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성찬식

온라인 성찬식

2021년 온라인 성찬예식 준비

1. 각 가정에 성찬용 컵(플라스틱 제조)을 발송한다.
2. 웰치 포도쥬스를 각 가정 또는 개별적으로 구입하도록 한다.
3. 성찬식 용 빵을 각 가정 또는 개별적으로 구입하도록 한다.
4. 예배 때에 인도자의 집례에 따라 가정에서 또는 개인별로 함께 참여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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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Table) / 하나님의 뜻 이해하기

오늘 하루를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시작하고, 반복적이며 단순하지만 우리의 평상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예배의 4중 구조의 ‘만남’과 ‘말씀’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경배하며 찬양으로 영광 돌리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일상의 삶은 순탄하지 않으며, 어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이 불명확한 삶이다.

평온했던 일상의 삶을 깨뜨리는 슬픔과 고통, 어려움은 우리 예배자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4중 구조의 예배 형태에서 ‘만남’과 ‘말씀’ 이후에 ‘성찬’이 이어진다.
성찬은 빵과 포도주를 통해 과거를 기억하며, 현재 생명과 호흡이 있어 예배 드릴 수 있음을 감사하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의미를 더 강하고 깊게 한다.
포도주와 빵을 함께 나누는 성찬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은혜를 상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붉은색의 포도주를 마시며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생각하고, 생명의 양식인 빵을 뗄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 예배 공동체의 소중함을 몸소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일상에서의 성찬은 어떤 의미인가? 

첫째,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시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평상의 삶에서 자칫 잊고 있었던 의미들을 되살리는 시간이다.
사람의 속성은 평안할 때에는 감사하기 쉽지 않다.
모든 것이 나의 생각과 뜻대로 흘러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는 더욱 어렵다.
또한 우리가 슬픈 일을 당하거나 힘든 일로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바라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언제나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고 싶어 하시는 선한 목자시다.
우리의 일상이 평탄치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기 원하신다.

“나, 너와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가 온전한 예배자로 하나님께 민감한 영성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저 무덤덤한 일상으로 휩쓸려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일상 가운데 새로운 변화는 더 깊은 교제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미건조한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우리를 서로 다른 모양으로 창조하시고 빚으셨다는 의미는 우리 모두를 각 달란트대로 늘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말씀하시고자할 때 우리에게 보내시는 사인(sign)이다.

하나님은 그의 예배자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다.
하나님은 본래 좋으신 분이며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시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잘못되기를 전혀 원하지 않는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일상의 삶이 어그러지거나 힘든 길로 들어설 때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이와 같은 신뢰의 관계는 예배의 기초가 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든 자들의 기본자세를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라 선언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왜 예배자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 믿음 위에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장중에 있음을 믿고, 더 나아가 어려움과 핍박, 고통, 슬픔까지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음을 인정해야하는 것이다.

하루 일상에서의 성찬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특별한 일들이다.
평상적이지 않은, 실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일들이 있다.
갑자가 가족 중에 누군가가 아프다든지, 예기치 않던 자동차 사고가 난다든지, 심지어 길을 가다가 넘어지는 일들이 있을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보다 보이지 않는 내적인 일들도 많이 있다.
직장 상사와의 갈등이 일어나거나, 가족 간의 불화가 있거나, 여러 관계 속에서 오는 마음의 고통들은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사인들은 우리가 좀 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바라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우선적으로 기억해야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새로운 일들이 우리를 예배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축복의 간섭임을 인정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이자.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겪었던, 당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어려움들이 하나님의 축복과 연결되어 열매로 맺혔음을 증거 한다.
요셉은 원인이 없는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거치면서 승리하여 가족을 구하고 민족을 세웠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애굽으로 팔렸을 때의 요셉의 상황은 마치 하나님이 버리신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원대한 큰 그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감사한다.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의 고난이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서 어떤 열매를 맺혔는지도 이와 마찬가지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들의 미시적인 눈으로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선한 분이심을 믿는 예배자들에게는 결국 축복의 계획임을 알게 된다.

또한 바울의 고백은 그가 참된 예배자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 얼마나 가슴 벅찬 고백인가! 이 같은 바울의 고백을 통해, 우리가 고난이 축복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의 창으로만 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과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교제하면서, 굳건한 믿음의 관계가 된다면 우리에게 당면한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섭리임을 인정하게 되고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하는 축복의 길이다.
주님의 피와 살과 함께하는 ‘성찬’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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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을 이해할 때, 우리는 성찬의 몇 가지 학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천주교의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

화체설은 성찬을 시행하는 가운데 신부의 축사를 통해서 빵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님이 살과 피로 변한다는 미신적(迷信的) 주장이다.

둘째, 공재설(共在說, coexistentialism)

공재설은 마틴 루터가 주장한 것이다.
공재설은 떡과 포도주는 있는 그대로 남아 있으나,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의 안에, 밑에, 함께(in, under, along with) 그리스도께서 임재해 있다는 주장이다1).

공재설의 핵심은 성찬의 신비를 지켜내고 가톨릭의 미신을 제거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로마 가톨릭의 미신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차이가 있다면 천주교는 집례 하는 사람(신부)의 영적상태나 받는 사람(신자)의 신앙에 관계없이 성례전 집례와 동시에 은혜가 기계적으로 주입된다고 주장한다면, 루터는 받는 사람의 신앙(믿음)이 필수라 할 수 있다2).

