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면류관(베드로전서 5:1∼4) |
-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질문)
부활이란 무엇인가?
지상(地上)과 천상(天上)의 연결
땅에서의 삶이 하늘에서도 실현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지상에서 천상으로 옮겨진 두 사람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에녹(창세기 5:24)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둘째는 엘리야(열왕기하 2:11)
홀연히 불말과 불수레가 엘리사와 엘리야 사이를 갈라놓은 후 엘리야는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였더라.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행하셨던 몇 가지 행적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도마에게 보여주신 손과 옆구리(요한복음 20:27)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때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이 모여 있던 곳의 모든 문들을 굳게 닫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엠마오 두 제자(누가복음 24:30)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들에게 주시매.
셋째는 베드로를 찾아오신 것(요한복음 21:12)
와서 조반을 먹으라.
넷째는 예수님의 승천(사도행전 1:9)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사도행전 1:11)
지상과 천상으로 연결되는 몸을 "신령한 몸" 이라고 합니다(고린도전서 15:44)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사람에게 약속된 것이 "영광의 관" 즉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신약 성경에 면류관을 세 종류로 구분합니다.
화관(스템마) 사도행전 14:13
면류관(스테파노스) 스데반,
요한계시록 2:10, (에베소교회) 죽도록 충성하라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요한계시록 3:11, (빌라델비아교회)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리라
요한계시록 4:4, 24 장로들에게 면류관
왕, 통치자(디아데마) 예수님(계 19:12), 짐승(계 13:1, 12:3)
누가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것인가?
(도입 이야기)
어느 아버지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구원이란 반지를 하나만 갖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구원 받은 아들에게 이 반지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세 아들은 그 구원의 반지를 받으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아버지가 세 아들을 지켜보며 반지를 만드는 세공사를 찾아가서 똑같은 모양의 반지를 두 개 더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세 아들에게 반지를 하나씩 나눠 주었습니다.
반지를 받은 아들들은 서로 자기 반지가 진짜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후 세 아들들은 재판관을 찾아가서 어느 반지가 진짜 구원의 반지인지 구별해 달라고 합니다.
난처한 입장에 처한 재판관은 솔로몬의 지혜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판결했다고 합니다.
“구원의 반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아야 하므로 그들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자 세 아들은 내가 갖고 있는 반지가 진짜 반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했다고 합니다.
구원의 반지 이야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교훈은 구원이란 구원 받은 삶을 보여주므로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2020년 부활주일을 맞이하는 4월 12일 입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구원 받았다면 구원 받은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부활을 믿습니까?
부활을 믿으면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삶과 부활 신앙을 믿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한국에서는 "불교" "가톨릭" "기독교"를 3대 종교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종교를 "불교"라고 말한다면 "불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또한 "가톨릭이라고 한다면 가톨릭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라면 구원받은 삶을 살아야 하고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터어키에 선교하던 선교사 한 분에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나는 여행하고 있습니다. 길을 가는데 두 갈래의 길을 만났습니다. 어느 길이 내가 목적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려고 하다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요 또 한 사람은 죽어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하겠습니까? 산 사람입니까? 죽은 사람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말하기를 "그야 물론 산 사람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내가 살아 계신 예수님께 찾아가지 않고 죽어버린 마호멧을 찾아가겠습니까 ?"
부활의 신앙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부활 신앙의 근거는 "십자가(十字架)"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죽음이 없이는 다시 살아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의 근거가 "십자가(十字架)" 라는 것을 몇 단계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부활(復活)이란 한문자
"다시 부(復), 회복할 부(復)"
"살 활(活), 물 콸콸 흐를 활(活)"
"다시 살아나는 것, 회복하여 살아나는 것, 다시 살아서 콸콸 흘러가는 것, 회복하여 콸콸 흘러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부활(ἀνάστασις, anastasis)이란 헬라어(386)
Strong's Concordance ; a standing up, ie a resurrection, a raising up, rising.
“일어서는 것 즉 부활”, “일어나는 것”
셋째는 성경적 근거(마태복음 16:13-24)
예수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정확한 대답은 베드로의 고백이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동안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며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때로는 먹을 것이 없던 들판에서 작은 물고기와 보리 떡으로 수 많은 사람들을 먹이고 남는 것을 거둬들였습니다.
심지어 죽었던 사람도 살려내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사건보다는 사람들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베드로의 고백에 집중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던 목적을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16:20-21,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메시아의 정체성이 처음으로 제자 베드로에게서 고백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항변하며 말하기를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부활 신앙의 근거는 십자가
부활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부활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려면 십자가를 찾아야 합니다.
만일 자기 십자가를 찾지 못한 사람은 부활 신앙으로 살아갈 수 없으며 부활을 믿지 않는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부활을 믿고 부활 신앙으로 살았다면 반드시 영광의 관 즉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신약 성경을 기록한 헬라어 성경에는 면류관이란 단어를 세 가지로 구분하여 사용합니다.
