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것을 찾으라(골로새서 3:1∼2) / 주일설교 원고(2020-3-1) 이승혁목사


                                                                  파트리스교회 주일 설교 / 2020-03-01 삼일절 101주년 기념주일

위의 것을 찾으라(골로새서 3: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  


왜 위의 것을 찾아야 할까요?

구약의 역사적 사건에서 위의 것을 찾아야 할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윗 왕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조사를 실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①. 사무엘하 24:1∼17, ②. 역대상 21:1∼17).
그때 군대 장관 “요압”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십니까?” 하고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이 재촉하므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요압은 레위와 베냐민 사람을 계수하지 않고 이스라엘에서 일백십만 명(②.110만,  ①.80만),
유다에서 사십칠만 명(①.47만, ②.50만)이라고 보고합니다. (1)

하나님이 인구 조사 한 것에 대해서 징계하셨을 때 다윗 왕은 잘못을 깨닫고 “내가 이 일을 행하므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내가 미련하게 행하였사오니 내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선지자 “갓”이 다윗 왕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했습니다(사무엘하 24:13).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왕의 땅에 칠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시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 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시 왕의 땅에 삼일 동안 온역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하게 하소서.  

다윗 왕은 세 가지 재앙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이냐고 묻습니다.

첫째는 칠년의 기근
둘째는 왕의 대적에게 석 달을 도망하는 신세
셋째는 삼일 온역

다윗은 위엣 것을 찾을 줄 아는 왕이었기 때문에 세 번째 재앙을 선택했습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무엘하 24:14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고통 중에 있도다 청하건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다윗은 세 번째 재앙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죽은 사람들의 수가 칠만 명(7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위의 것을 찾지 못하고 어느 한 순간 땅의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위의 것이란 하나님의 방법을 말합니다.
땅의 것이란 사람의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위의 것을 찾는다는 것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위엣 것을 찾아야 하는 이유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사람이기 때문에(창세기 1:26~27)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사람이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입니다.

사람”이란 헬라어는 “안드로포스(ἄνθρωπος, 444. anthrópos)” 라고 합니다.
‘안드로포스’의 뜻은 “위를 쳐다보고 사는 자”라고 합니다.

어떻게 위를 쳐다보며 살아갈까요?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골로새서 4:12b)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 하나님의 모든 뜻(ἐν παντὶ  θελήματι τοῦ Θεοῦ, in all will of God)

하나님의 뜻에는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합니다.

델레마(2307, θέλημα, theléma) will    
불래(1012, βουλή, boulē) counsel

“델레마”라는 하나님의 뜻은 어느 누구도 변경할 수 없는 “절대적인 뜻”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없었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놓으시고
기도하셨을 때 이 십자가를 내게서 벗겨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나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라고 기도를 바꾸었습니다.

델레마라는 단어가 사용된 성경 구절들을 소개합니다.
마태 6:10, 7:21, 12:15, 18:14, 21:31, 26:42
마가 3:35
누가 11:2, 12:47, 23:25
요한 1:13, 4:34, 5:30, 6:38, 6:39, 6:40, 7:17, 9:31
사도 13:22, 21:14

불래라는 하나님의 뜻은 환경과 상황에 따라 변경할 수 있는 “상대적인 뜻”입니다.
불래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
누가 14:31
요한 11:53, 12:10
사도 27:39
고후 1:17

하나님의 뜻을 찾지 못하면 세상에서 고통과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명령한 것이 전시상황이었다면 크게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시가 아닌 때에 태평시절에 인구조사를 실시하도록 명령한 것은 사탄의 유혹에 의한
다윗을 자극한 교만함이었습니다.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다른 존재와 달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습니다.

형상이란 히브리 단어는 “체렘(צֶלֶם, cherem)”이라고 합니다.
헬라어로 “호모이오마(homoioma, ὁμοίομα)”라고 합니다.

체렘, 호모이로마는 “불필요한 것들을 찾아내서 버린다”는 뜻입니다.