셋째, 기념설(記念設, memorialism)

기념설은 쯔빙글리가 주장한 것이다.
기념설은 가톨릭의 미신에 대해 극단적 반대로 간 나머지 성찬의 신비까지 완전히 사라지게 만든 주장이다.
때문에 기념설 성찬에는 어떤 신비도 없다.
단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감상적으로 기념하는 정도로 끝난다.
애석하게도 상당수의 장로교가 칼빈이 아닌 쯔빙글리의 기념설을 따르고 있다.

넷째, 영적 임재설(영적 임재설, spiritual existing)

개혁파 교회가 주장하는 ‘영적 임재설’이다.
영적 임재설은 성찬의 신비를 결코 상실시키지 않으면서 가톨릭의 미신을 정확하게 극복한 교리다.
그러므로 칼빈은 영적 임재설을 설명하면서 두 가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다음과 같이 경계했다.

“첫째로 표징에 대해서 주의를 게을리 하는 나머지 표징이 나타내는 신비를 표징과 완전히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둘째로 표징 자체를 지나치게 추켜세우는 나머지 그 속에 담긴 신비를 조금이라도 흐리게 만들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3).”

이처럼 성경적인 성찬은 신비는 살리고 미신은 철저히 제거하는 것이 돼야 한다.

그러면 신자가 성찬에 참여할 때, 어떻게 그리스도의 임재라는 신비를 경험하면서 미신에 빠지지 않으면서 믿음에 유익을 얻을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 번째는 영적 임재설이 가르치는 바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영적 임재설은 바로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념하거나 묵상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엔 성찬의 신비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단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대한 감사와 애통이 주를 이룬다. 예수님께서 재정하신 성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성도의 영적 양식으로 삼도록 하는 신비한 예식이다. 칼빈은 성찬의 이러한 사실을 아주 잘 지적해준다.

“요컨대, 떡과 포도주가 육체의 생명을 지탱시키고 유지시켜 주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우리의 영혼에게 양식이 된다는 것이다4).”

이 고백과 직결된 성경구절이 바로 신명기 8:3의 말씀이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의 이 말씀을 성찬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사건이 바로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 기적이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 자신이 광야에서 만나를 베풀었던 모세와 같은 메시아라고 스스로를 입증하셨다. 그리고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6:51)고 선언하신다. 광야의 만나는 그림자에 불과하며 실체는 예수님 자신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5)고 선언하시면서 성찬의 의미를 명확하게 가르치셨다.

이 말씀은 구속의 은총을 받은 성도라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만을 양식으로 삼아야 하며, 결코 애굽의 양식(옛적 삶의 방식)을 추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구약의 성례로서 생명나무의 실과와 선악을 아는 실과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여기서 영적 임재가 강조된다. 성도는 손으로 떡과 포도주를 잡는 것을 통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을 묵상한다5). 믿음으로(성령의 은총을 힘입어) 빵을 입에 넣고 씹으며 삼키면서 양식을 먹으면 그 양식이 살과 피가 되는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소화 할 때, 내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연합됨(신비적 결합)을 경험하게 된다. 성령께서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에게 임재 하여(빵과 잔에 임재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살에 연합시킴으로 믿음을 견고케 한다.

두 번째로 성찬이 말씀과 기도처럼 은혜의 방편으로 여겨지려면, 성찬이 보이는 말씀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6).

성경이 읽는 말씀, 혹은 듣는 말씀이라고 한다면, 성찬은 보이는 말씀이다. 보이는 말씀이란 글이나 음성으로 성도들에게 인식하도록 하는 성경과 다르다. 눈으로 봄으로써 복음을 인식하게 한다는 말이다. 성찬은 오감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의 살과 피가 되는지 깨닫게 한다. 빵을 냄새 맡고, 입으로 맛있게 씹어 먹으며, 그 후에 삼켜 소화를 시켜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주린 영혼에게 구미를 당기게 하는 향기를 내며 먹음으로 즐겁게 소화를 하여 살과 피가 된다. 그러므로 신약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기만 하고 먹지 않으면 소용없음을 깨닫게 한다. 칼빈의 주장을 들어보자.

“떡이 보는 것으로는 안 되고 반드시 먹어야만 몸에 영양이 공급되는 것처럼, 영혼도 그리스도께 진정으로 깊이 참여하져야만 비로소 그의 능력으로 살리심을 얻게 되는 것이다7)”

개혁파 교회는 성찬을 집례 할 때마다 설교를 통해서 성찬의 이러한 신비한 유익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찬의 유익이 보이는 말씀이 되어 성도들에게 말씀처럼 유익이 되고 궁극적으로 말씀에 복종하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퍼킨스의 주장처럼 “성찬의 결과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8).

세 번째로 성찬이 말씀과 기도처럼 은혜의 방편으로 여겨지려면 성찬을 통해서 성도가 한 몸이라는 점을 기억하게 해야 한다.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과 한 피에 같이 참여한다는 점을 가르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성찬을 하실 때, 하나의 빵을 찢어서 나누신 것은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한 몸에 참여함, 혹은 연합됨을 가르친다. 이 가르침은 사도신경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심을 믿사오며”라는 고백과 관련을 맺는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할 때, 성도들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임을 고백하며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심리적 하나 됨으로 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성도들은 반드시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구해야 한다. 이렇게 강력한 성령의 임재 가운데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는 성령의 하나 됨을 경험함으로써 인간이 스스로 고안해 낸 종교적 프로그램보다 탁월한 교회의 일치를 일구어 낸다.

