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10월)


오늘의 묵상(10월)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0

1

고린도전서 10:1∼33

신령한 반석(4절)

10

2

고린도전서 11:1∼34

주의 만찬(20절)

10

3

고린도전서 12:1∼31

더욱 큰 은사(31절)

10

4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10월 1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고린도전서 10:1∼33
♦ 묵상을 위한 주제 : 신령한 반석(4절)
♦ 성구 :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And drank the same spiritual drink; for they drank from the spiritual rock that accompanied them, and that rock was Christ 

“신령(神靈)한 반석(磐石) The Spiritual Rock”

사도 바울은 히브리 백성들이 애급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거쳐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영적 생활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메추라기와 만나를 먹은 것은 신령한 음식이라고 합니다.
또한 반석을 쳐서 물이 나와 모든 사람들이 마셨던 것을 신령한 음료라고 합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경배한 것은 간음죄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신랑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한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향한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 죄가 되어 장대에 구리 뱀을 만들어 매달고 그것을 쳐다본 사람은 회복되었지만 거부한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장차 오실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를 상징합니다.
광야에서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은 히브리 백성을 신령한 백성으로 다듬기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전략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창조주 하나님은 거룩한 전략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듬고자 합니다. 전염성이 강한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합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세 가지 기적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을 읽지 않는 기적
둘째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전도하지 않는 기적
셋째는 성경을 읽지도 않고 전도하지도 않으면서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기적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강력한 전염병이 닥쳐오기 전에 우리들의 약점을 지적하는 세 가기 기적을 생각하며 성령 충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는 취약 계층을 위해 기도합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노인들과 만성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지켜주시옵소서.
빈곤층과 혜택을 받지 못하는 취약 계층에게 그들의 필요가 공급될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일을 하고 싶어도 일 할 기회가 없어 삶의 염려에 붙잡힌 사람들에게 노동의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옵소서.

♪ 찬양 / 전능왕 오셔서

https://www.youtube.com/watch?v=tySNuzGINhw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0월 2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고린도전서 11:1∼34
♦ 묵상을 위한 주제 : 주의 만찬(20절)
♦ 성구 :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When you come together, it is not the Lord's Supper you eat.

“주의 만찬(晩餐) the Lord's Supper”    
주의 만찬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성도들이 모여서 떡을 먹고 주의 잔을 마실 때, 떡은 그의 백성을 위하여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합니다. 주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 안의 새 언약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떡을 먹고 주의 잔을 마심으로써 주를 기념하며 주의 만찬에 참여합니다. 이렇게 행하므로 주께서 오실 때까지 주의 죽으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합당한 방식으로 먹고 마시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데, 이는 물질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을 통하여 약속하신 은혜를 확신하며 그 은혜 안에서 함께 성장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의 분쟁의 원인 중 하나가 성찬식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진행하는 성찬예식과는 다르게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만찬에 참여했습니다. 이렇게 진행한 결과 나중에 도착한 사람들은 만찬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지요. 먼저 참석하는 사람들은 생활이 넉넉하고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있던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결과 부유한 계층과 늦게 참석할 수밖에 없었던 소외된 계층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분쟁 소식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주의 만찬은 음식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위한 것이라고 깨우칩니다.

주의 만찬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에게 베푸셨던 유월절 만찬을 생각하며 함께 나누는 거룩한 의식입니다.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것은 주님의 고난에 깊이 참여하겠다는 고백적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곧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오직 주님만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 치료법을 연구하는 과학계 종사자들과 의료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 치료를 위한 백신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혜를 내려주셔서 속히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모든 사람들이 이 질고에서 벗어나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그 날을 맞이하게 하옵소서.
 

♪ 찬양 / 예수 따라가며

https://www.youtube.com/watch?v=5epxlhsh5O0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0월 3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고린도전서 12:1∼31
♦ 묵상을 위한 주제 : 더욱 큰 은사(31절)
♦ 성구 :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But eagerly desire the greater gifts. And now I will show you the most excellent way.

더욱 큰 은사란 "아가페 사랑(agape)"을 말합니다.
왜 아가페 사랑을 더욱 큰 은사라고 하였을까요?
은사란 선물을 말합니다.
"카라" 라는 헬라어는 기쁨을 말합니다.
기쁨이란 카라에서 "카리스(은혜)"라는 단어가 파생하였고, 카리스에서 "카리스마(은사)"라는 단어가 파생합니다.
따라서 은혜와 은사는 기쁨의 열매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에게서 가장 큰 기쁨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청춘 남녀가 서로 만나 교제하다 결혼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이란 희생적인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헌신할 수 있는 힘을 갖습니다.

10월 1일 조카 이동훈목사(Jacob Lee, 36세)를 Long Island Pinelawn 공동묘지에 안장을 했습니다. 조카며느리가 라헬(Rachel, 31세)입니다. 세 명의 어린 자녀들(5세, 3세, 1세)을 생각하면 앞이 캄캄할 텐데 참으로 대견스럽게 하관예식을 지켜보며 꿋꿋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며 사랑의 힘과 신앙의 힘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위하여 나를 버리고 희생할 수 있는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사랑을 지탱하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믿음도 선물 즉 은사라고 합니다.
내가 아무리 믿으려 해도 믿지 못하지만 은사로 주신 믿음은 믿을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합니다.

라헬이 태어났을 때 병원의 간호사가 산모에게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을 것이냐? 라고 물었을 때 마침 비가 오는 날이라 "레인(Rain)" 이라고 하면 어떨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간호사가 그런 이름이 어디 있느냐? "라헬(Rachel)" 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라헬(Rachel)이 야곱(Jacob)을 만났습니다.
버팔로 대학에서 서로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고 믿음이 없는 가정에서 성장한 라헬에게 우리 집안으로 시집을 오려면 반드시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고 하였을 때 기꺼이 승낙하고 결국에는 두 사람이 필라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신학과 기독교 상담 심리학을 마치고 미국교회에 부목사로 부임하여 열정적으로 일을 하던 중 먼저 동훈목사가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며 믿음은 은사로 주어진 것이라고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8)

주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된 믿음의 동지들이여!
아가페적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믿음을 회복하여 남은 때를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누군가를 도울 수 있고 섬길 수 있는 은총의 삶을 위해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팬데믹이란 수용소에 갇혀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내가 젊기 때문에 어떤 질병도 이길 수 있다는 무모한 용기를 버리고 자기 건강을 지키기 위하여 늘 조심하며 질병을 퍼뜨리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옵소서.
또한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돕고자 하는 마음을 자극하여 주옵소서.
  

♪ 찬양 / 나 맡은 본분은

https://www.youtube.com/watch?v=5bb3rVpLcAo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0

 5

고린도전서 13:1∼13

제일은 사랑이라(13절)

10

6

고린도전서 14:1∼40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1절)

10

7

고린도전서 15:1∼58

나는 날마다 죽노라(31절)

10

8

고린도전서 16:1∼24

주께서 임하시느니라(22절)

10

9

고린도후서 1:1∼24

위로의 하나님(3절)

10

10

고린도후서 2:1∼17

그리스도의 향기(15절)

10

11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10월 5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고린도전서 13:1∼13
♦ 묵상을 위한 주제 : 제일은 사랑이라(13절)
♦ 성구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And now these three remain: faith, hope and lov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제일은 사랑이라(The Greatest Love)”
사랑이 가장 위대하다!
믿음과 소망도 중요하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아가페)이라고 합니다.
왜 사도 바울이 사랑을 강조하였을까요?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은사는 초대교회를 부흥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로마서에서 성령의 은사는 핍박 가운데서도 굳게 믿음을 지킬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에베소서에서 성령의 은사는 예수님의 몸이 되는 교회를 바르게 섬길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 성령의 은사는 마지막 시대를 살아야 할 성도들이 믿음을 지킬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에서 성령의 은사는  서로 자기의 은사가 제일이라고 분쟁하는 고린도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특징은 사랑이 식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4:12).