첫째는 스테파노스(Stephanos, στέφανος)
요한계시록에 8번 사용되었습니다(요한계시록 2:10, 3:11, 4:4, 4:10, 6:2, 9:7, 12:1, 14:14)
본문에 사용된 "관(冠)" 이란 헬라어는 "스테파노스" 라고 합니다.
스테파노스라는 면류관을 상징하는 이름은 "스데반"입니다(사도행전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둘째는 디아데마(Diadéma, διάδημα)
디아데마라는 면류관은 요한계시록에 3번 사용되었습니다(계 12:3, 13:1, 19:12)
스테파노스라는 면류관은 주로 경기장에서 우승한 사람이나 아니면 전쟁터에서 승리한 장군에게 씌워주는 관을 말합니다.
디아데마라는 면류관은 나라의 왕과 같은 통치자가 쓸 수 있는 관을 말합니다.
셋째는 스템마(Stemma, στέμμα)
스템마라는 면류관은 사도행전에서 단 한 번 사용된 면류관을 말합니다(행 14:13)
스템마라는 면류관은 화관(花冠)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들이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5장의 말씀을 읽어보면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신앙에 대해서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첫째는 고난의 증인(1절)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예수를 믿는 가장 최고의 보람은 "고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증인이란 함께 경험하고 참여한 사람을 말합니다.
띠리서 고난의 증인이란 고난에 직접 참여하거나 같이 경험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심지어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는 "순교자"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증인이란 십자가의 증인을 말합니다.
십자가의 증인이 되려면 먼저 자기 십자가를 찾아야 합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 조선의 정세는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웠다.
당시 국제 사회는 조선을 ‘소망 없는 은둔의 땅’으로 보았다.
그러나 황무지이기 때문에 더욱 복음이 증거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미국의 젊은 선교사들이 있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였다.
그들은 순교의 각오로 파송을 자원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거센 풍랑을 헤치고 한 척의 배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단순한 입항이 아니었다. 이 나라에 처음으로 복음이 들어오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렇게 부활절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조선땅을 밟았다. 황무지에 소망의 빛이 비치는 순간이었다.
아펜젤러는 본국에 보낸 첫 선교 보고서에서 이 날의 감동을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왔다. 그날 사망의 철창을 쳐부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조선의 결박을 끊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빛과 자유의 세계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이 세상에서 영광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영광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십자가를 찾은 사람은 세상의 영광 보다는 장차 나타날 영광을 사모할 것입니다.
장로교회에서 평신도로서 최고의 직분을 장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로가 될 때까지는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합니다.
그런데 장로가 된 후에는 마치 교회의 주인이 된 것처럼 자신을 주장하고 내세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현실에서 영광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원하는 사람(2절)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어떤 일을 할 때 억지로 하는 것과 자원하여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원하는 일을 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기 십자가를 아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을 때의 그유명한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베드로가 로마에 가면 붙잡혀 죽는다는 것을 알고 로마를 벗어나려고 할 때 누군가 십자가를 지고 로마로 행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그 환상을 보고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그러자 "나는 네가 버린 십자가 를 지고 로마로 간다."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돌이켜 로마로 가서 순교당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노부부가 성지순례차 고향 땅 이스라엘을 찾았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남편은 장의사를 찾아 시신 처리와 장례 절차를 물었다.
장의사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 묻힐 경우 축복도 받고 비용도 150달러면 충분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시신을 방부처리해 미국으로 공수하는 방식인데, 절차도 번거롭고 비용도 5000달러나 된다는 것이었다.
노인은 망설이다 결심했다.
비싸더라도 미국으로 시신을 옮겨 묘지에 묻겠다는 것이었다.
유대 땅에 묻히면 그 옛날 어느 분처럼 자기 아내가 부활할지도 모르는데, 그게 감당하기 어렵다는 ‘뼈 있는’ 이유였다.
우리는 부활을 바란다.
지금의 아내와 남편들도 함께 부활을 바라는가?
부활의 생명이 오늘의 유한한 생명 속에 꽃피고 열매맺기를 정녕 바라는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오늘을 내일처럼 사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열매일 것이다.
셋째는 기꺼이 하는 사람(2절)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기꺼이라는 단어를 한글로 번역한 성경으로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진심으로"
공동번역, 새번역 성경에서는 "기쁜 마음으로"
유대민족 전체가 하만이라는 장군의 음모에 의해서 모두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위기가 다가왔을 때 "에스더"는 삼일 금식을 결정하고 모든 유대민족에게 자기와 같이 금식하며 민족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며 금식한 후에는 왕이 왕후를 궁으로 부르지 않아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으로 왕 앞에 나가 유대 민족에 대한 불의한 일을 알리겠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자세를 가리켜 "기꺼이 하는 것" 이라고 하겠습니다.