칼빈은 성찬에 대하여 말하기를 “성찬의 약속들이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것은 그저 겉모양과 단순한 지식에 머물러 있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것을 진정으로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라 했다9). 성찬은 은혜가 성도에게 주어지도록 주님께서 만들어주신 은혜의 방편이다. 성찬의 은혜가 주어지는 방식은 퍼킨스의 말처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다. 매번 성찬에 참여하면서도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열매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성찬의 효력이 나타났다고 할 수 없다.

오웬의 주장 /

“우리가 [성찬] 규례에 가치를 별로 부여하지 않고 성찬을 통해 그리 유익을 얻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는 성찬에서 그리스도와 갖는 특별한 교제의 본질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잇기 때문이다10).”

미주

1) 루이스 뻘콥,공영민 역,「뻘콥 조직신학 제6권 교회론」,(기독교문사,1981),p.199.
2) 이형기,「종교개혁신학사상」,(장로회신학대학교,1997),pp.112-113.
3) 기독교 강요 Ⅳ.17.5.
4) 기독교강요,Ⅳ.17.10.
5) 조엘비키, 마크 존스,「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부흥과 개혁사,2015),p.854.
6) 칼빈은 기독교 강요Ⅳ.17.11에서 성찬은 “물질적인 표징들로서 우리의 연약한 능력에 맞도록 우리의 눈앞에 제시됨으로써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
7) 기독교강요,Ⅳ.17.5.
8) 조엘비키, 마크존스,op.cit.,p.851.
9) 기독교강요,Ⅳ.17.11.
10) 조엘비키, 마크존스,op.cit.,p.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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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칼빈, 쯔빙글리의 성찬에 대한 견해와 신학 사상

 
1, 개혁가들의 공통점과 차이점
 
 
 
          구 분
 
 
 
           루 터
 
    Martin Luther
 
 
 
               칼 빈
 
        John Calvin
 
 
 
        쯔 빙 글 리
 
     Ulrich Zwingli
 
 
           국적
 
 
  
  독일(Germany)
 
  프랑스(France)
 
  스위스(Switzerland)
 
     신학의 중심
 
 
  그리스도 중심
 
  하나님의 절대적 중심
 
  하나님 의지 중심
 
     신학의 출발
 
  이 신 득 의
  
  만인제사장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
 
  예정 사상
 
  이 신 득 의
 
 
        성 찬 론
 
 
  공 재 설
 
  영적 임재설
 
  기 념 설
 
 
    국가와의 관계
 
 
  교회는 국가에 복종
 
  국가와 교회의 분리
  민주 헌법, 교권 배격
 
      교회의 정치
 
.
  장로 정치
.
 
 
 
2, 개혁자들이 나누어진 배경 
 
성찬에 대한 이견
 
1529년 말브르그에서 루터와 쯔빙글리가 프로테스탄트의 연합을 위해 서로 만났으나 성찬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좁히지 못하였습니다. 이 성만찬 논쟁으로 루터파, 칼빈파, 쯔빙글리파로 구별하게 되었습니다.
 
1) 루터파 지역 : 독일과 동북 유럽
2) 칼빈파 지역 : 제네바 중심 불어를 사용하는 프랑스,스코틀랜드,네덜란드
3) 쯔빙글리파 지역 : 쮜리히 중심으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와 남부 독일
 
16세기 당시의 개혁자들이 개혁파, 루터파로 갈린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개혁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있었다라고 교회사가들은 일반적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개혁주의 교회사가들은 그 당시의 개혁주의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넓은 의미의 개혁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좁의 의미의 개혁주의입니다. 넓은 의미로 말할 때는 로마교에 반대하는 모든 개혁가들을 포함시킵니다. 하지만 좁은 의미로 말할 때는 루터파를 개혁하기 위한 개혁파를 개혁주의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루터는 교회 개혁에 대한 그다지 큰 열망은 없었다라는 것이 현재의 교회사가들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이것은 루터의 '아디아포라'와 '디아포라'에 대한 견해에서 잘 나타납니다. 루터는 '디아포라' 곧 본질적인 것에 있어서는 성경을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디아포라' 즉 비본질적인 것에 있어서는 "성경이 금하지 않는한 교회 안에서 해도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당시 로마교 안에서 행해지던 많은 예배 의식들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하지만 칼빈을 비롯한 대부분의 개혁파들은 루터의 이러한 태도에 강하게 반대하여 로마교의 모든 잔재들을 개혁된 교회 안에서 없애기 위하여 필사의 노력을 다합니다. 이것은 칼빈의 '아디아포라'에 대한 견해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즉 "성경이 명하지 않는 것은 교회 안에서 그 어떠한 것이든지 행 할 수 없다"는 것이 칼빈의 주장이었습니다. 이것은 루터파와 개혁파의 성경에 대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된 개혁주의는 오직 성경에 의거하여 성경만이 우리 신앙과 삶에 있어서 유일한 표준이며 기준(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서1장1절)인 것을 고백하며 오직 성경에 따라서 살 것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설교자 곧 목회자는 성경에 없는 그 무엇도 성도의 예배와 삶에서 강요하지 말 것을 가르쳤으며, 만일 이것을 어긴다면 그 목회자는 하나님이 죽으심으로 주신 성도의 자유를 침해하는 악한 죄를 범하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물론 가장 큰 차이는 성찬관입니다
 
 
3, 공재설, 영적 임재설, 기념설
 
1)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ation)
로마 천주교의 화체설은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실제적으로 변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루터의 공재설은 그것들의 본질이 변하지는 않고 대신 그리스도가 그 요소들의 "안에, 함께, 아래에, 몸으로" 임재하신다고 주장한다.
 