마지막 시대를 살아야 할 우리들에게 사랑이란 가장 위대한 힘이 될 것입니다.
먼저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사랑과 사랑이 부딪치며 소리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며 안타까워하십니다(누가 18:8).
올바른 믿음을 회복합시다.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으로 무장합시다.
등과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등은 모두 갖고 있으면서도 기름이 없으면 등을 밝힐 수 없겠지요?
성령의 도움을 간구하며 오늘은 뉴스를 전달하는 미디어 종사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
국민들을 혼란 가운데로 빠트리지 않는 정확하고 신속하며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 찬양 / 세상 모두 사랑 없어

https://www.youtube.com/watch?v=OtPdHLf3h48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0월 6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고린도전서 14:1∼40
♦ 묵상을 위한 주제 :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1절)
♦ 성구 :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Follow the way of love and eagerly desire spiritual gifts, especially the gift of prophecy.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desire spiritual gifts)”
신령한 것이란 영적 은사를 말합니다.
영적 은사를 사모하되 사랑을 따라야 합니다.
아무리 신령한 은사가 강할지라도 사랑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은사를 받았으면 반드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덕(德)을 세우는 것입니다(고전 8:1)
신령한 은사도 덕을 세워야 합니다.
만일 신령한 은사를 덕으로 덕을 세우지 못한다면 그 은사는 오히려 해(害)가 될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분쟁(分爭)하는 교회이었습니다(1:12).
분쟁의 원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사람이 기준이 된 것입니다.
바울, 게바, 아볼로, 그리스도파와 같은 분파로 나뉘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음행(淫行)하는 교회이었습니다(5:1).
아버지의 아내를 아들이 범하였으나 어느 누구도 그와 같은 일에 대해서 잘못이라고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우상(偶像) 제물(祭物)을 마음대로 사용했던 교회이었습니다(8:1).
믿음이 약한 사람은 우상 제물을 먹을 만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만일 그런 모습을 보면 신앙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차라리 먹을 수 있는 지식과 믿음이 있을지라도 먹지 않을 수 있는 절제가 더 중요하다고 깨우칩니다.

세속적인 사상이 오늘의 교회를 위협합니다.
마치 새로운 이론과 사상을 수용하는 것이 폭넓은 신앙처럼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인 미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하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용납하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 멈출 수 있는 것도 신앙인의 바람직한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정부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공직자들이 자기 맡은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코로나 전염병을 통치 수단으로 사용하여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옵소서.
감염자들에게 신속한 의료지원과 회복을 위한 최고의 서비스가 실현되어 모두가 함께 건강한 사회를 자랑하게 하옵소서.

♪ 찬양 / 전능왕 오셔서

https://www.youtube.com/watch?v=lb6ZWhitJOE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0월 7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고린도전서 15:1∼58
♦ 묵상을 위한 주제 : 나는 날마다 죽노라(31절)
♦ 성구 :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I die every day-I mean that, brothers-just as surely as I glory over you in Christ Jesus our Lord.   

"나는 날마다 죽노라(I die everyday)"
- 카드 헤메란 아포드네스코(καθ’ ἡμέραν ἀποθνῄσκω)(every day I die)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합니다.
왜 날마다 죽어야 할까요?
날마다 살기 위하여 발버둥치는 세상에서 날마다 죽어야 하는 인생은 어떤 사람일까요?

첫째는 죽음과 부활을 믿는 사람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장사지낸 후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와 오백여 형제들에게 나타나셨으며, 야고와 모든 사도들 또한 바울에게도 보이셨습니다.

오늘날도 주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으로 나타나시고 함께 하십니다

둘째는 주의 강림(降臨)을 믿는 사람

강림(降臨)이란 "파루시아(παρουσίᾳ)"라는 헬라어로 "현존(presence)" 또는 "다시 오심(coming)" 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우리들은 아담 안에서 모두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 주의 강림하실 때에 새로운 삶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신령한 몸으로 시작될 것입니다.

자기가 받은 은사가 가장 좋은 것이라며 서로 분쟁하며 다투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바울은 내가 받은 은사는 날마다 죽은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이 주님의 부름을 받고 사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 너무나 크고 놀라운 은혜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팬데믹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으며 심지어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같은 사람을 아직도 건강하게 지켜주신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아직도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며 그 일을 온전하게 감당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사회적 거리를 둘 수 없는 노숙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 노숙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하시고 모든 필요한 것과 충분한 시설이 제공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우리들이 협력하고 도울 수 있는 것을 찾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저희들과 조금 더 가깝게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찬양 /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PWmBJY_d0Y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0월 8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고린도전서 16:1∼24
♦ 묵상을 위한 주제 : 주께서 임하시느니라(22절)
♦ 성구 :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If anyone does not love the Lord a curse be on him. Come, O Lord!   

“주께서 임(臨)하시느니라!”

“주께서 임하시느니라”에 대한 영어 성경을 살펴봅니다.
NIV에서는 “Come, O Lord!”
NASB에서는 “Maranatha”
KJV에서는  “Maranatha”

“마라나타”라는 말은 헬라어를 음역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헬리어 성경에서 “마라나 타(Μαράνα θά, marana tha)”라고 기록한 것을 영어 성경에서 음역에 따라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의 사건을 “초림(初臨, First advent)”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에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본 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재림(再臨, Second Coming)”이라고 합니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는 말씀은 “재림(再臨, Second Coming)”을 말합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초림의 사건 때에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 이 세상에 재림의 메시아가 이미 오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재림의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알려면 그 교회에 소속한 자들만이 알 수 있다고 자랑합니다.

진리(眞理)를 증명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선지자 이사야로부터 그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11:6∼9)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그 때”는 하늘로 올라가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셨을 때를 말합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온갖 동물들과 사람이 서로 어울려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모습이 회복되지 않았다면 재림의 주님은 아직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거짓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위장(僞裝)하고 그럴듯하게 포장(包裝)된 가짜에 의해서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위험(危險)한 요소가 소용돌이치는 세상에서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격리 수용되어 고립되고 불안하거나 무력감을 느끼는 정신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
비록 일시적으로 격리되는 기간일지라도 불안하게 지내야 하는 저희들을 보살펴 주옵소서.
주님께서 강한 팔로 붙들어 주셔서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하시고 이 세상이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전염병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옵소서.

♪찬양 / 하나님의 나팔 소리

https://www.youtube.com/watch?v=e2GGYNfEGKg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0월 9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고린도후서 1:1∼24
♦ 묵상을 위한 주제 : 위로의 하나님(3절)
♦ 성구 :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Praise be to the God and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the Father of compassion and the God of all comfort.   

“위로의 하나님(The father of comfort)”
“위로(慰勞)”란 헬라어로 “파라클레시스(paraklésis, παράκλησις)” 라고 합니다.
“파라클레시스”란 “곁으로 다가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 때문에 곁으로 다가가야 합니까? 돕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첫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둘째는 자비의 아버지
셋째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은 모든 환난 가운데서 위로하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위로를 받은 사람은 모든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능히 위로하십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쳐나게 됩니다.

위로는 격려하는 말로 시작합니다.
상대방을 향한 나의 가장 작은 격려와 칭찬의 말이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큰 용기가 되어 소망의 끈이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어느 성실한 간호사가 있었습니다(그녀의 이름은 ‘뷸라’). 그런데 갑자기 그녀에게 급성 관절염이 찾아왔습니다. 그녀의 몸은 손을 쓸 새도 없이 굳어졌습니다. 오른쪽 손가락의 신경만 살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병상에 누워 하늘과 운명과 세상을 원망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오른쪽 손가락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오른손으로 전화하는 일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뷸라”는 병실에 전화를 설치하고 병상의 환자들과 가족 그리고 친구를 잃고 슬픔에 잠긴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전화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자살을 결심한 사람이 새로운 삶을 다짐했습니다. “뷸라”의 전화는 “위로의 전화”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육체의 장애가 오히려 봉사의 기회가 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을 위로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너무 깊숙이 감추어 놓고 잊어버리고 살아갈 뿐입니다.

이제는 팬데믹의 혼돈 속에 갇혀 있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위로가 필요한 사람을 찾아 그 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지혜를 기도합시다.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직자들과 일용직 노동자를 위해 기도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그들이 좌절하지 않도록 하시고,
교회가 자비로운 방법으로 그들을 지원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찬양 / 성령이여 우리 찬송 부를 때

https://www.youtube.com/watch?v=6ffl463-TTo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0월 10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고린도후서 2:1∼17
♦ 묵상을 위한 주제 : 그리스도의 향기(15절)
♦ 성구 :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For we are to God the aroma of Christ among those who are being saved and those who are perishing.

