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충만(사도행전 2:4) 주일 설교 원고(2020-05-31) / 이승혁목사

성령 충만(사도행전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All of them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in other tongues as the Spirit enabled them.

지난 주일에 “영생”에 대한 말씀을 소개했습니다.
영생이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It is as if the dew of Hermon were falling on Mount Zion. For there the LORD bestows his blessing, even life forevermore.)  

영생의 복을 받으셨으면 이제는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When anyone is joined to Christ, he is a new being; the old is gone, the new has come.)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유지하려면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영”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영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사도행전 2장 4절에서는 성령의 충만으로 회복을 말씀합니다.

성령 충만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첫째는 성령 충만이란 현상이 아닙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바람같이 또는 불의 혀같이 나타났습니다.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성령의 임재를 모였던 사람들이 느낄 수 있도록 나타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람과 불이 성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임했을 때 모였던 사람들은 제자들이 가르치는 복음의 내용을 방언을 통하여 정확하게 들었습니다.

둘째는 성령 충만이란 태도를 말합니다.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이 이제까지 삶의 방식을 모두 포기하고 함께 모여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2:42-47
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

방언과 기사와 표적이란 현상은 복음에 적합한 구체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주로 방언과 기사와 표적을 강조하여 마치 이런 현상이 성령 충만이라고 생각하였다면 지금부터 그와 같은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방언이란 헬라어는 "글로사(γλῶσσα, glóssa. 1100)"라고 합니다.
글로사의 뜻은 "혀(the tongue)" 또는 "언어(a language)"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영어에서 모국어를 "마더 텅(Mother Tngue)" 이라고 합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혀, 언어, 방언"으로 번역합니다.

예수께서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시며 그의 ""에 손을 대셨습니다(막 7:33)
이때 혀가 곧 글로사를 말합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계 7:9)
"언어"가 글로사를 말합니다.

사도행전에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내려오셔서 그들이 이전에 알지 못한 언어로 말하는 장면이 세 차례 언급됩니다(2:4, 10:46, 19:6) 방언입니다.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2:6, 8).

이때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 라고 합니다.
각 지역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를 할 줄 모르고 그들이 거주하던 지역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대략 16개 언어를 사용하는 흩어진 유대인들이 모였습니다.
마침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자기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들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방언 사건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이와 같은 방언의 사례가 여러 차례 소개됩니다(10:46, 19:6)

10: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뒤 오순절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그들은 놀라,
신기하게 여기면서 말하였다. ‘보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행 2:3~4, 7~8, 새번역)
성령은 그 사람이 어디서 온 누구든,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영을 회복하여 열매를 맺기 위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이란 오직 예수만 자랑하고 증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천당! 불신지옥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최봉석(崔鳳奭, 1869-1944) 목사가 바로 그 인물로, 세인들에게는 최권능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1902년 평안북도 삭주에서였다.
구한말 관리로 지내던 그가 공금횡령사건에 연루되어 삭주로 유배되었는데, 거기서 삭주교회를 설립한 백유계(白留溪)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노블(W. A. Noble) 선교사가 건네준 쪽복음서를 탐독하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벼락에 맞아죽는 꿈”을 꾼 후 그는 성령의 역사로 중생의 체험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으며, 평양 시내에서 그의 전도를 듣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에게 따라다니는 몇몇 유명한 일화들이 있다.

하루는 그가 장터에서 전도를 하다가 방탕한 시절의 옛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최권능을 보고 놀려댔다.
자리에 앉히고는 술을 권하고, 마시지 않으니까 입을 벌려서 억지로라도 마시게 하려고 했다.
그래도 마시지 않자 한 친구가 그의 얼굴에다 술잔을 부어버리고 말았다.
그때 옆에 있던 친구들은 이제 큰 일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아는 한 최봉석은 그런 일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저 친구 오늘 장례 치르는 날이겠구먼!”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최권능은 자기 옷을 털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태연히 앉아 있는 것이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친구가 하도 신기해서 “괜찮으냐, 어떻게 그렇게 참고 넘어가느냐”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최권능은 “이전의 최봉석이는 다 죽었어. 지금 살아 있는 것은 전도하는 최권능이야”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 하루는 평양의 백동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고 있었다.
그때 한 일본군 연대장이 시장터를 지나가고 있었다.
최권능은 그 일본군 연대장을 향해서 큰 소리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외치며 전도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우렁찼든지 연대장의 말이 깜짝 놀라는 바람에 말에 탔던 연대장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화가 난 연대장은 최권능을 일본군 주재소로 끌고 가 온갖 매질을 하며 심문했다.
그런데 최권능은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위축당하지 않고 일본 군인이 내리칠 때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하고 외쳤다.
세게 때리면 때릴수록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소리도 그에 따라 커졌다.
그러자 일본 군인은 최권능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조롱하듯이 “당신은 건들기만 하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냐” 하고 물었다.
이에 최권능은 “내 속에는 예수님 밖에 들어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건들기만 하면 예수님이 나오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일본 군인들은 그를 그대로 풀어주었다.