2) 영적 임재설(靈的 臨在說, spiritual presence)
칼빈의 견해로 성만찬의 현장에 말씀과 성령의 사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임재 한다는 해석이다. 그에 의하면 성례전은 "눈에 보이는 징표로서 우리에게 영적인 모든 일을 계시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외부적 증명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여러 약속을 우리 마음에 한층 더 강하게 각인하여 우리가 그 약속을 보다 더 확실하게 믿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장로교회는 영적 임재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으로, 말은 영적 임재설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실천에 있어서는 거의 기념설로 이해한다.

그 결과 성찬에 대해서 너무나 피상적인 이해가 교회 안에 보편화 되어 있다. 예수님의 참된 몸을 먹는다는 성찬의 본질은 사라지고,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죄와 그분의 은혜를 자각하게 하는 도덕적, 영적 적용이 주가 되어버린다.

이런 잘못된 견해들에 대항하여 개혁신학은 성찬을 영적 임재설로 올바르게 설명하였다.
본인이 항상 강조하듯이 영적 임재설이란 단어 자체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를 먼저 살펴 보자.
일단 ” 영적으로 임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떡에 정확히 무엇이 임하는 지에 대한 분명한 개념이 없다.
대부분, “예수님의 영혼이 임한다”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성찬에 임재하신다”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진다”
“영으로 임하신다” 정도로 희미하게 이해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영적 임재설을 실재적 임재설 (real presence)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예수님의 실재적인 몸은 성찬과 별 관계가 없게 되어 버렸다.

어떤 개혁신학자나 심지어 기본적인 신학교재도 이런식으로 설명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견해가 성도들, 심지어 목사들에게도 보편화 되어 있다는 사실은, 영적임재설이 얼마나 잘못 이해되고 있는 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영적 임재설에 대한 이러한 희미한 이해는 성찬에 대한 희미한 이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영적 임재설의 정확한 뜻은 “예수님의 몸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통하여 실재로(realis:  원래 이 단어는 res (thing)에서 유래하였다) 혹은 참으로 (vere) 떡에 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적 임재설은 전달 내용에 있어서는 실재적이고, 전달 방식에 있어서는 영적이다.
따라서 영적/실재적 임재설이 보다 정확한 개념이다.

임재설에 관한한 논쟁의 핵심은 무엇이 전달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전달되는가이다. 
쯔빙글리나 현대의 복음주의자를 빼고, 떡에 임하는 것이 예수님의 실재적인 참 몸이라는 것에 반대하는 교파는 없다.
어떻게 보면 아주 사변적인 논쟁처럼 보이지만, 어떻게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의 은덕에 참여하는가에 대한 매우 실천적인 논쟁이다.

개혁신학이 이것을 영적 임재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임재가 성령님의 사역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은 성령을 말한다.
또 이 사역은 우리의 몸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 역사하기 때문에 영적이라고 말한다.
이 점에서 성령의 역사는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성령은 예수님의 몸에 역사하셔서 우리의 영혼이 먹을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다른 한 편으로, 성령은 우리의 영혼에 역사하셔서 예수님의 몸을 먹을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이 점에서 성령은  그리스도와 신자를 연결하는 고리이다.

따라서 우리가 떡을 먹을 때, 우리의 몸은 입을 통하여 정말로 떡을 먹듯이, 우리의 영혼은 믿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참 몸을 정말로 먹는다. 그래서 믿음을 영혼의 입이라고도 한다.
성경은 “예수님의 몸은 영혼의 양식”이라고 분명히 가르친다. 
다시 한번 분명히 강조하지만, 우리의 영혼이 먹는 것은 예수님의 영혼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의 “몸”은 예수님의 육체, 즉 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카톨릭이나  루터교와 명백히 다르다.
부활하신 주님은 자신의 육체가 그대로인 채 자신의 몸을 영혼의 양식으로 만들어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나누어 주실 수 있다.
마치5병 2어로 5000명을 먹이신 것처럼.  

칼빈은 이렇게 비유하였다.
태양은 지구상에 그 자체로 임하지 않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빛을 지상에 있는 생명체에게 전달한다. 
즉 지상의 생물들은 태양 자체를 먹는 것은 아니지만, 태양이 주는 빛을 먹는다.
마찬가지로 신자들의 영혼은 예수님의 몸 자체를 먹지는 않지만, 그 몸이 전달하는  영혼에 필요한 양식을 먹는다.  
즉, 우리의 영혼이 실재로 주님의 몸을 먹는다. 
성찬은 우리의 영혼이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채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라고 부른다.

따라서 성찬은 우리 영혼을 위한 식사시간이다.
우리의 몸은 땅에 있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늘에 올라(Sursum Corda)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먹는, 참으로 즐거운 시간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성찬식을 행할 때, 주님의 몸이 이 땅에 임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하늘로 들려 올라가 그리스도 몸 앞에 임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 성찬을 통하여 우리의 피폐한 영혼이 소생함을 얻는다.
성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게 된다면, 일년에 겨우 2-3차례 실시되는 성찬식과 장례식 비슷한 분위기의 성찬식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많이 벗어낫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초대교회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성찬식을 주로 행하였다는 사실은 이 점에서 매우 의미 심장하다.