기꺼이 하려면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고 기쁘게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 역사 신학자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류 역사의 가장 큰 사건 세 가지를 말한다면 하나님이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사건이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사실 세계는 그 사건을 가장 큰 사건으로 지금도 인정을 합니다. 우리 인간사의 날짜 계산을 지금은 그리스도 탄생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금이 2003년이라고 하는 날짜 계산을 온 세상이 다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하나님이 죽으셨다는 사건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사건도 세계가 인정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십자가는 흉악하고 소름을 끼치는 사형 집행 기구로 누구도 보지 아니하려고 하는 괴물 같은 것으로 취급을 받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후는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표시가 되어서 온 세상에 십자가가 세워져있게 되었고 사람들은 이 거룩하고 경건한 표시를 몸에 지니고까지 다니게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십자가가 조금 화려해 졌습니다. 금으로 만든 십자가도 있고 다이아몬드 십자가도 있을 만큼 아주 귀하게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변해진 것입니다.
세 번째 사건은 죽었던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건입니다.
이것도 온 세상이 다 인정을 합니다. 오늘 온 세계 인류는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는 합창 소리로 지구를 진동시키고 있는 날이 오늘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이 작은 나라에만도 50,000개의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말하면 온 세계 지구 전체는 오늘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는 인류의 대 축제 사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이것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네 번째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일이 하나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이 세상에 다시 재림하여 오시는 사건이 됩니다. 결국 인류사는 예수의 사건이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큰 사건이요 관심이 된 것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넷째는 본이 되는 사람(3절)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장로교의 창시자인 장 칼뱅은 생전에 남긴 업적도 대단했지만 세상을 떠날 때도 큰 영적 교훈을 남기고 갔다.
칼뱅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장로교회를 창립하자 그의 영향을 받은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건너가서 장로교회를 세웠고 다른 많은 지도자들도 유럽 각지로 흩어져 개혁교회들을 세웠다.
칼뱅이 죽을 때 남겼던 유언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바로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유지를 따라 지금도 제네바에 가면 장 칼뱅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단지 그를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무덤 위에 ‘J.C’라고 이름 약자만 새겨놓았다.
그래서 칼뱅의 유언을 음미하는 사람들은 그의 무덤가에서 더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장차 부활의 새 아침이 올 것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들도 칼뱅처럼 아름다운 영적 유산을 이 땅 위에 남기고 가야겠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느끼는 것은 사람들의 언어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외출을 삼가고 주로 집안에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들도 집안에 거하며 외부의 일을 주로 다니엘이 맡아서 수고합니다.
지난 목요일 아침에 다니엘이 164가 우리아메리카 은행에 다녀온 후에 베이사이드 한아름 마트에 장을 보러 갔습니다.
제가 필요한 물품 9가지를 적어서 다니엘에게 주며 목록에 적힌 것들을 구입하라고 말했습니다.
그 중에 어머님이 자주 사용하시는 소금이 있었습니다.
천일염이 아니라 주방에서 자주 사용하는 아주 가는 소금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붉은 색 표가 있는 소금을 구해왔습니다.
그 소금을 어머니가 보시고는 "다니엘아 이 소금은 짜서 못써!"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또 돼지 삼겹살을 부탁했는데 돼지 껍데기를 제거한 삼겹살을 가져왔습니다.
삼겹살을 삶아서 수육으로 만들어 먹으면서 제가 다니엘에게 "다니엘아 다음부터는 삼겹살을 사려면 돼지 껍데기가 있는 것을 사면 좋겠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족들끼리도 서로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어른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예의 없이 말하는 것은 바람직한 자세가 아닙니다.
본이 되려면 먼저 잘못된 언어의 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어느 노인 아파트에 거주하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부부가 모두 잘 알려진 유명한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뉴욕에서 목회자가 되었는데 부모님처럼 명문 대학을 졸업한 것이 아니라 겨우 어느 교회에서 운영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목사가 목회하는 것도 실력도 부족합니다. 그런데도 부부가 아들을 부를 때에는 반드시 "아무게 목사님!" 이렇게 극존칭을 사용합니다.
그런 모습이 주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부부로 더 나가서 아들 목사까지도 주위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부활의 본이 되는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본이 되신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살아나셨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동안에 부활의 본이 되셨습니다.
그 좋은 예를 요한복음 11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다니라는 동네에는 예수님과 가깝게 교제했던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고 연락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는 것"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께 붓고 머리털로 머리털로 발을 닦던 사람이었고 나사로는 마리아의 오라비였습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사람을 보내어 속히 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음에도 오히려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신 후에 다시 유다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예수는 나사로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제자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셨습니다.
나사로는 이미 죽었고 무덤에 안치하고 나흘이 지났습니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예수님과 가깝게 지냈던 마르다와 마리아도 부활을 믿는다고 말했지만 부활 생명이 이 다음에 부활 때에 일어날 사건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부활 생명이 부활 때에만 일어나야 할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에서도 일어나야 할 사건이라고 깨우치시려고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려면 먼저 부활 때에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부활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다면 부활 신앙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부활을 믿는 성도들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 것만이 부활 신앙은 아닙니다.
부활 신앙이란 죽음 후에 심판대 앞에서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관심을 갖고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마지막까지 인내하며 경주하여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 신앙으로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승리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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