또 한번은 최권능이 평안도 구성에서 전도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그가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 들어가 전도한 뒤 그 옆집에서 전도하고 있었다.
그때 자신이 전도한 김씨가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곧 김씨의 아들이 찾아와 그를 향해서 아버지를 죽인 자라고 욕하면서 잡아가 자기 집에 가두었다.
이때 그는 오히려 그 아들에게 “네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내가 기도해서 아버지를 살려 줄 터이니 예수를 믿겠느냐?”고 묻자,
그 아들은 “믿겠다”고 대답했다.
이에 최 목사는 곧 죽은 그 김씨를 붙잡고 땀을 흘리면서 기도하는데,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결과 그 가족과 이웃들이 예수를 믿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최권능은 오직 예수의 사람이었다.
예수의 영으로 충만했던 그의 삶은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기생집에도 들어가서 전도하고, 남의 부엌에서도 전도하고, 얼굴도 알지 못하는 목사와 장로들에게도 전도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신자다”라고 하면 그는 “당신이 신자면 왜 내게 전도하지 아니하느냐?”라고 무섭게 책망할 정도로 구령의 열정으로 가득했다.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원초적이고 순수한 신앙으로 전도에 헌신했던” 한국교회사 속의 위대한 ‘전도대장’이었고, 예수 복음의 맛을 깊이 알았던 진짜 예수꾼이었다.
일신(一身)의 안일과 명예보다 주님의 명예가 더욱 소중함을 깨달았던 예수의 충복(忠僕)이었던 것이다.


사도행전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사도행전에서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만 자랑하고 증거하려면 반드시 회개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지난 날  예수를 자랑하고 증거하기 못했던 "거짓된 삶을 회개"하고 "형식적인 신앙 싱앙생활을 회개"해야 합니다.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If we live, we live to the Lord; and if we die, we die to the Lord. So, whether we live or die, we belong to the Lord.)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에 대한 성경적 이해

“성령 세례”는 일생에 단 한번 뿐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일생동안 지속되어야 할 사건입니다.

성령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믿음의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을 구원 받았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Therefore I tell you that no one who is speaking by the Spirit of God says, ‘Jesus be cursed,’ and no one can say, ‘Jesus is Lord,’ except by the Holy Spirit.)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신다!”고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런 것을 알게 하신 것은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즉 성령께서 깨우쳐 알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후에도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고 증거하는 삶을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 자랑하고 증거하는 삶을 실천하려면 반드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이란 용어를 살펴보겠습니다.

“성령 충만”이라는 용어가 신약 성경에서 “15회” 사용되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4번(1:15, 41, 67, 4:1)
사도행전에서 10번(2:4, 4:8, 31, 6:3, 5, 7:55, 9:17, 11:24, 13:9, 52)
에베소서에서 1번(5:18)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성령 충만”이란 용어가 14번 사용되었다는 것은 “성령 충만”이란 말이 93% 사용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사도행전에서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헸던 스데반 집사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7:55-60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 집사가 이와 같이 성령 충만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었던 까닭은 성령 충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가르쳤던 사도들에게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6:1-5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
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브로고로니가노르디몬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사도들은 사람을 구제하는 일은 집사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력질주하려고 결단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력질주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직 단 한 번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성령의 충만을 강조했습니다.
사도 바울은성령 충만을 "그리스도 안에" 라고 강조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 안에" 라는 용어가 119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 서신에서만 112회 사용되었고 나머지 7번은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3회,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1회, 요한이서 1회, 유다가 유다서 2회로 나타납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용어가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사도행전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여 교회를 부흥케하려는 목적으로 강조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란 바울 서신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목적으로 강조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무엇인가?