어느 거리에 한밤중에 사람의 힘으로 옮기기 어려운 매우 큰 돌덩어리를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천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하며 불평하며 돌덩어리를 피하여 지나갑니다.
그때 어느 조각가는 매우 큰 돌덩어리가 길가에 버려졌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그 돌을 기중기를 사용하여
조각가의 작업장으로 옮겨놓았습니다.
그리고 망치와 정을 갖고 돌덩어리를 다듬기 시작합니다.
몇 달 후 사람들에 의해서 불평이었던 돌덩어리가 아주 멋진 조각품으로 탄생했습니다.
버려진 돌덩어리가 작품으로 바뀌려면 돌덩어리에서 조각품이 될 수 없는 돌을 모두 다듬어 버려야 합니다.

“체렘”, “호모이오마”라는 단어가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는 조각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버려진 조각들을 또 다른 용어에서 확인하면 조각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죄(罪)라는 헬라어는 “하마르티아(hamartia, ἁμαρτία)”라고 합니다.
“하마르티아”란 사격 또는 화살을 쏠 때 과녁을 겨냥합니다.
그런데 총알과 화살이 과녁에서 벗어나는 것들을 “하마르티아”라고 합니다.

체렘, 호모이오마는 죄와 같은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에덴동산에서 처음 창조된 아담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이 흐려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죄를 제거한 후에 회복할 수 있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영적 생활의 승리를 위하여(빌립보서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I press on toward the goal to win the prize for which God has called me heavenward in Christ Jesus.) 

지난주일 황목사님의 설교의 핵심은 “푯대를 향하여 이전 것은 모두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문제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 것을 버릴 수 없고 세상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국가의 재난을 막기 위하여(역대하 7:13∼15)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솔로몬 왕은 다윗 왕국을 계승한 왕입니다.
다윗 왕국이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회복했던 왕으로 장차 “메시아가 오실 왕국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마치고 성전 완공에 대한 감사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장차 나라에 세 가지의 재앙 즉 “가뭄”과 “메뚜기 떼”와 “전염병”이 유행할 때 회개하면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 것이라고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이러한 약속은 솔로몬 왕이 다윗 왕이 성전 건축을 위하여 준비했으나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못하고 다음 대에 허락할
것이라는 계시에 따라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한 후에 그 성전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역대하 7:11∼12)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을 마치고 솔로몬의 심중에 여호와의 전과 자기의 궁궐에 그가 이루고자 한 것을
다 형통하게 이루니라.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 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성전을 삼았으니.  

최근 우한 폐렴에 의해서 세계가 긴장하고 있습니다.
시작은 중국의 우한(후베이 성)에서 시작했습니다.
133개 국가에서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사람들을 출입금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러시아와 북한에서도 중국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모두 입국금지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입국 금지당하는 나라의 수가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떠났던 한국인 관광객들이 입국 금지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제공하는 전세 항공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대적 상황을 생각할 때 지금은 위의 것을 찾아야 할 때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에 머물기 때문에 세상적인 것이 유혹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의 것을 찾지 못하면 어느 한 순간 나도 모르게 세상 것이 흔들 수 있으므로 위의 것을 찾는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위의 것을 찾는 가장 쉽고 편리한 방법은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게 하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능력의 말씀입니다. 아직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그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2020년 매일 아침 오늘의 묵상을 위한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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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1) 인구 조사의 결과 숫자가 차이나는 이유

이스라엘을 계수한 인구수

우선 사무엘하는 이스라엘에 군인이 80만명이라고 기록하고 역대상은 이스라엘에 군인이 110만명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는 모순일까요?

이에 대한 몇가지 가능한 설명이 있습니다.
우선 성경을 조금 더 자세히 봐야 할 것 입니다.
역대상 바로 다음 구절인 21:6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요압이 왕의 말을 가증히 여겼으므로 그들 중에서 레위와 베냐민은 세지 아니하였더라. <역대상 21:6>

즉 다시 얘기하면, 이스라엘 군인은 총 110만명 이었지만, 요압이 계수를 하라는 왕의 명령에 불만을 품고 110만명 중에서 레위와 베냐민 지파를 세지 않고, 80만명 이라고 보고했다는 것 입니다.