“그리스도의 향기(香氣) the aroma of Christ”

향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더구나 가장 유명한 명품 향수보다 더 좋은 최고의 향수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겠습니다.
과연 그리스도의 향기는 어떤 것일까요?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라고 합니다.
냄새로 생명의 주를 알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리스도를 알릴 수 있는 냄새의 특징을 살펴봅니다.

첫째는 “사랑(Love)”
둘째는 “순종(Obedient)”
셋째는 “용서(Forgive)”

이와 같은 냄새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풍기므로 사망을 따라가는 냄새로부터 생명을 쫓는 냄새로 옮겨가게 할 것입니다.

깊어가는 가을의 문턱을 넘어가는 계절에 짙은 그리스도의 향수를 선물합니다. 모두 향수를 뿌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팬데믹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용기를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감염률이 높은 지역에 있는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전염성이 강한 지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에게
희망의 말씀을 주시고,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찬양 / 성자의 귀한 몸

https://www.youtube.com/watch?v=PfJmoa0yivk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0

12

고린도후서 3:1∼18

그리스도의 편지(3절)

10

13

고린도후서 4:1∼18

질그릇과 보배(7절)

10

14

고린도후서 5:1∼21

하나님과 회목하라(20절)

10

15

고린도후서 6:1∼18

은혜 받을 만한 때(2절)

10

16

고린도후서 7:1∼16

세상 근심(10절)

10

17

고린도후서 8:1∼24

연보(2절)

10

18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10월 12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고린도후서 3: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그리스도의 편지(3절)
♦ 성구 :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You show that you are a letter from Christ, the result of our ministry, written not with ink but with the Spirit of the living God, not on tablets of stone but on tablets of human heart.    

오늘은 미국에서 “컬럼버스 데이(Columbus Day)”라는 공휴일입니다.

공휴일 아침에 읽어야 할 오늘의 묵상을 위한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편지(便紙) a letter from Christ” 라는 주제를 살펴봅니다.

편지는 주로 종이에 쓰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편지 중에 어느 출판사와 작가의 편지를 소개합니다.

작가 빅토르 마리 위고(Victor Marie Hugo, 1802. 2. 26∼1885. 5. 22)가 출판사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단 한 문자로 “물음표(?)”만 적어서 보낸 것입니다.

작가의 편지를 받고 출판사에서는 “느낌표(!)”만 적어서 보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편지의 내용이 무엇인지 이해하셨습니까?

작가는 “이번에 출판한 내 책이 얼마나 잘 파리고 있느냐?” 이런 질문입니다. 출판사는 “너무 많이 잘 팔린다!”는 대답입니다.

이 편지가 세계에서 가장 간단하고 짧은 편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편지”는 종이에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한 것이라고 합니다.

오래 전에 중국 집안 시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능(무덤)과 기념비를 직접 방문하였을 때(1996년) 거대한 돌비에 새겨진 글자가 많이 흐려진 것과 무덤 안에 그려진 벽화들의 색이 퇴색해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아무리 강한 바위에 새겨진 것도 세월이 지나면 흐려지고 지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으로 마음에 새겨진 것은 결코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심령에 새겨진 것은 무엇일까요?

새 언약의 일군(ministers of a new covenant) 이라는 약속입니다.

일군이란 단어를 NIV 성경에서 “minister” 라고 합니다.
“미니스터”란 단어가 정부에서는 “장관(長官)”을 의미합니다.

주를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장관으로 이 세상에 파견된 일군입니다.

인도에서 한 선교사가 어느 크리스천 여인과 이야기를 할 때 두 다리를 몹시 절고 있는 걸인이 동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는 동전과 함께 그들의 언어로 된 전도지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당신의 전도지를 그에게 허비하지 마세요. 그는 결코 크리스천이 될 수 없어요.” 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3일 후에 선교사의 집 문 앞에 나타난 걸인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전도지를 읽은 후에 이곳까지 오기 위해 불편한 걸음으로 8마일의 먼 거리를 걸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구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전도지를 원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전도지를 받은 뒤, 그 집 문 앞에 앉아 몇 시간이고 전도지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에게 성경책을 빌려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세례까지 받고 기독교 서점의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책꽂이의 모든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 장의 전도지가 어떤 사람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먼저 믿은 우리를 통해 무엇을 하실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날마다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생명을 구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 은혜가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팬데믹 시대에 어린 자녀를 둔 가정을 위해 기도합니다.  

만유의 주가 되신 하나님,
부모가 협력하여 자녀를 돌보고
모든 가정이 평안하길 기도합니다.
편부모나 조부모와 함께 생활하는 아이들에게도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처럼
필요한 것들이 공급되고
지원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찬양 / 듣는 사람마다 복음 전하여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0월 13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고린도후서 4: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질그릇과 보배(7절)
♦ 성구 :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But we have this treasure in jars of clay to show that this all-surpassing power is from God and not from us.   

“질그릇과 보배(Jars of Clay and Treasure)”

보배는 복음(예수 그리스도)을 말합니다.
질그릇이란 연약한 인간의 육체를 의미합니다.
질그릇에 보배를 담았기 때문에 질그릇은 깨지기 쉽고 약한 그릇이 아니라 보배로운 그릇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질그릇을 보배로 사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는 이 세상 신을 물리쳐야 합니다(4절)

이 세상 신이란 사탄을 말합니다.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복음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둘째는 예수를 전파해야 합니다(5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예수는 세상의 주가 됩니다.

셋째는 낙심하지 않습니다(8절)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핍박과 괴로움과 난처한 일을 당하며 심지어 죽음에 넘겨질지라도 예수 생명이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속사람의 능력(16절)

세상 신 사탄의 핍박과 유혹으로 인하여 겉 사람은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고 강한 사람으로 세워지므로 질그릇에 담긴 보배의 가치는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몸은 성령의 전과 같습니다(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건강을 관리하려고 운동을 하듯이 성령이 거하는 몸을 관리하는 일에도 관심을 갖고 마음에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로마서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질그릇이 깨어질지라도 두려워하거나 실망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질그릇에 담긴 보배가 깨진 틈새로 새어나와 보배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귀한 생명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조카 이동훈목사님이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생전에 그를 만나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사랑의 손길을 펼쳐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천국에 대한 소망이 분명했기 때문에 비록 일 년 동안 암 투병으로 인하여 육체의 고통은 깊어갔지만 속사람은 영생의 소망이 뚜렷하기에 더 건강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의 씨앗을 뿌렸다는 것을 확인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합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주 하나님의 측량 못할 은혜가 오늘의 묵상으로 신령한 교제에 참여하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하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찬양 / 내 영혼이 은총 입어

https://www.youtube.com/watch?v=jLuhZ5o_yUM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0월 14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고린도후서 5:1∼21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나님과 화목하라(20절)
♦ 성구 :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We are therefore Christ's ambassadors, as though God were making his appeal through us. We implore you on Christ's behalf: Be reconciled to God.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Be reconciled to God!)”
화목(和睦)이란 “서로 뜻이 맞고 정다움” 이란 뜻입니다.
“화목하라(καταλλάγητε)”는 동사 원형은 “카탈라소(katallassó. καταλλάσσω)”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은 “땅의 장막(the Earthly House)”과 “하늘의 집(an Eternal House in Heaven)”에 대한 말씀입니다.

“죽음(死亡)”이란 “땅의 장막이 무너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땅의 장막’이 무너질 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성령(聖靈)께서 보증(保證) 합니다.
둘째는 믿음으로 행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머물 때에 하나님과 화목한 신앙생활을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려면 하나님은 영(靈)이시기 때문에 육신의 몸을 갖고 영의 세계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육신의 몸으로 영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육신의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결정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한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은 “위하는 대상이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위하는 대상이 바뀐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a New Creation)” 이라고 합니다.

산소는 산소이고 수소는 수소입니다.
그러나 산소와 수소가 합쳐지면 전혀 새로운 물로 바뀝니다.
죄인이었던 내가 예수님과 합쳐지면 의로운 사람이라는 존재가 됩니다.
이와 같은 것을 “새로운 변화” 라고 합니다.

