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라!(로마서 12:21)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Do not be overcome by evil, but overcome evil with good.
참조 / 마태복음 5:39∼41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왜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할까요?
시편 37편 27절의 말씀으로 그 이유를 소개합니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신앙생활을 영적생활이라고 합니다.
영적생활에 성공하기 위해서 영적생활의 원리를 잘 적용해야 합니다.
영적생활의 기본 원리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또 다른 원리는 로마서 12장 21절 말씀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영적생활의 기본 원리를 “믿음”이란 단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믿음이란 용어의 근거는 하박국 2장 4절에서 “에무나”를 번역한 것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에무나’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49회 사용되었습니다.
‘에무나’라는 단어가 “진실(眞實)” 또는 “성실(誠實)”이라고 번역하였으나 단 한 번 하박국서에서는 “믿음”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에무나, 피스티스)”은 “진실”과 “성실”을 의미합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돈을 많이 벌어 헌금을 많이 하려고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서 헌금을 많이 한다면 그것이 믿음에 의한 헌금일까요?
‘에무나’라는 믿음은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헌금을 하기 위해서 “진실”과 “성실”하게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러한 것이 “에무나”라는 “믿음”입니다.
종교가 있는 사람과 종교가 없는 사람을 비교할 때 어떤 사람이 행복할까요?
종교를 바르게 믿는다면 종교가 있는 사람이 종교가 없는 사람보다 더 행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종교를 바르게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국의 경우 전체 인구의 50%가 종교가 없다고 합니다.
5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유교, 천도교, 가톨릭 등에 해당합니다.
부처를 믿는 사람을 불자(佛子)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을 성도(聖徒)라고 합니다.
성도(聖徒)란 “성스러울 성(聖)” “무리 도(徒)”라는 훈으로 “성스러운 무리”라고 하겠습니다.
성스러운 무리들의 영적생활 원리는 악을 악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라!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을 “체로키부족”의 전설 같은 이야기에서 찾아봅니다.
‘체로키(Cherokee)’는 북아메리카의 원주민으로 ‘이로쿼이어’를 사용합니다.
1650년에는 인구 22,000명이었으나 그 후 천연두의 유행으로 절반으로 감소되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배 과정에서 백인의 문화를 대폭 수용하였으며, 미국 정부는 원주민 교육의 시범 케이스로 1769년 디트머스 대학을 설립하였고, 북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고유 문자를 가진 원주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오클라호마의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강제이주 당했습니다. 문명화된 다섯 부족 중 한 부족입니다.
체로키 부족의 추장이 손자에게 인생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에서는 늘 싸움이 일어난단다. 마치 두 마리 늑대가 싸우는 것과 같단다.”
“하나는 악마 같은 놈 또 다른 놈은 선한 놈이지.”
손자는 잠시 동안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생각하다가 할아버지께 물었습니다.
“그럼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체로키의 추장은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긴단다.”
선으로 악을 이기려면 먼저 선에게 먹이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선에게 먹이를 줄 수 있는 방법은 오늘의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원리는 강한 것을 이기려면 더 강한 힘을 가져야 합니다.
선과 악의 힘을 비교하면 악이 선보다 더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는 말씀은 세상적인 원리가 아닙니다.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영적원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영적 원리를 가장 쉽고 분명하게 요약한 말씀이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의 산상복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산상복음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5:39∼41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악한 자를 대적(對敵)하지 말라(마태복음 5:39)
대적(對敵, ἀντιστῆναι)이란 “대할 대(對)” “원수 적(敵)”
적과 맞서 싸움을 의미합니다.
“안디스테미(ἀνθίστημι, 436, anthistémi)”라는 헬라어는 “∼에 대항하여(to set against)” 또는 “견디다(withstand)”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은 “악한 자에게 대항하지 말라” 또는 “악한 자에 대해서 견디라”는 뜻입니다.
첫째, 돌려대라(마태복음 5:39)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 돌려대라(στρέψον) - 스트레포(στρέφω, 4762. strephó)
- 돌려라(to turn), i.e. 전환하라(to change)
여러분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
상대방과 마주 설 때 상대편의 오른편 뺨을 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가능성을 몇 가지로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상대방의 뒤에서 오른편 뺨을 칠 수 있습니다.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몰래 때리는 것이므로 본문에서 합당한 경우가 아닙니다.