 
3) 기념설(記念說, memorialism)
성만찬을 단순한 하나의 기념으로 해석하는 쯔빙글리의 견해로 개혁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쯔빙글리는 고린도전서 11장을 근거로 성만찬에 대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그 이상의 뜻이 없다라고 말한다. 즉 성만찬은 죄의 대속물로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는 것이다.
 
 
 루터의 성찬론

루터의 성만찬교리는 대략 세 시기를 거치면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첫 시기는 1519년 '성찬에 관하여'를 썼을 때까지이며, 둘째 시기는 1520년부터 1529년까지, 곧 교회개혁의 3대 작품 중의 하나이자 성만찬에 관한 견해를 보여주는 '교회의 바벨론 감금'을 썼을 때부터 마부르그 논쟁 때까지이며, 세 번째 시기는 마부르그 논쟁 이후 루터 자신의 신학형성과 더불어 구체화된 시기이다.

   루터는 1519년 한편의 시편강해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원형"이란 개념으로 성찬의 상징적 의미를 가르친 바 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의 몸된 성례전과 형제의 사귐에 관한 설교"(Ein Sermon von der hochw, Sacrament des Leichnams Christi und von den Bruderschaften, 1519)에서는 성찬을 화체설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즉 루터는 "그의 참된 자연적 살이 떡 속에 있다. 왜냐하면 떡이 그의 참된 자연적 몸으로 변하고, 포도주가 그의 참된 자연적 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또 "떡이 어떻게 남아 있으며 그것이 어느 때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에서 루터는 화체(化體)의 '불가사의함'을 말한바 있다.

   그런데 다음 해(1520)에 쓴 '교회의 바벨론 감금'에서는 화체설적 견해를 포기하였다. 왜냐하면 화체설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영향 받은 토마스주의의 그릇된 개념으로 보았고, 화체설은 토마스주의로 복귀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루터는 떡의 실체가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몸이 동시에 전달된다는 사상, 곧 공재설(共在設, consubstantiation)을 주장하게 되었다. 즉 떡과 포도주는 물질이며 상대적 요소이지만 떡과 포도주 안에(in) 아래(under), 그리고 떡과 포도주와 더불어(with) 그리스도 예수의 참된 살과 피가 임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떡과 포도주와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신비스런 관계를 '가열한 철'(ferrumignitum)이란 비유로 설명했다. 철과 열은 별개의 것이지만 일치가 되면 특수한 조재가 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1522년에 이르러 루터는 네델란드 출신의 내과 의사였으며 인문주의자였던 코넬리우스 호니우스(Cornelius Honius)로부터 서신을 받았는데 그는 성만찬 제정의 말씀 곧 "이것은 내 몸이다"(Hoc est corpus meum)의 est는 significat라는 단어와 동등한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을 듣게 된다. 그러나 루터는 호니우스에게 답하기를 상징적 해석방법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 바는 아니나, 성경에 분명히 "이것은 나의 몸이라"하고 아무런 수사법도 없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그래서 루터는 성경이 '이다'(est)라고 말씀할 때 그 문자적 의미를 감히 '상징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진실로 성찬 속에 함께 하시며, 이러한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는 그의 무소부재성에 근거한다. 그래서 1529년까지의 루터의 성찬교리는 공재설과 그의 기독론의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설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쯔빙글리의 성찬론

루터가 수도원에서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찾고 있을 때인 1506년 말에 쯔빙글리는 글라우스(Glarus)에서 신부가 되었다. 루터가 자신의 종교적 갈망과 당시의 종교적 상황에서 개혁자로서의 길을 갔지만 쯔빙글리는 원전들로 돌아가고자 하는 에라스무스적 권고와 당대의 인본주의적 경향에서 출방하였다. 그래서 쯔빙글리는 에라스무스 외에도 왈프린(H. Walflin), 비텐바하 등과 같은 인본주의자들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성만찬에 관한 쯔빙글리의 견해를 찾을 수 있는 최초의 문헌은 1523년에 쓴 그의 서신이다. 그는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 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부정적이었다. 그는 화체설은 성경적 근거도 없을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에도 없었고 가톨릭의 창작이라 하여 거부하였다. 쯔빙글리는 '이것은 나의 몸이다'의 est라는 말은 윤리적-비유적(typolgisch)인 것으로 이해하였고 성찬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 요한복음 6장 63절의 "육은 무익하니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어거스틴과 초기 스콜라주의자들처럼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의 존재를 지역적인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배격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성만찬 제정의 말씀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였다. 즉 쯔빙글리는 성만찬은 이에 참여하는 신자들에게 이미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고 확인하는 증거로서 의미가 있을 분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나누신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성찬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주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데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쯔빙글리가 이처럼 성찬을 단순히 기념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코넬리우스 호니우스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호니우스는 1523년 헤이그에서 쯔빙글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는 하나의 수사법 혹은 문학적 표현 양식이므로, 이 구절은 '이것은 나의 몸을 상징한다.'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호니우스는 '우리는 입으로 받아들이는 빵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쯔빙글리는 호니우스의 해석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이 해석을 가리켜 어려운 난제를 명백하게 꿰뚫어 볼 수 있게 해준 '값진 진주'라고 극찬하였다.
 