뱀은 껍질을 벗어도 뱀입니다.
그러나 누에는 껍질을 벗으면 나비가 됩니다.
전혀 다른 생명체가 됩니다.
하나님과 화목할 때 우리 모두 새로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화해”를 헬라어로 “카탈라게”라고 합니다(롬 5:11, 15, 고후 5:18, 19).
“화해하다”는 헬라어는 “카탈라소”라고 합니다(롬 5:10, 고전 7:11, 고후 5:18, 19, 20).

“카탈라게”는 “완전히”라는 뜻의 “카타(kata)”와 “변화하다”, “변경하다”, “교환하다”는 뜻의 “알라소(allasso, αλλάσσω)”가 합성된 것입니다.

화해란 어원적인 의미는 “양자 간에 불편했던 관계가 어떤 대가를 서로 교환함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변화되어 그 불편했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Reconciliation”이라고 합니다(다시 re + 조정, 회유 conciliation).

고대 그리스의 결혼문서들을 보면, 결혼한 부부의 별거를 “아팔라소(apallasso)”라고 하며, 그들이 다시 합쳐서 화해를 할 때 “카탈라소(katallassó)” 라고 기록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전승에 따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11절에서 별거한 아내는 “그 남편과 다시 화해하도록 하라(카탈라소)”고 권면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화해란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되돌릴 수 없는 단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 및 세계와 완전히 다시 화해하셨다”는 뜻입니다.

화해란 죄 많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호의로 변해서 완전히 적의가 사라진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의 제물로 드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목하려면 십자가 신앙이 분명해야 합니다.

오늘도 십자가 신앙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 되는 화목의 은혜가 모두에게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찬양 /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https://www.youtube.com/watch?v=ePKu-JG1dWE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0월 15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고린도후서 6: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은혜 받을 만한 때(2절)
♦ 성구 :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In the time of my favor I heard you, and in the day of salvation I helped you. I tell you, now is the time of God's favor, now is the day of salvation.  

“은혜(恩惠) 받을 만한 때”

은혜의 특징을 세 가지로 생각합니다.

첫째, 은혜는 받는 것입니다.
둘째, 은혜는 받을 때가 있습니다.
셋째, 받은 은혜는 베푸는 것으로 나눠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혜를 받은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받은 은혜를 나눌 때 세상은 창조의 목적에 따라 회복될 수 있습니다.

“때”를 NIV 성경에서 “시간(time)”이라고 표현합니다.

시간이란 단어를 헬라어로 두 가지로 사용합니다.
하나는 “카이로스(kairos. καιρός)” 라는 시간이며, 다른 하나는 “크로노스(chronos. χρόνος)” 라는 시간입니다.

지난 주간 거실의 벽시계가 멈추었습니다.
고장 난 줄 알고 버리라고 하지만 건전지를 바꿔주었더니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계가 고장이 나서 멈췄어도 시간은 계속 흘러갑니다. 이러한 시간을 “크로노스” 라고 합니다.
 

팬데믹의 시간이 점점 더 길게 늘어나면서 일상생활의 리듬은 깨지고 삶의 패턴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예전의 생활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추구하며 나를 바꾸는 것을 “카이로스” 시간이라고 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 라고 합니다.

로마서 13장 11절에 보면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라고 하셨는데 ‘시기’ 라는 단어도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카이로스를 기회(機會)라고도 합니다.
팬데믹 시기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를 찾아 내 것으로 누리는 기회로 붙잡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찬양 /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https://www.youtube.com/watch?v=sAlN4ylQS84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0월 16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고린도후서 7:1∼16
♦ 묵상을 위한 주제 : 세상 근심(10절)
♦ 성구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Godly sorrow brings repentance that leads to salvation and leaves no regret, but worldly sorrow brings death.    

오늘 말씀에서 두 가지 근심을 생각합니다.
첫째는 세상 근심(worldly sorrow)
둘째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godly sorrow)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NIV 성경에서는 “경건한 근심”이라고 합니다.
얼핏 읽어보면 “근심”이 주제인 것 같지만 사실은 “회개(悔改)”를 강조하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이 물질과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돈과 물질이 아니라 회개라고 합닏아.

“달라스 윌라드(Dallas Albert Willard, 1935. 9. 4∼2013. 5. 8)”라는 미국의 기독교 영성 형성(Christian spiritual formation)에 관한 글로 잘 알려졌던 철학자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죽기 직전에 내 삶은 무엇이 될까?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몇 날 몇 시간밖에 안 되는 이 땅의 실존 중에도 그 분과 동행하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는데, 영원히 그분의 임재 안에 사는 것이 나에게 정말로 편하게 느껴질까?”

천국에 들어갈 것이 끔찍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그 분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히 그 분의 임재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하고 질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변화 없이, 회개 없이 예수를 믿는 것이 진정으로 가능한 일일까요?
변화는 죽어서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연장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구원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는 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참된 회개와 삶의 변화가 없는 신앙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회개는 구원을 얻기 위한 것과 세상과 구별된 삶의 거룩함을 회복하기 위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구원을 얻은 후에는 주님을 닮아가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삶을 회개해야만 합니다.

팬데믹 시대는 기독교인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다듬어지기 위한 특별한 연단의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비록 교회에 모여서 예배할 수 없지만 삶의 자리에서 경건한 예배를 할 수 있다는 영적 자세를 훈련하는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예배 중에 드려지는 헌금에 익숙해 있었지만 비대면 예배를 드리면서도 예배 중에 드리는 헌금처럼 똑같은 방법과 자세로 주님의 것을 주님에게 돌려드릴 수 있는 믿음을 점검하는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결정하는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어디에서든지 어느 때이든지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경건한 근심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 없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 찬양 /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https://www.youtube.com/watch?v=f3AWtl8eC_E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0월 17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고린도후서 8:1∼24
♦ 묵상을 위한 주제 : 연보(2절)
♦ 성구 :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Out of the most severe trial, their overflowing joy and their extreme poverty welled up in rich generosity.   

“연보(捐補)와 헌금(獻金)”
“연보(捐補)”는 “버릴 연(捐), 도울 보(補)”라는 훈(訓)으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하여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어로는 “컨트리뷰션(contribution)”이라고 하며, “함께(con) 돈을 나누어 낸다(allot)”는 뜻입니다.

“헌금(獻金)”은 “드릴 헌(獻), 쇠 금(金)”이란 훈(訓)으로 “드리는 쇠(돈)”이란 뜻입니다.

헌금(獻金. offering)은 성경에서 주로 ‘고르반(qorban)’과 ‘도라(dora)’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고르반”은 “하나님께 드림(레 1:3, 민 31:50, 마 5:23∼24, 막 7:11)” 또는 “예물(레 1:2, 2:1)” “헌물(민 7:10)”이란 뜻이다.

“도라”는 “예물(마 2:11, 5:23∼24, 8:4, 23:18, 19장, 히 5:1, 8:3∼4, 9:9, 11:4, 계 11:10)” 혹은 “헌금(눅 21:1, 4)” 이라고 개역 한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떤 본문에서 사용되든 “고르반”과 “도라”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의미합니다.

“연보(捐補)”의 한자 의미는 “남을 돕기 위해 내어 놓는다”는 뜻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보다는 “로기아(collection, 모금)” “하플로테스(generosity, 관대)” “유로기아(blessing, 축복)”와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를 위한 연보(고전 16:1)” 또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고린도 교회의 연보(고후 9:5)”라는 말에서 연보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보다는 성도를 돕는 일과 교회 간의 물질적 도움을 주는 “코이노니아(친교, 협력)”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은 “연보”라는 말보다는 “헌금”이라는 말로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 이라고 하겠습니다.

