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선교회




TOP 10 미전도종족 국가들 소개

  • 인도(2,444 미전도종족): 가장 많은 신과 함께 사는 나라
  • 파키스탄(501 미전도종족):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과의 끝없는 전쟁
  • 중국(445 미전도종족): 공산주의가 막고 있는 종족 개척
  • 방글라데시(301 미전도종족): 남아시아 이슬람권의 또다른 장벽
  • 네팔(275 미전도종족): 힌두국가를 고집하는 산악 민족들
  • 인도네시아(235 미전도종족): 현대화속에서도 이슬람 수호에 목매는 이들
  • 수단(130 미전도종족): 인종청소의 오명을 쓴 이슬람 정권의 퇴보
  • 러시아(117 미전도종족): 공산주의 망령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 라오스(109 미전도종족): 순수하지만 이데올로기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
  • 이란(84 미전도종족): 시아파 이슬람의 종주국 면모를 보여주는 나라


  • Post published:June 14, 2020

TOP 10 미전도종족 국가들 소개

  • 인도(2,444 미전도종족): 가장 많은 신과 함께 사는 나라
  • 파키스탄(501 미전도종족):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과의 끝없는 전쟁
  • 중국(445 미전도종족): 공산주의가 막고 있는 종족 개척
  • 방글라데시(301 미전도종족): 남아시아 이슬람권의 또다른 장벽
  • 네팔(275 미전도종족): 힌두국가를 고집하는 산악 민족들
  • 인도네시아(235 미전도종족): 현대화속에서도 이슬람 수호에 목매는 이들
  • 수단(130 미전도종족): 인종청소의 오명을 쓴 이슬람 정권의 퇴보
  • 러시아(117 미전도종족): 공산주의 망령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 라오스(109 미전도종족): 순수하지만 이데올로기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
  • 이란(84 미전도종족): 시아파 이슬람의 종주국 면모를 보여주는 나라

무슬림들이 모여 만든 파키스탄

인구가 미국의 60%에 불과한 파키스탄은 인도네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많은 무슬림 인구를 가진 국가이다. 전 세계 무슬림의 10% 이상이 파키스탄에 살고 있다. 2억명의 인구 중 96.28%가 무슬림이다. 

파키스탄에는 많은 수의 미전도종족이 살고 있지만 사실 전국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음에 가려져 있고 선교할 수 있는 여건도 안되어 소수의 선교활동만이 이루어 지고 있다. 전도자도 부족하고 교회 성장도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다.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에서 말씀하신 ‘돌밭’ 같은 땅이 파키스탄일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의 영혼들도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희어져 추수하게 될’ 추수밭이다. 주님께서 보내시는 일꾼들은 이 밭에 가서 성실히 섬기고 일하여 영혼들을 주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인 상황은 모든 선교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지금까지 그랬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미전도종족이 살고 있다. 그럼 어떻게 이 땅을 위해 선교적 접근을 해야할 것이며 기도해야 할까?

이슬람을 위해 세워진 유일한 국가

공식적으로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으로 알려진 파키스탄은 인도(동쪽), 아프가니스탄(서쪽),이란(남서쪽), 중국(북동쪽)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이다. 

파키스탄은 영국 식민지 당시 인도등과 같은 인도 대륙국가였지만 이슬람때문에 이곳으로 이주하여 만들어진 국가이다.그리고 고대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라는 역사적 유산과 힌두교, 불교와 같은 고대 종교의 전통에 뿌리를 둔 문화를 가졌지만 지난 수백 년 동안 이슬람이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슬람 국가가 되었다.

전통에 의하면 주후5 세기경에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파키스탄의 탁실라 (Takshashila) 지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당시에 세워진 교회의 유적은 없다. 지금 남아있는 교회들은 15세기 식민지 확장 시대에  들어와 사역하던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서구교회 스타일을 따른 교회만 남아 있다.

그리고 파키스탄에 있는 교회는 개인적인 회심에 의해 모인 공동체라기 보다는 특정 카스트와 인종에 의해서 구분된다고 할 수가 있는데 기독교인들의 상당수가 19세기, 20 세기 인도에서 있었던 대규모 선교 운동 기간동안 개종한 천민들의 후손들이 대부분이다 . 그리고 또다른 부류는 펀잡 지방의 펀잡인들이 주를 이루는 펀잡 교회인데 그들은 파키스탄 교회라고 부르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펀잡인들의 교회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파키스탄 교회와 성도들의 실정

파키스탄의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상황은 지난 70년 동안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인도와의 지속적인 충돌, 오랜 군사정부 통치, 이슬람의 급진화, 신성 모독법의 악용등으로 파키스탄은 점점 선교가 어려워졌다. 그중에서 신성모독법의 악용은 사회적으로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아시아 비비 (Asia Bibi)’로 알려진 아시아 노린 (Asia Noreen) 사건이다.