칼빈의 성찬론
 
칼빈은 “불가시적 은총의 가시적 형태”라고 규정한 어거스틴의 성례전 정의를 인정하지만 그보다도 “성례전이란 외적 표징에 의해 확증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증거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을 입증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러 가지 은유들을 사용하여 그는 말씀과 성례전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명확히 표출하였다. 이 관계에 의하면, 성례전은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하는 인(印)이며,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교환되는 서약이며, 우리의 제자됨을 사람들 앞에 나타내는 징표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믿음이고 성령께서 공급하는 불가시적 은총이 없으면 공허하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
 
세례를 다룸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것은 유아세례를 옹호하는 점이다. 유아세례와 관련하여 구약성서의 합법적인 입회 성례전으로서의 할례의 역할이 특별히 강조된다. 이 외에도 칼빈은 가장 타당성 있는 신약성서의 증거들을 제시한다. 그리스도께서 어린 아이들을 불러 팔에 안으시고 “천국은 이와 같은 자의 것”(마19:13-14)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신도의 자녀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곧 “죄”다.
 
세례가 구원의 경륜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은 구원의식이 아니다. 그는 쯔빙글리처럼 유아기에 죽은 유아들은 모두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세례받지 않은 자를 그 때문에 정죄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음을 지적한다. 전통적 견해인 세례 중생론을 폐기시키면서, 칼빈은 어린 아이가 자신을 교회가 용납하고 교회에 입회할 것의 의미를 점차 배우고 교회의 보호와 가르침에 영향을 받을 때 은밀한 영향력이 그 아이의 마음 안에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유아들은 세례를 받고 미래의 회개와 믿음을 성취한다.
 
‘주의 만찬’을 논하면서 그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제로 현존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하지만, 루터파에서 발전된 그리스도의 부활성체 편재설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례전용 빵과 포도주를 통해 현재화된다는 것은 거부한다. 다른 구절들에서 유추하여 “이는 내 몸”이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일종의 환유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로 들리워 가는 것을 사람들이 보았다. 그러므로 그 몸은 현재까지도 하늘에 계시고 빵과 포도주에 갇힐 수는 없다. 그러한 것이 아니라 성례전에 참예하는 자는 영적으로 하늘로 들리워 올라가 그 몸에 참여한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몸과 피에 영적으로 참여한다는 이 교의는 칼빈주의 교회의 특징이다. “나는 그 신비를 이해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경험 한다”. 어떤 면에서는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Communion)은 성령의 은밀한 역사를 통해 가능해진다. 교회의 공동체적 삶에서 이 성례전이 중요함을 평가하는데 칼빈을 능가하는 사람이 아직 없다. 그는 성례전이 자주 행해져야 한다고 역설하며 경건한 참예자의 종교적 경험을 열렬하게 묘사하고, 성례전에 참예함으로써 생겨나는 “사랑의 띠”를 그것이 갖는 사회적 의무라는 의미와 아울러 강조한다.
 
 
 
 루터, 칼빈, 쯔빙글리의 신앙
 
1)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아이스레벤에서 출생한 루터는 사제품을 받고 비텐베르크에서 성서학을 가르치는 중 ‘탑의 체험’을 하고 은총의 중재가 신앙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게 된다. 그의 종교개혁의 불씨는 1517년 비텐베르크 대학 성당 문에 게시된 대사에 대한 '95개항'으로,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루터를 교황청에 이단자로 고발하였다.
 
교황은 루터를 지지하던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요청을 받아들여 1518년 10월 아욱스부르크의 제국의회에서 심문을 받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의 명제철회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1520년 레오 10세는 Exsurge Domine 교서를 통해 루터의 모든 저서를 불태우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그해 12월 10일 교회법률서와 파문위협의 교황칙서를 소각함으로써 교회와의 단절을 공식화하였다.
 
한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알 5세는 보름스 제국의회(1512)에서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국가적 법익을 박탈하고 추방령을 내리는 ‘보름스 칙령’을 공포하였고, 반면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루터를 바르트부르그성으로 데려가 보호하였다. 루터가 바르트부르그에 은거해 있는 동안 독일은 제국의 기사들의 항거(1522)와 지방 영주들에 대한 농민의 봉기로 개혁의 요구가 강하게 일게 되지만 루터는 과격한 지도자들을 비난하면서 독자적인 중도적 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농민들의 요구에 대한 루터의 소극적인 태도와 농민들에 대한 탄압에의 권고는 많은 지지세력을 상실하였고, 상당수의 지지자들이 재세례파로 떨어져 나가게 되었으며, 농민들의 투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루터와 지방 영주들과의 동맹은 결국 프로테스탄트적 영방교회를 형성하게 된다.
 