파트리스교회의 설립 목적은 선교와 구제를 중요시 합니다.
현재 저희들이 지원하는 기관은 다섯 곳입니다.
북한 결핵 환자를 치료하고 보살피는 “유진벨 재단(대표 인세반회장)”
북한어 성경을 보급하는 “모퉁이돌 선교회(대표 이삭목사)”
뉴욕국제장애인협회(대표 임선숙사모)
뉴욕밀알선교단(대표 김자송)
은퇴 여자 선교사들을 안식관을 건축하는 “세빛 자매회(대표 김화자목사)”

비대면 예배로 인하여 헌금이 원활하게 운영되지 못하고 있지만 매월 꾸준히 후원금을 송금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협조와 후원에 의한 이와 같은 선교와 구제를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를 바쳤는가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얼마나 남았는가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부자가 성전에서 쏟아 붓는 많은 양의 헌금 보다는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바쳤을 때 부자보다 더 많이 드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친 양으로 계산하면 부자가 더 많이 넣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남은 것이 없는 구제와 선교를 위하여 힘차게 달려봅시다!
그리고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채워주심에 감사합시다!

♪ 찬양 /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0

19

고린도후서 9:1∼15

즐겨내는 자(7절)

10

20

고린도후서 10:1∼18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18절)

10

21

고린도후서 11:1∼33

광명의 천사(14절)

10

22

고린도후서 12:1∼21

낙원(4절)

10

23

고린도후서 13:1∼13

자신을 확증하라(5절)

10

24

요한계시록 1:1∼20

속히 될 일(1절)

10

25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10월 19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고린도후서 9:1∼15
♦ 묵상을 위한 주제 : 즐겨내는 자(7절)
♦ 성구 :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Each man should give what he has decided in his heart to give, not reluctantly or under compulsion, for God loves a cheerful give.     

“즐겨내는 자(a cheerful give)”
즐겨낸다는 것은 기분 좋게 바친다는 뜻입니다.

미국 어느 교회의 특별한 집회에 참여 했을 때 아주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예배 인도자가 순서에 따라 헌금하는 시간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모두 즐겁게 헌금합시다.”

모든 성도들이 줄을 서서 강단 앞에 놓여 있는 헌금함으로 춤을 추며 나와서 한 사람씩 헌금을 하고 들어가는 집회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인위적으로 순서에 따라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를 돕기 위한 특별 집회에 참석한 성도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선교에 동참하도록 인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팬데믹(Pandemic)의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질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라 비대면 예배는 지속될 것입니다.

전통적인 예배는 예배하는 장소를 거룩한 곳으로 성역화 했습니다. 그 결과 화려하고 웅장한 예배당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생각하지도 못한 코로나 19의 기습으로 웅장한 예배당은 텅 비어버렸습니다.

마치 그곳에서 예배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자부하던 영적 욕심을 순식간에 무너트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배는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고 그리심 산도 아니라 오직 영과 진실함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팬데믹 시대는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깨우쳤습니다.
예배당보다는 성도들이 흩어져서 생활하는 장소가 더 거룩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 결과 비대면 예배가 계속되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에 시달리는 교회와 사역자들 그리고 선교사들을 생각하며 즐겨낼 수 있는 손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주일마다 감사와 선교 헌금을 바치는 성도들의 손길을 생각하면 감동을 받습니다.

어떤 교인은 매 주일 사랑하는 손자와 손녀의 이름으로 감사 헌금을 바칩니다.

그 헌금에 새겨진 믿음의 어른이 후손들을 위한 사랑과 기도가 진하게 새겨져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모여서 예배하든지 개별적으로 예배하든지 하나님께 바치는 것에 변함이 없다면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영국의 종교개혁자 요한 웨슬리는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헌금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 아니다.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는 믿음은 올바른 회개가 아니다.

오늘의 말씀을 읽으며 나는 어떤 믿음의 사람인가 생각해 봅시다.

몸과 마음과 물질까지도 믿음의 사람으로 신앙의 본이 되는 은혜의 씨앗을 코로나 19에 붙잡혀 팬데믹 수용소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뿌려 봅시다.

♪ 찬양 / 성자의 귀한 몸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0월 20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고린도후서 10: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18절)
♦ 성구 :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For it is not the one who commends himself who is approved, but the one whom the Lord commends. 

“주께서 칭찬 하시는 자(The one whom the Lord commends)”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칭찬은 받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칭찬은 하는 사람도 변화시킵니다.
칭찬은 분위기를 변화시킵니다.
칭찬은 관계를 변화시킵니다.
칭찬을 많이 합시다.

주님께서 칭찬하신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는 교만한 사상을 무너트려야 합니다.
둘째는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셋째는 겉모습 보다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에 링컨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를 지켜 주신 은혜로운 손길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아직까지 성공의 감격에 도취한 나무지 너무도 자신만만해져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생명을 보존하시는 은총을 깨닫지 못했고, 몹시 교만에 빠져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잊었습니다.”

도가니에 은을 넣어서 끓이면 불순물이 제거되고 순수한 은이 나옵니다. 또한 풀무불에  금을 넣어서 재련하면 찌꺼기가 분리되어 순도 높은 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도가니와 풀무가 은과 금을 제련하는 것처럼 칭찬은 사람을 시험하여 평가하는데 쓰이는 시금석과 같습니다. 

칭찬 받을 때 보이는 반응에 우리의 인격과 마음의 자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을 낮추시고 겸손한 사람을 높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칭찬을 받을 때가 가장 위험한 때라는 것을 알고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때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다만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엎드려야 합니다.

주께서 칭찬하신다는 말씀은 주님께서 추천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필요한 자리에 주님께서 추천하므로 그 자리에서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 찬양 / 내 영혼이 은총 입어

https://www.youtube.com/watch?v=jLuhZ5o_yUM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0월 21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고린도후서 11:1∼33
♦ 묵상을 위한 주제 : 광명의 천사(14절)
♦ 성구 :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And no wonder, for Satan himself masquerades as an angel of light.

사탄이 “광명(光明)의 천사(天使)(an Angel of Light)”로 가장하여 나타났습니다. 영들을 분별하지 못하면 누구든지 그 모습에 끌려 다닐 것이 분명합니다.

광명의 천사가 등장한 것은 “가짜 예수를 전하고” “거짓 영을 가르치고” “거짓 복음 전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광명의 천사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려면 항상 마음속에 예수님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를 품는다는 것은 십자가 목걸이와 귀걸이를 몸에 장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깊이 생각하며 그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기 위하여 전적으로 성령의 도움을 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직도 육체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는 호흡이 멈추면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사탄의 유혹에서 벗어나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는 신령한 사람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바울은 말세에 교회 안에 나타나게 될 사탄의 역사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火印)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디모데전서 4:1∼3).

사탄의 시험과 속임수와 공격하는 방법은 항상 그 모양을 바꾸면서 교묘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항상 그 원리는 똑같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사용한 방법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해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의 공격에 대응하는 유일한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로 확실하게 무장하는 것뿐입니다.

현대인들에 쉽게 접근하는 다양한 SNS의 매체를 통하여 잘못된 영상과 정보가 홍수 몰려오듯 밀려오고 있습니다.

귀에 솔깃하고 내 생각과 비슷하고 나를 인정하는 그러한 내용 보다는 내 마음을 찔러 쪼개며 내 양심의 소리를 듣게 하는 진리의 외침에 관심을 갖고 팬데믹 시대에 지금도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주 믿는 사람 일어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0월 22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고린도후서 12:1∼21
♦ 묵상을 위한 주제 : 낙원(4절)
♦ 성구 :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Was caught up to paradise. He heard inexpressible things, things that man is not permitted to tell. 

낙원(樂園. Paradise)이란 단어가 헬라어로는 “파라데이소스(παράδεισος)”라고 하며, 뜻은 “공원(a park), 정원(a garden), 낙원(a paradise).” 이라고 합니다.

기독교(基督敎)를 생명(生命)의 종교(宗敎)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호흡은 세상에서 멈추었지만 죽음 이후에도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을 영원한 생명(永生)이라고 합니다.

“유신론(有神論, Theism)”이란 신(神)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무신론(無神論, Theism)”은 신(神)이 없다고 합니다.
유신론과 무신론의 차이는 단지 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아닙니다.
인간이 알지 못하는 영역 너머에 무엇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신학(神學, Theology)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것을 성경에서 찾아가는 학문입니다.
반면에 과학(科學, Science)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에서 창조의 원리와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는 학문입니다.