신성모독법은 1885 년 영국이 처음 도입한 법이지만 1927년에 개정이 되었다. 처음 영국이 이 법을 도입한 의도는 각 종교간의 증오범죄를 막기위한 것이었는데 인도와 분리 독립한 이후 이것은 이슬람 샤리아법을 정착시키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법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살해를 당하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할 정도로 극단적인 이슬람주의가 뿌리를 내리게 하는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개인 경비원에 의해 살해 된 펀잡 주지사 살만 태저(Salman Taseer)와 Tehrik-e-Taliban에 의해 암살된 소수민족 장관이었던 샤바 즈 바티 (Cshahbaz Bhatti)가 있다. 

파키스탄의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와 소외는 심각하다. 파키스탄 기독교인의 대다수는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으며 극도로 가난하다. 천민들이 기독교로 개종할 때만 해도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탈출의 수단으로 여겨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도 그들은 철저히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정부나 법은 모든 파키스탄인의 동등한 권리와 지위를 약속하지만 실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나라에 살면서도 불안하고 외국인처럼 살아야만 한다. 그들은 2등시민 상태로 주저 앉았다.

경제적 상황도 심각하다. 교회는 기독교 공동체가 경제적으로 상승할 수 있도록 교육과 프로젝트등을 진행하고 있지만 약 25 %만이 사회적으로 안정을 찾고 있고 나머지는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더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위치로 만들려면 이런 기독교인들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실력을 갖추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 

파키스탄에서는 여성들도 가부장제와 사회 문화적 제약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교회내에서는 여성들이 다양한 활동을 하며 여성의 역할을 드러내고 있지만 지도자의 위치나 사역자로서 안수받는 것은 아직도 닫혀 있다. 그것은 지역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선교적 가능성의 문을 열지 못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파키스탄 기독교인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교회에서 성도들의 경제적 상황을 개선하려고 교육과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지만 눈에띄는 결과는 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가 다양한 계층과 종족에게 확산되는 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사람들은 기독교가 하층민, 가난한 자들의 종교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선교적 도전

전술한대로 파키스탄은 고대 인더스 문명뿐만 아니라 힌두교, 불교, 이슬람이라는 주요 종교의 영향을 받은 나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적인 것에 익숙하고 각자 나름대로의 신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그런 사람들에게 담대히 접근하여 토론을 하거나 종교적 대화를 하기 보다는 고립되는 길을 선택했다.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 또는 적대감이 기독교인들 스스로를 막는 담이 되어 버렸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는 길이 장기적으로 파키스탄 선교의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파키스탄 기독교인들에게 선교적 의식을 가르치고 그들이 자국민을 선교하는 선교사라는 사명감을 갖도록 도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슬림과의 종교적 대화에 당당히 응할 수 있는 지식적 훈련도 필요하다. 그런 기회가 있어도 혼합주의나 자기 스스로가 타종교에 물들지 않을까 염려함으로 스스로 피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종교적 벽을 넘어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해야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도 생긴다는 것을 일깨울 필요가 있다. 

선교에서 또다른 어려움은 빈부 격차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파키스탄 기독교인의 대다수는 여전히 하층민으로 남아 있으며,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데 한계를 갖고 있다. 대부분은 일일 노동자로 살아 가면서 쉬는 날이 없이 일을 해야한다.

더더욱 심각한 것은 그들중 상당수가 ‘달러 미션(dollar missions)’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서구 교회들이 가난한 교회 사역자나 기독교인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면서 선교 활동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사회적 영향력을 미칠 수가 없어서 선교적인 열매를 거두는데 한계가 있다. 오히려 경제적 의존성만 키우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역량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한 현지인 사역자는 ‘선교 전략과 계획은 주로 서구에서 개발하고 파키스탄은 그것을 수입해서 시행하는 기지가 되었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자국민 지도자들이 개발되고 훈련되지 않으니 자립적인 사고는 점점 더 할 수가 없고 서구에 종속된 사역만 하는 교회로 전락될 수도 있다고 경고하기도 한다. 