“성령 충만” 이란 용어를 사전적 의미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聖靈, the Holy Spirit)” 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삼위 하나님을 말합니다.
“충만(充滿, be filled with)” 이란 가득 채운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 이란 “하나님으로 가득 채운다.”는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부 하나님께서 창조를 시작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성자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으로 역사하셨고 부활 승천 후에는 보혜사를 보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은혜 시대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요한복음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성령 충만은 곧 예수 충만이라고 하겠습니다.

산약 성경에서 충만이란 헬라어가  세 가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충만이란 의미는 가득 채워진 것이 밖으로 흘러넘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로 충만케 된 후에는 예수가 밖으로 흘러넘쳐나와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예수 충만입니다.

성령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공간에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성령 충만이라고 말씀한 것은 성령의 지배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 충만은 예수 충만입니다.
예수 충만이란 예수의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충만이란 예수의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성령 충만”이란 “하나님 충만”이며 “말씀 충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채워야 하며, 또 채워지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성령 하나님을 어떻게 내 안에 채울 수 있을까요?
말씀을 어떻게 내 안에 채울 수 있을까요?
또 성령 하나님께서 내 안에 채워진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성령 하나님을 내 안에 채우는 것을 이렇게 설명해 봅니다.
커다란 그릇과 물과 스펀지가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커다란 그릇에 물을 가득 채워 넣습니다. 그리고 스펀지를 물 위에 올려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처음에는 스펀지가 물 위에 둥둥 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면 스펀지는 물속으로 가라앉습니다. 이번에는 가라앉은 스펀지를 물속에서 집어들도 손으로 누르면 스펀지에 흡수되었던 물이 다시 스펀지 밖으로 나올 것입니다.

자, 이제 큰 그릇을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물을 성령이라고 하고 스펀지를 사람이라고 하면 사람인 스펀지가 물속에 들어가서 물을 최대한 흡수하여 물속에 가라앉는 것을 “세례” 라고 하며 “성령 충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례(洗禮)”를 헬라어로 “밥티조(βαπτίζω. 907, baptizó)” 라고 합니다. ‘밥티조’는 “잠기다, 가라앉다”는 뜻입니다(to dip, sink). 따라서 물을 흡수한 스펀지가 물속에 가라앉는 것은 “세례”라고 하겠습니다.

스펀지가 물을 최대한 흡수한 것을 충만 이라고 합니다. 즉 성령 충만과 같습니다.
그런데 만일 스펀지가 나는 물을 흡수하지 않겠다고 몸부림치며 거부하면 물을 흡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펀지가 물에 닿는 순간 자연스럽게 물을 흡수하면 스펀지는 물 위에 떠 있지 않고 물속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스펀지와 같이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 할 때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드릴 때 실현 될 것입니다.

성령 세례는 스펀지가 물속에 가라앉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스펀지가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 흡수한 물을 모두 포기하면 다시 물위로 떠오르는 것처럼 성령 세례를 받고 구원 받은 사람으로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몸부림을 쳤을 때 나도 모르게 물이 점점 내 안에서 빠져 나가버립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세상살이가 지옥과 같고 신앙생활에도 기쁨이 없습니다. 이때 다시 물속에 깊숙하게 들어가려면 내 주장과 의지와 습관과 지식과 같은 것들을 모두 포기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다시 성령 충만한 삶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란 어떤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를 말합니다.
현상과 상태를 구분해야 합니다.
현상이란 병든 사람이 고침을 받는 것, 눈 먼 자가 눈을 뜨는 것,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 것과 같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상태란 보여진 것이 아니라 보여지기 위한 완벽한 준비를 말합니다.
보여지기 위한 완벽한 준비가 드러날 때 성령의 열매가 됩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에서 성령 충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사도 바울에게서 성령 충만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하는 열매맺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 충만이란 교회 중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도 바울에게서 성령 충만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하는 교회 밖에서 열매 맺는 삶으로 나타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