신학과 과학은 모두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연구하거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탐구하여 각각에 내재된 계시를 찾고 해석하는 일을 합니다. 띠라서 신학과 과학은 하나님 계시의 다른 측면을 다른 관점으로 설명하는 것일 뿐 결코 서로 배타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마치 신학과 과학은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주장한다고 생각합니다.

낙원이란 세계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낙원으로 옮겨진다는 것을 믿음으로 알고 따르는 것이 신앙입니다.

지구촌교회 이동원 원로 목사님의 둘째 아들 “범”이가 대장암으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동대 Law School과 미국 USC Law School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던 장래가 촉망되던 43세의 젊은이였습니다.

아들의 장례를 마치고 아들 범과 작별하며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께서 열 가지 감사에 대한 간증에서 영감을 얻어 열 가지 감사라는 글을 소개했습니다.

1. 아들이 그 지독한 암의 통증에서 해방되어 감사합니다.

2. 영광의 나라 천국에 입성하여 감사합니다.

3. 그동안 유머가 많았던 아들을 인해 누린 기쁨을 인해 감사합니다.

4. 단 한 번도 불평 없이 자랑만 하던 아내와 애교덩어리 손자를 남겨주어 감사합니다.

5. 어려서 게임을 좋아하더니 게임변호사가 된 것 감사합니다.

6. 아들의 고통을 통해 예수님을 내어주신 하늘 아버지의 고통을 알게하심 감사합니다.

7. 아들의 암 투병을 통해 수많은 암 환자의 고통과 연대하게 된 것 감사합니다.

8. 또한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수많은 부모들의 고통과 연대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9. 아들의 치유를 위해 기도한 수많은 중보 기도자들과 한 지체가 되어 감사합니다.

10. 아들이 간 천국을 더 가까이 소망하게 되어 감사 감사합니다.

(2020년 10월 가을 하늘 아래, 아들 범을 천국으로 보내는 목사 아빠 이동원)

모든 사람은 반드시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다만 그 시간과 장소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죽음 후에 믿음으로 가야 할 낙원을 생각하며 오늘의 시련과 고통 그리고 아픔까지도 믿음으로 용납하며 저 좋은 낙원에서 만날 수 있다는 소망을 갖고 팬데믹(Pandemic)이란 무대 위에서 오늘도 건강하고 행복한 주인공으로 등장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저 좋은 낙원 이르니

https://www.youtube.com/watch?v=GEl3-8J0drc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0월 23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고린도후서 13:1∼13
♦ 묵상을 위한 주제 : 자신을 확증하라(5절)
♦ 성구 :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Examine yourselves to see whether you are in the faith; test yourselves. Do you not realize that Christ Jesus is in you--unless, of course, you fail the test

“자신(自身)을 확증(確證)하라!”
신앙생활을 오래 계속하면 나도 모르게 정말 내가 믿음에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합니다.
다양한 은사를 자랑하고 내가 누구에게 속했는지 분명하게 주장하는 교인들이었지만 그들의 자랑과 주장은 정말 믿음이었을까?

“믿음에 있는지 시험하고(examine) 확증하라(Test)”

“필립 얀시”는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 활동은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니 하나님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필립 얀시’는 그 책에서 여러 사람의 체험을 소개합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몰트만의 체험이 인상적입니다.
그는 독일인으로서 2차 대전 때 징집되어 독일군으로 참전합니다. 그런데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그는 히틀러가 병사들에게 나눠준 책 중에 두 권을 가지고 갔습니다. 괴테의 책과 니체의 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책들은 생과 사가 왔다 갔다 하는 전쟁터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전쟁 중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3년 동안 포로수용소에서 지냅니다. 포로들 중에는 절망감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몰트만은 군목이 전해준 성경을 읽고 큰 위로를 받습니다.

특히 시편 139장 말씀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139:8∼14).

그는 후에 “포로 수용소 철조망 뒤에서도 하나님은 존재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불안 가운데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본래 양자 물리학을 공부하고자 했던 계획을 포기하고 신학을 공부해서 “희망의 신학” 이라는 새로운 장을 개척합니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붙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진정한 희망이라고 합니다.

팬데믹의 전염병이 지구촌 사람들을 공포와 두려움으로 내몰고 있는 때에 내가 정말 믿음에 있는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므로 어려운 때에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몸과 마음으로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가 펼쳐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어려운 일 당할 때

https://www.youtube.com/watch?v=ugfWx_541m4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0월 24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다니엘 1:1∼21
♦ 묵상을 위한 주제 : 뜻을 정하여(8절)
♦ 성구 :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다니엘(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은 왕의 진미(the Royal Food)와 왕이 마시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음으로 자기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결심한 후에 음식을 주관하는 환관장(the chief official)에게 부탁합니다.

다니엘은 제1차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 끌려 왔습니다(기원전 605년 여호야김 제3년(혹은 4년)(1:1 참조). 1차 포로 때는 귀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 왔습니다(1:3).

포로의 신분으로 왕궁에서 왕이 먹는 음식과 포도주를 마시며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굉장한 특권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바벨론 왕이 제공하는 궁중 음식과 포도주를 오히려 먹지 않고 오히려 채식을 하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모든 음식과 마실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다니엘처럼 뜻을 정하고 먹지 않겠다고 약속했을 때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잘못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니엘의 결심은 혼자만의 결정이 아니라 여러 동료들과 함께 왕의 음식을 맡은 관리에게 “열흘” 이란 기간을 정하고 왕의 음식을 먹는 사람들과 먹지 않는 우리를 비교한 후에 판단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 결과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윤택하므로 감독하는 관리가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제공했다고 합니다.

다니엘과 같이 뜻을 정하고 실천한 결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식을 얻게 하였고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셨으며 모든 이상(visions)과 몽조(drewm)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팬데믹 시대에 하나님께서 전염병이란 바이러스를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깨닫기 위하여 다니엘처럼 뜻을 정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서 분명한 것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예배는 예배당에서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입니다.
헌금은 사람 앞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입니다.
전도는 신앙의 선택 과목이 아니라 필수 과목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오늘도 뜻을 정한 다니엘의 승리한 기쁨이 팬데믹이란 지구촌 수용소에 갇힌 모든 성도들에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문이 왕성하게 전달되어 더 많은 생명들이 주님 앞으로 나올 것을  기대합니다.

♪ 찬양 /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https://www.youtube.com/watch?v=O7zmjMpKTMw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0

25

다니엘 2:1∼49

뜨인 돌(45절)

10

26

다니엘 3:1∼30

사람을 구원할 신(29절)

10

27

다니엘 4:1∼37

거룩한 신들의 영(8절)

10

28

다니엘 5:1∼31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25절)

10

29

다니엘 6:1∼28

사자굴(7절)

10

30

다니엘 7:1∼28

큰 짐승(3절)

10

31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10월 26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다니엘 2:1∼49
♦ 묵상을 위한 주제 : 뜨인 돌(45절)
♦ 성구 :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

“뜨인 돌(the Vision of the Rock)”이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돌” 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 묵시문학에서는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뜨인 돌”을 KJV 영어 성경에서는 “a stone was cut out without hands”라고 번역합니다. “손이 없이 잘려 나간 돌” 이란 뜻입니다.