한편 가톨릭을 지지하는 제후들은 1524년 ‘라티스본 동맹’을 맺고 루터파의 확산을 저지하려 하였고, 또 루터파를 지지하는 제후들은 1526년 6월 ‘토르가우 동맹’을 맺어 루터파를 보호하고 있었다.그래서 1526년 제1차 슈파이어 제국의회는 ‘그 지역의 종교는 그 지역 통치자의 종교로’하는 지역별 종교선택의 자유의 원칙이 잠정적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1529년 터어키의 공격에 대비하고 신교운동의 확산방지를 위한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가 개최되었고 제국의회에서는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한 보름스 칙령을 재확인하고 제1차 슈파이어 제국의회의 결정사항을 번복하면서 ‘로마 가톨릭 신앙만이 유일한 합법적 신앙이기에 모든 이는 가톨릭 신앙에 남아야 한다’고 결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때에는 정치적 상황이 제1차 슈파이어 제국의회 때와는 달리 불화 관계에 있던 황제와 교황은 화해를 하였고, 황제와 프랑소와 1세도 평화조약을 체결한 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에 대하여 5명의 제후들과 14개 도시의 대표들이 루터를 지지하면서 제국의회의 결정에 항의하였고 슈말칼덴 동맹을 체결하게 되고 카알 5세는 슈말칼덴 동맹자들에게 선전포고를 하여 1547년 4월 엘베 강변의 뮐베르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프로테스탄트의 헤센의 필립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를 사로잡게 되어 공의회를 개최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으나 교황 바오로 3세와 황제 카알 5세와의 불화는 갖기로 한 공의회 개최를 어렵게 하였으며, 결국 황제는 종교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생각으로 1547년 아욱스부르크 ‘무장 제국의회’에서 자신의 해결 방안을 지시하였는데 1548년 ‘아욱스부르크 잠정 규정’을 잠정적으로 통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영주들의 혁명’이 일어나 황제는 동생 페르난디에게 종교문제를 맡기도 물러났다.
 
그리고 페르디난디는 혁명세력과 1552년 파싸우 휴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양측 종파들에게 상호 간의 관용을 보증하였다. 그리고 1555년 9월 아욱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종교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땅이 속한 자에게 종교도 속한다’는 지역별 종교선택의 자유의 원칙이 최종 결정되었다. 이로써 독일에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동등권이 인정되었으며, 백성들은 영주의 종교를 따르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하였다. 한편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개혁운동을 멜랑히톤에게 맡기고 죽었다.
 
 
2)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
 
루터와 쯔빙글리와 더불어 종교개혁의 3대 인물로 불려진다. 루터나 쯔빙글리보다는 한 세대 후배이지만 제네바를 중심으로 전개한 그의 개혁운동은 전 유럽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루터가 프로테스탄트의 길을 개척했다면 칼빈은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을 집대성하였다.
 
칼빈은 1528년 오르레앙 대학에 입학하여 인문주의를 배웠다. 특히 성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했던 인문주의자 올리베탄(1506-1538)에게서 성서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1533년 파리로 돌아온 칼빈은 친구 니콜라스 콥이 파리대학 학장으로 취임하는 연설문을 작성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이 연설문은 소르본 대학과 그 신학자들을 비판하였고,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교회개혁운동에 동조하였으며, 복음주의적 신앙을 강하게 표현하였다.
 
그로 인해 칼빈과 콥은 파리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가 마련해 준 성직록을 거부하고 가톨릭 교회와의 결별을 표하고 슈트라스부르그를 거쳐 바젤로 도피하여 프로테스탄트 최고의 신학적 저서인 ‘기독교강요’를 발간(1536)한다. 그런후 종교적 관용정책을 쓰던 슈트라스부르그로 갈 생각으로 제네바에 도착한다. 거기에서 빌헬름 파렐의 제네바의 개혁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고 개혁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1536년 10월 로잔에서 가톨릭측과의 신학토론을 벌이고 1537년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례’를 시의회에 제시하여 채택된다. 그래서 제네바 시의회는 모든 주민이 ‘신앙고백서’에 대하여 서약하도록 하였으나 주민들의 저항이 강하게 일어났고 1538년 새 시의회가 선출되자 칼빈과 파렐은 제네바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혼란이 가중되어 1540년 시의회의 요청으로 제네바에 돌아온 칼빈은 1541년 새로운 교회제도를 조직을 위해 ‘교회법규’를 시의회에 제출하여 채택되게 된다. 칼빈은 국가의 독립성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와 긴밀한 관계 하에 두었고, 제네바시를 하나의 교회적 구조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제네바시의 질서를 유지하고 시민들의 생활을 감독하고 정화하기 위해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되는 감시위원회, 즉 ‘종무국’(宗務局)을 구성하였다.
 
그래서 1555년까지 엄격하게 조직된 신국(神國)이 제네바에 형성되었고, 제네바는 개혁된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1559년 칼빈은 제네바 신학교를 설립하여 거기에서 배출된 수많은 설교가들은 전유럽에 칼빈의 교회제도, 신학과 사상 등을 전파하였다. 그리고 그의 종교개혁은 프랑스로 전파되어 박해에도 불구하고 1559년 최초의 국가 종교회의를 파리에서 개최하여 칼빈이 기초한 ‘갈리아 신조’를 채택하고 ‘위그노파’(Huguenots)로 불리게 되었다.
 
3)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
흔히 종교개혁의 ‘제3의 사나이’라고 불린다. 그도 성서, 신앙, 의화 개념이나 새로운 교회상의 정립, 정통교회에 대한 투쟁 등에 있어서 루터나 칼빈, 재세례파 등과 공통된 기본원칙들을 갖고 있다.
 