그리고 교회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사역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도 영역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구호, 의료 프로그램, 교육, 여성 프로젝트, 청소년 프로젝트같은 것들로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사랑을 전한다. 물론 그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파키스탄 교회는 그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가난한 하층민 뿐만 아니라 사회 지도층, 경제적인 부유층에도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사역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 그것은 파키스탄 교회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어쩌면 한국교회같은 외부 교회가 도울 수 있는 영역인지도 모르겠다. 

가난한 교회 사역자나 기독교인중 상당수가 ‘달러 미션(dollar missions)’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즉 서구 교회들이 그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면서 선교 활동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사회적 영향력을 미칠 수가 없어서 선교적인 열매를 거두기가 어렵다.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의존적인 기독교인들을 만들어 스스로 자국민 선교를 하겠다는 의지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우를 범하는 경우도 있다.

파키스탄 선교를 위한 기도

탈레반이 이끄는 근본주의 이슬람 세력이 전국적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인등 비무슬림들에 대한 테러를 자행할 뿐만 아니라 시아파 무슬림이나 소수종족까지도 공격을 가하고 있다. 그로인해 국가적인 분열을 극대화시켰고 불안정한 국가라는 오명을 쓰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경제 발전을 저해하여 수백만의 빈곤층을 만드는 결과를 나았다. 

북서부 Swat Valley에서는 반군이 마을과 학교들을 공격해 수천명의 희생자들을 낳았다.  무장 세력은 이 지역을 통제하며 정부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있고 그로인해 이동이 어렵고 선교활동 자체가 진행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정부와 협상하는 과정에서 이 지역에 강력한 샤리아법을 시행하기로 해 기독교인은 물론 무슬림이 아닌 소수 종족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무장세력들은 이러한 예를 다양한 지역으로 확산하려고 한다. 결국 근본주의 이슬람 무장세력들이 국민가적인 불안을 조성하고 있고 선한 사업들까지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세력이 전국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상황에서 또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학교이다. 이들은 정부가 제공하는 정규교육을 거부하고 여자 아이들에게 교육시키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데 그로인해 일부 지역의 학교들이 습격을 받고 폐쇄되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무장단체들은 전국에 이슬람 학교(madrasas)를 세워 공교육보다는 쿠란을 암송하거나 이슬람 교육만 하는 학교로 운영하고 있다. 이 학교는 장기적으로 차세대 근본주의 무장세력들을 동원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전국적으로 20,000여개로 추정)  

이러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에 탄압당하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정부가 통찰력을 갖고 이런 세력들을 상대할 뿐만 아니라 통제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국가 전반에 퍼져있는 이슬람 이외의 종교인들에게 대한 차별과 핍박 문제도 기도해야 할 중요한 제목이다. 1980년대부터 이슬람화된 정책을 추구하면서 비무슬림에 대한 제도적 차별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사회적 빈부격차와 갈등을 확산시켰다. 무슬림이 아닌 사람은 공무원이 될 수 없고, 교육의 기회나 고용의 혜택에서도 불이익을 당했다. 그러면서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이 이슬람으로 다시 개종을 하면 경제적, 사회적 혜택을 베푸는 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이슬람으로 유도하고 있다. 이런 일들이 국가적인 사업이나 공공연한 정책으로 실행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악명 높은 신성 모독법은 무함마드를 모독한 사람에게는 사형을, 꾸란을 훼손한 사람에게는 무기징역을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극단주의자들이 무고한 기독교인들을 이 법에 엮어 핍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지속적인 핍박도 계속되고 있다. 예배중인 교회당을 파괴하거나 성도들을 구타, 살해, 유괴, 강간등의 범죄를 저지르며 개종을 강요하기도 한다. 경찰도 이런 범죄들을 알면서도 대부분 이런 과격파들에게 매수되거나 연루되어 정당한 법집행을 하지 않는다. 

공식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법을 무색하게 하는 폭력적인 사회 구조때문에 기독교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법이 제대로 지켜지고 그리스도인들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국가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핍박과 학대속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끝까지 사랑과 용서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2020년 7월 25일에는 총선거가 치러진다. 기독교인 가운데 출마자는 없지만 여성(60석)과 소수종족(10명)에게 배정된 의석 가운데 약간이 그리스도인에게 배정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근본주의 이슬람 세력은 정치 권력을 장악하고 파키스탄을 더욱 강력한 이슬람 국가로 만들려고 하는데 이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파키스탄은 이슬람공화국이다. 