“뜨인”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게자르(gezar)”는 “예언자”라는 뜻과 함께 “채석장에서 돌을 잘라낸다”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뜨인 돌”은 공중에 떠 있는 돌이라는 뜻 보다는 “잘려서 떠내어진 돌”이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손이 없이 잘려 나간 돌” 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붙여서 그 뜻을 생각해보면 “사람의 손이 아닌 하나님께서 잘라내시고 떠내신 돌” 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유대 종교와 헬라 문화와 로마 정치가들이었지만 그들을 사용하여 구속의 일을 수행하시는 최종 결정권자이며 집행자는 메시아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은 하늘의 영역에서 탄생하고 만들어진 돌이 아닙니다. 채석장이라는 세상에 있다가 하나님에 의해 잘려서(십자가) 떠낸 돌(부활) 입니다. 다시 강조해서 말하면 이 돌은 육체를 입고 인성을 가지고서 이 땅에 오신 메시아 곧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상으로 예표 된 인간 정부의 총체(the totality of human government)를 부수기 위해 다시 오실 때에도 변화되신 신성만이 아닌 인성과 함께 오실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들어진 신성한 돌이 아닌 세상에 있던 보잘 것 없는 돌을 떠내어서 이 땅에 다시 보내시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들 때문입니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다니엘 2:35)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를 가득 채웁니다.
뜨인 돌의 확대와 확장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믿는 이들이 함께 몸의 지체들이 되어 한 인격을 가진 한 몸을 이룹니다.
확대와 확장을 이룹니다.
이것이 뜨인 돌이 신성만으로 이루어진 돌이 아닌, 세상에서 잘려서 떠내어진 돌이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뜨인 돌에 주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이 동참하고 동역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항상 뒤에서 따르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앞장  서서 뜨인 돌과 함께 완전히 하나 되어 예수님께서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혼연일체의 신앙인으로 완벽한 팀워크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앞장서는 그 자리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믿음으로 팬데믹의 혼돈을 극복하고 승리하신 주님과 함께 개선가를 부를 수 있는 믿음의 동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 주 예수님,
주님을 진정으로 찬양합니다!

우리를 뜨인 돌에 동참하고 동역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아멘. 주 예수님 오시옵소서(요한계시록 22:20b)

Amen. Come, Lord Jesus!

αμην ναι ερχου κυριε ιησου.


♪ 찬양 / 하나님의 나팔 소리

https://www.youtube.com/watch?v=e2GGYNfEGKg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0월 27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다니엘 3:1∼30
♦ 묵상을 위한 주제 : 사람을 구원할 신(29절)
♦ 성구 :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 터를 삼을찌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남 유다가 망하기 시작합니다.

애급에서 기적같이 광야를 거쳐 약속의 땅에 북에는 이스라엘 남에는 유다나라를 건설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운 나라가 망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망하고 있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망할 수 있습니까?

무리한 교회 건축으로 인하여 대면예배가 금지된 이후에 은행 이자와 융자금을 갚지 못하여 강제 경매로 문을 닫는 교회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교회가 망할 수 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바벨론의 1차포로가 된 귀족들 중에 다니엘과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이란 유능한 젊은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세계 최강의 나라를 지배하는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유다에 침입하여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하던 기구들을 바벨론 신전으로 빼앗아 온 왕입니다.

심지어 두라 평지에 금 신상을 만들어 놓고 엎드려 절하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라고 명령을 내린 지배자 왕입니다.

이렇게 종교적으로 만행을 저지른 왕의 입에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다!”

종교다원주의가 기독교 구원 신앙을 흔들고 있습니다.
대면예배가 금지되면서 비대면 예배가 예배 전통을 흔들고 있습니다.
비대면 예배가 교회 재정을 흔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이 신앙의 현주소라고 하겠습니다.

금 신상에 엎드리지 않은 아벳느고와 사드라과 메삭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명령에 따라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거워진 풀무에 던져졌습니다. 유대의 유능한 젊은이들을 풀무에 던져 넣던 바벨론 군사들은 불에 타 죽었지만 세 젊은이는 불 가운데서 셋이 아니라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풀무 가까이 가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아 불 가운데서 나오라”고 소리칩니다.

세 젊은이는 불에 탄 냄새도 없고 옷도 그을리지 않았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라고 선언합니다.

유다 젊은이들의 믿음과 오늘 우리들의 믿음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종교개혁 이후 믿음이 세속화 된 것은 아닐까요?
마치 전통보다는 현대화라는 근사한 껍질 속에 갇혀버린 현실화 된 믿음에서 단순하지만 오직 구원은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고집스런 전통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행전 4:12) 

종교개혁 503주년 기념일을 맞이하며 개혁의 슬로건을 함께 기억해 봅시다.

첫째,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오직 성경)
둘째,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 오직 은혜)
셋째, 솔루스 크리스투스(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넷째, 솔라 피데(Sola Fide, 오직 믿음)
다섯,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 찬양 / 구원으로 인도하는

https://www.youtube.com/watch?v=i1UbpDjlDtU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0월 28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다니엘 4:1∼37
♦ 묵상을 위한 주제 : 거룩한 신들의 영(8절)
♦ 성구 : 그 후에 다니엘이 내 앞에 들어왔으니 그는 내 신의 이름을 따라 벨드사살이라 이름 한 자요 그의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라.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the spirit of the holy gods is in him)”

“다니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 라는 뜻으로 유대 이름입니다. 바벨론 왕은 ‘다니엘’을 “벨드사살” 이라고 부르게 합니다. ‘벨드사살’이란 “저의 생명을 지킴” 이란 뜻으로 바벨론 즉 이교도식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우상 숭배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바꾸면 그 사람이 우상을 숭배할까요?

참된 하나님의 사람은 아무리 이름을 이교도식으로 바꿀지라도 중심은 절대로 흔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으로 보십니다(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 라는 “다니엘”을 “저의 생명을 지킴”이라는 “베드사살”이라고 부르지만 “생명의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의 중심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습니다.

비록 팬데믹(Pandemic)이란 전염병 수용소에 모두 갇혀 있어도 주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인”으로 구별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로마서 8:9).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환난과 질고 가운데서도 참 평안의 삶을 즐기며 살아갈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꿈을 꾼 후에 그 꿈의 내용을 찾아내라고 모든 술객들에게 명령합니다. 바벨론의 술사들은 왕이 먼저 꿈의 내용을 이야기하면 그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할 수 있지만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자신들의 입장이 난처함을 토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심판자라고 믿는 다니엘은 사람은 할 수 없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선포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신들의 영을 소유한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은혜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1st, 영광의 영이기 때문입니다(베드로전서 4:14)
2nd, 세상을 새롭게 하는 영이기 때문입니다(시편 104:30)
3rd,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영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3:17)
4th,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영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14)
5th, 사람의 속마음을 헤아리시는 영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2:11)
6th,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영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2:3)

팬데믹이란 족쇄로 교회와 세상을 묶어버릴지라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사람들은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종교개혁 503주년 기념일을 맞이하며 개혁의 슬로건을 함께 기억해 봅시다.

첫째,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오직 성경)
둘째,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 오직 은혜)
셋째, 솔루스 크리스투스(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넷째, 솔라 피데(Sola Fide, 오직 믿음)
다섯,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 찬양 / 마귀들과 싸울지라

https://www.youtube.com/watch?v=yWXWmgP_g00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0월 29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다니엘 5:1∼31
♦ 묵상을 위한 주제 :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25절)
♦ 성구 : 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메네 메네 데겔 우 바르신(Mene Mene Tekel Parsin, ופרסין  תקל  מנא  מנא)”

 “우”는 접속사(and)입니다.

"벨사살"은 왕이 아니라 실질적인 권력을 갖고 있는 '섭정자'라고 하겠습니다.
"벨사살"과 그를 따르는 군사들은 쿠데타를 일으켰고 “벨사살”의 아버지 “나보니두스”가 새 왕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나보니두스”는 “느부갓네살”의 딸인 “네르글리살”과 결혼하여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나보니두스”는 달신의 여사제 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달신(moon god Sin)"을 섬기며 바벨론 신 "마르둑"을 무시했습니다.

종교문제로 갈등이 생기자 "나보니두스"는 수도를 아라비아 비옥한 오아시스지역 "Tayma"로 옮기고 바벨론 지역은 아들 “벨사살”을 섭정자로 세웠습니다. 사실 군사적 실권을 “벨사살”이 잡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부왕 나보니두스가 떠난 바벨론은 이제 완전히 벨사살 세상이었습니다.

다니엘서가 연대순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후대의 사건이 앞에 나오고 선대 왕의 기록이 뒤에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사건은 벨사살 마지막 해에 된 이야기입니다.
7장에서 벨사살이 즉위하던 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런 과정을 미리 알고 보면 참고가 될 것입니다.

벨사살이 바벨론에서 왕 노릇한지도 17년이 흐른 어느 날 입니다.
벨사살은 쿠데타로 실권을 잡은 군인출신으로 거칠게 없는 성품이었습니다.

왕은 귀인 1000명을 불러다 잔치를 열고 술을 마시며 놀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자 예루살렘 성전에서 빼앗아온 제사용 금, 은 잔들을 가져다가 대신들과 왕비와 후궁들과 함께 술을 먹고 금, 은, 동, 철,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했습니다.

