

3

19

이사야 62:1∼12

헵시바와 쁄라(4절)

3

20

이사야 63:1∼21

주는 우리 아버지(16절)

3

21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3월 13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57:1∼21
♦ 묵상을 위한 주제 : 통회하는 자의 마음(15절)
♦ 성구 :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痛悔)하고 마음이 겸손(謙遜)한 자(者)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謙遜)한 자(者)의 영(靈)을 소성(蘇醒)케 하며 통회(痛悔)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蘇醒)케 하려 함이라. 
I live in a high and holy place, but also with him who is contrite and lowly in spirit, to revive the spirit of the lowly and to revive the heart of the contrite.  

오늘은 사순절(四旬節, Lent) 제22일째 날입니다.
이사야 57장은 “우상숭배에 대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우상숭배(偶像崇拜)가 성행(盛行)하는 것은 공의(公義)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인(義人)의 죽음에 관심(觀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의(義)로운 사람이 죽었을 때는 편히 쉼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비인도적 행위를 일삼던 바벨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실 것을 말씀하신 후에 56장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학대와 속임수 등의 비인도적인 행위를 하였으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무시와 불경의 비인도적인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나라가 망(亡)할 정도로 부패(腐敗)할 때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을 찾습니다. 주를 믿는 사람들이 의로운 사람으로 선택(選擇) 받으려면 통회자복(痛悔自服)하므로 나라를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나라 없는 교회(敎會)는 없습니다.
공의(公義)가 실현(實現)되는 나라에 거룩한 교회(敎會)가 세워져서 소금과 빛으로 세상(世上)을 밝히며 부패(腐敗)하며 타락(墮落)하는 그곳에 진리(眞理)가 세워지기를 소망(所望)하며 기도(祈禱)를 멈추지 맙시다.

어둠의 땅에
밝은 빛 비추어
진리의 길 따라
믿음의 행진가를 부르게 하소서

♪ 찬양 / 주의 진리 위해 십자가 군기

https://www.youtube.com/watch?v=XbOKfMZYpAU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12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56:1∼12
♦ 묵상을 위한 주제 : 만민의 기도하는 집(7절)
♦ 성구 :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My house will be called a house of prayer for all nations.   


오늘은 사순절(四旬節, Lent) 제21일째 날입니다.
이사야 56장은 “하나님과 연합(聯合)한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사야 54장은 장차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하나님의 영원한 자비(헤세드)를 말씀합니다. 이사야 55장은 오늘 여호와께 돌아와야 할 은혜를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56장은 여호와께 연합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방인도 하나님과 연합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3절).
하나님과 연합한 백성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첫째는 여호와를 섬기는 백성(6절)
둘째는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는 백성(6절)
셋째는 언약을 지키는 백성(6절)
넷째는 기도하는 집을 찾는 백성(7절)


기도의 자리를 찾으셨습니까?
그 자리를 굳게 지켜내시기 바랍니다.
아직 기도의 자를 찾지 못하셨다면 사순절 기간에 그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내 기도의 자리에 이미 약속된 하늘의 은혜와 은사들이 쌓여 있습니다. 그것들을 사용하여 팬데믹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내 기도하는 이 시간

https://www.youtube.com/watch?v=R_T2s440FaY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