파키스탄 선교연구의 출발점으로서
첫째 인도대륙의 이슬람 전개와 이슬람 통치를 개관하고자 한다.
둘째로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형성과정을 검토한다.
셋째로 파키스탄 정부의 권력갈등 구조를 이해하고자 한다.
넷째로 파키스탄의 종교들을 간략하게나마 검토한다.
다섯째, 파키스탄의 한국선교사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1.인도대륙의 이슬람 전개와 이슬람 통치

인도대륙의 이슬람 도래는 주로 두 가지 길을 통하여 전개되었다.
하나는 주후 712년경부터 이라크에서부터 동남으로 해안을 거쳐 상인들을 중심으로 들어왔다.
초기에는 평화로운 접근으로 힌두교인과 공존을 하였던 것 같다.
아나마리 쉠밀은 그의 책[인도대륙의 이슬람교]에서 까씸 장군은 그의 인도대륙 점령시기에 힌두교인의 사원을 그냥 두었다고 하였다. 아랍 상인들은 힌두교인들과 함께 인도 남부 해안에 평화롭게 정착하였다고 했다.
다른 길은 주후 1000년경부터 중앙 아시아의 북서쪽에서 아프가니스탄과 캐시미르 가까이 있는 카이바르 고원지대를 통한 것이었다.1)

이 시기에 지하드 정신에 따라 가즈니 지역의 마하무드 왕은 북쪽 푼잡지대를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1750년경에는 인도대륙은 전적으로 이슬람 통치 아래 있게 되었다. 모걸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명목뿐이었지만 1857년까지 왕좌를 지키었다. 그러므로 8세기에서 19세기까지 긴 기간 동안 인도 대륙에서 이슬람 세력은 찬란한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증가하였다.

파키스탄이 인도에서 분리할 때 인도대륙의 무슬림 교세는 전체 인구의 25%을 차지하였다 한다. 무슬림은 힌두인과 한 지역에 공존하면서 각각 다른 문화 발전을 이루었고 때로는 평화공존으로 또 때로는 억압된 폭력의 표출로 희생자들을 치르며 지내왔다.

인도대륙에서의 이슬람의 위치와 파키스탄 형성과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무슬림 지도층의 서로 다른 두 가지태도로 인한 갈등을 집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이 갈등은 세속주의와 정통주의와의 마찰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하나의 태도는 안정을 우선 순위에 둔 세속적 정책과 다른 하나는 이슬람적 주장을 한 이슬람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다른 태도는 갈등과 진통으로 이어졌다. 예를 들면 모걸제국의 아크바르 황제는 인도대륙에서 힌두교,불교와 함께 공존을 위한 혼합주의적 국가종교를 시도하였다. 그 반대로 모걸제국의 아루방제브 황제는 순니파의 하나피 학파의 전통적 입장을 그의 정치에 적용하는 강력한 이슬람 주장을 하였다. 아루랑제브 황제 이후 사실상 인도대륙의 이슬람 통치는 쇠퇴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아우랑제브 이후 인도대륙은 서구의 세력에 따르게 되었고 1847년 영국은 인도대륙을 전적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무슬림들은 영국통치하에서 가난과 굴욕을 치르었다. 무슬림들은 이 시기에 드릉의 우루드어 사용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소수의 지식층은 영어를 모어처럼 사용하게 되었다. 무슬림 언어인 우르드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은 무슬림들에게 무슬림 정체성의 포기와 같이 느껴졌었다. 우르드어는 아랍어 다음으로 2억이 넘는 무슬림들이 쓰는 문학어인데,식민정치 때문에 사용이 금지되었던 것이다. 우르드어는 모걸제국의 쇠퇴시기에 하나의 이슬람 개혁운동이 새왈리 알라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그는 이슬람 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하여 대폭적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 대표적 제스처는 코란의 우르드어 번역이다. 이 개혁주의 동향은 알라가대학교에서 영어교육과 서구 학문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우르드어를 가르치는 교육을 통하여 지속되었다. 이에 서구 학문의 도입에 반대하여 엄격한 울라마를 배출하는 무슬림 신학교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2세기 인도대륙의 이슬람은 세속주의와 정통주의가 갈등을 가지게 되었다. 세속주의는 파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인 무함마드 지나에 의하여 지속되었고 정통주의는 다수의 올라마에 의하여 주장되었다.