쯔빙글리는 글라루스에서 사목하던 중 군종신부로서 전투에 두 번 참전하고 용병제도에 대해 비판한다. 그리고 취리히에서 사목하면서 에라스무스적인 개념의 설교를 하고 패스트 발병을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신앙에 대해 더욱 깊이 탐구하게 되었고 1521년 카알 5세와 전쟁 중이던 프랑소와 1세의 스위스에 대한 용병파병 요청으로 다시 한번 용병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그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교회와의 갈등과 분열은 순전히 외형적인 교회법의 위반 때문에 촉발되었다. 1522년 사순절임에도 아인지델른의 사제인 레오 쥬드와 취리히 교회 지도자들이 금육을 지키지 않고 소세지를 먹은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그것에 대하여 취리히를 관장하던 콘스탄쯔 주교는 취리히 시의회에 이들의 처벌을 요구하였고, 시의회는 이들을 투옥하고 벌금형에 처하였다. 그래서 쯔빙글리는 먹는 음식을 금지하는 교황의 법령에 대하여 복음에 의해 선포된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라고 비난하였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달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직 성서만이 필요하며, 교회, 공의회, 교황이 하느님의 말씀을 정의․해석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콘스탄쯔의 주교가 쯔빙글리를 취리히 시의회에 고발하자 1523년 제1차 토론회에서 쯔빙글리는 히브리어․희랍어․라틴어 성서와 자신의 개혁안인 ‘67개 조문’을 근거로 논쟁하였다. 시의회는 쯔빙글리의 ‘67개 조문’에서 나온 개혁안을 채택하였고, 칸톤(Canton)내의 모든 신부들에게 실행하도록 명하였으며 시의회는 4차에 걸친 토론회를(1523-1524)통해 미사제도는 인정하되 성상폐지론은 결정하였으며 신자들의 성가, 오르간 음악 등, 성서에 명시되지 않은 모든 예배수단을 제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사와 관련된 가톨릭 교회의 모든 가르침을 반대하며, 새로운 양식에 의한 성찬식을 거행하였다. 한편, 취리히 시의회가 개혁을 더디게 진행하자 일부(재세례파)가 과격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면서 과격한 개혁운동을 전개하자 쯔빙글리는 그들과 결별하였다.
 
그리고 쯔빙글리는 루터와도 성만찬 논쟁을 일으키게 되는데, 루터는 성찬식에 상징적 성격이 있다는 것과 영적인 의미의 먹고 마심을 물론 전제하고 있었으나,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성찬에 실재(實在)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성찬식이 순전히 영적․상징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로써 루터와 쯔빙글리는 입장을 달리하는 교파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1529년 가톨릭 동맹주들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그가의 페르디난드 공작과 연맹을 맺자 쯔빙글리는 카펠로 진군하여 가톨릭 속한 주들은 페르디난드와 맺은 동맹을 취소할 것과 복음적 교회들의 존립을 허용할 것을 규정하는 제1차 카펠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동맹주들이 오스트리아와의 동맹관계를 취소하지 않자 쯔빙글리는 경제 봉쇄령을 내렸다. 이에 반대하여 가톨릭 주들은 1531년 취리히 주의 카펠을 침입하였고 가톨릭측이 승리하여 2차 카펠 평화조약이 체결된다. 조약 내용은 프로테스탄트들은 더 이상 영토확장을 하지 않고, 신교 안에 있는 소수의 가톨릭파들에 대해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여야만 했다.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적지 않은 교회가 성찬식을 진행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성찬식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 제자들과 가진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의식이다.
일반적으로 성도끼리 성찬기를 주고받는 방법으로 진행되는데 코로나19 상황에선 감염 우려 때문에 진행하기가 쉽지 않다.

지난 4월 12일 부활주일을 전후해 일부 교회가 온라인으로 성찬식을 진행한 것도 이런 이유였다.
최근에는 감염을 막을 수 있는 개인 성찬기까지 등장했다.
성찬용 빵과 포도주를 개인 용기에 담아 제공하는 것이다.

포항오천교회(박성근 목사)는 지난달 8일 성찬식을 하면서 성찬용 빵을 개인 용기에 담아 교인들에게 나눠줬다.
포도주도 기존 금속잔 대신 일회용 잔에 담았다.

박성근 목사는 3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성찬 빵을 개별 포장하고 포도주는 일회용 잔을 사용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올해 들어 두 차례 성찬식을 진행했다”면서 “700명 가까운 교인과 성찬을 나눴는데 감염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해서인지 모두 편안한 마음으로 성찬에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팬데믹 상황인 만큼 안전한 성찬식을 위한 다양한 방안이 나올 수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일회용 성찬기 모습. 

아마존 닷컴에서 "성찬키트"를 구입하여 각 가정에 배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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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림교회(김정석 목사)도 코로나19 이후 자체 제작한 개인 성찬기로 세 차례 성찬식을 진행했다.
친환경 재료로 만든 용기에 성찬 빵과 포도주를 개별 포장한 뒤 예배당 입구에서 교인들에게 나눠줬다.
교인들은 성찬 집례자의 안내에 따라 용기를 열어 빵과 포도주를 먹었다.
이 과정에서 다른 교인과 접촉할 일은 없었다.

예배학자들은 팬데믹 때마다 성찬 방법이 바뀌어 온 만큼 코로나19 상황에서도 감염을 막기 위한 대안을 적극적으로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성찬식의 경건성과 의미만 잘 살린다면 형식에는 크게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고 조언한다.
이전에도 팬데믹은 성찬식 방법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김병석 숭실대 베어드교양학부 교수는 “1918년 스페인독감을 기점으로 큰 잔에 포도주를 담아 돌려 마시던 성찬의 방법이 개인 잔을 사용하는 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며 “성찬의 본래 의미는 살리고 감염을 막기 위해 성찬의 형식을 바꾼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코로나19를 계기로 성찬의 방법이 또다시 바뀔 게 분명하다”면서 “성찬의 의미와 경건성에 강조점을 두면서 감염병을 막을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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