이때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시"이란 글자를 적은 것입니다.
벨사살 왕은 모든 박사와 술객들과 점장이들을 불러 글자를 해석하는 사람은 자주옷을 입히고 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세째 치리자를 삼겠다고 하였으나 어느 누구도 그 글자를 해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태후(벨사살의 어머니)가 느부갓네살 왕 때 유다에서 잡아온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다니엘(벨드사살)을 불러오게 한 것입니다.

발음과 철자가 비슷한 단어로 “메네”는 “마네(겔 45:12, 스 2:69)”

“데겔”은 “세겔”이며 무게 단위로 1세겔은 11.4g 입니다(삼하 14:26).

“바르신”은 “베라스”의 복수형인데 “베라스”는 “1/2 마네” 라는 뜻입니다.

“마네, 마네, 세겔, 베라스” 세 단어만 가지고는 무슨 뜻인지 젼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다니엘은 이렇게 해석합니다(26∼28절).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보였다”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데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 되었다”

다니엘은 문자를 그대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세 개의 단어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려는 뜻을 드러낸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할 때처럼 하나님의 영이 감동하여 선지자 다니엘에게 그 뜻을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의 신분으로 지배자 벨사살 왕에게 듣기 싫은 해석을 주저하지 않고 정확하고 바르게 알려주었습니다.

“벨사살 왕”은 하나님 눈 밖에 나서 왕권이 떠났고, 왕의 나라 바벨론은 분열되어 메데와 바사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는 듣기 거북한 예언이었습니다.

벨사살 왕은 예언자 다니엘의 책망과 불길한 예언을 듣고도 약속대로 다니엘을 세 번째 높은 치리자로 임명한 것은 지배자 왕으로서 더 우월한 존재를 두려워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벨사살 왕은 그 날 밤 반란 세력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벨사살은 쿠데타를 일으켜 어린 왕 “라르시마르둑”을 살해하고 왕권을 아버지와 나누어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말년에 그 자신 또한 반역에 의해 살해된 것입니다.

벨사살 왕은 하나님을 외면한 참람한 짓을 하다가 그날 밤에 살해되는 비극을 당했습니다. 연회석에 나타난 손가락의 문자와 다니엘의 해석은 기회를 엿보던 반란 세력들에게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반란 세력들은 벨사살 왕이 죽임을 당하고 나라가 “메데”에 넘어간 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가 왕이 되든지 어느 나라가 패권을 잡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통로가 되도록 순종하고 있는가? 그것만이 하나님의 관심사라고 하겠습니다.

인류 역사가 진행되면 많은 사건과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모든 사건과 사고의 주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금번 코로나 19사태는 세상의 변화를 더 이상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바이러스를 매개체로 놀랄만한 변화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지배자가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covic 19)라는 전염병이 지구촌을 펜데믹(pandemic) 수용소로 변화시켰습니다. 가장 작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를 통하여 변화를 일으키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 앞에 높아진 인간의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종교개혁 503주년 기념일을 맞이하며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점검하고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는 “종교개혁자들의 다섯 가지 슬로건”을 통해서 살펴봅니다.

첫째,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오직 성경)
둘째,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 오직 은혜)
셋째, 솔루스 크리스투스(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넷째, 솔라 피데(Sola Fide, 오직 믿음)
다섯,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 찬양 / 빛나고 높은 보좌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0월 30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다니엘 6:1∼28
♦ 묵상을 위한 주제 : 사자굴(7절)
♦ 성구 : 나라의 모든 총리와 수령과 방백과 모사와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율법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려 하였는데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이다.  

“사자굴(Lion's Den)”
다니엘서 6장에 “다리오 왕(King Darius)”이 등장합니다.
메대의 다리오가 왕으로 등극할 때 그의 나이는 육십 이세였습니다.

다리오 왕은 일백 이십 명의 방백을 세웠고 세 명의 총리를 두었는데 다니엘은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다니엘을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합니다. 그러자 총리들과 방백들은 다니엘을 고소할 기회를 얻고자 하였으나 그 어떤 허물도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총리들과 방백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허물을 찾아 다니엘을 고소하려고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 왕 이외의 어느 누구에게나 또는 신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법령을 만들었습니다.

다니엘은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며 감사했습니다.

결국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섬기는 다니엘을 하나님은 지켜주셨습니다.

다리오 왕은 다니엘을 고소한 자들을 사자굴에 던지게 하였고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끌어 올린 후에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라. 그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이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자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다.”고 선포했습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섬기는 사람들을 영원토록 지켜주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2차 코로나 바이러스가 다시 창궐한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피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더욱 더 조심하고 예방 수칙에 따라 조심하며 건강을 지켜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건강하게 살아남는 자들이 주님의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부패한 교회를 개혁한 것처럼 이제는 흔들리는 교회와 무너지는 신앙을 회복하기 위하여 개혁자들의 다섯 가지 슬로건을 다시 새겨 봅니다.

첫째,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오직 성경)
둘째,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 오직 은혜)
셋째, 솔루스 크리스투스(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넷째, 솔라 피데(Sola Fide, 오직 믿음)
다섯,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 찬양 / 환난과 핍박 중에도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0월 31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다니엘 7:1∼28
♦ 묵상을 위한 주제 : 인자 같은 이(13절)
♦ 성구 :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오늘은 “할로윈 데이(Halloween Day)” 이며
“종교개혁 503주년 기념일”입니다.

역사적으로 세계를 변화시키는 사건들 100가지를 선정했던 뉴욕의 타임지에서 가장 놀라운 변화를 일으켰던 사건은 “종교개혁”이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은 가톨릭교회에서 개혁교회가 시작한 것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변화가 시작된 사건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종교개혁 다음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사례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의 변화는 사람이 주인공이 되어 일으킨 사건이었다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사람이 아니라 전염병균이 사건의 주역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는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셨던 창조주 하나님께서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 기대를 갖지 못하므로 바이러스를 사용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되 먼저 교회와 성도들을 바꾸려고 합니다.

“인자 같은 이(like a son of man)”는 장차 오실 “메시아(Messiah)”를 말합니다(단 7:13, 10:16, 계 1:13).

다니엘서 7장에서 “보다(하자)”라는 단어가 10회 사용되었습니다(다니엘서 전체에서 18회 사용). 그러므로 7장에서 집중적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2장에서 소개된 “큰 신상(31절)”을 7장에서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머리는 “정금”(2:32)은 “바벨론”으로 “독수리 날개가 달린 사자”(7:4)

가슴과 팔들은 “은”(2:32)으로 “메대 파사”이며 “세 개의 갈빗대를 문 곰”(7:5)

배와 넓적다리는 “놋”(2:32)으로 “헬라”이며 “네 개의 머리를 가진 표범”(7:6)

종아리는 “철”(2:33)은 “로마”이며 “용처럼 생긴 짐승(7:7)”

발의 얼마는 “철과 진흙”(2:33)으로 “적그리스도”이며 “작은 나팔(7:8)”

“뜨인 돌”(2:34)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통치”라고 하겠습니다.

“인자 같은 이”는 옛적부터 계셨고 미래에도 영원히 통치하실 것입니다.

“인자 같은 이”는 요한계시록에서 구름을 타고 오시는 “심판 주”(1:7)와 같습니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는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의 모습과 같다고 하겠습니다(1:12∼16).

다니엘서의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요한계시록의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같은 맥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잊어버리게 하는 세속의 문화 “할로윈 데이”와 같은 일시적이며 충동적인 즐거움 보다는 영원한 통치가 도래 할 그 날을 기다리는 소망의 신앙을 회복할 수 있는 은혜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붙잡혀 허덕이는 온 세상에 넘쳐나기를 함께 기도합시다.

그리고 흔들리는 교회를 바로 세우려는 개혁자들의 다섯 가지 슬로건을 다시 새겨 봅니다.

첫째,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오직 성경)
둘째,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 오직 은혜)
셋째, 솔루스 크리스투스(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넷째, 솔라 피데(Sola Fide, 오직 믿음)
다섯,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 찬양 / 주 예수의 강림이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