2. 파키스탄 형성
파키스탄 형성배경에는 주로 세속주의를 주장한 알라가대학교에서 서구학문을 한 사이어드 아하마드 계보의 세력이 핵심을 이루었다. 사이어드 아하마드(1817-1898)는 전통적인 무슬림 가정에서 성장하여 판사의 신분을 누리면서 서구의 학문과 이슬람교의 "샤리아"를 조화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 실현을 위하여 알라가대학교를 설립하였고 영국대학을 모델로 하면서 아랍어,우루드어와 이슬람교를 필수과목으로 정하였다. 그는 서구학문을 도입하면서 동시에 무슬림학자들을 배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 다음으로 파키스탄 형성에 크게 공헌한 인물로는 무함마드 익끄발(1873-1938)이 있다. 그는 시인으로서 우르드어로 시를 썼으며 그는 자기 생전에 보지 못한 파키스탄 형성을 꿈꾸면서 시를 썼고 인도대륙의 무슬림들을 일깨웠다. 그는 퍼탄 지역,푼잡 지역, 즐로찌스탄 지역,씬드 지역이 하나의 국가로 연합되기를 꿈꾸었고 궁극적으로 무슬림들은 인도대륙에서 분리 독립되어 하나의 국가로서 무슬림 정체를 표현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세속주의자들 이외에도 파키스탄 형성 배경에는 파키스탄 분리 독립운동을 제원한 무슬림인 소수의 울라마들이 있었다.

파키스탄이라는 새로운 국가형성을 주장한 이들은 다양한 동기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 동기들을 요약해 보면 첫째 인도대륙에서 무슬림이 소수 공동체로 존속할 경우 힌두교인의 경제적 및 정치적 지배를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둘째 무슬림들은 힌두교가 강제로 무슬림을 개종하게 하여 힌두교의 계층 밖의 사람들과 같이 억합할 것을 우려하였다. 셋째로 무슬림들은 우르드어를 전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분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무슬림 정체를 위하여 힌두교의 언어인 힌디어 대신에 우르드어 사용이 필연적이라고 보았다. 넷째로 가장 중요한 동기는, 세속주의이거나 정통주의이거나 무슬림들은 다 이슬람의 정체가 무슬림이 절대 다수를 이루는 독립국가 안에서만 표현될 수 있다고 믿었던 데 있다.

무함마드 익끄발의 예언을 옮긴이는 무함마드 지나(1876-1948)였다. 이들의 사상적 교량은 우르드였고 이 언어 사용은 모든 무슬림들을 단합시키고 교육시키는데 절대적 역할을 하였다. 무함마드 지나는 파키스탄의 아버지라고 불리운다. 지나는 1940년 이슬람연맹(Muslim League)정당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그의 취임사에서 파키스탄이라는 이슬람 국가 형성을 암시하였다. 그는 무슬림과 힌두교인이 서로 같은지역에 있으나 서로 이질적 가치관과 문화 속에 살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구 종교인들은 같은 도시와 같은 농촌에 살지만 서로 같은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같은 상에서 음식을 먹지 않으며 결혼도 같은 종교권에서만 한다.이름으로도 무슬림과 힌두교인은 구별된다. 장례에서도 힌두교인은 화장을 하고, 무슬림들은 시신을 무덤에 묻는다.

영국이 인도대륙의 독립을 선언하자 힌두교인과 무슬림간에 충돌이 심화되었고 힌두교 지도자들은 간디를 위시하여 힌두교를 부흥시키려 하였다. 힌디어를 인도대륙의 언어로 정하며 힌두 문화화하려고 하였다. 무슬림들의 저항과 독립투쟁은 분명해졌다. 무슬림들은 다수 공동체가 아닌 소수 공동체의 열등감 사회적 차별은 이슬람 정신에 위배되는 것으로 보았으며 종내는 이슬람공화국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파키스탄은 1947년 8월 15일 1억4천4백만의 인구를 가진 이슬람 공화국이 지나의 지도력으로 힌두교의 인도대륙에서 신생국가로 탄생하였다. 당시 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방들라데시)으로 구분되었고 지리적으로 인도를 가운데 둔 두 지역으로 형성되었다. 1971년에는 내란과 3회에 걸친 인도와의 전재으로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분리 독립하였다.