혹은 역대상 27장 1절에서 15절까지 보면, 왕을 섬긴 관리들과 그 수가 나오는데, 12지파가 각 조당 24,000명씩 한달에 한번씩 교대로 왕을 섬긴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또 역대하 1장 14절을 보면  12지파에 24,000명이면 총 288,000명이고, 이를 반올림 하면 대략 300,000명 정도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대한 숫자를 뺀 기록일 수 있을 것입니다.

유다를 계수한 인구수

유다 백성에 대한 인구수는 어떨까요?

사무엘하에서는 50만명 이라고 기록했고, 역대상 에서는 47만명 이라고 기록 합니다.
이에 대해서 두가지 설명이 가능한데,

첫번째는 단순하게 사무엘서의 저자가 반올림을 했을 가능성 입니다.
우리는 요압에 다윗에게 보고한 숫자가 정확한 숫자가 아니며 어딘가에서 반올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요압은 어디에서 반올림을 했을까요?
이를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군인의 숫자가 6째 자리 즉 10만의 단위로 반올림이 되어 있는 것으로 유다 군인을 만 단위에서
반올림을 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역대기의 저자가 왕궁의 수비대 였던 3만명 <사무엘하 6:1>을 뺀 숫자를 기록 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왕궁에 있는 3만명은 이미 알고 있는 인원이었기에 실제 계수한 것은 47만명 이었지만,
왕에게 보고를 할 때는 왕궁에 있는 3만명 까지 합쳐서 보고를 했을 수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지식에 한계가 있기에 제가 제시한 것들은 일종의 시나리오 혹은 가능성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 중 어떤 시나리오가 맞다고 얘기할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 시나리오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성경의 다른 구절들을 토대로 합리적으로 추론해 볼 수 있는 것들 입니다.

열왕기서와 역대서에는 중복되어 기록된 내용들이 많이 있는데, 이는 두권의 책이 동일한 자료를 참고해서 썼거나,
더 후대에 쓰여진 역대서의 기자는 열왕기서를 알고 있었음을 의미 합니다.
즉 자신의 기록이 정말 문제가 되는 모순이라면 기록을 다시 확인하거나 열왕기에 맞춰서 수정을 했었을 것 입니다.

다시 얘기하면 다윗의 계수에 대한 두 책의 기록은 모순이라기 보다는 서로를 보완해주는 역할로 우리에게 더 풍부한
당시의 정보를 제시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2) 민수기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구조사를 두 번이나 명하시는데, 이 이유는 지파별로 인구 조사함으로써 싸울 수 있는
병력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에 비해 다윗은 어떻습니까?
바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교만해 짐으로 인구조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역대상 21장 1절을 보면 인구조사의 동기가 나오는데,
‘사탄’이 다윗을 충동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3) 인터넷 사이트
http://blog.daum.net/kimys3209/5538325

https://www.fingerofthomas.org/%EB%88%84%EA%B0%80-%EB%8B%A4%EC%9C%97%EC%9D%B4-%EC%9D%B8%EA%B5%AC-%EC%A1%B0%EC%82%AC%EB%A5%BC-%EB%AA%85%ED%95%98%EB%8F%84%EB%A1%9D-%EC%B6%A9%EB%8F%99%EC%A7%88-%ED%96%88%EB%8A%94%EA%B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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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마이어 버로우즈 제레마이어 버로우즈 (Jeremiah Burroughs, 1599-1646)
영국의 회중교회 목사,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 회원 