둘째는 상대방과 마주 설 때 왼손으로 오른편 뺨을 칠 수 있습니다.
쿰란공동체에서는 심지어 왼손을 사용하여 제스처를 하는 경우 열흘 동안 회원직을 박탈하고 회개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셋째는 상대방과 마주 서서 오른 손을 돌려서 때리거나 아니면 손등으로 칠 수 있습니다.
오른 손등이나 오른 손을 돌려서 때리는 것은 정상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의 풍속에 의하면 손등으로 치는 것은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창피와 모욕을 주기 위한 상징적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이라는 말은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주인이 노예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아이에게,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네 주제를 파악하라”는 뜻으로, 혹은 “너는 내 부하이니 권위에 복종하라”는 뜻으로 손등으로 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너는 쓰레기 같은 존재” 라는 뜻을 전달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청중들, 즉 당시의 소작농들과 병자들, 여인들이 이런 모욕을 당하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런 비인간적인 모욕을 더 이상 당하지 말고, 왼쪽 뺨도 돌려대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것은 반항하라는 뜻이 분명합니다.
즉 오른쪽 뺨을 맞은 사람이 왼쪽 뺨을 돌려댈 경우에는 가해자가 더 이상 손등으로 때릴 수 없게 됩니다.
또한 가해자가 왼손으로 친 것은 상처를 주지 않고 단지 모욕할 생각으로 친 것인데, 왼쪽 뺨을 돌려댈 경우에는 부득이 오른쪽 손으로 때릴 수밖에 없게 된다.
오른쪽 손으로 때린다는 것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싸울 경우뿐이기 때문에, 상급자가 오른 손으로 때리는 것은 결국 하급자를 자기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왼쪽 뺨을 돌려대는 것은 소작농이나 노예가, 혹은 유대인이 그 상급자에게 대하여 “나는 인간이다!” 라고 선언하는 행위라고 하겠습니다.
“나를 존엄성이 있는 존재로 취급하라”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즉 “당신이 나를 때려죽일 수도 있지만, 나는 더 이상 쓰레기가 아니며, 당신과 동등한 사람” 이라고 행동으로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왼쪽 뺨을 돌려대라는 것은 폭력에 굴종하여 눈을 내리깔고, 주인의 처분에 맡기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는 지금 “절대로 굴종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폭력적 세계 속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서 그렇다면 맞아죽을 것입니다. 모든 약자들이 함께 왼뺨을 돌려댈 때 비로소 사회적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가지게 하라!(마태복음 5: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 가지게 하며(λαβεῖν) - 람바노( λαμβάνω, 2983. lambanó)
- 가지다(to take), 받다(receive)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의복은 겉옷과 속옷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따라서 속옷을 가지려고 할 때 겉옷까지 가지게 한다면 벌거벗은 몸이 될 것입니다.
이 말씀 역시 불의를 조장하는 것으로 오해되었습니다. .
이 말씀의 배경이 되는 담보물 규정은 신명기 24:10∼15에 소개되었습니다.
네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줄 때에 너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말고. 너는 밖에 서 있고 네게 꾸는 자가 전당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
보통 담보물은 양이나 염소처럼 동산(動産)을 담보물로 잡지만, 그런 종류가 없을 경우 부동산을 담보물로 제공했다.
그러나 궁핍한 사람들은 겉옷을 담보로 잡혔지만, 낮 동안뿐이고, 해가 질 무렵에는 채권자가 반드시 채무자에게 겉옷을 되돌려주어, 추운 겨울에 채무자가 그 겉옷을 덮고 잘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예수 당시에 빚 문제는 가장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습니다.
로마제국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갖가지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부자들이 세금을 탈루하는 방식은 제국의 변방에 있는 토지를 매입하여 재산을 은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은 토지를 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가족의 생계가 그 토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부자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는 방식은 빌려준 돈이나 곡식에 대해 25% 내지 250%의 엄청난 이자를 붙이는 방식이었습니다.