파키스탄은 선교지리학적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나라이다. 북으로는 중국을 경계로 하고 있고 옛 비단길이 통하는 곳이며 히말라야 산맥이 펼쳐 있다. 8125미터의 낭가-파르바드는 세게에서 가장 높은 아름다운 산맥이며 세계 등반가들의 꿈의 지역이다. 서 북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이 있고 이 지역을 통하여 초기 이슬람 접촉과 전개가 이루어졌던 곳이다. 험한 산악지대로 퍼탄 사람들이 주로 정착하고 있으며 이들은 현재도 자치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곳은 아프가니스탄의 난민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며 동북쪽으로는 푼잡지역이다. 인도와의 경계선 때문에 인도와의 분쟁에서 희생자들이 많았던 곳이다. 아열대지역이므로 농사를 많이 짓고 파키스탄에서는 기후조건이 가장 좋은 곳이므로 교육도시들이 발달하였고 인구도 가장 밀접하여 있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몰려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서남쪽으로는 이란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불로찌스탄으로 알려진 이 지역은 가장 살기 어려운 지역으로서 사막과 고지가 섞여 있으며 인구분포가 다른 지역보다 낮다. 동남지역은 씬드지역인데 인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인더스 강이 바다로 흐르는 지역으로서 사막이지만 강변은 비옥하고 과수와 목장이 아름답다.운하시설이 잘 되어서 목축뿐만 아니라 농사도 지을 수 있다. 씬드사람들은 북쪽 퍼탄과 푼잡 사람들과는 달리 여유가 있고 동작이 느리고 피부가 덜 까맣다. 그들은 느릿한 몸짓으로 살아간다. 이 지역에는 문명 발상지인 모헨조다로가 있고 기독교가 가장 먼저 들어온 곳이다. 그리고 유일한 항구 카라치가 있다. 씬드는 필자의 선교지였다.

3. 파키스탄정부

1) 1947-1971:
1947년 이후 거의 25년간 파키스탄은 새 정부 정비, 난민문제,카쉬미르 문제들로 긍긍하였다. 새 정부는 지나 대통령과 아윱 칸 대통령 그리고 즐르휘카르 알리 부토의 집권을 통하여 헌법재정과 개정으로 진통을 겪으면서 이슬람요소들을 강조하는 공통점을 유지하였다. 새 정부는 세속주의와 정통주의의 갈등은 해소되지 못한 채 동파키스탄의 결별시기까지 지속되었다.

2) 1971-1977:
부토 정권은 사회주의로 평가되었었지만, 실제로는 이슬람요소가 강화된 때다. 그는 모든 기독교 교육기관들을 국유화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기독교인들을 탄압하였다. 교육기관에 아랍어는 필수과목으로 설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반대 정당들은 그를 이슬람에 관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집권자라고 비판을 하였고 부터 정권은 이에 대한 반응으로 아하미디아파를 비이슬람공동체로 선포하였고 음주금지,도박과 경마 금지, 나이트 클럽의 금지를 선포하였다. 이러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부토정권의 반대파들은 연합정당을 만들어서 Pakistan National Alliance(PNA)라고 칭하였고 이 PNA는 부토의 정당, Pakistan People's Party(PPP)와 심각한 대립세력이 되었다. 1977년 총선거에서 부토는 부정선거 고발로 인하여 실권하였고 갈등 끝에 투옥되고 처형되었다.

3) 1977-1988 :
1977년 7월 5일 지아 올 학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정권교체에 성공하였다. 그의 정당의 주 세력은 즈마엇대 이슬람이었고 이것은 "샤리아"에 의한 정치를 의미하였다. 예를 들면 후드드가 강조되었다. 절도범은 오른 손목이 절단되는 책벌을 받는 것이었다. 폭행을 자행하지 않은 고속도로의 약탈은 30대의 태형이 주어졌다. 간음죄는 기혼자일 경우는 돌로 쳐 죽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100대의 태형, 거짓비방은 80대의 태령,음주는 80대의 태형을 책벌로 정한것이다. 지아 올 학그 정권은 부토정권 때보다 강한 이슬람화, 원리주의에 근거한 이슬람화를 목표로 하였다. 이슬람의 다섯기둥은 정부 관리들에게 필수적이었다.

4) 1988- 현재
1988년 12월 즐르휘카르 부토수상의 딸, 베나지느 부토가 정권을 잡았고 여성으로서 파키스탄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 후 1990년 8월까지 집권하였고 실권의 3년을 반대 정당 Pakistan Muslim League(PML)지도자 주네조 집권하에 지냈으며,다시 1993년 10월 PPP정권을 회복하여다. 베나지르 부토 정권은 그의 부친의 정책과는 달리 모든 교육기관과 기업체들을 국유화했던 정책을 자유자제로 변경하였다.(Nationalization/den-ation-alization).그 밖에도 여성의 인권을 위한 꾸준한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부토수상은 이미 1971년 여성정치가의 꿈을 가지고 무슬림 여권선언서를 발표한 바 있었다.2) 위의 4시기를 통하여 본 파키스탄 정부는 다양한 정책들을 시도하면서 공통적으로 이슬람 부흥을 목적으로 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재 이슬람화가 성공인가 아니면 실패인가라는 많은 파키스탄 지성인들의 고민이되고 있다. 그들은 종족간의 내란과 방글라데시의 분리 독립과 파키스탄의 다른 종교인들,특히 기독교인들과 힌두교인들의 불안을 목격하면서 이슬람화의 의미를 묻는다고 본다. 특히 지아 울 학그 정권은 파키스탄 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 이슬람화를 강조하였고 이것은 실패로 나타났다.3) 국가와 민족간의 차이가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파키스탄은 170이상의 종족들로 구성되었고 그중 가장 큰 종족들이 자기들의 지역어와 문화를 지키면서 파키스탄 국가 안에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파키스탄 형성 이후 인도와의 3회에 걸친 전쟁과 불안한 정부의 교체와 군 계엄령 정치, 그리고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권위와 군력의 행사는 파키스탄의 불안한 정세를 더해 주었고 경제발전의 걸림돌이 되었다.