“먼저 "땅의 일"이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아름다움, 이 세상의 영광, 이 세상의 화려함, 이 세상의 유익, 이 세상의 쾌락과 명예 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지나치게 좋아하거나 즐거워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용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관하여 그들을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무조건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악한 사람의 특징으로 지적된 "땅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소유하는 것도 아니요, 자신에게 마땅히 돌아와야 할 몫을 정당하게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아,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이러이러한 것들을 가지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마음대로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넓고 큰 집을 여러 채 가지고 있고, 화려한 고급 가구를 마음대로 집안에 들여놓을 수 있으며,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일까! 아, 나도 그런 것들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것들은 참으로 귀중한 것들이다. 그런 것들은 참으로 기쁨을 주는 것들이다. 인생의 기쁨과 행복이 무엇이랴? 그런 것들을 마음껏 많이 누리는 것이 인생의 기쁨이요 행복 아닌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에 자신의 행복을 거는 사람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을 그토록 높이 평가하고 있다면, 틀림없이 그 사람은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어디에 마음을 쏟으며 살고 있는지를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다음 한 가지 질문에 스스로 답해 보십시오. "나는 무엇을 나의 탁월함으로 여기고 있는가?" 우리 자신의 탁월함이 달려 있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이든, 바로 그것에 우리의 마음도 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것과 어울리는 상태에 있기 마련입니다." 창세기 27:28-39절까지 보면, 이삭이 야곱과 에서에게 각각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특별히 야곱에 대한 축복의 내용과 에서에 대한 축복의 세부 내용이 순서적으로 어떻게 다르게 배치되어 있는지를 주목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야곱의 경우: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너에게 주시기를 원하노라"(28절) 에서의 경우: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39절)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경건한 사람도 현세적인 것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경건한 마음이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늘 이슬입니다. 땅의 기름짐은 언제나 그 다음입니다. 반면에 육적인 마음은 어떻습니까? 육적인 마음도 자신이 하늘에 속한 것들을 어느 정도 필요로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육적인 마음은 그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육적인 마음이 우선적으로 갈망하는 것은 땅의 기름짐입니다. 하늘 이슬은 언제나 그 다음입니다. 세속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땅의 일을 가장 중요하고 가장 고귀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세속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속한 것들에 마음을 쏟으며 사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세상일을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고 바쁘다면, 그 사람은 죄악된 방식으로 땅의 일을 생각하는 생각입니다. 본래 생각이란 마음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분출되거나 솟아오르는 무엇입니다. 다시 말해 생각이란 마음으로부터 직접 일어나는 거품과도 같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의 말과 행동을 살펴보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생각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으로부터 직접 솟아나는 것은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어떤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도 그러합니다. 사람의 생각은 곧 그 사람의 됨됨이를 그대로 말해 준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곧 그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입술을 통해 나오는 말과 외적인 행동의 경우는 사정이 다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별로 내키지 않는 약속을 지키거나 품행을 단정하게 꾸밀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입술을 통해 나오는 말과 외적인 행동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여러분이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은밀히 마음에 자주 떠오르는 생각들이 무엇인지를 조사해볼 수 있다면, 그것을 토대로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거느리고 있는 부하 직원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인사고가를 잘 받고 싶은 욕심 때문에 여러분 앞에서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단정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싶다면, 그들이 개인적으로 자주 다니는 장소에 혼자 있을 때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보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의 진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여러분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며 어떻게 처신하는지를 잣대로 삼아 여러분의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평가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이 방안에 혼자 있을 때 여러분의 마음이 어떤지, 내면의 생각 속에서 여러분의 마음이 어떤지를 잣대로 삼아 여러분의 마음을 자세히 평가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여러분의 마음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 여실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불현듯" 떠오르는 모든 생각까지 무조건 다 잣대로 삼아 여러분의 마음을 평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때로 마귀는 가장 경건한 사람의 마음에도 사악한 생각들을 주입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마음에 불현듯 떠오르는 모든 생각까지 다 평가 기준으로 삼는다면 낭패를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마음을 판단하는 잣대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는 생각은 우리가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생각이요, 우리가 감미로움과 만족을 얻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혼자 있을 때 가장 자연스럽게 행동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혼자 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까? "


아,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 내 마음은 얼마나 좋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