농민들은 결국 이자를 갚지 못해 땅을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는 이런 상황에 대해 채권자들이 아니라 채무자들을 대상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법정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너를 고소하여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내어 주라”는 말씀은 채무자가 입고 있는 속옷까지 벗어주어 완전히 벌거벗고 나체가 되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회에서 자신의 벗은 몸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알몸이 되는 것은 최소한 사람들을 찡그리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미국의 성서학자 “로버트 펑크(Robert W. Funk, 1926. 7. 18∼2005. 9. 3)”의 연구에 따르면 사해사본의 하나인 “훈련교범”에서 몸을 드러내는 규정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옷에서 팔을 빼면서 우연히 맨몸을 드러내면 30일 간 참회해야 한다.
둘째는 친구에게 아무 이유 없이 맨몸을 드러낸 경우에는 6개월 간 벌을 받는다(Manual of Discipline 7:12, 14.).
셋째는 수치를 당하는 것은 나체가 된 사람을 보는 사람들이다.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사람에게 겉옷을 벗어주라는 말씀은 “게릴라 전술”과 같습니다.
“게릴라 전술”(비정규전, 유격대)이란 전력이 약한 쪽이 강한 쪽을 치고 빠지는 식으로 괴롭히는 전략이라고 하겠습니다. 게릴라의 어원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대항하던 스페인의 비정규 무장집단들을 스페인어로 전쟁을 의미하는 ‘게릴라(Guerra)’에 “작은”이란 접미사 “일라(illa)”가 합쳐진 “게리야”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영어식 발음은 “구어륄라”에 가까우며 “게릴라”라고 하면 알아듣지 못합니다.
“게릴라(guerrilla)”들이 사용하는 게릴라전은 대개의 힘없는 약소민족들과 약소국가들의 국민들이 선호하는 전쟁 방식입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는 7년 전쟁 때 프랑스 혹은 영국 쪽에 붙은 미국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방법이고, 미국독립전쟁 때 역시 실전에 가까운 훈련을 받은 영국군을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 힘들었던 식민지인들이 쓰던 방법이었습니다. 서로 전면을 바라보면서 싸우는 전열보병에 익숙했던 유럽 군인들에겐 이동 도중에 공격하고 빠져버리는 것은 천적과도 같은 전술이기도 했다.
채권자 앞에서 벌거벗고 떠남으로써 고리대금에 근거한 경제구조가 어떤 것인지를 남김없이 폭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동행하라! - 가주어라!(마태복음 5:41)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주어라(마태복음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 동행하고(ὕπαγε) ; 후파고(ὑπάγω, 5217. hupagó)
- 인도하고, 이끌림을 받고(to lead or bring under), to lead on slowly, to depart
이 말씀 역시 많이 오해되어 왔다.
소요사태가 발생할 경우 로마 군단들은 신속하게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하루에 100리를 행군해야 할 경우도 있었다.
30~40 킬로그램에 달하는 배낭을 지고 행군하는 것을 쉽게 하기 위해 로마의 군법은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시켜 대신 배낭을 지고 가도록 하는 권리를 허락했다.
이러한 명령에 따르는 것은 예속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불응하는 것은 반역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그 권리를 남용할 경우 토착민들의 불만을 고조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오 리로 제한시켰다.
또한 로마의 모든 도로에는 오리마다 표지석이 세워져 있기 때문에, 이 군법을 어기는 군인들에 대해서는 장교들(백부장)이 적절한 처벌을 주도록 했던 것이다.
예수는 그 청중들에게 단지 로마군인들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배낭을 지고 오 리를 걸어간 후에 오리를 더 가겠다고 우기라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피해를 입는가?
그 병사로 하여금 군법을 어기도록 만들어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하라는 것이다.
로마 병사가 유대인에게 싹싹 빌도록 만들라는 것이다.
유대인이 1마일을 더 지고 가겠다고 맞설 때 로마 군인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예수는 식민지의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 체제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존엄성과 자주성을 목숨 걸고 지키는 전략을 통해 개인의 해방과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확보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폭력 앞에서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비폭력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폭력을 극복하라는 가르침이다.
또한 우리의 안전은 타인의 불안전 위에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안전을 보증할 때만 우리가 안전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 역시 우리가 폭력을 당할 때라도 비폭력으로 우리의 존엄성을 지킬 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폭력을 철저하게 폭로하여 자신들의 폭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후에 그를 용서함으로써, 우리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서, 인간 사이의 철저한 신뢰에 바탕을 둔 영적원리라고 하겠습니다.
* 마태복음 5:42∼45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 고린도전서 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 아모스 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 시편 37:27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Turn from evil and do good; then you will dwell in the land for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