4. 파키스탄의 종교들
파키스탄은 이슬람 공화국으로 '샤리아'에 근거하여 이슬람화 정치를 시도해왔다. 1977년 이후 지금까지 강한 극단적 이슬람 정당에 크게 좌우되어 왔다. 점진적으로 '샤리아'법이 헌법의 자리를 차지함에 따라 파키스탄의 다른 종교인들이 박해와 억압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초기 파키스탄 형성 때의 지나 정권과 아윱 칸 정권 때와는 달리 상당히 심각한 상황을 빚어주고 있다. UN 의 공식 멤버로서 파키스탄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공식적으로는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파키스탄 다수의 울리마에 의하면 배교자는 죽음의 처벌을 받게 되어 있고 코란과 예언자 무함마드에 대한 모독도 죽음의 벌을 받게 된다. 실제 지난 1994년 14세의 살라마트 마시와 44세의 래해마트 마시는 여론과 탄원으로 간신히 석방되었으나 본토에 있지 못하고 독일에 망명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4)

1) 이슬람
파키스탄 인구는 1990년 122,666,000, 1995년은 141,599,000이다.5) 그중 이슬람은 96.7%의 교세를 가지고 있고 순니가 67.6%,쉬아가 26.1%(이스마일리도 포함함),아하미디아는 공식발표는 0.13% 그러나 비공식 자료에는 3%(줄르휘카르 부토정권 시기에 아하미디아는 비무슬림으로 선포되었다)이다. 아하미디아는 정부 보도에서는 무슬림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다른 소수 종교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박해와 억압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들은 비밀리에 자기들의 소속을 지키고 있다.

2) 힌두교
힌두교인은 1.5%이다.이들은 주로 씬드 사막지역의 계층 밖의 천민으로 바스띠를 이루고 산다. 주로 유랑민들로 인더스 강가를 따라 목축을 하며, 더러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다. 거의 100% 문맹이다. 이들은 꼴리,아오와리,바그리,오드,다트키로 전적으로 미전도종족이다. 북 푼잡 지역에서는 쭈르하가 복음화되어 현재 기독교 교세를 형성한 사례 이외에 아직도 힌두교 계층 밖에 종족들은 문맹, 가난, 소외의 상황에 있다.

3) 기타종교
전체 인구의 0.1%로 정령숭배,바하이,조로아스터교,불교를 들수 있다.

4) 기독교
기독교 교세는 1.7%이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2.-3%까지 된다고 한다. 기독교 전개는 개신교 선교로서는 1833년부터이다.가톨릭교회와 선교는 별도로 깊이 있게 다루어져야 할 중요한 제목이다. 개신교 선교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 로우리 목사와 사모가 캘커타에 도착하여 푼잡 지역에 있는 씨크교도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시작한 것이 그 출발이다. 로우리 부인은 병으로 선교지에서 세상을 떠났고 로우리 선교사도 말라리아로 시달리다가 귀국하여 장로교 해외선교부를 조직하였다. 1849년부터는 찰스 포먼과 존 뉴톤이 본격적으로 푼잡지역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고 성공회 대표선교부(CMS)가 씬드지역에,감리교가 카라치 중심으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후 대부분의 교단들이 들어와 활동을 하였다. 의료선교,기독교 변론선교 등을 시도하였지만 교회개척은 극히 어려웠고 초기에는 교인수가 극히 적었다. 그러나 1890년에서 1930년에는 힌두교의 쭈르하 종족이 거의 전부 집단 개종을 하여 현재 파키스탄 교세의 80%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6) 쭈르하 계층의 개종이야기는 [파키스탄,나의 사랑]에서 이야기로 소개되었다.7) 파키스탄 교회에 관하여 도시교회,농촌교회,변두리교회에 관하여 이야기를 이미 소개해 놓은 것이 있다.8)

교단교회는 51개에서 2,883개의 교회들이 있다.9) 개신교 선교사들은 72선교부에서 736명이 파송되어 있다.대표적인 국제 선교부는 Interserve,TEAM, CMS,SIM,OM등이 있다. 현재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아직도 서구 선교사들이며,10%미만의 아시아 선교사들이 80년대 후반부터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키스탄에서 한국교회의 파송으로 선교사역을 시작한지 35년이 되었다.
이제 파키스탄 선교활동을 전반적으로 보고하고 후원하는 협력기구와 연구차원의 직업이 필요하다.
한국선교사들이 이슬람권 상황에 맞는 선교이론과 실제를 펴 나가기 위하여 체계적인 후원과 훈련이 요구된다.
지금까지는 선교사들 자체 내에서 친교정도 이외는 함께 선교정책을 의논 검토하고 선교활동을 평가하는 시간을 갖지 못한 채 분산되어 사역에 전념하고 있는 실정이다.
파키스탄 선교사들은 1994년 7월부터 파키스탄 연구회라는 친교및 협력을 위한 모임을 가지고 서로 소식을 나누고 있다.
국내에서 파키스탄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후원하는 선교부와 관련자들이 함께 모여 장기적 선교사역에 대한 비전과 지난 날의 선교활동을 평가하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 요구된다.
오늘과 내일의 파키스탄 한국선교사들을 위하여 파키스탄 선교의 실제를 보여주는 자료집이 발간되어야 한다.

최근에 파키스탄 선교에 관심 있고 이슬람권 선교를 중요시하는 교회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이 뜻을 합하여 CCC. 파키스탄기도회, 이슬람연구소 등 선한사마리아선교회를 설치하기 위한 기도를 하고 있다.
이러한 선교회는 다음과 같은 사역 목표를 두게 되기를 바란다.

첫째 파키스탄을 비롯한 이슬람권에 파송된 한국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의 활성화를 위한 연구와 후원 및 협력을 하는 것이다.
둘째, 파키스탄 교회지도자들과 좋은 관계를 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선교정책을 세우는 것이다.
셋째 이슬람권 선교사들의 평생선교훈련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다.
넷째 국내 이슬람권 관련자들과 만나고 함께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다.
다섯째 이슬람권 선교사들을 위한 선교관을 마련하는 것이다.


롤런드 앨런 「바울의 선교 VS 우리의 선교」 IVP P 237~239


바울이 교회 개척에 성공한 비결은 여러 원칙의 준수에 있었다.
그 원칙을 실제적인 규칙으로 정리할 수 있다.

1. 영구적으로 남을 가르침은 모두 이해되고 파악될 수 있는 것이어서, 그것을 일단 받고 나면 보존하고 활용하고 전수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가르침의 시험대는 실천이다.
이와 같이 파악해서 활용할 수 없는 것은 일절 가르쳐서는 안 된다.

2. 모든 조직도 잘 이해하고 유지할 수 있는 특성을 지녀야 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꼭 필요한 것이고, 그들이 지원할 수 있고 그럴 마음이 생기는 것이어야 한다.
너무 정교하거나 비싸서 조그마한 어린 공동체들이 재정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이면 안 된다.
모든 조직의 평가기준은 자연스러움과 영구성이다.
교인들이 이해할 수 없어 운영이 불가능한 것이면, 결코 일반적인 교회생활의 일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3. 일반적인 교회생활과 존립에 필요한 모든 재정은 외국의 원조와 별도로 그들 스스로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지역 교회의 재정 관리는 자급자족의 형태를 띠고 완전히 자율적으로 수행되어야지, 가난하게 되거나 외국 선교회의 지시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4.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의 책임의식을 조심스럽게 고취하고 또 그것을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온 공동체에 세례와 안수와 징계를 적절히 집행할 책임이 있다.

5. 영적인 은사들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은 단번에 아낌없이 주어야 한다.

교회생활을 강화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억제하면 안 되고, 교회의 영적 생명에 필요한 것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런 은사를 누리는 자유는 억제될 수 있는 특권이 아니라, 인정받아야 할 권리다.
권한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은혜를 받을 만한 역량 여부에 따라 좌우된다.

바울이 그처럼 담대하게 행할 수 있었던 것이 믿음의 정신 때문이었음을 보았다.
이는 회심자의 선천적인 역량이 아니라, 그들 속에 있는 성령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었다.

자료출처 / 롤런드 앨런 「바울의 선교 VS 우리의 선교」 IVP P 237~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